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김 가요”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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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김 가요”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요새 자꾸 눈이 침침하고 전에는 보이던 것도 이제는 안 보인다. 나는 책 읽는 게 참 좋은데, 전에 니가 갖다 줬던 책도 이제는 도통 읽을 수가 없네. 왜 이럴꼬? 기운도 없고 보이던 것도 안 보이고…… 나는 여러 사람 있는 데에 가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혼자 조용히 있는 게 좋다. 테레비도 연속극이나 쇼 같은 거는 재미가 없다. 뉴스나 스포츠가 좋다. 저 봐라. 씨름한다고 난리네. 씨름 저게 참 재미있는 기라. 옛날만큼 재미있지는 안 해도 재미가 안 있나.

저 사람들은 외국인인데 씨름을 참 잘한다. 감독이나 코치도 외국 사람이제? 하이고, 우짜겄노. 그만 번쩍 들리네. 저게 씨름의 재미라. 단번에 매다 꽂는 거, 저리 큰 사람을 번쩍 들어올리고, 힘이 장난 아니라. 스포츠를 보고 있으면 재미가 있다. 저 정도는 보인다. 그런데 얼굴이랑 표정 같은 거는 자세하게 안 보인다. 참으로 답답하다. 안약도 하루 네 번씩 꼭꼭 넣는데 나아지는 기 아이고 자꾸 나빠진다. 약으로 어찌할 수 없는 기 나이인기라.

작년(2013년) 11월까지는 안경 없이도 글이 잘 보였다. 큰 글씨 작은 글씨 할 것 없이 잘 봤는데 인자는 안경이고 뭐고 잘 안 보인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저기 창가에 햇빛이 들어오면 그 밑에서는 글자를 읽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안 된다. 참 답답하다. 안약도 넣고 병원에 가도 뾰족한 대답이 없네. 우찌해야 가는 눈을 잡아 볼꼬?

저게 봐라. 지금 끓나 안 끓나? 뜨겁다. 조심해서 봐라. 아직 시계는 눈 앞에 갖다 대면 아직 대충 보고 시간을 알 수 있다. 끓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안 끓는 게 아무래도 사단이 났는 갑다. 응, 맞다. 계란이다. 계란을 하루에 두세 개 먹으면 눈이 좋아진단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계란을 삶아 놓고 먹는데, 조금 낫는 것 같다. 블루베리도 먹으면 좋단다. 그래서 블루베리를 저리 사 놓고 먹고 있다.

책 읽는 할머니.

책 읽는 할머니.
<사진 – 김성리>

레지나 있제. 레지나 언니가 나이 들어 영 안 보였는데, 계란을 삶아서 먹고 눈이 좋아졌단다. 그래서 레지나가 와서 나보고 계란을 삶아서 먹어 보라고 하더라. 레지나도 안 보이지. 레지나는 너무 많이 안 좋아서 해봐도 소용이 없다고 하고, 나는 인자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하니까 한번 삶아 먹어보라고 해서 먹고 있다. 아이고, 그럼 그렇지. 그게(콘센트) 딱 안 끼어 줬고나. 바로 끼웠나? 안 보이니 병신이 따로 없다. 봐라. 금방 뜨거워지제? 인자 좀 있으면 끓는다.

시계 보고 있다가 끓고 나서 20분 지나면 끄고 식힌다. 저기 옆에 뜰채 안 있나. 내가 다 갖다 놓고 한다. 걱정하지 마라. 손 안 데이게 뜰채로 떠서 저 그릇에 담아가서 찬물로 식혀서 다 식으면 먹는다. 매일 삶는 게 힘들어서 왕창 삶아 놓고 하루 두세 개씩 먹는데, 진짜 좀 좋아졌다. 며칠 전까지는 저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이 잘 안보였는데, 이제는 얼굴이 보인다. 블루베리도 저리 사다놓고 열심히 먹는다. 인제 큰 글자도 보이고. 눈이 빨리 좋아져서 책도 읽고 하면 좋겠다.

안약은 내가 혼자서도 잘 넣는다. 허허허 그럼 네가 넣어주라. 뭐한다고 자꾸 넣어준다고 하노. 한 방울씩만 넣어라. 두 가지를 넣어야 하니까 많이 떨어지면 밖으로 주르르 흐른다. 아이고, 옛날에는 참 잘 보이고, 잘 보일 때는 그게 좋은 건지도 몰랐다. 작년 11월까지는 안경 안 쓰고 책도 읽었다. 이리 빨리 나빠지는 게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요새 들어 안 아프던 데가 자꾸 아프네.

팔도 아프제, 눈도 침침하제, 입도 아프제, 장도 안 좋아 변은 자꾸 흐르고, 그래 그런가 머리도 아프고, 이제 어찌 될 긴지 모르겄다. 조끔만 앉아 있어도 궁둥이가 아프네. 이 동그랗게 구멍 있는 방석 이것도 레지나가 갖다 주더라. 방바닥에 그냥 앉아 있으니 어찌 아프고 불편하든지. 이걸 깔고 앉으니까 그래도 영 낫다. 궁둥이 살이 없어서 그런가. 암튼 너무 불편하고 하루하루 지내는 게 힘들다.

우리 오빠가 나 어릴 적에 나를 얼마나 좋아했다고. 나를 참 사랑했다. 그런데 그 오빠도 하나 있던 남동생도 다 갔다. 둘 다 암으로 죽었다. 우리 오빠는 51살에, 우리 남동생은 63살에 죽었다. 요새 변이 자꾸 흘러서 쬐끔 먹던 밥도 잘 안 먹는다. 국수 삶아서 먹는다. 국수를 삶아서 먹으면 좀 낫고. 왜 이리 됐을꼬. 실수할까 싶어서 나가는 것도 싫다. 참 깔끔했는데, 아무래도 갈 때가 다 돼 가는가. 나도 이제 가야지. 하기사 너무 많이 살았다. 그쟈. 이리 머리가 허옇게 될 때까지 뭐한다고 살고 있을꼬. 뭐 좋은 거 볼 거라고.

1948년도에 소록도로 갔는데, 그때의 소록도는 일종의 형무소라. 광주 형무소의 소록도 지소꼴로 보면 돼. 그 형무소에 있던 나환자들 중에서 좀 말썽을 일으키고 폭력을 쓰는 나환자만 따로 소록도에 보냈는데, 나중에는 아무 문제 안 일으키는 나환자들까지도 그냥 모두 소록도로 보냈어. 거기는 무서운 곳이라. 나는 거기서 4년 살았어. 1952년도에 나왔어. 그래도 기억은 생생해.

그때 소록도에는 감금실이 있었는데, 딱 가마니 한 장 크기라. 화장실은 뭐 그냥 구멍만 하나 파 놓은 거고, 창문이라고는 밥그릇 정도 크기로 있었어. 밥이라 해야 주먹밥 하나를 공기에 담아서 그 구멍으로 밀어 넣어 줬지. 말썽을 일으키거나 말 안 들으면 감금실에 보내는데, 살아나온 사람보다 죽어 나온 사람이 더 많았지.죽어도 곱게 땅에 못 묻히고, 일단 죽으면 모두 해부하고 화장해버렸어.

먹을 것도 귀했지. 나는 돈이 없어서 배급 주는 걸로 살았어. 옛날부터 있었던 사람들은 저축미가 있어서 배급 주는 게 시원찮아도 괜찮았어. 또 돈이 있으모 쌀을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나는 돈이 없어서 배급 주는 겉보리쌀을 도구통에 넣고 찧어서 껍질 벗겨 먹고, 어쩌다 알양미(안량미)가 나오면 그때 쌀밥을 쬐끔 먹을 수 있었어. 주로 강냉이 죽을 먹었어. 소록도는 바닷가라서 파래가 많거든. 파래 뜯어서 구호물자로 나오는 강냉이하고 섞어서 죽을 끓여 먹었다.

소록도에서는 한 방에 8명이 살았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8명이 사는데, 큰 가마솥에 밥을 같이 했어. 아이고, 나는 그런 거 처음 봤다. 각자 요만한 밥종지가 있어. 거기다가 쌀이나 보리를 담아 내 놓으면 그 밥그릇 채로 솥에 넣어 밥을 했거든. 내가 젊어서 주로 내가 밥을 했어. 담아 주는 밥그릇을 받아서 담겨 있는 곡식을 씻고는 다시 그 밥그릇에 부어서 각자 밥그릇을 솥에 넣었어.

그리고 나무를 때서 밥을 하면 희한하게 밥그릇 안에 밥이 되어 있어. 그 밥그릇을 각자 가져가서 먹었지. 내 옆에 붙어 있던 딸이 다른 사람 밥그릇을 보고 “어매, 우리도 저런 거 먹자”하고 많이 보챘어. 그 어린 게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파래죽 안 먹을래, 파래죽 안 먹을래”하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때 그 기억들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가슴이 아프다. 아프고말고.

아들은 소록도에서 낳았다. 소록도에서는 아이를 낳아도 키울 수가 없었다. 그라고 임신한 걸 들키면 바로 낙태시킨다. 10달 된 태아도 낙태시켜 화장터로 가져간다.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하루는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어데서 아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 두리번 거려보니까 어떤 사람이 대야를 안고 가는데 그 대야 안에서 아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 어데로 가는 가 했더니 옆에 사람이 말해주대. 신생아를 담아 화장터로 데려간다고. 그때 소록도는 신생리, 남생리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화장터는 구봉리에 있었다. 그때 아들이 태중에 있었는데, 내 심정이 어땠겠노.

거기서 나는 아들을 낳았다. 내가 소록도에 갈 때는 배가 그리 표가 안 났어. 딸 업고 보따리 들고 있으면 표가 안 났거든. 그래서 무사히 태중에 아들을 품고 들어갔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그리 중한 환자들이 아니고 정도 있어서 안 일러바치고, 나도 배가 부르니 들킬까 싶어서 숨어서 지냈다. 그런데 아를 낳을 때쯤에 원장이 바뀌었어. 고 씨 성을 가졌는데 그리 무지막지하게 신생아를 죽이는 일을 못하게 했어. 그래서 아들을 무사히 낳았어.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니는 참 복도 많다. 운도 좋제”하며 많이 부러워했다.

소록도에 갈 때 딸은 4살이었는데, 그리 오래 같이 있지는 못했다. 몰래 낳아도 곧 들키거나 일러바쳐서 신생아는 그리 버려지고 좀 자란 아이들은 보육시설로 강제로 뺏어 갔거든. 우리 딸도 그만 7살 때 보육원으로 갔다. 그래도 아들은 품에 안고 4살까지 키웠다. 딸을 보육원으로 뺏기다시피 보내고 지냈는데, 안 되겠더라. 아이들이 학교를 가야하는데 우짜꼬 싶은 기라. 그때 마침 우리 동생이 손을 써줬어.

딸 7살, 아들이 4살 때 소록도에서 나왔다. 그때가 1952년도였어. 하나 있던 남동생도 나병을 앓았어. 소록도 가기 전에 애락원으로 가려고 했는데, 애락원에 있던 동생이 어떻게 형제가 같이 있냐고 했어. 나는 같이 있는 사람들도 봤다고 했는데, 내 동생이 “누이가 오면 내가 나갈 거요.” 하니 우째, 내가 소록도로 갔지. 그런데 동생이 애락원에서 있어보니 형제끼리 더러 와 있으니 전출신고를 해줬어. 응, 밖에서 가족이 전출신고를 하면 나올 수 있었어. 애락원은 전에도 있었고 친정이 있는 대구여서 마음이 한결 편했지.

그런데 거기서 딸을 잃었다. 11살 때 뇌막염으로 갔다. 열이 나고 아픈 딸을 업고 애락원 밖에 있는 소아과로 다녔다. 지금은 뇌막염 그거 잘 낫는다는데. 그 병이 그리 머리가 아픈 가봐. 어린 게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머리야”하고 머리를 잡고 뒹굴더라. 뭘 조금만 먹여도 몽땅 토하는 기라. 지 먹이던 밥그릇에 토물을 담는 그런 식이었어. 하, 휴우, 살아 있으모 지하고 둘이 앉아 옛말하고 살 건데……

딸 잃고 아들이 7살 때 애락원에서 나와서 의성 정착촌으로 갔어. 아들은 대구 외갓집에 맡기고. 애락원에서는 아무 것도 못하지. 아들을 초등학교라도 보내고 공부시키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뭐든지 해서 벌어야지. 그런데 애가 딸려 있으니 여기저기서 다 안 받아주는 거라. 그래서 아들은 대구 외갓집에 맡기고 나만 정착촌으로 갔다.

나는 혼자 정착촌에 있으면서 동냥을 다녔어. 뭔 돈을 보냈겄노? 동냥한 쌀을 보내주고, 학비는 좀 커서는 지가 벌었지. 우리 오빠가 데리고 있었어. 올케가 참 사람이 좋고 넉넉해서 구박 안 하고 중학교까지는 보내줬어. 남동생 올케도 있었는데, 오빠 올케가 우리 아들이 부모도 없이 그리 있으니 안쓰러워서 학교 갔다 오면 줄 거라고 먹을 걸 감추어 놓으면, 밑에 동생 올케는 와서 뒤져서 싹 가져간다고 그리 하더라.

이 철없는 아들이 지 외갓집에서 살면서, 시키지도 않는데 큰 소리로 “우리엄마 있는 데는요, 기계로 솥을 돌리요”하고 노래를 부르는 기라. 그러면 오빠나 올케는 기겁을 하고 입을 막았제. 애락원에서는 큰 솥에 쌀을 안쳐서 기계로 밥을 했거든. 게다가 아이가 똘똘하고 대답을 잘 하니까 옆에 어른들이 “네 성이 뭐꼬?”하고 물으면 “소록도 김가요”하는데, 참 기가 막히는 기라. 기가 막히제. 지금은 이리 웃어도 그때는 나환자 아들이라고 사람들이 알까봐서 간이 오그라들었다. 참 식겁할 일이제. 우리가 소록도에서 살다 온 걸 알면 안 되지. 사람들이 알면 쫓겨 날 건데.

그런 놈이 커서 대구 달성고등학교 나와서 서울대를 들어 가대. 고등학교 때에는 지가 과외해서 돈 벌었어. 부모라고 학비 대 주고 용돈 대 주고 그런 것 못했지. 저거 아버지에게도 가 봤다. 경북에 있었는데, 전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니 넉넉하지 않은 기라. 아이고, 나는 그 농사일을 도저히 못하겄더라. 그냥 보통 농사가 아이고 참 험하더구나. 그나마도 있기가 어려워서 그냥 아들 데리고 떠나왔어.

어미가 돼서 잘 입히고 잘 먹이지는 못해도 밥이라도 안 굶길라고 동냥을 다닌 거야. 동냥을 가면 술도 끼얹고 욕도 하고 그러지 뭐. 그래도 사회는 동냥이라도 할 수 있는데, 소록도나 애락원은 그런 걸 못하지. 한번은 개를 풀었는 기라. 그만 물렸는데, 욕은 하면서도 쌀을 대두 1말 주더라. 요게 이게 그 상처인데, 개에게 물린 것보다 쌀을 그리 얻으니까 좋아서 아픈 줄도 모르겄더라. 그리 커서 장가도 가고, 손자 하나는 서울법대 나오고 하나는 서강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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