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1)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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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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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3. 연설기술(1)

연설기술(Rh?torike : Redekunst)은 소피스트 사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철학자들을 살피기 전에 연설기술이 나타나게 된 이 현상부터 간단히 정리 고찰해보기로 하자.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선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리스 말이 가지고 있었던 비상한 힘과 유연성이다. 그리스어는 상대에게 말하고 전해야 할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이 점은 예를 들어 헤브라이어와 분명한 대조를 보인다. 그리고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것은 일상생활이건 전시에서건 간에 기회 있을 때마다 연설이 가져다 준 큰 기여이다.

연설기술의 경우 우리는 고대 포이니키아(페니키아)나 카르타고, 고대 게르만 등 어느 곳에서도 그것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에 반해 호메로스의 작품은 현재 우리의 손 안에 있다. 호메로스의 신들이나 인간들의 연설은 최고의 자연적인 힘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고 게다가 그러한 연설은 폴리스가 앞서 이룩한 큰 성취에 바탕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에서는 이미 모든 사안이 토론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것을 위한 성대한 경기도 열려 말하는 일이 일의 성취와 목표 달성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그 후 폴리스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민회와 민중 법정이 여러 가지 주요사안을 결정하게 되면서 연설은 갑자기 체계적인 학문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이 연설기술을 그리스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하고도 중심적인 요소로서 육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현대의 신문, 잡지와 달리 그리스의 말하는 행위는 특정 장소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그 시점에만 결부되어 있어, 연설하는 사람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가장 직접적이고도 실감 있게 설득할 수 있어야했고 그 반대자 역시 제대로 된 반론을 펴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리스인의 경우 현재의 신문 잡지의 힘에 필적하는 것으로서 연설의 힘과 비교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고대의 아테네인이 연설을 듣는 대신에 단지 열심히 신문 밖에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고 하면 사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연설기술은 의심할 나위 없이 아테네인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사색이나 지식, 학적 탐구의 경쟁 상대가 되었다. 연설기술은 이후 이 시민들의 전체 에너지의 실로 방대한 부분을 빼앗았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적인 탐구는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처지가 되었을 정도이다. 사실 연설기술에 동원된 막대한 노고 이를테면, 수사학을 위해서 작성된 대량의 안내서의 종류만 비교해보더라도 학적 탐구의 실적은 그저 어중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철학자들도 처음부터 연설기술을 철학의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 경우 가장 현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것처럼 그들 자신 이것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생애의 상당 부분을 수사학에게 바쳐 그 최대의 탐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실제 사변으로서의 철학은 연설기술에 대한 엄밀한 탐구를 꺼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예술과 시가의 손실은 돌이킬 수 것이었고 학적 탐구 또한 한참 뒤에 가서야 그 보충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놀랄 만한 현상을 고찰하기 위해서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자료는 무엇보다도 보존되고 있는 연설 그 자체이다. 연설의 발달사적 측면에서 그 가장 중요한 증인은 『브루투스(Brutus)』와 『연설가(Orator)』를 쓴 키케로(기원전 106-43)이다. 키케로는 양질의 자료와 그 자신 그리스에서 거둔 학업을 통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수사학 내지 연설의 기술관련 지도서는 철학자 대부분이 하나 정도는 썼던 까닭에 그 수는 몇 백 권에 달하지만 이러한 기술 지도서 중 우리 손에 남아 있는 것으로 눈여겨 볼만한 것은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Rh?torike)』과 『알렉산드로스에게 주는 연설기술(Rhetorica ad Alexandrum』이고, 그 이후의 저작으로서는 람프사코스의 아낙시메네스를 들 수 있고 조금 작은 기술 지도서로서는 할리카르낫소스의 디오뉘시오스의 저작 『고대연설가론(de oratoribus antiquis)』등도 중요하다. 그 밖의 것은 발츠(Walz)와 슈펜겔(Spengel)에 의해서 출판된 『그리스 연설가들(Rhetores Graeci)』를 참조했으면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자료 전부가 다루어지고 있는 근대의 저술로는 브라스(F. Blaβ)의 『아테네의 연설(die attische Beredsamkeit)』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예술적으로 연마된 연설의 목표는, 아직 독서 습관은 없었지만 민회나 법정 일에 길들여져 무엇이든 듣고 싶어 하는 민중들로 하여금 연설 내용이 ‘그럴 듯하다'(eikos)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럴듯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듣는 사람들을 승복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당연히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순진할 정도로 귀가 얇은 그리스인들로서는 어떤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 자기가 부정하는 견해이고 또 듣는 쪽에서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고 여겨질지라도 내 몸을 구하고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이 끌어다 댔고 게다가 그 연설이 소피스트들이 가르친 그대로 상대를 매료시킬 정도의 고상함을 갖추었을 경우에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었다. 섬세한 귀를 가지고 능숙하게 펼쳐지는 연설을 귀담아 듣는 것을 소중한 기회로 여기고 있었던 그리스인들로서는 이미 그 연설을 받아들일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도 『새(Ornithes)』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말은 정신에 날개를 돋게 하여 인간을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게 한다.” 이러한 말의 힘을 가장 풍부하게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것으로 안티폰(기원전 480-411)의 생애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안티폰이 망명자 신분으로 코린토스에 체재하고 있을 때 그는 위자료를 벌기 위해 노점을 열고 다음과 같이 방을 써 붙였다고 한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말로 치료해드립니다”(1447) 이윽고 사람들이 찾아오자 그는 그 사람들에게 슬픔을 치유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들의 불행을 쫓아내 주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데 말이 얼마나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과연 말로 슬픔을 치유할 정도의 사람이 있을지는 새삼 되물어 볼 일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연설은 그리스인에게서 이미 오랜 동안 다른 여러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것보다도 훨씬 중시되고 있었다. 나랏일에서나 법정에서나 사실 옛 부터 가장 큰 효과를 갖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은 늘 감탄의 대상이었다. 다시 말해 규칙과 체계를 가진 연설기술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말을 잘 하려는 어떤 대단한 의식적인 노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개개의 사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면서 그것과 함께 그러한 화법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것을 기록해두는 것은 아직 사람들의 염두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민주주의적 재판 제도가 발달하고 이 재판 제도가 연설의 기회를 습관적으로 제공하게 됨에 따라 마침내 그 노력들에 이어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연설 기술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최초로 행해진 것은 시칠리아에서였다는 것이 일치된 견해이다. 기원전 466년 시칠리아에서 참주들이 추방된 뒤 민주주의가 발흥 하여 “오랜 동안 권력에 의해서 억압되고 있었던 다수의 사법상의 요구가 크게 증대되었던 것”이다.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0?-430?)가 이 새로운 연설기술의 창시자로서 어느 정도 문제가 되는지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이즈음 이미 시칠리아 땅 쉬라쿠사이의 코락스(Korax)가 민중 연설가로서 또 법정 변론인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가장 초기의 『연설기술 안내서』혹은 단순히 『안내서』라고 불리는 책은 이 코락스가 지은 것인데 이 책은 적어도 연설의 형식과 구분에 대한 규범, 서두를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 등에 관한 지침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와 똑같이 연설 안내서를 쓰고 있었던 제자이자 경쟁자였던 티시아스(Tisias)의 저서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럴듯함”(eikos)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시칠리아의 연설 내지 연설기술은 이 티시아스와 소피스트인 레온티노이의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에 의해, 기원전 427년 그 자신도 동행했던 시칠리아 사절단의 아테네 파견을 계기로 유입되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연설과 더불어 예비지식으로서 철학, 그것도 앞서 본 것처럼 진리 인식을 부정하는 부정적 성격의 철학도 함께 유입되었다. 아테네에서는 프로타고라스(기원전 485?-414?)가 고르기아스에 앞서 연설기술의 기초는 만들어 주었던 터라 고르기아스 때부터 이미 연설기술은 소피스트들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또 고르기아스 자신 이미 연설기술의 교사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소피스트들 모두가 그랬듯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그곳 실정에 맞추어 체계적인 연설기술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연설 교사라는 게 하나의 직업으로 여겨졌다. 또 그들에게서 배우면 무엇인가 얻는 바가 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부터 연설 교사는 고액의 사례를 받을 수 있는 직업으로 떠올랐다.
 

고르기아스(Gorgias 기원전 483-376)

고르기아스(Gorgias 기원전 483-376)


 
고르기아스는 재능이 남달라 아무리 내용이 진부해도 시적인 표현과 새로운 언어로 그 내용에 맞추어 훌륭하게 재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가 이룬 진전은 의심할 바 없이 시의 운율을 도입하여 연설문에 균형 잡힌 구조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연설의 각 부분은 서로 대응해서 어울리는 문장들로 구성되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말의 울림이 매우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방식은 기술된 사안을 보다 명료하게 해주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연설 각 부분들을 서로 대비하면서 생각들의 대립을 부각시키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같은 길이의 문장(isok?la), 형식상 서로 대응하는 문장(parisa), 그리고 특히 똑같은 말로 끝나는 문장(homoioteleuta), 그리고 같은 소리의 말, 서로 운율이 맞는 말(paronomasiai, par?ch?seis)을 활용하여 연설가로 하여금 한층 더 활기 있는 열변과 화려한 몸짓을 더하게 만들었다.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고르기아스 이래 아테네에서 연설의 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향상은 아테네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오랜 동안 아테네의 정치가들에 의해서 기반이 잘 마련되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페르시아 전쟁 이래 그리스의 위대한 정책과 제국의 패권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현실이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미 테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8-462)부터 그 자신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연설가로서도 위대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몰자 추도 연설’을 할 때까지만 해도 실제로는 고르기아스가 이룬 연설 기술의 수준에는 크게 못 미쳐 있었다. 물론 고대 사료들은 여러 곳에서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보여준 마술과 같은 효과(ep?dai)를 전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연설이 올림포스의 위대한 신 제우스처럼 천둥과도 같이 전광을 발하며 그리스 전 국토를 뒤흔들었고, 그의 입술 위에는 연설의 여신이 머물러 있었으며 그의 연설은 청중의 마음속에 가시를 남겨두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설은 투퀴디데스(기원전 460?-400?)의 저작을 통해 그의 입으로 전해지는 것일 뿐 실제 그 자신이 쓴 것으로는 민회의 결의문 이외에 어떤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사실 플라톤도 말했듯이(『파이드로스』257d) 당시만 해도 나라에서 대단한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후세의 평판이 두려워 자신의 이야기들을 쓰거나 저술을 남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투퀴디데스의 저작에 실린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분명 그의 정신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그의 연설의 특수한 부분까지 담고 있지는 않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시적 형상을 이용하고 있었고 그 일부가 훗날 유명하게 되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그가 연설하는 모습 자체는 나중 세대인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가 가지고 있던 것 같은 정열적인 면모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실 페리클레스는 망토로 몸을 둘러 싸맨 채 가만히 서서 연설을 하였고 목소리도 항상 같은 높낮이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당시는 정치가는 물론 법정 변론가도 연설을 할 때 아직 단순한 말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고르기아스가 아테네에 도착한 이후 30년 남짓의 세월의 사이에 연설 기술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3. 연설기술(2)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0)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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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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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2. 신화와의 결별

다. 자연철학의 등장

그런데 그리스적 사고가 완전한 독립에 이르렀음을 선언해야할 시대가 도래하였다. 자연학과 윤리학 그리고 토론술(Dialektik)의 시기로 불리어지는 철학의 시대가 그것이다. 사실 이 시기들은 모두 하나의 지속적인 발전과정의 일환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자연학의 시대는 우주의 구조에 대한 학설과 함께 모든 저항을 이겨내고 마침내 신화의 시대와 결별하였다. 그리스인들 모두가 이 분야에 대한 지식에 굶주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 그만큼 일반적 추리력도 발전하여 그로부터 윤리학과 토론술도 나타났다. 철학의 가능성은 이렇듯 자연학에서 그 발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만물의 근원과 성질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민족의 경우 그들의 종교에 이미 일정한 교리로 확립되어 있었지만, 마침내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와 구전으로 전승된 자신들의 우주창조설화를 깨고 사물의 근원(archai)에로 육박하기에 충분한 자유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탈레스(기원전 640-550년)는 물을,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apeiron)를 물질의 근원으로 주장하고 그 중앙에 대지가 구(球)로서 떠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물질의 근원으로 여겼고, 별들이 대지 위의 천정처럼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 안에 있으면서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밀레토스 학파에 이어서 이 영역에서 아주 중요하고도 현저히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곧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의 저작은 고대에서조차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대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단편들은 오늘날에서조차 실로 여러 가지 해석과 생각들을 낳는 모태이기도 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 만물을 생성 과정으로 파악하기 위해 영원한 새로움의 상징으로서 한 순간의 휴식조차 없는 불을 필요로 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끊임없는 유동과 영원한 개조의 한 가운데 있으며 싸움이 만물의 아버지이다. 그 귀결 안에서 그는 주기적인 반복의 세계를 불태우고 있는 영겁의 불을 상정하고 있다. 세계에 대한 위대하고 대담한 생각들 중에는 그가 최초로 말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것들 중에는 감각으로 확인하기 힘든 것들도 있지만, 우리는 그의 말에서 호메로스와 그 신들의 세계에 대한 공공연한 증오와 철학자가 폴리스에 대해 행한 것으로서는 가장 최초의 격렬한 이반을 발견한다. 그의 관심사는 매우 크고 넓어 개개의 폴리스 차원의 문제들을 넘어서 있었다. 그는 벌써 세계 시민이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480?)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그리고 제논 등 엘레아학파의 사람들은 모든 것은 하나이고 그 하나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이오니아학파에 대립한다. 그들은 범신론의 길을 걸으면서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이 민족 종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신적 존재를 그 순수성 속에서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오니아학파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탐구와 다함없는 정진을 추구한다. 자유로운 사상은 그 자신의 필요로부터 학설로 발전하였고 또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 모두 충분한 부 또는 간소한 생활을 바탕으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 시대에도 이미 철학자들 서로에 대한 경쟁이 지배하게 되었다.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3-445)

 

그런데 어느 물질적인 원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운동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다(多)의 통일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또는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과 같이, 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아니면 데모크리토스와 같이 원자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간에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그 체계들은 모두 종교에 대한 단순한 주석이 아니고 오히려 독립된 창조물이었다. 신관에 의한 강제나 유인 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자연학적 발견이나 예측은 본질적으로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사고와 개인들에 의해 수행된 최초의 연구 활동이다. 이러한 지식은 종교적 의식이나 신화의 옷을 걸칠 필요가 없었다(엠페도클레스(Empedokles)의 학설에서 보이는 증오(neikos)와 사랑(philia)과 같은 추상적 힘은 여전히 신화의 파편이라고는 해도). 물론 이오니아학파의 자연학(peri physe?s)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그럴만한 시대적 조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가 식민지로서의 걸음을 시작할 즈음에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지기 마련인 데다가 본토의 다른 땅보다 훨씬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며 사고와 행동을 저해하는 모든 종교적 편견으로부터도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낙사고라스(기원전 500?-428)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탈레스가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고는 하지만 설사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민간 종교에의 예속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오니아학파 사람들은 운동의 원인을 그 원소와 전혀 구별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그 ‘정신(nous)’을 여전히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는 있었을 지라도 세계에 질서와 운동을 부여하는 원리로 삼을 정도로 위대한 혁신을 이룩했다. 최대한 기존의 아무런 전제도 염두에 두지 않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dros)의 개체의 발생에 대한 설명 또한 그들이 그 다양한 추측을 행하는 데에 얼마나 독립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그는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서서히 진화해온 것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307?)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오니아학파 사람들의 주장이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학파의 독립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세 명의 밀레토스 학파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감각에 의한 지각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배척하고 있는데 그것은 보는 주체도 객체도 끊임없이 흐름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철학자를 어떠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이유로 파멸 시키려할 경우, 통상 신에 대한 불경을 빌미로 삼곤 했는데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이 아낙사고라스에 대해서 제기한 소송은 그러한 중상들의 첫 번째 사례이다. 그가 호메로스의 신화를 도덕적으로, 신들의 이름을 우의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태양을 한 개의 돌 또는 뜨거운 금속 덩어리로, 달을 일종의 지면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옥고를 치렀고 석방된 후에도 아테네를 떠나 람프사코스(Lampsakos ; 헬레스폰토스 동쪽 해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또한 자신의 책을 통해 “신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 나는 모른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아테네의 사람들에 의해서 추방되었고(기원전 411년) 그가 쓴 책들 모두가 그의 집과 뤼케이온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회수되어 몽땅 불태워졌다. 디아고라스(Diagoras) 역시 엘레우시스(Eleusis)의 비의를 누설했다는 혐의를 받고 더 심한 곤욕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망을 친 그의 목에 1달란톤의 상금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바다는 언젠가 완전히 말라버릴 것”이라고 말한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Diogenes)도 결국 도망을 가서 생명을 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할 생각이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신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희극에서는 제멋대로 다루어도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지만 철학에서만은 유독 보수적이었다. 특히 기원전 432년에 디오페이테스(Diopeithes)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자연현상을 해명하려고 시도하는 사람 모두를 고소해야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진 이래, 자연에 대한 학적 탐구는 아테네에서 비밀리에 행해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상으로는 더 이상 철학을 억누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미 크세노파네스는 다신교적인, 또 의인적인 민간 종교에 대항하여 그 특유의 새로운 신의 개념인 하나이자 전체(hen kai pan)를 다음과 같은 말로 변호하고 있다. “사자로 하여금 만약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면, 신들도 사자를 닮은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또 데모크리토스는 민간의 신을 부정하고, 모든 사건을 필연성으로부터 도출하여 인생의 목표를 공포나 미신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평정(euthymia, euest?)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를 시조로 하는 원자론 학파는 회의론자들과 에피쿠로스가 출현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물론 아리스토파네스가에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묘사하고 있듯이 그러한 움직임을 비웃는 일이 아테네에 만연해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철학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모두 철학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무고자(sykophantes)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오랜 전란기를 보내면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익숙해져서 신들에 대한 불경으로 소송을 당한다 해도 예전만큼 그렇게 무서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들에 대한 불경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가능한 한 회피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에피쿠로스는 신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들의 세계 지배는 부정한다는 교묘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리스 철학은 민간 종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해나가면서(대체적으로 봐서 그렇다) 그렇다고 무신론은 아닌 일신론에 이르게 됨으로써 그 순환의 끝인 신플라톤주의에서 종교가 될 운명으로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향한 공격, 다시 말해 모든 그리스적 생존과 교양의 위대한 전제를 향한 공격은 전통적 신들을 향한 공격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사실 이 적대 행위는 벌써 피타고라스 때로부터 자신들의 신들에 대한 보다 큰 외경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해졌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들에 대해 엄격한 신앙심으로 헌신하고 있었다. 실제 그들의 윤리학은 종교적 토대 위에서 성립한 것이었고, 게다가 종래의 신화들을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을 포함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지하세계에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고 헤라클레이토스도 “호메로스는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처럼 시인들의 경시대회에서 추방당하고 채찍으로 맞아도 좋다”고 말했다. 게다가 또 신화를 거의 범신론적 개념상의 이름들로 극복하려한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공격하는 엘레게이아(Elegeia)와 이암보스(Iambos)율(풍자에 적합한 운율)의 시를 써서 신들에 관한 그들의 언급을 비난하였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플라톤이 국가에 대한 저작에서 행한 시인들에 대한 비판이다. 후대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러한 그의 태도가 소크라테스가 조각을 단념한 것처럼 그 자신 비극 문학을 단념하게 된 데에서 비롯된 호메로스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사색하는 사람들의 신화와의 결별은 이미 모든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윤리학과 토론술 또한 순전히 철학을 통해서 자연학과 나란히 어깨를 같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현상으로서 소피스트 철학이 끼어들었던 것이다. 소피스트 철학은 사회 현상으로서 나중에 고찰하게 되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리스적 사고와 지식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소피스트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해두기로 한다.

소피스트들은 철학자들로서는 아주 만만한 경쟁 상대였다. 따라서 철학자들의 말만 들으면 소피스트들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지도 높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해져온 선입견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소피스트들은 모두 외지로부터 아테네로 온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프로타고라스는 압데라 출신이고 고르기아스(Gorgias)는 레온티노이, 힙피아스(Hippias)는 앨리스, 프로디코스(Prodikos)는 케오스 출신이다.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끌어 축제가 있을 때면 연설을 통해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존경도 크게 받아 고액의 사례를 받았다. 그들이 돈까지 받았는데도 대중들이 그들에게 갈채까지 보냈다는 것은 분명 철학자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라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만으로도 수긍이 갈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의 경우, 정말 도움이 되는 처방전이라면 공짜로 그것을 받는 것보다 사례를 지불하고 받는 것을 더 좋게 그리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들, 예를 들어 페리클레스라든지 투퀴디데스(Thukydides)와 같은 사람들 또한 그들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원인이 있고 그로부터 생긴 필연적 결과들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된 것이 단지 소피스트들의 윤리적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 선이고 그자체로 악인 것은 없다고 주장했고, 모든 것이 그 나름의 견해와 약정에 의해서(doks? kai nom?)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것이며, 또 모든 일에는 찬반양론(duo logous)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또 종교와 관련해서도 그들은 단순한 회의론을 넘어서서 바야흐로 부정론을 내세워 아테네의 사람들을 사로잡아 온갖 이상한 행위로 그들을 내몰았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은 어떻게 이러한 생각들을 그토록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서 만들어 내고 유포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러한 생각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었고 소피스트들은 그것이 되살아날 수 있는 일정한 방식을 제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그들에 의해서 개발된 연설기술(Redekunst)은 모든 인식이 주관적이라고 하는 학설과 일체의 것이 설득력에 달렸다는 학설과 결합되면서 더욱 고취되고 크게 육성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참된 인식은 승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철학적 문제들 전반에 대해 정통해 있었다. 특히 그들은 엘레아학파로부터 차용해온 허위 추론방법을 그들의 토론술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 기술을 익히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마 정신적인 체력훈련(Gymnastik)이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들의 교육에는 깊이가 결여되어 있어 사람들을 ‘보다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요구에는 부응할 수 없었을 지라도, 그들은 세상사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과 기능을 가르쳤던 까닭에 대중들은 그들에 대해 대단한 사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힙피아스는 올림피아에서 석조 인장 등 자신의 손으로 만든 온갖 종류의 치장물을 몸에 붙이고 나타나 스스로 일종의 백과사전적 만능인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많은 실제적인 지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서적 또한 얼마 되지 않는 지적 풍토에서 대단한 지식욕에 불타고 있었던 시대적 요구에 영합했던 것이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굳이 만일을 빌어 이야기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 시대로 돌아가 그들을 보았다면 우리는 그들이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가 이룬 것 같은 효과를 그 시대에 미쳤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구조에 대한 학설(idea tou kosmou)과 천문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기하학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사용해 지도를 작성하는 방법까지 체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인들의 작품을 해석하고 음악을 가르쳤으며 문법에도 정통해 있었다. 힙피아스는 기억술과 관련한 학문도 취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논의영역에는 역사와 고고학, 폴리스의 종류에 대한 학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의 예비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비교정치학, 식민지학, 법률학, 가정 및 국가 행정에 관한 이론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이든 다 물어보라”(das proballete)고 말한 고르기아스의 그 유명한 재촉이 논리학상의 조작에 관한 것에 불과하고 모든 학문 영역에 걸친 모든 질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그 말은 소피스트들의 지식이 그 만큼 풍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소피스트들은 그것을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유포함으로써 그리스 사회에서 하나의 은혜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의 생활에서 필요한 요소였고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사회에서 그렇게 하찮은 취급을 받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3. 연설기술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9)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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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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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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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2. 신화와의 결별

나. 피타고라스와 영혼불멸 신앙

보다 엄밀함을 요구하는 시대가 다가오자 그에 대적하는 신화의 필사적인 저항이 이루어졌는데 그러한 몸부림이 가장 집약적으로 잘 나타나 있는 인물이 바로 저 위대한 피타고라스(Pythagoras)이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이미 윤회전생을 통해 아에탈리다스, 에우포르보스, 헤르모티모스, 퓌로스 등 네 사람의 삶을 살았고, 서로 다른 지역에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건 역사적 인물로서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70년경 사모스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하고 성년이 된 후 기원전 530년경 이탈리아의 크로톤(Kroton)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가르침을 펴다가 혁명이 일어나 그의 신도들이 처절하게 추방되기 3년 전인 기원전 497년에 사망했다. 그가 이집트를 다녀왔다는 것은 틀림없이 믿을 만한 사실이다. 제26왕조 치하였던 당시 이집트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 나우크라티스(Naukratis)가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한 왕래정도가 아니라 가장 진정한 이집트인, 즉 신관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들과 교유하면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헤로도토스(II, 81)도 전하고 있듯이 이른바 오르페우스(Orpheus)교와 박코스(Bakchos)교의 신도들이란 사실 이집트인들과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이었으며 그럴 정도로 피타고라스적 본질과 이집트적 본질은 아주 닮아 있었고 오르페우스교의 행사와 피타고라스학파의 행사 또한 서로 혼동될 만큼 비슷했다. 한편, 피타고라스가 바빌론에 갔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인도와는 어떤 식으로건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영혼 윤회설(metempsychos)에는 오히려 이집트적인 것보다는 인도적인 색채가 보다 강하게 배어있다.

피타고라스(기원전 582-497)

그런데 피타고라스가 그리스인에게 전해준 것으로서 주목해야할 것은 이 영혼 윤회설 내부의 금욕사상과 결합된 그의 새로운 종교와 윤리학이다. 그는 철학자이기보다는 오히려 종교 개혁가였고 생존의 고뇌가 이전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던 시대에 살고 있었으며, 이 지상에서의 삶이란 전생에서 범한 죄과에 대한 속죄의 과정으로서 감내해야 할?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속죄 상태가 끝난 후에는, 테오그니스(Theognis)가 생각하듯 침묵의 돌이 되어 무덤 가운데에 눕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정화의 순서를 밟은 다음, 내세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다시 윤회전생(輪回轉生)한다고 생각했다. 신비로 가득 찬 의식을 통해 정화되고 전 생애에 걸쳐 신성한 의식을 추호의 소홀함이 없이 수행해낸 경건한 사람만이 종국에 가서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쇠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러한 희망을 기치로 내세워 그 교단을 이끌어 간 것이다. 그 역시 오르페우스 교도와 마찬가지로 육체는 영혼의 묘지 혹은 감옥이며 고귀한 영혼은 천상 세계에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피타고라스가, 영혼이 여러 육체를 거치는 지상에서의 편력을 모두 끝낸 후에는 그 보답으로서 지상적 존재를 마감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가르쳤거나, 마지막으로 그 영혼은 신격의 하나로 영입되었을 것(어쨌든 이것은 플라톤의 희망이었고, 앞서 엠페도클레스도 이러한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이라고 가르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영혼불멸과 일치하는 것은 후자 쪽의 생각이지만, 영혼이 “벌로서” 육체에 갇혀 있다는 생각은 논리적으로, 영혼이 보다 크고 잦은 비참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신이 영혼을 구제해 줄 때까지 육체 안에서 잘 참고 견뎌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타고라스학파가 교인들에게 자살을 금하고 “노령의 죽음”을 맞이하도록 엄하게 가르쳤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에 과거가 어떻게 비쳐졌는지 또 그 경우 어떠한 것이 친근성을 가지고 그에게 전생과 관련한 신호를 보낸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생에서 4번이나 생존했다고 하는 그의 기억에 관한 전승들은 하나같이 동물들 안에 인간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너무도 사실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오래 동안 다우니아의 숫곰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와 친근했던 한필의 황소는 아주 나이가 많아질 때까지 타렌툼의 어느 신전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피타고라스가 영혼 윤회설을 고대인들이 믿고 있었던 것처럼 오르페우스 교도로부터 배웠는지 아니면 반대로 오르페우스 교도 쪽이 피타고라스로부터 그 교설을 배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아마 영혼 윤회의 사상은 어디에선가 도래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확실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딱히 이 사상을 거부하려는 사람도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불사의 신앙이 새롭게 요구되거나 그곳에로의 비약이 필요할 경우, 그리스인은 즉시 피타고라스를 상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 중에서 피타고라스학파와 별도로, 영혼이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 등으로 윤회전생을 거듭하는 것을 그야말로 영혼이 받는 벌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친 사람은 아그리겐툼(시칠리아)의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기원전 444년경)였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다. “나는 이미 소녀였으며 또 소년이었고, 새끼양이며 새이었고 바다 속 물고기였다.”

수학의 나라. 특히 기하학의 나라인 이집트로부터 피타고라스는 가장 중요한 이득으로서 수학적 지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학문의 과학적 일면은 여기에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의 가르침은 “수학과 음악 연구의 발단을 포함하고 있었고 이 연구가 후에 피타고라스 철학의 성격을 본질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수학적, 음악적인 우주의 구성에 도달 할 수 있었으며 또 오르페우스교의 교설과 달리 기괴한 신학에 미혹되는 일도 없었던 것이다.” (E. Rohde) 물론 그리스인이 생각했던 수의 이론이 매우 광범위한 문제영역을 가지고 있고 그 이론들 중 얼마만큼이 피타고라스와 연관되어 있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증언하고 있듯이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 같은 사람들보다 이전 시대에 이미 피타고라스가 수학을 자기 학설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아주 의도적으로 수의 영역에 다양한 다른 것들을 한꺼번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에게 수라는 것은 여러 가지 힘의 비유이며, 수의 비례나 비율 또한 여러가지 사상의 비유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그는 1과 다, 짝수와 홀수, 신성한 수 10과의 관계 속에서 신성한 4개의 수(1+2+3+4=10) 등과 같은 것들에 각각 사상을 결부시켜 청강자들을 갑자기 숭고함에로(ins Erhabene) 끌어 들였을 것이다. 또 이 학설에는 도덕적인 면과 함께 미학적인 면도 있었다. 즉 원은 가장 아름다운 평면이며, 구는 가장 아름다운 물체라는 설명함으로써 대지에 구의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대지가 타원형 또는 원반으로 여기고 있었던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소리는 여러 가지 수 또는 그 역이라고도 설명함으로써 이미 수를 음악의 기초로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물질적 원소들을 특정의 기하학적 도형들과 결부시키고 있었다. 윤리적, 지적, 물질적 세계를 이와 같이 수의 형태로 설명하는 것은 당대의 모든 그리스적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경향은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져 기하학과 산술은 이후 그리스의 모든 지식을 해명하는 손잡이(labai)가 되었다.

라파엘의부분화 – 음악이론을 기술하는 피타고라스

하지만 이상의 것들은 모두 이 세계 전체를 학문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기초에 불과했다. 다름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학설에서 처음으로 지구가 우주 체계의 중심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불후의 명성을 가져다 준 획기적인 주장이라 할 것이다. 처음에는 대지성(對地星, Gegenerde, 태양계 행성을 열 개로 하기 위해 지구의 뒤에 있다고 상정한 행성)이라든지 중심불(천체가 그 둘레를 수학적 법칙에 따라 회전하는 우주의 중심)이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긴 해도 그들은 결국 지구가 그 중심축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피타고라스 학설에 돌려야 할 영예가 또 있다. 그들은 처음으로 심리학적 구분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영혼을 인지력, 정열, 이성의 세 가지로 나누어 이 중 인지력과 정열은 동물도 가지고 있지만 이성은 인간만이 소유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이 학설이 단순한 철학이었다면 여성은 거론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피타고라스학파의 활동에 관한 전승에서 우리는 여러 명의 여성 피타고라스 교도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의 아내 테아노(Theano)와 그의 딸 다모(Damo) 등 일단의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최고 수준의 학문적 문제에 활발한 관심과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려나 양성의 평등을 가장 고귀한 의미에서 최초로 확립해 낸 것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혼 윤회의 학설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여성을 남성과 더불어 영혼 윤회과정에서 태어나는 동격의 사람으로 여겼고 윤회에 의해 태어날 다음 세대 사람들의 어머니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의 인품은 신화적 전승 통해서 추측하건대 매우 엄숙하고 아폴론적이었음에 틀림없다. 훌륭한 용모에 흰 의복을 걸치고 그는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언행에서는 온화하고 친근한 정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했지만 이내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 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하나의 마을 전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가르침은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 그의 학생들은 처음 5년간 스승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아마 일종의 예비 과정의 경우 수준 높은 제자들이 그를 대신하여 가르쳤던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제자들 사이에서 스승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무슨 일이든 “스승께서 그렇게 말씀하였다“는 말로 언표된 이상 그 이상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기록의 형태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어떤 교설을 전할 때마다 ”내가 호흡하고 있는 공기에 맹세코, 내가 마시는 물에 맹세코, 내가 말하는 일에 논박을 더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신도들에게 침묵과 명상과 내면의 집중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뛰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려고 했다. 그의 학설은 함부로 공개되어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종교적 비의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영혼의 윤회와 피타고라스적인 윤리는 공공연하게 가르쳐지고 있었다. 물론 일부 과학적 지식들은 비밀스럽게 전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피타고라스가 그러한 지식들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그러한 지식들을 신중하게 극히 서서히 전수하는 것이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학설이 와전되거나 왜곡되는 것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학파는 매우 독특하게도 가르침을 전수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상징적이거나 장중한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피타고라스는 이러한 학설을 주창하면서 신들에 대한 믿음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종교가 그를 만족시킨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종교로는 우주의 비밀을 밝힐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들 또한 무엇보다도 호메로스의에서 그려지듯 여러 가지 불성실한 상태로부터 결코 벗어나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에게 남아 있던 것은 혐오라고 하는 항의 밖에 없었다. 그는 지하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하나로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이름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신들을 얼마나 깊이 숭배하고 공경했음은 신께 바치는 기도에 대한 그의 훌륭한 태도만 보더라도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선물을 달라고 기도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는 선물의 선택을 철저히 신들에게 맡겼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영혼 윤회설 때문에 크로톤과 메타폰티온(Metapontion)에서 종래의 장중하고 화려한 사망자 숭배나 이것과 결부된 대량의 무속 및 유령 관련 미신들과 충돌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서 고도의 정화적인 기능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그리스 본토의 상당수의 제사들보다 훨씬 은밀한 성격의 제사방식을 가져와 그것을 수행했다. 영혼 윤회설은 이미 복잡한 학설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비의적 제사방식까지 함께 들여온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 윤회설과 결합된 새롭고도 고상한 윤리가 어떠한 내용의 것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일 것이다. 이 교설은 옛 부터 육식을 피하고 채식주의를 받들어 왔는데 그렇게 한 이유들 중 하나는 이전에 인간이었던 영혼이 동물의 모습으로 동물의 생활을 감내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듯 기원전 4세기의 피타고라스학파에서는 절제와 관련한 수많은 규범들과 관습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준수여부가 사후에 더 좋은 것을 요구할 권리까지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별한 의복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수행한 금욕은 오르페우스 교도의 그것보다 훨씬 밝고, 투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부패한 양심을 용서받기 위한 금욕이 아니고, 청정한 사람들이 청정한 삶 그대로를 유지하기 위한 금욕이었던 것이다. 그 유일한 목적은 단지 한층 더 고상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적 생활의 진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약속은 성실하게 지키되 서약은 가능한 한 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거짓 서약이 창궐했던 당시로서는 이것은 실로 이채롭다할만한 특색이다.

라파엘로,

피타고라스가 지방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면 그가 가르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라 치유하기 위해 왔다고 하는 소문이 퍼졌다.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도시에서는 부와 사치가 지나쳐 이른바 명문가 사람들은 전쟁이나 군대, 경기와 관련한 일 즉 넓은 의미에서 승부를 위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피타고라스는 그들이 추구하는 승부욕과 명예욕은 결국 그들 자신을 예속 상태에 빠트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부와 승부를 쫓는 삶을 경멸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이 비범한 스승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자신들의 소유물을 하나로 모아 숭고하고도 엄숙한, 종교적 기운으로 가득 찬 공동체를 꾸려 재산을 공유하며 생활하였다. 한편 그는 정치적 개혁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피타고라스 사후 아주 후대의 세속적 피타고라스 교도들이 행한 실제적인 정치적 활동 때문에 생긴 견해일 뿐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아니다. 또 다른 피타고라스 교도들은 오르페우스 교도들과 손을 잡아 고행을 앞세운 미신적인 단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가장 믿을 만한 증인으로서 플라톤은 최소한 실천철학과 관련해서는 피타고라스를 사생활 영역에서 독특한 형태의 종교 의식을 창시한 사람 정도로 말하고 있을 뿐, 솔론과 카론다스와 같은 정치가 내지 입법가들과는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대체로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극히 중요한 몇 개의 사안과 관련하여 다른 그리스인들과는 애초부터 다른 집단으로 여겨졌다.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는 매우 독특하게도 스승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정치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의 삶은 모두 이 폴리스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사모스로부터 와서 이 폴리스의 이러한 정치적 제도와 행태를 접하고는 줄곧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크로톤에서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의 말년의 짧은 전성기 이후 그리고 그가 죽은 지 몇 년 후 그의 신봉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가혹한 박해를 받아 급기야 그들 대부분이 추방을 당하거나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 사정 또한 아마도 수학과 관련한 그의 방정하고도 엄격한 태도와 가르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피타고라스학파가 고대 그리스에서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며 과학적이기도 한 가장 초기의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단체였다는 사실은 이 학파가 누려야할 영원한 명예일 것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친밀하게 서로 결속된 하나의 공동체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오니아학파나 엘레아학파와 다르다. 실제로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우정과 연대감으로 서로를 헌신적으로 도왔고 학파에 속한 사람들이 사망했을 경우 그 사람이 개인적인 안면이 있건 없건 장지가 멀건 가깝건 간에 상관없이 문상을 가 장례를 도왔다고도 전해진다. 이 학파의 영향이 스승이 사망한 이후 2세기 이상 유지되었다는 점도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피타고라스가 이러한 영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종교적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2. 신화와의 결별. 다. 자연철학의 등장. 다음에 계속 )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8)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8)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2. 신화와의 결별

가. 현인들의 등장

철학의 시초로 여겨지는 이오니아학파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잠언들이 지혜의 옷이었다. 이른바 7현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이 잠언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 중 가장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신화와 결별 하지는 않았지만 신화에 비의존적인 사유 세계를 들고 나왔다. 이들 일곱 명의 이름들은 늘 하나같지는 않았다. 언제나 거론되었던 사람은 탈레스(Thales), 핏타코스(Pittakos), 비아스(Bias) 그리고 솔론(Solon)이고, 나머지 3사람으로는 코린도스의 클레오불로스(Kleobulos), 스파르타 사람 케일론(Keilon), 페레퀴데스(Pherekydes), 아나카르시스(Anacharsis),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등이 각기 다른 조합으로 함께 거론되었다. 이 현인들에 참주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후대의 견해 때문에 그리스의 솔로몬이라고 일컬어지는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Periandros) 대신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라코니아(혹은 크레테) 출신 뮈손(Mys?n)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플루타르코스는 ‘현인(sophos)’이라는 호칭이 대부분 정치영역에서의 탁월한 능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고 탈레스만이 그러한 실제적인 요구를 넘어선 인물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탈레스는 현인인 동시에 이오니아 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왔고 헤로도토스의 책에서는(『역사』 제1권 74-75) 일식(日蝕)을 산정해내거나 할뤼스(Halys) 강의 흐름을 바꾸는 등 다방면으로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현인들 모두를 아직은 얼마간 신화적이고 일정한 유형적 특색을 가진 인물들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연대 상 태어난 해가 백년 이상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모두 델포이 혹은 코린토스에서 열리는 페리안드로스의 향연 모임에 함께 자리하게 한 들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이들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특별한 신화적 표현이 바다 속으로부터 주워 올려진 “황금 솥”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델포이의 신탁에 의하면, 이 솥은 가장 영리한 사람(신을 경애하는 마음이 가장 열렬한 사람이 아니라)에게 하사되었던 까닭에 소유권이 우선 탈레스(혹은 비아스)로부터 시작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차례차례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것을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마침내 이 솥은 델포이 혹은 이스메네스강의 아폴론에게 헌납되었다.

탈레스 (기원전 624-526년)

델포이 신전의 벽에는 이들 일곱 명의 현인들의 잠언들이 황금 문자로 각각 적혀있었다. 이것이 언제, 어떻게 또 누구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들에게 이러한 잠언들 중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들 중에는 잠언뿐만이 아니라 잠언풍의 경구( Apophthegmen) 및 일화도 들어 있다. 대부분은 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 중 아주 짧으면서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들이 가장 비중 있게 여겨졌다. 또 담긴 내용들이 항상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곳에는 “다수(die Mehrzahl)는 나쁘다”라는 말도 있다.

잠언투의 말이 어느 모로나 예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은 이미 헤시오도스의 『일과 나날』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다른 한편 스파르타 사람들 역시 스파르타식 간결한 표현으로 잠언투로 말하는 형색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었다. 이 점에서는 그리스인들과 오리엔트 사람들 모두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오리엔트 사람들의 경우는, 인도는 예외이긴 하지만, 격언적인 것(즉,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것) 이상으로, 그것도 비유적 이야기의 단계 이상으로 나가지는 못했고 어떤 윤리학도 전체적으로 이러한 것들과 관계를 끊는 일이 없었다.

7현인들에 병행해서 그들과는 다른 계열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들과 동시대에 살면서 그들과 접촉했던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기인(奇人)들(die wunderlichen Heiligen)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그들을 하나의 명칭으로 거론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스인들은 아주 특별할 정도의 뛰어난 사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특히 다음과 같은 제약 또한 가지고 있었다. 즉 그리스의 민족종교가 형이상학적으로 견실하지 못하고 게다가 부정합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 민족 종교는 우주 만물에 대한 설명으로서도 불충분한데다가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는데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아무런 윤리적 규정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종교에서는 일부 오리엔트 민족 종교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난 것과 같은 신관에 의한 조직적인 변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브라만교의 조직, 조로아스터, 모세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종교들이 거쳐 온 변혁의 과정이 이 종교에서도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러한 까닭에 천성적으로 사유능력을 타고 난 이 기인 내지 괴짜들이 자기들의 민족 종교에 대해서 일시적으로 제기 했었던 특별한 이념조차도 여전히 종교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비유적이고 신화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조차 모든 사태를 나타냄에 있어 (더 이상 비할 데가 없었던) 신화적인 표현법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이와 같이 자력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신화화해가면서, 다른 한편에서 이미 활동을 시작한 철학과 더불어 그 경쟁자로서 이윽고 아폴론적인 사람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금욕에 의해, 마음의 망아적 상태에 의해, 격정으로 들끓고 있는 그리스 전 국토에 속죄의 위로를 주는 정화 의식에 의해, 기적에 의해, 그리고 영혼 윤회라는 교설을 내세워 이상한 빛을 주위사람들에게 비추어가면서 교세를 넓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 후 전승에 의해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만들어 졌고 공상의 인물이 되어, 그들 자신이 다시 신화적이 되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로 알려졌다는 점이다.

페레퀴데스(기원전 580-520)

이런 사람들의 한 명으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크레테 출신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를 들 수 있다. 그의 생존연대는 참주 퀼론(kylon)의 피살로 인해 쇠퇴한 아테나이를 그가 정화시켰다(기원전 612년 또는 596년)는 전승에 의해서 확실하게 알려져 있다. 어쨌든 그는 속죄의 신관이고 예언자로서 우주생성론을 썼고 또 그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수차례 윤회전생 했다고 한다. 모든 사태를 유형적으로 파악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특징을 한 명의 인물 위에 겹쳐 쌓으려고 하는 그리스인들의 강한 의지는 벌써 이 에피메니데스를 마침내 그리스적 감각이나 사고로부터 생긴 자신들의 공상과 대체로 일치하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다음으로 아바리스(Abaris)를 들 수 있는데, 이 사람은 휘페르보로스(Hyperboros) 즉 아폴론신을 숭배하는 민족이 사는 전설상의 나라에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기원전 600년 이후) 실제로 생존하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정화(淨化) 신탁이나 예언을 행하면서 그리스 본토 전역을 돌아다녔던 사람이다. 후대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아폴론신에게서 받은 한 개의 화살에 몸을 싣고 공중으로까지 날아다녔다고 한다. 아바리스와는 반대로, 프로콘네소스 출신 아리스테아스(Aristeas)는 북쪽지방으로 가서 그곳에서 휘페르보로스를 찾아다녔다고 알려진 사람인데,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그는 아리마스포이(Arimaspoi) 사람 이야기를 쓴 서사시의 작자이고 포이보스(Phoibos : ‘빛나는’의 의미로 주로 아폴론을 가리키는 수식어)에 의해 접신 상태가 되어 아리마스포이 사람의 이웃인 잇세도네스(Issedones) 사람들의 나라로 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라도 자신의 육체를 분리시켰다. 메타폰티온(Metapontion: 타렌툼 해안에 위치한 도시)에서 그가 아폴론신의 수행자로서 까마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역시 영혼 윤회의 일단이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이 영혼 윤회 사상을 그리스 본토에서 처음 가르친 사람은 페레퀴데스였다. 그는 퓌타고라스의 스승으로 페니키아의 신비의 책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역시 특히 지금 전해지고 있는 그의 책(『신들의 탄생』)이 실증하고 있듯이, 사물의 본성에 대한 그의 관념과 예측(Ahnung)을 여전히 신화적 형식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는 점술가이자 천문학자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앞서 우리가 살핀 사람들 각각은 분명 극히 다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에 더해서 그야말로 아폴론적이지 않고 오히려 디오뉘소스적인 종파 혹은 당파가 처음으로 출현하기에 이르는데 그들이 곧 오르페우스(Orpheus) 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 오르페우스 교도는 아마도 이미, 앞서 이야기한 사람들로부터 당연히 예상될 수 있는 어떤 상념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잘 이용했다고 생각된다. 또 그들은 처음부터 오르페우스와 결부되었다고 거짓으로 꾸민 문헌을 내세워 정화를 통한 행복을 보증하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우주생성론을 주장하였으며 금욕과 채식주의를 실천하였고 행복에 이르는 저 세상에서의 생활을 언급하면서 영혼 윤회의 가르침을 설파하였다. 육식을 금해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도 아마 이 영혼 윤회 사상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오르페우스 교도들이 그리스적 삶에 속죄(Buβe)라는 개념을 끌어 들여, 현세의 생활이란 무덤에서의 생활과 서로 닮았다(to s?ma s?ma. 육체는 묘지이다)고 여기면서 이 땅에서 반복되는 탄생의 연쇄(kyklos genese?s)로부터 벗어나는 삶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진정한 삶은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성(Leiblichkeit)을 넘어서 있는 저 피안에서 드디어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르페우스 교도의 조직은 새롭고도 특별한 종교로서 나타나 그 교세를 넓히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나 그 특수한 내용이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전파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2. 신화와의 결별.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7)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7)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1)

 

1. 추동과 저지의 양 측면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에 대한 우리 논의의 목표는 그 구체적인 지식의 내용들을 서술하는데 있지 않고 이 학문들과 그리스 정신과의 관계를 서술하는데 있다. 사실 고대 오리엔트 남서부에 위치한 고대 국가들은 지식 축적의 측면에서 고대 그리스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앞서 있었다. 특히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문화는 매우 다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문화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오래전에 성립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나라들이 힉소스(Hyksos) 같은 탐욕스럽고 미개한 나라들의 장기간에 걸친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도 굳건히 그 문화를 지켜왔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도 위대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이룩한 최초의 위대한 종합이며, 또 이러한 국가들이야말로 지식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한 최초의 국가였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강력한 신관 계급이 그 일을 맡아 오면서 수많은 자료들을 축적해두었기 때문이다. 페니키아 문화는 이러한 고대 오리엔트 문화 중에서 그리스 본토에 이식된 최초의 햇가지라 할 수 있다.

그리스가 문화적으로 발전한 것은 이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기나긴 미개의 상태를 지나 국가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여러 개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계급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또 그리스인들은 특유의 강한 그리스적 특징을 보전하고 있어서 극히 강력한 제약아래서만 외래 문물의 차용을 허락했다. 예를 들어 페니키아 문물의 영향을 접했을 때도 그들은 이 문물을 즉시 그리스화하여 그것이 거의 외래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자기나라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상형문자, 민용문자에 이어 병기된 로제타석 그리스어 부분

그런데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강력한 힘은 다름 아닌 그리스인들의 언어에 있었다. 그리스어는 그들의 시가(詩歌)에 기여한 그 이상으로 학문의 발전에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어는 장차 나타날 철학을 이미 잠재적으로 그 안에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스어는 아주 투명한 사상의 외피라고 말할 정도로 사상 특히 철학 사상을 표현하는 데 아주 적합하였다. 아마도 그것을 표현하는 그리스어의 유연성은 실로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개별 사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는 언어 세계로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자체로 이미 실천적 변증술(praktische Dialektik)의 토대가 됨으로써 철학 사상을 표시하는데 발군의 창조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최대의 그리고 결정적인 여러 가지 이념들은 이집트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어로 비구상적인 것들 혹은 추상적인 사상을 막힘없이 표현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검토해 보아야할 일이다. 셈족의 언어도 그리스어에는 한참 뒤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헤브라이어로 번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라비아인들조차 그리스인의 저작이 없었다면 철학을 손에 넣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리스인 이외에 원래 처음부터 철학에 도움이 되는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인도인과 게르만인 뿐이었을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라든지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가장 초기의 그리스 철학자들 역시 철학적 사색의 각 과정에서 신화적 명칭을 부여하거나 추상적인 것을 의인화 했다. 하지만 이윽고 철학은 자기 고유의 말을 손에 넣었다. 즉 철학은 초기 시대부터 존재하고 축적되어 있었던 언어에 의지하여 보편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을 표현하였고 또 그 의미가 매우 불안정한 심리적 표현들 이를테면 nous, psych?, thymos, phrenes, prapides 등의 의미를 안정화시켰다. 그들은 추상적 관념을 용이하게 명사로 만들어내는 그리스어의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리스인은 어떤 것을 개념적으로 드러내고자할 때 실로 간단하게 복합어를 만들어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고, 또 사태와 관련해서도 모든 동사와 명사를 전치사와 연결시켜 용이하게 잘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형용사와 분사를 중성명사화 하여 아주 쉽게 여러 가지 원리나 기본 물질 등을 표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특히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그리스어에는 수동 형용동사(to lekteon)가 존재한다는 것, 동사의 부정과거(aorist) 용법 등을 통해 제약적인 것과 무제약적인 것이 드러내는 모든 표시와 음영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간태(주체의 동작이 그 주체에 관여하는 상태를 표시)를 통해 동사 개념의 미묘한 차이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리스어는 부정사의 명사적 용법은 물론 관사를 이용하여 실로 다종다양한 것을 명사화할 수도 있다. 물론 그리스어의 이러한 풍부한 활용성에도 불구하고 약점 또한 없지 않다. 이를테면 재앙과 사악함을 kakon이라고 하는 말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든지 ‘자의식(Selbstbewuβtsein)’을 나타내는 말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 등은 그 결함의 하나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리스어는 단지 사람들이 서서히 손에 넣어 익숙해진 도구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모든 정신적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는 대화로서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실로 meropes(사태를 구별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부분과 전체, 특수와 보편을 식별하고 그것들에 명칭을 부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경우조차 어떤 말도 신성화 하거나 화석 같은 상태로 숭배하는 일이 없었다. 어느 것도 특정의 전문 용어 아래 예속되지 않았다. 어느 철학자, 어느 학파가 그 학파의 말을 완고한 의미로 사용하면, 동시에 다른 철학자들이 그곳에서 신기한 다른 것들을 끌어낸다. 여기에서도 오로지 시합 내지 경쟁(agon)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또 정신세계에서 드러나는 개별적이고도 유별난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그리스인은 그것을 나타내는 살아있는 표현을 늘 가지고 있었고 경험세계의 다양한 것들로부터 개념으로 상승하였다가 다시 개념으로부터 개별적인 것들로 하강하는 작업 또한 용이하게 수행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인은 사고의 모든 메커니즘을 상상의 소산으로부터 분리하여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일종의 논리학과 변증술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에 가세해 수사학과 소피스트의 철학은 시민들의 입을 더욱 활발하게 열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어도 언어지만 비범하다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 자질이었다. 실로 그것은 인식의 가짓수 수준의 것이 아니라 어떤 인식에도 이를 수 있는 능력이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큰 약점마저도 그들이 철학을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분명 철학은 강력한 종교의 한쪽 편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도나 이슬람교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이단이나 종파로서 발생한 것들이다. 그리스인의 경우, 철학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생겨났지만 그것의 발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떠한 힘도 제도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관들 누구도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그리스 종교는 기존 지식과 신앙의 감독자였지만 동시에 사고의 소유자이기도 하였으므로 위계적인 계급(Kaste)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 철학자가 등장할 때에 반드시 그것과 결부되어 있을 법한 특정의 ‘단체(Soziet?t)’도 존재하지 않았고, 관료 족속 따위의 특정 계층도, 분열을 조장하는 어떤 ‘교양(Bildung)’도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극히 다양한 환경이 있었고, 현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 또한 일종의 자명한 합의에 의해서 그러한 환경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부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러한 현자들을 하나도 배척함이 없이 다 끌어안고 있었다. 또 정신적인 일에 종사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제약도 없었고, 자유민이라면 누구라도, 하물며 어떤 노예라도, 뿐만 아니라 비(非)그리스인들 조차도 그리스적 교양을 가지고 있으면 철학의 길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는 훨씬 커져갔다. 누구라도 실제로 철학에 종사할 수 있었고 철학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도처로부터 나타나 교사가 되었다. 계급대신에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는 학파(Schule)를 가졌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10권 일부가 실린 가장 오래된 파퓌로스

그러나 이상에서와 같이 철학을 추동하는 수많은 조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처음부터 철학의 형성을 저지하는 강력한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신화가 그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민족 형성기 이래 하나같이 영웅신들의 시대를 천진난만하게 살아왔고 그 후에도 신화는 실로 이 시대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서 중단되지도 축소되지도 않은 채 그리스인들을 지속적으로 지배하여 왔던 것이다. 이 빛나는 형상이 환영처럼 그리스인들의 머리 위를 맴돌았고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이 형상이 내비치는 상태에 가장 가깝고도 정당한 상속자라고 느꼈다. 그리하여 이 형상은 무섭도록 명백한 인생관으로 각인되면서 오랜 기간 철학을 대신했다. 이 형상이 지식을 대신한 까닭은 형상 스스로가 지식의 원형이었기 때문이고 자연, 우주관 그리고 역사, 종교와 우주생성론까지도 놀랄 만큼 상징적인 옷으로 치장하여 함께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화의 외형을 구성하고 있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시가(詩歌)들에 의해 신화는 불사신이 되었고 그리하여 신화는 그리스인에게 로맨티시즘이자 청춘으로 받아들여졌다. 신화는 고대 그리스인과 더불어 계속 살아있었고 고대 세계가 이어지는 동안 비그리스인에게도 계속 살아 있었다. 설사 종국적으로 신화가 단지 학술과 수집과 비교의 대상이 될 지라도 그것의 하나같은 표현이 예술과 시가인 한, 이 두 개의 분야에서 신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싹을 틔어왔다. 지식의 경쟁 상대이자 불구대천의 적(敵)인 신화는 오랜 동안 해석되고 새로운 해석이 더해지면서 거꾸로 뒤엎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유로운 사고와 지식을 일으켜 세우려고 한다면 먼저 신화를 전복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신화와의 결별은 아주 오랜 동안 더딘 속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결코 충분하게 완전히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이었다.

(2. 신화와의 결별.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6)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6)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2)

 

 

두 차례에 걸친 그리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격노한 다레이오스 1세는 다시 원정을 준비했으나 끝내 숨을 거두고 이후 기원전 480년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30만의 병력과 1000척에 가까운 군함을 이끌고 다시 그리스를 쳐들어 왔다. 이것이 3차 페르시아 전쟁이다. 그리스 북방의 마케도니아로부터 남하해 온 페르시아군을 맞아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라이(Thermopylai)에서 첫 방위전을 펼쳤다. 그러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 7000명 모두가 마지막 한명까지 목숨을 바쳐 용감하게 싸웠음에도 페르시아 대군의 위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테르모필라이의 방위전을 돌파한 페르시아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마침내 아테네까지 함락되면서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전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아테네를 구한 사람이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s)이다. 페르시아군은 남쪽 해안 루트를 통해 해군력을 총동원해 아테네를 굴복시키기 위한 마지막 총공세를 펼쳤는데 데미스토클레스가 지휘한 아테네 해군이 페르시아의 대함대를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해 페르시아 해군력이 거의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기원전 480년에 있었던 유명한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다. 그런데 살라미스에서 아테네 해군의 대승은 단지 아테네 해군의 전술능력과 용맹성으로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치밀한 사전 준비와 행운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1차 침공이후 해군력의 증강이 요구되었을 때 다행스럽게도 라우리온(Laurion) 광산에서 엄청난 양의 은광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얻어진 재화 모두를 군함건조에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는 고대 이래 나라건 개인이건 큰 부가 생길 경우 최대한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게 오래된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부유한 자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과도하게 요구되어 사회 문제가 된 공적 기부제(leitourgia) 또한 원래는 그러한 전통적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적 분배 대신 군함 건조에 자금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테미스토클레스의 탁월한 설득과 그에 대한 시민들의 지혜로운 동의가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테미스토클레스는 군함의 건조를 계획하면서 특별히 해상에서 기동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아테네 해군 고유의 삼단노 군선(tri?r?s)의 기능을 더욱 강화시켰다. 당시 해전에서는 상대 함정을 수직으로 부딪쳐 파괴하는 것이 최상의 전술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크기가 크면서도 기동력이 빠른 배가 필요했다. 적은 수의 군함으로 많은 적함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도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새로 건조되는 삼단노 군선은 당시로선 아주 큰 규모인 길이 40미터, 폭 4~5미터의 거대군함으로 만들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최대한 노(櫓)의 숫자를 늘리고, 노수(櫓手)들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배의 하부를 3단으로 설계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해군이 주로 전투원으로 구성된 750척의 배를 구비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아테네 해군은 380척에 불과했지만 승조원의 절반이 노수들이었다고 하니 가히 군선의 기동력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에서 200여척의 배를 잃고 크게 패전한 후 크세르크세스 1세의 뒤를 쫓아 퇴각했고 그리스 본토에 아직 머물러 있던 나머지 병력도 아테네·스파르타 연합군에 의해 기원전 479년 프라타이아에서 최종 격퇴되면서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데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5-459)

고대 아테네의 주력 군함 삼단노 군선(tri?r?s)

 

그런데 페르시안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계기가 된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대승은 흥미롭게도 차츰 아테네 정치지형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작용하였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아테네에서 정치적 발언권과 시민으로서의 긍지는 전쟁 기여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한 시민의 수만 해도 4만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전쟁이 끝난 후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고양되어 있었을까 짐작이 가고 남는다. 게다가 승조원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노수들은 무구를 갖출 재력도 없어 그 동안 전쟁에 참전할 능력도 없었고 그에 따라 어떠한 시민적 명예도 누릴 수 없었던 무산 시민들이었으니 그들의 자부심은 가히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감격적이었을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러한 고양된 시민의식은 그대로 아테네의 정치 및 권력지형에 반영되어 마침내 아테네 시민이면 귀족이건 무산 시민이건 간에 어떠한 차별이나 제한 없이 모두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발언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의 힘은 날로 커져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최고의 영웅으로 최고의 권력에 오른 테미스토클레스마저도 도편추방투표를 통해 국외로 추방할 정도로 그 위세를 발휘하였다. 물론 테미스토클레스의 탄핵이 정치적 음해가 개입되어 이루어진 누명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어쨌거나 정치적 사안과 관련한 결정과정에서 정치적 주체로 떠오른 시민의 힘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아테네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원전 461년 급진적인 민주정을 펴다 암살당한 에피알테스(Ephialt?s)에 이어 아테네 민주정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 페리클레스(Perikl?s)이다. 페리클레스는 이후 30년 가까이 오랫동안 아테네의 지도자로서 군림하면서 아테네의 민주정이 확고하게 제도적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도편추방 당하지 않고 권력을 유지하며 그런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인격과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장군직에 선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플라톤은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의 정체를, 사람들은 민주정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민중의 찬성이 수반된 귀족정이라고 평하고 있다.([메넥세노스] 238c,d)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치세는 아테네로서는 최고의 번성기였을지는 몰라도 그리스 전체역사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의 몰락을 앞당긴 시대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 종전 이 후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인접 폴리스들을 끌어들여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맹주로 자처하고 군자금을 거둬 비축해왔으나, 그 비용을 아테네의 신전 건축과 정치수당을 지급하는데 유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반발하는 폴리스들을 군사력으로 제압하여 그리스 사회를 아테네 중심으로 제국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상징으로 꼽히는 파르테논 신전 등 화려한 건축물도, 인류의 빛나는 유산으로 평가되는 여러 문학적·철학적 성취도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을 실질적으로 유지시키고 있었던 시민들의 여유와 경제적 번영도 실제로는 모두 다른 폴리스의 희생은 물론 시민들을 대신하여 아테네 경제를 떠받들고 있던 노예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민중최고재판소 재판관을 추첨하는데 쓰였던 도구들

 

페리클레스에 의해 주도된 이러한 패권적 제국주의의 경향은 결국 페리클레스 사후 스파르타의 반발을 야기하여 장기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휩쓸리게 함으로써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사회 전체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아테네의 민주정 또한 내전을 겪으면서 선동정치가의 득세 등 퇴행을 거듭하여 일시적으로 과거 정체로의 복귀를 꿈꾸는 과두주의자들의 반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내전이 끝난 직후에는 30인 참주들에 의한 비극적인 폭압정치가 자행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 참주정은 민주정으로 곧바로 복귀되었지만 아테네 시민들의 민주정에 대한 신념과 자부심은 이미 전성기를 이루었던 페리클레스 치세에 비해 현격하게 저하되어 있었다. 역사를 통해 부르크하르트 등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아테네 민주정의 치명적 과오로서 지적되고 있는 뮈틸레네인들에 대한 처벌을 둘러싼 민회의 결정, 아루기누사이 해전 장군들에 대한 처형사례, 니키아스의 주저가 빚어낸 시켈리아 해전의 참극,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처형 사례는 모두 아테네 민주정의 전성기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또는 그 직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서 조차 아테네 민중들이 선동정치가(D?mag?gos)들에 의해 휘둘려 비합리적이고도 어리석은 판단과 광분으로만 일관했다고 여기는 것은 그릇된 판단이다. 앞에서의 사례들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평가 또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이른바 선동정치가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수공업자·상인 등 평민 출신으로 처음 등장하여서는 원래 이름 그대로 민중(d?mos)의 의견을 대신 앞서서 표현하고 선도하는(ag?gos) 긍정적인 역할도 하였고, 민회의 결정과 관련해서도 민회가 일년에 40차례이상 수십 년에 걸쳐 수천 건 이상을 다루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위에서 알려진 몇 가지 사례들은 오히려 예외적인 소수의 오류들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 민중들이 보여주었던 민회에서의 열정과 전장에서의 헌신적인 용감성은 모두 맥동치는 국가성원으로서의 움직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기간 동안 시민대중들 또한 의연하게 절제와 지혜를 발휘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특히 30인 참주들을 축출 직후 극심한 갈등국면에서 아테네 시민 전체의 평화를 위해 아테네 민중들의 화해 조치와 처신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아테네 시민의 성숙된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처형과 관련해서도 당시의 아테네 민중의 정서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정황상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이라는 장기간의 비극적인 내전을 치르면서 아테네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종전 직후 들어선 30인 참주정은 아테네 민중의 비극적이고도 음울한 정서를 치유하기는커녕 폭정과 정적에 대한 대학살을 통해 민중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복구된 민주정의 지도자들에게는 이러한 정황을 전환시켜줄만한 어떤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소크라테스만큼 호재가 될 만한 인물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30인 참주들의 측근이었고 민주정의 이데올로그들인 소피스트들에게는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그가 말하는 다이몬(Daimon)이라는 신령은 아테네인들의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이교(異敎)신이라 여겨질 만큼 아주 낯선 것이기도 했다. 결국 민주정의 지도자들의 기대와 의도대로 민중들은 이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자신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취할 수 있는 희생 제물로서 암묵적인 교감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황이 시대의 현인 소크라테스까지 처형한 아테네 민중과 민주정의 처사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재판 등 일부 부정적인 사례들을 빌미로 아테네 민중들이 오랜 기간 이룩해온 정치적 이념 즉 ‘정치적 결정 및 재판에 대한 민중의, 민중에 의한 지배’까지 일거에 매도해버리는 처사 또한 부당하다. 플라톤의 [변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은 일단 절차상으로 보면 이른바 민주정이 이룩해온 전통적인 법적 절차에 의거해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피고인 소크라테스에게도 변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허용되었다. 아마도 [변명]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재판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발언을 기록하였다고 하면 우리는 인류역사를 통해 고·중세 시기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고대 아테네 민주정 고유의 공개적이고도 민주적인 재판과정의 전모를 알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아테네 말기의 정치적 정황이 아테네 민주정과 재판에 대한 신뢰를 크게 무너뜨리기 했지만 사실 아테네 민주정이 오랫동안 지향하고 견지해온 재판의 이념 자체는 고대 세계의 재판 그 어떤 사례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공정성을 수반하고 있었다. 민중 최고 재판소(heliaia)의 경우 기본적으로 재판관을 당일 추첨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재판의 전 과정에서 원고의 논고는 물론 피고가 의견과 이의를 제의할 수 있는 기회가 최대한 허용되었고 재판관들 또한 재판과정 내내 이의의 추가적인 존재 여부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면서 재판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는 소크라테스 재판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아테네 민주정이 발전시켜온 또 하나의 민주적 이념과 정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상 우리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유래된 민주주의의 이념적 지표로서 다수 대중들에 의한 다수결의 원리를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꼽는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초에는 다수결의 원리에 앞서 본질적으로 다수 의결과 관련한 일체의 사안들에 대한 정보의 공유 그리고 그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토론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뿌리에는 다수결과 더불어 합리적이고도 공개적인 토론의 정신이 핵심적인 지배원리이자 이념으로서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하에서 죽임을 당했고 플라톤은 그 민주정을 비난하였지만 그들 사상의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치열한 토론 정신은 다름 아닌 백가쟁명의 민주정 아테네의 토양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의 측면에서도 그와 같은 정보의 공유와 토론의 정신은 다수결의 원리의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필수적이고도 핵심적인 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아테네 민주정의 이념은 거대 이익집단의 정보조작에 의해 민중의 진정한 뜻이 왜곡되기 일쑤인 현대 민주주의에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준다. 진실은 다수결의 지지를 받지 않아도 궁극적으로는 인류에게 선과 덕을 가져다주지만 왜곡된 정보와 거짓에 기초한 다수결은 그 자체로건 결과적으로건 그 결의에 지배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정이 고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기 힘든 그와 같은 빛나는 이념과 지향을 가지고 있었을 지라도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비교해 보면 근본적으로 아주 많은 상이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간과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한계 또한 내포하고 있다. 우선 가장 큰 차이는 현대의 민주정이 대의제에 기초한 간접 민주정을 취하고 있는데 비해서(물론 일부 국가에서 직접 민주정의 요소를 이용하고 있고 또 오늘날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직접민주정의 시도 또한 논의되고 있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직접 민주정 체제였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아테네의 최고 결정 기관인 민회의 경우 18세 이상의 성년 남자 시민이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 누구든 제한 없이 평등하고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 표결은 오늘날과 달리 비밀 투표가 아닌 거수로 정해졌지만 도편추방여부 등 일부의 경우는 비밀투표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민회는 1년에 40회 정도 열렸고 국가 중요사안 일체가 심의되었다. 아무리 직접민주정이라고는 해도 열흘에 한번 정도 열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아테네 민주정이 정치 기능에 있어 정책의 적극적 수립보다는 사법적(司法的) 성격에 크게 치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민회는 워낙 많은 사람들의 참석을 요하고 도심에서만 열려 처음에는 정족수를 채우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페리클레스가 민회 참석자들에게 일상인들의 하루 수입에 준하는 정치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이후 도심에 살든 시골에 살든 생업까지 접고 회의에 참석하는 등 참석률이 크게 높아지기 시작했고 시민의식은 물론 정치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관심 또한 그 만큼 높아졌다.

그러나 여성이나 거류외인 그리고 노예에게는 여전히 참정권이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인구분포로 보면 인구의 40%정도에 달하는 노예를 포함하여 이들의 수가 전체인구의 70-80 %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엄격한 의미에서 민주정이라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민주정은 사회경제적으로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노예들의 희생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시민들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인 아테네 경제활동의 대부분을 노예들이 떠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수당 또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상당부분 델로스 동맹 기금에서 유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애초부터 정당성을 결여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아테네 민주정은 인접 폴리스의 희생은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다수의 기층 민중에 대한 착취를 기초로 성립한 특권화된 과두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제가 아테네뿐만 아니라 고대세계 전반에 유포된 제도였다는 점에서 그것이 곧 아테네 민주정의 본질적 한계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에서는 대부분의 관직이 추첨으로 이루어져 정치참여 또는 권력행사에 철저히 특권화가 배제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주요 행정직의 경우는 미리 기본적인 자질을 심사(dokimasia)했으며 특히 가장 중요한 군사직책 즉 장군(strat?gos)이나 재정업무에는 고도의 전문성을 인정하여 선거를 통해 선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임도 가능하였다. 페리클레스가 장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장군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의 최고 사법 기관으로서 민중 최고 재판소에서 판결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배심원(전문적인 재판관이 따로 없었으므로 이들이 곧 재판관(dikast?s))은 일관되게 그 재판 당일 즉석에서 추첨에 의해 선발하여 누구도 사전에 뇌물수수나 모의가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소크라테스(기원전 436-338)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정치 수당의 지급도 중지되고 아테네의 경제상황 또한 날로 악화되어갔다. 앞장의 논의들에서 살펴보았듯이, 특히 가장 큰 타격을 받은 테테스 층의 귀족들에 대한 공공연한 기부요구, 상습적인 무고(誣告)를 통한 이권수수가 횡행하면서 점차 아테네의 공동체 정신도 사라져갔고 인접 폴리스와의 잦은 전쟁과 정책에 대한 대립과 분열로 민주정의 기본골조도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북쪽 변방국가에 불과했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새로운 강자로 부각되면서부터 아테네는 친(親)마케도니아파와 반(反)마케도니아파로 분열되어 끊임없이 정쟁만을 일삼다 기원전 350년쯤에는 제국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진해졌다. 그 싸움의 중심에는 마케도니아와 평화를 유지하면서 아테네의 재건을 도모하려는 이소크라테스(Isokrat?s)와,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자유를 위협하는 정복자로 간주하고 그와 싸울 것을 주장하는 데모스테네스(D?mosthen?s)가 있었다. 끝내는 데모스테네스의 주장에 따라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에서 필리포스(Philippos)왕과 전쟁을 벌이지만 처절한 패배를 맞이함으로써 해상왕국에로의 복귀를 꿈꾸던 아테네는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한 채 마침내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

고전기 그리스는 아테네의 패권적 제국주의가 빚어낸 내분으로 결국 몰락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것은 적대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군사적 팽창주의로 이어졌다. 도시국가의 철학 또한 오랜 전란기를 통해 안심입명의 개인주의로 해체된 이래 헬레니즘과 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표징되는 또 다른 세계주의로 재편되었다. 때마침 근동 지방에서도 유대교의 민족주의적 폐쇄성을 넘어 보편주의를 기치로 종교적 세계주의가 등장하였다. 우연찮게도 기원전후에 등장한 이러한 세계주의적 경향들은 마침내 하나의 세계사적인 흐름으로 통합되면서 제국주의 거대 로마로 흘러 들어갔다.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끝-)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5)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5)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1)

 

 

부르크하르트가 전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말로는 자못 우울하고 냉소적이다. 아테네 민주정의 몰락과 그리스의 몰락이 함께 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그의 시선을 더욱 그럴듯하게 해준다. 사실 부르크하르트는 그리스 문화 전반에 대한 독보적인 수준의 풍성하고도 세세한 데이터와 통찰력 깊은 해석을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유독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 지배자 또는 기득권자들의 입장에 서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역사과정에서 정치적 강자, 사회 기득권자들에 의해 자행된 폭력적 억압과 그 피폐상에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역사학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역사 과정에서 가끔 눈에 띄는 민중권력에 의한 집단적 폭력과 그에 따른 혼란상에도 지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요컨대 그는 어떤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서든 반지성적 행태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집단적·정치적 폭력 일체를 혐오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학에서 인류의 역사적 가치의 형성 토대를 정치사와 경제사가 아닌 지성사와 예술사를 통해 다시 구축하고자 하는 역사학의 새로운 지평 이른바 문화사(Kulturgeschichte)의 영역을 최초로 확립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그의 정치적 입장은 보수주의라기보다는 지성주의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고중세사에서는 지성이 오직 귀족들의 역량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는 여전히 보수적 엘리트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주의의 관점에서도 아테네의 민중이, 보통 생각하듯 그저 어리석은 민중에 불과했다는 생각은 매우 섣부른 판단이다. 아마도 그러한 평가는 주로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이 끼친 지대한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단 다수 민중이 정치적 주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적이 2000년 이상의 고·중세를 통해 아테네 민주정을 제외하면 언제 있었던가를 생각하면 이미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인류 정치사의 위대한 성취이자 기층 민중들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준 매우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제로 아테네의 민주정의 초기 성립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비록 겉으로는 왕과 귀족 등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는 기나긴 정치체제의 역사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 틈바구니에서 민중 스스로 자신들의 욕구와 권리를 사회적으로 관철해내고자 하는 끊임없는 몸부림이 있어왔고 아테네 민주정은 그 결과로서 등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그 일단을 살펴왔지만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특히 그 점에 주목해서 아테네 민주정의 역사를 다시 한 번 간략하게 갈무리 해보기로 하자. 우선 아테네는 고대 폴리스 성립 이래 다른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한 명의 왕이 지배하는 왕정(basileia)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동 지방의 왕들처럼 절대적인 권력은 가지지 않았고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 중 한 사람이 대표로서 왕의 지위를 가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호메로스의 작품에는 직접 물레를 돌리거나 농사를 거드는 왕의 모습도 보인다. 그 때문에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이르면 왕정은 귀족들의 집단 정치체제 이른바 귀족정(aristokratia)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전시공동체로서 고대국가의 성격상, 정치적 발언권은 나라를 방어하는 전투 능력 및 기여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전투행태 상 중갑 기병(騎兵, hippikos)이 전투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를 하기 위한 기마 및 개인 무장 또한 자비부담에 의존하고 있었던 터라 자연적으로 전장에서도 귀족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 발언권 또한 그들에게 독점되어 있었다. 귀족들만이 비싼 가격의 말(馬)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츰 식민도시가 증가하고 그에 따른 교역량도 늘어나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부유한 평민이 나타났고 생산량의 증가에 따라 무기의 가격도 싸져서 평민 중에서도 무기를 스스로 조달하여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군의 핵심 전투력 또한 점차 평민을 중심으로 하는 중갑 보병(hoplit?s), 사각밀집대형(phalanx) 전술로 재편되었다. 이후 그들은 당연한 권리로서 귀족에게 참정권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참정권을 둘러싸고 귀족과 평민이 충돌하는 일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민계층의 약화는 그대로 나라의 방어력 약화를 의미했고 나라의 위기는 귀족들의 위기와도 직결되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평민의 불만을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원전 621년에 제정된 ‘드라콘(Drakon)의 입법’은 귀족들의 자발적인 정치개혁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간의 평민의 정치적 성장이 가져다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 법률의 핵심은 관습법을 성문화 했다는 데에 있다. 즉 나랏일과 관련한 중요사와 그 결정 과정을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대한 진전이었다. 그 때까지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결정 일체를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길 경우 그들이 행한 행태가 폭로되고 실정에 대한 변명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귀족이 결정한 정치적 사안과 법률의 내용이 기록으로 알려짐으로써 평민들도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귀족들도 더 이상 제멋대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평민에게까지 아직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거기서 양자의 조정자로서 등장한 인물이 솔론(Solon)이다. 시민들의 합의로 솔론은 계층 간 이해 조정을 위한 전권을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594년에 실시된 것이 솔론의 개혁이다. 솔론 개혁안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귀족·평민을 포함한 시민 전체를 재산과 토지의 소유수준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어 각각의 의무와 권리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중갑 기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귀족을 최상급의 시민으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아르콘 등의 최고 관직의 임용을 보장해주었다. 그리고 중갑 보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부유한 평민을 두 번째 등급의 시민으로 규정하여 그 다음 등급의 관직에 오를 수 있을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최소 수준의 무장인 경보병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세 번째 등급의 시민은 민회나 재판에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아예 어떠한 무장도 갖출 수 없었던 네 번째 등급의 시민들은 아무런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다. 무기의 가격이 싸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무산 시민(th?tes)으로 불리어 졌다. 이와 같이 솔론의 개혁은 토지·재산에 의해서 관직을 정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평민들도 부를 쌓을 경우 최고 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이 곧 금권정(timokratia)의 등장이다. 금권정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재산이 좌지우지하는 정치라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아테네 정치발전사의 측면에서 보면 마치 근세 시민사회의 성립이 그렇듯이 귀족들에 의해 독점된 정치 영역에 제한적이나마 평민계층의 참여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개혁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솔론 개혁안의 두 번째 핵심은 채무의 소멸과 채무 노예의 방지를 실시한 점에 있다. 솔론은 가난한 평민들의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평민이 빚 때문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또한 평민이 주력이 된 전투력을 보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화폐 경제의 발전에 의해서 평민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향상되었다. 그러나 그 만큼 몰락하는 평민 또한 늘어나 종국에는 토지를 상실하고 노예로 팔리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일단 빚을 지게 되는 지경에 이르면 토지가 채권자에게 압류되어 수확물의 6분의 1을 채권자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조차 체납되어 종국에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면 노예로 팔리는 것이 당시의 관습법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말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채무 노예가 나중 빚을 갚게 되면 인간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빚을 탕감해주는 정책이 평민의 채무노예로의 전락을 막아 국방력을 보전하는 좋은 방책일 수는 있었어도 그 자체로 부유한 귀족들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불만은 날로 켜져 갔고, 다른 한편에선 채무의 소멸 후에 토지를 재분배 받기를 원했던 평민들까지 나름 자신들의 기대에 못 미쳐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난한 평민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평민임에도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참정권에 차별을 두는 것 또한 불만이었고, 급기야는 신체를 저당으로 돈을 빌리는 법마저 금지하는 바람에 당장의 생활이 어려운 무산자들에게도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처럼 솔론의 개혁안은 점차 귀족과 평민 양쪽으로부터 모두 원성과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후 30년간 아테네는 귀족과 평민 간에, 부자와 가난한 자들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이 혼란한 정세를 이용하여 귀족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stos)라는 인물이 나타나 대다수의 가난한 평민들을 등에 업고 기원전 560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권력을 차지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곧 금권정에 종말을 가하고 나타난 참주정(tyrannik?)이다.

참주(tyrannos)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이용하여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차지하고 독재를 일삼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이긴 해도 온화한 인품과 노련한 정치술로 솔론의 개혁안을 유연하게 실행으로 옮겨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되 구테타를 피해 망명한 귀족이나 부패한 귀족들의 토지만을 몰수 하였고 그것을 평민들에게 분배하여 수공업의 발전을 꾀했고 해상 무역을 진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참주가 된 장남 히피아스는 사리사욕에 빠진데다가 폭정까지 일삼아 아테네를 큰 혼란에 빠트렸고 결국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s)에 의해 국외로 추방됨으로써 반세기만에 아테네 참주정은 종말을 고하고 만다. 당시 참주 히피아스의 동생 히파르코스를 살해하고 순교한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이후 아테네인들에게 참주정의 폭압성과 자유의 이념을 일깨어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기원전 570-507)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해외로 도피했다가 히피아스를 타도하는데 앞장선 망명귀족으로서 기원전 508년 이른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의 발전에 획기적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다. 그런데 클레이스테네스는 원래 처음부터 민주정을 지지하거나 민중의 이익을 앞세웠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반대파 귀족을 누르고 히피아스를 타도한 후 귀족정체로의 복귀를 꿈꾸었고 다만 그 과정에서 민중의 힘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혁명과정에서 증폭된 민중의 욕구는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고 그는 영악하게도 그 욕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새로운 정권의 수립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표징 되는 아테네 민주정의 빛나는 성취 그 이면에는 이렇듯 아테네 민중들의 정치적 자각과 그에 기초한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훗날 아테네의 급진적 민주정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는데 그 개혁의 급진성은 무엇보다도 도편추방제(ostrakismos)의 도입과 부족제의 혁명적 재편에서 잘 드러나 있다. 도편 추방제는 참주의 출현을 미리 막기 위해서 그럴만한 우려가 있는 인물을 미리 뽑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였다. 당시에는 아직 종이가 없었던 터라 기와 등 도기 조각에 이름을 써서 투표했는데 6000개 이상의 도편 가운데 가장 많은 표가 나온 인물의 경우 10년 간 추방명령이 내려졌다. 실제로 이 도편추방제에 의해 기원전 462년에는 키몬이, 444년에는 투퀴디데스가, 418년에는 클레온의 후계자이자 민중파 선동정치가였던 휘페르볼로스(Hyperbolos)가 추방당했고 제도수립이래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의 참주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정적을 합법적으로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유능한 정치가가 추방되는 부작용도 야기 시켜 휘페르볼로스 추방 이후 폐지되고 만다.

클레이스테네스의 또 하나의 급진적이고도 혁명적인 개혁은 종래의 귀족의 권력 기반이 되고 있던 낡은 혈연적인 4부족제를 혁파하고 순전히 기계적으로 지역을 열 군데로 갈라 10 부족제로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귀족 원로중심의 아레오파고스회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무산시민을 제외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는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민회(ekkl?sia)를 구성하고, 민회에 올리는 의안을 미리 토의하기 위해 지역 마다 50명씩, 재임할 수 없는 임기 1년의 위원을 추첨으로 뽑아 500인 평의회(boul?)를 구성하였다. 특히 민회와 평의회 위원은 물론 장군직과 일부 재정관 이외의 아르콘을 포함한 고위 관직까지 추첨으로 선발하였다는 것은 정치가 더 이상 엘리트 귀족들만의 독점영역이 아님을 상징하는 일종의 혁명 선언이었다. 이와 같은 추첨제가 가능했던 것은 아테네의 시민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테네인들 스스로가 정치적인 문제를 어떻게 그리고 왜 처리하는지를 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민의 지혜와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아테네가 시민을 정치 활동에 참여시킬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임할 능력을 갖추지 않은 무산 시민은 여전히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무산 시민까지도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하였다. 그것이 곧 기원전 492년에 시작된 페르시아 전쟁이다.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 때 크게 발흥하여 소아시아 서해안까지 진출하여 그리스 식민도시를 지배하에 두었는데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식민도시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한데서 비롯되었다. 발칸반도까지 진출을 꿈꾸고 있었던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1세는 그것을 빌미로 아테네에 진군을 명령했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로 향하는 도중 급작스럽게 밀어닥친 폭풍우 때문에 300척의 군함만 잃고 제 발로 물러났다가 그로부터 2년 후인 기원전 490년, 국외로 추방된 히피아스의 안내로 군사를 이끌고 바닷길로 다시 아테네를 쳐들어왔다. 이것이 2차 페르시아전쟁이다. 이 때 벌어진 전투가 유명한 마라톤 평야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는 1만명의 중갑 보병의 활약으로 3만명의 페르시아 대군을 대파함으로써 페르시아의 침략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전투가 끝난 후 한 명의 전령이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 승전보를 전하고 바로 숨을 거두었는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가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침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0년 후 세 번째 침략이 이루어졌고 그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 역사는 물론 아테네 정치사의 새롭고도 중차대한 전기가 찾아왔다.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그 의의와 한계(2)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4)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4)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4. 아테네 몰락기 민주정의 타락과 공포정치화

 

확실히 옛날의 위대한 말들은 그 후에도 울림이 있다. 안도키데스(Andokides)는 여전히 대담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사사로운 일에 몰두하는 자들에 의해서 폴리스가 보다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폴리스는 공공의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에 의해서 위대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알키비아테스 논박(adv. Alkib.)] 2)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당시 주로 누가 공공의 것에 마음을 쓰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셈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즉 대단한 애국심이 있는 양 보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들에 대한 불신이 크게 환기되었다고는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이미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나랏 것을 훔쳐(klepptein ta d?mosia) 부자가 되려 한다는 험담을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담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마저도 종종 연단에 오르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분명 그는 아테네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한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공직을 맡으면서 거액의 재산을 빼돌렸는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자신을 언제라도 비난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정 하에서 연설가들 내지 선동가들은 변론을 해주거나 반대로 입 다물고 침묵해주는 방식으로 큰돈을 벌어 들였다. 말하자면 연단에는 황금이 묻혀 있었다.(chrysoun theros to b?ma)(아리스토파네스의 [복을 주는 신(plut.)] 377ff) 그들은 연설을 통해 손에 넣은 공직이나 군사 혹은 외교상의 직책을 이용하여 특히 아테네의 패권이 강대했던 시절에는 여러 동맹국들로부터 수많은 선물들을, 재판 당사자로부터는 뇌물을 받아 챙겼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국고에 까지 직접 손을 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무능력하고 수입은 없지만 욕심은 유별난 보통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이러한 소득은 그저 현란한 것으로만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실로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나랏돈을 가로 채 부를 축적한 자, 신전과 무덤 그리고 친구마저도 탈취하는 그 자들이란 모반과 위증을 일삼고 거짓선서를 해대는 재판관들이고, 뇌물에 놀아나는 관리들’이었다.(플루타르코스의 [계율집-정치편(rei publ. ger. praec.)] 26) 어쨌든 온갖 종류의 부패가 아테네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재무관으로 있으면서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재무관이자 연설가였던 뤼쿠르고스(Lykourgos)도 그 한 사례이다. 아테네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당파가 있었는데 그 당파가 이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에 의해서 매수된 상태였다고 하니 당시 아테네의 부패상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기원전 524-480년)

 

그리고 소송에서도 원고든 피고든 그 권력과 재력이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판결이 내려졌다. 하물며 이피크라테스(Iphikrates)라는 자는 사형 죄에 해당하는 고소를 당했음에도 젊고 건장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와 재판정을 둘러싸게 한 후 단검을 슬쩍 내보이는 방식으로 재판관을 위협하여 무죄를 언도받기도 하였다.(Polyainos III, 9, 15) 그런데 이러한 횡포는 정치적 강자들끼리의 다툼에서 특히 더 기승을 부렸다. 이를테면 이름난 연설가가 선동적이고도 위협적인 연설로 정적을 고발하면 민중들은 그 연설에 압도되어 그 연설가를 진정한 애국자, 정치가로 여기기 십상이었고 또 연설가들은 민중들에게 상대 정적들에 대한 분노를 불러 일으켜 자신들이 저지른 부패를 은폐하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는 가장 안전한 방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찍이 니키아스(Nikias)는 시칠리아 해전에서 병사들 전체가 몰사의 위기를 맞았음에도 적시의 후퇴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그가 아테네로 돌아가 철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기소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동포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의 손에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의 최정예 부대가 궤멸당한 것이다. 연설가들과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놀아나는 시민들의 이러한 무분별과 광기는 이처럼 수많은 장군들과 책임 있는 자들의 결의를 무디게 하고 결단을 주저하게 하였다. 전쟁 대신 평화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한 정황에서조차 나라가 혼란스러워야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보다 더 잘 누릴 수 있다고 여긴 일부 아테네 사람들 때문에 전쟁이 계속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중상모략과 정당한 고소가 구분되기 힘들게 되자 아테네인들 서로의 불신은 극에 달해 급기야 고소는 또 다른 고소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서는 고소야말로 자신을 지키는 건강의 표시로까지 여겨졌다. 그 과정에서 규정을 바르게 적용하여 제대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공직자 전체가 끊임없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재무관의 직책에 맡으면서 어떤 비리도 저지르지 않았던 뤼쿠르고스조차 고소를 당하자 노환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자신을 소명하고자 마차에 실려 평의회당에 출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소인은 메네사이크모스(Menesaichmos)라는 자 한 명뿐이었다. 결국 뤼쿠르고스는 이 자의 고소를 논박한 후 빈사의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도 메네사이크모스가 다시 그를 고소하자, 시민들은 그들 스스로 화환과 상을 수여했던 뤼쿠르고스였음에도 그 대신 그의 아들들을 감옥에 쳐 넣었다. 그 후 그들에 대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진지한 경고가 있고서야 아들들은 간신히 석방되었다.

뤼쿠르고스(Lykurgos 기원전 338-326년)의독어역본 표지

그런데 국가는 오히려 이러한 제도의 개선은커녕 전면적인 운용을 위해 중상모략가 내지 무고자((sykophant?s : 소송을 직업적으로 일삼는 자)의 위세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대집단의 역할을 자임했다. 즉 밀고가 정식 직업으로서 승인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이 국가도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스파이에 의존한 것만큼이나 이러한 보조 수단에 의지하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 이 폴리스는 스페인의 왕위와 같이 어느 신격화 된 것, 즉 일탈을 막는 것이라면 어떠한 과감한 수단도 불사하는 종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물론 일탈 상태가 계속 될 경우 그러한 수단을 통한 통치가 불가피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테네 위주의 이 국가주의적 이념은 정상적인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비뚤어져 있었다. 그리고 국가에 의해 조장된 이러한 공포정치는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제반 사회적 병폐를 공공연히 용인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공포정치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기원전 431년) 후 100년 동안 아테네에서 하나같이 그 위세를 떨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게다가 이 공포정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후계자 시대에는 로마인들에게까지 만연되어있었다. 밀고와 무고를 일삼는 직업이 어떠한 부끄러움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임을 한 국가가 인정한다면, 어떠한 시대, 어떠한 민족에서도 이런 종류의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국가는 그들을 찾아내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중세를 걸쳐 이러한 일을 명백하게 직업으로 인정하고 시민 모두를 그 감시 하에 둔 것은 그리스 민주정뿐이었고 게다가 그것이 완전한 상태로까지 나타난 것 또한 오직 아테네 민주정뿐이었다. 그러나 아테네 하층민들로서는 이러한 일에 대해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할 것까지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처지와 사정은 물론 기분에도 부합하는 것이어서 이미 마음속으로 모두 용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섬의 소송의 증인이야. 밀고자이자 염탐꾼이지. 쥐구멍 파는 것은 사양해. 나는 이미 나의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밀고로 살아오고 있으니까.” 이렇게 아리스토파네스의 [새(Aves)](1423행 이하)의 등장인물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쨌든 희극 작가들까지 끌어들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밀고자라고 하는 인물을 마음껏 희화화해 주려는 유혹과 즐거움을 그들은 너무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무고를 일삼는 자들은 모두 애국자처럼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폴리스와 “현행법”을 보위하는 자로 여겼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 무리가 주로 염탐하고 있었던 것은 일단 명분상 시민들이 국가의 요구에 충분히 응하고 있는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횡포를 재제할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무고자가 자기가 고소한 소송에서 적어도 배심원의 5분의 1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을 경우 그는 1000 드라크마를 벌금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그가 제기한 소송건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경우에도 1000 드라크마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나 배심원 재판에서 5분의 1의 찬동자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 무고자는 벌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경우에도 통상 지불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버티었다. 뤼시아스(Lysias)의 시대에 그러한 미납액이 연체되어 1만 드라크마나 되었던 자(아고라토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남자는 배심원으로서 출석하고, 민회에도 얼굴을 내밀면서 여전히 모든 종류의 나랏일과 관련한 소송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어떤 사람이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에는 끊임없이 이런 무고자들의 포위공격을 받고 있었다. 니키아스는 일생동안 무고자를 두려워해 늘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와 그가 이끈 군대의 운명에 얼마나 중대한 결정을 미쳤는가는 이미 말한 바가 있다. 크세노폰(Xenophon)의 저작에 나타나는 훌륭한 남자의 모범인 이스코마코스(Ischomachos) 또한 종종 밀고당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배울만한 것은 소크라테스(Sokrates)가 이스코마코스처럼 박해받고 있던 크리톤(Kriton)에게 던진 아래와 같은 근사한 충고이다. “무고자를 막아 줄 사람을 돈으로 끌어들여라.”(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Memor.)] II, 9, 1) 다행히도 크리톤은 무고자를 막아줄 사람으로서 아르케다모스(Archedamos)라고 하는 인물을 찾아냈다. 이 남자는 무고자들에게 공포를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무고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크리톤과 그의 친구들은 다 그를 의지하고 존경하였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이 아르케다모스 같은 유용한 무뢰한을 자신들의 식탁에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주정을 뒤엎고 권력을 잡은 30인 참주들은 다수의 무고자를 잡아 사형에 처했지만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은 이내 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은 첩보자들을 이용해 의도된 목적을 완전하게 달성했는데 그것은 이 첩보자들이 이 기관의 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세뇌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아테네에서 무고에 의한 소송건은 그 성격과 목적이 달랐다. 즉, 무고자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소송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소송 당사자들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금품을 대가로 상호협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테오크리네스(Theokrines)는 친 형제의 살해자들로부터 금품을 받고 소송을 철회하고 있다.(데모스테네스의 [테오크라테스 논박(in Theocrin.)] p. 1331) 그러니까 폴리스가 달성한 것은 일종의 악취 즉 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 죄를 범한 사람들 내지 선동정치가들과 그 배후에 있는 무고자들과의 거래와 타협 같은 것들이었다. 이 악취 가득한 행태들은 공공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침투해 들어가 가장 뛰어난 상당수의 시민들로 하여금 공공 생활로부터 남몰래 혹은 공공연하게 등을 돌리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안전책이었지만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추첨으로 어떤 직무에 선택된 사람이 최종 합격을 위한 심사(dokimasia)를 받아야할 경우 무고자는 즉시 그 개인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이권이 생기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무엇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일평생 그런 짓을 하며 삶을 영위했다. 그래서 이 무고자 집단은 끊임없이 사람들 곁에 서서 사람들로 하여금 무고에 대해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착실한 사람들은 무고를 당하면 어떻게든 힘을 다해 소송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고, 무고자들 또한 소송까지는 끌고 가고 싶지 않아 했다. 왜냐하면 막상 소송에 말려 들어갔을 경우 소송 경비에서 기소인의 몫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적절히 사전에 타협을 해 소송을 중도에 취하하게 했을 경우에는 별도의 금품을 뜯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소송이 진행된 후 무고자가 그것을 철회했을 경우에는 1000 드라크마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 돈 또한 그 희생자에 의해서 몰래 충분히 벌충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무고자는 소송을 계속했다. 고령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신을 모독하였다는 협의로 고소를 당했는데 이것 또한 아마 그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낼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에우보이아)로 피해 마케도니아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그는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에게 보낸 편지에다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알키노오스(Alkinoos)의 정원과 같이 무화과(sykon)가 우거진 마을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발음의 유사성을 토대로 무화과(sykon)로 무고자(sykophant?s)를 비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년)

그런데 아테네는 이런 종류의 무고자들을 조력자로 이용하면서 어쨌든 국가 기구로서 존속하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생명력의 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어떠한 범죄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한 위협, 국가의 안보를 저하시키는 것으로 의심되었고 그에 따라 소송의 성격이 정치적인 것으로 급변하는 경향이 자주 있었다. 또 국가는 그리스인 본래의 종교로까지 추켜세워졌던 터라 형벌 또한 가장 신성한 것을 훼손한 대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테네의 형벌이 비정상적으로 엄중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벌금형과 시민권 박탈과 함께 형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던 사형이 전혀 중대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서마저 적용되는 일도 생겨났다. 이처럼 폴리스는 때때로 광분상태에서 판단력도 없이 형벌을 쓸데없이 휘둘렀다. 이런 까닭에 가끔 누가 보더라도 국가에 대한 명명백백한 범죄라고 인정될만한 사건이 생겼을 경우에는 재판의 엄정성에 대한 본때라도 보이려는 듯 그 범죄 혐의자에게 국가에 대한 모반죄를 씌워 가장 엄한 벌로 처벌하였다.

뤼쿠르고스의 레오크라테스(Leokrates)에 대한 논박 연설은 그와 같은 모반죄를 덮어씌우기 위한 대표적인 고소 사례들 중의 하나이다. 신성모독에 대한 고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들을 모욕하고 또 신들의 존재를 의심한 것에 대한 폴리스의 보복과 실제로 그 신들의 윤리적, 신학적 용렬성 사이에 존재하는 우스꽝스러운 불균형은 아테네 이외에 일찍이 어디에서도 존재한 적이 없다. 이런 종류의 단죄 방식이 만일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환상(phantasia)’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면 그것은 아테네의 재판관들이 하나도 나무랄 데 없는 판결만을 내리고 있었다거나 또 당시의 유력자들이 광분상태에서 제멋대로 내린 판단이 거의 없었다고 가정할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명심해야 할 것은 소송의 수단으로서 시민에 대한 잔인한 고문이 아테네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포키온(phokion)편 35) 이 고문은 노예를 고문하던 주인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 유사물이었으나 사실 그것은 페리클레스 이래 아테네 그 자체가 견지하고 있었던 이념 ? 즉 아테네 제국주의와 민주정의 결합 ? 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했다. 아테네는 일단 자신의 국가주의적 이해와 관련된 사안의 경우 그것을 혐의지우거나 적발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라도 다 승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5.?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최초의 민주주의 그 의의와 한계.?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3)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3)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3. 아테네 민중과 민회 그 빛과 그늘

30인 참주의 지배는 원칙에 있어서나 경과에 있어 폭압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들이 실각한 뒤 아테네인들의 생활 방식은 금방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참주들이 살아남아 이 광경을 보았다면 뤼시아스가 그랬듯이 누구나 다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생활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것이 다시 되살아나다니!”. 하기는 아테네 민중들의 부유층에 대한 탈취에 가까울 정도의 공적 기부의 강요는 민주정 회복 이후에도 크게 제제되는 일이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아테네는 더 이상 기부를 강요할 대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가난해져 판아테나이아(Panath?naia) 축제마저도 아주 간소하게 치룰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나라경제는 거류외인들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었다. 시민들이 이러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 이유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민주정 회복 이후 아테네 민중들은 노동을 통한 견실한 삶보다는 오랫동안 민회나 소송사건에 매달려 생계를 영위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마치 게으른 사람들이 먹는 일만 생각하고 있듯이 완전히 상궤를 벗어난 터무니없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클레온(Kleon)이 배심원의 급여를 3배로 올린 이래, 한층 더 열심히 민중 최고재판소(heliaia) 일에 전념하면서 재물을 손에 넣는 일이라면 위증이나 술수는 물론 세금을 부정한 방식으로 회피하거나 타인에게 전가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귀뚜라미는 나뭇가지 위에서 1, 2개월 노래할 뿐이지만, 아테네인들은 일생 동안 소송으로 노래하며 먹고 살고 있었다.

 

아고라 유적지 복원 가상도. 아크로폴리스 오른쪽 밑에 평의회 건물과 평의회 행정청 톨로스 그리고 선거로 뽑힌 배심원으로 구성된 민중 최고재판소가 나란히 위치해있다.

 

아크로폴리스 오른쪽 밑에 평의회 건물과 평의회 행정청 톨로스 그리고 선거로 뽑힌 배심원으로 구성된 민중 최고재판소가 나란히 위치해있다.이러한 정황은 여러 종류의 고대 자료를 인용할 것도 없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 등장하는 필로클레온의 말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난다.([벌(蜂)] 548f) 이 남자는 자신이 배심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얼마나 좋은 지를 아주 신이 나서 떠벌리고 있다. 이 작품의 정경들 중 어떤 장면을 취해도 모두 현실 그대로의 행태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아테네에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 사람들은 피고인이나 그 가족들이 자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곤경에 빠져 신음하는 이러한 사람들이 재판정에서 그에게 아첨하며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잘된 연극을 흥겹게 구경하듯,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자신의 위세와 무분별한 방종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 최고재판소에서는 자신이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고 해서 반드시 승소하는 것도 아니었다. 종종 배심원들의 분노라든지 동정심이 판정의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하였고 혹은 피고인 자신이나 어떤 당파에 속한 자들의 웅변조 연설에 의해 판정이 뒤집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변호 연설의 초안을 작성해 주는 관습 덕분이었다. 특히, 경탄할만한 천재성을 가지고 연설 의뢰인과 마치 한 몸 한 마음이나 된 듯 연설문을 써주고 큰돈을 벌었던 뤼시아스는 이러한 재판의 모든 과정이 얼마나 사람들의 정신을 소진시키고 피폐하게 만드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앗티카의 정의심은 고갈되어 갔고, 진리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으며 다만 수사술(rh?t?rik?)을 통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그럴듯하게 설득할 것인가(to pithanon)가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전부였다. 이런 까닭에 어떤 피고인 가족들은 비탄에 빠진 나머지 영향력 있는 당파와 잘 통하는 사람을 내세워 재판관을 찾아가서 선처를 청원하기도 했다. 크세노폰(Xenophon)이 전하는 헤르모게네스의 말은 간결하지만 당시의 정황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테네의 재판관들은 연설에 의해 설복되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수없이 처형했고 또 많은 수의 범죄자들을 무죄로 판결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 회상록] VI, 8,5) 사실 고전기 내내 어쩌면 최고의 인재는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의 뛰어난 사람들은 변론술의 수련을 통해 법정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길러졌다. 실제 이 기술은 시칠리아에서는 소송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고전기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끊임없이 발견되는 이 법정 변론술의 번성과 활약상에 비하면, 사실 정치적 변론술은 오히려 몇 가지 측면에서만 현저한 효과를 발휘했을 뿐이다.

민회가 열리던 아테네 프뉙스 언덕 연설단

아테네의 경우 정치적 변론술의 무대는 그 유명한 민회(ekkl?sia)였다. 민회는 모든 민주정에서 보여지듯이 원천적으로 50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Boul?)가 가지고 있었던 직무를 빼앗을 정도로 고도의 통치기관으로서 자리 잡았다. 이 민회는 때로는 현실 국면에 대한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했고 또 민중을 선동하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민회는 더 이상 기존의 다른 협의기구와 제대로 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데모스테네스(Demosthnes)는 곧바로 민회를 설득해 필립포스 2세와 단교하고 테바이와 연합하여 무모하게도 카이로네이아 전쟁(기원전 338년)을 일으켜 아테네를 멸망의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다. 민회에 대한 판단은 넓은 의미에서는 동시에 아테네 역사에 대한 판단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의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는 유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민회는 30인 참주정이 실각한 후 민주정이 부활하고 나서도, 비록 끝없이 변덕스럽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가 조직으로서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해온 기관이었다. 여러 폴리스들에서 아주 피비린내 나는 갈등과 위기가 반복해서 일어났지만, 아테네는 어떤 사태를 맞이했건 간에 이 ‘민회를 통한 협의와 결의’라고 하는 길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아테네 역사에 대한 평균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그리스 정신의 말기 상황을 파우사니아스(Pausnias)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민주정이 아테네인 이외의 사람들을 번영시켰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년)

 

아테네 사람들은 타고난 지적 능력에 있어서 다른 그리스 사람들보다 우수하고, 게다가 현존하는 법률에 불복종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스 안내기] IV, 35,3) 이 단합된 시민은 마치 하나의 생물과도 같아서 조형예술의 손에 의해 빚어지듯 이상적인 형태로까지 성장했다 물론 희극 작가들은 작품 속에서 이 시민을 정중하게 다루지도 않았고, 플라톤은 시민을 “크고 힘센 짐승(thremmatos megalou kai ischyrou)”으로 여겨 그 시민들의 기분과 욕망을 숙지하는 것이 국가를 다스리는 지혜로 간주하였다.([국가] 493b)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옛날부터 알려져 있는 아테네 시민들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욱하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또 측은해하며 마음을 확 바꾸기도 한다. 시민은 차분히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리하게 따지는 쪽을 좋아한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겸손한 사람들을 후원하기도 하고 또 유머는 물론 웃음을 동반하는 연설도 좋아한다. 자신을 칭찬해 주는 사람들을 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조소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화를 내지도 않는다. 시민은 그 통치자에게는 무서운 존재이지만,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조차 아량이 넓다.”(플루타르코스 [정치론 모음] ‘계율들’(rei p. ger. praecepta) 3)

 

참주 히파르코스를 살해하는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

 

집회에서 결정에 임하는 아테네인들의 모습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집회에서 무엇보다도 아주 엄숙하게 처신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체 사안들에 관한 최고의 처분권과, 무엇이든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을 경우 그것을 이룰 권리를 가지는 우리 아테네 시민!“ 이라는 표현 또한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평의회의 건물에는 평의회 위원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제우스와 아테네의 신전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들러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정의 안녕을 위해 기원을 드리면서 정성을 다해 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신전에서의 맹세가 상습화되어 있었던 대중들도 그 효과 또한 상투적인 것 이상으로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아테네인이라면 누구라도 디오뉘소스 축제를 앞두고는 정례적으로 아주 진지하게 민주정의 적(敵)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맹세(psephisma: 인민결의)를 올리곤 했다.(안도키데스(Andokides) [비의에 관하여(de myst.)] 97) 이를테면 민주정을 반대하는 자는 처단하고야 말겠다는 것, 특히 비민주정 체제하에서 높은 지위를 누린 자들, 참주와 그 부역자들 모두는 반드시 처단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처단한 자들은 무죄라는 것, 척결당한 자들의 재산을 처분하고 그 재산의 반을 그들을 처단한 자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사랑하는 상대를 탐한 참주를 함께 처단한 커플)의 자손처럼, 척결을 실천한 사람의 자손들에게는 급여를 주어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때마다 성실하게 신들에게 이러한 맹세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늘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해주었고, 거짓맹세를 일삼는 자들에게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파멸이 닥치길 기원하였다. 그리고 폴리스는 시민 모두가 증오하고 폴리스를 위해 척결해야 마땅한 자를 누가 처단했을 경우, 그가 어떤 사람, 어떤 신분이었던 간에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 격정넘치는 칭찬과 함께 화관을 하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을 위해 거짓으로 작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 유명한 헤르메스상 훼손사건(기원전 415년) 때에 디오클레이데스(Diokleides)는 이 사건은 시민들의 파멸을 도모하기 위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즉각 주장하고 알키비아데스를 범인으로 지목하였고 그 결과 알키비아데스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출정 중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를 구한 자로서 화관을 하사받고 마차에 태워져 회당으로 가서 향응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그것은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다.(안도키데스 [비의에 관하여] 36.45.65f)

그런데 아테네가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면서 여러 가지 목적상 민회를 통한 방법 외에 다양한 다른 방법을 취했다면,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일을 분명 보다 용이하게 달성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 민회에서 대외 정책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선전해야 했던 것은 대단히 희극적이다. 데모스테네스는 민회에서 당시의 정치적 관심사와 관련하여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국가에 유익한 것은 테바이 사람들과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강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테바이 사람들이 포키스(Phokis) 사람들을, 그리고 또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다시 포키스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이 최강자로서 안심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크라테스 논박(adv. Aristokratem)] 654) 게다가 그는 무심코 입을 잘못 놀려 아테네인은 그 어떤 다른 사람들의 죽음보다 오히려 필립포스 2세(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싶다고까지 말해 마케도니아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정체는 어쨌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생활방식이고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어 정열적인 전체 의지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집단의 목적 또한 생겨났고 또 전체의지를 통해 그 목적이 강하게 의식되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만 해도 민주정은 상당히 오래 전 부터 깊이 뿌리를 내려왔던 정치체제였으므로 현실에서 생동하는 모든 기억들은 이미 이 민주정체하의 인간이나 사물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토록 민주정은 실천적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후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압박에도 존속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쁜 경험들이 민주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민주정을 악용한 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가상도(기원전 431-404년)그런데 아테네 사람들의 소질, 의지 그리고 운명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임에도 후세사람들은 끊임없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싶은 유혹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아테네라는 국가는 지나치게 격정에 휩쓸려 국가에 극히 유해한 어리석은 행동과 폭거를 결의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유능하고도 자질이 훌륭한 사람들을 급속히 소진해버렸고 게다가 그들을 협박하여 외국으로 추방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아테네에 있다면, 그것은 국가로서의 아테네가 아니라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적 잠재력(Kulturpotenz)을 갖춘, 정신의 원천(Quelle des Geistes)으로서의 아테네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인들이 보여주었던 민회에서의 열정과 전장에서의 헌신적인 용감성은 모두 맥동치는 국가성원으로서의 움직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 기간 동안 시민대중들 또한 의연하게 절제와 지혜를 발휘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재앙으로 번졌을지도 모를 수많은 난관들이 고결한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미연에 저지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원전 406년 참혹했던 아르기누사이(Arginusai)의 해전에서 돌아온 장군들을 재판하면서 그들의 처형이 부당함을 외친 소크라테스 등 소수의 사람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광기에 찬 군중들은 이렇게 외쳤다. “시민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음해, 아테네는 마침내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에게 완패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최종적 패배자로서 치욕스런 예속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30인 참주정 실각 후 민주정이 회복한 뒤에도 이전에 그랬듯이 하루가 멀다않고 민회 결의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방식으로, 5백명으로 구성된 평의회의 예비 협의마저 무시하고 모든 결정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이끌고 갔다. 인민(d?mos)이 결의한다는 것은 실로 인간임을 표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닭이나 다른 동물이 인간과 다른 점은 그것들은 민회에서 결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아리스토파네스 [구름] 1428)이었다. 그러나 영속적인 가치와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순간이나 그 때의 기분에 따라 이루어지는 이러한 처사를 감내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잊고 있었다.

이제 이 민주정이라는 공적인 제도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실제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고 어떤 영향을 받고 있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야만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그리고 30인 참주정이 실각하기 전까지는 과두정주의자들이 민심을 부추겨 악의적인 일을 저지르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민주정으로 회복이 된 후에는 거꾸로 오로지 민주정 지지자들만이 민회 및 민중 최고재판소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 대표적인 두 부류가 변론술로 무장한 선동정치가(d?mag?g?s)들과 중상모략가(syk?phant?s)들이다. 물론 이 양자를 하나의 인물이 겸비하기도 했다. 그들은 민회건 법정에서건 그들이 원하는 결의를 얻어내기 위해 온갖 수사술을 다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을 선동 또는 매수하여 박수를 치거나 야유를 날리거나 위증을 하게 하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행위도 서슴치않았다. (다음에 계속)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2)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2)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2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2. 30인 참주정 전후의 아테네의 정치·사회상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는 재정을 있는 대로 다 쏟아 부었지만, 단지 자금만이 아니라 유능하고 헌신적인 그리고 용감한 사람들까지 다 소진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개개의 사람들 모두 자신들의 정열을 아낌없이 내던져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열을 다해 싸운 다음, 아테네는 자신들의 지배자로 선동 정치가(d?mag?gos)들을 선출하고 만다. 예를 들어 클레온(Kleon 기원전 ? -420년)이 그렇다. 클레온은 법정 수당을 세배로까지 증액하여 궁핍한 민중이 그것으로 생활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도 극심한 채무로부터 벗어낫고 나아가 50탈란톤(talanton)을 축재하기까지 했다. 아테네는 뛰어난 심미안을 가졌지만 이제 이런 자들의 벼락출세를 분별해내는 것조차 힘들게 돼 버렸다. 이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니키아스 평화조약(기원전 421년)으로 일시 멎었던 시절, 책략과 사리(私利)에 능란했던 시대의 풍운아 알키비아데스에게 아테네가 매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테네인 민족 내부에 잠복해있던 열망이 섬광처럼 떠오른 알키비아데스와 그가 주장한 시칠리아 원정(기원전 417년)을 통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긴 하지만, 아테네인들의 그러한 태도는 병리학상(pathologisch) 세계사 전체에서 눈여겨볼 만한 구경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 후 재개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끝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기원전 404년 크리티아스(Kritias)를 비롯한 30인의 참주들의 가혹한 공포정치에 직면하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개개의 여러 폴리스들의 움직임을 보면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기존의 권세가들(dynatoi) 즉 귀족내지는 부자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아테네에서도 그 최종적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기원전 528-462?) 시대 이래 모든 당파에는 물론 모든 우두머리들 주변에 일종의 정치 클럽 즉 헤타이레이아(hetaireia)가 결성되어 있었다. 페리클레스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시대에는 이러한 클럽은 소멸한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 그것들은 다시 소생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불사하였다. 이윽고 이른바 과두정(oligarchia)파의 형태로 나타난 그러한 결사에는 무엇보다도 빈곤과 착취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었던 사람들과, 권세를 상실하여 지금은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 일부는 이전에 귀족이었던 자들이었고 일부는 그저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조금은 더 태생적으로 능력이나 소질이 있었던 사람들은 원초적인 혈통에 대한 믿음은 물론 국가에 다시 중용 되고 싶어 하는 열망에 불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에 함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소피스트의 사상은 고작해야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들에 어떤 형식적 명분을 제공한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한 명의 소피스트도 스파르타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던 스파르타 권세가들의 태도는, 그들에 대해 극히 악의적인 아테네 시민들 이상으로 박대했다.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민중들의 친구인 양 처신했던 것도, 자신들의 신상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고 나아가 민중들로 하여금 과격한 제안을 하게 하여 민주정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반민주정 클럽의 전체 연합은 이미 기원전 411년에 몹시 난폭한 수단을 사용해서, 본질적 성격상 과두정적인 체제를 실시하는 것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것은 고작 수개월밖에 존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후 몇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아테네의 과두정 지지자들이 완전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극단적인 결의와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클레이스테네스 이래 민주정은 아테네에서 자명한 것인 양 받아들여져 모든 것이 그의 구상대로 개혁되고 있었을 때조차, 그것의 반대자들 역시 그리스인이었다고 하는 것, 즉 반대자들도 이와 같이 아무런 거침없이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민주정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테네를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은 그들 국외 이주를 바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정치 망명자에 대해 그랬던 것과도 같은 공분(公憤)을 안고 있었다. 민주정은 이 체제가 자기 쪽 당파의 유능한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당파의 유능한 사람들까지 절대적인 내적 자주성(absoluten inneren Unabh?ngigkeit)을 갖도록 길러냈다는 것을 아테네를 배반한 알키비아데스를 보고서야 비로소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사실 주의해서 보면, 아주 많은 수의 과두정 지지자들이 뤼산드로스에 대한 최후의 저항을 진압하는데 손을 빌려 줌으로써 전력을 다해 자신들의 조국인 아테네가 패배하는 것을 앞당기는데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05년) 그것은 그 저항군들이 이기면 결국 시민(d?mos)이 이기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과두정 지지자들은 아테네를 비산업적이고, 동산(動産)에 의존하지 않는, 바다에 등을 돌린 사회로 만들려는 과제에 매우 정통해 있었다. 그들은 아테네 성곽 문을 연 후, 뤼산드로스의 후견 하에 정권을 빼앗아 이른바 30명 참주들이 주도하는 공포정치를 시작했다.(기원전 404년) 30인 참주들은 1500명을 처형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재산 이동도 감행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자들 아래에서 금방 기강이 세워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미 앞 시대에서 각자의 성질들을 서로가 다 너무나 정통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이제 와서 완전하게 하나가 된 듯 행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테라메네스(Th?ramen?s)는 한걸음 양보하여 그 타개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그는 말 그대로 완전한 의미에서 막무가내인 자를(den Unbedingten) 만나게 된다. 그 자가 곧 그를 실각시킨 후 살해까지 한 크리티아스이다.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연설을 통해 우리는 다시한번 그들이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지배권력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목적을 바라는 사람은 수단 또한 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크리티아스에게 이 수단이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오싹하리만큼 분명한 것이었다. 언젠가 참주들 휘하의 중장보병들에게 행한 그의 연설 즉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을 바라고 또 같은 것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은 그리스의 모든 당파가 새겨들어야 할 모토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정치는 결국 트라쉬불로스(Thrasyboulos 기원전 440-388년) 등 민주정파에 의해 얼마가지 않아 타도되고 만다.(기원전 403년) 과두정이 무너지고 민주정이 부활한 후에도, 아테네에는 분명 여전히 과두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두정파로서 대두될 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주정 이후 시민들의 공격은 본질상 그러한 세력으로 여겨진 부유층들에게 향해졌던 것이다.

아테네 국가에 있어서의 외관상의 생활은, 이 위기 이후에도 대부분의 측면에서 이전과 같은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생활상을 관찰한다한들 그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큰 차이점은 오히려 이 시기의 전과 나중에 위치시킬 수 있는 아테네 사람들의 내면적 성질과 외면적 위상에 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완전하게 패배했다고 하는 것은, 이 전쟁이 초래한 시민들 간의 커다란 균열을 막는데 동원된 기본 방책들이 대단히 조잡한 것이었던 것에 비하면 아직 사소한 재앙인 것처럼 생각된다. 말하자면 전적인 헤게모니를 가지고 지배권을 행사하던 이전의 시민들에게 딱 맞았던 왕자의 외투를, 살이 빠져 말라깽이가 된 지금의 시민들도 여전히 헐렁한 채로 걸쳐 입고 있었던 것이다. 패전 후 동맹국의 소송 사건들에 대한 재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돼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재판을 하던 습관이 붙어 있었던 데다 패배자의 일상으로서 의심 또한 몹시 많아져서 시민들은 지금도 그 때 못지않게 아주 많은 아테네인들을 재판에 붙였다. 그 최초의 희생자 중 한 명이 소크라테스(S?krat?s 기원전 469-399년)였던 것이다.

민주정 하에서의 앗티카 지방의 개개의 시설이나 관공서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생략해도 괜찮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가로움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임시 직무이든 영속적인 직무이든, 직원이든 위원회 위원이든 일을 맡기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이나 포이니케 사람들이 이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잘 그리고 정확하게 직무를 수행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이 모든 결정을 한도 없이 독점함에 따라 업무가 엄청나게 늘어나 혼란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관공서의 끊임없는 교체 또는 추첨에 의해 근무부서를 임명받은 직원들 이외에, 늘 상임으로 근무하는 한명의 숙련된 직원, 즉 서기(grammateus, hypogrammateus)가 실무상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서기는 신분상 국유 노예에 지나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지난 날 베네치아에서조차 이 정도로까지 자신의 서기에 의존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물론 아테네인은 잘못 시작한 일일지라도 나중에 수정을 잘 할 수 있도록 많은 훈련을 쌓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일과 관련해서 하나의 금지령을 공표했다. 즉, 앞으로는 동일한 개인이 2년간 계속해서 동일한 관공서 내에 서기로 근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에는 어떤 법률이 실제로 어떻게 실행에 옮겨졌는지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것은 특정 감독관이 운영하지 않는 업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고, 하물며 음모와 책략을 일삼는 자들에 의해서 업무 일체가 지연되는 등, 업무 전반에 걸쳐 믿기 어려울 정도의 방만함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법률에 대해서는 그 효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솔론의 법률을 비롯해 그 이후에 공포된 엄청난 분량의 법률 편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5세기경 고대 그리스 화폐. 1탈란톤은 6000 드라크마. 당시 일꾼의 하루 품삯이 1드라크마 정도였다고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테네에는 찬탄을 자아내며 인용되고 있는 현명한 고래의 옛법률(nomos: 관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법률 가운데 다름 아닌 다음의 두 개의 법률들은 아테네의 역사에서 종종 위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어떠한 법률도 만약 그것이 동시에 모든 아테네인에 대해서 유효하지 않은 경우 한 개인에 대해서 공포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지 결의로만 표명된 것은 평의회의 것이건 민회의 것이건 하나의 법률보다 우위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률들은 제정 순으로 차례차례 신전 기둥 가운데에 혹은 돌기둥에 새겨지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법률에 대해 종종 그것들이 새겨진 소재를 핑계로 별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페이스테타이로스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새」(Ornithes :기원전 414년) 가운데에서(1054행) 이러한 돌기둥에다 매우 괘씸한 일을 저질렀다고 하여 근대의 어떤 편집자는, “하층민은 자주 이런 짓을 했다“라고 덧붙이고 있지만, 이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페이스테타이로스는 훌륭한 아테네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법률은 신들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도 계속 입버릇처럼 말해지고 있었다. 확실히 기원적으로는 법규 내지 법률은 종교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결부되어 있었다. 게다가 개개의 법 원리도 분명 태고 시대로부터 유래하고 있었다. 또한 법률은 신적인 기원을 가지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불변의 것이라고 여겨지기 조차 했다. 안티폰(Antiphon)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법률은 극히 오래 되었고, 동일한 일에 대해서는 항상 동일한 법률이 있다. 이것이 탁월한 상태의 법률이 지니고 있는 주요 표징이다. 왜냐하면 보통 시간과 경험(Zeit und Erfahrung)은 무엇이 부적당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관습의 형태로 전해진 법률들은 폐지되지 않은 채 재래의 법률에 새로운 법률들이 하나 둘 덧붙여지면서 이 후 아테네 법률들은 서로 모순을 안은 채로 방치되어 왔다. 그리하여 법정에서는 완전히 모순되는 법률들이 판을 쳐 마침내 그 폐해가 심해져 결국 성문법적인 법전의 편찬이 아무래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이 매우 중요한 일이 위원회를 차례차례로 돌다가 결국 그 숙련된 실무자 한 사람 즉 노예 출신이었던 니코마코스(Nikomachos)에게 맡겨졌다.(기원전 411년). 이 남자는 이 일을 그저 한해두해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효한 법률까지 삭제하여 법률을 허위로 날조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은 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책임을 추궁도 하기도 전에 아에고스 포타모이(Aegos Potamoi) 해전(기원전 405년 스파르타에게 대패했다)과 함께 아테네에 불운이 닥쳤다. 그리하여 해전이 끝난 후 폴리스를 재건하면서 다시 이전보다도 더 큰 합의 기관과 위원회가 법전 편찬을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니코마코스의 강력한 보호자들에 의해서 다시 또 모든 일이 근본적으로 그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는 또다시 4년간 이 사안을 진척시키지 않은 채 만지작거리다, 그의 전문 분야인 제사 안건으로 새로운 사치스런 희생 제물에 관한 법률을 생각해 내서 그것으로 인기를 얻으려 했다. 그 결과 나중에는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반대로 니코마코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쓰지 않을까 크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발자는 다음과 같이 고발장을 마무리 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절도를 기획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 소송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 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누구도 적이 될 수 없는 매우 대담한 자들이 될 것이다.” 물론 이 판결은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든 지금까지 말해 온 니코마코스의 사례만 가지고도 아테네에서 법률적 사안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플라톤이 왜 법률편찬자의 양성을 아카데메이아의 주요 교육목표로 삼았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런 사정에 처해 있었던 만큼 민주정 아테네에서는 특정의 시민, 즉 부유층 혹은 부유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요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개인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가지면서, 단단하게 결성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적 폴리스의 이념에 대해서는 결코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을 비난한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또 그리스인의 본성에 대해서 너무 심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될 것이다. 적어도 이 인간 종족은 야만 상태로부터 벗어나자마자 국가 기구와 공적 생활 외에 한층 더 특별한 생존방식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가정생활 그리고 특정 사상이나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영역을 구축해왔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지배자 계층에 속하는 인간들만을 정치적인 존재로 위상지우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스파르타 이외의 다른 곳, 특히 아테네 사람들은 반대로 폴리스가 개인들을 고무하고 동시에 개성적인 것의 발전을 아주 강렬하게 촉구하며, 사유재산의 획득과 그에 따라 야기된 사고방식을 모든 방법을 통해 촉진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실로 다양한 종류의 공적 기부제(leitourgia : 부유층이 자비로 일반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아테네의 공동체적 성격을 드러내는 독특한 제도)를 통해 폴리스로부터 주어진 부의 은혜에 적극 보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까지는 이 공적 기부제는 한편으로는 폴리스에 대한 실제적인 헌신의 문제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씀씀이가 크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야심의 문제였다. 키몬(Kimon)은 자신의 부를 모든 방법을 동원해 모두 내놓았다. 알키비아데스의 아버지인 클레이니아스(Kleinias)는 아르테미시온 해전 당시 자신의 배에 자비를 들여 200명의 병사를 탑승시켜 싸웠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 흐르게 되면서 부는 문자 그대로 먹이감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많은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아테네 부유층 사이에서도 바야흐로 공적 기부제가 부의 수탈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부를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폴리스를 떠날 수는 없었고 게다가 설사 도망간다고 해도 외지에서도 같은 위험, 아니 더 큰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 기부제가 단지 국가의 요구뿐이었다고 하면 고대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특별하게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는 문제였다. 사실 아주 고액 수준의 세금을 제외하면 국가가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공적 기부제 내지 봉사는 트리에라르키아(trierarchia) 뿐이었다.(이것은 시대에 따라 매우 차이가 나는 전투함정(3단노 군선 tri?r?s)의 장비 장착에 관한 의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이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적 기부제로서는 전시에 비교적 궁핍한 시민들의 무장을 도와준다거나 그들의 딸들의 결혼 비용을 부담한다거나, 매장비용 등을 부담하는 자선 행위 또는 완전히 민중들의 오락을 위해 기부하는 행위 같은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특히 코레기아(choregia : 합창대 비용부담), 즉 연극 합창대 및 제사와 축제를 위한 서정시 합창대의 무용가나 피리 부는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부담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른바 김나시아르키아(gymnasirchia : 체육행사부담)와 그러한 것들 중에서 가장 비용이 드는 종류인 람파다르키아(Lampadarchia : 일종의 경주행사 부담)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경쟁을 수반하는 경기(ag?n)를 위해서도 돈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신전에서 제전이 벌어질 때 사절을 파견하는 비용도 부담하였다. 마지막으로 부족(phyle) 혹은 그것과 관련된 지역(d?mos)의 여러 동년배들을 위한 향응도 떠맡았다. 이 경우 누가 부담할지는 자발성이나 추첨에 의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10개 부족이 그것을 떠맡을 동료 시민을 선출하여 그 사람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매년 반복되는 공적 기부제는 물론 가끔 임시로 열리는 봉사활동을 떠맡았던 것이다. 분명 이런 관습을 중지시키는 것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계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일부 부유층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이 봉 취급당하는 것을 거절했을 때 자기 신상에 불어 닥칠 증오를 지레 두려워해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니키아스(Nikias)가 시칠리아 원정 계획에 반대했을 때, 그는 결국 찬동자를 얻지 못했고 찬동자 중에는 유력한 사람들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동조할 경우 자신들이 공적 기부제와 3단노 군선의 장착비용을 면하려는 것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자신들의 신념에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소한 3탈란톤의 자산을 가지는 사람들만이 이것을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또 자산은 연평균 12퍼센트의 이자를 낳았기 때문에 1탈란톤의 자산이 있으면 어떻게든 생활은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합창대 비용 부담은 부유한 남자 한 명에게 매년 1200 드라크마 정도를 부담지우는 정도여서 대체로 15탈란톤의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로 여겨졌다.

이렇게 해 보면, 이러한 부담은 몇 가지가 크게 중첩되는 일이 없으면 곧바로 재산상의 파탄을 초래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 부당한 방식으로 그것을 부담지울 경우 그 사람은 파탄을 면치 못하였다. 이와 함께 이러한 부담을 떠맡는 것은 명예로운 것이라는 전래의 생각 또한 아주 오랜 동안 계속 되었고, 이런 일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 또한 적어도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저 쓸데없는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능력 이상으로 자신의 씀씀이가 좋은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같이) 합창대 비용을 부담할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플라톤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부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을 면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유한 친구로부터 그것을 위한 자금을 조달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복하여 합창대 비용 부담을 떠맡은 사람은 상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세발달린 솥(tripodon)을 걸어두기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이건 간에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짜고짜로 희생을 지불하게 되는 처사들 중에는 고역스런 일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당사자들이 자기의 사적인 자금으로 이러한 공적 기부제를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돈은 결국 스스로의 사적인 환락 생활을 위해서 낭비 되어 버렸을 텐데 그것이 대부분 민중 전체의 고상한 예술적 향유를 위해 지출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아테네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명예로운 것이라고. 그러나 강제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일로부터 존엄성을 빼앗아 버렸다. 아테네 국가는 개개의 부유층이나 생업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국가가 그 사람에게 부여한(어쨌든 극히 제약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안전과 교환한다는 명분으로 마음대로 과세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국가는 매우 변덕스럽고 또 탐욕스런 시민들의 수중에 떨어져 버려서, 시민은 이윽고 보다 높은 액수의 세금을 사정없이 요구했고, 그렇게 거둬들인 돈을 민중에게 직접 분배하는 것을 매우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오락을 위한 낭비에 있어서는 어찌 되었든 국가가 선두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에우불로스(Euboulos) 시대에는(대체로 기원전 353년부터 기원전 339년까지) 축제비용이 모든 예산의 주요 항목이 되어, 누군가 이것을 전쟁 목적으로 전용할 것을 제안하는 경우, 그것을 처음 입에 담은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위협함으로써 그 항목 자체의 보존이 담보되고 있었다. 아테네에 있어서 조차 이 경우, 대중의 관심사는 이러한 고상한 예술 형식을 즐기는데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일정한 정도 호사를 누리는 것에 있었을 것이다.

“불쌍한 부자들”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들의 재난을 상세하게 알려면, 크리토불로스(Kritobulos)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짓궂은 동정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토불로스가 감내하고 있는 일들을 모두 열거한 후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공적 기부가 충분히 행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만으로도, 아테네의 사람들은 마치 네가 자기들의 재산을 도둑질이라도 한 것인 양 너를 처벌하려 들 거야.” 크세노폰의 「향연」(symposion : 제4권 29절 이하)에 나오는 카르미데스의 말은 오히려 가난해졌기 때문에 자유롭고 행복하게 된 한 남자의 실로 유쾌한 유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전체의 극히 중대한 측면이 법정 변론가들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재판의 배후에는 모든 재산을 몰수해버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으므로 그러한 재산은 일부는 국가에, 일부는 고발자등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것으로써 그 돈은 이미 일체의 권리와는 관계없이 바람직한 공적 수입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 알키비아데스(Alkibiad?s 기원전 450?-404): 그는 정치·군사적 재능과 준수한 외모를 타고난데다가 페리클레스의 조카로서 젊은 나이에 벼락출세를 한 후, 서방으로의 세력확장을 바라는 민중의 열망에 편승하여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하지만 헤르메스상(像)을 파괴한 용의자로 소환령이 내려지자 아테네를 배반하고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비와의 스캔들로 다시 페르시아로 망명한 후 아테네의 과두정파에 빌붙었다가 뜻을 못 이루자, 다시 민주정에 충실한 사모스 해군과 손을 잡고 스파르타군을 격파하여 기원전 408년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아테네로 돌아온다. 정조 없이 야심과 사리에 가득 찼던 그의 삶은 결국 스파르타가 보낸 자객의 손에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소크라테스와의 각별한 인연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