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플라톤의 <국가> 강해(7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라톤의 <국가> 강해(74)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기하학(526c-527c), 천문학과 입체 기하학(528a-d)

 

[526c-527c] 기하학

*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찾는 배울 거리들μαθήματα중 두 번째 것으로 계산 기술λογιστική과 산수ἀριθμητικὴ에 이어 기하학γεωμετρία을 꼽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기하학이 군대 주둔στρατοπέδευσις과 지역 확보, 군대στρατιά의 집결과 산개 등 전쟁과 관련된 일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은 기하학과 계산λογισμός의 간단한 부분으로 충분함을 지적한 후 기하학은 근본적으로 많은 부분과 상급 단계가 좋음의 형상을τὴν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ν 더 쉽게 보게κατιδεῖν ῥᾷον 해주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 중에서ἐν ᾧ ἐστι 가장 행복한 것τὸ εὐδαιμονέστατον이 자리 잡은 저 영역을 향해 영혼의 방향을 바꾸도록 강제하는ἀναγκάζει 모든 것이 그런 일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있음οὐσία을 보도록θεάσασθαι 강제한다면 적합하고προσήκει, 생성을 보도록 강제한다면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526c-e)

*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일부 기하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 이를테면 정사각형 만들기’τετραγωνίζειν니 ‘맞추어 대기’παρατείνειν니 ‘덧붙이기’προστιθέναι니 같은 온갖 소리를 해대는데 그것은 이 분야의 앎ἐπιστήμη과 정반대의 성격을 갖는 것이며, 기하학이 수행하는 것은 항상 있는ἀεὶ ὄντος 것에 대한 앎γνῶσίς을 위한 것이지 때에 따라 생겨나고γιγνομένου 소멸하는ἀπολλυμένου 것에 대한 앎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혼을 진리ἀλήθεια로 이끌어가는 것이자 우리 영혼이 위를 향하도록, 철학적인 사고φιλοσόφου διανοία를 만들어내는 것이다.(527a-b) 그러므로 아름다운 나라καλλίπολις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도 기하학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것의 부산물τὰ πάρεργα도 적지 않다. 즉 그것은 글라우콘이 말한 전쟁πόλεμος과 관련된 것들만이 아니라 어떤 배움μάθησις이든 그것을 더 잘 수용하게 해준다.(527c)

 

[527d-528d] 천문학과 입체기하학

* 이제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세 번째 배울 거리로 천문학ἀστρονομία이 제시된다. 글라우콘은 천문학에 대해서도 계절ὥρα과 연월μήνη καὶ ἐνιαυτός을 더 잘 알아보게 하여 농사일γεωργίᾳ과 항해ναυτιλίᾳ 장군직 등을 수행하는 데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이 자신이 지시하는 배울 거리가 대중들πολλοὶ이 보기에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질까 두려워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한 후 다른 활동들로 망가지고 눈멀게 되는 각자의 영혼의 도구ὄργανον가 이 배울거리들을 통해서 정화되고ἐκκαθαίρεταί 다시 점화된다ἀναζωπυρεῖται는 확신을 갖고 그 영혼의 도구를 보존하는 것이 만μύριοι 개의 눈을 보존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직 이것에 의해서만 진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는 글라우콘의 이야기가 훌륭하게 보일 것이나 그런 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곳에서 이렇다 할 이로움ὠφέλεια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글라우콘의 이야기가 그저 실없는ἀμήχανος 소리로 들릴 것이라고 말한 후(527d-e) 글라우콘에게 이들 중 어느 쪽을 상대로 대화할 것인지διαλέγῃ 아니면 어느 쪽도 특별히 고려하지 않고 주로 자네 자신을 위해서 논의를 할 것인지를 묻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대체로 저 자신을 위해서 묻고ἐρωτᾶν 대답하며ἀποκρίνεσθαι 이야기하는 쪽을 택하겠다고 말한다.(528a)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지금 기하학 다음에 오는 것을 제대로 취한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차원δεύτερος의 평면ἐπίπεδος 다음에 삼차원τρίτος 입체στερεός 즉 정육면체κύβος 같은 깊이βάθος를 가진 것과 관련된 것을 취해야 함에도 회전하는περιφορά 입체를 먼저 취했다는 것이다.(528a) 이에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맞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된 데에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음을 밝힌다. 우선, 어느 나라도 이것들을 존중하지 않아서 이 어려운 것들에 대한 탐구가 빈약하게 이루어져 그 탐구를 이끌 감독자οἱ ζητοῦντες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고(528b) 설사 감독자가 생기더라도 현 상황이 그러하듯이 이걸 탐구하는 사람들ζητητικοὶ이 거만해서 감독자를 따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대중들과 이게 어떤 점에서 유용한지를 설명할 수 없는 탐구자들에 의해 이것들이 경시되고 방해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매력χάρις 때문에 이 모든 조건을 뚫고βίᾳ 성장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언급한다. (528c)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배울 거리로서 기하학은 명확하게 말하자면 평면을 다루는 것이 기하학이고 그다음 다룰 것은 입체 기하학이지만 모든 것들을 빨리 설명하려고 서두르다가 입체 기하학을 건너뛰고 다음에 천문학, 즉 깊이를 갖는 것의 운동을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52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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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6c ‘기하학’ : 여기서 말하는 기하학은 앞 강해에서 살폈듯이 내용적으로 산수를 포함한 당대 수준의 수학 일반을 의미한다. 선분의 비유에서 사고의 대상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적인 것’이라 말했을 때도 이미 그곳에는 기하학적 도형이 포함되어 있다. 퓌타고라스 수학에서도 당연히 수와 도형은 하나로 다루어진다. 우리가 에우클레이데스의 저술을 보통 <기하학 원론>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어는 원리들 내지 요소들(elements)을 뜻하는 stoicheia이고 그 책에는 수와 도형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다.

* 526c ‘군대 주둔과 지역 확보, 군대의 집결과 산개 등 전쟁과 관련된 한에서 적합하다’ : 이전 강해에도 언급했듯 글라우콘은 배울거리가 제시될 때마다 그 적합성을 실제 용도에서 찾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서곡으로서 기하학의 적합성은 오로지 좋음의 형상을 더 쉽게 보게 하는 일, 그 영역을 향해 영혼의 방향을 바꾸는 일 즉 철학적 사고를 만들어 내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굳이 실제 용도를 따진다 해도 이러한 일을 알고 그 부산물로 배울 때 더 큰 용도를 얻을 수 있다.

*527a ‘맞추어 대기’parateinein, ‘덧붙이기’prostithenai :‘ ‘맞추어 대기’는 ‘주어진 선분을 도형의 한 변과 일치하게 해서 도형을 옆에 붙이는 것’을 의미한다.(<메논> 87a참고) 그리고 ‘덧붙이기’는 ‘한 도형을 다른 도형에 덧붙여 놓는 것’을 의미한다.(<메논> 84d) 당시 일부 기하학자들은 도형들을 탐구하면서 실제 실물을 제작하여 여기저기 붙이거나 맞추어보곤 했다고 한다.

* 527c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 :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나라를 흔히들 ‘이상 국가’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표현은 <국가>에 없다. 다만 그러한 표현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전거를 들어야 한다면 바로 이곳에서 언급된 ‘아름다운 나라’를 꼽을 수 있다.

* 527d ‘영혼의 도구’ : 도구에 해당하는 원어는 ‘기관’의 뜻도 갖는 organon으로 영혼에서 지적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영혼 3분설(434c-4441c)을 기준으로 보면 영혼의 이성 부분일 것이다. 천문학은 오늘날에서조차 대중들 사이에서는 망원경을 통한 육안의 관찰이 중심인 양 여겨진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천문학 역시 사고를 통한 수적 비례와 계산이 탐구의 토대를 이룬다. 영혼의 도구를 보존하는 것이 만 개의 눈을 보존하는 것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진리가 보인다.

* 527e ‘’만개의 눈‘ : murioi는 10,000 또는 무수한 수를 의미한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어에서 수를 표기할 때 수마다 모두 고유의 알파벳 글자로 표기했다. 그런 까닭에 고대 그리스의 수표기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 표기 방식과는 도저히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렵다. 이를테면 243을 표기하려면 3을 나타내는 tria와 40을 나타내는 tettarakonta 그리고 200을 나타내는 diakosia를 합해 ’tria kai tettarakonta kai diakosia’로 표기해야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늘날은 초등학생 수준에서도 가능한 덧셈 뺄셈은 물론 곱셈과 나눗셈 등 큰 수의 계산이 고대 일상인들에게는 아예 엄두를 못 내는 일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계산할 줄 아는 전문적인 기술자들이 따로 있었다. 이곳에 나오는 logistikē란 그러한 ‘계산 기술’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스에서 수학이 크게 발달했다는 것은 오늘날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 528a ‘어느 쪽을 상대로 대화할 것인가’ : 영혼의 도구로 보는 사람들과 육안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서 글라우콘은 대중의 시선으로 대화에 임했다가 핀잔을 듣고 물러서지만 그렇다고 영혼의 도구로 보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수준도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묻고 대답하는 쪽을 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 528a ; ‘이차원의 평면 다음에 삼차원 입체’ ; 배울 거리의 순서가 차원을 기준으로 고려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수학은 기하학까지 포함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말하는 산수는 자연수 위주의 수론에 머물러 있어 차원을 기준으로 기하학 이전의 배울 거리로 제시된 것이다. 당시 산수는 무리수(無理數)를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무리수의 발견 이후 직각삼각형의 빗변이 그러하듯 기하학은 무리수를 도형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산수보다 진전된 배울 거리로 여겨졌다. 이것 또한 그리스 수학이 산수보다 기하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까닭의 하나이다.

* 528b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 : 당대 비교적 낮은 수준의 입체 기하학과 관련한 이곳의 언급은 <국가>가 설정하고 있는 대화 시점이 소크라테스 생전 이후 아무리 늦게 잡아도 플라톤 중년 시기 이전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플라톤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는 이곳의 언급과 달리 다섯 가지 입체를 포함한 높은 수준의 입체 기하학적 논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훗날 에우클레이데스는 그 자신 플라톤주의자로 불릴 정도로 플라톤과 똑같이 <원론>에서 다섯 가지 정다면체를 다루고 있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서 기하학이 핵심 교과였음을 고려하면 이곳의 내용은 당시에 실용적 계산 기술과 경험 기하학에 머물렀던 기하학이 플라톤이라는 탁월한 감독자를 통해 아카데메이아에서 획기적으로 발전되었음을 함께 보여준다. 실제로 플라톤의 제자였던 Eudoxos는 한때 도형과 도구에 너무 의존한다고 플라톤에게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J. Adam 527a 노트 참고) 종래 그가 이룩한 연구 성과 또한 에우클레이데스 <원론>에 포함될 정도로 큰 성취로 평가되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거만했던 탐구자들이 기하학의 매력에 이끌려 ‘어려운 조건을 뚫고 성장하고 있다’는 이곳의 언급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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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논의는 배울 거리의 두 번째 것으로 평면 기하학을 다룬 다음 그다음의 논의로 왜 입체 기하학을 다루지 않고 천문학을 다루게 되었는가가 주제를 이루고 있다. 예비적인 배울 거리와 관련한 이곳 논의를 들여다보면 플라톤이 얼마나 기하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시종일관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다루어지는 천문학과 화성학과 관련한 논의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같이 이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천문학과 화성학 역시 기본적으로 기하학에 기반을 둔 학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배울거리들을 논의하면서 이토록 기하학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앞서 살폈듯이 배울거리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근본적으로 장차 불변 부동의 진리로서 형상적 앎을 획득하기 위한 변증술적 능력을 함양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 보여주듯 감각적 가시적 세계로부터 그와 관련한 의견doxa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영혼의 상승적 전환을 통해 오로지 사고와 지성이 지배하는 가지계로 진입하는 것을 말한다. 형상적 앎이야말로 생성과 변화를 겪지 않으면서 항상 있는 것으로서 존재 세계의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사실 기하학’geōmetria이란 명칭은 ‘토지측정’을 뜻하는 말로 이집트에서 연원한 것이다.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토지가 유실됨에 따라 토지의 경계를 다시 복구하려는 용도에서 기하학이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기하학은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로 들어오면서 퓌타고라스 학파를 통해 감각 너머의 참된 존재 세계에 이르는 통로로 제시되었고 그 이후 플라톤에 이르러 오직 사고와 지성을 통해 진리를 담보하는 순수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부 플라톤주의자들은 ‘토지 측정’이라는 기하학의 이름 자체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j. Adam 노트 참고) 이곳에서도 플라톤은 기하학이 대중들의 생각과 달리 경험과 관찰과는 무관한 오직 영혼의 도구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비감각적 앎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곳에서 기하학이 어떻게 그러한 진리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진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즈음에서 기하학이 도대체 어떤 특성을 가졌기에 플라톤이 그토록 배울거리들의 배울 거리로 중시하고 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 주지하다시피 기하학(수학)의 근본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으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에우클레이데스(Eukleidēs 기원전 330?-270?)의 <원론>stoicheia을 떠올린다. (우리말 역본 : <유클리드 원론> 1, 2 박병하 옮김, 아카넷 2022) 그리고 우리는 그 책을 통해 플라톤이 왜 그토록 기하학(수학)을 중시했는지 근본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 물론 에우클레이데스가 시대적으로 플라톤보다 후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접근이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미 플라톤주의자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다 실제로 그의 책 내용을 들여다보면 플라톤과 그의 제자들이 아카데메이아에서 이룩한 기하학적 성취를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 이어받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기하학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을 끌어들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은 순수 사고를 통해 점과 선과 각과 도형과 관련한 23개의 정의(horoi)를 바탕으로 증명과 상관없이 누구나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5개의 공리(axiōma)들과 9개의 공통 개념들(axiōmata)을 세운 후 그것들로부터 465개의 정리들(theōrēmata) 즉 수학적 진리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도출 과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필연성을 담보하는 이른바 연역 추론의 과정으로서 그 자체로 정리들 각각이 참임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그곳에는 어떠한 개인적 판단이나 경험, 사회적 관습이나 관행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에 따라 465개의 명제는 어디에 살건 어느 시대에 살 건 인류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리적 연역체계 즉 보편적 진리 체계로 확립되었고 이후 수학의 방법은 인류사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모든 지적 작업의 근본 토대이자 원천이 되었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대학에서 <원론>을 배우며 천문학의 기초를 닦았고 플라톤의 <법률>(967a)에서 천문학의 필연적 성격에 주목한 것도 그리고 데카르트(R. Descartes)가 <원론>의 수학적 방법론을 토대로 좌표계를 이용한 해석 기하학과 근대 역학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원론>의 기본 내용과 정신은 2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교육과정에서 수학의 이름으로 지적 탐구의 기본 교과로 하나같이 채택되고 있다. 한 마디로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은 필연적으로 참을 담보하는 논증적 추론 즉 참에서 참인 방식으로 참을 필연적으로 도출해내는 연역 추론의 원형paradeigma을 담고 있다. (플라톤과 그리스 수학과 관련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아래와 같이 훌륭한 논문이 발표된 바 있다. 김성진, “pytagoras 학파의 수학과 자연철학” <서양고전학 연구> 제5집 1991. 이상인, “서양 고대의 수학과 철학 – 플라톤의 보편 수학을 중심으로”, <대동철학> 제18집 2002)

* 에우클레이데스 <원론>의 위와 같은 추론 방식은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언급하고 있는 추론적 사고dianoia가 수행하는 논증 방식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곳에서도 영혼은 추론적 사고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온전히 확보할 때까지 논증적 사고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그 어떤 전제나 가정도 없이 자체적으로 참임을 드러내는 자체적 존재 즉 형상적 앎으로 육박해 들어가고 마침내 변증술적 능력을 통해 형상적 앎을 획득한 후 하강과정에서 그것을 통해 비로소 추론적 사고에게 형상을 분유하는 최상의 논증적 앎으로서 학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 그런데 이미 알아차릴 수 있듯이 선분의 비유가 보여주는 이러한 추론적 사고의 수행 방식은 참을 담보하는 것이되 궁극적인 형상적인 앎까지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클레이데스가 보기에 기하학은 형상(이데아)에 준하는 그 자체로 증명과 상관없이 자명한 참을 담보하는 것임에도 플라톤에게 그것은 아직 자체성kath’ hauto을 갖는 형상적 앎epistēmē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동일성tauton을 가질 뿐이다. 자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자기 동일성과 달리 그 어떤 관계 맺음도 없이 어떤 가정의 도움 없이 그 자체로 스스로 참임을 드러내는 진리에만 붙여질 수 있다. 그렇지만 플라톤에게 수학적 기하학적 진리는 자기동일적인 진리로서 앞서 살폈듯이 순수 사유의 산물로서 선과 각과 도형들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가정하고 성립된 것이다. 철학적 진리는 그러한 가정hypothesis들마저 완전히 떨쳐 버리고 순전히 말 그대로 자체적으로 스스로 참alētheia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철학적 형상적 앎은 추론적 사고dianoia 단계를 넘어 지성적 이해noēsis의 단계에서 이른바 변증술적 능력dialegesthai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우클레이데스는 철학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진정한 철학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오늘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참의 체계로 받아들여진 <원론>의 진리가 다만 중력장이 미치는 공간 내부에서만 성립한다는 것 또한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가정을 포함하는 기하학 자체가 갖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평면 기하학으로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계를 딛고 제시된 리만 기하학적 진리 또한 그러한 수학적 가정들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없는 한, 언젠가 적용 범위 상 또 다른 한계를 드러낼 수 있는 국부적 진리이다. 플라톤이 기하학적 지식을 영혼의 전환을 통해서 다가갈 수 있는 매우 중차대한 앎으로 평가하고 중요시 했음에도, 기하학적 지식 일반 즉 이곳에서 제시되는 배울 거리 모두를 형상적 앎을 위한 예비적 준비 단계로 파악하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결국 플라톤에게 오늘날 발전된 자연과학적 성취조차 본질적인 한계상 궁극의 철학적 진리로 끊임없이 다가갈 수밖에 없는 불확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 플라톤은 <티마이오스>(53c-61c)에서 영혼과 물질로 구성된 우주를 순수 기하학적 요소로서 고도의 균형을 갖춘 정다면체들(흙은 정육면체, 물은 정이십면체, 불은 정사면체, 공기는 정팔면체)로 해명하고 물질적 원소로서 그 입체들을 궁극적인 최소 단위인 두 개의 비물질적인 직각삼각형으로 환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독창적인 해명방식은 하이젠베르크도 인정했듯이 오늘날 물질의 궁극적 구성 요소를 아(亞)물질적인 양자와 중성자의 수학적 균형관계로 파악한 양자역학에도 선구적인 성찰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플라톤에게 자기동일적 참을 담보하는 논증적 지식은 자연세계에 대해 말logos로 할 수 있는 최상의 지식을 제공하지만  자연 세계의 근원적 원인aitia 중 하나인 생성(to aei gignomenon)을 완전히 해명할 수 없는 한, 존재 세계에 대한 완벽한 진리는 아니다.  수학적 진리도 그런 의미에서  제한적이고 잠정적이고 자연학 역시 다만 개연적 설명(eikos logos)을 넘어서지 못한다.  문제는 그러한  철학의 궁극적 진리로서 형상 특히 좋음의 형상이 분명 존재하고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변증술도 있다고는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고백하고 있듯이(506d-507a) 그것은 숙명적으로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과연 말로 하는 학문으로서 철학은 무엇일까? 변증술은 학문이기는 한 것일까? (故 素隱 박홍규 선생은 만약 플라톤이 현대의 베르그송을 만났다면 그 고민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소은 선생의 형이상학에는 플라톤과 베르그송이 대척점에 서 있지 않고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자리하고 있다.) 철학이 종국적으로 총체적 앎에 대한 인간 욕구의 극치로서 형이상학을 숙명으로 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 그렇다고 플라톤이 가시적 대상, 경험적 관찰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그것들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및 인식상의 근본적인 한계를 직시하고 오히려 그것들이 갖는 규정적 측면을 찾아 최대한 그것들에 대한 학적 가능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티마이오스>에서도 플라톤은 시각을 커다란 유익을 주는 원인이라 언급하면서 그것을 통한 관찰이 우주의 본성을 탐구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47a) 이곳 선분의 비유에서도 기하학자들은 어떻게든 눈에 보이는 도형들을 이용하여 도형 자체를 사고하여 그것을 가지고 추론을 구성한다.(510b) 언제나 문제는 가시적 감각적인 것들이 포함하고 있는 주관적 요소들이다. 그런데 기하학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이용한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가시적 감각적인 것들에 들어있는 주관적 요소들을 넘어설 수 있으며 그런 경우 가시적 감각적인 것들도 논증적인 판단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든 그것들은 논증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눈에 보이는개별  현상들은 보편적 논증의 요소가 될 수 없지만 그것들에서 공통으로 반복되는 것들을 사고가 추상하여 개념화할 경우 그것들은 그 현상들에 대한 논증적 판단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경험적 판단들을 가지고 논증을 구성할 수 있는 것도 다 사고가 가시적인 것들에서 반복적인 것을 추상하여 일반화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시적 대상들이 비록 경험적인 것일 것일지라도 사고작용을 통해 논증적인 것으로 재구성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경험적인 것에 대한 앎을 획득하고 체계화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이러한 방식은 나중에 연역법과 더불어 논증 방식의 하나로 자리 잡은 이른바 귀납법과 비슷해 보이지만 논증의 성립 근거가 전혀 다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귀납법(induction)은 자연의 제일성(the uniformity of nature)을 자명한 전제로 가정하고  그것을 근거로 귀납적 비약(Inductive leap)을 통해 일반화를 관철하지만[이런 이유로 흄(D. Hume)은 경험지를 개연지로 여겼다] 플라톤은 그 일반화의 근거를 이미 가시적 감각적인 대상들에 분유(metechein)되어 있는 반복적 지속치 즉 형상을 닮은 분유치에서 찾고 있다(흄과 근거는 다르지 플라톤은 이런 이유에서 경험지를 개연지로 여겼다.) 플라톤에게 근대적 의미의 귀납 논증은 없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사고를 통한 일반화의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삼단논법(이를테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의 대전제가 보여주듯이 비록 경험과 관련된 판단이지만 일반 명제로서 논증적으로 참된 결론을 연역해내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은 초기대화편에서 ‘이것이 무엇인가?’ ti esti 즉 정의(定義) 문제를 다룰 때도 ‘용기’, ‘경건’, ‘절제’ 등에 대한 일상의 경험적 견해들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규정성을 가질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고 비판적 검토(elenchos)를 진행한다. 이와 같이 플라톤의 가지적인 지식에는 가장 아래쪽에는 감각적인 것들에서 사고를 통해 추상된 일반지로부터 가장 위쪽으로는 수학적 대상, 사고의 대상을 넘어 지성적 이해를 통해 획득되는 형상적 앎까지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다만 플라톤에게 앎의 최소한의 요건은 경험에 기원하는 것이건 아니건, 가시적인 것이건 아니건 어떤 방식으로든 사고를 통해 규정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경험지도 일반화를 거쳐 논증적 이론지가 될 수 있고 그 이론지를 통해 경험적 통찰 또한 확장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관찰을 통해 얻은 행성에 대한 관찰지를 사고를 통해 이론화하여 30년 후 그 행성의 궤적을 추론해 냈고 실제 30년 후 사람들은 그 행성이 그가 추론한 궤적대로 거의 정확하게 움직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론적 사고는 결코 경험적 사고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론적 사고는 경험 세계를 관통하는 가지적 질서에 대한 학적인 이해를 가능케 해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당장의 실용적 이익을 넘어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수많은 경험을 앞당겨 들여다보고 우리 삶과의 내적 연관을 사유할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은 천상에 대한 사유가 목적이 아니라 합리적 이성에 대한 믿음으로 일관되게 현상 세계의 학적 가능성의 확보 즉 삶의 존재론으로서 현실 구제를 지향한다.

* 이제 기하학 다음에 입체 기하학이 다루어져야 함에도 천문학이 세 번째 배울 거리로 제시된 이유가 논의되고 형식적 순서상 입체 기하학을 세 번째로 다시 조정한 후 네 번째, 다섯 번째 배울 거리로서 천문학과 화성학이 각각 다루어진다.

 

다음 주제 :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천문학(528e-530c), 화성학(530d-531d)

플라톤의 <국가> 강해(73)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3)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수와 계산 기술, 지성적 이해(521c-526c)

 

이제 논의 주제는 동굴의 비유에서 제시된 구제의 임무들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만한 훌륭한 철학자들이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겨날 것인가의 문제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521c-526c]

* 소크라테스가 밝히고 있는 그러한 교육과정은 ‘밤과 같은νυκτερινός 낮으로부터 진정한 낮을 향한 영혼의 전환ψυχῆς περιαγωγὴ’ 즉 ‘참된 철학’φιλοσοφία ἀληθῆ을 가능케 하는 배울 거리들μάθημα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한 배울 거리들이 생성하는 것το γιγνομένον으로부터 ‘있는 것’τὸ ὄν으로 영혼을 이끌어낸다.(521c-d) 물론 앞에서 다룬 신체단련γυμναστικῇ과 시가μουσικῇ도 배울 거리들이지만 신체단련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 몸의 성장과 쇠퇴를 관장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배울 거리가 아니다.(521d-e)

* 그리고 시가 또한 습관ἔθος을 통해 화음ἁρμονία과 장단ῥυθμός을 전수해주는 것이지 앎ἐπιστήμη은 아니다. 기술들도 모두 손을 쓰는βάναυσος 일로 보여 그러한 배울 거리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가와 신체단련과 기술들τέχναι을 빼고 어떤 배울 거리가 남아있을까?(522a-b)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첫 번째 배울 거리로 모든 기술τέχναι과 사고διάνοια와 앎ἐπιστήμη이 사용하는 공통의 것이면서, 누구나 제일 처음에 배울 수밖에 없는 것으로 수ἀριθμός와 계산λογισμός을 제시한다.(522c) 특히 계산하고 셈할 줄 아는 것은 전사πολεμικός에게 필수적인 배울 거리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 찾고 있는 것들, 즉 ‘본성상 지성적 이해로 인도하는’τῶν πρὸς τὴν νόησιν ἀγόντων φύσει 배울 거리들에 속하는 것이다.(522d-523a)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전적으로 ‘있음’οὐσία을 향해 이끌어주는 것임에도 아무도 이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감각αἰσθήσεσις에 속한 것들에서 지성적 이해νόησις를 불러내는παρακαλοῦντα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살핀다. 우선 감각에 속한 것들τὰ ἐν ταῖς αἰσθήσεσιν 중에서 어떤 것들은 감각에 의해 충분히 분간되기κρινόμενα 때문에 탐구ἐπίσκεψις를 위해 지성적 이해νόησις를 불러내지 않는 것들이고, 어떤 것들은 감각으로는 어떤 건전한ὑγιὲς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지성적 이해가 탐구하도록 요청하는 것들이다.(523a-b)  지성적 이해를 불러내지 않는 것들은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 것’ὅσα μὴ ἐκβαίνει εἰς ἐναντίαν αἴσθησιν ἅμα들이고, 반면에 지성적 이해를 불러내는 것은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멀리서 보든 가까이에서 보든, 감각이 그것을 특별히 더 그것이라고도 그와 반대되는 것이라고도 분명히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명확히 구분해 주기 위해 지성적 이해가 요구되는 것이다.(523c)

*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은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손가락δάκτυλος의 비유를 끌어들인다. 만약 우리가 새끼손가락ὅ σμικρότατος, 약손가락ὁ δεύτερος, 가운뎃손가락ὁ μέσος 이 셋을 가까이에서 보는 경우 가운데에서 보이든 끝에서 보이든, 하얗든 검든, 굵든 가늘든, 그리고 그런 어떤 경우든 이것들 각각은 똑같이 손가락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그 손가락들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래서 대중들의 영혼은 손가락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지성적 이해에게 묻도록 강제되지 않는다. 그 경우에는 시각ἡ ὄψις이 영혼에게 손가락과 그것에 반대되는 것τοὐναντίον을 동시에ἅμα 제시하지ἐσήμηνεν 않기 때문이다. 앞서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다’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그 경우 지성적 이해를 불러내거나παρακλητικὸν 일깨우는ἐγερτικὸν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523c-d)

* 한편 시각ἡ ὄψις은 손가락들의 큼τὸ μέγεθος과 작음τὸ σμικρότητα을 충분히 보는가? 이 경우 시각은 그것들 중 어떤 것이 가운데에 있든 끝에 있든 시각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건가? 촉각ἡ ἁφή은 손가락들의 굵음πάχος과 가늚λεπτότης, 부드러움ἢ μαλακότητα과 딱딱함σκληρότητα을 감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인가?(523e) 다른 감각들도 그럴까? 아니면 감각들 각각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냥 딱딱한 것에ἐπὶ τῷ σκληρῷ 적용되는τετάχθαι 감각을 부드러운 것에도ἐπὶ τῷ μαλακῷ 적용될 수밖에 없어서 이 감각은 ‘동일한 것을 딱딱한 것이면서 부드러운 것으로 감각한다.’ὡς ταὐτὸν σκληρόν τε καὶ μαλακὸν αἰσθανομένη고 영혼에 보고할까?(524a) 답은 후자이다. 감각은 동일한 것을 딱딱한 것으로도 부드러운 것으로도 보고하고, 가벼운 것의 감각과 무거운 것의 감각이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가벼운 것을 무거운 것으로 영혼에 제시한다.(524a) 감각이 영혼에게 이처럼 보고할ἑρμηνεί 경우 영혼은 자신에게 제시된 그 내용에 당혹해할ἀπορεῖν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혼은 그러한 보고 내용을 이상스러운ἄτοπος 것으로 여기고 탐구ἐπίσκεψις가 필요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에 따라 영혼은 이러한 상황에서 우선 계산λογισμός과 지성적 이해νόησις를 불러내서 보고된 것들 각각이 하나ἓν인지 둘δύο인지를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각각이 하나이고 함께해서 둘이라면, 영혼은 그 둘을 분리된κεχωρισμένα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분리되지 않은’ἀχώριστος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524b-c)

 * 앞의 상황에서 시각은 ‘크고 작음’μέγα καὶ σμικρὸν을(촉각의 경우는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분리된κεχωρισμένον 것이 아니라 뒤섞여 있는συγκεχυμένον 것으로 본다. 즉 ‘큰 것이면서 작은 것’으로 감각한다. 그러나 영혼은 그것을 구분해서 이해하기 위해 시각과 반대로, 그것들에서 ‘큼’μέγα과 ‘작음’σμικρὸν을 보도록 강제된다.ἠναγκάσθη(524c) 그래서 영혼은 여기 어디쯤에서 처음으로, ‘큼’τὸ μέγα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한 ‘작음’τὸ σμικρόν이 무엇인지τί ἐστὶ를 묻게 된다. 우리가 한쪽을 가지적인 것τὸ νοητόν이라고 부르고 다른 쪽을 가시적인 것τὸ ὁρατὸν이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524c) 그리고 그것들이 바로 조금 전에 어떤 것들은 사고를 불러일으키는παρακαλοῦντα 것이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내가 말했던 것들이다. 요컨대 자신과 반대되는 것과 함께 감각에 들어오는 것들은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지성적 이해를 일깨우지 않는 것이다.(524d)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사고와 지성적 이해가 영혼에서 발생하는 일이 어떤 경우에 생겨나는지를 설명한 다음, 지성적 이해가 수행하는 계산과 탐구의 근간에 수ἀριθμός와 하나τὸ ἓν가 자리하고 있음을 밝힌다.(524d) 만약 하나가 그 자체로 충분히 눈에 보이거나 다른 어떤 감각으로 파악된다면, 굳이 하나가 ‘있음’으로 이끌어주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것에 대립하는 어떤 것이 항상 그것과 동시에 눈에 보이나 그렇다고 특별히 하나οὐσία로 드러날 정도가 아니라면 그때에는 판정 내려줄ἐπικρινοῦντος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은 영혼으로 하여금 혼란스러움을 일으키는ἀπορεῖν 경우이기 때문에 영혼은 자기 자신 안에서 사유ἔννοια를 발동시켜 탐구ζητεῖν와 동시에 하나 자체αὐτὸ τὸ ἕν가 도대체 무엇인지τί ποτέ ἐστιν를 묻도록 강제되는ἀναγκάζοιτ᾽ 것이다.(524e) 그렇게 해서 ‘하나에 대한 배움’ἡ περὶ τὸ ἓν μάθησις은 영혼을 ‘있는 것을 구경하는 쪽으로’ἐπὶ τὴν τοῦ ὄντος θέαν 인도하며ἀγωγῶν 그쪽으로 방향을 바꾸게μεταστρεπτικῶν 하는 힘을 갖게 된다.(525a)

* 그러나 시각은 동일한 것을 하나인 것으로 보면서 동시에 수적으로 무한한ἄπειρος 것으로 본다.(525a) 그런데 하나 내지 모든 수가 시각 때문에 동일한 그런 일을 겪을 수는 없다. 그래서 계산 기술λογιστική과 산수ἀριθμητικὴ가 필요하다. 그것들은 시각과 달리 가시계를 벗어나 동일한 것을 진리로πρὸς ἀλήθειαν 인도ἀγωγός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찾고 있는 배울 거리들에 속하는 것이다.(525b) 전사에게는 군대의 대오τάξις 정비를 위해서, 그리고 철학자에게는 생성γένεσις으로부터 벗어나서 ‘있음’을 접해야하므로 이것들을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 수호자φύλαξ가 전사πολεμικός이자 철학자φιλόσοφος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배울 거리를 법으로 정하고 나라에서 가장 큰 일들에 참여할 사람들로 하여금 지성적 이해 자체를 통해서 수들의 본성을 구경하는 데에 이를 때까지 – 무역상이나 행상들처럼 사고팔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그리고 영혼 자체가 생성으로부터 진리와 ‘있음’οὐσία 쪽으로 방향 바꾸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서 – 계산 기술을 연마하게 해야 한다.(525b-c)

* 특히 이 배울 거리는 기묘해서κομψός – ‘행상 일을 하기’καπηλεύειν 위해서가 아니라 – ‘앎을 얻기’γνωρίζειν 위해서 수행할 경우 우리가 원하는 것과 관련해서 여러모로 쓸모χρήσιμος가 있다. 그것은 영혼을 위쪽으로 강하게 이끌고 ‘수들 자체에 대해서 대화하도록’περὶ αὐτῶν τῶν ἀριθμῶν διαλέγεσθαι 강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군가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체를 가진 수들을 영혼에 제시하면서 대화를 한다면, 영혼은 그런 대화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525d).

* 이런 문제에서 ‘대단한δεινός 사람들’은 누가 하나 자체αὐτὸ τὸ ἓν를 말로 나누려고 시도할 경우, 결코 하나가 여러 부분μόρια으로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525e) 만약 누군가가 그들에게 ‘어떤 수들에 관해 대화하고διαλέγεσθε 있는지’ 즉 ‘그것들이 어떤 수들이기에 당신들이 그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대로 각각 모두가 모두와 같고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으며 자신 안에 어떤 부분도 갖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수는 사고하는 것만διανοηθῆναι μόνον이 허용되고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영혼이 진리 자체αὐτὴ τὴ ἀλήθεια에 이르기 위해 지성적 이해 자체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임이 밝혀진 한, 이 배울 거리는 우리에게 정말 필수적이고 대단히 효과적이기까지 하다.(526a)

* 그리고 선천적으로 계산에 능한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어떤 배울 거리도 대체로 빨리 익힌다. 또한, 더딘 사람들도 계산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면, 다른 이득은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이전의 자신보다 빨라진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진전을 보인다.(526b) 더구나 배우고 연마하는 데 이보다 더 힘이 드는 배울 거리는 쉽게 찾을 수도 없고 많이 찾을 수도 없다. 이 모든 이유로 이 배울 거리는 빼놓지 말아야 하며 최고의 자연적 성향을 지닌 자들은 이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52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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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1c-523a : 앞으로 논의될 교육 과정이 앞서 동굴의 비유에서 언급된 영혼의 전환(518d-e)을 가능케 하는 배울 거리이고 그것이야말로 생성하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to on으로 영혼을 이끄는 것이라는 말은 장차 변증술을 목표로 하는 철학자를 위한 교육 과정이 다름 아니라 앞서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를 공히 관통하고 있는 것 즉 인식과 실천의 상승과정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곳의 논의 또한 앞서 논의의 동일 구도 즉 가시계로부터 가지계로의 상승적 전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청년기의 신체단련과 시가라는 배울 거리를 지나 그러한 상승의 최고 목표로서 변증술적 앎에 이르는  첫 단계로서 감각으로부터 지성적 이해로의 상승 내지 전환으로서 수와 계산 즉 수학 교육이 제시되고 있다. 요컨대 철학자를 위한 배울 거리의 첫 단계는 가시계의 감각적 지각의 단계로부터 가지계의 사고 단계로 전환 상승하는 것이다.

* 522a ‘시가는 .. 앎epistēmē이 아니다’ : 앎의 원어 epistēmē는 일반 기술적 앎에서부터 최상의 형상적 앎에 이르기까지 사용 범위가 넓다. 참고로 다양한 기술들이 앎으로 규정되는 사례는 아래와 같이 플라톤 대화편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테아이테토스> 146c-147c, 198a-c, <소피스트> 232a, 257d, <정치가> 258b-d, 297b, 300e, 305a, <필레보스> 55d-e, 57a-b, 58b-c, <알키비아데스 1> 125d-e, <카르미데스> 165c, 166a, 170b, 170c, 173c, <에우튀데모스> 289b, 291b, 292c-d 등. 이 점에서 보면 시가나 신체단련도 기술적 배울 거리의 하나로서 넓은 의미에서 앎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말의 의미를 선분의 비유를 기준으로 사고dianoia 단계 이상의 앎으로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 523a 지성적 이해noēsis : 그러나 지성적 이해의 원어 noēsis는 최상의 형상적 앎의 단계에 한정하지 않고 그 아래 단계인 사고dianoia 단계의 앎을 두루 포함하는 말 즉 가지계ta noēta 일반의 앎으로 넓게 사용되고 있다. 앞서 선분의 비유(509d-511e)에서도 noēsis는 때로는 ‘형상적 앎’epistēmē에 국한해서 때로는 수학적 앎까지 포함한 가지적인 것(ta noēt)에 대한 앎 모두에 두루 사용되고 있다.

* 522b ‘기술들도 모두 손을 쓰는 일로 보여’ : 건축술, 제화술, 조타술 등 기술들의 상당 부분이 손을 쓰는 일이기는 하지만 기술이라고 해서 모두 손을 쓰는 일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이곳 시가(음악)도 제1권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일종의 기술이고(335c) <정치가>에 나오는 왕의 정치술도 기술이다.

* 523e : 이곳에서 ‘큼’τὸ μέγεθος과 ‘작음’τὸ σμικρότητα, ‘굵음’πάχος과 ‘가늚’λεπτότης, ‘부드러움’ἢ μαλακότητα과 ‘딱딱함’σκληρότητα은 각각 greatness, smallness, thickness, thinness, softness, hardness 등 추상명사로 실물을 가리키는 말 이를테면 ‘큰 것’τὸ μέγα, ‘작은 것’τὸ σμικρὸν과 구분되는 말이다. 전자는 사고의 대상 내지 산물이고 후자는 감각의 대상 내지 산물이다.

* 524a ‘딱딱한 것에 적용되는 감각을 부드러운 것에도 적용될 수밖에 없어서’ : 딱딱한 것과 관련된 감각이 따로 있고 부드러운 것과 관련된 감각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같은 감각 즉 촉각이 적용된다는 뜻이다. 이어서 나오는 ‘가벼운 것의 감각과 무거운 것의 감각’이란 말도 가벼운 것의 감각과 무거운 것의 감각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무게와 관련한 같은 감각이다. 그러한 같은 하나의 감각이 정반대의 성질마저도 동시에 함께 영혼에 보고한다는 것이다.

*523c – 524c :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손가락들의 비유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즉 감각이 영혼에 전달하는 보고 내용은 어떤 경우 반대적인 것까지 구분 없이 섞어서 전달하는 등 일체의 고정성 내지 규정성을 갖고 있지 않아 영혼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손가락 비유와 관련한 이곳 텍스트 문장 하나하나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이를테면 ‘감각은 동일한 것을 딱딱한 것이면서 부드러운 것으로 감각한다.’고 했을 때 ‘동일한 것’이 손가락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인지 특정 손가락만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손가락들 전체를 말하면서 손가락들 중 어떤 손가락은 딱딱하고 어떤 손가락은 부드럽다는 이유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특정 손가락을 말하면서 그것이 어떤 때는 딱딱하고 어떤 때는 부드럽다는 이유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어떤 경우라고 해도 그 두 경우 모두, 손가락에 대해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감각내용들이 때와 부위에 따라 정도 상의 차이는 있어도 반대로까지 감각되는 경우가 있을까? 만약 손가락 뒷등은 딱딱하고 손가락 앞면은 부드러워서 그랬다면 혹은 특정 손가락이 어떤 때는 딱딱하고 어떤 때는 부드러워서 그랬다면 그것은 감각 수준에서 부위별로 혹은 시간 별로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손가락의 감각적 속성들과 관련하여 감각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반대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동시에 전해준다는 것인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굳이 가장 그럴듯한 경우를 든다면 약손가락의 크기와 관련된 감각의 경우이다. 왜냐하면 약손가락은 가운데 손가락보다는 작고 새끼손가락보다는 커서 동시에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감각이 약손가락의 크기를 동시에 크게도 보고 작게도 보았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영혼까지 가지 않더라도 감각 수준에서도 약손가락이 가운데 손가락보다 작고 새끼손가락보다 크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지각할 수 있다. 아무려나 구체적인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앞서 언급했듯 플라톤은 이 부분에서 손가락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손가락이 갖고 있는 속성들과 관련한 감각적 정보의 경우는 결코 일양적이지 못하고 어떤 경우 반대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 이런 점을 감안하면서 최대한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살려 이 부분의 내용을 풀어 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여기 세 개의 손가락이 있다면 우선 시각은 그것을 보면서 각각이 모두 손가락임을 알려준다. 최소한 손가락들을 보면서 그것에서 손가락과 대립되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반대적인 것이 함께 감각되지 않아 지성적 이해까지 소환되지 않는다. 즉 지성적 이해 단계까지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손가락들의 크기나 두께 무게 경도 등 속성들의 경우 감각은 어떤 때는 이렇게 어떤 때는 저렇게 감각하거나 또는 그냥 감각되는 대로 구분 없이 다른 속성들을 섞어서 함께 영혼에 전달한다. 시각은 물론이고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이다. 촉각의 경우도 두꺼움과 얇음, 딱딱함과 부드러움 등 동일한 대상에서 반대적인 속성들을 분리하지 못하고 그것들 섞어서 ‘두꺼운 것이면서 얇은 것’, ‘딱딱한 것이면서 부드러운 것’이라고 감각한다. 무게 관련한 감각 또한 가벼움과 무거움을 분리해서 감각하지 못하고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섞거나 때론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가벼운 것을 무거운 것으로 감각하여 영혼에 전달한다. 게다가 이러한 속성 관련한 감각의 경우는 나의 감각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누가 그것을 감각하느냐에 따라서 수없이 다양한 차이들은 물론 그 반대적인 것으로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프리카인과 에스키모인들이 같은 온도에 대해 정반대의 성질로까지 감각할 수 있고 같은 온도의 냄비에 대해서도 거칠 대로 거칠고 닳고 닳은 요리사의 손과 앳된 어린이들의 손이 감각하는 내용은 큰 차이가 있다. 이렇듯 각각의 감각들은 나의 감각 내에서도 동일한 것에 대해 반대적인 것들마저 구분 없이 섞어서 영혼에 제시하고, 사람들 간 동일한 것에 대해 반대되는 감각적 견해들도 동시에 내 영혼에 전달된다. 이럴 경우 영혼은 당황aporein할 수밖에 없다. 동일한 대상이 동시에 그 반대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각각이 그래서 영혼은 급기야 지성적 이해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지성적 이해는 즉각적으로 그것에 반응하여 ‘그것은 무엇인가? ti esti’라는 소크라테스적 물음을 통해, 보고된 내용들에서 ‘큼’과 ‘작음’, ‘두꺼움’과 ‘얇음’, ‘딱딱함’과 ‘부드러움’, ‘가벼움’과 ‘무거움’을 자기동일적 하나로 구별 분간해 낸다. 사고가 그러한 것들을 그 섞인 것들에서 분리 구분해 낸 것이다. 이로써 가시적인 것to horaton으로서 하나로 뭉뚱그려 뒤섞인 상태의 것 이를테면 ‘큰 것이면서 작은 것’은 마침내 각기 하나로서 ‘큼’과 ‘작음’으로 분리되어 비로소 가지적인 것to noēton이 된다.(524c) 요컨대 사고는 가지적인 산물로서 ‘큼’과 ‘작음’이라는 개념지를 추상하여 그것을 토대로 각 손가락들의 크고 작음을 구분하여 손가락들의 크기에 관한 분별적 지식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사고는 큼과 작음이라는 개념적 지식을 토대로 감각 내용에서 함께 섞여 있는 큰 것과 작은 것들이 측면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차린다. 큰 것은 어떤 측면에서 어떤 관계 속에서 큰 것이고 작은 것은 어떤 측면에서 어떤 관계 하에서 작은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약손가락의 경우, 영혼은 가운데 손가락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작은 것으로 새끼손가락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큰 것으로 분간해 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혼은 궁극적으로 동일 대상에서 어떤 성질이 본질적인 것이고 어떤 성질이 우연적인 것인지도 구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영혼은 감각으로부터 촉발된 당혹스런 난문aporia을 통과하여 참된 배움으로서 감각적인 가시계를 떠나 가지계로 진입한다.

* 523c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 것’ : 이 문장은 동사 ekbainei와 전치사 eis의 의미를 살려 ‘반대되는 감각으로 동시에 넘어가지 않는 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아직 단순 지각 상태에 머물러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포함하는 뒤섞인 감각으로까지 넘어가지 않은 것들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아직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으므로 지성적 이해를 자극하지 않는다.

* 아마도 플라톤이 당혹감을 주는 사례로 실체의 본질적 속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큼과 작음, 딱딱함과 부드러움 등 실체에 부대하는 속성 류의 것들을 끌어들인 배경에는 당대 소피스트들의 행태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소피스트들은 측면이나 계기, 속성 등 우연적인 것들을 파르메니데스를 끌고 와 마치 배타적 일자성을 갖는 것인 양 내세워 상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궤변적 쟁론술을 자주 구사했기 때문이다. <에우튀데모스>에서 디오뉘소도로스가 클레이니아스를 공격하는 논변에서도 그런 행태가 보인다.(277b-c) 그것을 쉽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은 궤변이다. 즉 클레이니아스에게 ‘배우는 일이 있느냐’를 묻고 ‘그런 일이 있다’고 그가 답하면 ‘그것은 앎을 받아들여 앎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당신은 지자(智者)이다’라고 결론 내리고, 곧 이어 ‘무언가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자인지 아니면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인지’를 그에게 묻고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자’라고 답하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도 속한다’는 것을 근거로 ‘당신은 무지자(無知者)이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그런 연후 ‘지자와 무지자가 반대’라는 것을 근거로 ‘당신 스스로 지자이자 무지자라고 말한 꼴’이니 ‘당신은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공격하는 식이다. 그런데 어떤 것은 알고 어떤 것은 모른다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각기 측면적 앎의 상태로서 동시에 병립 가능한 것이다. <국가> 이곳에서 감각이 반대적인 것들과 관련해서 지각하고 있는 것 즉 ‘큰 것이면서 작은 것’ 또한 동일한 것에 대한 측면적 지각들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사람에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동시에 같이 있듯이 같은 손가락일지라도 측면에 따라 ‘큰 것’일 수도 있고 동시에 ‘작은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클레이니아스 또한 어떤 측면에서는 지자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무지자이다. 그럼에도 디오뉘소도로스는 반대적인 것들이 한데 섞일 수 없음을 근거로 클레이니아스를 공격하고 클레이니아스는 이곳의 영혼처럼 그 공격에 당황한다. 그런데 손가락의 경우나 앎의 경우나 모두 각기 감각과 궤변이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구조는 비슷하지만 그 당혹스러움을 벗어나는 과정은 방향에서 서로 반대이다. 이곳에서는 영혼이 사고를 통해 ‘큼’과 ‘작음’이라는 추상적 개념치를 분리해 내는 방식으로 감각이 초래한 당혹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났다면, <에우튀데모스>에서는 거꾸로 디오뉘소도로스의 공격의 빌미가 된 ‘지자’와 ‘무지자’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지자일 수도 무지자일 수도 있는 측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디오뉘소도로스의 공격에서 벗어난다. 요컨대 소피스트들은 측면에 불과한 것들을 서로 배타적인 개념지로 호도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고 이곳의 감각들은 사고를 통해 배타적 개념지로 충분히 구분해서 드러낼 수 있는 것임에도 그 단계에 못 미쳐 그냥 반대적인 측면들까지도 구분하지 못한 채 하나로 뒤섞어 감각하는 방식으로 영혼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 이곳에서 영혼이 직면하는 당혹감 또는 난문aporia은 감각적 가시계에서 반대적인 것들이 동시에 함께 주어짐으로써 촉발된 것이지만, 그러한 난문들은 물질적 가시적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쾌락과 고통, 선과 악과 같은 윤리적 문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플라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참과 거짓,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 경건과 불경건, 쾌락과 고통 등과 관련한 일상의 주장들을 하나같이 난문에 빠트리는 장면들은 허다할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소크라테스적 난문들은 진정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당혹감을 주어 탐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철학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부추기고 자극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곳에서도 영혼이 마주하는 당혹감은 최상의 배움을 향한 상승과 전환의 첫 발을 내딛게 하는 발판이자 기폭제가 된다. 말 그대로 철학은 당혹과 놀라워 함thaumazein에서 시작된다.

* 524d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사고와 지성적 이해가 영혼에서 발생하는 일이 어떤 경우에 생겨나는지를 설명한 다음, 지성적 이해가 수행하는 계산과 탐구의 근간에 수arithmos와 하나to en가 자리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런데 그러한 구분에 ‘수와 하나’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우선 구분과 분간이 된다는 것은 대상들 각각이 어떤 단일한 일자적 규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일자적 규정성으로서 자기동일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타자와 분명한 구별이 불가능하다. A는 A로서 일자성이 확보되고 B는 B로서 일자성이 확보될 때 비로소 A라는 ‘하나’,  B라는 ‘하나’가 성립하고 그것들 모두 각기 나름의 일자성을 갖는 서로 다른 ‘여럿’(多)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여럿이 성립해야 비로소 그것들 간의 비교, 차이가 드러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도 드러나 이른바 그것에 대한 객관적 탐구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가시계의 물질적 감각적인 것들은 늘 생성 변화하고 그 안에 반대적인 속성들마저 뒤섞여 있어 자기동일성의 확보가 어렵고 그에 따라 동일한 것을 ‘하나’en인 것으로 보면서 동시에 수적으로 무한한apeiron 것으로 본다. 이렇듯 감각은 더 이상 대상들을 제대로 적확하게 지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혼은 사고 작용을 통해 그것들에서 물질적 감각적 변화의 요소들로부터 이를테면 큼 자체, 작음 자체라는 자기동일자를 분리해낸다. 예를 들어 A, B라는 속성들이 가시계에서 뒤섞여 있다고 하자. 이 경우 사고는 그곳에서 감각적 시간성을 제거하여 ‘A는 A’로 ‘A는 A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 B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으로 – 추상해 낸다. 이를 통해 비로소 그것들은 구별과 분간이 가능한 각기 ‘하나’이면서 동시에 서로 구분되는 ‘여럿’이 되는 것이다. 논리학에서 동일률과 모순률, 배중률을 사고의 기본 원리로 삼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 공간적 사고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자가 다름 아닌 ‘수’arithmos이다. 사고 단계를 구성하는 핵심에 수학이 자리하고 배울 거리의 첫 단계가 수학이 되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누군가 단일성의 개념을 형성해보려 시도하지 않았다면 산수라는 과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고를 불러일으키고 자극하는데 수학만큼 적합한 것은 없다.

* 물론 플라톤에서 사고가 가시적인 것들에서 각각의 자기동일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배경에는 그 각각의 것들에 자체적 존재로서 형상eidos이 자리하고 있다. 가시적인 것들은 그 형상들을 마치 그림자처럼 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수학적 자기동일성과 자체적 존재로서 형상이 갖는 자체성은 다르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수학적 자기동일성이 형상이라는 자체적 존재에 연원해 있다는 데 근거하여 수학에 기반한 사고 단계의 개별 학술들 즉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의 학문성을 확보한다.

* 그러나 오늘날 비합리주의 계열의 주장처럼 형상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플라톤이 말하는 사고 내지 지성적 이해는 실제 시공간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에서 시간을 제거하고 공간적 존재로서만 그것들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재하는 현실의 실상을 배반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노자(老子)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 설파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플라톤 철학은 어떻게든 현실을 말로 설명해내려는 현실 구제의 이념을 지향한다. 틀리면 그 이유를 대고 바로잡는 것 또한 말로 하는 논변이다.

* 525a ‘시각은 동일한 것을 하나인 것으로 보면서 동시에 수적으로 무한한apeiros 것으로 본다.’ : 이 말은 시각의 대상인 가시적 물질적인 것들이 반대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변화무쌍하게 수많은 측면들과 계기들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음을 함께 보여준다. 가시적 물질계는 존재론적으로 이미 그 자체로 무규정적apeiron인 것이다. 영혼은 형상 인식을 토대로 이러한 무규정성에 분유된 규정성peras을 간취하여 지성적 이해로 하여금 대상 세계의 분별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여럿으로 구성된 현실 세계의 구별 자체를 부정하는 파르메니데스적 허무주의와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가 극복된다.( <박홍규 전집> 3. 형이상학 강의 2. “플라톤의 허무주의 극복” 참고)

* 525a 계산 기술과 산수 : 플라톤은 이곳에서 계산 기술logistikē과 산수arithmētikē가 예비적 배울 거리의 첫 번째 교과임을 명시하고 있다. ‘산수’의 원어 arithmētikē는 오늘날 좁은 의미의 수학 즉 수론을 뜻하는 영어 arithmetic의 어원이 되는 말로 계산 기술을 내용적으로 포함하고 있다.(<필레보스> 56d) 그렇다고 arithmētikē를 오늘날 수, 양, 공간의 구조와 성질, 변화, 논리 등을 연구하는 넓은 의미의 수학 mathematic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수학 mathematics는 정수론, 대수학, 기하학, 해석학, 위상수학, 이산수학 등을 포함하는 말로 대수학조차 확립되지 못했던 플라톤 당대의 arithmētikē와는 비교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범위가 넓고 복잡하다. 사실 영어 mathematics는 이곳에서 ‘배울 거리’로 번역되고 있는 mathēma가 어원이다. 그 배경에는 퓌타고라스 학파가 자리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 전반의 퓌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Archytas(플라톤의 <편지>에 따르면 플라톤과 교유가 있었다)는 산수arithmetica, 기하학geometria, 천문학astronomia, 음악musica을 ‘모든 존재의 근본 형상이며 서로 한 형제인 수와 크기를 다루는 교과들’로 함께 묶어 ta mathēmata로 부르고 그것을 공부하는 퓌타고라스 학도들을 hoi mathēmatikoi로 불렀다.(Diels & Kranz,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Band I, Zürich/Berlin 1964. p.432 참고) 고대 그리스에서 ta mathēmata가 ‘배울 거리 일반’을 뜻하면서 훗날 수학의 어원이 된 것이나 이곳에서 플라톤이 형상적 앎을 획득하기 위한 예비적 배울 거리들로 산수,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 모두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플라톤에게 수학은 논증적 보편성을 담보하는 학적 인식의 근본 토대가 되고 그러한 플라톤의 관점은 현대 이론 물리학의 근간을 관통하고 있다.

* 525d ‘누군가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체를 가진 수들을 영혼에 제시하면서 대화를 한다면’ : ‘몸체를 가진 수들’이란 감각적 대상을 단위로 두고 세어진 수들 이를테면 사과 두 개, 말 세 마리, 물 세 컵 등으로 표현된 수들이다. 물 한 컵에 두 컵을 더해도 한 컵이 되는 것을 근거로 ‘1+2도 1이 될 수 있다’는 궤변도 몸체를 가진 수와 순수한 수를 구분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이다. 수학자들이 감각적 몸체를 가진 수들이 아니라 오로지 사고의 대상으로서 수만을 승인하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 525d ‘배울 거리가 여러모로 쓸모chrēsmos가 있다’ : 플라톤에게 앎은 그 자체로 좋음 즉 실천적 유용성을 수반하는 것이다. 일부 플라톤 연구자들이 그를 철저한 공리주의자로 해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소개되는 계산 기술과 산수 또한 영혼으로 하여금 생성으로부터 있음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질서와 대오를 중시하는 군대 즉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서 쓸모와 관련하여 플라톤이 강조하려는 것은 그러한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배울 거리는 기묘해서 ‘영혼을 위쪽으로 강하게 이끌고 ‘수들 자체에 대해서 대화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서 쓸모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대화하도록’의 원어 dialegesthai가 ‘변증술적 대화 능력’의 의미로도 함께 쓰이고 있음을 고려하면 수학 교육의 가장 큰 쓸모는 무엇보다도 바로 가장 위쪽 즉 좋음의 극치로서 형상적 앎에 이르는 변증술의 토대가 된다는 데 있다. 이 점은 차후의 배울 거리와 관련해서도 반복해서 강조된다.

* 525d ‘배울 거리가 행상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이 말은 이른바 순수 이론적 교과를 상업적 이익을 위해 가르치고 배우려고 하는 당대 지식인과 대중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 말 역시 앞서 언급했듯이 근본적으로는 예비적인 배울 거리로서 산술 내지 수학의 쓸모가 그러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형상적 앎을 획득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글라우콘은 이후 제시되는 예비교과들에 대해서도 매번 핀잔을 들으면서까지 눈치 없을 정도로 대중들의 관점을 반복해서 대변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모습 또한 해당 교과들을 순수 논증적인 차원에서 다루고자 하는 플라톤의 의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일조한다.

* 526a ‘그것들이 어떤 수들이기에 당신들이 그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대로 각각 모두가 모두와 같고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으며 자신 안에 어떤 부분도 갖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다면 : 여기에서 ‘당신들’이 가리키는 것은 당대의 기하학자, 천문학자, 화음 이론가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나중 그들 이론의 한계를 분명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일단 수학을 강조하는 이 단계에서는 일단 당대의 수 이론을 승인하고 있다. 수는 감각적 대상처럼 자신 안에 어떤 부분도 몸체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사고로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형상(이데아)으로서의 수도 아니다. 앞서 선분의 비유에서 사각형 자체가 그려진 도형으로서 사각형도 아니지만 형상으로서 사각형 자체가 아닌 것과 같다.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에서 사고의 대상을 수학적인 것으로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나 이곳의 내용은 사고dianoia의 대상이 수학적인 것임을 충분히 알아차리게 해준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이상학> 1.6.987b에서 플라톤이 감각물과 이데아 사이에 수학적인 것들이 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만큼 플라톤에게 수학은 앞으로 다루게 될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과 더불어 변증술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예비 교과이자 개별 학술로서 최상의 지위를 공유한다.

* 525b : 본성에 따른 천부적 능력이 우선시 되고 있지만 누구라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진전을 이룰 수 있음 또한 강조되고 있다.

* 526c ‘배우고 연마하는 데 이보다 더 힘이 드는 배울 거리’ : 플라톤은 앞서 제6권(503e-504d)에서 ‘가장 큰 배움’to megiston mathēma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길고 힘든 단련의 과정이 필요한지를 언급하고 있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것은 힘든 것’(ta kala chalep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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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제기하는 가시적인 것에 대한 지각에서 가지적인 것에 대한 인식에로의 전환은 어떤 인식론적 입장을 갖느냐에 따라 수많은 이견과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손가락에 대한 감각적 지각은 손가락이 아닌 지각을 동시에 산출하지 않는 단순 지각으로서 지성적 이해를 자극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칸트 인식론의 관점에서 보면 감각 대상이 손가락으로 인지되었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감각소여data에 손가락이라는 오성적 개념지 즉 범주의 개입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에 속하는 것들 가운데 반대되는 감각을 동시에 산출하는 감각도 있고 그것이 지성적 이해를 자극한다(523a)는 언급도 마찬가지의 문제를 낳는다. 왜냐하면 그 감각이 지각한 내용은 거울처럼 순수하게 대상을 수동적으로 모사한 감각소여가 아니라 이미 반대적이라는 오성적 판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론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의 감각 대상은 오로지 감각소여로 주어질 뿐이어서 그 지각 내용들에 그 어떤 지성적 이해도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다만 지각된 잡다한 관념들의 내적 연합의 법칙에 의해 개연적인 집합성만을 갖는 것으로 구별 인식될 뿐이다.

* 아무려나 이곳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철학자를 위한 이곳의 교육 과정 또한 구도상 앞서 살핀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인식과 실천의 상승과정과 그대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이곳에서 제시된 수학 교육은 선분의 비유 상 의견doxa이 지배하는 가시적인 것들에 대한 믿음pistis의 단계로부터 추론적 사고dianoia와 지성nous가 지배하는 가지적인 것들ta noēta에 대한 지성적 이해noēsis의 단계로의 전환periagōgē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장차 제시될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등과 함께 본 곡으로서 변증술적 앎을 준비하는 서곡을 구성한다. 앞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이 개별학술들technai은 본 곡으로서 변증술에 이르는 토대가 된다. 변증술이 지적 직관에 크게 바탕을 두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개별 학술들이야말로 설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학문의 실질적인 정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별학술들을 바라보는 플라톤의 시선을 고려하면 그가 오로지 형상에 대한 인식에만 매달렸다는 통상적 이해는 결코 진실이 아니다. 아무리 그것이 자체성을 갖는 최상의 앎이라고 해도 자기동일성에 기반한 개별 학술들에 대한 앎을 획득하지 않으면 결코 그곳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개별학술들은 이미 그 자체로 중차대한 학문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칸트 인식론의 ‘감성’(Sinnlichkeit)과 ‘오성’(Verstand) 그리고 ‘이성’(Vernuft)(좁은 의미)의 지배 영역을 큰 틀에서 플라톤의 인식 단계와 비교해보면, 비록 칸트의 인식론이 실재론자 플라톤과 달리 인식을 구성하는 주관에 치중되어 있다할지라도 그것들 각각은 가시계의 감각aisthēsis과 가지계의 추론적 사고dianoia 그리고 형상계의 지성nous에 대응한다고 볼 수도 있다. 오성 차원에서 물자체는 불가지이지만 이성 차원에서는 최소한 그 존재가 알려진다는 것도 사고 차원의 개별 학술적 앎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변증술 차원의 직관적·총체적 앎과의 간극에 대한 플라톤적 상념과 일정부분 닿아 있다.

* 이제 논의는 사고 단계의 첫 출발로서 산수 교과를 거쳐 나머지 예비교과로서 기하학, 입체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으로 이어진다. – 끝 –

 

다음 강해 :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기하학(526c-527c), 천문학과 입체 기하학(528a-d)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5년 4월 제17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발제: 송인재│2025.04.11.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주제: 『중국현대철학사론』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
-발제자: 송인재(한림대)
-일시: 2025년 4월 11일(금) 오후 4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 줌 온라인

이번에 살펴볼 양수명은 이규성 선생의 소개에 따르자면 대체로 유교를 중심에 두고 서구 사상을 흡수함으로써 현대에 되살리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유교는 양명학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유교의 인 개념을 서구 현상학자 오이켄의 직각 개념과 연결하여 정의적 공감을 나가고, 도 개념을 베르그송의 생명 개념과 연결하여 우주의 대 생명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생명과 정의적 공감에 기초하여 공동체(향촌)를 건설하려는 사회운동을 전개했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양수명을 연구하는 학자가 많군요. 강중기 선생이 책으로 발간한 바 있고 이철승 선생도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규성 선생도 거의 한 권의 책에 가까운 분량을 통해 양수명의 사상을 연구했군요. 아마도 전체적으로 보아 이규성 선생의 사상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에 남달리 애정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번 발표는 중국현대철학사상 연구자로 알려진 송인재 선생(한림대)이 맡아서 해 주시겠습니다.

 

발제문: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20250411

 

영상 출처: https://youtu.be/yMWvWZfSjFM?si=b8RAwnYEmdJA4wO_

‘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사변적 물리학을 위하여’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안호성 옮김, 『자연의 개념』(갈무리, 2025) 서평|글: 이수영(미술작가,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철학자의 서재]

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사변적 물리학을 위하여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안호성 옮김, 『자연의 개념』, 갈무리, 2025

 

이수영(미술작가,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해가 붉게 서산에 걸리면 태양의 광선이 대기권을 통과하는 경로가 길어지면서 파장의 길이가 길어지고 각도가 커진다. 태양광선의 파동 630~750nm은 물리적 객체이지만 노을의 붉은빛도 객체일까? 화이트헤드는 ‘붉은색’이라는 감각이야말로 우선하는 객체라고 말한다. 붉은색이라는 감각-객체가 아니라면 태양의 가시광선이라는 물리적 객체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객체 ‘붉은색’은 석양이 지는 복합적 관계들 속에서 우리의 감각 지각이 붙잡은 관계항이다.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붉은색’이 자연의 존재자이기 때문이지 색깔이라는 것이 단지 인간 정신 안의 표상이거나 태양광선의 특정 파동에 귀속된 특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사고가 아닌 감각이 자연과학의 기초여야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 정신에 대해 자립적인 닫힌 체계이다. 화이트헤드는 메이야수가 상관주의라고 부른, 즉 인간정신에 드리운 자연과 인간 바깥의 자연을 분리하는 이원론에 맞선다.

화이트헤드는 세계를 끊임없이 서로 관계하며 변화하는 사건들의 총합으로 보았다. ‘사건’이라면 교통사고 같은 것을 떠올리지만, 화이트헤드에게 광화문 사거리 이순신장군 동상 역시 사건이다. 이순신장군 동상은, 동상의 양자장이 요동치고 전자기장이 저항하는 등 여러 흐름들이 광화문 이순신동상이라는 상황으로 회집되어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광화문 이순신동상을 감각적으로 특정할 수 있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존재자들이 세계를 경험하는 매순간 현실은 생성 소멸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 샤비로는 『사물들의 우주』에서 화이트헤드를 들뢰즈의 생성과 흐름의 철학과 연결시킨다. 또한 화이트헤드는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이나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 등의 신유물론의 계보학적 선행연구로 떠오르기도 한다. 들뢰즈, 신유물론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공통점이라면 세계를 자기동일성에 폐쇄된 정태적인 실체나 사물들이 아닌 역동하는 과정으로 본다는 점일 것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존재를 존재이게 만들어 주는 작용인인 보편자는 창조성, 생성이다. 그는 ‘임페투스’라는 장(field) 개념을 도입하는데, 특정된 사건을 회집된 것으로 보는 관점은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이론을 떠오르게도 한다.

화이트헤드가 세계를 사건들이 요동치며 생성하는 과정으로 바라보지만, 수학자이기도 한 화이트헤드는 추이하는 사건을 미분해 들어가는 추론으로 이상적 극한을 추상화한다. 그리고 그 추상적 개념들로 지각 속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자연을 인식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사건들의 관계를 추상하는 것은 상대적이다. 요동치는 사건들을 경험하는 입각점에 따라 사건은 다르게 특정될 수 있다. ‘지각하는 사건’이라는 그의 개념은 지각하는 현재를 입각점으로 사건을 어떤 고유한 방식으로 식별하는 것이다. 관할하는 현재의 상황이 특정한 구조로서 사건을 파악하는데 포함되는 것이다.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관찰 행위가 관측이라는 장에 포함되어 관측결과에 영향을 주는 비결정성이라는 관찰자효과를 떠올리게 한다. 화이트헤드는 ‘파악(prehension)’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사건은 실재적 계기(actual occasion)의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다른 객체로 파악될 수 있는데, 객체란 이렇게 흐르는 사건 속에서 특정하게 상황화된 회집체이다. 들뢰즈라면 욕망에 따라 접속하여 전혀 다른 기계를 만들어 낸다고 했을 것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에 아인슈타인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화이트헤드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개념과 빛의 절대속도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에게 시공간은 사물들 간의 질량에 의해 구성되는 중력장으로 물리적 실체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에게 시공간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의 상호관계를 추상하는 수학적 개념이었다. 아인슈타인에게 빛의 속도는 불변하는 절대속도이지만 화이트헤드에게는 빛의 속도 역시 사건들의 관계의 추상이어야 했다. 화이트헤드에게 존재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사건들이지 자기동일성을 가진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었다.

화이트헤드는 우리로부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곳-예를 들어본다면 수억 광년 저편의 천체-에서 사건들이 상황화 된다면 빅토리아 여왕의 탄생과도 공-현재하면서 2025년 우리와도 공-현재하는 사건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설명은 마치 끈이론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의 블록우주이론하고 같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른다는 선형적 시간이론과 달리 덩어리로 이미 존재하는 시간-실재에 어떻게 진입하느냐, 어떻게 상황화 되느냐에 따라 달리 현재화 된다는 이론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하는 화이트헤드의 열린 사건들의 세계와 이미 닫힌 우주블록이론의 시간은 많이 다르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개념』에서 과학의 목적은 “다양한 객체가 상황화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다양한 사건 속에서 그 객체들의 나타남을 지배하는 여러 법칙을 추적하는 것(245)”이라고 밝힌다. 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화이트헤드의 책 『자연의 개념』이 주는 영감은 생생하고 매혹적이다. 물질이 뿜어내는 생기, 감각에 대한 신뢰와 집중, 이접(disjunctive)하는 다자(多子)들의 세계, 그리고 이 요동치는 카오스의 세계를 끈질기게 미분하여 극한으로 추상해내는 정합성. 기후위기와 디지털 시대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다양한 실천에 소환되고 있는 이유를 『자연의 개념』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7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2)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 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V)

 

3)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왜 온갖 난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논의(519c-521c)

 

[519c-521b]

* 나라수립자οἰκιστής로서 우리가 할 일은 앞에서 가장 큰 배울 거리라고 이야기한 것에 도달하도록 ‘가장 훌륭한 자연적 성향들을’τάς τε βελτίστας φύσεις 강제하는 것, 즉 저 오르막길을 오르고 ‘좋음을 보도록’ἰδεῖν τὸ ἀγαθὸν 강제하는ἀναγκάσαι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가서 충분히 보고 나면 지금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그런 것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μὴ ἐπιτρέπειν. 즉 “거기에 머물며, 저 수감자들 곁으로다시 내려가기καταβαίνειν를 원하지도 않고 변변치 않은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그들의 수고πόνος와 명예τιμή를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μηδὲ μετέχειν은 허용되어선 안 된다.(519c-d)

* 그러나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그렇게 할 경우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ἀδικήσομεν 것, 즉 그들이 더 나은ἀμείνων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데도 더 못한χείρων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지 반문한다.(519d)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법은 나라의 어떤 한 부류 γένος가 특별히διαφερόντως 잘 살게εὖ πράξει 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에 그런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즉 법νόμος은 설득πειθός과 강제ἀνάγκη를 통해서 시민πολίτης들을 화합시키고συναρμόττων, 각자가 공동체τὸ κοινὸν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이로움ὠφελία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그것을 서로서로 나누어 주도록μεταδιδόναι 만든다.(519e) 법 자신이 나라 안에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곳을 향하도록 내 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 자신이 나라의 결속σύνδεσμος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철학자가 된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을 ‘돌보고 수호하도록’ἐπιμελεῖσθαί τε καὶ φυλάττειν 강제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정의로운 것들을 요구하는 것이다.(520a)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수호자를 양육하지 않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국가가 양육비를 들여 누구보다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하게τέλειος 교육을 시켜 그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서 벌 떼들σμῆνος의 지도자들ἡγεμόνας이자 왕들βασιλέας처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520b) 그러니 각자가 차례로ἐν μέρε 나머지 시민들의 거처συνοίκησις로 내려가야 하고καταβατέον, ‘어두운 것들을 보는 데’τὰ σκοτεινὰ θεάσασθαι 익숙해져야 한다.συνεθιστέον. 익숙해지고 나면 그들은 아름다운καλός 것들과 정의로운δίκαιος 것들과 좋은ἀγαθός 것들에 관해 참된 것들τὸ τἀληθῆ을 본 까닭에 그곳 사람들보다 만 배나 더 잘 보게 될 테고, 각각의 영상들τὰ εἴδωλα이 어떤 것이며 무엇의 영상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깨어있는 상태οὐκ ὄναρ에서 다스려질 것이다. 오늘날 그림자를 두고 싸우는 사람들σκιαμαχούντων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가 그러하듯 결코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니다.(520c) 그들은 마치 통치하는 일이 무슨 큰 좋은 일이라도 되는 양, 그와 관련해서 내분을 일으키고στασιαζόντων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즉 통치하려는 열망이 가장 적은 사람들’ᾗ ἥκιστα πρόθυμοι ἄρχειν이 통치하게 되는 나라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내분 없이’ἀστασιαστότατα 다스려질 것이 필연적이며, 그 반대의 통치자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그 반대이다.(520d) 그러므로 우리에게 양육 받은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순수한 곳에서 서로 함께 살면서, 각자 차례가 되면ἐν μέρει 나라에서 ‘수고하는 일을 함께하길’συμπονεῖν 원할 것이다.(520d) 우리는 정의로운 자들에게 정의로운 것들을 명령하지만 그들 각각은 다른 나라의 통치자들과 달리 통치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불가피한ἀναγκαῖος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임할 것이다.(520e)

* 만약 통치할 사람들에게 통치하는 일보다 더 나은ἀμείνων 삶이 있다는 것을 자네가 찾아낸다면, 잘 다스려지는 나라가 실현가능ἔστι하게 될 것이다. 이 나라에서만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들’οἱ τῷ ὄντι πλούσιοι이 통치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란 금으로 부유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부유해야 할 것으로 부유한 사람, 즉 ‘현명하고 좋은 삶으로’ζωῆς ἀγαθῆς τε καὶ ἔμφρονος 부유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만약 사적인 좋은 것들에 굶주린 거지πτωχός들이 공적인 일에서 좋은 것들을 낚아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일에 나서고 있다면, 그런 나라는 실현가능하지 않을οὐκ ἔστ 것이다. 그런 경우 통치하는 일이 싸움거리περιμάχητος가 될 것이고, 그러한 전쟁πόλεμος은 나라 안에서ἔνδον 벌어지는 내전이어서 그들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까지 모두 파괴할ἀπόλλυσι 것이다.(521a)

* 요컨대 ‘진정한 철학의 삶’τὸν τῆς ἀληθινῆς φιλοσοφίας 말고 정치권력을 낮춰 보는καταφρονοῦντα 삶은 없다. 통치하는 일에 나서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사랑에 빠진 자’ἐραστής가 아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애 경쟁자들οἵ ἀντερασταὶ끼리 싸움을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가장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해 가장 현명하고φρόνιμος, 또한 정치적인πολιτικός 명예τιμή와는 다른 명예를 누리며, 정치적인 삶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들을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52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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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9 d : ‘그들의 수고와 명예를tōn par’ ekeinois ponōn te kai timōn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mēde metechein’ : 이 문장에서 ‘그들(수감자들)의 수고와 명예’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다. 특히 수감자들의 명예라는 표현은 당혹감마저 안겨준다. 그러나 전치사 para에 주목하면 이 말은 ‘수감자들 쪽에서 힘들어 하는 것과 영예롭게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풀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철학자가 동굴에 내려가 수감자들을 데리고 나오려면 우선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 또한 철학자에게 요구되는 ‘어둠에 익숙해지는 과정’(517a)의 일환이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한, 먼저 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동거하며(520c) 동고동락(同苦同樂)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의 말대로 여민(與民)의 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참고로 ‘나누려 하지 않는다’에서 ‘나누는 것’의 원어 metechein은 ‘사물들에 그 사물의 이데아가 분유(관여)되어 있다’라고 말할 때 그 ‘分有(關與)’의 원어로도 쓰인다. 

* 철학자들과 달리 현실 권력자들과 사회 기득권자들은 일반 시민 대중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들을 낮춰보고 자기들만의 생각,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대중의 힘이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기에 부와 권력, 언론과 교육 제도 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자신들의 의식을 유포하는 방식으로 시민 대중들의 눈을 가리고 그들의 비판 정신을 마비시킨다. 제8권에서 플라톤은 피폐한 민주정 치하 소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이 어떻게 일군의 대중을 선동하여 폭압적 참주정의 주도 세력인 양 이용하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러한 행태는 20세기 나치즘, 파시즘의 등장을 거쳐 현재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대선을 앞두고 그 일단의 세력들이 단말마적 발악을 자행하고 있다. 불타협의 태세로, 시민들의 강건한 연대로 그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 519e ‘환기시킨다.’ : 제5권 466a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가리킨다. 본 강해 참고

* 519e ‘설득peithos과 강제anagchē’ : 이 표현은 488c에도 나온다. 설득과 강제는 사람을 의도자의 목적에 따라 변화시키는 방편이다. 설득은 말logos을 통해 강제는 행위ergon를 통해 이루어진다. 행위는 제도와 법률의 집행은 물론 개인들의 폭력이나 거짓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설득으로 이루어지나 제도로서 강제의 측면이 있다. 도덕과 강제와 관련해서는 강해 본문 참고.

* 520a ‘강제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 흥미롭게도 글라우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끌어들이고 있는 정의관은 제1권에서 폴레마르코스가 제기한 정의관 즉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다. 그 정의관의 한계는 충분히 비판되었지만,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생각에 맞추어 설사 당대 상식적 정의관에 비추어보더라도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 520c ‘깨어있는 상태에서 다스려지는 나라’,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 : 전자는 철학자가 다스리는 나라 후자는 타락한 정치가들이 다스리는 현실의 나라를 가리킨다. 현실의 나라임에도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실상이 아닌 영상들 즉 동굴 속 그림자 같은 것을 두고 싸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520c-d 내분stasis(분쟁, 내란, 반목, 대립) : stasis는 <국가> 전편에 걸쳐 계층과 집단 또는 영혼의 상태로서 나라와 집단, 개인이 맞이하는 최악의 것으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351d-352a, 440b, 442d, 444b, 459e, 464e, 465b, 470b-d, 471a, 520c-d, 521a, 545d, 547a, 554d, 556e, 560a, 566a, 586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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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는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동굴 속 어둠을 빠져 나와 좋음의 형상을 본 후 그것이 얼마나 신적인 즐거움을 안겨 주는 일인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인간사에 마음 쓰고 싶지 않고 언제나 높은 곳에서 지내기를 열망한다.(517c-d) 그러나 철학자는 이제 수감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동굴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있다. 나라수립자들은 철학자가 동굴 속 수감자들 곁으로 돌아가 수고든 명예든 공유하려하지 않고  동굴 바깥에서 고고하게 지내는 것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들이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못하게 하는 것은 부정의한 일이 아닌지’ 반문한다. 그러면 이러한 반문에 대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어떤 대답을 제시하고 있을까?

* 519c ‘좋음을 보도록 강제하는anagkasai 것’ : ‘강제’와 관련한 표현은 짧은 이 문맥에서만 아래와 같이 네 차례나 나온다.[‘법은 설득과 강제anagchē를 통해서’(519e) ‘돌보고 수호하도록 강제anagchē’(520a). ‘통치하는 일을 불가피한anagkaios 것으로 여기고’(520e),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anagkazein(521b) 등]. 강제의 그리스 원어 anagchē는 ‘강제’의 뜻만이 아니라 ‘필연’, ‘불가피함’, ‘운명’의 뜻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때 anagchē가 포함하고 있는 강제의 범위는 도덕적 당위나 법률적 의무에서부터 형벌이나 처벌, 폭력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유념할 것은 플라톤이 철학자 또는 철학 교육과 관련하여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사회적 정당성에 기초한 도덕적 당위나 법률적 의무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 네 군데가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배의 비유(488b-489a)에서 ‘선원들(소피스트)이 선주(대중)에게 행하는 ‘강제’의 경우는 그와 다르게 바로 이어서 예시되고 있듯이 시민적 박탈과 벌금, 사형 등 외적인 강요와 폭압의 성격이 강하다. 위 두 경우는 같은 강제일지라도 자율과 타율의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정반대이다. 전자의 경우는 강제의 사회적 도덕적 정당성에 기초한 강제, 즉 내적인 동의에 따른 자율이 그 근간을 형성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는 내적인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당사자의 무조건적 수용, 즉 외적 강제에 따른 타율이 그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자율은 도덕적 실천의 기본 원리이다.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철학자가 동굴로 내려가는 일’이 본성에 따른 자발적인 것인지 강제에 의한 것인지가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자율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비록 동굴에 내려가는 일이 자신의 본성상 선뜻 반길 일은 아니지만 그것의 당위적 정당성을 배움에 따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그 강제를 내적인 동의, 즉 자발성과 강제를 공존시키는 자율의 방식으로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덕적 당위나 사회적 의무는 그 자체로 시민들 모두가 하나같이 선뜻 반기고 좋아하는 일은 아니다. 병든 부모를 모시는 일이나 나라를 지키려 군대를 가거나 세금을 내는 일 등을 즐거워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순순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은 도덕적 본성에 따른 당위나 그것의 사회적 정당성을 인정하고 비록 힘들고 싫은 일이라도 그것을 자율적으로, 또는 최소한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원함(wollen)과 당위(sollen)는 분명 다르지만 최소한 공동체의 시민에게 그 둘은 도덕의 이름으로 법률의 이름으로 공존할 수 있다. 철학자에게 주어지는 강제도 이런 성격의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는 그 공존을 누구보다도 기꺼이 그리고 쉽게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 철학자가 동굴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 즉 통치 참여의 근거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은 기본적으로 본성과 배움 모두에 기초해 있지만 설명의 내용에서 보면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도덕적 당위성의 측면이 강조되고 어떤 경우에는 본성과 자질의 측면이 강조된다. 우선 전자의 측면에서 그 근거는 철학자도 시민 공동체의 일원인 한 법 준수의 의무 차원에서 제시된다. 법은 나라의 어떤 한 부류가 특별하게 잘 살게 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화합시키고 그들에게 이로움을 나누어 주는 데 목적이 있다. 사실 플라톤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이미 제4권(420b)과 제5권(466a)에서도 “아름다운 나라가 지향하는 것은 나라에 있어서 어느 한 부류가 잘 지내도록 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임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다름 아닌 시민을 돌보고 나라를 수호하는 일인 한, 그들은 법에 따라 통치의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이상 국가가 지향하는 법의 정신뿐만 아니라 제1권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라는 전통적 정의관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나라가 양육비를 들여 누구보다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하게 교육을 시켜 그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나라의 수호자로 일하도록 키워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자에 대한 나라의 처사는 부정의한 것이 아니다.

* 플라톤은 이같이 사회적 법적 당위성 측면만이 아니라 본성과 자질의 측면에서도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해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즉 이상 국가의 구성원들은 누구든 간에 자신의 본성과 자질에 적합한 일을 수행함으로써 나라의 안녕은 물론 자신의 행복을 구현한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아름다운 것들과 정의로운 것들과 좋은 것들에 관해 참된 것들을 본 까닭에 그 누구보다도 또 다른 나라의 그 어떤 지도자들보다도 만 배나 더 잘 볼 수 있다. 배의 비유에서도 플라톤은 배를 지휘하기에 적절한 참된 키잡이라면 ‘한 해와 계절들 하늘과 별들 바람들 그리고 그 기술에 합당한 온갖 것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게 필연적’이라고 말한다.(488d) 배를 거짓된 선원들에게만 맡기면 결국 배도 파도에 쓸려 난파하고 키잡이를 포함해 모두가 파멸한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나랏일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이 나라 공동체를 살리는 길인지 무엇이 실상이자 진실이고 무엇이 영상이자 거짓인지를 탁월하게 분별하고 그것을 통해 나라를 늘 깨어있는 상태로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자신의 본성과 자질에 맞는 일을 가장 잘 해냄으로써 자신의 행복도 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타자들의 이익 즉 나라와 시민들의 행복도 함께 가져다준다. 이처럼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하는 것 즉 동굴로 내려가는 것은 수감자들을 무지와 불행으로부터 구출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자신의 행복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배움을 통해 통치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긴 하지만 좋음의 형상을 관조하는 삶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행복임을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훌륭한 사람들에게 통치는 부득이 감수해야 할 일이자 수고로운 일이기도 하다.(347c) 그래서 플라톤은 이들에게 통치를 맡기려면 벌로서라도 강제해야 한다고 말한다.(347a) 그리고 이때 벌zemia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347c)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철학자에게 주어지는 벌의 성격이 비록 강제이기는 하지만 앞서 살폈듯이 수치를 두려워하는 철학자의 본성상 그들의 자율적 동의를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플라톤이 이 벌이 철학자들로 하여금 수치를 면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역설적으로 그것을 보상misthos의 부류에 넣는 것도 그 때문이다.(347a) 참고로 이 벌은 오늘날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자신보다 저열한 자들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경고하는 플라톤의 금언으로 종종 인용되곤 한다. 그런데 실제 <국가> 텍스트에서 플라톤이 경고하는 대상은 시민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그 인용이 비록 적확하지는 않더라도 플라톤의 현대적 적용 차원에서 민주주의 현실을 사는 오늘날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 아무려나 통치하는 일은 분명 수고로운 일인지라 통치를 맡는 자들에게 보상이 있어야 하듯 철학자에게도 보상이 있어야 한다. 훌륭한 사람들조차 보상을 원하기 마련이다.(347a) 그러므로 나라는 철학자들에게 나랏일을 맡기되 그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통치 의무를 번갈아 가며 수행토록 해야 하고 통치자로서 의무를 마친 후에는 이들을 위한 기념물도 만들고 신과도 같은 분들로 모시고 철학자로서 복된 삶을 하나같이 누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540b-c)

* 그러나 통치자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지더라도 ‘인간사를 떠나 고고하게 철학자로서 좋음의 형상을 관조하는 삶’ 이상의 것은 없다. 관조의 삶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정 철학자들이 원하는 가장 행복한 삶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부득이하게 통치업무를 수행하지만 어떻게든 빨리 그 권력을 내려놓고 싶어 한다. 이처럼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철학자 왕은 나랏일에 가장 유능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원천적으로 권력에 대한 욕구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 플라톤의 철학자들은 신적인 능력이라 할 만큼 정치권력에 초연할 수 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인간의 권력의지와 관련하여 최소한 철학자의 경우 근본 전제부터 달리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통치자에 대한 가히 비현실적이라 할 정도의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그만큼 당대 현실 통치자에 대한 절망이 컸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목도한 당대 현실 국가의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모두 진실보다는 거짓에 매몰된 채 권력욕에 젖어있었고 그에 따라 통치 권력을 잡는 순간부터 나라와 시민들의 이익보다는 오로지 권력의 유지와 자기 이익의 보전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들에게 통치 권력은 그들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실현하는 최대 방편에 불과했던 까닭에 그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은 비일비재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나라와 나라, 계층과 계층이 분열하고 개인과 개인이 반목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통치하려는 열망이 가장 적으면서 동시에 깨어있는 상태의 사람들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이다. 통치자는 결단코 권력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 달리 길이 없다. 그런데 제대로 길러진 진정한 철학자의 경우 그러한 자질과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관조의 삶이 진정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정치권력을 능히 낮춰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권력보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들을 길러내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521b) 그래야 나라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내분 없이’ 다스려질 수 있다. 현실국가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목표로서 그 이상의 것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갖추고 있어야 할 기본 조건이자 원칙이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는 통치 권력자에 대한 믿음에서가 아니라 권력자들이 초래할 위험성에 대한 의심에 기초해 있다. 이점을 고려하여 굳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플라톤의 주장을 사람이 아닌 정치 원리로 바꾸어 말하자면 플라톤 <국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마디로  ‘지성의 정치’, ‘정치의 지성화’라 할 것이다. 플라톤이 오늘날 되살아나 우리나라 시민 대중들이 집단 지성의 힘으로 반지성적 최고 권력자를 끌어내린 – 그것도 두 차례에 걸쳐 – 세계사적인 장면을 목도하였다면 대중들에 대한 철학 교육을 <국가>의 중심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 플라톤은 이곳에서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해야 하는 근거를 다각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미 여러 곳에서 철학자들의 관조의 삶과 통치자로서의 삶이 비록 대비적일지라도 훌륭한 삶으로서 상호 조화를 이루고 일치될 수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제6권에서도 좋음의 형상을 인식한 철학자들은 단순히 실재들에 대한 인식과 관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본받고 삶에 구현하려고 하는 자(500c)이다. 지성이 좋음의 형상을 알고 있는 한, 다른 이들의 나쁨과 고통에 무관심할 수 없다. 만약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좋음의 형상을 모르는 것이다. 좋음의 형상을 인식하는 지성은 그 자체로 부정의에 대한 고도의 분별력과 함께 타자의 고통에 대한 섬세할 정도의 감수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좋음의 형상을 인식한 철학자들은 그들 자신 자신을 형성함은 물론 공적으로도 타자 즉 대중의 덕을 구현하는 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다.(500d) 물론 배의 비유에서 보듯 철학자들이 다중의 광기에 둘러싸여 나랏일은커녕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 그들은 ‘폭풍우 속에서 바람에 밀려오는 먼지와 비를 피해 벽 아래에 대피한’ 것처럼 조용히 지내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비록 작지 않은 성취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철학자에게 최대의 성취가 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496e) 그곳에서 플라톤이 밝히고 있는 ‘철학자가 이룩하는 최대의 성취’란 다름 아니라 ‘철학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정체를 만나 자신도 성장하고 개인적인 것들과 함께 공동의 것들도 보전하는 것’(497a)이다. 요컨대 철학자는 나라에서 통치자로 참여하면서 자신들과 공동체의 보전을 위해서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그곳에서 철학자로서 자신의 개인적 삶도 더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이처럼 철학자가 동굴에 다시 내려가는 것은 자신의 본성과 배움에 부합하는 혼의 행복을 담보하는 일이자 공적으로는 나라를 수호하고 시민들의 이익과 행복을 돌보는 이른바 개인과 나라에서 상호상승의 덕을 실현하는 일이다.

* 철학자로서 관조의 삶과 통치자로서의 삶이 노정하는 갈등적 측면은 어쩌면 플라톤 자기 삶의 여정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곱 번째 편지>(324b-326b)에서 플라톤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이 겪은 그와 같은 갈등들을 직접 토로하고 있다. 물론 플라톤은 종국적으로 좋음의 형상에 대한 깨달음을 토대로 그 두 측면의 조화와 공존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지만, <파이돈>에서는 논의 주제의 특성상 ‘몸의 어리석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해짐으로써’(67a) ‘영혼 자체를 그것 자체로 가지기를 열망하는’(67e) 순수 관조의 삶이 크게 부각되어 있고 그와 달리 <국가>에서는 부정의한 나라를 정의로운 나라로 이끌어가는 실천적 삶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조차 배의 비유에서 선주와 선원들에게 무시 받는 참된 키잡이에 대한 소회를 통해 플라톤 그 자신 얼마나 관조의 삶을 소망하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496d)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은 철학자로서 결코 작은 성취는 아닐지라도 결코 최대의 성취는 아닌 것이다.(497a)

* 끝으로 철학자가 동굴로 내려가는 근거들과 관련한 논의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논의를 시작하며 철학자 자신은 자신의 변화 때문에 행복하다 여기지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는’eleein 장면(516c)이 그것이다. 이것은 동굴로 내려가는 근거에 본성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심정이 그 출발점으로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후에 제기되는 논거들이 대체로 그것을 뒷받침하거나 그로부터 연역되는 성격을 갖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이곳에서 피력하고 있는 수감자에 대한 불쌍함은 그러한 논거들의 원천적인 배경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물론 플라톤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대중(수감자)을 불쌍하게 여기는 표현은 이곳 외에 다른 곳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대중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크게 돋보이는 <국가>(499e-500b)의 내용을 포함하여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을 부성주의(paternalim)적 관점에서 또는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입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실 동굴의 비유가 동굴 속 어둠에 갇혀있는 죄수들을 구출하는 이야기를 골조로 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동굴에 비유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이나 존재론, 정치철학과 도덕론 차원의 문제의식은 물론이고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확장, 음미,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포함하고 있다. 사실 일상의 측은지심(惻隱之心) 너머 삶의 근원적 불쌍함에 대한 깨달음은 도덕이나 정치의 영역을 넘어 일종의 종교적 거룩함의 경지에 다가설 때 비로소 얻어지는 삶의 진실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 삶의 근원적 비참성과 철학자들의 하강 또한 비록 그 배경과 성격은 다르긴 하지만 기독교 은총 신학만이 아니라 불교의 심우도(尋牛圖) 입전수수(入廛垂手)가 그러하듯 구원의 문제가 왜 궁극의 관심사가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불교의 수행자는 세계의 실상으로서 불성을 깨우친 후 고고하게 산사에 머물며 자신의 평안만을 누리려 하지 않고 그러한 깨달음을 토대로  미망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속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대속을 통해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 왔다가 세상 권력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 시민의 무지를 일깨우려 시장과 거리로 나가 거침없이 진리를 설파하다 그 역시 세상 권력자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예수가 종교적 대속자로 부활하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대속자로 오늘날 되살아나 여전히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고 있다.

* 동굴의 비유는 위와 같이 철학자가 동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와 정황을 논하는 것으로 모두 마무리된다. 이에 따라 이어지는 논의는 그런 일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만한 훌륭한 철학자들이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겨날 것인가의 문제로 이행한다. 즉 어떤 이들이 지하세계로부터 신들에게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듯이 이 철학자들을 어떻게 광명으로 인도할 것인가의 문제,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논의가 다음 주제로 다루어진다. -끝-

 

다음 강해 :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527c)

마누엘 데란다·그레이엄 하먼 대담, 김효진 옮김, 『실재론의 부상』(갈무리, 2025) 서평|글: 김진환(단국대학교 외국어대학 조교수) [철학자의 서재]

『실재론의 부상』 서평

 

김진환 (단국대학교 외국어대학 조교수)

 

실재론이 부상했다. 2007년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열린 한 워크숍의 제목으로 사용된 일을 기점으로 ‘사변적 실재론’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관련 서적과 연구의 숫자뿐만 아니라, ‘After Speculative Realism’이라는 상징적인 제목의 저서를 통해 논의의 활발함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최초의 시작’ 이후, 딱 10년 만인 2017년에 해당 저서의 영어판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다시 8년 뒤, 비상 중인 실재론에 관한 이야기가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된다.

이 책의 대담자 중 한 명이자 한국어판 서평을 쓴 ‘객체’인 그레이엄 하먼은 자신이 ‘새로운 철학’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한 이후, 매우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책을 출간하고 있다. 하먼의 이런 모습은 일견 슬라보예 지젝을 닮아 있기도 하다. 학문의 활동 기반은 상이하겠으나, 어디에선가 하먼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지젝의 학문적 생산력은 그의 이론에 대한 왈가왈부와는 별도로 일정 정도의 존중을 받을 만하다. 그래서인지 하먼도 지젝의 ‘뒤를 따라’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상에 앉으면 책 한 권 정도는 뚝딱인 지젝에게 ‘동어반복’이라는 비판이 있듯, 하먼도 유사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은 그토록 하먼이 ‘많은 말’을 함으로써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히 정리하기에 알맞은 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책이 되어준다.

『실재론의 부상』은 ‘그레이엄 하먼’이라는 객체와 ‘마누엘 데란다’라는 객체의 만남에 관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일차적 이점은 하먼과 데란다 각각의 이론 체계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하먼이든 데란다든 둘 중 한 명에게만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분명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며, 하먼과 데란다 각자가 말하려는 바를 보다 명료히 정리할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목차를 보면 쉬이 다가가기 어려워지는 측면도 있다. ‘실재론’, ‘유물론’, ‘반실재론’, ‘존재론’, ‘인지’, ‘시간’, ‘공간’, ‘과학’, ‘경험’ 등 그 자체로 책 한 권은 충분히 나올 주제들이 병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책 한 권에서 다룬다는 것이, 그것도 그다지 길지 않은 책에서 다룬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이 굳이 회의적일 필요는 없다.

이 지점에 이 책이 갖는 보다 근본적인 이점이 있다.

 

하먼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는 것처럼 “지금까지 지성사에서는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서로의 노력을 알지 못한 채로 어떤 유사한 관념을 동시에 품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본문 5쪽). 이는 당연히 자신과 데란다를 말한다. 하먼은 『사변적 실재론 입문』(갈무리, 2023)이라는 저서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는 ‘뛰어난 동료들’로 레비 브라이언트, 이언 보고스트, 티머시 모턴을 언급한 바 있기도 하다(15쪽). 이 이야기는, 하먼이든 데란다든 결국 다른 여러 철학자/이론가들과 학문적 결을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재론의 부상』은 하먼과 데란다의 대담이지만, 결국은 현재와 과거의 대담이다. 현재의 대표는 하먼-데란다-브라이언트-보고스트-모턴(이 연쇄는 계속될 수 있다)으로 이어지는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객체이고, 과거의 대표는 이곳에서 세세히 다룰 수는 없는 (왜냐하면 위에 언급된 인물들이 모두 동일한 과거의 철학자를 참조점 삼아 자신의 학문을 전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철학자-객체들이다.

과거가 우리에게 반드시 의미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럴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꼭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와 역사를 떠나 존재할 수는 없다. 시간을 초월한 인간은 없다. 그렇다면 남는 선택지는 하나, 과거와 유의미한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 대화의 주제는 이제 주체중심적 세계관, 즉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로 구성된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책에 접근한다면, 독자는 하먼에 더 동의하거나 데란다에 더 동의하거나 할 필요성을 잠시 내려둘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먼이 이야기한 것처럼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들이 공유하고 있을 수 있는 오늘날의 사유는 무엇인지에 집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론을 대상화해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것을 ‘잘’ 이해하면 또한 그것을 ‘잘’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독법이 읽지 못하는 것은 대상화할 수 없는 것을 (왜냐하면 모든 이론은 또한 언제나 ‘역사적’ 이론체계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대상화해 읽는 자신이 처한 위치다. 하먼도 데란다도 (사변적) 실재론도 역사의 특정 시점에 등장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수용될 유한한 객체일 뿐이다. 그것을 읽는 독자는,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가.

토마스 렘케(독일의 사회학자)는 사변적 실재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들[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인간의 접근과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는 실재론적 확신을 공유하지만, 현존하는 것에 관한 사변을, 존재를 (인간의) 사유와 지식의 범주들에 한정하지 않은 채로 실행할 것을 권함으로써 전통적인 실재론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한다.”(『사물의 통치』, 갈무리, 2024, 44쪽)

사변적 실재론은 실천적 개입이지 체계적 설명이 아니다. 여기에서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체계를 구성하지 못한다는 뜻이 당연히 아니다. 단지, 세상에 대한 하나의 정답을 제공하는 데 (사변적) 실재론의 의의가 있지 않다는 뜻이다. 『실재론의 부상』은 실재론이 ‘실제로’ 부상했음을 이야기하려는 자기 변론이 아니다. 실재론이 부상했다고 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유일하게 우리가 처한 21세기의 문제의식의 지평 위에 이 책이 위치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서로의 의견에 반대하면서도, 각자 자신의 이론을 방어하면서도 그들이 공통으로 경계하는 것은 과거로의 ‘단순한’ 회귀다. 오늘날은 문제의식의 지평 자체가 달라졌기에 문제에 대한 담론 자체도 바뀌어야 한다. 실재론은 ‘실재론’을 밀어내고 스스로 ‘새로운’ 실재론으로 부상 중이다.

 

☞ 실재론의부상-보도자료-fin

 


플라톤의 <국가> 강해(71)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1)

 

  1.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 동굴의 비유(514a-521b) – (III)

 

* 이제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가 논의의 편의상 구분한 단계들 중 마지막 단계 <C5>가 남았다. <C5> 단계는 동굴 바깥 세계와 태양을 본 사람이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를 그리고 있다.(516c-517a) 그런데 정작 소크라테스가 그리고 있는 비유의 마지막 부분은 당혹스럽게도 동굴 바깥 세계에 이르기까지 온갖 역경을 이겨낸 보람이나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동굴 속으로 내려가면서 맞이하는 고난의 과정을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동굴의 비유는 이렇게 일단 마무리된다. 그러나 비유 자체로는 그렇게 끝나지만 철학자가 맞이하는 난관과 관련한 플라톤 나름의 추가적인 해명이 제법 짧지 않은 분량(517a-521b)으로 덧붙여 있다. 그 해명을 위해 플라톤은 우선 앞서 살핀 난관의 내용(516e-517a)을 다시 끌어들이고 있다.(517d-518b) 그런 연후 그러한 난관들을 극복하는데 좋음의 형상이 갖는 중대성을 언급하고 그런 만큼 그것에 이르기 위한 획기적인 교육 방식에 대한 논의를 수행한 후 마지막으로 그것을 토대로 철학자가 왜 동굴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지에 관한 논거를 제시한다. 이 추가적인 논의 내용을 단락으로 소구분하면 아래와 같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의 기본 방향은 자연스럽게 다음 주제 즉 철학자를 기르기 위한 구체적인 교과들에 관한 논의의 마중물이자 바탕이 된다.

1) 우선 플라톤은 철학자가 동굴 바깥에서 종국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좋음의 형상임을 재차 확인한 후 왜 그것이 그를 동굴로 이끄는 근거가 되고 또 왜 그것이 장차 그가 동굴 속에서 겪게 될 난관들을 이겨내고 그 소임을 완수케 하는 힘의 원천이 되는지를 해명한다.(517a-518b)

2) 그리고 좋음의 형상이 갖는 그러한 중대성 그만큼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 그리고 그것에 상응할 만큼의 태도의 전환을 위해 어떠한 교육적 방책이 필요한지를 논구한다(518c-519c)

3) 끝으로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왜 온갖 난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논구한다.(519c-521c)

 

이에 따라 동굴의 비유에 관한 세 번째 강해는 <C4>를 다룰 때 그랬듯이 <C5> 단계의 비유 내용을 작게 잘라 차례로 살핀 다음 추가적인 해명으로서 위의 1), 2), 3)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 내용을 음미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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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 소크라테스는 태양이야말로 바깥 세계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아래와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n) 그는 처음에 있던 거처οἴκησις와 그곳에서의 지혜σοφία, 그리고 그때의 동료수감자συνδεσμώτης들을 상기하고서, 자신은 자신의 변화μεταβολή 때문에 행복한데εὐδαιμονίζειν 그들은 불쌍하다ἐλεεῖν고 여길 것이다.(516c)

o) 그런데 거기에서는 벽면 위 그림자들의 움직임을 가장 예리하게 보고 가장 잘 기억하며 그것을 그다음에 다가올 것을 가장 잘 예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칭찬ἔπαινος과 명예τιμή의 선물γέρας 등이 주어진다.(516c-d)

p)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와 칭찬, 존경과 권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느니 그는 호메로스 말대로 ‘제 땅도 없는 다른 사람 밑에서 머슴으로 밭일을 하는’ 처지가 되거나 또 다른 어떤 일을 겪더라도πεπονθέναι 차라리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516d-e)

q) 그리하여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동굴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시 동굴로 내려가 예전의 그 자리에 다시 앉는 경우 그는 태양으로부터 갑자기ἐξαίφνης 왔기 때문에 눈ὀφθαλμός이 어둠σκότο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눈이 익숙συνήθεια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516e)

r) 만약 그의 눈이 적응되기 전에 계속 수감 돼 있던 자들과 그 그림자들을 분간하는γνωματεύοντα 시합을 벌인다면διαμιλλᾶσθαι 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위에 올라가더니 눈을 망쳐가지고 돌아왔으며, 올라가는 일은 시도해볼 가치조차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을 풀어주고λύειν 위로 데려가려는ἀνάγειν 사람은 어떻게든 손으로 붙잡아 죽일 수 있다면 죽일 것이다.ἀποκτεινύναι(51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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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가 동료 수감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다시 내려가는 동기가 이곳에서는 그들에 대한 ‘불쌍함’eleein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것은 철학자의 현실 참여의 동기가 일단 그 본성적 자발성에 기초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자가 현실 참여를 원하지 않을 경우 벌로 그것을 강제해야 한다(347c)는 제1권의 주장과 일단 어긋나 보인다. 철학자가 동굴 속으로 돌아가는 이유 내지 철학자의 현실 참여, 정치 참여와 관련한 논의는 동굴의 비유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앞서 제시한 동굴의 비유의 추가적인 논의 부분 3)에서(519c-521c) 다시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 동굴의 비유는 철학자들이 이러한 위험을 이겨내고 수감자들을 동굴 바깥으로 끌어내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동굴 속 상황에 대한 이러한 기술은 철학자의 수감자 구출 과정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힘든 것인지 플라톤 또한 이미 절감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갑작스런 빛과 어둠이 주는 혼란과 그것이 갖는 의미 또한 동굴의 비유의 추가적인 논의 부분 1)에서(517a-518b) 재론되므로 그곳에서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 사람에게 인정 욕구는 본능이라 할 정도로 가장 강력한 욕구 중 하나이다. 특히 동굴 속 사람들 즉 세속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명예, 존경과 권세에 대한 욕구는 그 인정 욕구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그들에게는 동굴 속 그림자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인 한, 인정 욕구의 대상과 기준 또한 그림자들로부터 주어진다. 그림자들에 대한 경험이 크고 예리할수록 그곳 세계의 일에 밝고 그만큼 더 큰 명예와 칭찬을 누린다. 이들에게 바깥 세계에 대한 진실은 오히려 인정 욕구를 방해하는 거짓으로 여겨질 뿐이다. 플라톤이 동굴 속 사람들로 그리고 있는 대상이 당대 아테네 지식인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아테네 대중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아주 예민하여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험이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어 그러한 경험에서 그들의 영악함을 능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기는 길은 그들보다 많은 경험을 쌓는 것에 있지 않고 그 경험들이 갖는 한계와 무지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도 철학자는 이미 그들이 갖고 있는 경험이 그들의 확신과 달리 거짓임을 이미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들의 무지를 폭로하고 시민들은 물론 플라톤과 같은 젊은이들을 일깨우는데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이었다. 플라톤이 비유의 마지막 문장을 쓰면서 스승 소크라테스를 떠올렸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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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비유에 덧붙여진 추가적인 해명>(517a-521b)

1) 철학자가 동굴 바깥에서 종국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좋음의 형상임을 재차 확인한 후 왜 그것이 그를 동굴로 이끄는 근거가 되고 또 왜 그것이 장차 그가 동굴 속에서 겪게 될 난관들을 이겨내고 그 소임을 완수케 하는 힘의 원천이 되는지를 해명한다.(517a-518b)

[517a-518b]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동굴의 비유를 마친 후에 이제 이 비유εἰκών 전체를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에 적용해야προσαπτέον 한다고 말한다. 즉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δι᾽ ὄψεως φαινομένην ἕδραν ‘감옥의 거처에’τῇ τοῦ δεσμωτηρίου οἰκήσει 대응시키고ἀφομοιοῦντα, ‘감옥에 있는 불빛을’τὸ δὲ τοῦ πυρὸς ἐν αὐτῇ φῶς ‘태양의 힘에’τῇ τοῦ ἡλίου δυνάμει 대응시켜야 한다. 그리고 ‘위로ἄνω 올라가는 것’ἀνάβασις과 ‘위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는 것’θέαν τῶν ἄνω을 영혼이 ‘가지적인 영역’νοητὸν τόπον으로 등정ἄνοδος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τίθημι(517b)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는 경우 내가 추측(기대)하는 바ἐλπίς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추측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알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가장 마지막에 겨우 볼 수 있는 것’ἐν τῷ γνωστῷ τελευταία 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 καὶ μόγις ὁρᾶσθαι으로서 ‘좋음의 형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517b)

* 좋음의 형상을 보고 나면, ‘모든 경우에 그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의 원인’πᾶσι πάντων αὕτη ὀρθῶν τε καὶ καλῶν αἰτία이며, 가시적 영역에서 빛과 빛의 주인κύριος을 낳고τεκοῦσα 가지적 영역에서는 자신이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ἀλήθειαν καὶ νοῦν 제공하며, 또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ἢ ἰδίᾳ ἢ δημοσίᾳ. ‘지각 있게 행동할’ἐμφρόνως πράξειν 사람은 그것을 보아야만 한다.ἰδεῖν’(517c)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517b-c)

* 그리고 좋음의 형상에 이른 자들은 인간사τὰ τῶν ἀνθρώπων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고 그들의 영혼이 그 위에서 지내기διατρίβειν를 항상 열망한다.ἐπείγονται(517c) 그런데 누군가 신적인 것들을 관조θεωρία하다가 인간적인 나쁜 것들 옆으로 와서 주위의 어둠에 충분히 익숙해지기 전 눈이 아직 침침한ἀμβλυώττων 동안에, 정의의 그림자τοῦ δικαίου σκιά들이나 그 그림자들을 생기게 한 조각상ἄγαλμα들과 관련해 법정δικαστήριον이나 다른 어떤 곳에서 경합을 벌이도록ἀγωνίζεσθαι 강제되는 경우, 즉 정의 자체를 αὐ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본ἰδόντων 적이 없는 자들이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고ὑπολαμβάνεται 있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도록διαμιλλᾶσθαι 강제되는 경우, 그는 볼품없고 아주 우스워 보인다.(518d,e)

* 그런데 지각νόος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 가지 경우에서 비롯되는 두 가지의 눈의 혼란ἐπιτάραξις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빛φάος에서부터 어둠σκότος으로 옮겨온 경우와 어둠에서부터 빛으로 옮겨온 경우인데 그런 사람은 영혼과 관련해서도 그런 동일한 일들이 발생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영혼이 혼란에 빠져 뭔가를 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보면, 무턱대고 웃지 않고 그 영혼이 더 밝은φανός 삶βίος으로부터 와서 익숙하지 않아 어두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더 큰 무지ἀηθεία로부터 더 밝은 곳으로 와서 더 밝은 빛 때문에 눈부셔하는μαρμαρυγῆς 것인지를 살필 것이다.(518a) 그렇게 해서 앞의 경우는 그 영혼의 상태πάθος와 삶을 행복하다고εὐδαιμονίσειεν 여길 것이며, 뒤의 경우는 불쌍하다ἐλεήσειεν고 여길 것이다. 설사 뒤의 경우를 두고 웃으려 한다고 하더라도, 이때의 웃음은 위에 있는 빛으로부터 내려온 경우에 대한 웃음보다는 비웃음καταγέλαστος을 덜 살 만한 웃음일 것이다.(51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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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7b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논란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동굴의 비유를 앞서의 비유들에 적용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감옥의 거처’에 대응하는 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말하는 ‘가시적 영역’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감옥의 불빛’과 ‘태양의 힘’의 경우 동굴의 비유와 태양의 비유간의 대응이면서 가시계와 가지계의 대조적 대응인데 비해 ‘감옥의 거처’와 ‘가시적 영역’의 경우는 둘 다 가시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응적 대응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앞의 경우도 대조적 대응으로 해석하여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바깥 세계’ 즉 가지적 영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둘 다 동굴의 비유에만 국한된 해석이라는 점에서 동굴의 비유를 다른 비유에 적용해서 언급하겠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에서 ‘곳’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hedra가 일반적인 ‘곳’의 의미도 있지만 ‘앉는 자리’의 의미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 결박된 채 앉아 있던 ‘감옥의 거처’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둘 다 같은 동굴의 비유이면서 동일 장소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apomoionta 즉 ‘대응이나 비교 또는 닮은’ 것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어떤 해석이건 동굴의 비유와 다른 비유들이 갖는 상호 대응적 연관성을 크게 해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비유를 이해하는데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517b ‘알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가장 마지막에 겨우 볼 수 있는 것’이 ‘좋음의 형상’이다. : 좋음의 형상은 <C4> 단계에서 태양이라는 표현으로만 언급되고 있지만 태양의 비유에서 보듯이 그 태양이 ‘좋음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508e-509b) 이 점을 고려하면 ‘동굴 바깥에 나온 사람이 태양을 그 자체로 본다.’(516b)는 표현은 이미 <C4> 단계에서도 ‘좋음의 형상’이 언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형상을 ‘모든 경우에 그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의 원인’이자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 또한 태양의 비유에서 그것을 ‘앎과 진리의 원인’(508e)이자 ‘지성의 원천’(508d)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그 점에서 보면 좋음의 형상에 관한 이곳의 언급은 추가적인 정보 없이 앞서의 언급을 반복하고 재확인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좋음의 형상’을 다시 끌어들인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좋음의 형상이 기본적으로 철학자가 동굴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 원천적 근거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것은 그가 동굴로 내려갈 때 직면하는 온갖 역경에 맞서 싸우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자 푯대가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지각 있게 행동할 사람은 좋음의 형상을 보아야한다’(517c)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사실 좋음의 형상에 이른 자들은 인간사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고 신적인 것을 관조하는 데만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동굴에 다시 내려갈 경우 그 만큼 더 앞이 캄캄해 보여 어둠에 익숙한 자들이 보는 것을 보지도 못할뿐더러 동굴 속 벽면 그림자들에 대한 경험 또한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이에 따라 동굴 바깥 정의 자체를 본적도 없이 오로지 동굴 속 정의의 그림자만을 경험하고 그것만을 정의의 기준으로 여기는 자들과 다툴 경우 당장은 그들을 이길 재간이 없고 설사 정의 자체를 그들에게 들려준 준다고 해도 애초부터 그것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거짓말로 들려 오히려 철학자들이 거짓을 일삼는 자로 웃음거리가 되기 일 쑤이다. 그럼에도 동굴 속에서도 잠간의 침침한 상태를 이겨내고 어둠에 적응한 뒤 진정으로 끝내 그들을 압도할 수 있음은 오히려 형상에 대한 앎을 통해 그들이 내세우는 경험이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만 아는 자는 그것의 원인이자 실체로서 실물을 알고 다시 그림자를 보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리고 결국에 가면 이런 사람이 그림자들도 월등하게 더 잘 본다.(520c) 실로 그림자의 세계를 넘어 그것과 전혀 차원이 다른 지고의 형상적 앎으로서 좋음의 형상을 깨우쳤을 때에 비로소 그 앎의 진실성이 가져다주는 자부심의 크기만큼 그림자에 불과한 세속적 권세와 탐욕에 찰나의 눈길조차 주지 않는 무심함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굳건함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관적 진실에 대한 불퇴전의 확신이 온 영혼을 휘감고 있을 때에만 그림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일상의 분노를 넘어서 비로소 불쌍함과 연민의 마음이 차오르고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의지 또한 샘솟듯 터져 나온다. 실로 좋음의 형상은 지각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유일한 토대인 것이다. 

* 518a ‘두 가지 눈의 혼란’ : 눈이 혼란을 겪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갑자기 빛에서부터 어둠으로 옮겨온 경우와 어둠에서부터 빛으로 옮겨온 경우가 그것이다. 그 때 눈이 부셔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은 보통 사람들에게 둘 다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다.  동굴의 비유가 보여주듯 영혼과 관련해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특히 자기 성향까지 거슬러가며 밝은 곳을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서 혼란을 겪는 영혼의 모습은 사람들이 보기에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면서 겪는 영혼의 모습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자 더 많은 비웃음을 살 일이다. 그러나 이 두 영혼의 상태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다.  동굴로 내려가는 영혼은 이미 밝은 삶의 아름다움과 진리를 깨달은 상태의 행복eudaimonizein한 영혼이고 그에 비해 동굴에서 올라오는 영혼은 아직은 여전히 어둠 속 동굴 속에 있다는 점에서 불쌍eleein한 영혼이다.(516a) 지각있는 사람들이라면 두 경우를 살피면서 그 점을 알아차린다.(518b)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동굴을 들어갈 때건 나올 때건 영혼이 겪는 혼란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여기거나 비웃음을 던지지만 지각 있는 사람들은 그 두 경우들을 살펴 구분하고 무턱대고 웃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어떤 경우건 결코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다. 설사 만약 그들을 보고 비웃는 경우가 있다면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동굴로 내려가는 이유가 어처구니없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동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보다 다시 동굴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아무려나 보통 사람들은 물론 어떤 경우에는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철학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놀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음의 형상에서 나오는 자부심 즉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흔들림없이 늘 행복하다.

* 517d ‘정의의 그림자들이나 그 그림자들을 생기게 한 조각상’ : 정의의 그림자들을 생기게 하는 조각상들(agalmata)이 정의의 위상과 관련하여 어떤 지위를 갖고 있는지가 논란거리이다. 다만 이것들은 결박된 사람들이 눈과 몸을 돌린 후 그리고 바깥에 나가기 전에 즉 정의 자체에 대한 앎을 향한 중간 단계에서 보게 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정의 자체의 모상으로서 ’법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피스트> 234c, <정치가> 303c 참고(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 517e ‘논쟁을 벌이도록 강제되는 경우’ : 이 부분 역시 소크라테스가 법률의 해석을 둘러싸고 재판관들과 논쟁을 벌이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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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고 좋음의 형상이 갖는 그러한 중대성 그 만큼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 그리고 그것에 상응할 만큼의 태도의 전환을 위해 어떠한 교육적 방책이 필요한지를 논구한다(518c-519c)

 

[518c-519c]

* 이것이 진실이라면 교육παιδεία이란 어떤 이들이 공언하는 것처럼 ‘앎ἐπιστήμη이 없는 경우에 마치 보지 못하는 눈에 시각ὄψις을 넣어주듯이 자신들이 앎을 넣어주는 것ἐντιθέντες’이 아니라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σὺν ὅλῳ τῷ σώματι στρέφειν 않고서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 쪽으로 눈을 돌릴 수 없듯이, 각자의 영혼 안에 있는 앎을 위한 능력δύναμις과 각자가 앎을 얻는 데 사용하는 기관ὄργανον 역시 ‘영혼 전체와 함께’σὺν ὅλῃ τῇ ψυχῇ 전환περιακτέον시키는 것이다. 즉 ‘있는 것’τὸ ὂν과 ‘있는 것에서 가장 밝은 것’τοῦ ὄντος τὸ φανότατον을 구경하고서도θεωμένη 견딜 수 있게 될 때까지(518c) 그 능력과 기관을 영혼 전체와 함께 생성되는 것으로부터ἐκ τοῦ γιγνομένου 전환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가장 밝은 것은 ‘좋음’이다.(518b-d)

* 이것은 전환περιαγωγή을 위한 기술τέχνη 즉 ‘어떤 방식τρόπος으로 하면 가장 쉽고 가장 효율적ἀνύσιμος으로 그 기관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과 연관된 기술’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 기술은 그 기관에 시각을 넣어주는 기술이 아니라, 그 기관에게 바라보아야βλέποντι 할 쪽을 바라보도록 만들어주는 기술이다.(518d)

* 그런데 영혼의 덕ἀρετή 중 다른 것들은 신체의 탁월함ἀρετή처럼 습관ἔθος과 훈련ἄσκησις을 통해 형성되지만 똑똑함το φρονῆσαι의 덕은 ‘더 신적인’θειοτέρου 것에 속하는 것으로 그 힘을 결코 잃는 법이 없고, 전환이 이루어지는 방향에 따라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ὠφέλιμος 되기도 하고 또한 쓸모없고 해롭게βλαβερός 되기도 한다.(518e) 못됐지만πονηρός 지혜롭다σοφός고 하는 사람들의 허접한 영혼조차 자신이 향해 있는 쪽의 것들을 예리하게ὀξέως 분간하는데διορᾷ 매우 뛰어나다. 그들의 영혼이 악덕κακία에 봉사하도록 강제될 경우 더 예리하게 보며 그럴수록 그만큼 더 많은 나쁜 것들을 만들어낸다.(519a)

* 하지만 그들에게서 그러한 본성을 가진 이 부분을 아주 어려서부터 다듬어 생성γένεσις과 동족인συγγενής 것들을 쳐냈더라면, 그러니까 음식물이나 그러한 것들에 대한 즐거움ἡδονή과 식탐λιχνεία에 꽉 들러붙어서 납추처럼 영혼의 시선ὄψις을 아래로 돌려버리는 것들로부터 이 부분을 해방시켜 참된 것들τὰ ἀληθῆ을 향해 방향을 돌리게 했더라면, 동일한 사람들의 동일한 이 부분이 저 참된 것들을 또 가장 예리하게 보았을 것이다.(519b)

* 그렇게 보면 교육받지 못하고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ἄπειρος 자들도, 또 죽을 때까지 교육 속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허용된 자들도, 나라를 다스리기에 충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럴 법하고 필연적이다. 앞사람들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그들이 행할 모든 일을 할 때 반드시 가늠해보아야 할 하나의 표적을 삶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뒷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이미 복 받은 자들의 섬들μακάρων νήσος로 이주했다고 생각해서 그런 일을 자발적으로 행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519c)

* 그렇다면 나라수립자οἰκιστής로서 우리가 할 일은 앞에서 가장 큰 배울 거리라고 이야기한 것에 도달하도록 ‘가장 훌륭한 자연적 성향들을’ τάς τε βελτίστας φύσεις 강제하는 것, 즉 저 오르막길을 오르고 ‘좋음을 보도록’ἰδεῖν τὸ ἀγαθὸν 강제하는ἀναγκάσαι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가서 충분히 보고 나면 지금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그런 것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즉 “거기에 머물며, 저 수감자들 곁으로 다시 내려가기καταβαίνειν를 원하지도 않고 변변치 않은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그들과 수고πόνος와 명예τιμή를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μηδὲ μετέχειν은 허용되어선 안 된다.(519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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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b ‘각자의 영혼 안에 있는 앎을 위한 능력과 각자가 앎을 얻는 데 사용하는 기관’ : 이 기관은 몸에 눈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상응하여 영혼에 자리하고 있는 ‘지성’nous을 가리킨다.

* 518d ‘어떤 방식trpos으로 하면 가장 쉽고 가장 효율적anysimos으로 그 기관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과 연관된 기술’ : 좋음의 형상에 대한 앎에 이르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어려운 그 만큼 학생들이 그것을 최대한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효율적인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최고의 교육 방식은 어려운 것을 쉽게 가르치는 일이다.

* 좋음의 형상은 지고의 참된 존재로서 앎과 지성의 근거이자 철학자를 동굴로 이끌고 또 그곳에서 온전히 소임을 완수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좋음의 형상에 대한 앎이 철학자로 하여금 세속적 삶에 대한 환멸을 넘어서 비로소 불쌍함과 연민의 마음을 갖게 하고 오로지 그것만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실행을 담보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음의 형상에 이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 않고서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 쪽으로 눈을 돌릴 수 없듯이, 각자의 영혼 안에 있는 앎을 위한 능력과 각자가 앎을 얻는 데 사용하는 기관, 즉 지성을 ‘영혼 전체와 함께’ 전환periagōgē시키는 것이다. 온갖 쾌락과 생성하는 것들에 꽉 들러붙어서 납추처럼 영혼의 시선을 아래로 돌려버리는 것들로부터 지성을 해방시켜 오로지 참된 것들을 향하도록 방향을 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앎을 넣어주는’ 기존의 교육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형상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방책은 ‘가장 쉽고 가장 효율적으로 그 기관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과 연관된 기술technē’이어야 한다. 이러한 기술이 무엇인가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좋음의 형상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교과들이 다음 주제로 다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전환을 위한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책이자 기술이란 다름 아닌 그 교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영혼 전체의 전환을 위한 그러한 기술들은 장차 살피게 되겠지만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을 거쳐 종국적으로 변증술로 완성된다. 요컨대 철학 교육의 요체는 영혼의 전환에 있는 것이다.(521c) 이 점에서 이 부분은 다음 주제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그 중요성과 관련한 서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 518b ‘어떤 이들이 공언하는 것처럼’, 518c ‘앎을 넣어주는 것’: 여기서 어떤 이들이란 소피스트들과 이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프로타고라스> 319a, <고르기아스> 447c 참고) 플라톤이 여기서 공격하는 교육에 대한 지극히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견해는 좁게는 유모들의 교육방식 즉 ‘암기 위주의 주입식’을 포함하여 넓게는 일방향적 연설 기술에 매달리는 당대 소피스트들과 이소크라테스의 교육 방식을 암시한다.(345b 참고). <향연> 175d에서도 이러한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교육 방식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곳에서 아가톤은 ‘소크라테스와 접촉함으로 해서 지혜를 누릴 수 있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마치 ‘잔속의 물이 털실을 타고 더 가득한 잔에서부터 더 빈 잔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J. Adam. 해당 노트 참고) 소피스트들 역시 ‘앎을 영혼에 넣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플라톤에 따르면 앎의 힘 또는 능력으로서 지성nous은 우리 안에 있는 모종의 신적인 것으로서 이미 영혼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른바 상기설과 산파술은 그러한 바탕위에 서 있다.(<메논> 81a, <파이돈> 72e-76d). 플라톤은 교육이 눈먼 눈에 시각을 넣는 것이라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영혼 안에는 몸에 이미 눈이 있듯이 지성을 갖추고 있고 그것을 토대로 스스로 앎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은 영혼 속에 존재하지만 생성되는 것에서 비롯되는 힘에 가려지고 약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늘 직면해 있다. 이를테면 ‘똑똑함’to phronēsai의 덕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모든 덕들이 영혼 속 그 지성을 굳건하게 하는데 하나같이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교육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지성을 약화시키고 방해하는 힘이 된다.

* 518e ‘똑똑함’to phronēsai의 덕 : 이 말은 ‘지혜 또는 현명함’phronēsis와 어원을 공유하고 있다. 플라톤은 phronēsis를 4권 428b, 433b 이후 6권, 7권에서 ‘지성적 현명함’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최소한 이곳에서만은 이 말을 to phronēsai(phroneō 동사의 아오리스트 부정형에 관사를 붙인 것)로 바꿔 표현하는 방식으로 phronēsis, sophia와 다소 의미가 다른, 즉 ‘현실적인 영리함’ 내지 ‘영악함’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 지성을 생성되는 것으로부터 지켜 내고 흐트러진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영혼의 덕들 가운데 대부분은 신체의 덕처럼 습관과 훈련을 통해 형성되지만 앞서 말한 ‘똑똑함’의 덕은 아무나 갖추고 있지 않고 또 훈련을 통해 가질 수도 없는 이른바 타고난 자질로서 갖고 있는 선천적인 덕이다. 그것은 뛰어난 영악함으로 자신을 향해 있는 것들을 예리하게 분간할 줄 하는 능력이자 결코 그 힘을 잃는 법도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본성적 탁월함은 태어나면서부터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아 그들의 영혼이 악덕에 봉사하도록 강제될 경우 그 만큼 더 많은 나쁜 것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이 똑똑함의 덕을 갖춘 자들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영혼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지 않고 참된 것들 향하도록 보다 각별한 수준의 교육이 필요하다.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똑똑함을 거론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이 다름 아닌 알키비아데스(Alkibiades) 같은 자들일 것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알키비아데스만큼 본성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드물지만 또 알키비아데스만큼 그 명민함과 똑똑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귀영화는 물론 온갖 악덕을 저지른 경우도 드물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도 수많은 알키비아데스들이 그것도 제도 교육을 통해 공공연하게 선망의 대상으로 길러진다.

* 518d 신체의 덕 : 영혼의 덕에 관한 이곳의 언급이 신체의 덕들을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은 다만 영혼의 덕 가운데 똑똑함의 덕이 갖는 이중적 성격을 드러내 그것에 대한 각별한 교육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선천적이고 본성적인 성향일지라도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교육이 어떠한 가에 따라 그 성향이 초래하는 결과가 얼마나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자연적 성향이든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의 좋음은커녕 악덕이 발현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설사 영혼의 좋은 자연적 성향일지라도 그것의 탁월함 특히 윤리적 덕과 관련한 탁월함은 종국적으로는 형상적 앎을 통해 완성되지만 기본적으로는 끊임없는 교육과 훈련을 통한 습관 형성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03a 14-17 비교 참고) 그러므로 특히 장차 나라를 다스려갈 사람들을 길러 내기 위해서는 앞에서 가장 큰 배울 거리라고 이야기한 것, 즉 좋음의 형상에 도달하도록 ‘가장 훌륭한 자연적 성향들을’ 방치하지 말고 강제하는 것, 즉 저 오르막길을 오르고 ‘좋음을 보도록’ 끊임없이 교육하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 신적 요소라는 말 자체가 불멸성과 보편성을 함축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지성을 정점으로 하는 플라톤의 교육론은 이미 어느 한 시대가 아니라 영원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생에서 뿐만 아니라 다시 태어나서 그것을 접할 때조차도 그들의 삶에 도움을 줄 정도의 것이어야 하고(498d)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것은 ‘누가 자신으로 하여금 유익한 삶과 무익한 삶을 구별하며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들 중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고 또한 그럴 줄 알도록 해 줄 것인지를 어떻게든 배우고 찾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학문’이어야 한다.(618c) 미켈란젤로는 모든 대리석 덩어리에 상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조각가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장애가 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잘라낸다. 플라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앎의 능력으로서 영혼 본래의 훌륭함과 순수함이 온전하게 드러날 때까지 영혼을 부자연스럽게 가리고 있는 것들을 잘라내고 거둬내는 것이 교육의 본령이자 선생이 해야 할 일로 여겼다. 사실 플라톤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 중 그의 교육이론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아마도 고대든 현대든 모든 교육 문헌에서 <국가>의 이 부분만큼 교육의 목적과 범위에 대한 광범위하고 심오한 견해를 취하거나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불굴의 용기와 꺼지지 않는 희망을 불어넣기에 잘 어울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J. Adam 해당 부분 노트, 부록 II 참조) -끝-

 

다음 강해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동굴의 비유(514a-521b) (IV) – 마지막

3)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왜 온갖 난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논의(519c-521c)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5년 2월 제16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2020)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발제:인현정│2024.02.21.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 제16차 이규성 철학(사상) 연구 모임

-주제: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발제: 인현정 선생님

-일시: 2025년 2월 21일(금) 오후 4시

-장소: 한철연 세미나실 & 줌회의실 (온오프병행)

이번 발제는 중국현대철학사론 3장에 관한 것인데, 종백화라는 철학자는 생소합니다. 종백화는 1920년대 유럽 유학을 하고 돌아와 해방 이후 북경대 미학 교수를 지냈군요. 사회주의 시대 교수였으니,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미학을 주로 다루지 않았나 했는데, 이규성 선생이 정리한 내용을 보니, 그와는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이규성 선생은 종백화의 미학 사상을 융회와 공령의 미학이라 규정했는데, 융회는 아마도 베르그송 철학적 맥락 같고 공령 즉 비움이란 동양의 미학적 정신에서 유래한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 시대 중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니 놀랍습니다.

종백화가 지은 책은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제목에는 칸트 미학이나 괴테 미학이 다루어져 있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발전되는 미학 사상에도 종백화가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백화는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학 사상가인데 이런 종백화의 미학사상울 이규성 선생의 사상이 발굴했다는 것 자체가 이규성 선생의 사상적 안목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합니다.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jmviN52PoR8?si=HbVR_DtoRB8zpBmX

플라톤의 <국가> 강해(7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0)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 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I)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f) ‘결박된 수감자들 중 누군가가 풀려나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갑자기 강제된다.’ 이것은 일상의 타성적 앎과 삶에 회의를 느끼고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끌려 새로운 배움의 길에 들어서는 상황을 보여준다. 교육의 의미와 목표 그리고 그것의 당위적 성격을 행위를 빌려 표현한 것으로 이것만큼 근사한 말도 없어 보인다. 교육은 ‘고개를 돌려 걸어가 빛을 보도록’ 즉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반성적 태도의 전환을 요구하고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강제를 기꺼이 감내한다.

g) 그리고 새로운 배움의 과정은 자신이 보고 알았던 것들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힘들고 고통스럽다. 실제로 자신을 이끌어 주는 누군가가 지금 보는 것이 더 참된 것에 가깝다고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다그쳐 묻고 대답을 요구한다면 당장에는 전에 본 것이 더 참된 것으로 여겨져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h) 게다가 지금 모형들을 비추는 불빛 자체까지 보도록 강제될 경우, 그는 눈이 아픈 데에다 역광으로 되레 지금 보고 있는 것들조차 보이지 않아, 전에 보았던 것들이 더 명확한 것이라는 생각에 급기야 왔던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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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답법적 논박술 이른바 엘렝코스elenchos는 기존에 일상적 상식으로 갖고 있던 생각이나 판단이 갖는 오류를 집요할 정도의 문답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교육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곳곳에는 이러한 엘렝코스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난문aporia에 빠지거나 오류로 판명될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자기를 기만했다고 화를 내며 이전의 생각으로 돌아가 막무가내 고집을 피우거나 아예 대화 자체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국가> 제1권만 해도 문답의 첫 상대로 나오는 케팔로스 노인은 자신의 주장이 궁지에 몰리자 아들 폴레마르코스에게 대화를 맡기고 제사를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있고 또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철저하게 논파되었음에도 되레 흥분하며 처음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고집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이들과 달리 폴레마르코스처럼 그리고 이곳 풀려난 수감자처럼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논박을 감내하면서 새로운 배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고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처럼 그리고 <테아이테토스>의 테아이테토스처럼 소크라테스의 동반자가 되어 소크라테스의 의도에 따라 문답에 충실하게 부응하면서 진실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 비유에서 나오는 장면은 아니지만, 수감 상태에서 풀려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누군가에 이끌려 동굴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설 만큼 본성상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순수함의 정도와 크기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이 성향을 기반으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래서 어떤 누군가는 오름길이 너무 힘들어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만 해도 잘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새로운 배움의 길을 포기하거나 옛날의 타성이 몸에 배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모형들을 움직여가며 수감자들의 생각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정하는 사람들이 갖은 권력이 부러워 그들에 영합하여 그들의 일부가 되어 버릴 수도 있고 그들의 지시와 요구에 따라 모형들을 연구하고 제작하는 일을 떠맡기도 할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적 논박술은 논박을 통해 어떤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지 자체를 위축시키거나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에 갖고 있는 생각이나 판단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힘들지만 새롭게 진실로 다가가는 계기와 동기를 마련해 주기 위한 이른바 산파술maieutikē적 성격을 갖고 있다.(<테아이테토스> 148e-151d, 161a) 이른바 철학의 출발로서 ‘놀람’thaumazein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후 새롭게 다가온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그로부터 촉발된 앎을 향한 호기심 어린 기대와 열망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과 기대에 부응하듯 자기반성을 통해 C2상태에 들어선 그 누군가는 점차 불빛에도 익숙해지고 본성에 맞추어 배움도 하나둘 잘 받아들이게 되면서 전에 보았던 것들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의 그림자들에 불과하고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야말로 그것들의 원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앎은 본질적으로 동굴 속 불빛 아래에서 깨달은 앎인 한, 아직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은 벽면에 비춘 그림자의 원본들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굴 바깥에 실재하는 실물들의 모형들 즉 그것들의 모상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굴 속 불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이른바 감각적 가시적 의견에 불과하고 동굴 바깥 태양의 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실재적 가지적 앎을 모사한 정도의 낮은 단계의 앎이다. 이에 따라 동굴 속 불빛 아래 눈부심을 통한 모상에서 원본에로의 상승은 동굴 바깥 세계 태양 빛 아래 실물들과 인간들을 접하면서 다시 이루어지고 종국적으로 빛의 원천인 태양을 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 앎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대상이자 목표에 이르게 된다.

* 어떤 사람은 동굴 속 즉 믿음의 세계에서도 앎을 향한 깨달음 내지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전환이 가능한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을 어둠에서 불빛 쪽으로 돌리는 태도의 전환periagōgē은 나중 소크라테스가 밝히고 있듯(517c) 눈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실로 어렵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러한 정도의 전환은 당연히 동굴 바깥 즉 가지적 앎의 단계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태도의 전환은 한발 한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작고도 수많은 지적 결단과 선택들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심과 선택들 또한 전에 갖고 있었던 것들을 뒤로하고 새롭게 전진하는 것인 한, 그 또한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일종의 태도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지적인 앎을 향한 태도의 전환은 이처럼 가시적 세계에서 믿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 즉 동굴 속에서 고개를 돌려 빛을 보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태도의 전환이란 현명함phronein의 덕까지 포함하여 올바른 방향을 향한 영혼의 덕aretē 전체의 전환을 의미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혼의 덕이란  신체의 덕이 그러하듯이 이런 작은 규모의 태도의 전환들이 쌓이고 쌓여 몸에 밸 정도로 습관ethos화되고 단련askēsis이 된 상태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518a-519b) 그림자에서 모형으로, 모형에서 실물의 그림자로, 실물의 그림자에서 실물로, 실물에서 진정한 실재로의 상승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진정한 혁명이나 해탈이 그러하듯이 정의 자체 진실 자체를 향한 끊임없는 자기 다짐과 분투 속에서  그것을 딛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 그리고 영혼의 오름길에 들어선 이들의 지적 결단과 선택들은 본성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굴 바깥을 보고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보이는 그 누군가의 이끌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비유 상 누군가를 이끄는 그 사람이 동굴로 돌아온 철학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동굴 속에서도 이미 지성nous이 들어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철학 교육이 믿음의 한계를 들여다보고 그 믿음을 넘어서게 하는 지성의 훈련이라면 이렇게 철학의 인도를 받는 그 누군가의 영혼은 그 훈련을 통해 ‘믿음’을 넘어 ‘사고’를 거쳐 ‘형상적 앎’에 이를 정도로 점차 순수함이 더해지고 그만큼 더 강력해질 수 있다. 그리고 설사 그가 아직 동굴 속에 있을지라도 최소한 등정anodos을 감행하고 있는 한, 본성에 맞게 이미 그는 그 지성의 인도를 감내하고 수용하는 앎을 갖추고 있다. 굳이 이 앎의 단계를 앞서 살핀 이상 국가에서 찾는다면 나라의 구성원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앎 즉 철학자왕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앎으로서 절제sophrosynē의 덕aretē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바탕이 없으면 동굴로부터의 탈출 즉 철학의 지배 자체가 불가능하다. 철학 교육은 그 길고 지난한 교육과정을 통해 소수의 철학자 왕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고유하고도 다양한 본성을 일깨우고 그에 맞는 그들의 탁월함aretē 또한 길러낸다. 이상 국가는 그와 같은 다양한 탁월함의 공존과 조화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C3> 누군가에 이끌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동굴 바깥에 도달한 상태

 

i) 동굴 속 불빛에 점차 익숙해진 그 누군가는 그것에 비친 모형들도 충분히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또 그것들이 옛날 자기가 본 벽면 그림자들의 원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를 이끌고 가는 사람은 그 모형들 역시 동굴 바깥 실재하는 것들의 모사에 불과한 것임을 깨우쳐 주면서 다시 그를 부추겨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로 그를 인도한다. 지금까지의 길도 쉽지 않은 오름길이지만 ‘거칠고trachys 가파른anantēs’이란 표현이 여기서만 쓰일 정도로 C3 단계의 오름길은 동굴 바깥에 이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동굴 속 오름길 중 가장 험난하고 가파른 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동굴은 벽면에서 입구까지 똑같은 경사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불빛을 지나면서 위로 꺾여 경사의 정도가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오름길에는 C2 단계의 불빛은 거의 보이지 않고 동굴 입구에 이르기까지 다만 동굴 밖 멀리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만 드리워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오르는 사람은 불안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지만 그를 이끄는 사람은 가파른 길을 다 오를 때까지 그만큼 더 그를 강압함에 따라 그는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j) 그리고 이곳에서는 앞에서 본 모형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질 않아 뭔가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동굴 입구까지 도달했음에도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강렬한 빛에 눈이 부셔 지금까지 기대했던 참된 것은 차치하고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 또다시 놀람과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나 누군가 여전히 그를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차츰 빛에 익숙해지면서 처음으로 동굴 바깥 실물들의 그림자들을 보고 다음으로 물 같은 것에 비친 인간들의 영상들을 접하면서 비로소 동굴 바깥 실재 세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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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3의 상태를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면 추론적 사고 단계에 상응한다. 그리고 C3 단계의 오름길이 앞의 길에 비해 거칠고 가파른 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후의 단계가 이전 단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전의 단계는 감각적 경험이 중시되는 가시적 세계이고 이후의 단계는 감각이 탈각되고 추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물 공간이 아니라 논리적 공간에서 추론적 사고가 중심이 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에서 추론적 사고 단계는 가지적인 세계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음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511d) 이 점을 고려하면 C3의 동굴 속 위치는 끝에 가서 실물의 그림자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굴 바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적으로 동굴 속 불빛 즉 감각의 세계를 떠나 입구에 이르기까지 가파르고 험난한 추론적 사고의 길 즉 오름길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C3의 위치는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중간 즉 경계인 동굴 입구 위아래로 걸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여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면 선분의 비유에서는 추론적 사고가 상대적으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과 달리 이곳 C3 단계는 가장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것 역시 비유 간 취지와 성격이 각기 다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이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C3 단계의 철학적 특징보다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는 막바지 어려움이 강조되고 철학적으로는 동굴 바깥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비추는 실재 세계와 그로부터 다시 어둠 속 동굴로 귀환하는 여정이 가장 큰 비중을 갖고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선분의 비유 상 수학적인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 동굴 바깥 실물들과 인간들의 그림자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C1의 대상과 C2의 대상 간의 관계 역시 상상(L1)과 확신(L2)의 관계가 그렇듯이, C3와 C4의 대상 또한 둘 다 가지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이지만 서로 모상과 원본의 관계에 있는 것들임을 보여준다.

 

<C4> 동굴 밖 빛에 점차 익숙해져 실물들 자체를 보고 하늘도 본 후 마침내 태양을 보게 된 상태

 

k)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온 사람은 그림자들과 영상들을 본 후 차츰 익숙해지면서 동굴 바깥 실물들과 바깥 세계에 사는 인간들 ‘자체’auto를 본다. 그 실물들과 인간들 자체를 보았다는 것은 ‘형상’eidos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깥쪽 실물들은 원천적으로 동굴 속 모형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것이 곧 원본 즉 형상을 보았다는 것으로 금방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경우 수감자들과 모형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누군가를 이끌고 오는 사람들 모두 인간의 모형일 뿐이고 바깥쪽 사람들만이 인간의 원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또한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자체라는 비유 자체가 현상과 본질, 믿음과 형상의 대비를 함축하는 한, 비록 보기에는 같은 사람들일지라도 동굴 속에 있는 사람과 동굴 바깥 또는 동굴 바깥을 이미 경험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동굴 바깥으로 나와, 사람들과 자신이 햇빛 아래에서 같은 사람임을 깨달은 순간 그 누군가는 이미 이전의 자신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는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타인들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사물들과의 관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타자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앎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는 동굴 바깥 세계를 밝게 비추는 빛의 원천, 태양을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 자체와 하늘에 있는 것들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바로 하늘 위 태양을 보았다가는 눈이 멀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선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밤하늘의 별빛과 달빛부터 구경하고 낮에도 희미한 윤곽일지라도 구름 속 안개 속 태양의 모습을 보는데도 열성을 기울여야 한다. 앞서도 살폈듯이 궁극의 깨달음은 마지막 단계에서 관조를 통해 통으로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열성어린 고행의 오름길이 보여주듯이 단계마다 작고도 수많은 깨달음들이 하나하나 점진적으로 쌓여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l) 그러한 열성 어린 마음가짐과 준비 끝에 마침내 그는 마지막으로 하늘 위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그것도 잠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잠깐일지라도 태양이 인간과 동식물을 비롯한 이 존재세계를 낳고 기르는 지고의 실재임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과 그에 기초한 추론을 통해 그는 태양이야말로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고 눈에 보이는 영역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자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보았던 저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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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의 단계인 L4에는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따로 언급되지 않지만 그것에 상응하는 이곳 C4에서는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L4와 C4가 상응 관계상 아주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C4에도 이미 태양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C5를 따로 구분하여 그곳에 태양을 위치시킨 것 또한 그리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굴의 비유에서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본 사람이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까지 추가되어 있어 그것까지 포함해서 C5를 따로 독립시켜 구분한 것이다. 아무려나 이 구분들은 플라톤이 설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논의의 편의를 위해 구분한 것임을 다시 한번 염두에 두기로 하자.

* 여기까지가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 수감자가 본성에 맞게 풀려나 누군가에 이끌려 힘들고 가파른 오름길을 지나 동굴 바깥에 이르러 실물들의 그림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태양을 보기까지의 여정이다. 이러한 여정은 직접적으로는 무교육 상태에서 교육 상태로 발전 전환하는 과정 다시 말해 배움의 가장 아래 단계로부터 가장 높은 단계인 철학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교육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점에서 그것은 마치 <향연>에서 디오티마가 그리고 있듯 어떤 인도자에 이끌려 아름다움을 보도록 강제되어 몸의 아름다움에서 부터 에로스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영혼의 아름다움, 앎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여럿을 거쳐 마침내 아름다움 자체, 단일한 형상에 이르는 모습(210a-212a)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제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문제들의 갈등 양상과 그 극복 과정과 관련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우선 수감되어 결박된 상태는 현실 정치 일반에서 자주 목격되는 정치 지배 권력의 대중에 대한 정치적 억압이 관철된 상태를 보여주고 ‘일어나 고개를 돌리고 빛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그 정치적 억압이 갖는 부당함에 눈을 뜬 후 각성된 비판적 문제의식과 용기로 궐기하는 모습을, 그리고 가파른 오름길에서 때론 달아나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불안하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동굴 바깥에까지 이르는 것은 온갖 불리한 여건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워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여 정치적 해방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일깨워주듯 개인 차원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이를테면 현대 사회에는 무의식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비합리적 초자아의 지배를 도덕의 이름으로 평생을 참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개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들도 어떤 계기로 자신이 욕망하는 존재임에 눈을 뜨고 정신 분석가들의 진단과 충고에 이끌릴 경우, 그는 점차 자신을 견고하게 에워싸고 있던 온갖 자책과 위선, 죄의식과 심리적 장애를 이겨내고 자신의 원천적인 욕망을 스스로 객관화하는 과정을 거쳐 욕망의 주체로서 진정한 자아를 되찾곤 한다.

* 성서에는 늙은 나이에 간신히 자식을 가진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는 몇 줄도 안 되는 그 짧은 내용(<창세기> 22장 1-19절)을 신 앞에 홀로 선 인간의 실존적 삶의 정황으로 파악하고 아브라함의 그 심적 고뇌를 철저히 음미하고 세세하게 풀어내 <공포와 전율>(Furcht und Zittern)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산을 오르는 과정은 종교와 관련한 상황이라는 차이만 제외하면 동굴의 비유 속 그 누군가의 여정과 크게 닮아있다. 그 내용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자식 하나를 얻어 행복에 잠겨 있었지만, 그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신에 순종해야 하는 믿음에 따라 아내 사라도 모르게 홀로 어린 자식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오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산을 오르는 동안 자식에 대한 본능적 애착은 물론 왜 제사에 쓸 제물은 없냐는 이삭의 물음에 가슴 찢어지는 자괴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또 나중 자식을 제물로 바친 후 돌아와 주변으로부터 쏟아질 차가운 시선과 비난 그것도 자식을 죽인 아버지 천륜을 어긴 자라는 최악의 도덕적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지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 모두가 신의 명령에 반하는 세속적 인간적 집착임을 깨닫고 산 위에 올라 오롯이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슴에 안고 신의 명령대로 어린 자식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험을 이겨내고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그 모든 세상 욕망 일체를 내던지는 그 결단의 순간 그에게 멈추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고 그 후 그에게 신앙의 선조라는 명예와 함께 장차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 모래만큼 자손들이 번성하리라는 세상의 축복까지 내려진다.

* 이렇듯 동굴의 비유 전 과정은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어떤 영역 어떤 형태이건 정치적 억압과 해방, 종교적 죄와 구원, 미망과 해탈, 개인의 심적 장애와 극복, 비판적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중대 전환 등과 관련한 주제들에 두루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고 동굴의 비유가 단순히 그 주제들과 관련하여 앎과 무지, 빛과 어둠, 타락과 구원, 동굴의 바깥과 속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매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플라톤을 경직된 이원론의 원조라 부르는 통속적 이해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듯이 그가 존재와 무(無) 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서 ‘무한정자’apeiron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고 나면 금방 풀리는 곡해에 불과하다. 동굴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굴의 비유는 단순히 동굴 속과 바깥만 이 아니라 결박에서 풀려난 사람이 오름길에서는 물론 다시 동굴로 귀환하는 내림 길에서 온갖 난관들을 이겨내는 과정 즉 동굴 속과 바깥 사이metaxy에서 분투하는 과정 역시 역동적인 방식으로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진지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리고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명백성과 관련한 4가지 단계에 상응하는 학문들의 위계 또한 함께 포함하고 있다. 벽면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영상과 모방을 소재로 한 미술과 시가술의 영역을, 모형과 인공물들이 존재하는 단계는 제작과 관련한 일반 전문 기술 즉 경험과학의 영역을, 실물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수학과 기하학, 산술의 영역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실물과 인간들은 물론 태양이 그것을 비추는 단계는 철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영역의 위계적 상승은 그것을 모두 배제하고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상상과 확신 그리고 사고가 각기 자기의 단계를 참의 단계로 여기는 것은 그릇된 것이지만, 형상이라는 지식을 정점으로 그것으로부터 기초를 제공받고 그 등급에 비례하여 명백성을 드러내면서 삶에 필요한 기술 수준의 앎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온당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 그러나 동굴의 비유가 위와 같이 정치와 종교, 개인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함축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것 역시 기본적으로 지성주의를 표방하는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지향을 드러내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이 그러하듯이 인간 역사에 나타난 여타의 다양한 철학 사상들과 종교들 역시 마찬가지로 각기 고유한 문제의식과 목표를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들 모두 문제에 대한 철학적 진단과 처방에서 제각각이다. 특히 동굴의 비유가 보여주듯이 해방과 탈출, 구원과 실재 세계로서 동굴 밖 세계, 즉 단일하고도 지고의 지위를 갖는 실재로서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모든 것들의 근본 원인이 되고 이해의 궁극 근거가 되는 플라톤의 세계는 범신론적 종교는 물론 상대주의 또는 비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내세우는 모든 철학 사상들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 그럼에도 플라톤 철학이 동굴의 비유를 매개로 그러한 철학 사상들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진실을 향한 투쟁과 실천은 포기되어선 안 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철학적 지향을 갖든 치열하고도 냉철한 자기반성과 비판을 통해 집요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철학적 실천 자체가 보다 ‘좋은’agathos 삶과 세상에 대한 믿음pistis과 희망elpis, 그 구현을 위한 지혜sophia와 용기andreia를 끊임없이 북돋고 견인한다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서구 지성사에서 위대한 사상들이 공유하고 있는 진실을 향한 그와 같은 여정이 철학적인 깊이와 체계를 갖고 처음으로 음미되고 성찰된 것은 2500년 전 플라톤에 서부터였다는 것도 의미 있게 되새겨 볼 일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그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누군가는 이제 각고의 노력 끝에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바깥에 도달했음에 행복해하지만 다른 한편 지금도 동굴 속에서 결박 상태에 있을 동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롭다. 그래서 그는 결국 동굴 속에서 본성에 맞게 태도의 전환을 감행했던 것처럼 그들을 동굴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 동굴의 비유 계속 –

다음 강해 : 동굴의 비유(514a-521b) – (III)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허하라’ –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 서평|글: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허하라

–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칠순의 아버지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빠르게 몸의 기능들을 잃어갔다. 아침 산책을 나서지 못할 만큼 걸음걸이는 불안정했고, 자식들에게 생일 축하 카드를 써줄 수 없을 만큼 손떨림이 심했다. 식탁에서는 최상위 포식자로서 쾌락을 누리기는커녕 음식을 흘리며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병이 깊어지던 시절의 아버지는 증상의 일부로서 얼굴 근육이 굳어갔지만 많이 놀라고 슬프고 상처 입은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돌이킬 수 없는 끝을 향해 가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의 정신적 공황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저 문화의 관행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성실한 환자로 치료에 임하고 가부장답게 징징대지 않고 씩씩한 척 연기하며 몰락을 향해 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를 읽으면서 아버지의 투병 과정과 죽음 직전의 순간들이 되살아났다. 질병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인간의 삶 속에서 추방된 ‘타자’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질병을 말할 언어를 갖지 못했으므로 가족에게 자신의 병을 말하지 못했다.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간의 거리를 허물지 못했다.

의료사회학자인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는 분류하자면 학술서에 해당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프고 죽고’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에 대한 온전한 사유를 가로막는 근대 의학(“모더니스트 의학”)과 인간에 대한 전능성의 신화를 기반으로 한 주체 철학을 학자로서 넘어서고자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심장병과 고환암 선고를 받고 투병했던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어 일반적인 학술서와 구별되는 특별함이 있다. 아픈 사람의 좌절과 고독에 공감하며 아픈 사람들의 편에 서기 때문이다. 만성피로증후군을 겪고 있는 주디스 자루쉬스의 말을 인용해 저자는 “심각한 질병은 심각한 질병은 그 질병에 걸린 사람의 인생을 안내해 오던 “목적지와 지도”를 잃게 만든다. 아픈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배워야만 한다.”(50)고 침통함을 뚝뚝 흘리며 말한다. 아픈 사람은 더 이상 지금까지의 지도로 살 수 없으므로 다른 방식의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명료한 진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제 욕망을 내려놓고, 소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껴보자는 식의 뻔하고 기만적인 조언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언제나 치료의 객체, 즉 대상의 자리에 머물기를 요구받으며 자신의 질병을 낯선 것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환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당신의 질병을 새롭게 탐구하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질병과 이야기를 연결시켜, 아픈 몸에 대해 말하고 이를 통해 질병과 더불어 살며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자고 말한다.

아픈 몸이 말하도록 하자고 저자는 설득한다. 생각해보면 질병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것인데도 우리는 질병에 대해 정교하고도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모른다. 대부분의 아픈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회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언어나 대안이 없기 때문에 막연히 좋아지기를 바라며 의학에 자신을 맡기고,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좀처럼 사유하지 않는다. 근대의학의 권위와 상업적 이익을 위해서 혹은 전능한 인간의 환상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아픈 사람은 자신의 질병에 관해 말하고, 그것과 화해할 틈조차 박탈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렇듯 자신의 질병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억눌릴 때, 아픈 사람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노출되는 것만이 아니라 온전한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기회와 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이렇게 보자면 질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근대 의학과 주체중심주의에 의해 입이 틀어 막혔던 아픈 사람이 인간의 취약성을 폭로하고, 아픈 사람을 병리화, 타자화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질병과 함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본래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아픈 사람이야말로 이야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다. 안톤 체홉의 단편 「애수」는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이며, 삶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 늙은 마부는 아들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을 몰며, 손님에게 아들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마부가 죽은 아들을 애도하고, 아들의 상실이라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수용해 가는 방식이다. 이 소설은 마부가 자신의 슬픔을 들어줄 이를 찾지 못하고 결국 자신처럼 늙은 말에게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됨으로써 고통은 이야기와 청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아픈 사람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좋은 의사와 회복에 대한 낙관만이 아니라 자신을 사로잡는 고통, 즉 질병을 이야기하는 것과 그것을 들어줄 사람인 것이다. 아픈 사람은 질병을 중심에 두고 자신의 생애를 구성하는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질병 경험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때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 이야기가 치유와 회복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아픈 사람들을 식민화하고, 더 지독한 암흑과 절망 속으로 던져 버릴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아서 프랭크는 자신이 암 환자였던 경험을 토대로 아픈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이야기라고 하면서도, 질병에 대한 서사 유형을 복원, 혼돈, 탐구 등 세 가지로 나누고 그 특징과 의의 및 한계를 분석한다. 복원의 서사는 질병이 없던 이전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에 바탕을 둔 것으로 투병기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유형이다. 저자는 복원 서사를 제도 의학과 병원 너머의 더 강력한 이해관계 집단들이 질병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모든 고통에는 치료약이 있다는 모더니스트 기대”가 투영된 이 서사는 환자가 의학의 권위에 순응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환자에게서 필멸의 현실과 책임을 박탈한다. ‘혼돈’은 질병의 좌절과 공포에 노출되어 앞으로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과 절망에 파 먹힌 이의 이야기 유형이다. 혼돈 서사는 “비(非)-자아-이야기”(222)로 고통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간 순서의 감각도 없고 고통에서 목적을 발견하는 자아도 없기 때문에 글쓰기에는 서사성이 결여되어 있고 구멍도 많다. 혼돈 서사의 주체는 자신을 삶의 근본적인 우연성에 통제 없이 휩쓸린 무력한 존재로 규정하며, 수치심과 절망에 압도되어 타인에게 지원이나 위안조차 기대하지 않는다. 혼돈의 서사는 아픈 사람들을 절망에 가두고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극복이 필요한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탐구’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자신만의 질병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가능성을 열어놓는 서사 유형이다. 탐구 서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질병이라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앞으로 아픈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써나가야 하는가’다. 저자는 올리버 색스나 오드리 로드의 투병기를 탐구 서사의 대표작으로 꼽으면서 비록 질병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의 중단이지만, 질병을 통해 우리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고 또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한 인격의 변화나 자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암에 걸린 오드리 로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프고 유방을 도려낸 여성들과 연대함으로써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소수자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의 문을 열었다. 사라 아메드의 말처럼 불행이나 고통은 단순히 우리의 주체 역량을 갉아먹기에 부정되거나 회피해야 할 나쁜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현장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집중을 촉구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윤리적 정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출판·독서 시장에서는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질병 경험을 고백하는 1인칭 자기 서사들이 문화적, 미학적 우세종이 되고 있다. 그간 의학은 진단과 설명의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질병을 사회와 철저하게 분리시키고, 아픈 사람을 의학의 권위를 증명할 수단으로 객체화, 상품화해 왔다. 물론 정확한 진단과 치료는 질병으로부터 고통받는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의학의 진보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질병 경험은 질병이 한 인간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학적 서사로는 해명될 수 없는 경험을 삶 속으로 통합해낼 수 있는 당사자들의 질병에 대한 말하기는 계속될 필요가 있다. 또한 질병이 단순히 자기관리의 실패나 삶의 중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려면 당사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하고 해석 주체로서의 권리를 가져야 하며, 당사자의 이야기는 정상을 자처하는 이들의 자기 확신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가 공유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는 시의적절하고도 긴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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