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한 시대정신: 국정 교과서와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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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시대정신: 국정 교과서와 첫사랑

 

이지영(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첫사랑은 그것이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때에 아름답다. 그것의 과거 시제가 현재를 침범할 때,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비루한 현재만 부각된다. 피천득은 <인연>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뜬금없이 철학 웹진에 첫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은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드라마들에 등장하는 이상 징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첫사랑은 불치병이나 출생의 비밀 못지않은 한국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그럼에도 불치병, 출생의 비밀, 재벌가 실장님 등이 등장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짜증섞인 반응에 비교한다면, 첫사랑은 늘 모두를 설레게 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단골 소재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몇년 간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첫사랑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예전과는 좀 다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첫사랑 드라마 <겨울연가>의 경우만 해도, 고등학교 시절 만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십여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충분히 납득할만 하다. 다만 거의 서른이 된 주인공들이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과의 에피소드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매우 놀라워 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시절이 잘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부 시절의 일들도 매우 어렴풋하게 중요한 몇몇 장면들만 기억날 뿐, 그렇게 생생한 강도로 선명하게 디테일들을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몇 년만 지나도 요새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뭐, 기억력의 경우 개인차가 심할 수 있을테니 그러려니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드라마들은 뭔가 수상하다. 첫사랑의 나이가 아주 어려졌다. 첫사랑인지 아닌지도 잘 분간하기 힘들만큼 어린 시절, 초등학교나 심지어는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로 연령대가 낮아졌다.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그녀는 예뻤다> 역시 초등학교 시절 첫사랑을 15년만에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몇 달 전 방영되었던 <킬미 힐미>에서는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 만나서 함께 지내던 아이 둘이 트라우마로 둘 다 그 시절 기억을 잃어버렸으나 뭔가의 끌림으로 다시 시작하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였다. 그와 동시에 방영되었던 비슷한 소재의 다중인격을 다룬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에서도 10대 초반 시절의 강렬한 인연이 바탕이 되어 성인이 된 주인공들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현재 방영중인 조선 건국을 다룬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이방원 (유아인) 과 러브라인을 형성하게 되는 분이 (신세경)의 인연 역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온 주인공들의 사랑 (<풍선껌>, <너를 사랑한 시간>, <로맨스가 필요해 2012>)의 경우에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의 첫사랑 아니면 무엇인지 확인하기 힘든 인연이 성인이 된 이들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드라마적 요소로 등장한다. (작년 드라마 <힐러>의 두 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 이 외에도 아마 당장 기억나지 않는 드라마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이야기를 시작하기엔 충분할 만큼 많다.

고백하건대, 나는 드라마 매니아이다. 거의 종류를 막론하고 왠만한 건 다 본다. 영화 철학을 연구하는 필자가 온갖 드라마들을 매일 본다고 이야기하면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유치하고 식상한 클리쉐들로 가득 찬 수준낮은 드라마를 아방가르드한 영화를 연구하는 인간이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하곤 한다. 사실 드라마는 나에게 내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복잡한 철학적 미학적 논의들과 피곤한 세상사를 잊게 해주는 마취제이자, 머리를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비워서 다시 일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가장 좋은 스트레스 해소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치하고 빤한 클리쉐들도 나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즐거운 드라마들이 이상한 징후들을 내뿜으며 나에게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첫사랑 판타지가 꼭 미취학 아동 시절, 아니면 최소한 청소년기 이전에 이루어져야만 그 순수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 시절의 첫사랑은, 요즘 아이들의 조숙함을 생각한다면 너무 늦은 때묻은 사랑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중년의 사랑이나 노년의 사랑은 뭐란 말인가. 흉측하게 때묻은, 순수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냥 그런 너저분한 남녀상열지사란 말인가? 아, 이건 뭔가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생각이 넘실거린다. 개개인에게 있을법한 원형적인 첫사랑의 기억은 물론 소중한 것이지만, 이에 대한 집착은 ‘병’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랑 역시 어차피 일종의 정신병 아닌가. 이런 개운하지 않은 기분은 그저 이 사회가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중년이나 노년을 배제하고 있다는 그런 에이지즘(Ageism)적 차별 때문일까 라고도 생각해 보았으나,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고 있는 첫사랑에의 집착은 그렇다고 보기엔 도가 지나치고 뭔가 더 이상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이 현상에 대해 이렇게 원인을 말했다.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피상적인 인간 관계만을 맺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에서 신뢰하고 사랑할 만한 대상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맞는 말일 것 같다. 이런 측면 역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누군가의 어투를 빌어 표현하자면, 그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뭔가 그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고 말해야겠다.

대체 뭘까? 가끔씩 그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현듯 ‘그 이상한 기운’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왜 지금 알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때문이었다. 99 퍼센트의 국민을 좌파로 몰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을 좌편향 빨갱이로 몰고 있으며, 국정화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하는 이 황당하고 끔찍한 메카시즘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점이 바로 나로 하여금 ‘그 이상한 기운’을 파악하게 만들었다. IMF 이후 모두를 괴롭히고 있는 경제 침체와 경제적 불안정은 정치적 보수화를 가속화시켰고, 그 결과 우리 모두가 맞닥뜨리고 있듯 현 정권은 역사의 시계를 1970년대로 되돌리고 있다. 국정화 문제는, 우리집 아이의 표현을 빌자면, ‘박근혜의 공약대로 전국민을 대통합시키고 있다’고 할 만큼 보수와 진보를 넘어 모두가 반대하는 문제임에도 강행시키는 저 대담함은 군사독재 시절에나 가능했던 추친력 아니던가. 모두가 다 아는 이런 시국에 나는 왜 첫사랑 드라마들 이야기나 하고 있는 것일까. 첫사랑에의 집착이라는 전국민적 정서가 혹시 박정희에 대한 첫사랑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대통령이라는 중요한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박씨 왕조의 공주로 인식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를 선택한 국민들의 선택은 박정희의 경제 성장에 대한 첫사랑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야 현재의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 여자가 대통령으로 뽑힌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 아닌가. 결국 국민들이 선택한 것은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이다. 박정희라는 첫사랑에 대한 집착이 결국은 박근혜 정권이라는 시대착오적 결과를 자아낸 것이다. 정치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첫사랑이라는 과거의 판타지에 대한 집착이 현재를 갉아먹는 것이 2015년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는 시대정신(Zeitgeist)이라니. 이 첫사랑 판타지에 대한 집착은 더 이상 순수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이것은 병이다. 특히나 10세 이전의 첫사랑에 대한 집착은, 현재의 이상한 기운 속에서 박정희라는 판타지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생각하니, 그저 병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점잖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집착이 너무나도 강해서 이는 음란한 도착증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10세 이전에 만났던 첫사랑 꼬마아이는 그 사이 많은 세상 풍파를 겪으며 더 이상은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며 나 역시 그 때의 내가 아니다. 6-70년대 경제를 살렸다는 (물론 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그냥 군말없이 일단은 인정하기로 하자.) 박정희 정권이 가고 우리나라 경제를 둘러싼 상황은 그때의 상황과 조금도 같지 않다. 이러한 모든 중요한 세상사의 변화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기억 속 판타지의 대상에 집착하는 것은 거의 시체애호증(necrophilia)이나 소아성애자(paedophilia)의 변태적 도착증과 너무나도 유사하지 않은가. 징그럽다. 소아성애증 말이 나온 김에 최근의 아이유 ‘제제’ 논란이 떠오른다. 아이유의 해석이 소아성애를 부추기므로 음원을 폐지하라는 사람들이 3만명에 이른다는 기사를 보고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다. 소아성애증의 대상이어야 하는 아이유가 그 시선의 관계를 뒤집자 광분하는 꼴이라니.. 진정 사회에 해로운 도착증 환자들은 저기 다른 곳에 있는데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럼 과거는 다시는 만나지 말았어야 할 그런 대상인가? 아니다. 우리는 늘 그 과거의 영향권 하에서 살고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과거는 현재의 우리를 규정한다. 과거는 그저 아무 쓸데 없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굳이 철학자들의 이름과 논의들을 거론하지 않는다 해도, 과거는 현재 속에 공존하고 있으며 현재를 규정하는 막강한 존재론적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거를 현재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면하고 인식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첫사랑이든 아니면 과거사이든 간에. 왜 우리 사회는 지금 과거를, 그것도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과거를 현재에 아주 음란한 방식으로 반복하게 되었는가. 이 무슨 징그러운 반복강박인가. 어린 시절의 첫사랑에의 실패를 계속 반복하는 강박적 증상의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 그 원인 역시 과거에 있다. 지금껏 우리는 과거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의 개념을 조금 이용한다면, 과거에 대해 제대로 된 애도(mourning)를 하지 않은 탓일지 모른다. 첫사랑을 잃고 엉엉 울며 소주잔에 의지하는 것만이 애도는 아니다. 데리다에게 애도란 그저 지나간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애도란 과거를 현재에 불러내어 정당하게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 과거와는 다른 변화된 미래를 여는 것이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는 과거를 정당하게 대우한 적이 없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 행위를 한 인물들은, 조선시대식 어휘로 표현한다면 역모를 꾀한 것이고 이는 3대를 멸해야 하는 중죄이거늘, 우리는 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챙긴 부와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놔두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미군정기의 혼란과 미국의 이익 때문에 시작이 되었건, 일본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했던 전직 일본군이 나라를 18년이나 통치했던 이유 때문이었건, 그들의 자손들이 여전히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건 간에 말이다. 바로 그 자손들이 이제 자신들의 더러운 과거를 맑고 깨끗하게 세탁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하여 유지하고 강화할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 그들에게 과거는 그 어떤 현재의 반대보다도 강력한 현재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의 시계를 4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 닥터 후(Doctor Who)의 타임머신 타디스(Tardis)도,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의 드로리안(Delorean)도 없는데 우리 모두가 원치않는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 하수상한 도착적 정권은 전 국민을 원하지도 않았던 시간여행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타임머신의 시간을 어떻게 1970년대가 아닌 2015년으로 재조정할 것인가. 데리다가 말하는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은 대체 어떻게 열 수 있다는 말인가. 뻔한 답이지만 우리의 과거를 절대로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도 세탁하고 싶어하는 얼룩진 과거를 제대로 활짝 펼쳐서 김치국물 얼룩 하나까지도 모두가 볼 수 있게 하고, 그에 대해 정당한 대우 (doing justice)를 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아마도 페티쉬라 할 수 있을만한 첫사랑에 대한 도착적 정신병은 음란함의 정도를 넘어 우리 나라 자체를 거대한 폐쇄 정신 병동으로 변하게 만들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는 박씨 가문의 인물들을 현재까지 두 번 만났다. 피천득의 인연을 다시 떠올린다면, 우리에게 한번의 기회가 더 있는 것이다.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인 세번째 만남은 결코 성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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