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용어와 항목 [천 하룻밤 이야기]
시대: 용어와 항목
2026, 09 23 처서(處暑)
시대가 인물을 낳고, 용어를 창안한다.
공자는 열락(悅樂), 소크라테스의 이뭣꼬,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논리학), 플로티누스의 일자(빛), 데카르트의 방법(분석학),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미적분), 루소는 자연, 꽁트는 실증, 칸트는 비판, 헤겔은 절대, 프왕까레는 협약, 레비브륄은 심성, 벩송은 기억, 푸꼬는 광기, 들뢰즈는 다양체 등등을 시대마다 중요 문제거리로 다루었다. 그럼에도 19세기 후반 인류학, 사회심리학, 생물학, 수학사 등에서 “이뭣꼬”의 중심은 인간이 삶의 터전에서 공통으로 사용한 용어의 근원 또는 기원인 수(1)의 발생을 다시 탐문하기 시작했다. 퓌타고라스가 다시 불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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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설정에 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옛날부터 알려져 왔다. 그럼에도 그 수가 개별적 사물의 대상에서 나왔는지, 또는 사유의 대상을 일반화하는 추론에서 나왔는지는 19세기 말까지도 문제 거리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수, 개별 대상, 일반 항목 등으로 구별하려고 할 때, 추론하는 지성은 단위 설정에서 논리가 먼저라고 한다. 그 단위 설정에는 동일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며, 그로부터 차이로서 단위와 단위가 아닌 것을 구별한다고 한다. 다음으로 단위와 동일한 단위들을 나열하고 구별하면서 둘(2)이라고 한다.
대상화된 항목의 경우에, A라는 단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통해서 구분한다고 할 때, 한 항목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이 나온다고 한다. 존재와 무. 그리고 두 항목, 즉 이런 추론을 따르면, 두 항목이 있을 때 그 항들의 분류에는 A, (AB), B 그리고 여분으로 φ(여집합, 무)가 있다. 항목들이 셋일 경우에 7개의 개별 항목과 φ를 보태어 여덟이라 하고, 항목들이 넷일 경우(x 4승과 유사함)에 15 개별 항목들과 φ를 보태어 열여덟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의 수는 벤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현상적, 표상적, 실재적인 논의에서는 세 항목일 경우 또는 3차원을 실재적 영역이라 한다. 그러나 x 4승은 방정식으로 풀 수 있으나, x 5승은 페르마 이래로 해답을 풀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2항을 대상화하는 논의에서 연속적인 측면을 강조하면, 가우스의 종(鐘) 모양의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으며, 벤다이어그램 도식에 의미를 부여하여 A는 가치 B를 잉여라고 유비적 사유를 할 수 있으며, 이런 방식을 논리적 구별로서 정치경제학적으로 보려고 하면 A쪽은 인민, B쪽은 자본가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도덕론적으로 A는 가치이며, B를 공중에 떠 있는 주사위 놀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자연배후학’적 사유에서 A와 B는 둘 다 서로 다른 연원을 지닌 시뮬라크르들이고 AB는 혼합의 종류에 따라 잡다한 현상들의 일부분이다. 이런 시뮬라크르의 논의를 중세 신학의 평결론에 비추어보면, B는 신의 절대 의지를 따르고 A는 경험을 통한 과학적 인식으로 자연의 발생을 따른다고 한다. 이를 근대의 이원론에 비추어보면 B는 혼(의식)의 활동이고 A는 몸(신체)의 운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AB를 함께하는 생명체들의 잡다성이 지닌 차이 나는 성질들(양이 아니라)을 드러낼 때, 특히 인간의 경우 B에서는 신성이 드러나고 A에서는 동물성이 드러나는 것으로 착각했다. 한 번 더 내려가서 고대에는 B에 하늘의 원리를 대입하고 A에 자연의 생산을 대입시키고서, AB에 해당하는 것을 인간의 의식 활동이라고 보았다. 이런 의식은 뚜껑 있는 하늘과 움직이지 않는 땅의 중간(또는 연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추론하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단위 항목의 독립성이 하나이든 둘이든 셋이든 각각이 주어진다고 하는 생각은 인간에게 있어서 태생적 또는 선천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항목들도 19세기 후반 이래로 오랜 삶의 과정에서 무매개적으로 합의 또는 협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항목들의 단위가 자연수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수들도 있고, 즉 무리수, 원주율, 허수, 복소수 등과 같이 자연수로 설명할 수 없는 수들을 무한의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이원성의 구조를 인정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는 무한(무한계)을 무 또는 무처럼 취급하였고, 중세의 종교에서는 잘 모르는 것을 어둠이나 악으로 취급하였으며, 과도하게 악마 사냥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비유클리드 기하학 성립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여집합의 부분은 요소(현존은 아니라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항목으로서의 현존 지위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항목들과 단위들이 언어에서 표기와 입말로서 용어 또는 단어로 쓰일 때, 그것들에 당연히 어떠한 구조와 지위가 있다고 상상하였고, 또 심지어는 현존이니 실재니 말하기도 한다. 후기 중세 이래로 용어와 단어는 입말에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입말 또는 문자화가 인간들 사이에서 소통되고 전승되며, 그리고 삶에서 감화와 감동을 가져다주는 것은, 그 단위들 자체의 성격과 특성이 있기 때문일까, 또는 그보다 먼저 상호 공존의 심성에서 나온 공감과 공동의식의 협약이 있기 때문일까?
이런 문제의식에서 항목 또는 용어의 사용에 나타난 보편성, 일반성, 개별성, 특이성의 분류는 구조적인데, 이는 생성과 발산의 과정이 특이성으로부터 개별성, 일반성, 보편성으로 진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길처럼 보인다. 1900년 유전법칙이 재발견 되면서, 생성과 발산의 사유는 사물과 대상의 원리와 법칙(인과)을 우선하지 않게 되었고, 사유의 방향은 기원과 근원을 새롭게 탐색하면서 과거의 사고방식을 전도하거나 전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이를 백 년 가까이 지체시켰다. 이후 차이를 발생시킨 사유의 방식들을 다시 검토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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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이 신들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다룬다고 하면서, 신화를 벗어나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오니아의 사유와 엘레아의 사고가 대비되고, 아테네가 지중해의 맹주가 되면서 인간이 주제로 부상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라는 일반성과 소크라테스라는 개별성을 구별했던 것 같다. 그런 용어의 정의에 주목했던 제자들은 메가라 학파이겠지만,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플라톤은 용어 또는 항목에 대해 여러 방향으로 문제 제기하였다. 여러 측면으로, 즉 인식론과 존재론, 발생론 대 우주론, 폴리스 안에서 실천론 대 도덕론 등에서도, 마치 학문을 정초하기 위한 단위 설정처럼 용어의 정의(定義)는 흥미로웠을 것이다. 그는 언어상 용어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논의하고 규정하려 하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대상의 항목으로서 한계(페라스)와 비한계(아페이론)에 관심을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플라톤이 말한 크기라는 단어의 이중성을 고민해 왔다. 대상을 양으로 다루거나 질로서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수(산술)와 소리(음악)에서 차이가 드러나는 것만큼 전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으로서, 양의 차이보다 질의 차이에 주목했던 것 같다.
플라톤은 차이들을 규정(또는 정의)하려는 노력 속에 혼과 소리와 같은 질적 차이에 더 관심이 많았고, 후대에도 그 주석자들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일반 용어보다, 소크라테스, 파르메니데스, 고르기아스 등 인물을 중심에 두어, 책의 제목들도 인격적 대상으로부터 조성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그는 나라(폴리스) 안에서 인간들 각각이 무엇을 배우고 행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있었기에 <폴리테이아>를 썼을 테고, 인간이 세계 또는 자연에서 나왔기에 그 세계를 이루고 있는 구성(수의 방식)과 조성(운동의 방식) 방식이라는 이중적 관심을 풀어 <티마이오스>를 썼을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이 인간, 나라(터전), 세계(우주)라는 세 차원을 다루었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는 개인의 항에서 일반항으로 그리고 전체 항으로 확대하면서 사유를 넓혀 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승의 삶에서 실천과 그에 따른 독특한 사유를 잊을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실천과 사유에서 ‘훌륭타’와 ‘장하다’를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지 않았을까?
인간은 폴리스 안에서 개별화되고, 세계 안에서 종별화 됨을 규명해 보려 했을까? 다시 말해 폴리스 안에서 개인들이 각각 역할과 성격이 있다면, 유비적으로 세계 안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차원에서 나아가 다른 동물(생명, 자연)과 차이를 통해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탐구하지 않았을까? 나는 플라톤이 두 번의 이집트 여행에서 당대의 수학과 천문학을 통해서 동심원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을 빌려왔다고 추측한다. 플라톤에서 보면, ‘이뭣꼬’에서 ‘인간’이란 대상 또는 용어를 언어로 규정하면서 양보다 질적으로 규정(정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간 개인의 단위에서 보면, 한 개인은 다른 어떤 이에게도 환원되지 않는, 즉 특이자가 아닐까? 그 질적 차원이 혼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이뭣꼬를 크기로 구별한다고 말했지만, 인간이 훌륭타 또는 장하다라는 말은 보다 더 현명하고 보다 더 잘 실천(운동)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 운동하는 질적인 요소(혼)들의 공통성은 뭣일까? 이는 후대의 철학자들이 삶의 터전에서 “조화의 정의”일 것이다. 이에 대해 수학과 원자에서 찾기보다, 천문과 음악에서 찾으려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두 부류를 공유하는 일반화의 틀은 기하학의 원 또는 공의 포섭 또는 포함 방식에서 보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늘(운동)의 조화가 삶의 터전에 대해 연대적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폴리스에서 사람들 사이의 조화에서도 언어보다 음률에서 보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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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 또는 왕국에서 인간의 실질적 삶이 주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터전에서 사람들과 타인들 그리고 사물들을 규정하면서, 왕국의 제도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 보았을 것 같다. 논리학에서는 언어의 항목들이 규정되어야 추론이 가능하고, 그리고 추론에 따라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하므로, 삶의 터전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한 삶이라 보았을 것이다. 또 이런 추론의 진위(眞僞) 구별을 통해 인간의 실천에서 바르고 틀림을 구별함으로써, 개인의 지식과 실천에서 질서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요즘 표현으로 비유하면 사람들을 배치하고 배열하여 잘 실행되는 제도에서 잘 사는 것 또는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을 보았을 것이다.
플라톤은 사람들 사이에 차이를 동물이나 사물들에서 류적인 것과 종적인 것을 구별하듯이 구별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현명한 자(지식인)과 그렇지 못한자(무식자) 사이의 차이도 추론(로고스)을 잘하는 이와 잘못하는 이를 구별하듯이, 삼단논법을 잘 이용하는 자와 오류를 범하는 자를 구별하고, 또 사물을 류와 종의 영역으로 구별하는 것처럼 지식(지혜)을 갖는 자와 아닌 자를 구별하였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을 구별할 때 류적인 항목(상위)과 종적인 항목(하위)을 구별한다. 그럼에도 식물의 예에서는 이런 류적과 종적 구별을 확대하여 류적 구별에는 완전체의 목적을, 종적 미완성에는 질료라는 차원을 보태어, 자연 체계를 탐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도 이런 네 단위로서 구별할 수 있을까?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유를 이용하여 신학에서는 비유적으로 인간에게 완전체인 신과 같은 완전하고 절대적 추론을 하는 능력이 있다고 상정하고, 그리고 생명도 없이 이리저리 힘을 받는 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물체나 물질을 상정하여, 이중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 그는 추론을 확장하여, 자연계에서 물체들의 성질상, 하부에 무기물, 그 위에 식물, 그 위에 동물 그리고 추론하는 인간으로 네 단계로 구별할 것이다. 이런 것도 플라톤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선분의 비유와 닮았다. 그럼에도 그는 네 부분에 각각에 속하는 성질은 양으로 측정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다른 도움 없이 움직이지 못하는 물질, 고정된 자리를 가지면서도 상향하여 움직이는 것,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생각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생각하며 발명과 창작을 하는 인간이 있다.
플라톤이든 아리스토텔레스이든, 동일한 방식은 아니지만 네 항목 또는 네 단락(계층) 등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려 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중국에도 마찬가지로 사상(四象)이 있고, 불교의 염처경에서는 삶의 과정에 4단위가 있다. 그리고 구(舊)천문학에서 19년 주기를 따라 어린시절, 청년, 장년, 노년도 네 가지 구분을 한 것도 앞의 사례처럼 유비적으로 닮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구별은 인간이 오랜 삶의 과정에서, 또는 심성의 합에 의해 만들어진 지혜의 산물일 것이다, 19세기 말 인종학자들과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직관을 수용하면서, 생명의 과정과 오래 전승에 의한 심성을 우선으로 두고, 그 위에 감성, 인성, 지성(이성) 넷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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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측면에서 사유의 대상이든 현실의 대상이든, 시대마다 각 학자들은 자신들의 용어를 창안했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플로티노스의 일자 등은 고유한 명칭이었지만 일반화되기도 한다. 우리는 학자에게 맞는 고유한 의미를 지닌 명사(용어)를 어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유명하고 또 작품이 많은 경우에 그 학자의 어휘(용어)를 그에 맞게 읽어야 한다고 하면서 따로 정리하기도 한다. 게다가 철학의 용어, 수학의 용어(어휘), 물리학의 용어, 사회학의 용어, 정치경제학의 용어 등에서 용어 이상으로 방법적 사용을 달리 구별한다. 그럼에도 학문들 사이 또는 학자들 사이에는 공통의 용어가 있다.
그럼에도 소중한 것은 백성이 심성이 서로 통하여 공유하는 공화성, 즉 공통성과 공공성의 언어이다. 심성의 공유성에 따른 입말은 삶의 터전에 따라 대상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얼과 혼은 감동과 감화에 따라 나라 전체에서 공통성(일반성)과 공화성(추상성을 포함하는 일반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인(仁)이란 용어가 그러하고, 우리나라에서 ‘장하다’ 또는 ‘훌륭타’라는 입말이 그러하며, 소크라테스외 플라톤에서도 중요시되었던 아가톤(Ἀγάθων, 착하다 훌륭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양에서 공동체의 언어로 작용하여 쓰이는 단어들은, 문법적으로 명사 동사 형용사 등으로 나뉘는데. 거기에 더하여 전치사, 부사, 지시사, 관계사 등을 부가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에 비해 우리 입말에서는 흥미롭게도 명사(실사)의 용도를 알리는 조사(은, 을, 에게)도 있다. 이처럼 문법학에서는 공공성(일반성)을 넘어서 더 세부적으로 분류하여 깊이 다룰 수 있다.
우리는 실사 중에서도 명사와 대명사에 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사람과 소크라테스는 명사와 대명사를 문법적으로 구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생물과 소(말)는 류와 종의 관계인데, 사람(인간)과 소크라테스는 류와 종의 관계와는 다르다. 이런 분류의 방식에는 층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거꾸로 되돌아가, 플라톤은 특히 사물에 관해서 층위가 아니라 발생(생성)을 분류하면서 이름(명칭)을 다르게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사회 안에서 소통하면서 류와 종 사이의 차이에 의해 용어가 설정(정의)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합의의 인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아동 교육에서 지식의 기초를 가르치고 전수하기 위해 체계화되었고, 문법학, 논리학, 수사학으로 구별했던 중세의 3학(trivium)과 같은 고착적 전수 방식이 전개되었다. 여기에서 글자 쓰기와 문장 만들기가 중요하다. 그 문장에서 일반성(공공성)의 용어는 대상과 단어 사이의 일치로서 고정되어 쓰이는 것이 편리하다. 마치 류와 종의 구별이 있듯이 사회에서도 상층과 심층의 구별이 은연중에 자리매김하는가? 학문과 교육이 계층을 구별하기 위해 제도화한 것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터전에서 성내(城內)와 성 밖이 다르듯이, 언어의 체계 속에서 쓰고 사유하는 자들과 사물을 대하면서 생산하고 제작하는 자들 사이에서 한 용어가 (사물에 대해) 지시하는 내용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문법과 제도의 일치를 편리하게 받아들이는 제도(행정, 사법, 통치)에서는 사물을 알기보다 언어 체계를 아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일상에서 사물들에 대한 용어는 생물에서 류와 종을 구별하듯 사용되지 않으며, 공동체의 삶에서 일반과 개별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편리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제도 속에서 일의 순서(선후先後, 중경重輕)에 따라 실행하는 경우에, 선중과 후경의 차이에서 상층과 심층의 차이가 눈에 띄게 드러난다. 예컨대 귀족과 평민, 성직자와 신앙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들 사이에 있는 사회 질서가 명령과 수행 정도만이 아니며, 다른 방식으로 자연의 질서가 있다는 것도, 자연의 백성들은 잘 안다.
류와 종, 일반과 개별로서 구별은 공동체의 활동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제도 안에서 계층의 차이는 상층의 원리, 지배와 심층의 수동과 저항(플라톤의 필연성)이 대립하는 양면성을 드러낸다. 이것은 결국 두 가지를 네 가지로 구별하여 사유하는 방식이 이미 은연중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류의 원리로서 상위류(上位類)를 설정하듯이, 추론으로서 심층의 하위종(下位種)을 설정할 것이다. 제도상으로 또는 추론상으로 상위 류를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사유에 대입하면서, 제도의 고착성을 유지하기 위한 체계와 논리를 전개할 수 있으리라. 이에 더하여 최상위의 선(善)에 반하는 심층의 최하위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쩌면 플로티노스의 빛이 멀어져 간 마지막 순간을 어둠으로 여겨, 암흑 또는 잘못(le mal)으로 추론할 수 있었으리라. 자연 발생에서 가지치기 분류가 아닌, 사유의 추론에 의한 위계질서는 질서와 지배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런 측면을 언어상으로 보편자과 개별자로 나누었을 것이다.
중세 초기에 그리스 학문에 대해 깊이 다루지 못했던, 중세 사유의 일반화는 포르피리오스(232?-305?)의 저서 <입문(이사고게)>에서 다룬 류(genre, genos), 종(l’espèce, eidos), 종차(la différence, diaphora), 고유어(le propre, idion), 우연(l’accident, συμβεβηκός), 이 다섯 가지 용어에서 문제 거리가 출발한다. 종의 상위 용어인 류는 현실적 대상이라기보다 추론상으로 상위 용어인 셈이다. 상위 용어가 하위인 종들을 덩어리, 무리, 모임, 집합 등을 추론을 통하여 (쁘왕까레 표현으로 협약으로서, 요즘 표현으로 잠정적 경계를 지어 합의로서) 일반화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포르피리우스의 나무 판화 (알렉산더 브룬츠비크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논고(Tractatus in Aristotelis logicam)'(1748) 수록, 부다페스트 헝가리 프란치스코회 도서관 소장)
용어의 일반화(보편화)가 현실적으로 실재하느냐는 문제가 그리스 원전을 좀 더 깊이 읽는 시절인 11세기 말, 12세기 초였다. 로스켈리누스(1050경-1121)는 물체와 사유를 구별하고, 사유에서는 소리와 기호화를 구별하였다. 파리 성 빅트와르 수도원 창시자인 기욤 드 샹뽀(1070-1121)는 류가 상위로서, 사물 속에서는 보편성으로, 종에서는 무차별적 보편성이라 하여 보편성의 이중성을 드러냈고, 아벨라르(1079-1142)는 상위가 신 속에서는 보편자(나무 관념)이고, 사유 속에서는 인간에게서의 보편자(나무 기호화)라고 하면서, 이 두 보편자 사이에 있는 개별적 사물의 보편자(참나무, 소나무, 잣나무)를 구별했다. 보편자의 양의성(이중성)에서 물질에 속하는 보편자는 밀려나고, 결국 추상의 극한에 있는 보편자와 일반화된 사유 속에 기호화된 개별자 속에 있는 보편자가 남는다. 개념화는 인간 지성의 사유에 속하고, 추상화의 보편자는 신의 인식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이는 20세기 초 수학의 논리주의에서 집합의 용어와 집합 속에 요소들(원자 단어)을 구별하면서 다시 전개될 것이고, 언어에서는 소쉬르가 기표과 기의는 실재성과 다르다고 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류적 보편자에 대해, 안셀무스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은 사물처럼 실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로스켈리누스와 샹뽀가 보편자가 지성 속의 기호화와 연관이 있다고 하면서 보편자는 사물로부터 추상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았다(post rem). 학문의 분류와 교육에서 소통을 위한 보편자라는 용어는 다의성의 문제가 제기되어, 도미니크학파의 아퀴나스 후배들은 보편자가 사물의 내부에서 형상과 더불어 발현한다고 하여, 보편자에게 사물의 현존성을 부여하였다(in re). 이에 대해 프란체스코학파에서는 류가 상위이듯이 보편자는 개별자의 상위 추론의 용어로 사용된 이름일 뿐이고, 그런 보편자는 사물들이 있기 전에 이데아처럼 먼저 상정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현존과 연관이 없다고 한다(ante rem). 이어서 둔스 스코투스(1266-1308)은 여기 지금 현존하는 것은 소크라테스라는 개인이며, 류와 종의 분류보다 세분화한 개인을, 특이자를 강조하였다. 즉 현존하는 것들은 개별자들, 또는 특이자들이다. 보편자는 이름일 뿐이고 추상화된 기호일 뿐이다.
이런 논의는 천국, 신이 현존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넘어서 그 실재성을 부정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보편논쟁에서 프란체스코파의 논의 방식은 오캄 이후로 사라진다. 내가 읽은 바로는, 프란체스코파는 프란체스코 사후에 내부에서 좌파(걸승파, 평등파)와 우파(제도파, 학문파) 사이에 싸움이 있었고, 마침 이를 중재한다는 의미에서 교황청 교리성에서 우파와 결탁하여 좌파를 마남사냥하였다. 그러나 같은 뿌리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반성한 프란체스코 우파는 좌파를 종교재판하기를 포기하였고, 이런 종교재판의 권한을 도미니크파에게 넘겼다. 이 도미니크파는 프란체스코 좌파든 우파든, 게다가 신의 ‘존재’를 ‘현존’으로 바꾸어 생각하거나 교리와 조직에 저항하는 프란체스코파와 다른 파들도 이단으로 몰았는데, 사적재산의 소유권을 차지하는 데도 종교재판을 이용했다. 그래도 성자 프란체스코의 평등, 인류애가 남아서 지금도 그들 파의 수도자들이 사적 소유물(먹거리 잠자리 정도 이외)이 없다고 한다. 프란체스코파들은 도미니크파가 교황청이 재산을 소유하고 있듯이 사적 소유를 인정하였고, 소유권 유지를 위해 제국주의 전쟁(1차대전과 2차대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였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도미니크파는 전쟁을 막지 않고 항상 중재한다고 하는데, 이단들을 제거하는 호교론자들의 시대 이래로 교단이 (사적)이익이 되는 쪽으로 편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덧붙여 맑스주의자들도, 바울 이래로 재산증식(잉여착취)에 동의하여 종교의 조직화가 로마의 참주제(황제정)을 모방하며 따라갔다고 비판한다. 불교에서는 탐진치에 빠진 자들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챙긴다고, 이들을 마구니들이라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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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재판의 마남사냥은 점점 심해졌다. 스페인에 있었던 브루노는 도미니크파이다. 그는 무한이 보편, 완전, 제1 원인처럼 인간이 알 수 없고 신만이 아는 용어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실재로 망원경을 통해 하늘 뚜껑을 넘어서 우주(자연)의 무한(경계 없음)을 보았다. 교황청은 그를 잡아다가, 같은 파이기에 죽이지 않고, 로마에 데려와 학설을 스스로 폐기하도록 10년간을 설득했다. 브루노는 굴복하지 않았고, 그들은 그를 1600년에 바티칸 광장에서 산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사이비 신앙자들이 스스로 유일한 순교자를 세웠다.
용어, 항목 등에서 인간 지성은 대상을 다루면서 정의하고 한계 지었고, 이런 개념들을 사용해서 학문의 여러 길을 열었다. 근대에는 인간이 오성(지성 또는 이성)의 추론을 통해, 무한, 완전, 절대, 보편 등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현존한다’고 하듯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무한을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 또는 증거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천국, 부활, 천사, 절대를 비판하는 것도 무위로 끝날 수 있었다. ‘이뭣꼬’의 주제가 인간에게서 사유의 대상인 없음(0)과 있음(∞)인지, 없음과 존재 단위(통일성)로서 1(하나)인지 등이 근현대 170여년 동안 주제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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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에게 모든 터전(지역)에서 통용되는 보편이 있는가? 근대성에서는 있다고 하고, 그것이 태생으로부터 또는 선천적으로 또는 삶의 터전에서 조건지워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보편이 있다(현존한다)라고 생각한다. 이 보편은 추상의 보편이 아니라, 개념으로서 보편이다. 신과 천국, 부활과 육신화는 이제 문제 거리가 아니었다. 단지 인간의 지성이 무한과 세계 전체를 아는 것에 대해 신적 지성과 같다는 정도로만 신을 인정한다. 이런 신관은 이신론이라 한다. 그럼에도 삶의 터전에서 인간들의 유대에서, 특히 신대륙의 인디언 사냥에서, 신앙의 신은 여전히 과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종교재판과 마찬가지로 권세를 누리고 위력을 발휘했으며, 1950년 맥카시 사냥에도 그리고 21세기 일베의 좌표 찍기에도 스며들고 있다.
“빛들 세기”에 이르러 생산양식이 바뀌고, 노동 도구의 발달과 노동력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세상에서 ‘백성이 니르고자 ᄒᆞᆯ 배’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 18세기의 하고픈 이야기를 마구마구 하던 시대에, “요상한 것들의 박물관” 시대에 넘쳐나는 상상과 공상이, 넘쳐나는 만큼이나 신체를 통해 증거를 보여주거나 검증되는지를 점검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그리고 지성은 “백과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고 등록되었듯이 시간이 필요하다. 백성이 스스로 찾아볼 수 있는 정보체계의 성립, 자연이 드러내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기록, 인간이 자연 속에서 스스로 사유의 극한을 찾아가는 방식 등은 신을 통한 제도와 체제가 아니라, 인간이 평등과 자유를 기반으로 스스로 제도와 체제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의 대혁명에서, “제헌”하여 공화제를 만든다.
혁명이 4년 만에 좌초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제도와 체제를 만든다는 것의 한계는 인간 사이 생산양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만든다. 맑스가 말한 생산력의 발달이 인간의 의식을 바꾼다는 것은 역사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산업화 시대에 생산력의 확대는 생산양식, 즉 생산도구의 사적 소유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종교의 권세, 제국의 권력, 논리 지식의 권위의 세 카르텔은 암묵적으로 전쟁을 묵인하였다. 게다가 20세기 내내 크게 보아 인민 대 자본이라는 두 세력의 대립이 있었다. 세 패거리는 여전히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패권 전쟁을 거의 현상적으로 부추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원화 또는 다원화의 상황에서 미국 대 중국, 러시아 대 나토(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대 이란 승패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모른다.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21세기에 디지털 기술의 말 그대로 비약적인 발전이, 역사에서 어떤 방식과 방향으로 진행할지 아직은 모른다.
비결정성, 불확정성의 시대이다. 논리의 틀, 언어의 구조, 사회의 제도 등에서 구성과 구축이 해결책이 아님을 세 패거리가 드러내고 있다. 중세 이래로 유일 신앙에 포로가 되고, 제국주의에 포획되고 또한 그 체제 안에서 제도에 포섭되어서, 인간의 사유를 구속하였다. 이런 실천의 방향을 전도시켰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스스로 도는 운동을 하고, 게다가 먼 거리의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 그리고 자연, 그 자연에서 운동하는 발생하는 자치성과 자발성을 사유하면서, 사회에서 공공성을 제도에서 공화정을 이루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6:13, 59SMA) (8:02, 59SMD)
참조: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은 10가지이다. 주어(토 위포케이메논, τὸ ὑποκείμενο)과 술어(토 카테고로우메논, τὸ κατηγορούμενον)라는 용어에서 주어에는 실체(Substance, οὐσία), 그리고 술어에는 양(la quantité, ποσόν), 성질(la qualité, ποιόν), 관계(la relation, πρός τι), 장소(le lieu, ποῦ), 시간(le temps, ποτέ), 자세(le position, κεῖσθαι 또는 πῶς ἔχειν), 소유(la possession, ἔχειν), 능동(l’action), 수동(la passion, πάσχειν).
그런데 삼단논법에서 대전제의 항(τὸ μεῖζον, ὁ μείζων; πρῶτον)(terminus maior)과 소전제의 항(τὸ ἔλαττον; ἔσχατον)(terminus minor)을 이어주는 항을 중간 항(le moyen terme, ὅρος μέσος)이라 한다.
“비가오면 땅이 젖는다”에서 전제절(πρότασις)와 귀결절(ἀπόδοσις)로 되어 있다. 이 항들이 사실에 기반한 명제적 차원이다. 그럼에도 삼단론법에서 대전제와 소전제 그리고 귀결에서 항들은 세 가지이다. 모든 사람은 죽을 운명이다(AII M-P).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AII S-M). 소크라테스는 죽을 운명이다(S-P).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삼단논법들을 설명하면서 세 항목을 주로 명사들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항목(ὅρος)는 용어, 개념 등으로 쓰이지만, 자연학에서 류와 종으로 나눌 때, 각각도 또한 항목인 셈이다. 소는 반추동물이다고 할 때, 소는 종(種)인 셈이고, 동물이 류(類)이다.
스티븐 샤비로의 『기준없이』 1장. 「기준 없이」[신유물론 분과]
스티븐 샤비로의 『기준없이』 1장. 「기준 없이」
한철연 신유물론 분과 세미나 리뷰
먼저 신유물론 분과에 관한 소개를 간단히 하려 한다. 신유물론 분과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세미나 분과 중 하나로, 2021년 공무 모임을 시작하였고 참여 인원이 늘고 모임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2023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정식 분과로 등록했다. 이현재 회원(이하 호칭 생략), 박민미, 현남숙이 먼저 공무 모임을 제안하였고, 이후 참여 시기는 다르지만 이승준, 정유진, 이지영, 정희수, 서영화, 최종덕, 김선영, 손미아 회원이 합류하였고, 현재 서영화 회원이 분과장을 맡아 모임을 이끌고 있다. 신유물론 계열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책을 주로 읽고 있지만 세미나 구성원의 추천이 있으면 그밖의 주제나 텍스트에도 열려있다. 각자 전공이나 관심사가 달라 생태주의, 과학철학, 여성주의, 존재론, 문화철학의 바탕 위에서 신유물론의 이론적 지도를 파악하고 각자의 연구에 접목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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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신유물론과 분과에서 올해 들어 함께 읽은 책 중 하나이다. 영문학 배경을 가진 학자인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1954~)의 『기준 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은 여러 소주제들도 구성되어 있다. 샤비로에 따르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모두 칸트의 이러한 미학을 급진적인 방식으로 수용한다는 친연성이 있다. 그는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칸트 해석을 참조하여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판단력 비판』의 ‘취미판단’을 단순한 미적 대상을 위한 판단을 넘어 세계를 이해하는 일반적 방법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통상 세계 이해의 영역에서 칸트의 미학적 판단(반성적 판단)은 학적 판단(규정적 판단)에 비해 사소하게 여기거나 예외적으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샤비로는 이러한 기존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학적 사례들이 기존의 규범들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규범들조차 개별 사례들을 종합함으로써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기준 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의 제1장 「기준 없이」에서 샤비로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유효한 기준과 비판적 기준을 확립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차라리 “어떻게 하면 혁신과 변화를 막는 그러한 기준과 표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이다(p. 60) 샤비로에게 기준(criteria)이란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 등장하는 ‘규정적 판단력’을 의미한다. 샤비로는 이러한 기존의 기준의 문제를 대신하여 『판단력 비판』의 취미판단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취미 판단은 개념에 메이지 않고 대상을 단칭적으로 포착하며, 고유한 맥락과 상황에 맞는 세계 파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샤비로는 미적 판단 중에서도 취미판단에 더 주목한다. 그는 칸트 미학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들이 미에 대한 분석을 보수적이라 치부하고 탈근대적 관심에서 숭고 분석에 집중해 왔다고도 비판한다. 미적인 것에 관한 칸트의 이론은 실제로는 정동과 독특성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며, 또한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판단 형식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학은 더 이상 인식론과 윤리학의 규칙들에 대한 예외가 아니라, 바로 그것들의 실천을 위한 근거가 된다(p. 9).
규칙에 포섭되지 않는 단칭 판단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샤비로의 접근은 기존의 칸트 연구 전통에서는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샤비로는 이러한 관점이 오히려 오늘날의 중요한 쟁점들을 다루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고 전망한다. “칸트, 화이트헤드 그리고 들뢰즈의 연계 속에서 발견한 비판적 심미주의는 현대 예술과 미디어적 실천들, 기술적 실천들(특히 뇌 과학과 생물 발생학 분야에서의 최근의 진전들),그리고 문화이론과 맑스주의 이론( [증략] 생성 혹은 자기-조직 시스템의 역할에 관한 이론, [중략])에서의 논쟁들을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전망한다(pp. 25-26).
샤비로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일지 또한 어떤 시대적 통찰을 줄 것인지는 책의 나머지 장들과 그의 다른 저작들을 함께 살펴보며 지속적으로 탐구해 나가야 할 것 같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8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7)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첫 번째 증명 : 정치체제와 개인의 내적 구조에 기초한 증명(576b-580c)
[576b-580c]
* 소크라테스는 첫 번째 증명ἀπόδειξις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최악κάκιστον의 인간이란 한마디로 꿈ὄναρ에서나 가능한 상태를 깨어 있을 때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가장 참주정적인 성향을 타고난 자가 독재자μόναρχος가 되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576b) 대중πολύς에게는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그러한 자가 가장 사악한πονηρότατος 자이자 가장 비참한ἀθλιώτατος 자이다. 그리고 나라와 개인이 닮았다ὁμοιότητος는 점에서 덕ἀρετῇ과 행복εὐδαιμονίᾳ의 문제도 나라와 개인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576c) 그리고 참주정체제의 나라와 왕정체제의βασιλευομένης 나라를 덕과 행복과 관련하여 비교 판정κρίνειν할 때는 그 주변의 몇몇 사람이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576d), 나라 곳곳을 살펴보고서ἰδόντες 의견δόξα을 내놓아야 한다. 글라우콘은 이 말에 동의한 다음, 참주정체제의 나라가 가장 비참하고, 왕정체제의 나라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말한다.(576e)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비교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사유διανοίᾳ를 통해 인간의 성품ἦθος 속을 꿰뚫어 볼 수 있고διιδεῖν, 참주와 한 지붕 아래 살면서συνῳκηκότος 공적 사적 모든 행동이나 모습을(577a) 모두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판정 능력과 경험이 있는 사람인 척 해보자’προσποιησώμεθα고 제안한다.(577b)
* 이렇게 비교 판정을 위한 준비를 마친 후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으로 첫 번째 증명을 시작한다. 그 내용을 정리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와 사람의 유사성ὁμοιότητα을 상기하면 참주정체제의 나라는 자유로운ἐλεύθερος 나라가 아니라 노예 상태δοῦλος에 있는 나라이다. 그곳에서도 주인δεσπότης들과 자유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중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전체로 보면 그 나라는 가장 훌륭한 부분까지도 수치스럽고ἄτιμος 비참하게 노예 상태로 있는 나라이다.(577c) 사람이 나라와 닮았다면 나라와 동일한 구조τάξις가 필연적으로 사람에게도 있다. 그렇다면 그 나라를 닮은 참주정적 인간의 영혼은 숱한 예속δουλεία과 자유인답지 못함ἀνελευθερία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가장 훌륭한 부분들은 노예 노릇을 하는 반면, 작은 부분이자 가장 사악하고 광기 가득한 부분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 있는 나라는 그 어떤 나라나 보다도 원하는 바ἃ βούλεται를 못 하는 나라이므로 영혼 전체ὅλη ψυχῆς에서 보면 영혼 또한 원하는 바를 가장 못할 것이다.(577d) 그런 영혼은 폭력적인 욕망의 침οἶστρος에 늘 쫓기며 혼란ταραχή과 후회μεταμέλεια로 가득 차 있다.
2) 그리고 참주정체제의 나라는 부유하긴πλούσιος커녕 가난할πενομένη 수밖에 없어(577e)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늘 가난하고πενιχρός 채워지지 않은ἄπληστος 상태로 있고 또 두려움φόβος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나라만큼 비탄ὀδυρμός과 한탄στεναγμός, 통곡θρῆνος과 고통ἀλγηδών이 더 많이 발견되는 곳은 없다. 이에 따라 사람의 경우에도, 참주정적인 인간보다 더 많이 욕망ἐπιθυμία과 욕정ἔρως으로 미쳐버린 경우 또한 없다.(578a) 그러므로 바로 이 나라가 가장 비참한 나라로 판정된다.(578b) 그리고 특히 최고로 비참한ἀθλιώτατον 자는 이들 사인(私人)ἰδιώτη으로서 참주정적인 인간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어떤 불운συμφορά을 만나 실제 참주가 된 자이다.
3) 하지만 가장 중대한 문제, 즉 좋은 삶과 나쁜 삶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논의를 통해τῷ τοιούτῳ λόγῳ 보다 더 충실히 고찰해야 한다.(578c) 이를 위해 우선 나라에서 노예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πλούσιος 개개인ἑνὸς ἑκάστου τῶν ἰδιωτῶν들을 예로 들어보자. 이런 사람들은 많은 자를τὸ πολλῶν 다스린다ἄρχειν는 점에서 참주들과 닮았다. 그런데 이들은 나라 전체πᾶσα ἡ πόλις가 개개인을 돕고 있기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않고 가노οἰκέτης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578d) 그러나 만일 어느 신이 오십 명 또는 그 이상의 노예를 거느린 한 사람을 그의 재산οὐσία, 노예, 가족과 함께 어느 외딴곳에다 갖다 놓았다고 해보자. 이 경우 그는 나라전체가 주는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으므로 자신과 가족이 노예들에 의해 살해되지 않을까ἀπόλοιντο 두려움φόβος에 떨게 될 것이다.(578e) 물론 그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노예들 가운데 몇몇의 비위를 맞추고θωπεύειν 많은 것을 약속해주고 자유인으로 놓아주면서 그들의 아첨꾼κόλαξ이 되지만, 자기 주변에 다른 자가 주인 되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를 극형ἔσχατος τιμωρία에 처하려는 사람들이 이웃으로 살고 있을 경우 그는 온통 적πολέμιος들에 둘러싸여 감시당하면서φρουρούμενος(579a) 한층 더 엄청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참주의 성향을 갖고 있는 자들은 온갖 종류의 숱한 두려움과 욕정으로 가득 차 감옥δεσμωτήριον에 갇혀 있는 삶을 보낸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탐심λίχνος으로 가득하지만, 여느 자유인들처럼 구경이나 하고 싶어 하는 그 어떤 것도 못한 채 여인네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집안에 틀어박혀(579b) 다른 사람을 시기φθόνος하며 지낼 수밖에 없다. 어떤 불운에 의해 실제 참주가 된 자는 이처럼 나쁜 것들을 더 많이 거둬들이면서 마치 어떤 자가 몸σῶμα이 병들어서(579c) 자기 자신도 제어하지 못한 채 그런 몸으로 일생을 다른 몸뚱이들σώματα과 경쟁하고ἀγωνιζόμενος 싸우면서μαχόμενος 고달프게χαλεπώς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런 자야 말로 완전히 비참한 상태에 있는 자이다.(579d)
*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요컨대 진짜 참주는 가장 큰 아첨θωπεία과 굴종δουλεία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δοῦλος이고 가장 못난πονηροτάτων 자들의 아첨꾼이며(579d). 또한 영혼 전체의 측면에서 그런 자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자이며,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결핍된ἐπιδεής 자이자 가난한 자이다. 결국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와 닮은 상태에 있는 참주는 평생 두려움으로 차 있고 경련σφαδᾳσμός과 고통ὀδύνη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579e) 이런 사람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자신이 잡은 권력 ἀρχὴ 때문에 이전보다 더 시기심 많고φθονερός 믿을 수 없고ἄπιστος 부정의하고ἄδικος 친구도 없고ἄφιλος 불경스럽고ἀνόσιος 온갖 나쁜 것κακία들을 받아들이고 키워내는 자이자 이 모든 것들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까지도 불운한δυστυχής 자로 만드는 자이다.(580a)
*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첫 번째 증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논의를 가무단의 공연에 비유하여 최종 판정관이 공연 후 최종 우승작과 순위를 발표하는 것처럼 글라우콘에게 최종 판정관을 맡긴다. 이에 글라우콘은 논의 순서 즉 가무단χορός의 공연에 등장했던 순서대로 순위를 판정하고(580b)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어떠한 자인지 인간들과 신들 모두가 알든 모르든 간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래와 같이 선언한다. ‘가장 뛰어나고ἄριστος 가장 정의로운δικαιότατος 자가 가장 행복한εὐδαιμονέστατος 자이며 그 사람은 가장 왕정적인βασιλικώτατος 사람이자 자신을 왕정체제로 다스리는 자이다. 반대로 가장 나쁘고 가장 부정의한 자가 가장 비참한 자로서 이 사람은 가장 참주정적인 사람이자 자신과 나라를 최대한 참주정체제로 다스리는 자이다.’(58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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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6e ‘누구에게나 자명한 사실’ : 소크라테스가 전체를 살펴보고 비교 판정과 관련한 의견을 내놓자고 했음에도 글라우콘은 결론에 해당하는 말을 미리부터 자명한 사실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비교 판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전에 정의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동의한 것이 옳았다면’(576a) 지금까지의 논의로만으로도 대화자들끼리는 이미 논의의 결론이 충분히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중들 사이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대중에겐 다양한 의견이 있다’(576c)는 소크라테스의 첨언은 앞으로 제시될 증명들이 기본적으로는 지금까지의 펼쳐온 논의들을 마무리하고 재확인하는 결론적 논의이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을 가진 대중들을 최대한 설득하기 위한 목적도 크게 고려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주의하고 있지 않지만 트라쉬마코스는 제2권 이후에도 이 대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실제로 그는 제5권에서 대화에 끼어들기도 한다.(450b) 플라톤의 설정대로라면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곁에서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트라쉬마코스를 의식하고 있다.
* 577b ‘우리가 바로 그것을 판정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자 참주정적인 인간들을 실제로 만나 본 사람인 척 해보길 바라나?’ :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인 증명에 들어가기 전에 그 증명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그 증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갖추고 있어야 할 자격에 대해 언급한다. 요컨대 사유에 기초한 이론적 판단력도 중요하지만 관련된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겪은 경험 또한 중요하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자신과 대화자들이 그러한 경험 관련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특별한 언급 없이 바로 자신들을 그러한 자격을 갖춘 사람인 양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이것은 일단 형식상 논리적 비약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처사이다. 어떤 척을 하자고 말하는 것도 소크라테스에게 어색한 일이다. 아마도 이글의 저자 플라톤 자신이 아테네와 시켈리아에서 직접 참주정의 참혹상을 경험한, 그것도 혹독하게 경험한 당사자임을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랬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이 언급은 판정에 있어 사유를 통한 판단력뿐만 아니라 경험이 갖는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 577c ‘가장 훌륭한 부분까지도’ : 타락하기 이전 정치체제에서 통치 및 수호자 역할을 했던 사람들, 즉 나라의 구조 상 통치자계층과 수호자 계층을 말한다.
* 577d ‘동일한 구조’ : 여기서 ‘구조’의 그리스어 원어는 taksis이다. taksis는 원래 공격 또는 방어에 가장 효율적인 전투 대형을 갖춘 상태 즉 질서 잡힌 ‘대오’의 뜻을 갖고 있는 군사 용어이다. 그래서 taksis는 문맥에 따라 이곳처럼 ‘구조’(577d, 618b)라는 뜻 외에 ‘대오’(468a, 471d, 522d,e, 525b), ‘질서’(561d,587a), ‘순서’(620d), ‘줄’(617d)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여기서 구조는 내용적으로 나라의 세 계층과 개인 영혼의 세 부분 간의 질서를 말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구조가 잘 잡혀있다는 것은 각 계층과 부분의 위계와 역할이 본성에 맞게 질서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구 부분은 본성상 이기적 물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어 타자의 이익을 배려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이성 부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플라톤에게 지배 또는 다스림archein은 타자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려에 기초한 구성원 모두의 조화와 공존을 도모하는 일이다. 구조가 왜곡되면 다스림도 왜곡되어 조화와 공존은 무너진다.
* 577d ‘참주정체제의 영혼’ : 참주정적 인간의 영혼, 참주정적 인간의 극치가 참주라는 점에서 극명하게는 참주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다.
* 578a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늘 가난하고 채워지지 않는 상태로 있을 것이네’ : <고르기아스> 416e, 493a-494e, 521a, <파이드로스> 279c, <편지들> 355c 참고.
* 578e ‘오십 명 또는 그 이상의 노예’ : 기원전 5세기 고대 아테네에서 한 가구 당 노예의 수는 보통은 3명에서 많으면 12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50명 이상의 노예는 매우 부유한 소수 부자들의 경우일 것이다. 물론 대부호로 알려진 당대 니키아스는 1,000명에 달하는 노예까지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579a ‘신이 또 다른 여러 사람을 그 사람 둘레에 이웃으로 살게 한다고 해보세.’ : 여기서 ‘참주 둘레에 사는 이웃’은 앞서 자유인과는 다른 여러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참주가 갖고 있는 패권욕, 또는 그 참주의 전제 정치를 못 마땅하게 여겨 그를 제거하기를 원하는 주변 국가들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앞서 참주가 노예들 가운데 풀어준 자유인과 달리 민주정 치하에서 전적인 자유에 길들여져 있어 여전히 간섭을 싫어하거나 참주의 착취에 시달리며 참주정에 적대감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자유인들 또는 과두주의자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579b ‘여인네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집안에 틀어박혀’ : 고대 아테네를 비롯해 당대 그리스 폴리스 일반의 관습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은 다 드러난 공간에서 공공연히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조차 금지되었다.(<법률> 781c)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이 <국가>에서 여성을 통치계급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남성들과 함께 공동 식사하도록 한 것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로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플라톤은 오직 철학만이 그러한 관습적 편견과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여겼다.
* 579d ‘다른 몸뚱이들sōmata과 경쟁하고 싸우며 살아가도록 강제’ : 다른 몸뚱이들은 다른 참주정적인 인간들을 가리킨다. 지배 욕구에 찌든 참주정적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평생토록 서로 간 권력 투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580a ‘우리가 전에 말한 것들까지도’ : 이미 앞에서도 참주정적 인간들이 축복 받은 필연인 양 평생 대중들의 미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567a), 그리고 그 누구의 친구도 되지 못한 채 주인 아니면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576a)이 언급된 바 있다.
* 580b ‘마치 최종 판정관kritēs이 결과를 발표하듯 자네도 내게 그렇게 해주게.’ : 당대 아테네인들은 가무단의 공연을 심사할 때 아래와 같이 매우 엄격하고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 심사위원을 선정했다. 먼저 축제가 열리기 전 평의원에서 후원자들과 함께 심사위원 후보들을 선발한 후 이들 명단을 부족별로 하나씩 총 10개의 항아리에 담았다가 경연 당일 각 항아리에서 한 명씩 총 10명의 심사위원을 뽑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중 다시 추첨된 5명의 최종판정관이 앞서 심사위원들이 적은 투표함을 열어 우승 가무단과 순위를 확정한 후 전령을 통해 발표했는데 이곳 최종 판정관은 위와 같은 가무단 공연 심사과정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최종판정을 자신이 아니라 글라우콘에게 맡기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플라톤의 대화는 대화자들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거나 알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자들과 문답을 나누며 비판적인 설득을 통해 함께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에게 최종 판정을 맡기고 그 내용을 받아 직접 다시 발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함께 동일한 진실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준다.
* 580b ‘마치 가무단choros이 등장하듯 그들이 등장했던 순서라고 판정합니다.’ : 가무단 공연 심사의 경우 우승 가무단을 발표할 때 동시에 순위도 함께 발표하듯이 이곳에서도 그에 맞추어 최종 판정대상으로서 우승자인 철인왕정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논의된 타락한 정치체제들이 순서대로 함께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논의의 목표대로 철인왕정의 최종적인 비교 판정 대상은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이다.
* 580c ‘그들이 어떠한 자인지 인간들과 신들 모두가 알든 모르든 간에’ : 아데이만토스가 제2권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이 비교 판정과 관련한 답변을 처음으로 요청할 때 아래와 같이 말한 것을 환기시키고 있는 부분이다. ‘신들과 사람들에게 알려지든 그렇지 않든, 정의는 좋은 것이고 부정의는 나쁜 것인지도 보여 달라’(367e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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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소크라테스는 애초 계획한 대로 타락한 정치체제들과 그것을 닮은 사람들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과연 누가 행복한가를 비교 판정하는 논의(576b-592b 제9권 끝)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비교 판정을 위해 이곳에서 제시하고 있는 증명들은 아래와 같다.
1) 첫 번째 증명 : 정치체제와 개인의 내적 구조에 기초한 증명(576b-580c)
2) 두 번째 증명 : 영혼의 세 부분에 기초한 증명(580c-583a)
3) 세 번째 증명 : 참된 즐거움과 거짓 즐거움의 구분에 기초한 증명(583b-588a)
* 플라톤이 이 세 가지 증명에서 각각 사용하는 논거들은 크게 정치적 논거, 심리학적 논거, 그리고 형이상학적 논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첫 번째 증명은 정치체제로서 나라와 개인 사이의 유사성에 기초하고 있고, 두 번째 증명은 영혼의 3부분 즉 이성적 부분, 기개 부분, 욕구 부분 각각에 상응하는 즐거움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 번째 증명은 플라톤의 존재에 관한 이론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 내지 방법은 사실 대화편 전체를 통해서도 사용된 것들이다. 그 내용을 크게 구분해보자면 제2권에서 제4권까지는 정치적 방법이, 제8권에서 제9권까지는 심리학적 방법이, 제5권에서 제7권까지는 형이상학적 방법이 채택되고 있다. 그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 플라톤이 지금 그러한 방법들을 모두 동원해 종합적인 관점에서 최종적인 마무리를 수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 증명을 토대로 ‘부정의가 아니라 정의야 말로 이익’(588b-592b 제9권 끝)임도 덧붙인다. 이로써 정의와 행복이라는 <국가>의 기본 논제를 촉발시킨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형식에서나 내용에서 전적으로 잘못된 것임이 밝혀진다. 이번 강해는 우선 첫 번째 증명 부분을 다룬다.
* 첫 번째 증명의 핵심은 정치제제로서 나라와 개인이 갖는 유사성(577c), 즉 나라와 개인의 동형적 구조(577d)에 입각하여 그 내적 구조를 전체적으로 살피는 방식으로 참주정 체제의 비참성을 드러낸 후 그것을 근거로 그것을 닮은 참주의 비참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행복이건 비참함이건 나라와 개인의 동질적 구조가 빚어내는 양태들은 각기 그것을 구성하는 계층들과 영혼 부분들의 내적 관계를 ‘전체holos’(576d)로서 파악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요컨대 첫 번째 증명의 핵심은 나라와 개인이 갖는 유사성(577c)을 토대로 이와 같은 3계층 또는 영혼 부분들의 내적 관계 내지 질서를 개별차원이 아니라 ‘전체’ 차원에서 파악하는 방식으로(576d)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미 철학자의 행복은 이러한 영혼의 내적 구조가 전체적으로 조화와 질서를 갖추었다는 것으로 뒷받침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참주의 비참성은 이러한 영혼의 내적 구조가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하고 위계나 질서를 갖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 구조가 역전된 것이다.
* 이와 같은 방식에 따라 소크라테스가 첫 번째 증명을 통해 종국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참주의 비참한 삶의 양상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579d-580a)
1) 참주는 가장 큰 아첨과 굴종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이다.
2) 참주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이다.
3) 참주는 평생토록 친구도 없고 고립된 채 두려움과 경련, 고통으로 가득한 불운한 삶을 보낸다.
* 그리고 위와 같은 참주의 비참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몇 가지 논거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논거의 내용들이 상호 중첩되어 있어 분명하게 구분해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대한 그것들을 차례대로 정리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참주는 가장 큰 아첨과 굴종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이다.(577c-577e)
참주정이 극단적인 자유로부터 생겨난 최대의 예속이자 가장 야만스러운 노예 상태의 정치 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밝혀진 사실이다.(564a) 그리고 참주가 누군가의 주인 아니면 노예로 산다는 것도 이미 밝혀졌다.(576a) 나라와 개인의 유사성에 기초한 증명 방식에 따른다면 이것만으로도 참주가 진짜 노예라는 증명 과제는 증명된 셈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이곳에서는 정치체제의 내적 구조에 대한 전체적인 분석을 토대로 위계질서 붕괴에 따른 참주정과 참주의 노예 상태에 대한 증명이 수행된다. 즉 참주정은 그 내적 구조를 전체적으로 분석해 보았을 때 위계질서가 무너져 가장 작은 부분인 참주가 나머지 생산자 계층을 비롯해 가장 훌륭한 부분인 수호자 계층까지 노예로 만들어 버린 정치체제이다.(577c) 이에 따라 참주의 영혼 또한 참주정을 닮아 내적 구조상 위계와 역할이 전도되어 전체적으로 무질서 상태가 되고 만다. 물론 참주의 영혼에서 욕정에 사로잡힌 욕구 부분이 거꾸로 기개 부분과 이성 부분을 폭압적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성과 기개 부분이 노예이지 참주의 영혼은 노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참주의 영혼은 늘 욕망의 침에 쫓겨 다니면서 영혼 전체의 이익이 아닌 욕구 부분의 이익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주인다운 다스림과는 전혀 무관한 욕정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에서 ‘영혼 전체를 놓고 말한다면’(577e) 참주정 나라가 그렇듯이 참주의 영혼은 그 자체로 욕정의 노예일 뿐이다. 그래서 참주의 영혼은 혼란과 후회로 가득 차 있다.(577e)
2) 참주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이다.(577e-
578a)
참주가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임은 참주가 노예라는 앞서의 논거와 연동되어 있다. 그래서 내용도 짧고 간단하다. 한마디로 참주정 체제의 나라는 노예 상태에 있는 나라이므로 그 어떤 나라보다도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못하는 나라이다.(577d) 그러므로 참주정 체제의 영혼, 즉 참주의 영혼도 원하는 바를 가장 못할 것이다.(577d) 요컨대 참주정 체제의 나라가 가난한 것이 필연적인 한,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가난하다. 물론 참주정의 나라에서 나라 전체는 가난해도 현실의 참주는 풍요하면 풍요했지 결코 가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부와 가난은 재물의 크기가 기준이 아니라 원하는 바를 이루냐 못 이루냐가 기준이다. 욕망의 노예가 된 참주는 아무리 많은 것을 원해도 그것을 못 이루는 상태로 늘 결핍상태에 있다. 가난하다는 것은 결핍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비록 적은 재산을 가졌을지라도 결핍을 못 느끼면 그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부와 가난 역시 결국은 영혼의 내적 구조가 질서를 갖추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성이 아닌 욕구에 지배되는 참주는 그래서 늘 결핍에 시달리는 가난한 자이다.
3) 참주는 평생토록 친구도 없고 고립된 채 두려움과 경련,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보낸다.(579b-580a)
참주정의 나라와 참주정적 영혼은 욕망의 노예 상태에 있어 늘 가난하고, 결핍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나라보다 비탄과 한탄, 통곡과 고통이 더 발견되는 나라는 없다. 게다가 이런 나라와 그와 같은 사람은 두려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578a) 이런 점에서도 참주정적인 인간은 단연 가장 비참하다.(578b) 특히 참주정적인 인간이면서 불행하게도 어떤 불운을 만나 사인이 아닌 실제 참주가 된 자가 한결 더 비참하다.(578b-c) 소크라테스는 참주가 늘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참주들과 닮은 부유한 개개인 즉 노예를 많이 거느린 자들의 경우를 예로 든다.(578e) 이들은 사실 나라에서 그 노예들을 두려워하며 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라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은 제도와 법률을 통해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신들이 이 부유한 개개인들과 그들의 노예들을 나라가 그들을 도울 수 없는 상태, 이를테면 어느 외딴 곳에 떨어트려 놓았다고 가정할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그곳에서는 노예들이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 부자들과 가족들은 노예들에 의해 재산을 뺏기는 것은 차치하고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가 늘 상존해있다. 이것은 참주나 기득권자들이 나라의 제도와 권력에 기대어 자신의 사적 탐욕을 거침없이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정의한 그들의 삶 자체가 얼마나 많은 적대적인 사람들을 나날이 키워내고 있는지 또 그에 따라 주위 사람들에 대한 얼마나 많은 의심과 공포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한다. 설사 이런 고립된 상황이 두려워 노예들 가운데 비위를 맞추어 어떤 자를 자유인으로 풀어주고 그들에게 아첨하며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날이 갈수록 전적인 자유에 길이 든 자유인들이 참주의 지배에 불만을 가질 경우, 또는 참주의 패권욕과 전제정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주변 국가들이 있을 경우, 참주는 그들과도 적대적이 되어 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의심과 공포, 적들의 감시 속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집에 틀어박힌 채 고립된 삶을 살게 된다.(579a-c)
* 혹자는 현실에서 성공한 참주정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역사를 들여다보면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를 통해 공포와 불안을 극대화시켜 아주 오래 동안 체제를 유지하고 지속한 참주정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드러내고 있는 참주정의 비참성의 핵심적인 요체들 즉 ‘욕정의 노예상태’, ‘영혼의 궁핍’, ‘공포와 고립’은 현실 세계 실제 참주들 모두에게 – 그들이 끝까지 권력을 유지했건 중도에 좌절되었건 상관없이 – 하나같이 두루 적용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영혼의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에게 성공적인 참주란 그 자체로 형용 모순이다. 플라톤 당대 가장 알려진 최고의 참주로서 제명을 산 디오뉘시오스 I세조차 평생 전쟁에 시달렸고 특히 암살 위협 때문에 꼼짝없이 성에 갇혀 지내는 신세라 당대 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올림픽 구경조차 대리인을 보냈다고도 전해진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역사 속 폭력적 독재자들에 관한 전기에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증거를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반대로 처참하고 불행한 종말을 맞이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오늘날 자기 세상인 양 설쳐대는 우리가 알만한 현대판 참주들 모두 하나같이 권력 상실과 전쟁에 대한 공포, 자신과 가족에 대한 암살 위협에 시달리면서 폐쇄된 공간에서 잠도 못 이루면서도 욕정은 들끓어 늘 결핍과 불만을 끼고 산다. 무엇보다 권력을 독점하려는 참주의 욕망은 그 자체로 참주 자신을 배타적으로 고립시키고 타자들과의 관계 일체를 분열시켜 결국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현실 정치가 예외 없이 이러한 권력욕의 전쟁터일 수밖에 없다면 일시적인 평화는 몰라도 인류에게 불행이 그칠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곳 첫 증명에서 다루어진 노예 상태가 아닌 자유, 부(富), 그리고 공포로부터 해방 그 모두는(이것은 우연찮게도 각기 민주정 치하 민중들, 과두주의자들, 참주 포함 참주정 치하 시민들이 바라고 원하는 가치들이다.) 오직 철학자왕정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철학자왕정의 도래 가능 조건에 신적 행운과 영감의 도움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편지> 326a, <국가> 499c) 그 실현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 지성이 지배하는 나라를 향한 이곳 <국가> 논의가 얼마나 간절하고 처절한 것인지를 함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상의 실현은 어렵고 처절하다. ta kala tō onti chalepa.-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힘든 것이다.
* 이로써 첫 번째 증명이 마무리된다. 위 증명이 갖는 한계는 시작 전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전에 정의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동의한 것이 옳다’(576a)는 것, 즉 본성에 따른 모든 계층 간과 영혼 간의 조화와 질서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증명이 나라와 개인 간 ‘동일한 구조’와 ‘전체 연관’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두 번째 증명 : 영혼의 세부분에 상응하는 즐거움에 기초한 증명(580c-583a)
[강좌안내] 2026년 <한철연 아카데미> 서울도서관과 협업 : 9월 작가힙톡(Hip-Talk) 3주(매주 금요일 / 4일, 11일, 18일) 일정 [한철연 소식]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② [한철연 강좌]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②
글 : 오상현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
이 프로그램은 지난 7월, 서울도서관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 기획한 ‘작가힙톡’ 토크콘서트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나’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까지, 네 명의 철학자가 두 번의 저녁에 걸쳐 삶에 관한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두 회차 모두 진행과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았습니다. 아래는 그 두 번째 밤을 돌아보며 남긴 기록입니다.
2주차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는 철학의 기술 / 2026년 7월 24일 금요일 19:00
두 번째 밤의 주제는 ‘관계 속의 나’였습니다. 성균관대 현남숙 교수님이 ‘공감, 소통, 인간관계’를, 한국방송통신대 진보성 교수님이 ‘인정, 비교, 신뢰, 공정함’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지난 시간에 ‘개인으로서의 나’를 들여다보았다면, 이번 시간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 즉 나를 둘러싼 관계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진행을 맡아 무대에 섰습니다.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 서로 다른 전공의 두 분이 같은 주제 앞에 나란히 섰습니다.
첫 번째 강연자는 현남숙 교수님이었습니다. 대화는 다이얼로그, 혼자 하는 독백이 아니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르틴 부버의 ‘나-너 대화’와 ‘나-그것 대화’를 빌려, 상대를 인격으로 만나는 대화와 도구로 대하는 대화가 얼마나 다른지 짚었습니다. 힘들 때만 연락해 몇 시간을 쏟아내고는 평온할 때는 소식 없는 지인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셰리 터클의 『외로워지는 사람들』을 빌려 온라인 시대의 소통이 편리해진 만큼 헐거워졌다고 짚었고,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인용하며 갈등은 침묵과 시간이 메워준다고 조언했습니다.
관계 이야기에서는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속, 사랑이 식을까 두려워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해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로 나아갔습니다. 단단했던 관계들이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시대, 우리는 책임을 지는 ‘릴레이션십’보다 책임 없는 ‘네트워크’에 익숙해졌다고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빌려, 개성을 지키며 하나 되는 것, 보호와 책임, 존중과 지식이 관계의 조건이라는 말로 마쳤습니다.
두 번째 강연자는 진보성 교수님이었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서양 철학이 붙잡아 온 질문이지만, 『논어』에는 애초에 그런 존재론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신 ‘사람(人)’ 옆에 ‘두 이(二)’가 붙은 ‘인(仁)’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자체를 중심에 둔다는 것입니다. 복숭아 씨앗 속 씨알처럼 누구에게나 있지만,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인정에 대해서는 『논어』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구절과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 개념이 이어졌습니다. 비교에 대해서는 “군자는 두루 사귀되 비교하지 않는다.”는 『논어』 구절과 『장자』의 이야기를 빌려, ‘대동’과 ‘소동’을 구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문장으로 진짜 친구는 화려함이 사라진 뒤에야 보인다고 전하며, 거리를 두고 기다리라는 말로 마쳤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두 강연이 끝나고 토크콘서트가 이어졌습니다. 맨 앞에 나란히 앉은 두 분의 청중이 실은 오늘 처음 소개팅으로 만나 이 자리에 함께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강의실은 웃음과 탄성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오랜 친구인데도 나이가 들며 달라진 처지에서 오는 씁쓸함을 묻는 질문,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을 묻는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진보성 교수님은 타인을 자신의 삶의 패턴에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답했고, 현남숙 교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을 빌려, 굽신거림과 오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매 순간 적절한 판단을 찾아가는 것이 관계의 기술이라고 답했습니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탁 트인 서울광장에 다시 섰습니다. 저 멀리 남산타워는 여전히 게으름 없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밤, 나를 들여다보고 관계를 살펴보는 일까지, 두 번의 저녁이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의미 있는 사색의 시간이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소개팅 당일에 강연장까지 와 주셨던 두 분, 첫 만남에 나누었던 수많은 철학적 질문들을 함께 했으니, 앞으로도 오래오래 예쁜 사랑 이어가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프로그램이 종료되었습니다. 강연을 수락해주신 박은미, 현남숙, 진보성 선생님과 강연 협의부터 실무까지 함께 애써주신 서울도서관 관계자분들, 영상 촬영을 맡아주신 최기봉 피디님까지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 유익하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으로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끝.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① [한철연 강좌]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①
글 : 오상현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
이 프로그램은 지난 7월, 서울도서관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 기획한 ‘작가힙톡’ 토크콘서트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나’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까지, 네 명의 철학자가 두 번의 저녁에 걸쳐 삶에 관한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두 회차 모두 진행과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았습니다. 아래는 그 첫 번째 밤을 돌아보며 남긴 기록입니다.
1주차 ‘진짜 나’를 들여다보는 철학적 시선 / 2026년 7월 10일 금요일 19:00
진짜 나를 찾는 여름 밤. 첫 번째 밤의 주제는 ‘진짜 나’였습니다.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선생님이 ‘진짜 나, 욕망, 죽음, 행복’을, 저는 ‘외로움, 불안, 능력주의, 대체불가능성’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금요일 저녁 일곱 시, 무더운 여름 공기가 가시지 않은 채로 사람들이 서울도서관으로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마흔 명 정원을 훌쩍 넘어서 최종 신청 인원은 예순여덟 명이었습니다. ‘불타는 금요일’, 이른바 ‘불금’을 포기하고, 저마다의 약속을 미뤄두고 온 얼굴들을 보면서, 무엇이 이들을 여기까지 오게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프로그램의 기획 취지를 설명하면서 저는 ‘사람’과 ‘인간’이라는 두 글자를 나란히 세웠습니다. ‘사람(人)’ 옆에 ‘사이 간(間)’이 만나야 비로소 ‘인간(人間)’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이와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좌우에 계신 이분들이 바로 여러분을 사람에서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주시는 소중한 조건입니다.” 『논어』의 한 구절도 함께 건넸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그런데 그 세 번째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은 사람, 즉 ‘개인으로서의 나’를 살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강연자는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선생님이었습니다. 먼저‘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반면에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내맡기는 삶을 ‘가짜 나’라고 했습니다. 늘 누군가와 비교하고, 인정받아야 안심이 되고, 그러다 문득 공허해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나’는 비교할 잣대가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꼭 한 번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라는 말씀이 참석자들의 마음에 내려앉았습니다. 세네카의 말도 빌려 왔습니다. 인생은 진정으로 시작할 준비가 되면 거의 끝나 있다고 말입니다. 죽음을 자꾸 회피하려 들기 때문에 우리 삶이 새로워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나섰습니다. 외로움, 불안, 능력주의, 대체불가능성. 네 개의 단어를 들고 무대에 섰습니다. “외로운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외로움을 들키는 것”이라던 어느 카피라이터의 문장에서 시작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정호승의 시구를 지나, 마침내 『논어』의 한 구절에 닿았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넘어서야 비로소 독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얹었습니다. 다음 키워드는 불안이었습니다. 공포는 그 대상이 분명하지만, 불안은 그 대상 없이 오직 가능성만으로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존재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정해진 목적 없이 던져진 우리 인간에게 불안은 숙명과도 같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혹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병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인 셈이라고 전달했습니다. 위로가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짧은 두 강연이 끝나고 토크콘서트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한 참여자가 조용히 손을 들어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상황과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면서 매일이 불안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가수 보아의 노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데뷔 초, 유행했던 곡의 제목은 ‘No.1’이었지만, 십 년이 지나 그녀가 부른 노래는 ‘Only One’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등이 아니어도 좋다고, 유일한 존재가 되는 길도 있다고.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사람들은 해본 일보다 해보지 않은 일을 더 오래 후회한다고, 망설여진다면 일단 저질러 보라고 말입니다.
어느덧 마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정답을 얻으러 온 밤이 아니었습니다. 두 철학자의 이야기 역시 그들의 시선이기에, 각자의 시선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전했습니다. 강의실을 나서는 청중들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만은 한결 가벼워지기를 바랍니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나와 탁 트인 서울광장에 섰습니다. 저 멀리 남산타워가 무심하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불금을 포기하고, 철학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자 와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