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티르너 연구자인 한철연 박종성 회원이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1845)를 읽으며 번역과 자신의 주석을 제시한 글을 게재합니다.

이름 없는 자기중심적 사람의 정체성 비판 무명인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이 글은 한글본 [유일자와 그의 소유](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부북스, 2023. 2쇄[학술원 우수 학술도서])를 읽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짧은 영어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울피 란트스트라이허(Wolfi Landstreicher)의 글 [이름 없는 / 자기중심적 사람의 정체성 비판 / 무명인](Nameless An Egoist Critique of Identity Unknown”)

이 글에서 인용하는 슈티르너의 글은 독일어 원본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인용한 슈티르너가 쓴 [슈티르너 비평가들]이란 글은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비판의 반비판입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옮긴이 해제”와 “옮긴이 말”을 참조하길 바랍니다. 아울러 “자기중심적 사람”(egoist)이란 용어에 대한 설명도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옮긴이 해제”를 참조길 바랍니다.

 

Nameless
An Egoist Critique of Identity
Unknown

 

이름 없는
자기중심적 사람의 정체성 비판
무명인

 

울피 란트스트라이허 지음 박종성 옮김

2017

 

그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nichts) 때에만 그리고 그대의 이름만 언급될 때에만, 그대는 그대로서 인정된다(wirst anerkannt). 그대에 대해 무엇인가를(etwas) 말하자마다, 그대는 그러한 어떤 것(인간, 정신, 기독교도 등등)으로서만 인정된다.

– 막스 슈티르너 『슈티르너 비평가들』(Rezensenten Stirners, 1845)

 

사람들이 정체성(identity)과 개성(individuality)을 얼마나 자주 혼동하는지가 재미있습니다정체성은 동일성”(sameness)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일성은 나와 동일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개인들을 서로 충돌하는 동일한 원자(identical atoms)로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가능합니다(마르크스주의자는 이것이 개인주의자가 말하는 것이라고 가정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원자조차도 당신이나 내가 그들을 원자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할 때만 동일해집니다원자화는 나의 유일한(unique) 개성을 부정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는 과정이며이 과정에서 동일시(identification)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슈티르너는 당신과 나즉 지금 이 순간 육체가 있는 모든 개인을 유일자”(der Einzige)이라고 불렀습니다『슈티르너 비평가들』에서 그는 유일자 그저 이름일 뿐이며그 이상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말하고 쓰려면 이름을 사용해야 했습니다그러나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유일자는 … 전혀 개념의(옮긴이내용이 없다유일자는 불확정성 그 자체(Bestimmungslosigkeit selber)이다 … 내가 내 세상에서 살기 전에네가 네 세상에서 살기 전에유일자에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에 정체성과 동일성을 부여하고 유일한unique 것으로서의 유일자를 파괴하는 것입니다유일자)에 개념적 내용(conceptual content)을 부여하는 것은 유일자를 부조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유일자이면서도 정체성과 다투어야 합니다예를 들어 선술집에 들어갈 때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때경찰들이 제지할 때신원을 밝혀야 하는(identify myself) 진부한 일이 있습니다이러한 모든 경우들에 누군가는내가 그러한 경우들의 규칙들에서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지 확인하기 위해 특정 법적 권한(authority)을 위임 받았습니다나도 술 마실 나이가 된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요나는 수표를 현금화할 권한이 있는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요나는 미납 증서가 없는(no outstanding warrants)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요이러한 각각의 정체성들은 내가 따라 생활해야 할 개념들입니다그리고 그렇게 생활하지 않으면그 자기 생활의 결과를 감수하게 됩니다그러나 사실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들과 동일하지 않습니다비록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러한 각각의 과제들(어느 정도의 음주어느 정도의 현금 필요경찰들과 어느 정도 멀리하기)을 충족할 수 있다고 해도나는 어떤 그러한 대의들도 아닙니다그리고 나에게 이러한 기준을 부과하는 사람들은 나의 유일한 나(unique self)에 추상 개념들을 강요하고그들의 규칙들과 자신만의 일관성에 대해 사회적 요구 사항을 따르도록 강요한다는 점에서 나의 적들입니다그들은 나의 자기소유성(ownness)과 더불어 나의 유일성(uniqueness)을 훼손하려고 합니다.

게다가모든 지배적 사회 질서는 개인들을 인종성별국적성적 취향 등의 범주적 정체성(categorical identity)에 따라(in terms of) 처리하도록 설정되어 있을 뿐입니다이것들은 모두 허구이지만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이러한 범주들은 개인을 노예화하고개인을 배제하고개인을 제한하고(placing restrictions on), 개인을 구타하고 살해하는 등의 구역질날 정도(ad nauseum)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그러한 범주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학대를 경험한 이들이 이 학대와 가해자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연합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습니다(makes sense).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합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단결이 학대를 뿌리 뽑으려는 공유된 욕구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이 학대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된 범주적 정체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들은 그들이 파괴하려는 질서의 적들이 아니라인정과 정의를 원하는 질서의 희생자들로서 단결하기로 선택합니다사회 질서는 유일한 개인(unique individuals)이 아닌 범주들만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정의는 측정하고 무게를 달 수 있는 것즉 비교하고 동일시할 수 있는 것만 다룰 수 있습니다정체성동일성집단에 속함은 사회적 인정과 정의에 대한 요구 사항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입니다나의 유일성을 알고 있는 자기중심적 사람(egoist)으로서의 나는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범주적 정체성과 그걸로 즉시 혜택을 받는 사람들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적으로서 다르게 반응합니다내가 다른 사람들과 연합한다면그들은 내 자신의 목표와 힘을 향상시키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아니라내 자신과 내 연합을 위해 정체성과 정치를 파괴하는 것입니다하지만 나는 도덕주의자는 아닙니다나는 정체성이 항상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어떤 의미에서는 정체성의 용도를 잘 찾을 수 있습니다사실나는 내가 라고 말할 때마다정체성을 사용합니다. 이 말에서 나는 여기에서 지금의 내 자신곧 나의 직접적이고 구체적 나를 과거 내 자신의 나 개념과 동일시합니다유일하기 때문에(내가 구체적으로 여기에서 지금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과거 내 자신의 나 개념과 동일하지 않지만과거 내 자신의 나 개념과 동일시하는 정도까지 나 자신을 과거 내 자신의 나 개념과 결합하기로 선택합니다왜냐하면 내가 만난 타인의 과거 모습들과 타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타인의 힘을 향상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과거 내 자신의 나 개념은 나의 세계와 관련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 상호 작용하는 데서 나에게 중요한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여기서정체성은 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여기서도나는 범주적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개인적 정체성즉 내가 사용하기 위한나의 자기 향유(self-enjoyment)을 향상시키기 위한 개념적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서나 자신을 위해 만든 등식(equations)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약 내가 개념적 도구들을 나 자신이라고 여긴다면나는 나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최근에나는 자신을 개인주의허무주의자자기중심적허무주의자(egoist-nihilists)라고 묘사하면서 지배 질서에 대한 다양한 공격을 주장하는 개인들(분명히 소그룹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보이는)의 성명서(communiqués)을 접했습니다스스로 통치자의 질서에 반역하고 공격하는 자는 틀림없이 나의 동지입니다나는 개인의 행동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그의 모든 결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개인과 친밀감을 느낍니다그런데 왜 자기 자신의 삶에서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단체 이름을 사용하여 단체 정체성(group identity)을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어쨌든 개인의 행동에 대해 주장할 필요성을 느끼는지 궁금합니다내가 지배 질서를 공격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법에 위배되는 행동을 선택한다면이 선택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내 삶의 직접성에서 비롯되며나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의무가 없습니다그뿐만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다른 행동에서 영감을 얻을 필요도 없습니다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내 자신의 삶이고 내 자신의 기회입니다반항적 행동이 반항적 마음을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은 자신의 분노와 기쁨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행위를 주장하기 위해 글을 쓸 수도 있지만그렇게 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큰 지혜입니다그러나 여기서 내가 가장 의문시하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행위를 주장하는 개인이 정체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이것이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하는 이유입니다(이 이름들 중 일부는 아름답고 시적이기 때문에 정체성을 나타내는 호칭(labels)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명된 성명서(signed communiqué)는 그 행동을 수행한 유일한 개인들에 대한 행동의 즉각적이고 순간적 의미를 청중에게 그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영구적 의미로 대체합니다영구적 의미와 함께 영구적 정체성이 생기고 유일한 개인들은 이러한 결정된 형태 속으로 사라집니다스스로 행동하는 유일한 개인은 이름이 없습니다(nameless)유일한 개인 이름이 없습니다왜냐하면 유일한 개인이라는 존재는 의미가 완전히 비어 있지 않거나 그를 표현한다고 생각되는 이름에 비해 너무 직접적이고 덧없기 때문입니다그가 행동하기로 결정했다면정체성 없이 익명으로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만약 유일한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선택하거나그것을 대화나 토론의 문제로 만들기로 결정하거나자신들이 반항하는 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선택한다면유일한 개인이 이 일을 익명으로 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자신의 유일성으로 행동하는 개인은 자신의 행동과 동일시할 필요가 없으며그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는 완전히 그 행동에 빠져 있었습니다어쨌든자신의 행위를 주장하는 것의 완전한 의미들은 자신의 반란에서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과 느끼는 연대감과 친밀감(solidarity and kinship)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지속적 논쟁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정체성은 당신이 무엇인지(what you are) 규정하는 것입니다내가 말했듯이그러한 규정을 가지고 노는 것이 타당할 수 있는(또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순간들이 있습니다하지만 이러한 규정들이러한 정체성들은 결코 내가 될 수 없습니다그러나 그것들은 나를 하나의 역할이나 일련의 역할이라는 감방에 가두는 감옥이 될 수 있습니다그리고 내가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이 역할을 거부해야 합니다내 이익에 도움이 될 때 가끔 쓰는 가면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물론내가 그 역할에 맞지 않으면나는 예측불허가 되고나는 덧없어지고나는 제도와 제도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슈티르너는 『슈티르너 비평가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슈티르너는 유일자라고 이름을 붙이고 동시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름은 유일자라고 이름 붙이지 않는다.”(Stirner nennt den Einzigen und sagt zugleich: Namen nennen dich nicht) 정확하게 유일한 개인으로서 나는 이름이 없습니다정확히 그와 같은 나는 정체성이 없습니다나는 그야말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입니다(I am simply myself here and now).

 

Wolfi Landstreicher
Nameless
An Egoist Critique of Identity
Unknown


 

『유일자와 그의 소유』(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부북스, 2023, 2쇄-수정증보 개정판) 추천사 모음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유일자와 그의 소유』(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부북스, 2쇄-수정증보 개정판) 추천사 모음

  • 2023년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교육부 우수학술도서

 

국내 최초로 슈티르너의 독일어 원전을 번역하여 화제가 된 박종성 번역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가 2쇄를 내면서 내용을 수정증보하고 책 표지를 새롭게 바꾸어 펴냈습니다. 지난번 표지와 달리 이번에는 슈티르너의 얼굴을 추정하여 그린 초상화를 넣었습니다.

2쇄를 내면서 동료 연구자 및 철학 전공자들이 이 책에 대한 많은 추천사를 써주셨습니다. 아쉽게도 2쇄 개정판에는 담지 못했기에 지면을 통해 글들을 소개합니다. 지금 소개드리는 추천사는 책에 대한 소개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 각자의 눈으로 슈티르너 철학에서 발굴할 수 있는 의미, 사상사적 의의와 가치, 그리고 앞으로의 철학적 지향까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를 읽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슈티르너는 모든 ‘권위’를 거부한다. 종교, 국가, 법, 이데올로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인간’, ‘인간의 본질’ 같은 개념조차 “정신을 빼앗긴 사람”의 헛소리라고 거부한다. 반역적 언사와 파격적 은유로 일관되어 접근이 쉽지 않고, 통상의 사상사에서는 언급조차 안 되는 책이다.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은가! 이 책이 그 많은 문인과 사상가(Camus, Oscar Wilde, Husserl, Habermas, Herbert Read, Emma Goldman, M. Buber, Jacques Derrida…)의 애장 도서목록에 있거나 그들에게 직간접 영향을 미친 이유, 또 현대 주요 사조(니체, 아나키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한 원류(源流)로 평가받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서유석(호원대학교 교수)

 

♦ 현대인은 거대한 기계의 한 부품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시스템, 구조, 조직, 국가에 의해 압도되며, 민족, 인민, 프롤레타리아트, 국민, 대중, 다시 말해 ‘그들’의 익명성 속에서 ‘나’의 고유함과 독특함이 사라진다. 나치주의와 같은 국가민족주의가 새로운 극우 포퓰리즘으로 부활하고 있고, 스탈린주의와 같은 국가사회주의가 인민을 통제하고 있다. 거대 자본과 플랫폼 기업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대중을 쥐어짜고 있다.

막스 슈티르너는 각자의 유일한 개성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평등한 연합을 꿈꾼 아나키스트이다. 그는 모든 권위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는 자유인이다. 그의 책에서는 분자혁명을 이야기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주의를, 한나 아렌트가 고대 그리스의 참다운 민주주의로 내세운 이소노미아를, ‘세계공화국’을 외치는 가라타니 고진의 어소시에이션을, 제국에 맞서 다중민주주의를 제시한 네그리와 하트의 아나키즘을 예견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현대 사회의 도전과 그에 대한 대안적 사상을 그려볼 수 있다.

―김성우(상지대 파인드칼리지 교수)

 

♦ 파스칼은 우리의 세계가 우리의 이성적 의사결정이 아니라 ‘숨은 신’(Deus absconditus)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라 말한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처럼 나의 의지에 따라 단독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믿지만 사실상 이 세계가 만든 어떤 믿음의 틀에 사로잡힌 육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오인 혹은 환상에 불과하다. 슈티르너의 책 유일자와 그의 소유는 바로 그러한 환상에 대한 비웃음이자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우리를 얽매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을 말하는 책이다. ‘유일자’(der Einzige)는 그러한 비웃음과 저항의 근거가 되는 ‘나’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사회가 만들어내는 종교적, 도덕적, 법적 기준 또는 국가관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슈티르너가 보는 ‘나’는 ‘구체적인 나’로서 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추상화될 수 없는 ‘나’이다. ‘나’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며 유일하다. 또 그러한 유일자의 자유며 생명, 주권은 나 자신에게 고유하며 나만이 소유(Eigentum)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 ‘인종’, ‘국민’ 등 보편 추상화된 이름으로 규정하거나 도덕과 규범 등을 적용하려는 것은 그 자체로 ‘나’에 대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슈티르너의 책이 ‘사나운 책’이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것이 설령 신이든 국가이든 또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 믿어왔던 것이든 ‘나’의 유일성을 침해하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기성의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일탈이고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에 ‘잘못’(tort)이다. 그래서 이 책은 ‘위험한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변화의 물줄기는 그 잘못으로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독해가 까다롭고 도발적인 제안에 순간 멈칫하게 만들지만, 지금의 ‘나’가 그리고 ‘우리’가 더욱 자유로울 수 있는 철학적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벅찬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김종곤(건국대학교 교수)

 

♦ 슈티르너로 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우리의 시선을 과거 한반도로 돌려보자. 그리 멀진 않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적 강점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10여 년이 지난 1920년대 일군의 혁명적 운동가들이 낯선 인물들을 식민지 조선의 담론장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맑스, 크로포트킨 등과 함께 막스 슈티르너의 이름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 필요한 서구 변혁이론의 적극적인 소개와 수용 속에서 막스 슈티르너도 그렇게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물론 당시의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다양한 범사회주의 이론들이 맑스주의로 전일화된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무산자 계급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실현하기 위한 슈티르너의 외침은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민중의 궁핍한 생활을 가져온 봉건잔재와 식민지적 모순의 타파, 나아가 지배계급의 타락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 등의 시대적 요구 등이 슈티르너 철학의 소개를 불러 온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럼 다시 우리의 시선을 2023년 한반도로 가져오자. 과거 100여 년 전 식민지 조선에 울려퍼진 슈티르너의 치명적인 제안은 그 생명력을 조금도 손실치 않은 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전세계적으로 만연한 자본주의의 억압성 심화, 동아시아를 짖누르는 신냉전과 분단체제의 폭력성 존속, 한국사회 내부의 혐오와 적대심 증폭 등은 자유로운 주체의 존립을 가로막는다. 진정한 나로 결코 살아갈 수 없게 된 우리들의 실존은 이미 특정한 시기와 세대를 넘어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결코 절망만을 할 수 없다. 반격이 필요한 시점이 왔다. 우리들에게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그 반격을 가능할 수 있게 하는 철학적 사유가 존재했음을 상기하자. 슈티르너의 철학을 오직 단 한가지의 단어로 집약시킨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유’일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슈티르너 철학은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필요한 철학적 사유이다. 슈티르너와 함께 유일자의 자유로운 발걸음을 시작하자.

―박민철(건국대학교 교수)

 

♦ 올해 내가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몇 번씩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느낀 점은 슈티르너의 사상은 이 시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무력한 청년들의 정신세계를 강화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이 그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르다. 나는 나답게 살 것이다. 어떤 조직이나 대중의 취향에 맞춰서 살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가능성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역시 내 안에 어떤 힘을 숨어 있는지 나 스스로도 모른다’고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런 사람들이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읽으면 더 많이 나답게 되고, 한 개인으로 살아 갈 용기가 생길 것이다. 슈티르너의 말처럼 개인은 언제나 자신을 드높임으로써만 개인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개인이다. 이 책을 통해서 개인은 더 많이 개인이 되고, 개인의 영역을 확장시켜서 늘 그 누구도 이용당하지 않는 유일한 개인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읽으면서 막스 슈티르너에게 감동을 받아, 그를 통해서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은 최악의 상태다. 슈티르너가 원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위대한 유일자가 되는 것이며,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각자의 독특한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샤오체텐(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석사)

 

♦ 바야흐로 무기력의 시대이다.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개개인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모든 동력을 잃었다. 더 이상 새로운 종류의 움직임을 상상하긴 어렵다. 곧 해변을 덮칠 거대한 파도 앞에서 저항이나 탈주라는 행위가 과연 가능할까? 비명을 지른다고 한들 들리기나 할까? 모두들 불안해하면서도 휩쓸려 가기만을 기다린다. 외부에서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통제와 폭력에 맞서 각자 자기 자신만의 영토를 확립해야 한다. 그것은 생존이라는 기본권과 연결되기에 오늘날 세계에 던져진 사람들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드러나는 막스 슈티르너의 가르침이 무기력에서 벗어날 훌륭한 동기부여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다고 파도를 잠재울 수는 없다. 다만, 이 책은 어쩌면 파도가 사실 환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그 의구심의 이름은 희망이다. 그리고 환영이 사라진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순전히 나와 당신에게 달려있다.

―곽장훈(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 위대한 철학자는 불멸한다. 오늘날 우리 언어로 행해진 ‘막스 슈티르너’의 부활은, 시대와 사회의 문제가 슈티르너를 요청하고, 또 슈티르너가 그 문제에 적절한 답을 던지기에 행해졌을 것이다. 그의 유일자 사유는 대중으로 묶어진 채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한 ‘우리’ 시대의 과제와도 조응한다. 현대인들은 분명히 ‘나’임에도 동시에 ‘어떤 것’으로 포섭되는 탓에, 자유롭지도 안정되지도 못한다. 이에 그는 나를 얽매는 환상들을 파괴하라 말한다. ‘우리’는 자유로워진 ‘제각각의 나’들이 되어야 한다. 지금도 이 사회에는 ‘나 자신’은 물론 내 곁의 ‘유일한 나’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해 혐오와 차별이 만연해 있다. 드디어 슈티르너 번역이 이루어진 이 시점에, 그가 부르짖은 ‘유일한 나’들과 그들의 ‘자유로운 연합’의 세계를, 그리고 서로 다르기에 소중한 ‘나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답하는 ‘애정과 이해의 세계’를 꿈꿔볼 때이다.

이 저술은 그가 얼마나 ‘시대를 초월한 인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시대가 열광하는 현대 철학자들의 지적 풍토를 누구보다도 앞서,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참된 해방과 자유를 꿈꿔본 이에게, 슈티르너의 사유에 빠져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공간과 시간을 넘어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분들이 많다. 물론 막스 슈티르너도 이에 해당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연구와 번역으로 후속 세대의 꿈을 돕고 응원해주시는 박종성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올린다.

―안성혁(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 “그대는 생각 세계의 중심”이라는 슈티르너의 말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계는 내가 보는 대로 구성된다는 것을 인정하면 내가 가진 욕망을 더 분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를 이끄는 어떠한 관념이 있다고 전제하면 나는 의사 결정을 할 때에 내 욕망이 반영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세계가 각자의 경험지평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타인과 의사소통을 할 때에 모두가 나와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는 식의 오만함을 보일 가능성도 낮아지겠죠. 결국은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상이 부재함에 따라 각자의 속성이 존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논리에서 생각해 볼 때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산출하게끔 만드는 사회적 조건이 구성될 필요가 있으니 ‘개성 존중’의 유용성을 의심하는 독자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독일어 원전 번역본으로는 이 책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새흰(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 아나키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드디어 독일어 원문 번역으로 우리에게 찾아왔다. 이 책을 우리에게 전해준 박종성 번역자와 마르크스 공부를 함께하며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을 때만 해도, 그저 슈티르너는 낯설고 위험하며 공상적인 사상가라는 편견도 가졌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책에서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을 정리해 역사 유물론을 확립하면서 당시의 독일 철학 이데올로기가 관념과 망상을 걷어내면 모든 현실적인 억압과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헛된 기대 속에서 그저 급진적인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비판의 대상이 바로 슈티르너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이제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를 꿈꾼다면, 과연 그때의 연합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슈티르너처럼 고유한 유일자인 개인들을 억압하는 국가 같은 질서(아르케)에 대항하면서도, 그 고유한 유일자 개인들이 공동으로 함께할 수 있는 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아나키즘은 물론 이런 억압의 아르케를 드러내며 저항할 것을 촉구한다. 그럼에도 이때 각각의 고유한 유일자 개인들은 아르케에 사로잡히지 않은 그 어떤 무언가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창조해낼 수 있을까? 이제 슈티르너와 마르크스의 지향점을 함께 고민해 볼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우리들에게 비로소 이런 논의를 시작할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다.

―조은평(건국대학교 철학강사)

 

♦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 그를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이 책에서 당대의 종교, 철학, 정치 사상에 대한 전면적 거부와 비판이라는 무자비함을 보인다. 현존하는 모든 정신의 지배와 감히 맞서 싸우려는 탓에 주류 사상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언더독, 슈티르너의 급진성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지켜보고 싶은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슈티르너의 유일자 철학은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꿰뚫는데, 그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실천으로 나아간다. 슈티르너는 개개인이 비동등하다는 사실로써만 동등한 유일자임을, 따라서 이미 그의 바깥에 있는 관념에 복종하는 대신 진정으로 자기의지에 의해서만 살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삶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과 같다. 우리 존재는 발 디딜 곳 없이 위태롭게 휩쓸리고 있고, 작은 섬이라도 발견하면 당장 그곳으로 헤엄쳐 가고 싶을 것이다. 이처럼 존재의 근원적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안전한 곳에 머무르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고정된 관념의 섬에 우리 존재를 가두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다. 유일한 개인으로서 살아갈 용기를 얻고자 하는 나와 비슷한 청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고주연(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 철학하는 사람들이 갖는 공부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마음 한편에, 아니 요즘 식으로는 뇌구조 한편에 결핍이란 단어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자기가 갖지 않은 어떤 것을 사상가를 통해 채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슈티르너의 주요한 사상적 궤적으로 아나키즘이나 헤겔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언급하지만, 내가 보는 그의 사상의 기본은 실존주의다. 내가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不惑의 깔딱 고개를 넘길 거부하는 슈티르너의 자기 고백서로 읽은 이유다. 不動心의 숙제는 而立을 지난 모두가 꿈꾸는 유일한 마음이지 않은가.

“나는 사랑하기로 되어 있다.” 아울러 나는 슈티르너의 글 속에서 괴테를 본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신을 니체가 죽였다고 생각하는데, 일찍이 현정복음 1장에는 “…괴테가 마침내 신을 피해 동정녀 그레첸을 통해 헤겔과 쇼펜하우어를 낳고…쇼펜하우어가 베를린에 사로잡혀 갈 때에 슈티르너를 낳고 슈티르너가 열두 아들을 낳았으니 그 다섯째가 니체다.” 라고 쓰여 있다. 헤겔을 신학과 어떻게든 연결하려 애쓰는 애비 애미도 모르는 연구자들은 반성하시라. (코찡끗) MY oNe and Only LOVE를 떠올리는 제목에 혹해서라도,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책을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의 같은 30대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읽고 나면 유일이라는 단어와 소유라는 단어의 무거움을 實感할 것이고, 그의 우유를 팔아주지 않은 사람들을 나와 함께 원망할 수 있으리라.(나는아직비쥬얼30대) 내가 아는 번역자는 매우 의지가 약하고 의존적인 인물인데, 이 어렵고 주체적인 작업을 그가 해냈다. 남은 것은, 슈티르너가 상하기 전에 얼른 많이많이 파는 일. 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럼, 이 빌어먹을 “끊임없는 자기광고(Werben)를 위하여 건배!”

―인현정(이화여자대학교 철학강사)


출처: 알라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2478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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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우철 교수의 「『자본』의 변증법적 모순구조」(1993)에 대한 논평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노동력 소유자의 주체는 노동력 사용자의 주체인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본을 이해하는 열쇠이다.1

 

박종성(건국대, 한철연 회원)

♦ 이 글은 『시대와 철학』 제33권 4호(2022년 겨울호, 12월 31일 발간)에도 기고글로 동시 게재합니다.

 

이 글은 고(故) 김우철 교수의 「『자본』의 변증법적 모순구조」(1993)2에 대한 논평이다. 먼저 김우철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첫째, 『자본』에 적용된 변증법적 방법의 두 가지 문제를 살펴본다. 이 두 가지 문제의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변증법적 모순과 형식 논리적 모순의 구별, 변증법과 유물론의 관계(‘중층적 모순’)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자본의 내적 논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본의 내적 논리 규명의 이론적 과제는 본질과 현상, 추상과 구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문제는 모순이라는 주제로 압축된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의 긍정적 이해 속에서 그것의 부정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모순의 인식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우철 교수는 둘째, 『자본』의 서술에서 ‘논리적 모순’의 지위를 살펴본다. 맑스가 자본의 일반 정식, 즉 ‘화폐-상품-화폐’(좀 더 분명히 말하면 화폐’일 것이다. – 논평자)를 처음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자본의 모순규정을 주장한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할 수도 없고 또 마찬가지로 유통에서 발생하지 않을 수도 없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해야 하는 동시에 유통에서 발생해서는 안 된다.”

 

위 인용문은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다. 형식 논리학의 모순은 ‘A는 (A인 동시에) A가 아니다’ 혹은 ‘A는 B인 동시에 B가 아니다.’ 위 인용문은 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자본의 모순규정은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3으로 위 문장의 논리적 모순은 해소된다.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인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에 주목해야 한다.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는 동시에 따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이지만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력의 ‘사용가치’이다. “노동력이 그 자체 상품이 되고 이 특수한 상품의 경우 자신의 교환가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용가치가 바로 교환가치를 창조하는 힘이라는 데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노동력의 가치 크기는 자신이 사용되는 데서 창조되는 가치 크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화폐-노동력의 교환에서 가치법칙(등가교환)을 따르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인 반면, 가치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은 노동력의 ‘사용가치’, 곧 생산과정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가치이다. 따라서 위 인용문은 현상적으로 ‘A는 B인 동시에 B가 아니다.’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A’는 B이고 A”는 B가 아니다.’의 구조이다. 즉 자본의 ‘논리적 모순’은 새로운 탐구로 이행하기 위한 문제 제기이다. 노동력의 가치와 사용가치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전제하지 않으면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상호제약 관계이다. 그러니까 교환과정에서 등장하는 ‘상품’은 가치를 갖지 않고서는 사용가치로 실현될 수 없으며 또 사용가치를 갖지 않고서는 가치로 실현될 수 없다.

노동력의 사용가치(A’)와 가치(A”) 사이에는 상호제약적, 내적 연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용가치와 가치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결국, 변증법적 모순은 형식논리의 언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없다. 다시 말해 A’와 A”의 내적 통일성은 동일성(A)으로 환원될 수 없고 단순히 상호 무관한 것들(A와 B)도 아니다. 그래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모순을 정식화한다.

 

“공속해야 할 내적 필연성과 상호무관한 자립적 존재는 이미 모순의 기초이다.”

 

그래서 자본의 모순은 궁극적으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와 사용가치가 상호종속적인 동시에 상호자립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왜 노동의 이중성(사용가치, 가치)은 상품교환 사이에서 모순으로 정립되는 것인가?

김우철 교수는 이러한 점을 살펴보기 위해 셋째, ‘상품의 모순과 그 전개과정’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바로 사용가치와 가치의 모순이다. ‘가치’는 상품을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위선으로 가득 찬 매우 기묘한 물건”으로 만든다. 그러나 “가치 대상성에는 한 조각의 자연 소재도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가치란 무엇인가? “노동생산물의 가치 관계는 노동생산물의 물리적 성질이나 그로부터 생겨나는 물적 관계와는 절대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일 뿐이며 여기서 그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는 사물들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상품가치 속에 표현되고 있는가? 구체적 유용 노동은 상이한 형태인 추상적 인간 노동(교환의 기초, 사회관계의 기초)을 매개로 해서만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다.

이제 모순의 실현과 해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용가치로부터 가치가 완전히 자립된 형태인 화폐는 자신의 고유한 기능(가치척도, 유통수단, 지불수단)에서 볼 때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위한 사용가치를 갖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생산자의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자가 바로 화폐이다. 화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화폐는 그 자신 상품으로서 어느 누구의 사유 재산으로 될 수 있는 외적인 물체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힘이 개인의 사적인 힘으로 된다.”

따라서 자본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화폐-상품-화폐’에서 사용가치와 가치의 상호공속성은 가치에 대한 사용가치의 종속으로 의미가 바뀐다. 그래서 화폐는 “과정 전반을 포괄하는 주체”이자 자기 매개적 주체이며, 자신의 대립물을 자기 바깥에 갖지 않는 ‘절대자’이다. 이제 화폐는 한편으로 살아 있는 노동을 지배하는 가치, 곧 과거 노동이 자본가 속에서 인격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단순한 대상적 노동력, 곧 상품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하여 김우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논의를 결론짓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오로지 자본의 통제와 주도 아래에서 발휘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자본의 내재적 생산력처럼 나타난다.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이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물신주의, 이것이 바로 자본이 이룩한 업적이다.”(209쪽).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이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노동력 소유자의 주체는 노동력 사용자의 주체인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을 이해하는 열쇠일 것이다.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된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을 다시 전도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박종성 지음

가치가 삶의 목적인 이곳에서

사용가치가 삶의 목적인 그곳으로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인 곳으로

 

추상적 인간 노동이 사회관계의 기초가 되는 곳에서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관계의 기초가 되는 곳으로

 

추상적 인간 노동을 매개로 해서만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 곳에서

추상적 인간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아도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 곳으로

 

노동력의 가치가 사용가치를 종속하는 곳에서

노동력의 가치와 사용가치가 서로 함께 하는 곳으로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

사물들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는 곳에서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

인간들의 관계라는 현실적 형태를 취하는 곳으로

 

판매를 위한 구매가 유통과정인 곳에서

구매를 위한 판매가 유통과정인 곳으로

 

자본으로서의 화폐가 지배하는 곳에서

화폐로서의 화폐가 지배하는 곳으로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곳에서

산 노동이 죽은 노동을 지배하는 곳으로

 

모든 생산자의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자가 지배하는 곳에서

 

그렇지 않은 곳으로,

 

그곳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고(故) 김우철 교수(1960 ~ 2021.12.09)

슈티르너의 『유일한 사람과 그의 소유』를 읽기 전에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슈티르너의 유일한 사람과 그의 소유를 읽기 전에

 

박종성(한철연 회원)

 

아직은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한글본이 나오는 날을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슈티르너의 글을 읽을 때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인 ‘der Mensch’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글 속에서 저 단어는 고정된 하나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슈티르너는 ‘der Mensch’를 이중적 의미로 사용하고 이러한 이중적 의미에서 대립의 지점을 포착하고 그로부터 자기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그 대립을 역전시키고 있다. 전형적 변증법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단어는 중요하다. 그가 청년을 비유로 들어 관념론의 시기를 다루는 글을 보자.

 

순수한 생각을 밝히는 것, 혹은 순수한 생각을 신봉하는 것, 그것은 청년의 즐거움을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진리, 자유, 인류, 인간(der Mensch) 등과 같은 생각의 세계에 있는 모든 빛나는 자태는 청년의 영혼을 계몽하고 열광케 한다. (12쪽)

 

먼저 관념론의 시기를 다루는 저 구절에서 ‘der Mensch’는 어떤 뜻일까? 함께 쓰인 단어들을 보자. 그것은 ‘진리, 자유, 인류, 등과 같은 생각의 세계’, ‘순수한 생각’이다. 그러니까 ‘der Mensch’는 현실이 아니라 이상이고, 구체가 아니라 추상이고, 개별이 아니라 보편이며, 존재가 아니라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슈티르너가 원문에서 사용하는 단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슈티르너가 ‘der Mensch’의 정관사를 강조하면서 쓸 때, 그때 인간은 추상적, 이상적 인간을 의미한다. 원문에서 ‘der Mensch’는 정신, 이상, 인간 일반, ‘인간이란 본질’, 인간의 본질, 유령 같은 나, 참된 인간, 더 높은 본질, 유령, 허깨비, 신성한 것, 고정관념, 유적 존재와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대립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재밌게도 같은 단어이다.

 

-자유롭게 된 것은 저마다 다른 인간이 아니라,(오로지 저마다 다른 인간은 인간(der Mensch)이다.(121쪽)

 

위 문장에서는 같은 단어 ‘der Mensch’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슈티르너는 대체로 ‘인간’(Der Mensch)을 추상적 인간을 의미할 때 사용한다. 그때 ‘인간’이라고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관사를 강조하면서 쓴 ‘ 인간’(Der Mensch)은 구체적 인간을 의미하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der Mensch’는 개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인이라는 것은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사람이 ‘der Mensch’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der Mensch’는 앞서 인용했던 추상적 인간과는 대립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제, ‘der Mensch’라는 말은 거꾸로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추상이 아니라 구체이고, 보편이 아니라 개별이며, 본질이 아니라 존재이다. 원문에서 구체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개인, 개별, 어떤 인간, 나, 사람, 인간들 등으로 쓰고 있다.

위의 내용을 기억하면서 정리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다.

 

위와 같은 내용, 곧 모순, 대립의 지점을 아래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인간(der Mensch)이 인간들(die Menschen)에 맞서고, 또는 그 인간들이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Unmenschen)에 맞선다.(152쪽)

 

지금까지 ‘der Mensch’를 대체로 인간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의미는 앞서 설명하였듯이 추상적 인간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der Mensch’가 인간과 대립되고 모순되는 내용을 이 단어가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슈티르너는 이 지점을 인간에 대립하는 명제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 인용문에서 정관사를 그대로 두고 번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슈티르너는 단수와 복수의 대조를 통해 추상적 인간과 구체적 인간을 대립시키고 있으므로 정관사를 그대로 두고 옮기는 것이 더 명확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 인간’은 ‘ 인간들’과 대립적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 인간’은 추상적 인간이고 ‘ 인간들’은 구체적 인간이다. 인간은 인간들이 아니고,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조금 더 ‘테제’와 ‘안티테제’의 내용을 추가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이다.=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이제 ‘진테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자 이제, 그러한 발견의 결과로 얻은 이익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인간을(den Menschen) 기독교 역사와 인류의 종교적 혹은 이상적 노력이 마침내 발견했던 성과로 생각하도록 하자. 자, 인간은 누구인가? 이노라! 인간은 기독교의 결말이자 결과이다. 나로서의 인간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자 이용하는 재료이고, 자기희생의 역사 이후의 향유의 역사이며, [198]인간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역사이다. 인간이 보편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나와 자기다운 사람이 정말로 보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최고로 중요한 자기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테제와 안티테제를 추가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다.=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다.=인간은 나이다.=인간은 보편이다.=나는 인간다운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이다.=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나는 나로서의 인간이다.=나는 보편이다.

진테제: 인간은 나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나로서의 인간이다.=나로서의 인간이 보편이다.=나는 인간다운 인간이면서 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오로지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현실의 인간이다.

 

슈티르너는 진테제의 근거를 ‘나로서의 인간이 보편’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최고로 중요한 자기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현실에서 그럴까? ‘나로서의 인간’은 자기다운 사람(Egoist)이다. 자기다운 사람은 개인이고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면서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은 “오로지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현실의 인간”으로 해소된다. 이상으로서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슈티르너가 ‘der Mensch’라는 단어를 통해 모순, 대립을 설정하고 다시 그 대립으로부터 종합하는 사유방식을 통해 기존에 지배적이던 사유 틀을 깨부수려는 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대립은 인간으로서의 인간과 나로서의 인간이다. 전자를 강조하면 보편, 추상, 본질, 동일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우위에 두는 것이고 후자를 강조하면 개별, 구체, 존재, 차이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우위에 두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der Mensch’라는 말을 통해,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말장난을 통해, ‘der Mensch’로 익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익살, 조롱, 비웃음은 권위주의와 대항하는 힘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책 전체에 퍼져 있다. 슈티르너는 자신의 시대를 지배하는 권위주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 비웃음, 조롱, 익살로 저항한다.

 

내가 나의 참된 행복(Heil)을 어떤 것, -곧 ‘신성한 것’(Heiliges)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38쪽)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다. 무엇이 어이가 없는가? 유사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이가 없는가? 다른 어처구니없는 것은 없는가? 행복(Heil)을 ‘신성한 것’(Heiliges)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어처구니없게 만들기 위하여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지배적 담론을 유사한 단어를 통해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것이 돋보이고 있다. ‘신성한 것’은 보편, 추상, 본질, 동일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범주를 대표하는 것이 민족, 국가이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 <타인의 삶>이 떠오른다. 국가, 민족을 위해 살아온 그가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점원이 책을 누구에게 선물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주인공 ‘비즐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은 나를 위한 것이요.”

에고이스트의 또 다른 의미와 나답게 산다는 것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에고이스트의 또 다른 의미와 나답게 산다는 것

 

박종성(한철연 회원)

 

우리는 에고이스트의 의미를 흔히 일반적으로 ‘이기적인 사람’,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이타주의자’와 대립하는 의미로 알고 있고 이러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에고(ego)와 같은 의미로 ‘egoistisch, persönlich, eige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에고와 관련된 의미는 ‘나다운, 나답게, 자기다운, 자기만의, 자신의’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에고이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눈이 필요하다. 그는 일반적이고 굳어진 개념보다는 새로운 의미로 에고를 이해하고 있다.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살아가는 동안 자기다움이 짓눌리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살면서 한번쯤 “너 참, 인간답지 않다.”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또는 이런 말을 남에게 해본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슈티르너가 보기에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인간답지 않는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Menschlichen)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다운 사람과 자기다운 사람(Egoist)을 대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답지 않는 인간(das Unmenschliche[unhuman])이 자기다운 사람이다. 또한 자기다운 사람은 유일자(Einzige)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그가 사용하는 아래의 문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유일자로서의 자기다운 사람(das Egoistische als das – Einzige)”(162), “인간답지 않은 인간, 즉 자기다운 사람”(142) ‘인간답지 않은 인간’, 혹은 ‘자기다운 인간’(egoistischen Menschen)(376)

 

이제 분명한 것은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운 사람’이란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에고이즘도 이기주의가 아니라 자아주의로 번역하였다. ‘자아주의’는 ‘자기 찾기’, ‘자기에게 유용함’(376)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는 자아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주의와 사제직의 전쟁, 현세에 마음이 있는 사람과 성령에 마음이 있는 사람의 전쟁”(401) 슈티르너가 보기에 ‘인간다움’은 어떤 정신이다. 자기다운 사람은 정신을 ‘덧없음’으로 과소평가한다. 이러한 사람은 정신을 덧없는 것, 유한한 것, 무상한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기답게’(egoistisch)(350)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너의 모든 힘, 너의 능력을 가져와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것이다.(350) 그리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알고 있는”(208) 것이다. 자아주의는 나다움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자아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개성이라든가 개별화(Einzelheit oder Vereinzelung)에 거주하는 일치하지 않은 비동등성과 자기다운 비동등성”(108). 결국 자기답게 사는 것은 개성과 개별화 즉 비동등성, 곧 차이에 대한 인정이다. 나아가 자기다운 사람은 관념의 어떤 도구 혹은 신의 그릇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말을 확인해 보자.

 

“자기다운 사람은 자신을 관념의 어떤 도구 혹은 신의 그릇으로 간주하지 않고, 어떤 소명도 인정하지 않으며, 인류가 더 발전하는 목표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상상 따위도 하지 않기에 그러한 목표를 위해 눈곱만큼도 기여할 생각이 없다. 그는 그저 스스로의 삶을 살아 나가고 펼쳐 나갈 뿐, 그로써 인류가 잘될지 나쁘게 될지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339)

 

과연 우리는 관념의 도구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자아의 그릇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관념의 도구, 신의 그릇으로 살아가는 것, 인류를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은 자기다운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감정을 구분하면서 자기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이는 감정이 나를 고취하였던(eingegeben) 것인지, 단지 감정이 나를 자극하였던(angeregt) 것인지 이다. 나를 자극하였던 감정들이 자기 자신의 감정, 자기다운 감정들이다. 왜냐하면 나를 자극하였던 감정들은 나에게 감정을 각인하지 않았고, 받아쓰거나 따라하도록 불러주지 않았으며,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70)

 

그러니까 고취하는 감정과 나를 자극하는 감정을 구분하면서 후자를 자기다운 감정으로 간주한다. 그의 글에서 고취하는 감정을 확인해 보자. 그것은 어떤 현실의(wirklich) 내가 어떤 “자유로운 시민”, 어떤 “국가의 시민”, 어떤 “자유로운 혹은 진정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국가를, 국민을, 인류를 그리고 그 밖의 유사한 모든 것을 자기 내면에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그럴싸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어떤 낯선 나’를 받아들여서,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어떤 낯선 나(eines fremden Ichs)를 위한 헌신’을 받아들여서 진리를 보고 내 자신의 현실성(Wirklichkeit Meiner)을 본다고 그럴싸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247) 민족의식이 고취되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고취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들림이다. 그것은 미친 것이다. “만약 ‘신들림’(Besessenheit)이라는 말이 당신을 불쾌하게 한다면, 그렇다면 이 말을 선입관(Eingenommenheit)1이라고 부르자, 그렇다, 그 이유는 정신이 당신을 사로잡기(besitzt) 때문이고 모든 ‘고취’(Eingebungen)는 정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열광(Begeisterung) 그리고 황홀(Enthusiasmus)이라 부른다. -부진하고 철저하지 못한 방법으로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완전한 황홀(Enthusiasmus)은 –광신(Fanatismus)이라 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48)

잠시 ‘Begeisterung’ 단어에 주목해 보자. 맑스는 <자본>에서 “노동의 불길이 죽은 사물에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고’(begeisten)”(강신준, 292-293)라고 쓴다. 맑스가 사용한 이 단어는 헤겔도 사용하였다. 메럴드 웨스트팔에 따르면 ‘begeisten’는 헤겔이 만든 단어이다. 학문적 노고를 통해 진리에 이르는 정신적 활동이 ‘begeisten’이다. 이와 달리 열정에 휩싸인 상태{begeistern(Begeisterung)}는 진리를 인식할 수 없는 열정에 휩싸인 상태, 열정에 휩싸여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슈티르너에게 이 단어는 앞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들린 사람(Besessener)과 연결된다. ‘인간다운 사람’이라는 관념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신들린 사람, 미친 사람이다. 신들린 사람과 대립하는 사람은 유일한 사람, 자기다운 사람이다.

자기다운 사람과 사랑의 문제를 살펴보자. “자, 어떤 개인에 자기다운 충동(Trieb)이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을 하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가족을 공경’한다.”, “이와 반대로 그의 혈관에서 자기다운 피가 충분히 이글거리며 부글부글 끓는다면, 그는 가족에 ‘범죄자’가 되는 것을 더 좋아하고 가족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242) 슈티르너가 보기에 자기다운 사랑이 아닌 것은 “자발적 사랑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본질의 자기 사랑”,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다운(egoistisch)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다운 사랑이다.”(341)

자기다움과 국가의 관계는 어떨까? 국가는 신성하지 않는 사람을 야만인, 자연스러운 인간, ‘자기다운 사람’으로 간주한다.(263) 그래서 국가는 욕망하는 사람을 길들이고자 애쓴다. 국가는 구속이 없는 욕망을 발산하는 사람에게 “자기다운 사람”(egoistische Mensch)이라고 욕한다.(350) 슈티르너는 자아주의와 인간다움(Humanität)은 같은 의미이었어야만 했다(200)고 아쉬워하며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슈티르너는 새로운 인간다움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새로운 ‘인간다움’은 자기다움이다. 자발적이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더 높은 본질에 신들리지 않은 사람이다.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움이고 에고이즘은 자아주의이다. 자기다운 사람이 유일자이며, 더 이상 인간다움이 아니라 자기다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아래의 글은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슈티르너의 ‘기도’라고 비꼰 부분인데, 필자는 자기다운 사람의 ‘선언’이라고 본다. 원문은 시의 형식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다운 사람의 ‘선언’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시의 형식으로 변형하였다. 아래의 글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 결연한 용기로 자기 자신에 등을 돌리면서, 동시에 평온을 어지럽히는 비판가를 외면하고, [162]비판가의 항의를 건드리거나 다루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어떨까? “당신은 나를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라고 부른다.”고 비판가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보기에 실제로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외다.

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외다. 왜냐하면 오로지 당신이 나를 인간다운 사람과 대립시키기 때문이외다.

내가 내 자신을 이러한 대립에 매료되도록 하는 한에서만, 나는 내 자신을 경멸할 수 있었나이다.

나는 경멸당할만한 사람이외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보다 나은 자아를 내 밖에서 찾았기 때문이외다.

나는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인간다운 인간’을 꿈꾸었기 때문이외다. 나는 인간다운 인간의 ‘참된 자아를 갈망하고 항시 ‘가엾은 죄인’으로 남아 있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을 닮았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만 나 자신을 생각했나이다.

나는 충분히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고 충분히-유일한 사람도 아니었나이다.

바로 지금 나는 나 자신이 인간답지 않는 인간으로 여겨지기를 중지하나이다.

그리고 나를 인간에 비교하여 측정하거나 측정 당하는 일을 그만두고, 나보다 높은 어떤 것도 인정하기를 중단하나이다.

그럼 –잘 가시게, 인간다운 비판가여!

나는 이제까지 단지 인간답지 않는 인간에 불과했나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더 이상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 아니외다.

오히려 유일자이외다.

그렇다, 당신이 몹시 싫어하는, 자기다운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다운 사람은 인간다운 사람과 인도적 사람, 그리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람에 견주어 자기다운 사람 그 자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외다.

오히려 자기다운 사람은 –유일자로서의 자기다운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다운 사람 그 자체를 평가하나이다.”

글의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인간답지 않은 인간의 인간성은 무엇인가?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다음에 쓸 글의 주제는 “그렇다면 나답게 사는 것은 혁명일까 반역일까?”이다.)


  1. 이 말은 54쪽, 78쪽에 나온다. eingenommen은 ‘편견에 사로잡힌’이라는 형용사이다.

노동력(Arbeitskraft)과 능력(Vermögen) 그리고 에고이스트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노동력(Arbeitskraft)능력(Vermögen) 그리고 에고이스트

 

박종성(한철연 회원)

 

화폐에 대한 갈망을 추구했던 탐욕스러운 사람은

모든 양심의 독촉, 모든 명예심, 모든 관대와 모든 동정(Mitleid)1을 부인한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모든 배려를 고려하지 않는다. 탐욕이 그를 쓸어간다.(64)

 

맑스는 1844년부터 국민경제학을 공부했는데,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1857-1858년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에서 자본가가 지불해서 얻은 상품은 노동자의 능력(Vermögen)이며, 일종의 잠재성 내지 재능이라고 했다.2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은 자본의 착취의 비밀을 밝히는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증식의 비밀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 (1869)에 이르러서야 노동능력(Arbeitsvermögen) 대신 노동력(Arbeitskraft)이란 말을 사용한다. 능력(vermögen)과 힘(kraft)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mögen은 잠재성을 가진 힘이고 kraft는 잠재성이 없고 특정한 방향으로 행사되는 일정한 양의 힘이다. 니체는 kraft(force)와 구분해서 애용한 힘(Macht)도 mögen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mögen은 그리스어 뒤나미스(dynamis)나 라틴어 포텐차(potentia)와 통한다.3

그렇다면 맑스가 가혹하게 비판했던 슈티르너는 이 단어들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그러나 내 능력(Vermögen)은 단순히 내 노동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내 노동능력(Arbeitsvermögen)으로 애써 조달하는 얼마 안 되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304]

 

그러나 나는 노동하는 것을 “당신의 능력(Vermögen)을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부르지 않는다.[305]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먼저 능력이 노동능력보다 더 다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능력 중에 일부가 노동능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주 명확하지는 않지만 슈티르너는 노동력과 능력을 구분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화폐가치’를 인간의 ‘능력’(Vermöge)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화폐가치는 노동능력의 가치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능력과 구분하여 “노동력”이란 용어를 사용한다.(293) 그런데 그는 노동력의 사용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노동력을 능력과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력의 사용만이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그에게 ‘능력’이란 무엇인가?

 

“네가 할 수 있는(vermagst)것이 너의 능력이다!”(294),

“내가 소유할 능력이 있는(vermag) 것, 그것이 내 능력이다.”(294)

“우리는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물건들을 사용한다.”(377)

 

한마디로 말하면 그에게 능력은 네가 할 수 있고 소유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가능성과 현실성을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가능성과 현실성(Möglichkeit[Possibility] und Wirklichkeit[reality])은 항상 함께 일어난다.”(369)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가능성=현실성=능력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능력이 아닌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어야만 그것이 능력이다.

가능태와 현실태의 고전적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데, 한편으로 현실다운 것은 물질에 대립되는 형상을 뜻하며(모양을 갖춘 대리석), 다른 한편 가능태나 잠재태에 대립되는 활동성 자체를 뜻한다(말할 수 있음과 실제 말하고 있음). 이와 달리 가능성과 현실성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슈티르너에게 가능성, 예를 들어 말할 수 있음이 곧 실제 말하고 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mögen은 그리스어 뒤나미스(dynamis)와 통한다고 했는데, 슈티르너는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 개인들이 소유할 ‘지배’(Herrschaft)를 ‘뒤나미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151)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의미에서 dynamis는 현실태와 대립되는 가능태란 어떤 형상으로 결정되지 않은 경향, 단순한 잠재성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현대에 이르러 잠재력을 뜻하게 되었으면, 능동적 에너지 곧 어떤 현실적 결과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 슈티르너가 지배와 뒤나미스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지배, 곧 현실태는 잠재태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슈티르너의 능력 개념은 단순한 잠재성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결과를 생산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가능성과 현실성을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는 슈티르너는 힘(Macht)과 능력(Vermögen)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노동력과 구분한다.

 

[350]당신은 연합(Verein)으로 너의 모든 힘(Macht), 너의 능력(Vermögen)을 가져와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사회에서 당신은 당신의 노동력(Arbeitskraft)을 사용한다.

 

정리하면 슈티르너에게 능력은 가능성=현실성=힘=뒤나미스이다. 그리고 연합 속에서는 힘, 능력이 발휘되지만 사회에서 사용되는 것은 노동력이다. 그는 사회보다는 연합체를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게 노동력의 사용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자신의 능력, 그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드는 잠재적 힘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연합이 에고이스트의 삶이다. 맑스도 노동능력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곧 온갖 사물(정신적인 것을 포함해서)을 생산하는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다.4 그렇다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력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노동력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유용성을 인정받은 인간의 행위능력, 다시 말해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인간의 생산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인간의 생산능력은 “인간의 전반적 노동능력의 희생을 대가로 일면화 된 전문성”5이 된다. 다면적인 잠재능력 중 특정 재능만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달인의 경지’는 다면적인 잠재능력이 아니다. 슈티르너가 노동력과 능력을 구분한 것도 이러한 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전면적인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은 사회가 아니라 연합이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인간이, 더 정확히 말하면 유일자, 에고이스트가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노동의 현실은 어떠한가? “거의, 아니면 전혀 자신의(eigene) 노동이 아니라, 자본의 노동(Arbeit des Kapitals)과 공순한(untertänig) 노동자의 노동”[125]일 뿐이다. 결국 자본을 위한 노동이지 나를 위한 노동이 아니다. 또한 자본을 위한 노동자의 태도 또한 공순(恭順)한 것인데, 이는 노동자라는 주체를 공손하고 온순한 노동자로 형성하고자 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노동 가치설에 따르면 노동력은 노동자의 소유이다. 그러나 소유는 “돈과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 즉 자본가6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 노동자는 향유를 위해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척도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이런 노동자에게는 교양 있는(gebildet) 정신의 향유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조잡한 오락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양(Bildung)이라는 것은 봉쇄되어 있다.”(131) 여기서도 인간의 다면적 잠재능력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금 현실에서의 노동을 살펴보자. “그는 다른 어떤 사람의 손아귀에서만 노동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이 그를 이용한다(착취한다exploitiert).” “노동이 낮게 지불되고 있는 것이다!”(126) 노동력을 소유한 사람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함으로써 노동력의 사용권, 이용권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가의 것이 된다. 바로 자본가의 노동력의 사용, 이용은 착취이다. 맑스의 언어로 말하면, 잉여가치는 착취와 같은 말이다. 잉여가치의 비밀은 노동력이다. 이러한 상황을 전복시키고자 슈티르너는 노동자의 엄청난 힘을 믿고 있다. 그가 보기에 노동자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파업이다.

 

노동자는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언젠가 그들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소유하게 되었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어떤 것도 그들에 저항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들은 아마 동맹 파업을 하기만 하면 될 것이고,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향유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곳곳에서 발발하는 노동자 소요(Arbeiterunruhen)의 의미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127)

 

에고이즘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는 탐욕스러운 사람(Geizige)”은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다.7 이 구절은 탐욕(Geiz)이라는 점에서 맑스가 자본가를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슈티르너가 보이기에 여러 가지 욕망 중에 “하나의 것(Eins), 곧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의지, 하나의 열정 등등에 다른 모든 것을 거는 그런 사람”8, 곧 “화폐에 대한 갈망(Gelddurst)을 추구했던 탐욕스러운 사람”은 “탐욕이 그를 쓸어간다.”9 이는 자신이 욕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에고이즘은 자율주의인데, 이는 탐욕이 주체가 되어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화폐욕망’(Geldgier)은 ‘병적욕망’이고 ‘자기극복’10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앞서 슈티르너가 화폐에 대해 갈망하는 사람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예로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는 ‘탐욕스러운 사람’을 언급하였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물론 탐욕스러운 사람의 행위는 명확히 자기 이해관계, 자기중심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부유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에고이즘이라 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 사람의 행위는 슈티르너가 거부하는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이다. 그들의 모든 행위와 행동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이 열려 있지 않은,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bornierter Egoismus)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에고이즘과 구분하여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신들린 상태”(Besessenheit)이다.11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은 하나의 목적에 모든 것이 종속되어 있고, 이 하나의 목적은 우리를 고취시키고, 열광시키며, 공상에 빠지게 하므로 그것은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에고이즘은 ‘나’다움이고 자율성이며 자기지배로 볼 수 있다. 자신을 희생하는 에고이즘, 곧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은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다움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자기 지배는 외적이고 내적인 영역이다. 에고이스트, 곧 유일자는 스스로가 타자에 종속되는 것에서 벗어나길 요구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욕구나 목적에 복종시키는 것을 피하길 원한다. ‘관념’에 대한 그의 입장을 들어보자. 어떤 관념이 “내 마음 속에서 점점 더 굳어져 가고 있고(sich etwas in Mir festsetzt) 그것이 용해될 수 없게 된다면”, 그때 나는 “관념의 포로이고 노예, 예컨대 어떤 신들린 사람이 될 것이다.”12 마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신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것처럼 도덕적 사람은 “자신을 선이라는 관념의 도구(Werkzeuge der Idee)”로 만든다.13

이러한 관념에 대한 비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에고이스트가 더 이상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고이스트는 자신을 “생각의 실현을 위한 도구”14로, “관념의 어떤 도구”15로 만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관념과 이념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에고이스트가 실행하는 힘은 “세계의 무리한 요구와 무법행위”를 능가하는 것이고16, “내 본성을 능가하는 ”을 실행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에고이스트는 “내 욕구의 노예”17로 존재하는 것을 벗어나야만 한다. 이것이 나다움을 위해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변형할 수 있다. 자본가는 가치증식의 실현을 위한 도구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화폐에 대한 갈망의 도구이다. 그래서 그들은 관념의 포로이고 노예이며 신들린 사람이다.

나는 어떤가? 당신은 어떤가? 우리는 어떤가?


  1. 경건함을 뜻하는 라틴어 pietas가 어원인데, 타인의 불행한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공감, 전통적으로 철학은 동정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으나, 루소에게 동정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문명화된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원초적 본성이다.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은 이기주의와 이해관계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유대의 가능성을 확립한다, 지배의 욕망을 누를 수 있는 것도 동정이다. 이후 쇼펜하우어가 중요하게 다룬 주제이다.

  2. 칼 맑스 지음, 김호균 옮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그린비, 2007, 266쪽.

  3. 고병권, 『성부와 성자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천년의상상, 2019, 166쪽.

  4. 고병권, 『성부와 성자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천년의상상, 2019, 167쪽.

  5. 카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자본Ⅰ-1」, 길, 2008, 483쪽.

  6. 자본가에 대한 느슨한 정의인데, 맑스의 개념과 비교 가능하다. “화폐소유자는 이 운동[가치의 증식; 옮긴이]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담당자(Träger)로서 자본가가 된다. 그의 몸 또는 그의 주머니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그리고 그 유통의 객관적 내용, 곧 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subjektiver Zweck)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단지 추상적 부를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 두는 한 그는 자본가(Kapitalist)로 기능하는 것이며 또한 인격화된 자본으로, 곧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자본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적 이익 또한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이익을 얻기 위한 쉬지 않는 운동만이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이다.”(167f., 강조는 M. H.) 하인리히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1) 이용할 수 있는 화폐의 소유자(Eigentümer) 역시 자본가인데, 그는 오직 이용할 수 있는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어야만verfügen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7. 맑스는 『자본』에서 자본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금욕(Entsagung)의 복음(Evangelium)을 성실하게 준수한다…. 그러므로 근면(Arbeitsamkeit)과 절약(Sparsamkeit) 그리고 탐욕(Geiz)이 그의 주요한 덕목이 되었고, 많이 판매하고 적게 구매하는 것이 그의 정치경제학의 전부가 되었던 것이다.”(147)

  8. 같은 책, 81.

  9. 같은 책, 64.

  10. 같은 책, 379.

  11. Stirner, Max: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82.

  12. 같은 책, 157.

  13. 같은 책, 362.

  14. 같은 책, 385.

  15. 같은 책, 411.

  16. 같은 책, 373.

  17. 같은 책, 374.

나는 나인가? 내가 나라면, 나를 표현하라!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나는 나인가? 내가 나라면, 나를 표현하라!

 

박종성(한철연 회원)

 

 

내가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글을 쓰는가?

아니다, 나는 세계 속 현존을 내 생각에 마련해 주려고 글을 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생각이 당신에게서

당신의 휴식과 당신의 평화를 빼앗을 것이라고 예견할 수 있을망정,

내가 이러한 생각의 씨앗으로부터

가장 피 터지는 전쟁과 많은 세대의 몰락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알망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생각의 씨앗을 뿌릴 것이다.

당신이 하고자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그것은 당신의 일이고 나는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331)

 

 

이 글에서는 맑스의 가치 형태 분석을 차용하여 슈티르너의 인간다움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상품들이 등가형태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듯이, 인간다움이라는 대상성의 힘에 눌려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유령적 대상성의 힘, 가치의 거울이 우리 자신을 재현하고 있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유령적 대상성이라는 이상을 현실화하지 말고, 자기 가치를 표현하는 삶을 위해 고정된 대상과의 관계를 폐지하고 새로운 대상과의 관계, 곧 자아의 자기실현을 창조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라는 명령이 등장한다. 힘의 사용은 소유를 가능하게 한다. 자아의 자기실현은 자기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아가 자신이 자신에게 명령하므로 자유이다.

먼저 슈티르너의 의심을 들어보자. 고정된 대상성을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은 ‘의심’이다.

 

 

보편적 이성이라는 유령적 대상성

 

더 현대다운 철학 혹은 시대가 우리를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의 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 않기 때문에, 더 현대다운 철학 혹은 시대가 자유를 성취 했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94)

 

맑스의 대상성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모든 가치 형태의 비밀인 제1가치형태, 즉 단순한 가치형태는 “xA(상대적 가치형태) = yB (등가형태)”이다. 여기서 등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건들의 물리적 속성이 다른데 같다는 것은 추상노동, 평균적 인간, 추상적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 A는 자신의 가치를 B를 통해 표현한다. 다시 말해 A의 거울은 B이고, B는 ‘대상성’(Gegenstandlichkeit), 곧 ‘가치의 거울’(Wertspiegel)이다. xA = yB; 아마포 20미터= 저고리 1벌이다. 여기서 ‘저고리 1벌’은 ‘유령적 대상성’, ‘가치 영혼’(Wertseele)이다. 맑스는 등가형태를 대상성, 곧 상대적 가치형태가 ‘마주’본다는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대상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략하게 말하면 개인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다. “나는 세계와 마주하여(gegenüber) 더 이상 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사랑이 나를 나타낸다.”(330) 사랑이 나를 나타낸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인간다움=‘추상화된 본질’(197)이라는 의미이고 참된 인간=국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라는 고정관념은 “머릿속에서 ‘유령으로 출몰한다(spukt) 그리고 “가장 괴롭히는 유령(Spuk)은 인간(der Mensch)이다.”(80) 일반적 본질은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A = C 이고 B = C이다. 따라서 A = B인데, 다시 말해 나는 단지 인간일 뿐이고 너는 단지 인간을 뿐이다. 고로 나와 너는 같다.(196)

 

A, B는 개별자, 개인인데 C라는 ‘인간’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한다. 그러니까 ‘인간’, ‘추상적 본질’, ‘참된 인간’ 등등은 맑스의 용어로 ‘유령적 대상성’이고 ‘가치의 거울’이다. 또한 민중들과 국가들을 ‘인류’와 ‘보편적 이성’(allgemeinen Vernunft)으로 변용시키는 것은 노예근성을 더 강하게 생성한다고 비판한다.(267) 자아와 비아의 관계는 역설적이다. 비아가 강해지면 자아는 약해지고 비아가 위대하고 신성하면 자아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 된다. 가치의 거울은 ‘보편적 이성’, ‘인간다운 사회’, ‘인류’, ‘인간다운 가치’이다. 달리 말해 일반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일반적 이성’으로 변용시킨다는 것, 그것은 맑스의 화폐형태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슈티르너가 말하는 변용을 화폐형태의 발생에서 제3형태인 일반적 가치형태와 상응시키면 어떻게 될까?

화폐형태 분석의 제3형태는 일반적 가치형태(Allgemeine Wertform)이다. 이는 아래와 같다.

이전의 가치형태와는 달리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등식 전체의 성격이 변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다시 말해 단순(하나의 상품)하고 통일된(동일한 상품) 표현이라는 점이다. 이는 전개된 가치형태의 무한정성, 잡다함이 해소되고 공통된 어떤 것인 가치, 사회적인 것, 추상노동을 전제한다. 이는 상품 A의 가치표현이 완성되지 않고, 통일성이 없다는 제2형태인 전개된 가치형태의 결함을 극복한 것이다. 맑스의 표현으로는 “다채로운 모자이크”의 결함을 극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개된 가치형태는 동일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신하게 한다. 그런데 동일성을 전제했을 때, 통일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통일성은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나타난다. 이제 특정 상품의 몸으로 현현한 화폐형태가 등장한다. 왕의 출현이다! 왕이 승인하지 않으면 상품사회에서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슈티르너의 용어로 ‘일반적 본질’이라는 통일성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것, 곧 가치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참된 인간’, ‘국민’, ‘인류’, ‘보편적 이성’(allgemeinen Vernunft), ‘인간다운 인간’, ‘인간다운 사회’, ‘인간다운 가치’, ‘유령들’, ‘고정된 대상’, ‘숭고한 신성한 것’(Hochheiligen), 동등성, 신성한 표상(Vorstellung), ‘보편적 인권’, ‘일반적 본질’, ‘추상화된 본질’, ‘현실적 유적존재’(wirkliches Gattungswesen), ‘본질규정’ 등등이다.

 

 

 

새로운 인간성은 이념의 현실화가 아니라 힘의 표현이다.

 

맑스에 따르면, 가치는 금이라는 자신의 동등성, 하지만 ‘머릿속에서 유령으로 나오는’(Köpfen spukt) 것에 불과한 동등성(Gleichheit)을 통해 내보인다.(자본, S. 110–111) ‘인간다운 가치’는 동등성인데 동등성은 인간다운 정신의 동등성(190)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신성한 표상’이라는 ‘이상의 현실화’(411)를 비판한다. 그는 개인들의 존재 이유를 ‘이념의 현실화’(Verwirklichung der Idee)(411)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맑스의 ‘현실적 유적존재’를 비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슈티르너를 그토록 비난한 맑스 또한 계급투쟁이라는 진부한 말 대신, 공산주의를 다시 묘사한다. 공산주의는 더 이상 “현실이 스스로를 가져다가 맞추어야 하는 이상”이 아니라 “현존하는 질서를 폐지해 버리는 현실의 운동”이다. 어쩌면 맑스는 슈티르너를 공격하면서 그와 공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슈티르너는 고정된 대상과의 관계를 ‘폐지의(Auflösens) 관계’(79)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대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정된 대상의 파괴자이자 새로운 대상의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관계는 ‘자아의 자기실현’(Selbstverwertung)(302)이다. 그래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잘 쓰던 말을 다음과 같이 변주한다. “네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Verwerte Dich!)

그러면서 그는 “에고이즘과 인간성(인도주의 정신 Humanität)은 같은 의미”(200)였어야 한다고 아쉬워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국민이라는 것은 내 특성(Eigenschaft)이다. 그러나 인간다움이 내 특성일지라도, 나는 내 특성으로 흡수되어 없어지지 않는다. 나는 내 유일성에 의해 비로소 인간에게 실존(Existenz)을 준다.”(271) 내 특성으로 흡수된다는 것은 나다움이 사라진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다움에서 나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다움에서 비로소 인간다움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동등성(Gleichheit)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오로지 세계보다 상위에 있는 힘(Macht)이고자 하고, 세계를 내 소유로 만들고자 하는데, 다시 말해 세계를 향락할 수 있게 만들고자 한다.”(356) 세계와 내가 교류하는 목적은 향유이다.

잠시 맑스로 돌아가 보자. 단순한 가치형태, 전개된 가치형태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인 상품 A가 자신의 가치를 상품B로 표현한다. 전자가 능동적 역할을 수행하고 등가형태인 상품 B는 수동적 역할을 수행한다.(김수행,<자본>, 60쪽.) 그런데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등가형태를 통해서만 상대적 가치형태의 가치를 재현할 수 있다. 이를 표현적(expressive) 관계가 재현적(representative)관계로 대체된 것이라고도 한다. 슈티르너 또한 이러한 재현적 관계를 표현적 관계로 뒤집어 놓고자 한다. 그는 고정관념에 속하는 ‘소명’보다는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갖고자 한다.(366) 힘의 존재는 분명히 힘의 표현(Äusserung)(366)이다.

 

어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란 이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자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200)

 

힘의 표현은 힘의 사용이며 이는 소유와 연결된다.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소유한 힘만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슈티르너의 저작 제목 『유일자와 그의 소유』을 상기해 보자. 소유라는 의미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을 음미해 보자.

 

네 힘을 사용하라. 물론 이러한 명령(Imperativ)에 다음과 같은 의미가 놓여 있을 수 있다. 곧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과제라는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가장 먼저 자신의 소명을 바라보지 않고 현실적으로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소유한 만큼의 힘을 모든 순간에 모두가 사용하는 것이다.(366)

 

‘명령’의 어원은 ‘명령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imperare이다. 도덕 철학에서 “너는 ∼해야 한다”의 명령 형태를 지닌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이전의 ‘에고이스트 사랑’에 관한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에고이스트는 자기 자신에게만 의무가 있다. 따라서 “네 힘을 사용하라”라는 명령은 자신이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소명이라는 외적 명령이 아니라, 나의 힘은 나의 것이니까 힘을 소유한 자신이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이는 소명이라는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염려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Sorgen)는 자기폐지(Selbstauflösung)”(39)이다. 그의 저작이 출판되고 83년 뒤, 1927년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다”는 인간의 본질적 성격을 ‘실존’이라고 했다.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염려(Sorge)의 방식으로 관계한다는 것, 곧 자신의 본래적이고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염려하는 것이다.

또한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힘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소유한 만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힘은 소유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힘이 미치지 못할 때, 소유는 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 소유를 가능하게 한다. “현실적으로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하는 것”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맥락에서 맑스가 단 한번 언급한 ‘개인적 소유’에 대한 음미가 다시금 필요하다. 곧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킨 것만으로는 소유를 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 개인이 무엇을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어떨까! 따라서 현실적으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다 근원적이다. 잠재태가 현실화되는 것, 곧 현실태로 표현되어야만 자기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다움’에 대한 비판, 그것은 새로운 인간성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라로 귀결된다. “네 힘을 사용하라”는 자기결단이고 자기의지이므로 자기전권위임이다. 자기전권위임은 자유이다. 나는 나인가? 그렇다면 나니까, 나를 표현해 보자. 그리고 자문해 보자. 난 자유인가? 그대는 어떤가?

에고이스트 사랑은 자기 힘의 증가이고 호혜주의이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에고이스트 사랑은 자기 힘의 증가이고 호혜주의이다.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힘의 증가이다.

 

우리는 앞서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Eigennutz)에서 나 자신의 유용을 위해서만 합의에 동의한다.”(351)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지만 ‘서로 서로’ 사용하므로 ‘서로에게’ 자기향유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의무는 결국 나에 대한 나의 의무이고 이것이 에고이스트의 사랑이다. 그런데 이러한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고 상호적 자기 향유라고 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 힘의 증가를 지향한다.

 

“그리고 내가 같은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나는 개인이 실현할 수 있었던 권능보다, 합의를 통해 내 힘을 더 강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동의 권능을 통하여 내 힘을 더 강화하기 위하여, 의심할 바 없이 그와 의사소통을 한다. 이러한 유대에서 나는 내 힘의 상승만을 본다. 그리고 오로지 유대가 증가된 힘인 한에서만, 나는 유대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유대는 어떤 –연합(Verein)이다.” 349

 

이렇듯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신의 힘의 증가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힘의 증가라는 조건에서만 유대를 유지하므로, 이러한 조건에 어긋나면 에고이스트는 유대, 혹은 연합을 중지할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에고이스트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 사라지거나 폐지되는 관계를 지양한다. 유대, 연합의 관계 맺기는 힘의 증가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힘의 증가는 왜 일어나는가? “나는 모든 감정이 있는 존재와 공감(Mitgefühl)한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그들의 기분 좋음이 또한 나를 기분 좋게 한다.”(324) ‘공감’하는 존재이기에 힘의 증가도 가능하다. 공동의 권능을 통하여 나의 힘을 증가시키는 것, 그것이 유대이자, 연합이다. 연합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에고이스트 사랑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앞서 에고이스트 사랑은 ‘서로 서로’간의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제 슈티르너가 말하는 에고이스트 사랑의 내용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선 낭만적 사랑과 에고이스트의 사랑을 구별해야 한다.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이미 그 내용을 파악하였다. 그렇다면 낭만적 사랑은 무엇인가? 낭만적 사랑은 위선이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이라는 자기기만, 대상을 위한 대상의 사랑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을 ‘애국심’이라고 설교했다. 우리의 모든 낭만적 사랑은 같은 양식으로 움직인다. 말하자면 언제나 위선 혹은 오히려 어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uneigennützigen Liebe)이라는 자기기만(Selbsttäuschung), 대상을 위한 대상의 관심은 나를 위한 것-정확히 말해서 전적으로 나를 위한 것(um Meinetwillen)-이 아니라 대상을 위한 것이다.” 327

 

우리 시대에 ‘위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 곧 ‘자기기만’, 대상을 위한 대상의 사랑을 위하여 맹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2007년 7월,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의 제정ㆍ공포에 따라 행정자치부에서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여 새로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규정하였고,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이다. 초기 맹세문은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이고 1974년 이후 맹세문은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 맹세는 지난 1972년 당시 문교부에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암송하도록 해 왔다. 그런데 국가가 개인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전근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35년 만에 시대흐름을 반영한 내용을 담게 됐다고 한다. 과연 시대의 흐름을 반영했을까? 이 맹세는 충성의 맹세를 일방적으로 ‘고취시키는 교육’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교육을 신성한 것을 만들어 내는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지난번에 썼던 ‘국민교육헌장’의 내용을 상기해 보자. 이러한 교육은 ‘자기결정’에 의한 것, 곧 나다움이 아니라, 신성한 것에 굴복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훈육되는 것이고 신성한 것, 곧 “조국과 민족”이든 “정의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인데, 이는 ‘자기 굴복’, ‘자기비하’이다. 이러한 신성화에 대해 슈티르너는 신성한 대상에 대한 ‘신성모독’, ‘탈신성화’,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선포를 통해 ‘나다움’을 찾고자 하였다.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는 대상의 사랑, 조국애이다. 이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다. 슈티르너는 그러한 고정된 자아로 자신을 이해하지 말고 ‘창조적 무’라는 유일자로 자신을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슈티르너의 주장으로 이 맹세문을 나를 위한 맹세문으로 변주하면 어떨까?

 

나는 유일한 존재로서 내 유일성 앞에 자기결정과 자기의지의 자율성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존재해야만 하는 나에 대한 관심보다 나를 위한 나의 존재에 관심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에고이스트 사랑은 그런 것이다. 자기 힘을 증가시키는 관계 맺기가 에고이스트 사랑이니까. 보다 정확히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호혜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이 점에 관해 조금 더 주목해 보자.

 

  1. 사랑은 호혜주의이다.

우선 슈티르너가 ‘호혜주의’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확인해 보자.

 

교류는 호혜주의(Gegenseitigkeit)이고, 개별자의 행위이며, 개별자의 콤메르키움(commercium)이다. (239)

 

강당처럼, 그렇게 교도소는 틀림없이 일종의 사회, 협동조합, 공동체를 만들지만(예를 들어, 노동 공동체), [241]결코 어떤 교류도, 어떤 호혜주의도, 어떤 연합(Verein)도 만들지 못한다.

 

정리하면, 교류, 호혜주의, 연합, 콤메르키움(commercium)은 하나의 묶음이다. 콤메르키움은 상업, 교류를 뜻한다. 이렇듯 호혜주의는 교류, 연합의 원리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맥락에서 교류, 호혜주의, 연합, 콤메르키움을 같은 범주로 분류하고 사회, 협동조합, 공동체를 다른 범주로 구분한다. 전자는 ‘자기 유용성’에 의지하면서 ‘호혜주의’를 요구한다. 그럼 후자의 범주는 어떤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 “‘친절’(Liebesdienste), 자비, 연민 등등”이다.

 

차라리 나는 그들의 ‘친절’, 자비, 연민 등등에 의존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자기 유용성에 의지하고자 한다. 인간의 자기 유용은 호혜주의를 요구하고(당신이 나에게 하듯, 그렇게 나도 너에게), 아무것도 ‘헛되이’ 행동하지 않고, 노력하여 획득하고 –보상을 치르고 얻을 것이다.(347)

 

또한 에고이스트 사랑은 “상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은 확실히 도로 돌려줄 수 있지만, 상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Gegenliebe)에 의해서만 지불될 수 있다(“가는 호의가 있으면 오는 호의가 있다”;속담).348

 

  1. 에고이스트 사랑은 취득자의 사랑이다.

 

또한 슈티르너가 말하는 사랑은 ‘주는 사람, 선물을 주는 사람, 애정이 깊은 사람’(Liebevollen)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얻는 사람’(Nehmenden), 혹은 무엇을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 곧 ‘취득자’(Aneignenden)(346)의 사랑이다. 슈티르너는 ‘Nehmenden’와 ‘Aneignenden’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곧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학위를 취득하다.”는 것은 학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 독일어 ‘Aneignenden’에 주목해 보자. 이 단어의 동사 ‘aneignen’는 ‘무엇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영어 본에서 ‘appropriator’로 옮겼다.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에 원인을 두고 있는 그런 사랑이다. 이 단어는 맑스의 <자본>에서, “자본이 노동자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가고 노동의 결과물을 자본의 소유로 이전하는 모습을 말할 때 주로 섰다.”([생각하는 마르크스], 백승욱, 북콤마, 97쪽)

다르게 생각해 보자. ‘Aneignenden’을 보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면 어떨까? 이를테면 ‘취득자’는 자신이 자신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와 자기 능력의 결과물을 자신의 소유로 이전하는 그런 사람이다. 더 이상 주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취득자의 사랑이다. ‘취득자’는 ‘소유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취득자는 자기 유용성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와 그 능력의 결과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형식적으로 주어진 법률적 주어짐,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슈티르너는 주장하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 맺기는 자기 유용성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자!

무엇이 모두의 소유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수 없는 사람에게, 다시 말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사회적 소유는 쓸모없다. 사회적 소유는 개인의 소유로 전용되어야 쓸모 있다. 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드는 것이 보다 근원적이지 않을까?

유일자를 설명하거나 의미하는 많은 말들 중에 유일자는 취득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일자는 취득자이고 소유자이다. 어떤 능력의 소유자는 자신의 창조자이다. 이것이 나다움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취득자인가?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인가? “너는 너의 창조물(Geschöpf)로 존재”하는가?(39) 나는 나를 창조하는 창조자이자 내가 창조한 창조물인가?

에고이스트(Egoist) 사랑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에고이스트(Egoist) 사랑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에고이스트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고 자기 유용성이다.

 

에고이스트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간디의 일화를 얘기하면 좋을 것 같다. 간디 생애 말년에 어떤 서양기자가 간디에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평생 남들을 위해서 자기희생적인 생애를 살아왔느냐”라고. 이 질문에 간디는 뭐라고 했을까? 간디는 자기희생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간디는 자기가 남들을 위해서 살았다고 보는 것은 전혀 오해인데, 그 이유는 남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내 이웃이 인간다운 삶을 살고, 내 조국이 독립해야만 자기 자신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고 투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간디는 에고이스트이다. 현상적으로는 타인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에고이스트이다.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이 에고이즘인데, 에고이즘(egoism)을 흔히 이기주의로 번역하기 때문에 에고이즘이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느낀다. 그러나 자아(ego)는 ‘자기 존중 혹은 자기 중요성’(self-esteem or self-importance)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에고이즘은 자아주의이고 에고이스트는 자아주의자라고 번역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기존의 에고이스트라는 말의 의미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에고이스트를 ‘유일자’라고 말했다. 곧 유일자는 자아주의자이다. 그럼 자아주의자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분명히 인간이 “이타적”행위를 할 때조차, 개인의 모든 행위의 근본 원인은 자기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아주의자의 모든 행위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나는 나에게 모든 것이고 나를 위하여(Meinethalben) 모든 것을 한다.(179)

 

예를 들어 가족 사랑이 보통 ‘효성’(Pietät)으로 이해되었듯이, 가족사랑은 어떤 종교적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조국에 대한 사랑(Vaterlandsliebe)을 ‘애국심’이라고 설교했다. 우리의 모든 낭만적 사랑은 같은 양식으로 움직인다. 말하자면 언제나 위선(die Heuchelei) 혹은 오히려 어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uneigennützigen Liebe)이라는 자기기만(Selbsttäuschung/self-deception), 대상을 위한 대상의 관심은 나를 위한 것-정확히 말해서 전적으로 나를 위한 것(um Meinetwillen)-이 아니라 대상을 위한 것이다. 327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애인과의 사랑은 어떨까? “그러나 내가 애인의 이마 위의 슬픈 주름살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로, 그래서 나를 위하여, 나는 애인의 이마에 입 맞추어 통증을 제거한다.”(325) 이렇듯 심지어 사랑도 자기 유용성이다. 다시 말해 에고이스트간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다. 또한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은 ‘자기기만’이다. ‘애국심’은 자기기만이고 대상을 위한 대상의 관심이다. 그래서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다. 흔히들 ‘Eigennutz’(selfishness)를 이기주의로 번역하는데, 슈티르너는 이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그가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에고이스트가 무엇에 합의하는 이유는 자기 유용성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신의 이익(meines eigenen Nutzen)을 위해서만, 곧 자기 유용성(Eigennutz)selfishness에서 합의에 동의했다. 351

 

이제 ‘Eigennutz’(selfishness)는 ‘내 자신의 이익’(meines eigenen Nutzen)이고 영어로 my own benefit을 의미한다. 또한 Eigennutz단어에 해당하는 영어는 selfishness인데 이는 self(자기) + ish(적인) +ness 성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단어를 ‘자기 유용성’으로 번역하였다. 자기 유용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슈티르너의 글로 돌아가 보자.

 

나는 물론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단지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에고이즘의 의식으로 인간을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는 인간을 사랑하고, 사랑이 나에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사랑이 나를 즐겁게 하기에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나는 어떤 ‘사랑의 계율’도 알지 못한다. 나는 모든 감정이 있는 존재와 공감(Mitgefühl(fellow-feeling))한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Qual)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quält), 그들의 기분 좋음(Erquickung)이 또한 나를 기분 좋게 한다(erquickt).(324)

 

자기 유용성의 이해관계, 관심은 세계를 자기 소유로 하는 것이다. “세계가 –내 소유로 되도록, 내 자기 유용성(Eigennutz)은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것에 관심(Interesse)이 있다.”(342) 이러한 자기 유용성은 성인에 이른 ‘자기중심적 관심’(egoistisches Interesse)에서 가능하다.(14) 또한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유용성에 따른 사랑은 상호간의 관계이다. 존재와의 공감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자기 유용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기 유용성은 다른 존재와의 공감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기 유용성은 언제나 상호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조금 더 확인해보자.

 

2.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지만 서로 서로사용하므로 서로에게자기향유이다.

 

에고이스트 사랑이 자기 유용성이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곧 자기 유용성은 에고이스트 서로에게 해당한다는 것이다. 자기 유용성이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에고이스트의 사랑이 아니다. 다시 말해 유용성, 이용이 자기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에고이스트 상호간의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 서로(zueinander) 어떤 관계만을 맺고 있는데, 그 관계는 사용할 수 있음,(Brauchbarkeit/usableness) 쓸모가 있음(Nutzbarkeit/utility), 유용(Nutzens/use)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einander) 아무런 의무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의무가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껏해야 내가 나에게 의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331)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Eigennutz/selfishness)에서 솟아나고, 자기 유용성의 침대로 몰려들어 다시 자기 유용성에 이른다.(328)

 

나는 세계와 인간을 이용한다네 (benutze(utilize))!(330)

나는 내 열정의 자양분을 위한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애인을 선택하지 않는다. 애인은 항상 다시 내 열정의 자양분으로 원기가 난다. 애인에 대한 모든 내 염려는 내 사랑의 대상에만 해당되고,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대상에게만 해당되며, ‘열렬하게 사랑받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330)

 

이렇듯 슈티르너는 사람의 관계를 ‘서로 서로’ 유용성으로 보고 있다. ‘서로 서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유용성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유일자의 의미가 확장된다. 유일자는 단독자가 아니라 서로 서로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유일자에게 “교류(Verkehr)는 세계향유(Weltgenuss )이고 내 -자기향유(Selbstgenuss)의 일부를 이룬다.”(358) 서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자기향유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에고이스트간의 관계는 서로에게 자기향유를 위한 수단이다. 슈티르너에게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이용하는 것인데, 그에게 이용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향유하는 것이다. “내 사랑의 대상을 향유한다(geniesse)”(330) 그러니까 사랑의 대상을 이용하는 것은 향유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말하자면 ‘서로 서로’(zueinander) 이용한다는 것은 서로간의 자기향유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사용’은 향유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서로의 자기향유가 사람의 관계이므로 사랑도 서로의 자기향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슈티르너가 강조하듯이 ‘서로에게’ 의무가 없다. “내가 당신에게 의무가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껏해야 내가 나에게 의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이스트 사랑의 의무 또한 대상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나의 의무이다.

 

3. 사랑은 따로 또 같이’, 자기 유용성이란 수단이고 동시에 자기향유라는 목적이다.

 

사람의 관계를 상호간의 유용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람의 관계를 ‘따로 또 같이’라는 관계로 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따로따로’ 자기 유용성이면서 동시에 ‘함께’ 자기향유이어야 한다. 함께하는 자기향유는 에고이스트 간의 동등한 자율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함께하는 자기향유가 성립되지 않을 경우에는 사랑의 관계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있다. 잠시 사람 관계를 서로간의 사용으로 이해하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떠올려보자.

칸트가 <윤리 형이상학 기초 놓기>(I.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in: Digitale Bibliothek Band 2: Philosophie, 75면)에서 실천적 정언명령의 정식으로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Person)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도 인간성(Menschheit)을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하지(brauchest)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est.) [강조는 옮긴이]

 

이 글에서 옮긴이가 강조한 부분에 주목해 보자. 곧 ‘…만’, ‘항상 동시에’ ‘사용하다’라는 중요한 문구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문구는 왜 들어가 있는 것일까? 칸트가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는 것은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칸트는 사람 관계에서 상호 수단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하지말”라는 말은 “인간성을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상호 수단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수단적인’ 이란 말은 ‘나의 욕구와 행복과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이란 의미이다. 슈티르너의 사랑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칸트의 정언명령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관계가 오로지 상호 수단적으로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수단으로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를 슈티르너의 사랑에 대한 논의로 가져와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라는 수단이고 동시에 자기향유라는 목적으로 상대방을 대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자기향유라는 목적은 자아 외부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자아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칸트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 모두의 실천이성의 자율성을 존중하라는 말이라면, 슈티르너는 각자의 자아 안에 자기향유라는 목적이 동등하게 존재하고 이것을 “완전한 자유로운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하여 행위가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것”(117), 자아의 상호 존중, 그것이 에고이스트 사랑일 것이다. 또한 이것이 자유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자기결정에 의한 자유,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172)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의 사랑은 자유로운가? 다시 말해 완전한 자유로운 자기결정이었는가? 나는 그대에게, 그대는 나에게 따로 또 같이 자기 유용성이었고 자기향유이었는가?

유일자의 소유(Eigentum)란 무엇인가?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유일자의 소유(Eigentum)란 무엇인가?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소유는 소유자가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유일자’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간략히 말하면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나다움의 추구는 자기결정이며, 자신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 자기에게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유일자의 나다움은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다움은 고정된 자아를 끊임없이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슈티르너 책 제목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소유의 의미, 곧 ‘유일자의 소유’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맑스가 주장하는 ‘개인적 소유’의 의미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전의 글에서 소유는 ‘힘’과 관계 맺고 있음을 다시 상기해 보자. 아래의 글을 다시 음미해 보자.

 

내 힘(Macht)은 내 소유(Eigentum)이다.

내 힘은 나에게 소유를 준다.

내 힘은 나 자신이고 내 힘에 의하여 내 소유이다.[203]

 

슈티르너는 소유를 힘과 연관시키고 힘에 의한 내 소유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소유는 어떠한 내용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요약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는 소유를 ‘자신의 사용’(Eigennutz)과 연관시킨다.

 

“세계가 –내 소유로 되기 위하여, 나 자신의 사용은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342)

 

소유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와 교류하고자 한다. 그에게 세계는 “내가 마음대로 처리하는(schalte und walte) 내 소유이다.”(102) 결국 세계가 자신의 사용으로서 관계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소유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소유로서 사용할 수 있었던 수단과 조직만을 얻으려고” 애쓴다.(348)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그 당시의 문명 비판을 하는데,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을 문명화된 세계의 유행품(Modeartikel)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65) 그래서 그는 다시 묻는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Uneigennützigkeit)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65) 이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은 소유자로서의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우리의 소유를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schalten können) 어떤 목적이 중지하는 곳, 다시 말해 어떤 목적이 하나의 고정된 목적 혹은 하나의 -고정 관념이 되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66) 그래서 그는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다시금 소유로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소유는 감각적 재산뿐만 아니라 정신적 재산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소유의 현실화는 다름 아닌 ‘권능’에 따라서 작동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인간의 재산들, 곧 감각적 재산들뿐만 아니라 정신적 재산들은 내 것이고 나는 내 –권능(Gewalt)의 척도에 따라 소유자로서 그것들을 마음대로 처리한다(schalte).(274)

 

또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슈티르너는 프루동을 비판한다. 이를테면 바로 그 땅의 유용은 여전히 그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nach Belieben schalten kann) 그의 소유라는 것이다.(276) 나아가 “소유는 어떤 것(물건, 동물, 인간)에 대한 무제한의 지배에 대한 표현이다. 그것에 의하여 ‘나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Ich schalten und walten kann nach Gutdünken).(279) 여기서 ‘지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배는 “힘”또는 능력(die »Kraft« oder Dynamis)이다. 또한 지배는 추상적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개개인이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배(Herrschaft)[“”또는 능력(die »Kraft« oder Dynamis); 강조는 옮긴이]는 인간에 속한다. 이런 이유로 어떤 개개인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der Mensch)이 개개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왕국, 즉 세계는 인간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개개인(Einzelne)이 소유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든 것, 즉 세계를 소유물로서 지배한다.(151)

 

  1. 소유는 개개인이 실질적 주인이 되는 것이고 개개인의 힘과 능력의 현실화이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슈티르너는 ‘힘’을 ‘능력’(dynamis)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dynamis’는 철학사적 연원을 갖는 말로 그리스에서 유래하였다. 이 말은 모순된 두 가지 뜻으로 분화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의미에서 현실태와 대립되는 가능태를 의미한다. 가능태란 어떤 형상으로 결정되지 않은 경향, 단순한 잠재성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현대에 이르러 잠재력을 뜻하게 되었으며, 능동적 에너지 곧 어떤 현실적 결과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에게 소유 개념은 현실적이고 실질적 결과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슈티르너가 염려하는 것은 ‘너의 고유한 자아’(Dein eigentliches Ich)이다.(31) 고유하다는 것은 남과 구별되는 나만의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주장하는 “너의 독특함(Absonderlichkeit)이나 특질”(Eigentümlichkeit)(228쪽;이 단어는 한번 사용된다)을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잠시 ‘소유’(Eigentum)라는 말을 음미해 보자. 왜냐하면 슈티르너가 소유를 ‘특질’이란 단어와 연관시키는 것은 그의 소유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소유라는 단어는 영어로 property인데, 이 영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proprius이다. 이는 ‘남의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것인’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 어원은 ‘고유한’, ‘독특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독일어 Eigentum의 형용사형 eigentümlich는 ‘소유의’라는 뜻과 함께 ‘고유한’, ‘독특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소유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하는 자신만의 독특성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과 함께 앞서 확인했듯이 소유를 ‘힘’과 ‘능력’이란 말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종합하면, 소유자는 형식적으로 주어진 소유가 아니라 힘과 능력에 따른, 혹은 그 편차에 따른 실질적 소유자를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이에게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힘과 능력에 따라 그 성취도는 다를 수 있다. “자신의 주권과 권리를 요구하는 주장이 소유적 자유주의의 출현이다. 이와 달리 프랑스 혁명은 모든 인간은 property가 있든 없든 평등하다는 주장에서 출발했다. 자기를 대표할 소유가 없는 자라고 해도 소유가 있는 자와의 사이에 차별이 있으면 안 되며, 그것이 자유이고 평등이라는 생각이다. 그 때의 자유는 property에 기초하지 않는다.”(백승욱 지음, <생각하는 마르크스>, 북콤마, 2017, 95)

이렇게 볼 때, 슈티르너의 소유 개념은 영국식 소유 개념과 맞닿아 있다. 앞서 우리는 슈티르너가 소유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보다 현실 영역으로 논의를 구체화하면 어떨까?

 

  1. 소유: 슈티르너와 맑스가 이해하는 자본가

 

슈티르너는 시민계급의 정부(지배)하에서는 노동하는 자들은 소유하는 자들, 곧 자본가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자본가를 국가의 재산이라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zu ihrer Verfügung haben), 특히 돈과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들로 이해한다.(126) 그래서 “국가란 –부르주아 국가이고, 부르주아계급의 재산이다.”(Der Staat ist ein – Bürgerstaat, ist der status des Bürgertums.)(같은 쪽) 이러한 자본가에 대한 이해를 맑스의 견해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맑스는 <자본>1권(167쪽 두 번째 단락에서 168쪽 첫 단락까지)에서 자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화폐소유자는 이 운동[가치의 증식; 옮긴이]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담당자(Träger)로서 자본가가 된다. 그의 몸 또는 그의 주머니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그리고 그 유통의 객관적 내용, 곧 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subjektiver Zweck)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단지 추상적인 부를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 두는 한 그는 자본가(Kapitalist)로 기능하는 것이며 또한 인격화된 자본으로, 곧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자본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적인 이익 또한 자본가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이익을 얻기 위한 쉬지 않는 운동만이 자본가의 직접적인 목적이다.”(167f., Michael Heinrich, <Wie das Marxsche «Kapital» lesen?>, Teil 2, 강조는 미하엘 하인리히(M. H.))

미하엘 하인리히는 유통 G – W – G‘의 객관적 내용을 자신의 주관적 목적으로 만드는 사람, 따라서 가치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본가라고 한다. 미하엘 하인리히는 위 구절을 두 가지 해석하는데 우선 한 가지만 살펴보자.

(1) 이용할 수 있는 화폐의 소유자 역시 자본가인데, 그는 오직 이용할 수 있는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verfügen)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맑스가 정확하게 서술했듯이, 자본가는 화폐소유자(Geldbesitzer)이어야 한다. 하나의 사물을 실제로 자유로이 처리하는 사람은 그 사물의 소유자가 아닐지라도 그 사물의 점유자(Besitzer)이다. 그러니까 화폐를 이용하기 위해 화폐를 꾸어준 그 사람 역시, 혹은 지배인에게 낯선 능력이라는 가치증식을 위임한 그런 사람도 자본가로서 기능한다.

슈티르너나 맑스는 자본가를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verfügen)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다. 슈티르너에게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가혹하리만큼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자본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혹은 “국가란 –부르주아 국가이고, 부르주아계급의 재산이다.”라는 슈티르너의 견해에 대해 맑스의 비판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독일이데올로기>의 완역과 함께 충분히 논의해 볼 일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1. 소유는 개인적 소유이다. 그런데 현실은?

 

요약하자면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유일자의 소유는 개인적 소유를 의미한다. 이때 말하는 개인적 소유는 힘과 능력을 의미하면서 단순히 형식적으로 주어진 소유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현실화되는 소유를 의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소유 개념을 통하여 보다 유일자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유일자는 다른 사람과 구분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힘과 능력에 따라서 자신을 나타낼 수 있고 그것이 그의 ‘특질’(Eigentümlichkeit)이며 그를 소유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맑스가 <자본> 1권 7편에서 말하는 ‘개인적 소유’(individuelle Eigentum; 이 단어는 그가 한번 밖에 사용하고 있지 않다)와 공명할 수 있지 않을까?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화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소유가 현실화 될 수 없기 때문에, 보다 실질적 소유, 곧 개인적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자신의 시대,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비판한다. “노동자는 향유를 위해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척도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없다.”(126) 이전의 글에서 보았듯이 슈티르너는 “우리의 소유를 가치 있게 만들어라, 너 자신을 알라가 아니라,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라고 주장하였다. 유일자의 나다움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곧 개인적 소유의 현실화를 실제로 이루어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이 기계와 같은 노동에 얽매이게 된다고 하는 사실은 노예제와 흡사한 것이 된다. 공장노동자(Fabrikarbeiter)가 12시간 이상을 죽어라고 노동해야 할 경우, 그는 인간이 되는 것을 빼앗긴다. 모든 노동은 인간이 만족해야 한다는 목표를 지녀야만 한다. 그 때문에 인간 역시 노동에 있어서 전문가(Meister)가 되어야 하며 인간은 하나의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압정공장에서 꼭지만 끼우고 철사를 빼내기만 하는 등등의 일만을 하는 사람은 기계적으로 기계처럼 일을 한다. 즉 그는 불완전한 단편으로 머물 뿐, 결코 전문가가 되지 못한다. 그의 노동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단지 그를 피곤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노동은 그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목적도 없으며, 만들어진 산물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즉, 그는 다른 어떤 사람의 손아귀에서 노동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이용당한다(착취당한다exploitiert).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이런 노동자에게는 교양 있는 정신의 향유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조잡한 오락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양이라는 것은 봉쇄되어 있다.(131)

 

얼핏 보면 맑스의 글로 오해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노동은 어떤가? 총체성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기계와 같은 노동인가? 교양이 있는 정신의 향유인가? 우리는 사회를 이용하는가? 아니면 사회가 우리를 착취하는가? 이 책에서 ‘공장노동자’란 단어는 한번 언급된다. 그렇지만 가벼운 말이 아니다. 18세기 이래, 공장의 숙련공을 수공업에서 일하는 도제나 비숙련 육체노동자와 구별하게 해주는 말로 등장했다. 이미 1845년의 프로이센 기업 규정에는 도제와 보조 노동자를 위한 규정을 명확하게 공장 노동자로 확대시켰다. 이것은 수공업과 공장 노동이 기업(Gewerbe)이란 개념 아래 통합된 데에서 도출된 귀결이었다.(코젤렉 개념사 사전 10, 142-7) 나아가 공장 노동자들은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가장(pater familias)에 대한 가족 구성원(Glied der famlilia)처럼 인식되었다. 또한 군주국가의 모델 역시 노동자의 입지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가장-종, 군주-신하, 사령관-졸병이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노동자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요구는 19세기 말까지도, 그리고 이를 넘어서까지도 ‘부르주아’ 사회 하부에서 봉사하는 계층이라는 케케묵은 개념이 근대 산업사회 체제 안으로 이월되었다는 사실을 타나낸다.(같은 책 176-7쪽) 짧은 그의 말을 오래 음미해 보자. 소유는 개인의 실질적 소유이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역사는 희생의 역사 이후에 향유의 역사이고, 인간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이다.[197-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