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에서 현재 운영되는 연구분과의 분과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분과 소개나 분과 세미나 결과물, 또는 분과 개인들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스티븐 샤비로의 『기준없이』 1장. 「기준 없이」[신유물론 분과]

 

스티븐 샤비로의 『기준없이』 1장. 「기준 없이」

 

한철연 신유물론 분과 세미나 리뷰

 

 

먼저 신유물론 분과에 관한 소개를 간단히 하려 한다. 신유물론 분과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세미나 분과 중 하나로, 2021년 공무 모임을 시작하였고 참여 인원이 늘고 모임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2023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정식 분과로 등록했다. 이현재 회원(이하 호칭 생략), 박민미, 현남숙이 먼저 공무 모임을 제안하였고, 이후 참여 시기는 다르지만 이승준, 정유진, 이지영, 정희수, 서영화, 최종덕, 김선영, 손미아 회원이 합류하였고, 현재 서영화 회원이 분과장을 맡아 모임을 이끌고 있다. 신유물론 계열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책을 주로 읽고 있지만 세미나 구성원의 추천이 있으면 그밖의 주제나 텍스트에도 열려있다. 각자 전공이나 관심사가 달라 생태주의, 과학철학, 여성주의, 존재론, 문화철학의 바탕 위에서 신유물론의 이론적 지도를 파악하고 각자의 연구에 접목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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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샤비로, 『기준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 이문교 옮김, 갈무리, 2024.

 

 

이 텍스트는 신유물론과 분과에서 올해 들어 함께 읽은 책 중 하나이다. 영문학 배경을 가진 학자인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1954~)의 『기준 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은 여러 소주제들도 구성되어 있다. 샤비로에 따르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모두 칸트의 이러한 미학을 급진적인 방식으로 수용한다는 친연성이 있다. 그는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칸트 해석을 참조하여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판단력 비판』의 ‘취미판단’을 단순한 미적 대상을 위한 판단을 넘어 세계를 이해하는 일반적 방법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통상 세계 이해의 영역에서 칸트의 미학적 판단(반성적 판단)은 학적 판단(규정적 판단)에 비해 사소하게 여기거나 예외적으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샤비로는 이러한 기존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학적 사례들이 기존의 규범들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규범들조차 개별 사례들을 종합함으로써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기준 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의 제1장 「기준 없이」에서 샤비로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유효한 기준과 비판적 기준을 확립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차라리 “어떻게 하면 혁신과 변화를 막는 그러한 기준과 표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이다(p. 60) 샤비로에게 기준(criteria)이란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 등장하는 ‘규정적 판단력’을 의미한다. 샤비로는 이러한 기존의 기준의 문제를 대신하여 『판단력 비판』의 취미판단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취미 판단은 개념에 메이지 않고 대상을 단칭적으로 포착하며, 고유한 맥락과 상황에 맞는 세계 파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샤비로는 미적 판단 중에서도 취미판단에 더 주목한다. 그는 칸트 미학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들이 미에 대한 분석을 보수적이라 치부하고 탈근대적 관심에서 숭고 분석에 집중해 왔다고도 비판한다. 미적인 것에 관한 칸트의 이론은 실제로는 정동과 독특성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며, 또한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판단 형식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학은 더 이상 인식론과 윤리학의 규칙들에 대한 예외가 아니라, 바로 그것들의 실천을 위한 근거가 된다(p. 9).

규칙에 포섭되지 않는 단칭 판단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샤비로의 접근은 기존의 칸트 연구 전통에서는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샤비로는 이러한 관점이 오히려 오늘날의 중요한 쟁점들을 다루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고 전망한다. “칸트, 화이트헤드 그리고 들뢰즈의 연계 속에서 발견한 비판적 심미주의는 현대 예술과 미디어적 실천들, 기술적 실천들(특히 뇌 과학과 생물 발생학 분야에서의 최근의 진전들),그리고 문화이론과 맑스주의 이론( [증략] 생성 혹은 자기-조직 시스템의 역할에 관한 이론, [중략])에서의 논쟁들을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전망한다(pp. 25-26).

샤비로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일지 또한 어떤 시대적 통찰을 줄 것인지는 책의 나머지 장들과 그의 다른 저작들을 함께 살펴보며 지속적으로 탐구해 나가야 할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건국대학교 다자인 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

 

(이어서)

 

2. 『형이상학8(Η)(1~6)

8(Η)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실체들에 대한 논의를 이어 나간다. 모든 감각적 실체는 질료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질료 또한 실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대립적인 변화 모두의 근저에 놓여있는 어떤 기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들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생성과 소멸이 수반되지는 않는데, 어떤 것이 있는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생성하거나 소멸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체와 질료가 일반적으로 실체라 일컬어지지만, 이것이 아직 가능적 실체이기 때문에, 감각적 실체 중 무엇이 현실적인 실체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있는 것들이 그 합성구조에 따라 있거나, 결합에 따라, 혹은 다른 방식으로 있기 때문에, 질료가 다르면 그것의 현실태가 다르고 정식이 다르다는 논의는 분명하다. 한편, 문지방에 대하여 ‘방과 방 혹은 안과 밖을 경계 짓는 물건’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현실적인 문지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고, 앞선 질료와 더불어 말한다면 돌로 이루어진 복합실체를 말하게 된다. 이로써 감각적 실체가 있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질료는 가능적 실체이고, (2) 형상(형태)은 현실적 실체이며, (3) 이 둘이 결합한 복합실체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실적 실체는 바로 형상이다.

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부를 때, 이 이름이 합성실체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현실태나 형태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은 때가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이 형상과 현실태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현실태로서의 집은 합성구조(즉 형태)이지 이 합성구조에 속하게 되는 벽돌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4장과 5장은 질료에 대한 논의를 심화하고 있는데,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적 실체에 대하여, 각 사물엔 그 고유한 질료가 있음을 논한다. 예를 들어 ‘이것’의 질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것’이 불이나 흙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답해서는 안 된다. 모든 질료들이 궁극적으로는 불이나 흙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의 질료 또한 불과 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흙이 사람의 고유한 질료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6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나 수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복합실체를 이루는 첫 번째 부분들은 질료와 형상이다. 최종적인 질료와 형태는 동일한 것이자 하나이고, 감각적 실체가 하나인 이유는 질료와 형태가 하나이기 때문에 차이를 찾으려는 노력은 헛수고이다. 질료로부터 형태로의 운동에는 제작자 이외의 다른 원인이 없다. 한편, 질료를 가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그 즉시 하나인 것이다.

 

 

3. 『형이상학9(Θ)권 전반부 (1~8)

9(Θ)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와 ‘현실태’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론적 탐구를 수행한다. ‘가능태’와 ‘현실태’는 본래 변화 및 운동을 설명하는 개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개념들의 사용 범위를 넓혀 자신의 존재론적 탐구에 도입한다. 먼저 그는 가장 주도적인 뜻에서의 ‘가능태’에 대해 규정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뒤나미스’(가능태)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것 안에 또는 다른 것인 한에서의 자기 안에 있는 변화의 원리”이다. 따라서 ‘뒤나미스’란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 능력(능동적 능력), 어떤 작용을 받을 수 있는 능력(수동적 능력), 어떤 힘이 가해질 때 변화를 겪지 않는 능력, 어떤 작용이 잘 이루어지는 능력 모두를 일컫는 말로 이해된다.

운동 및 변화의 원리들은 어떤 경우 생명이 없는 것 안에 내재하고, 어떤 경우 생명이 있는 것들, 즉 영혼이나 영혼의 이성적 부분 안에 있다. 이성을 동반하는 능력은 동일한 것이 반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가령 의술의 경우 본성에 따라 다루는 것은 건강이지만, 부수적인 뜻에서는 질병을 다루기 때문에 질병과 건강을 함께 만들어낼 수 있다. 반면 비이성적 능력은 단 하나의 결과만을 낳는다는 단순성을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참으로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 즉 가능태 혹은 능력을 부정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메가라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집을 짓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집을 지을 능력이 없다는 불합리한 결과가 도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주장이 결국 운동과 생성을 부정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어떤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그것을 행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적 존재에서 현실적 존재로 이행하는 것에 아무런 불가능한 점이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과 관련된 능력, 즉 가능태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를 진행해 왔다면, 6장에서 그는 현실태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고 그 본성이 어떤지를 규정한다. 먼저 그는 ‘가능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지 않은 방식으로 어떤 대상이 주어져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현실태라고 말한다. 예컨대 집을 지을 수 있는 자에 대해 집을 짓고 있는 자, 잠자는 자에 대해 깨어있는 자, 눈을 감았지만 시력이 있는 자에 대해 보고 있는 자 등등의 예시에서 앞의 것은 가능태에, 후자의 것은 현실태에 분류된다.

이후의 논의는 “가능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것이 앞선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측면, 즉 정식(로고스)과 시간과 실체에서 현실태가 가능태에 앞선다고 말한다. 첫째, 가능적인 것은 그것의 정식 안에 이미 현실적인 것을 포함한다. 능력은 어떤 ‘현실적 활동’을 행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가능적인 것이다. 둘째, 시간의 관점에서 씨앗은 곡식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가능적인 곡식으로써 씨앗이 곡식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씨앗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것들에 시간적으로 앞서서 다시 곡식이 현실적으로 있어야 한다. 이처럼 종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시간적으로도 현실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에 앞선다고 말해야 한다. 셋째, 현실적인 것은 실체에서의 선행성 또한 갖는다. (1) 먼저 생성 과정은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 뒤에 오는 것은 앞에 오는 것보다 더욱 완전하다. (2) 또한 모든 생성이 어떤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진행된다고 할 때, 현실적인 것은 목적으로서 이 생성의 과정 전체 가장 앞에 놓인 시초이다. (3) 질료가 가능적으로 있는 것은 그것이 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즉 현실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가능적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4) 모든 현실적 활동은 목적이거나 목적에 가깝다. 그런 뜻에서 활동은 단순한 가능성이나 능력에 앞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영원한 것들을 논의에 끌어들여, 보다 주도적인 뜻에서 현실적인 것이 갖는 선행성을 논한다. 영원한 것들의 경우, 그것들은 실체의 측면에서 가멸적인 것들에 앞서며 영원한 것은 결코 가능적으로 있지 않다. 또한 가멸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거치면서도 이 세계 자체는 유지되는데, 이는 바로 태양의 운행이나 천체 운동과 같은 영원한 운동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 속에 있는 것들은 이 불멸하는 것들을 모방할 뿐이다.

 

(끝)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1)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인자(仁者)와 지자(知者) 그리고 군자(君子)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동양철학전공 석사과정 오서진

 

 

    1. 서론

『논어』에는 여러 인간상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군자(君子)가 있다. 『논어』 내에서 군자는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덕목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백성을 이끌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흔히 ‘성인군자’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군자는 유가(儒家)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자 이상적인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서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다.

그런데 『논어』에는 군자 이외에 인자(仁者) 그리고 지자(知者)와 같은 인간상이 등장한다. 직관적으로 봤을 때, 군자는 이미 인자와 지자의 면모를 모두 갖춘 것처럼 보인다. 군자가 이상적이고 모범이 되는 인간상을 나타낸 것이라면 훌륭한 성품과 덕성 그리고 지적 역량을 모두 갖추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어』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때로는 군자가 인자와 지자를 포함하는 것처럼, 또 어떨 때는 군자, 인자, 지자가 각각 별개의 개념처럼 보인다.

한 개념은 다른 개념과 명확히 구분되며 문장 몇 줄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중국 고대사상에 접근하는 바람직한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 개념이 함축하는 의미 그리고 그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사상가의 주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본문에서는 강독 모임 중 더 알아보고 싶었던 인자, 지자, 군자의 의미에 대해 모임에서 다룬 내용을 중심으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공자 초상 이미지

    2. 본론

2.1. 인자(仁者)와 군자(君子)

우선 인자와 군자의 관계에 대해 의문이 생긴 구절은 「옹야」(雍也) 편에 있다. 공자의 제자 재아(宰我)는 공자에게 인자에 대해 질문한다.

 

재아가 물어 말했다. “인자는 누군가 그에게 ‘우물 안에 인(仁)이 있다’고 말하면 그 말에 따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군자는 (우물 앞까지) 갈 수는 있어도 (우물에) 빠질 수는 없다. 속일 수는 있어도 해칠 수는 없다.”

이 구절을 읽고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재아는 인자에 대해 질문했는데 왜 공자는 군자로 대답했는가?’이다. 마치 인자가 곧 군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재아의 질문 의도를 파악한 공자가 일부러 ‘군자’라는 표현을 썼을 수도 있다. 혹은 일상 대화이기 때문에 생긴 사소한 표현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인자, 군자 등의 개념 자체가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러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분명한 점은 인자와 군자는 아주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두 인간상 모두 『논어』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바람직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자가 곧 군자는 아니라는 근거가 『논어』 내에 있다. 「헌문」(憲問) 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이면서 인하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소인으로서 인한 사람은 아직 없다.”

위 구절에 따르면 군자 중에는 인자가 아닌 경우가 있다. 반면 소인(小人)이면서 동시에 인자인 경우는 없다. 다시 말해 군자는 인자인 경우와 인자가 아닌 경우로 나뉘고, 소인은 인자가 아니다. 즉 군자이면서 인자가 아닌 경우가 있으므로 인자와 군자는 동격으로 볼 수 없다.

위 구절처럼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언급하는 내용은 『논어』 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리인」(里仁) 편을 보면 “군자는 덕을 마음에 두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법도를 지키려 하고 소인은 이익만을 바란다.”,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라는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군자가 철저하게 소인과 대비되는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소인이 땅(재물)을 생각할 때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이 이익을 바랄 때 군자는 법도를 지키려 한다. 또 소인이 이(利)에 밝을 때 군자는 의(義)에 밝다. 군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덕, 법도, 의는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이자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필요한 가치이다. 소인이 사리사욕을 챙기는 인물이라면 군자는 집단을 바로 세우는 인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군자는 인자와 구분된다. 군자는 덕이 충만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책임과 역할을 진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군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인 의(義)는 다른 어떤 덕목보다도 사회 정의와 관련이 깊다. 의는 몫의 분배와 규범에 관한 덕목이다. 올바른 기준에 따라서 재화나 지위를 나누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칙과 제도를 제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또는 지키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의(義)의 실현이다. 그러므로 의를 행한다는 것은 제 가족을 보살피고 이웃을 돕는 일상적인 일보다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의 일일 수밖에 없다. 공자 이전 시기에 군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었고 공자 역시 군자를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는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군자는 자신과 공동체 모두를 바르게 이끌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인자와 다르다.

그러나 인자와 군자는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많다. 군자는 잠재적 인자이다. 이 말은 모든 군자는 인자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와 의가 분리 불가능하듯 인 또한 군자가 품고 살아야 할,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덕목이다. 그러므로 인자와 군자는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렵지만, 유가 사상에서 추구하는 인간상을 설명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조각들이다.

 

(계속)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3)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3)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이어서)

 

– 「옹야」20

 

아래 인용은 「옹야」20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樂之者。」(자왈:「지지자불여호지자호지자불여락지자。」)

재국: 선생이 이르길, “앎이 있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 좋아하는 이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며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알기만 하는 자는 그것을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그것을 즐기는 자만 못하다.

 

「옹야」20의 번역에서 공유하고자 하는 부분은 ‘지지자(知之者)’와 ‘호지자(好之者)’, ‘락지자(樂之者)’의 의미이다. 『논어』 안에서 단계적으로 좋음과 나쁨을 설명하는 부분은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그 기준을 마음과 형식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은 「위정(爲政)」7, 「팔일」3, 4, 「양화(陽貨)」11이다. 네 구절 모두 형식만을 지키고, 마음이 없는 것에 비하여 실제로 마음이 있는 것이 더 낫다고 공통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 이면에는 실제로 마음이 있으면서, 형식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는 암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대응하여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를 해석한다면 ‘지지자’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방법만을 알 뿐 알고 있는 그것을 실제로 행할 마음은 없는 사람인 것이다. 다음으로 ‘호지자’란 좋아하는 그것을 행할 마음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잘 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락지자’란 즐기는 그것을 행할 마음도 있으며, 그것을 잘 행할 방법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 초상

이러한 해석은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에 도움을 준다. 또한, 『논어』 안에서 다른 구절들과도 크게 모순이 되는 부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올바른 해석이라고 확언하기에는 부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논어』 안에서 단계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은 위의 예시가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씨(季氏)」9에서 공자는 네 가지 단계를 통해서 사람의 단계를 표현하는데 태어나면서 아는 자가 가장 위이고, 배워서 아는 자가 다음, 어려움이 있어 배우는 사람이 그다음, 어려움이 있지만 배우지 않는 자가 가장 아래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공자의 설명에 따른다면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는 충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논어』 안에서 ‘지(知)’와 ‘호(好)’, ‘락(樂)’이 앞서 설명한 단계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가?”라는 점이다. 적어도 ‘지’는 『논어』 안에서 방법만 아는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로만 사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논어』 안에서 ‘지’는 72단락에서 117번 사용된다. 이 중 ‘지자(知者)’와 ‘지지자(知之者)’로 그 사용을 줄이면 ‘지자’는 「이인」2, 「옹야」23, 「자한(子罕)」29, 「헌문(憲問)」28, 「위령공」8, 「양화」24에서 그리고 ‘지지자’는 「술이(述而)」20, 「계씨」9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지지’가 사용된 것을 확인해보겠다. ‘지지’의 사용은 크게 4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 번째는 ‘인자(仁者)’와 ‘지자’를 대비하여 인자를 높이고 지자를 낮추는 방식으로 서술한 것으로 「이인」2와 「옹야」23이 이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지자’와 ‘인자’, ‘용자(勇者)’를 병렬로 서술하여 이 셋의 특징을 서술한 것으로 「자한」23과 「헌문」28이 이에 해당된다. 세 번째는 지자를 단독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며 지자를 높이고 있다. 「위령공」8이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은 제자의 발화 안에서 ‘지자’가 나온 것으로 이때 ‘지자’는 살피는 지혜로 여기는 사람으로 엄연히 말하면 아는 사람으로 ‘지자’가 사용된 것이다. 「양화」24가 이에 해당된다. 첫 번째의 방식으로 「옹야」20의 ‘지지자’를 이해한다면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에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방식으로 「옹야」20의 ‘지지자’를 이해한다면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지지자’가 사용된 것을 확인해보겠다. 두 구절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현은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이다. 이는 주로 ‘태어나면서 아는 자’로 해석되며 「술이」20에서는 공자가 ‘생이지지자’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고, 「계씨」9에서는 ‘생이지지자’가 가장 높고 그 아래로 순서대로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 즉 배워서 아는 자, ‘곤이학지(困而學之)’ 즉 부족해서 배우는 사람, ‘곤이불학(困而不學)’ 즉 부족하지만 배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지지자’의 해석은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의 근거가 되는 방법으로 해석을 할 수도 반대로 그 해석의 반례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해석에 근거가 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생이지지자’라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닌 방법만을 아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즉, ‘생이지지자’ 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 이후에 노력이 필요하다. 반례가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자면 ‘생이지지자’는 태어나자마자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즉 이미 마음과 방법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지자’ 중에서도 이미 마음을 다 갖춘 상태를 말할 수 있으며 이는 ‘호지자’와 ‘락지자’와는 구분되는 ‘지지자’의 특징과 모순되는 것이다.

 

– 글을 마치며

 

이렇게 『논어』 「옹야」13, 18, 19, 20의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 논해보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논어』를 읽으면서 고민해보지 않았을 부분에 대한 것을 보고 새로운 시각을 경험했을 수도 있고, 혹은 이미 독자가 해보았던 생각일 수도 있으며, 이 글에서 독자의 견해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수많은 감상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전하고자 했던 『논어』가 단순한 격언 모음집이 아니라는 감상만큼은 전달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이 독자들의 『논어』 읽기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기를 바란다.

(끝)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1)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1)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형이상학7(Ζ)권 후반부 (7~17)

 

7(Ζ)권의 7~9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에 대한 분석을 전개함으로써 형상이 생성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성 자체의 원인임을 밝히고자 한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의 3가지 유형, 즉 본성적 생성, 기술적 제작, 그리고 자생적 생성을 구분한다.

 

본성적 생성이란 본성에서 시작해서 생겨나는 것들의 생성이다. 이때 생성의 출처를 질료라고 하고, 생성의 작용인은 형상이라는 뜻에서의 본성이며, 생성의 결과물인 목적인은 일반적으로 실체라고 불리는 것으로 사람, 식물 등의 것들이다. 반면 기술적 제작은 기술, 능력, 사고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기술적 제작에서 형상은 제작하는 자의 영혼 속에 있다. 자생적 생성은 그 자체로 최종적인 동시에 생겨나는 것의 부분으로 있는 것으로, 예를 들어 제작과는 달리, 건축가의 개입 없이 돌로부터 어떤 것이 생성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들의 생성 모두에서 먼저 주어진 것, 즉 질료는 생성의 가능성 자체를 조건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생겨나는 것의 정식에 있어서도 질료는 속해야만 하는가? 생겨나는 것들을 그 질료의 이름에 따라 부를 때 우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 된’이라 부른다. 생겨나는 것들은 그 질료에 따라 정식화되지 않으며, 생겨나는 것의 정식은 질료 외의 다른 요소로부터 형성될 필요가 있다.

 

생성의 원인인 형상 자체는 생성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형상 역시 생성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라 가정했을 때, 형상인을 형상인의 생성 원인으로, 즉 형상인의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으로 다시 나눌 수 있을 터인데 이런 결론은 무한 퇴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0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분들에 대한 정식이 전체에 대한 정식에 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규명한다. 만약 전체에 대한 정식이 부분들에 대한 정식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가정했을 때, 부분들에 대한 정식은 전체에 대한 정식에 앞설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손가락이라는 동물의 부분이 동물이라는 전체로부터 따라 나오는데, 손가락은 동물과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지만 동물은 손가락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1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의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정식이 정의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떻게 하나인가? 실체는 ‘이것’, 즉 어떤 것 하나인 바, 정의는 실체를 말하므로 정의 역시 병렬적 나열이 아니라 하나여야 한다. 정의에는 유와 차이(diaphora)가 있다. 이때 유가 그 유에 속하는 종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질료적이며, 정의는 차이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적 차이는 유를 규정한다. 차이가 없는 것들에 이를 때까지 차이의 차이(tēn tēs diaphoras diaphoran)에 따른 분할은 진행되어야 하는바, 차이들의 수만큼 종의 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로 마지막 차이(teleutaia diaphora)는 각 사물의 실체이자 정의이고, 형상이며, 정의는 마지막 차이로 규정되는 정식일 것이다.

 

13~16장은 보편자와 개별자의 정의 가능성을 탐구함으로써 실체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하고 있다. 보편자는 실체일 수가 없는데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로, 실체는 고유하고 다른 것에 속하지 않아야 하지만, 보편자는 특정한 개체들에 대하여 있으며 그와 분리될 수 없다. 둘째로, 보편자는 여럿에 대해 술어가 되기 때문에 여러 개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실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이다. 한편으로 개별자는 정의될 수 있는가? 개별자로서의 복합체는 생성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감각적 실체들에 대해서는 정의도 없고 논증도 없다. 개별자는 질료적 우연성 때문에 정의될 수 없으므로, 실체의 정의는 복합실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질료 없는 형상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형상들이 실체라고 한다면, 이는 합당하다.

 

17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선 논의들로부터 실체에 대한 규정을 이끌어 내며 7권을 마무리 짓고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그 자체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없으나,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그러한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있다. 고로 탐구 대상은 질료를 특정한 것으로 만드는 원인으로서, 질료들을 ‘어떤 것’으로 있게 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이 곧 실체인 것이다.

(계속)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2)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2)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이어서)

 

  1. <형이상학> 3(B)권

 

<형이상학>의 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탐구되는 학문과 관련하여 이 학문의 물음 즉, 철학이 물어야 하는 주제가 어떤 주제들인지를 나열한다. 이 물음들은 철학적 난점들 즉, 아포리아(Aporia)들로 제시되며, 이는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어려움과 탐구 주제를 보여준다. 로스(W. D. Ross)의 구분에 따르면 아포리아들은 총 15개가 제시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 하나의 학문이 네 가지 원인을 모두 다룰 수 있는가? 2) 공리들을 다루는 것은 실체에 대한 학문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학문이 그것들을 다루는가? 3) 하나의 학문이 모든 실체를 다룰 수 있는가? 4) 실체에 대한 학문은 실체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들도 함께 다루는가? 5) 감각적이 아닌 실체들도 있는가? 그렇다면 그 종류는 얼마나 되는가? 6) 유들이 사물의 첫째 원리들인가, 아니면 사물들에 내재하는 부분들이 첫째 원리들인가? 7) 유들이 원리들이라면, 최상의 유들이 그런가 아니면 불가분적이 그런가? 8) 개별적인 것들과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 있는가? 9) 첫째 원리들은 각각 종이 하나인가 아니면 수가 하나인가? 10) 가멸적인 것들과 불멸적인 것들의 원리들은 같은가? 11) 있는 것과 하나는 실체들인가 아니면 속성들인가? 12) 수학의 대상들은 실체들인가? 13) 감각물들이나 수학의 대상들뿐만 아니라 이데아들도 있는가? 14) 첫째 원리들은 가능적으로 있는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있는가? 15) 첫째 원리들은 보편자인가 개별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물음들을 이전 철학자들의 논의들을 참조하면서 이 물음들이 단순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포리아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형이상학>의 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아포리아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이 물음들과 관련하여 여러 난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그친다. 그럼에도 이 아포리아들은 <형이상학>에서 큰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여기서 말해지는 아포리아들이 책이 탐구하는 학문 즉 형이상학의 범위와 문제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1. <형이상학> 4권(Γ) 3장까지

 

4권에서는 드디어 본격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논증이 펼쳐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형이상학을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탐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면서,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의 첫째 원리와 최고의 원인들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때, ‘있는 것’이라는 말은 다의적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있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리하면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설명한다. 있는 것은 실체와의 관계에 따른 하나의 원리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가령, 실체도 있는 것이고, 양태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원리를 지닌 것들은 저마다 그 원리를 따르고, 그것과 관계된 것으로 말해지는 것들을 탐구하는 하나의 학문이 있다. 이러한 실체 자체와 그 관계를 통해 다의적으로 있는 것 모두를 탐구하는 학문이 철학이다.

 

하나의 유에는 하나의 학문이 할당되고, 하나의 학문은 할당받은 유와 그 유에 속한 종들에 관한 분과들을 종으로 지니기 때문에, 철학은 있는 것의 유에 속한 종들만큼의 분과들을 그 종으로 지닌다. 따라서 있는 것의 유와 하나의 유는 서로의 유에 속한 종들이 일치하며, 하나의 유에 속하는 종들을 탐구하는 것 또한 철학과 그에 속한 분과들의 몫이다. 따라서 하나의 유에 종으로 속하는 동일성과 동질성 그리고 그것들에 반대되는 다름과 이질성 또한 철학의 탐구 주제에 속한다. 반대자들은 동일한 원리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같음과 다름 그리고 실체를 다루는 학문을 고찰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철학자의 일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첫 번째 뜻에서 있는 것, 즉 실체를 탐구하고, 하나와 여럿,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반대자들, 그리고 있는 것과 실체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을 탐구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의 첫째 공리 즉, 모순율을 탐구한다. 언뜻 수학에 몫인 듯 보이는 공리에 대한 이 물음은, 이 공리가 특정한 유에만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철학의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공리들에 대한 고찰 역시 보편적으로 있는 것과 첫째 실체에 대해 고찰하는 사람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공리를 모순율로 제시하며 모순율에 대해서 모든 원리 중에서 가장 확고한 원리에 대해서는 잘못을 범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무전제적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것이 있으면서 동시에 있지 않을 수는 없고, 반대되는 것들이 동시에 동일한 것에 속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모순율은 여타의 모든 공리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의 원리이다.

 

(끝)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2)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2)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이어서)

 

– 「옹야」18

아래 인용은 「옹야」13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質勝文則野文勝質則史文質彬彬然後君子。」(자왈:「질승문칙야문승질칙사문질빈빈연후군자。」)

재국: 선생이 이르길, “본질이 꾸밈을 이기면 너무 거칠고, 꾸밈이 본질을 이기면 너무 사치스럽다. 꾸밈과 본질을 겸하여 아름답게 빛나면, 그 후에 자연히 군자답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색을 이기면 곧 야인이다. 색이 본질을 이기면 사관이다. 색과 본질이 겸비되고 겸비된 후에야 군자인 것이다.

서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무늬를 이기면 촌스럽고 무늬가 바탕을 이기면 사치스럽다. 무늬와 바탕을 모두 겸비하여 빛나면 그러한 후에 군자라고 본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본질이 (먼저) 훌륭하면 곧 문장은 질박해지고(수수해지고), 문장이 (먼저) 뛰어나면 곧 본질이 화사해진다. 겉모양의 아름다움과 속내가 서로 잘 어울리는, 후자야말로 군자의 모습이다.

 

「옹야」18에서 크게 논할 수 있는 부분은 한 가지가 있었다. 이는 ‘야(野)’와 ‘사(史)’의 해석에 대한 것으로 ‘야’를 야인 혹은 촌놈으로 해석하고 ‘사’를 사관으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야’를 거칠다, 촌스럽다, 질박하다 등으로 해석하고 ‘사’를 사치스럽다, 화사해진다 등으로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전자로 해석하면 ‘야’와 ‘사’를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며 후자로 해석하면 ‘야’와 ‘사’를 용언으로 이해한 것이다. 아래에서는 『논어』 안에서 ‘야’와 ‘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야’의 사용이다. 『논어』 안에서 ‘야’가 직접적으로 사용된 부분은 「옹야」18 이외에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선진(先進)」1이다. 「선진」1에서 ‘야’는 전자의 해석인 인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야’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고 ‘야인(野人)’으로 사용되며 『논어』 안에서 ‘야’가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다음으로 ‘야’가 사용된 부분은 「자로(子路)」3이다. 「자로」3에서 ‘야’는 후자의 해석인 용언으로 사용되었다. 『논어집주(論語集註)』의 내용을 따르면 ‘야’는 ‘비속(鄙俗)’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이다. ‘야’의 용법을 확인한 결과에서는 어느 한쪽이 더 확실한 해석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은 ‘사’의 사용이다. ‘사’ 또한 『논어』 안에서 직접적으로 사용된 부분은 「옹야」18 이외에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위령공(衛靈公)」7이다. 「위령공」7에 나온 ‘사’는 전자의 해석인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정확히는 『논어집주(論語集註)』의 내용을 따르면 ‘사’는 「위령공」7에서 ‘관명(官名)’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사’가 사용된 부분은 「위령공」26이다. 「위령공」26에서 ‘사’는 「위령공」7과 같이 전자의 해석인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의 용법을 확인한 결과에서는 ‘사’는 관명 혹은 사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전자의 해석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야’의 용법에서는 두 해석 중 무엇이 더 정합적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사’의 용법에서는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전자의 해석이 더 정합적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두 해석 가능성을 평가하자면 ‘야’와 ‘사’를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전자의 해석이 더 정합적이고 뒤에 나오는 군자를 고려해보았을 때 문장의 통일성도 더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대로 ‘야’와 ‘사’를 용언으로 해석한 후자의 해석은 ‘야인’과 ‘사관’이라는 현대인은 『논어』 안에서 사용된 그 특징을 이해하기 까다로운 단어를 용언으로 풀어서 설명하면서 그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실제로 「옹야」18 ‘야’와 ‘사’에 대한 해석은 한국의 여러 『논어』 번역서에서도 그 해석의 방법이 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 「옹야」19

 

아래 인용은 「옹야」19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人之生也直罔之生也幸而免。」(자왈:「인지생야직망지생야행이면。」)

재국: 선생이 이르길, “사람이 직하게 살면, 불행한 삶이 아니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삶이 곧으니 바르지 않게 사는 것은 요행히 면한 것이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살아있는 자의 삶이란 곧게 하는 것(바르게 살도록 하는 것)이고, 망자의 삶이란 (살아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며 용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어』 한국어 번역본은 종범과 유사하게 번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장에서는 수진의 번역을 공유하고자 한다. 수진은 ‘망지생(罔之生)’을 망자의 삶, 즉 죽은 사람의 삶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앞선 ‘인지생(人之生)’과 대응 구조를 염두에 두고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른다면 공자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마땅히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서술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살아있는 사람은 바르게 살고, 죽은 사람은 (제사를 받음에 있어서) 은혜를 베풀면서 용서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번역이지만 몇몇 문제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이 번역이 『논어』 안의 다른 구절과 모순되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은 「선진」11과 「옹야」22이다. 「선진」11에서는 산 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삶을 모를 때 어찌 귀신을 섬기고 죽음에 대하여 알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다음으로 「옹야」22에서는 사람의 ‘의’에 힘쓰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자는 귀신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것, 혹은 공경하되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 그리고 핵심적으로 실제 살아가는 삶에 비해 덜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논어』라는 텍스트 안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의무를 강조하는 부분은 많이 찾을 수 있지만 망자의 의무를 논하는 부분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진의 번역이 의미를 지니는 부분은 「옹야」19의 문법적 구성을 보았을 때 앞과 뒤를 대응 구조로 해석할 수 있는 적어도 문법적으로는 편하게 도출할 수 있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논어』를 처음 번역하는 사람이 한 번은 고민해보아야 할, 다른 번역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 번역이 더 합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논어』 전반의 구성을 고민해볼 수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되기에 이렇게 그 번역을 공유하며, 그 정합성에 대하여 논했다.

 

(계속)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1)[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 안녕하세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편집부에서 알려드립니다.

6월부터 격주로   한철연 학문후속세대 지원사업에 선정된 팀의 활동 상황을 웹진을 통해 공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을 소개하고 풀어내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1)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1. <형이상학> 1(A)권

<형이상학>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람은 본성상 알고 싶어 한다”라는 문장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이 앎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의 단계를 ‘감각’, ‘기억’, ‘경험’, ‘학문적 인식과 기술’ 네 단계로 구분하여 감각과 기억까지는 동물도 가능하지만, 경험의 단계 다음부터는 오직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말한다. 학문적 인식과 기술은 “경험에서 얻은 많은 생각들로부터 성질이 같은 것들에 대해 하나의 일반적 관념”이 형성될 때 생겨난다. 예를 들어 칼리아스나 소크라테스 같은 개별적인 개개인에게 이런저런 치료가 통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경험에 속하지만, 보편적 관점에서 개인의 체질을 분류하고 그에 맞는 치료가 어떤 것인지 판단하여 그에 맞는 치료와 그것이 통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기술(의술)에 속한다.

비록 실제 행위에 있어서 경험을 가진 자들이 경험 없이 이론을 가진 사람보다 더 능숙할 수는 있더라도 학문적 인식과 기술이 더 높은 단계인 이유는 경험만을 가진 사람들은 결과가 그렇게 된다는 사실은 알더라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반면, 학문적 인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은 이유와 원인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기술자들은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유경험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기술은 경험보다 우위에 놓인다.

나아가 기술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필요에 의해, 어떤 것들은 여유 있는 삶을 위해 있다. 그리고 앞의 기술보다 후자의 기술을 발명한 사람이 더 지혜롭다. 그들이 가진 인식들은 유용성이나 필요에 의해 있지 않고,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활동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에 종속된 기술보다, 그 자체가 목적인 학문, 앎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유로운 기술과 학문이 더욱 지혜로운 것으로 본다. 이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최고 단계의 앎으로, 어떤 원리들과 원인들에 관한 학문적 인식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지혜, 즉 철학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인 견해로부터 출발한다. 이에 따르면 지혜는 1) 가능한 모든 것을 알고, 2) 알기 어려운 것을 알며, 3) 엄밀하고, 4) 원인들을 뛰어나게 가르치며, 5) 자기 목적적이고, 6) 지배적 위치에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가장 보편적인 인식’이자 ‘첫째 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한 이론적 학문’이라고 규정한다. 또 이 특성들에 따라 이 학문은 신이 소유하기에 가장 알맞다는 뜻에서 신적이며, 이것이 신적인 것들을 다룬다는 이유에서 신적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을 주재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고 일종의 원리라는 점에서 그러한 학문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성을 따지자면 어떤 학문도 그것보다 더 필요하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원인들에 대한 논의로 네 가지 종류를 제시한다. 첫째, 실체와 본질(형상인), 둘째, 질료이자 기체(질료인), 셋째, 운동이 시작되는 출처(작용인), 넷째, 그것과 대립하는 원인, 즉 지향 대상과 좋은 것(목적인)이 바로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제시한 네 가지 원인의 관점에서 그 이전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원리’ 혹은 ‘원인’에 대해 검토한다. 선대의 철학자들은 질료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원인들에 대해서 많은 주장과 논의를 내세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들의 방법은 적절치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그들이 내세운 논의가 어떤 한계와 문제가 있는지를 밝혀낸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대해 형상에 대해 말한 철학자들이 제일 본질에 가깝게 접근했다고 말하면서도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플라톤은 질료인과 형상인 만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중점으로 비판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이데아론은 개별자와 떨어져 설명에 대상을 늘렸을 뿐이며, 그 자체의 증명에도 분명한 것이 없고, 운동과 변화에 관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혹여 이러한 이데아가 수라고 하여도 이것이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포함하여 선대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미숙했으며, 네 가지의 원인을 두루 파악하지는 못했다.

(계속)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1)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 안녕하세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편집부에서 알려드립니다.

6월부터 격주로   한철연 학문후속세대 지원사업에 선정된 팀의 활동 상황을 웹진을 통해 공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을 소개하고 풀어내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1)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논어』라는 텍스트에 관하여

 

『논어』는 동양철학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고전 중 하나이다. 또한 그 내용은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쉬운 격언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렇기에 『논어』는 동양철학을 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부담감 없이 시도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동양철학을 거대한 체계가 있는 철학 사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래전 사람의 삶의 지혜를 담은 명언 모음집으로 치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논어』는 단순히 오래된 격언 모음집이 아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논어』라는 텍스트 안에서는 일관된 사상적 체계가 있다.

 

본고에서는 4월 30일 진행된 『논어』 강독에서 논한 「옹야」11-20 강독의 내용에서 구성원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온 부분을 공유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그에 대한 추가적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번 강독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온 부분으로는 「옹야」13, 18, 19, 20이 있다. 구체적으로 「옹야」13, 18에서는 스터디 구성원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논어』 텍스트 안에서의 정합성을 바탕으로 해석의 타당성을 논하고자 하고, 「옹야」19, 20에서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논어』의 일관된 사상적 체계의 부분들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옹야」13

아래 인용은 「옹야」13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謂子夏曰:「女為君子儒無為小人儒。」(자위자하왈:「여위군자유무위소인유。」)

재국: 선생이 자하에 이르길, “너는 군자다운 선비가 되고 소인 같은 선비가 되지 말아라

종범: 선생님께서 자하에게 일컬어 말씀하셨다. 너는 군자의 유학자가 되고 소인의 유학자가 되지 말아라.

서진: 선생님께서 자하를 가리켜 말씀하셨다. “너는 군자다운 유자가 되어야지 소인 같은 되서는 안 된다.”

수진: 선생님께서 자하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군자같은 선비가 되도록 하고, 소인같은 선비가 되지 말아라.

 

「옹야」13에서 크게 논할 수 있었던 부분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군자유(君子儒)’와 ‘소인유(小人儒)’에서 ‘군자의’와 ‘소인의’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군자’와 ‘소인’을 ‘군자다운’과 ‘소인다운’으로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전자로 해석할 때는 ‘군자’와 ‘유’ 그리고 ‘소인’과 ‘유’ 사이에 소유격을 의미하는 ‘지(之)’가 생략된 것으로 판단한 것이며 후자로 해석할 때는 ‘군자’와 ‘소인’이 ‘유(儒)’를 수식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의미이다.

「옹야」13에서 논할 수 있었던 다른 부분은 ‘유(儒)’의 의미이다. 스터디 구성원의 경우 이에 대한 해석으로 ‘선비’, ‘유학자’, ‘유자’의 번역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는 총 3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하나는 가장 떠올리기 쉬운 의미로 조선 시대 선비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논어』라는 텍스트가 만들어질 시기에 그 선비들이 공부할 사서가 아직 성립되기 이전이므로 조선 시대 선비의 이미지로 ‘유’가 해석될 수는 없다. 두 번째 의미는 많은 동양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제사 전문가로서 ‘유’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의미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그저 글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군자유’와 ‘소인유’에 대한 해석과 ‘유’의 의미는 그 둘을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 의미가 더 잘 드러난다. ‘군자유’와 ‘소인유’를 ‘군자의’와 ‘소인의’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유를 제사 전문가로 이해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자연스럽다. 제사 전문가로서 제사를 지낼 때 그 제사를 실제로 지내는 사람이 군자인 것을 추구하고, 소인인 것을 거부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해하면 「팔일(八佾)」6과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팔일」6에서는 계씨를 모시는 염유에게 계씨가 태산에 제사를 올리려고 하자(분수에 맞지 않은 제사를 올리려고 하자) 제사를 말릴 수 있는지 묻지만 염유는 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위 문장에 따르면 염유가 계씨를 모시는 것은 소인의 유인 것이며 이는 추구할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군자유’와 ‘소인유’를 ‘군자다운’과 ‘소인다운’의 의미로 해석하면 유를 제사 전문가로 이해해도 글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정확히 ‘군자다운’ 것과 ‘소인다운’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와 관련하여 「이인(里仁)」11과 16에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두 구절에서 군자는 ‘덕(德)’과 ‘의(義)’를 강조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이와 대비하여 소인은 ‘편안함’과 ‘이익’을 강조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군자유’와 ‘소인유’의 의미는 ‘덕’과 ‘의’를 강조하는 글공부 혹은 제사 전문가가 되고 ‘편안함’과 ‘이익’만을 위한 글공부 혹은 제사 전문가가 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계속)

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하) ‘문학 속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과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문학 속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과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

 

연효숙(여성과철학분과, 연세대)

 

『출구』의 후반부에서 식수는 그리스 비극, 독일 근대 문학 작품 그리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통해 이 작품들을 여성적 글쓰기와 연관하여 새롭게 해석한다. 우선 아이스퀼로스의 그리스 비극 속에서 식수가 이 작품들의 인물들을 어떻게 새롭게 그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엥겔스는 『가족, 사회, 국가의 기원』에서 모권제 중심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을 그렸다. 이른바 모권의 세계사적 패배다. 이를 식수는 그리스 비극의 주요 이야기를 통해서 입증 가능함을 보인다. 그러나 식수의 관점이 새로운 것은 그리스 신화, 비극 등에서 여성의 역할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이들의 긍정적인 역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진 5 : 코에포로이>│https://i.ytimg.com/vi/KJwputLOd8k/maxresdefault.jpg

 

식수는 그리스 비극 특히 아이스퀼로스의 『코에포로이』에서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 등의 장면을, 클리템네스트라, 오레스테스, 엘렉트라의 인물을 통해 그린다. 서양 역사에서 부친 살해는 많이 주목되었지만, ‘모친 살해’는 잘 부각되지 않고 있다. 오레스테스는 모친 살해로 결정적인 모권제 종식의 주요 인물이 되며, 식수는 이 사건을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연 장면으로 그린다.

트로이전쟁의 승리를 위해 남편 아가멤논이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여신들의 제물로 바치자 이에 분노한 클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그래서 클리템네스트라는 신화 속 비극적인 사건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클리템네스트라가 아버지를 살해한다는 계획을 미리 안 딸 엘렉트라는 동생 오레스테스를 피신시킨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어머니를 복수하기 위해 살해한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이제 남성 중심적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모권제는 황혼을 맞이하게 되며 모권의 광채는 흩어진다. 오레스테스의 모친 살해로 옛날 모권제하에서 모계에 따라 이어지던 혈통의 방향을 바꾸는 피가 쏟아진다. 오레스테스는 가장 죄악인 행동 즉 ‘모친 살해’를 하였다. 이 모친 살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피와 말 사이의 투쟁에서 말(로고스, 남성 상징)과 의지로 하는 약속은 피(여성)의 끈보다 더 강하다고 아폴론은 주장한다. 이럼으로써 어머니에게 연결된 피의 끈은 느슨해지고 말에 연결된 끈은 팽팽해진다. 이후 육체와 정의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설립되어, 이성과 남성을 대변하는 말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런데 식수는 모친을 살해한 오레스테스를 전형적인 남성적 인물로만 그리진 않는다. 오레스테스는 남성적, 여성적이 아닌 중성적인 인물로 반은 능동적이며 반은 수동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들의 위대한 통치의 정지를 각인시키고 부권제로의 이행을 앞당긴, 그래서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새긴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서 그리스 신화 속에서 유의해서 살펴봐야 할 인물들은 아가멤논도 아폴론도 오레스테스도 아닌 ‘여성들’이다. 식수는 클리템네스트라와 자매인 헬레네를 남성의 법의 지배를 받은 이 대지 위에 단 하나 남은 마지막 위대한 여인으로 그린다. 그녀는 변질되지 않은 자, 얼굴 하나로 테세우스를 은퇴시킨 여자, 납치당하지만 영원히 승화된 여자, 매혹적인 인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는 세기를 통해 그 이름 속에 격리된 여자로 국한해 묘사되었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대조하여, 딸이 아버지에 대한 편향을 지니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질투하는 여아의 복잡한 심리를 그린 상황을 말한다. 이런 엘렉트라를 식수는 이처럼 부정적인 시각으로 그리지 않고, 이름 그대로 자석(electronic)처럼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역할로 그린다. 특히 엘렉트라의 혀를 강조하는데, 이는 여성의 무기인 수다를 혀로 상징하는 것이다. 모친 살해를 통해 가부장제,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연 오레스테스의 혀에서 나온 말과 엘렉트라의 혀에서 나온 말은 다르다. 엘렉트라는 모권제의 쇠락함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불안을 불러일으키지만, 엘렉트라는 여자 아닌-여자, 동시에 너무-여자, 모든 면에서 논리의 과잉으로 인한 미친 이성을 가진 여자이다. 즉 이성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는, 뒤죽박죽의 존재가 된다. 오레스테스와 마찬가지로 엘렉트라도 모권제에서 부권제로 가는 이행기의 과도기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오레스테스인 남자 형제의 명령이 흐름-전기-엘렉트라성을 끊음으로써, 엘렉트라는 막대한 무기력으로 들어가고, 프로이트가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언급했듯이, 이제 위대한 남자가 지닌 ‘정신성’ 때문에 인류는 비로소 ‘진보’와 ‘문명’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식수는 엘렉트라의 혀, 여성적 엘렉트라 등에서 엘렉트라의 역할만 어느 정도 부각하고 있을 뿐인데, 아쉬운 것은 클리템네스트라의 역할을 크게 부각하지 못한 점이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비극적 주인공의 역할, 즉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고 그 결과 자신의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여 자신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깨달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역할인데, 이 역할에는 클리템네스트라가 적격이다. 그녀가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남성의 법칙의 세계를 어겼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지만, 그 벌을 받게 되는 자신의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인 클리템네스트라는 모권제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 상황을 그려낸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사진 6 : 펜테질리아>│https://media.s-bol.com/mZwrOqQppBp3/526×840.jpg

 

두 번째로 식수가 그리는 이야기는 독일 근대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클라이스트(H. W. von Kleist, 1777~1811)가 쓴 『펜테질리아』이다. 이에 대한 식수의 해석 역시 통념적인 방식과는 다르다.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전쟁 때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 의해 사망하고 이 때 아마존족의 여왕인 펜테질리아가 등장해 이 전쟁에 참여하여 그리스 측의 아킬레우스와 만나게 된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연인 관계가 형성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식수가 이 이야기에서 핵심적으로 파악한 주제는 ‘사랑’이다. 식수는 클라이스트에게서 태어난 연인은 모두 한결같다고 평가하면서 심지어는 ‘클라이스트는 펜테질리아다’라는 기묘하고 과감한 주장을 한다. 호메로스가 펜테질리아와 아킬레우스를 부정적으로 그렸다면, 클라이스트는 이 두 인물을 굉장히 긍정적이고 호감있게 그린다. 그래서 클라이스트가 자신의 정체성을 펜테질리아로 파악한 것은 자연스럽다.

펜테질리아는 트로이전쟁에 참전하면서 아킬레우스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은 후, 그녀의 존재는 새롭게 열리게 된다. 통상적으로 트로이전쟁은 처음에는 전형적인 남성적 전쟁으로 그려지며 힘들의 충돌이 보인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여성 진영으로 넘어가면서 힘 대신에 평화가 중요해지는 국면에 들어선다. 식수는 클라이스트의 『펜테질리아』를 통해 아킬레우스를 다른 남자들과 다른 예외적 존재로, 사랑에 포획된 자로 해석한다. 펜테질리아는 아마존의 여왕으로 이 여성들이 취하는 행동 양식은 남성의 법, 전쟁과는 다르다. 펜테질리아는 여성적인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펜테질리아가 거둔 이 승리는 남성적 승리의 의미와 다르다. “남성은 파괴하기 위해 지배한다. 그러나 여성은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지배한다. 여성은 지배공간을 파괴하기 위해 지배자를 지배한다.”(『출구』, 167-168쪽) 이 대목이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지배의 의미가 남성과 다르기 때문이다.

식수는 펜테질리아 속에서 광기를 본다. 광기 속에서 펜테질리아는 사랑의 끝을 향해 도약한다. 결국 클라이스트는 『펜테질리아』 작품 속에서 펜테질리아와 아킬레우스를 동일하게 보며, 심지어 클라이스트, 펜테질리아, 아킬레우스 다 동일한 인물로 보고 동일시하게 된다고 식수는 해석한다. 그래서 펜테질리아가 아킬레우스를 삼키고, 자기 체화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클라이스트 역시 펜테질리아가 되어 죽는다. 죽지 않고서는 펜테질리아가 될 수 없기에 그녀는 죽고 클라이스트도 역시 죽는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식수가 부각하고자 하는 것은 트로이전쟁의 힘의 논리 대신에 평화와 사랑이다.

 

세 번째로 식수가 그리는 이야기는 플루타르크가 쓴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로마 시대의 영웅 중의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이다. 역사에는 실제로 사랑의 승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안토니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명장군의 탁월한 자질과 유리한 조건을 살리지 못한 채, 허송세월만 지내다 생을 낭비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식수는 안토니우스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영웅주의적 시각을 버려 그의 사랑꾼의 면모를 보여주며 제국의 시선을 버린 인물로 새롭게 그린다.

식수가 보기에 사랑이야말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사람의 공동 주제이자 존재 이유다. 식수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한다. 통상 클레오파트라를 탁월한 미모를 지닌 인물로 그려 왔다. 그러나 식수는 클레오파트라를 미모보다는 대화술이 탁월한 존재로 평가한다. 그녀는 10개의 언어를 모두 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를 욕망, 소비, 풍요의 인물로 그린다. 반면에 관대함의 영역에 있어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한 인물로 해석한다. 이런 부분이 식수의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기존 평가와 다른 부분이다. 대체로 안토니우스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평가, 즉 용감하지만,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인 평가가 있는데, 식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식수의 시각이 반드시 여성주의적 시각이라고만 볼 수 없지만, 이성 중심적이고 업적 위주의, 제국 위주의 남성 중심적 시각에 비하면, 안토니우스에 대한 다른 평가인 셈이다.

또한, 식수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전통적인 역사적 평가와 다르게 새롭게 해석한다. 식수가 보기에 클레오파트라는 고고하고 자유로운 인물이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그녀는 그 어떤 남자보다도 더 위대한 여자이다. 삶을 만들고 사랑하고 삶에 몰두하는 무한한 지성을 지닌 여성이자 예술이 된 여성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식수는 극적인 묘사와 평가를 한다. 이 마지막 죽음에서 두 사람은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왕국들에서 멀리, 수많은 카이사르들에게서 멀리, 싸움판에서 멀리, 페니스와 검의 선망으로부터 멀리, 이 세상의 수많은 ‘재산’에서부터 멀리, 번드르르한 겉치레와 자존심에서부터 멀리 그들은 서로에게 조율된 채 아직도 살아 있다.”(『출구』, 199쪽) 이처럼 식수는 문학 속에 비추어진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완전히 새롭게 그렸고, 전형적인 남성들의 모습을 새롭게 해석했다.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의 방식에 따라 틀에 박힌 인물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진 7 : 글쓰기 사다리의 세칸>│https://m.media-amazon.com/images/I/6107cv4IdGL._SL1500_.jpg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에 가장 영감을 주고 영향을 준 현대 작가는 누구일까? 식수가 특별히 ‘여성적 글쓰기’라는 글이나 책을 쓴 적은 없지만, 여성적 글쓰기의 정신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특히 식수가 쓴 『글쓰기 사다리의 세칸』(1993년 출간)에는 그녀의 글쓰기의 성격이 암암리에 들어가 있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사다리’와 ‘세 칸’이다. 사다리는 글쓰기를 은유하며, 가로로 연결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식수가 말하는 세 칸은 글쓰기를 배우고 익히는 세 종류의 학교, 즉 망자의 학교, 꿈의 학교, 뿌리의 학교이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작가들은 리스펙토르, 베른하르트, 츠베타예바, 바흐만, 카프카 등이다.

맨 처음 언급되는 망자(죽은 자)의 학교에서는 죽은 자들에 주목한다. 이들은 ‘내려가는 자들’, 가장 낮은 것들과 가장 깊은 것들을 찾아가는 탐험가이다. 망자의 학교는 글쓰기를 시작하기 위한 죽음의 길로 들어설 필요성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식수가 보기에 글쓰기는 원초적인 그림,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그림을 복원하고 발굴하고 다시 찾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글쓰기는 죽는 법을 배우는 것, 삶의 극단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이 망자들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두 번째 꿈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꿈과 글쓰기 속에서 우리 몸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몸을 발견하기 위해 몸에서 몸으로 가는 여정에 착수해야 한다. 꿈의 학교에 가려면 침대부터 시작하여 무언가의 위치가 변해야 한다. 이것이 글쓰기의 정체이다. 앞에서 언급한 츠베타예바, 카프카, 리스펙토르, 주네, 바흐만은 모두 꿈꾸는 사람들이다. 또한, 식수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토로한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쓴 글은 깨어있는 의식의 영역에서 쓴 글과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낮 속에 숨겨진 밤을 글자 그대로 재발견해야 하는 일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러한 꿈의 학교는 『꿈의 해석』의 대가인 프로이트의 방점과는 다르다. 프로이트에게는 꿈의 번득임이 더는 없다고 식수는 비판한다. 우리는 꿈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법을, 꿈을 파괴하는 모든 내적 외적 악마들을 불신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꿈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고 본다.

마지막 학교인 뿌리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무엇일까? 식수가 말하는 뿌리는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근본, 계통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경계 건너기 혹은 경계 넘기이다. 즉 뿌리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전통적인 방법과 다르게, 근본이 되는 정체성의 구획이 아닌, ‘경계 넘기’이다. 식수는 리스펙토르를 분석하면서 뿌리의 뿌리 없음을 폭로한다. 글쓰기의 사다리를 가로지르는 뿌리는 분리임과 동시에 통로이고, 단절임과 동시에 연속을 보여준다.

<사진 8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https://www.que-leer.com/wp-content/uploads/2020/12/claricelispector_fotoarquivodefamilia2_0.jpg

 

이 가운데에서 특히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작가는 브라질 현대 작가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1920-1977)이다. 리스펙토르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는 작가인데, 그녀는 식수에 앞서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현실 속에서 여성의 갈등의 문제를 보여주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시간』(1989)에서 식수는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를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으로 본다. 리스펙토르가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거부하고 낯선 감각과 직관을 통해 글쓰기를 한 것을 식수는 기존의 언어를 해체하고 재탄생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게다가 리스펙토르가 여성 억압을 해방하고자 하고 기존의 남성 중심주의적 언어체계를 뒤흔든다는 면에서 여성적 글쓰기를 일찌감치 시도했다고 식수는 보았다. 물론 리스펙토르가 페미니스트이거나 여성 이론에 기대어 작품을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체험한 현실 속에서 문제화되지 않았던 여성의 내면세계 등을 난해하고 불가해한 글쓰기 방식으로 써 내려갔을 뿐이다. 1980년대 이후에 프랑스 페미니즘에서 여성적 글쓰기가 일어났을 때, 특히 식수는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를 여성적 글쓰기로 받아들였으며, 그녀로부터 영감과 영향을 받았음을 여러 곳에서, 특히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에서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유사 이래 남성 언어, 이성 언어만 있었던 근대시대까지, 남성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거침없이 발언하고 주장해 왔다. 반대로 여성들은 남성의 언어를 빌어 몸에 맞지 않은 채, 자기 생각을 말하다가 말문이 막혀 침묵하거나, 사회의 뭇 남성, 명예 여성으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여성 언어를 찾고자 하는 시도, 여성적 글쓰기를 하고자 하는 시도는 페미니즘 3세대부터 본격적으로 있었다. 물론 현재 여성들이 여성의 언어를 완전히 찾아 자기 생각을 완벽하게 길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비록 여성적 글쓰기가 여성의 정체성을 다 담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한계 상황에 봉착하는 경험을 갖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