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있으니 이리 산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9

“죄 있으니 이리 산다”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동두천역에서 옷과 돈이 든 보따리를 참 우습게 도둑맞고 나니 앞이 캄캄했다. 배는 부른데 얼라를 데리고 돈도 없이 어데를 어찌 가노. 그만 다리 힘이 탁 풀리고 아무 생각도 안 나더구먼. 그래도 대구까지는 가야한다 싶어서 딸아 손을 잡고 일어나서 국수집으로 갔다. 서울역 가는 표 끊고 남은 돈이 50전이더라. 딱 국수 한 그릇 값이라. 우짜겄노. 국수 한 그릇 사서 딸아 먹이고 남는 거는 내가 묵었지. 참 기도 안 차지만 그래도 가야한다 싶어 터벅터벅 걸어서 기차를 타러 갔다.

서울역에 도착은 했는데 대구까지 갈 일이 꿈만 같은 기라. 우리집은 대구 본전통에 있는데, 일단 대구까지 가야 집으로 걸어가든지 우짜든지 할 건데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으니 참 난감하지. 딸아 손을 잡고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맥을 놓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자존심은 남아 있어서 구걸도 못 하겄고, 세상 물정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탓할 수도 없고…… 얼마나 살기가 험했으면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의 보따리를 뺏들어 갔을꼬 싶다가도 화도 나고 그렇더라.

그렇게 망연자실해서 서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아줌마, 어디 가요?”하고 묻는 거라. 대구 간다 하니까 그 아저씨가 “이 기차가 대구 가는 급행 열차요. 빨리 타야 갑니다.” 하길래 용기를 내서 “이북에서 넘어오다 돈을 몽땅 잃어버려 오도가도 못합니다.”하고 사정을 말했다. 그랬더니  두말 안 하고 대구 가는 급행표를 끊어주는 기라. 그러면서 “지금 저기 출발하려는 저 기차를 타야 합니다. 어서 가이소.”하고 등을 밀어서 급하게 탔다.

기차표를 끊자 개찰이고, 개찰하면 바로 타야했거든. 급하게 탄다고 이름도 못 물어보고 어디 사는지도 못 물어봐서 지금까지 그 은혜를 못 갚고 있다. 돈을 갚아야 하는데, 다급할 때 도움을 받고 은혜는커녕 돈도 못 갚았으니, 아무리 급해도 이름 성명은 물어봐야 하는데, 그리 못했다. 그게 지금도 한이 된다. 요새도 그 아저씨 생각을 한다. 누군지 몰라도 잘 되라고 기도한다.

할머니의 방에서 구술 채록하는 모습

할머니의 방에서 구술 채록하는 모습

참 옛말에, 숭년에 부모는 굶어죽어도 아는 배터져 죽는다는 말이 있더마 다 맞는 말이라. 그냥 나온 말이 아니더라고. 기차가 요새하고 달라서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는 동안 장사도 지나가고 기차 타는 사람들도 먹을 걸 다 준비해서 탔거든. 근데 나는 돈이 없으니까 먹을 거라고는 하나도 준비 못했제. 참 눈치 없는 딸아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먹는 것마다 먹고 싶다고 졸라제. 그것도 모자라서 장사가 지나가면 그것 볼 때마다 사 내라고 졸라네.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데……

근데 사람들이 저거만 안 먹고 딸아한테 조금씩 나누어주는 거라. 수중에 돈 한 푼 없이도 얼라는 먹고 싶은 것 먹고, 배 안 곯고 그리 대구에 왔다. 그때는 모두가 배고프고 가진 게 별로 없던 때라도 옆에서 누가 굶으모 매정하게 못 본 척 안 하던 시대다. 지금하고 마이 다르제. 허긴 우리도 도와주는 사람들 없었으모 이리 살고 있기 힘들제.

동두천역에서 저녁에 출발해서 서울역에 도착하니까 밤이더라. 부랴부랴 기차타서 대구역에 내리니까 새벽이대.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새벽 4시 해금 사이렌이 울려야 다닐 수 있었거든. 그래서 대구역에서 새벽 4시까지 기다렸다가 자는 딸아 깨워서 역 밖으로 나왔다. 내가 살던 그대로 있더라. 그때 내 나이가 28살이었는데, 15살에 떠나던 그대로더라.     딸아 손을 잡고 집으로 가니까 아버지가 점포(포목점) 문을 열고 장사 준비를 하고 계시대. 우리 오빠가 대구에서 포목점을 했는데, 아버지가 아침 일찍 문 열고 장사 준비도 하고 했거든. “아부지, 아부지”하고 부르니까 “내가 왜 니 아부지고? 썩 안 나가나?”하는 거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 내 꼴을 보니 참 가관이라. 옷은 남루하기 말할 수 없고, 몇날 며칠을 제대로 씻지 못했으니 거지가 따로 없어. 누가 나를 정상으로 보겄나.

연천에서 올 때, 사람들이 옷을 남루하게 입어야 한다고, 그래야 검문 걸리도 잘 피해갈 수 있다고 해서 남루하게 입고 다른 옷들은 전부 보따리 안에 넣어 놨다 아이가. 딸아도 마찬가지라. 임진강에서 동두천까지 140리 길을 걸었제. 그 후에도 몇날 며칠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옷도 남루하고 더럽고 하니, 그냥 거지가 따로 없지. 세수를 제대로 했나, 머리를 제대로 빗기를 했나.

“아부지, ○○이요, ○○이” 그러니까 우리 아부지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기라. “니가 어짠 일이고?” 하면서 점포 문을 열어 주시더라. 나중에 들어보니 금달이네이라는 미친 여자가 있었어. 원래는 안 그랬는데 언제부터인지 정신이 나가서 식전 댓바람부터 우리 집에 와서 아부지라고 부르니까, 그 날도 금달이네가 와서 그러는 줄 알고 썩 나가라 한 거라. 그 정도로 우리 몰골이 처참했던 거지. 업고 다니는 아 이름이 금달이라서 미친 어미는 금달이네라고 부르는 거지.

집에서 며칠 있다가 소록도로 가서 아들내미 낳고 그리 힘들게 살았다. 소록도에서 나왔지만, 집으로 갈 수는 없었제. 그러다가 딸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아들은 오빠 집에 맡기고 문전걸식 하다시피 살았다. 그래도 아들은 배 안 곯게 해주고 싶고, 또 공부시키려고 내 딴에는 죽을힘을 다 해서 살았지만, 아들은 아들대로 얼매나 애를 달구고 서럽고 외로웠겠나. 외삼촌 외숙모가 그리 따뜻하게 보살펴도 부모 대신이지 부모는 아니잖나.

아들도 어느 정도 성인이 되고 해서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신라리에서 혼자 살았는데, 내 건강이 이러하니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일을 해야 먹고 사는데, 개간해서 농사를 지으면 그게 다 내 수입이 되는데,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이북에서 혈혈단신으로 넘어온 영감을 만나서 같이 살았다. 서로가 참 잘했다. 평양에서 넘어왔는데, 여기는 아무도 없이 혼자였어.

부지런하게 열심히 해서 살았는데, 마을에서 이장 투표로 싸움이 났어. 그때 거기서 못 살고 둘이 같이 나와서 경주 희망촌으로 갔어. 5~6년 같이 살다가 1994년도에 먼저 갔다.  우리 아들에게도 참 친아들 이상으로 잘 했다. 대구 카톨릭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화장은 싫다 하더라. 우리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없더라도 불쌍한 사람이니 관리비 주고 한번 씩 돌봐줘라.” 우리 아들이 그리 하마하고 약속했다.

혼자 살다가 칠곡의 피부과 병원인 엠마병원의 원장이 소개해줘서 1996년도에 여기 성심원으로 왔다. 편하고 따습게 살고 있다. 그래도 마음 한 편은 언제나 서럽고 외롭다. 빨리 죽는 게 소원이다. 너무 많이 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아들이 벌써 68살이다. 전화는 자주 한다. 여기 자주 오지는 못하지. 손자들은 내 생존여부는 모른다. 며느리는 내가 대구에 살 때 침대에서 떨어져 입원했을 적에 한 번 왔다갔다. 옷도 어쩌다 한번 씩 보내주는데, 그만큼만 해도 된다.

요새는 눈이 잘 안 보여서 애가 탄다. 글자가 잘 안보이니까 책도 읽을 수 없고, 미사 때도 성가책이나 성경책을 아주 눈 가까이 갖다 대야 보인다. 참말로 애가 터져 죽겄다. 책읽는 그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그마저도 안 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미사 갔다가 아침밥 먹고 물리치료 받으러 간다. 끝나면 연천에서 임진강으로 올 때 났던 발의 상처를 치료 받는다. 그때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상처가 안 낫고 애를 멕인다. 그러면 점심 시간이제. 점심 먹고 앉아서 놀다가 텔레비전 보다가 하루에 세 번 씩 안약 넣고 저녁 먹고 또 텔레비전 보고 잔다. 이게 내 하루다.

요새는 빨리 죽는 게 소원이다. 너무 오래 살고 있어. 잠 안 오면 누워서 생각한다. 내게 죄 있으니 이리 산다. 하느님께서 내 죄를 사해 주시기만을 바란다. 내가 죄 없으면 이런 병 안 걸렸지. 다 내 죄다. 그 죄를 하느님 아니면 누가 사해 주시겠나. 얼마 전에 시를 하나 읽었는데, 참 내 마음 같더라. 그래서 베껴 썼거든. 잘 안 보여서 빼뚤빼뚤 해도 아직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내 마음에 탁 와 닿는 것만 베껴서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니 이제 외운다.

 

다른 사람의 시를 옮겨 적어 놓은 글

다른 사람의 시를 옮겨 적어 놓은 글

 

외딴 곳 높은 산골짜기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해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

피고 싶어라

 

아이구, 쓴 사람 이름도 제목도 기억이 잘 안 나. 이 시를 쓴 사람도 마이 힘들었던 갑다. 나도 참말로 숨어 숨어 살고 싶다. 돈으로 따질 수도 없고, 매길 수도 없는 그런 꽃으로 살고 싶다. 값이 없는 그런 꽃이 되고 싶다. 어찌 이리도 내 마음 같을꼬.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8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아들 아버지는 애락원에서 만났다. 애락원은 개신교다. 개신교 플래처 목사가 세웠는데, 대구나병원이라고 한다. 애락원 거기는 병원이었다. 아매 지금 동산병원과 연결되어 있을 거다. 그때는 나환자들만 보는 병원이라 다른 환자들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격리시키는 거제. 산위에 고아원이 있었다. 후문으로 가면 기념관이 있었제. 전에 보니까 애락원 나무들은 별로 안 변한 것 같더라. 그 집들이 지금도 있을까 모르겄네.

그때 애락원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병 표가 안 나서 시장꾼으로 밖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니까 밖에 나가서 필요한 물건도 사 오고, 간혹 환자들에게 오는 돈이 있으모 가서 찾아오고 하는 일을 했다. 병표 나는 사람이 밖에 가서 일을 볼 수 없고, 환자는 함부로 밖에 못 나가지만, 그 사람은 겉으로 보모 워낙 멀쩡해 보이니까 일이 있으모 수시로 다녔지.

애락원에는 평옥과 구이층집으로 불리는 건물이 있었다. 평옥은 단층집인데 여자 환자들이 지낸다. 구이층집은 오래된 2층집이라서 그리 불렀는데 남자들이 살았다. 사는 곳은 달라도 애락원 마당은 같이 쓰니까 마주치고 했지. 그 사람은 발이 좀 시원찮았다. 나는 사람들이 오물짜 같다고 했다. 지금 이쁘기는 뭐가 이쁘노? 니도 거짓말 참 잘한다. 그 때도 이쁜 기 아이라 얼굴이 하얗고 작다고 그리 부르더라.

성심원 들어가는, 눈쌓인 다리 사진 촬영 엄삼영 수사

성심원 들어가는, 눈쌓인 다리
사진 촬영 엄삼용 수사

그 남자 누나가 자꾸 나를 불러내는 기라. 그래 밖으로 나가모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고 그러대. 응, 뭐 연애라면 연애지. 좋았지. 시간이 지나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알고. 그 사람은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나한테 꼭 뭔가 사오고는 했다. 둘이서 철문을 타고 살짝 넘어가서 영화관도 가고, 손도 잡고 그랬다. 대구 극장에서 영화 봤다. 내가 원에 허락받고 외박 나가는 날에는 역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병표가 없으께, 그리고 원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많으니까 내가 외박 나가는 날에는 지도 뭔 핑계를 만들어서 나오는 거지. 오빠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나오면 서문시장가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거기 가서 만났다. 내가 오빠 집에 가는 날이모 그 사람은 서문시장가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었거든. 어떤 때는 둘이서 시장에서 저녁 먹고 대구극장 가서 영화보고 했지.

그렇게 지내는데, 애락원에 김진옥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함흥 사람인데 우찌우찌해서 애락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친구가 그러는 기라. “흥남으로 가라. 니 정도면 흥남 가서 살모 아무도 나환자로 안 본다. 니는 손만 표가 좀 나니까 그리로 가모 아무도 모른다.” 그러는 기라. 그 위쪽에는 손에 화상 입은 아아들이 많아서 나도 화상입어서 그리 된 줄 알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리 가기로 했다. 그 사람은 한 달 먼저 함흥으로 가서 기다리고, 나는 원에서 수속 밟아서 엄마하고 오빠하고 기차타고 한 달 후에 갔다. 나 시집 보낸다고 우리 엄마랑 오빠가 이것저것 좀 장만해서 같이 간 거라. 그 사람은 나 기다리면서 한 달 내내 하루도 안 빠지고 흥남 역에 나와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더라. 내가 언제 올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그리 한 거지. 매일 나와서 기차가 올 때마다 뛰어와서 찾다가 없으면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노래를 부르며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렸다 카더라.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땅 밟아서 보니…” 아이고,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허허허, 내가 안 올까봐 불안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라. 혹시 가요무대에 이 노래가 나오모 그리 좋다. 옛 추억이 생각나고, 그때가 꼭 지금처럼 생생하고 그렇다. 애락원에 15살에 들어가서 23살에 나왔다. 24살에 결혼했다.

우리 오빠가 그 사람을 흥남지서에 취직 시켜줘서 먹고 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게 웃지방은 너무 추운 기라. 방과 부엌에 벽이 없다. 아이고, 참, 그 말을 그리 못 알아 듣노. 너무 추우니까 솥이 방안에 있는 기라. 그러니까 아궁이 불 넣는 데는 부엌에 있고 솥은 방안에 있는 거지. 불 때서 방을 뜨겁게 하는 거로는 난방이 제대로 다 안 되는 기라. 부엌에서 불을 때면 자연히 난로가 되고, 방은 뜨거워도 밖이 워낙 추우니까 방안이 썰렁해. 그래서 방안에 솥이 있는 거지. 방안에 솥이 있으니까 추워서 솥을 안고 자다가 어린 아아들이 손을 데이기도 하고, 어린 아이가 뽈뽈 기어 다니다가 솥에 손을 데이기도 하는 거지. 밖에서 방으로 들어올라 하면 부엌으로 들어와서 방으로 온다. 부엌이 참 깨끗타.

그래 보니까 거기에는 나처럼 손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많아. 나는 심한 것도 아이라. 시장에라도 가면 사람들이? “아이고, 새댁이 욕 봤겄네.” 하고, 또 “어쩌다 이랬을고, 쯧쯧쯧”하지 내가 이 병에 걸렸다고는 생각을 안 하더라. 그러니 마음 편하게 살았다. 좋았지. 좋은 사람하고 사니까…… 그 사람도 겉으로 표가 안 나니까 아무도 우리를 그리 안 봤거든. 그러니 밖에도 맘대로 다니고, 그랬다.

해방이 되고 고향도 가고 싶제. 오늘 내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남으로 갈라모 빨리 가라하는 거라. 삼팔 선이 그어져서 시간이 지나면 못 간다고 하대.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갈라고 보니까 이미 사람은 삼팔 선을 못 넘는 거라. 할 수 없이 남편 먼저 가고, 속초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 딸이 3살이고 아들은 뱃속에 있었다. 아니다. 남편만 먼저 갈라고 간 게 아이라.

사람이 삼팔 선을 못 넘으니까 배를 타고 가는데, 사람은 배에 탈 수가 없고, 짐만 실어 가는 거지. 응, 화물선 쯤 되는 갑다. 사람들이 그 짐 보따리 안에 숨어서 가는 거지. 근데 나는 그때 임신 7~8개월 때라 배도 부르지만 3 살배기 딸을 짐 속에 숨길 수가 없지. 얼라가 울기라도 하고 보채기라도 하면 숨어 있는 사람 다 들켜서 바다 귀신이 될 판이니 나하고 딸은 어찌하든지 육로로 해서 남쪽으로 내려와야 하는 기라.

함흥에서 일부러 옷을 남루하게 해서 떨어진 광목치마를 입고 보따리를 이고 딸 손잡고 연천까지 왔다. 연천에서 밥을 사 묵으러 들어가서 이남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니까 주인이 이남 갈려면 논둑을 타고 가야 한다고 길을 요리조리 가서 어찌 어찌 가라고 가르쳐 주더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기 가다보모 꼭 지나야 하는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 밑에는 소련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데, 들키모 그 자리에서 바로 총알 맞는다고 조심하라고 일러 주는 기라.

하이고 참, 밥을 시켜 묵고 해는 지고 ‘어찌할꼬’ 하고 앉아 있는데 웬 여자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여남은 살 먹은 머스마를 데리고 들어오는 거라. 주인이 저 사람들이 이남으로 장사를 다니는 사람들이니까 따라 가면 될 거라고 일러 주더라. 그래 그 사람들에게 나도 이남 가야한다고 데려가 달라고 했지. 어린 머스마가 딸려 있어서 말을 했지, 어른들만 있었으면 말 못했다.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은 이남에 없거나 귀한 것들을 떼서 이고지고 이남으로 가서 팔고, 거기서는 또 이북에 귀한 거를 사 와서 파는 보따리 장사들인 기라. 그 사람들이 데리고 있던 머스마는 저거 아아가 아니고, 그 사람들도 부탁 받고 머스마를 이남으로 데려다 주는 기라. 같이 가기로 하고 잠이 살짝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깨워 보니 캄캄한 밤중이라. 해뜨기 전에 임진강에 가서 배를 타야 된다고 하더라.

너무나 작은, 그러나 너무나 소중한 할머니의 서재 사진촬영 김성리

너무나 작은, 그러나 너무나 소중한 할머니의 서재
사진촬영 김성리

새벽 두 시에 자는 애 깨워서 밥 먹고 장사꾼들을 따라 나섰다. 캄캄한 밤에 어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은 여러 번 다녀 놓으니까 잘 가대. 나는 배는 부르고 보따리는 이고 딸애 손을 잡고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길을 죽을 동 살 동 따라 갔다. 그 사람들을 놓치모 오도 가도 못 하는 기라. “새댁이 걸음이 와 그리 느리네”하면서 어서 가자고 재촉은 해도 나를 두고 가지는 않더라. 근데 그 머스마 덕분에 내가 따라 붙었지. 여남은 살 먹은 아아가 얼마나 잘 걸을 수 있겄노. 허허허 그 머스마 덕을 좀 봤다.

밤새 걷고 또 걸었다. 참 산길이 끝이 없더만.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려고 하니까 뿌옇게 주변이 보이는데, 옆에 보따리 장사가 한탄을 하는 거라. 알고 보이 밤새 동네 뒷산만 뱅뱅 돌았던 거라. 출발했던 그게 와 있는 기라. 하하하, 참 지금은 웃음이 나온다. 그때는 앞이 캄캄했지. 임진강으로 가서 배를 타야 하는데, 그 배를 못타면 이남으로 못 가는 거야. 육로로 걸어서는 소련군 총알에 죽을 판이고.

“아이고, 큰일 났네. 어서 갑시다. 어서” 아주머이들이 난리가 났지. 참말로 죽을 힘을 다 해서 산길을 걸었다. 밤중에 산으로 산으로 얼마나 걸었을꼬. 인자 해가 떠올라서 사방이 훤하지. 말하자면 배를 몰래 타고 임진강을 건너 이남으로 가는 거지. 그 사공은 우리를 태워주고 다시 이북으로 와야 하는데, 우리가 늦으면 그 사공이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기라. 배 삯은 벌써 줘놨지. 그러니 전부 애가 타는 거라.

죽어라고 따라갔다. 하이고, 말 못한다. 고무신을 신고 있었는데 발은 부르트고 퉁퉁 붓고, 그래도 그 발로 죽어라고 따라 붙었다. 딸아를 업었다. 보따리를 이고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어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 보따리 장사꾼들을 안 놓치려고 허겁지겁 따라 붙었다. 배는 부르지 아아는 업었지 보따리는 이고, 참말로 그 머스마가 은인이라. 갸는 지금 어데서 우찌 살고 있을꼬.

저 멀리 임진강이 보이고, 사공이 우리를 알아보고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대. 허겁지겁 배에 올라탔는데, 사방이 너무 훤해서 간이 쪼그라들데. “하이고, 인자 오면 어짜요. 갈까말까 했소. 왜 이리 늦었소?”하면서 사공이 한탄을 하더라. 사공도 사방이 그리 훤한데, 지도 들키모 총살이니 암만 돈이 좋아도 목숨보다 귀한가. 그때는 아무도 못 넘어가. 육지는 군데군데 소련군이 지키고 섰제, 바다는 화물선만 다닐 수 있었어. 참 살벌한 시대였다.

배를 타고 건너 편 임진강에 도착하니까 이남에서 보고 있던 순경들이 고생했다, 어서 오시오 하면서 환영을 하더라고. 참말로 이남에 왔다 싶대. 인자 거기서 화폐교환을 해 주더라. 북쪽 돈하고 남쪽 돈하고 다르니까 교환을 해야지. 북쪽으로 가는 사람하고 남쪽으로 온 사람들하고 서로 갖고 있던 돈을 다 바꿨다. 그리고는 동두천으로 갔다. 거기 수용소가 있는데, 예방주사도 맞고 어디로 갈 건지 물어도 보고 하더라.

동두천으로 가는 길은 꼭 가리마 같은 길을 걸어서 갔다. 비가 왔다. 고무신 안에 물이 차서 걸을 때마다 철컥철컥 하고, 이미 퉁퉁 부어 있는 발은 인자 고무신 안에서 불어터져서 피고름이 신 안에 흥건했다. 애기 업은 두데기(포대기)까지 물이 줄줄 흐르고, 힘든 거는 말로 다 못한다. 그래도 가야지. 동두천 수용소에서 전국으로 흩어지는 기라. 나는 일단은 대구로 가기로 했다. 친정에 가서 순천으로 갈라고 했지.

기차역에는 사람들이 억수로 많아. 기차는 자주 없고 사람은 많으니까 빨리 표부터 끊어 놔야지. 그래서 딸아를 보고 “엄마 올 때까지 꼼짝하지 말고 여게 있어라. 이 보따리 꼭 잡고 있어라.” 하고 나는 표를 끊으러 갔다. 남대문으로 가야 부산 가는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지. 겨우 표를 끊어 갖고 오니까 보따리가 없는 기라. 보따리 어데 갔냐 하고 물어도 딸아는 말이 없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할매가 와서 보따리 달라고 하니까 그만 주더란다. 그래서 저거 할매인 줄 알았다 안 카나. 그 보따리 안에 옷하고 돈이랑 다 들어있었는데……

 

 

“소록도 김 가요”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7

“소록도 김 가요”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요새 자꾸 눈이 침침하고 전에는 보이던 것도 이제는 안 보인다. 나는 책 읽는 게 참 좋은데, 전에 니가 갖다 줬던 책도 이제는 도통 읽을 수가 없네. 왜 이럴꼬? 기운도 없고 보이던 것도 안 보이고…… 나는 여러 사람 있는 데에 가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혼자 조용히 있는 게 좋다. 테레비도 연속극이나 쇼 같은 거는 재미가 없다. 뉴스나 스포츠가 좋다. 저 봐라. 씨름한다고 난리네. 씨름 저게 참 재미있는 기라. 옛날만큼 재미있지는 안 해도 재미가 안 있나.

저 사람들은 외국인인데 씨름을 참 잘한다. 감독이나 코치도 외국 사람이제? 하이고, 우짜겄노. 그만 번쩍 들리네. 저게 씨름의 재미라. 단번에 매다 꽂는 거, 저리 큰 사람을 번쩍 들어올리고, 힘이 장난 아니라. 스포츠를 보고 있으면 재미가 있다. 저 정도는 보인다. 그런데 얼굴이랑 표정 같은 거는 자세하게 안 보인다. 참으로 답답하다. 안약도 하루 네 번씩 꼭꼭 넣는데 나아지는 기 아이고 자꾸 나빠진다. 약으로 어찌할 수 없는 기 나이인기라.

작년(2013년) 11월까지는 안경 없이도 글이 잘 보였다. 큰 글씨 작은 글씨 할 것 없이 잘 봤는데 인자는 안경이고 뭐고 잘 안 보인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저기 창가에 햇빛이 들어오면 그 밑에서는 글자를 읽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안 된다. 참 답답하다. 안약도 넣고 병원에 가도 뾰족한 대답이 없네. 우찌해야 가는 눈을 잡아 볼꼬?

저게 봐라. 지금 끓나 안 끓나? 뜨겁다. 조심해서 봐라. 아직 시계는 눈 앞에 갖다 대면 아직 대충 보고 시간을 알 수 있다. 끓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안 끓는 게 아무래도 사단이 났는 갑다. 응, 맞다. 계란이다. 계란을 하루에 두세 개 먹으면 눈이 좋아진단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계란을 삶아 놓고 먹는데, 조금 낫는 것 같다. 블루베리도 먹으면 좋단다. 그래서 블루베리를 저리 사 놓고 먹고 있다.

책 읽는 할머니.

책 읽는 할머니.
<사진 – 김성리>

레지나 있제. 레지나 언니가 나이 들어 영 안 보였는데, 계란을 삶아서 먹고 눈이 좋아졌단다. 그래서 레지나가 와서 나보고 계란을 삶아서 먹어 보라고 하더라. 레지나도 안 보이지. 레지나는 너무 많이 안 좋아서 해봐도 소용이 없다고 하고, 나는 인자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하니까 한번 삶아 먹어보라고 해서 먹고 있다. 아이고, 그럼 그렇지. 그게(콘센트) 딱 안 끼어 줬고나. 바로 끼웠나? 안 보이니 병신이 따로 없다. 봐라. 금방 뜨거워지제? 인자 좀 있으면 끓는다.

시계 보고 있다가 끓고 나서 20분 지나면 끄고 식힌다. 저기 옆에 뜰채 안 있나. 내가 다 갖다 놓고 한다. 걱정하지 마라. 손 안 데이게 뜰채로 떠서 저 그릇에 담아가서 찬물로 식혀서 다 식으면 먹는다. 매일 삶는 게 힘들어서 왕창 삶아 놓고 하루 두세 개씩 먹는데, 진짜 좀 좋아졌다. 며칠 전까지는 저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이 잘 안보였는데, 이제는 얼굴이 보인다. 블루베리도 저리 사다놓고 열심히 먹는다. 인제 큰 글자도 보이고. 눈이 빨리 좋아져서 책도 읽고 하면 좋겠다.

안약은 내가 혼자서도 잘 넣는다. 허허허 그럼 네가 넣어주라. 뭐한다고 자꾸 넣어준다고 하노. 한 방울씩만 넣어라. 두 가지를 넣어야 하니까 많이 떨어지면 밖으로 주르르 흐른다. 아이고, 옛날에는 참 잘 보이고, 잘 보일 때는 그게 좋은 건지도 몰랐다. 작년 11월까지는 안경 안 쓰고 책도 읽었다. 이리 빨리 나빠지는 게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요새 들어 안 아프던 데가 자꾸 아프네.

팔도 아프제, 눈도 침침하제, 입도 아프제, 장도 안 좋아 변은 자꾸 흐르고, 그래 그런가 머리도 아프고, 이제 어찌 될 긴지 모르겄다. 조끔만 앉아 있어도 궁둥이가 아프네. 이 동그랗게 구멍 있는 방석 이것도 레지나가 갖다 주더라. 방바닥에 그냥 앉아 있으니 어찌 아프고 불편하든지. 이걸 깔고 앉으니까 그래도 영 낫다. 궁둥이 살이 없어서 그런가. 암튼 너무 불편하고 하루하루 지내는 게 힘들다.

우리 오빠가 나 어릴 적에 나를 얼마나 좋아했다고. 나를 참 사랑했다. 그런데 그 오빠도 하나 있던 남동생도 다 갔다. 둘 다 암으로 죽었다. 우리 오빠는 51살에, 우리 남동생은 63살에 죽었다. 요새 변이 자꾸 흘러서 쬐끔 먹던 밥도 잘 안 먹는다. 국수 삶아서 먹는다. 국수를 삶아서 먹으면 좀 낫고. 왜 이리 됐을꼬. 실수할까 싶어서 나가는 것도 싫다. 참 깔끔했는데, 아무래도 갈 때가 다 돼 가는가. 나도 이제 가야지. 하기사 너무 많이 살았다. 그쟈. 이리 머리가 허옇게 될 때까지 뭐한다고 살고 있을꼬. 뭐 좋은 거 볼 거라고.

1948년도에 소록도로 갔는데, 그때의 소록도는 일종의 형무소라. 광주 형무소의 소록도 지소꼴로 보면 돼. 그 형무소에 있던 나환자들 중에서 좀 말썽을 일으키고 폭력을 쓰는 나환자만 따로 소록도에 보냈는데, 나중에는 아무 문제 안 일으키는 나환자들까지도 그냥 모두 소록도로 보냈어. 거기는 무서운 곳이라. 나는 거기서 4년 살았어. 1952년도에 나왔어. 그래도 기억은 생생해.

그때 소록도에는 감금실이 있었는데, 딱 가마니 한 장 크기라. 화장실은 뭐 그냥 구멍만 하나 파 놓은 거고, 창문이라고는 밥그릇 정도 크기로 있었어. 밥이라 해야 주먹밥 하나를 공기에 담아서 그 구멍으로 밀어 넣어 줬지. 말썽을 일으키거나 말 안 들으면 감금실에 보내는데, 살아나온 사람보다 죽어 나온 사람이 더 많았지.죽어도 곱게 땅에 못 묻히고, 일단 죽으면 모두 해부하고 화장해버렸어.

먹을 것도 귀했지. 나는 돈이 없어서 배급 주는 걸로 살았어. 옛날부터 있었던 사람들은 저축미가 있어서 배급 주는 게 시원찮아도 괜찮았어. 또 돈이 있으모 쌀을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나는 돈이 없어서 배급 주는 겉보리쌀을 도구통에 넣고 찧어서 껍질 벗겨 먹고, 어쩌다 알양미(안량미)가 나오면 그때 쌀밥을 쬐끔 먹을 수 있었어. 주로 강냉이 죽을 먹었어. 소록도는 바닷가라서 파래가 많거든. 파래 뜯어서 구호물자로 나오는 강냉이하고 섞어서 죽을 끓여 먹었다.

소록도에서는 한 방에 8명이 살았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8명이 사는데, 큰 가마솥에 밥을 같이 했어. 아이고, 나는 그런 거 처음 봤다. 각자 요만한 밥종지가 있어. 거기다가 쌀이나 보리를 담아 내 놓으면 그 밥그릇 채로 솥에 넣어 밥을 했거든. 내가 젊어서 주로 내가 밥을 했어. 담아 주는 밥그릇을 받아서 담겨 있는 곡식을 씻고는 다시 그 밥그릇에 부어서 각자 밥그릇을 솥에 넣었어.

그리고 나무를 때서 밥을 하면 희한하게 밥그릇 안에 밥이 되어 있어. 그 밥그릇을 각자 가져가서 먹었지. 내 옆에 붙어 있던 딸이 다른 사람 밥그릇을 보고 “어매, 우리도 저런 거 먹자”하고 많이 보챘어. 그 어린 게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파래죽 안 먹을래, 파래죽 안 먹을래”하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때 그 기억들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가슴이 아프다. 아프고말고.

아들은 소록도에서 낳았다. 소록도에서는 아이를 낳아도 키울 수가 없었다. 그라고 임신한 걸 들키면 바로 낙태시킨다. 10달 된 태아도 낙태시켜 화장터로 가져간다.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하루는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어데서 아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 두리번 거려보니까 어떤 사람이 대야를 안고 가는데 그 대야 안에서 아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 어데로 가는 가 했더니 옆에 사람이 말해주대. 신생아를 담아 화장터로 데려간다고. 그때 소록도는 신생리, 남생리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화장터는 구봉리에 있었다. 그때 아들이 태중에 있었는데, 내 심정이 어땠겠노.

거기서 나는 아들을 낳았다. 내가 소록도에 갈 때는 배가 그리 표가 안 났어. 딸 업고 보따리 들고 있으면 표가 안 났거든. 그래서 무사히 태중에 아들을 품고 들어갔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그리 중한 환자들이 아니고 정도 있어서 안 일러바치고, 나도 배가 부르니 들킬까 싶어서 숨어서 지냈다. 그런데 아를 낳을 때쯤에 원장이 바뀌었어. 고 씨 성을 가졌는데 그리 무지막지하게 신생아를 죽이는 일을 못하게 했어. 그래서 아들을 무사히 낳았어.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니는 참 복도 많다. 운도 좋제”하며 많이 부러워했다.

소록도에 갈 때 딸은 4살이었는데, 그리 오래 같이 있지는 못했다. 몰래 낳아도 곧 들키거나 일러바쳐서 신생아는 그리 버려지고 좀 자란 아이들은 보육시설로 강제로 뺏어 갔거든. 우리 딸도 그만 7살 때 보육원으로 갔다. 그래도 아들은 품에 안고 4살까지 키웠다. 딸을 보육원으로 뺏기다시피 보내고 지냈는데, 안 되겠더라. 아이들이 학교를 가야하는데 우짜꼬 싶은 기라. 그때 마침 우리 동생이 손을 써줬어.

딸 7살, 아들이 4살 때 소록도에서 나왔다. 그때가 1952년도였어. 하나 있던 남동생도 나병을 앓았어. 소록도 가기 전에 애락원으로 가려고 했는데, 애락원에 있던 동생이 어떻게 형제가 같이 있냐고 했어. 나는 같이 있는 사람들도 봤다고 했는데, 내 동생이 “누이가 오면 내가 나갈 거요.” 하니 우째, 내가 소록도로 갔지. 그런데 동생이 애락원에서 있어보니 형제끼리 더러 와 있으니 전출신고를 해줬어. 응, 밖에서 가족이 전출신고를 하면 나올 수 있었어. 애락원은 전에도 있었고 친정이 있는 대구여서 마음이 한결 편했지.

그런데 거기서 딸을 잃었다. 11살 때 뇌막염으로 갔다. 열이 나고 아픈 딸을 업고 애락원 밖에 있는 소아과로 다녔다. 지금은 뇌막염 그거 잘 낫는다는데. 그 병이 그리 머리가 아픈 가봐. 어린 게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머리야”하고 머리를 잡고 뒹굴더라. 뭘 조금만 먹여도 몽땅 토하는 기라. 지 먹이던 밥그릇에 토물을 담는 그런 식이었어. 하, 휴우, 살아 있으모 지하고 둘이 앉아 옛말하고 살 건데……

딸 잃고 아들이 7살 때 애락원에서 나와서 의성 정착촌으로 갔어. 아들은 대구 외갓집에 맡기고. 애락원에서는 아무 것도 못하지. 아들을 초등학교라도 보내고 공부시키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뭐든지 해서 벌어야지. 그런데 애가 딸려 있으니 여기저기서 다 안 받아주는 거라. 그래서 아들은 대구 외갓집에 맡기고 나만 정착촌으로 갔다.

나는 혼자 정착촌에 있으면서 동냥을 다녔어. 뭔 돈을 보냈겄노? 동냥한 쌀을 보내주고, 학비는 좀 커서는 지가 벌었지. 우리 오빠가 데리고 있었어. 올케가 참 사람이 좋고 넉넉해서 구박 안 하고 중학교까지는 보내줬어. 남동생 올케도 있었는데, 오빠 올케가 우리 아들이 부모도 없이 그리 있으니 안쓰러워서 학교 갔다 오면 줄 거라고 먹을 걸 감추어 놓으면, 밑에 동생 올케는 와서 뒤져서 싹 가져간다고 그리 하더라.

이 철없는 아들이 지 외갓집에서 살면서, 시키지도 않는데 큰 소리로 “우리엄마 있는 데는요, 기계로 솥을 돌리요”하고 노래를 부르는 기라. 그러면 오빠나 올케는 기겁을 하고 입을 막았제. 애락원에서는 큰 솥에 쌀을 안쳐서 기계로 밥을 했거든. 게다가 아이가 똘똘하고 대답을 잘 하니까 옆에 어른들이 “네 성이 뭐꼬?”하고 물으면 “소록도 김가요”하는데, 참 기가 막히는 기라. 기가 막히제. 지금은 이리 웃어도 그때는 나환자 아들이라고 사람들이 알까봐서 간이 오그라들었다. 참 식겁할 일이제. 우리가 소록도에서 살다 온 걸 알면 안 되지. 사람들이 알면 쫓겨 날 건데.

그런 놈이 커서 대구 달성고등학교 나와서 서울대를 들어 가대. 고등학교 때에는 지가 과외해서 돈 벌었어. 부모라고 학비 대 주고 용돈 대 주고 그런 것 못했지. 저거 아버지에게도 가 봤다. 경북에 있었는데, 전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니 넉넉하지 않은 기라. 아이고, 나는 그 농사일을 도저히 못하겄더라. 그냥 보통 농사가 아이고 참 험하더구나. 그나마도 있기가 어려워서 그냥 아들 데리고 떠나왔어.

어미가 돼서 잘 입히고 잘 먹이지는 못해도 밥이라도 안 굶길라고 동냥을 다닌 거야. 동냥을 가면 술도 끼얹고 욕도 하고 그러지 뭐. 그래도 사회는 동냥이라도 할 수 있는데, 소록도나 애락원은 그런 걸 못하지. 한번은 개를 풀었는 기라. 그만 물렸는데, 욕은 하면서도 쌀을 대두 1말 주더라. 요게 이게 그 상처인데, 개에게 물린 것보다 쌀을 그리 얻으니까 좋아서 아픈 줄도 모르겄더라. 그리 커서 장가도 가고, 손자 하나는 서울법대 나오고 하나는 서강대 나왔다.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6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5살에 어머니 손잡고 애락원 가던 날

외동딸 나를 “가스나”라고 부르던

어머니

가면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던

내 어머니

 

할미꽃 꽃대 꺾어 머리에 꽂으면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

세상 보려고 나온 생명인데

그렇게 꺾어 되느냐 가르치시던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힘들게 가르친 딸 대신하여

졸업장 받아들고

소리 없이 우셨을

어머니

내 어머니

– 이○○, 2014년 2월 19일 구술 내용에서 발췌-

 

사진-김성리 성심원 요양사 정경

사진-김성리
성심원 요양사 정경

 

애락원에 갈 때 내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외동딸이라고 나를 귀하게 여겼던 어머니는 부를 때 이름 대신 꼭 “가스나야”하고 부르더라.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어머니가 우겨서 좀 늦게라도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밥장사를 했는데, 글자를 몰랐다. 그라께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그리 안 우겼겠나. 내가 열서넛 살 되었을 끼다. 그때부터 안 좋았다. 손가락이 자꾸 뻣뻣해지는 기라. 주물러도 그 때뿐이고 좀 지나면 다시 뻣뻣해졌지.

학교에서 무용을 하는 시간이 있는데, 손가락을 펼치기도 하고 여러 모양으로 구부리기도 했다. 왜 그리 손을 많이 쓰는지 무용 선생님이 원망스럽더라. 아이들은 무용시간이 좋아서 들떠 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더라. 다른 데는 크게 표도 안 나고 그때는 발도 괜찮았는데, 뭔 조화인지 손가락부터 안 좋아지더구먼. 손가락이 뻣뻣하니까 손 모양을 따라 할 수가 없잖아. 혹시 내 손가락을 보고 친구나 선생님이 병 걸린 걸 알까봐 조마조마했다.

무용 수업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손을 궁둥이 밑에 넣어 깔고 앉아 있었다. 그러면 따뜻한 온기와 몸무게가 있어서 안으로 꼬부라져 오는 손가락이 잠시 펴진다 아이가. 겨우겨우 무용 시간이 끝나면 왜 그리 어린 마음에도 맘 한 구석이 허해지던지… 그리 애를 써도 손가락은 자꾸 굳어오고 안으로 오그라들더구나. 밥장사하던 우리 어머니는 아무리 바빠도 조그만 틈만 나면 내 손을 주물러 줬다.

친구들이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내 손을 흉내 내고 놀렸지만 나하고 잘 놀았는데 언젠가부터 드문드문해지더라. 나는 얼굴도 작고 피부도 하얗고 고와서 오물짜 같다고 했다. 그리 하모 뭐 하노. 나중에는 찾아오는 친구도 없고 놀 친구도 없는데. 놀 사람이 없고 동네 사람들 눈치가 보이니까 자꾸 산에 갔다. 산에는 나보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안 들리제. 그래서 산에 갔다.

우리 동네 뒷산에는 할미꽃이 참 많았다. 지천에 널린 게 할미꽃이었다. 초봄부터 여름이 다 갈 때까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할미꽃 뿌리는 기침에 참 좋은 약이 된다. 모양은 그래도 그 꽃은 여러 모로 잘 쓰면 좋은 기 많다. 혼자 산에서 놀다가 심심할 때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밑자루 있는 데가 불그스름하게 보인다. 고개 숙이고 외진 데에 피어 있는 할미꽃이 꼭 남의 신세 같지 않더라. 한참을 보다가 꽃대를 꺾어서 머리에 꽂고 산을 여기저기 그리 돌아다녔다.

사진-김성리 복지사 선생님의 허락하에 게재합니다.

사진-김성리
복지사 선생님의 허락하에 게재합니다.

할미꽃을 귀 옆에 꽂고 좋다고 집에 돌아오모 우리 어머니는 항시 같은 말을 하셨다.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 그러면 나는 픽 웃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 보려고 나온 생명인데 그리 꺾어 되느냐고 안쓰러워하던 어머니 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병든 어린 딸이 무심코 꺾은 그 생명이 그냥 예사로 보이지 않으셨던 게야. 그리 함부로 꺾다가 혹시라도 나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모 어쩔까 걱정이 앞섰던 게야.

열다섯 살이 되니 그나마 학교에 가기도 힘들어졌어. 동네 사람들도 학교 선생님도 모두 나를 어디로 보내라고 어머니를 졸랐다. 우리 어머니는 우짜든지 나를 안 보내려고 용을 썼지만, 어쩔 수 없어서 애락원으로 가기로 했제. 우리 엄마가 해주는 국밥을 먹으러 오던 단골 중에 손상이라는 떠돌이 곡식 장수가 있었는데, 그 양반이 애락원을 말해줬어. 열서너 살에 말해줬는데 우리 어머니가 안 보낼라고 모르는 체 했거든.

더는 못 버티고 우리 어머니 손잡고 애락원으로 갔는데, 문 앞에서 헤어져야 하는 기라. 병자 아닌 사람은 안으로 못 들어가. 문을 가운데 놓고 엄마도 나도 손을 못 놓고 꼭 잡고 있었다. 보다 못한 직원이 나서서 강제로 꼭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놓고 나를 문 안으로 들이 밀었어. 나는 문 안에서 우리 어머니 보고 우리 어머니는 문 밖에서 나를 봤다. 담도 아이고 문을 가운데 놓고 들어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그리 그리 서로 바라만 봤다. 돌아가야지.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나는 애락원으로 들어가야 하제. 어머니는 가면서 돌아보고 몇 발자국 가다고 또 돌아보고 했다. 나는 그냥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니다가 애락원으로 갔다. 글도 모르고 밥장사하는 어머니였지만, 하나뿐인 딸은 공부도 가르치고 예삐게 그리 키우고 싶어 하셨다. 세상 부모 다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 어머니 생각은 지금도 난다. 근데 왜 어린 시절에는 기억이 잘 났는데 중년 이후로는 이리 기억이 흐리지노? 그리 우겨서 힘들게 보냈던 학교를 나는 졸업식에 못 갔다. 우리 어머니가 나 대신 졸업장 받아왔지. 얼매나 울었을꼬. 나도 어미 되고 이리 늙어가니 새삼 어머니가 보고 싶다. 참 보고 싶다.

우리 어머니는 여걸이었다. 실수가 없었다. 손끝이 야무져서 바느질도 참 잘하고 음식도 맛깔스럽게 잘 했다. 그래서 동네 큰일이 있으모 뽑혀가서 음식을 만들고는 했다. 밥장사는 고령 장날만 장에 가서 했다. 집에서는 떠돌이 장사치들을 상대로 하숙을 했다. 장사치들이 장을 따라 다니기도 하고 물건을 지고 여기저기 다니거든. 그러다가 우리 동네 가까이 오모 꼭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는 기라. 그런 하숙이지. 애락원이 있다고 알려 준 손상도 그런 사람이었다. 손 씨인데 그때는 손상이라고 했다.

애락원에 들어갈 때 만원 줬다. 그때 그 돈은 엄청 큰 돈이었다. 굳이 돈을 안 줘도 되는데 우리 어머니는 나를 보내면서 그리 큰 돈을 줬다. 애락원은 병원 같은 데였다. 플래처 선교사가 의사이기도 했는데, 그 때는 건물이 2개 있었다. 나병원이라고 하더라. 우리 어머니는, 글도 모리던 우리 어머니가 시장에서 국밥 말아 팔고 장사치들 밥해 준 돈 만원을 내 치료해주라고, 잘 치료해서 꼭 낫게 해주라고 애락원에 냈다.

나는 ‘불효자는 웁니다’ 노래를 들으면 울고, 어머니 생각해서 울고 그냥 울고 매일 밤 한 번은 운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 보고 땅을 치고 통곡해요.다시 못 올 어머니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이리 부르고 어머니 생각하고, 휴우~~~ 말해도 소용없는 지난 일 생각하고…… 그래서 운다. 그리 힘들게 번 큰돈을 갖다 바쳐도 안 되는 게 이 병이더라.

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초등학교 나와서 대구에서 포목 장사를 했다. 동생은 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왔다. 우리 어머니하고 오빠가 열심히 일해서 내 병원비랑 동생 학비를 댔다. 내가 병에 걸려 학교를 못 다녀도 고등수학까지는 안다. 옆에서 보고 들으면서 혼자 공부했다. 나는 경북 고령이 고향이다. 주민등록증에는 1921년 1월 5일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1919년 1월 5일(양력)이다. 홍진으로 예방접종을 했다는 말은 들었다. 그때는 어린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호적에 늦게 올린 건가 싶다.

어머니가 해 주던 음식 중에 가죽 자반이 있다. 가죽을 뜯어서 살짝 데쳐서 말리거든. 살짝 말려야 돼. 약간 꼽꼽하게 마르면 밀가루 풀을 이파리 사이사이에 넣어서 잎을 반듯하게 만들어. 그 위에 찹쌀풀을 먹이는데, 그 찹쌀풀은 찹쌀하고 고추하고 소금을 넣어서 빻아서 만들어. 찹쌀풀을 서너 번 덧발라 줘야해. 마지막 풀이 또 꼽꼽하게 되면 통깨를 뿌리고 말려서 단지에 차곡차곡 재여 놔.

좀 맵거든. 매우니까 병에 안 좋다고 우리 어머니가 못 먹게 해. 그런데 그게 참 맛있어. 어머니 몰래 하나씩 꺼내 먹으모, 아이고 참 맛있다. 매워서 헥헥 거리면서도 훔쳐 먹고는 했다. 그리 하는 것도 있고, 여린 가죽 이파리를 소금물에 절여 꼭 짜서 말린 후에 고추장 양념해도 맛있다. 그것 말고도 갈치가 참 맛있었다. 명태도 맛있고 함흥에 청어가 많이 났는데 그 청어도 맛이 있지. 아, 참 김밥도 맛있다.

2011년부터 이상하게 입안이 헐어서 안 나아. 요 안에, 입 안에 봐라. 헐어 있는 거 보이제? 아이고 많이 아프다. 김치를 참 좋아하는데 김치도 못 먹고 매운 것도 못 먹고 하니까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게 자꾸 생각이 나. 죽을 먹는데 김치도 없이 뭔 맛으로 묵노. 오늘은 김치를 물에 씻어서 먹었는데 그것도 김치라고 좀 낫더라. 전에 여기 성심원에 의사로 있던 이비인후과 선생이 요새도 한 번씩 오거든. 내처럼 이리 입안이 헐고 아픈 거 공부해서 꼭 낫게 해준다 했는데, 그 공부가 어려운가 아직 안 낫아.

 

나는 사해(四海)에 솥단지 하나 걸어 놓고 살아도 된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5

나는 사해(四海)에 솥단지 하나 걸어 놓고 살아도 된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5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괜찮았다.?처음에는 몸이 아프니 마음이 아프더라.?그래서 날마다 울었다.?이 병이 왔을 때에는 뭐가 뭔지 몰라서 안 울었고,?소록도에 갈 때도 언니가 있으께,?내가 있어야 불쌍한 우리 언니 돌보아 줄 수 있으께 안 울었다.?온 몸이 아프고 죽을 것처럼 열이 나고 덜덜 떨리니까 겁이 나고 그렇더라.?남들은 다리 없이 어찌 살거냐고 하고,?우리 아버지는 내 꼬라지 보고 그 길로 화병을 얻어서 돌아가실 때도 한을 품고 가셨다.

나는 그냥 어리벙벙했다.?얼굴도 수건으로 안 덮어주고 수술하는 걸 보다가 졸도했는데,?깨어나서 보니 시원하더라.?얼매나 몸이 아프고 힘들었는지 슬프고 울고 그런 거 없었다.?너무 아픈 데가 없어지께 후련하고 가뿐하고 그랬지,?뭐.?그런데 살다보니 눈물이 날 때가 더러 있더라.?지금도 몸이 아프모 눈물이 안 나는데,?마음이 아프모 눈물이 난다.?왜 그럴꼬??소록도 생각해도 눈물이 나.?그때 생각하모 마음이 아파.?자꾸 아파.

소록도에 있을 때에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옷은 광목이었다.?틀린 거는 겨울이 되모 검은 물들인 옷을 입은 기다.?참 추웠다.?배도 고팠어.?배급을 주는데 맨날천날 모자라.?나는 어리다고 밥도 마이 안 줬어.?그래서 칡을 마이 묵었다.?칡이 억시기 많아서 물칡은 안 묵고 끊어 버리고 했다.?거기서 죽는 거는 사는 것보다 쉬워.?죽으모 제대로 장례도 안 지내주고 함부로 한께 사람 뼈가 예사로 있어.?왜 저 앞에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것 같던데,?그거 사실이다.?그때도 쇠꼬챙이로 아무 데나 땅을 부시모 뼈가 나오제.

밤에 바다를 보모 퍼런 빛이 번득여.?사람 뼈에서 나오는 인이 그리 보이는 기라.?아이가,?그냥 버리는 게 아니고 화장을 하는데,?제대로 안 돼서 그래.큰 도람통 같은 기 있는데,?죽으모 거기다가 넣고 화장하는데,?요새같이 그리 안 되지.?납골당이 있기는 있었어.?큰 뼈는 납골당에 넣고 납골당이 차모 지하실에 따로 보관했다.?그라고 자잘하게 나오는 거는 바닷가에 버리기도 했거든.?어떤 날은 뼈에 파래가 끼인 채로 해변가에 뒹굴어 다닜다.

양추자 - 시모임

바닷가에 자주 나갔지.?먹을 기 있다 아이가.?나는 소록도에 가서 반지락을 처음 보고 알았다.?우리집이 있던 거제도는 물살이 세서 반지락이 없어서 몰랐다.?파도에 껍데기만 밀리오고 했거든.?소록도에는 많았다.?그거 주워서 삶아 묵고는 했다.?그라고 파래가 많았거든.?파래를 뜯어서 그 우에다가 강냉이 가리를 솔솔 뿌리 갖고 쪄묵었다.?허허,?맛은 무신 맛.?파래강냉이 떡이지.?파래만 찌모 안되니까 쌀가리 대신 강냉이 가리를 쪼끔 뿌리서 묵는 긴데,?그기라도 실컷 묵었으모 했다.

그거를 묵고 나모 침이 질질 흘러.?몰라,?이상하대.?파래만 묵으모 속이 데리고 침이 질질 나와.?속이 마이 데린다.?처음에는 괜찮은데 자꾸 먹다 보모 데리다 못해 침이 질질 흘러내리.?산나물도 마이 뜯어서 그리해서 묵는데,산나물은 속이 고달퍼.?산에서 나는 거는 마이 묵고 자꾸 묵으모 속이 고달프고,?바다에서 나는 거는 속이 데린다.?그 이유는 몰라.?한 방에?10명씩 살았는데,?나만 그런 게 아이고 거의 다 그랬어.?그래도 묵을 기 워낙 없으니 바닷가에 가모 널린 기 파래고 옥수수 가리는 배급이 나온께 그거라도 해 묵고 허기를 달랬어.?묵고 나서 침이 흐르고 속이 데리도 그기라도 많이 묵고 싶었어.

곡식이 귀해서 그랬지 묵을 거는 그거 말고도 제법 있었제.?산에 소나무 안 있나.?소나무도 묵었다.?허허 아이다.?무신 아무 소나무를 꺾어 묵노.?니도 참 말이 안 된다.?소나무 솔잎에 새순이 안 드나.?그 새순이 올라오는 거(가지)?밑에 있는 가지를 꺾어서 껍데기를 벗기모 안에 또 껍데기가 나와.?그 껍데기를 이로 긁어서 묵으모 맛이 괜찮아.?작년에 올라온 새순 위(가지)에 또 새순이 올라 오모 올해 거는 놔두고 작년 걸 꺾어 묵었다.

소나무는 꽃도 묵고 이파리도 묵는다.?참 고마운 나무제.?송진도 묵는데 그거는 흐르고 난 뒤 사나흘 지나모 꼬들꼬들해지거든.?꼬들꼬들해진 걸 뜯어 묵는데,?꼭꼭 씹으모 껌처럼 된다.?배가 고플 때 그기라도 꼭꼭 씹고 있으모 좀 낫다.?씹으모 껌같이 되는 기 피비(삘기)다.?니도 피비는 묵어 봤고나.맞다.?거제도에 참 피비가 많다.?소나무는 묵으모 배가 부르고 그거는 묵으모 더 허기가 나.?풀도 나무도 생긴 대로 다 다른 기라.?굶어 죽으란 법은 없어서 천지에 묵을 거를 흩어 놓고 안 있나.?그기 자연이다.

16살에 다리 끊고 나무다리로 그리 그리 살았는데, 19살에 중매로 결혼했다.?옆에서 중매해줬는데, 29살 묵은 노총각이었다.?암만 노총각이라해도 내를 봐라.?좋은 마음으로 내 도와준다고 장가들었다. “어임주”?우리 영감 이름이다.?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산청이 고향이다.?산청초등학교 다닜다카더라.?소록도에서 나와 갖고 함안 정착지에서 살다가 여게(성심원)로 온 것도 다 그런 인연이제.?부부로 사십칠팔 년을 살아도 싸움 한 번 안했다.법도 없이 살 사람이다.

2007년?10월에 갔다.?내가 폴도 마이 아프고 다리도 좀 그렇고 해서 그런지 나를 마이 위해 줬다. 2007년 들어 좀 샐샐했제.?기운도 빠지고 해도 그래도 나는 그리 갈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그날 저녁에 밥을 참 맛있게 묵더라.그러고는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는 기라.?밥을 한 그릇 더 주라는 기라.?내가 무신 밥을 또 묵을라카노 하면서도 한 그릇 더 퍼주니까 암 말도 안하고 그 밥도 깨끗이 비우더니,?고마 자다가 안 가나.?응,?자다가 그리 갔다.?평생 그리 고생하고 배도 마이 곯았는데,?그래도 가는 길은 편하게 가서……얼매나 배 곯고 살았으모 가는 길에는 배 안 고플라고 두 그릇 든든하게 묵고 갔을꼬.?가는 동안은 배 안 고팠을 기다.

19살에 결혼은 했는데, 26살에 살림 났다.?결혼은 해도 낮에만 같이 있고 어두워지모 합숙하는 방에서 잤제.?방이 없었어.?어짜다가 누가 죽어서 혼자 되는 집이 있으모 그때는 혼자 된 사람은 합숙하고 그리 빈방에 살림을 내줬거든.?결혼했다고 딴 방을 줄 형편이 안됐어.?그래서?26살까지는 낮에만 부부지.?그래도 부부가 되니까 낮에 와서 힘든 일도 도와주고 좋대.?좋더라.하하하.

그래서 아이가 안 생긴 거 아이다.?그놈들이 단종수술을 해서 아를 못 낳았다.?소록도에서는 젊은 남자가 들어오거나 어리서 와도 사내 구실할 나이가 되모 모조리 단종수술을 했거든.?강제로 했다.?단종대가 따로 있었다.?붙들어 가서는 뭐 제대로 마취도 없이 묶어 놓고 했지.?그래서 원통하고 분하다.자식도 없으니 천지간에 나 뿐이라.?명절이 제일 서럽다.?평소에는 모리고 살지.?명절이라고 주변에 그래도 자식이 찾아오고 자랑하는 거 보모 서럽고 인자 그만 살고 싶다.

임신한 여자가 들어오모 강제로 낙태시켰다. 10개월이 되어도 아를 낳게 하는 기 아이라 낙태시켰다.?병원 지하에 강제 낙태시킨 태아들을 보관하는 데가 있었다.?나는 봤다.?병에 보관되어 있는데,?머리카락이 새카만 태아도 들어 있었다.?우찌우찌해서 아를 낳아도 바로 보육시설로 보내진다.?엄마가 울고불고 해도 소용없다.?놀래기는 와 그리 놀래노??거는 그런 거 예사다.?지금이야 뭐 천국이다 어쩌다 하지만,?우리 살던 옛날 소록도는 사람 사는 데가 아이다.

언젠가 남편이 그러더라. “우리 이 몸으로 돈 많이 벌었다.?참 일 많이 했다.”?그러대.?참 열심히 살았다.?죽어라고 일만 했다.?시동생이 아를 다섯 명이나 두고 먼저 갔다.?동서는 가출했버맀고 하니까 시어머니가?‘조카도 자식이다’?하대.?그 아이들을 시어머니가 키우는데 양육비를 보탰다.?말하자모 그 아이들 다섯 다 거두고 시어머니 생활비를 대줬다.?조카가 자라서 취직했을 때는 작은 차도 한 대 뽑아줬다.?둘째 질부는 가까이서 복지사로 일한다.?조카들이 가까이 있어도 안 온다.?그 시어머니도?2008년도에?98세로 돌아가셨다.

소록도에서 나와서 함안 농장으로 왔거든.?와서 보이까 우리 시어머니가 아들도 없이 손자 다섯을 데리고 살고 있는데,?나라로부터 아무 도움도 못 받고 살고 있는 기라.?하기사 누가 나서서 아들 하나는 죽고 하나는 몹쓸 병 걸리 있고,?며느리는 집나가고 없는 촌 할멈한테 관심을 두겄노.?우리 영감이 면사무소에 참 뻔질나게 다니고 항의도 하고 애원도 하고 해서 생활보호대상자가 됐다.?우리가 보태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그래도 그 돈이라도 나라에서 나오니까 밥은 안 굶고 손자들 공부는 시킸다.

60년 도에 소록도에서 통마늘 농사 지어서 서울에다 팔았는데,?얼추?1년에 한 천만 원씩은 되는 것 같더라.?그때는 보상 없었다.?무임금 노동이라고 들어 봤제??그런 기다.?돈 달라고 말도 못한다.?참 일 마이 했다.?불쌍한 우리 언니가?85년도에 죽었다.?그리 가엾고 또 가엾게 살다가,?나 생매장 안 시킬라고 내 배위에 엎어져서 그리 울던 큰 언니가 결국은 갔다.?언니가 죽자 우리도 소록도에서 나왔다.?그때는 우리가 나가고 싶다 하모 내보내주고 했다.?가운데 언니는 외동딸 하나 낳고 부산에서 살고 있다.?건강할 때는?1년에 한 두 번 씩 왔다 갔는데,?인자 늙고 몸이 안 좋은께 오도 못한다.

사회에 나와서 정착촌으로 갔는데 거가 함안 농장이다.?처음에는 짐승을 키웠는데,?품삯으로?50만원을 받았다.?기분 좋지.?일하고 돈을 받으니 아침부터 밤까지 참말로 열심히 했다.?죽기 살기로 일해서 우리 명의로 된 짐승도 사고 그리 했지.?니 보다시피 내 폴이 이렇다 보니 크게 힘쓰는 일은 영감이 했다.?나도 하는 데까지 힘을 보태도 다리도 나무 다리고 폴도 이리 해 갖고 뭐 그리 큰일을 했겄나.?밥하고 집안 일 하는 것도 참 힘들고 어렵더라.

학교??응,?다닜다.?소록도에서 학교를 다닜다.?집에서는 국민학교?4학년까지 댕깄는데,?소록도에 중학교가 생기서 들어가서 배웠다.?영감 만나 결혼하고 나서 학교 갔지.?재밌더라.?영감도 다니지 말라는 말은 안 해.?소록도 교회 안에?1960년도에 야간 성경 고등학교가 생깄다.?그게도 댕기고 있었는데,?고마?63년도부터 학생들 보고 오마도 공사에 가라카대.?오마도 공사에 학교 학생들을 죄다 데리고 가서 일 시킨다고 학교를 보내주나,?못 가게 하는 기라.?해뜨모 학교가 아이라 오마도로 갔다.?그래서 고등학교는 저절로 없어졌지.?그 길로 공부는 끝났다.?오마도 이야기는 안 하고 싶다.?참 마이도 죽고,?흔적도 없이 갔다.?일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고 파도에 휩쓸리 갖고 죽고 일하다가 죽고……

97년도에 여게 성심원으로 왔다.?더 이상 일도 힘들고 조카들도 얼추 크고 하니까 영감이 이리 오자고 하더라.?그래서 시어머니하고 조카들 단도리 좀 해 주고 돈?○○○원 들고 여게 와서?201동에 살림을 풀었다.?그때는 성심원이 지금하고 좀 달랐다.?응,?그렇지.?지금이 더 좋아졌지.?영감이 죽고 나서도 한참 동안 밥해묵고 있었다.?근데 폴이 이리 덜렁거리고 힘이 없은께 밥 한 끼 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고달파.?관절 때문에 팔에 기브스도 했는데,?밥을 제대로 해 묵을 수가 있어야지.?밥 한 끼 묵는 기 어찌나 고되던지 말도 못한다.

여게 요양사에 방이 없어서 못 들어오고 있다가 작년(2013년) 10월에 들어 왔다.?아이고,?암만 낫지.?밥 주제,?청소해 주제,?목욕 시켜 주제,?이런 데는 없다.?내가 시를 하나 썼는데 한번 봐라.?직원한테 불러주고 직원이 이리 종이에 옮겨서 갖다 놨다.?여게다가 내가 곡을 붙이서 노래 해 보꾸마.

 

성심원 구름이 두둥실

멀리 멀리 퍼지네.

너는 아느냐

성심원을……

나그네 천국이라는 걸

(중략)

성심원 바람이 두리둥실

온 세계에 퍼지니

너는 아느냐……

성심원이 장애인 동산이라는 걸

-2014년?4월?4일 구술-

 

이거는?4분의?4박자로 불러야 된다.?샤프(샵, #)를 넣어서 센트(크레센도)로 불러야 한다.?알지.?샤프와 센트는 높고 강하게,?프렛은 낮게 불러야지.내가 이래봬도 성가대 경력?30년이다.?소록도에서 교회 다닐 때도 노래 부르고,?천주교 다니고 나서도 노래 불렀다 아이가.?이거는 얼마 전에 소록도 갔다 와서 지어 봤다.?혼자 지어 갖꼬 혼자 노래 부르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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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은 우리 같은 나그네의 천국이다.?성심원이 좋다.?그런데 소록도에 가니까 예날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나대. (성심원)요양사에서 옆방 사람하고 맘이 안 맞아 속이 상해?‘나갈까’?하는 생각이 든다 한께 전에 같이 소록도에 있던 사람들이 오라고 하더라.?잘 지내던 사람들이 좀 남아 있더라.?다 안 죽고 살아 있더라.?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 못 만나고 왔다.?그게는 방도 항상 준비돼 있다 카더라.?벽지도 새 거고 방마다 에어컨도 있고……그게서 살다가 성심원으로 가고 싶으모 가도 된다고 그라더라.

소록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병원이다.?그게는 워낙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까 봉사자들이 많아서 아픈 사람들은 방마다 밥도 갖다 주고 하더라.?여게는 직원들이 밤낮으로 안 뛰어 다니나.?참 고맙고……?말로는 고마운 맘을 다 표시 못하제.?나한테는 우리 성심원 직원이 가족이다.?나는 사해에 솥단지 하나 걸어 놓고 살아도 된다.?돈 필요 없다.?나는 생활보호대상자라서 아파도 병원에서 돈 안 받는다.?이 나이 되고 보이 자식 하나 못 남긴 것,?그것만 억울하다.?나 죽고 나모 우리 영감이나 나나 누가 기억하겄노.

옛날에 우리 아부지가 그러는데,?내 사주가 남자 같았으모 사모관대를 쓸 사주인데,?여자로 태어나서 국록을 먹는다고 했단다.?큰 기와집 밑에서 전깃불 아래에서 산다고 했다는데 딱 맞다.?그 말을 모리겄나??내가 지금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묵고 사니 국록을 받아 묵는 기고,?소록도에 가니까 전깃불이 있더라.?그라고 지금 성심원,?이 큰 집이 내 집 아이가.?기와집이라는 거는 진짜 기와집이 아이고 큰 집이라는 뜻이라.?니도 참,?그리 못 알아 듣나?

울 아부지 함자는?‘양재만’,?울 엄마는?‘김순이’,?나 때문에 화병 걸린 우리 아부지는 일흔일곱에 돌아가시고 울 엄마는 이부지 뒤에 가셨다.?나는 원래1941년?3월?27일(음력)에 태어났는데,?호적에는?12월?10일로 되어 있다.?이유를 모리지,?왜 틀리게 되어 있는지.?내 밑으로 남동생이 다섯 명 있었다. 5남?4녀이다.?내 밑으로 아들이 줄줄이 나왔제.?내 이름 덕 좀 본 기라.?이런 이야기도 인자 다 부질없다.?세상이 허무하다.

요 앞에 날이 따시모 경호강에 가서 앉아 있으모 낚시하는 사람들을 제법 만난다.?고기 잡는 모습을 보모 참 사는 모양이 다 다르다.?어떤 사람은 내가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본 척도 안하고,?어떤 사람은 대답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먼저 말을 걸기도 한다.?어떤 사람은 잡은 고기 다 가져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잡은 고기를 놓아주고 빈 바구니 들고 간다.?잡았던 고기를 놓아 주모 고기가 물에 들어가자마자 파드득 놀래서 꼬랑댕이를 흔들며 가는 기 귀엽다.?그런 사람은 고기를 낚는 게 아이고 강가에 서서 세월을 낚는 기라.

그나저나 인자 나 시모임에 안 갈란다.?왜는,?그냥 안 갈란다.?처음에는 시를 모린다 하고 안 쓰던 사람들도 인자는 다 시를 써 와서 읽고 하는데,?나는 니 보다시피 연필을 쥘 수가 있나,?글을 쓸 수 가 있나.?머리속에 기억해놔도 그마 자고 나모 다 잊어버린다.?직원들도 바쁜데 내가 생각날 때마다 어찌 자꾸 써주라고 하노.?그리하모 안 된다.?사람이 미안한 거를 알아야지.내 생각만 하고 그라모 안 된다.

니가 서운하다고??그래도 안 갈란다.?뭐 내가 안 간다고 서운하노.?다른 사람들도 안 있나.?마이 서운하다고??섭섭하다고??맘이 안 좋다고??알겄다.생각해 보꾸마.?그래도 자꾸 신경이 쓰이고 그렇다.?나만 가만 있는 것 같고……?내 다시 생각해 볼게.?니가 그리 서운다 하모 그것도 내가 잘못하는 기제.?응,?응,?알겄다.?알았다고.

 

“내 얼굴은 큰 바위 얼굴 같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4

“내 얼굴은 큰 바위 얼굴 같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4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풍경3학교에서는 오지 말라고 해도 그래도 실실 가니까 또 별 말이 없어. 그래서 좀 더 다녔다. 응, 오다가다 가다말다 했제. 큰 언니는 얼굴에 표가 자꾸 나. 나는 7살에 병이 들었다카는데 내가 스스로 안 거는 아매도 초등학교 1학년 때였지 싶다. 뭐 병이 들었다 해도 그기 무슨 병인지 얼매나 심각한 건지는 몰랐제. 바닷가에 있는 바위는 넓고 크다 아이가. 바닷가에 놀러가서 큰 바위에 어짜다 닿으모 그 부위가 빨갛게 불키는 기라.

그리 긁었던 기억은 없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말하모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밤에 그 왜 큰 가마솥 안 있나? 그 솥 밑에 붙어 있는 검정을 긁어 와서 잘 때 되모 불킨 데에 솔솔 흩어서 뿌려주더라. 그라모 다음 날 아침에 보모 그 불킨 기 흔적도 없어. 그래도 바위에 닿으모 또 불키고, 검정은 그때뿐이고…. 그래도 그기 유일한 약이었던 것 같다. 그거 말고는 소록도 가기 전까지 약을 묵거나 바른 기억은 없어.

시간이 가니까 불키는 것 말고도 인자 무릎 우로 종기가 한두 개 나는 기라. 그래도 안 보이니까 그런 건지 그럭저럭 슬슬 다니고 때로는 친구들하고 놀기도 했다. 아매도 국민학교 4학년 때였지.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바위를 펄쩍 거리며 옮겨 다니며 노는데 그만 바람에 치마가 훌렁하고 날리는 기라. 친구들이 그만 봤다. 다리에 소소하게 빨갛게 불키 있는 거를. 치마를 얼른 덮었는데 친구들이 더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대.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학교에 가니까 역시 담임이 나오라쿠는 기라. 친구들이 담임에게 말했지, 뭐. 담임이 치마를 걷어보더마 인자 진짜 학교 오지 마라하고 집에 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집에 왔지 뭐, 어짜겄노. 오지 말라는데, 안 가야지. 또 언니하고 나하고 둘이서 산에서 놀다가 해가 지모 내려오고 그랬다. 뭐 먹었냐고? 산에 가모 묵을 거 천지다. 다래가 꼭 목화송이처럼 하얗게 보이는데, 그런 기 여기저기 많았다. 밥만 없지 묵을 거는 많아서 언니하고 나는 산에서 있는 게 편했다.

그런데 인자는 그것도 안 된다고 하더라. 산에 가는 것도 눈치가 보여서, 자꾸 눈치가 보이더라. 사람들이 자꾸 소록도에 가라고 하는 기라. 우리 아버지 엄마도 어쩔 도리가 없어. 버틸 재간이 있어야지. 면사무소에서도 오고 지서에서도 오고 마을 사람들은 내내 ‘왜 안 보내노? 언제 보낼 끼고?’ 하면서 우리 엄마 아버지를 자꾸 뭐라카고 한께 우리 부모님도 버틸 재간이 없었어. 언니하고 나 안 보내고 데리고 있을라고 얼매나 애를 썼다고. 그래도 더는 못 버텨. 성한 둘째 언니하고 내 밑으로 줄줄이 있는 남동생들을 생각하모 안 보낼 수도 없는 기라.

내가 12살 때, 1952년도에 소록도로 갔다. 동생들이 있으니까 아버지 엄마는 못 오고 나하고 언니하고 둘이 손잡고 갔다. 부모님은 좀 있다가 우리 보러 왔제. 언니라 해도 정신이 그러니 내가 언니 손을 꼭 잡는 기 아이고 우리 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다녔다. 견내량 다리를 건너 버스 타고 가다가 들키모 아무 데나 차 세우고 내리라 하고 그라모 내리고, 그래서 언니하고 손잡고 걷다가 차가 오면 손들어서 타고, 또 쫓겨 내리서 걸었다. 묻고 물어서 처마 밑에 자고 해서 이틀 만에 소록도에 닿았다. 여관에 갔는데 나가라 해서 길에서 잤다.멀면 멀고 가까우면 가깝고, 게가 그렇더라.

내가 갔을 때에는 소록도에 마을이 7개 있더라. 어데, 소록도는 구역을 나누어서 병 상태에 따라서 다리게 살게 해. 병 상태가 양호한 한센인은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에 가서 시중을 들어야 해. 나는 나이가 어리도 병상태가 양호하다고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에 가서 시중을 들어라 하데. 가서 물도 떠 주고 밥도 멕여 주고 잔심부름도 하는데, 제일 못할 기 대소변 수발드는 기라.

그 사람들은 화장실을 못 가.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이었거든. 우리 언니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까 일은 안 했제. 나는 병표가 마이 안 나고 그리 안 깊어서 굳이 소록도로 안 가도 되는데 우리 언니 혼자 못 보내니까 같이 간 거거든. 우리 부모님이 큰 딸이 걱정돼서 막내딸을 딸리 보내면서 맘이 어땠을꼬. 동네 사람들도 언니보고 난리지 나보고는 그리 안 했어.

밤새 요강에 오줌을 싸고 그래. 그라모 나는 아침에 일찍 해뜨기 전에 일어나서 그 요강을 비워야 돼. 그래도 다행인 게 똥은 딴 데 쌌어. 똥은 거름이 되거든. 오줌도 따로 모았어. 아무 데나 버리모 안 되고 그 모아 놓는 데에 갖다 버리야 하거든. 밤새 요강이 가득 차니까 어두컴컴한 새벽에도 일어나야 해. 빨리 안 가모 욕도 하고 난리가 나. 내가 빨리 요강을 비워야 또 싸지. 모아 놓는 데는 사람들이 있는 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어. 그게까지 오줌이 가득 찬 요강을 들고 가모 오줌이 막 내손으로 손목으로 타고 흘러내리.

손이랑 손목에 오줌이 마를 날이 없더라. 그때 겨우 12살인데…. 겨울이 너무 힘들었어. 날은 춥지. 요강은 무겁지. 오줌이 가득 찬 요강을 두 손으로 받치 들고 저 멀리까지 가모 팔이랑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아무리 살살 걸어도 오줌은 출렁거리고 흘러 내리. 아무리 빨리 걷고 빨리 움직이도 거리가 멀고 하니까 요강을 비우고 가모 욕이 들려. 내가 안 가모 오줌을 못 싸니까 오줌이 누고 싶은 사람은 참으면서 욕이 나오는 기지. 하하하. 욕 듣는 기 싫어서 빈 요강을 들고 종종거리기도 하고 뛰기도 했어.

한겨울에는 손목이랑 손가락이 얼어 터지는 것 같애. 그라고 요강을 씻는 것도 내가 했거든. 그때 따신 물이 있나. 그냥 찬물에 씻는데 너무 춥고 손이 시린께 오줌 냄새도 안 나. 누가 나를 씻기 주는 것도 아이고, 맨날 손이랑 손목이 틀어서 보기 숭했어. 겨울에는 튼 데가 터지서 피도 나고 가렵기도 하고 그렇는 기라. 그게 오줌이 흘러 내리모 따갑고 씨리고, 그라다가 딱지가 앉고, 어짜다 딱지가 떨어지모 또 피도 나고 그랬어.

더러버도 어짤 기야. 안 하모 안 되는데. 소록도에 간 이상 나가지도 못해. 온통 바다인데 어데로 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인자 그때 마음은 기억이 잘 안 나. 그냥 마음이 아파. 12살짜리 계집애가 오줌 가득 든 요강을 들고 찬바람 속을 발발 떨고 가던 기억만 또렷하고 자꾸 떠올라. 그래도 그기 있던 사람들이 나 어리다고 마이 예삐해 주고 잘 해줬다. 오줌을 참고 있으모 성을 내도 평소에는 참 따뜻하게 대해줬어.

어데로 가나 성질머리 더러운 사람은 있어. 그런 사람들 성질낸 거는 기억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잘하나 잘못하나 성질 내는데 거기에 동조할 필요가 없는 기라. 그 사람 천성이라. 그런 사람은 잘해 주도 툴툴 못해 주모 성을 뭐같이 낸다. 그런 사람의 성질에 내가 움직이 봤자 나만 손해라.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넘겨야 해.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기 어딨노.

풍경2내가 살던 부락에서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어. 환자들이 스스로 밥을 못하니까 단체로 밥을 해서 줬거든. 나도 식당에서 밥 먹었제. 그때 내 나이가 16살이었어. 날짜도 안 잊혀져. 4월 27일 주일이었어.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이 점심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았다고 가서 나물을 뜯어 오라 카더라. 요강 비우는 것보다는 나물 뜯는 일이 안 좋나. 오랜만에 홀가분하게 가서 나물을 뜯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놀래서 허겁지겁 갔는데 그래도 점심시간에는 좀 늦었어. 마이 안 늦고 쪼금 늦었어.

그래도 규칙을 어긴 게 돼서 감독관한테 불리 가서 종아리를 맞았어. 근데 좀 세게 때려졌는가봐. 그만 뼈가 부러졌던가봐. 종아리도 좀 터지고. 자꾸 덧나. 진물도 나고 안 낫는 기야. 그래도 오줌 요강은 들고 다녔제. 워낙 중환자도 많고 나는 부모도 없이 정신없는 언니하고만 있응께 자꾸 일을 해야제. 아팠지. 얼매나 아팠다고. 그게는 사지 있는 사람은 아프다고 봐 주는 것 없어.

날이 지나가니까 온몸이 불덩어리라. 열이 너무 심해서 어떤 날은 까무라치기도 하고 그랬어. 보다 안 되니까 다리를 끊자 하대. 치료법이 뭐가 제대로 없었어. 살면 사는 기고 못 살고 죽으모 죽는 운명이지. 의대가 있는 데에 병원이 있었어. 아이라, 지금 겉은 의대가 아니고 진짜 의사는 몇 안 되고 거기서 흰 가운 입고 의사 도와 일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는 데를 의대라고 불렀어. 해부도 하고 그랬제.

수술실 천장에 커다란 거울이 있었어. 둥글고 큰 거울인데 수술대 위에 누워서 보면 내 얼굴까지 다 보여. 수건으로 얼굴도 안 덮어줬어. 전신마취가 어데 있노. 그냥 허리 아래만 마취해. 수술하면서 저거끼리 웃는 소리, 말하는 소리 다 들어. 그라고 기계 덜그덕 거리고 다리 자르는 소리도 들리고 보였어. 봤지. 거울로 보다가 기절해버렸지, 뭐.

눈 뜨니까 당가에 거꾸로 매달아 놨어. 오른 쪽 다리가 없대. 링겔도 없고 눈 뜨고 물이라도 넘기모 사는 기고 안 그라모 죽는 기라. 나중에 이야기 들은께 몇 시간 동안 눈도 안 뜨고 못 깨어났어.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부실로 옮길라고 했는데, 우리 언니가 가슴이 따뜻하다고, 아직 안 죽었다고 내 가슴 위에 엎드려서 안 비켰어. 사람들이 나를 못 옮겨가게 내 위에 팍 엎어져서 “우리 동생 안 죽었다.”고 울고불고 했던 모양이야. 울 언니가 날 살린 셈이지.

열이 너무 마이 나고 오랫동안 열에 시달리고 나니까 얼굴 살이 축 늘어지대. 그냥 살이 축 늘어지고, 지금 나 봐라. 얼굴이 이리 축 처져서 바위 얼굴 같다 아이가. 웃기는 와 웃노? 내가 예삐다고? 니 거짓말도 잘 한다. 눈도 깜짝 안하고 입도 안 삐뚤어지고 그리 거짓말을 하나? 허허허 우리 아버지가 나 다리 잘리고 난 뒤에 와서 내 얼굴 보더니 “얼굴이 큰 바우 얼굴 같다.” 이라대. 그래가 내가 보니까 진짜 그렇더라. 그 전에는 좀 예뻤겠제? 처음에는 시간이 좀 지나모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안돌아 오더라.

며칠 누워 있었던 것 같애. 열도 내리고 몸을 좀 움직일만 하자 또 요강 비우러 다녔지. 옳은 치료도 없고 누가 있어서 나를 돌봐 주겄노. 우리 언니야 내 옆에 껌딱지 마냥 붙어 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이라. 목발이 어데 있노? 나무 작대기 하나 주워서 그거 짚고 절뚝거리고 다녔지 뭐. 맞을 때 양쪽 종아리를 맞았거든. 응? 점심시간에 늦었으니까 맞았지. 그게는 규칙이 하도 엄해서 딱 정해진 대로 움직여야 해.

왼쪽 다리도 마이 아팠어. 그래도 그 다리로 안 움직이모 어떻게 해? 누가 밥 먹여주나? 작대기 짚고 오줌이 흐르는 요강 들고 아픈 다리에 힘을 주고 절뚝거리고 다니다 보니 그마 왼쪽 다리도 탈이 났어. 너무 아프고 또 열이 나. 봄에 오른쪽 다리 자르고 난 후로 여름 내내 떨리기도 하고 열도 나고 춥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슬펐냐고? 잘 모리겄다. 슬펐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해 가을에 왼쪽 다리도 마저 잘랐다. 방법이 없었다니까. 요새하고 달랐어. 그라고 그게는 소록도다. 소록도가 어떤 데인지 알기나 하나? 지금 소록도는 그때 소록도가 아이다. 지금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모 우리 인생 아무도 모린다. 나도 가끔씩은 꿈이던가 생시던가 싶기도 하다. 어찌 다녔냐고? 처음에는 엉덩이로 밀고 다니다가 좀 있으니까 나무다리를 해 주더라. 응, 그때도 의족이 있었다.

지금 의족하고는 마이 달라도 걸어 다닐 수는 있었다. 나무로 동구랗게 홈을 파서 그게다 다리를 넣고 끈으로 묶어 다녔다. 처음에는 무겁고 불편해도 그게 아니모 못 걷는다 아이가. 그라께 열심히 연습했다. 나무다리로 다니면서 심부름도 하고 요강도 비우고 우리 언니도 돌봐주고 그리 했다. 나 때린 사람도 미안타 하더라. 그리 될 줄 몰랐다고, 일부러 그리 한 거는 아이라고 하더라. 그라모 됐지. 일부러 그라는 사람이 어데 있노.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됐다. 으응, 원망 안한다.

갑자기 사진은 무신 사진이고? 에이, 안된다. 니 얼굴 베린다. 커다란 내 얼굴이 니 옆에 있으모 니 얼굴 베리서 안 된다. 너무 붙이지 마라. 얼굴을 저리 좀 옆으로 해봐라. 니 얼굴이 고운데 나 때문에 베리모 어짤라고 자꾸 옆에 붙어쌌노. 사진? 올리도 된다. 누가 나를 알겄노? 어데다 사진을 낸다꼬? 내 이야기하고 같이 올린다고? 그리해라. 괜찮다. 응,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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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거제도라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3

“내 고향은 거제도라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3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나가 7살에 병이 들었다. 내 우로 언니가 둘 있었는데, 큰 언니가 먼저 병이 들었다. 울 언니는 얼굴에 병 표가 마이 나서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고, 나는 병 표가 얼굴에는 안 나고 다리에 나더라. 그것도 무릎 우로 나서 치마로 감추모 안 보였다. 큰 딸도 한스러운데 셋째 딸까지 그 험한 병에 걸리고 보이 울 아부지 엄마 맘이 어땠겠노. 내가 펄쩍거리고 뛰다가 행여라도 다리에 난 병 표가 들킬까봐 울 엄마는 나보고 뛰지도 못하게 했다.

7살에 병이 들어도 나는 내가 병든 줄을 몰랐다.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나를 환자 취급 안 했거든. 어린 기 병 걸린 게 맘이 아파서 내말은 무슨 말이든지 전부 다 들어줬다. 국민학교도 갔다. 집에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학교를 가니까 자연적으로 알게 되더라. 나도 모리게 자꾸 손이 치마로 가서 잡고 있었제. 펄쩍 거리고 뛰다가 다리 병표가 들킬까 무서버서 체육시간이 되모 자꾸 뒤로 가는 기라.

하루는 공부 마치고 집에 갈라고 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부르더라. 가니까 손을 펴 봐라, 손을 뒤집어 봐라 하데. 요리조리 보다가 고마 치마를 걷어 보라는 기라. 나는 안 걷을라꼬 자꾸 움찔움찔 했다. 그래도 어짜겄노 그마 다리 병표를 봤는 기라. 담임 선생님은 아무 소리 안 하고 “내일부터 집에 있어라.” 하고 나가더라. 응, 그 말은 인자 학교 오지 말라는 기지. 혼자 터벅터벅 걸어와서 말하니까 울 엄마도 집에 있으라카더라. 그 길로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다.

뭐라고? 원망스럽지 않냐고? 모리겄다. 그때는 내가 큰 죄를 지은 것만 같고 또 선생님이 오지 말라니까 가모 안 되는 걸로 생각했고. 그래도 그때는 울 엄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괜찮았다. 학교는 우리 아버지가 우기서 보내줬다. 엄마는 문맹이다. 내 우에 작은 언니는 나하고 큰 언니 때문에 참 마이 힘들었다.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밖에 나가모 잘 놀아주지도 않고 그랬다.

대성당 앞 벚나무

대성당 앞 벚나무

집에만 있으께 참 심심하더라. 학교를 안 갈 때는 몰랐는데 다니다 안 다니니까, 아이고 그 참 심심하데. 동네 아(이)들이 학교 갈 때는 집에 있다가 길에 아(이)들이 안 보이모 산으로 놀러갔다가 바닷가로 내리왔다가 그리 하다가 또 아(이)들이 학교서 올 때쯤 되모 집에 콕 들어왔다. 죄 지은 것도 없지만 어린 맘에 산으로 바닷가로 쏘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안 보일라고 애 마이 썼다.

큰 언니는 얼굴에 볼긋볼긋하게 나더라. 얼굴에 그리 나께 할 수 없이 학교도 못 가제. 집에 있으께 병이 나도 자연히 밥을 해 묵게 되는 기라. 작은 언니는 학교 가고 나는 어리고, 또 내 밑에 남동생은 마이 어린 기라. 아부지하고 엄마는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밖에서 일을 했다. 그라니까 큰 언니가 엄마 노릇을 해 줬제. 병들어도 언니가 집에 있으께 부모님도 그리 부지런히 날뛰었고, 우리 식구는 밥 안 굶고 쌀밥도 묵고 했다.

하루는 언니가 물양동이를 이고 우물에 물을 뜨러 갔다 아이가. 근데 우물가에 있던 여자들이 언니를 보고 소리 지르고 물을 끼얹고 난리를 피웠는 기라. 와 그랬겠노. 물 못 떠가게 그라제. 병 걸리 갖고 물뜨러 오께나 저거한테 병 옮는다고 그 난리를 피웠제. 여자들이 떼거지로 달리 들어서 언니를 이리저리 흔들고 옹기를 집어 던지고 물을 바가지 채로 갖다 붓고 물담아 이고 다니는 옹기를 발로 차고…… 휴우 휴이….

물에 흠뻑 빠져갖고 혼이 나가서 들어왔는데, 그날로 언니가 병이 났다 아이가. 그만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을 하는 기라. 여자 셋만 있으모 그마 혼이 나가는 기라. 그마 셋이 지나만 가도 그래. 그라이 집에만 있는데 울 부모 맘이 어땠겠노. 어데 가서 따지지도 몬하고 누구한테도 말 몬했다. 그날 들일 갔다가 들어오셔서는 언니 그 꼴 보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쉬지도 않고 일만 하더라.

나는 나이가 없어서 그때는 그 심정을 몰랐제. 한참 살고보이 인자는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이 병은 옮는 기 아이다. 우리 식구 여섯 중에 큰언니하고 나만 걸린 거 보모 모리나. 걸릴라 쿠모 다 안 걸맀겄나. 내 밑에 남동생은 나보다 나이가 마이 적었다. 엄마는 일 나가서 안 들어오고 동생은 배가 고파서 운다. 달래도 안 되고 배가 고프니까 자꾸 칭얼거리기도 하고……

암죽을 먹이야 하는데 나도 얼라 아이가.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생쌀을 입에 넣고 씹었다. 꼭꼭 씹어서 먹이기도 하고, 내가 씹은 쌀을 밥그릇에 담아 겨우겨우 불을 때서 끓여 먹이기도 했다. 내가 어리지만 생쌀을 그대로 주모 안 되겄고 굶길 수도 없고 그래서 그리 했는데, 그래도 내 맘 한 구석에 겁이 나서 엄마가 들어 오모 그 말을 못 했다. 말할 용기가 없는 기라. 혹시라도 어린 남동생이 병에 걸리모 어짜노 싶어서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그 동생은 병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잘 산다. 이기 옮는 병이모 우리 남동생은 걸리도 내가 쌀을 씹어 먹인 만큼 병이 걸리야 하는 거 아이가. 큰언니? 그때는 우물가에서 그 일을 당한 후로 병이 점점 들어서 그냥 멍하니 있는 기라. 아가 울어도, 그거를 암죽을 끓이가 먹이야 되는데 그것도 안 될 정도로 그리 병이 깊어가더라고. 내 맘에 쌀을 씹어 먹이모 그기 암죽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천방지축 뭐가 뭔지도 잘 모르고 날 새모 산에 간다. 산에 가모 봄이면 진달래가 온 천지다. 그거 뜯어서 입에 넣어 보모 싸~ 한 기 맛이 있었다. 맨날천날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다니다가 배고프모 집에 와서 밥 한숟가락 묵고, 동생 울모 업어주고 그랬다. 나는 별로 힘들지도 않고 학교 안 가는 게 그리 서럽지도 않더라. 심심한 거 하고 친구들 옆에 가기 힘든 것만 빼모 그리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 큰언니가 자꾸 문제가 생기는 기라. 우물가에서 그라고 온 뒤로 대문 밖을 안 나가는데 얼굴에 나는 기 더 표가 나. 점점 마이 나고, 나는 얼굴에는 안 나는데 왜 그리 얼굴에 나는지. 병 표도 마이 나고 정신도 나가고, 동네 사람들 눈에 우리 언니는 같은 동네에 있으모 안 되는 사람인기라. 저거 때문에 언니가 정신이 그리 됐는데……

내 눈에도 언니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더라. 집에 있다가도 갑자기 소리 지르고 벌벌 떨고, 그라모 나는 어째야 할지 몰라서 덩달아 겁이 나고 그랬다. 아마 우리 부모님 마음이 마음이 아니었을 기라. 지옥이 따로 있겄나, 그기 지옥이지. 하기사 그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는 걸 나는 몰랐지.

사람들이 처음에는 모린 척 하다가 점점 수군거리고, 언니를 소록도로 보내라는 기라. 우리 부모님은 애써 못들은 척 해도 마이 힘들었제. 가까이 지내서 걱정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니까 “인자 아(이)들을 그마 보내야 안 되겄나?”하고, 집에 오는 것도 좀 뜸해지는 것 같더라. 그때는 순경이 병자들을 잡아가기도 하고 그랬다.

그라다가 인자는 순경이 우리 집으로 온다. 뭐하러 오겄노?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문디 있다고 신고하니까 순경이 나오지. 빨리 잡아서 보내라고 신고하는 거지. 아버지 엄마는 들일하다가도 멀리서 순경이 우리 집으로 가는 거 보이모 어떤 때는 소리치고 어떤 때는 쫓아온다. 그라모 나하고 큰언니는 뒷산으로 내빼는 기라. 그냥, 그냥 산으로 들어간다. 언니하고 쪼그리고 있다가 해지모 집으로 들어가제.

하루는 집에 있는데 순경하고 동네사람들이 몰리 오는 기라. 아버지가 대문 앞에서 “아(이)들 없다. 왜 이라노?”하고 두 팔을 쫙 벌리고 버티고 서서 큰 소리를 지르는 기라. 응, 우리보고 빨리 달아나라는 뜻이지. 언니하고 나는 뒷문으로 돌아서 또 산으로 간다. 가다가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앞으로 퍽 고꾸라지고 있는 기라. 순경이 집안으로 들어 올라고 아버지를 사정없이 밀친 기라.

성심원 산책로

성심원 산책로

마음이 아프고 눈물 나고 그런 것 보다 큰언니하고 나는 겁에 질려서 계속 산으로 산으로 들어간다. 정신이 나간 언니 손을 꼭 잡고 안 잡힐라고 정신없이 뛴다.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어데 나무 밑에 덤불 밑에 쪼그리고 그리 있다가 어두워지모 엉금엉금 내려 왔다. 해가 있으모 못 내리오제. 동네사람들이 우리 보모 그냥 안 두지. 어짜든지 우리를 동네에서 쫓아 버리야 저거가 병 안 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떤 때는 어두워져도 안 가고 우리 집 마당에 버티고 있기도 하고.

응? 아이다. 다른 집에도 병자가 있었다. 그때 그리 흔한 병도 아이지만 드문 병도 아니었다. 그 사람들? 다 소록도로 가든가 집을 떠나든가 했제. 우리는 아버지가 어짜든지 멀리 안 보내고 옆에 가까이 두고 병을 낫게 할라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큰언니하고 나를 어데 보내라고 해도 못들은 척하고 버틴 거지. 그라고 우리 집이 그래도 좀 먹고 살았거든. 그라니까 아주 함부로 하지는 못했제. 그래도 결국은 떠나왔제.

고향? 생각 마이 나제. 어릴 때 떠나와도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난다. 봄이 되모 도다리 쑥국이 일품이다. 니가 어째 도다리 미역국을 아노? 니도 거제도라고? 거제도 어데고? 고향 사람 만났네. 맞다. 도다리 넣은 쑥국하고 미역국은 지금도 생각난다. 희한하게 쑥하고 도다리가 어울린다. 된장 약하게 풀어 넣고 캐온 쑥하고 싱싱한 도다리가 있는 국은 봄이 되모 생각난다. 미역국도 도다리 넣고 끓이면 국물이 진하고 참 시원타.

하이고, 너거 할머니도 숭어 간 맛을 알았네. 숭어 간, 그거 안 묵어 본 사람은 모린다. 나도 어릴 때 숭어 어장이 옆에 있었다. 어린 마음에 숭어 간을 한번 훔쳐 묵어 봤는데, 맛있는 기라. 몇 번 훔쳐 묵었지. 하하 흠, 참 맛이 있다. 숭어 한 마리에 간은 한 개제. 꼭 밤톨 맨치 생긴 게 싱싱한 숭어 간은 탱탱하다. 소금에 콕 찍어 묵으모 쫄깃한 기 참 맛이 있다. 보통 탁주하고 같이 묵는데, 술도 사람에 따라 발효하는 기 다른 기라.

누룩도 보통 요새 파는 누룩이 아이다. 그 누룩이 곡식 아이가. 물에 불리서 만들어 윗목에 두모 한 3일 뒤에는 발효하는 기라. 어데, 3일 후에 발효되는 기 정상이다. 더 오래 두모 술맛도 없고 술 색깔도 안 좋다. 그런데 더 빨리 발효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 갖고 술을 담가도 담가는 사람에 따라 술이 잘 익기도 하고 잘 안 익기도 한다. 술이 사람에 따라 다리게 발효되는 기지. 말하자모 술이 사람 가리는 기라.

칼치 회 묵어 봤나? 그거는 안 묵어 봤고나. 칼치는 바다에서 올라 오모 바로 죽는다. 칼치 잡는 배에서나 맛볼 수 있다. 그래도 금방 잡아갖고 금방 들어 오모 묵어도 괜찮다. 칼치는 반짝반짝한다. 맞다, 그렇제. 칼치는 비늘을 벗기야 된다. 칼치 비늘은 호박잎으로 마무리 하모 된다. 호박잎으로 몇 번 쓱 문지르모 된다. 뼈채 썰어서 된장에 함께 묵으모 그 맛이 기차다. 고소하고 참 맛있다. 에이, 고등어 회는 비리다. 비리서 별로라.

내 노래 한 번 해볼까?. “서러운 내 인생 흐르고 흘러가도 잊혀지지 않고 이 내 몸이 서럽고 서러워 한 세상 살아도 서러운 세상”. 나는 노래하는 기 좋다. 가수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옛날에는 한 번 부르모 한 번에 몇 곡씩 연달아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있으모 서러움도 잊어뿌고 눈물도 안 나고 괜찮다.

니는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여게 뭐할라꼬 오노? 니가 차가 있어야 하는데, 그기 걱정이다. 저게 박카스 있다. 박카스 묵어라. 저게 마이 안 있나. 한 개만 묵지 말고 마이 가져가라. 고마 한 박스 가져가라. 목마르고 할 때 묵으모 좋다. 또 갖다 준다. 걱정하지 말고 가져가서 차 가면서 묵어라. 뭐 할라고 또 온다고, 안 와도 된다. 니가 너무 힘들다 아이가. 내 걱정 하지 마라.

“내 이름은 양추자입니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2

“내 이름은 양추자입니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2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고향

?

빨간 색 뽈통 소쿠리 가득 담기면

주물러 붉은 물 빼고

남은 씨는 고운 햇살에 말려

찧으면 나오는 붉은 가루로

개떡 만들어 주던 이웃은 어디로 갔을까.

?

어머니 몰래 가져간 밥 한 그릇과

바꾸었던 칡수제비 한 그릇 먹고

함께 놀던 친구들은 잘 있을까.

?

목화송이마냥 하얗게 부풀어

베어 먹으면 새콤달콤한 동백꽃

구름이라도 끼이면

끝도 없이 가물거리던 그 작은 섬들

?

산이라도 그대로

바다라도 그대로

날 기다리며 있을 것 같은

한번은 가보고 싶은

잊을 수 없는 그 곳!!

-양추자, 2014년 2월 18일 구술한 것을 수정-

20140122_091652참말로 이상하고 얄궂다. 무신 시를 쓰고 읽자고 자꾸 찾아 오노? 말은 하는데 시는 모린다. 뭐 안 쓰도 된다하이 한번 해 보자. 내 이야기 들어가꼬 뭐 할끼고? 나는 서럽고 서러워서 그라고 억울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란데 또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다. 내 맘을 나도 모리제. 이래 뵈도 내가 노래는 참 잘한다. 소록도에 있을 때에도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라 하모 뜻도 모르는 유행가를 몇 곡씩 불어 제낐다.

고향? 우리 겉은 사람한테 고향이 어딨노. 태어나서 8살 묵을 때까지 살았다. 나는 거제도 바닷가 동네에서 태어났제. 위로 언니가 둘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내 고향은 앞에 바다가 있었고 뒤에는 산이 있었는데, 그 산에는 참꽃이 얼매나 붉게 피었는지 모린다. 참꽃 피몬 벚꽃도 피제. 아참, 머루도 참 많았다.

머루보다 뽈통이 더 많았는데, 그 뽈통은 워나게 커서 몇 개만 따 묵어도 금방 배가 부르고는 했다. 뽈통 알제? 큰 거는 손가락 마디만 하다. 없는 집에서는 그 뽈통으로 개떡을 만들어 묵었제. 산이라고 해도 바다 가까이에 있는데, 뽈통나무를 타고 올라가 흔들모 열매가 우두둑 떨어진다. 금방 소쿠리가 찬다 아이가. 참 재미있었다. 뽈통은 약간 떫으면서도 단맛이 난다.

우리 옆에 집에 살던 아가 그 뽈통을 한 소쿠리 따 가모 그 집 어매는 소쿠리 채 뽈통을 주무르는 기라. 그러면 뽈통 살은 빠지고 포루스럼한 씨가 남아. 씨는 포루스럼하고 하얗는데 그 씨를 빻으모 벌건 가리가 나오는 기라. 하모, 가리 색깔이 벌겋제. 그 가리를 체에 몇 번씩 거르모 밀가루 같다. 그게다가 쑥을 찧어 섞어 버무리서 커다랗게 만들어 찌거든. 그게 쑥개떡이라. 그게 너무 맛있어 보이제. 그래서 우리 어매 몰래 솥에 있는 밥을 한 그릇 가져가서 개떡하고 바까서 묵었다 아이가. 참 맞을 짓 했제.

어떤 때는 칡가리 수제비하고 밥하고 바까 묵기도 하고…… 아이고, 칡은 크기가 내 다리만 하다. 큰 칡을 도구통에 넣고 찧어서 물에 담가 놓거든. 시간이 지나모 밑에 칡가리가 가라앉는다. 그라모 물은 버리고 가라앉은 것을 돗자리 펴고 그 위에서 말린다. 그기 칡가리다. 그 말린 가리를 반죽해서 밭에서 나는 푸성귀를 섞기도 하고 그냥 칡가리만 갖고 반죽해서 뚝뚝 뜯어 끓는 물에 넣어 끓이모 수제비 아이가. 칡수제비는 시커멓다. 암만 생각해도 그리 맛있는 거는 요새까지도 별로 없는 것 같네.

칡 알제? 그 칡이 가리 칡도 있고 물 칡도 있다. 가리 칡은 꼭 생긴 게 고구마 같다. 이 칡이 큰 거는 참 크다. 웬만한 사람 다리만 한 것도 있고, 더 큰 것도 있다. 큰 칡은 손으로는 못 떼내고 톱으로 자르는데, 그때 옆에서 보모 칡가리 날리는 게 보인다. 이 가리 칡은 가리가 많아서 묵고 나모 입안이 터분한데 달착지근한 게 맛은 있다.

물 칡은 가리 칡보다 좀 작은데, 이거는 그냥 손으로 죽죽 찢으모 찢기거든. 입에 넣고 씹으모 물하고 찌꺼기가 입안에서 따로 논다. 단물만 빨아묵고 찌꺼기는 뱉아 내지. 그때는 묵는 게 귀해서 그런 것도 맛있었다. 요게 성심원의 클라라의 집에 있을 때 박군이 칡을 참 잘 캤다. 바로 그 옆이 산이거든. 툭하면 산에 가서 칡을 캐오는데, 참 잘 캐오더라.

우리 집이 있던 거기는 한 열대여섯 가구가 살고 있었다. 내가 시방도 한 집 두 집 셀 수 있다. 논이 거의 없었는데, 아마 한 집 정도 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란데 우리집에는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항시 밥이 있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애를 썼겠노 싶다. 논이 거의 없다보니 주로 강냉이하고 고구마를 마이 키웠다. 강냉이랑 고구마 참 마이 묵었다. 지금은 고구마 안 묵는다. 안 묵고 싶다.

바닷가에는 언제나 염소가 있었다. 그 염소들은 바닷가 바위 위를 폴짝폴짝 다님시로 여게저게 풀을 뜯어 묵다가 희한하게 해 지모 들어오는 기라. 산에는 소가 있고 바닷가에는 염소가 있는데, 해가 안 떨어져도 비가 오모 들어온다. 짐승도 생각은 있는 기라. 비라도 올라고 구름이 끼이모 섬들이 끝도 없이 가물가물하제. 실눈을 뜨고 봐도 섬은 기냥 가물거리고 있는 기라. 날이 맑으모 대마도가 아른아른 비치고, 어떤 때는 훤하게 보이기도 하고……

그 산이라도 그대로, 그 바다라도 그대로 있겄제. 나는 이리 변해도 그 산은 그 바다는 안 변하고 그대로 있겄제. 사람들은 나를 모린 척 해도 그 산은 그 바다는 나를 기다릴 것 같다. 내 친구들은 아즉도 살아있을까. 이때쯤 되몬 동백꽃도 따 묵고 했는데…… 커다란 동백꽃을 따서 빨아 묵으모 새콤달콤하다. 동백꽃 안에 고인 물을 빨아 묵으모 새콤달콤해.

미처 꽃이 되다 만 동백꽃은 뒤꽁지가 목화솜처럼 부풀어 있거든. 말하자모 사람으로 치모 장애자라. 씨가 온전하게 못돼서 장애자가 된 기라. 거기를 베어 묵으모 참 달다. 좀 새콤하기도 하고, 그 맛이 생각난다. 같이 꽃을 따 먹고 뛰놀던 내 친구들, 영이, 성이, 동열이, 재열이 다 거기 살고 있겄제. 나만 여게 있다. 친구들 이름은 그대로 적지마라. 갸들한테 해가 가모 어짤기고. 친구들 이름은 바리게 적지 마라.

우리 동네에 나무소년이 있었다. 그 이름은 내가 그냥 그리 불렀다. 열서너 살 쯤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지지리 가난했다. 맨날 지게 지고 산에 가서 나무 해 와서 그 많은 식구를 멕여 살렸다. 나는 학교에 갈 때 갸를 만나고는 했는데, 내가 머리를 푹 숙이고 지나치고는 했다. 마음이 참 안 됐더라고. 아부지는 병들어 누워있고 어매는 능력이 없고, 어린 여동생만 둘이 있었다. 그리하니 땅뙈기도 하나 없고 맨날 산에 가서 나무 주워 와서 묵고 사니 얼매나 가난하겄노.

그런데 세상에는 법이 없다. 남의 산에 가서 나무하다가 들키모 두드려 맞고 나무도 뺏기고, 그래도 다음 날에는 또 남의 산에 가는 기라. 내가 소록도에 있을 때 우리 어매가 와서 갸가 죽었다고 안 하나. 남의 산에 가서 땅에 떨어져 있는 나무를 주워오다가 들켜서 얼매나 맞았는지 집에 와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단다.

세상에 무슨 법이 있노. 그게 법이가? 땅에 떨어진 나무 좀 주워 그 많은 식구 멕여 살리는 그 얼라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을 만치 때리노. 땅에 떨어진 나무도 임자가 있는 갑다. 나는 그 아가 안 잊어진다. 자꾸 생각이 안 나나. 이상하제. 울 언니가 전에 와서 말해주는데 여동생 둘이는 그대로 그게 살고 있다카더라.

그래도 참 가보고 싶다. 근데 그기 왜 그리 안 되노. 아이고, 잊을 수가 없다. 얄궂게 왜 안 잊혀질고. 생각이 자꾸 난다. 내 고향은 거제도 함목이다. 동부면 갈고지 함목이다. 산양도 기억나고 도당포도 기억나고 구조라, 장승포도 놀러 다녔다. 쌍나리라고 있었는데…… 쌍나리는 내 외갓집 동네 이름이다. 통영다리를 지나서 한참 가모 나온다. 산을 타고 돌아가야 나오는데 산비탈이라서 돌이 떨어지모 그대로 바다에 첨벙하고 떨어진다. 그리 멀고 험한 동네도 외갓집이라고 힘든 줄 모리고 걸어서 놀러 다녔다.

건강하던 그 때의 내 이름은 막딸이었다. 언니 둘하고 나까지 연달아 딸이 태어나니까 우리 집에서는 이제 딸은 그만 놓으라고 막딸이라고 불렀는데, 내 밑으로 남동생이 태어났다. 나는 이름을 막딸로만 알고 있었는데, 울언니하고 소록도에 가서 아부지가 서류에다가 ‘추자’라고 적더라. 그때 알았다. 내가 추자, 양추자인 걸. 모리제, 원래 추잔데 아들 놓으라고 막딸이라 한긴지 이름이 없는데 적으라 하니까 ‘추자’라고 적은 긴지.

새로운 글을 시작하며[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새로운 글을 시작하며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지리산 자락에 성심원이 있습니다. 한센인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자들과 수녀, 그리고 사회복지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모여 살고 있는 곳입니다. 마을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한센인만 600여 명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생의 끝에서 150여 명의 한센인과 수십 명의 장애인이 모여 함께 살아갑니다. 성심원이 있는 곳의 원래 지명은 ‘풍현마을’입니다. 뒤로는 지리산이 있고 앞으로는 경호강이 흐른답니다. 그리고 성심원 내의 그 어딘가에는 지리산 둘레길로 들어가는 오르막 길이 있습니다. 대성당 앞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벚나무가 있지요. 성심원의 옛모습을 보려면 조금은 가파른 지리산 자락을 잡고 올라가야 하지만, 이 벚나무는 성심원 입구에 있는 철선과 함께 성심원의 오랜 시간을 말해줍니다.

이 글들은 성심원에 계신 한센인들의 구술을 옮긴 것입니다. 그 분들의 삶은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편안한 삶을 추구했던 비한센인들과 전체 국민의 안녕을 염려했던 정부 정책에 의해 훼손되고 소실되었지요. 그럼에도 그 분들은 가파른 지리산 자락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경호강물에 울음을 삼키기도 하면서 모진 세월을 견뎌 왔습니다. 이제 그 분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고자 이 글들을 씁니다. 기억하는 이 없이 마치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그 분들을 떠나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