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주는 철학-2: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 촛불 맨드라미 [철학자의 서재]

들려주는 철학-2: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 촛불 맨드라미

 

강지은(한철연 회원)

 

유튜브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www.youtube.com/@user-vg6dx9dk5m) 채널을 운영하는 강지은 회원(달고나)이 박은미 박사의 신작 [아주 일상적인 철학] 출간을 기념하여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오디오북 두 번째 영상입니다.

“박은미 작가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을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읽어보려고 합니다. 작가는 내가 나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도 모르게 하는 거짓말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거짓말인 줄 모르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건 좀 부끄러운 일인 것 같은데요. 실제로 부부싸움할 때 예전 일의 기억을 더듬으며 다투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그 기억이 실제 기억이 아니라 왜곡된 기억일 가능성이 높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마음이 편한 쪽으로 기억을 조작합니다. 오늘은 고석정 꽃밭의 촛불맨드라미 위주로 풍경을 감상해볼게요. 맨드라미가 뾰족한 것이 참 예쁜데 어마어마한 넓이에 심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예쁜 꽃밭과 함께 [일상에서의 철학]을 들어보실까요?”(유튜브 채널 소개 내용)

아래 목차를 확인 하고 바로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0:00 하이라이트
0:49 인트로
2:09 나조차 속아넘어가는 나의 거짓말
4:28 인지부조화와 기억왜곡
9:02 후광효과

참, 주인장 달고나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달달한 목소리로 문학과 예술을 읽어주는 유튜브 채널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 많은 분들의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잊지마세요~!)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lS7hJpoip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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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주는 철학: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의 버베나꽃 [철학자의 서재]

들려주는 철학: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의 버베나꽃

 

강지은(한철연 회원)

 

유튜브에서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www.youtube.com/@user-vg6dx9dk5m) 채널을 운영하는 강지은 회원이 박은미 박사의 신작 [아주 일상적인 철학] 출간을 기념하여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책을 읽는 오디오북을 제작했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을 쉽게 풀어낸 책의 주옥같은 구절들을 귀로 듣고 읽어보니,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한 발짝 더 깊이 생각하면서 철학적으로 풀어내기를 제안하는 [아주 일상적인 철학]의 내용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고 쉽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10월 말까지 꽃축제가 이어진다는 철원 고석정 꽃밭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풀어내길 제안하는 책 [아주 일상적인 철학]을 차분한 마음으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아래 목차를 참고하여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1:05 인트로
2:37 내가 이런 건 다 부모 탓이라는 생각
6:46 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게 될까?
13:06 부모와 나의 관계는?
15:57 남 탓하지 말고 제3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참, 주인장 달고나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달달한 목소리로 문학과 예술을 읽어주는 유튜브 채널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 많은 분들의 구독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W_QSEy5nPBQ?si=hxPJ6lpMD2npRm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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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힘든 시기에 읽어둘 책, 박은미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 [철학자의 서재]

마음이 힘든 시기에 읽어둘 책, 박은미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

 

오상현(한철연 회원)

 

박은미 선생님의 책, 『아주 일상적인 철학』은 “마음을 힘들게 하는 생각 습관 벗어나기”라는 부제를 달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 속에서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가, 또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해 철학자의 시선에서 고르고 담았다. 화가 많은 나로서는 일종의 처방전이었다고 해야겠다.

“논리적 결론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때 인간은 그 논리적 결론을 수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이끌어갑니다. 즉 논리적 결론이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마음은 논리적 결론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요. 그러니 논리적 결론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그 결론을 외면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자기 보존을 원활하게 만드는 결론, 즉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결론을 참이라고 믿습니다.”(38쪽)

철학을 전공하면서 ‘논리’를 무기로, 토론을 빙자한 말다툼에 열을 올리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은 일상에서 논리적이지 못하다. 행동경제학이 전통경제학보다 재미있는 이유도 마찬가지. 다만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면 다행이겠지.

“반성 능력이 좋은 사람은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 입힐 가능성을 생각하고, 반성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 가능성을 별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즉 후자는 자신의 잘못을 못 보기에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거죠.”(214쪽)

‘정신승리’가 자기 보존에 유리한 것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요즘 유독 ‘책임’을 지겠다는 권력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답답하고 아쉬웠는데, 반성 능력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태풍도 폭염도 곧 지나간다 하였다.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박은미 #아주일상적인철학 #마음을힘들게하는생각습관 #반성 #논리 #철학 #정신승리 #태풍 #폭염 #곧지나간다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 이병태 [철학자의 서재]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이병태(한철연 회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1. 슈티르너는 우리에게 오로지 맑스를 경유하여 알려진 철학자다. 바쿠닌, 바우어, 푸르동이 그러했듯이 슈티르너란 철학자는 맑스의 조롱과 비판 ‘덕분’에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슈티르너가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확인하기에 앞서, 혹은 그럴 필요도 없이 그의 이름은 확고한 ‘악명’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악명은 구체적으로 맑스의 『독일이데올로기』를 통해 형성된다. 주지하다시피 맑스의 신랄한 비판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제로 맑스의 주저 가운데 상당수는 특정한 이론, 사상, 실천적 노선 또는 그 주창자를 향한 ‘비판서’들이다. 『독일이데올로기』, 『신성가족』, 『철학의 빈곤』, 『헤겔법철학비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심지어 『자본』도 ‘정치경제학비판’이란 부제를 달고 있을 뿐 아니라, 속류경제학 및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한 전투적 글쓰기를 감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비판은 『독일이데올로기』(이병창 번역)의 슈티르너 비판이다. 단순히 비판을 위해 한 사람에게 할애한 원고량도 놀랍지만, 글쓰기의 스타일도 전무후무하다. 우선, 늘 그렇듯 날카로운 비판이 전개되긴 하지만, 혼란스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한 문장 및 구성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나아가, 저술 전체가 마치 ‘악플’인 듯 처음부터 끝까지 슈티르너를 조롱하며 심지어 그의 연인까지 들먹일 정도다. 어쨌든, 국역본 기준으로 700여쪽에 달하는 이 장대한 비아냥거림 덕분에 슈티르너는 악명이나마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맑스의 공이 크다고 해야 할까. 궁금한 것은 이처럼 과도한 비판의 칼날이 왜 하필 슈티르너를 향했는가 하는 점이다. 맑스의 인성부터 『독일이데올로기』 저술시점이 지닌 역사적·개인사적 긴박함까지 다양한 추측이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맑스의 비판, 그리고 그 강도는 논적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를 향한 맑스의 과도한 비판은 어쩌면 슈티르너의 사유가 지닌 영향력 또는 잠재력을 맑스가 간파한 데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2. 슈티르너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 첫머리부터 이미 가장 적극적인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저 위대한 자기중심적 사람을 섬기지 말고, 오히려 자기중심적 사람 자체가 되라고 제안한다.” 신과 신성, 위대한 인류애, 왕 또는 국가가 끊임 없이 설득해 온 자기 희생, 그리고 이 희생의 열매인 다른 이들의 안녕 및 행복이란 그가 보기에 명백한 기만이다. 진정 신과 인류를 생각한다면, 이들이 드러내는 타협 불가능한 자기중심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신은 오로지 “다른 모든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나, 나의 전부인 나, 유일자인 나”만을 자기 행위의 근거로 삼는다. 세속의 ‘선량한 도리’란 신에 근거하든 인류에 근거하든 ‘나’에겐 부질없으니, 진리와 선, 정의와 자유 따위는 신이나 인류의 관심사일 따름이다. 나는 ‘나의 것’, 나만의 것, 따라서 ‘유일한 것’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나에게, 나보다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맑스가 말한 해방이 ‘현실’적인 것인 한, ‘이념’, ‘가치’, 이를 체화한 제도 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를 통한 ‘통제’ 역시 불가피하다. 슈티르너는 신, 철학, 과학, 혁명 그 어떤 미명을 내걸든 ‘나’를 강박하는 외부를 완전히 거부하며, ‘나’의 유일무이함, ‘나’의 근원성을 일깨우고자 한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순전히 ‘나’의 권역에 속하는 문제다. 해방의 이상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또 혁명이 모든 억압의 소멸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역사, 21세기 민주주의의 현실, 과학을 비롯한 학문들의 현재, 현대인의 삶 등을 되돌아 보면 슈티르너의 이같은 목소리는 지금도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듯하다. 나아가 슈티르너의 사유는 헤겔이나 낭만주의의 기풍이 역력하긴 하지만, 영향력 있는 여러 현대 사상가들과 유사한 궤적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다양한 외적 강제와 그로 인한 ‘나’의 침몰을 치열하게 사유했기에 어떤 점에선 푸코의 권력 이론에 맞닿고, 소크라테스 이후 인류가 고대의 생기를 상실한 채 ‘정신’과 ‘진리’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에 대한 니체의 사유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맑스는 아마도 슈티르너의 이같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찍이 간파했기에, 그리고 그의 사유가 혁명의 길을 흐트릴 정도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구석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처럼 과도한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나아갈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자의 목소리는 엇나가는 이들에 대한 규제를 함축하지만, 길끝의 영광을 선취하는 이는 도정의 고난을 잠시나마 잊게 하기에 훨씬 달콤하다. 아마도 슈티르너는 후자였고, 맑스는 압도적으로 매혹적인 후자의 힘을 간파했던 전자였을 듯하다. 맑스의 일갈에 묻힌 철학자를 우리말로 꺼내 21세기 한국의 철학도들에게 소개한 박종성의 노고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1) – 이병창 [철학자의 서재]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1)

 

이병창(한철연 회원, 동아대 명예교수)

 

1920년대 무정부주의자 박열의 연인 가네코후미코가 감옥(법정)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가네코후미코가 들고 있는 책이 있다. 아마 슈트리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아닐까 한다. 1844년 작성된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국내에 무려 180년 만에 박종성 교수에 의해 번역(2023)되었다. 원문 자체에 풍자가 섞여 있어 번역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박 교수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지극정성으로 마침내 번역되었느니, 감개가 무량하다.

법정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동아일보> 1927년 1월 21일자)

필자는 이 책과 악연이 있다. 이 책이 발간되자, 1846-47년에 걸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슈티르너의 글을 풍자하는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작성했다. 이 책은 아마도 슈티르너의 원본보다 부피가 더 큰 약 500페이지에 걸친 비판서인데, 필자는 2019년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마르크스 엥겔스가 토막토막 동시에 풍자를 섞어서 인용한 슈티르너의 글을 읽었는데, 필자는 풍자한 슈티르너의 원본을 알 수 없어서 마르크스 엥겔스의 글 가운데 어느 만큼이 풍자이고 어느 만큼이 본래 슈티르너의 글인지 알 수 없어, 번역이 말 그대로 고통스러웠다. 필자는 속으로 정말 많이 욕을 했다. 이 욕은 원문을 쓴 슈티르너와 그를 풍자한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어느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필자의 무능력에 대한 동시적인 욕이었다.

슈티르너의 원본이 먼저 번역되었더라면 필자도 고통어린 수고를 덜었을 것이고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뒤늦게야 번역한 박종성 교수에게 약간 원망감이 들기도 하지만, 이제 독자는 원본과 비교하여 마르크스 엥겔스가 비판한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니, 번역자 박종성 교수에게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슈티르너의 책이 번역된 마당에 슈티르너가 마르크스 엥겔스에 미친 영향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마르크스 엥겔스를 이해하는 데서는 물론하고, 슈티르너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간단하게 이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 엥겔스가 말 그대로 공역한 것이다. 한 사람이 작성하면 함께 읽으면서 다른 사람이 교정하면서 전개되었다. 슈티르너 부분은 먼저 마르크스가 작성하고 엥겔스가 교정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사실 슈티르너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 약간의 편차가 있다는 사실이 일찍부터 알려져 왔다.

슈티르너와 엥겔스는 베를린 히펠 바(맥주집인지 와인바인지 모호)에서 열리는 자유인들의 모임에 함께 참석하여 서로 잘 알고 있었으나 마르크스는 이 모임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이런 거부감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비판에서 잘 드러난다), 슈티르너와 소원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인지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평지를 보면, 슈티르너의 책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엥겔스는 처음 슈티르너의 책을 접하게 되었을 때 긍정적인 점이 있다고 평가하면서 마르크스에게 이를 소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마르크스는 아마도(?)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사람이 브뤼셀의 아지트에서 함께 히히덕거리며(마르크스 부인 예니의 표현을 따르면) 토론한 결과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보듯이 철저한 풍자인데, 마르크스 엥겔스는 슈티르너를 성 막스라고 하거나 돈키호테의 시종인 산초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뜻에 굴복한 것인지, 엥겔스 역시 처음부터 그런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기 힘들다.

아무튼 슈티르너의 책은 이렇게 풍자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두 사람에게 긍정적인 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엥겔스가 말년에 언급한 글에서 드러난다. 알다시피, 독일 이데올로기는 모제스 헤스가 출판을 위한 협조를 거부한 결과 출판되지 않았다. 나중에 엥겔스의 말(『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서문에서)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들의 수고를 쥐들의 비판에 넘겨주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엥겔스는 이 수고를 작성하는 가운데 그들은 진짜 목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그 진짜 목적은 곧 그들의 사상인 역사적 유물론의 탄생이었다. 엥겔스의 회고에 따르면 슈티르너의 대담하고도 확고한 비판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포이에르바흐식의 유적 본질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슈티르너의 철저한 개인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관점을 통해 비로소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빛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이 지닌 혁명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못하고, 역사적 유물론으로 나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의 생각으로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의 아포리아로 알려진 두 가지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선 홉스의 아포리아가 있다. 즉 철저한 이기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절대왕권을 정당화한다는 문제다. 또는 마르크스의 아포리아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교환 관계를 통해서 여전히 불평등이 불생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마르크스는 개인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 유물론으로 이행했는데, 유일자의 절대적 자유와 그의 힘에 의한 소유를 타당으로 하는 슈티르너 자신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고민했는지 궁금하다. 만일 슈티르너식의 해결책이 있다면 굳이 우리는 역사적 유물론으로 이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사에서 슈티르너의 영향은 광범위하며, 20세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사상에 끼친 공적은 말할 것도 없이 잘 알려져 왔다. 특히 20세기 말 데리다나 들뢰즈의 철학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티르너의 사상에 대한 데리다나 들뢰즈의 평가도 흥미롭지만, 평자로서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니체에 대한 슈티르너의 영향이라는 문제이다. 19세기 말에는 슈티르너의 영향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었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오히려 그 영향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문제는 사실 니체의 사상적 발전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니체 연구자의 관심에 속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슈티르너의 유일자나 소유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흔히 유일자의 자유, 힘이라는 개념을 니체의 권력의지라는 개념과 비교되는데, 양자는 표면적으로 보면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니체의 경우 권력의지는 자기를 초월하는 힘, 즉 위버멘쉬의 힘이다. 그러나 유일자의 힘이란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힘이니,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닐까?

문제야 어떻든 간에 사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슈티르너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발언이 일종의 풍자인지 아니면 솔직한 자기주장인지 가려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풍자로 말한 것을 그의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오독이 될 텐데, 마침 박종성 교수가 이 책을 번역했으니, 슈티르너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가 본격적으로 연구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시 한번 박종성 교수의 노고를 치하한다. 벤야민은 책은 자신의 삶이 있다고 했는데 이번에 번역된 책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박선 지음, 『카메라 소메티카』(갈무리, 2023) 서평 – 박소연 [철학자의 서재]

신체를 경유해 감각하는 영화 이미지의 시대 – 『카메라 소메티카』 (갈무리, 2023) 서평

 

박소연(영화연구자, 수원대/성신여대 강사)

 

영화가 회화의 세계에 접속하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카메라 소메티카』의 분석 대상인 영화가 회화를 참조하는 방식은 조금 특별하다. 이 책은 분명 회화, 화가, 미술관 내/외부, 관람객을 소재로 한 영화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다루고 있지만, 회화 작품이나 미술관을 단지 소재주의적 차원에서 주목하는 데서 그치거나, 영화와 회화의 상호 매체적 관계를 관습적인 방식으로 분석한 책이 아니다. 저자가 세심하게 선별한 영화는 하나의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회화 작품이나 이를 구성하는 회화 담론을 매개함으로써, 회화와 영화가 공존하는 접경지대에서 발생하는 감정적이고 정동적인 화학작용을 감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화학작용이란 영화 속의 관람객, 그리고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 주체의 인지적 경험을 말한다. 말하자면, 『카메라 소메티카』는 미술(관)의 관람성과 영화의 관객성을 중첩시킨 영화를 인지주의적인 차원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고 분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저자는 오늘날의 포스트 시네마 관객성이 완전히 새로운 무엇이 아님을 강조한다. 뉴미디어 시대의 수용자가 신체와 감각을 통해 체험하고 전유하는 정동은 과거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사진 이미지가 담고 있는 정서적 잔여물과 일맥상통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관객의 신체를 경유해 감각하는, 이른바 “복제 이미지의 신체화로서 카메라 소메티카”(17)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저자의 이러한 개념은 동시대 맥락에 적용되거나 재고된, 바쟁, 벤야민, 바르트의 개념이나 논의를 포괄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카메라 소메티카』의 구성을 살펴보자.

 

회화를 생동하게 하는 영화의 활인화

1장과 2장에서 다루는 <풍차의 십자가>(2011)와 <셜리에 관한 모든 것>(2013)은 회화가 생산하는 고정된 의미를 해체하고 확장하는 영화 매체의 활인화 사례로서 등장한다. 브뤼헐의 <갈보리 가는 길>을 활인화 한 영화 <풍차의 십자가>는 회화 속 탈중심화된 인물들을 영화적 몽타주 형식으로 소개함으로써, 폭정의 희생양이 된 플랑드르 사람들의 역사적 현실을 드러내고, 관객이 일방적인 해석이 아닌 개인적인 해석을 가능케 만든다. 저자는 <풍차의 십자가>가 취한 형식적 시도가 회화 작품의 고정성과 폐쇄성을 해체하는 작업이며 이는 바쟁이 제기했던 “재현의 탈인본성(58)”을 구현하고, 나아가서는 완전 영화를 추구하는 사례임을 주장한다.

또 다른 활인화의 사례인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호퍼의 회화 속 여성 인물들에 셜리라는 이름과 일관된 정서를 부여하고, 회화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의 배경에 배치하여 관객을 디제시스 세계로 초대한다. 이 같은 방식은 셜리의 내적 정서를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연동시키고, 개인과 역사의 교직 속에서 호퍼 그림을 지배하는 고독감을 궁극적으로 에로스적 생명력으로 재탄생시켜 관객과의 교감을 꾀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재매개를 통해 경험을 추체험하기

3장과 4장에서 다루는 <잊혀진 꿈의 동굴>(2013)과 <유메지>(1991)는 각각 동굴 벽화를 남긴 구석기 인류와 화가 유메지의 경험을 영화의 재매개를 통해 추체험하게 하는 영화다. 저자는 유물로서 쇼베 동굴 벽화를 포착한 베르너 헤어조크의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2013)을 분석하면서 이 영화가 기존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은 “동굴벽화를 재현하는 방식과 그 재현 방식의 인지적 효과”(124)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가 구석기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재매개하는 방식은 동굴을 찾아온 사람들로 하여금 구석기 인류와 현대 인류의 유사성을 인지하게 하고, 나아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인 숭고까지 경험하도록 만든다. 이때, 관객은 영화가 재매개하는 벽화동굴 방문자의 이중 숭고 체험을 통해 쇼베 동굴 벽화를 수용하게 된다.

<유메지>(1991)는 화가 유메지가 자신의 창작활동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모습을 줄곧 담는다는 점에서 화가의 전기를 담는 관습적인 화가영화와 구별된다. 더욱 특기할 점은 스즈키 세이준은 유메지가 겪는 창작 불능의 고통을 “현재와 과거, 현실과 몽상, 회화와 영화의 이종적 이미지를 공존”(167)시킴으로써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간극의 공존 속에서 관객은 분산적으로 유메지의 상태를 지각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근대 일본이 봉건 이데올로기와 서구 지향적 모방 의식 사이(166)”에서 방향성을 잃고 창작 불능에 빠진 예술가로서 유메지가 드러나게 된다.

 

초국적 공간에서 다변화된 관객의 시선

5장과 6장은 미술관과 박물관의 새로운 관객성을 포착한 영화를 분석한다. <뮤지엄 아워스>는 관광지와 미술사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를 통해 지구화 시대의 근대성을 성찰하는 영화다. 특히 저자는 지구화를 근대성의 연장선으로 간주하고 벤야민이 근대성의 핵심으로 본 소요객의 이중적 정체성을 주인공 요한에게서 발견한다. 영화는 소요객이자 노동계급 도시인으로서의 요한을 통해 19세기 예술가 지식인과 구별되는, 근대성에 대한 시선과 자의식을 발견해낸다. 이는 “아우라가 대상에 귀속된 성질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간 정서”(234)로 보는 탈근대적 관점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

6장은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과 영국 내셔널 갤러리를 무대로 삼은 두 편의 다큐멘터리 <프랑코포니아>와 <내셔널 갤러리>가 “미술관과 예술 담론의 다층성”(249)과 “초국적 공간에서 다변화된 관객의 시선”(281)을 드러내는 방식을 주목한다. <프랑코포니아>가 루브르 박물관을 구성하고 있는 창작자, 권력자, 민중의 관계망을 영화적인 중첩 서사로 가시화한다면,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 속 예술작품이 독자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기보다 “현재적이고 관계적인 양상 속에서 끊임없이 그 의미가 재구성”(270)되는 풍경을 관찰하고, 제도로서 미술관이 예술성과 대중성 그 사이 어딘가를 지향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저자는 두 영화가 각각 미술관의 안과 밖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동시대의 관람객에 대한 해석은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동시대의 루브르 박물관은 예술품과 관람객의 거리감이 자아내는 아우라가 아니라 예술품과 관람객 사이 내밀한 접촉과 의식을 만나는 공간임을,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의 규율이 설명하지 못하는 관객의 “감각적이고 인지적인 교감”(275)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임을 강조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처럼 『카메라 소메티카』는 영화가 회화를 활인화하거나 재매개하는 관계 속에서 수용자와 내밀한 관계성을 추구하는 영화 매체의 이미지를 깊이있게 탐구한다. 시차와 논의의 층위가 조금씩 다르긴 하나, 저자의 시도는 전통적인 영화 양식 내에서 인지주의적 접근을 통해 분산적이고 주관적이며 정동적인 포스트-시네마의 관객성에 대한 사유를 이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이는 상대적으로 인지주의적 영화 연구가 미진한 국내의 상황으로 보건대 절대 작지 않은 성취다. 나아가, 영화 매체뿐만이 아니라 동시대 영상 매체를 향유하는 관객성을 사유하고 연구하는 데도 좋은 아이디어나 영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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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박사 지음,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서평 – 이병창 [철학자의 서재]

김성수 박사 지음,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서평 – 이병창

 

이병창(한철연 회원)

 

1)

2023년 1월 28일(토) 오후 2시, 천도교 본당에서 김성수 박사님의 저서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박사님은 출판에 즈음하여 소회를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노래를 하나 하겠다고 하면서 가고파를 부르셨다. 박사님은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우셨겠는가, 나 역시 박사님의 노래를 들으며 속으로 함께 울었다. 지금도 박사님이 부르던 ‘가고파’ 노래가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다.

박사님은 1936년 태어나셨으니, 지금 86세, 거의 아흔에 가깝다. 연대 철학과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 유학을 떠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으니, 보통은 한국에 돌아와 어느 대학교에서 교수를 하시다가 이제 은퇴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과 박정희 독재 체제는 박사님의 인생을 한꺼번에 바꾸어 버렸다. 1973년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와 관련된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973년부터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역만리 독일에서 망명 아닌 망명자의 신세가 되어 외로이 떠돌게 되었다.

박사님은 그 후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창립하면서 90년대 김대중 정권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가 일어나기까지 유럽 전역에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한 생을 바치셨다. 80년대 초 일부 회원들이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박사님에게 그런 길은 열리지 않았다. 박사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동경대전』을 독일어로 번역하셔서 유럽에 한국의 사상을 전하는 데 진력하였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2003년 9월 마침내 국내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으나, 정권이 바뀌면 다시 귀국이 금지되었다가 문재인 정부 시절 다시 귀국이 허용되었다. 그 사이 이미 유럽에 삶의 지반이 펼쳐져 있는지라, 박사님은 가끔 귀국할 수 있었을 뿐이니, 그러다 이번에 저서를 국내에서 출판하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얼마나 크셨겠는가.

박사님을 아는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출판기념회는 성황리에 끝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국내에서 박사님과 같이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후배들이 박사님의 출판을 마음으로 후원하였으니, 박사님도 무척 고맙게 여기시는 듯했다. 이제 박사님의 책을 미리 읽어본 후학으로서 박사님의 저서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 김성수 박사 / 출처: 도서출판 바람꽃 https://blog.naver.com/windflower_books/222992521925

2)

이번에 발간한 철학서 <서양철학의 역설>이라는 책은 제목에서 밝혀진 대로 서양철학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질적으로 사로잡혔던 역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역설이란 무슨 문제인가,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사람은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역설이라고 한다면, 영어로는 ‘paradox’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 주장이 서로 평행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A를 주장하게 되면 그것과 대립하는 주장인 B가 A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그것은 거꾸로 B라는 주장 역시 필연적으로 A라는 주장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사님은 이를 상호전환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뜻은 대립하는 두 주장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뜻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paradox’는 한자어로 역설[逆說] 즉 대립하는 주장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박사님은 이런 역설의 형태로 딜레마, 이율배반[Antinomie], 자가당착, 무한 진행, 순환론과 같은 다양한 형태를 거론하고 있다.

이 역설의 문제는 근대 철학에서 고전주의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 변증론에서 다루었으나 결국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는 다른 차원으로 이전해 버리고 말았던 문제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역설의 문제를 철학적 언어가 가지고 있는 모호함 때문이라고 보고 역설을 해결할 명확한 철학적 언어를 끝내 찾지 못하였다.

칸트와 러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남겨놓은 역설의 문제를 박사님이 자신의 책에서 포괄적이고도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학문의 길에서 어디서나 그렇듯이 문제를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은 문제를 극복하는 가장 지름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자리에서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역설의 종류나 형태를 일일이 열거하고 소개하는 것은 굳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서양철학에 대한 약간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던 것일 것이다.

 

3)

박사님의 책 가운데서도 이채로운 것은 문학에서 역설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박사님은 다양한 서양 문학 작품 속에 이런 인간론적 역설이 어떻게 등장하는가를 보여준다. 박사님은 이것을 통해 철학적 역설이 단순히 철학자만의 고답적인 고민에 그치지 않고 사실은 인간 자신의 삶 속에서 그때마다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박사님은 여기서 괴테의 <파우스트>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소개한다. 철학적 역설의 문제는 철학자의 소관이니 일단 그들에게 맡긴다고 하더라도 문학 작품에서 나타나는 역설의 문제는 철학적 고민이 삶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이 자리에서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파우스트>에 관해서 약간 상세하게 소개하였으면 한다.

박사님에 의하면 파우스트는 이성과 회의(성찰)을 상징하는 파우스트와 악과 행동을 상징하는 메피스토펠레스 사이의 대립을 그 기본 구도로 한다. 행동 없는 성찰에 지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감각적 자연 충동을 부여받게 된다. 파우스트는 이성과 감각적 자연 사이의 통일을 확신하면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저주를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 1부에서 파우스트는 감각적 충동에 의한 행동으로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충동으로 살아가는 그레첸을 사랑하게 되고 이를 통해 쾌락을 얻다. 하지만 감각적 자연 충동은 자연 자체의 자기모순으로 파괴되고 만다. 파우스트는 사랑을 방해하는 그레첸의 오빠를 살해하고 순진한 그레첸은 자기의 죄 없는 아이를 살해하면서 파국에 이른다. 순진한 자연 충동에 의한 삶은 자기모순을 통해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파괴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감성과 이성의 통일은 여기서 불가능하게 된다.

» 2부에서 파우스트는 고전적 미(美)의 이상인 그리스로 시간 여행을 한다. 그는 고전 그리스에 이르러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다. 헬레나는 고전적 미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마침내 이성과 감성적 미의 통일에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의 미는 이성적 질서인 자유의 이념을 직접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며, 여기서 개인의 자각적인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폴리스만이 자유롭고 개인은 어디까지나 폴리스를 대신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도 모순이 해결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파우스트와 헬레나의 아들인 오이포리온이 하늘을 날려다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통해 상징된다.

» 3부에서 파우스트는 근대 세계로 돌아와 제후가 되어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국가를 세우려 한다. 파우스트는 황폐한 자연의 개간을 통해 이성적 질서인 자유와 물질적인 행복이 함께 하는 사회에 이르려 한다. 자연의 개간이 끝나자, 마침내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지금 멈추어라’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 마지막 부분은 파우스트가 바라던 이성과 행복의 통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박사님은 이런 자연의 개간 과정에서 파우스트가 자연 속에 살아가는 노부부를 살해하는 데 주목한다. 노부부는 아마도 자연 자체 곧 신적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사님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곧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니 여기서도 이성과 감성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4)

이상에서 박사님은 서양철학사에 등장한 다양한 역설을 소개한 다음, 서양철학이 이 역설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발버둥을 쳐 왔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발버둥은 그만큼 역설의 문제가 서양철학을 괴롭혀 왔기 때문인데 박사님은 전반적으로 이런 시도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박사님은 이런 시도를 세 분야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 번째 사변론 분야에서는 사변적인 사유를 통해 역설을 극복하려는 시도인데, 여기에는 초월주의와 에소테릭(비의), 알레테이아(계시)가 속해 있는데, 그 가운데 에소테릭과 알레테이아는 종교적인 차원이니 생략하고 철학적으로는 초월주의가 주목할 만하다. 초월주의란 곧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역설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박사님이 자신의 저서에서 주목한 것은 화이트헤드, 하르트만, 하이데거와 같은 20세기 형이상학자이다. 유기체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부분과 전체의 대립을 해소하여 부분이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박사님에 의하면 화이트헤드의 유기적 철학은 다시 비유기적인 철학에 대립하면서 역설을 극복하기보다 역설을 다시 새로운 영역으로 이전했을 뿐이라 한다.

하르트만은 다양한 존재자를 인정한다. 예를 들어 그는 수, 문화 등과 같은 제3의 존재자를 인정하면서 관념적 존재자를 물질적 존재의 반영으로 보는 유물론과 관념적 존재자를 초월적 존재로 보는 관념론의 대립을 극복하려 했으나, 박사님은 이런 시도 역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라 한다. 왜냐하면, 제3의 존재 내에 다시 관념적인 수와 같은 것과 물질적인 문화와 같은 것이 대립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이데거는 명제의 진리 이전에 존재의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명제가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면서 사실을 사실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서양철학은 오랫동안 존재 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하이데거는 이제 존재를 이르는 새로운 형이상학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이르는 길은 이미 존재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존재[Da-Sein] 즉 실존[Ex-Sistenz]을 거쳐 나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박사님은 하이데거의 존재론 역시 역설을 근본적으로 극복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이데거 역시 언어의 이분법적 성격을 철학의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님은 첫 번째 초월주의 분야에 이어서 협동론 분야에서 등장한 시도를 소개한다. 박사님은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통섭론이고 다른 하나는 통합론이며, 세 번째는 삼분법론이다. 여기서 통섭론이나 통합론은 다양한 과학의 결합을 통해 전체 자연을 포괄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자연과학에서 등장한 주장이니 생략하고 세 번째 삼분법론은 철학에서 등장한 이론이니 주목할 만하다.

이는 관념과 물질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시도인데 스피노자는 물질 실체와 관념 실체를 넘어 무한 존재라는 세 번째 실체를 도입하였고 포퍼는 앞에서 소개한 하르트만처럼 문화의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관념적이면서도 동시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가정했고, 프레게는 의미의 세계를 상정하면서 기호나 지시체와 달리 의미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세 번째 분야는 반이성주의이다. 여기서는 비합리주의와 반합리주의적 경향이 거론되고 있다. 쇼펜하우어, 니체 등 직관주의적 철학이 그 예이며 비판이론 역시 아도르노에서 보듯이 직관주의를 광범위하게 도입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해체론과 같이 아예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인정하려는 시도를 들어볼 수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분야에서 전개된 역설 극복의 방식과 그 한계에 대해 박사님은 상세하게 분석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이상 다양한 주장은 서양철학이 역설을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가를 보여주는 주장이지만 전체적으로 박사님은 이런 모든 시도 역시 근본적으로 역설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5)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서양철학을 괴롭혀온 역설의 문제를 박사님 자신은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제1부 3절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박사님은 서양철학에서 역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단지 인간의 사유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박사님은 이런 역설을 유럽의 삶과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서양철학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역설의 문제에 사로잡혔지만, 특히 근대에 들어오면서 역설은 광범위하게 모든 분야에서 펼쳐지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박사님에 의하면 근대의 서양은 한편으로 산업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세계를 식민지화하게 되었다. 상세한 과정이야 다 알고 계실 것이니 여기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런 과정에서 서양은 자연과 비서구를 지배하는 가운데 유럽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가 등장하면서 자연과 감성을 인위와 이성을 통해 지배하려 했고 그 결과 자연과 감성이 인위와 이성에 대립하는 이분법적 사유, 역설적 사유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박사님은 역설은 이런 유럽 중심주의와 이성 중심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극복될 수는 없다고 한다.

박사님은 이런 점에서 거꾸로 서구의 지배를 극복하려는 동양의 사회 속에서 이런 이원론적 역설을 극복할 싹, 단초가 놓여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다. 박사님은 먼저 우파니샤드의 ‘여여[如如]’ 사상에 주목한다.

이런 여여 사상은 범아[凡我 ]일치 사상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든 분별을 부정하는 이론이다. 박사님은 스와미시바난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아는 것과 알려진 것은 하나다. 신과 나는 앎 속에 하나다. 시바와 브라만은 본질적으로 하나다. 고양이와 쥐의 영혼은 하나이다. 해와 달의 본질은 하나다. 오래된 형식 속에 하나의 동질적인 본질만 있을 뿐이다. 이 본질은 절대적이며 사멸되지 않는다. 이 본질이 아트만, 브라만, 무한한 것이다.”

박사님에 의하면 이런 여여 사상은 유럽의 이원론적 사유와 대조되는 것이며 후일 불교의 근본사상이 되었다고 한다. 흔히 불교에서 돌에도 부처가 있다고 하는데, 여여 사상이란 무차별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사님은 또한 도가의 무위 사상에도 관심 가진다. 도가에 따르면 도의 인식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수단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도의 이식은 이분법적 사유를 좌망[坐忘]을 통해 극복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도의 내용은 비이분적인 무위의 성격을 가졌다.”(137쪽)

좌망이란 곧 <장자, 대종사> 편에 나오는 심재좌망[心齋坐忘]을 말한다. 그것은 곧 “자기의 신체나 손발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눈이나 귀의 움직임을 멈추고, 형체가 있는 육체를 떠나 마음의 지각을 버리며 모든 차별을 넘어서 대도에 동화하는 것“을 뜻한다.

 

6)

역설과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려는 박사님의 고투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박사님은 결국 동양사상에서 역설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길을 발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아쉬움을 느낀다. 헤겔과 같은 변증법적 사유도 역설과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하는 한 길이 되지 않을까 보는데, 박사님은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박사님은 우리 후학에게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다. 서양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긴박하고 절실한 요구라는 사실을 박사님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박사님의 문제 제기에 따라 철학하는 후학들도 이런 역설과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고 제국주의적 지배를 끝장내는 길에 나서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들뢰즈 다양체』를 읽고’ – 질 들뢰즈 지음, 다비드 라푸자드 엮음, 서창현 옮김, 『들뢰즈 다양체』(갈무리, 2022-05-31) 서평 [철학자의 서재]

들뢰즈 다양체를 읽고

 

한동석(시각예술인)

 

공간이 3차원의 다양체인 것처럼, 『들뢰즈 다양체』는 편지들, 다양한 그림과 텍스트들, 청년기 저작들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껏 발표되지 않았거나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이 텍스트들은 질 들뢰즈의 주요 저작들의 사이에, 혹은 저변에 자리 잡고는 곧 다른 저작들의 시공간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가 좋아했던 오즈 야스지로 감독 영화의 막간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진동,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지며 알게 모르게 영화 속으로 스며드는 메아리와 흡사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어나가던 사이에 그의 주요 저작 가운데 소유하고 있지 않은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책꽂이는 조금 더 비좁아져 있었고 들뢰즈에 대한 내 마음은 조금 더 부산해졌다. 새 책의 낯선 느낌이 전해지며 방은 잠시 나와는 무관한 듯 느껴졌고 순간 기존의 물건들이 한결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1부 편지들」에서는 ‘친구’ 미셸 푸코를 포함한 여러 동료 철학자들, 흠모하는 예술인들, 여러 저작을 통해 협업을 펼쳤던 펠릭스 과타리, 들뢰즈 철학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 중인 연구생 등의 다양한 인물들을 향해 띄운 그의 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들뢰즈가 평소 편지를 보관하지 않았기에 발신 메시지로만 남았지만, 문장은 때로는 자잘한 속마음을, 때로는 그지없는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며 각 인물들과 맺은 관계의 고유성을 잘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드러내는 사뭇 다른 어조에도 철학적인 관심을 함께 나누려는 점에서는 공통되었다. 무엇보다 편지라는 친근한 형식에 힘입어 들뢰즈의 사유가 발전해나가는 내밀한 과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어 새로웠고 들뢰즈의 철학적 고민들이 여타의 저작에서보다 쉽고 간명하게 표현된 구절들을 만나볼 수 있어 반가웠다.

가장 호기심을 끄는 편지는 과타리를 향한 것들이었다. 협업이라는 때로 험난할 수도 때로 흥미로울 수도 있을 과정에 대한 일반적이며 막연한 궁금증도 애초에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들뢰즈 혼자만의 저작과 과타리와의 협업이 낳은 저작을 연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평소의 물음이, 이들 편지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으로 이끌었다. 먼저 편지에서 드러나는 들뢰즈는 과타리와 함께, 정신분석의 가족주의에 대한, 또 이를 너무나 손쉽게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 대응시키려는 당대의 사상적 경향에 대한 반대 입장을 확고하게 공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과타리를 ‘야성적 개념의 놀라운 발명가’라고 부르며 ‘무의식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인 메커니즘’으로서 과타리가 선구적으로 제시한 ‘기계’ 개념에 대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또한 무의식을 죄의식과 더불어 파악하기를 거부하고 법과도, 위반과도 무관한 것으로서 긍정하는 과타리의 입장을 무의식에 대한 보다 풍요로운 논의의 장을 열었다고 칭송하며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러한 동의와 지지의 기반 위에서 들뢰즈는 과타리와 더불어 분열증적 생산 기계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나가고자 한다.

편지에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종종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거나 서로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들도 눈에 띈다. 그런데 이러한 불일치에 더해, 그럼에도 이를 서로에게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은, 이들 차이의 철학자들이 협업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 설정되었으리라 짐작되는 구절들도 만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들뢰즈와 과타리의 협업 결과를, 철학자로서 보다 심대한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들뢰즈에게만 귀속시키는 태도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들뢰즈는 그의 철학을 연구하는 아르노 빌라니와의 편지에서 과타리와의 공저를 들뢰즈만의 창작물로 해석하는 그의 입장에 불만을 드러낸다. “하나의 분석에는 독창적일 모든 권리가 있지만, 그 책(『천 개의 고원』)이 본질적으로 나 혼자만의 저작이라 주장할 권리는 전혀 없습니다.” 만일 인물이 아닌 모종의 흐름에 의해 책이 탄생한다고 가정해본다면 둘의 협업은 본래와는 전혀 다른 흐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본래의 물결은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새로운 파장을 형성하는 데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협업 관계를 조망해볼 수 있는, 녹음에 기초한 또 다른 인터뷰 자료가 2부에 이어지고 있기에 이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했다.

들뢰즈는 편지 속에서 종종 여러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여러 업무와 실생활에 쫓겨 저작과 연구 활동에 몰입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구절들, 논문준비생에게 그의 철학을 연구해서 현실적으로 득 될 게 없을 것이라고 충고하는, 당시 프랑스 주류 철학계가 들뢰즈에게 취했을 껄끄러운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구절들은 왠지 모를 공감을 자아냈다. 감성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적 태도를 지향하며 전복적인 사유를 펼쳐나가는 철학자가 마주했을 학자로서의 삶이 현실적으로 순탄치 않았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험로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굳이 따져보자면 쉽게 수긍할 수도 없다. 단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방대한 양의 역작들을 통해 독창적인 사유를 이끌어낸 그의 성과를 바라보며 개인의 천재성, 혹은 독특성의 발현과 그에게 사회가 되돌려주는 고난, 이들에 대한 선후를 가늠할 수 없는 인과적 필연성을, 혹은 운명적 조응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2부 다양한 그림과 텍스트」는 들뢰즈의 그림들로 시작된다. 몇몇 그림은 ‘괴물’을 묘사하고 있었으며 번호가 붙어있었다. 「1부 편지들」에서 빌라니가 띄운 ‘당신은 괴물인가요?’라는 질문에 들뢰즈는 괴물이란 ‘그 극단적 규정성이 미규정성을 완전하게 존속시키는 그러한 어떤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대답에 대한 강한 공감과 더불어 무언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 느껴지는 현기증을 함께 담아 이 문장에 줄을 두 번이나 그었던 기억에 비하면, 괴물들은 지나치게 구체적이면서도 인간적이었고 게다가 평범하기까지 하여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은근히 우스꽝스럽게, 또는 그런대로 재밌게 생겼다고는 말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림 4. 평생 친구인 장-피에르 벙베르제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들뢰즈의 자화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 자체만으로도 느낌이 좋았지만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들뢰즈라는 철학자의 복잡한 의도를 알 길이 없어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핏 보기에 그는 친구에게 말을 하라고, 또는 말을 하지 말라고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달리 보면 그는 친구의 목을 매우 솜씨 좋게 어루만져 친구의 입에서 혀가 튀어나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 『칸트의 비판 철학』을 헌정했던 스승이었으며 훗날 절연했던 페르디낭 알키에는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알키에의 저작에 대한 들뢰즈의 2편의 리뷰에서 그 단면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키에가 ‘초현실을 피안으로서,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낳는 분리의 원리로, 시를 낳는 이행의 원리로, 현실에서 비현실로, 비현실에서 현실로 의지를 이행하는 수단으로’ 규정했다는 대목은, 들뢰즈가 발전시켜나갔던 초월적 경험론이라는 내재성의 철학의 단초를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알키에가 데카르트에 있어 ‘사유는 진리를 넘어서고 진리의 우연적 측면을 파악한다’고 해석한 대목에서, 사유를 진리에 대한 추구가 아닌, 사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유로, 역설적인 어조로써 새롭게 정의했던 들뢰즈의 입장이 마련될 실마리를 발견할 수는 없을까? 아마도 들뢰즈가 철학적 기틀을 만드는데 기여한 여러 입장들을 그의 삶과 가까운 곳에서 살피는 과정은 그의 사상이 갖는 또 다른 저변은 물론, 그가 보였던 창의적 역량도 새롭게 비추어볼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2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텍스트는 한때 들뢰즈가 출간을 고려했었다는 흄에 대한 강의 자료였다. 비교적 들뢰즈의 활동 초반기, 『차이와 반복』이 출간되기 10년 전 즈음에 이루어졌던 강의이니만큼 그의 사상적 진화의 출발 지점을 헤아려볼 귀중한 자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접근과는 별개로, 더 나아가 저자와도 무관하게, 이 자료는 흄에 대한 강의로서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간결한 표현들뿐만 아니라, 개념과 개념의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역동적인 구도와 명료한 짜임새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결국 개인적으로 개괄적인 이해의 계기를 고대해왔던 흄의 철학을 단지 인식론이나 인과론 영역에 한정 짓지 않고 총체적으로 접할 기회를 맞이할 수 있어 기뻤다.

이와 더불어 2부에 수록된 여러 단편 텍스트들도 모두 나름의 강한 여운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음악적 시간>이라는 매우 짧은 단편은, 음악을 들으며 철학 텍스트를 읽어보는 색다른 경험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여러 다양한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청각적 환경 속에서 이 단편을 읽어보는 나름의 실험적 상황을 꿈꾸게 되었다. 이 글은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을 소개하며 박자로부터 해방된 시간, 음향 풍경, 형식으로부터 해방된 음악적 재료에 대해 다룬다. 들뢰즈의 시간, 개체, 물질, 생명에 대한 사유가 음악 속에 녹아든 듯한 매우 아름다운 글이다.

 

「3부 청년기 저작들」에서는 스물, 스물 남짓 된 들뢰즈의 글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주요 철학적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하며 이를 자신만의 문장으로 표현할 길을 새롭게 모색하는 청년기 철학자에게서 남다른 재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성에 대한 묘사〉라는 텍스트는 어디에서 이해의 발판을 마련하여 다가가야 할지 다소 막막했다. 이 글에서 들뢰즈는 성에 대한 묘사와 철학적 담론을 동일한 맥락상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방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에로티시즘과의 연관 속에서 타자 철학을 새롭게 바라보며 그 한계를 느껴보려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여성에 대한 집요하면서도 공격적인 묘사가 낯설고 불편했다. 『천 개의 고원』에서 여성 되기는 있어도 남성 되기는 있을 수 없다고, 이는 소수자 되기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들뢰즈의 입장과 차이가 느껴지는 텍스트였다. 언젠가 여러 시간적 양태들이 혼재하는 결정체적 시간 이미지의 한 단면으로 이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이 텍스트와 공명할 또 다른 시공간적인 계기와 더불어 보다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인 독해의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보다 진보한 독자로서의 역량이 마련되길 기대해본다.

이 책을 들뢰즈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적인 자료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누구도 전면적으로 견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만일 이 책을 전기적 자료로 해석할 경우. 그의 저작들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만 그를 다소간 한정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작가 들뢰즈에게 삶의 파고는 철학적 작업과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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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 이광석의 『피지털 커먼즈』(갈무리, 2021) 서평 [철학자의 서재]

<‘메타버스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손보미(다중지성의 정원)

 

올해 국내 구글 사용자가 가장 많이 찾은 검색어는 ‘로블록스’였다고 한다. 로블록스는 주식회사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이 제작하고 배급하는 온라인 게임의 이름이다. 그런데 위키백과에 정리된 이 게임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로블록스는 사용자가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고, 다른 사용자가 만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 및 게임 제작 시스템이다.”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은 엄밀히 말해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기보다는 온라인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이고 따라서 ‘로블록스’도 온라인 게임 플랫폼의 이름인 셈이다.

구글 코리아의 검색어 순위 발표에 이어, “어서 학원 가서 게임 배워야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도 떴다. 기사의 주요 내용은 ‘로블록스’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제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과 수강생이 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로블록스를 ‘게임계의 유튜브’라 칭하며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주식이 올해 ‘메타버스 대장주’로 불렸었다는 사실로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로블록스를 검색하고 또 이 플랫폼에서 게임을 제작하는 기술을 배우려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먼저 이 책 『피지털 커먼즈』부터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책에 따르면, 현재 특정 기업들의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은 자본의 가두리치기(인클로저)용 장치들이다.

 

“오늘 ‘메타버스’라 불리는 기술문화 차원의 신생 공간은 또 다른 기술 세례와 축복에도 불구하고 바로 피지털계의 본격적인 인클로저를 알리는 서곡으로 볼 수 있다.” (7)

 

<‘온라인 플랫폼달콤한 신개념 가두리>

 

저자는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을 양봉장에 비유한다.

 

“플랫폼은 입주자와 이용자에게 차별 없이 놀 자리를 깔아 주고 각종 서비스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듯 보인다. 이들 입주자와 이용자 누리꾼은 마치 플랫폼에서 꽃밭 속 꿀벌처럼 자유롭게 데이터를 생성하고 주고받으면서 ‘화분’과 꿀 채집 활동을 한다. 누리꾼은 형식상 자유로워 보이지만, 내용상 플랫폼 임차인에 가깝다. 그날그날 본능에 이끌려 꿀을 채집해 플랫폼 벌통에 채우는 일벌과 같다.” (25)

 

공통의 에너지와 부를 기업의 이윤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 가두리를 치는 일이 물론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과거와 지금의 다른 점은 그 포획 방식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작업장에서는 그야말로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생산공정을 통해 착취가 이루어지는 데 반해서 신개념 작업장은 마치 양봉자가 벌통으로 꿀벌을 유혹해 수확물을 거둬들이듯, 플랫폼 앱 장치를 통해 일꾼들을 유혹해 억압 없이 자발적 노동을 끌어낸다.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노동은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즐거운 놀이와도 같아서 『제국의 게임』의 저자 다이어-위데포드는 이를 ‘놀이노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꿀벌이 꿀을 모으는 일이 애초에 양봉장 주인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듯이 현재 온라인 플랫폼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활동들, 심지어 놀이라고 불릴만한 즐거운 활동들도 애초에 기업 주주들에게 이윤을 안겨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다. 여기에 달콤한 신개념 가두리의 핵심이 있다. 지금 활발히 작동 중인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은 수많은 유인책을 통해 놀이를 포함한 생명의 다양한 활동들, 심지어 생명 활동 그 자체를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을까?

 

<데이터 사회>

 

책의 표제어로 쓰인 ‘피지털’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피지컬’(물질)과 ‘디지털’(비물질)이 혼합된 지금의 현실을 ‘피지털’이라 부르고 이러한 특성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세계를 ‘피지털 계’라 부른다. 그런데 ‘피지털’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이 피지털 계에 가두리를 치고 우리의 생명 활동을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자본주의는 플랫폼이라는 장치를 통해 … 인간 산노동은 물론이고 인간 의식과 생체리듬의 데이터 활동을 사유화된 가치 체제로 흡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6)

 

자본은 무엇 하나 평등하게 자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피지컬과 디지털이 혼합된 피지털 계가 자본주의를 만나면 디지털 세계의 기술 논리로 피지컬 세계의 지형과 배치를 좌우하는 데이터 사회가 된다.

산업사회는 인간의 피지컬 에너지(물리적 힘)가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원으로 포획되는 사회였다면, 데이터 사회는 인간의 피지털 에너지(물리적, 인지적 힘)가 주요 동력으로 포획되는 사회다. 즉 데이터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된 피지털 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데이터 사회, 즉 디지털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왜곡된 피지털 질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현 질서를 향한 강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로운 피지털 질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안 실천들을 통칭하는 이름이 바로 ‘피지털 커먼즈’다.

 

<피지털 커먼즈>

 

자본주의의 플랫폼 장치들을 통해 왜곡된 피지털 질서는 20세기말 한때 디지털 혁명으로 크게 번성했던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을 빠르게 쇠퇴시키고 있다.

 

“동시대 플랫폼 질서는 무한 복제, 비경합성, 한계비용 제로, 익명성 등 아이디어와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과 크게 배치된다. 영원히 ”자유롭고자 하는“ 디지털 정보의 본성은, 인류의 잠재적 창작의 원천이 되고 복제와 공유를 독려하면서 디지털 ‘자유문화’를 확장하지 않았던가” (95)

 

저자는 플랫폼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대안을 고민할 필요를 역설하며 정부와 기업의 과도하고 무차별적인 데이터 수집과 활용을 제한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요구와 감독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수집된 데이터에 대한 오, 남용을 막기 위해 다중 스스로 펼치는 문화정치 전술 또한 중요한데 대표적인 예로 핵티비즘(데이터 행동주의)이 있다.

데이터 행동주의는 기술시장 논리에 의해 몇몇 소수의 손아귀에서 자본의 구미에 맞춰 이용되고 있는 데이터를 원래 그 데이터의 주인들이 볼 수 있도록, 또 그 데이터들이 다른 질서 속에서 이용될 수 있도록 만천하에 공개하는 활동이다.

 

“‘스노우든 아카이브’는 캐나다 기자, 대학, 시민단체의 공동 연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글로벌 시민 다중이 언제든 권력의 기록에 접근해 검색하고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공통의 지식 커먼즈가 되었다.” (98)

 

<피지털 커먼즈는 생태 커먼즈>

 

자본의 인클로저의 다른 이름은 생태계 파괴다. 물론 지금 피지털 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클로저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기업들은 자유롭게 확산하고 다양하게 펼쳐져야 할 비물질적 에너지들을 데이터의 형태로 사로잡아 빅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데이터 센터에 가둬두고 있는데 이 를 유지하는 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얼마 전에 구글은 이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데이터 센터를 바다에 집어넣는 실험을 했다. 한 플랫폼 기업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뭇 생명이 사는 터전인 바다에 뜨겁게 달아오른 거대한 쇳덩이인 자본의 수장고를 집어넣은 것이다.

지금의 플랫폼 기업들은 생태계의 파괴를 더 많은 이윤 추구의 기회로 삼고 있기도 하다. 공기와 땅과 물이 오염되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없는 그래서 슬퍼야 마땅한 현실이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더 오랫동안 게임 플랫폼의 세계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기쁜 현실이 된다.

따라서 디지털 사회를 넘어설 대안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은 곧 자본의 생태계 파괴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후 위기로 대표되는 생태계 문제에 관한 관심 없이는 피지털 커먼즈 운동도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피지털 커먼즈는 곧 생태 커먼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피지털 질서는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질서다. 이를 넘어서려면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즉 착취하고 수탈하고 결국 죽이는 질서가 아닌 살리는 질서가 필요하다. 이에 저자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생명 존중 없는 혁신 논리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위태로운 생태 약자들을 중심에 둔 공생기술 전망이 필요하다. 물론 그 시나리오에는 인간 중심의 지구 구출 시나리오를 넘어서 자본주의 현실에서 타자화된 인간 종을 비롯해 동물, 기계종, 돌연변이, 자연사물 모두를 살리는 공생공락의 차이 속 연대가 요구된다.” (377)

 

목초지에 울타리를 세우고, 강에 댐을 만들고,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고 또 자유로운 디지털 세계에 자본주의적 양봉장이 들어설 때, 자율적인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모든 활동이 자본을 위한 노동으로 전락해 생명을 강탈당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디지털 꿀통 걷어차기>

 

피지털 계는 인간의 감각을 바꾸었다. 각종 디지털 기기와 결합한 인간은 감각과 인식의 확장 속에 있다. 관건은 이 확장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객체들과 민주적인 힘을 더욱 확장하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혹은 피지컬의 한계를 넘어 무한히 확장하는 ‘인간’ 의식 속에 모든 걸 가둬버릴 것인가.

로블록스 플랫폼에서 게임을 만드는 이들은 과연 어떤 확장 속에 있을까. 당연히 후자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의 삶 곳곳에는 늘 우연적인 만남이 존재하고, 그 어떤 척박한 곳에서도 예상치 못한 마주침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을 칭송하며 기다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에게 그리 많은 여유가 주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심각한 생태 재앙 속에 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디지털 꿀통이 선사하는 일시적인 안락함과 즉각적인 쾌락들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그 꿀통을 미련 없이 걷어차고 성공적으로 걷어치워 버릴 수 있는, “다른 삶과 범 생명 공존의 기획”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방법으로 모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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