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들[치유시학]

못다 한 이야기들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다시 찾은 할머니의 집

 

시간은 간다는 말도 없이 흘러갔다. 흐르는 시간 동안 할머니는 언제나 내 마음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가거나 길을 걷다가도 문득 떠오르면, 나는 괜히 눈을 부벼댔다. 어쩌다 한적한 곳으로 가게 되면 꼭 할머니 집으로 가던 그 길 같아서 주위를 돌아보며, ‘우리나라는 도심지만 벗어나면 풍경이 똑 같다’고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임종 소식도 듣지 못했다. 혹시 일이 생기면 연락해달라고 내 연락처를 적어 놓았지만 소용없었다. 한 동안 전화연락이 두절되었지만, 박사학위 논문 심사 중이라서 한 동안 할머니를 잊고 있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지나 겨울 문턱에서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집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시 찾은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고, 할머니 집 뒤 공터에 매여 있던 누런 개만 컹컹 짖었다. 마을 입구의 교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비탈길을 계속 내려오면 할머니의 집이 나온다. 할머니의 집은 동네 끝, 가장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비탈길 끝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야 한다. 대문이 없는 집의 마당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집이 보인다.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집은 적막했고 잡풀의 흔적마저 보이지 않았다. 담이 없기 때문에 겨울 바람은 마치 예전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빈 마당을 돌아나가고 있었다.

집은 기역자로 되어 있다. 원래는 일자형 집이었는데, 간단히 몸을 씻을 수 있고 보일러를 들여놓을 수 있는 공간을 이어서 기역자가 되었다. 현관문을 열면 작은 쪽마루에 방문이 연결되어 있다. 미닫이문을 열고 방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화장대와 그 옆에 작은 창문이 있었다. 화장대와 창문 사이 벽에는 작은 텔레비전이 낡은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방문과 마주 보이는 벽에는 옷장과 이불장이 연결되어 있는 오래된 가구가 있다. 그 옆 벽면에 작은 미닫이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창고 겸 작은 방이 나온다. 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 옆에 있는 또 다른 미닫이문을 열면 부엌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밖으로 나오는 문이 있는 욕실 겸 보일러실은 안에서 부엌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곳이 할머니가 거주하는 공간의 전부였다. 그 공간 뒤로 돌아가면 작은 방과 간단하게 식사준비를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는데, 그 곳에는 외지의 직장에 다니는 젊은이가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그 젊은이를 만나지 못했지만, 할머니를 통해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기억을 지니게 되었다. 그 젊은이는 할머니의 집 여기저기를 고쳐주기도 하고, 가끔씩 할머니의 손발이 되어 준다고 했다.

마당에는 초록색 간이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문은 오래되어 완전하게 닫히지 않고 색도 바래져 있고, 할머니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가서 이용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한 곳이었다. 그 화장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비가 오면 어쩌나, 바람이 세게 불면 어쩌나,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울텐데 얼마나 불편하실까. 마음과 달리 헤어질 때까지 나는 할머니께 화장실을 지어 드리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할머니만 안 계셨다. 예전보다 더 많이 어긋나 있는 화장실문을 보자 슬픔이 밀려왔다. 그 문에 덧대어 있는 얇은 판자가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시기 전 오랜 시간을 스스로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고 했다. 국가에서 보내주는 도우미의 도움으로 식사를 해결했지만, 그 도우미가 오지 못하는 날에는 이웃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때에도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괜찮다. 니는 공부 잘하고 있제? 너거 아는?” 하며 나를 염려했다. 괜찮다는 말을 나는 그대로 믿었다. 단 한 번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계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학위를 받으면 만나러 가야지, 학위를 받고 나면 소설을 써서 할머니께 감수를 받아야지 하는 부질없는 생각만 했었다. 골목을 돌아 나오며 스스로 “괜찮다. 괜찮다. 너는 몰랐을 뿐이야”라고 되뇌이면 되뇌일수록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지 않아. 넌 어쩌면 일부러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믿었던 것 아니야? 학위? 그런 건 변명이고 핑계야. 왔어야 했어. 절대로 괜찮지 않아.”

당신은 천상 여자였습니다.

 

할머니는 그 나이 대의 여느 사람에 비해 키가 컸다. 앉은 키가 나보다 훨씬 컸다. 결코 여리거나 가냘픈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10대 소녀의 감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초저녁에 울려오는 플루트의 음률 같은 감성은 할머니의 평생을 고통 속에 살게 한 원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시로 읊을 수 있게 해 준 힘이기도 했다.

한 여름에도 한 겨울에도 나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에도 수시로 옷매무시를 가다듬거나 머리카락을 곱게 쓸어내리곤 했다. 치마는 언제나 펼쳐져 있었다. 비록 나이 들고 병들어 있어도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형언키 어려운 감동과 함께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할머니는 이야기 도중이나 시를 읊을 때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다. 특히 밤에 혼자 누워 “지난날을 생각하며 시를 지으면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없어서 다음에는 안 한다 해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또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단순하게 기억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할머니는 기를 소진하여 두통이 올 정도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칡넝쿨처럼 헝클어진 자신의 생을 정리하여 반듯하게 뉘어 놓고 가시고자 했던 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자신이 다니던 울산 병영의 초등학교를 시에서 세심하게 표현했다. 부산고녀, 항도고녀(현재의 경남여고) 등에 대해서도 교복과 머리 모양까지 기억했다. 이야기책(소설)을 좋아해서 일제 강점기 때 장날에 가서 책을 사거나 어른들로부터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야기책을 좋아했고, 한글과 일본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병에 걸린 이후로는 책을 볼 수 없었노라고 했다. 이제는 좋아하는 책을 맘대로 볼 수 있는데 백내장으로 책을 읽을 수 없다며 허탈해 했다.

특히 아들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하여 그 고통의 크기와 깊이를 짐작하게 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마르지 않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그리고 안타까움은 거대한 강물이 되어 할머니의 80년 삶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그 그리움이 크면 클수록 병든 자신에 대한 원망도 깊어갔으리라.

이웃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생전에 안 좋은 일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웃이 알고 있는 사실마저도 할머니가 스스로 말하거나 인정한 적이 없었노라고 했다. 또 먼저 부탁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 조석으로 끼니가 힘들어도 신세지는 것을 꺼려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웃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자 자신을 향한 애정이었음을 안다. 19세에 꺾여버린 꿈, 이루지 못한 사랑, 어쩔 수 없었던 이별, 그 이후로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녀야 했던 삶, 60년 가까운 세월을 옆에서 지켜주고 사랑을 주었던 할아버지에게 차마 과거를 밝힐 수 없었던 죄스러움 등은 할머니를 옭아매고 있었지만, 그래도 놓을 수 없었던 것이 자기애였음을 나는 알고 있다.

몸은 내 것이면서도 내가 어찌할 수 없었지만, 자존심만은 끝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할머니의 그 마음을 고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애가 아집이 되고 고집이 되었다 하더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 마음을 나는 안다. 그 마음으로 80 평생을 모질게 버텨왔음을 알기에 오늘도 할머니 생각에 젖어든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온 몸의 기를 소진하여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시를 구상하고, 나를 만나 그 시를 들려주는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아마 시를 생각하는 그 과정 자체가 스스로 자기 삶의 매듭을 푸는 과정이었기에 두통을 앓으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것이었지 싶다. 나에게 시를 읊어주고 그 시를 다시 나의 목소리로 들으면서 할머니는 과거를 정리하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그 과거의 시간들을 서서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할머니와의 만남은 나의 실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할머니와의 만남은 ‘시가 과연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지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할머니도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 대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할머니와의 만남은 나 자신과 소통하는 길이자 우주로 통하는 길이 되어 있다.

예전에는 무심코 보았던 달이 이제는 나를 깨우는 북과 같다. 가득 차서 흠 하나 보이지 않는 보름달에서 초승달로, 다시 보름달이 되는 것을 보며 우리들의 삶이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가득 차면 내보내야 하고, 부족하면 다시 메우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라는 걸 안다. 또 우리들 모두는 몸과 마음이 미병(未病) 상태라는 것, 그래서 언제든지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병에 걸렸든 미병 상태이든 인간은 귀한 존재이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은 평생이라는 시간 개념에서 본다면 극히 짧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할머니와의 만남 이후의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 알고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게 얻었다. ‘시는 마음을 치유한다.’ 그러나 실제로 치유는 시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것이라는 걸 나는 덤으로 얻었다. 시는 치유로 가는 문이라는 걸 알았다.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다. 우리는 온전함에 가까워지기 위해 삶이라는 여행을 한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도 없고 쓸모없는 일도 없다. ([불혹의 문장들], 알렙) 그렇다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쓸모없는 생명도 없다. 할머니는 초기 구술시에서 자신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손톱만한 벌레만도 못한’ 사람으로 비하했다. 나에게 할머니의 삶은 바람 같고 푸른 잡초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바람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흔들거나 풀잎을 흔들어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때로는 우리들의 몸을 빌려 자신이 우리 옆에 와 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바람이 없는 곳은 없으며 갈 수 없는 곳도 없다. 잡초는 언제나 푸르다. 뿌리째 뽑히기도 하고 밟히기도 한다. 정원에 옮겨 심기는커녕 가까이 올까봐 온갖 약을 다 뿌린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자란다. 할머니의 삶은 바람처럼 잡초처럼 그렇게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왔다.

다소 불온한 의도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할머니를 통하여 내가 다시 깨달은 것은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결코 썩지 않으며, 바다로 가면 바다가 되고 돌틈으로 흘러 들어가면 맑은 샘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또 얻은 게 있다면, 나는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자각을 얻게 된 것이다. 나에게 있는 능력은 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고통을 덜어주고자 시를 읊어주거나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할머니가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고 스스로 치유해갔던 그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은 그와 같은 힘을 찾아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게 아닐까 한다.

 

*** 이말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끝을 맺고자 합니다. 그 동안 읽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누군가가 기억해 준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삶을 산다고 들었습니다. 육신은 가고 없어도 단 한 사람만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 분은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매듭을 풀어나가는 자기실현의 길[치유시학]

매듭을 풀어나가는 자기실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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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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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실현의 길?

자신의 비밀을 평생 동안 혼자 간직하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 뒤에는 온전한 자유를 향한 염원이 있다. 온전한 자유, 진정한 자유는 세계와 교류하여 나와 세계가 서로 영향을 줄 때 실현가능한 것이다. 삶의 빛은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7개월 동안의 만남에서 보여준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개인의 고유성과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아왔기에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지금은 없는 기억 속의 이웃들에게 분노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지난 삶을 정리하는 모습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 지난한 삶에 맺혔던 매듭을 말로써 하나씩 풀어나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내 할머니와 어머니의 다림질 모습이 떠오른다.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긴 광목천을 발로 밟아 빨아서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널어놓으면 마치 햇살이 내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에 펄럭이던 광목천 사이를 뛰어노는 사이 광목천은 바싹 마르고, 어머니는 그 천을 하나씩 걷어서 풀을 먹였다.

커다란 대야에 마른 광목천을 넣고 어머니가 풀주머니를 주물럭거리면 하얀 풀물들이 나와 광목천을 촉촉하게 적셨다. 광목천을 손으로 주물러 풀물이 골고루 천에 스며들면 다시 빨랫줄에 널어 말렸다. 풀을 먹인 광목천은 햇빛 아래에서 더 하얗게 표백되어 갔다. 빳빳하게 마른 천을 걷어 들인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서 입으로 물을 뿜어 천을 다시 촉촉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물을 뿜는 소리에 비례해서 어머니의 콧등에는 땀이 맺혔다.

촉촉하게 젖은 광목을 직사각형으로 개켜 보자기로 싸서 발로 밟았다. 어머니의 발 아래에서 광목은 물기가 골고루 퍼지면서 동시에 구김살도 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밟기가 끝나면, 광목은 다듬잇돌 위에서 다듬이 방망이에 의해 부드럽게 다듬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양손에 방망이를 들고 일정한 속도로 다듬잇돌 위에 있는 광목을 두드렸다.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는 그 어떤 음악소리보다 어린 내 가슴 속을 휘젓고 다녔다. 마당의 평상 끝에 앉아 다듬이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어머니가 광목천과 하나가 되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다듬이질이 끝나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마주 앉아 광목천의 끝자락을 잡고 팽팽하게 밀고당기다가 다리미질을 시작했다. 동그란 쇠 다리미에는 타고 남은 숯이 들어 있었고, 광목천은 다리미가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잔주름 하나 없이 평평해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 옆에서 사악거리는 다리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할머니가 자신의 삶과 가슴에 맺힌 한을 말로 풀어나가는 그 모습이 마치 누런 광목을 하얀 천으로 만들어가는 어머니의 손길 같았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원망도 미움도 안타까움도 사랑의 아픔도 하나씩 벗어던지는 모습이 지난한 시간을 거쳐 하얗게 탈색되어 햇살 아래 빛나던 광목천과 같았다. 그것은 자기 의지에 의해 자기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 곧 자기실현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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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크면 자신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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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 할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정확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떠나보낸 아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마쓰시타에 대한 회한, 먼저 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함께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아쉬움 등이 서로 뒤엉켜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한은 할머니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하나씩 보태지는 고통은 매듭과 같다. 이 매듭은 삶을 얽매는 질곡이자 현실을 어두움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나의 고통에 함몰되면 내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홀로 내던져진 것 같은 막막함만 남는다.

할머니의 초기 시를 보면 “나는 왜 이렇게 고통이 많고/ 내 앞에는 여러 가지 시련이 닥치나/ 절망에 싸였다.(시 [내 인생길] 중)”고 고백한다. “약한 자는 아무리 말을 하여도/ 소귀에 경 읽기더라.(시 [내 인생길] 중)”는 표현으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울분을 토해 놓았다. 그러나 시를 읊고 그 시를 내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들으며, 시로 못다한 이야기들은 말로 하면서 맺혀 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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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시 왈가닥한 성격에
참지 못해 그 사이로 뛰어들어
발로 얼음을 타며 돌아다니다가
결국 엉덩이로 얼음에
방아를 찧고 말았네.
내 죽는다고 뒹구르니
길가는 나그네 아저씨가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네
너무도 감사하여 맘으로 답례하였네.
– 시 [임진강에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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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allsonline.org/beautiful-winter-river/

할머니는 구술한 마지막 시인 [임진강]에서 처음으로 세계와 교류하고 소통하는 표현을 했다. 할머니는 이 시에서 “많은 인파들이 아이 어른 분별없이/ 팽대를 치며 썰매를 타고/ 옆에서는 스키를 타며/ 즐겁게 놀고 있는” 사이에 뛰어들어 얼음을 지치며 놀다가 넘어졌는데, 알지 못하는 나그네 아저씨가 도움을 주어서 고마웠다고 회상했다.

“임진강에는 언제 가보셨어요?” 나의 질문에 할머니는 “어데, 가 본적 없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에게 들었다. 꼭 한번은 가보고 싶대. 그래서 한번 생각해봤다.”라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김선생, 어떻노? 얼음이 얼모 팽이도 돌리고 얼음썰매도 탄다. 임진강은 저 우에 있으니 얼음이 더 얼었을 끼다.” 할머니는 눈을 지긋이 감고 혼자만의 생각에 젖어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편안해 보여서 말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실만 시로 읊거나 말을 하다가 상상으로 시를 읊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시 속에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많은 인파”)이 등장하고, 스스로 그 인파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놀았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우물물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이웃사람들에 대한 원망에서 벗어나 넘어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나그네에게 마음으로 답례를 하는 것은 어떤 변화일까?

어쩌면 고달픈 현실의 삶에서 희망을 찾고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할머니의 팔을 잡았다. “으응?”하며 나를 보는 할머니의 눈빛은 잔잔했다. 얼굴에는 밝은 빛이 서려 있었다. 며칠 계속된 감기로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할머니는 어두웠던 과거에서 빛을 찾아내어 어둠을 밝음으로 바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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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있어 기쁨은 빛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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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시와 이야기를 통하여 찾아낸 빛은 어린 시절 책에서 읽고 동경했던 임진강에 대한 기억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갈 수 없었기에 마음 깊은 곳에 꽁꽁 묶어놓았던 임진강으로 떠나서 해보고 싶었던 얼음지치기를 하며 노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그 어떤 자유가 찾아 온 것은 아닐까.

온전한 자유란 혼자만의 세계를 떠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행해지는 실천이다. 비록 상상의 세계이지만, 많은 인파들 사이에 스스로 뛰어 들어가 놀다가 넘어지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그 행위야말로 할머니가 원하던 자유였다. 할머니와는 물 한 모금도 나누어 마시지 않으려 하던 과거의 이웃은 넘어진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웃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늘 과거의 낡은 생각과 결별해야 하는 의식이 따른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분노는 어리석음을 낳고, 어리석음은 눈과 귀를 가리고 미혹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 미혹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자각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지나온 삶을 때로는 시로 나타내고 때로는 말을 하는 경험으로부터 할머니의 자각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각은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할머니를 이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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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아무런 소식도 없이
회오리바람이 불어
온 스키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모자와 목수건이 날아가며
그 나그네 아저씨의 모자가
하늘로 뱅뱅 돌더니
임진강 흐르는 강가에 떨어져서
돌고 있는데 철새 한 마리가
날개 죽지가 부러져서
퍼득퍼득 뛰며
그 모자 속으로 들어가서
갑자기 사공이 되어 노를 젓고
끝이 없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네.
이 일을 보고 있는 나그네 아저씨는
고요한 말로
‘허, 참, 이상하다’ 하더니
뒤돌아서네.
나는 곁에서 눈이 땅에 흐리도록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신기하다고 느꼈네.
– 시[임진강에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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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던 나그네의 모자는 날개 죽지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의 피난처가 되어 어딘가로 흘러간다. 그것을 눈이 흐려질 정도로 보면서 할머니의 마음은 신기함으로 가득 차 있다. 상처 입은 새와 함께 할머니의 지난 삶은 어딘가로 흘러가고, 이제 할머니는 사람 사이에서 신나게 놀기도 하고, 타인의 손을 잡고 일어서기도 하는 활달한 소녀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강물은 스스로 흘러 바다로 간다. 나와 너, 자연과 인간이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도 강물처럼 가야할 곳으로 간다. 그러나 삶의 질곡은 우리를 세계와 단절시키고,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둠 깊숙한 곳으로 자신을 유폐시킨다. 유폐의 길고 어두운 시간을 지나 할머니는 닫혔던 삶의 문을 열고 새로운 희망의 공간으로 발을 떼기 시작했다.

내 고통의 실체를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삶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함께 볼 수 있다. 할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날개 죽지가 부러진 철새 한 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철새에게 모자를 양보한 나그네도 함께 놀던 많은 인파도 사라지고 할머니는 혼자서 멀리 사라져가는 철새를 보고 있다.

60년의 시간을 지나, 지금 여기에 있는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60년의 시간 동안 자신을 할퀴고 간 수많은 고통의 순간들을 할머니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병에 걸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던 지나간 시간, 병 때문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들, 어머니, 마쓰시타에 대한 기억도 철새 한 마리와 함께 강물에 흘려보낼 순간이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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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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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를 읊은 후에도 우리들의 만남은 한 달 정도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봄이 오고 있는데도 그날은 몹시 추웠다. 방바닥은 냉기만 면하고 있었고, 전기장판 위에서 우리는 이불을 무릎에 덮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담담하게 앞을 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자 오지 마라.” “내 할 말 다 했다.” “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 짧게 이어지는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스스로 드러낸 할머니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할머니가 시를 들려주면서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전에는 밤에 누우면, 무신 생각이 그리 많은지 잠이 안 온다. 잠은 안 오고 생각은 자꾸 나고. 눈물은 왜 그리 나오던지. 그런데 요새는 시 생각한다고 다른 생각이 안 난다. 뭐라고 할꼬. 우찌하면 잘 표현이 될꼬. 하룻밤에도 수십 번은 시를 썼다고 허물었다가 안 하나. 어떤 때는 머리가 아파서 에이 하지 말자 하다가도 또 생각하는 기라. 그라다보모 머리도 안 아프고 잠이 든다.”

“보래이, 김선생. 내 살아온 이런 이야기도 시가 되나? 참 우습제. 내 다시는 말 못할 줄 알았다. 하모, 누한테 말하겄노. 시를 생각하다보모 내가 나한테 말을 하는 기라. 그때는 그랬다. 아이다. 이랬다. 혼자 그라다보모 날이 샌다. 허허허. 참 우습제?” 그렇게 마음으로 쓰고 기억한 시를 구술하고 내가 받아 적은 후 다시 읽고 있노라면, 더러는 “아이가, 그기 아이다.” 하며 수정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시로 나타내기 위하여 온 정신을 다하여 집중하는 동안, 할머니는 자신을 얽매고 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지혜를 터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지혜는 자신의 삶을 시로 만드는 성찰과 집중의 과정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시와 이야기로 들려주며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마음의 파도를 잔잔하게 다스릴 수 있었던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할머니는 스스로 삶의 매듭을 풀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라는 말은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 준 나에게 한 말이자 할머니 자신에게 해주는 위안의 말이었으리라. 또한 구술을 할 때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치게 해 준 말이었다.

우리들의 마지막 만남이 있었던 15개월 후, 할머니의 전화번호로는 더 이상 신호가 가지 않았다. 지난 6월 5일은 할머니가 시간과 공간, 무수한 인연들로부터 자유로워졌던 날이다. 날개 죽지 부러진 한 마리 철새는 임진강물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서 현해탄을 건너 아들을 만났을까. 마쓰시타를 만나 아들의 존재를 알렸을까. 그리고 할아버지를 만나 내 옆에 있어주어 고마웠다고 두 손 마주 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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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유를 위하여[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혼자 하는 사랑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괴로운 것일까. 사랑의 시작은 달콤하고 절대로 이별이 없을 거라는 믿음으로 시작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행복한 시기에는 만남은 필연적으로 이별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설령 생각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랑에 이별 따위는 절대 끼어 들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이별의 상황에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음을 안다 하더라도 강제적이며 급작스러운 이별은 마음 깊은 곳에 그 마음보다 더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할머니에게는 마쓰시타와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현실로 받아들일 심리적 여유도 없었다.

할머니에게 마쓰시타는 어쩌면 괴로움 속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할머니가 처음 읊은 시 속에서 첫사랑은 풀벌레의 울음소리처럼 애달픈 기억이었다. 깊은 밤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도 할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슬픔을 나타낼 수 없었고, 그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고통이었다.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nogada4723/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시 <여름밤>의 부분-

 
할머니의 사랑은 그랬다. 60여년의 긴 시간 동안 오직 혼자 알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그리워해야 하는 사랑이었다.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간도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밤이 되면 우는 풀벌레만 함께 할 수 있었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그립다 말하지 못하고 홀로 잠 못 이루며 고통스러워야 했다.

그 고통의 시간은 또 다른 죄의식의 시간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을 할머니의 곁을 지켜준 할아버지에 대해 할머니는 “나한테 참 잘했어. 내가 아무리 성질부리고 고집을 피워도 그리 화를 안 내대.”라는 말로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참 똑똑했다. 시대만 잘 만났으모 한 자리 했을 끼다. 뭘 해도 뭘 맡아도 똑 부러졌거든.”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한 가정을 이루고 부부의 연을 맺어 의지하며 긴 세월을 살아온 정이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정이 따뜻하고 깊어도 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과 정을 검은 돌과 흰 돌처럼 확연하게 구분하여 정의내릴 수 없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사랑이나 그리움 같은 표현을 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마쓰시타에 대한 할머니의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의 가면을 쓴 집착이었을까? 18살 어린 나이에 만나 19살이 되어서야 마음의 문을 열고 20살에 헤어진 사람을 81세가 될 때까지 변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것일까? 사랑은 변하는 게 아니라고, 단지 그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거라고, 그래서 할머니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다면 무엇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집착하며 고통으로 살아왔던 것일까? 무엇이 할머니의 마음을 60여 년 전의 시간 속으로 자꾸 끌고 간 것이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할머니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할머니가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앉아 있었다. 어쩌다 치마 밑으로 발이 나오면 애써 치마를 끌어당겨 발을 감추곤 했다. 진물이 묻어 있는 할머니의 발을 볼 때에도, 전동 휠체어를 타다 넘어져 크게 다쳤을 때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할머니가 자유의지로 서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80평생을 살아오면서 할머니가 자신의 삶과 자신의 몸을 자기의지대로 할 수 있었던 게 언제였을까? 마쓰시타와의 사랑이 종말을 고한 그 시점까지였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할머니가 집착하는 것은 잃어버린 사랑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이 아닐까?

 

너무도 사랑하여
양손을 꼭 잡고
철로길을 걸으며 뛰며
동심에 싸여
아무것도 두렵고
무서운 걸 모르더라.
-시 <사랑>의 부분-
 
서로가 웃으며 변치 말자고
손을 굳게 잡고 다짐하며
맹세도 하였더라.
이것이 영원한 우리의
사랑의 속삭임이었더라.
-시<첫사랑 이야기 1> 부분-
 

애당초 나와 마쓰시타는
맺어질 사랑이 아니었구나.
국경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니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보내주리라, 가거라
속절없는 사랑, 미련 없이 보내주마
-시<첫사랑 이야기 2>부분-
 
넘어지며 엎어지며 미끄러질 때마다
사랑하는 그대의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우리의 정으로 더 깊이 들더라.
-시<눈 내리는 날> 부분-

 

마쓰시타에 대한 기억은 사랑에 대한 영원한 약속에서 체념으로, 그리고 따뜻했던 정으로 이어진다. 사랑에 대한 약속도 이별도 할머니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비록 ‘국경이 다르고 나라가 달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이별도 할머니의 의지였다. “보내주리라, 가거라/ 속절없는 사랑, 미련 없이 보내주마”하며 체념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제 따뜻한 기억으로 돌아와 있다.
 

내게도 행운이 있었던가
김철수라는 청년을 알아서
60년 동거생활하며 그 안에서
예쁜 딸을 선물로 하나 받았더라.
-시<내 인생길> 부분-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행운”으로 표현하며, 딸은 선물로 여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21살 때 만난 청년 김철수로 호칭한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 60년 세월을 ‘결혼생활’이라는 말 대신 ‘동거생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언어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따지는 것이 때로는 무의미하기도 하지만, 불쑥 나오는 언어를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본다면 결혼이 아닌 동거는 할머니가 생각하는 자신의 결혼관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다.

마쓰시타와 함께 한 시간들과 이별이 자기의지에 의한 것이었다면, 할아버지와의 결혼은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일본에서 온 용한 의사를 만나기 위해 떠돌이 약장수를 따라 간 결과 이루어진 반강제적인 결혼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이루어진 결혼을 인정할 수 없었노라고 이미 수차례 되뇌었다.

살면서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여길 정도로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비록 자신의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입양시켜 보냈지만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선물이라고 여길 정도로 귀한 인연이었지만, 그 결혼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마쓰시타와 헤어진 이후의 60년은 온전히 할머니의 삶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도 살았노라고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삶이었다.
 
 

선택의 자유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것들은 이제 더 이상 할머니의 삶을 흔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눈 내리는 날의 따뜻한 정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60여 년을 찾아 헤맨 것은 삶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였다. 한센병이 찾아오면서 할머니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살다보면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방종으로 낭비하면서도 그것을 자유라고 여기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는 자유의지로 할머니를 찾아왔고, 할머니도 자유의지로 나를 맞이해 주었지만, 두 자유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내 연구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할머니를 만났고, 할머니는 삶으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나를 만난 것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만으로 얼마나 많은 올가미를 만들고 덫을 만들어 스스로를 구속했는지, 그리고는 살기가 힘들다고 푸념했는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는 생각의 자유마저도 없었다.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었고,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애써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도 외압에 의해 뺏기고 낯선 곳으로 강제 이주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60년 동안 자신의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사랑과 슬픔을 시로 읊었다. 비록 자유롭게 선택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선택한 것이 나와의 만남이었다. 선택의 자유, 온전한 자유가 항상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선택에 의해 내일 불행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애써 일구어 왔던 꿈이 사라질 수도 있다. 다만, 선택의 자유에 의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만큼 가슴 벅찬 일이 있을까.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풀어놓음으로써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자유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할머니는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온전한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할머니가 열어야 할 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는[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설렘과 기쁨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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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기억은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그 날로 돌아갔다. 할머니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눈은 고통의 기억이었다. 떠돌이 약장수에게 속아 한센인 집단촌으로 갈 때 눈길을 걸어갔던 기억을 고통스럽게 떠 올렸었다. 하지만 꽃이 가득했던 교정과 고향마을은 이제 하얀 눈이 마을을 뒤덮은 설날 아침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설렘과 기쁨 그 자체였다. 대문을 나서면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길가 곳곳에 피어 있었고,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던 것이 꽃과 나무였다. 산속에 버려져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사투를 벌일 때의 나무들은 할머니가 넘어야 했던 장애물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나무는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던 휴식처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기억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오래된 시간 속의 사물에 대한 기억은 이미지로 남는다. 그 이미지는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정신 속에 살아남아 기억의 주인과 함께 태어나고 늙어가며 사라져간다. 즉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사물이 반복하여 만나고 그 만남이 생의 전환점과 연관되어 있다면 기억은 이중의 잠금장치를 한다. 가장 오래된 기억이 뒤에 만난 기억에 의해 묻혀 잊히게 되는 것이다. 꽃과 나무 그리고 눈은 할머니의 유년기를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들이지만, 그 이후 할머니가 경험한 고통들에 의해 원초적인 기억은 사라졌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할머니를 들뜨고 행복하게 했던 기억들이 발병 후 이어지는 고난 속에서 기억 저 너머로 아득히 사라지고, 행복했던 기억의 자리에는 고통스럽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이별과 회한의 기억들이 자리 잡았다. 그 기억들은 너무나 단단하고 야멸치게 할머니의 삶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고통의 기억들을 걷어내고 행복하고 설레던 그 시절로 할머니는 돌아가고 있었다. 60여 년 동안 열리지 않는 문 안에 유폐되어 있던 그 기억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년기의 기억을 하나하나씩 읊조리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할머니의 작은 심장박동이 나에게로 옮겨와 나는 온 몸이 떨리는 긴장 속에서 할머니가 읊조리는 시를 받아 적었다.

소록도 설경(출처: 블로그southern-se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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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아침에

 

정월 초하룻날 설날이 되었다

잠에서 눈을 떠

창문을 열고 보니 폭설이 내려서

온 바다를 흰눈이 덮었고

은빛 찬란함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더라.

눈 내리는 날에 가장 좋아하던

우리 집 바둑이는 천지를 돌아다니며

뒹구르며 좋아하며 짖는 그 소리가

노래같이 들리더라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랍더라.

장독 위에는 소복소복 쌓인 눈이

연꽃같이 희고 아름다웠더라

대밭의 댓잎에서는 흰눈이

소복소복 쌓여서 칼끝과 같이

쪼삑쪼삑 하였더라.

소나무에도 많은 눈이 쌓여서

목화같이 보이기도 하고

눈꽃같이도 아름다웠고

좋게 보이더라.

우리 집 지붕 끝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보기에 경치가 좋았더라.

나는 설날의 음식과 떡국으로 차려서

아랫마을의 할머니 집으로

세배를 나섰더니 눈 속에서

길을 몰라 헤맬 때

바둑이가 내 앞에 뛰어와서

길을 인도하였더라.

그 후에 사랑하는 임과 함께

큰 눈덩이를 만들어 굴리고

눈사람을 만들어

머리에는 고깔을 씌우고

임과 둘이서 어깨 손을 얹어

사진을 찍으며 기뻐하였더라.

그리고 눈덩이를 만들어

서로 던지며 때리며 싸움이 벌어져

어린아이 같은 동심으로

돌아갔더라.

넘어지며 엎어지며 미끄러질 때마다

사랑하는 그대의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우리의 정으로 더 깊이 들더라.

팔십 평생을 살아도

눈 나리는 이 날이

잊혀 지지 않고

옛 추억이 그립더라.

눈 나리는 어느 날.

-<눈 내리는 날> 전문-

 

시 <눈 내리는 날>은 할머니의 10번째 시이다. 이 시 속의 바다는 아이를 남겨두고 돌아오면서 자살을 기도하던 예전의 바다 대신 흰 눈이 뒤덮어 은빛으로 빛나는 눈부신 바다이다. “그거는 바다가 아인기라. 얼매나 눈이 왔는지 바다가 안 보이더라” 어린 시절 보았던 눈 온 날 아침의 바다는 할머니에게 은빛으로 빛나는 기억이었다.

오래 전에 마주쳤던 사물은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거나 희미해진 채로 기억된다. 이때의 사물은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이미지로 남게 되는데, 은빛의 바다 이미지는 살아야 할 의미를 상실하고 죽음을 시도했던 바다의 기억을 뭉개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꿈을 키우며 뛰어 놀았던 울산 앞바다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실제로 아무리 많은 눈이 내려도 바다를 뒤덮지는 못한다. 바다의 색깔조차 바꾸지 못한다. 어쩌면 할머니가 은빛 바다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백사장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나는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할머니의 얼굴에 피어나는 행복감을 논리적이며 건조한 이성의 언어로 파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지만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기억이 있다. 몇 살쯤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날은 눈이 많이 왔었다. 눈길을 걸어 학교 운동장에 갔을 때, 그 곳에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바다가 있었다. 나는 그 바다 위를 발자국을 찍으며 걸었고, 강아지도 나를 따라 폴짝폴짝 뛰어 다녔다.

아무도 없는 그 곳을 뛰어다니며 강아지와 놀던 어린 나는 마치 그림 속의 풍경처럼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어른이 되고 세상사에 지칠 때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기억 속의 나를 멀리서 바라보며 위안을 받곤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나의 기억을 사실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눈이 내린 적이 없고, 우리 집에는 강아지가 없었으며 가족 중 그 누구도 어린 나를 아침 일찍 학교에 가게 내버려둔 적이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이 조목조목 아무리 많은 증거를 들이대며 나의 기억이 거짓이라고 논리적으로 말해도 따뜻하고 포근한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은 숨어 있는 진실처럼 나에게는 비밀스러운 기쁨이 되었다. 할머니의 시를 들으며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연꽃같이 희고 아름답게

 

할머니는 오래 전의 눈 내린 날 정경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눈이 내려앉은 대나무 잎, 마치 목화처럼 보이는 눈 쌓인 소나무, 눈이 녹아서 흘러내리다 얼어붙은 처마 끝 고드름까지 그 모든 정경을 마치 오늘 아침에 본 것처럼 이야기했다. “눈이 그렇게 많이 왔는데 설날 세배를 혼자 가셨어요?” “흠흠흠”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어깨를 웅크리며 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쪼끔만 기다리면 같이 갈긴데 내가 그냥 나섰제.” “그래서 길을 잃으셨어요?” “뭐 길을 잃었겠노. 눈이 하도 마니 와 놔서 좀 낯설기도 하고 강아지가 하도 날뛰니까 쫓아가다 딴 길로 가기도 하고 그랬제” 말하는 내내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할머니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 <눈 내리는 날>에서 눈에 띠는 것은 마쓰시타와의 추억이었다. 할머니가 시에 묘사하는 눈 오는 날의 정경이나 있었던 일은 분명 마쓰시타를 만나기 이전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 가서는 마치 눈이 많이 온 그날 마쓰시타를 만나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함께 만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마쓰시타는 허무와 고통의 얼굴로 표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쓰시타와의 기억은 언제나 분명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눈 내리는 날의 빛나는 정경과 함께 마쓰시타와 함께 했던 기억이 포개어지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질문했다. “마쓰시타와 눈사람도 만들었어요?” “응, 참 많이 엎어졌다. 그때마다 일으켜 주는 게 좋아서 또 엎어지고 했제”

눈 오는 날 마쓰시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과 마쓰시타와의 기억이 하나로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마쓰시타와의 사이에 있었던 아픈 기억이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에 의해 조금씩 덮여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으며 보냈던 유년의 기억들이 발병 후의 고통스러운 기억에 의해 시간 저 너머에 은폐되어 있다가 조금씩 모습을 내미는 것처럼 고통의 기억들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게 아닐까?

마쓰시타와 함께 했던 눈 오는 날의 기억은 ‘사랑하는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정으로 더 깊이 들’던 행복의 시간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팔십 평생을 살아도 잊히지 않는 그리운 시간으로 할머니의 사랑은 돌아오고 있었다. 이전에 구술했던 시에서 보였던 고통과 회한의 기억 대신 연꽃같이 희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푸른 하늘 밑에는 내 살던 집이 있겠지[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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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오래된 풍경

 

기억 속의 풍경은 원색보다는 무채색에 가깝다. 아주 오래된 시간 속의 풍경이 원색으로 재현된다는 것은 그 기억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색깔만이 아니라 어떤 소리, 어떤 풍경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고 점점 더 뚜렷하게 기억으로부터 떠오른다.

나에게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시간은 유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교실 옆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 주변에는 가지가 늘어져 땅에 닿는 버드나무가 있었다. 버드나무 잎은 처음에 연한 노랑을 띤 연둣빛에서 점점 초록으로 물들어갔다. 연못에 담긴 버드나무 잎을 보는 내내 나는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매일 걸어 다니는 등교 길에서 이른 아침에 만나던 초록빛 군무는 가끔 꿈에서도 만난다. 보리가 익기 전, 바람 따라 춤을 추던 보리들은 초록빛 바다였고, 나는 그 초록빛 군무에 넋을 잃고 서 있곤 했다. 마치 바람마저 초록빛이 되어 그 바람 속에 서 있는 나는 투명한 초록빛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착각에 빠졌다.

나이 들어가면서 힘들거나 분노를 느낄 때 어린 시절의 그 기억들은 나의 마음을 평화롭게 가라앉혀 주었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땐 참 행복했지.’라는 생각에 젖어들고,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고 나는 살아야 할 의미가 있는 가치로운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도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고, 그 행복에는 이유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나는 또 다른 행복감을 느꼈다.

유년의 시간은 그런 것이다. 시인 김춘수도 유년의 기억을 천사와 함께 하고 있다. 남녀의 구별이 없고 선과 악의 구별이 없는 시간, 그 시간이 천사와 같은 유년이 아닐까.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시간, 본성과 자연에 충실한 시간이 유년이 아닐까. 따라서 유년은 순수 그 자체일지 모른다. 유년은 온전함 그 자체일지 모른다.

시인 천상병은 ‘뼈와 살을 태우던’ 고통의 기억을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함으로 지워낸다. 천상병의 초기 시는 매우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면이 있지만, 고통의 시간 이후에 쓴 시들은 점점 후기로 갈수록 어린 아이처럼 기교가 없어진 단순?간결한 미를 지닌다.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은 약을 먹기 때문에 단순해진다고 말했다지만, 천상병은 본성에 충실하고 자연에 가까웠던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그의 고통을 스스로 치유했다고 본다.

어떤 인위성도 없고 강압적인 힘도 없던 그 시절이 유년이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 본성과 자연성을 하나씩 상실해 갈 때마다 유년의 기억도 하나씩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 가라앉는 것이리라. 그러다 지극한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그 시간의 끝에서 나를 바라볼 때 유년의 기억은 마치 거짓말처럼 하나씩 떠오르는 것이 아닐까.

 

고향을 노래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의 시는 유년의 기억으로 가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네.

아, 고향에 가고 싶다

보고 싶기도 하다

못 가는 신세가 되었으니

저 푸른 하늘 밑에는

내 고향 내 살던 집이 있겠지.

 

집옆에서는 올해에도 살구나무에

활짝 핀 살구꽃이 피었겠지

마당 뒤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꽃이 떨어지면

바가지로 주워담아

실로 꿰어서 목에 걸던

그 어린 시절이 그립구나

장독 뒤에는 목단꽃이

활짝 피어 그 옆에는 나리꽃이

돌담 위에는 호박 덩굴이 올라가서

금년에도 익은 호박이

주렁주렁 누렇게 매달렸겠지.

삽짝거리로 나와서

돌다리를 건너

사랑하는 모교에 가고 싶구나

칠계단을 올라가면

우편에는 벚꽃나무와

좌편에도 벚꽃나무가

엉겨 붙어서 봄이 되면

벚꽃이 장관이더라.

사계단으로 올라가니

매실 열매가 무르익어서

벌겋게 익으면 많은 사람 보시기에

입맛을 돋운다.

그리고 칠계단으로 올라가 서니

큰 운동장에서는

우리가 뛰놀던

그 모습들이 떠오르네.

운동장 옆에는

전부 벚꽃나무가 줄을 서서

너무나도 아름답더라.

친구들과 사진 찍던

그 추억이 떠오르며

선생님과 기념촬영도 했건만

모교가 잊혀지지 않고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네.

 

언제나 가보리

언제나 보고 싶어

먼 산만 바라보네.

-<고향> 전문-

 

9번째 시 [고향]에서 할머니는 고향을 회상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말과 말 사이에 으레 있던 침묵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 보며 천천히 말을 하던 평소와 달리 나를 보며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봐라, 김선생. 니 감꽃으로 목걸이 걸어봤다 했제?” “니 감꽃 냄새 기억하나?” 할머니는 나의 맞장구에 씨익 웃으며 시를 읊었다.

특히 시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과 동네, 그리고 학교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마치 지금 이 순간 그 곳을 걷고 있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한 구절 한 구절 시를 읊어 나갔다. 할머니의 시를 받아 적는 동안 잔잔한 호수 가를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져왔다. 기억 속의 고향은 꽃밭이었다.

할머니는 시 [고향]에서 ‘가고 싶다’ ‘그립구나’ ‘아름답더라’는 표현으로 고향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갈 수 없는 마음을 “저 푸른 하늘 밑에는/내 고향 내 살던 집이 있겠지.” “언제나 가보리/언제나 보고 싶어/먼 산만 바라보네”라는 표현으로 묘사했지만, 그 그리움마저도 할머니에게 찾아온 작은 행복을 어쩌지 못했다.

시 [고향]에 묘사되는 여러 종류의 꽃은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는 고향이 할머니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말해 준다. ‘집 옆에는 활짝 핀 살구꽃’이 있었고, ‘마당 뒤에는 감꽃’이 가득 떨어져 ‘바가지로 주워 담아 실로 꿰어 목에 걸’고 다녔다. ‘장독 뒤의 목단꽃과 그 뒤에 피어 있는 나리꽃’ ‘돌담 위를 오르는 호박 덩굴’에는 ‘누렇게 익은 호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유년의 집은 이제 갈 수 없지만 할머니의 기억 속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삽짝거리로 나와서/돌다리를 건너” 학교에 가면 그 곳은 벚꽃천지였다. “벚꽃이 그렇게 많았어요?” “하모. 요요 칠계단이 있었거든. 조게는 사계단이 있었고”라며 말을 이어가는 할머니는 마치 나의 손을 잡고 그 계단을 오르는 듯이 보였다. 두 팔을 넓게 벌려 한 손으로는 “여게 칠계단이 있는 기라”하며 허공의 한 지점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는 허공의 어딘가를 가리키며 “여게는 사계단인데, 계단을 오르다 서서 돌아보면 온통 벚꽃천지제.”

뭉툭한 할머니의 손끝을 따라 좁은 방안 가득 벚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큰 운동장 한쪽에서는 어린 할머니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뛰고 있었고, 계단 위에서는 또 다른 어린 할머니가 학교를 가득 덮고 있는 벚꽃을 경이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린 할머니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벚꽃들은 우리가 앉아 있는 방안 가득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덥던 여름 날 할머니의 집을 처음 방문하던 그날, 나를 맨 먼저 반겨준 것도 꽃이었다. 대문도 없고 울도 없는 집에 울타리 대신 피어 있던 코스모스가 생각났다. 그 마을은 꽃이 없는 집이 많았다. 많은 집들이 마당을 시멘트로 개조하였고, 마을 곳곳에도 산속 시골마을치고 꽃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 입구 교회 옆에 있던 키 큰 야생화가 그나마 눈에 띄었다. 교회 예배실 앞에는 화분에 꽃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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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문이 열리다

 

할머니의 유년 기억 속에 유난히 꽃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잊고 있었던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꽃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발병을 알고 난 뒤부터 할머니의 삶에서 꽃은 사치였는지 모른다. 발병과 함께 시작된 할머니의 고통 속에서 꽃은 더 큰 상처로 남았던 게 아닐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꽃으로부터 할머니는 상실의 아픔을 더 크게 느꼈을지 모른다.

시인 김춘수는 꽃을 보며 환희와 행복을 노래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가지의 끝에서 수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시간의 운명을 보았다. 김소월은 저만치 홀로 피어 있는 꽃으로부터 끝없이 순환하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찾았다. 삶의 아픔을 지닌 사람들에게 꽃은 아름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할머니에게도 유년의 꽃은 깊은 절망과 메울 수 없는 상실의 시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즐거움을 느끼는 것, 즉 쾌락은 매우 간단하다. 보고 싶으면 보고, 보아서 좋으면 즐기면 된다. 간단한 쾌락 대신 고통이 자리 잡는 것은 자아의 붕괴를 의미한다. 더 이상 내가 나를 즐겁게 바라보지 못할 때, 나 자신으로부터 행복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의 자아는 이미 붕괴되어 있는 것이다.

자아의 붕괴는 지극한 심적 고통을 동반한다. 고통은 그것과 연관된 것들을 무의식의 세계로 밀어 넣고 문을 잠가 버린다. 이 고통의 끝에서 유년의 기억이, 꽃의 기억이 되살아나 그 기억을 이야기하며 지금 현재를 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무엇이 60년 동안 굳게 닫혔던 무의식의 문을 열게 했을까?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아니 오히려 꽃의 기억이 할머니의 얼굴에 홍조를 가져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할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야야, 김선생. 벚꽃나무가 얼매나 큰지 모른다. 그 큰 나무들이 전부 꽃을 활짝 피우면 학교는 꽃밖에 안 보이는 기라. 이리이리 계단에 서서 손을 내밀면 꽃이파리가 손바닥에 떨어진다. 후 하고 불면 또 날아가는 기라.” 나도 할머니를 따라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바닥을 떠난 벚꽃 하나가 내 손바닥 위에 앉는 환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 안의 나를 만나러 가는 길[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한 마리의 귀뚜라미?

날씨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한낮이라도 웃옷을 걸치지 않으면 서늘함이 느껴지는 계절인데, 할머니의 방문 앞에 귀뚜라미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꼼짝을 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마루를 손으로 살짝 두드려도 미동조차 없었다. 나는 그날 아픈 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할머니를 찾아갔기 때문인지 그 귀뚜라미 한 마리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김선생이가? 안 들어오고 그서 뭐하노?” “귀뚜라미가 꼼짝을 안 하네요. 얼어 죽었을까요?” 나의 물음에 할머니는 크게 웃었다.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다. 언제나 소리 없이 얼굴만 웃었는데, 그날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공기를 가볍게 날리는 웃음소리가 아니라 내 주변의 공기들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웃음이었다.

“어제 밤에 그리 울더라. 그런데 니는 보이나? 나는 안 보여서 어디 간 줄 알았네. 인자 앞도 잘 안 보인다.” 할머니는 백내장으로 시야가 맑지 못하다. 밤새 울던 귀뚜라미가 방문 앞 마루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할머니는 그렇게 큰 소리로 웃었던 것이다. 눈 앞에 있는 사물을 볼 수 없는 날이 올 때, 나도 그렇게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을까?

감기는 낫지 않고 있는데 날씨가 계속 추워지자 할머니의 눈에는 눈곱이 떨어지는 날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날따라 할머니의 눈에는 커다란 눈곱이 매달려 있었지만, 그마저도 전혀 감각을 못 느끼고 있었다. 나환자들의 친구로 불리는 폴 브랜드는 고통을 신이 준 선물이라고 했다. 폴은 오랫동안 한센인들을 돌보고 치료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여 병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는 그들을 보며 고통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통이 꼭 몸의 감각에 의해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견뎌야 하는 마음의 고통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 탓인지 그날따라 할머니의 모습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날이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바늘에 찔리는 것과 같은 아픔이 밀려왔다.

 

2. 고향의 가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상념에 잠겨 말없이 앉아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할머니였다. “김선생, 집에 뭔 일 있나?” “아뇨” “왜 말이 없노?” 나는 할머니에게 당신 때문에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말을 할 수 없노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이상하게 당신의 고통이 나에게로 옮겨 와 내가 너무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매주 당신을 마주 하고 앉는 이 시간이 이제 너무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속였다. 웃으면서 “가을이 오니 심란하네요.”하며 가을 탓으로 돌렸다. “하이구, 니도 가을 타나?” “왜요? 저도 여자인데요.” 우리 둘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렇다. 할머니도 여자고 나도 여자이다.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마음속에 비밀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비밀이 불쑥불쑥 밖으로 나오려고 하면 수다스러워지거나 말이 없어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제가 어릴 적에요, 나무가 요술을 부리는 줄 알았어요.” “왜? 나무가 니보고 뭐라카더나?” “그게 아니고, 나뭇잎이 색깔이 변하잖아요. 그것도 이상한데 어떤 것은 빨갛고 어떤 것은 노랗긴 한데 안 예쁜 것도 있고, 신기하잖아요.” “니는 그런 것도 아직 기억하나?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 “옛날에는 기억이 다문다문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인자는 어릴 때는 없고 그냥 한 덩어리로 기억이 남아 있다.”

가을 하늘은 푸르고 맑기만 하더라

산천초목에는 붉은 물 든 단풍들이

장관이더라.

한 고개 내려와 보니

은행나무 잎에는

노리고도 노란 색깔 위에

황금빛을 나타내며

흐르는 잎마다 주워서 책 속에 넣던

옛 추억이 떠오르네.

뒤돌아보니 금수화꽃은

우리 한반도 지도처럼

차분하게도 피어 있더라.

온 들에서는 코스모스가 피었고

길에도 피어 색색가지로

자기를 나타내며

뽐을 내고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교만해 보이더라.

-부분-

할머니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유난히 나무가 많고 꽃이 많았다.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올 때마다 나무가 다르게 보였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할머니는 그 풍경이 좋아서 계단마다 서서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때로는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얼마나 좋은지 심심하면 계단에 갔제.” 학교는 배움터이자 놀이터였다.

할머니 기억 속의 고향 가을은 황금빛이었다. 황금빛 은행나무, 나지막이 피어 있는 금수화(금당화) 등은 많은 시간이 지나도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자연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기억이 있다. 시간의 벽 속에 갇혀 원래의 모습 그대로 기억되어 있는데, 할머니에게 고향의 가을은 변하지 않는 기억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기억들은 잊혀지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어 현재의 삶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삶의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마쓰시타, 어머니 그리고 아들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의 삶을 고통 속에 빠지게 했다면, 어린 시절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에게 삶의 휴식을 주고 있었다.

 

3. 고통의 강을 건너?

처음 썼던 시에서 자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이 밤도 뒹구르며/몸부림칠 때/눈물이 강이 되어/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면,에서 자연은 할머니에게 행복했던 시간을 되돌려주고 있었다. “꽃도 많고…. 가을이 되어도 코스모스는 있는 기라.” 60여 년 전에 피었던 코스모스는 할머니 집 마당 앞 공터에도 피어 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코스모스는 같은 코스모스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들은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거나 그 의미가 퇴색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은 고통이 되거나 행복이 된다. 할머니에게 기억은 고통이자 행복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삶은 어떤 양상을 지닐까?

살아가면서 생활의 규칙이나 법은 그대로 지키면 되지만 마음은 지킨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또렷하게 각인되어 현재의 삶을 고통 속에 머무르게 한다.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내 마음이지만 내가 다스릴 수 없고, 자꾸 떠오르는 기억을 지울 수도 없다.

잃어버린 것, 가지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며 마음이 슬퍼할 때, 나에게 남겨진 것을 생각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상처나 고통 같은 단어는 없어지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현재 남겨진 것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불행과 나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것들의 면면을 들여다 볼 때 고통과 슬픔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진정한 부정이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부정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며 그 과정은 험난하다. 혼란과 고통의 바다에서 스스로 삶의 중심을 잡고 희망의 키를 돌려야 하지만, 당장 살아나가야 하는 시간들은 눈앞에 있고,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할머니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몸으로 낳은 두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고,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딸 하나를 가슴으로 낳아 키웠다.

눈을 뜨면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돼지우리를 치우고 닭을 기르며 계란을 팔아 생을 이어갔다. 아무도 상처 주지 않았지만 삶 자체가 상처가 되는 시간들이었다. 누구에게나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스스로 받는 상처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처는 더 깊이 파고들어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상실한 채 휘몰아치는 시간의 강을 건너 할머니는 이제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고향의 자연으로부터 쉼터를 발견하고 있었다. 9번 째 시에서 할머니는 비로소 행복했던 유년의 시간을 찾고 있었다. 할머니는 혼란과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4. 유년의 기억 속으로?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이 낯설고 힘들지라도 자신을 오랜 시간 동안 어둠속에 가두었던 고통과 상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면, 오히려 그 얼굴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이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로 다가올 때, 상실했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지금 잊고 있었던 유년의 기억을 통하여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또 다른 자기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운동장 옆에는

전부 벚꽃나무가 줄을 서서

너무나도 아름답더라.

친구들과 사진 찍던

그 추억이 떠오르며

선생님과 기념촬영도 했건만

모교가 잊혀지지 않고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네.

-부분-

할머니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병과 타인의 질시 같은 오염된 기억이 아니라 순수하고 맑은 유년의 기억이었다. 고통과 상처는 우리가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오만과 교만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우리는 고통으로 아파하고 잃어버린 것으로 절망한다. 그러나 고통과 상실로 다시 일어서기도 한다. 고통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가장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고통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므로 마치 가뭄에 뿌리가 타들어가는 아픔을 이기고 싹을 틔우는 잡초처럼 우리를 강하게 단련시킨다. 할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들을 떠나보내고 어머니를 여의는 고통과 슬픔의 강을 건너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첫발을 디디고 있었다.

또 다시 찾아 온 이별[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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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딸을 보내다

세월은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아도 잰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시 오기를 몇 번 되풀이하자 험하고 삭막하기만 하던 산이 사람들을 품어 주었다. 그들이 사는 산속 마을에도 햇살이 찾아와 주었고 바람도 놀러 와 주었다. 다람쥐들은 도토리를 나누어 주었고, 새들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폭풍 같은 시간들이 지나고 생활이 안정되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사람이 사는 곳에 문제가 없을 리 없겠지만, 할머니에게 다가온 문제는 깊이 묻어 두었던 상처를 꺼내는 것이기도 했다. 죽음의 길을 가는 엄마를 끝없는 울음소리로 돌려 세웠던 그 딸을 이제는 할머니 스스로 떠나보내야 했다.

살리기 위해 아들을 떠나보냈는데, 이제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딸을 보내야 했다. 딸이 자라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걱정은 시작되었다. 딸은 소위 말하는 ‘미감아’였다. 예쁘고 영리했지만 아이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자라면서 말이 없어지고 침울해지는 아이를 보면서 할머니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밤이 오면 마당을 나와 밤이 새도록 서성거렸다. 달빛에 마음이 아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까닭모를 설움이 올라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했다. 그때마다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지만, 그 희망을 모질게 끊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울산에 있는 저거 큰 아부지한테 보내기로 했다. 큰 엄마도 보내라 카대. 데리고 있으모 안 된다고…” 딸아이는 큰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말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알았던 게지. 지가 여기 있으모 어떤 소리를 듣는지.” 단순하게 거주지를 옮기고 학교를 옮긴다고 ‘미감아’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몇날 며칠을 서로 말없이 얼굴을 외면했다.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아이를 영원히 보내야 한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곧 4학년이 될 것이다.

2. 그림자로 남은 엄마의 자리

“4학년 올라가기 직전에 갔다.” 할머니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툭 내던지듯이 말했다. 아이는 울지도 않고 큰 아버지 손을 잡고 갔다. “호적도 파 줬다.” 딸은 그날 이후 법적으로는 할머니의 딸이 아니라 조카가 되었다. 아이를 보내고 난 후 할머니는 덧나는 상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센병이 찾아 온 이후로 할머니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았지만, 자식을 보내야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이제는 만나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승팔이에 대한 그리움과 먹고 살 수 있는데도 보내야 하는 딸에 대한 애잔함이 할머니를 깊은 절망의 늪으로 끌고 갔다.

분명히 나의 일인데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할머니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우짤기고. 내가 뭐를 할 수 있겄노. 그냥 숨만 쉬었제.” 그런 할머니를 할아버지는 위로하고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가까이 있으니 만날 수 있다고, 여기서 사는 것보다 훨씬 잘 되었다고, 그렇게 도닥거려 주었다.

할머니도 이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깊이 묻어 둔 그리움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립다 말이라도 하면 좀 나아지겠지만, 그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골목길을 뛰어 나올 때 등 뒤에 들리던 승팔이의 울음소리만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 울음소리를 떨쳐내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다. 닭모이를 주고 똥을 널어 말리고, 계란을 모았다. 돼지우리를 밤낮 없이 치우고 또 치웠다.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면 새파랗게 날이 선 서러움이 밀려와 눈물이 흘렀다. 그 옛날처럼 말도 못하고 우는 게 아니라 아이가 보고 싶어 운다고 말할 수 있어서 울고 또 울었다.

딸은 방학이 되면 엄마를 찾아와 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뜸해졌지만, 엄마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끈을 놓은 적은 없었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할 때, 이제는 딸이 울었다. 딸의 부모는 더 이상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었다. 딸이 엄마의 품을 떠나던 초등학교 4학년부터 지금까지 할머니는 그림자가 된 엄마였다.

딸이 떠난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작은 딸이었다. 우연히 마을에 들어온 작은 여자 아이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할머니는 작은 딸로 받아들였다. 작은 딸은 할머니 곁에서 성장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작은 사위와 함께 수시로 찾아와 할머니를 돌보아 드린다. 가슴으로 낳은 딸이기에 때로는 더 측은하고 애틋하다.

작은 딸과 달리 마음대로 올 수 없는 딸은 전화로 자주 안부를 묻는다. “거의 매일 전화가 온다. 엄마 밥은 묵었나, 몸은 어떻노. 맨날 묻는다.” 딸은 오더라도 머물지 못하고 오전에 왔다가 오후에 돌아가지만,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홀로 계신 할머니를 틈틈이 돌보고 있었다. “우리 큰 사위는 나 모른다. 알모 안 되제.” 손자와 손녀가 장성하자 딸은 자신의 어머니를 알렸다. 성인이 되어 비로소 알게 된 외할머니를 손자 손녀는 방학 때마다 찾아와 주었다. 그리고 옆에서 자고 가기도 한다.

3. 가을을 앞에 두고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크고 무거운 삶의 고통일지라도 시간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할머니 곁에서 손을 잡아주던 할아버지도 떠나고 없다. 나란히 붙어서 문으로 연결되는 작은 방 두 개와 부엌, 그리고 옆으로 연결해 만든 목욕탕이 할머니의 공간이다. 마당 끝에 서 있는 간이용 화장실을 볼 때마다 할머니의 외로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이 없는 집의 마당 끝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마당에 서면 많은 차들이 고속도로 위를 끝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그 어디쯤에서 할머니는 닭과 돼지를 길렀다. “저 고속도로가 난다고 팔아라 하는데, 팔아야지. 그때 다 보상을 잘 받았다.” 땅을 보상받고 국가에 내어준 뒤 처음으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이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지나 겨울로 다가가고 있었다. 무성한 풀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 쓴 시에 “풀에 벌레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을 토로했었다. 방문을 열어 놓으니 제법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지만, 할머니와 나는 이불 밑에 몸을 반쯤 숨기고 저 멀리에서 달리는 차를 바라보았다.

“차가 많제?” “네, 참 많이 다니네요. 밤에 안 시끄러우세요?” “왜~~~, 아이고 큰 차가 지나가모 멀리서도 시끄럽제. 차가 저리 마이 다닐 끼라고 누가 알았겄노.” “하늘이 맑제? 파랗나?” “네, 진짜 가을이네요. 나가보실래요?” 백내장으로 흐릿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할머니는 처음으로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 대해 말해 주었다.
소록도의 풍경/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threagi74가을 하늘은 푸르고 맑기만 하더라.

산천초목에는 붉은 물 든 단풍들이

장관이더라.

한 고개 내려와 보니

은행나무 잎에는

노리고도 노란 색깔 위에

황금빛을 나타내며,

흐르는 잎마다 주워서 책 속에 넣던

옛 추억이 떠오르네.

뒤돌아보니 금수화꽃은

우리 한반도 지도처럼

차분하게도 피어 있더라.

온 들에서는 코스모스가 피었고

길에도 피어 색색가지로

자기를 나타내며

뽐을 내고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교만해 보이더라.

뒷동산에 올라가서 보니

고목나무에서는 주먹만한 밤송이가

이 구석에서 쿵 저 구석에서 쿵

떨어지는 알밤이

우리 맘의 욕심을 나타내더라.

시골길을 내려오니

돌담 사이사이마다

감나무 나란히 서서 가을 햇빛에

무르익은 붉은 색을 나타내고

감홍시 주렁주렁 매달려

보는 이로 하여금

탐스럽기도 하고 먹음직하기도 하고

우리의 맘을 끌고 있네.

고적지 담장 위로 돌아오니

벌써 시간은 황혼이었고

해는 서산으로 기울이며

오동나무에서는 오동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서 뒹굴 때마다

내 마음이 슬퍼지고 외로워져

옛 추억이 떠오르네.

눈에 고인 눈물이 볼 위에

주렁주렁 흐르면

이것이 가을의 계절인가

으악새도 슬피 울고 있네.

-전문-

4. 고통의 강을 건너

기억 속의 가을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고향은 어디를 가도 꽃이 피어 있었고, 가을이 되면 밤송이가 툭툭 떨어지고 감이 붉게 익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곳이었다. 마쓰시타를 만나고 한센병이 찾아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곳도 고향이었다. 승팔이를 낳아 떠나보내고 돌아왔던 곳도, 어머니를 한스럽게 묻었던 곳도 고향이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그 많은 시간의 강을 건너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도 고향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 고향은 더 이상 가슴 아프고 참담하던 곳이 아니다. 시을 한 행 한 행 들려주는 할머니의 얼굴은 평화롭고 따뜻했다. 생각에 잠긴 채 엷은 미소를 띠고 천천히 들려주었다.

“니도 감꽃 갖고 목걸이 만든 적 있나?” “그럼요. 제가 그 목걸이를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하얗고 향기도 좋고, 혼자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녔죠.” “나도 그랬다. 바늘에 실 꿰갖고 꽃잎을 연결한다. 그렇제? 하고 나모 손끝에서 감꽃 향기가 안 없어진다. 니도 그렇더나?” 할머니와 나는 시공을 뛰어 넘어 어린 시절의 공통된 기억을 찾아냈다.

그것은 감꽃 목걸이다. 여름을 앞둔 어느 날, 할머니와 나는 커다란 감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감꽃을 줍거나, 장독대 위를 하얗게 덮고 있는 감꽃을 한 손 가득 쥐고 와서 그늘에 앉아 감꽃 목걸이를 만들었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느 사이엔가 할머니의 기억은 고통의 강을 건너 유년의 행복으로 흐르고 있었다.

고향이 없는 사람들[치유시학]

?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고난 속의 작은 행복

 

미군들의 도움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주거 공간과 배고픔은 나아졌고, 무엇보다 건강 상태가 좋아졌다. 그러나 또 다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군들이 자주 왔다가고 집단적인 거주지가 형성되자 인근의 주민들이 한센인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몰려와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을 밤에 그 곳에 내려놓고 간 공무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입을 딱 벌리대. 누구 허락받고 예서 사느냐고 난리였다.” 지금까지 애써 억제해 오던 할머니의 감정에 작은 파문이 생기고 있었다. 여태껏 볼 수 없었던 결연한 표정은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위엄을 뿜고 있었다. 그 위엄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라 여겨졌다.

수십 년 전,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던 사람들,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했던 사람들의 분노가 할머니를 휘감고 있는 듯 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쉴 때마다 가슴은 눈에 띠게 오르락내리락 했고, 꼭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두 번의 백내장 수술로 흐려진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를 보았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였다.

60여 년 전에는 죽음만을 생각했지만, 이제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삶에 대한 의지였다. “입이 있어도 말 못한다. 그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하노. 사는 기 지옥인데.” 지옥과 다를 바 없는 삶은 연약한 한 여인을 강인한 여성으로 변모시키고, 끝없이 이어져 오는 고통은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게 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지만, 한센인들은 순간 순간 온 정성을 다해 숨을 쉬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하루 종일 온 몸으로 거친 땅을 일구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지극했다. “나는 일을 별로 안 했다. 못하게 하대. 아를 업고 가모 집에 가 있으라고 난리도 아닌 기라.” 자신은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해도 아내는 힘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마음, 그것은 남편의 사랑이었다.
항상 불안하고 고된 날들이 이어졌지만, 행복도 있었다. 아이는 천진하게 잘 자라 주었다. 가진 것이 없어 잘 입히고 잘 먹이지 못했지만, 아이는 엄마를 따랐다. 비록 다정한 말 한 마디 없는 아내였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기고 아껴 주는 남편이 있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가슴에 품고 사는 아들, 승팔이도 있었다.

 

 

2. 한 뼘의 땅

 

이웃 주민들의 반대는 인근 지역을 넘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군들이 오지 않는 날이나, 떠나고 난 후에 집단으로 나타났다. 마치 인근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한센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 했다. “어두워지모 겁나제. 갑자기 덮치모 어짤끼고.”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늘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커졌다. 미군들의 지원이 뜸해지던 때부터 마을 주변을 서성대는 사람들의 수는 눈에 띠게 불어났다. 인근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멀리에 있는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몰려왔다. 심지어 부산의 구포 지역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요구는 오직 한 가지였다. 자신들이 사는 지역 부근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멀리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센인들도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산에 버려져서 성하지 않은 손으로 나무 뿌리를 뽑고 돌을 치우고 만든 그들의 집이었기에, 한센인들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비록 나무에 군용천막과 비닐을 덮은 집이었지만, 그 곳은 한센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온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지켜낸 보금자리였다.

어린 아이들은 매일 반복되는 위협으로 겁에 질려 있었다. 밤이 되면 남자들은 조를 짜서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지켰다. 넒은 하늘 밑 그 어디에도 한센인들이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 곳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거지가 되어 돌팔매질을 당하며 동냥질을 하든가 어느 후미진 곳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가든가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날, 맨날 불안했지만, 아이고 참 힘든 날들이제. 누가 막 부르는 기라. 한센인들 중에도 여기를 소문 듣고 나중에 온 사람도 있었는 기라. 그 사람들 중에 누가 외지에 사는 친척이 있었거든. 그 친척이 하얗게 질려 갖고 안 왔나” 외지에 사는 친척이 다녀간 후 마을은 정적에 쌓였다.

“여게 상동 인근이랑 부산 사람까지 우리 모두 쥑인다고 모인다고 안 하나. 그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어찌 감당하겄노. 우리는 인자 꼼짝 없이 여게서 죽는 갑다 했제.” 인근 주민들의 요구대로 옮겨간다고 해도 갈 곳이 없을뿐더러 어디를 가도 도망 다니는 건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러대. 여기서 죽자고.”

할머니의 얼굴 근육이 떨리고 있었다. 나지막한 코끝에 앉은 안경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센인과는 이웃해서 살 수 없다는 그들의 논리에는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었고, 그들에게 타인의 존재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센인들이 떠나가더라도 비탈진 그 곳은 성한 이들의 땅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성한 이들은 자신들이 병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한센인들의 터전을 빼앗으려고 했다.
ⓒ에이블뉴스한센인들의 죄명은 “문둥이”이다. 시인 한하운은 자신의 시에서 “죄명은 문둥이…../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 한센병은 어처구니없는 죄명이며 이해할 수 없는 벌이기에 변호할 길이 없음을 한탄했다. 어처구니없는 죄명을 인정하고, 그냥 그 산속에서 살게 해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돌아오는 건 살기뿐이었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죽는 길 밖에 없으께 싸우자고 누가 그러대.”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함성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가서 낫이나 호미를 들고 나왔다. 누가 어떻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고, 합의를 한 것도 아니었건만 들 수 있는 무기는 모두 들고 모였다.

“밤이라 캤다. 그날 밤, 그 사람들이 몰려 오모 우리는 꼼짝없이 죽는 기라. 문둥이 죽는 거 한두 번 봤나. 누가 울어주기라도 하나. 문둥이 시체는 제대로 거다(거두어) 주지도 않는다.” 죽어서도 서러운 사람들, 주검마저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그들만의 죽음을 지나온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들이 몰려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가야한다고 했다. 어린 아이가 딸린 아녀자만 빼고 남녀노소 모두 손에 낫과 호미를 들고 산속에서 나왔다. 누더기를 걸치고 손과 발에는 진물이 배인 천을 감고 성치 못한 발로 그들은 걸었다.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이겼다.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한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한센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다가가면 그들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다가 잠시 틈을 주면 공격해 왔다. “그냥 휘둘렀다. 죽는 거 밖에 더 있나. 우리는 죽을라꼬 덤비고 그 사람들은 살라꼬 덤빘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3. 새로운 고향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지금의 터전을 지켰다. 그렇게 서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웃이 되었다. “모내기 철이 되모 서로 일손이 부족한 기라. 우리 중에서 병이 덜한 사람들이 가서 마이 도왔다. 처음에는 싫어해도 나중에는 와서 도와 달라고 하는 기라.” 때로는 이웃 마을의 사람이 와서 성하지 않은 손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돕기도 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주로 닭과 돼지를 키웠다. “닭은 알도 팔고 똥도 팔았다.” 닭똥을 모아서 밭 여기저기에 널어서 말린 뒤, 자루에 넣어 보관했다가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이익금은 일한 만큼 나누어 받았다. 일은 중노동이었다. 성한 사람보다 몇 시간은 먼저 일어나야 했고, 몇 시간 후에 자야 했다. 그렇게 해도 살아가기에는 힘든 나날들이었다.

성한 사람들이 서너 시간이면 끝날 일을 그들은 하루 종일 했다. “아이고 말도 못한다. 아침에 자고 나면 닭 밥 주고, 또 한 이틀마다 똥 치운다. 똥 치우는 날이 그 중 고되다.” 일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또 언제든지 쫓겨 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그들은 백방으로 다니며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험한 산을 일구어 밭으로 만들고, 밭도 만들 수 없는 곳에서는 돼지와 닭을 키우며 살고 있는 그 땅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임을 알아달라고 관청을 셀 수 없이 드나들었다. 관계기관에 갈 때마다 차를 탈 수 없어 걷고 또 걸어서 갔다. 간간이 다니는 버스는 텅 빈 채 가도 그들을 태워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수레도 얻어 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가야했다. 가서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리고, 아이들을 키우고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의 하소연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와서는 안 될 사람들이 왔다는 내색을 노골적으로 했다. 돌아서기도 전에 소금을 먼저 가져와서 그들의 뒤에 뿌렸다. 성한 사람들에게 한센인들은 소금을 뿌려야 하는 액(厄)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한센병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치료약도 없이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이고, 얼굴이 변하는 병이었지만, 병에 걸린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센인들은 마치 죄인마냥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현듯 잊고 있었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이름이 없었다. 언제나 검은 색 옷을 입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저녁 무렵에 나타났다. 말없이 우리 집으로 들어와 마당을 가로질러 뒤뜰에서 장작을 패 주었다. 키가 크고 마른 몸이었는데, 그 아저씨는 손에 때 묻은 흰색 천을 감고 있었다. 장작을 다 패고 나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 마당 한쪽 구석에 앉아 먹었다. 그리고는 기운 자국이 있는 바가지에 밥과 반찬을 담아 갔다. 그러다 어느 날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찾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6?25가 끝난 후, 홀연히 우리 동네에 들어와 산 밑 움막에서 혼자 기거하는 아저씨였다. 가족이 있었지만 헤어졌고, 한센병에 걸려 동네에 들어와 살 수 없었다는 것이 내가 아는 사실의 전부였다. 어렸을 적, 막연하게 그 아저씨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아저씨는 절대로 공짜 밥을 먹지 않는다고,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장작을 패거나 하다못해 마당이라도 쓸어 주고 간다고 어머니는 혀를 차셨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의 그 아저씨가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낯선 섬에까지 와서 10여년을 넘게 살면서도 자신의 땅 한 뼘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삶의 내력을 밝히지 않으며, 얻어먹고 살지언정 자존감을 잃지 않았던 그 아저씨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아픔이 되는 건 무슨 연유일까? 이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고향을 떠나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일구는 땅은 고향 이상이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자신들의 이름으로 된 땅을 가지고 싶은 이유가 살고 있는 그 곳이 바로 고향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센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한다. 하늘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인식은 오히려 한센인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늘마저 버렸기에 그들은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부평초처럼 떠돌지 않도록 두 발을 붙이고 있을 고향이 필요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네.

 

중에서

 

할머니의 머리칼은 백발이 되어 있었다. 뽀글뽀글 파머를 한 사이사이로 백발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금을 바가지 채로 뒤집어쓰며, 산길을 걷고 또 걸어 탄원을 했지만, 자신들의 땅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기적이 왔다. 마치 소리 없이 나무그림자가 땡볕을 막아주듯이 그렇게 기적이 왔다.

“대통령이 특별조치법을 내린 기라.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제. 그때 우리 한센인들이 사는 땅을 우리 거로 해주라는 특별 명령이 있었는 기라. 윤두관 원장 힘이 컸대이. 윤원장이 있어서 육여사가 소록도에도 가고, 우리 손도 잡아주고, 그라께 대통령도 우리를 알고 특별조치법에 우리를 넣었다 아이가.” 그래서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 고향에서 나는 할머니를 만나고 있다.

핏자죽이 어린 길 [치유시학]

?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산 속에 내던져지다

 

아, 내 인생길이

왜 이다지도 가시밭길인가.

찌를 때마다 피 흘러

걸을 때마다 핏자죽이었네.

걸을 때마다 잡초에 휘말려서

엎어지며 넘어지며

또 한 자국 걸을 때마다 자갈밭

또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진흙이 떡반죽 된 길

하나도 평탄한 길이 없더라

이것이 내 인생길인가.

– <내 인생길> 중에서-

 

할머니는 한스러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가시밭길이자 자갈밭, 그리고 핏자죽이 어린 길이라고 노래했다. 태풍을 피해 을숙도에서 나왔지만, 한센인들은 마을로 들어가지 못했다. 잠시 머무르던 긴급대피 장소인 학교에서도 더 이상 지낼 수 없었던 그들은 캄캄함 밤에 쓰레기를 싣고 다니는 차에 실려 지금의 땅에 내던져졌다. “비가 억수로 왔다. 그냥 말없이 타라 하데. 우리도 이대로 있다가는 죽겄다 싶어서 그냥 탔제. 한참을 가더니 내리라 하는 기라.”

그냥 내린 곳이 지금의 마을이었다. 아니, 그때는 산이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두운 밤에 그들은 산 속에 버려진 것이다. “벌레가 따로 없제. 그냥 발 잘못 디뎌 굴러떨어지면 죽는 기라. 안 죽을 거라고 꿈틀꿈틀 기어 다녔제. 그래도 살아볼 기라고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면서도 비를 피할 데를 찾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옷 보따리 뿐인데. 그리 울던 아도 안 울더라. 지도 무서운 기라. 본능적으로 무서웠던 거라.”

사람들은 조그마한 바위틈만 있어도 기어 들어갔다. 달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그들은 온몸으로 기어 다니며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혹시나 굴러 떨어져 산 어딘가에 머리를 박고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까봐 손을 잡고 기어 다녔다. 큰 돌에 부딪치는 줄도 몰랐고,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 다시는 올 것 같지 않던 아침이 왔다.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보고, 그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흙을 뒤집어쓰고 비에 젖어 산발이 된 모습은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참혹했다. “모두 흙투성이라. 아침이 되고 사방을 살펴보니 산이라. 산 위에 길이 있는데, 간간이 트럭 소리만 나더라. 차 소리만 나면 모두 숨었다. 나무 뒤로 흙더미 뒤로…”

“왜 숨으셨어요? 임자가 있는 산이었나요?” “아이다.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잡혀가면 이제 죽는 것 밖에 더 있겄나.” 그들은 사람들을 피해 산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길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산이 있었는데, 그 중 아래쪽에 있는 산에 그들은 버려졌던 것이다. 흙투성이의 몸으로 그들은 먹을 수 있는 뿌리와 나물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산에 버려졌거나 빗물에 쓸려 내려온 비료 자루나 거적을 찾으면 그것으로 움막을 만들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오목한 곳이나 바위틈, 그리고 흙이 쓸려 내려가 드러난 큰 나무의 밑둥이 있으면, 그 곳을 손으로 파서 사람이 들어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 앞을 비료 자루로 막아 거처할 곳을 만들었다. 어쩌다 자연적으로 움푹 패인 언덕바지라도 발견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비가 와서 미끄러지고 온 몸이 흙투성이는 되었지만, 나뭇잎이 쌓여 흙이 된 곳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드러운 흙이라도 파낼 수 있는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병든 그들의 손은 흙 반 진물 반으로 반죽이 되었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낮 동안은 햇빛이 있어 견딜만 했지만, 해가 지면 산속의 기온은 사정없이 내려갔다.

“더 무서운 거는 산짐승이라. 괭이가 있나 호미가 있나. 짐승이 덮치모 방도가 없는 기라. 어린 아를 가운데 두고 어른들이 삥 둘러 잤다. 잠도 깊이 못 잔다. 춥고 배고프고 살아갈 길이 막막하고…”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정경이었다. “지금하고 마이 다른 기라. 그때는 그래도 산에서 굶어 죽지는 않겄더라. 그런데 봐라, 김선생. 겨울이 되면 뭐 먹고 살기고? 겨울이 오기도 전에 얼어 죽고 굶어 죽을 판이라.”

할머니의 얼굴은 열기를 띠고 붉어졌다. 숨소리도 가빠지고 있었다. 불편한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겨우 일군 삶의 터전을 떠나서 산짐승 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산속에 내던져졌을 때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깊은 한숨 소리가 나의 심장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고통을 느꼈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나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당신의 삶을 치유하겠으니 지나온 이야기를 해보라는 나의 요구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고통에 가득 찬 저 삶을 누가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당혹감과 함께 낭패감을 느꼈다. 내가 과연 저 ‘핏자죽만’ 남아 있는 삶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몸도 뜨거워지고 있었다. 부끄러움으로.

 

집이 생기다

 

어느 날, 여러 대의 트럭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황급히 숨기에 바빴다. 트럭이 지나갔다 싶던 순간에 다시 차 소리가 들렸다. 몇 대의 트럭이 후진하여 돌아오고 있었다. 모두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하야리아 부대 미군들이더라. 지나가다 누가 우연히 우리를 본 모양이라.” 미군은 잔뜩 긴장하여 총을 손에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영어로 큰 소리로 뭐라 하는 기라. 몇 명이 내려왔는데 저거끼리 부르는 소리에 마이도 내려오더라. 또 두 명은 계속 큰 소리로 떠들면서 다시 올라가데.” 미군들은 한센인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군들과 한센인들은 마주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처음 보는 사람의 형상에 놀라기도 하고 긴장도 했다. “대장인갑더라. 옆에 있는 미군한테 뭐라 하더라.” 그 미군은 차에 가서 건빵 박스를 들고 왔다.

미군들은 한센인들에게 건빵을 몇 박스 주었다. 한센인들은 미친 듯이 건빵을 먹었다. 젖배를 곯던 아이에게는 씹어서 입에 넣어주었다. 그들이 건빵을 먹는 동안 미군들은 산을 살피고 다녔다. 비료 포대나 거적을 걷어보는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귀신같은 몰골의 한센인들을 말없이 지켜보다 미군들은 떠나갔다.

“야~~~, 도깨비한테 홀린 것 같더라. 키는 멀대 같이 크제. 코는 왜 그리 뾰족하노. 얼굴은 꼭 밀가루 덮어 쓴 것 모양으로 허옇제.” 건빵으로 허기를 채운 그들은 미군들의 정체에 대하여 설전을 벌였다. 그날은 그렇게 답을 얻지 못하고 지나갔다. 그들을 한밤에 산속으로 내던지면서 식량을 가져다주겠다던 공무원은 그날도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해가 채 안 떴제. 그냥 날이 밝아오는 시간이라.” 트럭 소리가 길 위에서 멈추더니,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움막에서 나온 한센인들의 눈 앞에는 전날의 미군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수십 명이었다. 미군들은 나무를 옮겨오고, 약상자를 들고 오고, 밀가루 포대를 어깨에 메고 산으로 내려왔다. 아무 말도 없이 미군들은 삽을 들고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들을 땅에 고정시켰다.

나무틀 위에 천막을 덮었다. 훌륭했다. 그랬다. 너무나 좋은 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군들이 간이 천막을 짓고 있는 동안 한센인들은 상처를 소독하고 치료를 받고 붕대를 몇 개씩 받았다. 어제와 달리 같이 온 한국군이 치료를 받는 동안 통역을 해줬다. 처음으로 치료하고 광목이 아닌 붕대를 감은 손이 남의 손처럼 보였다. 상처를 싸매고 있던 광목은 빨아서 계속 썼기 때문에 넝마가 되어 있었다. 미군들은 구덩이를 파고 그 넝마 조각들을 모아 태웠다.

미군들은 오기 전에 역할을 분담한 듯이 각자 다른 일들을 했다. 천막집을 만드는 팀, 치료를 하는 팀, 주변 나무의 잔가지를 치는 팀, 주변을 소독하고 다니는 팀 등. 한 팀이 땅을 고르면 다른 팀이 그곳에 나무를 이용해 집틀을 만들고 다른 팀은 천막을 씌우고, 그러면 또 다른 팀은 천막집 주변의 나뭇가지를 정리했다. “척척 하더라. 그 통역관 말이 전날 우리 꼴을 보고 가서 충격을 받았단다. 미군들이 도와야 한다고 부대장한테 말해서 몇 시간 동안 회의를 했단다. 그리고 팀으로 나누어서 일을 맡았다더라.”

산에 흐르던 물줄기를 어떻게 막았는지 공동의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호스가 연결되고 커다란 고무 물통에 그 호스 끝을 연결하여 식수통을 완성했다.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공동 공간도 만들어졌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쯤 일은 마무리 되었다. 천막 안에는 땅의 한기가 올라오지 못하게 베니어판이 깔려 있고, 그 밑에는 방수 깔개가 깔려 있었다.

일을 마친 미군들은 한센인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들의 옷은 땀으로 젖어 있었지만,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한센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기만 했다. 하루 동안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저의가 있는 건 아닌지 내심 불안했다.

미군들은 한센인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그 손을 잡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미군들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들이 손을 흔들며 트럭을 타고 떠나가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때는 누가 우리를 돕는다는 거는 상상도 못했다. 저것들이 이렇게 천막 쳐 놓고 내일 와서 우리를 쫓아내면 우짤기고.” 아무도 믿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미군들이 가져다 준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배부르게 먹고 잠을 청했던 그날 밤, 한센인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들에게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하루 사이에 물이 질척거리는 맨땅이 아니라 보송보송한 베니어 판 위에 몸을 누인 것이 꿈만 같았다. 딱딱한 베니어판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금침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다음날에도 미군들은 다시 왔다. 그들은 건빵과 설탕과 밀가루를 또 들고 왔다. 모포도 들고 와 집집마다 넉넉하게 나누어 주었다. 전날 보지 못했던 미군이 두 명 새로 왔다. 통역군인은 그들이 의사라고 했다. 두 명의 미군은 한센인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약이 주어졌다. 그 약은 예전 집단촌에서 먹던 약보다 양이 적었다. “나병약이라 하더라. 그 약은 속이 안 아프더라. 다른 영양제도 주더라.” 을숙도에서 나온 이후 약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병세는 악화되어 있었다.

미군들이 준 약은 위의 통증이 없었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어지럽던 증세도 없었다. 그날 이후 미군들은 정기적으로 찾아와 주변을 소독하고 밀가루와 통조림을 공급해 주었다. 때때로 건빵도 가져다주었다. 미군들의 도움은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 “좋은 약 먹고 소독하니까 금방 좋아지대.” 미군들이 지어 주었던 천막집도 시간이 지나면서 집의 형상을 갖추어 나갔다. 그 집들은 이후 정부에서 특별조치법이 시행되었을 때 그들의 집으로 허가가 났다.

 

기억 속의 하야리아

 

할머니는 도움을 주지 않았던 대한민국을 원망하거나 비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는 얼굴에 화기가 돌며 엷은 미소까지 지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기억 속에서 사라질 만도 하건만 할머니는 마치 어제의 일을 말하는 것 마냥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는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반미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50여 년 전의 미군들만 기억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한미 FTA는 무조건 좋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국과 하는 계약이니까. “갸들이 우리한테 손해나게는 안 한다. 우리끼리 싸우는 거제.”

할머니에게 기억 속의 미국은 지금의 미국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미군들이 지나쳐도 될 것을 다시 돌아와 한센인들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도움을 주었던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 것만큼 알고 아는 것만큼 믿는다. 죽음의 문턱에서 잡았던 도움의 손길은 따뜻하고 믿음직하다. 나는 할머니에게 50여 년 전의 하야리아 부대의 미군들 외의 미군들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군에 대한 그 기억 한 자락은 ‘진흙이 떡 반죽 된 가시밭길’ 같은 삶의 여정에서 따뜻한 등불이 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미군을 이야기하며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잠시라도 행복해하는 할머니를 욕할 수 없으리라. 지금의 우리는 그 당시 미군들과 달리 한센인들을 거부했던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었다. ‘지나 간 일이라고, 그때는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들었다고,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실제로 사라호 태풍 당시의 신문을 찾아보면 산속에 고립된 한센인들에게 식량을 보급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는 기사가 있다. 동네 사람들이 한센인들에게 가는 산의 입구를 가로막고 식량보급을 차단하여 한센인들이 아사 지경에 이르고 있지만, 대책이 없다는 내용이다. 동네 사람들은 한센인들이 그들의 주거지 부근에 삶의 터전을 마련할까봐 비상식량마저 보급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신문에 기사화된 곳과 할머니가 강제 이주된 곳이 다르지만, 행정 소속이 같은 부산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할머니와 그 동료들에게 식량을 보급하지 못하여 애를 태운 공무원이 있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미군들이 한센인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면 대한민국 정부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모두가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애써 변명해보지만, 안타까움은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꽃처럼 붉은 울음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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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세상이 참말로 험하다

 

이사는 수 없이 다녔다. 아니 이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살다가 떠나가라면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을 만나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울
▲ 에비슨이 촬영한 나병 환자(1900년대 초). ⓒ동은의학박물관산의 집단촌은 초가집이었지만 방이 있었고, 비도 피할 수 있었다. 거친 식량이었지만, 관청에서 나오는 배급품도 있었기에 굶주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웃 동네 사람들의 원성에 못 견뎌 한센인들은 흩어져 다른 지방으로 옮겨졌다.

할머니는 여기저기 옮겨 다녔던 지명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순서는 정확하지 않은 듯했다. 같은 지명을 다시 말하고, 서로 다른 지역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이 옮겼다. 60년, 50년 전에 다니던 데는 가물가물한다. 험하대이. 세상이 참말로 험하다.”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서러움을 세상이 험하다는 말로 표현했다.

할머니는 울산 집단촌을 나와 부산으로 온 것은 기억하지만, 부산의 첫 지명은 기억하지 못했다. 입안에서 계속 맴도는 듯 말을 할듯할듯 하다가 결국 기억하지 못했다. 부산에 와서 처음 살게 된 곳은 그리 큰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센인들이 모여 산다는 말이 돌자 여기저기서 한두 명씩 때로는 가족이 들어와 함께 살면서 마을의 규모는 커져 갔다. 울산에서도 그러했지만, 마을이 커지고 한센인들이 늘어나면 주변 사람들의 핍박은 거세진다.

구걸도 힘들었고, 마치 한센병이 공기를 타고 전파되는 것처럼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비한센인들의 이기적인 행동은 한센인들의 삶을 더욱 더 힘들게 했다. 그들은 주거 공간이 다르고, 주거지가 많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도 같은 지명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비한센인들에게 한센인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를 넘어 없어야 할 존재들이었다.

“거기서 용호동으로 갔제. 그래도 거(용호동)가 괜찮았다. 좀 살았던 것 같네.” ‘좀 살았던 것 같네’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순간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사셨어요?” “아매 2~3년 살았제. 하모. 그때는 마이 살았던 거제.” 용호동에서는 양계를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밤낮없이 일만 했다. 바닷가 바람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한센인들의 삶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2. 세상이 그런 기라

 

2004년도에 우연히 용호동 한센인 집단촌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45도에 가까운 경사로에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산을 뒤에 두고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던 그 판잣집들은 철거 중이었다. 지금은 부산 용호동을 대표하는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기 위하여 한센인들의 집이 무너지고 있는 광경을 그날 나는 보았다.

창문 대신 비닐이 쳐져 있는 집들의 대부분이 반쯤 무너지고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오륙도가 보이는 그 곳 바닷가에서 노인 대여섯 명이 무표정하게 우리 일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산과 집단촌 사이에 나 있던 도로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미처 챙겨가지 못한 옷가지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방문들이 부서져 널브러져 있는 광경은 참으로 처참했다.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그때 용호동 바닷가에서 보았던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갈 곳이 없어 떠나지 못하고 있던 그 노인들은 전기도 수도도 끊어진 그 곳에서 바다만 보고 있었다. 노인들 곁에 남아 있는 것은 햇살뿐이었다. 할머니의 젊은 날이 그러했으리라.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을 벗어나고 싶었으리라. 바다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비켜서지 않고 바다를 보고 지은 집들에는 한센인들의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사람이 살 수 없던 척박한 환경이어서 한센인들은 집단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산 밑에 천막을 치기 시작했고, 한센인들이 늘어나면서 천막을 하나씩 지어 내려 간 것이 바닷가에까지 닿았을 게다. 세상이 바뀌어 그 곳이 천혜의 자연을 지닌 산책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은 오래 전에 강제로 쫓겨 와 살기 위해 구걸하고 한편으로는 닭을 키우고 비탈을 개간하여 천막을 판자로, 다시 판자의 일부가 스레트로 바뀌었지만,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았다. 그 덕분에 자연은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곳은 이제 부자들이 도시의 오염을 벗어나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적지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자연을 보존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한센인들은 그 곳을 떠나 다시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용호동은 왜 떠나셨어요?” “휴우, 거기는 살기가 괜찮았다. 바람이 마이 불고 추워도, 산나물 있제, 계란 팔제. 계란은 파는데 남는 기 너무 없는 기라. 그래 사람들 사이에 말이 많았제. 그기 그렇다. 처음에는 그렇다가 좀 있으모 꼭 말썽이 생기는 기라.” “처음부터 있었던 사람, 나중에 들어 온 사람, 일 안 하고 잘 묵는 사람, 세상이 그런 기라.”

 

3. 아픈 줄 모른께 그리 살았제

 

할머니는 최초의 정착인이 아니었다. 이미 한센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에 할머니가 들어갔으므로 내부의 갈등으로 떠나야 할 사람도 할머니와 함께 들어갔던 사람들이었다. 닭을 키워 계란을 팔았으나, 직접 시장에 가서 팔 수는 없었다. 자연히 외부에서 계란을 가지러 오는 사람이 필요했고, 마을 내부에서 그 중개인을 상대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오해와 의혹에 의한 갈등이 자주 발생했다.

공동체 내의 누군가가 좀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은 누군가가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을 불러왔다. 이러한 갈등 끝에 시시비비가 붙었고, 일의 잘잘못을 떠나 공동체는 분열되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용호동을 떠나야 하는 쪽이었다. 같은 한센인이지만 그 갈등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이 마을과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은 용호동에서 서로 반목하던 사람들끼리 나뉘어져 정착한 곳으로 현재도 실제 거리보다 심리적인 거리가 더 멀어 보였다. 할머니를 만나기 이전에 먼저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을 방문했었다. 그 곳에서는 개인적인 접촉이 불가능했다. 나와의 만남을 가져보겠다는 사람도 마을 대표의 한 마디에 연락처도 없이 뒤돌아섰고, 나는 마을 안으로 아예 들어서지 못했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부산의 또 다른 지명은 신암이었다. 신암이라는 지명은 기억하지만, 그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없었다. 단지 많이 힘들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신암에서 강제로 이주 당해 간 곳이 을숙도였다. 할머니는 을숙도에서의 생활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을숙도에서의 생활은 몸은 고단했지만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한센인들이 이주하기 전부터 섬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원주민들과 한센인들은 서로의 생활 영역을 존중하며 생업에 열중했기 때문에 마주 칠 일이 거의 없었다. 섬이었지만 누군가의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다.

한센인들은 어떤 일이든 했다. 원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집중한 반면, 한센인들은 섬에 지천으로 널린 갈대와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었다. 갈대와 싸리나무는 젊은 남자들도 맨 손으로 꺾어 다듬기 어려운 식물이다. 그럼에도 한센인들은 불편한 손으로 갈대와 싸리나무를 꺾어서 구부리고 다듬어 빗자루로 엮었다.

그 빗자루는 뭍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사 갔다. 함께 사는 것은 거부했지만, 한센인들이 만드는 빗자루는 다른 빗자루보다 견고하고 성능이 좋았기 때문이다. 빗자루도 한센인들이 뭍으로 직접 나가서 팔 수는 없었다. 작은 나룻배에 싣고 강 가운데로 가면 뭍에서 나룻배를 타고 온 사람에게 넘겼다. 그 길만이 당시 을숙도에 살고 있던 한센인들의 생계수단이었다.

“김선생, 말도 마라. 온 손은 상처투성이고 피도 마이 났다. 피 나는 줄도 모르고 했다. 한참 하다 보면 그것들(갈대와 싸리나무) 군데 군데 피가 묻어 있는 기라. 그래 보모 온 손에 피라. 아픈 줄 모른께 그리 했제. 아팠으면 그리 했겄나” 한센인들이 돈을 벌어 삶의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것이 빗자루를 만드는 것이기에 그들은 그 일에 최선을 다 했다.

 

4. 한센 환자들, 그가 그리 역사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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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의 나환자촌. ⓒ동은의학박물관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그 어디에서도 정착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쓸쓸한 얼굴을 보며,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김정한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래톱 이야기>는 중학교 교사인 화자가 낙동강 하구 명지의 조마이섬에 사는 건우네 집을 가정방문하여 알게 된 조마이섬의 내력과 그 섬을 지키려다 감옥으로 가는 건우 할아버지인 갈밭새 영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마이섬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지배했고, 지금은 유력 인사가 사유지로 하려는 곳이다. 갈밭새 영감은 정부에 의해 이주해 온 한센인들을 몽둥이, 쇠스랑 등으로 쫓아내다가 팔을 다쳐 흉터도 지니고 있다. 오래 전부터 살았으나 아무도 자기 땅을 가지지 못한 몇 안 되는 조마이섬 사람들을 대신하여 갈밭새 영감이 유력 인사와 싸웠으나 결국은 감옥으로 가고, 건우는 학교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내가 들려주는 소설을 집중하며 듣던 할머니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무릎을 탁 치며 “그긴 갑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할머니는 <모래톱 이야기>의 무대인 조마이 마을은 처음 듣지만,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고 반색을 하며 오래된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자신의 이야기를 떠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건과 유사한 내용의 소설을 들은 할머니의 얼굴에는 강한 호기심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긴 갑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가. 요쯤(여기쯤)은 바다고 또 한 쪽은 땅인디, 한센 환자들이 거기 살려고 했제. 그런데 주민들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너거가 왜 오노 하고 막았다. 살라고 하는 한센 환자들하고 못 들어오게 하는 사람들 하고 크게 싸웠제.” 할머니가 사는 을숙도에서 벌어진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 사건은 한센인들 사이에 회자되었기에 할머니는 <모래톱 이야기>를 그 사건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듯 했다.

할머니가 회상하는 그 강변에서 한센인들과 주민들과의 투쟁은 처절했다. “환자들이 거서로 천막을 쳐놓고 살았던 모양이라. 천막을 쳐 놓고 집에 대창을 해가지고 싸우다가 안 되가 저거가(원주민이)…….그래가 술로 받아가지고……. (한센인들에게)술로 얼마나 먹여 놨던가, 한센 환자들이 술 먹고 그 마 잤삤어. 자는 여개(사이에) 그 사람들(원주민)이 와가지고 (천막에)불로 붙였어. (한센인들을)다 죽여 삘라고 불로 붙였는데 그서 튀나오는 사람 창 갖고 찔러 죽이고, 온 가족들하고 그 식구들하고 저쪽에 있고, 요쯤을 점령하면 (한센인)가족들도 욜로 올 수 있는 기라.”

할머니는 그 사건을 설명할 때, 두 팔을 벌려 한쪽팔로는 “요쯤은 바다고”, 다른 팔로는 “한쪽은 땅이고”라는 몸짓으로 그 강변의 지형이 길쭉했음을 온 몸으로 나타냈다. “그래 갖고 젊은 청년들 마이 죽었다. 그때 그래 많이 죽고 그래 갖고 요새 겉으면 한센 환자들 얼마나 많은 줄 아나 그냥 안 있다. 데모를 하든가 무슨 수를 내도 몇 만 명 되는데 그때만 해도 옛날이 되논께네……말도 못하고, 그리 되니까네 군수도 말로 못 하겠다 쿠고.”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어도단의 절벽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온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며 바라본 할머니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는 “한센 환자들 그가 그리 역사가 깊다.”하면서 긴 한숨을 쉬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많은 한센인들이 죽었고 다쳤지만, 어떤 보상도 없었다.

요산 김정한은 <모래톱 이야기>의 조마이섬이 가상의 공간이라고 말했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다와 인접한 실제 낙동강변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산은 곳곳을 직접 다니며 알게 된 사실들을 사회 비판적인 안목으로 소설화한 작가이다. 어쩌면 낙동강 주변을 탐색하다 한센인들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있었던 참혹한 사건을 듣고 <모래톱 이야기>을 집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모래톱 이야기>가 발표된 1960년대의 사회적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실제 사건을 그대로 소설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조마이섬에서의 한센인들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소설적 장치로 남긴 것이 아닐까 한다. 할머니는 그 강변의 정확한 지명을 묻는 나에게 “생각이 날락말락 한다. 하도 오래된 이야기고. 하기사 나도 쫓기는 건 매 한가진데”라며 기억을 애써 더듬었지만, 그 당시의 사건만 정확하게 되풀이 했다.

 

5. 해와 하늘빛이 서러워

 

젊은 한센인들이 살기 위하여 투쟁하다 목숨을 잃었지만, 그 사건은 그대로 시간 속으로 묻혀 갔다. 할머니는 끝내 그 곳이 낙동강 어디쯤인지 아니면 부근 다른 지역인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으나, 사건의 정황은 기억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던 사실이 많은 시간이 지나 다시 현실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

 

시인 서정주는 오래 전 항간에 떠도는 말들을 그대로 시에 옮겨 놓아 세간의 오해와 편견으로 인한 한센인들의 고통과 설움을 묘사했다. 비한센인들은 그들의 관념에 사로잡혀 한센인들을 배척했다. 두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알아야 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세인의 어리석음은 ‘오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구분지어 나누어 버린다. ‘나’아니면 ‘너’가 되는 것이다. ‘우리’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면서도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됨을 애써 모른 척 한다. ‘나’와 ‘너’ 사이에 절대로 넘어 설 수 없는 선을 그어 관용과 이해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나는 오만과 편견에 가득 찬 세상 속에서 병든 몸으로 시간을 헤쳐 나온 생명의 강인함을 마주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상념에 잠긴 옆모습에서 이름도 없이 살다 간 수 많은 한센인들의 슬픔을 만나고 있었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살고 싶다는 그들의 작은 소망을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달빛 아래에서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었던 그들이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소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