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② [시대와 철학]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②

 

문성원(한철연 회원, 부산대 철학과)

 

이 글은 2023년 11월 18일 부산대에서 열린 한국헤겔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저자의 기고로 게재합니다. 앞에 이은 두 번째 글입니다.

 

 

 

1. 많은 분이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만, 청년 시절 제게 헤겔은 무엇보다 ‘자유’의 철학자였습니다.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의 역사”라는 말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지요. 진보의 순서를 문명권에 따라 공간적으로 배치한 것이나 물질적·경제적 동인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것 따위는 맑스 같은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극복되는 시대적 한계로 여겨졌죠. 이런 지연 효과를 고려하면, 자기의식의 원리에서 출발한 자유는 산업화로서의 외화와 그것의 자주적 전유를 그 전개 형태로 담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경우, 자유는 산업화와 자주를 아우르는 근본 틀로 취급될 여지를 갖겠지요.

2. 그런데 이 ‘자유’는 최근에 우리가 여러 번 목도했다시피 내용 없는 공허한 울림으로 되뇌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자유가 운위되는 양태는 매우 자의적어서, 실제로는 자신의 좁게 겨냥된 과녁만을 노릴 뿐, 주변의 중요한 문제들을 수습하거나 해결하는 데는 무책임하며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자유롭죠. 흔히 말하는 대로 아집과 무지와 무능의 소치라 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데에는 애당초 자유 개념과 결부되어 있는 자기 중심성 탓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보편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합니다만, 알다시피 이때의 보편은 실상 시대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한정된 ‘보편’이죠. 게다가 우리가 익히 보다시피 그런 특정한 잣대마저도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덕택에 지금 우리는 권리와 법이 그야말로 ‘자유롭게’ 전횡되는 현실을 아프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요.

3. 이런 모습이 자유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부정적 면모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구태일 겁니다. 이념의 외화와 자기복귀라는 틀이 한 때 호소력이 있었던 건 그것이 자기 확인과 자기 확장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열망에 부응했기 때문이겠죠. 물론 아직도 그런 생각을 고집하고픈 집단이 있겠으나(아마 북한―적어도 현재의 주도적 지배층―의 경우는 여전히 이런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동안 드러난 숱한 문제들을 도외시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주체는 단일하지 않을뿐더러 궁극적으로 단일해질 수도 없다는 것, 각각의 주체는 재현의 실패를 지시하며1 그런 실패가 계속되는 한에서 요구된다는 것, 또 주체의 자유란 이 같은 실패가 일회적이지 않게 하는 선택의 기제이고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집단적 자유의지(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를 포함해서―의 실체라는 것, 등등이 그간의 사태에 대한 반성을 통해 도출된 일반적 결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4. 그렇다고 자유의 여지를 확대하고 공고히 하려는 활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확실성을 보장받으려는 과도한 목적론적 구도를 포기하고 자기중심적 외화가 초래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들을 충분히 경계한 채로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 시대에 뒤떨어진 목표에 얽매인 상태에서가 아니라면 과연 ‘자유’가 주도적 모토로 내세워질 수 있는지, 오히려 퇴행적 발상에 이용당할 소지가 많지 않은지 의심스러워 하는 것이죠. 더러 얘기되듯 누구의 자유인가, 어떤 자유인가를 구체적으로 문제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유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 자유 개념의 특성에 대해서 따져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2

5. 외화로서의 산업화와 자기복귀로서의 자주를 주된 계기로 삼아 지나간 일들을 꿰어보려 했다고 해서 미래에 대해서도 같은 틀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죠. 오히려 그동안 불거진 예기치 못했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일이 긴요할 겁니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제틀의 수립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테지요.

 

 

1. 여러 문제 가운데 제가 특히 흥미롭다고 여기는 우리 현실의 사안으로는 무엇보다 세대 문제를 들고 싶군요. 그중에서도 근래에 두드러진 세대 간의 불평등 논란이 관심을 끕니다. 세대의 문제는 시간적 추이와 관련된 문제고 그런 점에서 변화, 발전의 문제이기도 할 테지만, 변화의 속도가 느린 사회에서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이 일반적인 형태로 논의될 따름이었겠죠. 혁명적 격변의 시기에도 체험의 단절적 변화가 세대의 구분에 새겨지겠으나, 우리의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든 압축적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경험을 한 탓에 세대 간의 특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2. 이제 산업화 이전 세대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하겠고, 70년대까지 젊은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확연히 노년층에 접어든 산업화 세대와 87년을 전후한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라 할 이른바 386(이 이름이 등장했던 1990년대초 당시에 386이었지 현재는 586을 거쳐 686에까지 이른) 세대, 그리고 민주화 이후 성장기를 보낸 X, Y, Z의 알파벳 세대 등 갈수록 구분도 촘촘해지는 세대들이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죠. 여기서 특히 세기의 전환기를 어려서 겪은 이들, 대체로 1980년대 중반쯤에 태어난 Y세대에 해당하는 이들을 M(밀레니엄) 세대라고 하고, 이들과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 태어난 Z세대를 묶어서 MZ 세대라 부르는 것 같군요. 그런데 불평등과 관련한 논란의 초점은 현재 사회의 중심 세력이라 할 386세대와 2,30대 청년층을 이루는 MZ세대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3. 『불평등의 세대』라는 책을 쓴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는 한국의 세대를 ‘자원 동원 네트워크’라고 이해합니다.3 단순히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 이상이라는 거죠. 특히 그는 386세대가 성공적으로 이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한국사회의 주도층이 되었으며, 그 다음 세대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철승 교수가 드는 386세대의 성공 요인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어요. 첫째, 베이비 붐 세대라서 수가 많다는 점, 둘째, 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균질성과 응집력을 획득했으며 학생-시민-노동조직의 연계를 이루어 내었다는 점, 셋째 이른바 세계화에 편승한 고도성장기에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는 점. 그런데 다른 한편, 이 세대는 세계화의 신자유주의 바람에 휘말리고 만 탓에―IMF 외환위기가 그 단적인 징표겠죠― 시장이 야기하는 불평등한 ‘신분의 위계화’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권력의 과두제화와 독점’에 안주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청년 세대가 불만을 가지고 반발하는 주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테죠.4

4. 이철승 교수는 386세대와 다른 세대의 소득격차가 커져가고 있고, 세대간 정치권력의 분포 비율 면에서도 이 세대 이후 젊은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여러 통계 도표를 통해 제시합니다.5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지요. 그 주된 논거는 세대간 불평등에 비해 모든 세대 내의 계급간·계층간 불평등이 더 심하며, 따라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및 갈등의 주요 원인은 세대 격차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세대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이용하려는 세력이 문제라는 것이지요.6 저는 이 논란에서 어떤 편을 들 만큼 우리 사회의 실증적 사실에 밝지 못합니다. 양측이 내놓는 통계들은 나름으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요. 다만, 세대내의 불평등 역시 크다고 하더라도 386이라는 1960년대 출생 세대의 경제적·정치적 비중이 다른 세대가 같은 연배일 때에 비해 다소 큰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런 차원과는 조금 다른 결의 사태에 주목해 보고 싶군요.

5. 저출산의 문제야말로 심각한 세대의 문제이고 또 세대간의 문제가 아닐까요? 노령층을 부양해야 할 젊은 세대의 부담이 늘어난다든가 한국 사회의 소멸이 우려될 지경이라든가 하는 얘기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예상되는 결과 이전에 자식 세대가 출산을 기피하게 만든 부모 세대의 책임을 먼저 문제 삼아야겠죠. 그리고 지금의 청년 세대가 처한 상황의 엄중함에 주목해야 할 줄 압니다. 저는 이것이 앞서 말한 공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산업화가 낳은 문제들이 집약되어 나타난 증상이 저출산이고, 여기에 대한 대책의 부재가 사회 발전 방향과 비전의 공백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윤석렬 정권의 탄생과 같은 현상을 낳았다는 것이지요.

6. 저는 몇 해 전에 저출산이 ‘생물학적 파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7 작년에는 영국의 BBC가 ‘한국은 출산 파업 중’이라는 표현으로 우리의 저출산 사태를 보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8 사전의 협의도 주도하는 조직도 없는, 그런 점에서 무의식적이지만 집단적인 저항인 셈입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청년 세대를 낳은, 그리고 현 상황을 만든 세대를 향한 (아마 오늘의 발표자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항의겠지요.

7. 산업화한 국가들 대부분이 저출산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지난 몇 세기에 걸친 급속한 인구 증가를 생각하면 장기적으로는 인구수가 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지 모르죠. 하지만 인류세의 위기를 개체수 조절로 극복하는 선구적 모습을 보인다고 자위하기에는 출산을 포기하게 되는 이유들이 너무 팍팍하고 출산율의 저하가 너무 가파릅니다. 그 원인들에 대해서는 차고 넘칠 만큼 많은 논의가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사태가 급속한 압축 성장의 대가라는 점이죠. 극심한 경쟁과 수도권 중심의 과밀집 등이 저출산의 원인으로 흔히 지목되는 그 결과지요. 여기에 덧붙여 저는 축약된 과정 탓에 욕망에 대한 반성과 조절의 기회가 없었거나 부족했다는 것도 무시하지 못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서구의 68혁명에 해당하는 계기가 생략되어 버렸다고 할까요. 이런 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늘어난 소득에도 불구하고 더욱 돈에 모든 가치 평가의 기준이 집약되는 오늘의 분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386세대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거예요. 비록 압축적 과정 때문에 오히려 지연된 민주화라는 과제에 치여 스스로는 어쩔 수 없었던 면이 있다고 해도 말이죠.

8.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이 ‘어떻게’는 오늘 우리의 주제인 헤겔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아마 헤겔이라면 혹 압축적 산업화에 대립하는 계기로 탈성장을 내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긴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탈성장 담론이 자리잡을 여지는 얼마나 될까요? 그것은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으로 여전히 고초를 겪고 있는 한반도 주민의 일부가 그 반대의 극을 추구하기 위해 영세중립국을 내세우는 일9보다는 더 현실적인 시도일까요?

9.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2018)에는 두 개의 원작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1983)가 직접적 원작이지만, 무라카미의 그 단편이 제목에서부터 윌리엄 포크너의 “Barn Burning”(1939)을 염두에 둔 것인 데다가, 이창동 감독 자신도 포크너의 그 작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예 영화 한 장면에 그 소설이 실린 포크너의 책이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주인공인 종수(유아인 분)가 포크너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 말을 들은 벤(스티브 연 분)이 그 책을 구해 카페에서 읽고 있는 것으로 나오죠. 그거야 어쨌든 이 세 작품은 다 같이 헛간(<버닝>의 경우 비닐하우스)을 태우는 걸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하지만 세 작품의 배경이 다르듯, 태운다는 행위의 의미도 조금씩 다릅니다.

10. 포크너의 헛간 불태우기는 소작농의 저항을 표현하죠. 지주에게 헛간은 대단한 재산은 아니지만 쓸모없는 것도 아닙니다. 몰래 불 지르고 적당한 손해를 입히기에 적합한 장소지요. 그래서 그 일은 추적당하고 재판받는 자못 심각한 사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반면에 무라카미의 경우에는 헛간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묘사되죠.10 적어도 그것을 태우는 소설 속의 부유한 젊은이에게는 말입니다. 그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헛간, 그러니까 완전히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사라져도 별 지장이 없는 헛간을 골라두곤 마음 내킬 때 몰래 태웁니다. 아니, 그렇게 한다고 얘길 하죠. 소설에서 이 헛간은 그가 별 부담 없이 사귀는 젊은 여자와, 그러니까 있어도 없어도 좋을 그런 여자와 암시적으로 겹칩니다. 이창동의 영화 <버닝>에서도 비슷해요. 돈 많고 세련된 젊은이 벤(스티브 연 분)이 주기적으로 태운다는 비닐하우스와 그의 일시적 애인인 해미(전종서 분)가 겹치죠. 그런데 큰 차이는 <버닝>에서는 태우는 행위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11. <버닝>의 주인공 종수는 무라카미 소설의 화자(話者)와 마찬가지로 소설가(정확히는 소설가 지망생)이기는 하지만, 쿨한 분위기의 전자와 달리 농촌 출신의 투박함을 잃지 않은 청년이지요. 그래서 그는 태워짐에 분노하며 결국 태우는 자를 태웁니다. 쓸모없음을 처리하는 자를 처리하죠. 물론 영화 마지막의 이런 장면들은 종수가 쓰는 소설 속의 사태라고, 그러니까 종수의 희망이 영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어떻든 <버닝>은 이렇게 저항을 재도입하죠. 포크너가 묘사한 소작농의 저항은 이제, 사회가 꼭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적 존재로 전락할 위험에 놓인 청년 세대의 저항이 됩니다. 이 저항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우리 현실에서도 아직 그렇죠. 출산율 저하는 어쩌면 소극적 저항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의 미래를 태우는 극단의 저항으로 연결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1. “보통 사람도 자동차나 PC 같은 개인 소유 기계는 통제할 수 있겠지만, 대형 기계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거기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진보된 기술 덕분에 엘리트는 대중에 대해 더 강화된 통제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불필요해진 탓에 대중은 불필요한 존재, 즉 체제에 떠넘겨진 쓸모없는 짐더미가 되어 버린다.”11 이것은 ‘유나바머’ 테어도르 카진스키의 선언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십수년간이나 미국 몬태나주 숲 속에 숨어 지내며 기술문명을 중단시키려는 목적으로 십여차례에 걸쳐 폭탄 테러를 저지르다 1996년 체포되었던 인물이죠(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에 금년 6월 숨을 거뒀지요). 카진스키에 견해에, 특히 그의 반기술주의 방법론에 찬성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의 문제의식에는 동조할 수 있는 부분이 꽤 있다 싶어요.

2. 사실, 청년 세대의 집단적 불안감에는 자신들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구심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이전과는, 그러니까 소외되고 착취를 당하더라도 스스로의 활동에 분명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던 시절과는 크게 달라진 점이 아닌가 해요. 코인에 대한 열풍도 외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도 이처럼 가치의 기준이 불확실해진 데 따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안감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헤겔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대해 제가 자신 있게 답을 내놓을 처지는 아닌 것 같군요.12 저로서는 이렇게 어설프고 산만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으로 그치고 다른 분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여야 할 듯합니다.

3. 끝으로 덧붙이자면, 저의 이 부족한 발표에 ‘헤겔 바깥의 헤겔’이라는 제목을 붙여본 데에는 오늘의 상황이 헤겔 철학의 태생적 배경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젝은 “헤겔을 넘어선 헤겔”13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던데, 아마 외적 조건보다는 내적 특징의 발전과 연속성에 더 무게를 둔 것이겠죠. 저는 오늘날의 철학은 외부에, 바깥의 변화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설명과 의미 부여의 틀을 짜나가야겠죠. 그것이 제가 주제넘게 떠올려 보는 오늘의 헤겔 모습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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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헤겔 레스토랑』, 앞의 책, 469쪽 참조.

  2. 외람되지만 저는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졸저 『배제의 배제와 환대』, 동녘, 2000 참조.

  3.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33쪽 이하 참조.

  4. 이 책이 조금만 더 늦게 나왔더라면(출간일은 2019년 8월 9일인데요), 조국 사태를 이 불만 표출의 대표적 사례로 연결시켰을 법합니다.

  5.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125쪽 이하, 또 70쪽 이하 참조.

  6. 대표적으로 신진욱,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2022 참조.

  7. 졸저, 『철학의 슬픔』, 그린비, 267쪽.

  8. https://m.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208262158001#c2b

  9. 「한반도 영세 중립화 선언」 참조.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Tw8byRcRmOEwZHZeg2TBgsPN7LBrsOaupmykENb-cgnZ74Q/viewform

  10.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반딧불이』, 권남희 옮김, 문학동네, 2014, 68쪽.

  11. 테어도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 조병준 옮김, 박영률출판사, 2006, 111쪽.

  12. ‘만듦의 문명’에 대비되는 ‘즐김의 문명’에 대한 전망과 기대는 제가 단편적으로나마 곳곳에서 계속 피력해 온 것이지만, 이 자리에서 거론하기는 어렵겠습니다.

  13. “Hegel beyond Hegel” ― 이것은 그의 책 『분명 여기에 뼈가 있다』(정혁현 옮김, 인간사랑, 2016. 원서는 Absolute Recoil, Verso, 2014)의 3부 제목입니다.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① [시대와 철학]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①

 

이 글은 2023년 11월 18일 부산대에서 열린 한국헤겔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저자의 기고로 게재합니다.

 

문성원(부산대 철학과)

 

 

1. 지금부터 약 반세기 전 루치오 콜레티는 루이 알튀세르의 헤겔 해석을 가르켜 “헤겔을 읽은 지 매우 오래되어서 헤겔에 대한 기억이 대단히 희미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주장”1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알튀세르가 헤겔에게서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을 그 사상의 핵심으로 간파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한 평이었지요. 제가 이 자리에서 이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우선, ‘헤겔을 읽은 지 오래되었다’는 말이 제게도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저는 1980년대 초에 정신현상학을 비롯해서 몇몇 헤겔의 저작을 잠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이후로는 헤겔에 대해 집중적 연구를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오늘처럼 여러 훌륭한 헤겔 전공자들 사이에서 감히 발표자로 나서는 건 정말 무모한 작태인 셈입니다.

2.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논의의 초점이 헤겔에 대한 문헌학적 이해나 해석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겠습니다. 콜레티가 알튀세르를 몰아세웠던 요체가 바로 문헌학적 정확성 문제였지요. 헤겔에 ‘주체’가 없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해석이라는 거죠. 아마 헤겔을 좀 공부한 사람이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저도 그랬지요. 우리 사회에 알튀세르가 뒤늦게, 또 압축적으로 수입될 당시에, 그러니까 1990년대 초에, 저는 헤겔에 대한 오해와 곡해 속에 받아들여지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의 편향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문헌학적 정확성에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오히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다소 무리한 주장이 부각되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데 있을 겁니다.2

3. 슬라보예 지젝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해 볼 수 있겠지요. 지젝이 오늘날 헤겔을 재론하고 현재화하는 데 중심에 서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그의 헤겔 해석이 자의적이며 문헌학적 근거가 취약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역시 ‘주체’에 대한 해석이 초점이 되겠지요. 알튀세르처럼 주체가 없다고까지 주장하진 않는다 해도, 지젝이 내세우는 헤겔의 주체는 라캉 식의 빗금 쳐진 주체, 자기 부정의 주체이니 말입니다. 반면에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헤겔의 주체는 발전과 진보의 주체, 자기 확장과 자기 확증의 주체일 겁니다. 문제는 이런 주체로는 더 이상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갖추기 어렵게 되었다는 작금의 사태에 있는 것이겠죠.

4. 철학과 설명력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헤겔의 경우에는 사후(事後)의 설명이라도 가능해야 그 스스로가 ‘미네르바의 올빼미’라는 별칭에 부합할 수 있을 테지요. 저처럼 철학이 과학적 성과의 한계와 인간의 이지적 욕구 사이를 그럴 법한 가정과 논리를 통해 메우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처지에서는 더욱 이런 요구를 물리기 어렵습니다. 나름의 한계 내에서나마 미래를 예측하고 거기에 맞추어 목적을 세우는 일에 간접적으로라도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적 작업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목적론에 대한 비판은 우리의 이런 활동 방식을 무차별하게 다른 존재들에게 적용하는 데서 오는 무리함을 지적하고 경계하려는 것이지, 목적이 우리 삶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닐 겁니다. 그리고 적절한 목적 설정과 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잘 짜인 설명이 꼭 필요할 테지요.

5. 한국에는 사회 운영에 대한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이 부재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유튜버인 안유화라는 분의 지적이었는데,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사회 운영 프로그램과 비교하여 나온 말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으나, 뼈아픈 비판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장기적 전망과 청사진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변화무쌍한 현실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그런 구도 자체가 민주적 사회 운영 방식과는 어긋나는 면이 있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우왕좌왕해온 ―실제로는 ‘우왕우왕’이었다고 보는 분도 있겠지요― 금세기의 경험 가운데서 우리 사회가 과연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지 새삼 자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6. ‘큰 이야기’에 대한 불신을 설파하는 것은 한참 전에 시효가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혹 아직도 “공산 전체주의”를 운위하는 시대착오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 활용하는 경우라면 또 모르겠지만요. 우리는 거대 담론의 파국이 초래한 반작용의 음울하고 착잡한 늪에서 진작 벗어났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여기에 오늘날 헤겔을 다시 거론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여깁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알튀세르와 지젝이 원본의 헤겔을 변형하고 왜곡하면서까지 헤겔을 놓지 않은 이유와 통하는 것이지요. 변화와 발전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그런 의미에서의 변증법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로도스’에서 뛰는 헤겔의 사유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7. 그렇다고 제가 이 자리에서 헤겔 전문가들과 함께 뜀뛰기 경쟁을 할 자신은 없습니다. 저로서는 다만, 우리 현실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들을 몇 가지 늘어놓아 보는 데 그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객석에 머물러 있어야 할 아마추어가 경기장에 끼어들어 물을 흐리는 꼴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1. 세상은 복잡하지만, 설명은 가능한 한 단순할수록 좋습니다. 헤겔 철학이 제아무리 어렵다고 한들,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니, 세상사보다는 쉽고 단순해야 할 테지요. 두 항의 대립과 모순을 통한 변화의 설명 방식은 그런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항이 본래 하나에서 비롯된 것인지, 두 항의 설정에는 논리적 연관 외에 다른 요소들이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자의적으로 끼어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기로 합시다. 저는 헤겔 논리학(또는 “논리의 학”)의 세부 내용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집단적으로 개발해온 각종의 주요 개념들을 하나의 체계로 다시 엮어낸 그 솜씨가 매우 경탄스럽다고 여깁니다. 두 항의 운동이 하나로 지양되어 모이고 재차 다른 두 항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과정들이 이어지고 쌓여서 두툼할 뿐 아니라 방향성을 갖는 체계를 이루어내지요. 단순함으로 복잡함을 구현해내는 멋진 직조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물론 여기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어요. 헤겔의 논의를 쫓아갈 때, 우리는 대체로 현재 진행되는 과정만을, 말하자면 한 채널만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우리 의식의 집중 방식이 보통 그러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른 채널들로부터의 간섭을 고려하기 힘들죠. 이른바 중층결정(Überdetermination)의 효과들을 놓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건 헤겔에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닐 테지요. 헤겔식의 과정을 좇아 구성된 얼개를 통해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할 경험적 보충이 필요한 사안일 겁니다. 채널들의 자립성은 실험실에서 외부 요인들을 통제하듯 추상적 사유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일 따름이어서 상대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또 그런 과정들의 총괄이라 할 ‘전체’ 역시 잠정적일 테죠. 지젝이 헤겔에서 현재 또는 미래로부터의 소급을 통한 의미 발굴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당연해 보입니다.3

3. 그런데 이 같은 잠정성은 특정한 ‘전체’의 불완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현실 또는 실재 자체의 잠재적 면모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죠.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 불완전한 ‘전체’들 뿐이라면, 그 너머의 현실이란, 아니 현상을 통해 다가오는 현실 너머의 실재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저는 이제껏 철학 논의에서 어쩌면 블랙홀 같은 모습을 보여온 이 현기증 나는 영역으로 넘어갈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두 가지만 짧게 짚어 두도록 하죠. 우선, 현상 너머의 실재에 대한 생각도 현상에 속하니까 현상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입론은, 새로운 경험의 가능성을 봉쇄하지 않는 한 현상 너머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고 따라서 그 실재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4, 다른 한편으론,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개방성만 주목하고 강조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응답(response)의 자세 면에서 무책임(irresponsible)하기 쉽다는 점.

4. 저는 특히 두 번째와 관련하여 헤겔적 사유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숱한 철학자들이 개방성의 근거나 양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곤, 블랙홀 근처에서처럼 우리의 시간이 가는 걸 잊어버린 듯한 인상이에요. 지젝이 내세우는 “무보다 못한 것(less than nothing)”이나 “덴(den)” 같은 데 홀린 채 말이지요. 보기에 따라선 바디우의 “사건(événement)”이나 데리다의 ‘대상 없는 기다림’ 따위도 유사한 작용을 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이런 모토들을 둘러싼 진지한 태도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같은 막연함을 한껏 세공해 본들 거기에서 더 이상 기대할 만한 것이 있을지 궁금하군요. 그것보다는 차라리 체계화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두 대립되는 계기들로 변화의 과정을 논리화하고 설명하려는 방도를 세련화하는 것이 진정 헤겔을 계승하는 길이 아닐까요?

 

 

1. “근대화가 함축하는 서구적 산업화를 추구하는 계기와 식민지적 종속에 대항하는 자주의 계기가 근대 이후 우리의 역사를 이루는 변증법적 대립의 두 축이라고 할 만하다.”5 몇 년 전에 저는 이런 식의 문장으로 시작해서 우리 역사에 헤겔적 변증법을 적용해 보려는 어설픈 시도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고 별다른 반향도 없었던 그 내용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연속적인 문제의식은 버리지 않았던 탓에, 최근 몇 년간의 답답한 사태들의 해명 요구에 유사한 방식을 참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재와 같은 검찰공화국의 성립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민주주의의 후퇴와 남북관계의 경색, 대미 대일 종속의 심화 등등 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고, 이런 점들을 되짚어 보는 데 이전의 사유가 소환되기도 하니까요.

2. 최근 몇 년간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제가 보기에 남북관계인 것 같습니다. 벌써 옛날 일이다 싶지만, 평창 동계 올림픽 남북 단일팀과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 평양 능라도 경기장의 연설이 있었던 것이 2018년, 불과 5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회상해 보면, 우리가 여전히 같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질 지경이지요. 더 흥미로운 면은 이런 변화의 주요 원인이 우리 사회 내부에 있지 않다는 점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 가시적 변곡점은 2019년 2월의 북미 하노이 회담 결렬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런 변화가 우연적이 아니며 그 뿌리가 결코 얕거나 만만하지 않다는 점이 이후의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죠. 지금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대북 정책 기조는 최소한 오바마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고, 그것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노리는 이른바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정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 트럼프냐 바이든이냐 하는 정권의 문제보다 더 깊고 단단한 수준의 것이죠.

3.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한반도에 배치하고 남한과 일본을 묶어 세우려는 미국의 의도는 현재 성공적으로 관철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앞서 언급한 ‘자주’의 계기는 후퇴하고 위축되었다고 해야 되겠지요. 이런 분위기 탓인지, 근대 이후 한반도의 운명에 압도적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외세와 지정학적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컨대, 한국전쟁의 실질적 주역이 미국과 중국이었다는 인식이 부각되고 있는 것도 오늘날 미중의 대립과 긴장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6 산업화 면에서도 외세의 영향이 강조됩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몰락하고 대신 한국과 대만이 반도체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게 된 것도 미국의 주도하에서 일어난 일이고, 따라서 현재의 우리 산업구도와 미래 전망도 미국의 대중국 견제 전략에 따라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것 같습니다.

4. 중국의 중요성도 만만치 않지요. 특히 금세기 들어와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세계의 공장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수출입의 주요 상대국으로서 한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좋은 불평등이라는 책의 저자는 한국에서 소득 불평등의 정도가 심해진 시기가 중국과의 무역에서 대기업이 호황을 누렸던 기간과 겹친다는 점을 여러 통계수치들을 통해 입증하려 했지요.7 저는 이런 주장의 사실에 입각한 설득력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탈중국’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2023년 8월 현재 중국은 수출과 수입 모두에서 20%를 넘는 비중으로 우리의 교역상대국 가운데서 여전히 수위를 차지하고 있지요.8 현재 한국 경제의 불황이 중국 경제의 상대적 위축이나 투자 및 무역 여건의 악화와 관련이 있음도 분명해 보입니다.

5. 미국이 되었든 중국이 되었든 이들의 영향력을 떠나서는 우리 사회의 형편을 논하기 힘들 테지요. 이제 동남아나 남미 등 다른 지역과의 관계 다변화에 힘을 쏟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대외의존적 산업구조가 바뀔 것 같지는 않군요.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와 같은 여건에서 산업화와 자주의 요구를 마주했을 때,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길을 택했을 경우 자주(自主)는 상당 부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6. 우리 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민주화’는 이런 산업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속적이고 연속적인 계기였다고 할까요. 물론 이때의 ‘민주’를 보편적인 것이라 여길 순 없을 겁니다. 다중(多衆)이 힘과 권리를 가지는 방식이 여럿일 수 있을 테니까요. 또 현재 실존하는 민주주의의 방식들이 과연 명실상부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면도 많죠. 하지만 한때 우리에게 익숙했던 구호로 말하자면, ‘민중민주’가 ‘민족해방’보다는 산업화와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예에서 보듯 산업화가 필연적으로 서구적 민주화를 수반한다고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경우는 국가자본주의 축적 단계를 넘어선 서구적 산업화와 민주(民主)의 요구가 적어도 한동안은 잘 호응한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7. 북한의 경우는 반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주의 요구에 산업화와 민주가 밀려난 꼴이라고 할까요. ‘민족해방’이 오래도록 실질적인 ‘민중민주’를 가로막았다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과거 소련과 중국 도움을 받았지만,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고집이 핵개발에 이르게 했다고 볼 수도 있겠어요. 지금도 명목상으로는 조중동맹 조약이 유지되고 있고 최근에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있으나, 남한의 경우처럼 외국 군대가 계속 주둔을 한다든지 합동 군사훈련을 한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하지요. 지속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주를 ―그것이 비록 민중의 자주라기보다 소수 지배집단의 자주라고 할지라도― 뒤로 물릴 생각은 지금도 없는 듯합니다. 요컨대, 거칠게 말하면, 한반도에서 남쪽에는 산업화 내지 민중민주의 계기가, 북쪽에는 자주 내지 민족해방의 계기가 우위에 선 채 다른 계기와 대체로 길항적 관계에서 작용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 그런데 이런 조야한 개관이 헤겔의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오늘의 현실을 해명하는 데 어떻게 연결이 된다는 걸까요? 일단, 산업화와 자주의 계기란 헤겔 식의 모순을 이루는 쌍도 아니고, 또 거기서부터 민주화나 핵무장 따위가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도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앞서도 언급했듯이, 개념이나 계기의 연결을 통한 설명은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단순화하여 재구성하는 방편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자주’가 모순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립하거나 상충하는 계기로서 그 구체적 형태들을 달리하며 작용해 왔다고 파악하는 것이 오늘의 사태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9. 무엇보다도 저는 우리의 현황이 산업화 우위의 맥락에서 작용하던 내부적 동인이 목표를 잃고 취약해진 가운데 외적 요인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국면이라고 봅니다. 단적으로 말해, 많은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뜬금없는 윤석렬 정권의 등장은, 민주화 이후 자주의 요소가 개입된 시도들이 좌절되고 그간의 산업화 방식이 낳은 문제들이 극복되지 못한 데서 비롯한 방향 설정의 공백을, 고유한 내용 없는 형식적 수단에 불과한 검찰 중심의 관료적 집단이 주워 ‘먹은’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강하게 도사리고 있던 미국의 요구가 그 비어 있는 자리에 손쉽게 파고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사태일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우리는 한 나라의 정책 결정 심장부가 도청을 당하고도 항의할 생각조차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신뢰’의 일방적 투명함을 목도하게 된 것이죠.

10. 촛불혁명이라는 놀라운 형태의 민주화를 발판으로 성공적인 출발을 보였던 문재인 정권이 궁지로 몰리기 시작한 과정을 돌이켜 보면, 계기들의 양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노이 회담의 결렬 이후 ―그 다음에도 2019년 6월말의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같은 몇몇 에피소드적 사건은 있었으나 실질적 변화는 없었죠― 남북의 관계는 사실상의 관계 단절에 이르기까지 악화 일로를 걸었고,9 대중의 관심과 기대도 급속히 식어버렸습니다. 조국 사태가 터진 것이 2019년 9월이니까, 대외 여건 악화에 내부의 문제가 겹쳐진 양상이라고 해야겠죠. ‘적폐청산’의 도구로 썼던 칼날에 베인 꼴이라고들 합니다만, 더 큰 문제는 대북 정책의 좌절을 뚫고 나아갈 만한 ‘적폐청산’ 이상의 목표가 없었던 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2020년 코로나에 대한 대응으로 국민적 역량이 결집되긴 했으나, 그해 여름부터 터진 아파트 가격의 앙등이 민심의 이반을 재촉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지요. 문재인 정권이 구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거푸 확인된 셈입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할 만한 동인이나 세력은 눈에 띄지 않았지요. 윤석렬의 검찰 정권은 앞선 정권과 맞서는 공허한 힘만을 과시한 채 아무런 비전도 없이 이 상황을 집어삼킨 격입니다. 그렇다 보니, 실제의 내용은 강력한 외세의 영향을 적극 수용하는 것 말고는 이전 정권에 대한 반대라는 퇴행적 방식으로밖에 채워질 수 없는 것이겠지요.

11.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의 목표는 이러한 퇴행과 종속성의 강화를 다시 되돌리는 데에 맞춰져야 할까요? 아마 대부분 그런 것 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새로운 변화의 기초를 제시하고 그에 맞는 목표를 설정하는 일, 여기에 헤겔을 끌어올 수 있을까요?


② 에서 계속

♦ 다음 글


  1. 「루치오 콜레티와의 정치적·철학적 대담」, 이병천·박형준 편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Ⅰ』, 의암출판, 1992, 276쪽.

  2. 이 점에 대해서는 졸저, 『철학의 시추 ― 루이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 백의, 1999 참조.

  3. 슬라보예 지젝, 『헤겔 레스토랑』,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4장, 특히 401장 이하 참조.

  4. 여기에 대해서는 졸고, 「현상에서 윤리로」, 졸저, 『해체와 윤리』, 그린비, 2012 참조.

  5. 졸고, 「끝나지 않은 변증법의 모험」, 졸저, 『철학의 슬픔』, 그린비, 2019, 192쪽.

  6. 대표적으로 2020년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미중전쟁> 참조. 그 내용은 책 (『1950 미중전쟁』, 책과 함께, 2021)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7. 최병천, 『좋은 불평등』, 메디치, 2022. 특히 7장, 8장 참조.

  8. https://www.kotra.or.kr/bigdata/visualization/korea#search/ALL/ALL/2023/8/exp (KOTRA 통계) 2023년 연간으로도 수출, 수입 점유율은 각각 7%와 22.2%로 수위를 보이고 있지요.

  9. 이로부터 일년 뒤인 2020년 6월 북한은 남북통신연락 채널을 폐기하고 급기야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었죠. 2021년 7월 통신선은 복원했으나, 같은 해 남북간 왕래 인원은 0명이었고, 이런 상황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욱식,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서해문집, 2023, 122, 216쪽 등 참조.

최소한의 합리성이 없는 정치 [시대와 철학]

최소한의 합리성이 없는 정치

 

정동훈(성공회대 대학원)

 

모두의 주목을 받은 화제의 보궐선거가 끝났기 때문에 윤석열 정부에 대한 조금 이른 중간평가를 해도 적절할 것 같다. 처음 이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생각보다 막막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지? 라는 생각이 제일 처음 들었다. 비판할 주제가 너무 많아서 1주에 3번씩 글을 써도 6개월은 버티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마 6개월이 지나기 전에 6개월 치를 새로 쌓아줄 것이다. 악재를 더 큰 악재로 잊게 만든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만큼이나 엉망이다. 윤석열 정부의 임기 첫날부터 지금까지를 평가하면 총체적 난국이라는 표현도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윤석열 정부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최소한의 합리성이 없는 정치’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개인적인 정치 성향이 좌측이다 보니 보수 정부의 정책 내용에 찬성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러나 나의 성향이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보수 정부의 정책이라도 정책 결정의 맥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보수 정부라면 충분히 추진할 수 있는 정책들이 있다. 이해가 어려운 경우에는 보통 보수당원인 지인들에게 설명을 부탁하고 들어보면 의사결정의 맥락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정책 결정은 보수당원들에게 물어봐도 이해할 방법이 없다. 보수당원이나 관계자들도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본인의 소속정당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결정들이 임기 초반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구태여 예시를 나열하지 않아도 아마 문득문득 떠오르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에는 최소한의 합리성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상 집권을 했던 세력은 최소한의 합리성을 가지고 통치를 했다. 예를 들어 현재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파키스탄은 군부의 성향이 폭력적이지만 주변국과의 분쟁을 적절히 조절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북한의 김정일 역시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위해 주한미군의 주둔이 이어져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것이 집권세력이 가지는 최소한의 합리성이다. 윤석열 정부는 어떤가? 임기 초부터 지금까지 국제정치는 물론 국내적으로도 분야를 불문하고 제대로 설명이 가능한 정책이 거의 없다. 몇몇은 자신들이 내세운 주장을 어떻게든 관철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있다. 최근 치러진 보궐선거가 가장 시의성 있는 예시라고 생각한다. 대법원에서 유죄로 판결이 나와서 보궐선거를 진행하는데 거기에 그 원인이 되는 인물을 다시 출마시켜놓고 그것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심지어 승리를 바라는 모습에 최소한의 합리성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공화정 체제를 성공적으로 이룩하고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번영까지 일구어낸 선진국에서 이러한 현상이 연이어 일어나는 현실은 매우 불행하다. 심지어 한국이 공화정이 아니라 왕정이었더라도 집권세력이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의사결정을 남발하는 현실은 집권세력은 물론 최종적으로 국민에게도 득 될 것이 전혀 없다. 정말로 안타까운 지점은 이보다 더 비합리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에 대한 평가가 무색하게 며칠이 지나면 더 비합리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패턴의 반복이 윤석열 정부의 현재라는 것이다. 앞으로 개선의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많은 이들의 평가가 그렇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정치는 수준이 낮아지고 국민은 고통받는다. 더욱 충격적인 진실은 윤석열 정부의 임기가 아직도 3년이 넘게 남았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합리적 정책을 기대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우리 공동체에 비합리적 이해가 팽배해질 것은 자명하다.

법 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법치국가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들 [시대와 철학]

법 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법치국가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들

이 글은 지난 1월 27일에 ‘말과활아카데미’에서 열린 기획강좌 <지금, 여기의 정치철학: 빼앗긴 법치주의 정치철학적 고찰> 중 한철연 회원인 한상원 선생님이 강의한 2강의 주요 내용을 강연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는 것임을 알립니다.

강의: 한상원(충북대), 정리: 편집주간

 

2023년을 지내는 지금, 이 시대는 빼앗긴 개념들의 시대이다.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공정, 반지성주의, 법치 개념은 전도되고 왜곡되어 쓰인다.

지금 우리 시대의 ‘자유’는 소극적 자유에 국한되지 않을까. 보수 정치권에서 100시간 일할 자유를 운운한 것은 시민의 자유와 부합되지 않는다. 개체로 분절되고 원자화된 자유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약화한다. 자주 회자되는 ‘공정’은 어떤가. 공정 이전에 평등은 2023년에는 사라진 개념이 되었고 그 빈자리를 공정이 채웠다. 지금 말하는 공정은 게임의 법칙으로서 공정이다. 공정한 경쟁이 유일한 정의관이 되어 강자는 약자를 위한 정책에 반발하고 역차별을 주장한다.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는 ‘반지성주의’는 정치적 대립 상대에 대한 공격과 비난의 구호로 바뀌었다. ‘법치’는 이미 선택적 법치주의가 되었다. 강자의 부정의는 사면으로 보호받고 노동자의 투쟁에는 법과 질서의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댄다. 약자의 저항은 법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아는 법치는 탈취되었다.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그간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여러 일이 일어났다. 2023년 1월 18일 사상 최초로 국정원이 민주노총을 압수수색했고, 2022년 11월 29일에는 화물연대의 파업에 정부는 국가가 국민(노동자)을 강압하는 초유의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하여 전체주의적 발상을 정당화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당일에 경찰은 질서 유지가 아닌 마약 단속을 주업무로 삼아 국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사고 예방이 아닌, 범법자 검거를 경찰 활동의 우선순위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사태들이 오늘날 민주주의 정신에 부합된 법치의 모습인가. 우리는 민주주의와 법치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도대체 법치주의란 무엇인가?

∎법치주의의 기원

영어권 국가들에서 법치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13세기 영국의 ‘대헌장[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서 비롯되었다. 대헌장은 영국의 국왕 존(John, 1199~1216)에 대항하는 귀족들의 요구로 제정되었는데 ‘자유민을 체포하거나 구금할 수 없고’(39항), ‘왕을 포함한 그 누구도 정당한 정의와 권리의 행사를 거부하거나 늦출 수 없다’(40항)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어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고 시민의 권리(자유)를 보장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다. 물론 농노민이 아닌 자유민을 대상으로 삼기에 귀족 운동의 한계는 존재한다. 또 서구에서는 미국혁명을 통해 법을 성문화하여 인격체가 아닌 법에 기반한 통치의 제도화가 이루어졌고 프랑스혁명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인권선언이 이루어졌다.

∎법치주의의 자기모순

절대군주제를 비판하고 시민정부론을 주장한 존 로크, 법치국가에서 자유를 중시한 몽테스키외, 자신과 타인의 자유가 공존하게 만드는 질서가 법이라 명시한 칸트 등 근대 법치주의 사상가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근대 법치는 자유주의와 떨어질 수 없다. 그런데 현대 자유·민주주의 국가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과연 확대되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근대 법치는 국왕의 전제주의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높였다. 그러나 현대는 개인의 소극적이고 원자화된 자유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대 법치주의의 현실은 통치권을 장악한 정권이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며 개인의 권리는 축소한다. 법 전통을 위배하는 현상이다. 이를 위해 통치 권력을 잡은 정권은 특정 적(敵)을 설정한다.

모든 통치 권력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적을 언급한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가까운 한국의 경우 정권에 따라 일본이나 북한, 또는 엄한 이란이 적이 되기도 한다. 내부적으로는 토착왜구나 종북세력으로 불리는 적들이 등장한다. 법치주의는 자유주의 이론의 역사에서 전제주의를 몰아내고 개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도입된 이념인데, 실상 법치주의라는 이름은 적에 대항하는 국가의 투쟁이라는 반자유주의적 논리에 활용된다.

∎이상한 현실

또 이상한 것은 법을 가장 잘 아는 검찰 출신들이 통치 권력을 잡은 지금 한국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공부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법치주의를 실행하지 않고 마키아벨리와 홉스, 슈미트의 얼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법은 그 자체로 동시에 권리를 의미하며 이것이 법의 존재 목적이지만, 법의 이름으로 특수 집단의 권리가 제한되고 억압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이 아닌 현대 여러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대에 법은 개인들을 시민이라는 법 권리를 가진 자로 호명하나 실상 많은 사람을 법의 권리적 공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다.

∎법적 주체

우리는 법적 주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 법학자 한스 켈젠은 법적 주체 개념을 비판하면서 법적 주체는 사적 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주관적 법 이해에 불과하다는 일리 있는 주장을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경제적 권리라는 소극적 자유라는 의미보다는 정치적 권리를 실현하는 보다 적극적인 권리의 차원에서 법적 주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조금 넓은 의미에서 법적 주체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미국 수정 헌법 4조에는 “불합리한 압수와 수색에 대하여 신체, 주거, 서류, 물건의 안전을 확보할 국민의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 현실에서는 흑인(소수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개인의 존엄은 박탈된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적 주체 운동이 벌어지게 되고 그것을 마주하는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 없이는 법은 권리를 실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봉기와 헌정(구성)의 변증법과 민주주의의 민주화: 평등자유 명제

발리바르는 봉기와 헌정[constitution, 헌법, 구성]의 변증법을 얘기한다. 구성은 아래에서 위로의 혁명적 행위를 수반한다. 구성 단계는 혁명적 모험주의가 아니라 봉기를 통한 제도화로 나아가는 지점이다. 프랑스 이주노동자들의 폭동에 대해 발리바르가 지지 의사를 표명한 것을 보면 발리바르가 얘기한 봉기의 맥락이 어떤 것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이미 제도화된 헌정도 다른 형태로 변동 과정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발리바르는 프랑스혁명이 제출한 프랑스 제1공화국 헌법의 전문(前文, 공포문)에서 자연권 사상가들이 내세운 인간이라는 말과 자연권 비판의 영역에서 특정한 정치 공동체에 소속된 시민이라는 말이 동의어라 본다. 여기에서 ‘평등자유[Egaliberté, equaliberty(equality+liberty)]’라는 명제를 도출하고 이것이 프랑스 인권선언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민주주의와 시민권 이념의 기원을 이루는 ‘평등자유’ 명제는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요구하는 과정에서, 해방을 향한 투쟁 과정에서 언제나 반복적으로 출현하게 된다는 것. 이로써 갈등을 통한 새로운 제도화로 귀결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가 항상 발현되지 못하므로 기존의 지배 질서에 대항하게 된다. 한국에서 노동자, 또는 장애인의 투쟁은 ‘인간이되, 왜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하느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해방적 운동이 봉기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시민권의 내용은 갈등적 관계라는 토대 위에서 규정된다. 그렇다면 파업, 시위 등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봉기적 계기를 억압하는 법치주의는 사실상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혹인 민권운동의 역사를 보면 시민권은 내부적 갈등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인 흑인 유색인종의 구분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구분되지 않고 시민권 안에서 구분되기 때문이다.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

랑시에르는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지를 묻는다. 한나 아렌트는 추상적인 인권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장될 수도 없다고 했다. 현대에 미국은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전쟁을 용인하기도 하지 않는가. 과거 프랑스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통해 인권은 천명되었지만, 주체들이 그 내용의 이행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고, 스스로 ‘인권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만 인권은 주체화와 정치화의 과정을 촉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정치적 술어를 증명하려는 주체들이 등장하고 그 구체적 내용을 규명하려는 시도 위에서 과연 자유와 평등이 현실에 존재하는지? 누가 자유롭고 평등한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는 것이다.

한편 올랭프 드 구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사용된 인간을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 ‘homme’가 남성을 의미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토대로, 이 권리선언이 여성을 배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일종의 패러디로 ‘인간(남성)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대항하는 ‘여성(femme)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작성한다. ‘단두대 처형은 남녀 모두 똑같이 적용하나 왜 여성은 남성과 달리 연단에서 연설을 못하는가’라는 올랭프 드 구즈의 항변은 이미 존재하고 합의되어 성문화된 내용을 증명하기 위한 정치적 주체들의 활동이다. 이러한 불화는 조화가 아닌 갈등에서 출발한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인권선언의 내용은 ‘누가 자유롭고 평등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범주에 생물학적으로는 포함되나 정치적으로는 포함되지 않는, 그리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여성의 지위에 관한 전복적 질문으로 ‘재맥락화’된다. 즉 정치적 주체는 성문화된 권리의 내용을 증명하는 주체이고 공동체의 공동체성을 증명하는 주체이며 배제를 넘어서는 공동체를 창출하는 주체이다.

인권의 주체란 자신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한 주체이자 자신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가진 주체이다. 법에 명시된 권리를 현실에서 갖지 못한 주체(예컨대 미국 내 흑인들 )와 실정법상 권리를 갖지 못했으나 인권의 이념에 의해 권리를 가져야 마땅한 주체(예컨대 이란 내 여성들, 유럽의 난민들)들도 인권의 주체이다.

∎권리는 자신의 주체를 요청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3조 제1항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라고 하여 ‘노동3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문화된 권리의 내용을 증명하는 주체로서 화물노동자들은 업무개시명령에 적용되지 않으며 헌법을 벗어난 명령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현행법에서 ‘나’를 배제하는 지점을 발견하여 그 권리를 주장할 때 그들은 곧 권리의 주체로 발생하는 것이다. 2022년 9월 중순 이후 이란 여성들이 ‘여성, 삶, 자유(Women, Life, Freedom)’를 외치며 반히잡 시위에 나서고 이로써 촉발된 반정부 시위의 주체들은 ‘인권의 주체’이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법과 권리 사이 간극의 모순 문제를 통찰한 인권 주체의 외침이었다.

자신이 가진 권리를 증명할 주체를 소멸시키는 법치주의는 법이 실현해야 할 권리를 억압하는 ‘치안의 논리’이다. 지금 2023년 한국에서 우리가 마주한 법치주의는 권리와 인권의 주체를 억압하는 ‘치안’일 뿐이다.


 

빼앗긴 자유, 도둑맞은 공정 [시대와 철학]

빼앗긴 자유, 도둑맞은 공정 [시대와 철학]

[출처] https://blog.naver.com/readingclassics/222995108058 (세상책방 진로글방)

이 글은 지난 1월 27일에 ‘말과활아카데미’에서 열린 기획강좌 <지금, 여기의 정치철학: 빼앗긴 법치주의 정치철학적 고찰>의 1강(강사: 김성우) 강의록 일부를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을 알립니다.

김성우(상지대)

 

자유를 묻는가

자유라는 개념을 정의 내릴 때는, 지배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자유의 반대말이 ‘지배’이기 때문이다.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노예가 왜 노예인가? 주인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노예이다.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는 바로 지배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런데 지배에 대한 관점에 따라 자유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유의 의미가 여러 가지이기에 자유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애매모호하다. ‘자유주의’라는 말이 혼란스러운 이유이다.

자유주의(liberalism)가 유래한 liberal이라는 말은 현재 미국에서는 진보를 뜻하고, 유럽에서는 소유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를 주창하는 시장주의(자유방임주의와 작은 정부를 외치는 고전적 자유주의나 이것의 세계화 버전인 신자유주의)를 가리킨다. ‘libertarian’의 경우도 지금은 시장만능의 극우논리로서의 자유지상주의(신지유주의)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최초로 썼던 단어이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는 바로 지배로부터의 자유이다.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지배 없는 삶. 이것이야말로 무정부주의자들의 꿈이다. 자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마르크스가 내린, 코뮌주의의 정의도 자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코뮌주의란 “자유로운 개인들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연합(어소시에이션)”이다.

그런데 지금의 자유주의는 재산권과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며 지배 없는 삶을, 재산(생산수단)이 있는 소수에게만 부여하고 재산이 없는 다수를 지배하는 논리로 전락했다. 자본과 이를 보호하는 권력에 의해 착취 받을 자유만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만, 즉 형식적으로 자유로울 뿐이다. 자유로운 소수가 다수를 예속하고 착취하는 자유주의의 자유는 형식적인 자유, 가짜 자유이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가짜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빼앗겼다는 점이다. 소수만 자유로운, 더 정확히는 죽은 노동인 자본만 자유로운, 가짜 자유를 외치는 자유주의가 자유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 루소, 칸트, 헤겔, 마르크스를 포함해서 사르트르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들 때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철학자가 외친 진짜 자유를 다시 외쳐야 한다. 그래서 진짜 자유를 실현하는 ‘세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만인이 자유로운 이성국가(헤겔)이든, 자유로운 연합(마르크스)이든, 다중의 절대민주주의(네그리)이든, 자유로운 시스템으로서의 국가(지젝)이든, 어소시에이션으로서의 세계공화국(가라타니)이든.

세계화로 인해 불평등이 심각해지자 자유주의자들이 극우 포퓰리즘으로 전락해서 자유의 이름으로 노골적으로 스스로 자유의 적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동시에 시장 실패로 인해 시장의 자유가 예전의 헤게모니(설득에 의한 지배력)를 잃었다. 그러자 우리 사회에서 보수 언론이 ‘공정’이라는 단어를 다시 훔쳐갔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교묘한 엘리트주의인 ‘능력주의’를 포장하는 기만적인 언어조작에 불과하다. 본래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말한 ‘공정’은 소수 엘리트가 부와 지위의 독점을 보장하는 논리인 능력주의가 아니라, 최소수혜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는 사회 정의이다. 유사하게 마이클 샌델도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이 능력주의를 내세워 공정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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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단어는 1980년대 민주화 이후에 우리의 간절한 열망에서 사라졌다. 어떤 낱말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가 있는 것 같다. 이제 자유라는 단어는 많이 화석화됐고 더 나아가서는 자본에 의해 독점화되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의미보다는 왠지 낡아빠지고 의미 없게 느껴진다. 도리어 정의나 평등 아니면 복지라는 단어가 훨씬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정의라는 철학적인 개념도, 평등이라는 개념도, 복지라는 개념도, 자유 개념이 빠지면 그 고유한 의미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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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화되었다. 그런데 민주화된 이후에 우리는 실제로 자유로운가? 일상생활에서 여러분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이 어느 때인가? 예컨대, 지도 교수님에게 매여 자기 발언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 심지어 고상한 음악을 하는 대학에서도 매를 맞는다. 다행히 물의를 빚은 그 폭행 교수는 쫓겨났다.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항상 무언가에 예속되어 있어요. 한 청소부 아주머니가 이런 얘기를 하셨다. 자신은 비정규직이고 그래서 일자리를 계속 유지해야 하므로 불만스럽고 고통스러워도 항의할 수가 없다고 한다. 심지어 법치의 이름으로, 여론의 이름으로 미국과 브라질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극우적인 엘리트 정부가 들어서기도 한다. 이로 인해 촛불시민이 이룩한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 앞에서 현재의 정치 시스템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지운 제도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촛불시민의 강인한 열망도 확인할 수 있다. 열망은 제도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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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속의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유와 반대가 되는 단어, 즉 ‘지배’와의 대조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모델 1은 ‘지배를 간섭으로 해석할 것인가?’에서 비롯된다. 이때, 자유는 ‘선택’이 될 것이다. 이것이 자유(지상)주의 모델이다. 모델 2는 ‘지배를 강제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이때, 자유는 ‘자율’이 된다. 자유는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하게 되어 자율적인 인간들이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모델이다. 모델 3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이때, 자유는 ‘해방’이 될 것이다. 이 모델은 자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좋은 공동체 체제를 통해 실현될 가치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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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첫 번째 모델,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이기적 개인’이 가장 원하는 자유는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따라서 첫 번째 자유의 모델은 신자유주의의 모델로서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누가 개인에게 간섭하는가? 간섭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는 점도 여러분이 이해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최소 국가’를 의미하다. 국가가 내 재산을 지켜주고 타인이 내 재산을 뺏어가는 것을 막아주기를 원하는가? 방범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다. 다만 세금을 많이 걷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세금을 많이 걷어가는 것은 로빈 후드처럼 강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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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두 번째 모델, 강제로부터의 자유

이제, 두 번째 자유의 모델이다. ‘지배’를 ‘강제’로 해석해 보면 이런 ‘강제’의 반대말은, 칸트가 말한 ‘자율’ 개념이다. 자율이란 내가 스스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고 나 스스로 규칙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만, 이때의 규칙은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학처럼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공자님이 말씀한 경지이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내가 내 뜻대로 하지만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지이다. 그래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 개념이 왜 공리주의나 신자유주의의 자유와 다른지 여러분들이 여기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법칙을 내게 스스로 부여하는 자율이 진정한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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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세 번째 모델, 예속으로부터의 자유

자유의 세 번째 모델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간섭이나 강제는 간헐적일 수 있다. 하지만, 전근대사회의 노비나 현대사회의 비정규직처럼 예속은 지속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예속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해방(liberation)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월레스가 외친 프리덤(freedom)이다. 노동해방과 민족해방과 같은 단어가 이러한 모델을 대표하는 말이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자유가 아니다. 해방의 자유를 의식하고 실현하려면 먼저 노예로 살아가는 예속적 삶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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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주화된 이후에 민주와 자유를 얻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건 형식적인 민주와 형식적인 자유에 불과하다. 자유를 형식적인 자유와 실질적인 자유로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형식적인 자유라는 말은 법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이다. 우리는 신분제 사회의 노예는 아니다. 법적으로 1인 1표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법적으로 우리는 똑같이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실질적인 자유, 실질적인 평등이 요구된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민주화를 통해서 형식적인 자유와 형식적인 평등을 성취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법 재판에서 자본과 권력에 유리한 판결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다. 예컨대, 여러분들이 당장 법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가? 돈과 연줄이다. 예컨대, 삼성 X파일 사건이 있었다. 삼성과 연관된 쪽에서 대권 주자한테 어마어마한 뇌물을 준 사건이다. 그런데, 이걸 기자가 신중하게 공표한 행위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사생활을 침해한 범죄라고 해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래도 그중에 다섯 분이 반대 의견을 냈다. 사실 반대 의견 내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 반재벌 성향의 법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판사를 그만두고 나와 변호사로 성공하기 어렵다. 재벌에 협조하면 엄청난 수입이 보장되어 있다. 반대하는 행위는 수십억 원, 많게는 수백억 원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판사들도 소수이지만 존재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조금씩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성취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법꾸라지’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선택적 수사’, 심지어 ‘조작적 수사’를 하는 검사와 이에 동조하는 판사도 존재하고, 이를 여론조작으로 돕는 언론인들도 있다. 이러한 엘리트들이 제도적 권한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우 포퓰리즘이 우리 시대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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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자유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자유’라는 단어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라는 단어를 극우에 양보해서는 안 된다. 참된 자유는 단지 국가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가짜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국가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바로 주체적인 ‘시민으로서의 자유’이다.

일상생활에서 예속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행위가 거시적인 노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시와 거시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가 말한 대로 개인화와 전체화는 같은 흐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근본 흐름은 같다. 다시 말하면 개인과 전체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어떤 하나의 흐름은 개인을 만들고 또 하나의 흐름은 전체를 만든다. 자유주의의 흐름은 자유주의적 시민을 만들고 자유주의적 국가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어떤 새로운 정치적 운동은 새로운 주체의 모습과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만든다.

우리 사회에는 불행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우리에게 강제된 제도인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체제’ 탓이다. IMF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1997년에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들어왔다. 불행하게도 구조화된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이 커졌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인간 모습을 제대로 형상화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들이 보여주듯이, 경제는 성장하는데 왜 대다수는 행복하지 않은가? 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는가? 왜 정의와 평등이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가? 이는 진정한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이는 정의도 평등도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정의와 평등이 없이는 진정한 자유가 성취될 수 없다. 따라서 정의와 자유, 평등과 자유를 함께 고민해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할 수 있다.

푸코가 말한 대로 철학이란 바로 현대에 우리가 사는 우리의 현실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며 동시에 우리의 현재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로크의 <정부론>은 오늘날 우리의 제도를 그리고 있다. 이 <정부론>에서 나온 자유와 평등이라는 언어가 미국 헌법의 언어이며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언어이다. 이처럼 고전이 우리의 제도와 틀과 우리의 삶의 방향을 만든다. 그러면 내가 어떤 고전을 읽는가가 우리 삶의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하다. 현재 만들어진 것을 이해하게 해준 거라면, 거꾸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우리가 이것을 다른 식으로 바꿔볼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는 데 의미가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이런 점에서 ‘진정한 자유’에 관한 정치철학적인 정립에 대단히 중요하다.

 

심장의 자유를 이성에까지

과연 트럼프적인, MB적인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정치권력 행사는 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아니면 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제도이지만 민주주의 위기라는 시대적 모순으로 인해 제도가 뒷받침하는 권한 ‘행사’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시점이다. 과연 우리의 입법권이 국민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오히려 우리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나 있지 않는가? 우리의 행정부와 사법부가 과연 우리 국민들에게 잘하고 있는가? 우리의 행정부와 사법부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불신은 널리 퍼져가고 있다.

입법, 행정, 사법이라는 정치권력이 이렇듯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게 사적인 것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공적인 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자유주의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전혀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개인화와 전체화는 같은 흐름의 다른 표현이므로 어떤 개인과 어떤 정치 공동체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하지, 공적이라고 해서 자유를 억압한다는 단순 도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출발점과 문제의식을 오늘 철학적으로 마련해 보고자 했다. 일단 자유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원초적이고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성취해야 할 가치가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자유를 향한 전쟁터에 있다. ‘심장의 자유를 이성적인 자유로 실현하는 것,’ 이것이 루소,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적 과제였다. 내가 살아가는 데 어느 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낀 그 순간이 바로 철학함의 시작점이다. 루소만 따로 읽으면 그 철학적 의미가 잘 엮이지 않는다. 고전들도 서로 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루소를 칸트나 롤스와 같은 사람의 입장 속에서 읽을 수 있지만, 헤겔이나 마르크스, 니체나 푸코 같은 사람들과 연결해서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계열로 책을 읽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고전들도 관계가 있으므로 여러 계열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다양한 계열의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한 사람의 철학도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의 망 속에 있고 그런 관계망 속에 서야 그 철학적 고전의 의미가 우리의 삶을 제대로 비출 수 있다.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우리 사회에서 독재적 억압에서 벗어난 민주화 이후에 왜 평등과 정의뿐만 아니라 다시 자유를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유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한쪽에서 독점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진정한 실현은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평등과 정의를 강조하다 자유를 놓쳐버리면 평등과 정의를 외치는 체제도 (구소련의 스탈린 독재정권처럼) 억압적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이 절규한 것처럼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 버렸다’는 자기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말은 독재라는 거시적인 적이 사라지면서 우리 스스로가 일상생활에서 자유의 적(敵) 노릇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통렬하게 지적한 것이다. 자유는 자유주의의 독점물이 될 수 없다. 시장과 선택의 자유는 단지 하나의 자유가 아니라 소수만을 위한 가짜 자유이다. 이러한 가짜 자유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진정한 자유에 역행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자유는 서양 근대 정치철학에서 신분제와 봉건사회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시대적 열망을 담은 주요한 가치어가 되었다는 점에서 자유는 단지 근대적인 것만도, 자유주의적 것만도 아니다. 자유가 있어야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 자유는 인간다움의 기초이다. 이런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이다. 정의는 평등한 자유를 실현하는 제도의 원칙이다. 공정은 자유주의적 정의관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이다. 소수의 횡포로 다수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회는 정의롭거나 공정하지 않다. 이를 능력주의로 공정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공정을 훔친 격이다. 물론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진정한 정의로 가는 디딤돌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루소, 헤겔,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정의이다. 민주주의가 위협에 받은 지금이 도둑맞은 공정을 되찾아 빼앗긴 자유를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정의로운 시스템을 만들 때다.


 

우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시대와 철학]

우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정동훈(성공회대 대학원)

 

올해 하반기에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있다면 아마 ‘책임’이 아닐까 싶다. 이태원에서 발생한 대규모 참사와 함께 수 많은 말과 말 그리고 말들이 이어졌다. 그 중 압권은 ‘책임이 없다’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수도 한복판에서 수 백명이 넘는 국민들이 죽고 다쳤다. 사건 직후부터 충분히 대비할 시간과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책임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심지어 집권여당도 ‘책임은 없다’라고 말했다. 대형참사 앞에 무작정 책임이 없다고 우길 수는 없으니까 온갖 말들을 쏟아낸다. “지자체가 공식적으로 주최한 행사가 아니니까”, “외국의 문화를 즐기다가 죽은 것인데” 등등 사태의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말들로 부자연스러운 무책임을 빚어간다. 그들의 말은 너무 가볍다 아니 저열하다.

이 가벼움은 11월을 맞아 절정에 이른다. 11월 초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다녀온다. 귀국하는 대통령은 마중나온 행안부 장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출근길 문답에서 한 방송사의 기자가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는 질문과 행동을 했고 그것을 막으려고 설전을 일으킨 한 비서관은 ‘불미스러운 사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임을 했다. 이 모습이 보여주는 의미는 참으로 애석하다. 이태원 참사에 정치적 책임이 있는 장관의 어깨는 감싸주면서 언론통제를 하지 못한 비서관은 사임을 하는 모습은 왕조시대의 모습을 방불케한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가 시작된 지금의 시점까지 이러한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아니 그들의 말은 더 저열해지고 있다.

또 한가지 가벼운 말은 ‘사건을 정쟁에 이용한다’는 말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 정부와 정치권의 본령이 아니던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한 사건보다 더 정치적이며 정치권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중요한 사안이 있을까? 특히 의회는 정쟁을 하는 곳이다. 정쟁을 통해서 사회적 갈등을 조절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의회의 본질적인 존재 목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행위의 정당성을 선출이라는 대단히 요란스러운 의식을 통해 보장하는 것이다. 즉 사건을 정쟁에 이용한다는 말은 정치와 정치인의 존재 목적을 부인하는 것과 진배없다. 집권세력이 그리고 선출직이 스스로의 존재 목적과 의의를 부정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정치의 수준이 얼마나 가벼운지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벼움이 비단 그들만의 문제일까? 정치인들이 가볍다고 저열하다고 비난하고 몇 글자 적으면 끝이 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우리 정치의 수준을 가볍고 무책임하게 만드는 저열한 언어들은 시작은 정치권이지만 결국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재생산 된다. 이 잔혹하고 허접한 언어들은 소위 시사평론가와 정치유튜버라는 사람들을 통해 빠르게 전파되면서 시민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그것이 선거나 여론조사 등을 통해 결과적으로 우리 정치의 하향평준화에 기여한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밝혀두는 것은 이 글의 주된 소재가 집권세력에게 큰 책임이 있는 사안이라서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본질적으로 제 1야당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이다. 결국 이 가벼움과 저열함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가볍고 저열한 언어가 근본적으로 문제적인 지점은 죽은 사람은 항변할 수 없음에 있다. 항변할 수 존재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결국 살아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흘러가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지면의 한계상 다 담을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세월호 참사와 비교해서 우리의 수준이 더 가볍고 저열해졌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각자도생을 하고 있나? [시대와 철학]

누가 각자도생을 하고 있나?

 

진보성(한철연 회원)

 

이 글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보 <KNOU위클리>(https://weekly.knou.ac.kr/articles/view.do?artcUn=3461)에 동시 게재함을 알립니다.

요즘 뉴스 기사나 개인 블로그 글을 읽다 보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을 자주 본다. 자본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각자 살기를 도모하다’라는 뜻의 이 용어는 팍팍한 현실에 남보다 먼저 안정된 사회 주도층의 대열에 합류하겠다거나, 자칫 사회의 변방에서 처량하게 서식할 자신의 처지를 경계하는 지금 사람들의 군상과 사회의 분위기를 너무나 잘 반영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인지 각자도생을 현대에 만들어진 신조어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실은 출전이 있는 꽤 오래된 말이다. 각자도생은 조선 시대에 국가적이고 공적인 위기 상황에서 종종 사용되곤 했다. 이 용어는 당시 국정의 책임자들 사이에서 발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 55권(선조 27년 9월 6일의 5번째 기사)에는 임진왜란 시기 평양 전투에서 패한 왜적이 퇴각하며 도성의 백성을 모두 죽인 일을 예로 들면서 ‘타지의 백성도 이를 미리 알게 하여 각자 살길을 도모할 것’이라는 내용의 문장이 보인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각자 목숨을 보전해야 했던 일차 대상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의 각자도생을 일컬은 말은 국가 내부의 위기사태에도 등장한다. 『순조실록』 12권(순조 9년 12월 4일의 1번째 기사)에서는 광주 목사 송지겸이 흉년의 실상을 상소하면서 “<백성들이> 지금 살던 마을을 떠나 각자 살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폐허가 된 민중들 삶의 처참함을 묘사한다.

한편 각자도생은 ‘各自圖生’과 함께 ‘各自逃生’ 즉 ‘각자 달아나 살길을 찾는다’라는 용어와 혼용되었다. 역시 임진왜란 시기의 기록인 『선조실록』 32권(선조 25년 11월 17일의 2번째 기사)에는 국경 변방의 일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인 비변사가 “경기의 동쪽과 강원도 북쪽에는 통솔할 만한 장수가 없어 그곳 백성들이 각기 살길을 찾아 <난민이 되어> 산골짜기에 모여 있는데 남의 나라 땅 일과 같이 되어서 매우 미안하다”고 고했다는 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각자 목숨을 보전하려 살기를 도모하는 것으로 묘사된 대상이 힘없는 백성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던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족들도 그러했다. 『인조실록』 17권(인조 5년 10월 4일의 4번째 기사)에는 “종실(宗室)은 모두 나라와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해야 할 사람인데 난리를 당하자 임금(인조)을 버리고 각자 살기를 도모한 것은 실로 작은 죄가 아니다”라며 위기 앞에서 무력했던 왕실 인사들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대목도 존재한다. 그런데 인조는 결국 피난에 임금을 호위하지 않았던 왕족들의 가볍지 않은 죄를 모두 사해주고 다시 국가의 녹봉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사례를 살핀 것은 아니나 각자도생의 기록을 살짝 들춰본 뒷맛은 씁쓸함을 넘어 분노스럽다. 과거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 측은한 감정을 느꼈거나 역사적 사건의 실상에 각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시국 동안 각자 거리 두기로 각자도생하던 사람들이 해방구로 몰려들었던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의 경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살기 위해, 희생자가 희생자를 살리기 위해 다시 ‘각자도생’ 할 수밖에 없던 현실과, 유가족들의 각자도생은 방관하며 자기 책임은 회피하려 들었던 국정 책임자들의 각자도생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개개인의 삶의 양태가 각자도생으로 나가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긴 한데, 사람들이 각자도생을 안 하면 안 되게끔 만드는 국정 책임자들의 각자도생은 어떻게(어찌) 두고 볼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더 도망할 곳도 더 도모할 거리도 이제는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현실이 조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문제라는 것.

새해, 촛불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절차 악용 쿠데타가 브라질에서 성공한 이유와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실패할 이유- [시대와 철학]

새해, 촛불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절차 악용 쿠데타가 브라질에서 성공한 이유와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실패할 이유-

 

김성우(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세계화의 파산과 극우 포퓰리즘의 재등장

 

7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박근혜 정부 집권 1년 차인 2013년 말은 민주 시민에게는 절망의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다룬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유럽의 변방인 구동구권 출신으로 당대의 떠오르는 스타 철학자였다. 지젝의 정세 인식을 바탕으로 이 논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의 정치적인 상황이란 보수 쪽에서의 신자유주의적인 협박이 있다. 보수가 훨씬 능동적이고 풀뿌리적인 포퓰리즘의 형태를 취한다. 매우 공격적인 자세로 자유주의적인 현 상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반하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더 나아가 “세계화된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퇴색하고,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자본과 시장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스템으로 전락한 채로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체제가 공고해지고 있다.”

극우적 포퓰리즘이 득세할 것을 염려한 상황 인식은 불행하게도 2012년 우리나라 대선에서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과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실현되었다. 또한 절차 민주주의의 허점을 악용할 것을 걱정한 불길한 예측은 브라질의 연성 쿠데타로 이뤄지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지고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다. 기존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개혁과 혁명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 이때 취약한 계층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 체제 전복을 막는 운동 세력을 조직화하려는 전형적인 극우적 해법이 있다. 나치즘과 같은 포퓰리즘이 그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로 극성을 부리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민주적 저항에 맞서기 위해 기득권 카르텔이 내세운 카드이다. 새롭게 선택한 것처럼 보여도 대단히 낡은 카드이다.

대망의 새로운 밀레니엄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의 노동당과 독일의 사민당과 같은 진보 정권들도 신자유주의적 언어로 자신의 정책들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논란을 일으킨 참여 정부의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나오게 된 맥락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2008년 월가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로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위력이 마법같이 사라졌다. 세계화의 불평등과 이를 공고히 하려는 반민주적 기득권 카르텔에 저항하는 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불길처럼 타올랐다. 2010년부터 중동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을 상징하는 재스민 운동과 2011년에는 미국에서 봉기한 ‘월 가를 점거하라!’라는 오큐파이 운동이 대표적이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과 혁명의 세계사적인 시대적 흐름 안에서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 실패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반민주적 정책에 국민들이 염증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선 캠프는 박정희 전 대통령 향수를 자극하는 포퓰리즘을 바탕으로 경제 민주화를 포장지로 내걸었다. 문재인 대선 캠프는 민주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도 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극우 포퓰리즘 등장의 세계적 신호탄이었다.

2013년 여름, ‘아랍의 봄’에서 탄생한 이집트 최초의 민주 정부가 법원과 검찰의 포위 아래 다시 군부 쿠데타로 무너지고 말았다. 프랑스와 노르웨이 같은 진보 정당이 오래 집권했던 나라까지 포함해 유럽 전역에서 극우 정당이 지지세를 넓혀 가고 있었다.

2016년 여름, 영국에서는 보수당의 일부 극우 정치인들의 아젠다인 ‘브렉시트’가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 영국에서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은 2019년 말 열린 총선에서 영국판 트럼프라고 불리는 보리스 존슨 총리의 승리로 귀결된다.

같은 해 여름, 브라질에서는 보수 야권 세력이 연방 검찰과 재벌 언론의 유착을 바탕으로 포퓰리즘 방식으로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마침내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켰다. 이 사건은 검찰과 사법부를 이용한 연성(soft) 쿠데타로 규정된다. 이 쿠데타가 연성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군부의 총칼이 아닌 법적 절차를 악용한 합법을 가장한 정권 탈취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 언론이 가세한 극우 포퓰리즘이 견고하게 작동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수사 절차와 사법 절차를 남용한 쿠데타는 당연히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달아 같은 해의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는 극우 기독교 세력을 등에 업고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세계화의 피해자인 백인 남성 노동자들을 자극하여 모든 주류 언론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다. 이는 가짜뉴스와 결합한 극우 포퓰리즘이 세계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극우 포퓰리즘 정치 세력은 특히 기독교 파시즘 세력과의 결합으로 운동의 기본 동력을 마련하고, 가짜뉴스로 여론을 조작한다. 이런 식으로 진보 정권에서는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며, 보수 정권에서는 친정부 시위를 이끈다.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민주진보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난민 혐오나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반난민 정서를 부추기고 반중국 정책으로 자기 지지 세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했다. 유사하게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종북’이 민주진보 세력을 매도하는 대표적인 언어였다. 현재의 극우 야권 인사들은 문재인 정부를 친북이나 친 중국적인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한다. 자신들이 독재의 후예이면서도 시장의 권력을 약화하고 민생을 보살피는 개혁 정책이나 법안을 입법화하면 (재벌과 부유층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재라고 맹비난을 가한다.

세계 전역에서 군부 독재 세력의 잔당과 재벌이 결탁한 기득권 카르텔은 언론의 여론 조작과 검찰의 선별적 수사와 사법부의 자의적 판결에 의해 포퓰리즘적인 동원력을 갖추고 민주진보 정부와 운동을 짓밟는 힘을 과시한다.

브라질에서 연성 쿠데타가 성공한 원인은 식민지 시절부터 오랜 기간 동안 구축된 5개의 연합으로 이뤄진 기득권 카르텔이 굳건한 데 있다. 반면에 현재 미국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절차 남용 쿠데타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 전 브라질 대통령. 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ilma_Rousseff_-_foto_oficial_2011-01-09.jpg

 

쌩큐, 박근혜! 쌩큐, 트럼프!

 

트럼프보다 4년 먼저 당선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12월에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가결되어 직무가 정지되고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당한다. 트럼프는 4년 뒤인 2020년 말 대선에서 패배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과정에서 탄핵을 방해하기 위한 포퓰리즘적인 선동과 막무가내식 시도에 촛불 시민들이 얼마나 혀를 내두르고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엽기적인 내막이 알려지자 우리 사회의 기득권 카르텔이 전가의 보도로 내세운 박정희 신화의 철갑이 벗겨졌다. 이로 인해 여론과 민심의 지형이 바뀌고 말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민주진보진영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역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촛불 시민들이 각성하자 운동장의 기울기가 역전되었다.

여기에는 기득권 카르텔의 내분도 한몫했다. 권력의 애완견 역할을 자처하던 보수 언론도 박근혜 정부의 문제점을 공격적으로 보도하고, 보수 정권의 사냥개 역할을 하던 검찰도 과감하게 국정농단 수사를 했다. 그 당시 심지어 친박에 속하는 여권 의원들도 탄핵 의결에 동참하고, 친보수적인 판결을 일삼던 헌법재판소마저 탄핵소추안을 인용했다.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박정희 신화가 사라져버려 거꾸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현 보수 야권은 4차례의 선거에서 전패를 했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도는 철옹성처럼 보였다. 올해 총선에서는 180석의 거대 여당이 탄생하고 문재인 정부는 성공적인 방역으로 경제에서도 선방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게다가 영화와 음악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한류는 세계적인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오래된 식민지 의식의 잔재인 열등감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진국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하지만 불행히도 작년 여름부터 브라질식의 연성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아직 진행 중이다. 조국 전 장관의 가족에 대한 강압적인 수사로 검란이 일어났다. 검란에 기초하여 보수 언론과 보수 야당은 가짜뉴스에 가까운 여론 공세로 극우적 포퓰리즘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다. 사법부는 이미 사법농단으로 독립성이 흔들리며 국민적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법 논리를 악용한 판결로 검란에 동참하고 말았다.

검찰에 유착된 보수 언론의 가짜뉴스에 가까운 편파적 보도와 보수 야당의 극우화에 기인한 포퓰리즘적인 선동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검찰과 사법부의 쿠데타 시도는 현 정부에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기득권 카르텔의 복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로부터 구축된 기득권 카르텔이 박근혜 탄핵 이후 발생한 균열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절박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록 대선에서 졌지만, 포퓰리즘적인 선동에 능한 까닭에 열성적인 지지자를 대규모로 모아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하였다. 그 지지세에 놀란 공화당마저 자기편에 서게 하여 정치적 외톨이에서 당을 장악한 정치인이 되었다. 게다가 고위 관료와 연방대법관마저 자기 사람으로 심어 미국이 오랫동안 구축해온 민주적 절차와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뉴미디어와 대규모 열성 지지자를 동원해 선거 조작을 외치며 엄청난 물량의 소송전을 펼쳤지만, 각종 법원에서 연달아 거의 모든 소송이 기각되었다. 고위 관료와 다수의 공화당 인사들로 주의회나 주정부를 흔들어 대선 선거인단 투표를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나름대로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법적 투쟁을 홀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쿠데타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합리적으로 예상된다.

그 이유는 우선 미국의 공화당은 식민지 해방 이후 생겨난 신생국들의 보수 정당처럼 군부 독재 세력의 잔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력이 당내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현재 미치 맥코넬 상원 원내대표나 부시 전 대통령을 비롯해 유력한 공화당 인사들이 대선 결과에 승복하고 있다.

더군다나 <뉴욕타임스>와 <CNN> 등과 같은 주류 언론은 언제나 날을 세워 트럼프와 대립하였고, 심지어 친트럼프 언론의 대명사인 <폭스뉴스>마저 선제적으로 트럼프에게 불리한 예측을 했다. 심지어 트럼프가 임명한 국방부 장관이나 법무부 장관, 심지어 법관들마저 공개적으로 트럼프의 명령을 거부하고 불리한 발언을 하거나 판결을 내렸다. 이는 다섯 영역의 기득권 카르텔이 균열되어 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할 절차적 민주주의를 허무는 쿠데타에 찬성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트럼프식의 연성 쿠데타 시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기득권 카르텔의 연성 쿠데타 시도도 실패할 것으로 예측된다. 우선 보수 언론에 대항하는 민주 시민들의 뉴미디어 언론이 있다.

보수 언론이 아무리 정부와 여권에 대해 맹공을 가해도 다소 출렁거림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40% 선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보수 언론이 조국 가족에 대해 80만 건 이상의 친검(檢) 보도를 했지만, ‘검찰 개혁과 조국 수호’를 외치며 서초동에 모인 백만 이상의 촛불 시민의 집회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극우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민주 시민의 참여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더욱이 민주 시민들이 정부와 여당을 견인하여 공수처를 설치하고 다양한 개혁 정책들과 법안들을 입법화하고 있다.

거기에다 군부 독재 세력의 후신인 현 보수 야권이 많이 약화되고 분열되어 있다. 물론 검언(檢言) 카르텔이 대단히 견고하고 상당히 많은 보수적 판사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 이 강고한 기반을 바탕으로 연성 쿠데타 시도가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검언 카르텔이 일으킨 쿠데타에 법조 카르텔이 참여하면서 민주 시민들의 촛불에 다시 불을 지르고 말았다. 이 쿠데타에 무사안일하게 대처하던 민주당이 민주 시민들의 성난 목소리에 떠밀려 2차 검찰 개혁과 사법 개혁 및 윤석열과 사법 농단 판사 탄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미 여권은 180석을 바탕으로 국정원과 경찰 및 검찰이라는 3대 권력 기관의 1차 개편을 한 바 있다.

하지만 검언과 사법 쿠데타 시도로 말미암아 문재인 정부는 그 임기 내에 민생 개혁, 검찰 개혁, 언론 개혁, 사법 개혁을 마무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4대 개혁 과제에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재보궐 선거와 대선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새해에는 민주 시민들의 분노가 지닌 엄청난 압력에 정부와 여권이 4대 개혁을 상당히 이뤄낼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현 정부의 대명사인 선제적인 검사 외에 국내 치료제 개발과 해외에서 개발 중인 백신 계약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기에 검사, 치료, 예방이라는 3대 조치로 코로나바이러스 퇴치도 기대한다.

트럼프의 쿠데타 시도가 이미 실패로 판정이 나고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쿠데타 시도도 민주 시민과 거대 여권의 연대에 의해 제압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니 촛불 시민들이여, 분노하라! 그 분노의 목소리를 크게 외치자! 정부와 여권이 4대 개혁을 향해 신속하고 과감하게 움직이도록!

 

국민과 국회의원을 생각한다. – “좌좀들 150만명”발언 즈음하여 [시대와 철학]

국민과 국회의원을 생각한다. – “좌좀들 150만명”발언 즈음하여

 

이영훈(한철연 회원)

 

얼마 전, 국내 제1야당 소속의 민모 국회의원이 개인 SNS에 올린 글이 뉴스가 된 적이 있다. 기자의 사견 등을 제외하고 사실만 나열하면 뉴스의 대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모 의원이 북한 열병식 사진, 교황 방한 사진, 나치당 뉘른베르크 당 대회 사진과 더불어, 이번 검찰개혁 시위 사진들을 함께 올리고 “좌좀들 150만 명”이라 지칭했다.’

이전에도 국회의원들의 과한 언사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야 이 친구야, 쟤들은 원래 그렇잖아, 대한민국 국민답게 행동하라고’라는 식으로 넘어갈 사람들도 있을 테다. 그러나 나는 민 의원의 이 발언에서 그저 쉽게 넘기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국회의원은 어떤 직책인가’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내가 알기에 국회의원은, 시험 봐서 입성하는 입법부나 사법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권한 행사를 대행하라고 국민이 뽑은 ‘선출직’이다. ‘국민을 대행’하는 ‘선출직’이라는 점은 국회의원이 관료조직과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 부분이 왜 포인트인지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번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 의원의 득표율을 보자. 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확인해보니 민 의원은 해당 지역구 투표인 119,224명 중 32,963명이 투표하여 당선됐다. 참고로 2등은 여당 소속이며 27,540표로 낙선했다. 바꿔 말하면, 참여하지 않은 인원을 차치하고서라도, 민 의원 지역구 주민 중 2등을 뽑은 약 27,540명 중의 적어도 일부는 민 의원과 반대되는 정치적 성향을 지닐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아마도 그들 중 또 몇몇은 이번 검찰개혁 시위에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시위는 안 나갔어도 이 시위를 지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민 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 지역구 구민들, 그리고 더 나아가 전 국민의 뜻을 대행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민 의원 지역구의 예에서 보았듯이 상식적으로 그와 생각이 다를 가능성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민 의원은 이번 시위에 나선 국민을 “좌좀들 150만 명”으로 규정했다.

뭐 국회의원이니까, 이 정도 언사는 넘어가도 된다고 보는지? 혹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상적인 것이니까, 그도 사람이니까 내지는 정치인이니까… 이런 발언도 내뱉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서는 그의 발언에 대해 전혀 불편해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국민이 뽑았고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이 자기와는 생각이 다른 국민을 ‘사고능력은 전혀 없는 채 식욕에 따라 인육을 탐해 움직이는 죽어 썩어버린 상상의 시체 덩어리’인 좀비에 빗대어 “좌익 좀비 150만 명”으로 규정했다. 이 국회의원은 많은 국민들이 그 발언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더럽다, 더러워’라며 혐오의 발언을 또 다시 내뱉었다. 이 국회의원의 발언에 관대한 당신들의 동조 혹은 묵인 덕분에 민 의원과 그의 소속 당은 물론 당신들과 정치사상이 다른 국회의원까지 똑같이 국민을 무시할 수 있는 실질적 근거를 하나 더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생각해 봤는가.

 

그런 의미에서, 하나 묻는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국민을 거리낌 없이 모욕하는 민 의원의 발언에 관대한 당신과 그 소속 정당의 이해관계가 달라졌을 때도 저들이 과연 당신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일 것 같은가? 아니면 그저 자신들을 대표하는 자들일 것 같은가.

아마 어떤 사람들은 당신들과 그 정당이 영원히 뜻을 같이하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단히 안타깝게도, 그런 정치인에 대한 순진하기까지 한 ‘믿음’이 깨지는 실례는 특정 당적과 상관없이 지난 우리 현대사에서 수도 없이 봐 왔다.

 

자신과 같은 국민인 검찰청 앞의 저 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죽은 고깃덩어리 살육귀로 규정하는 자와 그런 인물이 소속된 정당이 과연 민의를 대변할 자격이 있는가? 과연 누가 저들에게 묵인과 동의로서 자신만을 대변할 면허를 주었는지 의문이다.

 

물론 청와대 대변인이었고 KBS 9시 뉴스 앵커 출신인 민 의원이 단지 세속적이고 친숙한 언사를 구사해보고자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의 언어를 뜻도 잘 모른 채 사용하는 ‘실책’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도 사람인지라 잠시 과한 언사를 했다고 얼른 태세를 바꾸어 사과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고 결과는 모두가 감당할 뿐이지만 국민의 입장, 또 시민의 입장에서는 ‘국민을 대행하는 자’가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고, 어떻게 발언해야하는지 깨닫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국회의원은 어떤 직책인가’라는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시대와 철학]

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정동훈(2018-시민대학 수강)

 

조인성 주연의 ‘더 킹’은 검찰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태수는 목포를 기반으로 하는 건달의 아들이며 동네에서 알아주는 ‘양아치’이다. 어느 날 태수는 한 주먹도 아까워 보이는 검사에게 아버지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공권력의 무서움을 실감하며 검사의 꿈을 품는다. 우여곡절 끝에 검사가 된 태수는 결의를 다지며 정의로운 검사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과 막막한 현실의 벽에 굴복한 태수는 결국 정치검찰의 길을 선택한다. 영화는 주인공 태수라는 인물을 통해 그동안 현대사에서 검찰이 어떻게 권력과 유착하여 기득권을 수호하고 민중을 탄압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검찰의 모습이 마치 영화 ‘더 킹’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검찰의 문제를 요약하면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를 받지 않는 집단’이라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근대적인 검·경찰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경찰인력을 대부분 일제 치하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을 그대로 대거 활용했다. 친일파가 가득한 경찰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당시 한국의 제도를 만들던 인물들이 선택한 방법은 인원이 적은 검찰에게 강력한 권력을 주어 경찰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선택은 검찰을 막강한 힘을 가진 괴물로 만들었다. 검찰은 총 2천여 명 남짓한 인원으로 11만 명이 넘는 경찰을 지휘·감독하며 수사, 영장, 기소, 공판 등등 사실상 법조의 전 영역에 있어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검찰은 견제 받지 않는다. 정치권력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의회가 정부를 정부가 의회를 견제한다. 또 정치권력은 궁극적으로 시민의 선출이라는 방법을 통해 평가를 받고 감시를 받는다. 하지만 검찰은 선출직이 아니다. 그렇기에 선거라는 민주사회의 가장 큰 시험으로부터 자유롭다. 형식상 법무부의 지휘·감독을 받지만 형식일 뿐이다. 검찰을 통제할 정치권력은 언제든 수사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기에 건드리기 어렵고 시민에게 검찰은 개인에게는 감히 저항조차 두려운 공권력이기 때문이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마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검찰이 검이라면 검을 쥘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택지는 두 가지다. 협력 혹은 개혁이다. 전자는 보수정부의 선택이었다. 민주화 이전 독재정부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지난 보수정부만 생각해도 검찰이 얼마나 권력과 유착하여 공생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후자는 노무현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검찰에게 개혁은 개혁이라고 들리지 않는다. 전쟁을 하자는 말로 들릴게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힘을 없애겠다는 말이니까. 노무현의 검찰개혁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다시금 유착한 권력과 검찰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다시 검찰개혁을 선언한 정부가 집권했고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다. 그리고 검찰은 다시 한 번 전쟁을 시작했다.

 

현대적인 사법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선 사적제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사적제제를 인정하는 순간 사회는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질게 뻔하다. 대신 국가는 ‘국가형벌권’을 인정하며 개인의 ‘복수’를 금지하는 대신 직접 나서서 범죄를 ‘처벌’한다. 검찰은 이러한 국가형벌권을 담당하고 실현하는 기관이다. 검찰은 선량한 시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며 악을 처벌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다. 그래서 그토록 강력한 권한을 검찰에게 준 것이다. 하지만 누차 말했듯 그동안 검찰은 자신의 권한을 사유화하고 권력과 유착하여 결과적으로 국가형벌권의 남용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전직 대법원장의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이 사법부의 문제를 담고 있다면 스폰서검사, 떡값검사 등의 부패검사들 그리고 검사 출신 전관예우 변호사들의 모습은 검찰의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수사 과정부터 재판까지 하나의 사건에 있어서 검찰의 권한은 때로는 대통령의 그것보다 강력하기에 그 자체가 비리와 유착을 부르는 원인이다. 또한 견제 받지 않기 때문에 내부의 비리가 고발된다 한들 언제든 제 식구 감싸기가 작동한다. 설사 비리로 인해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든다 해도 그 자체가 전관 출신 변호사가 되어 활개치고 다닐게 뻔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라고 헌법은 천명하고 있다. 국가기관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던 상관없이 국민의 것이다. 국가기관은 국민을 향해야한다. 검찰도 예외일 수 없다. 검찰의 주인은 국민이고 검찰은 국민의 검찰이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 작용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여지가 있다. 그렇기에 민주국가의 헌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 바로 권력분립이다. 국가권력을 나누어 견제와 균형을 꾀하고 그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려는 기본원리이다. 권력분립의 입각해서 볼 때 검찰은 어떠한가? 너무도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견제 받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검찰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 권한의 행사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과도하게 침해 될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검찰개혁엔 다양한 쟁점들이 있다. 검찰 스스로가 개선해야할 부분도 있지만 제도 자체를 개선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검찰 권력의 문제가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 장치의 부재로 요약된다면 제도 개선의 쟁점도 ‘권한을 나누고’ ‘견제 장치를 만든다’로 요약할 수 있다. 전자의 대안이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다. 이것은 2018년 행안부와 법무부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관련 법률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후자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이른바 ‘공수처’의 설치이다. 이것도 어려운 산이다. 제 1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지만 둘 다 얻기 어려운 아주 힘든 상황이다.

 

아직 검찰은 무서울 것이 없다. 검찰개혁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고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와 여당의 힘이 점점 빠져가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제 1야당이 아직 버티고 있으며 혹여나 그들이 정권을 탈환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승승장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칼은 칼이다. 내가 휘두르기만 하면 모든 것을 도륙할 능력이 있어도 휘두르는 사람도 얼마든지 베일 수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두 명의 전직 대통령들을 생각한다면 알 수 있다. 검찰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재벌도 차가운 감옥으로 아니 죽음으로도 내몰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정치인도 재벌도 무서울 게 없는 존재라면 그들만큼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일반 국민들은 얼마나 나약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을지. 검찰개혁의 명분과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노무현의 한을 풀기 위해서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검찰이라는 거대한 권력기관 앞에 항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질 바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