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유학 중인 이유철씨가 유럽에서의 여행과 유학생활에 관해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사진을 올릴 예정입니다. 웹진 게재에 흔쾌히 허락해 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독자님들은 앞으로 유럽 곳곳의 사진과 더불어 사람 사는 이야기가 활력있게 펼쳐지는 지면을 마주하실 있을 겁니다

보스니아 기차여행 [유철의 유럽방랑기] -5

보스니아 여행에서 놓치면 안되는 것 중 하나가 기차를 타는 것이라고 한다. 사라예보에서 남쪽 끝, 보스니아의 유일한 해안도시 네움Neum으로 향하는 기차여행이 그 중에서 으뜸이라 들었다. 특히 사라예보에서 남쪽으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모스타르Mostar까지의 길은 놓치면 안된단다. 하루에 오직 두 편, 오전 6시, 그리고 오후 8시에만 운영하는 기차, 내 선택지는 물론 오전 기차 뿐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새벽 4시에 숙소에서 나섰다. 피곤함에 조금 게으름을 피울까도 싶었지만, 이곳을 떠나면 언제나 다시 올까 싶은 마음에, 조금 일찍 나선다. 그리고 천천히 걸으며 마치 콘크리트 파편에 빨간 페인트로 채우듯 사라예보를 내 마음에 담는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사라예보 기차역,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다들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이다. 역무원 하나 안보이고, 영어 안내 표지판 하나 없는 친절한 역. 주변에 영어는 오직 한 쪽 벽면을 덮은 코카콜라 광고판 밖에 없다. 어제 미리 예약해 받은 기차표도 어찌나 허술 한지 손바닥 만한 종이 쪼가리에 수기로 적힌 플렛폼과 좌석 정보가 전부다. 그러나 그마저도 온통 보스니아어인 탓에 어떤 숫자가 플랫폼 번호며, 좌석 번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두리번 거리고 있는 찰나, 한 낡아 헤져 구멍이 난 반바지, 반팔을 입은 여성이 내게 다가 왔다.

“모스타르 가니? 그럼 날 따라와.”

독일에서 왔다는 23살의 안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녀는 공부를 마치자 마자 자신에게 선물로 두 달간의 여행을 떠나 왔다고 한다. 검게 탄 피부, 그리고 허름한 옷차림이 그녀의 지난 여정을 대신 설명한다. 알바니아-코소보-세르비아를 거쳐 보스니아에 도착한 그녀는 다시 크로아티아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그녀의 집이 있는 마부르크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녀의 지난 두 달여 간의 여행은 이제 거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덜컹 덜컹’

그렇게 그녀와 지난 여행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식이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꽤나 현대적인 내부를 지닌 기차다.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보스니아 정부 주도의 철도 민영화 과정에서 기차 사업권을 얻은 한 러시아 회사가 들여온 새로운 기차인데, 소비에트 당시 운영된 기차를 들여와 내부만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보스니아인들은 엉터리 라며 반발하고 있으나, 이미 이전에 운영된 기차는 그 보다도 오래된 기차였고, 그 사업권의 대가 중 하나가 철로 정비사업을 포함한 것이라고 하니.. 자본이 부족한 보스니아 정부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민영화는 보스니아의 최대 이슈 중 하나다. 여전히 민족간 갈등이 잠재되어 있는 가운데 지난 2010년 총선에서 정치적 혼란과 반목이 이어져 EU가입 후보국 지위를 박탈당하고 그 결과 4천만 유로 규모의 EU로 부터의 지원금이 중단된 터였다. 결국 당장 돈이 없는 보스니아 정부는 민영화를 추진하려 하지만 부패한 관료들과 유착관계를 맺고 있는 자국내 재벌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민영화를 추진한 몇 몇 기업이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이 실패는 실질적인 청년실업률이 약 60%(전체 실업률 약 45%)를 기록하고 있는 보스니아에게 그나마 고용된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체불이라는 재앙까지 덮치며, 지난 2014년 보스니아 내전 이후 가장 큰 대규모 시위를 불러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됐다. 시위대들은 시민 총회를 열어 공무원들의 임금 삭감을 비롯한 여러 개혁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민영화청을 설립하여 현재의 민영화 정책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의 기미는 없어 보인다.

서서히 출발한 기차는 사라예보의 총탄자국 가득한 아파트촌을 거쳐, 텅빈 평야를 달리더니 산길을 오르고 내리고, 그 산들 사이를 그리고 산과 산을 잇는 다리 위를 달린다. 
특히 코니치에서 모스타르로 이어지는 네레트바 밸리가 압권이다. 빗물이 석회암으로 형성된 지표면을 깎아 내리면서 만들어진 다채로운 자연환경은 절경이다. 에메랄드 빛 네레트바 강변을 따라 해발 2000m가 넘는 석회암 산들 사이로 달리는 기차, 그 창 밖으로 보이는 보스니아의 절경은 그렇게도 사람들이 보스니아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좌우로 이어지는 절경들. 그 절경의 한쪽만 보는게 아쉬웠다. 우연히도 나란히 안게 된 안나와 나는 카페가 위치한 칸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너는 중국에서 왔니?”

비교적 이동이 자유로운 카페 칸에서 좌우로 펼쳐지는 경관을 카메라에 그리고 눈에 담으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데, 승무원 한 명이 내게 묻는다. 아주 드물게 한국인인지를 묻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유럽 어디에 가든 중국인이냐고 묻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아니야, 나는 한국에서 왔어. 괜찮아 나도 너희들을 구분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야.”

그는 머쓱한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네가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줘. 음.. 나도 한국 사람을 하나 알지. 박지송? 숭? 성? 축구선수 말이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승무원과 대화를 듣던 안나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묻는다.
“참, 나도 얼마전 너희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봤어. 박근혜? 맞지? 그녀의 사법 절차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변방의 작은 나라의 이미지는 이렇게 서구사회에서 문화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특별한 발자취로 남겨진 이들로 인상지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과거에는 한국 하면 한반도 북쪽 김씨 왕조를 묻는 사람들이 대다수 였다. 요즘처럼 북한이 미사일 발사나 아니면 핵실험을 할 때면 모든 친구들이 내게 와서 그들을 묻기 일쑤였다. 그러나 요즘은 박근혜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꽤 늘었다. 영국에서 테레사 메이의 인기가 추락하면서는 현역 대통령을 탄핵시킨 나라라는 점에서 부러움을, 다른 한편에서는 ‘독재’ 혹은 ‘권위주의’ 나아가 ‘부패’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게 된 것 같다. 물론 건조하고 시니컬하게 그러한 한국 사회에 대해 논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미개’한 제 3세계의 이미지를 포착할 때면 마냥 시니컬하게 반응하기도 쉽지 않다.

지난 2월 박근혜에 대한 헌법재판소 선고가 있던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사회과학 대학 박사과정 학생들의 정례 세미나 날이자, 동시에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 토론회가 있었던 날이었다. 당시 발표 꼭지 중 하나를 맡아 ‘러시아 혁명과 한국의 촛불시위’ 라는 주제로 논하기로 되어 있었다. 서구인들에게도 어떠한 폭력사태 없이 법적 절차에 따라 현역 대통령을 탄핵시킨 것은 물론이요, 사법절차에 들어간 사례가 많지 않기에 큰 화젯거리 였다. 따라서 당시 토론회 참가자들은 탄핵국면까지 가는 과정, 그리고 정부의 부패 및 권위주의, 제 3세계의 특징 등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동유럽 출신의 대부분은 촛불시위 중 미국과 초국적 자본의 영향력, 그리고 그 안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역할에 관심을 갖는 한편, 서유럽 출신들은 주로 제 3세계 국가들의 특징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던 중 한 프랑스 여학생이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야. 제 3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부패 스캔들이 프랑스에서도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어! 문제는 대안이 없어. 사회당은 부패했고, 마크롱은 자본의 대변인이야. 그렇다고 멜랑숑이 대안이 될 수 없어. 그는 이상주의자일뿐 더러, 반 EU주의자야. 물론 여기에서 르펜을 거론할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해.”

내 신경을 건드린 건 다름 아닌 ‘제 3세계에서 있을 법한 사건’이라는 그녀의 표현이었다. 묘한 그녀의 발언에 나는 ‘얼마나 세련됐느냐의 차이일뿐, 너희 프랑스에서도, 영국에서도 물론 미국도 권력과 자본의 부패는 존재할 것’이라 답했지만 착잡한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물론 내 안에도 그러한 편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한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은 변방 출신의 나에게도 그리 쉽지 않다. 그건 앞서 내가 코소보와 알바니아를 두고 그저 근거없이(물론,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하다고 바라보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은 아닐까? 그건 그저 무지에서 비롯된 우매한 나의 고백인 것이다.

그렇게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를 하며 그리고 경치를 구경하고 달려온 길. 어느새 모스타르에 도착했다. 강하게 내리 쬐는 볕은 사라예보와 또 다른 느낌이다. 역사를 나서자 뜨거운 열기에 숨을 쉬기도 벅차다. 아직 8시밖에 되지 않았으나 30도를 넘는다. 한낮 기온이 40도를 넘는다 했으니, 조금 걱정이 된다. 짧았지만 인상깊은 대화를 나누며 길동무가 되어준 안나와 찐한 포옹 후 연락처를 주고 받고는 그곳이 독일이든, 영국이든, 한국이든, 혹은 그 밖의 다른 나라든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모스타르 하면 도시를 횡단하는 네레트바 강의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다. ‘옛 다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스타리 모스트는 보스니아 내전/국제전을 겪은 이들의 아픔과 화해를 상징한다.
16c 소금이 귀했던 그 시절, 오스만 제국의 화려한 황제로 알려진 쉴레이만은 달마시아 해변으로 나아갈 길을 만들기 위해 다리 건설을 명령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건축가 시난의 제자인 하즈루딘이 다리를 설계에 착수한 결과, 1088개의 하얀돌, 길이 30m 폭 5m, 높이 25m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길고 거대한 석조다리를 혁신적인 건축기법을 통해 건설하게 된다. 납 땜 된 철제 핀들과 달걀 흰자로만 커다란 석재들을 지탱하는 기법으로 만든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던 스타리 모스트, ‘썰’에 의하면 이 기법이 실패할 것에 대해 두려워 하이루딘은 다리가 완공되기 전 도망쳐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확인할 길을 없지만 스타리 모스트를 건설하기 전, 이와 똑같이 생긴 크리바 쿠프리야Kriva cuprija를 만든 것을 보니 그가 스타리 모스트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다리는 이 도시를 상징하는 것이자, 보스니아의 보물같은 존재였다. ‘모스타르’란 마을 이름의 뜻이 ‘다리의 수호자’란 뜻을 지닌 ‘모스타리(mostari)’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드러난다. 그러나1993년 11월 9일 오전 10시, 400년 동안 원형을 유지하던 스타리 모스트는 크로아티아 군의 폭격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스타리 모스트 동쪽 탑, 타라 탑에 위치한 스타리 모스트 박물관에서 당시 크로아티아 군의 폭격에 결국 무너지고 마는 스타리 모스트의 모습을 상영하고 있었다.(https://youtu.be/sFF1v0n6VUg)

세르비아가 사라예보를 포위하고 있는 사이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 극우 민족주의자 프리뇨 투지만은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 군대(Croatian Defence Council, 크로아티아 군대가 아니라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들이 중심이 된 군대로, 최초에는 세르비아에 대항한 전투를 벌였지만 후에 극우주의와 결탁, 보스니아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한다.)를 앞세워 모스타르를 정밀 폭격한다. 
그렇게 모스타르 서쪽 언덕 위에서 발사된 포탄은 정확히 스타리 모스트에 향한다. 그 포탄의 목표는 그들이 상정한 적도, 모스크도 아니었다. 정확히 그 다리, 스타리 모스트였다.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다리, 스타리 모스트는 한 발, 두 발 포탄을 맞으며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온 돌들과 철제 핀들을 하나, 둘 씩 흐르는 네레트바 강에 떨구고 만다. 그리고 다시 한 발, 두 발, 세 발. 오랜 다리는 서서히 힘을 잃어 간다. 끝내 포탄을 견디지 못 한 스타리 모스트는 자신들이 생기기 이전부터 그 자리에서 흐르던 네레트바 강물에 자신을 맡긴다. 그렇게 스타리 모스트로 형상화 되어 온 산에서 온 돌들은 포탄들과 함께 강에 던져져 다시 산에 일부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갔다. 400년 전, 오래된 다리가 생기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모스타르. 산도 그대로고, 강도 그대로고, 하늘도 그대로인데, 다리만 사라져 버렸다. 이 소식은 보스니아인들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 보스니아 정부는 다리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라예보가 포위되어 포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국가적 애도의 날을 선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크로아티아 여성문학의 대표작가 슬라벤카 들라쿨리치는 묻는다.
“우리는 왜 파괴된 다리의 이미지를 보며 학살당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볼 때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는가?”

그건 아마도 인간이 갖는 유한적 삶을 초월하는 기념비적 건축물이 담고 있는 영원성 때문은 아닐까. 당시 보스니아에서 민족간 통혼율이 가장 높았던 모스타르, 스타리 모스트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구혼의 장소로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그 자식과 손자의 사랑이 시작된 장소였다. 그리고 스타리 모스트에서 열리던 한 여름의 다이빙 대회는 수많은 이들의 추억을 만들어 왔을 것이다. 즉 스타리 모스트가 의미하는 것은 몇 대에 걸쳐 함께 공유하는 집단의 기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름과 공존의 무게를 버틴 공간이었던 오랜 다리였을 것이다.

발칸의 호메로스라 불렸던 이안 보드리치의 대하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의 다리도 그러했다. 소설은 남쪽 무슬림 마을과 북쪽 기독교 마을을 잇는 다리가 건설되면서 인간들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이해와 공존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드리나 강의 다리는 역사의 증인으로 그곳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함께하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관찰자이자 그들의 삶과 함께한 친구다. 이안 보드리치는 다리에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인생을 알기 전에 다리를 알았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 전 다리와 먼저 사랑을 나눴다. 다리는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문화와 문화, 종교와 종교가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 통로다.”

그런 옛 다리의 파괴는 단절을 의미하는 것 이상 아니었다. 그들이 존재하기 이전 부터 존재해 온 옛 다리가 사라지자, 네레트바 강은 잔인하게 서쪽 마을과 동쪽 마을을 갈랐다. 하나의 마을이었던 모스타르는 카톨릭 신자들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주로 살던 서쪽 마을, 이슬람 신자들인 보스니아인들이 주로 살던 동쪽 마을, 두개의 마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모스타르가 자랑하던 다름의 공존도 함께 무너졌다.

1993년 한 번 무너져 내린 스타리 모스트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4년 7월, 주변국들의 후원을 받아 터키 건축가들이 사료를 기반하여 그것이 건설된 방식으로 복원해 낸다. 그건 과거의 고통을 치유하는 그리고 공존과 평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첫걸음이다.
그렇다고 스타리 모스트의 복원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닐터, 여전히 서쪽 마을과 동쪽 마을은 관념적, 실질적 거리감은 여전히 존재한다.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 학교로 나뉘어 공부하던 학교는 내전이 끝나고 어느새 하나가 되고 한 지붕 아래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지붕 아래 각 학생들이 오르는 계단도, 공부하는 교실도, 운동장도, 교육과정도 그리고 이들을 책임지는 교장도 둘이다. 심지어 도시 구급 체계를 비롯해 모스타르 지방정부도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 두개로 운영되며, 경찰차도, 구급차도, 정치인도 다리를 건너지 않는다.
게다가 과거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에 참여한 이들 중 일부는 어떠한 형벌을 받지도 않고 여전히 모스타르에서 카페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서쪽 크로아티아계 마을 뒷산에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십자가는 단순히 내전 중 사망한 카톨릭 신자들을 추모하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저 그건 마음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는 증오와 불신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불행은 시간과 함께 그저 그렇게 지나가거나 혹은 최소한 인간들의 망각 속에 흩어져 사라진다. 오래전 무너져 버린 다리의 돌들이 네레트바 강에 흘러 내려 갔듯이, 그 불행도 새로운 오래된 다리 스타리 모스트 아래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에 흘려 내려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오래된 다리 위에서 몇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삶은 다시 시작되어야 할 때인 듯 하다.
모스타르 동쪽 마을, 스타리 모스트가 보이는 한 켠에 조그마한 비석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그 비석에 써있는 작은 글씨,

‘Don’t Forget’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그 불행을 인간의 망각 속에 흘려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건 불행을 잊는 것일 뿐, 결코 불행이 가져 왔던 참혹했던 과거를 잊으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다리 위에서의 삶은 그러한 참혹했던 과거의 실수 위에서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작은 비석은 이곳 모스타르에 사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는 듯 하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박종필 감독을 기억에 새기며 [유철의 유럽방랑기] -4

이번 유철의 유럽방랑기는 특별히 필자의 삶에, 또 많은 이들의 삶에 인연과 시선을 남긴 고 박종필 감독에 대한 기억과 추모의 글을 싣습니다. 인연이 있던 많은 분들이야 당연히 고인을 추모하겠지만, 일면식 없는 이들도  세상의 한 구석을 가까이서 함께 기록으로 남겨왔던 고인과 고인의 작업들을 조금이나마 다시 되새기고 남겨야 한다는 마음에서요. 너무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던 고등학생 그 시절, 나는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자 했었다. 그 영화가 바로 ‘끝없는 싸움-에바다(박종필, 1999)’였다. 이를 계기로 나는 에바다 문제, 특히 에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젊은이들의 투쟁을 영상으로 만들게 됐다. 그것은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그 영상으로 국제영화제에서 입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바꾼 건 그 영화제의 입상이 아니라, 그 영상을 만들며 만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통해 사회를 조금씩 알아갔고, 그리고 현재의 내가 됐다. 가끔은 그 사람들을 원망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냥 투정이란 것을 나도, 그 투정을 듣는 이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싶은 사람, 내가 영상을 만들며, 이를 통해 인연을 맺게 된 많은 사람들 중에 박종필 감독, 종필이 형이 있다. 그가 그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면, 결코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그는 내 영웅이자 롤모델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2000년 어느 날 신촌에서 그와 처음 만난 곳은 연대 앞 아주 구석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삼겹살 집이었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모여 삼겹살과 돼지 껍데기에 소주 한잔 나누는 그런 곳. 삼겹살이라 하더라도 불판에 얹으면 금새 녹아 없어지는 1인분 2000원짜리 삼겹살이니, 이게 정말 삼겹살인지 의심스러운 그런 삼겹살이 나오는 허름한 곳이었다. 
한 대학생 누나가 내게 오늘 내가 정말 좋아할만한 사람이 오니 꼭 나오라 연락에 나는 야자를 제끼고, 독서실 자리에 불을 켜 놓고서는 형 누나들과 할 소주한잔 기대하며 신촌으로 향했다. 
그들과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끄러운 가게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누나는 내게 그를 소개했다. 내가 본 그 영화, ‘끝없는 싸움-에바다’를 만든 그 사람이라고. 그도 내 이야기를 이미 들었었는지,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한다.

“어, 네가 그 고등학생이구나! 반갑다!”

그는 내게 고등학생 한 명이 대학교 동아리실에 무작정 찾아와 그들을 쫓아다닌다는 이야기, 그리고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 동안 무척 궁금 했었다고 말했다. 뭐든지 물어 보라던 그. 그러나 내가 질문하기도 전에 그는 카메라 다루는 법, 촬영, 편집할 때 주의사항,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작업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유의미하고 그리고 중요한지를 늘어 놓았다. 고등학생인 내게 소주를 따라주며 말이다. 그리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중에 꼭 같이 작업하자.”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의 제스쳐, 그의 말투, 그의 젓가락질, 소주 마시는 모습,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그때 당시 그가 건낸 그의 명함을 나는 아직도 지니고 있다. 그는 내게 영웅이나 다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영상작업을 통해 생긴 그 인연으로 노들야학에서 신세를 지게 됐다. 그리고 다시 만난 종필이 형. 그는 바쁜 일이 생기거나, 촬영이 겹치거나 하면 가끔 내게 카메라를 맡기곤 했다. 그는 내게 촬영 부탁을 하면서, 그날 필요한 그림들과 내용들을 설명하다가는 결국 항상 마무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냥 네가 찍고 싶은 데로 찍어봐. 못 쓰면 다시 촬영하면 되지 뭐.”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3년 에바다 농아원의 문이 열리던 그날, 나는 그곳에 있었고, 내가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던 에바다 농아원 사태는 점차 정상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맞이한 에바다 정상화를 자축하는 잔칫날.

“야, 너 유철이 아니니? 너 살아 있었구나? 어떻게 지내?”

반가운 형의 표정과는 달리, 어딘가 어색했던 나. 학생회를 한다는 핑계로, 나의 게으름으로 야학에 발걸음이 뜸해진 탓도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영상을 안하기로 마음 먹은 후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 영상작업의 첫 대상이었던 에바다 농아원에서, 그 에바다 문제를 영화로 만들어서 내게 큰 영향을 주었던 그와의 만남, 그러나 예전 나의 꿈에서 많이 멀어진 나. 그 상황에서 그를 마주하는 건, 불편한 것이었다. 아니, 왠지 모를 서운함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형에 대한 서운함은 아니다. 그냥 내가 당시 영상을 안한다는 그런 서운함일 듯 싶다. 그런 복잡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진다.

“너는 이제 영상은 그만 둔 거니?”

최소한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질문. 베시시 웃으며 “네”라 대답한다. 
그러나 그는 내게 ‘왜’를 묻지 않았다. 그냥 내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물으며 웃고 대견하다며 칭찬해 줬던 기억이 난다.

굳이 형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형의 얼굴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집회현장에서, 그리고 노들야학에서 쉬이 만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회가 끝나고는 허름한 술집에서 종종 소주도 한 잔 기울이며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 모처에서 우연히 갖게 된 그와의 술자리, 형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왜 영상을 그만하기로 한거였지?”

갑작스러운 질문,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머뭇머뭇 하고 있는 나를 그는 아무 말 없이 똑바로 바라보며 기다렸다.

“형, 저는 더 이상 카메라를 들 자신이 없었어요. 지금 당장이 비참하고 또 억울한데 그 상황에서 카메라를 든다는 건 너무 잔인해요. 평생 카메라 렌즈로만 세상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요. 그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나는 대학에 입학 후부터는 카메라를 결코 들지 않았다. 물론 몇 번 시도하기도 했으나, 열정과 분노만이 가득한 내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하는 이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기 보다는, 그리고 그 현장에서 같이 분노하기 보다는, 그들의 외치는 구호와 분노를 기록해야 하는 작업. 그들이 눈물을 흘릴 때도, 그들과 부둥켜 안거나 혹은 같이 울기보다는,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기 보다는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 하는 작업. 내게 그런 작업들은 내 눈앞에 벌어지는 그 수 많은 사건들에 벽을 치는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형은 그런 말도 안되는 내 이야기를 한참을 듣고서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했다.

“유철아, 우리에겐 각자의 몫이 있는 것 같아. 네가 해야할 역할과 내가 해야할 역할이 있는 거지. 그리고 지금은 너는 네 역할을 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우리가 각자 해야만 할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의 변명과 변명 속 어딘가에 묻어 있는 서운함, 아마 형은 그 서운함을 알아 차린 듯 싶었다. 내가 영상을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겠다는 것을 형은 이미 알아 차렸던 것 같다. 그때 그의 말이 무척 위로가 됐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어느새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같잖게도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한국을 떠났다. 그러던 지난해, 초여름. 정말 오랜만에 양재동에서 형과 만났다. 다른 동지들과 함께하는 술자리, 그러나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난 형과의 술자리에 나는 추억 팔이 삼매경에 빠졌다. 신촌에서 불판에 얹으면 녹아 없어지는 삼겹살을 안주 삼아, 그리고 질겨서 결국 씹다가는 결국 그냥 이를 삼켜야 했던 돼지 껍데기를 안주 삼아, 빡빡머리 고등학생 앉혀놓고 소주 따라주던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 추억팔이. 형은 내게 그 때 나와 함께 촬영 다니던 여학생하고는 사귀던 사이가 아니었냐며 뜬금포를 날렸다. 이에 나는 질세라 거 형의 연애사로 응수하며 ‘우린’ 박장대소 했다. 그리고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세월호 이야기를 꺼내고, 노들이야기를 하고.. 
함께 술자리를 하던 동지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떴지만 한참을 형과 소주를 기울였다. 둘의 혀가 조금씩 꼬여가던 찰나

“집 근처에서 한잔 더 할까?”

당시 두 번째 허리 수술을 한지 얼마 안됐던 터라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형과 함께 탄 택시. 형은 내 손을 꼬옥 붙잡으며 말했다.

“유철아, 건강해야 해. 유학생활 힘들겠지만 건강관리 잘하고, 들어오면 또 한잔 하자.”

그렇게 나는 다음에, 진짜 다음에 꼭 한 잔 할 것을 약속하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그게 형과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 때는 몰랐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결코 내리지 않았을 텐데.. 최소한 소주 한 잔 더 하자는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놀려주었을 텐데.. 건강 꼭 챙기시라 이야기 했을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허망 하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이렇게 후회해 보아도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그의 가는 길 조차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 후회마저 허망하다.

종필이 형, 이제 정말 형을 볼 수 없는 거야? 전 형이 언젠간 꼭 같이 작업하자는 말 기억하고 있어요. 근데 가긴 어딜가요.. 아직도 저는 더 이상 형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냥 너무 힘드네요. 특히 요즘 너무 힘들었는데 말이야. 이렇게 아직도 형에게 투정만 늘어 놓네요. 아직도 형 앞에선 제가 철부지 고등학생인 것 같아요. 그냥 지금 형이 그리운건 어쩔도리가 없네요. 보고싶어요.. 형.. 그저 형이 가는 길에 함께 할 수 없음이 너무 괴롭네요.

형이 아프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그냥 이 말 꼭 전하고 싶었어요. 그 날 양재동에서 형에게 한 말, 다시 하고 싶었어요. 내가 꿈을 키워가던 시절, 당신은 내게 영웅이었고, 지금도 형을 보면 설렌다고.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건 정말 형이라고 말이에요. 결국 전하지 못한 이말 이렇게나마 남겨요. 그곳에서 라도 이 글 읽어주세요.

이제 정말 형을 보내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네요. 아니, 보낸다는 건 말이 안되겠죠? 그냥 가슴에 묻는 것이겠죠. 호식이 형을 가슴에 묻은 것처럼.. 아마 가슴에 묻은 형들이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침반으로 계실 것이고, 지치고 힘들 때 내 삶의 원동력이 될거에요. 

형, 종필이 형! 조심히 가요. 먼 훗날 꼭 저승에서 약속한 소주 한 잔 기울여요. 그 때까지 건강히 계셔요..!

 

사진출처 : 4. 16 연대 페이스북 타임라인


현재 유튜브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고 박종필 감독의 영화 다시 돌아보기가 진행 중이니 꼭 보시는 것도 추모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유철의 유럽방랑기] -3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슬로베니아 남서쪽 끝자락 크로아티아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작디 작은 마을, 피란Piran. 수도 루블라냐에서 5시간, 국토 대부분이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진 슬로베니아에서 버스 외에는 변변한 교통수단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특히 피란은 바다를 앞에 두고 산으로 둘러 쌓인 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차를 탄다 하더라도 근처 도시인 코페르Koper에서 버스나 택시로 갈아타야 한다.
벅차 오르듯 넓디 넓고, 새파란 바다가 보고싶어 떠나온 여행이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길은 베니스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피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피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탈리아 두이노, 미라마레, 슬로베니아의 코페르, 이졸라의 아름다운 경관은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를 그저 지나쳐 갈 수 밖에 없는 그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그저 다음에, 그리고 언젠가 다시 오리라 나를 위로해 본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해안도로를 빠져나와 피란으로 들어가는 길, 산비탈을 굽이굽이 넘어 내려오자 눈 앞에 펼쳐지는 경관은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배의 선수처럼 뾰족하게 톡 튀어 나와 있는 마을, 피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새파란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 유난히 맑은 하늘,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는 마치 아드리아 해가 하늘로 쏟구쳐 나를 삼킬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었다.
옆 좌석에 앉은 노부부는 그런 나를 보며 웃는다. 그러나 그들도 나와 다를바 없다. 들썩이는 할아버지의 궁둥이나, 목을 내뺀 할머니의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살짝 몸을 비틀어 드리자, 할아버지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들어 상체를 쑤욱 내밀며 오래되어 보이는 자동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찰칵, 지잉…’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쯤 어딘가의 카메라가 정겹다. 그러나 장담 컨데 그 사진엔 내가 나올 수밖에 없었을 뿐더러 반사광에 바깥 풍경은 그저 하얗게 나올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내게 ‘엄지 척!’ 하며 웃으신다.
어린 시절, 아직 남은 필름이 들어있는 사진기를 집에서 몰래 들고나가 이것 저것 찍었던 기억이 난다. 난 그저 그 안에 있는 사진을 빨리 현상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선 24방, 36방을 빨리 채워버려야만 했다. 지금같이 원하는 것을 골라서 현상하거나 혹은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생각날 때 클릭해서 보는 그런 시절과 다르다. 무엇이 찍혔을지, 혹은 어떤 필름이 들어 있는지 하는 기대가 있었고, 그 필름이 현상되어서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다. 그런 노부부의 카메라를 보니 문뜩 그때 그 시절의 그리움이 싹튼다.

버스에서 내리자, 눈 앞에 펼쳐진 아드리아 해와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에 그 수평선 마저 모호한 그 곳에 내가 마치 던져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방파제 끝에 서로 마주한 초록과 빨강색 등대들은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랜즈’에서 고현정과 조인성이 이 방파제에 기대어 저 두 등대를 배경삼아 둘이 와인을 마시던 장면이 문뜩 떠오른다. 그러니 여기에 로멘틱함도 더해진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커플이 그 자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런 데서 셀카를 찍는 건 촌스러운거야!’ 셀카를 찍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가볍게’ 그곳을 지나친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호수 같이 잔잔하고 깨질듯 맑은 아드리아 해를 곁에 두고 그리고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그러자 눈 앞엔 타르티니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곳 한 가운데에는 피란이 자랑하는 이탈리아 바이올린 비루투오소이자, 작곡가인 쥬세페 타르티니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그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 사실 둘러보면 이 곳 마을은 타르티니 일색이다. 광장 입구에는 타르티니 호텔이 있으며, 동상 맞은 편 건물에는 타르티니의 생가라고 크게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의 동상 뒷 편 언덕 중턱의 성 프란시스 성당에도 마찬가지다. 성당에는 찬송가가 아니라 타르티니가 작곡한 소나타가 하루 종일 흘러 나온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타르티니 광장도 마찬가지다. 타르티니 광장 한 가운데서 어린 꼬마의 바이올린 연주가 한창이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 두고선 타르티니의 명곡, ‘악마의 트릴’을 연주한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동전을 하나 둘씩 던져주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문 채 고개를 휘저으며 연주에 집중하는 꼬마 모습이 당돌해 보인다.

 

 

사실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타르티니의 친구였던 프랑스 천문학자 요셉 랑드의 일기에는 그 이야기가 적혀있다.
음악에 심취한 타르티니는 좋은 악상을 떠올리기 위해 매일 밤을 전전긍긍하며 보냈다고 한다. 아마도 성직자가 되길 바랬던 부모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선택한 그리고 다시 그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음악을 선택한 그에게 남은 건 음악, 바이올린 그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타르티니는 꿈을 꾼다. 그리고 거기에서 악마와 마주하게 된다. 어둠 가득한 곳에서 나타난 붉은 모습의 악마는 타르티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살고 싶다면 당장 네 영혼을 내놓아라. 네가 영혼을 내놓는다면,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한 제안을 마르티니가 받은 것이었다. 악마의 제안에 타르티니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악마에게 건내며 망설임 없이 답한다.

“이 바이올린으로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가장 황홀한 연주를 내게 들려 주시오.“

그러자 악마는 그와의 약속에 따라 타르티니를 위해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악마가 들려준 트릴은 타르티니가 지금까지 평생에 들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한 아름다운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꿈 속에서 들은 악마의 연주를 오선지에 옮겼는데, 그것이 ‘악마의 트릴’이라고 한다.

타르티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작곡한 악마의 트릴, 만약 악마가 타르티니에게 한 제안을 누군가에게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답할까? 당장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신앙상의 문제를 들먹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평화? 남북통일? 그 순간 이렇게 거창한 것을 말하는 이도 많지 않을 터, 그럼 박근혜의 종신형? 영생이나 막대한 금은보화? 그것도 아니면 세월호에서 숨진 이들의 생환?…

문뜩 동네에서 만난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떠오른다. 아직 볕이 귀했던 영국의 겨울 어느 날, 오랜만에 허락된 햇볕을 만끽 하고픈 마음에 잽싸게 밖을 나섰다. 지금 해가 떠도 5분 뒤 비가 올 수 있는 것이 영국 겨울 날씨다. 시내를 거니는데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 온다. 오랜만에 허락된 햇볕과 함께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내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바이올린 소리에 이끌려 간 곳은 광장 한 귀퉁이. 그곳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백발의 아시아계 노인이 있었다.
낡디 낡은 테일드 코트에 잘 다려진 흰색와이셔츠, 검정색 등산복 바지에 반짝반짝 광나는 구두를 신은 백발 노인. 군데 군데 하얗게 빛 바랜 바이올린은 그 기능이나 할까 싶지만, 그 노인의 활 놀림에 응답하며 아직 수명을 다하지 않았노라 외친다. 인상을 쓰다가 살짝 미소 짓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짓는 애잔한 그의 표정은 그 울림에 깊이를 더 하는 듯 하다.
초라하지만 나름 갖춘 그의 복장과 그의 바이올린 연주실력에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연주를 마친 그는 관객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파란 하늘을 향해 키스를 던진다. 그리고 관객에게 말한다.

“이번 곡은 제 아내를 위한 곡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들려줄 수가 없어요. 얼마 전 그녀는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녀를 대신해 여러분들께서 감상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의 말에 관객들은 박수를 보낸다. 노부부는 다시금 손을 꼬옥 부여잡았고, 맞은편 어린 아이는 그녀의 부모를 꼬옥 끼어 안는다. 아직 찬 공기에 나는 손을 모아 입김을 불고는 두 손을 비벼본다.
호흡을 가다듬은 노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그의 활이 바이올린의 현과 마찰하며 이전과는 또 다른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건 건반악기가 주는 그런 직관적인 감동과는 다르다. 여러 개의 모노코드를 박자에 따라 혹은 화음 만들어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감동과는 다른 감동, 찰현악기가 내는 소리는 이보다 훨씬 감성적이다. 그 소리는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눈물이 흐르는 소리라고나 할까? 그의 연주에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마도 악마가 저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나타나 타르티니에게 한 제안을 한다면, 분명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내에게 나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게 해다오’ 하고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먼저 떠난 아내에게 바치는 그의 연주는 무척이나 애절했고,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꼬마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뒤로 하고 광장을 떠나려고 하는데, 좀 전에 버스에서 마주한 노부부가 서로 번갈아 가며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필름 돌아가는 손맛이 그리웠던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제가 두 분을 찍어드릴까요? 두 분 같이 서 보셔요!”

할아버지가 내게 카메라를 건내려 하자,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잡아 끈다.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게 카메라를 건내려 하자, 그녀는 마지 못해 그의 옷자락을 놓는다. 아마도 낯선 동양청년에게 ‘귀중품’을 맡긴다는 것이 불안했나 보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메고 있던 가방을 잠시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내 핸드폰을 놓았다. 그러자 비로소 되찾은 그녀의 미소.

“할머니! 할아버지랑 더 가까이 붙으셔요. 좀 더! 굿!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저매니~”

‘찰칵, 지잉..’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하는 독일인 노부부, 할머니는 언제나 마지막 여행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날씨가 좋아지는 시기인 봄, 그리고 절정인 여름마다 여행을 다닌다고 내게 말한다. 할아버지는 이에 덧붙이며 말한다.

“그래서 나는 늘 다음 여행을 미리 예약해. 낸 돈이 아까워서라도 죽을 순 없지. 이번 여름에는 두브로브니크!”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시며 말한다.
“그래요. 두브로브니크, 갑시다. 그러려면 당신도 계속 운동해야 해요.”

할아버지는 손을 번쩍들며 여전히 자신이 건강하다고 표현한다. 아마도 이 노부부에게는 다음 여행, 그리고 그 다음 여행, 또 그 다음 여행이 악마와의 거래 대상이 될지 모르겠다.

그럼 나는? 나는 악마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지금 내가 내 영혼과 맞바꿀 정도로 갈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처지를 생각해 보면 아마도 박사학위 정도라 답하지 않을까? 박사논문 서론에 내 연구의 의의랍시고 쓴 거창한 포부는 말하기도 부끄럽다. 하지만 이것이 죽은 아내를 위한 바이올린 연주나, 늙은 노부부의 다음 여행과 같이 그 다지 로맨틱하지도, 그렇다고 작지만 영혼과 맞바꿀 정도로 절실하거나 절박한 것 같지도 않다. 어찌 보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은 그저 시작했기에 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마무리 짓기 위해 필요한 것들일 뿐 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내가 갈구하는 그것이 가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로부터 그냥 주어진 것이라면 영원히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와 거래에서 이를 요구한다면 그건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노부부와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의 바람이 가치 있는 건 그들 인생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 했는가? 내가 이 과정에 충실해야 할 이유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아드리안 해의 작은 베네치아 [유철의 유럽방랑기] -2

아드리안 해의 작은 베네치아

 

피란은 ‘아드리아 해의 작은 베네치아’라고 불린다. 중세시대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강한 영향을 받은 피란은 슬로베니아어 외에 이탈리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베네치아풍의 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게다가 피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조지 교회 옆 종탑은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의 종탑을 본 따 만든 것이라고 하니 그 별칭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피란에서 내 눈을 사로 잡은 건물도 그런 베네치아풍의 건물이었다. 마르티니 광장에 위치한 붉은빛 외관의 베네치안 하우스가 그렇다. 타르티니 광장에 위치한 이 3층짜리 베네치안 하우스의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건물장식들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특히, 일반적으로 정면에만 테라스가 있는 주변 건물들과는 달리 이 건물의 테라스는 달리 정면에서 왼쪽면까지 이어져 있어 독특하기도 하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독특한 외관을 지닌 이 건물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피란이 베네치아 공국에 지배 받던 시절, 한 베네치아 상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상인은 나이 어린 피란 여인에게 반하고 말았는데, 그는 그 여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피란에 들를 때마다 그 여인에게 선물을 한 가득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남성들의 과시욕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그런 둘을 보며 피란 사람들은 무척이나 수근거렸다고 한다. 나이 많은 식민지배국의 남성이 피식민국의 어린 여성을 쫓아 다녔으니, 게다가 그녀의 선물을 매번 한가득 가져다 주니 이 좁은 동네에서 이만한 가십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분명 여인을 두고 매국노라 하는 이들부터 어린 여자가 돈만 밝힌다고 비난하는 이들, 곧 그 상인이 여자를 버릴 것이라며 떠드는 이들, 반대로 그런 여자를 쫓아다니는 남자에게는 파렴치한이라 하는 이들도 있었을 터. 둘을 바라보는 피란 주민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배신감은 무척이나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변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그녀에게 집 한 채를 지어 선물한다. 그리고 창문과 창문 사이 사자상을 설치, 그 아래 휘장에 라틴어로 이렇게 새긴다.

‘Lass a Pur Dir’

영어로는 ‘Let them talk’, 한국말로 해석하자면, ‘지꺼리게 놔둬’, ‘말하게 둬’ 혹은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다. 그건 자신들을 두고 수근거리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받는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둘이 서로 사랑한다고 주변의 불편한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그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시대에도 비난의 대상은 여성에게만 향했을 것, 게다가 상인은 무역을 위해 주기적으로 떠나야 하니, 그녀 곁에 항상 있을 수 없을테고 말이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오롯이 그녀 혼자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하는 말,

‘내사랑, 신경쓰지마오’

그리고 그녀와 자신은 비난하는 이들에게 하는 말,

‘떠들 테면 떠드시오! 하지만 사랑하는 내 여자를 괴롭히지 마시오!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지는 말란 말이오!!’

각자의 사랑이 왜곡되는 상황, 그리고 이를 홀로 감당해야 했던 그녀, 그런 그녀에게 그 상인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없을 때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집을 지어주는 것 밖에 없었지 않을까? 그런 그의 마음은 주변 건물보다 유난히 많은 창문, 큰 창문들, 그리고 두 면으로 이어진 큰 테라스, 굳이 밖을 나오지 않더라도 집에서 바다와 주변이 훤히 내다 보이는 건물 위치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이 로맨틱한 건물이 유명해진 이유는 사실 이런 사랑 이야기 때문은 아니다. 사람들이 이 건물에 방문하는 이유는 건물 1층에 위치한 세계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앞다투어 공수해 간다는 피란의 소금 가게, 피란스케 솔리네Piranske Soline가 있기 때문이다.
금처럼 귀하다는 피란의 소금, 그건 피란주민들에게 축복이자 저주였다. 소금은 피란에게 풍요로운 삶을 약속했으나, 이 때문에 주변국들로 부터의 침략과 핍박에 시달리게 하기도 했다. 소금을 차지하기 위한 제국들의 침략 역사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 비잔티움 제국, 신성로마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함부르크 제국에 이르기까지 한다. 피란을 감싸고 있는 모르곤 언덕의 몇 미터 남짓 밖에 남지 않은 성벽이 그 역사를 대변한다.

모르곤 언덕을 오른다. 이스트라 반도의 마을들이 그러하듯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사이 미로처럼 뻗어 있는 골목들. 건물과 건물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 내가 양손을 뻗으면 마주한 건물벽이 닿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은 정겹다. 집 창문에 고개를 내밀어 앞집과 대화하는 할머니, 그 앞집과 연결된 줄에 빨래를 널고 있는 아주머니들, 사람 사는 냄새 풀풀 나는 골목이다.
그 사람냄새 나는 좁은 길을 굽이굽이 오르며, 사람 사는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모르곤 언덕 위에 있다. 언덕 아래 펼쳐지는 피란. 내 시선과 수평선이 일직선이 되는 순간, 나는 마치 선수처럼 뾰족한 피란 반도라는 커다란 배 위에서 아드리아 해를 항해하는 듯 하다. 성 조지 성당 앞의 한 연주가의 아코디언 소리는 배의 항해를 알리는 기적 소리 같다. 연신 사진을 찍어보지만 내 눈 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사진 찍길 포기하고는 잊지 않기 위해 눈을 깜뻑이며 풍경을 머리 속에 담아 보려 애쓴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거기 한 번 서 봐요.”

한 동양인이 내게 말을 건다. 굴러가는 R발음이 이건 여지 없이 북미권 발음이다. 새까맣게 탄 얼굴, 허름한 옷차림에 목에 건 손바닥 만한 초록색 손가방, 하지만 언뜻 봐도 비싸 보이는 썬글라스가 인상적이다. 나는 얼떨결에 핸드폰을 건냈다. 셀카든 아님 찍히는 것이든 그리 능숙한 내가 아니다. 어색하게 팔을 허리춤에 올렸다가, 내렸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기를 반복한다. 그러자 R발음 굴러가던 그녀가 익숙한 언어로 내게 묻는다.

“한국사람이죠? 맞아, 한국사람이야. 반가워요, 저는 카탈리나라고 해요.”

한국말을 하는 그녀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한국계 미국 이민자였다. 그녀는 지난 1년째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오랜만에 자신의 한국 고향을 방문했지만, 너무나도 변해 버린 모습에 실망을 하고 제 2의 고향을 찾아 떠나 여행 중이라고 한다.

“시골에서 소 젖 짜고, 피사리 하고, 새참 먹고 했던 그런 곳에 논밭은 어디로 갔는지 아파트가 들어차고, 카페들이 생기고 하는 것을 보니 갑자기 낯설더라구요. 그건 제 고향이 아니었어요. 실망한 마음을 안고 바로 그 길로 한국을 떠났어요. 다른 곳에서 그 고향 냄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말이에요.”

지금은 자신의 새로운 고향을 찾았다고 한다. 우연히 여행중 만난 친구를 따라 찾아 가게 된 우크라이나의 리비우Liviv가 그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주변을 여행하고 있다는 그녀. 낯선 곳에서 고향같은 익숙함이라니, 그건 어떤 느낌일까? 게다가 정든 고향을 상상하며 방문한 그 고향이 내 고향 같지 않다는 느낌.. 사실 나는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부모님도 서울에서 자라셨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두 서울에 계셨기 때문에 명절이든 뭐든 서울 밖을 나선적이 별로 없다. 내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서울, 내가 자란 그 동네 아파트는 여전히 거기 있고, 그 앞에 있던 버거킹과 맥도날드도 그 위치에 있다. 변한 것이라고는 맥도날드 뒤편에 스타벅스가 생겼다는 것 정도? 서울은 변해 봤자 서울이다. 그 자리 그 건물에 간판들만 바뀌는 그런 곳.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 먹은 건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당선될 것 같아서 였어요. 트럼프가 대통령인 그 나라에서 살 용기가 더 이상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이제는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미국땅을 밟지 않을 거에요. 요새 영국은 어때요?”

나의 30대를 보내고 있는 영국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반이민 분위기를 대표하는 영국, 브렉시트 가결 이후에는 그러한 인종차별적 반이민 목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브렉시트 가결 전후로 해서 인종차별적 범죄가 5배나 늘었다고 하니, 실제 체감하는 건 그 이상이다.
나도 종종 인종차별을 겪는다. 인종차별을 당할 때의 그 모욕감은 사실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으로서의 자괴감을 들게 만든다. 처음 이를 경험 했을 때는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는 둔해 졌는지, 아니면 서구사회에서 ‘자발’적 ‘쭈구리’로 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수 많은 간접적 차별은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고, 인지한다 하더라도 ‘잘’ 참는다. 그래도 모욕적인 처사에는 가능한 한 영국 ‘젠틀맨 엔드 레이디스’에게 배운 ‘인다이렉트’한 표현과 함께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폴라이트’하게 그들의 자존심을 긁는다.

“매우 유감이군요. 당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당신들이 늘 말하듯 자랑스러운 영국인처럼 행동해야 하지 않겠어요? Be British!”

그러나 매번 이렇게 대응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한번은 이런 경험이 있었다. 어두운 밤 길을 걷고 있는데, 트럭에 탄 영국인이 나를 불렀다. 그리곤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아, 다시 정중히 다시 한 번 말해달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이, 아시아인들은 아기를 어떻게 갖아? 너희들 성기가 고만한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기나 해? 하하하하”

모욕감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떨렸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차에 탄 그들을 쫓아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내가 아는 누군가처럼 가운데 손가락을 쳐들며 ‘X먹어라!’하고 외칠 용기도 없었다. 그건 회피이기도 하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안의 쭈구리를 확인한다.
그렇기에 카탈리나의 용기가 부럽다. 비록 그것이 회피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벗어나 그곳에 있음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와 나는 우연히 또 다시 유럽에서 마주치면 그 때는 소주 한 잔 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물론 그녀는 내게 자신의 제 2의 고향 리비우에 방문하라며 친히 주소를 이메일 주소와 함께 내게 건내 주었다. 내 언젠가는 가리라 다짐해 본다.

쪽지와 함께 모르곤 언덕을 내려 오는 길, 어린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지나간다.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운 것을 보아하니 분명 하교길이다. 금발의 여학생들이 내 옆을 빠르게 지나치며 들릴 듯 말듯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칭크스Chinks~”

내 옆을 지나치자 마자 깔깔대며 웃는다. 그냥 넘어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용기내어 보기로 한다. 그냥 지나치면 그들이 평생 자신들의 행동이 무엇이 잘 못된 것인지 모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용기 내어 그녀들을 불러 세웠다.

“헤이, 레이디스, 너희들 그럼 못 써! 그건 누군가를 상처 줄 수 있는 표현이야. 앞으로는 그런 표현 쓰면 안돼. 절대로!”

검지 손가락을 상하좌우로 흔들며 아이들에게 말한다. 나의 정색이 당혹스러울 법도 한데, 잠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볼 뿐,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깔깔대며 나를 앞서 간다. 그녀들이 사는 온 천지가 백인이니, 나같은 노랭이를 보면 신기하기도, 놀리고 싶기도 하겠다. 나도 그들을 양놈이라, 그리고 코쟁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단지 훗날 그녀들이 시골 골목길에서 만난 그 검은 머리 노랭이 청년의 설교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민박집 관리인인 마르코가 추천해준 펍, Café Neptun으로 향한다. 기분 전환엔 맥주가 최고다. 아직 비수기인 탓에 가게마다 손님들은 거의 없지만 가게들마다 때마침 열린 슬로베니아의 국가대표 축구경기를 시청하고 있는게 보인다. 사람들은 TV를 바라보며, 소리지르기 바쁘다. 어디나 축구열기는 똑 같다. 바텐더로 보이는 여인이 내게 묻는다.

“뭐 마시겠어요?”
“로컬 맥주 하나 주세요.”
“그럼 이게 최고에요!”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며 잔과 함께 내게 건낸다. 그 병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Out of China’
내가 맥주를 한참 쳐다보고 있자, 슬로베니아가 지고 있는 상황을 보며 계속 성질만 내던 옆 자리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나는 애써 웃으며 바텐더에게 말한다.

“음.. 이 맥주 정말 맛있네요. IPA죠? 근데, 미안하지만 저는 중국인이 아녜요.”
내 얘기를 들은 바텐더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하하 오해하지 말아요. 이 맥주는 이 근처 지역 맥주인데, 그 지역 이름이 아이도브슈치나Ajdovščina에요. 발음이 비슷하지 않아요?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말장난을 무척 좋아해요. 하하하 정말 오해 말아요!”

그들에게 한국과 중국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내게 그들이 모두 양놈이고, 코쟁이들이 듯 말이다. 그래 나는 지금 한국 밖에 있다. 무척이나 낯선 곳. 나와 생김새도 문화도 사고도 다른 이들과 내가 자란 곳에서 비행기로 11시간 거리에 있다. 낯익은 거라곤 하나도 없다. 모든 게 낯설다.

나의 고향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도 없고, 논도 없고, 동네 바둑이도 없는 시멘트와 철근으로 쌓아 올린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아파트 촌. 내가 즐겨 찾던 비디오 대여점도 학교 과제물을 팔던 문방구도, 동네 슈퍼마켓도 사라져 버린 그곳. 이제는 낯익은 간판들마저 사라지고 낯선 외래어 간판들로 대체된 그곳. 공터들은 사라지고, 커다란 백화점과 주상복합 건물들로 가득 차 버린 그곳. 그런데 왜일까? 종종 겪는 차별은 더욱 그곳을 그립게 한다. 내게 이곳과 다를 바 없이 낯선 곳이 되어 버렸으며,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또다른 배제가 존재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립다.
그건 장소가 그리운 것이 아니고, 그곳에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아닐까? 비록 풍경이 변해도 낯선이들로 가득하다 하더라도 낯익은 사람이 낯설게 변했다 하더라도 혹은 그 시절 그 기억이 왜곡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절 그 기억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낯선 땅, 이역만리에서 잠시나마 터전을 잡아 살기로 했으나, 여기에는 나의 이야기가 없다. 아니, 쓸 생각을 안했다는 것이 맞다. 그저 이곳에 온 목적이 우선되었지 결코 내 이야기를 쓰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 있는 이들의 삶에 맞추어 그들과 이질적이지 않게 살았기에 그 동안의 이야기는 ‘그들 이야기 속 나’가 더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카탈리나가 그러했듯이 고향은 이질적인 곳이라 할지라도 의외의 곳에도 있을 수 있다. 이제야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의 마음으로 버텼던 지난 날이 헛되다. 이제 나도 이곳 낯선 땅에서 내 이야기를 써봐야겠다. 그들 속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 속 그들을 써 내려가 봐야겠다. 그렇다면 그들의 차별은 내 이야기가 되고, 그렇기에 그 차별에 더 용기 있게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리라 다짐해 본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크로아티아 여행기 [유철의 유럽방랑기] -1

앞으로 영국에서 유학 중인 이유철씨가 유럽에서의 여행과 유학생활에 관해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사진을 올릴 예정입니다. 웹진 게재에 흔쾌히 허락해 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독자님들은 앞으로 유럽 곳곳의 사진과 더불어 사람 사는 이야기가 활력있게 펼쳐지는 지면을 마주하실 있을 겁니다.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이스트라 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풀라Pula는 그동안 내가 거쳐 온 ‘마을’에 비하면 ‘도시’에 가깝다. 엄청난 크기 아우구스투스 성전과 풀라 아레나는 과거 찬란했던 풀라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러나 모든 개발도상국들이 그러하듯 풀라 아레나 넘어 보이는 수 많은 크레인들과 현대식 항구는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군데 군데 위치한 클럽들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 보다 그 동안 지나쳐 온 조용한 테라스를 가진 카페를 그립게 만든다. 거짓말 아님…ㅎ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그렇게 지나쳐 온 ‘마을’들을 그리워 하며 걷는데, 저 멀리 교회 앞 작은 광장에서 꼬마들이 공을 차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날씨가 꽤나 덥지만, 아이들은 열심히다.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가만있기 어렵다. 나는 말도 없이 자연스레(?) 아이들 공간에 침범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 하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웬 낯선 동양인의 공을 뺏기 위해 하나 둘씩 좇아 온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몇 분이나 뛰었을라나? 땀이 비오듯 하고,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날씨가 25도나 되지만 자외선 알러지가 있는 나는 옷을 벗지 못한다. 지쳐 길바닥에 누워버린 나를 보고 아이들이 웃는다.

“아저씨 저기 그늘에 누우세요”

꽤 유창한 영어로 내게 말하는 이 꼬마는 시몬이다. 2달 여전에 수도 자그레브에서 이사 온 시몬은 이 동네 똘똘이로 통한다. 영어도 잘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한다. 주변 친구들이 쉬지 않고 자랑한다.

“어, 아저씨도 영어하네? 있잖아요, 시몬은 우리 학교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구요, 그리고, 그리고.. 뭐였더라? 맞아, 수학도 엄청 잘해요!”

여기에서 가장 덩치가 큰 마테오는 마치 자기 일인양 자랑하듯 목소리에 힘을 주며 내게 말했다. 쑥스러운 듯 구석에 한 여학생이 크로아티아어로 시몬에게 말한다. 그러자 시몬은

“아, 이 친구는 사라인데요, 영어를 잘 못해요. 그래서 뭐라고 하는지 묻는거에요.”

그러자 마테오는 사라에게 다시 크로아티아어로 무슨 이야기를 하더니 곧장 도망친다. 얼굴이 빨개진 사라는 곧장 마테오를 쏘아보더니 그를 뒤쫓는다. 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자 여기에서 가장 키가 작은 디노는 내게

“그게 아니구요, 사라가 요즘 사랑에 빠졌는데요, 방금 마테오가 자신의 이름이 사라가 좋아하는 남자애 이름이랑 같다고 이야기 한 거에요”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상기된 얼굴의 사라를 바라봤다. 그냥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마테오도 사라를 좋아하는 듯 보였다. 새하얀 피부에 아드리아 해처럼 맑고 파란 눈을 가진 사라는 전형적인 크로아티아 여인이다. 그녀는 운동을 좋아하는 듯 보였고, 잠시 같이 뛰어 보니 실제 웬만한 남학생들보다 축구를 잘하는 듯 했다. 그런 사라는 친구들 사이에서 여자사람친구를 가장한 모두가 흠모하는 인기녀인 듯 했다.

마테오와 사라를 보고 있노라면 어렸을 적 생각이 난다. 무척이나 부끄럼 많았던 나, 내가 좋아하는 여학생이 같은 아파트에 살았었다. 나는 7층, 그녀는 11층이었다. 그녀와 우연히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거나,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탈 때면 어찌나 떨리던지.. 숨을 못 쉴지경이었다. 그렇게 몰래 몰래 그녀를 흠모하던 중 내 마음을 전한건 내가 아닌 제 3자였다. 그녀도 나도 방문 학습지을 했었는데,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걸 알아차린 방문교사는 오작교가 되어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을 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 입이 귀에 걸린 나를 보고선 방문학습지 선생님이 어찌나 웃던지. 그 때 나를 바라보던 선생님 마음이 내가 사라와 마테오를 바라보며 드는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냥 마냥 이쁘기만 하다. 그리고 덩치만 큰 마테오가 아주 소심하게, 그리고 수줍게 사라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에 내 마음이 설렌다.

“근데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이에요? 관광객이에요? 아시아인인데 영어를 어떻게 해요?”

그녀는 엘리다. 그녀는 키가 작고, 하지만 다부진 체격을 지닌 아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아시아인과 대화하는게 처음이라고 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관광객 상대로 장사하지 않는 이상 그들 인생에 대화해본 아시아인은 내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들의 눈에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박사 공부를 하는 학생이고 영국에 있다고 하니, 다들 눈이 휘둥그레 졌다. 그리고는 뒤에 있던 마르코를 불렀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뭐라 이야기 하더니 갑작스레 내 앞에서 시퍼렇게 멍든 무릎과 넘어져 생긴 상처로 보이는 발뒷굼치를 내게 보였다.

“아저씨, 얘 농구하다 다쳤어요. 괜찮아 보여요?”

아마도 이친구들에게 영어 닥터가 의사로 이해 되었나 보다. 내가 다시 설명하자, 이제는 내가 정치인 지망생이 되어 있는 듯 싶었다. 아니라고 설명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았다. 내 영어실력이 문제일까? 여튼 나는 이야기를 돌렸다. 그들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얘들아, 너희들은 커서 뭐 하고 싶어? 꿈이 뭐니?”

아이들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저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싶어요. 그리고 영국도 가보고 싶어요! 영국에서 공부해 보고 싶어요”
“저는.. 슈케르 같은 축구선수가 될거에요! 돈도 많이 벌고,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부모님이랑 넓은 집에서 살고싶어요!”
“저는 학교 선생님이요! 우리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저는.. 배를 탈거에요! 바다가 좋아요.”
“저는 아저씨처럼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탐험가가 될거에요. 영국 가보고 싶어요! 영국은 어때요? 좋아요?”
“마르코, 아저씨는 그냥 여행객이야. 탐험가가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여행은 탐험가가 아니어도 할 수 있어. 탐험가는 북극같은 곳을 가는 거란 말이야.”
“그런가? 하여튼 나는 탐험가 할래!”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티격태격하며 떠듬떠듬한 영어로 내게 말한다. 그들의 꿈에는 각자의 사연이 있다. 의사가 되고 싶은 시몬은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게 싫고 게다가 아픈 동생을 치료해 주고 싶다고 한다. 의사가 되면 동생도 고치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의사가 되고싶다고 했다. 작은키 다부진 체격의 엘리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 그저 넓은 집에서 가족이 화목하게 살고 싶다고 한다. 집안이 그다지 화목하지 않은 디노는 학교 선생님이 부모님 같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도 선생님이 되어 자신같은 아이들을 보살피고 싶다고 했고, 아버지가 어부인 마르코는 아버지랑 배타러 나가는 게 좋다고 한다. 덩치가 산만한 마테오는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해외에는 어떻게 사는지, 뭐가 있는지가 궁금해서 탐험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

각자의 사연, 각자의 꿈. 하나같이 그들은 하고 싶은게 많다. 조금만 더 물어보면, 또 다른 미래, 자신의 꿈을 그린다. 하고 싶은게 너무나도 많고, 세상이 궁금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내게 묻는다.

“한국은 어디에 있어요?” “중국하고 달라요?” “한국은 영어 써요? 아니면 중국말?” “영국은 좋아요? 옥스포드 가보셨어요?”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그것을 상상하면 마냥 즐겁고, 장미빛인 이 꼬마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 없이 때묻은 나를 발견한다. 하고 싶은 것 보다 할 수 있는 것, 되고 싶은 것 보다 될 수 있는 것, 나의 미래와 꿈을 상상하면 눈 앞이 캄캄해 질 수밖에 없는 현실. 그들의 행복한 미소와 상상이 나에겐 그리 많지 않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크로아티아에 오기 전, 나는 슬로베니아 서부를 크게 한 바퀴 돌며 여행 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인 대학생 한 명을 만났다. 언론을 전공하는 대학교 2학년 학생이자, 휴학생인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요리를 그만두기 작정하고 그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긴 여행길에 올랐다고 한다. 지방대를 다니는 자신에게 부모님이 바라는 그리고 부모님이 걸어온 그 ‘평범’한 길은 사실 어렵다며, 그리고 자신은 요리가 너무 좋지만 인정받기 어려울 것 이라며, 그래서 이를 잊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 방도를 찾기 위해 두 달간의 여행을 떠나 왔다고 했다.

그와 같은 도미토리에서 묵게된 나는 율리안 알프스에서 셀수 없이 많은 별이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밤새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단어들을 주고 받았지만, 그는 내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조언하지 못했다. 어쩌면 정해진 삶을 수용하느냐 마느냐만 남았다는 것을 둘 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조선 땅에서의 삶은 만족하는 삶이라기 보다 생존해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밤새 마신 술과 오랜 여독에 실신한 듯 잠들어 있는 그에게 편지 한 통 남기는 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위로의 전부 였다.

‘…. 00군, 아직 젊어요. 하고 싶은 것 한 번 해봐요. 응원 할게요. 좋은 여행되길…..’

새빨간 거짓말. 물론 응원한다. 그리고 그가 하고싶은 것을 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선택이 무엇이 될지 나도, 그도 알고 있다. 게다가 하고 싶은게 뭔지도 모르는 내가,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는지도 모르는 내가 그에게 하고 싶은 것 하라는 조언이 가당키나 한가? 오히려 그건 아마도 내게 하는 말일지 모르겠다.
요즘에는 도통 책이 읽히지 않는다. 게다가 글쓰기를 할 때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그건 아마도 물리적인 문제만은 아닐터, 최근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면역성 질환들을 경험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제 원형탈모까지 생겼으니.. 이제 내게서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다시 내게 묻는다.

‘유철아, 공부하는게 즐겁니? 왜 공부를 그토록 하려고 하니?’

나이라는 것은 내게 이런 질문을 묻게할 만큼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내 안에서 찾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헛된 나이가 되지 않을까? 이 여행에서 찾고 싶은 것, 내가 욕망하는 것을 찾아야지.

우물쭈물 하던 사라가 내게 말한다.
“저는 운동하는게 좋아요. 남들 보다 잘 하는게 많지 않은데 운동은 남들 보다 잘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뛸 때 가장 행복해요.”

사라가 대답하자, 마테오가 옆에서 외친다.
“마테오랑 결혼할거 아니야?”

그렇게 마테오는 다시 또 이곳 광장을 한 바퀴 돌고, 사라는 놀리는 것이 마냥 싫지 않은 듯 천천히 그를 쫓는다. 그리고 다시 각자 내 옆에 앉는다. 그들이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어떻게 기억할지도 모르겠으나, 이 시간 나는 그들과의 기억이 행복하다. 그리고 짧지만 잊혀질 것 같지도 않다. 나를 뒤돌아 보게 한 그들의 꿈들과 그들의 천진난만한 웃음 소리는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한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