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⑤ 권리 대 권리의 충돌, 이율배반과 비판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⑤

 

권리 대 권리의 충돌, 이율배반과 비판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인사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인사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시혜적이지 않는가! 마치 무슨 은혜라도 받으라는 것으로 들린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회보장은 국가,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어주는 것, 시혜,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의무, 책무이다. 사회계약론적 관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런 이유로 오래 전부터 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 대신에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라는 말로 새해 인사를 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과연 ‘나는 나인가’라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잠시 신문 기사를 상기해 보자. “지난 11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내년 8월 1일부터 시행되는 강사법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대학과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강사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온 문제다. (<교수신문> 946호, 2018년 12월 3일 자 참조)”

 

모순과 이율배반

 

위 신문에 나오는 강사법과 관련된 상반된 주장을 정리해 보자. 먼저 대학의 주장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 이 주장에 대항해서(contra/Wider) 강사들은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diction/spruch). 권리 대 권리의 충돌, 곧 모순(contradiction/Widerspruch)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상품교환이라는 틀 속에서 노동력의 구매자(학교)와 판매자(강사)는 각각 주장과 주장, 옳음과 옳음, 각각의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주장, 곧 권리(nomos)와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주장, 곧 권리(nomos)는 상품교환의 규칙 속에서 이율배반(Antinomie)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관계는 적대관계(Antagonismus)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모습을 칼 맑스는 자본의 일반정식(M-C-M′)에서 ‘평균 노동일’을 둘러싼 구매자의 권리와 판매자의 권리의 충돌로 드러나는 모순과 이율배반을 밝히고 있다. 노동력을 구매한 학교는 노동력의 지출을 늘리는 방향을 취할 것이고 노동력을 판매한 강사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전자는 노동력의 지출을 늘려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고자 하기 때문이고, 후자는 잘못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했다가는 다시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교환 틀 속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말하자면 강사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함부로 사용하게 되는 것은 착취로 나타날 것이고 대학의 입장에서 구매한 노동력의 지출은 잉여가치로 간주될 것이다. 같은 사건이 착취와 잉여가치라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맑스가 잉여가치를 착취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상품교환의 규칙 또한 당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맑스는 이러한 이율배반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먼저 권리와 권리의 충돌, 그 모순을 재판하는, 혹은 판단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더 이상 이성(logos)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논리(logos)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의 일반정식(M-C-M′)에 자기 증식하는 가치라는 자본은 허위이고 가상이라는 점이다. 맑스가 변증법(Dialektik)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가상과 허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가상의 이면에는 노동력의 지출을 둘러싼 투쟁이 있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적대관계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강사법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의 문제를 모순, 이율배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순의 해소는 ‘힘’이라는 맑스의 견해와 지난 3일 부산대 시간강사 파업 17일 만에 ‘고용안정’ 합의안을 도출하였다는 기사는 공명하고 있다. 한 쪽의 힘이 커지면 다른 쪽의 힘은 작아진다. 이것이 모순이다.

 

역설과 비판

 

그런데 우리는 강사법을 둘러싼 모습 속에서 역설(paradox)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사법과 관련하여 대학의 견해(doxa)는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이다. 이것에 대항해서 반대방향, 다른 방향(para)의 견해, 이를테면 강사들의 견해인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생겨나는 것, 이것이 역설(paradox)이다. 다시 말해 강사법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이고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저해’이고 ‘교육의 질 향상’이다. 한 쪽의 견해가 커지면 다른 쪽의 견해도 커진다.

이 역설을 통한 비판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위기(crisis)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이다. 18세기 유행어였던 ‘비판’(criticism, critique, Kritik)의 어원은 그리스어 krino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구별하다(differentiate), 선택하다(select), 판단하다(judge), 결정하다(decide)”이다. 우리의 삶의 위기에 대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비판과 위기를 생활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고’,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며, 어떠한 비판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하여’,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비판은 삶을 교정하는 비판임과 동시에 삶을 넘어서는 이행으로서의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 맑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를 강조하였다. 현재 우리 사회는 바로 그러한 시간성과 역사성 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맑스가 역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교정’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역설을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가치의 거울에 비친 강사들의 삶

 

일찍이 맑스는 가치형태에 대한 연구에서 등가형태에 대한 착각을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설탕 한 봉지의 무게가 추에만 있는 고유한 성격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설탕 한 봉지의 무게는 설탕 한 봉지와 추와의 사회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적 관계인가에 따라 설탕 한 봉지의 가치가 변화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강사들, 곧 비정규직의 삶의 가치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강사법을 둘러싼 힘의 관계는 그러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상품 세계의 한 시민이 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면서 상품으로서의 우리들의 가치는 등가형태인 ‘가치의 거울’, ‘대상성’, ‘가치영혼’, ‘유령적 대상성’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나의 가치로 마주하고 있는 ‘대상성’이 자연적 속성과 상관없듯이, 강사들은 그 자신의 자연적 속성으로 비정규직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비정규직이다.”라는 것은 ‘나=비정규직’인데, 이는 내가 비정규직의 유전자를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가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강사들이 일반적 가치형태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맑스의 비유로 말하자면, “개인 A가 개인 B에게 왕으로 섬김을 받으려면 B의 눈에 왕이 A의 몸으로 나타나야”한다. 이것은 B의 포기, 굴복이다. 달리 말하면 상품-가치-일반적 등가형태는 시민-주권-군주(정부)의 모습과 유사하다. 상품의 가치 표상이 일반적 등가형태이듯 시민의 주권 표상은 군주(정부)이다. 이 관계에서 시민의 주권 표상이 곧 군주라는 것은 군주에 시민이 복종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강사법과 관련된 권리들의 충돌 속에서, 강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강사들은 상품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가치를 ‘불안정 노동자’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나마 ‘상품 강사들’은 능동적이다. 반면에 대학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강사들)가 자신의 가치를 ‘불안정 노동자’로 인정받으면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명확히 수동적이다.

베드로가 바울을 통해서 자신을 마주했듯,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마주하고 있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우리네 삶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나의 결단인가, 아니면 비정규직이라는 단일한 등가형태로 우리네 삶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나의 굴복인가?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의 글귀가 떠오른다.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선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한길석(한철연 회원, 가톨릭대)

 

나는 2008년 박사 학위를 수료한 상태로 지방의 모 국립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박사 학위 소유자가 아니면 강단에 설 수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운 좋게도 나는 선배들의 배려로 강단에 설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립대학의 강사료는 사립대학의 그것보다 훨씬 후하다. 더구나 당시에는 정부에서 강사들의 생계 안정을 위해 국립대 강사료를 시간당 10만원 수준까지 인상한다는 정책 목표를 추진하고 있었던 덕에 나의 주머니 사정은 타 강사들에 비해 조금 나았다. 그래도 한 해 수입은 2천 만 원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북 지역에 있는 대학에 출강할 때는 9시 강의에 맞추려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첫 차를 타고 근 3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그날 강의를 마치면 다음날 강의를 위해 값이 헐한 모텔에서 하룻밤 묵고 또 아침 첫 강의를 시작하곤 했다. 강의료의 일부는 늘상 약값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지만 생계와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면 늘 다음 학기에 강의를 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곤 했다. 방학 동안에는 아무런 수입이 없어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편한 마음으로 학문에 전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든 맞게 마련이다. 한 학기가 지날 때마다 담당 강좌 시수가 줄어들더니 2012년이 되자 내가 출강하던 모든 대학에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드디어 박사 논문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자 했지만, 불현 듯 눈앞이 캄캄해 지는 건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한 학기동안 손가락만 빨고 지내다가 선배들의 주선으로 집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수도권의 모 대학에 출강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박사 논문을 마치고 전임교원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생계 걱정은 다소 접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늘 두렵고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만성피로와 스트레스로 통증을 달고 살았다. 저축은 생각지도 못했고 결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생계를 위한 강의를 하다 보니 교육에 대한 열정과 학문에 대한 사명감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연이은 강사들의 자살 소식에 마음은 무거워져 갔다. 외롭고 춥고 비참한 시절이었다.

어느 결에 강사법이 제정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편으로는 반가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제2의 비정규직 보호법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많은 강사들이 강사법 제정을 반대하는 역설적 상황이 몇 해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진통 끝에 강사법이 통과되었다. 교육부에서는 관련 예산을 편성하면서 강사법의 실행에 대학들이 협조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대학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다. 대량 해고가 필연적이라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면서 어느덧 강사 해고는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현실인 양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강사 대량해고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다. 대량해고에 대한 예상은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극을 전망하는 것이다. 불길한 예언의 쓸모는 들어맞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긋나게 함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살고 있는 사실은 이러하다. 강사법이 마련되었다. 만족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방학이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강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를 명령하고 있다. 근대 사회에서 법은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실증적이고 강제적인 힘이다. 일단 법으로 제정된 이상 강사들을 쉽게 내치지는 못한다. 아무런 무기도 없던 강사들에게 드디어 의지해 볼만한 합법적 무기가 생긴 것이다. 이제 강사들이 할 일은 변변찮음을 탓하며 힘들게 마련된 무기를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손에 익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학교에서 이 무기를 들고 대학에 맞서고 있다. 부산대에서는 강사들이 파업에 나섰으며, 고려대에서는 강사법을 핑계로 추진하려 했던 대학 구조조정 방안을 무산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정치적 실천 운동과 함께 할 때 법의 효력이 구현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사례다. 입헌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은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 없이는 만들어지지도 강제력을 집행하지도 못한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불가피한 현실인 양 여기는 어리석음은 일어나지 않은 비극의 힘을 과대하게 키울 뿐이다. 할 일은 한 가지다. 강사법이 명령하는 바를 대학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정치적 실천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운동의 조직적 실천은 2019년 5월에 마련될 시행령에서 강사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시킬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시행령의 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애써 마련한 강사법이 유명무실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따라서 강사들은 학내에 강사법의 관철을 위한 정치적 실천 거점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파리 목숨에 불과한 강사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런 운동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대량해고가 불을 보듯 뻔하다면 강사법 관철을 위한 운동에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다.

정치적 실천 활동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강사 이외의 구성원들과의 연대에 힘 써야 한다는 점이다. 학생과 전임교원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밥 그릇 지키기’로 폄하될 것이다. 따라서 운동의 이슈를 강사들의 고용 안정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질을 저하시키고 전임교원들의 근무 여건을 악화시키는 일방적 대학 구조조정 방안에 대한 비판으로 넓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조정 방안을 감행하게 하는 대학의 지배 및 경영 구조의 개혁에 관한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강사법은 아직 불행한 현실을 몰고 오지 않았다. 대량해고는 엄포에 불과하다. 대학이 대량해고의 소문을 흘리는 이유는 강사들에게 대학에 저항할 합법적 도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도구는 쓰면 쓸수록 손에 익는 법이다. 강사들이 할 일은 강사법이라는 도구를 손에 익도록 활용하여 그것이 실제적 효력을 발휘하게끔 노력하는 것이다.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③ 개정된 강사법의 시행령 확정에 앞서, 교육부의 단호한 의지를 촉구한다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③

 

※ 이 글은 필자의 2018년 가을 학단협 연합 심포지엄 발표문의 일부입니다. 필자의 동의로 게재함을 밝힙니다.

 

개정된 강사법의 시행령 확정에 앞서, 교육부의 단호한 의지를 촉구한다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시간강사 문제에 대한 내부의 시선 교원으로서의 지위 획득과 시간강사로서의 처우 개선 사이에서

 

여름 방학부터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딸아이가 건강보험에서 떨어져 나가 직장 건강보험 가입대상이 되었다. 1년 일하면 퇴직금도 준다고 한다. 기가 막힌다. 이른바 4대 보험 가입자가 된 것이다. 지난 추석에는 의기양양하게 선물 세트도 받아왔다. 20년 이상 시간 강사 경력 동안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처우를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몰랐다. 어느 시간강사가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에 대한 처우보다 대학의 시간강사 처지가 더 열악하다고 강변한 현실을 딸과의 비교를 통해서 실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대학의 시간강사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후 몇몇 분들의 헌신적이고 끈기 있는 투쟁 덕분에 국회에서 시간강사법 제정에 이르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시간강사의 교원지위 획득은 흔들릴 수 없는 전략적 목표이다. 그렇기에 그간의 성과가 매우 소중하다. 일각의 주장대로 부족한 점은 추후 개선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보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강사법은 몇 년째 유예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마도 이번 년도에는 실시가 확정되어 내년부터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듯도 하다.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어떤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일일이 살펴 따질 생각은 없다. 전략적 목표가 같다면 전술적인 방법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가 경험한 부당함의 내용에 따라 시급한 현안에 대한 방점도 다른 곳에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가벼이 여겨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목표 수립에만 매달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가에 대해서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노무현 정권 초반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공청회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당시 필자는 입법적 조치가 필요한 목표는 장기적으로 추진하더라도 강사료 현실화라고 하는 문제부터 압박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그러한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취급되었다. 교원지위만 확보되면 그에 따르는 처우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논지에 강사료 현실화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비하면 강사료가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2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세월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나마 국공립대의 경우에만 강사료가 대폭 올랐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의 강사료는 한 번 정해지면 최소 5,6년은 동결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이슈가 되었던 반값 등록금 문제는 강사료 인상을 방해하는 대교협의 또 다른 명분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필자가 십 수 년 전의 일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그 때 필자가 했던 주장이 옳지 않았느냐 하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시간강사법이 제정되고 유예를 반복한 마당에 지금이라도 강사 처우 개선에 대한 문제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재 주변의 후배들 중에는 강사료 소득만으로는 연간 소득 2,000만 원 이하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비단 철학 전공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확인해 봐야 정확한 추계를 할 수 있겠지만 시간강사들의 수입을 연간 500만 원 정도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림잡아 3,500억 원의 예산이 들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전국의 강사 수를 대략 7만 명으로 고려한 수치이다. 이를 정부와 전국의 400여개 대학이 공동으로 부담한다고 생각하면 그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학문 후속세대 관련 지원 예산 등을 통합 관리하고 정부의 고용 안전 자금 예산과 유사한 방식의 지원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일자리 안정을 위한 정부 예산이 민간 기업에도 지원이 되는데 공공적 성격이 강한 대학의 일자리에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인지 그 원칙에 대한 문제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영업자도 지원하고, 유치원도 지원하고, 중소기업에도 지원하는 데 시간강사는 이등 국민이라 지원하지 않는 것인가?

사실 앞서 언급한 공청회에 참석한 당시 교육부 관계자의 언급은 이러한 방식의 문제 해결 가능성을 비추기도 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교육부에서는 국립대학 기준 시간당 강사료 100,000원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사립대의 경우도 강사료를 현실화하는 방식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법률 제정이 필요한 요구에 대해서는 속도를 조절해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 보장에 대한 요구 역시 그 때도 느긋한 사안은 아니었기에 교육부 당국자의 발언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공청회 자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관료의 발언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리한 모든 것은 일단 챙기고 봐야 전술적 목표도 전략적 목표도 모두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강사료 올려주었다고 해서 교원 지위 보장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시간강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대학들은 ‘대학교육협의회’를 중심으로 담합에 가까운 대응을 보여 왔다. 비정년트랙이라는 제도를 만드는가 하면, 겸임교수, 연구교수, 강의전담교수, 초빙교수 등의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의 비정년 강의자를 양성해 왔다. 여기에는 어김없이 시장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사장의 논리가 좋다면 시장의 논리 안에서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강사료 현실화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면 너무 추상적이다. 일반적인 노동 시장에서 비정규직이 요구하는 기준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하지만 이는 시장의 논리에 맞지 않는다. 상품 이용의 측면에서 단기 임대 재화는 시간당 이용료가 더 비싸게 책정된다. 카메라 한 대를 몇 년간 렌트해서 이용할 바에는 아예 구매하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 상품 역시 단기 사용 노동에 대해서는 시간당 보수를 더 책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장의 원리에 맞다. 따라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기준은 불합리하다. 오히려 비정규직 우대임금이라고 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강사료 현실화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현재 전임교수들에게 지급되는 인건비에서 강의에 대한 수고에 해당하는 금액만 따져 봐도 현재의 강사료보다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강사료의 현실화는 무엇보다 대학의 강사들도 생활인이고 자식을 교육시켜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실존을 인정하면 당연하게 성취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자신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자기 자식의 대학 진학에 앞서서는 등록금 걱정부터 해야 하는 처지의 강사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강사들은 금융 이용에서도 많은 제한을 받는다. 하기야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봐야 갚을 처지도 못될 수도 있긴 하다. 대학의 강사는 더 이상 전임교원으로 가기 위한 중간 과정이 아니다. 대부분의 강사들은 직업 활동을 강사로서 마치게 된다. 그것도 아무런 노후대책도 없이… 어쩌면 학위기는 운전면허증보다도 자부심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아닐까.

2018년 현재 강사료는 국립대의 경우도 10만원이 못되고, 사립대의 경우는 더더욱 빈약하다. 강사료 현실화 없는 교원지위 보장은 자칫 속빈 강정이 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대학들은 강사료 인상 없이 방학 중에도 급여를 지급한다는 명목 하에 8개월분의 강사료를 12로 나누어 지급하는 술책을 실시하거나 획책 중이다. 국가는 대학의 강사들을 이등 국민으로 생각하고 대학은 강사들을 원숭이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대학이 강사를 고용하는 경제적 부담이 클수록 안정적인 교원으로서의 전환을 더욱 재촉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말고 그들

 

개정된 고등 교육법, 이른바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많은 대학들은 강사 수를 줄이기 위한 각종 편법을 강구하고 있다. 강사법 시행에 따른 대학의 재정 부담 가중을 부풀리면서 대규모 강의를 늘리고, 전임교수들의 강의 시수를 늘이고, 졸업 이수 학점을 줄이는 방식 등으로 강사 수를 줄이려고 한다는 사실은 대학 스스로 학문의 전당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한 대학의 그러한 술책에 동조하고 동의하는 대학 구성원들 역시 대학의 본령은 망각하고 자신들의 직장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대학이 그러한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자 한다면 먼저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우리들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고백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 재학 중인 대학원생들에게 하루 빨리 학업을 중단하고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권고해야만 그나마 양심적이라는 평가를 들을만할 것이다.

대학의 졸렬한 대응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부의 의지가 중요하다. 강사법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대학들에 대해서 교육부는 단호한 방침과 의지를 가지고 불이익을 주어야 할 것이다. 대학에 지원되는 재정의 불이익을 주고 교육부가 주관하거나 한국연구재단을 통해서 지원하는 프로젝트 선정 과정에서도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는 방침을 마련하면 된다. 그로인한 불이익의 크기는 강사법의 취지를 무력화해서 얻는 이익보다 훨씬 크게 설계하면 대학은 강사법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 문제에 대해 교육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교육부는 학문 생태계 파괴의 궁극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강사법을 무력화하는 시도는 학문 후속세대의 단절을 야기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 후속세대 문제는 비단 시간 강사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앞으로는 현재 학위 과정에 있거나 박사 수료 후 현직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후학들의 문제는 더 심각해질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는 없다. 강사법이 실시 적용되면 교원 지위를 획득하게 될 강사들의 경우는 1년 단위로 계약하고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3년간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이후의 후학들이 그나마 강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해질 것이다. 강사라는 신분으로 버틸 수 있던 연구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미래는 더욱 비관적이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과거 전임 교수들이 강사 문제에 무관심했듯이 교원이 된 강사들이 무관심해도 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으면 한다. 힘은 없다. 전임 교수들도 그랬다. 하지만 강사 문제 해결을 수십 년 동안 방해한 사람들은 전임 교수에서 총장이 되고, 이사장이 되고, 교육부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다. 힘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힘이 있어도 못한다. 진정한 학문 후속 세대는 우리가 아니다. 현재의 강사들은 학문 후속세대가 아니라 대개는 중견 연구자들이다. 이 글에서도 학문 후속세대 하면 시간 강사들을 먼저 떠올리는 방식으로 다루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진정한 의미의 학문후속세대들은 그들이 겪어야 할 고통의 첫 맛도 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니고 그들이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② 강사법 시행에 관한 단상 [침몰하는 대학]

고려대 민동 강사법관련 구조조정 저지 대자보

※ 위 링크는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서 지난 11월 28일 발표한 대자보 PDF 파일입니다. 메인 이미지 대자보 사진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저작자와 성명단체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게 되었음을 알립니다. 게재를 허락한 저작자와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 감사드립니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②

 

강사법 시행에 관한 단상

 

박지용(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사업1부장)

 

하나, 대학 내 시간 강사와 강사법

2018년 11월 28일, 7년이나 유예된 강사법이 다시 법사위를 통과했다. 그 다음날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8일, 29일 거의 실시간으로 김영곤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통과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진통 끝에 2019년 8월 1일부로 강사법이 시행되게 되었다. 강사법 시행과 관련하여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분은 김영곤, 김동애 두 부부 선생님이시다. 전국강사노조는 1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회 앞 텐트 농성으로 강사법 시행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 충분한 여론을 형성해 왔다.

김영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전공선택 과목을 가르치다가 2009년 대학 측의 해고통보로 강사직을 잃고 복직 투쟁을 하셨다. 당시 학교 당국은 박사 학위가 없는 시간강사들의 강의를 네 학기로 제한함으로써 ‘비정규직 보호법’을 피하려 했고, 이 결정에 따라 88명의 시간 강사들이 해고되었다. 비정규직 보호법은 2년 넘게 계약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법적인 취지와 달리 비정규직의 고용 상황을 더 열악하게 만들게 되었다. 김영곤 선생님의 복직 투쟁은 결과적으로 법원에서 패소함으로써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사립대학이 공적인 교육기관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기업일 뿐이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고려대학은 복직 소송에 패소한 김영곤 선생님께 천만 원의 법률비용을 청구했다. 일 년 동안 학교가 지급한 강사료가 천만 원도 안 된다는 사실은 학교 당국이 잘 알고 있다. 통상 기업들이 강고한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고 써먹는 수법을 일개 대학 강사에게 적용했다는 사실이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결과적으로 법원이 학교 당국의 법률비용 청구가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종결되기는 했다.

김영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본관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해왔지만, 학교의 압력으로 그 텐트는 교양관 앞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강의하러 교양관을 들락날락하면서 항상 그 텐트는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몇 해 전 첫눈이 왔던 추운 어느 날, 텐트 앞에서 김영곤 선생님과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당시 나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서 복직 판결을 받았고, 선생님은 밝게 웃으시며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셨다. 큰 틀에서 보자면 강사법 투쟁 또한 노동자 권익을 위한 투쟁이었다. 강사법은 국회와 정치인들이 약자를 포용해야 한다는 정의로운 가치에 따라서 시혜적으로 통과된 것이 아니다. 권익을 위한 투쟁은 항상 약자들 스스로 희생과 노력을 요구한다. 강사법 시행에 이르기까지, 권리를 향한 단결 투쟁이 제도 변화를 낳은 가장 큰 동력이었다는 원론적인 관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둘, 사학 자본의 민낯

자본주의는 노동착취를 통해 이윤을 낳는다. 대기업이 쌓아둔 영업이익이나 사립대학이 쌓아둔 재단적립금의 실체적인 원천은 같다. 노동자들의 착취가 대학과 대기업이 쌓은 이익의 원천이다. 이제 강사법은 방학 중 임금 지급과 4대 보험 지급의 의무를 고용기관인 대학에 부과한다. 그런데 대학 측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비용을 법으로 강제하다니!’라는 억울함을 피력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대학은 돈이 없다고, 정부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다른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고 강사들을 협박한다. 이런 사립대학의 뻔한 대응을 예견한 사람들은 법 시행 주체인 사립대학이 각종 대응책을 미리 마련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 목소리는 다시금 강사법 시행의 부당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대학은 예상한 그대로, 비용지출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대학 졸업 학점을 대폭 낮추고 강좌를 줄이는 식으로 구조조정 전략회의를 했고 또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하다.

사립 유치원장이 정부지원금으로 명품가방을 샀다는 기사가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많은 사립대학들은 재단적립금을 부당하게 주식투자로 돈을 날렸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 사회의 교육정책이 나가야 할 방향은 정치권에서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보다는 공공성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립 유치원보다 국공립 유치원이 더 신뢰도가 높고 안전하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점차적인 공공성 확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우리 사회의 다수가 동의하고 있지만, 그 실현과 관련해서는 넘어야 할 난관도 분명하다. 교육의 사회적인 공공성에도 불구하고 사학재단에 대한 구조조정을 정치적으로 결단하는 데에는 정당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 대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구조 안에서 사립 교육기관 대 교육 공공성 사이의 딜레마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국립대학에 대한 예산은 현재 강사 수준을 조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미 결정되었다. 그러니 국립대학 교수들과 총장들은 사립대학이 구조조정 없이 시행하라고 편하게 말한다. 하지만 사립대학은 정부지원금이 없으면 추가비용을 들일 수 없다고 대응한다. 이 과정에서 한 예로 11월 14일 고려대학교에서 구조조정과 관련한 교무회의 비공개 문서가 언론에 드러났다. 곧바로 강사법 구조조정을 저지하기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항의 방문을 단행했다. 나는 내가 가입해 있는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 이 사안과 관련하여 성명서를 발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직접 이해관계 당사자가 아니라도 졸업생들의 입장에서 민주동우회는 모교의 부당한 결정에 반대하여 공동대책위원회와 연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후 고려대학교는 12월 3일 강사법 관련 구조조정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전면 유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투쟁 역시 잠정적인 승리일 뿐 정작 강사법 시행을 실행해야 할 시점이 되어서는 어떤 입장 변화가 있을지 주시해야 한다.

김동애 선생님은 한 회의에서 강사법 투쟁을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서정민 열사의 억울한 죽음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하셨다. 그러니 더욱 강사법으로 인해 다시 극단의 희생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 “해고는 살인이다!”

 

셋, 사립대학은 강사법 시행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

벌써 몇 주 전부터 2019년 1학기 강의 시간 배정과 관련해서 선배, 후배, 동료들의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A 대학에서는 4대 보험을 다른 곳에서 들고 있는 강사들만을 남기고 정리를 했다고 한다. B 대학에서는 한 강좌만 하던 강사들은 정리했다고 한다. C 대학은 교양과목의 강사들을 모두 정리했다고 한다. 이 모두 정리해고 되는 경우들이다.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듯이 감정의 변화들을 감내하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다. ‘그래, 이게 현실이라면 화가 나도 받아들여야지.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하지만 장기화된 해고 상태가 개선되지 않은 채 지속하면 어떤 불행한 사태들이 나타날지 모두 알고 있다.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더 심각한 상황을 낳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 불안한 징후는 벌써 현실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박사 학위를 눈앞에 둔 학문 후속세대들의 위기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이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한 세심한 대책이 더욱 필요하다.

강사법 시행을 위한 정부 예산안이 국립대와 사립대에 불균형적으로 배정되어 사립대의 대량 해고를 막아낼 수 없는 현시점에서, 강사노조 단체들은 다시금 사립대학의 구조조정에 맞서 전체 시간강사들의 불이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2019년 8월 1일부로 시행되는 강사법에서 시간강사들의 전체 규모가 현저히 낮아지지 않도록 교육부에 사립대학 지원과 관련한 명확한 지침을 요구해야 한다. 가령 교육부가 전면에 나서서 구조조정의 실행 여부와 그 규모에 따라서 대학이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교육부는 눈앞의 비용 절감을 위한 구조조정을 실행한 학교들을 전수조사하고 철회를 분명히 강제해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단 한 푼의 지원금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2018년 12월 14일.


☞ 2019년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우리사회와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문제들을 드러내어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듣기 위한 취지에서 릴레이 기고를 기획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기고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다양하고 많은 얘기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1.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 아래 글은 [건대신문]에 12월 4일자로 게재된 칼럼입니다. <이 시대와 철학>에 칼럼으로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와 게재를 허락한 건대신문사 측에 감사드립니다.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조은평(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모교인 건국대에서 수업을 할 때면, 늘 마음 한편이 무겁다. 10년 내내 강사료가 49,700원이여도, 또 4대 보험과 6학점 강의를 보장해준다며 강사료를 6개월로 쪼개주는 기형적인 형태로 초빙교수를 뽑을 때도 아무 말 못했던 나. 심지어 성적입력이 늦을 경우 강사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1년 간 강의금지라는 조항을 신설할 때도 가만있었고, 그 대가가 부메랑처럼 마침 독감에 걸려 입력이 하루 늦은 내게 되돌아왔을 때도 머릿속으로만 저항하며 안으로 골병들어가던 내 모습이 죄책감처럼 따라붙기 때문이다.

철학자 랑시에르는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확보하는 문제가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몫이 없던 자들이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요구하면서 기존의 안정화된 제도적 질서를 비집고 비로소 ‘정치’가 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늘 정치철학은 안정화된 정치질서를 유지하려고 실제로는 몫이 없는 자들이 나름의 몫을 누리고 있다고 여기도록 잘못된 셈법을 고안해왔지만 말이다.

이런 지적은 우리 현실에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대학이라는 작은 단위의 사회만 보더라도 이 말은 여전히 진실이다. 대학의 주인은 누구일까? 과연 대학의 구성원들은 모두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지니고 있을까? 정말 그럴까?

내년 시행될 강사법에 대비해 이미 대학들은 강좌수를 줄이거나 대형 강의로 통폐합하고, 졸업학점을 줄이면서 시간강사를 대량 해고하는 전략에 돌입한 것 같다. 강좌의 절반 정도를 담당하면서도 전체 강좌비용의 1~3% 정도만 지불되는 강사의 인건비. 그런데도 교원지위보장과 방학 중 강사료 지급, 4대 보험 등을 핵심으로 하는 법 시행을 앞두고 몇몇 대학은 앞으로 부담할 비용이 엄청나다는 근거 없는 괴담을 퍼트릴 뿐, 정작 학생을 위한 교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모양새다.

고맙게도 랑시에르는 잊어서는 안 될 교훈 하나를 전해준다. 노예들의 반란 이야기. 스키타이족은 노예들의 두 눈을 멀게 해 길들였다. 하지만 주인인 전사들 대부분이 다른 나라로 원정을 떠난 사이, 노예의 자식들이 하나 둘 늘어나 멀쩡한 두 눈을 갖게 된 노예 후손들은 자신들도 전사로서 주인과 맞설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마침내 주인들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 노예들은 성 주변에 해자를 파고 전사로서 주인과 대적했다. 그런데 웬걸 주인인 전사들이 창을 버리고 예전처럼 채찍을 들고 달려들자 모두 식겁해서 도망쳤다고 한다.

대학의 구성원인 우리들도 어쩌면 이런 노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시간강사인 우리는 더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없었다는 걸 자각하면서 함께 연대해야 한다. 하지만 위 교훈처럼 단지 싸울 수 있다는 것만 깨닫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이미 대학의 구성원이자 ‘정치’를 실현하고 구성할 수 있는 평등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그런 권리를 실현할 정치적 기반과 통로도 마련해 나가야 한다.


☞ 2019년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우리사회와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문제들을 드러내어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듣기 위한 취지에서 릴레이 기고를 기획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기고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다양하고 많은 얘기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MeToo운동에 토를 다는 그대들에게 [피켓2030]

<#MeToo운동에 토를 다는 그대들에게>

 

이나연

 

현재 한국에서는 성폭력 사실을 고발하는 #MeToo운동이 한창이다. 영화계, 문학계, 예술계, 정치계, 교육계까지. 여태껏 얼마나 많은 피해가 ‘피해가 아닌 일’로 치부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피해자들이 혼자서 참아냈어야 할 그 울분을, 상상만 하더라도 고통스럽다. 나도 성폭력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연인 관계에 있던 자였고 그때 나는 애인 사이의 ‘강간’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고소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주어진 괴로움 앞에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일이라 생각하며 자책하는 것이 내가 당시에 할 수 있던 것의 전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분명한 범죄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후 나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개적으로 그를 고발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받았다. “나, 네 글 보고 충격 받았어. 우리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전혀 몰랐다는 듯이 뻔뻔하게 연락을 남긴 그를 보며 나는 또다시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MeToo운동을 하며 피해 사실을 알린 피해자들 또한 가해자들의 태연한 부인 앞에서 나와 같은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을 그리고 나를 피해자로 만든 일이 분명 그 하나만이 아닐 거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더욱 화가 난다. 만일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높은 사회에서 살았더라면, 여성들이 당당하게 고소하고 나섰을 일이 더욱 많았을 테다. 한 명의 피해자로서 내가 그러지 않았던 건 신고해봤자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나만 더 답답하고 힘들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경찰이 내게 2차 피해를 줄 것 같다는 두려움, 재판을 위해 돈을 들였어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거라는 불신 그리고 이 일을 진행하며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 이 모든 걸 견디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운이 좋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넘긴 일들이 무수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는 결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더라도, 성폭력을 겪었으나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나처럼 사법기관을 믿지 못해 법적으로 처리할 생각조차 안 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고민 끝에 경찰서에 신고를 한 사람들도 “이런 일은 너무 사소해서 사건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관련 법이 없어서 처벌할 수 없다, 소문나면 어차피 당신만 손해니 고소하지 말고 그냥 ‘좋게’ 합의해라” 등의 소리나 해대는 경찰들로 인해 또 다른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당연해지면서 피해자는 점점 더 가해자를 고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고소하지 않은 것인가, 못한 것인가? 그들이 그때 신고하지 않았던 게 정말 괜찮아서 그랬던 것인가?

이처럼 한국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신고했을 때, 그들이 법적으로 합당한 처벌을 받을 거란 믿음을 전혀 주지 못하는 사회였다. 그렇다면 사적인 처벌이 가능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털어놓으면 비난의 화살은 피해자를 향했고 가해자는 가해자들끼리 만든 방패 속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많은 여성은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걸 두려워했던 것이다. 한국처럼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척박한 곳에서 가해자를 고발하는 일에는 엄청난 용기와 그 일련의 과정에서 지치지 않을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일을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이가 많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므로 지금 성폭력 피해 사실을 제보하는 피해자들에게 “그때 말했어야지, 왜 이제 와서 그래?”라고 비난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현재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건, 여성들의 폭로가 실질적인 처벌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하며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을 제대로 징벌할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제는 전처럼 내게 있었던 일을 말하더라도 나를 책망할 사람들보다 내 편이 되어 함께 싸워줄 이가 많을 거라는 믿음이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성들은 그들의 더러운 편의를 위해 의도적으로, 암묵적으로 ‘그들만의’ 무죄의 기준을 만들어냈다. 자기들 멋대로 여성을 갖고 놀기 위해 서로의 죄를 눈감아주고 감싸줬다. 그렇게 남성들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범죄가 아니라고 밀어붙이며, 범죄자이면서도 안일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헤아릴 수 없는 피해자들의 억울함과 울분을 양산했다. 그러나 그들의 뻔뻔함을 보며 참지 않는 여성들의 움직임에 의해 그 기준은 점차 바뀌어나갈 것이다. 천박한 그들의 결속이 만들어낸 결백이, 더는 통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고독 [피켓2030]

고독

 

201778일 촬영

MODEL 이나연

PHOTO 신영빈

 

 

 

#1. 체념

나연 : 생의 마지막 순간, 끝내 놓치고 싶지 않은 아름다움을 눈에 담으며 떠날 것인가 아니면 절망과 혐오 속에서 눈감을 것인가. 지금의 나로서는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것을 떠올리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영빈 ;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그렇지만 나는 제자리로 오지 못했어. 되돌아 나오는 길을 모르니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 자신을 가둬두었지.

이젠 이런 내 모습 나조차 불안해보여. 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 임재범 <비상> 中

 

 


#2. 이면

나연 : 사람들은 나를 보며 태어났을 때부터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하는 자들의 무지한 착각일 뿐이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영빈 :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면 비로소 집중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평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지나치던 흔해빠진 모습도, 빛이 비춰지고 그림자가 드리우자 그 이면을 알 수 있을 때가 있다.

 


 

 

#3. 이면

나연 : 쓰레기 더미 옆에 있더라도 나는 악취를 맡을 수 없다. 내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나의 코는 이미 마비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영빈 : 스스로 빛나길 원한다면 화려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와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의 낮은 곳에서 나의 이면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면

나연 : 너를 경멸하는 듯한 나의 시선도 결국 나를 향하는 것이었다.

 

영빈 : 그의 눈을 봐. 눈은 내면의 창이래. 눈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

 


 

 

#5. 이면

나연 :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나는 언제쯤 이곳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없어질 수 있을지 생각한다. 죽기 전에도 내가 이곳을 떠나면 슬퍼할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 우습다.

 

영빈 : 가면을 벗어던지는 순간, 어떤 시선으로부터도 억압되지 않는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그의 이면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6. 고독

나연 : 나는 그들에 의해 그리고 나에 의해 가공된 조화의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내게는 쾌락도, 변화도, 쇠퇴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날 끼워맞춘 틀 속에서 말라 비틀어 죽는 것.

 

영빈 : 온통 ‘나’에게만 집중하던 생활이 서서히 주변으로 시선을 옮기기 시작할 때. 사소한 것들마저 기억에 담고 싶을 만큼 만족스럽거나, 사소한 것들만큼 부질없이 느껴지는 삶에 한탄하거나.

청춘이 뭐길래 [피켓2030]

이나연(건국대 철학과)

 

편집자님께 청춘의 입장에서 글을 써주면 좋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청춘, 청춘이라. 도대체 청춘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글들은 하나같이 사전에 써져있는 정의를 말하고 가기에 나도 그래보겠다. 청춘의 뜻은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란다. 아, 좋다. 날마다 봄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사로운 노란 빛의 햇살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예쁜 물감으로 칠해놓은 듯한 꽃들의 인사. 청춘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은 사전적 정의에서 청춘에 해당하는 10대와 20대인 우리들의 삶도 그렇게 밝고 푸를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우리들이 청춘이라며, 청춘은 무엇이든지 도전할 수 있고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며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들먹인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쓰러져도, 다쳐도, 고통스러워도 청춘이니 다시 일어나라고 종용한다. 이제 그런 말을 듣는 것조차 지겹다. 지겨워서 그냥 귀를 막고 퍼질러 누워있고 싶다. 그런 말을 듣느라고 내 뇌 용량을 쓰느니 시끄러운 락을 들으며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드는 게 낫다. 어른들의 착각과 달리 나는 10대 후반과 20대의 나이가 어떻게 보면 가장 지칠 수 있는 때가 아닌가 싶다. 만일 푸른색이 우리 나이 대를 대변한다면 피어나는 새싹과 같아서 푸른 것이 아닌 여기저기 멍이 들어 푸른 것 때문은 아닐까.

 

 

요새는 예전과 달리 초중고라는 정규교육이 필수가 되었다. 이렇게 필수가 되고 나니, 그걸 원치 않는 이들이, 맞지 않는 이들이 이를 거부할 힘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억압적인 학교의 시스템을 인지하는 이들도 ‘제대로’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받는 차별을 떠올리며 두려워한다. 주입식 교육에 흥미가 없는 이들도 그것이 무서워 학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여유롭게 사교육을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공부를 해야 한다. 이처럼 원치 않는 체제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어디에 있든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1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란다. 그것도 9년째 말이다. 2015년 자살한 청소년은 모두 708명, 암으로 사망한 경우보다 2.5배 많다고 한다. 사회는 우리가 그런 가시밭길을 지나가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 길만이 옳다고 하며, 그렇기에 싫어도 버텨야 한다며 그곳에 우리를 밀어 넣고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10대가 발에 피를 흘리며 걸어가고 있다. 그래도 공부해놓으면 쓸 데가 있다는, 꿈을 이루려면 일단 대학은 가야한다는 협박을 들으며 말이다. 그래서 멍 하나가 들었다.

 

 

자, 학교라는 지옥에서 벗어나기 전 이제 수능을 볼 차례이다. 제정신으로 살아남기 힘든 이곳에서 자살하지 않은 약 60만 명의 10대가 수능을 치른다. 그 60만 명은 시험 한 번으로 내 인생이 결정될 것이란 어른들의 말을 들으며 시험장에 들어간다. 그런데 아뿔싸, 시험을 망쳐버렸다. 그래도 돈 있는 10대는 사정이 낫다. 부모님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재수학원에 들어가면 된다. 돈 없는 10대에게는 선택권도 없다. 재수는 사치다. 나온 점수에 맞춰 그나마 나은 대학 중에 ‘골라’ 가야 한다. 그러나 이때 그들의 선택은 결코 선택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대학을 가더라도 집안에 돈이 없으면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한다. 비싼 등록금을 내주는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나보다는 집안을 위한 학과와 학교를 택한다. 즉, 그들은 취업이 잘 되는 과 혹은 빨리 졸업해서 사회에 나갈 수 있는 전문대를 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 등록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다. 사장 비위 맞추랴 손님 비위 맞추랴, 하루하루 스스로에게 말 걸 시간조차 없이 흘러간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타인에게 맞추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또 아플 수밖에 없다. 갈 곳 없는 원망만이 내 머릿속을 떠돌다가 결국 나에게 도착한다. ‘나는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난 거지. 왜 우리 부모님은 돈이 없지. 아니야. 이렇게 대학까지 보내주셨는데 내가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 내가 참 못났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로 인해 발생한 문제는 결국 개인이 자기혐오를 하게끔 만든다. 이때 멍 하나가 더 늘어났다.

 

 

여차저차 이제 대학을 졸업했다. 약 1000만원에서 3000만원이 넘는 빚을 떠안고 우리는 사회로 나왔다. 그 빚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의 능력과 재능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도 없었는데 회사들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웠는지에 대해 써내라고 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 ‘내가 지금까지 뭐했지. 별로 한 게 없다. 아니, 한 것은 많지만 그게 회사가 좋아할 것인지는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지원서 작성을 끝낸다. 지원 동기는 당연히 돈을 벌어 빚을 갚기 위해서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회사를 찬양하는 내용을 써야 한다. 다 쓰고 보니 내가 써내려간 자기소개서인데도 내 이야기 같지가 않다. 그래도 그나마 날 뽑을 것 같은 회사에 일단 지원서를 넣어본다. 결과는 불합격이다. 남들만큼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돌아오는 결과는 불합격뿐이다. 있지도 않았던 자존감이 이제는 마이너스가 되어버린다. 친구들이 싫은 소리를 하며 직장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조차 버겁다. 누구는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니는데 배부른 소리하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이젠 그런 친구들도 싫고 은근히 눈치를 주는 부모님도 싫고 가끔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하는 친척들도 다 싫다. 무엇보다도 모든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내가 제일 싫다. 또 그렇게 멍이 든다.

이게 바로 어른들이 말하는 청춘의 실제 삶이다. 세상에 이리저리 치여 멍으로 얼룩져서 푸른 삶이다. 청춘이 쓰는 글이란 이런 것이다. 더 이상 청춘에게 환상을 갖지 말라. 당신들이 볼 땐, 밟히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청춘이니 이런 대접을 받아도 괜찮은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누구도 이렇게 아파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청춘이라고 해서 이런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청춘이니 괜찮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회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역량 부족 따위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라면 어쩔 수 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사회를 바꾸자고 말하지 못하겠다면 아무 말 말고 가만히 있기만 해라. 그럼 반이라도 가니깐.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힘들다고 외치는 청춘들의 목소리를 죽이려 하지 말라. 청춘들에게 ‘그래도’ 살아야지, 라고 하는 것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최소한 ‘살 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청춘이란 단어는 그저 사전 속에만 존재하는 죽어있는 단어에 불과할 것이다.

 

 

아픈 이야기 [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지벼리

출판사에서 일하는 나는 오늘 다음 날 있을 출판사 총판 회의에 필요한 자료 준비와 출시될 도서들을 정리하느라  저녁 식사도 거르고 10시 30분까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밥도 못 먹고 온 나에게 신랑은 안쓰러운지 옷도 갈아 입지 않은 내게 빨리 소파에 앉으라며 테이블에 늦은 저녁을 차렸다.
몇 번을 데웠는지 모른다는 따근한 두부찌개. 나랑 같이 먹으려고 신랑은 김치볶음밥으로 우선 먹었다고…

신랑의 전매특허 두부찌개는 늘 맛있다. 오늘은 더 맛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더 맛있다. 목마름이 밀려와 맥주 한 캔 마시고 싶다고 했더니 내가 오기 전에 담배 사러 나갔다가 맥주도 사서 미리 냉장고에  뒀노라고.
이렇게 말하면 신랑은 집에서 살림만 하는 남자로 오해받을까? 살짝 걱정도 되지만 내 남자는 그런 거에 개의치 않는다. 무엇이든 잘~ 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사들인 텔레비전에서는 세월호에 관한 101분 기록으로 이야기를 다시 꺼내 영상으로 보여준다. 신랑과 나는 세월호  이야기에 대해  “이제 좀 그만하자.”고  말하는 사람들과  목에 핏대 세우며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남의 고통은 어찌 그리 쉽게 잊자고들 하는지 되려 묻고 싶다. “교통사고 같은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의 내리면 쉬운 표현이라 그리 했는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개탄스럽다. 나와 신랑 사이에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자 약속한 부분도 있고… 나이도 이제 마흔 중반에 생각도 많다. 사실 아이를 키우며 살 자신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랑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나는 아동 전문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세월호 탑승자 중에 가족이 있느냐고… 분노하는 내가 그렇게 비쳤는가 보다.

우리가 연결하면 연결 안 되는 고리가 있던가?
그렇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들은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가족 여행으로 세월호를 탔다가 엄마, 아빠, 형 모두 잃은 요셉이는 나의 먼 친척이었다.
내가 평소 친척으로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어서 몰랐지만, 아버지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그 주에 친인척들 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사고로 인해 모임을 취소했고, 그 안타까운 사연을 뉴스로만 들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주변 왈 그래서 네가 그렇구나… 세상에!
우리 다 같은 국민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을 안타까워하며 목소리 좀 냈다고…
그런 관계들이 있어서 내가 그러는 것이라고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건 사건보다 더 아픈 또 하나의 사건이다.
‘세월호’에 직접 탑승했거나 탑승한 가족이 있어야만, 또 다른 어떤 관계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말인가?

다만 그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이고 우리의 미래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꼭 했어야 하는 일들이 지금은 미련으로 남았을 그 꿈 많은 아이들을… 우리는 그 찬란한 미래를 무참히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사고였다’라고 말한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고 변명만이 소란하다. 비겁한 변명들을 듣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다.

맛있게 먹던 밥을 짧게 마무리한다. 맥주를 벌컥벌컥! 목이 메어와 숨쉬기가 곤란하다. 목 아픔을 참고 있는데… 난데없이 눈물 줄기가 참아지질 않는다. 그 부모들의 속은 어찌할꼬. 그 영상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미처 공개하지 못했던 어느 부분은 정말이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자기들은 빠져나가겠지?”, “지난번에도 그랬었잖아”, “아~ 이러다가 혹시 죽는 거 아니겠죠?”,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 남겨야지. 엄마, 아빠 사랑해요.”, “커튼이 이 만큼 들렸다는 건 그만큼 기울었단 말이겠죠.”, “물이 들어와요.”, “아~~~ 안돼! 정말 화가 나서 욕을 하고 싶은데 이 영상 어른들이 볼 거라 욕은 못하겠고… 아… 나는 꿈이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대로 죽을까 봐 걱정돼요. 아~~~.”

아프다.
많이 아프다.
그 영상 속 우리 아이들이 혹시나 했던 말들은 그리 되어 버렸다.

핸드폰 영상으로 담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록했을 우리 아이들의 희망을…
우리는 끊어 버렸다.

선장과 선원들은 상황실 신호도 끊고,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은 채 ‘패닉 상태였다’라고 말하며 살고자 허둥지둥 세월호 밖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고, 비겁했다.
또 그들을 구한 해경들은 선장인지, 선원인지 몰랐다고 했다.

선장답지 못했고, 선원답지 못했고, 해경답지 못했고, 어른답지 못했고, 인간답지 못했다.

상황실은 각각 보고만 잘 하고 있으라고…
해경들은 그 모습들을 보고도 퇴선 명령은 없다.
관저에서는 ‘세월호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니 사진으로 찍어 빨리 보고 하라고…
보고 싶어 하신다고…
민간 민박 선원들이 보다 못해 뛰어들자 해경은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한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1분 1초를 불안해하며 말을 이어가는 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사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어느 것이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인가?
아이들의 목소리는 다급한데…
상황실 보고하는 목소리는 여유가 있고 웃음도 있고…
참으로 비통하다.

아이들은 밀려오는 공포 속에서도  다른 객실에 있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걱정한다.
부모님께 보내는 메시지에는 곧 구하러 온다고 했으니 염려 말라고 안심시킨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아무런 지시 사항도 내리지 않고 그저 선내 방송으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라고  반복 방송을 하고 있다.  스피커에서 되풀이 되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듣는 아이들은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하고 그 지시에 따른다. 보통 다른 날이었더라면 어른들이 하는 말에 의문을 가졌을 법 한데… 이 날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맞다 생각해서 아마 그들 전부가 그렇게 행동한 것 같다. ‘내가 움직이면 배가 더 기울어져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 아이들이  선내 방송의 지시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그대로 따른게 아닐까 싶다. 어찌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아이들은 스스로 구명조끼를 나눠 입고 못 입은 친구들을 챙기며 불안한 감정들을 서로 다독인다.

그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웃음을 보이던 아이들은 그 상황이 그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아마 그리도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도 혹자는 ‘애들이 철이 없어서 그런다’라고 한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것은 그것과 다르다.
그냥 비판을 위한 비판인 것이다.
내 자식을 그렇게 수장시킨 부모들도 그리 말할까? 철이 없다고?
그 부모들을 대신해서 마구마구 싸워주고 싶다.

길게 끌어 봐야 국민들 세금만 더 늘어난다고 말하는 그들은 끝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그 누구도 억울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어린이 책!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순간순간 고민이다.
내 모든 힘을 다 동원해서…
인성이 바로 서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꼭! 그래야만 한다.
내가 나에게 내리는 주문이다.

다시 봄이 찾아왔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 그들을 도왔던 민간 잠수부와 민간 선박 선원들에게 이제 봄은 없다.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들이 맞는 봄이 새롭기를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

p.s  서로 나누고, 도우며… 함께 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하물며 일본의 ‘아베’도 해낸 연금 통합 우리도 해내자![썩은 뿌리 자르기]

아래 글은 회원이 자발적으로 투고한 글입니다.  약소하지만 소정의 원고료가 지급되며, 글의 주장은 전적으로 필자의 입장입니다. 


 

하물며 일본의 아베도 해낸 연금 통합 우리도 해내자!

:김형모가 쓴 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나태영

소득대체율 학살의 한국현대사
소득대체율이란 국민연금 가입자가 40년간 국민연금 보험료를 냈을 경우 나중에 자신이 벌던 월급의 몇 프로를 매달 연금으로 받는 것을 이른다. 쉽게 말해서 내가 40년간 한 달에 200만원을 벌어서 매달 수입에 맞게 정해진 국민연금 보험료를 40년간 냈다면 소득대체율이 50프로 경우 죽을 때까지 매달 100만원을 받는다. 20년간 냈다면 소득대체율이 50프로 경우 죽을 때까지 매달 50만원을 받는다.

1977년 노태우 정부 때 소득대체율은 70프로였다. 첫 번째 학살은 김대중 정부 때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받던 1997년 행해졌다. 나라 전체 재산이 갑자기 절반으로 줄어든 때이니 이해가 된다. 소득대체율이 60%로 떨어졌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여야는 60%였던 소득대체율을 2008년 50%로 10% 낮추고, 2009년부터 2028년까지 20년 동안은 매년 0.5%씩 낮춰 40%로 하기로 법을 고쳤다. 국민연금 지급 개시연령도 원래 60세였지만 2013년부터 5년 단위로 1세씩 올려 2033년에는 65세가 된다.

국민연금 대상자는 호구? 특수직연금 대상자는 정승?
2017년 현재 국민연금 보험금 지급을 국가가 보장하지 않는다. 2014년 국회에서 새누리당 인간들이 억지로 막아서 그리되었다. 국민연금 대상자들은 이래저래 국가로부터 버림받는데 공무원, 학교 선생님, 군인 등 특수직연금 대상자들은 국가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2013년 기준 … 48만 명의 공무원 등 특수직연금 수령자가 받는 연금액은 총 15조원이고, 나머지 750만 명(일부 중복수령 포함)이 넘는 국민연금 및 기초연금 수령자가 받은 연금액은 17조 1천억원이다.’(『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58쪽)

특수직연금 대상자들은 대체로 길게 일한다. 월급도 조금씩 더 늘어난다. 2017년 현재 젊은 층에서 교직원, 공무원, 직업군인이 되려고 안달하는 까닭중 가장 큰 까닭은 수명은 90대 전후로 늘어가는 상황에서 기타 직업으로는 45세 이후가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 같은 국민연금 대상자들은 한 직장에서 또는 한 업종에서 저들보다 더 짧게 일한다. 매달 버는 돈은 대략 45세 이후부터 팍 줄어든다. 반대로 들어갈 돈은 더 늘어난다. 나는 우리 나이로 올해 쉰 넷이다. 딸 쌍둥이가 지금 고3이다. 나는 재작년 연봉 약 1천 5백 만원, 작년 연봉 약 2천 만원, 올해는 운 좋게 1월부터 3월까지 한 달에 250 만원 정도 벌었다. 한울님! 고맙습니다.

우리 형은 91년부터 어린이(초등)학교 선생님 일을 했다. 두 딸 중 큰 딸은 올해 졸업했다. 둘 대학 등록금은 무이자 대출로 월 80만원씩 갚기로 했단다. 무이자 대출이라 나는 많이 부러웠다. 2년전에 형한테 들었다. 매달 연금보험료 본인부담 50만원, 국가부담 50만원해서 100만원 낸단다. 1년에 미래를 위해서 1천 2백 만원 낸단다. 내 입이 벌어졌다. 너무도 부러웠다. 나는 우리집 서울시 토지 사용료 매달 25만원, 이자로 나가는 돈이 매달 50만원인데!

또한 변변한 직장 다니지 못하는 사람이나 지역가입자는 국민연금 보험료를 다 본인이 부담해야한다. 내 경우도 연금 보험료 낸 기간중 약 90프로 기간동안 다 내 부담이었다.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는 건강보험 통합을 이뤄냈다. 반발이 컸다. 보기를 들자면 돈 많은 직장의료보험 노동조합이었다. ‘의보통합반대 100만인 국민서명운동’과 총파업 투쟁을 했다. 김대중 정부는 뚝심 있게 국민건강보험 통합을 이뤄냈다. 결국 국민건강보험 재분배기능을 높이고 효율성과 보장성을 키우는 효과를 거뒀다. 박수!

천덕꾸러기 국민연금과 특수직연금을 통합하여 ‘국민연금 하나로’ 이뤄내자! 아베도 했는데 어찌 우리가 못해내겠는가. 다수가 이 땅 중산층인 특수직연금 대상자들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래도 이뤄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자!

국민연금에 살아 숨 쉬는 소득재분배의 마술!
A값은 전체가입자 3년간 평균 소득을 뜻한다. 2015년 3월부터 적용되는 A값은 198만 1천 975원이다. B값은 가입 기간 중 당사자의 생애평균소득을 뜻한다.

‘홍길동의 가입 기간 평균 소득이 300만원이고, 연금을 받기 시작 시작할 때 가입자평균소득(A값)이 200만원이며, 소득대체율이 40%라 한다면’(『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28쪽)

300만원의 40%인 120만원과 200만원의 40%인 80만원을 더하면 200만원이 된다. 이를 2로 나눈 결과인 100만원이 300만원인 평균소득자 홍길동의 연금 수령액이다. B값이 100만원인 사람의 경우 위 공식대로 계산하면 연금액이 60만원이 된다. 결국 실제 소득대체율은 40%가 아니라 60%프로가 된다. 전체가입자 3년간 평균 소득인 A값이 198만 1천 975원 이하인 사람은 그만큼 덜 내고도 더 많이 가져가게 된다. 이는 낸 만큼 받아가는 사보험 연금과 다른 국민연금의 강점이다.

“단순히 내 월급에서 떼어간 만큼만 나중에 연금을 돌려주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 가입한 모든 이들’의 평균소득(일명 ‘A값’)이, 나 자신의 국민연금 지급액에 50%나 영향력을 미친다. 즉 ‘모두 함께’라는 공동운명체의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세대내 연대’와 노동에 종사하는 세대가 노인층인 세대를 부양하는 ‘세대간 연대’도 포함한다.(『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62쪽)

따라서 서민일수록 길게 조금씩이라도 끈질기게 국민연금 가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서민들은 피하고 강남 아줌마들은 임의가입을 통해 국민연금 재테크를 한다. 저들은 국민연금이 사보험 연금보다 수익률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예민한 촉수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사보험연금에서는 물가인상이 반영되지 않는다. 보험금이 30만원이면 10년 뒤나 30년 뒤나 숫자 그대로 30만원 받는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물가인상이 반영되어 지금 30만원 받는 경우 10년 뒤에는 40만원이나 45만원 받아서 지금 돈 가치 30만원이 평생 보장 된다.

김형모는 주장한다. 국민연금 강화 핵심은 다음 세 가지라고!

첫째, ‘A을 높인다.

둘째, 가입기간을 늘린다.

셋째, 소득대체율을 인상한다.

 

튼튼 국민연금을 만드는 길은 무엇일까?
국민연금 금고로 들어오는 돈이 국민연금 금고에서 나가는 돈보다 많으면 ‘튼튼 국민연금’이 가능하다. 독일 벤츠 회사 자동차 조립 공정의 로봇화 즉 자동화율이 97%이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러니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일자리 늘리는 길은 무엇일까? 하루 노동시간을 우선 7시간으로 줄이고 50년 뒤에는 6시간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 윤구병 선생이 사장으로 일하는 보리출판사는 50년 앞서서 하루 노동 시간을 6시간으로 한다. 월급은 똑같이 하고서 말이다. 하루 노동시간 7시간 제도를 우선 공무원, 학교 선생님, 군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제1 하청 정규직 노동자에게 실시할 필요가 있다. 월급은 지금 월급의 95프로로 줄일 필요가 있다. 이들에게 40세부터 임금 피크제를 실시하고 대신에 이들의 정년을 67세로 늘려줄 필요가 있다. 가늘고 길게 전략이다.

내가 사는 ‘성미산마을’에 망원시장과 월드컵시장이 있다. 망원시장 ‘부산어묵’ 사장님과 가족과 직원은 하루 14시간 일한다. 보통 자영업자 하루 노동 시간이 10 – 14시간이다. 이분들에게 하루 노동 시간 7시간은 무릉도원 이야기이다. 이분들이 하루 노동 시간을 20프로 줄이면 한 달에 40만원, 40프로 줄이면 80만원을 국가가 지불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하루 노동 시간 7시간이 뜻있는 길이 될 것이다.

또한 고졸자 4년후 임금과 대졸자 첫 임금 차이가 95대 100이 된다면 대학 진학률이 더 낮아져 사교육 비용이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이 땅 월급쟁이들의 지갑이 두둑해질 것이다.
위와 같은 정책이 시행되면 국민연금 금고로 들어오는 돈이 더 늘어날 것이다. 튼튼 국민연금이 이루어질 것이다.

참조>

국민복지연금법
제1장 총칙

제1조(목적) 이 법은 국민의 노령⦁폐질 또는 사망 등에 대하여 연금급여를 실시함으로서 국민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실록 국민의 연금』 4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