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필 감독을 기억에 새기며 [유철의 유럽방랑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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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유철의 유럽방랑기는 특별히 필자의 삶에, 또 많은 이들의 삶에 인연과 시선을 남긴 고 박종필 감독에 대한 기억과 추모의 글을 싣습니다. 인연이 있던 많은 분들이야 당연히 고인을 추모하겠지만, 일면식 없는 이들도  세상의 한 구석을 가까이서 함께 기록으로 남겨왔던 고인과 고인의 작업들을 조금이나마 다시 되새기고 남겨야 한다는 마음에서요. 너무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던 고등학생 그 시절, 나는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자 했었다. 그 영화가 바로 ‘끝없는 싸움-에바다(박종필, 1999)’였다. 이를 계기로 나는 에바다 문제, 특히 에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젊은이들의 투쟁을 영상으로 만들게 됐다. 그것은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그 영상으로 국제영화제에서 입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바꾼 건 그 영화제의 입상이 아니라, 그 영상을 만들며 만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통해 사회를 조금씩 알아갔고, 그리고 현재의 내가 됐다. 가끔은 그 사람들을 원망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냥 투정이란 것을 나도, 그 투정을 듣는 이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싶은 사람, 내가 영상을 만들며, 이를 통해 인연을 맺게 된 많은 사람들 중에 박종필 감독, 종필이 형이 있다. 그가 그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면, 결코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그는 내 영웅이자 롤모델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2000년 어느 날 신촌에서 그와 처음 만난 곳은 연대 앞 아주 구석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삼겹살 집이었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모여 삼겹살과 돼지 껍데기에 소주 한잔 나누는 그런 곳. 삼겹살이라 하더라도 불판에 얹으면 금새 녹아 없어지는 1인분 2000원짜리 삼겹살이니, 이게 정말 삼겹살인지 의심스러운 그런 삼겹살이 나오는 허름한 곳이었다. 
한 대학생 누나가 내게 오늘 내가 정말 좋아할만한 사람이 오니 꼭 나오라 연락에 나는 야자를 제끼고, 독서실 자리에 불을 켜 놓고서는 형 누나들과 할 소주한잔 기대하며 신촌으로 향했다. 
그들과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끄러운 가게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누나는 내게 그를 소개했다. 내가 본 그 영화, ‘끝없는 싸움-에바다’를 만든 그 사람이라고. 그도 내 이야기를 이미 들었었는지,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한다.

“어, 네가 그 고등학생이구나! 반갑다!”

그는 내게 고등학생 한 명이 대학교 동아리실에 무작정 찾아와 그들을 쫓아다닌다는 이야기, 그리고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 동안 무척 궁금 했었다고 말했다. 뭐든지 물어 보라던 그. 그러나 내가 질문하기도 전에 그는 카메라 다루는 법, 촬영, 편집할 때 주의사항,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작업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유의미하고 그리고 중요한지를 늘어 놓았다. 고등학생인 내게 소주를 따라주며 말이다. 그리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중에 꼭 같이 작업하자.”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의 제스쳐, 그의 말투, 그의 젓가락질, 소주 마시는 모습,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그때 당시 그가 건낸 그의 명함을 나는 아직도 지니고 있다. 그는 내게 영웅이나 다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영상작업을 통해 생긴 그 인연으로 노들야학에서 신세를 지게 됐다. 그리고 다시 만난 종필이 형. 그는 바쁜 일이 생기거나, 촬영이 겹치거나 하면 가끔 내게 카메라를 맡기곤 했다. 그는 내게 촬영 부탁을 하면서, 그날 필요한 그림들과 내용들을 설명하다가는 결국 항상 마무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냥 네가 찍고 싶은 데로 찍어봐. 못 쓰면 다시 촬영하면 되지 뭐.”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3년 에바다 농아원의 문이 열리던 그날, 나는 그곳에 있었고, 내가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던 에바다 농아원 사태는 점차 정상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맞이한 에바다 정상화를 자축하는 잔칫날.

“야, 너 유철이 아니니? 너 살아 있었구나? 어떻게 지내?”

반가운 형의 표정과는 달리, 어딘가 어색했던 나. 학생회를 한다는 핑계로, 나의 게으름으로 야학에 발걸음이 뜸해진 탓도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영상을 안하기로 마음 먹은 후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 영상작업의 첫 대상이었던 에바다 농아원에서, 그 에바다 문제를 영화로 만들어서 내게 큰 영향을 주었던 그와의 만남, 그러나 예전 나의 꿈에서 많이 멀어진 나. 그 상황에서 그를 마주하는 건, 불편한 것이었다. 아니, 왠지 모를 서운함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형에 대한 서운함은 아니다. 그냥 내가 당시 영상을 안한다는 그런 서운함일 듯 싶다. 그런 복잡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진다.

“너는 이제 영상은 그만 둔 거니?”

최소한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질문. 베시시 웃으며 “네”라 대답한다. 
그러나 그는 내게 ‘왜’를 묻지 않았다. 그냥 내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물으며 웃고 대견하다며 칭찬해 줬던 기억이 난다.

굳이 형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형의 얼굴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집회현장에서, 그리고 노들야학에서 쉬이 만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회가 끝나고는 허름한 술집에서 종종 소주도 한 잔 기울이며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 모처에서 우연히 갖게 된 그와의 술자리, 형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왜 영상을 그만하기로 한거였지?”

갑작스러운 질문,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머뭇머뭇 하고 있는 나를 그는 아무 말 없이 똑바로 바라보며 기다렸다.

“형, 저는 더 이상 카메라를 들 자신이 없었어요. 지금 당장이 비참하고 또 억울한데 그 상황에서 카메라를 든다는 건 너무 잔인해요. 평생 카메라 렌즈로만 세상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요. 그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나는 대학에 입학 후부터는 카메라를 결코 들지 않았다. 물론 몇 번 시도하기도 했으나, 열정과 분노만이 가득한 내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하는 이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기 보다는, 그리고 그 현장에서 같이 분노하기 보다는, 그들의 외치는 구호와 분노를 기록해야 하는 작업. 그들이 눈물을 흘릴 때도, 그들과 부둥켜 안거나 혹은 같이 울기보다는,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기 보다는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 하는 작업. 내게 그런 작업들은 내 눈앞에 벌어지는 그 수 많은 사건들에 벽을 치는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형은 그런 말도 안되는 내 이야기를 한참을 듣고서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했다.

“유철아, 우리에겐 각자의 몫이 있는 것 같아. 네가 해야할 역할과 내가 해야할 역할이 있는 거지. 그리고 지금은 너는 네 역할을 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우리가 각자 해야만 할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의 변명과 변명 속 어딘가에 묻어 있는 서운함, 아마 형은 그 서운함을 알아 차린 듯 싶었다. 내가 영상을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겠다는 것을 형은 이미 알아 차렸던 것 같다. 그때 그의 말이 무척 위로가 됐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어느새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같잖게도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한국을 떠났다. 그러던 지난해, 초여름. 정말 오랜만에 양재동에서 형과 만났다. 다른 동지들과 함께하는 술자리, 그러나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난 형과의 술자리에 나는 추억 팔이 삼매경에 빠졌다. 신촌에서 불판에 얹으면 녹아 없어지는 삼겹살을 안주 삼아, 그리고 질겨서 결국 씹다가는 결국 그냥 이를 삼켜야 했던 돼지 껍데기를 안주 삼아, 빡빡머리 고등학생 앉혀놓고 소주 따라주던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 추억팔이. 형은 내게 그 때 나와 함께 촬영 다니던 여학생하고는 사귀던 사이가 아니었냐며 뜬금포를 날렸다. 이에 나는 질세라 거 형의 연애사로 응수하며 ‘우린’ 박장대소 했다. 그리고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세월호 이야기를 꺼내고, 노들이야기를 하고.. 
함께 술자리를 하던 동지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떴지만 한참을 형과 소주를 기울였다. 둘의 혀가 조금씩 꼬여가던 찰나

“집 근처에서 한잔 더 할까?”

당시 두 번째 허리 수술을 한지 얼마 안됐던 터라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형과 함께 탄 택시. 형은 내 손을 꼬옥 붙잡으며 말했다.

“유철아, 건강해야 해. 유학생활 힘들겠지만 건강관리 잘하고, 들어오면 또 한잔 하자.”

그렇게 나는 다음에, 진짜 다음에 꼭 한 잔 할 것을 약속하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그게 형과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 때는 몰랐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결코 내리지 않았을 텐데.. 최소한 소주 한 잔 더 하자는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놀려주었을 텐데.. 건강 꼭 챙기시라 이야기 했을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허망 하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이렇게 후회해 보아도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그의 가는 길 조차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 후회마저 허망하다.

종필이 형, 이제 정말 형을 볼 수 없는 거야? 전 형이 언젠간 꼭 같이 작업하자는 말 기억하고 있어요. 근데 가긴 어딜가요.. 아직도 저는 더 이상 형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냥 너무 힘드네요. 특히 요즘 너무 힘들었는데 말이야. 이렇게 아직도 형에게 투정만 늘어 놓네요. 아직도 형 앞에선 제가 철부지 고등학생인 것 같아요. 그냥 지금 형이 그리운건 어쩔도리가 없네요. 보고싶어요.. 형.. 그저 형이 가는 길에 함께 할 수 없음이 너무 괴롭네요.

형이 아프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그냥 이 말 꼭 전하고 싶었어요. 그 날 양재동에서 형에게 한 말, 다시 하고 싶었어요. 내가 꿈을 키워가던 시절, 당신은 내게 영웅이었고, 지금도 형을 보면 설렌다고.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건 정말 형이라고 말이에요. 결국 전하지 못한 이말 이렇게나마 남겨요. 그곳에서 라도 이 글 읽어주세요.

이제 정말 형을 보내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네요. 아니, 보낸다는 건 말이 안되겠죠? 그냥 가슴에 묻는 것이겠죠. 호식이 형을 가슴에 묻은 것처럼.. 아마 가슴에 묻은 형들이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침반으로 계실 것이고, 지치고 힘들 때 내 삶의 원동력이 될거에요. 

형, 종필이 형! 조심히 가요. 먼 훗날 꼭 저승에서 약속한 소주 한 잔 기울여요. 그 때까지 건강히 계셔요..!

 

사진출처 : 4. 16 연대 페이스북 타임라인


현재 유튜브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고 박종필 감독의 영화 다시 돌아보기가 진행 중이니 꼭 보시는 것도 추모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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