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근 지음,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 – ‘우리는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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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2022)

 

진보성(한철연 회원)


우리는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가?

 

한여름이다. 연일 폭염에 시원한 소나기는 언제나 내릴지 하늘만 보다가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2022)를 손에 잡았다.

맹자의 글을 두고 한여름 더위를 식히는 소나기 같다고들 한다. 『맹자』에는 속 시원하게 내리는 비, 성대하고 세차게 흐르는 모양을 뜻하는 패연(沛然)이라는 말이 나온다. 벼 이삭을 자라게 하는 자연의 순리처럼 덕으로 펼치는 왕의 통치가 필요했던 전국시대, 백성 돌볼 줄을 몰라 왕 노릇도 하지 못하면서 무력으로 전국을 제패하여 패왕 자리에 오르려던 자들에게 바른 말[正言]을 거침없이 날렸던 맹자의 언변은 예나 지금이나 통치의 기본도 모르면서 자리만 차지한 자들을 보며 쌓인 마음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전호근의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는 청량제와 같은 『맹자』를 읽으면서 속만 풀고 말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 정치에서 우리가 원하는 통치자는 어떤 통치자여야 하는지를 알고, 우리가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지를 다시금 살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책은 맹자 사상의 요점을 밝힌 1장과 『맹자』 원문을 가려 뽑아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번역하고 해설한 2장에서 맹자의 정치론을 간명직절하게 정의한다. 맹자의 왕도론은 “누가 천하를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며, 혁명론은 “누가 천하를 다스려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 두 주제는 『맹자』를 관통하는 맹자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맹자의 사상은 왕 노릇을 할만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와 왕 노릇 못하는 왕은 끌어내려야 한다는 ‘혁명론’,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 이 세 가지의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 셋은 『맹자』 안에서 유기적으로 엮인다. “혁명은 왕도의 의무를 저버린 군주에 대한 저항이고 왕도정치의 실현 가능성이 성선설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주장을 분리해서 볼 수는 없다.”(15쪽) 현실 정치에서 무능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보편적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형이상학적 근거는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권력에 맞설 수 있고 바람직한 권력을 희망할 수 있다.

오늘날 『맹자』를 제대로 읽었다면 “방관자들의 압도적 무관심 속에서 독재와 억압의 부조리가 창궐했던 경우”(73쪽)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맹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75쪽) 이것이 맹자가 말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써서 행하는 기준이다.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사람”(74쪽)들이 권력을 탈취하면 사회에서 차마 그러지 못할 일들이 버젓이 횡횡한다.

옛날에는 자신을 수양하는 군자가 이러한 마음 씀과 행위의 기준을 담지하고 세상에 나아가 제시했다면, 민주 사회에서는 보통 시민들이 이 일의 당사자이기에, 그러함에 뻔뻔한 권력자들이 우리 사회에 여전한 것이 그저 남의 부끄러움의 몫은 아닌 것 같다.

맹자는 제선왕이 제사에 희생으로 쓰일 소가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에 소 대신 양을 쓰라 명한 것을 두고 제선왕이 왕도정치를 베풀 수 있다고 말했다. 의아해 하는 제선왕에게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임금님의 은혜가 소 한 마리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런데 그 공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결국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이지 은혜를 베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지금 임금께서 왕도정치를 베풀지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양혜왕상」)”(154쪽)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찮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맹자에 의하면 이 작은 마음은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과 남에게 차마 못할 일을 하지 않는 마음으로까지 확장된다. 2011년 구제역 살처분 당시 “우리 소는 평소에 제대로 먹이지도 못해 비루 말랐는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배불리 먹여주고 싶습니다.”라는 축산인의 말에 현장 사람들이 모두 공감하고 눈시울을 적셨다는 일화(153쪽)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선함을 믿고 그 가능성의 길을 따라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맹자의 꿈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왕도정치가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정치적 상상을 그 누가 할 수 있었을까.

맹자가 말한 것처럼 백성을 위하고 시민을 위한 정치는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데도 방기하고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전국시대가 그랬고 지금 시대가 그러하다. 맹자도 그랬지만 아마 우리가 원하는 통치자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자’일 것이다. 이런 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많은 수의 우리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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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자 진보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전임대우강의교수,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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