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0회|4. 선택과 탐색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0회

4. 선택과 탐색 (2)

 

1981년 여름 나는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앞으로의 진로도 확정해야 하고, 현재 하고 있는 공부도 확실히 해야 한다. 지금 상태로는 지지부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름 방학을 이용해 한 달 정도 외가 근처에 있는 암자에 가 있기로 했다. 그 당시 나의 관심사였던 책들을 한 보따리 들고 가 그냥 산속에서 책에만 파묻히고 싶었다. 외가가 있는 전라북도에 위치한 Y읍 까지의 동행은 친구 이은성 군이 해주었다. 그는 젊은 시절 내내 내 곁을 지켜주었다. 나중에 결혼해서 신혼여행을 갔을 때는 자신의 신형 소나타를 끌고서 무려 4박 5일 동안 동해안으로 함께 다니기도 했다. 절에서 공부하는 비용은 당시 모 신문사의 주필을 맡고 있던 최 모 집사가 대 주었다. 그는 나의 결심을 말하자 선뜻 10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을 내주었다.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갚으라고 했다. 워낙 술을 좋아하던 그는 비교적 많지 않은 나이에 간암으로 죽었다. 빚을 갚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두고두고 부담을 느꼈다.

 

Y읍에 위치한 외가에 도착해서 먼저 큰 외숙부댁과 작은 외숙부댁에 들러 인사를 드렸다. 양가 외숙댁에는 내 또래의 사촌 둘이 있어서 그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Y읍은 비교적 조용한 동네였다. 근처에 Y 초등학교도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숲이 울창하고 아름답게 조성된 초등학교를 본 적이 없었다. 암자에 있을 때는 가끔씩 그 초등학교를 산책하면서 머리를 식히곤 했다. 암자는 외가의 뒤편 산에 위치해 있었다. 나이 든 스님이 운영을 하고 있었고, 젊은 보살이 여러 가지 수발을 했다. 한여름의 산속은 나무들이 울창해서 한낮에도 서늘했다. 조용히 공부를 하기에는 딱 좋았다. 암자에는 나 말고도 고시 공부한다는 젊은 친구가 한 명 있었고, 떠돌이 중도 한 명 있었다. 아침에 식사할 때 흰죽 같은 수프가 먼저 나왔는데 다들 맛있게 그걸 먹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수행하는 데 잡념이 들지 않도록 하는 정력 감퇴제가 들어 있다고 해서 그 이후로는 먹지 않았다.

 

의탁할 데가 없는 나이 많은 중들은 절에서도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암자에 함께 기숙하던 나이 많은 스님은 식사할 때 반은 눈칫밥을 먹었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서 그런 일을 보아도 나는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스님이 어디 가서 술을 걸쭉하게 먹고 오더니 그동안 받았던 설움을 큰 소리로 푸는 것이다. 소리도 꽥꽥 지르고 발에 걸리는 물건들도 막 차고 그랬다. 그러더니 걸망을 메고 가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다. ‘내가 땡중인가비…’ 암자에 있는데 하루는 아주머니 두 분이 오더니 사주팔자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부엌에서 일하던 보살 아주머니가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털고 나왔다. 보살은 생년월일과 난 시(時) 등을 묻고서 사주팔자를 보는 책자를 뒤적이면서 아주머니들의 사주를 봐주었다. 그 앞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희한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한 인간의 사주팔자 보는 게 너무 쉽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인간의 운명이 그렇게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루는 소나기가 종일 내렸다.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 억지로 쓰러져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내 가슴 위로 무언가 지나다니는 느낌에 잠을 깼다. 큰 쥐 한 마리가 내 배 위에 올라와 있다가 내가 깨는 바람에 놀라서 달아난 것이다. 쥐는 내가 워낙 싫어하는 동물이다. 그 쥐가 다시 나타날까 봐 그날 밤 꼬박 새울 수밖에 없었다. 불빛 하나 없는 산중에는 소나기가 주룩주룩 내리고, 시커먼 쥐가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는 두려운 상황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는 글을 썼다. 내가 사랑하고 싶었지만 더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여인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 것이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연상시키는 이 편지는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과 이제 막 시작하려는 철학에 대한 나의 아주 원초적인 생각을 담고 있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9회|4. 선택과 탐색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아홉 번째 글

  1. 선택과 탐색 (1)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경험한 지난 한 달은 여러모로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유신이 무너진 후 고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결심은 그냥 물 건너 가버렸다. 5.17 이후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마자 법대 고시원도 폐쇄되었다. 덕분에 법학이나 고시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벗어 버렸다. 고시를 하겠다고 하고서 기숙사에 입소했는데, 사회 분위기가 바뀐 탓에 내 마음도 완전히 바뀐 것이다. 2학기에 등록할 때는 법대 과목이 아니라 문과대의 사회학과나 영문과 그리고 사학과에서 과목을 선택했다. 보다 현실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이런 과목들이 훨씬 흥미로웠고, 시험을 봐도 성적이 훨씬 잘 나왔다. 사실 나의 경제 상황을 고려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취직해야 하는 데 나는 그런 것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아나키스트의 방랑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 마음을 주었던 여성과의 만남도 예전 같지 않았다. 대신 유치장에서 사귄 몇몇 사람들과는 따로 세미나를 계속했다. 이 세미나는 단순히 공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데모를 시도하기 위한 학습으로 시작했다. 정치 상황은 여전히 살벌했다.

세미나를 하던 멤버 중의 한 명은 S 대 사회학과 4학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같은 대학의 체육학과 4학년이었다. 졸업 학기를 앞두고 데모하겠다고 하는 것은 보통 결심이 서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이미 경험도 있고 해서 다시 시위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성 한 명도 참석했는데, 그녀는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보다는 가끔씩 참석해서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 세미나는 각자 집을 돌아가면서 했지만 주로 우리 집과 사회학과 신모 군의 집에서 했다. 그 당시 우리는 주로 정세 분석과 향후 정국의 방향에 관한 이론서들을 많이 다루었다. 『전환 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 교수의 책들과 한국 경제를 다룬 최호진 교수의 책, 한국 근대사에 관한 김용섭 교수의 책을 주로 읽었다. 사회 이론에 관해서는 미국의 진보적인 사회학자인 C. Wright Mills의 『사회학적 상상력』과 『파워 엘리트』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당시 우리들의 지적 관심은 상당해서 그 당시 막 소개가 되기 시작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Critical Theory)과 헤겔을 전반적으로 소개한 H.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Reason and Revolution) 원서를 열심히 탐독했다. 사회 이론서들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웠지만 처음 접한 헤겔 철학을 소개한 『이성과 혁명』은 개론서 임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특히 법(Recht)을 Right로 번역해 놓았는데, 왜 이런 개념이 법철학을 다루면서 반복적으로 나오는지 알 수 없어서 애를 먹었다. 아마도 이때 부딪힌 어려움이 나중에 헤겔 철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책들이 법대생인 나에게는 생소한 편이었지만 사회학도인 신모 군이 과 내에서 도는 독서 목록과 동향들을 많이 소개해주었다. 체육학과 생인 복기호 군은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현실 운동에 보다 관심을 많이 보였다. 그는 실제로 대림동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치고 시위 현장은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는 편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간에 관심사와 편차는 있어도 거의 1년 이상을 꾸준히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향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세미나가 끝나면 술을 많이 마신 편이었다. 그 당시는 정말로 술과 담배를 억수로 많이 마시면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회와 대학가의 현실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형, 오늘 인문대 쪽에 삐라가 뿌려졌어요. 시위가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복기호군의 말이다. S대생들하고 세미나를 하는 덕분에 S대 동향을 많이 듣는 편이다.

“Y대도 마찬가지야. 요즘은 검색도 더 심해진 것 같아.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요즘 학생들의 분위기는 과거보다 훨씬 격렬해진 것 같아. 아마도 광주의 경험이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 같아.”

“그렇지요. 광주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겁니다. 이제는 광주 이전과 광주 이후로 운동사가 나뉘어 질 거에요.” 신모군이 예리하게 당시 정세를 분석한다.

“독재자들은 늘 국민과 국가를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 유지일 뿐이지요. 그들을 권좌에서 쫒아내지 않는 한 국민도 없고 국가도 없을 겁니다.” 라고 말을 하면서 복모군이 오른손을 살짝 들고 ‘투쟁, 투쟁!’을 외치는 흉내를 낸다.

“일단 혁명의 견인차는 젊은 엘리트 혁명가들이 되어야 할 겁니다. 과거의 모든 혁명 운동사를 통해서 볼 때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학가의 운동을 좀 더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이런 세미나를 하는 이유도 그 일을 선도적으로 하기 위해서이지요.” 신모 군이 세미나의 목적이 시위 주도에 있음을 다시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소수 엘리트 중심으로 나가다 보면 일반 대중으로부터 고립될 위험도 크다고 뵵니다. 엘리트주의는 철저히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하지 않는 운동은 결코 결정적 시기를 앞 당길 수 없어요.” 늘 체험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복모 군의 말이다.

 

엘리트와 대중의 관계는 우리들에게 늘 고민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 몸담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8회|3. 광주항쟁 (5)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여덟 번째 글

3. 광주항쟁(5)

 

  어느 정도 이곳 생활에 익숙해져 갈 때 내가 다니던 교회의 장로님이 위로차 방문했다. 장로님은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물어보고 사식을 넣어 주었다. K 교회에서 자주 어울리던 상수는 수시로 유치장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이렇게 큰 거사를 하면서 자기한테 안 알린 것에 대해 무척 섭섭해했다. 하지만 의대 본과에 다니던 그를 무조건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니던 교회의 미정이가 위문을 왔다. 그녀는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혼자 깔깔거리기도 했다. 위문 온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녀의 평소 스타일이 그런 면이 많기는 해도 나의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에 섭섭한 느낌도 들었다. 나는 그날 시위한 이래 처음으로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차단되었다고 생각했다. 철창 밖의 사람들과 내가 이질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설령 이곳을 나간다 해도 다시 또 들어올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렵지 다시 반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래도 비교적 적응을 잘하는 체질이라 나는 유치장 분위기에 금방 젖어 들었다. 우리는 정치범이라고 해서 일반 잡범들이 대우도 해주고 자리도 좋은 곳으로 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명색이 법대생이라고 해서 형사소송법과 법전을 옆에 펼쳐 놓고 일반 잡범들의 법률 상담도 해줬다. 소매치기로 들어온 어떤 여성은 생리 중에 그런 도벽이 생긴다는 현실을 호소해서 대신 이유서를 써준 적이 있다. 잡범들 가운데서도 소매치기들은 여간해서는 자신들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일단 하는 말들 대부분은 거짓말인 경우들이 많다. 오히려 솔직하고 단순한 잡범은 주먹을 쓰는 건달들이다. 이런 건달도 노는 구역이 어디냐에 따라서 행태가 다 틀린다. 중부서 관할의 남대문에서 노는 건달들은 비교적 순진하고 단순한 반면, 타워 호텔을 무대로 노는 건달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은근히 뻐기는 경우들이 있었다. 당시 명동 신상사파의 중간 보스쯤 되는 건달이 있었는데 그의 입담이 아주 걸쭉했다. 외모로 볼 때는 일반인하고 거의 차이가 없는데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고 말도 유창하게 잘했다. 그는 특히 음담패설을 잘했는데 한밤중에 그가 한 창 음담패설을 할 때는 내근하는 형사들까지 와서 열심히 듣곤 했다. 당시 연청의 핵심 멤버 중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외모로 볼 때는 호랑이처럼 생겼지만 마음 씀씀이는 여우 같은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법률 상담할 때 그가 뒤에서 자문해주곤 했다. 나중에 유치장을 나가면 그의 사업장으로 한번 찾아오라고 해서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은근히 외면하는 것 같아서 발길을 끊었다. 그는 나중에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하기도 했지만 그때의 경험 때문에 별로 신뢰감이 가지 않았다.

  유치장 안에서 비교적 대화가 잘 통하는 것은 비슷한 또래의 학생 운동권 사람들이다. D 대의 운동권 인사가 여럿 들어왔는데 그들과 향후 정국 동향이나 앞으로의 진로 등과 관련해 토론을 많이 했다. 그중의 한 사람인 우성과는 나중에 바깥으로 나가서도 만남이 이어져서 세미나도 함께 하곤 했다. 기억나는 한 분은 민중 불교를 하던 승려였다. 그는 평소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떠들고 토론해도 일체 관여하지 않고 면벽 참선만 했다. 결혼을 앞둔 상태라 신부 될 사람이 자주 유치장을 찾았다. 신부는 아주 옛된 여군 장교라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끌었다. 당시 김대중의 연설을 녹음해서 판매하다가 들어온 음반 제조업자인 모 씨는 바깥에 나가서 우리와 자주 어울렸다. 사람 좋은 그는 우리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을 알고 술도 많이 사줬고, 그가 제작한 클래식 테이프 모음집을 우리에게 줘서 한때 그것들을 팔아 용돈으로 쓰기도 했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 왜 사람들이 교도소를 학교라 생각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물론 우리가 있었던 곳은 교도소가 아니라 경찰서 유치장에 불과했지만 그곳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사람 경험을 많이 한 편이다. 내가 처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사람들이 많다 보니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국방부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가 시위를 한 것이 6월 27일인데 한 달쯤 돼서 갑자기 친구와 나를 불렀다. 따라서 올라가 보니 서약서를 제출하라고 하면서 석방이라고 했다. 다시는 그런 엉뚱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서약서를 쓰라고 했다. 비상계엄으로 삼엄한 상황에서 데모를 했지만 우리는 무사히 풀려났다. 우리와 관련된 모든 조사 기록들은 다 폐기 처분했다고 한다. 처음 거사했을 때 방사형으로 배후를 캐던 형사들이 아무 것도 나오지 않으니까 허탈해하면서 돈키호테 같은 놈들이라고 말했었다. 이번에는 그동안 조사했던 기록들을 하나 하나 씩 지워가면서 석방한 것이다. 함께 거사한 친구의 아버지가 백방으로 손을 보안사 과장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숨통이 콱콱 막히던 유치장을 나오니까 밖은 햇볕으로 눈이 부시고 더위가 한창인 7월 말이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7회|3. 광주항쟁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일곱 번째 글

3. 광주항쟁(4)

 

예나 지금이나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침 우리의 거사 날짜는 토요일 오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수걸은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토요일로 잡은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왼쪽으로 지하도가 있었고, 바로 앞에는 유명한 빵집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 맡은 분량의 전단지를 뿌렸다. 동시에 우리는 외쳤다.

 

“계엄을 철폐하라, 광주의 진실을 밝혀라. 학살 원흉 전두환은 물러나라!”

 

비상계엄이 여전했고, 곳곳에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현실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런 엄청난 구호를 외친 것이다. 도로 위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깍깍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광주 사태 이후 더욱 강화된 계엄상황에서 이런 데모를 벌이는 것 자체를 두렵게 보았을 것이다. 전단을 여기저기 뿌렸다. 뿌렸다기보다는 처음 해보는 일에 당황해서 그냥 뭉터기로 내 던졌는지 모른다. 지하도 안으로도 던졌고, 거리에도 던졌다. 손에 더 이상 전단이 없자 수걸과 나는 주먹을 쥔 오른손을 번쩍 들고 명동 방향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걸었다. 사람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우리 앞길을 열어 주었다. 단 5분도 안 걸린 시간이었을 텐데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목이 쉬어 버렸다. 그 이후로 내가 여러 차례 경험해봤지만 아주 짧은 시간에 영원과 접속되는 경험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 같았다. 그 사이 누군가가 우리를 신고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 몇 명이 나타났다. 계엄군이 출동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만약 군인이 출동했다면 그 자리에서 그냥 반죽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로 수갑찬 채 명동 파출소로 끌려갔다.

파출소에 도착하니 비로소 상황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파출소의 한 젊은 순경은 우리가 다소 안쓰러운지 담배를 권했다. 담배 한 모금을 빨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바깥은 우리의 시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토요일 오후 인파들로 덮여 있었다. 우리의 시위는 찻잔 속에 잠시 미풍이 분 것 정도도 안 되었다. 그런 일을 도대체 왜 했을까?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타인이나 사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동키호테식 행동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실제로 조사받는 과정에서 우리 뒷선을 아무리 캐도 나오지 않자 ‘이거 미친놈들 아냐. 완전 동키호테구먼.”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우리의 시위는 일종의 자기 확신에 기초한 자기 고백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고,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채무 이행이었는지 모른다. 훗날 이 사건을 반추하면서 나는 다시 새로운 다짐을 했다. 다시는 이런 동키호테식 자기 고백은 하지 않겠다고.

명동 파출소에서는 별다른 조사 없이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부서로 이첩됐다. 우리가 도착하니 큰 상황판에 방사선 형태의 그림이 그려졌다. 일단 형사 앞으로 가서 심문받고 조서를 써야 했다. 우리가 앉자마자 다짜고짜 한 형사가 뺨을 때린다.

 

“이런 미친놈들, 지금 시국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 이런 폭력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놈들,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배후가 누구야?” 다른 형사가 큰 목소리로 추궁했다.

“배후는 없습니다. 우리 둘이 다 결정한 것입니다.” 친구가 대답했다.

 

한참을 캐도 드러난 이상의 것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냥 보호실 철창으로 집어넣으라는 말이 들렸다. 바지의 혁띠를 푸르고, 내가 차고 다니던 보조기도 풀어야 했다. 당장 걷는 데 지장이 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잡범들과 함께 보호실에서 보냈다. 낯선 철창, 평소 범죄자들로 백안시했던 사람들과 한방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잠은 잘 잤다. 이제 나에게 익숙한 세상은 사라지고, 낯설고 새로운 상황이 다가온 것이다.

거사 당일 밤 수걸과 나의 집으로 형사대들이 급파돼서 증거물이 될 법한 것들을 가지고 왔다. 그날 밤 가족들이 크게 놀랬다고 한다. 아닌 밤중에 형사들이 조사를 위해 왔다고 하니까 가뜩이나 걱정이 많은 어머니가 많이 놀랬다. 수걸의 집을 조사했던 한 형사는 수걸의 집 책장의 수많은 장서들을 보고 놀랬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의 집에는 아버지와 형이 보던 책, 그리고 수걸이 보던 책들이 빼곡히 꼿혀 있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주범은 지수걸이고, 종범은 나로 확정됐다. 때문에 수걸은 수시로 불려 나갔다. 전단지를 인쇄한 곳이 어디냐는 추궁을 받았지만 그는 잘 둘러쳤다. 적어도 그를 믿고 일을 해준 사람들이 곤욕 치르지 않도록 처리했다. 그의 일처리는 생각보다 꼼꼼했다. 그가 한참 후에 한국형 레스트랑을 창업해서 크게 성공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의 일솜씨가 바탕이 됐을 것이다.

처음 시작한 경찰서 보호실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때가 때인 지라 정치범들이 여럿 잡혀 있었다. 이곳에는 이미 김대중 산하 청년 조직인 연청 관련 인사가 들어와 있었고, 근처 동국대의 핵심 간부들과 선후배들도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 씨 연설한 것들을 녹음해서 배포한 음반 업자도 있었고, 사회주의에 발을 들여놓은 지사형 정치인도 있었다. 그리고 이 보호실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들어온 사람들 외에도 일반 잡범들도 많았다. 계엄 상황에서 나중에 삼청교육대로 보내진 수많은 잡범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정치범에 대한 예우 때문인지 우리는 비교적 좋은 자리에 있었지만, 더운 여름날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는 상태로 칼 잠을 자는건 참으로 고역이었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할 때 알게 된 “타인은 지옥이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몸으로 체감했다.

내가 광주 학살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곳은 바로 경찰서 보호실 안에 들어와 있던 한 잡범을 통해서였다. 보호실 안은 끊임없이 소란스럽고, 온갖 소리들이 난무했다. 특히 밤에는 입담 좋은 친구들 주변으로 삼삼오오 몰려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담당 경찰관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그냥 묵인했다. 하루는 20대 중반의 한 청년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는 광주에서 아주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했고, 자신은 사선을 넘다시피 해서 그곳을 탈출했다고 했다. 그가 그날 밤 구구절절이 광주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을 때 다들 할 말을 잊은 듯 침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너무나 충격적이고 리얼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도 사투리로 떨리는 듯 말했다.

 

“정말 이제 못 보겠습디다. 공수 부대 안 있소? 완전히 무장해 갔고 대학생으로 보이면 무조건 곤봉으로 머리빡부터 뚜드려 패버리는 거예요. 그러먼 그 자리에서 자빠져불죠. 그렁께 여기저기 사람들이 막 쓰러져 있는 거예요.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옷부터 배께 갖고 팬티만 남기고 도로에 무릎 꿀레서 일렬로 안치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개머리판으로 사정 없이 패 부었어요. 길 가던 시민들은 놀래갖고 ‘오매 저러다 사람 죽이겄다’고 하면서도 군인들이 워낙 살기가 등등하니까 어쩌지도 못하고라. 최루탄을 쏴나서 눈도 못 뜨고 숨도 못 쉬고요. 멀리서 보고 오다가 도망가는 젊은이가 있으면 끝까지 쫒차가서 같은 방식으로 패버리는 거예요. 나는 너무 무서워서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냈어요.”

 

그날 밤 이런 끔찍한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올 때 일반 잡범들도 조용히 침묵했다. 어떤 이들은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도저히 국민의 군대라고 할 수 없다고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동국대 운동권 출신의 한 사람이 질문했다.

“직접 당신이 확인한 건가요?”

“그러문 요오. 신문에 안 나니까 모르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3일째 되는 날 집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께 무서워서 못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화순 쪽으로 빠져서 어떻게 기차를 겨우 타고 서울로 도망을 온 거예요. 물론 오면서 양심의 가책도 들었어요. 내가 아는 친구들도 저렇게 무자비허게 당하고 있을 텐디 나만 도망을 가는구나 하고요.”

 

그가 광주의 현장에서 도망간 것에 대해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목숨을 보전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1차적인 보호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로 한반도의 남녁은 깊은 침묵의 세월로 접어들었다. 과연 하늘에 신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주여!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바디스 도미네)

그날 그에게 끔찍한 광주의 학살 현장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솔직히 분노 이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도대체 이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렸는가, 그리고 다음 희생자가 누가 될 것인가, 감방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 여파가 밀려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등등으로 밤에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경찰서 유치장에서의 삶은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민생 사범들을 대거 잡아들이면서 보호실의 인구 밀도가 극도로 높아져서 지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6회|3. 광주항쟁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여섯 번째 글

3. 광주항쟁(3)

 

“그 당시 나는 교회에서 알게 된 미정에 대해 연애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그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녀도 회사에서 틈만 나면 나에게 전화했고, 전화를 시작하면 꽤 오랜 시간 전화기를 붙잡고 있기도 했다. 아주 오랜만에 서로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가 감방에 들어간다면 그녀와의 만남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에 미치면 괴로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거사를 하기 전날 나는 그녀의 집을 먼저 찾아갔다.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어야만 했다. 나중에 제3 자를 통해서 나의 거사를 알게 된다면 그녀는 나에 대해 실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내가 써 왔던 일기장을 그녀에게 준다는 것도 나 자신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나의 생각과 행동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밤늦게 그녀의 집 앞으로 찾아가서 그녀를 불러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사선을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녀는 갑자기 왜 불러냈느냐는 식의 심드렁한 표정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예요? 이 늦은 시각에.” 아주 뜬금없다는 태도다.

“잠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야.”

“그냥 전화로 하던지, 아니면 밝은 낮에 하면 안 되나요?”

 

그 말을 듣자 그녀와 나 사이에 넘기 힘든 벽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 간에 감정이 완전히 불통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물론 내 생각이 너무 앞서 간 면이 있었지만 달리 어떻게 할 시간도 없었다.

 

“알았어. 그런데 이 노트를 잘 좀 보관해줘. 내가 오랫동안 써 왔던 일기야. 그리고 나 내일쯤 당분간 멀리 떠나게 될 거야.”

“아니, 그걸 왜 나한테 줘요. 도대체 어디를 가는데 그래요?”

 

내가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일기장을 건네자마자 바로 그녀를 뒤로 하고 떠났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서로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다. 내 마음이 전혀 전달되지 않았고, 나의 절실한 감정에 대해 무신경한 그녀의 태도가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녀와는 비슷한 경험을 나중에 다시 하게 되었다.

 

다음 날 나는 수걸의 집으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나섰다. 이날 벌어질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1980년 6월 27일은 평생 가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는 봉천동에서 금호동 까지는 한참 먼 거리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집은 금호동 로타리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간다. 그곳으로 올라가는 나의 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예수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문을 두드리자 나온 수걸은 나를 보자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야?” 뻔히 알면서 묻는다.

“너 때문에 내가 골머리를 썩고 있다. 이놈아.”

“왜 네가?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지.”

“너라면 그게 편하게 받아들여지냐?”

“내가 너를 만나러 간 것은 뒤처리 좀 부탁하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이렇게 직접 찾아오니까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냥 뒤처리나 할 사람으로 보였나? 나는 그렇게는 못 하겠다. 내가 너의 마음을 꺾을 수 없다면 너 역시 나의 마음을 꺽을 수는 없을 거다. 내가 며칠 동안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론만 말할게. 네가 하려는 거사에 내가 함께 하겠다.”

“뭐라고? 그건 안돼. 내가 너를 끌어들인 셈이 되잖아.”

“너는 나를 뒤처리용으로 생각한다고 했지만 사실 너도 내가 함께 하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툭 하니 말을 내뱉는다.

“알았다. 그렇게 하자.”

 

이 말을 시점으로 함께 하기 위한 거사 준비를 일사분란하게 진척시켰다. 이미 거사 일에 현장에서 뿌릴 전단은 수걸이 다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각자 주소가 확인되는 친구들 한테 전단지를 우편으로 보내기 위해 주소를 적었다. 나중에 친구들이 놀랠 수도 있어서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우편물을 보내는 과정에서 내가 친구의 이름을 잘못 적어 보낸 것이 있다. 나중에 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해줬다. 그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일을 처리하다 보니 나온 실수였다.

다음으로 우리는 몸을 단정히 하기 위해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깍고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도 했다. 이제 마음의 준비도 다 됐다. 우리는 함께 거사 장소인 퇴계로 명동 입구의 지하도로 향했다. 묵직한 전단지를 들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 승객들이 다 우리를 주목하는 것만 같았다. 온 시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떨리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내가 지금 큰일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 곳곳에는 무장한 계엄군이 보였다. 잠깐 순간이었지만 나의 미래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불투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5회|3. 광주항쟁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다섯 번째 글

3. 광주항쟁 (2)

 

내가 광주 학살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사회에서가 아니라 중부서 보호실에서였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보도 통제된 일간지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더라 통신을 통해 간간히 광주 학살에 관한 이야기들을 접하기는 했지만 정확한 진상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지수걸을 통해 계엄 철폐 데모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은 초여름의 햇살이 밝게 비추던 일요일이었다. 나는 그때 새로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 있었다.

 

“뭐라고?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시우야, 조용히 해. 잠깐 내 말 좀 들어줘. 내가 이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한 게 아니야.”

“아니, 지금 시국이 어떤 상황인데 그런 생각을 해? 너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 줄 알아? 그 행동 하나로 인해 너의 인생이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 봤어. 어떻게 이기적으로 네 생각만 하냐? 너의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그래, 나도 그 점을 충분히 생각했어. 이런 결정을 내리기 위해 몇 날 며칠을 하나님에게 울면서 기도했어. ‘주여, 이 잔을 내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주소서’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런 간절한 기도 끝에 내가 얻은 대답은 가라, 네가 선택한 길을! 이었어. 이런 결정을 내리고 나니까 오히려 내 마음이 아주 차분해졌어. 그러니 나의 이런 심정을 친구인 네가 이해를 해줬으면 해.”

 

친구 수걸하고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아가페’라는 서클에서 만났다. 그 후 우리는 그 써클을 탈퇴했지만 그와 나는 서로 죽이 잘 맞아 계속 만났다. 나는 그가 다니던 K동 교회 청년회 사람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때마침 1977년에 아동 급식 빵으로 인해 대규모 식중독 사건이 일어나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됐었다. 나는 이 사건을 풍자한 사회극 시나리오를 써서 교회의 연극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당시 나는 카뮈의 『이방인』이란 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시나리오는 그 작품에 등장하는 검사의 논고를 흉내내 기성인들의 부패를 고발한 작품이다. 수걸과는 자주 어울려서 서울역 앞에 있는 고아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광주 사태 이후 갑자기 찾아와서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데모해야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정적으로 그에게 동조는 해도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설득하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일단 결심한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달걀을 가지고 바위에 내리친다고 하면서 이런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큰 바위도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거사 1주일을 앞두고 나에게 일방적인 통보 비슷하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가 폭탄선언을 하고 간 뒤로 내 머리가 아주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그 당시 교회에서 만난 한 여성과 막 사랑을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친구가 기름통을 메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하니까 더 대책이 서지 않았다. 이제 공은 나에게 넘어왔고, 내가 결정해야 할 시간이다. 나는 이 사실을 친구 가족들에게 알려서 그의 거사를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외롭게 역사의 짐을 지고 가는 친구의 거사에 동참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이미 마음이 굳어진 친구의 결심을 더는 어떻게 막을 수가 없다. 그 이후로 나는 매일 같이 다녀 보지 않은 새벽 기도를 나가서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이런 신심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의 모습을 보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그저 열심히 기도를 통해 물었다. 그때는 잠도 하루에 서너 시간도 자지 않았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다. 여전히 나에게는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도 할 수 없었고, 저렇게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철학을 공부할 때 배운 딜레마(Dillema)가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닷새쯤 되었을 때다 새벽에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데 갑자기 눈앞에 떡이 보였다. 그것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냥 사라져 버렸다. 일종의 헛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간절한 기도 속에서 접한 현상이라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당시 만나던 여성에게 이야기하니까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해준다.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하나로 5천 명의 사람을 먹였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다. 꿈보다 해몽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마음을 굳혔다. 친구의 거사에 동참하리라.

일단 나의 마음을 굳혔지만 생각할 일이 적지 않다. 지금과 같이 살벌한 계엄 상황에서 데모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고시를 보겠다는 나의 생각은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가는 것이다. 감방에 들어가면 몇 년이 될지 알 수가 없다. 결국 고시를 포기하는 것이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다. 너무 무모한 것은 아닐까? 두려움도 생기고 번민도 많았다. 이런 나는 나의 문제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닐까? 무엇보다 나의 이런 결정에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먹고 살기도 힘든 가정에서 대학을 보내 주었는데, 자기 인생을 말아 먹을 지도 모를 불섶으로 뛰어 들어가는 나의 행동을 가족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의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이해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런 불안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4회|3. 광주항쟁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네 번째 글

  1. 광주항쟁 (1)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10.26 사태 이후 정국은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다. 박정희만 죽으면 유신이 몰락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키운 군부 내 ‘하나회’ 세력은 호시탐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다. 12.12 사태틀 통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하를 전격 체포하면서 하나회 수장 전두환이 보안사와 계엄사를 동시에 장악했다. 사실 군사 반란에 버금할 이 사건은 향후 정국 전개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지만, 당시 계엄 치하의 언론에는 짤막하게 보도되었을 뿐 야권에서도 크게 이슈화하지를 못했다.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만큼 야당과 재야 세력은 정보에 무지했다고 밖에 할 수가 없는데, 이것이 <서울의 봄>이 무산된 결정적 원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민주화에 대한 의욕은 컸지만 그것을 실현할만한 실력이 없었다. 재야의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자 연일 민주 세력의 단합을 이야기하면서 활동 공간을 넓히고 있었고, 김영삼을 위시한 야권도 새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1980년도 신학기가 들어서자 대학가도 이에 발맞춰 불투명한 정국에 우려를 표시하면서 연일 데모했다. 단과 대별로 성토 회의가 열리고 총학은 나름대로 비상 정국을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개 정국은 새봄이 와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질 수 없었다. 다만 모를 뿐이었다.

나는 당시 고시 공부하겠다고 법대 기숙사에 들어왔지만 시끄러운 대학 분위기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고시생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주구장창 육법전서를 차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처럼 대학의 분위기를 의식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하루는 고시원 총무를 맡고 있던 한 선배가 식사 시간에 일장 훈계했다.

“여러분들, 고시원에 공부하러 왔습니까 아니면 데모하러 왔습니까? 공부하러 왔으면 공부에 열중해야지 왜 바깥세상 분위기에 휩쓸립니까? 그렇게 궁금하면 보따리 싸들고 나가세요. 아니면 옆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다른 원생들에게 최소한 방해를 하지 말아야지요. 우리가 고시를 공부하는 것은 먼 미래의 희망을 위해서인데 왜 자그마한 일에 촐랑댑니까? 앞으로 이런 모습이 보이면 법대 고시원 차원에서 단호하게 대처할 겁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선전 포고다. 데모에 참가하면 가차없이 퇴출시키겠다는 엄포다. 하지만 이에 기죽을 내가 아니다.

“선배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씀 가운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먼 미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리고 지금 학생들 데모하는 것이 아이들 촐랑대는 정도로 뿐이 보이지 않습니까? 평소 존경하는 선배님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내 말이 불쾌했는지 얼굴을 붉힌 그 선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나는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위반하는 원생들이 있다면 책임질 것도 생각하세요. 이만!”

고시원 선배 총무와의 이런 논쟁도 어쩌면 부질없는 것인지 모른다. 연일 민주화를 요구하고 전두환 물러나라는 데모 열기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10만여 명의 대규모 데모대가 서울역을 눈앞에 두고 회군했다. 지도부가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 결정에 대해 당시 반대도 많았다. 왜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는가 하면서 아쉬운 표정들을 많이 지었다. 하지만 데모대가 탈취한 경찰 버스에 시민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고, 연일 이어지는 데모 대에 대해 언론과 여론의 피로감도 적지 않았다. 서울역에서 회군한 총학 지도부는 16일 토요일 이대에 집결해서 향후 정국 대비 전국 총학 연석회의를 열었다.

고시원에서 내가 거주하던 방은 2층 맨 끝방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각자 자기 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9시쯤 돼서 갑자기 내 방으로 평소 알던 선배가 뛰어 들었다. 그의 첫 마디는 ‘당했다!’ 였다. 그는 법대 학생회를 실질적으로 이끌던 선배였다. 군대를 다녀온 그는 대중 연설과 선동에 탁월했다. 단과대 학장을 맡고 있었을 때 나 보고 법학과 과 대표를 맡아서 정법대 분위기를 잡는 데 일조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고시 핑계로 그 제안을 물리쳤다.

“도대체 당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선배는 E여대에서 열린 전국 총학생회에 참석했었다.

“총학생장들이 회의하던 E여대에 경찰이 덮쳤어. 대부분 현장에서 붙잡혔고.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아 도망칠 수 있었지. 나는 E여대 후문 쪽 담장을 넘어서 바로 여기 법대 고시원으로 도피한 것이야” Y대 동문 쪽 후문에 있는 법대 고시원은 E여대 후문과 멀지 않았다. 이곳 지리에 밝은 그는 길 건너 바로 이 고시원으로 올 수 있었다. 그가 맨끝의 방으로 온 것은 만약의 경우 바로 튈 수 있기 위해서라고 했다.

선배의 ‘당했다’는 표현은 당시 상황을 아주 잘 드러냈다. 사실 하나회가 이끄는 군부는 학생들 데모를 거리로 유도해서 호시탐탐 결정적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하나회 실권 세력의 이런 계략을 알만한 사람들은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신군부는 학생들이 서울역 회군을 단행하면서 휴지기에 들어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들은 E여대에 모인 학생 지도부들을 일거에 검거하면서 뜨겁던 데모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훨씬 더 큰 규모의 희생을 제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1980년 5.17일 9시 너머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단 20분 만에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모두가 전격적으로 계획된 수순(手順) 이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3회|2. 서울의 봄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세 번째 글.

2. 서울의 봄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유신 독재에 다들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TV에서 늘 반복하는 대통령의 뻔한 시정 연설이 나오면 사람들은 대부분 채널을 돌려 버렸다. 1979년 10월 박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반정부 시위가 지방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전에 동일 방직 사건이 있었고, 8월에는 YH 무역의 여공들 190여명이 신민 당사로 진입한 사건 등으로 여야가 날카롭게 대치했었다. 그럴 때 부산에서 대거 학생들이 유신 독재 반대 명분으로 들고 일어난 시위가 이웃 도시 마산으로 번지고 있었다.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대통령 박정희와 안기부장 김재규 그리고 경호실장 차지철 등이 모인 것은 부산 데모에 대처하기 위한 회의 때문이었다. 김재규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에서 자기를 따르는 정보부의 핵심 부하들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더 박정희의 마음을 떠보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심한 면책과 새카만 후배인 경호 실장 차지철의 모욕적인 발언뿐이었다. 그는 즉시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했다. 유신의 심장에서 벌어진 핵분열이라 할 수 있다.

통상 10.26 사건으로 지칭되던 이 사건은 사회와 역사를 생각하는 나의 삶의 방식에 변화를 많이 주었다. 시해 사건을 접했을 때 나는 그래도 한편으로 박정희가 없는 대한민국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를 걱정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그의 배려를 받아 대학을 입학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소 슬픔도 느꼈다. 다음 날 일찍 조문을 위해 양복을 걸쳐 입고 늘 친구들을 만나던 J 회관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 앞으로 전개될 대한민국호의 미래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국장은 며칠 동안 진행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18년 박정희 통치를 기억하며 애도했다. 그렇게 국장 일정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유신이 마감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유신 독재도 종말을 고(告) 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정치적 해빙기를 맞으면서 고시 공부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을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유신 독재 체제하에서 고시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생각과 이제 독재 체제가 끝나가기 때문에 고시 공부해도 된다는 생각이 컸던 것같다. 내가 그해 겨울 집 근처에 있는 교회의 문을 두드린 것은 신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고시 공부를 위한 다짐의 의미도 컸다.

내가 문을 두드린 교회는 동네 교회지만 근방의 다른 교회들보다는 비교적 컸다. 이 교회는 P 시장 앞 국회 단지 언덕 위에 위치 해있다. 이 교회로 올라가는 길은 2가지다. 하나는 내가 사는 집 뒤쪽으로 골목을 통해서 올라가는 길이 있고, 다른 하나는 P 시장 앞 정류장에서 국회 단지 쪽으로 올라가는 큰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교회로 가는 길이 나오고, 그쪽으로 한 100여 메타 올라가면 교회가 나온다. 교회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눈에 띈다. 왼쪽에는 청년회와 청소년회가 이용하는 회의실 건물이 있다. 교회 마당은 썩 넓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좁은 것도 아니다.

이 교회의 장점은 무엇보다 청년회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점에 있다. 내가 이 교회를 내 발로 찾아갔을 때도 여러 청년이 나를 반겨주면서 주일 예배 외에 청년회 모임에도 꼭 참석하라고 인도해 주었다. 이 모임에서 따로 성경 공부를 주로 하고 기타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개발해서 나누기도 했다. 성경에 대해서는 나 역시 관심이 있어서 나는 등록 즉시 청년회 모임에 참석했다. 내가 참석한 두 번째 모임인가였다. 성경 공부를 무사히 마친 다음에 공부를 주도하던 이가 기도를 끝으로 마감했다. 그 다음으로 친교 시간이 이어졌다. 친교부장을 맺고 있는 20대 초반의 앳된 여성이 말을 잇는다.

“자, 지금부터 친교의 시간입니다. 각자 자기가 마음에 드는 분 앞으로 자리를 옮겨 보세요. 오늘은 새로 들어 온 분도 있으니까 반갑게 맞아주세요.” 그녀는 미리 준비한 초를 각자에게 나눠 준다. 각자 그 촛불을 켠다.

나는 아직 사람들을 모르는 상태라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랬더니 아까 그 여성이 내 앞으로 온다.

“각자 눈을 감고 자기 앞에 있는 분을 위해 기도해보세요.”

이것도 나에게는 생소하다. 나는 그냥 눈만 감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자기 이름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미정이예요. 이 교회는 어렸을 적부터 다녀서 잘 알고 있어요. 지금은 청년회 친교부장을 맡고 있어요. 새로 오셔서 반갑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까딱하면서 인사했다. 생각보다 인상이 서글서글해 보인다. 내가 원래 낯선 사람에게는 얼굴을 가리는 편이지만, 호감 가는 상대 여성이 친절을 베푸니까 내 마음도 열리는 느낌이다.

“저는 이시우입니다. 새로 뜻한 바가 있어서 교회 문을 두드리게 됐습니다. 교회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괜찮아요.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서 교회 문을 두드린 것은 대단한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선교를 해도 외면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시우님은 주님이 특별히 은혜를 베푼 것 같아요.”

처음 청년회 모임에 온 것 치고는 비교적 무난한 편이다. 내가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Y대와 E여대생이 함께 운영하는 ‘아가페’라는 서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서클이 이름에 걸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1년이 안 돼 나온 경험이 있다. 아마도 내 속에는 종교적 체험에 대한 근원적 열망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늘 실망하곤 하는지 모른다. 이런 열망이 어디서 온 건지는 모르지만 종교는 그 이후로도 나의 젊은 시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4회에 계속.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회|1. 다시 찾은 길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두 번째 글.

1. 다시 찾은 길 (2)

 

첫 시간을 비교적 무난하게 끝내고 나서 다시 강사실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이미 강의를 끝낸 후배 학자들 몇몇의 얼굴이 보인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들이다.

“형! 점심 먹으러 가자.”

오랜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호칭이다. 사회에서는 항상 그 사람의 명함에 적힌 직급이나 성을 가지고 부른다. 하지만 대학은 그냥 형 동생이나 선 후배로 지칭한다.

“그래, 오랜만에 함께 식사하자.”

그 사이 바로 2명이 더 붙어서 4명이 함께 식사하러 밖을 나섰다. 따로 교수 식당이 없는 이곳에서 점심 때 학생들 틈에 끼여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고역이다. 우리는 한 후배의 차를 타고 대학 바깥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 소도시는 시내를 벗어나면 다 촌이고, 한가롭다. 곳곳에 맛있는 음식점들도 많아서 맛집 여행하듯 찾아 다닐 수 있어서 좋다. 다들 새벽같이 나와서 이때쯤이면 약간은 허기가 들 때도 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상태라 날씨가 쌀쌀했다. 우리는 추어탕이 어떤 가라는 말에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했다. 마침 대학에서 몇 킬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추어탕을 잘한다는 집이 있어서 그리로 갔다.

학자들끼리 식사를 하다 보니 많은 경우 이야기 주제도 학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형! 지난달 <학술 진흥 재단>의 연구 프로젝트 신청했어요?”

“그래,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보니 나도 억지로 하나 신청했어.”

“요즘은 그것도 신청자가 많아서 경쟁이 심하다고 해요.”

그래서 그런지 3월 말이 되면 전국 대학의 수많은 강사들이 이 프로젝트 신청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래전 대학 다닐 때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역이 하나 있고, 그 앞쪽으로 이른바 방석집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등록금 철이 되면 주방 아줌마들도 화장 이쁘게 하고 손님 받느라 바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학술진흥재단의 연구 프로젝트 신청이 공지되면 한국의 대학가들 역시 그와 비슷한 형국이다. 이 프로젝트라도 따야 그나마 쥐꼬리 같은 강사료를 벌충할 수 있고 품위 유지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점심을 마치자 바로 오후 수업에 들어가는 강사들도 있지만, 나처럼 오전 수업만 마친 강사들도 있다. 휴게실은 강사들을 위해 대학에서 배려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강의 준비를 할 수 있고, 프린터와 인터넷도 활용할 수 있다. 봉지 커피나 각종 1회용 차들도 구비되어 있어서 강의 중간에 마실 수 있어서 좋다. 사실 모교의 강사들이기 때문에 이런 배려를 해주지만, 출강하는 대부분의 대학들에는 이런 서비스가 거의 없다. 그래서 교정에 차를 세워 놓고 강의 준비를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나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4시 반에 서울 본교로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소파에서 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 참으로 편안한 기분이다. 이럴 때는 이상하게 내 생각이 과거로 돌아간다. 내가 대학에 들어온 지 벌써 30년이 가까이 흘렀다. 그사이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과 모험심, 도전 의식 등으로 좌충우돌 많이 헤매고 다녔다. 내가 법대를 졸업한 다음에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을 한 것도 아마 이런 지적 호기심의 연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법학이 주는 미래의 안정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법학은 자유 분망하고 비판적인 나의 사고를 담기에는 너무나 고루한 느낌이 들었다. 대학 4년 동안 지녀왔던 이런 나의 생각에 약간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에도 하나의 전기가 된 10.26 사태가 발생한 것은 1979년 가을이었다.

3회에 계속.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회|1. 다시 찾은 길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연재의 변

 

앞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필자가 쓴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이 책은 격동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2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이고, 2부는 1990년대 후반부부터 2020년대 전반부에 걸쳐 있다. 현재 1부는 완성되어 있고, 2부는 쓰고 있는 중이다.

필자가 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개인의 사적인 삶을 정리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겪은 한국사회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반성해보려는 것이다. 다들 알고 있듯, 한국의 1970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인들은 유신 독재와 광주 항쟁, 민주화 투쟁과 1987년의 민주주의의 쟁취 등으로 점철된 의미 있는 역사적 경험을 겪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사회과학의 전성시대이자 온갖 이론과 사상이 난무하던 지적 르네상스이기도 했다. 필자는 이 시기를 프랑스의 6.8 혁명 못지 않은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6.8 혁명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이론과 사상을 정립해서 세계인들에게 내 보였던 반면, 한국인들은 그런 귀중한 역사적 체험을 그저 그런 과거의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우리가 겪은 이 시대의 체험을 철학적으로 반성하고 의미화하고 싶은 욕구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구성해본 것이다.

한국철학의 고질적인 문제는 자신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철학을 구성하기 보다는 여전히 바깥의 수입 철학에 의존하고 2천년도 넘은 공맹과 노장 사상을 주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있다. 이런 지적 식민성과 사대주의가 한국의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겪은 위대한 경험을 과거로 묻어 버린 채 그저 바깥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론과 사상 혹은 오래된 사상에 목을 매달고 있을 뿐이다. <조선사상사>를 쓴 교토대 철학과 교수 오구라 기조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외래 사상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재구성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바꿔치기 하는 전면적 개변(改變)에만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다. 한 사상이 물밀듯 들어와서 한 시대를 지배하다가 시효가 되어 사라지고 다른 사상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개변의 일반적 형태이다. 과거 불교와 유교가 그랬고, 근대에 들어서는 유교와 맑스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등이 그랬다. 손바닥 뒤집듯 일어나는 개변의 가장 큰 단점은 사상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데 있다. 외래 사상만을 끊임없이 찾다 보니까 그런 사상의 축적이 이루어지기 힘들고, 더욱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철학계가 부닥친 커다란 딜레마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이런 생각과 틀을 바꿔야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 필자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시대 체험과 생각, 자신들의 언어를 살려서 자신들의 철학을 정립해보자는 것이다.

이 소설은 격동의 한국 사회를 한 개인의 지적 모험을 통해 재구성해보자는 데 있지만, 사실 이런 시도는 잘못하면 죽도 밥도 되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필자의 시도는 철학적 소설을 겨냥했지만 철학도 되지 못하고 소설이라는 면에서도 실패할 수 있다. 최대한 이러한 실패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 판단은 필자의 손을 떠나 읽는 독자들이 내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문제 의식에 대한 공유를 통해 우리 철학을 정립하는데 하나의 초석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필자 이종철


첫 번째 글.

  1. 다시 찾은 길

 

사위는 아직 컴컴했다. 대학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시각은 5시 45분이다. 개강을 막 시작한 3월 초니까 겨울의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다. 나는 외투 깃을 약간 올리고 천천히 정문 쪽으로 걸었다. 정류장에서 대학 정문은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다. 희뿌연 등이 정문에 밝혀져 있고, 그 옆 수위실도 불이 밝혀 있다. 내가 타려는 학교 버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별로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지방의 소도시의 분교로 출퇴근하는 교원들을 실어 나르는 버스는 정확히 6시 5분 전에 도착한다.

  나는 늘 그렇듯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인 다음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타고 담배 연기가 목젖을 파고들어 왔다. 순간 아직 잠에서 덜깬 몸처럼 목젖이 따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런 짜릿하면서도 약간은 고통스러운 쾌감 때문에 담배를 끊지 못하나 보다. 버스를 탈 시간이 되어 가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얼굴이 익숙한 후배 하나가 인사를 건냈지만 다들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는 원주에 전임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간강사들이다. 나도 그런 자격으로 오늘 이 버스를 타는 것이다.

  6시 정각이 되자 버스가 출발한다. 버스는 정문에서 신촌 로타리 쪽으로 난 도로를 타고 나가다가 로타리를 돌아 서강대 쪽으로 향한다. 서강대를 지나서 마포대교를 향해 꺽자 마자 우체국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태운 다음 바로 강변도로로 진입한다. 이 때 쯤이면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어둠이 걷히면서 한강 변 양쪽으로 빌딩들이 뿌연 형체를 드러내고, 강변을 따라 차들이 바쁘게 달리고 있다. 내가 탄 버스도 그 무리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거대한 자동차 물결에 휩쓸려 내 몸도 함께 달리고 있다. 버스가 한강 다리를 달릴 즈음에는 이미 해가 떠올라서 강변의 빌딩들이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침 햇살은 참으로 신기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햇살을 받아서 위용을 드러낼 때는 마치 새로운 존재들이 탄생하는 느낌마저 주었다. 그런 생각들이 일어나자 순간 지금의 내 삶도 어둠을 뚫고서 새로운 공간 속으로 태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의 저편과 밝은 햇볕 속에 드러난 이편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만큼이나 컸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나? 지금 나는 다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나는 남들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만 열심히 파지 않았는가? 왜 나는 끊임없이 방황을 하는가? 방랑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방랑자가 나의 참모습인가?

 내가 한곳에 머물지 못하리라는 운명을 나는 일찍부터 가졌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당시였을 것이다. 그때 사주 관상을 본다고 하던 엄마의 친구가 우리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아주머니가 내 사주를 보면서 하던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큰 별이 두 개가 있어. 그런데 이 아이는 어느 별에도 속하지 않아. 아마도 이 아이 사주는 떠도는 사주일 듯해.”

 

나는 그 당시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 말은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 아주머니의 말과 달리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쑥맥에다가 범생이나 다름없었다. 집과 학교, 그리고 기껏해야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나의 삶이었다. 나는 불편한 몸 탓에 친구들과 함께 가는 소풍을 거의 가본 적이 없고, 중학교를 들어갈 때까지 버스를 타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런 내가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떠도는 방랑자라니, 남들은 물론 나 자신도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차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전날 자지 못한 잠을 보충하고 있는 듯 조용했다. 간혹 오전 강의를 준비하는 듯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부스럭거렸다. 차는 이미 중부고속도로를 빠져나와서 영동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고, 창밖의 고속도로 풍경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가 사라진다. 무료하게 그런 모습을 보다가 이내 나도 첫 교시 수업에 생각이 미쳤다.

첫 교시는 내 전공과 관련된 독일관념론의 칸트 철학이다. 서울에서 강의를 할 때는 대부분 교양강의에 머무는 경우가 많지만 지방 소도시에서 강의하는 이 수업은 전공 강의이다. 교양강의는 강의 준비는 쉬워도 막상 강의를 할 때는 그렇지가 않다. 학생들 전공 분포도 다양하고, 이해 수준도 편차가 크기 때문에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가 늘 신경이 쓰인다. 반면 전공 강의는 강의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도 수업 자체의 집중도가 높고 학생들의 수업 열의도 크기 때문에 강의 자체가 즐거운 경우가 많다. 그만큼 학생들과의 유대도 많다. 강의는 각기 장단점이 있다. 교양 인문 강의를 하다 보면 단순히 글쓰기 강좌에서부터 ‘논증과 비판’ 같은 토론 수업, 문화 현상들에 관한 수업, 환경과 4차 산업 혁명 등 다양한 주제들을 섭렵해서 그야말로 백과사전적 지식을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지식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 소모품 형태로 강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 학기가 끝나면 그대로 잊히는 경우도 많다.

반면 전공 강의는 심화 학습을 할 수 있고, 논문과 연계시켜 원전 강독을 병행할 수도 있다.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생산적인 토론을 할 수도 있고, 수업의 영향과 효과를 확인할 수가 있어서 좋다. 지난 첫 시간은 오리엔테이션을 겸해서 독일관념론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강의했다. 학기 초라 그런지 다들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굴리면서 집중력을 높이고 있다.

독일관념론의 전체적인 흐름을 잡기 위해 내가 질문을 먼저 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해가 언제이지요?” 학생들은 약간 당혹스러운듯 눈동자만 굴린다. 그런데 뒷자리에 앉은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답한다.

“1781년이요.” 바로 맞혔다.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이 학생은 이미 칸트 책을 읽어보고 들어온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헤겔의 『법철학』이 나온 해는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른 학생이 구글을 검색했는지. “1821년이요.”라고 답한다.

“예, 맞습니다. 우리가 보통 ‘독일관념론’이라고 한다면 칸트의 주저인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1781년으로부터 헤겔의 『법철학』이 출간된 1821년까지 40년간을 지칭합니다. 한 세대하고 1/3을 약간 넘는 이 짧은 기간 동안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 철학의 전성기가 전개되었지요. 역사적으로 이렇게 짧은 시간에 기라성 같은 천재 사상가들이 등장한 것은 서양철학의 경우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지는 시기나 근대에 들어 데카르트 이후의 합리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의 철학이 박진감 있게 전개된 것에 버금할 것이지요.”

“여러분들, 혹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해가 언제인지는 아나요?” 학생들이 철학 수업 시간에 생뚱맞게 연도 알아맞히기 게임하는 것 아닌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문제는 비교적 잘 알려진 사건이라 바로 답변이 나온다. “1789년이요.”

“그러면 영국의 산업 혁명이 일어난 해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요?”

이 문제는 다소 애매한지 학생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본다.

 

이러한 숫자는 강렬한 의미를 줄 수 있고, 상징적 효과도 크다. 기억하기도 좋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산업 혁명은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발명한 1760년을 꼽는 경우가 많다. 이때부터 영국은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서구의 다른 어떤 국가들보다 빠르게 자본주의에 진입한다.

대충 여기 나온 숫자들 만으로 17-8세기 당대 유럽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1760년의 영국은 경제 혁명이 시작되는 해이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의 정치 혁명이 시작된 해이다. 1781년과 1821년은 칸트와 헤겔의 대표적인 저작인 『순수이성비판』과 『법철학 강의』가 출간된 해이다. 독일은 이웃 국가들의 정치와 경제와 같은 현실적 혁명을 구경하고 열광했을 뿐 자신들이 이런 혁명을 이룩하지는 못했다. 대신 이 시대 독일에서는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관념론이 완성되고, 괴테와 쉴러와 같은 대문호들이 활약하고, 모짜르트와 베토벤같이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이 등장했다. 한 세기에 한 명 나오기도 힘든 데 40년 정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이런 천재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때문에 후대의 사가들은 이를 독일인이 이룩한 ‘정신혁명’이라고 기술한다.

2회에 계속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 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