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래서 ‘교육용’ 전기 요금이었구나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와, 요즘 진짜 공부 많이 한다. 유전자조작식품(GMO), 청년수당,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둥지 내몰림), 사드(THAAD)에 전기 누진제까지. 가만있어 보자.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은데…맞다. 2005년엔 황우석 박사 덕분에 ‘줄기세포’ 전문가가 되더니 2008년엔 MB(이명박) 덕분에 광우병 지식인으로 거듭나고… 다시 공부 시즌이 돌아왔다. 무더운 여름 정부가 우리에게 또 다시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오늘은 날씨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른 전기 누진제 얘기를 해보겠다. 펄펄 끓는 ‘가마솥’ 더위가 이어지면서 학교에서도 전기 요금 폭탄을 우려해야 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매우 의아했다. 학교에 공급되는 전기 요금 체계엔 또 무슨 꼼수가 숨어 있기에 저런 뉴스가 나오는 걸까. 요즘, 주택용/산업용 전기는 언론에서 뭇매를 맞고 있어 자주 접하던 차에 교육용 전기는 또 뭔가 싶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주택용, 산업용, 일반용(상가), 기타로 구분하여 요금을 부과하는데 교육용/농업용/가로등이 기타 항목에 포함된다고 한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전기엔 누진제가 적용되진 않지만 교육용 전기의 독특한 요금 구조 탓에 높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폭염에 괴로워해도 학교 재정이 어려우면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를 그냥 참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때 필자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아, 이래서 교육용이구나”. 학교에 공급하는 전기를 ‘교육용’이란 딱지를 붙여 별도로 취급하는 이유는, 애초부터 고비용의 요금 구조로 설계함으로써 ‘참는 게 미덕’임을 가르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워도 참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교육용 전기 요금을 고비용으로 설계한 이유였던 것이다.

 

학교 밖에서의 교육이라고 다를까. 우리 주변에는 <참는 게 미덕이다>를 떠올리게 해주는 사례들이 즐비하다.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희롱 예방 교육에서 강연자가 “성희롱을 당하면 78.4%가 참고 넘어간다. 이게 미덕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다. 섬마을에서 학부형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자 교사도 참는 게 미덕이다. 교수가 되고 싶은 대학원생은 지도 교수의 성희롱은 물론 논문 가로채기를 당해도 꾹 참아야 한다. 병원에서 간호사는 서열에 따라 순번대로 임신을 해야 한다. 신입 간호사는 임신을 하고 싶어도 참는 게 미덕이다. 한편 일터에서의 노동자 역시 회사 측의 부당한 요구와 강압에 맞서 싸우면 안 된다.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검사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자고 일어나면 귀에서 흘러나온 피에 베개가 젖을 정도로 상사로부터 폭언·폭력에 시달려도 참는 게 미덕이다. OECD 최하위권의 노조 조직률 12.3%(2015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최저임금조차 못 받고 퇴직금마저 떼여도 참는 게 미덕이다. 팥빙수 장사가 잘 되어 상가 임대료가 오르면 임차인인 자영업자는 억울해도 참고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게 다 미덕이다.

 

사드가 들어와도, 핵발전소가 세워져도 참는 게 미덕이다. 허술한 공권력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도 징징대면 안 된다. 이유도 모른 채 바다에서 자식을 잃어도 정부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고 울음을 그치는 게 미덕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역시 ‘악악’대며 시위를 하면 안 된다. 정부에서 1인당 5,000만 원씩 준다고 할 때 얼른 받아 챙기고 입 다무는 게 미덕이다. 정부가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에 제동을 걸어 청년의 삶까지 직권 취소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노인들 역시 죽을 만큼 힘들어도 참고 뙤약볕 아래서 폐지를 주워 하루 1만 원이라도 건지는 게 미덕이다. 혹여 기업이 만든 치명적인 가습기 살균제를 흡입하여 폐 손상으로 평생 산소통을 달고 살아간다 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미덕이 여기서 멈출 순 없다. 횡단보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금연을 요청했다가 뺨을 맞아도 참는 게 미덕이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어도 참고 마시는 게 미덕이며, 아랫집 혹은 윗집으로부터 담배 연기가 스며들어도 참고 사는 게 미덕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가 겨울 내내 난방비가 한 푼도 나오지 않도록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리하여 설사 내가 부당하게 요금 폭탄을 뒤집어쓰더라도, 이를 발설하지 않고 참는 게 미덕이다. 교육부 공직자로부터 공개적으로 개·돼지 취급을 받아도 참는 게 미덕이다. “왈왈” 또는 “꿀꿀”대며 짖는 것도 잠시일 뿐 너무 더워서 짖을 힘도 없다. 더워도, 배고파도, 몸이 아파도, 모욕을 당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이제 똥·오줌도 참는 게 미덕이라는 말이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 참, 이미 병원에서는 인력 부족으로 간호사들이 화장실도 제 때 못 간다고 하니 지금 현실에 비추어 봐도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이렇게 학교 안팎에서 <참는 게 미덕이다>라는 가르침을 교과서를 벗어나 현장 위주의 실습 교육으로 제공해주시니 우리나라가 교육 강국의 반열에 오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우리나라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수차례 언급하지 않았던가. 문득 궁금해진다. 누가 국가 차원에서 이런 식의 대국민 교육을 조직적으로 기획할 수 있을지. 필자는 이른바 ‘민중 개·돼지’ 발언의 주인공인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씨가 그 정점에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감히 누가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겠다는 금기어를 발설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국정원도 못하는 일이다. 대통령도 못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컨트롤타워는 국정원이 아니라 교육부임이 틀림없다. 국정원 위에 교육부 있다. 이런 교육부에게 아직 교육 컨텐츠가 남아 있을까. 물론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교육해줄 내용은 ‘민영화(民營化)’가 아닐까 싶다. 전기·가스·수도·철도와 같은 공공부문의 사영화(私營化) 또는 영리화(營利化) 말이다. 그렇다면 대장정의 교육이 막을 내린 후엔 무엇이 이어질까. 정책기획관 출신 나향욱씨는 어디서 또 무엇을 기획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필자는 우리나라가 민영화 교육을 마지막으로 교육 강국으로서의 찬란했던 영광을 뒤로 하고 축산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갈 것으로 확신한다. 이미 지난 7월 8일 이후 우리는 개·돼지로 살고 있다는 점을 벌써 잊었는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지.

집에서 기르는 개를 보면서

저 개가 내 말을 알아들으면 얼마나 편할까얼마나 좋을까

당신의 글자는 위정자와 지배층에 그렇게 이용될지도 모른다.

무릇 백성은 어리석어 보이나 지혜로써 속일 수 없다 했어.

허나, 그 말은 어쩌면 오히려 어리석기 때문에 속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혜가 없는 산이나 바위를 속일 수 없는 것처럼.

헌데, 너의 글자로 지혜를 갖게 된 백성은 속게 될 것이다.

더 많이 속게 될 것이고 이용당하게 될 것이야.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개새끼처럼.

–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 최종회, 세종과 독대하는 정기준(윤제문 분)의 최후의 대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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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대학생의 며칠 [피켓2030]

이번 [피켓2030]에서는 특별히 소설 한편을 올립니다. ‘문과여서 죄송하다’말이 ‘문송’이라는 신조어로 굳어질 정도로 험난한 이 시절에, 철학과를 졸업하고도 감히 작가를 꿈꾸는 한 작가 지망생의 일상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 청춘들의 일면을 잘 드러내주는 글인 것 같아 전편을 모두 올립니다. 스크롤의 압박을 느끼시겠지만 그래도 읽어보시면 정말 잼납니다.ㅎㅎ


지하 대학생의 며칠

정승우(작가 지망생)

 

바닥까지 왔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어느 정도 지난 지금, 분명 나는 그 때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있다. 눈을 뜨는 새로운 아침마다 더 깊은 밑바닥을 맛본다. 이제 좀 그만 일어나자. 침대에서 일어나자는 게 아니다. 잠에서 깨어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 이정도면 죽어도 되잖아. 하지만 이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떠야하고 눈을 뜨면 나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먹고 살아야한다. 일을 해야 하고 꽤 괜찮은 사람이 돼야한다. 빌어먹을. 귀찮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사실 엄청 아프지는 않다. 이것도 내성이 생겨선지, 예전 같았으면 머리가 아프다며 침대에서 마구 뒹굴었을 것이다. 이젠, ‘아프다’ 한 마디 하고 말아버린다. 익숙해진 걸까. 뭐가 뭔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다지 아프지 않으니 다행이다. 대신, 몸에 힘이 너무 없어 움직일 수가 없다. 이렇게 인간이 힘이 없어도 될까 생각을 하다가 마치 내가 한 마리의 벌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온 몸을 최대한 오므리고 벽에다 붙는다. 벌레라면, 벌레의 마땅한 모습을 해야지. 최하의 인간이 된 것 같다.

해는 모습을 감췄다.

여기, 반 이상 땅으로 들어가 있는 조그만 한 칸의 방은 자연의 순환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모습, 아니 자신의 속성만을 끊임없이 고수한다. 어두움.

어두움으로 가득한 이 한 편의 지하세계는 그 이름에 걸맞게 죽음을 데려오려 한다. 여기에 갇힌 나는 이곳 밖의 사람들 보다 더 빨리 죽어간다.

이 어두움의 공간 속에서 내 몸의 열은 슬며시 빠져나가버리고 다시 그 열을 채워줄 해는 이곳에 닿을 수 없기에, 나에게 남은 것은 그저 빠져나감들 뿐이다. 열기의 빠져나감, 욕망의 빠져나감, 생명의 빠져나감. 

나는 이 어두운 구석에 눕혀져 이 한마디만을 되풀이한다. “살려주세요.”

어젯밤, 술을 마시고 들어와 노트에 끄적댄 글이다. 뭐, 이런 걸 썼지. 하긴, 반-지하 방에서 2년 정도 살다보면 어둠이 지긋지긋해지기 마련이다. 지금 시계가 한시쯤을 가리키고 있지만, 내 방은 아직도 컴컴하다. 작은 창문이 하나 있으나, 그것이 왜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빛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이곳으로 환풍이 되는 것 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밖에 볼 만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창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반대쪽 똑같은 반-지하 방의 창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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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마, 일어나 봐라. 뭐 좀 먹자.”

친구 한 녀석이 침대 밑에서 여전히 잠을 자고 있다. 이 친구는 일주일에 두 번은 이렇게 내 방에서 뻗어있다. 불을 켜야지. 녀석이 새우잠을 자고 있다. 아까 내가 벌레 모양을 한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최하의 인간이 나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안도감.

“용건아, 좀 일어나라 인마.”

그제야 친구는 눈을 뜨고, 우리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자다 일어난 꼴 그대로 내 방을 나온다. 밖에는 햇살이 뜨겁게 내리 쬐고 있다. 동굴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것 같은 기분. 왠지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다.

우리는 백반 집에 들어가서 제육볶음 하나와 순두부찌개 하나를 시켜 노나 먹는다. 참 맛있다. 평생의 끼니를 이것으로 충당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두 개를 먹는 데에 만천원이라는 돈밖에 들지가 않는다. 정말 평생 동안 이것만 먹는다고 해보자. 돈을 많이 안 벌어도 되겠네.

“야, 어제 나 술 먹고 뭐 안 했냐?” 용건이 매일 하는 질문을 어김없이 한다.

“뭐, 별 거 없었지. 늘 하던 대로.”

“또, 술 먹고 난리쳤어 그럼?”

“뭐, 늘 하는 정도로”

“술 그만 마시자, 이제”

“늘 그래야지.”

이정도가 우리가 나누는 대화다. 시답잖은 편이지. 용건이 계산을 한다. 일종의, 하룻밤을 내 방에서 묵은 대가다. 나는 장사꾼이 된 것 같단 생각이 들지만, 기분이 좋다. 용돈을 타 쓰는 이에게 밥 한 끼 값이 굳는다는 건 꽤나 큰 기쁨이다. 아, 세시 수업을 가야하는데. 뭐, 가야지. 우리는 다시 내 방에 들러, 가방만 든 채 나온다. 씻는 거야, 늘 보는 애들이니 이렇게 하루쯤 씻지 않아도 큰 무리는 없다. 무엇보다 그 친구들에겐 씻지 않은 내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하니, 더욱더 큰 무리가 없다고 봐야지.

문과대로 가는 길에 용건은 학교 호수를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한다. 정말 예쁘지 않느냐고 계속해서 물어보지만, 나는 귀찮아 대답을 넘겨버렸다. 처음엔 꼬박 대답을 해주었지만, 똑같은 물음을 계속해대니 나도 별수가 없다. 이번이 몇 번짼지. 여러 해를 봐온 호수인데, 용건은 매일 술을 마시며 호수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매일 호수가 예쁠 수 있는 거겠지. 어쩌면, 그게 더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똑같은 것을 보고서 매번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면, 다른 아름다운 것을 찾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러면 귀찮을 일이 없지. 아. 나도 술을 마시고 아름다운 모든 걸 다 까먹어버렸으면. 그럼 모든 걸 다 아름다워 할 수 있을 텐데. 나이가 들수록 익숙해지는 것이 늘어나고,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주변 모든 것들이 아침 알람처럼 짜증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때, 박쥐는 전혀 나쁜 놈이 아니야. 오히려 나쁜 놈들은, 싸움을 일으킨 놈들이지. 만약에 싸움을 일으킨 놈이 새들의 두목이랑 육지 동물의 두목 그 둘이라면, 그 두 놈이 나쁜 놈들이야. 우선, 싸우면 안 돼. 굳이 왜 싸워. 다투는 건 이 세상에서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리고 그 두 놈이 싸움을 일으켰으면 그 둘이서 해결해야 하는 거지, 왜 모두를 싸우게 만드느냔 말이야. 뭐, 그 둘이 싸움을 일으킨 게 아니라고 쳐. 그러면 새들, 육지 동물들 안의 어느 무리끼리 서로 시비가 붙었었겠지. 그러니까 싸움이 났을 거 아니야. 이 때도 똑같아. 자기들끼리 싸웠으면 자기네들끼리 싸워야지. 왜 모두 싸움을 하게 해. 일단, 이게 난 맘에 안 들어. 물론, 이건 그냥 푸념 식으로 하는 이야기고, 이제 중요한 걸 말해줄게. 들어봐. 박쥐는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야. 태어나 보니 육지 동물과 새의 모습 중간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전쟁이 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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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헛소리 하네 인마.”
“헛소리가 아니고, 들어보라고. 그러니까, 박쥐는 폭력을 당했어. 전쟁 중에 박쥐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겠지. ‘너는 어느 편이야?’ 박쥐에게 그 물음은 이런 것과 똑같아. ‘너는 어느 편이 될 거야? 너는 어떤 유(類)가 될 거야? 어서 정해. 그리고 잘 정해야 할 거야. 어떤 유가 되냐에 따라 너는 우리의 적이 될 테니까.’ 박쥐는 그냥 자기 모습 그대로 살고 싶었을 거야. 이편, 저편이 아니라 그냥 박쥐로 말이야. 그런데 육지 동물과 새들은 전쟁 중이라는 그 상황에서 서로 이기기 위해 박쥐에게 강요를 한 거지. ‘너는 우리가 되어라.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끝이다.’ 박쥐는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나는 열이 나게 이야기를 하고, 토를 하러 갔다.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셨다.


또 다시 눈을 떴고, 역시 내 방 침대에 나는 벌레처럼 누워있다. 오늘 있는 일 교시 수업을 한 번 더 빠지면 나는 F를 받게 된다. 그리고 눈을 뜬 지금은 12시 무렵이다. 수업은 이미 끝났을 것이고, 이제 나는 그 수업에서 F를 받겠지. 분명, 어제 용건에게 이 말을 하며 일찍 방에 들어가자고 했었지만, 당연한 결과다. 방은 여전히 컴컴하고, 이 녀석은 역시 새우잠을 자고 있다. 한편으론, 고맙다.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생을 편하게 살고 싶으면, 무리지어 다니라!’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 같다.
첫째, 무리 지어 다니면 생각을 할 겨를이 별로 없다. 그러니 고민이 없어지므로 아니, 고민을 할 시간이 없으므로 인생이 편해진다.
둘째, 무리지어 다니면 알게 된다. 나만 이런 등신이 아니구나. 인생이 편해진다.
제기랄. 그래도 나는 인생이 편하지가 않다. 이놈저놈 몰려다니는 데도 쓸데없는 생각이 끊임이 없다. 그래, 용건이 저렇게 자고 있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곧, 또다시 오만가지 생각이 들겠지. 니체가 틀렸다. 그래, 모든 걸 알 순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역시 제육볶음과 순두부찌개를 먹었고, 역시 용건이 계산을 했다. 그리곤 각자 집으로 갔다. 나는 방에 들어와서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 블루투스 스피커의 전원을 켜고, 노래를 들었다. 이 음악 저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딱히 내키는 것은 없다. 소리는 계속 흘러나온다. 그것은 내 귀로 들어오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소리가 음악이 되기 위해선 그것이 단순하게 일정한 음률을 지니는 것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 소리는, 지금 냉장고에서 세어 나오는 소음과 별 다를 것이 없다. 나의 집중은 그것에 가있지 않다. 내겐 둘 다 똑같이 윙윙 거릴 뿐이다.
밤이 되자 또다시 친구들의 연락이 왔다. 물론, 술을 마시자는 연락이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오늘은 방에서 쉴까, 아니면 언제나 그랬듯이 술이나 마실까. 그리고 나는 역시 술이나 마신다. 술자리에 도착하니 친구 두 놈과 여자애 하나가 있다. 나는 모르는 앤데.
“야, 왜 이렇게 오는 데 오래 걸려.”
“빨리 온 거니까 조용해라.”
“얘는 올해 신입생이야.”
“안녕하세요, 철학과 신입생 신나리입니다.”
“어, 안녕하세요.”
“이름 말해줘야지 인마.”
“이제 보지도 못 할 텐데, 됐어. 저는 그냥 4학년이에요.”


일학년 여자애가 잠깐 화장실에 갔다.
“야 저렇게 어린애를 네가 어떻게 아냐?”
“일학년 수업 안 들은 거 있어서 들으러 갔다가 예뻐서 봐뒀지. 예쁘지 않아?”
“몰라 인마. 진현아, 넌 근데 요즘 뭐하냐?”
“취업준비하지 뭐. 넌 돈 벌 준비 안 해? 그러다 쫄딱 굶는다. 돈을 벌어야 나중에 행복하게 산다. 형님 말씀 들어라.”
“아, 뭐 어떻게 되겠지. 야, 너도 취업준비 하고 있냐?”
“난 휴학해서 아직 3학년이잖아. 내년부터 하던가 해야지.”
재미없는 이야기들. 나는 술이나 마신다. 이 얘기도 별로, 저 얘기도 별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나는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다.
정말 나는 필름이 끊겼고, 눈을 떠보니 내 방 침대였다. 분명 턱을 괴고 소주잔을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눈을 한 번 깜빡이니 방인 거지? 핸드폰을 보니 정수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있다. 어젯밤에 전화한 거네.
“야, 나 어제 잘 들어갔냐?”
“그럼, 아주 잘 들어갔지. 내가 여자 있을 때 너 부르나 봐”
“왜 내가 뭐 했는데?”
“나리가 어제 너 부축해서 데려다준다고, 둘이 같이 간 거 기억 안 나?”
“몰라, 기억 안 나. 근데 걔가 왜 날 데려다줬는데”
“네 방이랑 같은 방향이라고 뭐 그러더라고. 하여튼, 허튼 짓 했기만 해봐라. 죽일 거다 내가.”
“아 몰라, 헛소리 할 거면 끊어.”
여자에 눈이 먼 놈, 나는 욕을 했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뭐 그렇다 해도, 관심도 없는 애에게 내가 뭘 했을까봐 저렇게 유난인 걸까. 그 때, 메시지 하나가 왔다. 모르는 번호다.
‘안녕하세요, 오빠. 저 어제 같이 자리에 있었던 신나리에요. 속은 괜찮으세요?’
사진 두 개가 첨부된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멋있는 말 같아서 찍었어요. 다음에 밥 사줘요, 오빠’
사진을 보니, 내 수첩을 찍은 것이었다.

숨김없음. 계속해서 밖으로 밀고 나가는 힘. 그게 긍정이다.

책임의 문제가 거대한 공포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그 때 그 순간은, 얼마나 많은 일들이 판단된 것들 혹은 예측된 것들의 범위를 벗어난 일들과 연관되어 있는 지를 보여준다. 우주적 차원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표현은 행위들이 발생하게 되는 질서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한낱 일종의 자신감이자, 자만이다.

이딴 게 멋있다니. 술에 취해 언젠지도 모르고 썼던 말들이다. 그런데, 얘는 내 번호를 어떻게 안 거지? 또 수첩은 허락도 없이 봤네. 기분이 불쾌했다. 한 마디 할까했지만, 됐다. 그 아이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것으로 그냥 넘긴다.


숙취에 오늘 하루를 멍하게만 보내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이었다. 뭐, 여긴 언제나 밤이지. 아니, 밤이라기 보단 언제나 어둠이다. 밤은 아름다운 것이잖은가. 내 방은 아름답지가 않다. 생각해보면, 밤이 아름다운 건 낮이 있기 때문이다. 또 낮이 값진 것은 밤이 있기 때문이고. 그런데 내 방은 그런 반대편이 없다는 거야. 여긴 그냥 어둠밖에 없어. 이것밖에 없는데, 아름답고 아니고 할 게 없는 거지. 내 방은 아름다운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저 어두움, 무(無)다. 갑자기 파르메니데스가 생각난다.
‘ex nihilo nihil fit’
‘무에서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덜컥 겁이 나, 방 안에 켤 수 있는 모든 불을 켰다. 그런다고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정말로 지금 나한테서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무다. 어둠 속에서 지낸 2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서서히 어둠이 돼버렸다.

아,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시간은 흐르고 여기 이 땅은 해를 맞이하여 불을 켜지만 우주는 언제나 어둠인 것을, 대체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끝없는 어둠의 자궁 속에 희미한 빛을 집어넣어준 것은 사정을 위해 들어온 남근이었거늘, 나는 이 어둠의 끝을 위해 아니, 한 순간의 짧은 이 어둠의 잊힘을 위해 어떤 천박한 것을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 끝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탯줄이 잘리며 한 존재가 드디어 자궁 속을 벗어나듯, 이 목숨을 잘라 이 우주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야, 나는 이 어둠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언제 잠이 들었던 걸까. 시간을 보니 새벽 7시다. 머리맡에는 수첩이 있고 저런 글이 쓰여 있다. 또, 헛소리나 적어놨구나. 나는 반쯤 감은 눈으로, 써놓은 메모를 연극 톤으로 읊어본다. 팔을 이렇게 하늘로 들고,
“아!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됐다, 집어치우자.
하늘로 뻗었던 팔은 그 상태 그대로다. 잠깐만. 나는 세상의 신비 중 하나를 알고 있다. 누운 상태에서 팔을 하늘로 뻗어 누워 있는 몸과 정확히 수직인 상태로 만든다면, 아무리 팔을 오래 들고 있다고 해도 아프지가 않다. 이건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안다. 이것은 확실하다. 이 부분에서는 내가 니체보다 낫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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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쯤, 방에서 아침을 대충 챙겨먹으려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글 같은 건 취업을 하고 나서도 쓸 수 있으니, 직장 구할 생각을 좀 해보라고 한다. 글 같은 거라. 글을 쓰는 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그 글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다. 그리고 글을 읽는다는 건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 이 세계의 내용들이 쓰이지만, 글이 써지는 순간 글은 이 세계와 분리돼 하나의 세계가 된다. 다만, 그것들은 이 세계와 공통의 언어란 것으로 연결돼 있다. 근데 어떻게, 이 방대한 일을 돈을 벌면서 부업으로 할 수 있단 거지? 물론, 나는 게으르다. 그래, 부지런한 누군가는 다 해내겠지. 핑계를 대는 건 좋은 것이 아니라고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워왔다. 대개, 부모님 말씀 중엔 틀린 게 없지. 아니다. 부모님 말씀은 대개 틀리지 않다고 말하기보다는, 대개 충고는 틀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여기서 잠깐, 나는 세상의 신비를 하나 더 알고 있다. 그건 이것이다. 이 세상 어떤 충고도 사실 틀릴 수가 없다는 것. 이유는 간단하지. 왜냐하면, 이 세상 어떤 충고도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바보라도 남의 충고 따위를 따를, 그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전화가 오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아침을 차려 먹었다. 스팸을 굽고 반숙으로 계란 후라이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하얀 밥. 사람들은 흔히 밥을 먹기 위해 반찬으로 스팸과 계란을 먹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스팸과 계란을 맛있게 먹기 위해 밥이 필요한 것이다. 스팸의 짠 맛을 흰 쌀이 중화시키며, 그것을 보다 맛나게 한다. 계란 후라이의 경우는 스팸과 조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와 같다. 밥은 주식이라기 보단 서포터 단연, 최고의 서포터다.
생각을 해보면 이 세상에는 거꾸로 된 것들이 꽤 있다. 밥을 먹기 위해 돈을 버는 것임에도, 돈을 벌기 위해 밥을 굶는다던가. 친구와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임에도, 어느새 술을 마시기 위해 친구와 시간을 보낸다던가. 살기 위해 행복하려는 것임에도, 행복하기 위해 산다던가. 아니면, 존재하고 난 뒤 형상이 드러나는 것임에도, 형상이 있고 존재가 등장한, 아 몰라. 생각을 그만둔다.


나는 대충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행정관 앞에서 조그마한 집회가 있다. 최근, 문과계열의 전공을 통폐합 하려는 학교의 움직임 때문이다. 예전부터 있어왔던 문제이지만, 최근에 몇 개의 과가 급작스럽게 통폐합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금 대두됐다. 때문에 sns 상에서도 수많은 글들이 올라온다. 이럴 때가 되면 다들 하는 말들이 있다. ‘무엇이 올바른가. 대학교의 올바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대학을 다니나. 지금 대학이 행하고 있는 것이 대학의 존재 목적과 상응하는 것인가.’ 내 성격이 모난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뭔가 그런 것들이 아니꼽다. 그곳에 가면 아마 진현도 있을 거고 정수도 있겠지. 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곳과 그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방을 나왔다. 역시 해는 밝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새로운 태어남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새롭게 태어나기를 갈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엔,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해결 방법은 모든 걸 갈아엎어 버리는 것이다. 특히 문제가 복잡하면 할수록 더 그렇다. 창세기 6장7절이 떠오른다. 문제로 가득 찬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는 신을 보면서, 뭔가 어긋났을 땐 ‘역시 새로 시작하는 게 최고인가’ 하는 생각을 이전에 한 적이 있다. 꼬인 것을 하나하나 풀기보다는 그냥 잘라버리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뭐가 그렇게 문제인 걸까. 잡생각을 하면서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는데, 폐휴지를 주우시는 아저씨가 옆을 지나갔다. 이틀에 한 번은 보는 아저씨다. 누가 보아도 거지꼴을 하고 있는 이 아저씨는 항상 입으로 무언가 중얼중얼 거리며 수레를 끄신다. 불쑥, 저 아저씨도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실까 궁금하다.
행정관 앞에는 역시 진현과 정수가 있었다. 그들은 제일 앞줄에 서서 열심히 대학의 올바른 나아감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정수 옆에는 그 때 만난 신입생 여자애가 있었다. 순간 그 애가 내가 있는 쪽을 쳐다봤고,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불편한 마주침은 하고 싶지 않다. 행정관 앞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 같다. 대단하다. 이 광경이 대단한 것인지,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광경이 대단한 것인가? 확실히 이런 풍경은 낯설다. 8,90년대 대학에서야 이런 모습이 흔했겠지만, 간혹 교수님들이나 어른들이 자랑하듯 그 때의 모습을 툭 내뱉기도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여 어떤 하나의 일을 꾸린다는 게 예삿일이 아니니, 이 만큼의 인원이 뱉어내는 어떤 힘 비스무리한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지는 역시 모르겠다. 정수가 그 여자애 어깨에 손을 걸치는 모습이 보인다.
“형, 왜 이제 와.”
“야 깜짝이야. 뭐, 이정도면 빨리 온 거 아니냐?” 병환이 갑자기 나타나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놀라 대답했다.
“우린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이러고 있었어.”
“얌마, 지금도 아침이긴 해.”
“아무튼, 빨리 나 따라와. 앞으로 가야지.”
“어, 어.”
병환은 사람으로 가득 차 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곳을 손을 비집으며 들어가 앞으로 나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주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 녀석의 모습을 보니, 한 명의 투사 같았다. 굳이 내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도 안 하는 것 같아, 나는 그 뒤를 따르는 척 하다가 몰래 옆으로 빠져 나왔다. 이곳이 뭔가 답답했다. 집회가 다 끝나고 저녁쯤이 되면 술을 마시자고 또 연락이 오겠지. 그 때, 사람들 얼굴이나 보던가 해야겠다. 지금은 그냥 방에 다시 들어가 쉬고 싶다.


방에 들어가는 길에, 폐휴지 줍는 아저씨를 또 마주쳤다. 그 아저씨는 역시 허공에다 혼자 중얼거리며 수레를 끌고 있었고 나 혼자서 아저씨를 바라봤다. 방에 들어왔다. 침대에 눕자마자 나는 ‘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편안함. 몸의 편안함보다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난 편안함. 어둠이 좋은 게 하나 있긴 하군. 이 안에 있으면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무엇이 있다 해도 느낄 수가 없지. 불을 켠다는 건 한편으로 위험해.
밤이 됐나보다. 시간을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다. 병환에게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후문으로 와, 형”
“응”
쉽게 대답을 해버렸다. 휴, 나가야지 뭐.
대략 10명쯤 있었다. 모두가 마구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나도 얼른 자리에 앉았고 꽤나 마셨다. 술자리는 곧 2차로, 다시 곧 3차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집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런 건 쉽사리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농담인 것 같다. 농담들이 난무한다. 웃음들이 퍼지고, 나는 그 소음 속에서 멍하니 소주잔을 바라봤다. 순간, 누군가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 신입생 여자애가 대각선 위치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엔 정수가 딱 달라붙어있다. 나는 또다시 얼른 눈을 돌렸다. 둘은 언제 온 거지.
“네가 뭘 아냐.” 갑자기 과열된 언성이 들렸다.
옆 테이블을 보니, 교성이형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누구한테 그러는 거야. 나는 고개를 앞으로 살짝 뺐다. 대상은 2학년 남자애였다.
“네가 그 책을 읽으면 이해를 할 수 있냐고. 이해도 못 할 거 읽어서 뭐하게 인마. 때려치워라 그냥.”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고 읽는 거죠.”
“조금? 읽어서 교수님정도로 이해도 못 할 거면, 쓸모없는 거 아니야?
저 형이 술에 취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농담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농담이 정작 있어야할 때는 대개 자리에 없다. 모두가 교성이형 눈치만 보고 있다. 낮에만 해도 투사가 돼서 학교에 맞서 소리 지르던 인물들인데, 밤이 되면 그 기운들이 빼앗겨 버리는 건지 아니면 해가 그런 기운들을 잠시 줬던 것뿐인지. 모두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정작 지금이야말로 투사가 필요한 때인데 말이다.
“그만해요, 형. 이해 못 한다고 책을 읽으면 안 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입을 뗐다.
“뭐라고 인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내 생각엔 형 생각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이 새끼가.”
형이 애들을 밀치며 나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물론, 말리는 이들이 있었다.
“둘 다 그만해 좀.”
“뭘 그만해. 저 새끼가 지금 말을 싸가지 없이 하는데.”
“형이 헛소리하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야, 너도 형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잠깐의 소란. 오래가진 않았지만, 이미 분위기는 꽤나 어색해졌고 술자리는 여기서 끝이 났다. 그 자리는 교성이형이 계산을 하기로 했었고, 모두들 형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나서 각자의 집으로 갔다. 나는 형이 계산을 하는 동안,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갔다. 그 2학년 남자애는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형을 기다렸다. 내 눈엔 다들 멍청해보였다.
다음날,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자가 와 있었다. 단체 문자 한 통과 몇몇 애들의 문자였다. 오늘도 집회가 있다며, 얼른 나오라는 내용들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다시 투사들이 되신 건가. 올바름을 물으며 행정관 앞에서 열심히 싸움을 하겠지. 역시,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집단, 집합이 대단한 걸까? 대단하지 않은 것들이 모여서 어떻게 대단한 것이 될 수 있지? 처음부터 그곳에 대단한 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 하고 계속 누워있다. 옆으로 눕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쿵. 순간, 어떤 추락이 느껴졌다. 실제로 내 몸이 떨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내 몸은 단지 옆으로 돌려졌을 뿐. 하지만, 난 분명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뭐지. 내 밑바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 몸이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걸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아래에 있다. 그리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아래에 있겠지. 이 추락은 언제 끝이 날까. 잠깐만. 내 추락은 언제 시작 된 거지? 그리고 왜? 그래. 내가 궁금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왜 추락을 시작했는가. 그리고 이 물음의 끝엔 내 추락이 언제 끝나는지에 대한 답이 자연스럽게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추락하는가.
추락은 부정이다. 내가 아래로 떨어질수록, 나는 더욱 더 나를 부정한다. 또한, 내가 나를 부정할수록 나는 더욱 더 아래로 떨어진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떻지? 4학년. 곧 졸업. 취업준비는 해놓지 않았고. 이전에 글을 써본 적도 없다. 잘생기지도 않았고, 부모님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천재도 아니고. 겨우, 서울권 대학에 들어와 다녔다. 고등학교 때를 생각해보자. 물론, 대학에 가기 위해 꽤나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밤을 새가면서 한 적도 있고. 아니, 나는 더 밤을 샜어야 해. 중학교 때를 보자. 그 때, 왜 그렇게 나는 멍청한 생활들을 했을까. 퍽 하면 친구들과 놀이터에 앉아, 죽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하며 이상한 이야기나 해댔다. 학원은 빠지기 일쑤였고. 초등학교 때는? 기억도 안 나네. 그냥 놀았다. 왜 그땐, 미래를 생각하지 못 했을까. 누군간 분명 그 때부터 훗날을 생각했겠지. 그럼 유치원 때는? 아기 때는? 시발. 나는 그냥 그렇게 살아왔던 거지. 내가 추락하게 된 건 내 잘못이다.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 부모님 말씀을 들었어야 했나. 나는 늘 부족했다. 그렇다면, 내 추락의 위기는 언제나 당연한 것이었고, 그 위기가 지금 드러난 것뿐이다. 홍수야 일어나라. 아니, 잠깐만. 아기 때는 도대체 어떤 잘못을 했었을까. 어떻게 내가 갓난아기시절을 보내왔기에 내가 이렇게밖에 성장하지 못한 건가. 홍수야 일어나라.
이 위대한 생각을 하는 중에, 갑자기 배가 고팠다. 쳇.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어. 그래, 배나 채워야지. 나는 제육볶음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역시 해가 높이 떠있다. 골목을 나오니 폐휴지 줍는 아저씨가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빵조각을 뜯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아니, 내 추락이 끝나는 지점이 된다면, 나도 언젠가 저런 사람이 되어있을까? 고개를 절며 나는 얼른 밥집으로 들어갔다. 제육볶음을 주문하는데, 아차. 큰 일 났다.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남았지? 핸드폰으로 확인을 해보니 2천 원가량이 남아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는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육볶음은 빵 쪼가리 보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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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건에게서 연락이 왔다. 물론, 술을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아직 채 술이 다 깨지도 않은 것 같지만,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마실 날이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지. 근데, 사주냐?’ 답장을 보냈다.
‘이 등신이. 과방으로 와.’ 답장이 왔다.
등신이라, 날 정확히 봤군. 나는 픽 웃었다.
용건을 만나러 가기 위해 과방으로 출발했다. 해가 참 쨍쨍했다. 반-지하방에서 나온 사람에게, 그 정도의 해는 꽤나 부담스럽다. 해가 아무리 쨍쨍하면 뭐하리. 결국 나의 방으로는 조금도 들어오지 못 하는 것을. 갑자기 궁금했다. 우리에겐 밝음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아니면 어두움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어둠이 본래 깔려 있고, 빛이 들어와 그곳을 밝히는 걸까? 아니면 빛이 본래 깔려 있고, 어둠이 들어와 그곳을 덮어버리는 걸까?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병환과 마주쳤다.
“어, 형! 어디 가는 거야. 어젠 잘 들어갔어?”
“그렇지 뭐. 지금 용건이나 만나려고. 너는 어디 가냐?”
“형 또 술 마시게? 정신 좀 차려. 허구한 날 술만 마셔 무슨. 난 행정관 앞에 가는 중이지. 형도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나랑 같이 거기나 가자. 좋은 일 좀 해.”
“너나 많이 해라. 난 간다.”
병환은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갔다. 갈 곳 있는 이의 걸음은 저렇게나 빠르다. 저 친구의 눈엔 난 항상 쓸데없는 것을 하는 사람인가보다.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기분이 조금 언짢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과방에 들어서니,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신입생들은 소파에 앉아 자기네들끼리 속닥속닥 거리고 있었고, 몇몇 고학번들은 직사각형의 테이블을 두르고 있는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과방에는 그 때 만난 신입생 여자애도 있었다. 나는 조금 불편했다. 용건은 날더러 과방으로 오라고 해놓고서는 정작 본인이 없었다. 아직 오는 중인가보다 생각하며, 나는 의자에 앉았다. 아는 애들도 없고 할 것도 없어, 나는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 때, 또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신입생 여자애가 어제 술집에서처럼 날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옆에 여자애에게 귓속말을 하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기분이 불쾌해져 과방 밖으로 나왔다. 복도 끝에서 용건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어제 넌 왜 안 왔냐?” 나는 삼겹살을 구으며 용건에게 물었다.
“그런 술자리 불편하다고 했잖아. 가면, 정치얘기만 아주 주구장창 해대.”
“안 그래도, 거기서 술 마시다가 교성이형이랑 싸웠다.”
“들었어. 애들이 안 좋게 말하던데.”
“누구를?”
“너.”
“아, 등신들.”
“됐어, 술이나 마셔 인마.”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삼겹살을 한 점 먹는다. 결코, 소주를 마시기 전에 삼겹살을 먹지 않으며, 소주를 먹고 삼겹살을 먹어도 결코 한 점 이상을 먹지 않는다. 그게 딱 나에게 적절하다. 그런데, 용건 이 놈도 나와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우리 둘이서 술을 마시면 안주가 많이 남는다. 한참 전에 불판 위에 놓인 삼겹살은 이미 새까맣다. 우리는 고기가 그렇게 타도록 내버려둔다. 타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우리 입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소주의 양은 정해져 있고 삼겹살은 그에 비해 넘친다.
정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용건에게 말하고 우리가 있는 곳을 정수에게 말해줬다. 정수는 금방 왔다.
“너 어제 왜 그랬어?”
“오자마자 그 소리냐.”
“어제 좀 심했어, 너.”
“심하긴 뭘 심해.”
“이번엔 둘이 싸우기라도 하려고? 정수야 술이나 받아.”
정수는 고기를 왜 태우고 있냐고 우리를 나무라며, 고기를 더 시켰다. 배가 고팠던 건지, 정수는 잘도 먹었다. 술병이 생각보다 늘어났다.
“너 근데 나리한테는 왜 그랬어?”
“그건 또 뭔 소리야.”
“나리한테 다 들었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둘이 나 모르는 소리 할래?”
“나도 무슨 소린지 몰라.”
“네가 나리한테 밥 사준다고 그러면서 껄떡댔다며.”
“걔가 그랬어?”

“어쨌든, 일들 잘 책임져서 풀어. 사람들이 너 못난 놈이란다.”
기분이 이상했다. 화는 딱히 나지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네요.’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그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참,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네요.
우리는 처음 있던 자리에서 끝까지 술을 마셨고, 그 고깃집에서 나왔을 땐 모두 만취한 상태였다. 용건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날따라 용건이 자기 집으로 간다고 해서 택시를 태워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학교호수를 따라 잠시 걸었다. 오늘따라 무척이나 호수가 아름다워 보이네. 웬일일까. 어쩌면, 용건이 호수를 늘 예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것에서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게 아니다. 이 호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던 호수지만, 오늘 아름답다.


나는 목이 말라 도중에 잠에서 깼다.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물은 다 마시고 없었다. 아. 나는 옷을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편의점은 내 방 바로 근처에 있다. 새벽 공기가 꽤 차다. 나는 물을 사자마자 벌컥벌컥 마셨다. 살겠다. 이 때 마시는 물만한 물이 없지. 나는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으로 들어섰다. 새벽부터 폐휴지 줍는 아저씨가 가로등 근처에 계셨다. 가로등은 환했다. 그 아저씨는 가로등 쪽으로 걸어왔고, 이젠 가로등을 등진 채로 서 있다. 술이 덜 깨선지, 가로등의 불빛이 그 아저씨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예전에 봤던 예수 그림이 떠올랐다. 불현 듯 생각이 들었다. ‘저 분에게는 지금의 당신 삶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다시 자려고 누웠을 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가로등 앞에 선 폐휴지 아저씨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아저씨는 뭘까. 추락의 끝에 신이 된 건가? 나는 뭘까? ‘못난 놈.’ 오늘 내가 들은 내 모습이다. 나는 왜 못난 놈인 거지? 내가 그렇게 불릴만한 일을 했어? 내가 한 거라곤 잘 알지도 못하는 애한테 온 연락을 무시한 것, 술에 취해서 이상한 소릴 하는 형에게 대꾸한 것 그리고 현재를 잊고 미래만 바라는 정의로, 뭉쳐 있는 곳에 가는 걸 거부한 것뿐인데. 대체 내가 왜 못난 놈인 거지. 나는 내가 닥친 상황에서 마땅히 할 만한 것을 했을 뿐인 걸. 그럼 어떡하라는 거야. 연락이 오면 무조건 대꾸를 하고, 형이 말하면 무조건 가만히 있어야 하며 함성이 있는 곳엔 무조건 가야하는 건가? 무조건?
그 때 나는 알았다. 추락은 없었구나. 나는 지금도,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시절도 그리고 갓난아기 시절에도, 그 어떤 때에도 잘못 행한 것 없이 충만했다. 나는 추락하지 않았구나. 아니지, 이렇게 말해야 할 거야. ‘나는 나를 추락시킨 적이 없었구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그 주위에서 끊임없이 내비치는 어떤 유형, 틀. 그리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 가해지는 비난과 부정. 그것들이 나를 추락하는 인간으로 꾸며낸 것뿐이구나.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 의무가 없는 곳에 굳이 부정이 있을 필요가 없지. 그랬었구나. 그랬구나. 그렇구나. 이게 내 모습일 뿐이구나.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나다. 당신들에게 말해야지. 미래의 내 모습을 기대하지 말아달라고. ‘미래의 나는 만날 수 없어요.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은 현재의 나입니다.’
나는 수첩을 찾아 펜을 들었다. 그리곤 이내 잠들었다.

나는 홍수를 일으켰다.

스펙타클의 사회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는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이번 글은 건국대 철학과 전공과목에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영역본을 함께 읽었던 학생이 기말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스펙타클의 사회

정승우(건국대 철학과)

우리는 풍요로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시대를 거치면서 문명과 과학 등의 발달로 인간의 권리는 계속해서 신장되고, 절대적인 재화의 양은 증가했다. 삶의 조건은 점진적으로 나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적인 예로, 자취를 하고 있는 나에게 세탁기가 없는 삶보다 세탁기가 있는 삶이 훨씬 살기가 편하다. 그런데, 그것들과 비례하게 우리의 삶의 행복 또한 늘어나고 있는가? 나의 견해로, 행복의 절대량은 늘지 않았다. 수백 년 전 시대보다 삶의 여건이 무수히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보다 결코 현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외부 환경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왜 내적인 환경은 변화 혹은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

“스펙타클의 사회” 1장은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이란 책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그 서문은 기호가 기호화된 대상을, 복사본이 원본을 그리고 외양이 본질을 대체하는 것을 비판한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 또한 그와 같다. 아주 단순화 시켜, 이미지로 말할 수 있는 스펙타클이 개인의 삶 전체를 대체하고 있다. 1테제(“현대적인 생산조건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삶의 모든 것이 스펙타클들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에서부터 34테제(“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에 이르기까지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과, 스펙타클이 만연하고 있는 ‘스펙타클의 사회’에 대해 서술한다.

1테제에서 말하는 현대적인 생산조건이 지배하는 사회는 곧, 자본주의 사회를 말한다. 여기서 스펙타클은 자본주의와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모든 것이다. 사용가치는 사라져버리고 교환가치만이 중시된다. 모든 것에 값이 측정되어 본래 목적에 대한 고려는 사라지고 오직 그 값의 규모에 따라서만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다. 자본이 모든 것인 자본주의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자본의 증대이다. 사실, 이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 권리의 신장과 함께 등장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개인들은 소유한 자본의 양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 특히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로 개인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는데, 자본을 생산할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노동을 교환가치로 내세우며 자본가 아래에서 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자본을 더 소유하는 순간 너는 언제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의 특수한 논리를 통해, 그러한 계급의 나뉨을 정당화한다. 이 사회 속에서 개인은 ‘having’ 소유를 통해서만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다. 즉, 모든 것의 가치가 자본으로 매겨지는 사회 속에서, 인정 혹은 사회적 선망은 자본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 개인이 적응하는 순간, 소외가 시작된다. 이 체제 안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노동의 과정에서 또한 소외되며, 인간으로부터도 소외되고 마지막으로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된다. 소외된 노동자의 비참한 삶은 자본가를 선망하게 된다. 즉, 자본을 선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욱 자신의 삶과 멀어진다. 자신과 자신의 삶의 분리, 자기 소외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이다. 개인들의 그와 같은 소외에 힘입어, 자본주의는 더욱 단단해지고 발전한다.

이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자가 발전을 하여 스펙타클의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 이전의 자본이 하던 기능, 목적 등은 스펙타클이 그대로 이어받는다. 다르게 말하면, 자본이 축적되어 스펙타클이 된다. 이제 ‘having’ 소유는 ‘appearing’ 보여져야하는 것이 된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이 자본 혹은 교환가치로 둘러 쌓여있었듯이,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스펙타클로 둘러 쌓여있다. 쉽게 말해, 교환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지화된다. 이제 노동자는 단순히 자본을 쫓지 않고, 자본이 보여주는 이미지를 쫓는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가상을 쫓는다. 하지만 그 가상은 동시에 물질적으로 환원된 실재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라고해서 이 세상과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얼어붙은 호수 위에 눈이 내려앉아 하나가 되듯, 스펙타클은 현실과 분리돼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존재한다. ‘벤츠’를 얻는 것이 벤츠를 사는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듯.

스펙타클의 사회는 파편화된 개인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스펙타클은 그러한 개인의 삶을 그자체로 통합해버린다. 자본주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합되었듯이, 모든 것은 스펙타클로 통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통합은 진정한 개인의 삶의 통합이 아니라 찢긴 채 분리된 삶을 단순히 획일적으로 뭉쳐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스펙타클에 의해 통합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생생한 삶이 아니라 허위의 삶이다. 왜냐하면 스펙타클 자체가 기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이 단지 소유되는 대상이 아니라 노동자 혹은 개인의 삶을 지배하기에까지 이르는 자립적인 존재였듯이, 스펙타클 또한 단순히 수동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지 않고 자립적으로 움직이며 개인의 삶을 잠식한다. 스펙타클과 개인의 삶이 전도되는 것이다.

스펙타클에 의해 개인의 삶이 잠식된다는 것은, 개인의 삶이 부정됨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펙타클은 보이는 것, 시각을 제외한 그 외적인 부분들을 부정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개인의 실현은 ‘appearing’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오직 시각적으로만 드러낼 수 있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스펙타클을 통해서만 드러내진다. 그래서 스펙타클은 일종의 지도이다. 어떤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서 지도를 봐야하듯이, 스펙타클의 사회 안에서 개인들은 행위 하기 위해 스펙타클을 통해야한다. 스펙타클에 의한 삶의 잠식 혹은 전도는 스펙타클이 더 이상 허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제 ‘벤츠’가 없이는 더 이상 벤츠는 벤츠일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스펙타클이 개인의 실제 삶의 부정이라는 것 혹은 개인의 삶을 점점 해체시킨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펙타클은 자본주의가 발전함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오로지 스펙타클 자체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스펙타클은 오로지 자본의 증대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총체적인 것으로서 스펙타클을 보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합리적 도구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결과이자 프로젝트이다. 자본은 소비를 통해 더욱 축적된다. 스펙타클은 바로 그 소비를 조장하고 정당화시킨다. 자본가는 스펙타클을 만들어서 개인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하지만 그 때의 욕망은 자본가에 의해 투여된 거짓 욕망이다. 개인의 실제 삶이 부정된다는 것은, 생생하게 경험되는 삶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생생하게 경험되는 것이 부정된다는 것은 스펙타클의 사회 안에서는 스펙타클 혹은 이미지만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스펙타클을 자본주의의 합리적 도구로 봤을 때, 스펙타클 혹은 이미지는 자본가에 의해 장치된 것이므로 이는 곧 개인의 삶이 자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으로 나아간다. 개인의 주도적 선택은 이제 소멸돼버린다. 그렇게, 개인은 점점 자기로부터 소외되고 종국에는 개인의 삶이 산산조각난다. 이처럼 스펙타클은 권력 자체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는 자본주의 안에서 드러나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틈 혹은 모든 문제들을 더욱 더 견고하게 벌려 놓는다. 스펙타클은 개인의 일상에까지 침투하고 노동자는 더욱 더 스펙타클에 그리고 자본에 종속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안에서 군림하며, 스펙타클을 도구로 사용하는 자본가는 과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실제 스펙타클은 자본주의에 갇혀진 의미를 초월한다. 스펙타클은 이미지 일반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한편으로 이미지다. 칸트의 인식론에서처럼, 물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칸트는 지각을 통해 받아들인 대상을 ‘인식의 틀’을 통해 인식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받아들여진 모든 것이 물자체에 대한 인식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모든 것은 이미지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근접함의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이미지는 본래 자립적이며 지배적이다. 최초로 받아들인 이미지는 우리의 인식을 통하여 떠올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만들어진 그 후로는 독립적으로 사고를 지배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새로운 사람을 보고 A라는 이미지를 가졌다고 가정하자. 이제 그 A라는 이미지는 내가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볼 때 저절로 떠오르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판단에 계속해서 개입한다.
개인적 인식의 차원에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통합되어 칸트 식의 ‘인식의 틀’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이미지들이 있다. 중세의 ‘신’, 근대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현대의 ‘스펙타클’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들은 ‘인식의 틀’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마치 개인의 주체성을 건드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것들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완벽한 주체성이란 것이 가능한가? 토마스 쿤은 과학 이론은 패러다임 속에 존재하며, 그 패러다임은 모든 과학적 탐구에 영향을 끼친다고 언급한다. 만약 현재의 패러다임이 무너진다면, 그것으로 패러다임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무너지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패러다임을 대체한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인간에게 생생하게 경험되었던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뿌연 연기 속에서 소외된 상태로 존재해왔다.

그런데 이 통합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러한 통합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기인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결핍을 외부의 무언가로 채우려고 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중 하나인 외로움을 생각해보자. 인간은 항상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타인을 만나면서 잠시 그 외로움을 잊는다. 하지만 타인이 떠나면 다시 혼자 남게 되고 외로움은 여전하다.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다시 타인을 찾는다. 여기서 타인이 바로 통합 이미지 곧, 스펙타클이다. 스스로 존재함에 대한 불완전함 혹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외부에 무언가를 상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외부로부터 만족을 바라는 태도, 인간의 수동성이 통합 이미지, 스펙타클의 기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가 자립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며 그것에 지배받는 것, 그 모든 과정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다.

다시, 자본가는 스펙타클로부터 자유로운가? 자본가조차 스펙타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속에서 자신들만큼은 능동적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소수의 자본가가 스펙타클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스펙타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스펙타클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뿐이다. 자본의 이미지화인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단지 노동자에 비해 자본을 많이 가졌다는 것,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자본가들이 자본을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그들이 결핍을 채워줄 외적인 존재, 즉 ‘스펙타클’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의 발전 혹은 삶의 조건의 발전과 개인의 행복이 무관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들에서 비롯된다. 행복의 절대량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삶의 불완전성을 외부로부터 채우려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해결하려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이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또 다른 ‘스펙타클’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하지만 스펙타클의 사회는 금방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펙타클은 매우 강력하다. 그 강력함은 곧, 불완전한 인간의 소유욕과 비례한다. 인간은 자본주의가 발생시키는 많은 부조리한 것을 보면서도, 자본주의를 쉽게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소유욕을 개인적 차원에서 가장 잘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자본이 있는 자는 무엇이든 소유할 수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말하는 이미지 또한 인간의 결핍, 소유욕을 채워주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자기실현은 언제나 ‘having’ 소유였다. 단, 그 소유의 대상이 달라진 것일 뿐.

과연 우리는 스펙타클 혹은 통합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의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결핍이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느냐, 실존 자체만으로 우리 삶을 만족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인간은 사회 구조를 끊임없이 인간 권리를 지향하는 쪽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무엇을 위해서인가. 바로 삶의 만족 혹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행복 혹은 만족은 외부에서 채울 수 없다. 집단 형성을 통한 혁명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능동적으로 보이는 이조차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물론,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개인적 차원으로 모든 것을 돌리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존 자체에 대한 만족이 없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로 시선을 돌릴 것이고 소외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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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 한병철의 ‘피로사회’로 바라본 내 자신 –

최민국(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3학년)

하루하루가 피곤하다. 언제부터인가 이 피로감은 가실 생각을 하질 않는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도 피곤이 몸에 걸린 족쇄처럼 나를 따라 다닌다. 이 피로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것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 없다. 모든게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공부도 노는 것도 전부 귀찮다. 그냥 매대에 널린 생선들처럼 침대에 가만히 누워 빈둥대고 싶다. 뭔가를 한다는 것에 대한 의욕이 없어 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 자신이 한심해지고, 내 자신을 구박한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초라해진다.

왜일까? 나는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시간을 거슬러 고등학교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때는 하나의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 가는 것. 수능을 잘 보는 것. 이 두 가지 목표만을 향해 나를 채찍질 해왔다. 가끔은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을 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그렇게 나를 다그쳐 달려온 길에는 몇 가지 타이틀이 놓여졌다. 그리고 그 길은 그 곳이 끝이었다. 그 길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전혀 알려주지 못했다. 나는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그저 이 허울만을 위해 달려 왔던 것이었다. 그때는 거창한 목표였던 줄 알았던 그것이 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게 되면 나의 삶도 자연스레 다음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나는 어느새 사회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던져져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아이와 같이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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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온 인생은 어쩌면 한병철이 제시한 ‘성과주의의 피로사회’에 충실한 삶이 아니었나 싶다. 내게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너는 할 수 있다.’ 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 나듯 바닥부터 시작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너희도 노력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프다하면 ‘힐링’이라는 명목으로 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때는 원래 아픈 거라면서. 노력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재촉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뒤쳐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성공과 실패에 대해 나는 ‘노력’이 부족한 나 자신을 탓하게 됐다. 성과에 매몰된 삶을 살았던 나는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사회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이전에 나의 결점을 찾게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더하여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들을 해 가는데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이 그저 사회가 제시한 목표를 따라 충실하게 일을 수행하는 그런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또한 이런 삶속에서 내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했고 그 끝에 탈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상태까지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한병철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색할 여유를 가지고 긍정적 피로를 만들어 낸다면 더 이상 이러한 성과에 집착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좀 아쉽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자기 자신의 성찰과 사색이 부족해서 이렇게 성과를 만들어 내는데 집착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그렇게도 노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자신의 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은 성과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구조가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도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도 없는 환경에서 사색을 통한 성찰만이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돈벌이가 안 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일만을 하면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마치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그 방향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사회가 제시하는 주류에 속하는 길은 너무도 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길에 들기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사회와 기업의 좋은 부품이 되기 위한 레이스같다.

이런 치열한 레이스 속에서 내가 여유롭고 싶다고 여유로워 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한 가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회 구조를 하나하나씩 바꾸어 나가는 것. 말로는 너무나 쉽다. 하지만 요즘 들어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구조가 바뀔 수 있냐는 의문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움직이지 못하고 이러한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은 자신이 당장 먹고 살길이 없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하루 살기 급급한 상황에서 결국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 눈앞에 던져진 문제들뿐일 것이다. 더 큰 문제들을 알더라도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고 다시 일상의 문제들로 눈을 돌린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무척이나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절망할 수는 없다. 이 상황 속에서 적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 먼저 우리는 이 문제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불씨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회를 똑바로 보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잘못된 것들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못된 것들을 잘못된 줄 모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게 하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작은 일상의 사소한 부분부터 바꾸어 나간다면 지금 당장 바뀌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미래가 그리 절망적이진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즉 우리가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만 어떤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다. 우리가 변화 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가? 오늘도 질문을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