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거라투스트라,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보다[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세상의 어머니여! 모든 아이들을 보호할 것인가, 우리 아이를 위험에 내놓을 것인가

김 경 원(문정중학교 교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립과 세계 기아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아기를 낳지 않는다 했던 여자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자연 번식(?)에도 성공하였다. 중고등 시절, 선생님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딴 짓과 자습 빼먹기를 밥 먹듯이 하던 여자는 먹고 살 방도를 위해 젊은 시절을 헤매다 양심도 없이 뒤늦게 교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의 유부녀 여교사가 된 것이다. IMF 시절에는 먹고 사는 문제로 소심해질 대로 소심해진 국민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적도 있었지만 요즘 내 주변의 사람들은 부쩍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지난 달에 부산에서 만났던 초면의 남편 선배는 요즘 구독하는 신문에서 보니 학교가 정말 심각하다며 나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았고 최근 만난 큰시누이는 내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힘들어서 어떻게 사냐고 했다. 뭐 그냥 그 자리에서 울어야 할 분위기였는데 안타깝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물론 내 주위에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심란한 에피소드는 많다. 내 주변의 소심한 동료는 수업이 끝나면 교무실에 돌아와 한참을 넋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는다. 그 선생님은 말 안 듣는 악동들의 교실에서 벗어난 충격(?)으로 점심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고 (정말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 앉아 있는 것인데 그러한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어떤 선생님은 자다가도 수업 시간에 힘들었던 장면이 생각나 벌떡 일어나 당시에 억울하게 당했던(?) 장면을 떠올리며 분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주변 학교의 즐거우신(?) 학생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활약상도 우리 학생들을 통해 종종 나의 귀에 들어오기도 한다. 킥복싱을 배운 학생과 학부모 혹은 자해하는 학생에 의해 위협을 당한 교사의 이야기는 같은 교사로서 학생들 앞에서 듣기에 민망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본인도 교직 생활 10여년 동안 무협의 세계에서 생활하며 나름대로 몇 가지 어려웠던 에피소드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의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들으면 매우 버릇없고 나쁜 인간 말종들의 이야기로만 들리기 때문이다. 혹은 학생 장악력에 문제가 있는 여교사의 하소연으로 들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섬세하게 그 상황의 뒷면까지 보면 어려운 가정 형편에, 가족의 해체에, 잘못된 입시 위주 경쟁 교육에, 믿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에, 권위적인 교사 및 학부모들이라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우회 도로로 해결 방법을 찾게 되기도 한다. 최근 언론 지면에는 학교에 학생들을 장악할 남교사가 너무 없었다거나, 가해 학생에게 너무 처벌이 미약했다거나, 학교 문제라고 해서 외부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거나 사회적으로 교사들이 체벌 등 강제적으로 학생을 장악할 방법이 없었다는 반성들이 들끓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남교사를 확충하자거나 가해 학생에게 강력하게 처벌하자거나 경찰의 적극 개입을 인정하거나 교사들에게 강력한 제제 주단을 주자는 등의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그 조치에 경쟁 위주의 교육 제도 시정이나 가족 복지에 대한 배려는 들어 있지 않다.

오늘도 인터넷에는 단골 기사인 학교 폭력 관련 기사가 새로 올라와 있다. 10만원 때문에 친구를 죽인 혐의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태연히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었다는 고등학생의 이야기가 우리의 흥미를 자극한다. “요즘 애들은 쯧쯧쯧…….”, “이런 애들은 콱 죽을 때까지 콩밥을 먹여야지.”, “이게 인간이야? 괴물이지!” 등등 강력한 대응이 자신의 도덕성을 입증하는 양 우리는 한 두 마디씩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성토하곤 한다. 그러면 우리는 깨끗하다. 이러한 괴물을 낳은 사회의 일원이지만 우리는 분명 깨끗할 것이다. 후속 기사에 따르면 이 아이의 아버지는 일찍이 도박에 빠져 집을 나가고 엄마가 홀로 일을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과거에는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현재는 폭력적인 가난 앞에 노출되어 있던 이 아이의 엄마는 분명 비정규직이었을 것이고 늦게까지 일하느라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말하면 그것은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학교 폭력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아이들을 학교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것인가? 엄마로서는 눈물 나는 일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교사인 나조차도 학교 폭력으로부터 내 아이를 완전하게 보호할 수 없다. 단지 운 좋게도 친절한 담임 선생님과 좋은 단짝 친구와 너그러운 일진을 만나길 기도할 뿐……. 혹은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총알도 피하는 유연성이 우리 아들에게 허용되길 바랄 뿐이다.

이기적인 엄마들 입장에선 우리 아이만 이 혼란한 세상에서 쏙 빼서 보호할 수 있은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쉽지 않아 나의 아이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안전하고 행복해야 비로소 나의 아이까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정말 절실하게 나의 아이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의 안위까지도 내 아이의 안위를 걱정하듯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무한한 친구의 친구의 가정이 어떠한지 아버지는 도박을 끊으셨는지 어머니는 정규직으로 전환되셨는지가 진심으로 궁금하고 걱정이 되는 것이다.

“신이 세상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듣는 엄마들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여자들은 결코 자신의 자식만을 보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을 보호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자식을 위험 속에 내놓든지 둘 중 하나다.

자거라투스트라,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보다[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편집자문위원)

니체 아부지, 울긴 왜 울었어요?

울다니, 내가 언제?

참 아부지도! 그 일이 너무나도 널리 알려져서, 이번에 영화로도 나왔던데요. 왜, 토리노를 여행하시다가, 가혹하게 얻어맞는 말의 말머리를 껴안고 울었다면서요? 왜 우셨어요?

아, 그거 말이냐, 어디 말이 불쌍해서 울었겠냐? 내 처지가 말하고 같아서, 그랬지. 왜 동병상린이라는 말도 있지 않니? 그런데 그게 영화하고 무슨 상관이냐?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됐단 말이냐?

헝가리 영화 감독 벨라 타르가 자신의 마지막 영화로 ‘토리노의 말’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대요. 그래서 저도 보고 왔어요. 물론 아부지를 주인공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요. 아버지의 토리노 에피소드에서 감독이 착상을 얻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얻어맞는 말과 유사하게 가혹한 삶을 살아가는 어떤 부녀에 관한 이야기이죠. 영화는 시작하면서 이 부녀의 삶을 암시라도 하는 듯이, 마차를 끌고 가는 말의 모습을 오랫동안 비추어 주죠. 비루먹어서 정말 가련하게 보이지만, 마부가 때리는 채찍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짐승처럼 마차를 끌고 달리는데, 카메라는 말 머리에 바짝 붙어서 말의 모습을 클로즈업해요. 이 장면이 너무나 오래 동안 지속되어서 지루해질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도 우리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면서 매혹하죠. 관객은 서서히 그런 말의 비루먹고, 짐승 같은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끼게 돼요. 그런데 아부지, 동병상린이라면 아부지도 누군가에게 가혹하게 얻어맞았다는 말인가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나를 때린 게 어떤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신이었지.

그런데 아부지, 아부지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던데, 웬 신이 아직 살아서 아부지를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말이에요?

글쎄 말이다. 자거라투스트라야, 채찍에 얻어맞는 말의 모습을 보니, 꼭 신이 우리를 그렇게 처벌하는 것만 같아서 말이야. 물론 신이란 것은 없겠지. 그런데도 우리는 신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왔어. 그 관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해 왔던 것이지. 너도 알겠지만, 난 한 평생 그런 신에 대한 관념과 싸웠지. 그런 신에 대한 관념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이 세상에 살면서 제대로 행복하게 웃어보지도 못했던 것이 아니니? 행복이란 것은 없었어. 그저 잠시의 휴식이 있었을 뿐, 우리의 짐승 같은 삶은 여전히 지속되었지. 그래서 마침내 나는 선언했던 거야. 신은 죽었다고. 그러면 이제 신이란 관념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줄 알았어.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던 거야. 신은 이미 죽어도 골백번 더 죽었지만, 인간은 신이란 관념을 버릴 수가 없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결국 내 인생도 그런 신의 관념에 잡아먹히고 말았지. 토리노에서 말이 얻어맞는 것을 보니, 나 니체조차, 신이 죽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이 니체조차도 신의 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의해 조종되고 지배되었다는 것이 한순간 너무 명확하게 자각되었던 거야. 주요한 것은 신은 관념만으로도 마치 실재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야. 신의 관념에는 존재의 관념이 포함된다고 하지 않니? 그러므로 관념만 있으면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아부지가 스스로 바보였다고 말한 거예요? “어머니 나는 바보였어요”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면서요? 그럼 아부지는 결국 신의 관념과 싸우다가 패배한 것을 자인한 셈이네요.
그런가, 나도 모르겠어. 그 순간 나는 내가 꼭 바보였다는 느낌이 들었어. 신의 관념이라는 허깨비 앞에서 내가 졌다고 생각되었어. 그래서 그 뒤로 난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았어. 그저 짐승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아픈 줄도 기쁜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가려 했지. 사람들은 내가 이제 진짜로 미쳤다고 하지만, 내가 미친 게 아니야. 나는 오히려 알았던 거지. 우리가 그저 짐승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래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던 거야.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와 똑 같았어.

그런데 아부지, 이 영화의 내용도 유사해요. 점차 죽음과 파멸이 다가오죠. 영화는 6일 동안 지속되는데 계속해서 카메라는 어느 황량한 벌판에 사는 두 부녀의 삶을 냉혹하게 지켜보죠. 그 벌판은 메말라 있고 그 위에는 쉼도 없이 돌풍이 몰아치고 있어요. 그 돌풍은 관객인 우리조차 지겨워하게 만들 정도이에요. 그 돌풍 앞에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오두막집은 비록 돌 벽으로 되었지만, 이미 곳곳에 무너지고 있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죠. 서서히 그들의 삶이 파괴되어 가요. 이튿날부터 말이 더 이상 마차를 끌기를 거부하죠. 나흘 째 유일한 우물의 물이 말라 버리고. 그날 두 부녀는 집을 버리고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들판은 텅 비어 있지만 그렇게 비어 있음 때문에 어디에로도 갈 수 없어요. 다시 두 부녀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닷새째 집안의 등불이 꺼지죠. 마지막 엿새째 암흑 속에서 두 부녀는 이제 모든 것이 죽음과 파멸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아요.

그럼 자거라투스트라야, 이 영화는 자연주의적인 영화이냐? 김동인의 감자처럼, 결국 주변의 환경 때문에 인간이 무너지고 만다는 거냐?

니체 아부지, 사실 저도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마 모파상의 작품인 것 같은데, 제가 지금 분명치 않습니다만, 눈보라 속에서 산장을 지키던 사람이 마침내 미쳐버리는 얘기가 떠올라서, 이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두 사람이 미치지 않을까 내심 기다렸지만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어요.

그럼 어떻게 끝났단 말이냐?

감독의 태도는 독특합니다. 이렇게 가혹한 삶 속에서 두 부녀는 마치 기계처럼 똑 같은 일을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반복해요. 그들은 깨어나면 한 잔의 술을 마십니다. 그것은 어떤 즐거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일처럼 보여요. 독일의 고지대에서 사람들도 깨어나면 맥주 한잔을 마신다고 해요. 그래야 머리가 부팅된다나요. 또 아버지는 한 쪽 팔을 쓰지 못해 딸이 아버지가 옷을 입고 벗는 것을 도와주는데, 돌풍을 막기 위해 걸쳐 입은 여러 겹의 옷을 하나하나 벗고 다시 입죠. 그것은 마치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 같아요. 두 부녀는 어떤 말도 서로 건네지 않습니다. 오직 “먹자, 자자” 라는 간단한 말만 오가는데, 그 말은 아마 항가리어이겠지만, 우리 귀에는 거의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같이 들렸어요. 두 부녀의 삶은 진부하지만 신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뭐라고 할까요. 어떤 인간의 자유의지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삶입니다. 어떤 가혹한 압박이나 굴욕조차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인간의 힘 말이에요.

자유의지라, 그러면 그들이 초인이란 말이냐?

사실 저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들은 장작을 패고, 옷을 깁고 하는 생존에 긴요한 일 외에는 창문 앞에 세워둔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몰아치고 있는 돌풍을 응시할 뿐입니다. 그들의 응시를 보면서 저는 들뢰즈가 말한 ‘시청각적 상황’이라는 개념이 떠올랐어요. 들뢰즈는 인간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사유할 수 없는 것을 강제로 사유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 사유가 바로 응시라는 거죠.

자거라투스투라야, 거 참 그 영화 어디서 하냐? 나도 꼭 봐야 하겠는 걸. 아주 마음에 든다. 내 철학의 정수이구나.
그래요, 사실 감독 벨라 타르도 사회주의 항가리 출신이지만 니체 아부지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요. 저는 사실 그 감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이 감독이 만든 영화들 ‘파멸’이라든가 ‘사탄탱고’ 등을 보아야 하겠어요.

그런데 아부지, 니체 아부지. 이 영화는 엿새 동안 진행되는 데 이튿날과 사흗날 외부에서 손님들이 찾아오죠. 이튿날은 동네의 이웃이 찾아옵니다. 그는 사실 술꾼이에요. 그러나 말로는 결코 굴복하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주인공은 그의 말은 믿지만 그의 행위는 믿지 않는 듯 술 한 병을 주어서 쫓아 보내고 말죠.

굴복이라니, 누구한테 굴복한다는 말이냐?

니체 아부지, 그게 사실 이 영화를 해석하는데 걸리는 가장 큰 문제에요. 저는 그 이웃 손님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의 대상이 신이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에는 보이지 않지만 신이 등장하죠. 끝없는 돌풍이나, 우물이 마르거나, 불이 꺼지는 것 등은 단순한 자연적인 사건은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신의 힘이 여기서 작용한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영화를 저는 꼭 욥기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성경의 욥기에서도 욥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하느님은 욥을 파멸과 죽음으로 밀어 넣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같은 맥락이지만 대답은 욥과는 반대이죠. 즉 주인공은 신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혹한 시련 앞에 처해 있어요. 그러나 그는 결코 신에게 굴복하지 않죠. 그 시련 앞에서 그는 오연하게 나는 인간이고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듯해요.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들의 엄숙한 선언이 마치 해방의 선언처럼 울려 퍼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그들이 프로메테우스란 말이냐?

에, 정말 감독은 그들의 모습을 마치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그려놓았어요. 거인 또는 영웅들이 모습이죠. 저는 이 영화에 사흘째 날에 등장하는 집시의 모습에서 감독의 이런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집시들이 다가왔을 때 주인공 부녀들은 그들을 쫒아내죠. 집시들은 떠나면서 딸에게 책을 하나 전해 줍니다. 그 책을 딸이 나중에 읽는데, 거기에는 성소가 더럽혀졌고 너희가 저지르는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이 적혀 있어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죄의식이죠. 집시가 전해주는 이 책은 바로 신에게 저항하는 이 영웅들을 신에게 굴복시키려는 달콤한 죄의식의 말이었던 셈이죠. 물론 집시 자신은 신의 율법에 따라 살지는 않아요. 집시들은 그런 죄의식 때문에 차라리 신의 명령을 포기한 삶 즉 욕망의 삶을 살지만 죄의식을 버릴 수는 없죠. 반면 이 영화의 주인공 두 부녀는 이런 신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죄의식 자체를 거부합니다.

자거라투스투라야, 이제 알겠니?, 내가 왜 나를 바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인간이 어떻게 신의 힘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냐? 결국 스스로 파멸에 이를 뿐이야.

니체 아부지, 신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이 있지 않을까요?

그게 무어지? 넌 아직도 모르겠냐? 신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주인공 두 부녀는 마침내 마지막 날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 스스로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인간에게 허용되는 최후의 자유의지가 아닐까요? 먼저 딸이 먹기를 거부하죠. 그리고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면서 감자를 으깨어 먹으려던 아버지조차 마침내 손을 내려놓습니다. 분노에 가득한 눈으로 그들은 서로 마주보죠. 그리고 영화는 페이드아웃 됩니다.

 

 

 

 

 

자거라투스트라 비키니를 만나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비키니 씨, 저 알겠어요?

아, 자거라투스트라 씨, 안 그래도 소위 서자 철학자라는 자거라 씨한테 가보려 했어요. 지금 저한테 걸린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가 아닌가요? 그런데 한국의 그 세계적인 철학자들께서는 어째 한 말씀도 없나요?

안 그래도 이 자거라투스트라가 나서 볼까 했지만, 원래 이 문제가 ….

자거라 씨도 겁먹었나요? 60만 ‘삼국카페’에서 들고 일어나니 그럴 만도 하겠네요.

왜 겁이 없겠소. 비키니 씨, 하지만 우리끼리 싸운다는 게 맘이 안 들어서, 그냥 넘어가기만 바랬어요.

아니 솔직히 한국의 철학자들이 언제나 그렇게 뒤꽁무니 뺐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요? 정치적인 문제야 철학자니까 몰라서, 아니 관심의 영역이 아니라서 그렇다 하더라도, 이처럼 윤리적인 또는 문화적인 문제가 나올 때도 항상 점잖은 척 뒷짐을 지고 있었던 거, 맞지요? 진중권 씨 혼자 일당백으로 싸우는데 미안하지도 않나요?

하긴 그래요. 우리 철학자들도 요새는 연구기금을 안 주면 연구 안하거든요. 그런데 보아하니 비키니 씨나 심지어 나꼼수 씨조차 큰돈은 없는 것 같은데, 무얼 하러 이 고상한 몸을 더럽히겠소.

더럽히다니요? 저 비키니는 정말 이 아름다운 가슴조차 더럽히면서 이 나라를 위해 나섰는데, 대체 이 나라 철학자들은 뭐가 그렇게 고상한 체 하는지 모르겠어요. 옛날에는 그래도 철학자 하면 디오게네스처럼 통 속에 사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우리나라 철학자들은 모두 시멘트 통속에 사는 것 같아요. 디오게네스의 통보다 시멘트 통이 더 고상한가요?

아니, 하여튼 미안하오. 하지만 이 문제는 철학자들도 별무 소용이요.

왜 그래요? 저 비키니, 차라리 확 벗을까요? 그러면 철학자들이 한마디 하겠어요?

누드 퍼포먼스의 역사야 길지요. 그때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곤 했고요. 그러면 이왕 만난 김에 한번 따져 봅시다. 여성의 누드, 또는 벗은 몸은 본래의 역할 즉 사랑의 매체라는 것 외에 사실 여러 가지로 이용되어 왔어요.

자거라 씨, 그런데 사랑이라면 사적이며 또 비밀스러운 관계가 아닌가요? 여성의 몸을, 아니 뭐 남성의 몸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런 공간에만 제한해야 하나요? 푸코의 연구에 따르면 그렇게 몸을 사적인 공간에 밀어 넣은 것은 근대 기독교의 권력 행사였다고 하잖아요.

하긴 여성의 몸을 사적인 공간을 벗어나 공적인 공간에 등장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하죠. 이런 영역이 워낙 다양하니까 일일이 검토하기에는 시간이 없겠죠. 대표적으로 두 경우를 들어보도록 하죠. 몸이 특히 여성의 몸이 가장 많이 쓰인 것이 아마 상업적인 광고의 매체가 아닐까요? 그에 못지않게 예술의 매체가 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예술의 매체일 때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상업적인 광고의 경우에는 여성의 몸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지요.

왜 예술은 되는데, 광고는 안 되었던가요?

비키니 씨, 그것은 예술이 아마도 가치가 있는 것이고 더구나 예술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여성의 벗은 몸을 매체로 썼으니, 그렇지 않을까요? 이 경우는 모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본래적인 가치를 고양시키는 것이었으니까요. 반면 여성의 몸을 광고로 이용했을 경우는 비난을 항상 받아왔지요. 예를 들어 자동차를 여성의 몸에 비유하면, 여성의 몸이 뭔가 쇠 덩어리가 되는 것 같아, 평가절하를 받는 것 같지 않나요?

글쎄요. 자거라 씨. 잘 모르겠어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딸은 자기의 누드를 매체로 해서 환경파괴와 인간의 욕심을 비판하는데 그것도 보면 그건 광고인가요 아니면 예술인가요?

비키니 씨, 그 분이 그 때문에 돈 받은 적은 없다니, 예술에 속하겠지요?

그러면 저도 돈 한 푼 누구한테 받은 일이 없으니, 광고를 한 것은 아니지 않아요. 더구나 저는 몸을 통해 정치적 주장을 펼쳤고, 더구나 저의 정치적인 주장이 독재나 착취를 촉구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반대로 민주화나 사회평등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려 했으니, 더 높은 가치에 기여하는 예술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럼요. 비키니 씨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잘했어요. 당신은 공지영 씨에 못지않는 예술가입니다.

물론 저야, 공지영 씨처럼 탁월한 예술적 표현을 하기에는 부족하죠. 하지만 표현이야 부족했더라도 그 표현하려는 내용이야, 가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서투른 예술가도 많지 않아요. 요새 지하철 다니다 보면 저보다 못한 시를 쓰는 시인도 많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공지영 씨한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니 저는 모르겠어요. 제 몸이 그렇게 보기 싫었던 건가요? 아니면 제가 표현하려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가요?

아니 표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저는 감탄했어요. 그냥 말로 ‘가슴이 터지도록’ 이라고 하면 자주 쓰는 진부한 표현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가슴을 눈으로 보여주니, 이 표현 자체가 생생한 아름다움을 얻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철학에서 개념(Concept)은 원래 임신(Conceive)이라는 의미인데, 제가 언젠가 이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자, 철학의 ‘개념’의 의미가 정말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그때처럼 저는 표현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저는 자거라 씨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가치라니, 좀 억압적인 느낌이 들지 않아요? 우선 가치 평가만을 가지고 본다면,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사람이야 높은 가치를 받겠지만 저같이 생물학적인 완성도에서 그렇게 높지는 않는 경우는 별 가치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면 가치 없는 몸은 아무렇게나 이용되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겠어요?

비키니 씨, 당신이야 딴지 총수조차 완성도에 감탄한다 했으니, 뭐 걱정이요. 하지만 사실 듣고 보니 가치 비교만으로는 안 될 것 같네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어떤 완성도와 상관없이 항상 가치로 평가되기 이전의 신성성을 가진다고 보아도 되니까요? 몸이 이용되려면 적어도 그런 신성성에 걸 맞는 영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거라 씨, 몸이 신성하다 하니까 정말 더 거부감이 드네요. 솔직히 이런 신성한 몸이라면 사랑을 위해서도 사용한다는 것조차 죄스럽게 여겨지고요. 그런 생각은 결국 너무 억압적인 것이 아닌가요? 무슨 이 시대가 빅토리아 시대도 아니고, 또 솔직한 것 같지도 않고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몸을 이용해서 먹고 사는데 그들은 그러면 이 신성한 몸을 더럽히는 건가요?

아, 할 말이 없군요. 비키니 씨

자거라 씨, 만일 몸이 신성한 것이라면 어떤 다른 더 고위한 가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몸에 스스로의 권리가 있다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게 보면 몸은 쾌감을 원하는 것 같아요. 자기에게나 남에게 서로 쾌감을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누가 강제를 이용해서 예를 들어 물리적인, 심리적인, 심지어 화폐적인 강제를 이용해서 쾌감을 강요한다면 그건 안 되겠죠. 그것은 일방만의 쾌감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유로운 자신의 결정이라고 한다면 이런 몸을 통한 쾌감은 어떤 방식으로 야기되든 그게 정치적인 매체든 예술적인 매체이든 문제없는 것 아닐까요? 상업적인 광고의 경우는 좀 문제가 있겠네요. 돈의 노예라서 억지로 불쾌하지만 몸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돈 받더라도 즐겁게 한다면 문제없지 않을까요?

공지영 씨도 비키니 씨야 잘못이 없다 했던 것 같아요. 아니 불쾌하지만 비난할 거리는 아니다 보고, 다만 비키니 씨와 같은 누드(아니 비키니) 퍼포먼스를 장려한다는 점에서 나꼼수 씨를 비난한 거겠죠.

정말, 그래서 제가 자거라 씨를 찾아가려 했던 거죠. 나꼼수 씨가 저의 벗은 몸을 보고 마초적으로 즐겼다는 것이 공지영 씨의 판단인데, 저는 그건 타인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한 것으로 봅니다. 물론 나꼼수 씨가 ‘대박’이라든가, ‘생물학적 완성도’라든가 ‘코피’라든가 말을 썼더라도 그것은 저의 벗은 몸을 보고 그저 욕망에 불타올랐다는 것은 아닐 거예요. 저는 선의로 생각합니다.

선의라니?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표현방식의 생생함이라는 거죠. 저는 ‘가슴이 터지도록’이라는 표현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단을 찾았던 것이었어요. 아마도 나꼼수 씨가 말한 ‘생물학적인 완성도’란 ‘표현의 완성도라는 말을 찾지 못해서 나온 잘못된 언어 선택이라 봐요. 정말 나꼼수 씨가 내 몸을 생물학적으로 감상하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거든요. 더구나 제 몸이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결코 완성도가 높지 않고요. 그럼에도 그렇게 표현한 것은 그런 의미겠죠.

그래도 비키니 씨, ‘코피’라는 표현은 사실 이미 그런 마초적인 감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 씨, 손가락으로 달을 지시하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바라보니, 잘못이라고 하기는 하겠죠. 그러나 사실 이런 문제에는 늘 이중성이 있지 않나요. 예술에서도 누드 퍼포먼스란 그런 이중성을 노리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손가락만 바라 본 사람이 제 뜻을 이해못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겠죠. 물론 그것이 그의 인간성이 아직 부족하다는 정도는 드러내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비키니 씨, 몸이 쾌감을 위한 것으로 충분하다면, 쾌감을 위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일까요? 그럼 돈 받고 즐겁게 몸을 파는 것도 마찬가지인가요?

자거라 씨, 너무 극단화시키는 것 같아요. 매춘 속에서 쾌감을 느꼈다는 여성은 실제로 거의 없지 않아요. 사실 쾌감이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결합으로 만들어지지, 그저 순수한 육체적인 접촉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런데 정신적인 것을 너무 무겁게 잡으면 육체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만일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 몸이 매체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엄격한 도덕적인 입장이겠는데, 이 세상에 정말 그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는 사랑을 상당히 가볍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저 호감이 가고, 매력을 느낀다는 정도로. 물론 이런 가벼움이야 시대나 사회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지겠죠. 저는 우리나라에서 사랑은 너무 무거워서, 저 같은 사람은 감당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사실 저는 아예 포기하고 맙니다. 사랑을 너무 무겁게 보니, 좀 지겨워요. 그러고 그런 사랑이란 것도 실제는 없고요.

가벼운 사랑이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는군요. 그런데 비키니 씨,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노출도 있다 하지 않아요? 왜 ‘바바리 맨’에 관한 얘기 들어보았잖아요? 솔직히 저는 부산에서 오래 살았는데 여름에 해운대 나가는 게 제일 싫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몸매란 찾아보기 힘들고 거의 대부분 불쾌감을 주더군요. 살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오는데 말이죠. 그래서 저의 지론은 해수욕장에서는 비키니를 금지하자는 거예요. 모두 옷 입고 바다에 들어가라 이런 말이죠. 불쾌한 몸은 샤워할 때 혼자만 보면 된다는 거죠.

자거라 씨, 논점 이탈이 아니에요. 뭐 철학자가 그래요.

비키니 씨, 논점 이탈이라니요?

지금 문제는 여성의 몸을 (뭐 남성의 몸이라 해도 좋겠지요) 사랑이라는 관계 외에, 특히 정치적인 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이잖아요.

그거야 이제 정리된 것 아닌가요? 상업적인 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위해서 몸을 매체로 이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사회적인 가치를 위한 투쟁도 마땅하지 않을까요? 물론 예술의 경우는 직접적인 몸이 아니라 이미지화된, 기호화된 몸이라는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퍼포먼스 같은 경우는 인간의 몸을 직접 사용하기도 하니까, 뭐가 다르겠어요.

맞아요. 그런데 자거라 씨는 아름다운 몸매 타령만 하니, 그게 논점 이탈이 아니에요?

아니, 비키니 씨가 몸이란 쾌감의 수단이라 하니까. 꼭 쾌감만 주는 것은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거죠.

육체란 쾌감을 주는 건데, 어떻거나 쾌감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육체는 그 자체로서 존중받더라도,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지 않아요. 정말 답답해, 정말 가슴을 풀어 헤쳐야 하겠네요. ‘가슴이, 아니 복장이 터지겠다, 철학자여’ 이거 내일 나꼼수에 오를 거예요. 내 복장 누드 사진하고 같이 오를 겁니다.

아니 참아요. 비키니 씨. 제가 먼저 벗고 싶지만,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체형이라서.

자거라투스트라, 새해 달력을 사러 시장에 가다.[자거라투스투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1

자거라투스트라는 신성한 새해를 맞이하면서 기이하게도 옛날에 쑥스러웠던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였다. “너는 어째 그 흔한 선물하나 받아오지 못하느냐?” 어머니가 명절날이 되면 이렇게 늘 안스러워 하시기에 언젠가 명절을 앞두고 자거라투스트라가 꾀를 하나 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자거라투스트라는 주변의 친구들을 불러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았다. 다들 처지가 비슷한 지라 자거라투스트라의 제안에 흔쾌히 동조하였다. 다음날 각자 자기 돈으로 자기 집에서 제일 필요한 물건을 사서 선물로 포장하였다.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그 선물을 자기 집에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보냈다. 선물이 도착한 날 자거라투스트라는 놀란 어머니 앞에서 짐짓 “아, 이 친구가 뭘 이런 걸 다 보냈지”라고 중얼거리면서, “거 참 하는 일도 바쁠 텐데…” 하고 한마디 슬쩍 밀어 넣었던 것이다. 마치 그 사람이 정부나 학교에서 제법 높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가 대견해 하시는 모습과 만족스러워 하는 웃음을 보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쳐진 것을 기뻐했다.

남들은 흑룡이 솟는다고 웅성대는 새해가 되자 자거라투스트라에게 이런 쑥스러운 옛날 일이 떠 오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도대체 새해가 되었는데도 달력을 하나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새해가 되면 세상에 흔한 게 달력이 아니었던가? 무슨 회사나 어느 기관이다 해서, 약간이라도 떵떵거리는 직장이라면 새해가 되기 전에 달력 하나는 꼭 찍어서 돌리곤 했다. 자거라투스트라가 선물은 하나도 못 받아도 그래도 달력만큼은 이리 저리 많이 얻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지천으로 방안에 굴러다니는 달력을 발로 차면서, 어디서 보냈는지도 굳이 확인하지 않은 채 이런 달력들이 너무 귀찮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심지어 달력을 보내주었던 친지들이 약간 시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저가 아직 그런 떵떵거리는 직장에서 안 떨려 나고 잘 다닌다는 그 말이지? 그래 잘났다.” 이렇게 자거라투스트라는 속으로 악다구니를 쓰면서 보낸 사람의 정성을 애써 무시하곤 했다. 그만큼 발로 차였던 것이 달력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자거라투스트라는 새해가 되면 이렇게 받은 달력 가운데 몇 개를 골라, 방방이 새 달력을 걸어놓는 것이 마치 한 해를 새로 맞이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 여겼다. 이렇게 새 달력을 걸어놓으면 그때는 마치 방마다 지난 해 쌓였던 먼지들과 액운 그리고 업보들이 모두 다 사라지고 새방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 달력의 깨끗한 빛은 방마다 환하게 빛났다. 불교 용어에 ‘정구업진언’이라는 말이 있는데 업을 씻어내는 주문이라는 뜻이다. 달력이야 말로 그런 진언이 아니었을까? 때로 달력 속에 자거라투스트라가 좋아하는 그림이라도 찍혀 있으면 날자 부분을 잘라 버리고 그림 부분만 따로 스크랩해서 벽이나 책장에 걸어놓아 두기도 했다. 달력에 찍힌 그림들은 원본보다야 훨씬 못하겠지만 색상이나 정밀도에 있어서 그림책으로 인쇄된 것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았으니, 그런 그림이 실린 달력을 보면 탐내면서 이미 얻은 다른 달력과 바꾸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도대체 올해는 걸어놓을 달력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리고 어디서도 새해 달력을 보내 주지 않은 것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주소를 잘못 아는 것인가? 여전히 학교 쪽으로 달력을 보낸 것일까? 아니면 이제 자거라투스트라가 더 이상 별 볼일 없으니 그까짓 달력 하나라도 굳이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달력에 관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달력이 없으니 갑자기 온갖 망상들이 머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새해 벽두부터 마치 스핑크스 앞에 부딪힌 것처럼 ‘달력 실종 사건’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2

문제는 달력 없이 지내는가 아니면 달력을 시장에 가서 사기라도 해야 하는가 하는 양자 결단의 문제였다. 물론 또 하나의 선택지가 있기는 하다. 새해 달력을 누군가 보내오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아직도 달력을 얻을 수 있는 데 부탁을 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자거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아는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을 세어볼 필요도 없이 이런 선택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과거에 달력을 기꺼이 보내주었던 친지들이 거의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하고 말았다는 것은 새해가 지나도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까지 달력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 냉엄한 현실이 거꾸로 잘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제 새로운 세대들이 달력을 찍어 돌리는 직장을 얻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아직도 자거라투스트라 주변에는 달력을 찍는다는 그 떵떵거리는 직장을 지닌 젊은 세대들이 없었다. 더구나 달력을 찍는 직장은 사실 이제 한국에서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과거에는 달력을 찍어 돌리곤 했던 직장들도 올해는 경기가 경기인 만큼 쓰임새를 줄이니 아마도 달력을 찍어 돌리는 것이 제일 먼저 줄여야 할 일인 모양이다.

달력을 걸어놓은 것이 자기 직장의 광고로서 효과가 많을 텐데, 그래 아낄게 따로 있지 달력을 안 찍다니. 아무리 경기가 좋지 않아도 달력만큼은 국민의 수대로 찍어서 여기 저기 보시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건 단순히 광고 때문만은 아니지 않는가? 그건 한국에서 잘나간다는 직장의 사회적 의무가 아닐까? 그럼 가난한 국민이 새해의 달력까지 시장에서 사야한다는 말이냐? 자거라투스트라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아가 났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명박 정부가 고환율 정책을 취하면서 죽어나간 것은 서민이요, 온갖 혜택을 다 본 것은 소위 대기업 아닌가? 그런데도 그래 달력하나 못 찍겠다는 말이지!

속으로 부아는 나지만 어쩔 수 없이 자거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달력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포기하고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달력을 돈 주고 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심리적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거라투스트라에게 또 하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한때 김치를 사기 위해서 시장 바닥을 돌았던 기억이다. 지금처럼 마트가 발달하기 전이다. 그때는 시장에 가면 김치를 쌓아놓고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들로부터 김치를 구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남자가 김치를 사러 간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하는 수 없어서 시장에 가서 김치 파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때면 번번이 다른 손님(대개 젊은 여성이거나 젊은 주부들이다)들이 김치 아주머니를 둘러싸고 김치를 사려는 것을 발견하고, 자거라투스트라는 발걸음을 돌려 시장을 한 바퀴 다시 돌았다. 그리고 멀찌기 곁눈으로 김치 아주머니에게서 손님이 없는 것을 보고 또 다가가면 어느새 또 어떤 손님이 나타나서 자거라투스트라의 발걸음을 돌리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김치 하나를 사기 위해 그렇게 몇 번이나 시장을 돌았던 씁쓸한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일 자거라투스트라가 시장에(아직은 달력 파는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가서 달력을 사기 위해 이리 저리 쌓인 달력을 뒤적거리면 누군가가 분명 자거라투스트라를 보지 않을까? 그러면 그 중 어떤 사람은 “저 놈은 틀림없이 그런 달력을 찾는 중일 꺼야. 왜 있잖아? 그런 거 말이야. 소주 회사나 내의 회사 같은 데서 나오는 달력 말이야. 틀림없어, 생긴 거를 보니…”라고 생각할 것이 아닐까? 또 다른 사람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거다. “아이구, 저런, 오죽하면 달력을 사러 나왔을까? 그래 사돈의 팔촌, 초등 중증 고등 대학 동창 중에 한국에서 대기업이나 주요 기관에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지? 그런 사람 하나만 있어도 달력 사러 나오는 일은 없을 거다. 입고 있는 꼬라지 보니 집안이 안돼 보이기는 하네.” 뭐 이렇게 사람들이 자거라투스트라를 비웃을 것을 생각하니 굳이 비싼 돈(아직 얼마인지 정말 모른다)을 들여서 달력을 사러 가야할지 자거라투스트라로서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달력 없이 지내면 어떨까? 대체 달력을 방방이 걸어 놓는 게 무슨 악취미인가? 무슨 그림을 걸어놓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입춘방문도 아니고, 무슨 부적도 아닌데 그걸 왜 방방이 걸어놓는가 말이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시계도 안 차고 다니더라. 혹 결혼한 사람이 ‘이 사람은 결혼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결코 넘보지 마시오’를 표시하기 위해 남자는 시계를 차고 여자는 반지를 차고 다니기는 하지만, 요새 시계가 어디에 쓰일 데가 어디 있을까? 핸드폰에 시계가 너무나도 편리하고 정확하지 않느냐. 마찬가지이다. 핸드폰에 달력이 있고 다이어리도 일정표도 있으니, 굳이 방안에 걸린 달력을 쳐다볼 이유가 없지 않을까?

솔직히 자거라투스트라도 지난 일 년 동안 달력을 쳐다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유독 달력을 볼 때는 일 년에 몇 번 되는 제삿날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새해 달력을 걸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달력에 제삿날을 표시하는 것이다. 제삿날이 모두 음력으로 되어 있어 표시해 놓지 않으면 금방 까먹고 지나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제삿날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제삿날을 평소에는 결코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달력에 빨간 줄로 여러 번 동그라미를 쳐놓기만 하면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여튼 그런 일이 없다며 정말 달력 쳐다 볼 일은 없으니, 제삿날도 핸드폰에 입력시켜 놓고 올해부터는 달력 없이 한 해를 지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렇게 자거라투스트라는 곰곰이 달력이 없는 삶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 시계를 찾고 다니라고 강요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내게 노동시간을 빼앗기 위해 자본가가 강요하는 것이다. 시계를 찬다는 것은 그러므로 노동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 때는 시계를 찬다는 것이 성공의 징표이기도 했다.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달력을 걸어 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회이다. 이 사회는 수많은 기념일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그 기념일이 사회적 시간을 조직하는 매듭 점들이다. 삼일절과 육이오, 개천절과 유엔 데이, 그리고 크리스마스 등. 그러니 달력이 없다면 우리는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된다. 나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자연 그대로의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달력을 이제 우리의 공간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필요가 있다.

 

3.

이렇게 한참이나 생각하던 자거라투스트라는 결국 달력을 사러 나가기로 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오직 달력을 거는 것이 지금까지 한 해를 맞이하는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무슨 의식처럼 해돋이를 보러 간다. 자거라투스트라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새해 첫날 부산 해운대 앞바다로 떠오르는 해를 보러 갔던 것이 기억났다. 지금까지 구름에 가려 구름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기는 했지만 정말 바다에서 황금빛 꼬리를 끌면서 떠오르는 해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번 그렇게 의식처럼 해를 보러 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달력을 거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나의 의식을 지킨다는 것은 아마도 인간만의 일일 것이다. 인간만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풍습을 갖듯이 인간만이 그 자체로서는 의미 없는 자연적인 시간에 일 년을 만들고 다시 달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달력 만드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소멸해가는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달력은 어디서 사는 것인가? 적어도 마트에 달력이 없다는 것은 자거라투스트라도 알고 있다. 매주 한 두 번은 마트에 들리면서 어디에 어느 물품이 있다는 것을 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달력은 문방구점에서 파는 것일까? 그것도 신년카드처럼 책방에서 파는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달력을 파는 가게가 따로 있지 않을까? 언젠가 명동 거리에 벽에 펼쳐진 좌판대에서 달력을 본 듯도 하다. 도대체 달력은 범주적으로 어디에 분류되는가? 언젠가 바늘을 구하기 위해서 고민했던 분류의 문제가 희망찬 흑룡의 해, 새해 벽두에 자거라투스트라의 두통을 발생시키고 있다.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3)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1.

마침내 다산초당 입구에 이르렀다. 자거라투스트라는 90년대 초에 학생들과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돈이 없어 감히 관광버스를 빌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골버스를 타고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을 툴툴거리며 돌아다녔다. 학생들은 ‘철학기행’이라는 티셔츠를 만들어 입고 등 뒤에다가는 “실학사상을 찾아서”라는 구호를 적었다. 그때 버스를 기다리던 동네 사람들이 참 신기하다는 듯이 아니면 먹고 사는 게 빠듯한데 저런 놈들도 다 있네 하는 식으로 바라보던 것이 기억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잠시 그때의 추억에 빠졌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학생들과 막걸리를 먹던 생각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학생들은 정말 노래를 많이 불렀다. 어디에서나, 어느 틈에서나 시간만 나면 학생들은 노래를 불렀다. 무슨 바위 덩어리나 돌멩이처럼 살자 라는 노래 말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지금도 의문이다. 왜 그때 학생들은 그렇게 노래를 불렀을까? 2000년대 들어 어느 덧 운동권 학생들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무렵부터 이상하게도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노래를 불렀지만 항상 노래방에서 다른 사람 앞에 나서서 그러나 혼자서 불렀을 뿐이지 길거리에서 합창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다산초당 입구에 내려 산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다산초당이 나왔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선배님에게 점심 먹기 전에 먼저 잠시 둘러보고 가자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산초당 입구에서 걸어 올라가는데 아무리 올라가도 다산초당은 보이지 않는다. 다산초당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산을 4분의 3정도 올라가서야 나타났다. 그때는 금방 올라갔는데…그게 벌써 이십년 전 자거라투스트라가 아직 젊었을 때의 일이니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씁쓸해 한다.

다산은 왜 이곳에 초당을 지었을까?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런 의문을 풀어보려고 다산초당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유배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강진읍 내에 있었다 하니까 굳이 이 외진 구석, 이름 없는 산 중턱까지 와야 했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물론 산에서 흐르는 물이 찻물로 좋기도 하겠지만 어디 좋은 물이 여기뿐이었을까? 다산초당을 오른 쪽으로 조금 돌아가면, 다산이 아마도 강진만의 푸른 들판과 은빛 갯벌을 동시에 바라보았을 장소가 있어 지금 거기에 누각을 하나 만들어 놓았으니 다산은 강진만을 보기 위해 여기 머물렀을까? 아니면 다산에게 다도를 가르쳤다는 초의선사가 다산초당이 있는 산 오른 쪽 중턱에 있는 작은 절(백련사)의 주지로 잠시 있었다니 서로 교유하기 위해 여기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산의 부인의 친정이 해남(해남윤씨)에 있었으니 그쪽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땅이 거기 있어서 그리 갔지 않았을까?

자거라투스트라가 그런 물음을 선배님에게 묻자, 선배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거야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유흥준 교수가 고민할 문제라는 것이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고민하지 말라 했는데, 남이 고민해 줄 문제를 우리 철학자가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거라투스트라는 언젠가 가까이 지내던 어느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분의 주장은 굳이 스스로 공부할 필요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과 술친구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가 알면 나도 아는 것이니 말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국민관광지’ 다산 초당을 휑하니 둘러보고 시끄러움을 피해 다산이 강진만을 바라보았던 곳에 가서 강진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유배라는 형벌이 제법 괜찮은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오늘에 되살리면 어떨까? 그래서 주로 학자나 예술가들에게 특별 형으로 부과하면, 좋지 않을까? 물론 국가가 밥과 잠자리는 제공해야 하겠지. 그러면 전국의 많은 시간강사들이 유배 형을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시대의 금기에 도전할 것이니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겠는가? 은빛으로 빛나는 강진만의 갯벌을 바라보다가 자거라투스트라는 잠시 몽롱한 오수에 빠졌다.
다산 초당에서 본 강진만의 모습, 비가 오려 흐려 은빛으로 빛나는 강진만의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2

다산 초당을 둘러본지 두 시간째 어느새 오후 세시나 되었다. 이제 점심 겸 저녁을 먹을 차례인데, 기대해왔던 꼬막은 어디서 파는지, 바닷가를 차로 실실 돌아도 눈에 띠지 않았다. 그럼 강진 시내에 들어가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무작정 강진시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갯벌이 있다고 다 꼬막이 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강진 시내에서도 꼬막집을 발견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꽃게탕을 한다는 집에 들어 배를 채웠다.

그런데 강진 시내를 돌아다니는 중 시인 김영랑이 살았던 집이라는 표시가 있어 밥을 먹고 바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새로운 발견을 한다는데, 김영랑이 여기 살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영랑의 집을 지나칠 수는 없지 않는가?

찾아가보니 영랑의 집도 국민관광지가 된 것이 틀림없다. 다 똑같이 만들어진 한옥이 이제 너무 식상하다. 국민관광지의 한 가지 특징이 있는 것 같다. 한옥에 두 종류가 있는데, 초가3간이 있고 기와3간이 있다. 약간 엘리트적인 느낌이 드는 인물은 기와 3칸으로 반면 약간 비엘리트적인 느낌이 드는 인물은 초가 3간이 배정된다. 중요도에 따라서 3칸 4칸 5간정도 크기가 조절된다. 나철 선생은 초가3간이다. 반면 영랑은 초가 5간이다. 실제 시인이었던 김영랑의 집이 5간이나 되는 너른 집(현대식으로는 약 40평정도)이었을까 의심스럽다. 이것을 통해 국민들이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랑의 집구석에 감나무가 있고 그 밑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실제 영랑의 시대부터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조경임에는 틀림없다. 아직 가을이 아니라 유감스럽게 장독대에 떨어지는 단풍잎을 볼 수 없었다. 세상에는 친화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화학적 친화성과 같이 이미지의 친화성도 있지 않을까? 얼음에는 팥을 쳐야지 콩가루를 칠 수야 없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감나무 잎이 단풍이 된다면, 그게 마루에 떨어질 수도 없고, 부엌에 떨어질 수도 없으니, 오직 장독대 외에는 다른 곳이 없지 않을까? 이런 장독대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누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지지 않을까? 영랑이 “오매 단풍들겠네” 라고 탄식할 때, 아마 그의 누이가 그 장독대를 닦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기에 저 산의 골짜기에서 시작한 단풍의 붉은 빛(골불)이 감나무를 거쳐서 마침내 장독대에서 일하던 누이의 발그랗게 상기된 얼굴에까지 번졌을 것이다.
모란과 감나무, 장독대가 어우러진 영랑의 생가의 마당

영랑의 집 앞에 비석처럼 생긴 바위에 그의 대표적인 시 ‘모란이 피기까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마당에는 모란이 심어져 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이 시를 민족주의적인 시로 해석하는 것을 기억했다. 차라리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설명했더라면 더 아름다웠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장미과에 속하는 모든 꽃들은 꽃이 떨어질 때 마치 목이 벤 듯 통째로 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장미도 무궁화도 그리고 동백도 꽃이 떨어질 때는 그처럼 목이 벤 듯이 떨어져 후드득 떨어진 꽃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처참하여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다. 그 점을 기억하면 모란이 피기까지에서 영랑이 이렇게 읊었던 이미지가 눈에 떠오를 것이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인터넷으로 확인해 본 해학 이기의 생가, 국민관광양식 초가 4간이다. 나철 선생 생가-초가 3칸-보다 한 등급 높다.

3.

식사를 하고, 영랑의 집까지 구경하니 벌써 다섯 시이다.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 서울까지 가려면 여기서 대 여섯 시간은 가야 하니까 말이다. 드디어 자거라투스트라는 차를 돌려 서울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차 안에서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 해학 이기의 절명시를 선배님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속도로 운전은 단조롭고 지루하기 때문에 감기는 눈을 깨워야 하기 때문이다.

형, 해학 이기의 고향은 어디에요.

글쎄 전라도 김제 어디라고 듣기는 했는데, 정확히는 몰라.

그러면 가는 길인데, 김제에 들렀다 갈까요? 근데 김제 어딘지 알아요?

몰라. 또 거기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시간이 되나?

 

글쎄요. 빨리 가면 해 지기 전에 김제까지 가지 않을까요? 형, 나철 선생과 해학 이기는 서로 친했어요?

매천 황현이나 홍암 나철은 모두 왕석보의 제자이고 낮은 벼슬이나마 중앙의 무대에 출사를 했으니 서로 가까웠을 것으로 짐작돼. 그런데 해학 이기는 김제에서 공부하다가 28세 되는 때 과거 시험을 포기하지. 게다가 상처도 하고 부친도 돌아가시고, 집안에 먹을 것도 없어 전국을 유리걸식하거든. 물론 선비니까 이 집 저 집 사랑방에 떠돌았겠지. 이때 그는 기왕의 유교와 선비라는 제도적인 틀을 벗어던지게 되지.

그래서요?

그때 대구에도 갔다가 천주교 신부하고 논쟁하면서 ?천주6변?이라는 글을 작성하기도 했지. 그때가 44세 즉 1891년이야. 그런 가운데 나름대로 개혁사상을 정립하는데, 1892년 45세 때 순창에 머무르면서 ?질제고?라는 책을 쓰지. 질제란 그의 호야. 그 다음 해 46세 1893년에 황현을 만나. 황현이 그를 구례로 초청한 거지. 아마 그때 왕석보의 제자들 틈에 끼어 있었으니, 나철도 만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데, 그때만 해도 세상에 절망해서 은둔해 버릴 요량으로 호를 남악거사라고 바꾸어 버렸어. 남악이란 곧 지리산이 아닐까 해.

형, 그의 개혁사상의 핵심은 무엇이에요?

그게 참 재미있어. 이어지는 해 1894년에 알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잖아. 이기는 이 혁명 앞에서 은둔해 버리려던 결심을 깨고 거꾸로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가담해서 처음 단순히 부패청산을 목표로 한 이 혁명을 그야말로 진정한 제도적인 혁명으로 바꾸기를 기도했지. 그래서 전주에 입성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을 만나러 전주에 간 거야. 그래서 자기의 개혁사상을 토로했지. 그 핵심은 바로 토지개혁이야. 토지를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주자는 주장이야. 그 방식은 공전제라고 하는데, 요새 말로 한다면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주장이지.

와 그때 그런 주장을 했단 말이에요? 대단한데…

그의 토지개혁론은 그가 실학 사상가 정약용의 여전제나 유형원의 한전론 등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제시한 이론이지. 실제로 그 후 60년 뒤에 이승만 시대 토지개혁이 유상몰수 유상분배였으니,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섰던 가를 짐작하지. 그는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을 몰랐지만 토지개혁이 부르주아 혁명의 핵심이라면 그가 바로 부르주아 혁명가이지.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힘으로 그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하려 했던 거지.

어마어마한데요. 소위 갑신정변도 꿈꾸지 못했던 혁명이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해학 이기를 다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전봉준이 만약 또 다른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김개남이 동의한다면 자기는 이기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김개남을 만나러 남원에 가는데, 이상하게도 더욱 혁명적이라고 알려진 김개남이 이기를 만나주지도 않고 체포하려 하지. 그래서 그는 간신히 탈출해서 도망하고 동학농민혁명 운동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어.

김개남이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에요?

그건 몰라. 연구를 좀 더 해야 하는데… 하여튼 그러고 나서 동학혁명 실패 후 일본군의 강압에 의한 정부 개혁에서 무언가 기대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보려 했지만, 한계를 깨닫고 3년 후 1898년 구례로 다시 내려와. 이때 그는 다시 황현 등과 어울리지. 1902년에는 ?급무8제의?라는 글을 써서 요긴한 개혁의 핵심을 고종에 건의하지만 동시에 시를 통해 고종의 무능과 대신의 비행을 비판했다가 수난을 당하지. 이때가 말하자면 재야 비판가로서의 활동이지.

그래서요?

그는 개혁운동에 점차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거든. 1904년2월 일제가 약간의 차관을 대가로 해서 항무지 개간권을 달라고 했어. 그때 황무지가 국토의 4분의 1정도니 엄청난 국토가 일제에 넘겨지는 거지. 이때 그가 나철과 더불어 보안회를 조직해서 반대하면서 일대 군중운동을 일으켰어. 그러자 정부는 이 보안회를 강제해산시키기도 했는데 어떻든 군중운동의 힘으로 일제의 간계를 막아냈어. 이 보안회가 나중에 대한자강회, 그리고 신민회의 핵심세력이 되고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니까 그의 역할이 짐작되지?

사상적으로 그는 입각점이 어디에 있어요? 여전히 유학자였나요? 실학 아니면 양명학?

그는 유학에서 잠시 묵자 쪽을 기웃거렸다가, 바로 양계초의 신민사상 쪽으로 넘어간 것 같아. 그 점에서 당시 개혁주의자들의 대세를 따른 셈이지.

 

4.

형 그러면 대종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어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데, 이 보안회 이후부터 그는 나철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활동하기 시작해. 1905년 을사조약 전에는 일본에 건너가 언론을 통해 비판운동을 하기도 하지만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1907년에는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조직 즉 자신회를 만들었어. 하지만 거사가 실패해서 주모자로서 그는 7년 형을 받았지만 고종이 감동받았던지 7개월 만에 풀려났어.

그런데요.

1908년 그는 ?일부벽파론?을 발표했지. 도끼를 들고 제도개혁을 주장한 거야. 그 도끼는 물론 내가 잘못이면 내 목을 도끼로 베라는 그런 의미이지.

정말 단호하군요.

그래 단호한 개혁사상가로서 그는 나철 선생 이상이야. 그러다가 1909년 나철과 더불어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창립하지. 그런데 1910년 나철 선생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자 그는 단학회를 발기하고 그 경전이 되는 ?진교 태백경?을 완성해. 그러고 나서 1909년 7월 1일 10 여 일간의 폐문절식으로 자진하고 말았다 해.

그게 좀 이상하네요. 왜 태백경을 지은 거죠?

글쎄 그건 좀 이상한데, 사상적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하거든. 최근 『환단고기』라는 책이 있잖아. 그건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에 가까운 것인데, 환인, 환웅, 단군의 시대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주장이지. 그 책이 최근에 발간되는 데는 복잡한 연원이 있는데 결국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책의 주요 내용은 해학 이기가 지었던 것으로 보여. 그렇게 본다면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화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면 이기는 단군을 역사적 영웅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해. 둘 다 민족애를 고취시키려는 시도였지만 종교와 역사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 사상가 해학 이기로서는 종교에 부담을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야.

이렇게 선배님의 강의를 듣는 동안 어둠은 깊어갔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 도저히 김제에서 해학 이기 선생의 생가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바로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10시, 피곤이 온 몸을 급습한다. 종교와 역사, 머릿속에는 이런 개념들이 마치 헬리콥터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소리치면서 맴돈다.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2)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1.

자거라투스트라는 난감한 가운데서도 요즈음은 각 시, 군에서 자기 고장 관광지도를 만들어 배포하니까 혹시 거기에 표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우선 휴게소를 찾아야 하는데, 보통 거기에서 관광지도를 배포하니까.

차는 순천 시내를 지나 금방 벌교의 벌판에 이른다. 광활한 논에는 파랗게 자란 벼들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바람은 순천만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듯하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는 순천만의 갈대 숲 사이로 흐르는 은빛 강물을 그려보고, 혀로는 오늘 점심으로 먹을 예정인 순천만 꼬막 맛을 느끼며, 눈으로는 도로 옆의 휴게소를 찾는데 여념이 없었다. 손과 발은 스스로 움직이면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으니, 모든 감각이 각기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기묘한 환각상태에 빠져들었다. 들뢰즈가 말했다는 파편화된 감각이란 것이 이런 상태를 의미하지 않을까? 이 상태가 어쩐지 환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는 마치 꿈속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피카소의 몽타주 그림이 떠올랐다. 옆자리의 선배님은 깊은 침묵 속에서 아마도 나철 선생의 사상을 의미하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교감한다. 공감각에 의한 공동의 세계가 차안에 넘치고 있었다.

드디어 벌교읍에 들어가기 직전 도로 옆에서 자동차 휴게소를 발견했다. 마침 벌교읍 관광지도가 마침 한 장 남아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급히 지도를 펼쳐 눈으로 나철 선생의 생가를 찾는다. 야호! 정말로 나철 선생의 생가가 표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도에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가 친절하게 표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이건 예상치도 않던 횡재이었다. 벌교에 오면서도 벌교가 바로 태백산맥의 무대였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태백산맥』을 생각하면 광활한 벌교의 벌판을 다시 보니, 이렇게 넓은 들판이라면 얼마나 많은 소작인들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그 순간 관광지도에 대해 느꼈던 고마움 때문에 관광지도에 드리워져 있는 절망의 그림자를 예감하지 못했다.

관광지도란 것은 한 장 속에 모든 관광지를 표시해야 하니까, 실제 지형을 상당히 왜곡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거라투스트라는 그 순간 이 평범한 진리를 잊어버렸다. 벌교를 찾아오는 거의 전부는 『태백산맥』의 흔적을 찾는다. 이 흔적은 시내 한 가운데 있는 부용산의 오른편에 위치한다. 거기에는 김범우의 집이며, 소화의 집, 그리고 읍내홍교가 표시되어 있다. 관광객들을 위해 이 부분은 확대되어 그려졌다. 반면 나철 선생의 생가는 부용산 왼편에 위치한다. 그런데 지도는 이 부분을 축소시켜서 나철 선생의 생가가 마치 읍내의 왼편 부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 걸어 다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시내 가운데 그려진 부용산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이다. 실제 나철 선생의 부용산 왼편에 있지만 무려 15키로 정도 떨어져 있다.

이 관광지도 때문에 자거라투스트라와 선배님은 부용산 자락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면서 여러 번 돌아다녔지만, 생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 혹시 부용산 산허리 어디에 있을까 하여 부용산을 걸어 올라 갔다. 부용산은 정말 이름 그대로 무척이나 예쁜 산이다. 『태백산맥』에서는 이 산에서 봉화가 오르는데, 그러면 정말 꽃봉오리처럼 보일 것 같다. 높이는 한 400미터 정도이다. 그런데 이 부용산을 거의 다 올라가도 유적지라는 것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나철 선생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혹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실상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부정확한 정보 때문에 10분이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나철 선생의 생가를 찾는데 무려 두 시간이 걸렸다. 자거라투스트라는 포기하려고 할 무렵, 마지막으로 지도상에 표시된 나철 선생 생가 가까이 있는 벌교 소방서를 GPS 기계에 넣어보았다. 나철 선생에 관해서는 일자무식이던 GPS는 벌교 소방서는 단숨에 알아보았다. 소방서를 찾으면 바로 거기에서 나철선생 생가를 찾을 수 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리하여 다시 기계에 몸을 맡기고 소방서를 찾아가보니 부용산 자락을 왼쪽으로 돌아서 무려 15 키로 이상을 돌아가서야 나철 선생의 생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두 시간 동안 헤매는 동안, 자거라투스트라는 어떤 깊은 절망감에 사로 잡혔다. 프랑스의 어떤 늙은 여배우는 혼자서 살다가, 접시를 깨뜨리자 절망감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때 여배우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될 것 같았다.

 

2.

동네에 들어가자, 나철 선생의 유적지 표시가 보인다. 무슨 유적지인가 했더니 나철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나철 선생의 생가는 동네 한 가운데 있다. 이제 비로소 나철 선생의 이름이 알려진 듯 생가는 새로 조성 중에 있었다.
나철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1990년 3월 1일에 세웠다고 한다. 사진을 확대하면 대개 어떤 말인지 짐작될 것이다.전국 어디서나 위인들의 생가는 다 똑같다. 삼간 기와집, 나철 선생의 생가도 꼭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위인 생가의 기본 설계도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철 생가는 새로 지은 기와집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미처 공사가 마무리 안 된 듯 땅 바닥에는 아직도 시뻘건 황토가 내팽겨져 있었다. 물론 안내인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개들이 낯선 사람을 보고도 짖지 않으니 아마도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후일을 위해 사진을 찍어 두고 선배님은 방에 모셔져 있는 나철 선생의 영정에 절을 한다. 짱구가 튀어나온 나철 선생의 인상은 단호하기가 겨울날의 얼음처럼 느껴진다.
선배님의 나철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지극하다.결국 찾아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읍내에 들어가서 『태백산맥』의 무대를 밟아보고 다시 순천만 쪽으로 가서 꼬막 맛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배님이 거기서 강진 다산초당이 얼마나 먼지를 물어본다. 어림대중으로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을 거라 하니, 그러면 그리 가자고 한다. 이까지 왔으니 다산초당은 꼭 보고 가고 싶다는 것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우리나라에서 화엄사와 다산초당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며 그 소수에 선배님이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아침을 늦게 먹었으니 점심 겸 저녁을 거기 가서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순천만의 꼬막만 꼬막일까, 강진만의 꼬막도 꼬막이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보성을 지나 강진만을 향해 출발했다. 길은 사차선 자동차 전용 국도, 호남지방의 도로가 다 그렇듯이 여기도 텅 비어 있다. 차를 몰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물었다.

형, 대종교는 요새도 신도가 있어요?

그저 단군할아버지를 조상신으로 모시고 있는 종교, 민족주의적인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종교, 고조선 시대가 실재한다고 믿는 종교, 그러나 실상은 조상숭배의 일종인 종교, 그것이 자거라투스트라가 알고 있는 대종교이다. 요새 누가 이런 구닥다리 종교를 믿겠는가?

대종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가장 주요한 단체를 이끌었지. 청산리 대첩을 이끌어낸 북로군정서가 바로 그건데, 알지? 그런데 이런 독립운동 때문에 오히려 대종교의 종교성이 사상적으로 간과되고 그저 국조 숭배운동으로만 격하되고 말았어.

그러면 대종교의 종교성은 어디에 있어요?

글쎄 나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흥미로운 특징이 있어. 대종교는 3분법을 중요시해. 대개 모든 사상은 이분법이잖아. 유교가 그렇거든. 태극, 무극, 음양, 4괘 등. 서구 구조주의도 이항 대립을 기본 골격으로 삼는다 하더라. 그런데 여기는 3분법이야. 대종교의 가장 주요 저서가 『삼일신고』인데, 셋이 하나이라는 주장이 그 핵심이라서 책 제목이 ‘삼일신고’이거든.

셋이 하나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삼신(三神)일체라는 뜻이지. 한배검(신)은 곧 환임(인), 환웅, 환검(단군)이라는 거야. 이 신들은 역사적으로 등장한 순서에 따라 나열된 신들의 계보가 아니야. 이 신들은 하나의 신 즉 한배검의 세 가지 위격이지. 환임은 조화의 신이고, 환웅은 교화의 신, 한검은 치화의 신이지.

뭐, 기독교의 삼위일체설하고 비슷하네요. 성령과 성신과 성자.

그러게 말이야.

기독교의 영향이라 보아야 하나요?

글쎄, 대종교 자신은 상고 시대의 종교의 부활이라 하지만, 사실은 20세기 초에 발생한 종교로 보이는데, 그러니 기독교 영향을 배제할 수가 없겠지. 마치 동학처럼 말이야. 그런데 왜 굳이 삼위일체설을 빌려 올 생각을 했을까? 그게 멋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형도 아시겠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은 그리스도가 인간이면서 신이라는 이중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리이잖아요. 삼위일체설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신적인 지배 질서를 보존할 수 있었죠. 결국 기독교는 종교이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유일한 종교가 된 거예요. 헤겔은 그래서 기독교가 중세에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을 사상적으로 보존해 왔다고 주장하죠. 이렇게 자유의지와 신의 질서를 종합하면, 세계의 타락과 신의 정의도 통일될 수 있죠. 전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한 타락이고, 후자는 신적인 질서의 관철이죠.

교주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많지 않나? 하지만 그런 종교가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는데…..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과 인간이면서 신인 그리스도라는 개념과는 좀 다르지 않아요? 신의 아들이란 자신의 신성을 가정하는데, 그것은 인간 속에 있지만 인성과는 독립된 본성이죠. 이 인성은 언젠가는 신성에 의해 사라져야 할 것이죠. 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에 영향을 많이 끼친 배화교가 그렇지요. 그런데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에서는 인성이 그 자체가 신성이라는 주장이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혁명적인 주장이죠. 예를 들어 육체적 욕망이 그 자체로서 신의 뜻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잘 모르겠는걸. 그런 주장은 불교에서 평상심이 곧 도심이라는 주장과도 비슷하네. 동학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주장도 그렇고. 그런데 삼위일체설에 대한 그런 해석은 기독교를 너무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글쎄요. 사실 기독교는 신성과 인성의 분리와 통일, 배화교와 삼위일체설 사이를 오가죠. 그 사이 어느 지점에 기독교의 제 분파들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신교는 신성의 분리 쪽으로 더 다가가고, 반면 구교는 신성과 인성의 통일 쪽으로 더 다가가죠.

그렇구나. 하여튼 대종교에서 이런 삼분법이 마치 만화경 속에서처럼 계속 확대재생산 되거든. 인간을 설명할 때가 특히 그래. 인간은 3眞과 3忘과 3途를 가지고 있어. 3진이란, 다시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곧 성, 명, 정으로 이루어지지. 그것들은 자체 내에 어떤 대립을 가지지 않는 것들이야. 이 각각이 내부에서 구별을 가지면, 이제 3망이 되지. 그래서 성이 선, 악으로 나누어지면 心이야. 명이 청, 탁으로 나누어지면 그게 기이고, 다시 정이 厚, 薄으로 나누어지면 그게 身이야. 이 3망이 도착적으로 되면, 그게 感, 息, 觸인데 그 각각은 모두 6가지로 이루어져 있어. 그 외에도 모든 교리에 3이 기본 단위가 되어서 항상 그 배수로 진행되거든. 마치 3이라는 숫자가 대종교에서 자기 증식을 하는 것 같아.

그거 참 신기하네요.

예를 들어 성이란 선도 악도 아니야. 이것은 본질태이지. 그런데 이 성의 현상태가 마음이야. 그런데 이 마음은 선, 악으로 나누어지거든, 그러면 깨달음의 논리가 이렇게 전개되지. 우선 우리는 수련을 통해 악한 마음에서 선한 마음으로 나아가야지. 그런데 그것만으로 부족해. 선하다, 악하다는 것조차 넘어서야만 비로소 그 마음의 본성에 도달하지. 이런 설명은 불교의 공론에서 주장한 것과 같다. 유에서 무로, 그리고 유도 무도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논리가 공론이잖아.

그것 참 흥미롭군요. 어떻게 수행하는지 아세요?

몰라. 주요한 것은 대종교 속에 인간을 설명하는 어떤 새로움이 있다는 거지. 아직까지 아무도 연구해 보지 않았는데, 나도 지금 연구 중이야.

김지하 선생은 한국의 사상의 특징이 3박자라고 해요. 서양음악의 기초는 2박인데, 한국음악의 기초는 3박이라는 거죠. 이런 3박에 맞추어 한국사상도 전개되었다 해요. 그런 3박의 개념이 대종교에도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글쎄, 하여튼 대종교가 특이하기는 해.
대종교의 주요 경전인 천부경이 새겨져 있는데, 자거라투스트라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차 안에서 토론 하는 사이, 차는 마침내 강진만에 도착했다. 다산초당 앞에 펼쳐진 강진만은 푸른 들판과 어울려서 싱싱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1)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사업단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자거라투스트라는 오래 전 선배님과의 한 술자리에서 전남 보성 벌교읍에 가보자고 약속했다. 선배님 말씀으로 거기엔 홍암 나철 선생의 생가가 있다는 것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처음에 시원스럽게 약속했지만, 사실 꼭 가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도대체 벌교라면 저 멀리 남쪽 바다 끝이 아닌가?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땅 끝’이라지? 다행히 선배님이 술자리에서의 약속이라 생각하신 듯 독촉하지 않으니 자거라투스트라도 그런 약속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여름방학도 끝나갈 무렵, 선배님과 우연히 다시 술을 먹는데, 나철 선생 이야기가 또 나왔다. 선배님이 최근 ‘한국현대사상사’를 쓰셨는데 거기 나철 선생도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나철 선생을 계룡산의 신흥종교의 어떤 교주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는데, 선배님의 말씀 가운데는 은근한 존경심이 감추어져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방학 동안 꼬박 집에만 붙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핑계 삼아 시원한 바다 바람이나 쏘이자 싶어, 그럼 바로 떠나가자고 했다. 선배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 뒤 말을 자르고 그러자고 하는 바람에 마침내 자거라투스트라는 벌교까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약속한 날 아침에 자거라투스트라는 세미나가 있어 그걸 다 마치고 떠나려니 벌써 오후 3시였다. 서두르면 순천 근처 갯벌까지 갈 수 있겠지? 거기는 꼬막 천지인데, 꼬막안주에 소주 한잔이면 그까지 간 보람도 있겠네. 이렇게 생각하니 자거라투스트라는 어릴 때 소풍 떠나는 심정으로 되돌아 간 듯했다.

떠나자마자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형, 나철 선생은 왜 자결했대요?

자기의 숨을 스스로 막는 선도의 수행법이 있는데 폐기법이라 해. 나철선생은 그렇게 돌아가셨어. 구월산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국문학자 김두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수행했는데, 드디어 1916년 8월 14일이 되었지. 그날 선생은 앞으로 사흘간 혼자서 수행할 것이니 누구든지 들어오지 말라 하셨지. 사흘이 되어도 아무 기척이 없자, 제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자진 하셨지.

그러면 유서는 없었어요?

있지. 순명시를 남기셨어. 동포의 참혹한 고통 보면서 “이들의 죄를 대신 받겠다.”고 기록하셨지. 즉 원래 죽어야 할 자, 즉 일제겠지. 일제를 대신해서 죽으니, 한을 조금이라도 풀라는 뜻이지. 동포들 보고 나의 몸뚱아리를 씹어 먹으며 자신들의 분을 풀라는 것이지. 기가 막힌 자살시이지?

한을 풀라는 것이에요? 아니면 내가 죽었으니, 너희도 죽음을 무릅쓰라는 거예요?

흠, 그런데 대종교는 1909년 음력 1월 15일 중광절에 창시되거든. 처음에는 단군교라 했는데, 일부 세력이 오히려 친일 쪽으로 빠지면서, 1910년 8월 5일에 들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지. 그러다가 1914년 5월 13일 만주 화룡현 청파호에 본부를 옮겨. 그는 이미 일제의 대종교 탄압을 예상한 듯해. 정말로 1915년 일제는 종교통제안을 발표해서 대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위장된 독립운동단체라면서 탄압하기 시작했지. 1916년 나철 선생의 자진은 일제의 이런 종교 탄압에 대한 항의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튼 그러면서 예언시도 남겼는데, 앞으로 북방의 이리와 남방의 원숭이가 싸울 것이고, 그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예언하셨대.

북방의 이리나, 남방의 원숭이가 무엇을 의미해요?

글쎄, 어떤 사람은 소련과 미국을 의미하고, 그래서 남북전쟁을 예언했다고도 보지. 순 억지지. 남방의 원숭이라면 당장 일본을 생각해야 할 게 아닐까? 그러면 러일 전쟁 또는 소일 전쟁을 예견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선배님과 차안에서 대화하는 동안 자거라투스트라는 자기도 모르게 대화에 빠져 길을 놓쳐 버렸다. 허둥지둥 길을 다시 찾아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고속도로에 들어가는데 그만 모든 진이 빠져 버렸다. 게다가 서울 천안 사이의 길은 항상 그렇듯이 지체와 정체를 거듭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차를 몰면서도 생각에 골몰했다. 그의 생각은 자진한 나철 선생의 운명과는 거리가 지극히 먼 생활상의 긴박한 문제였다. 본래 순천 갯벌에서 한잔 하려던 기획은 시간상 불가능하다. 그러면 오늘은 어디에? 자거라투스트라의 머리에 갑자기 지리산이 떠올랐다.

형, 온천해 볼래요? 시간상 오늘은 구례까지 밖에 못가요. 내일 아침 거기서 바로 순천으로 가는 고속화도로가 있으니까 벌교엔 내일 갑시다. 또 온천 랜드 가면 멋진 찜질방이 있어요. 제가 지리산 갔다가 내려와서 잤던 적이 있거든요.

찜질방에 잔다는 것에 대해 선배님은 거부 반응이 없어 보인다. 값이 싸기는 하지만, 찜질방에는 코고는 놈, 잠꼬대 하는 놈, 이가는 놈들이 많아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닌데….

천안에서 전주 쪽으로 빠지자 도로는 갑자기 텅 빈 듯했다. 이걸 차별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축복이라 해야 하나? 자거라투스트라는 애매함을 느끼면서도 텅 빈 도로 위에서 엑셀레이터를 밟기 시작했다. 이미 8월 말, 날은 차의 속도만큼이나 빨리 저물어 갔고 날이 저무는 만큼 차도 빨리 달려갔다. 어느새 구례 그리고 지리산 온천 랜드이다.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찜질방을 찾아 갔다. 찜질 방 옆에 자그마한 주막이 있어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과 막걸리를 굽고 삼겹살을 비웠다. 주막의 주모가 이 한 여름에 온천을 찾아온 우리들을 이상한 듯 쳐다본다. 정말 온천 랜드는 텅 비어 있었다. 아울러 찜질방도 거의 선방 수준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한없는 고요를 배게 삼아 꿈도 없는 잠을 달게 잤다. 새벽에 깨어나 보니 어렴풋한 새벽 빛 속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선배님이 구례 화엄사를 본 적이 없다 하기에 거기 홍매화가 있는데, 딴 것은 볼 것이 없고 그 매화는 꼭 보아야 한다고 우기면서 선배님을 모시고 갔다. 화엄사 앞에서 아침을 먹는데, 식당 주인이 관광지도를 전해 준다. 선배님이 그 지도를 보더니 갑자기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단다. 매천사라는 곳이다. 한말 선비 매천 황현이 순국하신 곳이다. 선배님은 밥을 먹다 말고 이 기막힌 우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매천 황현, 그리고 홍암 나철은 모두 왕석보라는 선비의 제자였어. 왕석보가 바로 구례 출신이야. 우리가 우연히 들른 이 근처 어디일꺼야. 그러데 왕석보의 제자로 또 한 분이 있지. 그 분이 바로 해학 이기라는 분이야. 매천은 광양 사람이고, 해학은 김제 사람이지. 그리고 나철은 벌교 사람이고, 모두 이 구례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어. 이 지리산 자락의 구례가 그들의 정신적 고향인 셈이지.

형, 왜 하필이면 구례인가요?

글쎄, 그걸 몰라. 이 근처에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뭔가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

그렇네요. 화순에 운주사라는 곳이 있는데 좀 신비해요. 이 근처는 미륵의 전설이 얽힌 곳이 많아요. 김제 금산사도 그렇구요. 소위 장소라는 개념으로 이 동네를 좀 연구할 필요가 있겠네요.

그런데 세 사람은 정치적으로 보면 다 달라. 매천은 전통 성리학을 고집하신 분이지만 양명 쪽도 가까이 하신 것 같아. 나철은 개혁주의자 반계 유형원을 사숙하고, 김윤식의 문하에서 활동했으니까, 실학 쪽을 계승한다 보아야겠지. 그런데 이기는 폭이 넓었어. 나중에는 진화론을 수용하여 신민론자 또는 자강주의자가 되지. 그런데 셋 다 자결했다는 데 공통적이야. 해학이 가장 일찍이 1909년 곡기를 끊고 자결하고, 이어서 매천이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아편을 먹고 자결하고, 마지막으로 나철이 1916년 숨을 막아 자결했어.

거참 형, 같은 선생의 제자들이 모두 자결했다니, 놀랍군요. 스승이 철학을 자결 연습으로 가르치신 게 아닙니까? 소크라테스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자결할 때 남긴 말도 비슷한가요?

매천 역시 절명시를 남겼어. 그런데 핵심은 인간 세상이 지식이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이었지. 약간 지식인의 책임감을 보이기는 하지만 절명시 치고는 좀 신세타령 투야.

해학 이기의 유언에 대해 묻기 전에 아침 식사가 끝났다. 우리는 곧바로 화엄사의 홍매화를 찾아갔다. 화엄사의 분위기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잘 어울렸다. 꽃이 진 홍매화는 각황전 옆에 서 있었지만,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고 그 스스로도 그런 고독을 즐기는 듯했다.
각황전의 돌사자 석등 오른 쪽 뒤편에 보이는 나무가 화엄사 홍매화이다. 봄이 되면 눈부신 매화가 피어난다.화엄사를 나와 자거라투스트라는 매천사로 가보았다. 다행히 GPS덕분에 힘들지 않고 찾을 수 있었으나, 이 시대 누가 매천을 찾으리. 매천사의 문은 두꺼운 열쇠로 잠겨 있었다. 사당 문이 열리면 순국하신 선생님께 절이나 하고 돌아갈까 하여 안내인을 찾으나 안내인도 보이지 않는다.
매천사의 사당을 담장을 넘어 찍어 보았다.

하는 수 없이 자거라투스트라는 서둘러 나와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벌교로 간다. 일사천리로 간다는 말이 정말로 실감난다. 텅 빈 거리는 속도 제한도 없어 정말 달리기 좋다. 차는 곧 순천을 벌교에 다다른다. 벌교 근처에 이르러 비로소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물었다.

나철 선생의 고향이 벌교읍 어디쯤인지 알아요?

선배님은 태연하게 말한다.

벌교읍에 가면 알 수 있다 했어.

아니 이럴 수가 아뿔싸. 자거라투스트라는 후회가 막급이다. 선배님만 믿고 나철 선생에 관해 전혀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고 떠났던 것이다. 급하게 GPS를 누르는데 나철, 홍암, 대종교 그리고 심지어 자결 등 아무리 집어넣어도 GPS는 묵묵부답이다.

 

자거라투스트라, 역사법칙에 내기를 걸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너 이놈, 자거라투스트라야, 감히 내기를 걸다니?

아, 니체 아부지, 어떻게 아셨어요?

이놈아, 니가 어제 밤 술 먹고 들어와서 중얼거리지 않았더냐? 박근혜가 대통령되면 니가 백만 원 따게 되었다고 히히닥거렸지.

아, 그랬나요? 맞아요. 어떤 후배의 농간(?)에 넘어가서 그만 내기를 걸고 말았죠? 박근혜 떨어지면 그 백만 원 가지고 잔치 벌리죠 뭐.

아이고, 이 멍청한 놈, 그런 내기는 일종의 패배주의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겠니? 그게 진짜 죄악이지. 근데 자거라투스트라야, 박근혜가 된다는 근거라도 확실하냐?

니체 아부지, 제가 철학을 했지 어디 점술을 배웠겠어요? 그러니 그걸 어찌 제가 알겠어요. 다만 거꾸로 생각한 거죠. 지금 박근혜의 대항마로 나오는 사람들이 너무 한심해서 말이죠.

자거라투스트라, 너보다야 더 한심하겠니?

저야 공부하는 사람인데 비교가 되나요? 하지만 그들은 어떤 정치적 비전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그게 너무 한심해서 제가 그런 내기를 한 거죠. 그런데 아부지, 니체 아부지. 도대체 정치란 무엇입니까?

야, 이놈, 내가 공자님이냐. 그리고 니가 무식한 자로(子路)이냐? 그런 식으로 묻게? 하지만 내가 생각해 본 것이 있는 데… 말하면 니가 알까?

제가 서자이지만 그래도 아부지 아들 아닙니까? 말씀 해보세요.

니도 알겠지만 다윈 선생한테 내가 배웠지만, 진화란 일종의 자연선택이 아니냐. 자연은 다양한 변이를 만들어. 상황이 변화하면 거기 맞는 변이를 선택해 지속하려 한다면서? 나머지 변이는 더 이상 쓸 데 없으니 진화의 시궁창이 속으로 내 던져지고 말지. 마찬가지 아닐까? 정치라는 것도? 정치가들도 다양한 변이를 미래의 프로그램으로 준비하고 있겠지. 그런데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그 중의 하나가 선택될 거야. 그러면 나머지는 정치인들은 전부 역사의 불구덩이에 내던져지고 말지. 정치가들은 자신이 선택될지를 모른 채 하나의 변이를 준비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역사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불쏘시개에 불과한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겠지. 그게 정치가의 ‘운명’이 아닐까? 정치가는 그런 운명을 짊어지는 운명애적 존재가 아닐까? ‘아모르 파띠’, 그게 내가 늘 부르짖던 것이잖아.

아부지 말씀은 꼭 헤겔이 역사이성과 영웅과의 관계에 대해 말한 것과 같네요. ‘이성의 간지’라는 말씀이죠? 하지만 정치와 자연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마르크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에 우여곡절과 전전반측이 있지만 어떤 큰 흐름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정치가는 이런 큰 흐름을 미리 예측하고 바로 그 흐름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요? 소위 역사의 전위라는 말이죠. 그런 예측적인 선택을 정치가의 ‘모럴’이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정치가의 패배는 운명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의 결과일 뿐이니, 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겠죠.

정치는 모럴이 아니야, 운명이라는 거지. 자거라투스트라야, 니는 아직도 역사의 법칙이란 게 아직도 있다고 믿느냐? 마르크스의 법칙이란 19세기 역사를 통해 포착한 것이지. 그때는 소위 세계라는 것이 없었어. 그저 민족국가만이 있었지. 자본주의의 민족국가적인 발전 단계였던 거지. 그런데 오늘날 21세기,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형성되어 있는 이 단계에서, 이제 그런 역사법칙이란 의미 없지 않을까?

세계사가 성립한다고 역사법칙에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씀이 이해되지 않네요.

거 봐라. 니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 않았더냐.

아, 아부지, 저도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해 보았어요. 아부지 말이 이런 거죠? 제가 설명해 볼게요. 국제자본은 일국의 자본주의를 넘어선 국제적 차원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거죠. 이런 구조 속에는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지구적 차원에서 분산되어 있다는 거죠. 그래서 한쪽이 문제되면 다른 쪽에서 문제를 풀어가면서 전체적으로는 국제자본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킨다는 거죠?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에 가까운 주장이시죠?

내가 뭐 그렇게 어려운 주장을 한 것은 아니고, 하여튼 그런 거야 IMF를 겪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냐? 그런 단계에서 역사법칙 운운하다니 자거라투스트라야, 어는 어느 시대 사람이냐? 나보고 19세기라 하는데, 니야 말로 19세기가 아니냐?

아부지, 곰이 롤러코스트를 타고 재주를 피운다더라도 언젠가 떨어진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 아니에요? 그건 필연적인 사건이죠. 마찬가지로 국제자본이 두 손으로 5개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을 하더라도 언젠가 하나는 놓치고 말죠. 5개 돌리다가 4개를 돌리더라도 국제자본이 돌아야 가겠지만, 한 개 떨어뜨린 공은 어떻게 되나요? 거기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저는 지난번 중동에서 일어난 자스민 혁명이 바로 그런 거라고 보아요. 그 중동이란 것이 국제 자본이 돌리던 공 중의 하나였는데, 그만 떨어뜨렸던 거죠. 그 사이에 혁명이 터졌구요.

글쎄다, 그게 무슨 혁명인지 모르겠는데, 자스민 혁명이 성공한 이집트에는 지금 군부가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사살한다 하더라.

아부지, 저는 그저 그런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한 거지, 반드시 성공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잖아요.

자거라투스트라야, 역사법칙이란 구시대 유물을 고집하려고 너무 어려운 논리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냐? 그냥 역사에 법칙이 없다고 보면 아주 단순하잖아. 그리고 모든 이론이란 것이 단순한 거구. 역사에 법칙이 없다면 나쁠 게 무엇이 있니? 니들 철학자들이 먹고 살게 없어서 좀 안 되긴 했지만, 니들 철학자들을 먹여 살리려고 우리가 머리가 아파야 하겠니?

아부지, 역사법칙이 없다면, 세상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역사법칙이 없다면, 무엇이 역사를 지배하겠어요? 결국 힘이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힘이 정의죠. 그래도 사람들이 살아갈 희망이 있을까요? 언젠가 이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투스트라야, 그게 바로 종말론이라는 거야. 니들이 역사가 심판해 줄 거라는 거지. 이 세상의 부정의와 고통과 학살을 신 대신 역사가 심판한다는 주장이 바로 ‘역사법칙론’이라는 주장의 실질적인 의미가 아니냐? 역사에 종말은 없어. 그걸 모르겠니? 그건 기독교가 뿌려놓은 아편이지. 신이 아편이 아니야. 종말이 온다는 믿음이 아편이지.

아부지, 니체 아부지, 아부지가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아편이 아닐까요? 아부지의 말씀은 절망이죠. 우리 모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절망이라는 아편이죠. 아부지, 사르트르는 잠들기 가장 좋은 방법은 잠 든 척 하는 거라고 말했대요. 실제로 잠 든 척하다보면 잠 들 거라는 거죠. 우울증 환자는 세상을 우울하게 보기 때문에 더욱 더 우울하게 된다고 하죠. 실제로 그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으니까요. 마찬가지 아닐까요? 역사에도 법칙이 있다고 우리가 믿는 다면 실제로 역사에 법칙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믿음이 존재를 만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 놈아, 그런 놈이 왜 진다는 내기를 했단 말이냐? 진다고 믿는다면 결국 지게 될 거 아니냐? 그러니 니가 패배주의를 선동했다 하는 거야. 알겠니?

자거라투스트라 박헌영을 만나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박헌영 선생님, 무고하신지요? 거기 계신 곳이 천당인가요?

글쎄요. 자거라투스트라씨, 여기가 천당인지 지옥인지 잘 모르겠소. 하느님은 ‘저 세상’에서 누구나 그의 소망을 실현시켜 주시지요. 그러니 여기가 천당이 맞을 거요. 예를 들어 살아있을 때 술을 좋아했던 사람은 죽어서 영원히 술을 먹도록 해 주시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시오. 영원히 술만 먹으라 하면, 그게 지옥이지, 뭐가 아니겠소. 하느님의 자비는 곧 하느님의 심술일 거요.

그러면 소망을 바꾸면 되지 않아요?

자거라투스트라씨, 아직 안 죽어서 모르시는 모양이군,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소망을 바꾸지 못해요. 그게 죽는다는 것이요.

그러면 박헌영 선생님은 거기서 무얼 하세요?

하느님은 나에게 저 세상의 정권을 잡도록 해 주셨소. 그래서 내가 지금은 ‘저 세상’ 한반도 통일국가 주석이요.

드디어 소원을 이루셨군요.

글쎄. 방금 말했잖소. 소원은 이루었지만 그게 소원의 성취가 맞는지는 모르겠소. 왜냐하면 여기 ‘저 세상’에서는 권력은 무의미하기 때문이요. 하느님께서 이미 모든 사람의 소망을 실현시켜 주셨으니까요.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어요. 찾아오는 사람도 없죠. 게다가 여기는 죽는 사람도 없소. 이미 모두 죽었으니까. 따라서 겁박당하는 사람도 없소. 그러니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여기는 사람들이 왕이 왕인지를 모르고 지내요.

그러면 박헌영 선생님, 거기서 이 지상 세계의 소식은 듣나요?

그럼. 항상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나 보고, 듣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어라도 들을 수 있소. 하지만 굳이 내려다 볼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못하오. 나만 그런 게 아니요. 여기서는 다들 그래요. 제상을 차려 놓으면 뭐 먹을 게 있나 가볼까 하다가도, 가 봐야 어느 집안이나 신세타령만 잔뜩 보고 들으니 요새는 여기 ‘저 세상’ 사람들은 다들 제상 보기를 돌보듯 하오.

그러면 요새 박헌영 선생님에 대해 재평가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도 모르시겠네요?

역사가들이 밥 벌어 먹고 살려고 때로 이렇게 평가했다가 때로 저렇게 평가하는데, 내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것들을 일일이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소? 근데 자거라투스트라씨는 웬 일로 나를 찾아 왔소? 벌써 죽으려고 미리 준비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박헌영 선생님, 저야 아직 죽을 생각은 없어요. 제가 이대 출판사하고 계약을 맺어서, 박헌영 선생님의 사상에 관한 책을 쓰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요즈음 이런 저런 자료 수집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새로운 평가들이 많이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정작 선생님은 그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한번 알고 싶었어요.

어디 어떤 평가인지 들어나 봅시다.

제가 요즈음 발견한 건데, 여러 가지 평가가 달라졌더군요. 그 중 한가지만 말하고 싶어요. 종파투쟁이라는 것이죠. 일제시대 ‘조선공산당’이라하면 종파투쟁 때문에 망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평가되어 왔었죠. 심지어 종파주의 때문에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해체된 이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중에서도 종파투쟁이 그치지 않았다고 하죠. 나중에 해방이후 남로당이 세워질 때 박헌영 선생님은 아예 일개 종파인 ‘경성콩그룹’ 빼고는 모두 배제시켰고 결과적으로 박헌영 선생님도 종파주의의 책임을 지고 숙청되신 걸로 아는데요?

저런 무식하기는, ‘경성콩그룹’은 종파가 아니고 정통이요. 종파와 정통을 그렇게도 구분 못해요? 실례지만 자거라투스트라씨, 그 머리로 무슨 철학을 하겠소?

죄송합니다. 박헌영 선생님, 하여튼 화내지 마세요. 제가 박헌영 선생님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그런 견해가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지요. 최근 성균관대 임경석 교수가 초기 사회주의를 연구하면서, 이런 종파주의의 책임이 조선 공산주의자한테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어요. 조선 공산주의를 지도하는 지도선 자체가 사실은 혼란스러웠다고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연해주 지역에 있던 소련 극동공화국 고려국에서는 상해파를 지지하고, 반면 코민테른 동양부에서는 이르크츠크파를 지원했다고 해요. 박헌영 선생님은 이르크츠크파이셨지요?

물론 나야 코민테른의 지시를 금과옥조로 여겼지요. 코민테른이야말로 정통 아니요. 소련 극동공화국 정부는 나중에 이단으로 해산된 정부인 줄 모르시오?

아 저도 임경석 교수의 책을 읽고 비로소 알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코민테른 동양부로 지시를 일원화 시켰지만 이번에는 코민테른 내부에서 혼란이 생겼다 하지요. 스탈린파와 비스탈린파 사이에 갈등이 생겼죠. 그래서 지시가 엇갈려서 어느 지시를 따를 지 혼란스러웠다고 해요.

하여튼 나 박헌영은 그 중에서도 항상 정통만 골라서 따랐소.

박헌영 선생님, 임경석 교수는 이런 혼란이 결국 민족주의의 문제였다고 합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는 반민족주의이었지요.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족주의하면 2차 코민테른의 제국주의 전쟁 참여, 나치즘과 파시즘 생각부터 나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레닌이 1922년 코민테른 2차 대회이후 민족주의를 받아들여, 서구 사회주의와 아시아 민족주의 사이의 국제적 동맹을 추구하면서부터 마르크스주의 내부에 혼란이 발생했다고 해요.

맞았소. 그 결과 중국에서 1924년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소. 그런데 1927년 4월 장개석의 상해쿠데타로 공산주의자들이 숙청되자, 분위기가 바뀌었소. 여기서 스탈린파와 비스탈린파 사이에 갈등이 생긴 거요. 스탈린은 민족주의를 긍정하고, 비스탈린파는 민족주의를 부정했다 해요. 그때만 해도 코민테른에는 비스탈린파가 우위에 있었고. 코민테른은 1928년 6차 대회 이후 민족주의가 위험하다는 생각했소. 그때 코민테른의 지시는 민족주의를 폭로하라는 것이었소. 대중들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떼어놓으라는 것이요. 그런 지침을 가장 충실히 따른 게 우리요. 그게 바로 이르크츠크파이고, 조선의 화요회파이고, 나중에 ‘경성콩그룹’파이요. 그래서 우리가 정통이라는 거요. 이젠 아시겠소?

그럼 박헌영 선생님,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지미트로프가 새로운 테제를 제시했던 거는 아세요? 그때 그 테제는 서구에서는 인민전선을, 아시아에서는 민족통일전선을 하라는 거였어요.

물론 내가 왜 모르겠소. 코민테른이 바뀌면 그걸 따라야 하는 거는 당연하지 않겠소. 그게 정통노선이거든.

그런데 박헌영 선생님, ‘경성콩그룹’이 중심이 되고, 선생님이 지도한 해방이후 남로당은 결코 그런 노선이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요? 바타협적인 투쟁 노선, 혁명적 대중노선이라고 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은 거부하고, 내부에서도 콩그룹 일색으로 꾸려가지 않았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발표한 8월 테제를 보시오. 민족통일전선을 강조한 거 아니요? 다만 이론과 달리 실제에서 우리나라에서는 해방이후 합작할 만한 부르주아가 없었어요. 우리나라 부르주아들은 대개 일제에 투항했소. 비타협적인 투쟁을 견지했던 민족주의자들은 얼마 안 되고, 그들은 정견이 고루하기 짝이 없었고, 더구나 우리를 적대해서 합작할 수 없었을 뿐이요. 게다가 경성콩그룹을 빼고는 일제시대 다 전향하지 않았소?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들과 당을 같이 하란 말이요?

박헌영 선생님, 노여워하지 마세요. 제가 최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문제를 바라보다 보니, 그 옛날 종파투쟁이 아직도 전개되는 것 같아서, 그래요. 임경석 교수는 조선공산당의 종파투쟁을 이론적인 차이에로 귀결시키려 했는데, 표면적으로 보면 결국 이번에도 민족주의가 문제더군요. 민족주의의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고, 이어서 민주당과 같은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관계의 문제이죠. 내부적으로는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하려는 자와 단절하려는 자 사이의 갈등이구요. 일파만파이죠.

그렇다면 자거라투스트라씨, 단호한 이론적 투쟁이 필요해요. 그래서 순결한 원칙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하지요. 그것만이 종파를 없애는 유일한 방식이요. 그때는 오직 정통만이 남아있죠. 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항상 정통이요. 이 세상은 정통만이 정통이요.

원칙적인 통합, 그게 바로 선생님의 주장이죠. 하기는 지금 민노당과 진보신당 사이의 통합 논쟁도 항상 그런 쪽으로 흘러가더라고요. 통합에 원칙이 없다는 거죠. 그러니 언젠가 깨어질지 모른다는 거고, 그래서 통합이 안 된다는 주장이에요. 절대 통합하지 않겠다는 거죠.

자거라투스트라씨, 역시 순결한 원칙을 따르고자 하는 순전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니군. 나야 항상 그런 대중들을 대변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박헌영 선생님, 저는 임경석 교수가 틀렸다고 보아요. 역사적인 운동이 무슨 자연과학적 운동이 아니라면, 거기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판가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겠죠? 운동이란 때로는 이게 옳은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저게 옳은 것처럼 보이니, 당연히 역사적 운동에는 이런 저런 분파, 이런 저런 종파들이 혼재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종파투쟁이란 역사의 불가결한 과정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것이 역사적 승리를 위한 필연적인 요구이구요. 하지만 여기서 순수한 원칙적 통일이란 좋은 말이지만 역사적 운동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투스트라씨, 세상에 쉬운 것이 어디 있겠소. 하여튼 당신도 항상 정통을 따르도록 해요. 그러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소.

박헌영 선생님, 이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통합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이론이 틀린 사람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잘못된 이론 때문에 나까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감이 들 때조차, 그래도 서로 협력하면서 함께 일을 할 수 있어야 종파라는 것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웬 궤변이요. 이론이 틀린데 어떻게 함께 해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도 몰라요?

하지만 박헌영 선생님, 이 세상에 이론이 같아서 함께 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함께 가는 묘안을 짜내는 것은 오직 마음만이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요? 바로 열려진 마음. 서로에게 기회를 주면서 파국을 피하고, 진실이 드러날 때가지 위험을 무릎 쓰고 참고 견디고,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추구해 왔던 일들이 상생의 효과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오직 마음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분열이 있었다면, 일단 무조건적으로 통합하고 모든 것을 상대편에게 넘겨준 다음,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게 옳지 않아요?

자거라투스트라씨, 마음이 아니요. 이론이요. 철두철미 정통만을 따르고자하는 마음, 그게 바로 우리 혁명가의 마음이요.

박헌영 선생님, 마오의 경우를 보시죠?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위와 코민테른의 극좌적 투쟁방침 때문에 그는 정권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탈당하지 않았고, 수년간 절에 거의 유폐되면서도 당이 위기에 빠졌을 때 기꺼이 협조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만리장정 가운데 비로소 지도권을 회복했었죠. 보리 출판사에서 나온 ‘대장정’이란 소설을 읽어보세요.

거 뭐 시답지 않는 소리요. 자거라투스트라씨, 그냥 잠이나 자시오. 나는 이 ‘저 세상’에서도 항상 정통만을 따르는 사람이요. 그래서 나의 공화국에 아예 이름도 이렇게 붙였소. 한반도 통일 정통 공화국이요.

자거라투스투라 소설가 김숨을 만나다[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사업단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자거라투스투라야, 왜 눈이 벌겋지? 요새 불면증이라도 생긴 거냐?

아니에요. 니체 아부지, 소설책 읽느라고요.

그 나이에, 아직도 소설을 읽느냐? 한심하다고 생각되지 않니? 니 친구들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데…넌 권력의지란 없느냐?

니체 아부지, 아부지가 말한 ‘권력의지’라는 것 때문에 철학자들이 죽을 지경이에요. 아부지를 위해 변명하느라고 말이에요. 저는 그걸 인간의 내면 속에서 솟구치는 자유로운 생명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해서,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주려 하지만, 솔직히 저 스스로 그 개념이 좀 수상하긴 해요.

뭐가 수상하다는 말이냐?

그럼, 니체 아부지, 토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 나오는 음모적인 무정부주의자도 그런 생명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거라투스투라야, 니는 아직 도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구나. 네가 그 속에 들어가 앉은 것은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너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작은 욕망 때문이지. 나는 그런 사람을 ‘종말인’이라고 부른다.

니체 아부지, 자유로운 생명력이 보편적인 선을 지향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신학자 샤르댕은 그런 해석을 하고 있지만, 역시 신을 개입시키지 않을 수 없을 거 같아요.

보편적인 선이라는 굴레조차 내 던져 보렴. 그때는 이 세상이 또 다르게 보일 것이야. 왜 불교의 선사들은 백척간두에서 자기 몸을 던진다 하지 않니. 너도 그렇게 너를 버려 보렴.

니체 아부지, 솔직히 전 그게 두려워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 자신이 아니라 겨우 교수직을 던지는 정도이죠. 그런데 아부지, 요새 아주 엄청난 소설가를 제가 발견했어요? 니체 아부지, 소설가 김숨이라고 알아요?

자거라투스투라야, 숨 막힌다. 이름이 왜 이렇게 숨 막히냐? 물론 예명이겠지만 너무 팍팍하게 지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알은 거지?

우연히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어요. 잘 아는 시인을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 있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돼지고기를 굽기만 하고 전혀 먹지는 않더라고요. 그 침묵이 심상치 않아서 제가 지은 책하나 드리고, 그가 지은 소설책 한권을 받았죠. 장사치고는 제가 훨씬 이득이죠. 안 팔리는 책과 잘 팔리는 책을 교환했으니까요. 그 소설책 이름이 또 숨 막혀요. 『간과 쓸개?라니까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그런 거 말이냐? 그럼 풍자소설이겠네?

그렇지는 않아요. 대개 200년도 후반 미국발 금융위기 전후에 쓴 단편소설들을 끌어 모은 책이에요. 그 중 첫 번째 소설의 제목이 ?간과 쓸개?이고, 그 제목을 따서 책 이름으로 했어요.

소설책 한권 읽는다고 그렇게 눈이 충혈되었냐? 소설이야 그저 전철에서 읽으면 충분한 거 아니냐.

니체 아부지, 소설가 들으면 도끼 들고 나오겠어요. 김숨의 소설이 하도 재미있어서 그의 소설을 대부분 구했어요. 많이도 썼는데 지금까지 제가 구해 읽은 것은 『간과 쓸개』 말고도 『투견』, 『백치』, 『침대』가 있어요.

그래 자거라투스투라, 니가 보기에 어떻드냐?

놀라운 소설가예요. 뭐랄까 힘이 넘쳐요. 위에 말한 책 가운데 가장 빨리 나온 게 『투견』인데 (2005년 정도) 그의 소설은 거의 대부분 현실에 짓밟힌 채 무기력하게 그리고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어 든든한 리얼리즘의 바탕 위에 서있죠. 그런데 강열한 이미지들, 철학적인 사색들로 해서 투박한 힘이 느껴지죠. 여성 작가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을 정도예요. 그게 꼭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을 연상시킨다니까요.

아, 김숨이 여성 작가이냐? 나는 이름 때문에 정말 김기덕처럼 생긴 남자가 아닐까 했는데…

그런데 니체 아부지, 소설가 김숨에게 200년도 후반에 아마 2007-8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요. 무언가 변화가 있어요. 그저 한번 쓱 훑어보았기에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예를 들어 혹 종교적인 개종과 같은 사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럼 김숨이 기독교인이란 말이냐?

그건 몰라요. 저는 한 번도 김숨과 예기한 적은 없다니까요? 아까 말했잖아요. 그저 말없이 돼지고기만 굽고 있었다니까요.

그럼 종교적 개종이란 무슨 말이냐?

아니 그와 유사한 사태라는 거죠. 니체 아부지, 말 귀를 그렇게 못 알아들어요?

알겠다.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하라는 얘기지. 니는 나의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듣느냐? 자식이 애비한테 대드는 것을 나는 못 본다.

글쎄 소설가 김숨이 다루는 대상은 항상 그래요. 예를 들어 『백치들』에서는 IMF 사태로 직장을 잃은 백수들을 다루고 있죠. 어떤 사람들인지는 충분히 짐작되죠. 그런데 김숨은 이들을 묘사하면서 마치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마르케스가 시도했던 것처럼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과 비슷한 것을 구사해요. 그래서 마술적인 분위기가 백수들의 어두운 삶을 에워싸고 있죠. 그들의 패배와 그들의 무기력 속에 그들이 가진 간절한 소망이 그렇게 표현되어요.

음. 마르케스는 남미의 원시림의 느낌이 들지 않나? 김숨도 그런가?

그런 원시림의 느낌은 아니에요. 오히려 썩고 끈적끈적한 물웅덩이 느낌이 들죠. 그러나 그 속에서도 생명은 살고 있는 거죠. 그런데 『간과 쓸개』에 와서 소설가 김숨에게 또 다른 변신이 일어났어요. 물론 여전히 다루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짓밟힌 하층민의 삶이죠. 하지만 이 책에서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넘어서 거의 카프카적인 느낌이 들어요.

카프카라니?

그 중의 한편을 제가 오늘 소개해 드릴 께요. 그러면 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거예요. ?모월 모일?이나 ?룸 미러?가 있는데, 그 중에 ?룸 미러?가 좋겠네요.

‘두 부부가 토요일 오후 차를 타고 구리에서 강변도로를 거쳐 파주로 가죠. 아내가 이 소설의 화자인데, 그들은 남편의 이모부의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죠. 남편의 이모가 20년 전에 죽은 이후, 남편은 이모부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해요. 당연히 왜 죽었는지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죠.’

‘차의 뒷자리에는 아이들(두 남자아이)이 타고 있는데 그들은 차를 타자말자 자고 있어요. 남편은 끊임없이 룸 미러를 힐끗힐끗 보면서 아이들이 깨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죠. 그건 화자인 아내도 마찬가지이에요.’

두 남자아이가 깨어나면 어떤 소동을 벌일지 짐작이 되죠. 그래서 차라리 그 아이들이 잠들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일 거예요. 그들의 삶은 그저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정도이죠. 니체 아부지, 짐작이 되요?

글쎄다. 그건 아파트에 사는 한국인이나 알겠지 19세기 독일에 살았던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남편은 전에 아이들이 키우던 도마뱀을 죽이려 했어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박제가 된 새를 선물로 합니다.’

이게 바로 아이들을 재우는 방식이죠. 아마 도마뱀이 아이들에 내재하는 생명력이라면, 박제가 된 새는 이를 감시하는 초자아를 의미하겠죠. 어떻든 그 결과 이 중산층 부부는 평온하면서 질서 있는 삶을 살죠. 물론 거세된 삶이겠죠.

자거라투스투라야, 니가 해설까지 덧붙이지 말고, 그저 소개만 하렴. 그래야 나도 나름대로 감상하지 않겠느냐?

알겠어요. 해설은 자제하죠. 하지만 해설하지 않고 설명하는 법을 제가 몰라요. 아니면 직접 읽어보시죠.

알았다. 하여튼 계속해 보렴.

한강을 끼고 달리면서 그들은 아주 진부한 사건들을 만나죠. 관광버스를 만나는데, 그 버스 회사의 이름이 ’우주 관광‘이에요. 처음에는 빈차였는데 이상하게도 나중에는 사람이 가득 타고 있어요. 그 가운데 잠든 노인이 있는데 화자가 들여다보니 혀가 없어요. 또 살찐 돼지를 싣고 아마도 도축장으로 가는 트럭도 만나죠. 화자는 돼지들에게서 역겨운 냄새를 맡고 구역질을 느끼죠.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 같아요. 거세된 삶, 그것은 곧 죽음 속에 들어있는 삶이죠. 바로 이런 세계는 니체 아부지가 유럽의 종말로 묘사한 그런 삶의 모습이죠.

그런데 차가 자유로로 들어가면서 점차 지체되기 시작해요. 비구름이 몰려와서 날은 저녁처럼 어두워지죠. 주인공이 잠깐 잠들었는데 그 사이(꿈이지 아니면 생시인지 불분명해요) 강변을 질서 있게 나르던 새들이 위협적으로 나르더니 갑자기 살찐 돼지들을 공격해요. 그리고 뒤차에서 상향등을 켜서 비현실적인 빛이 그들의 차안에 비추어 들죠. 그래서 땅에서 기던 차가 갑자기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 들어요. 여기서부터 현실이 환상적인 세계로 바뀌는데 그런 변화가 꼭 카프카적인 세계 같아요. 하여튼 이런 일들은 무언가 다가오는 어떤 것을 암시하는 알레고리죠.

그래서 제가 소설가 김숨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고 짐작하는 거죠. 실제로 ?룸 미러?의 마지막에 무슨 일이 생겨요. 갑자기 차들이 정지해 버리고 사람들은 내려서 걸어가죠. 화자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어 내려서 사람들을 따라 걸어요. 사람들 중 어떤 여인은 딸을 안고 가는데 그녀의 긴 머리칼이 딸의 숨을 막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그냥 미친 듯이 걸어요. 주인공이 마침내 사람들이 멈추어 서서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하죠.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데?

아니 소설은 거기서 끝나요.

“그리고 마침내 내 눈앞에 펼쳐진 그 광경을 보았다. 지금쯤 내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며…”

이게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에요.

그럼, 자거라투스트라 너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글쎄요. 모르죠. 적어도 분명한 것은 그 사건은 잠든 아이들을 깨어나게 할 만한 사건이라는 거죠.

그게 뭐냐?

글쎄요. IMF 사태 같은 거? 아니면 노무현의 죽음? 하여튼 아이들이 깨어난다는 것은 적어도 니체 아부지가 말한 생명력이 솟구친다는 뜻이겠죠. 죽음과 같은 현실을 깨뜨리는 그런 힘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긍정적으로 해석해요. 하지만 부정적일 수도 있죠. 그것은 소란과 폭동을 동반하는 것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