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2 feat.자우림 샤이닝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2 feat.

자우림 샤이닝

 

이상하(한철연 회원)

 

5.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자우림의 노래 샤이닝 중에서.

 

출처 여행중에 직접 찍은 제주도 협재 해변의 사진

 

 

 이번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나오미수녀와 벤야민에 대해 쓰면서 난 자우림의 명곡 샤이닝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도망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이 지루한 반복되는 일상과 예기치 못한 고난과 고통이 산재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허나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선 도무지 이 반복되는 지겨운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니체도 지긋지긋하다고 강조한 중력의 정령을.

 그래서 현대인들의 유토피아는 항상 외국, 여행 속에만 존재한다. 이 유토피아, 낙원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만… 진정한 자기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욕망이 여행에는 잠재되어 있다. 타인이 자기를 알아볼 일이 없는, 타인의 시선이 없는 곳의 자기를 알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떠났었고, 나치의 유럽을 피해서 미국으로 가려던 벤야민도, 수녀원을 떠나 여기가 아닌 어디로든 가고 싶었던 덴마의 나오미 수녀에게도 분명히 그런 욕망이 있었으리라. 그래서 수녀는 이렇게 주문했다. 어디로든 여기서 가장 먼 곳으로.

 그렇지만 그 여기서 먼 공간 조차도 돈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안에서만 정해진다. 분명 그러한 속세의 논리가 싫어서 봉사하는 삶을 위해 수녀원으로 들어갔을 나오미 수녀지만, 토지 소유권 문제로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고 거길 나와서도 이 돈의 한계에 갖히게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나 푸코 같은 사람이 말했다는 ‘자본주의의, 세계의 외부란 없다’라는 끔찍한 말이 떠오른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사실은 벗어날 이 내부의 ‘바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건 아닐까.

 게다가 이 에벤에셀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나오미는 정말로 마지막으로 남은 짐 또는 재산인 가방을 타지에 도착하자마자 부랑자에게 도둑질당한다. 그리하여 돈이 없기에 식사를 하고서 식당주인의 허락을 받아 설거지 노동으로 보상하려는데 그마저도 기차역에서부터 온갖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스트레스를 준다… 시선이란 참으로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헤겔 시절부터 말해온 것처럼 우리는 타인의 관심 타인의 시선을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인정욕망이 있지만, 그 때문에 또한 인정투쟁에 시달리게 되고 고통을 받고 일상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그래서 앞에서 말했듯 그런 시선이 없는 타지로의 여행을 이상화하지만, 나오미 수녀는 분명 멀리 타지로 왔음에도 오히려 수녀원보다 더욱 타인의 시선에 시달린다. 그리고 왠 낯선 남자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는데…

 이는 놀랍게도 에벤에셀 도시의 시장이 직접 나오미 수녀를 알아보고 찾아와서 그녀를 극진히 대접하려는 것이었다. 노인이 절반 이상인 실버타운 에벤에셀의 시장은 당연히 건강에 큰 관심이 있었고, 나오미 수녀가 그동안 만들어온 약효가 있는 만드라고라에 나오미 수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기에 시장을 비롯해서 모든 시민이 나오미 수녀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의 비서가 그녀에게 살짝 나오미가 계속 이 도시에 살며 만드라고라를 만들기를 원한다고 전해준다. 조용히 살던 수녀원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야반도주한 나오미 수녀의 입장에서 정말 만세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진작 그 끝도 없는 보상없는 노동이 반복되는 수녀원에서 도망쳤어야 하는 게 아닐까 더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20세기 세계대전중 나치의 독일에 살던 유대인 벤야민도 이런 희망을 기대하며 모스크바로 떠나고 미국으로 떠나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제 부르주아의 자식으로 크리스마스날 상가를 헤매고 파리의 아케이드를 산책하던 벤야민처럼, 듬직한 경호원이 항상 대동해주고 그보다도 더 듬직한 시장의 신용카드를 받고서 에벤에셀의 거리를 산책하는 나오미수녀.그녀는 돈이 필요없는 수녀로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겨우 며칠만에 잊어버릴 만큼 이 풍족한 소비생활에 익숙해진다. 이는 참으로 무섭고도 매혹적인 돈의 마력이자 자본주의의 매력이 아닐까.

 돈이 없을땐 누구나 돈과 자본주의에 악담과 저주를 퍼붓지만 돈이 많을땐 이 자본주의만큼 나에게 쉽게 만족과 행복을 제공해 주는게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름신이라던가 sibal 비용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가며 나의 행복을 위해 소비를 저지른다. 수녀였던 나오미 수녀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이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읽을 때 자본주의와 관련해 그런 일화가 있었다. 아일랜드였나 어떤 유럽의 소국에선 전통 음악 등 지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해서 전혀 미국의 화려함을 부러워하지 않았었는데, 어느날 티비가 아일랜드에 들어오고 엠티비같은 방송이 시작되자 겨우 몇년만에 아일랜드 사람들이 할리우드와 미국 팝송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이 나오미 수녀도 그와 비슷한 씁쓸하고도 달콤한 자본의 매혹과 참맛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자본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벤야민도 아마 그러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겨우 며칠만에 완벽하게 바뀌는 사람은 없고 나오미 수녀님도 그러하다. 5일전에 수도원을 철거하겠다는 용역 깡패의 말을 나오미수녀는 기억해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자신을 찾아온 택배원 덴마를 따라 다시 수도원으로 가게 된다. 허나 그곳에서 이전에 자신이 구하고 간호했던 거지들이 수도원 철거를 막는 광경을 보고… 나오미는 이전에 수녀원장님이 자신에게 남긴 말을 떠올린다…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4&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양손에 시장의 카드로 사거나 선물받은 물건을 잔뜩 쥐고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지 부랑자의 무리를 만난 나오미 수녀.

벤야민은 이 나오미 수녀처럼 도시의 빈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부모손을 잡고 상점가를 가다가 거리의 가난한 아이들을 만났었고… 파리같은 대도시의 거대한 아케이드를 산책하다가 화려한 상품들에 대비되는 실업자 거지 매춘업자 노숙자 심지어 온몸을 광고판으로 채운 샌드위치맨을 만났었다.

그리고 이 가진 것 없는 약한 자들 사이를 산책하면서 벤야민은 희망을 수집하고 새로운 서사를 구성해낸다. 어쩌면 나오미 수녀도 벤야민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의 말을 빌려본다면, 사회에서 아무 몫도 없는 자들에게 그들의 몫을 찾아주기… ?

 

 

6.

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있으니

더 늦기 전에

더 늦게 전에

어서 도망치렴.

안밖으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나오미수녀에게 원장수녀님은 병환으로 아픈 와중에도 이런 말을 남겨주었다. 이제 왜 그녀가 그런 말을 남겼는지 다시금 알아볼, 벤야민 식으로 말한다면 과거를 회억, 회상하고 기억해볼 시간이다.

수녀원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친 나오미 수녀. 하지만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서 의외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음에도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이 원했던 곳이, 자기가 즐거운 곳이 아니었으니까. 복에 겨운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오미는 만드라고라를 재배하는 농부일 때나 병자를 간호하는 간호사일 때나 신의 종으로 하루종일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수녀일 때가 가장 생명력이 넘치고 즐거웠다는 것을, 그 장소를 떠나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 다뤘던 철학자 하이데거도 딱 이런 상황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무언가가 부재할 때 우리는 진실로 그 존재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깨닫는다고. 물론 꼭 철학자의 이런 언어가 아니더라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으로도 왜 나오미 수녀가 이제서야 그것을 깨달았는지, 수녀원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저렇게 양손에 잔뜩 쥔 무거운 상품들을 내려놓고 예수나 부처를 떠올리게 할만한 미소를 짓게 되는지 알게 되는 이유로 충분하리라.

출처-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5&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그리고 이제 수녀원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이전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너무나 힘들어하는 후배를 만나고 원장수녀님이 말한 말씀을 계속 전해준다. 어서 도망치라고. 자신은 이미 잘 다녀왔다고. 심지어 이 후배의 이름은 마리아, 덴마의 세계에 기독교는 없고 그와 닮은 종교들만 있지만 예수를 낳았다는 성모 마리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이름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자의적 해석이지만, 나오미라는 이름 자체도

나오(더라도) 바깥으로

미(me)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라고 양영순이 의도한 것은 아닐까. 물론 마리아는 서양에 한국의 영희만큼이나 흔해빠진 이름이고 이 모든 게 나의 시쳇말로 뇌피셜 무리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허나 이런 게 바로 그저 재밌었다고 한번 휙 보고 넘길 수도 있는 만화 한 편에 대해서, 산책하고 수집하는 리뷰적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길은 아닐까. 벤야민이 모스크바 일기를 재구성했듯이.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6&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나오미를 그렇게까지 움직이게 한 힘의 원천이란 결국 뭐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생명이리라. 생명이라는 건 천주님이 이 우주 곳곳에 보편적으로 일어나게 한 가장 즐거운 에너지 흐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마치 스피노자가 기쁨의 정서에 대해 말한 부분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흔히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함께 서양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 철학을 개시한 이성을 중시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 동시에 기쁨이나 명예욕같은 구체적인 인간의 정서에 대해 매우 상세히 다룬 섬세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벤야민도 이런 스피노자나 니체의 철학을 분명히 읽었고 영향받은 기록들이 그의 저서 곳곳에 남아있다. 아마 그래서 벤야민은 20세기 나치의 파시즘이 휘몰아치는 유럽의 거리에서 빈민과 창부와 산책꾼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마음과 정서에 대해 살펴보고 수집하며 자신의 역사철학을 다듬어나간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도 바로 그런 수집가이자 산책가로서 벤야민의 문장과 마음을 훔치고 흉내내고 싶어서 이 연재글을 시작한게 아닐까.

이제 나오미수녀는 자신에게 확신이 생겼다. 떠나보고 나서야 그곳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공간, 즐거운 삶이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도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나 베를린에서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다가, 자신의 연인인 아샤를 보기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가 돌아오고 모스크바의 일기를 남긴 것도 바로 이런 나오미의 마음과 닮아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이런 정서를 다시 느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글을 마무리하면 나름 감동적이고 훈훈한 흔한 결말이리라. 하지만 나는 또 마음 한켠에서 삐딱한 작은 아이가 고개를 들고 입을 삐쭉 내민다.사실 나오미 수녀도 이전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야엘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능력있으면서도 운까지 좋은 일부 사례에 불과한건 아니냐고. 만드라고라 마스터로 이미 하나의 엘리트 전문가였고, 여행객이 타지에서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면 보통 패닉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기 마련인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도시의 시장이 그녀를 구해주러 오는건 지나치게 그녀에게 편리하고 양 작가의 작위적인 전개가 아니냐고. 좀 더 무리수를 던져본다면 어쩌면 베를린의 부잣집 엘리트로 자라난 벤야민이 잠시 모스크바로 외도를 떠난 것도 단지 그런 ‘일탈이자 행운으로 가득찬 여행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고.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6&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또한 이 에피소드의 스토리 전체가 그 각자 다양하고 수많은 일상의 고통과 고난을 자칫 개인적으로 버티고 즐기면 된다고 정당화하는건 아니냐고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을 법하다. 천년도 더 전에 로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시절부터 기독교의 이런 서사는 매우 고전적인 레파토리 아니었는가.

 현재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미래에 더 큰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서사. 이는 자칫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저 구원은 미래에, 심지어 죽음 뒤에만 존재하니 현실에서 무슨 고통을 받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종말론, 메시아주의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 21세기에 오히려 종교는 더더욱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중이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게 되는 2020년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모두 살고 있다…

 

 

7.

 개신교니 신천지니 하는 특정 종교나 특정 교파의 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이 다들 영원한 경제성장을 비롯한 유사 종교의 열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전편에 이어 이번 글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또한 고통받으면 나중에 보상받는다는 기독교스러운 서사는 여전히 우리 세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면 이런 만드라고라 마스터이자 수녀였던 나오미 수녀나 벤야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감각해야 할까. 이에 대해 나는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서론을 끝내는 이 말로서 내 표현을 대신하고자 한다. 물론 이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하지만 모든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는 단서를 달고서… 비판, 비평이란 당연히 그러해야 하니까. 다음 글에선 이런 기독교와 수도원의 구원서사가 아닌, 맑스의 투쟁과 해방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필자는 이러한 논의 속에서 자신의 관점을 숨기지 않으려 한다. 다시 말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역사철학을 재검토해 보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출발한 서구 역사철학 역시 이러한 관심, 즉 고통과 불의를 신의 관점 속에서 설명하려는 이유에서 ‘역사의 신’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맑스와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옹호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앞서 언급된 맑스의 이중성 역시 논증할 것이며, 아울러 벤야민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메시아에 대한 관점을 이를 보완하려는 시도로, 역사적 유물론을 일관된 방식으로 억압받는 자들을 역사의 주체로 사유하는 역사철학으로 재설정하기 위한 방향 전환으로 해석해볼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진보’라는 명분으로 과거를 망각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결국 역사철학의 세속화에 관한 이 책의 논의는 미래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정당화하고 망각하려는 시도들과 정반대로, 망각에 저항하고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미래로 ‘도약’하려는 모든 형태의 ‘몫 없는 자들’의 서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예비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역사철학에 대한 시론임과 동시에 정치철학적인 고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이 실은 모든 역사철학에 공통된 것이며,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 역시 그러할 것이다. (한상원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39-40p)

계속…

이유도 없는 외로움 사랑했다는 괴로움

내게도 날개가 있어 날아갈 수 있을까.

이 가슴 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 려나

바람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 있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 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책 [신년회 후일담 2]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책

오늘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다. 오후 3시에 시작해서 영화감상, 시평 토론회, 정기총회, 저녁식사와 여흥을 마치고, 현재 일부 회원들이 남아서 자유발언 중이다.

지금은 정년을 곧 맞이하는 이화여대 이규성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이규성왈

“나는 이제 책 안 본다. 이제 문자로 이루어진 책을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광화문에 가면 큰 책이 있다. 이 책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이 큰 책 앞에서 지금까지의 철학은 모두 무효가 되었다. 지금 나는 이 큰 책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린 이제 큰 책을 보기로 했다!

(전호근 회원의 페북에서 재게재)

철학은 개폼이다 [신년회 후일담 1]

철학은 개폼이다.

역시 올해 정년을 맞이하는 방송대 이정호 교수의 한철연 신년회 발언이다.

“철학은 왜 하냐? 철학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이다.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철학하는 자들이 제도권으로 들어가면 공부하지 않는다. 퇴직하면 책을 읽지 않는다. 인생은 그걸로 끝이다.

반면 제도권 밖에서 연구하는 이들은 정년이 없다. 한 사람의 실존적인 자부심은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는다.
자부심은 자신이(自) 짊어지는(負) 것이다. 이것이 기초다.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다.
남들은 개폼 잡는다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철학은 바로 개폼이다. 내 시선을 기준으로 처절한 자기응시에 직면하는 것 그것이 철학이고 공부다.”

우린 이제 처절하게 고민하고,처절하게 성실하고, 처절하게 반성하기로 했다!

(전호근 회원 페북에서 재게재)

과학은 질문하는 철학이다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5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5

 

오늘의 책

[진화적 분석](김원 외 옮김, 바이오사이언스, 2016)

: Herron and Freeman, Evolutionary Analysis, 5th ed. 2014.

 

과학은 질문하는 철학이다

진화론을 현대적으로 정립한 도브잔스키에 의하면 생물학은 진화론을 통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진화생물학은 중요하지만, 실제로 대학에서 사용하는 생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이 비중있게 다뤄지진 않는다. 현재 생물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내용의 대부분이 진화론적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진화론 이라는 이름의 교과과목으로는 많이 다뤄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분석생물학이 대세인 오늘날 진화론은 분석적이지 못하고 서술적 이야기 중심이라는 과거의 선입관 때문이다. 이런 선입관을 극복한 진화론 교과서가 있어서, 비록 그 책이 교양과학서나 대중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권 소개하려고 한다. 헤론과 프리만이 쓰고 서울대 생물학과 김원 교수 등이 번역한 <진화적 분석>이라는 책이다.(Herron and Freeman, Evolutionary Analysis, 5th ed. 2014; 한국어판, 김원 외 옮김, 진화적 분석, 2016)

이 책은 진화론을 다루면서도 기존의 서술적 방식이 아니라 철저한 증거주의 위주의 분석적 방법론으로 기술되었다. 이 책은 아래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이 책 <진화적 분석>은 특정한 주력이론만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후보이론들을 같이 보여주면서 독자가 스스로 문제해결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역시 교과서다운 장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미생물의 진화현상을 이해함으로써 분자생물학과 진화생물학이 만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항생제나 바이러스성 병인을 차단하는 약이 내성을 갖는데 이런 약제 내성은 진화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엄연한 사례이다. 이 책은 구체적인 진화의 관찰사실을 제시하여 진화론이 서술적 철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선과학에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문제풀이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셋째 이 책은 자연에 대한 보편적 과학이론과 최근의 경험적 분석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최적의 연구결과를 얻기 위한 과학탐구의 사유논리와 관찰의 추론방법 등을 제시한다. 이 책을 공부하려는 학생과 학생다운 일반독자에게 이 부분은 매우 소중한 읽을거리가 된다.
넷째 문화현상을 생물학 이론으로 대체하는 기존의 사회생물학적 편향추론 대신에 문화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병립적으로 놓는 객관적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 때문에 일반 사회과학 중심 독자들도 한번 이 책을 도전하도록 추천한다. 조금은 어렵지만 말이다.
다섯째 누구나 알고 있는 주변의 현상들을 진화론의 시각으로 간결히 설명해준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 책이 다루는 소재는 친숙한 주변의 사례들인데, 그중에서 벌레 이야기 하나 하려 한다. 온몸에 가려웠던 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어른이 많을 것이다. 요즘 초등학생에서 이가 다시 돌고 있다는 뉴스도 있다. 이의 진화계통학적 분석을 통해서 인류가 언제부터 옷을 입게 되었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 사람 이와 침팬지 이는 종이 다른 이이다. 사람 이에서도 몸니와 머릿니는 서로 다른 종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이란 서로 교배가능한 생식 공유집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온몸털에 서식하는 침팬지 이에서부터 머리털에만 서식하는 인간의 머릿니가 진화론적으로 갈라져 나왔다. 이후 언제부터인가 머릿니와 다른 종의 몸니가 생겼다.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을 골고루 표본조사하여 머릿니와 몸니의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결과, 몸니와 머릿니 사이의 분기 시점은 107,000년 전으로 밝혀졌다. 이로부터 과학자는 머릿니에서 몸니가 갈라져나온(분기) 시점을 통해서 인간이 옷을 입기 시작한 시점을 추론하였다. 몸니의 새로운 종 생성은 인류가 옷을 입으면서 의복에 적응된 소산물이라는 추론이다. 결국 인류의 의복은 십만 년 전부터 입었다는 추론결과가 나온다. 이 책은 이런 주변의 일들을 통해 어려운 진화론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139쪽)

오늘날 진화적 분석은 경찰 범죄학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 책에 나온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1998년 한 개인병원 의사와 그 병원에 근무했던 간호사 사이의 법적 소송 사건이 있었다. 개인병원 의사인 슈미트와 전직 간호사 트레이헌은 한동안 연인 사이였다. 이후 트레이헌은 슈미트 의사에게 이별을 고하고 헤어졌다. 이별의 증오심을 품고 있었던 의사 슈미트는 그 앙갚음으로 자기 병원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환자의 피를 묻힌 주사기를 옛 애인에게 주사했으며, 결국 트레이헌은 에이즈 유발 바이러스인 HIV에 감염되었다. 검찰에 송치된 의사 슈미트는 트레이헌의 HIV 감염 바이러스는 자신의 환자의 바이러스와 무관하며 둘 사이의 직접감염의 증거가 없다고 강하게 반론했다. 검찰은 이 사건 해결을 위해 진화생물학자와 공식 연구계약을 했다. 슈미트의 병원 내 HIV 환자와 새로 감염된 트레이헌의 HIV를 상호분석하여 그 둘 바이러스 사이의 진화적 유연관계를 분석함으로써 결국 슈미트의 범죄를 밝혀내었다. 슈미트는 2급 살인미수로 50년형 복역 중이다.(25쪽)

이 책은 전공서적이지만 이렇게 재미나다. 약의 내성을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왜 그렇게 꺼끄러운지, 문화현상의 변화와 자연의 진화가 어디서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지, 아이들이 채소 먹기를 왜 싫어하는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왜 사회적응성이 떨어지고 건강을 해치는지, 아이큐가 부모로부터 유전받기는 하지만 집단이나 민족 특성의 척도로서 아이큐를 간주하는 것이 얼마나 비과학적인 편견인지, 일부일처제가 진화사적으로 왜 중요한지, 등등 이 책은 그런 재미난 주변 이야기를 엄정한 진화적 분석으로 다시 설명해주고 있다.

교양과학서를 읽을 때 가끔은 교과서를 접하기를 권유한다. 냉철한 과학지식을 궁금해 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읽어가면서 특정가설이나 이론에 치우친 일방적 지식에 현혹되지 않고 다양한 연구결과들을 병립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독자를 위한 정말 좋은 책이다. 진화심리학의 특정이론으로 가족관계나 문화현상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일 대신에 다양한 설명장르를 제시한 후 독자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게끔 하는 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서평자는 실험생물학자가 아니라 생물철학을 전공으로 하는 넓은 의미의 철학자이다. 이 책은 진화생물학의 사실관계만 다룬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을 공부하기 위하여 <생각하는 방법>과 가장 타당하게 <질문하는 방법>까지를 보여주고 있다. 답을 당장 찾기보다 질문을 다양한 시선에서 던져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철학에서 더없이 중요한 명제이다. 사물을 관찰하면서 비로소 직관이 커진다. 통념과 관습을 버리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의심해본다. 한다. 유사성과 차이성을 보는 추론을 키운다. 그리고 안 될 것 같은 질문조차도 과감하게 하도록 강조한 저자는 생물학자이면서 틀림없이 철학자이기도 하다.(401-402쪽) 혹시 내가 과학자에게 훈계하고 충고로 가르치려고만 하거나, 과학지식을 무조건 기계적이고 반인간적 지식으로 오해하거나, 편협된 과학지식으로 권력을 선점하려거나, 철학적 논리와 추론을 허무하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려는 싹수를 나 스스로 느낄 때, 지체 없이 <진화적 분석>과 같은 교과서를 한번 공들여 읽어보도록 적극 권유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