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플라톤의 <국가> 강해(8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8)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두 번째 증명 :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는 즐거움에 기초한 증명(580c-583a)

 

[580c-583a]

*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증명ἀπόδειξις을 시작하면서 우선 영혼의 세부분에 기초하여 세 가지 욕구와 즐거움을 구분하고 그에 상응하여 사람들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

1) 한 나라가 세 부류로 나뉘었듯 각 개인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셋으로 나뉜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여 즐거움ἡδονή도 욕구ἐπιθυμία와 다스림ἀρχή도 세 종류τριχῆ가 있다. 우선 영혼의 세 부분이란 사람이 ‘그것으로 배우는μανθάνει 부분’, ‘그것으로 화내는θυμοῦται 부분’,(580c-d) ‘욕구부분’ἐπιθυμητικὸν으로 나뉜다. 이 욕구 부분은 ‘돈 사랑하는φιλοχρήματος 부분’이라고도 했는데, 그건 그런 욕구들은 돈을 통해서 가장 잘 충족되기 때문이다.(580e)

2) 즐거움과 사랑φιλία의 관점에서 이 부분은 이득κέρδος을 향해 있으므로 ‘이득 사랑하는φιλοκερδής 부분’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기개부분 τὸ θυμοειδὲς은 지배하는 것과(581a) 승리하는 것, 좋은 평판 얻는 것εὐδοκιμεῖν을 ‘언제나 전적으로’ἀεὶ ὅλον 추구하므로ὡρμῆσθαι ‘승리 사랑하는φιλόνεικος 부분’이자 ‘명예 사랑하는φιλότιμος 부분’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은 언제나 전적으로 진리가 어떠한지를 아는 것τὸ εἰδέναι으로 향해 있으므로τέταται ‘배움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부분’ 그리고 ‘지혜 사랑하는φιλόσοφος 부분’이라 부른다.

3) 이 부분은 돈과 평판에 대해서는 세 부분 중에서 이 부분이 가장 관심 없다.(581b) 영혼의 이 세 부분 중 ‘어느 부분이 다스리는지ἄρχει에 따라’ 인간ἄνθρωπος의 경우도 세 부류 즉 ‘지혜 사랑하는 자’, ‘승리 사랑하는 자’, ‘이득 사랑하는 자’로 나뉘고 그에 따라 즐거움의 경우도 인간 각각에 하나씩 해당하는 것으로 세 가지로 나뉜다.(581c)

4) 이때 만일 이 세 부류의 인간 각각에게 세 종류의 삶 중 ‘어떤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인지’τίς τούτων τῶν βίων ἥδιστος를 차례로 묻는다면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가장 찬양할 것이다.ἐγκωμιάσεται(581c) 돈벌이꾼은 재물χρῆμα에서 오는 즐거움만을,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명예를 누리는 즐거움만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다른 즐거움은 연기καπνός 같은 것이자 헛소리φλυαρία라고 생각할 것이다.(581d)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가 어떠한지 아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다른 것들은 ‘불가피한 것들’ἀναγκαίας이라고 부를 것이다.

5) 위와 같이 각 종류의 인간이 가지는 즐거움과 삶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ἀμφισβητοῦνται, 이때의 논란은 누구의 삶이 ‘더 아름답고 추한지’τὸ κάλλιον καὶ αἴσχιον도, 누구의 삶이 ‘더 낫고 못한지’τὸ χεῖρον καὶ ἄμεινον가 아니라, 단지 ‘누구의 삶이 더 즐겁고 고통 없는지τὸ ἥδιον καὶ ἀλυπότερον’에 대한 것이다.(581e)

6) 그렇다면 이들 중 누구 말이 진실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훌륭하게 가려내기 위한 판정κριθήσεσθαι 기준κριτήριον으로 경험ἐμπειρίᾳ 과 현명함φρόνησις 그리고 논변λόγος을 제시한다.(582a)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 판단 기준에 기초하여 우선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우리가 이야기한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ἐμπειρότατος 자인가’를 묻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이득을 사랑하는 자의 경우, 배움의 즐거움의 경험자가 될 그 어떤 필연성ἀνάγκη도 없지만οὐ ῥᾴδιον, 지혜를 사랑하는 자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배움의 즐거움을 맛보는 일이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받아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과 관련해서 지혜 사랑하는 자가 이득 사랑하는 자를 크게 넘어선다πολὺ διαφέρει고 말한다.(582b) 명예 사랑하는 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넘어설 수가 없다. 그리고 ‘있는 것’το ὄν을 관조하는 것이 어떤 즐거움을 갖는지는 지혜 사랑하는 자 외에 어느 누구도 맛볼 수 없다고 말한다.(582c)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이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판정할 사람은 바로 그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이 사람의 경험만이 현명함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논변이 훌륭하게 판정하기 위한 도구ὄργανον라면 지혜를 사랑하는 자야말로 그 도구를 갖춘 자라고 말한다.(582d)

7)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즐거움과 삶 자체와 관련한 논란에서(581d-e)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훌륭하게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득을 사랑하는 자나 명예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자 논변을 사랑하는 자이고 그가 칭찬하는 삶이 가장 참될 수밖에ἀληθέστατα εἶναι 없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이득 사랑하는 자는 부와 이득으로,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명예와 승리 그리고 용기ἀνδρείᾳ로 판정할 때나 가장 참된 판정을 내리는 자들이다(582e)

8)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이 지혜로운 사람을 판정관ὁ κριτὴς으로 삼아 영혼의 부분들 중에서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의 즐거움이 이 세 가지 즐거움들 가운데 가장 즐거울 것이며 또한 우리 가운데서 영혼의 이 부분이 다스리는 사람의 삶이 가장 즐거운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현명한 자가 자기 자신의 삶을 찬양할 때는 분명 그렇게 할 권위를 지닌 자κύριος로서 찬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전사와 명예 사랑하는 자의 즐거움이 두 번째, 이득 사랑하는 자의 즐거움이 맨 마지막이라고 말한다.(58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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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0c ‘영혼에 세 부분이 있으니까 즐거움 역시 각 부분에 고유한 것 하나씩 세 종류가 있고, 욕구epithymia와 다스림archē도 마찬가지로 종류가 셋일 것 같네.’ : 우리는 영혼 관련 언급할 때 ‘욕구’epithymia하면 영혼의 ‘욕구 부분’epithymētikon을 떠올리고 그 욕구 부분만이 욕구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는 세 종류의 욕구가 있다고 말한다. 즉 영혼의 이성 부분logistikon과 기개 부분thymoeidēs, 욕구 부분epithymētikon 모두 각기 욕구하는(사랑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영혼이 욕구하는 기능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보면 영혼의 한 부분으로서 ‘욕구 부분’에서 쓰인 ‘욕구’라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 ‘돈, 이득 등 물질적 욕구’를 의미하고, 여기서(580c)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욕구’라는 말에서 쓰인 ‘욕구’는 영혼의 욕구 부분은 물론 이성 부분, 기개 부분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 ‘영혼의 욕구 일반’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영혼에서 욕구 부분to epithymētikon만이 욕구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부분을 포함한 영혼 전체가 명예나 돈을 욕구하고 추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주의할 것은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는 세 종류의 욕구가 있다고 해서 한 사람의 영혼에서 이 세 가지 욕구가 따로따로 세 가지로 분리되어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분열증 환자에게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그 세 가지 욕구들은 한 사람의 영혼 내에서 영혼의 세 부분들의 내적 관계 맺음을 통해 결정된 하나의 욕구로 표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혼의 세 부분 가운데 어떤 부분이 주도하느냐에 따라 하나로 표출되는 욕구의 성격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성 부분의 지배 내지 다스림에 따라 영혼의 나머지 부분의 욕구들이 관계를 맺으면 가장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이성적인 욕구, 지혜와 배움을 사랑하는 욕구로 표출되고 그 에 따라 정의로운 개인이 된다. 그러나 기개 부분 또는 욕구 부분의 지배 내지 다스림에 따라 영혼의 나머지 부분의 욕구들이 관계를 맺으면, 이성 부분부터 욕구나 기개 부분의 도구가 되어 영혼의 욕구는 오로지 승리와 명예, 돈에만 집착하는 욕구로 표출되고 그에 따라 각각 부정의한 개인들이 된다. 결국 최종적으로 판정의 대상이 될 사람들의 부류는 그 사람의 영혼이 갖는 욕구에 따라 세 부류, 즉 ‘정의로운 자로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부정의한 자로서 명예를 사랑하는 자와 이득을 사랑하는 자’로 구분된다. 그리하여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삶은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명예 또는 돈을 사랑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삶은 없다고 생각한다.

* 580d ‘즐거움’hēdonē : 즐거움의 원어는 hēdonē이다. 즐거움은 좋은 경우도 있지만 나쁜 즐거움도 있다.(500c) <국가>에서도 몇 가지 예외, 이를테면 ‘이야기를 나누려는 욕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329d), ‘그의 욕구들은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485d) 등을 제외하면 대체로 부정적이거나 최소한 비도덕적인 함축을 지니고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hēdonē는 ‘즐거움’ 보다는 ‘쾌락’으로 더 많이 번역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hēdonē를 갖고 있고 욕구도 그에 상응하여 세 종류가 있으며(580d) 영혼의 욕구 부분만이 아니라 기개 부분, 배우는 부분 역시 각기 승리하는 것, 진리를 아는 것 등 뭔가 나름의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향해있다(581b)고 말한다. 이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영혼의 부분들 가운데 욕구 부분만이 아니라 나머지 부분들 모두 모종의 욕구를 갖고 있으며 hēdonē 또한 그것들 모두의 욕구 대상의 하나임을 보여준다. 영혼의 각 ‘부분’이 자기가 속한 ‘부분’의 성격에 따라 자신만의 즐거움(쾌락)과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이와 같은 견해는 <필레보스>뿐만 아니라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 3~5장에서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분석과도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을 마치 금욕주의의 선구인 양 여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곳에서도 hēdonē는 행복한 삶과 관련하여 주요한 관심사이자 주제로 제시되어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에게도 정서적으로 즐거운 감정은 대중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행복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요건의 하나이다. 다만 플라톤이 말하는 좋은 즐거움에는 즐거움의 지속성과 도덕성을 담보하는 현명함이 포함되어 있다.

* 581b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 : 영혼의 세 부분은 이성 부분logistikon,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나뉜다. 이곳에서 기개 부분과 욕구 부분은 이름 그대로 언급되는데 이성 부분만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으로 언급되고 있다.

* 581b ‘승리 사랑하는philoneikos 부분’ : philoneikos를 철자 그대로 ‘싸움neikē을 사랑하는’의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사실 당대 승리nikē에서 유래한 말들의 경우, 승리를 사랑하는 자는 투쟁 또한 사랑해야하기 때문에 i와 ei를 혼용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philoneikos는 앞뒤 문맥상 philonikos 즉 ‘승리를 사랑하는’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예 philonikos로 표기되어 있는 사본(MSS)도 있다. J. Adam. 해당 노트 참고.

* 581e ‘불가피한 것들’anankaias :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먹는 즐거움, 성적 즐거움 등은 생물학적 자기 보전을 위한 행위들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것들이지 따로 그가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즐거움은 아니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 580e ‘돈 사랑하는philochrēmatos 부분이라고 했는데’ : 소크라테스는 앞서 욕구 부분을 돈을 사랑하는 부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553c)

* 580e ‘먹을 것과 마실 것, 성적인 것 그리고 이것들을 뒤따르는 그 밖의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욕구들은 돈을 통해서 가장 잘 충족되기 때문’ : 욕구들은 앞서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에서 살폈듯이 필수적인 최소한의 물질적 생물학적 생존 욕구는 물론 필수적이지 않은 사치 욕구들과 온갖 종류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불법적 욕구 일체를 포함한다. 욕구 부분을 돈을 사랑하는 부분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은 그러한 욕구들 모두 돈이라는 교환가치를 통해 모두 충족되기 때문이다. 금전이 인간 욕망의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화신으로 자리 잡은 역사는 이토록 뿌리가 깊다.

* 581e 이때의 논란 : 앞서 세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란을 말한다. 그 논란은 단지 누구의 삶이 더 즐겁고 고통 없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진정 논란이 되어야 할 사안은 누구의 삶이 더 아름다운지, 수치스러운지 그리고 훌륭한지 못난지에 관한 것이다.

* 582b ‘누가 우리가 이야기한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empeirotatos 자인가’ : 이것은 언뜻 즐거운 경험의 많고 적음이 즐거움의 우위를 판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누가 보더라도 ‘누구의 삶이 더 즐겁고 고통 없는 삶일까?’의 문제와 ‘누가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 자인가?’ 문제는 논점상 별개의 문제이다. 비록 남보다 경험의 종류는 적더라도 특정 경험의 깊이와 느끼는 정도에서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즐거운 상태에서 가장 즐거운 삶을 산다고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실제 취지는 이러하다. 우선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모든 즐거움’은 즐거움 일반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 한 ‘배우는 즐거움’, ‘승리하는 즐거움’, ‘돈 버는 즐거움’을 말한다. 그 기준에서 보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3가지 즐거움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고, 그에 비해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머지 두 가지. 돈 버는 사람은 마지막 한 가지를 경험한 사람이다. ‘모든 즐거움에서 가장 경험이 많다는 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점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경험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단순히 경험이 많다가 아니라 첫 번째 즐거움이 다른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독보적인 즐거움이라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이 판정자격을 갖추고 있음은 경험의 종류에서도 많지만 그의 즐거운 경험에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그 만의 고유한 특성이 독보적으로 수반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 582c ‘있는 것’to on : ‘있는 것을 관조 또는 구경하는 것’tēs tou ontos theas이란 표현은 이미 제7권(517b, 525a, 532c)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다. 동굴의 비유에서 그 말은 동굴 바깥으로 나가 궁극적으로 좋음의 형상을 보는 것을 뜻한다. 글라우콘의 이 말은 두 번째 증명이 필연적으로 세 번째 증명 즉 형이상학적 방식에 근거한 증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 582e ‘지혜 사랑하는 자이자 논변 사랑하는 자가 칭찬하는 것이 가장 참될 수밖에 없습니다.’ : 즐거움과 가장 참됨을 연결하는 이 구절 역시 이 두 번째 증명이 세 번째 증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가 판정관인 한 그의 칭찬은 곧 그의 판정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원어는 ‘ho philosophos’이다. 그 말은 보통 ‘철학자’로 옮기지만 이곳에서는 지혜, 욕구, 이득 등 욕구의 대상을 각각 드러내기 위해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는 말로 옮기고 있다. 

* 583a ‘이 판정관은’ : 행복 관련 비교 판정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대화자들이 판정 능력을 갖춘 척하자고 말하고(577b) 시작되지만, 이곳의 판정관은 문맥상 앞 문장의 ‘현명한 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판정의 권위자인 동시에 자신이 가장 즐거운 삶을 사는 사람임을 자임하고 있다. 그럼에도 형식상 자기가 자기를 판정하는 격인지라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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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증명은 인간 영혼에 기초한 증명 즉 일종의 심리학적 근거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그 요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개인의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여 세 종류의 즐거움, 욕구, 다스림이 있다.

2) 즐거움과 사랑(욕구)의 관점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은 배움을, 기개 부분은 승리와 명예를, 욕구 부분은 돈과 이득을 사랑(욕구)하고 그것의 획득을 즐거워한다.

3) 다스림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 영혼의 세 부분 중 어느 부분이 다스리느냐에 따라 인간도 지혜를 사랑하는 자, 승리하는 자, 이득을 사랑하는 자로 나뉜다.

4) 이 들 중 누구의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인지를 차례로 묻는다면 저마다 자신의 삶, 자신이 누리는 즐거움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5) 이때 이들의 논란은 누가 더 아름답고 추한지가 아니라 누가 더 즐겁고 고통 없는 자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일 뿐이다.

6) 그렇다면 이들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경험과 현명함, 논변을 제시하고 그 기준에 기초하여 우선 경험을 기준으로 ‘우리가 이야기한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 자’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꼽는다. 특히 ‘있는 것’을 관조하는 즐거움은 그만이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게다가 현명함을 기준으로도, 판정 도구인 논변을 기준으로도 지혜로운 사람만이 그 도구를 갖추고 있다.

7)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만이 판정관의 자격을 갖고 있다.

8)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사람인 판정관의 입을 빌려 결론적으로 세 인간들 중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이라 판정한다.

* 첫 번째 증명이나 이번 두 번째 증명 그리고 세 번째 증명 모두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를 판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두 번째 증명은 행복을 즐거움에 연관 지어 누구의 삶이 가장 즐거운지를 판정하려 한다. 일단 판정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영혼의 부분들이 욕구하는 즐거움에 상응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 즉 배우는 것을 즐거워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승리를 즐거워하는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 돈 벌기를 즐거워하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판정 과정은 이 중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가장 즐겁다는 것을 밝히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세 부류의 사람들 중 지혜로운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고 나머지 두 사람 부정의한 사람임을 말해 준다. 증명을 마친 후 ‘이제 이렇게 이 두 판에서 정의로운 자가 부정의한 자를 두 번 거푸 이겼다’(583b)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그것을 분명하게 뒷받침한다.

* 사실 증명 과정에서도 우리는 그들이 부정의한 자들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곳에서 그들을 포함한 세 부류의 사람들은 영혼의 세 부분 중 ‘어느 부분이 다스리는지archēi에 따라’(581c) 구분된 사람들이다. 다만 이들 중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분업의 측면에서 분명 이상 국가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들 자신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이성의 다스림을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즉 이곳에서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성의 지배에서 ‘언제나 전적으로’aei holon(581b)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부정의한 것이다. 이상 국가에서 전사계층이 가장 명예를 사랑하고 가장 용맹하면서도 정의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리고 생산자 계층이 가장 이득을 사랑하고 가장 생산적이면서 정의로울 수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처럼 자신의 기개 부분이나 욕구 부분이 아니라 영혼의 이성 부분의 다스림에 따르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나라에서 그들은 ‘절제’sōphrosynē의 덕을 통해 자신들의 욕구가 가장 극대화되고 다른 계층들과도 최선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컨대 그들은 그 절제의 덕에 대한 앎을 통해 정의로운 나라에 걸맞은 자신의 분업적 역할에 따라 각기 정의로우면서 명예와 승리를 사랑하는 가장 용맹한 사람, 정의로우면서 돈과 물질을 사랑하는 가장 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부정의한 사람들은 쉽게 말하자면 각각 타락한 정치체제의 하나로서 명예정과 과두정을 닮은 명예정적인 사람, 과두정적인 사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영혼의 ‘욕구 부분’이 필수적인 욕구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불법적인 욕구로 세분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타락된 형태로 ‘전적인 자유’exousia를 사랑하는 민주정적인 사람, 폭력적 지배를 사랑하는 참주정적인 사람 즉 최악의 비교 대상으로서 참주까지를 두루 포함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 두 번째 증명은 비교 판정의 기본 목표가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비교하는 것임에도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사람 즉 지혜로운 사람의 우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다른 사람들의 저열성은 경험의 가짓수가 적다는 것 외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에 따라 두 번째 증명은 판정 기준 상 지혜로운 사람의 경험만이 갖는 적합성 내지 그들의 즐거움이 수반하고 있는 독보적 탁월함들(경험, 현명함, 논변)에 관한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 즉 누구의 삶이 더 즐거운가를 결정하는 관건은 누가 더 많이 그러한 탁월함들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살펴보니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러한 탁월함 내지 능력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증명은 궁극적인 비교 대상으로서 참주까지 살펴볼 필요 없이 곧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최종 우승자로 결론 내리고 있다. 그 만큼 정의로운 사람은 즐거움과 관련해서도 그 자체로 우월한 사람이다. 그래서 두 번째 증명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아예 판정관으로 내세워 최종적인 우승자로 결정하는 형식을 취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것은 내용상 판정의 대상인 자가 스스로에게 우승을 부여하는 격으로 누가 보더라도 공정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한 플라톤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우리가 가질 법한 그러한 의구심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os 즉 철학자란 곧 자기 객관화에 가장 능한 자라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이상 따로 설명할 사안이 아니다. 물론 오늘날 트럼프 같은 현대판 참주들은 물론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의 행태를 보면 자기를 객관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를 새삼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철학에 대한 플라톤의 정의를 토대로 그의 논증 과정 전체를 들여다본다면 정합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그 자체로 완전한 자기객관화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토대이다. 그것을 담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극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자면 이 논증은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이념적 이상과 권위kyrios를 재확인하는 것이자 그 객관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583a) 그 만큼 플라톤에게 철학과 지성은 현실의 삶을 넘어서기 위한, 정의로운 삶을 구축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토대이자 근본 조건이다. 그러나 철학의 지적 객관성이 곧 철학자의 지적 객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철학과 철학자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그 어느 주제보다 철학과 철학자의 정의 그리고 철학 교육에 큰 비중을 두고 <국가>의 백미라고 부르는 제5권에서 제7권 전체에 걸쳐 매우 주도면밀한 문답을 전개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이 <국가>의 주제를 한마디로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실 제9권 말미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나라와 개인의 정의와 행복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말로 세운 이상 국가가 그러한 교육이 다가가야 할 하나의 본이자 푯대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에 따라 플라톤은 말년에 <법률>을 통해 현실에서 그 이상을 최선으로 구현하기 위한 현실적 실제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다. 현실에서 철학자란 자신이 도달한 신념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 자체 참된 것이라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신념을 중시하고 실천하되 그것에 이르기까지 견지해왔던 열정과 긴장 그대로 늘 그것의 진리성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면서 끊임없이 다듬고 보완 정련해가는 사람이다.

* 위와 같은 측면에서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경험만이 현명함을 동반한다.’(582d)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핵심적 덕목이 다름 아닌 ‘현명함’임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명함의 원어는 phronēsis이다. phronēsis는 보통 실천적 문제 해결 국면에서 요구되는 총체적 인식과 지혜(practical wisdom), 분별(prudence) 내지 슬기로움을 의미한다. <국가>에서도 phronēsis는 이곳을 포함해서 대체로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다.(559b, 571d, 586a, 591b, 621b, 621c) 특히 그 말은 실천과 관련하여 ‘욕구를 지배하는 것’(431d)으로 또는 ‘완력과 신체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432a, 461a, 518e), ‘습관과 훈련에 의해 얻어지는 신체의 덕과 달리 신적인 덕으로’(518e) 언급되기도 한다. (참고로 정암학당 역본은 ‘현명함’으로, 박종현 역본은 ‘분별(슬기)’로 옮기고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플라톤은 <국가>의 모든 논의를 마무리하는 제10권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신들과도 친구 되고자 한다면 현명함을 동반한 정의를 모든 방법을 다해 실천하는 것’(621c,d)이란 말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현명함’은 어떤 개인의 좋음이나 이익을 위한 현명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좋음과 이익과 관련하여 실천적 정치사회적 현실 영역에서 적용의 보편성을 담보하는 정의로운 앎이자 지혜를 의미한다. 이곳에서도 현명함의 덕(518e)은 ‘있는 것’으로서 현실의 삶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경험을 규정하는 독보적이고도 핵심적인 능력으로 제시되고 있다.

* 이 두 번째 증명에서 언급되고 있는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 즉 영혼의 명예 부분, 욕구 부분의 다스림에 지배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리며 산다고 믿고 있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경험이 갖는 특성 즉 현명함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 고결한 정신적 즐거움과 관련한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정서 상태로만 기준으로 할 경우 누구의 삶이 가장 즐거운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즐거움과 고통은 사람에 따라 주관적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참된 즐거움은 현명함의 덕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일상적 즐거움들과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성적 탐닉이나 마약 같은 것이 가져다주는 찰나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은 반복을 거듭할수록 결국 고통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선행을 베풀거나 진리를 배울 때 느끼는 즐거움은 좋음과 현명함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어서 늘 마음을 채우고 오래남아 누구든 칭송하고 좋아한다. 이것은 즐거움과 관련한 판정에서 사람에 따라 갈리거나 다툼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모종의 객관적인 기준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러한 참된 실재를 관조할 수 있고 그것에 근원하는 현명함과 논변을 토대로 참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는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이다.

* 그런데 이곳 <국가>의 논의대로 거창하게 이상적인 나라와 개인의 영혼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 평범한 일상의 현실 차원에서도 앞서 말한 현명함의 덕을 남달리 특별하게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남을 위한 봉사와 희생, 자신의 내적 갈등은 물론 다른 사람간의 갈등과 관련해서도 화해와 포용의 능력에서 남다르게 뛰어난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부처님의 열반의 즐거움까지는 아닐지라도 –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감각적 즐거움은 물론 명예욕 인정 욕구에도 시달리며 살아온 경험도 있겠지만 – 자신의 현명함을 통해 비록 몸은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과 좋음과 기쁨을 함께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은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만의 경험을 갖고 있다. 아무리 많고도 즐거운 경험들일지라도 현명함을 동반하지 않았을 경우 그들에게 그것들은 그저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양적인 것의 반복에 불과하다. 이처럼 오늘날 일상의 현실에서도 현명함의 덕을 갖춘 사람들은 참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다. 현명함이 결여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즐거움은 얼마 가지 않아 결핍에 시달리며 고통으로 바뀌거나 권태를 불러일으킨다.

*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즐거움을 안겨주는 현명함까지는 갖추고 있지 않아도 일상의 선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 이른바 소확행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능력 내지 탁월함은 앞서 언급한 현명한 사람들처럼 사회적 좋음이나 모두의 즐거움까지 아우르는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의 현실을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 현명함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제는 소확행이 개인주의 사회가 갖는 구조적 불행의 조건까지 뒤바꿔 놓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플라톤의 관심사는 그 구조적 불행을 전복할 수 있는 근본 원리와 조건들을 찾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여전히 현실적 삶과 관련한 문제들과 그 총체적 연관들을 근본에서 따져 묻고 그에 대한 총체적인 해결 방식 내지 원리를 탐색하는 형이상학이다.

*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관조하는 즐거움을 포함하여 현명함을 수반하는 경험과 논변을 독보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곧바로 그에게 즐거운 삶과 관련한 판정관의 자격을 주고 그가 내린 판정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 두 번째 증명을 완성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즐거움이 다른 즐거움보다 더 즐거운 근거가 과연 무엇인지 왜 참됨과 현명함을 비롯한 지혜로운 사람들의 특성들이 보다 크고 많은 즐거움의 근원이 되는 것인지 이제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논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세 번 째 증명을 통해 그 즐거움의 진리성 즉 즐거움들이 과연 얼마나 참된 실재에 기초해 있는가를 묻는 궁극의 탐구 방식 즉 존재론적 방식을 끌어와 철학자와 참주 중 누가 더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지를 판정해 내려 한다. 이곳에서 이미 소크라테스가 시종일관 시사하고 있듯이(581e) 결국 플라톤에게 가장 즐거운 삶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즐거움의 양상이 아니라 참된 형이상학적 실재로서 그 즐거움이 갖는 ‘좋음과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판가름된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3) 세 번째 증명 : 즐거움의 존재론적 구분에 기초한 증명(583b-588a)

플라톤의 <국가> 강해(8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7)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첫 번째 증명 : 정치체제와 개인의 내적 구조에 기초한 증명(576b-580c)

 

[576b-580c]

* 소크라테스는 첫 번째 증명ἀπόδειξις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최악κάκιστον의 인간이란 한마디로 꿈ὄναρ에서나 가능한 상태를 깨어 있을 때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가장 참주정적인 성향을 타고난 자가 독재자μόναρχος가 되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576b) 대중πολύς에게는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그러한 자가 가장 사악한πονηρότατος 자이자 가장 비참한ἀθλιώτατος 자이다. 그리고 나라와 개인이 닮았다ὁμοιότητος는 점에서 덕ἀρετῇ과 행복εὐδαιμονίᾳ의 문제도 나라와 개인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576c) 그리고 참주정체제의 나라와 왕정체제의βασιλευομένης 나라를 덕과 행복과 관련하여 비교 판정κρίνειν할 때는 그 주변의 몇몇 사람이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576d), 나라 곳곳을 살펴보고서ἰδόντες 의견δόξα을 내놓아야 한다. 글라우콘은 이 말에 동의한 다음, 참주정체제의 나라가 가장 비참하고, 왕정체제의 나라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말한다.(576e)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비교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사유διανοίᾳ를 통해 인간의 성품ἦθος 속을 꿰뚫어 볼 수 있고διιδεῖν, 참주와 한 지붕 아래 살면서συνῳκηκότος 공적 사적 모든 행동이나 모습을(577a) 모두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판정 능력과 경험이 있는 사람인 척 해보자’προσποιησώμεθα고 제안한다.(577b)

* 이렇게 비교 판정을 위한 준비를 마친 후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으로 첫 번째 증명을 시작한다. 그 내용을 정리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와 사람의 유사성ὁμοιότητα을 상기하면 참주정체제의 나라는 자유로운ἐλεύθερος 나라가 아니라 노예 상태δοῦλος에 있는 나라이다. 그곳에서도 주인δεσπότης들과 자유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중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전체로 보면 그 나라는 가장 훌륭한 부분까지도 수치스럽고ἄτιμος 비참하게 노예 상태로 있는 나라이다.(577c) 사람이 나라와 닮았다면 나라와 동일한 구조τάξις가 필연적으로 사람에게도 있다. 그렇다면 그 나라를 닮은 참주정적 인간의 영혼은 숱한 예속δουλεία과 자유인답지 못함ἀνελευθερία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가장 훌륭한 부분들은 노예 노릇을 하는 반면, 작은 부분이자 가장 사악하고 광기 가득한 부분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 있는 나라는 그 어떤 나라나 보다도 원하는 바ἃ βούλεται를 못 하는 나라이므로 영혼 전체ὅλη ψυχῆς에서 보면 영혼 또한 원하는 바를 가장 못할 것이다.(577d) 그런 영혼은 폭력적인 욕망의 침οἶστρος에 늘 쫓기며 혼란ταραχή과 후회μεταμέλεια로 가득 차 있다.

2) 그리고 참주정체제의 나라는 부유하긴πλούσιος커녕 가난할πενομένη 수밖에 없어(577e)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늘 가난하고πενιχρός 채워지지 않은ἄπληστος 상태로 있고 또 두려움φόβος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나라만큼 비탄ὀδυρμός과 한탄στεναγμός, 통곡θρῆνος과 고통ἀλγηδών이 더 많이 발견되는 곳은 없다. 이에 따라 사람의 경우에도, 참주정적인 인간보다 더 많이 욕망ἐπιθυμία과 욕정ἔρως으로 미쳐버린 경우 또한 없다.(578a) 그러므로 바로 이 나라가 가장 비참한 나라로 판정된다.(578b) 그리고 특히 최고로 비참한ἀθλιώτατον 자는 이들 사인(私人)ἰδιώτη으로서 참주정적인 인간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어떤 불운συμφορά을 만나 실제 참주가 된 자이다.

3) 하지만 가장 중대한 문제, 즉 좋은 삶과 나쁜 삶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논의를 통해τῷ τοιούτῳ λόγῳ 보다 더 충실히 고찰해야 한다.(578c) 이를 위해 우선 나라에서 노예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πλούσιος 개개인ἑνὸς ἑκάστου τῶν ἰδιωτῶν들을 예로 들어보자. 이런 사람들은 많은 자를τὸ πολλῶν 다스린다ἄρχειν는 점에서 참주들과 닮았다. 그런데 이들은 나라 전체πᾶσα ἡ πόλις가 개개인을 돕고 있기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않고 가노οἰκέτης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578d) 그러나 만일 어느 신이 오십 명 또는 그 이상의 노예를 거느린 한 사람을 그의 재산οὐσία, 노예, 가족과 함께 어느 외딴곳에다 갖다 놓았다고 해보자. 이 경우 그는 나라전체가 주는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으므로 자신과 가족이 노예들에 의해 살해되지 않을까ἀπόλοιντο 두려움φόβος에 떨게 될 것이다.(578e) 물론 그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노예들 가운데 몇몇의 비위를 맞추고θωπεύειν 많은 것을 약속해주고 자유인으로 놓아주면서 그들의 아첨꾼κόλαξ이 되지만, 자기 주변에 다른 자가 주인 되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를 극형ἔσχατος τιμωρία에 처하려는 사람들이 이웃으로 살고 있을 경우 그는 온통 적πολέμιος들에 둘러싸여 감시당하면서φρουρούμενος(579a) 한층 더 엄청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참주의 성향을 갖고 있는 자들은 온갖 종류의 숱한 두려움과 욕정으로 가득 차 감옥δεσμωτήριον에 갇혀 있는 삶을 보낸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탐심λίχνος으로 가득하지만, 여느 자유인들처럼 구경이나 하고 싶어 하는 그 어떤 것도 못한 채 여인네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집안에 틀어박혀(579b) 다른 사람을 시기φθόνος하며 지낼 수밖에 없다. 어떤 불운에 의해 실제 참주가 된 자는 이처럼 나쁜 것들을 더 많이 거둬들이면서 마치 어떤 자가 몸σῶμα이 병들어서(579c) 자기 자신도 제어하지 못한 채 그런 몸으로 일생을 다른 몸뚱이들σώματα과 경쟁하고ἀγωνιζόμενος 싸우면서μαχόμενος 고달프게χαλεπώς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런 자야 말로 완전히 비참한 상태에 있는 자이다.(579d)

*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요컨대 진짜 참주는 가장 큰 아첨θωπεία과 굴종δουλεία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δοῦλος이고 가장 못난πονηροτάτων 자들의 아첨꾼이며(579d). 또한 영혼 전체의 측면에서 그런 자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자이며,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결핍된ἐπιδεής 자이자 가난한 자이다. 결국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와 닮은 상태에 있는 참주는 평생 두려움으로 차 있고 경련σφαδᾳσμός과 고통ὀδύνη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579e) 이런 사람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자신이 잡은 권력 ἀρχὴ 때문에 이전보다 더 시기심 많고φθονερός 믿을 수 없고ἄπιστος 부정의하고ἄδικος 친구도 없고ἄφιλος 불경스럽고ἀνόσιος 온갖 나쁜 것κακία들을 받아들이고 키워내는 자이자 이 모든 것들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까지도 불운한δυστυχής 자로 만드는 자이다.(580a)

*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첫 번째 증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논의를 가무단의 공연에 비유하여 최종 판정관이 공연 후 최종 우승작과 순위를 발표하는 것처럼 글라우콘에게 최종 판정관을 맡긴다. 이에 글라우콘은 논의 순서 즉 가무단χορός의 공연에 등장했던 순서대로 순위를 판정하고(580b)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어떠한 자인지 인간들과 신들 모두가 알든 모르든 간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래와 같이 선언한다. ‘가장 뛰어나고ἄριστος 가장 정의로운δικαιότατος 자가 가장 행복한εὐδαιμονέστατος 자이며 그 사람은 가장 왕정적인βασιλικώτατος 사람이자 자신을 왕정체제로 다스리는 자이다. 반대로 가장 나쁘고 가장 부정의한 자가 가장 비참한 자로서 이 사람은 가장 참주정적인 사람이자 자신과 나라를 최대한 참주정체제로 다스리는 자이다.’(58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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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6e ‘누구에게나 자명한 사실’ : 소크라테스가 전체를 살펴보고 비교 판정과 관련한 의견을 내놓자고 했음에도 글라우콘은 결론에 해당하는 말을 미리부터 자명한 사실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비교 판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전에 정의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동의한 것이 옳았다면’(576a) 지금까지의 논의로만으로도 대화자들끼리는 이미 논의의 결론이 충분히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중들 사이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대중에겐 다양한 의견이 있다’(576c)는 소크라테스의 첨언은 앞으로 제시될 증명들이 기본적으로는 지금까지의 펼쳐온 논의들을 마무리하고 재확인하는 결론적 논의이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을 가진 대중들을 최대한 설득하기 위한 목적도 크게 고려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주의하고 있지 않지만 트라쉬마코스는 제2권 이후에도 이 대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실제로 그는 제5권에서 대화에 끼어들기도 한다.(450b) 플라톤의 설정대로라면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곁에서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트라쉬마코스를 의식하고 있다.

* 577b ‘우리가 바로 그것을 판정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자 참주정적인 인간들을 실제로 만나 본 사람인 척 해보길 바라나?’ :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인 증명에 들어가기 전에 그 증명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그 증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갖추고 있어야 할 자격에 대해 언급한다. 요컨대 사유에 기초한 이론적 판단력도 중요하지만 관련된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겪은 경험 또한 중요하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자신과 대화자들이 그러한 경험 관련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특별한 언급 없이 바로 자신들을 그러한 자격을 갖춘 사람인 양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이것은 일단 형식상 논리적 비약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처사이다. 어떤 척을 하자고 말하는 것도 소크라테스에게 어색한 일이다. 아마도 이글의 저자 플라톤 자신이 아테네와 시켈리아에서 직접 참주정의 참혹상을 경험한, 그것도 혹독하게 경험한 당사자임을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랬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이 언급은 판정에 있어 사유를 통한 판단력뿐만 아니라 경험이 갖는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 577c ‘가장 훌륭한 부분까지도’ : 타락하기 이전 정치체제에서 통치 및 수호자 역할을 했던 사람들, 즉 나라의 구조 상 통치자계층과 수호자 계층을 말한다.

* 577d ‘동일한 구조’ : 여기서 ‘구조’의 그리스어 원어는 taksis이다. taksis는 원래 공격 또는 방어에 가장 효율적인 전투 대형을 갖춘 상태 즉 질서 잡힌 ‘대오’의 뜻을 갖고 있는 군사 용어이다. 그래서 taksis는 문맥에 따라 이곳처럼 ‘구조’(577d, 618b)라는 뜻 외에 ‘대오’(468a, 471d, 522d,e, 525b), ‘질서’(561d,587a), ‘순서’(620d), ‘줄’(617d)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여기서 구조는 내용적으로 나라의 세 계층과 개인 영혼의 세 부분 간의 질서를 말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구조가 잘 잡혀있다는 것은 각 계층과 부분의 위계와 역할이 본성에 맞게 질서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구 부분은 본성상 이기적 물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어 타자의 이익을 배려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이성 부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플라톤에게 지배 또는 다스림archein은 타자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려에 기초한 구성원 모두의 조화와 공존을 도모하는 일이다. 구조가 왜곡되면 다스림도 왜곡되어 조화와 공존은 무너진다.

* 577d ‘참주정체제의 영혼’ : 참주정적 인간의 영혼, 참주정적 인간의 극치가 참주라는 점에서 극명하게는 참주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다.

* 578a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늘 가난하고 채워지지 않는 상태로 있을 것이네’ : <고르기아스> 416e, 493a-494e, 521a, <파이드로스> 279c, <편지들> 355c 참고.

* 578e ‘오십 명 또는 그 이상의 노예’ : 기원전 5세기 고대 아테네에서 한 가구 당 노예의 수는 보통은 3명에서 많으면 12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50명 이상의 노예는 매우 부유한 소수 부자들의 경우일 것이다. 물론 대부호로 알려진 당대 니키아스는 1,000명에 달하는 노예까지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579a ‘신이 또 다른 여러 사람을 그 사람 둘레에 이웃으로 살게 한다고 해보세.’ : 여기서 ‘참주 둘레에 사는 이웃’은 앞서 자유인과는 다른 여러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참주가 갖고 있는 패권욕, 또는 그 참주의 전제 정치를 못 마땅하게 여겨 그를 제거하기를 원하는 주변 국가들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앞서 참주가 노예들 가운데 풀어준 자유인과 달리 민주정 치하에서 전적인 자유에 길들여져 있어 여전히 간섭을 싫어하거나 참주의 착취에 시달리며 참주정에 적대감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자유인들 또는 과두주의자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579b ‘여인네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집안에 틀어박혀’ : 고대 아테네를 비롯해 당대 그리스 폴리스 일반의 관습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은 다 드러난 공간에서 공공연히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조차 금지되었다.(<법률> 781c)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이 <국가>에서 여성을 통치계급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남성들과 함께 공동 식사하도록 한 것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로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플라톤은 오직 철학만이 그러한 관습적 편견과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여겼다.

* 579d ‘다른 몸뚱이들sōmata과 경쟁하고 싸우며 살아가도록 강제’ : 다른 몸뚱이들은 다른 참주정적인 인간들을 가리킨다. 지배 욕구에 찌든 참주정적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평생토록 서로 간 권력 투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580a ‘우리가 전에 말한 것들까지도’ : 이미 앞에서도 참주정적 인간들이 축복 받은 필연인 양 평생 대중들의 미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567a), 그리고 그 누구의 친구도 되지 못한 채 주인 아니면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576a)이 언급된 바 있다.

* 580b ‘마치 최종 판정관kritēs이 결과를 발표하듯 자네도 내게 그렇게 해주게.’ : 당대 아테네인들은 가무단의 공연을 심사할 때 아래와 같이 매우 엄격하고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 심사위원을 선정했다. 먼저 축제가 열리기 전 평의원에서 후원자들과 함께 심사위원 후보들을 선발한 후 이들 명단을 부족별로 하나씩 총 10개의 항아리에 담았다가 경연 당일 각 항아리에서 한 명씩 총 10명의 심사위원을 뽑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중 다시 추첨된 5명의 최종판정관이 앞서 심사위원들이 적은 투표함을 열어 우승 가무단과 순위를 확정한 후 전령을 통해 발표했는데 이곳 최종 판정관은 위와 같은 가무단 공연 심사과정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최종판정을 자신이 아니라 글라우콘에게 맡기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플라톤의 대화는 대화자들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거나 알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자들과 문답을 나누며 비판적인 설득을 통해 함께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에게 최종 판정을 맡기고 그 내용을 받아 직접 다시 발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함께 동일한 진실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준다.

* 580b ‘마치 가무단choros이 등장하듯 그들이 등장했던 순서라고 판정합니다.’ : 가무단 공연 심사의 경우 우승 가무단을 발표할 때 동시에 순위도 함께 발표하듯이 이곳에서도 그에 맞추어 최종 판정대상으로서 우승자인 철인왕정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논의된 타락한 정치체제들이 순서대로 함께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논의의 목표대로 철인왕정의 최종적인 비교 판정 대상은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이다.

* 580c ‘그들이 어떠한 자인지 인간들과 신들 모두가 알든 모르든 간에’ : 아데이만토스가 제2권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이 비교 판정과 관련한 답변을 처음으로 요청할 때 아래와 같이 말한 것을 환기시키고 있는 부분이다. ‘신들과 사람들에게 알려지든 그렇지 않든, 정의는 좋은 것이고 부정의는 나쁜 것인지도 보여 달라’(367e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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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소크라테스는 애초 계획한 대로 타락한 정치체제들과 그것을 닮은 사람들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과연 누가 행복한가를 비교 판정하는 논의(576b-592b 제9권 끝)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비교 판정을 위해 이곳에서 제시하고 있는 증명들은 아래와 같다.

1) 첫 번째 증명 : 정치체제와 개인의 내적 구조에 기초한 증명(576b-580c)

2) 두 번째 증명 : 영혼의 세 부분에 기초한 증명(580c-583a)

3) 세 번째 증명 : 참된 즐거움과 거짓 즐거움의 구분에 기초한 증명(583b-588a)

* 플라톤이 이 세 가지 증명에서 각각 사용하는 논거들은 크게 정치적 논거, 심리학적 논거, 그리고 형이상학적 논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첫 번째 증명은 정치체제로서 나라와 개인 사이의 유사성에 기초하고 있고, 두 번째 증명은 영혼의 3부분 즉 이성적 부분, 기개 부분, 욕구 부분 각각에 상응하는 즐거움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 번째 증명은 플라톤의 존재에 관한 이론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 내지 방법은 사실 대화편 전체를 통해서도 사용된 것들이다. 그 내용을 크게 구분해보자면 제2권에서 제4권까지는 정치적 방법이, 제8권에서 제9권까지는 심리학적 방법이, 제5권에서 제7권까지는 형이상학적 방법이 채택되고 있다. 그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 플라톤이 지금 그러한 방법들을 모두 동원해 종합적인 관점에서 최종적인 마무리를 수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 증명을 토대로 ‘부정의가 아니라 정의야 말로 이익’(588b-592b 제9권 끝)임도 덧붙인다. 이로써 정의와 행복이라는 <국가>의 기본 논제를 촉발시킨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형식에서나 내용에서 전적으로 잘못된 것임이 밝혀진다. 이번 강해는 우선 첫 번째 증명 부분을 다룬다.

* 첫 번째 증명의 핵심은 정치제제로서 나라와 개인이 갖는 유사성(577c), 즉 나라와 개인의 동형적 구조(577d)에 입각하여 그 내적 구조를 전체적으로 살피는 방식으로 참주정 체제의 비참성을 드러낸 후 그것을 근거로 그것을 닮은 참주의 비참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행복이건 비참함이건 나라와 개인의 동질적 구조가 빚어내는 양태들은 각기 그것을 구성하는 계층들과 영혼 부분들의 내적 관계를 ‘전체holos’(576d)로서 파악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요컨대 첫 번째 증명의 핵심은 나라와 개인이 갖는 유사성(577c)을 토대로 이와 같은 3계층 또는 영혼 부분들의 내적 관계 내지 질서를 개별차원이 아니라 ‘전체’ 차원에서 파악하는 방식으로(576d)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미 철학자의 행복은 이러한 영혼의 내적 구조가 전체적으로 조화와 질서를 갖추었다는 것으로 뒷받침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참주의 비참성은 이러한 영혼의 내적 구조가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하고 위계나 질서를 갖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 구조가 역전된 것이다.

* 이와 같은 방식에 따라 소크라테스가 첫 번째 증명을 통해 종국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참주의 비참한 삶의 양상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579d-580a)

1) 참주는 가장 큰 아첨과 굴종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이다.

2) 참주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이다.

3) 참주는 평생토록 친구도 없고 고립된 채 두려움과 경련, 고통으로 가득한 불운한 삶을 보낸다.

* 그리고 위와 같은 참주의 비참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몇 가지 논거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논거의 내용들이 상호 중첩되어 있어 분명하게 구분해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대한 그것들을 차례대로 정리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참주는 가장 큰 아첨과 굴종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이다.(577c-577e)

참주정이 극단적인 자유로부터 생겨난 최대의 예속이자 가장 야만스러운 노예 상태의 정치 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밝혀진 사실이다.(564a) 그리고 참주가 누군가의 주인 아니면 노예로 산다는 것도 이미 밝혀졌다.(576a) 나라와 개인의 유사성에 기초한 증명 방식에 따른다면 이것만으로도 참주가 진짜 노예라는 증명 과제는 증명된 셈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이곳에서는 정치체제의 내적 구조에 대한 전체적인 분석을 토대로 위계질서 붕괴에 따른 참주정과 참주의 노예 상태에 대한 증명이 수행된다. 즉 참주정은 그 내적 구조를 전체적으로 분석해 보았을 때 위계질서가 무너져 가장 작은 부분인 참주가 나머지 생산자 계층을 비롯해 가장 훌륭한 부분인 수호자 계층까지 노예로 만들어 버린 정치체제이다.(577c) 이에 따라 참주의 영혼 또한 참주정을 닮아 내적 구조상 위계와 역할이 전도되어 전체적으로 무질서 상태가 되고 만다. 물론 참주의 영혼에서 욕정에 사로잡힌 욕구 부분이 거꾸로 기개 부분과 이성 부분을 폭압적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성과 기개 부분이 노예이지 참주의 영혼은 노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참주의 영혼은 늘 욕망의 침에 쫓겨 다니면서 영혼 전체의 이익이 아닌 욕구 부분의 이익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주인다운 다스림과는 전혀 무관한 욕정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에서 ‘영혼 전체를 놓고 말한다면’(577e) 참주정 나라가 그렇듯이 참주의 영혼은 그 자체로 욕정의 노예일 뿐이다. 그래서 참주의 영혼은 혼란과 후회로 가득 차 있다.(577e)

 

2) 참주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이다.(577e-

578a)

참주가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임은 참주가 노예라는 앞서의 논거와 연동되어 있다. 그래서 내용도 짧고 간단하다. 한마디로 참주정 체제의 나라는 노예 상태에 있는 나라이므로 그 어떤 나라보다도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못하는 나라이다.(577d) 그러므로 참주정 체제의 영혼, 즉 참주의 영혼도 원하는 바를 가장 못할 것이다.(577d) 요컨대 참주정 체제의 나라가 가난한 것이 필연적인 한,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가난하다. 물론 참주정의 나라에서 나라 전체는 가난해도 현실의 참주는 풍요하면 풍요했지 결코 가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부와 가난은 재물의 크기가 기준이 아니라 원하는 바를 이루냐 못 이루냐가 기준이다. 욕망의 노예가 된 참주는 아무리 많은 것을 원해도 그것을 못 이루는 상태로 늘 결핍상태에 있다. 가난하다는 것은 결핍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비록 적은 재산을 가졌을지라도 결핍을 못 느끼면 그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부와 가난 역시 결국은 영혼의 내적 구조가 질서를 갖추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성이 아닌 욕구에 지배되는 참주는 그래서 늘 결핍에 시달리는 가난한 자이다.

 

3) 참주는 평생토록 친구도 없고 고립된 채 두려움과 경련,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보낸다.(579b-580a)

참주정의 나라와 참주정적 영혼은 욕망의 노예 상태에 있어 늘 가난하고, 결핍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나라보다 비탄과 한탄, 통곡과 고통이 더 발견되는 나라는 없다. 게다가 이런 나라와 그와 같은 사람은 두려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578a) 이런 점에서도 참주정적인 인간은 단연 가장 비참하다.(578b) 특히 참주정적인 인간이면서 불행하게도 어떤 불운을 만나 사인이 아닌 실제 참주가 된 자가 한결 더 비참하다.(578b-c) 소크라테스는 참주가 늘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참주들과 닮은 부유한 개개인 즉 노예를 많이 거느린 자들의 경우를 예로 든다.(578e) 이들은 사실 나라에서 그 노예들을 두려워하며 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라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은 제도와 법률을 통해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신들이 이 부유한 개개인들과 그들의 노예들을 나라가 그들을 도울 수 없는 상태, 이를테면 어느 외딴 곳에 떨어트려 놓았다고 가정할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그곳에서는 노예들이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 부자들과 가족들은 노예들에 의해 재산을 뺏기는 것은 차치하고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가 늘 상존해있다. 이것은 참주나 기득권자들이 나라의 제도와 권력에 기대어 자신의 사적 탐욕을 거침없이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정의한 그들의 삶 자체가 얼마나 많은 적대적인 사람들을 나날이 키워내고 있는지 또 그에 따라 주위 사람들에 대한 얼마나 많은 의심과 공포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한다. 설사 이런 고립된 상황이 두려워 노예들 가운데 비위를 맞추어 어떤 자를 자유인으로 풀어주고 그들에게 아첨하며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날이 갈수록 전적인 자유에 길이 든 자유인들이 참주의 지배에 불만을 가질 경우, 또는 참주의 패권욕과 전제정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주변 국가들이 있을 경우, 참주는 그들과도 적대적이 되어 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의심과 공포, 적들의 감시 속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집에 틀어박힌 채 고립된 삶을 살게 된다.(579a-c)

* 혹자는 현실에서 성공한 참주정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역사를 들여다보면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를 통해 공포와 불안을 극대화시켜 아주 오래 동안 체제를 유지하고 지속한 참주정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드러내고 있는 참주정의 비참성의 핵심적인 요체들 즉 ‘욕정의 노예상태’, ‘영혼의 궁핍’, ‘공포와 고립’은 현실 세계 실제 참주들 모두에게 – 그들이 끝까지 권력을 유지했건 중도에 좌절되었건 상관없이 – 하나같이 두루 적용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영혼의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에게 성공적인 참주란 그 자체로 형용 모순이다. 플라톤 당대 가장 알려진 최고의 참주로서 제명을 산 디오뉘시오스 I세조차 평생 전쟁에 시달렸고 특히 암살 위협 때문에 꼼짝없이 성에 갇혀 지내는 신세라 당대 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올림픽 구경조차 대리인을 보냈다고도 전해진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역사 속 폭력적 독재자들에 관한 전기에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증거를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반대로 처참하고 불행한 종말을 맞이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오늘날 자기 세상인 양 설쳐대는 우리가 알만한 현대판 참주들 모두 하나같이 권력 상실과 전쟁에 대한 공포, 자신과 가족에 대한 암살 위협에 시달리면서 폐쇄된 공간에서 잠도 못 이루면서도 욕정은 들끓어 늘 결핍과 불만을 끼고 산다. 무엇보다 권력을 독점하려는 참주의 욕망은 그 자체로 참주 자신을 배타적으로 고립시키고 타자들과의 관계 일체를 분열시켜 결국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현실 정치가 예외 없이 이러한 권력욕의 전쟁터일 수밖에 없다면 일시적인 평화는 몰라도 인류에게 불행이 그칠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곳 첫 증명에서 다루어진 노예 상태가 아닌 자유, 부(富), 그리고 공포로부터 해방 그 모두는(이것은 우연찮게도 각기 민주정 치하 민중들, 과두주의자들, 참주 포함 참주정 치하 시민들이 바라고 원하는 가치들이다.) 오직 철학자왕정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철학자왕정의 도래 가능 조건에 신적 행운과 영감의 도움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편지> 326a, <국가> 499c) 그 실현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 지성이 지배하는 나라를 향한 이곳 <국가> 논의가 얼마나 간절하고 처절한 것인지를 함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상의 실현은 어렵고 처절하다. ta kala tō onti chalepa.-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힘든 것이다.

* 이로써 첫 번째 증명이 마무리된다. 위 증명이 갖는 한계는 시작 전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전에 정의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동의한 것이 옳다’(576a)는 것, 즉 본성에 따른 모든 계층 간과 영혼 간의 조화와 질서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증명이 나라와 개인 간 ‘동일한 구조’와 ‘전체 연관’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두 번째 증명 : 영혼의 세부분에 상응하는 즐거움에 기초한 증명(580c-583a)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② [한철연 강좌]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②

 

글 : 오상현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

 

이 프로그램은 지난 7월, 서울도서관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 기획한 ‘작가힙톡’ 토크콘서트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나’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까지, 네 명의 철학자가 두 번의 저녁에 걸쳐 삶에 관한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두 회차 모두 진행과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았습니다. 아래는 그 두 번째 밤을 돌아보며 남긴 기록입니다.

 

2주차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는 철학의 기술 / 2026724일 금요일 19:00

 

두 번째 밤의 주제는 ‘관계 속의 나’였습니다. 성균관대 현남숙 교수님이 ‘공감, 소통, 인간관계’를, 한국방송통신대 진보성 교수님이 ‘인정, 비교, 신뢰, 공정함’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지난 시간에 ‘개인으로서의 나’를 들여다보았다면, 이번 시간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 즉 나를 둘러싼 관계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진행을 맡아 무대에 섰습니다.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 서로 다른 전공의 두 분이 같은 주제 앞에 나란히 섰습니다.

첫 번째 강연자는 현남숙 교수님이었습니다. 대화는 다이얼로그, 혼자 하는 독백이 아니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르틴 부버의 ‘나-너 대화’와 ‘나-그것 대화’를 빌려, 상대를 인격으로 만나는 대화와 도구로 대하는 대화가 얼마나 다른지 짚었습니다. 힘들 때만 연락해 몇 시간을 쏟아내고는 평온할 때는 소식 없는 지인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셰리 터클의 『외로워지는 사람들』을 빌려 온라인 시대의 소통이 편리해진 만큼 헐거워졌다고 짚었고,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인용하며 갈등은 침묵과 시간이 메워준다고 조언했습니다.

관계 이야기에서는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속, 사랑이 식을까 두려워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해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로 나아갔습니다. 단단했던 관계들이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시대, 우리는 책임을 지는 ‘릴레이션십’보다 책임 없는 ‘네트워크’에 익숙해졌다고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빌려, 개성을 지키며 하나 되는 것, 보호와 책임, 존중과 지식이 관계의 조건이라는 말로 마쳤습니다.

두 번째 강연자는 진보성 교수님이었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서양 철학이 붙잡아 온 질문이지만, 『논어』에는 애초에 그런 존재론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신 ‘사람(人)’ 옆에 ‘두 이(二)’가 붙은 ‘인(仁)’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자체를 중심에 둔다는 것입니다. 복숭아 씨앗 속 씨알처럼 누구에게나 있지만,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인정에 대해서는 『논어』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구절과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 개념이 이어졌습니다. 비교에 대해서는 “군자는 두루 사귀되 비교하지 않는다.”는 『논어』 구절과 『장자』의 이야기를 빌려, ‘대동’과 ‘소동’을 구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문장으로 진짜 친구는 화려함이 사라진 뒤에야 보인다고 전하며, 거리를 두고 기다리라는 말로 마쳤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두 강연이 끝나고 토크콘서트가 이어졌습니다. 맨 앞에 나란히 앉은 두 분의 청중이 실은 오늘 처음 소개팅으로 만나 이 자리에 함께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강의실은 웃음과 탄성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오랜 친구인데도 나이가 들며 달라진 처지에서 오는 씁쓸함을 묻는 질문,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을 묻는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진보성 교수님은 타인을 자신의 삶의 패턴에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답했고, 현남숙 교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을 빌려, 굽신거림과 오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매 순간 적절한 판단을 찾아가는 것이 관계의 기술이라고 답했습니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탁 트인 서울광장에 다시 섰습니다. 저 멀리 남산타워는 여전히 게으름 없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밤, 나를 들여다보고 관계를 살펴보는 일까지, 두 번의 저녁이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의미 있는 사색의 시간이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소개팅 당일에 강연장까지 와 주셨던 두 분, 첫 만남에 나누었던 수많은 철학적 질문들을 함께 했으니, 앞으로도 오래오래 예쁜 사랑 이어가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프로그램이 종료되었습니다. 강연을 수락해주신 박은미, 현남숙, 진보성 선생님과 강연 협의부터 실무까지 함께 애써주신 서울도서관 관계자분들, 영상 촬영을 맡아주신 최기봉 피디님까지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 유익하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으로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끝.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① [한철연 강좌]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①

 

글 : 오상현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

 

이 프로그램은 지난 7월, 서울도서관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 기획한 ‘작가힙톡’ 토크콘서트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나’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까지, 네 명의 철학자가 두 번의 저녁에 걸쳐 삶에 관한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두 회차 모두 진행과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았습니다. 아래는 그 첫 번째 밤을 돌아보며 남긴 기록입니다.

 

1주차 진짜 나를 들여다보는 철학적 시선 / 2026710일 금요일 19:00

 

진짜 나를 찾는 여름 밤. 첫 번째 밤의 주제는 ‘진짜 나’였습니다.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선생님이 ‘진짜 나, 욕망, 죽음, 행복’을, 저는 ‘외로움, 불안, 능력주의, 대체불가능성’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금요일 저녁 일곱 시, 무더운 여름 공기가 가시지 않은 채로 사람들이 서울도서관으로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마흔 명 정원을 훌쩍 넘어서 최종 신청 인원은 예순여덟 명이었습니다. ‘불타는 금요일’, 이른바 ‘불금’을 포기하고, 저마다의 약속을 미뤄두고 온 얼굴들을 보면서, 무엇이 이들을 여기까지 오게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프로그램의 기획 취지를 설명하면서 저는 ‘사람’과 ‘인간’이라는 두 글자를 나란히 세웠습니다. ‘사람(人)’ 옆에 ‘사이 간(間)’이 만나야 비로소 ‘인간(人間)’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이와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좌우에 계신 이분들이 바로 여러분을 사람에서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주시는 소중한 조건입니다.” 『논어』의 한 구절도 함께 건넸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그런데 그 세 번째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은 사람, 즉 ‘개인으로서의 나’를 살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강연자는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선생님이었습니다. 먼저‘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반면에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내맡기는 삶을 ‘가짜 나’라고 했습니다. 늘 누군가와 비교하고, 인정받아야 안심이 되고, 그러다 문득 공허해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나’는 비교할 잣대가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꼭 한 번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라는 말씀이 참석자들의 마음에 내려앉았습니다. 세네카의 말도 빌려 왔습니다. 인생은 진정으로 시작할 준비가 되면 거의 끝나 있다고 말입니다. 죽음을 자꾸 회피하려 들기 때문에 우리 삶이 새로워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나섰습니다. 외로움, 불안, 능력주의, 대체불가능성. 네 개의 단어를 들고 무대에 섰습니다. “외로운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외로움을 들키는 것”이라던 어느 카피라이터의 문장에서 시작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정호승의 시구를 지나, 마침내 『논어』의 한 구절에 닿았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넘어서야 비로소 독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얹었습니다. 다음 키워드는 불안이었습니다. 공포는 그 대상이 분명하지만, 불안은 그 대상 없이 오직 가능성만으로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존재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정해진 목적 없이 던져진 우리 인간에게 불안은 숙명과도 같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혹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병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인 셈이라고 전달했습니다. 위로가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짧은 두 강연이 끝나고 토크콘서트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한 참여자가 조용히 손을 들어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상황과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면서 매일이 불안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가수 보아의 노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데뷔 초, 유행했던 곡의 제목은 ‘No.1’이었지만, 십 년이 지나 그녀가 부른 노래는 ‘Only One’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등이 아니어도 좋다고, 유일한 존재가 되는 길도 있다고.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사람들은 해본 일보다 해보지 않은 일을 더 오래 후회한다고, 망설여진다면 일단 저질러 보라고 말입니다.

어느덧 마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정답을 얻으러 온 밤이 아니었습니다. 두 철학자의 이야기 역시 그들의 시선이기에, 각자의 시선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전했습니다. 강의실을 나서는 청중들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만은 한결 가벼워지기를 바랍니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나와 탁 트인 서울광장에 섰습니다. 저 멀리 남산타워가 무심하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불금을 포기하고, 철학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자 와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


플라톤의 <국가> 강해(8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6)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576b) -(4)

 

[572b-576b] 참주정적인 인간, 참주

* 소크라테스는 불법적인 욕구에 관해 살핀 후(제9권 시작 571a–572b) 애초 논의 주제로 돌아와 참주정적인 인간을 다루되 그 인간이 어떻게 민주정적인 인간에서 생겨났는지를 아래와 같이 논의한다.(572b) 이를 위해 우선 민주정적인 인간이 어떻게 과두정적 인간에서 생겨났는지를 다시 한 번 간략히 환기시킨다. 즉 민주정적인 인간은 처음에는 과두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돈 벌어들이는 욕구χρηματιστικὰς ἐπιθυμία만을 존중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들은 무시하였으나 방금 우리가 이야기한 불법적인 욕구들로 가득한 보다 세련된κομψός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양쪽 욕구 사이를 오가다가 결국 양쪽 생활방식의 중간μέσος 즉 인색하지도 불법적이지도 않은 삶을 살게 된다.(572c-d)

* 이런 민주정적인 사람이 나이가 들어 그의 생활방식대로 키워진 젊은 아들이 있는 경우 이 아들에게도 그의 아버지에게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572d) 즉 이 아들은 전적인ἅπας 자유ἐλευθερία를 명분삼아 온갖 불법παρανομία을 부추기는 자들과 그 반대편 아버지와 다른 친척들 사이를 오가며 처음에는 인색하지도 불법적이지도 않은 삶을 산다. 그러다 저들 즉 교활한 마술사μάγος들과 참주 옹립자τυραννοποιός들이 달리 이 젊은이를 사로잡을 길이 없다고 여기면 ‘욕정’ἔρως을 -빈둥거리며 닥치는 대로 눈앞의 것들을 나눠 먹는 욕구들의 선봉προστάτης으로- 그에게 심어 놓을 방법을 고안한다. 이 욕정이 곧 날개 달린ὑπόπτερος 거대한 수벌κηφήν이다(572e)

* 향μύρον과 향유와 화관στέφανος과 포도주οἶνος로 그리고 그런 것들과 어울리다 생긴 쾌락ἡδονή들로 가득 찬 여러 욕구αἱ ἄλλαι ἐπιθυμίαι가 그의 주변에서 윙윙거리며 갈망πόθος의 침κέντρον을 극단까지 키우고 길러내 수벌에게τῷ κηφῆνι 심어주면, 그때 이 영혼의 선봉ὁ προστάτης τῆς ψυχῆς은 광기μανία의 경호를 받으며 미쳐 날뛴다οἰστρᾷ.(573a) 그리고 혹시 그 사람 안에서 유익한 것으로 여겨지거나 아직도 수치를 느끼는ἐπαισχυνομένας 믿음δόξα이나 욕구 ἐπιθυμία를 붙잡게 되면 이것들을 죽여서 그 자신의 바깥으로 쫓아낸다. 절제를 정화해버리고καθήρῃ 그 대신 바깥에서 들여온 광기로 채울 때까지 그렇게 한다. 이것이 곧 참주정적인 인간τυραννικός의 기원γένεσις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전부터 에로스ὁ Ἔρως를 참주τύραννος라고 한 것이다.(573b)

* 술 취한μεθυσθείς 사람도 뭔가 참주정적인 마음새φρόνημα를 지닌 것이고 또한 정신 나간 미치광이ὅ μαινόμενος는 인간만이 아니라 신θεός마저도 지배할 수 있길 바라고 또 그렇게 하려든다. 이렇듯 엄밀한 의미의ἀκριβής 참주정적인 인간이 생기는 것은 타고난 본성φύσις이나 행태ἐπιτήδευμα, 또는 이 둘 모두로 인해 술 취하고 욕정에 휘둘리며ἐρωτικὸς 광증μελαγχολικός을 보일 때이다.(573c) 그래서 축제와 술판κῶμος과 연회θαλία와 기녀ἑταίρα와 그런 모든 것들이 그런 자들을 따라간다. 이것들은 에로스라는 참주가 그 안에 거주하면서 영혼의 모든 것들을 조종하게διακυβερνᾷ 되면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끔찍한δεινός 욕구들이 매일 밤낮으로 싹터 나와παραβλαστάνουσιν, 많은 것들을 요구하게 되고δεόμεναι

그에 따라 수입πρόσοδος이 생겨도 금방 써버리고(573d) 그다음에는 빚을 내고δανεισμός 자산οὐσία을 축내게 된다.

* 그리하여 그 모든 것들이 고갈되면 강렬한 욕구들이 마치 침에 의해 내몰리듯 다른 모든 욕구를 경호창병δορυφόρος처럼 이끌고 다니는 에로스 자신에게 내몰려 미쳐 날뛰면서, 에로스(참주)는 속임수나 폭력을 써서 뺏을만한 것을 누가 갖고 있지 않은지 찾아 나설 것이 필연적이다.(573e) 만약 그렇게 온갖 곳에서 거둬들이지 못할 경우 격심한 고통ὀδύνη과 괴로움ὠδίς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새로 생겨난 쾌락들이 옛 쾌락들보다 우위를 점해 저들의 것을 빼앗았듯이, 그는 자신의 몫μέρος을 다 써버리면(574a) 아버지의 것을 폭력을 써서βιάζοιτο 강탈하려고 할 것이다ἁρπάζοι.(574b) 결국 그는 새로 사귄 친구이자 필요치도 않은 기녀 때문에 오랜 친구이자 꼭 필요한 어머니와 연로한 아버지를 때리고 저들을 한 집안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의 부모를 저들 밑에서 종노릇을 하게 만들 것이다. 그야말로 참주와 같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다.(574c)

* 그러나 부모 재산도 고갈되면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다 신전ἱερόν도 털게 된다. 그런 가운데 에로스를 경호하는 새로운 믿음 δόξα들이, 그자가 어려서부터 정의로운 믿음이라고 여기며 갖고 있던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에 관한 믿음을 지배하게 된다.(574d) 이 새로운 믿음들은 민주정 체제일 때는 잠자는 동안 꿈ὄναρ에서나 풀려났던 것들로 그는 가끔 그런 믿음에 이끌렸던 자였었는데 에로스의 지배, 참주정적인 지배를 받게 되면서는 깨어 있는 동안에도 그런 자가 되어 끔찍한 살인φόνος도 그 어떤 행동도 꺼리지 않게 된다.(574e) 에로스는 독재자μόναρχος이기 때문에 어떤 다스림도 없이ἀναρχίᾳ 완전히 무법ἀνομία적으로 참주처럼 살고 자신이 마치 나라처럼 차지하고 있는 그 사람을 이끌어서 에로스 자신과 그 주변의 소동 일으키는 무리를 부양하기 위한 온갖 대담한 짓거리를 저지른다. 그 무리 중 일부는 못된 패거리와 사귐으로써 외부에서 들어왔고 또 다른 일부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같은 성향이 자기 안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된 것들이다.(575a)

* 이런 자들이 나라 안에 소수이고 다른 대부분의 사람이 절제 있다면,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어떤 참주를 경호하거나 어딘가에서 전쟁πόλεμος이 나면 용병 노릇 ἢ μισθοῦ을 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평화εἰρήνη시에는 나라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소소한 악행들 이를테면 도둑질, 가택 침입, 소매치기, 옷 훔치기, 신전 약탈, 인신 매매 같은 짓들을 저지른다. 그리고 말솜씨가 좋다면 무고를 하거나συκοφαντοῦσιν 거짓 증언을 하고ψευδομαρτυροῦσι 뇌물을 받아먹을 것이다δωροδοκοῦσιν.(575b)

* 그러나 참주가 나라에 끼치는 해악πονηρία과 비참함ἀθλιότης에 비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다 더해도 그것은 사람들의 말마따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자들이 나라 안에 많아지고 다른 이들이 이들을 추종하게 되며 또 자신들의 수가 적지 않다는 것을 이들이 감지하면, 그때 이들은 민중τὸ πλῆθος의 어리석음에 도움받아 그들 가운데서도 유독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참주를 자기 영혼 안에 지닌 자를 현실의 참주로 탄생시킨다.(575c)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참주정적인τυραννικώτατος 자이다.

* 그러나 사람들이 기꺼이 복종한다면 그렇겠지만 만일 나라가 응하지 않는다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벌주었던 것처럼,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동료들을 끌어 들여와 조국도 벌주려 할 것이다. 그리고 크레타인들이 모국이라고 부르는, 오래된 친구인 조국을 이들의 종으로 삼아 그렇게 유지해갈 것이다.(575d) 이것이 이런 인간이 지닌 욕구의 종착지τέλος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런 자들은 권력을 잡기 전에 사적으로는 무슨 일이든 언제라도 해줄 것처럼 구는 아첨꾼κόλαξ들이 있을 때 또는 그들(참주)이 필요한 것을 누군가 갖고 있어 그들(참주) 스스로 그에게 납작 엎드릴 필요가 있을 때 그들(참주)은 마치 그들(아첨꾼들과 참주가 필요한 것을 갖고 있는 자들)을 가족인 양 여기고 별의별 시늉을 다 한다. 그러나 그러다가 목적을 이루고 나면 남처럼 대한다.(575e-576a) 그러므로 이들은 평생토록 결코 그 누구의 친구도 되지 못한 채, 늘 누군가의 주인δεσπόζοντες τινός아니면 노예δουλεύοντες τινός로 산다. 그러므로 이런 참주정적인 성향은 자유ἐλευθερία도, 진정한 우정φιλία도 결코 맛볼 수 없다. 그런 자들은 결코 우리가 신뢰할 수 없는ἄπιστος 자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전에 정의δικαιοσύνη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동의한 것이 옳았다면 그들은 부정의한ἄδικος 자, 그것도 있을 수 있는 가장 부정의한 자들이다.(57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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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2e ‘ 교활한 마술사μάγος들과 참주 옹립자τυραννοποιός들’ : 민중들의 옹립을 통해 과두정에서 민주정으로의 혁명을 이끌었던 수벌, 즉 선도자들이 이번에도 민중들을 등에 업고 자신들 가운데 가장 참주정적인 인간을 참주로 옹립한다. 수벌들이자 교활한 마술사와 참주 옹립자들은 이들이 민주정적인 젊은이들에게 침을 심어 놓아 장차 그들과 같은 참주정적 인간 즉 날개 달린 수벌을 만들고 그 수벌들은 민중의 어리석음에 도움을 받아(575c) 그들 가운데에서 장차 가장 참주정적인 인간을 참주로 옹립한다.

* 572e ‘욕구들의 선봉ho prostatēs으로 욕정을’ : 불법적인 욕구들을 선두에서 이끄는 선봉장이 곧 욕정이다. 573a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혼의 선봉’도 바로 그 욕정을 가리킨다. 젊은이에게 그 욕정이 심어지면 그 젊은이도 바로 날개 달린 수벌 즉 참주정적인 인간이 된다. ‘이전부터 에로스를 참주라고 부른다.’(573b)는 소크라테스의 말도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 573a ‘여러 욕구가ai allai episthymiai …… 그의 주변에서 윙윙거리며 갈망pothosς의 침kentron을 극단까지 키우고 길러내 수벌에게 심어주면’ : ‘여러 욕구’는 수벌로 비유되고 의인화되어 이글에서 주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주변에서’와 ‘수벌에게 심어주면’이라는 표현에서 ‘그’와 ‘수벌’이 가리키는 것은 모두 젊은이이다. 불법적 욕구 즉 수벌들이 젊은이 주변을 에워싸는 순간부터 이미 젊은이는 그 불법적 욕구에 끌려 들어가 또 다른 수벌이 되고 만다. 그리고 수벌이 된 젊은이에게 극단으로까지 키워진 갈망의 침 즉 욕정이 심어지면 그 욕정이 젊은이의 영혼을 선도하는 광기 어린 선봉장이 된다. 즉 젊은이를 불법적 욕구로 이끄는 수벌 같은 자들은 불법적 욕구들을 전적인 자유라 칭하며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 욕구의 극단 즉 욕정에로까지 빠져들게 만들고 마침내 그 욕정은 젊은이의 영혼에서 모든 욕구들을 이끄는 선봉이 된다. 그 결과 젊은이의 영혼에 있었던 기존의 선한 믿음이나 욕구, 절제는 완전히 제거되고 대신 광기 어린 욕정이 젊은이의 영혼을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영혼 상태의 인간이 곧 참주정적 인간이다.

* 572e ‘욕정’erōs : 에로스에 대해서는 전승에 따라 기원과 설명에 차이가 있다. <헤시오도스>에서는 가이아와 타르타로스와 함께 가장 먼저 생긴 신이자 사려 깊은 의지를 제압해버리는 신으로 나오지만 <향연>에서는 페니아와 포로스의 아들로 나오고 다른 전승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아들로도 나온다. 이에 따라 에로스는 신격(ho Erōs, <국가>(573d, 574d와 e, 575a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사랑, 욕망, 욕정의 의미를 지니는 일반 명사 eros로 폭넓게 사용된다. 참고로 <향연>에서 에로스는 아래와 같이 마치 사다리를 오르듯 의미상 상승적 층위를 갖고 단계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1) 젊었을 때 신체의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 2) 아름다움 일반에 대한 사랑, 3)영혼에 있는 아름다움의 사랑, 4) 앎에로의 사랑, 5) 단일한 앎으로서 좋음의 형상에 대한 사랑. 그러나 여기서는 가장 저급한 단계 즉 물질적 신체적인 것에 대한 원시적 욕망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향연> 201d-212a 디오티마의 이야기 참고)

* 573c  ‘정신 나간 미치광이’ : 참주의 성격과 생활 방식에 관해서라면, 참주정적 인간은 온갖 형태의 방탕에 빠져들며 늘 새로운 욕망에 쫓긴다. 그의 수입과 재산은 곧 바닥나고, 아우성치는 정욕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의 재산을 강탈하며, 필요하다면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뒤이어 신성모독과 절도, 그리고 온갖 범죄가 뒤따른다. 과거에는 꿈속에서나 아주 드물게 행하던 짓들을, 이제는 살아있는 현실에서 실제로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들이 소수일 때는 외국으로 나가 다른 참주의 경호원이 되거나, 고국에 남아 잡범들의 무리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수가 많아지면, 그들 중 가장 악독한 자를 조국의 참주로 추대한다. 참주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자가 품은 욕망의 목표이자 완성이다. 참주정적 인간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전이나 후나 평생을 자유 및 우정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신의가 없고 극도로 부정의하다. 한마디로 그는 우리가 꿈속에서나 발견했던 기괴한 정욕이 살아 움직이는 화신이며, 통치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악해진다. 그들은 욕망을 마음껏 구현하는 욕망의 주인이 아니라 욕망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욕정의 노예들이다. 이 모두가 참주정적 인간이 필연적으로 비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성한다.

* 573c  ‘술 취한methystheis 사람도 뭔가 참주정적인 마음새phronēma를 지닌 것’ : 당시 귀족들의 교유 형식으로서 심포지온(향연)symposion은 뜻 그대로 술을 마시며 진행된다. 이 말은 음주 자체를 배격하는 말로 들리진 않지만 최소한 술에 취한 상태를 플라톤이 얼마나 혐오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술에 취하면 이성적 부분이 약화되어 욕정에 휘둘리게 만든다. 평생 독신으로 산 플라톤의 생애 관련 전승에는 성적 스캔들은커녕 주변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없다.

* 573d ‘조종하게diakyberna 되면’ : 나라를 이끌고 다스리는 통치자는 배를 조종하는 키잡이kybernētēs로 비유되고 있는데(333c, 341c-342e 등) 철학자 왕과 참주 모두 키잡이이지만 그 방식은 전자는 철학 후자는 불법에 기초하고 있다.

* 574a ‘그에게 새로 생겨난 쾌락들이 옛 쾌락들보다 우위를 점해 저들의 것을 빼앗았듯이, 그는 자신의 몫meros을 다 써버리면 아버지의 것을 빼앗아서 한 몫 챙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 573e부터 576a끝까지 참주정적 인간의 욕구가 종국에 가서 맞이할 역설적 양태가 다각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전적인 자유가 초래하는 무질서와 물질적 탐욕은 적대적 경쟁과 그 경쟁이 초래할 비극성을 필연으로 내포하고 있다. 오로지 폭력을 통한 독점적 지배 욕구에 매몰된 참주는 신뢰를 상실한 욕정의 노예로서 스스로 고립된 채 늘 반란과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공포와 불안 속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한다. 이것은 이어지는 최종 비교 판정 과정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 575c ‘참주가 나라에 끼치는 해악ponēria과 비참함athliotēs에 비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다 더해도 그것은 사람들의 말마따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 <국가>의 주제가 기본적으로 철학자와 참주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한지를 판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보다 효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대문자 비유를 거쳐 정치체제에 관한 논의로 확대된다. 혹자는 이것을 근거로 <국가>가 정치철학적 저술이라기보다는 도덕 심리학적 저술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플라톤이 강조하듯 개인 차원의 부도덕한 악행이 초래하는 비참함은 그 심각성의 크기와 범위에서 신민의 통치자이자 최고 권력자로서 참주의 악행이 초래하는 정치 사회적 불행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국가>에서 정치철학과 도덕심리학을 분리하는 것은 플라톤의 기본 의도와도 맞지 않고 한쪽 눈을 가리고 사물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 575d ‘사람들이 기꺼이 복종한다면 그렇겠지만 만일 나라가 응하지 않는다면.. 참주는 조국도 벌을 줄 것이다.’ : 참주정도 철학자왕정처럼 기본적으로 통치자, 군인, 생산자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참주정 치하에서는 철학자왕정과 달리 참주의 불법적 이기적 욕구가 이성적 욕구를 누르고 조종하여 다른 계층의 삶 전반을 폭력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참주정 치하에서 통치자에 대한 복종은 공포와 불신 속에서 강압을 통해 철저히 타율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폭압적 복종 관계는 군인 계층과 생산자 계층 내부에서도 권력과 지위의 서열에 따라 똑같이 재현된다. 이를테면 군인들은 통치자와 상급자에게는 엎드려 복종하지만 하급자와 생산자 계층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복종을 강요한다. 그리고 생산자 계층 내부에서도 부의 크기에 따라 서로 뺏고 빼앗기는 약육강식의 상태가 마치 당연한 일상처럼 받아들여 지고 있다. ‘나라가 응한다.’(575d)는 것은 신민들이 기꺼이 통치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참주는 나라와 신민에 응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라를 자신의 종으로 삼아 조국에 벌을 주고 있는 자이다. 참주정 치하에서는 욕망 구조상 나라 차원에서건 개인 차원에서건 이처럼 폭력적이고도 불법적인 욕구가 모든 계층과 영혼을 지배하고 있다.

* 575d ‘크레타인들이 모국mētris이라 부르는’ :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은 전통적으로 모계 사회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 조국을 ‘아버지의 나라’patris라고 부르는 대신 ‘어머니의 나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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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참주정적인 인간 내지 참주들의 불법적인 욕구가 자행하는 악행들을 들여다보면 당대 그리스의 악행들이 총망라된 것처럼 보인다. 우선 참주정적 인간의 불법적인 욕구들은 잠을 자는 동안에 사납고 야수적인 습성대로 먹을 것과 술로 채워져 제멋대로 날뛰고 수치심이나 현명함에서 풀려나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어머니를 포함 그 어떤 인간과 신과 짐승과도 몸 섞기를 주저하지 않고 살인도 무차별 저지른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 즉 참주가 되면 꿈속에서 자행했던 악행들을 그 자신이 악한 습성에 따라 현실에서도 똑같이 저지른다.

* 이로써 제8권에서 시작된 타락한 현실 국가와 그것을 닮은 사람을 다루는 마지막 주제 즉 가장 부정의한 참주정에 이어 그것을 닮은 인간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된다. 이제 애초 논의 목표대로 가장 정의로운 사람으로서 철학자와 가장 부정의한 자로서 참주를 행복과 불행의 측면에서 비교하는 일이 남아 있다. 이글 서두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참주정적 인간을 시작하면서 참주정을 논의할 때와 마찬가지로 행복에 관한 언급을 꺼내 들고 이후에도 참주정적 인간들의 비참성을 크게 부각시켜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타락한 정치체제들에 관한 마지막 단계의 논의가 장차 이루어질 철학자와 참주 간의 행복 관련 비교 판정을 위한 도입부 역할도 함께 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첫 번째 증명 : 정치체제와 개인의 내적 구조에 기초한 증명(576b-580c)

플라톤의 <국가> 강해(85)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5)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576b) -(3)

 

* <국가>의 논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를 가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 전반부는 문자 비유를 거쳐 대문자로서 정의로운 나라가 논의되고 제5권 이후 중반부에서 그 정의로운 나라가 철학자가 통치하는 나라임이 제시된다. 그리고 제8권에서는 그 판정을 위한 비교 대상으로 타락한 정치체제들과 그것들을 닮은 사람들이 타락의 순서대로 다루어지면서 끝부분에서 가장 부정의한 나라인 참주정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제9권에 들어와 마침내 비교를 위한 논의의 마지막 단계로서 참주정을 닮은 사람과 그 극치로서 참주가 다루어진다. 

 

[제9권 시작 571a – 572b] 불법적인 욕구

* 소크라테스는 이제 민주정적인 인간에서부터 어떻게 참주정적인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자가 어떤 방식으로 살게 될지, 즉 비참하게ἄθλιον 살지 행복하게μακάριον 살지를 살피는 일이 남았다고 말한다.(571a)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살피기 전에 우리의 탐구ζήτησις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필수적이지 않은 쾌락과 욕구 가운데에는 불법적인παράνομος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 이 불법적인 욕구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이 욕구는 이성λόγος을 갖춘 더 나은 욕구에 의해 제어됨으로써 아예 제거되거나ἀπαλλάττεσθαι 약화된ἀσθενεῖς 채로 소수ὀλίγος만 남아 있지만(571b)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더 강력한ἰσχυρότερος 것으로 더 많이 남아있으며 잠자는 동안에 깨어나는ἐγειρομένας 것들이다. 그것은 이성적이고λογιστικός 온순한ἥμερος 영혼의 다른 부분이 잠들어 있을 때 사납고θηριώδης 야수 같은ἄγριος 부분이 제멋대로 날뛰며 잠ὕπνος을 밀쳐내고 나가 자기 습성을ἦθος 채우려 하는 때에 깨어나는 욕구들이다. 그때 이것은 모든 수치심αἰσχύνης과 현명함φρονήσὶς으로부터 풀려나고 벗어나 있기 때문에 무슨 짓이든 다 하려고 덤벼들어(571c) 어머니와 몸 섞기μείγνυσθαι도 다른 그 어떤 인간과 신과 그리고 짐승과도 그러기를 주저하지 않고, 그 누굴 죽이는 것도 그 어떤 걸 먹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몰지각함ἄνοια과 몰염치함ἀναισχυντία의 극치이다.(571d)

* 하지만 자기 자신을 건전하고ὑγιεινός 절제 있게σωφρόνως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잠자리에 들 때, 자신의 이성부분τὸ λογιστικὸν을 깨워 아름다운 말과 고찰σκέψις의 성찬으로 대접하여(572d) 자신이 자기 자신과 일치된 생각σύννοια을 이루도록 하고, 한편 욕구부분τὸ ἐπιθυμητικὸν은 주리지도 않고 채워지지도 않게 해서 잠이 들게 만들어(571e) 이 부분의 기쁨χαῖρον이나 고통λύπη으로 최상의 부분에 소동을 일으키는 일이 없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상의 부분이 그 자체로 혼자서 순수하게 고찰하게 하고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그것이 알지 못하는 것을 파악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기개부분τὸ θυμοειδὲς 역시 진정시켜 누군가에게 화가 나 격분한 채로 잠드는 일이 없도록 한다. 이 두 부분은 잠잠하게 하고, 생각하는 곳인 세 번째 부분을 활동하게 하고서 휴식을 취한다면, 그는 그와 같은 상태에서 진리ἀληθεία에 가장 잘 닿을 수 있으며 꿈ἐνύπνιον속에서 보이는 것들도 이때 가장 덜 불법적이다.(572a) 요컨대 주목할 것은 아주 균형 잡혀 있다고μέτριος 알려진 사람들에게도 뭔가 무섭고 거칠며 그리고 무법적인 유형의 욕구ἄνομον ἐπιθυμιῶν εἶδος가 있으며 그런 것들은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57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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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1a ‘비참하게 살지 행복하게 살지를 살피는 일’ ; 다른 타락한 정체들이나 그것을 닮은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행복’이나 ‘비참성’ 관련 언급이 따로 없으나 플라톤은 참주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도 그랬듯이(566d) 참주정적 인간을 다루는 이곳에서도 그와 관련한 언급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것은 원래 목표대로 행복 관련 비교 판정에서 참주정적 인간 내지 참주가 철학자와 맞설 최종적인 비교 대상임을 다시 한번 환기해 준다.

* 571a ‘우리가 충분히 구별해내지 못했다’ : 소크라테스는 욕구를 ‘필수적인 욕구’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로 구분한 후(8권 558d-559c) 필수적인 욕구는 과두정적 인간에,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는 민주정적인 인간에 귀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욕구에 대한 충분한 구별이 이루어지려면 이제 참주정적 인간이 갖는 욕구 즉 불법적인 욕구까지 언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은 불법적인 욕구를 병렬적으로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참주정의 탄생이 민주정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즉 민주정의 멋대로의 자유가 질서와 위계를 무너트릴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경쟁을 유발시켜 나라를 약육강식 상태로 만들어 결국 그들이 자신의 자유를 위해 옹립했던 선도자들이 되레 소수 강자 참주가 되고 정작 자신들은 그들의 노예로 전락한다. 그들이 민주정에서 누린 전적인 자유가 스스로를 참주정 치하 예속 상태로 빠지게 만든 가장 크고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 571c ‘잠자는 동안에 깨어나는engeiromenas 것들일세.’ : 불법적인 욕구들이 잠을 자는 동안 깨어난다는 것은 욕구를 억제하는 이성적 부분이 그 만큼 잠을 자는 동안에는 약화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잠잘 때 구별해 내기가 가장 힘들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102b 5이하)고 말하고 있다. 플라톤 역시 깨어있을 때보다 잠을 자는 동안에 바람직하지 않은 충동적 이기적 욕구가  더 활성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비록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드러나는 정도는 깨어있을 때 형성된 습성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꿈속에서 온갖 짓을 다하는 참주정을 닮은 사람들은, 이성적 부분이 약화되거나 왜곡되어 생겨난 나쁜 습성에 따라, 깨어있을 때도 꿈속에서 행했던 온갖 악행을 그대로 저지르지만(574e) 반대로 건전하고 절제 있는 사람은, 깨어있는 동안 이성적 부분을 강화하여 좋은 습성을 갖고 있어 자는 동안에도 욕구 부분의 소동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571e-572a)

* 571d ‘어머니와 몸 섞기meignysthai도 전혀 주저하지 않고’ :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포스 왕>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오이디푸스는 델피 신전에서 자기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고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그 일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으로 그려지지만, 실상 플라톤에게 그러한 일들은 잘못된 습성을 가진 자들에게는 필연일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능히 피해갈 수 있는 것들이다. 플라톤은 전통적인 운명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삶에는 물론 우연이 개입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삶은 자기 고유의 능력과 그것을 고양하려는 노력에 달려 있다.

* 571e ‘욕구 부분to epithymētikon은 주리지도 않고 채워지지도 않게 해서’ : 이 부분은 플라톤이 엄격한 금욕주의자라는 견해에 대한 반대 전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플라톤은 금욕과 사치 중간의 적도(適度to metrion)를 지향한다. 영혼의 욕구 부분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기개 부분to thymoeides과 더불어 절제의 덕을 통해 이성적 부분과 조화를 이루면서 물질적 생산이라는 고유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정의로운 나라와 건강한 영혼을 구성하는 필수적 요소이다.

* 572a. ‘최상의 부분이 그 자체로 혼자서 순수하게 고찰하게 하고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그것이 알지 못하는 것을 파악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고’ : 이 내용을 어떤 사람은 ‘잠을 자는 동안 신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이 미래를 내다보고 깨어있을 때 허용되지 않는 진리의 영역에 접근하는 행위’ 즉 꿈을 신점(divination) 또는 예지몽 같은 것으로 여겼던 당대 사람들의 행위와 연관시킨다. 다시 말해 꿈을 ‘깨어있을 때 자기가 알지 못했던 속마음, 또는 알지 못하는 사태를 드러내 주는 뭔가’로 이해하는 것이다.  아래의 언급들도 그러한 생각들과 연관되어 있다. ‘사지가 움직이는 동안 영혼은 잠들어 있지만, 잠자는 이들에게는 수많은 꿈속에서 기쁜 일과 힘든 일을 판가름해주는 일이 일어난다.’(핀다로스 <단편> 131. 3-5행), ‘잠을 자는 동안 영혼이 홀로 (신체와 격리되어) 존재하게 될 때 영혼은 자신의 본래 성품을 되찾아 미래의 일들을 예언한다.’(아리스토텔레스 <단편>), ‘영혼은 잠 속에서 활기를 띠며 신체가 거의 죽은 듯이 누워있을 때 감각과 모든 근심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워진다.’(키케로 <신점에 관하여> 1권 60-61)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러나 잠을 자는 동안 영혼이 신체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당대 사람들의 생각은 이곳에서 ‘잠자는 동안 영혼의 이성부분이 약화되어 불법적 욕구가 깨어난다.’는 플라톤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말은 ‘영혼이 신체로부터 해방되면 즉 영혼이 순수해지면 불법적인 욕구가 깨어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 572b ‘우리가 너무 멀리 와버렸는데’ : 참주정적 인간을 살피려다가 논의에서 여전히 부족한 것으로서 571b 이후부터 불법적인 욕구에 대한 설명을 끌어들인 것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약간의 여담을 끌어들인 후 본론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한다.(<국가>만 보더라도 471c, 543c, 544b, 568d, 588b 참고)

* 572b ‘무법적인anomos 유형eidos의 욕구’ : ‘무법적’인 유형의 욕구는 적극적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욕구의 전 단계 즉 불법적’paranomos인 욕구의 바탕이 되는 욕구를 말한다. 이를테면 명예정적인 사람이 과두정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오만방자함(572c) 또는 법을 피하려는 태도(548b), 그리고 이곳에서도 환기되고 있듯이 과두정적 인간에서 민주정적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인색하지도 불법적이지도 않은 상태가 곧 무법적인 유형의 욕구 상태이다.(572c-d) 인간의 욕구 부분은 이성 부분과 조화를 이루어 건강한 영혼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지만 이성 부분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이곳의 경우는 ‘잠자고 있는 동안’) 그에 비례하여 욕구 자체가 갖는 물질적 본성상 언제라도 무법적 유형의 욕구로 드러날 수 있다. 그러다 침 달린 수벌들이 저지르는 온갖 불법에 둘러싸여 욕정erōs에 사로잡힐 경우 무법적인 유형의 욕구는 마침내 성문법이든 불분법이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563d) 불법적인 욕구로 변질 전락한다.(572e-573a) 변증술을 배우는 단계까지 오른 제법 똑똑한 자가 변증술을 잘못 배워 오용해서 생긴 일에도 불법적이라는 말을 쓴다.(537c, 538b, 539a) 무지한 자보다 잘못 배운 똑똑한 자가 더 위험하다. 이곳에서 민주정적 인간의 경우 아직 불법적인 욕구 상태로까지 타락한 사람이 아닌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572d) 플라톤은 이미 <일곱 번째 편지>(324d)에서 30인 참주정의 잔혹상을 경험한 후 차라리 민주정이 황금으로 보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만큼 참주정적 인간의 불법적 욕구는 민주정적 인간의 욕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가장 나쁜 수준의 욕구 상태이다. 여기서 유형의 원어 eidos는 일종의 형태, 방식의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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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에는 본성physis을 뜻하는 말은 있어도 생물학적 ‘본능’(instinct)에 해당하는 말은 딱히 없다. 굳이 내용상 가까운 말을 꼽자면 앞서 말한 대로 본성으로서 영혼의 세부분 중 하나인 욕구 부분 즉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과 관련한 필수적인 욕구epithymia 정도이다. 영혼의 나머지 부분 즉 이성적 부분과 기개 부분 또한 넓은 의미에서 뭔가를 욕망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것들 또한 본성적 욕구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이타적 합리성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생물학에서 말하는 ‘본능’과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

* 인간의 욕구를 자는 동안 꿈속에서 작동하는 경우와 깨어있는 동안 작동하는 경우로 구분하고 외적 행위를 그것들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욕구이론은 종종 현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 Freud)의 욕망론과 비교되곤 한다. 플라톤의 욕망 구조 이론이 영혼을 구성하는 세 요소 즉 이성적 부분, 기개적 부분, 욕구 부분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면 프로이트의 욕망 이론 역시 똑같이 정신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즉 초자아(Superego)와 에고(ego), 이드(id)의 관계로 해명된다. 그리고 크게 보면 어떤 요소는 충동적 이기적 성격을 갖고 있고 어떤 요소는 그것을 통제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서로 닮아있다. 이를테면 플라톤의 영혼의 이성 부분과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통제의 성격을 갖고 있고 플라톤의 영혼의 욕구 부분은 프로이트의 이드가 그렇듯 이기적 신체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플라톤의 경우 영혼의 세 부분 모두 똑같이 태어날 때부터 갖는 선천적인 것인데 비해 프로이트의 경우는 오직 이드만이 선천적인 것일 뿐 나머지 초자아와 자아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들이다. 초자아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의 이드들이 상호 충돌하고 서로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자기 보전을 위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자기 통제력이고 에고는 이드와 초자아가 타협하여 생겨난 현실 자아의 모습이다. 이렇게 보면 플라톤의 기개 부분에 상응하는 요소는 프로이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공히 통제의 성격을 갖고 있으나 플라톤의 영혼의 이성 부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이드를 제어한다는 측면에서 비록 도덕의 심리적 기초가 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는 이드와의 충동과정에서 형성된 억압을 근본 성격으로 갖는 비합리적 힘이다. 무엇보다 플라톤과 프로이트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욕구를 구성하는 세 요소 중 가장 원천적이고 중대한 것으로 내세우는 요소가 서로 정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경우는 다른 욕구 부분들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담당하는 영혼의 이성 부분을 인간성을 특징짓는 가장 중대하고 우월한 요소로 내세우는 데 반해 프로이트의 경우는 반대로 통제를 거부하는 충동적 욕구로서 무의식 내에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드를 인간성을 특징짓는 가장 강력하고도 원초적인 요소로 내세운다. 플라톤의 영혼론이 합리주의 도덕이론의 토대가 되고 프로이트의 욕망이론이 오늘날 비합리주의 욕망론의 토대가 되는 것도 각기 최강으로 내세우는 요소들 사이에 있는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다.

* 이곳 내용에 기초해보면 플라톤에게 꿈은 이성적 통제가 약화된 상태에서 생기지만 그렇다고 이성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즉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아니다. 굳이 무의식을 본성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플라톤은 프로이트와 달리 무의식에 도덕적 이성을 선천적인 요소로 포함시키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는 꿈의 내용 또한 비록 약화된 상태이나 선천적 본성으로서 도덕적 이성과 후천적 습관 또는 그 모두가 합해져 형성된 습성ēthos의 결과물이다. 물론 프로이트에게도 꿈은 습성은 물론 욕구에 대한 억압기제로서 초자아의 도덕적 통제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플라톤의 이성과 달리 선천적인 것도 아니고 합리적인 것도 아닌, 무의식 내에서 후천적으로 형성된 이드 못지않은 강력한 힘이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도덕의 기원이 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좋음과 나쁨과 무관한 그냥 욕망에 대한 비합리적 억제력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연과 인간에 비록 생성의 힘 내지 충동적 욕구들이 선천적으로 존재할지라도 그 욕구들을 절제할 수 있는 본성적 능력으로서 영혼의 이성 부분 또한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이곳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불법적인 욕구는 특성상 프로이트의 이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다만 잘못된 생각과 악행이 거듭되면서 더욱 나쁘게 굳어진 습성에서 비롯된 후천적인 욕구들로서 좋음의 형상에 기초한 인간 영혼의 내적 능력 즉 정신의 자기 고양을 통해 능히 극복할 수 있고 아예 제거할 수도 있는 것들이다.(571b) 동양의 불교에서도 인간은 누구나 미망(迷妄)에 빠져 탐진치(貪瞋癡)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내성으로 불성을 가지고 있어 정신의 자기고양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

* 불법적인 욕구들에 관한 언급을 마무리한 후 소크라테스는 논의의 마지막 주제인 참주정적인 인간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한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576b) -(4)

플라톤의 <국가> 강해(8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4)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제9권 576b) – (2)

 

*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자보다 행복한 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제2권부터 논의가 대문자 비유를 거쳐 국가 단위로 확대된 후 이상적인 정치체제로서 철학자 왕정이 말을 통해 제시되었고, 이제 제8권부터는 앞서 살폈듯이 그 연장선상에서 그 비교 대상으로서 타락한 현실 정치체제가 그 또한 말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전자가 말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상승의 국면이었다면 후자는 그 나라가 말로 해체되는 하강의 국면이다. 그런데 이상국가가 해체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지성과 철학, 교육과 설득을 통한 수정과 극복의 체제를 갖추고 있는 한,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비교를 위한 논의의 방편 상 실제와 다르게 무사이 여신들의 입을 빌려 철학자 왕정에서 그 지성과 철학, 영혼의 이성 부분이 마비된 경우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제했을 경우 철인왕정으로부터 어떻게 명예정, 과두정정, 민주정으로, 그리고 각각 그것에 상응하는 개인으로 순차적으로 타락의 정도를 더해가며 해체 타락해갈 수밖에 없는지를 다각적으로 살핀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비교 대상으로서 최악의 정치제제로서 최종 도착지 참주정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도 앞서 수차례 밝혔듯이 제8권 이후 이상국가의 타락과 해체과정은 비록 정치제제 변동과 관련한 플라톤 자신의 성찰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그 순서 그대로 정치체제가 변화해갈 것이라는 정치체제와 관련한 플라톤 자신의 역사적 견해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전 과정의 근간이자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성과 철학, 그것에 바탕한 교육과 설득이 덕과 제도로써 작동하고 있는 상태와 그 모두가 결여 또는 마비되어 있는 상태를 비교할 경우, 최악의 정체로서 참주정의 나라와 참주정적인 개인이 정의와 행복과 관련하여 얼마나 정반대의 귀결을 갖게 되는지를 이치의 측면에서든 심리적 측면에서든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566d-569c 제8권 끝]

* 이제 소크라테스는 행복εὐδαιμονία과 관련한 참주정의 실상을 살피기 전에 참주의 모습과 특징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참주τύραννός는 처음 얼마 동안에는 자신은 참주가 아니라고 하면서 사적으로도ἰδίᾳ 공적으로도 δημοσίᾳ 많은 것들을 약속하고 채무χρέος를 탕감해주고 토지γῆ를 나누어 주며 모두에게 상냥하고 부드러운 척한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전쟁πόλεμος을 일으킨다. 부과된 전쟁경비 때문에 궁핍해져서 그날그날 먹고사는 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그만큼 참주에 대해 음모ἐπιβουλεύειν를 꾸미는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리고 자유인다운ἐλεύθερος 생각을 갖고 자신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의심되는 자들을 적에게 넘겨 파멸시킬 구실을 갖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566d-567a)

2) 참주를 비판하며 거침없이 얘기παρρησιάζεσθαι하는 자들 있다면 친구든 적이든 조금이라도 유용한ὄφελος 자들, 이를테면 용감하고 야심이 있고 현명하고 부유한 자들을 적으로 삼아 온 나라를 정화할 때까지 음모를 꾸며 모두를 제거해야만 한다ὑπεξαιρεῖν.(567b-c)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름다운καλός 정화καθαρμός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의사ἰατρός들은 나쁜 것을 제거하고 좋은 것을 남겨놓지만 참주는 그 반대로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축복받은μακάριος 필연ἀνάγκῃ이라고 언급한다.(567d)

3) 이에 따라 시민πολίτης들의 미움을 받게 되면 될수록 믿을 만한πιστός 경호창병δορύφορος들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참주는 보수μισθός를 주면 저절로 날아드는 외래종 수벌들 즉 외국인 용병들과 시민들에게서 빼앗은 자국인 노예δοῦλος 즉 토종 수벌들로 경호창병을 구성한다.(567e) 이들은 신참 시민으로서 참주와 어울리겠지만, 양식 있는ἐπιεικής 시민들은 그를 미워하고 피한다.(567e-568a)

4) 그러나 에우리피데스 같은 비극τραγῳδία 작가들과 다른 시인들은 영리한πυκνός 생각διανοία에서 ‘참주들이 지혜로운 건 지혜로운 자들과의 어울림συνουσία 덕분’이라고 말하면서 참주정을 ‘신과 같은’ἰσόθεος 것이라고 찬양한다. 비극시인들οἱ τῆς τραγῳδίας은 지혜로워서σοφός 우리들이 그들을 참주정의 찬양자ὑμνητής들이라는 이유로 우리 체제 안에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들은 양해할 것이다.(568b) 그들은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군중을 끌어 모으고 목소리가 아름답고 우렁차며 설득력 있는 자들을 고용해서는 그 나라의 정치체제를 참주정이나 민주정으로 끌고 다니며 그에 대한 보수를 받고 또 존중도 받는다τιμῶνται.(568c)

5) 참주들은 신전 재물ἱερὰ χρήματα 같은 나라 재산과 자신들이 파멸시킨 자들의 재산으로 전쟁 경비를 쓰고(568d) 민중에게는 세금εἰσφορά은 낮게 부과하다가(568d) 결국 자금이 동이 나면 마침내 자신은 물론 그의 술친구συμπότης들도 그의 남녀 패거리ἑταῖρος도 모두 참주를 낳아준 아버지 즉 민중 δῆμος들을 수탈한다.(568e)

6) 아버지(민중)가 아들(참주)을 낳고 키운 까닭이 부자들과 소위 ‘아름답고 뛰어난’ καλῶν κἀγαθῶν 사람들에게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한 것임에도 반대로 이제 다 큰 아들이 어버지의 돈을 빼앗는 꼴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과 아들의 골칫거리 술친구들을 집에서 내쫓으려 해도 그들보다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어떤 짐승θρέμμα을 낳고서는 그를 반기고 키웠는지 알게 된다.(569a-b)

7) 그리하여 아들인 참주가 아버지에게 완력βιά을 쓰려 들고, 아버지가 자신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으면 때리기τύπτειν라도 하는 상황 즉 참주가 부친살해범πατραλοίας이자 가혹한 노인부양자γηρότροφος가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569b) 민중은 자유민이 노예가 되는 연기καπνός를 피하려다가 노예가 주인δεσποτεία이 되는 불 속으로 뛰어들고 만 셈이 된 것이다. 예전에 입었던 지나치고 철에 맞지 않는 자유 대신, 노예들의 노예가 되는 가장 가혹하고χαλεπωτάτην 쓰라린πικροτάτην 옷으로 갈아입은 처지 한마디로 참주정의 예속 상태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민주정으로부터 참주정이 어떻게 변화해 나오는지에 관한 전말이다. (56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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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7b ‘유용한hophelos 자’ ; 참주 비판에 가담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사람. 이어 나오는 용감하고 야심이 있고 현명하고 부유한 자들이 그에 속한다.

* 567c ‘계속 통치하려면 친구든 적이든 조금이라고 유용한 자는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제거해야 하네.’ : 이것은 참주가 왜 혼자 고립되어 황폐해진 영혼을 지닌 불행한 개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내적 필연성을 함축하고 있다.(헤로도토스<역사> 5권 92절, 아리스토텔레스<정치학> 3권 13장 1284a 26 이하, 5권 10장 1311a 20 이하) 에우리피데스 <탄원하는 여인들>은 정적의 제거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들을 담고 있다.(445~449) 그 가운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코린토스의 독재자 페리안드로스가 밀레토스의 독재자 트라쉬불로스에게 ‘어떻게 해야 나라를 가장 안전하게 다스릴 수 있는지’를 전령을 보내 물었다. 트라쉬불로스는 말없이 전령을 밀밭으로 데려가 이삭들 중 가장 크고 유독 높이 자란 이삭들을 골라 잘라버렸다. 전령은 이 행동의 의미를 모른 채 페리안드로스에게 보고했고, 페리안드로스는 이를 ‘국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위협이 될 만한 엘리트)들을 처형하라’는 조언으로 이해하고 실행에 옮겼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서는 두 인물의 역할이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 567d ‘축복받은 필연’ : 앞서 설명한 내적 필연성 즉 평생 대중의 미움을 받고 살거나 죽을 수밖에 없거나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는 참주의 삶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567d ‘숱한 자들이 날아 들 겁니다. 외래종 수벌’ : <법률>에도 이들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거론할 가치가 있는 외국인들은 네 부류입니다. 첫째 부류 중 상당수는 돈벌이하러 다니느라고 한 해의 이맘때쯤 바다 건너 다른 나라로 그야말로 날개라도 단 것처럼 날아들지요.’(952e) 외국인 용병으로 구성된 경호대는 그리스 참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크세노폰의 <히에로>(Xen. Hiero 5.3), 특히 디오니시우스에 관해서는 그로트(G. Grote)의 저서 <그리스 역사>(History of Greece X P. 221)를 참조.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외래종 수벌은 비 그리스계 외국인을 말하고 토종 수벌은 전쟁 포로가 되어 자국 시민의 노예가 된 사람들로서 비(非) 그리스계 외국인, 그리스계 다른 폴리스 출신자 모두를 포함한다.

* 568a-b ‘지혜로운 자들과 어울림 덕분’, ‘비극 시인을 체제 안에 받아들이지 않아도’ : 여기서 ‘지혜로운 자들’이란 참주와 어울리는 당대 비극 시인들을 말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참주 관련 부분에서 ‘지혜롭다sophos’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사용한다. 물론 그것은 참주들이 ‘부자의 문간’(489b)으로 몰려드는 현자들로부터 지혜를 얻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다. 하지만 플라톤은 여기서 그 말을 참주와 그 주변에 몰려드는 시인들에 대한 찬사로 바꾸어 그들 모두를 지혜로운 자들로 비틀어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이 여기서 인용한 말 중 ‘비극은 지혜롭다’는 표현 자체는 사실 에우리피데스가 아니라 소포클레스의 <작은 아이아스> 중 한 구절이다. 플라톤의 이 오류는 <테아게스> 125b에서도 반복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아마도 에우리피데스가 ‘지혜로운σοφός’이란 말을 상투적으로 과도하게 반복하고 있었던 탓에, 그런 오해가 발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에우리피데스가 참주정을 ‘신과 같은 것이라고 찬양했다’(568b)는 말도 사실 그것이 실린 <트로이 여인들>에서는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진정한 비극은 아름답고 좋은 삶을 모방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기본적으로 당대 비극 시인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사실 5세기 아테네에서 전성기를 이룬 연극들은 비극과 희극을 불문하고 모두 부자들의 공적 기부로 유지되면서 권력을 비판하기보다는 당대 민주정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도구 즉 대중용 교육과 선전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장치로 이용되곤 했다. 이곳에서도 그들은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군중을 끌어 모으고 목소리가 아름답고 우렁차며 설득력 있는 자들을 고용해서 그 나라의 정치체제를 참주정이나 민주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568c) <법률>에서도 플라톤은 아테네 손님의 입을 통해 새로 세우는 나라에 비극시인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817a-d 참고)

* 568b ‘그들은 양해할 것입니다.’ : 비극시인들을 참주정 찬양자로 우리들이 배척해도 그들 중 일부는 왜 자기들이 그렇게 불리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의미. 이곳에서도 ‘지혜롭다sophos’와 ‘세련되다kompsos’라는 표현 모두 반어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 568c ‘정치체제들의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숨이 차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들에 대한 존중timē은 그만큼 더 시들고 마네.’ : 시인들은 기본적으로 지혜롭고 영리하여 현실과 타협하여 참주나 민중들의 즉물적인 요구에 잘 부응하고 그들로부터 존중을 받지만, 옳고 그름만을 기준으로 나라가 운영되는 철학자 왕정에 가까이 갈수록 그 기준에 부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해 존중받기 힘들다. 이것 역시 당대 시인들에 대한 플라톤의 기본 시각을 잘 보여준다.

* 568c ‘옆으로 새서eksebēmen’ : 참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비극 시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새 나간 것을 말한다.

* 568d ‘신전 재물이 나라에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에는 그것을 쓰고, 또 자신들이 파멸시킨 자들의 재산을 쓰리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 실제로 디오뉘시오스 1세는 신전들을 약탈함으로써 헬라스의 도덕관념에 큰 충격을 주었다.(그로트 <그리스 역사> X p. 300, 302) 시라쿠사의 기사 테오도로스(Theodorus)가 디오뉘시오스 1세를 고발한 탄핵서(Diodor. XIV 65)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자는 신전들을 약탈하고, 사유 재산을 그 소유주들의 목숨과 함께 빼앗은 후, 주인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그 집의 종들에게 급료를 주고 있다.”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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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주tyrannos는 일반적으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이용하여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차지하고 독재를 일삼는 사람을 말하지만 세습 참주를 비롯해 참주마다 집권 배경과 행태가 조금씩은 차이가 있다. 이곳에서 가장 타락한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을 이끄는 참주는 민주정의 제멋대로의 자유가 초래한 위계질서의 붕괴와 그로 인한 계층 간 갈등과 빈부격차의 심화를 틈타 침 달린 수벌 즉 선도자가 대중의 이익을 내세워 환심을 얻은 후 민회 등 민주정의 의사 결정 체제를 무력화시키고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오직 자신만의 권력과 이익, 안위를 위해 오히려 민중을 노예로 삼아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자로 그려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멀게는 기원전 6세기 초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Periandros, 기원전 6세기 중후반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와 그의 아들 히피아스Hippias, 기원전 5세기 시라쿠사의 히에론Hieron 1세와 겔론Gelon 등이 있었고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하기 전 만나거나 목도했던 참주들의 경우에는 기원전 404년 민주정의 혼란을 틈타 스파르타를 등에 업고 권력을 차지한 30인 참주들과 플라톤 자신이 시칠리아를 처음 방문했을 당시 목도한 시라쿠사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가 있다. 특히 플라톤의 <일곱 번 째 편지>를 보면 30인 참주정과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당시 민주정에 대한 절망적인 탄식과 함께 플라톤 자신 그러한 타락한 정체들이 철학자 왕정을 꿈꾸게 된 기본 배경이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326a)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품고 그의 나이 40세 때 방문했던 디오뉘시오스 1세 참주정 치하 시라쿠사 사람들의 타락상이 그 뒤를 이어 세세하게 그려지고 있다.(326b-c)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참주들의 행태는 이전 시대 참주들에 대한 전승도 일부 포함되어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으로는 그가 실제로 겪은 30 참주들과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의 폭압적 행태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불확실한 전승에 따르면 디오뉘시오스 1세가 그곳을 처음 방문한 플라톤을 초청하여 자신과 친교를 맺을 것을 강권하자 그에게 ‘강한 자가 덕에 있어서 뛰어나지 않는 한, 강한 자의 이익은 자족적이지 않다’고 입바른 소리를 하여 디오뉘시오스 1세에 의해 노예로 팔릴 뻔했으나 퀴레네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고도 전해진다. 그럼에도 그의 편지에는 정작 당시 시라쿠사의 타락상은 언급되어 있어도 디오뉘시오스 1세의 이름은 한군데에서조차 거론되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주석가들은 시라쿠사에서 그가 겪은 수모가 플라톤 자신 얼마나 입에 담기조차 싫어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해석하기도 한다.(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편지들> 부록 ‘플라톤의 생애’ 참고)

*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완벽한 의미의 참주정을 ‘1인 지배자가 책임 추궁을 당하지 않으면서 지배 받는 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더 나은 사람들 모두를 지배하는’ 정치체제로 규정하고 있다.(<정치학> 1295a 20 이하) 아리스토텔레스의 참주정에 대한 위와 같은 규정은 다른 정치체제들에 관한 규정과 마찬가지로 지배자의 숫자와 지배 목적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다른 정치체제들을 다룰 때도 그랬듯이 그러한 외적인 양태나 지배 목적만이 아니라 지배 원리가 과연 철학과 지성에 입각해 있는 것은 아닌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것에 더해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 상태 내지 내적 욕망구조까지 유기적으로 함께 고려한 상태에서 참주정과 참주정적 인간을 규정하고 있다. 그만큼 플라톤의 정치체제론은 복합적이다. 그에 따라 이곳에서 참주정은 외적 통치구조에서 계층 간 상호 분업적 조화와 공존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 즉 나라의 모든 권력이 오직 참주 한 사람만의 이익을 위해 집중되어 있는 체제로 규정됨과 동시에 내적 욕망구조에서 영혼의 조화가 완전히 마비된 상태 즉 영혼의 이성 부분이 자신의 사적 탐욕을 극대화하는 도구적 계산적 이성으로 전락하고 기개 부분과 욕구 부분은 그것에 철저히 예속된 상태로 규정되고 있다. 요컨대 철학자 왕정의 통치구조와 욕망구조 모두가 그야말로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와해된 상태가 곧 참주정인 것이다.

* 이곳 제8권 말미에서는 우선 참주정의 행태와 특징이 다루어지고 이어서 제9권부터는 참주정적 인간의 행태와 특징이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참주정의 행태와 특징만 보더라도 참주정이 철학자 왕정과 비교하여 얼마나 정반대의 위상과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전형적인 특징들을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처음에는 채무 탕감과 토지 분배 등 대중을 위한 유화정책을 편다.

2) 민중이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처지에 놓이도록, 먹고 사는 일 외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그리고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파멸시킬 구실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도발한다.

3) 자신을 옹립하는 데 협력한 자들일지라도 참주를 비판하는 자들이 있는 경우에 친구든 적이든 조금이라도 유용한 자는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모두 제거한다.

4) 자신의 안위를 담보하기 위해 외국 용병을 끌어들이거나 내국 노예들을 빼앗아 자신의 경호창병으로 삼는다.

5) 자신을 지혜로운 자로 칭송하며 아부하는 시인들 세칭 지식인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자신을 찬양하는 시를 짓게 하고 목소리가 우렁차고 설득력 있는 자를 고용하여 참주정을 옹호하는 연극을 공연하도록 한다.

6) 신전 재물 등 국가 재산은 물론 자신들이 파멸시킨 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쓰고 민중에게 부과하는 세금은 낮추다가 그것마저 동이 나면 폭력으로 민중들을 수탈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고대 그리스 참주정의 자기 보존 방식을 이곳보다 훨씬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곳의 특징들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 참주정이 얼마나 최악의 정치체제인지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그 주요 내용을 추려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정치학> 1313b 1-1314a 10)

1) 특출한 사람 높은 기상을 가진 사람을 제거한다.

2) 정치적인 모임, 사적인 잔치 등을 허용하지 않는다.

3) 자부심과 신념을 형성케 하는 모든 것을 경계한다.

4) 학파나 학문적 동아리가 생겨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5) 도성에 있는 사람들을 항시 보이는 곳에 있도록 한다.

6) 남자들에 대한 험담을 누설할 수 있도록 여성과 노예에게 선의를 베푼다.

7) 피지배자들의 말과 행위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도록 염탐꾼을 갖고 있어야 한다.

8) 일상에 매달려 음모를 꾸밀 수 없도록 여가를 없애고 피지배자들을 가난하게 한다.

9) 지속적으로 지도자가 필요한 상태에 있게끔 끊임없이 전쟁을 도발한다.

10) 고분고분한 사람, 아첨하는 사람들에게 영예를 부여한다.

* 참주정이 갖는 이와 같은 특징들은 언론, 출판, 결사, 사상의 자유를 금지하고 시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일상으로 삼았던 20세기 인류가 겪은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파시즘과 나치즘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오늘날 나날이 득세하는 인종주의, 극우주의, 신종 매카시즘, 무한경쟁과 배타적 이기주의 및 그로 인한 각자도생의 삶도 그러한 피폐상이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말해준다. 게다가 절망스럽게도 초국적 기업들의 정보 감시 및 통제 시스템은 대중을 위한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환호를 바탕으로 더욱 정교함을 더해가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 러시아의 푸틴을 비롯한 현대판 참주들은 그러한 행태들이 초래하는 문명적 환경적 위해들에 눈을 감고 오히려 그것들을 경쟁 우위의 발판으로 삼아 군사적, 경제적 온갖 수단을 다해 끊임없이 전쟁과 침탈을 자행하고 있다. AI로 표징되는 현재 정보문명의 급속한 발달 또한 그것을 선도하는 일부 소수의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머지 대부분의 나라를 거의 불가역적인 양극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부 선진 소수의 나라에 속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그것의 선도적 개발에 목을 매고 있지만, 자칫 초인간 인공지능이 통제 불능의 수준으로까지 발달하는 경우 거꾸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설사 그것이 고도의 혜택과 효율성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어쩌면 속칭 부자 나라 잘난 사람들만 그것을 누리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과 사람들은 그들에 예속되어 가난과 억압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초국적 신종 계급사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기후 및 환경파괴까지 더해질 게 필연이라면 인류의 미래는 더욱 암울하다. 만약 AI가 초고도의 인공지능을 갖고 있으면서 사람과 똑같이 자의식과 함께 생물에 준하는 생존 및 번식 욕구, 정치적 능력까지 갖추어 ‘자기를 무력화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는 힘의 개입’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른다면 또는 그런 AI를 최상위 수준으로 운용하는 초강대 국가들과 초국적 기업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그 자체 이미 참주적 특징을 내면화한 것들로서 필연적으로 상호 패권투쟁을 유발하면서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물론 위와 반대로 그에 대응하여 그 만큼 도덕적 AI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인류 전쟁사가 보여주듯이 그들 간 적대적 싸움 자체가 초래하는 피 흘림의 역사는 오히려 크기와 정도를 더해가면 더해갔지 결코 줄어들거나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비관적 상상들이 매우 극단적이고 단선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지성의 결여가 초래한 고대 참주정의 폐해가 오늘날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고도로 발달한 기술 문명의 힘을 바탕으로 더욱 강고하고 보다 주도면밀한 방식으로 더욱 광범위하고도 심각하게 유포, 심화, 고착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은 오늘날 최선의 정치체제로서 평민 다수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체제를 강제로건 속임수로건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2500년 전 참주정의 참혹상을 겪은 플라톤은  아래와 같은 신념을 가슴 깊이 새기고 평생에 걸쳐 이상국가를 구상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적 신념의 밑바닥에는 그 이상의 크기와 깊이에 못지 않게 신의 도움에 기대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자신을 절망에까지 이끌었던 참담한 기억들이 무거운 근심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다.  “올바르고 진실되게 철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모종의 신적 도움을 받아 진정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일곱번째 편지> 326a, <국가> 473d)

*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정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플라톤이 <국가>에서 정치체제의 변화를 논하면서 그러한 변화가 실제 역사에서는 플라톤의 말처럼 반드시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과 함께 참주정 또한 정치체제 변화의 한 국면인데도 그 참주정이 또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지는 다루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정치학> 1316B) 그러나 이것 역시 오히려 <국가> 제8권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정치체제 변동론이 정치체제가 실제로 어떻게 역사적으로 변화해가는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다만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이 최선의 정치체제로서 철학자 왕정으로부터 행복과 정의와 관련하여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방편적 논의 차원의 것임을 반증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번 언급했지만 플라톤의 철학은 역사철학이건 정치철학이건 바람직한 목적과 방향은 제시되어 있을지라도 그 실제 진행은 나라건 개인이건 능력에 따라 그렇게 갈 수도 있고 가다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전환할 수도 있는 이른바 양상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박홍규 선생이 플라톤의 철학을 목적론이되 동적인 목적론으로 부르는 이유도 플라톤 철학 자체가 그러한 변화의 역동적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박홍규의 존재론적 사유에 담긴 플라톤의 정치철학’,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 참고) 이런 의미에서도 오늘날 정치적 문명적 위기 또한 정치의 지성화를 강조하는 플라톤의 가르침대로라면 그것의 해결 및 극복 모두 우리 손 특히 현대 정치지형을 떠받치고 있는 시민들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지성의 힘을 어떻게 깨우치고 어떻게 함께 사회 변혁의 역량으로 모으고 키워 나아갈 것인가에 달려있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경우 최고 권력자의 참주적 행태로 나라가 큰 위험에 처했을 때 평범한 일상의 시민들이 보여준 위기 극복의 모습들은 시대의 모순을 혁파하고 변화를 담보하는 민중의 지성, 집단지성의 발현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평화적 시민 혁명으로서 촛불 혁명은 현대 문명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를 알려 주는 실로 세계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이로써 참주정에 관한 논의는 제8권으로 끝난다. <국가>의 권수는 본 강해 서두에서 밝혔듯이 기본적으로 당대 파피루스 권당 기준 분량에 따라 나누어진 것이라 각 권이 꼭 주제에 맞추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참주정적에 인간에 대한 논의는 참주정과 쌍을 이루는 논의임에도 제9권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무리된 후(576b) 타락한 정치체제에 관한 논의의 최종 목표 즉 가장 최선의 정치체제로서 철학적 왕정과 철학자 그리고 가장 최악의 정치체제로 다루어진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사람과 가운데 과연 누가 왜 얼마나 더 행복한가에 대한 비교 판정이 이루어진다.(576b- 제9권 끝 592b)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제9권 576b) – (3)

파스칼 길렌 지음,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갈무리, 2026.5) 서평|글: 전솔비(시각문화 연구자) [철학자의 서재]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 서평

 

전솔비(시각문화 연구자)

 

신자유주의 시대 예술적 실천의 조건을 묻다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 전 지구적 예술, 정치 그리고 포스트포드주의>(파스칼 길렌,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26)-

올 초 처음으로 제안받은 일을 거절하는 경험을 해보았다. 언제부턴가 속도감 있는 예술 노동의 생산 루틴이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빠르게 진행되는 일들과 흐르는 시간을 열심히 따라잡으려 해도 항상 뒤처지는 기분이 불안했고, 어딘가 심각하게 아플 때까지 이 속도를 멈추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쌓이고 있었다. 정확한 출근과 퇴근 개념 없이 늘 읽고 쓰고 듣고 말하며 계속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감각, 즉 ‘한계를 모른다는 감각’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조건이자 동시에 자신을 갉아먹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소진(번아웃)은 아이디어가 고갈되었다는 느낌보다는, 뇌의 회백질 속에 언제든 활성화될 수 있는 미개발된 수동적 영역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좌절감에서 기인한다.” 파스칼 길렌의 신간에서 읽은 이 문장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예술가의 작업 방식과 노동 환경을, 어쩌면 나와 우리의 일상에 감춰진 진실을 너무나도 잘 묘사하고 있었다.

예술적 웅성거림의 두 가지 목소리

예술가의 노동 방식과 예술계의 작동 메커니즘은 이미 사회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많은 이들이 소진되지 않는 자신의 창조성을 증명하기 위해 번아웃이 올 때까지 일하고, 임시 계약 혹은 무계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끊임없이 이동한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해내는 오늘날의 예술가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 비물질 노동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고전적 자연주의와 달리 자신이 표방하는 자유를 불신하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통제, 측정, 관리하려 하는 억압적 자유주의에 가깝다. 신자유주의 논리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기업가적 마인드에 녹아들게 만든다. 저자는 포스트포드주의 노동 환경의 최전방이자 완벽한 모범이 된 예술의 양가성에 대하여 비판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나간다.

이 책은 포스트포드주의로 세계화된 예술계의 제도적 층위 분석에서부터 민주주의와 예술의 관계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한 ‘웅성거림’이라는 용어는 영어 단어 murmuring에서 왔다. 일반적으로 ‘중얼거림’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번역가는 저자의 의도와 사회학적 맥락을 반영하여 ‘웅성거림’으로 옮겼다고 말한다. 여기서 ‘웅성거림’은 비결정적인 집단적 소음이며, 복수의 소리이자, 전정치적 에너지로서의 사회적 활력을 의미하고 있다. 고립된 개인의 인간적인 뉘앙스를 띄는 ‘중얼거림’과 달리, ‘웅성거림’은 광장과 같은 넓은 공간에서 복수적이며 비인간적인 주체들을 포괄하는 의미를 불러낸다. 저자는 오늘날의 “예술계는 서로를 부정하고 침식하며 동시에 소환하는 역설적인 의미들로 가득 찬 장”이라고 말하며, 예술적 웅성거림이라는 현상 속에는 “할 수 없음”과 “하고 싶지 않음”이라는 두 가지 목소리가 들어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책에는 강조표시가 없지만 이 부분은 분명 이 책의 하이라이트이다. ‘할 수 없음’과 ‘하고 싶지 않음’이라는 두 가지 중첩된 목소리로 현실을 비틀고 미래를 끌어오는 것이 예술가의 정체성이자 역할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두 가지 목소리의 역학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예술의 정치성, 실천성을 말하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억압적 자유주의는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들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부정할 자유 또한 완전히 닫지 못한다. 가능성의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는 건 자유를 통제받는 억압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모른 채 혹은 자신도 모르게 탈출구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저항이기도 하다는 점을 여기서 읽어낼 수 있다.

유동하는 ‘우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저자는 예술 사회학과 비판적 사회 이론을 결합하여 이론적 뼈대를 세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집단적 가치 체제와 그의 제자 나탈리 하인리히의 단수적 체제를 병치하고, 여기에 빠올로 비르노의 비물질 노동론을 붙여 정체된 예술사회학을 재구성하려 시도한다. 저자는 포스트포드주의 노동 환경의 대표적 속성이 비물질 노동이라면, 그것을 가장 잘 구현하는 것이 예술가라고 보고 있다. 저자는 빠올로 비르노의 비물질 노동론을 참조하여 비물질 노동자는 유능한 연행자(수행자), 즉 퍼포머와 같다고 말한다. 예술가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당장 물질화할 수 없음에도 말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성과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이러한 끊임없는 연결 상태는 고도의 관계 맺기 역량을 요구하며, 대화나 메일, 문자에서도 끊임없이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한 섬세한 감정 노동을 지속시킨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5장 ‘노마데올로지: 유목적 존재의 미학화’에서 저자는 오늘날 미술 비엔날레가 열리는 곳과 망명 센터의 지리적 인접성에 주목하며, 자발적인 노마드로서의 예술가와 원치 않는 조건에 의해 노마드가 된 노숙인, 난민, 이주민들이 서로를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깝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유동하는 ‘우리’라는 말로 예술가들은 자신의 유목적 삶을 쉽게 수많은 소수자와 동일시하지만, 노마드적 존재로 쉽게 동일시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간극을 예술이 종종 감추거나 못본 체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술가들이 반드시 정치적일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노마드적 소수자들의 삶과 자신을 동일시하려 한다면 그러한 예술적 전략으로서의 노마디즘은 반드시 코뮤니즘적일 때만 유의미하고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예술적 실천의 조건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비판하는 자본의 논리가 결국 자신들의 경력을 쌓게 해준다는 점에 대해 ‘냉소’하면서 시스템을 떠나지 못하며,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예술계에서 고도의 적응력으로 ‘기회’를 찾는다. 하지만 저자는 예술가들을 단지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비르노의 관점을 빌려, 긍정이나 부정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초도덕적 관점에서 기회주의를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자신의 존재 방식을 성찰하고 거리 두며 끊임없이 발언의 자리를 찾아내는 행동의 가능성 또한 열어두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할 수 없음’과 ‘하고 싶지 않음’의 진동 속에서 분명 작은 저항의 수행성이 발현되고 있으며 그것은 기회를 포착하는 순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적 실천이란 ‘할 수 없다’라는 무기력함을 ‘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으로 만들어내는 전환의 지점에서 생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의 초반에 언급된 중요한 문장 속에 잘 함축되어 있다.

“개별 예술가가 더욱 선명한 단수성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수많은 타자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수많은 동료와 더불어 웅성거리는 다중 속으로 흡수될 수 있는 것이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며 창작하는 예술가의 실천은 그가 참조하고 의존하는 수많은 관계를 통해 비로소 웅성거림의 현장 속에서 살아 숨쉴 수 있다. 이는 타자에게 의존적이기에 역설적으로 독립적일 수 있고, 독립적이기에 다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확장해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술가의 자율성이나 개인의 실천처럼 보이는 목소리들이 사실은 늘 타인의 실천과 흔적을 경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웅성거리는 현장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책이 반복해서 말하듯, 자율성은 늘 타율성을 경유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유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웅성거림일지 모른다. 예술적 실천으로 물질화되지 않은 경유지 안의 이야기들, 그곳에 남겨진 반복적인 시도와 실패의 기록들, 갈등이 남긴 사유와 감정들을 풀어내는 작업들을 더 적극적으로 발굴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83)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3)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1.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2.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a-576b) -(1)

 

[562a –566d] 민주정에서 참주정으로의 변화

* 소크라테스는 이제 가장 아름다운κάλλιστος 정치체제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인 참주정τυραννίς과 참주τύραννος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우선 그는 민주정이 어떤 방식τρόπος으로 어떻게 참주정으로 변화하는지μεταβάλλει에 대해 언급한다.(562a) 그것은 과두정이 좋은 것ἀγαθόν으로 내세운 것 바로 부에 대한 끝없는 추구ἀπληστία 그리고 돈벌이χρηματισμός 때문에 그 체제가 파괴되었듯이 민주정 또한 그것이 좋은 것으로 규정하는 것(562b) 자유ἐλευθερία에 대한 끝없는 추구ἀπληστία와 다른 것들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그 체제가 파괴되고 참주정이 요청되는παρασκευάζει 상황에 이르게 된다.(562c)

* 민주정체제의 나라는 통치자들이 자유를 많이 허용해주지 않으면 그들을 과두정적 인간ὀλιγαρχικός들이라고 비난하고 통치자들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은 노예가 되려는 자라 모욕한다 προπηλακίζει, 그리고 자유ἐλευθερία가 극단에 이르러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들, 아버지와 아들, 시민ἀστός과 거류민μέτοικος 또는 외국인ξένος, 선생διδάσκαλός과 학생φοιτητής, 젊은이νέος들과 연장자πρέσβυς들 사이에 어떠한 위계나 예의도 찾아볼 수 없다. 서로가 하나같이 동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팔려온 남녀노예도 저들을 사들인 자에 못지않게 자유롭고, 아내와 남편 사이도 서로 평등ἰσονομία하고 자유롭다. (562d-563b) 이 나라에서는 자유가 넘쳐나 짐승 이를테면 개κύων도 여주인처럼 되고, 말ἵππος과 나귀ὄνος도 사람들이 비켜서지 않으면 언제든 들이 받을 정도로 자유롭고 당당하다σεμνῶς.(563c)

*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면, 그 핵심은 시민πολίτης들의 영혼ψυχή을 아주 예민하게ἁπαλῶς 만들어서 누가 그 어떤 예속이라도 가하려 든다면 발끈하고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563d) 이들은 자신들의 제멋대로의 자유를 위해 성문γεγραμμένων법이든 불문ἀγράφων법이든 법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참주정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그 만큼 멋지고 기세등등하다νεανική.(563e)

* 그러나 과두정에서 생겨나 과두정을 파괴했던 것과 똑같은 질병νόσημα이 민주정에도 생겨난다. 그 질병으로 민주정의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ἐξουσία는 더 널리 퍼지고 더 강력해져서 되레 민주정을 완전히 예속시켜버린다καταδουλοῦται . 무엇이든 지나친 것τὸ ἄγαν은 그 반대쪽으로의 큰 변화μεταβολὴ를 이끌어낸다.(563e) 개인이나 나라를 막론하고 지나친 자유는 바로 지나친 예속δουλεία으로 변한다. 이렇게 민주정으로부터 참주정이 수립된다. 극단적인 자유로부터 최대의 예속이자 가장 야만스러운ἄγριος 예속이 수립된 것이다.(564a)

* 민주정을 참주정으로 예속시킨 질병은 다름아닌 저 게으르고ἀργός 사치스러운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들 중 가장 용감하고 부류를 이끄는 자들이 이른바 침을 가진 수벌κηφήν이고 그들 뒤따르는 자들이 침이 없는 수벌들이다. 이들 두 무리는 가래φλέγμα와 담즙χολή이 몸에서 그러듯이, 어느 정치체제에서 생겨나 소동을 일으킨다.(564b)

* 그러므로 나라의 뛰어난 의사ἰατρός인 입법가νομοθέτης는 최대한 이런 무리가 생겨나지 않도록 미리미리 잘 살펴보아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생겨난다면, 최대한 신속하게 이것들이 들어있는 봉방κηρίον까지 함께 도려내야만 한다.

*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이 처해있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우리의 논의에서 민주정체제의 나라를 세 부류γένος로 분할해 볼 것을 제안한다.(564c) 이들 중 첫 번째 부류는 과두정에서는 관직ἄρχων도 단련의 기회도 없어서 강력해질 수 없었지만 민주정에서는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 덕에 훨씬 더 강력해진 부류이다. 이들은 말과 행동에서 가장 사납고 가장 앞장서 있는 자들로서 이 정치체제에서는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일을 이들 부류가 결정한다.(564d)

* 그리고 대중πλήθος과 구별되는 또 다른 두 번째 부류는 본성이 가장 질서 잡혀 있는 자들οἱ κοσμιώτατοι이어서 돈벌이도 잘하는 가장 부유한 자들οἱ πλουσιώτατοι이다. 그에 따라 이들은 수벌들의 먹잇감βοτάνη이라고 불린다.(564e)

* 그리고 세 번째 부류가 민중τὸ πλεῖστον이다. 이들은 스스로 노동을 하고αὐτουργός 공무에는 상관하지 않으며ἀπράγμων 가진 것이 결코 많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지만 모일 경우 민주정 내에서 수도 가장 많고πλεῖστον 가장 강력한κυριώτατον 부류이다. 그러나 이들은 앞장선 자들οἱ προεστῶτες이 가진 사람들로부터 재산을 빼앗아 그 대부분을 자신들이 차지하고 나누어주는 나머지를 자기 몫으로 얻을 뿐이다.(565a)

* 한편 재산을 빼앗긴ἀφαιροῦνται 자들은 정변까지는 엄두를 못내도 자신을 방어ἀμύνεσθαι할 수밖에 없어 무엇이든 하려 하지만 다른 편들로부터 민중에 대한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자 과두정적인 인간들로 고발을 당해 결국 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진짜 과두정적인 인간ὀλιγαρχικοὶ이 된다. 민중들이 그러는 건 자발적인 게 아니라βούλονται μή 무지해서 그리고 중상하는 자들에게 속아서 그러는 것이고,(565b) 부자들이 그러는 것 역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저 수벌이 침으로 그들을 쏘아 일으킨 나쁜 일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민중들과 부자들 사이에서는 서로 간에 탄핵εἰσαγγελία과 재판κρίσις, 소송ἀγών이 벌어진다.(565c)

* 그런데 민중δῆμος은 늘 누구 하나를 특별히 세워 자신들의 앞장을 서게 하고서 그를 보살피고τρέφειν 크게 키워내는αὔξειν 습성이 있다εἴωθεν.(565c) 그렇다면 참주는 이 선도자προστατῆς라는 뿌리ῥίζα로부터 싹 터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선도자가 참주로 변하는 것은 마치 아르카디아 지방의 뤼카이오스 제우스 신전에 관한 이야기처럼 민중의 앞장 선 자가 동족의 피를 맛보고 늑대로 변하는 것과 같다. 선도자는 동족이 피 흘리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사람들을 부당하게 고발하고 법정δικαστήριον으로 끌고 가 사형시켜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불경한ἀνόσιος 혀와 입으로 동족의 피를 맛보며 사람들을 추방ἀνδρηλάτης하고 (565d) 살해하며ἀποκτεινύῃ 채무탕감ἀποκοπή과 토지재분배ἀναδασμός를 암시한다. 필연적으로 이런 자는 그러다가 정적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사람에서 늑대로 변해 참주 노릇을 하게 된다.(565e) 바로 이런 자가 재산οὐσία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내분을 일으키는 자ὁ στασιάζων가 되고 이런 자가 추방되었다가 적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되돌아오게 되면, 참주로 완성되어 돌아온다.(566a)

* 그런데 그를 쫓아낼 수도 없고 시민들의 적이라고 중상하여 처단할 수도 없을 경우, 그의 적들은 폭력을 써서 그를 암살ἀποκτεινύναι할 음모를 꾸미게 되고 그에 맞서 참주는 참주다운 저 유명한 요구αἴτημα 즉 민중을 돕는 자ὁ τοῦ δήμου βοηθός인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경호대φύλαξ를 민중들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이에 민중은 저자가 잘못 될까봐 두려워하면서 정작 자신들 걱정은 하지 않고서 경호대를 마련해준다.(566b)

* 돈도 있고 또 돈에 더해 민중혐오자μισόδημος란 혐의를 받게 된 사람이 이런 일들을 보게 되면 제 못난 것을 부끄러워하지도αἰδεσθείη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붙잡혀 죽음을 당해 다시 부끄러워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566c) 저 선도자 자신은 더 이상 선도자가 아니라 상대를 숱하게 쓰러뜨리고서 ‘나라라고 하는 전차δίφρος’에 올라타 있는 완전한 참주가 된 것이다.(56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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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2a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 ; 557c에서는 민주정이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로 나오고 이곳에서는 참주정이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로 나온다. 차이가 있다면 그곳에서는 민주정이 갖는 온갖 성격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만하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직접 참주정을 가장 아름다운 체제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아름다운 것이 진정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아름답다는 말은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참주가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도 소크라테스는 ‘참 아름다운 정화’(567c)라고 말하고 있다.

* 562c ‘천성이.. 이 나라 뿐이라는 소리’ :  이를테면 『메넥세노스』 아래 귀절 참고.  아테네에서 ‘본성에 따른 태생상의 평등은 우리로 하여금 법적 평등을 추구하도록 강제하고 있고’( 239a)

* 562a ‘무정부상태anarchia’ : 무정부주의(anarchism)란 말에 익숙해서 이렇게 번역은 하였지만 기본 뜻은 ‘다스림이 없는 상태’이다.

* 562e ‘아들은 아버지처럼..두려워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지’ : 제멋대로의 자유가 가져다 준 이러한 행태는 <법률> 701b-c에도 나온다.

* 563c ‘사람들이 기르는 짐승’ : 로마 시대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율리아누스도 자신의 풍자 저서인 『Misopogon(수염 혐오자)』에서 안티오키아Antiochia 시민들의 과도한 자유와 방종을 비꼬며 짐승에 비유하고 있다. 그 책에서 그는 당나귀나 낙타가 짐승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이 동물들을 호화로운 공공 산책로 끌고 다니는 상황을 마치 신부가 결혼식장으로 입장하는 것 같다고 풍자하고 있다.(Teubner 판, p. 22, 23)

* 563c ‘상대가 비켜서지 않으면 언제든 들이받아 버리지’ : 에우리피데스도 『이온(Ion)』 (635~637행)에서 아테네의 도시 생활에서 지식인 또는 시민들이 겪는 수모 중 하나로 길거리에서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 떠밀림을 당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 563e ‘성문법이든 불문법이든 법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 플라톤은 <일곱 번째 편지>에서도 자신이 젊은 시절 겪은 30인 참주정과 스승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민주정에 대해 ‘성문법이건 관습이건 간에 다 황폐해졌는데, 그 진행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고 회고하고 있다.(<편지들> 325d)

* 564b ‘가래’와 담즙’이 몸에서 그러듯이’ : 뜨거운 체액은 통증을 유발하는(침이 있는) 것에 반응하고, 차가운 체액은 통증이 없는(침이 없는) 것에 반응한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85d 이하 참조.

* 564c  ‘세 부류’ : 부유한 자들, 가난한 자들 그리고 그 사이 중간에 있는 자들. 아리스토텔레스도 폴리스를 구성하는 세 부분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정치학』 4권 11장 1295b 1-5)

* 564d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 민주정의 지도자들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벌(무능하고 기생하는 자들)’ 집단에 속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소수의 예외는 예를 들어 페리클레스(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II 65. 8, 9 및 크세노폰 『향연』 8. 39) 또는 플라톤 자신이 직접 언급한 아리스티데스(『고르기아스』 526b)가 있을 것이다.

*565a ‘나머지를 민중에게 나누어주는’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가장 초기이자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민주정에서 민중dēmos은 주로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은 국토 전역에 흩어져 있어 민회는 자주 열리지 않았고 필요성도 별로 없었다.(『정치학』 6권 1319a 30 이하, 1318b 11, 그리고 1292b 27)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아테네 농부들의 아테네 강제 이주는 아테네 민주정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아리스토파네스의 『평화』 632~643행,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14장 및 16장) 그러나 아테네 말기 민주정이 타락하면서 일찍이 페리클레스 이후 지급되었던 민회 수당ekklēstikos misthos은 민중을 현혹하는 꿀로 여겨졌고 그에 따라 민회가 빈번하게 열리게 되었다.(『정치학』 1293a 1 이하). 민회는 1년에 40회 정도 열려 국가 중요사안 일체가 모두 심의 되었다. 민회는 6000명 이상의 출석을 필요로 했고 도심에서만 열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시민은 참석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민회 수당으로 아고라에서 물건을 구입할 겸 생업을 일시 접고 상경하여 민회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수당지급도 중지되고 아테네의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특히 가장 큰 타격을 받은 테테스 층의 귀족들에 대한 공공연한 기부요구, 상습적인 무고를 통한 이권수수가 횡행하면서 점차 아테네의 공동체 정신도 사라져갔고 민주정의 기본골조도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 565b ‘자신을 방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 : 이것 역시 아테네 민주정의 극도로 타락해 있던 시기 부유한 자들이 처한 상황들을 인용한 것이다. 당시 그들은 자위를 위한 공개적인 활동이 제한되어 있어 비밀 결사 같은 조직을 결성하였고(아리스토파네스 『말벌』 488 이하, 휘블리(Whibley)의 『아테네 정파들』(Pol. Part. in Athens) 65쪽 주석3 참고) 민중들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을 중상하여 민중에 맞서는 과두정적 인간으로 몰아갔다.(『정치학』 1304b 21 이하) 이 과정에 인민 선도자가 개입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565c ‘민중은 … 습성이 있지’ : 이 내용 또한 아테네 민주정 전성기 시절 민중들이 민중의 선도자prostatēs로서 페리클레스나 클레온 등을 내세웠던 것을 가리킨다. 특히 페리클레스는 30년 가까이 민중에 의해 지속적으로 장군직에 선출되어 오랫동안 아테네의 지도자로서 군림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의 정체를 민주정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참주정에 가깝다고까지 평하기도 하였다.

* 565e ‘늑대lykos가 되고야 만다는 이야기’ : 뮐러(Müller) 의 『그리스 역사가 단편(Frag. Hist. Gr.)』 제1권 31쪽, 헤카타이오스 단편 375) 및 파우사니아스의 『그리스 안내』 제8권 2장 6절 참조. 영국의 유명한 인류학자이자 고전학자인 프레이저(Frazer)는 파우사니아스의 해당 책 해당 구절에 대한 각주에서 늑대인간에 관한 고대의 전설들을 집대성하고 있다. 이 미신의 후대 역사에 대해서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9판에 실린 맥레난(McLennan)의 ‘Lycanthropy(늑대인간)’ 항목을 참고. 비고전적 신화들에 나타나는 유사한 사례들에 대해서는 타일러(Tylor)의 『원시 문화(Primitive Culture)』 제2판 제1권 308~315쪽을 참고.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 566a ‘채무탕감과 토지 재분배’ : 플라톤 『법률』 684e,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305a 5이하 참고. 참고로 아테네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책에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참주이긴 해도 온화한 인품과 노련한 정치술로 솔론의 개혁안을 유연하게 실행으로 옮겨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 하되 쿠데타를 피해 망명한 귀족이나 부패한 귀족들의 토지만을 몰수 하여 평민들에게 분배하였고 영농자금의 지원은 물론 수공업의 발전과 해상 무역을 진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참주가 된 장남 히피아스는 사리사욕에 빠진 데다가 폭정까지 일삼아 아테네를 큰 혼란에 빠트려 결국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국외로 추방됨으로써 반세기만에 아테네 참주정은 종말을 고하고 만다.(기원전 510) 당시 참주 히피아스의 동생 히파르코스를 살해하고 순교한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이후 아테네인들에게 참주정의 폭압성과 자유의 이념을 일깨어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후 아테네는 고전기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정치체제 또한 서서히 민주정으로 진입해들어 간다.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도 권력을 잡은 후 토지분배 정책을 취했다.

* 566b ’저 유명한 요구‘ : 이 또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호위대를 요구한 사례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길버트(Gilbert)는 『그리스 국가 제도론(Gr. Staatsalt.)』 I2권 281쪽 각주 1에서 경호대의 존재가 거의 모든 참주정의 발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 아테네 민주정에 관한 보다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본 웹진 필자의 글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15), 주제2. 그리스 문화사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을 참고. 그리고 같은 곳 주제2.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그 의의와 한계’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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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살폈지만 제멋대로의 자유를 특징으로 하는 이곳의 민주정은 아테네 민주정이 가장 타락했던 시기의 양태가 일부 포함되어 있지만 민중 스스로 끊임없는 몸부림을 통해 자신들의 욕구와 권리를 사회적으로 관철해온 근 100년 역사의 아테네 민주정의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모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민주정이 어떻게 참주정으로 변화하는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인용되는 사례들 가운데에는 정치체제에 상관없이 아테네 정치사에서 있었던 사건들과 플라톤 자신의 경험을 연상시키는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를테면 누가 통치자이고 피통치자인지 모르게 된 상황은 기원전 406년 민주정 혼란기 아르기누사이 해전 직후 장군들을 무차별적으로 처형한 민중들의 행태를, 추방되었다 돌아오는 선도자의 행적은 기원전 550년 전후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를, 그리고 동족에 대한 살해, 탄핵과 재판, 소송 등은 기원전 416년 멜로스인 학살, 플라톤 자신이 체험한 30인 참주정과 말기 아테네 민주정의 타락상을 연상시킨다. 특히 참주의 행태를 묘사할 때는 상당 부분 그의 첫번째 쉬라쿠사 방문 시절(기원전 387년) 직접 목도했던 동시대 가장 눈에 띠는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기원전 약 432년 – 기원전 367년)의 여러 모습과 특징들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곳의 정치체제의 변화가 플라톤의 실제 역사관을 반영한 것은 아닐지라도 플라톤은 자신의 사후에도 아테네가 계속 타락을 면치 못할 경우 결국 참주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J. Adam. 노트 참고) 그러나 아테네는 플라톤 사후(기원전 348년) 10년이 지난 즈음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에 패배하면서 아예 멸망하고 만다.

* 많은 사람들은 플라톤이 당대 주류 지식인이고 소피스트나 수사학자, 극작가들은 플라톤에 의해 부당하게 무시당하고 있었던 비주류 지식인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플라톤이 그들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플라톤이 당대 주류 지식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반대로 당시 주류 지식인은 소피스트와 수사학자, 극작가들, 이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실용 철학자들이었고 플라톤은 명문가 귀족이긴 하지만 현실과 무관한 수학이나 천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홀대를 받았다. 아테네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소크라테스와 데모스테네스가 나라의 운명을 걸고 크게 논쟁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왜 플라톤은 아무런 말이 없었는가를 문제 삼는 사람도 있으나 배의 비유에서 조타수가 완전 무시되고 있듯이 사람들은 애초부터 플라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의사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죽임을 당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스승 플라톤이 죽기 직전 아테네를 떠났다. 플라톤은 망해가는 아테네 한 가운데서 묵묵히 제자들을 길러가며 자신의 철학 담론을 글로 써내려갔고 우연찮게 그것이 온전히 전승되고 그 통찰이 갖는 탁월성이 인정되면서 기원 후 한참 뒤에야 철학사의 거두가 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을 기본적으로 시민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관직에 참여하고 정치적 결정에 있어 시민들의 다수의 권위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체제로 규정한다. 그런데 인민 선도자가 나타나 법보다 그가 이끌어 낸 군중의 결의psephismata가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되면 인민은 다수로 구성된 한 사람 즉 각자로서가 아니라 집합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민주정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민주정을 자신이 분류한 민주정의 종류 중 가장 극단적으로 타락한 4번째 것 즉 선동정치로 이어져 참주정과 유사성을 갖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5권 4장 1392a 5-20 참고) 이곳에서 그려지는 민주정의 타락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민주정의 마지막 단계와 완전히 일치한다. 즉 그것은 민주정 스스로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와해시켜가면서 스스로를 참주정의 예속에 빠트리게 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참주정의 등장 배경으로 부자들에 대한 반감을 등에 없고 권세를 키워온 인민 선도자의 등장을 꼽고 있다.(『정치학』 5권 5장 1304b 20 –1305a 35)

* 플라톤은 이곳에서 민주정이 어떻게 참주정으로 변화하는 지를 그리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동일한 사람이 인민 선도자와 장군이 되었던 예전에나 그러한 일이 있었고 (『정치학』 5권 5장 1305a 7 이하) 실제로 참주정은 귀족정에서 과두정 형태의 정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등장했다.(Whibley <그리스 과두정> 72~83쪽. J. Adam 564a 노트 참고) 다만 이곳에서 플라톤은 이곳 논의 목적에 따라 자신이 설정한 욕망구조의 타락과정에 맞추어 참주정의 기원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는 개인의 영혼이 쇠퇴할 때, 모든 욕망이 등질화 되는 ‘isonomia 평등’의 상태에서 불필요한 욕구의 뒤를 이어 불법적인 욕구 내지 ‘비자연적인paranomoi 욕망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비자연적인 욕망의 정치적 표현이자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의 등장을 그리고 있다.

* 특히 민주정의 제멋대로의 자유는 과두정에서 이미 관철된 계층 간 고유 역할의 붕괴와 욕구의 등질화에 더해 사회 관습적으로 그간에 용인되었던 모든 일상의 위계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려 민주정이 참주정으로 타락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된다. 자유의 극단적인 과잉은 모든 사회적 차이 이를테면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는 물론 부자 사이, 부부 사이, 노소 사이를 동등한 사이에 존재하던 관습적 위계와 차이마저 무화시켜 모두가 서로 동등한 관계로 전환시켜 결과적으로 충돌과 갈등, 혐오를 불러일으켜 그들이 그토록 추구하던 제멋대로의 자유마저 심각하게 제한하게 만든다. 욕망이 등질화된 사회 내 갈등관계에서는 누군가가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 자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회적 관계는 결국 날이 갈수록 보다 힘센 자가 보다 약한 자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관계로 변화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러한 관계 속에서 강자에 대해서는 열등감에 따른 시기 질투와 선망을, 약자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무시와 폭압을 서슴지 않는 신경증적 분열적 인간으로 변모해간다. 자학과 가학을 오가는 이러한 분열적 심리 상태는 마침내 자신을 보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약자를 짓밟고 자발적으로 강자에 의존하고 빌붙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만든다. 이렇게 해서 결국 자유의 과잉은 자발적인 예속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강자는 그들의 보호자임을 자처하여 사회 부유층을 착취하여 일부를 나누어 주고 동시에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명분으로 더욱 강고한 방식으로 그들을 통제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그토록 예민하게 추구했던 자유를 포기하고 예속을 자신의 삶의 보전책으로 기꺼이 수용한다. 플라톤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민주정을 구성하는 세 부류 즉 민중과 부자들 그리고 선도자들은 선도자의 주도 아래 그러나 자발적인 형식으로 위와 같은 상호 지배 관계의 변화를 거쳐 그들 스스로 마침내 참주정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 자유의 과잉이 초래하는 이러한 비극상은 20세기 들어와 에리히 프롬(E. Fromm)의 『자유로 부터의 도피』를 통해 파시즘의 등장 배경에 대한 탁월한 분석으로 크게 재조명된 바 있다. 이때 그의 분석이 갖는 탁월함은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내적 심리와 관련한 심리학적 방법론을 채용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개인적 자아의 독립을 포기하고 그 개인적 자아가 결여하고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자기 이외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그 자신을 융합시키려는 경향이 있다.”(재5장 도피의 메카니즘 제1절 권위주의 도입부) 즉 개인의 불안과 공포, 무력감은 그로 하여금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권위에로의 맹목적인 귀의를 결행케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 2500년 전에 플라톤 역시 프롬과 똑같이 정치체제 변화를 영혼 내지 욕망구조 즉 심리학적 요인과 결부시켜 자유의 역설과 참주의 등장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플라톤의 관점은 기본 틀에서 프롬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 점만 보더라도 이곳에서 참주정의 등장과 관련한 플라톤의 성찰이 얼마나 놀랄만한 것이자 선구적인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트럼프 같은 현대판 참주의 등장과 극우주의, 파시즘의 위협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참주정의 등장 배경과 관련한 2500년 전 플라톤의 선구적 통찰이 갖는 위대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 프롬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그 통찰의 중요성을 깨닫고 운위하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반성과 비판적 성찰은 생각났을 때가 제일 빠를 때이다. 그 또한 오늘 우리가 <국가>를 다시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 참고로 제8권 이상국가가 해체되어 타락하는 마지막 단계로서 참주정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지금까지 살핀 정치체제의 타락과 욕망구조의 변화 과정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간략히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정치체제

통치 구조 욕망 구조 목표 지배 욕망
철인왕정 철학자 왕 지배

3계층 분업과 조화

이성 부분의 지배를 통한

이질적 욕망들의 조화와 공존

이성 이성의 지배
명예정 전사 계층의 지배

통치, 전사 계층 간

경계가 와해

수호자 계층의 물질화

이성 부분의 변질

기개 부분의 지배

욕구 부분 절제가 흔들림

명예 기개의 지배
과두정 소수 부자의 지배

3계층 형식상 존재실질 경계는 와해

생산자 계층에 대한 착취

욕구의 등질화

절제의 덕 와해

금권욕의 전일화

필수적 욕구의

지배

민주정 민중 혁명

민중의 지배

3계층 경계 완전 와해. 선도자 출현

욕구의 등질화, 금권화에

제멋대로의 자유가 추가

자유 불필요한 욕구의

지배

참주정 참주의 지배

참주를 제외한

전 계층의 예속화

권위를 향한 자발적 의존

영혼의 질병 상태

권력 불법적인 욕구의

지배

 

* 칼리클레스는 『고르기아스』에서 아래와 같이 강자를 찬양하며 정의와 평등을 비웃는다. (483e-484a) “우리는 우리 자신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한 자들을 빚어내는 과정에. 사자들을 그렇게 하듯이, 그들을 어릴 때부터 붙잡아 동등한 몫을 가져야 하며 그게 훌륭한 것이고 정의로운 것이라는 말로 주문과 마법을 걸어 노예로 만들지요. 하지만 충분히 강한 본성을 지닌 사람이 태어나면 그는 이 모든 것을 떨쳐내고 부서트리며 벗어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노예는 자연에 반하는 우리의 기록, 마술, 주문, 법들을 모두 짓밟고 들고 일어나 자신이 우리의 주인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자연의 정의가 빛을 발합니다.”

이제 가장 타락한 정치체제로서 참주정과 참주에 대한 논의가 남아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연 철인왕정과 철학자는 참주정과 참주보다 정말 강하고 행복한지 그 최종적인 판정이 기다리고 있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1.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2.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a-576b) – (2)

 

플라톤의 <국가> 강해(8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2)

 

Ⅵ.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4. 민주정과 민주정적인 인간, 필수적인 욕구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555b-562b)-(2)

 

[558c-562b] 민주정적인 인간

* 소크라테스는 이제 민주정에 상응하는 개인을 살피기 전에 그가 과두정적 인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지를 먼저 고찰한다. 이곳에서도 그러한 변화 과정은 앞서와 동일한 비유 즉 아버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또 어떻게 아버지와 다르게 변해가는 지를 통해 제시된다.(558c) 절약하는φειδωλός 과두정적인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 아래 길러져 소비적이며ἀναλωτικός 돈벌이에 도움 되지 않는 온갖 쾌락ἡδονή들을 힘으로 다스린다. 그런데 이즈음에서 소크라테스는 보다 분명한 논의를 위해 욕구를 ‘필수적인ἀναγκαῖος 욕구ἐπιθυμία’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로 나눈다.(558d)

* 필수적인 욕구는 우리가 물리칠 수 없는ἀποτρέψαι 욕구들, 충족됨으로써 우리를 이롭게 하는ὠφελοῦσιν 욕구들을 말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는 어릴 때부터 훈련한다면μελετῷ 벗어날 수 있는ἀπαλλάξειεν 욕구들로서 어떤 좋은ἀγαθός 일도 하지 않는 욕구들이다. 이것들 각각의 예παράδειγμα를 들자면 필수적인 욕구란 건강ὑγιεία과 활력εὐεξία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만큼 먹고자 하는 욕구, 요리ὄψον에 대한 욕구 등이다.(559a) 먹을 것에 대한 욕구는 이로운ὠφέλιμος 것이라는 점에서도, 충족이 안 될 경우 생명활동ζῶντα을 중단시킬 수 있다παῦσαι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이것들을 넘어서는 그 밖의 다른 종류의 먹을 것들에 대한 욕구는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들로 몸에도 해롭고βλαβερός 영혼이 현명해지고φρόνησιν 절제하는 데τὸ σωφρονεῖν에도 해롭다,(559b) 이러한 욕구들은 소비적인ἀναλωτικός이지만 그에 반해 필수적인 욕구들은 일들τὰ ἔργα이 이루어지는 데에 유용하므로χρήσιμος 돈 벌어들이는χρηματιστικός 것이다. 성욕ἀφροδισίων ἐπιθυμία과 같은  그러한 쾌락ἡδονή과 욕구ἐπιθυμία로 가득 차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조금 전 수벌κηφήν이라고 이름 붙였던 사람들이고, 필수적인 욕구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곧 절약하는φειδωλός 사람이자 과두정적인 사람이다.(559c)

* 이러한 과두정적인 사람에서부터 민주정적인 사람이 생겨나는 경위는 이렇다. 즉 교육도 시키지 않고ἀπαιδεύτως 돈을 아껴가며 길러낸 젊은이가 수벌이 그러듯 꿀μέλι을 맛보고γεύσηται 온갖 종류의 다채로운ποικίλος 쾌락을 제공할 수 있는 사납고αἴθων 무서운 짐승θήρ들과 어울릴 때,(559d) 그 사람 안에 있는 과두정이 민주정으로 변하기 시작μεταβολή한다. 이 때 이 젊은이는 닮은ὁμοῖος 것이 닮은 것을 지원하듯이 욕구들 중 어느 한 종류가 그것과 닮은 외부 욕구의 지원을 받아 바뀌는데, 만일 이런 지원에 맞서서 그를 훈계하고 책망하는 그의 아버지나 다른 친척들로부터 동맹군이 와서 이 젊은이의 안에 있는 과두정적인 요소를 지원할 경우(559e) 그 사람 안에서 내분στάσις과 이에 대한 반동ἀντίστασις 즉 자기 자신과의 싸움μάχη이 일어난다.

* 이 싸움에서 민주정적인 요소τὸ δημοκρατικὸν가 과두정적인 요소에 굴복하여ὑπεχώρησε 이 젊은이의 영혼 안에 염치αἰδώς와 같은 것이 생겨난다면, 다시 질서가 잡히겠지만κατεκοσμήθη 대개의 경우 아버지의 양육τροφή에 대한 무지함ἀνεπιστημοσύνη 때문에, 추방당한 욕구들과 같은 종류의 욕구들이 다시 뒤이어 자라나고 많아지고 또 강력해지곤 한다.(560a)

* 이후 플라톤은 젊은이의 영혼에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이 갖는 문학적, 수사적 성격을 고려하여 최대한 전문에 가깝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그것들은 이 젊은이의 영혼의 성채ἀκρόπολις에 신의 사랑을 받는θεόφιλος 사람들의 마음διάνοια에서 최상의 파수꾼φρουρός이자 수호자φύλαξ 노릇을 하는 훌륭한καλός 배움μάθημα과 활동ἐπιτήδευμα, 진실된ἀληθής 말λόγος이 비어있음κενός을 알아채고는, 마침내 그 성채를 점령해 버린다.(560b) 거짓되고ψευδής 허풍 가득한ἀλαζών 말과 믿음δόξα이 젊은이의 마음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저 로토스를 먹는 자들Λωτοφάγοι에게로 가서 공공연히 눌러 살면서 친척들이 보낸 지원군βοήθεια은 물론 연장자πρέσβυς들의 말도 사절πρέσβις로 받아들이지 않는다.(560c) 젊은이의 영혼을 장악한 허풍 가득한 말은 염치αἰδώς를 어리석음ἠλιθιότης이라 칭하며 시민권을 박탈해ἀτιμόω 망명객φυγάς으로 만들어 밖으로 내몰고,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남자답지 못함ἀνανδρία이라 부르며 진창에 처박아 내쫓아버린다. 그리고 절도 있음μετριότης과 적절한κόσμιος 지출δαπάνη도 촌스럽고ἀγροικία 자유인답지 못한 짓ἀνελευθερία이라고 설득하여 다수의 이롭지 못한 욕구들과 한 편이 돼서 그것들을 추방해버린다περορίζουσι.

* 그리고 그것들은 신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거창한 의식τέλεσις으로 입교하는τελουμένου 젊은이의 영혼에서(560d) 이런 것들을 어떻게든 비워내고 정화하고서καθήραντες, 그다음에는 오만함ὕβρις과 무정부상태ἀναρχία, 낭비ἀσωτία와 몰염치ἀναίδεια에 화환을 씌워 많은 가무단χορός과 함께 복귀시킨다. 그리고 오만함ὕβρις을 기품있음εὐπαιδευσία으로, 무정부상태를 자유ἐλευθερία로(560e), 낭비벽ἀσωτία은 화통함μεγαλοπρέπεια으로, 몰염치는 용기ἀνδρεία로 부르며 찬양하고 미화한다. 필수적인 욕구들 속에서 길러진 젊은이는 이런 식으로 필수적이지 않고 이롭지 않은 쾌락들을 풀어주고 해방하는 쪽으로 변화한다. 그리하여 이 젊은이는 필수적인 쾌락 못지않게 필수적이지 않은 쾌락을 위해서도 재물χρῆμα과 수고πόνος와 시간을 소비하며 삶을 영위한다διατριβή.(561a) 다만 만일 그가 운이 좋아 거기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는다면, 게다가 나이도 좀 들어서 질풍노도θόρυβος도 지나가고 쫓겨났던 것들 중의 일부를 다시 받아들이고 또 침입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기지도 않는다면, 그는 여러 쾌락을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지낼 것이다. 그리고 마치 추첨에 뽑히기λαχούσῃ라도 한 듯, 그때그때의 쾌락에게 그것이 충족될πληρωθῇ 때까지 늘 자신에 대한 지배권ἀρχή을 그것에게 내어주고, 그러고는 다시 다른 쾌락에게 내맡기면서 결코 그 어떤 쾌락도 소홀히 대하지 않고 동등하게ἐξ ἴσου 키운다. 나아가 누군가가 아름답고καλός 좋은ἀγαθός 욕구에 속하는 쾌락은 높이 평가하고 그렇지 않은 다른 쪽은 제재를 가하고 예속시켜야 한다δουλοῦσθαι고 말해준다고 해도(561b) 그는 이런 이야기를 용납하거나 자신의 요새φρούριον 안으로 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며 쾌락은 다 마찬가지라고, 모두 동등하게ἐξ ἴσου 평가τιμητέας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이런 사람은 그때그때 닥쳐오는 욕구들에 그런 식으로 영합하면서χαριζόμενος 하루하루 살아간다.(561c) 어떤 때는 술 취해서 아울로스 선율에 심취하는가 하면, 또 물만 마시면서 살을 빼기도 하지. 어떤 때는 또 신체단련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게으름 피우며 모든 것에 무관심ἀμελής하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철학φιλοσοφίᾳ을 하는 것처럼 지내기도 하고. 종종 나랏일을 하기도πολιτεύεται 하고 벌떡 일어나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전사πολεμικός가 부러우면 그쪽으로 옮겨가고 돈 버는 사람χρηματιστικός이 부러우면ζηλώσῃ 또다시 그리로 간다. 이 사람의 인생에는 그 어떤 질서τάξις도 강제ἀνάγκη도 없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인생을 즐겁고ἡδύς 자유인다우며ἐλευθέριος 복된μακάριος 삶이라 부르면서 평생토록 내내διὰ παντός 그렇게 살아간다.(561d)

*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평등을 추구하는ἰσονομικός 사람의 삶βίος을 아주 제대로 설명해 주셨다고 답하고 소크라테스는 이 사람을 온갖 성격ἦθος으로 가득 찬μεστός 다면적인παντοδαπός 사람, 아름답고 다채로운ποικίλος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그의 삶 안에는 정치체제와 생활방식τρόπος의 사례들이 아주 많이 있어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그를 부러워한다고 말한 후(561e) 이 사람을 민주정에 상응하는 민주정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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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8c ‘이 체제에 상응하는 개인’ : 명예정과 명예정적인 인간, 과두정과 과두정적 인간은 전자가 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철학자왕정은 철학자들로 구성된 것이 된다. 그것은 설명의 편의를 위해 제시되었던 대문자와 소문자의 비유에서 대문자와 소문자의 관계가 그렇듯이 다만 크기와 규모만 다를 뿐 서로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붙여진 이름들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그것의 변화 과정은 형식상 평행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에 상응하는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이미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558c ‘절약하는pheidōlos 과두정적인 사람’ : 부를 추구하는 과두정적인 사람은 돈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필수적인 욕구를 넘어서는 것에 돈을 쓰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돈벌이에 도움 되지 않는 온갖 소비적인 쾌락들을 힘으로 다스린다. 이들은 수벌이 그러듯 꿀을 맛보고 다채로운 쾌락을 제공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점차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소비적이고 사치스런 욕구를 갖게 되면서 민주정적인 사람으로 변화한다.

* 558d ‘필수적 욕구’ : 의식주와 관련하여 생물로서 생존 및 자기 보전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욕구를 말한다. 과두정적 인간은 돈에 대한 욕구에 매몰되어 있어 돈을 쓰는 데 아주 인색하여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적인 것 이상을 욕구하지 않는다.

* 558d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 생존에 필요한 필수적인 욕구를 이상의 쾌락과 사치와 관련한 것들에 대한 욕구를 말한다. 이러한 욕구는 좋은 일도 하지 않고 해로운 것이지만 어릴 때부터 제제와 교육을 받으면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혹자는 ‘선을 추구하려는 도덕적 욕구’ 같은 것도 생물학적 자기 보전과 관련한 필수적인 욕구를 넘어선 것이라는 점에서 이곳에 말하는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에 해당하는 것이 되고 그렇다면 좋은 것도 이로운 것도 아닌 것이 되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주장과 어긋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여기서 말하는 욕구epithymia는 나라의 3계층 중 생산자 계층에 상응하는 개인 영혼의 3부분 중 욕구 부분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생존과 자기 보전과 관련한 일종의 물질적 생물학적 욕구를 가리킨다. 그런데 한편으로 넒은 의미에서 영혼 자체가 뭔가를 인식하고 가치를 지향하고 그에 부응하는 행위를 유발하는 기능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욕구 또는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고에서 사용되는 욕망구조라는 말에서 욕망이라는 표현 또한 그러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측면에서 앞서 말한 ‘선을 추구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 이른바 도덕적 욕구는 영혼의 이성 부분이 갖고 있는 욕구 내지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559c ‘일들ta erga이 이루어지는 데에 유용하므로’ : 여기서 ‘일들’이란 말 그대로 돈 되는 일을 말한다. ‘돈 되는데 유용한chresimos’ 일을 한다는 것은 곧 ‘돈을 벌어들이는chrematistikos’ 일을 한다는 것이다. 과두정적인 사람에게 절약 또한 돈 되는데 유용한 일로서 그 자체로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다.

* 559c ‘성욕aphrodisiōn epithymia’ : 물론 생물학적 자기 보전 즉 생식을 위한 필수적 욕구로서 성욕도 있다. 그러나 aphrodisios가 성적 쾌락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형용사라는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성욕은 생식을 넘어서는 쾌락을 위한 비필수적 욕구로서 성욕이다.

* 559d ‘교육시키지 않고’apaideutos, 560a ‘아버지의 양육trophē에 대한 무지함anepistēmosynē 때문에’ : 과두정적 아버지는 돈벌이에 도움 되는 것이 아닌 한, 어떤 교육과 양육에도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플라톤에게 교육과 양육은 나라와 개인을 보전하는 가장 중추적이고 핵심적인 토대이다. 이곳에서도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교육과 양육의 부재이다. 교육과 양육에 무지한 아버지의 가르침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추방시킨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들이 없어지기는커녕 다시 뒤이어 자라나 많아지고 강력해진다.

* 559d ‘사납고 무서운 짐승thēr들’ : 과두정 치하에서 부를 추구하다가 경쟁에 밀려 부를 탕진하여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 즉 수벌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부자들에 적대감을 품고 그들의 돈을 뜯어 소비적인 쾌락에 빠져들고 부유층 젊은이들을 유혹하여 필수적이지 않은 사치스런 욕구를 갖게 만든다. 그리고 끝내 그들은 점차 늘어난 사회적 불만층을 선동하여 기득권자들을 무너뜨리는 주도 세력이 된다.

* 560c ‘로토스를 먹는 자들’lōtophagoi : <오뒤세이아>(9권 83-104)에 나오는 자들로 이곳에선 과두정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꿀을 맛보게 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온갖 쾌락에 빠지게 하여 민주정적 인간으로 변하게 만드는 수벌들과 수벌을 따르는 민중들을 가리킨다. 민주정 치하 민중과 민주정적 인간에 대한 플라톤의 부정적 인식이 담긴 말이다.

* 560c-e : 타락해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안타깝고 비탄 섞인 소크라테스의 심정이 실감나게 표출되어 있다. 이러한 탄식은 494d에도 나오는데 많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젊은이로 플라톤이 염두에 두고 있었을 대표적인 인물로 알키비아데스를 꼽고 있다.(J. Adam. 이 부분 노트 참고)

* 560d ‘거창한 의식으로 입교하는 젊은이의 영혼에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든 비워내고 정화하고서’ : 젊은이들에게서 어떻게든 좋은 것을 비워내고 없앤다는 표현에 ‘정화하고서kathērsantes’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이곳에서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종교 의식을 주석가들은 엘레우시스Eleusis 밀교 의식으로 보고 있는데 맥락상 플라톤은 당대 그리스 사회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엘레우시스 밀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모종의 궁극의 앎에 이르는 통로로 이러한 비의(秘儀)적 입문 내지 비밀스런 가르침을 담은 장면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플라톤에게 수학과 기하학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피타고라스학파 역시 기본적으로 궁극의 앎은 비의적 입문과 수행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고르기아스> 497c, <향연> 210a, 218b, <테아이테토스> 155e-156a, <법률> 666b, 870d-e, <파이드로스> 250b-c, 249c, <파이돈> 81a, 69c, <국가> 378a 등(J. Adam 이 부분 노트 참고)

* 561a ‘화통함megalopreia’ ; megalopreia는 호방함, 큰 도량을 의미하는 말로 486a에도 나온다.

* 561b ‘쫓겨났던 것들 중의 일부를 다시 받아들이고 또 침입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기지도 않는다면’ : ‘쫓겨났던 것들’은 ‘염치, 절제, 절도 있음과 적절한 지출’(560d), ‘침입자들’은 ‘거짓되고 허풍가득한 말과 믿음’(560c)

* 561b ‘어떤 쾌락은 아름답고 좋은 욕구에 속하고 …… 어떤 쾌락은 나쁜πονηρός 욕구’ : 이와 관련해서는 <고르기아스> 494e, <필레보스> 13b 이하, <프로타고라스> 353d 이하, <법률> 733a 이하 등 참고.

* 561c ‘쾌락은 다 마찬가지라고, 모두 동등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 젊었을 때 나쁜 쾌락에 휩쓸려 있다가 나이 들어 운이 좋게 이전의 좋은 쾌락의 일부를 받아들인다 해도 여전히 좋은 쾌락과 나쁜 쾌락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두 마찬가지로 동등한 쾌락으로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에게 진정한 동등이란 주어진 조건이나 자질에 맞게 그 값어치대로 나누거나 대우하는 이른바 비례적 동등 내지 ’기하학적 동등‘hē isotēs hē geōmetrikē이다.(<고르기아스> 508a)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이 여기서 말하는 동등이란 맹목적인 상대주의에 입각한 형식적이고 산술적인 동등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동등은 아니다.

* 561c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며’ : ‘부정하며’의 원어 anaueuō 동사의 일차적 의미는 ‘고개를 뒤로 젖히다’이다. 당대 그리스에서 그런 행위는 우리들이 부정을 표시할 때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처럼 부정을 나타내는 행위로 사용되었다.

* 561e ‘평등을 추구하는ἰσονομικός 사람의 삶’ : 민주정은 동등한 자에게나 동등하지 않은 자에게나 동등함을 똑같이 나누어 준다.(558c) 그리고 앞에서 살폈듯이 쾌락에도 분명 좋고 나쁨이 있고 각기 그것만의 고유한 값어치를 갖는 것들이 있음에도 민주정적 인간은 그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평가한다. 아데이만토스가 민주정적 인간의 삶을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으로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민주정 치하에서는 각자의 적성과 소질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두가 물질적 욕구를 중심으로 등질화되어 있음을 고려하면 최소한 욕망구조의 측면에서 계층에 상관없이 모두가 제멋대로의 자유를 평등하게 누리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구성원 모두가 산술적으로 평등하게 무차별적 자유를 제멋대로 행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예상되는 갈등을 방임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법적 안정성을 와해시켜 결국에는 나라를 무너뜨리는 근본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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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문자와 소문자 비유에 따른 논의 구도 그대로 이곳에서도 타락한 정치체제와 개인 즉 과두정과 과두정적 인간,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은 각각 서로에 상응하면서 서로 닮아 있다. 그런데 이때 유념할 것이 있다. 그것은 명예정, 과두정, 민주정이 비록 타락한 정치체제일지라도 모두 정치체제인 한, 기본적으로 세 가지 계층 즉 통치계층,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에 상응하여 명예정적 인간, 과두정적 인간, 민주정적 인간 또한 영혼 3분설에 따라 영혼의 이성 부분,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이곳에서 정치체제의 타락은 이러한 3계층과 3영혼들 간의 관계의 재편 내지 변질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명예정은 전사 계층이 통치의 주도권을 갖는 관계로 재편된 경우이고, 그것을 닮은 명예정적인 인간은 영혼의 기개 부분이 행위의 주도권을 갖는 관계로 재편된 경우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렇다고 통치 계층 내지 통치 기능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정치체제인 한, 명예정에서도 통치 계층 내지 통치 기능은 존재하되, 다만 통치 계층 대부분이 전사 계층으로 대체되었거나 통치 기능이 그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도구로 변질 또는 전락한 상태로 있다. 과두정과 민주정도 마찬가지이다. 과두정에서도 통치 계층 내지 통치 기능은 존재하되 통치 계층이 부자들로 대체되었거나 통치 기능이 부자들의 욕구 즉 부를 보다 효율적으로 축적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상태에 있다. 민주정에서도 통치 계층 내지 기능이 존재하긴 하되 통치 계층이 민중으로 대체되었거나 통치 기능이 민중들의 욕구 즉 제멋대로의 자유를 보다 효율화하기 위한 도구로 대부분 전락한 상태에 있다.

* 정치체제를 닮은 개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명예정적 인간에서 영혼의 기개 부분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 존재하긴 하되 그 기능이 더 이상 제대로 된 본래의 이성 기능이 아니라 기개 부분에 영합하는 도구적 이성 기능으로 대부분 변질되거나 전락했다는 것을 말한다. 과두정적 인간과 민주정적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과두정적 인간에서 부를 위한 욕구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는 것 역시 영혼의 이성 부분이 존재하긴 하되 그 기능이 더 이상 영혼의 기개 부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부에 대한 욕망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도구적 이성 기능으로 대부분 변질되었거나 전락했다는 것을 말한다. 민주정적 인간에서 영혼의 욕구 부분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 역시 영혼의 이성 부분, 기개 부분이 존재하긴 하되 그 부분들 모두 욕구 부분으로 하여금 필수적 욕구를 넘어 사치스런 욕구로까지 확대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대부분 변질되었거나 전락했다는 것을 말한다. 욕망구조의 변질 차원에서 보면 과두정적 인간 이후의 단계에 이르면 영혼의 부분들 모두 물질적 욕구에 지배되어 있다. 영혼의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은 다만 그 욕구를 효율적으로 실현하는 도구적 기능으로 전락해 있다.

* 민주정에 관한 논의에서는 ‘제멋대로의 자유’가 민주정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제시되었지만, 이곳 민주정적인 사람에 관한 논의에 와서는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의 추구’가 민주정적 인간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언급되고 있다. 나라에서 제멋대로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기에 개인이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까지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둘은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사실 나라와 개인 타락과정에서 이미 과두정 단계에 이르면 욕망구조에서 계층과 영혼의 부분들 전체에 걸쳐 물질적 욕구가 지배하고 있고 통치 기능과 이성 기능은 그것의 효율적극대화를 위한 도구로 전락해 있다. 그런데 과두정적 인간이 어떻게 민주정적 인간으로 변화하는가를 논의하면서 플라톤은 흥미롭게도 이 물질적 욕구를 ‘필수적인 욕구’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로 구분하고 이후 민주정적인 인간이 참주정적 인간으로 변화하는 단계에 가서는 그러한 욕구들에 이어 불법적인 욕구까지 제시한다. 그리고 이처럼 세 가지로 구분된 욕구들은 물질적 욕구로 등질화된 과두정적 인간, 민주정적 인간, 참주정적 인간의 욕구 각각을 보다 세부적으로 구분하고 규정짓는 핵심적인 특징들로 제시된다. 이것은 나라와 개인의 타락과정을 욕망구조의 변질로 설명하려는 플라톤의 기본 의도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과두정적 인간 이후 개인 영혼의 타락과정에서 물질적 욕구가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방식으로 타락의 심도를 더해가면서 끝내 불법적인 욕구로까지 변질되어 가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그러니까 영혼의 부분들은 욕구 부분의 세분화까지 포함하면 ‘이성 부분’, ‘기개 부분’, ‘필수적 욕구 부분’,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부분’, ‘불법적인 욕구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그것들 각각은 철학자 왕정과 이후 타락을 더해가는 정체들에 각기 상응하여 그것을 닮은 사람들의 핵심적인 특징들로 제시되고 있는 셈이다. 나중 밝혀지겠지만 결국 정의로운 개인과 부정의한 개인의 판정이 영혼의 부분에서 이성 부분에 충실한 자와 욕구 부분 중 최악의 상태인 불법적인 욕구에 매몰된 자들이 갖는 행복과 불행의 크기로 결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제시된 욕구의 세분화와 그에 상응하는 정체적 인간들의 구분 또한 그 궁극의 판정을 위한 플라톤 자신의 주도면밀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이곳에서 제멋대로의 자유를 구가하는 민주정적 인간을 논하면서 일단 민주정적 인간의 삶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들 모두가 일상에서 평생토록 내내dia pantos 평등하고도 지속적으로 제멋대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561d) 게다가 이곳에서 플라톤이 들고 있는 제멋대로의 자유에 해당하는 사례들도 이른바 타인을 해치는 부도덕한 행위나 타인에 대한 간섭이 아닌 개인이 그냥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행태들로 구성하고 있다. 플라톤은 나중에 드러날 실제 전개와 상관없이 일단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의 삶을 민중들이 기대하고 믿고 있는 그대로 그들의 희망에 맞추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이곳에서 그려진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이 실제와 무관하게 이곳 논의 계획에 맞게 플라톤이 설정한 ‘플라톤의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러한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을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려진 그림 그대로 따로 떼어놓고 들여다보면 그것은 인간이 서로 평등하게 제멋대로의 자유를 평생토록 누릴 수 있는 상황 즉 개인들이 일상에서 타인의 자유를 서로 침해하지도 타인으로부터 어떠한 자유도 침해 받지 않으면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꿈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곧 다가올 수밖에 없는 파국에 대한 무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그렇게 될 수 없는 다만 대중의 환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꿈같이 펼쳐놓은 민주정적 인간의 그러한 삶의 양태들 그 자체는 플라톤의 생각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인간의 자유로운 삶의 낭만과 쾌락을 꿈꾸는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특히 플라톤이 이곳에서 동원한 풍부하고도 실감나는 문학적 수사는 거부감이전에 욕망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많은 문학가들과 예술가,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감과 함께 큰 감명을 안겨다 주었다. 어쩌면 민주정의 제멋대로의 자유는 원하는 것을 한다는 의미에서 근대적 자유 이념으로서 소극적 자유를 넘어서는 적극적 자유의 선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저명한 <국가>의 주석가 아담(J. Adam)조차 599d 부분 노트에서 플라톤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가 후대에 미친 영향과 정황을 아래와 같이 감탄조로 서술하고 있다. “이곳에서 플라톤이 묘사한 민주적 인간의 기원은 고대와 현대 문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장엄하고 웅장한 글 중 하나이다. 롱기누스(Longinus)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 대부분에서 플라톤의 문체는 ‘마치 넓디넓은 바다처럼 풍요로움 속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거대함’을 보여준다. 숭고함의 본질을 ‘웅대한 사상과 이미지, 그리고 언어의 가득 찬 조수’ – 소리나 거품조차 일지 않을 만큼 깊고 가득 찬 조수 -에서 찾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나은 예시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플라톤 특유의 제사장적 풍모에 대해 롱기누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전해 받고 있다. 특히 그의 <숭고에 대하여> 33~36장을 보면, 롱기누스가 정의한 ‘고결한 정신의 울림’으로서의 숭고함이 단순한 메아리 그 이상으로 생생하게 느껴진다. 반면,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뉘시오스는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기는 하지만, 그의 현학적인 비판을 보면 오히려 아티카 수사학자들에 대한 공부만으로는 플라톤을 심판할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플라톤의 이 대목은 문체의 고결함뿐만 아니라 심리학적 통찰력 면에서도 매우 놀랍다. 인간 사회의 ‘카멜레온’으로 묘사된 민주정적 인간에 대한 서술(561c 이하)은 시대를 초월한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실제 사실에 대한 묘사로서는 여느 때처럼 다소 과장된 면이 있으나, 매우 생생하고 강력하다. 이것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 대한 플라톤적 유추가 거장의 손을 거칠 때,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혼이 작동하는 방식을 풀어내는 얼마나 훌륭한 단서가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은 앞서 살폈듯이 아테네 민주정의 현실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당대 그리스 민주정의 모습과도 상당 부분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제8권에서 타락한 정치체제와 개인의 한 양태로서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을 플라톤 자신 어떻게 규정하고 있고 그러한 플라톤의 생각이 지닌 철학적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를 살피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일단 플라톤에게 민주정은 과두정에서 소외된 민중들이 선도자를 앞세워 혁명을 통해 세운 정체이고 그 민중들이 추첨을 통해 직접 관직에 참여하고 무엇보다 제멋대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정체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살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민주정이 플라톤에게 왜 타락한 정치체제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플라톤의 민주정은 누구나 상관없이 관직이건 어떤 사회적 직분이건 마음대로 참여하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면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내세우고 있으나 그것은 원천적으로 인간 각자가 갖는 다양하고도 서로 다른 자연적 본성과 소질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라를 통치하고 관리하며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일은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적성과 능력을 갖춘 자가 맡아야 하지 추첨이라는 무작위 방식을 통해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유지와 보전에 전혀 유익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에 반해 플라톤의 철인왕정은 서로 다른 자연적 본성과 소질에 따라 각자 원하는 사회적 직분과 역할을 배정하여 그것의 수행을 통해 각자가 갖고 있는 다양하고도 고유한 나름의 행복감을 누리게 한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에게 민주정은 철인왕정과 거리가 먼 타락한 정치체제이다. 물론 민주정도 사회적 직분과 역할과 관련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배경과 바탕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민주정은 명예정과 과두정을 거치면서 본래의 다양했던 소질과 적성을 제대로 길러가지 못한 채 물질적 욕구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욕망구조 상 돈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등질화된 상태에서 그에 부합하는 정치체제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욕망구조의 등질화 그것도 욕구 부분의 지배로 등질화되었다는 것은 제한된 물질적 재화에 대한 경쟁을 필연적으로 초래하고 결국 나라는 양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부자의 나라와 가난한 자의 나라로 분열한다. 이것은 서로 다른 것들의 조화와 공존을 꿈꾸는 플라톤으로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 이제 민주정의 제멋대로의 자유와 민주정적인 인간의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는 서로를 강화하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평생토록 평등하게 그것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애초의 기대들을 무참하게 깨트리고 만다. 상호 동등을 내세워 위계와 질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사되는 방만한 자유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는 무분별한 상호 침탈과  부류간 다툼을 불러일으키다가 결국은 침달린 수벌같은 자들이 지배하는 비참한 예속 관계를 낳는다. 플라톤은 이것이 초래하는 결과를 참주정의 등장으로 이어서 다루고 있지만, 이즈음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단계에서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과연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위한 대표적인 방책으로 가장 먼저 홉스(T. Hobbes)의 사회계약론을 떠올릴 것이다. 홉스에 따르면 민중들의 계산적 이기심은 서로가 똑같이 늑대와 늑대인 상태가 야기할 약육강식의 관계가 결국 그들 모두를 공멸로 이끌 것임을 알아차리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통제해 줄 정부를 상호 합의로 수립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정부에 이양하는 이른바 사회 계약의 방식으로 공멸의 위기를 벗어난다. 실제로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이런 사상적 특징에 힘입어 실제로 이후 자유주의 국가들의 정부 수립에 이론적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플라톤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그대로 제멋대로의 자유의 과잉은 결국 사회를 분열시키고 역설적으로 프롬(E. Fromm)이 말한 대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불러일으켜 결국은 강한 권력에 자신을 자발적으로 복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나치즘과 파시즘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플라톤이 이곳에서 피력하고 있는 참주정의 등장 배경과 마치 2000년 후의 일을 내다보기라도 하듯 거의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 참고로 니체 이후 그를 계승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및 현대의 여러 욕망 관련 이론들은 개인의 욕망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거대 권력 또는 담론들에 대한 사상적 비판 근거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이후의 지식인들 특히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사적인 개인의 권력의지 차원을 넘어 국가  권력자의 욕망 차원에서 보면, 나치의 히틀러가 스스로 니체의 초인임을 자임하고 자신의 욕망을 권력의 힘을 빌려 폭력적으로 표출했듯이, 어용적 지식인들이 그 이론을 끌어들여 국가 권력자의 무분별한 욕망마저 자연스런 욕망인 양 뒷받침하고 부추길 경우 가늠하기조차 힘든 절망과 폐해로 이어질 수 있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극우 정치가들이 득세하는 것도 권력자 자신의 욕망을 소외된 대중의 욕망에 투사하여 마치 대중의 욕망을 대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자 민주주의의 표상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의 최고 권력자가 마치 이곳 민주정적 인간이 그러하듯 자신의 욕망을 제멋대로 행사하고 있는 작금의 사태는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듯이 회복하기 힘든 세계사적 불행으로 귀결되고 있다.  플라톤이 민주정적 인간의 타락과정을 서술하면서 탄식을 담아 그리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 트럼프의 한창 시절 모습과 오버 랩 된다해도 전혀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하지 않다.  목하 트럼프는 마치 당대 알키비아데스가 그랬듯이 젊은 시절의 욕망 그대로 탐욕을 키워가며 끝내 욕망의 극점에 다가서 최고 권력자가 된 지금에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마치 자신이 받아야 할 당연한 보상이라도 되는 양 아무런 수치심 없이 환호와 갈채를 받아가며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욕망과 이기적 탐욕에 사로잡혀 침략전쟁까지 불사하고 있다.

* 우리는 이제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이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폭압적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참주정과 참주정적 인간, 참주로 변화해 가는지를 다음의 논의 주제로 남겨두고 있다. 플라톤이 이곳 <국가>에서 그리고 있는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의 ‘참주정과 참주적 인간’으로의 변화는 불행하게도 20세기는 물론 오늘날 극우 세력의 득세 현상과 더불어 미국 민주정 트럼프의 행태가 보여주는 그대로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제도로서 민주주의도 중요하지만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식상할 정도로 당연한 말이 새삼 실감나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끝-

 

다음 강해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576b)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