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2)[대안도덕교과서]-6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2)[대안도덕교과서]-6

 

 

김종곤(건국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3. 법과 습관 그리고 믿음

 

예를 들어 현재 도로교통법 제50조, 제67조, 제156조, 제160조에서는 안전벨트 착용과 그 처벌에 관해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1990년(경향신문 1990.09.19.)에 들어서면서 안전벨트 착용은 의무화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필자의 기억을 더듬어 보더라도 대부분의 차량 운전자들은 안전벨트가 자동차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는 것은 불법도 아니고 더구나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전벨트 미착용에 대해 대대적인 집중 단속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즉 적발시 벌금을 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불편하고 번거롭지만 안전벨트를 착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자동차에 올라타자마자 습관적으로 운전자는 안전벨트를 착용하기 시작하였고, 운전자가 착용하지 않을 경우 동승자가 안전벨트를 착용할 것을 권고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것이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하거나 적발시 벌금을 내야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서는 안 할 수도 있으며 의도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예에서 안전벨트에 관련한 법을 따르는 것이 ‘습관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좋은 개념이 습관(Habit)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아비투스’(Habitus)입니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사회적인 것이 신체에 내면화되고 그것이 다시 사회화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았을 때 ‘의례적으로’ 선물을 준비합니다. 이는 어느 날 자연스럽게 생긴 마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때 부터인가 자신의 생일이 되면 부모나 주변사람들이 선물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생일에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 증여는 사회적인 관습이 내 신체에 아로새겨진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자신 역시 친구의 생일에 선물을 주면서, 그 선물을 받는 친구도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즉, 자신의 신체 또한 사회적 믿음을 만드는 것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비투스는 한편으로는 의식적인 측면에서 또 한편으로는 단지 생각이 아닌 무의식적인 것으로서, 둘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안전벨트의 예로 돌아가 봅시다. 그렇다면 법 제정 이후 안전벨트를 습관처럼 착용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믿음을 자신도 받아들이고 그럼으로 해서 자신 역시 그것을 사회적 믿음으로 만들거나 강화하는데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법의 내용이 바람직하든 혹은 그 내용이 문제가 있든지 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믿으며 자신도 모르게 따르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믿음’이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i?ek)이라는 철학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듭니다. 한 정신병자가 있었습니다. 그 정신병자는 자신이 옥수수 알갱이라고 생각해서 닭이 자꾸 자신을 쪼아 먹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의 치료 후 이 환자는 완치판정을 받고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이 환자는 자신의 주치의를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깜짝 놀란 의사가 이 환자에게 당신은 완치되었으니 다시 나를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자 이 환자는 자신이 옥수수 알갱이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 여전히 닭이 자신을 옥수수 알갱이로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불안을 호소합니다.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자신(정신병자)의 믿음보다 타인(닭)의 믿음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할지라도 타인이 믿는 바를 벗어나기가 너무나도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신체적인’ 습관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믿음을 나의 믿음 체계로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상관없이 법에서 규정하는 바를 이미 우리의 ‘양심’과 같은 것으로 우린 안에 받아들여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법을 어겼을 때에도 심리적으로 불편한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버지가 pc방에 가는 것을 금지시킨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것에는 나름의 합리적이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게임을 너무 많이 하게 되면 학업에 영향을 준다던지 어른들의 담배연기 때문에 건강에 해로운 공간이라든지 말입니다. 하지만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것은 그 어떤 것 보다 큰 즐거움이고, 그곳에 가지 않으면 하루 종일 다른 일에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아버지의 금기 사항을 어기고 pc방에 가서 신나게 게임을 합니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동안에도 아버지에게 발각될까봐 불안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왠지 아버지를 보는 것이 껄끄럽습니다. 이 아버지를 법이라 생각해보세요. 아버지의 금기 사항을 듣고 머릿속에 기억하듯이 법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법은 단지 ‘나’의 외부에 혹은 법전(法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들어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법 물신성이라는 측면에서 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준수하고 또 그것을 위반하였을 경우 왜 불편함을 느끼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첫째, ‘법=바람직함’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 그 어떤 법이 불합리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거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법 그 자체를 신뢰하면서 신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중요한 것은 ‘법=바람직함’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믿음 체계가 문제가 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부되어야 하는 것은 ‘법은 법이니까’와 같이 법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4. 안티고네의 저항과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희곡 《오이디푸스왕》에서 안티고네는 종종 법 물신성에 대해 저항한 인물로 해석됩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 두 오빠가 있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나중에 자기도 몰던 사실이지만, 자신을 버린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것을 알고 심한 죄책감에 스스로 눈을 찌른 후 테베를 떠납니다. 이 후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교대로 테베를 다스리기로 하지만, 에테오클레스가 먼저 약속을 어기고 폴리네이케스를 추방시켜버립니다.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망명해 그곳의 공주와 결혼 한 후 군대를 이끌고 테베를 공격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일대일 대결을 벌였지만 결국 둘 다 죽게 되고 말지요. 이 과정에서 크레온은 왕이 되고 에테오클레스는 선왕으로서의 예를 갖추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루지만 테베의 입장에서 적인 폴리네이케스는 들판에 방치해 짐승이 뜯어먹도록 명령하였으며, 누구든지 그의 시체를 장례치루고자 한다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그것을 어기고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위에 흙을 뿌려 덮었고, 결국 그녀는 국왕의 명령을 어긴 죄로 크레온 왕 앞에 끌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혈육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크레온의 명령 보다 우선하는 신의 율법이라고 항거합니다.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는 안티고네/ 출처: www.redian.org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는 안티고네/ 출처: www.redian.org


 

이 희곡에서 크레온의 명령과 포고령은 국가의 법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안티고네가 그것을 위반한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녀의 말처럼 죽은 형제의 시신이 처참하게 들판에 버려져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폴리네이케스는 에테오클레스가 배신하는 타국으로 쫒겨가야 했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있어 아픔입니다. 그렇기에 국가의 법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에 저항하고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고 매장하는 것은 그녀 내면의 ‘바람직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선 법이 그 국가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그것은 법 물신성이 완전히 성공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안티고네가 믿는 바람직함이 법은 항상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안티고네가 오빠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욕망이 법은 그 자체로서 바람직하며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는 명제 혹은 그러한 믿음에 대해 저항의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민주주의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공동체 내에서 살고 있지만 그 어떤 법은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안겨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친북행위나 반국가적 활동에 대해 처벌하는 규정들을 담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종종 정치적 목적에서 악의적으로 국가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물론 법 그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그것을 이용하고 판결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법을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사람이 완전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문제가 되기에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꾸면 문제는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법이 있고 이를 누군가가 해석, 적용하는 한 이러한 문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세상 어디에 오판을 하지 않는 법이 있는가라고 또 한번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오판이나 오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법 그 자체를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그 법의 지속만을 주장하는 것은 법에 대한 숭배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논쟁 중 하나를 보도록 하지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표현의 자유와 권리 등의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하나의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한 논자는 「국가보안법의 쟁점에 대한 바른 이해…」(www.konas.net)라는 글에서 우리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논리를 편고 있습니다.

이는 헌법이 법률 체계 상 가장 상위의 법이기에 그 하위법인 국가보안법이 문제가 되면 통제를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간이 없습니다. 그냥 남아 있는 것은 ‘헌법’이고 그것 보다 힘이 약하다고 말하는 ‘국가보안법’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헌법에서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지 않아서 국가보안법이 남용되거나 악용된 것이 아닙니다. 헌법에 기본권을 명시하고 37조와 같은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법의 집행은 욕망을 지닌 ‘인간’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주장은 공포스럽게 까지 느껴집니다. 현실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의 고통을 헌법 제37조 제2항이 쓰여 있는 법전의 한 페이지를 찢어서 덮어주면서 조소하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주장은 우리 헌법의 기본정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담고 있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4·19혁명은 과거 이승만 정권이 정부 집권을 연장할 목적으로 부정개표를 한 것이 알려지면서 정권교체를 위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정부 항쟁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헌법이 정의(Justice)는 법이나 정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수 민중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는 나아가 헌법이 안티고네와 같은 저항을 인정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우리 헌법의 정신을 그리고 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다면 위와 같이 철저한 법 물신성에 기초한 사고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고통을 주거나 그 고통을 방치하도록 하는 법이 그 자체로 법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어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법이 정의롭지 못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될 때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입니다. 그렇기에 법을 숭배하는 것에 대한 저항은 곧 민주주의로 향한 걸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