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 가면 쓴 우주인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7

가면 쓴 우주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을 때

나의 세상 밖으로 나가서

가면 쓴 우주인을 벗고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비운 것처럼 슬퍼하는

가면 쓴 우주인을 벗고

노랑 날개를 펄럭이는

나비를 따라 향기를 맡으러 가보리.

그 곳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하늘도

내가 본적 없는 꽃도

내가 느껴 본 적 없는 나무도

내가 그려보지 못한 냄새의

향기로 가득할거야.

 

2017-3-1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언제나 틀을 없애려는 그 시도조차 어느 틀에 갇히는 수고로움을 갖게 됩니다. 진정으로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것처럼 결국에 그것 또한 욕망의 한 형태로 자리합니다. 수 없이 어떤 것에 규정되거나 정해진 사각형, 삼각형의 형태로 갇히길 원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또 다른 형태의 틀로 가기도 합니다. 살아온 환경, 살아온 경험, 살아온 관계는 그 사람을 규정하고 타인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성립하여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기쁘고 즐겁고 사랑스럽고 때로는 슬픔과 마주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타인으로 성립되는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나로서 내가 성립하는 나는 무엇인지 그 둘 간의 간극에서 벌어진 틈을 보면 마주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 자체로도 행복할 수 없는 나를 마주하는 나의 현실에서 타인에게서 나라는 존재를 성립하고 자신을 타인에게 성립하려는 자신의 가면 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가본 적이 없는 아주 먼 나라를 동경하고 직접 경험한 적 없는 우주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끝도 없이 걸어가는 기분입니다. 걸어갈 수 없는 타인의 길에 가끔은 함께 그 길을 걷고 싶기도 하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나의 길을 온전하게 걸어갈 수 있는 노력을 하는 삶이고 싶습니다. 공간을 유유히 흐르는 향기로운 나비처럼, 삶의 이상향을 찾아가는 노랑나비처럼, 삶을 유유히 흘러가는 나비가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로 받아들이는 익살스러운 가면 쓴 우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꼰대가 꼰대인 이유, 그리고 신나는 새해를 위하여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 7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7

 

오늘의 책 : 심의용 지음, <마흔의 단어들>, 도서출판 동녁, 2016 에 대한 서평

 

이 서평은 서평 없는 서평이다. 그냥 저자가 말하는 책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싶어서 정리된 표와 그림으로 만들었다. 독자께서도 알아서 이해해 주실 것으로 생각한다. (글씨가 잘 안 보이면 손가락으로 주욱 늘려 크게 보시기를 권유합니다.)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표와 그림들을 나열했는데, 글쓰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나의 속내를 보이기 싫어서 이렇게 만들었다. 그래도 두 세 마디 추가로 붙여보고 싶은 꼰대의 충동이 있다. 그 하나는 만약 이 책의 부제를 내 맘대로 다시 붙일 수 있다면 <외로움을 이기려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그냥 안고 가기> 로 하고 싶다. 두 번째로 마흔의 의미가 좀 넓어졌다는 점이다. 요즘 기대수명이 벌써 80이 훌쩍 넘었는데, 그 뜻을 다시 풀어본다면 공자맹자 시대의 60이 요즘 90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자기 나이에서 2/3 비례로 줄인 숫자로 살아가도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보자. 같은 마흔(40살)이라도 결혼을 못해 결혼을 애절히 원하는 노총각은 스스로 2/3로 축소된 27살로 생각하면 좀 더 느긋해 질 수 있다.(계산법: 40*2/3=27). 쉰 고개에 접어든 49세의 당신이 더 젊었을 때 못해보고 지나온 시절을 안타까워한다면, 그런 당신도 32살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 느긋해 질 수 있다.(계산법: 49*2/3=32). 계산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 심의용은 책의 본문에선 언급한 적이 없지만 유독 책날개에서 강조한 말이 나에게 의미있게 다가왔다. 즉 “심입천출”深入淺出이라는 말이다. 나도 이 말을 평생 안고 사는데, 나는 이 말을 ‘깊이 공부를 하지만 공부한 것을 드러낼 때는 쉽게 하라’는 뜻으로 새기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공부가 깊음을 직감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쓰기는 쉬우면서도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포스를 갖고 있다.

이 책 <마흔의 단어들>, ‘섹스’, ‘우월감’, ‘진실’, ‘자기기만’, ‘정직함’, ‘죽음’, ‘음흉함’, ‘무관심’, ‘자책감’, ‘냉소’, ‘사랑’, ‘즐거움’, ‘나르시시즘’, ‘행복’, ‘미각’, ‘무감각’, ‘균형감’, ‘애증’, ‘싸움’, ‘몰락’이라는 단어 하나하나가 실은 단어가 아니라 저자의 신체기관 하나하나였다. 그의 신체기관마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근접거리에서 나는 이 세상의 존재살이를 좀 더 다가갈 수 있었다. 폼나는 위선의 권위를 끝까지 부여안고 살려는 이들은 이 책을 읽을 필요 없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강력 추천한다. 또한 이 책은 박근혜 재앙의 동물행동학적 원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수효과를 제공한다. (e)시철의 독자와 함께 신나는 2017년을 한번 누려보자. <끝>

상실의 절망을 환상의 횡단으로 [시대와철학]

김성우(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10년간을 상실의 시대로 규정하고 집권한 뉴라이트 계열의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10년간이야말로 진정한 상실의 시대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뉴라이트는 기존의 보수주의보다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만능주의를 지향하며 대기업과 금융자본에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새로운 보수주의이다. 뉴라이트의 이러한 면모는 MB의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박근혜 대통령의 신탁적 표현인 “규제는 암 덩어리”라는 말로 대변된다.

 

MB 정부는 뉴타운 열풍으로 대표되는 부동산 투기 붐이 만든 환상적 매트릭스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는 초거대 인공지능이 광대한 컴퓨터 네트워크로 만든 가상 세계에 대한 명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매트릭스는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전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인간을 배터리로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설정은 매트릭스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온 국민의 부동산 욕망이 MB 정부를 지탱하는 에너지였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환상을 연장하고 싶은 노장년층과 보수층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는 매트릭스였던 것이다. 물론 인간 박근혜는 생물학적인 존재자로서도 아니며 검증된 사회적인 인물로서도 아닌, 영화 <향수>에 나오는 절대 향수와 같은 숭고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 영화에서 절대 향수는 욕망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것이다. 즉, 스타 철학자 지젝이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의 말을 빌려 표현한 ‘오브제 프티 아’(작은 대상 a)인 것이다. 지젝 식으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 후보로서의 박근혜는 도올 선생이 그렇게나 외친 스펙을 통한 지도자로서의 능력 검증을 거칠 필요가 없으며 생물학적인 여성이라는 한계와도 무관한 환상적인 매트릭스가 된다. 물론 이러한 매트릭스를 만들고 확장하는 데에 새누리당과 아울러 보수 언론과 보수 인사들이 지대하게 기여했다. 다시 말해 이들이 공모하여 자신들의 권력 연장을 위해 MB 정부의 실정에 실망한 국민에게 새로운 환상의 매트릭스를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환상의 매트릭스는 처음부터 대단히 깨지기 쉬운 연약한 것이어서 이를 방어할 방패막이 필요했다. 그래서 종북과 안보는 현 정권의 마법적인 부적이 되었다. 이 부적을 내세워 국가의 공익과 국민의 안전은 뒤로 한 채, 권력의 사유화가 극도로 진행되어 국가 시스템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로 인해 국가 시스템이 심각하게 마비되고 현 정부가 극도로 무능한지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국민은 국가의 부재를 느끼며 ‘각자도생’이라는 웃기도록 서글픈 신조어가 탄생했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서 옥시 같은 회사의 가습기 살균제로 소중한 아이들이 죽어가도, 폭스바겐 같은 회사의 연비조작으로 환경이 오염되더라도, 대기업의 이윤을 위해 차별과 착취의 비정규직이 늘어가더라도 정부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세월호 사건 때나 농민 백남기 님의 죽음 앞에서 실제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한, 궁극적인 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이나 실무 책임자들도 유가족과 국민에게 슬픔과 책임감을 표하기는커녕, 책임 회피를 위해 비정한 태도로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드디어 최순실과 관련된 박근혜 대통령 게이트가 터지면서 온 국민이 설마설마하면서도 마주하고 싶지 않던 현 대통령의 트라우마적인 리얼한 민낯에 직면하고 말았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매트릭스에서 분리되어 인간이 배터리가 되어 매트릭스에 봉사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지젝은 이를 ‘리얼(실재)이라는 사막’이라고 부른다. 그 뜻은 환상에서 깨어날 때 만나게 되는 진실이 트라우마를 일으킬 정도로 무의미한 폭력적인 야만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정신분석학에서 치유란 환상에서 벗어나 불편한 진실인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용기 있게  대면하는 것이다. 지젝은 여기서 더 나아가 환상의 횡단과 아울러 프레임의 재구성이나 변형을 추구한다. 환상은 주체의 욕망을 유지하는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지젝에 의하면 현실이란 리얼한 것이 아니다. 현실이란 환상의 프레임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 그동안 숭고한 대상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바라본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환상을 제거해버리면 현실까지 상실되고 만다. 아마도 지금 우리 국민이 느끼는 ‘상실의 시대’는 이러한 상태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환상은 제거가 되지 않는다. 횡단이 요구된다. 환상을 횡단하는 것은 헤겔 식으로 표현하면 부정적인 것을 감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환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의 원인대상을 먼저 상실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는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라는 숭고한 대상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기가 부정의 과정이다.

 

본래 상실이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므로 슬픈 사건이다. 상실의 시대란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어 국가가 더는 국민의 안전망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통치 권력의 무능이 드러나고 통치자의 권위가 사라짐과 아울러 국민이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숨짓고 절망하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상실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해서 절망한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배신과 몰락을 경험한 구 유고슬라비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상실을 순전히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러한 상실의 부정성을 견디며 박정희 시대라는 환상을 횡단하고 환상의 기존 프레임을 다시 변혁하고 재구성해야 함을 지적한다.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박근혜 대통령과 그 리얼한 사막인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과 관련된 기존 제도와 국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인가라는 프레임에 지배받지 않고 앞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통치의 방향과 이념을 정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박근혜 대통령과 박정희 시대라는 숭고한 대상에 대한 포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침 그 숭고한 대상의 민낯이 드러난 이상, 이에 공모한 공모자들에 대한 준엄한 사법적 처벌과 역사적 심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인 과제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존의 숭고한 매트릭스의 배터리인 우리의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서구화의 욕망, 상업화의 욕망, 부동산 투기의 욕망, 승자독식의 욕망, 차별적 구별 짓기의 욕망 등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상실의 시대가 꼭 나쁘지는 않다. 박근혜 정부는 우리의 뉴라이트적인 욕망이 공모한 환상의 매트릭스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실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이랴! 이제 문제는 뉴라이트라는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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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도서관강의]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2)

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2)

 

김우철(호원대 외래교수)

 

4. 욕구, 요구, 욕망

아기의 울음은 처음에는 배고픔이라는 본능적 욕구(need)를 전달하는 표현수단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울음에 대해 엄마가 보이는 사랑의 응답을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아기의 울음은 이제 엄마의 사랑에 대한 요구(demand)로 점차 바뀌어간다. 그러니까 배가 고파서 운다기보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워서 운다는 뜻이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욕구의 주체는 이리하여 점차로 요구의 주체로 바뀌어 간다. 특히 언어교육이 이루어지고 초보적 수준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짐에 따라 아이와 엄마 사이에는 이런저런 요구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

아이의 성장과정이 늘 행복한 경험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기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첫 번째 상실의 아픔은 바로 젖떼기(離乳)이다. 태어나서 매일같이 마음껏 빨아오던 젖가슴이 이제 아무리 울고불며 찾아도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이 상실의 아픔을 통해서만 아기는 엄마의 젖가슴과 젖꼭지가 나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게 된다.

젖떼기 시기에 아이가 자지러지듯 울며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욕구의 만족이 아니다. 그것은 엄마와의 일체감 속에서 맛보았던 ‘사랑의 만족감’이다. 곧 엄마 품에 안겨 엄마 목소리와 숨소리를 들으며, 엄마 시선을 마주보며, 젖꼭지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면서 달디단 젖을 먹던 그 행복한 느낌을 되돌려달라는 요구이다. 그러나 아이의 요구는 이제 좌절을 맛보게 된다. 욕구야 앞으로도 이러저러하게 충족되겠지만, 한때 경험했던 완전한 사랑의 만족감은 영원히 상실되고 만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요구가 좌절되는 경험을 통해 아이는 엄마와 자신 사이에 놓인 간극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젖떼기나 배변 훈련을 통해서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양육 과정 속에서 엄마가 아이의 요구를 외면하고 거절하는 일은 더욱 자주 일어난다. 이것은 아이가 보기에 엄마가 더 이상 자신만을 사랑하거나 자신에게서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아이에게는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엄마는 진짜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데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엄마는 과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의문에 싸인 아이는 마침내 엄마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즉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 찾고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이처럼 엄마의 욕망(desire)을 깨닫게 된 아이는 이제 그 자신이 욕망의 주체로 탈바꿈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는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를 간절히 욕망하기 때문이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는 아이가 무엇을 욕망할지를 엄마로부터 처음 배울 뿐 아니라, 엄마가 아이 자기 자신을 욕망해 주기를 욕망한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욕망해 주기를 욕망한다. 엄마의 욕망에 눈을 뜨고, 나아가 엄마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아이는 이제 마침내 엄마와 본격적으로 분리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이 단계를 가리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라고 이름 붙였다.

5. 욕망하는 주체의 탄생

‘오이디푸스(Oedipus)’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베의 왕으로서 신탁에 따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적 운명을 겪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프로이트는 이 신화가 아이의 정신적 성장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반대 성의 부모와 성적으로 결합하려고 애쓰는 반면 같은 성의 부모를 증오하는 심리상태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남자아이 같으면 엄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증오하는 심리이고, 여자아이 같으면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증오하는 심리를 말한다. 이런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는 어떻게 해서 아이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되는 걸까?

정신분석학에서는 그 원인을 엄마의 욕망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아이가 아버지의 남근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아이는 엄마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던 차에, 엄마에게는 없고 아버지에게는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남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남근이 바로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라고 믿게 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아이(남아와 여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에 남근이 이처럼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고 그 시기를 남근기(2세~6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시기의 아이는 남녀 성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즉 여자 생식기가 남자 생식기와 달리 몸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설령 안다 하더라도 아이의 관심은 그런 해부학적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엄마에게 없는 것이 (그래서 엄마가 아이 자신 말고 욕망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결여한 것이 엄마가 늘 사랑과 관심을 보이는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 바로 남근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아이의 눈에는 그것 말고 엄마에게 없는 것은 없으니까.

여기서 유의할 점은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남근’은 어른들이 이해하는 ‘남자의 성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는 ‘성’이 뭔지, ‘성교’나 ‘성기’라는 것이 뭔지 아무 개념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의 남근이 아니라 ‘엄마가 욕망하는 가치 있는 것’이라는 심리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페니스’와 구별되는 ‘팔루스’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팔루스는 아이의 눈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보물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남근은 엄마와 아이의 최초의 결합을 분리, 해체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이는 처음에는 엄마가 원하는 남근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믿고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엄마의 결여를 자신의 남근으로 메우려고, 그래서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은 예전의 일체감을 회복하려고 시도한다(근친상간 욕망). 그러나 이런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거니와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한다. ‘엄마에게서 당장 떨어지라!’ 하는 아버지의 금지 명령이 추상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금지 명령은 비단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대리자 격인 엄마나 다른 어른들의 입을 통해 반복해서 떨어진다. 더구나 그 명령은 거세(castration) 위협까지 동반한다. ‘고추를 떼버리겠다’는 위협은 엄마에게서 거세의 표식을 이미 확인한 아이로서는 심각한 위협과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결국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금지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어머니와의 합일 그리고 그 합일이 안겨주던 만족감을 영원히 단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거세라는 상징적 과정이다. 아이는 거세 과정을 거쳐 마침내 정신적으로 엄마와 완전히 분리되고, 하나의 ‘욕망하는’ 주체로 자리잡게 된다. 아울러 인간의 세계 곧 도덕과 법의 세계의 구성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맨처음 경험한, 그러나 영원히 상실하여 되찾을 수 없는, 그렇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엄마와의 행복한 일체감이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그 일체감을 부분적으로라도 구현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찾아 평생 헤맨다. 그러나 그 욕망을 충족시켜 줄 대상은 없다. 그것은 영원히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6. 인간의 성

이제 마지막으로 앞에서 제기한 몇 가지 남은 문제에 대해 개괄적으로 답변해 보자. 먼저 인간의 성적 쾌감의 문제이다. 인간의 경우 성욕 만족에서 오는 쾌감은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식욕이나 갈증 같은 자연적 욕구의 해소에서 오는 단순한 쾌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도덕/법에 의해 강력하게 억압된 상태에서의 성충동의 만족이기에 (라캉이 주이상스, 곧 ‘고통 속의 쾌락(pleasure in pain)’이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비할 바 없이 자극적이고 외설적이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 금기를 위반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그렇지 않은 쾌락에 비해 훨씬 더 증폭된다.

성감대의 편재성(遍在性)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식기 말고도 신체 전반에서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유아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과정에서 느꼈던 사랑의 손길이 오이디푸스적 억압을 당한 뒤에도 신체 곳곳에 무의식적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감대는 영원히 상실한 어머니와의 일체감의 기억과 소망이 잠들어 있는 신체 부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성(性)이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 현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성은 기본적으로 본능적,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정신적 현상이다.

그러면 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하는 성 정체성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되풀이하지만 성 정체성은 아이가 자기 생식기를 내려다보면서 스스로 깨닫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앞서 오이디푸스 및 거세 과정을 남아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정상적인’ 남자아이라면 거세 이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팔루스를 소유한 아버지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여자에 대한 사랑을 먼훗날로 기약하게 된다. 즉 남자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여자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성을 확립하게 된다.

반면에 여자아이가 여자가 되는 길은 훨씬 더 복잡한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와 달리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인 어머니가 최초의 사랑 대상이다. [* 이런 차이 때문에 정신분석학에서는 여자에게 동성애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보며, 남자 동성애를 도착증으로 보는 반면 여자 동성애는 특수한 병리 현상으로 보지 않다. 심리학적 여성의 심리구조에는 동성애적 요소가 강하게든 약하게든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다고 본다.] 그러다가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결여를 인지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자아이는 이미 거세를 경험한 상태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친다는 점에서 남자아이와 경로가 다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여자아이는 이 시기에 자신에게 없는 남근을 선망하게 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근 대신 아기를 소망하게 된다. ‘정상적인’ 여자아이라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근친상간 금지법을 수용하고 나서 (즉 최종적 거세가 일어나고 나면) 아버지 대신 아기를 제공해 줄 남자를 기다리게 된다. 즉 여자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더불어 남자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지 않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여 좌절이나 분노를 겪게 되면 (예컨대 이 시기에 엄마가 아기를 낳음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 아닌 엄마에게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이 여자아이는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아이는 이제 스스로를 아버지보다 더 남자다운 남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사랑의 대상을 이전의 어머니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즉 성적 정체성은 아버지와 동일화하여 남자가 되지만, 성적 지향성은 여자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자의 성과 여자의 성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간략히 설명했다. 정신분석학이 성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소개하는 것이 초점이었므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성적 정체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 확립되는지를 이해했다면, 성적 소수자들의 다양한 성적 지향성, 나아가 갖가지 정신병리적 증상들[* 신경증(히스테리, 강박증, 공포증), 도착증(새디즘, 매조키즘, 관음증, 노출증, 페티시즘 등) 그리고 정신증(편집증, 분열증)]이 모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성과 해소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대략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이 인간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정확히 그 역도 똑같이 성립한다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핵심 테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