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진 코너입니다~우리 나라 곳곳의 흔적을 추적하며 사진과 글로 우리 철학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합니다~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자유의 길을 찾아 혁명의 길을 간 행동가, 이회영 [길 위의 우리 철학] – 20

 

진보성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이회영의 삶

우리 근현대사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을 찾아본다면 아마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이 아닐까 생각한다. TV프로그램이나 언론에서 ‘육형제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로 자주 다루어졌는데, 바로 이회영 집안 형제들 얘기이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며 대대로 귀족의 삶을 살았던 경주이씨 상위 1%의 사람들이 600억 넘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쾌척하고, 온 가족이 압록강을 넘어 망명하면서 고난의 삶에 스스로 앞장 선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를 두고 임진왜란 때 국난극복에 크게 공헌했던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불변의 진리 덕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러나 고귀한 귀족의식이라던가 진짜 보수라는 칭사(稱辭)로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삶을 단평(短評)한다면 그 진정성이 외려 애처로워질 것 같다. 이회영의 삶은 가문의 명예나 유림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고 귀족적 영웅으로 박제된 자신을 원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 한 사람의 진정성을 몰라주면 그 사람의 지난 삶은 애처로워지고 만다.

‘우당 이회영 길’ 입구 안내 표지판, 사진출처 : 필자

그의 삶을 온전히 보기 위해 일단 그 삶의 자취를 찾아보는 길을 나섰다. 서울 종로에 자하문 터널 가는 길에는 우당기념관이 있어 그가 살아온 자취를 전방위로 확인할 기회를 제공한다. 여러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었지만 한 인물을 느끼기 위해서는 유적지로 발걸음이 옮겨지기 마련이다. 이회영은 서울 저동(苧洞), 지금의 중구 명동1가에서 태어났다. 이회영이 태어난 곳은 인터넷 지도검색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다. 명동성당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국 YWCA연합회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왼편으로 난 골목이 이회영의 옛 집터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 골목 입구에는 ‘우당 이회영의 길’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다. 중구청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17년 9월 20일에 명예 도로로 ‘우당 이회영 길’을 지정하였다.”고 쓰여 있다. 건물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건물 바로 옆 작은 쉼터로 조성된 화단에 그와 여섯 형제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과 이회영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회영 가문은 이 자리를 중심으로 명동 일대 대부분의 땅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육형제 중 둘째인 이석영은 아버지 이유승의 사촌형이자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당시 이유원은 양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방대한 대토지의 소유자였다. 이 때 물려받은 재산이 이회영 형제의 막대한 재력이 되었고 결국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의 초석을 세우는데 쓰이게 되었으니 쓰임만큼은 타인을 위해, 핍박받는 이웃의 생명과 자유를 위한 공유물로 쓰인 셈이다.

좌 : 이회영 집터 표석과 흉상 – 서울시 중구 명동1가, 우 : 쌍회정 터 – 서울시 중구 퇴계로6길 36(일신교회) *쌍회정은 아래 글 참조. 사진출처 : 필자

이런 의식이 나오려면 이른바 혁명적 성향과 맹렬한 과감성이 필요하다. 육형제 중 넷째였던 이회영은 어린 시절 이런 성향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회영의 제자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이관직은 이회영이 소년 시절부터 혁명적 소질이 풍부해서 일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자기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는가 하면, 밖에서는 남의 집 종들에게도 말을 높였다는 일화가 그렇다. 이런 당돌함의 배경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자유만큼 타인의 자유도 존중하고 공감하는 인간적 정감의 매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후 보이는 신분제도에 대한 반대는 여기서 출발했다. 익숙한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인지 그의 학문 성향도 옛 경전을 공부하기 보다는 새로운 서구 지식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이런 성향은 청년 시절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배경으로 보인다. 성리학이 계급적 질서의 옹호차원에서 이해되며 현실을 타개할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는 학문으로 인식될 때 양명학의 지행합일적 주체의식은 자기 안의 양지(良知)를 현실을 자각하고 개혁할 수 있는 중심핵으로 삼는다. 학술을 통한 능동적이고 자신감 있는 자기의 탄생이다. 이회영에게 양명학은 곧 자기 행동의 준거였다. 박은식 같은 인물이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양명학을 자기 학문의 중심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파격적 삶의 행보 : ‘시대의 모순에 반역하다’

이회영은 일찌감치 과거에 급제한 아우 이시영과 달리 관직에 나가는 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엄중한 시기에 관직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패한 관계(官界)에 대해서는 혐오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아예 출사를 거부했다. 그의 이런 출처관(出處觀)은 『논어』에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나타나 벼슬하고, 도(道)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는 부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의식과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옛 것을 거울삼아 현실을 인식하고 자기 행위를 통제하는 실천의 폭을 확장한다. 위정척사론자들이 봉건적 사회문화의 자장 위에서 익숙한 것을 ‘지키거나’, 아니면 ‘숨거나’·‘부끄러워’하는데 그쳤지만 이회영은 시대의 변화에 맞게 처신하여 그의 다섯 사촌 형제들을 삭발하여 신식 학교에 보내거나 그가 20세 전후 되던 시기에는 과부가 된 여동생을 전격적으로 재가시켰다. 봉건적 사회 잔재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이회영의 행보에서 상동교회(감리회)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재 상동교회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30(남창동 1-1)에 있지만 당시 상동교회는 지금 자리 건너편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상동교회는 상·천민이 중심이었던 교회였는데 이회영은 1904년 서울 상동청년학원 학감이 되어 청년교육에 힘쓴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나 계기에 대한 단서는 명확히 보이지 않고, 몇몇 설이 있으나 소개할 만한 사료적 근거는 희박하다. 추측컨대 신채호의 1910년 논설이지만 「이십세기 신국민」(『대한매일신보』)에서 “20세기 신국민적 종교의 가치” 운운하며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밝힌 사례도 있는 만큼 국민의 정신을 일깨울 종교적 구심점으로 그 기능성을 인정받기도 했고 마침 신학문에 관심이 많던 이회영이 반일운동에 앞장섰던 많은 우국지사들과 회합이 가능한 장소로 여겼기에 자연스레 귀의한 것으로 사료된다.

좌 : 예전 상동교회 자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 서울 중구 남대문로 39(남대문로3가 110) 한국은행, 우 : 현재 상동교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0(남창동 1-1), 사진출처 : 필자

이회영이 양명학을 공부하며 관심을 두었던 지행합일의 실천적 주체의식은 성경에서 말하는 만인 평등이나 자유에 대해 강조한 내용들과도 충분히 잘 어울리게 해석되는 시대 배경 또한 존재한다. 이 역시 그를 공명시켰을 수 있다. 여기서 이회영은 상민출신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친교를 맺는다. 이 둘은 함께 헤이그 특사 파견에 관여하거나 1907년 4월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이동녕·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하는 비밀 결사 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활동의 장소가 교회였다는 점,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좌 : 현재 상동교회 입구 벽면 부조, 우 : 현재 상동교회 역사 전시관. 정면 좌측 큰 초화상화가 전덕기 목사, 우측 옆에 스크랜턴 선교사, 맨 우측 아래 이회영 선생 초상이 보인다. 사진출처 : 필자

 

한국 아나키즘의 선구

이회영은 유자명처럼 사회주의 이론을 미리 학습하거나, 신채호처럼 언론계에 투신하여 신사조를 받아들인 후 지속적인 집필 과정에서 학문을 연마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회영은 당시 독립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에 주도면밀했고 무엇보다 실천과 행동을 중시한 인물로서 스스로 학술문헌을 남기거나 자기 철학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두지 않았다. 전면에 나서거나 어떠한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던 성향도 저술에 신경 쓰지 않은데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점은 그래서 이회영의 철학사상을 확언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철학사상의 중심이 양명학에서 기독교 사상으로, 망명 후에는 아나키즘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고 실천의 동력으로 삼았던 학문이라는 사실이다.

이회영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아나키즘의 선구로 불린다. 물론 당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서구에 바탕을 둔 아나키즘의 전개와는 다르게 아나키즘을 이해했다. 이는 당시 억압적 국가로서 강도의 위치에 있던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의 한국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무정부주의적 정신과는 다르게 모두 민족과 민중, 그리고 국가의 독립이라는 매우 이질적인 목표를 아울러 공유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라는 이름에 민족주의자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회영 역시 그랬다. 이러한 특징은 이을규의 『시야 김종진전』에서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거나, 무정부주의로 전환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한국의 독립에 대한 자신의 사고와 방책이 사상적 견지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과 상통할 뿐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이러한 면은 신채호가 1929년 공판에서 자신이 무정부주의에 기운 것은 책에서 얻은 이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요구”에 의했다는 주장과 유사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회영은 1918년 고종의 망명을 계획했던 적이 있는데, 이를 두고 일부 사람들이 보황파(保皇派)나 복벽주의자라고 비판하자 신분제도 등 봉건적 제도에 반대했던 자신의 과거 사례를 거론하면서도 동시에 운동의 목적이 독립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서, 사심 없는 공정한 민족적 양심을 지닌 이 독립운동이 무정부주의라고 한다면 “한국의 독립운동은 무정부주의 운동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스스로가 이념에 포섭되었다고 평가하기 보다는 자발적 이해의 장에서 아나키즘과 만났음을 강조한다. 이 지점에서 한국 아나키즘의 기원은 앞서 말한 민족과 연계된 바탕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민족적 상실의 탈환과 인간의 궁극적 자유를 향한 민중적 의지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한편 이회영은 김종진과의 대담에서 조소앙과 만남 시 공산주의의 민중에 대한 정치적 지배성을 우려했던 것처럼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독립된 한국에서도 무정부주의적 자유평등의 원칙은 그대로 지켜져야 할 것을 강조한다. 또 상호부조론을 인정하면서 국가를 초월하는 자유협동체의 인류적 이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러한 이회영의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은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10년 망명 이후 북경 시절 이회영의 거처는 상해와 만주에서 온 독립운동가들이 한번 씩 거쳐 가지 않았다면 이상할 정도로 망명가들이 자주 들렸던 곳이었다.

좌 : 우당 이회영 초상, 우 : 우당기념관 –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10길 17(신교동 6-22) 유니온빌, 사진출처 : 필자

 

종속적 삶이 아닌 자유로운 삶을 위해

1914년 5월 30일 하와이 교포신문 『국민보』에 이회영은 자신의 공화주의적 이상을 피력하는 내용으로 「한국은 어떠한 인물을 요구하는」라는 논설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대영웅이 대국민 같지 못함”은 역사적 격언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영웅이 건설한 나라는 길이 가지 못하지만 국민이 합동하여 세운 국가는 운명이 장구하다”고 힘주어 얘기한다.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는 힘은 몇몇 거대한 영웅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민이 평등함을 인식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곧 영웅이며 자각된 그들이야 말로 자유로운 민중으로서 연합을 이루어 독립과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회영 자신이 치열하게 사상적 고민을 전개했던 아나키즘은 사실 그 이전부터 자기 안에서 배태되는 일정한 낌새가 있었다. 그는 민중의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바라던 이상을 파괴하는 강도들에게는 무력투쟁으로 대응했다. 정치적 조직의 구성에 반대하여 임시정부와 인연을 맺지 않았던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의열단형성에 실질적인 산파 역할을 했으며 항일구국연맹과 비밀 결사체 흑색공포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내가 남에게 지배 받고 싶지 않으니, 나도 남을 지배하지 않음’이라는 이회영의 원칙은 이성적으로 당연히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간 것이었고 아나키스트가 실천하며 살아가는 길이었다. 일상세계에서 자기 원칙을 지키며 살아간 인물이 통속적 세상에서 희귀한 영웅의 면모로 비춰지는 것은 그리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자취 중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쌍회정을 찾아봤다. 쌍회정은 이회영의 10대조인 이항복의 집 앞에 있던 정자다. 현재 남산자락 서울 중구 퇴계로6길 36에 있는 일신교회 자리에 정자가 있었음을 알리는 작은 명판만이 남아있는데, 이마저 도로 시설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맨 위 사진 참조) 후에 이석영 소유가 된 이 곳에서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은 물론 이상설·여준·이동녕 등 동지들과 신·구 학문을 공부하고 의기 넘치는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회영의 사상적 계보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을 이어 자기 공부의 중심을 양명학적 지행합일에 두었고, 반일운동의 기점에서 기독교적 만민평등과 이상적 자유의 추구, 그리고 민족운동의 연장선에서 민중의 자유연합체를 구상하는 아나키즘으로 그 실천적 면모를 발전시키고 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지행합일의 정신을 가장 중시 했던 이회영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민족을 위해, 민중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그의 관념적 사고가 바탕 되었겠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이회영의 직접적인 문장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와 족적에는 반드시 그 철학과 사상의 흔적이 남고 그 지점을 이으면 하나의 철학사상의 지도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실천적 행동가의 삶을 학술의 영역에서 정리한다는 발상이 온전치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지도를 통해 종속적인 삶이 아닌 주체적 인간으로서 온몸을 던져 살다간 한 인물의 궤적을 파악해서 시대정신의 전범으로 삼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다.

한편 지금도 이회영의 삶은 우리에게 온전히 다가와 있는 것 같지 않다. 수많은 수식어와 찬사가 따르지만 독립운동가와 우국지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삶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목도한다. 지금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세상의 문제를 돌아보는데 도움이 되는 그의 선각적 교훈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까. 그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미래지향적 발상은 지금도 그 가치와 의미가 충분히 통한다. 그러나 그의 길을 따라가 본다는 것은 무리수이며 낭만적 상상에 그친다는 자조가 있다. 이 자조는 이 땅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이 시대의 자화상일 뿐이다. 우리 스스로가 그린 자화상을 두고 옛 이회영과는 형편이 다르니 그것은 지금 갈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회영의 진정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생생한 출처(出處)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 삶을 우리가 온전하게 안을 수 있다. 그의 지난 삶이 지금 시대에 외롭고 애처롭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다.

 

기고자: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양철학을 전공했고 남명 조식으로 박사논문을 썼다. 한철연 분과모임에서 한국의 근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한 이후 전통철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 구태환
  18.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 유현상
  19. 유림의 정신으로 독립의 길을 걷다, 심산 김창숙 [길 위의 우리 철학] – 19 : 김세리

유림의 정신으로 독립의 길을 걷다, 심산 김창숙 [길 위의 우리 철학] – 19

김세리

 

조선에 한 선비 있으니

벽옹 김창숙이라.

머리는 희었으되

마음은 일편단심

나라 구하려는 생각

그것 말고 무어 있을까.

차라리 독립을 위해

죽은 귀신 될지언정

신탁통치 노예는 절대로 되지 않으리.

인생이란 언젠가

죽게 마련

죽으면 죽었지

욕되게는 살지 않으리.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노년에 쓴 「신탁 통치」라는 시이다. 자신의 의지, 털끝하나 굽히지 않겠다는 결의가 칼날 같다. 나라의 운명이 어지러운 시절 그는 머릿속에는 오로지 ‘조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떳떳한 죽음을 선택하는 기개, 수많은 불의를 물리치고 오직 조국의 앞날만을 걱정하는 애국심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적어도 직접적인 외세의 압력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시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이해 불가의 일들이 아닐까? 아니 시대를 뒤집어 내가 그 시절을 살았던들 그러한 용기와 기백을 가질 수 있었을까. 시대의 어른으로서 민족의 정신적 기둥으로 삶을 살아간 그를 찾아 떠난다.

 

칼날 같은 정신으로 한결같은 그 길위에

_심산 김창숙 기념관 (서울특별시 서초구 사평대로 55)

 

한국 역사에는 애국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선각자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의와 정의를 위하여 그들은 스스로 무자비한 혹한의 시간을 선택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늘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겠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잊은지 오래며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구국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가족의 인연은 물론이며 사적인 소유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를 온전한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김창숙 또한 그러하다. 파란굴곡의 시대를 살며 그의 심장은 오로지 나랏일을 위하여만 뛰었다. 다른 우국지사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유학자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선비로서 학문과 인간적 도덕성을 갖추고 세속의 영화를 탐하지 않고 죽는 그날까지 청렴과 지조를 지켰다.

우선 그의 일대기가 한곳에 담아져있는 심산 김창숙 기념관 돌아보기로 한다. 기념관은 그의 고향인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1974년 심산기념회에 의해 건립)와 서울 서초구 반포동(2011년 서초구에 의해 건립) 두곳에 있다. 서초동 기념관은 반포공원과 서초구민체육센터와 이웃해 있고 기념관에서도 자체적으로 여러 가지 문화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길이 잦은 편이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그의 동상이 마주한다. 무궁화 꽃에 둘러싸여 무릎에는 서책을 놓아두고 조금은 편안하게 앉아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무궁화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서책은 유학을 상징하는 것일 게이다. 평생을 나라의 일로 달리다가 끝내는 모진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지만 동상이나마 편안하게 앉아계신 모습이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행적을 보여주는 사진 속 표정이나 그의 필체를 통해서 한걸음 한걸음 그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 본다.

 

심산 김창숙 동상

김창숙 기념관 내부 모습

 

‘파리장서(長書) 운동’은 김창숙의 대외적 활동의 첫걸음이었다.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한 명도 없음을 보고 심산은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고루하고 썩은 유교라고 매도할 때에 어찌 그 부끄러움을 견디겠는가?”라고 통탄하였다. 유교의 나라에서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빠진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국 대표들에게 호소해서 국제 여론을 환기시켜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도록 한다면 우리 유림도 독립운동의 선구가 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 우선 영남 유림의 영수(領袖)인 곽종석에게 알려 협조를 구하며 파리장서의 작성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동지들을 파견하여 유림대표들의 지지와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호서유림도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거의 같은 동기와 목적에서 장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고 준비하는 중임을 알게 되어 양측은 공동으로 파리장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137명의 유림대표들의 연명으로, “한민족은 불행히도 그간 일제의 간악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는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 있어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 및 만물을 통한 독립생존의 원리에 비추고, 또 강화회의에서 실현코자 하는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한 파리장서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도록 결정하였다.

김창숙은 137명의 연명으로 작성된 장서(長書)를 품고 극비리에 중국 상해로 출국했다. 상해에서 동지들과 의논 끝에 독립청원서를 영역(英譯)하여 이미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金奎植)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하게 하고, 김창숙은 중국과의 외교 활동을 위해 상하이에 남았다. 그리고 이 장서를 인쇄하여 중국의 정계와 언론계, 각국의 대사·공사·영사관 그리고 해외 교포들의 거류지와 국내 각 지방 향교에 빠짐없이 우송하였다.

이런 움직임을 인지한 일제(日帝)는 곧 국내 유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활동을 벌여 50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이른 바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유림의 참여라는 의의를 넘어 국내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혁신유림계의 선각자

_성균관(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31)

 

성균관 명륜당

 

유학(儒學)의 산실로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 성균관은 단순히 교육만을 담당하는 기관은 아니었다. 유학의 역사에 공헌한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享祀) 역할이 교육 못지않은 중요한 기능이었다. 그래서 성균관 건축은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앞쪽에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 공간을 앞쪽에 마련하고[대성전(大成殿)] 그 뒤로 교육 공간[명륜당(明倫堂)]을 배치하였다. 명륜당 앞뜰에는 행단(杏壇)을 상징하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우뚝하니 서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머물렀는지 나뭇잎 하나하나에 시간이 모인 듯 거대하고 울창하다. 지금의 우리들에겐 한가하고 여유로운 문화유산이지만, 이곳은 율곡, 다산, 단재에 이어 심산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 이르기까지 역대적 발자취가 켜켜이 모아져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김창숙의 유학 정신 또한 이곳이 본향이고, 때로는 의미를 쇠퇴했던 성균관을 바로 잡기 위하여 그는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투쟁의 시절, 온갖 모진 압박과 수난을 버티었던 정신의 모태는 유학 정신의 힘이었다.

명륜당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과 유림의 지도자 김창숙

촬영일: 1948.09.09 서울 성균관, 제공: 우리역사넷

 

 

1927년 12월 재판에서 나석주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의 주동자로서, 살인미수, 치안유지법, 폭발물 취급령 위반 등의 죄목으로 14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 때 당한 혹독한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하반신이 불구된다. 이후 평생토록 앉은뱅이로 삶을 보내 ‘벽옹(躄翁)’이란 별호를 얻게 된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김창숙은 병이 악화되어 1929년 5월 대구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병세가 심해 고향으로 옮겼으나 대구지장법원 검사장에 의해 곧 재수감되었다. 그는 오로지 정신력으로 이 시기를 이겨내는데, 몸 성치 못한 와중에도 『자서종요(字書綜要)』를 편찬하였으며, 『육경(六經)』 · 『이정전서(二程全書)』 · 『이학종요(理學宗要)』 등을 읽고 사유하며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심오한 이치를 연구하여 마음의 안정을 구하였다.

옥중 생활 중에도 자신의 의지를 꺾는 일이 없었으니 1933년 새로 부임한 전옥이 김창숙에게 절하기를 강요하자, ”내가 옥에 들어온 지 이미 6~7년이 되었지만 옥리를 보고 머리 한번 까딱하여 절한 일이 없다. 나는 위협으로 내 뜻을 변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에 대해서 절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다. 대저 절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내가 너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며 끝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당시 안창호와 여운형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되어 김창숙과 함께 수감되었다. 당시 쓴 시이다.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그의 애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7년 세월 이미

죄수로 몸져 누웠으나

나의 본 자세를 지킴은

나쁘지 않았어라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라니

어찌 차마 말하랴

분통의 눈물이

창자를 찢는구나!

 

교육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

_성균관대학(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

 

1945년 가을. 김창숙은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한다. 이후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유학의 근대적인 발전에 힘을 쏟게 된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유교문화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며, 일본이 왜곡시킨 유교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 하였다. 일제에 의해 유린되었던 성균관의 복구는 물론이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인재육성을 위한 성균관대학의 설립에 뜻을 두게 된다. 물론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하였고, 당시 열악한 상황에서 재정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김창숙은 성균관대학의 설립이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균관은 곧 우리나라의 유학을 높이 장려하던 곳이다. 유교가 쇠퇴하면 국가도 따라서 망하고 나라가 망하면 국학도 역시 망한다. 지금 학생 몇몇 사람이 강개하여 유학을 부흥할 뜻이 있어 명륜전문학원을 개인적으로 세웠으나 재정이 궁핍하여 유지할 방법이 없어서 길가에서 호소하다가 장차 해산하게 되었으니 어찌 우리 유교인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진실로 건국의 대업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 유학문화의 확장에서 시작할 것이다. 진실로 우리 유학문화를 확장하고자 하면 마땅히 성균관대학의 확립으로써 급무를 삼을 것이다. 진실로 성균관대학을 창립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 전국 유교인의 힘을 합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장차 전국 유교인이 합치느냐 못하느냐는 성균관대학이 성립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고 장차 성균관대학이 설립되느냐 못하느냐는 건국 대업이 늦느냐 빠르냐를 점칠 것이다.『심산유고(心山遺稿)』

 

성균관대학교 심산 김창숙 동상

 

그는 유학의 가치가 나라 운명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기에 교육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학교 설립의 일은 무엇보다도 절실하고 급박한 일이었다. 우선 그는 학교 설립을 위한 재원을 만들기 위해 향교 재산을 추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잘못된 관리 규정을 철폐하고, 향교 재산을 회수하고자 하였다. 1946년 6월 28일 성균관대학기성회(成均館大學期成會)를 발족하고,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해 9월 25일에 성균관대학을 정식으로 인가받게 된다. 물론 교과과정에 유학과 철학을 각 과에서 기본으로 공부하도록 필수 교양과목으로 지정하였다.

교육은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애국운동이었다. 김창숙은 “오늘날 우리의 유교정신은 옛 봉건시대의 진부한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것이 아니오, 또한 외래사상이나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거나 숭배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직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가장 좋은 점만을 절충하여 우리의 고유한 유교정신에 귀납 함양시키려는 바이다.”라고하여 구태의연하고 답답한 교육이 아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현실적인 교육을 추구하려는 명백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뜻을 가만히 곱씹어 보노라면, 그의 정신 바탕이 유교였기 때문에 그것을 천명하는 것이지, 조국과 민족에게 그것조차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그런 과단성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즉, 그가 원하는 것은 건강한 나라 땅에 건강한 정신의 우리사람들이 사는 것이지, 그 우위의 어떤 절대적인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정문 왼편에서 당당한 그를 만날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쭉 펴 올린 오른팔은 우리가 함께 가야할 지향점을 표명하는 듯 힘차고 강렬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도포자락은 어떠한 불의에도 대항하여 박차 오르는 의지의 기상이다. 그는 그렇게 그 자리를 비가오나 눈이오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한결같은 의지의 사람으로 남았다.

 

여전히 빛나는 백절불굴(百折不屈) 정신,

_심산 김창숙 묘역 (수유리 산 127-4)

 

심산 김창숙의 묘역

 

1955년 무렵부터 독재 권력과 그 주구들에 의해 소위 성균관 및 성균관대학의 분규가 확산되어 심산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성균관에서는 심산을 다시 모시려했으나 이미 기력이 쇠퇴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에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5·16으로 그마저 무산되었다. 성균관대학에서 물러난 심산은 곤궁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심산의 곧음과 청렴한 삶의 태도는 대학을 세우고 학장·총장을 지내고서도 셋집에서 여생을 보내게 만들었다. 세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안되고 안타까울지언정, 유학의 정신에서 보자면 대의를 이루고 정의를 지표삼다가 빈곤하게 사는 삶은 그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리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심산은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84세를 일기로 서거(逝去)하였다. 투철한 선비정신의 소유자요,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위대한 저항 자세와 과감한 행동주의(行動主義)의 표상이었던 심산이 세상을 떠난다. 5월 18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된 장례식 후 서울 수유리 산 127-4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역은 고요하고 가끔씩 지나는 새들이 지저귈 뿐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고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나아갈 바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움직였던 그. 시대의 참 어른이 존재한다는 것은 든든한 마음줄과 같은 것. 그래서 그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창숙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전통적 원칙을 지켜나갈 때 비로소 대의명분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마음(心)’에 의한 행동주의, 그리고 시대적 의리에 의한 대의명분론.

평생을 백절불굴(百折不屈) 정신으로 살아낸 떳떳한 유림의 표상.

 

심산 김창숙의 생전 모습

 

 

기고자: 김세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다산 정약용의 소통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다도(茶道)철학과 오감(五感)을 통한 인간미감(人間美感)을 연구 중에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
  18.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유현상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유현상

 

둘리네 동네의 어느 골목

가느다란 봄비가 내리는 날 도봉구 쌍문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쌍문역 4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걷다보니 이곳이 바로 둘리네 동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갑자기 생각난 것은 아니고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희동이가 길 안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는 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무대이기도 했다. 사실 쌍문동은 지나가기만 했지 돌아다녀 본 것은 처음이다. 둘리를 보니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개성 없이 확장된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지역을 알릴만한 소재의 빈곤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서 서운한 감정도 생긴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다. 쌍문역에서 800미터 정도 거리에 있다고 희동이가 알려주었다. 그곳은 개성 없이 확장된 서울의 여느 주택가와 다를 바 없는 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는 목적지를 찾느라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골목 어귀에 고만고만한 규모의 분식집들이 여러 개 보이는 것이 조금 다른 풍경이었다. 요즘에는 학교 근처에도 문구점이나 분식집이 그저 한두 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가보다. 그러고 보니 완만한 골목 맨 윗자리에는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가 다 몰려 있었다. 정의여중고 입구 교차로에서 정의여중고 방향의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 조금 올라가다 오른쪽 작은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니 목적지가 나타났다.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이니 함석헌(1901~1989)의 생가 등을 찾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하니 그의 삶의 흔적은 그가 마지막에 살았던 곳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통일이 된다고 해도 북한 지역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을 듯도 하다. 다만 그가 다녔던 평양고보 자리나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옛 오산학교 자리나 나중에 확인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의 마지막 거처는 지금 ‘함석헌 기념관’으로 변경해서 운영되고 있다. 원래 함석헌은 용산 원효로의 있는 작은 집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지금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집은 차남 함우용 내외의 집이었다. 도봉구는 이곳을 2015년 9월 함석헌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친지들의 도움으로 6.25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원효로 작은 집이 욕심 없이 소박한 삶을 살았던 함석헌을 보여준다면, 서울의 변두리 끝자락 쌍문동의 집은 강단철학에서 외면받아 온 한국 철학의 변방을 상징한다고 한다면 다소 지나친 생각일까?

 

(사진 1. 함석헌 기념관 )

 

우선 들어간 곳은 맨 아래 층에 위치한 작은 전시실 ‘씨ㅇ·ㄹ 갤러리’였다. 전시 내용은 ‘붓글씨로 만나는 함석헌’ 전이었다. 함석헌이 남긴 글의 내용을 여러 사람이 붓글씨로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워낙 많은 글과 시를 남겨 그의 글귀나 시를 소재로 서예전을 기획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쉬운 발상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전에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씨 갤러리’에서는 다양한 기획의 함석헌 관련 전시를 하는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위해서는 무료 대관도 해준다고 되어 있었다. 왠지 내부 통로를 이용하는 것은 정식 방문을 하는 느낌이 안 들어서일까 위로 향하는 내부 계단이 있었으나 굳이 바깥으로 나가 정문 출입구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작은 마당에 들어서니 기념관 안내판이 있었고 2층 현관 옆에는 함석헌의 묘비가 있었다.

 

(사진2 – 함석헌 묘비, 함석헌 기념관)

 

원래는 경기도 연천에 있던 묘를 2006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할 때 묘비는 이곳 기념관으로 옮겼다고 안내하고 있다. 2층은 안내 데스크와 전시를 위한 공간이다. 전시공간에 들어서자 맞은 편 벽에 제일 먼저 연보가 펼쳐져 있다. 이어 안쪽으로 들어가니 거실이었을 공간에 육필원고와 함석헌이 발행한 ‘씨의 소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더 안 쪽 방은 영상전시실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함석헌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들의 영상 자료를 계속 상영하고 있다. 함석헌이 사용한 방에는 자그마한 앉은뱅이 책상에 성경책이 자리를 하고 있다. 그렇지! 그는 스스로 한국교회의 이단자임을 자처하였지만 평화운동가이자 시인인 함석헌은 무엇보다도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종교사상가였다. 그의 소박한 책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성경이었다.

 

(사진 3 – 함석헌 서재의 성경책, 함석헌 기념관 )

 

저항과 사상혁명의 길

함석헌의 고향인 평안북도 용천은 일반인들에게는 2004년 용천역 폭발사건으로 더 잘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함석헌이 고향의 참사를 들었더라면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하였으리라. 일본의 패망에 뒤이은 한반도의 해방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고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것은 함석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함석헌에게 반공세력에 대한 정탐 요구를 했다. 이를 거부한 함석헌은 소련군에 의해 두 차례 더 옥고를 치른 후 북한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1947년 3월 가족들을 두고 홀로 월남한다.

소련군의 탄압을 피해 월남했건만 그 이후의 삶 역시 함석헌에게는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하였으며, 그의 삶 전체는 독재와 타락한 문명에 대한 저항으로 채워지게 된다. 함석헌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계기는 5ㆍ16군사 쿠데타 이후였다.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퀘이커리즘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1963년 독일에 들러 안병무를 만나고 난 후 귀국한 함석헌은 본격적으로 5ㆍ16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성을 알리는 강연 활동을 한다.

1970년에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정권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박정희정권만이 아니라 비겁과 나약에 빠진 지식인들과 언론을 거침없이 질타했다. 1971년 7월부터 1988년 5월까지는 오랜 동안 노자와 장자에 대한공개 강좌를 열기도 했고, 1973년부터는 여기에 더해 퀘이커리즘과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어 교육 활동에 함썼다. 비록 기독교적인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었던 함석헌은 1967년에 이르러서야 그 전부터 호의를 갖고 지켜 본 퀘이커교도가 된다. 하지만 퀘이커리즘에 대한 연구는 그 전부터였다. 그가 퀘이커 교도가 된 계기는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의 고립되었던 자신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고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 실현을 중시하는 퀘이커리즘의 정신 때문이기도 하다.

1970년대의 함석헌의 주요 활동은 반유신 활동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974년 11월에는 김대중, 윤보선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협의화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1일에는 김대중, 윤보선, 안병무, 이문영, 이태영, 이우정,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등과 더불어 박정희의 퇴진을 주장하는 이른바 ‘3ㆍ1 구국선언’ 등에 참여해 또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된다.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 가운데서도 함석헌은 당시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군사독재와의 싸움은 박정희가 죽고 난 후에 5공화국에서도 이어진다. 비록 전두환정권에 의해 씨알의 소리와 같은 비판적 잡지와 언론이 폐간되기도 했으나 강연 등의 활동은 계속 이어갔다. 또한 고령의 나이에 그의 활동이 그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지만 권위주의 독재 정권하에서 수많은 민주 인사들에게 그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함석헌의 저항의 정신은 종교를 절대화하려는 태도에도 항거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도 절대화하는 순간 거짓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자꾸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이 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삶은 끊임없이 절대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상대적 시간에 머물면서 현재를 절대화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이다. 현재를 절대화하는 것은 ‘뜻’에 근접할 수 없다. 그러한 삶은 생의 역동성을 유지할 수 없다. 진리를 향해가는 박진성이 결여된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나’라는 과거의 자아가 마치 본래적 자기라는 것을 규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 생성하면서 참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참나를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항거는 곧 나는 스스로 나이고자 하는 데서 나온다. 사람은 인격이므로 무엇을 다 한대도 인격의 자주성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인격의 자주성은 자연의 경로라 할 수 있다. 자연의 경로는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씨앗이 썩어 새싹이 움트기 위해서는 자신을 덮고 있는 흙과 돌에 항거하고, 병아리는 자신의 둘러싼 껍질에 저항해야만 한다.

 

(사진 4 –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때의 함석헌,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은 「씨ㅇ·ㄹ혁명의 꿈」(1980)에서 자신의 철학을 ‘씨ㅇ·ㄹ철학’으로 소개했다. 씨ㅇ·ㄹ이라는 말은 알맹이나 핵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근원이나 본질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은 유신시대에로까지 이어지는데, 그의 비판의 칼날은 유신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있기 이전에 발생한 4·19혁명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4·19실패의 원인에 대해 학생이 시작했지만 민중의 혁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 실패는 결국 민중의 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중 즉 사람이란, 함석헌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 ‘맨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이나 군인이나 다 맨 사람 위에 덧 입혀진 옷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람 아닌 학생, 군인, 정치인 등등의 정체성은 어떤 특정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맨 사람이 아니고 자신이 입은 정체성으로 만나면 제도에 그 자리에 붙게 된다고도 한다. 함석헌은 특권 없는 제도는 없으며, 혁명은 제도를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군인이 일으킨 혁명, 학생이 일으키는 혁명은 참 혁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었다.

맨 사람이 아닌 특정한 입장을 가진 사람에 의한 혁명은 순전한 자발성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제도화된 입장에 따른 이해관계는 행동을 강제하는 경향을 지니게 마련이다. 비단 외적인 강제에 의한 행동만이 아니라 내적인 강제 역시 자발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법이다. 우리가 노예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제도나 법률에 의해 타인의 강제에 따른 노예가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이해관계나 입장에 의해서만 행동한다면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삶에 대해서 내가 주체로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함석헌이 그래서 참다운 혁명은 사상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민중이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중 스스로 자신이 삶의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것이 사상 혁명의 내용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함석헌의 실천은 씨의 소리발간으로 구체화 된다. 씨의 소리발간은 독재 정권에 대한 함석헌의 정치적 저항이자 언론운동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독재에 대한 투쟁이었고 민중의 사상 혁명을 이끌기 위한 선동이었다. 함석헌은 자신이 말하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삶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러한 변화의 의미와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대 변화란 그래서 하는 생각이다. 변(變)도 화(化)도 다 달라진다는 뜻인데 변은 달리짐 중에서도 갑자기 달라짐을 가리키는 말이다. 변자(變字)밑에 있는 ‘文’이 그것을 표시한다. 그것은 작대기를 들고 두들기는 것을 그린 것이다. 즉 힘을 넣어서 급히 달라지게 만든다는 뜻이다. 거기 더해 화(化)는 질적으로 아주 전의 모습이 없이 달라짐,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를 뜻한다. 화의 한편인 ‘인’은 사람이라는 인(人)자인데. 이쪽의 ‘匕’는 인을 뒤집어 놓아서 죽은 것을 표시하는 자다. 죽으면 아주 달라진다. 우리말로 되졌다는 말이다.”

 

사실상 함석헌이 말하는 변화란 현재의 삶의 방식과 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전복, 즉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혁명은 씨의 스스로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생명의 원리를 스스로 함에 있다고 본 함석헌의 사유는 다분히 노장의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노장 사상은 인간의 도덕적 질서를 강조하는 유가 사상과는 달리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며 인위적인 삶보다는 자연에 따르는 삶을 강조한다. 여기서 자연은 저절로 그러한 세계이자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산학교 시절부터 이어져 온 노장 사상에 대한 관심은 함석헌의 사상이 씨에로 귀결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함석헌은 도덕경에서 인위적이지 않은 도의 길을 강조하는 데에 주목하였다. 또한 이상적인 통치자란 씨들이 생활에 최소한의 간섭만 하기 때문에 씨들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통치자라고 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씨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함’의 방식으로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함’은 자연이고 함석헌에게 자연은 필연이었다. 따라서 민중들인 씨들에 위한 일대 변화 역시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은 자유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고, 자유는 스스로(自)가 스스로의 까닭(由)인 것이다. 따라서 함석헌이 말하는 사상 혁명이란 스스로(自)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씨ㅇ·ㄹ이 스스로 함에 의해 실천할 수 있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씨은 생명의 자발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발성이라 함은 생명의 원동력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발성은 외부의 강제를 배척하는 원리이다. 오랫동안 백성, 신민, 국민 등으로 불린 민(民)은 자발성의 주체가 아닌 다스림의 대상이었다면 씨은 제도와 문명에 귀속된 것이 아닌 자유롭고 자발적인 삶의 주체를 은유하는 것이다.


(사진 5-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이 주장하는 저항의 또 다른 의미는 선악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 투쟁이다. 그는 인격이란 자유하는 것이라고 보고 자아의식을 가지고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이러한 자유에는 한이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다. 선악의 문제가 도덕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함석헌에게 그것은 보통의 윤리의 의미가 아니다. 생명의 선악이요 존재의 선악이다. 함석헌은 선을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라고 보고, 악은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저항의 철학」 이라는 글에서 함석헌은 “인격은 선악의 두 언덕을 치며 물살을 일으켜 흘러나가는 정신의 흐름이다. 물이 언덕은 아니요, 인격이 선악도 아니다. 그러나 흐름은 두 언덕을 쳐서만 있는 것이요, 인격의 발전은 선악의 싸움을 해서만 있다. 선이 무엇인가?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요. 악이 무엇인가?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밖에 다른 것 아니다. 사람은 악과 맞서고, 뻗대고, 걸러내고, 밀고 나가서만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함석헌의 자유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경로를 방해하는 일체의 억압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강력한 해방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의 사유는 우리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고할만한 중요한 인문적 성찰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사유 안에는 모든 제도적 억압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 의식이 담겨 있다.

 

(사진 6 – 비폭력저항주의자 함석헌, 함석헌 기념관)

 

4.19 묘역에서

함석헌 기념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민자치공간으로 꾸며진 곳을 빼고는 1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인근에 있는 수유리 국립 4.19민주 묘역에 들러 보았다. 문득 함석헌의 묘지를 대전 현충원으로 옮긴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함석헌이 마지막으로 머물러 기념관이 된 곳 인근에 자리한 4.19묘역이 더 적절했을 성 싶기 때문이다. 대전에는 서훈 취소가 되어 마땅한 인사들의 무덤도 즐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석헌은 과연 그런 자들과 머물기를 바랬을까?

평일이고 비가 조금씩 와서 그런지 참배객 등의 방문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 나마 몇몇 사람들은 그 옷차림새로 보아 인근 지역 주민들로 보였다. 4.19 기념탑에서 개인적인 간단한 참배를 하고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4.19 당시의 각종 자료와 화보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초등학생들의 시위참가를 기록한 사진이다. 함석헌은 4.19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맨 사람의 혁명이 아니었고 학생의 옷을 입은 혁명이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 새삼 떠올랐다. 당시 초등학생들의 시위사진을 보면 함석헌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말이야 초등학생들이지 그들이 무슨 학생의 옷을 입었으며 왜 맨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인가? 4.19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함석헌의 지적은 4.19를 주도한 학생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완의 혁명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진 7 – 4.19에 참가한 초등학생의 시위, 4.19기념관)

 

 

기고자: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

 

1.

두물머리에서 북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북한강 지류인 벽계천(檗溪川)이 흐르는 계곡이 나온다. 이 계곡을 따라 한참 들어가면 말 그대로 ‘궁벽한’ 마을이 나온다. 지명이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인 이곳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가 태어나고 죽은 곳으로서, 그의 생가가 남아 있고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그는 61세에 강원도 홍천의 삼포라는 곳으로 잠깐 이사했을 때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있던 해에 중앙 정계의 부름으로 한양에 기거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이곳에서 생활했다.

이항로생가 전경

 

독자들은 학창시절에 이항로에 대해서 한번쯤은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조선말기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과 운동의 거두로서 말이다. ‘옳음을 지키고 사악함을 배척한다’는 이 구호는 비장함마저 풍기는데, 실제로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비타협적인, 꼬장꼬장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일까? 생가라고 찾아온 필자 앞에 서있는 거대한 기와집들이 생소하기만 하다. 물론 이러한 느낌이 부유함에 대한 필자의 왜곡된 시선 때문일 수도 있다. 꼿꼿한 선비라고 반드시 궁핍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읊조리듯이 당시 지배층의 부는 일반 백성의 고혈이 농축된 것이 아니던가. 더구나 물산이 풍족할 리 없는 이런 국벽한 시골에 이처럼 거대한 기와집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거슬린다.

 

2.

이항로는 1792년 2월13일 옛 지명 양근군(楊根郡)에 속한 이곳에서 처사 이회장(李晦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세 되던 해 반시(泮試)에, 18세에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했으나 이미 이른 나이부터 관계의 진출을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했다. 그 결과 22세에 이미 스승을 따르지 않을 정도[不由師承]로 뛰어난 학자가 되었고,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스승은 중국 송대의 주희(朱熹)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주희에 대한 태도는 다음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하는 말마다 모두 옳은 사람이 주자(朱子-‘주희’에 대한 존칭)이다. 하는 일마다 모두 옳은 사람이 주자이다. 주자는 공자 이래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이때부터 나는 주자의 글을 읽고 그의 뜻을 추구했다. 나는 주자의 말이 아니면 감히 듣지 않았고, 주자의 의도가 아니면 감히 따르지 않았다. … 다른 이들이 저렇다고 하는데 주자가 이렇다고 하면 나는 다른 이들의 견해를 버리고 대신 주자의 견해를 따랐다.”

조선시대의 지배 이념이 성리학이었고, 따라서 성리학의 완성자 주희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에게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주희에 대한 태도는 신앙에 가까웠으며, 이항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위정척사’에서 ‘옳음을 지킨다’는 것은 주희의 사상을 견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주희가 완성한 성리학에서는 우주만물이 원리로서의 이(理)와 질료로서의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원리로서의 이는 절대선(絶對善)으로서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 인간의 선한 본성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선한 것은 아니니, 그 이유를 질료로서의 기에서 찾는다. 기는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그것이 맑은가 탁한가에 따라 그 안에 포함된 원리로서의 이가 잘 드러나는가 그렇지 못한가가 결정된다. 기가 맑아서 이가 잘 드러나면 선한 인간이, 반대로 기가 탁해서 이가 잘 드러나지 않으면 불선한 인간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에 부여된 선한 이, 즉 본성을 잘 보존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기를 끊임없이 맑게 수련해야 한다. 그러한 수련의 결과가 이 사회를 지배할 자격을 갖는 군자(君子)이다. 따라서 지배층으로서의 군자는 종교인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존재이며, 조선시대의 지배층 사대부에게는 이러한 삶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理)를 기반으로 해서 인간이 따를 도덕률이 나오는데, 그것이 흔히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고 한다. 이처럼 성리학적 도덕률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제어 수단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는 이의 발현이다. 따라서 이러한 삼강오륜을 거부하는 것은 사회적 지탄 대상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주의 원리를 거스르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한 우주의 원리인 이가 인간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즉 이(理)는 불변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불변하는 이에 기반한 삼강오륜은 인간에 내재된 도덕률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기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이항로가 말하는 ‘위정’이란 바로 이러한 삼강오륜의 도덕률을 수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척사’에서 말하는 배척해야 할 ‘사악함’은 이러한 삼강오륜을 거부하는 기독교 세력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문물이다. 즉 기독교 세력이 군신(君臣), 부자(父子), 남녀[부부夫婦], 장유(長幼)의 구분을 무너뜨리니 이들은 짐승과 같은 무리이고, 이러한 무리들이 입은 옷, 타고 온 배, 이들이 사용하는 물건 등은 모두 짐승의 것이다. 따라서 이항로에게 위정척사란 단순히 기존의 학문사상적 체계를 수호를 넘어서는 것이다. 짐승의 삶으로부터 인간의 삶을 지키기 위한 저항인 것이다.

 

3.

청화정사

 

생가의 계단을 올라 문을 지나자 담에 둘러싸인 아담한 방이 나온다. ‘청화정사(靑華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생가가 청화산의 서편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는 ‘화서(華西)’라는 호를 사용하였고, 자신이 기거하는 방을 이처럼 이름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독서와 사색을 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선비, 제자들과 함께 학문에 대해, 그리고 당시 시국에 대해 담론했을 것이다.

 

노산사

 

다시 문을 나와 왼편(동쪽)으로 가면 사당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노산사(蘆山祠)이다. 김평묵, 최익현, 유인석 등 그의 제자들이 스승 이항로를 기리며 지은 사당으로서, 원래의 것은 6.25 때 불타고 후일에 다시 지은 것이다. 여기에는 이항로만이 아니라 그가 존경했던 주희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영정과 위폐가 모셔져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항로는 주희를 추앙했는데, 그와 함께 송시열도 매우 존숭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벽계천이 흐르는 생가 주변을 ‘벽계구곡(檗溪九曲)’이라 하였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출신인 주희가 무이산의 계곡을 노래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송시열이 본떠서 자신이 은거하던 괴산의 계곡을 ‘화양구곡(華陽구곡)’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항로는 바로 이들을 본뜬 것이다.

특히 송시열은 병자호란 이후에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을 주장하던 이이다. ‘중화’란 중국인들이 자기 문화의 위대성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공자, 맹자, 주희로 이어지는 유학의 정통 문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러한 중화문화는 한족인 명나라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오랑캐 만주족인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하게 되어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송시열을 비롯한 당시 사대부들의 인식이었다. 더구나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우리를 구원하였고, 그러한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는 병자호란 때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줬으니, 마땅히 우리는 명나라를 존숭하여 청나라를 징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망한 마당에 중화문명은 우리 조선에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특히 조선의 유학자 사대부들에게는 이러한 중화문명을 수호할 임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책임 의식은 이항로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4.

노산사는 야트막한 동산 위에 놓여 있는데, 그 사당 앞에는 동산 위라고 보기에는 제법 넓은 마당이 있다.

이항로의 제자들은 매월 이항로의 집이나 명승지, 사찰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갈수록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 그래서 앞에서 본 ‘청화정사’에는 많은 제자가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그의 나이 56에 이곳에 야외교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궁벽한 곳에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까? 당시에 한양에서 온다고 했을 때, 배편으로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야 하고, 그후에도 육로로 상당히 험한 산길을 넘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가슴에 학문에 대한 열정, 옳음을 지키려는 열정을 가지고 모인 수많은 학자들이 모여 스승의 강의를 경청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일까. 이 장소의 이름이 제월대(霽月臺)이다. ‘제월’은 ‘비가 막 갠 뒤에 부는 상쾌한 바람과 비가 막 갠 뒤에 나타난 깨끗한 달’을 가리키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줄임이다. 비온 후의 달처럼 깨끗한 마음을 가진 제자들과 만나, 깨끗한 마음으로 진리를 나누는 곳에 참 어울리는 이름이라 할 것이다.

 

제월대

 

그런데 ‘제월대’라는 글이 새겨진 돌에서는 별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은 이곳을 내려가 생가 서쪽에 자리한 ‘기념관’에 들러서야 풀렸다. 원래의 돌이 기념관에 모셔져 있었고, 이것은 모조품인 것이다. 아마도 비바람에 훼손될까 우려하여 그렇게 한 것 같다.

 

5.

다시 서울로 발걸음을 돌린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한양에 간 것은 병인양요 때이다. 그 이전에도 조선의 중앙 정부에서는 그에게 여러 차례 관직을 내리지만,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자국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핑계로 한강의 양화와 서강까지 군함을 몰고 와서 시위를 하는 프랑스의 행태에 75세의 이항로는 결국 정부의 부름에 응하고, 노구를 이끌고 한강에 나가 시찰하기도 한다.

벽계구곡을 떠나 한양 나들이를 했을 때, 그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한강에 버티고 선 낮선 배[異樣船]는 그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아마도 그 배는 짐승같은 놈들의 배로만 보였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저 배가 왜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저 배와 우리 배의 차이가 무엇인지, 저들이 어떻게 저처럼 거대한 배를 그리도 빨리 움직일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저러한 기술이 조선에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지는 않을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름과 틀림은 분명히 다르다. 다름의 반대말은 같음이고 틀림의 반대말은 옳음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하기에 길게 이야기하면 구차해진다. 하지만 이 다름과 틀림의 문제가 간단하지 않게 다가올 때도 있다. 틀림이란 옳음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옳음의 범위가 좁은 이에게는 이 세상의 일들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것보다는 틀린 것이 많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들 중에서 틀리지 않은 것이 있음을 인지하기도 하며, 그 순간 그 사람은 지적, 인격적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옳음에 대한 굳건한 확신을 가진 이는 그 옳음의 기준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아니 바꿀 수 없다. 그들은 상대가 왜 나와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사고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평생동안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참이라고 믿는 삶에 대해서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과 행동에 대해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도 없이 자신의 것만이 옳다는 사고는 매우 위험하다. 아무리 광풍제월의 맑고 깨끗한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고는 자신과 다른 이를 배척한다. 이러한 태도는 현재에도 우리 세계에도 존재한다. 종교, 사상, 인종, 성적 취향이 자신과 다른 이를 틀렸다고 규정하고 배척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당신의 진리만이 참인가?

 

기고자: 구태환(상지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최한기의 인체론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배타적 소유권에서 벗어난 ‘인권’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독립문, 자주독립의 열망

독립문역사거리, 사통팔달의 분주한 길 남쪽에 멀찌감치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북쪽에는 북한산이 양쪽으로 안산과 인왕산이 들어온다. 시선을 조금 내리면 바로 앞에 고가도로에 가려 한 눈에는 볼 수 없는 독립문이 있다. 길을 건너 가까이 가본다. 독립문 뒤로 서재필 동상, 독립관, 3.1운동 기념탑, 그리고 서대문형무소가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외세의 침탈에 저항한 우리 역사의 흔적과 기억이 모두 모여 있다. 그곳은 중국 사신을 맞이한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하며 자주독립 열망했던 근대의 꿈이, 일본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이 모진 고초를 겪었던 서대문형무소라는 식민지의 좌절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과거의 독립문, 현재의 독립문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곧바로 독립문과 독립관 건립을 계획했다. 독립관은 모화관慕華館을 보수해서 사용하고, 독립문은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세운다는 것이다. 모화관은 조선시대 명과 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갑오개혁이후 사용하지 않아 폐가가 되어 있었고, 영은문은 바로 모화관 앞에 있던 것으로 1895년 철거되어 돌기둥만 남아 있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따 설계해서 1897년 11월 준공되었고, 197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의 건립은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제안했지만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이루어졌다. 19세기 말 안팎으로 거세게 흔들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조선의 운명을 붙잡고 싶었던 조선인들의 의지와 열망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1896년 6월 20일자 독립신문 영문판 ‘The Independent’ 사설)

 

 

서재필과 <독립신문>, 계몽의 꿈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독립문을 건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독립신문>이 있었다. <독립신문>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에 맞서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서재필이 주도하여 탄생시킨 근대적 신문이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7세 무렵 양자로 입적된 뒤 양어머니의 뜻에 따라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외숙인 판서 김성근의 집에 머물면서 북촌의 양반 자제들과 교류하였고, 1880년 무렵 13촌 아저씨뻘인 서광범을 통해 김옥균을 소개받았다. 1884년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에 가담했고 실패하자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때 국내에서 가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자살하거나 참형되었고, 아들도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죽게 된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시민권을 획득했다. 1895년 귀국을 요청받아 돌아 와 개화파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나는 우리나라 독립을 오직 교육, 특히 민중을 계발함에 달렸다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문 창간을 계획하고 당시 내무대신인 유길준에게 그 사정을 말하였더니 자기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국고에서 5,000원을 지출하겠다는 승인서를 받았다. 이것을 토대 삼아 우선 인쇄기를 일본 오사카에서 구입하기로 하고 장소는 정동 미국 공사관 뒤 정부 소유의 빈집을 사용하기로 했다.”(김도태, <서재필박사 자서전>)

 

독립신문 창간호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국문판 3면과 영문판 1면 총 4면, 주 3회 발행, 한글전용 띄어쓰기 언문일치를 실행한 최초의 민간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 논설에서 창간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1 불편부당하고, 2 양반 상인의 신분차별이나 지방차별이 없이 전 국민을 평등하게 다하며, 3 전국 인민을 공평하게 대변하고, 4 정부정사를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실상을 정부에 알리어 정부와 백성 사이에 의사소통을 시키며, 5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시행하여 일반국민이 모두 신문을 읽도록 하고, 6 신문가를 저렴하게 하여 일반국민이 구독할 수 있도록 하며, 7 부정부패와 모든 불법행위를 고발하고, 8 영문판을 발행하여 한국의 사정과 한국민의 입장을 세계에 알리며, 9 국민에게 나라 안 사정을 알게 하고, 10 국민에게 외국 사정을 알게 하는 것이다.

 

국민의 계몽을 목표로 한 <독립신문>의 발행부수는 처음 300부에서 곧 500부, 1898년 초에는 1500부, 그해 말에는 3000부로 급증했다. 당시의 구독방식은 지금과는 달리 신문 한 부를 여러 사람이 돌려 읽고 사랑이나 시장에서 낭독하는 것이었으므로 한 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을 것으로 추측하면 그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 폐간될 때까지 1 국민의 의식과 사상의 ‘개화’, 2 자주독립과 국가이익의 수호, 3 국민의 민권 신장과 수호, 4 한글 발전에 공헌, 5 부정부패 고발, 6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 7 세계와 한국의 연결과 한국인 시야의 세계적 확대 등에 기여 했다. 무엇보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독립신문>의 한글전용 채택이다. 계몽의 내용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910년대 후반 동일하게 국민 계몽의 목표를 설정하며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신청년新靑年>이 가장 주력했던 것도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를 사용하자는 백화문白話文 운동이었다. 이러한 취지의 <독립신문> 국문판을 창간부터 책임진 사람은 주시경이었다.

 

독립신문사터(배재학당 근처 표지석과 신아빌딩)

 

독립문을 둘러본 뒤 길 독립신문사의 흔적을 보고 싶다면 마을버스 종로05를 타보자. 독립문 건너편에서 출발한 마을버스는 인왕산 둘레 한양성곽까지 올라간 뒤 내려오며 사직공원 뒤편의 단군성전을 지난다. 그렇게 고불고불 작은 길과 큰 길을 지나 강북삼성병원에 하차해 길을 건너면 정동길이 시작된다. 정동길을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신아빌딩이 보이면 배재학당 방면으로 걸어 올라가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옆 배재정동빌딩 뒤편에 ‘독립신문사터’라고 쓰인 표식이 있다. 그런데 이곳이 실제 독립신문사 자리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걸어 왔던 길 초입에 있는 신아빌딩 근방에 독립신문사가 있었다는 다른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근대 시민의 길

<독립신문>의 발행 이후 독립문 등의 건립이 자주독립의 의지를 천명하는 상징적 실천이었다면, 독립협회의 창립과 만민공동회의 개최는 <독립신문>의 취지에 부합하는 근대적이며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서재필의 제안하고 여러 개화파 지식인집단이 참여한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창립한다. 독립협회가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의 건립을 추진하던 초기에는 관료들이 주도를 했지만 1897년 8월 29일 첫 토론회를 시작으로 점차 시민들이 표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국민 계몽에 관한 주제뿐 아니라 정부 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포함되었다. 따라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지원하던 정부도 입장을 바꿔 서재필의 해고와 <독립신문>의 폐간을 시도하였다. 토론회는 매주 일요일 3시 독립관에서 개최하고, 논쟁적 주제를 선정해서 찬성과 반대 연사 각 2명이 발표를 하며, 회원들은 토론자로 참가하고 회원이외의 방청인도 참관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분야의 문제를 주제로 모두 34회 개최되었으며 제8회 토론회부터는 약 5백 명씩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했다. <독립신문>의 국민 계몽이라는 목표는 독립협회의 토론회를 거치면서 근대 시민의 탄생과 성장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1898년 2월 서재필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운동을 계몽운동으로부터 민족독립을 지키기 위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전환한다. 첫 번째 작업으로 황제에게 강국들이 나라를 넘보고 내정을 간섭하여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만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므로 국민과 함께 단결하여 밖으로는 자주독립을 굳게 지키고 안으로는 과검하게 내정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리고 3월 10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한다. 최초의 만민공동회에는 서울 시민의 약 17분의 1인 1만여 명이 운집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였다. 이 민중대회에서 미전 쌀장수 현덕호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연사들의 연설을 들은 민중들은 박수로서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12일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하지 않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만민공동회가 동일 장소에서 개최되었는데 그 수는 더 많아져 수만 명의 민중들이 운집하였다. 이후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을 추진한다. 근대적 정치제도의 건설에 대한 논의와 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10월 28~29일 관민공동회를 거쳐 의회설립법이 제정 공포되었지만, 의회가 설립되기 하루 전날인 11월 4일 황제에 의해 개혁정부의 해산, 독립협회 해산과 간부들의 체포 명령이 내려지면서 의회설립의 꿈은 좌절된다.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던 곳은 지금의 광화문과 종각역 사이 종로구 서린동이다. 만민공동회가 열리면 종로의 상인들은 가게문을 닫고 참여했으며, 밥장사는 장국밥을 술장사는 술을 가져왔고, 부자와 거지 가리지 않고 기부금을 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낯설지 않고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것은 역사의 반복 때문일 것이다. 2016년 가을에서 2017년 봄까지 이어졌던 촛불집회는 만민공동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1898년 12월 1일자 <독립신문>의 사설은 당시 보름 넘게 철야투쟁을 하던 민중들을 “만민들이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무한 고생한다”고 묘사했다. 그해 겨울 우리도 120여 년 전 민중들의 열망과 분노로 가득 찼던 그 길 위에 그렇게 서있었다.

 

 

격변의 조선을 각자의 철학으로 지나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의 한 구절이다. 19세기 한국의 사상지형을 설명하기에도 적절한 말이다. 19세기 사상의 하나는 동학으로부터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는 민중적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초기 개화사상으로부터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에 이르는 계몽적 개화의 흐름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앞의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한 전통적 위정척사의 흐름이다. 이들을 ‘흐름’이라고 표현한 것은 1850~60년대부터 1900년 초까지의 각각의 사상 안에서도 변화가 매우 컸으며, 단일한 하나의 사상으로 규정하거나 체계화되지 못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첫 번째이고 가장 주목받지 못한 것은 두 번째이다. 앞선 시대와의 사상적 연관을 찾기 어렵다, 새로운 철학적 내용이 없다, 외세 의존적인 태도로 실제 많은 친일인사를 배출했다는 감정적 배제 등이 그 이유였다. 필자가 개화사상에 가졌던 오랜 편견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19세기 격변의 조선을 각자의 ‘철학’과 방법으로 지나온 흔적이며 역사일 것이다. 오랜 편견을 버리고 갖게 된 생각은 그들이 지나온 시간과 길을 읽고, 정리하고 그런 후에 평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다. 내가 찾고 있는 우리의 근대와 현대는 그렇게 지나온 시간과 길들에 의해 촘촘히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고자: 박영미(한양대 철학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7세기 이후 중국과 한국의 근대에 대한 모색과 사상적 연관을 연구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 원주역과 장일순의 얼굴

열차가 정차하는 역에는 그곳을 거치는 사람들만큼 많은 사연이 쌓이게 마련이다. 전국적으로 도로망이 촘촘해진 지금에야 열차보다 편리한 것이 고속·시외버스이지만, 예전에 큰 도시로 가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열차였다. 그리고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열차 시간을 알아보고 좌석까지 예매하지만, 예전에는 열차 시간을 알아보거나 열차표를 예매하기 위해서, 그리고 벗이나 자녀를 배웅하고 맞이하기 위해서 가야 할 곳이 열차역이었다. 이래저래 열차역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고, 그 많은 사람들은 대상으로 한 식당, 여인숙 등이 주변을 차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의 상인이나 여객들을 노린 깡패, 소매치기, 사기꾼들도 적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열차역과 그 주변은 온갖 인간 군상의 집결지였다.

 

 

<원주역 전경 (출처: 저자)>

 

 

원주역도 다른 도시의 역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오가고, 상권이 형성되고, 소매치기, 깡패 등이 순박한 시골 사람들을 노리기도 했던 곳이다. 적어도 대학생인 필자가 치악산에 가기 위해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처음으로 원주역에 도착했던 1980년대 후반 당시에는 그랬다. 그 이후 원주를 다녀갈 때에 열차를 이용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한참 후에 필자는 원주에 있는 대학에 강의를 다니게 되었고, 간혹 원주역에서 열차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역의 승강장에서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을 만나게 되었다. 한때(2013년~2016년) 원주역의 승강장 벽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장일순 벽화 (출처: 저자)>

 

 

장일순은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원주역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그러한 어울림은 많은 일화를 낳았고, 그러한 일화들은 그의 인간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 중 하나가 떠오른다.

 

원주역을 지나던 아주머니 한 사람이 딸의 결혼 비용을 소매치기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황한 아주머니에게 주위 사람들이 이곳에서는 어려운 일을 장일순이라는 사람에게 상의하면 해결되기도 한다고 알려주었고 그녀는 그를 찾아가 하소연한다. 사정을 들은 그는 원주역 주변 일대를 돌면서 그 소매치기를 찾아내고 결국 소매치기한 돈을 받아 아주머니에게 돌려줬다는 일화다. 참 영화 같은 이야기이다. 장일순이 그 동네를 주름잡던 깡패 두목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힘을 쓰는 사람도 아닌 그가 어떻게 소매치기를 설득했을까?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후 장일순은 그 소매치기를 다시 불러 술 한 잔 대접했다고 한다. 이 이유인 즉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신에게 소매치기한 돈을 돌려받았지만, 결국 내가 당신 영업을 방해한 것이니 미안하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사람을 대하는 장일순의 태도를 알 드러내준다. 그대가 도둑일지라도 나는 그대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는 태도, 그리고 나는 그대를 인간으로, 그리고 소매치기라는 당신의 직업을 생업으로 인정한다는 태도 말이다. 타인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2. 생애

장일순은 원주에 세거한 집안에 태어나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원주에서 보냈고, 원주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유소년기를 살펴볼 때에 필자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 몇 있는데, 특히 그의 조부와 모친은 예사롭지 않으면서도 예전의 우리 주변에서 간혹 볼 수 있는 현명한 이들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조부 장경호(張慶浩)는 가족들에게 “밥 한 그릇을 우습게 봐서는 아니 되느니! 온 우주가 힘을 합해야 그게 만들어지지 않더냐. 쌀 한 톨이라도 버리는 짓은 큰 죄를 저지르는 일이야.”라고 하면서 땅에 떨어진 한 알의 곡식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장사를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그의 조부가 이처럼 한 알의 곡식도 아끼는 행동은 자린고비의 그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조부는 걸인이 오면 상을 차려 대접하도록 하는 등 결코 자신만의 호의호식을 위해 곡식을 아끼거나 자신보다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수많은 묵객들이 드나들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시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걸인 상을 차릴 때에도 정성을 다하였고, 소작농에게는 더운밥을 대접하고 자식들에게는 찬밥을 주는 그런 이였다.

 

원주에서 소학교를 마친 장일순은 서울의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대학(서울대 공대의 전신)에 입학하지만 ‘국립대학 설립안’에 반대하다가 제적당하고 원주로 내려온다. 하지만 주위의 권유로 다시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했지만, 4학년인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온다. 그후 교육에 뜻을 두어 당시의 성육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여 1954년 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봉직하는데, 교사 부족 때문에 교사로도 활동한다.

 

그는 1958년과 1960년에 모순된 현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지만, 현실 정치 현실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두 번 모두 낙선하고 만다. 그런 그는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에 평소 주장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빌미로 체포되어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된다. 외세를 배제하고 남북한 당사자가 만나 평화통일을 협의하자는 주장이 북한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출소 이듬해에 대성학원 이사장에 복귀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고자 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사회안전법’ 등으로 그의 모든 활동을 감시하고 방해했으며, 결국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굴욕적인 한일외교 반대운동으로 구속되자, 장일순은 학생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이사장직을 포기하게 된다.

 

독재정권의 이러한 부당한 탄압 때문에 현재 우리가 장일순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한 가지 애로점이 생기게 된다. 일찌감치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 그는 자신의 글로 인해서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칠까봐 저어하여 글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이후 그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관심을 집중하여, 망가져가는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기 위한 신용협동조합 운동에 펼치게 되고, 1971년 이후에는 지학순 주교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조력자로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민주화 운동의 조력자로의 그의 역할로 인해서 박정희에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많은 민주인사들이 정권의 탄압을 피해 원주에 와서 장일순에 몸을 의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협동조합운동은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의 설립으로 드러나며, 특히 현재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한살림 생협’의 창립에 많은 공헌을 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고, 결국 생산자와 소비자, 나아가 땅과 생명을 살리는 운동에서 차지하는 장일순의 역할은 지대했다고 평할 만하다.

 

병든 세상을 고쳐보고자 평생을 노력한 그에게도 못된 병이 찾아왔으니, 1991년 위암이 발병하여 결국 1994년에 그 ‘병을 모시고’ 이 세상을 등졌다.

 

 

3. 걸어다니는 동학

암을 앓으면서 “병을 모시고 간다”던 장일순은 자신의 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자연도, 지구도 암을 앓고 있고, 자연 전체가 암을 앓고 있는데 사람도 자연의 하나인데 사람이라고 왜 암에 안 걸리겠어요. 그러니까 큰 것을 나한테 가르쳐주느라고, 결국은 지금 뭐냐 하면 너 좀 앓아봐라 하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진리는 단순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이야기하면 대단히 거창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삶의 참된 이치가 진리이고, 결국 진리는 우리 삶 속에 녹아있고, 우리는 진리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모르고서 말이다. 지구의 급격한 환경 변화, 그러한 변화의 급격함에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몸, 그 결과 드러나는 내 몸의 이상 현상인 병은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고, 그것은 참된 이치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아는 것은 내 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가까운 내 몸이 아는 것을 무시하고 다른 고차원적인 것에서 진리를 찾는다. 장일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 아니겠는가?

 

사람이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이 병들면 사람도 병들 수밖에 없다는 장일순의 사고는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가까이에서 그 연원을 찾자면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떠올릴 수 있다. 인간과 만물은 모두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고 만물과 내 몸에 깃든 한울님은 같은 존재다. 그리고 만물을 아우르는 하늘과 땅은 만물을 낳았으니, 내 부모와 한 몸이다. 따라서 최시형은 나막신을 신은 아이가 뛰어다니는 것을 마뜩치 않게 생각한다. 나막신이 딸각거리며 땅을 울리면 땅에 깃든 한울님, 내 부모가 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울님, 내 부모가 상하면 그 자식인 우리 역시 상하게 된다. 만물과 나는 천지라는 같은 부모의 품에서 생장하는 존재이니, 천지가 병들었는데 내 몸이 병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장일순은 ‘국대안 반대 투쟁’으로 제적당해서 원주로 내려왔을 때 먼 친척형인 오창세를 통해 해월 최시형을 접하여 그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접하게 된 것이다. 그후 그의 사상 행적 곳곳에서 최시형의 흔적이 보이는데,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의 최시형이 관군에게 체포된 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직접 글씨를 남긴다.

 

특히 그는 만물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고 한 최시형의 사상에 심취한 것 같다. 사람만이 아니라 곡식 한 알, 돌멩이 하나, 벌레 하나도 한울님이니, 이러한 한울님을 무시하고서 멋대로 개발하는 행위는 한울님을 해치게 되고, 결국 인간 역시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한울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

 

장일순은 ‘알뜰함’을 꼽는다. 수많은 농부의 땀과 하늘과 땅이 일체가 되어 한 사발의 밥이 나오는데, 그 밥을 소중하고 알뜰하게 다뤄야만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한 사발의 밥을 알뜰하게 다뤄서 이웃과 서로 나누는 것이 ‘한살림’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음식에도 한울님이 있으니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한울님을 영접하는 행위라고 강조한 최시형의 생각을 그러한 한울님이 깃든 음식을 알뜰하게 다뤄 주변 사람과 함께 먹음으로써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데에까지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한울님이 깃든 음식을 많다고 해서 허투루 낭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을 무한정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인간의 의도에 맞게 개발하고 변형함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4. 밑으로 기는 자세

자연을 인간의 이용과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그의 비판은 타인에게 군림하지 않는 그의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가 제자들에게 항시 했던 말 가운데 하나는 “기어라”이다. 장일순 자신 앞에서 기라는 것이 아니라 남과 맞서서 내가 잘났다고 내가 힘있다고 우기지 말고 남들 밑에 처하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제자 한 사람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길을 걷다가 장일순을 만났다. 그는 술김에 선생님께 치기를 부려 “선생님은 맨날 저희보고 기어라, 기어라 하시지만 당신께서는 언제나 저희에게 대접만 받지 않습니까”라고 따졌다. 이러한 제자의 치기어린 투정에 대한 장일순의 답변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제자는 술이 확 깼을 것이다. 그의 말이 알맹이 없이 입으로만 뱉어내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일화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 발밑을 기라는 그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많은 이들은 장일순의 이러한 사고의 연원을 『노자』에서 찾으며, 필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무위당’도 노자에서 차용한 것이며, 장일순의 구술을 제자 이현주가 풀어냈다고 하는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라는 책이 있는 것도 주지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어라’와 관련되는 노자의 대표적인 언급은 “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했다. 이러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스스로의 공을 뽐내지 않는다. 그리고 산에 있는 물은 아래로 흘러 계곡에 모인다. 노자는 이처럼 물이 모이는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면서 계속의 신을 오묘한 암컷의 생식기에 비유하는데, 이러한 암컷의 생식기에서는 만물이 탄생한다. 노자는 이 말을 통해서 남들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고 남 밑에서 기고 싶어 하지 않는 세태를 비판했다. 이러한 세태와는 달리 물은 모두가 싫어하는 밑으로 흐르면서도 만물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타인과 다투고 그 위에 군림하고자 하면, 결국 모두가 다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툼이 아니고 함께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군림하려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가? 장일순은 그 태도가 자신을 내세우는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자신을 채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자의 말처럼 비어있어야만 다른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다. 즉 다른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주 만물과 그에 속하는 나와 우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기어라’ 역시 만물과의 함께 삶을 추구하는 고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5. 그의 자취

모든 사람,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몹쓸 병과도 함께 살아가고자 한 장일순의 자취를 파악하는 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는 의도적으로 글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가 남긴 글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성인으로 숭상되는 공자, 소크라테스, 석가, 예수 가운데 누구도 글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제자들을 감복시켰고, 그 제자들이 스승의 말과 행동을 글로 남겨서 아직도 우리는 그 성인들의 위대한 사상에 젖어 있는 것이다. 장일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사상 행적은 우선 제자들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의 서화도 우리에게 그의 사상의 단편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는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의 묵객 가운에 한 사람인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게 서예를 배웠는데, 글을 쓸 수 없는 처지인 그에게 서화는 자신이 생각을 펼치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한 ‘의인란(擬人蘭)’은 일품이라 할 것이다.

 

<장일순 서화 (출처: 저자)>

 

 

윗 사진의 그림은 장일순의 대성학교 제자와 그의 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걸려 있는 것이다. 단아한 얼굴 모습을 한 꽃과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곧게 선 꽃대, 그리고 휘어져있지만 강한 생명력을 함유한 듯한 두 이파리는 그 그림의 주인공인 제자의 부인과 꼭 닮아 있다. 이 그림에는 삶의 역경을 견뎌내면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는 사람에 대한 장일순의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흔적은 그의 활동 공간에서 잘 드러난다.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체를 살리고자 설립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준 협동조합은 이미 전국적인 단위로 확산되었고, 많은 이들이 협동조합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원주 중앙동에 위치한 ‘밝음 신협’은 그 가운데 하나로서 그곳에는 아담한 규모이긴 하지만 ‘무위당 장일순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장일순의 고거 (출처: 저자)>

 

 

그리고 그의 흔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 1955년에 장일순이 스스로 지었다는 봉산동의 집이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을 이곳을 여전히 그의 부인이 지키고 있다. 안뜰에 잡초가 뒤섞인 온갖 생명체를 안고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은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 보는, 그래서 그 위에 군림하지 않는 장일순의 모습이 아닐까. 그는 봉산동 집을 나서 원주천 제방을 따라 원주역까지 걸어다니곤 했다고 한다.

 

<무위당길 표지판 (출처: 저자)>

 

 

이 봉산동 집 부근의 작은 길에는 ‘무위당길’이라는 명칭이 붙여져 있다. 혹자는 이처럼 작고 초라한 길에 장일순처럼 큰 스승의 이름이 부여된 것이 불만스러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자 한 그에게 큰 길을 선사하는 것은 오히려 모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중요한 것은 이 작은 길에서라도 그의 삶과 그의 정신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 아닐까 한다.

 

 

기고자: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최한기의 인체론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배타적 소유권에서 벗어난 ‘인권’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도산공원 가는 길

 

춘분, 추분과 더불어 낮과 밤의 길이가 동등한 날에 이른 점심을 먹고 도산 안창호의 자취를 찾아 집을 나섰다. 바깥은 안창호가 살았던 시대만큼이나 우울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 걸음을 돌려 우산을 챙겨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평일 한낮인데도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3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챙겨와 다행이라고 여긴 것도 잠시,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산이 이리저리 춤을 추는 탓에 온전히 앞을 보며 걷기가 힘들었다. 이윽고 빌딩숲 인공협곡이 만든 순간적인 강풍에 우산이 뒤집혀 살 하나가 부러지기까지 했다. 나의 허약한 3단 우산은 강한 바람을 버텨낼 힘이 없었던 게다. 그렇게 조금 먼 길을 돌아 도산대로를 거쳐 도산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도산공원 입구 (출처: 저자)>

 

도산공원과 도산 안창호 기념관의 의미

 

도산공원(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20)은 1973년 11월 10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던 안창호의 묘소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옮겨와 합장하면서, 도산이 ‘우리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애국정신과 민중 교화를 위한 교육정신을 국민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자 조성’된 근린공원이다. 전반적으로 아담한 크기의 도산공원은, 근린공원답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산책로와 체육시설, 휴게시설 등도 갖추고 있는 모양새다. 매일 24시간 개방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없다.

<도산과 이혜련 여사의 합장묘 (출처: 저자)>

 

도산공원은 이 땅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안창호의 자취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조성한 곳이다. 다시 말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안창호를 우리의 마음에 새길 필요성은 있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의 행적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장소나 공간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특별히 한 곳을 정해 그를 기리는 장소로 만든 것이다. 넓게는 도산공원이 그러한 곳이고, 좁게는 도산공원 안에 자리한 도산 안창호 기념관이 바로 그러한 공간이다.

 

도산 안창호 기념관은 안창호가 태어난 지 120주년을 기념하여 1998년 11월 09일에 개관한 건물이다. 입장료는 없으며, 01월 01일과 설날, 추석에만 휴관이다. 다만 관람시간은 인터넷 정보와 안내 책자 및 현장 안내문이 조금씩 다르게 기술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대체적으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정도까지 개방을 하는 듯 보이지만, 원활한 관람을 위해서는 방문하기 전 미리 개방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도산안창호기념관 (출처: 저자)>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니 다소 쌀쌀했던 날씨 탓에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안내나 관리를 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관람하고 있는 사람은 한 명. 기념관 처지에서는 아쉽겠지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관계자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본격적으로 도산 안창호의 삶으로 들어가 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다.

 

안창호는 1879년 11월 09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사도(일명 도롱섬)에서 아버지 안흥국과 어머니 황씨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다 1894년 서울에 와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밀러학당)에 입학하여 신식학문을 배우면서 기독교에 입교한다. 구세학당에서 보고 배운 것은 안창호에게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미친 듯하다. 구세학당을 졸업한 후 독립협회에 가입하면서 그의 민족운동가·개화사상가·교육자·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이 땅이 처한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안창호의 삶은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빼고서는 말할 수 없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도 일제의 내정 간섭 및 만행은 있었고, 안창호는 이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당시 우리 민족의 가장 급선무는 진정한 독립이고, 독립을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미국의 문명과 부강함을 배우고 본받아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1902년 결혼 후 일본을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난다.

 

도산(島山)이라는 호는 이때 생겼는데, 배를 타고 가면서 태평양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하와이를 보고서 스스로 지어 붙였다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섬뫼인데, 섬은 고립과 고독을 의미하고 뫼는 우직함을 상징한다고 본다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심한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그 속에 담은 셈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하와이가 아닌 독도나 제주도, 마라도를 보고 그렇게 붙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그러나 이 시기는 일제의 시커먼 야욕이 빠르고 치명적이게 우리 민족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때였다. 그야말로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 거센 비바람에 맞서는 허약한 우산 신세였다. 도산은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라고 한 자신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이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을 결심하고 1907년 02월 귀국한다. 이때부터 국내외 각지를 오가는 그의 힘겹고도 숭고한 여정이 시작된다.

 

<도산안창호기념관 전시실 (출처: 저자)>

 

 

힘을 길러야 한다!

 

도산은 우리 민족에게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옳은 것이라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하면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목적은 두말 할 것 없이 진정한 ‘독립’이다. 그리고 독립이 옳은 것은 전 인류의 최종적 목적이 ‘전 인류의 완전한 행복’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도산은 엉뚱하게도 행복의 실마리를 ‘문명’에서 찾고 있다. 개개인이 긍정적인 ‘개조’를 통해 서구 열강의 발달된 ‘문명’을 배우고 습득하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우리도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다분히 개화·계몽적이다 못해 사대주의적 발상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그의 현실적인 판단력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 인류의 행복은 모든 사람이 실제로 동등한 선상에 있거나 감성적으로 그러하다고 느낄 때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산이 보기에 우리 민족은 이미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그 불행의 시작은 뒤떨어진 문명에 있다고 봤다. 그렇기에 보다 일찍 문명을 받아들인 일제에 의해 더 이상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과 동등한 문명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동등한 문명, 곧 동등한 힘을 가지기 위한 개개인의 개조와 그에 대한 노력을 부단히 해야만 결국 동등해질 수 있고, 진정한 독립을 할 수 있으며, 이 땅의 올곧은 주인으로서 우뚝 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도산은 힘을 기르지 않고 “한갓 요행과 우연을 바라보고 한번 떠들기나 하면 독립이 될까, 혹은 육혈포질이나 작탄질이나 하면 독립이 될까, 혹은 어떤 나라에 호소나 잘 하면 독립이 될까하고 어련한 가운데서 호도하게 시간을 보내며 방황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석하기가 한이 없”다고 말한다.

 

도산은 우리 민족이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선진문명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교육과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서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개개인이 영원한 책임감을 가진 진정한 이 땅의 주인이 됨과 동시에 서로 간의 믿음에 기반을 둔 합동과 협동을 주문했다. 그러면 정의(情誼)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특히, 도산은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두고 서로 믿고 모이어 합동적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워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해 도산은 “어떠한 협동이든지 그 협동 중에 앞선 사람은 곧 지도자의 자격을 가진 자”라고 하면서 “지도자의 자격은 비교문제로 생”긴다고 말한다. 각자가 남을 시기하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 민족을 위하여 지도자를 찾아 세울 참된 뜻으로 냉정한 머리를 가지고 살피고 따지면 지도자의 자격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지도자가 될 후보군들이 다 협잡하고 싸움만 일삼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 중에 협잡과 싸움을 적게 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우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산의 생각에는 “위인이란 별 물건이 아니요 위인의 맘으로 위인의 일을 하는 자가 위인”이라는 그의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신이나 성인(聖人)과 같이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전제가 깔린 듯하다.

 

결론적으로 도산은 “무조건 허영만 표준하여 지도자라고 인정하지 말고 먼저 그 사람의 주의와 본령과 방침과 능력을 조사한 후에 그 주의와 본령이 내 개성에 적합하고 그 주의에 대한 방법과 능력이 나와 다른 사람보다 앞선 것을 본 후에 지도자로 인정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살피는 방법은 사회에 떠돌아다니는 요언비어(妖言誹語)에 의하지 말고 그 사람의 실지적 역사와 행위를 밝게 살필 것”을 들고 있다. 또한 지도자를 택할 때 마음가짐은 “친소 원근과 차당 피당의 관념을 떠나서 전 군중의 이해를 표준하고 공평 정직한 맘으로 할 것”을 말한다. 도산의 이처럼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견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바다. 그런데 당시에도 요구되는 바였고 지금도 요구되는 바라는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당시에도 가능하지 않았고 지금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기에 씁쓸할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도산의 길과 우리의 길

 

도산은 1937년 06월 28일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1월 10일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도산은 12월 24일 오랫동안 앓고 있던 병이 심해져 보석 출감하여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러나 약 3개월 뒤인 1938년 03월 10일 00시 05분에 간경화 등의 합병증으로 서거한다. 도산은 자신을 심문하는 일본 검사에게 “대한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마치 1945년 08월 15일의 광복을 예언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날을 함께 하지 못했다. 하지만 병을 앓고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독립에 대한 그의 희망과 동지들에 대한 믿음은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듯하다.

 

도산 안창호는 민족주의와 개화사상에 기반을 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곧 철학자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길을 더듬어 보면, 그 어떤 심오한 철학적 개념이나 명제만큼이나 철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과 민족, 나아가 인류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성찰을 바탕으로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 분석하며,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적절한 판단을 한 다음, 최선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실천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기꺼이 졌다. 이것이 철학이 있는 삶이 아니라면 무엇이 철학이 있는 삶이겠는가? 도산이 걸었던 길에 이제 우리가 서 있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에게 과연 진정한 독립을 이루었는지 물어야 한다.

 

 

기고자: 배기호(한국철학사상연구회)

순자의 철학사상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판기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기를 좋아한다. 잡기에 능하며 가끔 공부도 한다. 사람의 일, 정치에 관심이 많다.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1880년 겨울 지금의 대전에서 태어났고 세 살부터 청주에서 자란 신채호는 어린 시절부터 그 지역의 전통적 지식문화의 세례를 듬뿍 받고 자랐다. 몰락한 사대부 집안이었지만 엄격한 유학적 기풍을 고스란히 지닌 가문 분위기도 여기에 한몫했다. 조정에서 정3품 벼슬까지 지낸 할아버지에게 전수받은 한학으로 학문의 맛을 본 신채호는 열 살에 행시(行詩)를 짓고 열네 살 즈음에는 사서삼경을 독파할 정도로 공부에 제법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이웃마을의 문중 어른들에게 한학을 더 배우기도하고 신기선과 같은 이름 난 관료형 학자에게 수학하기도 한 신채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교한다.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신채호의 이른바 학창시절은 한 지역의 인재가 출세가도로 가는 엘리트 코스에 다름 아니었다. 같은 지역 출신의 애국지사로 유명한 신규식·신백우와 더불어 산동(山東)의 삼재(三才)라 불렸다고 하니 얼마나 주위의 큰 기대와 성원을 받았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단재 신채호 생가지 풍경,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229번길 47> 출처 : 필자

 

그러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고령신씨 신숙주의 후손으로 청주 상당산(上黨山) 동쪽에 모여 살았기에 산동대가(山東大家)라 불리는 신 씨 집성촌 사람이었던 신채호는 서울에 올라가서 가문의 영광과 보장된 자기 성공의 길을 놔두고 다른 길을 걸었다. 그 계기는 오히려 제도권 전통 교육의 최고 산실이었던 성균관에 입교한 것이 원인이었는지 모른다.

 

성균관에 들어간 신채호는 후일 자신의 전기 『단재전』을 짓는 변영만, 조소앙 등 신학문과 새로운 사조에 열중했던 학우들과 어울리면서 의병활동 지도자로 이름 높았던 이남규, 김연성, 애국계몽사상가 유인식 등에게 배운다. 새로운 시각과 관점으로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외세가 침탈하는 현실을 자각하면서 역사를 보는 눈이 뜨였다. 우승열패의 신화로 점철 되던 구한말 대한제국 처지에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관심은 구습·적폐를 버리고 신사조를 바라던 지식인층의 입장으로 일면 이해할 수 있다. 개화자강론에 관심을 보였고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던 신채호는 성균관에서 외출 나올 때면 어김없이 서대문에 있던 독립관을 찾았다고 한다. 가장 급진적 자유·민권운동이었던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했고 만민공동회의 철야시위에 참여했다가 연행되어 잠시 투옥되기도 한다. 이 때가 성균관에 갓 입학한 1898년 가을과 겨울 사이였다. 이 경험은 신채호에게 앞으로의 삶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잠시 청주에 학당을 설립하여 신규식, 신백우 등과 애국계몽·신교육 운동을 벌이기도 한 신채호는 1905년 26세의 나이로 성균관 박사에 임명된다. 이 당시 박사라는 직함은 지금의 교수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음날 이를 사직한다. 신채호는 전통적 학자의 전형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성리학적 도덕주의와 세계관에 대한 믿음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이미 동아시아 내에서 배신당한 뒤였고 다이내믹하면서 잔인하게 전개되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무시하고 성균관 박사자리에 앉아있기에는 눈에 보이는 망국의 현실이 가시덤불과 같았을 것이다. 그 시절 그가 투신한 것은 기존 유학자의 길이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여 시대정신의 정화를 구현하는 길이었다. 신채호가 보기에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최신 정보와 다양한 국내외 사조에 접근할 수 있는 언론인을 직업으로 택한 신채호는 1905년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초빙된다. 1904년 청주에 산동학당을 만들어 활동하던 중 며느리를 보기 위해 청주를 찾은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과의 만남이 인연이 되었다. 신채호는 자기 연고지에서 소박하나마 뜻을 펼치려 했지만, 1900년대 초 서울에서 신채호의 활동을 기억하는 이들은 다시 그를 서울로 불렀다. 지금도 종각 지하철역 5번 출구에는 『황성신문』 옛터 표지석이 서 있다.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1905년은 사람들이 ‘을씨[사]년스럽다’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침통하고 침울한 때였다. 한 국가 공동체가 당한 치욕의 시간을 민중은 그렇게 불러 기억했고 신채호는 펜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황성신문사 옛터,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 33 (종각역 5번 출구 앞)> 출처 : 독립기념관

 

신채호의 『황성신문』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을 고발한 것을 빌미로 『황성신문』이 발행정지 당하자 신채호는 1906년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제국시기 최대 항일신문인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를 맡아 다시 언론활동을 시작한다. 1907년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논설을 기고한다.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뒤편, 목은영당 옆이 『대한매일신보』가 있던 자리다. 이 시기 언론인으로서 신채호의 의기(義氣) 넘치는 논설은 절정을 이룬다.

 

당시 신채호의 사상전개의 중심은 민족 개념에 대한 확립에 있었다. 1908년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명명한다. 일찍이 우리에게 동포, 종족이란 개념은 있었지만, 민족(nation)이란 개념은 없었다. 민족은 근대적 개념이다. 신채호는 망국 앞의 나라가 위기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사대의 대상인 중국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화주의를 벗어나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역사를 관조하는 것은 현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다. 또한 이것은 세계질서가 된 사회진화론의 극복이기도 했다.

 

전근대적인 사대주의와 중화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 상고사에 대해 주체적으로 재해석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1910년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 신채호가 상고사에 몰두한 이유이다. 낭가(郎家)사상에 대한 연구는 우리 민족정신에 대한 고유성의 확보 시도였고, 이와 연계하여 1908~1909년 사이에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최영 등 우리 역사의 상무적 영웅들을 소설을 통해 현실로 소환한 것은 시대의 한계를 돌파하는 강력한 힘을 민족의식으로서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 논설에서 “이십세기 신동국의 영웅”을 두고 ‘국민적 영웅’이라는 뜻으로 설명하였고, 사회 전반의 각각 영역에서 활약하는 다수의 소영웅을 지칭하였다. 그리고 그 영웅들은 “이십세기 신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국민국가 출현의 바람과 세상을 이끄는 주체로서 신국민은 초기 신채호 사상에서 민족과 함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대한매일신문사 창간 사옥 터 표지석,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85 (목은영당 옆)> 출처 : 독립기념관

 

그런데 신채호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서 “영토와 국권을 확장하는 주의”가 제국주의라 규정하고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이것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일본의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이다. 신채호는 그의 저서 『기독말살론』을 한문으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보통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실천에 옮기려 한 시기는 1921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위 논설의 시기를 보면 이러한 사조를 처음 접한 것은 중국으로 망명하는 1910년 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신채호는 중국 신문 『진보(震報)』에서 “일본에 오직 고토쿠 슈스이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1929년 재판정에서 진술할 때도 고토쿠 슈스이의 저서를 읽은 후부터 무정부주의(아나키즘)로 기울기 시작하였다고 발언한 적이 있으니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게 되는 최초 영향이 고토쿠 슈스이로부터 있었음은 사실로 보인다.

 

일본을 강도로 규정한 아나키스트 신채호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길의 정점에서 제국주의는 민중을 억압하는 ‘야수의 유린’이기에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민중 스스로 생의 본능에 의거하여 자유의지에 의해 자유행동’으로 폭력혁명과 무력투쟁에 매진해야함을 지지했다.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는 이런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신채호의 서울살이는 1910년 중국 청도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어졌는데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던 1907~1909년 사이 ‘민족’에 대한 언급이 많이 보이지만, 경술국치 이후 신채호가 중국으로 망명한 1910년부터 현저히 감소한다. 국민국가 실현의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사라진 희망은 그의 자취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삼청동 신채호 옛집 터,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2-1번지> 출처 : 네이버 지도

 

신채호가 서울에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집터는 지금의 삼청터널 가는 길 끝자락 삼청동 2-1번지에 있다. 변영만은 『단재전』 첫머리에서 이 집을 방문한 광경을 적고 있다. 신채호가 아내의 모유가 부족하자 독수리표 연유를 사다 주었는데 아내 풍양조씨가 아들 관일(貫日)에게 잘못 먹여 체한 병이 났다. 이것 때문에 화가 난 신채호는 집 앞 개울에서 연유통을 모두 도끼로 찍어버려 삼청동 개울물이 모두 우윳빛으로 변한 처참한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후 변영만이 다시 방문했는데 그의 아들 관일이 사망한 뒤였다. 이에 신채호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관일이 마침내 백홍(白虹)이 되었어.” ‘흰 무지개가 해를 뚫고 지났다’는 이 말은 자식 잃은 슬픔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지만 한편 앞으로 나타날 비상한 사건의 복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1909년 이 일을 빌미로 조강지처와 이혼한 신채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떠난다. 떠나기 전 삼청동 집을 팔기 위해 집문서를 넘겨야 하는데 이마저 분실하여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9일자에 집문서를 분실 광고를 낸다. 신채호 서울살이의 마지막은 이렇게 안타깝게 끝나는데, 알고 보면 이는 대한제국의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 많은 인사들의 운명 역시 그러했겠지만 신채호의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도 삼청동 신채호의 옛 집터는 휑한 시멘트 공터로 남아있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9일자 신채호가 올린 광고> 출처 : 연합뉴스

 

기고자: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양철학을 전공했고 남명 조식으로 박사논문을 썼다. 한철연 분과모임에서 한국의 근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한 이후 전통철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1. 총을 들어야 했던 철학자의 운명

 

5병대 7병단 1군단

김생 김달삼 이호제 박치우 서득은

여러 슬기로운 지휘관들의 피

아직도 눈 위에 임리하고

청옥산 태기산 일월산

국망봉 백암산 준령들의 산정 위

피바람 불어 끊이지 않는 저

험준한 태백산 전구의 이름과

 

임화가 1952년 7월에 쓴 시, ‘기지로 돌아가거든’의 한 구절이다.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전쟁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상황에서 그는 한국전쟁 이전의 ‘빨치산’인 남로당 인민유격대 지휘관으로 전사한 동지들의 서늘한 이름을 불러 본다. 다음 해에 비극적으로 마감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임화도 예감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휴전 이후 숙청되는 박헌영과 남로당계의 몰락은 마치 예정된 일처럼 진행되었다.

 

<숭실전문학교 시절의 박치우(왼쪽), 행적을 알 수 없는 그의 부인과 함께(오른쪽)>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 <동아일보> 1949년 12월 4일자 신문에 짤막하게 소개된 신태영 육군참모총장의 이 말이 조선인 ‘서양철학 1세대’의 대표적 인물인 박치우(朴致祐, 1909~1949)의 마지막 행적이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잔존하는 오늘날의 남쪽은 물론이고 북쪽의 ‘혁명렬사릉’에도 그의 묘비는 없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의 동학이자, 일제의 ‘교육칙어’나 ‘황국신민의 서사’를 모태로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박종홍(朴鍾鴻, 1903~1976)과 달리 그는 남과 북 모두에서 오랜 동안 잊혀졌다. 다만 월북하기 직전에 출간한 유일한 저서 『사상과 현실』만이 박치우가 분투한 실천적 사유의 역사성과 현재성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대구에서 촉발된 ‘10월 인민항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미군정의 체포령이 떨어진 와중에 그는 일제말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발표한 글과 해방 직후에 발표한 원고를 급히 모았다.

 

<『사상과 현실』 초판(백양당 1946년 11월 20일 간행) 및 재간행본들>

 

1930년대 중반 한 때 언론지면에서 고상한 인문평론가로 활동하던 이 젊은 철학자는 이제 해방공간에서 ‘좌익 언론’ <현대일보>의 발행인 겸 주필이자 남로당의 핵심적인 이론가가 되어 있었다. 남쪽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가혹한 탄압과 우익단체의 무분별한 테러가 자행되던 1946년 말에서 1947년 초에 그는 북으로 올라 갈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이 월북하기 이전 평양에서 김일성과 진행한 일곱 번의 비밀회동에 네 차례 배석한 박치우였지만, 다시 어떤 모습으로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8.15’와 함께 그어진 ‘38선’은 1년 사이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적대적 경계이자 생사를 오가는 전선(戰線)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2. 해방공간 민주주의 담론의 현재성

 

한국전쟁 중 김책시(金策市)로 이름이 바뀐 함경북도의 항구 도시 성진(城津)에서 목사 박창영(朴昌英)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고 스무 살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던 박치우. 이후 몸담고 있던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자진 폐교와 <조선일보>의 폐간을 거치고, 일제 말기 중국에서 5년간 망명 생활 후에 돌아 온 고국에서도 그가 ‘말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일간지 <현대일보>는 “자유조선의 소리, 세계민주주의의 전령, 새 나라 건설의 전령”을 천명하며 창간되었는데, 일요일에도 발행할 만큼 당시 시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좌익 활동 탄압 및 민생정책의 무능, 그리고 우익의 파시즘적 행태를 가감 없이 비판했던 이 신문은 6개월도 가지 못해 강제폐간 당했다. 이처럼 해방 이후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 다른 여러 민주주의‘들’이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남북에 각각 정부가 세워지고 미국과 소련에서 이식된 분단국가주의적 민주제가 시작된 이후, 이 땅에서 도달 가능한 ‘인민의 자기 통치’로서 민주주의의 시간은 지속적으로 유예되었기 때문이다.

 

박치우는 해방공간의 민주주의 논쟁에 참여하면서 박헌영이 ‘8월 테제’에서 현 단계에서 필요하다고 제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도적 달성을 우선 지지했다. 그런데 그가 궁극적으로 해방 조국의 새로운 민주주의로 품고 있던 이상은 자유민주주의가 주장하는 형식적·사적소유중심적 시민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인민민주주의였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살아가는 ‘근로인민’이 바로 민주주의의 주권자이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다가가는 것이 ‘인주주의(人主主義)’의 토대가 되는 민주주의로서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낳은 근대 시민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진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가 원했던 새로운 한반도는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실현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주는 민주국가였다.

 

이후의 역사에서 ‘현실 사회주의’ 또는 ‘역사적 공산주의’가 단지 구호로만 표방했던 인민민주주의의 독재적이고 독단적인 제도화가 주는 편견에서 벗어나, 그의 말을 사회주의적 이상의 원형 속에서 다시 보자.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기 자신의 주의와 주장에 철저하려면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주저앉지 말고 다수자인 근로인의 현실적인 일대일의 요구를 강력히 보증할 수 있는 근로 인민 민주주의에까지 자신을 진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며 또 당연히 그렇게 되고야 말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예측 내지 각오할 줄 모르는 민주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벌써 민주주의가 아니라 ‘금(金)’주주의나 ‘물(物)’주주의 혹은 ‘지(地)’주주의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중)

 

박치우는 일제말기부터 새로운 독립 조국의 미래상을 고민하던 실천적 ‘지식인’이자, 역사의 수레바퀴를 조금이라도 굴려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자신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혁명가’였다. 그는 해방 조국이 무엇보다 어렵게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원했고, 그 길을 넓혀가기 위해 치열하게 ‘사유’하고 넓게 ‘연대’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는 파시즘이다’를 목놓아 외치고 싶어도 반대로 말하고 써야했던, 고통스러운 식민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자, 언제든 얼굴을 바꿔 도래할 수 있는 파시즘의 망령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역사가 강요하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한 굴복 요구에 맞서, 그는 총을 드는 것으로 응전했고 철학자로서 ‘당파성’을 당당히 옹호했다. 당시 그가 고민했던 문제들, 즉 반민족세력에 대한 처벌, 통일국가의 형성,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점진적 혁신과 사회적 연대, 시민사회의 모순과 이율배반의 극복, 변증법적 현실 인식의 정치적·실천적 가능성 등은 사실 당시 기준에서만 유효한 시대정신이 아니다. 실천으로서의 이론이자 이론으로서의 실천을 지향했던 그의 ‘철학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요구되는 인문학 연구자들의 학문적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박치우는 단지 1980년대 학생운동가들이 숨어서 읽던 사상가로만 추억될 수 없다. 1945년의 고민, 즉 진정한 독립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자는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반도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냉전의 종식 이후에도 여전히 독자적 체제로서 유지되는 분단체제의 극복과 동아시아의 평화 실현, 인민의 자유와 평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민주주의 같은 주제는 그와 오늘날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박치우가 남긴 짧은 글 속에서 그는 언제든 살아 돌아와 묻는다. “철학은 오늘, 이 땅, 우리에게 있어서 마땅히 무엇이어야만 될 것인가.”

 

언젠가 박치우가 분단국가의 남쪽에 머물 수 있었다면, 이후 한국의 철학계와 한국의 진보 정치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본 적이 있다. 지배 체제가 부여하는 권위와 권력을 비웃으며 시대의 모순을 비판하고 비합리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꼬장꼬장한 서양철학 1세대 선배들의 모습. 들어본 적 없는 그런 모습이 ‘우리 현대 철학’의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후대에 전해지면 좋겠다는, 오래된 기대가 내게도 있기 때문일 게다.

 

3.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의 역사적 고통과 철학함의 과제

 

박치우가 월북한 이후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는 박헌영의 지시에 따라 처음엔 정치 활동에 필요한 인쇄물을 공급하는 해주인쇄소를 설립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리고 1947년 10월 이후부터는 월북한 남로당 잔존 세력을 교육하여 유격대로 양성하기 위한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을 세우고 운영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평안남도 강동군 입석리의 탄광촌에 마련된 그곳은 당원들을 재규합하고 사상을 벼리고 무장투쟁을 교육하기 위한 군사학교였다. 박치우는 사상과 역사 교육을 전담하는 정치부원장으로서 2년여 간 이곳을 관리했다.

 

하지만 자신과 월북한 좌익이 곧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일 것을 그는 직감했다.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 이후에도 수세에 몰린 남로당 세력은 1949년 9월 총봉기를 통해 강동정치학원생들로 구성된 유격대를 남파했다. ‘여순반란’ 사건 이후 입산한 세력과 더불어 그들은 이미 6월부터 400여 명이 오대산 지구로 투입되었다. 분단국가 내부 권력 투쟁의 희생양들은 처절한 전쟁을 통해서만 독재적 지배체제의 구축이 가능함을 예감하고 있었을까. 전쟁이 얼마 남지 않은 1949년 가을, 박치우와 그의 동지들은 자신의 삶과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의 문턱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론 우리가 아는 분단의 역사는 이름도 없이 쓰러져 간 사람들의 실상을 기록하지도, 고통을 기억하지도, 죽음을 애도하지도 못했다.

 

<토벌대에 의해 체포된 빨치산> (출처: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

 

 

태백산 지구로 투입된 박치우의 1군단은 군경합동 토벌대에 의해 와해되고, 잔류병들은 제3군단 김달삼(金達三) 부대와 합류하여 끝까지 저항했지만 끝내 박치우는 태백산 인근에서 주검도 없이 산화했다. 제주 ‘4.3’을 주도했던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자신의 최후를 어느 지명에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공식 지명인 ‘김달삼모가지잘린골(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죽은 어느 빨치산 대장의 ‘잘린 모가지’는 왜 중요했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무고를 증명하고 부락민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민초들의 마음이 읽힌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못했고, 서로를 절멸시키려고 했던 상처는 두터운 피딱지가 되어 말라버렸다.

 

1928년 이른 봄, 경성역에 내린 축구를 좋아하던 스무 살의 수재 박치우는 가히 짐작이나 했을까. 사상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회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여 역사의 운명 같은 것을 감내해야 한다고. 기실 philosophy라는 서양의 학문전통을 최초로 수학했던 이들은 ‘실천으로서의 철학함’이라는 문제의식을 기저에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철학적 실천 방향에 따라 1세대의 삶과 후대의 영향은 크게 달라졌다. 그들의 시대와 정치공동체가 요구했던 민족사적 과제는 결국 독립 이후 특정한 이념을 지향하는 국가의 건설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두 분단국가는 냉전시대를 거쳐 오며 공생적 적대관계, 적대적 유사체제를 구축해야 했고 그들의 운명은 결국 당대 지배 권력의 필요와 요구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박치우는 경성제대 졸업논문에서 연구한 신칸트주의 철학자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이나 지도교수 미야모토 와키치(宮本和吉)보다 더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더 오래도록 살아남아 현재진행형의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1936년 ‘아카데미즘’ 중심의 철학을 벗어나며, 그는 과거에 철학이 무엇이었던지 간에 지금 여기에서 ‘나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진정한 철학의 과제라고 썼다. 박치우의 그 생각은 살아있는 ‘우리철학’을 고민하는 후학들에게 작은 이정표로 남아 있다. 바로 시대의 모순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스스로,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실천적으로’ 극복해 나가라는 메시지이다. 아니, 사실 그것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이래 철학함의 본령이었다.

 

기고자: 조배준(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원)

한반도의 역사와 시대정신에서 발현된 문제의식을 통해 정치철학과 한국현대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데, 그 동안 게으르게 지내서 반성하며 살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건국대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공립도서관에서 다양한 주제의 인문학과 통일학을 강의하고 있다. 함께 쓴 책으로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 『B급 철학』, 『통일인문학』, 『통일담론의 지성사』 등이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노라면 동분서주도 모자라 남분북주를 해야할 판이다. 고교시절 방영된 국경일 기념 드라마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 당시 윤동주 시인과 함께 나의 필통 데코레이션을 담당한 인물이었지만 3.1운동과 님의 침묵에 관한 잔상 이외에 그에 관한 지식은 전무했기 그의 발자취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불충분하다. 어떤 운명인지 충청도에서 자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강원도와 인연을 맺은 뒤 우연한 기회에 인제의 만해마을과 백담사를 찾아 오래전 추억을 떠올렸다. 만해마을 전시실에서 한용운이 한 세기 전에 지금 내가 보는 음빙실문집을 보았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총으로 주권자를 학살하고 권좌를 누리고 지금도 호위호식하는 사람의 흔적만 백담사에 남아있었음은 충격이었다. 이미 8년 전 일이고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

 

만해 대신 정치적 도피를 한 독재자를 기념하는 백담사

 

홍성에서 나고 자라 강원도 산사에서 출가했으며 배움을 찾아 러시아로 길을 떠났고 불교 인사로서 남도의 여러 사찰을 돌며 강연하고 조선의 독립적 종단 건설을 위해 승려들을 설득했으며 경성에서는 신문 잡지를 내며 본인의 목소리를 내고 생을 마쳤다. 한용운은 이렇듯 여러 지역에 족적을 남겼으니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면 한 두군 데 공간만 찾는 것으론 역부족이다. 5개 지자체가 손을 잡고 대학의 만해연구소가 협조하여 선양사업의 의지를 보인 것도 여기서 기인한 바가 없지 않다. 게다가 불교 개혁을 주장하고 불교 대전을 펴내서 불교 이론을 심화하고, 조선 독립의 서로 억압의 역사에 저항하는 족적을 남기고 만년에는 시와 소설로 문학인으로서의 면모(본인은 문학으로 나서는 것을 부끄러워했지만)도 남겼기에 한용운의 내면을 전면적으로 파악하려면 길고도 어려운 여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동북아시아를 주유하며 몸소 겪은 일들은 공간적으로도 활동 영역으로도 다채로운 그의 역정을 열정적인 독립운동가로 그리며 영웅적 행적이라고 기리고만 끝낼 수 없게 만든다. 승려가 된 후 그는 세계를 관심대상으로 품었고 세계의 현안에 적극적으로 맞섰으며 그의 길은 고단한 투쟁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첫 출타부터 고난을 겪었다. 출가 초기 중국에서 들어온 영환지략, 해국도지, 음빙실문집을 읽고 세계를 경험하리라는 꿈을 품은 한용운은 가정을 버리고 출가했듯 일본에서 떠나 조선을 거쳐 러시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를 거쳐 미주까지 가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으나 그 계획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좌절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현지 조선인이 그를 일진회로 오인해서 죽이려고 했다. 일단 풀려난 뒤에도 다시 조선인에게 봉변을 당하던 도중 현지 경찰에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생을 마칠 뻔한 경험에 한용운은 세계일주의 결심을 접게 된다. 국권이 위태롭던 시기 그의 길에서 위협을 준 이들은 역사의 현실이 만들어낸 동포의 배타심과 경계심이었다.

 

얼어붙은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바다

 

 

일본에서 유학하며 불교를 배운 경력이 있지만 불교 종단을 총독부가 통제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시기 그가 넘어야 할 큰 산은 총독부 권력을 이용해서 종단 내 본인의 권력을 굳히려던 친일 승려였다. 3.1운동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식민지 권력이 준 주지라는 자리에 취한 승려들의 비협조로 불교계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용운도 당시 종단의 유력인사도 은둔의 수도승이 아니었지만 세간에 대한 처신은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 차이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는 식민지 권력이었다.

식민지 권력에 맞서는 일에서도 그가 겪은 것은 결코 동지적 단결만이 아니었다. 임제종 운동이 끝난 후 고국의 현실을 알리려 만주에 갔지만 그곳에서 블라티보스토크의 악몽이 재현되었다. 정탐으로 오인한 그곳 조선인이 한용운을 총으로 쏘았던 것이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 학생이 총격을 가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이들이 훗날 조선독립운동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 이를 오인사살할 뻔한 일화다. 한용운은 이 일화를 「죽다살아난 이야기」로 남기기도 했다. 훗날 독립에 뜻을 같이 한 이들과의 불화, 불일치도 한용운의 역정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벗이었고 3.1독립선언을 주도한 최린과 여러 인사들이 훗날 변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독립선언을 준비할 때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서정주의 입으로 전해진 한용운에 대한 현상윤의 첫인상은 “껌정 두루마기에 껌정 고무신에 얼굴은 가무잡잡 불그레하고 키는 나지막한 청년”이었고 현상윤은 그를 “꼭 무슨 첩자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 한용운은 “처음 우리 판에 와서부터 어떻게나 열심히 한몫 끼워 달라고 조르던” 사람이었다. 일본 유학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독립선언도 ‘우리 판’이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한용운은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불교에서도 권력과 멀었고 지식인 사회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던 비주류였다. 신간회가 출범한 후에도 한용운을 찾아온 기자가 한용운의 입장을 민족주의에 끼워맞추려고 취재하려다 크게 혼쭐이 나서 돌아간 일화도 전해진다. 독립을 당연시 하는 후세의 시각에서는 당시의 민족운동을 단순하게 보기 십상이지만 상황이 빚어낸 오해든, 생각의 변화든, 퇴행적 네트워크 문화의 발로에서든 한용운은 갖가지 불화를 겪었다. 이러한 불화에 그는 “훼예를 무시하는 호담이 있어야 만인의 이상을 초월하는 쾌사를 창조할 수 있다.”(「훼예毁譽」)라며 결연히 응답했다.

 

심우장에 설치된 한용운의 동상

 

심우장에 동상으로 남아있는 한용운의 인상은 매우 고단해보인다. 2017년에는 심우장에서 그를 기리는 뮤지컬도 상연되었고 심우장은 서울특별시 기념물이다. 이렇듯 그에 대한 기억은 지속되고 있지만 이곳에서 그의 삶은 고달팠고 병을 얻어 해방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민적을 거부해서 인권 없이 살았던 탓이기도 하지만 출가 이후 불교개혁을 위해 조선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일 못지 않게 그가 겪은 ‘조선인’들과의 불화도 그를 힘들게 한 요소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친딸에 의해 정치가로 회고되고 불교에 투신한 것이 정치활동에 대한 갈망이라고 스스로도 밝히고 있지만 시대를 불철저하게 인식하거나 지배권력과 타협하며 그와는 다른 ‘정치’를 하고 있던 조선인들도 그의 삶을 더욱 핍진하게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스스로도 고단했다고 회고하는 삶의 동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는 그 흔적을 그의 열정적인 활동의 자산으로 남은 그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용운이 유명세를 탄 것은 3.1 독립선언 이후 투옥된 후 발표한 「조선독립의 서」이지만 그 생각의 연원은 불교사상이었다. 그는 고려대장경의 문구를 발췌해서 『불교대전』을 편찬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정의로운 차원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며 편찬 의도를 밝혔다. 그는 불경을 통해 현실의 사악함을 제거하고 선과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불교의 교지(敎旨)는 평등”이고 불교의 사업은 “박애(博愛)요, 호제(互濟)”였기 때문이다. 또한 선(善)은 “죽어 지내는 소극성이 아니라 우자가 되고 승자가 되어 뭇 사람들을 보호하고 만물을 애육하는 자가 되는 것”이요 “대등하고 평등한 세상에서 자아를 실현하여 사랍답게 사는 일”이다. 악은 “열자와 패자가 되어 남들에게 동정받는 자가 되고 사물에게 부림을 받는 자가 되는 것”, “차등과 불평등을 자초하면서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억압과 차등의 제국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일천하게 만해의 삶을 엿보는 동안 종교를 혁명운동의 중요한 계기로 삼자던, 장타이옌, 동시에 지식인과 수많은 불화를 겪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루쉰, 그리고 루쉰이 그려낸 끝없이 고난의 행군을 하는 나그네가 떠올랐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는 만해가 기념사업도 하고 공연도 열리며 기려지지만 권력의 자장 안에서 위선적 정치인, 나약하고 허위적인 지식인, 기레기, 그들의 네트워크가 공고한 오늘의 현실에서 만해가 살아있다면 비난받지 않고 불화를 겪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한용운

 

 

기고자: 송인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교수)

중국현대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실험과 시련, 행운을 불균등하게 겪으면서 좌충우돌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