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법치국가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들 [시대와 철학]

법 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법치국가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들

이 글은 지난 1월 27일에 ‘말과활아카데미’에서 열린 기획강좌 <지금, 여기의 정치철학: 빼앗긴 법치주의 정치철학적 고찰> 중 한철연 회원인 한상원 선생님이 강의한 2강의 주요 내용을 강연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는 것임을 알립니다.

강의: 한상원(충북대), 정리: 편집주간

 

2023년을 지내는 지금, 이 시대는 빼앗긴 개념들의 시대이다.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공정, 반지성주의, 법치 개념은 전도되고 왜곡되어 쓰인다.

지금 우리 시대의 ‘자유’는 소극적 자유에 국한되지 않을까. 보수 정치권에서 100시간 일할 자유를 운운한 것은 시민의 자유와 부합되지 않는다. 개체로 분절되고 원자화된 자유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약화한다. 자주 회자되는 ‘공정’은 어떤가. 공정 이전에 평등은 2023년에는 사라진 개념이 되었고 그 빈자리를 공정이 채웠다. 지금 말하는 공정은 게임의 법칙으로서 공정이다. 공정한 경쟁이 유일한 정의관이 되어 강자는 약자를 위한 정책에 반발하고 역차별을 주장한다.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는 ‘반지성주의’는 정치적 대립 상대에 대한 공격과 비난의 구호로 바뀌었다. ‘법치’는 이미 선택적 법치주의가 되었다. 강자의 부정의는 사면으로 보호받고 노동자의 투쟁에는 법과 질서의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댄다. 약자의 저항은 법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아는 법치는 탈취되었다.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그간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여러 일이 일어났다. 2023년 1월 18일 사상 최초로 국정원이 민주노총을 압수수색했고, 2022년 11월 29일에는 화물연대의 파업에 정부는 국가가 국민(노동자)을 강압하는 초유의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하여 전체주의적 발상을 정당화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당일에 경찰은 질서 유지가 아닌 마약 단속을 주업무로 삼아 국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사고 예방이 아닌, 범법자 검거를 경찰 활동의 우선순위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사태들이 오늘날 민주주의 정신에 부합된 법치의 모습인가. 우리는 민주주의와 법치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도대체 법치주의란 무엇인가?

∎법치주의의 기원

영어권 국가들에서 법치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13세기 영국의 ‘대헌장[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서 비롯되었다. 대헌장은 영국의 국왕 존(John, 1199~1216)에 대항하는 귀족들의 요구로 제정되었는데 ‘자유민을 체포하거나 구금할 수 없고’(39항), ‘왕을 포함한 그 누구도 정당한 정의와 권리의 행사를 거부하거나 늦출 수 없다’(40항)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어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고 시민의 권리(자유)를 보장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다. 물론 농노민이 아닌 자유민을 대상으로 삼기에 귀족 운동의 한계는 존재한다. 또 서구에서는 미국혁명을 통해 법을 성문화하여 인격체가 아닌 법에 기반한 통치의 제도화가 이루어졌고 프랑스혁명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인권선언이 이루어졌다.

∎법치주의의 자기모순

절대군주제를 비판하고 시민정부론을 주장한 존 로크, 법치국가에서 자유를 중시한 몽테스키외, 자신과 타인의 자유가 공존하게 만드는 질서가 법이라 명시한 칸트 등 근대 법치주의 사상가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근대 법치는 자유주의와 떨어질 수 없다. 그런데 현대 자유·민주주의 국가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과연 확대되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근대 법치는 국왕의 전제주의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높였다. 그러나 현대는 개인의 소극적이고 원자화된 자유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대 법치주의의 현실은 통치권을 장악한 정권이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며 개인의 권리는 축소한다. 법 전통을 위배하는 현상이다. 이를 위해 통치 권력을 잡은 정권은 특정 적(敵)을 설정한다.

모든 통치 권력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적을 언급한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가까운 한국의 경우 정권에 따라 일본이나 북한, 또는 엄한 이란이 적이 되기도 한다. 내부적으로는 토착왜구나 종북세력으로 불리는 적들이 등장한다. 법치주의는 자유주의 이론의 역사에서 전제주의를 몰아내고 개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도입된 이념인데, 실상 법치주의라는 이름은 적에 대항하는 국가의 투쟁이라는 반자유주의적 논리에 활용된다.

∎이상한 현실

또 이상한 것은 법을 가장 잘 아는 검찰 출신들이 통치 권력을 잡은 지금 한국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공부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법치주의를 실행하지 않고 마키아벨리와 홉스, 슈미트의 얼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법은 그 자체로 동시에 권리를 의미하며 이것이 법의 존재 목적이지만, 법의 이름으로 특수 집단의 권리가 제한되고 억압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이 아닌 현대 여러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대에 법은 개인들을 시민이라는 법 권리를 가진 자로 호명하나 실상 많은 사람을 법의 권리적 공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다.

∎법적 주체

우리는 법적 주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 법학자 한스 켈젠은 법적 주체 개념을 비판하면서 법적 주체는 사적 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주관적 법 이해에 불과하다는 일리 있는 주장을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경제적 권리라는 소극적 자유라는 의미보다는 정치적 권리를 실현하는 보다 적극적인 권리의 차원에서 법적 주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조금 넓은 의미에서 법적 주체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미국 수정 헌법 4조에는 “불합리한 압수와 수색에 대하여 신체, 주거, 서류, 물건의 안전을 확보할 국민의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 현실에서는 흑인(소수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개인의 존엄은 박탈된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적 주체 운동이 벌어지게 되고 그것을 마주하는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 없이는 법은 권리를 실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봉기와 헌정(구성)의 변증법과 민주주의의 민주화: 평등자유 명제

발리바르는 봉기와 헌정[constitution, 헌법, 구성]의 변증법을 얘기한다. 구성은 아래에서 위로의 혁명적 행위를 수반한다. 구성 단계는 혁명적 모험주의가 아니라 봉기를 통한 제도화로 나아가는 지점이다. 프랑스 이주노동자들의 폭동에 대해 발리바르가 지지 의사를 표명한 것을 보면 발리바르가 얘기한 봉기의 맥락이 어떤 것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이미 제도화된 헌정도 다른 형태로 변동 과정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발리바르는 프랑스혁명이 제출한 프랑스 제1공화국 헌법의 전문(前文, 공포문)에서 자연권 사상가들이 내세운 인간이라는 말과 자연권 비판의 영역에서 특정한 정치 공동체에 소속된 시민이라는 말이 동의어라 본다. 여기에서 ‘평등자유[Egaliberté, equaliberty(equality+liberty)]’라는 명제를 도출하고 이것이 프랑스 인권선언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민주주의와 시민권 이념의 기원을 이루는 ‘평등자유’ 명제는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요구하는 과정에서, 해방을 향한 투쟁 과정에서 언제나 반복적으로 출현하게 된다는 것. 이로써 갈등을 통한 새로운 제도화로 귀결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가 항상 발현되지 못하므로 기존의 지배 질서에 대항하게 된다. 한국에서 노동자, 또는 장애인의 투쟁은 ‘인간이되, 왜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하느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해방적 운동이 봉기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시민권의 내용은 갈등적 관계라는 토대 위에서 규정된다. 그렇다면 파업, 시위 등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봉기적 계기를 억압하는 법치주의는 사실상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혹인 민권운동의 역사를 보면 시민권은 내부적 갈등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인 흑인 유색인종의 구분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구분되지 않고 시민권 안에서 구분되기 때문이다.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

랑시에르는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지를 묻는다. 한나 아렌트는 추상적인 인권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장될 수도 없다고 했다. 현대에 미국은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전쟁을 용인하기도 하지 않는가. 과거 프랑스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통해 인권은 천명되었지만, 주체들이 그 내용의 이행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고, 스스로 ‘인권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만 인권은 주체화와 정치화의 과정을 촉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정치적 술어를 증명하려는 주체들이 등장하고 그 구체적 내용을 규명하려는 시도 위에서 과연 자유와 평등이 현실에 존재하는지? 누가 자유롭고 평등한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는 것이다.

한편 올랭프 드 구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사용된 인간을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 ‘homme’가 남성을 의미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토대로, 이 권리선언이 여성을 배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일종의 패러디로 ‘인간(남성)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대항하는 ‘여성(femme)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작성한다. ‘단두대 처형은 남녀 모두 똑같이 적용하나 왜 여성은 남성과 달리 연단에서 연설을 못하는가’라는 올랭프 드 구즈의 항변은 이미 존재하고 합의되어 성문화된 내용을 증명하기 위한 정치적 주체들의 활동이다. 이러한 불화는 조화가 아닌 갈등에서 출발한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인권선언의 내용은 ‘누가 자유롭고 평등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범주에 생물학적으로는 포함되나 정치적으로는 포함되지 않는, 그리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여성의 지위에 관한 전복적 질문으로 ‘재맥락화’된다. 즉 정치적 주체는 성문화된 권리의 내용을 증명하는 주체이고 공동체의 공동체성을 증명하는 주체이며 배제를 넘어서는 공동체를 창출하는 주체이다.

인권의 주체란 자신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한 주체이자 자신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가진 주체이다. 법에 명시된 권리를 현실에서 갖지 못한 주체(예컨대 미국 내 흑인들 )와 실정법상 권리를 갖지 못했으나 인권의 이념에 의해 권리를 가져야 마땅한 주체(예컨대 이란 내 여성들, 유럽의 난민들)들도 인권의 주체이다.

∎권리는 자신의 주체를 요청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3조 제1항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라고 하여 ‘노동3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문화된 권리의 내용을 증명하는 주체로서 화물노동자들은 업무개시명령에 적용되지 않으며 헌법을 벗어난 명령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현행법에서 ‘나’를 배제하는 지점을 발견하여 그 권리를 주장할 때 그들은 곧 권리의 주체로 발생하는 것이다. 2022년 9월 중순 이후 이란 여성들이 ‘여성, 삶, 자유(Women, Life, Freedom)’를 외치며 반히잡 시위에 나서고 이로써 촉발된 반정부 시위의 주체들은 ‘인권의 주체’이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법과 권리 사이 간극의 모순 문제를 통찰한 인권 주체의 외침이었다.

자신이 가진 권리를 증명할 주체를 소멸시키는 법치주의는 법이 실현해야 할 권리를 억압하는 ‘치안의 논리’이다. 지금 2023년 한국에서 우리가 마주한 법치주의는 권리와 인권의 주체를 억압하는 ‘치안’일 뿐이다.


 

빼앗긴 자유, 도둑맞은 공정 [시대와 철학]

빼앗긴 자유, 도둑맞은 공정 [시대와 철학]

[출처] https://blog.naver.com/readingclassics/222995108058 (세상책방 진로글방)

이 글은 지난 1월 27일에 ‘말과활아카데미’에서 열린 기획강좌 <지금, 여기의 정치철학: 빼앗긴 법치주의 정치철학적 고찰>의 1강(강사: 김성우) 강의록 일부를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을 알립니다.

김성우(상지대)

 

자유를 묻는가

자유라는 개념을 정의 내릴 때는, 지배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자유의 반대말이 ‘지배’이기 때문이다.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노예가 왜 노예인가? 주인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노예이다.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는 바로 지배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런데 지배에 대한 관점에 따라 자유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유의 의미가 여러 가지이기에 자유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애매모호하다. ‘자유주의’라는 말이 혼란스러운 이유이다.

자유주의(liberalism)가 유래한 liberal이라는 말은 현재 미국에서는 진보를 뜻하고, 유럽에서는 소유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를 주창하는 시장주의(자유방임주의와 작은 정부를 외치는 고전적 자유주의나 이것의 세계화 버전인 신자유주의)를 가리킨다. ‘libertarian’의 경우도 지금은 시장만능의 극우논리로서의 자유지상주의(신지유주의)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최초로 썼던 단어이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는 바로 지배로부터의 자유이다.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지배 없는 삶. 이것이야말로 무정부주의자들의 꿈이다. 자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마르크스가 내린, 코뮌주의의 정의도 자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코뮌주의란 “자유로운 개인들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연합(어소시에이션)”이다.

그런데 지금의 자유주의는 재산권과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며 지배 없는 삶을, 재산(생산수단)이 있는 소수에게만 부여하고 재산이 없는 다수를 지배하는 논리로 전락했다. 자본과 이를 보호하는 권력에 의해 착취 받을 자유만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만, 즉 형식적으로 자유로울 뿐이다. 자유로운 소수가 다수를 예속하고 착취하는 자유주의의 자유는 형식적인 자유, 가짜 자유이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가짜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빼앗겼다는 점이다. 소수만 자유로운, 더 정확히는 죽은 노동인 자본만 자유로운, 가짜 자유를 외치는 자유주의가 자유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 루소, 칸트, 헤겔, 마르크스를 포함해서 사르트르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들 때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철학자가 외친 진짜 자유를 다시 외쳐야 한다. 그래서 진짜 자유를 실현하는 ‘세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만인이 자유로운 이성국가(헤겔)이든, 자유로운 연합(마르크스)이든, 다중의 절대민주주의(네그리)이든, 자유로운 시스템으로서의 국가(지젝)이든, 어소시에이션으로서의 세계공화국(가라타니)이든.

세계화로 인해 불평등이 심각해지자 자유주의자들이 극우 포퓰리즘으로 전락해서 자유의 이름으로 노골적으로 스스로 자유의 적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동시에 시장 실패로 인해 시장의 자유가 예전의 헤게모니(설득에 의한 지배력)를 잃었다. 그러자 우리 사회에서 보수 언론이 ‘공정’이라는 단어를 다시 훔쳐갔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교묘한 엘리트주의인 ‘능력주의’를 포장하는 기만적인 언어조작에 불과하다. 본래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말한 ‘공정’은 소수 엘리트가 부와 지위의 독점을 보장하는 논리인 능력주의가 아니라, 최소수혜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는 사회 정의이다. 유사하게 마이클 샌델도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이 능력주의를 내세워 공정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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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단어는 1980년대 민주화 이후에 우리의 간절한 열망에서 사라졌다. 어떤 낱말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가 있는 것 같다. 이제 자유라는 단어는 많이 화석화됐고 더 나아가서는 자본에 의해 독점화되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의미보다는 왠지 낡아빠지고 의미 없게 느껴진다. 도리어 정의나 평등 아니면 복지라는 단어가 훨씬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정의라는 철학적인 개념도, 평등이라는 개념도, 복지라는 개념도, 자유 개념이 빠지면 그 고유한 의미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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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화되었다. 그런데 민주화된 이후에 우리는 실제로 자유로운가? 일상생활에서 여러분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이 어느 때인가? 예컨대, 지도 교수님에게 매여 자기 발언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 심지어 고상한 음악을 하는 대학에서도 매를 맞는다. 다행히 물의를 빚은 그 폭행 교수는 쫓겨났다.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항상 무언가에 예속되어 있어요. 한 청소부 아주머니가 이런 얘기를 하셨다. 자신은 비정규직이고 그래서 일자리를 계속 유지해야 하므로 불만스럽고 고통스러워도 항의할 수가 없다고 한다. 심지어 법치의 이름으로, 여론의 이름으로 미국과 브라질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극우적인 엘리트 정부가 들어서기도 한다. 이로 인해 촛불시민이 이룩한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 앞에서 현재의 정치 시스템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지운 제도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촛불시민의 강인한 열망도 확인할 수 있다. 열망은 제도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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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속의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유와 반대가 되는 단어, 즉 ‘지배’와의 대조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모델 1은 ‘지배를 간섭으로 해석할 것인가?’에서 비롯된다. 이때, 자유는 ‘선택’이 될 것이다. 이것이 자유(지상)주의 모델이다. 모델 2는 ‘지배를 강제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이때, 자유는 ‘자율’이 된다. 자유는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하게 되어 자율적인 인간들이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모델이다. 모델 3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이때, 자유는 ‘해방’이 될 것이다. 이 모델은 자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좋은 공동체 체제를 통해 실현될 가치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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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첫 번째 모델,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이기적 개인’이 가장 원하는 자유는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따라서 첫 번째 자유의 모델은 신자유주의의 모델로서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누가 개인에게 간섭하는가? 간섭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는 점도 여러분이 이해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최소 국가’를 의미하다. 국가가 내 재산을 지켜주고 타인이 내 재산을 뺏어가는 것을 막아주기를 원하는가? 방범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다. 다만 세금을 많이 걷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세금을 많이 걷어가는 것은 로빈 후드처럼 강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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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두 번째 모델, 강제로부터의 자유

이제, 두 번째 자유의 모델이다. ‘지배’를 ‘강제’로 해석해 보면 이런 ‘강제’의 반대말은, 칸트가 말한 ‘자율’ 개념이다. 자율이란 내가 스스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고 나 스스로 규칙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만, 이때의 규칙은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학처럼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공자님이 말씀한 경지이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내가 내 뜻대로 하지만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지이다. 그래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 개념이 왜 공리주의나 신자유주의의 자유와 다른지 여러분들이 여기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법칙을 내게 스스로 부여하는 자율이 진정한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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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세 번째 모델, 예속으로부터의 자유

자유의 세 번째 모델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간섭이나 강제는 간헐적일 수 있다. 하지만, 전근대사회의 노비나 현대사회의 비정규직처럼 예속은 지속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예속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해방(liberation)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월레스가 외친 프리덤(freedom)이다. 노동해방과 민족해방과 같은 단어가 이러한 모델을 대표하는 말이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자유가 아니다. 해방의 자유를 의식하고 실현하려면 먼저 노예로 살아가는 예속적 삶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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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주화된 이후에 민주와 자유를 얻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건 형식적인 민주와 형식적인 자유에 불과하다. 자유를 형식적인 자유와 실질적인 자유로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형식적인 자유라는 말은 법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이다. 우리는 신분제 사회의 노예는 아니다. 법적으로 1인 1표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법적으로 우리는 똑같이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실질적인 자유, 실질적인 평등이 요구된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민주화를 통해서 형식적인 자유와 형식적인 평등을 성취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법 재판에서 자본과 권력에 유리한 판결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다. 예컨대, 여러분들이 당장 법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가? 돈과 연줄이다. 예컨대, 삼성 X파일 사건이 있었다. 삼성과 연관된 쪽에서 대권 주자한테 어마어마한 뇌물을 준 사건이다. 그런데, 이걸 기자가 신중하게 공표한 행위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사생활을 침해한 범죄라고 해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래도 그중에 다섯 분이 반대 의견을 냈다. 사실 반대 의견 내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 반재벌 성향의 법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판사를 그만두고 나와 변호사로 성공하기 어렵다. 재벌에 협조하면 엄청난 수입이 보장되어 있다. 반대하는 행위는 수십억 원, 많게는 수백억 원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판사들도 소수이지만 존재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조금씩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성취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법꾸라지’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선택적 수사’, 심지어 ‘조작적 수사’를 하는 검사와 이에 동조하는 판사도 존재하고, 이를 여론조작으로 돕는 언론인들도 있다. 이러한 엘리트들이 제도적 권한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우 포퓰리즘이 우리 시대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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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자유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자유’라는 단어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라는 단어를 극우에 양보해서는 안 된다. 참된 자유는 단지 국가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가짜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국가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바로 주체적인 ‘시민으로서의 자유’이다.

일상생활에서 예속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행위가 거시적인 노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시와 거시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가 말한 대로 개인화와 전체화는 같은 흐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근본 흐름은 같다. 다시 말하면 개인과 전체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어떤 하나의 흐름은 개인을 만들고 또 하나의 흐름은 전체를 만든다. 자유주의의 흐름은 자유주의적 시민을 만들고 자유주의적 국가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어떤 새로운 정치적 운동은 새로운 주체의 모습과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만든다.

우리 사회에는 불행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우리에게 강제된 제도인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체제’ 탓이다. IMF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1997년에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들어왔다. 불행하게도 구조화된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이 커졌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인간 모습을 제대로 형상화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들이 보여주듯이, 경제는 성장하는데 왜 대다수는 행복하지 않은가? 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는가? 왜 정의와 평등이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가? 이는 진정한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이는 정의도 평등도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정의와 평등이 없이는 진정한 자유가 성취될 수 없다. 따라서 정의와 자유, 평등과 자유를 함께 고민해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할 수 있다.

푸코가 말한 대로 철학이란 바로 현대에 우리가 사는 우리의 현실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며 동시에 우리의 현재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로크의 <정부론>은 오늘날 우리의 제도를 그리고 있다. 이 <정부론>에서 나온 자유와 평등이라는 언어가 미국 헌법의 언어이며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언어이다. 이처럼 고전이 우리의 제도와 틀과 우리의 삶의 방향을 만든다. 그러면 내가 어떤 고전을 읽는가가 우리 삶의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하다. 현재 만들어진 것을 이해하게 해준 거라면, 거꾸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우리가 이것을 다른 식으로 바꿔볼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는 데 의미가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이런 점에서 ‘진정한 자유’에 관한 정치철학적인 정립에 대단히 중요하다.

 

심장의 자유를 이성에까지

과연 트럼프적인, MB적인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정치권력 행사는 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아니면 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제도이지만 민주주의 위기라는 시대적 모순으로 인해 제도가 뒷받침하는 권한 ‘행사’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시점이다. 과연 우리의 입법권이 국민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오히려 우리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나 있지 않는가? 우리의 행정부와 사법부가 과연 우리 국민들에게 잘하고 있는가? 우리의 행정부와 사법부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불신은 널리 퍼져가고 있다.

입법, 행정, 사법이라는 정치권력이 이렇듯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게 사적인 것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공적인 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자유주의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전혀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개인화와 전체화는 같은 흐름의 다른 표현이므로 어떤 개인과 어떤 정치 공동체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하지, 공적이라고 해서 자유를 억압한다는 단순 도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출발점과 문제의식을 오늘 철학적으로 마련해 보고자 했다. 일단 자유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원초적이고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성취해야 할 가치가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자유를 향한 전쟁터에 있다. ‘심장의 자유를 이성적인 자유로 실현하는 것,’ 이것이 루소,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적 과제였다. 내가 살아가는 데 어느 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낀 그 순간이 바로 철학함의 시작점이다. 루소만 따로 읽으면 그 철학적 의미가 잘 엮이지 않는다. 고전들도 서로 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루소를 칸트나 롤스와 같은 사람의 입장 속에서 읽을 수 있지만, 헤겔이나 마르크스, 니체나 푸코 같은 사람들과 연결해서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계열로 책을 읽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고전들도 관계가 있으므로 여러 계열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다양한 계열의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한 사람의 철학도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의 망 속에 있고 그런 관계망 속에 서야 그 철학적 고전의 의미가 우리의 삶을 제대로 비출 수 있다.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우리 사회에서 독재적 억압에서 벗어난 민주화 이후에 왜 평등과 정의뿐만 아니라 다시 자유를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유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한쪽에서 독점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진정한 실현은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평등과 정의를 강조하다 자유를 놓쳐버리면 평등과 정의를 외치는 체제도 (구소련의 스탈린 독재정권처럼) 억압적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이 절규한 것처럼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 버렸다’는 자기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말은 독재라는 거시적인 적이 사라지면서 우리 스스로가 일상생활에서 자유의 적(敵) 노릇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통렬하게 지적한 것이다. 자유는 자유주의의 독점물이 될 수 없다. 시장과 선택의 자유는 단지 하나의 자유가 아니라 소수만을 위한 가짜 자유이다. 이러한 가짜 자유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진정한 자유에 역행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자유는 서양 근대 정치철학에서 신분제와 봉건사회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시대적 열망을 담은 주요한 가치어가 되었다는 점에서 자유는 단지 근대적인 것만도, 자유주의적 것만도 아니다. 자유가 있어야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 자유는 인간다움의 기초이다. 이런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이다. 정의는 평등한 자유를 실현하는 제도의 원칙이다. 공정은 자유주의적 정의관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이다. 소수의 횡포로 다수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회는 정의롭거나 공정하지 않다. 이를 능력주의로 공정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공정을 훔친 격이다. 물론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진정한 정의로 가는 디딤돌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루소, 헤겔,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정의이다. 민주주의가 위협에 받은 지금이 도둑맞은 공정을 되찾아 빼앗긴 자유를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정의로운 시스템을 만들 때다.


 

우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시대와 철학]

우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정동훈(성공회대 대학원)

 

올해 하반기에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있다면 아마 ‘책임’이 아닐까 싶다. 이태원에서 발생한 대규모 참사와 함께 수 많은 말과 말 그리고 말들이 이어졌다. 그 중 압권은 ‘책임이 없다’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수도 한복판에서 수 백명이 넘는 국민들이 죽고 다쳤다. 사건 직후부터 충분히 대비할 시간과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책임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심지어 집권여당도 ‘책임은 없다’라고 말했다. 대형참사 앞에 무작정 책임이 없다고 우길 수는 없으니까 온갖 말들을 쏟아낸다. “지자체가 공식적으로 주최한 행사가 아니니까”, “외국의 문화를 즐기다가 죽은 것인데” 등등 사태의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말들로 부자연스러운 무책임을 빚어간다. 그들의 말은 너무 가볍다 아니 저열하다.

이 가벼움은 11월을 맞아 절정에 이른다. 11월 초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다녀온다. 귀국하는 대통령은 마중나온 행안부 장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출근길 문답에서 한 방송사의 기자가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는 질문과 행동을 했고 그것을 막으려고 설전을 일으킨 한 비서관은 ‘불미스러운 사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임을 했다. 이 모습이 보여주는 의미는 참으로 애석하다. 이태원 참사에 정치적 책임이 있는 장관의 어깨는 감싸주면서 언론통제를 하지 못한 비서관은 사임을 하는 모습은 왕조시대의 모습을 방불케한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가 시작된 지금의 시점까지 이러한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아니 그들의 말은 더 저열해지고 있다.

또 한가지 가벼운 말은 ‘사건을 정쟁에 이용한다’는 말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 정부와 정치권의 본령이 아니던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한 사건보다 더 정치적이며 정치권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중요한 사안이 있을까? 특히 의회는 정쟁을 하는 곳이다. 정쟁을 통해서 사회적 갈등을 조절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의회의 본질적인 존재 목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행위의 정당성을 선출이라는 대단히 요란스러운 의식을 통해 보장하는 것이다. 즉 사건을 정쟁에 이용한다는 말은 정치와 정치인의 존재 목적을 부인하는 것과 진배없다. 집권세력이 그리고 선출직이 스스로의 존재 목적과 의의를 부정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정치의 수준이 얼마나 가벼운지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벼움이 비단 그들만의 문제일까? 정치인들이 가볍다고 저열하다고 비난하고 몇 글자 적으면 끝이 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우리 정치의 수준을 가볍고 무책임하게 만드는 저열한 언어들은 시작은 정치권이지만 결국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재생산 된다. 이 잔혹하고 허접한 언어들은 소위 시사평론가와 정치유튜버라는 사람들을 통해 빠르게 전파되면서 시민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그것이 선거나 여론조사 등을 통해 결과적으로 우리 정치의 하향평준화에 기여한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밝혀두는 것은 이 글의 주된 소재가 집권세력에게 큰 책임이 있는 사안이라서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본질적으로 제 1야당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이다. 결국 이 가벼움과 저열함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가볍고 저열한 언어가 근본적으로 문제적인 지점은 죽은 사람은 항변할 수 없음에 있다. 항변할 수 존재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결국 살아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흘러가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지면의 한계상 다 담을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세월호 참사와 비교해서 우리의 수준이 더 가볍고 저열해졌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각자도생을 하고 있나? [시대와 철학]

누가 각자도생을 하고 있나?

 

진보성(한철연 회원)

 

요즘 뉴스 기사나 개인 블로그 글을 읽다 보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을 자주 본다. 자본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각자 살기를 도모하다’라는 뜻의 이 용어는 팍팍한 현실에 남보다 먼저 안정된 사회 주도층의 대열에 합류하겠다거나, 자칫 사회의 변방에서 처량하게 서식할 자신의 처지를 경계하는 지금 사람들의 군상과 사회의 분위기를 너무나 잘 반영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인지 각자도생을 현대에 만들어진 신조어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실은 출전이 있는 꽤 오래된 말이다. 각자도생은 조선 시대에 국가적이고 공적인 위기 상황에서 종종 사용되곤 했다. 이 용어는 당시 국정의 책임자들 사이에서 발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 55권(선조 27년 9월 6일의 5번째 기사)에는 임진왜란 시기 평양 전투에서 패한 왜적이 퇴각하며 도성의 백성을 모두 죽인 일을 예로 들면서 ‘타지의 백성도 이를 미리 알게 하여 각자 살길을 도모할 것’이라는 내용의 문장이 보인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각자 목숨을 보전해야 했던 일차 대상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의 각자도생을 일컬은 말은 국가 내부의 위기사태에도 등장한다. 『순조실록』 12권(순조 9년 12월 4일의 1번째 기사)에서는 광주 목사 송지겸이 흉년의 실상을 상소하면서 “<백성들이> 지금 살던 마을을 떠나 각자 살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폐허가 된 민중들 삶의 처참함을 묘사한다.

한편 각자도생은 ‘各自圖生’과 함께 ‘各自逃生’ 즉 ‘각자 달아나 살길을 찾는다’라는 용어와 혼용되었다. 역시 임진왜란 시기의 기록인 『선조실록』 32권(선조 25년 11월 17일의 2번째 기사)에는 국경 변방의 일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인 비변사가 “경기의 동쪽과 강원도 북쪽에는 통솔할 만한 장수가 없어 그곳 백성들이 각기 살길을 찾아 <난민이 되어> 산골짜기에 모여 있는데 남의 나라 땅 일과 같이 되어서 매우 미안하다”고 고했다는 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각자 목숨을 보전하려 살기를 도모하는 것으로 묘사된 대상이 힘없는 백성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던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족들도 그러했다. 『인조실록』 17권(인조 5년 10월 4일의 4번째 기사)에는 “종실(宗室)은 모두 나라와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해야 할 사람인데 난리를 당하자 임금(인조)을 버리고 각자 살기를 도모한 것은 실로 작은 죄가 아니다”라며 위기 앞에서 무력했던 왕실 인사들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대목도 존재한다. 그런데 인조는 결국 피난에 임금을 호위하지 않았던 왕족들의 가볍지 않은 죄를 모두 사해주고 다시 국가의 녹봉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사례를 살핀 것은 아니나 각자도생의 기록을 살짝 들춰본 뒷맛은 씁쓸함을 넘어 분노스럽다. 과거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 측은한 감정을 느꼈거나 역사적 사건의 실상에 각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시국 동안 각자 거리 두기로 각자도생하던 사람들이 해방구로 몰려들었던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의 경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살기 위해, 희생자가 희생자를 살리기 위해 다시 ‘각자도생’ 할 수밖에 없던 현실과, 유가족들의 각자도생은 방관하며 자기 책임은 회피하려 들었던 국정 책임자들의 각자도생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개개인의 삶의 양태가 각자도생으로 나가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긴 한데, 사람들이 각자도생을 안 하면 안 되게끔 만드는 국정 책임자들의 각자도생은 어떻게(어찌) 두고 볼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더 도망할 곳도 더 도모할 거리도 이제는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현실이 조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문제라는 것.

새해, 촛불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절차 악용 쿠데타가 브라질에서 성공한 이유와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실패할 이유- [시대와 철학]

새해, 촛불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절차 악용 쿠데타가 브라질에서 성공한 이유와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실패할 이유-

 

김성우(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세계화의 파산과 극우 포퓰리즘의 재등장

 

7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박근혜 정부 집권 1년 차인 2013년 말은 민주 시민에게는 절망의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다룬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유럽의 변방인 구동구권 출신으로 당대의 떠오르는 스타 철학자였다. 지젝의 정세 인식을 바탕으로 이 논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의 정치적인 상황이란 보수 쪽에서의 신자유주의적인 협박이 있다. 보수가 훨씬 능동적이고 풀뿌리적인 포퓰리즘의 형태를 취한다. 매우 공격적인 자세로 자유주의적인 현 상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반하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더 나아가 “세계화된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퇴색하고,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자본과 시장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스템으로 전락한 채로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체제가 공고해지고 있다.”

극우적 포퓰리즘이 득세할 것을 염려한 상황 인식은 불행하게도 2012년 우리나라 대선에서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과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실현되었다. 또한 절차 민주주의의 허점을 악용할 것을 걱정한 불길한 예측은 브라질의 연성 쿠데타로 이뤄지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지고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다. 기존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개혁과 혁명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 이때 취약한 계층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 체제 전복을 막는 운동 세력을 조직화하려는 전형적인 극우적 해법이 있다. 나치즘과 같은 포퓰리즘이 그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로 극성을 부리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민주적 저항에 맞서기 위해 기득권 카르텔이 내세운 카드이다. 새롭게 선택한 것처럼 보여도 대단히 낡은 카드이다.

대망의 새로운 밀레니엄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의 노동당과 독일의 사민당과 같은 진보 정권들도 신자유주의적 언어로 자신의 정책들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논란을 일으킨 참여 정부의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나오게 된 맥락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2008년 월가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로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위력이 마법같이 사라졌다. 세계화의 불평등과 이를 공고히 하려는 반민주적 기득권 카르텔에 저항하는 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불길처럼 타올랐다. 2010년부터 중동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을 상징하는 재스민 운동과 2011년에는 미국에서 봉기한 ‘월 가를 점거하라!’라는 오큐파이 운동이 대표적이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과 혁명의 세계사적인 시대적 흐름 안에서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 실패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반민주적 정책에 국민들이 염증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선 캠프는 박정희 전 대통령 향수를 자극하는 포퓰리즘을 바탕으로 경제 민주화를 포장지로 내걸었다. 문재인 대선 캠프는 민주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도 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극우 포퓰리즘 등장의 세계적 신호탄이었다.

2013년 여름, ‘아랍의 봄’에서 탄생한 이집트 최초의 민주 정부가 법원과 검찰의 포위 아래 다시 군부 쿠데타로 무너지고 말았다. 프랑스와 노르웨이 같은 진보 정당이 오래 집권했던 나라까지 포함해 유럽 전역에서 극우 정당이 지지세를 넓혀 가고 있었다.

2016년 여름, 영국에서는 보수당의 일부 극우 정치인들의 아젠다인 ‘브렉시트’가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 영국에서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은 2019년 말 열린 총선에서 영국판 트럼프라고 불리는 보리스 존슨 총리의 승리로 귀결된다.

같은 해 여름, 브라질에서는 보수 야권 세력이 연방 검찰과 재벌 언론의 유착을 바탕으로 포퓰리즘 방식으로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마침내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켰다. 이 사건은 검찰과 사법부를 이용한 연성(soft) 쿠데타로 규정된다. 이 쿠데타가 연성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군부의 총칼이 아닌 법적 절차를 악용한 합법을 가장한 정권 탈취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 언론이 가세한 극우 포퓰리즘이 견고하게 작동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수사 절차와 사법 절차를 남용한 쿠데타는 당연히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달아 같은 해의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는 극우 기독교 세력을 등에 업고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세계화의 피해자인 백인 남성 노동자들을 자극하여 모든 주류 언론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다. 이는 가짜뉴스와 결합한 극우 포퓰리즘이 세계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극우 포퓰리즘 정치 세력은 특히 기독교 파시즘 세력과의 결합으로 운동의 기본 동력을 마련하고, 가짜뉴스로 여론을 조작한다. 이런 식으로 진보 정권에서는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며, 보수 정권에서는 친정부 시위를 이끈다.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민주진보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난민 혐오나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반난민 정서를 부추기고 반중국 정책으로 자기 지지 세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했다. 유사하게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종북’이 민주진보 세력을 매도하는 대표적인 언어였다. 현재의 극우 야권 인사들은 문재인 정부를 친북이나 친 중국적인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한다. 자신들이 독재의 후예이면서도 시장의 권력을 약화하고 민생을 보살피는 개혁 정책이나 법안을 입법화하면 (재벌과 부유층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재라고 맹비난을 가한다.

세계 전역에서 군부 독재 세력의 잔당과 재벌이 결탁한 기득권 카르텔은 언론의 여론 조작과 검찰의 선별적 수사와 사법부의 자의적 판결에 의해 포퓰리즘적인 동원력을 갖추고 민주진보 정부와 운동을 짓밟는 힘을 과시한다.

브라질에서 연성 쿠데타가 성공한 원인은 식민지 시절부터 오랜 기간 동안 구축된 5개의 연합으로 이뤄진 기득권 카르텔이 굳건한 데 있다. 반면에 현재 미국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절차 남용 쿠데타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 전 브라질 대통령. 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ilma_Rousseff_-_foto_oficial_2011-01-09.jpg

 

쌩큐, 박근혜! 쌩큐, 트럼프!

 

트럼프보다 4년 먼저 당선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12월에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가결되어 직무가 정지되고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당한다. 트럼프는 4년 뒤인 2020년 말 대선에서 패배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과정에서 탄핵을 방해하기 위한 포퓰리즘적인 선동과 막무가내식 시도에 촛불 시민들이 얼마나 혀를 내두르고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엽기적인 내막이 알려지자 우리 사회의 기득권 카르텔이 전가의 보도로 내세운 박정희 신화의 철갑이 벗겨졌다. 이로 인해 여론과 민심의 지형이 바뀌고 말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민주진보진영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역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촛불 시민들이 각성하자 운동장의 기울기가 역전되었다.

여기에는 기득권 카르텔의 내분도 한몫했다. 권력의 애완견 역할을 자처하던 보수 언론도 박근혜 정부의 문제점을 공격적으로 보도하고, 보수 정권의 사냥개 역할을 하던 검찰도 과감하게 국정농단 수사를 했다. 그 당시 심지어 친박에 속하는 여권 의원들도 탄핵 의결에 동참하고, 친보수적인 판결을 일삼던 헌법재판소마저 탄핵소추안을 인용했다.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박정희 신화가 사라져버려 거꾸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현 보수 야권은 4차례의 선거에서 전패를 했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도는 철옹성처럼 보였다. 올해 총선에서는 180석의 거대 여당이 탄생하고 문재인 정부는 성공적인 방역으로 경제에서도 선방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게다가 영화와 음악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한류는 세계적인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오래된 식민지 의식의 잔재인 열등감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진국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하지만 불행히도 작년 여름부터 브라질식의 연성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아직 진행 중이다. 조국 전 장관의 가족에 대한 강압적인 수사로 검란이 일어났다. 검란에 기초하여 보수 언론과 보수 야당은 가짜뉴스에 가까운 여론 공세로 극우적 포퓰리즘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다. 사법부는 이미 사법농단으로 독립성이 흔들리며 국민적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법 논리를 악용한 판결로 검란에 동참하고 말았다.

검찰에 유착된 보수 언론의 가짜뉴스에 가까운 편파적 보도와 보수 야당의 극우화에 기인한 포퓰리즘적인 선동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검찰과 사법부의 쿠데타 시도는 현 정부에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기득권 카르텔의 복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로부터 구축된 기득권 카르텔이 박근혜 탄핵 이후 발생한 균열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절박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록 대선에서 졌지만, 포퓰리즘적인 선동에 능한 까닭에 열성적인 지지자를 대규모로 모아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하였다. 그 지지세에 놀란 공화당마저 자기편에 서게 하여 정치적 외톨이에서 당을 장악한 정치인이 되었다. 게다가 고위 관료와 연방대법관마저 자기 사람으로 심어 미국이 오랫동안 구축해온 민주적 절차와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뉴미디어와 대규모 열성 지지자를 동원해 선거 조작을 외치며 엄청난 물량의 소송전을 펼쳤지만, 각종 법원에서 연달아 거의 모든 소송이 기각되었다. 고위 관료와 다수의 공화당 인사들로 주의회나 주정부를 흔들어 대선 선거인단 투표를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나름대로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법적 투쟁을 홀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쿠데타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합리적으로 예상된다.

그 이유는 우선 미국의 공화당은 식민지 해방 이후 생겨난 신생국들의 보수 정당처럼 군부 독재 세력의 잔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력이 당내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현재 미치 맥코넬 상원 원내대표나 부시 전 대통령을 비롯해 유력한 공화당 인사들이 대선 결과에 승복하고 있다.

더군다나 <뉴욕타임스>와 <CNN> 등과 같은 주류 언론은 언제나 날을 세워 트럼프와 대립하였고, 심지어 친트럼프 언론의 대명사인 <폭스뉴스>마저 선제적으로 트럼프에게 불리한 예측을 했다. 심지어 트럼프가 임명한 국방부 장관이나 법무부 장관, 심지어 법관들마저 공개적으로 트럼프의 명령을 거부하고 불리한 발언을 하거나 판결을 내렸다. 이는 다섯 영역의 기득권 카르텔이 균열되어 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할 절차적 민주주의를 허무는 쿠데타에 찬성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트럼프식의 연성 쿠데타 시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기득권 카르텔의 연성 쿠데타 시도도 실패할 것으로 예측된다. 우선 보수 언론에 대항하는 민주 시민들의 뉴미디어 언론이 있다.

보수 언론이 아무리 정부와 여권에 대해 맹공을 가해도 다소 출렁거림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40% 선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보수 언론이 조국 가족에 대해 80만 건 이상의 친검(檢) 보도를 했지만, ‘검찰 개혁과 조국 수호’를 외치며 서초동에 모인 백만 이상의 촛불 시민의 집회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극우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민주 시민의 참여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더욱이 민주 시민들이 정부와 여당을 견인하여 공수처를 설치하고 다양한 개혁 정책들과 법안들을 입법화하고 있다.

거기에다 군부 독재 세력의 후신인 현 보수 야권이 많이 약화되고 분열되어 있다. 물론 검언(檢言) 카르텔이 대단히 견고하고 상당히 많은 보수적 판사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 이 강고한 기반을 바탕으로 연성 쿠데타 시도가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검언 카르텔이 일으킨 쿠데타에 법조 카르텔이 참여하면서 민주 시민들의 촛불에 다시 불을 지르고 말았다. 이 쿠데타에 무사안일하게 대처하던 민주당이 민주 시민들의 성난 목소리에 떠밀려 2차 검찰 개혁과 사법 개혁 및 윤석열과 사법 농단 판사 탄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미 여권은 180석을 바탕으로 국정원과 경찰 및 검찰이라는 3대 권력 기관의 1차 개편을 한 바 있다.

하지만 검언과 사법 쿠데타 시도로 말미암아 문재인 정부는 그 임기 내에 민생 개혁, 검찰 개혁, 언론 개혁, 사법 개혁을 마무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4대 개혁 과제에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재보궐 선거와 대선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새해에는 민주 시민들의 분노가 지닌 엄청난 압력에 정부와 여권이 4대 개혁을 상당히 이뤄낼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현 정부의 대명사인 선제적인 검사 외에 국내 치료제 개발과 해외에서 개발 중인 백신 계약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기에 검사, 치료, 예방이라는 3대 조치로 코로나바이러스 퇴치도 기대한다.

트럼프의 쿠데타 시도가 이미 실패로 판정이 나고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쿠데타 시도도 민주 시민과 거대 여권의 연대에 의해 제압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니 촛불 시민들이여, 분노하라! 그 분노의 목소리를 크게 외치자! 정부와 여권이 4대 개혁을 향해 신속하고 과감하게 움직이도록!

 

국민과 국회의원을 생각한다. – “좌좀들 150만명”발언 즈음하여 [시대와 철학]

국민과 국회의원을 생각한다. – “좌좀들 150만명”발언 즈음하여

 

이영훈(한철연 회원)

 

얼마 전, 국내 제1야당 소속의 민모 국회의원이 개인 SNS에 올린 글이 뉴스가 된 적이 있다. 기자의 사견 등을 제외하고 사실만 나열하면 뉴스의 대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모 의원이 북한 열병식 사진, 교황 방한 사진, 나치당 뉘른베르크 당 대회 사진과 더불어, 이번 검찰개혁 시위 사진들을 함께 올리고 “좌좀들 150만 명”이라 지칭했다.’

이전에도 국회의원들의 과한 언사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야 이 친구야, 쟤들은 원래 그렇잖아, 대한민국 국민답게 행동하라고’라는 식으로 넘어갈 사람들도 있을 테다. 그러나 나는 민 의원의 이 발언에서 그저 쉽게 넘기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국회의원은 어떤 직책인가’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내가 알기에 국회의원은, 시험 봐서 입성하는 입법부나 사법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권한 행사를 대행하라고 국민이 뽑은 ‘선출직’이다. ‘국민을 대행’하는 ‘선출직’이라는 점은 국회의원이 관료조직과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 부분이 왜 포인트인지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번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 의원의 득표율을 보자. 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확인해보니 민 의원은 해당 지역구 투표인 119,224명 중 32,963명이 투표하여 당선됐다. 참고로 2등은 여당 소속이며 27,540표로 낙선했다. 바꿔 말하면, 참여하지 않은 인원을 차치하고서라도, 민 의원 지역구 주민 중 2등을 뽑은 약 27,540명 중의 적어도 일부는 민 의원과 반대되는 정치적 성향을 지닐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아마도 그들 중 또 몇몇은 이번 검찰개혁 시위에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시위는 안 나갔어도 이 시위를 지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민 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 지역구 구민들, 그리고 더 나아가 전 국민의 뜻을 대행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민 의원 지역구의 예에서 보았듯이 상식적으로 그와 생각이 다를 가능성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민 의원은 이번 시위에 나선 국민을 “좌좀들 150만 명”으로 규정했다.

뭐 국회의원이니까, 이 정도 언사는 넘어가도 된다고 보는지? 혹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상적인 것이니까, 그도 사람이니까 내지는 정치인이니까… 이런 발언도 내뱉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서는 그의 발언에 대해 전혀 불편해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국민이 뽑았고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이 자기와는 생각이 다른 국민을 ‘사고능력은 전혀 없는 채 식욕에 따라 인육을 탐해 움직이는 죽어 썩어버린 상상의 시체 덩어리’인 좀비에 빗대어 “좌익 좀비 150만 명”으로 규정했다. 이 국회의원은 많은 국민들이 그 발언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더럽다, 더러워’라며 혐오의 발언을 또 다시 내뱉었다. 이 국회의원의 발언에 관대한 당신들의 동조 혹은 묵인 덕분에 민 의원과 그의 소속 당은 물론 당신들과 정치사상이 다른 국회의원까지 똑같이 국민을 무시할 수 있는 실질적 근거를 하나 더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생각해 봤는가.

 

그런 의미에서, 하나 묻는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국민을 거리낌 없이 모욕하는 민 의원의 발언에 관대한 당신과 그 소속 정당의 이해관계가 달라졌을 때도 저들이 과연 당신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일 것 같은가? 아니면 그저 자신들을 대표하는 자들일 것 같은가.

아마 어떤 사람들은 당신들과 그 정당이 영원히 뜻을 같이하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단히 안타깝게도, 그런 정치인에 대한 순진하기까지 한 ‘믿음’이 깨지는 실례는 특정 당적과 상관없이 지난 우리 현대사에서 수도 없이 봐 왔다.

 

자신과 같은 국민인 검찰청 앞의 저 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죽은 고깃덩어리 살육귀로 규정하는 자와 그런 인물이 소속된 정당이 과연 민의를 대변할 자격이 있는가? 과연 누가 저들에게 묵인과 동의로서 자신만을 대변할 면허를 주었는지 의문이다.

 

물론 청와대 대변인이었고 KBS 9시 뉴스 앵커 출신인 민 의원이 단지 세속적이고 친숙한 언사를 구사해보고자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의 언어를 뜻도 잘 모른 채 사용하는 ‘실책’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도 사람인지라 잠시 과한 언사를 했다고 얼른 태세를 바꾸어 사과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고 결과는 모두가 감당할 뿐이지만 국민의 입장, 또 시민의 입장에서는 ‘국민을 대행하는 자’가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고, 어떻게 발언해야하는지 깨닫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국회의원은 어떤 직책인가’라는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시대와 철학]

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정동훈(2018-시민대학 수강)

 

조인성 주연의 ‘더 킹’은 검찰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태수는 목포를 기반으로 하는 건달의 아들이며 동네에서 알아주는 ‘양아치’이다. 어느 날 태수는 한 주먹도 아까워 보이는 검사에게 아버지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공권력의 무서움을 실감하며 검사의 꿈을 품는다. 우여곡절 끝에 검사가 된 태수는 결의를 다지며 정의로운 검사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과 막막한 현실의 벽에 굴복한 태수는 결국 정치검찰의 길을 선택한다. 영화는 주인공 태수라는 인물을 통해 그동안 현대사에서 검찰이 어떻게 권력과 유착하여 기득권을 수호하고 민중을 탄압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검찰의 모습이 마치 영화 ‘더 킹’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검찰의 문제를 요약하면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를 받지 않는 집단’이라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근대적인 검·경찰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경찰인력을 대부분 일제 치하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을 그대로 대거 활용했다. 친일파가 가득한 경찰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당시 한국의 제도를 만들던 인물들이 선택한 방법은 인원이 적은 검찰에게 강력한 권력을 주어 경찰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선택은 검찰을 막강한 힘을 가진 괴물로 만들었다. 검찰은 총 2천여 명 남짓한 인원으로 11만 명이 넘는 경찰을 지휘·감독하며 수사, 영장, 기소, 공판 등등 사실상 법조의 전 영역에 있어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검찰은 견제 받지 않는다. 정치권력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의회가 정부를 정부가 의회를 견제한다. 또 정치권력은 궁극적으로 시민의 선출이라는 방법을 통해 평가를 받고 감시를 받는다. 하지만 검찰은 선출직이 아니다. 그렇기에 선거라는 민주사회의 가장 큰 시험으로부터 자유롭다. 형식상 법무부의 지휘·감독을 받지만 형식일 뿐이다. 검찰을 통제할 정치권력은 언제든 수사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기에 건드리기 어렵고 시민에게 검찰은 개인에게는 감히 저항조차 두려운 공권력이기 때문이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마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검찰이 검이라면 검을 쥘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택지는 두 가지다. 협력 혹은 개혁이다. 전자는 보수정부의 선택이었다. 민주화 이전 독재정부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지난 보수정부만 생각해도 검찰이 얼마나 권력과 유착하여 공생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후자는 노무현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검찰에게 개혁은 개혁이라고 들리지 않는다. 전쟁을 하자는 말로 들릴게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힘을 없애겠다는 말이니까. 노무현의 검찰개혁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다시금 유착한 권력과 검찰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다시 검찰개혁을 선언한 정부가 집권했고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다. 그리고 검찰은 다시 한 번 전쟁을 시작했다.

 

현대적인 사법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선 사적제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사적제제를 인정하는 순간 사회는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질게 뻔하다. 대신 국가는 ‘국가형벌권’을 인정하며 개인의 ‘복수’를 금지하는 대신 직접 나서서 범죄를 ‘처벌’한다. 검찰은 이러한 국가형벌권을 담당하고 실현하는 기관이다. 검찰은 선량한 시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며 악을 처벌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다. 그래서 그토록 강력한 권한을 검찰에게 준 것이다. 하지만 누차 말했듯 그동안 검찰은 자신의 권한을 사유화하고 권력과 유착하여 결과적으로 국가형벌권의 남용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전직 대법원장의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이 사법부의 문제를 담고 있다면 스폰서검사, 떡값검사 등의 부패검사들 그리고 검사 출신 전관예우 변호사들의 모습은 검찰의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수사 과정부터 재판까지 하나의 사건에 있어서 검찰의 권한은 때로는 대통령의 그것보다 강력하기에 그 자체가 비리와 유착을 부르는 원인이다. 또한 견제 받지 않기 때문에 내부의 비리가 고발된다 한들 언제든 제 식구 감싸기가 작동한다. 설사 비리로 인해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든다 해도 그 자체가 전관 출신 변호사가 되어 활개치고 다닐게 뻔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라고 헌법은 천명하고 있다. 국가기관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던 상관없이 국민의 것이다. 국가기관은 국민을 향해야한다. 검찰도 예외일 수 없다. 검찰의 주인은 국민이고 검찰은 국민의 검찰이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 작용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여지가 있다. 그렇기에 민주국가의 헌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 바로 권력분립이다. 국가권력을 나누어 견제와 균형을 꾀하고 그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려는 기본원리이다. 권력분립의 입각해서 볼 때 검찰은 어떠한가? 너무도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견제 받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검찰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 권한의 행사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과도하게 침해 될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검찰개혁엔 다양한 쟁점들이 있다. 검찰 스스로가 개선해야할 부분도 있지만 제도 자체를 개선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검찰 권력의 문제가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 장치의 부재로 요약된다면 제도 개선의 쟁점도 ‘권한을 나누고’ ‘견제 장치를 만든다’로 요약할 수 있다. 전자의 대안이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다. 이것은 2018년 행안부와 법무부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관련 법률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후자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이른바 ‘공수처’의 설치이다. 이것도 어려운 산이다. 제 1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지만 둘 다 얻기 어려운 아주 힘든 상황이다.

 

아직 검찰은 무서울 것이 없다. 검찰개혁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고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와 여당의 힘이 점점 빠져가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제 1야당이 아직 버티고 있으며 혹여나 그들이 정권을 탈환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승승장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칼은 칼이다. 내가 휘두르기만 하면 모든 것을 도륙할 능력이 있어도 휘두르는 사람도 얼마든지 베일 수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두 명의 전직 대통령들을 생각한다면 알 수 있다. 검찰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재벌도 차가운 감옥으로 아니 죽음으로도 내몰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정치인도 재벌도 무서울 게 없는 존재라면 그들만큼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일반 국민들은 얼마나 나약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을지. 검찰개혁의 명분과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노무현의 한을 풀기 위해서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검찰이라는 거대한 권력기관 앞에 항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질 바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가짜뉴스와 혐오발언의 공통점 [시대와 철학]

♦ 아래 글은 [건대신문]  3월호에도 동시 게재되는 칼럼입니다.  칼럼으로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전임 편집주간)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들은 혐오스럽다. ‘촛불은 바람불면 꺼진다’ 당시 새누리당의 김진태 의원이 뱉은 막말이다.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대통령의 이루 셀 수 없는 실정에 분노한 국민들이 광화문에서 뜨겁게 촛불로 마음을 모을 때 도대체 김진태는 무슨 생각으로 막말을 쏟았을까. 막말의 정점은 박대통령 대리인단의 김평우 변호사다. 김평우 변호사는 국민을 기만하는 막말을 마구 쏟아내며 탄핵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몇 가지 김평우의 막말을 되새겨보자.

 

“탄핵 인용시 시가전이 벌어지고 아스팔트 길이 피와 눈물로 덮일 것”

“요즘 우리나라 언론을 보면 소위 정계 원로, 법조계 원로라는 분들이 전부 무조건 헌재 결정에는 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조건 승복해라, 이게 조선시대입니까? 지금 우리가 양반이 복종하라고 하면 복종하는 노예입니까?”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대통령 그것도 여자대통령에게 뭐했냐고 한다. 이건 웃기는 일”

 

판사를 지냈다는 법조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또 스물스물 퍼져나가는 가짜뉴스들, 박사모 집회에서는 또 그 뉴스를 확인도 없이 너도나도 마구 쏟아내고 있다. 사실 시대적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막말에든 가짜뉴스에든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팩트와 진실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울 만큼 배운 저 엘리트들이 왜 저런 혐오발언들을 쏟아내며 막말 정치인, 막말 법조인이란 욕을 듣고도 멈추지 않는 것일까. 목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번갈아 두르며 광장에 나오는 박대통령 대리인단의 서석구 변호사, 막말 파문 때문에 부친인 소설가 고 김동리 선생까지 언론에 오르내리는 대리인단의 김평우 변호사는 혐오발언들을 쏟아내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사실 난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느낀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소위 엘리트인 그들이 막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가짜뉴스와 혐오발언의 목적이 행동을 생산하는 수행성의 정치이고 그만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발언>>(2016, 알렙, 265쪽)에서 ‘언어는 몸의 행위이며 수행문의 힘은 육체적인 힘과 절대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장(16쪽)에서 모리슨을 인용해 ‘언어의 폭력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포획하려는 노력, 따라서 그것을 파괴하려는 노력’이라고 쓰고 있다.

 

막말의 정치인들과 법조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촛불민심에 대한 상처내기와 광장에 모인 박사모들과 숨어있는 박대통령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데에 있다. 사실 이 두 효과 중 막말은 박대통령 지지자들을 더 열광하게 했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름의 마이크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고 그 마이크에서 쏟아지는 혐오스러운 발언과 스멀스멀 SNS를 통해 퍼지는 가짜뉴스들은 팩트가 어떻든 자신들이 지지하는 권력에 힘을 더해주는 수행성의 정치를 열심히 하고 있다.

 

사진출처 – 프레시안

이재용 삼성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유감과 분노 [시대와 철학]

이정호(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누군 3만원의 떡을 감사표시로 줘도 범법이고

누군 400억의 돈을 갖다 바쳐도 범법이라 단정할 수 없다니

형식논리적 법적용의 배후에 여전히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네요.

 

역사와 현실, 시대정신을 망각한 지식 모리배들에게

논리는 그저 탐욕의 노예일 뿐입니다.

역사는 그들의 부역을 심판할 것입니다.

 

2500년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플라톤의 <국가> 338c)라고 외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망령에 맞서

약자들이 싸워온 정의의 역사에

왜 피가 배어있는지 새삼 뒤돌아 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정의의 씨앗

열매를 맺지 않아도 이어지는 그  알 수 없는 신비!

아마도 불멸의 투쟁과 연대 그리고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정의의 열매를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spes immortalis

-희망은 불멸이다

 

 

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시대와 철학]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오를 다짐하는 한철연의 신년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편의 시평을 연달아 게재합니다.  이 두 편의 글은  모두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학술지 [시대와 철학] 27권 4호에도 동시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신년회에 참석하시기 전 미리 한번 읽어오시면, 함께 토론하며 한철연의 앞길을 의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박종성(호원대학교)

 

“세상에서 행세하는 것 중에 황금처럼 고약한 것도 없다.
폭리로 돈을 벌게 해 주고 국가를 뒤집어 폐허로 만들며
사람들을 파산하게 하며;
나쁜 물로 교화시켜 도덕을 등지게 만들고
올바른 사람을 유혹하여 죄의 수렁에 빠지게 하며…….
죽을 운명의  그 육체에게 사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며
저주받을 일을 하도록 만든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시대에 대한 성찰: “이게 국가냐”

“정말 이건 사람 사는 나라가 아니지 않냐”, 집회 나온 할머니의 말이다. “순실”의 시대에 우리는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왔는지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민중은 자괴와 상실만을 하지는 않았다. 상실의 시대에 민중들은 다시 촛불의 희망을 들었다. 7차 집회까지 연인원 700만을 넘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서울, 부산, 거제,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어린이, 대학생, 노인들에 이르는 민중의 모습은 우리의 시대에 대한 촛불의 거대한 시대의 성찰이자 주권자의 실천이었다. 촛불 혁명이었다. “오늘 이곳으로부터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나니, 우리는 바로 그 탄생의 현장에 서 있다.” 괴테가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발미 전투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우리는 촛불 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였고, 그 탄생의 현장에 시민들, 학생들, 노동자들이 있었다. 광장의 정치, 그 목소리는 다양했고, 정치의 참여는 자발적이고 평화로우며 축제 분위기였다. 가정주부는 답답하여, 학생들은 정유라 부정입학에 대한 분노로,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는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 노동자도 그렇게 광장으로 나왔다.
촛불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 이화여대 학생들은 정의롭지 못한 입학에 분노하였고 정의를 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정의(justice)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등의 원리, 각자는 각자의 공헌에 따라 분배받는 것인 분배적 원리이다. 정의롭지 못한 것, 공헌에 따라 분배받지 못한 정유라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렇듯 시민들, 학생들은 자신의 시대에 대해 성찰하고 비판하였다. 광장의 정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탄생이며, 유신 잔당들의 해체와 종식을 알리는 새로운 역사이어야 한다. 그런데 87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광장정치가 그야말로 텅 빈 기표로 남지 않기 위한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새로운 역사의 탄생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는 공적인(publica) 것(res)의 파괴이다. 공적인 것의 파괴와 사적인 것이 지배하는 국가, 바로 그런 지금의 국가(republic)에 대한 성찰이 촛불 혁명을 만든 것이다. 촛불 혁명은 탄생하였다. 그 성장의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성찰이 없는 삶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그에게 철학은 논박(elenchos)을 통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당혹스러운 상태(aporia)에 처하게 하여 무지를 자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현실에서 시민은 논박보다는 촛불을 들어 통치자의 무지 자각을 일깨우려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박근혜는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죽음을 대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는 근원적인 물음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거의 유신 망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폭정, 불의, 강도 짓을 일삼던 자들의 영혼, 즉 오늘날 망령, 독재의 유령은 이들의 영혼이 정화되지 못한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로 인하여 망령은 현실에서 배회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정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 그것을 성찰하고 행동으로 선택하였다. 민중들은 정의롭지 못한 국가, 사회에 대해 다시 물음을 던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현재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에게, 곧 부, 명성, 명예의 획득에만 혈안이 된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수백만의 민중들은 묻고 있다. 세월호 참사, 사드 배치, 국정원 선거 개입, 교육부 국정 교과서, 한일군사협정, 부정 입학, 국정 농단, 성과연봉제 등등 국정 전반에 대해 “이게 국가냐”고 말이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총체적” 질문이었다. 민중들은 충분히 철학적이었다.
둘째, 탐욕과 시기는 나라가 망하는 두 요소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화폐였다. 요약하자면 이번 사태의 핵심은 사적인 인간의 화폐에 대한 탐욕이었고 이것을 정치권력이 두둔하고 은폐하였다는 것이다. 공적인 혈세는 사적인 인간의 부의 증대로 둔갑하였다. 맑스가 말하는 “치부욕”에, 곧 사적인 인간의 치부욕에 우리들의 혈세가 쓰인 것, 민중들은 이것에 대해 분노하였고 자신의 현실적 삶의 성찰을 통해 거대한 촛불 혁명을 만들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국민을 믿지 않고 재물의 신인 플루토스(Plutus)를 믿는다. 맑스는 재물의 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사회의 “경제적 · 도덕적 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했었다. 그렇다, 국정을 농단한 결과는 도덕적 질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질서까지도 파괴하였다. 헌법 119조 2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 및 안정과 적절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며, 시장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 조항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의 역할을 다시금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부의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시대에 경제민주화를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더욱 절실히 요구하는 것이다. 고삐 풀린 자본을 위한 국가는 변혁되어야 할 대상이다.
플루토스를 추구하는 근대사회는 “자신의 고유한 생활원리를 눈부시게 비춰주는 화신(Inkarnation)을 자신의 황금 성배(Goldgral)로서 환영한다.”고 맑스는 말한 바 있다. 맑스는 『자본』에서 화폐형태는 일반적인 등가형태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특정한 상품의 특수한 현물형태(Naturalform)로 전환되어 상품소유자들의 공동의 행위 때문에 특정한 상품의 배타적 기능이 되고,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한다. 화폐는 “추상적 부의 물적 현존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일은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는 점이다. 오물을 흘리면 태어난 자본주의에서 민중들은 천박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민중이 권력을 갖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요구는 촛불 혁명이라는 광장의 정치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강화로 인하여 죽어간 구의역의 한 젊은이를 추모하는 발길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에서도 알 수 있다. 민중들은 자본이 생명의 가치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에 대해 성찰한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이들이 만들에 낸 국정농단 사태, 그곳에는 자신을 성찰하는 수백만의 민중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 민중은 철학적이었다.

사회적 유대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목적성을 “함께 존재함의 행복”이라고 하였다. 곧 한 정치 공동체를 위해 행복을 창출하거나 보존하는 행위를 하려는 경향을 정의로 보고 있다. 맑스의 진지한 고민은 “사회 구성원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풍요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함께 존재함의 행복은 신자유주의와 상반된다. 신자유주의는 소득 불평등의 확대와 ‘고용 없는 성장’으로 귀결된다. ‘일자리를 줄이는 경기회복’(Jobloss Recovery)이라는 사이렌의 소리는 새로운 불안한 계급들을 유혹하여 그 존재를 난파시키고 불안정한 삶으로 그들을 구속하며, 끝끝내 삶 자체를 침몰시켜버린다. 경제적 불안은 부의 불평등을 가속하고 그러한 불평등은 불안한 자들의 불안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불만으로, 자신의 좌절을 경제적 약자에 대한 적대로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유대는 깨져 버린다. 이 시대의 철학은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이번 촛불혁명은 바로 사회적 유대의 강화를 보여준다.
플라톤이 말하는 “고상한 거짓말”을 대한민국에서도 확인하였다.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국가의 태도에 민중들은 분노하였다. 청와대의 국정 운영의 방식에서 세월호 참사를 여객선 사고로 규정했다. “창조경제”, “국민행복 시대”라는 고상한 거짓말, 먼저 이 고상한 거짓말이 정치에서 의미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도시를 결속시킬 만큼 강력한 힘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는 끊임없는 고상한 거짓말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력을 약화하면서 보수단체를 이용하여 참사의 본질을 은폐하거나 희석하려고 하였다. 문제는 그러한 사유 틀이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과 반사회성이다.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자신의 안락인 이기주의, 타자의 고통인 악의를 버리고 타인의 안일을 원하는 동정(Mitleid)을 주장하였다. 동정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에 참여하는 것이다. 루소 또한 동정(pity)을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적 유대는 비단 이성만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여러 추모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동정의 사회적 유대이다.
민주주의를 선점한 자본으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을 파괴하고 집어삼킨 국가의 모습에서 새로운 민주적 국가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우리는 증오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부정적 계열에 속하는 정념인 증오를 사회적 유대를 해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사랑과 증오라는 정념들의 양가성을 인정한다. 공동선에 대한 사랑, 하지만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가 그것이다. 정의에 대한 사랑과 불의에 대한 증오이다. 촛불 혁명은 바로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사회적 유대이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할 것인가? 그 정념의 역량을 분출하고 시민의 권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

결국 민주주의의 다시금 회복시켜 자본에 종속된 권력을 민중에게로 재전유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병사로서 참여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민주주의이다. 이후 민주주의는 “좋은 외투, 좋은 모자를 쓰고 온 가족이 번듯한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권리”로서 나타난 “보통 선거권”의 확대에서 드러나듯이 자원의 배분과 관련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그렇다, 주권(sovereign)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superus) 최고의 권력(power)이다. 그러나 현실 민주주의에서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불일치, 그 틈을 메웠던 것이 촛불혁명이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에서 이 틈은 여전히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메워진 틈을 더 좁히는 일이다. 결국, 대표성을 강화하는 것, 이것을 모색하여 더욱 더 민주주의의 본래성을 강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결국 민중의 삶은 자원배분의 문제, 곧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사실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갈등을 없애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노가 투표를 통해 정부를 정당하게 해임하는 것이다. 결국, 갈등은 민주주의에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그러한 갈등을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는 반면에, 민주주의 질서에서는 갈등을 드러내고 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촛불은 갈등의 사회화 과정에서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쟁점은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이다. 이는 마치 호남 vs. 비호남과 같은 지역적 문제로 정치적 쟁점을 대체하거나 조직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민주화 과정이다. 민주주의를 강화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의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결함인 대표성과 주권 원리의 불일치, 그 틈을 더욱더 메워 주체화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더욱 더 자본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국민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상위 1%의 부가 하위 99%의 부를 넘어서는 시대에 계급 간의 불평등은 정치에 있어서 너무나도 강력한 정치적 갈등이므로 더욱더 지역을 넘어선 철저한 계급투표를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삶의 문제이다. 주권의 대표성을 강화하여 자원의 재분배에 참여하는 것, 그리하여 그야말로 민중(demos)의 권력(kratia)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촛불로 “죽 쒀서 개주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살려내는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듯, 민주주의를 탈(재)전유(exappropriation)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재전유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고유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될 민주주의라는 미래를 위하여, 자본이 선점한 민주주의를 재전유하기 위하여 민중들은 민주주의라는 현재를 잡은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비전유(expropriation)할 때의 지배성의 위험을 너무나 쓰라리게 경험하였다. 플라톤의 말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