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7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6)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영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2) 본 교과목 : 철학적 문답법 – 변증술(531d-535a)
[531d-535a]
* 소크라테스는 앞서 다룬 배울 거리들이 본 곡το νόμος을 배우기 위한 서곡το προοίμιον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다. 아무리 그것들에 대단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은 ‘변증술에 능한 자들’οἱ διαλεκτικοὶ이 아니기 때문이다.(531d)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바로 변증술적 대화’τὸ διαλέγεσθαι가 연주하는 바로 그 본 곡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그것은 마치 시각 능력이 마침내 동물들 자체와 별들 자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양 자체 보기를 시도하듯이 누군가가 변증술적 대화에 착수해서 모든 감각을 배제하고 논변을 통해 “각각의 있는 것 자체’αὐτὸ ὃ ἔστιν ἕκαστον를 향해 나아가ὁρμᾶν, 있는 것인 ‘좋음 자체’αὐτὸ ὃ ἔστιν ἀγαθὸν를 지성적 이해νόησις 자체에 의해 파악λαβή하는 것”이다. 즉 그 수감자가 가시적인 것의 끝점τέλος에 도달하듯이, 가지적인 것의 바로 그 끝점에 도달하는 그 여정πορεία이 곧 ‘변증술’διαλεκτική이라 불리는 것이다.(532a-b)
* 그리고 그 여정의 과정들 즉 결박δεσμός으로부터 풀려나기, 그림자σκιά들 쪽에서 영상εἴδωλον들과 빛 쪽τὸ φῶς을 향해 방향을 바꾸기μεταστροφή, 동굴κατάγειος에서 나와 태양ἥλιος까지 올라가기ἐπάνοδος,(532b) 그리고 거기에서 아직은 동식물들τὰ ζῷά τε καὶ φυτὰ과 태양의 빛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있는 것들의 그림자와 물ὕδωρ에 비친 ‘신적인 상들’φαντάσματα θεῖα을 보기 등 앞서 우리가 설명한 ‘기술들이 수행하는 이 모든 작업’ἡ πραγματεία τῶν τεχνῶν은 영혼 안의 가장 훌륭한βέλτιστος 것을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좋은ἄριστος 것을 구경θέ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올리는 힘δύναμις을 가지고 있다.(532c)
* 이와 같이 소크라테스가 본 곡에 대한 운을 떼자 글라우콘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도 받아들이지 않기도 쉽지 않은 일이어서 앞서 서곡에 대해 설명 했던 것처럼 본 곡도 설명해주기를 요청한다. 우선 그는 변증술적 대화τὸ διαλέγεσθαι의 힘δύναμις은 어떤 성격τρόπος의 것이며, 어떤 식으로 분류되고διέστηκεν, 또 어떤 길들ὁδοί을 따라가는지를 묻는다.(532d). 이 길들이 드디어 바로 그곳, 거기에 도달한 사람들οἷ ἀφικομένῳ에게는 길로부터의 휴식ἀνάπαυλα이자 ‘여정의 종착지’τέλος τῆς πορείας와 같은 것이 되는 그곳으로 인도하는ἄγουσαι 길들이기 때문이다.(532e)
*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열의προθυμία야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테고, 이제부터 비유εἰκών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게 보이는 대로 참된 것 자체’αὐτὸ τὸ ἀληθές,ὅ γε δή μοι φαίνεται를 보게 될 테지만 그리고 그것이 진짜 그런지 아닌지는 더 이상 자신 있게 주장할 만한 일이 아니지만, 더 이상은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533a) 그리고 그는 각각의 것 자체 모두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별도의 연구 즉 ’ἡ τοῦ διαλέγεσθαι δύναμις변증술적 대화τὸ διαλέγεσθαι의 힘δύναμις뿐이고 다른 모든 기술들은 사람들의 믿음δόξα들과 욕구ἐπιθυμία들과 관련되어 있거나, 생성γένεσις 또는 조립σύνθεσις된 것들과 관련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러한 것들을 보살피는 쪽πρὸς θεραπεία으로 모두 방향이 맞춰져 있다τετράφαται고 말한다.(533b) 그리고 ‘있는 것’τὸ ὄν에 어느 정도 관여한다고 우리가 주장한 나머지 것들, 즉 기하학과 그에 뒤따르는 것들도, ‘있는 것’을 깨어 있는 상태로 볼ὕπαρ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가정ὑπόθεσις들을 사용하되 그 가정들에 대한 설명λόγον διδόναι은 제공할 수 없어서 그것들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기ἐῶσι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첫 원리ἀρχὴ는 물론 결론τελευτή과 그 중간의 것들τὰ μεταξὺ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짜여진 경우’ἐξ οὗ μὴ οἶδεν συμπέπλεκται 설사 정합성ὁμολογία을 이룬다 해도 결코 앎ἐπιστήμη이 될 수 없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변증술적 연구ἡ διαλεκτικὴ μέθοδος만이 스스로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가정들을 제거하면서ἀναιροῦσα 첫 원리 자체로 나아가며πορεύεται,(533c) 우리가 설명한 기술들τέχναι을 ‘영혼의 전환을 함께 돕는 조력자’συνερίθος καὶ συμπεριαγωγός로 삼고서 그야말로 ‘야만의 늪에’ 묻혀 있는 영혼의 눈ἐν βορβόρῳ βαρβαρικῷ τινι τὸ τῆς ψυχῆς ὄμμα κατορωρυγμένον’을 ‘조용히 이끌어 위로 인도한다.’ἠρέμα ἕλκει καὶ ἀνάγει ἄνω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앞서 설명한 기술들을 우리는 습관ἔθος 때문에 종종 앎ἐπιστήμη이라고 불렀지만, 이것들에게는 믿음δόξα보다는 밝고 앎보다는 어두운 다른 이름이 필요하여 앞에 어딘가에서 우리는 이것을 사고διάνοια라고 불렀지만, 내가 보기에, 살펴볼 것이 우리 앞에 이토록 많이 놓여 있으므로 이름ὄνομα을 가지고 왈가왈부ἀμφισβήτησις할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533d) 그런 연후 앞에서 그랬듯이, 첫 번째 부분은 앎ἐπιστήμη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는 사고διάνοια, 세 번째는 확신πίστις, 네 번째는 짐작εἰκασία이라고 부르고 뒤의 둘은 합쳐서 믿음δόξα으로, 앞의 둘은 합쳐서 지성적 이해νόησις라고 부르면 충분하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믿음은 생성γένεσις과 관련되고 지성적 이해는 있음οὐσία과 관련되며, 있음과 생성의 관계는 지성적 이해와 믿음의 관계와 같으며 지성적 이해와 믿음의 관계는 앎과 확신의 관계, 그리고 사고와 짐작의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다만 이것들이 대상으로 하는 것들 사이에 어떤 비례ἀναλογία가 성립하는지와, ‘믿음의 대상과 지성적 이해의 대상 각각을 둘로 나누는 것’διαίρεσιν διχῇ ἑκατέρου, δοξαστοῦ τε καὶ νοητοῦ은 우리가 해온 논의의 몇 배나 되는 논의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내버려 두자고 말한다.(534a)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각각의 것의 있음οὐσία에 대해 설명λόγος을 할 수 있는 자를 ‘변증술에 밝은 자’διαλεκτικός로 그리고 그럴 수 없는 자는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제시’λόγον διδόναι할 수 없는 자로서 지성νόος을 갖추지 못한 자로 부르고 좋음τὸ ἀγαθός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즉 ‘좋음의 형상’τὸ ἀγαθοῦ ἰδέα을 설명을 통해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해서 규정할 수 없는 사람,(534b) 그래서 마치 전투에서처럼 모든 논박ἔλεγχος을 헤쳐 나가면서 믿음이 아니라 있음에 의거해서 검토하고자ἐλέγχειν 애를 쓰며 그 설명λόγος을 유지한 채로ἀπτωτί 이 모든 상황을 뚫고 나가지διαπορεύηται 못하는 사람은 좋음 자체αὐτὸ τὸ ἀγαθὸν도 그리고 다른 어떤 좋은 것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사람은 행여 어떤 영상을 포착한다고 하더라도 앎이 아니라 믿음으로 포착하는 것이며, 현재의 생에서 꿈꾸고ὀνειροπολοῦντα 졸면서ὑπνώττοντα 지내다가 여기서 깨어나기ἐξεγρέσθα 전에 하데스에 먼저 도착해서 완전히 잠들 것이라고 말한다.(534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아이들을 논의가 아니라 언젠가 실제로 양육하게 될 경우, 그들이 마치 무리수ἄλογος 길이의 선분들과 같은 상태로 나라의 통치자ἄρχων가 되어 가장 중요한 일들을 주재하는κυρίους 것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질문하고 대답하기를 가능한 한 가장 잘할 줄 아는 자가 되게 만드는’ἐξ ἧς ἐρωτᾶν τε καὶ ἀποκρίνεσθαι ἐπιστημονέστατα οἷοί τ᾽ ἔσονται 교육παιδεία에 그들이 참여하도록 법을 제정할 것을 제안한다.(534d)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자신의 설명이 변증술ἡ διαλεκτικὴ이 마치 갓돌θριγκός처럼 배울 거리들τὰ μαθήματα 위에 놓이고, 이것보다 위에 놓여 마땅한 다른 배울 거리μάθημα는 이제 더 없는 것으로 보이게 했는지를 확인한 후(534e) 배울 거리들에 대한 문제가 드디어 마무리τέλος되었다고 말하고 이제 배울 거리들을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방식τρόπος으로 부여할지를 배정διανομή하는 일이 남아있다고 말한다.(53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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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3c ‘첫 원리archē는 물론 결론teleutē과 그 중간의 것ta metaksy들’ : 변증술적 앎의 총체성은 철학의 총체성이 그러하듯 비록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구체적 개별자들을 하나로 관통하여 존재 세계에 대한 총체적 견지를 가져다주고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개별 존재들 각각의 본질에 대한 원리적인 포착을 가능하게 해준다. 플라톤의 형상은 위계상 최상의 실재 세계를 구성하지만, 철학자 왕에게 그 형상적 앎이 요구되는 근원적인 이유와 목표는 오히려 형상과 무(mē on) 사이에 존재하는, 끝없이 차이를 노정하는 중간의 것들 즉 현실 세계의 인식과 구원에 있다. 즉 형상의 인식은 실천적으로는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변증술을 통해 좋음의 형상을 아는 사람은 마치 전투에서처럼 모든 논박을 헤쳐 나가면서 믿음이 아니라 있음에 의거해서 검토하고자 애를 쓰면서 그 설명을 유지한 채로 현실의 모든 상황을 뚫고 나가는 사람이다.(534c) 변증술이 철학자 왕이 배우고 알아야 할 궁극의 교과인 이유이다.
* 533d ‘이름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 플라톤은 epistēmē와 관련하여 앞서 제5권(474c-480a)과 선분의 비유(509c-513c) 그리고 이곳에서 다소 그 범위를 유연하게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그것을 의식하고 한 말로 보인다. 그런데 본 강해 64에서 살폈듯이 그의 그러한 용어 사용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플라톤 자신 최소한 기하학, 천문학 등 일반 학술technai이 포함하는 dianoia의 학적 수준을 앎이자 지성적 이해로서 일정 부분 평가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해온 논의의 몇 배나 되는 논의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534a)도 인지적 상태들 사이에 성립하는 비례관계가 그 대상들 사이에 성립하는 비례관계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해석을 낳는 부분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이 역시 사고의 대상에 대한 학적인 성격을 일정 부분 인정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강해 64 해당부분 참고)
* 534b 설명을 제시하는 것logon didonai : logon didonai는 플라톤 철학을 설명할 때 핵심적으로 제시되는 용어의 하나이다. 플라톤에게 지성nous을 갖춘다는 것은 특정 입장의 강요나 압박, 선전·선동이 아니라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대화의 방식으로 충분히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 534d ‘무리수 길이의 선분들과 같은 상태로’ : ‘무리수’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alogos’이다. 그것은 logos(정수들의 비율)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비이성적’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일종의 말 유희를 포함하고 있다. 플라톤은 좋음에 대한 설명 또한 이성적 설명을 넘어선 것으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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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증술의 원어 dialektikē는 어원상 ‘대화하다’, ‘토론하다’, ‘끄집어내다’를 의미하는 dialegō에서 파생된 형용사 dialektikos(문답에 능한)의 여성형이다. 그래서 그 말은 명사형으로는 그리스어 사전상 표제어로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이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문답의 기술 즉 he dialektikē technē를 나타내는 하나의 명사 ‘dialektikē’로 사용된 곳은 이곳(532b)이 처음이다. 물론 제논(Zeno of Elea)도 이 말을 문답술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하고 있지만(<단편집> 단편 65) 전거상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고도의 철학적 문답기술로 제시한 것은 플라톤이 처음이다. 이후 철학사를 통해 수많은 철학자들이 쓰고 있는 이른바 ‘변증법’dialetics이라는 이름은 바로 플라톤이 <국가>에서 명명한 이 dialektikē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말 역본에서 dialektikē를 ‘문답법’이 아닌 ‘변증술’로 번역하고 있는 것도 플라톤 고유의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그러한 철학사적 연관도 함께 고려한 것이리라.
* 그러나 dialektikē라는 말이 <국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해서 플라톤의 변증술이 <국가>에 와서야 제시된 철학적 방법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국가>에서 그 변증술을 ‘변증술적 대화dialegesthai에 착수해서 모든 감각을 배제하고 논변을 통해 각각의 있는 것 자체를 향해 나아가, ‘있는 것’인 ‘좋음 자체’를 지성적 이해 자체에 의해 파악하는 것 즉 그 수감자가 가시적인 것의 끝점에 도달하듯이, 가지적인 것의 바로 그 끝점에 도달하는 여정poreia’(532a-b)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증술이 문답의 방법으로 있는 것 자체를 탐구하기 시작해서 지성적 이해를 통해 좋음 자체 즉 좋음의 형상이라는 끝점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 전체임을 말해준다. 이렇게 보면 플라톤의 변증술은 끝점 도달이 핵심이기는 하지만 대화편을 통해 플라톤이 수행하는 진리 탐구의 전 과정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플라톤은 <국가>에서 처음 변증술을 명시적으로 그와 같이 규정한 후 이후의 대화편들 이를테면 <파이드로스>, <소피스트>, <필레보스>, <정치가>에 이르면 이른바 모음(종합)synagē과 나눔(분할)diairesis의 방법을 끌어들여 형상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면서 그 탐문의 과정을 또 ‘변증술’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대화편들에서 거론되는 변증술을 따로 구분하여 ‘후기 변증술’이라고 부른다. 본 강해 중반에서 후기 변증술을 간략히 살펴보겠지만 나눔과 모음을 변증술의 방법으로 처음 제시하고 있는 <파이드로스>는 그 모음을 ‘흩어져 있는 여럿을 이들 모두를 함께 보면서 단일한 형상으로 이끄는 것’으로, 그리고 나눔을 ‘서투른 푸주한처럼 부분 부분을 부숴트리지 않고 형상에 따라 자연적인 마디 그대로 자를 줄 아는 것’으로 정의한다.(265d-266c) 그러나 모음과 나눔의 방법으로서 새롭게 제시된 이른바 후기 변증술이라고 해서 진리 탐구의 전 과정으로서 <국가>의 변증술과 무관하거나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용상 모음과 나눔이라는 표현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 <국가>에서도 형상들의 관계와 위계 그리고 최상의 형상이 다루어지고 있고 내림의 과정에서도 형상들 각각의 진상과 관계가 다시 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동굴의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수감자는 동굴 바깥으로 나와 동굴 바깥 어떤 단일 사물만을 보는 게 아니라 여러 사물들 즉 여러 실재 내지 형상들을 보고 나아가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해와 햇빛을 그 자체로서 본다.(<국가> 516a) 요컨대 동굴 바깥으로 나온 자는 단일 형상으로서 실물을 본 것을 넘어서서 각각의 실물들과 실물들의 복합물로 가득한 지상의 세계 즉 형상들이 결합한 세계는 물론 그 결합의 궁극 원리로서 좋음 자체도 인식한다. 그뿐만 아니라 선분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그러한 과정을 아래와 같이 보다 명시적인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변증술을 통해 “이성 자체가 첫 원리를 포착한 다음 이번에는 이 원리에 의존하고 있는 것들을 고수하면서 다시 결론 쪽으로 내려가되 그 어떤 감각적인 것도 전혀 이용하지 않고 형상들 자체만을 이용하여 이것들을 통해 이것들 속으로 들어가서 형상들에서 또한 끝을 맺는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511b-c) 이 언급은 모음의 방법으로 하나의 유(類)genos를 포착한 다음 나눔의 방법으로 그 유를 종(種)들eidē로 나누되 정의할 부류의 본질적 성질이 드러날 수 있도록 최하종atoma eidē에 이르기까지 나누는 후기 대화편에서의 변증술의 절차와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
* 이렇게 볼 때 플라톤의 변증술은 넓은 의미에서 좋음의 형상에 이르기까지의 참된 앎에 이르는 철학적 문답법으로 규정할 수 있되 그 철학적 문답법이 논의하는 주제와 구체적인 방식에 따라 내용적으로 세 단계의 형태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세 단계는 대체로 플라톤 대화편의 저술 순서에 상응해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플라톤의 대화편은 우연과 편견이 가득한 일상에서 참을 찾기 위한 dialogs 즉 대화에서 출발한다. 그에 따라 특히 <메논>을 비롯한 초기 대화편들은 우선 일상적 믿음과 편견에 대해 비판적 물음을 던지는 방식으로 ti esti 즉 사물과 사태에 대한 ‘정의(定義)’를 근본 주제로 다루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때 그러한 정의를 다루는 과정에서 문답의 방식으로 사용된 것이 이른바 소크라테스의 논박(elenchos)의 방법과 산파술(maieutikē)이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방법들 또한 넒은 의미의 변증술의 하나로서 앞에서 언급한 변증술의 단계별 형태를 기준으로 가장 첫 번째 것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답 끝에 제시되고 있는 마지막 결론은 늘 유보된 상태에서 ‘무지의 지’를 깨닫는 데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점차 이러한 무지의 지에 대한 깨달음은 참된 실재에 대한 앎의 욕구를 다시 촉발시키고 그에 따라 물음은 ‘정의’의 문제를 넘어서서 즉 실재에 대한 탐문으로 이어져 믿음doxa와 구분되는 ‘있는 것 그 자체’to on kath’ hauto‘ 즉 ’형상‘에 대한 앎epistēmē이 보다 진전된 철학적 문답법의 주제로서 탐색되기에 이른다. <국가>의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를 보면 일상의 대화에서 시작한 이러한 탐문의 과정이 앎을 향한 오름길anodos의 모습으로 잘 그려져 있다. 그래서 그 단계의 오름길에서는 어떤 한 부류의 사물들과 하나의 어떤 이데아 내지 형상이 맺고 있는 관계가 논의의 주제를 이루면서 이른바 methesis, parousia, koinōnia라는 용어가 그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것은 초기대화편에서 제기된 ti esti의 물음이 ’무지의 지‘에 대한 깨달음을 넘어서 사물들에 분유된 실재의 흔적을 추적하여 종국에는 그 실재 자체를 적극적으로 발견하려는 탐문으로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파이돈>, <국가> 등 중기 대화편의 주제가 그에 해당하는데 우선 <국가>만 보더라도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를 통해 그러한 실재 내지 참된 앎의 조건과 성격 그리고 그 대상을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특히 <파이돈>에서는 거짓을 폭로하는 논박을 뛰어넘어 참된 앎과 실재로 육박하려는 플라톤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방법으로서 이른바 ‘가정hypothesis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99c-100a) 플라톤은 그곳에서 영혼 불멸을 증명하는 차선의 방법으로 가장 강하다고 판단되는 명제를 가정한 다음 그야말로 정립과 반정립의 방식으로 참에 가까운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보다 상위의 가정에로 끊임없이 고양시켜 그렇게 이른 최선의 원리를 가정하여 그것을 근거로 답을 제시한다. 이것은 <국가>에서 가정들을 끊임없이 제거하면서 첫 원리로 다가가려는 이성 자체의 문답법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점에서 가정의 방법 또한 변증술의 한 형태로 앞서 언급한 단계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변증술의 이 두 번째 형태를 동굴의 비유를 빌려 끝점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언급한다. 즉 플라톤은 그것을 동굴 속 결박으로부터 풀려나기, 그림자들 쪽에서 영상들과 빛 쪽을 향해 방향을 바꾸기, 동굴에서 나와 태양까지 올라가기, 있는 것들의 그림자와 물에 비친 신적인 상들을 보기 등으로 요약한 후 그것을 ‘수학과 기하학 등 예비 기술들technai이 영혼의 전환을 함께 돕는 조력자(533d)로서 수행한 작업’he pragmateia이자 바로 그 끝점 즉 있는 것 중 가장 훌륭한 좋음의 형상에로 끌어 올리는 힘dynamis을 가진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532c).
* 그러나 플라톤은 개별 실재들에 대한 앎에 도달한 것을 넘어 그 실재들 즉 형상들의 결합과 그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영혼의 힘을 더욱 고양시켜 마침내 그러한 관계를 지배하는 종국의 원리를 포착한 후 그것을 통해 그러한 형상들의 결합 즉 존재 세계를 해명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앞서 간략하게 언급한 후기 대화편들에서 제시되고 있는 모음과 나눔의 방법으로서 후기 변증술 즉 변증술의 단계별 형태상 세 번째 것이다. 이 단계에서도 methesis, parousia, koinōnia란 말이 나오는데 이때 그 말은 사물과 형상 간의 관계가 아닌 형상들 상호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이러한 후기 변증술이 비록 후기 대화편들에 와서 구체적인 형태로 제기되었다고 해도 그 변증술의 기본 목표와 전체구도 및 지향은 그 이전 대화편에서도 일정 부분 이미 제기되어 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앞서도 간략히 살폈지만 <국가>의 동굴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는 비록 후기 변증술의 모음과 나눔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을지라도 내용적으로 형상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 세계 해명을 위해 변증술이 수행하는 오름과 내림의 과정을 큰 그림을 그리는 차원에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 이러한 사실은 플라톤이 변증술을 다루면서 사용하는 용어들만 추적해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이 변증술을 규정하면서 그 말을 dialektikē라는 명사형으로 표현하고 있는 곳은 이곳 <국가>가 처음이다. 그러나 <국가>에서 조차 그 말은 532b, 536d 두 군데 정도에서 사용할 뿐, 변증술을 거론할 때면 주로 상용어인 dialektikos(변증술에 능한)와 dialegesthai(변증술적 대화, dialegō의 중간태 현재 부정사. 중간태는 동사가 의미하는 행동이 자신에게 미치는 경우 쓰이는 그리스어 특유의 변화형)을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국가>에서는 변증술을 나타내는 말로 dialegesthai가 훨씬 많이 사용되고 있고(511b, 511c, 525d, 532a, 532d, 533a, 537d, 537e, 539c) 같은 용도로 dialektikos란 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에우튀데모스> 290c, <국가> 531d, 534b, <정치가> 285d). 그에 따라 그 말들은 이른바 후기 변증술을 본격적인 주제로 포함하고 있는 대화편들 즉 <파이드로스>, <소피스트>, <필레보스>, <정치가>에서도 변증술을 거론할 때마다 그 말들은 너무나 당연하듯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말들은 그곳에서만이 아니라 쟁론술과 대비되는 철학적 문답법을 나타내는 말로 이미 <국가> 이전부터 사용되어왔다는 점이다. 물론 그 말들은 상용어라는 점에서 꼭 변증술적 문답의 의미로만 쓰인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메논>에서도 dilektikos가 ‘진리를 답하는 것뿐만 아니라 묻는 사람이 안다고 인정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답하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고(75d) <크라튈로스>에서도 변증술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크라튈로스>에서는 입법가의 일을 잘 감시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dialektikos’변증술에 능한 사람’이 언급되고 있고(389d) <프로타고라스>에서도 소크라테스와 대화자들 사이에서 dialegesthai가 철학적 문답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335a, 336c) 그리고 중기 대화편이기는 하지만 <테아이테토스>에서도 <필레보스>(17a)에서처럼 dialegesthai가 쟁론술eristikē와 구분되는 진정한 철학의 방법임이 강조되고 있다.(167e) 하물며 <필레보스>에는 분명 변증술을 다루는 국면임이 분명함에도 변증술 관련 용어로는 부사형 dialektikōs만 발견되는 곳(17a)도 있다. 서양 역본은 물론 우리말 역본에서 ‘dialectics’, ‘변증술’이란 단어가 수없이 등장함에도 정작 그것의 원어가 꼭 dialektikē가 아닌 이유도, 그리고 변증술 관련 원어 색인에 dialektikē만이 아니라 dialektikos, dialegesthai가 병기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변증술을 해명할 때 최소한 dialektikē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국가> 이후의 논의에 한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 그럼에도 변증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경우 초기나 중기 대화편에서의 문답법보다는 변증술이 명시적으로 명명된 <국가>와 그 이후의 대화편들 즉 모음과 나눔의 방법으로서 후기 변증술을 다루고 있는 <파이드로스>, <소피스트>, <필레보스>, <정치가> 등의 논의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파이드로스>(266b), <필레보스>(16b)에선 ‘변증술이 가장 바람직한 철학적 방법’임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언명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국가> 이후 대화편들 모두에서도 이른바 후기 변증술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논의 주제의 하나로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그 대화편들 모두 변증술과 관련하여 주제적으로 변증술을 나눔(diairesis)과 모음(종합, synagogē)의 방법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국가>에서 언급된 변증술을 다루는 것이 본 강해의 초점이기는 하지만 플라톤의 변증술 일반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위해서 <국가> 이후에 제시된 이른바 후기 변증술을 살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그 기본 개요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 우선 <파이드로스>의 경우는 ‘변증술에 능한 자’dialektikos’를 ‘하나를 그리고 여럿을 볼 수 있는 자’라고 부르고 광기(mania)를 예로 들어 바로 나눔과 모음에 의해 그 구분이 가능함을 설명한다. 즉 모음이란 앞서 인용한 대로 ‘흩어져 있는 여럿을 이들 모두를 함께 보면서 단일한 형상으로 이끄는 것’이되 그 목적은 각각을 규정하면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항상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눔이란 형상들의 결합 관계를 하나로 꿰뚫은 다음 그것에 따라 개별 형상들을 본래의 자연적인 마디 그대로 자를 줄 아는 것으로 정의된다.(265d-266c) 그리고 <소피스트>는 변증술적 앎을 ‘유에 따라서 분리하고 동일한 형상을 다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다른 형상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이 앎을 행할 수 있는 자는 하나의 형상이 많은 – 각각 하나가 따로 떨어져 놓여 있는 – 것들을 관통하여 모든 곳에 퍼져 있음을 그리고 서로 다른 많은 형상들이 하나의 형상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둘러싸여 있음을 분명하게 지각한다. 또 그는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형상이 다른 많은 전체들을 관통하여 하나 속에서 합쳐 있음을 그리고 많은 형상들이 전적으로 분리되어 구별돼 있음을 분명하게 지각한다. 즉 이것이, 그것들 각각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고 또 그럴 수 없는지를 유에 따라서 분리할 줄 안다’고 말한다.(253d-e) 그리고 <필레보스>에서도 모음과 나눔의 방법으로서 이를테면 에로스, 소피스트. 정치가 등을 정의하는 데 변증술이 활용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 변증술은 무엇보다도 어떤 하나의 유genos와 무수한 것들의 중간에 있는 종들eidē이 얼마나 되는지를 밝혀내는 방법임도 새삼 강조된다.(16d-17a) 즉 중간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아는 것 또한 그 분야에 밝은 사람이라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다. 이곳 <국가> 533c에서 첫 원리, 결론과 더불어 변증술적 앎의 대상의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 ‘중간의 것들ta metaksy도 위에서 언급한 중간에 있는 것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게 보면 변증술은 인간의 정신이 실재를 파악하고자 할 때 이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밟을 수밖에 없는 사유의 통로로서 제안된 것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변증술은 플라톤의 실재에 관한 탐문과정에서 부분들로부터 그 부분이 속해 있는 전체에 관한 관심으로 또는 전체 속에서의 부분들의 위치로 관심이 이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볼 수 있다.
* 그러나 이와 관련한 주제들과 논의들은 이미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세부적인 분석은 물론 그것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전개되어 왔다는 점에서 본 강해에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본 강해는 철학적 문답법으로서 <국가>가 다루고 있는 dialektikē의 기본적인 의미와 후기 변증술에 관한 논의들을 최대한 간명하게 살펴보고 추가적인 관심이 있는 독자들을 위하여 해당 대화편들에서 변증술이 다루어진 주요 부분과, 그것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관련 논문들 몇 개를 소개하는 것에 머물고자 한다. 논문들의 경우 국회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에서 제목들을 검색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텍스트의 경우는 원문 역본을 참고해야만 기본적인 학술적 이해가 가능하다.
* <국가> 이후 변증술이 다루어진 주요 전거들 : <파이드로스> 265a-266d, 276e-277c, <소피스트> 252c-259d, 264c-268d, <필레보스> 16a-18d, 55c-59d, <정치가> 260a-263b, 285a-287c, 303d.
* 변증술 관련 우리나라 학자들의 주요 논문들 : 플라톤의 dialektikē와 측정술(박종현), 플라톤의 전기 변증론 연구(김남두), 플라톤의 <필레보스>편을 통해 본 변증술의 성격과 쓰임새(이기백), 플라톤의 후기 변증술 연구(김대오), <소피스트>를 중심으로 한 플라톤 존재론과 변증법 개념(김혜경), 플라톤의 <소피스태스>편에서 변증술과 존재론(김태경), 플라톤의 후기 변증술(김태경), 플라톤의 <정치가>에서 정치술과 변증술의 관계(이성훈) 등.
* 위의 모든 논의들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1) 플라톤은 <국가>에서 변증술을 ‘가정들을 제거하고 모든 앎의 궁극의 기초이자 첫 원리로서 좋음의 형상을 인식하는 기술’로 명시적으로 처음 규정하고 있다. 2) 그러나 문답을 통한 참된 앎의 탐문과정 일반으로서 넓은 의미의 변증술은 이미 대화편 초기부터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방법으로 제시되어왔다. 3) <국가>는 사물과 실재 관계 차원에서 실재에 대한 앎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것을 넘어 형상들의 결합 관계에 대한 견해 또한 큰 그림 차원에서 표명하고 있다. 4) 이른바 <국가> 이후 후기 변증술이란 이러한 <국가>의 변증술의 큰 그림을 토대로 유와 종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현실 존재 세계에 대한 앎에 점진적으로 접근하려는 실제적인 목표를 갖고 제시된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변증술은 여럿을 꿰뚫고 있는 하나로서 최종적 진실인 ‘좋음의 형상’을 포착하고 그것을 토대로 현실 세계 여럿의 본질을 규명해내는 즉 존재 세계 전체에 대한 진실을 최대한 명백하게 밝혀내는 철학 방법이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국가>에서 표명된 ‘좋음의 형상’은 존재 세계를 구성하는 여럿들 각각의 저다움과 그것들의 선하고 조화로운 하나됨을 담보하는 궁극의 원리로서 변증술의 궁극의 목표가 된다.
* 그러나 전체 개별과학에 통달한 신적 존재나 만물 박사라면 모를까 존재 세계 전체에 대한 진실을 하나하나에서부터 원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플라톤의 변증술을 근대 이후 철학과 개별과학의 관계와 관련하여 제시된 철학에 관한 정의들과 연관지어 음미한다면 철학적 방법론의 고전적 시원으로서 플라톤의 변증술이 갖고 있는 의미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철학의 정의로서 두 가지 정도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철학은 여러 개별과학의 기본 개념을 명확하게 하며 서로 다른 개별과학들의 성과를 종합하여 존재 세계에 대한 하나의 종합적인 관점을 갖게 하는 원리적 지식이다”(B. Russell). “철학은 특수과학에서 얻은 인식을 모순 없는 체계로 통일하여 과학에서 사용되는 인식의 방법과 전제들을 그 통일된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보편학”(W. Wundt)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변증술은 세계에 대한 총체적 앎을 추구하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철학적 방법론의 이상적 푯대이자 끝없는 질문을 통해 명명백백한 앎을 추구하는 철학 정신의 토대이다. 그리고 좁은 의미의 변증술의 기본 방법으로서 모음(여럿에서 그것을 꿰뚫고 있는 하나를 포착하는 것)과 나눔(하나로부터 그것이 꿰뚫고 있는 여럿을 구분해내는 것)의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형식논리적 귀납법과 연역법을 넘어 치열한 문답 과정을 통해, 추상적 개념들이 아닌 존재 세계의 실상으로서 형상들의 결합 관계를 해명하는 실질적인 연역과 귀납 능력으로서 철학적 분석과 종합의 토대가 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정치가로서 철학자왕에게 요구되는 측정술metrētikē과 직조술hypanitiē 또한 지행합일의 관점에서 이러한 변증술적 앎을 포착한 후 그것을 토대로 온갖 양상으로 뒤섞여 있는 이른바 현실세계 중간의 것들을 적도(to metron)에 따라 분별 있게 헤아리고 상호 반대적인 것조차 하나로 묶어내는 고도의 실천기술이자 이상적 정치술이라 할 것이다. 이곳에서 철학자왕이 배워야 할 지고의 배울 거리로 변증술이 제시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정치를 바로하기 위함이다.
* 한편 흥미롭게도 크세노폰(Xenophon)의 <소크라테스의 회상>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dialegesthai란 말은 모여서 종에 따라 사물들을 분류하고 의논하는 것에서 나왔다고 말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4권 5장 12절) 이때 dialegesthai의 의미를 단순히 ‘대화하다’로 옮길 경우 뭔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오히려 앞의 논의와 연관하여 생각하면 그 말은 ‘변증술적 문답’으로 옮기는 것이 딱 맞아 보인다. 크세노폰이 인용한 내용이 정말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라면 이것은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후기의 플라톤 사이에 최소한 dialegesthai의 의미와 관련해선 별다른 견해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지엽적이나마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무지의 지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흥미를 끈다.
* 끝으로 플라톤 철학에서 대화와 문답의 방법으로서 변증술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것으로 논의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dialektikē와 dialegesthai, dialektikos는 모두 동사 dialegō에서 나온 말로서 각기 어원상 ‘문답을 나누다’, ‘토론하다’, ‘끄집어내다’, ‘문답에 능하다’ 등을 나타내는 일상적 상용구로 쓰이다가 플라톤에 이르러 명실 공히 플라톤 철학의 방법론 즉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며 진리 내지 해결책을 구해가는 절차 또는 과정’으로 확립된 말이다. 물론 이러한 말들은 점차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방법론으로 구체화되어 가지만, 나중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플라톤 철학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dialektikē의 근본정신 즉 그것이 원천적으로 dialegein, dialogos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갖는 철학적 의미와 가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근본정신을 풀어서 말하자면 곧 1) 대화dialogos라는 가장 기초적이고 일상적인 상황에서 시작하여 일단의 의문을 제시한 후 그 답을 끌어내고 2) 다시 한 발짝 더 나가 그 답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다시 또 그에 대한 답을 내놓으면서 3) 갈수록 고도화되는 추상적 논변까지도 감내해가며 4) 끝내 ‘모두가 진리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답이 나올 때까지 치열하게 질문을 던지고 끝내 설명이 가능한 대답을 내놓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dialektikē가 철학 정신의 빛나는 토대이자 이념적 시원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훗날 테제와 반테제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모순 극복의 논변을 상호지양의 형식으로 끝까지 끌어올려 존재 세계의 기초를 해명하려는 일련의 세계관 철학을 왜 ‘변증법’(dialectics)라 부르는지, 그리고 인간이 다가설 수 있는 지적 궁리의 궁극적인 정점에서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불현 듯eksaiphnēs’(<일곱번째 편지> 341c-d) 직관으로 마주하는 진리의 빛이 왜 불가불 형이상학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도 그리고 그럼에도 왜 설명력을 갖는지도 이미 플라톤의 dialektikē가 함축하고 있는 근본정신을 통해 해명되고 있다할 것이다.
* ‘참고로 dialektikē, dialegesthai가 복수의 사람들 또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 또는 토론의 의미를 갖지만 플라톤 말대로 영혼이 영혼 자신과 나누는 말 또한 대화인 한(<테아이테토스> 189e, <소피스트> 264a-b) 개인이 치열한 내면의 사색을 통해 궁극의 진리를 직관하는 것 또한 진리 탐구의 치열한 과정으로서 dialektikē의 극치에서 충분히 주어질 수 있는 일이다. 533a에서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에게 비록 문답을 통해 이어져 온 진리 탐색의 과정임에도 이제 더 이상 따라올 수 없다(533a)고 말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하나의 화두를 두고 치열한 사색과 명상을 통해 끝내 돈오(頓悟)에 이르는 불가의 견성론도 방법론적으로는 dialektikē와 일정부분 상통한다 할 것이다. 종종 우리는 플라톤 철학 내지 그의 형이상학적 논변이 갖는 독단주의(dogmatism)을 비판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지적 역량을 총동원해 더 이상 의문을 던지기 힘들 정도의 수준까지 치열하게 끌고 가는 그 변증술적 문답의 과정 자체가 그것의 뿌리에 자리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 철학이 독단의 철학 이전에 끊임없는 질문의 철학, 의심의 철학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섣부른 답도 문제이지만 답을 내놓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플라톤이 내놓는 답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궁극에 이를 정도의 모든 의문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 궁극의 답마저 직관적 진리란 이름으로 궁극의 끝점이되 실제로는 끝없이 물러서는 끝점으로 마치 철학이 늘 길 위에 있듯이(auf dem Wege) 설명을 부대(附帶)하면서 그 진리성을 끝없이 충전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입장이나 주제를 가지고 치열하게 묻고 또 물으며 설명이 가능한 최선의 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플라톤의 변증술의 기본 정신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이 의심이라면 플라톤 철학은 그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철학적 토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우리가 법제화하여야 할 교육의 목표를 아래와 같이 제안하고 있다. 교육paideia은 ’무엇보다도 질문하고 대답하기를 가능한 한 가장 잘할 줄 아는 자를 만드는 일‘이다.(534d) -끝-
다음 주제 :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영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3) 교과목들의 대상과 부과 방법, 시기와 구체적 프로그램(535a-541b)
헤겔 형이상학 산책 43-양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 논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43-양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 논증
1)
양은 대자 존재의 관계다. 대자 존재는 동일한 것이 여럿으로 존재하니, 예를 들어 나뭇잎이나 물발울과 같은 것이다.
이들의 관계 속에서 관계 맺는 것이 동일한 일자므로, 이들은 서로 견인하면서 연속적인 것으로 되고, 동시에 여기서 관계 맺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자므로 이들은 서로 반발하면서 이 관계는 분산된 관계다.
“연속성 속에는 다의 병열이 여전히 내포되어 있으며 그러나 동시에 구별되지 않은 것, 중단되지 않은 것으로 포함되어 있다. 다는 연속성 속에 본래 그대로 정립되어 있다. 다는 다른 것과 같은 일자이며 각자는 다른 것과 동일하며 따라서 다는 단순한 구별이 없는 동등성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176)
대자 존재의 견인과 반발은 상호 작용적이니, 반발하는 가운데 견인이 일어나고 견인하는 가운데 반발하게 된다. 반발 가운데 견인하면서 연속하고 견인하는 가운데 반발하므로 분리된다. 헤겔은 이런 분리와 연속성이 동시에 존재할 때 한편으로 자기를 넘어 연장(지속)하는 것 즉 생산적인 지속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벗어나 분리되는 것 즉 영속적인 탈자태가 있다.
“양은 그 규정상 자기에 대한 지양하는 관계이며 영속적인 탈자화[Aussersichkommen]이다. 그러나 반발된 것은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반발은 자기 자신의 생산적인 지속[Fortfliessen]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177)
생산적인 지속이 양적인 것이며 영속적인 탈자태가 공허다. 물질은 양적이며 시공간은 공허다. 그러나 물질도 배후에는 탈자성이 있으며, 시공간도 배후에는 하나의 양적인 연속체다.
2)
헤겔은 이런 관계 개념들 즉 ‘대자 존재와 일자’/ ‘견인과 반발’/ ‘연속과 분리’/ ‘지속과 탈자’라는 개념을 통해 양적인 것을 규정한다. 이런 ‘양적인 것[Quantitaet]’은 아직 ‘정량[Quantum]’ 또는 ‘크기[Groesse]’는 아니다.
양적인 것은 지속과 탈자라는 관계만을 말한다. 여기서는 아직 어떤 한계가 주어져 있지 않다. 단순히 물질 또는 시공간을 말할 때 우리는 그 크기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정한 크기가 규정되지 않고 다만 지속과 분리만 말할 때, 즉 무규정적인 크기가 양적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시공간이 그렇다. 시공간에 관해서 또는 물질에 대해 누가 그것은 얼마나 큰 것인가 하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로소 정량 또는 크기는 일정한 크기를 통해 규정된 것을 말한다. 그런 어떤 것이 정량이 되려면 일정한 크기 즉 한계를 지녀야 한다. 예를 들어 물방울은 일정한 폭을 지닌 크기를 가진다. 그것을 우리는 분자 단위나 원자 단위로 세지 않는다. 물 분자의 일정한 집합체를 하나의 물방울로 보고, 비로소 물방울의 수를 센다. 물 분자가 물방울의 크기를 이루지 못하면, 물 분자는 그대로 있지만, 물방울을 사라진다고 말한다. 물방울이 더욱 뭉쳐서 물줄기가 되면, 이제 물줄기라 하지 이를 물방울로 보지 않는다. 이처럼 일정한의 크기를 지닌 어떤 것이 곧 정량이다.
3)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 정량, 크기로 넘어가면서 긴 주석을 통해 양의 연속성과 가분성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소개한다. 원자론자는 가분성을 주장하는 대표자다. 스피노자는 연속성을 주장하는 대표자로 소개된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 독자적으로 관심을 지닌 것이 아니라, 양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을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언급될 뿐으로 보인다.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 연속성과 분리를 동시에 인정하므로 양에 관해 칸트가 주장한 이율 배반이 특별히 흥미로웠을 것이다.
헤겔은 칸트의 양에 관한 이율 배반론을 살피기 전에, 칸트의 이율 배반론 전반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서술한다.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론의 공적을 인정하면서 칸트의 이율 배반론은 “이전의 형이상학이 전복이며 새로운 철학으로 이행의 주요 계기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율 배반론은 “유한성의 범주를 내용의 측면으로부터 무화시키기” 때문이다.
즉 이전의 형이상학은 지성의 개념 즉 판단 범주를 실체화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는 긍정하고 그것에 대립하는 것은 반박하였는데, 칸트는 두 가지 모두가 자기 모순적인 것을 밝힘으로써 어느 개념도 실체화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론이 지닌 한계를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
-칸트는 이율 배반에 속하는 네 가지 개념쌍을 네 가지 판단 범주에서 끌어내 “완전성이라는 가상을” 주려 했으나, 사실 지성의 모든 범주가 “이런 대립된 계기의 통일”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칸트는 지성의 개념을 물 자체에 적용하는 가운데서 이율 배반이 나온다고 보았으나, 이런 관점은 이율 배반이 개념 자체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물 자체에 적용되면서 구체화되는 가운데(즉 구체적 개념) 출현하는 것인지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칸트 자신은 지성 개념은 현상에 적용하면 문제가 없고 다만 물 자체에 적용함으로써 이율 배반이 생긴다고 했는데, 이는 이율 배반을 주관에 귀속시킴으로써 “모순을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니” 현상 자체에서도 마찬가지 이율 배반이 생긴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4)
이상 관점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면서 헤겔은 이제 양적인 것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을 비판하는 데로 들어간다. 이제 양적인 것에 관한 이율 배반은 두 대립하는 정립과 반정립을 모두 긍정하는 이율 배반이다. 모순이 존재할 수는 없으니, 두 주장 다 배척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헤겔은 칸트가 논증했다고 믿는 것은 사실은 진정으로 논증한 것이 아니라 전제 속에 감추어놓고 이것을 마치 논증한 결과처럼 떠벌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칸트는 논박 요술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항의한다. 고찰된 증명은 요술은 아니지만, 증명이라는 외적인 형태를 갖고 있어서 결론으로 출현해야 하는 것이 괄호 속에 증명의 축이 된다는 것을 투시하지 못하게 한다.”(논리학 재판, GW21, S. 184)
정립부터 보자. 이 정립은 “세계 속의 모든 합성된 실체는 단순한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즉 더는 나누어지지 않는 단순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어가 ‘합성된 실체’인데, 정립에서 칸트는 이 주어를 실체보다는 합성된 것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칸트는 이 주장을 논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합성된 것을 구성하는 단순한 것이 없다고 해 보자.
-그러면 합성된 것을 구성하는 것은 다시 합성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무한히 이어가면, 마지막으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만 남는다.
-합성된 것이 무로 구성될 수는 없으니, 단순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의 이런 논증에 대해 헤겔은 불필요한 우회를 해서 증명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구성 또는 합성된 것이라는 말 속에 이미 단순한 것의 합성이라는 의미가 깔려있다. 이것은 합성된 것은 합성된 것이라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합성된 실체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모든 합성은 사유 속에서 지양될 수 있으니, 어떤 합성된 부분도 남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단순한 부분도 없으므로 어떤 단순한 것도 따라서 어떤 것도 결과적으로 어떤 실체도 있을 수 없다.”(논리학 재판, GW21, S. 182)
“다음 사실이 밝혀진다…. 즉 증명으로 제시된 근거는 직접 추론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합성은 단순히 실체의 우연적 관계이며, 이 관계는 실체들에 외적이어서 실체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논리학 재판, GW21, S. 183)
5)
이제 반정립을 보자. “세계 속에 어떤 합성된 사물도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계 속에 어떤 단순한 것도 현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칸트는 정립과 다른 주어를 사용한다. 즉 ‘합성된 사물’이다. 흔히 그렇게 하듯이 ‘사물’을 ‘실체’와 같은 말로 보면, 정립과 같은 주어가 된다. 그런데 이 반정립된 합성된 실체(사물) 가운데 칸트가 초점을 두는 것은 정립에서와 달리 ‘합성체’가 아니라 실체 즉 ‘단순한 것’에 있다.
칸트는 이 반정립 역시 타당한데 그것의 논증은 이러하다.
-실체가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진다면
-모든 실체의 합성은 공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 부분들은 각기 공간을 차지한다.
-그런데 어떤 공간도 부분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합성된 것을 이루는 부분도 공간을 차지하는 공간은 다시 부분으로 나누어지니, 단순한 것은 합성된 것이 된다. 이는 자기모순이다.
-결론적으로 실체는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칸트가 이 논증에서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단순한 실체가 연속적인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는데, 헤겔은 칸트의 이런 논증 역시 잘못이라 한다. 여기서 이미 공간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전제된다. (칸트는 공간은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단순한 전체라고 본다.),
칸트는 반정립의 논증에서 사물을 공간 속에 집어넣었는데, 이는 곧 사물이 이미 공간적인 것 즉 연속적이어서,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이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정립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제에 몰래 집어넣은 것을 추론이라면서 끄집어낸 것에 불과하다.
“공간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가정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의 직접적인 근거로 되었다.”(논리학 재판, GW21, S. 185)
“공간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가정된다. 그러므로 단순한 것을 이런 공간이라는 지반으로 옮겨놓는 것은 근거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지반은 단순한 것이라는 규정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186)
6)
이 논증은 칸트가 공간을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하므로 발생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공간 속에서 합성이라는 외면적 관계가 성립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칸트는 물체를 공간 속에 집어넣고 물체의 합성을 공간적 관계로 설정했는데, 이것은 그 자신 공간을 다시 부분으로 합성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헤겔은 칸트의 혼란을 이렇게 지적한다.
“여기서 특히 공간에 대해 연속성이 매우 올바르게 부분의 합성과 대립하여 제시되었다. 반면 논증에서는 실체가 공간 속에 옮겨져 서로에 대해 외적으로 발견되는 관계가 즉 합성된 것이라는 관계가 동반된다고 가정된다. 그런 논증과 달리 공간 속에서 다양성이 발견되는 방식은 명백히 합성과 선행하는 부분들의 합일을 배제해야 한다.” (논리학 재판, GW21, S. 186)
사실 헤겔에서 물질과 공간은 양적인 것이면서도 서로 대립한다. 물질은 연속적인 것이면서 그 이면이 분리된 것이다. 공간은 분리된 것이면서 그 이면이 연속된 것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물질은 공간에 들어있고 공간은 물질을 수용할 수 있다..
칸트는 정립에서 처음에 주어는 ‘합성체’라는 점에 초점을 두었다. 만일 정립의 주어를 ‘실체에 맞추어 보면 즉 단순한 실체라고 본다면, 단순한 실체가 단순한 것으로 이루어진다( 즉 합성된다)는 말은 모순이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반정립에서 주어의 초점이 단순한 ‘실체(사물)’에 있었는데, 만일 이 초점이 ‘합성체’에 있다고 한다면, 반정립은 합성체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연속체라고 주장하니 그 자체로 모순이다.
결국, 정립과 반정립에서 칸트는 주어를 모호하게 했다. 정립의 주어는 ‘합성된 실체’고 반정립에서는 ‘합성된 사물’이다. (사물과 실체를 같은 것으로 보더라도)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각기 그 의미가 달리 해석된다. 칸트는 정립과 반정립 자체에 모호한 개념을 사용하면서 논증했으니, 철저한 논증이라 할 수 없다.
7)
헤겔의 입장은 ‘이율 배반이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아니다. 모호한 주어를 명확하게 하더라도, 정립과 반정립은 동어반복이든 아니면 자기모순이니 두 가지 주장이 동시에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헤겔은 칸트의 주장을 통해 대립하는 것의 통일, 모순이라는 그의 변증법적 원리를 확인할 뿐이다.
헤겔의 비판은 칸트의 의도를 비판하는 데 있다. 칸트는 정립과 반정립을 동시에 긍정하면서 이런 서로 대립된 것이 동시에 긍정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율 배반을 발견했다. 칸트는 그러므로 단순성과 합성된 것, 연속성과 분리라는 범주는 어디까지나 경험적 현상에만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즉 물 자체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이율 배반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은 모든 양적인 것이 지닌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성질이라고 보았으며, 이것이 우리가 양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들 물질, 시간, 공간 등의 본질적 특성이라 하였다.
“연속성 자체 내에 원자의 계기가 있다. 연속성은 단적인 분할의 가능성[즉 무한 분할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분리는 모든 구별을 지양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일자는 다른 것과 같은 일자이기 때문이다. …. 각각은 다른 측면을 그 자체에서 가지므로 다른 것 없이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이 규정의 어느 것도 진리가 아니다.”(논리학 재판, GW21, S. 187)
헤겔은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높이 평가한다.
“그는[아리스토텔레스] 무한 가분성을 연속성에 대립해서 무한한 추상적 다를 그 자체에서 또는 가능성에서 연속성 속에 포함시켰다. 현실적인 것은 추상적 다수성에 대립하는 동시에 추상적 연속성에 대립하는 것이니 구체적인 것이다.” (논리학 재판, GW21, S. 188)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 [천 하룻밤 이야기]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
산다, 뭘 하며 살지: 삶과 함 –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 2025 09 23 추분(秋分): 지구 온난화일까, 거의 추분 나흘 전까지 밤에도 20도를 넘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삶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 중의 하나가 학문이다. 그 학문의 체계화에는 철학이 있다. 철학은 한편으로 문제 해결에서 개인들 각각 편하게 살기 위한 방식도 있고, 다른 한편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위해 개인들 사이의 몫을 내놓는다. 이 문제라는 것을 화두라고 부를 수 있다. 화두 또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푸는 데는 일상적으로 눈으로 보고 또는 귀로 들어서 따라 하기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살아온 과정에 느낀 심정성이란 것도 있다. 지자들은 후자의 심정성이 인간 종으로서 당연히 있다고 느끼고 더 이상 말로 표현하지 않거나, 중경과 선후에 따라 뒷전으로 밀쳐둔다. 그런데 첫째의 지식에 관하여 눈과 귀는 개인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영향과 결과를 미친다고 여긴다. 게다가 이것을 잘 아는 자는 자기 이익을 챙기기 쉽다고 여긴다. 지자의 길은 현자의 길보다 중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 어릴 적에 할배들이 모인 사랑방 이야기에서 천문 지리를 통달해야 세상에 나가는 것이고(출세간, 出世間), 그렇지 않은 경우에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고들 했다. 한 해의 길이와 한 달의 길이 사이에서 기준이 다른 것들, 원의 길이와 원의 지름 사이의 비례, 하도와 낙서니,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임) 등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무엇인가 신기한 이야기를 잘 알아야 출세간 하는 줄 알았다. 그럼에도 농사를 짓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절후(해의 길이, 양력)라고 하면서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음력(달의 크기, 음력)으로 하는 것에까지 다른 점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한다. 어떤 현상 또는 사실들이 풀이 방법이나 추리 방식에 따라 달라서 서로 사맞디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랑방에서 한쪽과 다른 쪽 사이 견해가 서로 다를 때,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은 쪽으로 결정 나는 것 같은데, 실재로는 답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우선 정한 선후와 중경을 따르는 것 같다. 중등 시절인가, 중국 백만 대군이 백두산에서 오줌을 누면 우리나라가 떠내려간다든지, 중국인구가 몇 억이 모여 한꺼번에 뛰어서 구르면 지구가 흔들거린다고 들었을 때, 어린 마음에 중국이 무섭구나 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에 물리학을 배우면서, 이 걱정은 사라졌다. 백두산 꼭대기에 백 만 대군이 같은 자리에 올라설 수 없다는 것이고, 억대의 인구가 한자리에 모일 수도 없고 그들이 한자리에서 뛰어 구르지 않고 흩어져서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 정답은 아르키메데스가, ‘지렛대와 지지점을 주면, 지구를 들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철학사들을 읽으면서 서양 중세에도 이런 걱정을 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바늘 꼭대기 천사가 얼마나 앉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선승들이 들었으면, 점에서 위치와 크기가 없는 데 점에 무한한 상징들이 앉을 수 있지. 원이 무한히 줄어들면 점이 되고, 줄어서 무한히 작아지면 그 점이 없어질까? 점이 무한히 크다고 생각하면 점은 둥근 우주가 되는 것인가? 상상작용은 지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허구와 미신을 낳는다는 소(小)소크라테스 학자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중세 유명론에서 상상작용의 상징이 실재한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우주의 무한성은 아직도 허구일 것 같다. 우주의 크기가 눈의 관찰을 넘어서 빛으로, 그리고 빛이 오는 거리를 350억 광년거리라고 측정(추정?)한다고 하지만, 그 과학적 측정이 상상작용만큼이나 허구(fiction)으로 보이는데, 실재라면서 천문학의 기술을 믿는 이들은 비허구(non-fiction)라고 한다. 인간 종은 지구라는 삶의 터전위에서 문제거리가 중하고 먼저이다. . * 구석기 이래로 실재하는 사물들에 대해 수를 세는 노력은 있어왔다고 한다. 기록 상으로는 구석기 말기에 뼈나 나무 위에 빗금친 기호(le signe)들을 숫자를 세는 표기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숫자로서 기호가 표시된 것은 신석기 시대에 공동체가 형성되고 난 뒤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 숫자의 기호가 수를 셈하는 산술로서 상징이 되는 데는 인류에게 시간이 더 필요했다. 어쨌든 고대 수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개수를 세는 방식이 먼저였고, 그리고 셈법을 간소화하고 정확하게 하는 방식에서 산술학에서 말하는 수의 용어가 성립했다고 한다. 산술학에서 수는, 사과 한 개, 두 개; 대추 한 개 두 개의 한, 두와 다르다는 점이다. 한, 두는 수의 1, 2와 다르다는 것을 학술적으로 논의한 것은 그리스 철학사에서 퓌타고라스학파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수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이전에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 숫자와 수의 구별이 있었다고, 고대 문헌적 자료를 통해 해명하였다. 그런데 수학자들이 수의 셈에서 10진법과 하늘의 운행에서 나왔다고 여기는 60진법 사이에서 전자가 후자로 발전하는 또는 달리 생각하는 방법이 연속적인지 불연속적인지를 아직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두 개에서 2라는 추상의 상징을 생각해낸 과정을 분명하게 밝힐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사과 한 개와 배 한 개를, 두 개라고 하는 실재적인 것과 2라는 추상의 수는 별개인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실재적인 것은 현실적으로 바구니에 담는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개수의 둘은 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숫자에서 나온 것이다. 상징의 2는 사과와 배가 없이도, 그리고 바구니가 없어도, 생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수학 역사가들이 말하듯이 수와 숫자는 다르고, 셈법과 산술학은 다르다고 할 것이다. 이런 사유방식의 차이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졌을 것이고, 문헌적 체계로서 플라톤 먼저고 그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다. 라파엘(1483-1520)이 그린 “아테네 학당”의 그림은, 플라톤의 하늘, 아리스토텔레스 땅, 즉 하늘과 땅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천문지리의 이야기는 서양에서도 이어져 왔다. 셈법의 하나, 둘, 셋, 다섯, 열, 스물 등은 대상과 연관이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셋 또는 다섯을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라고 하면, 딱 떨어지는 셈법이 없다. 문제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현자 또는 지자일진데, 긴 세월에 걸쳐서 풀 수 있는 방법들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셈법과 달리 산술학이 편리하고 유용하다는 것은 점점 알아채고 있었다. 현실적인 것, 기호적인 것, 상징적인 것 사이에서 현자들이 차히를 알았음에도 하나로 설명하는 체계를 만들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지자들은 분할의 방법을 사용하여, 이 범위 속에서 이렇게 저 범위 속에서는 저렇게, 다른 범위 속에서 달리 체계를 만들어야 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후세 철학자들이 차히의 발생과 원인을 생각하기보다, 차이들 사이의 범주(항목들)와 체계를 만드는 작업의 노력을 학문의 길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스 아테네 철학이후 2천 5백여년 동안에 차이의 범주들을 기준으로 삼아 구성론(le constitution)과 구축론(construction)이 있었고, 그럼에도 잘 설명이 안 되지만 차히의 발생에서 조성론(composition)이 있다는 것도 끼여 있었다. 아마도 현대수학들의 논의에서 수학 역사가들이 단위 형성에 관한한 논리주의, 형식주의, 직관주의라는 방법론의 방향을 설명하는 것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생성론이란 방법이 있다면 이는 자연주의 일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과 한 개와 대추 한 개를 현실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수의 실재적인 것과 개수의 현실적인 것은 다르다. 그런데 1+1= 2라고 할 때 두 개의 2는 1의 동등성이 실재하는 것을 여긴다. 게다가 2를 분할하면 동등한 1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럼에도 고대에서는 그 1이라는 단위가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플라톤주의에서 이데아론의 실재론이고, 유일 신앙에서 하늘나라에서 부활의 대상이 실재론이고, 나아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의 규범과 헤겔의 절대지 등도 실재론이고 현상학에서 선험적 현상도 실재론이라 한다. 이에 비해 프랑스 철학사가들이 19세기말에 칸트와 헤겔의 영향으로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인식 대상의 관념이 실재한다고 하는 것이 허구(une fiction)이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시기에 산술학과 논리학의 대등을 논하는 것도, 관념론의 사유 논리와 같은 계열의 체계화로서, 사유에는 하나의 통일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중세 보편논쟁에서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전칭긍정명제가 실재하지 않은 추리에 의한 귀결이라고 여기고 착각이라고 불렀으며, 모든 S가 P이다에서 모든 S가 보편이니 절대니 하는 것은 하나의 신이 전체이면서 보편이라는 독단(le dogme, 억측)일 뿐이라고 한다. 그 1(하나)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vox, la voix)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유명론의 학문이 퍼져나가자, 신학은 다시 범주보다 체계를 세웠다고 하지만, 즉 아퀴나스가 보편논쟁을 정리했다고 하지만, 이에 대립하는 학자들은 그 신학자들의 독사(le doxa) 정도로 여겼다. 독단은 인간의 삶의 편안과 안녕을 위해 기호의 편의를 현실적으로 적용함에서 합리적인 부분만을 경계삼아 유용성과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고, 개인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부추기고, 집단적 오성(지성, 이성)인 것처럼 위장(포장)한 것이리라. 수학사는 흥미 있게도 하나라는 숫자는 범주와 체계 속의 단위(1)와도 다르고, 추상하여 1이라는 것과도 전혀 다르다고 한다. 게다가 1(추상)은 원주의 길이를 무한히 작게 잘라서 나온다고 여기는 점과도 다르다. 어쩌면 실재성이란 단위를 설정하기 이전에 아페이론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방황하는 흐름이고, 경계가 없는 덩어리이고, 게다가 무어라고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실재적인 것이며, 세상의 여러 다양한 것들 생성하게 하는 자연 또는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단위는 우주를 단위로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흐르고 변한다. 프랑스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브랑슈비끄(1869년–1944)가 원시 문화에서 숫자의 성립과 개념작업을 생각하면서, 원인(아이티아)과 범주(카테고리)는 서로 다른 길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사유였을 것이다. – 아마도 발생과 현상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재성은 발생에 있으며, 현상은 현질적이지만 실재적이 아니다. * 유명론이 하나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주장에 대한 허구라는 이야기에 대해, 근세철학에서 데카르트 이후로는 유명론의 언급조차도 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정수에서 무한이 절대적 무한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고 데카르트가 말한다. 마치 신이 모든 무한을 포함하는 무한성인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데카르트의 좌표 상으로 무한히 길이를 연장(l’étendue)하면 무한이 있고, 그 무한은 실재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이 무한성을 이해하는 인간의 사유가 타당(정당)하다고 하였고, 무한의 사유가 당연히 인정된다고 여겼다. 신은 무한하다. 무한성은 실재한다. 여기에 논리학이 끼어들면 무한한 전체(전칭긍정 명제의 주어)를 알면 그에 속하는 부분들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이후 200여년 만에 그 무한이 인간의 사고가 만든 무한이라는 것을 비유클리트 기하학이 제시할 것이고, 다른 무한을 증명할 것이다. 이런 여러 무한들도 모두 실재성이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칸토어 이후에는 무한의 종류들도 많아졌다. 그러면 우리가 사유하는 무한들 말고도, 모두를 체계 속에 넣어서 하나의 통일성을 갖는 무한, 그런 무한이 있을까? 아직 무한성이 비결정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실재성은 흐름 또는 생성(자연)이라는 이법이 성립한다. 흐름을 마름질하는 방식에 따라 상상작용은 흐르는 덩어리를 달리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등이 주장하는 하나의 원리(정의)가 다른 것(원인 생성)들의 잣대가 되는 것처럼 생각해왔다. 천문학이 우주전체에, 진화론이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등 종의 다양성에도, 통일장이 극미립자의 역학에서도 공리와 정의처럼 먼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각 학문은 한계 안에서 정합적이고 그에 맞는 대상(이미지작용)에 규약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전체에 통일성(l’unité)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모든 것은 하나의 통일성 속에 있다고 여긴다. 이 통일성이 단위가 아닌가? 그 단위가 고정되고 불변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단위가 흐르고 변화하고 움직이고 생성하는 중인 덩어리를 임의적으로 잘라 범주를 정한 것이 아닌가?. 수학의 범주와 체계화는 아직도 진행 중에 있고, 각 진행의 방식에 따라 세계 또는 자연을 구성, 구축, 조성, 생성 등에서 이유와 방식들은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 중이다. 수학의 문제를 푸는 방식은 50가지가 넘는다는 오일러의 발언은 경계(페라스)를 설정하는 방식에 따라 수학들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그 보다 더 많은 방식이 심리(프쉬케) 또는 영혼을 다루는 방식에도 있을 것이다. 요즘 급부상하는 AI가 이미지를 습득하고 다른 방식은 영혼(두뇌)을 다루는 새로운 한 방식일 것이다. 셈법에서 산술학, 측지술에서 기하학, 복리 이자계산에서 지수와 로그함수, 실재성의 무작위 재단하는 방식에 따라 부정방정식과 대수학, 우연이라기보다 우발적 사건들의 발생에 대한 주사위놀이와 같은 계산에서 확률론과 통계학, 기후 변화와 지진 활동의 발생에서 복잡계이론, 집합론과 파라독사 이후 무한계 등에 이르기까지 수학들(Les mathématiques)의 발전과 확장이 있어왔다. * 이와 마찬가지로 사유 방식의 천차만별의 차히들의 등장(생성)만큼이나 영혼학(프쉬케학, 심리학)의 영역(분과)들이 생겨났다. 여기서 상층의 정신과 생명체의 영혼 사이에서 새로이 응용할 용어로서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영국의 마음(the mind)과 어원을 같이 하는 심정성(la mentalité)의 용어를 수용한다. 정신과 영혼 사이에서 데카르트이후 “빛들세기”에서 정신은 추상과 보편을 실재성으로 삼는데 비해, 영혼은 자연과 발생을 실재성으로 삼는 차히를 드러낸다. 이로서 화학이 구화학(al-chimie)에서 벗어나고, 생물학이 보편과 추상과 별개로 실재성의 학문임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정신주의자들은 자연의 생성과 생명의 진화에는 법칙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학문이 아니라 우발성의 개연성에 머문다고 보았다. 생명은 원래 아자르(hasard)이고, 신의 활동도 아자르라고 하게 되면서 정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원리와 법칙을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이 또는 무슨 통일성이 절대와 완전으로부터 자연과 생명에 적용가능한가? 이런 물음은 신이 생명에 대해 무엇을 적용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추상의 산물로 여기는 신은 생명과 자연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해놓은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에서는 신의 권능과 역할이 있는가? 사회와 공동체는 인간 활동의 영역이다. 정신의 실재성, 관념의 실재성을 믿는 이들은 신의 권능과 역할이 자연과 생명에게는 유보하더라도 인간 사회와 국가의 체계는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신앙이 국가와 국민이라는 일반화의 정립이 실재성이라고 하고, 국가의 기능과 국민의 역할을 실재성이라 한다. 이런 우화적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전통과 풍습 속에서 이어져 왔다. 그렇다고 추상성과 보편성을 반박하듯이, 일반화에서 대상화를 이룬 개념들이 실재성이라는 것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반화의 대상들을 현실적으로 대응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물의 셈에서 개수(nombre)와 거리에서 길이(étendue)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 이런 사물들과 거리들이 실재하는 것인가에 대해 논의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 즉 추상관념들은 실재성이 아니지만, 추상관념이 적용하는 일반 대상들로서 개념들이 실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반화의 두 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추상관념이 개념화에서 개수는 세는 것과 같은 일반화가 있고, 다른 하나는 더미 또는 여럿에서 일반화를 합의하는 방식이 있다고 한다. 전자에서 대상은 개수를 세는 수학과 물리학의 편리에서 오는 것인데 비해, 후자에서는 공동체에서 훌륭한 일, 장한 일의 일반화이다. 플라톤주의와 논리주의는 전자의 일반화가 먼저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19세기말 20세기초 심리학의 발달과 언어학의 발달은 전혀 다른 길을, 후자의 길을 보여주었다. – 맑스의 가치, 니체의 가치, 심정성의 가치는 후자의 길에 가깝다 – 앞에서 언급한 셈칙과 산술학 그리고 기하학의 발달과정의 언급에서 일반화는 현실적 대상에서부터였다고 했다. 수학에서 일반화는 언어의 용어 성립에서도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언어학자가 아니라 일부 입말학자는 공동체의 삶에서 명사가 동사보다 먼저 생겼을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명사에서 동사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명사는 고정이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들 일체이다. 소크라테스는 대상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로서 살아간 과정과 행위의 일체를 말한다. 그 명사로서 용어는 과정의 일체로서, 그의 삶의 일반화에 대한 용어로서 일반화라는 것이다. 사자가 먼저이고 용맹하다는 다음이며, 날래다는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용어 성립에서 명사, 성질(특성) 형용사, 동사로서 규정하고 다른 것과 경계를 그었다는 것이다. – 이 가설은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에서 나온다. 일반화에서 전자의 일반화에는 관념 또는 추상의 상징이 실재성이라는 이론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후자의 일반화는 삶의 과정에 대한 표현과 합의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신석기 시대의 종족들의 공동체에서 언어가 문법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이야기에 암시를 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화용론에 있을 것이다. 작업장에서 벽돌 장인이 “벽돌”이라고 외치면, 벽돌을 쌓는 것인지 던지는 것인지는 같이 작업하는 동료와 약속 또는 합의에서 이루어진 활동에서 용어이라는 것이다. 삶의 터전에서 일반화의 용어로서 먼저 등장한 것은 삶의 터전의 합의와 조성에서 있을 것이다. 단어와 대상, 문자와 그림의 연관으로 보았던 비트겐슈타인이 1차 대전이 끝나고, 왜 고향 땅으로 돌아가 유치원 애들을 가르치면서 언어 형성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이 시기에 인류학과 입말학(언어학)은 논리학의 구조와 틀(체계)과 달리 생성하는 용어와 개념을 다루는 방식을 고민했다. 앵글로색슨이 인식의 우선으로 용어와 개념이 먼저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그것들이 먼저 있는 것이라고 실재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지만, 프랑스 쪽에서 언어학은 논리학과 달리 입말이라는 점을 보았다. 중세 말기의 개념이 기호와 목소리로 되어 있다고 하면서 추상은 실재성이 아니라고 하였듯이, 20세기의 언어학에서 그 입말은 소리와 이미지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벩송은 사유의 재료들이 이미지들로 되어있다고 보았던 심리학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언어는 몸짓, 행동, 말씨 등을 포함한다. 그 언어의 실행에서 논리가 먼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비해 논리학과 수학과 별개로 입말이 있고, 입말의 일반화가 있다. 소쉬르가 설명하는 입말의 경우에, 실재하는 대상으로서 소나무가 있고, 이 소나무와 별개로 현실적으로 청각 이미지(ㄴ, ㅏ, ㅁ, ㅜ)가 있으며, 이것을 듣는 이는 머리 속에 그리는 소나무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청각이미지와 상상이미지는 각각의 개인이 갖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카나다의 꼬마가 나무를 단풍나무로, 프랑스 파리의 꼬마가 떡갈나무로, 강원도 인제에 사는 꼬마가 미시령의 소나무를 생각(이미지를 그리며 상상)하는 것은, 그 꼬마들의 삶의 터전의 사유이다. 청각이미지를 시니피앙(기표), 사유(상상) 이미지를 시니피에(기의)라고 한다. 이 두 가지는 대상의 실재성과 전혀 관계없는 이미지들이라고 소쉬르는 못 박았다. 그런데 이 두 이미지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는 그 각각들이 살아온 과정의 이미지들을 일반화 한 것이다. ‘부산’은 우리나라 사람의 청각이미지이고 ‘푸산’은 미국인들의 청각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아는(상상하는 사유하는) 한반도 남쪽 항구의 부산에 대한 서술은 다르다. 그러면 진실은 부산을 죽 살아온 사람의 이미지 작업들의 일체일 것이다. 살고 있는 이 부산의 일반화가 먼저이고, 살지 않았던 사람들 각각의 대상 이미지는 나중의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한 가지를 더 보태어 보자, 이런 과정의 일반화에는 삶의 추억들의 일반화를 포함하며(추억이미지), 길게는 한반도 역사를 포함하는 일반화의 기억도 있을 것이다(기억이미지). 심리학과 입말의 결합에서 부산이라는 덩어리를 잘 표현하는 것은 추억들을 포함하는 기억을 잘 살리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이런 부산의 대상화가 실재성이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의 실재성의 과정의 일체를 말하는 것과 같다. 이에 비해 부산의 이야기를 듣거나 또는 한두 번 체류하여 아는 부산의 이야기는 일반화도 아니고 개념을 사용한 설명의 편리일 뿐이다. 게다가 ‘푸산’이라고 하는 개념화는 이 발화자의 자신의 삶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으면서 개념의 일반화를 빌려온 것이다. 종교의 신학에서 하늘나라, 천국, 극락 등의 개념은 어떤 실재성의 일반화 용어에서 빌려왔을까를 생각해 보라. 실재성은 시간의 과정에 있으며, 그 과정을 합의 또는 평결에 의해 일반화에서 오는 것이 먼저이다. 이런 관점을 철학사에 비추어보자. 이오니아학파의 자연과 엘레아학파의 존재 사이에 어느 것이 실재를 드러낸 것인가? 사람들은 존재가 실재이고 자연은 변화하기 때문에 가상 또는 현상일 뿐이라고 한다. 현대철학 사가는 이런 사람들을 플라톤주의, 논리주의, 유일신앙주의에 포획된 사람이라 한다. 실재성은 지구 형성과정을 포함하는 자연의 변화가 실재성이고, 그 시대에 맞는 일반화라는 것을 만든 것은 인간이 인간의 편리(유용)와 탐욕(이기심)에 맞추어 규정하고 정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가 19세기말 20세기초에 심리학과 인류학의 발달과 더불어 이미지 실현(상상작업, l’imagination)으로 나타난다. 추상관념은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은 중세 유명론이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편리를 위한 언어와 논리의 과학적 규정이 실재성과 연관이 없다는 것은 소쉬르의 입말에서 설명한다. 그럼에도 현실성이 실재성이라고 또는 신실재론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은 현실에 드러난 현상의 실재성이 역사와 과정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추상과 논리에 인습을 인정하며 유용성과 실용성의 이익에 우선하는 현실에서, 제국의 논리와 명령체계에 포획된 현실에서, 안주하는 것이다. 극우들이 국민주권과 최종심금을 무시하고 그들만의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으면서 인민주권에 저항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역사적 과정에 자기들의 관념과 개념의 정당성을 위하여, 이익과 착취를 위하여, 전쟁과 공포를 조장했을 뿐이다. 역사에서 그 자유와 인권을 인민이 극우(왕권, 교권, 제국권)에게 저항, 항쟁, 혁명하면서 겨우 찾아가는 중이다. 실재성은 삶의 터전에 과정에 있다. 보편과 절대의 체계로부터 인권이든 자유는 없었다. 말뿐이다. 낙수효과는 없었다. 이런 관념과 개념으로부터 현실성에 맞는 실재성을 도출하는 것은, 논리적 착각이며, 일반화의 허구이다. 이 허구의 극한에 유일신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오니아학파의 세계(코스모스) 이래로 “하나”는 실재하는 덩어리, 즉 아페이론이다. 이것은 변화중인 자연이며, 지속하는 우주이다. (7:04, 58TMC) |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42-제논의 오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2-제논의 오류
1)
양적인 것의 개념은 우리를 항상 혼란에 빠지게 한다. 왜냐하면, 그 양적인 개념은 일자와 원자 그리고 공허라는 개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철학과에 처음 들어와 그리스 철학사를 배울 때,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라는 개념까지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개념에서 ‘존재는 있고 무가 없다’라는 주장이나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이고, 여럿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부동하고 운동이란 없다’는 주장은 의외에도 쉽게 이해됐다. 논리적으로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1년생이었던 당시 상식과 전혀 다른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듣고 황홀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당혹했던 것은 원자론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원자론자가 주장하는 원자라든가 공허라는 개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서 무수한 여럿이 존재하고 부단히 운동하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원자나 공허를 도입했다는 것까지도 이해됐는데, 이런 것은 논리적으로는 후퇴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에서 황홀감을 느꼈던 필자로서는 현실을 위해 논리를 후퇴시킨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철학자가 논리에 관해 타협한다니, 그것은 아직 어렸던 필자의 가슴에서는 마치 정조를 잃는 듯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 뒤 대학에서 시간 강사가 되어 처음으로 그리스 철학사를 가르치면서 원자론자를 설명할 때마다 무언가 얼버무리는 듯한 느낌 때문에, 강의하면서도 스스로 의혹에 빠져들었다. 강의의 톤이 떨어지고 왠지 학생들이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는 나를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뒤 늘 머리에 떠나지 않는 의문이 이것이다. 왜, 우리는 원자론자의 타협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2)
다와 운동의 문제는 그 뒤 필자를 자주 괴롭혔던 문제다. 이 자리에서는 일단 운동에 관한 논의는 제쳐 두자. 여기서는 주로 다의 문제만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다의 문제가 다시 필자를 괴롭히게 된 것은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에서 언급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에 관한 언급 때문이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동일률을 제시하면서, 하나의 성질이라도 다르면 서로 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원리에 따라서 동일한 성질을 지닌 것은 여럿으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하나만이 존재할 뿐이라 했다. 모든 것은 고유한 모나드(일자)며 이 모나드는 서로 성질이 다르므로 이 세상에는 서로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는 원자론자를 계승한다.
칸트가 라이프니츠의 이 주장을 반박하면서 물방울을 예로 들면서 어떤 동일한 것이 시공간에서 차이 때문에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일한 것이 여럿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칸트가 여기서 다루었던 반성 개념은 물론 ‘동일성과 차이’라는 대립 개념만은 아니다. 그는 그 외에도 세 가지 반성 개념을 추가했는데-일치와 모순, 형식과 질료라는 대립 개념이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나머지는 제쳐 놓고 여기서는 동일성과 차이만을 논하자.) 그에게서 핵심은 여럿은 주관적 차이에 불과하고 실상 같은 것이라 존재한다는 주장이 된다. 그는 다시 파르메니데스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시공간이 사물의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시공간은 칸트에서는 주관의 선험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공간을 칸트처럼 주관의 형식으로 받아들인다면, 풀리지 않는 많은 문제가 제시될 것이다. 칸트처럼 하면 시공간은 등질적인 하나의 시공간이어야 하는데, 실제 세상에는 질적으로 차이 있는 다양한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당혹하게 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은 원자론자과 닮았다. 다만 원자론자가 원자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오직 질적 차이만 존재한다. 칸트는 같은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같은 것은 하나로 합쳐지니 파르메니데스적 입장에 가깝다. 물론 그에게 같은 것은 이미 특정한 어떤 것 즉 물방울이나 나뭇잎인 한에서다. 그들의 이론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근본적으로는 파르메니데스와 원자론자라는 두 흐름에 닿아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러 물방울이 있고 여러 나뭇잎이 있는데 라이프니츠처럼 하나의 존재를 부정하기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칸트처럼 여럿의 차이를 단순히 주관적 차이로만 여길 수도 없다.
3)
여기서 제논의 역설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논은 역설을 통해 여럿의 존재를 부정하고 파르메니데스의 유일한 하나를 옹호했다. 제논은 일 여럿을 전제로 한다면,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르지 못한다는 역설이 나온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여럿은 없고 오직 하나만 있다고 했다.
제논의 논증은 많은 관점에서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논증을 그가 사용한 트로포스(논증의 형식)에서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트로포스는 가설이 경험과 배치된다는 데에 있다. 즉 그에게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른다는 경험은 이미 진지로 전제돼 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 역설이 하나와 연속성만이 존재한다고 할 때 이미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와 연속성만이 존재한다면, 실제로 이 세상에 여럿이 존재한다는 경험 즉 여러 물발울이 존재하고 여러 나뭇잎이 존재한다는 경험과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원자론자가 먼저 그런 트로포스를 사용해 여럿의 존재를 주장하지 않았던가?
경험과 배치된다는 것을 트로포스로 삼는다면, 모순된 주장이 동시에 입증되니, 이 트로포스는 증명의 원리가 되지 못한다. 제논이나 원자론자는 동시에 잘못된 증명 원리에 기초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원자론자가 틀렸다면 마찬가지로 제논도 틀렸다.
4)
철학사에서 부딪히는 하나와 여럿의 문제에 관해 당혹한 경험을 했던 필자로서는 헤겔의 제시하는 양적인 것의 개념에서 이런 여럿의 문제를 해결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헤겔의 논리학이 가지는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헤겔에게서 양적인 것의 토대는 대자 존재다. 이 대자 존재는 어디까지나 두 개 이상의 일반적 성질이 관계하면서 일정한 지속성을 지니는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초에(또는 세계의 종말에 이르러) 개별적 성질이 무차별적으로 존재하면서 명멸할 때는 양적인 것은 없었다.
이 세상에 두 개 이상의 성질이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 이때 대자 존재가 출현한다. 이 대자 존재는 통일된 것이니 하나다. 대자 존재는 통일성 즉 관계를 의미한다. 그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매번 존재하는 관계는 개별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자 존재는 동시에 개별자다. 대자 존재는 하나이면서 개별자이니, 곧 원자가 된다. 또는 라이프니츠처럼 모나드(단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자 존재가 개별자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대자 존재가 여럿이라는 말을 함축한다. 개별자가 개별자만 있는 것은 우연일 뿐이다. 개별자는 이미 내적으로 여럿임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남녀가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요즘 혼자지만, 혼자인 것은 우연이고 아이가 여럿인 것은 필연적이다. 그 필연성은 우연 때문에 실현되지 않더라도 혼자인 것이 필연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개별자는 여럿이라는 것은 개별자의 본성에 내재하는 필연성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경우 파르메니데스의 ‘유일한 하나’ 개념을 부정하고 ‘여러 하나’라는 원자론자의 입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5)
대자 존재 자체는 양적인 것이 아니다. 대자 존재가 다른 대자 존재와 관계하게 되면서 양적인 것이 출현한다. 대자 존재는 서로 동일한 것이니 이것이 서로 관계한다면 연속적이어서 어떤 구분이 없다. 그러나 이런 연속 속에서도 각 대자 존재는 개별자니, 그것들은 서로 다른 것이며 그런 점에서 각 대자 존재는 서로 반발한다.
대자 존재가 다른 대자 존재에 대해 이처럼 연속과 반발이라는 이중적 관계, 서로 동일하면서도 다른 개별자라는 이중성 때문에 양적인 것이 출현한다. 양적인 것이 출현하면 동시에 공허가 출현하게 된다.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 사이의 연속성의 측면을 말한다. 그 이면은 서로의 반발이다. 반면 공허는 대자 존재 사이의 상호 반발하는 관계를 말한다. 그런 공허의 이면이 대자 존재 사이의 연속성이다. 양적인 것과 공허는 항상 동전의 양면으로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결합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원자론자가 원자를 상정한 이상, 그것들 사이에 연속성과 반발이라는 관계가 성립할 수밖에 없으니, 원자로부터 양적인 것이 출현하며 그와 동시에 공간이 출현한다. 이렇게 ‘하나(일자)’, ‘원자’, ‘공간’라는 개념은 상호 공속하는 개념이다.
세상에는 파르메니데스처럼 유일한 하나 또는 연속성만 있다고 볼 수도 없고 원자론자 처럼 여러 하나가 있고, 그들에 단절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나의 여럿, 연속성과 단절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5]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5]
3. 실증주의 비판에서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으로
□ 자, 이제 ‘실증주의 논쟁(Positivismusstreit)’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이 논쟁도 교수님의 하이델베르크 시절에 해당하죠. 교수님께서 당시 쓰셨던 글들, 특히 『사회 과학의 논리』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면, 변증법적 방법론을 주로 옹호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학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계셨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해 사회학’의 방법론을 전면에 내세우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 솔직히 그때는 그런 관점에서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말씀이 맞습니다. 어쨌든 저는 혼란스러웠던 소위 ‘실증주의 논쟁’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참고로 포퍼는 이 명칭에 대해 정당하게 반대했죠. 좋은 결과란 바로 그 논쟁 이후로 사회 연구 분야에서 오직 분석적 정통성만을 배타적으로 고집하던 분위기에 맞서, 다양한 질적 연구 방법론들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자면, 울리히 외버만(Ulrich Oevermann)의 ‘객관적 해석학(objektive Hermeneutik)’은 제가 그때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지만, 참 흥미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 논쟁 이후로 사회적 데이터를 어떻게 다루고 처리하는지와는 별개로, 해석학적인 접근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 그렇지만 그때 선생님께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변증법적 비판이라는 사회과학 연구 방법론과 더불어 가다머의 해석학을 옹호하셨죠? 그것이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또 다른 유의미한 방법이라는 이유에서 말이죠.
■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제 와서 비로소 제가 당시 제대로 설명했어야 할 두 가지 문제를 더 잘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사회학자의 위치를 성찰적 관점에서 관찰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점은 언급했지만, 선행적인 해석학적 참여가 관찰 행위에 미치는 사후적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의 해석학적 참여를 통해 성찰적 설명의 단계가 따로 형성되며, 이는 경험적–분석적 서술과 방법론적으로 구별되거든요. 당시에 그 점은 배경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변증법의 적용 영역에 대한 언급을 빠뜨린 것입니다. 변증법은 근대 사회에서 진행되는 위기를 재구성하는 방법인데 이점을 명확히 하지 못했어요. 이 두 가지는 제가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통해 나중에야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일상적으로 실천되는 상호작용이 예/아니오의 입장 표명과 그에 대한 비판, 즉 입장을 표명하고 그것의 근거를 묻고 답하는 과정을 거쳐 유지된다는 점을 비로소 깨달을 때, 사회학적 관찰자가 [생활세계에서 물러나 있는 게 아니라] 사회 자체 내에서 관찰 대상 영역과 공유하게 되는 합리적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이 합리적 잠재력은 사회학적 관찰자인 나 자신과 관찰 대상인 사회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설명하려면 제가 좀 더 길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좋습니다!
■ 먼저 사회 이론의 성찰적 구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행위 이론에 입각한 사회학은 관찰된 주체들의 의견, 가치 지향, 의도, 소망과 관심, 간단히 말해 그들의 견해와 그런 생각을 표명하는 행위 맥락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동일한 개념 수준에 있는 가설들[개별 주체의 주관성을 바탕으로 사회 현상을 기술하려는 가설]을 활용하여 설명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사회 이론은 이와 다릅니다. 사회학적 관찰자가 그 대상을 해석학적으로 파악하고 사회적 사실로 서술하려면, 대상 영역에서 발견되는 명제적 내용, 비판적 타당성 주장 그리고 수행적 태도의 교환에 가상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한 상태에서 접근합니다. 이런 관찰자는 이런 관점을 활용하여 자기 입장에 따라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적 사실은 [사람들이 상호의사소통을 통해 만들어낸 다양한 언어, 의미, 규범, 문화적 코드 등과 같은] 상징적으로 구성된 삶의 형식의 한 부분으로서, 양측[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공유하는 이유의 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적(deskriptiv)으로 접근하는 사회학 역시 이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대상 영역에서 마주치게 되는 근거, 입장, 견해들에 대해서는 즉각 대상화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즉 그것들을 단순히 주관적 표현으로 간주하면서 기술하고 있던 주체들에게 귀속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근거들은 ‘그들’의 근거가 될 뿐, ‘우리’의 근거가 되지는 못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근거라는 것이 단순한 주관적 의견이나 동기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상호 주관적 타당성을 요구합니다.
대상화의 관점을 가지고 기술하는 태도를 취하는 사회학자의 관점에서는 관찰된 근거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해당 개인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있는가라는 점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이에 반해 사회 이론(Gesellschaftstheorie)은 연구 대상 영역 내에서 통용되는 타당성 주장(Geltungsansprüche)과 이성적 잠재력(Vernunftpotentiale)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행위 지침이 되는 자기 이해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rational zu rekonstruieren) 과제를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참여자들의 근거는 그것을 [참여자의 관점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고서는 그 자체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사회 이론가는 행위자들의 자기 이해라는 지평에서 기술된 견해, 동기, 행위들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지를 이해할 수 있지만, 동시에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단지 가상적으로만 참여하는‘ 이론가 자신의 시각에서 그것들을 평가, 즉 비판적으로 가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관찰자를 관찰적 실천에 가상적으로 참여하는 자로서 반성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사회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한 해석학적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이론가(Gesellschaftstheoretiker)는 기술 사회학자(beschreibender Soziologe)와는 다르게 이러한 가상적 참여를 중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찰적 실천들 속에서 작동하는 이성적 잠재력, 즉 관련 당사자들에게 근거로 간주되어 사회적 사실을 형성하게 하는 그 근거들에 대해 스스로 입장을 표명하게 하죠. 왜냐하면 사회 이론가 역시 자신이 관찰하는 행위들과 동일한 근거들의 공간 안에 존재한다고 전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는 오직 이러한 전제하에서만 대상 영역에서 발견된 어떤 견해나 학설(Lehre)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기술할 정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사회학자가 관찰자의 객관적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근거들의 공간에 참여자로서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전제 조건]에 대해서는 지금 더 깊이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음 6회에서 계속~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은 실제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 ① –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1]
Max Stirner’s Philosophy Is Actually Worth Reading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은 실제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 ① –
이 글은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 1874~1960)의 글을 2024년에 훔볼트 대학교 사회비판센터 연구원 야콥 블루멘펠트(Jacob Blumenfeld)가 영역하고 이것을 다시 우리 말로 옮기면서 옮긴이가 주석을 단 것입니다.
옮긴이 박종성(한철연 회원)
주로 막스 슈티르너는 칼 마르크스가 조롱한 “허무주의자”(nihilist)로 기억된다. 그러나 독일 사회주의자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가 새롭게 해석한 기사(記事)에서는 슈티르너의 자기해방 철학이 노동계급 운동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주장합니다.
- 옮긴이 서문
노동계급에게는 철학이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어떤 철학이 필요합니까? 아마도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가 1897년에 제시한 답변보다 더 충격적인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노동계급에게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철학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이어야 합니다.
유명한 아나키스트이자 허무주의자인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Proletarian) 철학입니까? 이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 만약 슈티르너의 철학이 단순히 아나키스트이자 허무주의자라고 가정한다면 말입니다. 슈티르너의 사상에 대한 그와 같은 어리석은 묘사는 1844년 그의 책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The Unique and its Property, 종종 The Ego and its Own으로 잘못 번역됨)이 출판된 이래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에는 조금의 진실도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슈티르너를 칼 마르크스를 돋보이게 하는 부정적인 사람(negative foil)이나 프리드리히 니체와의 긍정적인 유사함positive analogy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슈티르너를 슈티르너 그 자체로 읽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를 전유하는(appropriating) 아나키스트와 그를 비난하는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에 끼인 슈티르너는 숨을 쉴 틈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슈티르너를 나쁜 헤겔주의자나 좋은 니체주의자로 읽기보다는, 현대 사회에 대한 원대한 비판자, 우상과 정체성의 무자비한 파괴자, 애국심의 진부한 이야기, 윤리의 본질, 종교의 의식(儀式), 성별의 우상, 그리고 국적의 규범을 경멸한 사상가로서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막스 슈티르너는 현대 사회에 대한 원대한 비판가이자
우상과 정체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사람이었습니다.”
슈티르너는 개인이 자발적 연합(voluntary associations)에서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여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 즉 자유로움을 성취함으로써 고정된 교리와 신성한 관습으로부터 개인의 자기해방(self-liberation)[2]을 옹호했습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 타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자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투쟁은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필요와 욕구로부터 시작해야,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대의(cause), 국가의 대의, 인민(people)의 대의를 위해 싸우지 말고 ―자신, 자기 자신의 대의를 위해 싸우십시오.[3] 이런 대의는 유용성의 극대화, 부의 획득 또는 기쁨의 추구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대의는 각 개인이 자신의 변화하는 삶 전반에 걸쳐 추구하며,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도달하며, 항상 새롭게 노력하는 가지각색의(a multiplicity of) 비교할 수 없는 목적을 지칭합니다.[4]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엥겔스가 언급했듯이 자기중심성(egoism)은 즉시 공산주의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in common), 우리 자신을 위해, 기쁨과 연대로 싸우는 힘 없이는 자기 자신의 삶을 전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통찰은 여러 시대에 걸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으로, 1897년 7월에 『사회주의 월간지』(Sozialistische Monatshefte)에 실린 헤르만 둔커의 이 짧고 낙관적인 글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어 처음으로 영문으로 번역했습니다.
헤르만 둔커의 책 『menschheits-gedichte』[5]
둔커는 독일 사회주의 역사에서 매우 인상에 남는 인물입니다. 파산한 함부르크(Hamburg) 상인의 아들로 1874년에 태어난 둔커 가족은 괴팅겐(Göttingen)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헤르만이 고등학교를 다녔고, 어머니의 손에 자랐습니다. 헤르만은 어머니가 키우는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1897년 이 글을 쓸 당시 그는 23세에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SPD) 당원이었으며 라이프치히에서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 카를 뷔허(Karl Bücher), 카를 람프레히트(Karl Lamprecht) 밑에서 정치경제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음악 학위를 막 마친 상태였습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in her own right 뛰어난 사회주의자인 케테 둔커(Käte Duncker(née Döll))와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사회주의자를 주제로 강연을 다니며 여행했고,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사회민주당을 탈당하여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6],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7],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8]과 함께 스파르타쿠스 동맹(Spartacist League)[9] 설립에 힘을 보탰고 결국 독일공산당(Communist Party of Germany/KPD)[10] 창당에 힘을 보탰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독일공산당의 초대 중앙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헤르만은 1925년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학교를 설립하고 사회민주당과의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독일공산당의 첫 번째 중앙위원이었습니다. 헤르만은 1925년에 마르크스주의자 노동자 학교를 설립하고 사회민주당과의 공동전선에 계속 헌신했습니다. 나치Nazi[11] 통치 기간 동안, 케테는 미국으로 탈출했고, 헤르만은 덴마크, 영국, 프랑스, 모로코를 거쳐, 결국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은 동독으로 돌아와 독일사회주의통일당(the Socialist Unity Party/SED)[12]에 가입했고, 헤르만은 로스토크(Rostock 대학교)[13]에서 [학생을] 가르치다가, 결국 자유독일 노동조합연맹(the German Trade Federation/FDGB)[14]의 수장가 됐습니다. 그는 1960년에 세상을 떠났고,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기념하는 사회주의자 기념관 옆에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펠데(Friedrichsfelde)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정의”와 “권리”와 같은 단어가 좌파의 담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아래 기사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슈티르너의 글을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 그의 사상이 노동계급(working class)에게 영감을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마침내 우리 자신의 대의(大義)보다 더 높은 대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독단에서 사회주의자들을 깨어나게 할 것입니다. 둔커는 슈티르너를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그들 자신과 그들 자신의 필요를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노동자가 스스로(for themselves)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은 사회적 해방을 위한 기본적 전제조건입니다. 둔커가 이 글의 주석에서 지적했듯이, 슈티르너의 “주요 철학적 작품은 레클람(Reklam) 판(版)에서 80페니히(pfennig)[15]에 구입할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작품 자체를 토대로 그의 혹은 그녀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노동이 자신을 얼마나 타락시키는지를 노동자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학”(philosophy of the proletariat)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해방을 가로막는 이념적 장벽을 일부 제거하는 것이지만, 결코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학은 그 일 자체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그러한 해방을 원하고, 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무거운 짐(burden)입니다.
[1]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독일 노동자 교육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원이었으며 나중에는 독일공산주의자의 일원이었습니다. 옮긴이 야콥 블루멘펠트(Jacob Blumenfeld)는 『나에게 모든 대의(大義)는 무(無)이다 : 슈티르너의 유일자 철학』(All Things Are Nothing to Me: The Unique Philosophy of Max Stirner)의 저자입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s://jacobin.com/2024/02/max-stirner-proletariat-philosophy-duncker – 나(옮긴이)는 이 글과 연결되는 내용을 내가 번역한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로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모든 주석은 옮긴이의 주석이다. –
[2] “여기에 자기해방과 해방279(Emanzipation)(자유롭게 방면함, 자유롭게 놓아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주석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 2쇄)[이하 『유일자와 그의 소유』로 표기] 262쪽. 그리고 261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3] “신과 인류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의 근거를 자기 이외에 아무것에도 두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의 근거를 바로 신처럼 다른 모든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나, 나의 전부인 나, 유일자(Einzige)인 나, 나 자신 이외에 아무것에도 두지 않는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11-12쪽.
[4] “실제로 나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며, 유일한 사람이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218쪽.
[5] 헤르만 둔커의 책 『menschheits-gedichte』에는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의 잊을 수 없는 웅변가였던 헤르만둔커가 자신의 펜으로 쓴 시를 통해 자신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각과 감정을 시로 표현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주요 주제는 무엇보다도 형제애와 연대 속에서 전쟁 없는 인간적인 삶에 대한 관심, 즉 인류를 위한 시였습니다! 선별된 시들은 노동 운동 대열에서 지칠 줄 모르는 교육 활동과 파란만장한 삶의 흔적을 따라갑니다. 그는 파시스트 독일에서 배척당했습니다. 1933년 스판다우(Spandau)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에 투옥된 후 수년간 지구 반대편으로 추방되었습니다.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는 베르나우 노동조합 대학의 총장으로서 동독의 사회주의적 변화의 시작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편집자 Dr. Dr. 젊은 대학을 졸업한 독일 하인츠는 1950년대 말 직원으로서 아주 늙은이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In diesem Buch kommt Hermann Duncker (1874 bis 1960), der unvergessene, wortgewandte Lehrer in der sozialistischen Arbeiterbewegung, mit Gedichten aus seiner Feder zu Wort. Er hatte ein ausgepragtes Bedurfnis, Gedanken und Gefuhle inVersen auszudrucken. Seine großen Themen waren vor allem die Sorge um ein menschenwurdiges Leben ohne Krieg in Bruderlichkeit und Solidaritat – Menschheitsgedichte! Die ausgewahlten Gedichte folgen den Spuren seiner unermudlichen Bildungsarbeit in den Reihen der Arbeiterbewegung und seines bewegten Lebens. Im faschistischen Deutschland war er verfemt. Der Haft in Spandau und Brandenburg 1933 folgten Jahre des Exils uber den halben Erdball. Hermann Duncker schatzte sich glucklich, als Rektor der Gewerkschaftshochschule in Bernau denBeginn der sozialistischen Umgestaltungen in der DDR noch miterleben zu konnen. Der Herausgeber, Prof. Dr. Heinz Deutschland, durfte als junger Hochschulabsolvent dem Hochbetagten Ende der funfziger Jahre als Mitarbeiter hilfreich zur Seite stehen).
[6] 로자 룩셈부르크(독일어: Rosa Luxemburg, 문화어: 로자 룩셈부르그, 1871년 3월 5일 ~ 1919년 1월 15일)는 폴란드 출신의 독일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이며 사회주의자, 철학자 또는 혁명가이며, 레닌주의 비판자이다.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이후의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사회 민주주의 이론가였다. 그녀는 신문 〈적기(赤旗)〉를 창간했고 나중에 독일 공산당(KPD)이 된 마르크스주의자 그룹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공동으로 조직하여 1919년 1월에 베를린에서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녀의 지도 아래 수행된 사건은 자유군단에 의해 진압되었고, 룩셈부르크와 수백 명의 스파르타쿠스 조직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7]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년 8월 13일 ~ 1919년 1월 15일)는 독일의 공산주의자, 혁명가, 사상가이다. 1900년부터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이었으며 1912년부터 1916년까지 국가의회 원내의 대의원으로 당내 혁명적 좌익세력을 대표했다. 리프크네히트는 반전주의자로 1916년 독일 정당들 간의 전시 협의에 반대함으로써 의원단에서 제명되었다. 그는 1907년 반전 팜플렛 제작과 1916년 반전 시위의 주도자로 두 번 투옥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독일에서 11월 혁명이 발생하면서, 리프크네히트는 1918년 11월 9일 베를린성에서 “자유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어 11월 11일에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과 함께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독일에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려는 그의 시도는 국가노병평의회(Reichsrätekongress) 다수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918년 말 리프크네히트는 독일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는 1919년 1월 그가 주도한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면서 자유군단에 억류되어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피살되었다. 그의 죽음과 직접 연관된 두 명의 인물이 기소되었으나 재판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8] 클라라 체트킨(독일어: Clara Zetkin, 1857년 7월 5일 ~ 1933년 6월 20일)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여권운동가이다. 1911년 최초의 국제 여성의 날을 조직했다. 1917년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원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옹호하는 당론에 반발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탈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독립사민당내 극좌파이자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에 가담했다.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뒤 공산당을 조직했고, 1920년 ~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권력을 잡고 1933년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독일 공산당은 활동이 금지되었고, 체트킨은 소련으로 망명해 거기서 죽었다.
[9] 스파르타쿠스 동맹(독일어: Spartakusbund 슈파르타쿠스분트[*])은 독일의 단체로, 고대 로마에서 노예들의 계급투쟁을 이끌었던 전설적인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따왔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활동은 1914년부터 암암리에 시작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6년 1월부터 잡지 『슈파르타쿠스브리페』(Spartakusbriefe)를 발행하면서 특히 스파르타쿠스 동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에 독일 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내의 극좌, 극단 성향의 당원들이 탈퇴하여 결성되었다. 1919년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맹원인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체포되어 1월 15일 처형당했다. 이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이 있다. 이 사건으로 좌파공산주의는 쇠퇴하게 된다.
[10] 독일 공산당(독일어: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KPD 코무니스티셰 파르타이 도이칠란드스, 케이피디[*])은 1919년 1월 1일 창당한 독일의 공산당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8년 11월 혁명에 참가했던 많은 공산주의 혁명 조직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독일 공산당은 초기부터 개량적인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 이해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초기엔 의회주의에 대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잏었으나 1919년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공산주의와 인민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으로 통일하였다. 에른스트 탈만이 서기장으로 취임한 이후 독일 공산당은 스탈린주의 노선을 지지했으며, 코민테른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나치 정권 시절 독일에서는 공산주의 서적이 폴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 서적들과 함께 소각되는 등 공산주의가 탄압받았기 때문에 나치당에 의해 독일 공산당의 활동이 금지되었고, 종전 후 연합국의 점령군에 의해 활동이 허가되었다. 1946년 4월 독일 공산당 동부 지부는 독일 사회민주당 통합한 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소련의 지지를 받아 독일 민주공화국을 건국했다.
서독 지역에서 독일 공산당은 제1회 독일 연방의회에 의원을 배출하였으나 서독 정부는 독일 공산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에 책임이 있고 소련에 종속적이며 위헌적인 정당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독일 공산당은 1956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1] Nɑtionalsozialist; 전(前)독일의 국가 사회당
[12]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 독일어 :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13] 로스토크 대학교(독일어: Universität Rostock)는 독일 로스토크에 있는 대학교이다.
[14] 자유 독일 노동조합연맹 (독일어 : Frei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 또는 FDGB)은 1946년부터 1990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민주 공화국(GDR 또는 동독) 의 유일한 전국 노동 조합 중심지 였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동독의 대중 조직으로, 모든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FDGB는 국민전선 의 구성원이었습니다. FDGB의 지도자들은 집권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고위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15] 《독일의 동전; 1마르크의 1∕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