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철학을 음미하는 삶 [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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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미래로 가는 길이다

 

 

박종성(호원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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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칭 죽음을 구조화하는 권력과 그 대리자

어느덧 나에게 와 닿는 바람도 여름이 떠나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그 바람은 광화문 단식농성장에 더 진하게 불고 있었다.?죄송한 가슴으로 찾은 광화문에서의 반성은 삶과 죽음,?다시 죽음과 삶에 대한 문제를 음미하게 만들었다.?그 바람 속에는 여전히 세월호의 넋들이 묻어나 있다.?바람은 그렇게 나에게 죽음을 음미하게 한다.?우리는 나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장켈레비츠에 따르면,?인간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으로 구분된다. ‘나’는 일인칭 죽음, ‘너’, ‘당신’은 이인칭 죽음,?나와 별 상관없는 그런 사람들의 죽음을 삼인칭 죽음이라고 하였다.?우리는 결코 일인칭 죽음을 알 수도 경험할 수 없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고 사유하며,?음미한다.?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묻는 것이다.?그것이 인간이다.?물론 실존주의는 나의 죽음을 강조했다.?그러나 인간은 일인칭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이것이 인간의 삶의 조건이다.?그러므로 인간은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의 의미를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즉 레비나스가 말하는 죽음의 의미로 보면,?타자의 죽음을 통해 보다 근원적인 죽음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삼인칭 죽음으로 구조화된 정부와 매스컴의 왜곡된 태도는 우리들에게 죽음에 대한 음미를 가로막는다.?즉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매스컴의 태도나 정부의 능력은 우리들에게 삼인칭 죽음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도록 강요하였다.?보다 직접적인 그 죽음의 원인과 아픔에 천착하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관조하거나 방관하고 호도하는 태도가 바로 그러한 죽음의 태도를 불러 일으켰다.?이러한 권력은 우리에게 죽음을 음미하지 못하게 한다.?이 문제는 삶에서 중요한 문제이다.?그 이유는 죽음은 상대의 존재 조건이기 때문이다.?우리에게 벌어진 이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묻고 또 물어야만 삶의 조건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이 너무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 삶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권력을 움켜쥐고 죽음을 음미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그들은 경제를 살리자고 주장한다.?이번 죽음의 의미를 다시 계속하여 묻지 않고 삶을 규정하는 경제 살리기가 가능하다는 것인가??참으로 허접쓰레기같은 발상일 뿐이다.?죽음이 삶을 비추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그도 그걸 것이 그들에게 일인칭 죽음만이 죽음일 것이 때문이다.?그러나 인간은 이인칭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나아가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힘을 창조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그것이 역사이고 삶이고 인간의 본래적 모습일 것이다.

 

죽음의 동반자인 존재의 의미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이렇듯 다시 음미해야 하는 이유는 삶과 죽음은 각각 존재의 의미를 상대에게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세월호 사건의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문제를 부각시킨다.?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바로 이러한 의미에게 그 억울한 죽음은 우리들의 삶의 동반자이다.?그래서 사람들은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이러한 모습은 광화문 광장에,?그들의 손에 든 푯말에,?행진하며 외치던 구호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그래서 이번 죽음은 우리들의 삶의 동반자이다.?아픈 동반자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아픈 동반자의 죽음,?그 기억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그들의 죽음이 나의 삶에서 함께 하면서 우리들의 죽음 속에서 마지막 죽음의 삶을 마감할 때 사라질 것이다.?그러나 그 죽음은 또 다른 삶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정치권력은 이 죽음을 뿌리치고자 한다.?그럴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삶은 죽음의 동반자가 될 수 없지만 죽음은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즉 삶 속에 있는 죽음,?그러나 죽음 속에 삶이 없기에 우리는 죽음의 동반자인 것이다.

죽음의 동반자인 우리들은 자기 보존 의지를 갖기에 삶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존재이다.?쇼펜하우어가 말하듯 인간은?‘생존 의지’를 갖기 때문이다.?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기분을?‘불안’이라고 보았다.?공포는 분명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다.?이에 비해 불안은 미래 속의 가능성으로,?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한 감정이다.?인간은 이러한 불안에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이러한 불안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하이데거는 보통의?‘인간’이라고 불렀다.?이러한 인간의 모습과 달리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의미를 통해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을 실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결국 하이데거에게도 죽음의 의미를 음미하는 것은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또한 소크라테스가?‘불운한 정령’(daimon)에 사로잡혀 철학적 삶을 살아가며 주장했던 것은 무지를 자각하라는 것이었다.?그가 말하는 무지에 대한 자각은 세속적인 욕구에 충실하고 자신에 대해 무반성적 태도를 보이는 인간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즉?‘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우리는 얼마나 현실적인 무와 명예에 쫓겨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또 그렇게 행동하며 반성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무지한 인간들,?즉 죽음의 의미에 대해 무지한 인간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이것을 소크라테스는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이번 죽음의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의들 중 현실을 강조하며 경제를 살리자는 이들의 가치관은 그야말로 자신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무지한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죽음 앞에 그들이 갖는 교만과 사악함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것이다.?결국 그들에게 죽음이 의미가 없는 것은 그들에게 이번 사건의 죽음들을 음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멘토 모리(mememto mori)

수도회에서 허락한 단 하나의 말이다. ‘죽음을 기억하자’라는 말이다.?우리의 삶에서 추방시키고자 한 죽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그러하지 못한 상황이 지금이 현실이다.?자꾸만 기억에서 저버리는 삶을 강요하는 권력과 그 대리자들은 현실적 삶의 규정,?삶의 미래 또한 포기하자는 것과 다름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소크라테스가 말하듯,?철학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죽음의 준비를 하는 과정이 철학이다.?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물어야 한다.?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이 죽음의 의미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재규정하고 설정할 수 있는지 말이다.?현실을 강조하며 경제 살리기를 강조하는 이들은‘맹목적인 삶의 의지’(der blinde Wille zum Leben)로 가득 찬 비합리적인 인간들이다.?쇼펜하우어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를 진단하고 있다.그가 세계를 고통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는 것은 세계가 고통의 세계이므로 고통의 치유를 요구한다는 것이다.?그냥 단순히 고통의 세계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우어의 죽음 철학은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단순한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새로운 삶의 의지의 긍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광화문에 울려 퍼지고 우리들의 가슴 속에 내려 앉아 싹을 틔우고 있는 죽음의 의미는 실존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개별적인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삶 전체,?생명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우는 것이다.?단순한 삶의 의지는 세계의 부정이 아니다.?죽음의 의미를 되뇌는 삶의 의지는 이와는 다르다.?이러한 삶의 의지는 단순한 세계의 부정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생명의 긍정이다.?이것이 이 번 사건의 의미이자 우리가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의 의미인 것이다.?자신의 포기가 아니라 자신을 넘어 생명이 생명력을 다 할 수 있는 그러한 의지를 보존할 수 있는 만들 수 있는 세계의 긍정이다.?지금은 그러한 안전한 세계,?생명의 의지가 실현되는 세계가 아니다.?우리는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다.?우리가 더 나은 세계를 긍정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다.?이기심에 가득 차,?개별적 삶만을 기억하고,?교만과 사악함에 물들어 죽음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지양하고자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고자 한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등 촉구 천만인 서명의 슬로건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약속합니다.?진실을 밝히겠다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이것을 위해 우리는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우리는 모두 다모클레서의 검 아래 있는 그러한 인간들이다.?우리는 죽음아래 살아가는 그러한 존재들이다.?살아가는 존재여!?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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