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와 파묘의 정치학, 비난의 칼날인가 비판의 죽비인가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박제와 파묘의 정치학, 비난의 칼날인가 비판의 죽비인가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26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유현상(숭실대학교)

 

데이터는 AI산업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이용자의 명령 혹은 의도에 부합하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AI는 가능한 한 많은 관련 데이터를 검토하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데이터 축적은 AI산업 발전을 위한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용량의 측면에서 보자면 영상 자료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데이터로 저장되는 정보의 상당량은 말과 글로 생산된다. 한번 생산된 말과 글이 디지털 세계에 등록되는 순간 영구히 저장된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에는 이를 ‘박제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편, 저장된 정보는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 다시 소환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일들을 최근에는 ‘파묘된다’고도 한다. ‘파묘’라는 단어는 동명의 영화가 화제가 된 이후에 빈번히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일상에서 ‘파묘’라는 단어를 쓸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정치권의 말과 글들이 ‘박제’되었다가 ‘파묘’로 이어지는 광경이 너무나도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다양한 종류의 SNS와 유튜브 같은 플랫폼 이용이 일반화되면서 마이크를 잡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각자의 견해를 가지고 정치적 논쟁에 참여하고 있다. 주권자들이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밝히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니 그 자체가 나쁜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마이크를 잡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타인의 박제된 말과 글을 소환해 파묘하는 방법들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인들의 말에 많이 주목한다. 물론 주권자는 정치인들이 일관된 정치적 입장과 행보를 요구할 수 있다. 변절과 배신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으면 정치적 행보를 이어가기 어려운 이유이다. 따라서 ‘박제’된 말과 글이 현재의 모습과 불일치하거나 모순되는 것으로 입증될 때 ‘파묘’는 매우 예리한 칼이 된다. 우려되는 점은 합리적인 비판을 통해 민주적 역량을 강화하는 약속 대련 정도로 그칠 논쟁이 잘 벼린 칼날을 휘두르는 진검승부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한때 동일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활동했던 정치세력이나 평론가들도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처럼 상처 주는 말들로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같은 진영에 속해 있었다는 말인가?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비판의 언어로 그쳐야지 비난의 언어로 치명상을 입히려 해서는 안 된다. 적을 만들기는 쉬워도 연대할 수 있는 세력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서로 상처를 깊게 주고 받은 사이는 더더욱 연대하기 어렵다. 비난의 언어는 비판의 언어보다 훨씬 주목받는 ‘박제’가 되고 너무도 손쉽게 ‘파묘’될 수밖에 없다.

‘박제’와 ‘파묘’는 정치인들이나 공개적으로 언급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게 신중한 언행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하나의 아이러니가 예상된다. 그것은 박제된 타인의 말과 글을 파묘하는 방법으로 공격했던 사람들의 언행 역시 박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락가락하는 정치인들의 언사야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정치는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판단은 수학적 판단이 될 수 없다. 정치가 상황과 시대 정신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으면 수구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명심보감>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혀는 내 몸을 베는 칼이다.” 비판의 죽비는 정신을 차리게 하지만 비난의 칼은 동지와 내 영혼을 베어버릴 수 있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9614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과두정의 시대와 윤리 없는 인공지능의 역설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8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김성우(대동평화연구원)

 

세계는 ‘빅테크 과두정’이라는 새로운 유령의 위협 앞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월가를 대신해 거대 IT 플랫폼 기업들이 경제를 넘어 정치 권력까지 장악하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조차 “우리는 빅테크 억만장자들의 과두정으로 향하고 있다”고 경고했듯이, 이는 디스토피아 소설 속 시나리오가 아닌 우리가 마주한 냉혹한 현실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사악한 생각’은 본질적으로 ‘은밀함’을 속성으로 한다. 공론장이 파괴되고 정보가 소수 권력에 독점될 때 사회는 어둠의 시대로 진입한다. 오늘날 알고리즘 권력은 겉으로는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이면에는 데이터 독점과 여론 조작을 통해 공공성(Publicity)의 기초를 잠식하며 공동선(Common Good)을 파괴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류에게 ‘재앙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낳고 있다. 사생활 침해, 차별적 알고리즘, 법적 책 임의 불명확성 등 인공지능이 야기하는 사회 문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AI가 학습한 편향된 데이터는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고착화하고, 딥페이크와 위치 추적 기술은 개인의 기본권을 상시적으로 위협한다. 확증 편향을 강화해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는 ‘필터 버블’ 현상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민주주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위기의 핵심에는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빅테크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구글, 메타, 아마존과 같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사용자 데이터를 독점하고, 객관성과 중립성으로 포장된 알고리즘을 통해 여론과 정치적 선호까지 조작하고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거대한 해킹’이 폭로했듯, 이윤 극대화를 위해 설계된 알고리즘은 공공성을 약화시키고 사회를 불투명한 통제 체제로 변모시키고 있다. AI 기술의 상업적 권한이 빅테크 과두정에 집중되면서, AI는 인류의 번영이 아닌 소수의 사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그런데 가장 즉각적이고 파괴적인 위협은 바로 ‘노동의 종말’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예견한 ‘노동의 종말’은 AI의 비약적 발달과 함께 가혹한 현실이 되었다. 정보통신기술의 진보로 세계 경제 규모와 생산성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정작 고용 시장은 얼어붙고 실업의 공포는 전방 위로 확산 중이다. 이는 기술 혁신이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과거 자본주의가 가졌던 ‘기술 진보에 따른 고용 창출’이라는 선순환 기제를 완전히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모순이 드러난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인간을 배제한 효율적 기술을 채택하지만, 그 결과로 해고된 노동자들은 구매력을 상실하게 된다. 즉, 생산의 효율성은 극대화되었으나 정작 그 생산물을 소비할 주체는 사라지는 ‘수요의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술 혁신의 파급 범위다. 과거의 자동화가 육체적 반복 노동에 국한되었다면, 이제는 AI와 로봇이 의사, 변호사 등 고도의 지적 전문직 영역까지 잠식하고 있다. 숙련된 경력자들은 일터에서 밀려나고, 청년층을 위한 신규 고용의 문은 아예 폐쇄되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가 고착화될 전망이다.

결국 4차 산업혁명의 결실은 플랫폼을 장악한 소수 빅테크 과두 세력에만 집중될 뿐, 대다수 시민은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풍요에서 소외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정점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고용 절벽과 수요 부족의 악순환이 심화되면, 과거 대공황과 같은 전 지구적 경제 참사가 재현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파국을 막고 자본주의의 자정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복지를 강조 하는 케인스의 복지경제학 아니었던가.

출처: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9300


 

조카야 고마워, 삶의 얼룩을 응시하며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조카야 고마워, 삶의 얼룩을 응시하며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3월 8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한길석(중부대 학생성장교양학부)

 

개강을 맞아 울적한 기분으로 수업 준비 겸 책장을 뒤지다가 못 보던 찻잔 하나를 발견했다. 개강을 피하고 싶은 건 학생들만이 아니다. 사과 한 알 크기의 포동한 녀석으로, 달항아리 같은 살결에 알록달록한 점과 별을 붙이고 새초롬하게 앉아 있었다. ‘고놈 참 이쁘네’ 하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뭔가 수상쩍어서 살짝 돌려 보니 고양이는 사라지고 정체불명의 커다란 갈색 얼룩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뒷면은 페인트 총에 맞은 우윳빛 벽화처럼 흉측한 얼룩으로 가득했다. 세상에는 돌려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내 말로는 조카가 준 거라 했다. 친구와 함께 도자기 공방에 놀러 갔다가 처음 빚어보고 선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얼룩은 어찌된 거냐 물으니 “원래 고양이였는데 망친 거래”라며 피식 웃었다.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해 봤다. 흙을 빚어 무늬를 넣고, 유약을 발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마 앞에서 기다리는 조카. 그런데, 백사장을 총총 걷던 고양이는 간데 없고, 정체불명의 갈색 얼룩이 떡하니 박혀 있는 것이다. 가마의 열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조카는 끔찍한 사고 현장이 담긴 이 오브제를 이모에게 넘기고 재빨리 사라졌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이 찻잔은 두 개의 얼굴을 한 녀석이다. 한 쪽은 귀엽고 상큼하지만, 다른 한 쪽은 예기치 못한 불행으로 일그러져 있다. 인생도 비슷하다. 온갖 정성을 기울여 자기를 빚어내 제 나름의 무늬와 빛깔을 뽐내며 세상에 나오지만, 터져버린 고양이 신세를 면치 못할 때가 적지 않다. 머리를 쥐어짜고 갖은 애를 써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봤자, 생각대로 착착 진행되는 일은 별로 없다. 마이크 타이슨은 말했다. ‘누구나 계획은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타이슨은 탁월한 철학자임이 틀림없다. 다만 그 밑에서 배우는 건 조금 겁난다.

조카는 이십대 청춘이다.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밤길을 조마조마해 하며,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텨낸다. 맵고 신 나날을 살다가 도자기를 빚으며 모처럼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열에 터진 고양이와 만났다. 가히 ‘미지와 근접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라 할 수 있다. 인생은 잠깐의 위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의 유머다. 웃기진 않지만. 그 나이에 나는 어땠나 생각해 봤다.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 다만 도자기 공방은 없었다.

우리는 보통 얼룩을 감춰 놓는다. 눈에 띄지 않게 치워두면 삶은 다시 쾌적하고 매끄러워진다. 실패한 기억은 장 속 깊숙이 넣어두거나, 잘 안 보이는 곳에 쳐 박아 놓는다. 그러나 그렇게 얼룩을 감추다 보면 고양이를 빚던 그 오후도, 가마 앞에서 느꼈던 설렘도 함께 지워진다. 결과만 기억하고 과정은 잊는 것. 실패의 흔적을 지우면서 그 안에 담긴 노력과 애정까지 지워버리는 것. 우리가 너무 자주 저지르는 잘못이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갈색 얼룩이 보이도록 찻잔을 비스듬히 놓아두었다. 귀엽기보다는 아름다운 찻잔이 되었다. 얼룩과 점들이 찻잔을 완성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삶이란 영광과 얼룩을 함께 응시하는 것일 테다. 잘 구워진 면만 드러내려 하지 않고, 터져버린 면도 슬쩍 내보이는 것. 그렇게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 적어도 이 찻잔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삶의 얼룩이 늘어날 때마다 이 찻잔을 쳐다봐야겠다. 조카야 선물 고맙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8352


 

신자유주의가 낳은 괴물, 트럼프의 ‘마가주의’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신자유주의가 낳은 괴물, 트럼프의 ‘마가주의’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2월 22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김성우(대동평화연구원 연구원)

 

현재 대한민국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의해 기존의 세계 질서와 국제적 합의가 무너지는 전례 없는 위협에 직면해 있다. 트럼프가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펼치는 거래적 외교는 과거의 동맹 가치를 위협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실존적 과제를 던지고 있다.

이러한 대혼란에서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고 있는 전환기적 상황임을 읽어내야 한다. 또한 미국의 새로운 세계 전략을 수립한 트럼프 대통령의 마가(MAGA)주의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가주의의 뿌리가 구소련 붕괴 이후인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 중심의 패권 질서가 구축해 온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빛과 그림자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구소련 붕괴 이후 형성된 미국 중심의 유일 패권 체제는 시장의 무한한 자유와 무역 장벽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세계 질서를 구축했다. 세계화는 보편적 번영을 약속했으나, 실상은 자본의 이동성만 극대화하고 자국 내 제조업 붕괴와 더불어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키며 미국과 유럽 대다수 시민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무한 경쟁과 시장의 자유를 내세웠던 세계화는 번영 대신 극심한 양극화를 초래했으며, 마가주의는 이러한 불평등 구조 속에서 병든 개인들과 집단의 분노를 동력 삼아 탄생한 괴물에 불과하다.

트럼프가 휘두르는 관세 장벽과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 우방국을 향한 경제적 ‘갈취’는 세계화에서 소외된 ‘백인 남성 고졸 노동자’의 분노를 동력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추구하는 마가주의의 본질은 공공성이 아니라 사적 이익과 야심을 위한 독재적 횡포를 향한 선동적 포퓰리즘이다. 이는 대의 민주주의가 소수 엘리트만의 과두정 게임으로 전락했을 때 나타나는 기형적인 현상이며, 가짜 뉴스와 혐오를 통해 본질적인 불평등 구조를 은폐하는 대중선동 정치이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는 소외된 시민을 대변하는 진정한 포퓰리스트가 아니라, 가짜 뉴스와 선동으로 타자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대중선동가(데마고그)이다.

그는 능력주의라는 허울 아래 일론 머스크로 상징되는 빅테크 승자들만의 자유를 추구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병든 이들의 분노를 불법 이민자나 외부의 적에게 전가하는 비겁한 선동 정치에 매몰되어 있다.

결국 다수의 패자가 신음하는 부자유한 사회 속에서 극단적 분열은 심리적 내전 상태로까지 번졌고, 이는 민주주의의 토대인 공공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이 새로운 마가주의 전략에 맞서려면, 결국 강자의 약탈적 자유를 제한하고 모든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공공성을 추구하는 민주 정부가 필요하다. 국가의 역할은 사적 이익의 극대화가 아닌 공공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혐오와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를 끝내고 모두의 평등한 자유를 실천하는 것은 ‘빛의 혁명’을 함께 일궈낸 대한민국 주권자와 현 민주 정부가 함께 짊어져야 할 지엄한 시대적 과업이다. 대한민국이 각자도생의 거센 파고를 넘어 국익을 중심에 둔 균형외교를 하는 자주 주권 국가로 우뚝 서기를, 그리하여 극우 포퓰리즘의 난동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새로운 희망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7521&page=5&total=11236


 

세 철학자가 들려주는 ‘분개’ 이야기 [시대와 철학]

세 철학자가 들려주는 분개이야기

 

정선우 (연세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분개는 타인의 부당한 선을 불승인하도록 만들고(아리스토텔레스)
타인이 겪는 피해를 순전히 남의 일로 치부함으로써 외면하거나 방관하지 않도록 만들며(데카르트, 스피노자)
심지어 국가가 불의를 자행할 때 이에 침묵하지 않고 권력에 적극적으로 불복종하도록 만든다(스피노자)

우리를 분개하게 만드는 대상은 사적 존재인 한 개인일 수도 있으나 공적 존재일 수도 있다.
분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어떤 의미에서 위협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손해나 고통을 끼치는 사람에게 증오와 분노를 느낀다. 가령 누군가가 내 몸에 위협을 가하거나 내 것을 강탈하거나 내 평판을 떨어트리거나 내 인격을 무시할 때 나는 그를 싫어하고 그에게 화낼 것이며, 그 결과 그와 맞서 싸울 것이다. 이처럼 타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주로 자기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진 해악을 이유로 생겨난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인간은 자신의 안녕이나 복리와 관련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느끼곤 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감정으로 분개(indignation)를 꼽을 수 있다. 분개의 감정은 이익을 추구하고 손해를 기피하는 자연적 성향, 곧 이기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감정에 주목해 왔다.

거의 모든 학문의 출발점에 놓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분개의 감정을 상당히 진지하게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분개는 일반적인 노여움이나 성냄과는 구별되는 감정으로, 이웃에게 일어난 일, 이웃에게 닥친 상황을 봄으로써 생겨나는 고통을 의미한다. 또한 분개는 시기(이웃이 잘되면 괴로워하는 것)와 심술(이웃의 불행에 즐거워하는 것) 사이의 중용에 해당하며, 따라서 유덕한 사람이 취하는 일종의 도덕적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분개란 불의를 향한 분노, 곧 ‘의분(righteous indignation)’이다. 가령 누군가가 요행이나 부정에 의해 정당하지 않게 선을 획득하는 경우, 그는 그 선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으므로 그가 선을 소유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따라서 훌륭한 사람은 그의 부당한 행복에 괴로워하며 분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덕스러운 행위자가 분개하는 까닭이 타인의 선이 행위자 자신의 이익과 상충하거나 행위자 자신의 행복을 저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그 자체로 옳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분개의 감정은 인간이 좁은 범위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옳음과 그름, 정당함과 부당함의 관점에서 사태를 평가할 수 있음을 드러내 준다.

한편,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개 개념을 보다 일반화함으로써 자신만의 분개 개념을 제시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떤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그를 미워한다. 이는 다시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첫째, 만약 이 악이 우리와 관련될 때, 곧 타인이 우리 자신에게 해악을 끼칠 때, 우리는 그에게 분노(anger)를 느낀다. 둘째, 만약 이 악이 우리와 관련되지 않는다면, 곧 타인이 우리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라면, 우리는 그에게 분개를 느낀다. 가령 어떤 사람이 선을 가질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소유한다면, 그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부당한 일(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에게 분개의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분개의 감정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처럼)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특징 짓는 요소로서 이해될 수 있지만, 반대로 정의를 가장하는, 실제로 정의롭기보다 정의로워 보이기를 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는 요소로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양면성을 지닌다. 데카르트는 이 후자의 측면에 주목함으로써 분개의 배후에 놓여 있는 은밀한 인간 심리를 매우 예리하게 포착한다. 데카르트가 지적하듯, 자주 분개하는 사람은 참되게 덕스러운 사람이기보다 덕스러워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가령 비난받을 만하지 않은 일이나 사소한 일에 과도하게 분개하는 사람, 혹은 세계의 운행이나 신의 섭리를 탓하면서 신이나 자연의 작품에 분개하는 사람은 도처에서 흠잡을 거리, 비난할 거리를 발견하는 사람이며, 따라서 덕을 사랑하기보다 악덕을 추구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런 사람은 자신의 빈번하고 과도한 분개가 도리어 자신의 올바름을 입증하는 양 착각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지적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분개는 증오나 분노 일반과 구별되는 특별한 감정이다. 타인의 불의에 분개하는 마음은 나 자신의 이익과 손해라는 협소한 관점을 벗어나는 태도라는 점에서 도덕적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개는 합당하고 바람직한 분개에 속한다. 그러나 분개는 ‘가짜 덕’ 혹은 위선으로부터 비롯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타인의 악덕이 자기 자신의 덕의 징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과오를 비난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은 정말로 분개해야 할 것에만 분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에나 쉽사리 분개한다. 이러한 분개는 합당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 않은 분개에 속한다.

분개의 중요성은 이뿐만 아니다. 이 감정은 비단 개인적 차원, 도덕적 차원에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안에서도 중대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분개는 공동체를 위태롭게 하거나, 심지어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데, 분개의 커다란 위력에 주목한 철학자는 바로 스피노자다. 우선,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분개 개념을 이어받는다. 스피노자에게서 분개란 다른 이들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 가지는 미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못되게 굴거나 해악을 끼친다면, 우리는 피해 당사자가 아닐지라도 분개를 느낀다. 가령 (우리가 이전에 아무 감정도 갖지 않았던) A라는 사람이 (마찬가지로 이전에 아무 감정도 갖지 않았던) B라는 사람을 괴롭힌다고 가정하자. 이때 우리는 A에게 분개를, B에게 연민을 느낀다. 이에 따라 B가 더 이상 A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B의 편에서 A와 맞서 싸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를 분개하게 만드는 대상이 사적 존재로서의 한 개인일 수도 있지만, 공적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지적하듯, 만약 주권자(가령 한 명의 군주나 여러 명의 귀족들)가 신민들을 학살하거나 약탈하거나 겁탈하거나 이와 비슷한 일을 행한다면, 수많은 신민들은 이에 분개하여 주권자에 맞서고자, 국가 권력에 대항하고자 공모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국가가 더 많은 사람에게 국가에 복종하기보다 저항할 이유를 제공할수록 국가의 지배력은 약해진다. 따라서 신민들이 공통의 분개를 계기로 하나로 뭉칠 때, 국가의 최고 권력은 무너진다. 역으로 말하자면, 국가 권력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만약 주권자가 법을 위반하여 대다수의 시민들이 주권자에게 분개한다면, 그 국가는 보존될 수 없으므로 주권자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법을 준수해야 한다. 제아무리 절대적 권력을 지닌 통치자라고 할지라도 대중들이 공통의 분개에 휩싸이지 않도록, 곧 시민들이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만큼 분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어떤 의미에서 위협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세 철학자 모두 제각기 다른 이유와 근거에서 분개라는 감정에 공히 주목한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분개하는 인간, 곧 불의와 악덕에 괴로워하고 불의와 악덕을 미워하는 자야말로 도덕적 행위자이자 정치적 행위자가 됨을 알 수 있다. 분개는 타인의 부당한 선을 불승인하도록 만들고(아리스토텔레스), 타인이 겪는 피해를 순전히 남의 일로 치부함으로써 외면하거나 방관하지 않도록 만들며(데카르트, 스피노자), 심지어 국가가 불의를 자행할 때 이에 침묵하지 않고 권력에 적극적으로 불복종하도록 만든다(스피노자). 반면에 분개가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싶은 욕망이나 무엇이든지 흠잡고 깎아내리려는 기질로부터 생겨난다면, 이는 참된 도덕적 성품이라기보다 도덕을 꾸며내는 것에 불과하다(데카르트). 따라서 마땅한 때, 마땅한 일에 대해, 마땅한 사람을 향해, 마땅한 목적을 위해, 마땅한 방식으로 분개해야 하며, 그럴 때만 인간은 참되게 고귀하고 훌륭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세 철학자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실로 인간의 위대하고 찬란한 면모도 보잘것없고 암울한 면모도 분개라는 이 하나의 감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개가 그토록 오랫동안 철학적 주목의 대상이 돼 온 것일 테다.


 

나의 소설로 한국의 철학을 말한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나의 소설로 한국의 철학을 말한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이종철 지음|대양미디어|(2025년 4월 8일)

 

나의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대양미디어, 2025)을 개인의 사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때문에 이런 사적 체험의 보편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간단하나마 리뷰 쓰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명백히 나의 소설을 오독한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은 법학도인 내가 철학에 눈을 뜨면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철학 공부를 하는 것에서 시작을 한다. 그런 점에서는 내가 다녔던 대학의 철학과 분위기가 배경으로 나오고, 그 당시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 이야기들도 많이 나온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 소설은 개인의 사적 체험을 넘어서기 힘들고 그만큼 보편적 의미를 찾기가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나의 공부가 개인적 공부가 아니라 1980년 광주항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던 시대와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졌고, 때문에 그 시대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또 그 시대의 갈등 해결에 철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철학 공부는 결코 책상 위에서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현실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고, 이러한 연관 속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을 실천적으로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과 연결된 것이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는 한국의 지적 르네상스라고 할 1980년대에 등장한 다양한 이론들을 교통정리하면서 그 한계를 지적하는 이론적 쟁투의 흔적들이 다수 담겨 있다. 지금 보아도 이 시대 이론가들을 포함한 철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은 대단히 치열했고, 고민의 내용도 깊이가 있었다. ‘한국헤겔학회’라는 연구 단체의 탄생은 이런 시대 연관 속에서 이루어진 필연적 산물이었다.

1980년대 후반들어 시대 변혁에 철학 연구자들이 좀 더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한국헤겔학회’와 서울대 ‘사회철학연구실’이 통합을 위해 노력하면서 마침내 1989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탄생했던 것이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탄생은 한국철학사에 두고두고 남을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학회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제도권 철학자들의 관심과 주시를 받았고 지원도 적지 않았다. 지금은 경향 각지로 철학회들이 무수히 많이 있지만, 그들 단체들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간에는 상당한 의미 차이가 있다. 과연 한국의 어떤 철학이 이렇게 깊은 시대 연관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위해 고민했단 말인가? 그런데 이런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소설을 저자 개인의 사적인 의미로 제한하고, 시대적으로 의미 있는 철학 소설에 대해 아무런 리뷰도 하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시대에 비해 지금의 철학자들은 철학을 사적 이해의 한계에 가두어 놓는 것은 아닐까?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 철학은 단군 이래 최대의 활황을 이루고 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 경향 각지로 수십 개의 철학회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찍어내는 철학 잡지들도 적지 않고, 한 해 생산되는 철학 논문들도 수없이 많다. 이런 현상을 인문학으로까지 확대한다면 그 규모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활황 국면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가 음울하게 확산되고, 대학의 철학과가 폐지되고 공동화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나는 한국의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시대와 사회를 주제화하지 못하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철학자들 자신이 자신들의 삶과 시대 문제를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허구한 날 바깥의 철학을 수입하고 해석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한 결코 이런 상황은 달라질 수가 없다. 동료 학자가 쓴 책을 읽지 않고, 읽어도 모른체하고, 더더구나 리뷰 하나 쓰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자기 철학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저 원숭이 철학과 앵무새 철학만 난무하고, 오퍼상 철학과 고물상 철학으로 자기 비하를 일삼는다면 어떻게 한국 철학 한다고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겠는가?


저자 이종철 프로필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원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에서 강의했고, 몽골 후레 정보통신대학 한국어과 교수와 한국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한남대 초빙교수를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은퇴를 했고,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브레이크뉴스>와 <저널인뉴스>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에세이철학’ 분야를 새로 개척하고 있고, NGO 환경단체인 <푸른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철학과 비판 – 에세이철학의 부활을 위하여》와 《일상이 철학이다》가 있고, 공저로 《철학자의 서재》, 《삐뚤빼뚤 철학하기》, 《우리와 헤겔철학》, 《문명의 위기를 넘어》, 《사북항쟁 44주년》등이 있으며, J. 이폴리뜨의 《헤겔의 정신현상학》(1/공역, 2), A. 아인슈타인의 《나의 노년의 기록들》, S. 홀게이트의 《정신현상학 입문》, G. 루카치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Ⅰ,Ⅱ》(2, 3, 4/공역), 《무엇이 법을 만드는가》(공역) 등 다수의 책들을 옮겼다.

웹진 연재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단행본 출간에 즈음하여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웹진 연재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단행본 출간에 즈음하여

 

이종철(소설가)

 

∗웹진 [연재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이 단행본 출간을 맞아(2025.04.08.) 연재를 잠정 멈추고 자전적 소설에 대한 작가의 변을 들어보려합니다. 격동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대학에서 강사와 연구자로 살아간 한 인물이 소설이란 장르를 이용해 자신의 철학적 삶과 삶의 철학을 어떻게 표현하려 했는지 그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이란 책은 내가 처음 써 본 소설이다. 이 소설은 격동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2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이고, 2부는 1990년대 후반부부터 2020년대 전반부에 걸쳐 있다.

필자가 이 소설을 쓴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시대를 치열하게 겪은 한 개인의 사적인 삶을 정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반성해 보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필자는 나 자신의 삶을 주변부 인생(marginal man)으로 규정하곤 했다. 나는 상고를 나와 법대에 진학했지만, 그것은 내가 향학열이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몸이 불편해서 은행이나 기업체에 입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오기가 있었는지 나는 유신 독재 시절에 대학을 보낼 때 법대생으로서 사법고시 1차 시험 한 번 보지 않았다. 법대를 졸업하고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을 해서 박사 종합시험까지 통과했지만, 나는 대학을 떠나 거친 사회에서 10년을 보냈다. 남들은 유학을 가거나 학위 논문 쓰느라고 매진할 때 나는 일반적인 연구자들이 경험하기 어려운 사회 경험을 많이 했다. 나중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실업자 생활을 할 때 유학을 다녀온 후배들과 다시 만나면서 대학으로 복귀할 기회를 가졌다. 뒤늦게 학위 논문을 썼지만 그 후 나의 삶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선생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힘든 시간 강사로 점철되었다. 그런 삶이 싫어서 몽골의 울란바토르에 한국인이 세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생각보다 너무나 열악한 환경 때문에 1년 만에 다시 한국의 대학으로 복귀했다. 모 대학의 초빙교수로 정년퇴직을 한 다음에는 비로소 프리랜서 작가로서 자유롭게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런 나의 삶을 ‘주변부 인생’이란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때문에 나는 중심을 해체시키려 하고, 기성에 대해 비판과 부정으로 대하는 것이 체질화되었다. 임제 선사의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보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말은 나의 삶과 정신을 이끄는 길잡이와도 같다.

다들 알고 있듯, 한국의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인들은 유신 독재와 광주 항쟁, 민주화 투쟁과 1987년의 민주주의의 쟁취 등으로 점철된 고통스럽고 의미 있는 역사적 경험을 겪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사회과학의 전성기이자 온갖 이론과 사상이 난무하던 지적 르네상스의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특정한 세계관과 사상이 지배적이기는 했지만, 이 시대는 그것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상으로 한국 사회의 변혁운동과 맞물려 상호 피드백 하면서 백가쟁명의 절정을 이루었다. 필자는 이 시기를 프랑스의 6.8 혁명 못지않은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은 6.8 혁명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이론과 사상을 정립해서 세계인들에게 내 보였던 반면, 한국인들은 그런 귀중한 역사적 체험을 그저 그런 과거의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우리가 겪은 이 시대의 체험을 철학적으로 반성하고 의미화하고 싶은 욕구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해 본 것이다.

필자의 본업은 철학이고 그중에서도 서양철학이자 독일 근대철학이다. 이런 철학자가 소설을 쓴다는 것이 한국 사회에는 다소 생소해 보이지만, 프랑스 철학에서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사르트르의 경우는 철학자로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소설도 꽤 썼다. 나중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사르트르는 철학자의 신념을 지키고자 그 상을 거부했다. 포스트모던 사상이 주류가 됨에 따라 전문 영역을 넘어 새로운 글쓰기 실험도 이루어지고 영역들 간에 소통도 자연스럽다. 10여 년 전 영화로도 나온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의 본명은 피터 비에리(Peter Bieri)인데,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 출신으로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한 철학교수이다. 한국에서도 찾아보면 없지는 않다. 경성대 철학과의 김재기 선생이 2002년에 장편 『알라 하임』을 쓴 적이 있다. 아무튼 지금의 시대는 전통적인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 시대적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몇 년 전부터 일상을 소재로 쉬운 일상어를 가지고 자신만의 철학을 담을 수 있는 ‘에세이철학’에 심취해왔다. 거의 매일같이 쓰는 철학 평론을 페이스 북과 네이버의 프리미엄 서비스나 브런치 스토리 같은 곳에 올리다 보니 동서와 고금을 넘나들고 전문 영역을 넘어서는 글을 쓸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문체도 자연스럽게 학자들의 논문 형식의 문체와 에세이 성격의 문체를 넘나드는 경험을 할 수가 있었다. 이 소설은 그런 실험적 글쓰기의 연장 속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필자는 이 소설의 형식을 통해 본업인 철학에 대해 반성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 철학자가 소설가들에게 배워야 것이 하나 있다. 철학자들은 허구한 날 남의 철학이나 사상을 끌어들여 해석하고 해설하는 일에 평생을 보내는 데 비해 3류 소설가라 해도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 물론 철학자들은 개념화된 사유를 하기 때문에 주관적 언어를 쓰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한국의 철학자들은 그 정도가 심해서 남의 언어와 남의 철학을 가져오지 못하면 사유를 하지 못할 정도다. 때문에 그들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는 자신들의 시대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철학을 구성하기보다는 여전히 바깥의 수입 철학에 의존하고 2천 년도 넘은 공맹과 노장사상을 주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있다. 이런 지적 식민성과 사대주의가 한국의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겪은 위대한 경험을 과거로 묻어 버린 채 그저 바깥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론과 사상 혹은 오래된 사상에 목을 매달고 있을 뿐이다. 『조선 사상사』를 쓴 교토대 철학과 교수 오구라 기조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외래 사상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재구성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전면적 개변(改變)에만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다. 한 사상이 물밀듯 들어와서 한 시대를 지배하다가 시효가 되어 사라지고 다른 사상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개변의 일반적 형태이다. 과거 불교와 유교가 그랬고, 근대에 들어서는 유교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그랬다. 손바닥 뒤집듯 일어나는 개변의 가장 큰 단점은 사상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데 있다. 외래 사상만을 끊임없이 찾다 보니까 그런 사상의 축적이 이루어지기 힘들고, 더욱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철학계가 부닥친 커다란 딜레마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이런 생각과 틀을 바꿔야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 필자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시대 체험과 생각, 자신들의 언어를 살려서 자신들의 철학을 정립해 보자는 것이다.

이 소설은 격동의 한국 사회를 한 개인의 지적 모험을 통해 재구성해 보자는 데 있지만, 사실 이런 시도는 잘못하면 죽도 밥도 되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필자의 시도는 철학적 소설을 겨냥했지만 철학도 되지 못하고 소설이라는 면에서도 실패할 수 있다. 최대한 이러한 실패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 판단은 필자의 손을 떠나 읽는 독자들이 내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문제의식에 대한 공유를 통해 우리 철학을 정립하는데 하나의 초석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파주의 우거에서

2025년 3월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3회|7. 철학과 대학원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23

  1. 철학과 대학원 (4)

 

그가 박사 논문을 쓴 다음에 그를 둘러싸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가 미쳤다는 것이다. 그는 교수 연구실을 찾아다니면서 “니가 뭐냐?” 하고 삿대질하고 행패를 부렸다. 그 친구 때문에 교수들은 봉변을 피해서 강의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 이전에는 박사 논문을 출판한 것을 들고 지방 대학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선배들을 찾아다니면서 술을 얻어먹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 적도 있었다. 강원도 소도시의 깡촌에서 서울로 유학 온 그가 명문대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했으니까 얼마나 대단한가? 그의 박사 논문은 1992년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마음』이란 이름으로 <자유사상사>에서 출간했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불교 철학의 관점에서 서술한 책인데, 국내에서는 이 방면으로 아마도 최초일 것이다. 그는 학위 논문을 그 당시 모 출판사 대표였던 김한용씨가 살던 북한산 근처에서 썼다. 그런데 논문이 마지막으로 접어들 때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잠을 못 자면 기가 위로 뻗쳐서 머리가 돌 가능성이 높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고, 무거운 수기(水氣)는 위로 끌어 올리고 가벼운 화기(火氣)는 아래로 끌어 내려야 한다. 그래야 기의 순환과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산속의 수행자들도 종종 수행과정에서 기가 뻗치는 현상이 나타나곤 해서 반드시 이를 잡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 학위 논문을 마치고 그것을 책으로 출판하면서 그에게 이런 증세가 본격적으로 터진 것이다.

대학원 시절 아주 친하게 지냈지만 그즈음 우리는 무엇 때문인지 거의 만나지 못했다. 특별히 싸운 것은 아니지만 비트겐슈타인과 불교 철학을 하는 그와 헤겔과 마르크스를 하는 내가 서로 대화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전에 무수히 논쟁과 언쟁을 반복하다가 싸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법대 동기인 김이후와 함께 용제관 2층의 아주 특이한 방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백양로를 한 참 걸어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상경관이 있었고, 정면에는 언더우드 동상과 그 뒤로 문과대 건물이 고풍스럽게 서 있었다. 오른쪽 언덕 길을 올라가면 유명한 청송대 숲이 있는데 용제관은 언덕 초입의 오른쪽에 있었다. 당시 가정대와 법대가 함께 이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용했던 2층의 방은 화장실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방이다. 때문에 화장실을 수많은 사람들이 들르면서도 이 방은 몰랐다. 문 속의 문이 있는 방인데, 이 안에 들어서면 백양로가 한눈에 보일 만큼 전망이 좋았다. 이 방에는 침대와 쇼파가 있었고, 두 명이 공부할 수 있는 책상도 있었다. 이 방은 원래 금융감독원을 다니면서 박사 논문을 썼던 정모 선배가 이용하던 방이었다. 그가 P 대로 임용되면서 나가게 되었는데, 그는 나중에 P 대 총장을 두 번 연임했다. 총장을 퇴임한 다음 몽골 울란바타르로 가서 ICT Univ. 총장을 역임하고 있다.

나의 법대 동기인 김이후가 정모 선배와 아주 친했기 때문에 그 방을 물려받은 셈이다. 당시 내 친구는 법철학으로 석사 논문을 마친 다음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그와 나는 정립회관에서 만난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을 이어 온 절친이었다. 그와 대학 다닐 때 술을 엄청마시고 1주일에도 몇 번씩 남가좌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자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때마다 전혀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우리를 잘 받아주고 밥도 잘 챙겨 주었다. 그가 그 방을 맡게 되자 그는 바로 나를 그 방으로 끌어들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 공부하기도 하고 함께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Knowledge and human interests)이라는 책을 읽기도 했다. 나중에 그가 미국에서 하버마스와 푸코로 학위 논문을 쓸 때 이때의 강독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종종 술을 마시고 이 방의 침대에서 잠을 자기도 했는데, 아침에 새소리를 들으면서 창가를 내다보면 연세 캠퍼스가 마치 나의 정원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 방은 당시 대학가의 데모가 격렬했을 때 건물로 쫓겨 들어왔던 학생들의 피신처가 되기도 했고, 철학과의 선후배 동료들도 많이 찾아 주었다. 친구가 유학 간 다음에도 나는 이방을 혼자서 한참을 이용했는데 나중에 법대 학생회에서 문제 삼아 마지못해 내준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이모 군과 신촌 시장에서 술을 먹다가 논쟁이 심하게 벌어진 적이 있었다. 개인과 사회의 문제였는데, 일종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으로 끝이 없는 논쟁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불교를 하는 그에게는 자유주의와 개인의 문제가 다른 어떤 것들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헤겔과 마르크스에 심취한 나에게 그런 이야기들은 그저 자유주의자들의 헛된 욕구에 불과해 보였다. 그날 심한 논쟁을 벌이다가 밤늦게 헤어져서 나는 용제관 그 방으로 돌아와서 쓰러져 잤다. 그런데 새벽에 이모 군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나랑 헤어진 후 밤을 꼬박 새운 후 새벽에 버스가 다니자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곱씹어서 완전히 털어 내야만 풀리는 성격이다. 일종의 결벽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그는 박사 논문을 쓰고 있었고, 나 역시 논문 문제로 골머리를 썩다 보니 우리가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1992년 이른 봄 즈음 그에 관한 소식이 내 귀에도 들렸다. 그가 머리가 다소 돈 것 같고, 사람들에 대해 적대적으로 행패를 부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한 번은 내가 철학과 강사실에 볼일이 있어서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그가 거기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부르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러니까 그는 단호하게 내 손을 쳐 버렸다. 그는 머리를 군인처럼 짧게 잘랐고, 얼굴과 팔 곳곳에는 상처도 보였다. 막 교도소에서 나온 모습같이 험악해 보였다. 나를 빤히 쳐다볼 때는 평소의 그와 달리 살기가 느껴졌다. 더 이상 우리는 말을 하지 않고 헤어졌다. 그날이 내가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다. 그의 행각은 여전히 거친 이야기로 들려 왔다. 한 번은 학생들 축제하는 기간 중에 텐트를 불 질러 버린 적이 있다. 학생이 공부나 해야지 무슨 축제냐고 하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 사건은 당시 일간지 사회 면에 보도된 적도 있고, 그는 바로 서대문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지도 교수인 P 교수가 힘을 써줘서 경찰서에서 풀려나자 그를 걱정한 친구들이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고 나서 한 두어 달 동안 잠잠했다. 그런데 아주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병원에서 퇴원 후 고향으로 낙향했는데 부모가 있는 집에서 농약을 먹고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철학과에서 숱한 경험을 했지만 그 일은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였다. 무지렁이 부친은 농약 먹고 고통스러워 떼굴떼굴 구르는 아들을 그냥 몇 시간 동안 방치했고, 죽자 바로 가마때기에 싸서 산에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에 우리가 원주의 가파른 치악산을 올라가 그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간단하게 나마 추도식을 올려 주었다. 그가 죽은 지 벌써 30 여 년이 흘렀다. 여전히 껑충한 키에 오른쪽의 혹을 돌리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2회|7. 철학과 대학원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22

  1. 철학과 대학원 (3)

 

철학과를 드나들면서 개성 있고 좋은 친구들을 여럿 만났다. 그중 삐쩍 말라 키가 껑충한 이상한 군은 대학원을 다니는 내내 친하게 지내고 자극도 많이 받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4학년 칸트 수업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그가 나중에 신과대 대학원으로 진학한 한 학생과 칸트 철학에 대해 열심히 논쟁하고 있었다.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 가면서 논쟁하는 데 이제 갓 철학과 수업에 들어온 법대생이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렇게 진지하게 논쟁하는 모습 자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법대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는 수업 시간에도 수시로 질문을 하면서 따졌다. 독일에서 학위를 하고 나서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선생은 이런 질문에 대해 상당히 곤혹해했다. 그럴 때면 선생은 상한군에게 한 번 답변해보라고 하면서 질문을 떠넘겨 버리기도 했다. 상한군은 당시 비트겐슈타인을 가지고 석사 논문을 쓰겠다고 했다.

그는 지방 소도시의 깡촌 출신이었다. 머리가 비상해서 Y대 철학과로 진학했는데, 당시 나는 그야말로 그가 철학의 화신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농담을 많이 하고 사회 문제 등도 이야기하곤 하는 데 이 친구는 그런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나 깨나 철학이고, 어떤 이야기를 하든 다시 철학으로 대화를 끌어갔다. 그의 모습을 보다 보면 논쟁을 즐기며 사람들을 낭패하게 만드는 소크라테스를 연상할 정도였다. 소크라테스의 별명이 소 잔등에 달라붙어서 아무리 쫓아도 사라지지 않는 ‘등애’였다. 이런 그의 태도는 처음 철학 공부를 시작하는 나에게 상당한 자극이 되었다. 나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수시로 그와 대화하면서 깨우쳤다. 우리는 주로 중앙도서관 3층의 계단에 앉아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당시는 도서관 내에서 담배도 피우던 시절이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틈에서도 철학을 이야기하는 친구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머리가 비상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을 만큼 비판적이었고, 또 절대로 비약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논리적이었다. 그가 오른쪽 목에 난 자그만 혹을 만지면서 차분하게 논리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 마치 비수로 가슴을 후비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태도는 강의실이건 도서관이건 가리지 않았고, 술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술을 마셔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날카롭게 이야기했다. 술자리는 사실 논리 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자리다. 그런 곳에서 논리적으로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덕분에 그는 술자리에서 여러 차례 얻어맞은 경험이 있다. 그의 키가 180 센티를 넘겼지만 그는 혼자 자취하느라 제대로 영양 섭취하지 못하고 술 담배를 많이 한 탓에 삐쩍 말라 있었다. 그의 모습이 만만하게 보였는지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나는 가장 가까운 데서 그런 폭력이 자행되던 모습을 보았다.

언젠가 철학과 대학원생들끼리 1차로 술을 마시고 나와 이모군, 그리고 동양 철학을 하던 독고탁과 김수철이 함께 자주 다니던 논지당 카페에 들어갔다. 이곳은 신촌에서 유명한 카페이다. 주인 마담과도 친해서 늘 술을 마시면 들르던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커피를 마시다가 일이 터졌다. 원인은 나였다. 나는 그 당시 술과 담배를 엄청 하던 관계로 기관지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칵칵거리면서 목에 낀 가래를 그냥 바닥에 몇 차례 뱉었다. 사실 정말 매너 없이 행동한 것인데 만취한 상태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 모습을 보고 동양 철학을 하던 김수철씨가 아주 보기 좋지 않은 듯 눈을 흘겼다. 그는 연극반 출신이고 수경사 출신으로 몸도 건장하고 술도 잘 마시던 낭만파 호인이었다. 주인 마담과도 친해서 논지당을 많이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환이 이 모습을 보면서 특유의 시니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니까 김 선배가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바로 옆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팼다. 얼굴이 피떡이 된 상태로 카페에 들어온 이모 군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경악을 했다. 상처가 심해서 바로 근처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나에게 향해야 할 주먹을 그가 대신 맞은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그의 동기인 김봉한이 때린 김 선배를 당장 고발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하지만 고발까지는 가지 않고 병원 치료비와 소정의 보상비 정도로 마감했다. 아무튼 이 친구는 너무 약해 보이는 데다가 냉소적이어서 그렇게 많이 맞고 살았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1회|7. 철학과 대학원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21

7. 철학과 대학원 (2)

 

처음에 헤겔과 독일 관념론에 관심을 갖고 모교의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대학원의 일반적 분위기는 영미 분석철학이 강했다. P 교수가 이 분야의 대부였고, 과학철학을 하던 O 교수도 영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D 교수도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또 다른 S 교수가 독일 보쿰 대에서 학위를 받았지만 내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해석학 분야였다. 그래서 독일 관념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따로 강독 세미나를 운영해서 자기들끼리 공부했다. 나의 동기들 모두 칸트와 헤겔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졸업하는 내내 독일어 원서 강독을 많이 했다. 이런 움직임 탓인지 3학기에 올라갔을 때는 독일 철학 연구자들의 숫자도 많이 늘어서 별도로 대학원 내에 독일 철학 연구자 모임을 만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모임은 만들자마자 바로 해산되는 비운을 경험했다. 사건의 발단은 그 모임을 만들고 나서 뒷풀이로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나왔다. 나는 그때 동생이 일으킨 사고처리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나중에 다른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 사정은 이렇다.

 

“김 봉한이 너무 독선적이지 않아요? 저 혼자 독일 철학을 다 하는 양 하는 게 좀 눈에 거슬리네요.”

 

“그 친구 독선은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그래도 이제는 원팀을 만들어서 함께 공부하려는 마당에 혼자서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보기 좋지 않죠.”

 

“하긴 그래.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해? 그만하라고 일일이 막을 수도 없고.” 이 친구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옆에 끼고 살았다. 3학년이 되어서는 칸트에 관한 학술 논문을 써서 대학 신문에서 수여하는 학술 논문상도 수상해서 나름 지명도가 높았다.

 

“아무튼 나는 그런 모습 못 봅니다. 자꾸 멋대로 행동하면 내가 그만두는 수밖에 없지요.”

 

“내가 한번 잘 이야기를 해보지. 아무래도 전체의 분위기가 중요하니까,” 그나마 그와 친한 선배의 말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다음 날 그 친구 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당장 화를 내면서 자기는 연구회 모임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제 막 시작한 모임이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해산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모임을 깨고 싶지 않았던 내가 그를 따로 만나서 설득해보기로 했다.

내가 술자리에 참석 못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나의 누이가 동부 이촌동에서 기사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비슷한 식당을 하는 친구가 너무 심하게 호객행위를 해서 나의 막내 동생과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 덩치는 훨씬 큰 친구가 운동을 했던 막내 동생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사촌 형이라고 하는 브로커를 내세워 당시로는 거금이라 할 수 있는 5백만 원을 합의금 조로 요구한 것이다. 만약 합의를 해주지 않을 경우 막내 동생은 구속을 면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그를 직접 병원으로 찾아가서 호소를 해봤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는 찾아간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링게르 주사를 꼿고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까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 보였다.

“사촌 형과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물론 때린 제 동생이 많이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서로 매일 같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들끼리 너무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다들 하루 벌어 하루살이 하는 형편을 잘 아시잖아요.”

 

내가 여러 말을 하면서 합리적으로 풀어 보려고 했지만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요지부동이었다. 브로커 삼촌이 일체 말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언질을 준 것 같았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주먹 몇 번 날린 것에 대한 댓가로 5백만 원을 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오후 교내 평화의 집에서 김봉한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독일 철학 연구자 모임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였다. 깨는 것은 쉽지만 다시 만들려고 하면은 훨씬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먼저 내가 운을 띄웠다.

 

“오늘 제 동생이 주먹을 잘 못 놀려서 적지 않은 돈을 물어주게 되었어요. 그 친구한테 사정 사정을 해봤지만 요지부동이네요. 한 마디로 말문이 꽉 막힌 사람이더군요. 살아가는 방식이 틀려서 그런지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는 함께 공부하는 연구자들이니까 그런 사람들하고는 다르지 않냐고 은근히 넘겨짚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함께 공부하자고 하면서 뒷다마 치는 인간들하고 어떻게 공부해요? 오늘 아침 그 소리를 듣고 정말 화가 많이 났습니다.” 가뜩이나 외골수인데 그런 소리까지 들었으니 더 말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한마디 더 했다.

“만약 우리가 이 모임을 깬다고 하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모임을 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대를 위해서 한 번쯤 이해해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걸로 끝이었다. 그냥 결별인 것이다.

 

이 친구의 고집과 뚝심은 참으로 대단했다. 나중에 그가 모 재벌을 상대로 시위하는 장면을 보고 그때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는 내가 대학원을 그만두려 했을 때 나에게 함께 일을 해보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잃은 신뢰 때문에 내가 거절하고 말았다. 독일 철학 연구자 모임은 만들자마자 바로 해산되었고, 다시는 만들지 못했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Y대 내에서 그런 모임을 진행하지 않았다. 대신 대학 밖으로 나가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타 대학 대학원생들하고 세미나를 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