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0회|7. 철학과 대학원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20회

7. 철학과 대학원 (1)

 

법대에서는 낙오자나 다름없었지만, 문과대 수업에서는 성적이 아주 잘 나왔다. 타지에서 설움을 받다가 고향에 온 느낌마저 들었다. 힘들고 오랜 항해 끝에 섬을 발견한 뱃사공들의 기쁨과도 같았다. 남들은 일부러 법대 가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하던데 나는 오히려 법대를 나와서 잘 팔리지도 않는 철학과로 갔다. 철학과 대학원 시험은 공부도 별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사히 통과했다. 그 당시는 대학원 시험을 통과하는 게 어려웠던 시절이다. 나의 대학원 동기는 타 대학에서 온 여학생과 본교 교육학과 출신인 여학생이다. 모두가 타과 출신인 셈이다. 대학원 등록금은 고등학교 동기가 자기 동생을 과외 공부시켜주는 조건으로 일부를 대주고, 나머지 절반은 나의 오랜 법대 동기인 김모 군의 어머니가 내주었다. 그 당시 과외를 금지했기 때문에 도봉구 방학동이었던 친구의 집에서 3달 정도 입주 과외를 해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돈 한 푼 없이 내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우리 대학원 입학 동기들은 타과생이라 학부 철학과에서 2과목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런데 수강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나를 아주 잘 보았던 과장 교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제가 생겼다. 나는 대학원에서 3과목을 신청하고 학부에서 1과목을 신청하겠다고 과장실로 찾아갔는데 과장 교수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과목의 수강 능력은 나의 선택과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그 교수가 벌컥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때 옆 소파에 앉아 있던 박사 과정 선배가 나가라는 눈짓을 주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과장 교수의 눈 밖에 나서 대학원 다니던 내내 불이익을 당했다. 우리 동기가 3학기가 되었을 때 그 과장 교수가 안식년 휴가를 떠나면서 과 조교에서 우리 동기들을 다 빼 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교 장학금은 나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받지 못하면 등록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대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당시 학생처장을 맞고 있었던 P 교수가 학생처장 장학금을 끌어다 줘서 간신히 등록을 맞쳤다.

대학원 수업은 재밌었다. 정말 공부하는 느낌이 들었다. 학생 수도 몇 명 안 돼서 강의의 집중력도 컸다. 학부에서 B 교수의 동양 철학 수업도 들었지만, 당시 동양철학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 남은 것이 없다. 당시 철학과 대학원은 강의가 끝나면 논문 형식의 리포트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다. 이 리포트를 방학 내내 작성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리포트 작성이 대학원 수업에서 비중을 많이 차지했다. 그때 제출한 리포트들이 교수들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 비트겐슈타인 강좌를 담당했던 P 교수는 내가 제출한 리포트 제목만 보고서 바로 그 자리에서 A를 줄 정도였다. 그때 내가 제출한 리포트 제목은 지금 봐도 멋지다. “커뮤니케이션의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삶의 형식’(Lebensforum)”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전기에 ‘언어의 그림이론’을 담은 『논리-철학 논고』(Tractatus)를 발표했지만, 후기 철학서인 『철학 탐구』(Philosophical Invesgation) 에서는 초기의 이론을 죄다 뒤엎었다. 그는 이 책에서 특히 삶의 형식’(Lebensform)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나는 이 개념을 당시 막 복사본으로 소개되었던 K. 오토 아펠의 책에서 알게된 ‘선험적 지평’이란 개념과 연결시켰다. 그의 삶의 형식은 언어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선험적 지평의 의미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 철학에 생소한 P 교수는 제목 자체만으로 봐도 멋있다고 높게 평가를 해주었다. 아무튼 이런 리포트를 석-박사 졸업할 때까지 10여 편을 작성해야 했다. 어려웠지만 배운 것도 많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9회|6. 다시 강의실로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9회

  1. 다시 강의실로 (4)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칸트 철학의 문제를 계속 강의한다. 지난 시간에 칸트 철학이 직면한 딜레마까지 다뤘다. 이번 시간에는 그것을 칸트가 어떻게 푸는 지를 다룬다. 칸트가 보기에 경험론은 모든 것을 경험적 인상들의 다발로 보다 보니까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필연성’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때문에 이런 주장은 회의론(Sceptism)에 빠지게 되고, 학문의 객관성도 확보하기 힘들어진다. 반면 합리론은 실체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논쟁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증명되지 않는 전제에 기초한 독단론(Dogmatism)에 그칠 뿐이다. 그리하여 회의론과 독단론을 피해 학문 -이 학문에는 당대의 뉴턴 역학도 포함되고, 필연성의 학문인 수학도 포함된다- 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칸트의 문제였다. 문제를 이렇게 정립하자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서 칸트는 유명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전략을 끌어들인다.

잘 알다시피, 코페르니쿠스는 당시까지 유지되어왔던 톨레미의 항성 이론에 대해 반대했다. 성경에 따라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태양계를 설명하려고 하니까 너무나 맞지 않는데, 이것을 뒤집어 태양을 중심으로 놓으니까 모든 것이 잘 설명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어와 술어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전략이다. 나는 종종 칸트 철학을 대하면서 그가 대단히 영리하다(clever)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는 여기에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문제가 잘 안 풀릴 때는 이렇게 시점을 바꾸고 발상 전환을 시도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완전히 시각을 바꾸어 보면 대상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대상) 간의 관계를 전도시킨 것이다. 경험론자처럼 항시 대상 의존적으로 사유할 경우 언제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 확률주의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점에서는 이성을 중시한 합리론자들의 전략이 훨씬 유효하다 할 것이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듯, 인간 이성이 지식과 과학의 주체가 되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의 중요성을 칸트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시 한번 학생들에게 칸트의 전략을 학생들이 이해하는지를 물어보았다.

 

“여러분들, 칸트가 시도하고 있는 전략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까?”

 

“네, 적어도 여기까지는 칸트의 전략이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선생님의 탁월하신 강의 때문인 듯합니다.” 한 학생의 아부성 발언이지만 듣기 싫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강의를 이어간다.

 

“칸트의 ‘영리함’은 또 다른 면에서 나타납니다. 칸트는 인간 이성에게 인식의 주도권을 넘겼지만, 그냥 무제한적으로 그 권리를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칸트의 저 유명한 ‘이성 비판’이라는 법정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통해 인간 이성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감성과 오성 그리고 이성 3가지로 구분합니다. 칸트의 이런 구분은 종래의 철학자들이 인식 능력을 감성(Sinnigkeit)과 이성(Vernunft)으로 양분했던 것에서 한 층 심화시켜 경험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오성(Verstand)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 스미스가 노동의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했던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중세처럼 작업 공정 전체를 마스터(장인)가 다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영역을 구분하고, 그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외계에서 인식의 재료를 받아들이는 감성의 능력과 과학의 범주로 이 재료를 재단해서 인식을 만드는 오성의 능력을 나눕니다. ‘직관이 없는 오성은 공허하고, 오성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가 인식의 두 가지 능력의 차이와 역할을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에게 인식은 감성과 오성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러한 인식은 종래의 형이상학자들이 생각하듯 무제한적인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형이상학자들은 이것을 무제한적으로 추론했기 때문에 이른바 독단론에 빠진 것이지요.” 잠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내 강의는 계속 이어진다.

“칸트는 분업의 생산성에 주목한 근대 경제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인식의 각각의 능력에 역할을 지정해주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한계를 밝혀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오성의 범주들은 경험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그 한계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근대식 공장의 분업에서는 누구도 자기에게 주어진 작업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성 비판’은 오성의 월권을 제한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사실 이러한 월권, 칸트식으로 말하면 초월(Transzendenz)은 인간 이성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도 그 자체를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thaumazein)이 형이상학과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고 밝힌 바 있지요. 인간의 의식은 늘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칸트가 변증론에서 이러한 초월로 인해 야기된 가상을 필연적인 ‘형이상학적 가상’(Schein)이라고 한 것도 그것이 그만큼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변증론’의 이성 비판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 이성의 월권을 방지하려는 칸트식의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월권이 이루어졌을 경우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요? 『순수이성비판』은 감성의 역할을 다룬 <감성론>(Sinnigkeitstheorie)과 오성의 역할을 다룬 <분석론>(Analytikstheorie), 그리고 이성의 역할을 다룬 <변증론>(Dialektik)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변증론은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초월했을 때는 야기되는 문제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에 관한 ‘안티노미 이론’과 영혼에 관한 ‘영혼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 존재 증명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칸트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Architecture)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는 이러한 건축의 이미지, 말하자면 체계를 구축하려는 사유의 이미지가 일반적이었지요.”

여기까지 주마간산 격으로 거칠게 설명을 했지만 학생들은 오히려 잘 이해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강의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칸트의 철학이 수학의 문제를 풀 듯 단순하고 명료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계도가 없으면 건축할 수 없는 반면, 설계도를 이해하면 건축을 훨씬 잘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8회|6. 다시 강의실로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8회

6. 다시 강의실로 (3)

 

강의가 다소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학생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강의 시간도 끝날 때 쯤이라 그 정도에서 마칠 수 있었다. 이 날은 원주에서 선생들 끼리 회식이 있다. 서울에서 멀리 출강하는 강사들을 위해 철학과의 과장 교수가 한 턱을 사는 날이다. 술을 마시고 뒤늦게 버스 편을 이용해서 올라가는 선생도 있고, 차를 몰고 내려 오는 선생은 음주는 하지 않고 올라간다. 이때 그이의 차에 편승해서 올라갈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술자리는 즐겁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고, 술 한 잔 들이키면서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것도 즐겁다.

 

“L 선생, 요즘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그렇게 공부하는 게 재밌어요? 논문 열심히 쓴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선배 교수가 덕담 수준으로 말을 건넨다.

“별 말씀을요. 뒤늦게 다시 시작한 공부를 따라 잡느라고 애를 많이 쓸 뿐이지요.”

 

서울에서 내려오는 강사들의 수업 시간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한 꺼번에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오늘은 그래도 많아서 5명이나 참석했다. 개중에는 독일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지 얼마 안 되는 선생이 있었고, 또 한국 철학을 하는 후배도 있었다. 이 선생은 퇴계의 철학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퇴계의 정신을 따라 작시(作詩)도 잘 했다. 그는 술자리에서 자기가 지은 시라고 하면서 낭독도 하곤 했다. 작시를 특별히 어렵게 하지 않고, 소재도 주변의 일상에서 찾은 것들이라 이해하기도 어렵지가 않았다. 그가 시 한 수를 뽑고 나서 바로 노래도 한 곡 부른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 오른다. 여기 저기서 장단 맞추는 젓가락 두들기는 소리도 난다. 서울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졌던 분위기가 소도시인 이곳에서 다시 기억을 일깨운다. 다들 같은 대학의 철학과 선후배로 이루어져 있어서 술 몇 잔 들어가면 그냥 형 동생 하는 사이다. 한국인들은 어디를 가든 이런 끈끈한 분위기가 술자리를 매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날 늦게 까지 술 자리를 이어가다가 거진 밤 10시 쯤 돼서 헤어졌다. 나는 마침 서울로 귀환하는 후배 차를 탈 수 있었다. 그는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단련된 운전 솜씨가 대단해서 나는 믿고 잠시 눈 좀 붙였다. 그런데 별로 잔 것 같지도 않은데, 그가 말한다. “형, 집에 다왔어요.” 벌써 내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한 것이다. 덕분에 아주 편하게 왔다.

지방의 소도시로 출강하는 수업은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즐겁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1주일에 한 번씩 여행을 다니는 기분을 즐겼다. 서울에서 여러 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이렇게 한 번 씩 서울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서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소수의 학생들을 상대로 전공 강의를 하는 것도 좋았다. 학자는 어떤 경우든 논문을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이런 전공 강의가 도움이 된다. 전임과 시간 강사의 차이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전임은 우수한 학생들을 데리고 학부 전공이나 대학원 수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반면 강사들은 그저 피상적인 교양 과목만 담당하는 것에 있다. 전임은 강의를 논문 쓰기로 연결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반면, 시간 강사들은 교양 과목 수업 준비만 하다가 허송세월 보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런 강사들의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학위 논문을 쓰는 학생들의 멘토로 이어주면 어떨까라는 제안도 해보았지만 아쉬울 것 없는 전임들은 그저 귓전으로 들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7회|6. 다시 강의실로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7회

       6. 다시 강의실로 (2)

 

3, 4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전공 강의인 칸트 수업 역시 내가 공을 많이 들였다. 이 수업은 지방의 소도시에서 진행이 되었지만 나는 1주일에 한 번씩 여행하는 기분으로 다녔다. 두세 번의 수업을 통해 강의의 대략적 틀을 잡았고,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칸트 철학의 내용을 다루게 될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도시에서 자취를 한다.

칸트 철학은 근대 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철학자다. 그의 철학은 하나의 거대한 호수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 이전의 철학이 그의 철학으로 몰려들고, 그 이후의 철학은 그로부터 흘러나가는 호수의 이미지에 그의 철학이 딱 어울린다. 칸트의 철학으로부터 철학은 본격적으로 아카데미권에 정착을 한다. 그 이전의 철학은 아마추어들의 철학, 거리의 철학, 살롱의 철학이었지만, 칸트의 철학은 비로소 프로의 철학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체계화시킬 수 있는 가를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학생이라면 높고 험한 산을 등정하듯 칸트의 철학과 대결을 해야 한다. 근대를 경험한 지금 칸트 철학은 저 근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철학 중의 하나이다.

두 차례 정도 지나고 보니까 이제 나의 칸트 강의에 학생들이 점점 몰입하는 느낌이 느껴진다. 강의하다 보면 느낌과 시선이 몸에 와 닿는 순간을 경험한다. 학생들 책상 위에는 백종현 선생이 번역한 하늘색 바탕의 하얀색 장정으로 만들어진 두툼한 『순수이성비판』 한글 번역본이 올라와 있고, 이 『순수이성비판』 해설서로 잘 알려진 고트프리드 회페의 번역본을 올려놓은 학생도 보인다. 20년 전 우리가 칸트 철학을 공부할 때는 활자가 빽빽한 최재희 선생의 번역본을 사용했고, 해설서도 별로 마땅한 것이 없어서 아주 기본적인 번역서를 가지고 공부했다. 내가 앞자리에 앉은 학생에게 질문을 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무슨 의미지요? 무엇이 순수(Rheinheit)이고, 무엇이 이성(Vernunft)이고, 무엇이 비판(Kritik)을 의미하나요?” 철학과 3.4학년 대상으로 진행하는 수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지 학생이 다소 당황한다.

“아, 선생님. 죄송하지만 제가 그걸 알고 싶어서 이 수업에 들어온 겁니다.” 이 학생이 재치 있게 내 질문을 얼버무린다.

“물론 그렇겠지.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철학과 3.4 학년이면 이 정도는 대답할 수가 있지 않을까?”

“칸트는 혹시 결백증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나치게 순수를 따지고, 원칙을 따지는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런 합리적 추정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주민들이 그의 산책 시간에 맞춰 시간을 맞추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아주 규칙적으로 산책을 했다고 하잖아요.” 간단한 직관이지만 이런 생각을 따지고 들다 보면 얼마든지 칸트의 사상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학생들에게 칸트 철학의 문제의식과 배경, 그리고 그가 시도하고자 한 사유의 혁명의 내용 같은 것을 개론적으로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전체에 대한 그림이 그려져야 그의 철학의 세부적인 미로를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관념론의 시대를 연 칸트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철학적 딜레마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대륙의 합리론(rationalism)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경험론(empiricism)이다. 예나 지금이나 섬나라인 영국과 대륙 간에는 이질적인 흐름이 강하다. 단일 유럽 공동체(EU)를 만들어보자고 외쳤지만 결국 영국이 탈퇴한 것은 대륙과 독립적으로 유지해온 오랜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상업과 해양 무역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거래를 하다 보면 서로 다른 거래의 관행이나 규칙 그리고 법규 등의 차이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협하고 조정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어떤 독단적인 이성보다는 경험과 상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에는 일찍부터 경험주의적 전통이 발달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중세의 오랜 기간 유럽인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 논리를 깨고 경험 논리에 기초한 ‘노붐 오르가논’(새로운 논리)를 주장한 것도 이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에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반면 프랑스나 독일로 대변되는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경험보다는 수학적 논증처럼 순수하고 필연적인 이성의 논리에 익숙했다. 일찍이 근대 철학의 지평을 연 데카르트가 그랬고, 그 뒤를 이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모두 연역 논리를 강조했다. 합리론자들은 여전히 실체니 영혼이니, 신이니 존재니 하는 전통 형이상학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을 쓰고 있었다. 사유하는 자아(Cogito)를 정립하면서 신을 밀어낸 데카르트에게도 신은 유한 실체인 코기토를 보증하는 무한실체이다. 실체(Substance)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이런 실체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가지고 갈라진다. 가령 데카르트에게 실체는 무한실체인 신과 유한 실체인 연장(res extensa)으로서의 물질과 사유(res cogitans)로서의 정신인 3가지 실체가 있다. 스피노자는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원인(Causa sui)이자 무한실체인 신일 뿐이고, 사유와 연장은 이 신을 표현하는 속성으로 간주한다. 스피노자 보다 다소 늦은 라이프니츠는 모나드(Monad)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다원론을 주장한다. 모나드는 우주에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실체이다. 이러한 모나드들은 창이 없지만, 우주를 반영하는데 존재 등급에 따라 하이어라키(hierachy)를 이루고 있다. 일종의 형이상학적 가설이라고 할 수 있는 합리론자들의 실체설은 존재에 대한 각기 다른 설명이 될 수는 있지만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다. 칸트는 이를 독단론(Dogmatism)이라 비판한다.

경험론자인 로크도 외계의 알 수 없는 실체 X를 말한 적이 있다. 반면 버클리는 알 수 없는 것을 왜 전제하냐고 하면서 그것을 표상하는 지각으로 환원시켜 버렸다. 여기서 “지각이 곧 존재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버클리의 유명한 명제가 나왔다. 20세기 유명한 초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보다 보면 버클리의 의식이론의 영향이 곳곳에서 보인다. 데이비드 흄은 이 실체를 아예 지각의 다발(bundle) 정도로 생각했다. 그에게 실체는 합리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아무런 필연성이 없는 것이다. 합리론자들은 영혼을 하나의 불멸의 실체로 가정했지만, 데이비드 흄은 그런 불멸은 없고 단지 수많은 기능으로 역할하는 지각의 다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흄의 이야기를 그대로 밀고 나가면 인간 영혼의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주장하기가 어렵다. 흄의 주장은 결국 회의주의(Sceptism)로 이어지고 만다. 합리론이 ‘독단’에 빠졌다면 경험론은 뿌리치기 힘든 ‘회의’에 빠졌다. 경험론과 합리론은 서로 다른 사유 전통을 유지하고 있고, 서로 간에 대화도 거의 없었다. 칸트는 이렇게 상반된 사유의 다른 전통이 안고 있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를 자기 철학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경험론과 합리론의 각기 다른 모습에 대해 학생들도 수긍하는 눈치다. 내가 “이해가 됩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예.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라고 맞장구를 친다. 그들 역시 칸트가 처한 문제 상황이 충분히 공감된 것이다. 문제 상황을 이해하면 해결 방식도 찾을 수가 있다. 많은 경우 문제를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 상황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에는 이에 관한 유명한 예가 설명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숫 염소의 젖을 짜려고 하니까 다른 사람이 그 밑에 통을 받치더라는 것이다. 숫 염소에게서 젖이 나올 리도 만무지만 그것을 모르고 그 젖을 받겠다고 통을 받치는 사람은 또 무엇인가? 많은 경우 철학적 문제들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칸트가 풍자한 것이다. 20세기의 뛰어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상황을 빗대 ‘파리통 속의 파리’로 묘사한 바 있다. 부처도 인간의 실존을 고통으로 보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고통을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를 제일의 과제로 삼았다. 그가 말한 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는 고통의 원인과 처방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나온 연기(緣起)와 무아(無我)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중요한 것은 이 딜레마적인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푸는 해결 방식이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6회|6. 다시 강의실로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6회

6. 다시 강의실로 (1)

 

다시 돌아온 대학 생활은 예전과 달리 흥미진진했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먹기로 강의를 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 바깥의 생활을 경험하다가 돌아온 지금은 젊은 학생들에게 내 이야기를 마음대로 떠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내 시간의 대부분은 1주일 12시간이나 맡은 강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번 학기에는 내가 기획한 <논증과 비판>이 단과대 특성화 수업 3년 기한으로 채택이 됐다. 이 수업은 ‘형식 논리학’ 강의와 달리 논증(Argumentation)과 관련한 토론 수업이었다. 지금은 교수가 일방적으로 강의하던 시대를 벗어나 학생들 간에 문제를 가지고 토론 수업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과거의 이념 서클과 달리 토론 관련 학회가 학생들의 인기를 많이 끌었다. 이 토론 서클의 몇몇 학생들은 각종 형태의 토론 대회에 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뛰어난 학생들은 전국 대회 규모의 토론 대회에서 아예 내놓고 상금 사냥하러 다니기도 했다.

나는 일찍부터 난청으로 인해 청력이 좋지 않고, 젊은 시절 흡연도 많이 해서 목소리도 좋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우수한 학생들을 끌고서 논증과 토론 그리고 비판 중심의 강의를 무려 11년이나 끌어갔다. 이 강의는 2016년 내가 몽골의 H ICT 대학으로 옮겨갈 때까지 유지하다가 다른 강사에게 넘겨주었지만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강되고 말았다. 강의의 전반부는 주로 응용 논리와 논증 이론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이론 강의를 한 다음 후반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난상 토론을 유도했다. 이 수업을 통해 강의 교수인 나도 많이 배웠다. 논증을 특별히 좋아한 나 역시 이 수업을 통해 단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수업을 시작할 때 반드시 요구하는 것이 2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목소리 관련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소개서이다.

“여러분, 프리젠테이션이나 토론을 하는데 절대 필요한 것이 뭔 줄 아세요? 목소리예요. 맑고 깨끗한 목소리, 불륨이 풍부한 목소리가 중요하지요. 그래서 전문 토론가들이나 성악가들은 특별히 목소리 관련해서 훈련을 받기도 하지요. 한국의 판소리 명창들도 폭포 앞에서 목소리 훈련하는 걸 영화에서 본 적이 있지 않나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굳이 그런 곳을 갈 필요가 없어요. 그냥 나를 상대로 이야기할 때 한 톤을 높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자연스럽게 목소리 훈련을 하게 되고, 나는 여러분들의 말을 좀 더 잘 들을 수 있지요.”

토론 수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선생은 아마도 나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학생들은 나의 이런 말을 들으면 배꼽을 잡고 웃는다.

두 번째 요구사항은 자기 소개서이다. 강의 첫 째 주는 일종의 탐색 기간이라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강의로 옮겨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좌를 유지하려면 첫 주에 학생들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첫 주부터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요구했다. 내가 의도적으로 학생들의 수강 철회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토론 수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너무 많으면 곤란하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20명 안쪽이 적절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두 번째로 요구하는 과제는 3분 동안 지속되는 자기소개서다. 이것을 통해 나는 수강생의 정보와 수업에 대한 관심도를 파악할 수가 있고, 학생들에게는 이 자기소개서를 가지고 프리젠테이션을 유도함으로써 무대에 대한 공포를 없앨 수 있다. 오랫 동안 이 강좌를 이끈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자기소개서가 절대적으로 효과가 있다. 어떤 경영학과 여학생은 이로 인해 자신이 무대 공포증을 벗어났다고 하고, 나중에 로스쿨에 합격한 다른 학생은 첫 시간의 특별한 경험으로 인해 수업 내내 흥미로웠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이 토론 수업에서 적절히 짝을 지어 난상 토론을 유도했다. 이런 토론은 길거리 싸움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역량과 준비를 총 동원해 싸우는 것이고, 그 결과는 내가 혼자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업에 참석한 다른 모든 학생들의 평가 점수로 결정했다. 이렇게 토론에 임하는 학생들 자신에게 모든 문제를 일임하고 다른 학생들의 토론을 진지하게 평가를 하다 보니 학생들의 토론 역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점은 나만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인정한 결과이다. 내가 수많은 강의를 맡아 보았지만 이 <논증과 비판> 수업은 나름대로 가장 보람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5회|5. 인문학 수업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5회

5. 인문학 수업 (3)

이제 나에게 남은 학기는 마지막 한 학기다. 하지만 졸업하기 위해서는 2학년 때 F를 받은 형법 총론 수업을 재수강해야 했다.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는 내가 그 수업을 듣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다. 당시 형법 강의는 독일에서 학위를 받고 K 대에 있다가 Y 대로 옮긴 L 교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강의도 열심히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방학 때는 독일어 특강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제대로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는 것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나에게는 힘든 문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필이 꽂히면 만사를 제쳐 놓고 깊이 빠지지만, 관심이 떠나면 거의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중간고사는 우여곡절 끝에 보았다. 그런데 마지막 기말고사는 시험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광복관을 향해 올라가는 도중에 고시 공부하던 후배를 만났다. 그래서 그에게 대리 시험을 부탁했다. 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그가 대신 시험장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그날 밤 후배에게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형, 큰일 났어요.” 전화기 너머로 들여오는 후배 목소리가 많이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야?”

“오늘 형법 총론 시험을 대신 보다가 감독관한테 걸렸어요.”

“아니, 그게 어떻게 걸리냐?”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감독관으로 들어온 사람이 제가 기숙사에서 잘 아는 대학원 선배예요. 이 선배가 왜 공부 잘하는 내가 형법총론 수업을 듣느냐고 물었던 거예요. 내가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이 선배가 중간고사 답안지와 필체 대조를 한 거예요. 꼼짝없이 걸린 거지요.”

다른 강의도 아니고 형법 수업을 들으면서 대리 시험을 보게 했으니 완전히 빼도 박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

“일단 L 교수님 연구실로 오라고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교 선배였던 또 다른 L 교수가 부정 사실을 알고서 당장 교수회의를 열자고 설쳤다. 하지만 과목 담당인 L 교수가 일단 당사자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했다고 한다.

다음 날 부리나케 후배와 함께 L 교수 방으로 찾아갔다. 어떻게 변명을 할 수도 없는 상태다. 나도 나지만 고시 공부를 열심히 하던 후배는 무슨 잘못인가? 미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이 교수가 말을 했다.

 

“거두절미하고 두 학생 모두 자신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반성문을 제출하게.” 딱 그 한마디뿐이었다.

 

졸업 학기를 두고 반성문을 써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창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종의 확신 범의 신념인지 모른다. 나는 그때 나의 상황을 솔직하게 진술했다. 나의 관심은 이미 법학을 떠났다. 나는 앞으로 철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도저히 어쩔 수 없어 후배를 끌어들여 대리 시험을 보게 했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이런 식으로 장문의 반성문을 썼다. 이런 나의 솔직한 반성문이 주효했는지 L 교수는 더 이상 대리 시험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만약 또 다른 L 교수처럼 교수 회의를 열었더라면 어쩔 수 없이 최소 정학을 맞았을 것이고, 졸업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훨씬 나중에 L 교수를 교내 화장실에서 한 번 뵌 적이 있다. 그때 L 교수는 “철학 공부 재밌어?”라고 관심을 보였다. 두고 두고 고마운 분이다. 나는 이 일을 경험하면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로운가를 배운 셈이다. L 교수는 당신이 구제한 학생이 먼 미래에 한국의 철학계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대리 시험까지 보게 했지만, 참으로 나의 대학 생활은 험난했다. 1학년 때 당구에 빠져서 성적 불량으로 한 학년 유급하고, 그 이후로도 쌍권총을 수도 없이 찼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했는지 전혀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나의 행동은 너무나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그 당시 ‘경제원론’이 정법대 필수 과목이었는데, 내가 이 과목을 무려 3번이나 F를 받았다. 대학 1학년 1학기 때 정법대 학생 전체가 나중에 총장이 된 J 교수에게 ‘경제원론’ 수업을 들었다. 상대 대형 강의실에서 그 수업을 들었는데 처음에는 인상적인 J 교수의 수업을 열심히 듣긴 했다. 그런데 1교시 수업을 듣기도 힘들고, 그 수업이 끝나자마자 상경대 뒷편에 있는 종합관에서 법학통론 수업을 듣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언덕을 한 참 걸어 올라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종합관 5층에서 영어 수업을 들어야 했다. 몸이 불편한 내가 도저히 10분 안에 걸어서 이동하기 힘들어 수업을 자주 빼먹었다. 결국 J 교수에게 F를 받았고, 그다음 해에는 당시 유명한 경제 사학자인 C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이분이 그렇게 대단한 교수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C 교수는 수업 시간에 자신이 쓴 문고판 『한국경제사』를 가지고 리포트를 내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 리포트를 제출하지 않아서 F를 맞았다. 세 번 째는 노동 경제학을 하던 K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기말고사를 볼 때 내가 모르고 시험 시간이 끝날 때쯤 시험 장소로 들어간 것이다. 얼마나 시험 보기 싫었으면 시험 시간까지 잊었을까? 그것도 세 번 씩이나 재수강하는 수업을 말이다. 내가 원래 공간에 대한 지각 능력은 떨어져도 시간관념은 철저한 편이다. 그런데 한 시간 늦게 들어갔으니 변명하기도 힘들었다. 김 교수가 자기 연구실로 따라오라고 해서 그 연구실 안의 교수 옆에서 시험을 보았다. 당시 나는 시험공부보다는 컨닝 페이퍼만 잔뜩 준비해갔는데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수에게 리포트로 대신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교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 그래? 그럼 F지. 시험지 두고 그냥 나가게.”

 

변명할 것도 없이 또 F를 받은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과목을 세 번씩이나 F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경제학을 싫어한 사람도 아닌데 경제원론 한 과목에서 무려 세 번을 F 받았으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경제학과의 세 교수한테 한 마디로 돌림 빵을 당한 셈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모두가 나의 책임이었다. 운 좋게 졸업 학기 때 경제원론이 선택으로 바뀌는 바람에 간신히 졸업할 수가 있었다. 내가 대학 생활을 이런 상태로 보낸 것은 한편으로 최악의 경우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당시 나에게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 충만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그리고 어떤 규칙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겠다는 고집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성적표를 가지고 내가 법대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마냥 힘들었고, 나 자신을 부적응자로 낙인찍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철학과 대학원에 가보니까 나 못지않게 권총을 많이 찬 동기가 있었다. 그는 훨씬 뒤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다음 교수 임용 면접 시험에서 권총이 너무 많아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가 칸트 철학자로 유명한 김봉한이다. 타과에서는 흠집이 되는 것이 철학과에서는 인정될 수 있는 낭만적 시대였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4회|5. 인문학 수업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4회

5. 인문학 수업 (2)

 

E 여대 철학과 교수인 J 교수의 인식론 강의는 대단히 흥미로웠다. J 교수는 인식 이론에 관한 일반 강의를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시간 간단한 명제를 제시하고 그것에 관해 A4 용지 한 장 정도로 학생들이 답변서를 써오도록 했다. 그리고 학생들 답변서를 읽으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으로 수업 시간을 채웠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완전히 토론식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J 교수가 첫 시간에 내준 숙제는 “자살로서 복수를 할 수 있는가?”였다. 이에 관해서 찬반으로 답변을 쓰면 된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복수는 그것을 지켜볼 주체가 있어야 하는 데 자살한 이후에는 전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논지를 적은 것이다. 그런데 정교수는 이것을 보고 ‘Excellent!’라고 점수를 주었다. 내가 이 떡밥을 물고서 생각한 바가 있다. “아, 나는 정말 철학이 맞는 거 같아.” 나중에 학위를 받고 우연히 학회에서 J 교수를 만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거진 30년 전의 일이라 기억을 못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J 교수가 이끈 수업은 내가 철학의 문제의식을 탐구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인문학에 관심갖는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문사철과 같은 학문들이 나의 관심과 체질에도 맞는 느낌이다. 문과대를 드나들면서 문과대의 전형적인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기도 했다. 그들과 술도 많이 마시고 토론도 많이 하면서 분과대 분위기에 서서히 적응해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진로와 관련해 결정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계속 공부하려면 대학원에 진학을 해야 한다. 일단 전공과 관련해서도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 아니면 점점 흥미를 갖게 된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내가 집에서 대학원 학비를 보조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런 상태에서 대학원 입학 시험에 합격한다하더라도 어떻게 입학금과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다.

1982년에 접어들자 대학가는 연일 데모가 일어났고, 대학가나 그 주변은 매캐한 체루 가스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등교를 할 때는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호신용 무기를 들고 교문에서 짭새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대학은 이제 매일같이 전투를 치르는 전장(戰場)과도 같았다. 학생들의 마음도 점점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장한 짭새들이 최루탄을 터트리면서 학교로 밀고 들어오고, 그것을 막기 위해 돌팔매질을 할 때는 전쟁이 따로 없었다. 매일 그런 전투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심리 상태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강의는 수시로 휴강이 이루어져서 한 학기 제대로 수업을 한 기억이 요원할 정도다. 그 와중에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스타디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세미나는 학생들의 일상적인 공부 방식이었다. 70년대에는 주로 학내 이념 서클에서 진행되었던 세미나가 80년 대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일상적인 공부 방식이었다. 80년대의 의식화 작업은 이렇게 선후배 동료 간에 이루어지는 세미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끊임없이 전투에 임할 전사를 배출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한국의 70-80년대의 학습 방식은 세계의 투쟁사에서도 귀감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학생들의 학습에 대한 욕구는 대단했다. 워낙 책이 없었던 시대라 책에 대한 욕구도 컸다. 어쩌다 용돈이라도 생기면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구입하곤 했다. 집의 책장에 책이 한 권 두 권 쌓이는 것을 보는 것도 낙이었고 자부심도 컸다. 그 당시는 단순히 욕구가 아니라 문제의식도 컸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권리인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가, 왜 한국 사회는 이 모양 이 꼴인가,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대학생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등으로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의식들이다. 물론 이런 시대 현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노는 데 열중하는 낭만파나 아니면 출세가 보장된 고시 공부에 몰두하는 고시파들도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학생들은 회색분자로 치부되곤 했지만, 그들 역시 시대 문제로 인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 당시 치열한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경우도 많았다. 한 마디로 요즘 학생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공감하기도 힘든 대학 생활이었다. 단순 비교가 쉽지 않겠지만,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 비하면 요즘 학생들은 너무 나약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3회|5. 인문학 수업 (1)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3회

5. 인문학 수업 (1)

 

암자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방학도 끝나가기 때문에 나는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랫동안 수염을 깍지 않아서 턱수염이 많이 자랐다. 산에서 있다 보니 다소 거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간에서 다소 달라진 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로 복귀하자마자 2학기 등록을 마치고 수강 신청할 때 나는 법대 과목 보다는 주로 문과대와 신과대 과목으로 수강표를 짰다. 이제 심적으로도 법대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문과대에서는 영문과의 O 교수의 햄릿 강의를 신청했고, 사학과의 K 교수의 농업 경제사 강의도 신청을 했다. 사회학과에는 당시 새로 부임한 J 교수 수업을 신청했다. J 교수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종교 사회학자로서 미국 대학 내 지명도가 높았다. 철학과 과목도 하나 신청했다. 철학과에서는 P 교수가 안식년이기 때문에 이화여대의 J 교수가 대신 강의하는 인식론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신과대의 유명한 H 교수 강의는 그 이후로도 한 3학기 정도 들을 정도로 열심히 수강했다. 외부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H 교수는 Y대가 자랑하는 천재였다. H 교수는 원래 교회사 전공이지만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사고와 복잡한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도식화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항상 만면에 웃음기가 돌면서 거침없는 입담으로 강의하던 H 교수의 수업을 제대로 이해는 못했어도 지적으로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했다.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참으로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정법대 4년을 다니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유일하게 정치학과의 L 교수 강의를 들을 때 한 번 경험했을 뿐이다. 긴 머리를 뒤로 넘기는 오드리 햅번 흉내를 내면서 “권력은 도취적이다.”(Power is intoxical, Acton경)이라고 외치던 L 교수의 정치학 강의가 그나마 나의 지적 욕구를 채워 주었을 뿐이다. 그 당시 법대 교수들은 각기 그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던 교수들이었지만 내가 워낙 법대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반면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행정관으로 바뀐 낡은 문과대 건물은 대부분 소강의실로 이루어져 있다. 기껏해야 열 댓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덕분에 선생과 학생들 간의 공간적 거리가 가깝고, 학생들 상호 간에도 유대가 적지 않았다. 그 공간에는 대학의 낭만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좋은 인문적 공간을 행정 공간으로 바꾸어 버린 인간들이 지금 대학을 운영하고 있으니 대학이 기업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문과대의 유명 교수들의 강의를 들었다. 앞서 언급한 사학과의 K 교수는 선비풍의 조용한 용모와 다르게 강의는 대단히 열정적으로 했다. 조선에도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유물사관에 입각해 설명하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나에게는 K 교수가 학생들의 수많은 질문에 대해 일일이 답변해주는 친절한 면모도 인상적이었다. 국문과에서는 당시 강사로 출강하던 『오발탄』의 작가 이범선이 ‘창작론’을 강의했다. 당시 나는 창작에 내가 전혀 소질이 없다고 생각해서 중도에 포기했는데 두고두고 후회했다. 사회학과에 새로 부임한 J 교수의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그는 1973년에 출간된 미국 사회학자 다니엘 벨의 The Coming of Post-Industrial Society 1973 을 교재로 삼아 강의했다. 지금은 다니엘 벨의 이론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지지만 당시 한국은 산업화 단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단계에서 벌어지는 독재와 자유, 인권과 같은 가치들을 둘러싸고 갈등이 첨예한 사회였다. 특히 1980년도에 일어난 광주사태는 많은 대학생들에게 트라우마처럼 작용했다. 반면 테크놀로지의 환상을 자극하는 후기 산업 사회 이론은 우리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아서 수업 시간 내내 그 선생하고 설전을 많이 벌였다.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대학자에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까불었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그 당시 나를 위시한 학부생들의 문제의식은 대단했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은 산업 사회에서 후기 산업 사회로 넘어가는 사회 발전론을 설명하고, 지식과 기술이 후기 산업 사회의 계급 구조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기술했다. 더 나아가서 이런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학적 개념과 사회 계획에 관심을 가지고, 궁극에는 누가 후기 산업 사회를 지배할 것인가라는, 지금 보면 대단히 상식적일 만큼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도래할 미래를 전망한 책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그 책은 버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양키들 이론 정도로 뿐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그 책이 한국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은 아닐까요? 왜 우리가 이책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하는 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남이 차려 놓은 상에 앉아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당돌한 형국이다. 이런 도전적인 자세를 보고 J교수는 혀를 끌끌 찬다. 이건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쇼비니스트의 행태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의 내용은 선진국 미국에서 대단히 호평을 받고 있어요. 산업 사회의 현실과 도래할 탈 산업 사회에 대한 전망에서 이 책만한 분석이 없지요. 지금 있는 현실만이 아니라 사회 발전의 전망에서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 대해 연구하는 이론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선생님 말씀과 달리 현실 적합성이 없다고 한다면 한낱 공염불이 아닐까요? 한국의 현실을 보세요. 한국은 1960년대 세계 최빈국의 상황을 벗어나 수출 입국에 돌입하면서 저임금 과노동으로 엄청 시달리고 있지요. 가까운 구로 공단에 한 번 가보세요. 후기 산업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뜬구름 잡는 환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한국은 유신 독재를 거치면서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했고, 80년대에 들어오자마자 광주에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한 경험도 안고 있습니다. 이런 한국적 현실에서 명색이 사회학을 한다고 하면서 선진이론이라는 명목으로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과연 그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나의 당돌한 이야기에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J 교수도 이 상황을 숙지하고 있었고, 이런 나를 꺽어 놓지 않으면 수업 시간 내내 시달릴지 모른다고 예감을 했을 것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2회|4. 선택과 탐색 (4)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2회

  1. 선택과 탐색 (4)

 

“그러나 당신이 갈구하는 사랑이 무엇이오? 나의 가슴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당신이 찾고 있는 그 사랑의 샘의 내용물이오. 당신은 정녕 진실한 사랑을 찾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순수한 사랑이 아니오. 내 눈에 비치는 것은 감각적이며 말초적인 언어의 유희에 당신의 순수한 혼을 흥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소. 왜 사랑을 세속적인 가치에 팔아 버리려고 하오? 보다 나은 대상, 보다 나은 사랑, 내가 당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걸고서 이야기하되 결코 사랑에는 보다 나은 것이라고는 없다고 맹세하오. 사랑은 그 자체이오. 거기에는 조건이 붙을 수가 없소. 대가를 바랄 수도 없는 것이오. 더욱이 경제적인 가치에 사랑을 결부시키려고 한다면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오. 황금의 신과의 교제는 정말이지 사랑의 탈을 가장한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짓거리요. 사정이 이러할진대 왜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그러한 것들과 결부시키려고 하오. 안타깝소.”

사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그녀와 나는 어울리기 쉽지 않은 배경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회사에 들어갔다. 워낙 성격이 쾌활하고 사교성이 많아서 회사에서도 바로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70-80년대 한국의 건설 붐을 주도하던 건설 회사에 다녔다.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있으니 그녀가 나에게 눈을 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빨리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편지는 단순히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고통은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이런 고통으로 인해 실존의 위기를 느끼면 더욱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당신으로 인하여 나는 지금 커다란 정신적인 진통을 겪고 있소. 내가 지녀 왔던 철학의 근본마저 뒤흔들리고 있소. ‘전체는 진리이다’는 헤겔의 말과 시민 사회의 주축 가치는 화폐의 신이 지배하는 물신주의임을 역설한 마르크스의 말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나의 머리를 혼돈의 나락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소. 일찍이 내가 헤겔에 접하기 전에 나는 어떤 계기로 인하여 인간 -개인-의 삶은 전체적 삶 속에서 비로소 조화와 생명을 얻는 것이라 확신했소. 해서 이러한 전체적 삶을 통한 인간 해방의 실현을 위하여 기꺼이 나의 작은 몸을 바치리라 결심했소. 불교에서 말하는 소신성불(燒燼成佛),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삶이며 인생관이라고 확신했소. 그러기에 나는 헤겔 철학에 접하는 순간 지적 안식처를 발견했다고 느낀 것이고 곧 마르크스의 실천 철학에 매혹 당한 것이오.”

초보적일지 몰라도 당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생각을 굳혔고, 새로 공부를 시작한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지난 1년 동안 유치장 동기들과 해온 세미나를 통해 상당 부분 강화되었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내가 본격적으로 철학을 하기 시작하면서 수행자의 화두처럼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생각의 알파이자 오메가 역할을 했다. 나의 철학적 캐리어는 바로 헤겔과 마르크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철학과 감성적으로 느끼는 철학 간에는 차이가 없을 수 없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편지글에서 사랑에 좌절한 젊은 청년의 감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요소는 개인 대 전체, 고난과 행복, 육체와 영혼, 차안과 피안, 투쟁과 승리등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소. 예컨대 일 개인을 들추어 본다 할지라도 그에게 작용하는 변수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 심리적 등의 수다한 것이 있소. 전체를 사상하고 단지 심리적 측면을 고찰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그 오묘하고 미묘한 움직임이란 우리를 매번 당혹스럽게 만드오. 더욱이 개인의 활동 및 사상의 흐름이 경제적으로 규정 받는 영역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전체와 관련이 커지고 동시에 그 역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미분화된 심리적 고독이 증대되어 가는 것 등은 단순히 헤겔적 사유 양식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것이오. ‘전체는 진리이다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은 영원히 개인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인 절대 고립의 오뇌가 현대인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오. 한 인간의 사회 경제적인 규정 조건을 파악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이상의 심리적 정신적 소외감의 해결을 위한 진지한 노력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현재의 나의 생각으로는 전체와 관련시킨 인간의 유적 본질의 실현이라는 마르크스적 접근 방식으로는 어려운 것이라 믿어지오. 정말이지 실존 상황에서 느끼는 개인의 자기의식의 분열은 법증법적 운동에서 보여지는 자기의식의 지양이라는 언어의 유희로서 위안 받을 수 없는 괴로운 것이오. 더욱이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느끼는 괴로움도 아니기에 그것이 더욱더 가중되는 것인가 보오. 케어케고르가 말하는 신 앞에서 선 단독자의 처절한 사투라고나 할까,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메카니즘의 차가운 환경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이 물신주의를 헤어나지 못하고 좌절하는 아픈 경험의 진상이오. 이러할진대 우리가 어찌 절대, 전체라는 거대한 언어를 들먹이면서 유토피아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것이오.”

“전체는 진리이다.”는 헤겔이 그의 주저인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사용한 유명한 명제이다. 반면 이와 완전히 대조되는 ‘신 앞에서 선 단독자’라는 명제는 키어케고르의 잘 알려진 명제이다. 그 둘은 전체와 개인을 각각 대변하는 사상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소나기가 밤새 내리던 산속의 암자에서 신앙 고백을 하듯 머리는 헤겔을 따르지만 마음은 키어케고어를 따른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 구절은 이런 감성을 전도서의 구절을 끌어들여 더욱 확인시켜 준다.

“하물며 당신의 사랑도 그러하니 나의 마음은 심히 안타깝소.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랑도 헛되고 진리도 헛된 것이니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이러다가 허무주의의 나락에 빠지지 않을까 두렵소. 당신이여, 이제 나를 잡아 주오.”

한참 그녀를 향한 장문의 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새 비도 그치고 하얗게 날이 새고 있었다. 우거진 숲에서는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들리고 있었다. 내 머리도 점점 더 맑아지고 있었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1회|4. 선택과 탐색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1회

  1. 선택과 탐색 (3)

 

“나요, 이형이요.

놀랬죠?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편지일 테니까. 그렇소, 나 역시 사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쓰고자 한 편지가 아니라 다소 얼떨떨하오. 그러나 왠지 당신에게 이 편지를 꼭 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소. 어제부터 몸살이 나서 그런지 오한이 나고 온통 몸이 쓰시오. 아무도 돌봐줄 사람 없는 외로운 산사에서 몸이 아프다는 것은 정말이지 육체적인 고통 이상으로 정신적인 고통이기도 하오. 그래서 어제는 낮잠을 무려 네 시간이나 잤소. 어제는 많은 꿈이 유달리 선명하게 기억되었소. 그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당신이 나를 힐책할 때의 고통이란…그 꿈 내용은 대강 이렇소. X-mas를 전후로 해서 모두들 즐겁게 놀 때 내가 당신 또래들 모임에 나타났소. 처음 박모 군을 보고 그리고 송모 군도 보았소. 그러나 당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불현듯 자리를 피한 것이오.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오. 그러나 황급히 돌아서 나오는 나에게 당신이 수도 없는 욕을 해대는 것이오. 왜 여기까지 와서 자기도 만나지 않고 돌아가느냐, 비겁하다 등 당신 특유의 감정이 고양되었을 때 내뱉는 말은 너무도 모욕적이어서 참기 어려웠소.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고통스러운 육체와 더불어 뇌리에 선명히 박히는 당신의 기억이 무엇인가 이 편지를 쓰도록 한 것이오. 그리고 당신과 나 사이에 분명 정리할 것이 있다면 정리해야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편지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흔히들 꿈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하오. 꿈속에서 기피하는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현실 가운데에서 그러하기 때문이오. 언제부터인가 내가 당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자 당신은 나를 기피하기 시작했소. 처음 당신을 만나는 순간부터 당신은 나에게 천사처럼 귀여운 우상이 되었소. 그러기를 무려 반년, 내가 당신에게 쏟았던 지순 지고한 정열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름다운 것이었소. 당신도 나를 무척이나 따랐고 또한 그렇게 행동했소. 그러나 이렇게 꿈속에서 부유하는 사랑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리 오래가지 못했소. 지난 해 여름, 나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가득 채워지던 때에 당신은 나의 감정을 공감하기는커녕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나에게 비쳤소. 당신은 가벼이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허망함이란, 자유가 차단되었을 때의 괴로움보다 더한 하늘이 무너지던 허탈함이었소. 그 뒤 뭐라고 할까. 당신이란 여자에게는 더 이상 깊이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오. 당신이란 여자, 참으로 무서운 여자요. 남자의 혼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리는 악녀요.”

“당신을 향한 불타는 사모의 정이 차츰 식어 들자 당신의 모습도 달라지더군요. 아름답고 귀여운 작은 천사이던 예전의 당신은 이제 점차로 하나의 평범한 여자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요. 아, 인간의 눈의 간사함이란 정말 모를 것이오. 한 얼굴이 지닌 두 가지 모습이 이처럼 천양지차로 변하다니, 우리는 항시 사물의 외관에서 비롯되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가련한 미물인가 보오. 그러나 슬퍼하지는 않소.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인지도 모르오. 당신이 언젠가 말하지 않았소? 당신에 대한 나의 기대가 깨질까 당신도 두렵다고. 비록 기대가 깨어지는 순간은 두렵고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그러한 고통은 서로를 위해서도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라고 생각하오. 너무 잔인한 말 이른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동안 미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소. 또한 이것을 아는 게 두려워서 더욱더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를 일이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 비로소 맑은 정신을 지니고 당신을 직시했을 때, 당신의 모습은 이전의 천사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여자였소. 이제는 좀더 정돈된 마음가짐으로 당신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더욱이 예전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애정을 품을 수 있었소.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의 태양이오. 해산의 난고를 겪고 난 후의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당신을 내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신이 들었소.”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은 상당히 순수하고 순진했다. 여자 경험이 거의 없었던 나에게 처음 청년회 친교 모임에서 다가온 그녀의 인상은 아주 강렬했다. 그날 촛불만 켠 상태라 내 표정을 들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녀를 볼 때면 나의 마음은 한없이 설레고 기뻤다. 그런데 경찰서 유치장에 와서 그녀가 남의 일처럼 떠들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녀와 나 사이를 높은 절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 다른 이들에게 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혹시 착각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이성적으로 그녀를 판단하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편지는 바로 이런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큐피드의 화살은 한 개로는 부족한가 보오. 당신을 향한 나의 화살로는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크게 밑도오. 당신이 나를 피하기 시작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소. 그것이 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듯한 아픔을 안겨줄 때마다 나는 나에게 잘못을 되돌리면서 애써 태연해지려고 했소. 당신에 대한 나의 정념도 순화시켜 절제하고 당신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려고 했소. 올해도 거진 반년을 넘어섰지만 특히나 올해는 당신에게 연락하는 회수도 크게 자제했소. 당신도 아마 괴이하게 생각했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 것이오. 당신에게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를 부여할지라도, 당신은 반드시 내게 돌아올 지혜로운 여자라고 나는 믿었던 것이오. 그러나 언젠가 당신이 내게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말했던 것처럼 당신은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있었소. 전혀 기대와는 어긋나게 당신은 무분별할 정도로 당신의 사랑만 갈구하고, 목마른 사슴처럼 사랑의 샘만 찾아 헤메이고 있는 듯하오. 정말 안타깝소. 당신이 어찌 나를 버릴 수 있소. 나는 당신에게 나의 순수한 혼을 바쳤소. 당신도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소. 언젠가 당신도 내가 한 것처럼 나에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