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영웅들에게 바치는 헌사 [나인당케의 단상들]

<로그원:스타워즈 스토리>는 여지껏 본 스타워즈 시리즈중 가장 덜 스타워즈 같은 느낌이었다. 단적으로, 엔딩크레딧이 흐를 때 눈물이 찔끔 났던 경험을 다른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겪어본 적이 있었던가. 아군은 단 한 차례도 광선검을 사용하지 않고, 죽은 자들은 피를 흘리며 최후를 맞는다.

가장 어둡고 무겁고 또 비장한 스타워즈. 과격파 반군은 마치 무자헤딘 류의 과격파 이슬람 반군을 연상시키고, 제다 시티에서의 시가전은 바그다드나 팔루자에서 미군과 현지 저항군의 전투를 보는듯 했다. 국가연합인 저항군의 보수성과 관료성의 민낯을 보여주고, 이에 불복종해 독단적으로 적진으로 뛰어드는 전사들은 게릴라 빨치산의 느낌으로 전투를 수행한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어른이 된’, 그리하여 더 이상 세상이 스타워즈가 그리는 선과 악의 단순 이분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유년시절의 스타워즈 팬들에게 헌정된 것 같은 느낌이다(때마침 같이본 사람들은 나와 20대를 같이 보낸 과후배들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결말이 떠올랐다. 종말, 폐허 그리고 구원. 이윽고 컴퓨터그래픽의 힘을 빌려 나타난 그녀. 무참한 대량살육을 견뎌내고 지켜낸 희망이라는 단 한마디.

<로그원: 스타워즈 스토리>는 영웅들의 모험담이 아니라, 거대 악에 맞서기 위해 싸우다 이름없이 쓰러져간 전사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말하지 않았던가. 역사는 이름 없이 쓰러져간 자들의 것이라고. 옛날옛적 은하계 영웅들의 모험을 다루던 스타워즈는 이렇게 현실을 향해 진화한다.

공동체의 수호자 [나인당케의 단상들]

지난 주말 광화문에 모인 20만명의 사람들에게 어떤 동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왜 그곳에 모인 것일까?

분명 그들에게도 개인적인 욕구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사용할 것이다. 예컨대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 그 시간에 취준생은 취직준비를 더 할 수 있었을 것이고, TV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한도전을 보면서 맥주 한 잔을 들이킬 수 있었을 것이고, 연인이 있는 사람은 놀이공원이나 극장에 가서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20만 명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황금같은 주말 오후를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다.

그들의 동기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고전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계급적 이해관계? 아니 그들은 동일한 집단과 계급도 아니었다. 정치권의 부패를 본 후의 즉자적인 분노?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정서를 분노라고 단정짓긴 힘들다. 시위 참여자들의 밝은 표정, SNS 곳곳에 그들이 남긴 후기들을 읽어보면 그들의 정서는 분노라는 감정의 표출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자신감이었다.

나는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의 동기를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자신이 속한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위기에 처한 그 공동체를 구제하기 위하여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말한 ‘공화주의적 인민의 덕성’, 스피노자가 말한 ‘정념(정동?)’, 혹은 헤겔이 말한 ‘정치적 신념'(물론 헤겔은 이것을 애국심과 동일한 것으로 불렀다만, 만약 우리가 그의 철학에서 국가주의적 요소를 빼고 재해석을 해본다면), 혹은 발리바르가 말한 ‘시빌리테’가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말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해 시위현장에 모여 촛불을 드는 시민들은 정치적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로서, (아마도 ‘애국자’라는 단어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공동체의 수호자’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마치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1세가 이끄는 수십만 병력에 맞서 스스로 갑옷으로 무장하고 마라톤 평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공동체를 수호한 아테네의 시민들처럼, 그들은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진정한 주권은 국가원수가 아닌 광장(아고라)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들, 권력을 실현하는 demos인 것이다. 주류 정치권과 재벌, 언론이 그토록 부패해 있음에도, 이토록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수많은 demos를 보유한 것은 우리에겐 하나의 축복이자, 어둠 속의 빛과 같은 희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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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5일 광화문

단상들 2016.9.22

 

단상들

1. 70년대에 리영희가 있었다면 오늘날은 손석희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손석희가 4차례 해고와 5차례 옥살이를 했던 리영희의 아우라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날 그의 앵커브리핑은 그 시절 리영희의 언론사 기고문을 접했을 젊은이들이 느꼈을 어떤 것을 우리 시대에 주는 게 아닌가 싶다. 그의 나즈막한 목소리는 단호한 고발과 함께, 우리 시대의 좌절한 청년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2. 최경환이 외압을 해서 채용시킨 인물은 서류점수가 2299등이었는데, 최종 36등으로 채용되었다고 한다. 내게 이 외압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36명을 뽑는 자리에 도대체 몇 명이 지원했길래 ‘2299등’이라는 수치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의 정규직 직원이 되기 위해 도대체 몇 명, 아니 몇천 명을 앞질러야 하는 것일까. 임원도 아니고 ‘노동자’가 되는 것조차 수천 명을 누르고 4차례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냥 해.” 최경환이 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노동자’의 삶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고작 중소기업진흥청 말단 직원이라는 대단하지도 않은 자리에 지인을 꽂아넣는 것이 별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그들이 보기엔 ‘머슴’일 뿐인 그 자리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렸다. 오늘날 그 수천 명의 흙수저들은 누가 대변할 수 있을까.

3. 제주도에서 일부 중국인들이 벌인 폭력,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에 달린 베스트댓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정 해군기지를 반대한 제주도인들, 너희는 당해도 싸다. 너희는 할 말이 없다. 이 무논리의 극치이자 동시에 몹시 잔인한 논리에 대한 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 논리가 왜 틀렸는지를 지적하는 댓글을 입력했다. 얼마 후 다시 들어가보니 나더러 ‘전교조냐? 뷰웅신’이라고 욕을 한 댓글이 다시 베스트에 올라 있었다. 웃음만 나왔다.

아마도 제주도인들이 당해도 싸다고 말한 사람도, 나에게 조롱섞인 욕설을 단 사람도, 최경환이 낙방시킨 수천 명의 지원자들과 같은 운명을 공유할 수많은 흙수저들. 그들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좌절된 욕구를 (아마도 일베같은 곳에서 배웠을) 공격적 발언을 통해 해소하며 사회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무기력감과 분노, 좌절을 그나마 삭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댓글을 단 사람에게 분노할 힘마저 없었다. 이런 생각만 맴돌았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이게 우리의 현 주소구나.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하는구나. 우리 시대의 또다른 자화상이다.

4. 최순실 게이트. 현 정권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정권을 공격할 호재가 생겨서 내심 기쁠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그렇지 않다. 가히 건국 이래 최대 친인척 스캔들이라 할 수 있는, 그리고 호사가들이 한 두마디 술자리 안주거리로 떠들어댈, 2대에 걸친 희대의 4각관계(최태원, 정윤회, 최순실, 박근혜)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품고 야권이 이 일로 정쟁을 벌이는 사이, 세월호 특별법 연장도, 각종 민생법안들도 이 정쟁에 밀려 통과가 늦춰질 게 분명하다. 소위 ‘현실정치’의 논리, ‘우선순위’의 논리다. 틀린 말은 물론 아니다.

비판할 게 너무나 많아서(정말로 그렇다), 부패가 너무나 많아서(정말이지 너무나 많다) 그 많은 사안들을 가지고 정쟁을 하느라 아무런 구체적 ‘정책’도 통과시키지 못하는 무능한 국회. 언제까지 이 광경을 봐야할까. 언제쯤 한국 국회가 ‘친인척 비리 폭로’를 넘어서 ‘정치’를 논할 날이 올까.

정치의 부재다. 그리고 고통받는 자들은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처우가 개선되고 사회가 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들의 생존방법을 익혀나간다. 타인에게 공격적 충동을 투사하기. 학번, 출신학교, (특목고뿐 아니라 이제는 심지어 영어유치원 출신인지까지), 거주지역 등의 미시적인 부분까지 위와 아래를 철저하게 따져서 권위 앞에 굴종하고 약한 자를 짓밟기. 고통당한 자들을 조롱하기. 그것이 세월호 유가족이든, 관광객에게 폭력을 당한 제주도민이든.

우리의 이 시대정신에 ‘역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치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정치철학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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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8. 08. [나인당케의 단상들]

단상1

우리 시대는 ‘신념에 가득 찬 투사’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아닐 것이다. ‘신념’에 가득 찬 투사는 결국은 자신의 신념의 노예가 되어 아주 쉽게 근본주의자가 되곤 한다. 다른 한 편, 우리 시대에 ‘투사’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도처에서 우리는 여전히 투사들을 보고 있다. 오늘날 투사가 없다는 식의 푸념은 현실을 보지 않는 자세이거나, ‘내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면 투사가 아니야’라는 식의 자기위안인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다만 이해하는 것이다.

단상 2

하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밤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히 많은 수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태도인지 모른다. 이것은 상대주의의 손을 들어주자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념과 확신은 상대주의와 동전의 앞 뒷면이다. 진리는 열려 있고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오히려 진리에 대한 열정을 요구한다.

단상 3

오늘은 제2롯데월드에 처음으로 가 보았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그 드높은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본은 우뚝 솟은 거대한 남근의 형상을 하고 낮은 곳에 사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우러러보라고 요구한다. (벤야민의 말투를 한 번 따라해보자면: 하늘을 향해 지어진 성경 속의 바벨탑이 무너진 뒤, 인간은 공통의 언어를 상실하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었다. 서울의 바벨탑은 그 자체로 현대인들의 소통불가능성을 알레고리적으로 체현한다.) 나는 그 모습에 분노스러웠지만, 5층의 전망 좋은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가는 길에는 잠실대로 인근에 아무 곳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경찰과 구청의 행정처리에 감격하며 또 분노했다. 저 거대하게 솟은 남근과 자본의 지배 앞에서 나는 고작 담배 한 개피를 어디서 피워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사회는 이렇게 개인을 통제하는가. 그물처럼 조직화된 ‘관리되는 사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단상 4

독일에서 귀국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밤에 제 시간에 잠이 든 적이 없다. 늘 피곤하면서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새벽이 깊어서야 잠이 드는데, 타지에서도, 고향에서도 언제나 아늑함 같은 것을 느껴보지 못하는 삶이 우습게 느껴진다. 루카치가 100년 전에 기가 막힌 말을 한 적이 있는데, 현대인들은 선험적 고향상실을 경험한다는 것. 즉 고향상실은 경험에 앞서서, 구체적 경험을 근거짓는다는 것.

단상 5

다시,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진리란 허공 어디엔가가 아니라 이러한 일그러진 삶의 미시적 형태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하지 말고 이해하라. 그래야 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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