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자의 소유(Eigentum)란 무엇인가?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유일자의 소유(Eigentum)란 무엇인가?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소유는 소유자가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유일자’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간략히 말하면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나다움의 추구는 자기결정이며, 자신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 자기에게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유일자의 나다움은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다움은 고정된 자아를 끊임없이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슈티르너 책 제목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소유의 의미, 곧 ‘유일자의 소유’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맑스가 주장하는 ‘개인적 소유’의 의미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전의 글에서 소유는 ‘힘’과 관계 맺고 있음을 다시 상기해 보자. 아래의 글을 다시 음미해 보자.

 

내 힘(Macht)은 내 소유(Eigentum)이다.

내 힘은 나에게 소유를 준다.

내 힘은 나 자신이고 내 힘에 의하여 내 소유이다.[203]

 

슈티르너는 소유를 힘과 연관시키고 힘에 의한 내 소유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소유는 어떠한 내용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요약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는 소유를 ‘자신의 사용’(Eigennutz)과 연관시킨다.

 

“세계가 –내 소유로 되기 위하여, 나 자신의 사용은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342)

 

소유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와 교류하고자 한다. 그에게 세계는 “내가 마음대로 처리하는(schalte und walte) 내 소유이다.”(102) 결국 세계가 자신의 사용으로서 관계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소유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소유로서 사용할 수 있었던 수단과 조직만을 얻으려고” 애쓴다.(348)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그 당시의 문명 비판을 하는데,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을 문명화된 세계의 유행품(Modeartikel)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65) 그래서 그는 다시 묻는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Uneigennützigkeit)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65) 이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은 소유자로서의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우리의 소유를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schalten können) 어떤 목적이 중지하는 곳, 다시 말해 어떤 목적이 하나의 고정된 목적 혹은 하나의 -고정 관념이 되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66) 그래서 그는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다시금 소유로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소유는 감각적 재산뿐만 아니라 정신적 재산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소유의 현실화는 다름 아닌 ‘권능’에 따라서 작동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인간의 재산들, 곧 감각적 재산들뿐만 아니라 정신적 재산들은 내 것이고 나는 내 –권능(Gewalt)의 척도에 따라 소유자로서 그것들을 마음대로 처리한다(schalte).(274)

 

또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슈티르너는 프루동을 비판한다. 이를테면 바로 그 땅의 유용은 여전히 그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nach Belieben schalten kann) 그의 소유라는 것이다.(276) 나아가 “소유는 어떤 것(물건, 동물, 인간)에 대한 무제한의 지배에 대한 표현이다. 그것에 의하여 ‘나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Ich schalten und walten kann nach Gutdünken).(279) 여기서 ‘지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배는 “힘”또는 능력(die »Kraft« oder Dynamis)이다. 또한 지배는 추상적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개개인이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배(Herrschaft)[“”또는 능력(die »Kraft« oder Dynamis); 강조는 옮긴이]는 인간에 속한다. 이런 이유로 어떤 개개인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der Mensch)이 개개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왕국, 즉 세계는 인간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개개인(Einzelne)이 소유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든 것, 즉 세계를 소유물로서 지배한다.(151)

 

  1. 소유는 개개인이 실질적 주인이 되는 것이고 개개인의 힘과 능력의 현실화이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슈티르너는 ‘힘’을 ‘능력’(dynamis)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dynamis’는 철학사적 연원을 갖는 말로 그리스에서 유래하였다. 이 말은 모순된 두 가지 뜻으로 분화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의미에서 현실태와 대립되는 가능태를 의미한다. 가능태란 어떤 형상으로 결정되지 않은 경향, 단순한 잠재성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현대에 이르러 잠재력을 뜻하게 되었으며, 능동적 에너지 곧 어떤 현실적 결과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에게 소유 개념은 현실적이고 실질적 결과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슈티르너가 염려하는 것은 ‘너의 고유한 자아’(Dein eigentliches Ich)이다.(31) 고유하다는 것은 남과 구별되는 나만의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주장하는 “너의 독특함(Absonderlichkeit)이나 특질”(Eigentümlichkeit)(228쪽;이 단어는 한번 사용된다)을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잠시 ‘소유’(Eigentum)라는 말을 음미해 보자. 왜냐하면 슈티르너가 소유를 ‘특질’이란 단어와 연관시키는 것은 그의 소유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소유라는 단어는 영어로 property인데, 이 영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proprius이다. 이는 ‘남의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것인’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 어원은 ‘고유한’, ‘독특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독일어 Eigentum의 형용사형 eigentümlich는 ‘소유의’라는 뜻과 함께 ‘고유한’, ‘독특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소유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하는 자신만의 독특성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과 함께 앞서 확인했듯이 소유를 ‘힘’과 ‘능력’이란 말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종합하면, 소유자는 형식적으로 주어진 소유가 아니라 힘과 능력에 따른, 혹은 그 편차에 따른 실질적 소유자를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이에게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힘과 능력에 따라 그 성취도는 다를 수 있다. “자신의 주권과 권리를 요구하는 주장이 소유적 자유주의의 출현이다. 이와 달리 프랑스 혁명은 모든 인간은 property가 있든 없든 평등하다는 주장에서 출발했다. 자기를 대표할 소유가 없는 자라고 해도 소유가 있는 자와의 사이에 차별이 있으면 안 되며, 그것이 자유이고 평등이라는 생각이다. 그 때의 자유는 property에 기초하지 않는다.”(백승욱 지음, <생각하는 마르크스>, 북콤마, 2017, 95)

이렇게 볼 때, 슈티르너의 소유 개념은 영국식 소유 개념과 맞닿아 있다. 앞서 우리는 슈티르너가 소유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보다 현실 영역으로 논의를 구체화하면 어떨까?

 

  1. 소유: 슈티르너와 맑스가 이해하는 자본가

 

슈티르너는 시민계급의 정부(지배)하에서는 노동하는 자들은 소유하는 자들, 곧 자본가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자본가를 국가의 재산이라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zu ihrer Verfügung haben), 특히 돈과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들로 이해한다.(126) 그래서 “국가란 –부르주아 국가이고, 부르주아계급의 재산이다.”(Der Staat ist ein – Bürgerstaat, ist der status des Bürgertums.)(같은 쪽) 이러한 자본가에 대한 이해를 맑스의 견해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맑스는 <자본>1권(167쪽 두 번째 단락에서 168쪽 첫 단락까지)에서 자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화폐소유자는 이 운동[가치의 증식; 옮긴이]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담당자(Träger)로서 자본가가 된다. 그의 몸 또는 그의 주머니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그리고 그 유통의 객관적 내용, 곧 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subjektiver Zweck)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단지 추상적인 부를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 두는 한 그는 자본가(Kapitalist)로 기능하는 것이며 또한 인격화된 자본으로, 곧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자본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적인 이익 또한 자본가의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이익을 얻기 위한 쉬지 않는 운동만이 자본가의 직접적인 목적이다.”(167f., Michael Heinrich, <Wie das Marxsche «Kapital» lesen?>, Teil 2, 강조는 미하엘 하인리히(M. H.))

미하엘 하인리히는 유통 G – W – G‘의 객관적 내용을 자신의 주관적 목적으로 만드는 사람, 따라서 가치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본가라고 한다. 미하엘 하인리히는 위 구절을 두 가지 해석하는데 우선 한 가지만 살펴보자.

(1) 이용할 수 있는 화폐의 소유자 역시 자본가인데, 그는 오직 이용할 수 있는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verfügen)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맑스가 정확하게 서술했듯이, 자본가는 화폐소유자(Geldbesitzer)이어야 한다. 하나의 사물을 실제로 자유로이 처리하는 사람은 그 사물의 소유자가 아닐지라도 그 사물의 점유자(Besitzer)이다. 그러니까 화폐를 이용하기 위해 화폐를 꾸어준 그 사람 역시, 혹은 지배인에게 낯선 능력이라는 가치증식을 위임한 그런 사람도 자본가로서 기능한다.

슈티르너나 맑스는 자본가를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verfügen)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다. 슈티르너에게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가혹하리만큼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자본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혹은 “국가란 –부르주아 국가이고, 부르주아계급의 재산이다.”라는 슈티르너의 견해에 대해 맑스의 비판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독일이데올로기>의 완역과 함께 충분히 논의해 볼 일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1. 소유는 개인적 소유이다. 그런데 현실은?

 

요약하자면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유일자의 소유는 개인적 소유를 의미한다. 이때 말하는 개인적 소유는 힘과 능력을 의미하면서 단순히 형식적으로 주어진 소유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현실화되는 소유를 의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소유 개념을 통하여 보다 유일자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유일자는 다른 사람과 구분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힘과 능력에 따라서 자신을 나타낼 수 있고 그것이 그의 ‘특질’(Eigentümlichkeit)이며 그를 소유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맑스가 <자본> 1권 7편에서 말하는 ‘개인적 소유’(individuelle Eigentum; 이 단어는 그가 한번 밖에 사용하고 있지 않다)와 공명할 수 있지 않을까?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화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소유가 현실화 될 수 없기 때문에, 보다 실질적 소유, 곧 개인적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자신의 시대,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비판한다. “노동자는 향유를 위해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척도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없다.”(126) 이전의 글에서 보았듯이 슈티르너는 “우리의 소유를 가치 있게 만들어라, 너 자신을 알라가 아니라,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라고 주장하였다. 유일자의 나다움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곧 개인적 소유의 현실화를 실제로 이루어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이 기계와 같은 노동에 얽매이게 된다고 하는 사실은 노예제와 흡사한 것이 된다. 공장노동자(Fabrikarbeiter)가 12시간 이상을 죽어라고 노동해야 할 경우, 그는 인간이 되는 것을 빼앗긴다. 모든 노동은 인간이 만족해야 한다는 목표를 지녀야만 한다. 그 때문에 인간 역시 노동에 있어서 전문가(Meister)가 되어야 하며 인간은 하나의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압정공장에서 꼭지만 끼우고 철사를 빼내기만 하는 등등의 일만을 하는 사람은 기계적으로 기계처럼 일을 한다. 즉 그는 불완전한 단편으로 머물 뿐, 결코 전문가가 되지 못한다. 그의 노동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단지 그를 피곤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노동은 그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목적도 없으며, 만들어진 산물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즉, 그는 다른 어떤 사람의 손아귀에서 노동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이용당한다(착취당한다exploitiert).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이런 노동자에게는 교양 있는 정신의 향유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조잡한 오락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양이라는 것은 봉쇄되어 있다.(131)

 

얼핏 보면 맑스의 글로 오해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노동은 어떤가? 총체성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기계와 같은 노동인가? 교양이 있는 정신의 향유인가? 우리는 사회를 이용하는가? 아니면 사회가 우리를 착취하는가? 이 책에서 ‘공장노동자’란 단어는 한번 언급된다. 그렇지만 가벼운 말이 아니다. 18세기 이래, 공장의 숙련공을 수공업에서 일하는 도제나 비숙련 육체노동자와 구별하게 해주는 말로 등장했다. 이미 1845년의 프로이센 기업 규정에는 도제와 보조 노동자를 위한 규정을 명확하게 공장 노동자로 확대시켰다. 이것은 수공업과 공장 노동이 기업(Gewerbe)이란 개념 아래 통합된 데에서 도출된 귀결이었다.(코젤렉 개념사 사전 10, 142-7) 나아가 공장 노동자들은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가장(pater familias)에 대한 가족 구성원(Glied der famlilia)처럼 인식되었다. 또한 군주국가의 모델 역시 노동자의 입지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가장-종, 군주-신하, 사령관-졸병이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노동자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요구는 19세기 말까지도, 그리고 이를 넘어서까지도 ‘부르주아’ 사회 하부에서 봉사하는 계층이라는 케케묵은 개념이 근대 산업사회 체제 안으로 이월되었다는 사실을 타나낸다.(같은 책 176-7쪽) 짧은 그의 말을 오래 음미해 보자. 소유는 개인의 실질적 소유이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역사는 희생의 역사 이후에 향유의 역사이고, 인간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이다.[197-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