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왔다.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길지 않은 노트 내용을 연재하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연재를 마치며 [유운의 전개도 접기]

연재를 마치며

 

이유운

 

저는 지금껏, 이런 연재를 마치는 마지막 글로 ‘연재를 마치며’ 라는 제목을 다는 게 참 멋없고 촌스럽고 성의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 글을 쓰게 되니까, 이 제목만큼 담담하고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제목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재를 편지 형식으로 대신한다는 것도요. 뻔한 결말이 되어서 아쉽습니다만, 뻔한 게 아니라 구관이 명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편지라는 건 정말 내밀한 형식의 글이죠. 편지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바로 유일의 독자. 물론 저도 카프카나 생로랑이 친구들, 연인들, 사랑과 주고받은 편지가 책으로 나왔을 때 환호했지만, 그 글들은 유일의 수신자가 아니라 제게 읽혔다는 점에서 이미 편지가 아니게 된 셈입니다. 편지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다른 글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제가 쓰는 편지도, 제가 수신자를 모르고 있으며 그 수신자가 유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편지가 아니게 되는 셈이지요. 이런 구구절절한 변명을 모두 대면서도 편지로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저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간의 거리를 좁히고, 또 아주 친한 벗인 척 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하고도 빠른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지막 편지로는 이런 말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사랑시를 자주 씁니다. 제 「전개도 접기」라는 연재를 꾸준히 보아준 성실하고 다정한 독자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시가 대부분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숨겨진 비유 같은 건 아닙니다. 필름을 덮지 않은 새 휴대폰 화면에 덕지덕지 묻은 지문처럼 그대로 드러나 있으니까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데뷔하고 나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저는 엉망이 된 세계에서 자꾸 허물어지고 다시 자신을 세우는 인류가 좋습니다. 제가 그런 특성을 가진 종의 한 일원이라고 생각하면 퍽 즐거워집니다. 생물에는 종마다의 특성이 있지 않습니까? 인류의 종적 특성은 허물어지고 다시 서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는 그 허물어지는 이유도, 세우는 힘도 모두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한 인류, 전 그런 걸 좋아합니다. (물론 그런 인류 중 한 개체가 저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건 좀, 별개의 일입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정말정말 좋아요. 술을 마시면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 합니다. 얇고 흑심이 여기저기 묻은 더러운 손을 흔들며 담배를 피우는 오래 전의 사람을 기억하기도 하고, 저를 연필로만 덧그리는 사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다른 결의 생각들이 모두 제 안에서 시작된다는 건, 논리적인 사고로는 아무래도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 논리 바깥에 있는(뛰어넘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뭉글뭉글한 것, 시각보단 촉각에 가까운 것,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에 가까운 그 무언가를 사랑이라고 지칭합니다. 연애로 축소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디까지 포괄할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상상하는 건 퍽 즐겁지 않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래서 시를 쓴답니다.

신기한 건, 전 아무에게도 이 질문을 되돌려 준 적은 없어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 질문을 했을 때 사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할까봐 두렵기도 했고, 그가 한 대답이 저를 실망시키게 되면, 제가 또 뭐라고 그에게 실망했다는 점 때문에 슬퍼질 것 같기도 했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궁금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사랑을 뭐라고 정의하는 게 대체 저랑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사랑과 다정이라는 건 아주 다른 결입니다. 그렇지요?) 아마 저와 같은 정의로 사랑을 공유하는 사람은 없을테고 바로 그런 점이 재미있는 건데요. 그래서 사실 전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치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답하는 저는 아주 많은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그간 한 많은 인터뷰들을 싫어했다는 건 아닙니다. 치사하다는 건 못된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치사하다’는 어감도 귀엽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다른 이야긴데, 저는 가끔 ‘내 맘도 몰라주고 정말 치사해.’ 라고 제게 누군가 써준 쪽지를 읽어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짝꿍을 같이 하지 않은 어떤 친구에게 받은 쪽지인데요, 옆에는 야무지게 악마도 그려뒀습니다. 왼손잡이였는지 옆으로 죄다 글씨가 번져 있어요. 이렇게 솔직하면서도 하나도 해롭지 않은 애정이 필요할 때 가끔 이 쪽지를 읽어봅니다. 귀엽지요. 사족이 길었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가끔,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면, 내가 지금 사랑이 궁금한 게 맞나? 내가 누군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어요. 사랑과 저를 혼동한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 아무래도 질문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저께 벗과 한철연에서 연재한 시 중에 가장 최근의 시, 「서울극장-인디아 송-」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퍽 공을 들이고 있는 『서울극장』 연작시 시리즈 중에 하나인데요, 서울극장은 제가 상경해서 처음으로 마음을 붙인 장소입니다. 사람이 별로 없는, 3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면 허리가 아픈, 단차가 높은 극장에서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멀리서 관찰하면 제가 겪고 있는 일들은 가짜가 되었거든요. 그 순간이 소중했어요. 그래서 누구는 영화 감독을 꿈꿀 때, 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서울극장을 인수해야겠다’ 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적당한 돈을 모으기도 전에 문을 닫았네요. 애석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극장에 관련된 시들을 많이 썼습니다. 팝콘 기름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면 손이 반질거리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언제나 로맨스 영화만 고르던 사람은 어떤 결말을 원해서 자꾸 그런 영화들만 골랐을까, 사실 그 결말에 내가 없는 걸 원했기 때문에 쉼없이 그런 영화들을 골랐던 게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 길거리에 돌아다니던 술에 취한 늙은 남자들의 얼굴은 어디서 연원했을까, 서울극장이 허물어지고 나면 내가 자주 앉던 의자는 어디에서 소각될까, 이런 질문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면 슬퍼지니까요, 오래 슬퍼하지 않기 위해서 시를 썼습니다. 시를 쓰고 나면 둥그렇게 헐어버린 마음이 남습니다. 슬픔은 잠시 없어지고요. 저를 슬픔이라는 감정에 한해서 소강 상태로 만들어주는 건, 서울극장 다음으로는 시를 쓰는 순간이 있겠네요.

최근에 자주 꾸는 꿈이 있습니다. 제가 시에서 만들어낸 생명들이 태어나 저를 공격하는 꿈입니다. 보통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저의 편에 서고, 제가 증오하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저를 죽이고 잡아먹으려 들어요. 그 시들이 서로 싸우고 피가 발목까지 고일 정도로 끔찍한 전쟁에서 저는 좀 못되게도, 그걸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은 실제로 아무것도 찢지 않으니까요. 그 꿈을 꾸고 나면 항상 생각합니다. 사랑은 정말 증오보다 강한 걸까? 대부분 사랑시들이 지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허물어진 마음을 세워서 다시 시를 쓰게 하는 건 아무튼 사랑의 일이지만…….

아무튼 제가 여기저기서 허물어지는 과정과 다시 세우는 일들을 시로 썼습니다. 이런 시들을 올리며 저는 꽤 행복했던 것 같은데요, 작가와 독자의 마음은 분리되어야 하니까요. 제가 행복했다는 사실이, 당신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 거잖습니까? 그래도 즐거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다음 계절, 책이라는 물성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당신의 얼굴을 모르지만, 당신은 나의 얼굴을 알게 될 겁니다. 저는 당신의 글을 모르지만, 당신은 제 목소리도 알게 될 겁니다. 저는 아주 멀리도 있고 바로 곁에도 있습니다. 참 멋진 일이지요. ■

 

지금까지 이유운 작가의 코너 [유운의 전개도 접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글들을 또 다른 곳에서 만나보길 고대합니다. 너무 멀리 있지는 말기로~   – 편집주간 –

 


지난 작가 소개 글: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서울극장 ― 인디아 송(1975) / 어둠이 닿기 전에 [유운의 전개도 접기]

서울극장

― 인디아 송(1975)

이유운

 

 

글자의 단위로 해체된 영원의 풍경 앞에

우리가 있다

 

이 사이에서 서로의 배역을 침범할 수 있다

우리는 깨진 단어들을 주워서 서로에게 이름을 붙였지

 

나는 너를 위해 이교도의 신에게 고해하는 자

미움을 가지고 네게 도박을 하고 있어

 

우리는 결국 서로를 세 번 부정할 것이다

 

그런데도

손을 나누어 잡고 팝콘 통에서 가끔 손등을 부딪히고 비슷한 장면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 것도 가능했다

 

영화가 끝나면 사이도 배역도 없어지겠지

 

차가운 물에 뺨을 댄 채로

이방인을 예감했다

 

새로 켜진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네 뺨은 결말도 모르고 훌쩍 자랐지

 

헐어 쓰고 버린 마음처럼 매끄럽게

 

너는 그걸 무심하게 바라보는 게 사랑이라고 했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새로운 슬픔이나 기쁨, 사랑이나 전쟁을 마음에 더 이상 들이지 않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연약한 것을

 

우리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토론을 하는 대신

서로의 뺨을 만지며 유일이라고 말을 하면서

무심결에 사랑을 너무나 잘 해낼 수도 있었다

 

저기 봐,

우리가 포개진 장면이 나온다

 

애써 익힌 사랑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니

 

내가 배운 건 영화를 위해 진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너는 입맞춤을 받기 위해 새롭게 만든 이마를 내게 보여준다

검정색 머리카락을 커튼처럼 걷어올리고

 

너는 사라진 것들을 많이 닮았어

너는 대답 대신 웃고 있지

 

희미한 빛 속에서 네 모양을 본다

 

왜 사랑의 장면은 이토록 희고 푸르러야 하는 걸까

 

 

어둠이 닿기 전에

 

 

사랑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건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말과도 같다. 자신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것은 큰 고통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종이접기를 하면 손톱으로 꼭꼭 모서리를 눌러 접어도 뒤집으면 언제나 하얗게 벌어진 부분이 있었다. 내가 내 안으로 들어가 나를 뒤집으면 그런 흰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기적인 마음, 사랑에 대해 욕심을 부리는 마음, 겁이 많아 이기심과 욕심을 사랑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마음, 그 거짓말이 남긴 흰 자국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누군갈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마음. 그런 마음들은 항상 뒤엉키고 함께 자란다. 아무리 예리한 칼로도 그것을 도려낼 수 없다. 나를 들여다 보는 마음에서 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자란다는 건 애석하고 슬픈 일이다. 시시한 사람이 되기 싫어서 그랬다. 나는 대단하고 비범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나를 뒤집었다가 다시 덮을 때마다 여러 자국이 생기고 나는 조금씩 비참하고 구겨질 뿐 조금도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자국이 남은 종이들은 점차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다. 뺨에 닿을 정도로 부드러워지면 나는 종이로 태어나 광목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은 멋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나의 선생님께 자주 편지로 보냈다. 나는 이 편지들을 오래 읽어본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도 이 글이 위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2018년 11월 15일 오전 2시 49분] 난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은 미래가 자신에게 다가와 있기 때문에 장래의 입장에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이나 제도를 진부한 것이고 형편없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 기존의 언어와 생활 관습을 익히거나 알지 않으면 그들을 넘어설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어린이가 부모의 언어를 배우다가 부모에 항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하고 싶은 연구를 끝까지 해야 한다. 단절은 연속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기존의 진부한 습관을 모르는 사람은 창조적 실천도 할 수 없다. 너는 늙은 세대가 아니니 너그러운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는 삼류 정객들의 시대, 덜 떨어진 학자들의 시대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새로움을 바라보고 있다. 너무 심각하니 그냥 웃어 넘겨도 된다. 지나치게 신경 쓰면 건강에 해로우니 항상 명랑하여라.

 

항상 명랑하여라. 이 어려운 말을 위해 마음을 털어내고 키운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가장 보편적인 시 / 〈작가 노트〉 [유운의 전개도 접기]

가장 보편적인 시

 

이유운

 

아무것도 모독하지 않고 문장을 끝내는 법

짐승이 되어가는 사랑을 견디는 법

 

수많은 개론서들 앞에서 자주 마음이 나빠지기 위해

학교에 다녔다

성실하게

 

이마에 붉게 찍힌 낙인을 문지르며

나의 마음을 읽고 쓰는 방법에 대해 물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들은 가르치기 어려웠다

 

    이것은 시입니다. 저것은 예술이고요, 이 방 안에서 당신은 여자라고 규정됩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보세요. 걸음걸이마다 이름을 붙여봅시다. 그런 것을 우리는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실재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생각 좀 해보세요, 누가 그런 걸 궁금해하겠습니까? 존재보다는 기분이 중요한 시대니까요. 자, 다같이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이것은 시, 저것은 예술, 당신은 여자.

 

잘 포장된 나

 

미래파적, 언어의 무용, 무해한 표현들, 상처받은 어린 화자, 탈피하고자 하는, 흰 공간……

대체로 시시했고 대부분 비슷했다

 

그러니까 진짜 웃기지 않니? 시라는 건

아무렇게나 말하고 이렇

행갈이만 하면 문학

지 않니

아주 문학 같다

퍽 예술 같기도 하지

 

뭉뚱그려 보편적인 시라고 거들먹거리며 걸어다닌다

 

 

작가 노트

 

어떤 행위에는 모종의 도덕성이 부여된다. 도덕성을 보유한 자와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자는 퍽 다르며 둘 다 이런 시대에는 비겁한 자가 된다. 성실하고 도덕적인 자 보다 비겁하고 저열한 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세상이므로 파편적이고 주변적인 시보다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시를 쓰는 게 훨씬 더 쉽다고도 말할 수 있다. 보편적인 시와 보편적인 학습. 그것들은 대체로 비슷한 말들을 하고 있다. 무해하고 하얗고 깨끗하고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하고…… 이런 말들도 행갈이를 하면 시 같을 것이다 보편적이므로.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백과전서파의 사랑 / 유일한 자에게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종교적 습관이자 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유운의 전개도 접기]

백과전서파의 사랑

 

이유운

 

나는 사전이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창틀에 정의들을 끼우고 학습하기에

적절한 탄생이다

 

많은 것을 외우며 자랐지

 

죽은 비둘기의 표정, 싸구려 조명,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 무릎의 튼살, 양철통으로 만든 마음, 꿈의 안팎에서 소진되어 돌아온 패잔병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더 이상 외울 정의가 없었으므로

그 또한 적절한 단락이었다

 

너는 자주,

날씨의 정의 아래에 서 있었다

 

헝클어진 얼굴

부르면 돌아보는 이름을 가진

 

그건 너무 순진한 모양이어서

나는 네 살갗을 짚으려고 손을 만들었다

 

내 손금에 박힌 절반의 문장을 보여줄게

이것이 우리 집에 마지막으로 남은, 아무도 외우지 않은 말이다

 

사물들이 점친 내 운명의 점괘다

 

요약하자면

 

돌이킬 수 없고 자주 갈라진다는 것이고

밝은 밤에 죽을 거라는 결말이다

 

결말이 오기 전까지

나는 주로 지칭대명사처럼 기능할 것이고

대부분 너를 위해 주먹을 쥐었다 펼 지도 모르겠다

이 점괘가 입술의 단위로 부서질 만큼 자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너를 부르면

너는 너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했지

 

아쉽지 않다

 

주인이 된다는 건

언젠가 그걸 잃어버린다는 거니까

 

네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며 집을 돌아다닌다

네가 지나치는 곳마다 정의들이 우수수 비처럼 떨어지고

 

비참하게 쌓인 종이들이 오래들 자고 있다

 

우리가 그 위에서 춤을 추면 어떨 것 같아?

 

나 아주 슬플 것 같아

 

 

 

유일한 자에게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종교적 습관이자 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내게 많은 풍광을 보여준다. 그는 내가 살지 않은 모든 곳으로 나를 데려갈 수 있다. 내가 아직도 공릉과 헷갈리는 정릉, 서울의 골목들,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걸음들, 학교, 순간들, 사람들, 얼굴들, 사랑들, 시간들, 미움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절대 알지 못했을 것들. 그 풍광들을, 순간들을 자꾸 글로 쓰게 된다. 그게 나로부터 미끄러지지 않았으면 해서. 내 마음과 시간과 우리에게 무언가 자국을 남기고 내려갔으면 해서. 그 자국이 쌓여서 스키드 마크를 남겼으면 해서. 그 마크를 손으로 짚으면 맥박이 느껴졌으면 해서. 내 손바닥을 간질이는 맥박. 고동. 규칙적인 심장의 소리. 우리 이 도시에 잔뜩 스키드 마크를 남기자. 모든 자국은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 언어 사이로 미끄러져 가는 사랑을 지켜보고 서 있다. 비가 내린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여름성경캠프 / 나의 투명한 자매님들에게 [유운의 전개도 접기]

여름성경캠프

 

이유운

 

어느 날 해가 거꾸로 솟았다 어젯밤 우리 중 누군가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깍지를 끼고 마주 잡은 손 위로

불투명한 천을 덮었다

 

천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어둠을 먹고

 

소원의 주동자를 색출할 때

한 명이 나서는 대신 모두가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용서한다는 일의 기괴함

 

사이좋게 멸망하길 바라는 마음이 왜 상냥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걸까

 

거짓말을 한 죄로 성역에서 분리된 우리는 서양호랑가시나무를 주워다 오두막을 짓고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 곳으로 추방당해 오는 자 모두 구원받으리”

 

쉽게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방법

이런 편리한 구원을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죄를 용서하는 신은 없어도 좋았겠다고 속삭였다

 

어둠을 잘라 만든 미사보

그 아래에 무릎을 대고 앉은 나와 너

 

고해하는 목소리 고백하는 얼굴

지옥을 가르치는 말투 사랑을 배우는 표정

 

유난히 날카롭게 발음되는 보호와 구원이라는 단어

 

너는 일어선다

그리고 난파된 유람선을 보듯 나의 무릎을 보고

 

『돌아가자』

 

너는 왜 그런 말을 선언처럼 하는지

너와 나를 우리라고 말하는 걸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도망가자』

 

너를 흉내내 고백하는 나

나는 너를 보지 않고 신발끈을 묶는다

 

우리의 캠프는 익사하기 좋은 숲에서 끝난다

 

캠프가 매해 여름마다 열리는 건, 우리가 만든 성역의 오두막은 오트밀을 먹으러 오라는 종소리와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지

 

네 귓바퀴 모양을 닮은 조개를 줍고

살갗같은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다 아마포처럼 두르고

 

오두막 바깥으로 너의 녹색 트렁크가 멀어져 가는 걸 본다

 

영원한 아침이 오고

천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나의 투명한 자매님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 베드로의 첫째 서간, 4장 8절.

 

사랑에 있어서, 나는 그간 제법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리는 배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떤 사랑이 그것이 사랑인지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 아닌 것도 사랑이라고 쉽게 착각했기 때문에, 아주 흐릿한 사랑의 징후들도 사랑이라고 잡아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여름성경캠프.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첫사랑의 자국을 떠올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동그랗게 모여 앉아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38색 크레파스’가 적힌 종이 쪽지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기억 사이에서 사랑의 징후를 찾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체구가 작았고 혼자 이상한 상상에 빠져 있는 좀, 음침한 어린이였다. 그런 나에게도 언니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오곤 했다. 성당에서는 미사보를 쓰고 있어 옆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그들이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묶고 드러낸 건강한 빛깔의 귓바퀴를 보는 것이 좋았다. 그들은 나에게 운동화의 벨크로를 단단하게 누르며 낮은 나무를 오르거나 풀을 뜯어다 반지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봉숭아 물을 들이는 법, 그리고 첫눈이 올 때까지 그것이 사라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마법 같은 이야기들도.

― 첫사랑이 이루어지는 거야.

― 그게 뭔데?

―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를 좋아하는 거.

그러면 나는 이걸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나는 내 손에 봉숭아 물을 들여주는 언니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언니들을 좋아하고 언니들은 나를 귀여워했으므로. 지금 이미 이뤄진 일을 위해서 첫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건 이상하게 들렸다. 그해 겨울에 첫눈이 내릴 때까지 내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었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발생한 사건의 진실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일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 캠프가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둘러앉은 둥근 얼굴들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너무나도 위대한 일이라서 고작 봉숭아물이 사라지지 않는 걸로는 이뤄지지 않았다.

종교는 나의 가장 오래된 습관이다. 집 한 켠에는 언제나 마리아 상과 ‘가정을 위한 기도’ 팻말이 놓여 있었고, 일요일 오전에는 어린이 미사를 갔고 나이에 맞추어 여러 가지 세례를 받았다. 나는 매주 신에게 고해할 나의 죄악을 마련해갔다. 나의 양육자는 내가 잘 되기를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나는 그 기도가 내가 받은 사랑 중에 가장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등학교 입시 시험을 잘 치르기를. 수능을 잘 보기를. 내가 대학을 잘 가기를. 내 석사논문이 무사히 통과하기를. 지금은 그가 나를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정상적으로 사랑하기를’?

이 에세이를 발표한다는 건 사실 아주 모험적인 일이다. 이 에세이를 쓰고 삼켜두고 일기장으로 복사 붙여넣기를 한 다음 다시 이 페이지를 비우고, 텅 빈 화면을 바라보고, 다른 글을 쓰다가 그걸 다시 지우고, 제목을 바꿔보고, 다른 시를 뒤적여봤다.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몇 번이나 망설였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꼭 ‘나’가 앞으로 나올 필요는 없다. 이것은 비겁한 방법이 아니며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할 때 당사자성은 필수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분과 태도가 아주 달라진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은 남성적이고 폐쇄적인 언어로 말을 한다. 대부분 내가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주 멋지고 유연한 사람들이었지만 철학의 이름을 달고 있는 매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위험한 일일수도 있다. 나는 한 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한다. 모든 사람은 최소한의 삶을 존중받아야 한다. 누구라도 타인의 삶을 규정할 수 없다. 모든 형태의 사랑은 위대하고(Love wins!) 물론 사랑이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하며, 누구의 젠더라도 존중해야 한다그리고 나는 이 말에 찬성한다.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일은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이상하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인데 어떤 말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선을 밟고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작년과 올해, 정말로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아는 사람들도, 친한 사람들도, 멀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SNS에 쓴 글들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슬픔이 가시면 화가 났다. 치사하기 그지 없다. 선은 처음에 누가 그었나? 우리 모두 분필을 쥐고 원하는 선을 그어보는 경험이 있었나? 없었다. 선을 긋는 분필이 있는지도 몰랐다. 태어나니까 그런 선이 있었다. 그 선에 운동화 앞코로 모래를 뿌리고 뛰어놀다 보니 좀 흐릿해졌다. 네 앞에 선이 있는데, 넘어가도 돼? 누군가 묻는다. 나는 그 선을 그린 적도 없고, 나에게 의미도 없는 선이니까 괜찮다고 말한다. 함께 놀 때는 공간이 넓은 게 좋으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나를 죄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괴이하고 비논리적인 일이다. 이걸 누가 그었는데요? 아무도 모른다. 모르면서 우선 잘못이라고 한다. 우리는 걸을 수 있으니까 걸었고 뛰고 싶어서 뛰었을 뿐인데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잘못이 되었다.

나는 나를 부정하거나 규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에게 ‘나는 이해하고 존중해’ 라는 말도 할 필요조차 없다. 당신이 뭔데 나를 이해하지? 나는 타인이 내 존재를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지? 길을 잘 가다가, 당신을 지나치는 고양이나 노신사를 갑자기 붙들고 ‘나는 네 존재를 이해한다’ 라고 말해보는 걸 상상해보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다. 그걸 왜 ‘특별하고 편견에 맞서는 분들’ 에게는 하지 못하는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와 거리를 두고, 내가 그런 사람인 것을 지나치면 된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보통 이런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 수는 없니?”라는 괴상한 말이다. 평범이라는 게 뭔지부터 말해봐야겠다. 소위 말하는 ‘정상’? 그럼 세상의 어떤 사람도 태어나서 한 번도 평범한 적 없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언제나 특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힘껏 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백 번 나은 말 같긴 한데, 그래도 즐거운 말은 아니다.

이 괴이한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그리고 때마침 운좋게 나는 시인이다. 할 수 있는 건 계속해서 말하고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이라는 건 이런 말을 하기에 퍽 편리한 도구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발표하기로 했다. 별 얘기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선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땅따먹기를 하고 있을 것이고 나와 내 친구들은 새로운 평범을 위하여 선이 없는 세상으로 갈 것이다.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은 당신의 자유지만…… 낙오자가 되는 건 아무래도 멋진 일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 영원한 벗,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 용감했던 HY를 기억하며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농담의 세계 / 곪아버린 것들의 신 [유운의 전개도 접기]

농담의 세계1

 

이유운

 

포자의 상태로 나누는 입맞춤

언니는 전보다 나를 사랑하는 얼굴을 하고 있지

 

나는 하얗게 빛나는 나의 연인 앞에서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이거나

아주 먼 곳에서 상상된 타자이거나

 

나는 발뒤꿈치로 걷고 있으며

언니는 턱을 괸 채로 나의 망가진 걸음걸이를 본다

 

이 세계에서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들 뿐

 

우리가 똑같이 없어진 세계에서

우리, 건강하게 잘 지내자

 

언니가 나를 보지 않고 신발끈을 묶으며 말했으므로

나는 이 장면이 원망인지 희망인지 알지 못했다

 

미지근한 초콜릿을 입에 머금고

언니와 나 사이의 시차를 본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드라마가 되겠네

혹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가 되거나

 

내가 닮은 건 언니의 뒷모습

나는 꿈에서 거슬러 받은 나를 추슬러서 돌아온다

 

이토록 지겨운 세계에서

이제 나는, 꿈을 꾼 나날들을 가늠하지 않고……

 

 

곪아버린 것들의 신2

 

련도, 난연[爛然] 곪아버린 것들의 신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종종 이 세계가 내가 알던 세계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이상한 감각이 든다. 가위를 눌리면 손가락을 뒤로 꺾어보면 된다고 한다. 꿈 속에선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잠든 사이에 세계가 온통 바뀌어 있다면, 그건 무슨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고통의 감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나는 세계를 감각할 수 있을까? 꿈이 선명하게 기억날수록 이런 의심은 강해진다.

    꿈 속에서 주로 나는 신과 대면하곤 한다. 내가 믿는 신일 때도 있고, 내가 존재조차 몰랐던 신일 때도 있다. 주로 그 신들은 화가 나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만들어냈는데, 너는 왜 그렇게 나를 모욕했느냐고 화를 낸다.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그 신들의 얼굴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의 얼굴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종종,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고 또 실제에는 없는 실재의 인물들의 얼굴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 그리고 그림에서 내가 상상으로 얽어낸 얼굴들이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지만 그들 자신을 위해 종교와 신을 만들어낸 멋진 종족이다. 나는 그 종족의 일원으로써 이 멋진 발명품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나는 신화와 종교가 좋다. 그들이 죽음과 고통을 대하는 엄청난 자세가 좋다. 취향에 따라 종교와 신을 선택하는 일은 어쩐지 불경하게 느껴지지만…… 특히 좋아하는 건 질투하는 신들이다. 그런 신들은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경배와, 손으로 꼽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선사한다.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신과 악마가 잘 구분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신을 믿으면서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건가? 인간에게 바람을 불어 넣어 전쟁을 하게 만드는 신, 메뚜기와 전갈을 보내 사람을 갉아먹도록 하게 하는 신, 인간의 가죽을 벗겨내는 것으로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신. 그런 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한 걸까? 그들의 공포를 기반으로 한 믿음은 어딘가 서슬이 퍼렇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낸 신화는 조금 색깔이 다르다. 련도 작가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새롭고도 아주 멋진 새로운 신화에 매혹되었다. 영원의 신,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영원불변의 곧은 신은 언제나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의 손은 언제나 신성한 손으로 쥐고 있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 하지만 련도 작가의 신화에서 새로이 태어난 신들은 그간 신의 것이 아니었던 특성들을 전유한다. 곪거나 썩은 것들. 무한보다는 영원에 가까운 순간의 신들. 이 신들은 슬프거나 질투하거나 무서워 보이지 않다. 그는 내 꿈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왜 나를 모욕했느냐고 화를 낼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살이 썩어 있으니 그것을 만지면 저항없이 내 손가락 사이로 허물어질 지도 모른다. 신화와 꿈 사이의 금을 밟고 서 있는 그들은 가끔 나에게 그런 살갗과 얼굴을 보여준다. 정말로 연약하고 매혹적인 신들이다.

    그 중에서도 《곪아버린 것들의 신》을 봤을 때, 그가 그려낸 신의 팔과 얼굴에 돋은 이끼와 버섯을 보며 이유리 소설가의 「버섯의 나라에서」를 떠올렸다. 우리는 사랑과 신을 쉽게 등치시킨다. 그 둘은 모두 완전무결하고 성스럽고 깨끗하며 그 흔적들은 여기저기 낭자하지만 그것의 실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전설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신과 사랑을 모욕하는 건 비슷하게 힘이 들고 또, 꼭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버섯의 나라에서」에서 ‘강희’는 “레즈비언 윤강희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버섯 윤강희가 되겠다” 하고 유서 아닌 유서를 남긴다. 그런 그가 마지막 편지에 연인에게 건강하길 바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같다.

    강희가 버섯이 된 방 안에서, ‘언니는 여전히 잘 있다’ 라고 말을 시작하는 ‘수민’처럼, 나도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서 지금 내게 벌어지고 있는 신화 없는 전쟁의 삶을 받아들인다.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연약한 신과, 내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작고 하얀 연인이 있는 삶을 받아들인다. 그런 삶에서는 나도 무언가를 태어나게 하고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으로 걷는 시간을 소망한다. 아마도 그 시간이 흐르는 세계는 푹신푹신한 땅이 없어서 나는 발뒤꿈치로 걷고 있으며 자주 넘어져서 무릎과 발뒤꿈치가 죄다 까져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가짜로 만들어진 쿠션을 걸어 무릎의 연골과 근육이 퇴화되는 것보다는 자주 다치고 구르며 아주 멀리서 태어나는 내가 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슬픈 이야기와 연약한 신을 태어나게 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에 포자처럼 달라붙어서, 나는 딱딱한 길 저 멀리까지 가고 싶다.

 

 

 

이유리 소설가는 2020년 경향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빨간 열매」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onyuthegreatestcat@gmail.com

련도 작가는 신화와 종교를 기반으로 주로 평면 작업을 하고 있다. ryundoyoon@gmail.com

 

 

  •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동 시대 작가들과 동료들을 소개하는 연재를 마치고 2주 후에 유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1. 본 시는 이유리 소설가의 「버섯의 나라에서」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이유리, 「버섯의 나라에서」, 『레인보우 다이빙』, 아미가 출판사, 2020.

  2. 련도 작가의 동일 제목의 작품에서 따왔다.

프리저 브레이크Freezer Break / 얼어붙은 빛덩이들에게 [유운의 전개도 접기]

 

프리저 브레이크
Freezer Break

이유운

 

 

어디서 왔어?

네가 포장지 없는 나의 살갗을 바라보며 물었으므로

나는 공원에서 왔다고 답했다

 

너와 마주한

아일랜드 식탁

 

나의 곁으로 먼지가 빛처럼 내려앉기도 하고

거대한 손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끌어안기도 했다

 

사이좋게 둘러앉아서

 

사실은 난

돌아갈 곳이 있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모두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식탁에선 어울리는 주제가 아니었다

내가 뭐라고

 

내가 볼품없이 망가지고 나면

그러니까 이 식사가 끝나고 나면

 

모두가 둘러앉아 우리의 원인을 고백했으면 좋겠다 나는 너의 빠진 속눈썹으로부터 너는 나의 빛나는 어깨로부터, 그리고 나면 내가 등을 돌리겠지

너는 내 등 옆에서 이전에는 나의 일부였던 눈과 빛덩이를 움켜쥐고서

 

나는 네가 나의 바깥이 되는 일이,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도 믿었다

 

너에게 물을 부으면

반듯하고 가지런한 사랑이 나온다

 

우리 모두 이 만들어진 사랑에 박수를 치자

 

나는 네 단단한 침묵을 견딜 것이다 내가 녹는 방식으로

 

 

본 시는 김지우 극작가의 「프리저 브레이크」를 인용하거나 변용하였다.

김지우, 「프리저 브레이크Freezer Break」, 웹진 연극인 197호 수록(2021. 03. 25)

 

 

 

얼어붙은 빛덩이들에게

 

 

어렸을 때, 나의 양육자는 내가 멋진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건, 예민하고 성질이 나쁜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라면 한 번씩은 하는 착각일 것이다. 나의 양육자 또한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고, 그는 매번 주말마다 대중교통을 몇 번씩이고 갈아타고 예술의 전당이나 서울시립미술관에 데려가곤 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언제나 《어린이를 위한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을 보았고, 평양에서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가 왔을 때는 줄을 길게 서서 보고 오기도 했으며, 조금 머리가 커지고 나서는 명동예술극장에서 《밤으로의 긴 여로》를 보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양육자가 기대한 만큼 멋진 예술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어렸을 적 의무처럼 겪었던 예술 경험 덕분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예술 향유자 정도는 된 것 같다.

그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예술 분야는 연극이다. 곧은 눈동자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만으로 사랑과 슬픔과 그 너머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그 예술을 동경한다. 처음으로 내 의지로 본 극은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기억의 체온》 낭독극과, 와즈디 무아와드의 작품을 번역한 《그을린 사랑(원제:Incendies)》이다.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픈 형편없는 붉은색 의자 위에서 나를 보는 듯, 나를 보지 않고 죽음과 사랑을 번갈아 이야기하는 그 순간이, 그 몰입의 순간이 너무나도 좋았다. 좋았다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게 옷을 입고 벗는 것처럼 타인의 인생을 덮고 내려놓는 배우들에 나는 매료되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onme habentes nihil possidentes)”을 수 있는 유일의 자들처럼 보였다. 나는 아마도 그들을, 그로토프스키의 말마따나 성스런 배우(holy actor)처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매번 다르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배우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희곡을 읽고 쓰는 일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옛 작가들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시대를 살며 희곡을 쓰고 극을 사랑하는 자들의 극도 읽기 시작했다.

젊은 극작가들은 자유로운데, 그들은 “아우라의 쇠퇴나 상실(Verfall der Aura / Verlust der Aura)”의 가능성을 고려하거나, 그들의 작이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이 될지도 모른다는 책임감 혹은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고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자유롭다(혹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비단 극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감정과 정신의 골격, 행위에 앞서는 감정을 작품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예술의 새로운 형태이자 역할이 된 것 같다. 신화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자 하지 않는 예술이 얼마나 투명하고 빛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의 작품에는 더 이상 동상이 세워지지 않는다. 대신 탈출을 위해 철조망을 넘는 난민, 사랑을 기계적으로 출력하는 AI, 이 모든 세상에서 배회하는 내가 있다. 이런 변화는 경쾌하다.

김지우 극작가의 데뷔작 『길』을 보면, 주인공인 미노와 이르는 그들을 허구의 이상을 위한 목적으로 쓰는 것을 거부한다. 미노는 “이름이 그대로라서 다행이라고”, 말하며 터널과 청자를 향해 자신의 이름을 외친다. 그들이 상실할까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다. 이 얼마나 슬프고 처절한 근대적 인간인지! 미노와 이르는 상상으로 현실을 만들고, 현실로 상상을 만든다. 그들은 교차되는 호명으로 그들의 존재 가능성을 증명한다. 우리는 늑대도, 코요테도, 미노도, 이르도 될 수 있다. 서로 미노와 이르가 있다는 전제 하에.

지난 8월, 전시공간 불나방에서 평면 기반의 작업을 하는 네오내오 팀의 《네 개의 틈》 전(展)에 간 적 있다. 그 전시에서 나는 밧지 작가의 여러 작품을 보며 상상으로 무언가가 될 수 있는 예술의, 우리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김지우 극작가의 작품들을 몇 마디 끼워 맞추기도 했다. 예를 들면 《유토피아Utopia》 라는 작품에는 미노와 이르가 노을이 내려앉은 기차 위에서 늑대를 상상하는 모습을 넣어보았고,

 

밧지, Utopia, oil on canvas, 30×30

 

 

밧지, Harmony, oil on canvas board

 

《하모니(Harmony)》라는 작품에서는 “오리 (머뭇거리다) 있지, 내가 빨리 녹으면 날씨가 그만큼 따뜻해졌다는 뜻이잖아.” 라는 대사를 떠올리기도 했다.

꽉 채워진 여러 색깔이 그리는 빛이 가득한 그림은 경쾌했지만 어딘가 슬프고 묵직했다. 밧지 작가는 조금 수줍은 표정으로 나와서 이 그림들이 경유한 과정들을 설명해줬다. 스위스에 있을 때, 어딘가를 걸을 때, 마주쳤던 빛과 순간들……. 사실 그 모든 말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와 그의 세상에 몰입하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 자신이 겪는 감정, 자신이 확신하는 감각, 자신의 주변에 충실한 그림. 물감이 뭉쳐 있는 양감과 붓이 지나간 질감을 보면서 나는 그런 것들을 상상했다. 자신을 충실하게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더라도 투명하다고.

투명한 작가들이 계속해서 더 많이, 더 크게, 더 반짝거리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손을 잡으러 와도 좋다고 그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마음껏 말했으면 좋겠다.

 

 

김지우 극작가는 2020년 서울신문 희곡 부문에 『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iamalexakim@gmail.com)

밧지 작가는 평면 작업을 위주로 하고 있다. (dig05061@gmail.com)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우리는 아무도 울지 않고 / 아무도 우리를 울리지 않고 / 이유운과 류휘석 [유운의 전개도 접기]

우리는 아무도 울지 않고

 

이유운

 

갑자기 모든 개가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다들 아프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손을 바꾸어 잡아가며 걷고 있었다

 

영원히 내리는 비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는 사이좋게 사랑에 빠지고

 

네 옆얼굴에 빗물이

그림자처럼 흐르고 있었다

 

보도블럭의 금을 피해 밟으며

너는 노래처럼

“너와 있으면 이상한 규칙들이 너무 많아져.”

 

나는 네 제국이 되는 나를 상상한다

 

거꾸로 말하지 않아도 아비를 저주할 수 있는 마법의 세계가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그 세계에서도 적당한 인사말을 배우려고 애쓰고들 있겠지

 

우리는 축일을 생각하며 타로카드를 던지기도 하고

죽은 비둘기를 보고도 고기를 먹었냐는 질문을 하기도 하면서 자랐으므로

선언하지 않고 안부를 묻는 법을 잘 모르지 않니

 

왜 우리는 침묵하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까

 

귀를 막으려고 잡은 손을 풀면

너의 얼굴에 자라는 슬프고 무서운 표정

 

비에 젖은 횡단보도와 우리가

각자의 소음에 골몰하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울리지 않고

                                               

류휘석

 

앞서 걷던 네가 뒤돌아

“벌써 끝인가 봐. 개가 돌아오고 있어.”

말하면서 규칙은 시작된다

 

“가는 길에 비 피할 곳이 있을까요?”

지친 개를 안아든 주인이

흘러넘친 얼굴을 닦으며 말을 걸자

 

너는 개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나는 네 손을 꼭 잡고

 

“글쎄요. 저희는 방금 막 시작해서요.”

 

목줄이 길게 바닥을 긁으며 저녁을 죄다 끌고 가는 동안

그 틈으로 모인 짙고 어두운 빗물이 우리들의 발목을 세게 말아 쥐는 동안에도

너는 개가 사라진 곳을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를 울리지 않았는데

공원은 넘치려하고

 

나는 가만히 네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단단하게 직조된

가늘고 의미 없는 인간의 형상 같은 것을

 

“괜찮아?”

 

움켜쥔 사랑을 마구 휘두르면서

우리를 우리라고 함부로 부르는 것을

 

“미안. 잠깐 다른 생각했어.”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여기가 끝이에요?”

 

나는 손가락을 뻗어

공원의 안전표지판을 가리켰다

 

 

 

이유운과 류휘석

 

이유운과 류휘석은 놀랍게도 어떤 자음도, 어떤 모음도 공유하지 않는다. 동그란 이유운과 각진 류휘석. 나는 이름만큼이나 그와 다른 사람이다. 그도 이름만큼이나 나와 다른 사람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시가 아니었으면 절대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아주 ‘극적’으로 만났다. 작년, 나는 집 옥상에서 ‘옥상낭독회’를 개최했다. 나는 갓 데뷔한 시인이어서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리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면서 무슨 배짱이었는지 SNS에 옥상낭독회를 할 거니까 아무나 오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온, 이상한 아무나 중에 류휘석 시인이 있었다. 우리는 그때 처음 만났다. 류휘석 시인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부끄러운 일들과 사랑의 불가능을 말하고 시를 읽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나는 그가 아무렇지 않게, 조금 더 뜯어보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하는 표정으로 시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서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도 나를 보면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로 이상한 우리는 그 후로 꽤 시간이 흐르고 여름의 초입에 만나서 술을 마시며 친해졌다. 어른이 되고 좋은 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타인과 친해질 때 아무렇지 않게 제정신이 아닐 수 있도록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

시인들은 정말로 술을 마시면 시 얘기만 하는군요. 류휘석 시인과 술을 마시며 내가 웃었는데, 그 ‘정말로 시 얘기만 하는 시인들’ 무리에 나도 있었다. 시인 이상형 월드컵이나 데뷔작 밸런스 게임 같은, 어디 나가면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할 이야기들이 통용되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다. 그래도 우리가 가장 많이 한 건 욕이다. 이 문학‘판’이 정말 별로라고, 다들 꼰대같다, 전부 쓰레기같다, 라고 말하면서 결국엔 무슨 시를 쓰고 싶은지 말하는 게 웃겼다. 시에 진심인 것 같으면서도 시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하고 인생의 전부가 시를 쓰는 것처럼 굴고선 바로 시를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것처럼 툴툴 털어내고 일어나는 것이 뭐랄까, 그는 나와 정말로 다른 부류였다.

그는 자신에게 확신이 있다가도 없었고, 물렁물렁하고, 슬퍼 보이면서도 경쾌했고, 외로워 보이면서도 친구가 많았다. 그런 그가 나나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확신을 가지는 것이 퍽 신기했다. 그는 나를 신뢰한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진심으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나의 모든 면을 신뢰한다는 것인지 나는 자주 고민했다. 나는 거의 모든 순간 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래도 그가 신뢰할 수 있는 나의 면을 고를 수 있다면 나는 시를 제외한 생활의 면모였으면 좋겠다.

나는 그에게 종종 내 시의 초고를 보여준다. 신기하게도 그는 내가 자신없이 얼버무린 부분이나 외면한 부분들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나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나의 가장 나 같지 않은 부분과 나의 가장 나 같은 부분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모른다. 잘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탁월하게 질투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으나 그들을 잘 알 수 있는 꾸준함, 다정함, 세심한 시선 같은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나를 신뢰한다고 하면, 나는 신뢰받을 만한 생활을 꾸릴 책임감을 갖게 된다. 나의 책임감은 나를 보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에 빚지고 있으며 류휘석 시인은 핑크 팬더 비니를 쓰고 그 얼굴들 중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다.

 

 

이유운 작가의 말

가을 동안은 제 벗들을, 예술적 동료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들 저와 다르게 기쁘고 비슷하게 슬픈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소개한 류휘석 시인은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랜덤박스」로 데뷔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무너지는 패턴과 수신인 미상 / 나의 다이애나에게 [유운의 전개도 접기]

    무너지는 패턴과 수신인 미상

 

이유운

 

들립니까? 말하겠습니다

지금은 계속해서 무너지는 중입니다

괴기하고 아름다운 모양으로 무너지는 저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아주 많이요

다들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좀 우습기도 해요

무너지고 나면 나는 더 이상 금이 갈 수가 없으니 내가 여기서 가장 단단한 존재일 텐데

나를 타고 넘어가는 연인들이 있습니다

내 핏줄을 우두둑 뜯어내며 철골로 된 반지를 만들어주겠다고 속삭여요 “이건 끊어지지도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을거야”

다 거짓말이죠 제가 바로 그 증거니까

이상하게 나와 당신을 닮았어요 그 연인들

서로를 부르는 이름을 듣고 싶은데 이름 없이 입만 맞추고 있어요 그 축축하고 슬픈 소리…….

무너질 때 우는 건 부끄럽고 못된 일이라서 입술 안 쪽을 꼭 깨물고 있어요 비린내가 나요 뭔가를 잡아 먹은 사람처럼

당신은 나에게 왜 이렇게 자주 무너지고 있느냐고 물었었지요 부스러기와 먼지가 너무 많이 날린다고 코를 풀면서 무너지는 나 때문에 비염이 도무지 낫지를 않는다고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나도 낫지 않는 병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그런 병일수도 있고

있고

없고

방금 무너지고 있는 나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 연인들이 들어와 앉았어요

서로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그래, 이런 곳이 필요하지

나는 귀를 기울이는데 내가 무너지는 소리가 너무 커서 잘 들리지가 않아요

마지막 연인 같아, 부럽다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우리도 무너지는 누군가 안에 들어 앉아서 서로 이름을 최초로 부르고 좋아하는 색깔을 물었어요 그거 엄청난 비밀이잖아요, 당신은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했고

눈을 감았다 떠요 그때 눈동자가 파란색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깨지기 쉬운 유리 거품처럼

거품 바깥으로 연인을 봐요

우리가 함께 모욕하고 돌 던질 수 있는 유일한 과거

그런데 그 때 우리가 앉아 있던, 무너지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이제야 이런 게 궁금하다니 나도 참 못됐어요 물론 당신도 마찬가지

우리는 닮았으니까

입술을 뒤집고 네모난 이를 모두 드러내 보여줘요

나는 그렇게 웃을 줄 몰라서 일부러 입술을 누르는 그 장난이 좋았어요

이렇게 웃을 때 뭔가가 한꺼번에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푸른 소리

들려요?

이 소리가 부럽고 궁금했지요?

내가 무너져야 이런 소리가 납니다

이제

다 무너졌습니다

도망쳐도 좋아요

또 편지할게요

 

 

 

  

나의 다이애나에게

 

 

    잠깐 인천에 살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동네 근처에는 해체 작업 중인 건물들이 많았다. 삼사층 짜리의 작은 빌라들을 부수고 아파트들을 짓는 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어린 내가 다 알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공사는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나는 그 황폐한 풍경이 좋았다. 도시 한복판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황량하게 뼈를 드러내고 있는 건물들. 나는 반쯤 무너진 건물들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런 건물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아지트가 되었다. 어느 건물에 들어가도 바닥에는 본드와 봉투, 그리고 브랜드가 다른 몽당만한 담배 꽁초들이 어지럽게 버려져 있었다. 손톱보다 짧아진 담배 꽁초를 보면서 나는 신기해했다. 이렇게까지 짧게 태운 담배는 처음 본다. 나는 아빠나 삼촌이 버리는 담배보다 훨씬 짧은 담배 꽁초들을 보면서 그 꽁초에 입술을 댄 사람을 상상하기도 했다.

    나는 보통 햇빛이 사선으로 들어오는 오전 즈음에 그런 건물 안에 들어가 앉아 있는 걸 좋아했다. 조용했다. 내가 이 세계의 마지막 생존자 같았다. 그 때 읽은 책이 참 이상하게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예를 들면 최승자의 ‘내 청춘의 영원한.’ 나는 이 시를 모두 외울 수 있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아무도 없는 무너진 건물의 뱃속에서 연극배우처럼 서서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햇빛이 내려앉았다. 간지럽고 따뜻했다. 세상이 멸망해도 햇빛은 여전히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면 멸망이나 죽음 같은 것들이 두렵지 않았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나는 이 세 가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담배가 입술을 델 정도로 짧게 피우는 자들이 이런 세 가지 움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나는 어린 자가 그렇듯 그 세 가지 움을 가지고 있을 나를 상상했고 그 상상 속의 나는 언제나 사랑을 하고 있어서 좋았다. 그러니까 나는 비참한 어른이 되기를 꿈꿨던 것이다.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트라이앵글. 나는 그 발음을 좋아했다. 입이 쫙 벌어지는 그 발음. 나는 이 시를 외우고 무너지는 건물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부서지는 계단에 누워서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옥상 문 앞에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점심 즈음이 지나면 그 곳에서 나왔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살인마처럼 깊은 비밀을 간직한 것 같은 쾌감에 빠졌다.

    나는 그걸 ‘건물’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건물보다는 어떤 다른 이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처음 말하는 내 비밀인데,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무너지는 건물에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인천 부평구의 황폐한 건물에 멋들어진 아가씨 같은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그때 내가『빨간 머리 앤』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끝에 e가 붙은 앤처럼 발랄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재주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꿈치 끝이 포동포동한’ 귀엽고 예쁜 친구인 다이애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갈까마귀 같은 검은 철골을 드러내고 있는 건물에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가 나의 가장 친한 벗이라고 여겼다. 조금 부끄럽고 웃긴 일이다. 하지만 그건 멋진 일이었다. 나는 다이애나의 품 안에서 처음 시를 읽었다. 내가 막역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의 안에서 처음으로 시를 읽는다는 건, 아무튼 멋진 일 중에 하나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른이 된 나는 이 때를 떠올린다. 어린 내가 함부로 꿈꿨던 비참한 어른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목에 대고 숨을 오래 그리고 느리게 쉰다. 어른이 된 나는 비참한 어른보다 이런 방식으로 숨을 쉬는 고대 생물이 되는 것을 꿈꾸기로 한다. 이것도 처음 말하는 비밀이다. 나는 최근에도 종종 다이애나의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자주 상상했다. 다이애나와 나는 함께 폐건물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 숨어드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그들은 대부분 추방자들이다. 이방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같은 얼굴과 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랑이나 젊음을 이유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뛰어내린 자들이다. 나와 다이애나에게로. 나는 내가 쓴 것이 분명한 편지들을 그들의 어깨 너머로 훔쳐본다. 나를 이렇게나 멀리서 바라본다. 이런 것들이 보통 어른이 하는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런 것을 편지에 모두 적어 넣는 일은 어른의 일일 수 있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화분 / 분갈이 [유운의 전개도 접기]

화분 / 분갈이

 

이유운

 

화분

 

 

    아이를 낳아본 적은 없었고 살아 있는 것을 가지고 싶었다 마음껏 미워할 수 있도록, 되도록 끊임없이 자라는 것으로 이런 마음은 숨기고 제안을 한다 화분 좀 사러 갈까 꽃이 피는 걸로, 알잖아, 집에 녹색이 없어서

 

    잎과 뿌리를 매만지고 구운 화분이 정말로 숨을 쉬는지 손바닥으로 그것을 쥐어보고 나의 방을 위해 골몰하는 너의 옆얼굴 만약 내가 작은 식물을 데려와 네 이름을 붙이고 너를 기르는 것처럼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래도 우리는 부서지는 것을 사랑할 수 있을까

 

    둥글고 앞으로 휜 꽃받침

    이 꽃 너랑 닮았다

    네가 기울여 열중하는 모습 같아,

    너는 아무렇지 않게 나의 비밀을 말하고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왜 모든 일은 다 이렇게 노력해야만 하는 결말이 될까 책상에 엎드려서 어린 잎맥을 매만진다

 

    여기

    던져져 있는 나

    그 앞의 어린 식물

 

    장마에는 물을 주지 않아도 된대, 공기가 습해서. 간편한 생활 방식에 나는 경악하고 나는 얼마나 복잡한 방법으로 비슷하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늠한다

 

    창문을 연다

    베란다 주변에 빗물이 고여서 썩기를 바라고

 

    곧 무언가가 사라질 것이다

 

 

 

분갈이

 

 

    분갈이를 했다. 위 사진은 ‘하트호야’ 고 물론 개별적이고 사적인 이름 또한 가지고 있는 나의 식물친구다. 이 식물은 아주 느리게 자란다고 했는데, 그래도 두 마디나 자라서 분갈이를 할 때를 맞이했다. 화분을 퍽 오랫동안 세심하게 골라서 분갈이를 해줬다. 얇은 플라스틱 화분에서 하트호야를 위로 쭉 뽑아낼 때, 뿌리에서 흙이 후두둑 떨어졌다. 뭔갈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고 마치 피를 처음 본 의사처럼 긴장했다.

    화분에 흙을 꾹꾹 눌러 채우며 어떤 생명을 책임지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슬프고 무섭고 무거운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계속 강아지며 고양이를 키웠기 때문에 생명이 내 주변에 있는 게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좋아한다. 그 보드라운 털과 나만 바라보는 이성 이전의 사랑을 사랑하지 않고서 나는 배길 수 없다. 그 순박하고 순진한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좋다. 평온하다.

    그 생명들이 십 년 전후로 죽을 때, 나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슬프고 마음이 아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주 보호자가 아니라서 나는 슬픔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이 나의 뺨을 핥을 때 내가 이들의 죽음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어서, 그래서 나는 간편하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늙어서 병원에 다니고 치매에 걸려 가리지 못하는 배설물을 치우는 것은 주 보호자인 할머니의 몫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산책을 하고 예쁘다고 끌어 안아 주는 피상적인 사랑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랑은 즐거운 취미에 가깝다.

    서울로 올라오고 혼자 살면서 나는 나의 주 보호자가 되었다. 아직 아무것도 키워보지 못했던 내가 정말 까다롭고 거슬리는 생명인 나를 키워야 했다. 제때 밥을 먹이고 적당한 때에 운동을 시켜주고 좋아하는 책과 음악을 제공해주고 적절히 사랑해주고 세심하게 살펴야 했다. 나와 너무 가까이 있는 나는 너무 괴롭다. 이 생명은 나에게 너무 컸다. 무거웠다. 귀찮았다. 전부 내던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뒷산 수녀원에 올라가서 오디를 따고 가르쳐주는 식물들의 이름만으로 살고 싶었다. ‘싶었다’ 라고 말하는 이유는 결국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거라는 증거다.

    그래서 다른 생명을 책임질 생각은 절대 하지 않으려 했다. 세심함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에 대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면에서 두 번 실패했다. 나는 자주 다른 생명과 내가 함께 살기를 바라고, 그러면서도 그것에 대한 깊고 끈질긴 책임감에 대해서는 쉽사리 잊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화분을 들일 때는 조금 달랐다. 나를 위해 골라준 식물친구를 받아들면서 나는, 이런 어린 식물을 나에게 골라주는 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새 화분을 들이며 점을 치지는 않았지만1 이 식물이 죽지 않고 오래 자라는 동안 나는 어디까지 자랄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사랑이 나에게 주는 넓은 시야를 상상한다.

    그러므로 아직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아직 멀었고

    모두 닿지 않았다.

 

    비가 온다.

    잠시 후 만날 나의 연인에게

 

    나는 너의 이름을 붙인 화분의 흙 밑둥을 눌러주며 네 이마 사이를 입술로 누르는 상상을 했다 아주 많이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1. 권나무, 화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