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⑦ 쥐구멍에 강제로 볕들게 하기

쥐구멍에 강제로 볕들게 하기

 

김성우(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맑스의 저작 중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대단히 희귀하지만 주옥같은 정치 분석에 해당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60여 년간의 혼돈의 과정에서 겨우 획득한 의회공화정이 결국 4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독재체제로 붕괴되었다. 그것도 그토록 평범한 한 인물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양상을 분석하면서 맑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한다. “헤겔이 어딘가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세계사의 모든 거대한 사건과 인물은 말자하면 두 번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즉,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인민혁명당 사건은 1974년 4월 군사독재에 맞서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당시 중앙정보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을 구속기소했으며 법원은 이 중 8명에게는 사형, 15명에게는 무기징역 및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 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자체 조사결과,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반국가 단체라고 발표된 인혁당은 서클 수준의 단체였으며 수사과정에서 각종 고문이 자행됐다는 점이 인정됐다. 그리고 2차 인혁당 사건의 중심이었던 ‘인혁당 재건위’는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박문각) 결국 이 사건에 관해서 2007년 서울중앙지법의 재심 판결은 1975년의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여러 번의 정권 교체를 이뤄낸 개명된 대한민국의 2013년 무더운 한여름에 인혁당 사건이라는 비극이, 맑스의 경구처럼 다시 희극으로 일어난다. 유신독재시대의 중앙정보부가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인혁당이 다시 이석기를 필두로 한 지하혁명조직(일명 RO)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이 사건이 희극적인 이유는 관련 당사자가 모두 현실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극소수가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환상을 논의하는 장면이 있다. 그들 스스로도 이를 농담이라고 변명한다. “국가안보 수호”에 전념하는 한 국가기관의 원칙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이다. 그래서 그 기관은 은밀하게 불법적인 정보조작으로 대선에 개입한다. 결국 그 국가기관은 자신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는 국민들의 잇따른 촛불 시위와 정치권에서의 조직개혁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수세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은 그 기관이 억압과 거짓을 향한 무명의 헌신에 전념한 까닭이다. 반전을 꿈꾸며 그 기관은 무명의 헌신이라는 원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번에는 유명(有名)의 헌신에 착수한다.

그 기관은 극소수의 비현실적인 환상이 내란음모죄에 해당한다며 수사를 선언한다. 그것도 공익을 빌미로 불법으로 녹취한 자료를 가지고서 말이다. 내란이란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행위를 말하며 음모란 이를 위해 모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극소수의 비현실적인 환상의 담론이 이러한 폭동을 모의하는 구체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혹시 이러한 비상식적인 관점은 “국가안보 수호”를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여 자신의 불법 행위를 망각하게 하고픈 그 국가기관의 오래된 망상은 아닐까? 이와 같이 이번 수사에 대해 국민적인 의혹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그 기관이 자신의 원칙인 무명의 헌신을 저버리고 국가의 정치판을 모조리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그 기관에 햇볕이 잘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에게는 커다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이런 까닭에 국민은 역사적으로 반복된 이토록 웃기는 사건을 접하면서도 웃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⑥-잔적(殘賊)의 도당은 전복된다

잔적(殘賊)의 도당은 전복된다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국정감사가 끝났다. 결과는 뻔했다. 누구는 할 말을 당당하게 했지만 한 톨의 거짓 없이 사실을 실토해야 할 사람은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일은 없다하고 없던 일은 있다했다. 영혼 없는 공복(公僕)이라고 했던가. 영혼 없는 공복은 사복(私僕)이다. 이들은 이제 충성스런 사복을 자임하며 자신들의 과오를 한 여름 이슈로 마감하려 한다. 하지만 아직 추억의 사건이 되기에는 이르다. 누가 그만두라고 했나?

국정원 심판에 대한 국민들의 의지는 아직 불탄다. 시내거리에 촛불을 든 시민들, 언론?지식인들, 각 처의 운동가들, 정치관계자들까지 모두 지난 대선의 진실을 폭로하고 이를 통해 상식을 벗어난 행정수반과 정치권의 행태를 리셋시켜 그들이 초심으로 귀환함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정치공작들과 교묘한 장난질에 실로 감탄(?)을 표할 일이 많아질 것은 예상되는 바이다.

그런데 그 장난질이 도를 넘었다. 고인을 관에서 끄집어내 시정에서 조리돌리듯 하는 것도 모자라 검증이라는 이유로 남북 국가정상의 회담내용까지 공개해버리고 이제는 유신정권에서 자행되었던 내란음모죄까지 부활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을 조장하고 국가를 전복의 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국정원의 행태다. 국정원이 자행한 결과로 발생한 조직 내부의 불안과 위기를 민주주의와 사회의 진보를 지향하는 시민, 인사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맹자는 “인(仁)을 헤치는 것을 잔(殘)이라 하고 의(義)를 헤치는 것을 적(賊)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지금 국정원은 국민들 사이의 믿음과 신뢰를 잃어버리게 했으니 인을 헤쳤고, 헌법을 유린하며 자행한 불법을 스스로 묵과하고 또 다른 정치공작을 벌이고 있으니 의를 헤쳤다. 인의를 뭉개버린 무리는 ‘시정잡배’일뿐이며 전복의 대상이다. 또한 그 사태를 관망만 하고 있는 박 대통령은 맹자의 말대로라면 필요 없는 지도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생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헌법질서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는 것은 국정원과 청와대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조속히 대선개입 의혹에 대한 정확한 수사와 진실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국민이고 시민이다. 민주주의에서 개혁의 대상이 개혁을 요구하는 주체를 역으로 공격한다면 맹자가 말한 잔적(殘賊)을 헛갈려 아는 것이다. 잔적은 민생을 돌보지 않고 국민을 기만하며 국론분열을 조장하는 교활한 권력에게 붙이는 말이다. 잔학하고 교활한 권력은 개혁의 대상에서 곧 전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⑤-‘민주주의’라는 유령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민주주의’라는 유령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조은평(건국대 비정규직 교수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이 유령에 맞서 집권세력들은 ‘종북’과 ‘안보’라는 낡아빠진 카드를 들이밀며 이 유령의 출몰에 대응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허울 좋은 명목을 내세워 낡고 늙은 보수주의자들의 결집을 호소한다.

하지만 정작 ‘민주주의’라는 유령의 출몰을 초래한 것은 바로 집권세력 자신들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이 국정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며 분노하는 외침이 시작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절차에 국가 기관이 개입한 사건. 그래서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민주주의적 절차를 훼손한 사건.

이런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국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 긴 세월을 거쳐 비로소 민주주의 공화국을 탄생시킨 시민들은 민주화의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유령이 배회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미 ‘민주주의’는 죽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저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보다 민주적인 현실이 실현되리라 기대하고만 있었을 뿐이다. 민주주의라는 실재는 단지 ‘지연된 미래’에 불과하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었다.

언론이 제대로 된 말을 전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무참히 쫓겨나 자살을 택했을 때, 빈민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교육 현장이 더 이상 제대로 된 현실을 가르치지 않게 되었을 때, 이미 ‘민주주의’는 한 걸음 씩 뒤로 밀려나 죽어가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지연된 미래’에 대한 기대감마저 철저히 무너져 내렸을 때, 오늘날처럼 ‘민주주의’라는 유령은 다시금 그 봉합된 틈새를 뚫고 출몰하는 법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 유령이 배회하는 오늘날의 상황은 더 의미심장하다.

집권 세력은 점점 더 초조해 하며, 이 유령의 출몰을 어떻게든 봉쇄하려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출몰한 유령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거리를 채우고 있는 촛불의 물결은 이제 점점 더 큰 물결로 넘쳐날 것이다. 그리고 그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을 경험한 우리들이 단지 책임 있는 사과나 국정원의 개혁만을 요구하며 머뭇거릴 때, 앞으로 또 다시 새로운 ‘민주주의’의 유령은 언제든 다시 출몰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만국의 민주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 각자의 민주주의 슬로건으로 이 유령의 출몰에 함께하라!’고. 아마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민주주의자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기에 이 슬로건은 터무니없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유령의 요구가 무엇인지. 어쩌면 바디우가 말한 ‘모두의 귀족되기!’, 그래서 우리 모두가 우리 삶을 좌우하는 현실에 관여할 수 있기를 요구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령이 요구하는 민주주의다. 당신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게 아닌가? 그렇다면 당신들이 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내라! 그리고 함께 이 유령의 출몰을 맞이하자!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병적 상태들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시대와 철학]

예외상태와 합리성의 신화적 퇴행 : 한국 사회의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하여

 

?한상원(베를린 대학)

 

예외상태의 일상화. 벤야민과 슈미트를 이어받아 아감벤이 사용한 개념이다. 아감벤은 일상, 즉 규칙이 되어버린 예외상태 속에서 법의 지배가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개념이 한국사회만큼 잘 적용되는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정치적 영역부터 사적 영역까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건 일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예외상태가 아닐까? 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이었고 내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선동하면,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호남인들을 죽이자고 선동해도 정상참작이 된다. 일상이 예외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예외가 일상을 지배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일상이 된 예외상태의 사례는 분단이다. 한국은 70년 가까이 남북간 준전시상황이고, 성인 남성은 2년간 전쟁훈련을 받으며, 실제로 북한정권은 핵무기 쏘겠다고 툭하면 협박해온다. 이러한 일상적 위기를 계기로 삼아 국가권력은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쟁취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해 공격을 감행한다. 2010년 북한이 연평도에 미사일 공격을 하자, 이 패닉상태 속에서 여당은 과감하게 예산안 날치기를 감행한 바 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비판이 일자, 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발언을 했다면서 쟁점 전환을 시도했다. 툭 하면 등장하는 맹목적인 ‘종북’ 여론몰이를 보면, 이러한 낯선 타자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기반성적 이성의 목소리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북한 트위터 계정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몇 년간 구속과 압수수색 그리고 재판에 시달려야 하는 이 상황은 온라인 매체까지 스며든 일상화된 예외상태의 사례다.

분단 문제는 한국인들의 일상 속에 숨어든 병리적 심리항태의 사례 중 하나다. 외부의 적(북한)에 대한 공포와 이로 인한 내부의 적(우리 안의 간첩)에 대한 광기 외에도, 양적 경제성장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 외적인 국가적 상징(한류, 김치, IT 등)에 대한 과도한 우월의식 등, 한국인들의 심리상태는 그야말로 병적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경향의 사람들은 흔히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모토를 즐겨 사용한다. 이 용어는 한국 사회를 상식(형식적 민주주의와 법치)이 아니라 비상식(부패, 학벌, 권위주의, 지역감정 등)이 지배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여기서 ‘상식’이라는 단어는 철학적으로 볼 때 ‘합리성’이라는 단어와 조응하는 듯하다. 즉 이성적인 견지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합리성이 아닌 비합리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이 겨냥하는 궁극적 목표는 따라서 ‘합리성이 그 순수한 형태로 관철되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놓치고 있는 점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비상식’, 즉 ‘비합리성’이 실은 그 대립물인 ‘합리성’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합리성의 기획, 근대적 계몽의 기획은 매우 늦게 추진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5?16 쿠데타 이후 등장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물론 르네상스적 인문적 의미의 계몽주의와도, 유럽에서 시민사회와 보편선거권 이후 도입된 정치적 의미와도 구분되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지배한 경제적, 양적 합리성과 유사한 개념이다. 다시 말 해, 군부정권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합리성 기획은 합리성 개념이 포괄하는 다양한 맥락을 추상해버리고, 오로지 양적 성장을 지상과제로 설정한 일면적인 합리성인 셈이다.

4?19 혁명의 주요한 요구 중 하나는 ‘자립경제 건설’ 이었다. 이것은 곧 미국의 원조에 종속된 국가를 근대적 자주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반영한다. 쿠데타 이후 집권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은 이승만의 자유당도, 4?19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도 수행하지 못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여 원조경제에서 탈출하고, 자립적인 근대적 산업국가를 만든다. 이 점에서 5?16은 4?19의 계승이라는 우파들의 역사관은 일부나마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그것이 5?16과 독재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한국 사회에서 유럽의 17~18세기 절대왕정 내지 계몽군주에 상응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종의 합리성 기획이라고 볼 수 있는 박정희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동시에 한국사회의 병리적 퇴행을 낳는 원인이기도 했다. 양적 성장에 대한 집착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결과론적 규범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장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배척당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담론은 성장의 논리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오늘날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으며, 이를 무마하고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경찰 수뇌부가 수사를 방해했다는 증거와 증언들이 등장함에도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멀리 보면 이러한 한국 근대화의 실패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계몽군주’ 박정희는 ‘신화'(일인숭배, 딸로 권력세습)로 퇴행했다. 이 퇴행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신화가 된 계몽’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부합한다. 합리성(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은 비합리(박정희 신화와 독재 정당화)로 변증법적으로 전화된다. 이러한 설명도식은, 한국사회의 비합리적, 병리적 심리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여러 각도의 이론적 설명 중 하나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적 병리상태를 “비합리성으로 전도된 합리성”으로 규정하고 그 배경에 1. 일상화된 예외상태로서 분단, 2. 지난 세기 이뤄진 합리성 프로젝트의 실패가 있다고 규정한다. 이를 개념규정하기 위해 나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차용하였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 지적하는 급진적인 핵심은 합리성이 양적이고 도구적인 성격으로 후퇴하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합리성 프로젝트(계몽)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점에 있다. 교환원칙과 이윤축적 원칙에 기반을 둔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합리성이 지닌 여러가지 잠재력을 하나의 것 ? 경제적, 양적, 도구적 이성 ? 으로 환원하는 근본적 배경이다.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합리성 기획이 신화로 퇴행한 것은 애초에 합리성을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만 사고하게 만든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의 메커니즘이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특수한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한 진단은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이라는 보편적 구조에 대한 변화와 결부되어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보편적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당장 실현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닌 한에서, 어떻게 제한된 조건 하에서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병적 상태들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우리를 무거운 고민 속으로 이끌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④-국가폭력의 완성 ?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국가폭력의 완성 ?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이원혁(한철연 회원)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해 연일 계속되는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나 촛불집회에도 불구하고 전·현직 정보당국의 책임자들과 또 그 연계가 의심되는 전·현직 대통령들은 그 어떤 책임 있는 행동이나 발언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오히려 여당은 대선불복이니 국론분열이니 하면서 적반하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뻔뻔함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지지하는 소위 콘크리트지지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국가권력의 강고함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국가라는 이름과 힘에 의해서라면 그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이 그들의 행동과 언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이번 사건이 유신시대를 연상시킨다고 말하는 이유기도 하다. 국가에 의해 진행되는 강압과 음모에 대해 그것을 행한 이들이 도덕적, 양심적 가책을 받지 않고 카메라와 국민 앞에서 저토록 당당한 것은 국가권력은 그래도 되고 그럴 힘이 있으며 그 힘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 덕분에 가능하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시대의 권력층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민주주의 정치와 가장 동떨어진 의식이다.

근대 사회계약론의 환상과는 달리 국가는 사람들의 합의로 구성,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신의 거대한 폭력성에 의해 국민을 구성하고 포섭하여 국가의 체계를 유지시켜온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난 세월 지난한 민주주의 투쟁은 이러한 국가 폭력을 견제해 왔으며 이를 통해 사회 공동체의 붕괴를 막아왔다. 근대 이후의 국가는 사회와 국민에 대한 수많은 폭력과 강제를 진행해왔지만 민주주의 본질에 대해서는 감히 범하지 못했다. 설령 범하는 국가권력이 있었더라도 패망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 국가권력이었다는 점은 역사가 명백히 보여줘 왔다. 즉 국가권력과 그것에 심취한 권력자는 전제적 권력을 완성하기 위해 국민을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까지 진행하지만 그것의 말로는 손에 잡히는 역사책 한권만 펼쳐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여당과 청와대는 부정선거 발언이나 대선불복은 금도를 넘은 것이라 말하지만 정작 금도를 넘은 것은 정보기관을 통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인 보통선거의 근간을 흔든 권력이다. 이번 사건은 여당의 표현대로 금도를 넘은 사건이며 사회적 금기의 파기는 묻혀 질래야 묻혀질 수 없는 것이다. 무능한 야당의 무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장이 날이 갈수록 더욱 커져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 책임 당사자의 뻔뻔함이 이대로 계속간다면 뿌리가 흔들리던 민주주의는 오히려 들풀처럼 일어나 뻔뻔하게 흔들던 손을 날카롭게 베어버릴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③-장물 취득 정권의 탄생

장물 취득 정권의 탄생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대다수의 국민들은 국정원이 어떤 기관인지는 알아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분명히 알고 있는 점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그들은 막강한 권한을 국민도 모르게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회조차도 그 예산 집행 내역을 알 수가 없는 집단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사용한 권력은 한국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일에도 동원되었다는 점도 일부 밝혀진 바 있다.

이번 대선 정국에서 드러난 국정원 댓글 사건은 그들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집단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댓글 작업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직원은 종북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까지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북을 이롭게 하는 것이 종북이라면 그들은 가장 위험한 종북 세력임에 틀림없다. 남북 대치 국면에서 북을 가장 이롭게 하는 것은 남한 사회의 국론 분열과 민주주의의 퇴행일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선과정에서 이루어진 국정원의 행위는 그 어떤 공작 정치보다도 유치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막대한 세금을 들여 무엇을 하나 했더니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댓글 작업이었다. 마치 값비싼 다이아 반지 사주었더니 집안 유리나 자르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울러 박근혜 정부 역시 이번 국정원 댓글 사건의 피해자임도 드러났다. 왜냐하면 박근혜 정부가 처음부터 정통성을 잃은 실패한 정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출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법상 장물 취득죄는 미필적 인식의 성립만으로도 적용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불거진 이 문제에 대해 적어도 미필적 인식의 차원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이 훔친 민심이라고 하는 장물을 취득한 정권이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이 이번 문제에 대해 미봉적으로 대할수록 국민들은 그들의 인지 가능성에 대한 더욱 가능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가장 상식적인 국민들의 판단은 구린 구석이 없으면 도대체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는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덮으려 하지 말고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정원과 같은 권력 기관이 더이상 민심을 우롱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반역적 행동을 하지 않도록 철저한 개혁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정보기관의 특수성이라는 수사를 동원해서 그들의 범죄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패한 정권 혹은 성공한 정권은 정권초기에 나올 말이 아니라 정권을 내려놓은 이후에 나와야 할 평가인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② –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말아먹은 자 누구냐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말아먹은 자 누구냐

강지은(한철연 회원, 웹진편집주간)

드디어 1954명의 언론, 출판계 인사들이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한국언론은 죽었다”고 비웃는 해외 언론들의 비난을 이제 면할 수 있을까. 아직 멀었다. 권력과 유착한 메이저 언론들은 ‘국정원 대선 개입’에 분노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왜곡, 유린하고 있다. 이들이 권력에서 독립해 국민을 위한 목소리를 내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 이명박 정권부터 작금의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지는 권언유착은 흡사 5공화국을 떠올리게 할 만큼 친정권적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은 누가 뭐라해도 권력에 의한 부정선거임을 피할 길이 없다. 부정선거로 권력을 쟁취한 자들이 앞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못할 짓이 무엇이겠는가. 권력과 유착한 국가정보기관의 선거개입이 명확한 이 마당에 대한민국의 국민은 어떠한 미래도 꿈꿀 수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죽은 꽃에서 어떤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배 열사들이 핏자죽이 아직도 선명하건만 이 시대의 민주주의는 죽은 꽃이 되어버렸다.

국정원의 선거개입만 문제가 아니다. 권력기관의 부패가 드러난 이 시점에 대선개표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시행되었어야 할 수개표가 진행되지 못했다.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확인되어야 할 투표용지가 오류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기계에 맡겨졌다. 민심은 천심이다. 천심을 기계에 맡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언론과 야당은 국정원대선 개입문제 뿐만 아니라 수개표까지 관철시켜야 한다.

언론을 타지 못하면 없는 일이 될 만큼 강력한 것이 언론이다. 언론은 오감을 곧추세워 헌정질서를 교란시킨 범죄자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역사에 늦은 시기란 없다. 언론은 권력의 하수 노릇을 집어치우고 국민과 민주주의 수호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① – 은밀하게 위대하게

은밀하게 위대하게

 

한길석(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교육부장)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장탄식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을 아끼지 않는 어느 국가 기관 종사자들의 전사적 열망 때문이란다. 하지만 난 그들의 순정을 믿는다. 그들이나 나나 ‘자유와 진리’를 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서, 그들은 내곡동 어느 골짝에서.

1960년대 이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던 이 은밀하던 기관은 구제금융기의 경제적 위기를 맞아 ‘정보는 국력’이라는 대단히 경제적인 모습을 잠시 보였다가 어느새 ‘진리와 자유를 향해 무명’으로 ‘헌신’할 줄 아는 위대한 변신을 하게 된다. 경제적 가치로만 폭주하고 있는 이 한심한 세상에서 참으로 고고하게도 ‘진리와 자유를 향한 무명의 헌신’을 외치다니…역시 그대들은 ‘은밀하게 위대하게’ 사는구나.

‘자유와 진리’에 대한 이들의 이름 없는 헌신은 작년 이후 줄곧 너무도 교묘하게 수행되고 있다. 그들이 행한 ‘NLL 공작’과 ‘사이버 여론 조작‘이라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의 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찬란한 부활을 위한 ‘고육지계’다. 이건 ‘자유와 진리를 향해’ 헌신해 온 동업자만 알 수 있는 직감인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민주화 이후 민주화의 의미를 마구 ‘민주화’시켜 결국 ‘홍어 삼합’과 함께 좆으로 가공한 ‘우중’의 가공할 행태에 격분한 나머지 민주주의의 진리와 자유를 위해 악명을 뒤집어쓴 헌신의 가시밭길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죽어가는 민주주의의 회생을 위한답시고 이름과 명예를 걸고 싸우고 있는 데 반해 우리의 전사들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부활을 위해 이름 따위는 제쳐두고 달려든다. 상대가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름 없는 헌신은 민주주의의 번영을 위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진리를 들이대면서 반민주주의의 doxa를 물리치는 것도 방법이지만, doxa의 거짓됨을 분명히 드러내게 함으로써 진리에 기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997년에 세운 ‘북풍공작’이 그 좋은 예다. 이 황당한 계획에 꼬여들게 만든 그들의 교묘함이란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그러니까 우리의 전사들을 욕하는 건 이제 그만 두기 바란다. 오늘은 저들의 품 안에 안겨 그들 입 안의 혀 노릇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일 이들의 무명의 헌신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행동을 더욱 단련하는 데에 좋은 망치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대들이여 민주주의를 위한 반민주주의 행보에 더욱 표독스럽게 매진하기를. 그대들이 더러워질수록 민주주의는 더욱 아름답게 빛날테니…. 건투를 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성명서-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려야 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성명서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려야 한다

국정원의 선거개입 논란과 함께 국정원과 새누리당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나라가 시끄럽다. 나아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중·동 신문은 대화록의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왜곡보도를 일삼고 있다. 공개된 회의록만 보아도 이들 언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텍스트만 읽고 콘텍스트는 읽지 못하는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NLL포기 발언’이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무마하려는 정치적 의도 속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이 ‘국정원의 자발적 댓글 공작정치’ 이상의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정상회의록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혹의 핵심에는 김무성 의원이 있다. 지난 6월 25일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총괄본부장이었던김무성 의원은 “지난 대선 때 이미 내가 그 대화록을 다 입수해서 다 읽어봤다”라고 발언하였다. 국가 기밀인 정상회의록이 특정 정당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사실로 확정된다면 박근혜 정부는 물론이고 국가의 위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국가 정보기관이 특정 정치 세력에게 국가기밀을 넘겨 선거에 개입하였기 때문이고 국가의 공공성 그 자체, 중립성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정원 수장은 “국정원의 명예와 직원의 사기 진작을 위해 공개했다”고 말하는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이 땅의 국가가 ‘공적인 것’(res publica)으로서의 국가(Republic)인지 반문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묻는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일찍이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다중의 표현으로, 자유로운 인간들의 정치적 행위로, 모두에 의한 모두의 통치로 이해하였다. 즉 민주주의는 절대적 힘의 표현이며, 따라서 구성적 행위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 국정원 선거개입은 자율적인 주체들의 정치적 행위라는 민주주의의 구성행위 그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를 구성할 수 있는 대중의 권능(potestas)을 무력화하고 민주주의를 실제적으로 생산하는 힘(potentia) 또한 상실하게 만든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조사 계획서는 조사범위를 “전 국정원장의 불법 지시 의혹 및 국가정보원 여직원 등의 댓글 관련 등 선거 개입 의혹 일체”로 한정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이번 사건이 단순한 ‘국정원 댓글 사건’이 아니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자율적 존재의 힘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대중의 힘을 드러내는 것 그 자체를 부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절대적 민주주의를 향한 집단의 힘과 실제적인 민주주의의 구성을 통해서만 풀어낼 수 있다. 민중의 힘의 표현과 그 힘을 통한 실제적인 민주주의의 구성이 민주주의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실제적인 민주주의를 구성하고자 하는 힘을 더욱 증가시킬수록 우리 모두는 더 많은 권리를 갖는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을 표현할 때 생긴다.

따라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이번 사태에 대해 침묵할 수 없었다. 진정한 민중의 권력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은 정치를 민중의 사회적 힘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선열들의 피와 땀을 먹고 자랐다. 인간 존재는 고갈되지 않는 자유를 향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한 여정 역시 멈출 수 없다. 이 땅에서 철학은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주체가 바로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이 삭제될 수 없는 시간성 속에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힘을 조직하는 한편, 통치 권력의 부정성과 언론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관료적인 경직성과 이데올로기적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 어떤 권력도 억견과 위선으로 생성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꺾을 수 없다.

2013년 7월 16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응답하라! 학생들의 시국선언에 침묵하는 언론과 어른들이여![시대와 철학]

응답하라! 학생들의 시국선언에 침묵하는 언론과 어른들이여![시대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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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대학의 어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난 6월 18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국정원선거개입 관련 시국선언을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을 시작, 의견을 수렴해 다음 달 중 시국선언을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일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과 경찰 축소수사에 대한 총학생회의 입장’을 발표했다. 이어 20일에는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시국선언 추진을 공식 발표했다. 비운동권 성향의 서울대 총학생회의 이러한 행보는 곧 다른 비운동권 총학을 포함한 대학들의 동참 선언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종교계도 서서히 이에 동참하고 있다.

이번 시국선언 추진 운동은 SNS를 통해 확산된 것과 비운동권 총학, 총학이 아닌 ‘보통 학생’들의 적극적 참여가 특징적이다. 총학이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시국선언에 불참하겠다고 밝힌 성신여대는 SNS를 통해 하루 만에 자신을 ‘보통 학생’이라 밝힌 119명이 모여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119명의 학생들은 정치적 중립의 기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총학생회장의 직함으로 대통령 직속 기구에 소속된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 하면서 ‘사회문제에 학생 자격으로 목소리를 내는 시국선언’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주저하는 총학의 언행은 모순입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현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에서는 정치외교학과 학생 4명이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이렇게 대학가에서 운동권, 비운동권의 범주를 깨고 자발적 정치참여가 시작되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다. 대학 내의 운동이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교수나 재야인사, 종교계에서 시국선언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먼저 시작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반면에 교수 등의 대학가의 ‘어른’들은 그 어떤 뚜렷한 제스처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침묵은 촛불로까지 번지고 있는 대학가의 시국선언과 지지호소의 열기를 식히고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시국선언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해야만했던 그 교수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다른 선언을 준비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때 당했던 상처를 아직도 수습 중인가? 그도 아니면 시국에 대한 온도차가 있는 것일까,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냉소주의에 빠져있는 것일까? 교수들도 개인적으로는 활발하게 의견개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집단적 입장 발표도 없는 작금의 상황에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20대는 88만원 세대, 혹은 삼포세대라고 일컬어진다. 기업은 그들에게 취업하고 싶으면 자신의 절박함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 절박함이란 것은 수시로 학점으로, 토익 점수로, 해외연수경험으로, 자기소개서로 바뀌건만 취업문은 절대 넓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정부는 복지 혜택을 받으려면 자신의 빈궁함을, 경제적 비참함을 만인에게 공개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런 그들이 정치에 등 돌리도록 종용한다. 그런 세상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리고 그 노력에 지지를 호소하는 대학생들에게 지금 그 스승들, 멘토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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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왼쪽부터 네번째)과 학생들이 2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규탄하고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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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언론의 권력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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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쪽 날개로만 힘겹게 날아오르려 하는 대학생들을 언론은 노골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학생들의 시국선언을 파급력 없는 단순한 ‘선언’으로 끌어내리려는 언론은 침묵하는 방법으로 정치권력을 돕는다. MBC와 YTN의 메인 뉴스에는 시국선언에 대해 아직까지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또한 포털 사이트 ‘네이트(NATE)’에서는 21일에 ‘시국선언’ 단어를 검색하면 사이트가 먹통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논란이 커지자 네이트는 단순한 기술상의 오류라고 해명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시국선언’을 검색하면 검색어가 ‘시국의 선언’으로 자동으로 바뀌어 검색되는 기현상이 있었다. 또한 포털 사이트 ‘네이버’ 또한 21일에 ‘다음’과 달리 실시간 검색순위에 ‘시국선언’에 관련된 검색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이 시국선언을 검색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슈파이팅을 저지하려는 의도인지, 그저 단순 오류인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네이트와 네이버의 검색어 조작논란은 이러한 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매번 있었고, 그때마다 전문가들의 조작에 대한 근거제시와 함께 네티즌의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이보다 더 적극적인 언론들은 정치세력들과 함께 돌팔매질에 돌입했다. 조중동은 아직 판결이 나지 않은, 수사과정에 있는 사건에 대해 ‘시국’ 운운하는 것은 과잉행동이라는 자신들의 주장과 함께 따라서 ‘시국’에 대한 논쟁이, 선언에 찬성하지 않는 학생들의 반발이 학내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리고 특히나 학생들의 선언이 무게가 없다거나, 그저 또래의 유행 같은 집단행동이라는 등의 ‘권위 있는 교수’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 파급력을 깎아내리고, 갈등요소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진부하지만 언제나 효과를 보장하는 ‘물타기 수법’도 등장하고 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이에 대한 수사 축소 및 은폐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한 사건을 앞에 두고도, NLL 대화록을 공개하겠다는 유치하고 진부한 협박이 통하리라 생각하는 정부와 국정원, 집권여당의 수준이 개탄스럽다. 하지만 그보다 더 쓰라린 점은 이러한 방법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꾸준히 진행되어온 권력의 언론 잠식은 박근혜 지지율 70%라는 경이로운 효과를 드러냈다. 인사 참사와 외교에 대한 무능력이 여실히 드러났음에도 말이다. 그러니 권력이 학생들의 선언문따위야 묵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끝없이 ‘권력앓이’하고 있는 언론이 든든히 버티고 서서 적절한 어휘와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국정원의 선거개입 정황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그 사안 자체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중대하고 위급한 문제임에도 언론은 애써 이것을 ‘민감한 정치적 문제’로, 따라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논조로 문제를 축소시키려 한다. 2008년의 촛불집회는 국민의 주권과 건강권이라는 이슈를 중심으로 공감대 형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뛰었다. 그래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여론 형성과 의제 설정을 위해 제 4의 권력으로서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언론은 이명박 정부의 방통위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해고·해직의 칼날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괴사(壞死)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게 제 기능을 잃어버린 언론은 정권의 나팔수로 활동하던 지난 세월을 그대로 반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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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촛불은 번져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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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지역 대학생들은 21일부터 광화문에서 ‘국정원 선거개입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돌입했다. 주말인 23일에는 시민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이 광화문에 모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날, 경찰은 최루액을 분사하였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고교생의 얼굴에 최루액을 분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첫 촛불집회에서 경찰은 집회의 양상을 고려하지 않고, 진압수위를 높이는 충성심을 보인 것이다.

‘민감한 정치적 문제’라는 용어로 국민을 주춤하게 만들고, ‘종북좌파’라는 틀거리로 학생들을 옭아매면서, 국정원의 NLL 대화록 공개라는 눈가리개를 통해 박근혜 정부는 촛불을 꺼버리고 싶어 한다. 이명박의 정치적 유전자를 물려받은 박근혜 정부는 촛불을 두려워하는 것 또한 닮아있다. 하지만 2008년에 비해 보다 더 정부에게 유리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거기에 더해 미온적인 태도의 교수들과 어른들, 일베로 대표되는 젊은 ‘넷(net) 극우파’들의 극성스런 방해로 이번 학생들의 촛불은 채 자신을 다 태우지도 못하고 사그라져갈지도 모른다. 다시금 촛불이 번져갈 수 있을까? 그것은 ‘정상적인 나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싶다는 학생들의 절실한 바람과 정당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답하고, 자발적으로 응하는 태도에 달려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