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7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4)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기하학(526c-527c), 천문학과 입체 기하학(528a-d)
[526c-527c] 기하학
*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찾는 배울 거리들μαθήματα중 두 번째 것으로 계산 기술λογιστική과 산수ἀριθμητικὴ에 이어 기하학γεωμετρία을 꼽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기하학이 군대 주둔στρατοπέδευσις과 지역 확보, 군대στρατιά의 집결과 산개 등 전쟁과 관련된 일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은 기하학과 계산λογισμός의 간단한 부분으로 충분함을 지적한 후 기하학은 근본적으로 많은 부분과 상급 단계가 좋음의 형상을τὴν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ν 더 쉽게 보게κατιδεῖν ῥᾷον 해주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 중에서ἐν ᾧ ἐστι 가장 행복한 것τὸ εὐδαιμονέστατον이 자리 잡은 저 영역을 향해 영혼의 방향을 바꾸도록 강제하는ἀναγκάζει 모든 것이 그런 일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있음οὐσία을 보도록θεάσασθαι 강제한다면 적합하고προσήκει, 생성을 보도록 강제한다면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526c-e)
*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일부 기하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 이를테면 정사각형 만들기’τετραγωνίζειν니 ‘맞추어 대기’παρατείνειν니 ‘덧붙이기’προστιθέναι니 같은 온갖 소리를 해대는데 그것은 이 분야의 앎ἐπιστήμη과 정반대의 성격을 갖는 것이며, 기하학이 수행하는 것은 항상 있는ἀεὶ ὄντος 것에 대한 앎γνῶσίς을 위한 것이지 때에 따라 생겨나고γιγνομένου 소멸하는ἀπολλυμένου 것에 대한 앎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혼을 진리ἀλήθεια로 이끌어가는 것이자 우리 영혼이 위를 향하도록, 철학적인 사고φιλοσόφου διανοία를 만들어내는 것이다.(527a-b) 그러므로 아름다운 나라καλλίπολις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도 기하학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것의 부산물τὰ πάρεργα도 적지 않다. 즉 그것은 글라우콘이 말한 전쟁πόλεμος과 관련된 것들만이 아니라 어떤 배움μάθησις이든 그것을 더 잘 수용하게 해준다.(527c)
[527d-528d] 천문학과 입체기하학
* 이제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세 번째 배울 거리로 천문학ἀστρονομία이 제시된다. 글라우콘은 천문학에 대해서도 계절ὥρα과 연월μήνη καὶ ἐνιαυτός을 더 잘 알아보게 하여 농사일γεωργίᾳ과 항해ναυτιλίᾳ 장군직 등을 수행하는 데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이 자신이 지시하는 배울 거리가 대중들πολλοὶ이 보기에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질까 두려워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한 후 다른 활동들로 망가지고 눈멀게 되는 각자의 영혼의 도구ὄργανον가 이 배울거리들을 통해서 정화되고ἐκκαθαίρεταί 다시 점화된다ἀναζωπυρεῖται는 확신을 갖고 그 영혼의 도구를 보존하는 것이 만μύριοι 개의 눈을 보존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직 이것에 의해서만 진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는 글라우콘의 이야기가 훌륭하게 보일 것이나 그런 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곳에서 이렇다 할 이로움ὠφέλεια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글라우콘의 이야기가 그저 실없는ἀμήχανος 소리로 들릴 것이라고 말한 후(527d-e) 글라우콘에게 이들 중 어느 쪽을 상대로 대화할 것인지διαλέγῃ 아니면 어느 쪽도 특별히 고려하지 않고 주로 자네 자신을 위해서 논의를 할 것인지를 묻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대체로 저 자신을 위해서 묻고ἐρωτᾶν 대답하며ἀποκρίνεσθαι 이야기하는 쪽을 택하겠다고 말한다.(528a)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지금 기하학 다음에 오는 것을 제대로 취한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차원δεύτερος의 평면ἐπίπεδος 다음에 삼차원τρίτος 입체στερεός 즉 정육면체κύβος 같은 깊이βάθος를 가진 것과 관련된 것을 취해야 함에도 회전하는περιφορά 입체를 먼저 취했다는 것이다.(528a) 이에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맞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된 데에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음을 밝힌다. 우선, 어느 나라도 이것들을 존중하지 않아서 이 어려운 것들에 대한 탐구가 빈약하게 이루어져 그 탐구를 이끌 감독자οἱ ζητοῦντες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고(528b) 설사 감독자가 생기더라도 현 상황이 그러하듯이 이걸 탐구하는 사람들ζητητικοὶ이 거만해서 감독자를 따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대중들과 이게 어떤 점에서 유용한지를 설명할 수 없는 탐구자들에 의해 이것들이 경시되고 방해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매력χάρις 때문에 이 모든 조건을 뚫고βίᾳ 성장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언급한다. (528c)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배울 거리로서 기하학은 명확하게 말하자면 평면을 다루는 것이 기하학이고 그다음 다룰 것은 입체 기하학이지만 모든 것들을 빨리 설명하려고 서두르다가 입체 기하학을 건너뛰고 다음에 천문학, 즉 깊이를 갖는 것의 운동을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52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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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6c ‘기하학’ : 여기서 말하는 기하학은 앞 강해에서 살폈듯이 내용적으로 산수를 포함한 당대 수준의 수학 일반을 의미한다. 선분의 비유에서 사고의 대상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적인 것’이라 말했을 때도 이미 그곳에는 기하학적 도형이 포함되어 있다. 퓌타고라스 수학에서도 당연히 수와 도형은 하나로 다루어진다. 우리가 에우클레이데스의 저술을 보통 <기하학 원론>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어는 원리들 내지 요소들(elements)을 뜻하는 stoicheia이고 그 책에는 수와 도형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다.
* 526c ‘군대 주둔과 지역 확보, 군대의 집결과 산개 등 전쟁과 관련된 한에서 적합하다’ : 이전 강해에도 언급했듯 글라우콘은 배울거리가 제시될 때마다 그 적합성을 실제 용도에서 찾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서곡으로서 기하학의 적합성은 오로지 좋음의 형상을 더 쉽게 보게 하는 일, 그 영역을 향해 영혼의 방향을 바꾸는 일 즉 철학적 사고를 만들어 내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굳이 실제 용도를 따진다 해도 이러한 일을 알고 그 부산물로 배울 때 더 큰 용도를 얻을 수 있다.
*527a ‘맞추어 대기’parateinein, ‘덧붙이기’prostithenai :‘ ‘맞추어 대기’는 ‘주어진 선분을 도형의 한 변과 일치하게 해서 도형을 옆에 붙이는 것’을 의미한다.(<메논> 87a참고) 그리고 ‘덧붙이기’는 ‘한 도형을 다른 도형에 덧붙여 놓는 것’을 의미한다.(<메논> 84d) 당시 일부 기하학자들은 도형들을 탐구하면서 실제 실물을 제작하여 여기저기 붙이거나 맞추어보곤 했다고 한다.
* 527c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 :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나라를 흔히들 ‘이상 국가’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표현은 <국가>에 없다. 다만 그러한 표현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전거를 들어야 한다면 바로 이곳에서 언급된 ‘아름다운 나라’를 꼽을 수 있다.
* 527d ‘영혼의 도구’ : 도구에 해당하는 원어는 ‘기관’의 뜻도 갖는 organon으로 영혼에서 지적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영혼 3분설(434c-4441c)을 기준으로 보면 영혼의 이성 부분일 것이다. 천문학은 오늘날에서조차 대중들 사이에서는 망원경을 통한 육안의 관찰이 중심인 양 여겨진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천문학 역시 사고를 통한 수적 비례와 계산이 탐구의 토대를 이룬다. 영혼의 도구를 보존하는 것이 만 개의 눈을 보존하는 것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진리가 보인다.
* 527e ‘’만개의 눈‘ : murioi는 10,000 또는 무수한 수를 의미한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어에서 수를 표기할 때 수마다 모두 고유의 알파벳 글자로 표기했다. 그런 까닭에 고대 그리스의 수표기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 표기 방식과는 도저히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렵다. 이를테면 243을 표기하려면 3을 나타내는 tria와 40을 나타내는 tettarakonta 그리고 200을 나타내는 diakosia를 합해 ’tria kai tettarakonta kai diakosia’로 표기해야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늘날은 초등학생 수준에서도 가능한 덧셈 뺄셈은 물론 곱셈과 나눗셈 등 큰 수의 계산이 고대 일상인들에게는 아예 엄두를 못 내는 일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계산할 줄 아는 전문적인 기술자들이 따로 있었다. 이곳에 나오는 logistikē란 그러한 ‘계산 기술’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스에서 수학이 크게 발달했다는 것은 오늘날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 528a ‘어느 쪽을 상대로 대화할 것인가’ : 영혼의 도구로 보는 사람들과 육안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서 글라우콘은 대중의 시선으로 대화에 임했다가 핀잔을 듣고 물러서지만 그렇다고 영혼의 도구로 보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수준도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묻고 대답하는 쪽을 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 528a ; ‘이차원의 평면 다음에 삼차원 입체’ ; 배울 거리의 순서가 차원을 기준으로 고려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수학은 기하학까지 포함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말하는 산수는 자연수 위주의 수론에 머물러 있어 차원을 기준으로 기하학 이전의 배울 거리로 제시된 것이다. 당시 산수는 무리수(無理數)를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무리수의 발견 이후 직각삼각형의 빗변이 그러하듯 기하학은 무리수를 도형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산수보다 진전된 배울 거리로 여겨졌다. 이것 또한 그리스 수학이 산수보다 기하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까닭의 하나이다.
* 528b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 : 당대 비교적 낮은 수준의 입체 기하학과 관련한 이곳의 언급은 <국가>가 설정하고 있는 대화 시점이 소크라테스 생전 이후 아무리 늦게 잡아도 플라톤 중년 시기 이전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플라톤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는 이곳의 언급과 달리 다섯 가지 입체를 포함한 높은 수준의 입체 기하학적 논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훗날 에우클레이데스는 그 자신 플라톤주의자로 불릴 정도로 플라톤과 똑같이 <원론>에서 다섯 가지 정다면체를 다루고 있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서 기하학이 핵심 교과였음을 고려하면 이곳의 내용은 당시에 실용적 계산 기술과 경험 기하학에 머물렀던 기하학이 플라톤이라는 탁월한 감독자를 통해 아카데메이아에서 획기적으로 발전되었음을 함께 보여준다. 실제로 플라톤의 제자였던 Eudoxos는 한때 도형과 도구에 너무 의존한다고 플라톤에게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J. Adam 527a 노트 참고) 종래 그가 이룩한 연구 성과 또한 에우클레이데스 <원론>에 포함될 정도로 큰 성취로 평가되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거만했던 탐구자들이 기하학의 매력에 이끌려 ‘어려운 조건을 뚫고 성장하고 있다’는 이곳의 언급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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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논의는 배울 거리의 두 번째 것으로 평면 기하학을 다룬 다음 그다음의 논의로 왜 입체 기하학을 다루지 않고 천문학을 다루게 되었는가가 주제를 이루고 있다. 예비적인 배울 거리와 관련한 이곳 논의를 들여다보면 플라톤이 얼마나 기하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시종일관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다루어지는 천문학과 화성학과 관련한 논의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같이 이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천문학과 화성학 역시 기본적으로 기하학에 기반을 둔 학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배울거리들을 논의하면서 이토록 기하학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앞서 살폈듯이 배울거리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근본적으로 장차 불변 부동의 진리로서 형상적 앎을 획득하기 위한 변증술적 능력을 함양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 보여주듯 감각적 가시적 세계로부터 그와 관련한 의견doxa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영혼의 상승적 전환을 통해 오로지 사고와 지성이 지배하는 가지계로 진입하는 것을 말한다. 형상적 앎이야말로 생성과 변화를 겪지 않으면서 항상 있는 것으로서 존재 세계의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사실 기하학’geōmetria이란 명칭은 ‘토지측정’을 뜻하는 말로 이집트에서 연원한 것이다.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토지가 유실됨에 따라 토지의 경계를 다시 복구하려는 용도에서 기하학이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기하학은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로 들어오면서 퓌타고라스 학파를 통해 감각 너머의 참된 존재 세계에 이르는 통로로 제시되었고 그 이후 플라톤에 이르러 오직 사고와 지성을 통해 진리를 담보하는 순수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부 플라톤주의자들은 ‘토지 측정’이라는 기하학의 이름 자체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j. Adam 노트 참고) 이곳에서도 플라톤은 기하학이 대중들의 생각과 달리 경험과 관찰과는 무관한 오직 영혼의 도구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비감각적 앎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곳에서 기하학이 어떻게 그러한 진리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진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즈음에서 기하학이 도대체 어떤 특성을 가졌기에 플라톤이 그토록 배울거리들의 배울 거리로 중시하고 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 주지하다시피 기하학(수학)의 근본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으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에우클레이데스(Eukleidēs 기원전 330?-270?)의 <원론>stoicheia을 떠올린다. (우리말 역본 : <유클리드 원론> 1, 2 박병하 옮김, 아카넷 2022) 그리고 우리는 그 책을 통해 플라톤이 왜 그토록 기하학(수학)을 중시했는지 근본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 물론 에우클레이데스가 시대적으로 플라톤보다 후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접근이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미 플라톤주의자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다 실제로 그의 책 내용을 들여다보면 플라톤과 그의 제자들이 아카데메이아에서 이룩한 기하학적 성취를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 이어받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기하학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을 끌어들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은 순수 사고를 통해 점과 선과 각과 도형과 관련한 23개의 정의(horoi)를 바탕으로 증명과 상관없이 누구나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5개의 공리(axiōma)들과 9개의 공통 개념들(axiōmata)을 세운 후 그것들로부터 465개의 정리들(theōrēmata) 즉 수학적 진리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도출 과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필연성을 담보하는 이른바 연역 추론의 과정으로서 그 자체로 정리들 각각이 참임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그곳에는 어떠한 개인적 판단이나 경험, 사회적 관습이나 관행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에 따라 465개의 명제는 어디에 살건 어느 시대에 살 건 인류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리적 연역체계 즉 보편적 진리 체계로 확립되었고 이후 수학의 방법은 인류사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모든 지적 작업의 근본 토대이자 원천이 되었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대학에서 <원론>을 배우며 천문학의 기초를 닦았고 플라톤의 <법률>(967a)에서 천문학의 필연적 성격에 주목한 것도 그리고 데카르트(R. Descartes)가 <원론>의 수학적 방법론을 토대로 좌표계를 이용한 해석 기하학과 근대 역학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원론>의 기본 내용과 정신은 2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교육과정에서 수학의 이름으로 지적 탐구의 기본 교과로 하나같이 채택되고 있다. 한 마디로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은 필연적으로 참을 담보하는 논증적 추론 즉 참에서 참인 방식으로 참을 필연적으로 도출해내는 연역 추론의 원형paradeigma을 담고 있다. (플라톤과 그리스 수학과 관련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아래와 같이 훌륭한 논문이 발표된 바 있다. 김성진, “pytagoras 학파의 수학과 자연철학” <서양고전학 연구> 제5집 1991. 이상인, “서양 고대의 수학과 철학 – 플라톤의 보편 수학을 중심으로”, <대동철학> 제18집 2002)
* 에우클레이데스 <원론>의 위와 같은 추론 방식은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언급하고 있는 추론적 사고dianoia가 수행하는 논증 방식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곳에서도 영혼은 추론적 사고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온전히 확보할 때까지 논증적 사고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그 어떤 전제나 가정도 없이 자체적으로 참임을 드러내는 자체적 존재 즉 형상적 앎으로 육박해 들어가고 마침내 변증술적 능력을 통해 형상적 앎을 획득한 후 하강과정에서 그것을 통해 비로소 추론적 사고에게 형상을 분유하는 최상의 논증적 앎으로서 학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 그런데 이미 알아차릴 수 있듯이 선분의 비유가 보여주는 이러한 추론적 사고의 수행 방식은 참을 담보하는 것이되 궁극적인 형상적인 앎까지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클레이데스가 보기에 기하학은 형상(이데아)에 준하는 그 자체로 증명과 상관없이 자명한 참을 담보하는 것임에도 플라톤에게 그것은 아직 자체성kath’ hauto을 갖는 형상적 앎epistēmē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동일성tauton을 가질 뿐이다. 자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자기 동일성과 달리 그 어떤 관계 맺음도 없이 어떤 가정의 도움 없이 그 자체로 스스로 참임을 드러내는 진리에만 붙여질 수 있다. 그렇지만 플라톤에게 수학적 기하학적 진리는 자기동일적인 진리로서 앞서 살폈듯이 순수 사유의 산물로서 선과 각과 도형들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가정하고 성립된 것이다. 철학적 진리는 그러한 가정hypothesis들마저 완전히 떨쳐 버리고 순전히 말 그대로 자체적으로 스스로 참alētheia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철학적 형상적 앎은 추론적 사고dianoia 단계를 넘어 지성적 이해noēsis의 단계에서 이른바 변증술적 능력dialegesthai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우클레이데스는 철학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진정한 철학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오늘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참의 체계로 받아들여진 <원론>의 진리가 중력장이 미치는 공간 내부에 한정해서 성립하는 이른바 평면 기하학적인 진리로 밝혀진 것도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지적한 가정의 한계를 에우클레이데스가 채 인지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평면 기하학으로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계를 딛고 제시된 리만 기하학적 진리 또한 수학 자체가 갖는 가정들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하는 한, 언젠가 모종의 또 다른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 플라톤이 기하학적 지식을 영혼의 전환을 통해서 다가갈 수 있는 매우 중차대한 앎으로 평가하고 중요시했음에도, 기하학적 지식 일반 즉 이곳에서 제시되는 배울 거리 모두를 형상적 앎을 위한 예비적 준비 단계로 파악하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결국 플라톤에게 오늘날 발전된 자연과학적 성취조차 본질적인 한계상 궁극의 철학적 진리로 끊임없이 다가갈 수밖에 없는 불확정적인 것이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53c-61c)에서 영혼과 물질로 구성된 우주를 순수 기하학적 요소로서 고도의 균형을 갖춘 정다면체들(흙은 정육면체, 물은 정이십면체, 불은 정사면체, 공기는 정팔면체)로 해명하고 물질적 원소로서 그 입체들을 궁극적인 최소 단위인 두 개의 비물질적인 직각삼각형으로 환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독창적인 해명방식은 하이젠베르크도 인정했듯이 오늘날 물질의 궁극적 구성 요소를 아(亞)물질적인 양자와 중성자의 수학적 균형관계로 파악한 양자역학에도 선구적인 성찰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플라톤에게 자기동일적 참을 담보하는 논증적 지식은 자연세계에 대해 말logos로 할 수 있는 최상의 지식을 제공하지만 자연 세계의 근원적 원인aitia 중 하나인 생성(to aei gignomenon)을 완전히 넘어설 수 없는 한, 지고의 진리로서 자체성을 갖는 진리는 아니다. 수학적 진리도 그런 의미에서 제한적이고 잠정적이며 자연학 역시 다만 개연적 설명(eikos logos)을 넘어서지 못한다. 문제는 자체성을 갖는 철학의 궁극적 진리로서 형상 특히 좋음의 형상이 분명 존재하고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변증술도 있다고는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고백하고 있듯이(506d-507a) 그것은 숙명적으로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과연 말로 하는 학문으로서 철학은 무엇일까? 학문이기는 한 것일까? (故 素隱 박홍규 선생은 만약 플라톤이 현대의 베르그송을 만났다면 그 고민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소은 선생의 형이상학에는 플라톤과 베르그송이 대척점에 서 있지 않고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자리하고 있다.) 철학이 종국적으로 총체적 앎에 대한 인간 욕구의 극치로서 형이상학을 숙명으로 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 그렇다고 플라톤이 가시적 대상, 경험적 관찰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그것들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및 인식상의 근본적인 한계를 직시하고 오히려 그것들이 갖는 규정적 측면을 찾아 최대한 그것들에 대한 학적 가능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티마이오스>에서도 플라톤은 시각을 커다란 유익을 주는 원인이라 언급하면서 그것을 통한 관찰이 우주의 본성을 탐구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47a) 이곳 선분의 비유에서도 기하학자들은 어떻게든 눈에 보이는 도형들을 이용하여 도형 자체를 사고하여 그것을 가지고 추론을 구성한다.(510b) 언제나 문제는 가시적 감각적인 것들이 포함하고 있는 주관적 요소들이다. 그런데 기하학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이용한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가시적 감각적인 것들에 들어있는 주관적 요소들을 넘어설 수 있으며 그런 경우 가시적 감각적인 것들도 논증적인 판단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든 그것들은 논증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눈에 보이는개별 현상들은 보편적 논증의 요소가 될 수 없지만 그것들에서 공통으로 반복되는 것들을 사고가 추상하여 개념화할 경우 그것들은 그 현상들에 대한 논증적 판단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경험적 판단들을 가지고 논증을 구성할 수 있는 것도 다 사고가 가시적인 것들에서 반복적인 것을 추상하여 일반화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시적 대상들이 비록 경험적인 것일 것일지라도 사고작용을 통해 논증적인 것으로 재구성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경험적인 것에 대한 앎을 획득하고 체계화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이러한 방식은 나중에 연역법과 더불어 논증 방식의 하나로 자리 잡은 이른바 귀납법과 비슷해 보이지만 논증의 성립 근거가 전혀 다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귀납법(induction)은 자연의 제일성(the uniformity of nature)을 자명한 전제로 가정하고 그것을 근거로 귀납적 비약(Inductive leap)을 통해 일반화를 관철하지만[이런 이유로 흄(D. Hume)은 경험지를 개연지로 여겼다] 플라톤은 그 일반화의 근거를 이미 가시적 감각적인 대상들에 분유(metechein)되어 있는 반복적 지속치 즉 형상을 닮은 분유치에서 찾고 있다(흄과 근거는 다르지 플라톤은 이런 이유에서 경험지를 개연지로 여겼다.) 플라톤에게 근대적 의미의 귀납 논증은 없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사고를 통한 일반화의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삼단논법(이를테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의 대전제가 보여주듯이 비록 경험과 관련된 판단이지만 일반 명제로서 논증적으로 참된 결론을 연역해내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은 초기대화편에서 ‘이것이 무엇인가?’ ti esti 즉 정의(定義) 문제를 다룰 때도 ‘용기’, ‘경건’, ‘절제’ 등에 대한 일상의 경험적 견해들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규정성을 가질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고 비판적 검토(elenchos)를 진행한다. 이와 같이 플라톤의 가지적인 지식에는 가장 아래쪽에는 감각적인 것들에서 사고를 통해 추상된 일반지로부터 가장 위쪽으로는 수학적 대상, 사고의 대상을 넘어 지성적 이해를 통해 획득되는 형상적 앎까지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다만 플라톤에게 앎의 최소한의 요건은 경험에 기원하는 것이건 아니건, 가시적인 것이건 아니건 어떤 방식으로든 사고를 통해 규정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경험지도 일반화를 거쳐 논증적 이론지가 될 수 있고 그 이론지를 통해 경험적 통찰 또한 확장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관찰을 통해 얻은 행성에 대한 관찰지를 사고를 통해 이론화하여 30년 후 그 행성의 궤적을 추론해 냈고 실제 30년 후 사람들은 그 행성이 그가 추론한 궤적대로 거의 정확하게 움직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론적 사고는 결코 경험적 사고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론적 사고는 경험 세계를 관통하는 가지적 질서에 대한 학적인 이해를 가능케 해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당장의 실용적 이익을 넘어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수많은 경험을 앞당겨 들여다보고 우리 삶과의 내적 연관을 사유할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은 천상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합리적 이상에 대한 믿음으로 일관되게 현실 구제를 지향한다.
* 이제 기하학 다음에 입체 기하학이 다루어져야 함에도 천문학이 세 번째 배울 거리로 제시된 이유가 논의되고 형식적 순서상 입체 기하학을 세 번째로 다시 조정한 후 네 번째, 다섯 번째 배울 거리로서 천문학과 화성학이 각각 다루어진다.
다음 주제 :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천문학(528e-530c), 화성학(530d-53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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