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⑤ 권리 대 권리의 충돌, 이율배반과 비판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⑤

 

권리 대 권리의 충돌, 이율배반과 비판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인사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인사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시혜적이지 않는가! 마치 무슨 은혜라도 받으라는 것으로 들린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회보장은 국가,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어주는 것, 시혜,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의무, 책무이다. 사회계약론적 관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런 이유로 오래 전부터 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 대신에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라는 말로 새해 인사를 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과연 ‘나는 나인가’라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잠시 신문 기사를 상기해 보자. “지난 11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내년 8월 1일부터 시행되는 강사법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대학과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강사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온 문제다. (<교수신문> 946호, 2018년 12월 3일 자 참조)”

 

모순과 이율배반

 

위 신문에 나오는 강사법과 관련된 상반된 주장을 정리해 보자. 먼저 대학의 주장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 이 주장에 대항해서(contra/Wider) 강사들은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diction/spruch). 권리 대 권리의 충돌, 곧 모순(contradiction/Widerspruch)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상품교환이라는 틀 속에서 노동력의 구매자(학교)와 판매자(강사)는 각각 주장과 주장, 옳음과 옳음, 각각의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주장, 곧 권리(nomos)와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주장, 곧 권리(nomos)는 상품교환의 규칙 속에서 이율배반(Antinomie)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관계는 적대관계(Antagonismus)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모습을 칼 맑스는 자본의 일반정식(M-C-M′)에서 ‘평균 노동일’을 둘러싼 구매자의 권리와 판매자의 권리의 충돌로 드러나는 모순과 이율배반을 밝히고 있다. 노동력을 구매한 학교는 노동력의 지출을 늘리는 방향을 취할 것이고 노동력을 판매한 강사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전자는 노동력의 지출을 늘려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고자 하기 때문이고, 후자는 잘못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했다가는 다시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교환 틀 속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말하자면 강사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함부로 사용하게 되는 것은 착취로 나타날 것이고 대학의 입장에서 구매한 노동력의 지출은 잉여가치로 간주될 것이다. 같은 사건이 착취와 잉여가치라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맑스가 잉여가치를 착취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상품교환의 규칙 또한 당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맑스는 이러한 이율배반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먼저 권리와 권리의 충돌, 그 모순을 재판하는, 혹은 판단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더 이상 이성(logos)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논리(logos)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의 일반정식(M-C-M′)에 자기 증식하는 가치라는 자본은 허위이고 가상이라는 점이다. 맑스가 변증법(Dialektik)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가상과 허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가상의 이면에는 노동력의 지출을 둘러싼 투쟁이 있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적대관계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강사법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의 문제를 모순, 이율배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순의 해소는 ‘힘’이라는 맑스의 견해와 지난 3일 부산대 시간강사 파업 17일 만에 ‘고용안정’ 합의안을 도출하였다는 기사는 공명하고 있다. 한 쪽의 힘이 커지면 다른 쪽의 힘은 작아진다. 이것이 모순이다.

 

역설과 비판

 

그런데 우리는 강사법을 둘러싼 모습 속에서 역설(paradox)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사법과 관련하여 대학의 견해(doxa)는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이다. 이것에 대항해서 반대방향, 다른 방향(para)의 견해, 이를테면 강사들의 견해인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생겨나는 것, 이것이 역설(paradox)이다. 다시 말해 강사법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이고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저해’이고 ‘교육의 질 향상’이다. 한 쪽의 견해가 커지면 다른 쪽의 견해도 커진다.

이 역설을 통한 비판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위기(crisis)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이다. 18세기 유행어였던 ‘비판’(criticism, critique, Kritik)의 어원은 그리스어 krino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구별하다(differentiate), 선택하다(select), 판단하다(judge), 결정하다(decide)”이다. 우리의 삶의 위기에 대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비판과 위기를 생활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고’,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며, 어떠한 비판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하여’,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비판은 삶을 교정하는 비판임과 동시에 삶을 넘어서는 이행으로서의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 맑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를 강조하였다. 현재 우리 사회는 바로 그러한 시간성과 역사성 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맑스가 역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교정’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역설을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가치의 거울에 비친 강사들의 삶

 

일찍이 맑스는 가치형태에 대한 연구에서 등가형태에 대한 착각을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설탕 한 봉지의 무게가 추에만 있는 고유한 성격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설탕 한 봉지의 무게는 설탕 한 봉지와 추와의 사회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적 관계인가에 따라 설탕 한 봉지의 가치가 변화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강사들, 곧 비정규직의 삶의 가치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강사법을 둘러싼 힘의 관계는 그러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상품 세계의 한 시민이 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면서 상품으로서의 우리들의 가치는 등가형태인 ‘가치의 거울’, ‘대상성’, ‘가치영혼’, ‘유령적 대상성’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나의 가치로 마주하고 있는 ‘대상성’이 자연적 속성과 상관없듯이, 강사들은 그 자신의 자연적 속성으로 비정규직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비정규직이다.”라는 것은 ‘나=비정규직’인데, 이는 내가 비정규직의 유전자를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가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강사들이 일반적 가치형태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맑스의 비유로 말하자면, “개인 A가 개인 B에게 왕으로 섬김을 받으려면 B의 눈에 왕이 A의 몸으로 나타나야”한다. 이것은 B의 포기, 굴복이다. 달리 말하면 상품-가치-일반적 등가형태는 시민-주권-군주(정부)의 모습과 유사하다. 상품의 가치 표상이 일반적 등가형태이듯 시민의 주권 표상은 군주(정부)이다. 이 관계에서 시민의 주권 표상이 곧 군주라는 것은 군주에 시민이 복종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강사법과 관련된 권리들의 충돌 속에서, 강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강사들은 상품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가치를 ‘불안정 노동자’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나마 ‘상품 강사들’은 능동적이다. 반면에 대학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강사들)가 자신의 가치를 ‘불안정 노동자’로 인정받으면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명확히 수동적이다.

베드로가 바울을 통해서 자신을 마주했듯,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마주하고 있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우리네 삶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나의 결단인가, 아니면 비정규직이라는 단일한 등가형태로 우리네 삶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나의 굴복인가?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의 글귀가 떠오른다.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선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한길석(한철연 회원, 가톨릭대)

 

나는 2008년 박사 학위를 수료한 상태로 지방의 모 국립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박사 학위 소유자가 아니면 강단에 설 수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운 좋게도 나는 선배들의 배려로 강단에 설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립대학의 강사료는 사립대학의 그것보다 훨씬 후하다. 더구나 당시에는 정부에서 강사들의 생계 안정을 위해 국립대 강사료를 시간당 10만원 수준까지 인상한다는 정책 목표를 추진하고 있었던 덕에 나의 주머니 사정은 타 강사들에 비해 조금 나았다. 그래도 한 해 수입은 2천 만 원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북 지역에 있는 대학에 출강할 때는 9시 강의에 맞추려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첫 차를 타고 근 3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그날 강의를 마치면 다음날 강의를 위해 값이 헐한 모텔에서 하룻밤 묵고 또 아침 첫 강의를 시작하곤 했다. 강의료의 일부는 늘상 약값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지만 생계와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면 늘 다음 학기에 강의를 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곤 했다. 방학 동안에는 아무런 수입이 없어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편한 마음으로 학문에 전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든 맞게 마련이다. 한 학기가 지날 때마다 담당 강좌 시수가 줄어들더니 2012년이 되자 내가 출강하던 모든 대학에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드디어 박사 논문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자 했지만, 불현 듯 눈앞이 캄캄해 지는 건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한 학기동안 손가락만 빨고 지내다가 선배들의 주선으로 집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수도권의 모 대학에 출강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박사 논문을 마치고 전임교원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생계 걱정은 다소 접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늘 두렵고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만성피로와 스트레스로 통증을 달고 살았다. 저축은 생각지도 못했고 결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생계를 위한 강의를 하다 보니 교육에 대한 열정과 학문에 대한 사명감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연이은 강사들의 자살 소식에 마음은 무거워져 갔다. 외롭고 춥고 비참한 시절이었다.

어느 결에 강사법이 제정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편으로는 반가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제2의 비정규직 보호법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많은 강사들이 강사법 제정을 반대하는 역설적 상황이 몇 해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진통 끝에 강사법이 통과되었다. 교육부에서는 관련 예산을 편성하면서 강사법의 실행에 대학들이 협조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대학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다. 대량 해고가 필연적이라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면서 어느덧 강사 해고는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현실인 양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강사 대량해고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다. 대량해고에 대한 예상은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극을 전망하는 것이다. 불길한 예언의 쓸모는 들어맞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긋나게 함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살고 있는 사실은 이러하다. 강사법이 마련되었다. 만족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방학이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강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를 명령하고 있다. 근대 사회에서 법은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실증적이고 강제적인 힘이다. 일단 법으로 제정된 이상 강사들을 쉽게 내치지는 못한다. 아무런 무기도 없던 강사들에게 드디어 의지해 볼만한 합법적 무기가 생긴 것이다. 이제 강사들이 할 일은 변변찮음을 탓하며 힘들게 마련된 무기를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손에 익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학교에서 이 무기를 들고 대학에 맞서고 있다. 부산대에서는 강사들이 파업에 나섰으며, 고려대에서는 강사법을 핑계로 추진하려 했던 대학 구조조정 방안을 무산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정치적 실천 운동과 함께 할 때 법의 효력이 구현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사례다. 입헌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은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 없이는 만들어지지도 강제력을 집행하지도 못한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불가피한 현실인 양 여기는 어리석음은 일어나지 않은 비극의 힘을 과대하게 키울 뿐이다. 할 일은 한 가지다. 강사법이 명령하는 바를 대학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정치적 실천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운동의 조직적 실천은 2019년 5월에 마련될 시행령에서 강사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시킬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시행령의 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애써 마련한 강사법이 유명무실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따라서 강사들은 학내에 강사법의 관철을 위한 정치적 실천 거점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파리 목숨에 불과한 강사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런 운동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대량해고가 불을 보듯 뻔하다면 강사법 관철을 위한 운동에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다.

정치적 실천 활동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강사 이외의 구성원들과의 연대에 힘 써야 한다는 점이다. 학생과 전임교원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밥 그릇 지키기’로 폄하될 것이다. 따라서 운동의 이슈를 강사들의 고용 안정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질을 저하시키고 전임교원들의 근무 여건을 악화시키는 일방적 대학 구조조정 방안에 대한 비판으로 넓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조정 방안을 감행하게 하는 대학의 지배 및 경영 구조의 개혁에 관한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강사법은 아직 불행한 현실을 몰고 오지 않았다. 대량해고는 엄포에 불과하다. 대학이 대량해고의 소문을 흘리는 이유는 강사들에게 대학에 저항할 합법적 도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도구는 쓰면 쓸수록 손에 익는 법이다. 강사들이 할 일은 강사법이라는 도구를 손에 익도록 활용하여 그것이 실제적 효력을 발휘하게끔 노력하는 것이다.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③ 개정된 강사법의 시행령 확정에 앞서, 교육부의 단호한 의지를 촉구한다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③

 

※ 이 글은 필자의 2018년 가을 학단협 연합 심포지엄 발표문의 일부입니다. 필자의 동의로 게재함을 밝힙니다.

 

개정된 강사법의 시행령 확정에 앞서, 교육부의 단호한 의지를 촉구한다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시간강사 문제에 대한 내부의 시선 교원으로서의 지위 획득과 시간강사로서의 처우 개선 사이에서

 

여름 방학부터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딸아이가 건강보험에서 떨어져 나가 직장 건강보험 가입대상이 되었다. 1년 일하면 퇴직금도 준다고 한다. 기가 막힌다. 이른바 4대 보험 가입자가 된 것이다. 지난 추석에는 의기양양하게 선물 세트도 받아왔다. 20년 이상 시간 강사 경력 동안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처우를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몰랐다. 어느 시간강사가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에 대한 처우보다 대학의 시간강사 처지가 더 열악하다고 강변한 현실을 딸과의 비교를 통해서 실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대학의 시간강사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후 몇몇 분들의 헌신적이고 끈기 있는 투쟁 덕분에 국회에서 시간강사법 제정에 이르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시간강사의 교원지위 획득은 흔들릴 수 없는 전략적 목표이다. 그렇기에 그간의 성과가 매우 소중하다. 일각의 주장대로 부족한 점은 추후 개선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보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강사법은 몇 년째 유예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마도 이번 년도에는 실시가 확정되어 내년부터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듯도 하다.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어떤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일일이 살펴 따질 생각은 없다. 전략적 목표가 같다면 전술적인 방법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가 경험한 부당함의 내용에 따라 시급한 현안에 대한 방점도 다른 곳에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가벼이 여겨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목표 수립에만 매달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가에 대해서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노무현 정권 초반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공청회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당시 필자는 입법적 조치가 필요한 목표는 장기적으로 추진하더라도 강사료 현실화라고 하는 문제부터 압박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그러한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취급되었다. 교원지위만 확보되면 그에 따르는 처우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논지에 강사료 현실화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비하면 강사료가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2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세월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나마 국공립대의 경우에만 강사료가 대폭 올랐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의 강사료는 한 번 정해지면 최소 5,6년은 동결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이슈가 되었던 반값 등록금 문제는 강사료 인상을 방해하는 대교협의 또 다른 명분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필자가 십 수 년 전의 일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그 때 필자가 했던 주장이 옳지 않았느냐 하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시간강사법이 제정되고 유예를 반복한 마당에 지금이라도 강사 처우 개선에 대한 문제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재 주변의 후배들 중에는 강사료 소득만으로는 연간 소득 2,000만 원 이하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비단 철학 전공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확인해 봐야 정확한 추계를 할 수 있겠지만 시간강사들의 수입을 연간 500만 원 정도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림잡아 3,500억 원의 예산이 들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전국의 강사 수를 대략 7만 명으로 고려한 수치이다. 이를 정부와 전국의 400여개 대학이 공동으로 부담한다고 생각하면 그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학문 후속세대 관련 지원 예산 등을 통합 관리하고 정부의 고용 안전 자금 예산과 유사한 방식의 지원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일자리 안정을 위한 정부 예산이 민간 기업에도 지원이 되는데 공공적 성격이 강한 대학의 일자리에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인지 그 원칙에 대한 문제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영업자도 지원하고, 유치원도 지원하고, 중소기업에도 지원하는 데 시간강사는 이등 국민이라 지원하지 않는 것인가?

사실 앞서 언급한 공청회에 참석한 당시 교육부 관계자의 언급은 이러한 방식의 문제 해결 가능성을 비추기도 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교육부에서는 국립대학 기준 시간당 강사료 100,000원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사립대의 경우도 강사료를 현실화하는 방식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법률 제정이 필요한 요구에 대해서는 속도를 조절해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 보장에 대한 요구 역시 그 때도 느긋한 사안은 아니었기에 교육부 당국자의 발언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공청회 자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관료의 발언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리한 모든 것은 일단 챙기고 봐야 전술적 목표도 전략적 목표도 모두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강사료 올려주었다고 해서 교원 지위 보장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시간강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대학들은 ‘대학교육협의회’를 중심으로 담합에 가까운 대응을 보여 왔다. 비정년트랙이라는 제도를 만드는가 하면, 겸임교수, 연구교수, 강의전담교수, 초빙교수 등의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의 비정년 강의자를 양성해 왔다. 여기에는 어김없이 시장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사장의 논리가 좋다면 시장의 논리 안에서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강사료 현실화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면 너무 추상적이다. 일반적인 노동 시장에서 비정규직이 요구하는 기준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하지만 이는 시장의 논리에 맞지 않는다. 상품 이용의 측면에서 단기 임대 재화는 시간당 이용료가 더 비싸게 책정된다. 카메라 한 대를 몇 년간 렌트해서 이용할 바에는 아예 구매하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 상품 역시 단기 사용 노동에 대해서는 시간당 보수를 더 책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장의 원리에 맞다. 따라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기준은 불합리하다. 오히려 비정규직 우대임금이라고 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강사료 현실화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현재 전임교수들에게 지급되는 인건비에서 강의에 대한 수고에 해당하는 금액만 따져 봐도 현재의 강사료보다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강사료의 현실화는 무엇보다 대학의 강사들도 생활인이고 자식을 교육시켜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실존을 인정하면 당연하게 성취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자신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자기 자식의 대학 진학에 앞서서는 등록금 걱정부터 해야 하는 처지의 강사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강사들은 금융 이용에서도 많은 제한을 받는다. 하기야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봐야 갚을 처지도 못될 수도 있긴 하다. 대학의 강사는 더 이상 전임교원으로 가기 위한 중간 과정이 아니다. 대부분의 강사들은 직업 활동을 강사로서 마치게 된다. 그것도 아무런 노후대책도 없이… 어쩌면 학위기는 운전면허증보다도 자부심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아닐까.

2018년 현재 강사료는 국립대의 경우도 10만원이 못되고, 사립대의 경우는 더더욱 빈약하다. 강사료 현실화 없는 교원지위 보장은 자칫 속빈 강정이 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대학들은 강사료 인상 없이 방학 중에도 급여를 지급한다는 명목 하에 8개월분의 강사료를 12로 나누어 지급하는 술책을 실시하거나 획책 중이다. 국가는 대학의 강사들을 이등 국민으로 생각하고 대학은 강사들을 원숭이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대학이 강사를 고용하는 경제적 부담이 클수록 안정적인 교원으로서의 전환을 더욱 재촉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말고 그들

 

개정된 고등 교육법, 이른바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많은 대학들은 강사 수를 줄이기 위한 각종 편법을 강구하고 있다. 강사법 시행에 따른 대학의 재정 부담 가중을 부풀리면서 대규모 강의를 늘리고, 전임교수들의 강의 시수를 늘이고, 졸업 이수 학점을 줄이는 방식 등으로 강사 수를 줄이려고 한다는 사실은 대학 스스로 학문의 전당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한 대학의 그러한 술책에 동조하고 동의하는 대학 구성원들 역시 대학의 본령은 망각하고 자신들의 직장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대학이 그러한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자 한다면 먼저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우리들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고백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 재학 중인 대학원생들에게 하루 빨리 학업을 중단하고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권고해야만 그나마 양심적이라는 평가를 들을만할 것이다.

대학의 졸렬한 대응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부의 의지가 중요하다. 강사법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대학들에 대해서 교육부는 단호한 방침과 의지를 가지고 불이익을 주어야 할 것이다. 대학에 지원되는 재정의 불이익을 주고 교육부가 주관하거나 한국연구재단을 통해서 지원하는 프로젝트 선정 과정에서도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는 방침을 마련하면 된다. 그로인한 불이익의 크기는 강사법의 취지를 무력화해서 얻는 이익보다 훨씬 크게 설계하면 대학은 강사법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 문제에 대해 교육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교육부는 학문 생태계 파괴의 궁극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강사법을 무력화하는 시도는 학문 후속세대의 단절을 야기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 후속세대 문제는 비단 시간 강사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앞으로는 현재 학위 과정에 있거나 박사 수료 후 현직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후학들의 문제는 더 심각해질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는 없다. 강사법이 실시 적용되면 교원 지위를 획득하게 될 강사들의 경우는 1년 단위로 계약하고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3년간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이후의 후학들이 그나마 강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해질 것이다. 강사라는 신분으로 버틸 수 있던 연구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미래는 더욱 비관적이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과거 전임 교수들이 강사 문제에 무관심했듯이 교원이 된 강사들이 무관심해도 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으면 한다. 힘은 없다. 전임 교수들도 그랬다. 하지만 강사 문제 해결을 수십 년 동안 방해한 사람들은 전임 교수에서 총장이 되고, 이사장이 되고, 교육부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다. 힘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힘이 있어도 못한다. 진정한 학문 후속 세대는 우리가 아니다. 현재의 강사들은 학문 후속세대가 아니라 대개는 중견 연구자들이다. 이 글에서도 학문 후속세대 하면 시간 강사들을 먼저 떠올리는 방식으로 다루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진정한 의미의 학문후속세대들은 그들이 겪어야 할 고통의 첫 맛도 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니고 그들이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② 강사법 시행에 관한 단상 [침몰하는 대학]

고려대 민동 강사법관련 구조조정 저지 대자보

※ 위 링크는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서 지난 11월 28일 발표한 대자보 PDF 파일입니다. 메인 이미지 대자보 사진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저작자와 성명단체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게 되었음을 알립니다. 게재를 허락한 저작자와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 감사드립니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②

 

강사법 시행에 관한 단상

 

박지용(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사업1부장)

 

하나, 대학 내 시간 강사와 강사법

2018년 11월 28일, 7년이나 유예된 강사법이 다시 법사위를 통과했다. 그 다음날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8일, 29일 거의 실시간으로 김영곤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통과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진통 끝에 2019년 8월 1일부로 강사법이 시행되게 되었다. 강사법 시행과 관련하여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분은 김영곤, 김동애 두 부부 선생님이시다. 전국강사노조는 1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회 앞 텐트 농성으로 강사법 시행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 충분한 여론을 형성해 왔다.

김영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전공선택 과목을 가르치다가 2009년 대학 측의 해고통보로 강사직을 잃고 복직 투쟁을 하셨다. 당시 학교 당국은 박사 학위가 없는 시간강사들의 강의를 네 학기로 제한함으로써 ‘비정규직 보호법’을 피하려 했고, 이 결정에 따라 88명의 시간 강사들이 해고되었다. 비정규직 보호법은 2년 넘게 계약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법적인 취지와 달리 비정규직의 고용 상황을 더 열악하게 만들게 되었다. 김영곤 선생님의 복직 투쟁은 결과적으로 법원에서 패소함으로써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사립대학이 공적인 교육기관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기업일 뿐이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고려대학은 복직 소송에 패소한 김영곤 선생님께 천만 원의 법률비용을 청구했다. 일 년 동안 학교가 지급한 강사료가 천만 원도 안 된다는 사실은 학교 당국이 잘 알고 있다. 통상 기업들이 강고한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고 써먹는 수법을 일개 대학 강사에게 적용했다는 사실이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결과적으로 법원이 학교 당국의 법률비용 청구가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종결되기는 했다.

김영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본관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해왔지만, 학교의 압력으로 그 텐트는 교양관 앞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강의하러 교양관을 들락날락하면서 항상 그 텐트는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몇 해 전 첫눈이 왔던 추운 어느 날, 텐트 앞에서 김영곤 선생님과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당시 나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서 복직 판결을 받았고, 선생님은 밝게 웃으시며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셨다. 큰 틀에서 보자면 강사법 투쟁 또한 노동자 권익을 위한 투쟁이었다. 강사법은 국회와 정치인들이 약자를 포용해야 한다는 정의로운 가치에 따라서 시혜적으로 통과된 것이 아니다. 권익을 위한 투쟁은 항상 약자들 스스로 희생과 노력을 요구한다. 강사법 시행에 이르기까지, 권리를 향한 단결 투쟁이 제도 변화를 낳은 가장 큰 동력이었다는 원론적인 관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둘, 사학 자본의 민낯

자본주의는 노동착취를 통해 이윤을 낳는다. 대기업이 쌓아둔 영업이익이나 사립대학이 쌓아둔 재단적립금의 실체적인 원천은 같다. 노동자들의 착취가 대학과 대기업이 쌓은 이익의 원천이다. 이제 강사법은 방학 중 임금 지급과 4대 보험 지급의 의무를 고용기관인 대학에 부과한다. 그런데 대학 측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비용을 법으로 강제하다니!’라는 억울함을 피력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대학은 돈이 없다고, 정부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다른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고 강사들을 협박한다. 이런 사립대학의 뻔한 대응을 예견한 사람들은 법 시행 주체인 사립대학이 각종 대응책을 미리 마련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 목소리는 다시금 강사법 시행의 부당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대학은 예상한 그대로, 비용지출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대학 졸업 학점을 대폭 낮추고 강좌를 줄이는 식으로 구조조정 전략회의를 했고 또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하다.

사립 유치원장이 정부지원금으로 명품가방을 샀다는 기사가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많은 사립대학들은 재단적립금을 부당하게 주식투자로 돈을 날렸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 사회의 교육정책이 나가야 할 방향은 정치권에서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보다는 공공성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립 유치원보다 국공립 유치원이 더 신뢰도가 높고 안전하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점차적인 공공성 확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우리 사회의 다수가 동의하고 있지만, 그 실현과 관련해서는 넘어야 할 난관도 분명하다. 교육의 사회적인 공공성에도 불구하고 사학재단에 대한 구조조정을 정치적으로 결단하는 데에는 정당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 대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구조 안에서 사립 교육기관 대 교육 공공성 사이의 딜레마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국립대학에 대한 예산은 현재 강사 수준을 조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미 결정되었다. 그러니 국립대학 교수들과 총장들은 사립대학이 구조조정 없이 시행하라고 편하게 말한다. 하지만 사립대학은 정부지원금이 없으면 추가비용을 들일 수 없다고 대응한다. 이 과정에서 한 예로 11월 14일 고려대학교에서 구조조정과 관련한 교무회의 비공개 문서가 언론에 드러났다. 곧바로 강사법 구조조정을 저지하기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항의 방문을 단행했다. 나는 내가 가입해 있는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 이 사안과 관련하여 성명서를 발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직접 이해관계 당사자가 아니라도 졸업생들의 입장에서 민주동우회는 모교의 부당한 결정에 반대하여 공동대책위원회와 연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후 고려대학교는 12월 3일 강사법 관련 구조조정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전면 유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투쟁 역시 잠정적인 승리일 뿐 정작 강사법 시행을 실행해야 할 시점이 되어서는 어떤 입장 변화가 있을지 주시해야 한다.

김동애 선생님은 한 회의에서 강사법 투쟁을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서정민 열사의 억울한 죽음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하셨다. 그러니 더욱 강사법으로 인해 다시 극단의 희생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 “해고는 살인이다!”

 

셋, 사립대학은 강사법 시행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

벌써 몇 주 전부터 2019년 1학기 강의 시간 배정과 관련해서 선배, 후배, 동료들의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A 대학에서는 4대 보험을 다른 곳에서 들고 있는 강사들만을 남기고 정리를 했다고 한다. B 대학에서는 한 강좌만 하던 강사들은 정리했다고 한다. C 대학은 교양과목의 강사들을 모두 정리했다고 한다. 이 모두 정리해고 되는 경우들이다.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듯이 감정의 변화들을 감내하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다. ‘그래, 이게 현실이라면 화가 나도 받아들여야지.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하지만 장기화된 해고 상태가 개선되지 않은 채 지속하면 어떤 불행한 사태들이 나타날지 모두 알고 있다.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더 심각한 상황을 낳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 불안한 징후는 벌써 현실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박사 학위를 눈앞에 둔 학문 후속세대들의 위기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이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한 세심한 대책이 더욱 필요하다.

강사법 시행을 위한 정부 예산안이 국립대와 사립대에 불균형적으로 배정되어 사립대의 대량 해고를 막아낼 수 없는 현시점에서, 강사노조 단체들은 다시금 사립대학의 구조조정에 맞서 전체 시간강사들의 불이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2019년 8월 1일부로 시행되는 강사법에서 시간강사들의 전체 규모가 현저히 낮아지지 않도록 교육부에 사립대학 지원과 관련한 명확한 지침을 요구해야 한다. 가령 교육부가 전면에 나서서 구조조정의 실행 여부와 그 규모에 따라서 대학이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교육부는 눈앞의 비용 절감을 위한 구조조정을 실행한 학교들을 전수조사하고 철회를 분명히 강제해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단 한 푼의 지원금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2018년 12월 14일.


☞ 2019년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우리사회와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문제들을 드러내어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듣기 위한 취지에서 릴레이 기고를 기획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기고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다양하고 많은 얘기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1.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 아래 글은 [건대신문]에 12월 4일자로 게재된 칼럼입니다. <이 시대와 철학>에 칼럼으로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와 게재를 허락한 건대신문사 측에 감사드립니다.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조은평(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모교인 건국대에서 수업을 할 때면, 늘 마음 한편이 무겁다. 10년 내내 강사료가 49,700원이여도, 또 4대 보험과 6학점 강의를 보장해준다며 강사료를 6개월로 쪼개주는 기형적인 형태로 초빙교수를 뽑을 때도 아무 말 못했던 나. 심지어 성적입력이 늦을 경우 강사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1년 간 강의금지라는 조항을 신설할 때도 가만있었고, 그 대가가 부메랑처럼 마침 독감에 걸려 입력이 하루 늦은 내게 되돌아왔을 때도 머릿속으로만 저항하며 안으로 골병들어가던 내 모습이 죄책감처럼 따라붙기 때문이다.

철학자 랑시에르는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확보하는 문제가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몫이 없던 자들이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요구하면서 기존의 안정화된 제도적 질서를 비집고 비로소 ‘정치’가 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늘 정치철학은 안정화된 정치질서를 유지하려고 실제로는 몫이 없는 자들이 나름의 몫을 누리고 있다고 여기도록 잘못된 셈법을 고안해왔지만 말이다.

이런 지적은 우리 현실에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대학이라는 작은 단위의 사회만 보더라도 이 말은 여전히 진실이다. 대학의 주인은 누구일까? 과연 대학의 구성원들은 모두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지니고 있을까? 정말 그럴까?

내년 시행될 강사법에 대비해 이미 대학들은 강좌수를 줄이거나 대형 강의로 통폐합하고, 졸업학점을 줄이면서 시간강사를 대량 해고하는 전략에 돌입한 것 같다. 강좌의 절반 정도를 담당하면서도 전체 강좌비용의 1~3% 정도만 지불되는 강사의 인건비. 그런데도 교원지위보장과 방학 중 강사료 지급, 4대 보험 등을 핵심으로 하는 법 시행을 앞두고 몇몇 대학은 앞으로 부담할 비용이 엄청나다는 근거 없는 괴담을 퍼트릴 뿐, 정작 학생을 위한 교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모양새다.

고맙게도 랑시에르는 잊어서는 안 될 교훈 하나를 전해준다. 노예들의 반란 이야기. 스키타이족은 노예들의 두 눈을 멀게 해 길들였다. 하지만 주인인 전사들 대부분이 다른 나라로 원정을 떠난 사이, 노예의 자식들이 하나 둘 늘어나 멀쩡한 두 눈을 갖게 된 노예 후손들은 자신들도 전사로서 주인과 맞설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마침내 주인들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 노예들은 성 주변에 해자를 파고 전사로서 주인과 대적했다. 그런데 웬걸 주인인 전사들이 창을 버리고 예전처럼 채찍을 들고 달려들자 모두 식겁해서 도망쳤다고 한다.

대학의 구성원인 우리들도 어쩌면 이런 노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시간강사인 우리는 더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없었다는 걸 자각하면서 함께 연대해야 한다. 하지만 위 교훈처럼 단지 싸울 수 있다는 것만 깨닫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이미 대학의 구성원이자 ‘정치’를 실현하고 구성할 수 있는 평등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그런 권리를 실현할 정치적 기반과 통로도 마련해 나가야 한다.


☞ 2019년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우리사회와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문제들을 드러내어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듣기 위한 취지에서 릴레이 기고를 기획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기고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다양하고 많은 얘기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박지용의 복직투쟁 이야기 [침몰하는 대학]

박지용의 복직투쟁 이야기

박지용(한철연 회원)

즐거운 방학, 우울한 시간강사

또! 방학이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학생 신분인 모든이들은 방학을 기다린다. 학생들만큼이나 초등학교 선생님부터 대학교수들까지도 방학을 기다린다. 모두 방학을 즐겁게 기다린다. 방학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들은 시간강사들이다. 계절학기를 하지 않고서는 강의가 있을리 만무하고 강의가 없으니 수입이 없다. 대학에서는 1년 열두 달 동안 방학이 네 달이나 된다. 그러니 시간강사들에게는 삼분의 일 이상의 정기적인 무직상태를 견뎌내는 나름의 생존기술과 지혜가 요구된다. 스님들이 동안거 하안거를 하듯이 일상적인 사회관계를 최소화해서 지출을 줄여야 한다.

대학 생태계 질서에는 정년을 보장받았거나 곧 받게 되는 전임교수들이 있고 강의만 하고 강의수당을 받는 시간강사들이 있다. 시간강사에서 전임교수의 간격은 냉혹하게 말하면 급여와 연금, 4대보험이다. 신분변동에 따른 자존감 상승 따위의 비경제적 효능은 신경쓰고 싶지 않다. 승자에게 주어지는 경제적인 보상에 패자들은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오랜 번데기 생활을 견뎌내 나비로 변신한 친구는 첫 달 급여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고서야 전임교수가 되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이 과정을 폄하하거나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야말로 경쟁의 승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좋을까, 부럽다.

교육당국과 대학의 밀약에 의해서 대학 생태계의 어떤 변화가 생겨났다. 대학은 큰 돈 들이지 않고 전임의 머리수로 셀 수 있으면서 대학 평가에도 점수를 올릴 수 있는 OO교수를 만들어 냈다. 특임, 초빙, 연구, 객원, 강의전담 등등 그 명칭은 각양각색이지만 기본범주로는 비정년교수 혹은 비전임교수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을 대상으로 통계를 내면 통계학자마저도 한 눈으로는 전체를 이해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하다. 핵심은 간단하다. 대학평가 기준과 요건이 시시각각 바뀜에 따라서 대학의 주판이 튕겨지고 잡다한 OO교수의 직함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임교수와 시간강사의 차별이 달라지지 않듯이, OO교수들은 그저 OO일 뿐이다. 오히려 뻔데기가 나비가 될 확률만 더 줄어들고 큰 뻔데기 작은 뻔데기만 많아질 따름이다.

 

큰 뻔데기에서 작은 뻔데기로, 작은 뻔데기에서 큰 뻔데기로

어릴 적 읽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한 대목이 기억난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뻔데기가 나비가 되어 “저 꼭대기까지 가보아도 아무 것도 없어”라고 말한 장면이 인상 깊게 남는다. 이제 나비가 될 수 없다. 이 상황이 비장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비들이 여전히 부럽다. 지금은 시간강사로 강요된 하안거 기간을 보내며 최소식단의 섭생과 금욕을 실천하고 있다.

대학에서 4년간 OO교수로 적힌 명함에 방학에도 급여를 받고 4대보험과 퇴직금을 받은 적이 있다. 보수에 비해 노동조건이 열약했다는 점을 다시 시간강사가 되고서야 절감하게 될 정도로 일이 많았다. 다행히 현재로서는 순수 시간강사(참으로 낭만적인 단어다)가 된 지금이나 그때나 연간 급여총액에서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한시적인 호황일따름이다.

2015년 3월 경기 지방노동위원회에 여섯 명의 동료가 부당해고를 문제 삼아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사건의 피해당사자는 거의 삼배수였지만 대학이라는 특수 노동환경 탓에 어렵사리 시작한 투쟁이다. 절친한 선배는 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아무 말 없었지만 말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현재 진행형인 이 싸움에서 아직 외면적으로는 그 누구와도 언쟁 한 번 없었다. 그야 말로 조용한 싸움, 싸움 같지도 않은 답답한 싸움이다. 해당 보직교수(학장)와의 협의 자리에서도 아메리카노를 아이스로 마실지 설탕을 넣을지를 물어가며 웃으며 얘기했다. 기껏해야 한겨레신문에 사건보도 기사를 하나 내는 정도였고 그마저도 동료들과 겨우 협의를 이끌어낼 정도였다. 사건을 맡은 담당 노무사가 답답해서 화를 내기도 했다. 경기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승소했지만 대학은 중앙노동위원회로 재심을 신청했고, 8월 말 즈음 중앙노동위원회에서도 승소하게 되었다. 주문 내용은 원직복직과 해고 기간 동안의 임금차액을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노동위원회의 최종적인 행정명령에 대해 학교측은 법원에서는 달리 판단할 것이라 생각하여 행정소송을 진행시켰다. 노동위원회가 국가 행정기구이므로 행정명령의 법적인 정당성은 행정법원에서 심판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참조인의 신분이 되었다. 학교는 원고가 되고 노동위원회가 피고가 되고 우리는 피고의 참조인이었다. 노동위원회의 법률 담당자는 관례상 우리도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각출하여 변호사를 샀다. 행정소송도 삼심제인 상황이므로 지방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으로 절차적으로 이어진다. 2016년 5월, 1심에서 의외로 패소하게 되었다. 패소 판정이 나자마자 노동위원회 법률 담당자가 원고가 되어 다시 항소할 것이라는 의사를 우리에게 전달했다. 우리는 법률적인 신분이 참조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변호사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비용을 각출했다. 이제 사건은 고등법원에 접수된 상황이며 9월에 심리가 열릴 예정이다. 대법원에서 이긴다하더라도 주위에서는 글쎄라고 다들 말한다.

 

연대를 가로막는 것들

아내가 이전에 같이 활동했던 선배 하나가 책을 낸 적이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로 해고투쟁 일지를 출간한 것이었다. 아내는 그 선배가 동지애적인 결혼관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혼을 했다고 말했다. 순간 겁이 났지만 대범한 척 잠자는 아들을 품에 안았다. 나는 내년에 오십이 되지만 내 아이는 네 살이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사건을 처음 시작하면서 더 많은 동료들과 뜻을 같이하고자 했다. 다들 연령대, 전공분야가 다른 만큼이나 가치관이나 판단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명백하게 해고자복직투쟁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1년 반 정도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과도 조금은 다르다. 조금 더 느슨하게 말하자면, 이 시대에 노동자의 계급의식이라는 게 쌍용자동차의 투쟁이나 현재 금속노조의 투쟁에 있기나 한 것인가?

시간강사 노동자는 강의선택의 기회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학기 말 들려오는 핸드폰에서 학교 번호가 떴을 때 통화음을 누르는 손이 떨린다고들 한다. 학과장인 선배도 미안해서 직접 전화하지 못할 것이기에 학과 조교가 강사해촉 통보를 내린다. “아, 네. 그래요? 할 수 없죠. 알겠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다행히 강의를 맡게 될 영광을 안고 뿌듯한 마음으로 강의 준비를 한다. 교양강좌든 전공강좌든 철학을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 삶의 문제를 비켜갈 수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의 문제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총체로서의 삶, 굴곡있는 시간을 관통하여 충만한 삶,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담아 아이들과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철학자의 행복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지혜와 용기, 절제의 미덕을 칭송한다.

아래 한겨레 관련기사 참조

“[단독]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들에 ‘계약해지’ 일방통보 논란”
http://v.media.daum.net/v/20150909013006307?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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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와 강사수업에 수업료 차등적용으로 대학의 기만적 구조 드러내자[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3

교수와 강사, 수업료 차등적용으로 대학의 기만적 구조 드러내자[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3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지난 호에 이어서

숭고한 이상으로 수업하고 시궁창같은 현실에 좌절하는 대학강사

셋째, 강사들은 자신들의 허위의식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강사들은 머리는 하늘의 별을 향해 있지만 몸은 시궁창 속에 빠져 있는, 이 시대의 가장 분열된 존재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들의 정신은 한 없이 숭고합니다. 하지만 강의실을 벗어나는 순간 품위와 명예를 존중하던 그들은 한없는 굴욕감과 분노를 곱씹을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들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냐, 나에게는 이상이 있어. 전임만 되면 이 모든 굴욕을 한꺼번에 벗어던질 수 있어”라고 자위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이 현실 속에서 좌절될 때 그들은 또 다시 허탈해하고 좌절하다가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 시궁창 같은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 교수들의 수족 같은 노예 역할을 하고, 또 때로는 교수나 재단이 채용을 이유로 비정상적인 금품을 요구하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합니다. 생계를 위해 지식 보따리를 들고 이 대학 저 대학을 떠돌고, 오전에는 이 도시 오후에는 저 도시로 미친 듯이 차를 몰고 다니며 강의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뛰어 다니면서도 최소한의 경제적 삶을 보장받기가 힘들고, 그런 세월이 반복되다 보면 연구할 시간도 확보하지 못해 나중에는 학자로서 자긍심마저 잃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미 수많은 강사들이 그런 전철을 밟아가면서 상아탑을 쌓는 무덤들이 되었습니다. 사실이지 오늘날 강사 문제는 개인의 역량과 크게 상관없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대학교육의 40% 이상을 담당하고, 수많은 연구 단체, 학회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인력의 60-70%가 강사와 무늬만 교수인 강의 전담, 비 정년 트랙 등 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한국의 대학은 그들을 사회적 루저(Loser)로 취급하고 굴욕감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지적 호기심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 이 땅의 강사들과 연구자들이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이러한 수탈구조를 통해 자신들의 성장과 발전을 꾀하려는 대학들의 부도덕과 불공정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피해 당사자인 대학 강사들이 이런 현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전국단위 토론대회 3연속 우승 – 수업의 질, 강사와 교수 간 크게 차이 없어

대학 안에서 가장 착취 받는 그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비판하고 개혁하려 들지 않는 한 누구도 이 시궁창 같은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들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과 허위의식을 깨뜨리려 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강사문제, 대학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나는 강사’라고 밝힌다고 해서, 아니 그렇게까지 나서지 않더라도 학생들이 강사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나요. 이미 학생들도 강의하는 선생이 강사인지 아닌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뿐이지요. 그렇지만 분명한 차이는 있습니다. 학생들이 강사의 수업을 들을 때는 그에 해당하는 수업료를 차별 지급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 혜택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 운동이 현실화된다면 강사들은 이 왜곡된 대학 현실 속에서 학생들을 참으로 위하는 진정한 스승으로, 저임금과 신분차별 속에서도 학생들에 대한 열정과 책임을 다하는 진정한 스승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이지 강의실에서 만나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저임금이나 신분 차별과는 상관없습니다. 오로지 배우려는 열의와 가르치려는 열정으로 만나는, 순수한 영혼과 영혼의 불꽃 튀는 만남이 있을 뿐입니다. 필자가 강의하는 대학의 토론 관련 수업에서는 수강생들이 전국 단위의 토론대회에서 내리 2년간 3연속 우승하는 진기록을 낳기도 했습니다. 강사냐 교수냐는 수업의 질과 크게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야바위꾼 같은 대학들이 이런 순수한 열정을 악용해서 현재의 착취구조를 영속화하려는 기도에 있고, 이 착취 구조 하에서 자신들이 대단한 역량을 가진 듯 당연히 이 착취의 수혜 물을 향유하고 동료 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방관하는 교수들에 책임이 있습니다.

 

대학교수, 동료 강사의 부당한 차별에 대해 분명한 책임 있어

그렇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 교수들은 대학에서 부당 차별을 받고 있는 동료 학자이자 강사들에 대해 분명한 책임이 있습니다. 한정된 파이에서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현저하게 많이 가져간다면 결과의 부정의를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강사들의 비참하고 불공정한 현실이 대학의 왜곡된 착취구조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한다면, 이 구조의 수혜집단인 대학교수들도 큰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운동은 합리적인 시장 논리에 의해 교수들 역시 현재의 수탈 구조 하에서 그들 역시 수탈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수혜 집단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비판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양심적인 소수의 대학교수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개개인들의 양심과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대다수의 교수들은 그들이 누리는 향유와 특권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 역량 때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현재 대학들에서 자행되고 있는 부도덕과 불공정의 하수인이고 협력자들입니다. 그들 역시 동료 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유지·존속한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식민지 체제의 안정과 유지에 성실하게 노력한 자들이 그 체제 하에서 고통 받던 대다수의 주민들의 고통에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고액 연봉, 그들이 안식년을 가서 편안하게 즐기는 여유, 그들이 우아하게 연구실에서 차를 마시며 하는 작업의 이면에는 저임금에 시달리는 강사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점철된 고통이 있습니다. 때문에 교수들 역시 이런 현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작금의 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학 사회에서는 강사들을 동료 학자로 존중하지 않고 한낱 하수인 정도로 생각하는 철부지 부도덕한 교수들도 많습니다.

 

대학의 건물은 우후죽순 늘었지만 대학발전의 한 축인 강사를 위한 공간은 턱없이 부족

지금까지 강사들은 법적 지위를 개선하고 강사료 문제를 현실화시켜 달라고 부단히 요구해왔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오히려 강사들의 비참한 현실만을 부각시켜 그들을 루저로 만들고 시혜의 대상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강사 문제는 결코 시혜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 교육의 정상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파행적이고 불공정한 현실이 온존함으로써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학생들에게 가고 있고, 대학의 미래, 사회의 미래, 나아가서는 국가의 미래에도 그대로 악영향을 줄 것입니다. “강의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운동”은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대학의 기형적 구조의 진실을 밝히고 대학을 혁신하는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 운동은 왜곡된 구조의 원인 제공자라고 할 대학들이 실제로 얼마나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행태를 일삼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태를 합법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법 이전에 도덕과 정의의 문제입니다. 대학의 건물은 30년 전에 비해 엄청 늘어났지만, 강사들에게는 최소한의 연구와 휴식 공간마저 허용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학의 고도성장의 당당한 주역이라고 할 강사들의 흔적은 대학 발전사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무한 희생과 무한 고통만 강요당하는 소모품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학자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와 존엄도, 최소한의 경제적 삶과 행복도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강사들에게는 방학 중에는 연구를 위해 필수 요소인 도서관 출입과 접속도 끊어버리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들을 헌신짝 취급하는 대학들이 과연 이 땅의 인재들의 미래 교육을 말할 수 있을까요? 대학의 교직원들도 이 기막힌 현실의 부역자이자 수혜자라는 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주체였던가를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더는 이런 현실을 관행으로 덮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부정의와 부도덕이 온존해 있는 한 대학은 결코 자유를 외칠 수 없고, 진리와 양심의 상아탑을 자처할 수 없습니다. 대학사회는 이제 비판의 화살을 자신들의 심장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대학 사회의 힘 있는 주체들은 분명하게 자신들의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현실을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지난 수 십 년 간 대학들은 이 땅의 경제 발전을 위해 귀중한 인재들을 배출해왔습니다. 또 사회 민주화를 위해 대학 사회의 수많은 주체들이 용감한 목소리를 내왔고 헌신적으로 희생을 감수해왔습니다. 이 땅의 강사들은 이 모든 공로와 희생에 절반 이상의 기여를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쌓아 올린 대학이 지금은 사회 어느 곳보다 극심한 차별을 당연시하고,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편법과 불법을 감행하는, 가장 부도덕하고 부정의한 집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부끄러운 고리를 끊기 위해 결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당장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겠지만, “강의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하자!”는 우리의 운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첫 걸음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으로 시작은 미미하겠지만, 대학과 사회의 도덕적 공분과 정의에 대한 열망이 들불처럼 타오를 것입니다. 강사 여러분들, 대학생 여러분들, 학부모 여러분들, 비정규직 노동자 여러분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애쓰는 이 땅의 모든 양심적 시민들, 우리들 스스로가 이 들불을 당기는 횃불을 높이 치켜듭시다!

 

하나,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강사냐 교수냐) 실명제를 도입하자!

 

하나, 직급에 따라 수업료를 차등 지불하자!

 

 

-끝-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부도덕한 자본주의 대학의 폭리[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2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부도덕한 자본주의 대학의 폭리[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2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지난 호에 이어서 게재합니다

▲ 장래가 없는 박사 과정…대한민국의 미래라면? ⓒ김영곤-프레시안사진

▲ 장래가 없는 박사 과정…대한민국의 미래라면? ⓒ김영곤-프레시안사진

대학들은 오랫동안 이런 부당행위들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해 왔습니다. IMF 이후 우리 사회 곳곳이 생존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도 한국의 대학들, 특히 메이저 대학들의 양적인 규모는 비약적으로 성장해왔습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들어온 학생들은 4년 내내 공사 판 같은 대학 캠퍼스에서 소음에 시달리며 학습권을 침해받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특정 대학에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대학이 이런 양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비싼 등록금으로 인한 학부모들의 고통과 저렴한 강사료로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 강사들, 그리고 용역 회사로 넘겨진 학내 비정규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들의 간판급 연구소들도 실정을 알고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대학의 모든 연구소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앵벌이 시스템에 가깝습니다. 연구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정규직 강사들로 채워져 있고, 그들이 국가 기관이나 기타 등등에서 연구비 지원받는 프로젝트를 따와야만 돌아가는 형태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연구원들은 앵벌이들처럼 다시 밖으로 나가서 연구 프로젝트를 따와야 합니다. 대학은 그 수수료를 펀딩 받아 운영하고, 그 연구 업적을 대학의 이름으로 자랑합니다. 대학의 대부분의 연구소들에 대학 자체적으로 지급하는 유급 연구원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앵벌이 시스템 때문이라는 것은 그렇게 놀랄만한 것도 아니지요. 이렇게 강사들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도 대학들은 강사들을 소모품처럼 활용하는 데만 급급하다가 아무런 통보 없이도 해고해버리고 대체품을 찾습니다. 강사들은 수 십 년 동안 한국 대학들의 고도성장의 가장 큰 역군을 담당해왔으면서도 그들의 공적이나 흔적은 대학의 발전사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성장의 역사의 뒤안길에서 오직 사회적 루저(Loser)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입니다. 시장을 감시 감독해야할 공정거래 위원회 같은 교육부는 오히려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하면서 대학의 그런 관행들을 오랫동안 방치하고 두둔해왔습니다. 만약 소비자들이 그 내막을 안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당연히 분노하고 그런 부당거래의 관행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학은 오랫동안 학생들의 순수한 구매 욕구를 이용해왔고, 연구와 강의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는, 너무나 멍청할 정도로 순수한 딸깍발이 서생(書生)들의 처지를 악용해왔습니다. 멍청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전전 긍긍할 뿐이었습니다. 몇몇 용감한 강사들이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몸짓은 메아리 없는 광야의 외침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이처럼 불공정하고 부당한 처사에 대해 곳곳에서 문제제기도 하고 항의도 해봤지만 판매업자들이나 관리 감독청들은 외면하고 묵살해 왔습니다. 너무 큰 폭리가 그들의 도덕 감정을 막고 있기 때문에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제안을 해보고 싶습니다. 소비자가 알고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시장이 자율적으로 적정 가격을 찾아가도록 하자는 것, 불공정한 대학에서 분배 정의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죠. 모두가 짐작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모든 상품은 원산지 증명이라는 것이 따라가고, 하다못해 음식점에서 먹는 고기 한 점, 반찬 한 가지에도 호주산인지 칠레 산인지 아니면 중국산인지 밝혀야 됩니다. 원산지 증명은 소비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 때 광우병 우려로 미국 산 소고기와 관련해 촛불 시위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는 대학의 강의에서도 강사들 강의인지 교수들 강의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아주 저렴하게 고용한 강사들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당연히 저렴하게 수업료를 지불하고, 교수들의 강의에는 고 비용의 대가에 대해 당연히 높은 수준의 수업권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더 이상 대학의 기만적이고 야비한 술책이 불공정하고 부도덕하게 실행될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예산 타령을 하고 경제 논리를 앞세우는 대학 당국과 교육부의 요구대로 투명하게 시장의 논리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 시장에서 부당 거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착취와 폭리가 어떻게 발생하고, 그 모순이 누구에게 전가되는지를 아주 투명하게 시장 논리대로 밝혀서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실라버스 직급 공개는 원산지 증명과 원가 공개를 요구하고, 차등 구매 비용에 따른 차등 지불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당연한 권리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요구 운동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첫째는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을 공개하고 수강료를 차등화하자고 했을 때 그 혜택은 무엇보다 소비자들인 학생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앞서 예로 든 중국산 덤핑 물건과 달리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강사들의 강의 상품은 상품 자체의 질(質) 면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질(質) 좋은 똑 같은 상품이 1/10 가격도 안 되게 팔릴 수밖에 없는 이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현실이 기가 막힐 뿐입니다.)

교육 상품의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구매한 상품이 떨이 덤핑으로 구입한 상품이고, 도덕적으로도 불공정한 상품이라는 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대학들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할지 몰라도 말하자면, 법 이전에 상 도덕적으로 불공정하고 부당하다는 비난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커피나 양탄자의 생산과정에서 아동 노동력이 심하게 착취되는 현실을 알 때, 혹은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걸치는 값비싼 모피가 동물의 고통과 희생이라는 것을 알 때 소비자들은 분노하고 불매 운동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와 비슷한 행태가 대학 안에서, 자신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가해지는 현실에 대해 대학생들도, 그리고 비싼 등록금으로 등골이 휘는 학부모들도 똑 같이 분노하고 또 개선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의 대학 구조상 강사들이 수탈당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이전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 기형적인 착취 구조 하에서 강사들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똑 같이 피해를 당하고 있는 당사자의 한 편입니다. 현재 자녀 1인을 4년제 대학 졸업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1억 이상이 소요됩니다. OECD 국가들 중 네 번째로 높은 한국 대학의 등록금은 가계 부채의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싼 등록금은 앞서 이야기했듯 대단히 불공정하게 책정된 것입니다. 가계부채가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현실에서도 적립금과 부동산을 산처럼 쌓아 놓고 있는 대학들이 정작 학생들의 비싼 등록금과 강사들의 저임금을 외면하는 이 기형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운동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값 등록금 운동이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고도 합리적인 요구임을 드러내줄 것입니다.

둘째, 이 운동은 무엇보다 대학들의 부도덕한 정책에 큰 타격을 입힐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들에게 법적 교원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조차 거부합니다. 아무런 법적 자격도 없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게 할 수 있을까요? 강사들의 강의 역량이나 학문적 능력이 미덥지 못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대학들은 넘치는 박사 인력으로 인해 박사학위 소지자를 강사 자격의 기본 요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게다가 강사 문제가 개인의 학문적 역량과 별 상관없이 하나의 구조적인 문제가 되고 있어 이제는 오랜 경력 강사가 강사로 정년퇴임 한다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법적 자격 부여를 거부하는 것은 오로지 1/10도 안 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고용하기 위해서, 강의 외에 어떤 비용도 지불하지 않기 위해서, 아무 때나 저들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맹자(孟子)는 제 아무리 좋은 명분과 허울을 두르고 있는 자들이라도 인(仁)을 해치는 자는 그저 도적에 불과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는 한낱 강도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은 대학 강사들을 싸구려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고 착취함으로써 인(仁)을 해치는 도적이 되었고, 강사와 교수 간에 불평등과 신분차별을 구조화함으로써 의(義)를 해친 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한국의 대학들이 이런 부도덕과 불공정을 개선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제 그들을 대학 도적이고 대학 강도로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일반인들의 상식으로 보아도 어떻게 이런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일이 진리와 자유를 추구한다는 상아탑 안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 갈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최악의 불공정 거래[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1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최악의 불공정거래[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1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김영곤 선생님, 안녕하세요.

불철주야, 풍찬 노숙하면서 이 땅의 대학 강사들을 위해, 대학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 내외분에게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오늘 날 한국의 대학 강사들은 유례없이 수탈당하는 집단이라 생각됩니다. 21세기 현대판 지식 노예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고급의 노동자이면서도 가장 저급한 대우를 받고 있고, 부당 처사에 대해 아무런 항변도 못하는 무력한 집단이지요. 지난 수 십 년 간 대학들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전임 교수들 못지않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공과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대학 교원이라는 최소한의 법적 지위도 부여받지 못한 유령 같은 존재입니다.

한국의 대학은 외형적 성장만 일삼는 거대한 괴물이 되었습니다. 재단의 소수 인물이 이끄는 그 괴물은 대학교수와 교직원들을 하수인으로 부리고 있지요. 그들은 하수인이면서도 기득권자라는 이율배반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지요. 반면 대학 강사와 비정규직 노동자, 학생들은 이 거대 괴물의 피 수탈 집단이고요. 학생들은 이제 4년 동안 교육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뜨내기 고객들로 취급될 뿐입니다. 대학 강사와 청소직등 비정규직 노동자는 거대 기계를 돌리는 부품이자 소모품 취급도 못 받고요. 대학 강사들은 실질적으로 대학 교육의 40%이상을 담당하면서도 법적으로는 무자격자입니다. 똑같이 학위를 받고 똑같이 연구를 하고 똑같이 논문을 쓰면서도 시급 알바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전혀 항의도 못하고 경력 인정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제가 작금의 부당한 강사제도의 개선을 위해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이 제안은 강사의 현실적 지위 뿐 아니라 대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반값 등록금 운동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니라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 실명제를 도입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와 강사의 강의를 들을 때 등록금을 차등 지불하자는 겁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값싼 물건과 값비싼 물건에 대해 똑 같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시장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안의 이면에 놓인 논리는 현재와 같은 대학의 기만적이고 부도덕한 수탈 정책을 폭로함으로써 교수와 강사 간의 형평을 찾자는 것이고, 대학교육에 기여한 강사들의 정당한 노고를 인정받자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학생들도 자신들의 비싼 등록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아야 하고, 정당한 수업권의 보장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 강사들의 열악한 상황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다음 세대의 학문을 담당해야할 젊은 연구자들의 학문적 전망은 더욱 더 불투명하고 불안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현재의 강사 제도와 강사료가 합법적이라고 강변하면서 후안무치를 일삼고 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법 이전에 정의와 형평의 문제이고 도덕적 정당성의 문제입니다.

현재 대학교수 1명을 채용할 때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적어도 강사10명 이상의 비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예를 들어 7천만 원의 연봉을 받는 대학 교수와 시간 당 5만원의 강사가 주당 9시간을 강의하는 경우를 단순 비교해보지요. 강사의 경우는 45만*4=180만원이고, 1년을 똑 같이 강의한다고 할 경우 강사들은 한 학기 4개월이므로 1년이면 8개월이고, 따라서 1,440만원이 됩니다. 매학기 강의 확보의 불안에 시달리는 강사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도의 강사는 거의 A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의 경우 7천만 원 연봉 외에도 연구실 운영비용, 6년 강의 후 7년째 주어지는 안식년 비용, 연금과 퇴직금 정립,방학 중 연수비용, 4대 보험 그리고 입시철마다 떨어지는 특별 수당 등까지 합친다면 거의 1억4천만 원 정도로 계산해도 많지 않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강사1인을 고용할 때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거의 10배 수준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 트위터에 프랑스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고 명문 이화여대에서 대단위 강좌를 운영한 모 강사의 11년 간 총 수령액이 7천만이었다고 하던데, 이는 해당 대학 교수 1년 치 연봉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강사 10명이 교수 한 명 수준도 안 된다는 계산이 틀리지 않죠. 명문 사립대학이 이 정도이니 다른 대학은 이보다 못하면 못하지 결코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10배 이상의 수입 차이가 나는 대학교수와 강사들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격차는 경제적인 것뿐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경제적인 차이, 봉건시대도 아닌 21세기의 대학에서의 신분적 차별이 더 심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봉 차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회사의 평사원과 CEO의 연봉이 같을 수 없겠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봉 격차가 커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적용하자는 비정규직의 노동자들의 한 맺힌 구호가 나올까요? 그런데 이런 격차도 사회에서는 평균적으로 70%이고, 더 크게 잡아도 50%수준을 넘지 못하죠. 만약 특별한 사유가 없이 그 이상이 된다면 그것은 착취이고 수탈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 사회에서는 똑 같은 학생들을 데리고 한 학기, 1년을 강의하면서, 그리고 똑 같은 강의 평가 기준을 적용하면서도 무려 10배 이상의 임금 차별과 신분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대학교수들과 강사들의 임금 산정 방식이 다르고,또 교수들은 과 행정, 학교 행정 등의 일도 담당한다고 강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런 행정과 관련된 일이 현재의 임금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교수들의 행정과 관련된 일은 보직과 출세에 도움 되는 것이고, 또 연봉 외 수당도 받는 일입니다. 그것이 강사들의 현저한 부당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 정도 임금 차별은 사회에서는 시급 알바 생 하고 임원들의 차이에서나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일하는 방식이나 내용, 그리고 책임 정도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차이를 문제 삼지 않지요. 그런데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은 전혀 그런 차이가 없습니다.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생도 동일 대학 학생이고, 강의 내용의 수준도 강사라고 해서 봐주는 것 없습니다. 오히려 강사들은 교양과 관련한 대단위 강좌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 관리도 힘들고 성적 처리나 리포트 피드백 등을 감안한다면 소규모 전공 강의를 운영하는 교수들의 노고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어떤 이들은 전공과 교양 수업 간에 강의 준비와 운영상의 난이도가 크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학 강의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저학년 교양 강의이고 그 다음이 전공 강의이며, 끝으로 대학원생들 데리고 하는 세미나 강의가 가장 쉬운 강의라는 사실은 대학 사회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 그런데도 강의 평가 기준을 똑 같이 적용하고, 교수들과 달리 평가가 나쁜 강사들은 바로 해고해버립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가르치는 사람을 강사로 생각하고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실상 학생들에게는 강사나 교수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다만 강의 내용이 좋고 들을만한가 또 들어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강의인가만이 중요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강의와 관련해서는 임금 수준에 관계없이 똑 같이 강의하고, 대학도 유독 강의와 관련해서는 교수나 강사를 똑 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학생들하고 관련된 강의 및 평가에서는 교수와 강사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임금과 신분상에서, 경제적으로나 법적으로 큰 차이와 차별이 존재할까요??이렇게 한 치의 차이가 없음에도 교수와 강사 간의 연봉 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동일 노동에 대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차별,?부당하고 불공정한 차별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학생들 입장에서도 비싼 등록금을 내고 구입한 교육 상품(?)이 이렇게 불공정하게 가격이 책정되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면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어렵사리 구매의 자격을 얻어 고급의 매장에서 고급의 브랜드가 붙은 상품을 비싸게 구입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구매를 하는 과정은 너무 경쟁이 심해 눈물겹기도 합니다. 해서 구매가 확인되는 순간 학생들은 자신들의 현명한 결정에 대해 감격해하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매한 상품이 하나는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정상 가격으로 책정된 상품이지만 다른 하나는 전혀 비상식적인 방식으로(법적인 교원 자격도 부여하지 않고 달랑 4개월짜리 계약서 하나를 가지고), 전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매집한 상품에다가 자신들의 브랜드를 붙여 판매한 상품인 것입니다. 좀 거친 비유를 든다면 부도 직전의 회사나 값싼 노동력으로 만든 중국산 덤핑 물건을 뒷골목 시장에서 구입 해다가 신세계나 롯데 등의 고급 백화점 매장에서 고급 브랜드를 붙여 판매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판매업자인 대학들은 무려 10배 이상의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처에 널려 있는 이처럼 싸구려 덤핑 물건들을 값싸게 사들여 자신들의 매장의 거의 40%이상을, 더 심한 곳은 70%까지 진열해 놓고 있습니다. (예, 거친 비유이겠지만 오늘날 한국의 대학 강사들의 질(質)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격 면에서는 중국산 싸구려 수입품이나 부도 회사의 덤핑 물건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강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교육부는 점차적으로 강사 비율을 줄이고 교수 비중을 늘리겠다고 합니다. 교원 비율에 따라 대학 평가와 지원을 달리하겠다고 압박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법의 달인들인 한국의 대학들은 비 정년 트랙, 강의 전담 전임 계약직 교원들을 대거 뽑아 들여 이전에 강사가 담당하는 강의를 비슷하거나 낮은 비용으로 훨씬 많은 강의를 떠넘기고 있습니다. 명색이 대학의 전임 교수인데 월150만원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울의 종합 대학들에서도 비일비재합니다. 어떤 경우는 2학점짜리 80명 단위의 수업을 8개씩이나 강의하면서도[한 학기에 80*8=640명] 연봉이 3천이 되지 않고, 그것도 2년 지나면 재계약을 빌미로 용도 폐기시킵니다. 그러니까 대학의 입장에서는 시간 강사들에 들어가는 정도의 비용으로 무늬만 전임들을 고용할 수 있으니까 교육부 평가도 높이고 지원책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손 안대고 코푸는 야바위꾼들의 사기행위와 같은 이런 편법을 이용해서 대학들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행태를 진리의 상아탑 속에서 부끄럼 없이 일삼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교육부는 전임 비율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달리 한국의 대학에는 초빙, 외래, 대우, 강의 전담, 비정년 트랙 등 당사자들도 헷갈리는 직급이 많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시간 강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이런 원천적 착취와 수탈 구조 속에서 오늘 날 한국 대학에서 강사들, 비 정년 트랙 전임들,계약직 강의 전담들의 강의 비중은 40%를 훨씬 상회합니다.) 이런 실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취하는 폭리를 그들의 탁월한 장사 솜씨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대학의 탁월한 솜씨가 아니라 기만이고 사취이고 협잡일 뿐입니다.

아주 예외적인 사정이 아니라면 모든 시장가격에는 상품과 관련한 어느 정도의 공정 가격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다른 진열대에 있는 똑 같은 상품들에 비해 무려 1/10일 수준으로 구입해서 똑 같이 판매한다면 이것은 상도덕 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사기이자 기만입니다. 그것도 고급 백화점들과 같은 대학들이 말입니다. 만일 신세계나 롯데 백화점에서 이런 상행위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날로 문을 닫아야 할 만큼 여론의 질타와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 이마트에서 직원들의 노동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불법 감시를 하다가 언론에 노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마트에 대한 사회적 비난으로 인해 최고 책임자까지 앞장서서 사죄하는 상황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법 이전에 도덕적 공분의 대상이며, 우리 사회가 그런 불공정과 부도덕을 묵인할 만큼 불감증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지성과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에서는 이런 야바위꾼들의 협잡과 같은 행위들이 지금까지도 낯 뜨겁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대학들과 그 부역자들이 과연 사회를 향해 비판과 양심의 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