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8월 1일부터 매주 수요일 ‘그리스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에서 열리고 있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상설 강좌”의 강의록입니다. 이 강의록은 매주 열리는 강좌 진행에 맞추어 본 웹진에 정기적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원고를 게재해 주신 이정호 선생님과 정암학당에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강 사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명예교수)
대 상 : 학당 회원, 방송대 동문, 일반 시민
텍스트 : 플라톤의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플라톤의 <국가> 강해(6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0)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철학자의 자질(제6권 484a-487a)

* 제5권에서 소크라테스는 말로 세운 나라가 실제로 행위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 나라의 통치자가 철학자일 경우 최대한 그에 가깝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대화 참가자들 모두는 철학자가 뭐길래 소크라테스가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의아해한다. 이에 따라 과연 철학자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철학자란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그 진리가 다름 아닌 언제나 한결같이 존재하는 형상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 형상이 일상인들의 믿음과 어떻게 다른지도 함께 언급되면서 이른바 플라톤의 형상론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제6권에 들어와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철학자가 어떻게 나라의 수호자이자 통치자로서도 적합한지를 드러내기 위해 철학자의 자질에 관한 논의를 이어간다. 철학자의 자질이 얼마나 통치자의 자질로도 유효한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제6권 484a-487a]

*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해보려면 논의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곧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질을 주제로 다음의 논의를 이어가려 한다. 그런데 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수호자φύλαξ이자 지도자ἡγεμονεύς로 지혜로운 사람을 내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면 그 사람은 무엇보다 ‘이 나라의 법νόμος과 수행할 일들ἐπιτηδεύματα을 수호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갖추어야 할 그 능력의 기본 조건이 다름 아닌 ‘좋은 시력을 갖춘’ὀξὺ ὁρῶντα 감찰τηρεῖν 능력에 있음을 밝힌 후 그 감찰 능력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484a-b)

* 수호자는 무릇 진실로 있는 것 각각에 대한 앎γνῶσις을 가지고 영혼ψυχῇ 안에 뚜렷한 본 παράδειγμα으로서 가장 참된 것τὸ ἀληθέστατον을 바라보고ἀποβλέποντες 항상 거기에 조회하며κἀκεῖσε ἀεὶ ἀναφέροντές 가능한 한 정확하게 관찰할 수’καὶ θεώμενοι ὡς οἷόν τε ἀκριβέστατα있어야 한다.(484c) 그렇게 해서 아름다운καλός 것들과 정의로운δίκαιος 것들, 좋은ἀγαθός 것들에 관한 이 땅에서의 법규τά νόμιμα를 설정τίθεσθαί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설정하고 세워진 것은 수호해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화가γραφεύς들이나 눈이 먼 사람들τι τυφλῶν은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게다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ἐμπειρία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 덕ἀρετή의 다른 어떤 부분에서도 뒤처지지 않는 사람들이다.(484d)

*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능력을 위와 같이 언급한 후에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연적 성향φύσις 즉 자질을 갖추었기에 그러한 능력들을 두루 다 가질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485a)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연적 성향은 아래와 같다.

1) 그들은 항상 있으며ἀεὶ οὔσης 생성γένεσις과 소멸φθορά에 의해 방황하지 않는μὴ πλανωμένης 저 존재οὐσία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배움μαθήματός과 ‘항상 사랑에 빠져 있다’ἀεὶ ἐρῶσιν.(485b)

2) 그들은 그 모두와 사랑에 빠져 있어서, 큰 부분이든 작은 부분이든 더 가치 있는 부분이든 덜 가치 있는 부분이든, 어떤 부분이든 포기하지 않는다οὔτε ἀφίενται.

3) 그들은 거짓 없음ἀψεύδεια, 그리고 어떤 식으로도 거짓τὸ ψεῦδος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며, 진리ἀλήθεια를 좋아한다στέργειν. 자연적 성향상 누군가에 대한 정욕을 가진ἐρωτικός 사람은 그 애인과 친족이고syggenes 그에게 속한oikeios 모든 것πᾶν을 반기는 것이 전적으로 필연적인 한, 진리보다 지혜σοφίᾳ와 더 가까운 것은 없다.(485c) 그러므로 진정으로 ‘배움을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사람은 어려서부터 곧장 모든 진리를 가능한 한 최대로 추구할 수밖에 없다.

4) 그들은 배울 거리들과 그러한 모든 것을 향해서 욕구의 물길이 뚫린 사람들로서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ἡδονή들을 추구하며 육체σῶμα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은 저버린다.(485d)

5) 그들은 분별σώφρων이 있어서 결코 ‘돈을 사랑하는’φιλοχρήματος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돈과 많은 소비δαπάνη에 몰두σπουδάζειν하지 않는다.(485e)

6)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전체 모두를 항상 추구할ἐπορέξεσθαι 영혼에게 좀스러움 σμικρολογία이란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호방함μεγαλοπρέπεια과 모든 시간χρόνος과 모든 존재οὐσία에 대해 관조θεωρία함을 갖춘 정신διανοίᾳ을 지닌 사람에게 인간적인 삶은 뭔가 대단한μέγας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θάνατος도 무서운δεῖνος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486a) 비겁하고δειλός 자유인답지 못한ἀνελευθερίος 자연적 성향은 참된 지혜·사랑과 상관이 없다. 이에 더해 그들은 규율이 있고(품행이 단정하고)κόσμιος 허풍ἀλαζών을 떨지도 않는 사람으로서 계약을 파기하지δυσσύμβολος 않는 사람들이다.(486b)

7) 그들은 영혼이 정의롭고 온순하며ἥμερος 쉽게 배우고εὐμαθὴς 기억력μνημονικός이 좋아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잘 보존σῴζειν하는 사람이다.(486c-d)

8) 그들은 균형ἐμμετρία과 동족인συγγενής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므로 본래적 성향τὸ αὐτοφυής상 균형 잡히고 우아한εὔχαρις 정신διάνοια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정신이 그들을 있는 것 각각의 형상ἰδέα으로 이끌어 준다.(486d)

9) 있는ὄντος 것에 충분하게ἱκανῶς, 그리고 완전하게 τελέως 참여할μεταλήψεσθαι 영혼에게 이 각각의 것들은 필수적이며ἀναγκαίη 상호 연관된ἑπόμενα 것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연적 성향상 기억력이 좋고νήμων 쉽게 배우며εὐμαθής 호방하고μεγαλοπρεπής 우아하며εὔχαρις 진리ἀληθεία, 정의δικαιοσύνη, 용기ἀνδρεία, 절제σωφροσύνη와 친구φίλος이자 친족적인συγγενής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교육παιδείᾳ과 연륜ἡλικία에서 원숙해지면τελειωθεῖσι 바로 그들에게만 나라를 맡겨야 한다ἐπιτρέπειν.(486e-48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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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4a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해보려면 논의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국가> 논의의 근본 출발점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청(362-367)에 따라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플라톤은 이곳 말고도 이점을 <국가> 중간중간에 여러 번 환기하고 있는데(420b-c, 427d, 434d-435a, 445a-b, 427b, 545d, 588b) 이것에 주목하여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다루고자 하는 근본 관심사가 정치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행복한 삶과 관련한 윤리학 내지 도덕철학의 문제라고 주장하고 그에 기초하여 dikaiosynē도 ‘정의’justice보다도 ‘올바름’righteousness으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 강해 서두에서 <국가>의 원제 politeia의 의미를 설명할 때 언급했던 것처럼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삶이란 그 자체로 시민적 삶, 폴리스적 삶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구분 자체가 특별히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철학과 윤리학을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배타적 이기주의를 토대로 개인의 자의식이 확립된 근대 이후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오도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 아테이만토스 형제의 요청에 응하면서 곧바로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전제 없이 개인을 국가로 확장하는 것도 플라톤 스스로 이미 politeia 즉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개인의 삶과 시민적 삶의 방식을 별개로 여기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플라톤이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개인의 영혼에 대해서도 ‘정의롭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 특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성격을 보다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좀 더 타당성을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본 강해에서도 수시로 강조했듯이 20세기 일부 비평가들의 견해들처럼 플라톤이 개인의 삶을 국가주의에 복속시켜 그들의 희생을 정당화하거나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국가>에서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통치 목표는 그 대상인 시민들 모두의 행복이며, 개인들 또한 어떤 계층에 속하건 시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본성에 따른 직책을 기꺼이 수행하는 방식으로 나랏일에 참여하는 것이 나라의 이익은 물론 자신의 이익과 행복에도 부합하는 것임을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절제의 덕을 통해 이미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시민들 각각의 행복을 담보하는 통치의 방식으로 공동체로서 국가의 이익과 안전을 구현하는 나라이다.

* 484c ‘수호자는 진실로 있는 것 각각에 대한 앎을 가지고 영혼 안에 뚜렷한 본으로서 가장 참된 것을 바라보고 항상 거기에 조회하며 가능한 한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구절은 우주를 제작하면서 오직 본으로서 원상만을 바라보고 그것에 기초해서 우주를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려 하는 <티마이오스>의 데미우르고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티마이오스>는 <국가>의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고 운영하는 통치자 즉 철인 통치자의 이상적 모델인 것이다. 이곳에서 본(paradeigma)은 <티마이오스>에서도 그대로 사용되면서 내용적으로 공히 이데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apoblepontes) 관찰하고(theomenoi) 조회한다(anapherontes)는 말은 이데아에 대한 앎 즉 장차 다루어질 변증술의 기초가 기본적으로 철학적 직관 내지 관조(theoria)에 기초해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철학자 왕을 다루는 제6권 500c, 500e-501c에서 여기서 언급된 본에 대한 관조가 다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아담(J. Adam)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데아에 대한 철학자의 지식이 단순히 인식적 가치만이 아니라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정치적 앎으로서도 가치가 있음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다.(J. Adam 해당 노트 참고)

* 484d ‘이 땅에서의 법규를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설정하고 세워진 것은 수호해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 철학자가 이상적인 나라에서 태어났을 경우 그 나라는 이미 형상에 기초하여 세워진 나라이므로 그는 단지 이미 확립된 법규를 수호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철학자들은 현실 국가의 개선을 위해 바람직한 법률을 세우고 관철하려는 입법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J. Adam 해당 노트 참고)

* 484d 화가(grapheus)들이나 눈이 먼 사람들은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 화가들에 대한 비판을 예술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시가 교육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에게 음악과 조각 등 조화미와 관련한 예술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이곳과 10권에서 화가에 대한 비판은 화가가 형상의 모상으로서 현실의 대상을 또다시 모상한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형상적 앎의 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 484d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empeiria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 : ‘경험’의 그리스 원어 empeiria는 영어로 ‘experience’, acquaintace with’, ‘practice, without knowledge of principles’의 뜻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도 그 말을 사전적 의미와 크게 벗어나지 않게 다음 세 가지 의미로 쓰고 있다. 첫째는 넓은 의미에서 ‘~을 접해 본 적이 있음’이라는 경험 일반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원리적 추론과 지식이 아닌 ‘감각적 경험이나 지각’으로 좁혀 사용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익숙함’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467d, 529e, 601c)가 있다. <국가>에서 첫째의 경우는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584e)이라는 표현에서처럼, 지식이나 감각과 상관없이 ‘접해 보았음’ 일반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로서, 위의 용례 외에 ‘앎이나 이득에서 오는 즐거움에 대한 경험’(582a), ‘문답하는 것에 대한 무경험’(apeiria)(487b), ‘진리에 대한 무체험’(apeiros)(519b), ‘교과들을 경험한 자’(533a), ‘사려분별과 덕에 대한 경험’(585e) 등의 용례가 있다. 그리고 셋째의 경우는 ‘경험과 연령에 있어서(467d), ‘기하학에 익숙한 사람’(tis emperos)(529e), ‘사용함에 있어 가장 경험이 많은 자’(601c) 등의 용례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는 경험을 ‘감각적 경험’으로 한정하여 사용하는 용례로서 대부분 원리적 추론, 실재나 앎과 분명하게 구분하거나 대비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험이 아닌 지식을 이용함으로써’(409c), ‘권투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422c), ‘전투 관련 경험과 관찰에 의해서’(467a), ‘이들이 (앎에서 뿐만 아니라) 경험에 있어서도 남들에 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539e) 등의 용례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484d)라는 이곳의 표현 또한 이 둘째 용례에 해당한다. 이 경우 ‘경험’은 원리적 사고로서 ‘사려분별(pronesis) 또는 이성적 추론’(logos)(582a)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것은 설사 그 경험이 수없이 축적되더라도 진정한 앎에 다다를 수 없는, 지식의 단계상 본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것이다. 그러나 유념할 것은 비록 경험이 진정한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낮은 수준의 것일지라도 결코 그것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앞서 앎보다 믿음이 지식의 단계에서 저급한 수준의 것이지만 믿음이 실제 생활 영역에서 기술적 훈련을 통해 학술의 수준까지 고양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기 고유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라를 수호하는 수호자들에게 전쟁 전체에 대한 정책적 결정과 전략에 대한 앎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투 역량의 향상을 위한 지휘 및 전투 등 전쟁 실무 능력의 향상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 실무 역량의 향상은 실제 전투 경험을 포함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끊임없는 반복적 관찰과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영혼을 통해 획득되는 지성적 앎의 능력과 더불어 반복적인 연습과 체험을 통해 몸에 밸 정도로 숙달된 신체 능력이자 실천 기술인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수호자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체육을 통한 끊임없는 신체 단련은 물론 경험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도록 35세부터 50세까지 15년 동안 전쟁 지휘 및 관직의 수행 등 실무 경험을 쌓게 하고 그것을 마친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 중 가장 훌륭한 자들을 통치자로 뽑아 최고의 철학 교육으로서 변증술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 이 점만 고려하더라도 지성적 앎은 물론이고 통치와 관련한 어떠한 경험도 쌓지 않은 자가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혀 기득권층을 등에 업고 졸지에 최고 통치자가 되어 분별없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현금의 우리나라 현실은 실로 통탄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근세 합리론과 경험론(empiricism)을 이야기할 때 ‘경험’의 의미도 이 두 번째 용례에 기초해 있다. 그래서 경험론이 말하는 지식은 경험적 감각자료들의 귀납에 의해 개념적 일반지의 지위를 갖는다. 그렇지만 귀납지가 귀납적 비약(inductive leap)을 전제로 성립하는 한, 플라톤이 이미 포착하고 있듯이 그것은 보편성을 가질 수 없는 개연지일 뿐이다. 플라톤에게 보편지는 형상적 앎 또는 그에 준한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으로부터 연역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이 형상적 앎과 감각적 경험을 통한 믿음 모두 일정 수준에서 모두 각기 인간 삶의 보전에 기여하는 한, 플라톤에게 있어 그 각각은 비록 인식론적 지위는 다를지라도 모두 각각의 영역에서 앎으로서 고유성과 의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이 형상적 앎을 논리적 추론 차원을 넘어선 소수 철학자들의 직관지로 파악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왜 칸트가 근대 과학지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 과학지를 ‘인간 나름의 해석’ 즉 지각에 대한 오성의 구성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그리고 그에 따라 오늘날 과학적 지식이 본질적으로 왜 가설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도 함께 해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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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직위로서 수호자를 처음 언급했을 때(374d) 수호자(phylax)는 나중(414b)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taleis)로서 통치자들(hoi archontes)과 그들의 보조자들(epikouroi) 내지 협력자들(boētoi)로서 전사들(stratiōtas)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플라톤 이상 국가의 최고 지도자는 수호자에서 통치자로 좁혀졌다가 이곳에서부터 그 통치자가 다시 철인 통치자로 더욱 좁혀진다.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한 성향이나 자질도 처음 포괄적으로 제시된 이후 점차로 보다 구체적인 자질들이 추가되면서 이곳에서 철학자의 자질이 언급되고 있다. 물론 주제 상으로는 철학자가 지닌 자연적 성향이나 자질로 언급되고 있지만, 이 철학자들의 자질이 통치자의 자질로서도 적합하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것인 만큼 내용적으로는 철학자의 자질이면서도 동시에 통치자가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자질들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장차 철인 통치자를 염두에 두고 제시되고 있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은 지금까지 언급된 수호자와 통치자들의 자연적 성향과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것들이 특히 추가되었을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호자의 성향을 다룰 때(375a-376c)와 달리 지혜의 친족이자 진리로서 ‘형상’(idea)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때에도 용기와 더불어 배움과 지혜가 주요 자연적 성향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배움과 지혜에는 보조자들이 갖는 ‘올바른 믿음’(orthē doxa)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임에 비해,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철학자들의 배움은 ‘존재’(ousia)를 보여 줄 수 있는 ‘배움’이고(485b) 지혜를 사랑하는 것 또한 우아한 정신으로 참된 앎 곧 ‘형상’(idea)에 다가가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486d) 그리고 보조자들이 아닌 통치자들의 선발과 자격을 언급할 때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dogma)과 소신(doxa)이 추가적으로 강조되고 있을 뿐(412e) 이곳에서처럼 형상에로 이끌린다거나 그것을 열망했다거나 하는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요컨대 지금까지 수호자의 자연적 성향과 관련해서는 도덕과 지식이 하나라는 전제를 염두에 둘지라도 기본적으로 도덕의 고양에 크게 방점이 주어져 언급되었다면 지금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과 관련해서는 영혼의 고양을 통해 존재 내지 형상에로 다가가는 것에(486d-e) 크게 방점이 찍혀 있다.(J. Adam 497c note 참고)

* 그러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 하나하나를 음미해보기로 하자.

위 요약문 1)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수호자의 자질에 더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으로서 가장 먼저 ‘생성과 소멸에 의해 방황하지 않는 존재ousia’가 자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철인 통치의 근본 토대와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에 ‘항상 사랑에 빠져 있다’함은 철학자이자 통치자로서 존재를 향한 지향이 결코 잠정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과 열정을 수반하면서 늘 항상성을 갖고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위 요약문 2) : 철학적 지향이 그러하듯 철학 통치 또한 총체성과 전면성을 가지며 어떠한 것도 따로 차별해서 다루지 않는다. 요컨대 철인 통치자라고 한다면 특정 계층, 특정 대상, 특정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크건 작건, 가치가 더 있건 덜 있건 간에 상관없이 통치와 관련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그것들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전면적이고도 총체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그 문제 해결에 다가서며 동시에 그러한 노력을 결코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철학적 문제의식의 전면성 내지 총체성과 더불어 문제 해결에 있어 철학 통치자에게 불타협적 끈기와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위 요약문 3) : ‘어떤 식으로도 거짓(to pseudos)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며’라는 말은 플라톤이 특수한 조건에서 ‘통치자의 거짓말’이 옹호될 수 있다는 내용(414b 등)과 상충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하게 플라톤적 의미에서 ‘진리를 향한 영혼의 결여에서 나오는 무지’를 의미한다. 다만 플라톤은 엄밀한 의미의 앎을 가진 통치자가 자신이 아닌 대상의 이익을 분명하게 담보하는 전제하에서 거짓말을 허용한다. 그들은 자연적 성향상 정욕을 가진 사람이 애인을 대하듯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반기는 사람들이므로 결코 진실을 결여한 거짓과 가까이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지혜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위 요약문 4), 5) : 철학자란 배울 거리들과 그러한 모든 것을 향해서 욕구의 물길이 뚫린 사람들로서 욕구의 물길이 크게 뚫린 그만큼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 쪽으로 깊숙이 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깊숙이 가 있는 그만큼 분별력 또한 뚜렷해져 육체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이나 돈에 대한 사랑은 아예 생겨날 여지가 없고 그에 따라 감각적 향락을 위한 소비도 없다.

위 요약문 6) : 철학자의 영혼이 그러한 상태에 있는 한 그들은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전체 모두를 항상 추구하며 그에 따라 전혀 좀스럽지 않고 반대로 호방하게 모든 시간과 모든 존재를 관조하는 정신을 갖춘 사람들이다. 중국 송대 지식인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에서 노래하듯 물여아개무진야이우하선호(物與我皆無盡也而又何羨乎. 세상 만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이 하나이거늘 달리 또 무엇을 부러워하랴)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인간적인 삶이란 대단하게 여겨지지도 않고 죽음도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며 그에 따라 행위에서 비겁할 이유가 없다. 공자가 70세에 이른 사람의 경지를 일컬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고 했듯이 철학자는 자유인답게 늘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어떤 행위를 해도 지혜사랑 안에 있으므로 규율에서 벗어나지 않고 허풍도 떨지 않으며 매사에 있어 사회적 연대나 계약에 어긋남이 없다.

위 요약문 7) : 여기에서는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로서 정의로움과 온순함에 더해 우수한 학습력과 기억력이 강조되고 있다. 1)에서 6)까지 언급된 내용들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한 내용들 대부분은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 일정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우수한 학습력과 기억력은 그것들에 비해 다분히 천부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철학 통치자는 그 스스로도 이미 건국신화를 통해 황금족으로 따로 구분했듯이(415b) 자격에서부터 원천적으로 소수 엘리트로 제한될 수밖에 없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위 요약문 8), 9) :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균형과 동족이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 통치자란 위와 같은 성향들을 영혼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시켜가면서 균형 잡히고 우아한 정신으로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존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통치의 궁극적 이념으로서 형상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은 기억력이 좋고 쉽게 배우며 호방하고 우아하며 진리 정의, 용기, 절제와 친구이자 친족인 사람들이다. 위와 같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은 통치자들이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자질로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이러한 사람들을 교육과 연륜에서 원숙해지면 바로 그들에게만 나라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 플라톤이 말하는 이와 같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이자 동시에 바람직한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들은 하나같이 도덕과 지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정치이념으로서 도덕과 정치를 분리한 마키아벨리즘과 철저히 대척적이다. 특히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가 그러하듯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자 개인이나 파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그것은 당대의 참주정의 목표와 그대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설사 그러한 통속적 이해와 달리 마키아벨리즘을 마키아벨리(N. Machiavelli)가 의도한 그대로 ‘수단의 도덕적 선악과 관계없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정치 행위에 있어 그 유용성과 효율성만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연 그러한 정치이념이 말 그대로 과연 ‘정치 현실에서 국익을 위한 공적 권력의 성공적인 유지와 관리를 담보’해왔는지는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근대 이후 개인적인 관계에서건 계층 간 나라 간 관계에서건 배타적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는 이른바 냉혹한 현실에서 그것은 나름 성공적인 평가를 받아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평가는 근대 이후 형성된 정치 현실에 대한 단기적 진단에 토대를 둔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 그러한 처방은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거나 치유하기보다는 그 질곡을 더욱 부채질하고 강화하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오늘날 배타적 자국 이기주의와 패권주의에 토대를 둔 신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불평등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원천적으로 국제간 평화 공존이 그 자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이른바 나라이건 개인이건 ‘신의와 약속’은 자기 보존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으며 오로지 살길은 각자도생하며 각자 의심의 눈을 부릅뜨고 배타적 경쟁력을 갖는 힘을 키우는 것뿐이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을 견인한 산업혁명은 오늘날 막대한 자본력과 정보 통신 기술의 융합을 토대로 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개인 간 계층 간 나라 간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를 마치 문명 발전이 수반하는 불가피한 실재로 정당화하면서 나날이 그 끝을 모를 정도로 기세를 떨쳐가고 있다. 그 최전선에 도구적 지식인들이 창궐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소한 통속적인 의미에서 오늘날 마키아벨리즘은 강대한 나라에게는 타국에 대한 패권적 억압을 합리화하는 이념적 토대가 되어 불평등한 국제질서를 고착화하는데 기여하고 있고, 반대로 약소국에서는 정치권력의 폭압성과 기득권 세력의 피폐성을 정당화하고 약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열패성을 마치 숙명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구 환경 및 기후의 급격한 변화가 보여주듯이,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이 초래한 생태적 위기는 강대국 약소국을 막론하고 세계 시민들 모두를 앞이 빤히 보일 정도의 문명적 재앙으로 점점 더 몰아가고 있다. 게다가 정치 영역에서도 미국의 트럼프 등을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이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고 서구에서 쥐꼬리만큼이나마 연명하고 있었던 톨레랑스도 이제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윤석열이란 무도한 자가 검찰, 언론, 종교 등 강고한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형식 민주주의의 약점을 이용하여 통치 권력을 장악한 후 하루가 멀게 반민중적 횡포를 일삼고 있다. 그래도 촛불혁명을 이끈 민중의 저력을 보여주듯 24년 3월 현재 다가올 총선을 앞두고 피폐한 윤석열 정권에 대한 심판의 목소리가 나날이 커지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정치 사회적 진보의 전망은 물질문명에 눈이 멀어 문명적 재앙을 선도하는 초국적 자본과 각 나라의 기득권 세력이 갖는 위세 등등함에 비하면 여전히 너무도 미약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적 변화의 시작이 민초들의 자각에서부터 시작했듯이 시민 모두가 담론 생산자가 되어 비판적 담론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조직화해가면서 그 씨앗을 더욱 크게 키우고 더욱 넓게 퍼트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순진한 지식인들의 낭만적 이상론으로 불리면서 그 현실성에 대한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플라톤이 여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진리를 향해 터져 나오는 욕구의 물길처럼 이상을 향한 인간의 정신과 의지가 내뿜는 힘은 결코 현실에 압도되거나 줄어들거나 약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의 영역에서건 현실 분석의 영역에서건 마키아벨리즘의 냉철함과 영악함을 크게 압도하는 진보에 대한 절실한 열망을 토대로 철저함과 진지함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키워가면서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끊임없이 견인해 나갈 것이다. 정치의 지성화를 본질로 하는 플라톤의 관점은 분명 원리적 사고의 측면에서 그러한 진보적 담론 형성과 투쟁에 일조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정치철학이 간과하고 있는 문명과 인간 본성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성찰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의 발전과 변화를 꿈꾸며 고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 인간의 본성으로 당연시 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란 게 결코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상수도 진실도 아니라는 것을 큰 울림으로 일깨워주고 있다. 세계 사상사의 전체 흐름이 보여주듯이 현대 물질문명 각 영역에 대한 지식인들의 개별적인 분석과 미시적 비판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모순을 딛고 문명의 전환을 꿈꾸면서 그 모든 고려 요소들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아우르고 통합하는 형이상학적 거대 담론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형이상학이 매몰된 현금의 철학적 정황 속에서 인간과 우주의 생태적 연대와 소통을 기반으로 세계관 차원에서 문명의 전환을 모색하는 이 시대의 한국 철학자 이규성(李圭成, 1952-2021)의 철학이 필자에게 빛나게 다가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 그러나 철학자의 자질이 통치자의 자질로도 유효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제기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마치 철학에 대한 현대인의 의구심을 선구적으로 궤 뚫어 보기나 한 듯이 이내 아데이만토스의 반박에 부딪친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그와 같이 주장을 해도 현실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설사 그러한 자질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철학자들 대다수가 스스로 그러한 자질들을 나라의 공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이들이 되거나 반대로 그 소질들을 개인의 이익과 영달에 이용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그러한 지적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현재의 상황에서 철학자가 그렇게 평가되고 있는 이유를 냉정한 눈으로 분석한다. 그러한 현실 인식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임을 철저히 밝혀내야 철학자에 대한 현실 인식을 온전하게 바로잡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끝-

다음 강해 B. 3. 철학이 비난받는 현실(487b-497a)

1) 철학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이유(487b-488e)

2) 철학자들이 스스로 타락하는 이유(488e-495b)

플라톤의 <국가> 강해(59)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9)

 

B.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2) 형상적 앎과 믿음

 

[476e-480a]

*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전자의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아는 것γιγνώσκειν이 아니고 그저 믿는 것δοξάζειν일 뿐”이라고 우리가 말했을 때 그 사람이 우리의 말이 참τὸ ἀληθές이 아니라고 대드는 경우 어떻게 그 사람을 설득할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μὴ ὄν은 누구도 알 수는 없으므로 그 사람 역시 ‘무엇인가를 아는γιγνώσκει τὶ 사람’이라는 동의를 받은 다음, 그 사람에게 그가 알고 있는 그 뭔가가 ‘있는 것’ὄν인지 ‘있지 않은 것’μὴ ὄν인지를 묻는 방식으로 ‘그가 아는 그 뭔가’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477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이 ‘그가 아는 그 뭔가’가 다름 아니라 ‘있는 것’ὄν도 ‘있지 않은 것’μὴ ὄν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것’임을 밝힌 후 그 사람의 사고 대상이 그것인 한 그의 사고는 믿음δόξα일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1) ‘완전하게 있는 것’τὸ παντελῶς ὂν은 ‘완전하게 알 수 있지만’παντελῶς γνωστόν ‘어떻게도 있지 않은 것’μὴ ὂν μηδαμῇ 은 ‘어떤 방법으로도 알 수 없다’πάντῃ ἄγνωστον.

2) 그런데 ‘어떤 것이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한 상태’τι οὕτως ἔχει ὡς εἶναί τε καὶ μὴ εἶναι라면, 그것은 ‘순수하게 있는 것’εἰλικρινῶς ὄντος과 ‘어떻게도 있지 않은 것’μηδαμῇ ὄντος ‘사이’μεταξὺ에 놓여 있는 것이다.(477a)

3) ‘앎’γνῶσις은 ‘있는 것’을 대상으로ἐπ᾽ 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무지’ἀγνωσία는 ‘있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의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앎ἐπιστήμη과 무지ἀγνοία 사이의 것이다. 그것이 곧 ‘믿음’δόξα이며 그것은 앎과 다른 ‘능력’δύναμις이다. 요컨대 믿음δόξα과 앎ἐπιστήμη은 각각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한다. (477a-b)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앎과 무지와 믿음을 그것들 각각이 갖는 대상을 기준으로 구분하고 앎과 믿음 모두가 왜 능력이고 그 능력이 어떻게 별개의 대상에 관계하는지를 아래와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1) 능력이란 있는 것들의 한 부류γένος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다른 모든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2) 능력들은 ‘같은 것을 대상으로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을 같은 능력이라고 부르고 다른 것을 대상으로 다른 일을 해내는 것을 다른 능력이라고 부른다. 즉 능력은 대상으로 하는 것과 ‘해내는 일’ὃ ἀπεργάζεται이 능력마다 각기 다르다. 예를 들어 시각ὄψις과 청각ἀκοή은 모두 능력에 속하지만, 시각은 색깔χροάζω이나 모양σχῆμα이나 그 비슷한 것들을 구별하는 능력이고 청각은 그와 달리 들리는 것들을 구별하는 능력이다.(477c)

3) 앎ἐπιστήμη은 일종의 능력으로서 모든 능력 중 가장 강력한ἐρρωμενεστάτην 것이다. 믿음도 능력이다. 그러나 앎은 오류 불가능한 것τό ἀναμάρτητον 이고 믿음은 오류 불가능하지 않은 것τό μὴ ἀναμάρτητον이다. (477d)

4) 앎과 믿음 각각은 본디 서로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어서, 서로 다른 것ἕτερον을 대상으로 한다. 앎은 본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믿음은 믿는 일을 할 수 있고 믿음이 믿는 것은 앎이 아는 것과 다른 것이다.(477e-478a) 요컨대 앎과 믿음이 둘 다 능력이되 서로 다른 능력인 한, 앎의 대상과 믿음의 대상이 같은 것일 수 없다.(478b)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앎과 믿음이 별개의 대상에 관계하는 별개의 능력임을 분명히 한 후에 위의 논의들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그 앎의 대상이 ‘있는 것’임에 비교하여 믿음의 대상이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 사이에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믿음은 앎도 아니고 무지도 아닌 중간의 것임을 아래와 같이 다시 한번 재확인한다.

1) 앎의 대상γνωστόν은 있는 것τὸ ὂν이고 믿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해서 믿음을 가지는 한, 믿음의 대상δοξαστὸν은 ‘어떤 하나의 것ἕν τι’이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것’은 ‘어떤 것도 아닌 것’μηδὲν 즉 ‘있지 않은 것’τὸ μὴ ὄν이 아니다.

2) ‘있지 않은 것’에는 믿음이 아니라 ‘무지’ἄγνοια가 할당되고 ‘있는 것’에는 ‘앎’γνῶσις이 할당된다.ἀποδίδωμι(478c) 그런데 믿음은 ‘있는 것’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을 믿는 것도 아니므로 믿음은 무지도 앎도 아니다.

3) 그것은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들 바깥, 즉 명확함σαφήνεια에서 앎을 넘어서거나 불명확함ἀσαφείᾳ에서 무지를 넘어서는ὑπερβαίνουσα 그 양쪽 어느 것도 아니다. 믿음은 앎보다는 더 어둡고σκοτωδέστερον 무지보다는 더 밝은 φανότερον 것 즉 그 둘 사이μεταξὺ에 놓여 있는 것이다.(478c)

4) 믿음이 앎도 무지도 아닌, 그 사이의 것이듯이 믿음의 대상 또한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있지 않은 그런 종류의 것τι οἷον ἅμα ὄν τε καὶ μὴ ὄν으로서 ‘순수하게 있는 것’과 ‘전적으로 있지 않은 것’ 사이의 것이다.(478d) 양 끝에 있는 것들에게는 양 끝에 있는 것들을 할당하고, 사이에 있는 것들에는 사이에 있는 것들을 할당해야 한다.(478e)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언급한 후 처음에 제기되었던 물음으로 돌아가 결론적으로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 그리고 왜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정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 즉 철학자인지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1)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움 자체,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ἀεὶ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 상태로 있는 아름다움 자체의 형상ἰδέα이란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 많은 정의로운 것들을 믿는다. 그러나 이들이 믿는 아름다운 것들은 어느 면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어느 면에서 추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 필연적이다.(479a) 큰 것들과 작은 것들, 가벼운 것들과 무거운 것들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것들은 모두 항상 반대적인 것ἢ τἀναντία으로 불리면서 양쪽 모두에 관계한다.(479b)

2) 이 많은 것들(ta polla) 각각은 잔치 자리ἑστίασις에서 이야기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애매해서, 이것 중 어느 것도 확실하게 있다거나 있지 않다고, 또 둘 다이거나 둘 다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것들을 놓아둘 자리는 있음과 있지 않음의 중간이다. 이것들은 더 있지 않음과 관련해서 있지 않은 것보다 더 어두운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며, 더 있음과 관련해서 있는 것보다 더 밝은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479c) 요컨대 아름다움이나 그 밖의 것들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것들’πολλὰ νόμιμα은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다κυλινδεῖται. 그것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고 중간에서 떠도는 것으로서 중간의 능력으로 포착되는 것이다.(479d)

3)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구경하면서 아름다움 자체는 보지도 못하고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런 사람들은, 온갖 것들을 믿으면서δοξάζειν 그들이 믿는 것들 중 어떤 것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각각 그 자체의 것들’이며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ἀεὶ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ς ὄντα 것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한다.γιγνώσκειν 이들은 앎이 대상으로 하는 것들을 반기고 사랑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믿음이 대상으로 하는 것을 반기고 사랑하며 아름다운 소리나 색깔이나 그런 것들을 사랑하고 구경하지만 아름다움 자체를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지는 않는다.(479e-480a)

4) 그러므로 각각의 있는 것 자체αὐτὸ ἕκαστον τὸ ὂν를 반기는ἀσπαζομένους 사람들은 믿음을 사랑하는 사람φιλόδοξος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φιλόσοφος라고 불러야 한다.(48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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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논의에 따라 철학자와 감각으로 구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 앞의 강해에서 살폈듯이 철학자가 사랑하는 진리는 곧 형상(形相)에 대한 앎이다. 요컨대 진정한 앎의 대상은 형상이고 형상은 곧 ‘있는 것’, ‘(완전하게) 순수하게 있는 것’, ‘완전하게 알 수 있는 것’, ‘오류 불가능한 것’,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감각으로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고 상태는 진리로서 앎(epistēmē)이 아니라 ‘믿음’에 불과하다. 사실 믿음의 그리스 원어 doxa는 기본적으로 ‘(옳건 그르건) 일상인들이 수행하는 모든 생각과 의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텍스트 곳곳에서 doxa를 존재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인식 차원에서 진정한 앎과 철저히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 말은 종종 ‘억견’이나 ‘상상’ 등의 말로 옮겨지기도 한다. 플라톤이 사용하고 있는 앎과 믿음이라는 말의 이러한 용례만 보더라도 철학사에서 왜 그를 두고 이른바 예지계와 현상계를 철저히 구분하는 두 세계 이론 즉 이원론적 세계관의 선구라고 평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선 강해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이 그와 같은 세계관을 내 세운 근본적인 동기가 현실 세계의 다(多)와 운동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현실 구제론에 있음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말들의 용례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 또한 근본적으로 그에 상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하고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 다시 말해 플라톤의 세계관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주목해야 할 핵심은 예지계와 현상계, 앎과 믿음을 구분했다는 것 이전에 왜 플라톤은 그 예지계를 구성하는 형상들을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상정했을까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도 누차 언급했듯이 엘레아주의자들에 의해 부정된 다의 세계로서 자연세계와 현실 세계의 존재성을 철학적으로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형상들의 존재는 그것의 모상(模像)으로서 다의 세계의 존재성을 뒷받침 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변화무쌍한 다의 세계의 운동성까지 해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현실 세계의 다의 운동성을 해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물질적 운동성도 부동의 형상과 더불어 우주 발생의 시원적 원인들의 하나로 상정하게 된 것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배경에는 이처럼 다의 세계이자 운동하는 세계로서 자연 및 현실 세계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동기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다와 운동을 자연세계의 시원적 토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리스의 전통적 세계관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세계관은 종축에서 보면 위와 아래 예지계와 현상계를 가르는 이원론이지만 횡축에서 보면 마치 그리스의 신화가 그러하듯이 여럿들이 상호 공존하고 있는 다원론적 세계관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세계관을 두고 이원론인가 다원론인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플라톤의 가장 최종적이고 원숙한 세계관을 표방하고 있는 <티마이오스>를 보면 우주 생성의 세 가지 근본 원인(aitia)들로서 형상인 원상(paradeigma)과 수용자이자 보조원인(synaitia)인 질료적 공간(chora), 그리고 제작자 데미우르고스(Demiourgos)가 제시되고 있는데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 점에 주목하여 플라톤의 세계관을 3원론으로 규정짓기도 한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플라톤에게서 ‘좋음의 이데아’가 최상이자 유일의 유적 형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자나 교부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철학을 아예 일원론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 그런데 플라톤의 현실구제론이 단순히 자연 세계의 존재성과 운동성만 해명하는 것이라면 원자론이 이룩한 철학적 의의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원자론은 원자들과 그것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으로서 허공의 존재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존재성과 운동성을 함께 해명하였지만, 영원히 운동하면서도 조화와 질서라는 합목적적 가치를 함께 보전하고 있는 그리스적 우주, 즉 코스모스를 온전히 뒷받침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형상계와 운동하는 현상계를 따로 구분하되 그 현상계가 형상계와 완전히 분리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이른바 분유(分有, metechein)와 모방의 방식으로 밀접하게 상호 연관된 것으로 파악한다. 즉 물질적 현상계는 형상들의 세계인 예지계의 모상으로서 예지계가 지니는 존재성을 일정 부분 분유함으로써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모방의 방식으로나마 조화와 질서를 갖춘 코스모스의 한 축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현상계는 형상계와 비교하여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면서 존재성이나 앎의 근거가 크게 부족한 세계이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형상의 분유치로서 일정한 존재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현상계의 물질적 운동성에 역행하는 영혼의 설득(peithos)(<티마이오스> 48a, c, 51e, 70b)을 받아들여 최대한 형상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토대 즉 형상과 닮을 가능성도 함께 갖춘 세계인 것이다.

* 이곳 논의 부분에서 플라톤이 믿음의 대상을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것’,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것들’, ‘항상 반대적인 것으로 불리면서 양쪽 모두에 관계하는 것’,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 것’ 등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위와 같은 근본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른바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존재도 무도 아닌 제3의 것’으로서 물질적 타자성(heteron)에 의해 언제나 생성 변화하는 속성을 가진 ‘무한정자(apeiron)’인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여러 번 강조했듯이 플라톤에게 현상계로서 현실은 극단적 일원론자들에 의해 백안시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수많은 여러 것들이 다양한 측면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공존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현상계의 구제를 위해 바로 그러한 무한정자에 분유의 형식으로 존재성도 함께 부여함으로써 현실세계가 자기동일성의 차원까지 상승할 수 있는 존재론적 근거를 함께 구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요컨대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엘레아주의의 극단적 이분법에 의해 촉발된 허무주의가 극복될 수 있는 가능적 토대가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우리나라 서양고대철학의 태두 박홍규(1919-1994)는 위와 같은 믿음의 대상으로서 존재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것 즉 무한정자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가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그의 전집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 사례들을 꼽자면 수도 없지만 하나의 예로서 그의 논문 <유티데모스편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지상세계에 대한 소피스트들의 엘레아주의에 기초한 이분법적 독단이 어떻게 현실 허무주의를 조장하는지를 그 자신의 무한정자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를 기초로 탁월하게 풀어내고 있다.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의 논리를 토대로 모든 현실의 다와 운동을 무로 돌리지만 무한정자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조건적인 부정과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역에서 다양한 측면과 정도 차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배움을 통해 일정한 변화 즉 교정이 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즉 존재와 무 사이의 것으로서 무한정자는 타자성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플라톤에게 현실 허무주의의 타파를 위한 가능성의 토대이기도 한 것이다.

* 이런 점에서 이 부분에서 제시된 믿음의 대상이 갖는 내적 무한정성을 단순히 부정적인 관점에서 그저 해체의 원인으로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부분의 논의는 현실의 삶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보전을 위해 사용하는 사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믿음과 그 대상을 고찰하되, 그것의 한계는 물론 그 반대로 최대한 형상적 앎에 근접할 수 있는 내적 가능성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형상에 대한 진정한 앎에 대한 인식이 변증술을 익힌 소수 철학자들의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믿음의 영역은 현실의 삶의 보전을 위해 일상의 장인(demiourgos)들이 수행하는 일반 기술 내지 학술들(technai)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이 갖는 실제적 앎으로서 가치는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 논의에서는 인식과 관련하여 앎과 믿음 두 가지로만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이어지는 선분의 비유에서나 동굴의 비유 등 이후의 논의를 함께 살펴보면 믿음은 분유와 모방의 방식으로 형상적 앎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믿음이 기하학적 수학적 사유 단계로까지 상승하면 비록 자체성(kath’ hauto)을 갖는 형상적 앎(noesis)은 아닐지라도 그에 최대한 근접해 있는 자기동일성(tauton) 차원의 사고 상태(dianoia)까지도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믿음의 원어인 doxa를 우리말로 단순히 ‘억견’이나 ‘억측’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형상과 비교 차원에서 그리고 실제 환상이나 상상조차도 믿음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일반 기술과 학술들 즉 오늘날 말과 개념으로 이루어지는 개별과학적 수준의 지식 또한 같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분의 비유에서 플라톤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수학적 대상의 경우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것들’(ta noēta)로 분류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성에 대한 플라톤의 해석을 넓게 해석하는 일부 학자들의 경우 선분의 비유를 토대로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을 아예 형상적 앎의 하나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학적 대상 특히 기하학적 대상은 물질적 연장성은 갖고 있지 않더라도 도형이라는 공간적 연장성을 전제(hypothesis)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연장성도 갖고 있지 않은 무전제의 원리(archē anypothtos)인 형상과는 분명 구별된다.(510b) 구상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수학적 대상은 형상적 앎의 대상에 닿아 있지만 마치 당구공들이 서로 닿아 있어도 서로가 분리되어 있듯이 형상적 앎의 대상에 속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아무려나 이런 의미에서도 현상계의 믿음의 대상들과 믿음이 가지는 가치는 결코 폄하할 수 없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일반 기술 내지 학술들이 그렇듯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 최상의 수준에까지 고양될 경우 우리 모두가 학문 행위를 전개하고 있는 실질적인 개별과학의 진리성으로서 자기동일성까지 확립 가능한 일종의 일반 법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주장하고 있듯이 자기동일성은 형상의 자체성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기동일성에 기초한 개별 학술들 내지 개별 과학은 본질적으로 개연성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20세기가 낳은 걸출한 이론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 하이젠베르크(W. K. Heigenwerg)가 제기한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가 플라톤 철학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 비록 논란은 안고 있지만 이렇듯 믿음의 영역은 최상의 수준에서는 추론적 사고를 토대로 하는 수학적 기하학적 사유까지 포함되지만, 그것을 제외한 그 이하의 수준에서는 그야말로 억측이나 환상에 불과한 상상(eikasia)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즉 믿음의 대상이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 것’이라는 말은 그 믿음이 본질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양상의 측면을 갖는 가능성의 영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중 없는 것 쪽으로 해체될 가능성의 경우는 존재 쪽으로의 극복과 상승의 측면에서 보면 내용적으로 우연성이 증대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물질적 무한정자는 그 자체 맴돌면서 그 우연성을 어떻게든 증대하는 게 필연적 속성이라는 점에서 <티마이오스>에서는 그것을 ‘방황하는 원인(planōmenē aitia)’이라 칭하면서도 동시에 역설적으로 ‘필연(ananch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티마이오스> 48a) 이런 점에서 형성과 해체 양쪽으로 열려 있는 무한정자의 내적 가능성은 양상론적으로 능력(dynamis)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무한정자의 영역에서는 능력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도 앎과 더불어 믿음을 능력으로 언급하고 그 능력이 적용되는 대상을 구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정한 앎은 분명 믿음과는 구분되지만, 그 내적인 수준에서 보면 변증술의 능력에 따라 일정 정도 차이가 있듯이, 믿음 또한 능력과 수준에 따라 추론적 사유를 통해 지성에 의한 앎으로까지 상승할 수도 있고 반대로 억측이나 환상의 수준까지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짐작하겠지만 이러한 앎과 믿음이라는 능력의 주체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영혼(psychē)이다. 즉 앎과 믿음은 영혼의 능력이되 그것이 영혼의 능력 안에서 앎과 믿음으로 갈리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는 영혼의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영혼은 무한정자의 타자성이 비록 운동과 변화를 담보하지만, 그 힘을 설득하여 다를 해체하는 쪽이 아니라 보전하는 쪽으로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능동적 힘, 즉 포이운(poioūn)으로서 능력의 지향 방향 즉 해체를 거슬러 가장 완전하게 복구해야 할 보존의 근본 지향 내지 목표는 다름 아닌 형상(eidos)이다. 그러나 이것을 플라톤 형상론이 목적론적 성격을 갖는 근거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플라톤에게 목적은 능력에 따라 다다를 수도 있고 다다르지 못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이 결정론적이라면 플라톤의 목적은 비결정론적인 것으로서 다만 가능적인 것일 뿐이다. 그리고 믿음의 영역에서 확립 가능한 자기동일성 또한 영혼의 힘을 토대로 무한정성의 지배를 거슬러 올라 형상적 앎에 근접했을 경우 획득 가능한 최상 수준의 인식 값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물질적 타자성(heteron)도 포함되어 있다. 물질적 타자성은 영혼의 힘을 거부하고 무한정성 고유의 성질이 극도로 발현된 상태 즉 언제나 무로 향하는 해체의 원천이다. 그러나 자기동일성의 측면이 강화될수록 앎에로의 가능성이 증가하고 타자성의 측면이 강화될수록 우연성과 해체성이 증가한다. 이것들을 존재론적 위계로 구분해 본다면 일자적 자체성이 확보된 형상이 가장 우위에 있고 그다음이 능동자 포이운(poioun)으로서 영혼 그리고 가장 아래에 무한정자가 위치하지만, 가능성의 토대가 무한정자인 한, 믿음 영역 또한 상승과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한 분투 어린 삶의 영역으로서 결코 방기할 수 없는 철학함의 실질적인 현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 물론 그러한 분투를 통한 영혼의 내적 고양 단계에서 그야말로 철학적 변증술을 통해 형상에 대한 직관적 통찰의 수준까지 고양되지 않을 경우, 사고 상태는 그저 믿음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형상적 앎과 믿음은 모두 영혼 능력의 연속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 형상적 앎은 그 영혼 능력의 고양을 통해 믿음의 영역을 초월해야 획득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형상적 앎에 이른 철학자가 믿음의 영역 즉 현실에서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떠날 수도 없다. 다만 철학자는 믿음이 갖는 본질적 성격을 인지한 상태에서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 믿음을 앎으로 여기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진리를 토대로 모두가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바라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에 따라 고통스러운 등에의 역할을 자임하게 되는 것이다.

* 변증술을 통해 형상적 앎을 획득한 철학자가 믿음이 지배하는 현실의 삶의 영역에 왜 실천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의 문제는 그것이 과연 철학자의 근본 욕망으로서 관조적 본성과 일치하는가의 문제와 함께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논의가 전개될수록 플라톤 철학의 실천철학적 성격은 갈수록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곳에서 제시된 진리를 관조하기를 좋아하는 철학자와 보통 사람들의 구별, 형상적 앎과 믿음의 구별 즉 형상이론의 근본 틀은 플라톤 존재론의 기본 원칙과 시작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플라톤은 이것을 기점으로 이 이후에 제시되는 선분의 비유와 태양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을 통해 이러한 기본적인 존재론적 원칙을 토대로 철학의 기본 구상들을 보다 다각적인 측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대해간다. 다소 거칠게 그 내용들의 성격을 미리 요약하자면 선분의 비유는 이곳의 존재론적 논의를 바탕으로 제시된 플라톤 인식론의 기본 틀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태양의 비유는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 플라톤 철학이 종국적으로 지향하는 총체적인 지향가치와 합목적성을 보여주며, 동굴의 비유는 믿음이 지배하는 현실의 영역에서 철학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분투의 여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왜 형상적 앎을 이룩한 철학자가 왜 종국적으로 동굴 속 현실의 세계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비유들은 모두 플라톤 철학의 종착점이 왜 현실의 구제를 위한 실천의 철학인지를 하나같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있는 것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은 믿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philosophos)라고 불러야 한다’는 이곳 논의의 결론(480a)이자 제5권의 마지막 문구는 차후에 펼쳐질 논의를 통해 여전히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이상국가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는 자들을 향한 선전포고이자 차후의 구상을 예고하는 선제적 선언인 셈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어질 제6권에서 위와 같은 철학자들의 기본 성향과 자질들을 다시 한번 정리 제시한 다음, 승리의 요건으로서 지피지기가 중요하듯 그러한 철학자들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현실의 실태들과 그 이유들을 분석적으로 비판한다.

* 끝으로 이곳 논의에서 언급된 무지agnōsis에 상응하는 대상은 ‘있지 않은 것to mē on’이지만 실제 사람의 경우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무지한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설사 억측을 밥 먹듯 일삼고 있는 자일지라도 믿음의 영역에 있는 한, 무지한 사람은 아니다. 요컨대 현실에서 일정 부분 무지한 사람은 있어도 전 영역에서 전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적 앎을 획득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모두가 서로 일정 부분 옳고 그른 생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의 생각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포함된 한에서 일방적으로 매도되어선 안 된다.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주의의 이분법을 토대로 그 다양한 측면들을 어느 한쪽으로 매도하는 방식으로 모든 현실 판단에 대한 회의를 부추겼다. 그러나 현실 판단 모두가 상대적이고 회의적인 것은 아니다. 믿음의 영역은 수많은 대립적인 것들과 측면들이 혼재하는 영역으로 영혼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보다 ‘앎’에 가까운 믿음도 있고 ‘무지’에 가까운 믿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분별하는 일이야말로 삶의 보전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철학함의 중대하고도 실질적인 관건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은 영혼을 고양하는 철학적 훈련을 통해 길러진다. 그러므로 철학 공부는 개인으로서건 시민으로서건 좋은 삶의 필수 조건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의 관점에서 굳이 현실에서 가장 많은 측면에서 가장 무지한 자를 꼽으라면 인간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통치 영역에서 자신의 무지조차 모른 채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따라 반지성적 전횡을 일삼는 자라 할 것이다. 그러한 무지한 통치자야말로 인간 삶에 가장 위해를 가하는 자로서 철학자가 가장 비판하고 지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직업으로서 철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아니라 최소한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통치의 종식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책무가 아닐 수 없다. 2024년 2월 한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경우 가히 그 책무는 너무나 절실하고도 시급하게 요구된다. “윤석렬은 탄핵되어야 한다.”는 우리들의 외침과 저항 또한 그 당연한 책무의 하나이다.

* 이곳 논의는 형상론에 대한 원칙적인 논의로서 <국가>에서 처음 제시된 곳이기는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곳 논의 말고 형상론과 관련한 논의는 플라톤 대화편 전체에 두루 걸쳐 있다. 그러므로 일단 이곳에서는 형상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보다는 그것에 접근하면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소개하고 앞으로 형상론 관련 논의가 나올 때마다 다른 대화편의 내용도 함께 연관해 가면서 추가로 논의 사항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플라톤 대화편 전체에서 형상론과 관련한 논의가 제시된 부분은 아래와 같다.

 

* 플라톤의 대화편 형상(이데아)론 관련 전거들

<라케스> 191e, 192a

<에우튀프론> 54d

<고르기아스> 467e, 506d

<대히피아스> 289d, 292a, 293e, 294a, 298b, 300a, 303a

<뤼시스> 217b, d

<에우튀데모스> 280b, 301a

<메논> 72c, 72d. 72e

<크라튈로스> 389b, 390a

<향연> 204c, 211b

<파이돈> 74d, 75b, 78d, 100b, 103e, 104b, d, e, 105a

<국가> 402c, 434d, e, 435a, b, c, 476a, d, 500e, 510b, d, e, 511a

<파이드로스> 237d, 250a, b, 265e

<파르메니데스> 149e, 150a, 159e, 158b, c, 160a

<테아이테토스> 203e

<소피스테스> 228c, 247a, 252b, 260e

<티마이오스> 28a, 29b, c, 29b, 39e, 48e, 49a, 50c, d, 51a, c, 52c,

<필레보스> 16d, 25b

* W. D. Ross, Plato’s theory of Ideas, Chp. 17th, Oxford 1951

(W. D. 로스, 김진성 역, 『플라톤의 이데아론』, 누멘 2011, 259쪽)

 

이상으로 제5권 끝

다음 주제: 2. 철학자의 자질(제6권 484a-487a)


 

플라톤의 <국가> 강해(5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8)

 

  1.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2.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1) 형상(이데아)론(474c-476d)

 

* 이데아론을 다루기에 앞서 살핀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요약하면 결국 “제2권 369a에서 제4권 427c까지 ‘말로 세워진 나라’(gignomenē polis logō) 이른바 로고폴리스(logopolis)는 그 자체 본(paradeigma)으로서 현실구현이 불가능하지만, 철학자를 그 나라의 통치자로 임명할 경우 최대한 그 본에 가깝게는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제5권 502c부터 제7권 540e까지 철학자의 자질과 교육과정 등 그 본에 최대한 닮은 나라 즉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구체적으로 다룬 다음 그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비로소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라고 명명한다.(527c). 사실 <국가>에는 이상국가라는 말 자체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플라톤 <국가>의 주제를 나눌 때 일반적으로 제2권 369a에서 제4권 427c까지의 내용을 ‘이상국가의 수립’으로 불러 구분하고 그 후 철인 통치자와 교육과정까지를 포함해 <국가> 내용 전체를 통틀어 ‘이상국가론’이라 부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른바 말로 세운 로고폴리스도 플라톤의 이상국가이고 제7권에서 명명된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 또한 그의 이상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전자의 논의가 후자의 논의를 위한 토대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자에 철학자 통치론이 추가된 후자의 나라야말로 플라톤이 생각한 최종적인 의미에서의 실질적인 이상국가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요컨대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실현 가능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지닌 입장을 정리하자면 전자의 이상국가는 본으로서 현실 불가능하지만, 후자의 이상국가는 최대한 그 본을 닮은 나라로서 최대한 가까운 한도까지 실현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그 실현 가능성이 어떤 단일한 조건에서 어떤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아니라, 복잡한 구조와 제도를 갖춘 나라의 경영 상태를 어떻게 최선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와 관련한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이점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과 관련한 실질적인 물음은 단지 가능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가능하되 어떻게 얼마나 더 본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가의 문제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필수적인 가능 조건으로서 철학자 왕의 문제는 결국 철학자 왕의 수준, 즉 바람직한 철학자 왕의 자질과 능력이 무엇이고 그 능력의 최고치는 어떻게 담보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파도와 관련한 논의를 모두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철학자 통치론을 다루되 철학자가 어떤 자질과 능력을 지닌 사람이기에 나라의 통치자로서 적합한지부터 본격적으로 논의한다. 여기서 철학자가 좋아하는 진리로서 형상이 제시되고 드디어 이데아론이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474c-476d]

* 소크라테스는 이제 어떤 사람들이 철학에 발을 들이고ἅπτεσθαι 나라를 인도하는 것ἡγεμονεύειν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지προσήκει φύσει부터 아래와 같이 해명한다.

* 누군가가 뭔가를 사랑한다φιλεῖν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옳으려면, 그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소년을 좋아하는 사랑꾼φιλόπαιδα은 한창때의 아이들 모두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지고 누구도 내치지 않다. 포도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명예를 사랑하는φιλότιμος 사람들 또한 어떤 포도주이건 어떤 지위이건 가리지 않고 욕구한다.ἐπιθυμηταί 이렇듯 뭔가를 욕구하는ἐπιθυμητικός 사람은 그것의 모든 종류를 욕구하는 사람이다.(474a-475b)

*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지혜σοφία는 욕구하고 어떤 지혜는 욕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배울 거리τὰ μαθήματα에 대해서도 그 모든 것을 선뜻 맛보기를 원하고 기꺼이 배우려 하며 그래도 늘 부족해 하는ἄπληστος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475c)

* 이에 글라우콘이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οἵ φιλοθεάμονες, 듣기를 사랑하는φιλήκοος 사람들도 구경거리, 들을 거리가 있으면 어디든지 빠짐없이 찾아 돌아다니며 그 비슷한 것들이나 잡기술τεχνύδριον을 배우려 드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도 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은 그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닮은 사람들일 뿐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ἀληθείας φιλοθεάμονας이라고 말한다.(475d-e)

* 그러자 글라우콘은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 설명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아래와 같이 ‘그 자체로 하나인 형상’과 그것들이 온갖 곳에 나타나서 ‘여럿으로 보이는 것’을 구분한다. “아름다움καλός과 추함αἰσχρός, 정의로움δίκαιος과 부정의함ἄδικος, 좋음ἀγαθός과 나쁨κακός 등 모든 형상εἶδος 각각이 그 자체로 하나’αὐτὸ ἓν ἕκαστον인데, 그 형상들이 행위πρᾶξις들이나 물체σῶμα들과 어울림κοινωνία으로써, 그리고 자신들끼리 서로ἀλλήλων 어울림으로써 온갖 곳에 나타나서 각각이 여럿πολλὰ으로 보이는 것φαίνεσθαι이다.”(476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기초로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전자)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후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요컨대 전자의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된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로움과 부정의함 등 ‘그 자체로 하나인 형상’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로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유일한μόνος 사람들이다. 그리고 후자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φωνή나 색깔χροάζω, 모양σχῆμα, 그리고 이런 것들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반길 뿐, 그들의 지적 상태διάνοια로는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ὸν의 본성은 볼 수도ἰδεῖν 없고 반길 수도ἀσπάσασθαι 없는 사람들이다. (476b)

* 아름다움 자체에 다가가서 그것을 그 자체로서καθ᾽ αὑτὸ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σπάνιος.(476b) 누군가가 후자의 사람들 즉 ‘아름다운 것들ὁ καλὰ πράγματα은 믿으면서νομίζων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κάλλος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앎γνῶσις으로 이끌고 갈지라도 그를 따라갈 수조차 없는 사람은 꿈ὄναρ을 꾸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전자의 사람들 즉 아름다움 자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름다움 자체와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들τὰ μετέχοντα을 모두 볼 수 있으며,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이 ‘그것 자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 자체’가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은 깨어 있는 상태ὕπαρ로 살고 있는 것이다.(476c-d).

* 전자의 사람들 지적 상태διάνοια는 아는 사람의 것으로ὡς γιγνώσκοντος 앎γνώμη이라고 부르고, 후자의 사람들 지적 상태는 믿음을 갖는 사람의 것으로ὡς δοξάζοντος 믿음δόξα이라고 불러야 옳다.(47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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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c ‘어떤 사람들이 철학에 발을 들이고 나라를 인도하는 것hēgemoneuein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지’ : 자연적 성향에 적합하다는 것은 그 성향에 맞는 것을 자기 일로 삼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말한다. 이상국가의 분업 원리도 모두 그 원칙에 입각해 있다. 여기서 철학자는 자연적 성향에서 무엇보다 철학에 적합하지만, 나라를 인도하는 것 즉 통치에도 적합하다고 언급된다. 즉 철학자는 철학을 좋아하지만, 자신의 자연적 성향 그대로 통치하기도 좋아하고 또 그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국가> 다른 곳에서는 그 반대로 철학자는 ‘통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521b)이고 ‘정치적 관직을 깔보는 삶’(521b)을 사는 사람들이어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통치하게 하려면 강제가 요구되는 사람들(521b)로 나온다. 그렇다면 이러한 플라톤의 말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철학자가 통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관직을 깔본다는 내용은 통치를 시민의 이익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 정치 권력을 쟁취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즉 철학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는 통치행위는 당연히 싫어하고 그러한 권력 지상주의자들이 탐하는 관직을 깔본다. 그러한 통치는 동족 간 내란을 일으켜 모두를 불행에 빠뜨리기 때문이다.(521a) 그러나 바람직한 통치자는 한 집단의 행복이 아니라 시민 전체의 행복을 도모하고(420b) 시민과 함께 즐거움과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462b), 또 성향상 철학자가 그러한 통치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므로 통치 권력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는 정치 생활 보다는 철학 생활하기를 더 좋아하므로 누구라도 선뜻 먼저 나서기보다 서로에게 떠맡길 수 있어 일종의 자율적 강제의 형식으로 통치의 수고를 돌아가며 떠맡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는 싫어하는 것을 강제로 강요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꺼이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선뜻 나서지는 않는 사람들에 대한 자율적인 내부 규제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철학자에게 강제는 없다. ‘강제’라는 표현은 철학자들이 통치 적합자임에도 자칫 이기적 권력을 탐하는 자들로 비칠 수 있음을 변명하기 위한 일종의 레토릭(rhetoric)의 성격이 강하지만 어쩌면 철학과 정치 참여 사이에서 평생을 고민해온 플라톤 자신의 내적 심리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 475d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 요컨대 철학자는 진리를 좋아하고 사랑하여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사랑한다’거나 ‘추구한다’는 것은 모종의 성취 결과를 이룬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음’, ‘추구하고 있음’이라는 과정 그 자체 현재 진행형의 성격을 갖고 있다. 사랑을 쟁취했다는 말도 쓰지만, 사랑을 쟁취한 사람이 진정 원하고 목표로 하는 것은 쟁취 그 시점이 아니라 그 사랑을 현재 진행형으로 일관되게 유지하고 키워 나가는 것이다.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면 철학 역시 어떤 목표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고 설사 진리라는 확신이 있더라도 그에 머물지 않고 늘 되물어 보고 되돌아보면서 보다 진일보한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지적인 긴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 자체가 우리 모두의 철학함의 진정한 목표라 할 것이다.

* 476d 지적 상태(dianoia) : dianoia는 추론적 사고(思考)(thinking), 사고 내용(notion, thought expressed), 사고 과정(process of thinking), 이해(understanding), 사고 기능(thinking faculty), 지적 능력(intellectual capacity)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지적 이해의 상태 내지 내용’을 의미한다. 나중 선분의 비유(509c-513e)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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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차 언급했듯이 <국가>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은 이데아론, 철인 통치론, 좋음의 이데아, 선분·태양·동굴의 비유, 변증술과 철학자 교육과정 등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불릴만한 핵심적인 주제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 <국가> 관련 연구서들은 물론이고 서양철학사 관련 책들이라면 모두 플라톤 철학을 소개하면서 거의 빠짐없이 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만큼 이 주제와 관련한 논의들은 개요 수준에서부터 전문적인 연구 수준에 이르기까지 자료들이 매우 풍부하다. 이 점을 고려하면 다행하게도 최소한 이 주제들과 관련하여 우리 강해에서 기울여야 할 노력은 그만큼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이데아론을 비롯하여 제5권에서 제7권까지 우리가 다룰 플라톤 철학의 주요 주제들에 대해 우리 강해는 앞으로 아래와 같은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우선 지금까지 해왔듯이 기본적으로 <국가> 텍스트의 해당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소개하되, 위 주제들과 관련하여 철학사를 통해 많이 알려진 일반적인 설명은 줄이는 대신 주요 논쟁점과 더불어 플라톤 철학 전체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간과되어온 몇 가지 점들을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 그럼 텍스트 순서대로 <국가>에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 또는 ‘형상(eidos)론’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플라톤의 형상은 철학자가 어떤 사람이기에 통치자로서 적합한가에 대한 아래와 같은 도입부의 대화를 통해 제기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철학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모든 배울 거리를 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글라우콘이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온갖 것을 기웃거리며 배우기를 좋아한다면 그들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는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그런 연후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아래와 같이 대비해가면서 그 둘 간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그 과정에서 철학자가 사랑하는 진리를 담지하는 대상으로서 형상이라는 것이 처음 소개된다.

* 물론 플라톤의 형상이 <국가>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국가>에서 형상은 이곳에서 처음 다루어지기 시작하여 선분·태양·동굴의 비유, 좋음의 이데아, 변증술로 이어지면 깊이를 더해 가지만 그 주제가 플라톤 철학의 중심 주제인 만큼 <파이돈>,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테스>, <티마이오스> 등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에서도 두루 다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을 바탕으로 플라톤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통일적으로 이해하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대화편 자체가 체계적인 논의가 아닌 데다가 대화편마다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들 자체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불분명한 구석 또한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 말이 ‘플라톤 이데아론’이지 그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고 그 해석 또한 학자마다 천차만별이다. 특히나 오늘날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의 발달에 따라 관련 텍스트에 대한 미시적 언어 및 논리 분석이 크게 증대되고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대두되면서 현대철학에서는 아예 플라톤의 원초적인 의도와 관점이 아예 공중 분해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텍스트를 직접 접하거나 전문 연구서를 보기보다는 서양철학사 등 플라톤 이데아론을 다룬 개괄서들을 통해 일반적인 개요 수준에서 그 내용을 접하고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과연 <국가> 텍스트에서 플라톤의 형상은 어떤 관점에서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 우선 형상(eidos : 形相)이라는 말은 ‘보이는 것’, ‘외모’, ‘형태’, ‘종류’, ‘개념’ 등 여러 가지 뜻을 지니는 일상어로서 앞에서도 여러 번 사용된 말이다.(402c-d, 434d, 435b 참고) 그러나 약간의 논란이 있는 402c eidē의 경우를 제외하면(강해 40참고) <국가>에서 플라톤이 eidos를 본격적으로 ‘형상’(形相)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한 곳은 이곳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리고 ‘이데아’(idea)라는 말은 eidos라는 말과 함께 eidō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eidos와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그 형상을 언급하면서 ‘그 자체로’(kath’ hauto, kata auto), ‘자체’(auto)라는 말을 여러 번에 걸쳐 사용하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auto를 형용사에 정관사 to를 붙여 명사화한 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점차 밝혀지겠지만 이 말들은 소크라테스가 거의 공식이라 할 정도로 형상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 아름다움 자체(auto to kalon), 정의 자체(auto to dikaion) 등)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형상을 ‘각각 그 자체로 하나’(auto hen hekaston)이자 ‘각각의 있는 것 자체’(auto hekaston to on)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들은 우선 플라톤의 형상이 파르메니데스적인 일자성(一者性)을 갖고 있다는 것 즉 형상이 어떤 타자와도 무관하게 독립적이고 그 자체로 실재하며 늘 한결같고 불변하는 하나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하나가 각각 하나라고 함은 그 형상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달리 ‘여럿’(polla)임을 나타낸다. 즉 플라톤의 형상은 다(多)의 진상으로서 각각 일자성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 자체로 독존적으로 실재하는 ‘있는 것’(to on)이다.

* 형상의 실재성을 표현하는 그리스어 on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einai의 중성 분사형으로 being의 뜻을 갖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어에서 ‘있음’을 나타내는 einai동사는 영어의 be동사가 그러하듯 ‘있음’이라는 존재를 나태는 용례만이 아니라 ‘~임’이라는 술어적 용례로도 쓰이고 나아가 ‘다름 아닌 정말 그것 맞음’이라는 진위적 용례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플라톤이 형상을 ‘to on’으로 언급하고 있음은 형상이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자 ‘~인 것’이며 동시에 ‘정말 ~인 것으로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이 이 세 가지 용례 중 어떤 용례로서 to on을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 온갖 경우를 들어 세세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그리스어 자체가 그 세 가지 용례를 모두 포함하는 데다가 플라톤이 그 말을 사용하면서 용례의 특수성을 따로 설명하지 않는 한, 그러한 분석이 별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플라톤을 이해하려면 그가 사용한 용례의 허점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왜 그 모든 용례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 플라톤은 그 형상들의 실례로 이곳에서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로움’과 ‘부정의함’을 들고 있다. 그런데 형상들이 존재하는 곳이 믿음(doxa)이 대상으로 하는 현상계가 아니라 진정한 앎epistēmē이 대상으로 하는 예지계라는 점에서 과연 ‘추함’ 이나 ‘부정의함’도 형상인가 그것은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의 ‘결핍에 불과한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특히 to on의 진위적 용례가 to on의 참됨을 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곳 바로 뒤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오류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분명 이 점은 논란거리이긴 하다. 다만 이곳의 언급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추함’과 ‘부정의함’ 또한 ‘정말 다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자체로 추한 것, 부정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오류 불가능성 또한 ‘정말 추한 것, 부정의한 것에 틀림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 그런데 이렇듯 플라톤이 예로 들은 형상의 실례를 통해 형상이 무엇인가를 접근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른다. 왜냐하면, 이곳 <국가>에서도 ‘아름다움’, ‘추함’, ‘정의’, ‘부정의함’ 등 뭔가 윤리적이거나 미적인 것 이외에 감각계 인공적 사물인 ‘침상’의 형상(597c)도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있음’, ‘없음’, ‘운동’, ‘정지’ 등 범주적인 것들(<파르메니데스 129d-e, 139b, <소피스테스> 254b-255e, <티마이오스> 35a 등)을 비롯해 ‘하나’, ‘둘’, ‘홀수’, ‘짝수’, ‘원’, ‘직선’, ‘도형’, 다름’, ‘같음’ 등 수학적이거나 논리적인 것들(<대히피아스 300d-302b, <파이드로스> 104a-c, 104e, <에우튀프론> 12d, <메논> 74b, 74d-e 등) 그리고 ‘눈’, ‘불’, ‘벌’, ‘흙’, ‘공기’, ‘물’, ‘불’ 등 자연물들(<파이드로스> 103c-105d, <메논> 72b-c, <티마이오스> 51b 등)도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침상의 예처럼 형상의 그림자인 것들로 인간이 만든 인공물의 형상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것이어서 침상의 경우 그냥 비유로만 사용된 것이라 이해한다 해도 플라톤이 언급한 위와 같은 형상들의 다양한 예들은 과연 플라톤이 생각하는 형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실로 많은 논란과 의문을 수반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와 같은 예들 대부분이 무언가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사례들로 정의하는 것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예시된 것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형상은 모든 경우에서 늘 필연적으로 변화가 수반될 수밖에 없는 감각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 않은 것, 즉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aei kata tauta hosautōs onta)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우리의 일상의 경험에서도 가까운 예로 일정한 음의 수적 비례 등 수와 논리, 자연의 법칙을 구성하는 수많은 이론적 원리들이 수많은 아름다운 악곡들 배후에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그리고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형상들과 행위들 또는 물체들과 어울림(koinonia)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장차 또 자세히 다루어지겠지만 이른바 감각적 물질세계에 대한 형상의 관여(metechein)로 설명되면서 실상의 세계, 예지계로서 형상계와 그 그림자의 세계로서 현상계의 내적 관계를 규정하는 토대가 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형상들) 자신들끼리 서로 어울려’라는 부분은 예지계 형상들끼리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별도의 추가적인 설명도 없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과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형상들이 어울린다고 하면 형상들에게 어울리는 측면이 있어야 가능한데 형상들 각각은 어떤 것들과도 관계 맺지 않는 자체적이고 독립적이며 불변의 것으로서 관점이나 측면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플라톤은 이곳에서 형상들의 결합과 관련하여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는 대신에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소피스테스>에서 그 문제를 독립적인 주제로 삼고 있어 우리는 <소피스테스>(250a-259d)를 통해 그 의문의 실마리를 부분적으로나마 풀 수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존재(ousia)와 운동(kinesis) 그리고 정지(stasis), 같음(tauton)과 다름(thateron)을 형상의 예로 들면서 운동과 정지 모두 일단은 있는 것으로서 존재성을 갖는 한, 존재에 의해 포괄된다고 말한다. 즉 운동도 정지도 존재와 일정하게 결합(koinonia)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는 그러면서도 이들 각각의 것과 다른 어떤 것이므로 이들 각각은 또 서로 다른 것으로 ‘다름’과 결합해 있을 뿐만 아니라 각기 그 자체로 자기 동일적이므로 ‘같음’과도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서 철자의 비유를 통해 형상들의 결합을 설명한다. 즉 자음 모음은 각각 그 자체 하나의 유(類, genos)이자 형상으로서 서로 결합하여 글자를 이루고 글자는 다시 어울려 단어를 이룬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형상이 있다면 그것은 3의 형상과 선분의 형상 등이 일단 어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각형의 형상에서 3의 형상과 선분의 형상 각각이 결합했다 해서 그것들 각자의 일자성을 잃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 자체로 자체성을 보전하면서 유와 종의 관계를 갖고 서로 결합한다. 물론 이것들은 무한대의 경우 수로 결합하거나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존재와 정지는 결합할 수 있되 정지와 운동은 결합할 수 없듯이 철자들이 아무런 철자술(grammatikē, 253a) 상의 규칙 없이 아무 자음과 모음들끼리 임의로 결합할 수는 없다. 이른바 최고류에 해당하는 형상은 종차를 이루어가며 가장 위쪽으로 섞이고 모이면서(synagein) 드러나는 형상이고 반대로 그러한 최고류의 형상이 분할(diairesis)되어 더 분할 될 수 없게 되면 그것이 최하종으로서 이를테면 철자에 해당하는 원자적 형상(atomon eidos)이 될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세계에서 이러한 결합과 분할의 내적 관계와 규칙을 훤히 들여다보고 알 수 있는 능력이 곧 철학자가 최종적으로 습득해야 할 변증술(dialēktikē)이다.

* 이러한 형상들의 결합은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우주 제작과정을 그리고 있는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이른바 형상들의 세계를 본(paradeigma)으로 삼아 그것을 보고 실제 자연 세계를 만든다. 이 경우 데미우르고스가 바라보는 형상들 가운데에는 개별 형상들도 있겠지만 ‘여럿이 조화롭게 어울린 자연 세계의 본’으로서 복합적 특성을 갖는 ‘결합된 형상들’ 또한 존재할 것이다.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따로 자신이 본을 구상하지 않고 순전히 그 형상계의 본만을 보고 우주를 제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본으로서 제작 전에 주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제작하는 목표가 ‘좋은 우주’ 즉 ‘여럿들의 조화와 공존’에 있는 한 우주 전체에 섞여 그것을 통일적으로 관철하는 우주 세계의 본으로서 ‘좋음의 형상’ 또한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가>에서 앞으로 제시될 ‘좋음의 형상’은 형상계의 모든 형상들의 총체적인 결합과 관련한 형상으로서 우주 제작자가 가장 중시해야 할 본이라 할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형상론은 그 이후의 철학사를 통해 예지계와 현상계를 가르는 두 세계 이론(Two worlds theory) 즉 이원론적 세계관의 토대로만 주목되면서 플라톤으로 하여금 현실 세계는 그저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고 반대로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천상의 세계만을 실상의 세계로 생각하는 철학자로 평가되게 만들었다.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만 봐도 플라톤의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이후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형성된 근대 인문주의 내지 과학주의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철학사적 전통에서 플라톤 철학이 왜 ‘현상 구제론’ 즉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철학으로 불리고 있는지를 해명하지 못한다. 플라톤의 형상론을 접하는 사람이면 보통의 경우 대부분 앞서 말한 두 세계 이론부터 떠올리지만, 현상 구제의 관점에서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형상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多) 즉 복수의 형상들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플라톤이 형상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기본적으로 존재 세계에서 오직 부동의 일자만을 주장하는 종래의 파르메니데스주의를 혁파하고 존재 세계가 본래부터 여럿의 세계이자 운동하는 세계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 익히 알고 있듯이 플라톤 당대 혼란기 아테네를 지배하고 있었던 철학 사조는 파르메니데스주의를 이어받은 엘레아의 철학이었다. 아테네 철학은 소박한 물활론에서 시작하여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론(panta rhei)을 거쳐 파르메니데스 사상이 큰 영향을 미치면서 급기야 엘레아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전통적으로 당연시되어온 자연(physis)과 관습(nomos)의 유기적 통일, 여럿과 운동이 철저히 부정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여럿과 운동의 부정은 그 자체로 현실 세계 다양한 존재자들의 존재성과 그것들의 운동과 변화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학적 인식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전란에 허덕이는 당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극복의 근거나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그들을 아예 극단적인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서 덕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바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적 논리주의를 이용하여 권력 지향적인 귀족들에게 궤변적 수사술과 처세술을 가르치며 사적인 이익을 취했고 그런 방식으로 귀족들과 신흥 부유층으로 형성된 기득권 세력의 고착화에 기여했다. 물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현실과 지적 풍토를 극복하기 위해 엘레아주의에 대항하여 여럿과 운동의 철학적 기초를 제시하려는 노력들이 없지 않았다. 특히 원자론자들은 엘레아주의자들을 의식하여 파르메니데스적 일자성에 부합하는 이른바 원자(atom)의 존재를 상정함과 동시에 그러한 원자들이 운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원자들을 둘러싼 허공(kenos) 즉 없는 것(無)의 존재도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요컨대 그들은 철학적으로 존재 세계가 여럿이자 운동하는 세계임을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자론은 그런 방식으로 일정 부분 여럿과 운동을 구제할 수는 있었으나 플라톤이 보기에 그 운동의 기계론적인 성격은 그리스적 세계관의 토대로서 자연과 관습의 유기적 통일을 위한 합목적적 가치 지향을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이었다.

* 그래서 플라톤은 여럿과 운동의 근거도 확보하고 운동과 변화의 합목적적 가치지향도 가능할 수 있도록 고정치는 고정치대로, 운동치는 운동치대로, 관계치는 관계치대로 각각에 정당한 존재론적 기초를 부여하여 존재 세계에 파르메니데스적 일자들이 여럿이 있음과 동시에 그것들이 운동하는 것임을 밝히고 덧붙여 존재 세계의 총체적인 합목적적 가치의 지향 푯대로서 최고의 유적 형상이자 본으로서 ‘좋음’(to agathon)의 형상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형상론은 자연 세계 여럿의 존재와 인식의 근거로서 파르메니데스적 일자성을 형상들 각각에게 부여하여 여럿이 각각 그 자체로서 실재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일차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형상들의 세계에서는 운동치가 자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그에 이어 운동치는 고대 이래로 그랬던 것처럼 물질적 존재자들의 근본 속성으로 받아들이되 다만 그것들이 형상을 분유(metechein)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물질적 존재자들의 구분과 식별을 위한 최소한의 존재성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즉 플라톤은 고정치는 형상계에, 운동치는 물질적 현상계에 두고 그것들이 존재 세계에서 상호 관여의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존재 세계가 일정하게 여럿을 보전하면서도 상호 섞일 수 있는 관계치의 근거도 함께 마련한 것이다. 이로써 여럿이자 운동하는 현실이 존재론적으로 구제된 것이다. 이제 화살이 정지해있지 않고 날아가는 것이, 토끼가 거북이를 앞질러 달려가는 것 또한 더 이상의 가상이 아니고, 여러 가지 것들의 차이를 식별하고 구분하여 사물과 사태의 다양한 측면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 또한 더 이상의 허튼짓이 아니다.

* 그러나 현상계 존재자들은 형상의 분유치만 갖고 있으므로 한결같이 고정적이지 못하고 물질성의 크기에 비례하여 불완전한 분유치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상계의 존재자들을 대상으로 인식과 학술을 도모할 경우 형상 수준의 진리성 즉 에피스테메까지 이르지 못하고 믿음(doxa)이나 확신(pistis) 수준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요컨대 그것들에 대한 학술적 성격은 본질적으로 ‘그럴듯한 수준의 설명’(eikos logos) 즉 개연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계에서도 물질성을 최소로 갖고 있거나 물질성이 갖는 연장성만 지니는 존재가 있다. 그것이 곧 수 또는 도형 다시 말해 수학적 기하학적 대상이다. 그러므로 지성(nous)을 통해 형상에 대한 에피스테메를 획득하는 변증술을 제외하고 자연 세계에 대한 학술로서 가장 에피스테메에 근접하는 일반 학술은 오직 수학과 기하학 그리고 수학적 논리학뿐이다. 그러므로 수학과 기하학은 가정(hypothesis, 510c-d)도 수반하고 형상이 갖는 완전한 고정치까지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분유치로서는 최고 수준의 고정치를 인식할 수 있는 학술인 만큼,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모든 학술의 최선의 방법론적 토대가 된다. 이를테면 건축술, 조타술, 제화술 모두 최대한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기하학이 반드시 필요하고 오늘날 물리학과 생물학을 비롯한 개별과학 역시 본질적으로 수학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른바 자체성(kath’ hauto)은 변증술을 통해 형상 인식의 진리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자기동일성(tauton)은 추론적 사고(dianoia)로서는 최고 단계 즉 최고 수준의 분유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 수학과 기학학적 인식의 진리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교육과정에도 수학과 기하학은 변증술을 익히기 위해 반드시 이수해야 할 전 단계 과목으로 제시된다.

* 가장 완전한 앎으로서 형상에 관한 앎은 변증술 즉 철학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라면, 당대의 일반 학술들(technai)(511b-c)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일반 개별과학 내지 자연과학들에게는 대상의 자기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이 학적 인식의 최고 목표가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자기동일성은 기본적으로 현상계 진리성이므로 진정한 앎이 갖는 자체성에 미치지 못하는 본질적으로 개연적 진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일반 학술로서 오늘날 개별과학 내지 자연과학은 절대지에 이를 수 없고 늘 그 절대지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절대지에 근접하는 지식만 얻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자연학이 갖는 개연성에 만족하지 못해 형상을 자연세계 개체에 끌어들여 자연학의 진리성을 확보하고 이른바 경험과학의 기초를 제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갈릴레오 역학과 그 이후의 이론 물리학의 등장, 그리고 그것의 진리성은 그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만 고려하더라도 2,500년 전 제기된 플라톤의 형상론이 말을 너머 진상에 대한 직관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사상이나 종교는 물론, 오늘날 자연과학 내지 개별과학의 학문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인지는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확인하지만, 플라톤의 형상론은 본질적으로 현상계의 학술적 해명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것, 즉 현상계의 구제를 위해 제시된 이론이다. 그런 점에서, 지적 위계에서 본다면 형상계가 최상이지만 플라톤이 기울인 관심의 위계에서 보면 현상계 즉 현실에 대한 관심이 최우위에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 실제로 이같이 형상의 인식과 현상계의 인식을 구분하는 위계적 구도를 현상계에서 똑같이 보편-개물의 구도로 적용할 경우. 오늘날 일반 학문의 기본 구도와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학문은 현상계 소여들을 귀납하여 보편적 개념으로 일반화하고 그 보편 개념들의 정합 관계를 통해 사물과 사태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도모하는데, 플라톤의 인식론 또한 보편 실재로서 형상들이 관여의 방식으로 개물들에 결합된 형상적 분유치들(현상계 사물의 공통 속성들을 일반화한 개념들)을 토대로 감각적 개물들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적 인식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그 기본 구도는 서로 비슷하다. 현상계 인공물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보편이 드러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오늘날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는 현상계의 사물들에 대한 일반 개념들은 개물들이 갖는 공통적 속성의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 위쪽의 방향으로 모여져서 주어지는 데 비해, 플라톤의 인식론에서는 그 반대로 실재하는 형상(아름다움 자체)이 위에 있고 개체들(아름다운 것들)은 그것들이 아래쪽으로 분유되는 방식으로 존재성을 획득하고 그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이른바 형상이든 개념이든 이른바 보편자를 통해 개별자에 대한 인식과 식별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즉 플라톤의 형상론에서 ‘형상과 현상의 관계’와 현상계 내에서 ‘개념과 개체의 관계’는 마치 하나는 보편-개별 관계의 원상이고 하나는 보편-개별 관계의 모상인 양 구조적으로 닮아 있어, 비록 현상계의 인식이 분유치에 대한 개연적 설명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오늘날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현상계에서 사물들에 대한 개념적 인식과 그것의 정합적 체계화가 구조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 그러나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비록 형상에 대한 인식이 참된 앎이고 그것에 이르는 학술이 변증술이자 철학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획득된 앎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플라톤 자신 대화편 어느 곳에서도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굳이 그 내용이 있다면 형상들의 실례 정도, 그것도 불분명한 수준 정도의 밖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그 자신을 포함 누군가 그것에 대한 앎을 획득했다는 언급도 없고 그저 철학자가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플라톤 철학에서조차 형상계와 관련해서는 여러 형상들이 있다는 정도 외에 철학자가 아닌 일반적인 학자 수준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측면에서 보면 결국 형상계에 비교하여 비록 낮게 평가되고 있으나 바로 그 현상계가 일반 학술 차원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학적 인식의 실질적인 중심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플라톤 또한 결코 현상계 영역을 허투루 다루고 있지 않다. 사실 이곳 형상론도 정의로운 국가를 논의하기 위한 이상적 푯대이자 토대로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얼핏 세계를 물자체가 존재하는 예지계와 현상계로 나누고 실질적인 학적 인식을 현상계에 대한 오성(Verstand)의 인식으로 국한한 칸트(I. Kant)의 비판적 인식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칸트의 실천철학에서도 신은 위계상 지고의 존재임에도 현실의 도덕을 성립시키기 위해 요청(Postulat)되는 형식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그에게서 신학은 위계상 최고의 학문임에도 도덕론에 부수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논쟁점을 갖고 있는 영역이 또 플라톤의 현상계이다. 바로 그 현상계에 대한 논의가 이곳 형상계에 대한 논의에 이어서 다루어진다. -끝-

다음 주제: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2) 현상계와 믿음(doxa)(474c-476d)

플라톤의 <국가> 강해(5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7)

 

  1. 전쟁에 관한 일(466e-471c) 그리고 세 번째 파도 : 철학자와 권력 –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471c-474c)

 

제5권 [466e – 471c]

* 소크라테스는 세 번째 파도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며 뜬금없이 아래와 같이 전쟁에 관한 일들을 길게 늘어놓는다.

1) 아이들과 동반 출정의 이유와 안전을 위한 방책

* 전쟁πόλεμος과 관련한 경험ἐμπειρίᾳ과 구경θέα을 통해 장차 아이들이 훌륭한 수호자가 될 수 있도록 전쟁에 함께 출정해야 한다. (466e)

* 이때 이들의 안전ἀσφάλεια을 도모하기 위해서 경험과 연배에서 지도자ἡγεμονεύς이자 아이들의 인솔자παιδαγωγός이기에 충분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말 타는 법ἱππεύειν을 가르쳐 필요할 경우 가장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게 하는 방도도 강구해야 한다.(467d)

2) 전사들 자신이 가져야 할 태도와 전사자에 대한 대우

* 전사στρατιώτης들 가운데 비겁κάκη하게 대오τάξις를 이탈하거나 무기ὅπλον를 버린다거나 혹은 그런 비슷한 일을 하는 자는 장인이나 농부로 보내야 한다.(468a) 산 채로 적들에게 잡힌 자는 적들οἱ πολεμία이 마음대로 하도록 선물로 줘 버려야 한다.(468b-c)

* 반대로 무훈을 세우고ἀριστεύσαντά 명성을 떨친εὐδοκιμήσαντα 자는 화관στέφανος을 수여하고 환영해야 하고 짝짓기 기회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무훈을 세우는 데 더 열심을 낼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우수한 자식들도 태어난다.(468c)

* 호메로스를 따라 젊은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에게 명예τιμή를 높여주는 것이 정당하다. 제사나 모든 행사에서 찬가ὕμνος와 함께 명예로운 자리와 고기, 그리고 가득 찬 술잔으로 명예를 높인다. 그것은 한창때 용감한 자들의 명예를 드높임과 동시에 체력을 증진시킨다.(468d-e)

* 출정 중 전사한 이들 가운데서 명성을 떨친 이들은 황금족γένος τοῦ χρυσοῦ으로 이야기하고 잘 장사 지낸 후 무덤을 돌보고 엎드려 절해야 한다. 또한, 특별히 훌륭하게 살다 죽었을 경우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것을 관례νόμος로 삼아야 한다.(468e-469b)

3) 적들에 대한 태도

* 가능한 한 그리스인들이 이민족βάρβαρος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고 그들이 적일 경우에도 그들을 관대하게 대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지 말아야 한다.(469b-c)

* 승리를 거두고서 죽은 자에게서 무기 외에 약탈해서는 안 된다. 시체를 약탈하거나 시신 수습을 방해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 땅을 유린하고 집을 불사르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그 해의 농작물καρπός만을 취한다.(469c-470b)

* 친족에 대한 적대행위는 ‘내분’στάσις이고 남에 대한 적대행위는 ‘전쟁’πόλεμός이다. 그리스가 병이 들어 내분을 벌이더라도 상대편의 농토를 유린하고 집을 불사르지 말아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한, 보모τροφό이자 어머니인 나라를 유린해서는 안 된다.(470b-d)

* 패배한 친족들은 싸울 상대가 아니라 화해διαλλάσσειν하게 될 상대라고 생각하고 그들로부터 농작물 정도나 취하는 게 적정하다. 그리스인들은 훌륭하고 양식 있는ἀγαθοί τε καὶ ἥμεροι 사람들로서 그리스를 자신들의 조국으로 간주하고 사랑하며 공통의 종교의례를 갖는다.(470d-e)

* 친족과 내분이 있을 때도 그리스인들은 상대방을 노예로 삼거나 파멸시키는 식으로 제재를 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서로 좋은 뜻에서 상대방의 분별을 일깨워 주는 사람들σωφρονισταί이지 적이 아니다.(471a)

*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가릴 것 없이 해당 나라의 모든 이가 그들에게 적대자인 것이 아니라 매번 갈등의 원인이 되는 소수만이 적대자이다. 따라서 대다수가 친구인 상대방의 땅을 황무지로 만들거나 집을 무너뜨리지 말아야 한다.(471b)

* ‘아무 잘못 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의해’ὑπὸ τῶν ἀναιτίων ἀλγούντων 책임자들οἱ αἴτιοι이 대가를 치르도록 강제되는 상황에 도달할 때까지만 갈등을 지속해야 한다.(471b)

* 땅을 유린하거나 집을 불사르지 말라는 것도 수호자들에게 법으로 제정해줘야 한다.(47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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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7d 아이들의 인솔자 : 아테네에서 이 역할은 노예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경험과 연배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춘 우수한 시민에게 그 역할이 맡겨져 있다. 플라톤은 아이들의 교육 과정에서부터 이미 혁신을 기하고 있다.

* 467d 말 타는 법 : 아테네 전투편제에서 기마병은 자신이 소유한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할 능력을 갖춘 소위 귀족 내지 지휘자급의 병과였다. 그에 따라 귀족들의 경우 승마교육이 중시되었다. 이곳에서도 수호자 계층에게 승마교육이 요구되고 있다.

* 468c 이 문맥에서 글라우콘은 무공을 세웠을 경우 ‘출정 중 입맞춤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면 누구도 거절할 수 없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까지 한다. : 이것은 무공을 세운 자들에게 소년애를 마음껏 누리게 해야 한다는 글라우콘의 바람을 드러낸 말이지만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남녀 간 짝짓기 기회를 더 많이 주는 것 이상을 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설사 동성 간 입맞춤이 허용되더라도 그것은 자식을 대하듯이 선의의 입맞춤이어야 함을 이미 강조한 바 있다.(403b) 플라톤은 남성과 남성 또는 여성과 여성의 결합은 자연에 어긋난 것으로 뻔뻔함(tolmēma)과 무절제(akrateia)의 소산으로 여긴다.(<법률> 63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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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과 관련한 답변을 최대한 늦춰 보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일종의 여담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내용상 전쟁 관련해서 이상국가가 택하고 있는 바람직한 정책들을 그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정 부분 주제와 연관되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나마 플라톤의 전쟁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플라톤은 적대행위를 크게 동족끼리 싸우는 내분과 이민족과 싸우는 전쟁으로 나눈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플라톤에게서 전쟁은 오직 침입에 맞서는 방어 전쟁뿐이라는 사실이다. 플라톤은 당대 아테네인 모두가 칭송하고 옹호하던 아테네의 패권적 침략 전쟁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메넥세노스> 해설 참고) 실제로 동족이건 이민족에 대해서건 침략 전쟁을 옹호하고 있는 부분은 대화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내분과 전쟁 모두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가장 나쁜 것이지만 플라톤은 앞서도 살폈듯이 내분을 특히 더 나쁜 것으로 간주한다. 이민족과의 전쟁도 나라의 내분이 없는 한 두려워할 게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단합하여 이민족인 페르시아 대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장기간에 걸친 내분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 내분을 대처하는 방안이다. 우선 내분은 친족과 싸우는 것이므로 언젠가 화해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삶의 터전인 농토나 가옥을 파괴하거나 재물을 약탈하거나 시신을 훼손하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아서도 안 된다. 그리고 내분은 질병 상태인 만큼 질병의 원인이 되는 소수만이 적일 뿐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해당 나라의 모든 이가 적대자는 아니다. 친족들은 서로 좋은 뜻에서 상대방의 분별을 일깨워 주는 사람들이지 예속이나 파멸을 의도하여 서로에게 벌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갈등 내지 적대행위 또한 다만 그 불화의 장본인들이 벌을 받는 시점까지여야만 한다.

*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전쟁에서 동족을 적으로 대할 때 태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 자신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과정에서 뼈저리게 체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제국주의 아테네가 기원전 416년 동족 멜로스인들에 대해 저지른 참혹한 학살 사건은 플라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멜로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주민들이 대부분 도리스인이어서 종종 스파르타 함대의 출입을 허용하였다. 이에 아테네는 이전 공격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재차 멜로스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시민들 대부분을 무차별 학살하고 여성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때 멜로스 여성을 자신의 정부로 삼기도 했다. 점령 과정에서 멜로스인들과 아테네인들과의 대화는 정의와 힘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유명하다. 멜로스인들은 정의에 의거 항복할 수 없고 시민들에 대한 처리 또한 정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아테네인들은 ‘정의는 힘 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자는 힘 있는 자가 만든 정의에 순응할 때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또한 제1권의 내용을 구상하는데 기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5권 84-116 참고)

* 그리스 시대 동족끼리 그래왔듯이 오늘날 모든 나라는 민족과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인류애를 바탕으로 동등한 세계시민으로서 상호 존중 하에 국제간 평화를 도모하면서 올림픽과 국제적인 예술제 등 문화적 인적 교류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나라 간 민족 간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그에 따라 오늘날에도 대규모 살상 무기의 제한 및 전쟁 포로의 인권적 처우 등 전쟁 관련 기본 규범 등 국가 간 전쟁 또는 분쟁 시 서로가 준수하고 노력해야 할 최소한의 규범과 그 해결책이 다각적으로 강구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규범들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을 비롯한 민간인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방침들을 들여다보면 이미 2500년 전 플라톤이 내놓은 위와 같은 제안들이 근본 원칙으로 관철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 자신 평생 전란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국가 근간을 마치 전시 체제 정부인 양 그리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통치의 이념을 들여다보면 그 자신 나라 간 사람들 간 평화와 안전 그리고 화해와 공존에 얼마나 목을 매고 있었는지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 세 번째 파도 : 철학자와 권력 : 이상 국가의 가능성(471c-474c)

 

[471c-474c]

* 소크라테스가 기대와 다르게 전쟁 관련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자 글라우콘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이러다간 미뤄두었던 문제를 아예 잊어버리실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한 후 그런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생겨난다면 당연히 그런 온갖 좋은 것들이 있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알겠으니 이제 다른 것들은 제쳐두고, 그러한 정치체제가 어떻게 가능한지 설득해 주기를 요구한다.(471c-e)

* 이에 소크라테스는 가까스로 두 개의 파도를 피했는데 삼중 파도 중 가장 크고 거친 파도로 내몰고 있다고 말한 후 그 주제가 통념에도 어긋나고 말을 꺼내기도 힘든 것임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나 재촉이 거듭되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부정의가 어떠한 것인지를 탐구하다가 논의가 지금에 이르렀음을 환기케 한 후 정의 자체αὐτόε δικαιοσύνη와 완전하게 τελέως 정의로운 사람, 부정의와 가장 부정의한 사람에 대해 우리가 탐구해온ἐζητοῦμεν 것은 그것들을 본παράδειγμα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즉 “그것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행복εὐδαιμονία과 그 반대와 관련해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며 우리들 자신과 관련해서도 가능한 한 그것들과 가장 닮은 사람이 그러한 운명과 가장 닮은 운명을 갖게 될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지, 그것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ἀποδείκνυμι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472a-d)

* 이를테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본을 그림에다 충분히 표현한 화가가 그런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것까지 보여줄 수 없다 해서 그 화가를 폄하할 수 없듯이 설사 우리가 말로 만들어 온 훌륭한 나라의 본 그대로 나라를 수립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의 논의가 목적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472d-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행위πρᾶξις가 본래 말한 것λέξις 그대로 진리ἀληθεία에 다다를 수는ἐφάπτεσθαι 없는 만큼, 우리가 말로 설명한 나라가 실제로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주기를 강요하기보다는 그 나라와 가장 비슷하게 경영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정도의 성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오늘날의 나라들에서 잘못 행해지고 있다면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게 해서’ὅτι ὀλιγίστων τὸν ἀριθμὸν καὶ σμικροτάτων τὴν δύναμιν 어떤 것을 바꾸어야 이런 방식의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를 찾아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473a-b)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제 뭔가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이 그 변화의 방법과 관련하여 “내가 보기에는 하나εἷς가 바뀌면 – 비록 그 하나가 작은 것은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니지만 – 나라가 변화될 수 있다.”고 운을 뗀 후, 당대 아테네인들의 비웃음과 경멸에 휩쓸릴 정도로 가장 큰 파도에 비유했던 지금의 주제 즉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자신이 그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가슴 속에 품고 눌러만 두었던 속내를 마침내 선언하듯 아래와 같이 털어놓는다. “철학자들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 나라에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말로 설명해온 바로 그 정치체제가 가능한 한도까지 자라나서 햇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ἐὰν μή, ἦν δ᾽ ἐγώ, ἢ οἱ φιλόσοφοι βασιλεύσωσιν ἐν ταῖς πόλεσιν ἢ οἱ βασιλῆς τε νῦν λεγόμενοι καὶ δυνάσται φιλοσοφήσωσι γνησίως τε καὶ ἱκανῶς, καὶ τοῦτο εἰς ταὐτὸν συμπέσῃ, δύναμίς τε πολιτικὴ καὶ φιλοσοφία, τῶν δὲ νῦν πορευομένων χωρὶς ἐφ᾽ ἑκάτερον αἱ πολλαὶ φύσεις ἐξ ἀνάγκης ἀποκλεισθῶσιν, οὐκ ἔστι κακῶν παῦλα, ταῖς πόλεσι, δοκῶ δ᾽ οὐδὲ τῷ ἀνθρωπίνῳ γένει, οὐδὲ αὕτη ἡ πολιτεία μή ποτε πρότερον φυῇ τε εἰς τὸ δυνατὸν καὶ φῶς ἡλίου ἴδῃ, ἣν νῦν λόγῳ διεληλύθαμεν. 요컨대 이것 이외에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행복해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οὐκ ἂν ἄλλη τις εὐδαιμονήσειεν οὔτε ἰδίᾳ οὔτε δημοσίᾳ.(473c-d)

*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비장하게 속내를 털어놓자 글라우콘은 크게 놀라워하며 그 소리가 불어올 충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그 소리를 듣고 아주 많은πολύς 사람들이, 그것도 만만치φαῦλος않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당장, 이를테면, 겉옷을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각자 손에 잡히는 대로 무기ὅπλον를 집어 들고서는, 끔찍한 일이라도 벌일 것처럼 선생님께 있는 힘껏 달려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글라우콘은 만약 소크라테스가 이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피해내지 못할 경우 그야말로 조롱거리가 될 수τωθαζόμενος 있음을 함께 우려하면서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주장을 온전히 다 펼쳐내 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그 자신 호의εὔνοια와 격려παρακελεύεσθαι로써 할 수 있는 수단을 다해 논의에 잘 부응하겠다고ἐμμελέστερον 다짐한다.(473e-474a)

*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토록 큰 동맹군을 제공해준다고 하니 그렇게 해보겠다고 언급한 후 철학자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할 경우 무엇보다도 먼저 그 철학자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를 규정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게 분명해지면 왜 철학자들이 나라를 인도하는 것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 일인지가 드러나 그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474b-c)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을 최대한 담보해낼 수 있는 관건으로 이른바 철학자 통치론을 내세운 후 본격적으로 철학자가 통치자로서 왜 자연적 적합성을 갖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47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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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살폈듯이 글라우콘 등 대화 참여자들이 재촉해왔던 주제는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글라우콘은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여러 가지 처자 공유의 이로움을 공동체적 처자공유 일반이 가져온 이로움으로 일반화한 뒤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를 그러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을 구현하고 있는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의 문제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내용상 처자 공유의 가능성이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의 이러한 태도 전환이 크게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닐지라도 세 번째 파도를 헤쳐 가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처자 공유라는 말조차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 주제가 처음과 다르게 보다 일반화된 주제로 슬그머니 전환 내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이에 따라 세 번째 파도의 주제는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 즉 플라톤이 지금까지 말로 수립한 이상 국가가 과연 현실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로 재정립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 전에 그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기본 전제들을 먼저 언급한다. 즉 1) 말로 세운 이상 국가는 하나의 본(paradeigma)이다. 2) 행위는 말한 것 그대로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3) 그러므로 이상 국가가 행위를 통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증명할 수 없다. 요컨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기본 전제를 언급한 후에 그것을 토대로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의 성격 전환을 시도한다. 본 그대로 현실화는 불가능하지만, 본에 최대한 다가갈 수는 있다. 즉 본을 최대한 닮은 것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 이로써 이상국가의 가능성 문제는 마지막 단계에서 이상 국가와 최대한 닮은 나라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그것의 구현은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우리가 만족하기에 충분한 성과이자 실제 목적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그 목적을 현실에서 달성하는 방법의 최선으로 철학 통치론 내지 철학자 왕이 제시된다.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기 전에는 지금까지 말로 세운 그 정치체제가 ‘가능한 한도까지’εἰς τὸ δυνατὸν 자라나 햇빛을 보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최대한 미룰 대로 미루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는 이렇게 논의의 최종 단계에서 최대한 닮은 나라의 구현 가능성으로 규정되고 그 가능성을 담보하는 조건으로서 철학자 왕의 극적인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이로써 제5권을 통해 철학과 철학자의 문제를 다루려는 플라톤의 기본 의도가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 그러나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내용으로서 이곳과 다소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여러 곳 발견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상 국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본 것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그와 관련하여 <국가> 다른 부분에서 나타나는 내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오늘날 권좌에 앉아 있거나 왕좌에 앉아 있는 자들 또는 그 자식들이 어떤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애욕(eros)에 사로잡히는 것 그 두 가지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가 일어날 경우, 우리가 이야기해온 나라가 가능하다.(제6권 499c-e)

– 누군가가 왕들과 권력을 잡은 자들의 자손들이 자연적 성향상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사람만 생겨나고 나라가 그에게 복종한다면, 그것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들을 완전히 실행하기에 충분하다.(제7권 520e-521a)

– 진정한 철학자들이 여럿이든 한 명이든 나라의 권력자가 되어 … 자신들의 나라를 바로잡을 경우, 나라와 정치체제와 관련한 우리의 기원이 전적으로 기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렵긴 하지만 가능하다.(제7권 540d)

* 위에서 인용한 경우들은 언뜻 보기에 하나같이 철학자 왕이 나타날 경우, 우리가 이야기해온 나라와 정치체제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곳에 인용된 경우들은 지금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내용 즉 본 그대로는 불가능하고 다만 최대한 그것과 닮은 나라만 가능하다는 언급과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위에서 새로 인용한 경우들을 자세히 잘 들여다보면 그 답이 나온다. 우선 그 경우들은 누가 보아도 말의 내용과 정황에 있어 지금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것과 다르지 않다. 모두가 하나같이 권력과 철학의 결합을 가능성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논의 내용과 정황이 다르다면 몰라도 모두 같다면 인용된 경우들에서 언급되고 있는 ‘권력과 철학이 결합할 때 가능한 나라와 정치체제’의 의미 또한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 제5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철학과 권력이 결합할 때 가능한 나라와 정치체제’는 본(本)으로서 정치체제가 아니라 분명코 ‘가능한 한도까지eis ton dynaton’ 본에 다가가 최대한 그 본과 닮은 나라와 정치체제이다. 요컨대 인용된 위의 경우에서 언급되고 있는 나라와 정치체제도 내용상 그와 다를 게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국가> 전체에서 상호 모순 없이 하나로 일관되어 있다.

* 이상의 논의를 기초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플라톤의 답변을 요약하면 1) 이상 국가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2) 그러나 말로 세운 이상 국가의 의미가 결코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3)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행위를 통해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최대한 본에 가깝게 나라와 정치체제를 구현할 수 있는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만족해야 한다. 5) 따라서 중요한 것은 최대한 본에 가까운 나라와 정치체제를 구현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일이다. 6) 그런데 그 방법을 찾는 최선의 길은 가능만 하다면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은 것’ 즉 가장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가장 완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일이다. 7) 철학자가 왕이 되면 그러한 능력을 지니게 된다. 결국,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문제는 위와 같은 논의 과정을 거쳐 철학과 권력의 결합을 확보하는 문제로 전환되고 마침내 철학자 왕이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과 관련한 이상의 논의들을 플라톤의 우주론적 틀을 빌려와 분석하면 논의 구도가 좀 더 명확하게 해명된다. 무엇보다 먼저 여기에서 플라톤 우주론과 연관된 몇 가지 개념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플라톤은 말로 세운 이상 국가를 본(paradeigma)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본(本)을 바라보고 현실로 구현해내려는 제작자 내지 실행자가 나온다. 그리고 그 제작자 내지 실행자에 의해 최대한 본에 가깝게 만들어진 실물 내지 모상이 나온다. 그런데 본과 제작자와 모상 등 3가지는 플라톤 우주론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다. 앞서 소크라테스가 예를 든 것들에 적용해보면 ‘정의 자체’, ‘완전하게 정의로운 사람’,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본’에 해당하고 ‘통치자’, ‘화가’는 ‘제작자’ 그리고 ‘정의 자체에 가장 닮은 사람’, ‘그림 속에 잘 그려진 아름다운 사람’은 각각 ‘모상’에 해당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제작자의 행위(praxis)는 본래 말한 것(lexis) 그대로 진리에 다다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제작자는 본을 바라볼 수는 있되 행위로써 그것을 있는 그대로 모상으로 구현할 수 없고 다만 본과 최대한 가까운 모상을 구현해낼 수 있을 뿐이다. 요컨대 제작자의 실제 목표는 본이 아니라 본과 최대한 가까운 모상이다. 실제로 여기서 화가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본으로 삼아 그것을 최대한 그림으로 잘 표현해내는 과정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가 우주를 만드는 과정과 그대로 일치하고 본 또한 두 곳 모두 ‘paradeigma’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플라톤 연구자라면 모두가 동의하고 있듯이 <티마이오스>에서 그 paradeigma, 즉 본은 우주의 원상으로서 플라톤 존재론의 최상위 실재, 즉 이데아적인 일자성을 갖는 그 자체로 진상인 ‘자체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을 바라보면서 물질적 질료에 영혼을 결합하여 최대한 본과 닮은 것으로 우주를 만들어 낸다.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우주는 항성과 행성 등 여럿으로 이루어진 운동하는 다(多)의 세계이되 그 여럿은 각각 본의 일자적 ‘자체성’(kath’ auto on)을 닮은 ‘자기 동일성’(tauton)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다의 세계로서 우주 영혼으로 자기 운동하되 자기 동일성을 온전히 보전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영원히 실재한다. 즉 우주는 절대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체이다.

* 그러나 그에 비하면 인간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신들에 의해 만들어져 우주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가사적(可死的) 존재로서 해체와 소멸을 면치 못한다. 요컨대 우주는 그 자체로 본의 모습 그대로 관철된 영원한 실재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본에 대한 앎은 가질 수 있어도 우주 영혼처럼 그것을 지속적이고도 항구적으로 보존하지 못한 채 신체가 갖는 무규정성으로 인해 평생 무지와 탐욕에 시달리는 가사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행히 우주 영혼을 닮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 있어 그 자신 영혼의 자기 고양을 통해 비록 본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최대한 우주와 닮도록 자신을 도야할 수 있고 그것을 기초로 우주적 조화 원리에 따라 정의로운 나라도 만들 수 있다. 앞서 살폈듯이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이곳 논의에서도 말로 세운 이상적 정치체제는 본이 되고 현실 통치자는 그것을 본으로 삼아 최대한 그것을 닮은 나라를 만드는 제작자가 되며 최대한 본과 닮은 나라는 본의 모상으로서 현실의 조건에서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현실 국가가 된다.

*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우리가 지금 문제 삼는 주제인 이상국가가 현실국가로 가능한지 아닌지, 본이 그대로 실물이 될 수 있냐 없냐의 문제는 애초부터 물음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따질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플라톤에게서 본은 모상에 관여될 뿐 본 그대로 실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기서도 플라톤은 이상 국가의 가능성 문제를 아예 본을 최대한 닮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문제로 제한한 뒤 그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그 최선의 방도로서 결국 철학과 권력의 결합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 국가가 본(本)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말년에 가서 그러한 가능성이 결국 무망함을 깨닫고 <국가>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률>에서 최선의 현실 국가론을 새로 구상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상 국가가 본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국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상 국가는 현실 통치자가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주어진 본일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그래서 <국가>는 이상 국가론이라고도 불린다. <국가>의 이상은 처음부터 현실화가 될 수 없음을 플라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법률>에 가서 그 현실화 가능성을 포기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다만 플라톤은 <국가>에서 가장 최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장차 만들어질 실물의 본이 될 수 있는 이상적 목표와 조건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고 그에 따라 현실에서 그 본을 말로 세운 후 최대한 그것을 닮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 본을 닮은 최선의 나라를 만드는 최선의 방도로서 플라톤이 도달한 것이 철학과 권력의 결합이고 철학자 왕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의 이상적 논의를 기초로 그 연장선 위에서 본으로서 <국가>의 원리를 최대한 현실적 조건에 부합하게 적용하여 관철한 것이 <법률>인 것이다. 비록 <법률>에서는 철학자 왕이라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지만 <국가>와 <법률>의 나라 모두 하나같이 철학과의 결합, 철학자들의 통치라는 기본 원리 위에 서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다만 <법률>에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체득한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탐문을 토대로 <국가>의 입법 취지에 기초해 구체적인 법률들이 발전적인 보완책으로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다. <국가>와 <법률>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의 연관을 순차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한 플라톤의 평생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극이다.

* 이제 처자 공유와 관련한 모든 논의는 다각적인 관점에서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확대되고 고양되면서 마침내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본으로 삼아 최선의 현실적인 나라를 구현해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능력 내지 능력자를 찾는 일로 수렴되고 최종적으로 그 정점에서 드디어 철학과 철학자가 그 방법의 가히 유일하고도 핵심적인 요체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 철학과 권력의 결합 즉 철학자 왕의 등장을 제시하자 대화 참여자들 모두는 큰 충격을 받는다. 급기야 대화 참가자들 모두는 지금 아테네 현실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가히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라고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이것을 모를 리 없다. 사실 바로 이러한 반응이 나올 것을 이미 예상했기에 최대한 그 충격을 다소간 완화하기 위해서 세 가지 파도 등 다각적인 수준의 예비적 논의를 문학적 복선까지 끌어들여 주도면밀하게 전개한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애초에 예상하고 준비한 논의 구도대로 대화 참여자들은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막아서기보다는 그의 동맹군이 되어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호의와 격려로써 할 수 있는 수단을 다해 앞으로 전개될 논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노라 다짐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정치체제에 최대한 가깝게 갈 수 있는 관건으로 이른바 철학자 왕의 배출을 내세운 후 본격적으로 철학자가 어떤 사람이며 왜 그런 사람이 왕의 역할에 부합하는 자연적 적합성을 갖는지 그리고 그러한 철학자 왕을 배출하려면 어떤 조건과 어떤 교육적 환경에 주어져야 하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드디어 <국가>가 포함하고 있는 철학적 논의 영역의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 결국,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철학자 왕의 등장을 통해 가능하고 철학자 왕의 등장은 철학자 교육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가능성의 영역인 한에서 각각의 단계는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성공적인 철학자 양성 교육이야말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현실화를 담보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전제이자 조건이 된다. 그래서 플라톤 <국가> 논의의 정점으로 불리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 논의의 초점은 종국적으로 철학자의 교육 과정에 모여져 있다. 그런데 교육은 본질적으로 능력의 영역이고 능력의 영역은 그야말로 양상론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이다. 본에 대한 온전한 앎을 토대로 영원한 우주 실재를 제작한 데미우르고스와 달리 현실 통치자는 아무리 최상의 교육을 받았어도 절대 실수하지 않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가 될 수는 없다. 그가 도모하는 일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며, 잘 되었다가도 흐트러질 수 있고 흐트러져 있다가도 다시 잘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지 본 또는 선의 이데아를 알아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그 본에 가까운 것을 행위를 통해 실제로 구현해내려는 의지와 능력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일례로 불가에서 어느 누가 성불을 했다고 해도 현실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난관 앞에서 어느 순간 판단을 그르쳐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성불했다고 함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푯대 삼아 다시 자신을 곧추세워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굳건히 그것에로 다가갈 수 있는 하나같은 의지와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교육 과정이 추구하는 가능적 능력 또한 바로 그처럼 끊임없는 분투와 지적 긴장을 통해 최선에 다가가는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이다. 요컨대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구현 가능성은 철학자들의 자연적 본성 그대로 앎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그에 부응하는 철학 통치자의 한결같은 실천을 통해 담보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이란 그 자체로 진정한 앎을 향한 분투 어린 수련과 실천 그 자체인 것이다.

*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현실에서 최대한 그에 가깝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철학자 왕 을 통해서 담보될 수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정치의 지성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담보하는 근본 바탕으로 일정한 수준에서 객관적인 표준과 안정성을 담보하는 법률이나 제도가 아닌 어떤 특정 사람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주장은 법치와 인치의 특징을 비교해서 살필 때 그랬듯이 적지 않은 한계와 논쟁점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20세기 나치즘이나 파시즘 그리고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가 초래한 비극상을 뼈저리게 경험한 현대인들에게 ‘정치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어떤 사람’에 대한 기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독단과 무지를 교묘하게 지혜로 포장하여 대놓고 참혹한 폭정을 일삼는 자’에 대한 불안에 압도되어 가히 무망하기 그지없는 몽상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누구에게 최고 권력을 맡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고 권력을 기능적으로 분산하고 상호 잘 감시할 것인가가 핵심 관심 사항이 되었다. 그리고 통치자와 관련해서도 누가 훌륭한 정치가인가를 찾아 통치자로 내세우는 것보다 누가 위험한 정치가인가를 찾아 통치에서 배제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게다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치적 현실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헤아려 가며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해도 문제해결이 쉽지 않을 판에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은’ 한 가지 방식을 택해 일거에 해결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권력과 지성의 결합을 통한 정치의 지성화를 주장하는 플라톤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조차 그 취지는 사람이 아니라 제도나 법률에 한정하여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굳이 사람에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 어차피 그는 의심스럽기 때문에 – 그 권력자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정치의식 관련 덕목으로 요구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러나 앞서 살핀 대로 플라톤에게서 본과 모상, 이상과 현실은 서로가 각기 독립적인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공존하는 것인 만큼 플라톤 정치철학 전체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본으로서 <국가>의 이상 국가론만이 아니라 최대한 그에 닮은 모상으로서 <법률>의 현실 국가론을 동시에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위의 비판은 <국가>에 대한 비판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일정 부분 <법률>에서 고려되고 해소되고 있다.  – 끝 –

 

* 다음 주제 : B.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480a)

플라톤의 <국가> 강해(5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6)

 

  1. 두 번째 파도(II), 처자 공유의 목적 : 나라의 결속, 고통과 기쁨의 공유(461e-466d)

 

* 우선 이곳의 논의는 논의 구도 상 앞서 제시한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가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반임을 밝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는 그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핵심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부분의 논의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적 목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 점은 플라톤 스스로 주도면밀하게 구성한 이곳 전후의 논의 구도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두 번째 파도를 논의하기 전에 플라톤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어떤 문학적 구성으로 어떻게 세 가지 파도와 관련한 전체 논의 국면을 이끌어 가고 있는지를 미리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 중 양성평등과 처자 공유 문제에 대해 청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제5권에 들어서며 새로운 주제 전환을 시도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그 양성평등과 처자 공유의 문제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크게 곤혹스러워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방식으로 그 문제 해명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임을 크게 부각한다. 특히 처자공유의 가능성과 관련한 문제는 대화 참가자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 자신 논의 자체를 회피하고 싶을 정도로 매우 당혹스럽고 난감한 주제로 제기된다.

2)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난감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자유로운 생각의 날개를 펼친 상태에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것은 가능성은 젖혀두고서라도 일단 이론적으로는 처자 공유의 문제가 공동체로서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과 얼마나 직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처자 공유의 가능성은 그 자체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라는 핵심가치의 구현 가능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3) 이에 따라 이 가능성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세 번째 파도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 예상되는 논의 국면에서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들이 맞이하게 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길게(466e-471c) 늘어놓는다. 이러한 주제의 일탈은 처자 공유라는 주제 자체를 여전히 곤혹스러워하는 소크라테스의 심리 상태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고대하는 대화 참여자들로 하여금 당혹감과 조급함을 불러일으키려는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다.

4) 아니나 다를까 글라우콘은 제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재촉하고 소크라테스는 마지못해 세 번째 파도인 가능성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요컨대 이곳 논의 국면에서 플라톤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를 최대의 관심사로 극대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자 공유의 가능성 문제는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가능하면 정의로운 나라의 핵심가치가 구현 가능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처자 공유의 가능성 문제를 슬그머니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 가능성의 문제로 바꾸어 말하는 것도 그 두 가지 가능성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5) 그러면 그 가능성은 어떻게 주어질까? 다음 강해에서 다루어지겠지만 그 가능성은 단적으로 ‘철학자 왕’을 통해 주어진다. 이렇게 보면 결국 세 파도와 관련한 이곳 논의 국면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관한 관심을 최고도로 끌어올린 다음 그 절정에서 그 불가능에 가까운 난관을 해소하는 종국의 열쇠로서 철학과 철학자 왕의 문제를 <국가> 논의의 최고 정점으로 끌어 올리려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6) 이로써 플라톤이 왜 <국가> 전체 논의 구도에서 제5권을 새로운 논의 전환점으로 삼으면서 왜 세 파도를 끌어들였고 또 그 논의 전환점을 통해 무엇을 핵심 주제로 삼으려 했는지가 비로소 밝혀진다. 요컨대 세 가지 파도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제5권에서 플라톤이 이제 집중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는 곧 철학과 철학자 왕의 문제이고 그에 따라 제5권-제7권은 정의로운 나라를 구현하는 유일한 토대로서 그 철학자 왕을 출현시킬 수 있는 철학과 그 교육 과정으로 채워진다. 이렇게 보면 정의로운 나라(제2권-제4권)의 구현 가능성의 문제는 그 철학자 왕의 가능성의 문제(497a-502c)가 되고 종국적으로는 철학자 왕을 담보하는 이상적인 교육의 문제(502c-541b)로 귀착한다.

* 그러나 이러한 교육 과정이 과연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할까? 교육은 능력의 문제를 본질로 하고 있고 능력은 논리적 필연성이 아닌 가능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 최소한 가능성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없다. 세 번째 파도를 다루는 부분에서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가 다만 본(本: paradeigma)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리고 그럼에도 그것이 실천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도 결국 그것에 있다. 플라톤의 철학 역시 지혜를 향한 사랑으로서 ‘사랑’ 즉 본질적으로 정신의 자기 고양을 통해 끊임없이 선의 이데아, 즉 지고의 진리에 다가가는 ‘분투’의 철학인 것이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해당 부분 강해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 이상이 세 파도와 관련한 논의 국면 전체가 갖는 기본 구도와 성격이다. 그러면 이제 서두에서 밝힌 취지에 맞게 그러한 논의 국면의 전체적인 이해를 배경에 두고 오늘 강해의 주제인 처자 공유의 목적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461e-466d]

* 플라톤은 우선 나라의 최대선이 나라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이고 그러한 나라의 결속이 즐거움과 괴로움의 공유에 있음을 밝히고 그러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 나라 수립을 위해서 가장 큰 좋은 것, 이것이 입법자가 법을 세울 때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으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συνδῇ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διασπᾷ 하나가 아니라 여럿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462a) 나라를 결속시켜 주는 것은 즐거움ἡδονῆ과 괴로움λύπη의 공유κοινωνία이다. (462b) 최대다수πλεῖστοι가 동일한 것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으로ἐπὶ τὸ αὐτὸ κατὰ ταὐτὰ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면, 그런 나라가 가장 잘 경영되는 나라이다.(462c)

*‘우리 중 누군가가 손가락을 찌었을 경우, 몸 전체를 거쳐 영혼까지 뻗어 있으면서 안에 있는 다스리는 것에 의해 단일한 조직σύνταξις을 이루는 전체 공동체πᾶσα ἡ κοινωνία가 손가락 찧은 것을 감지하고, 부분의 고통에 대해 전체가 모두 함께 아픔을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를 갖춘 나라가 경영되는 방식이다.(462c-d) 다시 말해 ‘시민들 중 한 명’ἡ τοιαύτη πόλις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사람이 겪은 일을 자기의 일이라고 주장하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는 통치자들과 민중δῆμος이 서로 시민πολίτης들이라고 부른다.(462e-463a)

* 그러나 다른 많은 나라의 민중들은 통치자를 군주δεσπότης라고 부르고 민주정체를 갖춘 나라에서는 그냥 그대로 통치자ἄρχων라고 부른다.(463a) 이에 비교해 우리의 나라에서 민중들은 통치자들을 시민들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구원자σωτήρ들이자 조력자들ἐπίκουροι이라고 부르고 통치자들은 민중을 보수를 주는 자μισθοδότης들이자 부양자τροφεύς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통치자들은 민중을 노예δοῦλος라고 부른다.(463b) 다른 나라에서는 통치자들 서로를 동료 통치자συνάρχων라 부르지만 우리의 나라에서는 동료 수호자συμφύλαξ라고 부른다.(463b)

* 다른 나라 통치자들의 경우 어떤 이들은 친족οἰκεῖος이라고 부르고 다른 이들은 남ἀλλότριος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나라 수호자들은 누구를 만나든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또는 이들의 자손이나 조상을 만난 것으로 여긴다.(463c) 이 나라 통치자들은 이름만 친족이 아니라 이름에 따르는 모든 행동도 친척을 대하듯이 하도록 법을 정하여 어렸을 때부터 서로에 대해 공경하고 봉양하며, 부모에게 순종해야 함 등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하게 한다.(463d)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의 일이 잘되거나 잘못되었을 때 ‘내 일이 잘되었다’거나 ‘내 일이 잘못되었다’고 모두 한목소리를 낸다.(463e)

* 이러한 신념δόγμα을 갖고 이런 식의 표현을 사용하다 보면 우리의 시민들은 동일한 것을 최대로 공유하고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괴로움과 즐거움을 최대로 공유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가장 주된 이유는 이 나라에 마련된 다른 제도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더해 수호자들이 여자와 아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464a) 즉 우리의 나라에서 가장 큰 좋은 것의 원인은 조력자들이 아이와 여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464b)

 

[464b – 466d]

* 그런 연후 이제 소크라테스는 처자 공유를 기반으로 가능해진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 진정한 나라의 수호자들은 집도 토지도 다른 어떤 소유물도 사적으로 갖지 말아야 하며, 다만 수호의 보수로 다른 이들에게서 양식을 받아 그들 모두가 공동으로 소비해야 한다.(464b) 참된 수호자란 이 사람은 이것을, 저 사람은 저것을 ‘내 것’이라고 부르면서 남들과 상관없이 혼자 여자와 아이도 따로 가지고 사사로운 일들에 대해 사사로운 즐거움과 아픔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것’에 대한 하나의 신념으로 모두가 동일한 것을 목표로 삼고, 할 수 있는 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공유하는 사람이다.(464c) 요컨대 그들은 자신의 몸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소송이나 고소도 없으며 돈이나 자식과 친척으로 인한 내분 또한 없다.(464d-e)

* 그들 사이에서 폭력이나 폭행으로 고소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며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 또는 부모와 자식 간에 폭력을 쓰거나 모욕을 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두려움 δέος과 염치αἰδώς가 그런 일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법으로 인해 모든 영역에서 이 사람들은 반목함이 없이 서로서로 평화εἰρήνη롭게 지내게 될 것이다.(464e-465b)

* 그리고 이들이 자기들끼리 내분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라의 다른 계층 사람들이 이들과 반목하거나 혹은 자기들 서로 간에 반목을 하게 될 위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아래와 같은 아주 사소한 나쁜 것들로부터도 해방될 것이다. 즉, 가난한 자들이 부자에게 아첨하는 일, 아이 양육과 하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벌이에서 생기는 곤란함과 고생, 즉 여기서 좀 빌리고 저기서 좀 떼먹는 등 온갖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아 아내나 하인들에게 맡겨 가계를 꾸리도록 하는 일 등 누가 봐도 뻔하고 비루한ἀγεννής 일 따위도 없을 것이다.(465c) 이들은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가 사는 복된μακάριος 삶보다 더 복되게 여겨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경기 우승자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은 수호자들이 가진 것 중에 작은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호자들이 거둔 승리는 더욱 훌륭한 것이며, 그들은 나라를 구한 명예를 누리고 공공기금으로 자신은 물론 자식까지 삶의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되어 죽어서도 걸맞은 장례가 치러진다.(465d-e)

* 시민들의 것 모두를 가질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수호자가 과연 행복한가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나라 안의 한 집단에 주목해서 그 집단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할 수 있는 한 행복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466a) 그리고 우리의 조력자들의 삶이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들οἱ Ὀλυμπιονῖκαι의 삶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더 나은 것으로 드러났다면, 그것은 구두장이들의 삶이나 다른 어떤 장인들의 삶, 농부들의 삶 등과는 비교가 안 된다.(466b) 수호자들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몰지각하고 유치한 믿음에 사로잡혀 우리가 이야기한 삶을 고수하지 못하고 나라 안의 모든 것을 권력을 행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쪽으로 이끌린다면, 그는 ‘반이 전체보다 많다’πλέον ἥμισυ παντός고 이야기한 헤시오도스가 진실로 지혜로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466b-c)

* 여자들은 남자들과 함께 교육받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다른 시민들을 수호하는 일을 공유해야 한다. 여자들이 남자들과 공유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전시이건 아니건 그러한 공유는 최선의 것을 행하는 것이자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 이제 남은 문제는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 인간에게도 그러한 공유가 생기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어떻게 가능한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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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3b 조력자들 : 이곳에서 조력자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epikouroi는 수호자 계층에서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을 구분하면서 전사들을 통치자의 ‘보조자들’ 또는 ‘조력자들’로 부를 때(414b, 416a, 420a 등등) 사용한 말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곳에서는 민중들이 통치자들을 부를 때 쓰는 말로 나온다. 즉 수호자들은 통치자들을 보조하는 사람이고 통치자들은 민중들을 보조하는 사람이다.

* 464b ‘우리의 나라에서 가장 큰 좋은 것의 원인은 조력자들이 아이와 여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466a ‘우리의 조력자들의 삶이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들의 삶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 :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왜 ‘수호자들’이란 말을 쓰지 않고 ‘조력자들’이라는 말을 썼는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J. Adam 해당 부분 note 참고) 플라톤의 처자 공유가 수호자 계층 가운데 통치자들이 아닌 전사 계급 즉 ‘보조자’ 내지 ‘조력자’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자 공유와 관련한 대부분 문맥에서는 일관되게 수호자들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이 부분에서는 바로 앞서 통치자들을 조력자들로 불렀던 것에 기초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 465c ‘가난한 자들이 부자에게 아첨하는 일, 아이 양육과 하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벌이에서 생기는 곤란함과 고생, 즉 여기서 좀 빌리고 저기서 좀 떼먹는 등’ : 아테네 당대 현실의 경제적 실상을 보여주지만, 가난이 초래하는 일상의 양태로서 오늘의 현실과도 크게 다를 게 없다.

* 465c 온갖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아 아내나 하인들에게 맡겨 가계를 꾸리도록 하는 일 누가 봐도 뻔하고 비루한 일 따위도 없을 것이다 : 수호자 집단 내에 하인이나 노예도 없음을 보여준다.

* 466a ‘시민들의 것 모두를 가질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수호자가 과연 행복한가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 제4권을 시작하면서 아데이만토스가 제기한 비판이다.(419a)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들의 관점에 서 있다.(<정치학> 1264b15-24 참고)

* 466b ‘반이 전체보다 많다’ : 헤시오도스 <일과 나날> 40 참고. 권력자들이 모두 나라의 반을 갖겠다고 한다면 그 모두를 합칠 경우, 전체를 훨씬 초과할 것이다.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이 나라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냉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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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이곳의 논의는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로 대표되는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곳에서 제시된 이상적 공동체의 핵심 요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입법의 목표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 하나가 아니라 여럿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2) 나라를 결속시켜 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민들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3) 통치자들은 민중을 구원하고 지키는 조력자이고 민중은 통치자들에게 보수를 주고 부양하는 자로서 서로를 똑같이 시민들로 불러야 한다.

4) 통치자들은 서로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 등 친족으로 부르고 서로를 공경하고 봉양하며 서로에 대해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해야 한다.

5) 수호자들은 집과 토지, 자식과 배우자 등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6) 통치자들은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영역에서 시민들과 반목함이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위와 같은 플라톤의 주장은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지만 앞선 강해에서도 여러 번 소개되었듯이 다양한 형태의 정치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기존의 논쟁들을 염두에 두면서 다시 한번 필자 나름의 관점에서 이 부분에 대해 해석을 더 하자면 아래와 같다.

 

* 1)의 내용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흔히들 내거는 총화단결이라는 슬로건을 떠올리거나 일체의 개인행동을 금지하고 나라 전체를 위해 하나의 대오를 강조하는 군국주의적인 획일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상은 플라톤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 플라톤의 나라에서 개인들은 각기 자연적 본성에 따라 서로 다른 각기 고유의 역할을 갖고 그들 간의 분업적 의존을 통해 각기의 본성적 욕망을 최대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획일적이 아니다. 여기서 하나의 나라라는 것은 그러한 다양한 역할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음악에서도 조화는 획일적인 같은 음들이 그저 하나같이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음들이 각각의 고유한 음가를 가진 상태에서 마치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플라톤의 나라에서 하나 됨이란 같은 것들끼리의 획일적인 통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자기다움을 보존하는 것과 그것들 상호 간의 조화를 통해서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통치의 목적은 통치를 수행하는 권력자의 이익이 아니라 통치 대상인 시민의 이익과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의 달성을 좋아하는 것이 통치자의 본성인 한에서 통치자 또한 충실한 통치의 수행을 통해 그 스스로 행복을 얻는다.

* ‘누군가가 손가락을 찧었을 때 단일한 조직을 이루는 전체 공동체가 아픔을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462c-d)라는 말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유기체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평가를 낳기도 했다. 20세기 전체주의자들이 내건 국가유기체설에 따르면 개인과 나라의 관계는 유기체에서 유기체를 구성하는 여러 부위들과 몸 전체의 관계와 동일하다. 유기체를 구성하는 각 부위는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그 역할과 기능 또한 자신들 개개의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전체로서 몸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개인은 국가를 떠나 결코 독립적일 수 없으며 역할과 기능 또한 개인 자신이 아니라 전체로서 국가의 보전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단일 생명체가 생명을 잃으면 그것을 구성하는 부위도 존재할 수 없듯이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 그리고 생체 부위들 일부가 손상되거나 기능을 상실해도 생명체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듯이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개인들은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고 희생해야 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나라는 과연 이와 같은 국가유기체설에 토대를 둔 전체주의 국가일까? 일단 유기체라는 말만 고려한다면 분명 플라톤의 나라는 유기체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개인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영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고 나라를 구성하는 계층들 또한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플라톤의 나라에서 그 유기체를 구성하는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의 각 계층이다. 개인 차원에서도 유기체적 특성을 구성하는 것은 신체적 부위들이 아니라 개인 내부의 각기 다른 영혼들이다. 그리고 개인들은 분업적인 상호 의존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이지만 자기 욕망을 희생하는 방식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 욕망을 최선으로 발휘하는 방식으로 참여하고 그것을 통해 개인 고유의 행복을 누리고 동시에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하고 의지한다.

* 무엇보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국가>의 논의 자체가 어떤 개인이 더 행복한가를 주제로 출발하였으며 나라에 대한 논의는 그 주제를 보다 확대해서 분명하게 살피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개인 내부 영혼들 간의 조화에 기초한 개인 자신의 행복이 논제로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고려하면 플라톤의 나라에서 ‘개인은 단지 나라의 이익을 위한 부속물에 불과하다’ 또는 ‘개인들은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은 사회적으로 상호 의존적 존재이므로 개인의 행복 또한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 담보된다는 앎 즉 절제의 덕을 토대로 기꺼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나라에서는 절제라는 그러한 공동의 덕목 아래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수록 가장 행복한 개인이 되고 또 동시에 가장 충실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앞선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이 보고 있었던 것은 개체성의 말살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을 통하여 개체성을 가능한 최상의 정도로까지 끌어 올리는 일이었다.’

* 2)의 내용에서 ‘시민들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 이 말에서 특히 ‘시민들 중 한 명’이란 표현은 플라톤의 나라가 그 자체로 얼마나 국가주의와 거리가 먼지를 잘 보여준다. 정의로운 공동체란 특정 계층이 다른 계층의 희생 위에서 행복을 누리는 나라가 아니라 최대다수가 동일한 것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면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체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나라이다. 그러한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서 나라가 나라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들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발상은 어디에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 3)의 내용 또한 플라톤의 나라를 권력에 따른 철저한 위계 사회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통치자와 민중은 군주와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각기 자신의 고유한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함께 정의로운 나라를 일구어가는 서로가 똑같은 시민의 관계이다.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부를 탐하는 자들이 아니라 단지 민중의 안녕을 보전하고 그들을 보조하는 대가로 민중이 기꺼이 제공하는 보수를 받는 자들이다. 보수라는 말이 사용자가 피고용인에게 주는 대가라는 점에서 굳이 말하자면 플라톤의 나라에서는 민중들이 사용자이고 통치자들은 피고용인인 셈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관계를 사회계약론적 관점에서 이해해서도 안 된다. 근대사회 이후에 성립된 사회계약론은 이기적 개인들의 배타적 이해관계 속에서 상호 의심을 바탕으로 수많은 제한 규정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관계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각기 고유한 역할을 토대로 상호 호혜의 관점에서 자발적이고도 협동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관계이고 무엇보다 이기적 개인이 아닌 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의심이 아닌 덕과 믿음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관계이다.

4)의 내용은 처자의 공유가 가져다주는 이로움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이로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내용은 1)에서 최선으로 언급된 ‘나라의 내분을 막고 하나 됨’이라는 입법의 목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이 나라에서 가장 나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나라의 분열 특히 그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통치자들의 내분이다. 나라의 최악을 초래하는 통치자들의 내분은 역사적인 사실들에 기초해보더라도 기본적으로 권력과 재력 등 특권의 부당한 독점이 주된 원인이고 그 특권의 중심에는 가문과 가족 등 혈연과 가족주의로 뭉쳐진 기득권 집단들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를테면 플라톤이 직접 겪은 아테네 히피아스 참주정과 시켈리아의 디오니소스 참주정 모두 직계 가족 간 세습으로 이루어진 폭압적 참주정이었다. 오늘날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가까이 우리와 관련해서도 북한 역시 3대에 걸친 부자 세습으로 이루어진 독재국가이다. 오늘날 막강한 힘을 갖고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른바 재벌들 또한 대부분 부자간 세습을 통해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대규모 종교집단에서도 세습에 의해 권력이 이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기득권층이 누리는 부유함 또한 대부분 가족 간 상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상속 과정에서 그들 서로도 분열되지만, 그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빈부의 사회적 양극화를 초래하면서 그 자체로 사회 분열의 원인이 된다. 요컨대 나라나 사회 또는 개인들이 서로 갈라져 분열하고 싸우는 원인 한 가운데는 가족이기주의와 물질적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진 자들일수록 그러한 가족이기주의가 초래하는 피폐상은 당사자 개인들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불행을 낳는다. 우리나라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도 권력자들과 그 가족들의 사리사욕과 폭행, 권력의 남용과 책임회피가 나라가 분열되든 말든 아무런 두려움이나 염치없이 마치 당연한 권리인 양 뻔뻔하게 자행되고 있다.

* 한편 가족이기주의가 초래하는 폐해가 심대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가족주의가 갖는 혈연적 친밀감과 연대감은 그 집단의 긍정적인 결속에 큰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가족이기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배제하기 위해서 수호자들에게 일상 형태의 가족 구성은 철저히 금하지만 그 대신 4)에서처럼 수호자 집단의 짝짓기를 통해 출산된 공통의 자식들과 친족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친밀한 가족 내지 친족으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이른바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를 통해 수호자 집단 고유의 가족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1262a-b)에서 플라톤이 가족 확장을 통해 얻고자 하는 구성원들 간의 친애(philia) 사랑은 마치 많은 물을 섞으면 농도가 묽어지는 것처럼 오히려 줄어들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굳이 처자의 공유는 농부 계급에서 더 유용하고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정한 신념과 소명으로 무장된 수호자 집단의 경우 오히려 일상의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가족적 연대감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기될 수 있다. 분명 플라톤이 주장하는 수호자 집단 내 가족의 확장은 그러한 생각에 기초해 있다.

* 5)의 내용은 많은 사람에 의해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 체제로 평가하는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만약 가장 소박하고 단순하게 공산주의를 규정하여 ‘사적 소유를 제한하고 공공의 소유에 기반을 둔 정치 사회 경제 공동체 형성에 관한 사상’으로 정의한다면 분명 플라톤의 나라는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정의되어 왔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로 규정하는 문제 역시 그 자체로 애매함과 불분명함을 안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특정 시대 특히 근대 마르크스주의 또는 현실사회주의가 표방하고 있는 공산주의에 준거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나라와 현대 공산주의 국가 간의 공통점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흔히들 일컫는 사적 소유의 금지만 해도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경우 개인 수준에서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금지하고 있는 것은 생산 수단이 아니라 재산의 사적 소유의 금지이고 그것도 특정 수호자 집단에만 한정된 것이다. 수호자 집단을 제외한 일반 시민들의 경우는 생산 수단을 비롯하여 재산과 가족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일정 부분 부도 축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나라는 현대적 의미의 공산주의와 거리가 멀고 굳이 연관시킨다고 해도 정치체제 전반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나라의 소수 권력자 집단에 국한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나라들 대부분은 정치체제와 상관없이 정치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거나 권력자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특권을 누리는 것을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플라톤의 나라는 권력자들에게 사적 탐욕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현대의 여느 국가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플라톤의 구상은 그 금지의 수준이 권력자 집단 내 가족제도의 폐지까지 포함할 정도로 극단적이다. 그러나 가히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을 금하고 있는 플라톤의 나라는 구현 가능성 이전에 그 철두철미함 그 자체로 정치권력이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지향해야 할 궁극적이고도 이상적인 도덕적 목표가 무엇인지를 좀 더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 플라톤이 제시하고 있는 위와 같은 공동체의 핵심가치와 목표를 아래와 같이 풀어 쓸 경우, 정치체제와 크게 상관없이 최소한 명분에서 그 나라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행동 강령으로 가히 손색이 없다.

1) 나는 나 자신과 가족과 관련한 사사로운 이익을 좇지 않는다.

2) 나는 정해진 보수 이외에 금품이나 향응을 받지 않는다.

3) 나는 시민 한 사람의 고통과 기쁨을 나 자신의 고통과 기쁨으로 여긴다.

4) 나는 시민 위에 군림하지 않고 같은 시민으로서 시민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5) 나는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시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힘쓴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는 수호자들끼리 소송하거나 고소하는 일, 폭력이나 폭행을 저지르는 일도 없고 돈이나 혈연으로 인한 내분 또한 없다. 그리고 그에 따라 수호자들과 다른 계층들 사이에도 반목이 없고 다른 계층들 내부 사람들끼리도 반목할 위험이 없다.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 집단이 처자 공유를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초로 삼았을 때 갖게 될 이로움을 이렇게 언급한 후 수호자들의 통치 목표가 이미 제4권에서 말한 것처럼(419a) 나라 안 한 집단의 행복이 아니라 나라 사람들 모두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나라가 갖는 이러한 이로움은 모두 모두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교육받고 함께 아이들을 양육하며 함께 다른 시민들을 수호하고 함께 서로를 공유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통치의 본성이 시민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통치자의 본성에 부합하는 한, 통치자 자신 또한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명예로운 삶을 누린다고 이곳 논의를 마무리 한다.

* 이곳 서두에서 밝힌 대로 이곳의 논의는 논의 구도상 앞서 제시한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가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반임을 밝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그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핵심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이 부분의 논의는 <국가> 논의 구도 전체 속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처음 대화 참여자들이 요구한 대로 이런 이상적인 나라를 담보하는 처자의 공유가 어떻게 가능한가. 즉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 예상되는 논의 국면에서 뜬금없이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들이 맞이하게 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길게(466e-471c) 늘어놓는다. 앞서 미리 밝힌 대로 이러한 주제의 일탈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를 여전히 곤혹스러워하는 소크라테스의 심리 상태를 보여줌과 동시에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기를 고대하는 대화 참여자들과 독자들로 하여금 당혹감과 조급함을 불러일으키려는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다. 세 가지 파도가 논의의 주제임을 고려하면 이 부분의 논의는 일종의 여담에 해당한다. 그럼 다음 강해에서 이 부분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끝-

* 다음 강해 : 2. 두 번째 파도(III) : 전쟁에 관한 일(466d-471c)

플라톤의 <국가> 강해(55)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5)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1.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두 번째 파도(1) : 처자의 공유(457b-461d)

 

[457b-461d]

* 양성의 평등한 역할과 관련한 첫 번째 파도를 넘어선 후에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헤쳐 나가야 할 파도로서 이른바 처자의 공유 즉 수호자 집단에서 배우자 공유의 문제를 제기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수호자φύλαξ들과 여성수호자φυλακίς들이 모든 일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가능하고δυνατά 이롭다ὠφέλιμα는 점에서 우리의 주장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 후 바로 처자의 공유 문제를 꺼내든다.(457b-c) 처자를 공유한다는 것은 ‘여자들 모두가 이 남자들 모두에게 공유되어서κοινός 어떤 여자도 어떤 남자와 사적으로ἰδίᾳ 함께 살지 않으며 아이들도 공유되어서 어떤 부모도 자식들이 누군지 알지 못하고, 어떤 아이도 부모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457d)

* 이에 글라우콘은 그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에 대해 의심을 표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겠지만 이로움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가장 크게 좋은μέγιστον ἀγαθὸν 것임은 논쟁ἀμφισβήτησις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457d)

* 그럼에도 글라우콘은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 많은 논쟁이 불가피하니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에 대해 논의해주길 요구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이로움에 관한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가능성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유익함도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457e) 다만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이 허락만 한다면 게으른 사람들이 혼자 걸어 다니며 자신만의 생각의 잔치를 벌이곤 하듯이 지금은 그것들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고서, 그것들의 구체적인 방책이 무엇이고 그것의 실제 운용이 나라와 수호자들에게 어떤 근거에서 가장 이득이 되는지를συμφορώτατ᾽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458a-b)

* 글라우콘이 그것을 허용하자 소크라테스는 우선 배우자 공유의 문제가 통치자에 의해 어떻게 법제화되고 실제로 운용되는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남자들을 선발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능한 한 그들과 본성이 같은ὁμοφυής 여자들을 선발하여 주거와 식사를 공동으로 하고 누구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체단련이나 그 밖의 양육을 받으면서 함께 지내게 한다.(458c) 그렇게 어울리다 보면 이들은 타고난 필연성 즉 성적인 필연성ἐρωτικός ἀνάγκη에 의해 서로의 교합μίξις으로 이끌리게 된다.(458d)

2) 그런데 행복한 이들의 나라에서는ἐν εὐδαιμόνων πόλει 이 서로의 교합이 무질서하면 경건한ὅσιος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짝짓기γάμος는 최대한 신성한ἱερός 짝짓기이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이로운 짝짓기가 신성한 짝짓기이다.(458e)

3) 가장 이로운 짝짓기는 동물들의 경우에서 제일 나은 새끼를 얻으려고 할 때 그리 하듯이 인간 종τὸ τῶν ἀνθρώπων γένος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능하면 한창때ἐξ ἀκμαζόντων 혈통 좋은 자들끼리 짝짓기를 해야 최고의ἄκρον 통치자들을 얻는다.(459a-b)

4)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의사가 환자를 위해 약 처방을 할 때 그러하듯이 통치자들이 과감하게 처방을 해야 하는데 그 처방은 곧 거짓ψεῦδος과 속임수ἀπάτη이다. 즉 통치자들은 피통치자들의 이로움을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많이 써야 한다. 짝짓기와 아이 낳기παιδοποιία의 영역에서 그것은 ‘옳음’τὸ ὀρθὸν이고 그 크기 또한 특히 작지 않다.(459c) 왜냐하면 가장 뛰어난 남자와 여자들끼리 최대한 자주 관계를 갖게 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막아서 우수한 자손들을 낳아 무리ποίμνιον가 가능한 한 최고의 상태가 되고 수호자 집단ἀγέλη τῶν φυλάκων 또한 가능한 한 가장 내분이 없는ἀστασίαστος 상태가 되게 하려면 이 모든 일이 통치자들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459d-e)

5) 그리고 이러한 속임수는 축제나 제의 몇을 법으로 정해서 거기에서 신랑νυμφίος과 신부νύμφη들이 만나도록 하되 짝이 맺어질 때마다 그 못난 사람들이 통치자가 아니라 운τύχη을 탓하도록 교묘한κομψός 제비뽑기κλῆρος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460a) 그리고 이때 그렇게 맺어지는 짝짓기에 어울리는 찬가들도 지어야 하고 짝짓기의 수가 얼마가 되게 할지도 정해져야 한다. 전쟁이나 질병이나 그런 모든 것들을 잘 고려해서 가능한 한 남자들의 수를 동일하게 유지하도록 하고,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나라가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전쟁이나 그 밖의 영역에서 뛰어난 이들에게는 특전γέρας과 상ἆθλον 특히 여자들과 잠자리συγκοίμησις를 같이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기회ἐξουσία를 아낌없이 주어 이런 자들로부터 씨를 받아σπείρωνται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기르고 양육하는 관리들ἀρχαὶ을 두어야 한다.(460b)

7) 이때 뛰어난 자들의 자식들은 그들이 받아서 양육소σηκός로 데려가 나라의 어떤 구역μέρος에 따로 떨어져 거주하는 보육인τροφός들 손에 맡기고 못난 자들의 자식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의 자식이라도 불구인ἀνάπηρος 경우에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ἀπόρρητος 은밀한ἄδηλος 장소에 적절하게 감추어κατακρύψουσιν 두어야 한다. 그리고 엄마들이 젖이 불면 양육소로 데리고 가되 자기 자식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고 그 밖에 힘든 일은 유모나 보모에게 넘겨주도록 해서 엄마들을 돌보게 해야 한다.(460c-d)

8) 여자는 20살부터 시작해서 40살까지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고, 남자는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한창때 25세를 지나고 나면 그때부터 55살까지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460e)

9) 만약 이와 달리 이들보다 나이가 많거나 나이가 적은 사람이 공동체τὸ κοινὸν를 위한 출산에 끼어들어 몰래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그러한 제사θυσία와 기원εὐχή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무절제ἀκράτεια를 수반한 어둠σκότος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다.(461a) 그리고 아직 아이 낳는 시기에 있는 남자라도 통치자의 주선을 거치지 않고 적령기의 여자와 관계를 가지면 동일한 법이 적용된다. 그가 나라에 신성하지 않고 공인되지 못한 서출νόθος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461b)

10) 그러나 그 여자들과 남자들이 아이 낳을 적령기를 벗어나면 자식이나 손자, 부모뻘 되는 사람을 제외하고 그들이 원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해도 되되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된다. 만일 태아나 아기가 생긴다면 그런 아이에게 양육이 없을 것임을 알게 해야 한다.(461c)

11) 이 경우 짝짓기가 이루어진 후 열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달에 태어난 자식들은 누구든 그들 모두의 아들이나 딸이고 그들은 아버지가 되고 마찬가지로 얘들의 자식들은 손자 손녀가 되고 그들은 다시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자식을 생산하던 시기에 태어난 자식들은 모두 형제와 자매라고 불러야 한다. 이들끼리 교합은 금지되며 다만 남매지간의 경우는 제비뽑기가 그렇게 나오고 퓌티아 사제가 승인할 경우 동침이 허락된다.(46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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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교합’μίξις 2)에서 ‘짝짓기’γάμος란 말은 각각 ‘성교’와 ‘결혼’으로도 옮길 수 있는 말이다. 이들의 짝짓기는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축제와 제의를 동반하는 신성한 결혼 의례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 4)에서 거짓과 속임수가 ‘크기가 작지 않은 옳음’인 이유는 장차 수호자가 될 우수한 자손들을 출산할 수 있는 방책이자 무엇보다도 그들의 내분을 막을 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내분을 막고 결속을 이루는 것은 나라의 ‘최대선’τὸ μέγιστον ἀγαθὸν이다.(462a) 곧이어 밝혀지겠지만 처자 공유가 가져다주는 가장 큰 이로움 또한 나라의 내분을 막고 결속을 이루는데 있다.

* 5)에서 ‘한 나라가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나라의 인구를 적절히 유지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곳은 수호자 집단과 관련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다소 어색하다. 수호자 집단은 전체 인구 비중에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423c에서 나라 전체의 크기와 관련해서 이미 같은 말을 했음을 고려하면 아마도 생산자 계층의 인구수도 당연히 통제 대상임을 전제하고 한 말일 것이다. 우수한 수호자들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언급도 앞의 언급과 다소 상충하지만, 이 말은 기본적으로 전체 인구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생학적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 6)에서 ‘아이를 기르고 양육하는 관리들ἀρχαὶ’ : 여성의 역할에서 가사 노동의 분리는 기본적으로 계급사회에서 특권 여성이 노예들에게 고생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에 따라 육아 및 가사 노동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서 가사 노동은 별도의 관리들 즉 분업에 따른 전문적인 직업군에게 위탁된다. 여성의 사회참여에 따라, 가사 노동이 분리되고 또 그에 따라서 가사 노동이 일정한 직업군으로 전문화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양태와 일정 부분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의 가사 노동은 공적 노동으로 그 대가가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무려나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비록 소수 집단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온전한 의미에서 여성과 가사 노동의 분리가 제도적으로 관철된 최초의 사회이기도 하다.

* 7)에서 ‘못난 자들의 자식과 불구자’ : 불구로 태어난 아기들을 유기하는 것(apothesis)은 당대 아테네의 일상화된 관습이었다. 그러나 영아유기는 이유를 불문하고 용납해서는 안 될 반인권적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못난 아이들’의 경우 어떻게 했는지는 여기서 불분명하다. 다만 <국가>의 주장을 요약하고 있다는 <티마이오스> 19a의 내용에 따르면 ‘못난 자들의 자식들은 도시의 다른 영역으로 은밀하게 분산하여 키우되 아이들이 자라나는 동안 항상 그들을 지켜보면서 가치 있는 아이들은 다시 올려보내고 거꾸로 우수한 자들의 자손도 열등해질 경우 아래로 내려보내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도시의 다른 영역’ 또는 ‘아래’가 의미하는 것은 앞서 건국 신화 부분에서도 살폈듯이 생산자 계층 또는 그들의 생활 영역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이상 국가에서는 불구가 아닌 한 이른바 못난 아이들도 양육과 교육의 결과에 따라 우수해질 경우 다시 수호자가 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나라의 분업적 구성원의 하나로 그에 적합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 11)의 내용은 처자의 공유가 분명 가족의 해체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가족의 공동체적 확장일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곧이어 처자 공유의 이로움을 다루면서 이기적 가족주의의 해체가 가져다주는 장점을 공동체의 확장 차원에서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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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상국가에서 법으로 정해야 할 처자 공유란 그 내용이 ‘남성 수호자들과 여성 수호자들 모두가 서로 배우자가 되고 태어난 아이들 또한 그들 모두의 자식으로 공유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앞서 다룬 양성의 평등에 관한 첫 번째 문제처럼 가능성과 유익성의 측면에서 두 번째 문제 즉 처자 공유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지만 글라우콘은 가능성은 물론 유익성도 의심스럽다며 이의를 제기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유익성과 관련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가장 크게 좋은 것’이어서 그 문제는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가능성만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이로움마저 논쟁거리가 된다는 말에 가능성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우선 처자 공유의 유익성에 대한 논의부터 꺼내든다. 이로써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두 번째 파도는 크게는 처자공유의 문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처자 공유에 어떤 이로움이 있는가의 문제로 구체화 되고,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는 이상적인 정치체제 자체의 가능성의 문제로 슬그머니 확대되면서(472b) 소크라테스가 해명해야 할 세 번째 파도를 구성하게 된다. 첫 번 째 파도보다 두 번째 파도가 그리고 두 번째 파도보다 세 번째 파도가 더 큰 난관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면 처자 공유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이러한 서두적 논의는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의 문제를 비롯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기하는 정치체제 전반의 실현 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그 어느 문제보다도 궁극적으로 플라톤이 해명해야 할 가장 어려운 문제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처자 공유의 유익함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글라우콘에게 ‘게으른 사람들이 혼자 걸어 다니며 자신만의 생각의 잔치를 벌이곤 하듯이’ 일단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마음껏 이야기하겠다고 요청하는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이 장면은 논거가 비교적 분명한 유익함을 전면에 세워 처자 공유 주장의 정당성을 우선 확보해두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유익성에 반비례하여 그 가능성의 문제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함께 보여준다. 그것은 처자 공유의 이로움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분명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야 함에도 소크라테스가 엉뚱한 주제를 끌고 들어와 이리저리 그 논의를 미루면서 시간을 끄는 장면(466e-471)에서도 더 분명하게 확인된다. 제법 지루하다고 할 정도로 길게 다루어지고 있는 이 장면은 결국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의도적인 논의 지연을 알아차린 글라우콘의 항의를 접하고서야 끝이 나고 그제에서야 비로소 세 번째 파도인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요컨대 이러한 장면 구성들은 모두 처자 공유의 문제가 유익함에 있어서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지만, 그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어렵고 난감한 주제인지를 플라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음을 함께 보여준다. 이 또한 처자 공유 문자의 문제를 바라보는 플라톤 나름의 긴장을 보여주는 하나의 문학적 장치인 것이다.

* 사실 첫 번째 파도인 양성평등의 문제의 경우는 아테네 사회현실에서는 힘들었을지라도 최소한 시대 현실에 따라 가능할 수 있고 그 자체로 발전적 변화로 평가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파도인 처자 공유의 문제(일부다처 혹은 일처다부가 아닌 전적인 배우자 상호 공유)는 아테네 사회현실에서는 물론이고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어떤 사회에서 현존했었던 적도 없을 정도로 어느 시대 그 누구에게도 그 자체로 실현 가능성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특히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중시되는 오늘날의 경우 그것은 용납 여부는커녕 아예 말조차 꺼내기 힘들 정도로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사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제시하는 처자 공유의 문제는 그 자신도 비록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일단 그 구상 자체만으로도 오늘날 수많은 비평가의 혹독한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 이상국가의 제반 구상을 여러 측면에서 해명하고 옹호하려는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최소한 이 처자 공유의 문제만큼은 누구도 예외 없이 가장 크고 심각한 난관이자 어떻든 피하고 싶은 곤혹스러운 주제로 받아들여 진다. 플라톤 저명한 주석가 앤너스도 해당 논의 부분에서 처자 공유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는 방식으로 일거에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아예 도외시하고 있다. (J. Annas(1981) 181-184쪽 참고)

* 플라톤의 처자 공유 문제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듯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아래와 같이 다각적인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그 개요는 아래와 같다.

1) 플라톤은 하등동물에 대한 유비에서도 보듯이 동물의 품종 개량에 기울이는 것과 동일한 관심을 수호자 집단의 우생학적 개선에도 적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물의 품종 개량이 동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이, 인간의 우생학적 개량 역시 인간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처자의 공유가 국가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 의사와 무관하게 권력 집단에 의해 특정 계층에게 강제의 형식으로 요구된다는 점에서 그의 구상에는 전체주의 내지 국가주의적 이념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2) 게다가 비록 통치계급에 한정되긴 할지라도 결혼과 출산 및 양육이 철저히 국가 소수 권력자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기초한 정교한 제도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개인의 인권과 성적 자기 결정권 또는 사적 영역에서의 행복 추구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다. 사실 개인 간 특정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성적 욕구는 통제할 수 없는 본능으로 플라톤도 인정하고 있다. 정교한 속임수를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것이 조작된 것임이 드러날 경우 그 불만족이 초래하는 위험의 크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그 속임수가 ‘크게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459c) 당사자보다도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이 그들의 행복에 충분히 더 부응할 정도로 지고의 지혜를 갖고 있으며 또 그들에 의해서만 그 지혜의 구현이 담보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지고의 지혜가 과연 존재하는지 검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에 의해 그것이 구현될 수 있다는 보장 또한 어디에도 없다. 정반대로 그러한 믿음은 실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치적 폭압과 불행을 초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구상은 최소한 형식에서 나치가 국가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자행한 우생학에 기초한 폭력적 인종주의와 구조적으로 차이가 없다.

3) 실제 역사적인 사례에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고 설사 대의명분이 선하다 해도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이라는 말처럼, 인간의 주체적 욕망과 개개인의 특수한 정황 그리고 비합리적 감성을 배제한 채, 오직 소수 권력의 독단과 형식적인 정치 이성에 기초해 정치적 실천 방안이 수립될 경우 그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수준의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충분히 경험하고 확인했다. 처자의 공유 문제는 플라톤의 이성주의가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고려 없이 극단적으로 형식화되고 정당화할 경우, 얼마나 참담하고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처자 공유가 우리에게 안겨다 주는 엄청난 당혹감과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용납 여부와 무관하게 비록 어렵긴 하지만 구상 차원에서나마 플라톤이 그러한 제안을 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이 일정 부분 존재했음을 살피는 것 또한 <국가>의 이상적 구상 전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 일단을 살피면 아래와 같다.

1) 우선 플라톤이 살던 아테네 당대에는 결혼 당사자들에게 ‘개인적 사랑이나 성적 욕망에 기초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관념 자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관념은 근대 개인주의가 확립된 이후에 생긴 것일 뿐 고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고대 아테네 남성들에게 결혼은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에서 그저 출산을 위한 짝짓기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고 성적인 욕망은 이른바 창녀로 불리는 여성들과의 성매매나 소년애를 통해 충족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결혼 또는 결혼 상대조차 당사자가 아닌 부친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 결정의 배경에는 최대한 명문 집안 내지 가문과의 혈연 동맹을 통한 이권 확보에 대한 고려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국가>에서는 그 가부장적 권력이 소수의 국가 권력으로 대치되고 결혼이 소규모 가문 수준의 구성이 아니라 나라를 수호하는 공동체 수준의 구성과 처자의 전면적인 공유로까지 크게 확대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혼 당사자들 모두 기본적으로 후계의 생산 말고는 ‘개인적 사랑이나 성적 욕망에 기초한 자유로운 선택’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결혼과 관련한 이러한 고려들은 오늘날에서조차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집안 어른이나 부친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정혼(定婚) 관습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처자의 공유 차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논평이나 비판을 가하지 않고 다만 처자 공유라는 공동체적 가족의 확장이 플라톤의 기대와 달리 결코 혈연적 애착의 증대로 귀결되지 않음에 대해서만 비판을 가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II, i-vi)

2) 그리고 우생학에 기초한 플라톤의 구상은 – 특히 나치 인종주의의 야만성과 연계되면서 – 그야말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그려진 폭력적 동물 사육과 품종 개량에 버금가는 위험천만한 발상으로, 아예 언급조차 금기시될 정도로 비판받고 있지만, 우생학적 관념 자체는 오늘날 인간의 건강한 삶과 복지를 위한 의제로 현대과학 전반에 걸쳐 다각적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죄악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가족계획과 관련한 안전하고 효과 높은 피임약의 개발, 결혼 당사자들의 건강진단서 교환, 우수하고 건강한 정자를 확보하기 위한 정자은행의 노력, 태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등은 모두 일정 부분 개인들의 우생학적 고려, 또는 유전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최근 급속하게 발전을 이루고 있는 유전자와 줄기세포 연구 분야를 들여다보면 인간 유전학에 기초한 기술과학의 발전 차원에서 질병의 치료와 삶의 복지를 위한 우생학적인 관점이 유의미하게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그러나 그러한 유전공학적 시도가 확장 발전하는 현대적 상황 자체가 갖는 위험 또한 상존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 본래의 생물학적 생태적 자연 상태를 인위적으로 수정 조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오용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추동하는 배후에는 자연의 생태적 환경을 거스르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생학적 고려와 그에 따른 유전공학의 발전이 오늘날 불가피한 현실로 상존하는 한, 그것을 추동하는 인간 욕망에 대한 이성적인 통제와 관리가 필연적으로 다시 요구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우생학적 구상에 대한 주된 비판 근거로서 자리 잡고 있었던 인간의 자연적 욕망에 대한 이성적 개입과 통제가 이제는 거꾸로 왜곡된 인간 욕망을 바로 잡는 철학적 기초로 다시 소환되는 것이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어떻게 왜 발생했고 그것이 과연 인간과 자연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성적으로 따져 묻고 그것에 대해 어떠한 지향을 지니고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이성적으로 모색하고 그에 맞추어 이성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플라톤 이성주의의 핵심적이고도 일관된 정신이기 때문이다.

4) 다만 문제는 그것을 따져 묻고 모색하며 실천하는 플라톤 이성주의의 실천 주체가 최소한 정치영역에서만은 이른바 소수 철학자 집단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곳에서도 우생학적 판단과 실행은 오로지 그들 소수에 의해서만 기획되고 통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플라톤의 왕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비참함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역사적 경험을 안겨 준 나치와 스탈린의 독재정과 연계되면서, 시민 대중과 개인들의 권익이 아닌 국가 전체와 소수 권력층의 이익만을 위한 이른바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적 폭압체제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연구의 진전에 따라 오늘날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균형 있게 바라보고 비평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을 제외하면 플라톤의 철학자 왕정이 비록 왕정의 구조는 갖고 있으나 그 체제를 시민 대중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국가전체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전체주의적 폭압체제로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본 강해에서도 플라톤의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가 아니라 철학자왕 자신들을 포함하여 각기 다양한 본성의 계발을 통해 행복을 획득하는 개인들의 집합으로서 이른바 공동체주의에 있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일관되게 피력해 왔다. 플라톤 <국가>의 고전적인 주석가인 네틀쉽도 이 부분에 주해를 달면서 플라톤의 철학자왕정이 지향하는 개체성과 공동체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추상 속의 개인, 문자 그대로 모든 타인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개인들의 공동체가 아닌 그런 공동체란 없으며, 남자든 여자든 개인에 의해서 공유되지 않는, 그들이 살고 있지 않는, 그런 공동의 삶이나 관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개체성이란, 그 참다운 의미에서 보면, 이 공동의 삶이나 이익에 참여함으로써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적 봉사에 헌신하는 공복(公僕)이란 그 봉사 때문에 개인이 되기를 중단한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가장 이익적인 구두쇠가 자신의 일에 ‘자기 자신’을 최대한 집어넣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신의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다고 말할 정도로 공동의 이익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던져 넣을 때, 그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개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개체성은 더욱 위대한 것으로 살아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플라톤이 보고 있었던 것은 개체성의 말살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을 통하여 개체성을 가능한 최상의 정도로까지 끌어 올리는 일이었다.‘(R. L Nettleship(1925) Lectures on the Republic of Plato. <플라톤의 국가론 강의> 김안중, 홍윤경 역, 교육과학사 2010. 182쪽)

 

* 아무려나 일부 집단의 처자 공유가 구상으로라도 일정 부분 가능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주장의 강도와는 다르게 그것의 현실적 가능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세 번째 파도에서 그 가능성의 문제를 슬그머니 이상 국가 일반의 실현 가능성의 문제로 전환하고 있는 데다 그마저 꼭 그것의 실현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다만 본(本)으로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한 걸음 물러서고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실제로 <국가>의 이상적 구상이 실물로서 현실화된 것이라 평가되는 <법률>에서 첫 번째 파도인 남녀평등은 일정 부분 구체적인 제도로 반영하고 있지만, 이 처자 공유의 문제는 전체를 통틀어 아예 한마디 언급조차 안 하고 있다.

* 그럼에도 플라톤은 이제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에 대해서만은 아주 구체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언급하려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처자의 공유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비록 의심스러울지라도 만약 그것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법제화된다면 그것이 나라에 가져다주는 이로움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최소한 자신이 왜 처자의 공유 문제를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매우 중대한 과제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철학적 정당성의 일단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어지는 논의는 현실적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순전히 이성적 사고 차원에서 그가 내세우는 처자의 공유가 과연 어떤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요컨대 이 부분은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 자체에 관한 논의라기보다는, 다만 그러한 구상을 통해 지향하고자 하는 정치철학적 목표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는데 방점이 있다. 특히 이 부분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해설은 다음 강해에서 다루기로 한다. -끝-

* 다음 주제 : 2. 두 번째 파도(II), 처자 공유의 궁극적 목적 : 나라의 결속, 고통과 기쁨의 공유[461e-466d]


 

플라톤의 <국가> 강해(5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4)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여성의 지위 : 451c-457b)에 대한 해설

 

* 앞서 살폈듯이 여성과 아이들의 공유 문제는 수호자 집단 내에서 벌어질 수호자들의 배우자 공유와 그들 사이에서 생긴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관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아이들을 올바로 소유하고 다루는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뜬금없이 경비견 사례를 꺼내든다. 처자의 공유가 이상 국가의 목적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임을 논증하기 이전에 우선 수호자 집단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비견 사례를 통해 플라톤이 제안하는 양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기존의 전통적인 견해들과 정면으로 대치될 만큼 아주 파격적이다. 어떤 이는 이 경비견 사례를 성 역할과 관련한 오늘날의 동물행태학적 접근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동물 일반의 사례가 아님을 고려하면 경비견 사례는 다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유라 할 것이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경비견 비유는 일단 그 자체로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 외에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에 있어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비유대로라면 여성은 출산과 수유 기능 이외에 처음부터 남성과 어떠한 차이도 없으며 그에 따라 수호자들의 집단생활에서도 남성 수호자와 동일한 환경 여건에서 동등하게 동일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 그러나 비유와 다르게 실제 사람의 사회적 역할은 개의 역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플라톤의 경비견 이야기를 사람과 동물의 행태 및 역할 상의 차이를 간과한 그릇된 인용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를테면 동물은 가사를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정치학> 1264b4) 그러나 이어서 제기된 대머리와 구두장이 비유 그리고 반대 의견을 포함한 대화와 쟁론에 관한 이론적 논의까지 모두 종합하여 평가해보면, 사회적 역할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내세우는 양성평등론은 단순한 비유 수준을 넘어 견고한 논변의 형식으로 수호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 및 기술 영역 전반에 걸쳐 하나로 관철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출산과 양육과 관련한 생물학적 차이를 근거로 양성 간 사회적 역할과 관련한 차이를 논증하는 것은 쟁론가들이 흔히들 저지르듯 표현상 말꼬리만을 붙잡아 서로 다른 논리적 범주들을 하나로 혼동한데서 비롯된 잘못된 추론이다. 남성은 아이를 잉태하게 하고 여성은 임신 출산하고 일정 기간 수유하는 생물학적 기능은 양성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범주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생물학적 차이들은 사회적 역할 수행에서 양성 간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반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요컨대 남성과 여성은 인간 종으로서 자연적 본성이 동일한 만큼 각기 감당해야할 사회적 역할에서도 전혀 차이가 없다.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늘날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과도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아이의 임신과 출산 이외에 최소한 가사를 돌보는 일도 여성의 고유한 일로 여기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주장은 오히려 후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플라톤이 살아 있다면 오늘날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는 군대 징집 대상에서 여성을 제외하는 처사조차 자연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당한 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 물론 플라톤은 자연적 본성에서건 사회적 역할에서건 양성 간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일에 따라 남성이 여성보다, 여성이 남성보다 각각 더 잘하는 경우가 분명 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그런 사례들은 우연적인 경우로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자연적 종류(eidos)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여성이 남성보다 요리를 잘한다고들 여기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요리를 잘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요컨대 남성과 여성은 사회적으로 할 수 일에서 어떠한 차이도 없다.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여성도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양성 간 차이를 말하자면 다만 힘과 능력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플라톤은 언급한다. 즉 여성은 힘과 능력에서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비록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남성이 생물학적 근육의 힘에서 여성보다 강하다는 게 일반의 상식임을 고려하면 최소한 힘과 관련한 그의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차이조차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오래된 관습이 낳은 후천적 결과이며 오히려 소근육과 유연성에서는 여성이 단연 우월하다는 연구도 있다. 문제는 그것 외에 일의 수행 능력에서까지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보면 비록 플라톤 주장의 혁명성을 충분히 인정할 지라도 그 역시 분명 그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할 것이다.

* 그러나 양성 간 힘의 차이에 대한 그의 부차적 언급을 시대적 한계로 비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서조차 여성의 지위는 여러 측면에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른바 양성평등과 관련하여 발달 수준이 비교적 높다고 평가되는 서구 선진국에서도 여성의 선거권과 정치참여는 지난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경우만 해도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여성의 사회참여는 물론 자유롭게 집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이슬람 사회에서는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정치적 기본권은 물론 최소한의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2,500년 전 아테네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은 축제를 제외하고는 집안에만 갇혀 아이들의 양육과 가사 역할만 맡았고 외부에서 생필품을 구하는 것조차 남성 가족 내지 남성 노예들이 대신해야 했다. 그리고 결혼 대상조차 부친이 결정했으며 출산 기계라고 불릴 정도로 결혼에 따른 성생활은 주로 아이 출산을 위한 목적으로만 행해졌고 쾌락을 위한 남성들의 성적 대상은 창녀들이나 동성 소년들이 대신했다. 게다가 상속할 권한이 생겼어도 여성은 그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과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에게 권한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성차별과 관련한 이러한 뿌리 깊은 사회적 관습과 배경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놀랍게도 여성에게 남성과 마찬가지로 수호자 계급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물론 통치자로서 권력의 수장까지 될 수 있는 동등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고, 장차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어린아이 때부터 남성과 동등한 양육과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말로 세우는 이상 국가론의 형태로 제시된 것이지만 그가 과거 100년도 아닌 2,500년 전 인물임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이 얼마나 선구적이고 혁명적이었는지 가히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이다. 최소한 이 점만 고려해도 플라톤을 오늘날 최소한 페미니즘의 고대적 선구로 평가하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현대 여성주의자들은 물론 플라톤에 대한 현대 비평가들 대부분이 그의 양성평등론을 평가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20세기 인류가 겪은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스탈리즘의 참혹상을 비판하면서 크로스만(R. Crossman), 포퍼(K. Popper), 아렌트(H. Arendt)를 비롯한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들이 그 전체주의적 발상의 배후에 플라톤이 있다고 맹렬하게 공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러한 비판과 공격은 오늘날까지도 지식인 사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긴 오늘날 여성의 개인적 권리와 인간적 존엄성을 내세우는 페미니스트라면 어느 누구라도 이른바 전체주의의 사상적 뿌리로 낙인찍힌 플라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로 내세운다는 게 쉽게 용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래서였을까? 플라톤 연구자로서 명망이 높은 앤너스(J. Annas)조차 그의 양성평등론이 여성의 권리를 인권의 차원에서 권리 그 자체로 확보해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다만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양성 구분 없이 인력을 총동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 절하한다. 플라톤은 여성의 권리에 관심이 없으며 인간 평등함과 존엄성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고, 다만 여성을 단지 거대한 미개척 자원으로 본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곳에서 여성 수호자와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분명 여성의 지위에 관한 혁명적인 생각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대상, 즉 수호자로서 자격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나머지 여성들은 그저 당대의 일상적인 열악한 여성의 지위 속에 방치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플라톤의 제안은 그토록 끔찍한 삶을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불행과 굴욕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또 수호자 계급에 여성이 참여하는 일이 과연 자기 의사에 기초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들은 수호자의 역할이 매우 거칠고 힘든 일임을 고려하면 그러한 수호자의 역할과 지위를 여성들 스스로 원한 것이기보다는 실제적으로는 권력 있는 자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부여된 측면이 강하다고 의심한다. (J. Annas(1981) 181-185쪽 참고)

*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가나 집단 공동체의 이익이 그 사회의 가장 큰 목표였음에도 그것을 위해 여성 일반을 자원으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장차 왕이 될 수도 있는 수호자 계급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물론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한 경우는 19세기 이전까지 아예 없었다. 게다가 플라톤의 주장이 양성 평등에 관한 기초적인 발상은 물론 성차별을 자연적 삶 자체로 당연시했던 근 2,500년 전에 제기된 것임을 함께 고려하면, 근세 이후에야 간신히 남성 부르주아 시민들을 대상으로 확립된 인권 개념으로 플라톤을 평가하는 시도들 자체가 이미 비판의 적절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힘들고 거친 일이라고 여성들 모두가 기피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의심 자체가 이미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은 여성을 수호자 계급에 참여시키면서 여성 모두에 대해 그 자격을 열어 두지 않는다. 플라톤은 남성 수호자의 선발 과정이 그러하듯이 이곳에서도 여성 수호자를 선발함에 있어 이른바 수호 역할에 뛰어난 여성들과 그러한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우열을 가린다. 지혜를 사랑하는 여자와 지혜를 싫어하는 여자가 있으며 또, 기개가 있는 여자가 있고 기개가 없는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456a) 그러나 이것은 남성 수호자 선발과정이 그 자체로 남성 차별이 아니듯이 이 또한 여성 차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뛰어남 또한 수호 역할과 관련되어 있을 뿐 모든 측면을 다 포함하지도 않는다. 수호자는 결코 생산 기술에서 생산자 보다 뛰어나지 않다. 오늘날에도 적정 자격을 위한 선발 과정에는 그와 관련한 뛰어남을 기준으로 우열이 비교되고 그것을 토대로 선발하는 것을 정당한 절차로 모두 받아들인다.

* 이밖에도 플라톤의 양성평등론과 관련하여 비평가들이 크게 의심하는 사안이 또 있다. 그것은 경비견의 비유에서 보듯이 플라톤이 여성의 역할 가운데 오로지 수호자의 역할에만 관심이 있고 수호 이외에 여성이 맡을 수 있는 다른 역할에 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거나 아예 무시하거나 차별하고 있다는 의심이다. 경비견의 비유는 개가 주인을 위해 주인에게만 복종하고 봉사하듯이 사람 또한 나라를 위해 나라에만 복종하고 봉사해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의 근거로 비평가들은 여성 수호자에 대한 그의 언급 대부분이 싸움과 운동 훈련에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한다.(452a-b, 453a, 458d, 466c-d, 467a, 468d-e) 설사 플라톤의 제안을 양성평등론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저 여성의 남성화를 통한 평등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성 수호자에 관한 논의가 플라톤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마치 공연을 재연하는 것처럼 남성 수호자에 관한 논의와 똑같은 과정과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임을 고려하면 그 의심은 사회적 역할 중 수호의 역할에만 초점을 맞추어 다소 과민하게 제시된 비판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남성 수호자를 기준으로 이루어진 앞서 이상국가론에는 단지 수호자 역할만 갖는 사람들만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들의 역할 즉 생산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른바 여성 공연으로 표현되는 이곳의 논의가 앞서 이상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전개된 남성 공연에 상응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곳에서도 여성으로서 생산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 또한 당연히 함께 포함되고 고려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 실제로 플라톤은 대화와 쟁론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논의 대상을 ‘표현 자체가 아닌 종류에 따라 다만 수행할 일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경우’, 시가와 기술, 체육과 전쟁 등 어떤 역할이건 간에 양성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일관되게 논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유를 언급하면서도 플라톤은 생산자 계급에 속하는 구두장이와 의사, 목수 등의 역할을 인용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여자 의사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454d)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양성의 사회적 역할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일반론적 논증에 기초한 플라톤의 일관된 주장을 굳이 수호자 역할에만 한정해서 좁게 적용하는 것이 오히려 플라톤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비록 이곳에서는 수호자의 역할이 주제가 되는 한, 양성의 동일한 역할에 대한 논의가 수호의 역할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플라톤의 생각은 양성의 본성과 능력에 대한 일반론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성의 기준에 관한 455b-c의 논의는 양성의 사회적 역할을 논할 때 양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인지, 그 기준을 정함에 있어 이치에 따른 논거가 얼마나 핵심을 차지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의 말 그대로 여성의 본성과 남성의 본성은 동일하다. 여성들은 자연적 본성상kata physin 남성들과 동류syngeneus인 것이다.(456b)

* 그런데 오늘날 새롭게 전개되는 양성평등론과 관련한 논쟁들을 들여다보면, 양성 간의 근본 차이가 과연 플라톤의 주장대로 출산과 수유 단계까지의 양육 정도뿐인지 아니면 그 밖에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모종의 본질적인 성차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다양하고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논쟁적으로 제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현대 생물학과 생리심리학에서도 눈에 보이는 양성 간의 신체적 차이 외에 유전자 자체의 차이에서 비롯된 여성성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성징들이 따로 존재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모종의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지 많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논쟁의 과정에서 플라톤의 주장과 달리 일련의 과학적 성과를 토대로 출산과 양육 기능 이외에 성역할과 관련한 양성의 독특한 특성들과 정체성이 각기 고유하게 존재하며 그에 따라 진정한 양성의 평등은 오히려 양성의 그러한 근본적 차이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도 생겨났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진정한 의미에서 양성평등론이 아니다. 그들은 플라톤이 성별 간 일방적이고도 무차별적인 평등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 양성 간 고유하게 실재하는 생물학적, 문화적 차이들과 정체성을 원천적으로 무시 또는 제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양성 간 불일치는 해결할 수 없다는 분리주의의 관점에서 오히려 성, 출산, 육아등과 같은 여성의 신체적 고유 능력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가부장제를 타파하고 여성 고유의 문화 영역을 구축하는 적극적인 토대로 삼기도 한다.

* 그러나 지난 2,500년 동안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차이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를 통해 성차별을 극복하는 근거로 수용되었던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역사 속 수많은 선구적인 주장들이 운명처럼 겪어 왔듯이 그들 주장 또한 전도가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인류 역사 이래 양성 간 차이는 거의 대부분 남성의 우위를 정당화하고 고착화하는 차별의 근거로만 이용되어 왔고 그 위세 또한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하물며 일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은 양성 간 차이와 정체성에 기초하여 전통적 여성주의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양성 평등을 내세우는 여성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어처구니없게도 양성 간 차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근거로 악용하기까지 한다. 일부 보수적인 플라톤 비평가들(L. Strauss 등)이 양성 간 근본 차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끌어들여 플라톤의 접근방식을 오히려 자연 법칙에 반하는 것이며 적용 불가능한 것이라고 적극 비판하는 것도 그러한 경향의 일단을 보여준다. 양성평등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지난하고도 먼 가시밭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세계사적 진보는 늘 그 가시밭길을 딛고 헤쳐 가며 이루어졌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다.

* 아무려나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 내지 여성성의 범위가 현대 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더 크게 확대되건 아니건 또는 설령 생물학적 차이 말고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양성 간 문화적 차이가 있건 없건 간에,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차이일지라도 양성이 사회적 삶을 영위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들과 관련하여 그 차이들이 결코 양성간의 차별이나 불평등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양성 간 동일함은 동일함대로 차이는 차이대로 정당하고 균형 있게 받아들여져 그것이 양성의 자유로운 의지와 행위를 저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권리를 고양하고 담보하는 적극적인 근거로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오늘날 페미니즘의 출발 역시 이러한 자각을 토대로 생물학적 차이가 결코 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명제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미 2,500년 전 제기된 사회적 역할과 관련한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어쨌거나 그 이후 제기된 전통적인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그 어떤 주장보다도 그 명제에 가장 충실하게 일치하고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런데 플라톤의 양성평등론과 관련한 이상의 다각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 사이에서 플라톤 주장이 갖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일관되게 지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양성평등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이 대화편 전체를 통해 일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곳 <국가>만 보더라도 여자들을 ‘속 좁은 사람’(469d), 또는 아이들이나 여자들을 ‘다수의 미천한 사람들’로(431b-c) 표현하고 있는데다가 다른 대화편들에서도 ‘정해진 삶을 잘 영위하지 못했을 경우 두 번째 탄생에서 여자로 바뀌게 된다.’(<티마이오스> 42b, 90e-91a)거나 ‘남성이 여성보다 사려가 깊다’(<크라튈로스> 392b)는 표현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이 이것을 근거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이중적이며 변덕스럽기 그지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플라톤이 제안한 양성평등론이 그 자신도 조심스러워하고 대화 참여자들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성격을 갖는 것임을 고려한다면 대화편들 전체에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왜 일관성을 갖기 힘들었는지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 즉 플라톤은 여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당대 아테네인들이라면 모두가 반대할 정도로 파격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간의 성찰을 종합하여 마침내 <국가>에서 여러 가지 근거들을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전까지는 굳이 많은 설명이 요구되는 견해를 불쑥 내놓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대화 국면에서는 그냥 소극적으로 일상의 견해들을 따라 언급을 해오다가 비로소 <국가>에 와서 그간의 성찰을 종합하여 비로소 여성에 대한 파격적인 수준의 속생각을 적극적으로 털어놓게 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사실 플라톤의 여성에 대한 <국가>의 견해가 과연 그토록 조심하고 경계했어야할 정도로 파격적인가에 대해서는 당대 아테네 대중은 차치하고 지성을 대표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여성관을 들여다보더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를테면 소포클레스는 ‘여자에게는 침묵이 곧 품위kosmos’(<Ajax> 193)라고 말하고 있는가하면 에우리피데스는 ‘여성은 선한 행동을 할 줄 모르며 오히려 모든 악을 고안해내는데 가장 뛰어나다’(<Medea> 406)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플라톤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용감함의 수준에 있어 ‘용감한 여자라고 해 봐야 비겁한 남자’의 수준일 뿐이고 품위의 수준에서도 ‘여자가 남자만큼 품위 있다고 해도 그저 수다스러운 여자’정도라고 말하고 있다.(<정치학> 1277b25) 게다가 아테네 민주정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리클레스조차 과부가 된 전몰자의 아내에게 짧은 충고를 전하면서 ‘덕에 대해서건 결함에 대해서건 남자들 사이에서 소문나는 일이 아주 적다면 그것으로 큰 명예’(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45)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포클레스 등 여타 당대 유명 저작가들의 문헌들 여러 곳에서도 발견된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인습들 자체가 역설적으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대화편 전체에서 왜 일관되게 표출되기 힘들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일정 부분 설명해줌과 동시에 오히려 그것들은 그 인습의 견고함에 반비례해서 <국가>에서 제안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얼마나 파격적이고 혁명적이었는가를 다시금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보다 적극적인 근거가 된다.

*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의 이상국가론을 토대로 차선의 현실국가론을 펼친 것이라고 평가되는 <법률>을 통해 양성 평등에 관한 <국가>의 주장들을 일정하게 이어 가고 있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아테네인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기본적으로 ‘여자들을 위한 것이 무질서한 상태로 그냥 간과될 경우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이 관행을 고치고 바로 잡는 것이, 나아가 모든 관행을 여자와 남자가 공유하도록 조직하는 것이 나라의 행복을 위해 좋다.’(781b)고 말하고 있고, 구체적인 역할과 관련해서도 ‘여자도 관직에 나갈 수 있고 군역도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부과할 수 있되 관직에 진출하는 연령은 남자가 30세 이상, 여자는 40세 이상인 반면에 군역은 여자의 경우 아이를 낳은 후에만 부과하되 50세까지로 제한해야 한다.’(<법률> 785b)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법률>에서도 양성의 동등한 역할에 있어 전쟁과 관련한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래의 인용을 보면 양성 평등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가 교육 및 사회 분야 전체에 두루 걸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인용하자면 그곳에서 주인공 아테네인은 ‘그리스에서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한 뜻으로 같은 일을 수행하지 못해, 동일한 지출과 수고로 2배까지 성장할 수 있는 일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과 아이는 아버지의 반대와 무관하게 모두 교육을 받아야 하며’(804e-805a) ‘전술적 기동과 전투대형 갖추기, 무장 기술 등을 양성 시민 모두가 똑같이 익혀야 한다.’(814a-c)고 주장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의 제안이 실현될 수 있는 한, 여성은 교육과 그 밖의 다른 일에 남성과 함께 최대한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지니는 열기가 식는 일은 없을 것’(805c)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가히 2,500년 전에, 여성에 대한 기존의 그릇된 관습을 타파하기 위한 그 자신만의 길고도 힘든 숙고 과정을 거쳐 <국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원칙의 형태로 제안된 이후 <법률>에서 현실에서 적용 가능한 정책적인 대안으로 실질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 하겠다.

*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아이들의 공유 문제에 대한 대화참여자들의 이의 제기에 답변하면서 우선 수호 역할을 중심으로 남성과 여성들의 동일함을 논증한 후, 그것이 자신이 제시할 주장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했을 하나의 ‘파도’kyma라고 말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첫 번째 파도를 넘어선 후 그것을 토대로 이제 두 번째 파도로서 처자 공유의 문제를 본격적 다루기 시작한다. <끝>

* 다음 회 : 3. 두 번째 파도 : 처자의 공유, 전쟁에 관한 일(457c-471c)


 

플라톤의 <국가> 강해 (53)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3)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도입부(449a-451c)

 

* 제4권의 끝은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것을 예고하고 있지만, 그 논의는 제5권이 아니라 제8권에 가서 이어진다. 대화 상대자들이 논의 진행을 끊고 몇 가지 이의를 제기했고 그 이의에 대한 논의가 5권에서 7권까지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제5권에서 제7권까지 펼쳐진 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다만 형식상의 일탈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나름의 문학적 플롯에 따라 플라톤이 주도면밀하게 사전 계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소크라테스는 말로 나라를 수립하는 차원에서 통치자와 수호자, 생산자 계급으로 이루어지는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기본 틀과 그들의 기본 덕목을 논의했다. 그러나 정작 이상 국가를 다스리는 핵심적인 중추로서 통치자 계급과 관련해서는 그 선발 과정 이외에 그들이 앞으로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역할과 위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을 통해 담보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미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로 세운 이상국가가 다름 아닌 철학 위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고 그에 따라 나라의 통치자 또한 최고 수준의 훈련과 교육을 받은 철학자들로 구성되어야 이상국가의 이상과 목표가 온전하게 구현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그런데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철학과 철학자들의 위상이란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를 신을 모독하고 청년들을 오도한다는 이유로 사형에 내몰 정도로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고 지식인 사회의 중심은 전통적인 시인들과 신흥 소피스트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시인들이 기반하고 있는 신화적 세계관과 소피스트들의 궤변적 수사술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시대와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지적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 객관적 인식과 논리에 기반한 철학으로 대체되어야 하고 아테네가 직면한 정치적 현실 또한 철학과 철학자들의 정의로운 통치와 참여를 통해 극복되어야 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러한 구상은 당대의 지적 풍토에서 결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으로서는 지금까지 말로 세운 이상국가의 기본 틀 이상의 정치 체제의 기본 위상과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애초 설정한 논의 계획을 일시 유보하고 철학의 위상은 물론 철학자들이 어떤 교육 과정을 통해 어떤 능력을 갖추었기에 통치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를 근본적으로 먼저 밝힐 필요가 있었다.

*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논의 구도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제5권을 시작하면서 앞서 소크라테스가 건국신화에서 제시한 처자공유 및 양육과 교육에 관한 내용에 대해 대화 상대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형식으로 계획된 논의 전개를 중단시키고 양성평등과 처자공유, 철인정치의 가능성 등의 파격적인 주제로 앞으로 다루어질 본격적인 철학적 논의들에 불을 당긴 후, 논의 방향을 아예 철학과 철학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논의로 완전히 틀어 버린다. 이러한 논의 구도의 전환은 형식적으로는 논의의 일탈로 보이지만 플라톤이 염두에 둔 이상 국가가 다름 아닌 철학 통치자들에 의해 그 온전함이 구현되는 나라임이 확인되면서, 내용적으로는 기본 틀만을 다룬 지금까지의 이상 국가론을 더욱 심화하고 확장하는 획기적인 전기가 된다. 게다가 논의의 목적상 철학과 철학자의 위상이 심도 있게 다루어지면서 그 부분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는 물론 주제적으로도 형이상학과 인식론, 윤리학과 정치철학 등 철학적 탐구의 핵심적인 문제의식들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플라톤 연구자들은 형식상 일탈로 보이는 제5-7권을 오히려 <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자 철학적 논쟁의 정점을 이루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철학사를 통해 <국가>와 관련한 의미 있는 수많은 철학적 논쟁들이 이곳에 담긴 주제들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테면 양성의 평등, 좋음의 이데아, 동굴의 비유,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철학의 위상, 수학 및 기하학과 천문학의 기초, 변증술 등 플라톤 철학의 핵심 주제가 모두 이곳에 담겨 있다.

 

*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갖는 이러한 성격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제5권 도입부의 논의 내용을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449a-451b]

1) 소크라테스는 논의 계획에 따라 이제 나라경영διοίκησις과 관련해서나 개인들의 영혼의 성격 형성τρόπου κατασκευή과 관련해서 네 가지 나쁜 유형εἶδος의 정치체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449a) 그러나 이때 아데이만토스는 폴레마르코스가 그의 겉옷ἱμάτιον을 잡아당기며 건네는 말을 듣고 이내 목소리를 높여 소크라테스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소크라테스가 결코 작지 않은 주제 즉, 여인들이나 아이들과 관련해서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κοινὰ τὰ φίλων이 되리라는 게 누구에게나 명백하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며(424a)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다ἐκκλέπτειν는 것이다.(449b-c) 그러니 나쁜 정치체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처자공유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말한 그 공유의 방식ὁ τρόπος τῆς κοινωνίας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야기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글라우콘과 트라쉬마코스 등 대화자 전원이 그에 동의를 표한다.(449c-450a)

2)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는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는데 자네들이 지금 얼마나 큰 논의의 벌집을 건드리고 있는지 모른다고 당황해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가 이 사람들이 논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황금을 캐려고χρυσοχοήσοντας 여기에 온 것으로 생각하냐고 반문하고 그것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적정한μέτριος 정도의 논의를 언급하자 다시 또 글라우콘이 나서 그러한 종류의 논의를 듣는 데 적정한 정도란, 지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평생 전부가 될 것임을 내세워 제기된 처자공유와 아이들의 양육τροφή 및 교육에 관한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말씀해 줄 것을 재차 촉구한다.(450a-c)

3)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한 설명이 실현 가능성은 물론 그것이 최선인지도 의심스러운데다 설명할 경우 그것이 소원이나 비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된다며 다시 한번 그 문제를 다루길 주저한다.ὄκνος 이에 글라우콘은 재차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진리ἀληθεία를 알고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자신감을 가지고 할 만한 안전한 일이지만 확신이 없는 채로 찾고 있는 중ζητοῦντα에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섭고 위험한φοβερόν καὶ σφαλερόν 일이라고 말한다.(450c-451a)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본의 아니게 훌륭하고 좋은 사람들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본의 아니게 살인자φονεύς가 되는 것이 더 작은 죄ἁμάρτημα라고 생각함에도 ‘글라우콘이 잘도 나를 북돋는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본의 아니게 살인자가 된다 해도 방면해드릴 테니 용기를 내서 말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한다.(45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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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0b 트라쉬마코스 : 트라쉬마코스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이후에도 두 번 정도(498c-d, 590d) 있지만 소크라테스가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을 펼친 후에 직접 대화에 끼어든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 450b ‘황금을 캔다’ : 이 말은 아테네인들에게 전해지는 고사에 기초하여 생긴 격언에서 따온 말로 의미상으로는 ‘제 할 일은 게을리한 채 어리석게도 별 이익도 가망도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을 빗댄 말이다. (J. Adam note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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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애초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라는 점에서 마치 제1권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그렇게 해석되듯이 제5권-제7권의 내용도 별도의 목적으로 작성되었다가 이곳에 삽입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제5권 서두를 읽다가 앞서 그려진 424a의 장면을 잘 음미해보면 제5권 서두의 논의 전환이 훗날 삽입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도면밀하게 플라톤에 의해 하나로 계획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424a로 되돌아가면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교육과 양육을 훌륭하게 받아 절도 있는 수호자가 되면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이라는 속담대로 아내와 자식을 공유하는 것까지도 당연한 것으로 간파하게 될 것이라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의아스럽게도 대화 참여자들은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파격적인 언급에 아무런 이의 없이 순순히 동의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제5권 서두에 와서야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의아하게 여긴 그대로 제5권에 가서 대화 참여자들 역시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하도록 만들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었다. 즉 플라톤은 424a에서 미리 그와 같은 의아한 장면을 복선으로 깔아 독자들에게 의아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대화 참여자들로 하여금 내내 궁금증을 간직하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이의를 제기하게 만드는 배경으로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 제5-7권의 핵심 주제가 철학과 철학자 왕이라는 점도 이 부분이 나중 <국가>에 삽입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국가>의 주제인 개인과 나라의 행복과 정의와 관련해서 그 행복과 정의를 담보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철학과 철학자 왕이고 그 내용이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 또한 제5-7권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5-7권은 플라톤이 처음부터 <국가>의 전체 구도 안에서 따로 집중해서 다루려 하는 의도에서 편제된 <국가>의 핵심 부분인 것이다.

* 그럼에도 아데이만토스 등 대화 참여자들의 이의 제기와 요청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지나칠 정도로 방어적이고 신중하다. 자신의 대답이 진리가 아니라 소원이나 비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된다는 말도 하고 하물며 그 자신 확신도 없는 말로 본의 아니게 좋은 사람들을 속이느니 차라리 본의 아니게 살인자가 되는 것이 더 작은 죄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곧이 들일 필요는 없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가 내놓을 답변들은 모두 <국가>의 핵심을 차지할 정도로 오랫동안 플라톤 스스로 숙고와 성찰을 거듭해서 내놓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후 본격적으로 토해내는 주장 또한 놀랄 만큼 확신에 차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왜 여기 시작 단계에서 소크라테스를 그토록 조심스러워하고 주저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 내용들이 <국가>의 중심 주제이자 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양성평등과 처자공유 및 정치체제에서 철학과 철학자 왕의 위상에 관한 문제는 당대 아테네의 지적 풍토에서는 감히 꺼내 들기도, 설득력을 지니기도 힘든 주제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에서 양성평등이란 입에 꺼내기조차 힘든 주제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당대 아테네에서는 지식인 세계에서 위세를 떨쳤던 전통적인 신화와 시인들과 달리 철학과 철학자란 크게 주목을 끌거나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주제들을 자신의 핵심 주장으로 제기하려는 플라톤으로서는 다각적으로 저작 기법상의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자신이 불쑥 그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주변 대화 참여자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답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 태도 또한 시종일관 낮은 자세를 취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장면 또한 플라톤의 치밀한 의도 아래에서 그려진 것으로 일종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대답을 극력 촉구하는 글라우콘을 향해 농담조로 ‘잘도 나를 북돋는다’(451b)고 반문하는 것 역시 이 국면이 플라톤의 의중을 담아내기 위한 아이러니임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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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 양성에서 동일한 직무와 동일한 교육 451c-457b)

 

[451c-457b]

1) 소크라테스는 마지못해 대화 참가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남성 공연δρᾶμα을 완전히 다 마치고 나서 여성 공연을 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남성들을 무리의 수호자로 세우려 했던 앞서의 과정과 상응하는 방식으로 처자공유 방식을 논의하되 우선 여성들과 아이들을 소유하고 다루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451c) 우선 소크라테스는 수컷 경비견φυλάκων κυνῶν들과 암컷 경비견들의 비유를 들어 암컷들이 새끼를 낳고 기르는 것 때문에 경비나 사냥 같은 일은 수컷이 하고 암컷은 집을 지켜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단지 힘 차이를 빼면 두 경비견이 하는 일은 동일하므로 하는 일 모두를 공동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비유에 기초하여 그러한 동물을 동일한 일’ἐπὶ τὰ αὐτὰ에 쓰려면 그 동물에게 ‘동일한 양육과 교육을’τὴν αὐτὴν τροφήν τε καὶ παιδείαν 부여해야 하듯이 여성γυνή들도 남성ἀνήρ들과 같이 동일한 일에 쓰려고 한다면 여성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가르쳐야διδακτέον 하고 시가와 신체단련 기술은 물론 전쟁 임무도 부여하는 등 동일한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51d-e)

2) 이를테면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레슬링 도장παλαίστρα에서 ‘옷을 벗고 신체단련을 하는’γυμναζομένας 것이 관습상 우스울지라도 그리고 하다못해 몸에 주름이 잡혀서 보기 좋지 않은 노인네들이 신체 단련장에서 볼 수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두고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농담σκῶμμα을 해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452a-c) 그리스인들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크레타 사람들과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벗고 신체 단련하는 것을 보고 희화화했지만 막상 신체단련을 해보니까 벗어버리는 게 더 낫다는 걸 깨달았듯이 논변λόγος을 통해 가장 좋은 것이 밝혀지면 눈ὀφθαλμός으로 우습다고 여겨진 것은 다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요컨대 나쁜 것τὸ κακόν이 아닌 다른 어떤 것ἄλλην τινὰ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좋은 것 말고 다른 것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진지해하는 사람은 다 멍청하다.(452d-e)

3)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본성φύσις상 여성이 남성과 모든 일을 공동으로 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대쪽 사람들 편에 서서 우리 자신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토론해 볼 것을 제안하고 우선 그쪽 편에 서서 이렇게 반론을 제시한다. 즉 i) 각 사람이 본성에 맞는 자기의 일 한 가지를 해야 한다‘δεῖν κατὰ φύσιν ἕκαστον ἕνα ἓν τὸ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고 당신들 자신이 동의했다. ii) 그런데 여성과 남성의 본성이 완전히 차이 난다. iii) 그렇다면 일도 자신의 본성에 따라 각자에게 다른 일을 맡기는 것이 적절하다. vi) 그러므로 그들이 동일한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가당착τἀναντία이다.(453a-b)

4)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반박에 대한 탈출구를 요구하는 글라우톤 등에게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즉 그렇게 반박을 하는 사람들은 대화διάλεκτος가 아닌 쟁론ἔρις을 벌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논의 대상을 종류εἶδος에 따라 나누어 고찰하지는 못하고 표현 자체αὐτὸ τὸ ὄνομα에 매달려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이러한 반박술에 휘말릴 경우 우리는 표현에 얽매여서 동일한 본성이 동일한 일의 수행을 맡아야 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을 용맹스럽고 쟁론적으로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대머리인 사람들φαλακροὶ과 머리가 긴 사람들κομῆται이 반대되는 본성이 아니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냐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고서 그들의 본성이 반대된다는 데 우리가 동의하면, 대머리인 사람들이 구두장이σκυτοτόμος 일을 하면 머리가 긴 사람들은 못하게 하고 역으로 머리가 긴 사람들이 구두장이 일을 하면 대머리인 사람들은 못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라는 것이다.(453c-454b) 요컨대 동일한 본성과 다른 본성을 모든 측면에다 다 갖다 붙여서 적용하면 안 되며 다만 수행할 일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본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란 이를테면 의사ἰατρός 일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의사 일에 적성이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을 서로 연관시키는 경우이다. 이 경우 의사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닌 목수τέκτων 일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연관시킬 경우 그것은 서로 다른 본성을 가진 것끼리 연결 짓는 것이다.(454c-d)

5) 남성들과 여성들의 경우도 어떤 기술이나 다른 어떤 수행할 일과 관련해서 한쪽이 더 뛰어난 것으로 드러나면 본성상 양자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단지 여성은 아이를 낳고 남성은 아이를 배게 한다는 차이만으로는 어떤 기술이나 수행하는 일과 관련한 논의에서 여성과 남성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수호자들과 그들의 여성들이 동일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반박되지 않는다.(454e) 나라 경영διοίκησις과 관련해서 여성이 고유하게 수행할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455a) 어떤 것에 적성τὸν εὐφυῆ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적성이 없다고 할 때 기준이란 i) 한 사람은 그것을 쉽게 배우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경우 ii) 한 사람은 조금 배워도 그 배운 것으로부터 스스로 아주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은 많이 배우고 익히고 나서도 배운 바를 유지하지도 못하는 경우 iii) 한 사람에게서는 몸에 속한 것들이 생각을 충분히 잘 섬기는데μελέτης, 다른 사람에게서는 그것들이 생각에 저항하는ἐναντιοῖτο 경우이다.(455b-c)

6) 물론 사람들이 익히는 일들 중에 여성이 잘 한다고 여겨지고 그래서 거기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더 못하면 정말로 웃기는 일들 이를테면, 뜨개질이나 빵 굽는 일, 채소 삶는 일 따위가 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남성이 여성을 훨씬 능가κρατεῖται하긴 하지만 많은 여성이 많은 남성보다 더 뛰어난βελτίων 영역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일 중 어떤 것도 따로 여성에 속한 것도 따로 남성에게 속한 것도 없으며 그와 관련한 본성들은 양성 모두에 비슷한 방식으로 흩어져 있어서, 비록 모든 일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긴ἀσθενής 하지만 남성과 여성은 수행할 일들 모두에 본성에 따라서 공히 참여할 수 있다.(455d)

7) 다만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를테면 본성상 의사 일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이 있으며, 또 시가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이 있듯이 신체단련과 전쟁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전쟁과 어울리지 않고 신체단련을 좋아하지 않는 여성이 있다.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여성과 지혜를 싫어하는 여성이 있으며 또, 기개가 있는 여성이 있고 기개가 없는 여성이 있다.(455e-456a) 이렇듯 수호라는 목적에 비추어볼 때도 더 약하거나 더 강하다는 점만 빼면 여성의 본성과 남성의 본성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성들도 선발해서 그러한 남성들과 함께 거주하고 함께 수호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하고 본성상 그런 남성들과 동류συγγενής이기 때문이다.(456a-b)

8) 결국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여성 수호자들에게 시가와 신체단련을 부여하는 것이 본성에 어긋나지 않다는 데에 우리가 동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법으로 세운 것도 아니고 단순한 소원εὐχή 같은 것을 법으로 세운 것도 아니며 본성에 맞게 법을 세운 것이다.

9)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동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이제 남성 수호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수호자로 두는 경우도 과연 최선일지가 동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근거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즉 우리가 수립한 나라에서 앞서 말한 양육과 교육을 받은 수호자들이 구두장이 기술을 교육받은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나은 사람이듯이 여성의 경우도 같은 양육과 교육을 받은 여성이 여성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ἄριστος 나은ἀμείνων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수호자가 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렇듯 가능한 한 뛰어난 여성들과 남성들이 생기는 것보다 나라에 더 나은 일이 없으며 시가와 신체단련이 우리가 설명한 대로 이루어지는 한 그 일은 성취될 수가 있다.(456c-e) 요컨대 우리는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한 것’οὐ μόνον ἄρα δυνατὸν ἀλλὰ καὶ ἄριστον을 나라의 법으로 정한 것이다.

10) 그러므로 여성 수호자들은 의복 대신에 덕ἀρετὴ을 몸에 두른 것이므로 옷은 벗어야 하고 전쟁과 그 밖의 나라 수호 일을 함께해야 하며 다른 일은 하지 말아야 하되, 다만 여성이 더 약하니까 그런 일 중에 더 가벼운 일을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부과해야 한다. 최선βέλτιστος의 것을 위해서 옷을 벗고 신체단련을 하는 여성들에 대해 웃는 남성은 자신이 무엇을 두고 웃는 것인지도 또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전혀 모르는 자이다. 실로 ‘이로운 것은 아름답고 해로운 것은 추하다’τὸ μὲν ὠφέλιμον καλόν, τὸ δὲ βλαβερὸν αἰσχρόν.

11)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수호자φύλαξ들과 여성수호자φυλακίς들이 모든 일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 과정을 우리 주장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했을 하나의 파도κῦμα라고 말을 한다.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맞이할 파도들 중 첫 번째 파도를 이제 넘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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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451c 남성 공연과 여성 공연의 비유는 이후에 언급되는 여성 수호자에 관한 내용이 앞서 언급한 남성 수호자에 관한 내용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남성 수호자를 기준으로 표현된 ‘처자의 공유’라는 말 또한 남녀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표현하자면 수호자 계급에서 ‘배우자와 아이들의 공유’가 될 것이다.

* 2)에서 452d-e : 이 부분에서 노인들의 경우는 스파르타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나이 들어서까지 전사로서 레슬링 훈련을 계속했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편견에 기초한 관습들은 객관적인 경험들과 이치에 맞는 논변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좋고 나쁨은 오직 이치에 기초해서만 판정되어야 한다. 눈으로 보면 여성 수호자들 역시 옷을 벗고 있지만, 이치에 기초해보면 그들은 다만 덕을 두르고 있는 것이다.

* 2) 452d ‘나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 모든 것들이 좋은 것 나쁜 것들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소피스트들은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늘 중간의 것들 무규정적인 것들이 있다. 무규정적인 것들은 다만 정도 차이만 가질 뿐 서로 다른 것들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다르다고 나쁜 것으로 여기거나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틀린 것으로 여기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 3)의 i)- iv)는 대화가 아닌 쟁론에 기초한 반박이다. 이러한 반박술은 논의 대상을 종류에 따라 나누어 고찰하지 않고 종류상 서로 다른 본성의 것임에도 표현 자체에 매달려 그것을 동일한 본성으로 여겨 모든 측면에다 다 갖다 붙여서 적용하는 경우이다. 오늘날 오류론에 입각해서 보면 생물학적 범주와 사회적 범주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논점 일탈의 오류 내지 유추의 오류이자 특정한 사례를 기준으로 모든 사례가 그렇다고 일반화하는 부당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오류들은 쟁론을 일삼던 당대 소피스트들의 궤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오류들이다. 이곳 논의에서 쟁론이 아닌 대화로 평가될 수 있는 경우는 다만 수행할 일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머리와 구두장이 비유는 쟁론과 대화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 6)에서 뜨개질이나 빵 굽는 일, 채소 삶는 일은 소크라테스에게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나누는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다만 우연적 요소에 불과하다. 플라톤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 짓는 본질적인 요소는 적성이다. 그리고 적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5)의 i) – iii)에 기초해야 하며 그 기준에 기초하는 한 남성과 여성의 적성은 동일하다.

* 9)에서 456c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한 것’ : 남녀의 평등과 차이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는 전혀 경직되어 있지 않고 유연하다. 양성의 역할을 비교하면서 예외적인 경우가 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연의 진리에 부합하는 본질적인 경우인지 우연적인 경우인지를 가려, 일반적인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흔들림 없이 견지한다. 여성 수호자가 가능한 것도 이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성평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세우는 법과 기준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kata physin) ‘가능한 것들이자 최선의 것들’이다. 이것은 인류 지성사를 통해 양성평등의 자연법적 기초가 플라톤에 의해 처음으로 확립되었음을 보여준다. <끝>

* 다음 회 : 2.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 451c-457b)에 대한 세부 해설


 

플라톤의 <국가> 강해 (5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52)

 

  1. B.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441c-444a]

*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정의를 마무리하면서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τὰ αὐτὰ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ἴσα τὸν ἀριθμόν고 말한다. 이를 토대로 그가 말하는 개인의 정의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가 지혜로웠던 방식으로 나라를 지혜롭게 했던 것에 의해서, 개인ἰδιώτης 역시 지혜롭다σοφός.(441c) 그리고 개개인을 용기 있게 하는 그것에 의해서, 그리고 개개인이 용기 있는 방식으로, 나라 역시 용기 있다. 절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개인 또한 나라가 정의로웠던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정의롭다.(441d)

2) 나라의 세 부류들 각 부류가 자기 것을 함으로써 나라가 정의롭듯이 개인도 ‘자기 안에 있는 것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게 되면’ἕκαστον τῶν ἐν αὐτῷ πράττῃ, 그런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자 자신의 것을 하는 사람이다.(441d) 그러므로 이성 부분λογιστικόν이 다스리고 기개 부분θυμοειδής은 그 부분에 순종하고 그것의 동맹군σύμμαχος이 되는 것이 적절하다ἐπιθυμητικόν.(441e)

3)우리가 말했던 대로(411e-412a) 시가μουσική와 신체 단련γυμναστικῆ의 혼합κρᾶσις이 그것들을 조화롭게σύμφωνος 만든다. 그 한 부분은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배움으로 고조시키며ἐπιτείνουσα 키우고, 다른 하나는 화음ἁρμονίᾳ과 장단ῥυθμός으로 풀어주고ἀνιεῖσα 달래서παραμυθουμένη 길들인다ἡμεροῦσα.(441e-442a)

4) 이성적 부분은 본성적으로 돈에 대해 가장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 부분ἐπιθυμητικόν을 제어하고,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져 자신의 것을 하지 않고 부적절하게도 다른 둘을 노예로 삼아 다스리고καταδουλώσα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모두의 삶 전체를 뒤집는 일ἀνάτρεψις이 없도록 감시한다τηρήσετον.(442a)

5) 이성 부분은 숙고를 하고 기개 부분은 다스리는 부분을 따르며 숙고된 바를 용기를 가지고 이행하며 싸운다. 개인을 용기 있다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부분μέρος 때문이다(442b). 이성이 지시한 대로 기개 부분은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존한다.(442c)

6) 개인의 경우 지혜롭다는 것은 이성 부분이 세 부분 각각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ὅλῳ τῷ κοινῷ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앎을 자신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441c)

7) 개인이 절제 있다고 부르는 것은 영혼 각 부분들의 우애φιλίᾳ와 화합 συμφωνίᾳ 즉 이성 부분이 다스려야 한다는 데 대해 다스림을 받는 두 부분과 다스리는 부분이 믿음을 같이 하고 그것을 거슬러 내분στάσις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이다.(442c-d)

8) 개인이 정의로운 것도 나라가 정의로운 것과 같은 방식이다.(442d) 아래와 같은 일상의 사례들을 적용해보더라도 그렇다. 나라와 본성이 유사하게 태어나고 유사하도록 양육된 사람은 재화를 떼어먹거나 신전 약탈ἱεροσυλία이나 도둑질κλοπή, 또는 사적으로는ἰδίᾳ 동료들을 공적으로는δημοσίᾳ 나라를 배신하는 것 같은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442e-a) 게다가 그것은 간통μοιχεία이나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442a)

9)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그의 안에 있는 부분들 각각이 다스림과 다스림을 받음과 관련하여 자신의 것을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이와 같은 사람들과 나라들을 만들어내는 힘δύναμις이다. (443b) 이로써 정의의 어떤 단초ἀρχή와 원형τύπος에 발을 들여 놓은 것ἐμβεβηκέναι 같다는 꿈(433a)이 완전히 이루어졌다κινδυνεύομεν.

10) 그런데 그것은 사실 정의의 어떤 영상εἴδωλόν이었다. 본성상 신발 만드는 것이 적성인 사람은 신발 만드는 일σκυτοτομική을 목수인 자는 목수 일τεκτονικἡ을 하는 것 그런 어떤 것이 정의이기는 하지만, 사실 정의는 외적인 행위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과 관련된 것πρᾶξις τῶν αὑτοῦ περὶ τὴν ἐντός이다.(443c-d)

11) 이처럼 개인의 정의는 영혼 안에 있는 부류들이 서로 참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잘 가다듬고θέμενον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ἄρξαντα 조율하여συναρμόσαντα 자신과 친구가 되게 하는 것, 즉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νεάτη, 상현음ὑπάτη, 중현음μέση들과 마찬가지로 세 부분이 조화ἁρμονία를 이루는 것이다.(443c)

12) 그리고 설사 그 중간에 다른 어떤 것들ἄλλα ἄττα μεταξὺ이 있더라도, 정의로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한 데 묶고 여럿으로부터 전적으로 하나를 이루어 절제와 조화를 이룬다.(443e)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어떤 행동을 할 때이든 이 모든 경우에 이 상태를 보존하고서 만들어 내는 행위가 정의롭고 아름다운 행위이다.(443e) 이 행위를 관장하는ἐπιστατοῦσαν 앎ἐπιστήμη이 지혜σοφία인 반면, 이 상태를 그때그때 와해λύη시킬 수도 있는 행위는 부정의한 행위이고 이 행위를 관장하는 믿음δόξα은 무지ἀμαθία이다.(443e-444a) 이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과 정의로운 나라, 그리고 그것들 안에 있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발견했다ηὑρηκέναι.(44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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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 1)과 2)(441c-442a)와 앞서의 논의(434c-441c)에 한정해서 나라의 통치자와 수호자, 생산자에 상응하는 개인 영혼의 이성적 부분, 기개적 부분, 욕구적 부분의 성격을 종합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이성적 부분

욕구들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고 그 계산에 따라 특정 욕구를 막거나 통제한다.(439c-d)

영혼을 다스린다.(441e) 숙고를 한다.(442b) 욕구 부분을 제어하고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져 다른 둘을 노예로 삼아 모두의 삶 전체를 뒤집지 못하도록 감시한다.(442a)

2) 기개적 부분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낸다.(440b)

이성 부분에 순종하며 숙고된 바를 용기를 가지고 이행하며 싸운다.(442b)

두려움과 두렵지 않음에 대한 이성의 지시를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전한다.(442c)

3) 욕구적 부분

사랑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그 외의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하는 것, 일종의 만족과 쾌락의 동료로서 비이성적이다.(439c-d)

욕구들 중 가장 두드러진 욕구는 목마름과 배고픔 즉 마실 것에 대한 욕구와 먹을 것에 대한 욕구이다.(437d-e)

본성적으로 돈에 대해 가장 만족할 줄 모른다.(442a)

* 나라에 있는 덕들과 동일한 덕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고 수적으로도 같다는 언급(441c)과 나라와 개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덕을 갖고 있다는 이곳 1)과 2)의 언급만(441c-442a)을 토대로 나라와 개인 간의 유비적 관계를 종합 정리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1. a) 나라의 덕목과 상응하는 개인의 덕목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자가 되면 그 나라가 지혜로운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영혼을 다스리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441d)

용기 있는 사람이 수호자가 되면 그 나라가 용기 있는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기개적인 부분이 이성적 부분을 보조하고 순종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441d)

모든 나라 구성원들이 절제로써 믿음을 같이 하면 절제 있는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각 부분이 절제로써 이성 부분을 믿고 따르면 그 사람들은 다 절제 있는 사람이 된다.(441d)

모든 나라 구성원들이 통치자의 지배에 따라 각자 자신의 것, 자신에 속한 것을 할 때 정의로운 나라가 되듯이 영혼의 각 부분이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각각 자신의 것을 할 때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441e)

  1. b) 지혜로운 개인

개인의 경우 지혜롭다는 것은 이성 부분이 세 부분 각각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앎을 자신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441c)

c). 용기 있는 개인

개인을 용기 있다고 부르는 것은 이성이 지시한 대로 기개 부분은 고통과 즐거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보존하기 때문이다.(442c-d)

  1. d) 절제 있는 절제

개인이 절제 있다고 부르는 것은 영혼 각 부분들의 우애와 화합 즉 이성 부분이 다스려야 한다는 데 대해 다스림을 받는 부분과 다스리는 부분이 믿음을 같이 하고 그 믿음을 거슬러 내분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이다.(442c-d)

  1. e) 정의로운 개인

외적인 행위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 그것은 사실 정의의 어떤 영상eidōlon이다. 정의는 그렇게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자신의 것을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443c-d)

영혼 안에 있는 부류들이 서로 참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잘 가다듬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조율하여 자신과 친구가 되게 하는 것, 즉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 상현음, 중현음들과 마찬가지로 세 부분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443d)

  1. f) 정의로운 행위

정의로운 행위들의 원인은 영혼의 부분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나라의 계층 내지 영혼의 부분들 각각이 자신의 것을 하게 만드는 힘dynamis이다.(443b)

어떤 행동을 할 때 영혼의 절제와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만들어 내는 행위가 정의롭고 아름다운 행위이며 그 행위를 관장하는 앎이 지혜인 반면 이 상태를 와해시킬 수도 있는 행위는 부정의한 행위이고 이 행위를 관장하는 믿음은 무지이다.(444a)

* 위의 글 3)(441e-442a)에서 ‘그 한 부분’과 ‘다른 하나’는 각기 시가와 신체단련을 가리키는데 실제 이어지는 그 역할에 대한 설명은 모두 시가의 역할이라는 지적이 있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러나 신체 단련도 결국 ‘영혼을 위해 있는 것’(410c)이고 ‘시가와 신체 단련의 혼합이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영혼에 적용된 상태’가 ‘가장 시가에 능한’ 상태(412a)임을 고려하면 신체 단련도 마치 율동처럼 화음과 장단이라는 시가적 요소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글 4)는 욕구 부분이 커지고 강해질 경우 나머지 부분들을 노예로 삼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욕구 부분은 능동적으로 지배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이성 부분이 병이 들었어도 욕구 부분은 이성 부분에 따른다. 다만 그때 이성 부분은 병이 든 상태이므로 욕구 부분을 제어하는 쪽이 아니라 반대로 그 욕구를 강화하는 쪽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상태는 곧 이어서(444b) 언급되듯이 부정의한 영혼의 상태이다.

* 위의 글 8)은 당대 아테네에서 정의롭지 못한 행위들의 대표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부모 봉양 등 동양의 전통 윤리와도 별 차이가 없다는 것도 흥미롭다.

* 위의 글 9) : 플라톤에서 정의를 비롯한 지혜, 용기, 절제 등 제반 덕들은 앎인 동시에 실천을 담보하는 힘 즉 실행 능력이다.

* 위의 글 10)에서 플라톤은 외적인 정의로운 행위들을 정의의 어떤 영상eidōlon으로 언급한다. 이 영상이 의미하는 것은 통상 플라톤의 보편적인 정의(定義)가 통상 구체적 사례들이 아니라 본질 차원에서 규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상과 그림자라는 관계에서 그림자 내지 구체적 사례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 언급의 초점은 실상과 그림자의 관계라기보다는 개인의 정의를 외적인 행위를 기준으로 규정하지 않고 영혼의 내적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실상과 그림자의 관계로 보자면 전자 즉 외적 행위는 정의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후자 즉 영혼의 내적 상태가 정의의 실상이라 하겠다. 이 점에서도 플라톤 윤리학의 고유성이 드러난다. 개인에게 있어 정의와 선은 외적인 행위 이전에 내면의 영혼 상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플라톤의 입장은 도덕 심리학의 혁명적 선구이자 오늘날 덕의 윤리학의 뿌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글 11)에서 화음의 세 기본음인 하현음, 상현음, 중현음 : 그리스 음악의 화음체계에서 음계의 구성은 4개음으로 이루어져 완전4도가 되는 테트라코드(tetrqachord) 2개가 이어져 만들어진다. 이중 가운데 위치한 음을 중현음(mesē), 가장 낮은 음을 하현음(hypatē), 가장 높은 음을 상현음(neatē 또는 nētē)이라고 불렀다.

* 위의 글 12)에서 ‘설사 그 중간에 다른 어떤 것들이 있더라도’ : 세 가지 기본음을 나라와 영혼의 세 계층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경우, 이 표현은 나라와 개인 영혼의 세 계층들 사이에도 어떤 다른 계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 기본음은 화음의 기본음이고 하나의 음악에 그 밖의 음들도 수없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똑같이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 표현의 강조점은 정의는 어떠한 다양성의 경우라도 하나를 이루어 절제와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 위의 글 12)에서 앎epistēmē과 믿음doxa, 지혜sophia와 무지amathia가 대비되고 있는데 특히 <국가>에서 앎과 믿음이 동시에 대비되는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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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플라톤은 덕들과 관련하여 나라와 개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숫자로 유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러한 언급은 앞서 언급한 내용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명 상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다.

우선 앞서 나라의 덕을 논하던 부분에서는(427d-445c) 분명 지혜의 덕은 통치자의 고유한 덕으로, 용기의 덕은 수호자의 고유한 덕으로, 절제의 덕은 모든 계층 공통의 덕으로 그리고 그러한 덕들을 서로 조화롭게 만드는 덕은 정의로 각기 언급되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통치자는 지혜, 용기, 절제의 덕 모두를 수호자는 용기와 절제의 덕을, 생산자는 절제의 덕을 갖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이곳 개인의 덕을 논하는 부분에 와서는 나라가 갖고 있는 덕들과 동일한 것이 같은 수로 개인에게도 있다고 언급되고 있다. 즉 개인 역시 나라가 지혜, 용기, 절제, 정의 4개 덕을 갖고 있듯이 개인도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4개 덕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다르게 언급하고 있을까? 그것은 앞서 통치자의 덕들에 대한 논의 부분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이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 발생적인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다. 즉, 플라톤은 통치자의 출현에 맞추어 통치자의 덕을 언급하면서 논의 순서에서 통치자가 아직 철학자라는 점이 살펴지기 이전임을 고려하여 일단 그렇게 한정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라의 부분들과 개인 영혼의 부분들이 어떻게 유비적으로 상응하는지를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일단 나라의 세 계층과 영혼의 세 부분이 서로 상응하는 것이라면 통치자 계층은 이성 부분, 수호자 계층은 기개 부분, 생산자 계층은 욕구 부분에 서로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상응한다고 해서 통치자 계층의 영혼은 이성 부분만 있고, 수호자 계층의 영혼은 기개 부분만 있으며, 생산자 계층의 영혼은 욕구 부분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 자신 모든 사람의 영혼은 누구나 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영혼 3분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그 누구든 그들의 영혼은 모두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똑같이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나라와 개인 간의 유비는 실제로 어떤 관계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일까?

* 설명을 위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경우를 살펴보자. 플라톤에 따르면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모두 그들 자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가장 잘 발휘했을 때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들 자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가장 잘 발휘했다는 것은 그들 자신 내부의 영혼들이 그들 고유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되도록 최상의 조건으로 조직화되었다는 것 즉 서로 최상의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통치자의 영혼은 자신의 고유한 역할이 최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이성 부분의 주도하에 통치에 관한 지혜가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고, 수호자의 영혼은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수호에 관한 용기가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며, 생산자의 영혼은 이성 부분의 지시에 따라 각자 욕구와 소질에 맞는 생산 기술 능력이 최고 상태가 되도록 조화를 이룬 것이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모두는 각각 가장 조화로운 영혼의 상태를 이루되 통치자는 이성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수호자는 기개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생산자는 생산력으로서 욕구 부분이 극대화된 영혼의 상태로 나머지 부분들과 조화를 구현하면서 각기 정의로운 개인이 되고 그러한 개인들이 정의로운 나라의 정의로운 시민이 되는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의 상태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의 내적 능력 즉 덕을 최대한 발휘하여 구현한 상태라면 그들 계층 각각은 그리고 그들의 내적 영혼의 부분들 각각은 공히 지혜와 용기와 절제 그리고 정의의 덕을 구유한 것이 되고 그에 따라 그러한 영혼을 간직한 개인 역시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라는 4개 덕을 갖춘 개인이 되는 것이다. 다만 서로 간에 차이가 있다면 통치자는 나랏일 전체를 다스리는 지혜의 덕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고, 수호자는 통치자를 도와 나라를 수호하는 용기의 덕이 통치자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사람이며, 생산자는 통치자와 수호자와 더불어 공히 뛰어난 절제의 덕을 바탕으로 최소한 각자의 기술 영역에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은 모두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을 갖추고 있고 또 모두가 정의의 덕을 통해 각자의 일을 최선으로 수행하면서 계층 간 영혼의 부분들 간의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과 양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최고의 클래식 성악가와 트로트 가수가 있다면 그들은 모두 각자 자기가 가장 잘하는 영역에서 최상의 조화로운 음악을 구현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음과 소리의 성격 내지 그것들의 조화 양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 이렇듯 정의로운 나라의 개인들은 모두 자신의 고유한 역할 수행을 통해 정의로운 나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모두 정의로운 사람이고 나아가 각자 나름대로 최상의 영혼의 조화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행복하며 그 행복감의 크기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고유한 적성과 소질에 따라 구현된 최상의 조화인 한, 서로의 역할에 대한 질투나 선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랏일을 기준해서 보면 그들의 역할이 갖는 중요도의 차이만큼 그들의 조화에 대한 평가는 달라 질 수 있다. 이를테면 통치자이자 철학자의 경우 오랜 동안의 철학 교육을 이수해온 데다가 나랏일에서 가장 중차대하다고 여겨지는 통치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인 만큼, 그들의 영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을 동반한 가장 고매하고 품격 있는 수준의 조화를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의 앎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정의로운 나라는 분업에 기초한 협동적 공동체로서, 통치자의 앎뿐만이 아니라 수호자, 생산자 모두의 앎이 최소한 각기 자기 기술 영역에서 만큼은 최고의 앎의 상태로 조화롭게 결합되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 인간 본성의 다양성 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각기 다른 적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인간 본성론과 관련한 플라톤 철학의 기본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국가>에서도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나랏일과 관련한 역할을 기준으로 크게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 구분한 것도 그러한 인간의 자연적 본성론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주장이 그러하다 해도 생산자 계층을 제외한 통치자, 수호자 계층이 차지하는 수적 비중을 고려하면, 본성을 세 그룹 정도로 구분하는 것만으로 과연 자신이 내세우는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할까 의심이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세 그룹 중 생산자 계층이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플라톤이 정작 인간의 다양하고도 고유한 적성과 소질들을 거론할 때 인용하는 사례들을 보면 통치 기술과 전투 기술뿐만이 아니라 농사기술, 제화술, 의술, 조타술, 목공술 등 생산자들이 갖는 다종다양한 기술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 자신 각기 다른 자연적 본성에 따라 사회 계층을 크게 세 계층으로 구분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세부적으로는 이상 국가 구성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산자들 또한 내적으로 서로 다른 본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플라톤은 생산자들 각자의 실질적인 욕망 또한 비록 그들 욕망이 대부분 돈으로 충족된다.(442a)는 점에서 돈을 좋아 하는 부류로 단순화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질적 욕구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종다양한 적성들과 소질들 즉 각기 다른 다양한 욕망들을 갖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오늘날 어린 시절 우리들 모두 장래 희망하는 직업이 다종다양하게 서로 달랐다가 성장하면서 당대의 외적인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거의가 비슷한 직군들을 선망하게 됨을 되돌아보면 플라톤의 견해가 오히려 자연적 본성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는 이들의 이와 같은 다양하고 고유한 욕망에 기초하여 분업적 사회 공동체에서 각자 그에 걸맞는 고유한 역할을 최선으로 수행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 각자의 적성과 소질에 합당한 양육과 교육을 설계하고 그것의 이행을 의무화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국가는 말 그대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이상적인 나라인 것이다.

 

[444a-445d]

* 소크라테스는 이상으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에 대한 논의의 대장정을 모두 마무리 한다. 그러나 애초 논의 목적으로 상정된 부정의한 나라 및 개인들과 비교해보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그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우선 부정의ἀδικία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살펴보려 한다.(444a) 이에 관해 이곳에서 그가 펼친 논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부정의란 이 세 부분들의 내분στασις이며 참견πολυπραγμοσύνη이고, 남의 일에 대한 간섭ἀλλοτριοπραγμοσύνη이며 영혼 전체에 대한 일부의 반란ἐπανάστασις이다.(444b)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노릇하는 것δουλεύειν이 적합한 그런 성향φύσις의 부분이 영혼 안에서 벌이는 반란이다. 부정의는 영혼 안의 부분들의 혼란ταραχή과 방황πλάνη이며 방종ἀκολασία이고 비겁δειλία이며 무지ἀμαθία 즉 일체의 악덕κακία이다.(444b)

2) 그렇다면 부정의한 행위와 정의로운 행위가 무엇인지도 명확하다. 이것들이 영혼 안에서 하는 작용은 건강한 것들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이 몸 안에서 하는 작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 건강한 것들은 건강ὑγίεια을 생기게 하고,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병νόσος을 생기게 한다.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 역시 정의를 생기게 하고, 부정의한 일은 하는 것은 부정의를 생기게 한다.(444c)

3) 건강을 생기게 함은 몸 안에 있는 것들이 본성에 맞게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도록 확립하는 것인 반면, 병을 생기게 함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본성에 어긋나게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도록 확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의를 생기게 함은 영혼 안에 있는 것들을 본성에 맞게κατὰ φύσιν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게 확립하는 것인 반면, 부정의를 생기게 함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본성에 어긋나게παρὰ φύσιν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445d)

4) 덕ἀρετὴ은 일종의 영혼의 건강이고 아름다움이며 좋은 상태’ἀρετὴ ὑγίειά τέ τις ἂν εἴη καὶκάλλος καὶ εὐεξία ψυχῆς인 반면, ‘악덕은 질병이며 추함이고 허약함’κακία νόσος τε καὶ αἶσχος καὶ ἀσθένεια이다. 아름다운 활동τὰ καλὰ ἐπιτηδεύματα은 또한 덕ἀρετῆ의 획득κτῆσις으로 이끌고 추한 활동τὰ αἰσχρὰ은 악덕 κακία의 획득으로 이끈다.(444e)

5)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의롭게 행하는 것, 아름다운 활동을 하는 것,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인 것이 이득이 되는지λυσιτελεῖ 아니면 부정의한 사람인 것이 이득이 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445a)

6) 글라우콘은 그 두 가지 각각이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왔던 그런 것들임이 드러난 마당에 그것을 비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더라도 우리가 여기까지 왔으니 기운을 잃지 말고 사실이 이렇다는 것을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게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445b)

7) 덕은 한 가지ἓν 유형이지만 악덕은 무한하며 ἄπειρα 그중 기억해 둘 만한 것들(악덕)은 네 유형이다.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몇 종류τρόπος이든 영혼의 종류도 그만큼이 있다.(445c) 이에 따라 정치체제가 다섯πέντε 종류이듯, 영혼도 다섯 종류이다.(445d)”

8)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왔던 정치체제는 한 종류이지만 이름은 둘이 붙을 수 있다. 다스리는 사람들 사이에 특출한 사람이 한 사람이면 왕정βασιλεία이라 부르고 여러 사람인 경우에는 최선자(最善者)정체ἀριστοκρατία라 부른다. 이것은 모두 한 유형ἓν εἶδος이다. 다스리는 사람이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온 양육τροφῇ과 교육τροφῇ을 실행하는 경우에는 나라의 중요한 법을 흔드는 일은 없다.(44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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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의 글 1)에서 ‘부정의란 .. 영혼 전체에 대한 일부의 반란’ : 부정의에 대한 이곳에서의 언급은 앞서 (442a) ‘욕구 부분이 다른 부분들을 노예로 삼는다.’는 말과 하나로 연관된다. 이곳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러한 상태를 ‘종노릇하기에 적합한 그런 성향의 부분이 영혼 안에서 벌이는 반란’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내용상 이성이 욕구의 도구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 행위와 동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어쨌거나 이성이다. 인간 행위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욕구의 힘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병이 들어 본래 모습을 상실하고 스스로 잘못된 방향인지도 모른 채 아니 그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 양 착각하고 능동적으로 욕구를 이끌고 가는 것이다. 이른바 도구적 이성, 계산적 이성으로 전락한 것이다. 욕구의 측면에서 보면 욕구에 이성이 지배된 것으로 보이지만 애당초 욕구는 지배라는 의도적 목적을 가질 수 없는 그 자체로 맹목적인 힘이다. 플라톤에게서 구조상 영혼과 동일한 나라의 경우에도 반란은 생산자 계층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자 계층을 이용한 선동적 정치가들 내지 타락한 통치계층에 의해 저질러진다. 요컨대 부정의는 이렇게 이성이 병이 들었을 때 그 병든 이성이 능동적으로 초래하는 결과들 즉, 영혼 안의 부분들의 혼란과 방황이며 방종이고 비겁이며 무지, 즉 일체의 악덕이다. 20세기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재현되고 있다. 이성이 폭압적 권력을 비판하기는커녕 반대로 권력을 정당화하는 능동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이다. 일례로 나치 권력에 빌붙어 플라톤의 이름으로 나치즘을 극력 정당화한 프리데만(H. Friedemann)과 싱게르(K, Singer)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게오르그(S. Georg) 학파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플라톤을 폭압적 전체주의의 이론적 배후로 낙인찍히게 만든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이정호, ‘플라톤의 정치철학’, 『아주 오래된 질문들』, 동녘, 2017 참고)

* 위의 글 3), 4)에서 플라톤은 덕으로서 정의를 자연적 본성에 따른 영혼의 건강이자 좋은 상태로, 악덕으로서 부정의는 자연적 본성에 거스르는 질병으로 규정한다. 플라톤은 제2권 서두에서(357b-c) ‘좋은 것’을 아래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i) 그 자체로 좋은 것 ii) 그 자체로도 좋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에서도 좋은 것 iii)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번째 것의 대표적인 경우로 건강을 들고 있다. 여기서 플라톤이 정의를 ‘건강’과 ‘아름다움’ 이자 ‘좋은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정의를 그 자체 때문에도 좋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즉 완전하고 영원한 조화를 구현하고 있는 우주적 선(善)에 뿌리를 둔 객관적 원리이자 본성적 선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몸이 건강하면 편하고 몸이 질병에 걸렸을 경우 직각적으로 아프고 불편하다는 것을 안다. 플라톤이 보기에 부정의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질병에 걸리거나 몸이 다쳤음에도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미 그 자체로 터무니도 없고 가당치도 않은 것, 즉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한, 어떤 경우에서든 영혼의 조화 즉 마음의 평화를 이루어 평안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건강이 그러하듯 정의는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서 사람들의 견해에 의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규정될 수 있는 것 즉 상대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아직 증명된 것은 아니다. 제2권 서두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개의 논의 단계를 상정하였다. 우선 그것을 보다 잘 살핀다는 명분으로 대문자 비유를 통해 사람을 나라로 확대시켰고 그런 연후 정의로운 나라를 세워 그 나라가 어떤 덕들을 갖추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원래 논의 목적대로 나라에 대한 논의에서 개인 영혼에 대한 논의로 돌아와 개인에서도 나라와 같이 정의가 성립하고 나라의 덕과 동일한 덕이 개인의 영혼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함을 논증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그러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부정의한 나라와 부정의한 개인과 비교하여 그 중 어떤 나라와 개인이 그 자체로 좋고 결과에서도 이득이 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미 기본적인 결론을 내놓은 상태일지라도 글라우콘에게 그 둘을 비교하는 논의를 시작하자고 말한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이미 지금까지의 논의만 보더라도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 다 드러난 마당에 그 둘을 비교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대꾸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게 보아야 한다는 점을 내세워 그러한 논의를 이어가려한다. 그리고 그 첫 단계로 정의로운 사람을 살필 때 사람을 나라로 확대해서 고찰했듯이 이곳에서도 부정의한 사람을 살핌에 앞서 우선 부정의한 나라 즉 부정의한 정치체제들부터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논의한 정치체제와 상반된 네 가지 유형의 부정의한 정치체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에 착수하게 된다.

* 위의 글 8), 9)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정치체제의 종류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지금까지 논의한 정치체제로서 왕정 내지 최선자 정체를 포함하여 명예정,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 등 다섯 가지 정치체제들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여기서 이른바 왕정과 최선자 정체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사실 지난 강해(44)에서 플라톤의 철인왕정이 1인왕의 지배체제인가 다수 왕들에 대한 지배체제인가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에게 철인왕의 숫자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핵심은 그 왕의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몇 사람이건 어떤 양육과 교육을 받았는가 즉 그들이 과연 진정한 철학자인가 아닌 가에 있다. 다만 지난 번 강해에서 플라톤의 철인왕 정치체제를 일인 왕정이 아니라 실제로는 다수 철인왕의 정치체제 즉 최선자 정체라고 집중해서 강조한 것은 오늘날 플라톤의 철인왕정에 대한 인식이 이른바 일인 독재체제로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시도된 것이다. 설사 통치자의 수를 문제 삼는다고 해도 <국가>나 <법률> 모두 통치 행위 주체를 표현할 경우 하나같이 복수의 통치자들로 표현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어쨌거나 핵심은 통치자의 수가 아니라 그가 철학자인가 아닌가 이다. <정치가>에서 한 사람의 철인왕정을 최상의 정치체제로 설정한 것 역시 정치가를 규정하는 과정에서 통치자의 숫자를 정치체제 분류의 한 기준으로 삼은데 따라 제시된 것일 뿐 그곳에서도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올바른 정치가 즉 왕은 철학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 최선자 정체의 그리스 원어 ‘aristokratia’는 보통 ‘귀족정’을 나타낸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은 철인왕정이라는 새롭고도 낯선 정치체제를 내세우면서도 기존의 정치체제와 비교했을 때 그나마 자신의 정치체제가 일종의 ‘복수의 뛰어난 귀족 엘리트들에 의한 정치체제’에 가깝다고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aristokratia’는 플라톤도 알고 있었을 통상의 귀족정과는 전혀 다른 그가 고유하게 제창한 정체제제 즉 말 그대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정치체제’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통상의 귀족정과 구분하고 플라톤의 취지도 살려 그것을 원어의 말뜻 그대로 ‘최선자 정체’로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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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국가> 제4권의 논의가 끝을 맺는다. 이른바 이상 국가의 기본적인 얼개가 소개된 것이다. 그리고 분량 면에서도 <국가>가 크게 다섯 부분 즉 제1권, 제2권에서 제4권, 제5권에서 제7권, 제8권에서 9권, 제10권으로 구분된다면 전체 내용 중 5분의 2를 살핀 셈이다. 그런데 제4권의 끝부분이 보여주듯이 우리 모두 제5권에서는 당연히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논의가 다루어질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그 논의는 제5권이 아니라 제8권에 가서 이어진다. 대화상대자들이 논의 진행을 끊고 몇 가지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원래의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제5,6,7권에서 펼쳐진 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형식만 일탈일 뿐 실제로는 플라톤 나름의 주도면밀한 문학적 플롯에 따라 이상국가론을 철학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뒷받침하는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통상 <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난해한 철학적 주제로 평가되는 좋음의 이데아나 변증술의 문제를 비롯해 동굴의 비유,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의 철학적 기초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이곳이다. 더욱 힘을 내서 새로운 기운으로 제5권의 논의를 이어가기로 하자. – 제4권 끝-

* 다음 주제 :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실현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필자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후 강해는 대략 한 달 간격으로 올릴 예정입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51)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51)

 

  1. B.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1) 영혼의 세 부분(434c-441c)

 

[435b-439d]

* 소크라테스는 서두에서 대문자 비유에 따라 정의에 대한 논의가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된 배경을 상기시킨 후(434d) 이제 최초의 논의 목적에 따라 지금까지 나라를 통해 드러난 것을 개인에게 적용해보자고 말한다. 즉 정의로운 사람도 정의라는 특성εἶδος 자체의 측면에서 정의로운 나라를 닮았다면 개인의 경우도 자신의 영혼 안에 이와 동일한 부류εἶδος의 것들을 갖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영혼 안에도 과연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를 살피기 시작한다.(435c)

*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처음에 사소한φαῦλος 문제라고 말을 했다가 글라우콘이 ‘아름다운 것들은 어렵다’χαλεπὰ τὰ καλά라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자 그의 말에 수긍한다. 그 문제를 엄밀하게 파악하려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따로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앞서 고찰했던 것 정도만큼의 방법으로 그 문제를 다루겠다고 말한다.(435d) 영혼 안에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는 이 부분의 논의는 다소 장황할 정도로 441c까지 이어진다. 소크라테스가 전개하는 논의의 전개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에 있는 것과 똑같은 특성εἶδος과 성품ἦθος이 우리들 각자에게 있다. 각 나라는 서로 다른 그만큼 그 나라 사람들의 특성과 성품도 서로 다르다. 예컨대 우리 지역의 경우 배움을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특성이 있고(435e) 페니키아 사람들과 이집트 지역 사람들의 경우에는 재물을 사랑하는 특성이 있다.

2) 하지만 우리가 이것들 각각을 동일한 것으로 행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 가지가 있어서 각기 다른 것으로 각기 다른 것을 행하는지 어려운 문제이다.(436a)

3)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따라 동일한 것에 관련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거나 겪을 수는 없다.ὅτι ταὐτὸν τἀναντία ποιεῖν ἢ πάσχειν κατὰ ταὐτόν γε καὶ πρὸς ταὐτὸν οὐκ ἐθελήσει ἅμα 혹시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여럿이다.(436b) 동일한 것이 동일한 측면에서 동시에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436c) 팽이στρόβιλος가 동일한 곳에 그 끝을 고정하고 회전할 때, 전체가 정지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운동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436d)그것들은 자신 속에 수직축과 원둘레를 가지고 있어서, 수직인 측면에서는 정지해 있는 것이고 원둘레의 측면에서는 둥글게 움직이는 것이다. 동일 측면에서 동시에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436e)

4)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 무언가를 얻기를 갈망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끌어당기는 것과 밀쳐내는 것 등 이런 모든 것들이 서로 반대되는ἐναντίος 것들이듯이, 욕구 일반ὅλως τὰς ἐπιθυμίας과 욕구하지 않음, 원함τὸ ἐθέλειν과 원치 않음, 바람τὸ βούλεσθαι과 바라지 않음, 영혼의 갈망과 밀쳐냄, 영혼의 끌어당김과 몰아냄 등 모두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437b-c)

5) 욕구 중 가장 두드러진 욕구는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하나는 마실 것에 대한τὴν ποτοῦ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먹을 것에 대한τὴν ἐδωδῆς 욕구이다. 목마름은 어떤 특정한 종류의 마실 것에 대한 욕구가 아니다. 목말라함 그 자체 αὐτὸ τὸ διψῆν는 그것의 본래 대상인 마실 거리 자체 αὐτοῦ πώματος 외의 다른 것에 대한 욕구가 결코 아니며, 배고파함τὸ πεινῆν과 먹을거리 βρώματος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욕구 자체는 그것의 본래 대상만을 대상으로 하고αὐτή γε ἡ ἐπιθυμία ἑκάστη αὐτοῦ μόνον ἑκάστου οὗ πέφυκεν, 특정한 종류의 이러저러한 것을 대상으로 할 때는 추가된 것들이 있을 때이다.(437d-e)

6) 모든 것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τὰ μὲν ποιὰ ἄττα ποιοῦ τινός ἐστιν 반면,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해서 있다.τὰ δ᾽ αὐτὰ ἕκαστα αὐτοῦ ἑκάστου μόνον” (438a-b)

7) 앎ἐπιστήμη의 경우도 그 자체로 보면 배울 거리 자체와 관련해서 그 대상 자체와 관련해서 앎이다. 어떤 앎, 즉 어떤 특정한 종류의 앎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된 것이다. 이를테면. 앎이 집 짓는 일에 관련되었을 때, 그것은 건축술이라고 불린다.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그것 역시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이다. 다른 기술들도 마찬가지이다. (438c-d)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것들의 경우에, 그 자체이기만 한 것들은 그 자체이기만 한 것들과 관련된 것이고 αὐτὰ μὲν μόνα αὐτῶν μόνων ἐστίν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것들과 관련된 것τῶν δὲ ποιῶν τινων ποιὰ ἄττα.이다. 예컨대 건강한 것과 병든 것과 관련되는 경우에 그 앎도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이 되어 더 이상 단순히 앎이라고 부르지 않고 특정한 종류의 어떤 대상이 추가되어 의술이라고 부른다.(438e)

8) 목마름 자체는 많거나 적은, 좋거나 나쁜, 한마디로 말해 특정한 종류의 어떤 마실 거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본래 마실 거리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439a) 그러므로 목말라하는 사람의 영혼은 그가 목말라 하는 한에서, 마시는 일 말고는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것을 갈구하고 그것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런데 만약 무엇인가가 목말라 하는 영혼을 반대 방향으로 당긴다면, 목말라 하며 짐승처럼 그것을 마시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것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 영혼 안에 있는 것이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439b)

9) 그런데 사람들이 목말라하면서도 마시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그들의 영혼 안에는 마시라고 시키는 것ὁ κελεύοντος도 있고, 마시는 것을 막는 것τὸ κωλῦον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막는 것은 계산λογισμός으로부터 일어나고 반면에 데려가고 끌고 가는 것들은 그가 겪고 있는 일과 질병들에 의해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으로 계산하는 것’ τὸ ᾧ λογίζεται은 영혼 안에 있는 이성적인 것λογιστικόν이라 부르고, ‘그것으로 사랑하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그 외의 욕구들과 관련해서 들뜨는 것’은 일종의 채워짐과 즐거움의 동료로서, 비이성적이며 욕구적인 것ἐπιθυμητικόν이라 부른다. 이것들은 영혼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두 유형εἶδος이다.(439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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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영혼 안에 세 가지 부류가 있는지의 문제를 사소한paulos 문제라고 했다가 글라우콘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 말에 수긍한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를 엄밀하게 파악하려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따로 있을 정도로 사소한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504a-b에도 이 ‘더 길고 오래된 길’이 다시 언급되고 있는데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길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수준의 길이 아니라 최대한 실재에 다가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적절한’(metriōs) 길임을 밝히고 있다. 즉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사소한’으로 번역된 paulos는 ‘쉽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이 말한 ‘어렵다’chalepa라는 말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그 문제를 사소하다고 한 까닭은 현재 논의 단계에서는 아직 실재에 관한 적절한 접근 방법으로서 변증술이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고려하여 기존의 논의 방식과 수준에 따라 쉽게 다루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생각을 모른 채 자신의 수준에서 그 문제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원래 그 문제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그의 말에 수긍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선택한 기존의 논의 방법은 통상 소크라테스가 ‘그것이 무엇이냐?’ti esti의 문제를 다룰 때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에 대한 대중들이 갖는 일상의 특수한 사례들이나 관념들이 갖는 한계들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도 논의는 욕구의 특정한 종류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욕구 자체로 다가간다.

* 1)에서 특성eidos : eidos는 플라톤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서 ‘형상’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곳의 eidos를 형상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플라톤의 형상 이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이전이고 실제로 플라톤도 지금까지 이 말을 철학적인 전문 용어가 아닌 일상적인 사전적 의미(부류, 특성, 종류, 형태)로 사용해왔다는 점에서(부류-357c, 358a, 363e, 392a, 402c, 435c. 특성-432b,d, 435d. 종류-376e, 400a, 406c, 427a. 형태-397c, 433a) 여기서도 일단 ‘특성’으로 옮긴 것이다. 플라톤은 5권 476a에 가서 비로소 이 eidos를 그 자신의 중요한 철학적 용어로서 ‘형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 2)에서 ‘이것들’ : 사본에 따라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이 다르거나 애매하다. 스토바이오스의 수정제안을 받아들인 아담의 텍스트를 따르는 경우 ‘이것들’은 앞 문장에서 각 지역 사람들의 특성에 따른 행위들을 가리키거나 뒤에 나오는 ‘배우고 화내고 영양 섭취 등을 하는 행위들’을 가리킨다.(J. Adam 436a note 참고)

* 3)에서 ‘어려운 문제’ : 신체의 기능들은 서로 다른 신체의 부위들이 있어 그것들이 각기 고유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기능들은 과연 영혼 전체로 그 기능들을 수행하는 것인지 영혼도 신체의 부위처럼 서로 다른 부분이 있어 그 부분별로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립의 원리’를 토대로 논리적 추론을 통해 영혼도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부분들 각기 서로 다른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밝힌다.

* 3)에서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따라 동일한 것에 관련해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거나 겪을 수는 없다.’ : 소크라테스의 이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확립한 사고의 모순율(<형이상학> 1005b19)의 선구적인 언급으로서 무모순의 원리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언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언급 자체를 모순율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모순율은 명제로 표명된 진술들에 적용되는 원리이지만 여기서 ‘반대되는 것들’로 언급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면 명제라기보다는 행위나 실재(entity)를 가리키고 모순 관계는 물론 반대 관계에 있는 것들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이 원리를 모순율(principle of contradiction)과 구분하여 ‘대립의 원리’(principle of opposition)라고 부른다.

* 3)에서 ‘동일한 것에 따라’kata tauton라는 말과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pros tauton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지 논란이 있다. 모순율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에는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라는 표현은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 말을 ‘동일한 것에 따라’와 중복되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아담은 ‘동일한 것에 따라’는 대립자의 원리가 적용되는 대상의 부분들과 관련된 기준이고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는 적용되는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과 관계되는 기준이라고 주장한다.(J. Adam. note 참고)

* 6)에서 ‘모든 것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은 특정한 종류의 어떤 것과 관련해서 있는 반면에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해서 있다.’라는 말은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여러 사례를 한마디로 정리해주는 말이다. 이를테면 ‘목마름’의 경우 특정 종류의 것들은 ‘뜨거운 것에 대한 목마름’, ‘많이 목마름’ 등 특정 정도나 특정 종류의 목마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그것은 ‘차가운 것에 대한 목마름’, ‘적게 목마름’ 등으로 추가될 수 있다. 특정 종류의 목마름이 다양한 만큼 그 목마름의 대상으로서 특정 종류의 마실 것들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목마름’은 모든 사람의 욕구가 하나같이 ‘이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으로 똑같다는 점에서 결단코 다양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로운 것’ 역시 ‘더 큰 이로운 것’ ‘보다 작게 이로운 것’ 등으로 정도에 따라 다르게 추가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목마름의 고유한 본래 대상은 이러 저러한 특정 종류의 마실 것들이 아니라 ‘마실 거리 자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요컨대 ‘각각의 것들 자체’는 ‘각각의 것 자체’와만 관련되어 있다. ‘배고파함’과 ‘먹을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욕구를 특정 종류들이 아닌 ‘그 자체’로만 규정하려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대립의 원리’를 통해 또 다른 ‘그 자체’로서 반대의 욕구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비로소 영혼 안에 그 욕구와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7)에서 소크라테스는 앎의 경우도 그 자체로 보면 배울 거리 자체와 관련해서 그 대상 자체와 관련해서 앎이라고 말한다. 특정한 종류의 앎은 특정 종류의 대상에 대한 앎으로서 특정 기술이다. 그렇다면 특정 앎의 대상이 아닌 앎 자체의 고유한 대상으로서 그 대상 자체는 무엇일까? 아직까지 그것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나중에 그 대상 자체는 특정한 종류의 앎들을 앎으로서 규정해 주는 총체적인 앎의 본질로서 ‘형상’으로 드러난다.

* 8)에서 드디어 앞서 언급한 ‘대립의 원리’가 ‘목마름 자체가 본래 마실 거리 자체와 관련된 것’이라는 말에 어떻게 적용되고 그것은 영혼의 부류들과 관련하여 어떤 결론으로 이끌어지는가가 드러난다. 즉 영혼의 한 부류로서 목마름이라는 욕구는 그 욕구 이외에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그것을 갈구하고 그것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런데 영혼 안에 무엇인가가 짐승처럼 끌고 가는 그 욕구와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우리들 모두는 비록 목이 말라 무엇을 마시고 싶은 욕구가 가득해도 만약에 그것을 마셨을 때 병이 나거나 죽는다면 분명 그것을 마시기를 주저하고 거부한다. 이것은 마시라고 시키는 것, 즉 목마름이라는 욕구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 즉 마시는 것을 막는 것이 우리 영혼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자신의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반대되는 것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영혼 안에는 욕구와 구분되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갖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욕구와 구분되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갖는 어떤 것이란 욕구들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고 그 계산에 따라 특정 욕구를 막거나 통제하는 영혼의 또 다른 어떤 부류로서 이른바 ‘이성적인 것’이다. 결국, 영혼 안에는 비이성적인 ‘욕구적인 것’ 이외에 그것과 구분되는 ‘이성적인 것’ 이 하나의 유형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439e-441c]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제3의 유형으로서 ‘기개적인 것’이 영혼 안에 따로 있음을 논증하고 그 특성에 관해 논의한다. 그 개요는 아래와 같다.

1) 그런데 기개θύμος와 관련되며 ‘그것으로 우리가 분노하는 것’τὸ ᾧ θυμούμεθα이 있다. 이것은 앞의 것들 중 어느 한 유형과 본성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다른 세 번째 유형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분노의 예로 아글라이온의 아들 레온티오스의 경우를 든다. 레온티오스는 사형집행인 옆에 있는 시체들을 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동시에 그러는 자신을 역겨워하면서 갈등하다(439e) 욕구에 지배된 자신에 대해 분노를 터트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분명 분노는 욕구적인 것들과는 다른 것이고, 때때로 욕구적인 것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것πολεμεῖν을 보여준다는 것이다.(440a)

2) 계산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고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λοιδοροῦντά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내고θυμούμενον, 마치 둘로 편을 나누어 내분을 벌이기라도 하듯 그의 기개는 이성의 동맹군이 된다. 이성이 하지 말라는 판정을 내렸는데도 그에 반대하여 기개가 욕구들과 결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440b)

3) 자신이 부정의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로 인해 굶주림이나 추위 또는 그런 유의 다른 어떤 일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품위 있는γενναῖος 사람일수록 분노는 덜하다. 반대로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부아가 끓고ζεῖ 사나워져서χαλεπαίνει 그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편과 동맹을 맺고συμμαχεῖ 갖은 힘든 일을 겪어도 그런 일들을 견디면서 이겨낼 것이고, 뜻을 이루거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아니면 목동νομεύς에 의해 개κύων들이 진정되듯 자신 곁에 있는 이성λόγος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진정될 때까지 고귀하게γενναῖος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개들이 양치기ποιμήν에게 순종하듯이 보조자ἐπίκουρος들이 나라의 통치자들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다. (440c-d)

4) 기개적인 것θυμοειδής과 관련해서 좀 전에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욕구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영혼 안에 내분στάσις이 일어났을 때, 이성적인 것을 편들어 무기를 든다. 이것은 이성적인 것과도 다르고 욕구적인 것인 것과도 다른 제 삼의 것τρίτος이다. 나라가 돈벌이하는 집단χρηματιστικόν, 보조하는 집단 ἐπικουρητικόν, 숙고하는 집단βουλευτικόν, 이렇게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듯이 영혼에서도 이 기개적인 것이 나쁜 양육으로 인해 망가지지 않는 한, 본래 이성적인 것을 보조하는 것으로 따로 있다. 이것은 욕구적인 것과도 이성 부분과도 다른 어떤 것이다. 그건 아이들παίδιον과 짐승들θηρίον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날 때부터 화θύμος로 가득 차 있지만, 계산 능력λογισμός은 제가 보기에 어떤 아이들은 결코 갖추지 못하고 대개의 아이들은 늦게서야 어느 땐가 갖추게 된다. 호메로스(<오뒷세이아> 20.17)도 서로 다른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꾸짖는 상황, 즉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에 대해 계산을 한 부분이 비이성적으로 분노하는 부분을 꾸짖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440e-441b) 이렇듯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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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분노하는 것’ : 영혼의 부분에는 욕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이외에 제삼의 유형으로 기개적인 것이 있다. 이 또한 대립의 원리에 의해 발견된다. 즉 기개적인 것은 레온티오스의 경우가 보여주듯 욕구적인 것의 발생을 막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욕구적인 것들에 분노하여 그것들과 싸움을 벌인다는 점에서 욕구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욕구적인 것은 반성이나 주저함이 없이 그대로 그 욕구를 표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이성적이지만 기개적인 것은 비록 계산능력은 없어도 그러한 비이성적인 욕구적인 것들과 싸우고 분노한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것의 동맹군이 된다.

* 레온티오스의 경우 그가 시체에서 성기를 보고 싶은 자신의 욕구에 분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레온티오스의 경우이건 호메로스가 묘사하고 있는 경우이건 그것들 모두는 기개적인 것이 인간의 본원적 자존심 내지 나름의 명예 의식과 깊숙이 관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들도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듯이 지적 수준이나 성격적 특성에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름의 자존심과 명예 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손상될 경우 예외 없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만큼 그것은 개인의 행위 동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 2)에서 ‘이성이 하지 말라는 판정을 내렸다’는 것은 영혼의 이성적인 것, 즉 영혼의 이성 부분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한 기개와 욕구는 이성의 통제를 받아들인다. 물론 기개와 욕구에 이성이 끌려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조차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함에도 기개와 욕구가 그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성 자체가 교육과 양육의 잘못으로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한, 결코 기개가 욕구에 결탁하거나 욕구의 힘에 이성이 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일시적인 내분, 즉 심리적 갈등은 있어도 이내 조절 통제된다.

* 3)에서 ‘분노는 덜하다’ ; 사람들은 때때로 부정의한 짓을 하다가 고통을 치른다. 그러나 품위 있는 사람일수록 그 고통을 정당하다 여겨 덜 분노한다. 그러나 타인에 의해 자신이 부정의한 일을 당하는 경우는 누구나 하나같이 분노를 터트리며 정의로운 편과 동맹을 이루어 어떠한 고통도 잘 견디며 이겨낸다.

* 4)에서 ‘그건 아이들과 짐승들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다’ : 아이들과 짐승들의 경우에도 기개적인 것이 있다. 이를테면 아이들과 동물들의 경우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을 빼앗기는 경우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내거나 크게 울부짖는다.

* 영혼의 기개적인 부분은 이곳뿐만 아니라 581a-b에서 추가적으로 다시 다루어진다. 그곳에서 기개적인 부분은 이기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부분으로 언급된다. 이와 관련한 기개적인 것에 대한 추가적인 해설은 그 부분을 다룰 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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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에서 살핀 영혼의 세 부분과 관련하여 종합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들이 있다.

1) 인간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작용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도 알고 있었다. 호메로스도 이미 노오스(noos)와 튀모스(thmos)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조차 그 마음의 작용을 이른바 영혼psychē으로 부르진 않았다. 호메로스 시절에 psychē라는 말은 다만 사람이 죽었을 때 몸에서 빠져나가 저승에서 그림자 비슷한 것으로 머무는 것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일리아스> 22.362) 물론 그때도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프쉬케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노오스, 튀모스, 메노스(menos) 등이 사용되었고 마음의 작용을 담당하는 주체도 횡경막이나 허파를 의미하는 phrenes이나 심장을 뜻하는 ker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 이전 시절에는 인간의 마음 작용 자체에 대한 관심 자체가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렇게 관심을 끌 만한 주제가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후 인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마침내 이전까지 단편적으로 논의되었던 인간의 마음 작용 일체에 대한 논의가 플라톤에 의해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져 통합적으로 사유하고 성찰되기 시작했고 이후 영혼의 문제는 서양 철학사를 관통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주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서양의 정신사에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2) 그런데 플라톤이 마음의 작용 일체를 영혼에 대한 분석을 통해 천착해 들어갔지만,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논의한 것은 <국가>가 처음이다. 초기 대화편들에서도 영혼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그것의 부분들에 대한 논의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파이돈>에 와서 <국가>와 비슷한 종류의 사례를 통해 인간의 심리적 갈등을 영혼과 신체의 대립으로 이야기하면서 그 과정에서 신체를 ‘신체적 욕구’로 표현하기도 한다.(66c) 플라톤이 당시 신체 자체도 욕구를 지닌다고 여겨 그런 표현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국가>와 그곳의 논의를 함께 비교해보면 이 신체적 욕구는 내용상 <국가>에 나오는 영혼의 욕구 부분과 크게 차이가 없다. <국가>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혼의 세 부분이 최소한 영혼에 관한 이전 논의들의 발전적 결과들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제 플라톤 자신 사상적 원숙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다양한 마음 작용과 욕구의 특성들 일체를 신체가 아닌 영혼의 작용들로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1

3) 영혼의 세 부분은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최종적인 영혼의 상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영혼은 그러한 부분들의 유기적 복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영혼의 작용은 오늘날 뇌의 물질적 생리화학적인 작용의 종합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최소한 서로 다른 마음의 작용과 특성들이 뇌의 서로 다른 부위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플라톤의 발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4) 이곳에서 영혼의 부분들은 각기 계산하고 사유하는 기능, 화를 내는 기능, 욕구하는 기능 등으로만 언급되고 있지만, 플라톤에게 영혼의 기능으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가 지각과 인식의 기능이다. 이러한 지각과 인식이 영혼 안에서 어떤 부분들의 어떤 상호 연관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는 추후 살피게 되겠지만, 영혼의 이성 부분은 단순히 어떤 주어진 것에 대한 계산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사유와 인식 기능 전반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중에 가면 그것 또한 넓은 의미에서 욕구임이 밝혀진다.

5) 플라톤은 9권 580d에서 실제로 다음에 다룰 ‘기개적인 것’까지 모두를 욕구에 포함하여 욕구 또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목말라하며 마시라고 욕구를 부추기는 것도 영혼의 욕구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시 그러한 욕구를 막으려는 것도 영혼의 욕구이다. 그러니까 욕구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영혼의 한 부류로서 ‘욕구적인 것’으로서 욕구가 있는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영혼 안에는 각기 고유한 어떤 것을 바라고 원하는 ‘이성적인 것’으로서 욕구와 ‘기개적인 것’으로서 욕구도 함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곳에서 플라톤은 그것들 각각이 욕구인 한, 각각은 자신만의 특유한 즐거움도 하나씩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이성적인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철학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욕구인 것이다. 이성은 단순히 주어진 것을 계산하고 지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즐거워하며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하는 이념이 있는 것이다.(580d-581e)

6) ‘계산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고 욕구들이 누군가를 강요할 때면, 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 자신 속에서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상대로 화를 내고 마치 둘로 편을 나누어 내분을 벌인다.’는 말을 뜯어보면 영혼의 계산하는 부분과 화를 내는 부분, 욕구하는 부분이 서로 갈등도 하면서 행동의 동기로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혼의 각 부분은 인간의 행위 동기의 원천이 된다. 요컨대 플라톤 철학에서 인간의 행위 동기를 유발하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신체는 행위 동기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인 감각 자료를 제공하지만, 그것을 지각하고 행위의 동기로 촉발케 하는 것은 영혼이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영혼의 욕구 부분이나 기개 부분의 경우 분명 행위의 동기를 촉발하지만, 그곳에서 촉발된 동기들 자체가 곧바로 특정 행위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인간의 행위는 영혼의 부분들이 촉발한 동기들을 이성 부분이 모두 종합하여 자신의 욕구를 기준으로 계산한 연후에야 비로소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요컨대 영혼은 인간 행위 동기의 원천이되 그 동기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다. 영혼의 이성 부분이 건강하면 아무런 흔들림 없이 다른 영혼의 부분에서 촉발된 동기들을 자기 주도로 통제하여 행위로써 표출하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다른 동기들에 압도되어 이끌려가거나 반대로 그 동기들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7) 이점에서도 흔히들 ‘욕구적인 것’이 부도덕한 행위의 근본 동기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욕구적인 것’은 먹는 것, 마시는 것, 돈벌이 하는 것 자체가 부도덕한 것이 아니듯이 그 자체로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생산자 집단을 돈벌이 하는 집단으로 부르는 것 역시 폄하가 아니라 다만 생산자들이 고유하게 욕구하는 물질적인 것들이 대부분 돈을 통해서 충족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581a 참고) 이렇듯 ‘욕구적인 것’은 도덕적 평가와 무관하게 맹목적으로 직진하듯 제 욕구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그것은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발휘할 경우 나라를 이롭게 하거나 도덕적인 행위를 생산하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이성적인 것’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도구적 이성, 즉 도구적 계산능력으로 전락하여 욕구적인 것의 무분별한 표출을 강화하고 결과적으로 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더욱 악화시키는 바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행위가 도덕과 부도덕이냐 하는 것은 ‘욕구적인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영혼의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8) 플라톤 철학에서 이성적인 것이 제 기능을 하는 한, 욕구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을 거스르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이성을 정념이나 욕망의 노예로 파악하는 흄(D. Hume)과 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생각은 플라톤이 보기에 욕망구조가 물질적 욕망구조로 변질된 상태를 욕망의 자연적 상태로 착각하고 있는 단견일 뿐이다. 그러한 견해는 플라톤 철학 어디에도 끼어들 틈이 없다. 이렇듯 플라톤은 서양의 철학적 전통에서 이성적 자아를 확립한 최초의 사상가이자 가장 강력한 주창자로 꼽힌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우주적 이성을 본질로 한 플라톤의 이성적 자아는 데카르트 이후 선한 우주의 소멸과 함께 오늘날 무도한 자본의 이성으로 전락하여 이른바 도구적 이성이 인간과 우주를 난도질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우주적 연대를 복원하는 길이 현대 사회의 뿌리 깊은 비참성을 극복하는 길이라면, 개인주의적 미시담론과 욕망론에 갇혀 플라톤을 고루하고도 순진한 이성주의자라고 비난하기 이전에, 현대인들의 관념 속에 마치 진실인 양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인간 욕망구조의 등질적 획일성을 감연히 깨부수는 것에 미래 철학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선한 우주와 인간 본성의 근원적 다양성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공동체적 연대와 자연적 본성의 회복을 위한 토대이자 동시에 플라톤 정치철학의 온전한 이해를 위한 첫걸음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9) 플라톤에게 영혼의 세 부분의 기능은 나라의 세 부류의 역할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 그 관점에서 앞의 경우는 나라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 나라를 부정의하게 만드는 것은 생산자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교육과 양육에 실패한 통치자들의 잘못 때문이다. 이상 국가에서는 통치자가 제대로 역할을 하므로 설사 생산자의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은 교정 할 수 있으나 그 반대의 경우는 가능하지 않다. 이상 국가에서 생산자는 정치 역할을 모두 통치자에게 절제라는 믿음으로 위임했기 때문에 설사 교정 사항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돌아가며 통치를 맡는 통치자들의 몫이다. 물론 플라톤에 따르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면 이상 국가도 타락할 수 있다. 그런 경우 통치자들의 욕망이 금전욕으로 변질되어 생산자 욕구를 침해하게 되고 그에 따라 생산자들 역시 통치자와 수호자들에 대한 의심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가 물질적 금전욕으로 획일화되면서 배타적 이기심을 기초로 한 민주정이 출범하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민주정이 되면 생산자들 즉 대중들도 정치에 대한 욕구를 갖고 참여하게 되고 대중들의 뜻대로 그것이 선동에 의해서건 아니건 그들이 원하는 통치 권력이 세워지는 일이 가능해진다고 분석한다.2

10) 현대인들은 이렇게 맞이한 민주정을 최선의 정체로 여기지만 플라톤은 민주정이 초래한 물질적 욕망의 획일화 자체가 또다시 기득권자들의 이권 증대의 토대로 이용되면서 종국적으로 민주정을 참주정체로 전락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당대 민주정을 근본적으로 반대한 근본 이유는 민중 자체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욕망의 획일화가 참주정의 모태인지도 모른 채 물질적 욕망을 모두의 자연적 본성인 양 부추겨 온 민주정의 선동가들과 시인들, 즉 당대 지식인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사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물질적 욕망은 원래부터 대중들, 즉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대중들도 이제 생존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서 본래의 다원적 욕망구조는 이렇게 지배 엘리트들과 기득권자들의 타락을 기점으로 획일화된 물질적 욕망구조로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국가> 8권에서 플라톤이 분석하고 천착한 당대의 정치적 현실상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그의 분석과 성찰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최소한 우리는 플라톤이 평생에 걸쳐 비판하고 공격했던 핵심적인 대상이 왜 대중이 아니라 타락한 지식인들 즉 타락한 지배 엘리트들이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1) 정치적 책임은 정치적 권한을 가진 자의 몫이다. 그런데 이제 민주정체에서는 대중이 정치적 권한을 가졌으므로 책임 또한 대중이 가져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민주정의 타락 원인도 대중에게 돌려져야 한다. 실제로 플라톤은 민주정 하에서 대중들에 의해 스승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하는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래서 플라톤도 당연히 민주정 아래 대중들의 무지를 비판한다. 그러나 대화편을 보면 아테네인들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과 공격은 기본적으로 대중보다는 지배 엘리트들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은 민주정에서조차 실제로 그 체제를 이끄는 주체가 대중이 아니라 선동정치가로 대표되는 지식인들과 기득권자들이라는 것을 궤 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대중들의 정치적 역할과 능력을 원천적으로 폄하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시대가 지니는 현실적 한계라는 점에서 플라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현실을 돌아보면 플라톤의 진단이 설득력을 얻는 징후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게다가 플라톤으로서는, 당대 아테네 민주정이 선동정치가들에게 장악되어있는 한, 정치체제 중 가장 참혹하고 폭력적인 참주정으로 전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를 통해 실천적인 정치인을 배출함과 동시에 당대 현실을 극복하는 장기적인 정치철학적 프로젝트로 당대의 시대적 조건에서 현실적으로 철학 교육의 수용에 가장 빠르고 유효한 소수 뛰어난 자들을 뽑아 오랜 기간 혹독한 수준의 철학 교육을 통해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담보하는 철인왕정을 꿈꾼 것이다. 그는 격동의 시대 현실을 살아가면서 결국 고도의 도덕적 정치적 능력을 갖춘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한, 인류에게 불행이 그칠 날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평생의 사색을 담아 이상국가론을 펼치게 된 것이다. 물론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오늘날의 시대 조건에서 보면 극히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환상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의 정치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정치의 지성화와 자연의 본성으로서 욕망구조의 이질적 다양화라는 이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정치철학적 화두이자 푯대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번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플라톤이 다시 태어나 오늘날 민주주의 현실에서는 철학자왕은 가히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대신 시민 대중들의 지성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주저 없이 대중에 대한 철학 교육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일로매진했을 것이다. 이미 기득권으로 찌들대로 찌든 지배 엘리트들을 각성시키기보다는 대중을 철학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정치의 지성화 내지 변혁에 이르는 훨씬 더 가까운 지름길인 것이다.

 

* 441c에서 ‘이렇듯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는 말은 나라에 있는 덕들 즉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 개인의 영혼에서도 그에 상응하여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동일하게 있으며 그 세 부분이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는 한,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 모두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에 상관없이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덕 또한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논의는 이상 국가 수립의 마지막 주제로서 마침내 개인의 주요 덕목들을 다루면서 정의로운 개인이 부정의한 개인보다 행복한지 다시 또 한 번 따져 묻는다. -끝-

다음 주제 :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