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에 한 번씩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필자 이현이 롹음악을 중심으로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어낸다.

연말 특집 – 한국 인디씬을 위하여 [악(樂)인열전]⑤

연말 특집 – 한국 인디씬을 위하여

 

이 현 (건국대학교 철학과)

 

항상 외국 아티스트를 소개하고 공부하면서, 한국 아티스트들을 소개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다. 그런데 뭐랄까. 나에게 있어서 한국 인디씬은 참 아픈 손가락이다. 실망과 기대가 공존하고 있다라고 해야하나. 개인적으로 2000년대부터 다시 한국 인디씬이 대중들에게 주목 받고 장기하, 십센치, 혁오 등이 대중음악에 안착한 것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진성 덕후들은 난색을 보이겠지만, 이러한 성공 사례는 대중음악 전반의 퀄리티를 높여주는 중요한 요소이고 이러한 성공은 인디씬 활성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사례가 한편으로는 인디씬의 개성을 사라지게 만들고 흔히 ‘돈이 되는 인디’가 생겨나면서, 예전에 비하면 인디의 중요한 핵심인 ‘다양성’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나의 기대가 지나치게 큰 걸까? 물론 어느 시대에나 주류 흐름이라는 것이 있고, 인디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흐름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흐름 속에서도 자기의 색을 찾고 차별화를 줄 수 있는 음악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아쉬울 뿐이다.

 

좋은 인디 음악을 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좋은 인디음악이란 무엇일까? 완벽한 사운드 메이킹? 멋있는 가사 스토리텔링? 이러한 기술적인 부분들은 메이저 음악을 이길 수도 없으며, 이길 필요도 없다. 이미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어버린 ‘음악’의 조류 속에서 한낫 물고기 한 마리가 파도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수는 적지만 그 파도 속에서 힘차게 자기의 길을 해엄치는 ‘대어’들이 있고, 우리는 그 대어를 낚을 때 월척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현재 인디씬에 머물러 있는 아티스트들을 응원하고 있다. 인디씬의 침체는 아티스트들의 역량들을 떠나서 환경적으로 너무나 열악하고, 음원 수익의 불공정한 구조가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솔직히 한국에 인디씬의 활성화를 떠나서, 살아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한국 인디씬에서 꾸준히 자신들의 색을 찾고 있는 아티스트들은 분명히 있다. 연말도 됐으니, 이런 반골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음악 덕후로서 앞으로 주목할 만한 한국 아티스트들 소개하고자한다.

 

O.O.O(오오오)

이미지 출처, O.O.O 공식 페이스북

 

2018년 11월에 첫 정규앨범을 낸 4인조 밴드이다. 이들의 음악세계는 한 외로운 개인의 시선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의 전 미니앨범들인 [HOME] [CLOSET], [GARDEN]은 한 개인의 우울한 내면에 집중했다. 그들의 섬세하고 몽환적인 사운드는 갇혀있는 한 개인의 감정의 미묘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앨범 제목들은 ‘집’, ‘정원’과 같이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들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내면적인 공간이며, 떠나고 싶은 곳이었던 HOME에서부터 떠나기 전 마지막 준비를 하는 곳 CLOSET. 그리고 집 밖으로 나왔으나 완전한 밖은 아닌, 안이라고도 밖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간, 그 경계에 있는 GARDEN에 나왔고, 정규앨범 [PLAYGROUND]에 이르면서, 외부와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외로운 ‘나’와 ‘타인’ 사이에 있는 ‘우리’라는 흐름을 타고 나아가고 있다.

 

O.O.O – [PLAYGROUND]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kye2HmUFurYW0LSa0KYu0rFKDqPZGP7tl

 

O.O.O – [GARDEN]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lNjNRswUtyxAX7ImrpC61Z3SEfshxrUD4

 

O.O.O – 푸른달

https://youtu.be/b7fkx4VZuXg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이미지출처, 한국대중음악상

 

2018년부터 개최된 <서울블루스페스티벌>을 기점으로 재야의 블루스 뮤지션들이 참여하며 한국 블루스의 기준을 바꿔가고 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뮤지션이 ‘최항석과 부기몬스터’이다. 2019년 ‘난 뚱뚱해’로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부분’ 후보에 오르면서 한국 블루스 부활의 신호탄을 날렸다. 그가 만들어가고 있는 블루스는 기존 미국정서에 벗어나 예스러운 한국 정서의 블루스이다. 유머와 위트 대신 해학과 풍자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흔히 ‘아재감성’이 물씬 풍긴다. 블루스의 핵심적인 정서라면 특유의 끈적함인데, 그것의 근원은 멜랑꼴리한 감정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멜랑꼴리는 한국인들이 느끼기 힘든 정서이고 결국 블루스는 미국에서만 먹히는 음악인가 싶었다. 그러나 최항석은 멜랑꼴리 대신 ‘한’으로 끈적임을 만들어 벌렸다. 블루스하고 어울리는 것은 진한 커피였지만, 최항석에게 어울리는 것은 뜨끈한 국밥이다. 한국 블루스가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 <난 뚱뚱해>

https://youtu.be/QblUiRdp3Ek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 [Good man but Blues man]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ZnZnYMM0GS7XqM2Vbm3soRTp49dFKZq_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x 엄인호 – <푸들푸들 블루스>

https://youtu.be/VBKjQAz1kwc

 

 

보수동쿨러

이미지 출처, 포크라노스

 

이 밴드는 2019년 최고의 발견이자, 극찬이 전혀 아깝지 않은 밴드이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인디 밴드로서 그들은 쟁글 팝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복고적이면서 세련된 사운드는 익숙하면서 새롭다. 기존 독법에 새로운 해석은 그들의 음악관을 잘 보여준다. 몽환적이면서 동시에 명료한 문제작 <3080>의 가사처럼, “삶은 누구에게나 실험이고 중독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실험은 경계를 부풀리는 새로움”을 전해줄 것이다. 이 가사말은 그들의 음악을 대변하고 있다. 익숙함에 멀어지고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익숙한 독법 속에서 그 익숙함을 벗어나고자 한다. 일상은 늘 반복되지만 영원하지 않는 것처럼, 익숙함은 영원할거 같지만 영원하지 않다. 그들의 음악은 익숙한 장르 안에서 이질적인 부분은 계속 끄집어낸다. 그렇기에 그들의 음악은 익숙하면서 이질적인 모순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규정되지 않는, 구분하지 않는 끝없는 감정의 재생산”이다.

 

보수동쿨러 – <3080>

https://youtu.be/WHhbac6PVqs

 

보수동쿨러 – <목화>

https://youtu.be/wyJcV_V82Bw

 

보수동쿨러 – <죽여줘>

https://youtu.be/FwjWwRCA860

 

인디의 가치는 무엇인가? 사실 함부로 독단할 수 없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정의함 그 자체가 인디에게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음악덕후로서 인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상 속에서 나에게 새로움을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투박하지만 신선한 충격.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에게 너무나도 잘 맞는 음악. 나에게 너무나도 와 닿는 음악. 그것이 인디의 매력이 아닐까.

연말을 기념할 당신만의 음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이다.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지만 좋은 노래를 찾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으니 말이다. 세상에는 들을 수 있는 노래는 많지만 나에게 다가오고 와 닿는 노래는 쉽게 오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

 

간지나는 사춘기 찌질이들의 탄생/소외된 사춘기적 주체 – 더 스미스 [악(樂)인열전]④

간지나는 사춘기 찌질이들의 탄생/소외된 사춘기적 주체 – 더 스미스

 

이 현(건국대학교 철학과)

 

출처 : The Smiths, back in the glory days (Picture: Stills Press Agency/REX/Shutterstock) Read more: https://metro.co.uk/2017/09/21/the-smiths-30-years-since-the-split-and-still-the-best-british-band-ever-6904839/?ito=cbshare Twitter: https://twitter.com/MetroUK | Facebook: https://www.facebook.com/MetroUK/

 

비틀즈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영국 밴드는 더 스미스(The Smiths)이다. 스미스는 오늘날 브릿팝(BritPop)이라고 정의 내려지는 장르의 아버지격이 되는 밴드이다. 오늘날 ‘락’을 논하면서 ‘브릿팝’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키델릭과 함께 브릿팝은 좋든 싫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요즘 인디씬의 주류는 브릿팝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지 음악적 스타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브릿팝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 감성이 (어쩌면 음악적 스타일보다) 후대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줬다.

더 스미스는 비록 활동기간 동안 영국 이외에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블러나 오아시스로 대표되는 브릿팝 열풍 속에서, 모두들 자신들이 제 2의 스미스라고 자처했으며, ‘스미스’라는 망령은 다시 주위를 맴돌고 있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대중들에게 주목 받고 있는 인디 밴드들인 ‘잔나비’나 ‘새소년’ 역시 브릿팝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브릿팝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브릿팝은 오늘날까 힘을 가지고 있는가? 어쩌면 ‘브릿팝’스러움은 ‘스미스’스러움의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브릿팝의 힘은 ‘스미스’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albumism

1984년 그들의 데뷔앨범 [The Smiths]가 발표될 때만 해도 스미스가 이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스미스의 최고의 앨범을 한 장의 앨범을 뽑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규 3집 음반 [The Queen Is Dead](1986)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밴드 스미스의 힘’은 오히려 [The Smiths]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앨범의 완성도 때문도, 사춘기 정서로 가득한 때문도 아니다. [The Smiths]의 힘은 당시 주류 팝으로부터 소외 되어왔던 ‘침묵한 다수’가 수면 위로 등장한 첫 시점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복고적 측면이 강하다. 그들이 데뷔한 80년대는 락의 인기가 예전만큼 좋지 못했고, 신디의 발전으로 기타를 베이스로 한 전통적인 락 사운드가 외면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니 마(Johnny Marr)의 징글쟁글(jingle-jangle)1) 주법은 기타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스미스의 노래들은 대체로 보컬이 아닌 기타를 통해 곡의 맬로디를 만들어간다. 그들의 작곡 방식은 먼저 기타로 주선율을 잡고 그 위에 보컬을 입히는 방식이다. 결국 노래이기 이전에 연주곡으로 완성된 이들의 곡에서 모리세이의 보컬은 상당히 제한된다. 하지만 모리세이의 보컬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 보컬의 테크닉을 심하게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모리세이의 보컬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덕분에 그의 혀짧은 발음과 중성적인 목소리 톤은 성숙하지 않은 유아적인 웅얼거림으로 표출된다. 찰랑거리고 밝은 기타 톤과, 아이의 투정 같은 음색, 그리고 문학적이고 자기비하적인 가사는 모리세이를 ‘사춘기적 주체’로 재탄생한다.

모리세이의 ‘사춘기적 주체’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소외된 자아’를 전면으로 세운다. [The Smiths]의 화자는 성적으로 미숙한 사춘기 남자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Reel Around the Fountain”, “Pretty Girls Make Graves”)으로 대변된다. 이는 타자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에 기인한다. 이는 80년대 영국의 분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영국은 한 순간에 추락하게 되고, 새로운 질서를 마주하게 된 영국의 두려움이 이 곡에서 반영된다. 이는 자신의 자책감으로 드러낸다(“You’ve Got Everything Now”, “Still Ill”). 그리고 이 자책감은 완성되지 못한 나 자신(성인)에 대한 자책감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혼자 살기 힘든 이 더러운 세상에 대한 비난과 조소(“You’ve Got Everything Now”, “This Charming Man”),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이에 대한 원망, 내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세상에 대한 불만(“What Difference Does It Make?”, “I Don’t Owe You Anything”),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비하(“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를 통해 자신의 소외감을 표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이러한 더러운 세상을 한편으로 긍정하며, 누군가 자신을 이해하고 함께 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Hands in Glove”). 이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른이 될 수 없었던 아이들’에 대한 ‘동일시’에 이른다(“Suffer Little Children”). 사춘기적 주체는 이 ‘동일시’에서 등장한다. 물론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에 대한 동일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자신 안에 변하지 않는 ‘유아성’에 대한 동일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출처 : UNCUT

 

라캉이 말했듯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자아는 주체로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계 진입하면서 인간은 자신을 ‘언어’로서 드러내면서 동시에 (존재적 측면에서) 언어 뒤에 숨는다. (아마 라캉이라면, 정신병으로 규정하겠지만) 유아적 상태를 주체에 자리에 놓는다. 성인도 아니고 유아도 아닌 상태, 사춘기적 주체는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잃어버린 존재를 복원하는 또다른 매듭으로서 기능한다. 사춘기적 주체는 원초적 자아의 주체화이며, 나의 원초적인 모습, 남들이 보기에 찌질한 모습, 숨기고 싶은 모습을 오히려 드러낸다. 가식을 던져버리는 행위, 자기비하를 당당하게 드러내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냄은 ‘비하로서 긍정함’이다. 이러한 ‘비관적 긍정’은 스미스 이후 블러, 오아시스로 이어진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는 성인적 숨김을 버리고 무분별한 사춘기적 드러냄은 브릿팝의 당당함의 시원이 된다.

스미스의 앨범은 ‘숨어있던 어른이 영혼’들을 위한 앨범이다. ‘어른’들은 스미스(와 모리시에의 가사)를 철부지들의 투정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미성숙’의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던, ‘사춘기’라는 시기를 그자체로 삶의 한 형태임을, 그리고 그 시기의 예민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함을 당당히 선언한다. 사춘기의 변덕스러움은 성인이 되면서 자제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변덕스러운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즐겁다고 우울해지는 감정은 우리와 늘 함께한다. 삶에 대한 긍정과 비관이라는 이중성은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사춘기이다. 그럼으로써 스미스의 음악은 ‘누구나 겪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시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한 사춘기를 살고 있을지도.

 

The Smiths – The Smiths, 1984, Full Album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lKjfbzZGdkZf-GN9RcAFVQFkPaWn9At

 

The Smiths – The Queen Is Dead, 1986, Full Album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lKjfbzZGdnN_prwsxZUf745SVUz88MX


1)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서 징글쟁글이라고 부른다.

“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 소리의 가능 조건으로서 침묵, 로버트 프립에 대한 단상 [악(樂)인열전]③

 

“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 소리의 가능 조건으로서 침묵, 로버트 프립에 대한 단상

 

이 현(건국대학교 철학과)

 

“고요함은 소리의 부재다. 침묵은 침묵의 존재다.”

– 로버트 프립 Robert Fripp

 

1951년 현대 음악의 선구자인 존 케이지는 하버드 대학의 무향실을 간 적이 있었다. 그는 무향실을 다녀오고, 이렇게 썼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두 개의 소리를 들었다. 공학자한테 이 이야기를 하자 그는 나에게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이고, 낮은 것은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존 케이지는 완전한 무음 상태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무음’이 아니라 ‘자신의 소리’였다. 들뢰즈가 “회화가 얼굴의 탈영토화이듯 음악은 목소리의 탈영토화”라고 말했듯이, 음악은 언어(라는 문법적 규칙)를 벗어난 음-기계들 생산의 과정이고, 음의 배치이다. 완전한 무음은 없다. 그때 존 케이지는 이렇게 선언한다. “음악의 종말은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존재의 원초적인 소리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일정한 반복을 유지하고 심장 박동수는 최초의 리듬이다. 그 소리의 근원은 지상의 원소들의 소리이며, 리비도의 ‘울음소리’는 일체 세계의 울림이다. 그리고 이 울림은 존재 그 자체이다. 존 케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소리는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그것은 계속 있을 것이다. 음악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절대적인 무음은 없다는 발견이 존 케이지로 하여금 〈4분 33초〉를 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완전한 무음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한다. 클래식 공연이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처럼, 모두가 소리를 내지 않는 순간, 그때 우리는 침묵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침묵의 순간에도 미묘한 잔음들은 청각기관을 자극하고 있다. 소리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존재의 필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침묵이라고 말하는가? 우리에게 침묵이란 없다. 단지 우리는 ‘침묵을 듣는 것’이다. 침묵도 하나의 소리인데, 비-소리로서의 소리이고, 우리로 하여금 소리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소리이다. 침묵이 없다면 음악도 없다. 와인을 담아 둘 와인잔이 필요하듯, 침묵은 소리를 받아주는 그릇이고, 음악을 가능케 해주는 또 다른 소리이다.

갑자기 존 케이지의 이야기가 왜 나왔을까? 존 케이지의 일화는 침묵 역시 음악의 영역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침묵은 음악에 있어서 우연성에 해당한다. 클래식 공연이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을 상상해보자. 누군가는 기침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움직일 것이며, 이 모든 행동들은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소리들은 연주자가 제어할 수 없는 우연적인 것들이다. 연주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주자는 연주를 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심호흡을 하며, 소리를 만들고 있다. 연주자가 내고 있는 이 소리들은 연주자의 소리이지만 제어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침묵의 순간은 소리의 필연성과 우연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이고, 아이러니하게 침묵은 ‘소리의 존재’를 보여준다.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King Crimson

이러한 소리의 우연성의 발견은 현대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그 세례를 받은 인물 중에 하나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이다. 로버트 프립은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기타 연주자로 잘 알려졌다. 킹 크림슨은 69년에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희대의 명반과 함께 등장했으며, 70년대 락의 황금기를 풍미했다. 70년대는 락의 테크닉이 최고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이고, 대부분의 락의 형식이 이 시기에 정리되었다. 20세기 초 미술의 모든 실험적 방법이 아방가르드 시기에 구축되었다면, 80년대 락의 모든 실험적 방법은 프로그레시브 락 장르에 의해 완성된다. 킹 크림슨을 빼고 프로그레시브 락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킹 크림슨은 락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로버트 프립이 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King_Crimson_members

 

킹 크림슨은 로버트 프립을 제외한 멤버 교체만 20명이 넘는다. 프립의 극단적 진보성향은 그의 인간관계에서도 보인다. 그는 새로운 멤버들과 새로운 음악에 도전했고, 그것을 극한까지 몰아세웠다. 그 고행을 견뎌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늘 변화를 추구했던 그는 매번 기상천외한 음악적 시도를 했고, 그 시도들은 마니아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밴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프립과 다른 멤버들이 늘 대립했고,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다. 이 불협화음은 그들의 음악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그였기에, 그의 밴드 역시 늘 우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

 

그의 진가는 킹 크림슨에 한정되지 않는다. 킹 크림슨 얘기만 해도 많지만, 이번에는 로버트 프립에 집중하기로 하자. 프립은 킹 크림슨 이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았다. 그 중 73년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명반 [No Pussyfooting]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FRIPP & ENO [No Pussyfooting]

https://youtu.be/ZwHH7XECJLg

앨범 아트 역시 하나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 거울 방 안에 있는 거울이 재현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거울인데, 그 거울 역시 반대편 거울을 재현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상상해보자. 우리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볼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거울이 반사하고 있는 것은 반대편 거울이고, 반대편의 거울이 반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거울이다. 거울 속 이미지들 사이에서 선후관계는 없고 계속 반복되는 자기복제, 모방의 모방들 밖에 없다. 끝없이 펼쳐지는 거울 방은 마치 소리의 파장과 같다. 무한히 같은 소리를 반복하면서 점점 퍼져나가는 음파처럼, 거울 속 이미지들은 계속 자신을 재현하면서 확장한다. 거울을 이용한 이 앨범 아트는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음들이 계속 중첩되면서 무한히 반복되는데, 반복되고 중첩될수록 새로운 소리가 탄생한다. 우연적 음들의 배합과 자기복제. 그들이 추구하는 사운드 메이킹을 거울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브라이언 이노로부터 프립은 많은 영감을 얻고 자신만의 연주 기법을 발명한다. 초기의 형태는 2대의 아날로그 녹음기(Revox A77)를 이용하여 한번 연주된 소리를 녹음과 재생을 여러 번 반복하는 일종의 딜레이 효과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70년대 말부터 “Frippertronics”라는 명칭을 얻는다.

https://youtu.be/4Xjtm-RZaek – Montreal, North American tour in 1979

프립퍼트로니스(Frippertronics)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

프립퍼트로니스의 원리

 

Frippertronics는 시대를 거치면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더욱 성능이 향상되었다. 2대의 아날로그 녹음기는 디지털 장비로 대체되고 각종 이펙터가 추가됐다. 이 시기부터 프립의 기법은 “Soundscape”라는 명칭을 얻었다. Soundscape 역시 Frippertronics과 마찬가지로 사운드에 반복, 연장 효과를 준다. 이 효과는 마치 넓게 퍼진 풍경(Scape)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프립은 Soundscape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Soundscape에 의한 나의 연주는 음의 지연(delay), 반복(repetition), 우연적인 효과(hazard)를 기본으로 한다. 주로 즉흥연주(Improvisation)이기 때문에 때와 장소, 청중들과 청중들에 대한 연주자의 반응에 따라 달라진다. Soundscape은 기타 한 개로 수많은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가능성을 가진 내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https://youtu.be/lr8SR_bzayk

David Sylvian & Robert Fripp [The First Day] – Bringing Down the Light

사운드스케이프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곡이다. 92년 발표된 데이빗 실비안(David Sylvian)과 함께 발표한 이 곡은 완전히 사운드스케이프만으로 이루어졌다. 몽환적인 사운드가 일품이다.

 

프립을 소개하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다. 그의 음악을 듣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어렵다. 그는 저작권에 대단히 민감한데, 그래서인지 음원사이트를 통해서 그의 음악을 다운로드할 수가 없다. 그의 음악을 듣고 싶으면 수고스럽게 시디를 직접 사서 들어야 한다. 21세기에 너무나도 불편하지만 그의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을 어찌 말리겠는가. 혹시라도 프립에 관심이 생겨서 시디를 직접 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다음에 앨범은 꼭 구매하기를 추천한다.

 

<King Crimson>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킹 크림슨의 ‘불쾌하리만큼 완벽한 걸작’ 21st Century Schizoid Man을 시작으로 Epitaph까지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를 권장한다. 킹 크림슨 1기를 대표하는 앨범

[Islands], 1969

킹 크림슨 2기에 해당하는 앨범이다.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 시작하면서, 좀 더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던 시기. 킹 크림슨 앨범들 중에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운드를 만들어 내던 시기이다.

[Larks’ Tongues In Aspic], 1973

3기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다. 재즈, 클래식, 헤비메탈 등등 한 앨범이 아니라 한 곡에 다 섞여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예스의 드러머였던 빌 브루포드가 참여했다. 굉음과 침묵이 서로 핑퐁하듯이 왔다갔다 하는데, 킹 크림슨이 음악적 실험을 가장 극한으로 밀어붙였던 시기이다.

[Red]

3기의 마지막 앨범. 여러 멤버들이 탈퇴하고 3인 체제로 낸 앨범이다. 보통 킹 크림슨의 앨범 중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다음으로 걸작으로 뽑히는 앨범이다. <Starless>에서의 프립의 독주는 정말 환상적이다.

 

<프로젝트>

FRIPP & ENO [No Pussyfooting], 1973

명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와의 합작, 프립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사실상 프립의 진가는 여기에 다 녹아 들어가 있다.

David Sylvian & Robert Fripp [The First Day], 1992

제펜의 데이비드 실비앙과의 합작, 사운드스케이브가 가장 잘 드러나는 앨범

David Bowie [Heroes], 1977

동명의 타이틀곡에 프립이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다.

 

<솔로>

[The Last of the Great New York Heart Throbs], 1978

 

[Exposure], 1979

프립의 음악세계가 나를 매혹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프립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보다 소리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소리’에 대한 철학이 나에게는 매우 인상 깊었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그들의 소리는 왜 소음이 아니라 음악이 되는 것인가. 음악의 핵심은 반복과 변화이다. 리듬은 반복이지만, 동시의 변화이다. 우리가 반복인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잠깐의 텀이 필요하다. 반복이라는 의미 안에는 움직임과 멈춤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있는 것이다. 소리 다음에 침묵. 그리고 침묵 이후에 등장하는 소리로의 변화. 이 모순적인 요소들의 순환이 바로 음악이다.

비단 음악뿐이겠는가. 삶 역시 반복과 변화의 나열 아니겠는가. 늘 일상은 반복되지만 그 반복된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가 삶을 작은 예술로 만들어주기에, 조금이라도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존 케이지와 로버트 프립. 우리는 침묵 역시 듣고 있다. 소리는 침묵 덕분에 음악이 될 수 있었다. 그 침묵은 음악의 이정표 역할이 되어준다. 와인을 마시기 위해 와인잔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이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잠깐 찾아오는 침묵의 소리를 찾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자기에서 자기와 다른 자기에로 ‘변화'(transformation)가 아닐까.

 

기타는 마음이다. 로이 부캐넌 [악(樂)인열전]②

기타는 마음이다. 로이 부캐넌

 

이 현(건국대 철학과)

만약 블루스가 당신의 플레이리스트에 없다면 그건 둘 중의 하나이다. 블루스가 필요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거나, 블루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이다.1)

이번에는 블루스 음악에 대해서 좀 다뤄보고자 한다. 블루스는 들으면 들을수록 어려운 음악이다. 그런데도 블루스는 사람을 당기는 힘이 있다.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계속 듣게 되는 음악이다. 그 힘은 어쩌면 음악이 아니라 듣는 이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블루스라는 음악이 좀 그렇다. 마치 평양냉면과 같아서 처음 접하면 그 매력을 느끼기 힘들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처음 듣자마자 블루스가 맞았다면, 그만큼 당신의 속이 쓰라렸다는 것이다. 그 쓰라림을 씻어 내려줄 음악이 블루스이다.

오늘의 동행자는 로이 부캐넌(Roy Buchanan)이다. 그는 1939년 미국 아칸소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흑인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스틸 기타의 재능을 보였고, 15살 때부터 직업적인 기타리스트 생활을 했다. 그는 19살에 나이에 〈Suzie Q〉로 잘 알려진 데일 호킨스 밑에서 세션 활동을 했고, 그 후에 수많은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하면서 경력을 쌓아 갔다.

 

그는 1971년 미국의 한 공영방송에서 방영한 “세계 최고의 언더그라운드 기타리스트(The Best Unknown Guitarist In The World)”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전국적인 파장을 일으킴으로써, 존 레논을 비롯하여 저명한 컨트리 뮤지션 멀 해가드(Merle Haggard)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72년 블루스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그의 데뷔 앨범 [Roy Buchanan]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앨범에는 명곡 이 실려있다.

“나는 나의 연주에 대해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이미) 충분했다.”

“기타는 마음이고 성격이다. 기분이 울적할 땐 기타도 울적하고 기쁠 땐 기타도 노래를 한다. 자기의 마음 기분을 잘 반영할 줄 아는 연주인이 결국은 끝까지 남는 법이다.”

– 로이 부캐넌

 

부캐넌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블루스는 감정의 격정을 연주하는 장르이다. 인간의 감정은 아주 미묘하고 섬세하다. 우리가 흔히 감정을 ‘희로애락’이라고 구분하고 있지만, 그것들 사이의 경계는 매우 희미하다. 우리의 분노는 한편으로 슬픔이 섞여 있고, 우리의 슬픔 역시 분노가 섞여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이 아니라, 수많은 겹침으로 얽혀 있는 아날로그이다.

블루스는 음악적 재능만으로 할 수 있는 장르는 아니다. 왜냐하면 블루스의 세계에서 훌륭한 연주자는 자신의 감정을 잘 연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블루스에서는 싱어(singer)는 없고 오직 연주자(player) 밖에 없다. 블루스는 오직 삶과 고통으로부터 빚어지는 연주(play the blues)만이 있을 뿐이다. 부캐넌의 재능도 그의 음악을 완성시키는 요소는 맞지만, 부캐넌의 삶 그 자체가 그의 음악을 완성시킨다. 삶의 깊이를 얼마나 끌어 올릴 수 있는가. 그 과정은 심히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연주자로서 그가 선택한 기타는 무엇인가. 그가 연주했던 기타는 펜더의 텔레케스터 2324모델(Fender Telecaster SN 2324), 일명 낸시(Nancy)다. 그는 텔레케스터의 선구자이다. 텔레케스터는 상당히 다루기 까다로운 기타이다. 특유의 비음 소리와 깽깽거리는 음색은 매력적이지만, 개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곡의 조화를 맞추기 어렵고, 펜더사 역시 블루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낸시는 부캐넌의 특유의 심플하면서 그루지한 치킨피킹 주법과 궁합이 잘 맞았다. 그는 연주 시 볼륨 패드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러한 연주 방식은 음향을 통일시킴으로써 텔레케스터 특유의 음색을 잘 살리면서 곡 전체를 조화롭게 만들었다. 텔레케스터의 음색은 부캐넌 특유의 담백함을 살려주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의 레코드사 Polygram은 그에게 상업적 성공을 강요했다. Polygram은 그가 좀 더 대중적인 음악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원치 않았고, 이러한 의견 차이 때문에 레코드사와 다툼이 심했다. 그는 점차 술과 약물에 빠져들었고, 1988년 8월 14일 아내와 크게 다투다가 경찰서로 연행됐고, 유치장에서 셔츠로 목매달아 생을 마감했다. 일세를 풍미했던 음악가로서는 참으로 비극적인 최후였다. 블루스 아티스트들 중에서는 삶의 고독과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제니스 조플린, 스티브 레이 본이 그러했고, 로이 부캐넌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루스는 고통스러운 자기 삶의 깊이를 끌어올려 드러난 그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다. 블루스에서 부르고 응답하기(Call and Response)가 음악적 핵심이다. 여기서 부르고 응답하는 것은 단순히 음악적인 코드를 주고받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응답이다. 나는 블루스라는 장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삶의 고독을 소리로 조각하는 것. 그 고독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끊임없이 불러 세우고 그 감정에 응답하는 것. 그래서 아티스트의 고독이 깊어질수록 그 소리는 더욱 빛난다. 그는 에릭 클랩튼, 제프 백, 지미 페이지 등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찬사와 인정을 받았음에도, 대중들로부터는 소외당했다. 그는 늘 외로웠고, 그에게는 누구보다 블루스가 필요했다. 자신의 고독을 위해서. 그의 고독을 연주함으로써 찬란한 고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https://youtu.be/v4e2VgycfSw

Roy Buchanan – Live from Austin TX, 1976

 

위의 1976년 텍사스 오스틴 라이브는 블루스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중 하나로 꼽힌다.

라이브의 시작을 알리는 <Roy’s Bluz>는 등장부터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로커빌리2)적 요소가 가미된 이 곡은 상당히 경쾌하면서 간명하다. 로커빌리적 요소는 백인 블루스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백인 블루스의 매력은 흑인 음악의 특징인 그루브함 위에 컨트리 특유의 간명함과 통통 튀는 감성이다.

<Roy’s Bluz>는 1972년 앨범 [That’s What I Am Here For]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앨범에는 라이브의 4번째 곡인 <Hey Joe>가 실려있다. <Hey Joe>는 원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곡으로서 부캐넌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리메이크한 헌정곡이다. 둘이 비교하면서 들어도 좋은 청음 포인트다.

 

https://youtu.be/8mr9I7g1A7o

Roy Buchanan – Roy’s Bluz

 

https://youtu.be/fe82eYRjiBU

Jimi Hendrix – Hey Joe, 1967 Monterey Pop Festival

(상당한 명연이다. 기회가 되면 꼭 지미 헨드릭스도 꼭 다뤄보고 싶다.)

 

두번째 <Soul dressing>은 Malcolm Lukens과의 협주가 인상적이다. 블루스의 Call and Response를 잘 보여주고 있다.

 

https://youtu.be/ClRHx5FJ9yA

Roy Buchanan – Sweet Dreams

 

나머지 두 곡 와 은 그의 데뷔 앨범인 [Roy Buchanan]에 실려 있는 곡들이다. 는 그의 부드러운 기타 연주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선율이 특징이다. 블루스곡이지만 상당히 컨트리적인 따뜻함이 담겨 있는 곡이다. 애절한 벤딩은 분명 엄청나게 화려한 스킬은 아니지만, 마음을 녹인다. 기타는 손이 아닌 마음으로 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곡.

 

https://youtu.be/XgOLDAWu6OY

Roy Buchanan – The Messiah Will Come Again

 

누가 뭐라 그래도 그의 대표곡은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이다. 환상적인 트레몰로와 처절한 벤딩은 사람들을 진한 감성 속으로 녹여버린다. 부캐넌의 연주 특징이라고 하면 충실함에 있다. 엄청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의 연주에는 빈틈이 없다. 그의 연주는 촘촘히 직조된 직물과 같아서,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움을 자아낸다.

The messiah will come again

– Roy Buchanan

 

Just a smile

Just a glance

The Prince of Darkness

he just walked past

 

There’s been a lot of people

they’ve had a lot to say

But this time

I’m gonna tell it my way…

 

There was a town

It was a strange little town they called the world

It was a lonely, lonely little town

 

Till one day a stranger appeared

Their hearts rejoiced

and this sad little town was happy again

 

But there were some that doubted

They disbelieved, so they mocked Him

And the stranged He went away

and the said little town that was sad yesterday

It’s a lot sadder today

 

I walked in a lot of places I never should have been

But I know that the Messiah,

He will come again…

 

“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들 저마다 할 얘기가 많았지만 이번엔 내가 내 방식대로 얘기해보겠다(There’s been a lot of people they’ve had a lot to say But this time I’m gonna tell it my way…)”는 부캐넌이 자신의 방식(my way)으로 ‘세계라는 작은 마을(little town they called the world)’에 다녀간 ‘이방인(stranger)’, 예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부캐넌이 말하는 세계, 즉 작은 마을은 ‘외로운 작은 마을(lonely little town)’이다. 그러나 홀로 찾아온 이방인이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고(rejoiced), 그 작은 마을은 아주 행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방인을 의심하고(doubted) 불신하며(disbelieved) 조롱했다(mocked). 그런데 그가 떠나자 그 마을은 점점 슬픔에 잠겼다. 외로운 세계의 찾아온 이방인 덕분에 사람들은 행복했고, 그런 이방인을 떠나 보낸 것은 그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메시아, 예수는 인간의 죄를 사하고 떠나버린 존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들이 떠나보낸 것에 가깝다. 그래서 누구는 그가 영원히 떠났다고 말한다. 어둠의 왕자(The Prince of Darkness). 그는 어두운 과거로 떠나가 버렸다고(he just walked past) 말이다. 이 가사의 내용을 종교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메시아라는 매개를 통해서 결국 부캐넌은 인간의 실존적 상태, 고독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고독 속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

부캐넌은 무엇 때문에 과거로 떠나버린 이방인이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일까?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늘 현재를 살아간다고 믿지만,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매 순간 ‘지금’을 잃어가는 고독의 순간에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늘 곁에 있는 것은 사실 없을 수도 있다. 마치 바람처럼 말이다. 우리가 맞고 있는 바람은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며, 잡을 수 없는 바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독 속에서 마주하는 바람은 ‘현재의 나’와 마찬가지로 예전에 다른 누군가를 스치고 지나갔던 바람이다. 즉, 우리가 ‘지금’ 맞고 있는 바람은 ‘누군가의 과거’였다.

파울 클레 :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 1920

그렇기에 과거와 지금에는 ‘은밀한 약속’이 놓여 있으며, ‘지금시간Jetztzeit’에는 앞서 간 모든 과거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깃들어 있다. 벤야민이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로 여겼던 것처럼, 부캐넌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부캐넌에게 있어서 고독은 오히려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준비, 즉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닐까? 그리고 그 구원은 과거로부터 온 것, ‘파울 클레의 천사’ 발 앞에 쌓여있는 잔햇더미 속에서 온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잔햇더미는 우리의 마음에 쌓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안타깝게 떠나버린 이들을 가슴 속에 묻어 두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떠나 보냈다고 생각하는 메시아, 즉 구원은 어쩌면 나의 마음속에 묻어 둔 것일 수도 있다.

현재 부캐넌은 우리 곁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부캐넌의 메아리가 깃들어 있다. 마음을 울리는 힘은 기억이고, 우리가 느끼는 향수병은 마음 한편에 쌓여있는 추억의 내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외롭고 힘들 때, 단 한 명이라도 그의 소리를 기억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를 위로해주기 위해 늘 과거로부터 우리와 함께 있다. 그의 텔레케스터 소리와 함께.


1) 정성일 평론가의 <영웅본색> 평론의 패러디이다.

 

2) 1960년대 등장한 로큰롤과 힐빌리(hillbilly:컨트리송의 다른 명칭)가 결합된 형태의 음악장르이다. 로큰롤이 태동하던 초기에는 많은 컨트리가수들이 로큰롤로 진출했다. 그러면서 로큰롤에 컨트리적 요소가 많이 섞이게 되는데, 나중에 이러한 특징이 하나의 음악장르로 정립되게 된다.

성性스러운 성가聖歌 제프 버클리 [악(樂)인열전]①

[악(樂)인열전]

연재를 시작함에 앞서
처음, 이 연재 의뢰가 들어온 지는 꽤 오래됐다. 작년 초겨울인 거로 난 기억한다.
계속하여 미루다가 드디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됐다. 그동안 나의 게으름도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추어인 내가 음악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말 할 수 있는 ‘음악’이란 무엇인가? 내 역량 안에서 음악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경험한 음악’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음악은 ‘나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또 다른 체험’이다.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음악은 내가 보고 있는 세계를 바꿀 힘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매번 일어나기 싫은 아침이었지만 <예스>와 함께한 아침은 웅장했다. 그리고 점심시간마다 <리암 갤러거>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러 잡생각을 실내화 마냥 던져버렸고,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지친 마음을 <빌 에반스>가 대신 울어주었다. 그들은 내가 걷는 길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나에게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해준 동행자들이었다.
우리는 음악을 듣는 데 있어서 너무나도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건 그 동행자들을 손쉽게 고를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원한다면 언제나 <비긴 어게인>의 한 장면을 나의 세계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이어폰을 꽂고 있을 때만큼은 나와 동행자 단 둘뿐이며, 어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유일한 순간이며, 나만의 여행을 떠나는 순간이다. 음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여행의 경험을 말해주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 나만 느꼈던 그것을 말해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마다 후기를 적는 것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본 연재에서 나의 경험들을 전달하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동행자들, 그중에서 처음 음악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새로운 친구 한 명 소개받는 느낌으로 이 글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성性스러운 성가聖歌 제프 버클리

이 현(건국대 철학과)

 

제프 버클리(Jeff Buckley, 1966.11.17~1997. 5. 29)

처음 소개할 동행자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인 제프 버클리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다. 나에게는 정말 음악을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특히 제프 버클리를 좋아했다. 항상 버스 뒷 구석에 그 친구랑 나란히 앉자 한쪽씩 이어폰을 끼면서 같이 이 노래를 들었었다.
“들으면 행복하면서 너무 슬퍼”
그 친구의 평이 너무 인상 깊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제프가 나의 곁에 있게 된 것이

Jeff Buckley – Hallelujah
https://youtu.be/y8AWFf7EAc4

<가사>
Well I’ve heard there was a secret chord
That David played and it pleased the Lord
But you don’t really care for music, do you?
Well it goes like this:
The fourth, the fifth, the minor fall and the major lift
The baffled king composing Hallelujah
Hallelujah(X 4)
Well your faith was strong but you needed proof
You saw her bathing on the roof
Her beauty and the moonlight overthrew ya
She tied you to her kitchen chair
And she broke your throne and she cut your hair
And from your lips she drew the Hallelujah
Hallelujah(X 4)
But baby I’ve been here before
I’ve seen this room and I’ve walked this floor
You know, I used to live alone before I knew ya
And I’ve seen your flag on the marble arch
And love is not a victory march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Hallelujah(X 4)
Well there was a time when you let me know
What’s really going on below
But now you never show that to me do ya
But remember when I moved in you
And the holy dove was moving too
And every breath we drew was Hallelujah
Hallelujah(X 4)
Maybe there’s a God above
But all I’ve ever learned from love
Was how to shoot somebody who outdrew ya
And it’s not a cry that you hear at night
It’s not somebody who’s seen the light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Hallelujah (X 12)

노래 자체는 매우 단조롭다. 기타와 보컬 단 두 가지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조에 감미롭고 절제된 기타선율과 제프의 담백하고 절절한 보이스는 곡 전체를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고, 그 모습은 마치 성령의 빛으로 가득한 성당 내부와 같다. 성당 안쪽은 텅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친 빛들 덕분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성당은 밝지 않으면서 어둡지 않다. 비어있으면서 가득 찬 공간. 성(聖)적 공간은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다.
원래 이 노래는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이 1984년에 발매한 그의 앨범 Various Positions의 B면 1번 수록곡이었다.

Leonard Cohen – Hallelujah
https://youtu.be/ttEMYvpoR-k

이 곡을 낸 이후 존 케일(John Cale), 루퍼스 웨인라이트(Rufus Wainwright), 밥 딜런, 본 조비 등등 다양한 커버들이 나왔다.

John Cale – Hallelujah
https://youtu.be/-gi3J8nPKPE

Rufus Wainwright – Hallelujah
https://youtu.be/PBo-n_17XU0

Bob Dylan – Hallelujah
https://youtu.be/u7JrHD6YAto

Bon Jovi – Hallelujah
https://youtu.be/RSJbYWPEaxw

레너드 코헨은 이 곡을 작사하기 위해서 수년간 고민을 했다고 한다. 가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한 구절만 80개의 초고를 썼으며, 성(聖)적이고 성(性)적인 가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얼핏 보면 성(聖)스러움과 성(性)적인 것은 정 반대에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어쩌면 “신성은 금기의 매혹적 양상”이라는 바타유의 말처럼, 이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반대에 있으면서 동시에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Ecstasy of St. Teresa, Bernini. 1598-1680>

많은 커버 중에 가장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커버는 제프의 커버이다. 코헨으로부터 ‘원곡보다 뛰어난 리메이크’라며 찬사받은 바 있다. 1997년 발매된 Grace의 6번 트랙인, 이 커버는 사실상 곡의 주인이 레너드가 아니라 제프라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테크닉의 훌륭해서? 아니면 그의 타고난 목소리 때문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곡에 대한 해석이다. 제프는 이 곡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사람이다. 제프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할렐루야는 숭배하는 사람, 우상, 신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가 아니에요.” “하지만 오르가슴의 할렐루야라고 할 수 있죠.” 그렇기에 성가(聖, 性-歌)는 관능적인, 환희의 노래이다. 정말로 우연하지만, 이 둘이 한국어 발음에서 같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Halleluja”는 무엇을 위한 송가인가? 제프가 연주한 ‘비밀스러운 코드’(secret chord)는 ‘사랑’을 위한 소리이다. 성(聖, 性)인 사랑은 모두 자신을 뛰어넘어 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얻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어쩌면 완전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늘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 노래에 대해서, “당신은 노래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할렐루야의 가사는 곡 씹으면 씹을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 노래는 (제프의 말했던 것처럼) 사랑, 오르가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엌 의자에 묶어 머리를 자르는 장면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서에서 머리카락은 영광을 상징하고 그런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몰락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몰락임과 동시에 상승하는 순간. 엑스터시의 순간이다. 사랑의 순간은 바로 이 순간 아닐까? 당신을 추구하기 위해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 말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나를 버리는 순간이며, 행복하면서 동시에 슬픈 것이 아닐까?

“love is not a victory march,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사랑은 승리의 행진은 아니에요. 그것은 차가운데다 부셔져 있지요. 할렐루야

제프 버클리는 1966년 11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팀 버클리와 메리 귀베르사이에서 태어났다. 팀 버클리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메리 귀베르와 이혼했고, 메리는 이후 재혼하여 제프는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제프는 양아버지의 성을 따라 스코티 무어헤드(Scotty Moorhead)로 개명하기도 했었다. 팀 버클리와는 8살 때인 1975년에 다시 만났는데, 이것이 둘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만다. 만나고 얼마 뒤 팀 버클리는 약물중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제프는 버클리라는 성을 되찾았다.

Halleluja가 수록된 <Grace>는 1994년에 발매된 그의 첫 정규앨범이자, 마지막 정규앨범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 ‘팀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요절했다. 1997년 5월 29일 친구와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부르며 울프 강을 걷다가 갑자기 옷을 다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었다. 친구가 한눈판 사이 제프는 사라졌었고, 이후 수색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6월 4일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Grace>는 얼터너티브 포크 록의 정수로 남아있다. 그의 아버지 ‘팀 버클리’도 엄청난 천재였지만 그는 그를 한 편으로는 뛰어넘었다. 제프는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정규 데뷔 이전까지 시네(Sin-é)를 비롯한 뉴욕의 클럽들을 돌며 레드 제플린, 밥 딜런, 누스랏 파테 알리 칸, 레너드 코헨 등의 커버 곡들을 연주하면서 자신을 갈고닦았다. 그러면서 다른 아티스트의 곡을 자신의 색채로 버무리는 연습을 꾸준히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 끝에 제프의 커버는 원곡자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습 과정을 거쳐 첫 자신의 소리를 담은 것이 였다. 1994년 첫 데뷔 당시 그는 롤링 스톤 매거진에서 “어떤 곡을 가져다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이제 그 수업은 끝났어요.”라고 말했다. 이제 자신이 생긴 것이다.

그의 매력은 독특한 감수성이다. 묘한 슬픔과 거침이 함께 공존한다. 그의 째지한 리듬감 덕분에 슬프지만 절대 처지지 않았고, 그의 목소리 울림은 거기에 깊이감과 우아함을 입혔다.
첫 번째 트랙 [Mojo Pin]이 그의 보컬의 매력을 잘 느낄 수 있다. 속삭인 듯하면서 절규하는 그이 보컬은 앨범의 시작부터 사람들을 휘어잡는다. 타이틀 곡인 [Grace]는 다이나믹한 전개와 게리 루카스(Gary Lucas)의 기타가 일품이다. 서로 다른 기타 2대를 다른 리프로 구성했는데, 그 위에 버클리의 보컬 기교가 극한까지 이르렀다. [Lover, You Should`ve Come Over]는 그의 자작곡으로서 도입부의 오르간 소리가 인상적이다. 포크의 감성을 제프만의 감성으로 잘 표현했다. 의 곡의 구성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은지 알 수 있다. [Last goodbye]와 [So Real]은 전형적인 포크 록의 형태를 띠고 있고, [Corpus Christi Carol]은 중세 교회 성가를 편곡해서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가 하면, [Eternal Life]과같이 헤비메탈 스타일의 곡도 있다.

Mojo Pin
https://youtu.be/Svo7LZbnUVw

Grace
https://youtu.be/A3adFWKE9JE

Lover, You Should`ve Come Over
https://youtu.be/HxfE6PJmGS8

Last goodbye 

https://youtu.be/3MMXjunSx80

So Real
https://youtu.be/EcaxrqhUJ4c

Corpus Christi Carol
https://youtu.be/pRyHLrsqO0c

Eternal Life
https://youtu.be/7eiqlE98bPI
(앨범 자체가 명반이기에 전곡을 한번씩 다 들어봤으면 좋겠다.)

그의 노래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늘 사랑이었다. 가사 전체가 다양한 사랑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당시 유행처럼 퍼진 염세주의를 거부했다. 그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마냥 행복하고 밝은 사랑은 아니었다. 그의 사랑은 “이별을 포함한 사랑”이었고, “얻을 수 없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사랑은 마냥 행복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마냥 행복하지 않기에 우리는 사랑으로 버티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늘 양가적이다. 그렇기에 제프의 사랑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가깝다. 그리고 그 태도는 기쁨도 아니고 체념도 아니다. 사랑의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임에 가깝다. 우리의 삶이 행복하면서 너무 슬픈 것처럼 말이다.

다음에 문장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라캉의 사랑’의 쓴 장 알루슈는 그의 책에서 ‘사랑하기 혹은 사랑받기의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스스로를 축축하지만 불타오름 없이 연소되는 장작으로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