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6- 추론의 자기 지양[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6- 추론의 자기 지양

1)

필연성(관계) 추론은 정언 추론에서 가언 추론을 거쳐 선언 추론에 이른다. 이 선언 추론이 추론의 마지막 형식이다. 필연성 추론은 주어와 술어를 매개하는 것이 유 즉 실체다. 유는 한편으로 단순한 규정성인 유적 본질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가 실현된 개별적 종의 전체이다. 유적 본질이 특수성에 해당한다면, 종의 전체는 곧 일반성을 의미한다. 유 자체는 구체적인 개별성에 해당한다.

정언 추론은 현존 추론의 일격[E-B-A]을 따른다. 그 매개는 특수자[유적 본질]로서 유인 동시에 유 자체이다. 정언 추론에서는 유적 본질이 대전제에 언표된다. 소전제에서 유가 실현된 우연한 개별자가 제시된다. 여기서 아직 일반자로서 유는 우연한 개별자 속에 감추어져 있다.

가언 추론은 이격[B-E-A]을 따른다. 가언 추론의 매개는 일반자로[A와 B의 관계]서 유와 개별자의 존재[A라는 존재자)다. 가언 추론에서는 대전제에서 개별자의 조건적 관계를 통해 제시된다. 이 조건 관계는 실체적 연관을 의미한다. 소전제는 개별자의 존재를 나타낸다.

가언 추론에서는 우연한 개별자 사이의 관계를 통해 개별자 전체가 제시되지만, 여기서 개별자의 관계 즉 실체적 연관은 개별자에 외면적이어서 이 개별자는 직접적이고 우연적이므로 그 전체는 진정한 전체로서 유를 이루지 못한다.

2)

이제 정언 추론이나 가언 추론과 비교해 선언 추론의 형식을 살펴보자. 헤겔은 선언 추론이 삼격의 도식[E-A-B}을 지닌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선언 추론의 형식으로 매개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동시에 제시한다. 결론은 그 반대로 나온다. 매개가 긍정이면 결론은 부정이고, 매개가 부정이면 결론은 긍정이다.

긍정적 형식:

A는 B 또는 C이다. A는 B이다. 그러므로 A는 C가 아니다.

부정적 형식:

A는 B 또는 C이다. A는 B가 아니다. 그러므로 A는 C이다.

가언 추론과 선언 추론에서 바뀐 것은 대전제에서 가언 판단이 선언 판단으로 바뀐 것만은 아니다. 사실 형식 논리학적으로 가언 판단과 선언 판단은 서로 교환될 수 있으니, 이런 대전제의 바뀜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선언 추론에서 이 선택지가 ‘배타적인 통일’[entweder oder, negative Einheit, gegenseitig]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B와 C는 서로 배타적이며 그런 한에서 유의 전체를 이룬다. B와 C가 배타적인 통일을 이룬다는 사실은 소전제와 결론이 서로 부정적이라는 데서 알 수 있다.

형식적으로 보아서 대전제의 선언 판단은 반드시 배타적인 통일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언 추론은 형식상 이미 소전제와 결론을 통해 배타적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배타적 통일성이 아닌 선언 판단이 가능하지만, 배타적 통일이 없는 한 선언 추론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선언 판단이나 선언 추론을 이런 배타적인 통일을 지닌 것에 한정한다. 사실 배타적 통일성이 없는 선언 판단이나 선언 추론도 가능하다. 일반 논리학에서 선언은 이런 비배타적 관계를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헤겔이 선언 추론을 배타적인 것에 한정한다. 그 이유는 배타적 통일을 지닌 선언 추론만이 다른 형식과 비교해서 새로운 발전된 인식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3)

헤겔에서 유는 항상 배타적으로 분화한다. 배타적 관계는 타자를 통해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며, 곧 부정의 부정을 통한 관계다. 만일 선택지가 배타적인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의 전체는 유를 이루지 못한다. 그런 전체는 서로 무차별한 개별자의 집합일 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유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인종의 구별은 유를 이루지 못한다.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은 파충류, 포유류와 유인원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흔히 동물 유의 종으로 여겨지지만, 이는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헤겔에서 이런 구별은 유가 개념적으로 분화된 종이 아니다. 오히려 암컷과 수컷의 구별은 생물체의 유를 이룬다. 유는 암수로 구별된다. 암수만이 생물체 유의 종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가언 추론에서는 매개는 세 가지 규정을 동시에 지닌다. 대전제에서 주어는 A는 개별자의 배타적 통일(B or C)로서 유 즉 일반성을 의미한다. 소전제에서 A는 특수성으로서 유 즉 특수화된 종(B)이다. 결론에서 A는 특수성의 부정(-C)이니, 곧 개별성을 의미한다. (부정적 형식에서는 소전제가 개별성이고 결론이 특수성으로 될 것이다.)

이제 매개가 모든 개념 규정성을 총체이므로 이 매개는 주어와 술어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이미 정언 추론에서 내용상 동일성이 출현했다. 그러나 이제 선언 추론에 이르면 내용상 동일성은 형식상의 동일성으로까지 발전했다.

“선언 추론 안에 개념의 총체로서 설정된 중심은 그 자체로 두 극단을 완전한 규정성 속에서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극단은 중심과는 구별된 가운데 다만 정립된 것으로 존재할 뿐이니 중심에 대립하는 더 이상 본래적인 규정성이 그런 정립된 극단에 속하지 않는다.”(주관 논리학, GW12, 124)

4)

추론이 여전히 주관성에 머물렀던 것은 추론의 양극단을 매개하는 매개 항이 양극단에 대해 외면적인 추상적 규정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선언 추론에 이르러 양극단과 매개 항은 모두 내용적으로 유를 의미하며, 동시에 형식적으로도 매개는 주어와 술어의 규정성을 자기 안에 포함한다.

“[추론에서] 이러한 형식주의적인 것 또는 주관적인 것이 성립하는 원천은 양극단을 매개하는 자가 추상적 규정으로서 개념이며 이 매개하는 추상적 규정이 자기가 통일하는 양극단과 구별된다는 데 있었다. 반면, 완성된 추론[선언 추론]에서 객관적 일반성[유]이 그에 못지않게 형식적 규정들의 총체로서 정립되면서 매개하는 것과 매개되는 것 사이의 차이가 제거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25)

이제 매개와 매개되는 것, 전제와 결론의 구별이 사라지고 “매개되는 것은 매개되는 것의 본질적 계기이고” 각 계기는 매개를 통해 필연적으로 출현한다. 여기서 매개는 현존 추론처럼 타자를 전제로 하지 않으며 반성 추론처럼 자기의 결론을 전제하지 않고 각 항의 동일성을 통해 더는 매개가 필요하지 않으니, 이미 추론이라는 매개를 넘어선 직접적인 된다.

이제 종합적으로 추론의 각 형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추론에서 각 항은 개별성, 특수성, 일반성이라는 개념 규정성을 지닌다. 여기서 매개 항은 개념 규정성의 총체이어야 한다. 그래서 매개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당위는 추론이 발전하는 가운데 실현된다.

우선 현존 추론에서 매개는 각 추상적 규정을 교대로 지닌다. 반성 추론에서는 매개는 개별성과 일반성의 직접적 결합으로서 양면성을 지닌다. 마지막 필연성 추론에서는 매개는 개념 규정성의 총체이다.

이와 같이 매개가 양극의 규정성을 통일하면서 매개와 매개된 것이 구별되지 않으면서 개념의 분화가 지양되고 마침내 통일이 회복된다. 이 통일성은 다만 내적인 분화에 머물렀던 개념이 아니라 판단을 통해 분화가 이루어진 동시에 추론을 서로 통일된 것이다. 이렇게 분화된 가운데 통일된 것이 세계의 총체 즉 객관성이다.

“추론은 매개이며 개념이 완전하게 정립된 것이다. 추론의 운동은 이 매개를 지양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오직 타자를 매개로 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그 결과는 매개의 지양을 통해 출현한 직접성이며 그에 못지않게 매개와 동일하게 된 존재이니 그 존재는 개념이되, 자신의 타자 속에서 그리고 그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회복한 개념이다. 따라서 이 존재는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사태 즉 객관성이다.”(주관 논리학, GW12, 126)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5-필연성[관계]의 추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5-필연성[관계]의 추론

1)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추상적 규정성이었다.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은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 즉 개별자의 전체이다. 이제 필연성 추론에 이르면, 매개 항은 곧 일반성인데 단순하게 된 것 즉 유이다.

매개 항인 이 유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규정된다. 첫 번째는 ‘단순하게 규정된 일반성’ 즉 유적 본질을 통해 규정된 유이다. 유적 본질이 ‘규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현존 추론의 매개 항과 같은 특수성이다.

두 번째는 구별된 개별자[종]의 전체[일반성]로서 유이다. 헤겔은 이를 ‘충족된 단순한 일반성’으로 규정한다. 개별자 전체라는 점에서 이 매개 항은 반성 추론의 매개 항과 같다. 이 일반성은 전체라는 점에서 일반성이며 동시에 개별성의 전체라는 점에서 개별성이다.

매개 항인 유 즉 실체는 우선 일반자의 본질이 단순화된 것이므로 이 점에서는 일반성과 특수성, 개별성을 동시에 지닌다.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단일한 규정성이었고 격의 변화에 따라 교체되었다.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은 이중적인 것이었으나, 내적인 전체성이 점차 표면으로 부상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필연성 추론에서 매개 항은 세 가지 개별 규정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추론과 구별된다.

이 추론이 필연적인 것은 매개 항이 양극단의 규정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의 주어는 유가 실현된 개별성이며 결론의 술어는 일반성 즉 유적 본질인데, 매개 항으로서 유는 한편으로 유적 본질이며 다른 한편으로 개별자 전체이니, 이 매개 항은 결론의 주어와 술어를 필연적으로 결합한다.

양극단의 내용은 매개 항이 출현하는 다른 형식일 뿐인, 양극단과 매개 항은 내용상 동일하지만, 다만 형식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추론의 각 항이 지닌 형식 규정은 독자적으로는 비본질적인 형식이다. 이 필연성 추론은 그 추론이 필연성을 띠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2)

정언 추론은 형식적으로 현존 추론의 일격이나 반성 추론에서 전체성 추론(연역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추론들에서 대전제를 이루는 명제가 서로 다르다. 현존 추론에서 대전제는 단순한 질적인(현존) 판단이다. 여기서 술어는 추상적 우연성이다. 전체성 추론에서 대전제는 전칭 명제이다. 그 술어는 필연성이다.

정언 추론에서 대전제는 정언 판단이다. 즉 주어는 어떤 유이고 술어는 그 유가 지닌 종차 또는 유적 본질이다. 예를 들자면 ‘사람은 사유하는 동물이다’와 같은 명제이다. 정언 추론의 소전제에서 술어는 대전제의 주어와 같은 유이다. 이 소전제에서 주어는 그 유에 속하는 단순한 개별자이다. 그러므로 이 개별자는 유가 실현된 우연한 개별자이지만, 그 속에 이미 유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정언 추론에서 매개는 곧 유이며 논리적 범주로 말하자면 실체이다. 이 실체는 유가 실현된 개체들의 ‘단순화된’ 집단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고, ‘사람의 유적 본성(예를 들어 사유)’도 아닌 유 자체 즉 실체이다.

매개 항으로서 유는 결론의 술어로서 유적 본질과 결론의 주어로서 유가 실현된 개별자를 결합하는 것이니, 이 추론은 필연적이다. 세 가지 항이 사실은 동일한 내용이지만, 다만 형식상으로만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으니, 이미 내용적으로 본다면,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니 이미 추론을 넘어선 것이다.

현존 추론에서 각 항은 서로 자립적이므로 여기서 추론을 통한 매개는 외면적이다. 이 추론은 형식적으로 타당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모순에 이를 수 있다. 반성 추론은 자기의 결론을 전제로 삼으므로, 이 추론은 내적으로는 필연적이지만, 아직 각 항의 자립성이 남아 있어 추론으로서 모습을 유지한다. 그런데 정언 추론에 이르면 형식만 다를 뿐, 내용은 동일하므로 추론은 이미 자기를 지양한 것이니 추론의 모습은 겉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정언 추론은 더 이상 주관적이지 않다. 그 항들의 동일성에서 객관성이 시작된다. 중심은 양극단과 내용상으로 동일하며, 양극단은 그 중심 안에서 각자의 자립성을 지닌 채 포함되어 있다.”(주관 논리학, GW12, 120)

정언 추론에서 아직 남은 것이 있다면, 이 형식상 차이 때문에 남아 있는 추론의 겉보기 모습조차 사라지는 것인데, 이것은 가언 추론과 선언 추론을 거쳐 제거된다.

3)

정언 추론에서 소전제의 주어는 개별자이며, 이는 실체가 실현된 우연한 존재다. 따라서 다른 개별자 역시 이 개별자에 못지않게 실체에 속할 수 있다. 거꾸로 보면 이 개별자는 실체에 속하지 않는 다른 직접적인 성질을 지니는 것이며 이 개별자가 실체에 속한다는 것은 다만 내적인 필연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정언 추론은 가언 추론으로 이행한다. 가언 추론은 정언 추론의 진리다. 즉 정언 추론에서 여기서 두 가지 개별자의 실체적 연관은 내적인 필연성으로 남으며 각 개별자는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니, 바로 이 내적 필연성으로서 실체적 연관이 곧 가언 추론이다.

가언 추론의 대전제는 가언 판단이다. 즉 ‘A이면 B이다’라는 형식을 취한다. 이런 가언 판단에서 A와 B의 연관은 이 개별자가 실체에 속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연관이며 아직 개별자가 직접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한, 내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런 가언 판단에서는 아직 A가 존재한다거나 B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다.

이제 가언 추론에 이르면, 소전제에서 A의 존재가 정립된다. 가언 추론에서 매개는 곧 A이다. 그것은 대전제에서는 하나의 가능성, 가정으로서 출현하며 소전제에서는 하나의 실제성, 현존으로 언급된다.

결론은 계사를 통한 판단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여기서 매개자로서 계사는 보이지 않는다. 계사는 ‘그러므로’라는 연결사가 대신한다. 헤겔은 이런 방식의 연결사를 ‘충족된 매개적 통일성’이라고 부른다.

4)

헤겔은 이런 가언적 관계(판단, 추론)는 조건적 관계로도 해석되며 더 인과 관계나 근거 관계로도 해석될 수 있으나, 가언 판단이나 추론에서는 조건적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근거나 원인은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자기를 통해 자기에 대립하는 개념인 토대나 결과와 같은 그 타자로 이행하지만, 조건 관계에서는 아직 조건과 제약된 것은 서로 무차별하고 그 관계는 내적인 필연성이므로, 이는 다른 관계를 포괄할 수 있는 더 일반화된 관계이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서 헤겔은 가언 판단과 가언 추론의 차이점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해 나간다. 우선 가언 판단에서 A, B는 자립적이고 서로 무차별하며 그 관계는 다만 내적인 필연성일 뿐이다. 이런 가언 판단에서 조건[A]은 다만 가능성이며 그것은 결과[B]에서 실현되면서 실제성을 지니게 된다.

결과가 실현되기 위해서 그 조건은 다만 하나인 것은 아니다. 여러 조건이 동시에 작용해서 하나의 결과가 실현된다. 결과에 기여 하는 조건들은 개별화되고 분산되어 있으며, 결과에 이르러 비로소 통일성을 얻는다.

그런데 가언 추론에 이르면, 소전제를 통해 A의 존재가 언급된다. A라는 존재는 개별자이므로 다른 존재에 무차별한 존재이지만, 하나의 우연적 존재이므로 부정성을 지니면서, 지양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대전제에서 A와 B의 관계는 가언 판단으로 보면 내적 필연성에 불과하며 이런 내적 필연성은 A, B의 자립성에 막히게 된다. 그러나 가언 추론에서 보면 소전제의 부정성을 통해 대전제는 자기를 실현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것이 실체적 연관이라는 개념이 자유롭게 자기를 실현하는 ‘개념의 자유로운 통일성’이 출현할 단서가 된다.

“이제 A가 매개하는 존재가 되는데 왜냐하면, 첫째로 매개자가 직접적 존재이자 무차별한 실제성이지만, 둘째로 동시에 본래 우연적이고 자기를 지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들을 새로운 형태를 지닌 실제성[B]으로 즉 그 조건들을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들로 옮기는 것은 조건들이 추상적인 직접성으로서 존재라는 사실이 아니라 이 조건들이 개념 속의 존재, 즉 우선은 생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조건이 생성이더라도 개념이 더 이상 이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특히 자기에 관계하는 부정적 통일성으로서 개별성이다.”(주관 논리학, GW12, 122)

“왜냐하면, 이 중심은 한편으로는 객관적 일반성 즉 동일 내용의 총체성과 다른 한편으로 무차별한 직접성 사이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 중심은 더 이상 내적 필연성이 아니라 존재하는 필연성이며 객관적 일반성은 단순한 직접성과 즉 존재로서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내포한다.”(주관 논리학, GW12, 122)

매개 항인 A의 존재가 이처럼 모순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결론 즉 ‘B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순이다. B는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인 동시에 매개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우연적이며 후자의 측면에서 필연적이다.

5)

정언 추론에서는 매개는 주어와 술어를 긍정적으로 통일한다. 이를 통해 세 항이 동일한 내용임을 보여준다. 가언 추론에서는 부정적 통일을 통해 이런 동일성을 표현한다. 즉 A가 사라지면서 B가 출현하는 것이다. 이런 사라짐과 출현을 통해 정작 실현되는 것은 A와 B라는 실체적 연관이다.

“제약하는 실제성을 제약된 실제성으로 옮겨놓는 것이 지닌, 형식 전환의 활동성은 본래 통일성이며, 그런 통일을 통해 … 무차별한 현존에 이른 규정성은 이제 해소되고 A와 B의 구별은 공허한 명칭에 불과하게 된다.”(주관 논리학, GW12, 123)

가언 판단은 이미 내적으로 실체적 연관을 보여준다. 이 실체적 연관은 가언 추론을 통해 실현된다. 실체적 연관이 실현되면서 ‘유적 본질’을 지닌 실체는 ‘개념적으로 분화한 종의 집단’으로 실현된다. 이 양자의 관계가 곧 선언 판단이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4-유비 추론의 적극적 가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4-유비 추론의 적극적 가치

1)

반성 추론은 연역법과 귀납법에 이어서 유비 추론 즉 유추로 발전한다. 이 유추의 근본 도식은 삼격 즉 E->A->B(헤겔은 B->A->E로 표현한다)이다. 유추의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예를 들 것이다.

지구[Earth]는 사람이 거주하는 행성이다.

달은 하나의 지구[Earth]이다.

그러므로 달은 사람이 거주하는 행성이다.

이와 같은 유추는 흔히 형식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유추에서 매개가 되는 두 개념(예를 들어 ‘지구’)는 겉으로는 같게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것이어서, 정확하게 매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네 개 항의 오류, 모호한 매개의 오류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형식적인 오류인 유추는 실상 과학적 탐구에서 아주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만일 유추가 없었더라면, 많은 과학적 진리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원자의 구조를 파악하는데서 우주의 구조가 원형이었다는 사실은 자주 언급되는 예이다.

우리의 인식도 사실은 하나의 유추이다. 사유의 도구인 많은 추상적인 개념은 사실 원초적인 의미에서는 구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개념[concept]’는 ‘임신하다[concieve]’에서 나왔다. 아이를 임신하는 것과 머리가 사유를 잉태하는 것이 같은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유추는 사실 우리 사유의 원초적인 모습인데, 이런 유추를 사유에서 추방한다면, 우리의 사유는 빈곤해질 것이다. 헤겔은 유추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파악하는데, 그것이 지닌 긍정적 측면을 특별히 부각한다는 점에서 유추에 대한 유추에 대한 헤겔의 설명이 돋보인다.

2)

유추에서 중요한 것은 매개 항이다. 이 매개 항은 소전제에서는 유로 표현된다. 위의 예에서 ‘달이 하나의 지구라’ 할 때 지구는 지구의 유적 속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지구라는 것’ 또는 ‘하나의 지구’이며 아직 그 유적 본질(종차)이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유적 본질을 지칭하는 것이다. 반면 대전제에서 매개 항은 개별적인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지구’는 개별적 행성으로서 지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추에서도 매개 항은 연역법이나 귀납법과 같이 일반성과 개별성이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연역법이나 귀납법에서 일반성은 전체성이며, 개별자의 전체를 의미하며 여기서 유적 존재는 잠재적이고 아직 정립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추에서 일반성은 정립된 유적 본질 즉 일반적 유의 본질적 속성을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연역법이나 귀납법보다 발전된 측면을 지닌다.

소전제에서 주어는 이런 유적 존재에 속하는 하나의 개별자이다. 물론 여기서 개별자는 유적 존재가 우연하게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연역법의 소전제와 같다.

그런데 대전제에서 술어는 주어인 개별자에 속하는 성질인데, 여기서 우연성과 필연성이 구별되지 않는다. 이 술어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으나 유추에서 이런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전제가 ‘지구는 사람이 사는 행성이다’라고 한다면, 이 ‘사람이 사는 행성’이란 술어는 개별자인 지구에 속하는 우연성이다. 그러나 만일 그 술어가 ‘공전하는 행성’이라면 지구의 필연성에 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만일 이 유추가 부당하다면, 그 부당성의 원인은 흔히 말해지듯이 유추가 모호한 매개 항을 또는 서로 다른 매개 항을 사용한다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한다. 유추의 부당성은 전적으로 대전제의 술어가 개별자에 속하는 우연성 즉 추상적 규정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유추에서 대전제의 술어를 개별자의 유에 속하는 필연성으로 규정한다면, 이 추론은 오히려 타당한 추론이 된다.

3)

흔히 유추의 부당성 때문에 이를 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유추의 형식을 일종의 삼단논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때 유추의 일반적 형식을 유추의 대전제로 삼는다. 그러면 유추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된다.

대전제:

‘어떤 객체에 어떤 징표에서 유사한 것은 다른 특징에서도 그 객체에 유사하다.’(즉 a가 p&q인데, b가 p라면, b는 q이기도 하다.)

또는 이 대전제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두 대상이 어떤 성질에서 일치한다면, 하나가 가지는 다른 성질을 다른 것도 지니게 된다“(a가 p이고 b도 q인데, a가 q를 동시에 갖는다면, b 역시 q를 갖는다.’

소전제:

‘지구는 흙으로 이루어지고, 사람이 사는 행성이며’,

‘달은 흙으로 이루어진 행성이다.’

결론: ‘달은 사람이 사는 행성이다.’

추론의 형식을 이렇게 삼단논법으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결론이 부당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헤겔은 유추라는 일반적 형식에 경험적 내용을 집어넣든, 유추의 일반적 형식 자체를 삼단논법의 대전제의 내용으로 삼든 결과는 마찬가지라 한다.

자주 문제 삼는 것은 유추의 형식 자체에서 매개 항의 이중성인데, 사실 이런 이중성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연역법이나 귀납법 즉 일반적으로 말해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이 가진 일반적 특징이다. 유추의 형식이 매개 항의 모호성 때문에 형식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귀납법이나 연역법도 타당하지 않다.

헤겔은 오히려 이런 문제점은 추론 형식이 발전하는 과정 중에서 인식적 의미 또는 객관적 의미가 제한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 그런 추론 형식이 원천적으로 추론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4)

헤겔은 오히려 유추가 연역법이나 귀납법보다 발전된 인식적 의미를 지니면서, 그 결과 관계 추론으로 이행하는 계기가 된다고 본다. 이제 그 발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연역법에서 매개 항의 일반성은 개별자에 대해 외적인 것으로 특히 여기서는 주어의 전체성[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으로 출현했다.

그것은 귀납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 매개 항의 일반성은 전제들의 전체성[e1, e2, e3…]으로 출현한다. 이런 전체성에서 유적 존재는 잠재적으로 내재하지만, 아직은 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추에 이르게 되면, 일반성은 개별자[대전제의 주어]와 유적 본질[소전제의 술어]의 직접적인 결합이라는 방식으로 출현하면서 유적 존재가 처음으로 정립된다.

이처럼 잠재적이었던 유적 존재가 유추를 통해 처음으로 유적 본질로 정립된다는 점이 유추가 연역법이나 귀납법보다 뛰어난 점이고 연역법이나 귀납법이 사실 인식에 별로 기여하지 않는 반면, 유추가 과학의 발전에 더 많이 기여해 온 것도 이런 측면 때문이다.

연역법과 귀납법에서 매개는 개별자와 일반자의 결합이지만, 여기서는 개별자는 긍정적이며 일반자는 내적인 것이다. 아직 개별자는 자기를 부정하여 일반자로 고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추에 이르면 일반자 즉 유적 본질이 직접 출현하면서 개별자와 결합한다.

이런 결합은 아직 직접적이지만, 이제 개별자가 이 일반자를 통해 부정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왜냐하면, 일반성 자체가 개별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추를 통해 이런 가능성이 열림으로써 이로부터 일반자 자체가 매개 항으로 되는 추론 즉 관계 추론이 출현하게 된다.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추상적 규정성이었다.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이 이중화되면서 최초의 부정이 등장한다. 그리고 반성 추론의 끝에서 유추에 이르러 직접적 규정성은 완전히 지양될 가능성이 열린다. 연역법과 귀납법에서 잠재적 일반성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일반성’이 된다.

“유추 추론에서 유는 단지 직접적인 전제로서만 중심의 요소였다. 추론 자체가 전제된 직접성의 지양을 요구함에 따라 개별성의 부정이 정립되며 이를 통해 일반자는 더는 직접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정립된다. 반성의 추론은 처음으로 직접성에 대한 첫 번째 부정만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이제 두 번째 부정이 등장함으로써 외적인 것에 머무르던 반성의 일반성이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으로서 규정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17-118)

5)

현존 추론에서 하나의 추론 형식은 자기의 전제를 자기 밖에 있는 다른 추론 형식을 통해 입증했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자기의 결론을 전제로 하니, 자기를 매개로 한다.

그러나 유추에 이르면 전제와 결론은 동일하게 된다. 유추에서 대전제는 p이면서 동시에 q라는 성질을 지니는데, 결론 역시 b는 q라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이다. 전제와 결론의 동일성은 관계 추론이 지니는 특징이니, 이런 점에서도 유추는 반성 추론에서 관계 추론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된다.

“[유추를] 긍정적 측면에서 볼 때 결론은 전제와 동일하며 매개는 그것이 전제하는 것과 합쳐진다는 것이 드러나며 이로써 반성적 일반성이 지닌 동일성을 통해 그것은 더 높은 일반성이 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18)

개념의 내적 통일성은 판단에서 자립적인 양극단으로 분리된다. 추론에 이르면 양극단은 매개를 통해 서로 매개된다. 현존 추론에서 전제는 외적으로 매개되지만, 연역법과 귀납법에서 자기의 결론을 전제로 한다. 마침내 유추에 이르러 전제와 결론은 동일해지며, 따라서 매개 항은 양극단과 동일하게 된다.

마침내 유추를 넘어 전제와 결론, 매개와 매개된 것의 내용적으로는 이미 동일하게 되었으나, 다만 형식적으로만 서로 구별되는 관계 범주가 출현하게 된다. 관계 추론의 운동을 통해 이런 마지막 형식적 차이조차 극복되면 이제 개념의 주관성 장은 끝나면서 객관성 장으로 이행하게 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3-연역과 귀납[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3-연역과 귀납

1)

추론의 운동은 매개가 지닌 규정성의 발전에 있다. 현존 범주에서 추론의 매개는 직접적으로 규정성을 지니지만, 이 규정성은 추상적 즉 “개별적으로 독자적인” 규정성이었다. 매개는 자립적인 양극단에 외적으로 관계한다. 여기서 매개는 다른 규정성으로 이행하면서 전체 규정성을 다 거치지만, 이런 이행은 타자로의 이행에 불과하다.

이제 반성 범주에 이르게 되면, 매개는 이중적으로 된다. 여기서 매개는 외적인 규정성 이미 자기의 규정성 안에 비치면서[scheinen] 자기 내로 반성[Reflektieren]하니, 표면의 규정성과 이면의 규정성이 다른 양면성에 머무른다.

그런 한에서 매개는 “다른 규정과 관계하는” 구체적인 것이며 자기 자신에서 총체성이지만, 아직은 타자를 반영하는 데 그치는 직접적인 총체성이다. 매개가 총체적이므로 매개는 양극단에 외면적이지 않으며 이미 양극단의 “자기 속에 포괄한다.” 이 추론에서 매개의 반성적 성격 때문에, 이 추론은 반성 추론이라 불린다.(주관 논리학, GW12, 110)

그러나 매개는 타자를 반영할 뿐, 자기의 자립성을 유지하니, 아직 개념이 자기를 전개하는 ‘개념의 절대적 동일성’에 이른 것은 아니며 다만 ‘반성의 통일성’에 그친다.(주관 논리학, GW12, 110)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반성 추론에서 매개는 첫째 개별성을 지닌다. 둘째 이 개별성은 일반성으로 확장되어 있으니, 즉 모든 개별자이다. 셋째, 이 개별자 전체 속에 유의 일반성이 들어있지만, 아직 그 유는 정립된 것은 아니다.

2)

반성 추론에서 매개의 성격에 따라 양극단의 성격도 변화한다. 현존 추론에서 두 전제는 직접적인 판단이며, 따라서 이 전제가 입증된 매개된 판단이려면 자기와 다른 추론의 결론이어야 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추론의 결론을 전제로 삼고 자기는 다른 추론의 전제를 제공하는 일종의 순환적 관계를 이루었다.

그런데 반성 추론에서는 전제는 반성적이다. 이 반성 관계는 다른 추론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전제와 결론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성 관계다. 이 반성 추론에서는 연역법이나 귀납법에서 상세하게 보듯이 전제와 결론이 각기 서로를 반성한다. 즉 전제는 결론을 이미 함축하며 결론은 전제를 함축한다.

반성 추론에서 전제와 결론 사이의 반성 관계는 아직 서로의 직접성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전제와 결론은 매개와 마찬가지로 양면성을 지닌다. 각자는 표면적으로는 직접적인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자를 반성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3)

반성 추론에서 첫 번째 추론은 전체성의 추론이다. 이 추론 형식은 현존 추론의 일격과 유사하지만, 대전제가 전칭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흔히 이 추론은 연역법이라 알려진 추론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데스는 죽는다.

대전제에서 주어의 전체성{‘모든 사람’]은 유인 한에서 그런 술어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이 유는 아직 잠재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를 정립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성은 개별자 전체이므로, 개별자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주어는 이중적으로 표현된다. 즉 위의 예에서 ‘모든’은 전체성을 말하며, ‘사람’은 잠재된 유적 존재를 표현한다.

이 전체는 개별자의 전체인 한에서 ‘개념의 일반성’이 아니라 ‘반성에 속하는 외적인 일반성’이다. 즉 전체성은 “개별자를 다만 외적으로만 일반성 속에 포괄할 뿐이며” 개별자는 “그 일반성 안에서 여전히 직접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전제의 주어인 전칭과 소전제의 술어가 매개 항이 되는데, 소전제에서 술어는 주어에 대해 유적 존재가 된다. 매개 항은 대전제에서는 전체성이면서 잠재적으로 유로 규정된 것인데 이제 소전제의 술어에서 유적 존재로 정립된다. 그러므로 매개 항은 한편으로 개별성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유적 존재라는 측면에서 이중성을 띠게 된다.

소전제에서 주어는 개별자로서 술어인 유에 속하지만, 유가 우연하게 실현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주어는 개념이 자기 분화하여 이루어진 것 즉 종에 속한 것이 아니다. 위의 예에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는 유의 종이 아니라 그 유가 우연히 실현된 개별자이다.

일격은 술어가 우연적이므로 추론이 타당하더라도 그런 추론을 통해 얻은 결론은 우연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런 일격에서는 모순적인 결론이 동시에 끌려 나올 수도 있다. 반면 전체성 추론에서 술어는 모든 개별자에 속하는 것 즉 필연적인 것이므로 여기서 결론은 필연적 진리에 이르게 된다.

3)

전체성 추론에서 대전제는 개별자 전체에 관련하는데, 여기서 대전제는 직접 진리로 전제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가정된 것이 아니라 진리로 단언된 것이다. 이런 대전제로부터 매개 항을 통해 소전제가 나오는데, 소전제의 진리는 직접적인 진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매개된 진리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대전제의 진리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인식 가운데 전체를 직접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 때 이 대전제의 진리는 결론이 진리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끌어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반성 추론에서 그 추론 자체에서 정립되는 사실은 곧 대전제가 바로 그 자신의 결론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런 대전제가 개별자와 술어의 결합을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 그 결합은 결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주관 논리학, GW12, 113)

대전제의 직접적 진리는 공허한 가상이다. 거꾸로 결론은 직접 개별적으로 경험될 수 있으니, 결론이 직접적인 것이며 결론이 마치 대전제로부터 끌어낸 매개된 진리라는 것은 거짓된 외양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 추론에서 한 추론 형식에서 전제는 같은 현존 추론 가운데 다른 추론 형식의 결과이며, 추론 형식은 서로 전제로 하면서 순환한다. 여기서 하나의 형식에서 전제가 되는 것은 자기 바깥에 있는 형식이다. 그러나 전체성 추론에서 전제는 자기의 결론으로부터 끌어낸 것이니, 그런 점에서 자기를 매개로 한다.

반성 추론의 대전제는 개별자의 진리로부터 끌어낸 것이니, 이제 전체성의 추론은 개별자를 매개로 한 반성 추론으로 즉 귀납법으로 이행한다.

4)

전체성 추론이 일격[E->B->A]에 속하는 것이라면, 귀납법은 개별성을 매개로 하는 이격[A-> E->A]에 속한다. 이 귀납법의 일반적 형식은 잘 알려진 대로 다음과 같다.

사자는 네 발을 가진다.

코끼리도 네 발을 가진다.

…

무한히 나간다면

모든 포유류는 네 발을 가진다.

현존 추론의 이격에서 매개는 추상적인 개별성에 지나지 않으면서 고립적이고 어느 전제에서나 주어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이 이격은 형식적으로 타당한 추론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귀납법에서 매개는 개별성이지만, 전제 전체에 걸친 전체성이므로 “완전한 즉 그[개별성]과 대립되는 일반성과 함께 설정된 개별성”이므로 그런 점에서 매개가 모든 전제에서 주어의 위치를 차지하면서도 이 추론 자체는 형식적으로 타당한 추론이 된다.

그런데 귀납법에서 표현상으로 매개는 한정된 전제로 이루어지지만, 실상 여기에는 이런 한정된 전제가 더 확장되어[즉 ‘이런 전제가 무한히 나간다면’] 전체성에 이르더라도 그 전제는 여전히 옳다는 것이 가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주어는 가정된 전체성이며 잠재적으로는 유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개별자의 전체는 결론의 주어에서 표현된다. 여기서도 전체성 추론에서처럼 매개 항은 개별자의 전체인 동시에 잠재적으로 유적 존재다. 여전히 개별자가 자립적이며 표면에 나오며 유적 존재는 이면에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결론의 주어는 이중적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자면 ‘모든 포유류’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한편으로 ‘모든’을 통해 전체성을 표현하되, ‘포유류’라는 표현을 부가하면서 암시적으로 유가 표현된다.

여기서 모든 전제와 결론에서 술어는 동일하다. 이 술어는 결국 우연적인 일반성이 아니라 모든 개별자에 속하는 필연적인 일반성으로 규정된다. 그런 점에서 술어는 전체성 추론에서 술어와 동일하다.

이런 귀납법에서 동일한 술어가 전제에서는 각각의 개별자에 귀속되며, 결론에서는 개별자 전체에 귀속된다. 각각의 개별자가 곧 개별자 전체이므로 전제와 결론은 동일한 내용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5)

귀납법에서는 전제인 개별 명제가 진리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런데 실상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리는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귀납 추론은 이런 한정된 경험을 통해 전체의 진리를 얻는다.

전체의 진리는 다만 가정된 또는 추측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리로 정립되는데, 한정된 경험을 통해 이런 진리를 정립하는 것에는 비약이 들어있다. 한정된 경험으로부터 전체성에 이르는 과정은 하나의 과제이고 하나의 당위이지만, 이 당위가 실현되는 일은 개연적[problema tisch]이다. 따라서 이는 최종적으로 허위로 결정될 가능성이 남아있다.

그것은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 주관은 결단하면서 진리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이 귀납법은 추론하는 주관의 결정에 의존하며, 주관이 이런 결단을 내릴 때, 주관은 이미 전체의 진리를 전제하고 있다.

“귀납은 오히려 여전히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추론이다. 중심은 직접성 속에 있는 개별자다. 개별자들을 전체성을 통해 유로 종합하는 것은 외적인 반성에 불과하다. 개별자들에 이미 존재하는 직접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외면성을 고려할 때 일반성은 단지 완전성에 불과하거나 오히려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주관 논리학, GW12, 114)

앞에서 연역법의 대전제가 결론 즉 개별자의 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제 귀납법에서는 거꾸로다. 귀납법에서 전제의 진리는 이미 결론 즉 전체성의 진리를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귀납법 역시 연역법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전제로 한 추론이지만, 그 방향은 정반대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결론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같다.

귀납법을 통해 개별자가 당위인 유적 존재와 결합된다. 귀납법에서 이런 결합은 다만 가정된 것에 불과하다. 만일 이것을 하나의 가정으로 보고 그친다면, 여기서 중심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두 부분(개별성과 유적 존재)으로 분열될 것이며, 추론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이 실제로 정립되면 개별자가 곧바로 유적 존재가 되면서 이로부터 유비 추론이라는 형식이 발생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3- 수학적 추론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3- 수학적 추론에 관해

1)

현존 추론의 일격은 E->B->A이다. 이격은 B->E->A이다. 여기서 첫 번째 소전제 E->B에서 B가 우연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세 번째 형식은 두 번째 추론 형식의 결론인 B->A를 대전제로 삼고 첫 번째 형식의 결론 E->A를 소전제로 삼는 것이다. 이제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은 두 전제에서 술어가 되는 A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곧 E->B인데, 이것은 첫 번째 형식에서 매개 없이 전제된 소전제가 이제 매개를 통해 나온 것으로 된다.

이로써 추론의 상호 매개가 완성된다. 세 가지 추론 형식을 통해 지금까지 추론을 구성하는 세 가지 명제 E->A, B->A, E->B가 모두 직접적인 명제에서 추론을 통해 정립된 명제로 변화했다. 그러나 각 명제를 매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추론이 아닌 자기 밖의 추론이다. 세 가지 명제는 서로 순환적으로 타자에 의해 증명된다.

2)

세 번째 형식에서 추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민주당원이 한국인이고’ ‘국민당원이 한국인’이더라도, 민주당원이 국민당원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즉 A가 E에 우연성이고 B에게도 우연성이라면, B->A이고 E->A이더라도 E->B가 성립하는지는 알 수 없다.

매개자인 A가 어느 전제에서도 술어이므로, 즉 타자를 포섭하거나 타자에 내재할 뿐, 타자를 포섭하는 동시에 타자에게 포섭당하고 타자에 내재하는 동시에 타자를 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추론 형식도 특칭화를 통해 형식적 관점에서 추론의 일격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즉 E->A이고 어떤 B는 E라면, 어떤 B는 A가 된다. 이런 특칭화를 통해 형식적으로 타당하더라도, 결론의 특칭성은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성립하는 것 즉 무규정적인 것이 되므로, 헤겔은 이런 특칭화를 통한 정당화는 의미 없는 것이라 한다.

만일 두 번째 전제인 B->A를 부정 명제로 즉 ‘B는 -A가 아니다’로 바꾼다면, 형식적으로 추론은 성립할 수 있다. 이 경우 결론도 부정적으로 된다. A는 B는 배타적이므로 E가 A라면 ‘E는 B가 아니게’ 된다.

“이 추론은 추론의 일종으로서 이 추론에 부합한다면 여기서 E->A라는 한 관계가 이미 충분한 관계를 갖는 만큼, 다른 A->B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충분한 관계를 가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무차별한 판단 즉 부정 판단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하면 추론은 합법적으로 되지만, 결론은 필연적으로 부정적으로 된다.”(주관 논리학, GW12, 103)

이런 가정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세 번째 형식은 첫 번째 형식에서 대전제에서 술어 A 역시 우연성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추론에서 소전제의 술어인 B의 우연성은 이미 앞에서 두 번째 형식을 통해 폭로되었다. 이제 세 번째 추론 형식을 통해 첫 번째 추론의 형식에서 전제가 모두 우연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3)

두 번째, 세 번째 추론 형식을 통해 추론의 대표로 알려진 첫 번째 추론 형식이 사실은 우연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현존 추론에서 운동이 전개할 부정적 결과다. 삼격은 앞에서 보았듯이 형식적으로 성립하지 않지만, 삼격이 성립하는 특별한 경우가 있다.

즉 수학에서는 ‘두 사물이나 명제가 제삼의 것과 같다면 그 둘은 서로 같다’라는 법칙이 성립한다. 예를 들자면, 수학에서 a+b=c이고 x+y=c 라면, a+c=x+y가 된다. 또 기하학에서, 서로 질적으로 다른 도형에서 두 개의 도형이 세 번째 도형과 크기에서 동일하다면, 이 두 도형도 서로 크기가 동일하게 된다.

이는 수학적 추론이라 알려지는데, 헤겔은 이는 일반논리학을 완성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혀 몰랐던 격이라 한다. 헤겔은 이를 사격으로 규정하며 그 도식을 A=A=A로 표현한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사격(즉 특별한 삼격)이 성립하는 경우를 엄격하게 제한한다. 그것은 다만 양적인 것이나 수적인 것의 동등성이나 부등성을 다룰 때만 성립한다.

“이 추론[수학적]이 직관적으로 명백하다는 장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장점의 근거는 규정이 지닌 모든 질적 상이성을 추상하고 오직 그 규정의 양적 동등성이나 부등성만을 받아들인다는 것 즉 이 추론의 형식주의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주관 논리학, GW12, 104-105)

동등성이나 부등성은 산술적 계산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수학적 계산에서는 이 삼격이 성립한다. 그런데 기하학적으로는 그 외의 다른 관계도 있다. 예를 들어 비교의 관계 즉 ‘크다’나 ‘작다’라는 관계를 보면, 여기에서는 이런 수학적 추론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A가 C보다 크고’, ‘B가 C보다 크다’라고 할 때 A와 B 가운데 어느 것이 큰지는 알 수 없다.

수학적 동등성은 모두 ‘=’ 의 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헤겔이 이 수학적 삼격을 A=A=A로 표현한 것은 이처럼 =의 관계에서 삼격이 성립하기 때문일 것이다.

4)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추론 형식이 일격에서 이격, 삼격으로 바뀌면서, 특수성에서 개별성을 거쳐 일반성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개념 계기가 매개로 되었지만, 단지 자리를 바꾸었을 뿐, 그 자신이 내적으로 타자로 이행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추상적인 규정이 매개로 남아 있었다.

현존 추론은 서로 타자의 전제가 되어 각자는 입증된 전제로부터 매개를 통해 끌어낸 결론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그 결론은 완전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로 전제가 되면서, 선결문제의 오류를 범한다. 하나의 추론 형식에서 전제는 입증된 것이어야 하지만, 그 전제를 입증하는 것은 그런 전제로부터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완전하며, 즉 자기의 결론은 입증된 전제로부터 끌어냈다는 주장은 오히려 기만이며 그런 추론은 가장 불완전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현존 추론의 운동을 통해 전제에서 동일성의 조건이 출현한다. 이격을 통해 소전제에서 E=B이어야 한다는 것이 제시되었으며, 삼격을 통해 대전제에서 B=A임이 드러났다. 이런 긍정적 결과를 통해 현존 추론에서 항이 지닌 추상적 질적인 성격은 사라지고 오직 단일한 성질이 지닌 양적인 것이 매개 항으로서 추론에서 등장한다. 이를 통해 현존 추론은 반성 추론으로 이행한다.

“그런 변증법적 운동의 단순하게 부정적인 결과는 단순한 양적인, 수학적 추론을 통해 질적 형식 규정성이 소실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출현하는 긍정적 결과는 즉 매개가 개별적인 질적인 형식 규정성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질적 규정성의 구체적인 통일성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고찰된 세 가지 추론 격이 지닌 결함이나 형식주의는 그러한 개별 규정성이 추론의 격에서 중심을 이루어야 했다는 데 있다.”(주관 논리학, GW12, 106)

헤겔 논리학 개념운동22-현존(형식적) 추론의 모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운동22-현존 추론의 모순

1)

E-B-A라는 추론 형식은 현존 범주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추론 형식이다. 이를 명제로 표현하자면, 대전제 B->A와 소전제 E->B로부터 E->A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된다. 결론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 곧 두 전제이며, 매개 항은 두 전제에서 주어와 술어에 동시에 관계하면서 결론을 매개한다.

여기서 추론을 이루는 세 가지 항, 소개념(결론의 주어 E), 대개념(결론의 술어 A), 매개 항[B]는 각기 고립적인 추상적 규정이며 서로 무차별하다.

판단을 외연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로 분석할 수 있듯이 이 추론 형식 역시 외연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로 분석된다. 외연적으로 본다면, 개별자가 특수자에 포섭되고, 특수자는 일반자에 포섭된다. 그러나 내포적으로 본다면, 개별자가 지닌 성질 가운데 하나가 특수자이며 이 특수자가 지닌 성질 가운데 하나가 일반자이다.

현존 추론은 내포적인 의미에서 현존 판단에서와 마찬가지로 특수성이 개별성에, 그리고 일반성이 특수성에 우연적으로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별성은 특수성 외 여러 성질을 가지며 그들은 서로 무차별하다. 따라서 이 특수성이 개별성에 속하는 것은 우연적이다. 또한, 특수성 역시 일반성 외 여러 성질을 가지고 그들 사이에 서로 무차별하다. 여기서도 일반성이 그 특수성에 속하는 것은 우연적이다.

여기서 특수성은 한편으로 개별성에 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성을 자기에 귀속시키므로, 개별성과 일반성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우연적이므로, 특수성을 통해 개별성과 일반성을 매개하는 것은 사태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추론하는 제삼자의 주관적 반성에 속할 뿐이다.

2)

추론의 형식은 사태 자체에 무관한 외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어진 동일한 개별자에 속하는 여러 성질 가운데 어느 것을 매개로 하고, 또 이 매개자의 여러 성질 가운데 어느 것을 술어로 할 것인지는 주관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동일한 형식이 여러 내용을 지닌 추론을 가능하게 하며 심지어는 이를 통해 서로 대립하는 추론, 모순적인 추론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어인 개별자는 대립물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동물적인 동시에 정신적이니, 어떤 주관은 ‘사람은 정신적 존재이며 따라서 선악을 안다’라고 추론하지만, 다른 주관은 ‘사람은 동물적 존재이며, 따라서 선악을 구별하지 못한다’라고 추론한다.

따라서 이런 형식을 거쳐 나온 결론은 한편으로는 전제로부터 나온 매개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의 선택에 좌우되는 우연한 결론이며, 주관은 추론 이전에 이미 그런 결론을 내려놓고 거기에 맞추어 전제나 매개를 선택한 것일 뿐이다.

이런 추론 형식이 독자적으로는 타당한 추론이지만, 그 내용상 모순에 빠진다는 것은 이 추론 형식이 담고 있는 내용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 추론 형식 자체의 성격 즉 추론 형식에서 각 항이 우연적이며 서로 무차별하다는 성격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즉 그런 추론 형식 때문에 그런 모순적인 내용을 담게 된다.

“이제 형식적 추론에서 항들은 질적인 본성을 지니므로 구체적인 것[E]이 그에게 귀속되는 여러 규정 중 하나에 따라 파악됨에 따라서 추론이 [결론에서] 구체적인 것에 부여하는 술어는 매개 항에 상응한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추론은 그에 반대되는 규정에 이르므로 그 전제와 그것의 결론 자체는 완전히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 추론은 그 때문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주관 논리학, GW12, 96)

3)

이 추론이 모순에 부딪힌다는 사실은 아직은 정립된 것은 아니다. 이 추론의 표면적인 형식을 가지고 본다면, 이 추론은 타당한 추론이며, 자주 모든 추론의 대표적인 추론으로 여겨진다. 다른 모든 추론 형식은 이 대표적인 추론 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는 한에서만 올바르다.

이제 이 추론 형식을 반성해 보면, 곧 그 추론이 지닌 모순이 출현한다. 우선 추론에서 전제는 증명된 것이 아니다. 추론의 전제 자체 즉 대전제든 소전제든 직접적인 판단이며,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각 전제의 술어는 주어에 대해 우연적으로 관계한다.

전제가 증명된 전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 자체가 매개된 증명된 것이어야 한다. 우선 이런 증명은 그 전제가 동일한 추상적 추론 형식에 입증되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면 이 추론 형식의 전제가 되는 두 전제는 각기 두 전제를 통해 증명되며, 새로운 두 전제는 각기 또 두 전제를 가지게 되는 등, 무한한 진행 즉 악 무한이 일어나게 된다. 이 악 무한은 전제가 추상적인 직접적 존재라는 것과 입증된 것이어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 벌어지는 모순을 보여 준다.

이런 악 무한을 피하려면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 추론을 통해 증명된 결론을 전제로 삼는 방식이다. 즉 대전제인 B->A를 증명하기 위해 결론 E->A를 전제로 삼거나 소전제인 E->B를 증명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결론 E->A를 전제로 삼는 방식이다.

그렇게 결론을 전제로 삼아 그 결론을 끌어낸 전제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순환을 이루는 데 따라서 이런 방식은 추상적 추론 형식의 결함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상적 추론 형식이 지닌 한계나 모순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 된다.

4)

첫 번째 추론 형식의 전제를 매개하는 두 번째 추론 형식은 우선 대 전제를 첫 번째 추론 형식을 통해 매개된 결론 E->A으로 삼고, 소전제 E->B는 그대로 두는 형식이다. 이렇게 되면, 두 번째 추론 형식에서 매개가 되는 것은 개별자 E이다. 첫 번째 추론의 대전제였던 B->A가 이제 결론이 되는데, 이제 매개를 통해 나온 결론이다. 결론의 술어는 여전히 A이지만, 주어는 변화되었다. E 대신 B가 주어다.

E와 B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형식에서 서로의 자리를 교환한다. E는 결론의 주어이었다가 이제 B가 했던 매개의 자리에 들어서며, B는 매개였으나 이제 결론의 주어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 E는 각자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규정을 가지며 마찬가지로 B 역시 특수자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규정을 가진다.

이처럼 E, B가 이중적 규정을 가지면서 개념 규정이 총체적이어야 한다는 추론의 요구 또는 목표에 조금 다가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규정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즉 하나가 다른 것의 자리에 들어서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그 자체에서 타자로 이행하는 것은 아니니, 아직 개념 규정과는 거리가 멀다.

B->A라는 결론이 E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이 이 두 번째 격이 지닌 의미인데, 이는 내포적으로 보면, 곧 B가 A라는 성질을 가지는 것은 B에 속하는 원소 E가 그런 A라는 성질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A가 가운데 B가 아닌 B’는 A인지 아닌지는 판단에서 배제된다. 만일 B 가운데 E가 아닌 E’가 있다면, 그 경우는 이 추론 형식에서 논의에서 배제되어 있다. 즉 그런 경우라면 B가 A라는 성질을 가질지는 보장할 수는 없다.

이 두 번째 추론은 형식적으로 보면, 성립하지 않는다. 매개자 E가 대전제와 소전제에서 동시에 주어이므로 여기서 매개자는 결론의 주어와 술어를 매개할 수 없다. 매개라면 한번은 포섭하고 한번은 포섭되거나 한번은 타자가 자기에 내재하고 다른 한 번은 자기가 타자에 내재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대머리다’라는 전제로부터 ‘대머리가 철학자다’가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없다.

“첫 번째 추론의 매개는 그 자체로 우연적인 것이었으나 두 번째 추론에서는 이러한 매개의 우연성이 정립된다.”(주관 논리학, GW12, 102)

4)

이때 ‘E->B’를 특칭 명제 즉 ‘약간의 B는 E이다’로 바꾸면 이 추론 형식은 성립하지만, 결론 역시 특칭화 되어야 한다. 즉 ‘약간의 B는 A다’로 된다. 그러나 이런 특칭 판단은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이다. 즉 ‘약간의 B가 A라’면, ‘약간의 B는 A가 아니다’는 동시에 성립한다. 그러므로 이런 특칭 판단은 무규정적인 판단이라 하며, 그런 무규정적인 추론을 끌어낸다는 것은 추론으로서는 의미가 없다고 보면서 헤겔은 그런 특칭화를 통해 추론을 정당화하는 가능성을 무시한다.

“따라서 이런 이격의 결론은 특칭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특칭 판단은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하므로 이러한 결론에는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주관 논리학, GW12, 101-102)

만일 이 결론을 성립하게 하려면, 매개자인 E와 B가 같아야 한다. 헤겔의 말로 하자면 “부정적 통일성이 특수성이라는 규정성을 그 특수자로부터 제거해야”(주관 논리학, GW12, 100) 한다. 즉 오직 E=B일 때, E->A라는 대전제에서 결론 B->A가 나올 수 있다.

즉 대머리가 소크라테스의 내적 고유성이어야 한다. 즉 대머리가 아니면 소크라테스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E가 곧 B와 같다는 것은 단순히 외연적으로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포적으로 E의 고유한 속성이 B라는 말이다.

이격에서 요구되는 동일화는 나중에 나오는 삼격에 요구되는 동일화와 더불어 현존 추론이 추상적 우연성이라는 규정성을 벗어던지고 고유성을 항으로 갖는 반성 추론으로 이행하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1- 추론 형식의 발전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1- 추론 형식의 발전에 관해

1)

앞에서 말했듯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성의 형식 즉 대표적인 삼단 논법은 헤겔에서는 이성의 형식인 추론이 아직 자기를 전개하지 못한, 따라서 아직 ‘현존’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추론 형식이다.

이 형식의 대표적 예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예 즉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이며 헤겔은 이것의 일반적 형식이 개별자[E]-특수자[B]-일반자[A]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이를 삼단 논법의 형식에 따라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B-A

E-B

그러므로E-A

일반 논리학에 따르면 이런 형식이 추론을 대변하는 형식이며 나머지 모든 다른 추론은 적어도 타당한 것인 한에서, 이 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며, 다시 말해 이 형식에 속하는 명제들을 대당 관계(부정이나 특칭화)를 통해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는 추론의 형식 사이에 사태의 진리를 인식하는 데서 어떤 발전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차피 추론 형식이란 사태 자체의 내용과는 무관한, 다만 형식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헤겔은 위와 같은 대표적 형식은 최초의 출발점에 등장한 형식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최초의 형식 잘못된 형식이라고 보지 않고 오히려 이런 형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다만 추상적인 형식, 개념을 결여한 형식으로 파악한 것이 잘못이라고 본다.

“형식적 추론의 결함은 추론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 형식은 이성의 형식이지만, 그 형식이 단지 추상적이고 따라서 개념이 결여된 형식일 뿐이라는 데 있다.”(주관 논리학, GW12, 108)

그러므로 출발점으로서 이 형식은 자기 내에서 운동을 통해 다른 형식으로 나가는데, 이런 형식의 발전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의 단순한 변형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통해 그 형식이 지닌 내용, 인식적 의미가 발전한다고 본다.

이런 발전은 마치 앞에서 판단을 다룰 때 칸트가 12개의 판단 형식이 각자 독자적으로 경험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는 데 반해, 헤겔은 이 12개의 판단 형식 즉 범주가 지닌 내용, 인식적 의미가 발전하는 것에 따라 전개된다고 보는 것과 같다.

그 때문에 추론 형식의 발전은 대체로 판단 형식의 발전과 같다. 판단 형식과 추론 형식을 단순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판단

추론

현존 범주

긍정

일격: E-B-A

이격: B-E-A

삼격: E-A-B

사격: A-A-A

부정

무한

반성 범주

단칭

전체성(연역)

->귀납

->유사

특칭

전칭

관계 범주

정언

정언

필연성

범주

가언

가언

선언

선언

개념 범주

단정[현실]

객관성(?)

기계론

문제적[가능]

화학론

자명[필연]

목적론

3)

범주마다 나타나는 세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네 개 범주의 전개는 동일하다는 점에서 판단과 추론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판단에서 관계 범주는 추론에서 필연성 범주에 대응한다는 차이가 있다.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보인다. 위의 표를 보면, 관계 범주에서는 판단의 종류와 추론의 종류가 일치한다. 그러나 다른 범주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결정적 차이는 추론에서는 개념 범주가 없다는 것인데, 이는 개념 범주가 사실 ‘판단에 대한 판단’으로 이미 ‘판단의 판단에 대한 관계’로서 추론으로 이행하는 과정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굳이 찾자면, 차라리 주관성 장 다음에 나오는 객관성 장이 여기에 상응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현존 범주에서 추론의 변화는 매개 항의 변화에 따른다. 즉 매개항이 B에서 E로 그리고 A로 나간다. 반성 범주에서 추론은 통상적 논리학에서는 복합추론의 형식이라 불리는 것인데, 헤겔은 이를 반성 범주에 집어넣는다.

헤겔은 추론의 변화는 매개항의 변화에 따른다고 보며, 이 매개 항은 위의 세 가지 범주 모두에서 특수자에서 개별자를 거쳐 일반자로 나가는 방식(B->E-A)을 취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형식추론에서 일격은 전체 추론과 정언 추론에서 반복되며, 이격은 귀납법과 가언 추론에서 그리고 삼격은 유추와 선언 추론에서 반복된다.

이런 매개 항의 차이는 단순히 특수, 개별, 일반이라는 외연적 크기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E->B->A의 순서로 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니면, 내포의 차이로 본다면 거꾸로 A->B->E로 나가야 할 것이다.

4)

그렇다면, 추론이 나가는 길은 왜 이렇게 규정되는 것일까? 판단 형식으로서 범주는 <정신현상학>에서 의식 경험의 길을 통해 제시했듯이 하나의 범주는 대상을 구성하고 여기서 현상 밖의 물 자체에 부딪히고 이런 모순 경험을 통해 범주는 자기 내로 반성하여 새로운 범주로 이행한다.

<논리학>에서 이런 범주 즉 판단 형식의 발전은 판단 형식이 지닌 내용 자체 즉 사태가 모순에 부딪히면서 다른 범주로 발전했다. 그런 점에서 이 <논리학>에서 판단 형식의 발전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 경험의 길을 전제로 하고 이것이 의식에 내면화되면서 일어나는 발전으로 보인다.

이제 추론의 경과를 보자. 추론이란 결국 주어와 술어를 매개 항을 통해 결합하는 것이다. 일반 논리학은 추론의 타당성을 문제 삼으면서 형식적 추론의 관계에 주목했다. 이는 추론을 이루는 항들의 외연적 크기의 비교를 통해(주연, 부주연의 관계) 이 추론의 정당성을 확립한다.

그 때문에 벤다이어그램이 추론의 타당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헤겔에 따르면 이런 형식적 추론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이 매개 항으로부터 도출되는지 아닌지 하는 여부를 판단하는 것”(주관 논리학, GW12, 108)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설혹 형식적으로 그런 추론이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그 추론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매개 항이 주어, 술어로부터 고립된 특수한 것이라면, 매개 항은 주어 술어에 대해 무차별하므로, 동일한 형식이더라도 여러 매개 항을 가지면서 여러 술어가 도출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서로 대립하는 술어가 도출될 수도 있으니,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추론이란 양극단이 지닌 통일성이 그 매개 안에 설정되어 있다는 데 있다면, 그러나 이 통일이 한편으로는 특수성으로서 독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외적인 관계로 받아들여지면서, 비 통일성이 추론의 본질적인 관계로 설정된다면, 그 추론이 이성이라 할지라도 이성적 타당성에 기여하지는 못한다.”(주관 논리학, GW12, 91)

5)

헤겔은 추론이 발전한다는 것은 매개가 이처럼 형식적 매개에 그치지 않고 실체적인 매개로 발전하는 과정이라 본다. 이 과정에서 형식적 매개가 지닌 모순이 드러나면서 더 발전된 매개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이 과정이 세 개의 범주가 차례로 그리고 각기 B->E->A로 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범주와 세 가지 추론 형식을 이루는 표를 대각선으로 읽어나가는 것이다.

현존 추론

반성 추론

필연성[관계] 추론

매개자B

일격

전체

정언

E

이격

귀납

가언

A

삼격

유추

선언

특수자[B]는 외적인 추상적 규정이며, 그러기에 매개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수 있다(예를 들어 현존 추론에서 일격이 그렇다). 개별자는 이 구체적인 것이니, 개별자[E]가 매개라는 것은 주어, 술어를 매개하는 것이 적어도 하나는, 그러므로 약간은 있다는 말이 된다.(반성 추론에서 이격인 귀납법을 생각해 보라.) 일반자[A]가 매개라면, 그런 종류의 모든 것에서 매개가 성립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 매개는 실체적인 매개이다.(필연성[관계] 추론에서 삼격인 선언 추론을 통해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출발점인 현존 추론(또는 형식적 추론)에서 일격에 관해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현존 추론이 그 자체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실은 그것들[항들]은 단순한 추상적 규정들이 아니라 각각이 타자에 대한 관계이며 중심은 양극단의 규정들에 대립하는 특수성일 뿐만 아니라, 그 양극단의 규정들을 자기에서 정립된 채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주관 논리학, GW12, 91)

이런 추론이 발전하는 목표도 미리 그려 놓아야 하겠다. 매개 항이 주어나 술어를 이미 내적으로 통일하고 있어서 그 주어나 술어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 항 즉 주어나 술어, 그리고 매개 항이 각자 독자적인 규정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타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는 총체성이어야 한다. 그게 곧 추론의 마지막 형태인 선언 추론이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0-이성[Vernunft]의 형식과 내용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0-이성[Vernunft]의 형식과 내용에 관해

1)

헤겔 논리학 2부인 주관 논리학의 1편 주관성 장은 개념-판단-추론으로 전개되면서, 전통적인 논리학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부분이다. 앞에서 개념과 판단을 살펴보았다. 이제 추론을 살펴볼 차례다.

개념은 이 개념을 이루는 내적 계기 즉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이 아직 외적인 자립적인 존재로 출현하지 않는 상태다. 판단에 이르러 이 내적 계기가 외적으로 출현하면서 판단을 이루는 주어, 술어의 규정성이 된다.

판단은 주어, 술어의 개념 규정성이 아직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판단의 형식이 발전하면서, 서로의 관계가 점차 고양된다. 마침내 최종적 판단인 개념의 필연성[자명한] 판단에서 개념 규정성이 내적 관계를 이룬다.

이때 양상 술어는 하나의 주어에 속하는 술어가 아니라 하나의 판단에 속하는 술어가 되면서 이미 판단에 관한 판단이 된다. 이 ‘판단에 관한 판단’은 곧이어 ‘판단과 판단의 관계’로서 추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추론을 통해 개념의 계기들 사이의 연관 관계가 다시 회복되지만, 개념에서처럼 단순히 내적 계기로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립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이 추론은 개념과 판단의 통일이 된다.

“추론은 판단 속에서 개념이 회복된 것이다. …. 추론에서 개념의 규정들이 판단의 양극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규정된 통일 또한 정립된다.”(주관 논리학, GW12, 90)

2)

헤겔에서 판단의 능력은 지성이라고 불리며, 추론의 능력은 곧 이성이라 한다. 헤겔에서 이 두 능력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이미 개념의 계기는 내적으로 연관되고 이 관계가 추론이므로 개념은 내적으로 추론이다. 반대로 추론은 이미 말했듯이 개념의 통일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니, 지성과 이성은 서로 통일되어 있다.

지성은 이성의 한 계기이며, 지성이 전개되면 곧 이성이다. 그러나 지성의 차원에서 아직 이성은 감추어져 있으며, 이성의 차원에서 지성은 자신의 한 계기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추론의 능력으로서 이성은 이성의 형식과 관련된 이름이다. 이성은 일반적으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대체로 일반적인 법칙, 또는 법칙의 원천을 인식하는 능력이라 말해진다. 법칙의 원천은 곧 신이나, 일자, 초월자, 무한자, 자유, 영혼 등이니 바로 이런 대상이 이성적 대상이라 지칭된다. 이 이성적 대상이 곧 이성의 내용적 측면이다.

통상적으로 일반 법칙의 인식은 매개나 추론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또는 내적 심정을 통해 인식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추론 능력이라는 이성의 형식적 측면은 무시되기 일쑤이며, 중요한 것은 바로 이성적 대상 자체의 인식에 있다고 말해진다.

반면, 헤겔은 이성의 내용적 측면은 이성의 형식적 측면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심정을 통해 이성적 대상인 신이나 자유를 인식한다면, 이 신이나 자유는 이성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감각적 확실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성적 대상이 진정으로 이성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성의 형식인 추론을 통해 인식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성의 형식이야말로 이성적 대상을 진정으로, 본래 대로 인식하게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헤겔에서 이성적 대상은 현실의 근원이나 현실 너머에 직접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외화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니, 이 운동 자체가 이성의 형식인 추론이다. 이성적 대상 자체가 추론적으로 자기를 전개하니 이를 인식하는 방식 역시 추론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3)

이성의 형식인 추론이 신이나 자유, 영혼조차도 인식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보는 데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된다. 신적인 것을 인식하는 이성이 고착 추론이라고 하면 어떤 반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반감은 추론적 이성을 낮춰보는 견해를 전제로 한다. ‘고작 추론이라는 것을 통해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는 생각일 것이다.

사실 일상적으로 추론은 대체로 낮춰본다. 추론을 다루는 논리학이란 굳이 배울 필요가 없는 학문으로 여겨진다. 논리학은 배워본 사람은 알지만, 무척이나 까다롭고 번거로운 학문이다. 오늘날 형식 논리학에 이르러서는 거의 수학적인 증명에 가까워지며, 더 복잡한 양화 논리나, 양상 논리에 이르면 일반인이 아니라 전공자조차도 포기하고 만다.

또, 논리학을 배우면 사유를 논리적으로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사실 논리학을 배웠다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논리학의 법칙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논리학자보다 더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마치 해부학이나 생리학을 배우지 않더라도 소화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듯이 논리학을 전혀 모르더라도 건전한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사유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한다.

까다롭고, 배울 필요가 없는 논리학, 추론의 형식은 게다가 거의 무의미하기조차 한다. 삼단논법의 대표적 예인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추론을 보자.

‘소크라테스가 죽는다’라는 사실은 이런 형식적으로 체계화된 추론을 거치지 않더라도 직접 알 수 있으며 게다가 굳이 이 결론을 추론을 통해 안다고 하더라도 그 대전제인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명제는 결론에 해당하는 것 즉 ‘소크라테스가 죽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죽고’.. 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니 그 자체가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이다.

논리학, 추론이 아무리 그 이름은 ‘이성’이라 하더라도 그런 이성은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것이니 그런 이성으로 신과 영혼과 자유를 인식한다는 것은 오히려 신과 영혼, 자유를 낮춰보는 것이 될 것이다.

4)

그러나 헤겔은 이성과 추론을 낮춰보는 견해는 이성과 추론의 본성에 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그런 낮춰봄은 통상적인 논리학에서 다루는 이성이나 추론의 형식[삼단논법, 헤겔적 표현으로는 E-B-A]이 사실은 다만 이성과 추론이 발전하는 단계에서 겨우 출발점에 불과한 것인데도, 마치 이것이 이성의 유일한, 본래 능력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나온 거라 한다.

헤겔은 추론에 관한 통상적 서술은 결코 ‘이성적 인식’이 아니며, “이성적 형식으로서 추론에 관한 서술”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잘못된 서술은 “‘추론의 지성적 형식’에 머물러서, ”개념 규정들이 ‘추상적 형식적 규정’으로 간주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07)라는 데 나온다고 한다.

즉 추론 형식에 관한 오해는 이 추론 형식에서 그 형식을 구성하는 항(즉 대개념, 소개념, 매개념)을 추상적인 규정성으로 보고, 각자 고립적이고 서로 무차별적인 것으로 보면서, 따라서 추론의 형식은 그 형식이 다루는 내용과는 무관한 것, 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추론 형식은 ①사태가 그 스스로 전개하면서 드러내는 형식일 뿐이며, 그 때문에 추론을 이루는 항은 개념 규정으로서 이는 ② 독자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타자를 이미 자기 속에 포함하는 총체라는 것이다.

“개념 규정 사이에 내재와 포섭이 존재한다는 사실 속에 이미 … 개별자는 그 자체로 일반자이며 … 일반자는 그 자체로 개별자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으며, 더 자세히 말해 추론은 바로 이 통일성을 매개로 명시적으로 정립하고 추론이 지닌 규정[의미]란 바로 매개에 있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으며, 즉 개념 규정들이 … 오히려 그 통일성을 토대로 삼는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주관 논리학, GW12, 107)

그러므로 헤겔은 라이프니츠처럼 일반 논리학을 기호 언어로 재정립하려는 시도를 경멸한다. 그런 시도는 논리학에 수학적 연산을 도입하려는 시도인데, 수는 개념이 없는 소재이며 계산은 외면적으로 합치하거나 분리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논리학은 “개념 자체를 유일한 내용을 삼는 대상”인데, 그런 논리학을 다루면서 “그토록 철저하게 비개념적인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주관 논리학, GW12, 108-109)은 이성의 대상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카뮈 ‘이방인’에 관한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해석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카뮈 ‘이방인’에 관한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해석 관해

1)

기다리던 영화 오종 감독의 ‘이방인’을 보았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내게 특별한 소설이었기에 이 소설에 대한 오종의 해석이 궁금했다.

어릴 때 집에 아버지가 아마도 월부 전집 판매상인 친척을 돕기 위해 사놓은 카뮈 전집이 있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방인’을 읽었다. 그 때문이었을 텐데, 대학 시절 당시 프랑스에서 갓 귀국했던 김화영 교수의 ‘이방인’ 원서 강의를 문법만 아는 수준에서 들어가 들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카뮈에게서는 감각적인 느낌이 중요하다는 말만 기억되었다. 바다의 냄새와 차가운 파도 거품의 느낌, 여인의 살갗이 주는 감촉, 뜨거운 태양이 주는 아득한 감각을 이해해야만 카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인은커녕, 내륙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나, 당시까지(대학 2년생이었는 데도) 바다를 구경한 적도 없는 나로서는 김화영 교수의 감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태양이 뜨겁다고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의문이었다. 그 후 나이 들어 학생들의 강요 아닌 강요 때문에 한 번 더 이방인을 읽은 적 있었고 그때는 그런 감각을 약간은 이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이번에 오종 감독의 영화를 기다린 것도 그런 의문 때문이었다. 오종 감독 역시 카뮈 ‘이방인’처럼 이해되지 않는 잔인한 살해를 소재로 한 영화로 유명하니, 어쩌면 잘 다루었으리라 생각했다.

2)

영화의 인트로가 시작되자마자, 프랑스 식민지 지배에 관한 대립한 주장이 등장했다. 하나는 식민 지배자의 라디오 연설이고 다른 하나는 담벼락에 쓰인 저항자의 구호였다. 그 외에도 감독은 원작에 그려지지 않는 도시 배경을 통해 식민지적 지배의 흔적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원주민 출입금지’라는 푯말이다.

감독은 원작과 달리, 뫼르소가 뜨거운 열기로 아른거리는 감옥 복도를 걸어, 어두운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감옥에 들어간 뫼르소의 회상을 통해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하기까지 과정을 그려내는데, 이 과정 자체는 원작과 다르지 않다.

감독은 원작 가운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두 인물 즉 개를 학대하는 남자의 이야기와 사건의 발단이 되는 아랍인 여자를 정부로 둔 친구 레몽의 이야기를 부각한다. 이 두 에피소드는 공통적인데, 즉 둘 다 타자를 학대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하고 심지어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사이에는 어떤 권력 관계가 드러나는 데 즉 표면적으로는 지배적이면서도 사실은 오히려 의존적이라는 관계다.

원작에서 카뮈가 이 두 에피소드를 소개한 것은 인간의 행위가 지닌 부조리한 측면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면서도 잔혹하게 대하는 것은 인간 심리의 이해 불가능한 집착이나 폭력성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종 감독은 다른 관점에서 이 두 에피소드에서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관계는 동물이나 여자에 대한 관계이지만, 감독은 여기서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인 원주민 사이에 관계를 읽어내는 듯 보인다. 이것은 영화에서 감독이 부여한 인트로나 식민지 지배 흔적이 해석에 미친 영향이다.

3)

사건에 관한 원작과 감독의 해석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 마지막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할 때의 장면이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마송의 별장에서 여자들의 울음소리(레몽이 다친 것 때문에)를 피해 나간다.

해변에는 여전히 태양이 내리쬐었고, 주인공은 바위 뒤 신선한 샘이 떠올라 그리 갔으나 거기서 레몽을 칼로 해친 아랍 청년을 만났다. 아랍 청년은 누운 채 칼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주인공은 주머니에서 손으로 총을 잡은 채 그에게 다가간다. 피할 수 있었는데도, 해변의 뜨거운 햇볕이 그가 돌아서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 한다.

아랍 청년은 “웃고 있는 듯”했고, 주인공은 혈관이 거칠게 뜀박질했으며 불타는 태양을 견딜 수 없었다. 주인공이 다가가자 아랍 청년은 여전히 누운 채로(이는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의미한다) 칼을 빼 들어 주인공을 겨눈다. 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번쩍였고 불타는 검처럼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바다는 소용돌이쳤고, 하늘은 불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주인공은 총을 꺼내 발사했다. 첫 발을 쏘고 이어서(이미 저항의 능력이 없는데도) 네발을 더 쏜다.

오종의 영화에서도 여전히 햇볕은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 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드러난다. 원작에도 바다의 소용돌이가 묘사되어 있으나, 그것은 최종 격발 순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별장에서 그의 마음을 소용돌이치는 바다의 포말을 통해 그려낸다. 어떤 분노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말해 준다.

원작과 달리 영화는 별장에서 나가기 전 주인공 마음속의 분노를 그려냄으로써, 이 분노를 진정하려 별장을 떠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랍 청년을 만난 것은 여전히 우연적인 사건이지만, 그의 마음에 분노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분노가 사건의 동기로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작은 아랍 청년의 얼굴에 미소를 “웃고 있는 듯했다”로 모호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데 영화는 아랍 청년의 얼굴이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상당히 오래 강조해서 묘사한다. 그것은 경멸이나 조롱과 유사한 미소였다. 이 미소는 주인공의 행위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4)

원작에서 카뮈는 인간의 행위는 자유로운 선택이고, 주인공의 행위는 비록 부조리한 현실 때문에 파국에 이르렀지만, 어떻든 그 자신이 행위한 결단으로 설명된다. 자주 언급된 햇볕의 영향은 그의 행위를 지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다. 이 햇볕은 그의 합리적 지성을 혼란스럽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행위의 원인은 아니다. 그 행위는 동기도 없고 그 자신에 해로운 것이지만, 그는 결단했다. 그 행위는 이유 없는 행위다.

부조리한 상황에서 이유 없는 행위라는 개념은 2부에서 주인공이 감옥의 침대에서 찾은 기사를 통해 암시된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여관집 모녀가 해외에서 성공하고 돌아온 자기 아들을 모른 채로 살해하는 사건이다. 이는 돌아온 아들이 어머니와 동생을 놀라게 하기 위한 단순한 이유로 자기 신분을 가렸기 때문인데, 그 결과는 그의 죽음은 물론이고 모녀의 자살로 이어졌다.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주인공의 행위를 이렇게 이유 없는 부조리한 행위로 해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오종은 이런 해석을 피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오종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햇볕의 영향은 합리적 이성을 마비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 주인공을 이끈 동기가 있다고 본다. 그 동기는 곧 주인공의 분노와 상대의 비웃음과 조롱이다.

주인공 뫼르소를 분노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식민지 지배자의 일원으로서 그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아랍 청년이 해쳤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뫼르소 자신은 아직 자신에 대해 반성하지 못한 소박한 식민지 지배자층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 사실 회사에 고용된 자이고 선량하지만, 지배층으로서 오만은 버리지 못한 자로 해석된다.

그가 권총을 발사하게 된 최종적 결정 동기는 아랍 청년의 얼굴에 어린 조롱과 경멸의 미소가 아니었을까? 이 조롱과 경멸의 미소가 그의 심정을 치게 만든 이유는 사실 그가 이미 무의식적으로나마 죄의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래도 표면에서는 자신의 지배자로서 권리가 정당하다고 믿는다. 아마도 대부분의 식민지 이주민이 그런 상태일 것이다. 카뮈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이런 식민지 이주민의 대표로서 뫼르소를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에 대한 조롱과 경멸에 부딪혔을 때 발작적으로 행동한다. 이런 발작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나 나치즘적인 폭력 행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원작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1부에서는 뫼르소의 행위가 서술된다. 2부에서는 뫼르소의 사건을 둘러싼 재판이 그려진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재판에 임하지만, 마치 자기가 구경꾼인 것처럼 행동할 뿐이다. 원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자는 경관과 뜨거운 악수를 했다. 그 순간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부르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슷한 부류끼리 모여 즐거워하는 사교 모임 같았다. 그리고 내가 괜히 낀 사람, 잉여물 같다는, 마치 불청객 같다는 이상한 느낌이 마음을 맴돌았다.”

“모든 게 나를 배제한 채 이루어졌다.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내 운명을 결정지었다. 가끔은 모두의 말을 가로막고 외치고 싶었다. 세상에, 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인도 중요합니다.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따져보면 할 말이 전혀 없었다.”

원작은 주인공의 이런 태도를 실존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소외되어 있다. 이런 소외된 구조에 관한 관심은 원작에서 감옥의 구조가 지닌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통해 암시한다. 또한, 이런 소외는 재판에 임하는 판사, 검사, 변호사가 저마다 임하는 역할 상 불가피한 결과다.

이런 소외는 사형수를 처형하는 기계적인 무자비한 수단[기요틴]이나 구토를 하면서도 공개 처형을 구경 간 아버지의 심정[“독을 탄 기쁨”], 그리고 최후로는 어찌하든 사형수의 항복을 얻고자 말겠다고 결심한 사제의 행위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6)

소외된 세계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는 일종의 무관심이다. 이 무관심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주인공은 낮에는 종일 상고를 생각하지만, 결국 포기한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사실 서른에 죽든 일흔에 죽든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당연하다. 어찌 됐든 다른 남성이나 여성이 살아갈 테니까”

주인공은 심지어 마리에 대해서조차 더는 마음이 아프지 않다. 그가 죽고 나면 다들 자기를 잊을 것이며 죽은 이상 그들과 그는 무관하다는 생각이 지배한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는 마음이 아프지조차 않았다.

무관심한 주인공의 태도에서 보면, 감옥을 찾아온 신부에게 터뜨리는 분노는 특이하다. 사제가 집요하게 믿음을 강요하자, 그는 마침내 사제의 깃을 부여잡고 소리친다. 이때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분노”가 뒤섞였다.

“[당신의 확신은] 그래 봤자 여성의 머리카락 한 올 값어치도 없는 확신일 뿐이야, 자기가 살아 있긴 한지도 모를걸? 산송장처럼 지내잖아.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보여? 그래도 난 내게 확신했어. 모든 것에 확신했지.”

원작은 두 세계를 대비시킨다. 사제의 삶과 주인공의 삶이다. 사제의 삶은 의미가 부여된 것이지만, 그 의미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산송장의 삶이다. 사제의 삶만이 아니다. 결혼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마리나, 개나 여자를 학대하면서도 집착하는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반면, 그의 삶은 순간에 자기가 확신하는 느낌에 따라서 산 삶이니 충만하고 아무리 짧다더라도 더 풍요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모든 의미란 무의미해진다.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살며, 그건 그의 특권이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 균등해진다. 그러기에 인간은 살아 있는 순간, 그 순간의 확실성, 느낌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모든 삶이 이런 죽음 앞에서 결국 사라질 무의미한 것이란 점에서 그는 더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니, 마음의 평온을 느낀다. 이제 죽음 앞에서 악도 사라지고 물론, 희망도 사라지니, 이 무차별한 평등의 세계 “징조와 별로 가득한 밤 앞에서”, 그는 오히려 다정함을 느끼게 된다.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씻겨내고 희망을 비워냈다는 듯, 징조와 별로 가득한 밤 앞에서,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이와 같은 발언은 사실 주인공의 발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작가가 개입한 작가의 말로 보인다. 그런데 부조리한 세계에서 소외된 자가 느끼는 자기 확실성이 과연 이렇게 목청 높여 강조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1부에서 태양 때문에 살해했다는 뫼르소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해되지 않는 말이지 않을까?

7)

원작이 실존적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영화는 주인공의 태도를 이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재판에 관한 묘사에서 영화와 원작 역시 유사하지만, 몇 가지 차이점을 보여준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은 어떤 ‘키가 작은 여자’에 주목한다. 카뮈는 주인공이 그녀를 식당에서 봤던 여성이라고만 소개한다. 다만 주인공은 그녀가 입은 재킷을 기억하여 단호한 표정을 기억한다. 이 여성을 주인공이 왜 기억하는지, 그녀가 왜 이 재판정에 나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여성을 친구 레몽의 정부였던 아랍 여자로 소개한다. 재판이 휴정하는 중에 주인공의 여자인 마리가 그녀를 찾아가서 대화한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녀는 마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마리가 자기도 여기가 고향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마리를 비웃는다.

또 하나, 원작에서 주인공이 처음에는 여러 아랍인 죄수들과 함께 거주하는 방으로 끌려가는데, 아랍 죄수들이 그에게 냉담하게 대한다는 말은 없다. 그리고 이어서 “수감자들이 어떻게 거적을 이용해서 잠자리를 만드는지를 알려줬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크게 주목받을 만하지 않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가 아랍인을 죽였다고 하자, 그에게 냉담하다. 그는 밤에 거적도 없이 돌바닥에 누워 자고 있었다. 한참이나 어떤 아랍인이 거적을 가져와서 그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준다. 이것은 아랍인 하나가 그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이었으나(그가 저지른 행위에 비추어 본다면 절대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친절인데) 이 행위가 주인공 뫼르소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는 것으로 묘사된다.

8)

2부에서 영화가 원작과 차이가 있는 또 다른 점은 예심 판사가 주인공에게 물은 질문이다. 원작에서 예심 판사는 권총을 연이어 발사했는지 아닌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주인공은 솔직하게 말한다. 첫 발을 쏜 조금 뒤에 다음 네 발을 쏘았다고 했다. 예심 판사는 첫발을 왜 쏘았는지는 묻지 않으면서, 왜 쓰러진 육신을 또 쏘았는지 물었다. 예심 판사는 그게 아주 중요한 물음이라면서 다그쳤다.

아마도 예심 판사가 보기에 첫발은 위협에 대한 대응일지 모르지만, 뒤의 네 발은 가혹한 행위이니 명백히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대답하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시뻘건 해변과 이마 위에 타오르는 태양을 떠올렸다.” 즉 주인공에게 첫발이나 나머지 네 발이나 모두 태양 때문이었기에 차이가 없었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은 다르게 그려진다. 예심 판사가 아랍 청년이 칼을 빼 들고 위협했는가를 묻는다. 이 사건에서 주인공이 아랍 청년이 칼을 빼 들고 그를 위협했다고 말한다면, 앞서서 레몽이 그의 칼에 의해 상해를 받았으니, 어느 정도 정상을 참작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주인공은 예심 판사가 이를 물었을 때, 솔직하게 대답한다. 즉 아랍 청년이 그를 위협했는가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주인공이 마음만 먹으면 위협받았다고 해도 될 일이다(그 장면을 본 목격자는 없다). 그런데 그가 그냥 솔직하게 말한 것은, 그가 법을 몰랐다기보다 어쩌면 그가 이미 자기를 구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재판에 대한 주인공의 자포자기적인 태도는 다른 점에서도 드러난다. 마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면회를 왔을 때, 마리는 나오면 결혼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과연 그렇게 될까?’라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뭐라도 말하려고 한 말이었다.”라고 말한다. 즉 자기가 나가지 못할 것은 안다는 것이다.

9)

재판과 관련하여 영화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감옥에서 아랍인이 그에게 베푼 작은 친절이 주인공에게 깊은 울림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잠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단순한 잠자리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1부에서 아랍인을 살해할 때 느껴지던 어떤 분노가 진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결국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즉 살해 위협이 없었다는 증언)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그에게 재판은 위선적이었다. 재판에서 주로 장례식과 다음날 마리와의 관계가 초점을 이룬 것은 사실 아랍인의 살해는 당시 지배층이었던 프랑스인에게는 일상이었고 변호사나 마리의 이상한 무죄라는 확신은 이런 일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검사 역시 이를 건드릴 수 없었기에 주인공의 인성을 주로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이 점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에게 자신의 재판이나 처형은 일종의 속죄 과정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굳이 자기를 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냉담한 태도를 취한다. 물론, 이 속죄는 기독교적 의미에서 속죄는 아니다. 이 속죄는 지배자로서 자신의 오만함에 대한 속죄이며, 그가 바다나 신체에 대해 느끼던 감각적 확실성과 같은 연대 의식에 대한 느낌이 아닐까 한다. 이 연대의식은 개와 사람, 남자와 여자, 프랑스인과 원주민 사이의 연대의식일 것이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사제에게 자신에 대한 확실성을 느낀다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오종의 해석은 결말에서 죽음 앞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다정한 무관심’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성이라는 개념만큼은 오히려 더 분명하게 부각시켜 준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9- 판단에서 추론으로[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9- 판단에서 추론으로

1)

헤겔에서 개념 판단 형식은 단정 판단에서 개연 판단으로 그리고 자명한 판단으로 이행한다. 우선 단정 판단에서 주어는 눈앞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개별자이다. 술어는 ‘좋다’, ‘나쁘다’와 같은 양상어이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 집은 나쁘다’라든가, ‘이 행위는 아름답다’ 등과 같은 판단이다.

여기서 어떤 것의 일반적인 개념이 판단자의 마음에 전제되어 있다. 이 일반적 개념은 앞에서 선언 판단을 통해 출현하는 일반적 본성이다. 이런 일반적 본성은 아직 ‘실제적[wirklich]’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므로 다만 주관적 사유 속에 있는 것이며,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당위로서 존재한다.

주어는 눈앞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이 개별자는 “어떤 상태이거나 외적인 실존으로서 존재하므로””(논리학 2부, GW12, 85) 특수한 것[Besonderheit]이지만, 아직 그 특수성이 정립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판단하는 주관은 이 눈앞의 개별자가 그런 일반적인 개념 즉 당위에 속하는 상태를 지닌다고 단정하지만, 사실 이 개별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지는 주관적 단정에 속할 뿐이다.

단정 판단은 직관적으로는 주어와 술어가 통일되었지만, 이런 단정은 제삼자인 주관에 의한 것이며 이 개별자의 상태가 아직 무엇인지 명확하게 되지 않았으므로, 이 통일성은 잠재적[an sich]이고 내적일 뿐이며, 아직 정립되거나 드러난 것은 아니다.

단정 판단에서 개별자와 일반적 개념의 통일성이 양상어로 표현된다. 개념 판단의 주어 자체가 하나의 판단 즉 개별자와 일반적 개념이 결합한 판단이므로 이미 자기 내에 계사를 지니고 있다. 양상어는 주어에 속하는 판단이 지닌 계사가 이 주어에 대한 이차적인 판단이 지닌 술어로 출현한 것이다.

이런 단정 판단에서 주어가 직접적인 한, 그것과 일반적 개념의 구별이 들어 있으니, 이런 단정 판단은 곧 부정적 판단이다. 그러므로 단정 판단은 개연적인 판단으로 이행한다.

“따라서 이런 단정 판단이 지닌 확신에 대해 바로 그런 동일한 권리로 대립하는 판단이 서 있다. ‘이 행위가 좋다’라는 판단이 확실하다면 대립한 판단 즉 ‘이 행위는 악하다’라는 판단도 여전히 동등하게 평가된다.”(논리학 2부, GW12, 86)

2)

‘개연 판단’은 ‘의문스러운[problematisch]’ 판단이라는 뜻이다. 단정 판단에서 주어는 직접 눈앞에 있는 것이며 아직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것이다. 주어의 개별자가 어떤 것인지, 어떤 상태에 있는지가 파악되면서 개연 판단이 등장한다. 이 개연 판단은 일반적으로 ‘그러한 것이 좋다’라고 할 수 있다.

개별자가 지닌 상태 때문에 한편으로 이 개별자는 이 상태를 통해서 일반적 개념에 합치하는 측면을 가진다고 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이 개별자는 항상 이 상태 즉 합치하는 측면과 반대되는 상태를 동시에 지닌 것이기에 그런 측면에서는 일반적 개념에 합치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개연 판단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 즉 긍정인지 부정인지 무규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반성 판단에서 마치 단칭 판단이 하나의 임의의 개별자이므로 곧바로 특칭적인 판단이 되며, 이 긍정적인 특칭 판단에서 ‘몇몇이 그러하다’라면, 곧바로 ‘그런 몇몇과 다른 것은 그러하지 않다’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으니, 긍정적 특칭 판단이 부정적 특칭 판단으로 곧바로 이행하는 것과 같다.

가언 판단 역시 의문스럽기[problematisch]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가언 판단은 ‘P이면 Q다’라는 판단인데, P를 존재하게 하는 것 즉 주어는 ‘P가 아닌 것’도 포함하고 있기에 이 주어는 항상 다른 결과 R과 관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법칙 관계는 항상 부분적으로만 성립할 뿐이니, 이런 법칙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관계할 뿐이다.

특칭 판단이나 가언 판단이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갖는다는 점에서 개연 판단과 같지만, 개연 판단은 이런 무규정성이 판단 자체의 형식에 내재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주어인 개별성은 일반적 개념에 비추어서 판단되기 때문이다. 개별성은 개별성인 한에서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연 판단 자체에서 이런 긍정과 부정의 정립은 언급된 판단[특칭 판단이나 가언 판단]에서보다 더 내재적이다. 왜냐하면, 개연 판단에서 술어의 내용은 주어가 개념에 어떻게 관계하는가이며 따라서 이를 통해 직저적인 것이 하나의 우연적인 것이라는 규정이 그 자체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논리학 2부, GW12, 86)

개연 판단의 계사는 ‘이다’가 아니라 ‘일 수 있다’ 즉 가능적인 것이다. 이 가능성은 즉 긍정인지 부정인지 무규정성은 술어 때문은 아니다. 술어는 이미 일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주어는 개별적인 것이고 직접 어떤 상태 속에 있는 것이기에, 이로부터 무규정성이 나오게 된다.

3)

주어의 상태가 술어의 일반적 개념, 당위와 합치해야, 자명한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주어의 상태가 개념에 합치하는 일반적 상태로 고양되어야 한다.

여기서 이런 합치가 일어나려면, 주어의 개별자가 지닌 어떤 상태 즉 특수성이 추상적인 특수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헤겔에서 특수성은 이미 정립된 것인데, 그 자신이 다시 부정되면서 구체적인 개별성이 된다. 이 부정의 부정으로서 구체적 개별성을 통해 개념의 일반성이 회복된다.

그러므로 개별자의 자기 부정적인 상태가 곧 술어인 일반적 개념이나 당위에 합치하는 것일 수 있으니, 여기서 일반적 개념은 “자기의 대립물인 개별자를 통해서 자기와 연속된다.”

“주어와 술어는 서로 상응하고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 이 내용은 그 자체 일반성이 구체적으로 정립된 것이다. 즉 이 내용은 두 가지 계기를 지닌다. 한편으로 객관적 일반성 또는 유[일반적 개념]이며 다른 한편으로 개별화된 것[구체적 개별성]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반적인 것은 자기 자신인 동시에 자기의 대립물을 통해서 자기와 연속되는 것이며 이 대립물과 통일로서 비로소 일반적인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88)

따라서 헤겔에서 자명한 판단에 이르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런 자기 부정성을 결여한 것은 자명한 판단에 이를 수 없다. 예를 들어 ‘집’과 같은 것은 자기 부정성이 없으므로 자명하게 좋을 수 없으며, ‘행위’는 자기 부정성이 있으므로 자명할 수 있다.

자기 부정성을 지닌 것이 곧 주체이므로 결국, 자명한 판단의 주어가 되는 것은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주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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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판단에서 술어는 일반적 개념이며 곧 실체이다. 반면, 주어는 주체이며, 개별자이다. 양자는 모두 구체적 일반성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이를 통해 판단에서 지속 출현했던 구별이 사라지고 개념이 지닌 동일성이 회복된다.

지금까지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것은 계사였다. 이 계사는 주어, 술어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존재였다. 이 존재가 제삼자, 판단하는 주관이다. 그러나 이제 자명 판단에 이르게 되면, 주어와 술어는 동일하게 되면서, 양자를 연결하는 계사가 주어, 술어와 통일된다. 계사는 주어 속에 있는 주체, 선험적 통각이며 동시에 술어 속에서 양상어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판단의 형식이 몰락한다. 그 이유는 우선 주어와 술어가 본래 동일한 내용이기 때문이지만, 두 번째로는 주어가 자신의 규정성을 통해 자기를 넘어 술어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셋째로 이런 관계가 술어로 이행했으며 다만 그 술어의 내용을 이루며 따라서 정립된 관계로 되거나 판단 자체가 된다. 그러므로 개념의 구체적 동일성은 선언 판단의 결과이었으나 개념 판단의 내적인 토대를 이루면서 전체적으로 자기를 회복한다. 이 내적 토대가 이제 처음으로 다만 술어 속에서 정립된다.” (논리학 2부, GW12, 88)

이제 주체인 주어 자신이 자기를 전개하여 자기를 술어화하고 이를 통해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바로 이런 계사인 주체 자신이 전개하는 운동이 곧 추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