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 소리의 가능 조건으로서 침묵, 로버트 프립에 대한 단상 [악(樂)인열전]③

 

“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 소리의 가능 조건으로서 침묵, 로버트 프립에 대한 단상

 

이 현(건국대학교 철학과)

 

“고요함은 소리의 부재다. 침묵은 침묵의 존재다.”

– 로버트 프립 Robert Fripp

 

1951년 현대 음악의 선구자인 존 케이지는 하버드 대학의 무향실을 간 적이 있었다. 그는 무향실을 다녀오고, 이렇게 썼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두 개의 소리를 들었다. 공학자한테 이 이야기를 하자 그는 나에게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이고, 낮은 것은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존 케이지는 완전한 무음 상태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무음’이 아니라 ‘자신의 소리’였다. 들뢰즈가 “회화가 얼굴의 탈영토화이듯 음악은 목소리의 탈영토화”라고 말했듯이, 음악은 언어(라는 문법적 규칙)를 벗어난 음-기계들 생산의 과정이고, 음의 배치이다. 완전한 무음은 없다. 그때 존 케이지는 이렇게 선언한다. “음악의 종말은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존재의 원초적인 소리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일정한 반복을 유지하고 심장 박동수는 최초의 리듬이다. 그 소리의 근원은 지상의 원소들의 소리이며, 리비도의 ‘울음소리’는 일체 세계의 울림이다. 그리고 이 울림은 존재 그 자체이다. 존 케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소리는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그것은 계속 있을 것이다. 음악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절대적인 무음은 없다는 발견이 존 케이지로 하여금 〈4분 33초〉를 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완전한 무음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한다. 클래식 공연이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처럼, 모두가 소리를 내지 않는 순간, 그때 우리는 침묵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침묵의 순간에도 미묘한 잔음들은 청각기관을 자극하고 있다. 소리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존재의 필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침묵이라고 말하는가? 우리에게 침묵이란 없다. 단지 우리는 ‘침묵을 듣는 것’이다. 침묵도 하나의 소리인데, 비-소리로서의 소리이고, 우리로 하여금 소리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소리이다. 침묵이 없다면 음악도 없다. 와인을 담아 둘 와인잔이 필요하듯, 침묵은 소리를 받아주는 그릇이고, 음악을 가능케 해주는 또 다른 소리이다.

갑자기 존 케이지의 이야기가 왜 나왔을까? 존 케이지의 일화는 침묵 역시 음악의 영역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침묵은 음악에 있어서 우연성에 해당한다. 클래식 공연이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을 상상해보자. 누군가는 기침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움직일 것이며, 이 모든 행동들은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소리들은 연주자가 제어할 수 없는 우연적인 것들이다. 연주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주자는 연주를 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심호흡을 하며, 소리를 만들고 있다. 연주자가 내고 있는 이 소리들은 연주자의 소리이지만 제어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침묵의 순간은 소리의 필연성과 우연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이고, 아이러니하게 침묵은 ‘소리의 존재’를 보여준다.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King Crimson

이러한 소리의 우연성의 발견은 현대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그 세례를 받은 인물 중에 하나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이다. 로버트 프립은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기타 연주자로 잘 알려졌다. 킹 크림슨은 69년에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희대의 명반과 함께 등장했으며, 70년대 락의 황금기를 풍미했다. 70년대는 락의 테크닉이 최고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이고, 대부분의 락의 형식이 이 시기에 정리되었다. 20세기 초 미술의 모든 실험적 방법이 아방가르드 시기에 구축되었다면, 80년대 락의 모든 실험적 방법은 프로그레시브 락 장르에 의해 완성된다. 킹 크림슨을 빼고 프로그레시브 락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킹 크림슨은 락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로버트 프립이 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King_Crimson_members

 

킹 크림슨은 로버트 프립을 제외한 멤버 교체만 20명이 넘는다. 프립의 극단적 진보성향은 그의 인간관계에서도 보인다. 그는 새로운 멤버들과 새로운 음악에 도전했고, 그것을 극한까지 몰아세웠다. 그 고행을 견뎌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늘 변화를 추구했던 그는 매번 기상천외한 음악적 시도를 했고, 그 시도들은 마니아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밴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프립과 다른 멤버들이 늘 대립했고,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다. 이 불협화음은 그들의 음악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그였기에, 그의 밴드 역시 늘 우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

 

그의 진가는 킹 크림슨에 한정되지 않는다. 킹 크림슨 얘기만 해도 많지만, 이번에는 로버트 프립에 집중하기로 하자. 프립은 킹 크림슨 이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았다. 그 중 73년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명반 [No Pussyfooting]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FRIPP & ENO [No Pussyfooting]

https://youtu.be/ZwHH7XECJLg

앨범 아트 역시 하나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 거울 방 안에 있는 거울이 재현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거울인데, 그 거울 역시 반대편 거울을 재현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상상해보자. 우리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볼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거울이 반사하고 있는 것은 반대편 거울이고, 반대편의 거울이 반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거울이다. 거울 속 이미지들 사이에서 선후관계는 없고 계속 반복되는 자기복제, 모방의 모방들 밖에 없다. 끝없이 펼쳐지는 거울 방은 마치 소리의 파장과 같다. 무한히 같은 소리를 반복하면서 점점 퍼져나가는 음파처럼, 거울 속 이미지들은 계속 자신을 재현하면서 확장한다. 거울을 이용한 이 앨범 아트는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음들이 계속 중첩되면서 무한히 반복되는데, 반복되고 중첩될수록 새로운 소리가 탄생한다. 우연적 음들의 배합과 자기복제. 그들이 추구하는 사운드 메이킹을 거울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브라이언 이노로부터 프립은 많은 영감을 얻고 자신만의 연주 기법을 발명한다. 초기의 형태는 2대의 아날로그 녹음기(Revox A77)를 이용하여 한번 연주된 소리를 녹음과 재생을 여러 번 반복하는 일종의 딜레이 효과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70년대 말부터 “Frippertronics”라는 명칭을 얻는다.

https://youtu.be/4Xjtm-RZaek – Montreal, North American tour in 1979

프립퍼트로니스(Frippertronics)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

프립퍼트로니스의 원리

 

Frippertronics는 시대를 거치면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더욱 성능이 향상되었다. 2대의 아날로그 녹음기는 디지털 장비로 대체되고 각종 이펙터가 추가됐다. 이 시기부터 프립의 기법은 “Soundscape”라는 명칭을 얻었다. Soundscape 역시 Frippertronics과 마찬가지로 사운드에 반복, 연장 효과를 준다. 이 효과는 마치 넓게 퍼진 풍경(Scape)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프립은 Soundscape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Soundscape에 의한 나의 연주는 음의 지연(delay), 반복(repetition), 우연적인 효과(hazard)를 기본으로 한다. 주로 즉흥연주(Improvisation)이기 때문에 때와 장소, 청중들과 청중들에 대한 연주자의 반응에 따라 달라진다. Soundscape은 기타 한 개로 수많은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가능성을 가진 내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https://youtu.be/lr8SR_bzayk

David Sylvian & Robert Fripp [The First Day] – Bringing Down the Light

사운드스케이프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곡이다. 92년 발표된 데이빗 실비안(David Sylvian)과 함께 발표한 이 곡은 완전히 사운드스케이프만으로 이루어졌다. 몽환적인 사운드가 일품이다.

 

프립을 소개하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다. 그의 음악을 듣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어렵다. 그는 저작권에 대단히 민감한데, 그래서인지 음원사이트를 통해서 그의 음악을 다운로드할 수가 없다. 그의 음악을 듣고 싶으면 수고스럽게 시디를 직접 사서 들어야 한다. 21세기에 너무나도 불편하지만 그의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을 어찌 말리겠는가. 혹시라도 프립에 관심이 생겨서 시디를 직접 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다음에 앨범은 꼭 구매하기를 추천한다.

 

<King Crimson>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킹 크림슨의 ‘불쾌하리만큼 완벽한 걸작’ 21st Century Schizoid Man을 시작으로 Epitaph까지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를 권장한다. 킹 크림슨 1기를 대표하는 앨범

[Islands], 1969

킹 크림슨 2기에 해당하는 앨범이다.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 시작하면서, 좀 더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던 시기. 킹 크림슨 앨범들 중에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운드를 만들어 내던 시기이다.

[Larks’ Tongues In Aspic], 1973

3기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다. 재즈, 클래식, 헤비메탈 등등 한 앨범이 아니라 한 곡에 다 섞여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예스의 드러머였던 빌 브루포드가 참여했다. 굉음과 침묵이 서로 핑퐁하듯이 왔다갔다 하는데, 킹 크림슨이 음악적 실험을 가장 극한으로 밀어붙였던 시기이다.

[Red]

3기의 마지막 앨범. 여러 멤버들이 탈퇴하고 3인 체제로 낸 앨범이다. 보통 킹 크림슨의 앨범 중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다음으로 걸작으로 뽑히는 앨범이다. <Starless>에서의 프립의 독주는 정말 환상적이다.

 

<프로젝트>

FRIPP & ENO [No Pussyfooting], 1973

명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와의 합작, 프립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사실상 프립의 진가는 여기에 다 녹아 들어가 있다.

David Sylvian & Robert Fripp [The First Day], 1992

제펜의 데이비드 실비앙과의 합작, 사운드스케이브가 가장 잘 드러나는 앨범

David Bowie [Heroes], 1977

동명의 타이틀곡에 프립이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다.

 

<솔로>

[The Last of the Great New York Heart Throbs], 1978

 

[Exposure], 1979

프립의 음악세계가 나를 매혹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프립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보다 소리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소리’에 대한 철학이 나에게는 매우 인상 깊었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그들의 소리는 왜 소음이 아니라 음악이 되는 것인가. 음악의 핵심은 반복과 변화이다. 리듬은 반복이지만, 동시의 변화이다. 우리가 반복인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잠깐의 텀이 필요하다. 반복이라는 의미 안에는 움직임과 멈춤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있는 것이다. 소리 다음에 침묵. 그리고 침묵 이후에 등장하는 소리로의 변화. 이 모순적인 요소들의 순환이 바로 음악이다.

비단 음악뿐이겠는가. 삶 역시 반복과 변화의 나열 아니겠는가. 늘 일상은 반복되지만 그 반복된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가 삶을 작은 예술로 만들어주기에, 조금이라도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존 케이지와 로버트 프립. 우리는 침묵 역시 듣고 있다. 소리는 침묵 덕분에 음악이 될 수 있었다. 그 침묵은 음악의 이정표 역할이 되어준다. 와인을 마시기 위해 와인잔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이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잠깐 찾아오는 침묵의 소리를 찾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자기에서 자기와 다른 자기에로 ‘변화'(transformation)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