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근현대 삶·사회 연구 분과’ 12월 공개세미나 「니체와 20세기 초 한국 정신사-‘니체주의’와 ‘톨스토이주의’ 논쟁을 중심으로」(발표자: 김정현) [월례발표회•세미나]

‘근현대 삶·사회 연구 분과’ 12월 공개세미나

「니체와 20세기 초 한국 정신사-‘니체주의’와 ‘톨스토이주의’ 논쟁을 중심으로」 (발표자: 김정현)

 

근현대 삶·사회 연구 분과(한철연)

 

2020년 12월 28일 20시, 한철연 ‘근현대 삶·사회 연구 분과’는 원광대 철학과의 김정현 선생님을 초빙하여 특별 세미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날 발표 논문은 독일의 니체연구지

Nietzscheforschung』, Bd.23(2016)에 게재된 글로 한국에서 첫 니체 수용의 의미를 밝힌 것입니다. ‘개인’과 ‘개인적인 것’, ‘근대적 개인주의’의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저희 분과에서는 김정현 선생님의 연구가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논의된 내용들을 간략히 소개하며 뜻깊었던 자리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선 논문에서 김정현 선생님은 왜 니체가 동아시아에서 문제가 되었는지를 물으며 니체 연구의 수용사가 20세기 한국의 시대적 문제의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주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어 본문을 통해 저자는 크게 두 개의 주제와 연관하여 논의를 발전시키고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아시아 정신사에 자리 잡고 있는 니체의 위치를 점검하고 후반부에서는 니체주의와 톨스토이주의의 비교를 통해 한국의 니체 수용사의 구도를 고찰합니다.

일본지성계와 중국지성계의 상황을 비교하는 전자의 논의에서 흥미롭게 지적된 점은 일본에서의 니체 논의는 국가주의, 개인주의, 사회주의와 연결되었던 반면 중국에서의 니체 논의는 구습의 폐지, 신문화 창조, 민족주의의 담론으로 이어졌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또한, 후자에서 다룬 서북학회의 니체 수용사는 이 시기의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을 위시한 서구 인권사상, 민중 계몽의 사상 등을 확산시키면서 니체와 톨스토이의 사상을 대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 주었는데, 두 사상가들이 다룬 개념들을 20세기 동아시아라고 하는 특수한 지형 속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논의였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언급된 ‘윤리 및 개인과 사회의 관계’ 부분은 1909년 <서북학회월보>를 통해 소개된 ‘애기(愛己)’와 ‘애타(愛他)’에 관한 필자불명의 두 편의 글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었는데, 김정현 선생님은 이 시기의 니체 연구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있었던 시대정신과 분리될 수 없음을 밝히면서 윤리적이고도 사회적인 개인의 발견과 근대성의 이해 문제가 대한제국의 자기인식이라는 숙제와 연관되어야 함을 지적했습니다.

3.1운동을 거쳐 1920년대 초반까지 진척되었던 한반도 사상계 속 개인과 사회, 국가에 대한 새로운 물음들은 톨스토이와 니체를 중심으로 한 대결적 구도 속에서 근대 인식의 지도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언급된 특징들이 일본이나 중국과도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날 분과원들을 비롯하여 동·서양 철학을 전공하는 30여 명 정도의 인원이 참석하였습니다. 모두 김정현 선생님과 열띤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졌고 수많은 흥미로운 발언들 속에서 저마다의 숙제를 담아갈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의미 있는 마무리가 된 것은 김재현 선생님이 동과서 출판사에서 근현대 한국 총서 시리즈로 출간된 양일모 선생님(팀)의 최근 연구서(들)을 소개하면서 발표자인 김정현 선생님이 앞서 언급한 필자불명의 글이 일본학자의 것임을 부연해주었다는 점입니다. 이날의 세미나는 참으로 21세기의 한국철학을 만들고 있는 ‘젊은’ 한국 철학자들의 만남이라 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에서 동서양 연구의 만남에 대해 가치 운운하던데, 바로 오늘 같은 만남(20세기와 21세기를 횡단하고 동양과 서양의 연구가 교접하는 ‘across the sophia-phile’) 이상의 또 뭣이 중할 수 있겠습니까?


*flex: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분과 모임인 <근현대 삶·사회 연구 분과 세미나>는 2019년 5월 28일 첫 모임을 시작으로 매달 마지막 주 저녁 8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오후 4시경쯤 서교동에 있는 한철연 세미나실에서 모였으나, 팬데믹 이후 Zoom을 통해 저녁에 회합하고 있습니다. 요일은 그때그때 다르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미리 연락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현재 멤버는 김교빈(분과장), 김문용, 김재현, 김제란, 김홍경, 연효숙, 이종란, 이찬희, 이현구, 인현정, 황희경입니다. 참고로 저희 스터디의 aka가 ‘복덕방 스터디’로 알려졌는데 왜 이런 경이로운 소문이 퍼졌는지, 올해로 평균 연령 21세가 되는 멤버 모두가 갸우뚱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인보, 이기, 최남선, 신채호 등의 글들을 살펴왔고, 앞으로도 근현대 인물들의 삶과 철학을 폭넓은 관점과 주제로 공부할 예정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1월 월례발표회 영상 –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 – 순자철학을 중심으로”(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1월 월례발표회 –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 – 순자철학을 중심으로” – 윤태양 회원 발표

 

링크: https://youtu.be/eS6II1sNO18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1월 월례발표회

2020년 11월 26일에 줌(ZOOM)으로 진행한 월례발표회 영상입니다.

 

-일    시: 2020년 11월 26일 (목) 오후 4~6시

-주    제: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 – 순자철학을 중심으로

-발표자: 윤태양(건국대 모빌리티인문학연구원)

-토론자: 배기호(충북대 철학과)

 

“이 발표문은 윤리적 행위를 해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한 가능성으로 정동적 변화를 지목하고, 그것이 어떻게 이동성과 다양성이 만연해진 현대사회에 효과적인 제안이 될 수 있을지 탐구한다. 한국 학계에 있었던 ‘정동(情動, affect)’ 개념을 둘러싼 토론을 정리하고, 순자 성악설의 논리구조와 ‘정안례(情安禮)’를 중심으로 모빌리티 패러다임 안에서의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의 길을 모색한다.”

의철학의 지도 그리기 – 최종덕의 『의학의 철학』 서평 [철학자의 서재]

의철학의 지도 그리기

최종덕의 『의학의 철학』 서평

 

김범수(한철연 회원, 상지대)

 

평생에 걸쳐서 하나의 이론적 지형을 그려낸 저작이 있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분야라서 그 노고만큼의 화제나 명성을 얻기도 힘들다. 이 소모적인 일을 저작에 대해서 짧게 말하려고 한다. 이 책은 최종덕 교수가 쓴 『의학의 철학』이다. 이 저작은 아마도 교과서와도 같이 필요하면 소환되어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10년이 지난 뒤에도, 20년이 지난 뒤에도 독자들에게 소환되어 저작에 그려진 ‘의철학’이라는 낯선 지형을 탐색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깊이의 책을 독해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의학의 철학』은 최종덕 교수가 학자로서의 평생 업적을 집약해 놓은 저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기센대학에서 양자역학의 존재론이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물리학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시도를 해왔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관심은 물리학, 수학에서 진화론과 생물학으로 넓혀갔다. 물리 대상에서 생명으로, 자연스럽게 인간의 몸으로 관심분야가 확대된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저작의 주제는 다수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의학 철학이다. 이 과정을 살펴본다면 저자의 이력은 과학 철학이라는 큰 울타리에서 새로운 가지들이 분기해서 생물학이며 의철학으로 꽃을 피운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작은 이미 앞선 『생물철학』, 세종도서상을 받은 『비판적 생명철학』의 연장선이자 발전이기도 하다. 실제로 『비판적 생명철학』에서는 단순히 생명을 규정하기 위한 마이어와 같은 학자를 이용하는 것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론적 사고와 생기론적 사고를 비교하면서 생명의 특성 안에 상호작용, 혹은 공생의 의미를 살피고 있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따뜻한 인문학 안에 과학적 사고의 요청과 필요성을 소환하려는 저자의 이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유는 자연스럽게 진화론과 연결되면서 『생물철학』에서 『의학의 철학』을 집필하게 될 전조가 감지된다.

최종덕 교수가 쓴 『의학의 철학』은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제법 두껍기도 하거니와 생소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주제가 배치되어 단번에 읽어 보겠다는 야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버거울 수 있다. 이에 많은 분량을 간단하게 분류하여 그 흐름을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구성을 임의로 재배치하면 크게 세 주제 혹은 네 묶음으로 재분류할 수 있다. 1장과 2장, 그리고 11장은 의학철학의 존재론적 문제가 중심을 이룬다. 존재론적 문제에서 인식적 차원의 논의로 이해하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이는 3장, 4장, 5장이다. 그리고 인식론적 차원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인식적 문제의 주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독자적인 부분으로 이해할 법한 9장과 10장이 있다. 이 부분에서는 면역학과 노화방지학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6장, 7장, 8장의 진화(의학)론이다. 이렇게 보면 대략 세 주제 혹은 네 묶음으로 재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시작은 의철학의 존재론적 물음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11장에서도 이러한 구성에서 철학자의 분투가 그려진다. 왜 그런지 간단하게 설명해 보자. 존재론적 물음은 흔히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서 찾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에서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계속 묻는다. 가령 용기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 이 간단한 질문은 대화 상대를 늘 곤경에 빠뜨린다. 심지어는 이 물음을 던질 소크라테스마저도 ‘나도 잘 몰라’라고 고백하게 만든다. 바로 이런 물음이 존재론적 물음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마저 무지를 고백하게 만드는 존재론적 물음은 거인족(티탄족)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언뜻 인식론적 차원에서 논의가 접근되는 것 같지만, 어김없이 “~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한다. 이 물음을 그대로 ‘의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구체적으로 제기해 보자.

저자는 의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우회적인 답을 내린다. 그 답의 키워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도 그리기이고, 다른 하나는 플랫폼이다. 저자가 말하는 의철학은 다음과 같은 우회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철학은 추상적인 문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실존적인 현실 문제도 깊이 다룬다. … 철학은 미술작품이나 문학작품에 대해 미학적 해석을 시도하며, 로봇윤리와 같이 인공지능의 가치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의학에 대한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의료윤리와 같은 가치론을 다룰 수 있는데, 이런 분야를 ‘의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 엄밀하게 이런 정의는 본질적 물음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 하지만 의철학의 위상을 매우 솔직하고 정확하게 지도 그리기를 한 것이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를 상상해보자.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도가 있어야 한다. 그 지도는 여행 전체 일정을 바꿀 수도 있다. 지도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낯선 곳이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라 어느새 익숙한 풍경으로 바뀌게 된다. 이로부터 여행은 더 안락하고 즐거워진다. 이 책에서는 의철학을 설명하면서 그 인식론과 존재론, 가치론을 다룰 수 있다는 말은 매우 불친절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향으로 책이 정리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즉 의철학이 다루는 존재론의 문제, 인식적 문제, 가치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하나의 의철학 지도로 톺아보면,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이나 깡길렘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 새롭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구체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학의 철학』에서는 그려진 지도가 매우 자세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영토를 표시하는 지도가 아니라 풍경이 그려진 지도의 형식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지도 그리기로 설명한 존재론적 문제에서 인식적 차원의 논의로 좀 더 세분하여 나아가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이는 3장, 4장, 5장, 그리고 9장과 10장으로 연결된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다뤄야하는 부분이 바로 질병에 대한 ‘인식’이다. 질병이 무엇이고, 왜 생기는지를 알 수 있다면 건강과 장수의 희망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3장에서 분류 의학의 존재론적 기초를 다루면서 질병마다 고유한 본질을 따로 갖고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로부터 근대 의학이 탄생할 수 있는 병리학의 위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분류 의학의 존재론적 의미가 질병관의 역사적 모델과 함께 상세하게 4장에서 다뤄진다. 그리고 의료인류학의 인식적 기초를 5장에서 자세하게 소개한다. 의료인류학은 인간의 건강이 사회적 요소에 의해서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연구 분야이다. 의료인류학은 문화적, 역사적,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 질병의 경험을 기술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질병이 단순히 실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료인류학적으로 문화 횡단적이고, 역사적이며, 진화론적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6장부터 8장까지 최종덕 교수는 진화론과 의학의 관계를 조명한다. 진화에 관한 논의는 물론 라마르크나 다윈과 같은 학자들의 논의에서 출발하지만, 이내 진화 의학으로 발전적인 지도를 그려간다. 진화의학은 우리 신체가 적응진화의 소산물이라는 진화론적 인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질병과 병리적 징후군의 기원과 원인을 이해하여 더 나은 치료와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임상과 이론의 의학 체계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진화의학은 의학계에서 외면 받아왔다. 최종덕 교수는 그 이유를 진화 의학의 다양한 해석을 제공하면서 임상의학에서 이용될 수 있는 접점을 그려보고 있다.

한편 5장에서 다루어진 의료인류학은 삶의 문화적 실존과 더불어 삶의 실존을 억압하는 현실의 사회-역사적 조건을 살펴보게 된다. 여기서 여러 감염병의 파장으로 지역적 의료환경과 보건 정책 등을 따져보게 된다. 이로부터 건강 모델이나 공중보건 모델이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9장에서 면역의학으로 연결될 수 있다. 면역의학은 면역학적 사유체계를 통해서 질병을 해석하고 생리의 역동구조를 이해하려는 인식론적 태도를 말한다. 이 인식적 태도에서 공진화와 공생과 같은 개념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이로부터 공존의 존재론, 즉 숙주의 면역작용과 기생체의 공격작용이 하나의 방향이 아니라 변화를 겪는 공존의 존재론적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책 전체를 보면 의철학을 구성시킬 수 있는 인식론적, 가치론적 태도가 다시 존재론적 위치에서 다시 탐문하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다시 처음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의철학이란 무엇인가? 아니 이 질문은 실용적으로 다음 질문으로 대체해 보자. 의철학은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는가? 『의학의 철학』에서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캐플란은 1992년 “의철학이 존재하는가?”라는 논문에서 고유한 영역이 가능하려면 그 영역만의 핵심 교과서를 필요로 한다고 지적한다. 의철학은 그 당시까지 고유 영역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고립된 지식의 섬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서 그는 의철학의 고유성을 부정하는 비관적인 주장을 담았다. 하지만 의철학은 고유한 영역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마컴은 의철학의 고립성을 부정한다. 의철학 교과서가 미비하고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계속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고 있고, 앞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점에서 마컴(Marcum)은 의철학의 고유성을 제기한다. 바로 이런 설명이 앞으로의 의철학 발전을 위한 플랫폼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책 11장은 본질적이라고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 등 여러 조건에서 의철학의 규정이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플랫폼’이라는 형식을 제안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은 세상을 보는 비판적 시각과 나 자신을 바라보는 성찰적 시선을 잃지 않는 관점이며 문제와 문제 아닌 것을 구분하여 진짜 문제를 질문하는 태도를 말한다. 의철학이란 그런 질문을 의학에 던지는 사유행위이다. 의철학은 철학사에 갇혀 있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인문의학과 의료인문학의 방향과 지향을 안내하는 나침판이다.”

플랫폼은 빈 그릇이다. 그리고 그 빈 그릇에는 매우 다양한 것을 담을 수 있다. 애초에 『의학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로 두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지도 그리기’와 ‘플랫폼’이 그것이다. 이제 이 책 『의학의 철학』으로부터 지도와 플랫폼을 하나의 격자로 만들어서 각자가 그려갈 의철학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한철연 2020년 10월 월례발표회 영상 – “리인(利仁)과 안인(安仁) – 윤리적 태도와 이념에 관한 주자의 인식 고찰”(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2020년 10월 월례발표회 – “리인(利仁)과 안인(安仁) – 윤리적 태도와 이념에 관한 주자의 인식 고찰”

김나윤(중앙대) 발표 2020.10.22.

 

 

링크:  https://youtu.be/RdOJenOs3Io

사진: http://www.hanphil.or.kr/photo01/view.asp?Page=1&Board_Key=349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0월 월례발표회 줌(ZOOM)진행 영상입니다.

이번 월례발표회는 동양철학 전공자인 김나윤 선생님의 발표와 박영미 선생님의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 주 제 : 리인(利仁)과 안인(安仁) – 윤리적 태도와 이념에 관한 주자의 인식 고찰

– 발표자 : 김나윤(중앙대 철학과)

– 토론자 : 박영미(한양대 철학과)

– 일 시 : 2020년 10월 22일(목) 오후 4시 ~ 6시

– 오프라인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 온라인 : 줌(ZOOM)

한철연 2020년 8월 월례발표회 영상 – “박세채 『범학전편』의 구성과 특징- 저술을 통한 조선 도통의 재구축”(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한철연 2020년 8월 월례발표회 영상 – “박세채 『범학전편』의 구성과 특징- 저술을 통한 조선 도통의 재구축”(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링크https://youtu.be/iPgwkp4YGcQ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지금, 우리’의 전통철학 – 유학의 현대적 연구”라는 주제로 동양철학 특집으로 2020년 하반기 월례발표회를 총 4회 진행합니다.

그 처음은 김정철 선생님의 지난 8월 발표로 시작합니다.

– 주 제 : 박세채 『범학전편』의 구성과 특징- 저술을 통한 조선 도통의 재구축
– 발표자 :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 토론자 : 조현웅(한국학중앙연구원)
– 사회자 : 박민철(한철연 학술1부장, 건국대)
– 일 시 : 2020년 8월 1일 오후 3시
– 장 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 방 식 : 비공개 방식(오프라인 촬영 및 영상 업로드)

한철연 2020년 5월 월례발표회 “슈티르너의 역사철학 – 인간의 삶과 인류 역사의 미래”(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5월 월례발표회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이번 2020년 5월 발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대응으로 온라인 녹화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새롭게 시도되는 방식의 첫 번째 월례발표회는 건국대의 박종성 선생님과 경희대의 이병태 선생님께서 맡아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제목: 슈티르너의 역사철학 – 인간의 삶과 인류 역사의 미래

발표자 : 박종성(건국대 상허교양대학)

논평자 : 이병태(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일시: 2020년 5월 30일(토) 오후 4시 – 6시

장소 : 건국대학교

방식 : 비공개 방식(오프라인 촬영 및 영상 업로드)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㊵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401b-401e]

* 소크라테스는 시가의 선법과 리듬에서 뿐만 아니라 그림 등 모든 기예, 나아가 인체 및 생물들의 본성에서도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닮고 모방해야할 좋은 성품ἦθος과 생각διάνοια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인에 대해 좋은 성격의 상τοῦ ἀγαθοῦ εἰκόνα ἤθους을 시 속에 새겨 넣도록 강요하거나 장인δημιουργός들에 대해 동물들의 상이나 건물 그 밖의 어떤 제작물에도 나쁜 성격τὸ κακόηθες과 무절제ἀκόλαστος, 비굴ἀνελεύθερος, 꼴사나움ἄσχημον을 새겨 넣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한다ἐπιστατητέον고 그는 말한다.(401b) 마치 나쁜 풀밭에서 매일 같이 조금씩 여러 군데서 풀을 뜯어 먹으면 결국 많은 것을 뜯어 먹게 되는 것처럼, 수호자들이 나쁨의 모상 속에서ἐν κακίας εἰκόσι 양육될 경우 수호자들의 영혼 안에도 하나의 큰 나쁨κακὸν μέγ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아름답고καλός 우아한εὐσχήμων 본성을 추적하는데 타고난 능력이 있는 장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마치 건강에 좋은 곳에 살면 그곳에서 산들바람αὔρα이 건강을 실어 나르듯이, 아름다운 작품ἔργον으로부터 젊은이들οἱ νέοι의 시각이나 청각에 뭔가가 부딪혀 와서προσβάλῃ 모든 것에서 젊은이들이 이로움을 얻게 되고(401c) 자신들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바로 아름다운 말에 동질감ὁμοιότης을 느껴 벗으로 삼고 일체감συμφωνί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401d)

* 이상의 논의에 기초해서 소크라테스는 드디어 시가교육μουσικῇ τροφή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다름 아니라 그것이 젊은이들의 혼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력 때문임을 밝힌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장단ῥυθμὸς과 화음ἁρμονία이 영혼의 내부에εἰςτὸ ἐντὸς τῆς ψυχῆς 가장 잘 스며들고καταδύεται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을 실어 날라φέροντα 영혼을 가장 힘차게ἐρρωμενέστατα 사로잡는ἅπτεται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우아한 사람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401d) 그런데 무엇보다도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ὁ ἐκεῖ τραφεὶς은 아름답게 제작되지 못했거나 아름답게 성장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곳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가장 날카롭게 지각할 수 있다ὀξύτατ᾽ αἰσθάνοιτο ὡς ἔδει.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간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이전’πρὶν λόγον δυνατὸς εἶναι λαβεῖν, 즉 어려서부터 이미 그것을 제대로 비난하고ψέγοι 미워할μισοῖ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는 칭송하고 즐길 줄ἐπαινοῖ καὶ χαίρων 알며 그것을 영혼 안에 받아들여 그것들로부터 양육되어 스스로 훌륭하고 뛰어나게καλός τε κἀγαθός 된다는 것이다.(401e)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양육된 사람인 까닭에 자라면서 그 논거를 접하게 되면ἐλθόντος τοῦ λόγου 그 친근성 덕에δι᾽ οἰκειότητα 그것을 바로 알아보고γνωρίζων서 제일 반기게ἀσπάζοιτ᾽ 된다는 것이다.

 

—————————-

 

* 플라톤은 시가의 선법과 리듬뿐만 아니라 기타 그림과 자수, 건축 등 기타 예술 영역 모두를 가릴 것 없이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닮고 모방해야할 좋은 성품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시가의 원칙들이 음악 이외의 다른 예술 분야 전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 즉 원칙 적용의 확대와 일관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우리는 이 말에서 플라톤 예술관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을 간취할 수 있다. 즉 플라톤에게 예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성품과 생각의 반영으로서 결코 도덕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예술은 좋은 성품을 만들고 좋은 성품은 좋은 예술을 만들며 그 반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예술의 좋음과 나쁨이 있다면 예술 자체가 갖는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 예술이 반영하거나 담고 있는 성품과 생각의 좋고 나쁨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의 문제는 곧 도덕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즉 예술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반영하고 도덕은 심미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성품과 생각으로 이끄는 좋은 예술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훌륭한 예술가와 예술 교육은 정의와 도덕이 살아 숨 쉬는 나라가 갖추어야 할 불가결의 조건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가 교육의 목표와 과정 일체를 법으로 제정하여 굳건한 제도로 확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술과 예술 교육의 문제를 분별 있게 다루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맺고 끊음이 분명한 논리적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주관적 요인이 강한 감각을 통해 생동하는 감성에 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감각의 영역은 매우 주관적이고 경계가 불분명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성 또한 민감하고 충동적이며 은밀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마치 나쁜 풀밭에서 매일 같이 조금씩 여러 군데서 풀을 뜯어 먹으면 결국 많은 것을 뜯어 먹게 되는 것처럼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분별도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빠져들게 만들고 특히 감성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혼속에 들어와 그들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답고 우아한 본성이 남긴 자취까지 추적해낼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한 분별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예술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자못 실감나는 수사적 비유까지 들어가며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말하길, 그렇게 뛰어난 예술가들이 있어야 마치 건강에 좋은 곳에 살면 그곳에서 산들바람이 건강을 실어 나르듯이, 그들이 만든 아름다운 작품으로부터 젊은이들의 시각이나 청각에 뭔가가 부딪혀 와서 모든 것에서 젊은이들이 이로움을 얻게 되고 자신들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바로 아름다운 말에 동질감을 느껴 벗으로 삼고 일체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 이처럼 플라톤에게 시각과 청각을 기초로 하는 예술과 예술 교육은 그 민감성의 크기만큼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바르게 일으켜 세우는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매우 중차대한 과제로 제시된다. 예술 교육은 눈과 귀를 통한 감성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자체로는 비록 낮은 단계의 교육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특성 상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그와 같은 감성 교육 단계에서의 감수성의 발달은 그 발달의 정도에 비례하여 이후 전개될 과학 교육과 철학 교육 과정에도 매우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플라톤은 오늘날 정서 교육에서 시청각 교육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평가 못지않게 감성 교육에서 시각과 청각이 갖는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시각과 청각을 신의 선물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 갖는 교육적 의미 때문이다. 즉 시각은 하늘에 있는 지성을 관찰하여 우리 안에 있는 사유의 회전으로 하여금 그것에 닮게 하는 것이고, 청각은 우리 안에 있는 혼의 회전이 조화를 이루어 자신의 질서를 찾기 위한 연합군으로서 무사 여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티마이오스> 49a-d)

*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그러한 시가 교육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도 지금 다루고 있는 음악 교육 분야에 매우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물론 이곳의 논의 주제가 시가라는 점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술과 관련한 다른 대화편의 내용들과 비교해도 매우 이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그림이나 조각, 건축 등 예술 분야와 관련한 내용 모두를 통틀어보아도 여기만큼 큰 비중과 분량을 가지고 음악이 다루어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플라톤이 여러 예술 분야 가운데 왜 그토록 유독 음악 분야를 강조하고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플라톤은 여기서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부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시가에 붙는 장단과 리듬이야말로 그 어떤 다른 예술적 요소들보다 영혼 내부에 가장 잘 스며들고 우아함을 실어 날라 영혼을 가장 힘차게 사로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러 예술들 가운데 감성에 작용하는 자극이 가장 강하다는 것이다. 시가의 원어 mousikē에서 나온 music이 오늘날 음악의 의미로만 쓰여 지고 있는 것도 어쩌면 가사에 비해 음악적 요소가 갖고 있는 감각적 직접성이 그만큼 더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시가에 붙는 장단과 리듬은 단순히 감각상의 자극만이 아니라 시가가 가지고 있는 내용, 즉 그리스인들이라면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선조들의 생각과 행동들을 자극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영혼 속에다 모종의 직감적 세계관으로 강력하게 아로새겨 넣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음악관에 따르면 좋은 장단과 리듬은 혼에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도록 그 자체로 조화를 구현하는 수학적 원리에 따라 배열되고 설계된 것이다. 이에 따라 시가는 장단과 리듬이 결합된 음송의 형식을 띠면서 시민 교육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채용되고 전승 발전되었고, 기원전 5세기에 들어와서는 당대 시문학의 발달에 힘입어 점차 합창 등이 결합된 연극이라는 종합적인 공연 예술로 발전하면서 마치 오늘날의 영화가 대중문화 영역에서 누리는 인기 그 이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시민을 교육하거나 위무하는 최상의 수단으로 더욱 확고하게 인식되면서 급기야 나라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정례 공연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가와 그 시가에 붙는 음악적 요소들은 아테네에서 젊은이들의 영혼에 가장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술인 동시에 아테네라는 도시국가를 이끄는 일종의 지배 이념 내지 세계관을 심어주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자 토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그러한 정황 속에서 수많은 연극 공연 및 시가 교육 그리고 그것을 이끄는 시인과 지식인들의 양태는, 그야말로 플라톤이 보기에 당대 아테네 시민과 젊은이들로 하여금 현실의 극복을 위한 올바른 세계관과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함양하기는커녕,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위무라는 미명하에 퇴폐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을 부추겨 정치적 무관심과 이기적 개인주의, 성적 쾌락과 현실 도피를 조장하여 정치 영역에서 선동 정치가 판을 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이런 까닭에 새로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그야말로 어렸을 적부터 그러한 풍토를 정화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올바른 시가 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입법의 형식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제대로 된 시가 교육을 통해서만 올바른 감성 교육이 이루어지고 나중 이루어질 지성 교육에도 제대로 된 기초를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시가 교육 내지 감성 교육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예술적 감수성이 길러지고 그렇게 형성된 예술적 감수성만이 이성적 능력이 발현되기 이전, 즉 어려서부터 참과 거짓을 직감하여 그것을 제대로 칭송하고 즐기거나 미워할 줄 알게 해주고, 아름다운 것들을 영혼 안에 받아들여 그것들로부터 양육되어 스스로훌륭하고 뛰어나게 해주며, 이후 아름다움의 논거를 접했을 때에도 그 친근성 덕에 그것을 바로 알아보고서 제일 반기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가를 통한 예술 교육은 감성 교육 차원에서 참과 거짓을 민감하게 직감하는 이른바 가치 감수성, 나아가 정의감 내지 도덕의식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다음 단계에서 이루어질 과학교육과 철학 교육의 건강한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제까지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플라톤이 언급하고자 한 시가 교육의 근본 목적이자 그 중요성인 것이다.

* <국가>의 논의 자체가 근본적으로 현실의 구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한, 여기서 펼쳐지는 그의 예술과 음악에 대한 사유 또한 그가 살던 당대 아테네의 정치적 현실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특히나 시가는 줄곧 이야기해왔듯이 단순히 노래나 시가 아니라 고대 아테네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앞서 살폈듯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뿐만 아니라 당대 지식인이나 정치가들은 모두 시가 자체가 아테네 사람들 모두가 숙지해두어야 할 기초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것임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에 따라 그들 모두 시가 교육을 당대 아테네의 가치관을 유포하고 공유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시가를 내용으로 하는 연극과 합창 공연은 아테네에서 시민 교육의 일환으로 나라의 재정적 지원 혹은 부유층의 기부를 토대로 정기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시민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플라톤이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앞에서 우리가 수차 언급하였듯이 그와 같은 연극이나 시가의 내용을 짓거나 유포하는 당대 시인들과 지식인들의 사고방식과 행태였다. 플라톤의 눈에 그들의 행태는 위기에 빠진 아테네를 구제하기는커녕 더 위기를 가중시키는 것으로 철저하게 비판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플라톤이 정의로운 나라를 확립하는 일환으로 젊은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에 왜 그토록 많은 논의를 할애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왜 그토록 단호하고도 엄격한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무려나 플라톤의 예술관은 비록 수호자 교육이라는 특수한 목적 하에 제시된 것이라 할지라도 현대 오늘날의 개인주의적 예술관에 비추어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일양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어 있다. 특히 한 개인이 갖는 적합성을 아무리 그 나름의 소질이나 적성과 연관 지운다 해도 평생을 통해 다양한 예술적 경험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까지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납득하기가 힘들다. 에를 들어, 오늘날 아무리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관생도일지라도 음악적 감수성은 각기 다를 수 있고 오히려 그와 같은 다양한 경험들이 훗날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과 예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플라톤의 인식 자체만은 오늘날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플라톤은 비록 진리 인식과 관련하여 감각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의 심급을 낮게 본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예술 자체의 중요성까지 낮게 본 것은 아니다. 플라톤의 예술관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다만 기본적으로 최소한 현대의 자유주의적 예술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특히 플라톤의 예술관이 내세우고 있는 예술과 인격 내지 도덕의 결합 그리고 나아가 정치적 현실과 현실의 결합은 분명 그의 예술관이 갖는 특징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예술을 정치적 현실과 연관시키는 관점 자체를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이 저질렀던 오류, 즉 예술을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시켰던 피폐한 경험들을 토대로 무조건 부정하거나 혐오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실제로 오늘날 예술과 정치적 현실의 관계를 중시하는 모더니즘적 예술관이나 순수 예술지상주의는 비록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 현대 예술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의미 있는 경향들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자유주의 예술관 역시 현대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하나의 경향일 뿐 새로운 정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고 비판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철학적 균형 감각과 비판 정신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입장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당대 아테네의 피폐한 현실을 주도하고 있었던 개인주의적 예술관에 대한 플라톤 나름의 비판적 균형 감각의 소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플라톤이 주목하고 있는 예술과 도덕, 예술과 정치의 문제는 예술 또한 본질적으로 인간 삶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한, 결코 사라지거나 무시할 수 없는 부동의 주제로 예술사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고 그 때마다 플라톤의 관점은 매우 의미 있는 토론의 토대와 출발점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402a-402d]

* 그리고 플라톤은 이것을 마치 글자들γράμμα을 충분히 읽을 줄 알게 될 때까지의 경우에 비유한다. 즉 소수의 요소 문자들τὰ στοιχεῖα이 그것이 결합된 단어들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περιφερόμενα 경우 그것이 작게 쓰이건 크게 쓰이건 간에 상관없이 그것들 모두를 주목해가면서ἠτιμάζομεν 열심히 식별αἰσθάνεσθαι할 때 충분히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402a) 글자들을 알기 전에는 글자들의 모상εἰκών이 물속이나 거울에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므로 글자를 익히는 기술τέχνη과 훈련μελέτη은 글자들의 모상을 익히는 기술이나 훈련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402b) 우리가 수호자로 길러내려는 사람들, 즉 시가에 밝은 사람이 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절제σωφροσύνη, 용기ἀνδρεία, 자유로움ἐλευθεριότης, 고매함μεγαλοπρέπεια의 부류들εἴδη, 그리고 그것들과 반대되는 것들ἐναντία 모두가 시가 속 여기저기서 옮겨가며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뭔가 그것들 안에 그것들 자체αὐτὰ와 그것들의 상들εἰκόνας αὐτῶν이 들어가 있음ἐνόντα을 깨닫고αἰσθανώμεθα 그것들이 작은 것에 있건 큰 것에 있건 무시하지 않고 식별하는 훈련을 반복하다보면 그것들 모두가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것을 믿게 되면서 비로소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οὶ이 된다는 것이다.(402c)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은 글과 글자 그리고 글자의 모상의 예를 사람의 혼에도 연결시킨다. 즉 사람의 혼(시가) 속에 훌륭한 성품ἦθος(어떤 글자)이 있고 그것과 합치하고 조화되는 것들이 외모(글자의 모상)에도ἐν τῷ εἴδει 있게 된다면, 그리고 이것들이 같은 원형τύπος(글자 자체)에 관여하고μετέχοντα 있다면 이는 이 ‘원형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τῷ δυναμένῳ θεᾶσθαι 가장 아름다움 광경θέαμα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것ἐρασμιώτατον이라고 말하고 이런 사람들을 시가에 밝은 사람이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402d)

 

—————————-

 

* 플라톤이 이곳에서 설명하고 있는 글자를 익히는 과정은 우리가 처음 글을 터득할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서는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문자를 터득하고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간결하게 언급된 이 부분의 내용을 좀 풀어 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우선 글들을 반복해 보면서 글이나 단어들이 몇 개의 한정된 요소 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반복해서 그러한 글이나 단어들을 보거나 또 사람들이 그 글들을 어떻게 읽는가를 반복해서 접하면서 그 요소 글자들의 종류와 음가를 어렴풋이나마 식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을 오랜 시간 반복해서 경험하며 글자를 식별하는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어떤 글이나 글자가 물속이나 거울에 흐릿하게 또는 굴절되어 나타나더라도 그 요소 글자들의 종류와 음가가 각각 무엇이고 어떻게 발음이 되는지 분명하게 식별할 줄 알게 되고 종국에는 그것을 토대로 글을 읽을 줄 알고 글의 내용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 글자의 모상을 익히는 것에서 글자를 아는 것에 이르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앞에서 예술적 감수성이 훗날 지적 감수성의 토대가 된다는 언급의 연장선상에서 지성 교육의 전단계로서 감성 교육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플라톤이 끌어들이고 있는 비유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흥미롭게도 인간의 인식 능력의 발전과 관련한 인지심리학 내지 인식론적 흥미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플라톤의 인식론과 관련한 몇 가지 토론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이곳에서 글자를 알게 되는 과정에 관한 플라톤의 언급을 근대 인식론적 용어로 풀어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즉 감각(글자에 대한 최초의 지각)은 모상 수준의 것을 지각하는데 불과하지만 그러한 개별적인 지각 과정에서 현상에 대해 비슷한 지각, 즉 비슷한 감각적 경험이 여러 번 반복해서 생기다 보면 일정한 경험적 관념이 형성되고(글이 요소 문자로 이루어졌음을 아는 단계) 그러한 경험적 관념은 다시 비슷한 현상을 접하면서 주어진 감각 소여(所與)에 더해져 그러한 현상에 대한 보다 더 선명한 경험적 관념을 형성하는데 기여한다.(요소 문자의 종류와 음가를 어느 정도 식별하고 익히는 단계) 그리고 다시 또 이와 같은 경험이 반복되면서 경험적 관념들과 새로운 감각 소여들 간의 상호 작용이 상승 반복하면, 비슷한 관념들은 모종의 동일한 현상으로 추상화되고 마침내 일반적인 경험적 관념들, 즉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개념지가 생겨나게 된다.(요소 문자의 종류와 음가를 식별할 줄 아는 단계) 그리하여 반복된 경험과 훈련을 통해 획득한 이러한 개념지를 토대로 비로소 물이나 거울 속 등에 그것들의 상이 보일 경우 그것이 어떤 글자인지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된다.(글자의 종류와 음가를 충분히 식별할 줄 아는 단계) 그리고 종국에는 이것을 토대로 글을 충분히 읽고 쓰는 것은 물론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인식론에서 경험지의 성립과 관련하여 흄(D. Hume)이 언급한 관념연합의 법칙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 추상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반복적인 경험 때문이 아니라 선천적인 오성 능력에 있다고 가정하면 경험지를 감성과 오성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칸트(I. Kant)를 연상케도 한다. 다만 여기서의 플라톤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글자는 그에 대한 내용적 인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불가지의 물자체가 아닌 주관 바깥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실물 글자인데다 비유의 내용 역시 그 실물의 글자를 식별하여 개념지로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글자에 대한 앎은 칸트의 구성설적 개념지와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할 것이다. 플라톤의 앎은 구성지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모상에 대한 모사지로 시작하여 점차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하여 형상으로서의 완전한 참 그 자체를 알아볼 수 있는 직관지이다.

* 그런데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 글자와 관련된 존재론적 층위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와 용기, 자유로움 등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개념들의 층위와 상호 맞물려지면서 이곳의 내용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모종의 연관성을 갖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즉 글자의 비유402a-b)(A)와 이어지는 덕들에 관한 언급(402c)(B)은 각기 글자와 덕들을 깨닫는 과정이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말에 비추어 볼 때, 내용적으로 서로 상응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상응 관계가 분명치 않은 까닭에 이 내용을 이데아론과 결부시키는 데 많은 논란과 문제점을 노정시키고 있다. 우선 덕들에 관한 언급(B)에서는 덕의 부류들과 그것들 자체, 그리고 그것들의 상이라는 말도 나오고 이어서(402d) 그에 상응하여 혼 안의 성품들과 외모 그리고 그것들이 관여하는 원형이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존재론적인 층위로 구분해 보면, 다분히 실물과 모상, 그리고 이것들에 관여 내지 분유되어 있는 형상으로 이해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즉 이 부분을 이데아론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글자 비유 부분(A)을 보면 여기(B)에서 언급되고 있는 만큼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굳이 A와 B 두 부분에서 존재론적 층위에 맞추어 같은 층위에 해당하는 개념들을 대응시켜 보면, 실제 쓰고 읽는 글자는 실물에, 물속이나 거울에 비친 그 실물 글자의 상은 모상에, 그리고 글자(요소 문자) 자체는 형상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A에는 원형 내지 형상을 가리키는 ‘자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내용적으로도 형상으로서 글자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B에서는 존재론적 층위에 있어 이데아론에서 다루어지는 개념들이 다소 명시적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B부분을 이데아론을 기초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즉 시가와 현실 여기저기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거나 경험되는 덕들은 그것과 반대되는 것들과 함께 거론된다는 점에서 덕들의 구체적인 양상들, 즉 덕의 모상들이고, 그렇게 반복되는 상들에서 추상된 일반적 덕목들은 개념지로서 덕목들이며, 그것들 자체는 일반적인 덕목들 배후에 있는 본질이자 형상으로서의 덕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이어지는 언급에서 나타나는 외모와 성품, 그리고 원형과도 큰 어려움 없이 짝처럼 서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즉 외모는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무규정적 성격의 모상이고, 영혼의 성품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모상의 운동성과 원형의 존재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즉 자기동일성을 가진 것이며, 원형은 그것에 관여되어 있지만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형상으로서의 자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는 플라톤이 이데아를 설명할 때 많이 쓰고 있는 관여metexis라는 말까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B부분에서도 ‘덕들 부류’라는 표현에서 ‘부류들’eidē이 가리키는 것이 형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인지 일반적인 ‘개념적 차원에서의 덕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원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것들 자체와 그것들의 상들이 들어 있는 것’이 그 ‘부류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해석이 갈리기 때문이다.(E. Zeller, 박종현 등은 부류들이 형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아예 부류라는 말을 형상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지만 그에 이견을 갖는 사람들(J. Adam 등)도 많다. 이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선 이데아론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제7권에 들어가기 한참 전인 이 부분에서 전후 맥락상 아무 시사도 없이 그 중대한 이데아론을 꺼내놓는다는 것이 뜬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러한 주장은 이곳에서 말하는 ‘글자에 대한 앎과 글자의 상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절제 등 그런 부류들에 들어 있는 그것들 자체와 그것들의 상을 깨닫는 것’이 모두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언급(402b, 402c)과 내용적으로 상호 모순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체’라는 말을 이데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플라톤의 그 말은 플라톤 자신 어떤 대상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 다름 아닌 그 대상의 상에 대한 반복적인 식별 훈련 내지 경험을 통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플라톤의 주장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란 감각적 지각의 반복적 경험과 수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야말로 순수한 지성적 직관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지성 교육의 전단계로서 감성 교육이 갖는 중요성과 그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는 문맥으로만 이해해야 하며, ‘자체’라는 말도 그 연장선상에서 모상에 대비되는 실물의 의미 그 이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야 또 B부분의 내용과 A부분의 내용이 플라톤의 의도대로 서로 모순 없이 서로 동일한 내용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들 말대로 감각적 지각의 반복적 수련과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 비록 의미상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긴 할지라도, 인간의 인식 과정에서 하물며 플라톤에게서 조차 과연 그것들이 전혀 별개의 단계로 서로 단절되어 있는지는 그들 입장의 타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마치 물을 끓이면 어느 순간 액체 상태가 기체로 변하듯이 그 상태 자체는 별개의 것으로 규정될 수는 있지만 그러한 현상이 드러나는 이행과정 자체는 하나의 연속을 이루고 있다. 이데아에 대한 인식 능력 역시 어느 순간 전후맥락 없이 별안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선승이 피나게 힘든 고행 끝에 어느 순간 깨달음에 이르듯이 끊임없는 경험적 지식의 축적과 피나는 사유와 성찰 그 마지막 단계에서 비로소 획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자의 비유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덕의 식별과 관련한 언급들을 같은 선상에서 풀어서 비교하자면, 절제, 용기, 자유로움, 고매함 등은 소수의 글자들(알파벳) 같은 부류들이고 시가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은 그것들의 모상이고 시가는 글(단어 혹은 센텐스)에 해당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글자에 대한 앎은 점차 글로 이루어진 시가를 읽는 능력으로 발전하고, 시가를 읽으면서 내용에서 획득되는 개별 덕들에 대한 앎은 종국적으로 시가가 담고 있는 총체적인 세계관에 대한 깨달음으로 발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글자의 모상을 익히는 것은 실물 글자에 대한 앎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시가를 익히는 기초가 되면서 종국적으로 시가의 본질에 대한 앎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부류-자체 그리고 외모-성품-원형 등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 것 역시 감성 교육 단계에 이어 앞으로 수행될 과학교육, 그리고 궁극적으로 요구되는 철학교육의 단계 및 그것들에 상응하는 교육 대상들을 함축하기 위해 끌어들인 구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앎의 단계는 나중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도 비슷한 구조를 드러내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논의된다. 모상을 아는 것이건 원형을 아는 것이건 모두가 동일한 전문 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말은 아마도 참된 지식의 체득과 관련한 이러한 과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이 부분이 이데아론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에 동의한다.

* 아무려나 모상에 대한 지각과 원형 자체에 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임에도 플라톤 자신이 그것들을 동일한 전문지식과 기술적 수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이론적인 영역에서건 실천적인 영역에서건 그의 철학 내지 철학함이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야말로 절제, 용기, 자유로움, 고매함의 부류들, 그리고 그것들과 반대되는 것들 모두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글자를 익힘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작은 것에 있건 큰 것에 있건 무시하지 않고 식별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논의 전개과정에서 점차 드러나겠지만 그가 설계한 교육의 단계와 그것들이 총체적 통일성을 함께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교육의 단계를 감성 교육의 단계, 과학 교육의 단계, 철학 교육의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비록 감성 교육에 대한 과학 교육, 지성 교육의 우위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과학 교육이나 철학 교육 모두 감성 교육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식별을 위한 반복적인 수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οὶ이란 단순히 선천적으로 지성적 소질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더해 크건 작건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기술적 수련을 반복하면서 공력을 쌓아가는 사람, 그렇게 해서 그야말로 자신의 삶 자체를 최상의 예술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402d-403c]

* 이에 글라우콘은 어떤 사람이 영혼에서 어떤 결함이 있다면ἐλλείποι 그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결함이 신체적인 것τι κατὰ τὸ σῶμα이라면 그는 참고서ὑπομείνειεν 기꺼이 반기려 할 것이라고 말한다.(402d) 그러자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듣고 글라우콘에게 신체에 결함이 있는 소년 애인παιδικὰ이 있거나 있었던 것이라고 지레 짚어 말한 후 그의 말에 동감을 표하면서 절제σωφροσύνῃ와 과도한 쾌락ἡδονῇ ὑπερβαλλούσῃ 사이에 공통점κοινωνία이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글라우콘은 쾌락이 고통λύπη 못지않게 사람을 얼빠지게ἔκφρων 만드는 것인데 무슨 말씀이시냐고 반문한다.(402e) 이에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쾌락과 그 밖의 덕ἀρετῇ들은 전혀 공통점이 없지만 오만함ὕβρις과 무절제(방종)ἀκολασία와는 아주 잘 어울리며 성적인 쾌락ἡδονὴν τῆς περὶ τὰ ἀφροδίσια보다 더 크고 짜릿하고ὀξύς 광적μανικός인 쾌락은 따로 없음을 서로 확인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사랑ὁ ὀρθὸς ἔρως이란 시가를 알고 절제를 갖춘 사람답게 단정하고κόσμιος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인 한, 올바른 사랑을 그 어떤 광적이거나 무절제 같은 것에다 갖다 붙여선 안 된다고 말한다.(403a)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ἐραστής와 소년 애인παιδικὰ이 서로 올바르게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면 결코 그런 쾌락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지금 수립되고 있는 나라에서는 아래와 같이 입법해야νομοθετέω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소년을 사랑하는 자가 소년 애인을 설득할 때는ἐὰν πείθῃ 마치 자식을 대하듯 선의χάρις로 사랑하고φιλεῖν 같이 지내며συνεῖναι 어루만져야ἅπτεσθαι 하며 그밖에 다른 일로도 그 이상의 관계로 보이지 않는 선에서 상대와 사귀어야 한다ὁμιλεῖν.(403b) 그리고 이를 어길 경우 시가에 무지하고ἀμουσία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ἀπειροκαλία으로 비난ψόγος을 받게 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 관한 논의ὁ περὶ μουσικῆς λόγος가 끝맺어야 할 곳에서 끝맺음을 본 것 같다고 말하고 아마도 ‘시가의 문제’τὰ μουσικὰ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문제’τὰ τοῦ καλοῦ ἐρωτικά로 끝나야만 할 것 같다는 말로 376e부터 시작된 시가 교육에 관한 긴 논의를 모두 마무리 한다.(403c)

—————————-

 

* 플라톤이 영혼 속에 있는 성품과 외모 그리고 원형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들이 원형에 관여하고 있다면 원형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이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고 시가에 밝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자 글라우콘은 자기는 신체적 결함이 있더라도 영혼이 온전하면 참고 사랑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외모가 떨어지는 소년과 소년애 관계에 있음을 내비친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을 시가에 밝은 사람이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를 의식해서 지레 변명하듯 나온 고백일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지금 수립되고 있는 나라에서 소년애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내용을 입법해야한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당시 육체적 관계를 당연시 했던 소년애에 대해 극히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즉, 플라톤에게 올바른 소년애란 육체적인 쾌락과 무관한 것이며 마치 자식을 대하듯 선의로 사랑하고 같이 지내며 어루만져야 하며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향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구애를 철저히 물리치면서 오직 철학적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실제로 <향연>에서 플라톤은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지혜를 향한 에로스의 치열한 여정을 아주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는데(205e-212a) 특히 마지막 단계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알게 되는 과정은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마치 불가의 수도승이 교(敎)와 선(禪)을 아우르며 치열하고도 고뇌에 찬 구도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는 것과 같은 극적 희열과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듯이 시가의 문제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문제이고 그러한 사랑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문제, 즉 철학의 문제는 ‘지혜에 대한 사랑’의 문제인 것이다.

* 한편 사람들은 종종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의 의미를 이와 같은 소년애에서 육체적인 관계를 부정하는 태도를 일컫는 것으로 잘못 한정하여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토닉 러브’는 육체적 관계 자체를 부정하느냐 않느냐에 상관없이 다만 사랑은 어떤 형태의 사랑이건 간에 ‘지혜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플라토닉 러브는 앞서 ‘지혜를 열망하는 에로스’ 즉 철학인 것이다. 지혜를 열망하는 에로스는 진정으로 그것을 열망하는 한, 육체적 쾌락조차 절제의 덕과 조화를 이루면서 지혜를 고양하는 동력의 하나로 승화된다.

* 이로써 제법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전개되었던 시가 교육에 관한 논의가 시가 교육의 목적과 관련한 논의를 끝으로 모두 마무리 되고 이어서 체육 교육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시작된다.

 

<참고> 이 글은 3월 19일 새벽에 처음 올린 글의 일부를 고쳐 3월 19일 밤에 다시 올린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㊴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계속)

 

[397b-398b]

* 소크라테스는 이야기 방식λέξις과 관련하여 우선 서술 방식διήγησις을 기초로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 방식으로 구분하여 논의한 후, 이제 그에 이어 그 이야기 방식을 화음(선법)ἁρμονία과 장단(리듬)ῥυθμός을 기초로 논하고자 한다. 그런데 서술방식과 마찬가지로 이야기 방식을 구성하는 선법과 리듬 또한 변화들이 작고 한 가지로 이루어지는 경우와(397b) 온갖 형태의 변화를 갖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야기 방식은 서술 방식에 의해서도 두 가지로 구분되었지만 선법과 리듬에 의거해서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래서 모든 시인은 앞서 말한 두 유형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 중 전자나 후자 또는 양쪽을 혼합한συγκεραννύντες 어떤 것을 만나게 될 텐데,(397c) 이 나라에서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ἐπιεικής ἄκρατος들이 받아들여야 할 것은 전자의 방식이지만 아이들과 이들의 교육을 돌보는 가복들 그리고 대다수 군중ὄχλος들은 반대로 후자나 혼합형이 월등하게 제일 즐거운 것이어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397d)그러나 이 나라에는 제화공이든 농부든 전사든 각자가 한 가지 일을 하는ἕκαστος ἓν πράττει 사람들만 있으므로, 다시 말해 양면적인 사람διπλοῦς ἀνὴρ이나 다방면적인 사람πολλαπλοῦς ἀνὴρ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유형은 우리의 정체πολιτεί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7e) 그리고 만일 온갖 것이 다 될 수 있고 또 온갖 것을 다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기도 하지만 생기는 것이 합당하지도 않으므로 거룩하고 놀랍고 재미있는 ἱερὸν καὶ θαυμαστὸν καὶ ἡδύν 분이라 추켜세워 준 뒤 다른 나라로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이 나라에서는 우리의 이로움을 위해 한결 딱딱하고αὐστηροτέρός 덜 재미있는ἀηδής 시인과 설화 구술가μυθόλογος가 채용될 것이며(398a) 그들은 우리한테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을 모방해 보여주고 이야기도 군인 교육에 착수했을 때 법제화했던 규범τύπος에 의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서 이야기λόγος 및 설화μῦθος와 관련된 부분에 대한 논의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고 말한 후 이제 남은 것은 노래ᾠδή와 선율(서정시가)μέλη의 양식τρόπος과 관련된 부분이라고 말한다.(398b)

 

—————–

 

* 이야기 방식(말투)leksis과 서술 방식(이야기의 진행)diēgēsis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논의의 편의상 그 말들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야기 방식은 앞서 다루었듯이 어떤 서술방식을 따르는가에 따라 규정되기도 하고 앞으로 다루어지듯이 어떤 선법과 리듬에 따르는지에 따라 규정되기도 한다. 요컨대 이야기 방식은 가사와 노래로 구성된 시가를 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서술방식은 앞서 말한 대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시가를 구성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데 노랫말 즉 시가 가사의 표현 방식으로서 ‘단순 서술방식’과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다시 그 가운데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은 ‘한 가지만 모방하는 서술방식’과 ‘온갖 것을 모방하는 서술방식’으로 구분된다. 이에 따라 이전 강해에서 살폈듯 이야기 방식이 서술방식을 기준으로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각기 구분되고 있다. 즉 1)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 : 서술방식 중 최대한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은 지양하되 모방을 할 경우라도 훌륭한 사람이나 훌륭한 것 한 가지만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 2) 훌륭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 : 단순 서술방식은 지양하고 대부분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을 택하되 그것도 온갖 것을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

* 그리고 이제 서술방식에 기초한 앞선 논의에 이어 선법과 리듬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이 논의된다. 앞서도 말했듯이 시가는 노래 내지 음송의 형식을 갖고 있으므로 가사와 관련된 서술방식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그것에 붙여지는 선법과 리듬에 대한 논의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리듬과 선법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들을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이 견지해야 할 기본 원칙을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다시 한번 재확인하고 있다. 즉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은 온갖 것을 모방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혼합형의 이야기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politeia에 어울리는 사람은 각자가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는 이러저러한 일을 가리지 않고 모방하는 양면적이거나 다방면적인 사람은 발견되지 않고 제화공은 제화공으로, 농부는 농부로, 전사는 전사로 발견될 뿐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다른 나라로 추방되어야 한다. 오히려 한결 딱딱하고 덜 재미있는 설화작가가 우리에게 더 이로움을 주므로 처음에 법제화했던 규범에 의거 이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채용해야 한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과정의 일환으로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논의를 하면서도 시가 교육을 통해 양성될 수호자가 다스리는 나라 즉 정의로운 나라의 정체가 지향해야 할 기본 원칙의 일단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소질과 적성에 기초한 한 사람 한 가지 일 즉 일인일기의 전문가주의와 그러한 전문가주의에 기초한 분업주의이다. 물론 이러한 기본 원칙은 아직 보다 일반적인 형태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제2권의 서론적 논의(370b-c)에서도 그랬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앞으로 다루어질 이상국가의 기본 틀과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국가> 내내 간단없이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 있어서 이야기 및 설화와 관련된 논의를 완전히 마무리했다고 말하고 바로 이어 노래와 선율의 방식에 대한 논의를 개시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는 이야기 방식에 관한 논의이되, 시가의 노랫말에 관한 논의 즉 이야기 내용과 그것의 서술방식에 기초한 논의이고 지금부터 개시되는 논의는 이야기 방식에 관한 논의이되, 가사에 붙여지는 음악적 요소들과 관련한 논의이다.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1-2-1-2-2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398c-399e]

* 소크라테스는 노래와 선율의 양식과 관련된 논의를 시작하면서 이에 관한 논의 또한 앞서 말한 것과 일치를 보려고 하는 한, 우리가 해야 할 말들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찾아냈다고 말을 한다. 글라우콘은 그 ‘모두’에서 자신은 제외되는 것 같다고 겸손해하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도 능히 말할 수 있을 게 분명하다고 말한다.(398c)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바로 뒤에서(398e) 글라우콘이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ός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노래μέλος는 세 가지 즉 노랫말λόγος과 화음(선법)ἁρμονία, 그리고 장단(리듬)ῥυθμός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398d)

* 소크라테스는 우선 노랫말이란 곡이 붙지 않은μὴ ᾀδομένος 말과 다를 것이 없고 화음(선법)과 장단(리듬)은 이 노랫말을 따라야 함을 밝힌 후 바로 글라우콘과 선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398e) 여기서 소개되는 화음의 종류와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혼성 뤼디아 화음μιξολυδιστί ἁρμονία과 고음 뤼디아 화음συντονολυδιστὶ ἁρμονία, 2) 이오니아 화음ἰαστί ἁρμονία과 뤼디아 선법λυδιστὶ ἁρμονία, 3) 도리스 선법δωριστὶ ἁρμονία과 프뤼기아 화음φρυγιστί ἁρμονία. 이 중 1)은 비탄조θρηνώδης의 선법으로서 남자는 물론 훌륭해야만 되는δεῖ ἐπιεικεῖς εἶναι 여인들한테도 무용한 화음이고 2)는 유약하고μαλακός 게으름ἀργία과 주연(酒宴)에 맞는συμποτικός 화음으로서 수호자에게 가장 부적절한ἀπρεπέστατον 화음이다. 다만 나머지 3)의 화음만은 훌륭한 사람들의 어조φθόγγος와 억양προσῳδία을 적절하게 모방하게 될 화음으로서 남겨두어야 할 화음으로 제시된다.(399a)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두 가지 상반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대처하는 모습으로 각기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전투 행위나 강제적인 업무βίαιος ἐργασία 등 불가피하게 불운한δυστυχούντων 상황에 처했을 때의 모습과, 그 반대로 운 좋게εὐτυχούντων 평화로운εἰρηνικός 상황에서 자발적인ἑκούσιος 행위를 행할 때의 모습으로 나누어 훌륭한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습들을 각각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의 상황에서 훌륭한 사람이란 부상이나 죽음 등 역경에 처하더라도ἀποτυχόντος 자신의 불운을 꿋꿋하게παρατεταγμένως 참을성 있게καρτερούντως 막아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후자의 상황에서 훌륭한 사람이란 누군가에게 뭔가를 설득하며 요구를 할 때에는 신께는 기도εὐχή로써 하되 사람한테는 가르침διδαχή과 충고νουθέτησις로써 하고 반대로 남이 자신에게 요구를 해오며δεομένον 가르치려거나 변화를 설득하려μεταπείθω 하면 조신하게 귀를 기울이는(자신을 숙이는)ἑαυτὸν ἐπέχοντα 사람, 그래서 지성에 따라 행동하고πράξαντα κατὰ νοῦν 거만하지 않으며μὴ ὑπερήφαν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금도 있게μέτριος 행동하며 결과τὰ ἀποβαίνοντα에 만족하는ἀγαπῶντα 사람이다.(399b-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노래ᾠδή와 선율μέλος에는 많은 현χορδία을 사용할 필요도 없고 모든 선법을 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ὄργανον도 필요 없고 그에 따라 삼각현τρίγωνος이나 펙티스πηκτίς 등 여러 현과 여러 화음(선법)을 이용하는 모든 악기의 연주자ποιός나 제작자를 양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399d) 특히 현이 가장 많은 아울로스αὐλος가 그렇다. 온갖 화음(선법)παναρμόνια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들 자체가 아울로스의 모방물μίμημ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뤼라λύρα와 키타라κιθάρα 그리고 농촌에서 쓰는 쉬링크스(피리)σῦριγξ 정도만 남을 것이며 그런 까닭에 마르쉬아스Μαρσύας와 그의 악기보다 아폴론과 그의 악기를 선호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καινός 것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9e)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앞서 372a에서 호사스럽게τρυφάω 산다고 말했던 나라가 우리도 모르는 새 다시 완전히 정화διακαθαίροντες되었다고 말하고 그 연장선 위에서 나머지 것들인 화음에 이어 장단(리듬)ῥυθμός(rythmos)에 관해 논의하자고 말한다. 장단과 박자βάσις(步格,basis) 역시 선법이 그러했듯이 현란하거나 다양해서는 안 되며(400a) 운율πούς(詩脚,pous)과 선율μέλος(melos) 또한 절도 있고κόσμιος 용감한 사람의 말(노래 말)λόγος을 따라가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리듬에 관해 묻는데 글라우콘은 음정φθόγγος에 네 가지가 있듯 운율에는 3종류가 있지만 어떤 리듬이 어떤 삶을 모방해내는 것인지는 모른다고 답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에 관해 다몬Δάμων에게 상의하겠지만 그에게서 들은 몇 가지 장단 즉 어떤 복합장단σύνθετος(복합적인 시각), 에노플리오스ἐνόπλιος(전쟁조), 닥틸로스δάκτυλος(장단단격), 이암보스ἴαμβος(단장격), 트로카이오스(장단격)τροχαῖος(400c) 등을 소개한 후 남겨야 할 박자(basis)와 장단(rythmos)과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이 좋은 장단εὔρυθμος을 따르고 또 좋은 장단은 아름다운 이야기 방식καλός λέξις을 닮은 것이고, 꼴사나움ἀσχημοσύνη은 그 반대의 것을 따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장단ῥυθμός과 선법(화음)ἁρμονία이 말(노래 말)λόγος을 따르는 한 좋은 화음εὐάρμοστος 또한 아름다운 이야기 방식을 따르고 나쁜 선법은 그 반대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방식은 영혼의 성품ἦθος을 따르고 나머지 것 즉 장단과 선법은 그 이야기 방식을 따른다고 말한다.(400d) 요컨대 좋은 말εὐλογία과 좋은 화음εὐαρμοστία,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 좋은 장단εὐρυθμία은 단순함(좋은 성품, 순진함)εὐηθείᾳ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순함이란 어리석음ἄνοια을 좋게 부르느라 우리가 단순함이라고 부르는 그런 단순함이 아니라, 정말로 좋고 아름다운 성품을 갖춘 생각διάνοια을 말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것을 행하게 되려면 어디서나 이것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400e) 그리고 장단과 선법 등 음악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회화γραφικὴ나 그와 같은 모든 기예δημιουργία 즉 직조ὑφαντική, 자수ποικιλία, 건축οἰκοδομία을 위시하여 다른 살림살이들의 제작은 물론 우리 몸σῶμα의 본성φύσις과 다른 모든 생물φυτόν들의 본성도 이런 것들 즉 우아함, 좋은 성품과 단순함, 그러한 성품을 갖춘 생각들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꼴사나움과 나쁜 장단ἀρρυθμία과 나쁜 화음ἀναρμοστία은 나쁜 말κακολογία과 나쁜 성품κακοηθος의 형제ἀδελφή이고, 그 반대되는 것들은 절제 있고σώφρων 좋은ἀγαθός 성품의 형제이자 모방물μίμημα이라고 말한다.(401a)

 

——————-

 

* 선법과 리듬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을 논하는 이 부분에는 고대 그리스의 음악 용어가 많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 음악과 근현대 음악이 갖는 차이 때문에 그 용어들을 어떻게 오늘날의 음악 용어로 번역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고 그에 따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어들도 차이가 있다. 우리 말 역본들(박종현 역본, 천병의 역본, 학당 초고본)에서도 차이가 있다. 참고로 우리말 역본에서 차이가 나는 주요 역어들을 그리스어 원어와 병기하면 아래와 같다. 강해에서는 편의상 학당 초고본(아직 최종 역어는 아님)을 기준으로 표기했으나 그 역시 아직 최종 역어는 아니다. 약어 : 학초=학당 초고, 박=박종현 역본, 천=천병희 역본. 쪽수 표시는 최초 표기된 곳.

 

ἁρμονία(harmonia) 397b- 선법(박, 천), 화음(학초)

– 학당 초고는 일단 ‘화음’으로 옮겼지만 여기서 harmonia는 우리가 흔히 알 듯 고저를 달리하는 둘 이상의 음정들이 동시에 울리는 경우의 화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음계 즉 고저를 달리하는 음정들의 일정한 계열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선법’이라는 역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ῥυθμός(rythmos) 397b 리듬(박, 천), 장단(학초)

ᾠδή(ōdē) 398c – 노래(박, 천, 학초)

μέλη(melē) 398c – 서정시가(박), 음악(천), 선율(학초),

μέλος(melos) 399e – 노래(박), 멜로디(천), 선율(학초),

βάσις(basis) 399e – 운율(천, 운각(韻脚)400a), 보격(步格)(박, 운율400a), 박자(학초)

πούς(,pous) 400a – 운율(천, basis와 동일하게 번역), 시각(詩脚, 박), 운율(학초),

φθόγγος(phthogos)400a – 소리(학초, 박, 천), 또는 음정(박)

εὔρυθμος(eurythmos) 400d – 좋은 리듬(박, 천), 장단이 맞는 것(학초),

εὐάρμοστος(euharmostos) 400d – 조화로움(박), 좋은 선법(천), 화음이 맞는 것(학초)

 

* 아래는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정암학당 해당 부분 역자 김주일 박사가 초고에 붙여 놓은 임시 각주들이다.

1) 399e 마르쉬아스 : 마르쉬아스는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염소의 형상을 한 사튀로스들 중 하나로서, 아울로스 연주를 잘해서 뤼라를 즐겨 연주하는 아폴론 신과 대결을 벌였다는 신화적 존재이다.

2) 399d 아울로스 : 아울로스는 피리의 일종으로 관악기이기 때문에 사실은 현이 없다. ‘현이 가장 많다’는 것은 여기서 다양한 화음을 연주할 수 있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울로스는 다양한 장치를 사용해 다양한 선율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래서 399c-d에 나오는 ‘현이 많다’란 말도 ‘다양한 화음을 연주할 수 있다’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399e basis(박자, 운각) : 그리스 리듬에서 강음은 장음에 주어지고, 하박(basis, thesis) 역시 장음에 주어진다. 따라서 장음으로 시작하는 운각에서는 시작부분에 강음(ictus)과 하박이 떨어지고, 단음으로 시작하는 운각에서는 나중에 나오는 장음에 강음과 하박이 떨어진다. 문자에 충실해 보면 basis의 다양함이란 이런 강박의 위치의 다양성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기초이론의 이해>를 보면 metre를 박자로 이해한다. 문제는 그리스 시가의 metre가 강약 중심으로 짜인 것이냐의 문제다(역시 같은 책에서 리듬을 장단의 배열로 이해한다). 엮어보면 박자는 기본적으로 첫 박의 장음에 강세가 가는 방식으로 짜인다. 리듬은 장음과 단음의 배열이다. 박자는 배경으로 규칙적으로 깔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리듬은 장단음을 기본 요소로 짜인다. 그런데 그리스 음악은 기본이 시가이기 때문에, 자연적 장단음을 가진 말로 짜인다. 따라서 기본 metre에 따라 박자는 정해져 있고, 리듬도 이것과 기본적으로 겹치는 체제이다. 그런데 이것을 인위적으로 쪼개거나 늘리는 것을 플라톤이 배제하는 것이 아닐까?

4) 399e-400a 리듬(박자) : 고대 그리스 음악의 리듬(rhythmos)은 시가의 운율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리듬(rhythmos)은 시가 운율의 장단음 배열을 기본적으로 따른다. 한편 시가 운율의 기본 단위는 장음과 단음의 혼합으로 이루어지는 운각(pous)으로서, 이것들이 모여 운율(metron)이 되며, 시가의 한 행은 한 운율이 된다. 다른 한편 하나의 마디에 들어가는 하나의 운각(운각을 박자와 같은 의미로 볼 때, 서양음악에서는 한 마디에 여러 박자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지만, 고대그리스 음악에서는 기본적으로 한 박자를 한 마디로 잡는다)을 상박(upbeat)과 하박(downbeat)로 나누고 상박을 ‘arsis’라 부르고 하박을 ‘basis’ 또는 ‘thesis’로 불렀다. 상박은 단음 또는 단음들이고 하박은 장음이다.(Adam은 Westphal을 따라 두 개의 운각과 하나의 강음-ictus-이 하나의 basis를 이룬다고 보았다.) 따라서 박자(basis)는 원래 하박을 부르는 명칭이고 운각(pous)은 장단음이 결합 된 것으로, 운율의 기본 단위이지만 현재 맥락에서는 리듬과 큰 의미 차이 없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Ancient Greek Music(M.L.West, 1992), p.129~137 참고. 이런 취지에서 rhythmos, basis, pous를 뉘앙스는 살리고 정확성은 좀 약화하여 장단, 박자, 운율로 하고자 한다. 뉘앙스를 구별한다면 장단의 기본 단위는 운율(pous)이고, 이 운율은 박자(basis)에 의해 이분 되는데, 특히 basis는 강음을 포함하여 장단에 입체감을 주며, 장단은 운율들이 모여 변형을 이루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5) 400a, 화음(선법)을 구성하는 4가지 : 화음을 구성하는 네 가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기본적인 음정의 비율(2:1, 3:2, 4:3, 9:8)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Adam 주석 참고). 박자를 구성하는 세 가지는 운각(pous)을 이루는 장음과 단음의 비율이 구성되는 방식으로 닥튈로스(장-단-단)나 스폰데이오스(장-장)처럼 장음과 단음의 비율이 2:2가 되는 경우, 이암보스(단-장)나 트로카이오스(장-단)처럼 2:1인 경우, 크레티코스(장-단-장)처럼 3:2인 경우가 있다.

6) ‘그런데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는 다몬이 어떤 복합장단을 행진에 맞는(에노폴리온) 장단이며 닥튈로스라고, 심지어는 영웅적 장단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을 들은 것으로 생각하네’oimai de me akēkoenai ou saphōs enoplion te tina onomazontos autouῦ syntheton kai daktylon kai ērōon ge, .. 400b : 이 부분도 구문에 대한 이해에 따라 번역이 갈린다. 우선 남성 4격의 tina에 생략된 명사가 리듬rhythmos이나 아니면 운각metron이냐의 여부에 따라 syntheton의 번역이 갈린다. 일부(Griffith, Leroux, Shorey)는 생략된 명사를 중성임에도 metron으로 보거나 운율pous로 보고 있다. 아마도 이 맥락을 시가적이라고 본 듯하다. 그런데 리듬의 문제가 시가와 음악을 구분 짓기 애매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음악의 맥락에 더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리듬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그래서 syntheton을 ‘복합장단’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와 연동하여 tina를 syntheton에 거는 쪽(Waterfield)과 enoplion에 거는 쪽(Leroux, Sachs) 그리고 어느 쪽에도 걸지 않고, tina에 대한 이름으로 나머지 네 개를 보는 쪽(Shorey)이 있다. 또한 enoplion과 syntheton을 어떻게든 묶고, 나머지는 뒤의 분사구문의 목적어로 보는 방식(천, 박)도 있고, 이들을 묶고 tina에 대한 세 이름으로 보는 방식(Adam)도 있다. 문법적으로는 te tina에서 te를 enoplion에 붙는 te로 볼지, 그냥 te, ..kai로 볼지 양쪽으로 갈리는 듯하다. 전자는 어순이 자연스럽고 후자는 뜻에 더 맞아 보인다. 행진풍의 리듬을 복합적이라고 하기에는 복합적이라는 말이 더 넓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복합장단은 운율(pous)이 장단음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영웅적이고 닥튈로스라고 한 것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가 닥튈로스 운각의 6각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닥튈로스나 스폰데이오스가 ‘장-단-단’ 또는 ‘장-장’으로서 두 개의 장음 또는 한 개의 장음과 두 개의 단음으로 구성된다면, 이암보스는 ‘단-장’, 트로카이오스는 ‘장-단’으로 장음 하나와 단음 하나로 구성되며, 앞의 것들이 위아래(arsis-basis)가 균등한데 반해 이것들은 불균등하다.

 

————————

 

* 위 같은 내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추가 설명과 철학적으로 음미해볼 사안을 덧붙이면 아래와 같다.

 

1) 시가에 붙는 화음과 장단(선법과 리듬)에 관한 논의에서 소크라테스가 강조하는 것들은 앞서 시가 가사(말)의 서술방식과 관련한 논의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들과 내용에서 크게 차이가 없다. 즉 그것들은 장차 용감하고 훌륭한 수호자가 되어야 할 젊은이들에게 적합해야 한다. 우선 시가에서 신들과 영웅들의 훌륭한 말과 행동을 모방하여 절제 있고 절도 있게 말하고 행동하려면 훌륭한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에 밝아야 하듯이 시가에 붙는 선법과 리듬은 반드시 그러한 시가의 내용 즉 노랫말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시가를 서술함에 우아한 것이건 추한 것이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온갖 것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서술하는 시인들이나 배우들과 달리 화음과 리듬을 구사하는데도 비탄과 한탄, 술취함과 유약함, 게으름 따위를 부추기는, 그래서 군중들이나 좋아하는 이러저러한 화음을 배제하고 절제 있고 절도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화음을 선호해야 한다. 이를테면 도리스 화음이나 프뤼기아 화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에 따라 수호자를 위한 음악 교육에서 악기 또한 여러 현과 넓은 음역을 갖는 악기, 이를테면 아울로스 같은 악기는 제외되어야 하고 뤼라와 키타라 같은 악기 정도만 남겨두어야 한다. 장단과 박자, 운율과 선율 또한 마찬가지이다. 복잡 미묘하고 현란한 장단과 박자는 수호자가 지향할 우아함과 거리가 멀다.

2) 다양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와 같은 음악 교육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그야말로 터무니가 없을 정도로 경직되어 있고 일양적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 학교에서건 가정에서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정에서는 분야에 상관없이 나름의 일정한 교육 목표와 기준이 요구되어왔고 오늘날 보편화 된 대중문화를 생산 유포하는 방송 및 언론 기관에서조차 일정한 기준 아래 심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목표와 기준이 가지는 내용의 적합성과 그것을 결정하는 합리적 정당성이다. 플라톤의 주장은 오늘날 민주사회가 지향하는 합리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적합성과 관련해서는 일정 부분 귀담아서 들어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플라톤은 적합성의 기준을 다수의 결정에서 찾지 않고 소질과 적성이 다양한 사회 구성원 각각의 본성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본성만큼 적합성의 내용 또한 다양하다. 여기서는 나라의 수호자로서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적합한 절도와 절제가 강조되고 있고 그에 어울리는 음악 교육이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내용 자체만 들여다보면 누가 보더라도 경직되고 단순하며 일양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수호자 즉 훌륭한 군인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과정에서 채택된 것임을 고려하면 나름의 적합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기 힘들다. 단순하고 일양적이기는 하지만 내용 면에서 교육 대상과 교육 목표에 적합한 것일 수 있다. 오늘날에도 행진곡, 장송곡 등 경우와 상황, 대상에 따라 어울리는 음악이 따로 있다. 여기서도 그 적합성은 모든 경우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적합성은 수호자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수호자에게 요구되는 것이지 결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적합한 것으로 일양적으로 요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사회 구성원들은 각자 소질과 적성이 다르고 그에 따른 본성과 욕망 또한 다르고 그에 따른 그들의 일과 직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307d에서 보듯이 대다수 군중은 그와 반대되는 유형에 어울리고 오히려 그러한 유형이 그들을 월등하게 즐겁게 해 준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적합성과 관련하여 일관된 원칙이 있다면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 각자의 본성과 욕망에 어울리는 적합성을 찾아 주는 것이다. 그들 각각에 적합한 것이 고유하다면 그들 각각은 일양적이지만 그 각각의 차이만큼 각각에게 어울리는 고유한 적합성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곳에서의 음악적 리듬의 일양성도 다만 늘 냉철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수호자를 위한 음악 교육과정에서는 그와 같은 특정의 리듬이 가장 어울리고 그들의 수호자다운 성품의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내세우는 특정 성향의 타당성을 일단 논외로 한다면 일반적인 관점에서 플라톤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선법과 리듬 등 제반 음악적 요소들은 매우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차이가 다양한 만큼 인간의 인격 내지 성품 형성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다양하다. 그리고 그 차이는 리듬과 박자가 그러하듯 일정하고도 객관적인 규칙성과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과정에서 그러한 음악적 요소들의 내적 연관성은 적합성 차원에서 반드시 분석되고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그런데 위와 같은 음악 관련 논의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음악적 일양성과 경직성이 과연 현대사회의 다양성과 얼마나 대치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이른바 자유주의 사회로 표징되는 현대사회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다룬 음악 분야는 물론이고 그 밖의 모든 분야에서 과연 인간 욕망의 다양성이 담보되고 있는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그들 각각의 소질과 적성, 성격과 성향에 상관없이 대체로 돈과 재물에 대한 욕망으로 획일화되어 있고 그에 따라 재화 획득 능력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생존 능력과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보면 무한경쟁의 이름으로 그런 능력의 고양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야말로 오히려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 각자에게 부합하는 고유한 적합성과는 무관하게 일양적이고도 획일화된 기준을 구조적으로 강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대중들의 음악적 관심사만 보더라도 그것은 하나같이 재물 획득의 효율성을 노리는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그 다양성은 개인들의 주체적 욕망을 반영하기보다는 자본에 의해 기획된 구매 욕구의 반영으로서 상품화된 다양성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것은 자본의 지속적인 확대 재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서 유행과 개성이라는 미명으로 개인들의 소비 욕망을 부추겨 자연적·사회적 자원을 끊임없이 소모하고 있다. 자본에 의해 수단화되고 상품 가치로 획일화된 이러한 개인의 욕망을 각자의 소질과 적성에 따른 다종다양한 본래의 욕망으로 되돌리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에 찌든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중대하고도 심각한 과제의 하나라면, 인간의 다양한 자연적 소질과 적성을 기본 전제로 깔고 그 위에 세워지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이야말로 반(反)민주주의적이라는 오늘날의 비판을 넘어서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이념과 본질을 근본적으로 다시 되돌아보도록 촉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장차 수호자들은 전쟁이라는 불운한 상황에 처하여 불가피하게 강제적인 일도 해야 하고 평화 시에는 지도자다운 품성을 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절제 있고 예절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비록 반대적인 상황과 반대적인 일조차도 나라의 수호를 위해서라면 수호자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 속에서 마치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직물을 지어내듯 바람직한 하나로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이곳에서도 플라톤의 반대적인 것들의τῶν ἐναντίων 조화와 균형의 원리가 하나같이 강조되고 있다. 반대적인 것들이 함께 있는 것이 무규정적 현실과 인간 욕망의 근원적 특성이지만 그것들을 영혼이 가지는 지성의 힘으로 헤아리고 분별하고 규정하여 그것들의 조화와 공존을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수호자이자 철학자들이 할 책무인 것이다.

5) 이에 따라 플라톤은 399b에서 바람직한 어조와 억양, 선법을 모방하여 위와 같은 상반된 상황을 가장 훌륭하게 넘어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제법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묘사하는 인간상은 당연히 정의로운 나라를 이끌어 갈 바람직한 수호자 상이기는 하지만 내용 면에서 마치 플라톤 스스로 평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생활 지침을 되새기는 것처럼 비추어지면서 자못 우리에게 감동과 교훈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것은 흥미롭게도 동양 유가의 군자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누군가를 설득하며 요구할 때는 신에게는 기도로 하고 사람에게는 가르침과 충고로 하라’는 말은 ‘하늘을 받들고 타인을 사랑하고(敬天愛人) 천명에 따르고(待天命) 남을 자신에 비추어 생각하며(推己及人) 말을 삼가되(愼言) 남을 가르치는 일에 성심을 다하고(誠之) 게을리 하지 않는다.(敎不倦)’는 말과 상통하고 반대로 ‘남이 자신에게 요구를 해오며 가르쳐 주거나 변화하도록 설득을 해오면 귀를 기울이라’는 말 역시 공자의 가르침을 떠오르게 한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올바른 말로 일러 주는 것은 잘 따라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法語之言能無從乎改之爲貴)고 말하면서 ‘남이 은근하게 타이르는 말은 기쁘지 아니한가?(巽與之言能無說乎)’라고 반문하고 있다. 여기서 ‘귀를 기울인다’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ἑαυτὸν ἐπέχοντα(heauton epechonta)인데 사실 그 말을 직역하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자신을 숙인다’라는 뜻으로 그야말로 공자가 강조하는 겸양(謙讓)의 미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성에 따라 행동하고 거만하지 않으며 절제 있고 금도 있게 행동하고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 역시 ‘앎과 행동을 같게 하고(知行合一) 겸손(謙遜)하고 온유후덕(溫柔厚德)하며 스스로를 다스려 예(豫)를 세우고(克己復禮)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천명에 따르면서(盡人事待天命) 수분자족(守分自足)하는’ 동양의 군자상과 그대로 일치한다.

6) 결국 시가에서 음악적 요소 또한 시가를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서 앞서 서술방식과 관련한 논의에서처럼 그 내용과 방식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리듬과 좋은 선법은 반드시 시가의 아름다운 이야기 내용 즉 노랫말(시가 가사)에 어울려야 하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요즘에는 곡이 작곡된 후 그에 맞추어 가사를 쓰는 일도 있지만 플라톤의 경우에는 작곡은 반드시 노랫말 즉 가사에 맞춰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 노랫말은 영혼의 성품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흥미롭게도 여기서 이러한 좋은 말씨, 좋은 화음(선법), 좋은 리듬(박자), 좋은 모양(우아함)은 모두 단순함(순진함, 좋은 성격 euētheia)을 따르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란 우리가 보통 어리석음anoia을 좋게 부를 때 쓰는 그런 단순함이 아니라, 정말로 좋고 아름다운 성품을 갖춘 생각διάνοια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직분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어디서나 이것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시가와 관련한 이야기 방식에서 따라야 할 우선순위를 요약하면 선법과 리듬 즉 음악적 요소는 시가의 스토리 즉 말(노랫말)을 따라야 하고 그 말은 영혼의 성품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단순함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 단순함이란 성품을 잘 훌륭하게 갖추고 있는 생각(사고)dianoia을 말한다. 즉 단순함은 영혼의 성품과 하나를 이루면서 그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음악은 감각에 작용하는 감성적 요소로서 말이라는 지적 요소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고 그 지적 요소는 다시 영혼의 성품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배관계의 최상위에 있는 영혼의 성품이란 그 성품을 보존하는 생각으로서 단순함을 그 내적 본질로 가지고 있다.

7)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말하는 단순함εὐηθείᾳ(euētheia)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의 원어 euētheia는 일차적으로 ‘좋은 성격’이나 ‘순진함’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그 순진함은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가 빈정거리듯 정의를 ‘고상한 순진성’genaian euētheia으로 부를 때(348d)와 같은 의미에서의 순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어린이의 마음을 일컬을 때의 순진성에 더 가깝다. 소크라테스도 여기서 그 말을 어리석음anoia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 사고로서의 dianoia와 연결 짓고 있고, 주석가인 아담(J. Adam) 역시 그 말의 진정한 어원을 hōs alēthōsῶς(truthfully)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아주 복잡한 것을 아주 단순화하여 한마디로 명쾌하게 꿰뚫어보는 경우도 경험하고 반대로 아주 간단한 것도 선입견이나 편견에 휩쓸려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경험한다.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단순함이란 인식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단순함은 사물과 사태의 내적 관계나 실체들을 아무런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분명하고 온전하게 그야말로 명석판명하고 간명하게 드러낼 때의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러한 진실을 간취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인간 고유의 인격적 요소 즉 영혼의 성품을 구유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은 이와 같은 순수성이 영혼의 성품이 내적 본질로서 가지고 있는 단순함의 의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이곳에서 ‘젊은이들은 이러한 것들 즉 단순함과 생각을 추구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다소 개념적으로 풀이해서 말하면 이런 의미 즉 ‘장차 수호자들이 될 젊은이들은 반드시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성품을 보전하여 나라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복잡한 일들을 진실의 관점에서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그 문제의 핵심적인 내용과 해결 방안을 가장 명료하게 찾아내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어서 설명하고 있듯이(401e-402a) 이처럼 청소년을 위한 시가 교육의 단계에서 예민하게 진실을 직감하는 젊은이들의 순수성 내지 초보적 단순성은 자라면서 이성적 논거 형성 능력의 민감성으로 발전하고 이후 고도의 철학적 추상 능력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변증법을 통해 진리 자체 즉 이데아에 대한 인식으로 승화되어 나가는 것이다.

 

8) 그리고 플라톤은 지금까지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논의 즉 말과 그에 수반되는 음악적 요소에 대한 시가 관련 논의 전체를 통해 드러낸 위와 같은 결론적 문제의식을, 단순히 시가 관련 분야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림 분야를 비롯한 모든 기예들 즉 직조술, 자수, 건축 등의 예술 영역은 물론 인체 및 생물들의 내적 구조와 본성 등 우아함과 관련한 모든 영역으로 확장 시킨다. 이것은 시가 관련한 논의를 수행하면서 논의된 문제의식과 일부 도출된 결론들이 앞으로 다루어질 정의로운 국가의 전반적인 문제 영역에서도 통일적이고도 일관되게 적용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로써 이야기 방식에서 음악적 요소와 관련한 논의가 마무리되고 지금까지 진행된 시가 교육이 왜 중요하고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끝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㊳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392c-d]

* 소크라테스는 이야기λόγος와 관련한 논의 즉 시가의 내용에 대한 고찰을 마치고 이어서 시가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에 대해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야 시가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지ἅ λεκτέον와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지ὡς λεκτέον의 문제가 완전하게 마무리된다는 것이다.(392c)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야기 방식에 대한 고찰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설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나 시인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일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가에 대한 고찰이라고 답한 후 그 ‘이야기 진행방식(서술방식)’διήγησις을 단순 서술 방식ἁπλός διήγησις과 모방μίμησις을 통한 서술 방식 또는 그 양쪽 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서술 방식으로 나누어 고찰하기 시작한다.(392d)

 

[392e-393c]

* 소크라테스는 단순 서술 방식이란 이야기를 진행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꾀하고 있지 않은 방식 즉 시인 자신이 직접 서술하는 방식을 말하며,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이란 시인 자신이 마치 시가의 등장인물이 직접 발언하는 것처럼 여겨지도록 최대한 그를 모방하여 서술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아데이만토스가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아듣지 못하자, 소크라테스는 마치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 설명해주겠다고 말한 후, 그 두 가지 방식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아가멤논에 대한 크뤼세스Χρύσης의 간청을 다루고 있는 <일리아스>의 첫 부분에서 각각 인용하여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호메로스는 어떤 곳에서는 크뤼세스에 대해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말하는 자신이 호메로스가 아니라 늙은 제관인 크뤼세스로 생각하게끔 최대한 크뤼세스를 모방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393d-394b]

* 소크라테스는 만약 시인이 자기 자신을 어디에서고 숨기지 않고 호메로스로서만 이야기를 했더라면 모방은 없고 단순한 서술 방식만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후, 그러한 단순한 서술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보다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흥미롭게도 앞서 인용한 <일리아스> 첫 부분의 내용을 모방이 없는 단순 서술 방식으로 형식을 바꿔 길게 들려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발언과 발언 사이에 있는 시인의 말(단순 서술 부분)을 제거해버리고 등장인물들의 대화들만 남겨 놓을 경우 이야기 진행은 앞의 것과 정반대 즉 모방만 있는 서술 방식이 되고 만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

 

* 시가 교육에서 이야기의 내용과 이야기의 방식이 따로 구분되어 다루어지는 이유는 시가 자체가 설화 내용만이 아니라 옛날부터 구전되어오면서 노래 내지 음송의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 형식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진행된다. 하나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과 관련한 논의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야기에 붙는 곡조와 리듬과 관련한 논의이다. 우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논의는 이중 전자의 것으로서 세부적으로 1)설화를 서술하되 설화에서 설명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을 해설조로 서술하는 방식 즉 ‘단순 서술 방식’과 2) 등장인물이 말하는 부분을 마치 그가 직접 말하듯 서술하는 방식 즉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으로 구분된다.

* 1)의 방식은 쉽게 요즘의 소설이나 연극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간접화법의 방식 즉 내용에서 일반서술이나 지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저자나 음송인이 단순 서술하거나 음송하는 방식이고, 2)의 방식은 직접화법의 방식 즉 설화에서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부분 즉 대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것인 양 서술하거나 음송하는 방식이다. 이 가운데 2)의 방식은 시인이나 음송인이 마치 해당인물이나 신이 말하듯 음송 서술해야 하므로 최대한 해당인물이나 신 또는 영웅을 잘 흉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1)의 방식은 시인이나 음송인에 의한 단순 서술 방식으로 부르고 2)의 방식을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으로 부른다.

* 플라톤의 시인 비판이나 예술 비판을 주제로 <국가>를 고찰할 때 꼭 제기되는 개념이 ‘모방’mimesis개념이다. 오늘날 예술과 관련하여 ‘모방’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흔히들 ‘창조’에 대비되는 의미부터 떠올린다. 그래서 오늘날 예술의 본질을 창조로 여기는 사람들은 종종 플라톤이 예술을 모방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그를 예술 폄하론자로 몰아세우곤 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에서 사용하는 ‘모방’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모방의 의미보다 훨씬 넓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모방에 관한 논의가 처음 나타나는 이곳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 개념의 근본 의미를 간단하게나마 미리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모방이라는 말에서 창조라는 말의 반대말 즉 어떤 원상을 외형적으로 흉내 내는 것, 복제하는 것, 베끼는 것뿐만 아니라 무형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을 표절하는 것을 우선 연상해낸다. 그리고 모방 또한 뭔가에 대한 일종의 묘사이자 표현이긴 할지라도 우리는 모방이라는 말을 표현이나 묘사라는 말과 결코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묘사나 표현에는 모방적인 묘사나 표현뿐만 아니라 이른바 창조적인 묘사나 표현까지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플라톤의 모방 개념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묘사와 표현의 뜻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모방의 일차적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원상을 단순히 베끼거나 모사했느냐 아니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창조이건 아니건 그 모두 객관적 원상에 대한 주관의 묘사이자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객관적인 원상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묘사나 표현 또는 그 결과물 일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동사적 표현이나마 모방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나는 <국가> 388b에서도 이미 직접적으로 그 말을 ‘묘사’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근본적으로 객관적 원상에 대한 주관의 묘사라는 점에서 모방의 결과는 실재성의 심급에 있어 원천적으로 원상에 못 미치는 일정 부분 결핍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성의 한계일 뿐 그 밖에 원상에 대한 표현과 묘사로서 모방 자체가 갖는 가치와 효용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본질적으로 원상의 모사인 만큼 실재성에 있어 원상에는 못 미친다는 점만 괄호에 넣고 보면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있어 모방의 좋고 나쁨은 모방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방하는 대상이 좋은 것인가 나쁜가와 그 모방의 정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예술은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말은 감각적 묘사의 산물로서 예술 작품이 갖는 실재성의 한계에 대한 비판일 수는 있어도 예술이 갖는 가치나 기능 내지 효용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오해되어선 안 된다.( <국가> 10권에서의 예술과 시인 비판은 여기에서와 달리 기본적으로 실재성의 심급과 관련하여 모방이 갖는 이러한 한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요컨대 예술의 가치와 기능과 관련하여 예술이 비판 받는다면 그것은 모방 때문이 아니라 그 모방의 대상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모방의 대상과 모방 수준에 따라 마땅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훌륭한 예술도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예술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를 토대로 모방이 이루어지는 각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언표 된다. 이를테면 이곳에서처럼 시가의 이야기 영역에서의 모방은 신과 영웅을 대상으로 마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흉내 내어 서술하는 것(emulation)을 의미하고, 미술과 조각, 음악 등의 영역에서의 모방은 모양이건 소리이건 원상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최대한 똑같이 재현(representation) 또는 모사(copy)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수호자 교육의 영역에서의 모방은 좋은 것을 추구하고, 좋은 사람의 생각과 태도를 그대로 본받고(modelling) 배우는 것(learning)을 뜻하고, 넓게는 기술 영역에서도 장인들은 기본적으로 우주를 제작한 데미우르고스의 기술을 본받아 사람들에게 선하고 이로운 것을 만들거나 제공한다는 점에서 모든 전문 기술 또한 모방인 것이다. 요컨대 그 모방의 좋고 나쁨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모방 그 자체 때문에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어떤 수준으로 모방했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이를테면 신이건 영웅이건 모양이건 소리이건 게다가 기술에서건 교육에서건 원상들의 선성과 아름다움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모상 속에 재현해내느냐에 의해 얼마든지 좋은 모방이 될 수 있고 그만큼 훌륭한 예술가들의 존재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리고 모방의 과정에서 남과 다르게 원상의 아름다움을 보다 잘 드러내면 우리는 그것을 모방하는 사람의 탁월성이자 훌륭한 능력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에서 드러난 남다른 차이는 모방자만의 고유 능력에 의해 새롭게 산출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창조’의 성격 또한 갖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누군가가 아름다움을 창조해냈다고 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만큼 숨겨진 원상 본래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재현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술 영역에서의 창조와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이 전적으로 상호 배척되거나 모순되는 것만도 아니다. 오늘날에도 예술이 창조행위를 통해 도모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여전히 시대를 불문하고 인류 모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지고의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구현해내는 일이라 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예술적 창조성이란 원상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예술가 자신에 의해 작품 속에 구현된 새로운 미적 가치와 의미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듯 원상을 전제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일지라도 그 현실적인 과정의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는 탐구와 모색을 통해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이를 찾아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모방 또한 새로운 의미 생산으로서 예술적 창조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플라톤적 예술 내지 미학에서 유독 객관적인 균형과 질서, 조화미가 강조되는 까닭은 모방의 대상으로서 플라톤적 원상의 극대점에 다름 아닌 영원히 선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자리하고 있고 그 우주적 선성의 본질이 곧 ‘서로 다른 것들의 영원한 조화와 공존’으로 표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우주는 이미 우주 영혼을 통해 그 자체로 시간적 영원성과 공간적 질서와 조화를 확고하게 관철하고 있는 신적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 영역에서 모방은 말할 것도 없이 배움과 철학의 영역에서도 그 우주 영혼을 모방하여 실재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개인과 나라에서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 또한 당연히 수호자들이 추구해야할 모방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수호자 교육의 궁극의 단계에서 요구되는 변증법을 통한 형상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 또한 본을 보고 우주를 만든 원상으로서 데미우르고스적 사유에 대한 모방인 것이다. 다만 그러한 철학 영역에서의 모방과 예술 영역에서의 모방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이유는 후자의 모방이 시각과 청각 등 감각을 통해 표현되고 기본적으로 감정에 작용하는 것임에 비해, 전자는 감각 너머의 지성적 사유와 관조를 통해 표현되고 이성과 정신에 작용한다는데 있다 할 것이다.

* 우리는 이상에서 플라톤의 모방 개념을 여러 영역에 걸쳐 아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지금 읽은 이 부분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모방 개념에만 주목한다면 일단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은 다만 위에서 말한 여러 모방 개념들 가운데 하나인 시가 영역에서 사용되는 좁은 의미에서의 모방일 뿐이다. 즉 그것은 앞서도 인용했듯이 다름 아닌 시가 영역에서 신과 영웅을 마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직접 흉내 내어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읽을 때 모방 개념에 대한 이해는 그러한 의미로 한정해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394c-d]

*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그러한 모방만 있는 이야기 진행은 비극의 경우라고 말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시나 설화 이야기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을 아래 3가지로, 즉 전적으로 모방에 의해διὰ μιμήσεως ὅλη 이루어지는 것, 단순 서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그 양쪽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구분하고 희극κωμῳδία과 비극τραγῳδία, 디튀람보스διθύραμβος 시가, 서사시ἐπή를 순서대로 그것들 각각에 귀속시킨다.(394c)

* 그제야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려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말하려 했던 것이 시가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지의 문제 즉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아래의 선택지들 가운데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지를 고찰하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즉 전적으로 모방을 통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일부는 모방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전혀 모방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할 것인지를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어떤 것을 모방의 방식으로, 어떤 것을 모방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할 지도 합의해야 한다χρείη διομολογήσασθαι고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 나라에서 비극과 희극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말은 어쩌면 그 이상πλείω ἔτι τούτων일 것이라 언급한 후 다만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으므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을 진행해가자고 말한다.(392d)

 

[394e-395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이 모방에 능한μιμητικός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지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하면서 이 문제도 앞서 말한 바에 따르게 되는지를 묻고 ‘동일한 사람이 여러 가지 것을 모방할 때는 한 가지 것을 모방할 때처럼 훌륭하게 할 수 없다는 것ὅτι πολλὰ ὁ αὐτὸς μιμεῖσθαι εὖ ὥσπερ ἓν οὐ δυνατός을 확인한다. 그런 일을 시도할 경우 많은 것을 붙잡으려다 모든 것을 놓치는 격이 되어 결국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이다.(394e) 그러므로 희극과 비극을 짓는데 있어 양쪽 모두에 능할 수는 없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음송인ῥαψῳδός이자 배우ὑποκριτής가 되는 일도 불가능하고 같은 사람이 희극 배우κωμῳδός이자 비극 배우τραγῳδός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들 모두가 모방물μιμήματ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95a)

 

[395b-396b]

*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성향은 그런 종류의 것들 보다 한층 더 세분되는σμικρότερα 것이어서 우리의 처음 주장대로 수호자들은 다른 일체의 전문 기술δημιουργία을 포기하고 ‘이 나라의 엄밀한 뜻의 자유의 일꾼들’δημιουργοὺς ἐλευθερίας τῆς πόλεως πάνυ ἀκριβεῖς이어야만 하므로 그것에 기여하는 것 외에 어떤 것에도 종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 한다면 그 밖에 어떤 것에도 매달려서도, 그 어떤 것도 모방해서는 아니 되고 다만 모방을 할 경우 용감하고ἀνδρεῖ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경건하며ὅσιος 자유로운ἐλεύθερος 사람들과 같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바로 어릴 때부터 모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방이 젊은 시절부터 오래도록 계속되면 몸가짐과 목소리 또는 사고διάνοια에 있어 습관ἔθος이나 성향φύσις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비굴하거나 창피스런 짓을 모방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395c-d) 그러므로 훌륭한 남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이들이 이러 저러한 못난 일을 하는 여인들은 물론 노예들과 못되고 비겁한 자들, 비속한 말을 해대는 자들, 그 밖에 언행을 통해 자신과 남들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는 일들을 모방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5d-396a) 그리고 수호자들이 대장일 등 다른 전문적인 일을 하는 장인들이나 삼단노 전함τριήρης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 등에 마음을 쓰거나 모방을 하게 해서는 안 되며 말ἵππος과 황소ταῦρος가 우는 소리, 시끄러운 강물ποταμός 소리나 굉음을 내는κτυποῦσαν 바다θάλασσα나 천둥소리 같은 것을 모방해서도 안 되고 미친 짓을 하거나 그것을 닮은 짓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396b)

 

[396c-397b]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시가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과 이야기 진행(서술 방식)διήγησις에 있어서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한 사람ὁ τῷ ὄντι καλὸς κἀγαθός이 따라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것이 있다고 언급한 후 그 각각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즉 절도 있는μέτριος 사람은 시가를 이야기하다가 훌륭한 사람의 말투나 행동에서 꿋꿋하고 슬기로운 모습이 나오는 대목에 이르면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이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말하며 모방하고 싶어 할 것이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지만,(396c) 그 사람이 못난 일을 하거나 혹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을 열의를 갖고 모방하려들지 않을 것이고 그런 모방을 창피스러워하고αἰσχυνεῖσθαι 내심으로 경멸할ἀτιμάζων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6d) 따라서 조금 전에 호메로스의 시구와 관련해서 언급했던 두 가지 이야기 방식 즉 단순 서술을 통한 방식과 모방을 통한 방식 모두가 이야기 진행에 관여가 되어 있지만, 결국 그 가운데 모방을 통한 방식과 관련해서는 위와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만 모방이 허용되는 한, 시가를 이야기함에 있어 수호자들이 모방하는 부분은 긴 이야기 가운데 작은 부분이 될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6e)

* 그러나 이와 달리 훌륭하지 않은 자들의 경우는 그가 비천할수록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온갖 것들, 이를테면 천둥소리나 우박 또는 도르래 따위의 굉음 또는 나팔이나 아울로스 등 악기 소리, 개와 양, 새소리 등 갖가지의 소리와 몸짓을 모방하려든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들의 이야기 방식과 서술 방식에 있어서는 그 만큼 단순 서술 방식은 조금 뿐이고 대부분이 모방을 통한 방식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 방식을 거론한 배경이 다름 아닌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비로소 확인된다.(397b)

 

——————————

 

* 소크라테스는 시나 설화 이야기에서 서술 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 방식 중 소크라테스가 지지하고 있는 방법은 단순 서술 방식이고 가장 멀리하는 방식은 모방의 방식 즉 자기가 등장인물인 듯 흉내 내어 서술하는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모방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리아스> 첫 부분의 내용을 단순 서술방식으로 몸소 바꾸어 서술하는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러한 서술방식들을 굳이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단순 서술 방식은 간접화법의 방식으로, 모방을 통한 방식은 직접화법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언뜻 우리 생각에는 직접화법이 간접화법보다 이야기를 보다 직접적이고 실감나게 전한다는 점에서 최소한 전달 방식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간접화법 즉 단순 서술 방식이 더 우위에 있다고 보고 있다. 아데이만토스도 이야기 진행 방식과 관련한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방식 간의 우열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그 방식들과 희극과 비극, 디튀람보스 시가, 서사시를 순서대로 그것들 각각에 귀속시킨 후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 나라에서 비극과 희극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말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자신의 말은 어쩌면 그 이상일 것이라 언급한 후 다만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으므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을 진행해가자고 말한다.

*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일단 모방보다는 단순서술 방식에 더 우위를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시가는 옛날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이 직접 목도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판단되는 이야기를 허구의 형식을 빌려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단순 서술 방식은 비록 허구일지라도 사실에 대한 시인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모방의 방식은 그러한 허구 외에 마치 시인 자신이 그 모방의 대상인 양 여겨지게 만드는 허구 즉 흉내라는 허구를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흉내를 내는 대상들이 각기 다른 여럿이라는 점에서 그 대상의 숫자만큼 허구의 가짓수 또한 늘어나는 것이다.

* 그런데 바로 이 점에 주목하면 이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가 단순히 단순서술 방식과 모방의 방식을 구분하고 비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님이 서서히 드러난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앞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하자고 말한 것처럼 그 이후 이어지는 논의를 들여다보면 앞서 말한 이야기의 진행 즉 서술 방식간의 비교 우위와 그에 합당한 극형식의 선택이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오히려 논의는 그 가운데 모방의 방식과 관련하여 시인들이나 음송인들, 배우들이 모방의 대상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다 흉내 내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앞서 살폈듯이 시가에서 단순 서술방식은 최소한 이야기 서술에 있어 시인이나 음송인 한 사람의 허구를 담고 있지만 모방의 방식은 등장하는 각기 다른 여러 대상들을 다 흉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온갖 종류의 허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이 저마다 한 가지 일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지 많은 일을 그렇게 할 수 없다(394e)는 일인일기의 원칙 즉 한 사람이 하나의 전문 기술을 가진다는 원칙에 비추어보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한 사람이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을 다 똑같은 수준으로 다 잘 흉내 낼 수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좋은 것 나쁜 것 가리지 않고 흉내를 낼 경우 그러한 모방은 시가를 배우는 어린이들 특히 수호자가 될 사람들에게 아주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요컨대 이 부분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언급들은 모방 자체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일인일기의 원칙에 따라 시가 교육과정에서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은 물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 흉내 내는 시인들과 음송인 내지 배우들의 행태가 초래하는 해악을 비판하는데 있다. 특히 수호자들은 플라톤의 처음 주장대로 일인일기라는 전문가 주의 원칙에 따라 다른 일체의 전문 기술을 포기하고 ‘엄밀한 뜻에서 이 나라의 자유의 일꾼들’이어야만 하므로 시가 교육 단계에서부터 시인들이나 음송인들, 배우들처럼 분별없이 온갖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행위들과 온갖 종류의 나쁜 소리들을 모방하게 해서는 안 되며 다만 모방을 할 경우 용감하고 절제 있고 경건하며 자유로운 사람들과 같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바로 어릴 때부터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에게 모방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모방은 배움의 중요한 양태이다. 앞서도 살폈듯이 모방의 좋고 나쁨은 다름 아닌 그 모방의 대상과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온갖 다양한 사람들의 행위나 소리들을 흉내 내거나 묘사해내는 능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문 기술이자 능력으로서 이른바 연극배우의 고유한 기능이다. 단 한 사람의 성격과 역할만을 잘 흉내 내고 모방할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배우가 아니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행태를 마치 그 사람인 양 똑같이 흉내, 즉 연기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이 연극배우가 갖는 고유 기능이다. 그리고 연극의 사회적 기능과 가치가 요구되는 그 만큼 그러한 능력 있는 연극배우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나 연극배우를 일인일기 내지 전문가 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로 비판하고 있는 플라톤의 관점은 사실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게다가 연극배우들이 다양한 행위나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연기에 불과하다. 악역만을 전문으로 하는 연극배우가 악한 사람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 그럼에도 굳이 플라톤이 일인일기 원칙에 입각하여 시인들이나 배우들에게 비판을 퍼붓는 배경에는 이미 선대의 시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은 물론 당대에 활동하던 기존 시인들의 행태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부정적인 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 소크라테스가 시가에서 수호자들이 모방하는 부분은 긴 이야기 가운데 작은 부분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396e) 이미 당대의 시가에서는 수호자가 모방을 통해 배울 내용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호메로스 등 선대 시인들은 시가를 지으면서 이미 신과 영웅들에 대해 거짓말을 일삼고 있으며, 당대 시인들 역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시가 교육 과정에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규모의 연극을 통해 유포 재생산함으로써 어린이들과 대중들을 그릇된 가치관으로 이끌어 아테네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당대 시인들은 물론 음송인들과 배우들 모두 그릇된 시가 내용을 무분별하고 반성 없이 지속적으로 모방하고 유포함으로써 단순히 시의 창작이나 연기행위를 넘어 그것을 그들 자신의 삶인 양 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대중들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아 분별력을 잃고 자신의 고유 욕망을 넘어 서로의 욕망을 넘보게 되면서 각기 다양했던 모두의 욕망이 종국에는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여기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정의로운 나라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는 좋고 나쁨에 구애 없이 무분별하게 모방을 일삼는 이러한 시인들과 음송인들, 배우들의 삶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모방 양태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시가 교육이나 예술 교육 자체가 갖는 중요성까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중요한 만큼 더욱 철저히 비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서 지고의 진실로서 신의 선성을 토대로 기존의 시가 교육과정을 철저히 재편하려는 것이다.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는 그와 같이 새롭게 재편된 시가 교육 과정을 통해 당대의 시인들과 다르게 오직 신과 영웅들의 선한 모습을 모방하고 배움으로써 훌륭한 수호자로서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온전하게 수행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대 시인들과 시가 교육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수행할 수호자들의 교육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고 엄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대 시가와 시인들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대중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예술인 내지 대중문화의 생산자들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그들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 자유주의적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매우 중차대한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이처럼 시가 내지 예술 교육이 미치는 영향은 심대하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시가의 이야기 서술 방식에 대한 반성적 논의를 마무리 한 후에 시가가 갖는 음악적 요소에 대한 반성적 논의를 매우 상세하게 이어간다. 시가에서 이야기 서술 방식이 갖는 중요성도 크지만 시가가 일종의 노래의 형식을 갖고 음송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가 교육에서 음악적 요소가 차지하는 영향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㊲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3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386a-391e)

                * 용기(386a-389a)

                * 정직과 절제, 경건(389b-391e)

 

[389b-d]

*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시가에서 수호신과 영웅들을 다루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덕목으로 용기를 이야기 한 후에 정직ἀλήθεια을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들은 거짓말ψεῦδος을 할 이유 자체가 없는 신과 달리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통치자들이 나라의 이익 또는 시민들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합당해도, 그 밖의 사람들의 경우 누구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389b) 일반 개인ἰδιώτης들이 통치자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환자가 의사ἰατρός를 상대로, 신체 단련 수련생이 체육 담당자παιδοτρίβης를 상대로, 선원이 선장κυβερνήτης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과 똑같다.(389c)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거짓말을 하는 자를 붙잡으면 전문가οἳ δημιοεργοὶ이건, 예언자μάντις이건, 의사이건, 목수이건 벌을 줘야 한다. 그들은 마치 배를 전복하듯 나라를 전복하고 파괴할 그러한 관행ἐπιτήδευμα을 들여오는 자이기 때문이다.

 

———–

 

* 소크라테스가 청소년들을 위한 시가 교육 단계에서 거론하는 덕목들은 기초적인 수준에서 장차 수호자들이 갖추어야할 덕목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직 수호자를 선발하기 이전 단계이므로 최소한 시민이자 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 즉 용기와 절제가 먼저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용기에 이어 절제를 다루기 전에 불쑥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용기와 절제 외에 정직도 별도의 덕으로 추가하려는 것일까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정직에 관한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별도의 논의로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그곳에서 다시 살피기로 하자.

* 아무려나 이 부분은 시작부터 현대의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오늘날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경악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내용 즉 ‘통치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또 거짓말 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통치자에게만 허용된다’는 도발적인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의의 전후 맥락에 상관없이 통치 권력자와 거짓말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그 내용만 따로 떼어져 20세기 포퍼(K. Popper)를 비롯한 여러 자유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플라톤 정치철학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폭로하는 핵심 근거로 자주 인용 되어 왔다. 사실 자유주의가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현대의 독자들이 이 부분을 접하면서 느끼는 당혹감은 어쩌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적 정치권력이 저질러온 수많은 거짓과 위선, 폭압에 대한 뼈저린 역사적 경험 위에서 소수 정치권력에 대한 다수의 견제와 의심을 토대로 성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둘러싼 그러한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서, 일단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통치자와 거짓말에 대한 플라톤의 주장만 들여다보자면, 플라톤이 제1권 이후 시종일관 내건 주장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도발적이라거나 새롭다고 할 만한 내용은 없다. 플라톤은 줄곧 통치술을 일반적인 전문 기술에 상응하는 것 즉 정치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동일한 성격의 앎으로 등치시켜왔는데,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한 이곳에서의 주장 또한 내용적으로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제1권에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를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의 관계 즉 전문기술자와 그 기술 대상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자는 기술 대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그 나라의 통치자들ἄρχων τῆς πόλεως(389b)’이란 말 가운데 ‘통치자들’은 비록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더라도 맥락상 제1권에서 언급된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간취할 수 있고, ‘그 나라’ 역시 그러한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나라 즉 앞으로 제기될 정의로운 나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통치자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주장에 현대의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까닭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위와 같은 플라톤의 기본 설정을 배제하거나 간과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거짓말은 기본적으로 나쁘다. 플라톤도 당연히 그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누구를 막론하고 현실의 삶에서 불가피하게 거짓말이 필요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사실 거짓말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군인이 적을 속이기 위해, 의사가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다못해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일상의 다반사이고 또 그런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부당하다고 문제 삼는 사람도 없다. 제1권에서 언급된 미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말을 용인하는 근거가 될 수도 없다. 특히나 거짓말의 용인 수준과 관련하여 나랏일과 관련하여 통치자가 행하는 거짓말과 그 밖의 사람들이 행하는 일상의 선한 거짓말을 결코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만큼 통치자의 경우는 거짓말의 해악을 분별해내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잣대가 무엇이고 그 엄격성의 객관적 근거를 누가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하여 플라톤은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사람들 모두 관련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를 내세우듯이,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도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즉 최상의 통치 전문가를 그 잣대로 내세운다. 요컨대 통치자의 거짓말이 초래하는 위험성이 위중하고 중차대한 그 만큼 아무나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통치의 기술과 도덕, 지성의 전 영역에서 철저히 훈련된 고도의 전문가 즉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자격을 가진 자에 한해서만 거짓말의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독극물의 경우 그것이 위험한 그 만큼 최고의 독약 전문가에 한해 취급이 인가되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그러나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여, 최소한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 기술과 객관적 보편성 내지 정치 전문가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나랏일과 관련하여 거짓말이 요구될 경우, 권력의 자의적 독단을 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다수의 합의에 의해 정해진 법과 제도에 따라 검증되고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플라톤은 정치야말로 가장 중대한 영역인 만큼 그 어느 영역에서보다 최고의 정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근세 이래 자유주의자들은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예외적으로 전문가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플라톤이 가장 정치에 비전문가라고 폄하하고 있는 대중에게 정치적 결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정치의 기술 즉 통치술과 일반 전문 기술을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 자신의 기본 전제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정치철학이 그의 지식철학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지식의 객관성과 그것의 인식 능력을 토대로 성립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정치적 지식의 객관성과 그것의 구현이 철학자라는 사람을 통해서 담보되고 관철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역사 이래 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가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백안시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근본적으로 지향하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정치의 지성화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의 정치철학을 인치인가 법치인가의 잣대로 양자택일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리 온전한 이해 방식도 아니고 적합한 논의 방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말년의 저작 <법률>에 이르러서도 하나같이 정치의 지성화를 목표로 삼아 <국가>에서 강조한 인치의 측면에 더해 법치를 함께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치와 관련해서도 1인의 철학자 대신 ‘야간위원회’hoi nyktōr syllegomenoi, nykterinos syllogos(<법률> 908a, 909a, 968a)라는 다수의 철학자 집단에 최고의 정치적 결정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치이건 덕치이건 간에 플라톤 정치 철학적 지향과 목표가 본질적으로 정치의 지성화에 있는 한, 그의 제안들은 정치철학 일반에서는 물론 구조적으로 늘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의 입장에서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성찰해보아야 할 철학적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곳 논의 부분의 주제는 통치자의 거짓말 권한 여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에서 정직이 왜 중요하고 귀한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정직의 문제로 돌아가 일반 개인들이 정직하지 않았을 때 나라가 어떠한 위험에 처하고 그에 따른 처벌이 왜 마땅한지를 언급한 연후, 바로 이어 절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389d]

*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왜 절제σωφροσύνη가 요구되는지 어떤 면에서 대중에게 절제가 가장 중대한지를 묻는 방식으로 아래와 같이 절제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즉 절제의 가장 중대한 면면은 통치자들에 대해 순종하는 것ὑπήκοος 그 반면 주색πότος καὶ Ἀφροδίσιος이나 먹는 것과 관련된 쾌락ἡδονή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ἄρχων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시가에서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을 훌륭한καλός 사람들이라고 언급하고 그와 관련된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해가면서 바람직한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해가며 하나하나 비평을 가한다.

 

[389d-391d]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신화 속 내용과 사례들을 내용적으로 순서에 따라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 (인용 사례의 구체적 내용들과 전거는 텍스트와 주석 참고) 1) 디오메데스(389e) – 지휘관에 대한 순종 2) 아킬레우스(389e) – 지휘관에 대한 불손 3) 시인(389e) – 통치자에 대해 함부로 말함νεανίευμα 4) 에우륄로코스((390a-b) – 식욕을 인내καρτερία하지 못함(참지 못함) 5) 제우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390c) – 성욕을τὴν τῶν ἀφροδισίων ἐπιθυμίαν 참지 못함 6) 오뒷세우스 – 분노를 참지 못함 7) 헤시오도스, 아킬레우스(390e) – 재물욕φιλοχρήματος을 참지 못함 8) 아킬레우스(391a-c) – 신에 대한 불손ἀπειθής과 오만ὑπερηφανία 9) 테세우스와 페이리투스(391c) -무서운 겁탈 10) 기타 신의 아들, 영웅들의 무섭고 불경한δεινὰ καὶ ἀσεβῆ 짓들(391d).

 

————-

 

* 이쯤에서 절제를 다루고 있는 이 부분의 논의를 살피기 전에, 앞서 언급한 대로 왜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불쑥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들였을까, 그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했듯이 이곳 정직에 관한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 음미해보자. 앞서 소크라테스는 정직을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 후 바로 통치자 이외에 누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의 초점은 전후 문맥상 통치자의 거짓말 권한 여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라와 일반 개인들 모두에게서 정직이 왜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마치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처럼 환자가 정직하지 않으면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처럼 통치자와 사인들의 관계에서도 사인들이 정직하지 않으면 나라의 안전과 질서를 담보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통치자들이 일반 개인들의 이익에 종사하는 전문 통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인 한, 사인들은 자신이 처한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허위 진술, 허위 보고는 생사의 문제를 오가는 질병과 항해, 전쟁 영역에서 죽음과 불행과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다. 즉 정직은 통치자와 사인들 간의 참된 관계를 성립시키는 필수 조건이자 나라와 개인의 안전과 질서를 담보하는 선결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통치자와 사인들의 참된 관계는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 지휘관과 병사의 참된 관계가 그래야 하듯이 구체적으로 통치자들에 대한 사인들의 순종 즉 지배와 피지배관계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해서 순종이 사인들의 예속과 희생이라고 오해되어선 안 된다. ‘정직’으로 옮긴 ἀλήθεια(alētheia)는 여기서는 거짓말과 대비하여 그렇게 옮겼지만, 그 말은 ‘정직’(frankness)의 뜻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진리’, ‘진실’, ‘참됨’이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다. 서로 다른 여럿의 관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화가 이루어지려면, 그리고 모두가 받아들이는 합의가 이루어지려면 조화에 참여하는 여러 구성 요소들이, 마치 도가 도답고 미가 미답고 솔이 솔다워야 도미솔 화음이 이루어지듯, 모두가 다 서로에게 진실해야 하고 자기다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순종은 그들 자신의 안전과 이익이 통치자를 통해 구현된다는 앎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참여와 합의 그리고 질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피통치자가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근거로서 참된 앎에 통치자 역시 순종해야 한다는 점에서 순종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기 이전에 참된 앎과 그것에 따르는 구성 요소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정직에 이어 절제를 다루면서 곧바로 절제의 가장 중대한 면면의 하나로 무엇보다도 통치자에 대한 순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정직에 대한 논의는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관점은 이곳의 논의와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용기와 절제에 대한 논의를 지나치게 일대 일로 대응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곳 정직에 대한 논의는 거짓말을 일삼는 시인들에 대한 경고를 담은 별도의 논의, 즉 나라에서 거짓말은 통치자 이외에 허용될 수 없음을 밝히는 방식으로 특별할 것 없는 일반 개인으로서 시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환기시키려는 의도를 담은 일종의 삽입일 수도 있다.

* 아무려나 이제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시가를 지으면서 영웅들과 관련하여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용기에 이어 절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통치자에 대한 순종으로 설명함과 동시에 주색이나 먹는 것과 관련된 쾌락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로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보다시피 이곳에서의 절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은 행태 위주로 매우 구체적이다. 이것은 절제에 대한 이곳에서의 논의가 앞서 용기의 경우가 그랬듯이 나중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보편적인 규정 차원에서의 절제에 대한 논의의 예비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보여준다. 사실 앞서 정직에 대한 논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절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구성요소 또는 개인의 내적 구성 요소들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절제는 강해 초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원래 군사 용어에서 나왔다. 그리스 육군의 기본 전술은 창과 방패를 들고 견고한 대오를 유지하며 전진하는 팔랑크스(phalax) 전법이다. 이 전술은 단순히 병사 각자의 개인적 능력만 가지고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강한 병사가 있더라도 대오를 벗어나 혼자 전진하려 들면 밀집대형은 흐트러져 패배에 직면할 수 있다. 각 병사는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되 밀집대형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병사와의 관계 내지 전체 대오를 늘 염두에 두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며 전체 대오 유지를 위해 시시각각 들려오는 지휘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군인이라면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가지고 있어야할 원칙이자. 지휘관과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존중하고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합의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말하는 절제 즉 통치자에 대한 순종은 그러한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앎과 그것을 구현하는 자발적 실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정의(定義) 차원에서 절제를 다루면서 그러한 바람직한 관계의 구현으로서 절제를 ‘질서’κόσμος 인 동시에 ‘쾌락과 욕망의 억제ἐγκράτεια’로 표현(430e)하기도 하고 ‘강한 소리, 약한 소리, 중간 소리의 협화음συμφωνίᾳ, 화성ἁρμονίᾳ’(430e, 432a)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주색이나 먹는 것과 관련한 쾌락에 대해서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로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개인의 내적 관계에서 관철되어야 할 바람직한 지배와 피지배관계를 담고 있는 말이다. 즉 개인 차원에서 절제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유혹을 자신 안에 있는 다른 힘으로 그것을 제압하는 것 즉 지배를 관철시켜 그 유혹을 참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와 관련해서도 나중에 본격적으로 절제를 언급하면서 절제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κρείττω αὑτοῦ’이라고 말한 후 그것을 ‘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서 한결 나은 것τὸ βέλτιον과 한결 못한 것τὸ χεῖρον이 있어서 성향상φύσει 한결 나은 부분이 한결 못한 부분을 제압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430e-431a). 즉 절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건 개인적인 차원에서건 어느 구성요소가 어느 구성요소를 지배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즉 일종의 지배관계에 대한 합의ὁμόνοια’(432a-b)인 것이다. 아무려나 절제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대 그리스 사회가 늘 전쟁의 위기에 직면해오면서 그것의 극복을 위한 전사 공동체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일단 여기서 절제에 대한 논의는 젊은이들에 대한 시가 교육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기존 시가에서 영웅들을 무절제한 사람으로 잘못 그리고 있는 구체적인 장면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 실린 영웅들의 무절제한 행태들은 나중에 절제가 무엇인지를 다루 때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부분의 절제에 대한 논의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추후 다루어질 정의(定義) 차원에서의 절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을 갖는다 할 것이다. 우선 이곳에서 그려지고 있는 영웅들의 무절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크게 통치자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행태들과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쾌락을 이겨내지 못하는 행태들로 나누어진다. 특히 쾌락을 이겨내지 못하는 행태들은 장차 수호자들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유혹의 종류들 다시 말해 플라톤이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쾌락의 실체들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불순종과 무절제와 관련된 구체적 행태들을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신화 속 내용과 사례들에 대응시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 1) 디오메데스(389e)와 아킬레우스(389e)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지휘관에 순종하지 않거나 불손한 행위를 담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절제가 한결 나은 것에 대한 한결 못한 것들의 순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불순종과 불손은 정치적 사회적 관계에서 젊은이들과 수호자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무절제 행태들이다. 2) 에우륄로코스((390a-b), 제우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390c), 오뒷세우스(390d), 헤시오도스, 아킬레우스(390e)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절제하기 힘든 인류 공통의 유혹들을 담고 있다. 그 첫째는 생물학적 욕망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식욕과 성욕이고 사회적 욕망 차원에서 형성된 것으로 분노와 재물에 대한 욕망이다. 식욕과 성욕 그리고 분노와 재물욕 모두 개인 내면에 자리한 ‘한결 못한 혼에 대한 한결 나은 혼의 지배’가 관철되지 못한 상태 즉 바람직한 혼의 내적 관계가 전도된 상태에서 나오는 무절제한 행태들이다. 그리고 3) 아킬레우스(391a-c), 테세우스와 페이리투스(391c-d)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불손과 오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다룬 불순종과 상통하는 것이지만 앞서의 불순종이 사람에 대한 불순종인데 비해 여기서의 불순종은 신에 대한 불손과 오만으로서의 무절제라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직이 절제와 직결된 것과 마찬가지로 경건 또한 절제와 직결 되어 있다. 경건 또한 신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기타 이 부분에서 단편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부분 몇 가지를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1) 390b에서 ‘자제(自制)’로 옮겨진 ἐγκράτειαν(enkrateia)는 여기서는 절제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가면 enkrateia가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외적인 강제와 두려움에 의해 억지로 참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다는 점에서 여기서 참된 앎에 기대 자발적으로 참는 것으로서 절제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2) 391a에서 플라톤은 호메로스에 대한 비난을 일부 유예하고 있는데 이것은 플라톤이 기존 신화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전적인 부정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391c에서 ‘자신 속에 두 가지 상반된 병폐ἐναντίος νόσημα로 재욕에 따른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과 신들 및 인간들에 대한 거만함ὑπερηφανία이 거론되고 있는데 옹졸함과 거만함이 갖는 상반성이 우리말 역어로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옹졸함에 해당하는 원어가 예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재물에 대한 옹졸함은 재물에 대한 예속을 뜻하고 신들 및 인간들에 대한 거만은 신들과 인간들에 대한 방종과 오만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상반성이 보다 더 잘 이해가 된다. 한결 나은 것의 한결 못한 것에 대한 지배관계가 관철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동일하게 심적 동요상태ταραχή 즉 무절제에 해당한다.

 

[391e]

*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절제와 관련한 사례들을 마무리 하면서 시인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신들이 나쁜 일들을 생기게 하며 영웅들도 보통 사람들 보다 조금도 나을βελτίων 것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들은 앞서 말했듯이 경건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으며οὔθ᾽ ὅσια ταῦτα οὔτε ἀληθῆ 그것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나쁜데 대해 관대συγγνώμη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사악함πονηρία에 대한 무신경εὐχέρεια이 생기지 않도록 그런 이야기들은 말하지도 들려주지도 말아야 한다.

 

—————-

 

* 영웅들과 관련된 무절제한 사례들은 모두 시가에 실린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 역시 기본적으로 시가 교육과 관련하여 시인들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시인들이 그려낸 신과 영웅들의 무절제한 모습은 그 자체로 거짓말이기도 하거니와 내용적으로 젊은이들로 하여금 마음속에 사악함에 대한 무신경을 생기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그런 신화는 짓는 것도 말하는 것도 들려주는 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어떤 것을 들려주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통해 기본적으로 어떤 것을 들려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규범도 함께 논의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이곳에서도 시가 비판과 더불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절제의 기본적인 내용도 함께 드러나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곳 논의 역시 절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 또한 함께 갖고 있다.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4 인간들에 관한 것(386a-391e)

 

[392a]

*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그 내용적 규범을 정하는ὁρίζω 것과 관련하여 신들과 관련한 논의에 이어 영웅들과 관련한 논의까지 모두 마무리 되었다고 선언한 후, 이제 인간ἄνθρωπος들과 관련한 논의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들과 관련하여 시인들이 시가를 통해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와 관련한 규범을 세울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과 관련하여 시인들이 잘못 말하고 있는 내용은 아테이만토스 형제가 소크라테스에게 이미 토론의 근본 주제 답변을 요구했던 것들이다. 즉 그 내용은 ‘부정의한 자들ἄδικοι은 다수가 행복한εὐδαίμονες 반면 정의로운 사람들δίκαιοι 은 다수가 비참하고ἄθλιοι 또한 부정의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들키지 않는 한, 이득이 되나λυσιτελεῖ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ἀγαθόν이되 자신에게는 손해ζημία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에 관한 문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의에 관한 모든 논의가 마무리된 다음에나 제대로 다루어질 수 있는 문제이므로 합의는 그 때로 미루고 시가 교육과 관련하여 무엇을 말할 것인가ἅ λεκτέον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내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이제 논의는 시가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이어 시가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ὡς λεκτέον에 대한 문제 즉 이야기 투λέξις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