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계절의 끝에서 [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치유될 수 없는 과거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아픈 상처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할머니에게 아들과의 이별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는 가슴 깊이 커다란 웅덩이를 파고 들어 앉았다.

속아서 결혼했다는 생각으로 남편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6살이 많았던 남편은 어린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지만, 20살의 아내는 남편의 정성마저도 싫었다. “진짜 정 안 주어지더라. 내 때문에 저거 아버지도 참말로 죽고 싶다했다. 내내 울고, 달래도 울고, 아침 저녁으로 내내 울었다.” 먹지도 않고 제대로 지자도 않으면서 울기만 하는 아내를 달랠 방법이 없었다.

“내 간다 이러면, 보따리 싸가 간다, 그리 하면” “아이고 가보지 어디가 몇 발 못가가 붙잡히지. 이 안에 법이 없는 줄 아냐, 당신 마음대로 하냐, 가 봐라.”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가겠다는 아내의 말에 아랑 곳 없이 그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남편이 하루 종일 옆을 지키면서 달래고 또 달래도 스스로에 대한 서러움과 속았다는 분노는 다스려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머물러야 할 곳은 울산 바닷가였다. 울산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바닷가 넓은 바위 위에 앉아서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분노 속에서 할머니는 집단촌에서 주는 약을 거부했다. 약을 먹지 않는 상태에서 끼니마저 거르자 병의 속도는 빨라졌다.

“한 번은 저 바닷물에 빠져 죽을라 했다. 그것도 그만 들켜서 안 됐제. 근데 헤엄을 치몬 도망 갈 수 있겠는 기라. 그리 생각하니까 사람들이 쫓아 올낀데 가다 잡혀서 두들겨 맞으모 우야노, 몽디 갖꼬 두들겨 맞으면 우야노, 겁이 나 얼마나 벌벌 떨어댄 줄 아나.” 그래도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허허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 당시 공부도 좀 했다 쿠고, 공부 많이 한 처자가 저기 있다 소문이 어디까지 나가지고, 영감한테까지 오게 된 기라. 영감도 공부는 좀 했더라꼬.” 남편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던 중 한센병에 걸린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고향에는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배운 학식으로 한센인 집단촌의 행정적인 일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할머니 기억 속의 젊은 남편은 미남이었다. “얼굴도 뽀얗고 모리고 보면 진짜 의사 같앴다. 인상도 참 괜찮았다. 마음도 좋았제. 얼매나 착한 사람이었다고.”

그러나 20살 할머니의 눈에 그런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죽는 게 낫다는 절망감뿐이었다. 그 절망감은 20살의 할머니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한번은 약 묵고 죽을라꼬 치료약을 한 서른 개 묵었다. 서른 개 먹으니 죽지는 안 하고 토하기만 토하고 얼굴이 새파래지고 굿이 났지. 그거 묵고 나니 잠이 안 오데. 밤낮으로 잠이 안 오데. 그래 가지고 어떤 사람은 죽게 놔두라 하고, 간 크게 어디 약을 그리 지 마음대로 먹노 하는 사람도 있고, 약병을 단디 안 놔놓고 뭐했노 하는 사람도 있고, 아이고 동네 굿이 안 났더나.”

 

새로운 탄생

몇 날 며칠을 밤낮없이 뜬 눈으로 보내고 난 후, 할머니는 운명에 순응했다. 삶은 팍팍했다. 일자리를 얻을 수가 없었으므로 동냥을 다녔다. 운이 좋으면 쌀도 얻고 이삼일 지낼 수 있는 반찬거리도 얻었지만, 쫓겨 다니기도 수 없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 싶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해 뜨면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잤다.

“이 사람이 현재 내캉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맘속으로 자꾸 다짐했제. 안 그래야 될 낀데 자꾸 지난 기 생각나는 기라.”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 되면 밥 먹고 양식이 떨어지면 동냥을 다녔다. 그러다 집단촌에 배급이 시작되었다. “땡보리가 나오더라고. 쌀은 없었어.” 그 중에서도 좋은 것은 위에서 가로채 갔다. 나머지 힘 없는 사람들은 맷돌로 갈아서 보리 수제비를 해먹었다. 거친 보리 수제비지만 동냥을 다니지 않아도 굶지 않는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 동안 몇 번의 강제 이주가 있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와서 떠나라고 난리를 치면 입은 옷 그대로 보따리만 들고 떠나야 했다. 집단촌은 울산을 떠나 부산으로 옮겨졌다. 세월의 무심함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변해서 세월이 무심해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결혼하고 만 3년이 지나 24살 때 딸을 낳았다. 30살에 아이를 본 남편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지만, 할머니의 슬픔은 방긋거리는 딸을 볼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커져 갔다. 어디를 가든지 정부에서 나오는 배급품은 한센인들에게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좋은 것은 전부 힘 있는 관리나 하다못해 집단촌 이장까지 팔아서 이익을 챙겼기 때문이다. 생활은 항상 궁핍했지만, 딸은 젖을 먹여 키울 수 있었다.

할머니와 마주 앉은 방안은 서늘했다. 낡은 집의 창틈으로 찬 바람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리 추워서, 겨울이 되니까 영감에 대한 시를 하나 지어 볼라꼬 아무리 생각해도 시가 생각이 안 나.” “추운데 왜 할아버지 생각이 나세요?” “내가 겨울에 영감을 만났거든. 참 마이 추웠다. 눈도 마이 오고……. 하아얗게 쌓여 있었다.”

할머니의 감기 기운은 낫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미열도 더 이상 내리지 않고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몇 년 전부터 감기가 자꾸 걸리는 기라.” 할머니는 혀를 찼다. 깊은 산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 가는 고목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할머니에게서는 하나 둘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고목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텅 빈 삶

딸아이가 젖을 뗄 무렵, 삶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할머니는 다시 약을 먹었다. 이번에는 예전보다 더 많은 양의 약을 먹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딸의 울음인지 승팔이의 울음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됐다. 이제는 됐다.’라는 안도의 물결만이 밀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편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참말로 징하다. 어찌 그리 독하노. 니 같은 독종은 살다 살다 처음 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듯한 목소리에는 분노와 허무함이 묻어났다. 아내에 대한 서운함과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남편은 한 동안 말문을 닫았다.

“밥 먹자 하면 먹고, 일하러 가자 하면 가고, 이거 하자 하면 이거 하고, 저거 하자 하면 저거 하고, 별 그거 없고 그래 지내는 사람인데 내 영감은… 이거는 만나 놓으면 어렵거든. 법적으로 이래 이렇게 그거는 없고” 할머니는 띄엄띄엄 간격을 두며 먼저 가신 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냈다.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텅 빈 듯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린 딸은 어떻게 하라고 그러셨어요?” 나의 바보 같은 질문에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 딸도 승팔이도, 영감도, 아무 죄 없는 기라. 죄는 나한테 있는 기라. 그러니 죽을 수밖에.”

사는 것이 죄를 짓는 일이고 죽는 것이 속죄하는 일이라면 삶과 죽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태어나야 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태어나서 병들어 사는 것이 죄라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죄’라는 단어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삶이 저렇게 고독하고 고통스러운데, 그 삶이 죄가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의 죄는 무엇일까. 할아버지와 딸에 대한 시를 짓고 싶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 편의 시가 떠 올랐다.

 

나무들이 요란히 흔들리는 가운데 겨운 햇빛은 떨어지며 너를 불러들인다. 얼은 들판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나에게로. 잘 왔다. 친구여, 내 알려줄 것이 있다. 저 캄캄해오는 들판을 바라보라. 들판을 바라보는 그대로 너를 나에게 오게 하는 법을 배웠느니라.

이제 무엇을 말하겠는가. 혹은 다시 보겠는가. 네 허전히 보낸 나날의 표정 있는 얼굴을. 네 그처럼 처음을 사랑했던 꿈들을.

보여라, 살고 싶은 얼굴을. 보아라, 어지러운 꿈의 마지막을. 내려서라, 들판으로, 저 바람 받는 지평으로.

황동규 <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부분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은 죽음이었다. 찬 바람 부는 언 들판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이에게 괴로움과 기쁨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대상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 바라보는 삶은 어둠이 내려앉은 캄캄한 들판과 다를 바 없었을 게다. 그런 사람에게 ‘왜 죽음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으리라.

 

계절의 끝에서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으로 모두에게 외치는 한 생명의 탄생이 어떤 이에게는 살아보기 위해 애써 누르며 외면하고자 했던 상처를 수면 위로 들어 올리는 사건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기쁨이라고 해야 할까 고통이라고 해야 할까. 할머니에게 딸의 탄생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

남편은 “당신 속에 무엇이 들어 앉아 있는가? 내가 알면 안 되는 것인가?”라며 아내의 마음을 열고자 노력했다. “가까이 오면 저리 가라고, 오지 마라고 폴을 휘둘렀지.” 털어 놓을 수 없는 비밀은 아내의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고,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은 까맣게 타 들어갔다.

“영감은 나한테 온갖 이야기 다 했다. 지 연애 했던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어릴 때 이야기,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만약 말씀하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감은 참 좋은 사람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는 더 좋아졌제. 무엇이든 나누었다.”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남편의 좋은 점을 열거했다.

좋은 사람이었으며, 5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했지만, 사랑은 싹 트지 않았다. 딸을 바라보면서 떠나보낸 아이를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다짐했지만, 그것은 다짐일 뿐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리움과 연민은 불쑥불쑥 튀어 나와 가슴을 텅 비워 놓았다. 그때마다 어미는 어린 딸의 얼굴을 외면하고, 아이는 본능적으로 어미에게 더 매달렸다.

‘이렇게 병들어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데, 아이가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잘 자라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할머니는 캄캄한 들판에 홀로 서서 칼바람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맞았다. 그래도 추운 줄 몰랐다. 할머니의 마음을 꽁꽁 얼게 만드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 온 이후 할머니의 삶은 언제나 죄책감이 함께 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죽음에 대한 유혹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죽는 것도 내 기 아이라. 내 거는 아무 것도 없는 기라.”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괴로움도 기쁨도 고통도 내 것이 아닐 것이다.

내 것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것뿐이리라. 할머니의 가슴은 언제나 찬 바람이 불어도, 그 찬 바람은 더 이상 할머니의 삶을 흔들지 못했다. 할머니에게는 이제 지켜야 하는 딸이 있고, 할머니를 지켜주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아닐지라도 함께 갈 수 있다는 믿음이 할머니에게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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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사진 : 상단 나무 / 하단 작가

부를 수 없었던 내 아들의 이름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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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어머니가 되다

가을이 지나갈 때쯤 할머니는 퇴원했다. 기력은 눈에 띠게 약해졌고, 갈비뼈의 통증이 남아 있어 숨을 얕게 쉬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병원에 있는 동안 울산에 살고 있는 큰딸은 애만 태울 뿐 오지 못했다. 김해 근교에 있는 작은 딸과 사위는 수시로 할머니를 찾아 돌봐 주었다. 할머니는 아들 한 명과 딸 둘을 두었다. 그 중 작은 딸은 큰딸을 큰댁으로 떠나보내고 허허로움에 젖어 있을 때 지금 살고 있는 마을로 온 작은 여자 아이를 입양한 인연이다.

19살의 할머니는 아들을 낳았다. 먹을 것이 제대로 없어 젖배도 많이 곯았지만, 아이는 잘 자랐다. 아들이 6개월에 접어들 무렵부터 젊은 어머니는 입양을 결심했다. 아이를 낳은 후부터 젊고 병든 어머니의 몸은 변화가 빨라지고 있었고, 두 모자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은 쉬이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가서 동냥하듯이 얻어 오는 식량으로는 아이의 밥물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젖은 점점 말라가고 아이는 언제나 춥고 배가 고파 찡얼거렸다. 절대로 올 것 같지 않던 봄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모르는 사람도 어쩌다 마주치면 다시 돌아볼 정도로 병은 몸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 집은 경주에 있었다. 보기에도 잘 사는 것 같더라. 아들인가 아인가 먼저 보더니, 아 들이라고 그리 좋아하대. 아이 옷부터 먼저 갈아입히고 안고 좋아하더라. 나는 그냥, 그냥 보고만 있다가 돌아왔다. 그 집에서 사람이 뒤따라와서 돈을 쬐끔 주더라. 안 받았다. 받 으모 안 되제. 와 그리 눈물이 나더노. 길이 안 보이더라.”

젖을 채 떼지 못한 아이를 울산에 있는 먼 친척의 소개로 모르는 집에 주고 올 때 귓가에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아이가 엄마를 찾아 우는 소리로 들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고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살아 있는 게 사는 게 아이다. 그냥 지옥인기라. 우리 어무이도 나보고 안 묵는다고 뭐 라 하면서도 아무 것도 못 묵는 기라.”

일주일 만에 아이를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젖 대신 쌀을 갈아 밥물을 만들어 먹였다. 아이는 그 동안 몰라보게 살이 올라 있었고, 입고 있는 옷도 깔끔하고 좋아보였지만, 그 아이를 떼어 놓고 살 수는 없었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아이를 찾아 온 젊은 어미의 몰골을 본 사람들은 말없이 아이를 등에 업혀 주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의 체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었다.

간혹 들러 안부를 묻던 사람들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다시 입양을 권했다. 마쓰시타는 아이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일본으로 떠났다. 문 앞까지 왔다 갔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아비도 없이 병든 어미가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이냐는 말만 들려왔다. 연락처도 없이 떠나 간 마쓰시타에 대한 원망의 소리도 들려왔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경주에서 데리고 올 때 통통했던 볼 살은 다 빠져 성장이 멈추는 듯이 보였다.

 

아이를 떠나보내다

봄이 왔지만,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불안감이 매일 밀려왔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아이도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는 기어 다니며 무엇이든지 빨고 움켜쥐었다. 그러다 상처라도 나면, 어미를 보고 좋다고 기어오는 아이에게 어미의 병이 옮는다면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지만,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아이를 떠나보내는 것뿐이었다.

“일본으로 보내기로 했제.”

“왜 하필 일본이었어요? 경주에 있던 그 집으로 다시 보내면 어쩌다 볼 수도 있는데, 그 렇게 멀리 보내셨어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묻지 말아야 하는 것을 물었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손을 빼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손은 부드러웠지만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침묵을 깨트린 건 할머니였다.

“아들이 있는 건 알고 갔제. 같은 하늘 아래 있으모 언젠가는 안 만나겄나. 혹시라도 지 나가다 마주치면 닮았다 싶어 서로 쳐다는 보겄지. 평생에 한 번은 보겄지.”

“우리 어무이가 가까이 보내면 또 가서 찾아온다고….. 나도 못 살고 아도 못 산다고 며칠 을 나를 달랬제.”

아이를 일본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했다. 여러 손을 거쳐 일본에 살고 있는 김해 사람을 소개받았다. 아이가 없던 그들은 소식을 듣자 인편으로 약간의 돈과 타고 갈 수 있는 배편을 알려왔다.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잠든 아이를 안고 밤을 꼬박 새웠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안겨 잠든 아이를 밤새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그런 할머니를 어머니는 옆에서 밤새 지키고 있었다.

“아이 이름을 기억하세요?”

“하모. 승팔이, 승팔이다. 일본에 이긴 팔월에 태어났다꼬 승팔이라고 지었다.”

할머니는 6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던 아들의 이름을 힘주어 말했다. 할머니의 아들은 1945년 8월에 태어났다. 어머니 품에서 8개월 동안 자라다가 다른 사람의 품에서 자라 이제는 회갑을 넘긴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마쓰시타, 어머니는 요시코이다. 할머니는 60여 년 전 자신이 아이를 업고 찾아갔던 일본의 지역명과 그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 대판에 있는 김해 사람 집에 데려다 줬다. 아 이름을 지어놨더라. 야스다 가스하찌. 그기 승팔이 이름이다. 경주보다는 잘 사는 것 같지 않더라. 아가 귀한 집이라 좋아하대. 한참 동안 사진하고 편지가 왔다. 아는 잘 크는 것 같더라. 말해 주겠다고 했다. 아가 크 모 에미 이름은 말해 주겠다고 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듯이 아이는 엄마의 품을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울었다. 온몸으로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골목을 빠져나올 때까지 들려왔다. 골목 끝에서 넋을 놓고 있는 할머니를 선원이 와서 데리고 갔다. 그 선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타고 왔던 배로 할머니를 데리고 가 밥을 주었지만, 수저를 들 수 없었다.

 

바다에 나를 버리다

뱃머리에 꼼짝 하지도 않고 앉아서 바닷물만 바라보았다. 물보라를 일으키는 바다는 할머니를 유혹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배의 난간 위로 몸을 올렸다. 바닷물이 할머니의 얼굴과 맞닿았다고 느낀 순간 할머니의 몸은 사정없이 들어올려졌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마디 굵은 손이 할머니의 허리춤을 잡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죽는 거는 순간이요. 살아야 아이 얼굴도 볼 수 있는 기요.”

살아 있어야 아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그 말이 할머니의 가슴을 후벼 파며 깊이 들어앉았다.

 

아가야 보고 싶구나

 

핏덩이 너를 등에 업고

현해탄을 건너 이국만리에 가서

너를 버리고 뒤돌아 설 때

돌아보고 또 돌아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눈물자죽만 남았단다.

 

연락선을 붙잡고 한 없이

울었단다

연락선은 가자고 고동을 불고

성난 파도 이리저리 흔드니

파도소리에 몸을 띄우려고

몇 번이나 맹세하였건만

끝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네.

 

오늘날까지 이것이

내 가슴에 응어리 맺혀

쇠못이 박힌 아픔을 느끼네.

– <아가야> 부분 –

 

“그때 죽지 못한 기 한이다.”

할머니는 60여 년의 시간을 그리움과 고통 속에서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살다 보면 잊혀질 것이라 여겼다. 잊기 위해 안간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일본에서 돌아와 보내는 나날은 살아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몸은 살아 움직이나 마음은 죽어 있었다. 생각나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었다. 아이가 누워 자던 자리, 꼼지락거리던 작은 손, 품에 안겨 웃던 모습들만 보였다. 그리고 울음소리만 끝없이 들렸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봐라, 김선생. 니는 공부하고 글을 쓴다고 했제? 내 이야기를 소설로 써 주라. 내가 살아 생전에 우리 승팔이를 우찌 만나겄노. 나 죽고 난 뒤에 승팔이가 혹시라도 나를 찾으면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지금이라도 내 아들을 만나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나 마이 생각해 봤는지 모른다. 키는 얼매나 될꼬, 목소리는 어떨꼬, 뭐를 좋아할꼬 온갖 생각 다 해봤다. 휴유, 내가 아는 기 하나도 없더라. 그래도 내가 지를 얼매나 사랑했는지,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는지 말해주고 싶다. 나를 마이 원망하겄제. 그 사람들이 지 어미에 대해 말을 해 주겄나? 말해준다고 했는데 말해줬을까? 우짜모 나를 모를지도 모르지. 그기 낫겄제? 그 사람들을 지 친부모로 알고 사는 게 낫겄제? 그래도 모른다. 혹시 아나? 갸가 나를 찾아 올지. 마쓰시타는 만났을까? 아이고, 우찌 만났겄노? 만나도 우찌 알겄노? 아이다. 내가 말해줬다. 혹시나 만날까 봐서 내 이름도 말해주고 내 살던 데도 말해줬다. 그라고 마쓰시타 이름도 말해줬다. 알았으모 지 아버지를 안 찾았겄나? 내가 지금 만나모 뭐하노 싶다가도 그래도 보고 싶다. 지는 나를 안 봐도 나는 꼭 한 번은 보고 싶다. 김선생, 니가 소설을 써서 잘 팔리면 그 사람도 안 보겄나? 요새는 그 뭐라카노, 일본 소설도 마이 나온다 카대. 우리나라 소설도 일본으로 안 가겄나. 그라고 살아 있으모 마쓰시타도 지 아들이 일본에 있는 거를 안 알겄나. 나를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기다. 내가 살아서는 말 못하겄다. 먼저 간 영감, 그 사람이 알면 섭섭해할까봐, 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처음부터 말을 안 하다 보께 그만 아무 말도 못했다. 그라고 영감을 보냈다. 나도 미안한 거는 안다. 우리 딸? 섭섭하겄제. 그래도 우짜겄노. 그래도 손가락질은 안 할 끼다. 지도 자식 낳고 사는데 우찌 그리 버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나를 욕하겄노. 나는 우리 승팔이한테 꼭 말하고 싶은 기 있다. 나는 니를 안 버렸다. 니를 살리라꼬 그랬다. 이말 꼭 하고 싶다. 내가 병만 안 들어도 몇 번은 찾아갔을 끼다. 우리 승팔이도 찾아오고 마쓰시타도 찾아 갔을 끼다. 내가 병만 안 들었어도…”

승팔이는 60여 년을 할머니의 마음속에서만 살다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승팔이는 할머니에게 여전히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울던 아기로만 남아 있다.

언젠가

승팔이도 이 일기장을

볼 때가 있겠지

이 모든 것이 허공에

꿈이 되었으면 싶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이것이 나와 승팔이의

맺힌 열매이다.

 

승팔아

이 어리석은 에미

바보 같은 에미

병든 나를 용서해 다오.

– <아가야> 부분 –

 

할머니는 긴 한숨 소리와 함께 이야기를 끝내고 팔을 휘이 저었다. 한참 후에 말을 이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만나기를 약속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할머니는 아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비록 아들은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미워하고 원망할지라도, 아니면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를 모를지라도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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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혼란의 시간 속에서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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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다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인식함을 의미한다. 현실의 시간은 순차적으로 지나가지만, 과거의 시간은 오히려 거꾸로 돌아온다. 되돌아 온 과거의 시간과 기억은 현재의 나를 성찰하게 하고, 그 성찰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행복했던 시간과 기억이 현재의 나에게 슬픔을 주더라도 비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할머니는 자신이 결코 과거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를 회피하거나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정기적으로 만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의 이러한 태도는 나에게 혼란을 주었다. 너무나 담담하게 전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에 어느 순간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엄청 난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고, 현재도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진실 되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요시코와 마쓰시타와의 이야기도 사춘기 때의 상상이나 드라마를 보면서 지어낸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왜 숙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걸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할머니로부터 처음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김선생이가? 나가 마이 아푸다. 이번 주는 오지 마래이.” 전화선을 통해 힘없는 할머니의 소리가 들려 왔다. 뭐라도 물어볼 틈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나는 급하게 할머니 집을 찾아 갔다.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고, 이제 낯이 익었는지 동네 개들은 짖는 대신 꼬리를 흔들었다.

마을 가장 안쪽, 마을 입구에서 보면 지붕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낮게 자리 잡은 할머니의 집은 마을보다 더 고요했다. 대문도 없는 할머니의 집 마당에 들어서자 일찍 핀 코스모스 두 송이가 눈에 띄었다. 주인이 없는 방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잘 정리된 방을 생경하게 보다가 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앞집 아주머니께 갔다.

“큰일 날 뻔 했제. 어데로 간다고 혼자 휠체어를 탔을꼬. 중심을 못 잡아서 휠체어하고 같이 요 밑으로 굴렀다 아이가. 이장이 병원 차 불러서 싣고 갔다. 그래도 김선생 헛걸음 한다고 전화하대. 참 두 사람 얄궂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 몸에 힘이 빠져서 겨우 걸음을 떼어 할머니 방 앞에 있는 작은 툇마루에 앉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둠이 내려앉는 마당에서

천천히 걸어도 마을 한 바퀴를 도는 데 30분이 걸리지 않는다. 그 마을 내에서 이동할 때에도 할머니는 전동 휠체어를 타야 한다. 할머니의 뭉툭한 발로는 중심을 잡고 걸을 수 없다. 할머니의 발은 언제나 붕대가 감겨 있었다. 방안에서도 할머니는 서지 않는다. 엉덩이로 움직인다.

마을 입구에 있는 교회에 갈 때나, 병원에 갈 때를 제외하면 거의 방안에서 생활한다. 교회에 갈 때에도 전동 휠체어를 타야 한다. 그래도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잠시라도 서서 움직여야 할 텐데 그때 미끄러지면 어쩌나 싶어서 발바닥에 미끄럼 방지 돌기가 있는 꽃무늬 양말을 몇 켤레 사 드린 적이 있다.

내 손으로 신겨 드리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싫다고 했다. 방바닥 한 쪽에 그때 사드렸던 양말 중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 양말을 신고 어디로 갈려고 했던 것일까? 지난 번에 왔을 때, “조금씩 운동을 하는 게 어떨까요?”했던 내 말이 너무 방정맞았던 것일까? 그 손으로 양말을 제대로 신기나 했을까?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나는 그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마당은 어둑해지고, 나는 조금씩 밀려오는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네 살 때였던가.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골목 입구에 있던 어떤 집에 들어가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 호기심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골목길은 신기했다.

그때 어느 집에서 개가 짖었고, 나는 겁에 질려 소리 지르며 뛰다가 엎어졌다. 금방이라도 큰 개가 나를 덮칠 것 같은 공포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아이가 뛰어와서 돌멩이를 던져 개를 쫓아내고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무릎에 난 피를 닦아 주고 있을 때, 그 애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오더니 나를 알아보았다.

그 애는 내 손을 꼭 잡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돌아서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집에서는 이미 난리가 나 있었고, 대문 앞에 퍼질러 앉아 있던 할머니 손에 끌려 그 애는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양 손에 두 꼬마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집에 가서 고마움을 전했고, 그 애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같은 나이였지만, 그 애는 나에게 언제나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그 애와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전학을 가기 전까지 우리는 매일 아침에 만나서 저녁에 헤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14년 후, 남포동 골목길에서 “리야”를 큰 소리로 반복해서 부르고 있는 그 애를 만났다.

나를 부둥켜안고 팔짝거리는 그 애와 달리 나는 뭔가 어색했다. 그 날, 그 옛날처럼 그 애의 손에 이끌려 그 애의 집으로 갔을 때, 온 식구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 둘이 만났을 때의 이야기가 꽃을 피웠지만, 정작 나는 즐겁지도 않았고 유쾌하지도 않았다. 또 반갑지도 않았다.

다만, 부끄러웠다. 같은 나이의 친구에게 보호를 받아야했던 나약했던 유년의 그 기억이 부끄러웠다. 바보같이 다 아는 동네의 길도 모르고, 나보다 훨씬 작은 개에게 놀라 겁쟁이처럼 엎어져서 일어설 줄도 모른 채 울기만 했던 내 유년의 시간을 누군가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고, 현재의 내 모습을 신기해하는 그 분들이 좋게 다가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마당에 내려앉는 어둠을 보면서, 왜 할머니가 숙자와 연관된 기억을 말하려 하지 않는지, 요시코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기억이 있다. 내가 어린 시절의 단짝과 함께 했던 시간이 부끄러워 감추고 싶듯이 할머니에게는 숙자가 감추고 싶은 기억인 것이다.

마주 보고 앉아서 함께 숙자의 시간으로 돌아가기에는 할머니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기억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할머니와 내가 나란히 앉아 함께 바라볼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요시코와 마쓰시타의 이야기만이 할머니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인 게다.

 

할머니를 다시 보다

할머니가 처음 구술한 시가 생각났다.

 

고요한 이 밤

풀에 벌레들

아름다운 멜로디로

내 심장을 울리네.

 

현해탄의 사랑이여

옛 추억의 첫사랑

– 내 전부를 바친 임이여

그리워 그리워서

하염없는 눈물에

내 옷깃이 젖었네.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여름밤 > 전문

 

마쓰시타는 할머니의 ‘전부를 바친 임’이다. 평생을 홀로 그리워하던 사람이고, 그 그리움 때문에 죄스러움을 떨칠 수 없었다. 고요한 밤이 되면 풀벌레 소리에도 생각나고, 초승달만 보아도 보고 싶어서 눈물 흐르게 하는 사람이 마쓰시타이다. 그에 대한 그리움은 마쓰시타를 만난 19살부터 80세를 넘기는 현재까지 할머니의 영혼을 기억 속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부림 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할머니에게 왜 ‘숙자는 말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할머니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 곳곳에서 기쁨보다 슬픔을 먼저 느끼며 살고 있다. 나는 할머니의 슬픔을 나의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할머니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여러 번 본 방인데도 다르게 느껴졌다. 낡고 오래된 가구가 지키고 있는 방은 정갈했다. 새삼스럽게 할머니가 자기 주변을 매우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엌에도 처음으로 들어갔다. 역시 깔끔하고 허투르게 놓인 그릇 하나 없었다. 보일러실 겸 세탁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사용하는 사람 없이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하다못해 벗어 던져 놓은 옷가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 드린 양말만 한 구석에 없는 듯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옷차림도 유난히 정갈했다. 여름에도 그 작은 방에서는 시골 방에서 흔히 나는 냄새조차 없었다. 그것들이 할머니가 품위를 지키고 자존심을 잃지 않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나의 어리석음이여!

지금까지 할머니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나, 나는 텅 빈 공간에서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할머니가 다쳤다는 말에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반응들, 온 몸으로 느꼈던 허탈함과 정신적인 공허감은 지금껏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할머니와의 이별 예감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할머니는 이제 자신의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고, 이별의 시간을 위하여 주변을 정리하는 것일 게다. 풀벌레의 울음을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말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멜로디에서 심장을 울리는 슬픔을 느끼는 할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마쓰시타가 옛 ‘추억의 첫사랑’임을 알면서 시를 통해 현재의 시간 속에 나타내는 것도 정리의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과거 시간 속의 자신과 현재의 자기를 비교할 수 있다. 숙자와 현재의 할머니를 비교할 때 숙자는 행복과 슬픔의 경계선에 있는 인물이다. 한센 병이 찾아 온 이후 어머니와 잠시 함께 했던 시간 외의 그 많은 시간을 할머니는 홀로 현실을 버텨냈다. 남편이 옆에 있었지만, 내밀한 속내를 털어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정신은 언제나 갇혀 있었다.

천형이라는 표현 외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병을 평생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몸과 마음의 상처를 혼자 다스려야 하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할머니의 세상 바깥에서 오빠와 언니들이 애타게 찾았던 동생은 숙자였다. 현재의 할머니는 아니었던 것이다. 회상만으로도 따뜻하고 포근해야 할 기억이 현실과 연결되지 못할 때 그 기억은 슬픔이 된다.

내가 어린 시절 친구와의 기억을 누구와 공유하고 싶지 않듯이 할머니에게는 숙자가 공유하고 싶지 않은 기억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숙자에 대한 호기심을 내 마음 속에서 지워야 하지 않을까. 숙자를 의식하지 않아야 할머니의 마음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할머니도 삶의 짐을 조금은 가볍게 내 앞에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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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기억 속의 이름 [치유시학]

?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유년의 이름, 그 따뜻함

내가 배우처럼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놀이터로 여기고 즐길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때 이름은 묘한 힘을 지닌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름에 쓰이는 문자의 뜻에 의해 삶의 방향이 결정되기도 하고,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에 의해 이름이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믿음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다. 더러는 이름을 바꾸면 미래가 변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내가 어릴 적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리야”라고 불렀다. 정말 나는 내 이름이 ‘리야’라고 믿었으므로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선생님께서 “김성리”를 부를 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꿋꿋하게 내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출석부가 접히고 ‘탁’ 소리를 내며 교탁 위에 내려지는 순간, 놀랍게도 한 남자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리야 이름 안 불렀는데예”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특이한 병 치례와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나는 꽤 알려진 아이였기 때문에 처음 만난 선생님과 많은 아이들은 남자 아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의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나는 당황했고, 내가 호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키가 크고 마른 몸집을 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천천히 나에게로 와서 “네 이름은 김성리다. 잘 기억해라”하시며 머리를 만져 주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아이들은 비실비실 웃었고, 용감했던 그 남자 아이는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 헝클어져 있었고, 대문 앞에서 할머니가 “리야”라고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거제도 내의 다른 지역에 계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오셨다. 나는 심각하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지만, 모든 가족들은 큰 소리로 웃기만 하고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은 그 자리에 내가 없는 것 같은 착각에 내 머릿속은 더 어지러웠다.

어둑해지는 데도 불구하고 나는 뒷마당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슬프고 외롭고 뭔가 분하고 억울했다. 아버지가 내 앞에 앉아 막대기를 집어 흙 위에 글자 세 개를 적어서 내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큰 소리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읽었다. “김, 성, 리, 네 이름이다. 리야는 우리가 너를 이뻐해서 부르는 이름이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 “리야”라는 이름은 나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한 기억이 되었다. 나를 “리야”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나의 성격이 어떠했으며 어떤 병을 앓았는지 안다. 심지어 내가 한글을 언제 읽고 쓰게 되었는지까지 안다. ‘리야’라는 이름 속에는 내 유년의 시간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놓아버릴 수 없는 유년의 기억

‘이숙자’라는 이름에는 할머니의 유년이 들어 있다. 할머니에게는 언니가 두 명, 오빠가 한 명 있었다. 오빠와 언니들은 할머니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미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향에 남겨졌던 여동생을 수소문하여 연락이 닿았음을 볼 때, 할머니는 부모형제의 사랑을 받은 막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빠와 언니들은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일본에서의 터전을 미처 정리하지 못해 귀국을 미루는 사이 국교는 단절되어 어린 동생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현실적으로 형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잊다시피 살았지만, 오빠와 언니들은 막내를 포기하지 않고 할머니를 찾았다.

“오빠는 안 만날라쿠데. 언니가….둘이 나한테 편지가 왔데….”

“오빠가 실망이 컸다 아이가. 언니도 실망하고….”

“실망 안 하겄나. 실망했제. 마이 실망했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오빠는 병든 여동생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때로는 끼니 잇기가 힘에 겨운 생활이었기에 오빠가 정기적으로 보내 주는 돈은 유용했다. 언니들은 간헐적인 도움을 주는 대신 잦은 전화로 동생의 안부를 챙겼다. 오빠는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까지 여동생을 내버려둔 세월과 고향 사람들과 세상을 용서하지 않았다.

“몇 해 전에 올케라는 사람이 왔다갔다. 오빠가 죽었다카더라. 일본 여자데. 오빠가 너무 마음 아파했다고….보고 싶어 했다고….”

“그래서 자기가 왔다고 하더라. 올케가 오빠 대신 나 보고 가서 말해 주겠다고. 흐응…. 내가 어찌 살고 있는지, 내가 어떤 모습인지 말해 주몬 죽은 오빠가 아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마치 고요한 마당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주위의 사람이 죽어서 가마니에 둘둘 싸여 갈 때도 할머니는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은 다르게 다가왔다. 자기의 유년의 한 켠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쁘고 어리게만 여겼던 막내 여동생의 고단한 삶은 뒤늦게 오빠의 한이 되었고, 그런 오빠에게서 할머니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느꼈다. 끝까지 여동생을 만나지 않은 것은 오빠의 가슴 아픈 배려가 아니었을까. 매달 오던 돈은 오빠 사후에도 한 동안 보내져 왔다. 올케의 말에 의하면 오빠의 부탁이 있었다고 한다.

“인자 돈이 안 온다. 올케도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있는지. 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돈 보낸다고 하데. 오빠가 죽기 전에 신신당부하고 부탁했다 카데.”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되어 현재까지 지속된다.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유년기의 행?불행을 떠나 언제나 부모님의 사랑과 형제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내가 ‘리야’라는 이름만으로도 외롭지 않듯이 ‘숙자’라는 이름에는 이제는 할머니만이 알 수 있는 관심의 시간들이 살아 있는 것이다.

 

내려놓을 수 없기에 고통이 되어버린 과거의 이름

숙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집에서 놀았다. 조신하게 살림살이를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나누는 생활에 싫증이 나면서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마침 집안에 서울에 가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여고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은 더 간절했다. 일찍 객지에 나가 자기 앞가림을 하는 오빠와 언니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집안이 좀 괜찮았다. 그래도 울산에는 학교가 없는 기라.”

집안 살림살이가 괜찮은 덕에 숙자의 여고 진학은 쉽게 결정이 났고, 숙자는 시험을 쳐서 부산공여에 진학했다. 부산에 하숙집을 정해 놓고 토요일이 되면 울산 집에서 지내다 일요일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었지만, 숙자의 자긍심은 나날이 높아갔다. 일제 강점기에 여고를 다니는 여성이 많지 않았기에 교복을 입고 기차를 타면 한복을 입은 또래 여성들의 부러운 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숙자는 할머니의 기억 속에 교복 입은 여고생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1940년대의 여고생, 단발머리를 하고 책가방을 든 얌전한 여고생의 이미지는 어쩌면 할머니의 영혼에 남아있는 또 다른 상처일지 모른다. 할머니는 ‘단발머리’를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그때는 전부 단발이라. 단발머리하고 있으모 공여생인기라.”

“하모. 단발머리하고 교복입고 기차 타 봐라.”

한 때는 단발머리가 억압과 획일화된 교육의 실체로 지목되어 지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 현실적인 시간 속에서도 할머니 기억 속의 단발머리는 꿈 많던 공여생인 숙자와 동일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숙자는 이제는 절대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기억 너머의 지층 깊숙한 곳에 홀로 남겨져 있다.

숙자로부터 60년도 더 되는 시간이 흘러갔고 많은 사건들이 지나갔다. 한 여인의 곁으로 셀 수 없는 바람과 흙이 마치 먼지처럼 날아갔다.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고 지고 또 피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도 태어나고 죽기를 수없이 반복했던가. 그러한 시간 동안 숙자는 할머니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할머니가 숙자를 기억 속에 묻어 놓고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은 유년의 기억이 현재는 고통으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숙자가 꾸었던 그 많던 꿈들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소멸되었고, 숙자는 바로 할머니의 유년기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숙자는 할머니의 타자였던 것이다.

 

저 푸른 하늘 밑에는

내 고향 내 살던 집이 있겠지.

 

집옆에서는 올해에도 살구나무에

활짝 핀 살구꽃이 피었겠지

마당 뒤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꽃이 떨어지면

바가지로 주워담아

실로 꿰어서 목에 걸던

그 어린 시절이 그립구나

– <고향> 부분 –

숙자가 살던 집에는 큰 감나무가 있었다. 숙자는 하얀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었다. 어린 적 우리 집 뒷마당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크지 않아 감꽃이 많이 열리지 않아서 나는 이웃집 마당에 떨어져 있는 하얀 감꽃을 주워 목걸이로 만들었다. 감꽃은 금방 시들었지만, 그 향기는 오랫동안 코끝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병든 몸으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고향>)”고 있다. 병은 숙자와 할머니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렸고, 숙자는 기억 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

 

과거를 말해주는 흔적, ‘숙자’.

숙자라는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으나 할머니는 숙자로 살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대신 풀어 나갔다.

 

삽짝거리로 나와서

돌다리를 건너

사랑하는 모교에 가고 싶구나

칠계단을 올라가면

우편에는 벚꽃나무와

좌편에도 벚꽃나무가

엉겨 붙어서 봄이 되면

벚꽃이 장관이더라.

(……)

친구들과 사진 찍던

그 추억이 떠오르며

선생님과 기념촬영도 했건만

모교가 잊혀지지 않고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네.

 

언제나 가보리

언제나 보고 싶어

먼 산만 바라보네.

– <고향> 부분 –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숙자는 결코 지워진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리웠고 언제나 돌아가고 싶었지만, ‘내가 숙자’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먼 산만 바라보’듯이 그렇게 숙자를 가슴 깊이 묻었던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그 과거의 과거가 함께 있지만, 누군가는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기억 깊숙이 묻어버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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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사랑, 그 고통의 여정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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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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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내 안의 타자

요시코가 마쓰시타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린 것은 그가 일본 순사 부장의 아들이라는 것과 대학 졸업반이라는 사실이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는 비밀이란 게 없었다. 어머니의 염려가 깊어지자 요시코는 마쓰시타를 피해 다녔지만, 마쓰시타는 일 년이라는 시간을 변함없이 그녀의 곁에서 맴돌았다.

마쓰시타의 관심이 싫지 않았지만,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더 움츠려 들게 했다. 이런 요시코의 마음은 아랑 곳 없이 마쓰시타는 틈만 나면 부산으로 왔다. 교문을 나서면 마쓰시타가 기다리고 있는 날이 많아지고, 어느 순간 그녀도 마쓰시타를 기다리게 되었다.

반복되던 일들이 어느 날 중단되면 일상이 낯설게 느껴지듯이 마쓰시타가 보이지 않는 날은 발길을 쉽게 떼지 못하고 교문 앞에서 서성이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요시코는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마음은 온통 마쓰시타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주 해운대에 갔다. 전철 안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붐볐지만, 둘 이외의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넓은 해운대 백사장에는 데이트를 나온 젊은이들이 간간이 눈에 띌 뿐, 그 어느 누구도 두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넓은 백사장은 마치 두 사람만을 위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의 힘이 외부의 장애는 장막으로 가려주지만, 세상의 잡다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요시코와 마쓰시타가 만난 시점은 일제 강점기가 마지막에 다다른 때이다. 일본의 힘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민족을 강제 점령하고 있는 국가의 국민을 사랑한다는 데 따른 심리적인 고통은 피하기 어려웠다.

마쓰시타에 대한 마음이 깊어갈수록 요시코의 고민도 깊어갔다.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겄노. 맨 날 마음은 지 멋대로인 기라. 만나고 온 날은 내가 미쳤제 싶다가도 자고 나면 보고 싶은 기라.” 자신의 마음을 자기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날들이 많아지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만남에 불안감도 커져갔다.

 

사랑, 고통의 시작

일본 본토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징용이 심해졌기 때문에 마쓰시타는 부모의 뜻에 따라 울산에 계속 머물렀다. 마쓰시타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머물고 있었기에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은 마을을 돌고 돌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요시코만 보고 요시코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한숨은 나날이 늘어 갔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벌어지는 전쟁 때문에 현실의 삶은 고단했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적대감정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자신들의 삶 자체가 위협받는 한국인들의 분노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일본인들의 집념은 크고 작은 사건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요시코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단단해져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의식은 때때로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여 무모한 용기를 준다. 주변의 염려와 위협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매일 만나서 둘만의 장소를 찾아 헤매었다.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요시코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축하받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었지만, 드러낼 수 없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을 만났을 때 초월적인 의지력으로 헤쳐 나가기도 하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당시의 요시코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 달마다 있던 것이 없자 어머니는 졸도할 지경에 이르고, 요시코는 아침만 되면 집을 나섰다. 신산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뒷산에 가면 언제나 마쓰시타가 있었다. 둘은 점점 말을 잃어갔고, 마쓰시타는 요시코가 안쓰러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오늘도 마쓰시타와 둘이서

남 모르는 고통을 안고

조용히 산과 들로 걸어가면

근심걱정에 싸여

눈에는 이슬이 맺혀

단풍잎만 바람에 휘날려도

눈물이 쏟아진다.

 

마쓰시타, 포켓에서

손수건 꺼내어 내 눈물을 닦아 주며

서로가 위로하고

정을 주며 정을 받고

둘이가 양손 굳게 잡고

우리의 따뜻한 깊은 사랑

변치 말자고 맹세하며 다짐하며

이 세상 끝까지 같이 가리라는

 

옛 추억이 다시금 떠오르네.

<첫사랑 2> 중에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에 60여 년을 가슴에 모아 둔 이야기를 시로 읊조리는 동안 병마가 지나간 흔적을 고스란히 지닌 얼굴이 회한으로 일그러졌다. 눈가에 맺히는 눈물이 지난 세월의 고통을 말해주고 있었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고 기억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지난 60년의 세월 속에서 요시코는 마쓰시타에게 잊혀진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할머니에게는 요시코가 그대로 살아 있어 그때의 고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잊지 못하기에 기억 속에 갇혀 있던 고통이 지금 내 앞에서 한 편의 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랑, 멈춰버린 시간

<이 여자 이숙의>의 이숙의는 남편 박종근이 빨치산 토벌군에 의해 사망했음을 알았고, 죽은 남편 때문에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미결수가 되기도 했으며, 경찰서로 불러 다니는 고초를 겪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삶은 의연했고, 말없이 그 고통을 삼켰다. 그녀가 의연할 수 있었고 교사로서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사망을 확인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와 달리 할머니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쓰시타가 자신을 잊었는지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지, 현해탄 너머 일본 땅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들은 어떻게 자랐는지 등 알아야 할 사실들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에 과거의 기억 속에서 나올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할머니는 ‘시’라는 출구를 통해 요시코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과거의 시간에 사로잡혀 있는 게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동화가 있다. <말하는 나무의자와 두 사람의 이이다>란 책에서 나무의자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날 “곧 돌아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침에 집을 나간 어린 이이다를 20년 동안 기다린다. 나무의자는 할아버지가 이이다를 위해 만들어준 이후 언제나 이이다와 함께 했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나무의자는 우연히 오래 된 폐허 같은 집을 발견하고 들어간 4살의 유우꼬를 보고 이이다가 외출에서 돌아 왔다고 여긴다. 마치 아침에 나갔다가 오후에 돌아온 이이다를 맞이하듯이 나무의자는 유우꼬와 이야기를 나눈다. 어린 유우꼬는 예전의 이이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무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나무의자와 소꿉놀이도 하고 그림도 그리며 논다. 오후가 되면 마당의 분수가 있는 연못 가에 둘이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어느 날부터 유우꼬는 마치 자기가 이이다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유우꼬를 염려한 오빠 나오끼는 나무의자에게 유우고는 이이다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무의자는 나오끼에게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유우꼬를 깊이 감추려고 한다. 유우꼬를 위해 나오끼는 이이다를 찾다가 리쯔꼬를 만난다. 진짜 이이다가 분명한 리쯔꼬는 그러나 이이다란 어린 소녀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나오끼에 의해 유우꼬가 자신이 기다리던 이이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의자는 부서지고 만다. 의자에 대한 아픈 기억을 안고 할머니의 집을 떠나 온 어느 날, 나오끼와 유우꼬는 리쯔꼬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리쯔꼬는 자기가 이이다였으며, 원폭에 의해 할아버지를 잃고 그 충격으로 기억을 상실한 상태에서 양부모에게 발견되어 리쯔꼬로 살고 있었으나 이제는 기억이 돌아왔노라고 했다.

리쯔꼬는 부서진 의자를 들고 와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었던 그 의자로 다시 만들어 자신의 침대 옆에 놓아두고 “내가 이이다야. 알겠니? 너에게 조그만 엉덩이를 얹고 앉았던 이이다란 말이야.”라고 매일 말을 건네고 있지만 의자는 침묵만 지킨다고 편지로 알려 왔다. 아침에 나간 이이다가 곧 돌아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나무의자는 2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기억 속으로 홀로 묻혀버린 그 이름, 이숙자

기억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의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기억하는가’는 ‘내가 어떤 일을 경험했는가’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요시코는 마쓰시타와 연관될 때 자신의 실존에 대한 문제를 지닌다. 할머니의 80여 년의 생애 중에서 요시코의 기억을 제외한다면, 남는 것은 한센병을 앓는 이숙자라는 여인만 남는 것이다.

이숙자, 할머니의 법적인 이름이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으니 봐 달라고 부탁하신 공과금 고지서에 찍힌 이름이다.

“이숙자라고 되어 있어요.”

“그기, 그기 그란께 해방되고 고칠 때 제대로 안 고쳐서…”

그날 이후 할머니는 한 번도 이숙자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 이름에는 마쓰시타를 처음 만났던 시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영원히 기억 속에만 간직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한센병 이전의 할머니의 고운 모습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이가 태어나면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이 이름 짓는 일이다. 이름을 단순히 한 사람을 호명하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애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 작명소가 있으며,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학식이 있는 사람을 찾거나 돈을 들이는 데는 호명 이외의 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존재를 의미한다. 내가 누군가를 부를 때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름을 쉽게 알려주지 않거나 타인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간혹 유명인들의 이름을 알더라도 그 사람 자체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이름은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상징적 호명의 도구일 뿐이다.

마쓰시타는 할머니를 ‘숙자’가 아닌 ‘요시코’로 불렀다. 마쓰시타가 알고 사랑했던 여인은 요시코였지 숙자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감추고자 하는 ‘이숙자’라는 이름에는 여러 가지 경험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울산에서 부산으로 다녔던 고녀 시절, 마쓰시타와의 첫 만남 등 할머니의 생애에서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시간들이 이숙자라는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숙자’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기 전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이름을 거부하고 요시코라고 스스로 부를 때 밝아지는 얼굴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채 2년이 되지 않는 사랑의 기억이 나머지 자신의 생애와 견주어서 결코 가볍지 않다는 뜻일까. 그리고 나에게 말한 ‘이말란’이라는 또 다른 이름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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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잃어버린 나를 찾다[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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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마쓰시타를 만나다

요시코가 17세 때 마쓰시타를 만났다. 주말이면 학교가 있는 부산에서 집이 있는 울산으로 갔다. 일제 강점기임에도 울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은 사각모를 쓴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 전신) 남학생들이 많았다. 명랑하고 활발한 요시코였지만,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많지 않던 때이기도 하고 남학생들의 모습이 눈이 부시게 보여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오바상, 일본어로 아주머니를 오바상이라고 불렀거든. 오바상이 나를 툭툭 치대.”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다가 한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드니까 나를 보고 있는 기라. 그래 좀 있다 내가 보나 안 보나 한 번 더 보니까 아직까지 보고 있는 기라.” 마쓰시타는 읽고 있던 책을 아예 무릎 위에 내려놓고 요시코만 보고 있었다.

할머니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64년이라는 시간은 멈추었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을 친구에게서 듣는 것 같은 가벼운 흥분마저 느껴졌다. 마쓰시타는 할머니의 작은 방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것처럼 시간의 강을 건너 할머니 앞에 앉아 있었다. 뭉툭한 손으로 뒤틀린 얼굴을 살짝 가리며 웃는 모습은 17살 소녀, 요시코였다.

부산이 가까워 오자 마쓰시타는 요시코가 앉아 있는 자리를 스쳐 지나가며 메모지를 교복 치마 위로 툭 던졌다. 그녀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메모지를 치마 위에 그대로 두었다. 부산에 도착할 때쯤 치마 위에는 메모지가 수북했다. 차마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서 반찬을 싼 보자기 안으로 밀어 넣고 기차에서 내렸다.

마쓰시타는 요시코를 쫓아와서 반찬 보따리를 뺏다시피 가져가서 들었다. 요시코는 마지막 전차를 타야만 하숙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빠르게 걷는 그녀 옆에서 마쓰시타도 함께 걸었다. “대신동 갈라면 어떻게 가느냐 이라데” 할머니의 말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쓰시타는 대신동이 아닌 기라. 그 학교는 대신동하고 반대편에 있는 학교라.”

많은 경험들 중에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경험은 시간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시간은 우리들의 과거를 뒤죽박죽 섞어 놓기도 하고, 낯익은 얼굴들을 기억 속에서 지우기도 하고, 어느 날 낯익은 얼굴이 낯설어 보이게도 한다. 생기를 띠며 소녀 같은 미소를 짓는 할머니의 얼굴은 시간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사랑을 맹세하다

마쓰시타는 말이 없는 요시코를 따라 전차를 타고 대신동까지 가서 그녀가 내리자 따라서 내렸다. “자꾸 묻더라. 이름이 뭐꼬? 주소가 어찌 되노? 어디서 사노? 주말마다 울산 가나? 울산 집은 어데고?” 처음 듣는 할머니의 웃음 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지만, 이른 새벽 풀잎 끝을 또르르 구르며 떨어지는 이슬방울 소리를 냈다.

마쓰시타는 자기가 사는 집 주소를 요시코의 손에 쥐어 주면서, 역 앞이니 울산에 오면 꼭 들려주기를 당부하며 돌아갔다. 마쓰시타가 사는 집은 경찰서와 거의 붙어 있었고, 그녀의 집은 경찰서 뒤로 조금만 가면 되는 거리에 있었지만, 애써 피해 다녔다. 마쓰시타가 순사 부장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방학 때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우체국에 가는 길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쓰시타는 자전거를 타고 쫓아오며 어떻게 알았는지 “요시코 요시코”라며 그녀를 불렀다. 우체국 안에까지 막무가내로 따라 들어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뛰다시피 집으로 오는 내내 요시코의 가슴은 콩당콩당 뛰고 있었고, 마쓰시타는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이름을 부르(<첫사랑 1>부분>)”며 그녀를 따라왔다.

그날 저녁에 잡지 책 안에

편지 한 통이

담으로 던져 마당에 있더라.

주워보니 그 얄미운

마쓰시타더라.

그리고 이것이

일 년 동안 지속되었다.

옛날 속담과 같이

열 번 찍어서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더니

이것이 나를 두고 하는 소리더라.

결코 만나자기에

일 년 후에 둘이가 만났더라.

<첫사랑 1>의 부분

둘의 사랑 앞에서 그가 일본인 순사 부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17세의 요시코와 마쓰시타는 “둘은 손을 꼭 잡고/동백섬에 들어가서 동백꽃을 꺾어/내 머리에 꽂아주고/내 역시 동백꽃을 꺾어서/그대의 윗 포켓에 꼽아 주며” “변치 말자고/손을 굳게 잡고 다짐하며/(< 첫사랑 1>의 부분) 맹세”했다.

그리고 이후 요시코의 삶은 두 손을 꼭 맞잡고 한 맹세에 갇혀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결혼을 한 다른 남자가 곁에 있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64년 전의 맹세에 묶여 있었다. 할머니는 시 <눈 내리는 날>에서 마쓰시타와 함께 한 시간들을 “팔십 평생을 살아도/눈 나리는 이 날이/잊혀 지지 않고/옛 추억이 그립더라.(<눈 내리는 날>부분)”고 말한다.

사랑에 대한 맹세의 기억이 없었다면, 어쩌면 할머니의 삶은 좀더 자유롭지 않았을까? ‘사람 목숨이 먼저이니 일단 살고 보자’고 그녀를 설득했던 청년 김철수와 결혼하여 59년을 함께 살았지만, 요시코의 영혼은 굳은 사랑을 맹세했던 마쓰시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별한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런 마음을 이야기 내내 표현하면서도 마쓰시타라는 이름 앞에서 17세의 소녀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 <이 여자, 이숙의>의 주인공인 이숙의 역시 결혼 생활 6개월 만에 월북한 남편을 잊지 못하고 53년 동안 홀로 지낸다. 불같은 사랑을 했지만 남편은 임신한 아내를 남쪽에 두고 월북하였다. 6?25가 발발하자 남하하여 빨치산을 조직하고 남부군으로 활동하다 잡혀 사형되고, 이숙의는 홀로 딸을 낳아 기르며 남편을 그리워했다. 이숙의도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남기고자 글을 썼지만, 책이 출판되기 전에 생을 마쳤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로즈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잭과 함께 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몸을 바다에 담근 채 “넌 꼭 살아야 해. 네가 원하는 삶을 행복하게 살아야 해”하며 바다 밑으로 가라앉던 잭을 죽는 순간까지 마음에 간직한 채 삶을 이어갔다. 다른 남자를 만나 아내로 어머니로 살면서도 잭을 떠나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요시코, 이숙의 그리고 로즈는 우연히 만나 사랑했고, 그 사랑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죽음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회상이 아닐까. 살아가면서 문득 문득 떠오르는 사랑의 기억은 그녀들의 삶을 때로는 기쁨으로도, 때로는 슬픔으로도 채우면서 출렁거렸던 것은 아닐까.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무르다

17세에 만나 채 3년이 되지 않는 시간의 기억들이 한 사람의 삶을 64년 동안 지배한다는 현실 앞에서 망각의 힘은 무력했다. 할머니가 마쓰시타의 생사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한 기억들이 의식의 흐름을 통해 지속되고 있었기에 현재까지 설레임과 그리움을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와 이숙의, 그리고 로즈에게 공통적인 것은 사랑의 기억이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요시코와 마쓰시타의 이별은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때문이었다. 한 인간의 힘으로 역사의 흐름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할머니가 했던 저항은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고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며 사는 것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무사히 삶의 저편에 닿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한 가운데에서 추억을 되살림으로써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마쓰시타와의 재회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이루어질 것으로 믿으면서 할머니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었으리라.

17세의 그녀는 마쓰시타와의 우연한 만남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년 동안 이어지는 마쓰시타의 구애를 받아들일 때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굴러갈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온 마음과 몸을 다해 사랑하고 사랑받았으며, 사랑만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우리는 본다. 사랑은 한 사람의 삶의 축을 가로지르며 척박한 현실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교사였던 이숙의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회주의자를 사랑했지만, 남편이 남긴 딸과 함께 역사와 이념의 장벽을 넘었다. 로즈는 자기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잭의 마지막 부탁이었기 때문에 잭을 가슴에 품고 또 다른 삶을 찾았다.

그러나 할머니의 사랑은 그들과 달랐다. 마쓰시타를 다시 만난다 해도 한센 병 때문에 그 앞에 나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의 손으로 남의 집에 양자로 보낸 아들의 얼굴은 한 살 젖먹이 얼굴 그대로 가슴 속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날마다 조금씩 변해 가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할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죽음마저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을 때 할머니는 스스로 자신을 가두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추억은 그러나 죽음과 같은 현실의 삶에 때때로 생기를 주었다. 마쓰시타와 함께 했던 해운대 모래사장과 동백섬은 척박한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회상의 공간이었으며, 눈 내리던 날에 함께 만들었던 눈사람은 잊혀지지 않는 순수의 지점이었다. 현실의 고통을 과거의 기억에 의해 버틸 수 있었던 것, 이것이 할머니의 삶에서 추억이 지닌 가치였다.

 

나를 찾아서 길을 떠나다

할머니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잃어버린 존재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단히 흘러가는 속성을 지닌 자연적인 시간은 추억에 의해서 할머니만의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무르는 것은 단순한 현실부정이 아니라 과거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을 부정하는 그녀만의 심리적 시간은 할머니의 의식이 의지적이든 무의지적이든 한센 병이 발병하기 이전의 시간 속에 자신을 두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욕구는 할머니의 사진이 한 장도 없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할머니가 보여 준 앨범 속에는 젊은 시절의 청년 김철수에서 영정 속에서 웃고 있는 모습 등 모두 사별한 할아버지의 모습만 있었다. 한센 병 발병 이전의 할머니는 그녀의 기억 속에 요시코의 모습으로만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물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지만, 오히려 과거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아닐까? 할머니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던 이유는 이숙의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짧았던 사랑의 기억만으로 살아왔지만, 그 기억 속에 자신을 가두고 싶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삶의 실존성을 회복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길, 이숙의에게는 자전적 소설이었지만, 할머니에게는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시를 쓰고 자신의 시를 읽으며 스스로 치유하고, 치유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찾는 데에 마쓰시타는 할머니가 건너야 할 또 다른 장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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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나는 누구일까? 내 인생길 (3)[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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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장애의 벽을 허물다

일주일이 지나도 할머니의 두통은 지속되고 있었다. 대화 중간에 말을 끊고 침묵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침묵하는 동안의 할머니는 마치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통의 실체를 직접 대면한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두려워하는 듯했다. 60년 동안 할머니의 내면에만 머물렀던 고통의 실체는 크고 단단한 옹이가 되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옹이를 할머니는 ‘몸 안에 묵어 있던 이거’라고 표현했다. “내가 오늘날까지 이거, 묵어 있던 거 몸 밖에 꺼내어 뭐할 낀고 싶다.”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몸 밖으로 꺼내는 것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혼자 고통을 되새기며 보내는 동안 몸과 마음은 경계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있어서 몸의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지만, 몸이 마음의 장애가 되어 자신을 속박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 장애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한다. 나의 운명을 어찌할 수 없을 때 고통은 시작된다.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속박했던 장애의 벽을 허물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과 이러한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마음 사이의 갈등은 할머니의 내면을 분열시키고 있었다. 갈등에 의해 할머니는 마음을 한 군데에 두지 못하고 계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자신의 삶의 행적을 차마 말로 옮기지 못하고 망설일 때에 시는 공감의 통로를 만들어 줄 수 있다.

“내 죽으모 그거는 인자 남가 놓고” 갈 수 있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내면의 고통을 드러낸 시를 죽은 뒤에 남길 수 있는 자기의 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할머니에게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이제 그 고통을 남겨 놓겠다는 말은 자기를 외면하고 소외시켰던 세계에 자기의 존재를 알리겠다는 하나의 징후이다.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은 자기 회복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취하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이다. 할머니의 삶을 지배하던 고통의 근원은 몸의 질병과 그 질병으로 인한 삶의 장애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고통의 실체를 시를 통해 드러내는 것은 삶의 장애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징후이지만, 그 징후는 망설임과 갈등도 동반하고 있음을 첫 번째 시에서 알 수 있었다.

고요한 이 밤

풀에 벌레들

아름다운 멜로디로

내 심장을 울리네.

 

현해탄의 사랑이여

옛 추억의 첫사랑

– 내 전부를 바친 임이여

그리워 그리워서

하염없는 눈물에

내 옷깃이 젖었네.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여름 밤> 전문

이 시에는 고통의 근원인 한센병에 대한 표현은 없고, 할머니의 고통이 단순하게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첫사랑 때문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실연의 슬픔은 여름밤 풀벌레 울음소리와 초승달과 같은 자연으로부터 전이되어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표현은 할머니의 내면세계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전이와 투사는 시를 쓰긴 했지만, 처음부터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기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이다. 내면의 갈등은 가라앉지 않는 두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같은 한센병을 앓았던 한하운 시인의 시를 읽고 그의 삶을 궁금해 하는 것은 시가 할머니에게 단절되었던 과거의 세계로 다가가는 소통의 길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다가가다

할머니는 두 번째 시 <어머니>에서 60년의 세월 동안 결코 멈추지 않았던 사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한센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어머니는 아이를 낳은 이듬해 큰병을 앓지도 않았고 시름시름 앓지도 않았지만 자리에 누운 지 며칠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는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입양시킨 후였다. 할머니는 “하늘과 땅 사이에 나만 남았지”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할머니는 다섯 번째 시 <내 인생길>에서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했노라고 했다.

어느 8월 15일

유난히도 밝은 달이었다

내 발걸음은 태화강을 걸어 가

강변에 우둑히 선

반구돌에 우뚝 서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

이것마저도 내 운명이 아니었는가

뱃놀이 나오는 사람들의

구제의 손길에 다시 살아났다.

<내 인생길> 부분

자신이 동네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한 채 물조차 마실 수 없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놓이자 태화강으로 몸을 던졌다. 자살은 세상과 단절되어 절대적인 밀폐의 상황에 놓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자기표현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과 한센병 발병이라는 현실에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이 불안이 극대화되자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개인은 관계를 통하여 전체를 구성한다.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고 전체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다면 ‘자기’라고 할 수 없다.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은 하나의 종합이므로 관계가 없는 인간은 ‘자기’가 아니라고 했다. ‘자기’라는 정체성은 혼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있을 때 형성되는 것이다.

할머니가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또 누군가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 주고 들어 주었더라면 자신을 스스로 버리는 극단적인 행동은 없었을 것이다. 자살은 할머니가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뱃놀이 나온 사람들에 의해 구조됨으로써 할머니는 또 다른 삶을 만나게 된다.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자기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멸시와 천대를 받아가며(<어머니>)” 살아야 하는 “손톱만한 벌레만도 못한(<내 인생길>)” 인간이기에 “차라리 벼가 되었으면(<내 인생길>)”하는 자기 부정은 분노를 불러 온다. 그러나 분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의식 있는 자는 고뇌하며, 고뇌하는 자는 분노할 수 있으며, 분노는 절망과 달리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 자신을 스스로 세우게 한다.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지워지고 싶지 않으며 인간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분노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분노에 의해 자기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마음의 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새로운 삶을 만나다

혼자 지내고 있던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움막으로 찾아 왔다. 조금씩 이상 증후를 띠는 몸 때문에 할머니는 그 남자가 움막에 드나드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며칠을 계속 찾아와서 할머니로서는 구하기 힘든 ‘대풍유’같은 한센병 치료제를 건네주었다. 자신을 약장수라고 소개하면서 중매도 한다고 했다.

“이 동네 저 동네 소문이 난 기라. 한센병 걸린 젊은 처자가 혼자 산다고 옆 동네에서 들었다 카더라.” 끈질긴 청을 거절하기 힘들었지만, 혼자 움막에서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더 컸다. 그 남자는 일본에서 한센병 전문의사가 와서 무료로 치료해주는 진료소를 차렸는데, 그 곳까지 함께 가주겠다는 제의도 했다.

할머니가 움막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도 아이도 떠났고, 할머니의 마음은 배고픔과 외로움과 불안감으로 지쳐갔다. 어쩌면 일본인 의사의 도움과 좋은 약을 먹으면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지금이라도 병이 나으면 마쓰시타와 아이를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에 그 남자를 따라 길을 떠났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 길을 잊을 수 없노라고 했다. “옷 보따리 하나 가슴에 안고 떠났제.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걷고 허름한 시골집 헛간에서 자고 또 걸었제.” 가도 가도 진료소는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면 그 남자가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때만큼 자신이 한센병에 걸린 게 고마웠다. 겨울의 추위는 낡은 옷과 신발을 뚫고 할머니의 몸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할머니는 사흘째 되던 날, 문득 눈 속에 반쯤 묻힌 자신의 발가락이 더 이상 시리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내가 발가락이 동상에 걸렸다고 막 울었다. 그 놈은 삐죽이 웃더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공포가 밀려왔다. 더 이상 안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몸은 마음과 달리 그 남자를 따라갔다.

초가지붕이 서로 어깨를 맞댈 정도로 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그 중 가장 큰 초가지붕을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했다. 의사라고 소개하는 남자를 보는 순간 할머니는 눈이 쌓인 마당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의사의 엄지 발가락이 꺾어져 발이 몽탕했다. “속았제. 속은 기라. 그 놈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엉터리 약도 팔고, 나처럼 병이 얕은 처자나 없는 집 처자들을 속여서 집단촌에 넘기는 기라.”

의사라고 소개받은 사람은 자기는 의사가 아니라고 했다. 일본에서 학교 다니던 중 징집을 받았으며, 군 생활 중 잦은 구타 끝에 한센병을 얻었다고 했다. “김철수라카대. 핸섬하대. 친절하고, 예의도 바르고, 마이 배워서 이해심도 깊고….”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할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흔들며 오래 전의 상황 자체를 부정하고자 했다.

할머니에게는 병을 고쳐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납덩이처럼 가슴을 누르는 아이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마쓰시타를 찾아가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할머니에게 그런 희망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집단촌이었다. 남자와 여자들은 각각 떨어져 다른 집에서 거처했다.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한센병을 앓는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되었다. 그게 정부의 시책이었으며, 그 마을이 존재하기 위해선 모두가 말없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다. 그 마을마저 없어지면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또 다시 산과 들을 헤매며 살아야 했다. 부부들은 낮에 일할 때만 서로 얼굴을 대하고 안부를 묻고 해가 지면 서로 다른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곳에서 할머니는 몇 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했다.

그때마다 번번이 잡혀 곤욕을 치루었다. 때로는 독방에 가두어 놓고 며칠씩 굶기기도 했다. 때로는 사는 게 싫어서 스스로 굶기도 했다. 마지막 탈출 시도 후, 갇혀 있는 방으로 김철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찾아왔다. “혼인하자카더라. 안 하면 인자 죽는 길 밖에 없다고.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 하대. 거기서 사람 목숨 하나 사라지는 거는 장난이라.” 나라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 곳에는 그 곳의 법이 있었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할머니는 혼인했다. 혼인하고 나니 남편은 더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럴수록 할머니의 외로움은 깊어갔다. 병든 사람들과 마주 대하고 있으면 자신이 금방 무너질 것만 같았다. 눈 속에서 시린 줄 몰랐던 발가락이 하나씩 없어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캄캄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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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게재된 사진은 전호근 작 <회현동 계단>입니다.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나는 누구일까? 내 인생길 (2)[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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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산속 움막으로 쫓겨 가다.

몸이 아프거나 외로울 때는 어머니가 끓여주던 미역국이 먹고 싶다. 싱싱한 생선과 생미역을 넣고 끓인 뜨거운 국을 먹으면 몸이 따뜻해지면서 힘이 솟았다. 어머니는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면서 안쓰러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미역국에서는 언제나 어머니의 냄새가 났다.

행복한 일상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에게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어머니이다. 할머니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어머니가 살아 계시냐는 질문을 자주 했다. 그 질문 뒤에는 “김선생도 아(아이)가 있제?”라는 또 다른 질문이 꼭 이어 나왔다.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얼굴도 알 수 없는 아들과 함께 수많은 마음 속 옹이 중의 하나였다.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소문은 마을 전체로 퍼져 나갔고, 가끔씩 호기심으로 소문의 진위를 탐색하기 위해 오던 이웃들의 발길도 끊겼다. 할머니와 어머니 둘이서 살던 집은 세상 속의 섬이었다. 두 사람은 말을 잃어갔고, 하루 종일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음이 기정사실화 되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살고 있던 집을 강제로 빼앗기다시피 팔고, 동네 뒷산 기슭에 있는 허물어져가는 움막 같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은 밤이 되면 더 무섭고 추웠다. 짐승의 울음소리도 무서웠지만, 누군가 와서 해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깊이 잠들 수도 없었다.

19살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초여름이었지만 부둥켜 안고 잠을 잤다. 산속 움막은 계절과 관계없이 밤만 되면 서늘한 바람이 여기저기서 들어왔고, 혹시 잠이 깊이 들었을 때, 누군가 와서 딸을 해칠까봐 어머니는 깊은 잠을 자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과 태어날 아이에 대한 불안감에서 할머니는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냈다.

움막 주위 어디에도 물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왔지만, 한센병에 걸린 할머니가 물가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씻을 물도 마실 물도 움막 가까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산속에 흐르는 물줄기 가까이에 갈까봐 멀리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람이 많은 시간을 피해서 새벽이나 저녁 무렵에만 우물로 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용케 알고 쫓아와 두레박을 뺏고 물통을 발로 차며 우물가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옷고름이 찢어진 채로 빈 물통을 들고 와 통곡하는 날이 많았다.

 

이래도 부모는 병든 자식이

그렇게도 좋을까

우물에 물을 뜨러 가시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레박을 빼앗기며

양철통을 발로 차이고

온갖 학대와 멸시와 천대를 받고

돌아오면 모녀간에 부둥켜안고 울어

눈도 붓고 얼굴도 부었네.

<내 인생길> 부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다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숨결이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벌레도 풀의 이슬을 먹고 사는데, 나는 사람이다 하고 소리 질렀다. 나는 벌레도 아인기라.”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할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떨어져 내리더니 코끝에 걸쳐 있는 안경알에 고였다.

할머니는 스스로를 사람도 아니고 벌레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 무엇이라고 했다.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살 수 없는 한센인은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한하운, <나>)”과 같은 존재였다. “다만, 억겁을 두고 나누고 또 나누어도 많이 남을 벌(<나>)”받은 존재인 것이다. 오로지 남아 있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한하운, <삶>)”라는 처절한 싶은 현실뿐이었다.

한센병에 걸린 자신으로 인하여 어머니가 겪는 고통은 할머니에게 자신의 병보다 더 견딜 수 없는 벌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들판으로(<내 인생길>)” 내달려도 마음의 고통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돌에 채이고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는 한센병의 진행을 도왔다. 병은 몸을 조금씩 잠식해왔지만, 뱃속의 아이 때문에 시중에 떠도는 약은 아무 거나 먹을 수 없었다. 한센병에 좋다고 인정된 약은 너무 비싸 사 먹을 수 없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절망이라는 마음의 병을 가지고 왔다. “차라리 이 땅위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내 인생길>)” 자신으로 인해 곤궁한 삶을 사는 어머니를 보면서 할머니의 마음은 병들어 갔다. “배는 불러오제, 끼니거리도 구하기 힘들제, 우리 어무이는 온 산을 헤매고 다니며 산나물이고 열매고 갖고 와서 나 먹이기 바쁜기라.” 할머니의 숨결이 다시 가빠졌다. 눈시울은 붉게 물들고 맞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살아 있는데, 죽은 사람처럼 먹지도 마시지도 씻지도 못하고, 사람 가까이에 갈 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삶은 사는 것일까? 죽는 것일까?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현재 살아 있지만,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지난날을 말로 다 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과 눈물과 떨림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6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과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차라리 자기가 없었더라면, 어머니는 가족이 함께 살던 큰 집에서 넉넉한 생활을 하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임신만 하지 않았더라도 어머니 곁을 떠났을 것이고, 그러면 어머니가 좀더 편안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회한도 컸다.

 

느삼태 찾아 이산 저산 헤매던 어머니

무더운 8월 여름에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조금씩 나오던 젖도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아이는 언제나 배를 곯았다. 어쩌다 살갑게 지냈던 사람들이 아이 낳은 것을 알고 살짝 갖다 놓고 가는 양식이 유일한 끼니거리가 되는 날이 이어졌다. 산 아래 사람이 사는 세상은 해방이 되었다고 기쁨이 넘쳤지만, 산기슭 움막에는 적막만 있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옷을 못 입혔제. 지도 산 목숨이라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는데, 젖이 안 나오는 기라.” 할머니는 이야기를 멈추고 긴 한숨을 쉬었다. “에미는 나병에 걸렸는데, 아는 괜찮더라. 참 우습제.” 많은 사람들이 전염될까봐 외면했는데, 정작 한몸으로 있었던 아이는 건강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찾아오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일본으로 급히 돌아갔다는 사실도 어렵게 찾아 온 친구를 통해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일본으로 가기 전에 할머니를 찾았노라고 친구는 전해주었다.

어쩌면 아이를 낳은 사실도 영원히 모를 것이라고 할머니는 짐작했다. 실제로 마쓰시타가 아이의 존재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할머니는 자신과 아이가 마쓰시타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았다는 믿음을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자 병은 무서운 기세로 할머니를 덮쳤다.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산모와 제대로 울지도 않는 갓난 아기를 두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산을 헤매고 다녔다. 한센병에 좋다는 느삼태를 구하기 위해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렸다. “허리에는 노끈을 드리우고 약초 망태기는 어깨에 메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산 저산으로 헤매며(<어머니>)” 다녔다.

어머니는 오로지 느삼태를 구하기 위하여 어떤 날은 “엎어지고 넘어져” “머리 깨어 피투성이가 되”기도 하고, “까치 밭길에 천 갈래 만 갈래 찢긴 옷”을 “바람에 휘날리”며 돌아오기도 했다. 느삼태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내 한이야 내 한이야”하며 통곡했다. 어머니의 통곡 소리는 지금도 할머니의 귓가를 맴돌고 있다.

 

사모곡과 할머니의 두통

어머니가 당했던 고통의 근원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할머니는 “머리털 하나하나 뽑아서 어머니 신틀메를 삼아도, 뼈를 깎아 어머니 공덕탑을 세워도” 불효를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겼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6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할머니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가 한 편의 시로 재현되었다.

이 불효 여식

벌레만도 못한 인생

이것 무엇 보시고

당신께서는 그 높은 사랑

사랑으로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십니까.

 

팔십 평생 살며

어머니 앞에

딸자식 자랑거리가 못되어

많은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받아가며

어머니 앞에 황송할 뿐인

이것이 내 인생길입니다.

 

어머니

끝끝내 당신은

나를 두고 눈물로

황승길 가셨나요.

아,

어머니.

<어머니> 부분.

시 <어머니>를 읊고 나자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이마에 열기가 있었다. 놀라서 화장대 서랍을 열고 약을 찾았다. 서랍 안은 몇 권의 공책과 전화번호부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수많은 약봉지 속에서 두통약과 해열제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약을 찾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돌아앉은 채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할머니의 말을 듣기만 했다.

“내가 오늘날까지 이거, 묵어 있던 거 몸 밖에 꺼내어 뭐할 낀고 싶다.”

“우리 어무이는 참 고왔다. 아버지가 좀 일찍 돌아가시고 해도, 남긴 것도 있고 논도 있고 먹고 사는 데에 넉넉했다.”

“봐라, 김선생. 약 안 먹어도 된다. 옛날 생각해서 머리 아프다.”

“어제 밤에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더라. 마이(많이) 나서 마이 울었다. 그래 머리 아프다.”

할머니 옆에 가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웃는 것뿐이었다. 할머니를 만나면 시를 읊기 전까지는 내가 많은 말을 하지만, 할머니가 시를 들려주고 그것을 받아쓰기 시작하면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받아쓰는 내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할머니의 두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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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게재된 사진은 전호근 작 <벽>(2007)입니다.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나는 누구일까? 내 인생길 (1)[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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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거울

인간에게는 부끄러움이 있고, 이 부끄러움 때문에 사실을 감추려고 한다. 영원히 감추어 두어야 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면 삶은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자신의 실상이 자신에 의해 가려져 스스로 소외될 때 우리는 기억 속에서 위안을 받고자 한다.

그러나 그 기억이 쓰라린 경험과 함께 떠오를 때 위안은 문을 닫거나 눈을 감는다. 이러한 의지와 관계없이 고통스러운 기억은 모습을 달리하여 우리의 삶을 떠나지 않고 머무르며, 마음 속 옹이를 단단하고 크게 키운다. 비록 그 옹이가 나의 고통이고 나의 삶을 잠식하는 것일지라도 그 상처를 잡고 있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을 잡고 있어야 나의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옹이는 작은 방 곳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초여름인데도 두꺼운 커튼이 작은 창문을 반쯤 가리고 있었고, 방안 그 어디에도 사진이 없었다. 사진이 없는 작은 방, 과거와 단절된 채 현재의 시간만 있는 그 방이 할머니의 옹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화장품과 약병이 놓인 화장대의 거울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큰 거울 앞에서 할머니는 아마도 비켜가는 시선으로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거울 앞에서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스스로를 비켜갔던 것일까. 그런 사이 옹이는 죽음처럼 단단하게 여물었을 것이다.

한하운 시인은 시 <자화상(自畵像)>에서 “한 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한 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얼굴은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모습이다.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얼른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이기에 그의 자화상은 옹이처럼 굳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일상에 언뜻 언뜻 비치는 모습은 한센병 이전의 처녀 적 고운 모습 그대로였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할머니의 손은 머리카락을 뒤로 단정하게 쓸어 넘기고 있었다. 방안에 앉아 있으면서 치맛자락을 가지런하게 펼치기를 반복하고, 81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리를 펴고 있었다.

“피부가 참 고우셔요.”라는 나의 말에 할머니는 턱짓으로 화장대를 가리켰다. “저거 좀 비싸게 주고 샀다. 저번에 화장품 아지메가 와서 새로 나온 건데 좋다 카더라.” 화장대 위에는 요즘 드라마 전?후의 광고에 나오는 화장품 병이 세 개 놓여 있었다. 수줍게 웃을 때나 나의 이야기에 크게 웃을 때도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 고와서 슬펐다.

 

눈물

할머니가 19살 때 한센병은 찾아왔다. 할머니는 명랑하고 친구와 노는 걸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학교수업 중에서도 체육시간이 가장 좋았다. 여름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문득 다리의 피부가 부옇게 보였다. 처음에는 때가 끼었나 싶어 문질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날이 갈수록 다른 사람의 눈에도 띌 만큼 부옇게 변하며 건조해져 갔다.

“땀이 안 나더라. 다른 사람들은 덥다고 땀을 닦는데 나는 땀이 안 나. 그때는 몰랐지. 한참 지나서 땀이 안 난다는 걸 알았제.” 혹시나 했지만 단순한 피부병일 거라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초여름인데도 계속 다리가 건조해서 어머니의 동백기름을 살짝 바르기도 해 보았지만, 나아지지 않고 얼굴까지 부옇게 느껴졌다.

그렇게도 좋아하던 체육 시간에 할머니는 혼자 그늘을 찾아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학교 가기가 싫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 날을 즐거워하며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짧은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을 뛰며

즐거워하고 있다.

 

나는 왜 이렇게 고통이 많고

내 앞에는 여러 가지 시련이 닥치나

절망에 싸였다.

<내 인생길> 부분.

할머니는 자작시 <내 인생길>을 천천히 읊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중간 중간 쉬어가며, 한숨을 크게 쉬며 나지막하게 들려주었다. 한센 병 이전의 할머니는 유일하게 종아리를 드러내고 마음껏 뛸 수 있는 체육시간을 매우 좋아하고 기다렸다. 종아리를 스치는 바람의 느낌도 좋았다. 하지만 남의 눈에 쉽게 띄는 종아리는 이제 감추어야 했다.

다리의 피부색이 변하기 전부터 얼굴과 몸이 붓고 손발에 힘이 없었다. 사랑에 빠졌던 할머니는 임신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어머니는 한의원에 가기를 권했지만 임신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할머니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감추는 것뿐이었다.

고녀 시절에 할머니는 남자를 만났고, 그리고 고녀 졸업반일 때 임신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일본 순사 부장의 아들이었기에 드러내놓고 말할 처지도 못되었지만, 처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은 너무 부끄러워 감추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지내는 위태로운 시간들이었지만 학교에 가는 것은 즐거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발의 감각이 무뎌지고 눈썹이 눈에 띠게 빠졌다. 세수를 하고 얼굴의 물기를 닦은 후 수건에 묻어있는 눈썹을 떼어내면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졸업이 다가오자 모두 사진을 찍는다고 들떠 있었지만, 할머니는 불러오는 배로 인하여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안에만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심한 백내장과 오랜 기간의 한센병 투병으로 동공의 색깔은 검은 색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눈물은 맑고 투명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쓸어내리던 손, 오랜 시간을 홀로 눈물 닦았을 그 손은 뭉툭했다.

무너질 가슴이 남아 있었던가. 할머니는 안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손을 빼내어 치마 밑으로 감추었다. 할머니의 마음속 뜰은 텅 비어 있었다. 출입문 유리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는 여름 햇살만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잡아주고자 하는 손마저 거부한 채 할머니의 눈물은 또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할머니의 감정이 살아있었음을 말한다. 60여 년 동안 누구에게도 열어서 보여주지 않았던 자기만의 뜰을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할머니의 외로움은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서 살아가는 곳이 세상인데, 그 곳에서 홀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불안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홀로 선 사람끼리 만나 둘(서정윤, <홀로서기>)’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가슴을 치며 울 수조차 없었던 할머니가 기대어 살아 갈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할머니는 임신을 하고, 또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센병에 걸렸던 것이다.

 

슬픔

외롭다는 것은 자신과 세상을 연결할 수 있는 공간이 비어있음을 말한다. 김소월은 <산유화>에서 청산에 홀로 피어 있는 꽃의 외로움을 노래했다. 청산과 꽃 사이에는 저만치 거리가 있듯이 사람이 있는 세상과 할머니 사이에는 텅 빈 공간이 놓여 있어서 건너갈 수가 없었다.

몸의 이상과 불러오는 배를 누군가 알아볼까봐 방안에 숨어 지낼 때, 할머니에게 친구들은 가장 큰 위안이었다. 친구들은 거의 매일 찾아와 그날의 일들을 말해 주었고, 할머니와 마쓰시타 사이의 전령 역할을 해 주었다. 그때쯤 동네에는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친구들은 그 소문에 개의치 않았고, 할머니도 애써 부정했다.

소문은 점점 더 거세져서 언제나 학교를 마치면 할머니에게 와서 한 이불 밑에 같이 발을 넣고 어깨를 맞대며 웃고 장난치던 친구들이 하나 둘 찾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온 친구는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밖에서 다시는 올 수 없다고 했다. 여기 온 걸 알면 부모님으로부터 크게 혼날 거라고 했다.

할머니는 자기를 떠나갔던 친구들에 대하여 담담하게 말했다. “온 동네에 소문이 파다했제. 그래도 친구들은 살짝 나와서 나하고 이불 밑에서 다리를 포개기도 하고, 아들이가 딸이가 농담도 했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보고 니는 연애도 하고 좋겄다고 부러워했제. 갸들도 어쩔 수 없었는 기라.”

하지만 그 당시의 할머니는 친구나 동네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앞의 현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는 자신의 예감대로 한센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슬픔이 끝없이 밀려 왔다. 그 슬픔의 눈물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 이렇게 땅 위에는

모래알같이 많은 인간이 살고 있지만

내게는 나병이라는 걸 내립니까.

하나님도 원망하고 싶고

내 자신도 미워

차라리 이 땅 위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내 인생길> 부분.

할머니는 자신을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게 더 좋을 뻔’한 존재로 생각한다. 이러한 자기 존재의 부정은 자기의 삶에서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게 한다. 뜻밖에 찾아 온 나병은 할머니의 삶을 죽음과 같은 어둠 속에 놓이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었기 때문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육체적인 질병에 의해 마음은 병들어도 삶은 지속된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절망에 빠지게도 하지만, 또 한편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희망도 품게 한다. 이 때문에 눈물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할머니는 나를 만났을 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세상의 온갖 재앙과 슬픔이 쏟아져 나왔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희망이다. 인간은 불행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희망 때문에 더 절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희망이 있어서 고통을 견디기도 한다. 할머니에게 임신과 한센병은 더 할 수 없는 불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자기만의 옹이를 진주로 키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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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60년의 닫힌 문을 열다[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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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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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집

집시들의 춤은 한 줄기 바람처럼 가볍고 노래는 오월의 햇살처럼 경쾌하다. 그들의 삶은 자유롭다.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마을에 들어서면서 먼저 마주친 것은 숨듯이 창 너머로 나를 훔쳐보는 눈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몸을 숙이는 여인의 모습에서 집시가 떠 오른 것은 어떤 연유일까.

차에서 내려 기억을 더듬어 마을 입구일 것이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마을은 보이지 않고 교회 십자가만 나무 가지 끝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애기똥풀 꽃이 가득한 길가를 돌아서 걸어 들어가자 비로소 교회가 모습을 드러내고, 내리막길을 따라 집들이 보였다.

할머니의 집은 마을의 끝이다. 경사진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다시 비스듬히 들어가면 유난히 키가 큰 노란 누드베키아 꽃들이 대문을 대신하여 서 있다. 담도 없고, 시골집에는 으레 있는 개 한 마리도 없는 작은 마당에 적막만이 감돈다. 문을 두드리자 두꺼운 안경 너머로 반가움이 먼저 나온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내 발걸음 수만큼 할머니는 뒤로 물러난다. 내가 가까이 다가앉자 역시 내가 다가간 만큼 뒤로 물러나 앉는다.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오늘은 별로 안 덥다.”라는 말로 물을 대신한다. 커다란 거울이 달린 화장대가 방 가운데에 놓여 있고, 화장대 위에는 몇 개의 약병과 함께 화장품들이 놓여 있다.

“어머니, 제 이름은 김성리예요. 부모님께서 여자는 영리해야 한다고 바탕 성에 영리할 리를 이름으로 주셨죠. 모두들 리야라고 불러요.” “거 좋은 이름이네. 뭐하는 사람이라고 했노?” “시를 공부합니다.” “시 공부하는 사람이 나는 뭐할라꼬 찾노.” 순간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하고 이야기 하려고 왔죠.” “어무이가 있나?” “네, 고향에서 큰 오빠 내외와 계세요.” “나도 딸이 하나 있다. 아니다. 둘이다.”

 

여성의 삶에서 어머니의 자리는 특별하다. 세상의 어머니는 모성이라는 그들만의 언어로 대화를 나눈다. 할머니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나이, 아이들, 남편,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을 묻고 또 물었다. 7월의 날씨는 더웠고, 나의 몸은 땀으로 끈적거렸다. 할머니는 엉덩이로 몸을 움직여 손바닥으로 그릇을 받쳐 물을 가져다주었다. 물을 마시고 말없이 부엌으로 나가서 그 그릇에 다시 물을 부어 할머니께 드렸다.

 

침묵의 대화

말은 입을 통하여 나오고 귀로 듣는다. 때로는 묻지 않아도 알고 대답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마음으로 하는 말은 마음으로 듣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께 한하운 시인의 시 <전라도길 – 소록도 가는 길>을 들려주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할머니는 세 번을 반복해서 들으며 뭉툭한 손으로 방바닥만 문질렀다. “누고?” 나는 한하운 시인의 삶을 이야기처럼 전해주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그 사람과 나는 함께 존재의 가치를 지닌다. 할머니는 한하운 시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노라고 했다. 시를 한 번 읽어보고 싶었노라고 했다. 그리고 덧 붙였다. “살았나? 죽었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방안을 가득 채우는 사이, 할머니와 한하운 시인의 시는 침묵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눈은 끝을 알 수 없는 시간 저 너머의 어딘가를 보고 있고, 나는 기다렸다. “이 사람은 왜 시를 썼을꼬?” 할머니의 말은 짧고 명료했으며, 간간이 이어졌다. “이 사람도 할 말이 많았겄제?” “처음에는 참 이상한기라.” “꼭 내 끼 아인 것 같고 넘 것 같다가도 내 낀가 싶고”

할머니는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라는 한하운 시인의 말에 “한참 일하다 보몬 칭칭 감고 있는 광목에 흙은 묻고, 집에 와서 풀어 보몬, 참 그런 기라”라며 응답했다. “내가 좀 그랬제. 우리 영감은 안 그랬다.” 소금을 먹어보기 전에는 소금의 짠 맛과 바다의 짠 맛을 구별할 수 없다. 담담하게 하는 할머니의 말을 옆에서 담담하게 들었다.

 

동무가 된다는 것

백 가지를 안다고 해도 한 가지를 모를 때가 있다. 그 한 가지가 사람의 마음이라면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경상도 지역에서 흔히 하는 말이지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 중의 하나가 ‘문디’이다. 서정주는 자신의 시에서 이 ‘문디’는 밝은 낮에는 나올 수 없어 ‘달 뜨면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우는 해와 하늘 빛이 서러운’ 존재로 묘사했다.

끝없는 황톳길에서 낯선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문둥이라면 친구가 된다. 그런데, 만약 마음을 털어놓고자 하는 상대가 문둥이가 아니라면 어찌할까. 나는 ‘문디’가 아니므로, 할머니 자체가 될 수 없으므로, 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할머니의 삶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머니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나도 쓸 수 있겄나?” “김선생은 많이 배웠제?” 할머니는 일제 말기에 여고를 다녔다. 주말이 되면 부산진역에서 기차를 타고 울산 집에 가는데, 어머니가 대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다시 학교가 있는 부산으로 떠날 올 때에는 보따리 가득 밑반찬이 들어 있었고, 어머니는 그 보따리를 들고 기차 안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아 주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마치 강물이 산등성이에서 바다까지 갈 때 햇빛이 함께 가는 것(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처럼 그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함께 하며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나는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할머니의 마음을 보았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혼자 속으로 조용히 우는 것(<갈대>)”이라는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할머니는 60여 년 동안 혼자 말하고 혼자 들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아무도 들어 줄 수 없었던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의 내면에 상처를 주고, 그 상처는 더 큰 상처를 주며 할머니의 삶을 기억 저 너머에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TV 프로그램 중 이산가족을 찾는 것은 언제나 본다고 했다. 오빠와 언니가 있었지만, 할머니의 한센병 발병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헤어졌기 때문에 다시 만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남과 다른 몸은 타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타인의 시선은 무차별적으로 그들만의 방법으로 나의 몸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살던 오빠가 오랫동안 수소문하여 할머니를 찾았을 때 오빠는 분노했다. 동생이 한센인이었기 때문에 국가도 사회도 심지어 고향의 지인들까지 동생을 버렸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할머니의 현실에 오빠는 절망하며 이 땅을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떠날 수 없었다. 떠나기에는 상처가 너무 컸다.

어디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한센인 집단촌에서 쫓겨나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며 전전하다가 낙동강 하구둑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 곳에서도 쫓겨나 용호동에 정착했다. 그것도 잠시 다시 신암을 거쳐 배를 타고 을숙도로 갔다. 을숙도로 가는 동안에도 인근 주민들은 삽과 곡괭이를 들고 나와 감시했다. 을숙도는 세상과 단절된 섬과 같았지만 차라리 그 곳의 생활이 편하고 행복했다.

사라호 태풍이 오자 한센인들은 집채처럼 덮쳐 오는 물기둥을 피해서 죽을 힘을 다 해 을숙도에서 탈출했다. 그들은 동네로 들어오지 못하고 인근 초등학교에 강제 수용됐지만, 그 난리 속에서도 주민들의 위협은 살벌하고 집요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밤에 그들은 청소차에 실려 지금의 마을에 내던져졌다.

 

소통의 언어

내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고통은 어떤 경우에도 나의 것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할머니의 삶을 떠나지 않고 있는 고통 중의 하나는 소외감과 절망이었다. 한센인들과는 같은 공간에서 숨조차 쉴 수 없다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집착은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혼자 잘 살겠다는 아집은 나에게 고통을 주지만, 너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아집은 타인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표현은 소통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소통을 가로 막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몸이 병들어 일그러지는 것은 육체가 무너지는 것일 뿐 한 사람이 일그러져 내려앉는 것은 아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 다른 개개인의 감정들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러나 겉만 볼 뿐 속은 보지 않는 마음에서는 감정들이 교차될 수 없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이러한 소통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할머니는 화장대 위에 놓인 공과금 고지서와는 다른 이름을 말해주었다.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는 “매독 같은(<공간의 시 6>)” 현실의 벽 앞에서 느끼는 상실감을 시인 엄국현은 “이름을 바꾸었으면 한다. 나는 바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공간의 시 6>)”라는 말로 대신했다. 이름을 바꿈으로써 자유로운 바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시인의 희망처럼 할머니도 이름을 바꿈으로써 영혼을 구속하는 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는지 모를 일이다.

마을 입구에서 마주쳤던 여인의 흔들리던 눈빛이 먼 옛날의 할머니 눈빛은 아니었을까. 그 여인의 눈길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하는 바람 같은 집시 여인의 희망을 보았던 게다. 희망은 현실을 추상화처럼 변형시키지만, 그 현실이 자신을 소진시키지는 않는다. 희망이 있으면 언제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81세의 할머니가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또 다른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할머니만의 언어이며 희망일 것이다.

스스로 믿고 희망하는 행위 자체는 하나의 체험일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조각상 토르소를 보며 “너를 바라보지 않는 곳이란 한 군데도 없으니까.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아폴로 고대 토르소>)”라며 토르소의 삶에 희망을 불어 넣는다. 집시들이 바람처럼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듯이 할머니는 60년 간 닫혀 있던 문을 조금씩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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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게재된 사진은 순서대로 전호근 作 (2004년) 작품으로 작가의 허가를 받아 올린 것임을 밝힙니다.[편집자]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