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당케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야기

‘정당한 적(justus hostis)’ 개념: 슈미트의 위대한 통찰과 나의 반론 [나인당케의 단상들]

‘정당한 적(justus hostis)’ 개념: 슈미트의 위대한 통찰과 나의 반론

 

한상원(한철연 회원, 충북대)

 

그림 칼 슈미트의 저서 <대지의 노모스(Der Nomos der Erde)>

Carl Schmitt / 출처: 위키피디아

 

1.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칼 슈미트가 <대지의 노모스>에서 기술한 ‘정당한 적(justus hostis)’과 ‘전쟁 길들이기(Hegung des Kriegs)’라는 개념들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슈미트의 주장은 이렇다. 국제질서는 도덕 규범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정당한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간주하는 세력은 상대를 부당한 적으로 간주하게 되고 따라서 적에 대한 잔혹한 응징을 정당화한다. 오히려 교전 당사자를 ‘정당한 적’으로 규정하는 관점만이 전쟁의 극단적 폭력성을 억제하면서 ‘전쟁 길들이기’를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실제로 그러하다. ‘깡패국가(rogue states)’를 응징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개입’을 명분으로 중동을 군사적으로 침공하고 폭격했던 미국과 나토, 그리고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있는 돈바스 지역의 ‘자치공화국’들을 승인하며 해당 지역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러시아의 푸틴 모두 자신들을 정의의 수호자로, 상대방을 부당한 침략자이자 범죄자로 규정하면서 각자의 군사적 팽창을 정당화한다. 만약 바이든과 푸틴이, 서방과 러시아가 서로를 악마화하지 않고 (각자가 추구하는 질서에 대한 상이한 개념을 가진) ‘정당한 적’으로 규정한다면, 지금의 끝이 보이지 않는 충돌의 위험이 줄어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2.

‘정당한 적’이라는 개념은 이처럼 정치의 도덕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이를 국내정치에 대입해봐도 유용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 촛불시위 이후 등장한 민주당 정권은 자신을 ‘촛불 혁명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혁명 이후 실행되어야 할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자신들은 불의한 세력을 응징하는 정의의 심판자이며, 반대편은 심판되어야 할 불의한 적폐 세력이다.

그런데 이 패러다임은 정부와 여당으로 하여금 모든 권력을 잡고도 자신을 영원히 정의의 심판자 역할로 이미지화하면서, 자기 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불의들, 예컨대 권력형 성범죄, 입시비리 등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반성적인 태도로 일관하도록 만들었다. ‘정의로운’ 세력이 실은 ‘불공정’을 자행하는 ‘내로남불’이라는 비아냥에 직면한 것이다. 이제 이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과반수가 ‘정권교체’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답하고 있고, 상대진영 대권주자는 이제 똑같은 적폐청산 프레임을 이용해(‘민주당 적폐 청산’) 자신의 권력획득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처럼 거대여당과 야당이 서로를 적폐로 규정하면서 정작 시민들의 실질적인 삶과 관련된 핵심적인 쟁점들을 흐리는 이 상황은, 본질적으로 정치를 도덕으로 환원해서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심판하는 행위로 이해하게 될 때 벌어지는 해프닝에 가깝다.

 

3.

이러한 논의구도를 조금 더 확장했을 때, 역사적으로 벌어진 수많은 ‘혁명적 폭력’들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 이후 벌어진 공포통치나 모스크바 재판과 같은 사건들은 혁명 이후 국가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자신들의 정적을 ‘인민의 적’으로 악마화함으로써 벌어졌다. 여기서도 정치는 도덕화되며 ‘정의’의 이름으로 적을 ‘심판’해야 한다는 패러다임이 작동한다. ‘정당한 적’이라는 관념이 결여된 채 벌어지는 ‘숙청’의 잔혹함은 정치의 도덕화가 실은 매우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력들’)을 동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그리고 슈미트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러나 상통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아렌트는 ‘고통’과 ‘연민’이 정치의 주제가 되었을 때 정치가 그러한 고통에 대한 응징으로 변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폭력적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상대가 ‘비인간적 범죄자’라는 도덕적 분노는 ‘인류의 적’으로 규정된 상대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어째서 정치적 갈등이 쉽게 폭력으로 전환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사실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슈미트의 ‘정당한 적’이야말로 다원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에 융합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실제로 무페가 ‘적대(antagonism)’를 비폭력적이고 다원주의적인 ‘경합(agonism)’으로 승화시켜 자유민주주의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가장 결정적으로 참조했던 것은 슈미트였다.

 

4.

그러나 이처럼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슈미트의 주장은 문제가 없는 걸까? 과연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첫째로, 민주주의 정치는 원자화된 개인이 집단적으로 벌어지는 정치적 행위의 장에 참여함으로써 그 사회의 주권자로 거듭나는 주체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과연 개인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 속에 ‘정의에 대한 헌신’이나 ‘타자에 대한 연대감’과 같은 도덕적 요소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한 주체화 과정을 단순히 ‘전능한 주권자와의 직접적 동일시’로 이해하고 이를 만장일치적인 박수갈채 행위 속에 가능하다고 간주하는 슈미트의 관점에서는 물론 도덕의 요소가 결합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개인이 어떻게 주체로 호명되는가라는 관점에서는 ‘어떻게 ‘올바른’ 사회를 만들 것인가’와 같은 규범적이고 도덕적인 요소가 원천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국제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주권국가들 사이의 국제법 질서를 하나의 헤게모니적 체제로 이해할 때, 그러한 헤게모니 질서는 특정한 규범적 가치에 대한 신뢰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로마가 로마의 패권을 유지했던 것은 단지 로마가 전쟁을 잘 수행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시민권’과 ‘로마법’이 가진 가치에 대한 믿음이 종속민들로 하여금 로마의 동맹세력이 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국제관계에서도 일정한 도덕적 요소를 갖는 가치에 대한 믿음이 수행하는 물질적 효과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로,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인권선언’과 같은 국제인권규범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어느정도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슈미트는 1919년의 파리 강화조약의 결과로 생긴 국제연맹, 그리고 2차 대전 후 만들어진 국제연합을 비난하면서, 그 토대가 되는 세계시민주의를 ‘제국주의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이데올로기’로 비난한다. 이러한 비난이 완전히 거짓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국제연합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슈미트라면 따라서 유엔 결의를 통해 공표된 세계인권선언을 정치의 도덕화이자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중립화로, 곧 정치의 탈정치화로 비난할 것이다. 또 인권선언이 가진 추상성과 모호성으로 인해 ‘인권’을 둘러싼 새로운 갈등이 전개될 것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실제로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인권선언과 같은 공적으로 선언된 이념이 갖는 ‘정치적’ 실재성에 관해서 슈미트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발리바르와 랑시에르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이러한 인권선언이 수많은 배제된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권리를 얻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치를 지배에 대한 ‘대항정치’의 관점에서 사유하지 않는 슈미트에게서 그러한 물음은 제기되지 않는다. 제기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를 사회적 지배(아렌트가 말한 ‘사회적인 것’)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주권적 연합으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정치는 그러한 연합이 실행되기 위한 ‘주체화’의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필히 정치와 도덕이 맺는 환원적이지 않고 몹시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5.

결론적으로, ‘정당한 적’과 ‘전쟁 길들이기’라는 슈미트의 통찰은 우리에게 ‘정치의 도덕화가 낳는 폭력’에 대한 유용한 깨달음을 주지만, 이를 통해 정치와 도덕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다고 믿은 슈미트의 관점은 온전히 수용될 수 없다. 정치는 (심지어 슈미트가 말하는 ‘적/동지’의 구분이라는 의미에서도) 일정한 ‘가치지향’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별철폐 동아시아 연대를 만들어갑시다” – 반인종주의정보센터(ARIC) 대표, 재일조선인 3세 량영성(梁英聖)씨 인터뷰 [나인당케의 단상들]

“차별철폐 동아시아 연대를 만들어갑시다”

– 반인종주의정보센터(ARIC) 대표, 재일조선인 3세 량영성(梁英聖)씨 인터뷰

 

(정리: 한상원/ 통역: 최성문)

 

량영성 씨는 198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에 정착하였으며, 그의 가족은 이후 3대째 일본에서 살고 있다. 량영성 씨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에 다녔다. 조선학교는 재일교포 중, 국적을 ‘조선’으로 표기한 조선인들의 자치학교로, 아직도 일본에서는 다른 외국인학교와 달리 정식학교로 인가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 내 극우단체 재특회(在特会)의 조선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가 극심해지고 그에 대항하는 카운터스 운동이 등장하던 2013년, 그는 반인종주의정보센터(ARIC)를 세워 40여 명의 활동가들과 함께 캠퍼스 내 헤이트워치 감시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현재 히토쓰바시 대학(一橋大学) 언어사회연구 박사과정생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그의 책 『혐오표현은 왜 재일조선인을 겨냥하는가』가 번역되어 있다. 필자는 도쿄도 후추(府中)역 인근 카페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통역에는 요코하마 국립대학 사회학 박사과정생 최성문 선생이 수고해주었다. 그중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여 옮긴다.

 

–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금지법’과 반인종주의 운동을 소개해주십시오. 한국에서도 혐오발언 문제가 심각하고 이를 규제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진행 중인데,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규제법안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제 생각에 2016년에 제정된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은 문제가 많은 법입니다. 한국이 참고한다면 미국이나 유럽의 50년 전에 기본적으로 차별을 정의한 이념법, 금지법을 참고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선진국가들 중에서도 독특한 국가인데, 미국, 유럽 등 다른 선진국가들에서는 네이션의 중요한 요소로서 인권의 진보적 가치를 두지요. 프랑스는 군주를 처벌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일본이라면 혁명이나 민주화 운동이 한 번도 사회를 바꿔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종주의와 관련해서도 근본적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인종주의정보센터(ARIC) 대표, 재일조선인 3세 량영성(梁英聖)씨 출처: 필자

 

헤이트 스피치가 이렇게까지 창궐하는데 일본 정부가 어떠한 대처도 하고 있지 않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하지만 예컨대 프랑스는 루이 국왕을 죽이고 인권을 천명하는 공화주의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했고, 노예해방 내전을 벌였고, 공민권운동도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이런 국가들에서는 ‘역시 차별은 안 된다’는 규범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규범이 일본에는 없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과 그 이후의 독재정권 타도하는 투쟁 등을 거치면서, 이것이 내셔널리즘, 네이션이라는 한계는 있으나, 인권 개념을 국가가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본은 현재 전후 처음으로 재특회 등등 풀뿌리 극우 운동 등이 형성되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독일의 경우, 국가가 나치즘을 부정하기 때문에 네오나치 운동은 반국가적인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일본은 천황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전쟁 책임을 거의 지지 않고 있습니다. 반(反)차별 정책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면서 조선인들의 국적도 박탈했습니다. 사실 이런 나라에서는 극우운동이 성립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보신 것처럼 국가가 이미 차별을 하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지난 10년간 극우가 발흥했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이 일본의 2016 헤이트 스피치법을 참고로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악법입니다. 한국이 참고하려면 차라리 두 가지 측면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하나는 ‘원칙적 측면’으로 기본적 차별금지법을 가능한 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이념법’을 제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긴급적 측면’인데요. 당면한 차별을 멈추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한국 상황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동아시아가 처한 수준에서 EU가 제정한 것과 같은 차별금지법을 한국, 대만 등이 아시아의 선진국으로서 만들어주기를 바랍니다. 중장기적으로 그렇게 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 상당히 문제가 많지만, 어쨌건 재특회를 규제하려는 법인데…

규제하려는 법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재특회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도, 사쿠라이 마코토(재특회 전 회장)가 일본제일당 만들어서 선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재특회는 일본에서 평판이 나빠져서 옛날보다 인기가 없습니다. 옛 중심인물들이 재특회를 버리고 선거 활동을 통해서 차별적인 활동을 하는데, 그에 대해 일본 정부는 재특회에 대해서도, 일본제일당에 대해서 모두 방치하고 있습니다.

 

 

– 실질적으로는 규제하지 않는다, 그럼 일본 정부가 이걸 도입한 이유는 ‘보여주기식’인 건가요?

재일조선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는 특히 2009년부터 2011년 사이가 절정이었습니다. 교토의 조선고교 습격 사건, 필리핀인들의 자녀인 당시 14세 소녀 노리코 강제소환 촉구 시위 등 ‘습격형’ 헤이트 스피치가 심각해졌지만, 매스컴은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2016년에 해당 법안이 만들어진 것은 직접적으로는 2013년 2월 처음으로 <아사히신문>이 ‘헤이트 스피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재특회 데모를 비판한 데서 기인합니다. 이것이 2013∼2014년 사이 급속도로 문제시되어 2014년 즈음부터 야당이 인종차별금지법을 만들려 했습니다. 2015년 법안이 제출됐고, 결과적으론 아베 정권이 제정한 셈이죠. 그러나 실은 헤이트 스피치가 2013년부터 큰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최대 이유는 카운터(대항) 운동의 존재였습니다.

량영성씨의 저서 『혐오표현은 왜 재일조선인을 겨냥하는가』(2018) 출처: https://image.aladin.co.kr/product/16626/10/cover500/8990062861_1.jpg

 

종래 일본의 반차별운동은 기본적으로 자이니치 또는 피차별인종이나 소수자 당사자들이 그들의 조직이나 개인 차원에서 차별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타입이었는데요. 사회운동은 그러한 운동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즉 올드타입 운동은 ‘피해자를 케어’하는 운동이었으나 반면 카운터 운동은 ‘가해자를 억압하여 차별을 그만두게 한다’는 방식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은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피해자가 (신분상 불이익 등으로)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가해’ 자체가 범죄이자 악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카운터 운동의 대대적인 성장이 <아사히신문>에 의해 보도가 되면서 2013년에 ‘사회악’으로서의 차별이 최초로 가시화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카운터 운동이 먼저 있고 나서, 그것을 보도하는 매스컴이 나오고, 그것이 또 사회문제화되어 겨우 야당이 법안제정에 나선 것입니다.

아베 정부는 야당에게 헤게모니를 주지 않으려 하면서도, 이 법안의 내용을 가능한 무력화하기 위해 2016년 법안을 제한된 범위 내에서 통과시킵니다. 차별받는 피해자의 범위를 ‘본국 외 출신자’로만 한정을 두어, 오키나와 출신자를 배제하는 효과를 냅니다. 또 구체적인 처벌 조항도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 정부가 의지가 없다는 것이죠. 차별이 발생해도 그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일본에서 차별금지법을 만들어낸 것은 한계는 있지만 분명 운동의 성과이기는 합니다. 카운터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은 특히 도쿄나 관동지역의 경우에는 축구와 록 음악 등 서브컬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구의 ‘안티파(Antifa)’ 문화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건 그것대로 좋은데 다만 문제가 있다면, 미국이나 독일의 안티파는 되지 못한 것이죠. 독일은 실제로 네오나치 집회를 저지하는 행동이 가능합니다. 반면 일본은 실질적인 극우 집회 저지는 불가능합니다. 사람 수가 적고 그런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운터 운동을 ‘카운터’ 운동 이상으로 하는 것, 즉 카운터 운동을 발전시키는 한편 운동을 래디컬화하는 제3의 사회운동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 한국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시기 일베 등 극우 사이트의 혐오 표현이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이를 규제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표현의 자유’ 규제 논쟁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학술적으로도 혐오 표현 규제에 반대하는 주디스 버틀러와 규제에 찬성하는 제레미 월드론의 저서가 나란히 번역되면서 논쟁이 촉발되기도 했지요. 반차별 운동에 참여하시는 선생께서는 이러한 논쟁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 나라의 역사나 사회에 따라서 차별금지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차별금지법 제정이 2006년으로 늦어진 이유는 이미 형법상 민중선동죄가 있었고, 역사교육을 통해 충분한 시민교육을 하고 있었으며, 국가에 의한 진상규명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에 반인종주의 법안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가해자 나치 전범 처벌과 같은 개별 이슈들에 대해서는 투쟁이 존재했고 승리해왔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는 1964년의 공민권이 포괄적 차별금지를 규정합니다. 인종, 성, 연령, 장애 등이 포함되고, 흥미로운 것은 예비역을 차별금지 범주에 넣었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의 베트남전 반대운동을 억압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죠. 그 이후 블랙팬서당에 대한 학살과 탄압이 벌어지면서,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사고가 사회운동 쪽에도 널리 퍼지게 됩니다.

결국 (역사부정이나 혐오 표현을 처벌하는 독일식 모델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식 모델 중 어떤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이러한 논쟁 중에, 어느 쪽이 좋은가를 추상적으로 사고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출처: https://image.aladin.co.kr/product/8833/79/cover500/8997779664_2.jpg

 

버틀러의 책 『혐오 발언』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일본에서 버틀러를 좋아하는 분들이 실천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 연구자들은 버틀러가 헤이트 스피치 규제를 거부한다고 생각하지만, 잘 읽어보면 버틀러는 ‘국가가 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대학이 하는 스피치 규제는 찬성’합니다. 버틀러는 Gesetz[법률]를 통한 규제는 반대하지만, Recht[법/권리]를 대학, 기업, 지역사회에서 수행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가 얘기했듯 근대사회의 물상화는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사적 노동으로부터 사회 총노동을 성립시켜야 하는 모순이 노동생산물을 상품으로 물상화 시키므로, 인간도 부르주아/공민으로 분열시킵니다. 따라서 ‘시장의 인격’, ‘부르주아’로서의 권리에 대해 대항하면서, 국가 구성원의 공적인 인권 주체(공민)에도 반대하는 의미에서 시민권(Citizenship) 개념이 필요합니다. 일본, 한국에는 이 개념이 부재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상품 계약 주체도 아니고, 원자화된 물상화의 인격화로 승인된 국가의 구성원도 아닌, 공동체적 시민성의 자발적 연대, 결합, 투쟁 속에 형성되는 시민성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혐오 발언을 규제한다면, 어떤 차원으로부터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장 차원에서의 규제인지, 국가적 강제의 차원인지도 구분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자율적 규제, 즉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규제가 필요하며, 운동 속에 반차별 규범을 국가가 시행하도록 만들고, 사회가 국가를 흡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아까도 설명했듯이, 일본형 반차별 운동의 특징은 피해당사자의 입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행동이 차별로 됨은 피해자가 그것을 차별이라고 발언해야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는 차별의 진의를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방식이었습니다. 고립감, 두려움 등으로 피해자가 ‘그것은 차별이다’라고 공개 발언하지 못하면, 제3자는 나서지 말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했습니다.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무엇이 차별이고 차별이 아닌지에 대한 ‘진리’가 피해자의 ‘고백’에만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민권(citizenship)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해자조차 ‘자신의 손실을 항의하는 시장의 부르주아적 주체’로 규정하는 부르주아적 인권(시장에서 물상화된 인격) 개념일 뿐입니다. 이것이 일본이라는 기업사회의 비밀입니다.

반면 시민권(citizenship)에 근거하여 차별에 반대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가해자의 책임을 지게 하며, 가해자가 가진 자연권[표현의 자유]을 억제한다는 것, 그것이 포인트입니다. 기존의 일본형 반차별운동은 피해자의 입을 통한 발설로 차별을 규정하기 때문에 가해자의 자연권 억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피해자가 얼마나 요구하든지 간에, 가해자의 자발적 반성을 요구하는 것뿐, 그가 ‘차별할 자유’를 빼앗는다는 논리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푸코가 말한 (자유주의적 통치성 속에서) ‘인권의 공리주의’의 논리를 보여줍니다. 인권 개념을 공리주의적인 도구로 쓰는 발상, 다시 말해 정의를 오직 ‘개임의 룰’로만 이해하는 인권 개념 말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시장에서의 공정경쟁 외에 어떤 규범도 인정하지 않는 사고로 이어집니다. ‘평등’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범이 없습니다. 노동에서의 차별이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이죠. 이것도 일본형 기업사회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 한국의 진보진영조차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의 반인종주의 활동가로서 한국의 시민사회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습니까?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나 재일조선인 인권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며, 한국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아시아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U와 비교했을 때 아시아에는 지역 차원에서 전쟁이나 분쟁을 방지할 수 있는 국제관계가 없습니다. 현재의 국가 간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일본의 위안부 부정이라던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 등이 국제적인 영토문제와 결부되어 지역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차별금지정책은 전후 세계에서는 반파시즘과 차별금지를 보장하여 국제평화 유지에 기여할 것입니다. EU의 기반에 있는 것은 ‘반차별=반파시즘’이라는 규범을 통한 평화 유지입니다.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도 일본 정부가 이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차라리 아시아 수준에서 차별금지를 국제적인 룰로 만들면 어떨까 싶습니다. 각각의 나라에서 시민권의 원칙을 성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예컨대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 부정은 ‘차별금지’로써 억제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부정 그 자체가 역사부정일 뿐만 아니라, 성차별을 선동하고 있으며 나아가 계급차별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삼층집을 짓는다면 먼저 토대가 필요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역사갈등 문제를 직접 푸는 건 토대 없이 삼층집을 세우는 것과 같아요. 좀 먼 길이라고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차별금지정책을 시행하고, 시민권의 원리를 각국에서 제정해서 아시아 각국의 공통언어로 ‘차별반대’를 제정하지 않으면 역사 문제를 말할 공통언어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혐오는 국내 소수자의 문제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한국 여성차별(미소지니) 살인의 억제 등 긴급한 과제이기에 그것을 위해 혐오 표현의 규제가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아가 이를 국제적인 파시즘 억제 전략으로 확대하여 차별금지법을 먼저 한국, 대만에 만들어놓는 것도 중요합니다.

역사부정이나 파시즘화를 넘어서는 동아시아의 관계를 사유하는데, 역사를 인식하는 패러다임의 측면이 아니라 차별금지라는 시민권의 관점에서 출발해야 다른 길이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의 전략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공통언어로서 ‘시민권(citizenship)’과 ‘반차별’이 필요합니다. 반파시즘 위안부 문제 등에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독도 문제 등 영토문제에도 민족주의 논리로만 반대하게 된다면 극우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극우에 반대하는 데 있어서 ‘인권’은 소소해 보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권(citizenship)으로써 차별반대 논리, 이것을 지침으로 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다가오는 올림픽에서 욱일기 응원을 허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어떻게 반대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로 제기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서경덕 교수의 방식, 즉 역사 언어로 비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틀리지는 않지만, 약점을 말한다면 역사적으로 엄밀히 따질 때 지금의 히노마루(일본 국기)도 문제 삼아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저는 욱일기가 문제 되는 것도 차별금지 문제라고 봅니다. 실제로 10년 전부터 가두 연설방식의 헤이트 스피치에서 욱일기가 문제시되고 있는데, 역사적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더라도 이 10년간에 걸친 ‘차별=욱일기’라는 연관 증거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차별’의 상징으로 하켄크로이츠가 있는 것처럼 욱일기도 차별의 상징으로 규정할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역사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 차별의 상징으로 욱일기를 금지하자고 주장하면 됩니다.

이처럼 역사 문제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차별의 논리로 풀어서 얘기합시다. 그게 아마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또 한국 내 극우 반대 논리로도 써먹을 수 있습니다. 이영훈의 책 『반일종족주의』를 보면 한국 뉴라이트 특징은 민족주의 비판에 있는 듯합니다. 한국에서는 민족주의가 오히려 좌파에 의해 점령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극우는 아마도 시장원리에 근거하는 것 같습니다. 경제 성장 같은 것들 말입니다. 식민지 시기를 정당화하는 것도 경제, 독재정치 정당화도 경제입니다. 따라서 한국 뉴라이트를 비판할 때도 역사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완전히 극우를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뉴라이트가 ‘자본주의’ 경제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근거한 뉴라이트를 논박하려면 역시 시장을 넘어서는 논리, 시민권이라는 논거가 중요할 듯싶습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는 오늘날 무엇을 뜻하는가? [나인당케의 단상들]

♦ 아래 글은 『똑똑똑 녹유』 제14호(2019. 12)와 <ⓔ 시대와 철학>에 중복 게재됨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나인당케의 단상들] 코너에 게재할 수 있게 원고를 보내준 필자와 게재를 허락한 『똑똑똑 녹유』 편집팀에 감사드립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는 오늘날 무엇을 뜻하는가?

 

한상원(한철연 회원)

 

[이 글은 녹색당 유럽당원모임에서 발간하는 매거진 <똑똑똑 녹유>에 기고된 글이며, 허락을 통해 중복게재합니다.]

 

 

들어가며: 독일 통일과 정치적 주체화 과정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 그리고 이듬해 동독과 서독은 역사적인 통일에 합의한다. 올해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독일 베를린의 역사적인 장소인 브란덴부르크에서는 대규모 축제가 열렸다. 거대한 지구본과 레이저 쇼로 장식되고 인기 가수들의 노래와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으로 채워진 이 호화로운 축제는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 과정을 하나의 ‘스펙터클’로 전시하고 싶은 독일 주류 사회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것은 행사 마지막에 펼쳐진 거대한 불꽃놀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림1 2019년 11월 9일 장벽붕괴 30주년 기념행사. 사진출처: dpa/Annette Ried, www.rbb24.de

그러나 독일 통일 과정은 단지 두 분단국가의 재결합과 하나의 국가형성이라는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분석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우리가 동시에 기억해야 할 사실은 동독의 권위주의 정권의 퇴진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 과정이 드러내는 또 다른 측면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인민의 공화국’을 표방하지만 정작 인민의 목소리를 묵살해온 정치체제에 대한 인민 자신의 저항 과정이자 정치적 주체화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독일 통일은 (최근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김누리 중앙대 독문과 교수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흔히 언급되는 바와 같이 단순하게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독 인민의 자주적인 결정과 정치적 행동에 의해 이뤄진 사건이었으며, 따라서 이 사건은 ‘국가의 결합’ 이전에, 억압적 정치체제의 종식을 가져온 ‘아래로부터의’ 주체화 과정의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복잡한 사태에 직면한다. 오늘날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는 자유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 의한 장벽의 붕괴, 즉 타자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구호는 난민과 이민자의 유입에 반대하면서 국경통제를 요구하는 우익 포퓰리즘 정치세력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아가 통일 이후 독일도 피해가지 못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오늘날 ‘인민(Volk, people)’의 범주는 상실되었거나, 기껏해야 이러한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의 기형적 정치운동에 동원되며 보수적 민족주의와 타자 혐오에 젖어 있는 수동적인 군중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이끌었던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의 현주소를 추적해보는 것은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을 진단하고 성찰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니콜라이 교회에서 본홀머 슈트라쎄로: 1989년 가을의 인민

 

동독 주민들의 자유화 시위는 80년대 후반 간헐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9월 4일부터 라이프치히에서 이른바 월요시위(Montagsdemonstrationen)가 매 주 열리게 된다. 니콜라이 교회에서 열리는 예배를 중심으로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광장에 집결한 시위대는 언론의 자유와 여행의 자유 그리고 자유선거를 요구했다. 이 시위의 정점은 10월 초, 독일민주공화국(DDR) 건국 40주년 기념일을 전후로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에서 드러나게 된다. 10월 4일 드레스덴(Dresden) 중앙역에 5천 명의 시위대가 모였고, 건국일인 10월 7일에는 플라우센(Plausen)에서 1만 명이 참여하는 더 큰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경찰은 최루탄, 물대포, 곤봉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다음날인 8일에는 다시 드레스덴에서 1천여 명의 시위대가 정권에 항의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베를린을 방문 중인 가운데, 이처럼 동독의 건국 40주년 기념식은 주민들의 격렬한 시위와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속에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명예가 짓밟혔다고 생각한 당국과 호네커 국가평의회 의장은 그해 여름 중국 베이징을 핏빛으로 물들인 천안문 항쟁 방식의 진압을 검토하였고, 군부의 투입과 진압작전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음을 은밀히 암시하면서 시위대가 겁에 질리기를 유도했다. 즉 시위대와 당국 양측 모두 이 사태가 중국의 천안문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될 위험에 대해 알고 있었고, 따라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위축되지 않았다. 10월 9일, 다시 월요일이 돌아왔다. 이날의 월요시위에는 무려 7만 명이 라이프치히 시내에 운집했다. 만약 경찰의 발포나 군부대의 투입이 일어났다면 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유혈사태로 이어졌을 것이다. 당국은 결국 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지 못했다. 시위는 평화적으로 이뤄졌다. 시위대는 자신감에 가득찼고, 자신들의 승리를 장담했다. 주민들의 자신감이 상승하자 시위의 규모는 더 커졌고 그 다음주 월요일인 16일에는 12만 명, 그 다음주인 25일에는 무려 32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그림2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를 외치는 동독 시위대. 사진출처: https://www.maz-online.de

이러한 시위의 결과 호네커는 사임한다. 동독 당국은 더 이상 시위대의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여행 자유 조치를 취함으로써 여론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던 정부는 11월 9일 전국에 생중계되는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조치를 발표한다. 애초에 익일(10일)부터 적용될 예정이었던 이 조치는 정부 대변인으로 기자회견장에 나온 귄터 샤보프스키(Günter Schabowski)의 역사적 실수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는 기자들에게 이 조치가 “즉시(sofort), 지체 없이(unverzüglich)” 시행될 것이라고 잘못 말한 것이다.

이 기자회견을 본 동베를린의 주민들은 본홀머 슈트라쎄(Bornholmer Straße)의 검문소로 달려간다. 수많은 시민들의 요구에 검문소는 통행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동베를린 시민들은 1961년 장벽 건설 이래 처음으로 서베를린으로 자유로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장벽이 붕괴한 것이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의 영토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 장벽은 그 기능을 상실했고, 이듬해까지 대부분의 장벽이 철거되기에 이른다.

니콜라이 교회에서의 월요시위부터 본홀머 슈트라쎄에서의 장벽 통과에 이르기까지의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변화 과정에서 등장한 상징적인 구호가 바로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이다. 이 구호는 1835년 발표된 게오르크 뷔히너(Georg Büchner)의 희곡 『당통의 죽음(Dantons Tod)』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뷔히너는 이 구호를 통해 인민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법률은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호소한 바 있다.

이 구호를 통해 동독의 시위대는 ‘인민 공화국’의 정치인들이 언제나 입에 올리는 ‘인민’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당국의 정치가들에게 ‘인민’이라는 기표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 동원해야 할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바로 우리가’ 인민이라는 사실을 외침으로써, 이 ‘텅 빈 기표’에 실질적인 내용과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랑시에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치안(Polizei)’의 논리로 동원된 ‘인민’이라는 기표가 실질적으로 배제하는 바로 그 인민들, 즉 ‘몫 없는 자들’이 자신들 스스로를 ‘인민’, 곧 공화국을 이루는 보편적 주체로 선언함으로써 이 치안의 논리에 저항하는 ‘정치(Politik)’의 논리를 보여준다. 그것은 따라서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이며, 이러한 주체화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 자들을 발화하는 자들로 만듦으로써 기존의 사회적 공간에서 전개되던 감각적인 관계를 전복, 새로운 감각의 공동체를 출현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듬해인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외무부장관 사이의 협정을 통해 체결된 독일의 통일은 그야말로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동독 주민들의 거대한 정치적 주체화의 경험이었다. 국가 간의 협정도,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도 아닌, 동독 주민들의 급진적 정치화 과정이 바로 30년 전 1989년 가을 일어난 장벽 붕괴를 이끌어낸 것이다.

 

 

인민과 새로운 포퓰리즘: 오늘날의 쟁점

 

1989년 역사의 주체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동독 주민들은 새로 탄생한 통일된 독일 연방공화국에서 자신들이 정당한 주체로 대우받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엇나갔다. 통일 이래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격차는 커져만 갔고, 동독 지역의 소외와 낙후성은 개선되지 않았다. 통일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경제적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동독 주민들의 임금과 생활수준은 여전히 서독 주민들의 70~80% 가량으로 조사되고 있다. 여전히 동독 지역 주민들의 57%가 자신을 ‘2등 시민’으로 느낀다는 보고도 있다. 그 사이 동독 주민들이 느끼는 배제와 박탈의 감정은 커져만 갔다. 그들은 서독에 주요 기반을 두고 있는 독일의 두 거대 정당들 – 기민연(CDU)과 사민당(SPD) – 이 자신을 대변해주지 못한다고 여긴다. 이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누가 이들을 대변할 것인가?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은 현재, 동독 주민들이 느끼는 차별의 감정은 쉽사리 외국인 배제와 독일 민족주의의 강화를 촉구하는 우익 포퓰리즘 정치의 성장을 낳았다.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우리가 인민이다’를 자신들의 선거구호로 채택했다. 이미 연방의회 제3당을 차지한 AfD는 올해 9월 구동독 지역인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10월에는 튀링엔 주 지방선거에서 제2정당으로 부상했다.

AfD의 선거광고. 사진출처: https://www.demokratiegeschichten.de/wir-sind-das-volk/

이 구호가 우익 포퓰리즘 운동의 전유물이 된 것은 이미 2014년, 라이프치히 시위 25주년을 맞아 드레스덴에서 다시금 ‘월요시위’를 시작한 페기다(PEGIDA)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AfD의 부상, 그리고 2018년 (과거 칼 맑스 시(Karl-Marx-Stadt)라 불리던) 켐니츠에서의 대규모 우익 시위대에서 이 구호는 그 현실성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수의 ‘진보적’ 혹은 ‘좌파적’ 비판가들이 AfD나 페기다 시위에 대해 가하는 비판은 이들이 ‘네오 나치’ 혹은 ‘파시즘’, ‘극우 인종주의’ 세력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에 해악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주로 의회주의에 기반을 둔 자유 민주주의를 최상의 정치체제로 정의하며, 이에 대해 저항하고자 하는 포퓰리즘적 목소리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하는 태도와 결부돼 있다. 만약 그러한 가치판단이 사실이라면 독일 사회, 나아가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자국 내에 존재하는 이들 ‘극우 파시즘’ 세력을 금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마치 독일 형법 130조가 – 표현의 자유 논란에도 불구하고 – 나치 찬양이나 인종혐오 등의 선동(Volksverhetzung)을 금지하고 있듯이 말이다.

AfD와 페기다를 ‘악’으로 묘사하는 이러한 총체적 가치판단이 놓치고 있는 물음은, 어째서 현재의 동독 주민들에게 이들이 강한 호소력을 갖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서독인들은 이들이 동독에 사느라 ‘민주주의의 훈련’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쉽게 답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1989년 자유화를 요구하면서, 천안문 방식의 폭력적 진압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민이다!’ 구호를 외치고 권위주의적인 호네커 정부를 끌어내린 사람들에게는 합당하지 않다. 한 조사에 따르면 페기다 시위 참여자의 40%가 과거 라이프치히 월요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들을 손쉽게 민주주의의 ‘적’인 ‘네오 나치’, ‘파시스트’ 세력으로 단정짓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2018년 출간된 샹탈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는 우익 포퓰리즘에 대한 이러한 일면적 가치평가를 비판한다. 먼저 무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인해 자본, 특히 금융자본의 경제적 권력이 국제적인 규모로 급속도로 확산되는 가운데 국민국가의 실질적 효력이 축소되면서, 주권의 담지자로 규정되었던 ‘인민’이라는 범주가 사실상 퇴조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낳은 ‘포스트 민주주의’ 내지 ‘포스트(탈) 정치’의 상황은 다시금 ‘잃어버린 (인민)주권’에 대한 갈망을 낳았다. 반면 199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만 속에 유럽 전역에서 집권할 수 있었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신자유주의 담론과 타협, 우경화하면서 토니 블레어 식의 ‘제3의 길’을 선언하였다. 독일에서도 1998년 집권한 슈뢰더 사민당 정부는 하르츠IV 등 기존 사회국가의 복지정책을 대폭 축소하고 신자유주의적 조치들을 도입해 거대한 반발을 낳았다.

즉 좌우를 막론하고 기존 의회정치세력은 ‘신자유주의적인’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이는 대중적 분노와 박탈감을 야기했다. 오늘날 우익 포퓰리즘 확산은 바로 좌우를 막론하고 신자유주의 의제들을 수용한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이러한 대중적 분노를 그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페는 우익 포퓰리즘 정당들을 통해 제기되는 대중의 요구들이 상당부분 ‘민주적인’ 요구들이라고 도발적으로 지적한다. 즉 그것은 권력에 대한 ‘인민’의 통제, 곧 ‘인민주권’에 대한 요구인 것이며, 따라서 여기에 대해 ‘정치적’ 답변이 제시되어야 한다. 문제는 우익 포퓰리즘 세력이 내놓는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적 답변이 실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좌파는 이들을 대신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담론을 제기해야 한다. 무페는 이를 통해 건설되어야 할 운동이 정치적 주체로서 ‘인민’을 호명하며, 그러한 인민의 잃어버린 주권에 대한 요구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인민주의)적’ 요소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무페의 주장은 포퓰리즘이라는 기표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기존의 담론들과 단절하면서, 오히려 좌파 정치세력들이 ‘포퓰리즘’ 운동을 새로운 방식으로 주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즉 ‘기득권’에 대항하는 ‘인민’이라는 전선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 이 전선을 좌파적으로 재전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골칫거리로 여기는 전반적인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그녀의 주장은 격렬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필자는 그녀의 주장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아쉽게도 그녀에 대한 반론을 이 자리에서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1989년 ‘우리가 인민이다!’를 외치며 호네커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난 구동독 지역의 ‘인민’이 어째서 30년이 지난 오늘날 동일한 바로 그 구호를 통해 AfD와 같은 우익 포퓰리즘 정당에 대한 지지를 표출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페가 제시하는 현실 분석과 전망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 10월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의 초대로 독일을 방문한 무페는 좌파당 당수 카티야 키핑(Katja Kipping)과 바로 이 점에서 논쟁을 벌였다. 무페는 ‘어째서 노동계급이 그들에게 지지를 보내는가를 이해해야 한다’면서, 우익 포퓰리즘 정당을 ‘극우 파시즘’으로 규정하면 그들을 지지하는 대중과 선을 긋게 된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좌파는 이들 대중에게 계속 대화를 걸면서, 그들의 ‘포퓰리즘적’ 요구, 즉 ‘인민적’ 요구에 공감하는 가운데 이를 좌파적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영국에서도 브렉시트에 찬성한 사람들 중 16%가 코빈에게 투표했는데, 이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니며 따라서 브렉시트에 찬성한 사람들을 모두 ‘파시스트’로 부르고 조롱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조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무페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은 오늘날 필요한 것은 우익 포퓰리즘 세력의 구호로 전락해버린 ‘우리가 인민이다!’를 폐기할 것이 아니라, 이 구호를 새로이 재전유하는 일일 것이다. 과연 ‘우리’란 누구인가? 즉 누가 오늘날 ‘인민’의 범주에 포함되는가? 이 물음에서 우익 포퓰리즘은 마이너스(-)의 정치를 선보인다. 그들은 이민자와 난민, 무슬림, 유태인, 그리고 모든 외국인은 ‘인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고 말한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플러스(+)의 정치를 제시해야 한다.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 즉 노동자와 외국인, 난민, 성소수자와 여성 등이 서로의 요구들을 기표연쇄를 통해 헤게모니적으로 구성하며 함께 투쟁할 때 현재의 억압과 소외, 차별과 불평등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해야 한다.

지난 40여 년간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해온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파국으로 드러난 현재의 상황에서, 정치적 전선은 ‘신자유주의 이후’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그것은 오늘날 CDU와 SPD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브렉시트와 제레미 코빈(영국) 사이에서, 트럼프와 샌더스(미국) 사이에서, AfD와 디 링케 혹은 녹색당(독일) 사이에서, 마리엔 르펜과 멜랑숑(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선이다. 과연 신자유주의 이후 정치질서의 원천은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적, 민족주의적 국가주권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적이고 수평적인 인민주권이 될 것인가? 이 전선에서 ‘주권자 인민’은 우익 포퓰리즘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상으로 호명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이 장벽 붕괴 30주년인 오늘날의 정세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이라고 믿는다.

 

 

보론: 천안문, 라이프치히 그리고 홍콩. 어떤 30년 전이 반복될 것인가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은 동시에 천안문 항쟁 30주년을 뜻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호네커 정부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앞에서 열린 월요시위를 천안문 방식으로 진압할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30주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인민이다!’ 구호를 계승하고 있는 것은 홍콩의 시민들이다. 30년 전 천안문 시위대와 마찬가지로, 라이프치히 시위대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인민 공화국’이 끝없이 인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배제하고 있는 ‘인민’이 바로 자신임을 제시하면서 치안의 질서에 대항하는 정치를 드러내고 있다. 홍콩 경찰이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고, 중문대와 이공대에서의 잔인한 진압작전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현재, 중국 정부와 인민군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이 이뤄질 것이라는 우려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홍콩은 과연 30전 년의 천안문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라이프치히 시위와 장벽 붕괴를 반복할 것인가. 거대한 폭력 앞에 선 홍콩의 민주화 시위대는 벤야민이 말한 ‘과거의 현재화(Aktualisierung)’를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은 잊혀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순간마다 역사의 한복판에 벌거벗은 채로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 ‘인민’의 전통을 현재적인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다.

그림4 사진출처: Hong Kong Free Press (www.hongkongfp.com)

최근 한국에서는 중국 유학생들이 대학가의 홍콩 지지 대자보를 찢고 지지 학생들을 모욕한 일이 있었다. 그들이 정치적 반대자를 비난하기 위해 여성과 위안부에 대한 모욕적 발언을 사용한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럼에도 어쩌면 그들은 예전에 아편전쟁을 일으킨 전범 제국주의 국가들의 내정간섭으로부터 사회주의 중국의 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애국자일 수도 있다.

나는 ‘사회주의’ 중국을 수호해야 한다고 믿는 그들에게 맑스의 문장들을 되돌려주고 싶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쓴 청년 맑스는 ‘국가’를 숭배하기 이전에 그 국가가 과연 ‘인민’의 의지에 의해 구성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보았고,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헤겔은 국가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을 주체화된 국가로 만든다. 민주주의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국가를 객체화된 인간으로 만든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국가는 […] 인민의 특수한 내용이자 특수한 현존의 형식에 불과하다.”

『공산당 선언』에는 이런 문장도 등장한다. “한 마디로 코뮨주의자들(공산주의자들)은 도처에서 현존하는 사회적 정치적 상태에 반대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 이 문장은 많은 면에서 마오의 조반유리(造反有理)를 닮았다. 억압받는 자의 저항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마오의 그 정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사회주의의 대의를 옹호하는 중국인이라면, 이 순간 홍콩인들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진압에 반대해야 할 것이다. 1949년 권력을 장악한 그들의 선조를 이어받은 것은 인민에게 탱크를 보내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1989년 천안문과 라이프치히, 베를린에서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었으며, 오늘날에는 홍콩인들이 그러한 ‘인민’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6:30 AM [나인당케의 단상들]

6:30 AM

 

한상원(한철연 회원)

 

새벽 6시 반. 아침식사가 되는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사창시장을 가봤는데 문 연 식당이 없다. 부산할매 수육국밥집은 문을 열었고 사람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이 집은 국물이 너무 짜다. 결국 다시 봉명동으로 와서 동네 국밥집에 가기로 한다. 새벽 5시부터 열지만, 손님 없을 때는 할머니가 주무시고 계셔서 깨우는 게 난감한 순대집이다.

매일같이 새벽녘 사직대로 큰 길가에는 곳곳에 출근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 있다. 오늘처럼 새벽바람이 추운 날에는 두터운 검은 패딩을 입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젊은 여성부터 50대 중년 남성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린다. 이윽고 도착한 전세버스들은 맨 앞에 행선지를 적어놓고 있다. ‘청호나이스’, ‘LG기공’ 등을 적어놓은 버스들에 올라탄 사람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패딩에 몸을 담그고 잠이 든다.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을 희끗 보여주다 버스는 다시 문을 닫는다.

내가 사는 봉명동이나 인근 사창동 등에는 새벽녘 출근하는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쓰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 중앙아시아에서 온 고려인들이거나 그들을 따라 온 현지 출신의 가족들이다. 이른 경우는 새벽 4시에도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3교대라 출근시간이 일정치 않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저 출근 버스들도 24시간을 운행한다.

이윽고 순대집에 도착하니 속칭 ‘노가다 복’을 입은 60대 아저씨들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그들이 신고 온 워커화에는 새하햔 먼지들이 가득 묻어있었다. 갑자기 하이데거와 고흐의 구두 에피소드가 생각나 혼자 키득거렸다. 새벽녘 순대국에는 이제 노동하러 가는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고 기운을 돋아주는 힘 같은 게 느껴진다.

 

여기 청주에 사는 분들, 그것도 나름 지역 시민단체 활동도 하고 계신 분들도 내가 봉명동 공단입구에 산다고 하면 ‘근데 거기는 공기가 더럽지 않아요?’ 하고 묻는다. 사실 여기서 충북대 인문학관까지 1킬로미터 안밖이기 때문에 여기 공기가 더러우면 충북대 학생들도 다 그 공기를 마시는 셈인데. 그리고 충청권 전체가 발전소, 소각장 등의 영향으로 공기질이 매우 나쁘기 때문에 어딜 가나 큰 차이도 없는데. 그리고 청주 최고 부자들이 사는 지웰시티는 바로 SK하이닉스 공장 길 건너에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왠지 어떤 편견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식당 사장님이 틀어놓은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이런 대사를 한다. ‘저랑 밥 먹으러 가요. 냄새 안 나는 청국장집이 있어요. 청담동에.’ 나는 이 단어들의 조합이 매우 징후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청국장은 당연히 냄새가 난다. 그러나 청담동이나 강남에 사는 그들이 먹는 청국장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냄새를 싫어한다. 마치 영화 <기생충>의 박사장 가족처럼. 이 대사는 ‘공단 입구 지역은 공기가 더럽다’는 속설처럼 우리가 가진 무의식의 어떤 지점을 드러낸다.

우리 시대는 ‘냄새나지 않는 청담동 청국장’과 같은 어떤 신기루를 좇고 있다. 언제쯤 새벽녘 대로에서 출근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작업하러 가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대우받는 날이 올까. 갑자기 노회찬 의원이 그리워진다.

도시와 제국의 싸움 [나인당케의 단상들]

 

 

도시와 제국의 싸움

한상원(한철연 회원)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도시와 국가가 같은 개념이었다. 그리스어로는 polis, 라틴어로는 civitas는 모두 도시와 국가를 뜻했다. 이는 ‘도시국가’별로 정치단위를 가졌던 고대적 언어관습이다(아마 이와는 상관 없겠지만, 독일어에서도 도시Stadt와 국가Staat는 모음 길이만 다른 거의 유사한 발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시란 자율성을 가진 정치적 자치공동체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을의 확장인) 도시가 이루는 자율적, 독립적 공동체로서 폴리스를 예찬한다. 그러나 고대의 도시국가 체제는 마케도니아와 로마라는 대제국의 출현으로 붕괴되었다. 도시는 제국으로 흡수된 것이다. 

그러나 도시는 중세의 한복판에 재등장한다.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의 일부 지역에서 시민들은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사고 공동방위를 통해 자치도시(코뮌) 공화국을 수립한다. 마키아벨리가 활동한 피렌체는 대표적인 자치도시 공화국이었다. 맑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당시의 도시공화국(생캉탱)의 자유에 얼마나 분개했는지, 그에 맞서 코뮌의 시민들이 어떻게 상호방위를 실행했는지 엥겔스에게 쓰고 있다. 훗날 벤야민은 이 편지를 인용하며 이렇게 적는다. “최초의 코뮌: 도시.”

최근 중국 대륙에 대항하는 홍콩 시민의 저항을 보면, 마케도니아와 로마와 같은 대제국에 흡수되는 것에 저항하는 도시국가(폴리스), 또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중세 자치도시(코뮌)의 기운이 느껴진다. 특히나 홍콩인들이 최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도시의 자치권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앙집권적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이 21세기 도시공동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도시는 제국으로부터 살아남아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을까. 오늘날 홍콩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이름 없는 영웅들에게 바치는 헌사 [나인당케의 단상들]

<로그원:스타워즈 스토리>는 여지껏 본 스타워즈 시리즈중 가장 덜 스타워즈 같은 느낌이었다. 단적으로, 엔딩크레딧이 흐를 때 눈물이 찔끔 났던 경험을 다른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겪어본 적이 있었던가. 아군은 단 한 차례도 광선검을 사용하지 않고, 죽은 자들은 피를 흘리며 최후를 맞는다.

가장 어둡고 무겁고 또 비장한 스타워즈. 과격파 반군은 마치 무자헤딘 류의 과격파 이슬람 반군을 연상시키고, 제다 시티에서의 시가전은 바그다드나 팔루자에서 미군과 현지 저항군의 전투를 보는듯 했다. 국가연합인 저항군의 보수성과 관료성의 민낯을 보여주고, 이에 불복종해 독단적으로 적진으로 뛰어드는 전사들은 게릴라 빨치산의 느낌으로 전투를 수행한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어른이 된’, 그리하여 더 이상 세상이 스타워즈가 그리는 선과 악의 단순 이분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유년시절의 스타워즈 팬들에게 헌정된 것 같은 느낌이다(때마침 같이본 사람들은 나와 20대를 같이 보낸 과후배들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결말이 떠올랐다. 종말, 폐허 그리고 구원. 이윽고 컴퓨터그래픽의 힘을 빌려 나타난 그녀. 무참한 대량살육을 견뎌내고 지켜낸 희망이라는 단 한마디.

<로그원: 스타워즈 스토리>는 영웅들의 모험담이 아니라, 거대 악에 맞서기 위해 싸우다 이름없이 쓰러져간 전사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말하지 않았던가. 역사는 이름 없이 쓰러져간 자들의 것이라고. 옛날옛적 은하계 영웅들의 모험을 다루던 스타워즈는 이렇게 현실을 향해 진화한다.

무당, 마약, 성형, 섹스? 당신들의 관심이 불편한 이유 [나인당케의 단상들]

요즘 난리라지요. 청와대가 사들인 의약품들 중에 비아그라가 들어있다는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주사제를 대리처방 받았다고 하는데 대통령이 성형중독에 걸렸다거나 마약중독에 걸렸다는 의심이 퍼지고 있습니다. 언론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래퍼 산이’니 ‘DJ DOC’니 하는 잘 나가는 가수들도 이렇게 박근혜를 낯선 남자와 키스를 한 ‘더러운 혀’로 국민 앞에 변명하는 음란한 여자, 성형중독에 걸려 ‘하도 찔러대서 얼굴이 빵빵’해진 ‘미스 박’으로 묘사합니다. 대중들은 이런 직설적 어법에 시원해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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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진보’언론들도 이러한 관심을 부추기며 취재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프로포폴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하는 이상호 기자와 파파이스의 김어준씨뿐 아니라 급기야 어제는 주진우 기자가 박근혜의 ‘섹스 테이프’가 공개될 거라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보도가 권력자의 스캔들을 보도함으로써 진실을 알리는 정의로운 행위라고 생각들 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불편합니다.

 

주진우 기자님, 저는 박근혜가 섹스비디오를 찍었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상호 기자님, 김어준씨, 저는 박근혜 최순실 최순득이 어느 병원에서 어떤 주사를 맞고 다녔는지도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관심있는 건 부패한 ‘시스템’입니다.

 

무당, 마약, 성형, 섹스. 당신들이 어린 시절 보았던 선데이 서울에나 실릴 법한 3류 이야기들을 거대권력자들이 실제로 하고 다녔으니 흥미를 자극하지요. 그리고 당신들은 대중의 그런 호기심을 부채질하고요. 그러는 사이 뭐가 잊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 권력형 비리의 최대 수혜자가 한국 재벌들이라는 것. 그들이 수백억을 최순실에게 바치면서 지키려고 했던 것은 그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이 체제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더욱 집중해야할 것은 국가-재벌 유착의 고리와 체제 전반의 부패라는 것입니다.

 

박근혜를 ‘성형중독 걸린 김치녀’이자 ‘비아그라 사고 섹스비디오 찍는 음란녀’로 몰아가는 당신들의 보도 프레임은 이제 신물이 납니다. 이 혐오 프레임 보도를 멈춰요. 부패한 시스템에 대한 고발 없는 ‘정치포르노’형 취재를 멈추란 말입니다.

 

더 중요한 물음이 있지 않나요? 롯데와 삼성을 비롯해 부패한 재벌총수들은 아직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권력을 누리고 있으며, 박근혜가 퇴진 또는 탄핵된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할 것입니다. 조선일보 같은 주류보수세력 역시 아직도 전혀 헤게모니를 상실하지 않고 정국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박근혜의 섹스 테이프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이, 이런 사실들은 잊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TV조선, 채널A 같은 보수종편은 언제나 김정은의 추악한 사생활을 보도하거나, 세월호 사건 이후 유대균이 ‘뼈 없는 치킨’을 시켰다거나 하는 등의 가쉽거리들을 보도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모읍니다. 그리고는 정작 본질적 물음에 대한 보도는 회피하지요. 이번엔 진보 언론들도 같은 길을 가기로 한 겁니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부패한 ‘한국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성형녀 섹스중독녀 마약녀’로 프레임 잡은 박근혜와 최씨자매의 사생활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 말고요. 그게 제가 원하는 ‘진보 언론’의 보도입니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과 미국대선 [나인당케의 단상들]

미국에서 트럼프 정권의 탄생은 분노와 좌절을 느끼게 한다. 많은 이들이 슬퍼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분노할 자격이 있다. 또 서로 위로해주어야 할 과제 역시 안고 있다.

그러나 현재 힐러리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몇몇 분들의 과도한 주장들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례로 지금 SNS나 인터넷에서는 힐러리를 비판하는 모든 종류의 주장들을 ‘여성혐오’로 몰아붙이며 극단적인 욕설과 원색적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여기서 여성혐오의 사례로 지적된 발언들은 ‘버니 샌더스가 나왔으면 이겼을지도 모른다’거나, ‘힐러리가 약자를 대변하지 못했다’는 등 근본적으로 ‘여성’혐오라기보다는 힐러리의 무능함을 질책하는 것들이었고, 이러한 발언은 정치인에 대한 비판의 자유로서 보장받되어야 한다. 단지 힐러리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고 해서 힐러리 비판이 여성혐오로 이어진다고 보는 견해는 굉장히 위험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러한 주장들은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의 모든 차별받는 사람들의 정치적 투쟁과 해방을 향한 과정들을 거대한 사기저하와 무기력함으로 고통받게 만든다. 나는 트럼프가 집권했다고 해서 미국의 시민사회가 곧바로 붕괴할 것이라고 비관하지 않는다. 작년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을 때 미국내의 열기, 그리고 그것이 전 세계에 준 신선한 충격을 기억하라. 단지 1년만에 트럼프가 집권했다고 해서 그들이 이 흐름을 하루아침에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힐러리의 패배를 자신의 패배와 동일시한다면, 그들이 트럼프의 공격으로부터 이러한 지난 사회운동의 성과들을 방어하는 투쟁에 곧바로 진지하게 대처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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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보운동 전체가 힐러리와 자신을 동일시해야 하며, 그녀를 비판하는 모든 주장들은 여성혐오라는 식의 주장은 매우 폭력적이다. 무엇보다도 힐러리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무능한 기성 정치인일 뿐이다. 물론 최초의 여성대통령 도전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유리천장의 존재가 그녀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숨기기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미국 민주당의 보수적 고위관료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버니 샌더스가 일으킨 political revolution의 새로운 흐름을 차단해버리고, 샌더스 효과의 모든 모멘텀들을 대선으로부터 추방해버린 인물이다. 또 그녀는 국무장관 재직시절 미국이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저지른 모든 형태의 전쟁범죄들에 가담한 인물이다. 수억대의 강연료를 받고 월스트리트를 옹호한 수십 년 경력의 ‘기성’ ‘주류’ 정치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이번 대선에서 그 어떤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한 무능한 후보였다.

그녀에게 대선때 어떤 전략이 있었던가? 분명 그녀 역시 샌더스의 정치혁명이 일으킨 흐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선택지들이 있었다. 샌더스를 부통령으로 지명한다든가, 무상교육 같은 샌더스의 대대적 복지정책을 수용한다든가, 젊은이들의 좌절스런 삶을 개선할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다던가 하는 전략 등.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펴지 않았다. 그저 트럼프의 역겨운 혐오발언에 반사이익을 누릴 생각 뿐이지 않았는가?

따라서 트럼프와 백인남성들의 혐오공세에 맞서 사회적 약자들, 소수자들의 반격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흐름을 창조해내지 못한 것은 그녀의 무능함 때문이다. 그리고 대선에서 그녀의 패배를 직면한 진보적 유권자들이 그녀의 그러한 무능한 대응들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정치적 권리다. 이러한 비판들을 ‘여성후보’에 대한 공격으로 묵살해선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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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트럼프의 집권은 분명 하나의 예외상태다. 그것은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추구해왔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 전략'(국내에선 개인의 자유를 강조, 국제적으로는 자유를 빌미로 한 군사개입)이 사실상 끝났음을 선언하는 사건이자, 미국 주류 사회가 국제적으로 ‘어메리칸 리버럴리즘’의 위대함을 선언하던 시절이 끝났음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트럼프는 분명 적(라티노, 무슬림, 성적 소수자)을 설정함으로써 백인남성 중심의 ‘우리’를 통합하려는 정치적 술수를 쓸 것이며, 장벽건설, 이민자 추방, 타국과의 외교단절 등의 예외적 조처들을 사용해 초월적 차르와 같은 주권자의 입지를 굳히며 지지기반을 다지려 할 것이다. 이러한 유사 전체주의적 트럼프의 지배에 맞서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에 서서 이러한 예외가 실은 ‘상례’라고 지적함으로써 ‘진정한 예외상태'(벤야민)를 전개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과제인지도 모른다.

힐러리와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을 일치시키는 모든 시도들은 이러한 정치적 과정에 역행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최초의 여성대통령 탄생이 무마되고 극우 혐오주의자 정권이 탄생한 것에 다른 모든 분들과 함께 분노하지만, 동시에 이 패배의 원인을 인식하고, 어째서 힐러리가 트럼프를 넘지 못했는지를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울지도 웃지도 말고 다만 이해하라. 이것이 우리가 현 순간 취해야 할 자세일 것이다.

 

공동체의 수호자 [나인당케의 단상들]

지난 주말 광화문에 모인 20만명의 사람들에게 어떤 동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왜 그곳에 모인 것일까?

분명 그들에게도 개인적인 욕구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사용할 것이다. 예컨대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 그 시간에 취준생은 취직준비를 더 할 수 있었을 것이고, TV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한도전을 보면서 맥주 한 잔을 들이킬 수 있었을 것이고, 연인이 있는 사람은 놀이공원이나 극장에 가서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20만 명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황금같은 주말 오후를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다.

그들의 동기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고전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계급적 이해관계? 아니 그들은 동일한 집단과 계급도 아니었다. 정치권의 부패를 본 후의 즉자적인 분노?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정서를 분노라고 단정짓긴 힘들다. 시위 참여자들의 밝은 표정, SNS 곳곳에 그들이 남긴 후기들을 읽어보면 그들의 정서는 분노라는 감정의 표출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자신감이었다.

나는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의 동기를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자신이 속한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위기에 처한 그 공동체를 구제하기 위하여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말한 ‘공화주의적 인민의 덕성’, 스피노자가 말한 ‘정념(정동?)’, 혹은 헤겔이 말한 ‘정치적 신념'(물론 헤겔은 이것을 애국심과 동일한 것으로 불렀다만, 만약 우리가 그의 철학에서 국가주의적 요소를 빼고 재해석을 해본다면), 혹은 발리바르가 말한 ‘시빌리테’가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말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해 시위현장에 모여 촛불을 드는 시민들은 정치적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로서, (아마도 ‘애국자’라는 단어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공동체의 수호자’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마치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1세가 이끄는 수십만 병력에 맞서 스스로 갑옷으로 무장하고 마라톤 평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공동체를 수호한 아테네의 시민들처럼, 그들은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한 주권은 국가원수가 아닌 광장(아고라)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들, 권력을 실현하는 demos인 것이다. 주류 정치권과 재벌, 언론이 그토록 부패해 있음에도, 이토록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수많은 demos를 보유한 것은 우리에겐 하나의 축복이자, 어둠 속의 빛과 같은 희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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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5일 광화문

단상들 2016.9.22

 

단상들

1. 70년대에 리영희가 있었다면 오늘날은 손석희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손석희가 4차례 해고와 5차례 옥살이를 했던 리영희의 아우라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날 그의 앵커브리핑은 그 시절 리영희의 언론사 기고문을 접했을 젊은이들이 느꼈을 어떤 것을 우리 시대에 주는 게 아닌가 싶다. 그의 나즈막한 목소리는 단호한 고발과 함께, 우리 시대의 좌절한 청년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2. 최경환이 외압을 해서 채용시킨 인물은 서류점수가 2299등이었는데, 최종 36등으로 채용되었다고 한다. 내게 이 외압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36명을 뽑는 자리에 도대체 몇 명이 지원했길래 ‘2299등’이라는 수치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의 정규직 직원이 되기 위해 도대체 몇 명, 아니 몇천 명을 앞질러야 하는 것일까. 임원도 아니고 ‘노동자’가 되는 것조차 수천 명을 누르고 4차례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냥 해.” 최경환이 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노동자’의 삶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고작 중소기업진흥청 말단 직원이라는 대단하지도 않은 자리에 지인을 꽂아넣는 것이 별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그들이 보기엔 ‘머슴’일 뿐인 그 자리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렸다. 오늘날 그 수천 명의 흙수저들은 누가 대변할 수 있을까.

3. 제주도에서 일부 중국인들이 벌인 폭력,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에 달린 베스트댓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정 해군기지를 반대한 제주도인들, 너희는 당해도 싸다. 너희는 할 말이 없다. 이 무논리의 극치이자 동시에 몹시 잔인한 논리에 대한 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 논리가 왜 틀렸는지를 지적하는 댓글을 입력했다. 얼마 후 다시 들어가보니 나더러 ‘전교조냐? 뷰웅신’이라고 욕을 한 댓글이 다시 베스트에 올라 있었다. 웃음만 나왔다.

아마도 제주도인들이 당해도 싸다고 말한 사람도, 나에게 조롱섞인 욕설을 단 사람도, 최경환이 낙방시킨 수천 명의 지원자들과 같은 운명을 공유할 수많은 흙수저들. 그들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좌절된 욕구를 (아마도 일베같은 곳에서 배웠을) 공격적 발언을 통해 해소하며 사회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무기력감과 분노, 좌절을 그나마 삭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댓글을 단 사람에게 분노할 힘마저 없었다. 이런 생각만 맴돌았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이게 우리의 현 주소구나.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하는구나. 우리 시대의 또다른 자화상이다.

4. 최순실 게이트. 현 정권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정권을 공격할 호재가 생겨서 내심 기쁠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그렇지 않다. 가히 건국 이래 최대 친인척 스캔들이라 할 수 있는, 그리고 호사가들이 한 두마디 술자리 안주거리로 떠들어댈, 2대에 걸친 희대의 4각관계(최태원, 정윤회, 최순실, 박근혜)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품고 야권이 이 일로 정쟁을 벌이는 사이, 세월호 특별법 연장도, 각종 민생법안들도 이 정쟁에 밀려 통과가 늦춰질 게 분명하다. 소위 ‘현실정치’의 논리, ‘우선순위’의 논리다. 틀린 말은 물론 아니다.

비판할 게 너무나 많아서(정말로 그렇다), 부패가 너무나 많아서(정말이지 너무나 많다) 그 많은 사안들을 가지고 정쟁을 하느라 아무런 구체적 ‘정책’도 통과시키지 못하는 무능한 국회. 언제까지 이 광경을 봐야할까. 언제쯤 한국 국회가 ‘친인척 비리 폭로’를 넘어서 ‘정치’를 논할 날이 올까.

정치의 부재다. 그리고 고통받는 자들은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처우가 개선되고 사회가 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들의 생존방법을 익혀나간다. 타인에게 공격적 충동을 투사하기. 학번, 출신학교, (특목고뿐 아니라 이제는 심지어 영어유치원 출신인지까지), 거주지역 등의 미시적인 부분까지 위와 아래를 철저하게 따져서 권위 앞에 굴종하고 약한 자를 짓밟기. 고통당한 자들을 조롱하기. 그것이 세월호 유가족이든, 관광객에게 폭력을 당한 제주도민이든.

우리의 이 시대정신에 ‘역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치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정치철학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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