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에서 현재 운영되는 연구분과의 분과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분과 소개나 분과 세미나 결과물, 또는 분과 개인들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하)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기원 그리고 현대 페미니즘 영향사”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시몬느 드 보부아르, 『2의 성』()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기원 그리고 현대 페미니즘 영향사

 

연효숙(여성과철학 분과)

페미니즘 역사에서 『제2의 성』이 미친 영향은 ‘서양철학사 다시 쓰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면에서 굉장하다. 서양 철학사에서 인간을 논의할 때 구체적인 보편자인 ‘인간’을 거론하지만, 이 인간은 항상 ‘남성’으로서의 인간이었다.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성별 정체성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이에 대한 문제점을 본격적으로 던진 도전적인 철학자를 보부아르로 봐도 좋을 것이다. 즉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에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고전적인 문제제기인 성(sex)과 젠더(gender)의 구별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제 상식이 된 생물학적 성과 문화, 사회적인 젠더 간의 구별은 이후 ‘성 정체성’(sexual identity) 논의에서 특히 ‘여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사회 속 권력 관계 속에서 ‘여성’을 어떻게 위치지을 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과연 “여성은 누구인가?” 보부아르가 던진 질문과 논쟁 이후 이에 동의하든, 비판하든 간에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나름 대답하고 있다.

『젠더 트러블』(1989)로 페미니즘과 현대 철학계에 일약 스타로 등장한 미국의 페미니즘 철학자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er)는 이 책의 제1장인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의 서두에 다섯명의 사상가와 그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시몬느 드 보부아르) “엄밀히 말해 ‘여성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줄리아 크리스테바) “여성은 하나의 성을 갖지 않는다.”(뤼스 이리가레) “섹슈얼리티의 전개는 (….) 오늘의 성 관념을 만들어냈다.”(미셸 푸코) “성의 범주란, 이성애적 사회에 기초한 정치적 범주이다.”(모니크 위티그)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2008, 83쪽) 이는 여기서 맨 처음 순서로 등장하는 보부아르의 명제가 이후 4명의 사상가들 그리고 버틀러에게 직, 간접적으로 영향이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 가운데에서 푸코를 제외하고 이들의 보부아르 관련 논의를 살펴 보자.

Wednesday 5th November 2004, Luce Irigaray, Belgian born (b.1930) philosopher, feminist, linguist and cultural theorist delivers a public lecture ‘Ethical Gestures Toward the Other’ at the University of Sussex, England, UK.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페미니즘에 남긴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여성’의 범주에 대한 주목이다. 벨기에 태생의 철학자,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인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가 초기에 저술한 『반사경 : 타자인 여성에 대하여』(1974)는 프로이트부터 시작하여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흐름을 보여주는데, 이는 단순히 서양철학사를 역순으로 읽자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사를 ‘반사경’처럼 뒤집어 읽고자 함이었다. 마치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인간, 남성에 대한 서양철학사를 ‘여성’을 초점으로 하여 다시 쓰고자 한 현대적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리가레는 보부아르가 제기한 ‘여성’의 범주에 대한 문제를 좀 더 복잡하고 근본적인 논쟁으로 몰고 들어간다. 『하나이지 않은 성』(1977)에서 이리가레는 여성들의 성이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양 전통 형이상학,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가 굳건히 지켜진 이래, 남성 중심적인 언어 안에서는 여성들이 그러한 언어로 재현 불가능함을 이리가레는 주장한다. 즉 여성들은 언어의 부재나 불투명성을 대표하며 일의적인 남성 중심적인 언어에서 여성의 성은 규정 불가능하다. 이는 여성들이 ‘하나’가 아닌 ‘다수의 성’이기 때문이다.(『하나이지 않은 성』, 참조) 따라서 이리가레는 주체와 타자의 구조 속에서 남성과 여성을 대입시켰던 보부아르의 실존주의적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보부아르의 실존주의적 주체, 타자의 언어 역시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 언어에 침윤되었으며, 보부아르는 암암리에 ‘본질의 형이상학’의 질서 속에서 남성과 여성을 대입시켜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리가레의 ‘하나이지 않은 성’은 보부아르의 타자로서의 고정된 여성의 범주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섹스와 젠더의 구별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니크 위티그(Monigque Wittig)는 프랑스의 작가, 철학자이자 유몰론적 페미니스트이다. 위티그는 급진적 레즈비언주의자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보부아르의 성/젠더 구별을 전적으로 비판하였다. 위티그는 저서,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 이성애 제도에 대한 전복적 시선』(1992년 출간, 허윤 옮김, 행성B, 2020)에서 보부아르의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보부아르 당사자뿐 아니라 당대 페미니스트들을 동요시켰다. 보부아르의 그 말은 ‘여성’이란 원형이 있다는 걸 전제하며 그것은 결국 남/녀 이분법과 이성애 사회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다는 비판이다. 위티그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신의 섭리에 따른 구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으며,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위티그가 보부아르의 명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를 의식해 주장한 논문의 제목은 「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1981년 발표, 위의 책, 55-75쪽에 수록)이다. 성의 범주는 불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며, 재생산적 섹슈얼리티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자연 범주를 정치적으로 활용한 용례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정치적인 제도는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이성애 중심주의를 의미하며, 그 제도에 따르지 않는다면 인간의 몸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눌 이유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위티그에게 섹스와 젠더 간에는 아무 차이가 없으며, ‘섹스’의 범주는 그 자체가 젠더화된 범주이고 전적으로 정치적으로 부과된 것이며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65쪽) 이러한 위티그의 주장은 후에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에서 거의 같은 취지로 반복된다. 위티그는 보부아르의 자연적 생물학적 성으로서의 여성과 구분된 문화적 사회적인 젠더의 구별 이후 이를 페미니즘에 커다란 공적으로 당연시 여겼던 경향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과 새로운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인 셈이다. 또한 위티그는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으로 “우리의 역사적 임무는… 우리가 유물론적 용어로 억압이라고 불렀던 것을 정의하고, 여성이 계급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 범주가 ‘남성’ 범주만큼이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범주이며 영구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67쪽)라고 하여, 유물론적 입장에서 여성 범주가 계급이자 원형없이 유동적임을 역설한다.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페미니즘 철학자이자 문학 이론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이리가레, 시수 등과 함께 현대 프랑스 페미니즘 학계를 이끌고 있는 삼인방 중의 한사람이다. 문학 이론 등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다양한 방면에서 글을 써 온 크리스테바가 페미니즘에 결정적으로 관여하여 기여한 책으로는 대표적으로 『시적 언어의 혁명』(1974)을 들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이 책에서 충동의 이질성과 시적 언어의 다성적 가능성 사이의 필연적 인과 관계가 있음을 주목하였다. 크리스테바는 시적 언어가 억압할 수 없는 다성적 소리와 의미의 이질성을 드러내는 언어적 사례로 보고 있다. 여기서 라캉의 언어관과 크리스테바의 언어관은 명확한 차이를 드러낸다. 라캉의 상징계가 모든 언어적 의미를 드러낸다면, 크리스테바의 언어는 상징계 이전의 ‘기호계’로 명명되어, 언어 속에서 작동될 수 있는 충동의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맥락은 보부아르의 섹스/젠더 구분의 이분법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 연관은 ‘몸’에 대한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성 중심주의, 남근 중심주의의 서양 철학사에서는 항상 영혼 만이 문제였지 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주목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부아르는 비록 실존주의 주체, 타자의 철학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영혼 중심의 남성적 언어 담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한 셈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이러한 보부아르의 의도를 간파하고 몸의 정치학과 기호계적 언어를 제시했는지는 명료하지 않다. 다만 크리스테바가 라캉의 상징계 중심의 인간 언어와는 다른, 전혀 이질적인 충동과 기호계를 찾았다는 면에서 보부아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상징계 중심의 언어관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찾을 수 있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보부아르의 유명한 주장, 즉 섹스와 젠더의 구별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열고 있다. “보부아르에게 젠더는 ‘구성된’ 것이지만 그의 공식에는 어떤 행위 주체(agent) 즉 어쨌든 젠더를 걸치거나 전유할 수 있고 원칙적으로는 다른 젠더도 걸칠 수 있는 코기토(cogito)가 암시되어 있다.”(『젠더 트러블』, 99쪽) 여기서 버틀러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별이 유효하지 않음을 말하고자 한다. 즉 여성이 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문화적 강제 상황 아래서 있다면, 이 강제는 ‘섹스’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몸이 하나의 ‘상황’이라면, 언제나 이미 문화적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 몸에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섹스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성으로 볼 수 없고, 섹스는 그 정의상 지금까지 줄곧 젠더였다는 것을 버틀러는 밝히고자 하였다. 버틀러에게는 섹스와 젠더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생물학적으로 날 것인 해부학적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버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섹스와 젠더의 이분법적 구별은 이제 해체되거나 무화되고 만다.

버틀러가 보기에 보부아르는 여성 혐오적인 실존주의 분석 안의 남성적 ‘주체’와 여성적 ‘타자’를 구분한 후, 실존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권리를 주창했다고 본다. 이에 대해 버틀러가 묻고자 하는 것은 보부아르가 여성의 몸이 남성적 담론 안에 나타나지만, 보편적인 남성적 몸은 남성적 담론 안에 나타나지 않는 역설이다. 이에 따라 여자의 성은 몸에 국한되고, 완전히 부인된 남자의 몸은 역설적이게도 분명한 급진적 자유를 위한 육체적 도구가 된다. 이에 따라 “남성성은 어떤 부정과 부인의 행위를 통해 비체현의 보편성으로 노정되며, 또 여성성은 어떤 부정과 부인의 행위를 통해 부인된 육체성으로 구성되는가”(『젠더 트러블』, 106쪽)라는 질문이 노정된다. 보부아르는 여전히 정신/몸의 이분법을 주장하기 때문에, 정신은 남성성, 몸은 여성성이라는 이분법이 견지된다. 따라서 여자의 몸은 여전히 남성적 담론 안에서 표식되고 보편성으로서의 남성적 몸은 표식되지 않는 채 남아 있게 된다.

현대 페미니즘에서 비교적 젊은 세대에 속하고 이탈리아 출신으로 여러 나라에서 ‘유목적 지식인’으로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는 들뢰즈, 가타리의 유목주의, 그리고 현대 포스트휴먼 지식의 맥락과 연관된 페미니즘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에서 브라이도티는 보부아르에 대해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성’과 ‘성 정체성’에 대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브라이도티 역시 보부아르의 섹스, 젠더의 구별 등에 관한 주제와 간접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1994)에서 보부아르가 여성이 재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현되어야 한다고 하며, 이것이 여성 운동의 주요 과제라고 보았다.

우리 시대 페미니즘에서 체현과 성차의 문제를 다뤘던 『유목적 주체』의 8장 ‘유목적 정치 기획으로서의 성차’에서 브라이도티는 특히 다양한 성차의 층위를 논의함으로써, ‘성차’에 대한 현대적 변신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보부아르 시대에 고전이 된, 인간 남성 일반에 대립되는 ‘대문자 여성’의 구성된 여성 주체를 어떻게 다양한 시각에서 여성‘들’과 여성들 사이의 ‘차이들’로 보여 주어야만 하는지를 치열하게 논의한다. 브라이도티는 각 여성들 내의 차이들, 심지어 자기 안의 복수성으로서의 여성들-되기의 변신을 자유롭게 제안하고 있다. 그만큼 브라이도티는 고전이 된 보부아르의 섹스/젠더의 이분법적 틀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체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제시한 섹스와 젠더의 구분으로 페미니즘 역사에서 핵심적인 논쟁점을 던진 대모 역할을 맡아 왔다. 그 후 페미니즘 역사에서 여성 문제를 둘러싼 시원에는 언제나 보부아르가 기원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보부아르에 동의하든 신랄하게 비판하든 간에 논쟁의 시발점은 언제나 보부아르의 섹스와 젠더의 구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부아르 이후 현대 페미니즘의 다채로운 갈래들의 기원에 보부아르의 짙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렇다면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 그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어떻게 매길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부아르는 ‘여성’ 범주를 최초로 문제시했다. 『제2의 성』의 제목이 가르치는 것은 바로 ‘여성’이다. 제1의 성이 남성이라면, 제2의 성이 여성이라는 얘기다. 이 문제에 대해 이리가레, 브라이도티 등 많은 현대 페미니스트들이 각자 답을 내리고 있다. 둘째, 보부아르가 명시적으로 그 용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현대 페미니즘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 중 하나인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제2의 성』의 유명한 명제가 제공했다. 대표적으로 위티그와 버틀러가 이 문제에 대해 집요하게 도전적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셋째, 이러한 섹스/젠더의 구분은 결과적으로 ‘몸’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논쟁을 유발시켰다. 이성 중심주의 서양철학사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몸,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일으킨 셈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리가레, 크리스테바 그리고 버틀러 등이 여전히 활발하게 논쟁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실천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보부아르가 남긴 영향력은 그리 크지 못했다. 여전히 그는 프랑스 엘리트 사회의 ‘명예 남성’으로 남았으며, 제2의 성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실천적인 각성과 거부, 저항, 투쟁의 강도는 강하게 남기지 못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상) (하) 끝.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상) –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시몬느 드 보부아르, 『2의 성』()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효숙(여성과철학분과)

 

출처: https://pictures.abebooks.com/inventory/md/md21869913397.jpg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번역되어 시중에 유통되는 이 문장은 페미니즘(여성주의)에 대해 무지하거나 적대적인 사람들도 한 번씩은 들어 봄 직한 말이다. 이 문장의 출전이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Gallimard, 1949)이며, 이 책의 필자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인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적어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의 성』을 완독한 사람을 손에 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책의 엄청난 분량 때문이고, 이 책에서 언급된 보부아르의 어마어마한 식견에 대해 감탄하다가 질렸기 때문일 것이다. 『제2의 성』은 페미니즘 역사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의 『여성 권리의 옹호』만큼이나 고전주의 반열에 들어갈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이 페미니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향력과 논쟁을 불러 왔다는 점이 이 책의 중요성이자 미덕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보부아르 역시 이 책 만큼이나 논쟁을 불러일으킨 20세기의 유명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실존주의 철학자, 소설가, 극작가, 제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여성주의자), 참여 지식인 그리고 사르트르의 계약 결혼 당사자 등 보부아르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넘쳐난다. 이 가운데에서도 보부아르를 특징짓는 점은 보부아르가 활약한 활동 영역의 다양함과 함께 보부아르를 유명세로 이끌었던 『제2의 성』이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차이의 페미니즘으로의 길을 개척해 준 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이다.

출처: https://frenchintellectuals.files.wordpress.com/2017/12/simone-de-beauvoir-interview.png?w=944&h=631&crop=1

『제2의 성』이 출간된 해는 1949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완성되었다. 알다시피 두 개의 큰 세계 전쟁을 겪은 인류에게 남은 것은 전쟁의 폐허와 상처, 죽음, 불안, 공포뿐이었다. 특히 유럽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자국 땅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세계 대전의 상흔으로부터 비켜 갈 수 없었다.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선 것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서구의 근대 문명 특히 인간 중심주의적 기조가 자가당착으로 도달하게 된, 두 개의 전쟁 후에 인류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성, 과학, 확신이 아니라, 죽음, 운명, 실존 등 인간과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이런 공통적인 흐름에 대해 보부아르 자신이 어떤 자각을 가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책을 쓸 때 보부아르는 ‘인간’에 대한 근대의 보편적 물음이 아니라, ‘여자’에 대한 실존주의적 물음을 던졌다. 물론 이때 보부아르는 아직 페미니스트도 아니었고 페미니즘 운동사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즉 “나에게 여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보부아르가 묻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여성’에 대한 그의 연구가 페미니즘으로 연결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페미니즘 역사에서 이 책과 저자가 차지하는 위상과 위치는 어느 정도인가? 보부아르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현대 페미니즘의 많은 논쟁점을 살펴본다면, 그 한가운데 보부아르의 이 책이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가? 또 보부아르가 이 책에서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제2의 성』은 제1권, 사실과 신화, 제2권, 체험, 이렇게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 여성을 둘러싼 이론적인 배경, 논쟁 등을 다뤘다면, 제2권에서는 여성의 성장 과정과 여성이 놓인 상황 등을 다루면서 여성 해방에 대한 대안을 결론으로 맺고 있다.

이 책 제1권 ‘사실과 신화’의 서론에서 보부아르는 자신이 여자에 관해 책을 쓰는 것을 오랫동안 주저해 왔다는 심경을 토로한다. 이어서 남자가 ‘주체’이고 절대적이며, 여자는 ‘타자’라고 하여 남성과 여성 관계를 실존주의적 범주로 규정하여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 다음 제1부인 ‘운명’에서는 여성의 운명을 결정지어 온 세가지 관점을 분석한다. 첫째, 생물학적 조건에서 볼 때, “여자? 아주 간단하지”라고 단순한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여자란 자궁이고, 난소이며 암컷이다. 여자를 규정하기에 이 말이면 충분해”(『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47쪽, 이하 인용에서는 쪽수만 표기)라고 말한 이 부분은 동물, 유기체, 인류(인간)에 대한 암수 구별의 생물학적 설명을 통한 여성의 규정이다. 그러나 “생물학은 우리의 초미의 관심사인 여자가 왜 타자이냐는 질문에 답변을 주기에 부족하다. 역사의 흐름에서 여자의 자연적 본질이 어떻게 파악됐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인류가 여자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가를 알아야만 한다.”(78쪽)라고 생물학을 비판한다.

둘째, 보부아르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을 빌어 “정신분석학이 정신생리학의 영역에서 이룩한 지대한 발전은 어떤 요소도 인간적 의미를 띠지 않고서는 정신적 생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학자들에 의해 기술된 신체-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체험한 신체이다. 여자는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는 것에 따라서 여자다. ….. 생물학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음핵 같은 기관이 체험적 상황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자를 규정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여자는 자연을 자기의 감성에서 다시 파악해 자신을 규정해 나간다.”(79쪽) 그러나 보부아르는 “프로이트는 여자의 운명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남자의 운명에 대해 먼저 기술하였고 거기서 몇 가지 특징만 수정한 채 그대로 여자의 운명을 기술했던 것이 분명하다….. 프로이트는 여자의 섹슈얼리티가 남자만큼 발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독립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80쪽)라고 신랄하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셋째, 보부아르는 엥겔스의 『가족의 기원』에서 가부장제의 등장으로 여성의 역사적인 패배를 언급하면서 역사적 유물론의 의의와 한계를 논의한다.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밝힌 것은 남성 노동 중심으로의 변환, 일부일처제의 등장이다. 이에 대한 보부아르의 비판은, 공유재산(공산주의)에서 사유제로의 이행의 설명에 대한 근거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여자의 섹슈얼리티는 다소 복잡한 우회로를 통해 여자의 경제적 상황을 드러나게 할 뿐이다.”(103쪽)에서 보듯이 엥겔스의 견해는 경제적 일원론에 머물고 만다는 점이다.

위의 세 가지 견해에 대해 보부아르는 “우리는 인간이 몸, 성생활 기술을 인간 존재의 총체적 전망에서 파악할 때만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할 것이다. 근력, 음경, 도구의 가치는 가치의 세계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가치는 실존자가 존재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기본적 계획에 의해 결정”(103쪽)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여기에 바로 보부아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자기 견해가 전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어서 보부아르는 제2부 ‘역사’에서 남녀의 기나긴 불평등의 역사를 추적한다. 우선 유목 사회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여자의 종속을 선사학과 민속학 등의 자료를 통해 검토하는데, 이는 엥겔스가 철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을 다룬 것에 견줘 보면 여성 억압의 역사를 더 일찍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 농경사회로 진입한 후 1949년까지 서구 역사 속에서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들을 지배, 억압했는지 그 반복 강화의 역사를 검토한다. 그렇다면 이 여성을 억압한 역사의 결론은 무엇인가? “남자들이 점하고 있는 경제적 특권, 그들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위세, 남자의 지원 유용성 등 모든 것이 여자들에게 남자의 마음에 들기를 열렬히 원하게 만든다. 여자들은 여전히 전체적으로 종속의 상황에 놓여 있다. 그 결과, 여자는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규정하는 대로 자신을 인식하고 선택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남자가 꿈꾸는 여자를 묘사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남자를 위한 여자의 존재 방식은 여자의 구체적 조건을 이루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220쪽)라고 여성 억압의 역사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이제 보부아르는 제3부에서는 여성 신화를 고찰한다. 보부아르가 여성 신화를 고찰하는 것은 남성들이 자기 우월의 정당화를 위해 여성들에게 투사한 이미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모든 신화는 자기의 희망과 두려움을 초월적인 하늘을 향해 투사시키는 주체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들은 자신들을 주체로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계획이 반영될 남성 신화를 창조하지 못했다.”(226쪽)에서 보듯이, 여성들이 신화를 창조하지 못한 이유를 보부아르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주체와 타자로 놓고 여성이 여전히 타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서 찾고 있다. 다만 여성들을 주제로 한 신화는 이브 신화, 생명과 수태 신화, 처녀성 신화, 동정녀 마리아 신화, 어머니 신화, 착한 아내 신화, 뮤즈 신과 같은 여성적 신비의 신화 등이다. 여기서 문제는 여성을 여성의 신화 속에 가두어 두려고 하고, 여성의 신비화를 통해 여성 타자의 모습이 구현됨을 보이는 것이다. “단지 여자는 비본질의 양태로 모든 것이다. 즉 여자는 완전히 타자다. 그리고 타자로서 여자는 그녀 자신 외의 다른 것이고, 여자에게서 기대되는 것과 다른 것이다.”(298쪽) 결국 여자는 영속적인 빗나감, 실존의 빗나감 자체에 머물고 말 뿐이다.

이어서 보봐르는 여성 신화의 이상과 같은 분석을 확인하기 위해, 몇몇 작가들에게서 나타났던 신화의 개별적이고 혼합적인 모습을 몇몇 유명 작가들의 여성에 대한 태도를 통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이 작가들은 여성 폄하 신화를 창조한 장본인들인 셈이다. 이런 여성 신화를 극복하기 위해 보부아르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주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끝으로 여자가 자신을 위해 자신에 의해 살게 될 때, 여자는 완전한 한 인간이 된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제2권의 ‘체험’의 제1부 ‘형성’의 제1장의 유년기의 첫머리에 보부아르의 『제2의 성』만큼이나 명성이 자자한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389쪽) 이 명제는 현대 페미니즘에서 성(sex)과 젠더(gender) 간의 구분에 대한 원초적인 출전에 해당한다. 이 명제만큼 논쟁을 많이 불러 일으킨 명제도 없을 것이다. 보부아르 후대의 많은 페미니즘 철학자들이 이 명제를 한 번 이상 거론하지 않는 적이 없을 정도이다. 이어서 보부아르는 여성의 유년기부터, 사춘기를 거쳐 사춘기 이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고, 성에 입문하는 과정, 동성애 등을 다룬다. 이는 마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성생활의 형성 과정을 보부아르는 실존주의적 입장에 입각해 일관되게 재해석한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은 프로이트가 설명한 논거와는 분명 차이를 보인다.

제2부의 여성의 ‘상황’에서는 결혼한 여성, 어머니, 사교 생활, 매춘부와 첩, 성숙기에서 노년기를 그린다. 특히 결혼에 대해 비판적인 보부아르의 견해를 청취할 필요가 있다. 결혼이 ‘자주적인 두 사람 간에 자유롭게 합의한 하나의 결합’이라고 정의되지만, 결혼에서 두 배우자는 동등하게 지위가 확보되지 않는다. 그 당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여성이 경제 주권을 부분적으로 가질 수는 있지만, 여성의 수동적 지위는 결혼을 통해 더 강화된다. 결혼이 비극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그 제도적인 결함에 기인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특히 여성에게 경제적 조건을 보장해 주어야 하고, 남성들의 각성 등을 제시하지만,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로 남아 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이슈는 보부아르의 ‘모성애’에 대한 입장이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출산은 여성에게 ‘기쁨’과 ‘존재의 정당화’를 가져다 주는, 여성에게는 최고의 단계이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이러한 전통적 견해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그 견해 속에 들어있는 모순적이고 기만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출산한 어머니와 아이와의 관계 역시 복잡하고 양가의 감정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3부 ‘정당화’에서는 여성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경우들, 나르시시즘, 사랑 그리고 신비주의 여성에 대해 논의한다. 여성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는 자기 숭배, 자기 사랑을 통해 자유를 확신하고자 하는 거짓 도피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리고 여성이 사랑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평소에 길들여진 수동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여성은 사랑의 태도에서 남자와의 상호적 관계를 견지하기 보다는 그 사랑에 스스로 예속되어 간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자기 도피와 포기가 아닌, 강건함과 자기 확립을 위해 사랑을 할 때, 진정한 사랑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흔히 여성들이 신비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현실을 피하고 자기의 실존을 최고의 인격으로 구현해 줄 수 있는 전체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비주의 태도는 여성에게 주체의 이미지를 부여하지 못하며, 자유의 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이제 『제2의 성』의 최종 결론으로 가보자.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을까? ‘제4부 해방을 향해’에서 이에 대한 답을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또 『제2의 성』을 제일 유명하게 만들었던 명제인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처럼,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여성의 열등성이 선천적이거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여자의 한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세워야 할 것은 그녀의 ‘상황’이지 신비스러운 ‘본질’이 아니다.”(965쪽)라고 말하며,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는 여자의 가능성이 억압되어 인류의 손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여자 자신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여자가 마침내 모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할 때라는 것”(967쪽)임을 여성 해방을 위해 강조하고 있다. 보부아르는 맨 마지막 ‘결론’의 실천적인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여자와 남자가 진정으로 ‘평등’해지기 위해 법, 제도, 풍습, 여론, 그리고 모든 사회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할까?”(980쪽)라고 묻는다. 그리고 제시한 대안, 결론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관계’임을 주장하며,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지배의 “숭고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여자와 남자가 자연적 차이를 넘어 우애를 분명하게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988쪽)라고 말하며 이 책의 대단원을 맺는다. 이 마지막 맺음말을 통해 보부아르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보부아르가 주장하는 여성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여자와 남자 간의 자연적 차이를 넘어서 우애를 확립하자는 주장은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와 대립을 강조하기보다는 우애로 상징되는 ‘평등’의 가치를 획득하자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보부아르는 남성과 여성 간에 존재하는 ‘차이 속에서의 평등’을 강조했을까? 아니면 ‘평등 속에서의 차이’를 부각하고자 했을까? 비록 보부아르가 섹스, 젠더 간의 구별과 차이를 통해 현대 차이의 페미니즘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을지라도 보부아르 자신은 차이보다는 평등과 우애에 무게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맺음말에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은 다소 맥이 빠지고 싱겁다. 여자와 남자 간의 자연적인 관계, 그리고 자연적 차이를 넘어 우애를 확립하자고 하는 보부아르의 결론에서 실천적인 페미니즘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두꺼운 분량을 할애해 쓴 보부아르의 역작은 결국 여자와 남자의 우애를 위한 것일까? 제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에게 우리가 너무 지나친 기대를 걸 수는 없겠고, 이후 현대 차이의 페미니즘에 논쟁의 물꼬를 튼 역할을 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하) 편에서 계속


김주일 지음,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 ‘정의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EBS 오늘 읽는 클래식]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2022)

 

진보성(한철연 회원)

 

정의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이게 나라냐’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과 그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된 말이다. 지금은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상반된 의도를 담은 정치 공세의 구호로 쓰이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나라(폴리스)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바탕이며 그 목적이기도 하다. “시민의 삶을 살거나 시민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살며, 공적인 삶과 관련해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동물”(18쪽)이 인간답게 사는 사람을 뜻한다면,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칭하는 ‘나라’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정의로운 공동체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주일의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2022)은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 국가와 시민의 관계, 사회와 국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서두에도 자세히 밝히고 있듯이 플라톤 『국가』의 원제는 ‘Politeia’로 ‘폴리스의 정치체제’라는 뜻이 있다.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윤리관이 담긴 『국가』는 플라톤의 유토피아인 ‘정의가 살아 있는 이상적인 국가’의 조건을 제시하고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가 어떻게 성립 가능한지, 또 어떻게 타락해 변해갈 수 있는지를 다중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플라톤의 스승이자 불의한 죽음을 맞았던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여러 사람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주제로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에서는 총 10권 분량의 『국가』 서설에 해당하는 1권의 대화 내용을 주로 다룬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파하며 정의의 실체를 논하는 내용을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작은 제목으로 체계적으로 나누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강자의 세계관을 들고 논의에 난입”한 트라쉬마코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시종 “정의(正義)의 정의(定意)를 묻”고 논박한다.

“자신의 이익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부정의(不正義)를 통치자의 기술로 둔갑시킨”(100쪽)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지금 부정의한 통치자들의 그것과 닮았다. 지금 우리의 통치자들은 어떤가? “정의가 남 좋은 것이라 위장해 피통치자들을 속이고, 다 당신들을 위한 것이라며 자신들이 정한 법을 지키게 하고 위법한 자는 부정의한 자라고 하여 처벌한다.”(100~101쪽) 이런 모습이 통치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피치자는 위정자의 모순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감히 부정의를 저지르지 못하고 비난하며, 정의를 지키는 시늉을 한다. 치자와 피치자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속셈을 가지고 있을 때, 이 공동체가 이 모순을 견디며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101~102쪽) “우리 사회가 겪었던 최악의 통치 권력 중 하나였던 제5공화국이 내세웠던 국정지표가 ‘정의사회구현’이었던 것을 보면”(102쪽), 정의라는 이름 아래 모순의 사회가 유지된 역사는 가까운 과거사에서도 목도된다. 현대 사회에서 정의로운 자의 타율적 결핍은 심해지는 데 반해 부정의한 자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현상을 두고 부정의한 자의 ‘능력’이란 말로 칭송될 때 2,500년 전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비극적으로 현실화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후반부에는 플라톤이 주장한 정의로운 이상적인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 철학자가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종합적 견해를 다룬다. 사회 구성원 중 사적 소유를 허용하지 않는 수호자 계층을 지목하여 그들이 함양할 덕목과 함께 교육의 중요성, 제도권 안에서 공적인 삶의 태도 등 가장 지혜롭고 훌륭한 자들이 통치하는 철인정치의 가능성을 다채롭게 짚으며 정치체제뿐 아니라 이에 관계하는 인간의 영혼 및 이데아 개념, 문학 등도 거론하는 대목은 플라톤의 『국가』를 다시 읽어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오늘날 『국가』를 읽는 것은 ‘정의에 이르는 길’을 찾는 지적 여정의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정의에 이르는 길, 즉 정의로운 나라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플라톤의 국가』 논의의 연장으로 한철연 웹진 〈ⓔ 시대와 철학〉에 연재하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의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㉚”의 한 대목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나라란 부정의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른바 자연적 정의 상태가 존재하는 최초의 나라 같은 나라가 아니라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통제하고 이겨내면서 정의를 보전해내는 그러한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장차 플라톤이 구축하려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이다.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최초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사스러운 나라를 최대한 정화하여 최대한 정의를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나라라 할 것이다.”1


서평자 진보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전임대우강의교수,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박은미 지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2021)

 

유현상(한철연 회원)

 

박은미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를 읽고

 

철학자들의 언어는 어렵다.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 자체가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누구나 아는 말로 표현해도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일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실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선택하는 과정은 철학자들에게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사유를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고 인정받았던 하이데거조차도 자신의 사유를 표현할 언어의 한계를 느껴 한동안 집필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곤혹감의 표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역시 철학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읽는 것만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마음이 가지 않는 철학 연구자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박은미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 는 많지 않은 분량으로 쇼펜하우어와 그의 대표 저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제한된 지면에서 소개하기가 쉽지 않은 텍스트 임에도 핵심적인 이해를돕기에는 적절한 설명을 담고 있다. 핵심어인 ‘표상’ 개념에 대해서는 언어 분석적 접근을 통해, 그리고 ‘의지’에 대해서는 칸트의 ‘물자체’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쇼펜하우어의 세계 인식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인데 그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의 세계이기도 하다.”라고 하는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덧붙여서 ‘의지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난 세계가 바로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설명한다. 우리들의 세계인식의 양상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이보다 더 간명하게 소개하기란 쉽지 않다. 의지가 객관세계의 존재근거라면 표상은 인식 주관의 인식 내용의 근거라고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는 세계 인식의 양상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이 단지 세계 인식에 관한 문제의식만을 담고 있지 않음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책의 필자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나의 밖에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한 인식의 중요성, 즉 의지에 근거한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대상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고통스러운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 세계를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이성주의 혹은 합리주의적 관점은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역동적 세계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과 논리는 어쩌면 일종의 ‘죽어 있는 사고의 형식’일 수 있다. 헤겔은 이런 난점을 극복하고자 형식논리를 넘어서는 변증법적 논리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철학 역시 법칙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다.

심리학은 세계 못지않은 역동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지적 도전이다. 그 도전이 인간의 구체적 존재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많은 진전을 이루어 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 현상을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 역시 규칙성과 논리로 인간의 마음을 읽으려 한다는 점에서 생의 역동성을 근원적으로 구명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나타난 반합리주의 철학이 이성을 통해서만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 철학의 주류적 흐름에 생(生)을 역동적인 모습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유 지평을 연 철학임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 있다.


서평자 유현상: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전호근 지음,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 – ‘우리는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2022)

 

진보성(한철연 회원)


우리는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가?

 

한여름이다. 연일 폭염에 시원한 소나기는 언제나 내릴지 하늘만 보다가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2022)를 손에 잡았다.

맹자의 글을 두고 한여름 더위를 식히는 소나기 같다고들 한다. 『맹자』에는 속 시원하게 내리는 비, 성대하고 세차게 흐르는 모양을 뜻하는 패연(沛然)이라는 말이 나온다. 벼 이삭을 자라게 하는 자연의 순리처럼 덕으로 펼치는 왕의 통치가 필요했던 전국시대, 백성 돌볼 줄을 몰라 왕 노릇도 하지 못하면서 무력으로 전국을 제패하여 패왕 자리에 오르려던 자들에게 바른 말[正言]을 거침없이 날렸던 맹자의 언변은 예나 지금이나 통치의 기본도 모르면서 자리만 차지한 자들을 보며 쌓인 마음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전호근의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는 청량제와 같은 『맹자』를 읽으면서 속만 풀고 말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 정치에서 우리가 원하는 통치자는 어떤 통치자여야 하는지를 알고, 우리가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지를 다시금 살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책은 맹자 사상의 요점을 밝힌 1장과 『맹자』 원문을 가려 뽑아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번역하고 해설한 2장에서 맹자의 정치론을 간명직절하게 정의한다. 맹자의 왕도론은 “누가 천하를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며, 혁명론은 “누가 천하를 다스려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 두 주제는 『맹자』를 관통하는 맹자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맹자의 사상은 왕 노릇을 할만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와 왕 노릇 못하는 왕은 끌어내려야 한다는 ‘혁명론’,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 이 세 가지의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 셋은 『맹자』 안에서 유기적으로 엮인다. “혁명은 왕도의 의무를 저버린 군주에 대한 저항이고 왕도정치의 실현 가능성이 성선설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주장을 분리해서 볼 수는 없다.”(15쪽) 현실 정치에서 무능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보편적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형이상학적 근거는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권력에 맞설 수 있고 바람직한 권력을 희망할 수 있다.

오늘날 『맹자』를 제대로 읽었다면 “방관자들의 압도적 무관심 속에서 독재와 억압의 부조리가 창궐했던 경우”(73쪽)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맹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75쪽) 이것이 맹자가 말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써서 행하는 기준이다.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사람”(74쪽)들이 권력을 탈취하면 사회에서 차마 그러지 못할 일들이 버젓이 횡횡한다.

옛날에는 자신을 수양하는 군자가 이러한 마음 씀과 행위의 기준을 담지하고 세상에 나아가 제시했다면, 민주 사회에서는 보통 시민들이 이 일의 당사자이기에, 그러함에 뻔뻔한 권력자들이 우리 사회에 여전한 것이 그저 남의 부끄러움의 몫은 아닌 것 같다.

맹자는 제선왕이 제사에 희생으로 쓰일 소가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에 소 대신 양을 쓰라 명한 것을 두고 제선왕이 왕도정치를 베풀 수 있다고 말했다. 의아해 하는 제선왕에게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임금님의 은혜가 소 한 마리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런데 그 공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결국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이지 은혜를 베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지금 임금께서 왕도정치를 베풀지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양혜왕상」)”(154쪽)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찮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맹자에 의하면 이 작은 마음은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과 남에게 차마 못할 일을 하지 않는 마음으로까지 확장된다. 2011년 구제역 살처분 당시 “우리 소는 평소에 제대로 먹이지도 못해 비루 말랐는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배불리 먹여주고 싶습니다.”라는 축산인의 말에 현장 사람들이 모두 공감하고 눈시울을 적셨다는 일화(153쪽)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선함을 믿고 그 가능성의 길을 따라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맹자의 꿈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왕도정치가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정치적 상상을 그 누가 할 수 있었을까.

맹자가 말한 것처럼 백성을 위하고 시민을 위한 정치는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데도 방기하고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전국시대가 그랬고 지금 시대가 그러하다. 맹자도 그랬지만 아마 우리가 원하는 통치자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자’일 것이다. 이런 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많은 수의 우리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384


서평자 진보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전임대우강의교수,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1. 캐롤 페이트만의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을 읽고
하편. ‘시민의 자유와 예속관계는 교환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유가연(여성과철학 분과)

 

캐롤 페이트만(Carole Pateman, 1940~)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계약을 남성과 그에 예속되는 여성과의 관계, 여성과 그녀로 인해 자유에 대한 판타지를 가진 남성과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남녀 간의 자유와 예속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치적인 성차를 토대로 살펴보았다. 성차의 정치적 특성은 혼인계약, 고용계약이나 노예계약에서와 같이 시민법에 의거해 시민 개개인의 행동이 국가로 인해 제한된다는 조건 아래 맺는 사회계약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남녀 간의 자유와 예속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시민의 자유와 지배가 예속되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시민은 국가로부터의 보호를 보상으로 되돌려 받는다는 점에서 이 관계는 교환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과연 시민의 자유와 예속의 교환관계가 제대로 성립되느냐는 것이다. 캐롤 페이트만에 따르면, “자유와 교환가능한 예속이 착취라는 개념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들”1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호교환할 수 있는 이원 항은 일단 등가물로서 동등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데, 자유와 착취 간의 관계는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20세기 초반만 해도 자유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제대로 규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실상 20세기 중반 영국 런던 출신의 정치가이자 작가이면서 경제학자, 신학자 및 역사학자였던 죠지 콜(George Cole, 1889~1959)은 노동당에 소속되어 있었고, 길드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페이트만은 콜의 급진적인 정치이론이나 활동은 일단 논외로 두고, 콜이 언급한 노동자들의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콜에 의하면, 정작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가 가진 잘못된 생산 시스템을 비판하거나 지적하지 못했다.”2는 점에 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 환경이나 조건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조차 깨닫거나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된 사회계약의 노예제와 같은 속성이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노동계약은 그저 추상적이고 막연한 가난이고 불공평한 것이었다. 페이트만이 지적한 사회계약의 어두운 면은 20세기 초반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시민의 몰이해와 편견, 불식, 무지 등으로 인해 폐허로 남아 있다.

캐롤 페이트만은 성과 부부와 관련한 사적인 생활을 비정치적 범주로 묶어 부성의 권력 아래 완전히 감추고 망각시킨 사회계약을 비판하는 반면,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는 강요된 비정치적 자연 및 권리를 종교와 민속학 및 인류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크리스테바는 『여성과 성스러움』에서 가톨릭 미사의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발작증세를 보인 흑인여성에 대해 알린 바 있다. 이 증세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없었다. 미사 시간에 쓰러져 울부짖은 여성은 “신들림, 미친 여자, 히스테리, 투밥(서구화된 아프리카인 여성), 애니미즘, 미국식 외침 요법, 묘기, 영매 등”3으로 명명되었다. 같은 여성이지만, 엄격한 수도회 교육을 받은 아프리카인 수녀들이나 엘리트층 여성들은 발작 증세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개 하층민 여성들에게 일어난 히스테리는 유럽으로부터 강제 이식된 가톨릭교에 짓눌려 있던 토속종교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신분석학자이면서 기호학자, 철학자, 작가이고, 파리 디드로 대학의 명예교수인 크리스테바는 흑인 여성의 이러한 증세를 “성스러운 착란증”, “가톨릭교의 성스러움과 다른 새로운 성스러움”4이라고 불렀다. 아프리카인들이 노래와 춤을 즐기면서 자신만의 리듬을 만드는 “감응적 기질”5이 성스러움에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녀는 페이트만과 같이 사회계약의 토대를 이루는 성적 계약을 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욕망하는 대상으로 만나는 모성, 즉 가부장제로 인해 은폐되고 왜곡된 모성으로 정의하였다. 인간은 태어나 주관적인 입장을 관철하면서 성장하여 모성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인간은 모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모성을 부정하는 것에 집착하고 억압받는다. 페이트만은 시민의 자유와 예속의 관계를 성적 계약으로 밝힌 바와 같이,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를 통해 주체의 모성 배척 행위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강박증적 억압의 상태를 제시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유와 예속의 교환관계에서 보상되어 얻는 국가로부터의 보호권을 대신하여, 인간 주체가 내재적으로 드러내는 신경증적 징후를 제시하였다. 인간이 자연을 부인하고 분리하려고 할수록, 그는 무의식의 보상 및 억압 기제로 인해 자연에 더 집착하기를 욕망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회계약을 어머니와 맺는 인간 최초의 애착 관계로 보았다. 어머니와의 욕망과 억압 관계는 성인이 되어서도 불안과 공포의 감정으로 표출되면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무의식을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자아와 지각의 대상을 분리하고, 자아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면서 겪는 근심과 불안감은 안과 밖의 경계성에서 의미를 무수히 창출한다. 이것이 크리스테바가 제시한 문화비평 용어인 “아브젝시옹”6이다. 아브젝트는 공포증이나 자아분열증과 같이 어느 대상을 부인하거나 동일시하는 행위가 뒤섞이는 이념을 말한다. 아브젝트는 사회계약론으로 규정된 성적 계약의 가장 순수하고 강렬한 실재이다.

Carole Pateman in Brazil 2015, 출처: 위키피디아 / <Agência Brasil> https://agenciabrasil.ebc.com.br/

캐롤 페이트만은 원초적 사회계약이 가부장제가 폭로되는 남녀 간의 성적 계약이라고 비판한다. 그녀는 “사회계약론에 나타난 개인은 실체도 정체성도 없이”7 추상적인 자아만을 가지고 있어 행동 발달 과정에서도 구체화되지 못하고 추상적인 단계에 머무른다고 지적한다. 남성의 행동은 보편적이고, 여성의 행동은 개별적이라고 보는 사회계약론은 결코 성차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는 미국 버클리 도시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이면서 정치철학, 윤리학, 여성주의, 퀴어 이론, 문화 이론 분야의 전문가로서, 개인의 구체적인 정체성을 담고 있는 것은 ‘나’라는 인칭대명사나 이름이 아니라 언어의 독특한 수행성을 띠는 동사라고 주장한다. 수행언어를 통해 젠더 문제를 논한 그녀는 페미니즘 분야에서 대표적인 젠더이론가이자 퀴어학자, 철학자이다. 버틀러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욕망의 억압 기제에서 더 나아가, 자유와 예속의 보상물로서 잃어버린 모성을 향한 애착을 “우울증”8으로 제시하고, 이것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의 대표 저서인 『젠더 트러블』에서는 젠더의 우울증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한 버틀러의 초기 의도가 후반부에서는 나타나지 않거나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그녀에 따르면, 우울증은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예측할 수 없고 불확실한 젠더의 정치적 특성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 증세는 젠더 문제가 규범적이거나 미리 규정된 형식을 갖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는 고유한 수행적 특성으로부터 발생한다. 버틀러는 젠더를 지배하는 규범들을 파괴하고 해체하고자 하는 “수행”9적 언어를 믿지 않는다. 젠더가 담지하는 사회적 수행성은 자신을 ‘나’일 수 있도록 만드는 조건으로서 투명하지 않을뿐더러 사회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정확히 규명되어있지 않다. 즉, 나를 나이게끔 하는 것은 ‘나’라는 인칭을 나타내는 언어에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나의 이름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버틀러에 의하면, ‘나’는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와 사회 간의 예속관계에 있다. 우리는 이미 언어가 지시하는 행동을 수행하는 맥락에서, 동사 언어는 “계약한다”의 뜻을 지닌 사회계약론을 이미 담지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수행언어가 아닌 진술을 목적으로 하는 명사는 사회계약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버틀러는 사회계약론을 동사의 수행적 정체성이 지니는 지시작용, 현시작용, 의미작용으로 대표되는 기호학적 구조로 정의한다.

캐롤 페이트만이 사회계약의 근간으로 간주되어 온 남녀 간의 성적 계약을 비판했다면,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1930~)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왜곡된 모성과 관련한 계약을 비판한다. 남성은 모성을 모체와 관련한 사회적 관계, 이성과 권력, 언어 등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물질, 사회에서는 능력 없는 자연으로 여기고, 이것들을 교환할 수 없고, 보상받을 수 없는 가치로 분류하면서, 모성을 단절해버린다(뤼스 이리가레, 『반사경: 타자인 여성에 대하여』, 심하은‧황주영 역, 꿈꾼문고, 2021, 62-65쪽). 이리가레에 따르면, 모성을 현전하는 남성은 특유한 부채 의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남성성에서 벗어난 채로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인 것처럼 가장한다. 끊임없이 사회가 가치 판단을 강요하는 남성성에 대해 자신은 방관하는 척, 무관심 및 무책임한 척, 그것을 가장 보편적인 이성으로 논리정연하며, 도덕적인 질서로 포장한다. 남성성도 여성성도 없는 어느 이의 중성성이 남기고 간 존재의 “빈 공백”(뤼스 이리가레, 위의 책, 2021, 67쪽)은 남성성에 예속된 여성들에게는 하염없이 나약하고 지지부진하며, 어설픈 어느 가치를 다시 만회하고 채워야 하는 것처럼 밑도 끝도 없는 의무감으로 다가온다. 이와 같은 맥락 없는 무책임과 막연한 의무감 사이에 생겨나는 무의식적 억압 기제는 선험적이고 합리적인 인식론의 모습을 한 채 철학사에서 발전되어 왔다. 이 논의와 관련하여, 이리가레는 모성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억압적인 분화과정과 차이 개념이 폭로된다고 본다. 이러한 분화와 차이 관계가 자연에 대한 몰이해나 편견을 없애고, 철학사 속 합리적 이성과 같은 물질을 역설적인 진화 과정에서 살펴보고, 모체와 남성, 여성 간의 관계를 재조명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에게 이리가레가 내세우는 남성과 여성 간의 성적 차이는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이라서 고정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본질이나 실체이다. 즉, 그녀에게는 이리가레가 헤겔의 자연과 정신의 지양 구도를 급진적인 관점에서 분리 구도로 재해석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정신의 관계에서 더 이상적이고 높은 단계에 다다르기 위해 무엇을 멀리하거나 배격하는 관계 양상을 모성에 억압된 남성성과 그것을 계속 회복하려고 하는 여성성의 집착증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이리가레에게 헤겔의 자연과 정신의 지양성은 정신분석학에서 살펴보는 무의식 기제의 핵심적인 원동력이 되므로, 이는 캐롤 페이트만이 사회계약론으로서 남녀 간의 억압된 성적 계약을 비판한 만큼의 분명한 안티테제를 제시할 수 없었다. 이리가레에게 정신과 자연의 분리 구도는 실재가 아니라 단지 상징적 언어에 불과했다. 또한, 그녀는 남성이 얼마나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서의 자연으로 배제하고 타자화하는지를 오롯이 비추는 거울(반사경)은 어떻게 여성에게 자신만의 관점과 세계를 구축하게 하고, 자신을 재현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서, 헤겔의 이상적인 변증법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여성의 자유와 권력은 단지 상징적 언어에 귀속된 상상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리가레는 여성학자로서 문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을 전공함으로써 여성의 인권과 자유의 문제를 정신병리학적 관점에서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필자는 캐롤 페이트만이 제시한 페미니즘적 사회계약론을 읽고, 저작의 핵심 개념어를 선정하여 이를 중심으로 그녀와 다른 관점을 보이는 여러 여성학자들의 입장을 비교 분석하여 보았다. 페이트만이 논하였듯이, 남성중심주의적인 철학사에서 벗어나 여성과 남성 간의 감추어진 사회계약론을 비판하는 입장은 오늘날 미래 인류의 위기, 우리가 사는 지구가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점을 경고하는 에코페미니즘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할 수 있다. 인본주의, 형이상학, 인식론, 관념론, 존재론, 유물론, 윤리학, 실재론 등 이제까지 철학사를 구성한 주요한 논의들은 모두 미래에는 상상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할 수 있다. 필자는 글을 끝마치기 전에,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쓰레기와 퇴비와 같은 어두움에 숨겨져 왔거나 감춰왔던 순수 물질, 즉 “방문하기, 일하기, 놀기의 방식과 방향을 결정하는 동물 공생자들”(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역, 마농지, 2021, 191쪽.)을 배치해 본다. 과연 몇 백년이나 몇 천년 후의 세대로 포함할 비-인간은 앞으로 인간과 어떠한 사회계약을 맺으며 살아갈 것인지를 자문해본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에서 2023년 4월부터 11월까지 예정으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를 기획·연재합니다. 지난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블로그분과진에 연재되었고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에 이어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합니다. 본격 연재 전 자세한 소개는 「연재의 변」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지난 연재 바로가기

‘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에서 2023년 4월부터 11월까지 예정으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를 기획·연재합니다. 지난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블로그분과진에 연재되었고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에 이어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합니다. 본격 연재 전 자세한 소개는 「연재의 변」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캐롤 페이트만의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을 읽고
상편. ‘더 이상 우애 정신은 없다 – 포스트 코로나 시기를 앞두고 우애적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유가연(여성과철학 분과)

 

캐롤 페이트만(Carole Pateman, 1940~)은 1940년 영국에서 출생한 정치학자이자 여성학자이다. 1963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72년 시드니대학 정치이론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대학 정치과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부터 현재까지 페이트만은 이 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해 있다. 그녀는 민주주의와 관련한 여성이론과 정치이론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이자 교수이며, 자유주의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입장에 서 있다.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은 1988년에 출간한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페이트만이 시드니대학 정치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했을 때 나온 책이다. 이 책이 출간된 후인 1990년대 초중반에 그녀는 최초로 국제정치학회에서 여성 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은 The sexual contract로, 한국어로 번역한 제목보다 더 간략하다. 이 책의 내용은 페이트만이 미국과 호주에서 열었던 여러 강연과 토론을 바탕으로 하고, 참고 자료들은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스탠포드대학 행동과학연구소에서 수집하였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프린스턴대학 사회과학연구소에서는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인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1

이 책은 홉스, 칸트, 로크, 루소 등의 근대철학 텍스트들에서 쉽게 간과하거나 가볍게 다룬 부분들을 골라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여 기존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페이트만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여러 가지 계약들에 관한 논의들이 정치이론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논의를 폄하하거나 과도하게 비난하는 입장을 피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전통적 정치이론과 현대적 정치이론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적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페이트만이 여성이론 분야에서,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를 정치이론 텍스트로 연구하고 논의하는 이유는 역사의 균열 속에서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가진 지속성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이 역사의 굴곡에서조차 없앨 수 없었던 삶과 존재에 대한 열망은 아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넓게 조망하고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내속적이고 존속적인 시간에 담긴 것이었다.

Carole Pateman(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Political Science, Distinguished Professor)  https://ucla.academia.edu/CarolePateman

페이트만에 따르면, 너무 잘 알려진 토머스 홉스, 존 로크나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는 정작 여성들이 배제되어 있다. 정치철학 및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 논의들이 배제되었던 1970~80년대만 해도 여성의 정치적 의무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바라본 입장은 급진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보였다. 정치학이나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 것도 낯설었지만,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사회계약설에 대항하는 입장을 내세우는 시도는 더욱 낯설었기 때문이다. 홉스는 여성이 시민사회에서 혼인계약을 할 수 있는 동시에 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무를 내세우지만, 여성이 시민의 자유를 획득하는 사회계약에 참여하지 않고 참여할 수 없는 신민(臣民)이라고 간주하는 실질적인 계약과 시대 및 사회적 한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2 홉스의 시민 계약론도 남성중심주의를 이상적으로 규정한 점에서 볼 때, 기존의 근대 철학자들의 입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시민들이 스스로 국가와 시민법에 예속되고, 자신들의 보호를 위해 예속이 교환된다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루소는 시민을 자발적으로 지배하고 예속하는 사회계약설을 제시하는데, 시민의 지배 및 예속권이 가지는 자발성은 결국 사회계약을 교의적으로 만들어버렸고, 실질적이고 자유로이 실천가능한 모델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시민의 권리 문제는 루소의 사회계약설로 인해 진부한 논의로 치부되거나 더 나아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주제로 전락해 버렸다.3 로크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과 사회적 권력을 구분하고, 계약을 통해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페이트만은 로크의 사회계약설은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을 배제하였다고 비판한다. 혼인계약은 매춘계약이나 고용계약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을 예속하는 수단이었고, 사회계약은 결국 인류사와 함께 지속되어온 성 계약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성적 계약은 가내 아버지의 정치적 권력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라진 후에 새로이 등장한 형제계약에 속한 가부장제에 기반해 있다. 가부장제는 더 이상 아버지의 권력이 중심되는 가족구조가 아니라 시민사회와 시민의 자유에도 영향을 주는 형제계약이다. 따라서, 형제계약에 속하는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사회에 예속되는 개인의 신분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가부장제 계약은 항상 국가, 자본과 노동 간의 협상에서 수많은 논쟁과 갈등을 야기하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숱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임금에 의한 노예계약과 시장사회주의에서 수많은 페미니즘운동을 일으킨 신체상의 소유권 등이 그 예이다. 사회계약에 대한 노동자나 시민의 예속과 복종의 관계는 언제나 가부장제를 토대로 한다. 사회계약의 전반에 걸쳐 계약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은 가부장제에 있다. 그렇지만, 푸코가 제시한 바와 같이 사회계약이 사법제도나 교육상의 훈육, 통제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책의 제목과 같이 페이트만은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다루고 다양한 법적 계약 관계를 주제로 삼지만, 특정한 계약법을 다루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계약과 성 계약은 각각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계약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상호대립관계에서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를 갖고 평등한 상태로 태어나고,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 모든 인간을 토대로 사회계약은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자연에 가까운 원초적 계약의 상태는 남성과 여성 간에 커다란 차이가 남겨져 있다. 은연중이든 의식적이든, 편협적이든 포용적이든, 상징적이든 실재적이든 간에, 사회계약에서 자유를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남성으로 상징하고, 예속을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여성으로 대표하는 질서라는 것을 해체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과 여성의 성차는 인간의 원초적 계약상태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관계 차이인 것이다.

17~18세기 국가와 시민, 정부 간의 사회계약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발전이 있었으나 성적 계약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괄시하거나 논의하지 않았다. 성인은 시민이 되고 결혼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또한,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시민사회로 접어들면서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성인이 획득하는 자유에 여성을 소유하는 것도 해당해 있다. 페이트만이 내세우는 여성과 관련한 핵심적인 논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사회계약도 성적 계약에 기초해 있고, 시민이 얻는 자유도 이러한 성적 계약으로 인한 가부장제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은 사회에서 성과 관련한 여러 가지 계약 형태를 고려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논의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남성에게는 사회계약뿐만 아니라 성적 계약까지도 원시적 자연이자 자유라는 의견이 오래된 편견으로 남아 있고,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민주주의를 만든 법에도 남성중심주의가 지닌 오래된 파행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왜 가부장제를 문제시 여기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아버지의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구분하지 못한 데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아버지의 권력을 형제애로 탈바꿈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것은 남성의 성에 대한 권리가 근대적 사회계약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프랑스어에는 애인이나 연인을 가리킬 때에 사랑(amour)에서 비롯되는 연인(amant)의 표현 외에 우정(amitie)에서 비롯되는 ‘한 명의 사랑스러운 친구’를 뜻하고, 엉(윈) 쁘띠(뜨) 아미로 발음하는 표현인 ‘un(e) petit(e) ami(e)’가 있다. 한 명의 친구를 프랑스어로 표현하면, un(e) ami(e)인데, 이 어휘에서 ‘petit(e)’와 같은 형용사가 들어가는 이유는 petit(e)가 ‘작다’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사랑스럽고 귀여우며 정답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다’는 의미를 가진 어휘에 ‘친밀한 감정’의 의미가 함께 포함된 이유는 주니어(junior)와 같은 ‘막내 형제’가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나의 애인을 가리키는 ‘쁘띠(뜨) 아미’는 마치 맏형이 막내동생을 대하는 태도나 시선 등에서 연유한다. 즉, 성적 계약에 기초한 애인을 표현하는 어휘는 가족애적인 가부장제가 우애적인 가부장제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어휘임을 알 수 있다. 18~19세기 혁명기의 사회계약설에 기반한 새로운 가부장제에서 비롯한 ‘나의 연인’과 같은 어휘에는 혈연관계를 뜻하는 형제애의 맥락과 의미가 비어있는 채 잔여물로 남아 있다. 근대 형제애는 여성이 남성에 종속된다는 뜻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형제계약은 고용계약, 매춘계약을 포함한 성적 계약으로 간주되어서 사회계약에 속한 결혼 계약과 구분된다.

페미니즘에서 연구한 가부장제에 관한 모호하거나 불명확한 특성으로 인해, 페이트만은 사회적 결사를 위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개인이 신체를 자유로이 소유한다는 의미에서의 재산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사회적 결사란, “시민들끼리의 개인적 우애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대를 도모하는 집단으로서의 복수 형태인 우애‘들’을 의미한다.”4 이 용어는 남성 중심적인 비밀결사단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모든 계약은 재산이나 권리의 상호교환과 이에 따른 평등이 전제해 있다. 그러나 한쪽이 “잠재적인 재산이 되면 불평등하게 된다.”5 재산은 기본적으로 물질에 기반하므로, 잠재성을 전제로 한다면, 반드시 현실화되는 실재가 동반한다. 이것은 물질에 이미 담겨 있는 가치상에서의 평등이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상상적인 신체로만 여기고, 실재적 신체를 가상화하는 관계에 제한한다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더 이상 합법적이거나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여기에서 잠재성은 어느 행위가 현실화되는 가능성(계기나 준원인 등)을 의미하는 한에서의 가상성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실재하는 신체를 가진 남편이 현실에서 실재적인 아내의 신체를 특정한 가상 세계의 도구로 삼거나 특정한 성적 행위를 포함한 행위를 일삼는 경우,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을 만큼 아바타나 메타버스, 인터넷게임 등으로 가상화되어 있는 경우에 가상 남편이 가상 세계에서 연장된 현실의 실재적 아내에게 실질적 행위를 하는 경우 등, 전혀 현실화되지 않는 상태에서 전적인 가상 세계에 의해 선택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언어와 행위의 실질적인 영향력 등의 경우에 남녀의 성적 차이는 가상과 실재 간의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지 자연적 성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남녀 간의 성차가 순수한 자연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가상과 실재의 차이에서 비롯된 다양한 법적 지위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소유하는 권리를 가상과 실재의 불평등한 관계로 인해 박탈당하는 경우는 여성의 인권뿐만 아니라 성적 정체성을 박탈당하는 경우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민의 자발적인 신체 소유권 문제는 남성과 여성 간에 형제애를 토대로 한 형제계약에서 비롯된다. 이 계약이 가능하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 이어온 자본경제의 역사와 관련된다. 자본경제는 남녀 간의 형제애를 이상적인 모델로 규정하여 현실과 신화 간의 간격을 모호하게 만들며, 그 틈에서 용암이 분출하듯이 남성에게는 오이디푸스의 신화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여성에게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뿜어져 나온다. 근대 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와 공화국 이념은 언제나 신화적 특성을 배제할 수 없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이자 보편적인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 중 박애는 프랑스어로 fraternite라고 하며, 우애 혹은 형제애라는 의미도 가진다.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이념인 박애 정신은 근대 시민사회 시민들끼리 강하게 유대하도록 이끌어 오늘날에는 관용 정신(똘레랑스)으로 불린다. 박애 이념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기능을 맡아왔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 사회에서 관용 정신은 본래의 기능을 벗어나 사회적인 문제와 갈등을 심각하게 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애나 형제애 정신으로 대변되는 다양한 사회계약, 특히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 매춘계약, 고용계약, 노예계약 등은 여러 유형의 가정폭력과 성범죄, 각종 중범죄, 빈부격차, 인종차별, 성차별, 난민수용의 문제 등을 초래하였다. 오늘날의 관용 정신이든 근대사회의 기반을 마련하고 공화국 및 민주주의를 형성한 주요 정치이념마저도 가부장제의 어두운 면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를 민주주의 공화국을 향한 혁명의 길로 이끌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시민들이 민중이 되어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끈 정치이념은 더 이상 사회통합의 계기가 아니라 사회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근대 사회계약의 토대를 이루는 성적 계약에 대해 살펴보았다. 페이트만은 이 책에서 사회계약론을 살펴보려면 우선 성적 계약을 논해야 한다는 페미니즘적 이념을 내세웠다. 그녀는 다양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이념을 연구하면서, 가부장제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여성운동이 일어난 지 약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가부장제에 대한 개념과 범위 규정,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살펴보는 역사적 고찰, 사회적 권력의 구조화 문제, 사회의 보편성인지 특수성인지의 여부, 자본주의와의 관련성, 여성성과 관련한 식민제국주의의 역사적 고찰 등과 같은 연구 과제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는 페미니즘 연구는 현대 여성들의 사법 판결권을 개혁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자 작업이다. 4년 전 현 인류에게 느닷없이 닥친 코로나19 팬데믹은 또 다른 현대적 우애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 세계 통계상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망한 자가 약 670만 명이 넘고,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노동자들은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었으며, 시민들의 경제 및 사회활동이 줄어들자 자영업자들의 소득이 크게 감소하여,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아 길거리 문화가 사라질 위기가 처해 있다. 또한, 20~30대 청년들은 사회의 양극화 구조가 심각해지고, 기존의 산업 패러다임이 해체된 가운데 일자리를 얻거나 정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는 데 어려움이 늘고 있다. 2023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17세기 근대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 공화국의 이념과 시민의식, 인권사상, 자본주의 경제사회 등이 300년 넘게 이어온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계약의 지배와 예속관계를 새로이 깨닫는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시민사회는 또 다른 정치적 의무이자 권리, 자유를 실천하고, 논의를 확장 및 발전시키는 과제를 미래에 남겨두고 있다. 오늘날까지 은연중에 교의적으로 수용되었던 시민의 자유와 권리의 문제는 이제 허물을 벗었다. 우리는 신종바이러스의 발견과 감염경로, 방역 대책, 예방진료,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 통계 및 이와 관련한 신기술들을 경험하면서, 진부하고 하찮게만 여겨졌던 근대 사회계약설을 재고찰하게 되었다. 끝내 사회계약은 시민들에게 진실을 은폐하고 기만한 성적 계약의 진면모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성적 계약은 시민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제3의 성이든 간에 어떠한 성(性)이라도 띠며 살고 있음을 폭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페이트만이 이 책에서 강조한 형제애적 가부장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꼭 고려해야 할 논의이다.

— 하편에서 계속


☞ 연재 바로가기

‘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여성과철학 분과

 

지난 2019년에 발행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의 작업을 잇는 연속 작업으로, 이번 기획은 페미니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명할 수 있는 확장된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우리의 이전 기획 이후 지난 3년간 출판된 여러 편의 페미니즘의 고전을 비롯해, 페미니즘을 혁신하거나 다양화시키는 여러 텍스트들이 번역‧출판되었으며, 우리는 페미니즘 사상의 발전을 위해서 이들의 추상적 개념, 전개되는 논리,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기존의 질서 및 이데올로기와의 전투, 마르크스주의-생태주의-아나키즘-자유주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정신분석학 등과의 우호적이거나 적대적 마주침, 철학-법학-사회학-생물학-인류학-문학-언어학-공학-자연과학의 분과학문적 틀 안에서 혹은 그것과 투쟁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모험 등을 쉽고 익숙한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오늘날 여성학이라는 분과학문의 형태로 정규화되고 규범화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사유의 궤적과 흐름을 추적 및 구성하면서 현재의 사회지형 안에서 페미니즘의 다양한 철학적 면모를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기획은 한편으로는 이론의 관점에서는 이론적‧분석적‧논리적‧비판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실천의 형태에서는 실천적‧대중(지향)적‧구성적‧상상적인 성격을 띤다. 즉 자유롭게 상상함으로써 페미니즘의 외연과 의미를 더 넓게 확장시킬 수 있는 연구를 하면서도, 그것의 서술과 전개과정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며, 실천적 활동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자 한다.

이것은 지난 2016-2018년을 경과하며 미투 운동으로 상승했던 페미니즘 운동이 최근 하강/침체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운동에서의 다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이론적 계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이 기획은 이전의 운동이 가진 단조로움이나 협소함을 넘어서 다양성과 깊이, 그리고 더 넓은 연대의 가능성을 마련하기 위한 이론적 포용성을 넓히는 것에 초점이 두어진다. 또한 이 기획은 “한철연” 내에서 ‘여성과철학’ 분과의 지난 활동들의 결과물을 모으는 것이기도 하며, 그래서 활동을 강화하고 신규회원을 모집하는 계기도 지니고 있다.

이 기획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가 진행하는 것으로, 먼저 웹진 <e-시대와 철학> ‘블로그 분과진’에 글을 업로드하고, 모든 글이 최종 마무리 제출된 이후에는 글들을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펴낼 생각이다.

 

집필자 : 김세서리아, 김은주, 연효숙, 유가연, 이승준, 이지영, 정유진, 주현


  • 연재 글의 저자와 주제

[1] 전반기

  • 유가연 : 남과 여, 은폐된 성적계약(캐롤 페이트먼)
  • 이승준 :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샌드라 하딩)
  • 연효숙 : 『2의 성』(시몬 드 보부아르),
  • 주현 : 『스트레이트 마인드』(모니크 위티그)
  • 이지영 : 『몸 페미니즘을 향해』(엘리자베스 그로스)
  • 정유진 : 『캘리번과 마녀』 / 『혁명의 영점』(실비아 페데리치)
  • 주현 : 『섹스할 권리』(아미아 스리니바산)
  • 김은주 : 『변신』 / 『포스트휴먼』(로지 브라이도티)

[2] 후반기

  • 연효숙 : 『시적언어의 혁명』(줄리아 크리스테바),
  • 이승준 : 『여성 인종 계급』(앤절라 데이비스)
  • 김은주 :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캐서린 헤일스)
  • 김세서리아 :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프리드리히 엥겔스)
  • 유가연 : 『반사경』(뤼스 이리가레)
  • 김세서리아 : 『권력의 정신적 삶』(주디스 버틀러)
  • 이지영 :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트러블과 함께하기』(도나 해러웨이)
  • 정유진 : 『대항성 선언』(폴 프레시아도)

☞ 연재 바로가기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유재민 지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초빙교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69-399), 플라톤(Platon, 기원전 429?-347)과 함께 고전기 그리스 철학, 나아가 서양 사상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그리스 북동부 칼키디케 반도의 스파케이로스로 그리스 변방 출신이다. 기원전 367년, 17세에 그는 당대 문화의 중심이었던 아테네로 유학을 가서, 플라톤이 교장으로 있었던 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공부한다. 학생 시절 그를 가리키는 몇 가지 별명은 “학원의 지성”, “부지런한 독서가”였다. 그는 20년 후 아카데미아를 떠나 자신의 독자적 학파를 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사상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한 철학자이다. 그는 ‘만학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서양 사상사 거의 전 분야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서양 최초로 학문을 분류한 사람이다. 그의 저술은 크게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적 저술로 분류된다. 그리고 ‘실천적 학문’에 윤리학과 정치학적 저술들이 포함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과 함께 실천적 학문에 속한다. 그중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대표하는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윤리학적 저술에 『에우데모스 윤리』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포함되는데, 이 책의 제목은 에우데모스[아폴론 뤼케이오스(아폴론 신의 별칭) 신전 근체에 세운 학교인 뤼케이온 학원 구성원 중 한 명]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인 니코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록을 편집해서 붙인 것이다.

유재민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부제를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로 붙였다.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은 제1장의 첫 소제목인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이다. 그리고 유재민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다음 소제목을 “행복에서 시작하여 덕으로 나아가다”, “행복, 윤리의 사다리”, “객관적 행복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으로 정했다.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재민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를 ‘행복’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인 그는 제2장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행복이란 무엇인가”, “덕과 중용”, “정의와 우정”,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주제어를 중심으로 읽기 시작한다. 마지막 제3장에서는 “철학의 이정표”라는 제목으로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테오프라스토의 『성격의 유형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 에피쿠로스의 『세 통의 편지』, 윌리엄 프라이어의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을 소개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와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지,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돌진하는 군인은 ‘착한’ 군인이 아니라, ‘훌륭한’ 군인이다. ‘윤리’는 그리스어 ‘에티코스’(êthikos)를 번역한 말이다. ‘에티코스’의 어원은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이다. 사람이 습관을 들여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성격’ 혹은 ‘성품’이다. 따라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성격에 관한 책’ 혹은 ‘성품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 행위자의 본성적이고 본질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인간의 행복에 관한 설명을 통해 제시된다. 또한 이 원리는 좋은 사람을 만들어주고 행복한 사람을 살게 해주는 여러 덕목들에 관한 설명을 통해 제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 덕과 중용, 정의와 우정,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덕목들을 개인 안에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국가이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어떤 국가에 살고 있는가?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손철성 지음,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손철성 지음,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현남숙(한철연 회원, 성균관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근대의 서막을 연 인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신유물론, 생태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서양철학의 극복되어야 할 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베이컨의 『신기관』의 부제는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이다. 이것이 시사하듯, 자연에 대한 투명한 인식과 그로부터 지배가 가능하다고 보는 관념은, 인류세라 불리는 기후위기의 시대에 인간중심적이고 무모한 생각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이 아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올 때의 시간지평에서 보면, 베이컨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그의 학문적 공과 중에 ‘과’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한편, 베이컨은 당대의 사유관행에 맞서 싸운 우상타파자이자 새로운 학문 방법론의 창안자인 점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손철성(이후 저자)의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은 베이컨의 『신기관』에 관한 대중적 해설서이자 비평서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organon)과 구별되는 당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신의 도구를 의미한다(‘오르가논’이란 ‘도구, 특히 생각의 도구란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그의 논리학 저작 전체에 붙여진 이름이다).

1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을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제시한 인물로 위치 지운다. 그는 베이컨을 근대를 기획한 인물로 명명하면서,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초입에 도달할 무렵인 16세기에 학문의 대혁신을 이룬 인물로 그려낸다. 대혁신의 요체는 자연을 인간의 통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위한 인식의 방법을 창안하여 지식의 진보를 이루는 것이다.

2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의 『신기관』의 실제적 내용을 두 각도에서 소개한다. 하나는 지식의 진보를 가로막는 우상타파(종족의 한계, 개인적 편견, 언어의 오염, 기존철학의 방해)에 관한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자연의 해석과 지배를 가능케 할 정신의 도구로서의 참된 귀납법에 관한 내용이다. 베이컨은 개별공리로부터 단번에 일반화된 공리로 나아나는 일반적 귀납법과 달리, 경험의 재료를 모아 중간 공리들을 끌어내고 그것을 다시 개별 사례에 적용해 보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참된 귀납법을 제시했다.

3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의 『신기관』이 자신과 다른 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알려준다. 그 중 두 가지만 언급하자면, 베이컨 자신이 그려낸 과학기술 유토피아에 관한 소설인 『새로운 아틀란티스』와 과학기술에 대한 베이컨의 지나친 낙관을 비판하는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이 있다.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학문의 대혁신으로 만들어갈 과학기술 유토피아에 관한 우화를 제시한다. 한편,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에서 베이컨의 이러한 구상이 갖는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처럼,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은 베이컨의 『신기관』에 대한 쉽고도 신뢰할 만한 입문서 역할을 한다. 뿐더러, 근대 경험주의 계열의 철학자와 만날 수 있는 유의미한 통로로서의 역할도 한다. 특히, 베이컨의 학문적 공과를 균형 있게 풀어나간 점은 저자가 가진 철학적 내공이자 미덕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베이컨의 프로젝트, 즉 인간을 자연과 분리하여 자연의 우위에 두고,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인식하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생각은 대체로 비판받고 있다. 근래 팬데믹이나 기후위기에서 보듯, 자연은 인간의 생각만큼 잘 예측되거나 통제되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관념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누적되어 온 생태적 부작용도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베이컨이 당대에 새로운 정신의 도구를 제시했듯, 오늘날 철학은 인류세에 요청되는 새로운 지식의 도구나 사유의 방향을 제시할 책무를 갖는다. 길을 잃었을 때 왔던 길을 되짚어가서 새 길을 찾듯, 베이컨의 철학을 성찰적으로 복기해 보아야 한다. 저자가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중에, 이러한 점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서평자 현남숙: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한철연 회원

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