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루빈(下)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4. <일탈>, 게일 루빈 (下)

성을 사유하기: 급진적 섹슈얼리티 정치 이론을 위한 노트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S/M 레즈비언 권리 집단 ‘사모아’의 후원 파티, 게일 루빈이 DJ로 참여함)

 

  • 성전쟁

 

1980년대는 미국 여성주의 운동사에 있어서도 게일 루빈의 개인사에 있어서도 여러 모로 시련의 시기였다. 이 시기를 백래시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으로,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 의해 여성과 돌봄에 관한 예산이 전폭적으로 삭감되었으며, 평등권 수정 운동이 실패하고, 낙태권 반대 운동이 확산되어 갔고, 우익 기독교 집단이 반페미니즘, 반동성애를 기치로 삼아,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며 집결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들은 ‘자매애’를 더 이상 외칠 수 함께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주의 내부에서도 인종적‧계급적‧지리적 차이들이 강조되면서 여성들이 손쉽게 ‘우리’라고 묶일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는 반포르노그래피 운동이 미국 전역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 운동은 광고와 음반, 영화산업 등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섹슈얼리티와 연결하는 데 반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지만, 점차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표현하는 것 전반을 문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포르노그래피에서의 S/M 코드의 사용이 가장 문제시되었다. 여성을 속박하고 때리고 물건처럼 취급하는 이미지가 여러 매체들에서 사용되는 데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분노는, 곧 S/M 섹슈얼리티에 대한 전반적인 비난으로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WAVPM(Women Against Violence in Pornography and Media, 포르노 및 대중매체의 폭력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모임)은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상업적 S/M뿐만 아니라 동의에 기반한 S/M이라는 개념까지 부정하며, S/M은 불평등한 권력 관계와 육체적‧정신적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페미니즘의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S/M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을 한 게일 루빈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오명이 씌워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게일 루빈은 팻 캘리피아(Pat Califia)와 함께 S/M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권리 집단인 사모아(Samois)를 창립하여 레즈비언의 S/M도 페미니즘적 행위이며, S/M의 참여자들은 사회적 자본을 결여한 여성들로 그들은 놀이를 통해 권력 개념을 탐험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포르노그래피 규제를 둘러싼 페미니스트 사이의 갈등은 1982년 4월 24일 바너드 대학에서 개최된 컨퍼런스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제9차 바너드 컨퍼런스는 ‘성 정치를 향하여’라는 주제로 개최될 예정이었다. 주최 측은 의도적으로 반포르노 활동가들을 초청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들이 너무 많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반포르노 활동가들을 격분하였고, 컨퍼런스 당일에 항의 시위가 벌였다. 바너드 대학 행정실은 컨퍼런스에서 배포될 예정이었던 섹슈얼리티 회의 일지 책자를 몰수하였다. 이 문제의 바너드 컨퍼런스에서 게일 루빈은 「성을 사유하기」를 발표하였다.

 

  • 반복되는 성 공포

 

「성을 사유하기」는 성 공포(sex panic)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성 공포는 반복되는 사회적 현상으로, 그것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정부와 경찰은 시민들을 속박할 수 있는 법적‧규제적 무기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평소대로라면 반인권적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을 받았을 논쟁적인 법안들이 성 공포의 수사학 앞에서는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되며, 이에 따라 국가의 감시 체계와 경찰 권력은 강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 영국과 미국에서의 아동과 청소년의 자위에 대한 공포는 1873년 미연방 반외설법이 통과되도록 만들어 음란하다고 판단되는 그림이나 서적을 제작, 공고, 판매, 소지, 송부, 수입하는 행위 일체를 범죄화하는 데 기여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과 1910년대의 미국에서는 소위 ‘백인 노예’ 공포가 사회를 휩쓸었다. 이 공포에 의해 영국에서는 1885년 형법조항이 개정되고, 미국에서는 모든 주에서 반매춘법이 제정되었다. 이로 인해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과 아동에 대한 강력한 즉결 심판이 가능해졌고, 성인 남성들이 합의하에 행한 외설적 행위도 범죄로 간주되었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성범죄 및 동성애 공포가 있었고, 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결합하여 정부기관에 종사하는 동성애자를 소탕과 동성애자에 대한 조직적 사찰이 일어났다.

게일 루빈에 의하면 미국의 1980년대에는 아동-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였다. 동성애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 아이들을 구하자’라는 캠페인과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에 힘입어 ‘아동 포르노그래피’ 근절을 위한 법안이 속전속결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은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아이들을 기소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아동 안전과 복지 증진이라는 명목 하에 금욕이 홍보되었다. 또한 아동-포르노그래피 공포라는 또 다른 형태의 성 공포로 인해 오히려 아이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가 신중하게 검토되지도 못했으며, 아이들이 자기 나이에 맞는 알맞은 성적 정보와 서비스가 제공될 기회가 차단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느슨해졌던 성 관련 규제를 원상 복구시키는 계기가 되어 시민의 중요한 성적 자유를 폐기하는 데 일조하였다.

페미니즘 역시 성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반포르노그래피 페미니즘 이데올로기는 S/M 이미지를 선동적으로 활용하여, 포르노는 S/M 포르노로 연결되고, S/M 포르노는 결국 강간에 이르고야 만다”는 논리로 성적 규제와 억압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처럼 성 공포는 만연해 있으며, 성 공포에 휩싸여 시민들은 투쟁을 통해 쟁취한 권리들을 자기도 모르게 다시 내주고 만다. 따라서 이제 성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성을 사유할 때가 왔다고 루빈은 말한다.

 

  • 성에 관한 사유의 발전을 저해하는 이데올로기

 

성 공포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고정된 이데올로기 역시 성에 대한 사유를 가로막는다. 이 이데올로기들은 거의 의심받지 않으며, 새로운 수사적 표현과 함께 반복해서 출현한다. 문제가 되는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는 성 본질주의이다. 이는 성을 개인의 고유한 특성으로 분류하여 섹슈얼리티에는 역사도 사회적 맥락도 없는 것처럼 사고하게 만든다. 그러나 섹슈얼리티는 사회적‧제도적‧역사적 맥락에 결합되어 있다. 구두가 없었던 시대에는 구두에 대한 페티시즘이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현대처럼 기계와 인간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시대에 인간은 기계를 통한 섹슈얼리티를 꿈꾸기도 하듯, 섹슈얼리티는 유동적이며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 본질주의는 섹슈얼리티를 개인적 문제로 환원하여 성에 대한 사유를 어렵게 만든다.

또 다른 이데올로기는 성을 위험하고 파괴적인 힘으로 간주하는 성 부정성의 경향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며, 서구 사회는 이 전통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때 출산만을 목적으로 맺는 혼인관계만을 성스럽다고 간주하며, 성해방과 관련된 논의를 차단하고 불경한 것이 된다. 이는 여성의 낙태권을 부정하고, 청소년들이 피임법과 성교육에 관해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이질적 성에 대해 저주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 섹슈얼리티 위계

 

「성을 사유하기」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성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섹슈얼리티 위계에 대한 지도를 그려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 위계에서 ‘좋은 성’은 “이성애여야 하고, 결혼 제도 내부에 있어야 하고, 일대일 관계여야 하며, 출산해야 하고, 비상업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같은 세대에 속한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지되 집에서 해야” 하고, “포르노그래피, 페티시 대상, 그 어떤 성인 용품, 남녀 역할이 아닌 다른 배역” 등이 결부되어서는 안 된다. ‘나쁜 성’이란 반대로 “동성애, 혼인 관계가 아닌, 문란한, 출산하지 않는, 상업적인 성교”이며, “자위 혹은 난교 파티에서 일어나는, 세대 경계를 넘는, 공공장소, 적어도 덤불숲이나 목욕탕에서 하는 성교”이고, 여기에는 “포르노그래피, 페티시 대상, 성인 용품, 특수한 배역” 등이 결부된 것으로 상정된다.

이 ‘좋은 성’과 ‘나쁜 성’ 사이에 일종의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혼인관계가 아닌 이성애 커플, 문란한 이성애자, 장기간 안정된 레즈비언과 게이 커플 등이 속한다. ‘최악의 성’에는 복장전환자, 트랜스섹슈얼, 페티시스트, 사도마조히스트, 상업적 성, 그리고 세대 간 성애가 속한다. 이처럼 ‘좋은 성’과 ‘나쁜 성’ 사이에는 경계선들이 존재하는데, 경계선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섹슈얼리티는 날뛰게 되면서 최악의 성으로까지 치닫게 될 것이라는 공포가 작용한다.

이 성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잘못된 관념으로 인해 성에 대한 해방적 사유를 저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들에 대한 시민권 차별 경제적‧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성소수자들을 성 공포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무기가 된다.

 

  •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한 페미니즘의 한계와 퀴어 이론의 시작

 

페미니즘은 늘 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다. 왜냐하면 “섹슈얼리티는 젠더들 간의 관계의 접점이며, 여성 억압의 상당 부분이 섹슈얼리티로 인해 발생했고, 그것을 통해 매개되었으며, 그 내부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페미니즘의 사유의 경향은 성 해방론적인 것과 성 보수주의적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반포르노그래피 담론은 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기존의 이성애적 섹슈얼리티 위계 구조를 그대로 반복한다. 다만 섹슈얼리티 위계에서 이성애 지위를 강등시키고, 일대일 레즈비언의 섹슈얼리티를 상향시켰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한계를 드러냈다고 게일 루빈은 평가한다. 더 나아가 페미니즘은 젠더 억압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에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나는 섹슈얼리티 이론에서 페미니즘이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거나, 그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전제에 도전하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젠더 억압에 관한 이론이다. 이러한 사실이 자동으로 페미니즘을 성 억압의 이론이 되게 한다고 추정해버리면, 한편의 젠더와 다른 한편의 성애 욕망을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여성 거래」「성을 사유하기」 두 텍스트 간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루빈은 「여성 거래」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와 젠더 정체성 형성을 인과적으로 연결시키는 섹스/젠더 체계라는 개념을 구상했다면, 「성을 사유하기」에서는 섹슈얼리티 체계와 젠더 체계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젠더 체계를 중심으로 보는 사유이기 때문에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조직을 온전히 망라할 만한 관점이 없다”고 평가하며, 이후 퀴어 이론의 전개를 암시한다. 마치 맑스주의적 분석으로 젠더의 사회적 구조라는 쟁점을 다룰 수 없듯이 젠더 억압을 중심으로 놓는 페미니즘의 분석으로는 섹슈얼리티 위계까지 포괄하여 억압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거래」에서 주요하게 사용했던 개념을 「성을 사유하기」에서 철회하는 중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텍스트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여성 거래」에서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곧 여성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을 사유하기」에서의 주요 목표 역시 섹슈얼리티의 궁극적인 자유와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성 거래」에서는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젠더 정체성의 구속으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면, 「성을 사유하기」에서의 섹슈얼리티 해방은 궁극적으로 성적 쾌락을 자유롭게 추구하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로 인해 숨어 다니지 않으며, 상대방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외로워해야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즉 섹슈얼리티 그 자체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게일 루빈의 사유는 섹슈얼리티를 남성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이자 여성에게는 위험한 것으로 상정했던 그 당시 페미니즘의 일방적인 흐름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성 전쟁에 참여하면서 페미니즘의 성에 대한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여, 성에 대한 페미니즘의 사유를 급진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퀴어이론의 출현을 암시하였다. 성 전쟁 이후 등장한 제3물결 페미니즘은 기존의 제2물결 페미니즘의 한계를 넘어 섹슈얼리티를 다양한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성 해방을 주요한 의제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이때 게일 루빈의 사유는 큰 참조점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루빈의 「성을 사유하기」는 페미니즘 운동사의 한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여철분과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연재는 여기까지입니다.  🙂

게일 루빈(上)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3. <일탈>, 게일 루빈 (上)

여성 거래: 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두 번의 커밍아웃

 

게일 루빈(1949 ~ )은 두 번의 커밍아웃을 통해 삶의 커다란 전환을 이뤘다. 첫 번째는 루빈이 미시건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할 즈음인 1971년에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1978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고 나서 사도마조히스트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것이었다. 첫 번째 커밍아웃보다 두 번째 커밍아웃이 루빈에게는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첫 번째 커밍아웃 때는 동성애자들을 향한 혐오 담론들이 깨져나가던 시기였기에 루빈은 새내기 레즈비언으로서 도덕적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커밍아웃 때에는 S/M에 대한 악마화 작업이 구체화되던 중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의 이미지가 하루하루 추해지는 걸 지켜보고, 체포를 두려워하고, 앞으로 얼마나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인지 불안해” 했다. 특히 자신이 한때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던 페미니즘 운동이 S/M을 가부장제의 사악한 산물로 여기는 바람에, 루빈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로 인해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배제되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게일 루빈이 1971년에 발표한 「여성 거래: 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를 첫 번째 커밍아웃이라는 맥락에서, 1982년에 발표한 「성을 사유하기: 급진적 섹슈얼리티 정치 이론을 위한 노트」를 두 번째 커밍아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두 텍스트 사이의 차이와 변화가 보다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두 텍스트 사이에는 게일 루빈이 놓여 있었던 정치적 상황 및 루빈 자신의 섹슈얼리티, 그리고 공간적 이동과 연구 주제 및 연구 방법론에서의 변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텍스트는 섹슈얼리티의 해방이라는 관점을 공통적으로 견지하지만, 「여성 거래」에서 주요 개념으로 제시한 ‘섹스/젠더 체계’를 「성을 사유하기」에서는 철회하는 식으로 게일 루빈 이론의 내용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게일 루빈의 주요 저작인 「여성 거래」와 「성을 사유하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각 텍스트가 갖는 의의와 함께 어떻게 게일 루빈이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조응하면서, 여성주의의 주요 논제에 응답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여성억압의 기원으로서 여성 거래

 

여성억압의 기원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는 앞으로 여성 해방을 위해 어떤 전략과 계획을 취할 것인지와 연결되는 문제였다. 게일 루빈은 「여성 거래」에서 ‘여성 억압의 기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레비스트로스(1908.11.28 ~ 2009.10.31)의 구조주의와 프로이트(1856.5.6 ~ 1939.9.23)의 정신분석학을 배경으로 응답한다. 루빈 역시 그 당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와는 별도로 기능하는 여성 억압의 기제를 상정한다. “생물학적인 여자를 억압받는 여성이 되도록 만드는” 억압 기제를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왜 “도무지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조차 여성들은 억압받고 있”으며, 왜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지”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을 이 글에서 시도한다.

게일 루빈은 「여성 거래」에서 여성 억압의 시작을 친족의 기원에서부터 탐색한다. 이때 친족은 “생물학적 생식이라는 사실 위에 문화적 조직을 부여한 것”으로 근친상간 금기라는 최초의 섹슈얼리티 통제가 발생한 장소이다. 이 통제는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사건에 족외혼 및 혼인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부과”하여 “허용된 성적 파트너와 금지된 성적 파트너라는 범주들로 성적 선택의 세계를 분할”하는 기능을 한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근친상간 금기의 비밀은 어머니, 여자 형제, 딸들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낼 수 있도록, 즉 여성을 선물로 교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메커니즘이다. 이처럼 최초의 섹슈얼리티 통제는 여성 교환을 기반으로 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친족의 기원으로 여성이 거래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함의한다. 첫째, 여성은 물건처럼 교환의 대상인 반면, 남성은 거래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가 상정된다. 둘째, 남성들 간의 여성 거래는 결국 남성들 간의 연대와 호혜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남성중심적 사회는 여성 거래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애초에 생물학적으로는 위계가 없던 성에 구별을 두기 위해서는 여성이 여성으로 길러지게 되고, 남성이 남성으로 길러지게 되는 특수한 가족 내 관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 거래가 일어나도록 하는 특수한 조건들의 체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게일 루빈은 ‘섹스/젠더 체계’라는 개념을 고안한다.

 

  • 섹스/젠더 체계

 

‘섹스/젠더 체계’는 “인간의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인 원자재가 인간의 사회적 개입으로 빚어지고, 아무리 기괴한 관습일지라도 그런 관습적인 방식으로 충족되는 일련의 제도들”로 규정된다. 즉 인간의 몸과 성적 욕망이라는 자연적 재료를 ‘젠더’라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 및 관습으로 바꾸는 시스템이 섹스/젠더 체계이다.

섹스/젠더 체계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가 젠더 정체성의 형성 및 생산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상정하는데, 특히 여성의 몸에 이 섹슈얼리티 통제는 강력하게 작용한다. 거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섹슈얼리티가 본래 가지고 있는 능동성과 역동성을 수동적인 형태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게일 루빈은 정신분석학에서의 가족 서사를 ‘여성 거래’와 여성의 섹슈얼리티 억압이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 오이디푸스 서사에 대한 재해석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갖는 강력한 이점은 인간의 정신 형성 과정을 가족 서사, 즉 오이디푸스 서사를 통해 설명한다는 데에 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엄마, 아빠, 아이의 관계를 들어다보면, 거기에는 서로에 대한 욕망과 질투와 좌절로 가득 차 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미성숙한 아이는 이 과정을 충분히, 그리고 완전하게 견디고 겪어내야 성숙한 정신을 가진 ‘정상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의 ‘정상적’ 인간이란 자신의 성적 욕망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수행해야 할 성 역할이 무엇인지를 완벽히 체현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정상적’ 인간이 되기까지 아이가 겪는 고된 역경의 과정을 신화적인 표현을 빌려 ‘오이디푸스’ 서사라 하는 것이다.

게일 루빈은 라캉을 따라 ‘남근 선망’이 아닌 ‘팔루스 교환’을 오이디푸스 서사의 중심에 놓으면서 팔루스를 잠재적 여성 교환을 위한 징표로 해석하여 레비스트로스의 ‘여성 거래’ 개념과의 접점을 찾는다. 이에 의하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각기 다른 과정을 통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어머니를 포기한다. 이때 남자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를 긍정하는 대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팔루스를 확증해주며, 이 팔루스는 남자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여자를 교환할 수 있게끔 하는 상징적 증표가 된다.

반면에 여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거부당하면서 근친상간 금기뿐만 아니라 동성애 금기까지 경험한다. 그리고 팔루스를 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철회하고 팔루스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아버지에게로 사랑을 향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남자아이게 주었던 팔루스를 여자아이에게는 주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결국 남성에게서 받는 선물(성교와 어린아이)을 통해서만 팔루스를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수용하게 된다. 이처럼 오이디푸스 단계가 여자아이에게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여자아이의 에고는 수동적이고 마조히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정체성이 형성되는 오이디푸스 서사를 급진적으로 해석한다면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여자아이에게 억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오이디푸스 서사와 이 서사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깨버려야 정신적인 해방까지 가능할 것이다. 첫 번째로 팔루스와 팔루스가 함의하는 여성 교환을 깨버려야 한다. 두 번째로, 애초에 아이의 욕망이 어머니에게로만 향하는 양육방식을 깨버려야 한다. 세 번째로, 가정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고 있는 아버지의 권위를 깨버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엄마, 아빠, 아이로 구성되는 전형적인 가족관계의 구성을 깨버려야 오이디푸스 서사가 완전히 파괴될 수 있을 것이다.

 

  • 젠더가 없는 사회

 

여성억압의 기원이 ‘여성거래’라면 여성해방의 기획은 자연스럽게 여성거래를 없애는 것이 될 것이다. 게일 루빈에 의하면 “만약 성적 소유 체계가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최우선적인 권리를 가지지 않은 방식으로 재조직된다면(만약 여성교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이디푸스 드라마 전체는 유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친족 체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친족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스스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게 되면,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섹슈얼리티를 경험하고, 레즈비언 아빠나 게이 엄마처럼 여러 형태로 가족이 구성된다면, 고통스러웠던 젠더 정체성의 형성 과정도 약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미 친족의 구속력은 약화되어 “가장 최소한의 뼈대인 섹스/젠더 체계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는 가능한 해방 전략이 될 수 있다.

게일 루빈은 섹슈얼리티의 해방을 통해 젠더 젠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진정한 여성해방으로 보았다. 비록 해부학적‧생물학적 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를 사랑하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양성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의 상을 전망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 억압의 철폐 그 이상을 꿈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강제적 섹슈얼리티와 성 역할들의 제거를 꿈꾸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꿈은 양성적이며 (섹스가 없진 않겠지만) 젠더가 없는 사회에 대한 꿈이다. 그런 꿈속에서 한 사람의 해부학적 성은 그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행하며,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할 것이다.

 

  •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下)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2. <에코 페미니즘>,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 (下)

 

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에코페미니즘이 자연의 훼손과 생태계 위기의 맥락이 여성에 대한 그것과 같다는 통찰 아래에서 시작되었음은 이미 설명하였다. 에코페미니즘은 서구 근대 주류 사상이 근대 과학과 자본주의를 뒷받침한다고 파악한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남성-되기 열망을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과학은 서구인들이 믿는 것처럼 만인을 위한 보편 이익에 봉사하지도, 인류 전체를 해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과학에 대한 맹신에 가까운 서방세계의 믿음은 이전 초월적 신에게 부여했던 신성의 자리를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주류 믿음들은 자연과 여성을 파편화하여 물질/신체로 다루기 때문에 이들의 창조적 재생 및 갱신의 능력을 훼손한다. 이러한 환원의 기계론적 은유와 이에 대한 통제/지배는 자연과 여성을 소외시켜 통치하는 것을 객관과 보편이라는 거짓 이름으로 합리화한다.

부분과 원자로 자연을 분해할 수 있다는 서구 남성 중심주의적 믿음, 환원주의는 우연이 아니라 서구 근대화 개발 과정과 호응하며 서로를 증폭시킨다. 근대화 개발론은 효율과 이윤의 극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상업적 이윤과 맺는 관계가 작은 부분은 무시하고 소멸시킨다. 상업적인 자본주의는 획일화된 상품 생산이 목적이기에 자연 자원의 획일성이 거기에서 따라 나온다. 숲은 상업적 목재로, 목재는 펄프와 종이 생산을 위한 섬유소로 환원된다. 그것은 숲을 이루는 생명체의 다양성과 유기적 연결성에는 무관심하다. 파괴하든 돈이 되는 종만 키워 생태계를 단순화시키든 이윤을 극대화시킬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여성 또한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근대화와 맞물려 자본주의가 침투해올수록 기존의 여성 노동 또한 상품 생산과 무관한 것이기에 비노동, 수동적 노동으로 평가 절하되고 무시된다. 그것이 경작이든 가사 노동이든 간에 동일한 경로를 밟는다. 자연은 공짜로 이용 가능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생산력이 무시되듯 여성의 숙련된 노동의 가치 또한 무시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성 노동은 남성 중심적 노동 사회를 발전, 존속시키기 위한 희생물로 유령화된다.

 

  • 따라잡기식 개발 신화 뒤집어 보기

 

전세계로 서구식 사고와 자본주의가 퍼져나갈수록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국가의 윤택한 생활이 하나의 이상적 모델로 자리잡는다. 비서방 국가들과 여성들 또한 이들 서방 세계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따라잡아야 하며 이들 서방 세계가 걸어온 산업화, 과학 기술화, 자본 축적의 노선을 되풀이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진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다는 생각 혹은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거짓 신화에 불과함은 쉽게 밝혀진다.

첫째, 서방 세계가 풍요롭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풍요가 비서방 주변부 국가인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의 지배와 억압, 착취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란 역사적 사실은 쉽게 망각된다. 이 풍요는 서구 남성들의 폭력(무력을 앞세운 식민 지배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고 풍요의 유지 존속 또한 주변부 국가들을 계속해서 착취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주변부 국가가 개발을 통해 서방화된 경우는 매우 드믈 뿐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수다한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국가들이 여전히 서방 국가의 풍요를 위한 각종 물적, 인적 자원을 저렴하게 제공하면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저렴한 자원과 값싼 노동력의 공급지 역할을 하며 정작 이들 국가의 경제 시스템은 외국 자본의 힘과 내부 남성 지배 집단 사이의 결탁에 의해 더 뒤틀리고 여성들의 천착해온 생활 근거지는 이들에 의해 파괴된다. 이런 비서방 국가에 대한 착취와 빈곤의 최대 피해자가 여성과 그 아이들인 것이다.

둘째, 서방 세계 따라잡기 신화에 사로잡힌 이들은 높은 물질적 생활수준을 삶의 진정한 윤택함으로 착각한다. 에너지를 과잉 사용하고 더 많은 사치재를 소비하며 즉석 식품과 가공 식품을 먹으면서도 건강을 유지하고 각종 다양한 산업 폐기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맑은 공기, 맑은 물, 오염되지 않은 식재료는 서방 국가 사람들의 일상에선 이루어지지 않는 꿈일 뿐이다. 만일 서방 세계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추동질하는 것처럼, 비서방 세계 다수가 서방 세계 만큼 풍요로워진다면 서방 세계의 오늘날의 풍요로움은 불가능해지고 지구 자원은 믿기 힘든 빠른 속도로 고갈될 것이고 지구 생태계는 완전히 붕괴할 것이다. 또 비서방 세계의 자연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각종 폐기물을 이곳에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풍요가 유지되고 있다는 진실 또한 모르거나 회피한다. 주요 서방국가 중 미국 한 국가의 예를 보자. 전세계 인구의 6프로를 차지하는 미국인들이 화석 연료 총생산량의 30프로를 소비한다. 그런데 가난한 국가의 인구가 전 세계 인구의 80프로를 넘는다. 이는 나머지 국가의 사람들이 미국인들과 같은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기란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셋째, 서방 세계 사람들의 삶은 더 행복한가하는 점이다. 여성과 아이의 삶은 어떠한가. 서방 세계 다수의 국가에서 빈부 격차는 나날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나 빈곤 여성과 어린이의 가난은 더 극심해지고 있으며, 이들이 주타겟인 남성 범죄의 증가 또한 무시 못 할 수준으로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근대화 이전 지역 공동체는 붕괴하여 개인들은 점점 더 원자화되고 고립된다. 서방 세계의 물질적 풍요 또한 중산층 이상 계급에게 한정되는 일이라는 사실, 이 사회의 물질 분배의 양극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눈을 감는다.

요약하자면, 성장과 이윤 창출은 사실상의 식민지인 자연, 여성, 이민족을 착취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백인 여성들, 페미니스트들 또한 이러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기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직시해야한다는 뜻이다. 자신들 또한 자연과 이민족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존엄을 훼손함으로 현재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또한 서방 세계의 사실상 식민지 일부가 서구화되면 자원은 더 급속히 부족해질 것이고 이는 곧 자원을 둘러싼 국제 전쟁으로 비화될 것임도 분명하다. 우리는 걸프전이 석유 자원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임을 안다.

 

  • 제3세계 여성, 인도 여성의 시선으로

 

『에코페미니즘』의 공저자인 반다나 시바는 서방의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인도 여성들 또한 자신들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명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자연과 신체를 타자와/대상화하여 정신적 존재되기를 꿈꾸는 남성 되기와 다름없는 것이며,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과학 기술을 앞세운 개발은 자연, 여성, 이민족에 대한 거대한 착취 없이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불의하고, 주변부 국가가 서방 국가를 따라잡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저급한 노동 착취가 개발 과정에서 일상화되며, 노동 집약적 산업과 생태계 오염 산업이 주변부 국가로 이전되고 이러한 발전 과정이 설사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해도 그 동안 서방 세계는 또 다른 발전 단계로 접어 들어간다.

서구인들, 나아가 서방 세계 여성들이 저개발 국가의 여성의 처지를 동정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잣대로 주변부 국가 여성들을 재단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반다나 시바는 인도의 자발적 여성 에코 운동인 ‘칩코 캠프 운동’을 예로 든다. 많은 인도인들은 서구인들과는 달리 자연과 훨씬 많이 가깝고 친숙하다. 자연은 이들에게 서구식 개발, 조작,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서구인들은 그 사실을 망각했지만 자연은 인도인들에게 살아 숨 쉬는 삶의 터전이다.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일용할 양식을 나눠주는 진정한 어머니-자연인 것이다. 이곳에서 인도의 여성은 소외되지 않은 노동을 한다. 이러한 인도 여성은 농사에 필요한 종자들을 관리하며 숲 속의 다양한 생명체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생명 다양성의 관리자이자 수호자들이다. 남성 노동은 쟁기질과 같은 힘쓰는 노동에 한정돼 있을 뿐, 자연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여성들의 것이다. 여성들은 인정받는 노동의 중요 축을 담당하고 그 노동에 의해 가족과 자신이 먹고 사는 자급자족의 생활을 한다. 서구 여성들의 망각해버린 역사가 아직 이들에게선 살아 숨 쉰다. 서구 17세기 말, 18세기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마녀 사냥의 이유가 자연의 다양한 생명체들에 대한 여성 지식과 독립적 지위의 삭제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겐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녀 사냥으로 죽어간 여성들은 대개 자연의 생명체들을 적합하게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주변의 존경을 받았고, 배품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독립적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여성들이었다. 서구의 광기 어린 마녀 사냥은 여성의 자급자족 능력을 제거하여 무임금 유령 노동인 가사 노동으로 여성들을 가두고 더욱 남성 의존적 삶을 살게 만든 서구 근대화의 역사와 그 흐름을 같이 한다.

칩코 여성 캠프 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인도 여성들의 자연 생태계 보호 운동은 외부의 누군가가 들어와 운동을 조직하고 선동하여 이루어진 운동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인도 둔 계곡의 나히낄라 마을의 여성 차문데이 등이 주도하여 석회석 광산개발을 빌미로 자행된 숲 파괴를 저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화되었다. 무려 20여 년간 지속된 개발 저지 운동은 생활 터전인 숲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맑은 물과 공기, 약초, 열매 등 숲의 배품이 지속되길 희망했다. 숲이 사라짐은 자신과 아이들이 가꾸며 먹고살아온 자급자족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자유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정부가 제안하는 임노동 일자리를 자유로운 삶을 앗아가는 것이기에 거부한다. 개발이 이들이 오래 유지해온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할 것임을 안다. 이들은 개발로 인해 자유를 잃고 자연적 공동체성을 상실하길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다. 하여 트럭을 몰고 밀어붙이는 남성들의 무력을 죽음을 불사하며 막아섰던 것이다. 자급자족은 팔 수 있는 상품 생산 노동이 아니므로 자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생산 노동이 아니지만 그것은 다만 서구인들의 기준일 뿐이다. 이들에겐 숲에서의 자급자족이야말로 예속이 아닌 자유의 원천이며 생명의 자연스러운 생존 방식인 것이다.

 

  • 자기 결정 – 생식 능력에서의 해방에 얽힌 문제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페미니즘』은 한국 여성들에게도 중요 이슈로 떠오른 자기 결정, 자기 신체와 삶에 대한 권리문제에 대해서 또한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낙태권에 대한 시각은 결정적이다. 자기 재산과 신체에 대한 소유권은 서구 근대 부르주아 시민 혁명의 근본 과제였다. 당시 교회와 봉건 왕권의 절대적 권력의 압제에서 자유롭게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 개인의 불가침의 권리가 주장되었다. 이렇게 생명권, 자유권, 소유권은 자유 시민의 권리가 되었으며 이 중에서도 근대 자유민주주의를 견인한 부르주아지들은 특히 소유권의 획득과 행사를 위해 투쟁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여성이 이 시민권을 부여받기까지는 수백 년에 걸친 기다림이 필요했다. 서구 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한 국가 공동체의 시민임에도 공적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해온 시민권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했으며 여권 운동이 ‘참정권’ 획득 운동에서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참정권을 얻은 여성들은 교육권, 재산권, 사회권 등의 폭넓은 시민권을 보장 받기 위해 투쟁해왔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한 한 분파로 자리 잡고 있다. 낙태권 또한 시민권의 인정 및 행사라는 동일 맥락에서 주장되는 것이다. 여성의 생식기관과 출산 능력은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 의해 통제되어왔으며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남성과 가부장제의 식민지였던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를 되찾는 문제는 따라서 이러한 식민 상태의 종결과 해방을 의미하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낙태의 권리를 둘러싼 자기 결정, 자율적 결정권의 문제를 두 가지 각도에서 재고할 것을 제안한다. 하나는 서방 세계에서 주장되는 여성 생식 능력, 여성성에서의 해방이고 두 번째는 제 3세계 여성들의 다른 입장이다. 두 가지 재고는 모두 남성중심의 근대 데카르트적 사유, 자연 과학 기술의 확대, 자본의 제국주의적 지배 등과 관련되어 있다.

여성은 시민권 획득 운동을 통해 남성의 여성 지배에 대해, 가부장적 여성 지배에 대해 싸워왔으며 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 여성은 생식 능력, 여성성이라고 불려왔던 것들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낙태의 권리는 대표적 안건이다. 이 싸움이 가능해진 것은 과학 기술 진보에 빚진 바 크다. 파이어스톤의 급진 여성주의의 주장 즉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출산과 양육에서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여성과 인간 해방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상징적 사건이다. 근대 서구 남성들이 정신의 자유를 신체/자연을 식민화하고 통치하면 된다는 사유와 믿음에 근거하여 구체화시켜온 것처럼,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와 통제 역시 그러하다. 여성이 자기 신체를 타자화/대상화하고 식민화시키는 과정, 그것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통해서만 여성의 자기 신체에서의 해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임신 기간 동안 여성의 신체와 한 몸으로 연결된 태아 또한 자기 신체의 일부로 여기고 자기 신체를 타자화/대상화하는 방식으로 태아 역시 타자화/대상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타자화된 여성의 신체와 태아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해 분해하고 조작할 수 있는 물질로 환원된다. 그리고 현대 의학이 마련해 놓은 기술적 처방의 제한적 선택지들 중에 한두 가지를 선택해 신체와 태아를 과학 기술이 처리하도록 내맡기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근대 남성 중심주의 사상의 주요 전제들과 적용(신체에 대한 정신 우위 및 신체/자연의 기계화)을 그대로 답습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면서 또 다른 현실적인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남성은 성적 접촉의 결과인 여성의 임신에 대한 책임에서 더욱 더 자유로워지고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를 기술에 맡기는 타율성에 종속되는 것이 그것이다.

낙태와 그 권리를 둘러싼 문제와 접근은 단언하여 해답을 제안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소유권과 자유권을 내세운 자유주의적 해법이 내재하고 있는 문제는 제기되어야만 한다. 여성의 신체가 기계가 아니듯 태아는 소유물이 아니다. 모체와 태아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맺는 공생 관계이며 이는 생태적 관계의 표현이기도 하다. 낙태권에 대한 국가 기구의 공격은 여성의 폭력에서 태아를 보호해야한다는 전제로 펼쳐진다. 여성이 자신의 일부인 동시에 다른 생명체인 태아의 적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가부장적 가족 관계, 어린이에게 적대적인 환경, 육아와 고용의 양립 불가능성, 현대 사회의 극심한 실용주의와 물질주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병적 집착 등 여성이 아이를 낳아 키우기 힘들게 만드는 조건들은 모두 면죄부를 받거나 제외된다.

제3세계 여성들에게 낙태권이 가부장제와 결탁한 국가주의의 또 다른 직접적 폭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도 서방세계 여성들은 인지해야만 한다. 남미, 아프리카, 인도 지역 등에서 펼쳐지는 국가에 의한 강제 불임 수술과 낙태는 이 지역 여성들이 한 줌의 식량, 옷가지 등과 맞바꾸는 강제된 선택의 결과물로 시행된다. 이 지역 여성들에게 자율적 선택과 지역 공동체에서의 독립은 자유의 획득이 아니라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 생존 자체를 바로 위협받는 길로 이어진다. 서방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환경 위에 그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 여성들은 가족 안에서 살고 가족들에 둘러싸여 사망하길 원한다. 서방 세계 여성들의 독립된 혼자만의 집과 요양원에서 홀로 맞이하는 죽음은 이들에게 씁쓸한 귀결로 여겨진다. 또 서방 세계 여성들의 임신할 자유, 권리를 위한 대리모 찾기가 제 3세계 여성들의 신체를 빌려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야 한다. 모체와 태아 사이의 관계를 기계적 연결 관계로 보고 과학 기술로 조작하는 이 행위가 가진 생태적인 폭력, 과학 기술의 오남용 여부는 서방 세계 여성들이 자신의 신체와 태아를 기술에 내 맡기는 원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다.

 

  • 자연, 신체, 여성적인 것의 재고

 

에코페미니즘은 자연/신체/여성의 상징적이며 언어적 연결성에 주목하고 여성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친화성을 긍정한다. 이들은 자연의 재생산력과 창조적 변화 능력이 여성의 생식 능력과 맞닿아 있음을 말하며 남성중심주의에서의 자연 해방, 보호가 곧 여성을 해방시키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살펴보았듯 근대 남성 중심주의적 사유 방식과 이에 기초한 과학 기술, 자본주의는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하였으며 동일 맥락에서 여성 또한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과 여성이 돌보는 아동은 이 억압과 착취, 피해의 일차적 피해자이며 당사자이므로 자연을 지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돌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에코페미니즘의 입장은 여성주의 1차 웨이브를 이끌었던 자유주의 페미니즘 및 이 노선과 상응하는 권리 중심 페미니즘에 반해 등장한 다양한 입장들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6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70년대를 풍미한 서구 제2물결 페미니즘의 일부 분파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무시하며 벗어나고자 했던 여성성과 신체의 가치를 재평가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여성을 자연 본질론에 묶어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반다나 시바, 마리아 미스 또한 에코페미니즘의 근본 가정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알고 있으며 『에코페미니즘』에서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응답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연결시키며 이 중심에 자연의 생산 능력과 여성의 출산 능력의 상징적, 유비적 유사성이 있다. 핵심어는 ‘모성’이 될 것이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이 ‘모성’이 우파에 의해 낭만화되고, 좌파에 의해 탈자연화된 것을 지적하며 양자를 모두 경계해야함을 말한다. 마리아 미스는 미국 등의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여성의 자연 본질화로 비판받는 모성과 자연의 연결이 좌파의 입장과 유사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들 여성주의자들은 모성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적인 것임을 주장하며 모성과 자연 연결성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비난한다. 좌파는 맑스의 견해를 견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맑스는 반자본주의자의 입장에 서 있으나 자연을 인간 이성에 의해 개발하고 자연의 힘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인류가 진보하고 결국 그릇된 생산 관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쟁취한다고 봤다는 점에서 반자연적이다. 포스트모던한 사회 구성주의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나 좌파는 모두 자연적인 것을 부정한다. 이들은 자연적인 것의 실재함, 자연/신체/모성의 가치 재평가를 주장하는 입장, 모성과 자연의 연결 등을 다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거부한다.

이 반대에 있는 것이 우파의 입장이다. 독일의 경우 모성의 강조, 모성과 자연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은 흔히 독일 파시즘의 흔적으로 치부되며 공격의 대상이 된다. 우파와 극단적 우파인 파시즘이 모성과 자연의 보호를 말하며 어머니-땅-민족을 찬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연/신체/여성/모성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낭만화하며 이상화한다는 공통점을 보여주며 아버지-국가-남성의 보호를 받아야할 존재로 대상화시킨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좌파나 우파 나아가 포스트모던한 입장은 사실상 자연/문명, 자연/합리, 여성/남성 등의 이분법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망각하고 있다. 자연은 실재하며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실제하는 현실이다. 이분법의 망령에서 벗어나 자연/여성/신체/모성이 국가나 자본의 조작,지배, 통제 대상이 아님을 이들은 인지해야하며 그것이 인류 전체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근대 남성일지라도 여성에게서 태어나며, 땅에서 난 음식을 먹고, 장차 죽어 땅으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나아가 자연의 공생관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만 살아있을 수 있고, 건강할 수 있으며 성취 또한 가능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이분법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성 능력 또한 자연의 산물임을 인정하며 자연을 떠난 생존은 불가능함을 깨닫는 것,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남성들 또한 깨닫는 것이야말로 남성 중심주의와 그 변주들을 벗어나는 길일 것이다.

좌파나 우파의 생각과 달리 실제 자연 안에서의 여성은 ‘자연 안에서 여성은 강인하게 노동하고 자립하여 생활하고 동시에 주변을 돌본다.’

 

  • 『에코페미니즘』의 현재성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페미니즘』이 고전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의 역사 이래 지속되어왔던 자연과 여성, 자연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이의 언어적, 실재적 친연성에 근거하여 생태의 위기는 곧 여성의 위기임을 주장한다. 남성중심주의적 사고 방식과 그에 기초한 근대 자연 과학 기술 및 자본주의가 자연/여성적인 것들을 어떻게 억압, 통제, 착취해 왔는가를 보여주면서 자연/여성을 해방시켜야함을 말한다. 여성은 자연 생태계가 그러하듯 남성 중심적 세계의 피해자이며 당사자임이므로 자연 생태계를 지켜내는 것은 여성 자신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엇보다 이 책이 빛나는 것은 서로 다른 역사, 문화, 환경에 놓인 두 여성의 공저이며 아직 주변부 국가에 속하는 인도 여성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기 때문 아닐까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차이와 다양성’은 대립과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 서로 차이나는 것들의 공존과 상호 유기적 연결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생태계의 속성이라는 사실이 에코페미니즘의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여성 특히 도시 생활에 익숙한 여성은 사실 서구 세계 따라잡기에 성공한 드믄 국가의 일원, 서방 세계의 일원이나 다름없기에 이들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낙태의 권리에 대한 이들의 비판이 그러하고 제3세계 여성들의 바람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제1세계에 속하는 한국 여성이 이 책을 주장을 수긍하기 위해서는 많은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페미니즘의 역사가 여성성, 신체의 속박에서의 자유를 여성의 자유와 등치시키는 경향이 강하게 존속해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상 백인 남성중심적 시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반다나 시바 등의 지적은 틀리지 않다. 우리가 서구, 중산층이 아닌 계급의 여성 및 서방이 아닌 지역의 여성들을 이해해야할 필요성이 나날이 급박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다른 상황과 입장에 공감하는 상상력의 극대화가 절실하다. 칩코 여성들의 운동과 바람이 보여주듯 그들은 그들의 입장과 환경에 맞춘 여권 신장 운동과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꾸며 움직이고 있다. 세계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것만큼 서방 세계 여성들이 걸어왔던 것과 다른 방식의 여성주의,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무엇이 그들 안에서 태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페미니즘』은 근대 서구 주류 사상이 뒷받침하는 근대 과학과 자본주의 비판에 많은 장을 할애한다. 세계의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모두 자연 안에서 벌어지는 것임을 주장하는 것의 옳음을 증명하듯 서방 세계 여성들의 권리 신장과 풍요로움은 자연, 제3세계 여성과 아동, 그 지역 거주민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삶의 체계를 뒤흔드는 방식을 숨기고 있음을 직시해야할 필요 또한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1세계 소비의 80프로가 생필품이 아닌 사치재에 치중되어 있으며 그 가공되지 않은 원자원과 노동력이 대부분 3세계 착취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지국 온난화, 미세 먼지의 습격, 플라스틱 등 생활 폐기물 처리의 곤란함, 오염되는 물, 자원의 고갈 위협, 핵의 위협 등 헤아리기도 힘든 생태계 파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자연에 대한 앎과 개발이 자연, 지구, 인류를 포함한 현 생태계 생명체의 궤멸 위기로 치닫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것을 모르는 척 한다. 우리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 이 무지의 무지를 깨우쳐야 하고 그것이 바로 여성의 문제이자 여성이 해야 할 일임을 에코 페미니즘은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주장하듯 자연/문명, 여성/남성, 신체/정신 등의 이분법을 깨고 존재하는 모든 것, 근대의 남성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했던 이성마저도 오로지 유일하게 실재하는 자연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인지하는 것에서 재출발해야할 필요성을 깊이 성찰해 봐야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끝)

 

–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의 『에코페미니즘』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주부터는 게일 루빈의 『일탈』이 연재됩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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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下)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0.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下)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반근본주의적 연합의 정치

 

이리가레는 남근로고스 중심적 언어에서 여성들은 재현불가능성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뜻이 명료한 일의적 의미화의 언어 안에서는 여성의 성적 차이는 지칭되거나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들은 ‘하나’가 아닌 다수의 성이다. 나아가 이리가레는 여성을 ‘타자’로 지칭하는 보부아르에 반대하면서 ‘남성=주체 대 여성=타자’라는 변증법적 인식에는 인간 안에 어떤 본질적 속성이 있을 거라고 미리 단정짓는 ‘본질(실체)의 형이상학’이 전제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버틀러는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의 이론이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나 결정론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나아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획일성을 비판할 근거를 줌으로써 페미니즘적 비평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게 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뒤이어서 이리가레가 ‘타자의 문화’를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확대사례로 포함하는 방식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인식론적 제국주의’의 일종임을 밝히고자 했다. 즉 사회적 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여러 권력작용들을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라는 단일한 기호로 비판하는 것은 ‘적을 단일한 형태로 동일시하는’ 전략이며, 이것은 ‘페미니즘 자체의 전체화’를 방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권력의 식민화는 항상 남근중심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며, 그 안에는 인종적․계급적․이성애중심적 권력생산 작용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와의 관계 안에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 속에서 배치되는 가운데 생산되며, 그래서 이는 여성운동 안에서조차 무수한 형태의 권력관계의 효과로 생산된 ‘여성’들이 있음을 수용하는, 즉 통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연합의 정치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방향을 취하게 만든다.

“페미니스트의 행동은 안정되고 통일되고 합의된 정체성으로부터 설정되어야 한다는 강압적 기대만 없다면, 이 행동은 더 빨리 출발할 것이고, 이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훨씬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여성 범주는 영원히 미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연합의 정치학에 대한 이런 반근본주의적 접근방식은 ‘정체성’이 하나의 전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형성되기 이전의 연합집단의 형태나 의미를 알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 열린 연합은 당면한 목적에 따라 번갈아 제정되고 또 폐기되는 정체성을 주장할 것이다.(113)”

 

  • 복종위반의 양가성과 삶의 욕망

 

보부아르가 젠더가 구성적이라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몸(그리고 ‘성’)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기인할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푸코는 여기서 벗어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푸코에게 몸은 오로지 권력관계의 맥락에서만 담론으로서 의미를 획득하며, 따라서 ‘성’은 일관된 정체성을 부여하는 규제적 관행, 즉 섹슈얼리티를 이성애로 안정화시키는 법적․규범적 장치를 통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푸코의 계보학적 탐구는 욕망이 단순히 금지나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되었다고’ 간주하게 만드는 담론적 생산과정을 통해 특정한 형태로 반복적으로 생산된다는 점을 제시한다. 근친상간 금기로 대표되는 금지의 이면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억압되었다고 간주한 이성애 욕망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인정받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푸코에게는 스스로의 관점과도 모순되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욕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페니스(혹은 확대된 클리토리스)를 갖고 태어난 그래서 ‘여자’의 성을 부여받은 에르퀼린은 수녀원에서 만난 소녀들과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한’ 수녀들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죄의식으로 괴로워했다. 에르퀼린은 자신이 작은 성기를 갖고 있음을 고백하고 당국으로부터 합법적인 남자의 권리를 부여받지만 이후 의사와 판사의 신체규정에 따라 법적 격리조치된 이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푸코는 바르뱅이 여자에서 남자로의 변신 전에는 사법적․규제적 성 범주의 압력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쾌락’을 향유했다고 보는데, 버틀러는 이렇게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를 설정하는 푸코의 논의는 섹스와 정체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유토피아적인 쾌락의 세계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따라서 섹슈얼리티를 형이상학적으로 물화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에르퀼린의 양성구유의 몸과 그/녀의 성적 쾌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버틀러는 에르퀼린의 몸과 쾌락은 일의적인 의미를 부과하는 법담론 내에서 생산된 것이면서도 동시에 법담론의 언어로는 규명될 수 없는 모호한 양가성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에르퀼린의 욕망은 한편으로 자매와의 섹슈얼리티를 금지시키는 수녀원의 제도적 명령(‘동성애 금지’)에의 위반으로 구성(‘동성애 감정’)되면서 다른 한편 자매들의 몸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따라서 ‘비동성애적 욕망’)을 느낀다. 사라라는 이름의 ‘자매’와의 하룻밤 뒤 에르퀼린은 ‘이성애가 내포된’ 소유와 승리의 언어(“바로 그 순간부터, 사라는 내 것이었다!!”)를 말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이성애 규범 내에서 작동하는 남성적 특권을 ‘찬탈’하고 그 특권을 모방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녀의 욕망은 푸코가 생각한 ‘비정체성의 지대’가 아니라, 이성애 규범체제에 복종한(즉 이성애적 정체성을 형성한) 결과이면서도 동시에 아직 권리상 여자인 상황에서 그 규범을 위반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복종․위반․굴절․혼란이 교차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려 했는데, 이러한 정체성 형성은 그/녀가 규범체제 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삶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 즉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서 행해진 것”(63)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버틀러는 바로 이렇게 정체성이 생산되는 그 자리에서 대안이 전개될 존재론적 지위를 확인한다, 즉 ‘삶을 욕망하는 한, 그들은 모두 자신에게 강제된 권력체제 한가운데에서도 늘 전복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젠더의 ‘통일성’은 강제적 이성애의 실천효과이다. 이 실천의 힘은 배타적 생산장치를 통해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의 상대적 의미를 제한하기도 하고 그 의미들의 융합과 재의미화가 일어나는 전복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성애주의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권력체제가 그들의 논리, 형이상학, 당연시된 존재론의 지속적 반복을 통해 스스로를 증식하고자 한다고 해서, 반복 자체가 멈춰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복이 정체성의 문화적 생산이라는 기제로서 지속된다면 다음과 같은 핵심적 질문이 등장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전복적 반복이 정체성 자체의 규제적 관행을 문제삼을 것인가?(145-146)”

 

  • 구성적 외부로서의 우울증

 

그렇다면 이러한 강제적 이성애 체제 안에서 그것을 벗어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버틀러는 그것을 정신분석학의 ‘우울증’ 논의를 통해 해명하고자 했는데, 그녀와 유사한 입지점을 가진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분석․비평함으로써 ‘우울증’의 확장된 개념틀을 확보하고자 했다.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모체에 대한 기원적 관계의 억압을 필요로 한다는 라캉의 서사에 도전하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라캉과는 반대로 그녀는 ‘기호계’가 기원적 모성의 몸 때문에 생겨난 언어 차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통해 기호계는 상징계 안에서 영원히 전복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이 점에서 크리스테바의 전략은 라캉의 상징계에 맞서 ‘기호계’를, 아버지 법에 맞서 ‘시적언어’를 대치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크리스테바의 전략은 몇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크리스테바가 시적언어로 아버지 법을 대체하려고 노력하는 그만큼 불가피하게 그 법의 안정성을 전제하고 그 체계를 확정짓는다는 점, 둘째, 크리스테바는 모성적 몸이 문화보다 앞서 있는 의미와 본질성을 지닌다고 말하는데, 그에 따라 모성은 물화되고 모성의 변이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 셋째, 크리스테바는 상징계가 억압하는 일차적 충동(모성적 충동)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 충동의 현실화로 ‘아이의 옹알이’나 ‘정신병자의 방언’처럼 상징계 바깥에 놓여있는 영역을 설정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동성애를 모성으로의 귀환으로 보는 만큼 ‘동성애=정신병’이라는 전제를 아무 문제의식없이 수용하게 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버틀러는 이렇게 크리스테바의 한계와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그녀가 ‘근친상간 금기’와 ‘동성애 금기’가 아이의 젠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문을 개방한다는 점을 긍정한다. 프로이드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주체가 보이는 심리적 반응을 애도와 우울증으로 구분해 설명한 바 있다. 상실된 대상을 분명히 이해하고, 대상에 대한 사랑에 머무는 ‘애도’와 달리, 상실된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며, 상실을 통해 자아의 형성으로 나아가며 또한 대상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변모하기도 하는 ‘우울증’은, 크리스테바에게서는 엄마에 대한 딸의 사랑이 근친상간과 이성애 금기를 통해 형성된 상실감을 내면화시키는 기제로 설명된다. 여자아이의 정체성은 모성적 몸에 대한 일종의 상실․결여가 되며, 아이의 에고는 모체와의 분리에 우울증적으로 반응한 결과 ‘특정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크리스테바의 관점이 그녀가 모성성을 우울증과 동일시함으로써 ‘젠더 정체성의 형성’을 설명할 근거는 제공하면서도, 그것이 왜 이성애적 틀 안에서의 젠더 생산과정에 동성애의 거부/보존이 지속적으로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크리스테바는 아버지 법을 금지 개념에만 독점적으로 한정시키기 때문에 아버지 법이 특정 욕망을 자연스러운 충동의 형태로 생성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여성의 몸은 그 자체 법에 의해 생산되는 구성물이고, 그것은 법의 토대를 약화시키게 되어 있다.”(261) 버틀러는 이성애 규범을 통해 배제되는 동성애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정신병으로 귀착하는 것만도 아닌 ‘주체의 내부로 진입해’ 매 순간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모든 이들의 내면에서 그들의 정체성(및 규범)을 흔들리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따라서 버틀러에게 우울증을 앓는 젠더 주체의 몸은 이성애 중심주의가 배제했던 동성애를 불완전하게 합체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젠더’는 이성애 규범을 신체로 통합하지만 항상 그 규범이 실패하고 거부됨으로써 형성된 내 안의 타자(즉 ‘구성적 외부’)인 것이다.

“젠더 정체성은 자신을 몸에 암호화하고 사실상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을 결정하는, 상실의 거부를 통해 설정될 것이다. 반은유적 활동으로서의 합체는 몸 위에 혹은 몸 안에 상실을 문자그대로 새겨넣어서 몸의 사실성으로, 즉 몸이 문자적 진리로서 ‘성’을 갖게 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주어진 ‘성감’대에서의 쾌락과 욕망을 금지하거나 그 위치를 설정하는 행위야말로 몸의 표면을 가득 채운 일종의 젠더 특정적 우울증이다.”

 

  • 수행적, 전복적 패러디와 페미니즘의 영원성

 

수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과 문헌에서는 행위 뒤에 행위자(‘여성 주체’)가 있다고 가정하곤 한다. 행위주체 없이는 어떤 행위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사회의 지배관계를 변화시킬 저항의 추동력도 주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니크 위티그 역시 행위작용의 장소로 주체와 개인을 상정하는 입장 안에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론이 이전보다 진일보한 것은 그녀가 젠더의 수행적 구성은 문화의 물질적 실천 속에서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위티그가 보기에 성의 이분법적 규제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을 수행하는데, 그 속에서는 오로지 여성 젠더만이 언어적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강제적 이성애 안에서 남성이 보편적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그만큼 젠더에는 오로지 여성만이 남게 되는데, 예컨대 각종 직업들의 표시에서 ‘여의사’, ‘여교수’, ‘여기자’가 말해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겠다. 위티그는 이러한 표식이 제도에 효과적으로 저항하는 실천들에 의해 삭제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생각의 전제에는 ‘섹스’가 언어적 허구이며, 이 허구를 유지하기 위해 이성애제도는 강제적 규범으로 작동한다는 점이 담겨 있다. 따라서 위티그에게 섹스와 젠더는 차이가 없으며 섹스 범주는 그 자체 권력관계 속에서 젠더화된 범주로 이해된다. 위티그의 이러한 발상은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확립할 동등한 기회가 언어 안에서 주어질 수 있으며, 그래서 여성들로 하여금 발화를 통해 자신에게 부과된 물화된 ‘성’을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두게 한다. 그 결과 위티그는 ‘문학작품도 전쟁기계처럼’ 작동할 수 있으며, 이 전쟁의 주된 전략은 여성, 레즈비언, 게이들이 ‘말하는 주체의 위치’를 선점하는 데 있다고 본다.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관점은 오직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관점을 취해야만 또 전세계를 레즈비언화해야만 강제적 이성애 질서가 파괴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고 보는데, 문제는 이러한 ‘도전적 제국주의 전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성애에 참여하고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억압을 반복하고 강화한다는 것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성애가 완전한 위치변경을 필요로 하는 체계라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이성애주의를 재의미화할 가능성 자체는 거부되며, 따라서 위티그의 이론에서는 이성애에 대한 근본적 순응인가 총체적 거부인가라는 양자택일만 남게 된다. 또한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저항전략에는 강제적 이성애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동성애’가 상정될 수밖에 없으며, 그만큼 이성애와 퀴어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도 보장되지 않는 근본적 단절만이 남게 된다고 점을 지적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생각에 맞서 “이성애 자체는 강제적인 법이기도 하지만 또한 필연적인 코미디이기도 하다. … 나는 이성애가 강제적인 체계이자 내재적 희극, 즉 그 자체에 대한 지속적 패러디로 보는 동시에 어떤 대안적인 게이/레즈비언 관점으로 보려는 통찰을 이성애 쪽에 제시하고 싶다”(315)고 말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버틀러만의 고유한 저항전략 개념(즉 ‘전복적 패러디’)이 도출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권력은 거부될 수도, 철회될 수도 없다. 다만 재배치될 뿐이다. 사실 나의 견해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실천에 대한 규범적 핵심은 권력의 완전한 초월이라는 불가능한 환영보다는, 권력의 전복적이고 패러디적인 재배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효과적인 전략은 정체성의 범주 자체를 전유하고 재배치하는 가운데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단지 ‘성’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체성’의 자리에 다양한 성적 담론이 집중된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어떤 형식이 되건 간에, 성의 범주를 영원히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다.”(318-319, 326)

이런 점에서 버틀러의 ‘패러디’ 개념은 강제적 이성애 체제 안에서 그것이 부과하는 규범에 대한 재이용․재의미화를 염두하는 것이며, 그만큼 그러한 저항전략은 담론 이전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상정하지도, 나아가 저항 이후의 유토피아적 낭만화로도 귀결되지 않는 진정한 ‘내재주의’의 성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재주의’는 권력작용이 있는 곳에서는 그 어떤 장소나 시간, 어떠한 위치에서도 저항과 전복이 가능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영구혁명’ 모델로 귀결되며, 그래서 페미니즘 정치의 새로운 대안을 확립하게 해준다. 이러한 대안적인 페미니즘 정치에 대해 버틀러는 마지막으로 젠더 트러블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최종 정리한다.

“페미니즘의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환영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이 환영적 구성물은 자신의 목적이 있지만, 그 용어의 내적 복잡성과 불확정성을 부정하고, 또 그것이 동시에 재현하고자 하는 구성물의 일부를 배제해야만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처럼 빈약하고 환영적인 ‘우리’라는 위상이 절망의 원인은 아니며, 최소한 절망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이 범주의 근본적인 불안전성은 페미니즘의 정치적 이론화에 대한 근본적 제약을 문제시하며, 젠더와 몸뿐 아니라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연다.”

 

  • 2회에 걸쳐 연재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부터는 마리아 미즈와 반다나 시바의 <에코 페미니즘>이 연재됩니다. 🙂 많은 기대 바랍니다.

주디스 버틀러(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9.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上)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젠더의 의미를 둘러싼 현대 페미니즘 논쟁은 이 시대를 이끌다가 다시 특정한 의미의 트러블에 도달했다. 마치 젠더의 불확정성이 결국 페미니즘의 실패를 보여주는 정점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트러블이 있다고 해서 이처럼 부정적인 가치를 수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나는 트러블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최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렇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서문(73-74쪽[한글판])

 

1956년 헝가리와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주디스 버틀러(1956. 2. 24 ~)는 1990년 <젠더 트러블>의 출판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페미니즘에서 정치철학, 윤리학, 퀴어이론, 문학이론에 걸쳐 자신의 작업을 이어간 버틀러는 정체성과 주체성 형성의 문제를 뼈대로 삼아 젠더․섹스․폭력․언어 등에 대한 여러 새로운 논쟁적 입장을 제출함으로써 오늘날 미국 내에서 가장 주목받는(버틀러를 패러디하면 ‘트러블을 일으키는’) 철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문제는 그녀가 일으킨 트러블이 단지 기존의 관성처럼 받아들이던 법적․언어적 개념들이나 사고형태들만을 뒤흔든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에도 불편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현존하는 권력구조 안에서 우리가 정체성을 통해 주체가 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그 속에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모두 법과 제도의 이차적 결과물이며 나아가 그것들을 구분짓는 경계 역시 문화적역사적 구성물임을 폭로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자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연적․필연적 토대란 없으며 그러한 토대를 상정하는 이론을 ‘실체(혹은 본질)의 형이상학’으로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말처럼 ‘여성’ 정체성이 이처럼 언제나 유동적․불확정적이며, 그래서 심지어 페미니스트들 안에서도 ‘여성’의 의미를 동일하게 고정시킬 수 없다면, 여성을 억압하는 체제는 무엇이며, 또 그에 맞서 저항하는 토대는 무엇인지를 규정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남게 될 것이다. 즉 페미니즘의 안정적 기반을 동일하게 규정할 수 없다면(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운동의 측면에서나 이론의 측면에서 어떤 가능성을 갖게 되는가?

 

  • 섹스/젠더/욕망으로 분할된 인식틀에 대한 비판

 

‘젠더’라는 용어가 현재와 같이 통용되게 된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1908. 1. 9 ~ 1986. 4. 14)<제2의 성>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선언한 이후부터일 것이다. 즉 ‘여성적인 것’이 생물학적 성과는 달리 문화적․사회적 과정에 의해, 다시 말해 젠더화된 규범을 강제로 부과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만들어 진’ 것이라는 비판적 문제의식이 발전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보면 섹스는 생물학적 몸의 차이, 젠더는 문화적․사회적 동일시 양식, 섹슈얼리티는 성적 행위가 유래하는 근원적 욕망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구별짓고 분리시킨 인식론적 틀은 이후 여성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했고 페미니즘의 여러 형태의 이론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몸의 차이에 기초해 여성에게 부과했던 기존의 여러 속성들(예컨대 모성성, 수동성, 감정적임, 연약함 등)이 사회적인 제도나 규범이 낳은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 결과 여성으로 하여금 성역할이나 직업선택에서의 고정성을 탈피할 계기를 주며, 나아가 또한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분리될 수 있다면, 이성애에 기초한 정상가족체제의 필연성 역시 허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의 작업의 독특함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인식(보부아르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여러 페미니스트들을 지배하는 인식) ‘안에서’ ‘그에 맞서는’ 근본적이면서도 내재적인 비판을 전개한다는 점에 있다. 첫째, 보부아르의 생각, 즉 사람은 몸과 그 몸에서 비롯된 ‘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성이 젠더의 필연적․인과적 원인은 아니며 젠더는 신체적 외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설혹 성이 생물학적으로 둘(남자와 여자)로 분류된다 할지라도, 젠더가 둘이어야 할 필연성은 나오지 않으며 섹슈얼리티의 형태 역시 특정한 형태로 한정될 이유는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부아르는 젠더를 논할 때 늘 두 형태(남성성과 여성성)를 상정하곤 하는데 이는 그녀 역시 젠더를 이분법적 틀로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젠더가 섹스를 반영하거나 모방하는 관계에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95) 둘째, 보부아르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99)로서 즉 어쩔 수 없는 ‘자연적 소여’로 받아들이곤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염색체와 호르몬의 상태를 통해 우리에게 몸의 차이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확인시키려 하는 무수한 담론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임산부의 뱃속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그 무수한 담론들은 무엇이며 심지어 이런 성별감별의 담론들은 왜 종종 그 감별조차 실패하곤 하는가?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보부아르의 주장과 달리 ‘몸’은 늘 담론 안에 감싸여져 있으며, 그 담론들을 통해서야 비로소 어떤 특정한 형태로 생산된다는 점에서 ‘자연적 소여’일 수가 없다. 셋째, 보부아르는 ‘주체’가 언제나 이미 남성적인 것이고 나아가 보편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음을 폭로하면서 이를 여성적 ‘타자’와 구분하는데, 이를 통해 그녀(그리고 여러 페미니스트들)는 추상적인 인간이나 주체의 담론에 늘 도사려 있는 남성중심적 인간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계기를 주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보부아르가 ‘인간’이라고 하는 담론의 장에서 여성의 몸을 “부인되고 멸시당한 체현(embodiment)”(105)으로, 나아가 보편적 규범 바깥에 있는 것으로 전제되는 만큼 의미화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으로 보고, 그 결과 해방의 가능성은 의미화되지 않은(남성적 규범에 물들지 않은) 여성의 몸을 자유의 도구로 이해할 때 발생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주장에서 보부아르는 은연중에 ‘남성 의미화 對 여성 비의미화’, ‘남성=주체=문화=정신 對 여성=타자=자연=몸’이라고 하는 플라톤과 데카르트 등이 전개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며, 그래서 남성중심적 인간주의를 비판하는 뒷문으로 역설적이게도 이리가레가 말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를 끌어들일 여지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는 결국 ‘여성성’을 규범적으로 배제된 영역에 영원히 묶이게 만듦으로써 암묵적으로 젠더 위계의 체계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페미니즘의 정치의 일체의 해방적 가능성을 스스로 유폐시키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 열린 복합물로서의 젠더와 삶의 박탈

 

버틀러는 이처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분리시키는 인식’이 한편으로는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을 성장시킨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규범(남성성/여성성)의 고착화’, ‘담론 이전의 영역으로의 몸의 실체화․물신화’, ‘여성성의 항구적 타자화 및 배제’ 등의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을 비판함으로써 젠더와 몸뿐 아니라 페미니즘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버틀러는 섹스가 (1차적․본질적인) 자연과 관계되고 젠더가 (2차적․인위적인) 문화와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섹스는 이미 젠더이며 그런 점에서 섹스와 젠더(나아가 섹슈얼리티)는 모두 문화적 구성물임을 강조하는데 그 결과, 그녀의 관점에서 젠더는 “그 총체성이 영원히 보류되어서, 주어진 시간대에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도 없는 어떤 복합물[로서] … 다양한 집중과 분산을 허용”(114)할 가능성의 영역으로 열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버틀러가 이처럼 ‘섹스가 이미 젠더이고 젠더를 열린 복합물’로 이해하게 될 때, 문제는 그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라는 견고한 개념을 통해 확보되는 ‘정체성’(특히 ‘젠더 정체성’)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가 남게 될 것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만일 버틀러의 논의대로 젠더 정체성이 비일관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 일정한 자리를 배치받는 ‘인간’으로서의 터전, 아니 인간 그 자체의 존재론적 지위 및 문화적 인식 가능성이 위협받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인간’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문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미리 주어진 규범적 이분법, 즉 여성이나 남성으로 고착되지 않는다’로 대변되는 급진적 (탈)젠더정치는 ‘그럼 넌 사회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으니 그 안정적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라는 공포스러운 박탈정치를 예고하게 만든다. 버틀러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인간으로서 ‘인식된다는 것’의 의미와 그것에 내포된 권력관계를 분석할 필요를 제기하면서 프랑스 페미니즘과 후기구조주의 이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 이리가레푸코위티그크리스테바의 수용 및 대결

 

버틀러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론으로서 크게 4가지 입장, 즉 타자를 재생산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남성성만이 정체성으로서 존재한다’는 뤼스 이리가레(1930. 5. 3 ~)의 입장,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정체성 범주는 널리 확산된 섹슈얼리티의 규제적 경제체제의 산물’이라는 미셸 푸코(1926. 10. 15 ~ 1984. 6. 25)의 입장, 강제적 이성애 상황에서 ‘정체성은 언제나 여성적’이라는 모니크 위티그(1935. 7. 13 ~ 2003. 1. 3)의 주장, 마지막으로 ‘상징계(아버지 법)에 자리한 남성 정체성의 위치를 기호계(모체에서 비롯된 시적 언어)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자 했던 쥘리아 크리스테바(1941. 6. 24 ~)의 비판적 정신분석학의 입장 등이 있는데, 버틀러는 이 4가지 입장의 정체성 규정과 이론적 의의 및 한계를 제시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결론을 통해 페미니즘 이론 및 정치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첫째, 앞서 언급했던 보부아르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전도시키는 이리가레의 성차이론은 한편으로 서구문화의 관습적 재현체계 안에서 여성은 주체모델로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점에서 여성들은 보부아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항상 이미 남성적인 주체의 단순한 부정(타자)’으로는 이해될 수 없으며, 따라서 여성은 주체도 타자도 아닌, 이분법적 대립으로는 재현 및 환원될 수 없는 차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성=몸 對 남성=이성’을 은연중에 전제하는 보부아르 역시 지배적인 남성성, 남근로고스 중심주의 담론을 효과적으로 은폐하는 데 일조하는 것으로 비판된다. 둘째, 푸코가 보기에 본질적인 섹스의 문법은 이분법의 각 용어에 인위적인 내적 일관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양성 간의 인위적인 이분법 관계 또한 강요한다. 이처럼 섹슈얼리티를 이분법적 성범주로 규제하는 것은 이성애적․재생산적․법의학적 헤게모니를 파열시키는 섹슈얼리티의 전복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셋째, 보부아르의 연속선상에 있는 위티그가 보기에 성에 대한 이분법적 규제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을 수행한다. 그래서 그녀는 강제적 이성애주의의 전복이 자유로운 인간의 산출이라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열며, 에로스 경제의 확대가 섹스/젠더 그리고 정체성의 허상을 깨뜨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위티그는 여성들에게 보편적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섹스’의 허상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제3의 젠더를 세우자고 말하는데, 이는 결국 레즈비어니즘을 긍정하는 전략으로 소급된다. 넷째, 크리스테바는 라캉의 ‘아버지 법’이 모든 언어적 의미화 구조(즉 ‘상징계’)를 구성하는 보편원리로 기능하면서 모체에 대한 아동의 근본적 의존과 기원적 리비도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고 보았다. 결국 상징계는 모체와의 기원적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데, 이러한 억압의 결과로 나타나는 ‘주체’는 억압적 법을 전달하는 메신저나 옹호자가 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라캉의 서사에 도전하면서 기원적인 모성의 몸으로 생겨난 언어차원인 기호계가 상징계 안에서 영원히 전복의 원천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다원적 의미와 기호의 비종결성이 지배적인 시적언어를 통해 ‘상징계’ 질서를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입장들에 대한 버틀러의 분석 및 비판은 (지면의 한계상) 거칠지만 다음과 같은 간단한 도식의 형태로 정리될 수 있다.

 

이리가레 푸코 위티그 크리스테바
규범과 정체성 규정 ․ 남성로고스 중심주의

․ 남성적 성만이 존재하며 여성은 남성적 성과의 차이로서만 기능

․ 이성애 중심주의

․ (남자든 여자든) 성범주는 섹슈얼리티의(이성애)의 규제적 효과

․ 강제적 이성애

․ 남성은 보편적 인간으로 등록되며 따라서 여성만이 성범주로 표시(ex.여의사)

․ 언어적 의미화 구조(상징계)

․ 아버지 법으로서의 상징계와 다원적 의미가 억압되는 母體(및 시적언어)

의의 ․ 여성의 오인 혹은 재현불가 능성으로 인한 ‘하나이지 않은 성‘의 가능성

․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와주체와 타자의 변증법 비판

․ 주체 개념에 전제된 실체 형이상학 및 인간주의 비판

․ 정체성의 기원을 제도․담론․ 실천의 효과로 봄으로써 성범주(섹스)가 역사적으로 특정한 섹슈얼리티 양식을 통해 구성된다는 계보학적 접근의 가능성

․ 금기가 담론을 통한 효과로 작용하며 금기를 권력관계 속에서 읽어내면서도 금기의 생산성을 설정한다는 점

․ 성의 자연성이 허구적임을 폭로하며 섹스가 상상적

구성물이며, 젠더화된 범주로 산출된다는 점을 폭로

․ 섹스의 허구성을 근원적인 언어적 존재론(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부여된다는 것)을 통해 극복할 가능성

․ 라캉과 정신분석학의 근본적 전제로서의 상징계를 전복할 가능성 제공

․ 모성적 몸에 가해지는 아버지 법의 단성적 의미화 기제를 다원적 의미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

․ 강제적 이성애 체제가 우울증과 비체화를 요청하는 인식적 가능성의 개방

한계 ․ 남근로고스 중심주의 비판을 통해 적을 단일화하는 인식론적 제국주의 설정.

․ 하지만 ‘식민화’는 남성성으로부터만 비롯되지 않으며, 인종, 계급, 이성애중심주의와 교차하면서 작동.

․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대한 해석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동성애적 인식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

․ 바르뱅의 쾌락을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로 이해할 때 드러나는 이상적 해방관 및 그에 따른 섹스와 정체성의 낭만화

․ 모든 발화에서 흠없는 매끈한 정체성을 요구

․ 대안으로 설정되는 ‘전세계적 레즈비언화’가 지닌 도전적 제국주의의 위험성

․ 레즈비어니즘이 가진 이성애 질서와의 근본적 단절 따라서 이성애내에서의 재의미화 가능성이 차단됨.

․ 의미 이전과 이후의 설정

․ 기호계의 시적언어를 통해 전복하고자 하는 아버지 법의 상징적 의미화에 의존

․ 문화에 앞서는 모성을 설정함으로 인한 모체의 자연주의화

․ 모성본능의 목적론 설정

 

  • 주디스 버틀러 (上)편은 여기까지 입니다 –
  • (下)편도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