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 28- 예술 장르론(1) 질료의 속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 28- 예술 장르론(1) 질료의 속성

 

1)

헤겔의 미학 강의는 미학(미학강의 1권)과 예술사(미학강의 2권) 그리고 장르론(미학강의 3권)를 포괄하는 저서다. 헤겔 미학강의에서 가장 이채로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장르론을 다룬 3권일 것이다.

미학에 관한 저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술사에 관련된 책도 여럿 있다. 하지만 예술 장르론에 관한 저서는 필자가 알기로 헤겔의 미학강의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 같다. 물론 개별 예술에 관한 일반론은 많다. 문학과 음악, 또는 시나 희극에 관한 개론 말이다. 하지만 개별 예술들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포괄적 장르론은 없다. 아마도 유일한 게 있다면 바로 헤겔의 미학강의이다.

솔직히 그런 장르론이 가능할까도 극히 의심스럽다. 개별 예술에 대해서조차 아는 게 힘든 데 모든 예술장를 다루다니, 좀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실정에 비추어 본다면 모든 예술 장르를 아우르는 일반적 장르론을 전개한 헤겔의 능력에 경탄이 아니라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그의 장르론이 한계는 얼핏 보기만 해도 쉽게 드러난다. 그가 미학강의 3권 장르론(헤겔은 ‘개별 예술의 체계’라는 이름으로 장르를 다룬다)에서 다룬 것은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문학(서사시, 서정시, 극시)뿐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예술 장르인 영화는 헤겔 당시에는 없었으니 다루지 않았다고 비난하기는 어렵지만, 고대부터 현재까지 예술의 한 장르로서 빼놓을 수 없던 무용은 왜 빠진 걸까? 농담이지만 한국의 많은 대학에서 그렇듯이 무용은 체육에 속하는 걸로 간주하는 걸까?

문학 아래에도 오늘날 대표적인 문학 장르인 소설이 빠졌다. 헤겔 당시 이미 소설이 있었고, 헤겔도 낭만주의 예술 형식이 해체되는 마지막 시기에서 ‘소설 같은 것[romanhafte]’을 조금 다루기는 하지만 독립된 장르로서는 다루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욱 많은 반발이 등장할 것이다. 다른 개별 예술론은 말할 것도 없고 처음 등장하는 건축을 보자. 헤겔은 건축을 돌과 같은 거대 물체[Mass]를 재료로 한다고 하면서, 그로부터 건축은 간접적으로 정신을 암시하는 상징적 예술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이런 결론은 건축의 외면적 형태를 통해 정신을 표현하려 하는 현대의 많은 건축가들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주장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지중해를 닮은 수평 창문의 건축가 르꼬르뷔지에와 같은 작가나 환영이 눈앞에 날아다니는 듯한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을 만든 프랑크 게리와 같은 작가에게 한 번 물어 보라.

2)

한편으로 경악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개별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예술과 특성을 비교하고 서로 어떤 장단점을 갖는지 이해하는 것은 불가결한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요즈음 미술관 전시회에 가 보면, 미술은 전통적인 미술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미술이 아니라 조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거나 미술이 아니라 영화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차라리 조각이나 영화이라 하지, 왜 저걸 꼭 미술이라 한 것일까? 혼합 장르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미술이 조각이나 영화를 넘보는 것은 미술에 어떤 한계가 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술에 어떤 한계가 있고 조각이나 영화가 그것을 어떻게 도움을 주고 거꾸로 방해하는지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 장르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져야 하는데, 과연 누가 예술의 전체 장르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헤겔이 모든 예술에 걸친 포괄적인 장르론을 전개했다는 것 자체가 경탄에 경탄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엉성하기에 헤겔의 장르론을 절대화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장차 장르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데 그 출발점이나 또는 어느 정도 시금석을 제공해 줄 수는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필자만 느끼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의 장르론은 예술론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장르론은 그 후 전개되는 많은 장르론의 긍정적이거나 비판적인 초석이 되어 왔고 새로운 장르론을 전개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3)

필자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두 철학자의 작업이 당장 떠오른다. 그 하나는 벤야민의 작업이다.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라는 저서(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되었으나 승인 받지 못했던 작품으로 그 후 많은 박사 학위 논문 심사에서 논문 제출자를 변호하는 구실(?)이 되었다)에서 그 동안 대표적인 비극 이론으로 간주된 니체 비극론을 비판했다. 그는 고전 비극[Tragoedie]을 니체와 달리 역사적으로 해석했는데, 이때 기초가 된 것이 바로 헤겔의 장르론 가운데 극시에 관한 분석에 속하는 고전 비극 개념이다. 그는 이어서 17세기 바로크 시대 등장한 비극을 ‘비애극[TrauerSpiel]으로 명명하면서 그 특징을 역시 헤겔의 근대 비극의 개념에 기초하여 전개했다.

또 하나가 루카치의 소설론이다. 루카치는 <소설이론>에서 헤겔에게서 결여된 소설이라는 장르론을 전개했다. 헤겔은 소설론을 독자적으로 전개하지 않았으며 근대의 서사시라는 개념이나 또는 소설적인 것[Romannhafte]이라는 개념으로 간단하게 언급하면서 낭만주의 예술 형식의 해체기에(시기적으로는 근대 부르주아 세계의 등장 이후를 다룬다) 등장하는 예술로 다루었다.

헤겔에서 소설적인 것은 개인적인 주관을 포함한 개별적인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산만한 예술에 그친다. 헤겔은 소설이 다룬 개별적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생동적인 정신의 총체성이 이 속에 표현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개별적 현실 속에 정신의 총체성이 내재적으로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1]

루카치 역시 소설은 개별적인 현실을 다루므로, 유기적 형식이 결여되어 산만하게 전개된다고 본다는 점은 헤겔과 동일하다. 다만 루카치는 이를 평가하는 지점에서 헤겔과 달리 한다. 루카치는 소설이 다루는 개별적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왜냐하면 이 현실은 총체성이 상실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분열을 반영하고 상실된 총체성을 찾으려 하는 동경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평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형식을 개별적 현실, 산만한 형식으로 보는 관점에서 루카치의 소설이론에는 헤겔 미학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여하튼 한편으로 경탄과 다른 한편으로 경악을 불러 일으키는 헤겔의 장르론을 다루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렵다. 적어도 헤겔이 다룬 개별 예술에 대해 상당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런 능력도 없으면서 그저 헤겔의 장르론을 소개한다는 일념으로 지금부터 미학강의 3권에서 다루어진 헤겔의 장르론을 설명하려 한다. 그의 이론이 옳은가 그른가는 독자의 몫에 맡기기로 하자.

4)

철학이나 종교와 달리 예술은 이념을 감각적 형상을 통해 드러낸다. 구체적인 감각적 형상과 그 시대의 정신 즉 이념 사이의 관계 방식이 예술 형식을 규정한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헤겔은 세 가지 기호적 관계 즉 상징, 현상, 가상을 소개하며, 이에 따라 역사적으로 세 가지 예술 형식을 구분했으니 즉 상징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예술 형식이다.

헤겔에서 예술적 형식은 예술가 자신이 주관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각 시대의 예술적 이념 속에 이미 자기를 감각적 형상으로 표현하는 고유한 방식이 내재하고 있으니, 예술가는 이런 시대의 예술적 표현 방식에 무의식적으로 종속한다.  

그렇다면 예술의 장르[Gattung] 즉 개별 예술을 개별 예술로 만드는 그 종적 본질[Gattung]은 무엇을 기초로 규정되는가? 이 종적 본질의 토대는 개별 예술 사이에 공통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각 개별 예술에 고유한 것이어야 할 것인데, 과연 어디서 그런 토대를 찾을 수 있을까?

헤겔은 여기서 우선 개별 예술이 감각과 관련된다는 것에 착안하여 감각의 다양한 종류에서 개별 예술의 차이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살펴본다. 이런 시도는 감각 방식의 종류에 따라서 예술의 차이가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인간에게 오감이 존재한다고 보는데, 그 가운데 후각, 미각, 촉각과 관련해서 예술은 성립할 수 없다. 후각, 미각, 촉각은 감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물질적 질료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기초한 요리, 향수 등은 예술이 될 수 없다. 반면 시각과 청각은 대상을 거리를 두고 파악하는 이론적 감각이므로, 여기서 예술이 출현한다. 시각은 회화와 조각 그리고 청각은 음악이나 문학과 관련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론은 한계가 있다. 너무나도 단순한 구분이기 때문이다. 시각과 관련해서 볼 때 건축과 조각 그리고 회화는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건축과 조각의 차이가 규정될 수 없다. 더구나 음악과 문학은 소리와 연관되지만, 음악과 문학을 같은 예술 장르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개별 예술의 차이는 감각의 종류에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이런 감각적 질료의 차이를 통해 예술을 분류하는  예술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5)

그렇다면, 개별 예술 장르가 구분되는 토대는 무엇일까? 헤겔이 여기서 제시하는 토대는 예술의 매체[Mittel] 곧 질료이다. 예술은 정신을 감각적 형상으로 표현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질료[Materie]가 있다. 이 질료는 정신의 감각적 형상을 산출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여기서 감각적 형상과 질료를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회화에서 다빈치의 모나리자 형상을 보자. 이 형상은 실제의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한다. 이런 모사에서 사용된 질료는 곧 색채이니, 이 색체는 삼원색이든 무지개 색이든 이미 추상화된 질료이다. 정신과 형상, 질료는 예술의 삼각형을 이룬다.

정신과 형상, 질료의 이런 차이에 주목할 때, 헤겔이 장르를 구별하는 토대를 질료에서 찾았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지닌다. 단순한 질료 자체가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질료가 일정한 감각적 형상을 표현할 때, 질료에는 고유한 속성이 있으므로, 그런 형상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형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질료의 속성이 곧 장르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만일 질료가 다르더라도, 그 특성이 유사하여 감각적 형상화에서 차이가 없다면, 새로운 장르를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음악을 보자. 현대 들어와서 전자 악기가 등장하여 그 이전 물체적 악기에서 나는 소리와 구분되는 질료를 제공하지만, 음파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고 그 음악적 형상화의 방식은 유사하니, 전자 악기가 새로운 장르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돌이나 목재와 같은 질료를 보자. 이런 질료는 일정한 덩어리[mass]를 지니고 있으니 일정한 양적 연장[延長]성을 지닌다. 또한 이런 질료는 물질[material]로서 특성 즉 질적 특성도 가진다. 덩어리와 물질, 연장과 질은 동일하게 무게나 크기, 단단함 등의 속성을 지칭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이용되는 속성이다. 이 두 가지는 마치 빈 공간과 그것을 채우는 공기처럼 또는 존재와 무처럼 대립하는 것이다. 덩어리가 부정적인 것이라면 물질은 긍정적인 것이다.

긍정적인 물질은 조각적 형상화를 가능하게 하니 조각은 물질의 예술이다. 반면 부정적인 덩어리는 건축의 형상화를 가능하게 한다. 건축은 덩어리의 예술이다. 감각적 형상화와 관련되어 같은 질료의 다른 특성이 이용되고 있으니, 장르의 차이는 질료의 일반적 특성이 아니라 감각적 형상화와 관련된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6)

형상을 표현하는 수단인 질료[Materie]가 반드시 물질적인 것[Matter]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물질적인 질료인 건축 재료조차 자연 그대로의 물질적인 것[Matter]이 아니라 이미 상당히 추상화된 덩어리[Mass]다. 그것은 나무이거나 바위가 아니라 깎은 나무 토막이거나 잘라내 다듬어진 돌덩이다.

미술이나 음악에 이르면, 빛이나 소리가 질료로 사용된다. 이때 헤겔은 빛이나 소리를 물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관념화된 물질[Matter]이라고 규정한다. 빛은 무게를 잃어버린 것이라는 점에서 관념적 물질(또는 물질의 영혼)이며, 소리는 더 이상 공간성을 지니지 않고 시간성 속에서 흘러간다는 점에서 자기 부정적인 물질이라고 규정된다.

회화나 음악의 질료가 관념성을 지니더라도 여전히 물질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문학의 질료인 표상 즉 이미지나 감각적인 관념의 경우 추상적인 관념과 구분되어 물질성에 가까운 속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이미 물질성의 단계를 벗어난 관념의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다.


[1] 즉 그전에는 집안의 집기나 기르는 가축이 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그것 자체가 어떤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 그 이전에는 부정적으로만 묘사되었던 탐욕과 질투, 열정 등의 감정은 이제 그 자체로 흥미로운 대상이 되었다.

헤겔미학산책 23-리얼리즘에 대해: 개체적 특수성[리얼리즘]의 미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 23-리얼리즘에 대해ㅣ 개체적 특수성[리얼리즘]의 미학

 

1)

낭만적 미학형식의 세 번째 형식을 헤겔은 ‘형식적으로 자립적인 개체적 특수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었다. 헤겔은 이 세 번째 형식을 추가로 설명하면서 “현실 자체에 대한 갈증, 현존하는 것에서 얻는 자족[Sichbegnuegen], … 유한한 것, 특칭적인 것, 초상화적인 일반에 만족하는 것[Zufriedenheit]” 이라고 했다.[1]

 

또 헤겔은 여기에 “현재에서 현재적인 것 자체”를 “눈 앞의 생동성 속에서 … 재창조”[2]하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니,  ‘개체적 특수성’은 곧 ‘현재적인 것’으로, ‘형식적으로 자립적인 것’은 ‘눈 앞의 생동성’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설명은 낭만주의의 세 번째 권역이 리얼리즘적인 예술 형식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첫 번째 종교적 예술의 권역, 두 번째 기사도 문학의 권역에 이어 낭만주의 예술 형식의 세 번째 권역으로 소개되는 것이 흔히 낭만주의 예술과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리얼리즘적인 예술 형식이라니, 좀 의아한 생각을 갖게 된다.

 

헤겔이 이 세 번째 권역에 속하는 예술로 들고 있는 구체적 예들은 르네상스 시기 이후 바로크를 거쳐서 근대 초기 시민 예술과 고전주의, 그리고 자기 시대의 낭만주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괄하는 광범위한 작품들이다. 흔히 이 작품들은 근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중세 예술과 구분해서 독자적으로 다루어지며 그런 가운데 리얼리즘적인 예술에 속하는 것(르네상스 예술이나 시민 예술)과 낭만적 예술에 속하는 것(바로크 예술과 낭만주의 예술)으로 구별되어 다루어진다.

 

그런데도 헤겔은 이 작품들을 중세부터 시작된 낭만주의 예술형식 속에 그것도 마지막 최후의 형식으로 포괄하면서 낭만주의(넓은 의미에서)의 마지막 권역에 흔히 구별되는 리얼리즘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18세기 낭만주의 즉 좁은 의미에서 낭만주의)을 구별하지 않은 채 리얼리즘적인 예술로 규정하는 그 까닭은 무엇일까?

 

2)

근대 예술, 그 가운데서도 리얼리즘적인 예술을 리얼리즘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다루는 소재나 방법에 따른 것이다. 헤겔 말 대로 ‘현재적인 것’을 ‘눈 앞에 생동적인 대로’ 서술하는 것인데, 이런 리얼리즘적 예술은 어떤 의미나 목표를 가지는 것일까?

 

미리 말하자면 여기서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것을 눈앞에 나타나는 생동성 속에서 다룬다는 뜻이 현실 자체를 그대로 모방하는 예술이라는 말은 아니다. 현실적인 것을 모더니즘적으로 생산할 수도 즉 ‘재창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리얼리즘적인 것은 독자에게 예술이 창조한 실제 사건이 수반하는 동일한 감정이나 행동을 환기하는 심리적 효과(연상, 또는 감정 이입의 효과)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참한 현실을 그린 예술 작품을 통해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이에 저항하는 행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예술보다는 저널이나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아주 사실적인 기록이나 영상이 더 강하고 풍부한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굳이 예술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리얼리즘적 경향을 지닌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는 리얼리즘적 예술은 피지배 계층의 생동하는 저항 정신을 표현하며, 반면 지배 계층은 양식적인 예술을 지향하는데 이를 통해 억압을 정당화한다고 한다. 이런 설명은 지배와 예술이 어느 시대나 반복되므로, 그때 마다 리얼리즘적 예술과 양식적 예술이 교차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그 시대적 차이를 간과하고 만다. 즉 아놀드 하우저에게서 고전적 리얼리즘 예술과 근대 리얼리즘적 예술의 차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리얼리즘 예술을 옹호하는 많은 이론가는 결국 주술적 효과에 기대고 있다. 곧 현실과 닮은 것은 현실이 일으키는 결과와 동일한 결과를 일으킬 것이라는 믿음이 예술을 낳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대표적으로 루카치나 아도르노와 같은 미학자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 일리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을 지극히 편협한 영역으로 제한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이런 주장은 근대 이전의 예술이나 근대 예술 가운데 리얼리즘적 예술에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인 낭만주의 예술을 예술로부터 배제하고 만다.     

 

이런 생각을 통해서 볼 때, 헤겔이 근대의 독특한 예술 현상인 리얼리즘 예술을 중세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은 미학적으로 무척이나 흥미로운 문제가 된다.  여기서 근대 예술의 역사를 보는 헤겔의 독특한 관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다시 한 번 묻게 되지만, 헤겔은 왜 낭만주의 세 번째 권역을 이런 리얼리즘적인 예술로 규정하고 심지어 낭만주의 예술조차 이런 리얼리즘적 권역 속에 포함한 것일까?

 

3)

앞에서 설명했듯이 헤겔에서 중세와 근대는 역사적으로 연속되며, 이 시대는 시장 관계가 점차 일반화되는 과정이다. 이런 시장 관계를 토대로 새로운 정신이 출현했으니, 헤겔은 이를 절대적 주관성 또는 내재적 초월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시대, 정신은 종교에서는 내재적 신이라는 개신교적 신의 개념으로 출현했으며, 예술에서는 가상이라는 형식으로 출현했다. 그 가상은 곧 예술적 형상이 자기 부정이라는 운동을 통해 그 본질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이 가상은 구체적 첫 번째 종교적 권역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수난의 역사를 통해 즉 시간적 운동을 통해 제시되며, 두 번째 기사도 문학의 권역에서는 기사도적 정신이 지니는 이중적 측면 즉 우연한 현실적인 것에 부여되는 무한한 정신이라는 모순으로 출현했다. 

 

이미 살펴본 두 가지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서 가상이라는 개념에서 이미 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런 현실적인 것은 단순히 현실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정신적인 것이 드러나는 가상이지만, 이런 가상은 결코 환상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는 아니 되며, 오직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한에서만 가상으로서 자격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낭만주의 예술 형식은 처음부터 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낭만주의 예술 형식은 이런 현실적인 것이 가상으로서 그 본질적 의미를 드러내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니, 여기서 종교적 권역에서는 수난의 역사가, 그리고 기사도 문학은 자기 모순이 문제되는 것이다.

 

근대 예술이 그 이전 종교적 예술이나 기사도 예술과 마찬가지로 시장 관계를 토대로 하는 정신에서 나온 것인 한, 근대 예술 역시 이중성이 불가피할 것이다. 시장 속에서 개인은 자신에게 주관적 가치를 부여하면서 이것이 마치 절대성을 지닌 것처럼 오만하지만, 이 시장 속에서 개인에 되돌아오는 현실은 곧 시장의 힘에 의해 결정된 객관적 가치이니, 이를 알지 못하는 개인에게 이런 객관적 가치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운명이며, 보이지 않는 힘의 지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시장적 사회 관계 속에서 개인은 주관적 오만과 운명의 지배 아래 개인의 삶은 찢겨져 있으니, 근대 예술은 한편으로 자신에 대한 오만 속에서 자신의 무한한 내면(욕망과 목적)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지니며, 다른 한편 그를 엄습하는 운명을 파악하려는 가운데 있는 그대로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 두 가지 측면 한편으로 자기 내면에 대한 관심 즉 내재하는 것과 또 다른 한편으로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 즉 초월하는 것은 종교 예술이나 기사도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니, 여기서 근대 예술은 이중적으로 분화하면서도 상호 뒤얽혀 있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겔은 근대 예술이 지닌 이중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발견하는 것은 현상의 익숙한 세속적 고유성이 본래부터 관념적인 것의 한 계기로서 즉각 취택된다는 사실이며, 심정은 미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고 일상적이며 우연적인 외적인 것에서 만족을 구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다만 가능성의 면에서 즉 일단 즉자적으로는 신과 화해되어 있을 뿐이다. 만인은 비록 지복을 향한 소명을 받았으되, 선택된 자는 극히 드누니, 하늘나라뿐만 아니라 현세의 나라마저도 하나의 저편으로 남아 있는 심정에는 세속성과 자기 위주의 현재성을 정신성 속에서 포기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3]

무리요의 거지 소년이라는 작품이다. 리얼하게 그려져 있지만, 헤겔은 이 소년이 지닌 정신적 맑음과 자유로움에 주목하고 있다.

4)

헤겔은 근대 예술이 지닌 이런 이중성 때문에 근대 예술의 근본적 경향성을 리얼리즘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속에 근대 리얼리즘 예술과 근대 낭만주의 예술을 포괄적으로 다루게 된다.

 

헤겔은 근대 예술을 이미 설명한 대로 두 단계로 구분하여 서술한다. 근대예술의 첫 번째 단계는 ‘자립적인 개인적 성격’을 다루는 예술이니, 이는 이미 단테의 신곡에서부터 시작하여 특히 셰익스피어의 성격문학, 심지어 괴테와 실러의 시민 문학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런 첫 번째 단계는 성격 예술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겠는데, 그 핵심은 개인이 지닌 주관적 내면 즉 그 욕망과 목적, 성격 등에 대해 관심을 지닌 예술을 말한다. 성격 예술은 단순히 그의 내면을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내면적 성격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파국에 이르는지 파악하려 한다.

 

근대 예술의 두 번째 단계에서 등장하는 예술을 헤겔은 모험 예술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에 속하는 예술의 효시는 곧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며, 이후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소설적인 것[Romanhafte] 로 발전한다.  

 

여기서 예술은 전전 반측하는 현실 자체를 사실적으로 파악해 나가는데, 단순히 이런 우연의 유희를 그려나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런 모험적 예술은 궁극적으로 우연적 현실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자각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자 즉 성격 예술이 내면적 성격을 다룬다는 점에서 기사도 정신을 다루는 기사도 문학을 닮았다고 한다면, 후자 즉 모험 예술은 현실의 운동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다루는 종교 예술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격 예술과 기사도 문학, 종교적 예술과 모험 소설은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으니 이런 차이점은 앞으로 근대 예술의 구체적 형태를 다루는 경우에 상술하기로 하자.

 

미리부터 말하자면, 낭만주의 예술의 세 번째 마지막 권역이 리얼리즘 예술이며, 리얼리즘 예술의 두 단계가 곧 성격 예술과 모험 예술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파국과 자각이라는 운동성이 사라지고, 현실이 그 자체로서 긍정되는 단계에 이른다.

 

이런 단계에 이른 예술로서 헤겔이 드는 예가 곧 디드로의 소설이나 독일 낭만주의의 아이러니 예술이다. 이 단계를 지나면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기를 그치고 예술을 넘어서게 되니, 여기서 예술은 해체되고 종언을 고하게 된다.

[1] 미학강의 2, 210쪽

[2] 미학강의 2, 210쪽

[3] 미학강의 2권, 210쪽

헤겔미학산책19-근대인과 파토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9-근대인과 파토스

 

1) 근대인

근대는 시장 또는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를 받는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정신의 소외’라는 개념으로 서술했다.

소외된 정신 속에서 신과 인간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신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 작용 즉 개인의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를 나타낸다. 앞에서 이를 내재적 초월이라는 기독교 신의 모습을 통해 설명하였다.

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대로 반영하는 것이 곧 근대인의 모습이다. 한편으로 근대인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자기를 긍정하리라 믿는다. 그는 자기에 대한 오만에 빠지며, 무한정한 열정으로 자기를 추구한다. 이것이 근대인의 파토스다. 다른 한편으로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언제든지 그를 파멸시킬 수 있으니, 그는 운명에 대한 예감 가운데 죄의식을 느끼며 그 앞에서 불안하다.

헤겔은 무한한 파토스 속에서 오만하면서도 닥쳐오는 운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헤겔은 이런 점을 근대인의 파토스와 죽음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이 두 개념은 고대에서도 출현하는데, 헤겔은 고대적 개념과 근대적 개념의 차이를 정신적 토대의 차이에서 규정하려 한다.

 

2) 고대의 파토스

고대인의 파토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라는 작품이다. 여기서 두 주인공 엘렉트라와 클레온은 파토스에 따라 행동한다. 역시 그들의 파토스는 그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실체적 힘 예를 들어 가족의 윤리나 국가의 윤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기 자신이 명백하게 정당하다고 믿고 이를 주저 없이 단호하게 행동으로 실천한다.  

그들은 행위의 결과 몰락하지만, 그의 몰락은 그가 자기의 실체와는 대립하는 다른 실체적 힘을 해치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 다른 실체적 힘에 의해 보복 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에 대립하는 실체적 힘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부당하게 보복 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안티고네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오빠를 장사 지내고 클레온 앞에서 끌려와서 자신이 택한 원리가 하늘의 법이라고 주장한다.

 

“전 글로 쓰인 것은 아니지만, 확고한 하늘의 법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임금님의 법령이 인간의 몸으로서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법은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고 불멸의 것이며 그 시작은 아무도 모릅니다.”[1]

 

 반면 클레온[안테고네의 외삼촌이다]은 국가의 원리를 대변한다. 국가적으로 본다면 싸움을 벌인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조국을 방어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조국을 배반한 자다. 당연히 전자는 경배 되어야 하고 후자는 처벌되어야 했다. 클레온은 등장하자마자 코러스 앞에서 자신의 임무를 고백한다. 그는 국가를 최우선의 원리로 삼는다.

 

“시민에게 안전이 아니라 파멸이 닥쳐오는 것을 보고서는 나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작정이며, 또한 국가에 적대하는 인간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외다. 그것은 즉 우리나라가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는 배이며, 그 배가 편히 항해할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

 

안티고네든 클레온이든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실체적 힘과 다른 실체적 힘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그는 무지에 의해 범법을 실행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티고네는 자신의 무죄를 끝까지 주장한다. 

 

“저는 이렇게 친구들의 버림을 받고 불행한 이 몸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죽음의 동굴로 갑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경건한 일을 하다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불쌍한 이 몸은 신들께 의지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로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면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똑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3]

 

그럼에도 그들은 마침내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되는데, 그런 자각은 자신이 다른 실체적 힘으로부터 보복 당하면서 비로소 생겨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정당성이란 주관적이거나 추상적인 당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는 실체적 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파멸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된다. 아래 클레온의 고백을 들어보자.

 

아, 이 죄는 도저히 다른 사람한테 전가할 수 없는 것이구나! 내가, 그렇다, 내가 죽였다. 불쌍한 이 몸!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얘들아, 어서 나를 데려가거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나를 빨리 데려가거라!”[4]

 

3) 근대의 파토스

근대인의 파토스는 이런 실체적 힘과는 무관하다. 여기서 파토스란 자신의 목적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추구하면서도 이런 추구가 단순히 자신의 주관적 선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적인 힘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그는 아직 신적인 강요를 명백하게 자각하지 못하며 그것은 다만 느낌으로 다가오기에 그는 자신의 목적을 자기를 넘어선 욕망 즉 무한한 욕망 즉 열정이라는 방식으로 느낀다. 

하지만 이런 자의적인 추구는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파멸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토스적 인간은 처음에 그에게 다가오는 파멸을 어떤 알 수 없는 외적인 힘에 의해 지배되는 운명으로 파악한다. 그는 이런 운명을 무의식적으로 예감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끝없는 죄의식과 불안 속에 있다.

근대인의 파토스는 예를 들어 절대주의 시대 대표적인 예술가인 라신느의 희곡 페드라[5]에서 나타나는 페드라의 모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페드라는 자신이 이폴리투스를 고발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유모! 질투의 불길에 휩싸인 이 몸의 심정을 보살펴 주오. 아리시아를 그냥 둘 수는 없소. 그 가증스런 혈통에 항거하는 내 낭군의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하오! 그녀의 죄는 그의 오빠들의 죄에 능가하는 것이니 가벼운 벌로 그치지 않도록 내 질투에 겨운 분노에 힘입어 내 낭군 테세우스에게 간청하려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내 지각이 갈피를 잃고 질투에 눈이 멀어 테세우스왕에게 애원하는 것에 의지하다니. 내 낭군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시련으로 몸을 불사르다니!” [6]

 

위의 글의 앞부분은 질투, 뒷부분은 죄의식을 드러낸다.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한없는 질투, 그것이 곧 근대인의 파토스이다. 그런데 이런 파토스 속에 이미 그는 자신의 잘못, 죄를 자각하고 있다. 그의 질투에는 죄의식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파멸을 예감하고 있다. 그에게 마침내 파멸이 다가온 순간 그는 그것이 그 자신에게 적절한 자신의 정의라는 것을 인정한다. 자신의 죄를 자각한 페드라는 모든 것을 고백하고 죽기로 결심한다.

 

“지금 이 몸은 촌각이 소중하오. 테세우스왕이시여!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우려주오. 순결하고 존엄한 왕자에게 불륜의 추파를 던진 것은 이 몸이요 비너스신의 화살이 이 가슴에 정념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으며, 그 밖에 모든 일들은 하녀 에노느가 서둘러 저질은 짓이옵니다. 그러나 이젠 그도 자기 죄를 깨닫고 바다 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이 몸은 당신 앞에 나아와 내 한 맺힌 탄식을 털어놓고 한발 늦게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려 합니다.”[7]

 

4) 죽음에 관해

헤겔에 따르면, 고대인과 근대인은 죽음에 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고대인에게 삶은 정당한 실체적 힘을 추구하는 것이니, 그에게 죽음이란 자연이 그에게 부과한 몫이 그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체적 힘을 추구하는 일은 이제 그의 사후에 새로운 인간에 의해 이어져가니, 그의 죽음은 우연적인 개인적 삶의 소멸에 불과할 뿐이며 그의 삶이 추구하는 본질은 계속적으로 이어 간다. 따라서 고대인은 이미 스스로 불멸하며, 불멸에 대해 진지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 앞에서 담담하며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래는 죽음 앞에 선 안티고네의 고백이다.

 

“(안티고네) 저는 이렇게 친구들의 버림을 받고 불행한 이 몸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죽음의 동굴로 갑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경건한 일을 하다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불쌍한 이 몸은 신들께 의지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로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면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똑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 [8]

 

반면 근대인에게 죽음이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거꾸로 근대인에게서 죽음이란 자신에게 아주 소중한 삶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인은 자신의 주관적 욕망이 무한히 중요한 것이므로, 죽음이 두려운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근대인은 불멸에 대한 진지하고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근대인에게서 죽음은 오히려 신적인 정의의 실현이 된다. 사실 무한한 욕망으로 추구되던 개인적인 목적은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이런 자의적인 목적이 제거되는 것만이 진정으로 중요한 객관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니, 죽음은 신적 정의를 회복하여 신적인 것으로 복귀하는 과정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근개인에게서 죽음은 곧 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즉 개인의 죽음은 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근대인의 죽음 개념의 앞에서 언급한 페드라에서도 나타난다. <페드라>에서 운명의 힘은 마지막 장면에서 폭로된다. 이 마지막 순간 페드라의 태도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라신느는 온몸에 독이 퍼져서 죽어가는 페드라의 고백을 통해서 이를 밝히고 있다.

 

“죽음은 내 눈에서 빛을 빼앗아 이 눈이 더럽힌 이 세상의 모든 빛을 정결케 하려는 것이요.”[9]

 

페드라는 자기의 죽음을 긍정한다. 그 때문에 페드라는 마지막 순간 더는 자책도 사라지고 고귀한 고요 속에서 죽음을 겪게 된다. 이런 몰락의 극을 통해 라신느가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상을 영원히 지배하는 신의 힘, 신의 영광이다.


[1]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현암사, 1969. 이 가운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조우현이 번역했다.

[2]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3]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4]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5] 라신느는 루이 14세 시절 즉 바로크 시대 궁정 작가이다. 그는 같은 비극작가 코르네이유와 희극 작가 몰리에르와 대결하면서 여러 비극을 작성했는데, <페드르와 이폴리투스>는 그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페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원래 에우리피데스가 만든 비극 <이폴리투스>가 있지만 작가 라신느가 이를 개작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비교적 단순한 비극이지만 라신느의 비극은 그의 시대 바로크 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화려한 비극이다. 라신느는 개신교의 예정조화론을 믿는 장세니즘의 신봉자였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적인 운명 개념 대신 근대 기독교적 운명 개념을 비극 <페드라>를 이끌고 가는 기본적인 동력으로 삼았다. 대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아내인 왕비 페드라는 전 왕비의 아들인 이폴리투스를 사랑하지만 감히 고백하지 못하고 야위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출정 중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이폴리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폴리투스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반면 이폴리투스는 테세우스가 무너뜨린 아테네 전 왕조의 딸 아리시아를 사랑한다. 테세우스가 죽었다는 소문에 이폴리투스는 아리시아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한다. 아리시아 역시 이폴리투스를 연모해왔던 터라,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맺어지게 된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살아서 돌아온다. 그러자 페드라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혹시 이폴리투스가 자신을 왕에게 고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페드라는 먼저 왕에게 무릎을 꿇고 이폴리투스를 고발한다. 이폴리투스가 오히려 왕이 없는 사이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면서 이폴리투스에게서 훔쳐온 그의 단검을 증거로 내보인다. 테세우스는 이폴리투스를 추방하고, 분노 때문에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에게 추방당한 이폴리투스를 죽여 달라고 요청한다. 페드라는 이를 알자 후회하지만 이번에는 아리시아에 대한 질투감 때문에 자신의 거짓을 밀고 나간다. 이폴리투스는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사랑하는 아리시아에게 먼 나라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떠나지만 그가 타고 가던 마차를 넵툰이 보낸 괴물이 덮쳐 그는 죽게 된다. 그의 죽음을 알게 되자 죄의식으로 고통 받던 페드라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페드라는 스스로 독을 마신 채 왕에게 나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죽는다.

[6]  라신느, Phaedra, 이연자 역(극단 성좌 77년 공연 대본), 2막 5장

[7]  라신느, Phaedra, 위의 책

[8]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9]  라신느, Phaedra, 위의 책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가을 제65회 정기학술대회 ‘포스트휴먼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연합학술대회 영상 20231209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가을 제65회 정기학술대회 ‘포스트휴먼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연합학술대회 20231209

◎ 주제: ‘포스트휴면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일시: 2023년 12월 9일(토) 11:00~18:00
●장소: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 308호(31308)
●주최: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숙명인문학연구소 HK+사업단,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주관: 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영상 목록(특정 발표 영상만 공개)
☞ 개회사 사회: 현남숙(성균관대)
☞ 개회사: 김종갑(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회장·건국대)
☞ 축사: 박정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성균관대)
1부 신유물론과 물질에 대한 논쟁 – 좌장: 김재희(을지대)
☞ 2발표(11:40): ‘신유물론의 물질 개념과 들뢰즈의 존재론’ – 박준영(수유너머 104)
2부 기조발제 – 사회: 하인혜(인천대)
☞ 1발표(13:30): ‘얽힘과 접촉’ – 최종덕(독립연구자)
☞ 2발표(14:10): ‘위기인가 기회인가: 포스트휴머니즘의 곤경과 신유물론 정치의 가능성’ – 박인찬(숙명여대)
3부 신유물론과 물질과 몸 – 좌장: 이승준(생태적지혜연구소)
☞ 1발표(15:00): ‘물질과 시간의 미결정성, 그리고 애도의 윤리’ – 서영화(서울대)
☞ 2발표(15:30): ‘몸의 물질화와 수행성’ – 정유진(서강대)
☞ 3부 질문 및 토론(16:00~16:20)
4부 신유물론과 디지털도시화 – 좌장: 이지영(이화여대)
☞ 2발표(17:00): ‘디지털 도시화와 탈/재물질화’ – 이현재(서울시립대)

전체 일정표 참고 링크
http://ephilosophy.kr/han/category/e-academy/e-academy5/
—————————————————————————-
개회사, 1부 – 2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vA0Hp8-IHhk?si=004ZEyIC_Wv382Ny

2부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C54pkAUt-7E?si=JLqkWLaZwyrobw_M

3부 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TUdBTLFLPGc?si=4VkkM-JcRDZwxMYQ

4부 – 2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dlGdQU2quDc?si=lu3dIOLZ0HV9VZH4

헤겔미학산책14- 호머에서 신과 인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4- 호머에서 신과 인간

 

1) 고전 시대

앞에서 언급했지만 헤겔에서 예술은 정신의 표현 기호이다. 이 정신은 마침내 절대 정신으로 발전하는데, 그 토대는 바로 국가이다. 이 국가는 사회적 상호 관계 위에서 출현한 사회 정의나 공동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개별적 의지의 통일체이니, 루소의 말을 빌리자면 즉 일반의지이다.

상징적 예술 형식의 토대가 되었던 동방 국가(인도, 페르시아, 이집트의 국가)나 고전적 예술 형식의 토대가 되는 고전 시대 국가(앞으로 고전 국가로 통칭하기로 하자)가 도시 국가에서 출발해서 하나의 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은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헤겔은 양자 사이에 근본적 차이를 설정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 차이는 동방 국가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억압이 일반적이었지만 고전 국가에서는 자유가 존재했다는 데 있다. 즉 고전 국가에서는 평민의 자유가 보존되었고 이주민에게 일정한 권리가 인정되었으며, 도시 국가와 도시 국가 사이에서도 상대적 평등이 인정되었다. 물론 이런 자유나 평등은 정점에 이르렀을 때를 말하며, 그 과정에서 억압과 불평등이 존속했으나, 동방 국가가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자유나 평등에 마침내 도달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평가되는 역사적 근거는 고전 시대에서 적어도 그 전성기에서는 왕과 귀족에 대한 평민의 투쟁을 통해 민주제와 공화제가 출현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1] 같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했음에도 이처럼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 시대가 민주제와 공화제로 나갈 수 있었던 역사적 원인을 밝히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니 생략하기로 하자.

헤겔은 고전 시대에 찬탄함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대체로 두 가지 한계가 언급된다. 우선 고전 시대에서 개인의 자유가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전 시대에서 개인은 자발적으로 공동체의 의지인 국가에 복종했지만 그것은 근대에서와 같이 자각적으로 복종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관습적으로 형성된 민족 의식[2] 또는 위대한 영웅에 대한 감정적 신뢰를 통해서 복종했다는 것이다.[3]

또 하나 헤겔이 강조하는 한계가 있다. 고전 시대[여기서는 로마 공화정까지만 다루어진다]의 도시 국가 사이에는 협력과 대립의 관계가 무상하게 변천했는데 그런 가운데 한번도 동방의 국가가 도달했던 것과 같은 통일체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고전 시대의 도시 국가는 그리스에서처럼 공동의 동맹을 만들어내거나 로마 공화정에서처럼 자율권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 동맹 도시보다는 발전된 형태 즉 동맹 도시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의 동맹 관계조차 후일 로마 제국이나 그 이전 동방 국가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통합에 이르지는 못한다. [4]

 

2) 신들의 전쟁

고전 시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이런 한계 때문에 헤겔은 고전 시대의 정신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면서 여기서 개별성이 출현했으나 그 개별성은 일반성과 직접적으로 결합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이런 매개가 결여된 ‘직접적 결합’이라는 원리가 고전 시대 시대 정신을 규정하니 우리는 이런 특징을 예술적 표현에서 찾기 전에 먼저 종교적 표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그 점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정신적인 것을 내실로 삼고 자연적인 것은 단순한 출발점에 불과한 것이 그리스 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리스 신은 아직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신[기독교 신]은 아니며 인간적 한계를 지닌 특수한 신이고, 외부 조건에 좌우되는 특정 개성을 지닌 정신이라고 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개체의 형태를 띠는 것이 그리스 신이다. 신의 정신이 아직 여기서는 스스로의 정신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그곳에 놓여 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이 신의 실질을 이루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표현을 위한 요소에 불과하다.”[5]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상징 시대처럼 동물 신의 모습이나 아니면 이슬람의 카바(흑색 돌)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신 개념에 대한 헤겔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데 신의 본질이 바로 인간 공동체의 의지 즉 일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에서 신이 본성은 이성적으로 자각된 것은 아니고, 감각적 수준에서 직접적으로 자각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어떤 모습을 취하는가는 우연하다. 이런 우연성은 상징주의 시대 자연 신의 모습에서 빌어오든가 아니면 지역적으로 전래하는 신으로부터 빌어온다

하지만 그 우연성만 본다면, 전래의 상징적 신이 수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이미 구 시대 신의 형태는 새로운 신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구 시대 신은 더 이상 자연력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제 정신적 힘을 의미하게 된다.

구 시대 신은 자연적인 것이며 불명료하고 우연적인 것이며 환상적인 것이지만 새로운 신은 정신적인 것이며 명료한 것, 필연적인 것이고 실체적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는 구 시대 신과 새로운 신 사이의 투쟁[6] 또는 신의 변용[7]을 그려내고 있다.

신의 이런 차이에 관해서 헤겔은 예를 들어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거론한다. 프로메테우스는 구 시대 자연신인 티탄 족의 신인데도 인간을 위해 불과 기술을 가져다 준다. 헤겔은 이 사실은 얼핏 불합리해 보이지만, 이런 신화에서 신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헤겔은 이때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 나오는 설명을 소개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에피메테우스가 모든 생물에게 살아가기 위한 고유한 기술을 나누어주었는데 프로메테우스가 나중이 보니 인간에게 줄 기술은 더 이상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헤파이토스와 아테네로부터 불의 기술과 직조의 기술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간 사이에 끝없는 분쟁이 벌어지니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헤르메스를 통해 정의를 선사했다고 설명한다.

헤겔이 주목하는 것은 플라톤의 이런 설명을 통해 볼 때 불과 직조의 기술은 아직 실체적인 것에 속하지 않는 단순한 생존의 기술, 자연의 힘에 속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비록 프로메테우스가 욕구의 만족을 위한 기술을 주었지만 프로메테우스 자신은 구 시대 신에 속한다는 것이다. [8]

헤겔은 이런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통해 구 시대 신인 프로메타우스와 새로운 신인 제우스, 헤르메스의 차이를 분명하게 부각한다.

 

3)신과 인간

더구나 신이 지닌 우연적인 모습은 이제 정신적 힘의 표현이 되므로, 단순한 인간이 아닌 이상적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신은 개인적 의지가 아니라 공동체적 의지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이상적 인간의 모습을 곧 “아름다운 개체의 형태”라고 말한다.

신이 자기를 이런 아름다운 개체의 형상으로 드러낼 때 헤겔은 이를 “그것이 신의 실질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그것을 마치 상징주의 시대에 자연 속에 신이 존재한다고 보는 범신론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자연이라는 기호를 상징적으로 즉 마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 시대 신상이 신이 현존하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헤겔은 이를 어디까지나 신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표현이란 곧 이 시대 예술을 의미하는 자기를 이중화하여 드러내는 예술적 기호라는 의미이다. 달리 고전 시대 신상은 숭배의 대상은 아니다.

고전 주의 시대 신상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작품으로 간주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현존으로 간주되니, 양자는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서사시에서 인간의 행위와 신의 행위가 중첩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으로 인간적 사건이 신의 행위로 설명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신의 행위는 인간의 감정을 반영한다.

헤겔은 예를 들어 호머 일리아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거론한다. 아킬레스의 친구 파틀로클로스와 트로이의 헥토르가 싸울 때, “어슴푸레한 어둠에 몸을 감춘 신(아폴로)가 혼전을 틈타 그에게 다가와 등과 어깨를 내리치며 투구를 벗겨 내고” “그의 손아귀에 있는 청동창 역시 부러뜨리며 그의 어깨에서 방패를 끌어내리고 갑옷을 벗긴다.” 이어서 호머는 비로서 에우포르보스가 창으로 파트로클로스의 뒤에서 어깨 사이를 찌를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헥토르가 신속히 다가와 창으로 복부의 약한 부분을 깊숙이 찌른다. 이런 서술을 보면 인간의 행위가 신의 행위로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서사시가 아니더라도 그리스 신화에 보면 인간의 행위와 신의 행위가 서로 중첩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헤겔은 호머의 이런 서술을 이렇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호메로스가 특수한 사건들을 그러한 신의 등장을 통해 설명하는 모든 경우에, 신들은 인간 내면 자체에 내재하는 것 즉 그의 고유한 열정과 고찰의 힘이거나 그가 처한 상황의 일반적 힘들 즉 인간에게 닥치는 것과 이 상황의 귀결로 그에게 발생하는 것의 힘이자 근거이기 때문이다.”[9]


 

[1]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그리스 로마 사회에 대해 각기 이렇게 서술한다.

“사람들이 왕에 복종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에 바탕한 상하 관계에 의한 것도 … 아니고, 가부장제 지배에 의한 것도 아니고, 명문화된 법적 지배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함께 살아 가려면 … 복종할 필요가 있다고 모두가 느꼈기 때문이다. 왕은 … 개인적 위엄이 있었다.”(역사철학강의, 227쪽)

“로마에 이르러 겨우 자유라는 일반원리 또는 추상적 자유가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추상적인 국가와 정치와 권력을 구체적 개인 위에 두고, 개인에게 철저한 종속을 강요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 권력에 대립하는 인격을 창출한다. 인격이야 말로 법의 근본적 기초이기 때문이다.”(역사철학강의, 275-276쪽)

[2] 이 민족의식은 씨족이나 부족을 통해 형성되는 혈연적 일체감과는 구분된다. 도시국가에서 다양한 씨족, 부족은 해체되며, 그 사이에 다양한 혼인이 교차되면서 역사상 민족이 형성된다. 예를 들어 아테네 민족이라든가 로마 민족 등이다.

[3] 이 점에 관해서는 헤겔의 다음 글을 참조로 하라.

“국민은 전쟁터에서 왕의 용병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내몰려서 예속미으로서 마음에도 없이 싸우는 것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는 존경하는 주군을 따르는 자로서, 주군의 전공과 명예의 증인으로서 또 필요하다면 주군의 호위로서 싸운다.”(역사철학강의, 228쪽)

또는 미학강의에 나오는 다음 글도 참조하라.

‟그리스 인륜적 삶에서 개인은 독자적이며 내적으로 자유로웠으되, 현실의 국가에서 현전하는 일반적 관심 … 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인륜의 일반성과 내적, 외적으로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는 그리스적 삶의 원칙에 적합하게 평온한 조화를 이루었으니” (미학강의 2, 27쪽)

[4] 헤겔은 그리스 사회에 대해 로마 사회가 가지는 차이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않는다. 로마 사회는 후일 제정으로 넘어가면서 한편으로 자유로운 인격이 출현하며, 다른 한편으로 로마법의 지배가 출현한다. 동시에 이 시대 기독교가 출현하는데, 헤겔은 그 핵심 원리를 추상적 법과 추상적 자유의 관계에서 찾는다. 헤겔은 이런 추상적 법과 추상적 자유의 원초적 형태는 이미 로마가 출현할 때부터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간주한다.

헤겔은 그 역사적 원인을 로마가 주변의 민족국가로부터 추방된 자 또는 도덕들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출발했다는 데서 찾는 것으로 보인다. 그 역사적 원인이야 어떻든 헤겔은 로마의 정신을 그리스 정신과 구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원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정신은 기쁨과 명랑함과 만족으로 충만한 형태를 취해 추상적 세계에 틀어박히는 일이 없다. …그 때문에 개인의 덕도 공동체 정신이 넘치는 예술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추상적이고 일반적 인격과 같은 것이 거기에는 아직 없었다.”(역사철학강의, 275쪽)

그리스 시대 개인은 관습적으로 길러지는 덕성[arete]을 통해 공동체적 의지로 통합되었으나, 로마 시대 개인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니 이런 욕망을 공동체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법의 원리가 출현한다. 이 법은 강제적 힘에 의해 강요되니, 이게 바로 로마 시민의 덕성(즉 virtue)이다.

“주관의 내면성이라는 원리는 우선 자신을 충족시키는 내용을 밖에서부터 지배자 내지 통치자의 특수한 의사라는 형태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역사철학강의, 277쪽)

그러나 헤겔은 그리스 사회와 로마 사회 사이의 차이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듯 보인다. 적어도 공화정으로 나가는 시기 그리스 사회나 로마 사회는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가 제정으로 변화하는 것은 그 시대 역사의 종합적 결과이지, 본래 내재하는 속성의 발현이라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어떻든 고전적 예술 형식을 논하는 자리에서 로마의 예술은 후기 즉 그리스적 전성기의 해체기에 주로 다루어진다.

[5] 헤겔, 역사철학강의, 240쪽

[6] “반면 티탄들은 추방당하여 지하에 거주해야 하며 혹은 오케아노스가 그렇듯 밝고 명랑한 세계의 어두운 가장자리에 머물거나 기타 다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헤겔, 미학강의 2권, 67쪽

[7]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이제 단순한 자연욕구와 그 만족에 제한되는 인간의 행동이 뒷전에 밀려감을 발견한다. 자의식적 정신에서 발원하는 법을 통해 규정되지 않는 옛 정의는 즉 테미스와 디케 등은 무제한적 타당성을 상실하며, 또한 반대도 마찬가지이니 단순한 지역성은 비록 그것이 여전한 역할을 하지만 보편적 신의 모습으로 변신하니, 그들에게서 지역성이 그저 흔적으로 잔존할 뿐이다.”헤겔, 미학강의 2권, 69쪽

신들의 변용에 관한 구체적 예를 들자면, 포세이돈은 오케아노스와 같이 바다의 신이지만, 그에게는 트로이의 건설자이고 아테네의 수호자라는 새로운 특성이 부여된다. 아마도 해양 무역을 보호하는 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폴로는 태양의 신으로서 헬리오스의 자취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또한 질서의 신이 된다. 에베소의 여신 디아나는 자연의 생산적 힘을 상징하는 옛 신이지만 원래 달의 신을 의미하는 아르테미스는 이제 동물을 사냥하여 인간을 보호하는 신이 된다.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대지의 여신이었지만 그리스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으로 변모한다.

[8] 헤겔, 미학강의 2권, 61쪽 서술을 참조하라.

[9] 헤겔, 미학강의 2권, 111쪽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② [시대와 철학]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②

 

문성원(한철연 회원, 부산대 철학과)

 

이 글은 2023년 11월 18일 부산대에서 열린 한국헤겔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저자의 기고로 게재합니다. 앞에 이은 두 번째 글입니다.

 

 

 

1. 많은 분이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만, 청년 시절 제게 헤겔은 무엇보다 ‘자유’의 철학자였습니다.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의 역사”라는 말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지요. 진보의 순서를 문명권에 따라 공간적으로 배치한 것이나 물질적·경제적 동인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것 따위는 맑스 같은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극복되는 시대적 한계로 여겨졌죠. 이런 지연 효과를 고려하면, 자기의식의 원리에서 출발한 자유는 산업화로서의 외화와 그것의 자주적 전유를 그 전개 형태로 담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경우, 자유는 산업화와 자주를 아우르는 근본 틀로 취급될 여지를 갖겠지요.

2. 그런데 이 ‘자유’는 최근에 우리가 여러 번 목도했다시피 내용 없는 공허한 울림으로 되뇌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자유가 운위되는 양태는 매우 자의적어서, 실제로는 자신의 좁게 겨냥된 과녁만을 노릴 뿐, 주변의 중요한 문제들을 수습하거나 해결하는 데는 무책임하며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자유롭죠. 흔히 말하는 대로 아집과 무지와 무능의 소치라 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데에는 애당초 자유 개념과 결부되어 있는 자기 중심성 탓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보편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합니다만, 알다시피 이때의 보편은 실상 시대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한정된 ‘보편’이죠. 게다가 우리가 익히 보다시피 그런 특정한 잣대마저도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덕택에 지금 우리는 권리와 법이 그야말로 ‘자유롭게’ 전횡되는 현실을 아프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요.

3. 이런 모습이 자유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부정적 면모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구태일 겁니다. 이념의 외화와 자기복귀라는 틀이 한 때 호소력이 있었던 건 그것이 자기 확인과 자기 확장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열망에 부응했기 때문이겠죠. 물론 아직도 그런 생각을 고집하고픈 집단이 있겠으나(아마 북한―적어도 현재의 주도적 지배층―의 경우는 여전히 이런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동안 드러난 숱한 문제들을 도외시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주체는 단일하지 않을뿐더러 궁극적으로 단일해질 수도 없다는 것, 각각의 주체는 재현의 실패를 지시하며1 그런 실패가 계속되는 한에서 요구된다는 것, 또 주체의 자유란 이 같은 실패가 일회적이지 않게 하는 선택의 기제이고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집단적 자유의지(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를 포함해서―의 실체라는 것, 등등이 그간의 사태에 대한 반성을 통해 도출된 일반적 결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4. 그렇다고 자유의 여지를 확대하고 공고히 하려는 활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확실성을 보장받으려는 과도한 목적론적 구도를 포기하고 자기중심적 외화가 초래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들을 충분히 경계한 채로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 시대에 뒤떨어진 목표에 얽매인 상태에서가 아니라면 과연 ‘자유’가 주도적 모토로 내세워질 수 있는지, 오히려 퇴행적 발상에 이용당할 소지가 많지 않은지 의심스러워 하는 것이죠. 더러 얘기되듯 누구의 자유인가, 어떤 자유인가를 구체적으로 문제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유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 자유 개념의 특성에 대해서 따져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2

5. 외화로서의 산업화와 자기복귀로서의 자주를 주된 계기로 삼아 지나간 일들을 꿰어보려 했다고 해서 미래에 대해서도 같은 틀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죠. 오히려 그동안 불거진 예기치 못했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일이 긴요할 겁니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제틀의 수립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테지요.

 

 

1. 여러 문제 가운데 제가 특히 흥미롭다고 여기는 우리 현실의 사안으로는 무엇보다 세대 문제를 들고 싶군요. 그중에서도 근래에 두드러진 세대 간의 불평등 논란이 관심을 끕니다. 세대의 문제는 시간적 추이와 관련된 문제고 그런 점에서 변화, 발전의 문제이기도 할 테지만, 변화의 속도가 느린 사회에서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이 일반적인 형태로 논의될 따름이었겠죠. 혁명적 격변의 시기에도 체험의 단절적 변화가 세대의 구분에 새겨지겠으나, 우리의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든 압축적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경험을 한 탓에 세대 간의 특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2. 이제 산업화 이전 세대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하겠고, 70년대까지 젊은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확연히 노년층에 접어든 산업화 세대와 87년을 전후한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라 할 이른바 386(이 이름이 등장했던 1990년대초 당시에 386이었지 현재는 586을 거쳐 686에까지 이른) 세대, 그리고 민주화 이후 성장기를 보낸 X, Y, Z의 알파벳 세대 등 갈수록 구분도 촘촘해지는 세대들이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죠. 여기서 특히 세기의 전환기를 어려서 겪은 이들, 대체로 1980년대 중반쯤에 태어난 Y세대에 해당하는 이들을 M(밀레니엄) 세대라고 하고, 이들과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 태어난 Z세대를 묶어서 MZ 세대라 부르는 것 같군요. 그런데 불평등과 관련한 논란의 초점은 현재 사회의 중심 세력이라 할 386세대와 2,30대 청년층을 이루는 MZ세대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3. 『불평등의 세대』라는 책을 쓴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는 한국의 세대를 ‘자원 동원 네트워크’라고 이해합니다.3 단순히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 이상이라는 거죠. 특히 그는 386세대가 성공적으로 이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한국사회의 주도층이 되었으며, 그 다음 세대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철승 교수가 드는 386세대의 성공 요인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어요. 첫째, 베이비 붐 세대라서 수가 많다는 점, 둘째, 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균질성과 응집력을 획득했으며 학생-시민-노동조직의 연계를 이루어 내었다는 점, 셋째 이른바 세계화에 편승한 고도성장기에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는 점. 그런데 다른 한편, 이 세대는 세계화의 신자유주의 바람에 휘말리고 만 탓에―IMF 외환위기가 그 단적인 징표겠죠― 시장이 야기하는 불평등한 ‘신분의 위계화’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권력의 과두제화와 독점’에 안주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청년 세대가 불만을 가지고 반발하는 주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테죠.4

4. 이철승 교수는 386세대와 다른 세대의 소득격차가 커져가고 있고, 세대간 정치권력의 분포 비율 면에서도 이 세대 이후 젊은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여러 통계 도표를 통해 제시합니다.5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지요. 그 주된 논거는 세대간 불평등에 비해 모든 세대 내의 계급간·계층간 불평등이 더 심하며, 따라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및 갈등의 주요 원인은 세대 격차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세대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이용하려는 세력이 문제라는 것이지요.6 저는 이 논란에서 어떤 편을 들 만큼 우리 사회의 실증적 사실에 밝지 못합니다. 양측이 내놓는 통계들은 나름으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요. 다만, 세대내의 불평등 역시 크다고 하더라도 386이라는 1960년대 출생 세대의 경제적·정치적 비중이 다른 세대가 같은 연배일 때에 비해 다소 큰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런 차원과는 조금 다른 결의 사태에 주목해 보고 싶군요.

5. 저출산의 문제야말로 심각한 세대의 문제이고 또 세대간의 문제가 아닐까요? 노령층을 부양해야 할 젊은 세대의 부담이 늘어난다든가 한국 사회의 소멸이 우려될 지경이라든가 하는 얘기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예상되는 결과 이전에 자식 세대가 출산을 기피하게 만든 부모 세대의 책임을 먼저 문제 삼아야겠죠. 그리고 지금의 청년 세대가 처한 상황의 엄중함에 주목해야 할 줄 압니다. 저는 이것이 앞서 말한 공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산업화가 낳은 문제들이 집약되어 나타난 증상이 저출산이고, 여기에 대한 대책의 부재가 사회 발전 방향과 비전의 공백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윤석렬 정권의 탄생과 같은 현상을 낳았다는 것이지요.

6. 저는 몇 해 전에 저출산이 ‘생물학적 파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7 작년에는 영국의 BBC가 ‘한국은 출산 파업 중’이라는 표현으로 우리의 저출산 사태를 보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8 사전의 협의도 주도하는 조직도 없는, 그런 점에서 무의식적이지만 집단적인 저항인 셈입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청년 세대를 낳은, 그리고 현 상황을 만든 세대를 향한 (아마 오늘의 발표자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항의겠지요.

7. 산업화한 국가들 대부분이 저출산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지난 몇 세기에 걸친 급속한 인구 증가를 생각하면 장기적으로는 인구수가 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지 모르죠. 하지만 인류세의 위기를 개체수 조절로 극복하는 선구적 모습을 보인다고 자위하기에는 출산을 포기하게 되는 이유들이 너무 팍팍하고 출산율의 저하가 너무 가파릅니다. 그 원인들에 대해서는 차고 넘칠 만큼 많은 논의가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사태가 급속한 압축 성장의 대가라는 점이죠. 극심한 경쟁과 수도권 중심의 과밀집 등이 저출산의 원인으로 흔히 지목되는 그 결과지요. 여기에 덧붙여 저는 축약된 과정 탓에 욕망에 대한 반성과 조절의 기회가 없었거나 부족했다는 것도 무시하지 못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서구의 68혁명에 해당하는 계기가 생략되어 버렸다고 할까요. 이런 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늘어난 소득에도 불구하고 더욱 돈에 모든 가치 평가의 기준이 집약되는 오늘의 분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386세대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거예요. 비록 압축적 과정 때문에 오히려 지연된 민주화라는 과제에 치여 스스로는 어쩔 수 없었던 면이 있다고 해도 말이죠.

8.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이 ‘어떻게’는 오늘 우리의 주제인 헤겔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아마 헤겔이라면 혹 압축적 산업화에 대립하는 계기로 탈성장을 내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긴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탈성장 담론이 자리잡을 여지는 얼마나 될까요? 그것은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으로 여전히 고초를 겪고 있는 한반도 주민의 일부가 그 반대의 극을 추구하기 위해 영세중립국을 내세우는 일9보다는 더 현실적인 시도일까요?

9.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2018)에는 두 개의 원작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1983)가 직접적 원작이지만, 무라카미의 그 단편이 제목에서부터 윌리엄 포크너의 “Barn Burning”(1939)을 염두에 둔 것인 데다가, 이창동 감독 자신도 포크너의 그 작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예 영화 한 장면에 그 소설이 실린 포크너의 책이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주인공인 종수(유아인 분)가 포크너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 말을 들은 벤(스티브 연 분)이 그 책을 구해 카페에서 읽고 있는 것으로 나오죠. 그거야 어쨌든 이 세 작품은 다 같이 헛간(<버닝>의 경우 비닐하우스)을 태우는 걸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하지만 세 작품의 배경이 다르듯, 태운다는 행위의 의미도 조금씩 다릅니다.

10. 포크너의 헛간 불태우기는 소작농의 저항을 표현하죠. 지주에게 헛간은 대단한 재산은 아니지만 쓸모없는 것도 아닙니다. 몰래 불 지르고 적당한 손해를 입히기에 적합한 장소지요. 그래서 그 일은 추적당하고 재판받는 자못 심각한 사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반면에 무라카미의 경우에는 헛간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묘사되죠.10 적어도 그것을 태우는 소설 속의 부유한 젊은이에게는 말입니다. 그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헛간, 그러니까 완전히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사라져도 별 지장이 없는 헛간을 골라두곤 마음 내킬 때 몰래 태웁니다. 아니, 그렇게 한다고 얘길 하죠. 소설에서 이 헛간은 그가 별 부담 없이 사귀는 젊은 여자와, 그러니까 있어도 없어도 좋을 그런 여자와 암시적으로 겹칩니다. 이창동의 영화 <버닝>에서도 비슷해요. 돈 많고 세련된 젊은이 벤(스티브 연 분)이 주기적으로 태운다는 비닐하우스와 그의 일시적 애인인 해미(전종서 분)가 겹치죠. 그런데 큰 차이는 <버닝>에서는 태우는 행위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11. <버닝>의 주인공 종수는 무라카미 소설의 화자(話者)와 마찬가지로 소설가(정확히는 소설가 지망생)이기는 하지만, 쿨한 분위기의 전자와 달리 농촌 출신의 투박함을 잃지 않은 청년이지요. 그래서 그는 태워짐에 분노하며 결국 태우는 자를 태웁니다. 쓸모없음을 처리하는 자를 처리하죠. 물론 영화 마지막의 이런 장면들은 종수가 쓰는 소설 속의 사태라고, 그러니까 종수의 희망이 영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어떻든 <버닝>은 이렇게 저항을 재도입하죠. 포크너가 묘사한 소작농의 저항은 이제, 사회가 꼭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적 존재로 전락할 위험에 놓인 청년 세대의 저항이 됩니다. 이 저항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우리 현실에서도 아직 그렇죠. 출산율 저하는 어쩌면 소극적 저항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의 미래를 태우는 극단의 저항으로 연결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1. “보통 사람도 자동차나 PC 같은 개인 소유 기계는 통제할 수 있겠지만, 대형 기계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거기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진보된 기술 덕분에 엘리트는 대중에 대해 더 강화된 통제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불필요해진 탓에 대중은 불필요한 존재, 즉 체제에 떠넘겨진 쓸모없는 짐더미가 되어 버린다.”11 이것은 ‘유나바머’ 테어도르 카진스키의 선언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십수년간이나 미국 몬태나주 숲 속에 숨어 지내며 기술문명을 중단시키려는 목적으로 십여차례에 걸쳐 폭탄 테러를 저지르다 1996년 체포되었던 인물이죠(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에 금년 6월 숨을 거뒀지요). 카진스키에 견해에, 특히 그의 반기술주의 방법론에 찬성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의 문제의식에는 동조할 수 있는 부분이 꽤 있다 싶어요.

2. 사실, 청년 세대의 집단적 불안감에는 자신들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구심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이전과는, 그러니까 소외되고 착취를 당하더라도 스스로의 활동에 분명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던 시절과는 크게 달라진 점이 아닌가 해요. 코인에 대한 열풍도 외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도 이처럼 가치의 기준이 불확실해진 데 따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안감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헤겔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대해 제가 자신 있게 답을 내놓을 처지는 아닌 것 같군요.12 저로서는 이렇게 어설프고 산만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으로 그치고 다른 분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여야 할 듯합니다.

3. 끝으로 덧붙이자면, 저의 이 부족한 발표에 ‘헤겔 바깥의 헤겔’이라는 제목을 붙여본 데에는 오늘의 상황이 헤겔 철학의 태생적 배경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젝은 “헤겔을 넘어선 헤겔”13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던데, 아마 외적 조건보다는 내적 특징의 발전과 연속성에 더 무게를 둔 것이겠죠. 저는 오늘날의 철학은 외부에, 바깥의 변화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설명과 의미 부여의 틀을 짜나가야겠죠. 그것이 제가 주제넘게 떠올려 보는 오늘의 헤겔 모습입니다.

– 끝 –


♦ 이전 글


  1. 『헤겔 레스토랑』, 앞의 책, 469쪽 참조.

  2. 외람되지만 저는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졸저 『배제의 배제와 환대』, 동녘, 2000 참조.

  3.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33쪽 이하 참조.

  4. 이 책이 조금만 더 늦게 나왔더라면(출간일은 2019년 8월 9일인데요), 조국 사태를 이 불만 표출의 대표적 사례로 연결시켰을 법합니다.

  5.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125쪽 이하, 또 70쪽 이하 참조.

  6. 대표적으로 신진욱,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2022 참조.

  7. 졸저, 『철학의 슬픔』, 그린비, 267쪽.

  8. https://m.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208262158001#c2b

  9. 「한반도 영세 중립화 선언」 참조.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Tw8byRcRmOEwZHZeg2TBgsPN7LBrsOaupmykENb-cgnZ74Q/viewform

  10.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반딧불이』, 권남희 옮김, 문학동네, 2014, 68쪽.

  11. 테어도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 조병준 옮김, 박영률출판사, 2006, 111쪽.

  12. ‘만듦의 문명’에 대비되는 ‘즐김의 문명’에 대한 전망과 기대는 제가 단편적으로나마 곳곳에서 계속 피력해 온 것이지만, 이 자리에서 거론하기는 어렵겠습니다.

  13. “Hegel beyond Hegel” ― 이것은 그의 책 『분명 여기에 뼈가 있다』(정혁현 옮김, 인간사랑, 2016. 원서는 Absolute Recoil, Verso, 2014)의 3부 제목입니다.

자연 순환, 그 회귀 [천 하룻밤 이야기]

자연 순환, 그 회귀:

관습 또는 습관을 넘어설 것인가?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중.

— 2023 12 22, 동지(冬至).

 

누구에게나 삶이 자신을 속이지는 않는다고들 한다. 단지 속는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의 자기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경향과 관습을 이어가면서, 임의적으로 여러 갈래 길에서 하나로 밖에 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냉정하다. 이것을 따뜻하게 느끼는 것이 착각이다. 이런 착각과 달리 착오는 비교에서 온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하는데, 또는 제 눈에 들보를 못 보면서 남의 눈에 티끌을 따져든다고 한다. 신체를 가진 삶은 상식[sens commun,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다섯 감각: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영향을 받는다. 그다음으로 생각하는 의식이 있다고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좀 더 깊이 사유한다는 편들은 원래 영혼의 사유하는 양식(bon sens)과 신체의 느끼는 감각작용이 다른 길도 있다고 한다. 어째거나 이 둘의 통합이 가능하다고 믿는 쪽이 있고, 서로가 다르게 작동하는데 어느 쪽을 우선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고도 한다.

그런데 상식의 사유도 양식의 사유도 인간의 이기심 앞에서 무력하다고 한다. 그 이기심이 삶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권력, 권세, 권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결정은 상식과 양식과 다른 의사결정의 기제(메카니즘)이 따로 있다고 하면서, 그래서 결정권을 가진 어떤 능력을 의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개인의 활동에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보면, 그 의지라는 것도 오래 익숙해진 습관과 같은 관례적 또는 본능적 결정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면서, 어떤 본능이 상식과 양식과 다른 인식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간이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무상보시나 희생 등의 예를 들면서 인간이 행동 결정에서 의지가 본능을 넘어선다고들 한다. 의지라는 것을 설정하면서 상식과 양식과 다른 길이, 즉 의지가 인간의 내부에 능력으로서 있다고들 한다. 다른 한편 그 의지가 협박과 고문 등에 의해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과오 또는 오류 정도로 취급한다. 그럼에도 강압적이 아닌 유혹과 회유에도 다른 길을 선택하기 할 때, 그것은 의지와 상관없이 지성이 계산하여 선택한 것으로, 그것은 의지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의지를 잘만 사용한다면 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의지를 다른 어떤 능력과 달리 상위에 두고자 한다. 그 의지의 결단이 지성의 계산 없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들은 의지도 최종결단에서는 자기 지식으로서 상식과 양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잘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결단이 맹목적이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관습적으로 만들어진 자기신념이든 종교 신앙이든 지성의 영향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사건들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사건의 영향 아래 더 깊은 본능에 충실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본능이 자기보존에 맹목적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면서, 지성과는 다른 방식을 사용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능을 동물적 또는 아메바적이라고 비하해버리면, 간단히 지성이 우위이고, 지성의 계산하는 판단과 달리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판단에는 의지가 작동한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신체의 감성, 의식의 지성, 그리고 삶의 판단의 의지가 따로라고들 한다. 이런 논의들도 인간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사유하는 것이라고 본다.

살아간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문제는 인간이 생명체로서 자연의 흐름과 절단 그리고 자연의 순환과 재생산에 익숙했던 시절을 지나, 산업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에게 다가와 있다는 것이다. 우선 토지와 더불어 자연생산을 위주로 하는 삶에서는 자연 순환이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인간이 먹을 것을 저장하고 집을 짓고 옷을 입는다고 해도, 자연 속에서 자연생산은 자기 회귀의 길을 간다. 곡식이든 집이든 세월의 흐름에서 변질하고 소멸한다. 그 변질하는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생명 있는 존재들은 잘 알고 있었다. 먹고 싸고 자고 일어나고 하는 흐름의 과정에서 생물체들이 자기 방식대로 순환하는 방식을 형성하고 관습대로 다양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인류가 도구를 발달시키면서 점점 더 흐름의 절단을 잘하게 되고, 또 그 절단을 고정해서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안정되게 한다고 믿고 산다. 자연에서 고착적이고 고정적인 면들을 만들면서,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자연을 도구로 또는 대상으로 삼고, 그 자연의 자기순환과 회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철학사의 시작을 두고 자연의 이법(理法)에 대한 관심이 신화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전환했다고들 한다. 그 이법을 아는 것이 순리대로 사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법을 신화와 더불어 참주의 법치와 대립으로서만 생각했으나, 참주의 법률에 익숙해진 관습에 젖으면서, 이법을 따르는 것이 법률을 따르는 것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법을 대상에 대한 자연법이라고 여기고, 이것을 본능의 삶이라 여기면서, 법률의 영속성을 위해 지성의 체계와 원리들을 창안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률 그 위에 신법을 설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이런 신법을 무한 소급하여, 자연법 이전에 신법이 있었다고 추론하는 사고가 등장하면서, 자연은 법치의 하부, 게다가 신법의 하부 중의 하부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자연을 떠나서 사회 또는 체제 속에서 권력이 우세하고, 다른 한편 법률의 권력을 넘어서 원리의 권위가 우선하다고 여기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런 전도된 방식은 이상하게도 철학사에서 기원전 300년 경에 논리학과 기하학의 체계가 성립하는 시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삼단논법의 증거하는 방식과 기하학원론의 증명하는 방식은 전혀 다른 방식이다. 증거와 증명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논리학의 증거와 기하학의 증명이 언어와 도형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의 대상은 그래도 사물이며, 도형의 대상은 추상된 점과 선이다. 이 둘의 정합적 체계가 하나의 방향으로 여기는 것이 양식에 가깝다면, 이 두 방향이 다르지만, 평행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겨, 초기에 더는 묻지 않고서 상식에 근거하여 유비적으로 타당성만을 근거로 삼는다. 이런 상식과 양식이 사유체계의 우위를 차지하면서, 철학을 한다고 하는데, 이는 삶 또는 실재성과 멀어진 것이리라. 어쩌면 철학적 사유는 이미 자기도 모르게 또는 암묵적으로, 인간이 자연보다 상위 또는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자연을 대상으로 다루면서 탐욕과 오만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루는 자들이 이것을 내면적으로 아는 자들을, 사용가치가 없다는 명목으로, 열등하게 취급하였고, 다루는 자의 방식에 따라오지 않은 자들을, 자기들과 비교해 도착자들로 규정하였다.

대상을 다루는 자는 공감하며 상부상조하는 자들이 자기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는 법리로 배척하고 제외하려 하였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먼저 억압하고 또는 공포를 심으며 협박하였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우월성에 대한 다른 대처 방식으로 정복과 식민지 노예로 삼는 폭력이 있었다. 이 정복은 상대 토지에서 삶을 몰살시키기를 서슴지 않은 것이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소금을 뿌렸다고 했던가. 지배자는 더 이상 그 토지에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만들고자 했다. 자연은 사용자의 논리에 속하지 않는다. 자연은 복원하고 그 토지에는 추어들과 기억을 지니고 지금도 살고 있다.

사람들은 사고 체계가 있기 전에도 인간은 도시를 건설하던 시기로서 기원전 7천 년 전부터 수많은 전쟁과 소멸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은 있었지만, 소멸이 있었을까? 아니면 전쟁의 과정에서 절단을 피해 다른 곳으로 흐르지 않았을까? 그보다 자연재해도 소멸의 한몫을 했을 것인데 흐름은 돌아서 돌아서 회귀의 과정을 걷고, 새로운 토지 위에 삶을 영위해 나간다. 긴 세월의 이야기 즉 신화와 설화로 남았다.

그런데 인종들 간에 전쟁에서 노예로 삼는다는 조건 이전에, 노예로 살기보다 죽음을, 이라고 말하며 저항했던 시대가 있었을까? 아무래도 노예보다 자유라는 용어를 역사상으로 떠올리는 것은 종족의 집단이 관습과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방식이 가능할 때라고 본다면, 전설 따라 이야기에서 기록상 이집트 왕조 시작의 기록으로 보아 기원전 3천200여 년 경으로 어림잡을 수 있을 뿐이다. 또는 바빌론 3천여 년경, 중국의 3천여 년경, 인더스 문명도 마찬가지로 잡는데, 이 시대들이 정복과 투쟁의 시대였을까? 문명의 건설에서 상부상조 노력의 시대였을까?

물론 삶에 이익과 편리를 추구한다는 점을 기본으로 하면, 사냥에서 전쟁의 방식이 인종들 간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문자 이전의 설화는 전쟁의 설화라는 점이다. 그 흐름의 절단면은 전쟁이 전부였을까? 들뢰즈는 흐름은 단절의 장애를 우회하기도 하고 밑으로 흐르기도 하고 산과 벽을 넘기도 한다고 했다. 왜 이른 리좀의 흐름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절단의 단면으로 문명의 지배로 역사가 쓰였을까? 지금도 자본제국의 이야기를 떠들고 있음에서, 값싼 노동력의 인민들은 세계를 흐르고 있다. 자본이 흐르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산업사회 이후로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전쟁이라는 말을 끄집어내면서 어느 사회집단이 부를 획득하고 지배권을 누릴 방편으로 용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세기 전 1차 대전에서 유럽 국가 간의 부의 경쟁에서 식민지 쟁탈전이었다고들 한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로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십자군 전쟁 이후로, 다시 한번 교회와 왕권들이 자기들의 기반을 다지려는 방편이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1차 대전에서도 교회가 전쟁을 막기보다 부추겼다고 한다. 이런 근거로서 중국에게 전쟁을 걸게 하는 것은, 선교사의 박해를 핑계로 교회 권세의 확장에 국가권력을 끌어들인 것이라고들 한다.

‘어떻게 종교가 인민이 죽어 나가는데, 권력들의 전쟁에 동의하면서까지 교권의 권세를 누리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던가’에 대한 대답으로, – 그 이야기를 하는 자는 크리스트교든 유대교든, 이슬람교든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는 방편으로 전쟁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도 엄창난 부를 누리고 있으며, 그때에도 이름하여 ‘성전(聖殿)이라는 교회’의 부를 지키자는 암묵적 동의 아래 전쟁을 수행하였고, 교회의 재산은 인민에게 나누고 전쟁을 반대하자는 반대파를 제거할 때는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반(反)애국으로 몰았고, 종교 자체에서는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박해하였다는 것이다. 이 혼란한 세상을 조장하면서 이합집산으로 교회 전체의 총괄하는 부를 늘여갔다는 것이다.

13세기에 프란체스코파들이 말하듯이, 교회가 가난한 자의 천국을 말로 하기보다 교회 재산을 인민에게 환원하면 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말로만 가난을 구제하고 전쟁 없는 평화를 이야기 해봤자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14세기에 파리의 프란체스코파 학자들이 도미니크파 학자들에 대해 비판하다가 당했지만, 18세기에 아나키스트들이 말했고, 20세기 초에 프랑스 공산당이 독일과 전쟁을 반대하면서 주장했던 것이다. 파괴는 다음 건설에서 어느 한쪽으로 부 또는 자본을 몰아주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런 방식이 산업화 이래로 불평등은 점점 심화되어 2세기 전의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차이보다 21세기 차이를 엄청나다고 한다.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니아 전쟁과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에서, 어디에서 누가 재화의 집중화와 자본의 재영토화를 실행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자본제국으로서 미국이 몰락하는 중이고, 다극화의 세계를 여는 중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전쟁을 부추겼던 종교와 국가는 주구로서 하수인을 키워왔고 또한 보수화라는 이름으로 존속되게 만들었다. 이 점에서 권세와 권력은 여전히 탐만치에 빠져있다. 어쩌면 탐만치를 벗어나기 위해 주구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은 저항과 항거가 공염불이 될지도 모른다. 주구가 아니라 근원을 폭파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근원 폭파의 노력은 있어왔다. 프랑스의 샤르트르학파, 프란체스코학승들, 아나키스트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이어지면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토마다 다 같은 것이 아니고, 살아온 관습과 습관은 전혀 달리 살아가는 방식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 당연을 넘어서는 것은 인식의 차이라기보다 교육이다. 교육 자연은 자기 방식으로 흐른다는 알게 하는 것이다. 윤구병 말대로 어린 시절에는 토지 위에서의 교육이 필요하다. 윤구병의 “특별기고(2017)”는 참조할 수 있다.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흐르면서 줄기를 창발하는 것이다. 탈주로를 찾고 있다. 역사 속에서 이 많은 글과 이론들을 전개해 왔음에도, 이제도 그 글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고 있다는 한계에서 흐름은 개념도 관념도 아니라 이미지이다. 이미지를 만드는 중이다.

다른 한편 아직도 천문학과 물리학이 생물학과 심리학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이 있다. 물리학처럼 중심은 하나라고 쳐봐도 1초에 퍼져나간 구(공)위에 무수히 많은 점은 다양하다. 다양한 점들만큼이나 생명체들이 있다. 각 생명은 자연 자체의 여러 방향 중의 하나이다, 그 하나 중에서 다른 하나에 쿼크니, 끈이니 초끈이니 하는 이야기를 붙인다. 그 끈이든 초끈이든 1초 만에 우주가 생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지구상의 생명체에 관하여 말하자면 흐름의 과정이 삶인데, 그만큼 많은 시간을 흘러가야 현 생명체의 삶이다. 그 흐름이 언제 시작했으며 언제쯤 끝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은 이미 혁명을 포기한 자이다. 들뢰즈는 혁명이 이미지라 한다. 마치 한 사람의 삶이 마감할 때 그 사람의 이미지가 있듯이, 혁명은 다른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한 시대를 마감할 때 이미지가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즉 창발하는 자는 완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 이미지의 형성은 자연의 과정일지 아무도 모르지만, 흐름의 한 줄기로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레닌을 이름으로 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마오쩌뚱의 이름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20세기 후반에는 미국의 패배가 낳은 호치민의 이름으로 베트남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미지 만드는 과정과 작동은 혁명이며, 들뢰즈에게서는 철학이다.

(3:28, 56WMA) (4:29, 56WMA)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신간안내]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 – 비판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가』(한상원 지음|에디스코|2023년 9월 15일) [한철연 소식]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 – 비판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가』(한상원 지음)

 

한상원 회원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충북대 철학과 한상원 회원이 지난 2018년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이후 또 한 권의 단독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지난 겨울 필로버스에서 진행한 『계몽의 변증법』 강독 세미나 녹취를 바탕으로 엮은 것입니다. 청중들과 소통하며 써낸 책이다보니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저자의 강연에 참석한듯 책의 내용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 창립 100주년을 맞은 2023년 올해 의미있게 출간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사상의 정수를 이해하고 『계몽의 변증법』이 지닌 오늘날의 의미를 추적해 봅시다. 2023년 한국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진단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저자의 바람대로 이 책이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대중적인 해설서로 읽히면 좋을 것 같습니다.

  • 한상원 회원은 지난 9월13일부터 15일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에서 ‘비판이론을 미래화하기’(Futuring Critical Theory)라는 제목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창립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반)정치적 정서로서 공포를 이해하기: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의 비판이론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발표 했습니다. 참고로 이와 관련한 기사 링크를 첨부합니다.

♦ ‘오징어게임’의 역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묻다 – 비판이론 100주년 학술대회 참관기(한겨례, 2023-09-18)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09088.html?fbclid=IwAR1YbvcnOFjF0zGcqWk8AsuarT9KsYnmWzBu2rq1XEd2Un3GamxrA9bb1ZU

 

아래 책 소개와 목차 안내입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는 해당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아래 링크참조)

 

책소개

아도르노 정치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상원 교수가 필로버스에서 진행한 『계몽의 변증법』 강독 세미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은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의 사상가들,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 내지는 ‘비판이론’이라고 불린 지식인 그룹의 1세대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한상원 교수는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를 통해 『계몽의 변증법』이 지닌 오늘날의 의미를 추적하고, 우리 시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틀로 활용하고자 제안한다.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 고전이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사상의 정수를 담은 『계몽의 변증법』을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안내서가 될 것이다.

목차

1강 서문 & 계몽의 개념 15
책의 제목에 관하여 18 / 비판을 통한 구원 20 / 책의 발생사 23
/ 계몽의 약속과 좌절 25 / 공포와 지배 29 / 지식은 권력이다 33
/ 체계와 통일성 37 / 주술과 미메시스 40 / 우상 금지 원칙과 부정사유 43

2강 부연 설명 1: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 47
부르주아 개인의 원형 52 / 내적 자연의 억압 57 / 자기보존의 역설 61
/ 등가교환과 희생제의 66 / 오디세우스의 모험들 72 / 자연 지배와 인간의 지배 78

3강 부연 설명 2: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 83
어두운 사상가들 86 / 성숙과 자기보존 89 / 도덕적 폭력 96
/ 고삐 풀린 시장경제 100 / 계몽에 대립하는 계몽 104 / 전도된 칸트, 사드 107

4강 문화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1 113
문화산업 비판의 의미 116 / 개별자의 예속 118 / 관상학적 방법: 벤야민과 아도르노121 / 뉴미디어와 K-콘텐츠 시대의 문화산업론 128 / 위대한 예술 132

5강 문화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2 137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 140 / 욕망의 억압 145 / 웃음의 폭력 150
/ 유흥의 기능 154 / 동일성 논리의 역설 158 / 개별자의 잉여인간화 160

6강 반유대주의적 요소들: 계몽의 한계 1 167
인종주의의 변증법 171 / 자유주의의 이중성 176 / 동화된 유대인들 179
/ 대중운동으로서 반유대주의 186 / 반유대주의의 정치경제학 193
/ 혐오의 발생학: 이디오진크라지와 미메시스 196 / 억압된 것의 회귀 205

7강 반유대주의적 요소들: 계몽의 한계 2 211
허위적 투사 214 / 편집증적 주체 219 / 폭력에 대한 변명 226
/ 절반의 교양인 229 / 개인과 자유 237 / 사유의 폭력성 243

8강 스케치와 구상들 251
두 개의 세계 254 / 유물론과 금욕주의 262 / 진보의 대가 264 / 대중사회 268
/ 모순들 270 / 철학과 노동분업 274 / 인간과 동물 278

♦ 출처: 알라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4447260

♦ 책 소개 기사 – 저자 한상원의 기사

우리는 왜 타인을 혐오하고 분노하는가(교수신문, 2023.10.11)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0353&fbclid=IwAR1Zu66U9zBTbHJJuU6-hWpf_GsZitFGMswVgyW7hZCLLWdcY5jI9oA6_qk

파국·재앙의 위기…‘비판’이 변화 이끈다(교수신문, 2023.10.09)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0352&fbclid=IwAR0dV0TjMrkszywkkJMS92J_uvyEzdQjZePAPBYxOVkLNlvj9GMGTZ1ADWw

출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4447260

 


저자 한상원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에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 개념 연구로 석사 학위를,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아도르노의 정치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아우구스티누스, 맑스, 벤야민. 역사철학과 세속화에 관한 성찰』이 있으며, 역서로 『공동체의 이론들』(공역),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역사와 자유의식: 헤겔과 맑스의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 『근대 사회정치철학의 테제들』, 『아도르노와의 만남』, 『왜 지금 다시 마르크스인가』, 『팬데믹 이후의 시민권을 상상하다』 등 여러 책을 공저했다. 현대사회 · 정치철학의 여러 주제들을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 충북대학교 철학과에 재직 중이다. 

최근작 :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동아시아 마르크스주의>,<동아시아 자본주의> 등 총 13종

[신간안내] 『일상이 철학이다』(이종철 지음|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2023년 9월 30일) [한철연 소식]

『일상이 철학이다』(이종철 지음)

 

이종철 회원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2021년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란 부제로 『철학과 비판』을 출간하여 철학계에서 ‘에세이 철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분야를 개척하였습니다. [2021년 웹진에 실린 •연효숙 회원의 서평, •저자의 답글] 2023년에 출간된 이종철의 『일상이 철학이다』 (삶의 지평을 넓히는 에세이철학)에는 ‘에세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의 철학화, 철학의 일상화를 주창해 오는 저자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저자의 에세이철학론에 따르면 에세이철학은 일상어의 철학이며, 공유와 토론의 철학입니다. 일상의 나의 생각과 관점이 SNS에서 속풀이 단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쓰는 자와 읽는 자가 서로 철학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자 장이 됩니다. 이 책을 통해 에세이철학의 부활을 주창하는 저자와 깊게 소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 전공자들은 물론 관심있는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아래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소개와 목차를 안내합니다. (아래 링크참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오늘 우리는 누구나 글을 쓰고, 읽는 시대를 살아간다. “책을 안 읽는다!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다”는 말이 떠돈 지 이미 오래고,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서, 출판사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시대이지만, ‘글쓰기’와 ‘글 읽기’는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는 인간의 활동 분야이기도 하다. 하여, 오늘날은 ‘책 읽는 사람보다 책 쓰(고자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대’가 되었다.

전통적인 글쓰기-책 쓰기 문법에 따르면 오늘날을 ‘글쓰기가 왕성하게 성장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각종 SNS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글을 읽고, 쓴다. 책을 종이책에, 신문을 종이신문에만 한정하지 않으면, 종이책 독서나 TV 시청이 줄어든 대신 넷플릭스나 유튜브 시청이 늘어난 것까지를 아우르면, ‘정보 습득으로서의 독서’는 지극히 일상적이며, 지속적이며, 현대인의 삶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행위이다. 오늘날이야말로 읽고 쓰기의 르네상스, 진정한 혁명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책 읽기’와 ‘글쓰기’의 개념과 범위가 달라진 만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의 범주와 용도도 크게 달라져야 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실제로 오늘날 인문학은 대학 울타리를 벗어나 삶의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문-사-철’을 포함한 정통인문학에서부터 실용적인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분야를 넘나들고 확장되고 심화되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을 통하여 정보가 무제한, 무가격으로 공급되면서,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하고, 쓰고, 배포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교육 수준의 향상되면서, 좋은 글, 의미 있는 글쓰기에 대한 욕구와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에세이철학’은 이러한 시대 상황과 요구에 따른 새로운, 어쩌면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철학하기를 주창하여, 철학을 일상화하고, 나아가 일상 즉 생활세계에서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 만나는 사람, 겪는 사건, 떠오르는 생각 하나하나를 철학적 수준에서 재음미하고, 그것을 글로써 정리(집필)하는 것을 말한다. 철학의 일상화가 필요한 이유는 생활과 괴리된 철학-학문은 의미 없으며,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서 ‘생각 없는 삶’의 위험천만함을 설파했듯이, 철학하지 않는 삶이란 위험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의 활동이 철학 활동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인정할 때,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을 헤매는 현대인에게 철학적인 삶, 삶의 철학화가 의미 있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강단에서 철학을 교육해 온 저자가, 은퇴 이후 ‘에세이 철학하기’의 관점에서 그동안 주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발표해 온 글들을 한데 모으고, 단행본으로 편집한 것이다. 에세이철학에 ‘대하여’가 아니라, 실천적 글쓰기로써 에세이철학‘을’ 실현하고 실행하는 글쓰기의 성과를 모은 것이다. ‘단행본’의 의미와 ‘편집’의 의미가 더해짐으로써, 에세이철학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책이 되고 있다.

1부는 ‘일상과 철학’을 주제로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생활세계를 대상으로 철학하고 생활에 즉한 철학을 함으로써,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하자!”는 에세이철학의 본령을 보여준다. 철학자로서의 저자에게 다가오는 일상의 사건들의 의미를 일상에 내맡겨 버리지 않고, 그 속에 깃든 철학적 의미를 길어올리는 글들이다. 특히 저자가 새롭게 직면하는, 그리고 우리 사회가 급작스럽게 맞이하는 고령화 시대에, 에세이철학의 의미와 가치를 다각도로 논설한다.

2부는 ‘영화’를 철학적 사유 대상으로 삼아 철학(사유)을 전개한다. 영화뿐 아니라 유튜브나 넷플릭스 드라마 등이 그 안에 다양한 철학적 토론과 논의의 소재를 담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좋은 영화는 그 자체로 한 권의 책 이상의 것이 되고, 한 권의 책은 하나의 도서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에세이철학에서는 중요한 비유로 삼을 수 있다.

3부는 한국 사회와 정치 문제를 철학적으로 논구한다. 정치와 사회의 일들이란 곧 일상 이상의, 이외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에세이철학은 정치, 사회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은 많은 에너지 소모를 가져오는 일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주체적인 삶을 누리는 인간이라면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혜롭게,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정치사회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기술을 엿볼 수 있다.

4부는 도구와 기술에 관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직접적으로 에세이철학의 발상이 주로 소셜미디어에서의 글쓰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중요한 논점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 AI에 기반한 디지털 혁명, 챗GPT 등으로 가속화하는 세계의 ‘탈인간중심주의’ 등이 인간의 정체성에 끼치는 영향, 그 속에서 인간이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인간다움의 실체와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5부는 ‘한글과 역사’라는 주제로, 저자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부문, 즉 쉬운 우리말로 철학하기라는 관점에서는 에세이철학의 핵심 주제가 되는 한글과 우리나라를 중심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새로운 세기의 세계문명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이동한다고 할 때, 이 지역의 국가 특히 우리나라가 어떻게 자기 자리를 잃지 않고,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가 또 어떻게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자주성과 공존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지, 에세이철학의 심화가 이루어진다.

6부는 저자의 전공 영역으로서, 평생에 걸쳐 체험해 온 대학과 교육 문제점을 일반 대중과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풀어나가고 있다. 오늘날 모든 한국인의 관심사이자 한국사회 문제의 출발점이며, 내일의 한국사회의 희망의 출발점이기도 한 한국 대학의 현실은 개혁이 필요한 상황임을 직격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 외에도 앞으로의 모든 글쓰기 활동을 ‘에세이철학’의 관점에서 전개함으로서 철학의 일상화, 일상의 철학화라고 하는 비전과 과제에 천착해 가고자 한다. 그것이 현대 사회, 시민들에게 중요한 동기부여와 가치창발의 계기가 되리라 믿으며.

목차

제1부_ 일상과 철학

일상과 도(道) 자율과 강제

실존적 아포리아(aporia) 운수 좋은 날

한국인의 내로남불 위험한 상상

고령화와 한국 사회의 대응 고령화 시대의 삶의 기술―1

고령화 시대의 삶의 기술―2 내가 바라는 엉뚱한 소망들!

습관 페이스북과 라이프니츠

제2부_ 영화와 비평

<아제 아제 바라아제>와 깨달음 <가을비 우산 속에>와 <안티고네>의 갈등 해법

<거래>(Arbitrage)와 빼어남의 악덕 <1911, 신해혁명>과 북한 체제

<십계>와 기독교의 본질 <필라델피아>와 이반의 사랑―1

<필라델피아>와 이반의 사랑―2 통쾌하지만 씁쓸한 영화 <암살>

<아임 얼라이브>와 좀비들 세상 <페르시아 수업>과 우연, 언어, 이성, 인간, 기억

제3부_ 사회와 정치

5월에 부침 민란과 직접민주주의의 전통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방정책 미국 사회의 흑백 차별과 기독교 근본주의

제4부_ 도구와 기술

글과 글쓰기 SNS와 공간의 소멸

소확행과 블루투스 음성 인식 기술과 글쓰기

기술과 인간 AI 시대에서의 인간의 고유성

제5부_ 역사와 문자, 그리고 한글

고대사 연구와 문헌 순혈주의와 동종교배

역사의 변곡점과 역사적 주체의 대응 역사 청산

불행했지만 자랑스러운 한국의 최근세사 반사대주의

사무라이와 일본 우익의 전통 한국과 일본, 역사

중국과 소국 콤플렉스 문자와 기록

문체와 사유 한글과 성경

한글날을 생각하며―1 한글날을 생각하며―2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 별의 이미지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 운초 김부용을 그리며

제6부_ 한국의 대학과 교육

공자와 공부 질문이 왜 중요한가?

언어와 학문 주권 의학 교육과 인문학

한국의 인문학 교육과 유학

♦ 출처: 알라딘: 일상이 철학이다 (aladin.co.kr)

♦ 서평: 박찬운의 아브라카다브라: 신간 “일상이 철학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회를 만드는 길-  https://chanpark.tistory.com/entry/%EC%9D%BC%EC%83%81%EC%9D%B4-%EC%B2%A0%ED%95%99%EC%9D%B4%EB%8B%A4?fbclid=IwAR1Cx5CikzMMVreSgPq18Bfo1aPLF2ECddsfjrATnqNUTgLXoaiiF-XIr3w

♦ 이종철의 브런치 에세이 모음: https://brunch.co.kr/@35a0b96c4e334fd

출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start=short&ItemId=324954590&fbclid=IwAR27Hs6U8WY7gRFWQ-40Zpt3LRdFGWVIlhWI4AEywiTZpE9jqDRARTajRMI


저자 이종철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원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에서 강의했고, 몽골 후레 정보통신대학 한국어과 교수와 한국학연구소장을 역임하고, 한남대 초빙교수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현재 연세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브레이크 뉴스’와 ‘내외신문’ 컬럼리스트와 NGO 환경단체인 ‘푸른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고, 네이버 프레미엄 서비스에 정기적으로 기고를 하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 ‘에세이철학’을 철학의 독립 장르로 만들기 위한 글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저서로 『철학과 비판-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가 있고, 공저로 『철학자의 서재』, 『삐뚤빼뚤 철학하기』, 『우리와 헤겔철학』, 『문명의 위기를 넘어』 등이 있으며, J. 이뽈리뜨의 『헤겔의 정신현상학』(1/공역, 2), A. 아인슈타인의 『나의 노년의 기록들』, S. 홀게이트의 『정신현상학 입문』, G. 루카치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Ⅰ,Ⅱ』(2, 3, 4/공역), 『무엇이 법을 만드는가』(공역) 외 다수의 책들을 옮겼다. 접기

최근작 : <일상이 철학이다>,<철학과 비판> … 총 12종

호퍼와 정신분석 3 – ‘망사르 지붕’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3 – ‘망사르 지붕’

 

1)

앞에서 호퍼의 그림에 나오는 다리를 살펴보았다. 호퍼의 다리는 결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호퍼에게 이 다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다리는 어디론가 건너가는 것이며,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죽음과 같은 강물을 건너가야 한다.

 

그런데 이 다리는 어디로 건너가는 것일까? 그림에서 호퍼가 다리를 건너 이르는 곳은 다름 아닌 집이다. 1909년의 ‘왕궁 다리’나, 1913년 ‘퀸스보로우 다리’에서 보이듯이 그 집은 주로 망사르 지붕을 한 집으로 나타난다.

 

2)

망사르 지붕이란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지붕이다. 이 망사르 지붕은 19세기 말 부활하여, 제국주의 양식의 일부가 되어, 이 시기 상류층의 저택이나 호텔에서 차용되었다. 아마도 미국에서도 시골 농장주나 도시 부르주아의 저택이 주로 이런 망사르 지붕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망사르 주택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고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한 두 창문을 제외하고는 굳게 닫혀 있어서, 매우 침울한 모습을 하고 있다. 1909년 ‘왕궁 다리’ 그림이 그려질 시기만 해도, 이 왕궁으로 가는 다리는 안정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1913년 ‘퀸스보로우 다리’는 이 주택으로 접근하지만 그 힘은 너무 과도하여 이미 지나친다.

 

20년대 이르면 이제 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냉혹하게 차단되고 마니, 이 시기 이후 집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도 고립되면서 마치 꿈 속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환상적인 모습을 취하게 된다.  1925년 그려진 ‘철로 가의 집’을 보자.

 

이 그림에서 화면의 하단을 가로지르며 녹슨 철로와 둔덕이 지나가면서 그 너머에 있는 집으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 너머 망사르 지붕을 주택은 시각적으로 약간 왜곡되어 있다. 전체의 왼편보다 오른쪽 편이 약간 확장, 돌출하여 있다. 시선이 오른쪽 위쪽에 놓여 있는 듯한데, 반면 햇빛이 그림의 왼쪽으로 들어오면서, 시선의 방향과 충돌한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고, 이층의 햇빛을 받는 쪽의 창문 하나가 반쯤 열려 있다. 전체적으로 녹슨 철로의 붉은 색과 대조되는 망사르 지붕의 짙은 녹색은 황량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집은 아마 현실 속에 실제로 있는 집 같지 않다. 주택의 이런 왜곡된 모습은 어쩌면 환상 속에 있는 듯하다.

 

3)

1927년 그려진 ‘도시’라는 그림에서 화면의 오른쪽 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망사르 지붕을 한 호텔이다. 이 호텔은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림의 왼편 아래쪽에는 텅 빈 광장이 있고 행인의 모습은 지극히 축소되어 점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왼편 위쪽에는 1950년대 세워졌을 법한 빌딩, 수평적인 빌딩과 수직적인 빌딩이 교차한다. 이런 빌딩은 오른쪽의 호텔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보인다.

 

빌딩이나 망사르 호텔의 어느 창문도 검고 닫혀 있어 그 안을 볼 수 없다. 다만 호텔의 2층 시선이 가는 바로 앞의 창문은 전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밝은 색으로 차양이 내려져 있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그림의 전체 색조는 대체로 우중충하게 탈색된 듯하여 전체적으로 황량한 느낌을 준다.

 

호퍼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망사르 주택(저택이나 호텔)은 다리와 마찬가지로 형태상 아름다움의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호퍼가 여러 번 반복하여 이런 집을 그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집은 아마도 사회적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망사르 지붕의 집은 아마도 미국 시골의 농장주나 도시의 중소 부르주아의 저택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 미국이 급속하게 자본주의화하면서, 과거 농장주와 중소 부르주아는 몰락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니, 호퍼에게 아마도 향수를 불러일으켰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퍼 그림 전체에서 목가적인 향수가 주제로 된 적은 없으니, 이런 사회적 관점도 적절한 해석이 되지는 못한다.

 

이 집이 호퍼에게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호퍼의 그림에 접근하는 통로를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단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의 힌트가 주어져 있다. 그것은 히치코의 영화 사이코이다.

 

그의 영화에도 망사르 지붕을 한 주택이 출현한다. 언덕 위에 고립적으로 솟아 있는데, 이 집은 아래쪽 모텔의 주인인 남자가 살고 있는 집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 집의 비밀을 폭로한다. 남자는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유골을 지하실에 보존한다. 그리고 그 일정한 때가 되면 스스로 자기 어머니로 변신한다. 그 때란 곧 그가 외부의 다른 여자에게 욕망을 느낄 때이다. 그는 자신이 욕망을 느낀 여자를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해한다.

 

영화에서 히치코크는 실재계에 사로잡혀 있는 주인공 남자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망사르 지붕을 한 고립된 주택을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망사르 지붕의 집이 호퍼를 사로잡았던 이유도 바로 이런 실재에의 고착이 아니었을까?

 

3)

집이 어머니를 상징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집은 고향이며, 어머니이고 유년의 시절이고 자궁이다. 그렇다면 호퍼도 이런 망사르 지붕을 한 부르주아 또는 농장주의 저택에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호퍼의 부모는 중산층이고,  독실한 청교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실제 호퍼가 살았던 집은 그의 그림 ‘퓨리턴’에 나오는 것과 같은 집이다. 단순한 맞배 지붕으로 이루어지고 백색의 나무 판넬로 지어진 집이다. 그런데도 호퍼가 이렇게 망사르 지붕을 한 집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망사르 집의 특징은 아무래도 지붕 밑 다락방에 있을 것이다. 약간 상상해 보자.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집은 단층 기와집이었다. 부엌의 위쪽에는 다락이 있었다. 안방에서 다락으로 들어가는 구조였지만, 나는 학교 시절 자주 책을 들고 혼자 다락방에 올라 책을 읽었다. 주로 소설책이었다.

 

그렇게 다락방에 머무르는 시간은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고요함과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런 기억을 생각해 보면, 망사르 지붕을 한 집에 호퍼가 심리적으로 꽂힌 이유도 짐작되지 않을까?

 

망사르 지붕을 한 고립된 집은 호퍼에게는 곧 실재이다. 그는 이런 실재계의 흔적을 전반적으로 황량하게 보이는 집에 암시했다. 그것은 유독 눈길을 끌도록 하는 붉은 색 굴뚝이나 밝은 색깔의 차양이다. 호퍼는 때로는 과잉적으로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차단되어 다가가지 못한다. 이 집은 끊임없이 호퍼를 매혹하며, 차단된 저 너머에서 그에게 손짓한다.  호퍼의 의식이 접근하지만 끝내 접근하지 못하는 그것은 즉 실재이다.


» 다음 글: 호퍼와 정신분석 4 – ‘등대’

« 지난 글: 호퍼와 정신분석 2 –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