『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5-부정적인 것은 실재하는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5-부정적인 것은 실재하는가?

1)

모순하는 것은 자기인 동시에 자기의 타자이다. 즉 A이면서 -A이고 거꾸로 -[-A]이면서 동시에 [-A]이다. 헤겔은 이처럼 자신의 타자로 필연적으로 이행하는 모순의 운동을 ‘자기 자신을 배제하는 반성[sich selbst ausschliessende Reflexion]’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곧 “자립성 속에서 자기를 지양하여” “스스로 자신을 자신의 반대물로 번역하는[Uebersetzen]“ 운동이다.

대립하는 것은 자기의 부정인 타자를 부정하여 규정되는 것이므로, 이런 이중 부정을 통해

자기 관계에 이르고 자립적인 것으로 되지만, 동시에 이는 타자에 대립하는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모순하는 것 속에서 출현하는 자기를 배제하는 반성을 통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그 어느 것이나 몰락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배제하는 반성은 동시에 정립하는 반성이다. 모순의 결과는 0일 뿐만은 아니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자립적인 것이 정립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자기 자신을 통해 부정되는 것은 이렇게 정립된 자립적인 것을 지양한다. 이것은 모순 속에 진정으로 몰락하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1)

2)

이런 몰락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 즉 0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을 통해 대립하는 것이 몰락한다는 것은 그런 모순하는 것을 산출했던 공간 자체, 그리고 이를 열어놓는 본질의 부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모순이 출현하는 것을 통해 그 본질은 주관적인 본질임이 드러난다.

대립에서 모순으로 이행하고 주관적 본질이 객관적 본질로 전환하는 과정은 역동적인 과정이다. 모순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위상을 달리한다. 긍정적인 것은 자기 동등한 것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것에 부등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 모순이지만, 그 모순은 아직 감추어져 있다. 긍정적 모순은 아직 대립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에 이르면, 이 부정적인 것은 자기에 부등한 것이니, 그것은 그 자신에 대해서도 부등하며, 그 결과 내적 모순이 외적으로 출현하게 된다. 이렇게 모순이 출현하면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외적 반성에서 나온 것이며 주관적 본질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본질의 주관성 때문에 부정적인 것에서 자기모순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순에서 부정적인 것이 지닌 자기 부정성은 곧 이행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

부정적인 것의 자기모순은 새로운 반성을 일으키면서 더 근본적이고 더 포괄적인 본질, 사태에 외적인 본질이 아닌 사태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본질, 즉 객관적 본질이 출현하게 된다. 이것이 곧 규정하는 반성이며 여기서 출현하는 객관적 본질 속에 부정적인 것은 이제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하게 된다.

3)

규정하는 반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제 더 근본적이고 더 포괄적인 본질 즉 객관적 본질이 등장한다. 그 이전에 서로 모순하는 것은 그런 객관적 본질이 열어놓은 공간 속에서는 모순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서로 모순하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거의 통일로서 본질”(GW11, 282)이다.

“그래서 자립적인 것은 자기 자신을[eigene] 부정하는 것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는 통일이 된다. 왜냐하면, 이 자립적인 것은 자신이 정립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이런 통일은 본질에 속하는 통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타자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와 동일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1)

이 객관적 본질은 개체적 현존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개체적 현존과 대립하지 않는 “긍정적인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서 본질”((GW11, 282)이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이데아처럼 초월적으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적 현존을 서로 매개하는 운동으로서만 개체적 현존에 내재하는 것으로서만 출현하니, 이런 점에서는 이 본질의 자기 동일성은 “부정성으로서 자기에 관계하며 그러므로 자기를 규정하고 배제된 정립된 존재[개체적 현존]로 만드는”(GW11, 282) 동일성이다.

이런 객관적 본질은 자기를 현존하게 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것 즉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분지한다. 즉 A=P or -P이다. 이런 근거 속에서 모순하는 것들은 서로 종합하여 전체적 본질을 이루는 것이 된다. 이제 P나 -P거나, 정립된 개체적 현존은 본질에 의해 규정된 것이 되며, “정립된 존재가 정립된 존재로 되는 가운데 이 정립된 존재는 자기 자신과 통일[본질] 속으로 복귀한다.”(GW11, 282)

이제 그 속에서 본질이 긍정적으로, 자기 관계하는 자립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즉 정립된 존재는 본질이 전적으로 자립화한 것이니 “이 본질은 근거 즉 이런 자신의 부정태[개체적 현존] 속에서 자기와 동일한 것이며 긍정적인 것이다.”(GW11, 282)

이상에서 모순의 상호 통일이 곧 근거라는 사실을 제시한 끝에 헤겔은 이제 모순론을 마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러므로 자기 모순적인 자립적 대립은 이미 그 자체 근거이다. 자기와의 통일이라는 규정이 덧붙여진다. 이 규정을 등장하게 하는 것은 곧 자립적인 대립물 각자가 자기를 지양하고 자기를 자신의 타자로 만들어 몰락하지만 그런 가운데 동시에 다만 자기와 합치하며 그러므로 자기의 몰락 속에서 즉 자신이 정립되거나 부정되는 것 속에서 오히려 자기 내로 반성하여 자기와 동일하게 된 본질로 된다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2-3)

4)

5)

헤겔은 모순을 다루는 끝에 주를 세 개나 덧붙인다. 그 가운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주 1이다. 주2는 형식논리학에서 모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배중률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며, 주3은 고대 변증론자가 모순은 운동의 근거라고 말하면서 모순을 인정하지 않기에 운동 자체를 부정했지만, 모순이 운동의 근거라고 한 것 자체는 옳다고 한다. 헤겔은 이런 주 모두에서 모순이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려 했다.

주1에서는 헤겔은 흔히 실재는 긍정적인 것이고 부정적인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주관이 사유를 통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을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대립은 전자는 객체이어야 하지만(그 이름상으로는 가정된 것Poniertsein, 정립된 것을 표현하더라도) 후자는 주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받아들여진다. 물론, 여기에서 주관적인 것은 다만 외적 반성에 속하기에 그 자체로 대자적인 객체를 전혀 다루지 못하며 전적으로 그런 객체 앞에 나서지도 않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4)

모든 실재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일견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의심스럽게 하는 것이 바로 부정적인 판단이다. 어떤 것은 P이다가 허위라면 어떤 것은 P가 아니라는 주장은 진리가 된다. 이 부정판단을 진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소위 긍정판단을 진리로 만드는 긍정적 사실 또는 사태가 있을 때 긍정판단이 진리가 된다면, 부정판단을 진리로 만드는 부정적 사실이 있어야 이 부정판단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부정적 사실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은 지각될 수도 없고 인과적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 지각되지도 않고 인과적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는 것이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부정적 사실은 없다고 해야 마땅할 것 같다.

그러나 부정적 사실이 없다면, 부정판단은 왜 진리가 되는 것일까? 부정적 사실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면, 부정판단은 긍정판단을 사유를 통해서 부정함으로써 출현한다고 설명된다.

긍정판단이 허위이므로 그것으로부터 긍정판단을 사유를 통해 부정하는 판단이 진리가 되는 것일까? 그러나 이번에는 긍정판단을 허위로 만드는 것이 문제가 된다. 긍정판단을 진리로 만드는 것은 긍정적 사실이라면, 긍정판단을 허위로 만드는 것은 그런 긍정적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긍정적 사실이 없다는 것은 부정적 사실이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닌가?

결국, 부정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할 수도 없고, 부정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다. 부정적 사실의 존재는 일종의 딜레마이며 자가당착에 빠지는 문제다.

5)

헤겔은 위의 구절에서 부정적인 것을 주관적 사유의 산물로 보는 입장을 비판하는데, 그는 우선 부정적인 것이 주관적 사유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에 대응하는 대자적인 객체[부정적 사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사실상 부정적인 것이 주관의 자의가 추상한 것에 지나지 않거나 외적인 비교에서 나온 규정을 표현한다면 이 부정적인 것은 물론 객관적으로 긍정적인 것 앞에 출현하지 않는다. 즉 객관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자기 자신에서 그러한 공허한 추상에 관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긍정적인 것에서 자기가 긍정적인 것이라는 규정도 물론 다만 외적인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4)

부정적인 것의 실재를 부정하는 입장에 대한 헤겔의 반론은 단순하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것조차도 사실은 사태 자체에 외적인 반성에서 나오는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헤겔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사유가 필요하다.

부정판단이 지닌 딜레마는 긍정판단과 부정판단을 각기 고립적으로 이해하면서 나오게 된다. 이를 고립시킨다면, 부정판단은 긍정판단 전체의 부정이니, 긍정판단의 진리에 의존하게 된다. 이 긍정판단이 진리라면 문제없는데 허위라면, 문제가 벌어진다.

긍정판단은 독자적으로 판단되어야 하니(이 경우 긍정판단의 허위를 결정하기 위해 부정판단의 진리로 되돌아가는 것은 도돌이표에 불과하다) 그것이 허위인 경우 부정적 사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부정적 사실이란 그 자체가 개념상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니, 있을 수 없다. 그 때문에 딜레마를 벗어날 수 없다.

6)

그러나 우리의 사유는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반성적이다. 즉 사유 자체가 반성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사유는 서로 대립하는 것들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빨간색은 파란색과 같은 빨갛지 않은 색에 대립하여 규정된다. 이 파란색을 빨간색의 부정으로 만드는 것은 사유에서의 반성적 관계다. 사실 파란색은 사유에서는 반성적 관계를 통해 빨간색의 부정이지만, 사실은 그저 파란색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정판단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긍정적 사실에 대한 판단이며, 다만 사유를 통해 부정적인 판단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나는 파란색을 보는 순간, 이것은 파란색이라고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동시에 이것은 빨간색이 아니라고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진리인 부정적인 판단은 사실 긍정적인 사실에 대한 판단을 통해 나온 것이다.

,

거꾸로 허위인 긍정판단도 마찬가지로 반성적으로 판단된 것이다. 이것은 파란색인데, ‘이것은 빨간색’이라고 판단할 경우 그것은 허위이다. 이런 판단은 이것은 파란색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동시에 이것은 빨간색이라는 판단은 허위가 된다. 이는 곧 반성 관계를 통해서 나온 것이지, 이 허위인 긍정판단이 부정적 사실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6)

인간의 사유가 반성적이라는 사실은 진리인 부정판단보다 더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없다. 어떤 논리도 판단을 고립적으로 즉 요소 명제나 원자 명제로 파악한다면, 부정판단의 진리의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

긍정적인 판단이든, 부정적인 판단이든 사실은 다 긍정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그런 긍정적 사실을 반성적 사유를 통해 긍정적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진리인 부정적인 판단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 긍정적이다. 부정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든 긍정적 사실은 서로 상이할 뿐, 그 사실 사이에는 대립은 없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는 다른 문제다.

긍정적 사실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 긍정적 사실이 서로 대립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전기는 +전기에 대립하지만, -전기가 부정적인 사실은 아니다. 남극은 북극에 대립하지만, 남극이 부정적 사실이거나 아니면 북극이 부정적 사실은 아니다.

형식논리학에서 사유는 존재에 외면적인 것이며 이때 어떤 것들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묶는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 사유에 속하는 것이며 실재 자체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칸트의 선험적 철학에 따르자면, 사유가 존재를 구성하므로 사유에서 대립은 존재를 대립적으로 구성한다. 그러므로 사유에서의 대립은 존재에서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빛과 어둠을 보자. 양자는 대립하지만, 이는 사유에서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빛과 어둠은 곧 존재에서의 대립이기도 하다. 어둠이 빛에 대립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둠이 어떤 긍정적인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어둠은 고유한 실재를 지닌다. 그러나 빛과 대립하여 본다면, 그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현상적으로는 대립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립은 동시에 반성적 사유에 의해서 대립한 것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것이 사유를 통해 구성된 만큼 긍정적인 것 역시 사유를 통해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위에서 부정적인 것만 사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도 사유에 속한다고 했다.

7)

물론, 이런 대립하는 것이 실재한다고 할 때 이는 현상적인 대립이다. 칸트는 물 자체는 사유 밖에 있다고 했다. 사유에 의해 구성된 대립이 아닌 물 자체에서의 대립이 있는가는 알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헤겔은 외적 반성에서 규정하는 반성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물 자체에 내재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런 규정하는 반성에 사유에서 본질은 곧 객관적이니 여기서 긍정적인 것이나 부정적인 것도 실재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객관적인 것으로 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4-모순과 의식 경험의 길[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4-모순과 의식 경험의 길

1)

앞에서 대립을 살펴보았다. 대립은 상이한 것이 모순으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다. 여기서 한편으로 개체적 현존은 자기의 부정인 타자를 통해 규정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개체적 현존은 직접적이어서 서로 무차별하다.

여기서 대립을 통해 규정되는 것은 개체적 현존에 대해 외적인 반성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즉 마치 영하와 영상이 섭씨 0도라는 주관적 기준에 의해 대립하듯이, 주관적인 관점을 통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헤겔은 이런 대립하는 것을 모순하는 것과 구분하는데, 모순하는 것은 우선 대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긍정과 부정이 서로 대립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런 대립에서 긍정과 부정으로 규정된다는 말은 곧 그 자신이 직접 규정되지 않고 필연적으로 타자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 규정된다[정립된 존재]는 말이다.

이때 타자는 다시 자기의 부정(-A)이니, 결국 자기의 부정을 부정하는 이중 부정(–A)을 통해 자기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각자는 타자를 이미 내포하고 있는 전체이다. 후자의 측면에서 각자는 타자를 배제한 채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인 것이고 대자적 통일이다.

이런 이중 부정이 성립하는 것은 A와 -A 즉 긍정과 부정 사이에 어떤 다른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이른바 배중율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A와 -A는 서로 배타적인[부정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2)

대립하는 것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각기 직접 존재하는 것이다. 양자는 개념에서는 대립하지만, 실제 존재는 우연하다. 그러나 모순하는 것에서 양자는 서로에 대해 필연적이다. 즉 자기[A]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타자[-A]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순하는 것에서 자기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타자를 인정한다는 것이 된다. 또한, 타자를 부정한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즉 A이면 -A이며, -A가 아니면[–A] A도 아니다[-A]. 결국, 논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모순하는 것은 딜레마, 이율 배반이며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자립적인 반성 규정은 다른 규정을 포함하고[-A] 이를 통해 자립적으로 되는 것[A]과 동일한 관점에서 똑같이 타자를 배제하므로[–A] 자립적인 반성 규정은 그 자립성 속에서[A] 자신의 자립성을 자기로부터 배제한다[-A]. 왜냐하면, 이 자신의 자립성이 성립하면[A] 자기와 다른 규정을 자기 내에 포함하고[-A] 이를 통해 외적인 것에 관계하지 않을 뿐[-A]이지만, 마찬가지로 직접 자기 자신이고 자기에 부정적인 규정을 자기로부터 배제하기[A] 때문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9)

모순이 이처럼 필연적으로 자기의 타자로 이행한다는 것은 곧 어떤 개체적 현존에 대해 서로 모순적인 술어가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이며 이는 그런 것이 이제 더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3)

타자와 모순하는 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에 자기가 모순하는 것이다.

①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정립된 모순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부정적인 통일 자체이면서 자기 자신을 정립하며[A] 그런 가운데 각자는 자기를 지양하고 자신의 반대물[-A]을 정립하기 때문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9)

② “이 양자는 배제하는 한에서 규정하는 반성을 이룬다. 배제는 구별이며 구별된 것 각각은 배제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 전적인 [타자의] 배제이기에[–A] 각각은 자기 자신 속에 자신을 배제한다[-A].”(헤겔, 논리학, GW11, 279)

이런 자기모순 속에서 즉 자기를 자신이 배제하는 가운데 대립에서 여전히 머물러 있던 외적 반성이 사라지고 ‘규정하는 반성’이 출현한다.

어떤 것이 자기 모순적이어서 자기가 존재하는 동시에 자신의 타자가 존재하게 된다면, 이 모순은 사실 어떤 개체적 현존을 규정하는 공간을 열어놓는 본질이 한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한계 선상에서 출현하는 어떤 것은 이제 이렇게 규정되면서도 동시에 그 반대로 규정되며 또 이렇게 규정되지도 않고 그 반대로 규정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제 본질이 발전하여 이런 모순적인 것을 포괄하는 더 근본적인 본질 즉 심층적 근거가 출현하게 된다면, 이 근거 속에서 모순은 사라지고 각자는 그 근거의 공간 속에서 일정한 현존을 부여받을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런 근본적인 본질에 이르는 반성이 곧 규정하는 반성이다.

이율배반적인 것은 칸트에서 물 자체가 출현한다는 것의 신호이다. 물 자체는 인식의 경계선상에 존재하니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반대도 성립하는 것이며, 따라서 심지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칸트는 이런 물 자체에 부딪히면서 인식이 난파하고 말지만, 헤겔에서 이런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반성이 일어나서 더 포괄적이며 더 근본적인 본질, 외적 주관적 반성이 아니라 내재적인 객관적 본질이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 자체에 부딪힘으로써 본질로 반성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 관해서는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개념으로 서술한 바가 있다. 논리학 본질론에서 모순 개념은 이런 의식 경험의 길을 배후에 깔고 이루어지는 반성 운동이다.

4)

대립하는 것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두 계기로 가진다면, 긍정과 부정의 관계는 주관적 관념에 속하는 것이며 각자는 직접 우연하게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것만 존재하거나 부정적인 것만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순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그 의미가 변화한다. 이제 긍정적인 것은 어떤 것이 직접 정립되어 있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것에 대립하는 것이니, 이런 대립한다는 점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잠재적 모순이다. 그런 모순이 외화하면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것은 모순이다. 즉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배제하여 자기와의 동일성을 정립하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을 어떤 것의 부정태로 만들며 그럼으로써 자기가 자기로부터 배제했던 것인 타자로 만든다.”(헤겔, 논리학, GW11, 280)

거꾸로 부정적인 것은 무엇을 부정하는 것 즉 긍정적인 것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런 부정적인 것 자신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니, 이를 통해 긍정적인 것으로 되돌아온다. 이런 긍정적인 것은 아직 자기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드러나지 않았다. 이것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외적 반성에서 주관적 본질이 규정하는 반성에서 심층적 근거로 발전해야 한다.

“긍정적인 것은 다만 잠재적으로만 이런 모순이다. 그에 반해 부정적인 것은 이 모순이 정립된 것이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것의 자기 내 반성 속에서 그리하여 그 자체로 대자적인 부정태가 되거나 부정태로서 자기와 동일하게 되면서 이 부정적인 것은 비동일한 것 즉 동일성을 배제하는 것이라는 규정을 가지게 된다. 부정적인 것은 동일성에 대립하여 자기 동일적인 것이고 따라서 배제하는 반성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자기로부터 배제하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0)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이런 이행은 각자가 그 자신에서 타자가 된다. 대립하는 것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순하는 것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발전하는 운동 속에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내재하는 모순이 외화되고 이를 통해 본질로 반성이 일어나는 운동의 과정이다.

“이제 나가서 각자[긍정과 부정]는 타자의 본래 모습과 같은 것이니, 부등한 것[긍정과 부정]의 관계는 양자가 동일성을 이루는 관계[ihre identische Beziehung]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0)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3-대립과 남녀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3-대립과 남녀 관계

1)

앞에서 설명했듯이 상이성은 가족 유사성과 같이 개체 사이의 동등성과 부등성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즉 동등성과 부등성은 다른 관점에 따라 규정되니, 어떤 점에서는 동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점에서 그들이 부등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동등성은 상이한 개체적 현존에 외면적인 것일 뿐이다. 이는 외적 반성의 결과다.

상이한 개체적 현존들 가운데에는 경험의 발전을 통해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자면 암수 또는 음양의 관계다. 헤겔은 이런 서로 대립하는 개체들을 긍정적인 것[Positive]과 부정적인 것[Negative]으로 대표한다.

대립하는 것은 상이한 것과 모순적인 것 사이의 중간 단계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상이한 것보다는 모순에 가까운 측면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상이한 것에 가까운 측면도 지닌다. 대립하는 것은 자주 모순적인 것과 뒤섞여 사용되는데, 헤겔은 대립하는 것을 이런 중간적인 것으로 모순적인 것과 구분한다.

2)

상이한 것과 달리 대립하는 것은 부분적인 동등성이 아니라 집합 전체가 어떤 하나의 관점[A]에서 A이든가 그것이 아닌 것 즉 -A로 갈라진다. 여기서 서로 부정하는 관계가 성립하려면 A와 그것의 부정인 -A가 배타적이어야 한다. 즉 양자의 가운데 A이면서 동시에 -A인 것이 없어야 하며, 양자는 배타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야 한다. 모든 개체적 현존은 생식의 측면에서 암컷이든가 아니면 수컷이다. 암컷이거나 암컷이 아닌 것은 없다.

서로 대립하는 개체적 현존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하나의 측면은 상호 관계의 측면이다. 다른 측면은 무차별성의 측면이다. 상호 관계의 측면에서는 모순적인 것에 가까우며 무차별적인 측면에서는 상이한 것에 아직 머물러 있다.

두 측면 가운데 먼저 상호 작용의 측면을 보자. 이 측면은 다시 두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있다. 우선 배타적, 부정적 관계의 측면이다. 어떤 것은 그 자체로 규정되지 않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① 어떤 것은 자신의 타자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즉 “비교되는 반성 속에서만” 규정된다. 즉 P[Positive]는 -N[Negative] 이고 N은 -P이다.

타자에 의해 부정된 것으로 규정된다면, 어떤 것은 자신의 규정 속에 이미 타자를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② 각자는 자기의 타자를 포함하는 전체이며 동시에 전체의 한 계기이다.

“두 계기의 각자는 그 자신의 규정을 지니는 가운데 전체이다. 각자는 다른 계기도 또한 포함하는 한에서 전체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2)

동등성은 자기 동일적인 것이지만, 부등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니, 이런 부등한 것을 부정하면서 부등성을 내포하는 동등성이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부등성도 마찬가지다. 부등한 것은 동등한 것과 부등한 것이니, 이런 부등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부등성은 자기 자신과 동등하다. 이처럼 동등성을 내포하는 부등성이 곧 부정적인 것이다.

“이런 자기와의 동등성이 자기 내로 반성하면 자기 자신 속에서 부등성에 대한 관계를 포함하면서 긍정적인 것으로 된다. 그러므로 부등성이 자기 자신 속에서 그 비존재 즉 동등성에 대한 관계를 포함하면 부정적인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3)

3)

그것은 타자에 의해 타자가 아닌 것으로 정립되지만, 이 타자는 거꾸로 어떤 것 자신에 의해 정립된 것이니, 어떤 것이 규정된다는 것은 곧 자기에 의해 정립된 타자에 의해 정립된 것이니, 어떤 것은 곧 ③ 자기가 자기를 규정하는 것으로 되면서 곧 자기 내로 반성한 것,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이런 측면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대립의 ‘절대적 계기’다. 여기서 양자는 상호 순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각자는 자기 자신이며 동시에 타자이고 이를 통해 각자는 자기 규정성을 타자에서 갖지 않고 그 자신에서 갖는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 관계하면서 이때 다만 자신의 타자에 관계할 뿐이다. 각자는 이중적 측면을 갖는다. 각자는 자신의 비존재에 관계하지만, 이 타자를 자기 내로 반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의 비존재는 다만 그 자신 속에 있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73)

대립은 앞에서 말한 타자에 의해 부정되는 정립된 존재의 측면과 이중 부정을 통해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 측면이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어떤 것이 자기 내로 반성하며 ① 자기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은 자기가 자립적인 것[–A]임을 의미한다. ② 자기가 타자에 의해 부정되는 관계에 있다는 것[-A]이다. 이는 정립된 존재의 측면이다. 그러므로 자립적 존재는 다시 타자에 의존하는 정립된 존재가 된다.

전자의 측면은 ①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측면[–A]에 대응하며 후자의 측면은 ②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측면[-A]에 대응한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성하는 규정은 우선 양자가 대립의 절대적 계기라는 점에 존립한다. 그것이 존립한다는 것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반성이다. 그것을 존립하게 하는 매개 속에서 ① 각자는 자신의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서 따라서 그의 타자 또는 ② 그 자신의 비존재를 통해서 존재한다.”(헤겔, 논리학, GW11, 273)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말해 우선 각자는 타자가 존재하는 한에서 존재한다. 각자는 타자를 통해서 ② 그 자신의 비존재를 통해서 각자의 본래 모습이 된다. 각자는 다만 정립된 것이다. 둘째로 각자는 ①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 존재한다. 각자는 타자의 비존재를 통해서 그 본래 모습이 된다. 각자는 자기 내로 반성한다.”(헤겔, 논리학, GW11, 274)

4)

이런 순환은 구체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자가 이미 남자에 의해 규정된 존재니, 여자에 의해 남자로 규정된다는 것은 사실은 남자 자기가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다. 반대로 남자가 여자를 규정한다고 해 보자. 남자가 이미 여자에 의해 규정된 존재니, 이는 여자가 자기를 규정한다는 말이 된다.

실제 우리는 남자가 여자를 비난하면서 한탄할 때 사실은 자기가 그런 여자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남자를 비난할 때 그런 남자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여자 자신이다.

앞에서 지젝이 반성 개념을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보았는데, 그때 그는 ‘전제를 정립하기’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가족으로부터 혹사당하는 어머니의 예를 들었다. 그 어머니는 가족이 자기를 혹사한다고 불평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그런 가족을 자기를 혹사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주 드는 예로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 때 사실은 여자가 그 남자로 하여금 그를 유혹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예를 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대립에서 정립된 것이 곧 자기 내 반성된 것이다. 그러나 대립하는 것에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즉 직접적 무차별성의 측면이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개념적으로는 서로 대립적으로 규정되지만, 동시에 각자는 직접 무차별한 하나의 현존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대립적 규정은 특정한 관점에 따른 것이며 이는 외적인 반성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에서도 기점을 어디로 잡는가에 따라서 음수와 양수가 대립한다. 우리는 섭씨 0도를 기준으로 그 이하는 음수로 그 이상은 양수로 잡을 수 있고 화씨 0도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음이거나 양이 된다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지, 그 개체적 현존 자체에 고유한 것, 내적인 것은 아니다.

대립적인 것이 이런 직접적인 규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통해 드러난다.

우선 이런 직접성 때문에 어느 개별적 현존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그에 대립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든가 상관없다. 남녀의 관계에서 남자를 긍정적인 존재로 보든, 여자를 긍정적인 존재로 보든 차별이 없다.

“따라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라는 규정성 가운데 하나가 사실 모든 측면에 속하지만, 그런 규정성은 서로 뒤섞일 수 있으며 각 측면이 존재하는 방식은 각 측면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도 괜찮으며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도 괜찮은 방식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4)

또한, 남녀는 개념적으로는 대립하지만, 남과 녀는 따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는데, 이 세상에는 남자만 존재하거나 여자만 존재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태어나는 존재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우연적인 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빛만 있다거나 어둠만 있을 수도 있으며, 자산만 있거나 빚만 있을 수도 있다.

헤겔은 대립을 설명하는 주석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갖는 흥미로운 예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누가 어떤 자산을 타자에게 빌려주었을 때, 그것은 그 자산을 누가 사용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빌려준 자에게는 부정적인 것이고 빌려 온 자에게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권리, 소유권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빌려준 자에게서는 긍정적인 자산이고 빌려 온 자에게서는 부정적인 빚이다.

그는 이런 측면에서 -a* +a와 +a*-a가 서로 다른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알다시피 위의 두 식은 음수와 양수를 대립적으로 보는 관점에 따르자면, 동일한 결과 즉 -a²이다. 그러나 -, +를 직접적인 것으로 읽는다면, 전자와 후자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즉 전자 즉 -a를 빚으로 보면 빚a를 a번 곱하면 빛 a² 즉 -a²가 나온다. 그런데 후자에서 +a를 자산으로 읽고 -a를 a 번 ‘빌려준다’로 읽는다면, 여전히 자산이 a² 만큼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5)

대립하는 것은 이처럼 두 측면을 지닌다. 하나의 측면에서 대립하는 것은 타자를 부정함을 통해 규정된다. 이는 동시에 이중 부정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대립하는 것은 직접적인 것이고 무차별한 개체적 현존이다.

이런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대립하는 것은 이제 ‘자기 자신에서[an ihm selbst]’ 긍정적인 것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긍정적인 것은 자기 자신[an ihm selbst]에서 타자에 대해 긍정적인 규정성이 들어 있는 관계 속에 있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은 타자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규정성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 안에서[in ihm selbst] 갖는다.”(헤겔, 논리학, GW11, 274)

이런 ‘자기 자신에서’ 긍정적이고 부정적이라는 것은 서로가 부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이 배타적 통일의 관계가 각자의 밖에 놓여 있는 외적 반성의 관점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 즉 그런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닌 통일 속에서 서로 타자에 관계하는 것 또는 그렇게 정립되는 것”을 말한다.

개체적 현존이 외적인 반성을 통해 긍정적인 것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도 이 외적 반성이라는 관점이 망각되면, 이런 외적인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마치 어떤 것에 내재하는 즉 본래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마치 빛이 직접적으로 긍정적인 것이며, 탄생이 직접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같다. 그런 긍정적인 것은 “정립되지 않은 것이며 대립이 지양된 것이지만, 사실은 대립 자체의 한 측면으로 존재한다.”

반면 부정적인 것도 사실은 직접적인 것이고, 외적인 반성의 관점에서 긍정적인 것이 결여된 것인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도 부정적인 것은 본래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마치 본래부터 어둠은 부정적인 것이며, 죽음도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6)

대립은 아직 외적 반성에 머물러 있다. 대립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개체적 현존 자체에 외면적인 규정일 뿐이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서 모순으로 이행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긍정적인 것은 대립에 머무르지만, 부정적인 것은 모순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것은 직접 존재하는 자기와 동등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규정되니, 이런 점에서 부등한 것이다. 따라서 긍정적인 것은 이미 모순적인 것이지만, 아직 그 모순은 출현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것은 자기 동등성에 고착되면서, 외적인 반성에 머물러 있다.

“사실 어떤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 볼 때는 타자에 관계하는 가운데 규정되어 있으나 그 방식을 보자면, 그런 긍정적인 것의 성격은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긍정적인 것은 이 타자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기 내로 반성한 것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74)

부정적인 것에 이르면, 그것은 긍정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여기에서는 아직 외적 반성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가능성을 지닌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긍정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부정적인 것조차 아닐 가능성이다. 부정적인 것은 자기와 부등한 것인데, 이런 자기 부정의 가능성이 출현하면서 이중적 부정을 통해 자기와 동등할 가능성이 출현한다.

“부정적인 것은 절대적 반성인 한에서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아니며 오히려 정립된 존재[긍정적인 것]가 지양된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니, 그 자체로 대자적[자기 관계하는]인 부정태이며 자기 자신에 긍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은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므로, 타자에 대한 그 관계[-P]를 부정한다. 그것의 타자가 긍정적인 것인데 즉 자립적인 존재다. 따라서 그런 긍정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는 자기를 자기로부터 배제하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4-5)

이 가능성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외적 반성에서 본다면, 그것은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 자기 모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이 부정적인 것을 통해 모순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 자기모순에 부딪히면서 외적 반성은 규정하는 반성으로 이행하면서 더 포괄적이며 더 근본적인 본질 즉 객관적인 본질이 등장하게 되면서, 규정하는 반성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 규정하는 반성에 이르면 자기와 부등한 부정적인 것은 자기와 동등한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 12-상이성과 가족 유사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 12-상이성과 가족 유사성

1)

생물체에서 개체적 현존은 모나드처럼 자기 완결되어 있으니 다른 개체적 현존과는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 고립적인 개체다. 그러나 이런 고립적 개체는 개체 내적으로는 자기 부정성을 통해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구별과 동일성을 통일하는 것이다. 어떤 개체적 현존은 이처럼 자기 부정성을 통해 자기 관계하면서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할 뿐이니 이런 점에서 개체적 현존을 상이한 것이라 한다.

존재론에서 현존과 타자는 분리되어 있지만, 그 자체에서 타자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자는 접점을 통해 분리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본질론에서 현존과 타자는 상이한 것이니, 이는 분리되어 있으면서 접점이 없는 무차별한 것이다.

“동일성은 그 자신에서 상이성으로 전락한다. 왜냐하면, 절대적 구별을 자기 내에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을 자기의 부정태로 정립하고 이 두 가지 계기 즉 동일성 자체와 자기의 부정태인 자기 내 반성이 서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는 동일성은 이와 같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직접 그 자체로 지양하고 그런 규정 속에서 자기 내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구별된 것은 서로 무차별하게 상이한 것으로서 존립한다.”(헤겔, 논리학, GW11, 267)

2)

이런 상이한 것들은 무차별하지만, 어떤 비교를 통해서 서로 공통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런 공통성이 찾아지면, 그것들의 차이도 발견된다. 상이한 것들 모두에게서 하나의 공통성을 발견할 수는 없다. 이런 상이한 것들 사이에서 공통성이 발견되더라도 그 공통성은 상이한 것들의 부분에만 성립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 공통성은 일종의 가족 유사성이다.

이런 가족 유사성과 같은 공통성은 비교의 관점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 비교는 개체들에 대해서 외면적이며, 그런 한 여기서 공통성과 차이는 외적 반성에 속하는 것이다. 이는 주관적인 공통성과 차이이며, 그 사물 자체에 속하는 본질적 공통성과 차이는 아니다.

외적 반성은 반성 운동 즉 수직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상이성은 개체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서 나타난다. 양자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데, 상이한 것이므로 외적 반성만이 가능하며 거꾸로 외적 반성을 통해 정립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상이하다. 헤겔은 이런 외적인 반성을 통해서 얻은 공통성과 차이를 ‘동등성[Gleichheit]’과 ‘부등성[Ungleichheit]’으로 규정한다.

동등성은 부등성은 동일한 비교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동등성은 부등성에 대립하여 규정되며, 거꾸로 부등성은 동등성에 대립해서 규정된다. 동시에 동등성과 부등성은 분리된다. 양자는 상이한 것들이 지닌 다른 측면 다른 관점에서 본 것을 말한다. 전자의 측면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정립된 것이며 후자의 측면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직접적인 것[그 자체로 반성한 것]이다.

3)

예를 들어 가족 유사성에서 가족 A, B, C가 있다 할 때, A와 B는 코가 동등(유사)하고, B와 C는 눈동자 색깔이 동등하다. A와 C는 머릿결이 동등하다. 이런 경우 어떤 성질 A와 B의 코의 동등성은 A와 B의 머릿결의 부등성과 관계 속에 있다. 양자의 코의 동등성은 머릿결의 부등성과 짝을 이루며, 서로의 이면을 이룬다.

그러나 A가 지닌 눈동자 색깔은 B와는 무관하다. A의 눈동자 색깔은 B의 관점에서는 자기와 무관한 A가 지닌 직접적인 것이다. 물론, A를 C와 관계해서 보면, 눈동자 색깔은 동등성에 속하고 이는 A와 C가 코가 부등하다는 것에 대해 부정성의 관계에 있으니 정립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A, B, C가 지닌 모든 성질은 한편으로는 정립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관한, 직접적인 것이다. 어떤 것이 지닌 무관한 직접성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정립된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무관한, 직접성을 헤겔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반성[an sich Reflexion]’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규정한다. 사실 헤겔이 왜 이런 표현을 골랐는지는 모호하지만, 생각해본다면, 그 자체로[an sich]란 아직 잠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니, ‘그 자체로 반성적인 것’이란 반성이 아직 일어나지는 않은 직접적인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정립된 것으로 바뀔 수 있으니, 그런 점에서 단순히 직접적인 것은 아니고 잠재적으로 반성적인 것이 된다.

헤겔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상이성이 이중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정립된 측면과 그 자체적인 반성의 측면이다.

① “상이성은 무차별한 구별이므로 이 상이성 속에서 일반적으로 반성이 자신에 외적으로 생성된다. 구별은 다만 [동일성에 대해] 정립된 것이거나 또는 지양된 구별[독립성]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 구별은 전적으로 반성한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7)

② “그러므로 이중적인 측면이 출현한다. 즉 자기 내 반성 자체와 부정성 또는 정립된 존재로서 규정성이다. 정립된 존재는 자기에 외적인 반성이다. 정립된 존재는 부정으로서 부정이다. 따라서 그 자신에서 사실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이나 자기 내 반성이지만, 다만 그 자체로 그럴 뿐이다. 그런 정립된 존재는 외적인 것으로서 그런 부정에 관계하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8)

③ “그 자체에서 반성은 동일성이지만, 구별에 대해 무차별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구별을 전혀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서 구별에 대립한다.“(헤겔, 논리학, GW11, 268)

4)

위에 설명한 것처럼 상이성에서 두 가지 계기 즉 동등성과 부등성은 외적으로 정립된 것이어서, 가족 유사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경험이 발전하여 상이한 것들 가운데 동등성과 부등성이 단적으로 대립해서 그것에 속하는 모든 원소가 동등한 측면을 지니면서 동시에 부등한 측면을 지니게 된다면, 이런 경우는 동등한 것은 긍정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부등한 것은 부정적인 것이 된다. 헤겔은 이런 경우를 대립이라고 규정한다.

상이성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중첩될 뿐, 서로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대립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단적으로 대립하므로 이는 통일을 이룬다.

헤겔의 논리학이 항상 그렇듯이 개념의 발전은 경험의 발전을 전제로 한다. 이런 경험의 발전을 회고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논리적 발전이다. 마찬가지로 상이성에서 대립으로 개념이 발전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 경험의 발전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경험은 물론 생물의 개체적 현존에 대한 경험이다. 생물학은 분류를 통해 발전했다. 처음에는 외적인 특징을 가지고 생물이 분류되었으나 그런 분류를 벗어나는 예외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아직 상이성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근대에 와서 분류는 종이 재생산되는 방식 즉 생식을 기준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어느 생물에서나 일정한 발전을 이루어 유성생식에 이르게 되면, 암수의 구별이 생겨난다. 암수의 분류는 다른 분류 기준과 달리 위에서 말한 대립을 이룬다. 암수는 단적으로 대립하면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헤겔은 이처럼 일어나는 경험의 발전을 상이한 것이 개념상 자기모순을 통해 대립으로 나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즉 경험의 발전이 개념적으로 설명된 것이다.

5)

상이성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가족 유사성에서 보듯이 서로 무관하고 외면적이다. 그것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위의 예에서 A와 B는 코의 측면에서 동등하지만, 눈동자의 측면에서는 부등하다. B와 C는 눈동자의 측면에서는 동등하지만, 머릿결의 측면에서는 부등하다.

“동등성과 부등성이 이리저리 넘어가는 관계는 이런 규정성[동등성과 부등성]에 외면적이다. 또한, 양자는 서로 관계하지 않으며, 각자는 독자적인 것으로서 다만 제삼자에 관계한다.”(헤겔, 논리학, GW11, 268)

“그러나 서로 무차별하다는 것을 통해 동등성은 자기에만 관계하고 부등성도 마찬가지로 고유한 관점에서 일어나는 독자적인 반성이다. 따라서 각자는 자기 자신과 동등하다. 동등성과 부등성의 구별은 사라진다.”(헤겔, 논리학, GW11, 269)

이런 외적인 반성, 즉 제삼자에 의해 일어난 반성에 따라서 조건이나 측면, 관점에 따라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달라지니 양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런 서로 분리된 동등성과 부등성은 개념상 모순을 범하게 된다. 이 개념적 모순은 마치 플라톤의 저서 파르메니데스에서 나오는 논변을 상기시킨다. 아래를 보라.

우선 동등성은 자기에 대해 동등하지 않다. 왜냐하면, 동등성은 부등성과 분리된 것 즉 부등성과 부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등성은 자기모순이다. 마찬가지로 부등성도 자기모순이다. 왜냐하면, 부등성은 자기에 부등한 것인데, 따로 떨어져 독자적으로 존재하므로 동등한 것이다. 그 결과 부등한 것이 동등하다는 모순이 나온다.

“그러므로 동등성은 자기 자신과 동등한 것이 아니고 부등성으로서 부등성은 자기 자신과 부등하지 않으며 자기에 부등한 것은 그 자체가 동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등한 것과 부등한 것은 자기 자신과 부등한 것이다. 따라서 각자는 이런 반성이니 동등한 것은 자기 자신이며 동시에 부등한 것이며 부등한 것은 자기 자신이면서도 동시에 동등한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9)

이상의 논변은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상이성에서 나타나는 동등성과 부등성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족 유사성에서는 관점(코나 머릿결 등)을 제외한다면, 동등한 것이 동시에 부등하고, 부등한 것이 동시에 동등하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 A와 B는 동등하면서도 부등하며, 그것은 B와 C는 부등하면서도 동등하다.

이처럼 가족 유사성 즉 상이성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자기모순을 통해 붕괴하면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대립이 출현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상이한 것은 [동등성과 부등성으로] 정립됨을 통해서 부정적인 반성으로 이행한다. 상이한 것은 구별[동등성과 부등성]이 단순하게 정립된 것이므로 더는 그 구별은 구별이 아닌 것이며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등성과 부등성 자체는 정립된 것으로 되면서 무차별성이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반성을 거쳐서 자기와의 부정적 통일로 즉 동등성과 부등성을 자기 자신에서 구별하는 반성으로 되돌아간다. 상이성은 자기의 무차별한 측면들이 동시에 잔적으로 이 부정적 통일의 계기로 되면서 곧 대립으로 된다.”(헤겔, 논리학, GW11, 270)

상이한 것들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외면적이다. 그러나 대립한 것 즉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예를 들어 암수의 구별과 같은 것)은 개체적 현존 자체에 내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개체적 현존 자체가 “자기 자신에서 구별하는 것”이며 그 구별 즉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 통일의 계기”로 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1-개체와 심연으로서 본질[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1-개체와 심연으로서 본질

1)

반성 운동은 현존과 본질 사이의 관계다. 이런 관계의 축은 수직적이다. 반면 본질 규정에서 다루어지는 동일성과 구별, 상이성과 대립, 모순은 개체적 현존들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이 관계의 축은 수평적이다.

개체적 현존과 개체적 현존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 본질이다. 개체적 현존을 그 자체로 보면, 유기적인 통일체이고 자기 완결적이다. 그러므로 마치 모나드처럼 다른 개체적 현존으로부터 독립적이다. 그러므로 이 개체적 현존 사이는 서로 건너갈 수 없는 심연의 바다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개체적 현존은 사실 본질의 구체적 실현태이며 본질을 통해 다른 개체적 현존과 연관된다. 이 본질이 열어 놓는 공간에서 하나의 현존이 다른 현존과 관계한다. 이 본질을 통해 하나의 개체적 현존은 다른 개체적 현존으로 지속한다.

본질이 현존에 대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즉 그 운동이 외적 반성 운동인가 아니면 내적 또는 규정하는 반성 운동인가에 따라 개체적 현존의 관계도 변화한다. 그 관계는 외적 반성 운동에서 개체적 현존의 관계는 상이성이다. 반면 규정하는 반성에서 개체적 현존의 관계는 대립, 모순이다.

2)

반성 운동을 다룰 때 추상적인 차원에서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이 있어서 현존과 본질 사이의 운동하는 양 측면을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개체적 현존을 개별적으로 보면, 그 내부에서 두 측면이 존재한다. 즉 동일성과 구별이다. 즉 동일성과 구별은 아직 개체적 현존 사이를 다루지 않고 이 서로 관계하는 개체적 현존 각각에 내재하는 두 측면이 된다.

그 가운데 본질의 운동은 자기 부정성을 통해 매개된 자기 관계이다. 이런 자기 부정성이 자기 관계하는 측면을 일컬어 동일성이라 한다. 이 동일성은 곧 자기 동일성이며 개체적 현존이 지속해서 현존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치 모나드처럼 창이 없으며 타자와의 사이에 심연이 놓여 있다.

“본질[본질의 현존]*은 절대적 부정성 속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이런 절대적 부정성 속에서 타자 존재와 타자에 대한 관계가 단적으로 자기 자신에서 순수한 자기 동일성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본질은 자기와 단순한 동일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0)

주*) 여기서 본질이란 현존과 구별되는 본질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본질은 현존하는 것으로서 본질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동일성은 부정성의 부정을 매개로 한 자기 관계이고 이 자기 부정성이 곧 구별이니, 이 동일성은 구별을 자신의 한 계기로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동일성은 추상적인 동일성과 다른 것이다.

추상적 동일성은 서로 다른 현존을 비교하여 공통된 것을 의미하므로 이 공통성은 현존들이 서로 구별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이 동일성은 타자 즉 구별을 부정함으로써 규정되는 동일성이다.

반면, 생물체의 개체가 끊임없는 신진대사를 통해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듯, 이 개체적 현존에서 나타나는 동일성은 이미 내적으로 자기 부정성 즉 구별을 포함하고 있으니, 그 자신은 전체의 한 계기이면서 동시에 전체가 된다.

“동일성은 자기 내로의 반성[본질로의 반성]이어서 이는 내적인 반발인 한[현존의 정립]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반발은 자기 내로의 반성으로서 반발이며 직접 자기 내로 자기를 환수하는 반발이다. 따라서 동일성은 자기와 동일한 구별인 한에서 동일성이다. 그러나 구별은 동일성이 아니라 절대적인 비동일성이므로 자기 자신과 동일할 뿐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2)

3)

동일성의 이면인 구별의 측면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구별은 추상적인 구별과 다르다. 추상적 구별이 비교를 통해 나온 구별이며 그것은 공통성이라는 추상적 동일성에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체적 현존에서 나타나는 구별은 자기 자신과의 구별이니, 헤겔은 이를 ‘절대적 구별’이라 한다. 이런 자기 구별은 동시에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그런 가운데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니, 절대적 구별은 이런 자기 동일성을 자신의 한 계기로 내포하고 있는 구별이다. 이 구별은 자기의 한 계기이자 동시에 전체이다.

“구별은 본래 자기 관계하는 구별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타자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구별은 구별 자체가 아니며 자기의 타자이다. 그러나 구별로부터 구별된 것은 동일성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구별 자체인 동시에 동일성이다.”

“이 구별은 그 자체이며 대자적인 구별이니, 절대적 구별이며 본질의 구별이다. 그 자체이며 대자적인 구별로서 이 구별은 외적인 것을 통해 일어나는 구별이 아니며 구별이 자기에 관계하므로 단순한 것으로 되는 구별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6)

존재론의 영역에서 개별 현존[즉 어떤 것의 술어적 규정]은 타자로 직접 그 자신에서 이행한다. 빨간색은 어떤 것에 우연적이므로 이 어떤 것[주어]은 언제라도 파란색이라는 타자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본질론에서 개체적 현존이 지닌 구별은 생물적 개체에서 보듯이 구별된 것이면서 동시에 구별되지 않은 것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분명 다른 나이지만, 동시에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같은 나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구별은 필연적이니, 헤겔은 여기서 타자는 그 자체로 대자적인 타자라고 한다.

“이 구별은 반성의 구별이며 현존[존재론 영역에서]의 타자가 아니다. 현존과 그 타자 존재는 서로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정립된다. 서로 대립적으로 규정된 현존 가운데 각각은 독자적으로 직접적인 현존을 갖는다. 그에 반해서 본질의 타자는 그 자체로 대자적인 타자이지 타자 밖에서 발견되는 타자로서 타자가 아니며 또한 단순한 규정성 그 자체로서 타자가 아니다.”(헤겔 논리학, GW11, 266)

4)

개체적 동일성은 자신의 타자인 구별을 지양하면서 자기 동일성에 이르지만, 이 자기 동일성은 이미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니, 곧 자신의 타자인 구별로 넘어가는 것이다.

개체는 자기의 타자인 구별로 넘어가는 측면을 헤겔은 자기 반발이라 하는데, 이렇게 자기 반발은 다시 구별에 이르지만, 이 구별은 다시 지양되니, 개체는 다시 자기 내로 반성하여 자기 관계 즉 동일성에 이른다.

개체적 현존은 동일성으로서 다른 개체적 현존과 심연을 통해 떨어져 있으나 이미 자기 부정성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의 다른 개체적 현존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개체적 현존과 다른 개체적 현존은 심연을 통해 연결된 본질적인 동일성이다.

심연을 통해 단절되고 동시에 연결되는 이유는 개체적 현존을 매개하는 것이 심층 속에 존재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체적 현존이 내부에서 겪은 운동은 곧 현존과 본질 사이의 운동이며 이 운동이 표면에 비추어지면, 동일성과 구별의 운동으로 나타난다.

개체적 현존이 본질로 자기 내 반성하는 것은 개체가 자기를 구별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본질이 다시 자기를 개체적 현존으로 정립하는 것은 자기 관계하는 동일성으로 나타난다. 수직적 운동이 매개되어서 수평적 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5)

동일성과 구별의 통일은 생물체의 종적 개체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헤겔은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상의 사실[구별의 절대성]이 반성의 본질적 본성이며 그리고 모든 활동[Taetigkeit]과 자기 운동[Selbstbewegug]의 특정한 원초적 근거[bestimmte Urgrund]로서 고찰될 수 있다.”(헤겔 논리학, GW11, 266)

윗글에서 ‘자기 운동’이라는 말이 주목된다. 헤겔에서 스스로 운동하는 것은 바로 생물체의 종적 본질밖에 없다. 이 스스로 운동하는 본질이 곧 개체적 현존과 개체적 현존의 심연 속에 잠복하면서 개체적 현존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동일성과 추상적 구별과 달리 공허한 동어반복으로서 사유 법칙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종적 개체에서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필연적 법칙이니, 그것은 존재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이행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법칙이고 구체적인 법칙이다.

개체적 현존이 이처럼 두 측면 즉 동일성과 구별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며 양자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이제 이런 개체적 현존과 다른 개체적 현존 사이의 관계가 출현한다. 처음 나타나는 관계가 곧 상이성이다.

6)

자주 헤겔은 동일성의 철학자로 간주한다. 특히 현대에 와서 아도르노나 들뢰즈 등이 헤겔을 그렇게 해석한다. 그런데 헤겔 자신은 정신현상학에서 셸링의 철학을 동일성의 철학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셸링이 모든 소는 밤에 까맣게 보인다고 주장한다면서 비난했다.

이런 비판은 셸링의 직접적인 일반성 또는 무차별적 존재를 비판하는 것인데, 이런 무차별적 존재가 아도르노나 들뢰즈 철학의 기초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서로서로 동일성의 철학으로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설명했듯이 헤겔에서 동일성은 자기 부정성의 자기 관계이며 그런 점에서 이미 구별을 내포하는 동일성이다. 이 동일성은 생물체의 개체적 현존이 지닌 동일성이며 이 개체적 현존은 본질을 매개로 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동일성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을 동일성의 철학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자기 부정성의 철학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자기 부정성이 곧 절대적 부정성이며, 이것이 곧 차이이니, 헤겔은 차이의 철학자이며 이 절대적 부정성이 곧 본질이 자기를 재생산하는 생성의 운동이니 헤겔은 또한 생성의 철학자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0-본질 규정과 동일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0-본질 규정과 동일률

1)

헤겔 논리학 본질론 1편 2장은 본질 규정을 다룬다. 헤겔은 이 본질 규정을 반성 규정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속하는 규정이 동일성과 구별, 상이성과 대립 그리고 모순이라는 규정이다. 이 규정은 오른쪽과 왼쪽, 아버지와 아들 등과 같이 반성 규정이지만, 오직 본질적인 것 즉 본질의 현존에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본질 규정이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질적 반성 규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

본질 규정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헤겔은 바로 주석을 달아서 이 본질적 반성 규정[본질 규정]이 존재론에서 다루었던 규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이 문제를 본질적 반성 규정이 지닌 독특한 특징과 관련하여 풀어나간다. 그 문제란 곧 본질적 반성 규정은 사유의 일반 법칙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유법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일률이나 모순률 그리고 배중률과 같은 것인데, 여기서 다루어지는 것이 동일성, 구별, 모순 등과 같은 반성 규정이다. 왜 질적이거나 양적인 다른 규정 즉 존재론에 속하는 규정들은 사유법칙으로 되지 않지만, 반성 규정은 사유의 법칙으로 올라설 수 있는가?

이 동일률이나 모순률은 흔히 사유법칙으로서 동어반복을 표현하는 것이니 필연적인 추론의 법칙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현실을 파악하는 범주로서는 무의미한 것이라 보는데, 헤겔은 이 사유법칙을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일까?

2)

존재론에 속하는 질적인 규정이나 양적인 규정은 판단의 술어에 해당한다. 판단의 술어는 한편으로는 주어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독립적인 것이어서 여러 가지 것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이렇게 독립적이더라도 그것은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판단의 술어인 질적 규정이나 양적 규정에 관해서는 일반화된 법칙이 적용될 수 없다.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두 독립적인 것의 만남이니, 이는 항상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술어는 그 사물에 우연적이며 경험적인 명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상이 바뀌면 술어는 다른 술어로 바뀌게 마련이다. 이를 헤겔적으로 표현하자면 즉 이런 술어는 그 자체에서 자기를 지양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대립된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존재의 영역에서 어떤 규정성은 본질적으로 대립된 것으로 이행한다. 어떤 하나의 규정성을 부정하는 규정성은 그 규정성만큼이나 필연적이다. 모든 규정성은 직접적인 규정성인 한에서 그것에 대립하는 다른 규정성이 직접 존재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9)

그러므로 이런 존재론의 영역에서 어떤 하나의 술어가 모든 사물에 적용되거나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이런 술어에 관해서는 일반화된 법칙이 적용될 수 없다. 이런 주장은 “직접적 진리이거나 반박할 수 없는 사유 명제라는 성격이 더는 귀속될 수 없는”(헤겔, 논리학, GW11, 259) 주장이다. 예를 들어 ‘모든 존재자가 빨간색이라’거나 ‘모든 금은 원자가 32이다’는 판단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동일성과 구별과 같은 반성 규정은 이런 존재론적 규정 즉 술어와는 구별된다. ‘어떤 것이 빨간색이다’ ‘어떤 것의 크기는 3미터다’라는 판단은 말이 되지만, ‘빨간색은 동일하다’라든가, ‘32 그램은 동일하다’는 명제는 무언가 부족하다.

문장에서 반성 규정이 술어로 부가되려면 적어도 비교되는 두 개의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두 개의 개별자가 비교될 수도 있고 두 개의 술어가 비교될 수도 있다. 즉 두 물방울의 본질이 동일하거나 현존이 동일하든가 두 색깔이나 두 량이 동일하다. 동일성과 구별이라는 단순한 반성 규정은 그 비교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런데 헤겔은 문장에서 명제와 판단을 구분한다. 문장은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지는데, 명제는 술어가 개별적인 것이다. 반면 판단에서 술어는 일반적인 것이다. (헤겔은 명제와 판단의 구별을 나중에 논리학 개념론 판단론에서 서술한다. 여기서는 일단 헤겔에서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지나가기로 하자)

그러므로 어떤 주어가 반성 규정을 술어로 할 때 헤겔은 이를 판단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술어는 일반성을 지니지 못하고 자립적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성 규정인 ‘동일하다’는 사물 자체가 지닌 성질도 분량도 아니니, 사물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교하는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비교에서 나오는 반성 규정은 비교되는 대상에 따라 변화하므로 비교 대상에 개별적으로 속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명제다.

“판단은 내용을 일반적 규정성인 술어 속으로 옮겨놓는다. 그 결과 일반적 규정성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단순한 계사로서 그 관계와 구별된다…. 그에 반해서 반성 규정은 정립된 것이 자기 내로 반성된 것이니, 명제 형식에 가깝다.”(헤겔, 논리학, GW11, 259)

여기서 정립된 것은 곧 술어를 말한다. 이것이 자기 내로 반성된 것이라는 것은 곧 그 현존에 고유한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술어가 주어에 고유하니, 이는 판단이 아니라 명제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X 대신 Y나 Z를 주어로 삼으면 ‘Y는 A와 동일하다’라든가 ‘Z는 A와 동일하다’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X는 A와 동일하다’라는 판단에서 ‘A와 동일하다’를 일반적 자립적 술어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A와 동일하다’는 술어와 ‘동일하다’는 술어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지금 논의되는 것은 ‘동일하다’는 술어이지 ‘A와 동일하다’라는 술어는 아니다. ‘A와 동일하다’가 아니라 ‘동일하다’라는 술어를 가지고 볼 때, 이 후자는 술어는 일반성과 자립성을 지니지 못한다.

3)

반성 규정 자체만 가지고 보면 서로 다른 것들의 비교에서 나오니, 필연적인 사유법칙이 될 수 없다. 어떤 것은 다른 것의 오른쪽에 있지만, 또 다른 것의 왼쪽에 있다. 그렇다면 동일률이나 모순률과 같은 사유법칙은 어떻게 성립하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 본질론에서 헤겔이 다루는 반성 규정은 이런 개별자나 질적, 양적 규정 등의 동일성과 구별이 아니다. 여기서 헤겔이 다루는 것은 특히 특정한 반성 규정인데 그것은 곧 본질이 나타난 현존 즉 개체에서의 반성 규정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여기서 다루는 반성 규정 즉 동일성과 구별을 본질 규정[Wesenheit]*이라 한 것이다.

주*) Wesenheit는 일상적으로 본성을 의미하는데, 사물의 본질이라고 할 때 Wesen과 구별해야 한다. 그러면 이 Wesenheit는 마치 존재론에서 개별자에 관해 적용되는 질적, 양적 규정성「Bestimmtheit]이 다루어지듯이 본질에 관해 적용되는 규정성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런데 헤겔 논리학에서 이데아와 같은 초월적인 본질이 있고 그것이 질료 속에서 현존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현존은 자기를 재생산한다. 본질이란 이런 재생산의 과정을 통해서 출현할 뿐이다.

현존은 마치 생물체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개체와 같다. 이런 개체들은 이전의 개체 내의 본질이 자기를 새로운 현존으로 재생산한 것이다. 본질은 이 과정에 감추어져 있고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곧 개체적 현존일 뿐이다.

생명체에서 개체에서 또 하나의 개체가 출현하는 것은 시간상 단절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사실 개체 자체가 끝없는 자기 재생산을 통해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존재일 뿐이니 여기서는 개체와 개체 사이에는 시간상의 단절도 없으며 우리가 보기에 하나의 개체가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헤겔이 개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불가분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유기적으로 체계화된 것이므로, 자기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에서 술어가 적용되는 주어는 개별자「Einzelne]이지 개체[Individualitaet]는 아니다. 반면 본질론에서 다루어지는 주어는 항상 개체적 현존이다. 이런 개체적 현존 또는 본질적 현존에 대해 적용되는 술어가 본질 규정이다.

4)

이처럼 본질론에서 다루는 동일성 등 반성 규정은 이와 같은 개체의 술어가 되는데, 여기서 ‘A[어떤 개체]가 동일하다’라는 문장은 기이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동일하다라는 반성 규정은 항상 두 개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개체가 동일하다는 문장은 따라서 비문법적인 문장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주 ‘A는 동일하다’라고 말한다면, 사실 이것은 생략된 표현이다. 즉 이 표현은 정확하게 하자면 ‘A는 자신과 동일하다’라든가 ‘A는 A와 동일하다’로 표현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A가 A와 동일하다’는 것은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는 일반적으로 사유의 필연적 법칙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은 대체로 ‘A는 A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런 표현을 하나의 판단으로 보면, ‘A이다‘는 술어화되면서, 마치 빨간색이나 32그램과 같은 A의 존재론적 규정이 된다. 그러나 동일성과 같은 술어는 사물의 존재론적 규정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술어적인 표현은 동일성과 같은 반성 규정을 잘못 표현한 문장이다.

이런 표현이 의미가 있으려면 일종의 동어반복적 추론의 표현으로 파악해야 한다. 즉 ‘A이면 A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어반복적 표현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문장이다.

또한, 동일률은 지시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샛별은 저녘별이다’와 같은 문장이다. 하지만 이런 문장은 의미의 동일성을 다루는 하나의 반성 명제이어서 예를 들어 색깔의 동일성 문장과 같이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명제이지,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을 표현한다고 볼 수 없다.

5)

형식논리학에서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은 동어반복을 표현하는 것으로 경험과는 무관하게 사유의 규칙[추론의 법칙: A이면 A이다]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헤겔은 이 동일률 법칙은 단순한 사유법칙이 아니라 본질의 반성 규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비교되는 두 대상은 본질의 구현체로서 두 개체적 현존이다. 두 개체는 모두 자기 자신이니 여기서 비교 대상은 곧 자기 자신이다.

본질은 여기서 감추어져 있으므로 단순히 두 개체적 현존이 비교된다. 그 개체적 현존은 자기 내에서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니 자기 밖에 있는 다른 현존과는 무관하다. 두 현존은 마치 심연을 통해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현존은 본질의 구현체이다. 물론 이 본질은 감추어져 은폐되어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두 개체적 현존일 뿐이다. 그러므로 두 개체적 현존 즉 ‘A는 A이다’라는 명제는 유의미한 것이며 본질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명제이다.

모든 개체는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 이것은 개체가 개체인 한에서는 필연적 원리이다. 도대체 개체가 자기 동일적이지 않으면, 이들은 본질의 구현체라고 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개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반성 규정은 사실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따라서 타자에 관계하지 않고 대립 없이 존재한다는 형식을 갖는다.”(헤겔, 논리학, GW11, 260)

6)

이제 헤겔은 동일률의 법칙을 개체적 현존에 관한 한 필연적인 명제로 본다. 그러므로 그것은 법칙이지만, 이 동일률의 법칙은 단순한 동어반복적 사유의 법칙도 아니고 모든 개별자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법칙도 아니다. 이 동일률의 법칙은 개체 즉 생물적 개체에서만 일반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이다.

반성 규정은 모든 개체적 현존에 관해서는 필연적으로 성립한다. 개체적 현존은 곧 본질의 구현체이므로 다시 말해 “자기 내에서 본질이 비추는 것”이므로 한편으로는 개체적 현존이며 다른 한편에는 본질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그것은 자기 동일한 것이며 본질이 자기를 정립한 것이다. 후자의 측면에서 그것은 자기 구별적인 것으로 자기 내로 복귀하여 본질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모든 개체적 현존은 한편으로 동일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사유법칙으로서 동일성과 구별도 서로 대립하면서도 매개하고 지양하는 것이다.

“반성 규정은 서로에 대해 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 규정은 반성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행이나 모순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사유법칙으로서 제기된 여러 명제들은 엄밀하게 고찰해 볼 때 서로 대립하며 상호 모순적이고 서로 지양한다.”(헤겔, 논리학, GW11, 260)

헤겔 논리학 반성 운동9- 지젝과 반성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반성 운동9- 지젝과 반성 개념

1)

라캉 해석자이면서 문화나 이데올로기 비평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지젝은 헤겔이나 칸트와 같은 고전 철학에 해박하다. 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헤겔의 개념을 이용해서 소개하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곧 헤겔 반성 개념에 대한 지젝의 설명이다.

그는 1989년 지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국내 번역은 이수련 역, 인간사랑, 2002년 5월)이라는 책의 마지막 6장에서 정립, 전제, 외적 반성, 규정하는 반성 개념을 설명한다. 그의 설명을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실재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이는 헤겔의 논리학에 나오는 반성 개념과 연관되어 있어 보인다. 그의 설명은 헤겔의 맥락과는 다른 맥락에서 하지만, 그 자체로 흥미롭고 거꾸로 헤겔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이 자리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2)

지젝에서 루소의 순수한 자연, 칸트의 물 자체와 포이어바흐의 소외된 신, 라캉의 증상 너머의 실재, 국가의 의지로서 군주, 텍스트의 원초적 의미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된다. 이야기를 단순화하기 위해 여기서는 물 자체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고 설명하기로 하자. 동일한 논리가 자연이나 신이나 실재, 의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알다시피 칸트는 물 자체라는 개념을 설정 즉 정립했다. 이 물 자체는 현상 너머에 있으면서 현상의 근거가 되는 것인데, 이 개념이 설정되는 논리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지젝은 헤겔의 반성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는 헤겔이 본질론 1편 1장에서 전개한 반성 운동 즉 정립하는 반성과 외적 반성, 그리고 규정하는 반성을 끌어들이는데 이를 단순화해서 ‘전제를 정립하기’와 ‘정립을 전제하기’라는 두 과정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 두 개념은 헤겔에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때 그는 헤겔의 외적 반성을 ‘전제를 정립하기’로 규정하고 규정하는 반성을 ‘정립을 전제하기’로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헤겔의 정립하는 반성이나, 외적 반성, 규정하는 반성에 부여하는 의미는 헤겔 자신의 것과는 구별되는데, 우선 그의 개념을 설명한 다음, 그 차이를 밝혀 보기로 하자.

3)

그 가운데 첫 번째 정립하는 반성은 어떤 현상을 그 자체로 물 자체로 보는 소박한 또는 순진한 관점을 말한다. 즉 현상적으로 주어진 것을 그대로 믿는 태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취하는 태도가 주어진 현상의 규정을 그대로 믿는 태도이니, 이것을 지젝은 정립하는 반성이라 부른다.

두 번째, 외적 반성은 현상 너머에 현상의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물 자체로 설정하는 태도이다. 이 초월적 실재는 현상을 출발점으로 해서 소급적인 방식으로 설정되며, 일단 설정된 이후에는 오히려 이 현상을 설명하는 근거로 여겨진다. 물 자체가 설정된 이후에 물 자체는 현상과 괴리되며, 진리인 물 자체에 비추어 본다면, 현상은 제약된 것, 왜곡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외적 반성을 그는 ‘전제를 정립하기’로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정립이란 곧 현상을 말하며 전제하기란 이 현상의 근거를 찾아 들어가는 운동을 말한다. 일단 그 근거가 확립된 다음엔 현상은 이제 그 근거로부터 설정된 것으로 규정된다.

사실 이 근거란 현상으로부터 소급된 것이니 현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이 현상의 근거로 설정되면서 현상이 오히려 근거에 의존하는 일종의 소외 또는 전도가 여기서 출현하게 된다. 이런 전도는 종교적으로 신에 매달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또 다른 흥미로운 예로서는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개념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자신을 현실로부터 학대받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이 학대받는 현실을 설정하는 것은 그 자신이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신이 희생당한 존재가 되도록 자기를 희생하게 하는 가족을 설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학대하고 희생하는 현실은 자기도 모른 채 자기가 전제한 것이다.

4)

현상의 근거가 되는 물 자체가 사실은 현상으로부터 주관에 의해 소급적으로 도출된 결과이니 곧 물 자체는 주체 자신이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외적 반성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 이 주체 자신의 설정 운동은 은폐되고 만다. 그 결과 마치 물 자체가 현상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규정하는 반성에 이르면, 이 물 자체가 사실은 주관 자신이 소급하여 설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지젝은 이를 ‘정립을 전제하기’로 규정하는데, 여기서 정립이란 정립하는 주체를 의미하며, 이 정립하는 주체가 곧 물 자체의 전제가 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는 흥미로운 예로서 남근을 들고 있는데, 남근은 관념을 통해 발기되지만, 그 관념은 신체적인 것으로서 의식적 통제 너머에 있다. 의식적 통제 너머에 신체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남근은 물 자체로 전제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관념을 통해 발기된다는 점에서는 주관이 설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형식적 전환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주관 밖에 물 자체가 주관이 정립한 물 자체라고 인식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상의 근거가 되고 의식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지젝은 헤겔이 실체가 주체가 된다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이상과 같은 형식적 전환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전환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공허한 제스처”이다.

“어쨌든 일어나고 있는 무엇에 대해 책임지도록 하는 순수한 가장 행위이다. 이것이 ‘실체가 주체가 되는’ 방식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45)

5)

지젝은 이상과 같이 헤겔의 반성 개념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한 다음, 헤겔적인 반성 개념의 한계를 지적한다. 헤겔에 대한 그의 비판은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참조한다. 마르크스는 어떤 것이 거짓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며, 그런 이데올로기를 갖도록 하는 사회적 조건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젝 역시 마찬가지다.

첫째, 그에게서 외재적 반성은 단순히 주관이 현상의 근거로 물 자체를 설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외재적 반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본질 자체가 자기를 타자화하여야 한다.

“외재적 반영의 결정적 특징은 본질이 사전에 객관적으로 주어진 외재성의 형태로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 바로 자시 자신을 미리 전제한다는 것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51)

여기서 ‘본질의 타자화’란 곧 본질 속에서 주체가 현상의 근거를 초월적 물 자체에서 찾고자 하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소외된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 소외될 수밖에 없으니, 그 때문에 외재적으로 반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마찬가지로 지젝은 헤겔이 말하는 규정하는 반성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 자체가 주관이 설정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더라도, 주관이 그런 물 자체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 자체를 설정하는 주관 자신의 조건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이 변화되어야만 비로소 물 자체를 설정하는 일이 끝나게 될 것이다. 이를 지젝은 신 자체의 주체화라고 말한다.

“인간은 신의 진리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다시 말해 주체가 소외된 실체적 본체의 진리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체가 자신의 전도된 이미지 속에서처럼 이 본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정 반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핵심은 실체적 본체가 그 자체로 분열되어 주체를 산출해내야 한다.(즉 신 자신이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56-357)

5)

외적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에 관한 지젝의 설명은 헤겔의 설명과는 다르다. 헤겔은 외적 반성은 어떤 정립된 것의 본질이 그것 자체에 외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삼자인 주관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규정하는 반성에서 찾아진 본질은 그 어떤 것 자체에 내재적인 것이며, 따라서 제삼자인 주관이 아니라 그것 자체에 본질적인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헤겔에서 외적 반성에서 규정하는 반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인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즉 주관적 인식이 사물 자체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지젝에서 외적 반성은 주관이 물 자체를 설정한다는(물론 자각 없이) 의미에서 주관적이지만, 설정된 것은 주관 밖의 물 자체다. 이는 헤겔에서 단순히 주관적으로 본질을 설정하는 외적 반성 개념 이상의 것이다. 헤겔에서는 주관 밖의 물 자체를 설정하는 운동은 나중에 정신의 소외 운동에서 설명되는데, 이는 하나의 주관이 아니라 다수의 주관이 상호작용이라는 것을 매개로 한다.

또한, 규정하는 반성의 경우 지젝은 주관이 그런 물 자체를 설정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며, 이는 단순한 형식전환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헤겔에게서처럼 사물에 내재하는 객관적 본질이 인식된 것은 아니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8-외적인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8-외적인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

1)

앞에서 정립하는 반성[ㄴetzende Relexion]과 전제하는 반성[voraussetzende Reflexion]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판단이 지닌 두 측면이다. 한 측면은 본질에서 현존을 끌어내서 판단(정립)하는 작용이다. 이렇게 정립된 것이 곧 ‘그 자체 부정적인 것[an sich Negative]’인 가상이다. 다른 측면은 개별 현존에서 다시 그 근거가 되는 일반 본질을 찾아가는 판단 작용이다. 이는 현존을 전제로 본질에 이르는 길이다.

이 두 측면은 사실 동일한 판단의 두 측면이며 서로 이면이면서 교차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 두 측면을 인식의 발전 과정으로 설명했다. 현존하는 가상은 이미 본질에 의해 규정된 것 즉 정립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정립은 감추어진 것이었다. 그러한 정립이 의문시되면서 감추어진 본질을 자각하여 제시할 때 이것이 전제하는 작용이다.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은 서로 순환한다. 이런 순환은 인식의 운동에서 항상 일어난다. 인식은 어떤 주어진 개별자로부터 귀납하여 일반적 본질에 이르지만, 이런 귀납은 순환적이다. 왜냐하면, 어떤 주어진 것은 감추어진 일정한 본질을 통해서 이미 선택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귀납이란 자기가 이미 감추어놓은 본질에 다시 이르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전제하는 반성 운동을 통해 찾아진 본질은 주관적으로 미리 설정한 것에 불과하니 헤겔은 이런 반성은 ‘외적인 반성’에 그친다고 한다.

“반성이 지양하면서 자기에 전제하는 직접적인 것은 단적으로 다만 정립된 것이며 그 자체로 지양된 것이어서, 이는 자기 내로 되돌아옴[본질]과 상이하지 않으며, 그 자체 다만 이런 자기 내로 되돌아옴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정립된 것은 동시에 부정적인 것으로서 규정되니, 이는 일자[직접적인 현존]와 직접 대립하는 것이며 타자[본질]와도 직접 대립하는 것으로서 규정된다. 대립한다. 그러므로 반성은 특정한[bestimmt: 주관적인] 것이 된다. 반성은 이 규정성[Bestimmtheit]에 따라서 전제를 가지니 자신의 타자로서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니, 이런 반성은 외적인 반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이런 외적인 반성은 자신이 출발하는 지점이 “자신의 타자로서 직접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실 그것이 이미 그가 주관적으로 선택된 즉 이미 정립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2)

이런 외적 반성은 순환적이다. 외적 반성은 현존을 한번은 직접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한 번은 본질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자는 그가 의식하고 있는 측면이다. 후자는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측면이다. 그는 진정으로 직접 경험에서 출발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미리 선택해놓은 것에서 출발한다.

“외적 반성은 이런 규정 속에서 이중화되어 한번은 전제된 것으로서 또는 자기 내로 반성하여 직접적이 되는 것으로서[현존] 존재하며 다른 한 번은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는[가상] 반성으로서 존재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2-253)

이런 외적인 반성은 직접적인 것을 전제로 해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앞에서 말한 전제하는 반성 또는 칸트가 말한 반성 판단과 같다. 헤겔도 그러므로 주석에서 “칸트가 특수자가 주어진 경우 그것에 대해 일반자를 찾으려는 것이라는 의미를 할당한 반성은 이미 밝혀지듯이 다만 외적 반성과 흡사하다”라고 말한다.

칸트의 반성 판단에 속하는 미적 판단은 칸트 자신은 순수하게 직접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믿었다.

“사유하는 반성은 외적인 반성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사실상 단적으로 주어진 것 즉 그것에 낯선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나가서 자신을 단순히 형식적인 활동으로 즉 내용과 소재를 외부에서 받아들이고 독자적으로는 다만 그런 내용에 의해 제약된 활동으로 고찰한다.” (헤겔 논리학, GW11, 255)

그러나 사실 헤겔이 말한 대로 이런 반성 판단 즉 외적인 반성은 이미 주관적으로 선택된 것에서 출발하는 순환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칸트 이후 철학자들은 반성 판단을 그런 외적인 주관적인 반성에 그친다고 보고, 진정한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반성을 떠나서 절대적인 고찰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낭만주의 철학자들은 절대자를 직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헤겔은 그들이 반성을 “절대적 고찰방식의 반대 극이며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간주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4-5)라고 말한다. 그러나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보듯이 절대자에 관한 이런 직관주의적 인식론을 밤에는 모든 소가 검게 보인다고 하면서 비판했다.

3)

헤겔은 인식이 개념을 통해 일어나는 선험적 인식인 한에서 반성적 인식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반성이 처음에는 외적 반성이더라도 마침내 절대적인 반성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절대적 반성은 곧 반성을 통해 얻어지는 본질이 단순히 외면적 주관적인 본질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고유한 본래적 본질 즉 객관적 본질이 될 수 있게 하는 반성이다.

“그러나 반성에는 또한 절대적 반성의 개념도 있다. 왜냐하면, 반성이 자기의 규정 작용 속에서 다가가는 일반자, 원리 또는 규칙과 법칙은 출발점이 되는 그런 직접적인 것의 본질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직접적인 것은 무실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런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 즉 규정하는 반성이 비로소 직접적인 것을 그 진정한 존재에 따라서 정립하는 것으로서 여겨지며 그런 규정하는 반성이 직접적인 것에서 수행하는 것 즉 그런 반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규정은 그런 직접적인 것에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래적 존재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4)

헤겔은 이런 객관적 본질에 이르는 반성을 ‘절대적 반성’이나 ‘내재적인 반성’ 또는 ‘규정하는 반성[bestimmende Reflxion]’이라는 개념으로 서술한다. 헤겔의 논리학 본질론에서 반성 운동의 명운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 규정하는 반성이며, 이는 본질론이 존재론과 개념론을 매개하는 장이니, 논리학 전체를 짊어지고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으니, 이제 이 개념이 지닌 정확한 의미를 탐구해 보기로 하자. 도대체 어떻게 반성 운동이 외적인 반성에 그치지 않고 규정하는 절대적 반성이 될 수 있는 것일까?

4)

헤겔은 1편 가상의 2장에서 반성을 다루다 그 3절에 이르러 규정하는 반성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는 지금껏 논의하지 않았던 ‘반성 규정[Refleionbestimmung]’이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이 반성 규정은 나중에 ‘본질 규정[Wesenheit]’이라고 하므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 절 바로 다음 1편 3장에서 다루게 될 ’동일성‘과 ’차이‘, ’대립‘과 ’모순‘이라는 규정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먼저 이런 반성 규정이 존재론에서 다루었던 질적 규정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한다. 질적 규정에서 어떤 규정은 그 자체에서[an ihm selbst] 자신의 타자로 이행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그 자체에서 파란색으로 이행한다. 이런 이행은 질적 판단에서 긍정 판단에서 부정 판단으로의 이행이다.

“존재의 영역에서 현존은 그 자신에서 부정을 지녔던 존재이며 이런 부정은 그 자체 직접적인 것이었으니 존재는 그 부정의 직접적인 받침대이자 지반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5)

그러나 반성 규정에서 어떤 현존 즉 규정은 마찬가지로 타자와 관계하지만, 여기서 관계는 반성의 관계에 있다. 즉 어떤 것은 자신의 타자를 통해 규정될 뿐이다. 예를 들어 왼쪽은 오른쪽이 아닌 것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아버지이다.

“반성 규정은 존재, 질의 규정성으로부터 구별된다. 이 존재의 규정성은 일반적으로 타자에 직접 관계한다. 정립된 존재도 타자에 관계하지만, 이때 타자는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질의 부정성은 존재하는 것으로서 부정성이다. 존재가 그 근거와 지반을 이룬다. 그러나 그에 반해 반성 규정은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헤겔 논리학, GW11, 256)

즉 본질의 영역에서 하나의 현존은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을 통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 ‘자기 내 반성’은 다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질은 자기 내에서 부등하며 따라서 이행하는 것이며 타자로 소멸하는 계기이다. 그에 반해 반성 규정은 부정으로서 정립된 것이며 그 근거에 부정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 부정이며 자기 내에서 자기와 부등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본질적이며 비 이행적인 규정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56)

“정립된 것은 자신을 규정으로 고정하는 데 그 이유는 반성이 반성을 통해 부정된 존재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성을 통해 부정된 존재는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규정은 존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동일성을 통해 성립한다. …반성의 자기 동일성은 부정적인 것[타자]을 부정적인 것으로 즉 지양되거나 정립된 것으로서[부정함] 가지므로 부정적인 것에 존립을 주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6)

5)

여기서 자기 내로 반성한다는 것은 자기의 타자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 자기가 규정된다는 것을 말한다. 질적인 규정과 반성 규정은 부정성의 차이가 있다. 질적 규정성에서 부정성은 타자로 이행, 특정한 부정[bestimmte Negation]이다. 반면 반성 규정에서 부정은 부정의 부정[die Negation des Negatives]이며, 자기로 복귀하는 것이니, 그런 한 타자와 관계하면서도 각자는 자유롭다.

“반성 규정은 이처럼 자기 내로 되돌아온 것이므로 자유로운 본질 규정으로 나타나니, 이 본질 규정은 공허 속에서 서로 견인하거나 반발하는 것 없이 떠도는 본질 규정이다. 이 본질 규정 속에서 규정성은 자기 관계를 통해서 고정되었으며 무한히 고정되었다. 그것의 규정되어 있음은 그 이행과 단순한 정립됨을 자기에 종속시키거나 그것의 타자로의 반성을 자기로의 반성으로 구부러지게 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6)

“반성 규정은 정립된 것이며 부정이지만, 이런 부정은 타자에 대한 관계를 자기 내로 구부려 되돌아오게 하니 이런 부정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자기 자신과 자기의 타자가 통일된 것이 다만 이를 통해 본질 규정으로 된다.”(헤겔 논리학, GW11, 257)

하나의 현존과 다른 현존 사이의 이런 반성 관계 속에서 그들은 서로 동일하거나 차이를 지니며,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한다. 반성 규정은 본질론 영역에서 다루어진 현존 사이의 반성 관계를 규정하는 일종의 메타 규정성이다.

6)

이제 헤겔이 반성 개념을 두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하나의 차원은 현존을 본질과 관계하여 반성 운동을 말한다. 이때 제시된 것이 외적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이다. 다른 하나는 본질의 영역에서 현존 사이의 차원에서 사용한다. 이런 현존은 서로 반성적 관계 속에 있으며 이를 통해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규정을 지닌다.

본질과 현존 차원의 반성 운동은 수직적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현존과 현존 사이의 반성 관계는 수평적이라 할 수 있다. 양자는 그러면 어떤 관계인가? 현존 사이의 반성 관계는 다양한데(즉 차이와 대립, 모순 관계) 이 반성 관계를 통해 현존이 현존하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 현존의 공간은 존재론에서 질의 공간이나 양의 공간과 구별되는 공간이며 반성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공간이다. 반성에 두 차원이 있다는 사실은 아래 글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반성은 자기 내에서 지속하는 규정 작용이다. 본질은 이런 규정 작용 속에서 자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구별된 것은 단적으로 정립된 것이며 본질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구별된 것은 정립된 것이 아니고 자기 내로 반성된 것이다. 부정으로서 부정은 이런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 속에 있으며 자기의 타자 즉 자기의 비 본재 속으로 반성되는 것이 아니다.”(헤겔 논리학, GW11, 257)

여기서 헤겔은 정립의 측면과 자기내 반성의 측면을 구별한다. 전자는 본질과 가상의 차원이다. 후자는 현존 사이의 관계 차원이다.

그런데 두 차원은 서로 관계하는 것이 아닐까? 즉 본질이 열어주는 것이 바로 현존의 공간이 아닐까? 하이데거는 존재가 현존재가 살아가는 세계를 열어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헤겔에서도 본질이 현존의 세계를 개시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거꾸로 현존의 공간을 통해 그것이 열어준 본질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즉 그 본질이 내재적인지 외적인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은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이를 통해 반성 규정[반성 관계]은 규정된 가상을 즉 가상이 본질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인 본질적 가상[반성 운동]을 이룬다. 이런 이유로 규정하는 반성은 반성이 자기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의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은 지배적인 것으로 된 부정 속에서 상실된다.”(헤겔 논리학, GW11, 257)

여기서 헤겔은 규정하는 반성은 반성이 자기를 벗어나 더는 반성이 아닌 것으로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규정하는 반성을 통해 본질이 현존에 내재하게 되면 여기서 개념 운동이 시작되는 주체 개념이 출현하기 때문이다.이 개념은 자기 실현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며 이를 헤겔은 “지배적으로 된 부정” 즉 주체라고 한다.

문제는 이 두 차원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 논의다. 본질과 공간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 문제는 헤겔 논리학에서 핵심 문제인데 헤겔은 이 문제를 바로 다음 장 즉 본질 규정 장에서 다루고 있으니, 일단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후로 미루기로 하자.

6)

헤겔은 존재의 영역에서 직접 주어지는 것보다 오히려 이런 반성적 관계를 통해 규정된 것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본다. 많은 철학은 이런 직접 주어지는 것이 궁극적인 진리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가장 직접 주어지는 것을 찾아서 고대 철학의 지각 경험에서 근대 철학의 감각 경험으로 다시 현대 분석 철학 등에서 제기하는 요소적 감각 경험으로 나갔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직접 주어지는 경험은 지각이든 감각이든 요소적 감각이든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는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 장을 읽어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는 이미 후일 콰인 등이 제시한 지시적 불확실성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헤겔은 칸트 선험적 인식론을 따라서 모든 인식은 개념의 체계를 토대로 출현한다고 본다. 칸트는 이런 개념적 인식이 물 자체에 대한 불가지론에 부딪힌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헤겔은 오히려 그 개념적 체계가 개별자들에 대해 외면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며 본래적이어서 물 자체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오히려 그는 이런 개념적 인식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본질에 즉 물 자체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정립된 것이 더 높은 것이다. 왜냐하면, 현존이 정립되면, 현존은 그것의 본래적 모습 즉 부정적인 것이며 단적으로 다만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것에 관계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립된 것은 본질과 관계해서 정립된 것 즉 자기 내로 되돌아간 것[본질]을 부정하는 것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56)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

1)

앞에서 본질과 가상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부정적인 것의 자기 부정 운동이 곧 본질이며, 이 부정의 부정이 자기 관계하면서 직접적인 가상이 되었다. 우리는 이 양자의 관계를 종과 개체의 관계에 비추어 이해했다.

본질과 가상은 서로 순환하는데, 이런 순환하는 운동의 양극단이 본질과 가상이라면 양극단을 매개하는 운동이 곧 반성이다. 헤겔은 반성하는 운동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우선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의 짝이 있다. 다음으로는 외적인 반성과 내적 반성 또는 규정하는 반성의 짝이 있다.

먼저 정립하는 반성[앞으로 정립으로 축약]과 전제하는 반성[앞으로 전제로 축약]을 살펴보자. 헤겔은 양자는 상호 작용적으로 보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했던 두 가지 판단 작용의 구분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설명한 적이 있지만, “이 장미는 빨갛다”라는 판단에서 한편으로 이 판단은 주어인 꽃이 지닌 여러 성질(빨갛고, 향기로운 것 등) 가운데 하나인 빨간색을 끌어내는 것이다. 빨간색은 개별 장미에 내재한다. 칸트는 이런 판단 작용을 구성적이라 했다. 이는 지성의 작업이다.

그런데 이 판단은 장미라는 개별 대상을 빨간 것들이라는 일반적 유에 포섭하는 판단이기도 하다. 이처럼 개별자를 일반자에 포섭하는 판단은 전제하는 판단이며 이는 상상력의 작업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여기에 속한다고 했다.

“판단력 일반은 특수를 일반 아래에 포함된 것을 사유하는 능력이다. 일반이 주어져 있는 경우에는 특수를 이 일반 아래에 포섭하는 판단력은 규정적이다. 그러나 오직 특수만이 주어져 있고 판단력이 특수에 대하여 일반을 찾아내야 할 경우에는 판단력은 단지 반성적이다.”(칸트 판단력 비파], 서언, S. 27)

2)

칸트는 판단을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해서 서로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인식에서 구성적 판단도 구상력을 통한 도식을 매개로 하며 거꾸로 미적 판단도 필연적이려면 지성의 개입이 필요하다. 지성은 개별 대상을 가장 적절하게[필연적으로] 일반적 유에 포섭한다. 결국, 칸트 자신은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모든 판단은 구성과 포섭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헤겔은 논리학 3부 주관 논리학 판단론에서 판단을 내재와 포섭이라는 이중적 작용으로 파악한다. 이 가운데 내재란 칸트가 구성이라고 했던 판단 작용이다. 반면 포섭이란 칸트가 반성이라고 했던 판단 작용이다.

“그러나 이제 주어는 자립적인 것인 한 그런 동일성[계사로서 이다]은 술어가 그 스스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고 그 존립을 다만 주체 속에서 갖는다는 관계를 가진다. 술어는 주어에 내재한다.

….

그러나 다른 한편 술어 역시 자립적인 일반성이고 주어는 거꾸로 그 술어의 한 규정일 뿐이다. 그런 한 술어는 주어를 포섭한다.“(헤겔 논리학 2부, GW12, 57)

하나의 판단에서 이 두 가지 작용이 동시에 일어나므로 주어는 내포 상으로는 다양한 규정을 잠재적으로 포함하는 것이고 외연 상으로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술어는 이런 내포적 규정 가운데 하나가 실현된 것이고 동시에 개별자를 포괄하는 일반자가 된다.

위에서 말한 판단의 주어 술어 관계는 모든 판단 일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다루어지는 것은 질적 판단, 양적 판단을 넘어서 출현하는 반성 판단 또는 관계 판단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주어는 개체이며 술어는 종적 규정성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사유하고 있다”와 같은 판단이다. 이런 판단에서 여기서 주어가 곧 가상이며 술어가 곧 본질이다.

3)

반성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 가상과 본질은 판단하는 운동의 양극단이며 양자를 매개하는 운동이 곧 반성 운동이다. 이 반성 운동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정립하는’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전제하는’ 운동이다. 이런 운동은 판단을 구성하는 두 측면으로 보아도 좋지만, 헤겔의 반성 운동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이를 하나의 운동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더 올바른 이해가 될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어떤 것을 발견한다. 우리가 발견할 때 그것은 이미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직접 현존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미 그것을 나름대로 규정한다. 우리는 눈앞의 현존에 관한 이런 규정을 마치 자연적인 것으로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규정은 아직 어떤 판단으로 출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것은 선술어적인 규정이다. 이것을 헤겔은 직접적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곧 이것을 판단으로 구성한다. 즉 예를 들어 ‘이것은 개다’라고 판단한다. 선술어적 판단이 판단으로 이행한다. 이런 선술어적 판단에서 자연적으로 주어진 규정이 판단에 이르게 되면, 주어 술어로 분화된다. 즉 판단이 성립한 것이다.

“가상은 반성과 본성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가상은 직접적인 것으로서 반성이다. 자기 내로 복귀한 가상, 따라서 그 직접성으로부터 소원화한 가상을 우리는 반성이라는 외국어로 표현한다.”(헤겔 논리학, GW11, 249)

“본질은 반성한다. 이 생성이나 이행이 자기 내에 머무르기에 여기서 구별된 것은 단적으로 다만 그 자체에서 부정적인 것[규정된 것] 즉 가상으로 규정된다.”(헤겔 논리학, GW11, 249)

가상은 최초에는 직접적인 것인데 이 가상이 직접성을 벗어나서[소원화하면서] 반성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반성하면서 가상은 정립된 것으로 된다. 이 과정이 곧 정립하는 반성이다.

4)

이렇게 판단 속에서 규정된 것이기에 이 직접적 현존은 더는 “출발점으로 되면서 그 자신의 부정으로 이행하는 최초의 직접적인 것[선술어적 직접성]이 아니며” 그렇다고 “반성을 통해서 운동해서 지나가는 존재하는”(GW11, 249-250) 불변하는 기체[Substrat]도 아니다.

“이것은 정립된 것이다. 즉 직접성이 순수하게 다만 규정성으로서 또는 자기 반성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이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것[본질]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직접성은 가상의 규정성을 이루는 직접성이며 이로부터 반성 운동이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헤겔 논리학, GW11,251 )

이와 같은 정립하는 반성에서는 이미 그런 근거 즉 개의 본질적 규정이나 종적 규정이 판단하는 자에게 알려져 있었고 그는 그런 근거를 통해 그것을 개라고 판단했다. 그는 예전에 그런 물음을 제기했고 나름대로 그 답을 알거나 배웠다.

그러나 이미 익숙해져서 그 근거는 이렇게 판단할 때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마치 자전거나 수영하는 기술을 그가 알고 있으나 명확하게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리는 판단 대부분은 이런 명확하게 의식하지는 않으나 이미 알고 있는 근거를 통해 내려진 판단이다.

5)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왜 그게 개야?”라고 물으면 그가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때 그는 나름대로 개의 본질, 즉 판단 근거로 간주했던 것을 제시할 것이다. 즉 저것은 개 머리를 지니고 있는데 개 머리는 개에게만 나타나는 것(개의 종적 규정성)이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이런 근거를 제시하기를 요구받지도 않았고 그 근거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는다. 개 머리를 보는 순간 곧바로 “저건 개야”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판단하면서 그것은 이제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정립된 것이 된다. 이게 헤겔이 말하는 반성 운동의 첫 번째 과정인 정립하는 반성이었다.

그런데 개 머리를 하고 있는데 왠지 종종거리고 걷는 것이 꼭 고양이 같아서 저게 개인가 하고 의문스러워지는 때(또는 “그게 왜 개야?”하고 누가 묻을 때), 우리는 개라고 하는 판단의 근거를 묻게 된다. 이렇게 물음은 개에 관한 관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 물음을 통해 우리는 그가 그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를 알게 된다. 그는 개가 어떻게 걷든 간에 개 머리를 하고 있으면 모두 개야라는 생각을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제 어떤 판단의 근거 즉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헤겔은 전제하는 반성이라 한다.

“반성은 부정적인 것[가상]을 지양하는 것이니 곧 반성의 타자[가상]를 지양하는 것이며 직접성을 지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은 되돌아온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 자기와 합일하는 것으로서[자기 부정으로서 본질] 직접성이므로 이 반성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가상]을 부정적인 것으로서 보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반성은 전제다.”(헤겔 논리학, GW11, 251)

“또는 직접성은 되돌아온 것인 한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며 직접성이 아닌 것일 뿐이다. 그러나 반성은 반성 자신을 부정하는 것[직접성의 정립]을 지양하는 것이다. 반성은 자기와 합일이니 반성은 그 자신의 정립을 지양한다. 반성이 자신을 정립하는 가운데 이런 정립을 지양하니 이런 반성이 곧 전제다.” (헤겔 논리학, GW11, 251)

이때 전제된 것은 현존에서 관찰된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개 머리의 모습이다. 그는 이 개 머리를 전제로 그러면 그것은 개라는 종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때 판단의 전제가 된 것은 개별적 현존에서 관찰된 현상이다. 이 현상을 전제로 해서 그 근거로 되돌아갔으니 왜냐하면 이 현상은 곧 본질의 종적 규정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성은 자기가 넘어나가고 그로부터 복귀한 직접적인 것을 자기 앞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이런 되돌아옴은 이런 발견된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전제된 것은 생성되는 동시에 다만 버려진다. 그 직접성은 지양된 직접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거꾸로 지양된 직접성은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것이며 본질이 자기에 이르는 것이며 단순하게 자기 자신과 동일한 존재[본질]이다. 이를 통해 자기에 이르는 것은 자신을 지양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으로부터[직접적인 것] 자신을 반발하는 것이며 [직접적인 것을] 전제하는 반성이다. 반성의 자기 반발은 자기 자신[본질]에 이르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7)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현존을 개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현존의 본질 규정성 때문이다. 최종적인 판단이 내려지는 과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런 정립하는 반성을 논리적으로 규정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개의 본질 규정성은 곧 개 머리를 지닌 것이다.

이것은 개 머리를 지니고 있다.

——————-

그러므로 이것은 개다.

반면, 전제하는 반성을 도해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개다.

———————

왜냐하면, 개 머리를 지닌 것은 개의 본질 규정성이고

이 개는 개 머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정립하는 반성이나, 전제하는 반성은 동일한 것이다. 다만 그 방향만 전도되어 있다. 정립하는 반성은 ‘그러므로’를 통해서 근거로부터 규정된 것이며, 전제하는 반성은 ‘왜냐하면’을 통해서 근거를 찾아 나선 것이다.

결국, 정립하는 반성은 습관적으로 일어난 판단이며, 전제하는 반성이란 판단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자각적으로 그 근거 즉 본질을 밝히는 작용이다.

“따라서 반성하는 운동은 고찰된 것에 따라서 볼 때 자기 내에서 절대적으로 받아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자기 내로 되돌아옴[본질]이 전제하는 것[가상]은 본질이 그것에서 나와서 비로소 되돌아감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인데 이런 되돌아옴 그 자체 속에서[정립하는 반성]만 가능하다.”(헤겔 논리학, GW11, 252)

“반성이 출발한 지점인 직접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은 오히려 비로소 이런 넘어감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직접적인 것을 넘어가는 것은 그런 직접적인 것에 이르는 것이다. 운동은 앞으로 나가는 가운데 직접 자기 자신 내로 전환하여 다만 그런 방식으로 자기 운동한다. 정립하는 반성이 전제하는 반성인 한에서 자기에서 나온 이런 운동은 전제하는 반성인 한에서 단적으로 정립하는 반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6-라이프니츠의 표상에 관한 헤겔의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6-라이프니츠의 표상에 관한 헤겔의 비판

1)

앞에서 설명했듯이 본질과 가상은 동전의 양면이다. 존재론에서 질 즉 현존[Dasein]은 직접적 존재지만, 가상은 직접적 존재더라도 본질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가상에서 본질에 대립하는 규정성이 갖는 직접적 존재는 본질의 고유한 직접성일 뿐이다. 이 본질의 직접성은 존재하는 직접성이 아니라 단적으로 매개되거나 반성된 직접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7-248)

“가상은 존재의 규정성 속에 있는 본질 자체이다. 본질이 가상을 갖는 방식은 곧 본질이 자기 내에서 규정되고 이를 통해 그 자신의 절대적 통일로부터 구별되는 방식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8)

가상은 그 자신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상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니,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이 곧 본질이다. 이를 통해 가상은 자기 내로 복귀하여 본질이 된다.

본질은 부정성이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이런 자기 관계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것이며 그런 점에서 가상이 된다. 그런 가상은 앞에서 말했듯이 다시 자기를 부정하여 본질로 복귀한다.

“부정성은 부정성 그 자체이니, 이 부정성은 자기가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정성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것이다. 이 부정성은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며 자기 자신을 반발시키는 부정이다.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직접성은 직접성에 대립하는 부정적인 것이거나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성 자체는 절대적 부정성이며 규정 작용이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규정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지양하는 것이며 자기 내로 되돌아옴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48)

마치 자기 관계로서 가상과 부정의 부정으로서 본질은 서로의 이면이며 마치 순환하는 듯하다. 그런 가운데 가상이나 본질은 모두 이중화된다. 가상은 직접적이면서도 자기 부정적인 것이며, 본질은 부정의 부정이면서 자기 관계이다.

2)

헤겔은 이런 가상을 회의주의에서 판단중지와 비교한다. 회의주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이 그 자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회의주의는 이런 부정조차도 다시 부정하니,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 세계에는 풍요한 내용이 있다.

어떤 것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도 그것의 부정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니, 여기서는 어떤 판단도 내려질 수 없으며 그 결과 판단중지 상태에 빠지는데, 헤겔은 가상이란 개념은 바로 이와 같은 상태라고 말한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정은 곧 부정을 부정하는 것이니 그것은 존재한다.

이런 이중적 상태는 근대 관념론에서 현상 개념도 마찬가지다. 칸트의 경우 현상은 물 자체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부정된다. 하지만 현상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선험적 감성 형식을 통해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물 자체만이 모순이 아니다. 칸트에서 현상 자체도 이미 모순이다. 그것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으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회의주의에서 판단중지, 관념론에서 현상은 그것은 다양한 내용을 지니지만, 그것이 실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뿌리도 없이 다만 풍요한 내용만 나타나는 것은 마치 허공에 뜬 물거품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과 같다.

“이런[회의주의나 관념론] 내용에는 사실 어떤 존재나 어떤 사물 또는 물 자체가 밑바닥에 놓여 있을 수 없으며 내용은 독자적으로 내용이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머무른다. 다만 내용은 존재에서 가상으로 옮겨졌을 뿐이니 가상이더라도 자기 자신 내에서 직접 존재하고 상호 대립하는 다양한 규정성을 갖는다.”(헤겔 논리학, GW11, 247)

3)

가상과 본질의 이런 관계는 자주 거울과 사물 사이의 빛의 유희에 비추어진다. 사물은 거울에 비추어어서 자기를 보며 거꾸로 거울 역시 사물에 비추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본질과 가상의 관계는 거울과 사물 사이의 빛의 유희로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빛의 유희는 그야말로 사물이나 거울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효과이기 때문이다. 거울과 사물에서 빛의 반사는 표면 배후에 마치 이와 무관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헤겔에서 본질과 가상의 관계는 차라리 종과 개체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종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은 개체가 자기를 복제하는 과정 중에서만 즉 그런 운동을 통해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개체는 직접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런 종의 자기 재생산을 매개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일시적인 존재다. 개체는 자기를 부정하기 위해서만 그래서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서만 직접 존재할 뿐이다.

본질 역시 마찬가지다. 본질은 현존과 구별되는 현존을 피안에서 갖지 않는다. 본질은 오직 자기를 재생산하는 개체의 운동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런 가운데 본질은 시간상 지속해서 존재한다.

4)

이런 맥락에서 헤겔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에서 표상 개념을 소환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표상을 전개한다. 그러나 모나드는 생산하고 결합하는 힘이 아니다. 오히려 표상은 모나드 속에서 거품처럼 떠오른다. 표상은 무차별하며 직접 존재하니 서로에 대해 대립할 뿐만 아니라 모나드 자신에 대해서도 대립한다.”(헤겔 논리학, GW11, 247)

이 짤막한 구절은 곧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전체에 대한 헤겔의 긍정과 부정을 통시에 포함하는 말이다. 그 말의 구체적 의미는 헤겔이 철학사 강의에서 라이프니츠에 관해 설명한 것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우선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표상을 본질의 가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단순 실체인 모나드는 어떤 질이나 규정을 지니고 있다. 이 질이 곧 모나드의 표상 또는 지각이다. 모나드가 질이나 표상을 지니지 않으면 이 세계의 다양성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나돌로기, 명제8 참조)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질이나 표상을 스피노자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본 것과 달리 자기 내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내부에서 주어지는 질과 표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헤겔이 말한 본질의 가상이 된다.

모나드는 단순한 실체이므로 이미 내부에 모든 질과 규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모나드가 지닌 하나의 질은 다른 질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모나드는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 없으므로 이런 이행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내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모나드의 질적인 이행을 일으키는 힘이 곧 모나드가 지닌 욕망이다. 이처럼 모나드가 욕망하는 힘을 지닌다는 점에서 모나드는 원자론자의 원자와 다르다.

“변화를 일으키는 내적 원리의 작용(즉 하나의 지각으로부터 다른 지각으로의 전이)이 욕망이라 불리는 것이다. 욕망은 그것이 목표로 하는 전체 지각에 항상 완전하게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은 항상 어떤 지각을 획득하며 새로운 지각에 도달한다.”(모나돌로기, 명제 15)

5)

그런데 여기서 약간 혼란스러운 것이 있다. 욕망은 자주 자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나드는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 필연적으로 변화한다. 여기에는 필연적 법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욕망과 필연 사이에 대립이 생기지 않을까?

이런 문제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욕망과 필연성을 화해시키려 한다. 그런 가운데 그는 자침의 비유를 든다. 자침은 필연적으로 북쪽을 향한다. 그러나 자침이 만일 의식이 있다면 자유롭게 북쪽을 욕망하지 않을까? 즉 법칙을 따르는 것이 자유라는 스피노자적인 개념이 여기서 되살아난다.

이런 이행은 단적으로 일어날 수 없고 연속적, 점진적으로 일어나니, 여기서 모나드는 다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갖게 된다. 모나드는 통일성 안에 다중성을 지닌다. (모나돌로기, 명제 13 참조)

헤겔은 모나드가 욕망을 지니고, 자기를 표상하며, 다수성 속에서 통일을 이룬다는 점에서 자아나 정신과 같다고 한다. 즉 모나드는 정신적 원리이며 관념적인 것이라 한다. 여기서 물체적 모나드는 아직 자각되지 않은 미소의 상태에 있는 의식적 모나드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여기까지는 헤겔이 라이프니츠에 찬탄하는 부분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보다 탁월한 지점이 이렇게 본질의 가상이라는 개념에 라이프니츠가 이미 이르렀다는 데 있다. 그러나 헤겔은 곧바로 라이프니츠는 본질의 가상이라는 개념을 아직 충분하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6)

여기서 우선 헤겔은 의문을 표시한다. 모나드의 질 즉 표상이 이행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기에 헤겔은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의 질 즉 표상은 마치 “거품과 같다”고 한다. 이는 가상 개념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개별적 질이 거품과 같다면, 이는 욕망이 이를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은 자기가 정립한 질을 왜 다시 부정하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헤겔은 모나드는 각자 “자기 자신과 대립한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는 부정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긍정적인 것일 뿐이니 하나의 질이 다른 질로 이행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더구나 질의 이행과 관련해서 라이프니츠는 신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이렇다. 즉 모나드는 개별적인 모나드인데 서로 다른 질을 가지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외적인 영향을 주거나 받을 수 없으니 이들은 각자 자립적으로 다른 모나드와 무차별하게 존재할 뿐이다.

하나의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와 전혀 무관하지만, 라이프니츠로서는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두 모나드의 변화는 필연적인 것인데, 그런 필연성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면, 우주는 곧바로 무질서한 세계가 되어 맹목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통해 난파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가 난파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나드의 질적인 변화가 각자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나드는 자립적이고 타자와 무차별하니 이런 모나드들 사이에 질적 변화를 서로 조절하여 통일하게 하는 힘은 모든 모나드를 넘어서서 모나드를 지배할 수 있는 존재 즉 신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라이프니츠에 따른다면 이 세계가 난파하지 않는 것은 신이 예정조화를 통해 모나드들 사이의 조화를 우주에 부여했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라이프니츠에서 신을 상정하는 것은 마치 연극에서 기계 신을 도입하여 갈등을 해소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한다.

결론적으로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본질과 현존 사이의 수직적인 매개 관계를 생각해냈으나 아직 본질을 매개로 현존과 현존이 수평적으로 매개된다는 원리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본다. 수직적 매개와 수평적 매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헤겔에서 본질의 반성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