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이야기 [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지벼리

출판사에서 일하는 나는 오늘 다음 날 있을 출판사 총판 회의에 필요한 자료 준비와 출시될 도서들을 정리하느라  저녁 식사도 거르고 10시 30분까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밥도 못 먹고 온 나에게 신랑은 안쓰러운지 옷도 갈아 입지 않은 내게 빨리 소파에 앉으라며 테이블에 늦은 저녁을 차렸다.
몇 번을 데웠는지 모른다는 따근한 두부찌개. 나랑 같이 먹으려고 신랑은 김치볶음밥으로 우선 먹었다고…

신랑의 전매특허 두부찌개는 늘 맛있다. 오늘은 더 맛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더 맛있다. 목마름이 밀려와 맥주 한 캔 마시고 싶다고 했더니 내가 오기 전에 담배 사러 나갔다가 맥주도 사서 미리 냉장고에  뒀노라고.
이렇게 말하면 신랑은 집에서 살림만 하는 남자로 오해받을까? 살짝 걱정도 되지만 내 남자는 그런 거에 개의치 않는다. 무엇이든 잘~ 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사들인 텔레비전에서는 세월호에 관한 101분 기록으로 이야기를 다시 꺼내 영상으로 보여준다. 신랑과 나는 세월호  이야기에 대해  “이제 좀 그만하자.”고  말하는 사람들과  목에 핏대 세우며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남의 고통은 어찌 그리 쉽게 잊자고들 하는지 되려 묻고 싶다. “교통사고 같은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의 내리면 쉬운 표현이라 그리 했는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개탄스럽다. 나와 신랑 사이에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자 약속한 부분도 있고… 나이도 이제 마흔 중반에 생각도 많다. 사실 아이를 키우며 살 자신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랑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나는 아동 전문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세월호 탑승자 중에 가족이 있느냐고… 분노하는 내가 그렇게 비쳤는가 보다.

우리가 연결하면 연결 안 되는 고리가 있던가?
그렇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들은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가족 여행으로 세월호를 탔다가 엄마, 아빠, 형 모두 잃은 요셉이는 나의 먼 친척이었다.
내가 평소 친척으로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어서 몰랐지만, 아버지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그 주에 친인척들 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사고로 인해 모임을 취소했고, 그 안타까운 사연을 뉴스로만 들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주변 왈 그래서 네가 그렇구나… 세상에!
우리 다 같은 국민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을 안타까워하며 목소리 좀 냈다고…
그런 관계들이 있어서 내가 그러는 것이라고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건 사건보다 더 아픈 또 하나의 사건이다.
‘세월호’에 직접 탑승했거나 탑승한 가족이 있어야만, 또 다른 어떤 관계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말인가?

다만 그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이고 우리의 미래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꼭 했어야 하는 일들이 지금은 미련으로 남았을 그 꿈 많은 아이들을… 우리는 그 찬란한 미래를 무참히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사고였다’라고 말한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고 변명만이 소란하다. 비겁한 변명들을 듣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다.

맛있게 먹던 밥을 짧게 마무리한다. 맥주를 벌컥벌컥! 목이 메어와 숨쉬기가 곤란하다. 목 아픔을 참고 있는데… 난데없이 눈물 줄기가 참아지질 않는다. 그 부모들의 속은 어찌할꼬. 그 영상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미처 공개하지 못했던 어느 부분은 정말이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자기들은 빠져나가겠지?”, “지난번에도 그랬었잖아”, “아~ 이러다가 혹시 죽는 거 아니겠죠?”,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 남겨야지. 엄마, 아빠 사랑해요.”, “커튼이 이 만큼 들렸다는 건 그만큼 기울었단 말이겠죠.”, “물이 들어와요.”, “아~~~ 안돼! 정말 화가 나서 욕을 하고 싶은데 이 영상 어른들이 볼 거라 욕은 못하겠고… 아… 나는 꿈이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대로 죽을까 봐 걱정돼요. 아~~~.”

아프다.
많이 아프다.
그 영상 속 우리 아이들이 혹시나 했던 말들은 그리 되어 버렸다.

핸드폰 영상으로 담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록했을 우리 아이들의 희망을…
우리는 끊어 버렸다.

선장과 선원들은 상황실 신호도 끊고,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은 채 ‘패닉 상태였다’라고 말하며 살고자 허둥지둥 세월호 밖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고, 비겁했다.
또 그들을 구한 해경들은 선장인지, 선원인지 몰랐다고 했다.

선장답지 못했고, 선원답지 못했고, 해경답지 못했고, 어른답지 못했고, 인간답지 못했다.

상황실은 각각 보고만 잘 하고 있으라고…
해경들은 그 모습들을 보고도 퇴선 명령은 없다.
관저에서는 ‘세월호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니 사진으로 찍어 빨리 보고 하라고…
보고 싶어 하신다고…
민간 민박 선원들이 보다 못해 뛰어들자 해경은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한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1분 1초를 불안해하며 말을 이어가는 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사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어느 것이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인가?
아이들의 목소리는 다급한데…
상황실 보고하는 목소리는 여유가 있고 웃음도 있고…
참으로 비통하다.

아이들은 밀려오는 공포 속에서도  다른 객실에 있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걱정한다.
부모님께 보내는 메시지에는 곧 구하러 온다고 했으니 염려 말라고 안심시킨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아무런 지시 사항도 내리지 않고 그저 선내 방송으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라고  반복 방송을 하고 있다.  스피커에서 되풀이 되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듣는 아이들은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하고 그 지시에 따른다. 보통 다른 날이었더라면 어른들이 하는 말에 의문을 가졌을 법 한데… 이 날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맞다 생각해서 아마 그들 전부가 그렇게 행동한 것 같다. ‘내가 움직이면 배가 더 기울어져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 아이들이  선내 방송의 지시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그대로 따른게 아닐까 싶다. 어찌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아이들은 스스로 구명조끼를 나눠 입고 못 입은 친구들을 챙기며 불안한 감정들을 서로 다독인다.

그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웃음을 보이던 아이들은 그 상황이 그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아마 그리도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도 혹자는 ‘애들이 철이 없어서 그런다’라고 한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것은 그것과 다르다.
그냥 비판을 위한 비판인 것이다.
내 자식을 그렇게 수장시킨 부모들도 그리 말할까? 철이 없다고?
그 부모들을 대신해서 마구마구 싸워주고 싶다.

길게 끌어 봐야 국민들 세금만 더 늘어난다고 말하는 그들은 끝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그 누구도 억울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어린이 책!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순간순간 고민이다.
내 모든 힘을 다 동원해서…
인성이 바로 서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꼭! 그래야만 한다.
내가 나에게 내리는 주문이다.

다시 봄이 찾아왔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 그들을 도왔던 민간 잠수부와 민간 선박 선원들에게 이제 봄은 없다.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들이 맞는 봄이 새롭기를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

p.s  서로 나누고, 도우며… 함께 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며[4.16]

4.16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너와 내가 타지 않은 세월호에

가슴이 타지 않은 세월호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망각의 강을 건너

그래서 회피하고 싶은 공간을 어지럽히고

무차별하게 밟히고 또 밟혀서

잊혀진 꽃이 된 내 안의 붉은 꽃은

너와 내가 탄 세월호에

가슴이 타는 세월호에

고통으로 짓이겨 세월의 꽃을 밟는다.

모두가 타는 가슴으로 피어나는 세월은

우주 끝을 돌아 돌아 다시오는 세월

 

세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줘

깜깜한 어둠이 차오르는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을 간절히 찾아 헤매던 그 손길

이미 흐려지고 잊혀지고 지워져 가는 꽃들

 

붉은 꽃들, 날개를 피어 우주의 한 줄기 빛으로 피어나줘

 

 

 


세월호를 기억하며 2016-3-28

네버엔딩스토리0416[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3

 

네버엔딩스토리0416

 

 강지은(편집주간)

일 년이 지났다. 진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고 시간만 자꾸 흐른다.

세월호는 아직 차가운 바다 밑에 있는데 정부는 돈으로 모든 일을 수습하려고 한다.

그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될 것이다. 결코 세월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나비 꿈을 꾸는가? 나비가 내 꿈을 꾸는가?[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2

내가 나비 꿈을 꾸는가? 나비가 내 꿈을 꾸는가?

 

나태영(한철연 회원)

 

18대 대선 기간 동안 국정원과 국방부 사이버사령부가 부정 댓글을 무수히 많이 달았다. 이 사건이 수류탄 터진 경우라면 18대 대선 선거 개표조작은 핵폭탄 터진 경우이다. 하지만 선서 개표 조작은 여론화 되지도 못한다. 소수 촛불 시민들만이 여론화 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다.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대한민국 전체 투표권자들 이 연극배우가 되었다. 왜 그런가? 201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 하루 전 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컴퓨터에 박 근혜가 51.6프로 득표한다는 내용이 저장되었다. 저들이 박 정희가 저지른 5.16 쿠데타 연상하도록 51.6프로로 득표 조작을 했다. 저들은 이 땅 유권자를 조롱했다.

투표함 열기 전에 개표 방송 했다.무수히 많은 보기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의 보기만 들겠다.

보기

강원도 춘천시 제 1 투표구 투표수: 2,924매강원도 춘천시 선관위 투표지 분류를 끝낸 시각: 2014년 12월 19일 저녁 9시 24분강원도 춘천시 선관위원장 공표 시각: 2014년 12월 19일 저녁 7시 40분투표함 열기 1 시간 32분 전에 개표 방송 했다.

신 상철은 말한다.

“선거 개표조작 당사자가 박 근혜에게 내가 당신이 대통령 당선되게 해 주겠소 말한 다음에 대통령 당선 시켜주면 박 근혜가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당신이 51.6프로로 대통령 당선되게 해 주겠소 말한 뒤에 그런 결과를 내면 박 근혜는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명박과 박 근혜와 전 중앙선거관리 위원장 김 능환은 국기문란죄로 처벌 받아야 한다.

그래도 이 땅 언론인, 진보정당 사람들, 지식기술자들은 침묵한다. 박 창신 신부가 이 내용을 담은 책 『제18대 대통령 부정선거백서』를 가슴 아래에 들고 시국 선언했어도 이 땅 언론인, 진보정당 사람들, 지식기술자들은 침묵한다.

이들은 칼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한테 회초리 맞아야 한다.

선거 개표조작을 막지 않으면 새누리당 인간들은 지들이 선거에서 불리할 때마다.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 전 날처럼 계속 선거 개표조작 할 것이다.

18대 대선 선거 개표 조작을 문제 제기한 한 영수(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노조 위원장)와 김필원은 감옥에 갇혀 있다.감옥에 갇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아니라이 명박, 박 근혜, 김 능환 세 인간이다.

장자가 기가 막혀!

 

세월호 특별법에 관한 단상[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1

세월호 특별법에 관한 단상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1.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을 요구하는 문제는 나에게는 진리에 대한 칸트와 헤겔의 대립을 연상케 한다.

 

칸트

칸트

1.2. 그들은 말한다. 진상 조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이 필요하다.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선험적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을 특별법 속에 정립해야 한다.

 

1.3. 칸트는 말한다. 진리를 알 수 있느냐의 문제는 먼저 인식 주체인 우리 자신의 능력 여부를 알아야 한다. 주체의 인식 능력에 대한 탐구가 진리 탐구의 전제이다. 그런데 인식 능력에 대한 탐구는 인식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이다. 경험을 시작하기 전에 이런 경험 가능성의 조건을 모른다면 우리는 경험을 할 수가 없고, 진리를 알 수도 없다.

 

2. 헤겔은 칸트의 이런 물음을 간단히 일축한다. 내가 수영 능력이 있는지 없는 지는 직접 물 속에 들어가봐야 한다. 물 속에 들어가기 전에 나의 수영 능력이 가능한지 안 한지 검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레닌도 비슷하게 말한다. 말을 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말을 타봐야 안다고…물 속에 들어가보지도 않고, 말을 타보지도 않고 가능한지 안 한지를 따지는 것은 공허한 형식주의 논쟁이다.

 

2.1 어떤 이는 말한다. 이미 물 속을 들어가봤다고, 이미 말을 타봤다고. 조사권만 가졌던 과거사 진상조사위가 무기력하게 벽에 부딪혀 보지 않았냐고. 그래서 더 ‘성역없는’ 수사권이 필요하지 않는가고.

 

2.2 과거사 진상 조사위하고, 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특검이 동일한 것인가?

 

2.3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이 초헌법적이라는 발상에 대해 어떤 이는 말한다. 이미 반민특위가 가져보지 않았냐고.

헤겔

헤겔

 

2.4 반민특위는 그런 ‘성역없는’ 수사권으로 무엇을 경험했는가? 그들은 경험을 경험했는가?

 

3.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진보를 표방하면서 ‘성역 없는’ 조사권과 수사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칸트의 후예라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들에겐 애시당초 참사의 진상은 알 수 없는 X인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진상을 밝힐 수 있는 조건의 가능성 여부만이 관심사인지 모른다. 가능성의 조건이 그들에게는 동시에 진상규명의 조건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는 실제 수사를 하면서, 재판을 하면서, 대책을 수립하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진상에 대한 접근은 형식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진상 조사를 하면서 드러나는 내용의 문제가 아닌가?

 

3.1 그들이 말하는 ‘성역없는’이 법리로 가능한가? 모든 ‘성역’은 정치 논쟁, 정치 투쟁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3.2 한 시인은 말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집에다 싸움판을 벌여놓고 가출한다.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이미 제기된 문제를 미루거나 포기하고 새로운 문제를 찾아나선다. 그들이 ‘신비’에 정통한 듯이 행동하는 것도 그곳에서는 안심하고 나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모든’ ‘완전한’ ‘진실한’ 등 일련의 형용사들의 간계를 조심하지 않은 까닭에, 젊은이들의 정신이 정체하거나 부패하는 수가 있다. 힘겨운 문제를 대면하는 데 지구력을 보일 수 없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형용사들을 미끼로 문제를 농담으로 유인해들이는 것이다.”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4. 아마도 그들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가능성의 조건만을 따지면서 벌이는 무한한 스콜라적인 신학 논쟁, 말하자면 공허한 정치 투쟁이 본질인지 모른다. 이들은 문제를 푸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다만 자기 목소리를 키우고, 맹주 역할을 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5. 헤겔은 비판한다. 인식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는 인식을 도구로 간주하는 형식주의일 뿐이라고. 하지만 인식이라는 사고의 도구는 인식 바깥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에 관한 법률 조항도 현실 바깥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5.1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고 그 속에 머무는 것이 정신의 힘이다. 이러한 머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바꾸는 마법의 힘이다.(헤겔)

 

6. 인식의 이런 선험주의는 도덕적 엄숙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 “이 세상 안에서, 아니 세상 밖에서라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다.” (칸트 도덕 형이상학 기초) 이 착한 마음은 현실의 다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마땅히 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만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무감은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행하는 행위이다. 이것이 양심의 윤리이다. 하지만 그가 따르는 도덕법칙은 얼마나 공허한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내 마음 속의 의심할 수없는 양심! 엄숙주의와 자폐증, 또 이런 선은 얼마나 추상적이고 독단적인가?

 

7. 헤겔은 말한다. 양심과 추상적 선의 무기력을, 엄숙한 도덕적 주체의 공허함을…이 공허함과 부정성에서 오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노예의 종속 상태로 자신을 비하시키게 될 객관성에의 동경을…그들은 어떤 확고한 지주나 권위를 붙잡고자 한다(헤겔)! 교황을 열광하던 그 마음과 그 태도들을 보라.

 

8. 이제 우리는 더는 그런 공허한 형식주의, 도덕적 엄숙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9. 마르크스는 말한다.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성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인간은 자기사유의 진리성을, 즉 현실성과 힘을, 그 생명력을 실천에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천을 떠난 사유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논쟁은 순전히 스콜리학적인 문제이다.”(포이에르바하 테제)

 

10. 노자는 말한다. “挫其銳(좌기예)하며, 解其紛(해기분)하며, 和其光(화기광)하며, 同其塵(동기진)이니라.”(도덕경)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어지러운 것을 풀어헤치며,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진흙 구덩이 속에 함께 하라고…그렇다. 진흙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부딪히는 것이 아닌가? 들어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문제를 풀 수 있는가?

 

11. 이들의 말은 모두 한결같다. 직접 현실로 뛰어 들라고, 그 현실 속에서 풀어 헤치라고, 그 현실 속에서 확인하라고. 그 현실 속에서 바꾸라고…벌써 세월호 참사가 몇 개월이 지났는가? 그 사이에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끊이지 않는 형식주의 논쟁, 도덕적 엄숙주의, 종교적 순결 외에 우리는 무엇을 확인했는가? 그 끝은 어디로 가는가?

 

12.다른 시인은 말한다. “이 비정한 세상에 희망은 있는 것일까… 그 많은 진단과 분석, 나라를 개조하자던 다짐들은 어디로 가고…증오와 불신과 비어들만 거리마다 넘치는가”(도종환, 광화문 광장에서) 혹시 그들은 이제 이처럼 희망을 상실한 비탄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 우리는 스스로 만든 관념의 노예가 되려 하는가?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혹시 우리들은 파리통 속에 빠진 파리들이 아닌가? (비트겐슈타인)

 

13. 특검은 구성도 못했는데, 정작 검찰과 법원은 수없이 조사하고 판단들을 내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판단들을 내렸다가 나중에 다 다시 뒤집으려는가? 판단의 판단, 그 판단의 판단의 판단. 그 판단의 판단의 판단의 판단…무한한 퇴행!

 

14. 나는 나의 이런 말들이 질주하는 욕망의 비계 덩어리들, 영혼이 없고 창이 없는 독단의 황제를 두둔하는 말로 곡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미워한다. 나의 말들은 다만 내 친구들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충격을 주어서 사라진 어린 영혼들이 안식처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사고를 싫어하고, 오직 편들기에만 열중하는 시대에 나도 내 말이 무익한 열정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죽음의 철학을 음미하는 삶 [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0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미래로 가는 길이다

 

 

박종성(호원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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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칭 죽음을 구조화하는 권력과 그 대리자

어느덧 나에게 와 닿는 바람도 여름이 떠나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그 바람은 광화문 단식농성장에 더 진하게 불고 있었다.?죄송한 가슴으로 찾은 광화문에서의 반성은 삶과 죽음,?다시 죽음과 삶에 대한 문제를 음미하게 만들었다.?그 바람 속에는 여전히 세월호의 넋들이 묻어나 있다.?바람은 그렇게 나에게 죽음을 음미하게 한다.?우리는 나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장켈레비츠에 따르면,?인간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으로 구분된다. ‘나’는 일인칭 죽음, ‘너’, ‘당신’은 이인칭 죽음,?나와 별 상관없는 그런 사람들의 죽음을 삼인칭 죽음이라고 하였다.?우리는 결코 일인칭 죽음을 알 수도 경험할 수 없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고 사유하며,?음미한다.?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묻는 것이다.?그것이 인간이다.?물론 실존주의는 나의 죽음을 강조했다.?그러나 인간은 일인칭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이것이 인간의 삶의 조건이다.?그러므로 인간은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즉 레비나스가 말하는 죽음의 의미로 보면,?타자의 죽음을 통해 보다 근원적인 죽음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삼인칭 죽음으로 구조화된 정부와 매스컴의 왜곡된 태도는 우리들에게 죽음에 대한 음미를 가로막는다.?즉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매스컴의 태도나 정부의 능력은 우리들에게 삼인칭 죽음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도록 강요하였다.?보다 직접적인 그 죽음의 원인과 아픔에 천착하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관조하거나 방관하고 호도하는 태도가 바로 그러한 죽음의 태도를 불러 일으켰다.?이러한 권력은 우리에게 죽음을 음미하지 못하게 한다.?이 문제는 삶에서 중요한 문제이다.?그 이유는 죽음은 상대의 존재 조건이기 때문이다.?우리에게 벌어진 이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묻고 또 물어야만 삶의 조건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이 너무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 삶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권력을 움켜쥐고 죽음을 음미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그들은 경제를 살리자고 주장한다.?이번 죽음의 의미를 다시 계속하여 묻지 않고 삶을 규정하는 경제 살리기가 가능하다는 것인가??참으로 허접쓰레기같은 발상일 뿐이다.?죽음이 삶을 비추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그도 그걸 것이 그들에게 일인칭 죽음만이 죽음일 것이 때문이다.?그러나 인간은 이인칭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나아가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힘을 창조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그것이 역사이고 삶이고 인간의 본래적 모습일 것이다.

 

죽음의 동반자인 존재의 의미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이렇듯 다시 음미해야 하는 이유는 삶과 죽음은 각각 존재의 의미를 상대에게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세월호 사건의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문제를 부각시킨다.?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바로 이러한 의미에게 그 억울한 죽음은 우리들의 삶의 동반자이다.?그래서 사람들은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이러한 모습은 광화문 광장에,?그들의 손에 든 푯말에,?행진하며 외치던 구호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그래서 이번 죽음은 우리들의 삶의 동반자이다.?아픈 동반자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아픈 동반자의 죽음,?그 기억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그들의 죽음이 나의 삶에서 함께 하면서 우리들의 죽음 속에서 마지막 죽음의 삶을 마감할 때 사라질 것이다.?그러나 그 죽음은 또 다른 삶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정치권력은 이 죽음을 뿌리치고자 한다.?그럴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삶은 죽음의 동반자가 될 수 없지만 죽음은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즉 삶 속에 있는 죽음,?그러나 죽음 속에 삶이 없기에 우리는 죽음의 동반자인 것이다.

죽음의 동반자인 우리들은 자기 보존 의지를 갖기에 삶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존재이다.?쇼펜하우어가 말하듯 인간은?‘생존 의지’를 갖기 때문이다.?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기분을?‘불안’이라고 보았다.?공포는 분명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다.?이에 비해 불안은 미래 속의 가능성으로,?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한 감정이다.?인간은 이러한 불안에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이러한 불안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하이데거는 보통의?‘인간’이라고 불렀다.?이러한 인간의 모습과 달리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의미를 통해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을 실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결국 하이데거에게도 죽음의 의미를 음미하는 것은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또한 소크라테스가?‘불운한 정령’(daimon)에 사로잡혀 철학적 삶을 살아가며 주장했던 것은 무지를 자각하라는 것이었다.?그가 말하는 무지에 대한 자각은 세속적인 욕구에 충실하고 자신에 대해 무반성적 태도를 보이는 인간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즉?‘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우리는 얼마나 현실적인 무와 명예에 쫓겨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또 그렇게 행동하며 반성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무지한 인간들,?즉 죽음의 의미에 대해 무지한 인간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이것을 소크라테스는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이번 죽음의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의들 중 현실을 강조하며 경제를 살리자는 이들의 가치관은 그야말로 자신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무지한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죽음 앞에 그들이 갖는 교만과 사악함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것이다.?결국 그들에게 죽음이 의미가 없는 것은 그들에게 이번 사건의 죽음들을 음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멘토 모리(mememto mori)

수도회에서 허락한 단 하나의 말이다. ‘죽음을 기억하자’라는 말이다.?우리의 삶에서 추방시키고자 한 죽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그러하지 못한 상황이 지금이 현실이다.?자꾸만 기억에서 저버리는 삶을 강요하는 권력과 그 대리자들은 현실적 삶의 규정,?삶의 미래 또한 포기하자는 것과 다름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소크라테스가 말하듯,?철학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죽음의 준비를 하는 과정이 철학이다.?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물어야 한다.?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이 죽음의 의미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재규정하고 설정할 수 있는지 말이다.?현실을 강조하며 경제 살리기를 강조하는 이들은‘맹목적인 삶의 의지’(der blinde Wille zum Leben)로 가득 찬 비합리적인 인간들이다.?쇼펜하우어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를 진단하고 있다.그가 세계를 고통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는 것은 세계가 고통의 세계이므로 고통의 치유를 요구한다는 것이다.?그냥 단순히 고통의 세계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우어의 죽음 철학은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단순한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새로운 삶의 의지의 긍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광화문에 울려 퍼지고 우리들의 가슴 속에 내려 앉아 싹을 틔우고 있는 죽음의 의미는 실존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개별적인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삶 전체,?생명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우는 것이다.?단순한 삶의 의지는 세계의 부정이 아니다.?죽음의 의미를 되뇌는 삶의 의지는 이와는 다르다.?이러한 삶의 의지는 단순한 세계의 부정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생명의 긍정이다.?이것이 이 번 사건의 의미이자 우리가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의 의미인 것이다.?자신의 포기가 아니라 자신을 넘어 생명이 생명력을 다 할 수 있는 그러한 의지를 보존할 수 있는 만들 수 있는 세계의 긍정이다.?지금은 그러한 안전한 세계,?생명의 의지가 실현되는 세계가 아니다.?우리는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다.?우리가 더 나은 세계를 긍정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다.?이기심에 가득 차,?개별적 삶만을 기억하고,?교만과 사악함에 물들어 죽음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지양하고자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고자 한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등 촉구 천만인 서명의 슬로건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약속합니다.?진실을 밝히겠다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이것을 위해 우리는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우리는 모두 다모클레서의 검 아래 있는 그러한 인간들이다.?우리는 죽음아래 살아가는 그러한 존재들이다.?살아가는 존재여!?죽음을 기억하라!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9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

 

김재현(경남대 철학과 교수)

 

모든 생명체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계절의 변화에 따른 더위와 추위, 장마와 태풍 등 자연이 주는 시련을 겪어야 하고 우리 인간들은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힘든 상황과 고통을 겪고, 견뎌내면서 살아나간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전문)

 

사진-강지은

사진-강지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며 꽃을 피우는 식물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시련을 겪으며 성장해 간다. 고통과 시련은 삶에서 되도록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거치는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이 고통과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로 소중한 자식, 가족,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을, 앞으로도 가슴 아픈 삶을 살아가야 할 유가족들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기성세대로서, 희생된 수많은 학생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사고 중에 보여줬던 무책임하고 무력했던 선장 및 선원들, 해양경찰청 등 관련 기관과 정부의 한심한 대처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깊은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런데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어처구니없는 희생과 쓰라린 경험, 고통, 분노의 표출을 통해 조금씩 발전해 왔으며, 이러한 경험을 계기로 한국 사회도 돈보다 생명가치를 중시하는 인간적인 사회로 발전해 나가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 수많은 젊은이들의 억울한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유가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며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인간들은 한편으로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이나 사건들을 기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쓰라린 기억을 망각하고자 하는 경향도 있다. 왜냐하면 고통스런 기억 자체가 우리 삶을 힘들고 지치게 하며 또한 우울하게 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고, 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쓰라린 경험들을 항상 오래도록 기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상처를 잊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으며, ‘현재(the present)’를 ‘선물(the present)’로 받아들여 하루하루 활기차고 충실하게 사는 것이 생활의 ‘지혜’이며 ‘행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건들과 경험들도 있다. 특히 사회적, 역사적으로 함께 겪은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될 사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개인들에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라고 강요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그렇다면 기억과 망각의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개인의 삶, 가족의 삶은 사회적 환경에 의해 지배받으므로 사회적 조건이나 구조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어떤 성격의 국가인가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소외받고 힘없는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다반사로 하며,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부(국가)가 지배하는 사회에 사는 개인들은 돈과 권력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인정과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또한 전쟁 중인 사회에서, 빈부격차가 심해 사회적 갈등이 심각한 사회에서, 대형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불안전한 사회에서 개인들이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는가?

사회적 조건이나 사회구조가 우리 개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므로,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타자의 고통받는 모습에 대해 공감하면서, 자신도 그러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자각을 통해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적 현실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참여를 통해 우리 자신이 보다 인간적이 되고 성숙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개인의 자각만으로는 힘겹고 부족하므로 여러 개인들이 함께 노력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담쟁이> 전문)

 

개인들의 자각과 실천이 담쟁이 같은 연대와 네트워크로 모아질 때 거대한 벽도 조금씩 허물거나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인들과 조직들의 사회적 연대를 토대로 사회와 국가는 보다 민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제대로 된 ‘특별법’ 제정을 통해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 처벌 등을 통해 사회적 정의를 세워야 하며, 원칙을 존중하고 생명을 중시하는 안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사회시스템 차원에서의 개혁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지속할 수 있도록 제도의 확립이 필요하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미래로 가는 길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8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미래로 가는 길이다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 같은글이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2597

 

새민련이 의원총회에서 세월호 특별법 합의안을 부결했다. 박영선 비대위 대표 측도 재협상이나 추가협상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간과정이야 어떻든 잘한 선택이다. 유가족과 국민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세월호 특별법을 임의로 합의 처리하기는 힘들다. 문제는 비대위 위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바로 여당과 합의한 박대표의 입지점이 대단히 취약해졌다는 점이다. 새민련 내부에서도 그렇고 여당과의 협상 입지도 좁아졌다. 유가족과 참사 대책위의 시선도 좋은 편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예측 가능했음에도 왜 박대표가 협상안에 합의했냐는 점이다. 박대표의 현실 인식이 너무 안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국민 대다수가 이른바 세월호 피로증을 앓고 있고, 조만간 교황이 방문하고 얼마 안 있어 추석으로 이어지면서 더는 이 상황을 끌어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이라는 명분을 고집하기 보다는 일단 조사위를 유리하게 구성해서 진행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은 결정적으로 불가능하다.

 

첫째, 세월호는 정치인들이 입맛에 맞게 요리할 수 있는 의제의 수준을 넘어서 있다. 그동안 교통사고니 시체 장사니 하면서 세월호 참사의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는 한국사회의 불법적, 비도덕적 관행으로 인한 안전과 구호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과 국민들이 죽어간 사건이다. 이와 관련한 의혹도 부지기수로 생산되고 있다. 해경과 안행부의 조기 대책, 유병언의 도피와 관련한 김기춘 비서실장의 관계, 유병언의 죽음의 진실의 문제, 박대통령의 7시간 행방의 문제, 세월호 주인과 관련한 국정원의 관계, 향후 대책 수립과 제도 정비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적당히 덮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세월 호 참사는 시대적 과제이고 역사적 문제이다.

 

▲http://www.jabo.co.kr/ 16일 침몰한 세월호(전라남도 수자원과 제공)

▲http://www.jabo.co.kr/
16일 침몰한 세월호(전라남도 수자원과 제공)

둘째, 사안이 중차대하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같은 상태로 있을 수 없다. 9.11사태를 경험한 미국이 안전과 테러와 관련해 Before 9.11/After 9.11로 시대 구분을 하는 것처럼, 대한민국도 세월호 참사와 그 대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Before 4.16/After 4.16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역사의 향방이 그렇게 짜여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만일 정치인들이 안일하게 세월호 문제를 여타의 다른 사건 정도로 무마하려고 하면 할 수록 이 문제를 처리하는 사회적 비용과 시간, 그리고 국론 갈등 등의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 특히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정치적 지혜가 필요하다. 하물며 야당 대표가 적당 수준에서 합의해 처리할 수 없다. 지난 80년대 한국 사회가 광주의 희생을 해결하는 데 얼마나 큰 시간과 노력을 들였고, 사회적 진통을 겪었는가를 교훈삼아야 한다.

 

셋째, 박 대표는 세월호 정국이 오래 가다 보니 이른바 항간에 나도는 세월호 피로증과 같은 현실주의적인 인식을 했을지 모른다. 세월호의 여파는 경제를 비롯한 사회 각 부문들에 깊은 충격으로 남아 한국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피로증은 여권 핵심이 세월호 참사를 일반 국민들과 분리시키려는 고도의 책략 중 하나이다. 참사가 발생한지 120일이 되었지만 정치권에서 해결한 것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유가족들과 국민들의 고통만 가중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보수 간에 국론 갈등도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력하고 무능한 야당은 문제 상황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여권의 분리 전략에 말려든 셈이다. 이런 분리전략은 이미 80년도에 전두환 군사정권이 성공적으로 써먹은 경험이 있다. 피로증은 문제가 답보 상태에서 갈등만 심화될 때 나온다. 해결의 책임은 현 정부를 꾸려 나가고 있는 여권의 책임이고 순전히 대통령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지난 120일간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과연 이렇게 무능한 대통령이 있을까 할 정도이다. 세월호가 서서히 수장되는 골든 타임에 대통령은 무엇을 했는가? 오죽하면 청와대에서 실종된 7시간이 논란이 될 정도이다. 배를 버리고 도망 나오는 선장들과 선원들을 보고 살인자라고 역정을 내고, 슬픔에 잠긴 유족들에게 특별법과 특검을 약속해 놓고서도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유병언을 검거하라고 닦달만 했지 정작 그의 시신은 유골이 돼서 일반인에 의해 발견되었을 뿐이다. 지금 이 무능한 대통령은 청와대 가신들의 뒤로 숨어 있을 뿐이다. 여의도 정치의 실종을 개탄하면서 민생을 이야기할 때 보면, 과연 대통령이 현 정국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국민의 고통을 이해하는 대통령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한국 사회가 지난 97년의 금융위기를 비교적 빠른 시간에 잘 헤쳐 나온 데에는 정권교체와 김대중이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고, 국민들이 믿음을 갖고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후유증들이 없지 않았지만, 커다란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그의 과단성 있고 지혜로운 행동이 큰 역할을 했다. 지금 우리가 박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도 이런 지도자의 역할이다. 세월호 피로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약속도 식언하는 믿지 못할 대통령, 세월호 참사의 역사성도 인식 못하는 멍청한 대통령, 난맥처럼 얽혀 들어가는 세월 호 정국을 방치만 하고 있는 무책임한 대통령이자 무능한 대통령 때문이다.

 

넷째, 아마도 박대표가 협상안을 성급하게 받아들인 데는 보궐선거에서의 참패로 인해 야권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궐선거에서 야권이 참패한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세월호 정국에서 김한길/안철수로 대표되는 야당의 무기력한 대응과 잘못된 공천, 호남 정치인들의 안이한 판단 때문이다. 국민이 야당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 국민은 정권을 비판할 수 있는 강한 야당,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비전 있는 야당, 참사를 해결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야당의 모습을 원했다. 야당이 참패한 것은 그런 모습과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대표가 이전 대표들의 무기력한 모습을 반복하면서 현 정국을 돌파할 여력이 없다고 주저앉는다면, 그것은 야당의 본분을 망각한 처사이고 정치인으로서 역량이 의심스러운 모습이다. 그의 협상안은 8월 11일 새민련 의원총회에서 바로 부결되었고, 재협상을 시사하는 발언이 나오고 있다. 이로 인해 박대표의 입지도 더욱 좁아졌고, 때문에 현 시점에서 박대표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도 제한되어 있다. 먼저 박대표는 유가족과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협상안은 물 건너갔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다시 좌고우면한다고 혼선을 일으키면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조차 위태로워질 수 있다. 지금의 협상 정국 돌파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대표직이 아닌 의원직 총 사퇴까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협상 정국의 단축을 위해 대통령과 직접 협상을 유도해야 한다. 지금 정국을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대통령의 결단 뿐이다. 다른 어떤 해결 방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과 같이 대통령에게 막중한 권한이 실려 있는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는 생활 정치, 민생 정치의 물꼬를 트는 역할도 대통령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여의도에서 정치가 실종되었다고 말을 하기 전에 그들이 정치를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 주어야 한다. 그 물꼬는 세월 호 문제를 접근하고 풀어나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온갖 갈등과 분열,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은 세월 호 정국으로 집중되어 있다. 여기서 물꼬를 트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가 실종되고, 국민들이 피로증에 걸려 분열되고 있다. 이 물꼬는 오직 성역 없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마련하는 일에서만 풀 수 있다. 대통령은 여당만을 위한 대통령이 아닌 국정의 총책임자이다. 요즘 항간에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명량]은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 장군의 명량 대첩에 관한 영화다. 장군이 말하지 않던가?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다”고. 박대표도 그렇고, 박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특별법을 제정하면 여권에 엄청난 부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해서 막고 있다면 그건 오산이다. 정권의 생명은 약간 연장될지 몰라도, 대한민국의 미래는 여전히 구태와 관행, 분열과 갈등 속으로 실종될 것이다. 만일 대통령이 죽으려는 자세로 푼다고 하면, 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대통령, 역사에 기록되는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다. 이런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정치적 지혜를 요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 대표도 안이한 현실 인식에 안주해서 살려고 하면 그의 정치 생명은 오래갈 수 없다. 우리는 과거 그런 정치인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다. 박 대표도 이미 한 차례 경험하지 않았는가? 정치인들의 인기는 아침이슬과 같고, 물거품과 같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신뢰감과 책임감이 있는 정치인이다. 그가 죽으려 한다면 반드시 박 대표의 죽음의 길에 국민이 같이 동반할 것이고, 죽어가는 야당도 국민이 다시 살릴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월호 특별법을 조건 없이 만들어라![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7

세월호 특별법을 조건 없이 만들어라!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 같은글이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19987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로 시작된 유가족 단식 농성이 벌써 21일을 넘겼다. 평소 단식을 하지 않던 사람이 이 더운 날에 거리에서 이 정도로 단식을 한다면 생명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벌써 몸 상태가 현저하게 나빠져 외부 접촉을 막고 있다고 한다. 유가족들의 이런 상태를 걱정한 시민들이 현재 광화문에서 연좌 농성에 진입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 정권은 무엇이 두려워서 특별법 제정을 막고 있는 것이고, 도대체 무능한 야권은 무엇이 힘들어서 계속 머뭇거리고만 있는 것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생으로 저 바다에 수장시킨 것도 원통한데, 그 부모들까지 나서 이렇게 배를 곯아 가며 청원해야 하는가? 특별법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까지 흘려가며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이 아닌가? 우리 국민은 그 당시 대통령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참으로 어린 학생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면서 흘린 눈물이라고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 있고서 벌써 100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진척이 없을 뿐, 원통한 부모들만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루 하루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이 국민들은 언제까지 대통령의 무능한 판단과 느려 터진 결정으로 고통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당신들은 참으로 유가족들이 거리에 쓰러져 다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인가? 이미 죽은 아이들의 혼이 구천에 떠돌면서 원통해하는 데도 당신들은 그런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특별법은 특정 정당이나 정권의 정략적 산물이 될 수 없다. 세월호 참사는 현 정권 만의 잘못도 아니다. 물론 사고 책임의 직접적 당사자들과 책임 범위 안에 있는 관료들의 문제는 중차대하다. 하지만 관피아와 해피아 같은 문제들은 지난 수 십 년 간 한국사회가 앞만 보며 달려 오면서 누적된 문제들이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일은 현 정권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풀어야 할 역사적인 과제이다. 성역없는 수사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현정권의 책임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대한민국, 우리 자손들이 살아갈 대한민국을 올곳이 세우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세월호 참사를 이렇게 역사적 과제로 생각한다면 도대체 당신들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가? 정권은 유한하지만 우리 민족과 후손이 살아갈 대한민국은 영원하다. 그런 국가를 바로 세우는 문제에서 왜 당신들은 정권의 안위만 생각하고, 정략적으로만 문제를 보는가? 대통령은 이미 오래 전에 정권에 기초한 권력의 무상함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대통령은 그런 권력의 무상함을 또 다시 경험하고 싶은가, 그리하여 세월호 문제를 정략적 미봉책으로 해결하려다가 자자손손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하나의 오점으로 남고 싶은가? 당신들은 역사가 두렵지 않은가?

 

사진-민중의 소리

사진-민중의 소리

4.1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백일이 훨씬 지났고, 그 부모들의 단식도 21일이 지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한 치의 걸음도 내딛고 있지 못하다. 대통령은 이렇게 조사가 늦어지고 대책 수립이 지연되다보면 그냥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럴수록 부모들의 원한의 감정은 하늘을 찌르고, 국민들의 갈등과 분열의 골도 메우기 힘들 정도로 깊어질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조사를 미룰수록 항간에 떠도는 세월호 관련 의혹들은 더욱 비등할 것이고, 그 모든 화살은 정치권과 청와대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그리고 그 여파는 경제를 비롯한 사회 각 부문들에 깊은 충격으로 남아 우리 사회의 발목을 더욱 더 과거에 묶어두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책임은 정부의 수반이고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안이한 현실 인식과 무능한 판단에 있다는 것을 결코 모른단 말인가? 대통령은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 대일 관계에서 과거사 청산을 따지고, 대북관계에서 진정성과 신뢰를 문제 삼고 있지 않은가? 과거의 불행한 문제들이 청산이 안 되고, 서로 간에 신뢰가 부재하다면 결코 미래의 발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대통령이 왜 세월호 참사를 가볍게 생각하는가? 왜 그것을 조삼모사 식의 정략적 판단으로 호도하려고 하는가? 왜 국정의 최고 책임자의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했던 이야기를 뒤집어 버리려고 하는가? 세월호 참사로 야기된 문제들을 조사하고 최소한 미래에 다시 반복되지 않을 정도의 대책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은 한 치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대통령은 참으로 모른단 말인가? 혹여 대통령은 지난 보궐선거의 압승 결과를 믿고 이제는 세월호의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안이하게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만일 대통령이 선거결과를 그렇게 이용하려 한다면 이제 국민들은 무능한 야당에 대한 불신을 넘어 정치권 전반을 불신하는 엄청난 사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정치인들은 벌써부터 보상금을 가지고 유가족들을 회유하고 분열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부모가 자식의 목숨값을 가지고 흥정을 하려 하겠는가?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 부모들의 비통한 마음을 위로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원한의 감정만 심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정치가 아니겠는가? 아, 어떻게 이다지도 어리석은 정치인들을 우리 손으로 뽑았단 말인가? 정녕 대통령은 정치 전체가 불신되고, 국민들의 갈등과 분열이 막심해지는 시대의 대통령이 되고 싶은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는 분명히 적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만약 주권자인 국민이 선출권력들 앞에서 좌절과 절망을 느끼고, 그들을 더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국민과 대립하는 국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헌신짝 취급하는 국가, 국민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거나 위로하지 못하는 국가, 국민의 원한 감정만 자극하는 국가, 그런 국가가 과연 국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런 국가가 언제까지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강조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라. 봄날에 화창하게 핀 꽃같은 아들과 딸들이 수학여행을 간다고 집을 나선지 몇 시간이나 되었는가? 그런 그들이 배에 갇혀 구조의 손길 한번 받아 보지 못한 상태로 서서히 저 차가운 바다로 수장된 모습을 지켜본 부모들의 비통한 심정을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 기가 막히고, 너무나 황당해서 말이나 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컴컴한 바닷 속에서 시신이라도 거두어주기를 바라는 영혼들이 있는데, 그런 부모들이 무얼 그렇게 심한 걸 원한다고 하는가? 시체장사를 한다고, 자식팔아 영화를 누리려 한다고, 심지어 유가족 충이라는 막말까지 들어가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 대단한 것인가? 그들은 단지 정확한 진상규명이고, 그것을 위해 성역없는 수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수사권을 가지고 수사를 하더라도 음해하고 저항하는 세력들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그 결과를 가지고 법원의 공정한 판단을 받는다는 것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그런 판단이 있더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무수한 장애들이 또 다시 앞을 가로 막을 터인데, 그런 사이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면서 유가족들의 가슴은 한 없이 타들어갈 터인데, 어찌 국민의 녹을 받고 있는 국회와 국정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은 첫 단추를 꿰는 일에서부터 이토록 유가족의 애를 태우는가?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 우리들의 어린 자식들이 구조의 손길도 받지 못하고 서서히 수장되어갈 때, 다들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던 마음으로 돌아가자. 그 때 누가 좌우를 따졌고, 여야를 따졌고, 진보와 보수를 따졌는가? 그 수장되어가던 순간에 한 마음 한 뜻으로 안타까워하지 않았던가? 구조의 손길을 펼치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할 골든 타임을 놓친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자책하고 분노를 했던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잃었던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장비를 투여했고, 얼마나 많은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었는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고통스러워했는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국민 경제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있는가? 그런데 다시 우리는 그 시간을 놓쳐 국민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미래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흔들어 놓으려고 한다. 이 땅의 정치인들이여, 그리고 대통령이여. 당신들은 또 다시 그런 골든 타임을 놓치고, 외면하고, 무시함으로써 역사의 죄인이 되려 하는가? 국민은 더는 그런 어리석음을 보고 싶지 않다. 다시 한 번 호소한다. 세월호 특별법을 정략적으로 바라보지 마라. 역사의 눈을 의식하면서 조건없이 신속하게 처리하라. 그래서 더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라. 더는 국론을 분열시키지 마라. 더는 국민들이 이 고통 속에서 한 없이 좌절하지 않게 하라. 비온 뒤의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간절히 부탁한다. 부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고통을 생각하라. 부디 갈라진 국론을 하나로 합칠 것을 생각하라. 부디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라. 부디 역사의 눈을 생각하라. 정권은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유구하다는 것을 생각하라.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은 도착증 환자의 환상일 뿐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6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은 도착증 환자의 환상일 뿐이다>

김성우(ⓔ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이 글은 <프레시안>과 공동게재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로우려면 신이 존재해야 할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아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무신론을 택한다. 그의 실존주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야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본질(시나리오)이나 규범이 없게 될 테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실존하면서) 자신의 시나리오(본질)를 써 가는 작가가 된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해서 인간의 자유를 선포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라캉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는 이러한 말로 정치적인 전체주의의 병리적인 현상을 설명한다. 진정한 스탈린주의 정치가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끔찍한 정화(숙청)와 집행(학살)을 수행한다. 그의 마음은 그 일을 하면서도 찢어지는 듯이 아프다. 그렇지만 그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이 인류의 진보를 향한 그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는 단지 ‘역사적 필연성’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형적인 도착증 환자의 태도이다.

꾸미기_유럽2013.01 462도착증의 대표적인 유형은 가학증인 사디즘과 피학증인 마조히즘이다. 도착증의 전형적인 태도는 자신을 ‘큰 타자의 도구’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큰 타자는 주체에게 그 상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가에게는 ‘국민의 뜻’, 기업가에게는 ‘소비자의 욕구’, 일신교도들에게는 ‘신의 뜻’,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의 사명’, 관료에게는 ‘조직의 명령’ 등이 그것이다. 도착증 환자의 대표적 사례인 사디스트는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면서도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느낀다. 그는 자신을 ‘큰 타자의 뜻’을 성취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도착증에 전형적인 부인(disavowal)에 해당한다.

지젝은 이러한 도착증의 범주를 가지고 정치적 전체주의는 물론 테러리즘에 빠져든 종교적 근본주의까지 해명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정적을 살해하거나 표적물을 죽일 때도 역시 ‘알라신의 뜻’에 호소한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나자 이완용은 세 차례에 걸쳐 경고문을 <매일신보>에 실었다. 특히 5월 29일에 기고한 제3차 경고문에서 그는 조선이 일본에 식민지가 된 것도 다 ‘상천(上天, 유교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썼다. 따라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망령된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매국도, 제국주의적 침략도 정당화하는 마법 지팡이이다.

혹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의 ‘하나님의 뜻’에 관한 발언도 이러한 도착증적인 증상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유명해진 그의 온누리 교회 강연록(국무총리실 제공)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한국방송공사(KBS) 화면 갈무리

ⓒ한국방송공사(KBS) 화면 갈무리

“그때도 그러면 왜 그럼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셨으면 일본한테 합방하지 않게 하시지,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이렇게 당하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속으로. 그런데 저는 아까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우리한테 너희들은 이조 500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고난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36년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마치 광야의 40년 생활을 하고서 우리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갈 수 있듯이 36년의 고난을 거치고 난 다음에 대한민국에게 독립을 허용하신 거예요.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 이거예요.”

종교적 근본주의의 특징은 일종의 논리적인 합선(short-circuit)이다.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제멋대로 합선시켜 구사하는 것이다. 광신주의적 살인마는 표적물이 된 사람에게 보낸 협박 편지를 신의 분노로 포장한다. 그는 교묘히 세속적인 협박 편지가 주는 공포와 최후의 심판 때 신의 분노를 마주할 때 일어나는 두려움을 섞는다. 문창극 후보자의 논리에도 이러한 합선이 존재한다. 학술적이거나 객관적인 근거도 없이 우리의 민족사와 신성한 섭리를 뒤섞어 민족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식민 지배, 더 나아가 분단과 6·25라는 민족적 비극의 역사를 단 한마디로 풀어낸다. 이런 사건 모두 다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나님은 너희들은 안 되겠다. 다시 고난을 더 가져라, 그래서 분단을 시켰어요. 그것뿐입니까? 6·25까지 만들어 주셨어요. 이 6·25까지 주신 거야. 우리 생각에는 이야, 하나님 참 너무 하다, 이럴 수가 있냐. 어떻게 6·25를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6·25가 저는 이렇게 얘기하면 지가 죽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6·25를 또 저렇게 미화한다는. 6·25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단련이 된 거예요, 6·25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논리적 합선에 대해 기독교계 일부에서도 문제를 삼고 있다. 광주 기독교연합회(NCC·CBS·YMCA·YWCA)는 “문 후보자는 역사에 대한 자신의 자의적 해석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킨 비성경적이고 반신학적인 인사“라고 규정한다.

물론 또 다른 기독교 인사들은 문 후보자의 논리를 두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종윤 원로목사는 “우리가 당한 고난의 길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문 후보의 교회에서 강연은 모든 것이 하나님 뜻 안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한, 지극히 성경적 표현인 것”이라고 평했다. 심지어 전광훈 목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4백년 애굽종살이나 70년간의 바벨론 포로도 하느님의 주권적 섭리”로 해석되는 것처럼 “한국 근대사에서 긍정적 내지 부정적 모든 사건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며 “세상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에서 교회 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 관점에서 이를 재단하는 것은 잘못이자 교회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대로 기독교 신앙적 관점과 세상적 관점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유대교적인 관점과 기독교적인 관점의 구분도 중요하다. 문 후보자를 비롯한 그를 비호하는 목사들의 해석은 세상적인 것에 기독교적인 관점과 심지어 유대교적인 관점까지도 뒤섞어버린다. 이는 테러와 침략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및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BBC 방송에 따르면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신의 계시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처럼 “나는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라고도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은 이들의 정신세계에서는 라캉의 말처럼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과연 테러, 학살, 침략을 이렇게 신의 계시, 신이 주신 사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지극히 이슬람적인 관점이거나 기독교적인 관점인가? 가해(加害)를 신의 명령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나와 같은 비신학자가 보아도 당연히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마찬가지로 피해(역사적 비극)를 신의 섭리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족사와 유대교의 민족사를 마구 뒤섞는 것도 마찬가지로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신약성서의 어디에 예수가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의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곳이 있는가? 예수는 도리어 “가이사(로마의 황제인 케사르)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로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뒤섞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지배한 것도 일본에게 주신 신의 뜻인 것인가? 이러한 해석이 앞선 말한 도착증 환자의 논리적 합선에 해당한다. 가해를 신의 뜻으로 본다면 이는 사디즘적인 도착증과 유사하고 피해를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마조히즘적인 도착증과 유사한 것이다.

더군다나 왜 문 후보자는 애국적인 투사인 안중근도 아닌, 김구도 아닌 매국노의 대표자인 윤치호의 글을 인용한 것인가? 더군다나 비판적인 자세가 아니라 공감적인 자세로 인용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또 버전 업을 시켰느냐 하면, 이 윤치호라는 사람은. 조선유학생들이 일하기가 싫다, 이거야. 그리고 앉아서 순 말로만 하는 것 좋아한다 이거야.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고 이게 아주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던 거야. …… 그러니까 우리나라 그 이조 말기에 우리 민족들의 피에는 공짜로 놀고 먹는 게 아주 그냥 몸에 박혀 있었대요. 하여튼 이런 나라였어요.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고 그런데 그런 나라에 선교사님들이 와가지고 변화를 시킨 거야.”

이완용ⓒWikimedia Commons

이 인용문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한데 선교사가 와서 변화를 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극단적인 자기 폄하와 서구 중심주의가 깔려 있다. 이러한 자기 폄하는 일제의 식민 사관에서 가장 강조하는 핵심적인 주제이며 유럽의 식민 사관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자기 폄하와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는다는 것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매국노의 기본 논리이다. 그래서 친일은 필연적으로 친서구로, 종국적으로는 친미로 귀결된다.

“6·25전쟁이 그렇게 났으면 우리는 소련이나 중공 밑에서 그 후원을 받은 북한에 우리 다 지금 다 흡수되고 말았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안 되겠다, 너희들 붙잡아야겠다. 너희들 어떻게 붙잡느냐. 미국을 못 가게 만들어 주겠다. 하나님이 미국을 우리 딱 붙잡아 주셨어요. 미국이 6·25 사변이 끝나면서 우리하고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상호안보조약을 맺었어. 그건 뭐냐. 우리나라가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침략을 당한 것처럼 도와주고 미국이 침략을 당하면 우리가 침략 당한 것처럼 또 미국을 도와준다. 우리가 무슨 미국을 도와줄 힘이 있습니까? 괜히 미국에 조약을 맺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그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까지 그 조약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가 살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것 때문에 지금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한국에 미군이 없는 한국을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친일과 친미적 사관이 기독교적인 사관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러면 예수는 친(親)로마적인 매국노인가? 아니면 반(反)로마적인 민족 투사인가? 아니면 이런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종교적 구원자인가?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아마도 세 번째의 예수의 모습을 기독교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도착증 환자라면 첫 번째나 두 번째의 예수의 모습을 선택할 것이다.

도착증 환자의 가장 큰 특징은 진실을 부정하는 방식에 있다. 지젝에 의하면 부정(Verneinung)은 무의식의 저항이다. 일종의 방어 메커니즘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형태의 부정, 즉 억압(Verdr?gung), 부인(Verleugnung) 그리고 거부(Verwerfung)가 있다. 이러한 부정의 세 가지 심리 메커니즘은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이라는 진단 범주들에 상응한다. 신경증적인 부정은 억압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주전자를 빌린 후에 다시 깨진 주전자를 돌려줄 때 세 가지 형태로 부정하는 발언들이 존재한다. “난 결코 네가 요구하는 주전자를 빌린 적이 없다.” 이런 발언이 전형적인 억압적인 부정이다. 또한 물신주의적인(도착증적인) 부인은 다음과 같다. “난 그것을 온전한 상태로 너에게 돌려주었잖아.” 마지막으로 정신병적인 거부(Verwerfung, foreclosure)의 사례는 상징 질서인 큰 타자를 배제하고 있어서 비(非)논리적으로 발언한다. “어쨌든 그것은 구멍이 있었어.”

이와 유사하게 문 후보자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발언의 변화를 살펴보자. 채널A 방송에 따르면 처음에 문창극 후보자는 출근길에 교회에서의 강연 내용에 대해 사과할 생각이 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사과는 무슨 사과냐?”고 반문했다. 청문회 준비단과 회의를 한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한 강연이 일반인의 정서와 거리가 있을 수 있으며 오해의 소지가 생겨 유감”이라고 표명했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 청문회 준비단은 왜곡된 보도를 하는 언론사에는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힌 이후에 문 후보자도 퇴근길에서 “(강력 대응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사실을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다음 날, 몇몇 기독교 목사들은 문 후보자의 해석이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두둔했다. “어쨌든 그것은 성경적이었어.” 이러한 태도는 처음에 인용한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게 허용된다.”는 식이다.

부디 우리나라 기독교계를 이끄시는 분들 가운데 몇 분이 혹시라도 도착증 증세가 심해지거나 심지어 정신병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