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폭력과 나무 불꽃[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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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채식주의자-폭력과 나무 불꽃

(예전 2017년에 썼던 글이다. 한강의 소설이 노벨상을 받은 것을 축하하며 다시 올린다)

 

1) 폭력의 세계

제목이 <채식주의자>라서, 채식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면서 책을 들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아서 작가는 채식의 미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당장 눈에 뜨이는 것은 폭력성이다. 육식을 거부하는 아내인 영혜, 그것보다 섹스를 거부하는 아내를 지배하기 위해 남편은 온 가족을 동원한다. 아내의 부모는 딸에 대한 걱정보다는 사위에 대한 걱정 때문에(차라리 두려움 때문이겠지!) 강제로 고기를 입속으로 틀어넣는다. 이런 코믹한(‘섬뜩한’이라는 뜻도 있다) 폭력이 아직도 딸 가진 게 죄인인 우리 사회에 밑바닥에 깔린 것이 아니겠는가? 폭력에 희생되어 미치게 되는 주인공! 작가는 이 비극을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연작 소설의 형식을 띤 이 소설의 첫째 편(<채식주의자>)을 읽는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래서 첫째 편만 읽고 일어서야지 하면서 그 마지막 구절을 읽는 순간 갑자기 눈이 번쩍 띄는 구절이 있었다. 아침, 가슴을 드러낸 채 병원 벤치에 앉은 영혜를 병원 직원들이 끌고 가려는 순간이다. 그녀의 입술에는 루즈가 함부로 번진 듯 피에 젖어 있었다. 작가는 화자인 남편의 눈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아니, 그렇다면 작가가 이 사회의 코믹한 폭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대체 이 반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폭력을 가하는 사회에 대한 영혜의 증오감이 동박새를 뜯어 먹는 힘으로 표현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답이 궁금했기에 책을 놓을 수 없었다.

2) 실체변환

이어지는 두 번째 편 <몽고반점>에서 화자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두 번째 편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의 남편이며 화가이다. 그는 2년 동안 아무것도 새 작품을 내지 못한 불임의 상태이다. 이 기간은 그가 처제인 영혜에 매혹되기 시작된 때와 일치한다. 그 매혹을 격발시킨 것은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아내의 말이다.

상상 속에 그려진 몽고반점 때문에 한 남자가 매혹된다니? 몽고반점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할까? 여기서부터는 나는 작가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의심스러워하는 독자가 되어, 책을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부터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영혜에 대한 의문보다는 약간 포르노적 관심(불륜은 포르노의 주요 주제이다)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몽고반점이라는 이미지로부터 남녀가 몸에 꽃을 그린 채 서로 교합하는 장면이 마음속에 떠올라, 화가는 이를 미리 스케치북에 그려놓는다. 단 두 남녀가 그와 영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 속에 감추어 두기 위해 얼굴은 그리지 않았다. 일단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화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기를 실현한다. 그는 그저 이미지의 노예일 뿐이다. 그는 멧돼지처럼 돌진하면서 그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해 돌진한다. 이 과정 끝에서 영혜는 맨몸으로 다가온 그를 거부하지만, 그가 몸에 꽃을 그리고 다가가자 마침내 받아들인다.

‘몽고반점’이라든가, ‘꽃의 문신을 한 채 이루어지는 교합’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먼저 두 이미지 속에 죽음의 이미지가 어려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몽고반점의 푸른빛은 죽음의 빛일 것이다. 또 꽃의 교합도 식물성의 이미지이고, 니르바나라는 관념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미지를 고려할 때 화가와 영혜의 성적 교섭은 일단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목 또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충동을 그려내려 했던가? 성적 교합에 대한 작가의 서술에는 그렇게 이해할만한 단서가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이미 흠뻑 젖은 몸, 무서울 만큼 수축력 있게 조여드는 몸 안에서 그는 혼절하듯 정액을 뿜어냈다.”

정신분석학자 바타이유의 경우 성적 교합이 죽음의 충동이며 이 가운데 쥐상스(열락)가 얻어진다고 말했다. 영혜와 화가가 윤리적 차원을 위반하고 있다는 점도 이런 이해를 지지한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해하기에는 곤란하다는 것은 아래와 같은 표현을 보면 이해된다. 작가는 두 사람의 성적 교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그녀 안으로 들어갔을 짓무른 잎사귀에서 흐르는 것 같은 초록빛 즙이 그녀의 음부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향긋하면서도 씁쓸한 풀냄새가 점점 아릿해져 그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여기에 교합을 한 이후 더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는 영혜의 반응을 덧붙여 보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꿈을 꾸지 않게 될까?”

그 꿈은 피에 젖은 얼굴에 관한 꿈이다. 게다가 몽고반점이 단순히 푸른빛이 아니고 연두색이 배어있다는 서술도 연관된다. 이런 표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체변환’이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체변환이란 기독교에서 포도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을 말한다. 영혜와 화가는 서로의 교합을 통해서 죽음에 이른다. 이런 죽음으로 넘어가면서 그들은 실체변환을 하게 된다. 그들은 이제 꽃과 같은 식물적 존재로 변환된다.

이런 실체변환이라는 과정을 매개하는 것이 예술이 아닐까? 작가는 예술이란 문신과 마찬가지로 주술적인 차원이라고 보는 것 같다. 화가와 영혜는 실질적인 죽음 대신, 예술적 차원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이들은 주술적인 차원에서 식물적 존재로 변환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만연하고 편재하는 폭력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는다. 사회는 예술에게 금기를 정한다. 이 금기는 주술적 차원의 실체변환을 파멸시킨다.

이런 실체변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본다면 드디어 영혜의 ‘채식주의’를 이해하는 단서를 얻게 된다. 이 단서는 세째 편 <나무 불꽃>에서 확실하게 드러날 것 같다.

3) 내재하는 폭력성

이 소설의 특징은 연작 소설이라는 점이다. 그 가운데 화자가 변화된다. 첫 번째 편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영혜의 남편이다. 그는 두 번째 몽고반점의 화자는 화가가 된다. 세 번째 편 나무 불꽃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 인혜이다.

세째 편은 인혜가 갇힌 정신병원으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회상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런 회상은 시간적으로 지그재그식으로 이동하기에 복잡한 순서를 맞추어 보기 위해 나는 도표를 그렸을 정도이다. 그런데 작가의 서술을 따라가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영혜와 언니가 서로 묘하게도 겹치는 것 때문이다.

인혜의 자살 시도를 보자. 영혜가 남편과 비디오를 찍은 직후로 보인다. 작가는 인혜가 그전 하혈을 하였다고 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를 덮쳤다고 암시한다. 그리고 비디오를 찍은 직후 “며칠 만에 새벽에 들어온 그가 도둑처럼 그녀를 안았을 때”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자살을 하러 산으로 올라간다.

인혜의 자살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 영혜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인혜의 말은 곧 영혜의 말로 보인다. 앞의 두 편에서 영혜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자격을 박탈당했다. 대신 영혜의 꿈만이 시적인 언어로(일상적 언어가 아니라, 시적인 언어로 서술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개입되어 있다. 그런 영혜를 대신해서 셋째 편에서는 언니가 말한다. 이 언니의 말을 통해 영혜를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들은 죽으려 했을까? 인혜와 영혜가 사는 세계는 복종을 요구하고 폭력이 행사되는 세계, 동물적 세계라 하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세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평생 성실하고 남을 위해 희생해온 인혜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이다. 그녀는 남편과 영혜의 비디오를 보고서 두 사람을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킨다. 그건 영혜도 마찬가지이다. 영혜 역시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점을 어릴 때 자기를 물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끌려다니다가 거품을 물고 죽어가는 것을 영혜가 지켜보았다는 서술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여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속에 이미 폭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나는 작가가 첫째 편 마지막에서 제시한 동박새를 뜯어먹는 영혜의 모습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억압된 폭력적 본성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억압된 폭력의 본성은 영혜에게 수면을 뚫고 의식으로 점차 다가온다. 처음 그것은 꿈으로 나타난다. 이 꿈에서 영혜는 자기가 바로 맹수가 된 것이 아닌지 두려워한다.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피의 형상, 파헤쳐진 두개골, 그리고 다시 맹수의 눈, 내 뱃속에서 올라온 것과 같은 눈, 떨면서 눈을 뜨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현실 세계는 폭력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 폭력성은 어떤 외적인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흘러나온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누어져 있다면 혁명을 통해 사회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가 곧 피해자이고, 피해자가 곧 가해자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인간의 내적 본성 속에 이런 폭력성이 내재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혁명은 다만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영혜의 절망은 아니 작가 자신의 절망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4) 영적인 타자

절망만으로 문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망을 넘어서는 힘을 문학이 보여주어야 한다. 작가 역시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그 힘을 보여주려 한다. 그 힘을 발견하는 단서는 인혜의 깨달음 속에 존재할 것이다.

자살 시도를 통해 상징적으로 죽음을 겪은 인혜는 점차 죽어가는 영혜에게 다가간다. 영혜는 점차 자신이 나무가 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무처럼 물구나무서며, 마침내 먹지 않아도 되고 햇빛만 받으면 되고, 심지어 말과 생각도 곧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말문을 닫는다.

“비에 녹아서 … 전부 다 녹아서 … 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거든.”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인혜는 영혜의 말을 처음에는 의사가 분석하는 것처럼 정신분열증적인 환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상징적 죽음을 겪은 이후 인혜는 점차 영혜의 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런 이해의 첫 단계에서 인혜는 영혜가 자기처럼 자살하려는 시도로만 이해한다.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그러나 의사가 최후로 영혜에게 강제로 호스를 통해 음식을 집어넣으려 시도할 때 인혜는 처음 병실 밖에 있다가 영혜가 몸부림치자 뛰어들어가 의사를 제지한다. 그러면서 인혜는 달려가 영혜의 몸을 껴안는다. 이때 작가는 “영혜 피를 토한 피가 이때 그녀의 블라우스를 적신다”라고 말한다. 곧이어 의사가 치료를 포기하고 큰 병원으로 데려가라 하자, 인혜는 수속을 마치고 나오면서 화장실에서 “뿌연 차와 함께 노란 위액”을 토한다. 영혜의 피와 인혜의 노란 위액이 서로 감응한다. 작가의 이런 서술은 마치 이제 인혜와 영혜가 하나의 몸이 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직 인혜는 영혜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몸으로는 이미 하나가 된다.

작가는 우리에게 그 비밀을 말로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영혜의 말 가운데서 그 비밀의 단서를 노출하고 있다. 영혜의 말은 결코 무의식의 말은 아니다. 영혜의 말은 너무나도 또렷한 언어로 말해진다. 그렇다고 영혜가 우리가 가진 의식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영혜를 통해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 작가는 영혜가 말하는 가운데 불가사의한 “미소를 짓고” 얼굴이 “환하게 밝았다고” 했다. 영혜는 음식을 거부하면서 의사조차도 신비하게 생각하듯이 온 몸이 긴장되어 있다. 바로 그 미소와 빛, 온몸을 사로잡는 힘이 영혜를 통해 말하는 주체가 아닐까? 이 주체는 바로 영적인 타자가 아닐까?

5) 나무 불꽃

이제 첫째 편으로 돌아가자. 영혜를 불안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 꿈이다. 그 꿈은 그녀의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녀에게 내재하는 폭력을 끌어내는 것은 바로 사회적인 폭력이다. 사회적 폭력에 감응하여 인간 내면의 폭력성이 깨어난다. 영혜는 떠오르는 폭력성에 대해 저항한다. 영혜에게 그 저항의 힘을 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영적 타자의 말이 아닐까? 그 말이 채식으로, 그리고 주술적인 차원으로 최종적으로 죽음으로 그녀를 불러낸다. 그 앞에서 영혜는 단호하고 담담하다. 그녀는 어떤 굴복도 없이 어떤 주저도 없이 영적 타자의 부름에 충실하다.

그런데 인혜는 자살 직전에 멈춘다. 그녀를 멈추게 한 힘은 무엇일까? 아마 이 소설의 백미라면 바로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 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인혜가 들은 말은 생명의 말이다. 생명이 곧 영혜를 불렀던 그 영적 타자가 아닐까? 그 생명은 인혜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작가는 그것이 무자비한 말이라 했다. 왜 무자비한 것일까? 그 설명은 바로 다음에 나온다. 나무는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이라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인혜에게 자신의 말을 눈에 보여준다. 그 말은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 몸을 버티고 서 있으라!”는 무자비한 말이다.

죽음을 통해 나무가 되려는 영혜, 그에 반해서 나무처럼 살아가려는 인혜, 이렇게 해서 죽음의 길과 삶의 길은 나누어졌다. 하지만 두 길은 서로 통한다. 이 길 가운데서 영혜가 죽음으로 들어가면서 인혜가 삶 속으로 걸어 나온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영혜에게는 책임질 아이가 없지만, 인혜에게는 책임질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숨죽여 의문 했다. 꿈일 뿐, 우연의 일치뿐일까. 박명 속에서 일어서는 뒷산의 나무들에서, 바랜 보라색 티셔츠 차림이 그녀가 뒷걸음질 쳐 내려왔던 그 아침이었다.”

인혜는 아이의 꿈속에서 하얀 새가 날아가던 때 바로 그때 자신이 죽음 향해 걸어갔던 것을 기억한다. 아마 아이의 눈물이 그녀를 되돌아서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악문다. 불현듯 그날 새벽 걸어 내려오던 산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샌들을 적신 이슬이 맨발에 차갑게 스몄었다.”

맨발을 적신 이슬, 그게 아이의 눈물일 것이다. 아이와 엄마 사이의 이 신비한 교감은 인혜를 삶으로 불러들인 바로 그 힘, 생명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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