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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통 대 신실재론 [천 하룻밤 이야기]

동지(冬至),

문화 전통 대 신실재론

2025 12 22. 동지(冬至), 소설(小雪)때 갑자기 추웠었고 어제부터 다시 춥기 시작 한다.

 

류종렬(한철연)

 

    동지(冬至)의 글을 쓴지 스물다섯 해, 4반세기가 지나간다철학사에서 흐름을 보려고 하다가인간의 살아온 과정을 보게 되고 그리고 자연의 변화에 대해 관심이 생명과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서양철학을 간단히 표현한 말로서 박홍규 선생님보다 잘 표현한 것을 찾지 못했다서울대 박홍규 교수는는 1984년 6월 15일 퇴임강연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냐 공간이냐 둘 뿐이에요플라톤은 둘 다를 놓았고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에서 형상이론(form theory)을 놓았고베르그송은 시간에서 정리했습니다그 이외는 없어요.” (54) –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1』(박홍규전집 2), 민음사, 2007(1995) 54.

    벩송(1859-1941)의 저술에서 관통하는 사상이 있다그의 관점에 따르면고중세는 하늘에근대에는 표면에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이제 안에서부터 철학을 해야 한고 한다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철학사는 상층의 철학에서표면의 이중성으로현대에서 심층에서 생성의 다양성을 이야기 해야 한다고 한다벩송은 따로 단행본을 쓰지 않았지만 그의 저작의 순서를 따라가면하늘에서 표면으로그리고 내부로 라는 것을 알ㄹ 수 있다들뢰즈는 벩송의 생성론을 따라서가타리와 함께 천개의 고원(1980)』을 썼다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박홍규(1919-1994)와 들뢰즈(1925-1995)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양쪽에 각각 있으면서비슷한 생각으로 서양 철학사의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하는 서양 철학사는 하늘과 땅의 이중화에 어떤 연대가 있다고 보았다그런데 사유는 하늘의 운행에서 운동하면서도 동일반복을 한다는 점에서 고정성과 영원성에 관심이 컸다고 한다그리고 신화학이 아니라 유일신학과 접하면서 하늘이 우선이고 땅의 사실들은 인생무상(人生無常)처럼 허상으로 보았고상층 사상과 종교의 하늘나라가 지배하는 방식이 고중세 철학사라고 한다인간의 사유가 다시 태어나는 르네상스에서표면인 터전에 사는 인간이 중심이 되었고생각하는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이로서 벩송은 말하기를인간의 생각이 하늘의 원리를 갈릴레이의 빗금을 따라 지상의 표면으로 내려왔다고 한다표면에서 인간의 사유와 자연의 변화에 대한 이중화 현상에서표면 아래로 또는 사유의 내부로 들어가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한다내부로 파악은 물질에서 원자 안으로 사유에서 심리 또는 기억의 내부로 향하였다고 한다물질의 내부로의식의 내부로 연구가 19세기 후반에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더불어 펼쳐졌다.

    박홍규와 벩송을 중첩하여 보면하늘의 운동이 지상의 운동으로 이전은 지속이 아니라 위치이동과 같은 물체 운동인데물질자체의 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사유는 있어왔다고중에에서는 이런 자체 운동의 과정을 위치이동처럼 설명할 수밖에 없었지만운동의 과정에 대한 반성을 우주발생론이라 부르고위치 이동처럼 설명하는 운동의 조립과 조작에 대한 관심을 우주론이라 부른다이런 관점을 고대와 근대에 연결하면우주론의 뒤에 절대자와 같은 신이 있다고 여기는 형이상학(자연배후학)이 있다이에 비해 우주의 자기 발생으로 여기는 이들은 자연에 대한 관점을 자치적이고 자율적이라고 생각했다근대에서이분법이 아니라표면을 대하는 이중화 현상에서 자연(또는 우주)의 배후는 신이 아니라 자연자체일 것이라고 여겼다그러나 고중세의 오랜 관습의 사고는 상층이 우선이듯이자연의 배후에 신의 정신과 같이 하는 인간의 정신이 있다고 여기면서자연에서부터 발생과 변화의 사유가 불합리하다고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을 칸트가 이야기했다자연의 배후에 신인지 인간인지의 문제를 인간의 역량이 알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그래도 세상 또는 국가를 유지하는 도덕과 천륜이 먼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벩송의 표현으로 지상에서 상층으로 다시 올린 철학자가 헤겔인 셈이다벩송은 맑스와 니체를 다루지 않았지만종교의 권위와 국가의 권력이 상층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백성이 또는 인민이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다종교제도든 국가체제이든상층에 대해 자연이 자체적으로 성립하듯이제도와 체제의 상부에 대해 인민이 토대이며 심급의 최종결정권자라는 의미에서 대혁명을 이어받아루소에 이어 맑스도 인민주권인민권력의 등장을 알렸다.

    상층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심층으로부터 사유의 확장을 두려워 한 쪽은 제도와 체제의 옹호자들이다이들을 벩송은 네오스콜라주의라고 한다자연에서 실증적 사실들의 자료들지층과 화석은 신의 창조를 허구 또는 망상으로 만들었다상층의 절대성과 보편성은 중세 후기에서 유명론에서 지위를 잃었지만근대에서 이원성에서 정신이 상위라는 주장에 편승하여이야기(우화)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국가의 성립에서 국가의 꼭대기에 앉으려고(왕권과 참주 위에 있었듯이네오스콜라주의로 기울어졌다꽁트의 실증주의와 맑스의 공산사상에 대항하여헤겔이후에 앵글로색슨에서 현실의 이중성에서도 제도와 천륜이 먼저라고 두고 지배방식을 유지하고자하였다고중세에서 이데아와 하늘나라가 실재성이라고 했듯이관념(이데아)의 모방에서 이중화와 현실의 생성에서 이중화 사이에정신과 사유가 상위이며 이에 정합한 것을 진리이라고 주장하는 논리실증주의가 뒷받침하였다이런 논리와 사유의 정합성을 위한 현실의 상태에서원리에 맞는 모방을 재현 또는 표상으로 삼아표상 또는 현상이 실재성이라고 하였다이런 실재성을 고중세의 실재성과 달리 표면에서 현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가져다준다고 하면서 신실재론이라 하였다이런 현상의 신실재론과 네오스콜라주의 개념들의 신실재론이 제국주의와 함께 패거리를 맺는 것이 1차대전과 2차대전이라 한다이 전쟁을 누가 일으켰고 누가 배를 불렸는가가 그 해답을 말해준다.

    천지의 이중성에서 언제나 상위를 설정하고 있고그 설정이 진리라고 또는 원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근대성이 정립되는 시기에 관념론자의 신실재론이 있다이들이 주장이 그럴듯하게 보였던 것은심층으로 또는 내부로 들어가는 학문적 방법이 미숙했기 때문이었다지층을 통한 연대가 억년을 넘어가는 실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1901년의 마담 뀌리의 방사능에 대한 연구이래로여러 광물에 의한 반감기의 연대측정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근대의 세포와 신체의 생리학적 흐름은 현미경이 발달해야만 가능했고원자의 단위 속에 핵과 전자핵 속에서 양성자와 중성자 등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를 재는 회전의 방식보다 더 깊고 정교한 사이클로트론이 발명되어야 했다철학은 지층의 유물들과 같은 추억들로서 과거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자연에서 생명의 과정 속에서 지속하고 있는 기억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심층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미 다양한 방식들과 방향들에서 다룬다는 것은 대상과 사물의 단일성(통일성속에 이미 다양성이 있다는 것이다한 생명체든 사실이든 사건처럼 다양체이며 복잡계라는 것이다이 다양체의 발현의 방식을 빛의 발산처럼 온 방향으로 퍼져나가기에한 방향을 다룬다는 것이 개연성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이제 상층의 원리와 통일성으로부터 표면의 현실을 볼 것이 아니라자연의 자기 발생에서 나온 현실의 새로운 생성을 보자는 것이다이런 학문적 방향에서도권세권력권위의 패거리들이 전쟁에 일으키고 지배와 배치를 공고히 하였다여기에는 도구/무기의 생산과 활용이 있었다그 지배가 학문을 일 방향에 맞고 다른 방향은 틀렸다는 도구적이고 실용적 입장에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였다.

    세계는 이분법으로 되어있지 않다그럼에도 사람들은 편리와 실용에 경도되어 당연히 맞고 틀리다는 진위구별의 이원화에 빠져있다산다는 것은 서로의 연관이고 이 연관은 다양하다삶에서는 솔직함과 진실함을 먼저 가늠하고 약간의 손해가 있다하더라도 사람들은 평화와 행복을 위한 방향을 찾으려 한다생성에서 우주발생론과 우주론의 관점의 차이가 있고인식면에서 형이상학의 이중화 현상에 자연배후학과 신()배후학이 있듯이삶의 품성에서 공동체의 공감이 먼저라는 쪽이 있는가 하면이익의 창출에서 부의 축적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현실의 활용에서 상층은 수학의 무한과 같이 상징의 계산논리인데 비해현실의 이중성에서 상징의 지배방식과 달리 심층의 다양한 발현에서 협의(평결)와 협약이 우선한다고 여긴다신실재론은 3패거리의 지배권을 유지하려고표면 상층의 표상과 현상을 실재라고 하는데우주론과 신()형이상학에 예속되어 그 속에서 자유니 민주니 한다이에 비해 실재론은 언제나 내부와 심층이었고그것은 자연의 생성이었다이런 자연이 자치성과 자율성을 갖기 시작한 것이 근대이며벩송 이후에 자연의 자발성을 말하게 된다자연(본성)의 자발성의 실현이 자유인 셈이다.

*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극우파들이 얼마나 설쳐대었던가를 철학자들은 잘 알고 있다. – 이상하게도 기술정보(IT) 시대가 인공지능을 만나면서도 이런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 관념 우파의 신실재론이 앵글로색슨 계열에서 헤겔주의자들이었고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앵글로색슨철학을 이루고 있다그런데 19세기 후반에 심층의 실재론은 자연 속에서 인간그리고 어느 터전에 사는 인종의 심정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그 담론들은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침잠해 있다가 20세기 중반에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이런 실증주의의 경향은 벩송처럼 삶이 먼저이고사유(반성)은 다음이라 한다산업사회를 지도한다고 여긴 패거리가 두 차례의 대전쟁 이후에도 체제를 유지하였다그리고 터전에 사는 이들은 자신들의 지속을 이어가고 기억하는 반세기를 보낸 셈이다그럼에도 전쟁과정에서도 심층으로부터 연구는 있어왔다물론 제국주의에 복속되어 겉보기에 무기생산이었지만, 20세기 이후에 다른 세기를 형성할 전파망원경과 전자현미경의 발명이었다이 둘은 1953년을 기점으로기술과 생명에서 두 가지 길을즉 디지털과 DNA의 길을 열었다. 21세기에 문제제기에서 디지털의 인공지능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유역량을 외부축적(외장하드또는 크라우드(지식 공유위상)를 만들자고 한다제국은 이런 외적공유위상을 지배하는 것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이 크라우드가 현실에서 적용과 활용에서 조립과 조작을 실재성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19세기의 상층의 관념이 현실의 지배에 이용되는 방식과 같이신실재론이란 용어를 끌어다 쓴 것 같다이제는 현실에서 적용과 실행 가능한 현상을 실재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그 실재의 현상에서 재현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크라우드 속에서 관념 또는 가상성을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요즘 떠도는 앵글로색슨 계열의 논문들과 논의들에서 신실재론은 19세기말 제국주의자들이 진리의 진위를 주장하며 정합성 속에 맞는 것을 신실재론이라 하는 것과 닮았다왜 이런 이야기가 학문의 경향으로 유행하고 있을까크라우드 속은 수학의 상징계 속에서 허수를 다루는 것과 닮았는지 모른다삶의 이야기는 달리 전개될 것이다.

    엉뚱하게 이재명 대통령이 산하기관의 공개점검에서 환빠의 이야기를 하여 화제라 한다문헌으로 하는 학문은 이집트의 고대 기록으로부터 시작하여 5천년 전이라 한다그렇다고 여러 삶의 터전에서 같은 시기에 기록 자료들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심층으로 내부로 삶의 과정을 본다는 것은 지층 속에서 유물과 유적들이다나로서는 심정성을 연구하였던 레비브륄이래로 르화구랑이 인류가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와 신석기의 기호들의 발전으로 보았던 것을 흥미롭게 여겼다그리고 그 후배격인 빠스칼 삐끄가 생리학적으로 인간의 입말이 짐승들의 입말과 다른 구강성을 갖는 시기를 200만년전의 호모 에르가스테르까지 소급하여 전개하는 것도 이야기 거리이다그럼에도 들뢰즈가 인간의 내재성의 발현을 소빙하기가 지나면서기원전 1만년전을 언어의 방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재배와 가축기르에서그 다음 사냥의 포획에서 말이다그래서 그가 신석기에서 동기(銅器)로 이행에 가장 빨랐던 현 터키지역인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구리의 발견과 도구화를 생각하는 역사 속에서 한 고원으로 설정하는 것도 흥미있다.

    국가 구별이전에 인종이라고 그 이전에 종족이라고 구별하는 것도 서술의 편의를 위한 것이리라인류는 마지막 소빙하기 이래로 터전의 변화에 맞게 이동을 하였을 것이고삶의 이동이 지구상의 위도가 비슷한 곳에서 일어났을 것이고그리고 그 이동은 오랜 시간을 걸렸는데동물의 가축화와 이동수단으로 동물의 사육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동을 훨씬 멀리까지 이루어졌을 것이다그런 이동에서 상호연관은 현재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정보의 이동이 있었을 것이다생산방식과 생산도구의 이동만큼이나 과거의 지식정보도 이동하여 살만한 북반구의 위도 대()를 형성했을 것이다이런 과정에서 먹거리 다툼에서 싸움이 있었을 것이고이런 싸움에서 먹거리와 잠자리를 지키기 위한 군대와 같은 제도를 갖추고 수장도 필요했을 것이다이런 전쟁의 이야기와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삶과 터전에 대한 변형으로 집단화 또는 소도시화는 당연했을 것이다이 집단에서 정보의 전승을 위해 삶의 양식의 기호화 입말의 문자화도 이루어졌을 것이다인류학을 연구했던 초기 실증주의자들은지나가는 이야기로지자는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해가 지는 서쪽에 관심이 있었고새로운 삶을 동경하는 현자는 동쪽에 관심이었었다고 한다해가 지는 쪽에 죽음이후가 있을 것이라는 착각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명은 동쪽에올 것이라고 것도 착각이지만관심의 차이는 비슷한 위도 대에서 삶의 터전의 양식을 달리 했을 것이라 상상하였다동쪽의 끝에 있는 우리나라현자의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을까이런 말을 했을 때 이미 환빠라는 소리를 들었다그러나 청동기와 같은 시기에 고인돌의 유적이 세계의 40% 이상이 우리나라에그리고 많은 수가 서유럽에 있다는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했다.

    서양의 자의식의 발현은 데카르트시대인 16-17세기프랑스어로 문헌을 남기기 지작한 몽테뉴부터라고 한다우리나라에서는 이보다 일찌기 언어가 아니라 입말이 문자화하였다는 것이다입말의 문자화를 갖는 15세기의 훈민정음이었다삶의 양식을 터전의 방식에 맞게 표현하는 것은 중요했을 것이로, 1우리나라의 상층은 한자로 표기해야한다고 여겼다상층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이 서로 같은 문화를 형성했다고 여겼지만백성은 달리 살았다프랑스에서 대혁명에서 상층과 다른 제3신분이 등장한 것은프랑스어 입말의 문자화가 이루어진지 200여년이 지나서였다우리나라는 상층의 지배가 16세기말 17세기 초 왜와 청나라 전쟁에서 무너졌음에도백성이 일어서지 못했다우리 입말의 문자화가 없었다프랑스에서 18세기 말 혁명은 일부 신부와 지식인들이 스스로 제3신분으로 자처하면서 이루어졌다우리나라는 16세기말 17세기 초 두 전쟁 후 피폐해진 나라에서 200여년을 지나면서도 상층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다시 일본제국주의에 먹힘으로써그때서야 지식인이 각성하였다이로서 만주로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선구자들이 민중 또는 인민을 토대로 한 공화국을 생각하였다고 한다여기에 환빠가 있다이들은 남녘의 지배층들이 일본과 미국의 지식에 예속되어 앵글로색슨 학문을 수용과 달랐다만주의 선구자는 한자가 아니라 한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서울을 중심으로 일본 수용자들은 백성의 발현보다일본 지식에 함몰되었다지금에 미국 지식이 중요한 것도 마찬가지이다만주로 간 선각자들이 공화정을 바라면서도 한문 투로 글을 남겼는데훈민정음이래로 우리 입말을 널리 이롭게 하지 못한 안타까움도 있지만그나마도 망국 속에서 한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그런데 이들 선각자들이 중국과도 일본과도 달리 생각하는 사유들을 남긴 전승이 해방 후에 단절되었다일제의 잔재와 앵글로색슨 학문이 성행하면서선진 유가적 전통에서 나온 공화정이라는 의미는 비판을 받고미국 제국을 수용하면서 인성자유주의가 아닌 시장자유주의인도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가 서구 사상인 것처럼 지배하였다이런 경향은요즘도 철학계의 90%정도가 앵글로색슨이라는 것과 같은 경향이다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19세기말 신실재론을 내재하고 있으면서, 21세기 크라우드 정보시대에도 신실재론의 유행을 따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러 차례 이야기 했지만우리가 자율성과 자발성을 갖고서 입말을 하고 있으면서 문자화와 소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이 시대에도 9대 1정도의 사유 방식의 차이가 있는데이에 비해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자연배후학 대 신()배후학심층 대 상층의 비율이 51 대 49로 변환의 시대가 되었다삶과 터전입말과 문자화가 자율성과 자발성을 통해 인민이 토대로서 기본심급과 인민의 평결과 계약(제헌헌법)으로서 최종심급의 공화정을 이룰 때이다이런 시대의 변역(變易)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문제제기를 하였다고 본다. AI의 저장고인 크라우드를 이용하는 입말의 소통은벩송의 말대로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하지만속도와 강도의 노력은 우리 스스로 크라우드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세계 문화의 새로운 변역(變易)은 동쪽의 문화에서 있을 것 같다.

(5:02, 58WME) (5:22, 58WMC)

     덧우리나라에 오랜 전통으로 선도(仙道)가 있었다고 한다왕권국가가 생기면서 한문문화권이 들어오고중국을 본뜬 체제가 성립하면서 유학(儒學)과 도가(道家)가 들어왔다고 하며선가는 도가를 닮았지만 선가는 민중신앙으로 남아있다고 한다그리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유학과 더불어 천년을 이어왔다조선 시대에는 유학을 체제의 정통을 삼으로면서 스님은 천민화되어 가다가 선도와 결합하는 것이 조선 말기라고 한다조선 시대에서 상부세력의 다툼은 조광조이래로 사림파와 사장파로 갈라졌고제도 밀려나기 시작한 사림파인 남인은 실학(실증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백성이 근본으로 여겼다고 한다임란과 호란이후에 노론의 지배는 유교를 체제유지에 이용하였다가일본 제국주의에 병탄되었다이 사림파의 후예들인 남인들이 공화정을 선호하였다그런데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한계를 보았고일부는 인민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입말을 통한 자주성을 찾으려했다고 한다이런 만주의 운동에서 고대의 상고사에 관심과 민족주의의 맥을 이어가고자 하여 대종교와 연계되기도 하였으며이런 사상이 환빠와 연결되었던 것 같다일본과 미국을 통한 앵글로색슨의 신스콜라주의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세기 이상을 지배한 경향이었다유럽이 보기에 우리나와 중국에서체제의 제도와 사상에서유일신 없는 제도와 체제를 만들었다고 한다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천지건곤음양은 교대라고 보았듯이또한 색()과 공()이 따로 있지 않듯이상층과 심층 사이에 대립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순환과 조화에서 공화를 보았을 같고터전에서는 이제 다양체로서 입말을 쓰는 인민이 평결과 협약의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공화제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6:01, 58WME)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56-비례 형태의 발전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6-비례 형태의 발전

1)

앞에서 헤겔은 정량이 비례로 발전하는 과정에 관해 설명했다. 그 과정은 하나의 추상적 정량이 다른 정량과 관계를 맺어 구체적인 복합적 정량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외연량, 내포량, 그리고 양적 비례[비례량]의 개념이다.

외연량은 추상적 고립적 양이다. 내포량 즉 정도[Grad]는 개별 양이지만, 이미 타자와 비교해서 규정되는 양이다. 마침내 양적 비례에 이르러, 두 정량이 관계하면서 새로운 구체적 복합적 양이 나온다. 외연량의 대표적 예가 길이, 무게다. 내포량의 대표적 예는 경도나 강도가 될 것이다. 양적 비례 또는 비례량의 대표적 예는 비중이다. 알다시피 비중은 무게와 부피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헤겔은 외연량에서 비례량에 이르는 과정은 양적 부정성 개념이 매개된다고 한다. 하나의 외연량은 자기를 부정하면서 타자 즉 다른 정량이 되는 데(일차적 부정) 이 타자로부터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이차적 부정) 비례량이 된다. 이 이중 부정의 과정은 개념의 자기 전개 과정이지만, 이 과정을 매개하는 것은 경험의 발전이다. 우리는 경험 속에서 처음에는 추상적 양을 발견하지만, 좀 더 경험이 발전하면 다른 양의 비례 관계를 통해 이루어져 있는 구체적 복합적 정량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 과정에서 수 개념이 전개되는 것으로 본다. 수는 정량을 대표[또는 대리]하는 것 즉 상징, 그 기호다. 이런 수는 더하기에서 나누기로 발전하는 데, 이런 수의 발전은 수 자체가 발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량의 발전과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더하기가 외연량을 표현한다면, 분수는 내포량을 표현한다.

2)

이제 헤겔은 비례 자체의 발전을 다룬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비례를 다루면서, 양의 관계로서 비례가 발전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비례가 분수로 표현된다고 할 때, 이 분수는 통약 가능한 정수비에서 통약 불가능한 무리수 비로 발전한다고 했다.

헤겔은 무리수 비를 다루면서 주석에서 미분 개념의 정당화라는 거의 100쪽에 달하는 논의를 전개했다. 이 무리수 비가 미분 개념의 핵심이며(그 반대인 제곱비가 적분을 이룬다), 이 무리수 비를 통해 헤겔은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다. 길이는 면으로 발전한다.

이런 발전은 한편으로 본다면, 동일한 정량의 한계에 머무른다. 예를 들어 선이 면이 되고, 속도가 가속도가 된다 할 때, 면은 길이의 제곱이다. 제곱이란 곧 같은 것의 반복이니, 같은 것의 한계 내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자기 반복을 통해 이미 다른 정량이 된다. 즉 길이와 면은 다른 정량이다.

이처럼 어떤 정량이 자기를 반복하는 것을 통해 다른 정량으로 발전하는 것이 곧 통약 불가능한 무리수 비례[앞으로 무리수 비라 하자]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런 무리수 비는 같은 것의 한계 내에 다른 것이 출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 그다음 단계에서 출현하는 비례 즉 다른 정량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비례를 논리적으로 예고하며 그것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비례가 곧 두 다른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 비례 즉 비중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비례는 역시 고유한 하나의 정량이다. 예를 들어 비중은 길이나 무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량이다. 그러나 비중은 두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두 정량은 완전히 다른 서로 무차별한 정량이다. 그러므로 비중은 길이가 면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같은 것의 한계 내에 머무르는 것과는 구분된다. 그런 점에서 수 즉 무리수 비로 표현되는 것과 그 관계를 이제는 수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비중은 구분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해보게 된다. 즉 어떤 정량이 무리수 비를 이루면서도 비중에서처럼 자기와 완전히 다른 정량으로 이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가속 운동의 경우는 특이하다. 가속 운동은 시간의 차원에 한정해서 본다면 거듭제곱의 관계다. 속도가 가속도로 발전한다는 점은 마치 선이 면으로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가속도는 곧 힘이 된다. 시간이 힘으로 발전한다고 보면 여기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되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에서 정량은 척도를 거쳐 마침내 본질에 이르게 되는데, 이런 발전은 우리가 여기서 상상한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논의는 차후에 맡겨놓기로 하고, 우선 정량에서 비례를 거쳐 척도에 이르는 헤겔 자신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3)

이상에서 헤겔은 양적 비례의 개념을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정수 비와 무리수 비가 매개됐는데, 필자가 헤겔의 설명을 미리 앞당겨서 끌어들인 것이다. 나중에 나올 것을 미리 끌어들이는 것은 필자의 고육지책이었다.

필자는 이 비례의 발전과정을 수학적인 분수 형태의 발전을 통해 설명했다. 정수 비와 무리수 비다. 헤겔은 이 발전과정을 비례 형태의 발전과정을 통해 설명했다. 정수 비는 헤겔에서 정비례에 해당하며 무리수 비는 헤겔에서 제곱비례에 해당한다. 필자는 단순히 둘로 나누어 설명을 단순화했으나, 헤겔은 가운데 역 비례를 집어넣어 설명이 좀 더 복잡하고, 매개 과정이 더 잘 설명된다. 이제 헤겔 자신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외연량이 비례가 되면서, 두 정량의 관계가 나온다면, 이 정량의 관계는 그 비례의 형식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이 과정을 헤겔은 미분 개념을 길게 다룬 다음에 양적 비례라는 장(1부 존재론 2편 양적인 것, 2장 정량 3절 무한성에 이어서 3장에 해당한다)에서 다룬다. 여기서 헤겔은 비례의 다양한 형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즉 정비례와 역 비례 그리고 제곱비례다. 3절 제목인 제곱비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실은 이 부분이 미분 개념을 다루는 곳이다.

비례에서 두 정량이 관계한다. 두 정량은 이제 서로 무차별한 정량이 아니라 비례라는 관계 속에 묶여 있으니, 여기서 두 정량은 비례의 계기가 되며, 각 정량은 타자를 통해서 규정되니, 타자를 매개해서 자기 내로 복귀한다고 할 수 있다.

“두 정량은 본질상 외적인 양들로서 서로 관계하지 않는다. 각자는 그 규정성을 다른 것과 관계 속에서 갖는다. 따라서 각자는 그 타자 존재 속에서 자기 내로 복귀한다. 각자가 무엇인가는 타자 속에 들어 있다. 타자는 각자의 규정성을 이룬다.”(논리학 재판, GW21, S. 310)

4)

헤겔이 비례 형태의 발전을 다룰 때 주요 개념 장치는 곧 수 개념의 두 계기인 총수와 개수의 관계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개수는 단위가 몇 번이나 반복되는가를 말한다. 이는 집합 개념에 속한다. 반면 총수는 이 반복된 단위가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규정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7이란 수는 개수로 보면 1이라는 단위가 7번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지칭하는 말 ‘일곱’은 7개의 개수 전체를 지칭하는 고유한 말이다. 이 ‘일곱’이 총수다.

이제 x와 y가 정비례 관계[y=ax]에 있다고 할 때, 이런 비례 관계 속에서 x, y 두 계기 중 y는 독립적인 정량이 아니라 이 비례 관계에 묶여 있는 계기로 규정된다. 즉 y(종속 변수)는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x 즉 독립 변수는 무차별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 비례 지수 a는 x를 a 번 반복하라는 의미이므로, 개수다. 이때 반복되는 단위는 곧 총수 x이다. 즉 x가 a 번 반복된다. 이때 a는 x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규정된 정량이다. 총수 x가 무차별한 정량이듯이 개수 역시 무차별한 정량이다.

y는 x를 a 번 반복해서 나오는 수이므로, a와 마찬가지로 개수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수는 단순히 개수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체를 지칭하는 총수가 된다. 지수는 총수이자 개수로서 두 계기를 동시에 지니지만, 지수의 두 계기 x, a는 각기 하나의 계기만을 지닌다. x는 총수로서만 의미를 지니고, a는 개수로만 여겨진다.

5)

직접 비례에서 개수 a와 총수 x가 나뉘어 있고 서로 무차별한 데, 양자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성립하면서 지수와 총수가 통일을 향해 다가가면서 새로운 비례가 출현한다. 직접 비례에 이어서 출현한 비례는 역 비례다. 역 비례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a= x*y이다.

여기서 x와 y는 서로 무차별한 독립적 정량이면서도 대립적 관계에 묶여 있다. 하나가 줄어들면 그만큼 다른 하나가 늘어나며 하나가 늘어나면 다른 하나는 감소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는 타자 속에 자기의 규정을 가지며 타자의 규정을 자기 속에 품는다. 타자를 자기의 비-존재라 할 때, 자기는 자기의 비-존재 속에 속하며, 타자의 비-존재 때문에 자기가 존재하면서 타자의 비-존재를 자기 안에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비례 속에 서 있는 크기들 가운데 하나는 자기를 연속해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서 이 하나의 크기는 그것과 다른 측면 즉 개수의 총수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 이 하나의 측면은 다른 측면으로 부정적 측면으로 부정적 방식으로 연속된다. 하나는 자기만큼 티자 속에서 지양된다. 각자는 개수로서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다. 각자는 다른 것이 줄어드는 만큼 존재한다. 각자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것을 포함한다.”(논리학 초판, GW11, S. 182)

지수는 그 자체로서는 직접적 정량이지만, 이미 그 내부에서 x, y의 구별이 출현한다. 각 구별된 계기는 전체의 계기이며, 잠재적으로 전체다. 비례 지수 a는 양자가 변화할 수 있는 한계가 된다. 각자는 자기의 한계에 다가가지만 아무리 가더라도 다가가지 못하니, 각자는 잠재적으로 한계이지만, 이는 무한진행이며 그 도달은 다만 피안이나 당위에 머무른다.

“지수는 이런 직접적 규정 속에서는 비례의 두 측면이 지닌 한계이며 이 한계 내에서 두 측면은 상호 대립적으로 증가하고 감수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지수는 그 한계, 두 측면의 비-존재를 이룬다. 왜냐하면, 지수는 존재하는 전체이지만, 두 측면은 다만 전체인데 한 면에서는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수는 두 측면이 무한히 다가가는 두 측면의 피안이며, 무한진행의 악무한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316)

지수는 두 구별된 계기에 대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피안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정량이다. 그러므로 지수는 피안이 현존하는 것이다.

“이런 양자가 다만 점차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뿐인 무한자는 곧바로 긍정적 차안으로서 출현하며 현현한다. 그것이 곧 지수의 단순한 정량이다. 이 속에서 비례의 두 측면이 부착되어 있는 피안이 도달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316)

직접 비례에서 의존 관계는 일방적이다. 그러나 역 비례에서 두 정량의 의존성은 상호적이다. 그러므로 각각은 한편으로 독립적 정량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벗어난 정량이다. 이 가운데 독립적인 것은 총수가 되고 의존적인 것은 개수가 된다(x가 총수이면 y는 a/y의 개수를 지닌다). 어느 것이 총수가 되든 무방하지만, 자기를 총수라 하고 타자를 개수라 한다면 그 자신 속에 총수의 측면과 아울러 개수의 측면을 지니게 된다.

정비례에서 총수와 개수는 각기 독자적이고 서로 무차별한 정량이었다. 역 비례에서 총수와 개수의 통일이 출현하지만, 이런 통일은 다만 직접적이어서 교대적으로 한번은 총수가 되고 다른 한 번은 개수가 될 뿐이다. 총수와 개수가 완전한 통일을 이루는 가운데 제곱비례가 등장한다.

6)

헤겔은 역 비례를 거쳐 제곱비례를 설명하는데 이 제곱비례가 앞에서 미분 개념을 다룰 때 출현했던 것이다. 그 기본 형식은 x*x=x²의 형식인데, 여기서 x²이 곧 비례의 지수가 된다. 이 형태는 한편으로는 정비례와 닮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 비례와 닮았다.

즉 지수 x²이 총수 x에 따라 변화하고, x는 독립 변수이고 x²은 종속 변수라는 점에서 정 비례를 닮았다. 그런데 이 제곱비례에서는 총수와 개수가 서로 같다. 그에 따라 어느 것이 총수이고 개수이든 무방하며, 자기 안에 자기의 비-존재인 타자를 포함한다는 점에서는 역 비례와 닮았다.

“이제[제곱비례] 개수는 다만 총수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서 정립된다. 이것이 제곱비례에서 나타나는 경우다. 제곱비례에서는 그 자체에서 개수인 총수가 동시에 총수로서 자신에 대립하는 개수가 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318)

이런 제곱비례에서 지수는 총수의 제곱인데, 총수가 의미하는 정량과 지수가 의미하는 정량은 서로 다른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총수가 선이라면 지수는 그 제곱 즉 면을 의미하게 된다. 면과 선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이행한다는 생성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정량은 제곱 속에서 자신을 지양한다. 왜냐하면, 정량은 그 자신에게 타자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신의 타자는 동시에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통해 제한된 것이다.”(논리학 초판, GW11, S. 185)

그러나 선은 면의 한계, 그 끝이라고 본다면, 이 제곱비례는 곧 면이 자기를 통해 자기를 생성한 것이 되며, 자기의 끝, 타자로부터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 된다. 비례는 이미 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외연량처럼 추상적인 자기 관계가 아니라 타자에 대립해서 자기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타자를 통해 자기가 규정되는 제곱비례에 이르면 질적인 것이 비로소 완전하게 출현한다. 제곱비례의 운동은 자기가 자신을 부정하고 다시 자기로 복귀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7)

제곱비례를 넘어서면 비례는 마침내 완전히 다른 정량의 관계가 된다. 이때 비례는 새로운 정량이 되며, 두 정량의 관계는 더는 수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것이 척도다.

질적인 것은 자기를 지양해서 양적인 것으로 된다. 질적인 것은 타자에 대립해서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빨간색이 아닌 것에 대립해서 빨간색이 된다. 질적인 것은 일반적 성질로 발전하고, 두 가지 성질의 관계를 통해 대자 존재가 출현하면서 양적인 것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양적인 것은 정량으로 발전한다. 이 정량은 다시 두 개 정량의 관계를 통해 비례로 발전한다. 이렇게 해서 양적인 것은 질적인 것으로 복귀한다.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운동,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것으로, 그리고 양적인 것에서 다시 질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운동을 통해 마침내 척도가 출현한다. 이 척도는 서로 다른 두 량의 관계다. 예를 들자면 무게와 부피의 관계인 비중과 같은 것이다. 이 서로 다른 두 량은 제곱비례를 넘어서 두 정량의 비례로 출현한 것이다.

두 정량의 비례를 통해 이제 등장한 새로운 정량은 앞에서 다룬 정량과 구분된다. 앞에서 질적인 것이 일반적 성질을 거쳐 대자 존재로 발전했듯이, 여기서도 그런 발전이 일어난다. 외연량은 추상적인 개별적인 정량이었다면, 이제 등장하는 새로운 정량 즉 척도는 특수한 정량이다. 전자가 어떤 개별자에 한정되는 것이었다면, 이제 척도는 일반성을 지닌 정량이다. 그러나 마치 성질의 일반성이 특수한 주관적 일반성이듯이, 이 척도 역시 특수한 주관적 일반성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55-미적분은 정당한가(4)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5-미적분은 정당한가(4)

1)

이상에서 헤겔은 뉴턴의 미분 증명이 이론적으로는 다른 미분 증명보다 탁월한 점을 제시했다. 그것은 페르마, 라이프니츠, 칸트 등이 여전히 무한소나, 사라지는 크기 개념에 매달렸을 때, 뉴턴은 최종 비례라는 개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미분은 곧 최종 비례이다.

그런데 헤겔은 뉴턴이 이론적으로 확립한 이런 최종 비 개념이 실제 계산 과정에서는 무시되고 말았다고 말한다. 헤겔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①계산을 편리하게 한다는 욕구가 미분 계산이 지닌 문제점을 간과하게 했다.

헤겔은 뉴턴이 범한 오류를 곱하기 즉 x*y의 미분을 끌어낸 증명에서 발견했다. 이 곱하기의 미분은 (x+1/2dx)(y+1/2dy)-(x+1/2dx)(y-1/2dy)이다. 뉴턴은 그 답이 xdy+ydx라고 했는데 사실은 dxdy가 추가돼야 한다.

그런데도 계산상의 욕구가 뉴턴이 자기 답이 오류라는 것을 무시하게 했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뉴턴은 마찬가지로 미분 계산에서 첫 번째 항을 제외한 나머지 항은 그 값이 사소하기에 계산의 편의를 위해 버려도 무방하다고 보았다고 한다.

② 운동의 함수를 보면, 등속 운동은 v=ct 로 표현되고, 등가속 운동은 s=1/2at²이며 저항은 3차 함수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뉴턴은(이는 사실 라그랑쥬에서부터 유래하는데) 미분을 위한 전개식에서 첫 번째 항은 등속 운동을 의미하고, 두 번째 항은 등가속 운동, 세 번째 항은 저항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것은 전개식의 각 항에 질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예를 들어 낙하운동의 속도를 구하는 미분에서는 첫 번째 항 속도와 무관한 두 번째 이하의 항은 관계없으니 무의미한 것이라 보면서 제거했다는 것이다.

③세 번째는 카르노처럼 미분 계산에서 나오는 이항 정리에서 각 항은 동일한 비례가 반복되는 것에 불과하니, 버려도 된다는 주장이다.

2)

이어서 헤겔은 라그랑쥬의 입장도 소개하는데, 그는 뉴턴에 귀속되는 이유 중 ②을 포함하여 새로운 이유를 갖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미분 계산 가운데 이항 전개에서 나오는 각 항은 그다음 모든 항의 합보다 크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은 점차 미분의 거듭제곱이 더 커지는 것인데(예를 들어 dx, dx², dx³ …) dx가 아주 작은 수이니 그 제곱은 제곱으로 작아지기 때문이다. 라그랑주가 들고 있는 이 이유는 사실 첫 번째 항을 제외한 나머지 항은 그 값이 사소하다는 주장과 같은 주장이니 주장①에 통합해도 될 것이다.

라그랑쥬의 주장을 제쳐 놓으면, 남은 것은 뉴턴이 말한 세 가지 이유다. 이 가운데 ②, ③ 주장은 그 주장 자체가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그럴 것 같지 않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뉴턴이 정말 그랬을까 싶은데, 일단 헤겔은 그렇게 파악한다는 사실만 말하고자 한다. 헤겔 자신도 그런 주장을 소개만 할 뿐, 정당한지는 따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핵심은 역시 첫 번째 주장에 있다. 뉴턴은 이론적으로는 최종 비례라는 개념을 끌어냈으나, 실제 계산에서는 다시 최종적 크기, 또는 사라지는 크기라는 개념으로 되돌아가면서, 라이프니츠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항은 크기가 작으므로 버려도 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헤겔은 뉴턴이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크기로 되돌아간 것은 수학적 증명 과정에서 dx와 dy가 비례 관계로 묶이지 않고 각자 독립적으로 출현하므로, 이를 최종 비례의 계기로 보지 않고, 사라지는 크기로 파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헤겔은 미분 계산에서 dx, dy는 단적으로 dy/dx의 계기로서만 여겨져야 하는데도 “특히 그런 기호를 적용하는 데서 기계적으로 계산하는 가운데 미분 계수의 양 측면[dx, dy]이 서로 떼어 내진다는 것으로부터 그런 계산이 끌어내는 장점이 사라진다”(논리학 재판, GW21, S. 265)고 한다. 여기서 그 계산이 지닌 장점이란 곧 미분을 비례로 이해함으로써, 미분 계산이 부딪힌 모순이 해결되는 장점을 말할 것이다.

3)

이상과 같이 헤겔은 뉴턴의 미분을 이론에서는 최종 비로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용에서는 이를 다시 사라지는 크기로 이해하는 잘못을 서술한 다음, 최종 비의 개념이 비례의 한계라는 개념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례의 한계란 곧 dy/dx가 질적인 크기로서,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한계는 곧 가변적 크기의 함수 즉 원래 함수 관계에 있는 x, y 즉 F(x)가 지닌 한계다. 질적 한계(dy/dx)를 이루는 두 요소 dx, dy는 오직 이런 관계 속에서 계기로서만 존재하며 더는 독자적인 정량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말했듯이 정량에서는 한계가 자기에 외면적이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스스로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 이런 정량은 그 한계 즉 규정이 자기에 외면적이니, 서로 동일하면서도 서로 무차별하다. 여기서 독특한 양적 관계 즉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이중성이 출현한다.

그러나 비례에 이르면, 한계는 다시 내면화하면서 고정된다. 하나의 질적인 한계 즉 어떤 규정은 내면화되는 동시에 다른 질적 한계나 규정과 대립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이제 하나의 비례 규정은 타자와 대립해서 자기를 규정한다.

이런 비례의 한계 개념에서는 앞에서 말했듯이 dx가 0으로 수렴하더라도, 비례의 한계 즉 dy/dx는 0/0이 아니라 일정한 값을 지니게 된다. dx 즉 증분은 끊임없이 0에 다가가는 점근적인 것이더라도, 비례의 한계는 일정하다. 그러므로 이런 비례의 한계 개념은 사라지는 크기로서 증분 또는 미분이라는 개념에서 해방된다.

“미분 계산에서 dx, dy로 출현하는 무한소는 어떤 유한적이지 않은, 주어지지 않는 크기가 지닌 부정적 공허한 의미를 더는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적인 것의 질적 규정 즉 비례의 계기 그 자체라는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 ”(논리학 재판, GW21, S. 265)

사라지는 크기라는 개념은 여전히 정량의 개념에 머무른다. 그러나 최종 비, 또는 비례의 한계라는 개념을 통해 진정한 무한의 개념이 출현하며, 정량은 그 자체로서 지양되면서 질적인 크기 즉 비례의 계기가 된다. 헤겔은 이를 “유한한 크기가 무한한 크기로 전환한다”라고 말한다.

“지적된 바와 같이 소위 미분은 비례의 양 측면 즉 정량이 사라짐을 표현하며[사라지는 크기] 남아 있는 것은 양적 비례이어서 그런 한 순수하게 질적인 방식으로 규정된다. 질적 관계는 여기서 사라지지 않으니, 오히려 바로 유한한 크기가 무한한 크기로 전환하는 결과로 나오는 것이다.” ”(논리학 재판, GW21, S. 268)

유한한 크기 즉 정량과 무한한 크기 즉 비례는 서로 다르다. 구체적 예를 들어 원호는 정량으로 본다면, 할선보다 클 수밖에 없다. 할선은 직선이며 두 점 사이에 최단 거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호를 무한한 할선으로 구분하면, 무한한 원호는 무한한 할선과 같게 된다.

또 운동을 예로 들어 볼 때, 곡선 운동과 직선 운동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양적으로 양자는 다르지만, 무한한 크기로서는 양자는 같다. 즉 가속 운동[ungleichfoermige Bewegung]에서 무한히 작은 시간에 지나가는 거리는 등속 운동[gleichfoermige Bewefung]에서 무한히 작은 시간에 지나가는 거리와 같다.

4)

주석1을 마치면서 헤겔은 마지막으로 수학적 방법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옛날의 해석학자는 해석학을 어디까지나 구체적 대상과 관계하여 전개했다. 이때 구체적 대상이란 바로 공간적 관계나 역학적 운동을 말한다. 사실 뉴턴은 경험적으로 증명된 것 즉 갈릴레오에 의해 발견된 낙하 법칙이나 케플러에 의해 발견된 천체 운동 법칙을 그의 미적분론을 통해 정당화했을 뿐이다.

그러나 헤겔 당시 해석학자는 구체적 대상과 관계 속에서 지닌 실질적 의미를 무시하고 전적으로 추상적인 수학적 방식으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이를 모든 대상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 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수학의 지위를 경험을 넘어 고양하면서 수학적 사유에서 자연법칙을 끌어내려 했다.

“그런 명제는 역학의 근대 해석학적 형태에서는 전적으로 계산의 성과로서 소개되며 그런 명제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즉 어떤 실존이 그런 명제 자체에서 독자적으로 어떤 상응하는 의미를 지니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또한 그런 것의 증명도 고려하지 않는다.””(논리학 재판, GW21, S. 271)

“단순한 계산을 통해 경험을 넘어서 제시되는 법칙, 어떤 실존도 갖지 않은 실존 명제를 발견하려는 시도가 학문의 승리로 과장되고 있다.””(논리학 재판, GW21, S. 271)

“그와 같은 가상을 사람들은 단순한 믿음이나 경험적 지식보다 항상 더 우선시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이 단순한 주머니 돌리기 요술이나 증명하는 체하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여기며 그 아래에 뉴턴의 증명조차 집어넣는데 굳이 숙고해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논리학 재판, GW21, S. 272)

그러나 헤겔은 이런 수학의 월권을 비판한다. 수학은 경험을 통해 이미 발견된 법칙을 정당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미적분론은 자기 제곱이 가능한 대상 즉 공간이나 역학적 운동에서나 타당할 뿐이라고 한다.

5) 이상 헤겔이 수학적 무한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석 1에서 전개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주석 2와 주석 3은 재판에서 추가한 것이다. 주석 2는 방정식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제외하고는 주석 1의 내용과 거의 합치한다. 주석 3은 적분 개념을 통해 다시 수학적 무산성을 소개하는데, 주요 내용은 미적분은 수적으로는 거듭제곱의 함수에서 적용되며 구체적으로는 공간 운동이나 역학적 운동에 적용될 수 있을 뿐, 모든 운동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미 주석 1에서 충분히 설명한 부분이라 더 구체적인 소개는 생략하려 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54-미적분은 정당한가(3)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4-미적분은 정당한가(3)

1)

앞에서 헤겔은 자신의 진정한 무한성 개념을 소개했다. 이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곧 두 정량 사이의 관계 또는 비례다. 여기서 각 계기는 다른 계기에 관계하여 규정되는 것이므로, 이런 관계는 질적인 것으로 된다.

이 질적 크기는 수적으로는 분수로 표현된다. 이런 무한량 가운데 거듭 제곱의 관계에 있는 것이 곧 분수 가운데 정수비로 환원되지 않는 루트나 파이로 표현되는 분수다. 수적인 제곱 관계는 구체적으로는 길이나 면적, 부피의 관계나 물체의 공간적 운동을 표현한다. 바로 이런 거듭제곱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 미적분이다.

헤겔은 이처럼 미적분이 적용되는 무한량, 그 가운데서도 거듭제곱의 관계를 소개한 다음, 드디어 미적분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때 특히 뉴턴의 방식에 주목했는데, 그 이유는 뉴턴에 이미 진정한 무한성 개념이 비록 뉴턴 자신은 알지 못했더라도 출현했다는 것이다. 헤겔은 “그 규정의 발견자(즉 뉴턴이다)는 그 사상을 개념으로 아직 정초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적용할 때에는 그와 같은 더 나은 상태에 모순되는 방편이 필요했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3)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뉴턴이 발견하지만, 자각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2)

뉴턴은 미적분을 유출법이라고 했다. 이 유출법의 방식은 그 이전(페르마와 데카르트 그리고 뉴턴의 스승 배로우에 이르기까지)의 무한소 개념에서 기초하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무한소 또는 “불가분적인 것이라고 이해한” 무한 개념을 뉴턴은 다르게 이해한 것이다. 즉 “사라지는 가분적인 것”(논리학 재판, GW 21, S. 253)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뉴턴은 이 사라지는 것이 단순히 정량이 아니라 정량의 관계 즉 비례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그 점은 나중에 보도록 하자)

우선 미분법을 이해하기 쉽게 다음과 같은 도해를 보기로 하자. 아래의 도해에서 보듯이 곡선 F(x) 상에서 점 p1, p2가 있다고 할 때 두 점을 이으면서 곡선을 자르는 할선의 기울기는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작은 삼각형의 세로/가로 곧 F(x+h)-F(x)/ h이다. 이 식을 풀어서 두 번째 항 이하를 버리면, 미분식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F(x)가 이차함수 x²이라면, 이 할선의 기울기는 (x+h)²-x²/h이며 이 식을 이항 정리를 통해 풀어보면 2x*h/h+h/h*h가 된다. 이 식 가운데 h/h는 1이니 남는 것은 2x+h이다. 미분의 계산법에서는 이 h는 0으로 간주하고 버리며, 그 결과 미분은 곧 2x로 규정된다.

문제는 h/h가 1이라는 것과 남는 h가 0이라면서 버리는 이유 또는 정당성에 관한 것이다 페르마에서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h는 무한소이며 크기가 없는 것 즉 0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h를 버리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h/h다. 이것은 0/0이 되면서 악마의 소굴에 빠져 버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무한소 개념이 가지는 모순이라고 했다.

이 모순을 벗어나기 위해 라이프니츠는 이 무한소를 최소값으로서 0이 아니라, 무한히 작아질 수 있는 크기로 보았다. 그것은 0은 아니고 0에 다가가는 수로 규정되는데, 이것이 바로 앞에서 칸트가 설명한 무한진행이라는 개념이다.

라이프니츠의 무한진행으로서 무한소를 헤겔은 ‘사라지는 크기’ 즉 ‘무한히 가분적인 것’로 규정한다. 이 말 자체는 뉴턴이 쓴 말과 같지만, 라이프니츠에서 사라지는 것은 곧 정량, 크기다. 그러면 h/h가 1이라는 것은 이해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머지 h를 버리는 것이 문제다. 라이프니츠는 이 사라지는 크기를 아주 사소한 크기니, 버려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울프는 라이프니츠를 옹호하면서 실제 측정술에서 산의 높이를 잴 때 순간적으로 부는 바람 때문에 모래가 날아가 사라진 것은 계산에 빼도 무방한 것처럼 또는 일식이나 월식을 잴 때 집이나 탑의 높이를 무시하는 것처럼 미분 계산법에서도 아주 작은 크기는 버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h는 무한히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정한 크기를 가진 것이니, 수학적 엄밀성을 위해서는 버릴 수 없다.

3)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뉴턴은 ‘최종 비’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뉴턴은 이를 사라지는 크기라고도 했는데 여기서 크기는 곧 비례를 의미한다.) 즉 h가 아무리 작아지더라도 h/h는 일정한 크기의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다. 아래 도해를 보면, 할선의 기울기가 점차 접선에 다가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h=o가 되더라도 h/h는 일정한 비율(즉 접선의 기울기)로 남는다. 이것이 바로 최종 비이다.

헤겔은 이처럼 일정한 크기가 유지될 때 그 비례를 뉴턴이 최종 비라고 할 때 마음에 품었던 것이라고 본다. 이런 최종 비에서는 분자와 분모를 이루는 두 정량은 독자적인 정량이 아니다. 두 정량은 하나의 관계 속에서 통일되어 있으니, 여기서 두 정량은 비례의 계기에 불과하며, 서로가 아무리 줄어들더라도 일정한 비례를 유지하면서 줄어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계기는 다른 계기를 통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뉴턴이 자기가 말하는 진정한 무한성으로서 비례 개념에 도달했다고 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h/h는 1로 받아들이고 반면 h는 버리는 이유가 정당화된다. 전자는 최종 비이며 h가 아무리 줄어들더라도 비례를 유지하지만, 후자 h는 줄어들면 마침내 0이 되면서 사라지는 것이다.

h가 사라지면서 오히려 미분 계산의 정확성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확성이 오히려 회복된다는 사실은 기하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아래와 같은 도해를 보자.

이 도해에서 보듯이 h가 줄어 들면(h->h’->h’->0′) 할선이 점차 점p에서의 접선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접선이 바로 구하려던 곡선의 기울기 즉 미분이다. 이처럼 기하학적으로 보면, 미분은 기울기가 지니는 한계 즉 극한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비례 아래서 사라지는 크기는 사라지기 전에서도 아니고 사라진 이후에서도 아니며 오히려 그와 더불어 사라지는 가운데 있는 비례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생성하는 크기의 최초 비례는 그것이 생성하는 비례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3)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는 최종 비는 최후의 크기가 지닌 비례가 아니라 한계 없이 줄어드는 크기의 비례가 주어진 모든 유한한 차이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한계다. 그런 한계를 최종 비는 무가 될 만큼 넘어서지는 못한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4)

현대에서 수리철학자 코헨과 바이어스트라세는 미분을 정의하면서 이런 극한 개념을 사용한다. 이 극한 개념은 헤겔이 뉴턴으로부터 발굴한 최종적 비례, 또는 비례의 한계를 의미하며 그런 한 코헨과 바이어스트라세는 헤겔의 개념 분석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겠다.

“한계라는 표상에는 사실 가변적 크기의 질적 비례 규정이라는, 앞에서 제시된 진정한 범주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그런 가변적 크기로부터 등장하는 형식 즉 dx, dy는 단적으로 dy/dx의 계기로서만 여겨져야 하며, dy/dx 라는 기호 자체는 불가분적인 유일한 기호로 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65)

3)

뉴턴은 이 최종비라는 개념을 이제 ‘생성하는 크기[genita]’, ‘생성의 원리’로 이해한다. 그것은 순간적인 증분이나 감분인데 곧 이 생성하는 크기는 무한소나 무한진행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증분이나 감분은 어디까지나 비례 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적 증분이나 감분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 변화된 운동은 하나의 독자적 정량이며, 뉴턴은 이를 생성의 원리로부터 생성된 크기로 간주한다. 양자는 생성에서 저차적인 질서와 고차적 질서로 구분된다.

이런 설명은 뉴턴이 미분을 이처럼 운동, 생성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을 잘 보여준다. 미분은 어떤 것이 운동할 때 어떤 순간에 운동을 변화시키는 힘을 말한다. 생성된 크기가 어떤 정량이라면, 생성하는 크기는 질적인 것이다. 전자는 현존의 무차별성, 외면성 속으로 이행한 것이며 후자는 타자와 관계 속에 규정되는 계기다. 그러므로 헤겔은 전자와 후자가 수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 다르다 한다. 전자가 x, y로 규정된다면 후자는 dx, dy로 규정된다.

‘사라지는 크기[Letzte Groesse]’ 즉 정량의 무한진행이나 ‘최종 비[Letzte Verhaltnisse]’ 즉 비례의 무한진행은 유사한 듯 보이는데도 마땅히 구별돼야 한다. 정량은 무한히 사라지더라도 일정한 크기를 유지한다. 그것은 결코 0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비례의 무한진행은 비례 자체에서 분자와 분모를 이루는 크기는 비례 관계에 묶여 있어 아무리 줄어들더라도 일정한 비례 관계를 유지하지만, 비례를 벗어나게 되면 각 정량은 독자적으로 줄어들면서 마침내 0에 이르게 된다. 아래 두 인용문을 비교해 보라.

-사라지는 크기

“이런 표상이 사태의 진정한 본성을 표현하는 조건은 정량이 무한진행 속에서 갖는 정량의 항상성이 정량이 사라지는 가운데 자기를 연속하면서, 자신의 피안에 다시 다만 어떤 유한한 정량을 즉 급수[계열]의 새로운 항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4)

-사라지는 비례

“그러나 진정한 무한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행에서는 항상적인 것은 비례다. 그 비례는 아주 항상적이고 자기를 보존하기에 그런 이행은 오히려 다만 그 비례를 순수하게 드러내는 데 성립하며 또한 비례의 두 측면을 이루는 정량이 이 비례 밖에 놓이면서도 여전히 정량이 되게 한다는 사실 즉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규정이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4-255)

헤겔은 이와 연관하여 오일러의 주장을 소개한다. 오일러는 뉴턴의 최종비 개념을 근거로 하여 h/h는 1이지만, h=0이라는 주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무한한 차이[미분]은 다만 정량의 0이지, 질적인 0은 아니며, 정량의 0이더라도 단지 비례의 순수 계기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7)

오일러는 0/0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 산술적 비례와 기하학적 비례를 구분했다. 수학적 비례에서 0/0은 악마의 소굴이 되더라도 기하학적 비례에서는 0/0은 일정한 값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헤겔은 오일러가 기하학적 비례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뉴턴이 최종비라고 말한 것에 해당한다고 본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7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8)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현실 국가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1. 도입부 : 원래 문제로 복귀. 고찰의 방법과 순서(제8권 543a-545c)

 

* 소크라테스는 말로 세운 정의로운 나라와 사람에 대한 논의를 마친 후 제5권에 들어와 애초의 논의 목적 즉 정의와 부정의 중 어느 것이 진정 행복을 가져다주는지를 비교 판정하기 위해 부정의한 나라와 사람을 다루려고 한다. 그러나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끼어들어 그러한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앞서 말로 세운 나라에서 처자 공유에 관해 갖고 있던 자신들의 의문부터 해명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마지못해 그들의 요구에 응하게 되면서 제5권부터 논의는 애초의 계획에서 벗어나 처자 공유가 필요하고 가능할 수 있는 조건들로서 철학자와 철학자 왕정 그리고 그들을 위한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가 다루어진다. 일탈의 형식으로 진행된 위와 같은 논의가 제7권 말미에서 모두 마무리되자 소크라테스는 이제 애초의 계획에 따라 다루려고 했던 주제 즉 부정의한 나라와 사람에 대한 문제를 다시 꺼내든다. 이렇게 제8권은 주제 상 제7권이 아닌 제4권을 이어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543a-545c]

* 소크라테스는 여인γυνή들과 아이παῖς들의 공유κοινός는 물론 모든 교육παιδεία과 전시나 평시 활동에서 남녀가 공동으로 해야 하고 철학과 전쟁 관련 일 모두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이 왕들βασιλέας이 되어야 한다는 것(543a) 그리고 일단 통치자들οἱ ἄρχοντες이 세워지면, 전쟁의 선수ἀθλητής와 수호자φύλαξ로서 그들이 함께 지내야 할 거처οἰκήσεις를 포함하여 소유와 보수μισθός 그리고 임무와 관련해서 그들이 감당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가 동의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543b) 그런 연후 그는 글라우콘에게 원래의 논의를 벗어났다가 다시 여기로 오게 된 사정을 기억해 볼 것을 요구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좋은ἀγαθός 나라와 그것을 닮은 좋은 사람을 세웠음을(543d) 그리고 사실 그보다 한층 더 아름다운καλλίω 나라와 사람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서도 그랬음을 환기시킨 후 제대로 된ὀρθός 그 나라 외에 결함 있는ἡμαρτημένας 네 종류의 나라들과 그 나라들을 닮은 사람들을 모두 살펴보기로 했음을 기억해 낸다.(543e) 그리고 그 목적 또한 누가 가장 뛰어나고ἄριστον 누가 가장 못났는지κάκιστον 의견의 일치를 본 후, 그들 중 누가 가장 행복하고 εὐδαιμονέστατος 누가 가장 못난 자이자 가장 비참한ἀθλιώτατος 자인지를 고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도 확인한다.(544a) 그리고 글라우콘은 그때 폴레마르코스와 아데이만토스가 끼어들어 처자 공유와 관련한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네 종류의 정치체제에 대한 논의가 중지되었다가 여기로 이어진 것이라는 것도 함께 기억해낸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기억을 칭찬한다. 그러자 글라우콘은 레슬링선수처럼 그때와 똑같은 붙들기 자세로 전 같은 질문을 드릴 테니 그때의 주제로 돌아가 네 종류의 정치체제에 대해 말해줄 것을 요구한다.(544b)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요구를 받아 그 네 종류의 정치체제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첫 번째는 우선 크레타체제Κρητική 또는 스파르타체제Λακωνικὴ이고 두 번째 체제는 과두정ὀλιγαρχία 체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체제와 대립하는 것이면서 이것에 이어서 생기는ἐφεξῆς γιγνομένη 민주정δημοκρατία 체제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이 모든 정치체제로부터 벗어나 있는διαφέρουσα 것이자 가장 말기에 이른 질병νόσημα과 같은 체제로서 참주정τυραννὶς 체제이다.(544c) 그리고 세습왕정δυναστεῖαι βασιλεῖαι이나 매매왕정ὠνηταὶ βασιλεῖαι 같은 정치체제들도 있는데 그것들은 저 네 개의 체제들 사이 어디 쯤 속할 법한 것들이다.(544d)

* 소크라테스는 정치체제에 상응하여 인간 성격의 종류ἀνθρώπων τρόπων εἴδη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최선자정으로서 철학자왕정과 앞서 다룬 네 개의 결함 있는 정치체제에 상응하여 개인의 영혼도 다섯 가지로 존재한다. 우선 최선자정ἀριστοκρατίᾳ을 닮은 사람은 이미 설명했듯이 뛰어나고 정의로운 사람이다.(544e) 그리고 이보다 못난 나머지 네 종류의 사람으로서 첫 번째는 스파르타 정치체제에 상응하는, 승리를 사랑하고φιλόνικος 명예를 사랑하는φιλότιμος 인간, 두 번째는 과두정적인ὀλιγαρχικός 인간, 세 번째는 민주정적인δημοκρατικός 인간, 그리고 네 번째는 참주정적인τυραννικός 인간이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살펴 가장 부정의한ἀδικώτατον 자와 가장 정의로운 사람을τῷ δικαιοτάτῳ 맞세워 놓으면 순수한ἄκρατος 정의δικαιοσύνη와 순수한 부정의ἀδικία가 그것을 지닌 사람들의 행복εὐδαιμονία과 불행ἀθλιότης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견주어 보려는 우리의 고찰도 완결될 것이라고 말한다.(545a) 그러면 트라쉬마코스에 설득되어 부정의를 추구할지, 아니면 지금 드러나고 있는 논의에 설득되어 정의를 추구할지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545b)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네 종류의 인간, 네 종류의 영혼을 살피면서 앞서 성품ἦθος에 대한 고찰σκοπεῖν을 시작할 때 방식 그대로 개인ἰδιώτης보다는 정치체제를 먼저 살핀다. 그래서 그때와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도 명예를 사랑하는φιλότιμος 정치체제 즉 명예정τιμοκρατία이나 명예통치정τιμαρχία을 먼저 살피고 그 정치체제와 상응하는 인간을 고찰하고 같은 방식으로 이어서 과두정과 과두정적인 인간, 민주정과 민주정적인 인간을 관찰하고 마지막으로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영혼을 살피겠다고 말한다. 그래야 애초 제기한 문제들을 판정κριτής하기에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54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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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3a – 543b : 이곳에서 동의된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 내용들은 제3권, 제4권에서 다룬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415d-421c)과 임무(421c-427c) 그리고 철학자의 자질(484a-487a)과 철학자 왕(497a-502c)을 다루고 있는 부분을 참고.

* 543b ‘전쟁의 선수athlētēs’ : 403e에서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을 가장 큰 시합의 선수들로 언급하고 있다.

* 543d ‘좋은 나라와 그것을 닮을 좋은 사람을 세웠음을’ : 제5권 서두 449a 참고

* 543e ‘그보다 한층 더 아름다운 나라와 사람’ :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굳이 구분하려고 하면 제2권에서 제4권까지 말로 세운 나라와 나중 제7권에서 제시된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나눌 수 있다. ‘한층 더 아름다운 나라와 사람’은 그 두 나라 중 후자를 가리키는 것이긴 하지만 말로 세운 나라에서 언급된 통치자의 자질을 보면 내용적으로 이미 철학자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 두 나라는 다른 나라가 아니다. 이곳의 표현은 다만 논의의 단계상 말로 세운 나라의 통치자가 명시적으로 철학자임이 드러났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 543e ‘그 나라 외에 결함 있는 네 종류의 나라들과 그 나라들을 닮은 사람들’을 모두 살펴보기로 했음을 기억해낸다. : 제4권 445c, 제5권 449a 참고

* 544a ‘누가 가장 행복하고 누가 가장 못난 자이자 가장 비참한 자인지를 고찰하기 위한 것이었다’ : 제2권 361d 참고

* 544c 크레타체제와 스파르타체제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제2권 제9장-제10장 (1269a30 – 1272b20) 참고. 플라톤은 이곳에서 이 체제를 명예를 사랑하는 정치체제 즉 명예정timokratia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 544c 질병nosēma : 참주정은 플라톤뿐만 아니라 당대 민주정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질병으로 여겨졌고 실제로 그렇게 불렸다. 이소크라테스 <헬레네 찬가> 34 참고.

* 544d 매매왕정ōnētai basileiaiι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정치제제를 ‘관직을 높은 재산 자격 조건에 따라서 임명하고 그들 자신 그러한 자격을 지니는 남아 있는 자들을 임명하는 경우’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예정이라는 명칭을 평가재산timēma에 기반하여 수립된 금권정의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규정하고 있는 이곳의 명예정과 내용상 차이가 있다. 그만큼 명예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명칭은 아니다. 플라톤에게 금권정은 이곳에서는 과두정에 해당한다(550c). <정치학> 제4권 1292b. 플라톤 <법률> 680a-b,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 제10장 참고.

* 544e ‘최선자정’aristokratia : 플라톤의 철학자 왕정에서 왕은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왕의 수가 아니라 그 왕이 철학자인가이다. 플라톤은 직위명이 아니라 실제 최고 권력자dynatēs를 거론할 때 기본적으로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473d) 그래서 플라톤 스스로도 철학자 왕들이 여럿인 체제를 최선자정aristokratia으로 부르기도 한다.(445d) 철학자의 지배라는 점에서 플라톤에게 철학자왕정basileia과 최선자정aristokratia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aristokratia는 이후 정치사에서 귀족정aristocracy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면서 플라톤의 철인왕정이 귀족정으로 불리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귀족정은 귀족이 곧 철학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철학자왕정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이곳 기준에서 보면 높게는 명예정에 낮게는 과두정에 가깝다.

* 545d ‘개인보다는 정치체제들에서 먼저 시작했듯’ : 제2권에서 소크라테스는 대문자 비유를 끌어들여 소문자보다 대문자가 보기 쉽듯이 인간 개인의 영혼에 대한 논의를 나라의 계층에 대한 논의로 확대해 정치체제를 먼저 다루고 있다.(368d-369a). 이곳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나라를 먼저 살핀 후 개인의 영혼을 유추하던 앞의 논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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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권은 나라의 타락 과정과 그에 닮은꼴로 대응해 있는 영혼의 타락 과정을 일련의 연속된 흐름의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제8권에서 플라톤이 의도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타락 과정 각각의 내용을 세부적으로 살피기 전에 그 흐름 전체를 크게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플라톤이 논의에 앞서 타락 과정에 포함된 정치체제 전체를 미리 순서에 따라 제시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점을 고려하여 그 전체 흐름을 내용적으로 좀 더 풀어서 정리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무엇보다 타락은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층 가운데 통치 계층의 타락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통치 계층의 변화는 마치 도미노처럼 계층 간 내분stasis을 일으켜 우선 전사 계층의 변화를 초래하고 끝내는 생산자 계층의 변화로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먼저 통치계층이 이성 능력의 결함에 따라 후계 권력으로 갈수록 통치 능력을 상실하여 전사 역할 정도만을 수행할 정도로 타락하면 철인왕정은 명예정timokratia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통치 기능이 마비됨에 따라 전사 계층들도 점차 본분을 넘어 통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수호자 계층 간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끝내는 그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소수 전사들이 통치하는 과두정oligarchia이 들어선다. 이미 명예심조차 상실하고 부와 권력의 맛을 본 과두주의자들은 권력을 부를 축적하는 최상의 방편으로 여겨 매관매직은 물론 생산자 계층의 재산마저 착취하여 나라는 갈수록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로 양극화된다. 민주정dēmokratia은 이러한 소수 과두주의자들의 착취로 빈곤의 나락에 빠진 민중들이 혁명을 통해 과두정을 무너뜨리고 수립한 정체이다. 민주정에 이르면 기능 분업적 계층은 남아 있어도 적성에 따라 소속을 구분하는 장치는 모두 와해되어 본래 소질이나 직분에 상관없이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추첨에 따라 관직도 맡을 수 있고 전사가 되어 나라를 위해 싸울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방임의 상태에서 모든 사람의 욕구만은 이미 물질적 욕구로 일양화되어 있다. 그에 따라 어떤 일을 하건 부의 획득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 날로 경쟁이 격화되고 급기야 서로에 대한 모함과 소송이 판을 치면서 나라는 극도의 분열과 혼란에 빠져든다. 그러자 이러한 혼란을 틈타 민회를 조종하는 자들 중 가장 사나운 무리들이 가난한 민중을 등에 업고 최고 권력을 탈취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을 장악한 후 빈민층을 구제하기는커녕 되레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이용해 오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몰두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가능케 하기 위해 폭압적인 독재 권력 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민주정은 가장 나쁜 정치체제로서 참주정tyrannis으로 전락한다.

* 앞으로 이러한 타락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미리 염두에 둘 것이 이밖에 몇 가지가 더 있다. 우선 이러한 나라의 타락과정 모두 이를테면 명예정,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에로의 타락 과정 모두 자신이 속한 계층이 본래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해 발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본래의 분업적 계층 자체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자신이 속한 계층의 본래 직분에 충실한 사람들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명예정이 전사 중심의 과두정으로 타락했다고 해서 통치 계층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통치 계층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다 자신의 직분을 버린 채 전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과두정이 민주정으로 변모했다고 하더라도 통치 계층, 전사 계층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들 모두가 자신의 직분을 잃고 생산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타락이라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다만 자신이 속한 계층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들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면서 자신이 속한 계층에서 이른바 주도권을 상실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개인의 타락 과정도 나라의 타락 과정과 마찬가지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영혼 세 가지 부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그들 세 부분의 영혼들 내부 간 갈등이 진행되면서 그들 상호 간의 지배 관계가 점차 다르게 변모한다. 이를테면 명예정적인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영혼이 모두 기개적 영혼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영혼 삼분설에 따라 이성적 부분의 영혼, 기개적 부분의 영혼, 욕구적 부분의 영혼을 다 갖고 있되, 기개적 부분의 영혼과 다른 영혼과의 지배 관계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즉 기개적인 영혼의 부분이 그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결정하는 주도권을 갖고 나머지 부분 이를테면 이성 부분을 도구적으로 이용하고 통제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과두정적 인간, 민주정적인 인간, 참주정적인 인간들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인간들 모두 각기 서로 다른 영혼 부분들을 가지고 있되, 그러한 그들 서로의 관계에서 이성적 영혼 부분이 약화되어 본래의 조화로운 관계가 무너지고 그에 비례하여 타락한 영혼 부분이 다른 영혼 부분을 압도하여 자신의 성향에 맞추어 주도적인 역할을 행사함에 따라 각기 그러한 인간들이 된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이것을 뒤집어 보면 타락 과정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필연의 과정이 아니라 비록 쉽지는 않지만 여전히 온전한 영혼을 보전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언젠가 극복과 반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 즉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함께 보여준다.

* 이밖에 제8권의 논의가 이루어지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점이 또 있다. 그것은 나라의 타락 과정과 개인 영혼의 타락 과정 모두 대문자와 소문자의 관계가 그렇듯이 형식적으로는 서로 대응 관계를 갖고 각기 독립적으로 서술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용에서 보면 그것들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앞서 이상 국가를 다룰 때 나라와 영혼의 유기적 성격을 강조했던 것 그대로 플라톤은 결함 있는 나라들의 변화를 언급하면서도 각각의 나라들과 그 계층을 구성하는 개인들 영혼의 변화를 유기적으로 연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점은 이제 우리가 제8권을 살피면서 지속적으로 주목해야 할 주제 즉 플라톤의 정치체제 변동론이 근대적인 의미에서 일반적인 정치철학적 주제로서 다루고 있는 정체체제 변동론과 그 본질적 성격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점차 밝혀지겠지만 화두 차원에서 미리 이야기하자면 플라톤의 정치체제 변동론의 특징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전제로 두고 성립된 근대적 의미의 정치체제 변동론과 달리 인간 본성의 중층성을 토대로 인간의 내적 영혼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정치체제 변동론 즉 인간 욕망구조의 변화와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그 결과로서 드러나는 정치체제 변동론이라는 점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이른바 영혼의 정치철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즉 정의로운 나라는 계층 간 조화라는 사회적 조건에서만이 아니라 개인들의 내적 상태, 즉 정의로운 영혼에로의 자기 고양이 담보될 때 비로소 가능하고, 부정의한 나라 역시 같은 방식으로 부정의한 영혼들의 내적 관계에 상응하여 그 관계가 본래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에 비례하여 각각 그에 상응하는 부정의한 나라로 전락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최상의 정치체제로 여겨지고 있는 민주정은 본래의 각기 다른 영혼들이 이성 부분의 주도하에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관계에서 최하급의 영혼 즉 물질적 욕구가 주도하는 관계로 전락한 상태 즉 본래의 다양하고도 중층적인 본성 상태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이 마치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물질적인 욕구만 갖고 태어난 것처럼 여기고 있는 상태에서 채택된 정치체제, 다시 말해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궁극적으로는 인간 본성의 고양과 회복을 통해 극복해야 할 정치체제인 것이다.

* 그리고 위에 추가해서 미리 논의해 볼 사안이 있다면 그것은 제8권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나라와 개인의 타락 과정이 실제 정치체제의 역사적 변화와 관련하여 플라톤의 퇴행사적 역사관 내지 그 자신의 비관적인 숙명론을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토인비(A. Toynbee)가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치체제 변화는 비록 타락하는 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그것을 근거로 플라톤이 실제로 정치체제가 그렇게 변화해왔고 변화해 갈 것이라고 여겼다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곳에서 서술되고 있는 타락 과정은 원천적으로 정의로운 나라와 부정의한 나라를 서로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를 판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애초부터 상정이 예고된 것이다. 다시 말해 정의로운 나라가 갖고 있는 특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 부정의한 나라가 있다면 그런 나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방식으로 어떤 점에서 그러한 나라가 되었는지를 드러낸 후 그 결함들과 나쁜 점들을 근거로 그 나라가 좋음과 행복의 측면에서 정의로운 나라와 결코 비교조차 될 수 없을 정도의 최악의 나라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논의 목적상 일종의 설명을 위해 채택된 논리적 심리적 귀결 방식에 따라 이르게 된 나라일 뿐 실제 역사적 전개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그러한 귀결을 이끄는 조건들이 결코 일양적일 수 없고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한, 그 변화의 실제적 방향과 흐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플라톤에게 바람직한 방향과 목표는 분명 주어져 있지만, 그것의 도달 여부는 능력에 따른 가능성의 영역이지 필연의 영역이 아니다. 게다가 누구나 다 인정하듯이 플라톤의 <국가>의 근본 주제가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고려하면 오히려 퇴행사적 역사관보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딛고 일어서 이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진취적인 역사관으로 평가하는 것이 플라톤의 근본 의도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번 밝혔듯이 플라톤 철학은 경직된 정적인 목적론이 아니라 목적을 행한 분투 어린 노력, 가능적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동적인 함양을 강조하는 역동적 목적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말년의 <법률> 또한 가능성 차원에서 현실에 부합하는 최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조건들의 탐색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굳이 실제 역사와 관련지어 생각한다 해도 플라톤이 그린 이상 국가는 아테네 정치사에서 존재한 적도 없거니와 실제 역사적 전개 과정 또한 이곳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타락의 과정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문맥에는 플라톤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역사적 경험들이 분명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플라톤이 제시하고 있는 특정 정치적 변화 국면에 대한 설명들은 실제 일어난 역사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탁월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곳의 서술과 설명의 초점은 정치체제들의 역사적 변화를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행복임을 증명하려는 애초의 논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정치체제와 인간 본성의 유기적 관계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데 모아져 있다. 특히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그러한 해명과정에서 인간의 본성과 관련한 개인의 심리 내지 욕망 구조의 변화가 정치체제를 결정하는 중대 변수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지닌다.

* 이상이 제8권의 논의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미리 염두에 두어야할 몇 가지 사항들이다. 제8권을 살피는 동안 우리는 이러한 사항들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지속적으로 음미하게 될 것이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현실 국가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

  2. 최우수자 통치로부터 명예정으로 체제 변동 : 명예정과 명예정적인 인간(545C-550C)


 

헤겔 형이상학 산책53-미적분은 정당한가(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3-미적분은 정당한가(2)

1)

앞의 글에서 헤겔은 미적분을 정당화하는 개념으로 무한소나 무한진행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무한 개념 즉 진정한 무한을 설명했다. 진정한 무한은 두 정량 사이의 비례 관계이며, 타자를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며 질적인 크기라고 했다.

이런 무한량의 개념은 이미 양적 무한성을 다룰 때 헤겔이 설명한 것인데, 아직 이 무한량이 미적분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런 설명은 주석 1의 후반부에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소개되는데, 이에 앞서서 헤겔은 이런 진정한 무한성의 개념을 수적으로 표현하는 문제에 다시 골몰한다.

무한량은 수적으로는 분수로 표현된다. 헤겔에서 셈은 곧 새로운 수를 낳는데, 더하기 빼기는 정수에 머무른다. 곱하기에 이르면 이미 두 개 정량의 관계가 출현한다. 곱하기는 더하기로 환원될 수 있다. 3*4는 세 번씩 더하기를 네 차례 걸쳐 계속하면 얻어진다. 그러나 곱하기의 진정한 의미는 두 정량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3미터 길이를 폭으로 4미터 이동한 것일 수 있으며, 시간 당 3키로 속도로 네 시간째 달린 거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곱하기는 흔히 더하기로 환원되면서 두 정량의 관계는 감추어지고 마는데, 이 두 정량의 관계는 곱하기를 뒤집은 셈인 나누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누기는 두 개의 정량이 서로 관계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예를 들어 2/7이 그렇다. 두 개 정량의 차이와 동시에 관계가 빗금[/]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2)

나누기를 표현하는 분수는 두 개 정량의 관계라는 점에서 이미 무한량을 표현한다. 그러나 정수비로 환원될 수 있는 분수는 무한량을 은폐한다. 그것은 독자적인 하나의 정량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수비로 환원될 수 없는 분수가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무리수나 통약불가능한 수(예를 들어 원주율)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표현에 이르면 이런 분수가 무한량을 표현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겔은 무한량을 표현하는 두 개의 표현 형식을 비교한다. 이 두 표현 형식은 정수비가 되는 분수에서도 성립하지만, 여기서는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정수비가 아닌 분수에서 그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후자의 측면에서 두 표현 형식의 차이를 살펴보자. 하나는 무한 계열[Reihe: 급수]의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분수 표현이다.

①: 2/7, 루트 2, 파이

②: 0.285714.., 1.141…, 3.14…

②의 표현 형식을 보면, 무한 계열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표현은 ①을 개수[Anzahl]로 표현한 것인데, 이 경우는 정수비와 달리 결코 최종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 표현된 것은 진정한 전체에 비해 모자라며 항을 추가해서 필요한 만큼 더 정확하게 규정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항을 추가하더라도 모자라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 규정은 당위에 불과하며 악-무한 또는 무한 진행을 표현한다.

헤겔은 이런 표현은 “질적인 규정성에 기초하는 것을 개수로 표현하려는 것”(논리학 재판, GW21, S. 244)이기 때문에 그런 모순은 해소되지 않는 모순이라고 한다. 또는 표현하는 것은 정량이고 표현되는 것은 무한이니, 양사의 상이성 때문에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도달해야 하는 한계는 자기의 항 밖에 있다.

반면 ①의 표현 형식을 보면 이런 무한 계열로 표현되는 것이 일정한 합에 이미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합이 곧 분수며 루트며 파이다. 이런 표현 형식에서는 ②의 표현에서 드러났던 무한성이 다시 감추어진다. 그러나 ①의 표현 형식은 이 무한성이 사실은 두 개의 정량의 관계라는 점이 그것도 일정한 비례 지수 즉 질적인 크기를 가지고 있음을 표현한다. 이런 표현은 무한량의 한계를 직접 표현한다.

“급수는 정립된 항 때문에 무한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에 즉 그 항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타자가 그 급수의 피안에 있기 때문에 무한하다.”(논리학 재판, GW21, S. 245)

“그러나 그 급수에 반해서 유한한 표현 또는 그런 급수의 합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결함이 없다. 그런 표현은 급수가 다만 추구하는 값을 완전하게 포함한다. 피안은 도주하는 것으로부터 소환되어서 그런 표현의 본질과 본질이어야 하는 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동이한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45)

3)

헤겔은 여기서 스피노자의 무한 개념을 소환한다. 흔히 유한은 긍정이고 그 부정인 무한은 부정으로 규정되지만, 스피노자는 유한을 오히려 타자의 부정으로, 무한을 자기 긍정으로 규정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스피노자의 무한 개념이 진정한 무한성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스피노자는 이런 절대적 긍정성으로서 무한 개념을 예를 들어 두 개의 원을 통해 설명했다. 즉 서로 부등한 원이며 하나의 원이 다른 원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중심이 다르면서 서로 접촉하지 않을 때 두 개 원 사이의 공간은 일정한 크기를 지닌 것이지만, 그것을 수를 통해 표현하려 하자면 무한한 계열이 필요하니, 바로 이것이 현존하는 무한성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무한에 관한 무한을 급수나 집합으로 표상하는 것을 내버리고 무한히 현재적이고[gegenwaertig] 완전하다는[in sich vollendet] 사실을 위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스피노자는 전자를 상상의 무한으로 후자를 사유의 무한으로 부른다. 이 후자가 진정한 무한성[wirkliche Unendlichkeit]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서 자기 긍정으로서 무한성은 절대적 통일, 부동의 통일이며, 그런 점에서 타자를 매개로 해서 자기 내로 복귀한 자기 긍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고 한다.

4)

이상 헤겔은 진정한 무한성의 개념을 소개했다. 그 무한량은 두 개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이는 수적으로는 분수로 표현된다. 이 분수적 표현을 곱하기의 표현 즉 함수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수적으로 같은 분수로 표현되더라도, 정수비로서 분수와 무리수와 같은 분수는 구분된다. 정수비는 곱하기로는 y=ax와 같은 함수로 표현된다. 여기서 정수비 a는 고정된 정량 즉 개수를 의미한다. 여기서 서로 함수 관계에 있는 두 정량은 “각자 고립적으로 독자적인 정량이며, 그 함수 관계는 그 수[정량]에 본질적이 아니다.” 즉 그 함수 관계는 두 정량에 대해 무차별하다.

물론 이 사이에도 관계가 있으며 그 관계는 곧 무한량이다. 그러나 그런 무한량은 무한성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처럼 관계 즉 비례가 그 정량에 외면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수비에서 무한량은 운동에서는 등속운동과 같은 것이거나 비중(=무게/ 부피)인데, 여기서 미분은 제로라는 점을 생각하면 헤겔이 왜 무한량이 충분히 자기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말하는가가 이해된다.

반면, 등가속 운동 즉 Y=1/2at² 이나 포물선 운동 y²=x 는 이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함수의 양 측면은 특정한 정량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함수 자체가 고정된 정량이 아니라 가변적 크기다. 양자는 제곱 비례하며, 이런 제곱 비례는 비례를 이루는 두 정량과 외면적인 관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관계를 지닌다.

그러므로 여기서 관계하는 정량은 더는 독자적 정량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다른 정량과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고 따라서 타자에 대한 관계를 자기에 내재하는 것으로 함축하고 있다.

헤겔이 미적분을 정당화할 때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바로 정수비와 달리 제곱 비례는 관계하는 정량에 대해 내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함수 관계에 있는 x와 y는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즉 dy와 dx인데 이 표현은 사실 라이프니츠가 무한소, 미분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지만, 헤겔은 이를 y/x에서처럼 외면적 관계가 아니라 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즉 “dy, dx는 더는 정량이 아니며 단지 비례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논리학 재판, GW21, S. 251)는 것이다.

5)

무한량은 두 정량의 관계라 했다. 이 두 정량은 동일한 정량에서 서로 다른 정량일 수도 있고, 종류가 다른 정량일 수도 있다.

처음은 곱해진 것[또는 비례 관계에 있는 것]이 동일한 정량일 때다. 이때 두 정량의 사이는 무차별하며, 외면적이니, 이런 동일한 정량의 관계는 정수비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수비에서도 미적분이 성립하지만, 실상 여기서는 그 의미는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 미분은 0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두 정량이 다른 종류일 때 그 관계는 물질적 결합을 의미할 것이다. 예를 들어 원소의 상호침투적인 화학적인 결합이 이에 속한다. 이런 화학적 결합에서는 하나의 정량이 자기를 지양해서 완전히 다른 정량으로 이행하니, 이는 구조적으로는 미분적 관계이지만(상호 침투가 그런 미적분의 관계를 보여준다), 더 이상 수적인 방식으로 표현될 수는 없다. 이것은 수학적 운동을 넘어선 물질의 구체적 운동에 속한다.

수학적인 미적분이 다루어지는 영역은 이 가운데 특히 동일 정량이 거듭제곱의 관계에 있는 경우다.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곧 거듭제곱 도는 자기 제곱이다. 이제 곱하기가 자기 제곱으로 발전하게 되면, 그 결과 새로운 정량이 출현할 때 이런 곱하기는 자기 자신을 제곱하는 것이니, 자기에 내면적인 것이며 이때 곱해진 것들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비례가 아닌 제곱근의 관계에 있다. 이때 비례는 정수화할 수 없는 무한급수의 형태로 출현한다.

자기를 제곱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길이를 길이로 곱해 면적으로 구하거나 면적을 면적에 곱해 부피를 구하는 것과 같은 운동이다. 물질의 운동 가운데 속도와 가속도, 운동 에너지 사이의 관계도 이런 거듭제곱에 속한다.(여기서 시간은 공간적 길이의 하나로 여겨진다)

“무한은 이런저런 정량으로서 지양될 뿐만 아니라 양 일반으로서 지양된다. 그러나 양적 규정성은 남는다. 그것은 정량의 지반, 원리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데 최초의 개념에 도달한 양적 규정성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51)

미분이 이처럼 공간운동이나 역학적 운동에 한정된다는 사실은 헤겔이 철학의 방법론으로 수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는 까닭이 된다. 하지만, 헤겔이 수학적 방법이 양을 다루는 역학의 영역에서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양적인 것의 영역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은 곧 이런 수학적 방법 즉 미적분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