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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안내] 『헤겔 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1, 2 (이병창|먼빛으로|2025-11-15) [한철연 소식]

『헤겔 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1, 2 (이병창)

 

헤겔 철학 연구에 있어서 기념비적 저서가 출간되었습니다. 한철연 이병창 회원(동아대 명예교수)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번역하고 주석과 해제를 달았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성과로 저자의 50여 년 헤겔 연구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본 웹진 <이 시대와 철학>에도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코너를 운영중인 저자는 현재 <헤겔의 형이상학 산책>을 47회 째 연재 중에 있으며 60회를 연재한 <헤겔미학산책>은 『정신의 표현 기호로서 예술』(2024)이라는 단행본으로 작년 8월에 출간되었습니다. 퇴임 후에도 여전히 왕성한 학술 활동과 집필을 이어가는 저자의 학문적 성과 앞에 예를 표하며, 헤겔 철학의 봉우리이자 깊은 심연으로 안내할 책의 내용을 직접 확인할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아래는 『헤겔 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1, 2에 대한 저자 제공 소개글입니다.

이번에 발간된 『헤겔 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1, 2)』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동시에 주석과 해제를 달아 놓은 책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번역은 국내에서 여러 번 시도됐지만, 헤겔 『정신현상학』을 번역하고 동시에 주석과 해제를 단 책으로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아니 세계적으로 볼 때도 『정신현상학』을 주해하기를 시도한 책으로는 처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는 『정신현상학』의 해석을 위해 거의 50여 년을 바쳐왔다. 그동안『정신현상학』 해설서를 여러 권 발표했으나, 이번 나온 주해 본은 그의 최종적인 노력의 결실이라 하겠다.

헤겔 『정신현상학』은 1807년 발간된 지 200년이 더 지났어도 아직 그 감추어진 진의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헤겔이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 책을 지었고 나가서 이 책이 전개되는 독특한 방식이나 전체 구조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지금껏 부분적인 해석은 있었어도 전체에 거쳐 완전하고 일관적으로 해석한 책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그런데도 누구도 헤겔 『정신현상학』의 내용이 심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못했는데, 간간이 드러난 내용만으로도 헤겔 이후 철학의 발전에 어마어마한 충격과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연구와 관련된 저간의 사정을 생각해 볼 때 이를 번역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주석과 해제를 붙였다는 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헤겔 『정신현상학』의 전개 과정을 헤겔이 서론에서 제시한 ‘의식 경험’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고, 『정신현상학』의 최종 도달 목적인 절대정신을 그리스 철학의 비의인 ‘헨 카이 판(hen kai pan)’에서 흘러나오는 공동체 정신이라고 해석하면서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과 노예의 투쟁을 통해 형식적 자유의지가 출현하고 근대정신의 소외된 관계를 통해 실질적 자유의지 또는 정의를 추구하는 일반의지가 출현하며, 마지막으로 예술과 종교, 철학을 통해 이 일반의지가 구체적으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이 책의 설명이 모든 점에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더라도, 헤겔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초석이 될 것은 틀림없다. 이 책을 토대로 질정을 거쳐나가면, 헤겔이 『정신현상학』에 감추어놓은 비의가 철저하게 드러나면서 앞으로 정신의 발전을 고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갈망을 충족할 것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철학사는 항상 심성을 함양하는 문제에 주력해 왔는데, 이 책은 그런 철학적 관심을 충족하는 데도 많이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뉴스 기사 참조

[인터뷰]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쓴 목적은 원대한 ‘공동체 정신’의 실현”

 

● 1권과 2권의 전체 목차

  1권

번역자 서문

서문[Vorrede]
서론[Einleitung]

A 의식
Ⅰ 감각적 확신 또는 이것과 의도[meinen]
Ⅱ 지각; 사물 그리고 속임
Ⅲ 힘과 지성, 현상과 초감각적 세계

B 자기의식
Ⅳ 자기를 확신하는 진리
A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 자립성: 주인과 노예
B 자기의식의 자유: 스토아주의, 회의주의 및 불행한 의식

C (AA) 이성
Ⅴ 이성의 확신과 진리
A 관찰하는 이성
a 자연의 관찰
b 자기의식을 순수한 상태에서 외적 현실과 관계해 관찰 하는 것: 논리적 법칙과 심리학적 법칙
c 직접적인 [신체적] 현실과 자기의식의 관계에 관한 관찰, 관상학과 골상학
B 이성적인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을 통한 실현
a 쾌락과 운명[필연성]
b 심정의 법칙과 자만의 광기
c 덕과 세속
C 그 자체로 자기에게 나타나면서 스스로 실재하는[reell] 개체성
a 정신적인 동물의 나라와 속임 또는 사태 자체
b 법칙을 발견하려는 이성
c 이성에 의한 법칙의 검증

2권

C (BB) 정신
Ⅵ 정신 11
A 참다운 정신, 인륜성 24
a 인륜의 세계; 인간의 법칙과 신의 법칙; 남성적 존재와 여성적 존재 28
b 인륜적 행동; 인간의 인식과 신의 인식; 죄와 운명 62
c 법적 상태 97
B 자기에게 소원화된 정신: 교양 114
B-1 자기에게 소원화된 정신의 세계 126
a 교양과 교양이 실현된 나라 129
b 신앙과 순수 통찰 203
B-2 계몽 229
a 계몽과 신앙의 투쟁 236
b 계몽의 진리 310
B-3 절대적 자유와 공포 336
C 자기를 확신하는 정신, 도덕성 368
a 도덕적 세계관 376
b 전치 409
c 양심, 아름다운 영혼, 악과 그 용서 443

C (CC) 종교
VII 종교 545
A 자연 종교 576
a 빛[Lichtwesen] 582
b 식물과 동물의 신 588
c 장인 593
B 예술 종교 604
a 추상적 예술작품 613
b 생동하는 예술작품 642
c 정신적인 예술작품 656
C 계시 종교 706

C (DD) 절대지
Ⅷ 절대지 797
부록-1 정신현상학을 이해하기 위한 예비지식 851
1 『정신현상학』의 발간 851
2 판본에 관해 863
3 『정신현상학』의 구조, 방법, 개념과 목적 869

 


저자 소개

이병창

서울대학교 철학과 수학,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2011년 2월 명예퇴직, 현대 사상사 연구소 소장
헤겔철학과 정신분석학 및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면서 문화철학 및 영화철학을 연구한다.

박사학위 논문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정신 개념에 대한 연구」, 서울대, 2000.

주요저서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헤겔 정신현상학 서문 주해)』, 먼빛으로, 2010
『반가워요 베리만 감독님』, 먼빛으로, 2011
『불행한 의식을 넘어(헤겔 정신현상학 자기의식 장 주해)』, 먼빛으로, 2012
『지젝 라캉 영화』, 먼빛으로, 2013『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 말, 2015
『우리가 몰랐던 마르크스』 , 먼빛으로, 2018
『정신의 오디세이-자유의지의 역사』, 먼빛으로, 2021
『헤겔의 정신현상학-EBS오늘의 클래식』, EBS BOOKS, 2022
『지적 대화를 위한 교양인의 현대철학』, 팬덤북스, 2024
『헤겔 미학 산책-정신의 표현 기호로서 예술』, 먼빛으로, 2025

번역
프리드리히 슐레겔, 『그리스 문학 연구』, 먼빛으로, 2014
프리드리히 슐레겔, 『미학 철학 종교 단편』 , 먼빛으로, 2020
마르크스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먼빛으로, 2018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5년 10월 제20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7장. ‘도’의 형이상학과 ‘이사겸중’의 지식론: 김악림(金岳霖)│발제: 인현정 / 토론: 한재석│2025.10.31.

-주제: 이규성 선생의 김악림 연구(중국철학사론 7장)
-발제: 인현정 선생님(한철연 회원)|토론: 한대석 선생님(충남대)
-일시: 2025년 10월 31일(금) 오후 4시
-장소: 한철연 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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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선생이 지은 대작 『중국현대철학사론』 독해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10월 모임에서 김악림을 다루고 다음 모임에서 장세영을 다루면, 마칠 듯합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중국 현대철학자 김악림(金岳霖, 1895~1984)을 다루고자 합니다.

이규성 선생에 따르면, 그는 중국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중국철학과 중국에서 발견되는 철학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발견되더라도, 보편성을 지닌 철학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데, 그에게서 보편적인 것은 ‘ 리적이고 분석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명료한 진리에 기초하여 논리적으로 전개된 철학이라 분석철학의 이상을 담은 말로 보입니다.

물론 여기서 논리란 형식논리학을 의미합니다.

그는 철학을 보편성과 특수성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는데, 철학의 필수 조건은 논리학과 지식론이지만, 특수성은 자기 사회나 시대를 반영하는 윤리와 정치사상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김악림은 후자의 측면에서는 노자나 장자의 초탈한 삶을 추구했다고 하네요.

그는 청년기 개혁적 자유주의, 윤리적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며, 장개석의 파시즘이나 공산당의 지배에 대해서는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가 지향하는 것과는 반대로 흘러갔으니, 그는 현실로부터 내적으로 망명한 상태에서 논리와 명료한 진리를 추구하면서 현실적으로는 방관자로서 “권태로운 무심함을 즐겼다”고 합니다.

어떻든, 그가 명료한 진리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전개시켰는지 궁금한데요. 이번 발제는 인현정 선생님이 맡아주셨고, 토론은 충남대 철학과에서 분석철학과 논리학을 연구하는 한대석 선생님이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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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CCESvI24z3Y

[영상없음]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5년 8월 제19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 6장. 동서 ‘융회’와 형식주의 신이학: 풍우란(馮友蘭)-발제: 박영미│2025.08.22. [월례발표회•세미나]

이번 19차 정기세미나는 기술적 문제로 유튜브 영상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양해바랍니다.
세미나 사진과 박영미 선생님의 발제문은 아래 한철연 홈페이지 링크로 접속하여 첨부파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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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성 철학(사상) 연구회] 제19차 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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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동서 ‘융회’와 형식주의 신이학: 풍우란(馮友蘭) (『중국현대철학사론 6장』)
-발제: 박영미 선생님
-일정: 2025년 8월 22일 금요일 오후 4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줌 온라인 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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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차 이규성 선생 사상 모임에서는 이규성 선생님이 지은 중국 현대철학사론 가운데 6장 풍우란 편을 읽고 토론하고자 합니다.
풍우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현대철학자입니다. 그의 중국현대철학사는 중국철학을 이해하는 안내서로 여겨졌습니다.
그 책 덕분에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풍우란의 사상의 중국철학을 이해하는 방법이나 그 해석하는 관점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풍우란을 잘 알지 못하지만, 이규성 선생이 쓴 글의 서문을 통해 보면 풍우란은 동서 융회의 관점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송대 이학이 플라톤적 이데아론과 통하는 것으로 보는데, 그런 이데아에 이르는 길은 오히려 논리적 길이라 합니다.
이 논리적 길은 사변적인 방법을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논리적 분석을 통해 그 의미를 끊어버리는 회의주의적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천리에 이르는 길은 최종적으로는 선적인 직각을 통한 길입니다.
풍우란은 선적인 직각을 통해 우주와 합일하며 이를 통해 인생의 이상을 세우고 여기서 내적 초월과 외적인 도덕의 합일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풍우란은 이를 바탕으로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중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내적인 혼란을 극복하려 하였다는 거죠.
설명 대로면 거의 플라톤적 사유를 빼다 박은 듯이 보이는 데(제가 제대로 이해하는지 모르겠지만),
풍우란의 사상을 통해 이규성 선생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7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7)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영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3) 교과목들의 대상과 부과 방법, 시기와 구체적 프로그램(535a-541b)

 

[535a-541b]

* 소크라테스는 서곡으로서 예비적인 배울 거리들에서부터 본곡으로서 변증술에 이르기까지 배울 거리 전반에 대한 언급을 마무리한 후에 그 배울 거리들을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부여할지를 배정하는 일이 남아있다고 말한다. (535a) 우선 누구를 배움의 대상으로 삼을지를 다루면서 소크라테스는 이전 통치자를 선발할 때 기준으로 삼았던 자연적 성향들을 다시 끌어들인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그 자연적 성향 내지 그에 적합한 자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가장 안정적이고βεβαιοτάτος 가장 용감하며ἀνδρειοτάτος 가능한 한 가장 잘생긴εὐειδεστάτος 자.(535a) 성품τὰ ἤθη이 고상하고γενναῖος 강건하며βλοσυρός 배울 거리와 관련해서 예리하고δριμύτης 학습 능력이 뛰어난 자.(535b) 기억력이 좋고μνήμων 강인하며ἄρρατος 모든 점에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φιλόπονος 자.(535c) 철학의 불명예ἀτιμία는 이러한 자격에 맞지 않은οὐ κατ᾽ ἀξίαν 사람들 즉 적자γνήσιος 아닌 서자νόθος들이 철학을 접했기 때문이다.(535c)

* 그리고 철학을 접하는 자가 고생을 마다하지 않음φιλοπονίᾳ에서 절름발이χωλός여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신체 관련 일들에서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배움을 좋아하지는 않는 경우가 그렇다.(535d) 그와 마찬가지로 진리와 관련해서도 의도적인ἑκούσιος 거짓ψεῦδος은 미워하고 성을 내지만, 의도하지 않은 거짓은 가볍게 받아들이고, 발각되어도 성내지 않는 자들은 불구ἀνάπηρος의 영혼을 가진 자로 마치 돼지 닮은ὕειος 짐승θηρίον처럼 무지ἀμαθίᾳ 속에서 맘 편히 뒹군다.(535e) 절제σωφροσύνη, 용기ἀνδρεία, 호방함μεγαλοπρέπεια, 그리고 덕ἀρετή의 부분들과 관련해서도 누가 서자이고 누가 적자인지를 경계해야 한다.(538a) 적자가 아닌 자들을 교육할 경우 나라πόλις와 정치체제πολιτεία를 구하지 못하고 철학을 한층 더 큰 비웃음의 홍수 속에 빠트린다.(536b)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느닷없이 우리가 놀이하고 있었다는 것ὅτι ἐπαίζομεν을 잊고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 자신이 우스운 꼴이 되었다고 말한다. 철학이 부당하게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성이 나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통치자 선발ἐκλογή 관련 이야기로 돌아가 이번에는ἐν δὲ ταύτῃ 연장자πρεσβύτης를 선발하면 안 될 것이라 말한다.(536c) 산술과 기하를 비롯한 모든 예비교육προπαιδεία은 아이παῖς들일 때 제공되어야 하고 방식 또한 ‘강제로 배우는 가르침의 형태’ἐπάναγκες μαθεῖν τὸ σχῆμα τῆς διδαχῆς가 되어선 안 된다. 자유인ἐλεύθερος이 아닌 노예δουλεία처럼 억지로 배우는 것은(536d) 몸과 달리 영혼에 전혀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아이들을 양육할 때는 놀이 삼아παίζοντας 배우게 해야 한다. 그래야 ‘각자가 어디에 적성이 있는지’ἐφ᾽ ὃ ἕκαστος πέφυκεν도 잘 살필 수 있다.(536e)

* 그리고 아이들을 말에 태워 전쟁터에 데리고 가서 구경하게 해야 하고 좀 안전하다면 새끼 사냥개들처럼 피 맛도 보게 하여 모든 고생과 배울 거리와 두려움φόβος 속에서 가장 잘 대처하는ἐντρεχής 자를 선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선발은 2년에서 3년 동안 필수적인 신체단련γυμνάσιον 기간이 지나 스무 살이 된 자 중에서 이루어지되(537b) 선택된 이들은 배울 거리들 상호 간의 친족 관계οἰκειότης와 ‘있는 것의 본성에 대해 전체적인 조망’σύνοψις τῆς τοῦ ὄντος φύσεως을 갖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조망을 하는 사람ὁ συνοπτικὸς이 곧 변증술에 밝은 사람διαλεκτικός이기 때문이다.(537c)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적법한νόμιμος 일들에서 누가 가장 잘 머물러 있는지μόνιμος 등을 잘 살펴보고 이들이 서른 살이 되면 이들 중에서 다시 선택해서 변증술적 대화διαλέγεσθαι의 힘을 통해 시험하면서 누가 ‘있는 것’ 자체αὐτὸ τὸ ὂν에 진리ἀληθεία와 함께 다다를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537d)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교육 단계에서 아주 많이 경계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변증술적 대화와 관련해서 나쁜κακός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하는 사람들은 불법παρανομία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이 놀라운θαυμαστός 일이 아니어서 그들을 이해해 줄 수συγγιγνώσκεις도 있지 않겠냐고 글라우콘에게 묻고(537e) 그들이 변증술적 대화와 관련해서 그렇게 된 사정을 비유를 들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누군가 부모가 바뀌어 부유하고 큰 가문에서 많은 아첨꾼κόλαξ 사이에서 자라나 어른이 된 후 부모가 바뀌었음을 알게 되고 진짜 부모도 찾지 못했을 경우, 그 이전과 이후 그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보자.(538a) 그가 진실을 모를 때에는 부모와 친척들을 아첨하는 사람들보다 더 존중했을 것이고, 그들에게 불법적인 행동이나 말을 덜 했을 것이고, 중대한 일들과 관련해서 아첨꾼들보다 그들에게 불복하는 일이 덜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나면 반대로 부모에 대한 존중은 줄어드는 대신 이전보다 현저하게 아첨꾼들의 말을 따르며,(538b) 그들의 방식대로 삶을 살고 드러내놓고 그들과 사귈 것이다.”

* 그러나 글라우콘은 이 비유εἰκών가 논변λόγος을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들과 어떤 점에서 관련이 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또 아래와 같이 설명을 이어간다. “어려서부터 우리에게는 정의로운δίκαιος 것들과 아름다운καλός 것들에 대한 신념δόγμα들이 있어 마치 부모γονεύς에게 양육되듯이 우리는 이 신념들에 복종하고 존중하면서 그 속에서 양육된다.(538c) 그런데 동시에 우리에겐 이것들과 반대로 쾌락ἡδονή을 수반하는 다른 활동ἐπιτήδευμα들도 있어 우리의 영혼이 아첨하는 쪽으로 이끌리기도 한다. 이때 다소라도 균형 잡힌 사람들은 그것에 설득되지 않고 이겨내지만, 때론 누군가 ‘아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τί ἐστι τὸ καλόν라는 질문에 접한 후 다양한 방식으로 논변에 의해 논박ἔλεγχος당할 경우(538d) 그는 그릇된 믿음δόξα 속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이 경우 그의 삶은 자신의 영혼에 아첨하는 삶βίον τὸν κολακεύοντα이 된다.”(539a)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논변을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상황이 이렇다면 그건 이해συγγνώμη해줄 만한 여지가 많지 않은가’를 묻고 글라우콘 또한 그에 동의하며 연민ἔλεος을 살 만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 서른 살 먹은 자들에 대해서 이러한 연민이 생기지 않도록 모든 점에서 조심하면서 논변을 배우기 시작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539a)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크게 조심해야 하는 것εὐλάβεια 한 가지로 젊어서 논변λόγος을 맛보지 않도록μὴ γεύεσθαι 하는 것이라 말한다. 젊은이νέος들이 처음 논변을 맛보면 그것을 그들은 마치 애들 장난παιδιή처럼 사용해서 항상 반박ἀντιλογία하는 데 써먹고 또 논박하는ἐξελέγχοντας 사람들을 흉내 내서 스스로 남들을 논박하면서, 논변을 도구로 삼아καταχρῶνται 마치 사냥개 새끼σκυλάκιον처럼 매번 옆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겨서 찢어발기기σπαράττειν를 즐기기 때문이다.(539b) 스스로 많은 이들을 논박하거나 많은 이들에게 논박당하기도 하다 보면, 그들은 전에 믿었던 것들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으로 급격하게 빠져들게 되고 이로 인해서 그들 자신과 철학 전체가 남들에게 비방을 받게 된다.(539c)

* 그러나 나이가 좀 든 사람ὁ πρεσβύτερος은 그러한 광기μανία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고, 변증술적 대화διαλέγεσθαι와 진리 탐구σκοπεῖν τἀληθὲς를 원하는 자를 흉내 낼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더 균형을 갖춘μέτριος 사람이 될 것이다.(539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열심히 논변에 참여하며 단련하는 기간을 5년 정도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기간에 단련을 마치면 이후 15년 동안 즉 쉰 살이 될 때까지 그들을 다시 저 동굴로 내려가게 해야 하고, 전쟁과 관련한 일들을 관장하고 젊은이들에게 맞는 관직ἀρχαί을 맡도록 강제해야ἀναγκαστέος 한다. 그들이 경험에서 남들에게 뒤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도 그들이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는지ἐμμενοῦσιν 시험받아야βασανιστέος 한다.(539d-e)

* 이렇게 쉰 살이 되어 모든 과정을 통과하고 일ἔργον에서나 앎ἐπιστήμη에서나 모든 점에서 모든 식으로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인 이들을 드디어 최종 목적지τέλος로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영혼의 눈길을 들어 올려 만물에 빛을 제공하는 것 자체를 바라보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리고 ‘좋음 자체’τὸ ἀγαθὸν αὐτό를 보고 나면 그것을 본παράδειγμα으로 삼고서, 남은 삶τὸν ἐπίλοιπον βίον 동안 대부분 시간을 철학을 하며 지내겠지만, 차례가 오면 각자가 나랏일로 고생하면서 나라를 위한 통치 업무를 불가피한ἀναγκαῖος 것으로 받아들여 수행해야하고 자신들과 비슷한 다른 이들을 교육하여 나라의 수호자φύλαξ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런 연후 그들은 복된 자들의 섬μακάρων νήσος으로 떠나, 거기에 거주할 것이다. 이들은 신령들δαίμοσιν 또는 행복하고 신적인 사람들로 여겨지고, 나라는 이들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 공적인 제사를 지낼 것이다.(540b-c)

* 소크라테스가 위와 같이 배울 거리들을 누구에게 어떻게 배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자 글라우콘은 마치 조각가처럼, 통치자들을 완전히 아름다운 자들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통치자들이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 통치자들τὰς ἀρχούσας도 포함하고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540c) 그리고 끝으로 소크라테스는 앞서 다루었던 나라와 정치체제와 관련한 모든 이야기가 전적으로 기원εὐχή에 불과한 것들이 아니라 어렵긴 하지만 어떤 식으로는 가능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여럿이든 한 명이든ἢ πλείους ἢ εἷς 진정한 철학자들이 나라의 권력자가 되어 오늘날의 명예들은 멸시하고, 정의로운 것에 봉사하고 그것을 증진토록 하면서 나라를 바로잡을 때가 바로 그때이다.(540d-e)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나라와 정치체제를 가장 쉽고 빠르게 수립하기 위해 통치자들은 나라 안에 있는 열 살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시골로 보내버리고 그들의 아이들을 넘겨받아서, 부모들도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습성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가 앞서 설명했던 것과 같은 자신들의 생활방식과 법들 속에서 양육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나라 자체도 행복하고 그 나라를 이루는 집단τὸ ἔθνος도 가장 크게 이득을 볼 것ὀνήσειν이기 때문이다.

* 이에 글라우콘은 그런 나라가 언젠가 생겨난다면 어떤 식으로 생겨날지에 대해 지금까지 이야기가 잘 된 것 같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 또한 그런 나라와 그런 나라와 닮은ὅμοιος 사람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로써 정의로운 나라와 정치체제 그리고 그러한 나라를 닮은 정의로운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마무리 된다.(541a)

– 제7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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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5c ‘앞서도 말했듯이’ : 이 부분은 제6권 495c-496a에서 언급된 내용을 가리킨다.

* 535c-d ‘서자’nothos, ‘절름발이’chōros : 신분으로서 ‘적자와 서자’, 신체 상태로서 ‘사지 멀쩡한artimelēs 자와 절름발이’가 차별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내용적으로 그 말들은 장차 나라의 수호자와 통치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의 자질에 걸맞게 영혼과 신체의 균형을 갖춘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그 말은 그 또한 신분적 차이와 신체적 장애 여부를 사회적 차별의 기준으로 당연시했던 당대의 정치·사회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535e ‘의도하지 않은 거짓은 가볍게 받아들이고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게 발각되어도 성내지 않고 마치 돼지 닮은 짐승처럼 무지 속에서 맘 편히 뒹구는 영혼’ : 제2권(372d)에 나오는 ‘돼지들의 나라’가 말해주듯 이곳에서도 돼지는 무지와 탐욕을 상징하는 동물로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변명>(38a)에서 말했듯이 ‘반성적 성찰이 없는 삶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없는 삶이다’ho de anexetastos bios ou biōtos anthrōpō. 누구든 실수를 한다. 그러한 한, 사람의 위대함은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 의해서건 자신에 의해서건 그 실수나 잘못이 드러나는 대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아파하며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반성하고 다짐하는 데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실수를 변명하는데 너무나 익숙하고 어떤 때는 변명은커녕 아예 뻔뻔스러운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런 영혼이야말로 돼지 닮은 짐승처럼 무지 속에서 맘 편히 뒹구는 그런 영혼이다. 설사 거짓이나 잘못이 없더라도 그것을 자부하기 이전에 더 잘하지 못하거나 잘한 것이 없음을 부끄러워하고 혹시나 나의 무지가 타인의 눈물이 되지 않을까 늘 지적 긴장을 보전하는 것이 곧 지성이다. 세속 지식은 타자를 이기는 힘에 비례하여 커지지만, 지성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비례하여 커지고 자라난다.

* 536c ‘우리가 놀이paidia를 하고 있었다는 것hoti epaizomen을 내가 잊고 있었네. 그래서 너무 열을 내며enteinamenos 말을 했군.’ : 놀이하고 있었다고 해서 한갓 장난치고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선 안 된다. <파이드로스>(276a-e)를 보면 ‘배우는 사람의 혼에 앎과 함께 글로 쓰이며 자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있으면서 그래야 마땅할 사람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침묵할 줄 아는 이야기’를 ‘더없이 아름다운 놀이’로 표현하고 있다. 이곳에서 말하는 ‘놀이’도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 등 대화 상대자들이 일정한 논의 주제를 가지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지금 놀이의 주제에 맞지 않게 혼자 흥분하여 배울 거리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을 지나치게 길게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스스로 책망하고 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당대 철학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을 얼마나 혐오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철학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소피스트들을 비롯해 이른바 철학자를 자칭하는 이소크라테스 같은 당대 지식인들이 그들이다. 제6권 495c에서도 이 부분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가짜 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이소크라테스로 짐작되는 인물에 대해 그답지 않게 대머리에 작달막한 외모까지 끌어들여 다소 흥분상태로 비난하고 있다. 이곳에서 느닷없이 다른 곳에서와 달리 통치자의 여러 조건 중 잘 생김을 꺼내든 일도 그 때문일까?

* 536c ‘이전에 통치자를 선발할 때에는 우리가 연장자를 선발했지만, 이번에는 그러면 안 될 것이네.’ : 문장만 보면 3권(412c)에서 언급했던 통치자 선발 방식을 이번에는 바꾸겠다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통치자의 선발 기준은 이곳에서도 쉰 살 이후로 언급된다는 점에서 내용 상 바뀌는 것은 없다. 게다가 제2권과 3권에서 수호자를 위한 교육을 다루면서 이미 전 연령의 단계마다 시험과 선발이 주어진다는 점이 언급되고 있음을 고려하면(412d-e) 이 부분을 그렇게 해석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바로 이어지는 문맥도 통치자의 선발 방식의 변경이 아니라 다만 배울 거리는 장차 통치자가 될 나이 어린 예비 통치자 때부터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될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에는en tautē 그러면 안 될 것’이라는 문장에서 ‘이번’은 ‘배울 거리를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부여할지’에 관한 ‘이번’ 논의를 가리키고 ‘그러면 안 될 것’이란 그에 관한 논의에서 전번처럼 연장자를 불쑥 제시하지 않고 습득 능력이 뛰어난 젊은 시절부터 교육해야 한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 537a ‘아이들을 말에 태워 전쟁터에 데리고 가서 구경하게 해야 하며’ : 이 이야기는 앞서 제5권에서 언급된 내용이다.(467c-e)

* 537e ‘오늘날 변증술적 대화와 관련해서 나쁜 일이 많이 벌어지고 그걸 하는 사람들은 불법paranomia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네’ :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은 그들이 현실에서 많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변증술의 맛만 보고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영혼 상태가 불법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증술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그만큼 매우 어려운지라 안타깝게도 초기 단계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그런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변증술의 그릇된 사용이 초래하는 위험이 워낙 심대한 만큼 최대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신중하고도 철저한 준비와 대책이 필요하다.

* 538d ‘질문이 찾아와서’, ‘논변이 그를 논박하는데’ : 변증술은 앞선 강해에서 살폈듯이 기본적으로 끈질긴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의 상승적 반복을 통해 좀 더 확실한 진실로 다가가는 토론 과정을 토대로 한다. 그것은 입장이 다른 복수의 사람들끼리 문답을 통해 혹은 혼자 자문자답 형식의 치열한 사색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그러한 변증술적 문답 과정을 보다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질문과 논변을 의인화하고 있다.

* 539b ‘젊은이들이 처음 논변을 맛보면 마치 애들 장난처럼 사용해서 항상 반박하는 데 써먹고’, : 논변은 변증술적 논변을 말한다. <필레보스> 15d-16a, <변명> 23c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이런 양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보이는 ‘‘마치 사냥개 새끼처럼 매번 옆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겨서 찢어발기기를 즐기기 때문’이란 표현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를 두고 ‘마치 야수처럼 혼신의 힘을 가다듬어 찢어발기기라도 할 듯이 우리한테 덤벼든다’(336b)고 말한 것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 539d ‘이것보다 먼저 이야기된 것들도’ : 539b에서 언급된 크게 조심해야 하는 것 즉 젊어서 논변의 맛 정도만 보고 섣불리 그 논변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 539e ‘다시 저 동굴로 내려가게 해야 하며’ : 애초의 동굴 비유에서는 수감자가 풀려나 동굴 바깥으로 나와 태양을 본 다음 동굴로 내려가지만, 여기에서는 태양 즉 좋음의 형상을 보기 전에도  동굴로 내려간다.  이것은 쉰 살 이후 본격적으로 통치자로서 현실 통치 업무에 임하기 전에 실습 차원에서 15년 동안 통치 보조 업무를 의무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 540a ‘영혼의 눈길을 들어 올려 만물에 빛을 제공하는 것 자체를 바라보도록 강제해야 한다.’ : 이 말은 변증술 교육을 억지로 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변증술의 최종단계인 좋음의 형상을 본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매우 힘들고 어려운 것이므로 그것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낼 수 있도록 좀 더 강화된 방식으로 좀 더 주도면밀하고 철저한 방식으로 교육을 수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쉰 살에 이르러 모든 점에서 모든 식으로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룬 자들은 그만큼 이미 최종 목적지에 이르려는 자발적인 의지로 충만해 있는 사람들로서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 540b ‘복된 자들의 섬’makrōn nēsos : 헤시오도스 <일과 나날> 171에 나오는 신들과 영웅들이 사는 축복의 섬. 생전에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거나 착하게 산 사람들도 사후에 그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519c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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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의 논의 주제는 ‘배울 거리들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부여할지를 배정하는 일’이다. 이에 따라 이 부분(535a-541b)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우선 누가 배움의 대상으로 적합한지와 관련하여 이전에 수호자의 선발 기준을 논의할 때 제시되었던 수호자의 기본 자질과 성향들이 다시 소환된다.(535a-536b) 2) 이어서 그들을 대상으로 언제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무엇에 중점을 두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다룬다.(536c-537d) 3) 그런 연후 그러한 교육 단계에서 경계해야 일들, 즉 철학적 자질이 부족한 자들이 저지르는 일과 그럴 경우 발생하는 나쁜 일에 대한 논의가 비유까지 포함해서 제법 길게 논의된다.(537e-539c) 4)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변증술을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잘 가려내야 하고, 나아가 그 배움의 중요성만큼 얼마 동안 어떻게 그것을 단련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즉 앞서 논의 주제로 제시되었던 배울 거리에 대한 배정의 문제가 연령별, 단계별로 다루어진다.(539d-540c) 5) 그리고 끝으로 이제까지 논의해온 나라와 정치체제들이 실현 가능한지에 관한 언급이 간략히 주어진 후, 양육과 관련해서 현재 상태에서 그런 나라를 가장 쉽고 빠르게 수립하기 위한 과도기적 방안이 제시된다.(540c-541b)

* 1) 그런데 누구에게 배정될지에 대한 논의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다. 배울 거리들의 배정 대상은 당연히 통치가가 될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개진하고 있는 배울 거리들의 대상이 갖추어야 할 기본 성향과 소질들 또한 모두가 제3권 수호자의 성향(375a-376c)과 제5권 철학자의 자질(484a-487a) 부분에서 다루어진 내용들과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그것을 따로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통치자가 되기 위한 배움의 과정 특히 최종적인 배울 거리로서 변증술의 습득 과정이 아무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매우 특별하고도 높은 수준의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가장 잘생긴’eueidestatos이라는 외모 관련 조건은 통치자의 성향으로 여기서 처음 언급된 것이다. 오히려 그 말은 제6권 494c에서 부유하고 명문 태생이지만 지성은 갖추지 않을 수 있는 자를 언급할 때 한 번 사용된 적이 있다. 알키비아데스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점에서도 외모상 잘 생김은 다른 조건들과 달리 통치자의 필수 조건으로 제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전승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조차 이 기준엔 부합하지 않는다.

* 2) 여기선 위와 같은 자질을 가진 자들 대상으로 언제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무엇에 중점을 두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다룬다. 우선 나이가 들면 배우기 어려우므로 교육은 어려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방식 또한 자유인답게 강제가 아닌 놀이를 하듯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물론 교육 과정에는 일정한 강제가 개입된다. 그러나 그 경우도 그 강제의 의미를 인지하고 그것을 감내하려는 자발적인 의지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억지 내지 강요와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전쟁터에도 데려가 새끼 사냥개들처럼 피 맛도 보게 해야 한다. 그런 연후 필수적인 신체단련 기간이 지나 스무 살 즈음에 이르면 나중 최종적인 배울 거리로서 변증술을 습득하기 위한 예비적인 교육이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전체적인 조망 능력’이 주요 과제로 제시된다. 이것은 변증술적 능력의 요체가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synopis 즉 복잡다단한 사안들을 총체적이고도 통일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임을 잘 보여준다. 앞선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변증술은 총체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조정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며 모든 것을 유용하게 만드는 기술’(<에우튀데모스>290d)이며 ‘누구든지 듣는 사람들의 본성들을 일일이 헤아릴 뿐만 아니라 있는 것들을 부류에 따라 일일이 나누고 그 하나하나를 한 형태에 포괄하는’ 능력이고, ‘하나의 형상이 많은 것들을 관통하여 모든 곳에 퍼져 있음을 그리고 서로 다른 많은 형상들이 하나의 형상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둘러싸여 있음을 분명하게 지각하는’ 능력(<소피스트>(253d )이다.

* 3) 논의의 주제가 ‘배울 거리를 누구에게 어떻게 배정할 것인가’임을 고려하면 ‘배정에 있어 고려해야 할 적극적인 사안’이 중심 내용이 될 것이라 예상되지만 정작 내용을 보면 ‘배정에 있어 경계해야 할 사안’이 논의의 주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교육 단계에서 많이 경계해야 할 일이란 앞서 살폈듯이 철학에 적합하지 않은 이른바 서자나 절름발이가 그 한계를 드러내 영혼이 불법으로 가득 차게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런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시험이나 선발 과정에 철저함을 기해야 한다. 그러나 십 년 동안 예비 교과와 철학 일반을 마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누가 변증술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가려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때까지는 누가 진짜 적자인지 서자인지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채 인지하지 못한 상태인 데다가 설사 적자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시험을 이겨낼 것이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의 비유에서 자신이 서자임을 알게 된 사람은 서른 살에 이르러 변증술을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철학에 부적절한 자임이 드러난 자를 말한다. 그리고 아첨꾼이란 그들에게 지혜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유혹하는 당대 소피스트들과 수사학자들 즉 가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젊은이들 모두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친부모 밑에서 즉 전통적 신념들을 잘 보전하며 자라왔다고 여기고 있고 이후 변증술을 모두 배우기까지의 기간 또한 절대 짧지 않은 터라, 그들 중 누가 적자와 서자인지 즉 누가 철학에 적합하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가려내기란 크게 신중을 요하는 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후 교육 단계에서 여러 가지 시험의 방식으로 일부가 변증술에 부적합한 자로 판정되었을지라도 그간의 사정이 이러하므로 그들에게 이해와 연민이 따를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러한 이해와 연민이 생겨나지 않도록 최대한 배움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누가 변증술에 적합한지를 잘 가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에 부적합한 젊은이들이 제대로 가려지지 못했을 경우 변증술의 힘의 크기만큼 왜곡된 변증술이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 또한 심대하기에 더욱 그러하다.(539b-c)

* 플라톤이 가히 실감 날 정도로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이러한 그릇된 가짜 철학자들의 모습과 그들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들은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플라톤이 겪은 절망스런 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플라톤 자신의 절절하고도 심각한 우려를 가득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당대 아테네의 지적 상태는 오늘날의 철학적 상황에 비추어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어설프게 논박의 기술을 익혀 당대 지식계를 주도하고 있는 가짜 철학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철학계를 여전히 주름잡고 있지만, 오히려 철학 자체의 위상과 영향력을 그 어느 시대보다 떨어뜨리고 있는 현대 영미 분석철학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플라톤이 2500년 전 토로하고 있는 ‘마치 사냥개 새끼처럼 매번 옆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겨서 찢어발기기를 즐긴다’는 표현은 오늘날 철학계를 주름잡고 있는 영미 분석철학자들의 행태와 너무도 닮아 있다.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절박한 상황에서 생각을 창조하고 구성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 더욱 한심한 것은 형이상학적 문제의식으로 가득한 플라톤 철학 분야에서조차 분석철학자들이 창궐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날이 분화되어가는 오늘날 학문 현실에서 여전히 앎의 극치로서 철학의 총체성이 요구되는 상황임에도 그들이 생산하는 담론들은 마치 사사로운 써클 활동처럼 공적 삶의 세계와 단절되어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놀이로 그들끼리만 공유된다. 논리적 분석과 비판이 진정 의미 있으려면 그 절차의 형식적 정밀성을 따지기 전에 삶의 현실과 관련하여 과연 무엇을 위한 비판과 분석인지, 무엇을 위한 정확성인지를 먼저 되새겨 봐야 한다. 마치 어설프게 변증술의 맛만 보고 전체를 조망하지 않고 그저 형식적 논박을 즐기고 있는 이른바 아첨꾼이나 서자들처럼 철학의 총체성을 간과한 채 그저 주어진 것에 대한 파편적 분석에만 몰두하는 자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플라톤의 말대로 가짜 지성, 가짜 철학자들일 뿐이다.

* 그런데 변증술 교육 과정에서 경계할 일로 소크라테스가 제기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오늘날 전체주의의 폐해를 경험한 우리로서 좀 더 짚어 볼 물음이 있다. 앞서 살폈듯 변증술 교육에서 플라톤이 경계하는 것은 변증술의 요체 중 하나인 질문과 대답 능력 즉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진실에 다가가는 고도의 문답 능력이 잘못 전수되어 초래될 수 있는 위험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변증술의 또 다른 요체이자 핵심 즉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이 잘못 전수되었을 경우 어떤 부작용이 초래될 수 있을지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련의 문답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작용도 심대하긴 하지만 그야말로 진실 전체를 모든 국면에서 모든 방식으로 전도시킬 수 있는 최종적인 단계에서 발생하는 위험에 비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들은 오늘날 이른바 나치즘, 파시즘, 스탈리니즘 등 이른바 전체주의 정치체제들이 모든 국면에서 전체를 내세워가며 얼마나 나랏일을 황폐화시켰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20세기 이후 많은 사상가들은 그러한 정치체제들은 물론 플라톤의 정치체제까지 민주주의의 적으로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플라톤은 오늘날 전체주의 정치체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은 참주정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변증술에서 경계해야 할 사안을 다루면서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이 초래하는 부작용의 경우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왜 그랬을까?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플라톤 자신 그 자체로 이미 애초부터 변증술의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을 참주나 이른바 전체주의자들이 갖춘 능력과 비슷하기는커녕 아예 거론할 만한 어떠한 접점조차 갖고 있지 않은 그야말로 정반대의 것으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단지 권력자의 머릿수를 기준으로 철인왕정과 참주정을 동일시하고 있지만 플라톤의 관심은 오로지 권력이 철학적 지성을 갖추고 있느냐에 있었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철인왕정과 참주정은 원천적으로 처음부터 비교조차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철인왕정은 본질적으로 좋음과 아름다움 자체를 자연세계를 구성하는 우주적 실재이자 진실이며 나아가 정의로운 나라의 토대임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앞으로 제8권에서 밝혀지겠지만 참주정은 위와 같은 우주적 진실과 정의라는 모두의 좋음을 부정하고 오로지 특정 개인 내지 기득권자들만의 좋음을 즉 배타적 이기적 탐욕만을 정치의 원리이자 목표로 내세운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좋음의 형상의 존재와 그것을 통해 나라에서 우주적 좋음을 구현하려는 플라톤의 절절한 선의지를 단칼에 외면하고 플라톤의 철인왕정을 마치 현대 폭압적 전체주의 체제의 시조인 양 비하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과 20세기 피폐한 전체주의적 정치체제의 등장 이후 이른바 ‘선한 우주agathos kosmos’에 대한 믿음 자체가 무너져 버린 데 기인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자연사 및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철인왕정에 대한 그들의 비난은 그 시대 나름의 의미와 타당성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들의 견해가 우주적 실재를 관통하고 지배하는 원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최소한 우리는 현 단계에서 가히 시간적으로 무한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싶을 정도의 우주가 실재하며 나아가 그 우주가 일정한 질서와 법칙 이른바 자연의 제일성(齊一性, unifomity)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주적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 또한 그러한 전제와 토대 위에서 성립한다. 플라톤의 철인왕정 또한 그러한 믿음을 토대로 우주의 일부로서 인간적 삶의 공동체를 목표로 최대한 우리가 바라고 지향할 수 있는 이상적 푯대로 제시된 것이다. 물론 플라톤의 철인왕정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당연히 비난의 대상이 될 만한 사안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폭압적 전체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혐오는 현대 자유주의자들보다 컸으면 컸지 절대로 작지 않다. 아무려나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건 오늘날이건, 플라톤이건 현대 자유주의자들이건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하나같이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끼리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공존하길 원한다. 그러한 한, 상이한 여럿의 조화와 공존을 본질로 하는 좋음의 형상 자체는 쉽게 외면할 일이 아니고 또 그렇게 외면될 수도 없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내부에 현존하는 불멸의 힘이자 희망으로 끝없이 도전을 이겨내고 우리 영혼을 북돋고 고양시키며 인간의 역사를 견인하고 구성하는 하나의 실재체ousia가 아닐 수 없다.

* 4)에서는 변증술의 부작용이 생겨나지 않도록 변증술을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잘 가려내야 하고, 나아가 그 배움의 중요성만큼 얼마의 기간 동안 어떻게 그것을 단련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즉 앞서 논의 주제로 제시되었던 배울 거리에 대한 배정의 문제가 다루어진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그 구체적인 연령별 단계별 내용을 어린 아이 시절부터의 교육을 포함하여 함께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i) 4-5살부터 17-18살까지 : 시가 및 체육 교육

시가교육(376e-403c)과 신체 단련 교육 즉 체육 교육(403c-412b)은 제2권과 제3권에서 다루고 있다.

ii) 17, 18-20살(2-3년) : 필수적인 신체 단련 기간(537b)

이 기간은 청소년 시절 시가와 더불어 진행된 체육 교육이 아니라 군대에서 의무적으로 복무하는 기간을 말한다.

iii) 20-30살(10년) : 변증술을 위한 예비적 배울 거리들을 배우는 기간(537c)

스무 살이 된 자 중 선발된 자를 대상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이 기간은 변증술에 적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는 가장 큰 시험이 되는 기간이다.

iv) 30-35살 : 변증술을 단련하는 기간(537d-539e)

서른 살이 된 자들을 대상으로 오로지 변증술적 논변에 참여하고 그것을 단련케 하는 기간이다. 이때 변증술의 맛만을 보고 그릇되게 사용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초기 단계부터 조심해야 하고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기는 경우 그런 자들을 걸러내야 한다.

v) 35-50살(15년) : 의무적으로 나랏일을 실제 경험하고 실습하는 기간(539e)

앞선 모든 과정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로 하여금 경험에서 남들에 뒤지지 않도록 전쟁 업무를 포함하여 그들에게 맞는 관직을 의무적으로 수행케 하는 기간이다. 통치자가 나랏일을 관장하는 최고 관리직이라면 이들은 그들을 보조하는 관료들이라 할 것이다.

vi) 50살 이후 : 통치자로 임명되어 번갈아 가며 통치 업무를 수행하는 기간(540a-b)

이들 중 쉰 살에 이른 자들을 대상으로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변증술의 최종단계인 좋음의 형상을 본 자들을 통치자로 임명한다. 이들은 남은 생애 대부분을 철학을 하며 지내면서 자신의 차례가 되면 좋음 자체를 본으로 삼아 통치 업무를 수행하고 동시에 장차 통치자가 될 수호자들을 길러낸다. 그리고 사후에는 복된 자들의 섬에서 거주한다.(540b-c)

 

* 5) 그리고 끝으로 소크라테스는 앞서 다루었던 나라와 정치체제와 관련한 모든 이야기가 전적으로 기원euchē에 불과한 것들이 아니라 어렵긴 하지만 어떤 식으로는 가능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실현 가능성과 관련한 이전의 논의(강해 64)에서도 이미 살폈듯이 매우 제한적인 조건에서만 가능할 정도로 그 실제적인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런 점에서 <국가>의 정치체제는 플라톤에게도 실제로는 말 그대로 말로 세우는 이상으로서 정치체제이다. 그리고 철학자 왕이 ‘한 명이냐 여럿이냐’의 문제 역시 앞선 강해(강해 44)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여럿이든 한 명이든’ 그 사람이 진정한 철학자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곳에서 제5권(456a-466e)에서 이미 밝혔듯이 그 통치자에 여성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다.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나라와 정치체제를 가장 쉽고 빠르게 수립하기 위한 방안을 이곳에서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로 세운 국가가 안정적으로 구축된 이후 상시적으로 시행되는 방안이 아니라 현실국가를 이상 국가로 정화하는 단계에서 과도기적으로 요구되는 방안이다.

 

* 이로써 제5권에 들어와 배우자 공유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면서 논의 일탈의 형식으로 제시된 주제 즉 통치자로서 철학자 왕의 불가피성 그리고 그들을 위한 교육 내용과 단계에 관한 논의가 제7권을 끝으로 모두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정의로운 나라와 사람 그리고 그 반대로 부정의한 나라와 사람을 비교하여 누가 더 행복한가를 살피고자 했던 최초의 논의 계획의 전반부 즉 정의로운 나라와 그 나라를 닮은 정의로운 사람에 관한 논의가 모두 마무리된 셈이다. 이제 부정의한 나라와 그것을 닮은 사람에 관해 논의할 차례이다. 제8권부터 우리는 그 주제와 마주한다. -제7권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현실 국가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1. 도입부 : 원래 문제로 복귀. 고찰의 방법과 순서(543a-545c)

헤겔 형이상학 산책 47-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인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7- 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인가?

 

1)

논리학은 정량을 다루는 가운데, 수 개념을 제시한다. 이 수는 정량을 대표하는 것 즉 상품을 대표하는 화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수가 지닌 모든 속성은 정량에서부터 유래한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수학에 관한 여러 가지 철학적 논의에 개입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제시한 주장 즉 ‘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다’라는 주장이다. 헤겔은 이를 주석에서 다루는데, 그의 주장에는 우리의 흥미를 끌 만한 요소가 있어 여기 소개한다.

알다시피 칸트는 아주 기초적인 수학적 명제를 예로 든다. 즉 ‘7+5는 12라는 명제’다. 칸트는 여기서 ‘더하기’라는 개념을 분석하더라도, 그 더해진 수가 ‘12’라는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 12라는 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손가락을 이용해 7개를 세고, 더 나가서 5개를 더 세어야 한다. 이렇게 세어진 결과 구부려진 손가락을 직관하면서, ‘12’라는 수를 떠올린다. 그러므로 칸트는 개념을 넘어서 경험적 직관의 도움 없이는 위의 명제를 알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말한다.

헤겔은 칸트의 이런 주장을 비판하면서, 위의 수학적 명제는 분석적 명제라고 말한다. 즉 경험적 직관의 도움이 없어도 위의 명제가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에서 ‘더하기’란 가장 외면적인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적인 일자들 사이에 서로 외면적인 관계, 서로 동등하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관계를 다룬다고 했다. 양자의 서로 동등한 관계가 곧 물질적 관계며, 양자의 서로 구분되는 관계가 공간적 관계다. 물질적인 관계와 공간적 관계는 상호 동전의 양면이다.

이런 양적인 것의 관계는 가장 외면적인 관계다. 여기서 서로 관계하는 일자들 사이에 어떤 내적인 연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외면성은 기하학적 공간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하학적 공간은(일단 여기서는 유크리트적 공간을 말한다) 텅 비고 동질적이어서 그 속에서 도형을 아무리 이리저리 이동하더라도 그 도형은 서로 합동이며 즉 도형의 내적 성질은 그런 공간적 이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양적인 것은 가장 외면적 공간이어서 그 속에서 정량들이 맺는 관계는 그 정량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7개에 5개를 더하더라도, 전자의 개수가 7개인 것에는 변함이 없고 후자에 개수 5개 역시 그대로 남아 있으니, 12개의 개수가 보존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12개의 개수가 보존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직관이나 경험의 도움이 없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며 이는 분석적인 사실이다.

칸트는 12개의 개수가 있을 때 이를 ‘12’라는 총수로 표현하기 위해서 경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이것은 언어적 표현의 문제이다. 12개의 개수를 ‘12’라는 수로 표현하는 것은 12라는 수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언어로 표현할 것이다. 만일 12개의 개수를 표현하는 언어가 ‘12’라는 수가 아니라, ‘한 다스’라는 언어이어서 그 결과를 ‘한 다스’로 표현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는 언어적 문제이지 ‘더하기’라는 사태의 본질은 아니다.

2)

칸트가 수학이 선천적 종합 명제라는 주장의 예로 또 하나 끌어들인 것이 기하학의 명제다. 그것은 곧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다’라는 명제다. 이 명제가 선천적 종합 명제라는 주장에 대한 칸트의 논증은 간단하다. 직선이라는 개념은 질적인 개념이다. 직선은 ‘곧바른’, ‘단순한’ 선이라는 말이니 말이다. 반면 ‘최단은 양적인 개념이다. 즉 길이가 가장 짧은 것이라는 의미다. 질적인 개념에서 양적인 개념이 나오지 않으니, 위의 명제는 분석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명제다.

헤겔은 여기서 칸트가 직선 개념을 오해했다고 한다. 직선은 단순히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직선에는 이미 양적인 개념이 들어 있다. 즉 직선은 그저 ‘곧바른 것[Gerade]’ 가 아니라 ’곧바른 선[Gerade Linie]’이므로 위의 기하학적 명제는 양적인 개념에서 양적인 개념을 끌어낸 것일 뿐이다.

이렇게 칸트를 반박한 다음, 헤겔은 직선 개념에서 최단 개념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끌어낸다. 직선은 가장 ‘단순한’ 선이니 ‘자기 관계하는’ 선이고, 이런 ‘자기 관계’는 “어떤 종류이든 규정의 상이성이나 그 바깥의 점이나 선에 대한 관계도 정립되지 않은 것”이니, 따라서 ‘최단’의 선이다는 것이다. 그 논증의 핵심은 곧 직선은 두 점 사이에 놓인 축에서 벗어난 제3의 점을 거치지 않으므로, 즉 우회를 거치지 않으므로 최단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직선이라는 규정은 사실 다름 아니라 단적으로 단순한 선이다는 즉 그 탈자화(점의 운동) 가운데 단적으로 자기 관계하며, 그 확장 속에서 어떤 종류의 상이한 규정이나 자기 바깥의 점이나 선에 대한 어떤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 단적으로 자체 내 단순한 벡터[Richtung]라는 의미다.”(논리학 재판, GW21, S. 200)

헤겔의 논증은 겉으로 보기에도 좀 억지 또는 궤변처럼 보인다. 기하학적 명제에 관한 한, 칸트가 말한 것처럼 경험적 성격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면서 기하학적 논증이 일정한 특수한 공간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 서문에 보면, 거기서 헤겔은 기하학적 명제의 증명이 작도에 의존하며, 그런 작도는 경험을 통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서, 기하학적 명제가 순수하게 개념적이며 분석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여기서 비록 칸트가 예로 들기는 했더라도, 굳이 기하학적 명제를 끌어들여, 수학이 분석적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혼란스럽게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기하학은 해석기하학을 통해 수학으로 환원됐으며 해석기하학은 특수한 공간에 적용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달리 순수한 양적인 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학적 명제의 성격에 관해서 이미 다분히 경험적인 기하학적 명제를 끌어들이지 않고 수의 관계를 통해서 분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3)

알다시피 칸트는 이런 수학적 명제는 경험적이면서도 필연적(보편적)이어서, 그 때문에 선천적 종합 명제라 불렀다. 흥미로운 것은 헤겔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학적 명제가 경험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수학적 명제가 필연적이라는 사실 역시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수학적 명제가 분석적이라고 했다. 분석적이라면 필연적이 아닌가? 적어도 칸트의 용법에서는 그렇다. 그런데도 헤겔은 그 필연성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헤겔의 필연성 개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헤겔에서 필연성은 사태가 내적으로 연관돼서. 연관된 하나의 사태에서 다른 사태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고도 충분한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수학적 명제가 토대를 두고 있는 양적인 것의 관계는 서로 외면적인 것이다. 동일한 일자가 반복되면서 맺는 양적인 관계는 같은 것의 반복(물질적 측면)이어서 연속적이며 그런 한에서는 전적으로 동어반복적인 필연성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이 관계는 서로 단적으로 다른 것의 관계(공간적 측면)이어서 불연속적이며 그런 한에서는 서로 무차별하다. 이런 무차별한 측면에서는 그 관계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수의 관계를 보면, 같은 것의 반복이라는 측면에서 분석적이다. 그러나 다른 것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체적 사물을 일자라는 것으로 추상화해서, 즉 단순한 물질이나 공간으로 볼 때, 이 사물의 수적 관계는 분석적이다. 그러나 어떤 일자를 구체적인 것으로 본다면, 이것들의 관계는 비록 수학적으로 표현되더라도 필연적이 아니고 우연적이다.

즉 손가락을 추상화하며 동일한 일자로서 볼 때 여기서 더하기는 분석적이다. 그러나 손가락을 구체적 사물로 볼 때(수자는 본래 손가락을 지시하는 명사였다는 것을 기억하라), 즉 손가락 두 개로 보지 않고 예를 들어 엄지와 검지, 중지로 보면, 이런 구체적 사물의 관계에서 더하기라는 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엄지와 검지를 더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이를 통해 중지가 나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관계는 그때그때 구체적인 관계이며, 수적인 필연성을 지닌 관계는 아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칸트는 수학적 명제를 선천적 종합 명제라 했다. 헤겔은 수학적 명제는 분석적 우연의 명제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최근 언어철학자 크립케는 고정지시어를 경험적이며 필연적 명제라 했는데, 그의 주장은 칸트에 가깝다기 보다 헤겔에 더 가깝다.

4)

수학적 명제가 이처럼 추상적인 일자의 관계 즉 추상적인 물질이나 공간에서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헤겔은 수학의 한계를 본다. 근대에 들어와 수학은 자연과학의 도구로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때문에 철학자들은 수학적 관계를 일반화해서 세계의 모든 관계를 표현하려 시도했다. 즉 수학을 철학의 방법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헤겔은 자연과학에서 수학이 놓아준 성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역학적 물체를 다루는 영역은 전적으로 양적인 영역이니, 여기서 수학을 적용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라 한다. 수는 정량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를 충분히 인정하는 가운데서도 수학적 관계를 일반화해서 자연 전체를 즉 생물학이나 심지어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할 때 이런 철학적 시도에 관해서는 비판적이다. 생물이나 인간의 경우에는 이미 더 복잡한 물질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니, 여기에 수학적 관계를 적용한다는 것은 생물이나 인간을 역학적 물체로 환원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진정한 사상, 가장 생동적이며 가장 운동적이고 단지 관계 속에서만 개념화되는 것이 이같은 탈자의 지반[즉 수] 속으로 옮겨지면서 죽은 운동이 없는 규정으로 변한다. 따라서 사상의 규정과 관계가 풍부할수록 수와 같은 형식으로 사상을 표현하는 것은 더욱 황량하고 자의적인 것이 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205-6)

물론, 헤겔은 수학적인 것이 감각적인 것과 사상의 가운데 있는 추상적인 일자의 영역 즉 양적인 영역이므로 수학적인 것은 사유를 통해 사상에 다가가는 예비적 단계로서 사유를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가 수학을 배우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사상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로 수를 사용한다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기호이란 표면적인 유사성(도상)이나 단편적 흔적(지표), 관습적 관계(상징)만으로도 상징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삼위일체와 같은 수학적 상징이 그러하다.

그러나 헤겔은 ‘삼위일체’라는 수학적 상징은 개념의 발전 즉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 사이의 내적 필연적 연관을 성자, 성부, 성령과 같은 자연적인 가족적 관계로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런 수학적 상징은 수가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개념의 내적 발전이나 연관을 은폐함으로써 오히려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는 한계가 있다. 다음과 같은 헤겔의 한탄을 들어보라.

“고대인은 사상규정을 위한 수적 형식의 불충분성을 매우 올바르게 통찰하고 있었으며 사상을 위한 임시변통 대신에 사상에 본래적인 표현을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요구했다. 고대인들은 숙고의 측면에서 오늘날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나았는가,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다시 수 자체와 수적 규정을 … 사상 규정 대신에 정립하면서 무능력한 유아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어떤 가상할 만한 것이며 근본적이며 심원한 것으로 여긴다.”(논리학 재판, GW21, S. 205)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6]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옮긴사람 행길이(한철연 회원)

 

[6]

 

3. 실증주의 비판에서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으로 –  –

 

□ 기술 사회학(beschreibende Soziologie)도 사회적 갈등의 측면들을 충분히 잘 조명하고 있습니다이에 비해 당신의 비판 사회이론(kritische Gesellschaftstheorie)이 더 나은 점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즉 기존 정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legitimieren)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그저 특별한 경우일 뿐입니다사회 비판은 일반적으로 행위 주체와 그에 상응하는 제도들의 합리성 전제(Rationalitätsunterstellungen)에서부터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시민들은 법정에서 어느 정도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것은 현실주의자들이나 비판 법학(Critical Legal Studies)을 지지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주장즉 판사들이 내리는 판결에는 이해관계에 편향된 동기들이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습니다—을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법정에서 갈등을 해결해 보고자 합니다시민들은 합리성 전제가 성립될 수 있을 경우에만 법적 해결을 신뢰하면서 참여합니다이러한 합리성 전제는 때때로 [체제 반대와 같은일탈 행위를 설명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어느 정도 기능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경청될 수 있고정치 과정에서 자신들의 의견이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할 때에만 습관적으로 총선에 참여할 것입니다민주 헌법은 심지어 그들의 표가 다른 모든 시민의 표와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고 약속하기까지 합니다이러한 것들 역시 이상화된 전제들이지만 이것들은 사회적 결과를 낳습니다왜냐하면 지속적으로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유권자들은 더 이상 선거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투표거부자들(Nichtwähler)이 종종 포퓰리즘 운동에 동원되는 것을 목격합니다그러나 이때 그들은 자신을 체제 반대자(Systemopposition)’로 이해하면서 민주적 선거의 전제 조건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작동을 가로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참여합니다이러한 [체제거부적실천들에서 문제거리가 되는 것은 참여자들에게 요구하는 이상화된 전제들이 아니라 제도 자체의 신뢰성입니다이를테면 소외된 투표거부자들과 그들의 이해관계를 정당정치적 차원에서 참작하지 못함(parteipolitische Nichtberücksichtigung) 사이를 돌고 도는 악순환이 발생하거나공적 의사소통의 기반구조가 붕괴하여 충실한 정보에 입각한 공적 의견이 아닌 어리석은 원한감정(dumpfe Ressentiments)이 마당[공적 의사소통 공간즉 공론장]을 장악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거죠비판 사회이론은 이러한 체제 반대의 실천 경향을 민주적 절차에 함축된 이상화된 전제에서 갈라져나온 것이라는 식의 합리적으로 재구성된 이해를 가능하게 합니다바로 이것이 오로지 객관화로만 접근하는 기술 사회학적 설명보다 비판 사회 이론이 낫다고 할만 한 것입니다.

 

□ 그렇다면 당신의 견해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정치적 행위 영역에서 행위자들의 다소 합리적인 의도 및 의견을 경험 사회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저 첫 단계에 불과하며행위자들(Handlungsakteure)의 실천은 민주적 제도들의 객관적 의미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규범적 기대를 재구성하기 위한 접근법으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죠왜냐하면 우리가 [민주적 제도들의 객관적 의미에 비추어 행위자들의 규범적 기대를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행위들에 대한비판적 판단을 형성할 수 있는 어떠한 기준이나 척도도 가지지 못하게 될테니까요.

 

■ 네저는 이런 논점에 대해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가지고는 전문가들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런 상황 속에서 저는 이성(Vernunft)’을 주관적 능력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의사소통적으로 사회화된 주체들이 공동의 언어를 가지고 근거들의 공간을 공유하면서 담론적으로 규제된 주제입장논증의 교환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루만(Luhmann)의 체계이론도 자기성찰성에 바탕을 두고 이론을 전개한다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그는 이러한 종류의 성찰성을 (전통적 철학 개념으로서의이성에 귀속시키지 않습니다그런 의미에서 루만 역시 사회이론에 종사하고 있습니다그렇지만 그는 자기성찰(Selbstreflexion)’을 처음에는 후설(Husserl)적인 생활세계(Lebenswelt)’ 개념으로 파악하다가 생물학을 모범형으로 삼아 그것을 다시 대상화합니다체계의 자기성찰은 다음과 같습니다복잡한 환경에 직면한 체계는 자기 준거적 경계 유지(selbstbezügliche Grenzerhaltung)를 고수하면서 환경에 대한 대응 기능을 자기산출적으로(autopoietisch) 제어합니다즉 그의 이론에서 자기성찰은 세계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것들(Entitäten in der Welt)을 끝내 관찰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려는 특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 힘차게 노 저어 가다보니 어느새 루만과의 논쟁 지점까지 도달버렸습니다이 논쟁은 근대에 대한 철학적 담론에 관한 당신의 설명을 배경으로 염두에 둬야만 하는 것이죠만

 

■ 맞습니다그 부분은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 주제의 범위에서 벗어난 듯 하군요제가 합리적 재구성[사회 현상이나 행위자들의 행위에 내포된 규범적 기대와 가능성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에 대해 너무 길게 설명했는데요이 부분은 변증법의 역할에 대한 당신의 원래 질문과는 관련이 없습니다당시 실증주의 논쟁에서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은 주제가 아니었고방법론적 담론에서도 다룰 것도 아니었습니다제가 이해한 바로는 헤겔의 변증법은 엄격한 의미에서 결코 논리학이 아닙니다오히려 범주론(Kategorienlehre)이죠헤겔은 이 범주론을 지나치게 보편화했지만 사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뚜렷하게 강조했듯이 특정한 문제의식에 맞춰진 것이었습니다즉 당시 부르주아적’ 사회다시 말해 다소 자유주의적인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위기의 전개 양상과 그 동학을 묻는 질문에 대해 어떤 개념들로 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 말입니다.

우리가 앞서 헤겔이 근대 사회의 위기 경험즉 인륜적’ 생활 형식의 해체를 야기하는 압도적 소용돌이라는 위기와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제기되었던 대답즉 해체된 생활 관계로부터의 해방의 운동을 어떻게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나타나는 배열 변화로 파악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이러한 것들은 기존의 총체성이 해체되고 다시 복원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총체성의 특징은 개별적인 것특수한 것 그리고 보편적인 것을 강제없이 통합한다(zwanglos integriert)는 것입니다저는 제 최근 저서의 헤겔 장에서 점점 늘어나는 사회적 복잡성과 심화하고 있는 개별화의 조건(Bedingungen wachsender gesellschaftlicher Komplexität und fortschreitender Individuierung아래에서 이러한 위기와 화해 경험을 언어 화용론적 방법을 통해 풀어내려 시도했습니다. 이 방식으로 풀어내보면헤겔의 총체성 개념과 그에 관련된 변증법이란 것은 서로를 만족스럽게 통합된 생활 형식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하는 개인들의 자기 서술(Selbstbeschreibung)에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저는 헤겔 변증법의 논리적 기본 개념에 담긴 규범적 의미를 개인들이 참여자적 관점에서 생활 형식의 상태를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해야 하는 인칭 대명사의 수행적 의미를 통해 설명합니다즉 생활 형식에 대한 소속감이나 소외감을 표현할 때는 인칭대명사를 [관찰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참여자의 입장에서 수행적 의미로 사용한다는 겁니다왜냐하면 개별성(Individualität) –또는 비동일적인 것(das Nichtidentische)–의 모습은 기술적 관찰자의 객관화된 시각으로는 단지 지칭할 수만 있을 뿐 그 자체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즉 그것은 관찰자의 관점에서 3인칭으로 기술되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라고 말하는 1인칭의 관점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언어의 공간 속으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물론 그것이 끝없는 자서전적 맴돌기(Einkreisung)의 형태로만 가능할 뿐그 자체를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죠.

제 생각에는 헤겔 변증법의 기본 개념들은 본래 특정한 경험에 불과한 것을 집합적 형식으로 자기 서술하는 것즉 헤겔이 『법철학』에서 분석한 근대 사회의 위기 경험을 우리라는 말로 행했던 자기 서술에 적합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이 개념 장치를 국지적 적용 대신에 헤겔처럼 객관화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즉 자연과 정신 전체에 적용하는 경우 이는 역사 철학적인 포편화를 암묵적으로 시도하는 것입니다그래야만 위기 상황을 표현하는 모든 사회 현상을 선험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즉 이 위기는 관련 당사자들의 관점에서는 해결이 필요한 것으로 파악되는 것은 물론이고변증법적 필연성의 관점에서는 (비록 잠정적일지라도해결이 가능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