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하는 코너, 영화로 말 건네는 철학이야기.
영화가 던져주는 삶의 이야기!!

모라토리엄의 곁에서 [톡,톡,씨네톡]

모라토리엄의 곁에서

 

박근형(전북대 철학과 대학원)

 

함박눈이 쏟아지던 1월 초, 거실에 상추를 심었다. 흐린 겨울날이 계속되면서 우중충해진 집안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는 신록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미 다육식물 등의 화분이 있었지만, 식물 키우는 재미를 느끼려면 한 달이면 쑥쑥 자라서 따먹을 정도가 된다는 상추가 제격이지 싶었다. 큼지막한 화분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한 배양토를 붓고 씨앗을 심은 뒤 물을 흠뻑 주었다. 새싹이 돋을 때만 해도 초록이 주는 설렘에 기대가 만발했다. 그러나 웬걸. 날이 한참 따사로워진 4월 말에도 상추는 이제 겨우 엄지손톱 크기만큼 자랐을 뿐이다. 성장이 멈추어 버린 상추를 두고 나는 20대의 어느 날에 보았던 영화 한 편을 떠올렸다.

2014년 개봉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이하 <다마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코후 스포츠샵 딸내미 다마코와 사진관 아들내미 히로시는 코후 스포츠샵의 벤치에 늘어지게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올해 23세인 다마코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곁에서 놀고먹으며 1년을 보낸 상태다. 여름이 끝나면 아버지에게서 독립해야 하지만, 어디로 갈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농구부 활동을 하는 중학생 히로시에게 다마코는 주전이 될 수 있을지 여부와 여자친구와의 안부를 묻는다. 히로시는 주전 선발 여부는 “미묘”하며, 여자친구와의 관계는 “자연 소멸”했다고 답한다. 그는 내일 다마코를 다시 만날 것처럼 간단한 인사로 떠나고, 홀로 남은 다마코는 기지개를 켠다. 그녀는 자연 소멸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들어보았다며 웃으며 프레임을 벗어나고 이후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거창한 것 없는 이 2분 18초간의 엔딩 장면에 87분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가 줄곧 이야기한 것이 압축되어 있다. <다마코>는 말한다. ‘사계절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듯, 청춘의 모라토리엄도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이 있다.’

모라토리엄은 본디 국가나 지자체가 빌린 돈에 대해 상환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라토리엄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젊은 세대가 충분히 경제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사회적 진출을 꺼리고 두려워하여 학생이나 무직 상태로 남아있는 현상을 의미한다. <다마코>는 다마코가 놓인 모라토리엄의 시작과 끝을 잔잔히 담는다. 그녀의 모라토리엄은 구직활동은 제대로 하고 있냐는 아버지의 일갈에 “지금은 아니야!”라며 버럭 대들면서 현시되고, 여름이 끝나면 독립하라는 아버지의 통보에 ‘좋은 아버지 합격’을 주면서 ‘자연 소멸’한다.

<다마코>를 처음 접했던 20대 후반의 어느 시기, 나는 다마코보다 훨씬 긴 모라토리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영화에 대한 많은 감상평은 “유예”에 방점을 찍었고 나도 그랬다. 꿈이 있다는 핑계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놓고 그 꿈조차 유예하고 있던 날들이 있었다. 현실을 직시할 용기도, 포기할 용기도 나지 않아 모든 걸 회피하고 있으면서도 양심은 남아있어서 어영부영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시기였다. 부모님이 어려운 마음으로 전세자금을 지원해 준 노량진의 원룸에는 햇빛이 들지 않았다. 화장실은 가건물이었다. 여름에는 비가 샜고 겨울에는 세탁기와 변기가 얼었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었다. 20대 중반의 두 자매가 반나절 만에 구한 집이었으니 좋은 집일 리 만무했다. 학자금 대출도 없었고 묵묵히 기다려 주는 부모님이 계셨으니 경제적인 사정이 어렵다고는 할 수 없고, 그저 미래가 궁핍했던 시기였다. 와중, 아르바이트 구직구인 앱을 통해 노량진의 슈퍼마켓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평일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슈퍼는 주말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면 되었다. 노량진의 아침은 새벽 시장만큼이나 이르게 시작해서, 유명한 강사의 수업을 앞자리에서 듣고 싶으면 수험생들은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강의실 앞에 번호를 적은 노트 등을 놓는 방식으로 줄을 미리 서 놓아야 했다. 그들은 카페에서 제일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몇 시간씩 공부를 하므로, 공부하기 좋은 카페들은 ‘음료 주문 시 4시간까지 착석 가능’ 등의 문구를 미리 표기해 두었다. 노량진 마트나 슈퍼에서는 초코파이 1개 200원, 두루마리 휴지 1개 500원, 커피 믹스 스틱 1개 100원, 이런 식으로 생필품을 쪼개 팔았다. 그러면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은 공시생들이 그것들을 사 갔다. 천이백 원에 세 개인 휴지를 사지 않고 오백 원에 하나인 것을 사 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해의 겨울은 길었다. 슈퍼 안까지 햇빛이 들 리는 만무하니 집에서도, 슈퍼 안에서도 모든 시간이 항상 밤 같았다. 고독을 이겨보려고 유튜브에서 철학 강좌를 검색해서 틀어두었더니 공시생들이 나도 같은 공시생인 줄 알고 음료수와 인사를 건네는 일도 더러 있었다. 몇백 원짜리 간식도 셈해서 사야 하는 처지를 알기에, 나는 그것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기꺼이 받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격려는 언어로 구체화되지 못한 일련의 연대 행위이자 동질감의 표현이었다.

엔딩크레딧이 오른 후 다마코가 취업을 할 수 있을지, 코후 스포츠샵을 떠나 어디로 갈지, 관객은 알 수 없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아빠로만 존재할 것 같았던 아버지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수용할 수 있고, 피하고만 싶었던 동창생에게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넬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다마코>는 밑도 끝도 없는 유예에 대한 영화가 아니며, 무책임한 힐링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힐링은 순간적인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상황 개선에는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힐링에는 힘이 없다. … 끝없는 위로만을 보내며 우리 청춘을 같은 자리에 유예시킨다. 스스로의 연민에 빠진 청춘들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마비된다. 나는 ‘아프니까’ 라고. ”1 애초에 다마코는 스스로에 대해 어떠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다마코>는 주관적인 서정을 형성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주변의 어른들은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위로와 양보를 해주지 않는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인생과 몫이 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다마코의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므로, 아버지는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하지만, 그녀의 도약과 자신의 삶을 위해 그가 지원할 수 있는 분명한 한계선을 제시한다. 태생적으로 재원과 권력 구조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가족 내 헤게모니에서 백수인 다마코는 약자의 입장이지만,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합격” 선언을 통해 삶을 선택하는 주체로서의 위치를 유지한다. 그럼으로써 <다마코>는 ‘고달픈 청춘’이라는 소재가 빠지기 쉬운 자기 연민이라는 함정을 피해 가는 영리한 영화다. 기지개와, 앵글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행위는 새로운 시작의 직관적인 메타포다. 좁은 방에 누워있던 장면으로 시작한 <다마코>는 필연적으로 집이라는 닫힌 구조의 외부에서 모라토리엄의 종기를 맞이한다.

그리하여 <다마코> 이후에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모라토리엄을 보내고 있는 청춘에 대한 개인적인 공감인가? 최근 발표된 결과에 따르면, 취업난 속에서 학자금 상환 개시 소득에 이르지 못한 저소득 청년 수는 갈수록 늘어가고 있으며, 취업 후 상환을 시작했다가 중도에 감소하는 바람에 상환이 중단된 사례는 2017년(4만 7천여 명)에 비해 2021년(9만 8천여 명)에 2배 가까이 늘었다.2 개인적인 공감은 이러한 국가 전반적인 경제·사회적 현실에 어떤 영향력을 갖기에는 미약한 수단이다. 한국 현대 수필 문학에 대해 비평하고 반성한 <수필의 자폐성을 넘어서>에서는 현대수필의 문제점으로 “세계의 자아화”를 꼽았으며, ‘외적 사물, 사건, 현실을 자아의 몽롱하고 주관적인 내면으로 끌어와 ’주정主情‘으로 몰아간다.’고 비판하였다.3 비단 현대 수필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시 등 모든 예술 작품이 빠질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직언이었다. 창작자뿐 아니라 수용자 역시 <다마코>를 자기 경험이나, 가족 및 주변인에 투사하고 감성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그친다면 이 또한 ‘세계의 자아화’에 불과할 것이다.

사계절을 거치면서 다마코의 영역은 조금씩 확장되어 간다. 영화가 처음 시작하는 ‘가을’ 파트의 등장인물은 다마코와 아버지뿐이며 카메라 역시 집 밖을 벗어나지 않지만, 계절이 진행되어 갈수록 다마코의 관계의 영역은 확장되고 등장인물도 증가하며 공간적 배경도 다채해진다. 우리의 경계도 이처럼 조금씩 확장되어 가야 한다. 나에게서, 가족과 주변인에게로, 동시대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마침내 사회와 역사로. 청년뿐 아니라 여러 이유로, 여러 부분에서 누군가는 모라토리엄을 겪고 있다. <다마코>에서 청년 취업률의 감소, 캥거루족의 증가 등의 사회적 현상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지 않는다고 해서 ‘청년기의 모라토리엄은 왜 발생하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라는 의문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목격하는 개인의 불행을 사적인 것으로만 돌려서는 안 되는 이유는 많든 적든 그것은 시대적 악몽을 그림자처럼 지니기 때문이다.”4

8년가량의 세월이 지나 <다마코>를 다시 감상하는 지금, 이번에는 ‘기다림’에 포커스를 둔다. 새해 전날 다마코는 엄마의 전화와 결혼한 언니의 방문을 기다리고 다마코의 아버지는 그런 다마코의 독립을 기다린다. 이런 류의 기다림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애정이다. ‘기다림’은 다른 방향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영화였다면 속도감 있는 전개를 위해 생략되었을 법한 장면을 <다마코>는 편집하지 않았다. 다마코가 자전거를 타고 화면을 가로지르는 장면, 무료하게 떡을 먹는 장면, 아버지가 보일러 석유를 교체하는 장면… 카메라는 묵묵히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고 기다린다. 기승전결에 필수적인 장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듯이, 어쩌면 다시는 오지 못할 모라토리엄의 이 순간마저 언젠가는 추억하게 될 것이라는 듯이 <다마코>는 그런 장면도 애정을 담아 기록한다. 감독이 의도했는지 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기다림이라는 상태는 느리다는 행위에 잇따르고, 느림은 근본적으로 사유를 낳게 되어있다. 영화가 기다림을 보여주었다면 프레임 너머를 사유하는 일은 관객의 몫이다.

<다마코>는 느린 호흡으로 배우와 상황 곁에 서있다. 카메라는 역동적인 로우앵글이나 하이앵글로 장면을 담지 않는다.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정면각에 가까운, 아이레벨숏으로 촬영된 것은 극적인 드라마가 아닌, ‘당신의 눈높이에서 함께 바라보는 일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라는 연출된 메시지로 읽힌다. 눈높이를 맞추고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소소한 안부와 일상을 주고받는 것. 그 겨울 노량진에서 건네받았던 음료수에 담겨있던 마음을 돌이켜본다. 확장할 수 있는 힘은 공감에서 비롯하여 연대에서 출발한다. 다마코의 이야기를 나의 경험담과 겹쳐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누군가 내게 건네주었던 격려를 잊지 않고 다른이에게 전해주는 것, 누구나 유예기를 겪을 수 있으며 그럴 수도 있다고 공감해 주는 것, 그렇게 손을 맞잡고 나면 한 발짝 더 나아가 목소리를 내어보는 것. 대단한 일은 아니어도 그런 마음들이 모이면 반드시 “좀 더 괜찮은 세상”의 실마리가 되리라고 믿는다.

퇴근하면 나는 제일 먼저 상추를 찾는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컸는지, 새싹 하나하나를 들여다본다. 언젠가는 자랄 것이라고 믿는 마음으로 마른 흙을 적셔준다. 몇 달 만에 이제야 싹을 틔우는 씨앗도 있다. 너무 일찍 자란 싹은 줄기가 웃자라 힘이 없지만 느지막이 기지개를 켠 싹은 작은 몸뚱어리를 흙에 단단히 박았다. 잎사귀 색도 웃자란 싹보다 훨씬 선명하다. 모두가 같은 속도로 같은 시기를 보낼 수는 없다는 삶의 진리를 늦게 움트는 상추 새싹에서 만난다.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중시하였다. 그는 “삶이란 마치 조각모음과 같”아, “일관된 자기 모습을 구성하기란 무망”한 일이라고 보았다. “일관된 모습이 없으니 후회스런 삶이 있을 까닭이 없다. 모든 삶이 예외 없이 존귀할 따름이다.”5


 

영화 <디태치먼트>와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 대해 [톡,톡,씨네톡]

영화 <디태치먼트>와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 대해

 

김다혜(상지대학교 재학)

 

‘디태치먼트(Detachment)’는 무관심, 고립, 분리, 거리를 둠이라는 의미로 정의된다.

영화 <디태치먼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다. 밀려드는 문제들 속에 고립된 그들은 각자 고통의 바다에서 표류 중이다. 모두가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지만, 모두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그들은 왜 서로 돕지 않는 걸까?

 

영화는 “어느 하나에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했고 내 스스로 격리되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느낌이다.”라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속 한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등장하는 이 문장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나의 20대는 딱 그런 식이었다. 스스로 고립되어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할 정도로 예민했다. 눈앞에 세상이 있는데도, 내가 섞여들지 못하는 이 세상이 나에게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출처 https://sprdthemssg.wordpress.com/2018/07/13/%EB%B6%84%EB%A6%AC/

나는 차가움이 싫었다. 살면서 만난 모든 사람이 차갑지는 않았지만, 차가움은 항상 내 마음에 시리도록 큰 상처를 남겼다.

김경미 시인이 쓴 <다정이 나를>이라는 시가 있다.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라고 이야기하는 시다. 누군가의 냉소가 나를 휩쓸고 간 후에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 시처럼 마냥 서러웠다.

어른의 차가움을 가장 크게 느꼈던 그 날은,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선명하다. 내 나이 열 살 때, 아빠가 큰 빚을 지고 말 그대로 야반도주를 했다. 엄마와 동생들은 외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들어갔고, 학교에 다녀야 했던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시내의 삼촌 댁에 맡겨졌다. 당시엔 소위 말하는 ‘놀토’가 없었던지라 내가 엄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일요일 오전 몇 시간이 고작이었다. 삼촌 차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갈 때마다 나는 뒷좌석에서 혼자 숨죽여 울곤 했었다. 사건이 있던 날은 엄마와 두 시간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삼촌 차를 타는 대신 몇 시간 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신다는 숙모와 함께하기로 했던 날이다. 숙모는 화가 많은 사람이었고, 나는 혼날까 봐 무서워 버스를 기다리며 숙모에게 물었다. 제가 귀찮게 해서 집에 가면 저를 혼내실 거냐고. 버스 정류장에서 숙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집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내 멱살을 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한참을 날 향해 온갖 삿대질과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쏟아붓는데, 그 자리에서 나를 도와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삼촌은 숙모 옆에 서서 그저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때의 그 얼굴들, 눈빛들, 나를 향한 그 사람의 말도 안 되는 뜨거운 분노, 그 차가움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어렸다.

왜 그랬을까?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줄 수는 없었던 걸까? 하루아침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버린 외로운 아이를 가만히 안아줄 수는 없었던 걸까.

 

차가운 사람들을 보면 나는 화가 났다.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왜 서로에게 좀 더 다정할 수는 없는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남의 불행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그들 모두가 불행해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정함이 결핍된 무심한 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 <디태치먼트>는 20대의 내 시선으로 본 세상과 많이 닮아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주인공인 헨리 역시 많은 문제를 가진 미성숙한 인물이다. 그는 겉보기에 감정을 잘 다스리는 성숙한 어른처럼 보이지만, 스위치가 눌리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력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고통에 잠겨 절규하는 이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그는 노력한다. 거리에서 매춘생활을 하며 사는 여자아이를 데려와 보살펴주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모두가 투명인간 취급하는 동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기도 한다. 거리 생활을 하던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던지 고맙다는 인사 대신 “왜 이래요.”라고 말한다.

철조망에 매달려 온몸으로 고독함과 고통스러움에 매일 몸부림치는 같은 학교의 동료 선생에게 주인공 헨리가 다가가 괜찮냐고 물어보는 장면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이다. 단지 이 장면 하나 때문에 굳이 이 어려운 영화를 인용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 투명인간이었던 선생은 의아한 듯 되묻는다. “내가 보여요?”라고. 헨리가 다시 “네, 보여요.”라 답하자 선생은 “세상에 드디어… 고마워요. 고마워요.” 연신 고맙다 인사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난다.

나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관심으로 변하는 순간.

출처 https://wpalss.tistory.com/765

20대의 나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긴 시간 벽을 쌓고 잔뜩 날을 세운 채로 고립된 삶을 살았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 내 인간관계는 모두 ‘나-그것’이었다. 그때 만난 모든 사람에게 나는 ‘그것’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참 많은 실수를 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 만을 바라며 살았다. 지나가라, 얼른 지나가. 지나가면 이 고통이 끝날 줄로만 알고. 그러나 20년이 흘렀어도 선명한 그 날의 기억처럼 어떤 상처는 시간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나의 실수를 가만히 감싸준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나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내가 나에게 박했던 건지, 세상이 나에게 박했던 건지 그 순서조차 이제는 모르겠다. 단지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사실만은 정확히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그 시간을 지나온 지금의 나는 제법 성장했다. 적어도 항상 화가 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지금은 화를 내는 대신 냉소적인 사람들에 대해 오히려 어떤 연민의 정을 느낀다. 고통 속에 스스로 고립되어 사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최근에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정도로 성숙한 인간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 비슷한 단계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법정 스님이 생전 남기신 글 중에서는 더운 날 나무의 그늘이 얼마나 시원한 쉴 곳이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사람의 그늘은 덕인데, 눈앞의 사소한 이해타산에 걸려 덕의 그늘을 펼칠 줄 모른다. 나무의 그늘에 견줄 때 우리들 사람의 그늘은 얼마나 엷고 빈약한가.”라는 내용을 담은 글이 있다.

나는 아직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줄 만큼 큰 사람은 아니다. 나 한 사람은 너무 작다. 그러나 적어도 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려는 노력은 계속 진행 중이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파트를 청소해주시는 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어 인사를 나눈 후, 마침 점심때라 식사는 하셨는지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는 먹었다면서 자신의 안부를 물어봐 줘서 고맙다고 마음을 다해 몇 번이나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덕분에 아파트가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으니 오히려 제가 더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드렸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시며 마지막으로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나는 그게 참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몫만큼 감당해야 할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립된 채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상대방이 무심코 내뱉는 말과 행동에 상처받기도 하지만, 또 별거 아닌 일에 크게 감동하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오늘을 버틸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 한 사람이 고립되지 않도록 돕는 것도 마땅히 우리 사람이 할 일이 아니겠는가.

무조건 타인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을 돕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만 한다. 그게 순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을 지키는 일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나를 돕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도울 수는 없다.

 

영화 <디태치먼트>의 주인공 헨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설교한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삶의 대부분을 죽도록 일하다가 끝마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무뎌지는 것과 싸우기 위해서 배우는 거야. 상상력을 자극하고 의식과 신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 모든 기술이 필요하지. 우리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소설가 김영하는 독서를 왜 하느냐는 물음에 ‘내면을 구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나, 고유한 나, 누구에게도 털리지 않는 내면을 가진 나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독서. 그렇게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마음을 지키는 데 책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따위의 고민에 빠져있을 때 책 속 문장들은 한결같이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래.”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책은 나에게 가장 많은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은호야.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 난 믿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난 은호 너에게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 말을 남기고 싶구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없어도 한 사람의 마음에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겠니. 네가 힘들 때 책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었듯이, 내가 은호 너라는 책을 만나 생의 막바지에 가장 따뜻한 위로를 받았듯이. 그러니 은호야.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한 권의 책이 되는 인생을 살아라. 네 안에 있는 한 줄의 진심으로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살아.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꾸거나,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해도, 좋은 책은 언젠가는 꼭 누구에게나 읽히는 법이니까.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따뜻해지는 거 아니겠니.”

 

나 역시 누군가에게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는, 그런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바람은 그러한데 형편없는 사람이라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고통의 종류와 형태는 매우 다양해서 전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아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허지웅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삶에서 고통을 뺄 수도,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안 그래도 힘든 세상이다. 적어도 서로 괴롭히지는 말자.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할지라도, 타인에게 고통을 더해주지는 말자. 타인의 실수를 그냥 덮어줄 줄도 아는 인간이 되자. 누구나 실수하고 산다. 내가 그러하듯이.

나는 앞으로 더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서툴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친절할 것이다. 무엇을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 없이 타인을 도와주고, 또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나와 너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사회가 서로 돕고, 의지하고,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한 사회가 되기를 염원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aver?code=82239

가난의 현실적인 미묘함에 관하여, <기생충> [톡,톡,시네톡]

 

가난의 현실적인 미묘함에 관하여, <기생충>

 

양윤영(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재학)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내가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조금 나아졌지만, 학창 시절 내내 나에겐 차상위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그게 부끄러웠냐면 꼭 그렇진 않았다. 차상위여서 지원받는 것도 있었고, 공부에는 관심이 없던 내가 집이 가난해 학원을 못 가는 것을 핑계로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특성화로 간 이유도 빨리 취업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대학을 갈 필요가 없어서 수능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온종일 텔레비전을 봤다. 나는 가난한 가운데에 제법 즐겁게 살았다. 마치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네 집이랑 비슷했다.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기택의 말처럼 나는 특별히 계획을 세우거나 뭘 바라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어차피 그래봤자 이룰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다 내게 꿈이 생겼다. 웹툰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보내는 동안 한국만화계는 웹툰으로 넘어가면서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전까지 만화가를 꿈꾸는 것이 내게는 사치라고 생각했는데, 점차 커지는 웹툰 시장을 보니 이곳이라면 충분히 뛰어들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배울 돈이 없었다. 입시학원만 해도 한 달에 50만 원은 드는데, 우리 집은 그 돈을 낼 형편이 안 되었다. 혼자서 연습하기엔 재능이 없었다.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하는지, 색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도서관에서 빌린 만화 작법서를 아무리 읽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다른 쪽으로는 재능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쓰는 능력이었다. 내가 만든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면, 다들 재밌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문제가 내 발목을 잡았다. 만화를 공부하거나 그릴 시간이 부족해진 것이다. 스무 살이 되면서 나는 회사에 다녀야만 했다. 내가 일을 그만둔다고 집안이 힘들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벌어야 더 나아지는 것은 분명했다. 만화에 신경 쓸 시간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지만, 내가 봐도 내 만화의 작품 수준은 너무 낮았다. 나는 계속 투고했고, 계속 떨어졌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내게 시간과 돈이 충분했다면 어땠을까 계속 가정해보았다. 그건 좀, 비참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건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주변에 재능이 아주 뛰어난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림이라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점점 더 뒤처진 것이다. 그 차이는 처음엔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가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깨달았다. 가난한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 그냥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것을.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들이 박 사장의 집에 하나하나 들어갈 때, 처음에는 그 상황이 코믹하고 재밌게 그려진다. 기택네는 박 사장네를 놀리기도 하고, 착하고 멍청하다며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박 사장네는 부자다. 비가와도 공기가 맑아질 테니 좋다고 생각해도 되는, 멍청해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지위에 있다. 그에 비해 기택네는 생각해야 하고, 남을 속여야 한다. 그것이 가난의 속성이다. 비가 와 집이 침수되었을 때, 기정의 표정은 씁쓸하다. 그전까지 기정은 남을 비웃을 여유가 있었지만, 비가 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온통 난리가 난 집, 구정물이 역류하는 변기에 앉았을 때야 자신에게 솔직해진 것이다. 자신이 사는 곳, 그곳의 사라지지 않는 냄새, 올라오는 변기 물. 기정은 박 사장네 식구들을 속인 동시에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정말 제시카라고 말이다.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현실은 늘 더 끔찍하다.

 

<기생충>이 가난을 다룬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욱 주목받은 이유는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진짜 가난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인 미묘함을 잘 잡아내는 것은 무척 어렵지 않은가. 영화의 마지막을 보며, 나는 기우가 기택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루어질 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는 그게 어떤 것보다도 비참한 소망이라는 생각에 조금 슬퍼졌다. 가난은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물론 나는 그 감정에서 벗어나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지만, 뒤를 돌아보면 20대 초 돈과 시간을 만화에 투자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속상해하는 지망생이 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사실, 우리 집의 재정이 그 이후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가세가 더욱 기울어졌다면 아마 나는 만화를 완전히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씁쓸해질 수밖엔 없다. <기생충>의 그 결말처럼.


 

응!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톡,톡,씨네톡]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전태일을 잘 몰랐던 20대 청춘이 영화로 전태일을 만나고 돌아본 지금 우리 삶에 대한 단상 – 편집자 주

 

!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도시인

 

아직 11월 말인데 거리는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빠져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길가와 카페를 채우고 방금 커피 주문을 받던 점원은 루돌프 뿔을 머리에 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로윈 데이였는데… 올해 할로윈의 주인공은 조커와 할리퀸이다. 영화의 힘일까? 귀신을 기리지 않고 캐릭터 인기투표의 장이 돼가고 있다.

마침 라떼가 나왔으니, 한잔 들이키고 내 어릴 적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때는 세계가 해리포터에 빠졌었다. 모두 마법사 망토를 두르고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윙가르디움 레비오사”라고 외치고 다녔었지. 물론, 지금처럼 활발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할로윈 데이 때는 다들 해리가 돼 이마 한편에 번갯불을 이고 다녔었다. 그런데 할로윈 데이에 볼드모트 분장을 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였기에 이름조차 부르면 안 되는 사람 분장을 하는 건 너무 끔찍해서일까?

하지만 이건 내 라떼의 이야기고 요즘 이야기를 하자. 이제 한국은 제법 문화적으로 풍부해진 것 같다. 할리우드, 일본 애니메이션을 들여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문화도 수출하고 있다. 가장 잘나가는 것 중 하나가 방탄소년단일 것이다. 여기 카페에서도 방탄소년단의 캐릭터가 새겨진 굿즈를 팔고 있다.

사실 난 보이그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뇌리에 깊숙이 박힌 한 장면이 있다. 음악프로에서 노래가 시작하기 전에 한 멤버가 말했다. “응! 어서 와~ 방탄은 처음이지?” 남자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여자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매혹적인 표현으로 속삭인다. 그 어떤 자기소개보다 짜릿했다.

 

전태일, 너는 나에게 부담감을 줬어.

 

최근에 본 영화 중 나에게 방탄소년단의 부담스럽고 낯부끄러운 인사와 같은 짜릿함을 준 게 뭘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나에게는 옛사람인 전태일(1948.8.26~1970.11.13)은 한국 현대사에서 큰 인상을 주고 떠나간 사람이지만, 정규 역사 수업에서는 배운 기억이 없다. 어르신들 얘기를 엿듣거나 책이나, 유튜브에서 가끔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클릭해 본 적이 없어, 이름은 들어봤지만, 정작 옛날에 뭘 한 인물인지는 잘 몰랐다. 이러던 내가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를 보게 됐다.

영화에서 말하는 그의 이미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볼까? ‘세상과 대척점에 서서 노동자의 삶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희생한 인물’ 물론, 한 인물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건 위험한 일반화지만 이 글은 전태일에 관한 글이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전태일이란 이름을 들으면 볼드모트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뭔가 큰일을 했지만, 지금 그 사람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묘해질 수 있으니까 굳이 그 이름을 꺼내면 안 되는 사람 정도? 이른바 금기어에 갇혔다고나 할까.

어른들이 공통으로 하는 조언 중 하나가 ‘정치·종교·집안 문제는 말하는 게 아니여~’인데, 전태일은 이 중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이야기 주제일 것이다. 이 세 주제는 개인의 바뀔 수 없는 신념과 관련된 문제라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걸까? 반면에 신변잡기 같은 ‘small talk’이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재미있으면서 이렇든 저렇든 누구에게나 큰 상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적인 문제를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나누면서 공감하는 건 도박에 가깝다. 모 아니면 도, 아니 마이너스 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모든 사람은 아니더라도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해야 하는 주제가 있긴 하다. 바로 정치적 올바름(PC)이다.

사실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옳지만, 현대에는 약간 변질되지 않았던가. 이 문제의 뿌리는 언어적 제국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함은 옳지만, 왜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금기되어 있다. 강자가 강해진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논의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대까지 살아남은 이데올로기는 생활에 녹아내릴 수 있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식어버린 체다치즈 감자튀김처럼 우리는 무언가에 둘러싸여 끈끈하게 굳혀졌다.

굳혀진 끈끈함 중 하나는 쉬이 공감 받고 싶은 열망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나누고 싶고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 쉽게 공감 받을 수 있는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예측 가능한 대화들은 늘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갑자기 분위기 미스터 션샤인

 

김태리와 이병헌을 필두로 <미스터 션샤인>이 대한민국을 휩쓸었을 때가 있었다. 어쩌면 고리타분한 소재인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아주 멋들어지게 드라마는 그려냈고, 이 드라마는 지금도 커지고 있는 반일본 정서의 기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갑자기 <미스터 션샤인>에 매료됐던 걸까?

역사적 사건들은 과거의 일이다. 과거의 일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겐 발효된, 묵은 옛날의 이야기다. 그래서 다시 새길만 하다. 시대가 지날수록 정치·사회·문화 모두가 변해가므로 그 당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잘 다듬어진 교두보가 필요하다. 일제강점기를 이해하기에 <미스터 션샤인>은 매혹적인 교두보였다. 세대 차이가 나는 현대와 과거의 중간 지점에서 서로를 잊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문화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일 것이다.

세상은 너무나도 빨리 변한다. 조선말부터 한반도의 사람들은 그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부적응의 대가를 너무나도 아프게 치러왔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생각지 않고 지금 현실의 삶에 만족한다고 대화의 구심점이 되는 주제가 무미건조하게 언제나 듣기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게 과연 우리 자신에게 좋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금기어라고 느낄 수 있는 토론 논제가 어쩌면 우리 생활에서 서로를 단절하고 고립시키는 깊숙이 박힌 악순환의 고리와 맞물려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의견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다고 말하는 피드백을 동반한다. 진정한 자유는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이해심과 스스로 충분히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 금기어는 누군가에겐 상처일 수 있는 민감한 소재일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해도 타인의 아픔을 무시한 채 자만심만으로 대화를 만들어가는 건 옳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를 지금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사실 너무나도 많다. 비싼 점심 메뉴, 비싼 커피값, 의미 없는 학교 수업, 실업 문제 등 과연 지금 우리의 생생한 삶을 둘러싼 이야깃거리는 아주 많다. 코를 뚫은 남자, 무릎 꿇고 구걸하는 걸인, 어제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보라. 생각보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한 가지 문제만 골라보자.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자. 내 의견뿐만 아니라 구글 선생님에게도 물어보고 책도 읽어보자. 겹겹이 자료를 쌓고 준비가 끝났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자.

 

“응!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下) [톡,톡,씨네톡]

이 글은 2018년 5월 9일 이대 철학과 영화제에서 상영한 <토지와 자유>를 보고, 20분 정도 스페인 혁명의 사상적 의의에 대해 발표하고, ‘예스터데이’ 뒤풀이 자리에서 간략하게 토론한 글을 수정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

 

이규성(한철연 회원, 이화여대 철학과 명예교수)

 

2. 무정부주의와 가장 현실적인 욕망

 

무정부주의는 원래 민중의 협동심과 공감능력을 믿는 성선설을 선호한다. 특히 개체의 자발성과 활력을 강조하며, 생명에 대한 외경심도 존중한다. 자발성을 누르는 모든 권력을 비난한다는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초월적 지배자나 권력 혹은 제일 원리를 의미하는 아르케(arche)를 부정한다는 反권력주의(Anarchism)를 의미했다. 이에 비해 레닌주의는 민중의 혁명성을 찬양하면서도, 자발성의 한계를 강조하고, 합리적 조직능력과 지도력을 갖춘 주체적 의식성을 강조한다. 무정부주의자는 이를 퇴행적 부패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토지와 자유》에 나오는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자와의 갈등에는 두 이념 간의 사상적 차이가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과도 교류한 한국 민족 해방군 일 천명{지도자는 대한독립군 총재인 大倧敎 宗師 서일(徐一, 1881~1921)}이 이르쿠츠크에서 공산주의 군대에 포위되어 무장해제를 강요받아 교전 끝에 반절이상 사상자가 발생하고, 후퇴하는 중 만주 군벌 친일 마적 떼의 습격으로 거의 괴멸되자 자결한다.(자유시 사변).

 

스페인 내전은 1934년 선거에 의해 민주 세력이 집권하자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 가 독일과 이태리의 군사 지원에 힘입어 일으킨 쿠데타로 시작한 내란이다. 우익 세력은 군부와 왕당파 및 스페인 가톨릭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모두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나치즘), 이태리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친화적. 이에 비해 민주 공화파(스페인 인민전선)는 개혁 자유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코민테른 산하의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등으로 구성. 타국의 급진주의 행동가들도 혁명 운동에 참여하여 국제여단을 구성. 사회주의자인 헤밍웨이도 기자이자 전투원으로 참전. 스페인 내전은 거의 모든 현대적 이념들이 각축하는 가운데,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혁명운동. 그것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2차세계대전의 전초전이 되었다.

 

“스페인 사회혁명의 중심에는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스페인에서 꽃피었던 신념의 추종자들, 곧 무정부주의자들이 있었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혹은 국가 없는 공산주의를 믿는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경찰, 왕실, 돈, 세금, 정당, 가톨릭교회, 사유재산을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보았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상호부조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간본능이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본능을 자유롭게 펼침으로써 공동체와 작업장을 민중이 직접 운영하면 된다고 믿었다.”1)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궁극적으로는 근대국가 폐지라는 무정부주의 이상을 채택하지만, 과도기로 설정된 당 중심의 국가체제를 인정한다. 혁명 초기에 레닌은 국유화를 통해 토지를 재분배하고, 시장경제를 용인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다.(이를 자본주의적 길이라고 명명). 모든 평의회(소비에트)는 당 정치 위원회에 종속되어야 했다. 후에 국가 주도로 집단농장화를 강제 시행하여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사회주의 목표를 이탈한다. 이에 따라 스탈린 체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의 당이 지배하고, 과도하게 정치화된 국가체제는 ‘전체주의적 관료주의’(트로츠키)를 닮게 되어, 급진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무정부적 혁명 이념이 물물교환을 인정할 정도로 순진하여, 복잡한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실화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왜곡된 관료주의적 사회주의 이념을 수정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스페인을 달군 뜨거운 혁명의 시대가 이처럼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부를 공유하고, 공장도 노동자들이 소유하며, 토지의 주인 또한 농민이고, 비록 아직은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방식일지라도 예전에 비해서는 한층 직접적이 된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요컨대 이상주의자들이 1세기 넘게 꿈꿔온 세계가 펼쳐진 시대였기 때문이다.”2) 소규모 연합체들의 연합체를 국가로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는 1910년대 이회영, 신채호, 유자명, 백정기 등 한국 독립 운동가들이 광복 이후 건국 방략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가 현존하고, 정치적 공포가 남아있는 한, 현실에서 완전히 주어질 수 없는 것일지라도 백일몽처럼 나타나 실천적 사상을 이끌어 갈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은 ‘바다’의 푸른 정신을 가지고 반동세력(상어)이 뜯어 먹어 가시만 남은 청새치(이념)를 잡아 가지고 돌아와 강건한 실천을 상징하는 사자의 꿈을 꾼다. 현실적 실패는 있어도 이상을 향한 의지는 패배를 모른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의 메시지는 《토지와 자유》의 메시지와 유사하다. 《전쟁과 평화》에서의 톨스토이가 민중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여 역사의 주체라고 주장한 것도 초월적 지배 권력이 민중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진실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다. 진실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망은 조직 권력에 대한 충실과 분리된다.

사진출처: 다음영화 https://t1.daumcdn.net/cfile/151C254B4DB580F433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악의 세력에 저항하는 산하대지[山川]의 생명을 바탕 삼은 심성은 자유주의도 레닌의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민중적 생명 공생주의를 지향한다. 친일파에게 빼앗긴 토지를 되찾아 무상으로 재분배하는 서희를 통해 땅은 재물이 아니라 상생을 위한 일시적 공유물이라는 동학사상이 재천명된다. 생명의 사회적 실현[氣化]은 평등한 자유를 실현하는 생명주의 윤리이자 불교적 연민을 현세에서 구현하는 심미적 진실이었다. 恨의 정서는 악행으로 왜곡될 수도 있지만, 부정당한 인생을 다시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진실을 품은 긍정의 정서이다. 이 또한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의 생명 사상과도 상통한다. 유토피아를 향해 진격하는 세르반테스의 행동주의 정신인 돈키호테도 대지 품에서 공생하던 황금시대를 꿈꾸고, 그것을 부분적이나마 실현하는 제자 산초 판사를 남기고 죽는다.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이 산초 판사들이라 할 수 있다.

 

장발장의 고난과 사업을 통해 자본주의의 윤리적 책무를 강조하는 빅톨 유고는 레미제라블의 1장에서 라이프니츠와 같은 카발라적 생명철학으로 ‘지렁이와 소크라테스의 동일성’을 설파하고, 민주 공화파의 정치해방과 사회적 연대성을 옹호한다. 초인의 초월성[차이성]만을 본 니체와 하이데거는 다수성과 평등한 동일성의 진리를 대중적 가축 떼의 사상으로 폄하한다. 이에 비해 동학의 초인은 민중의 고통과 같아지는 내재적 동일성을 실현한다. 즉 생명에 대한 내적 자각과 세속성의 분별을 극복한 내외(자아와 세계)의 통일성에서 진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데카르트와 같은 인위적으로 고립시킨 자아의 자명성에 근거한 철학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한다>는 민중적 지성을 발전시킬 필요성이 나온다. 스페인 내전기의 공화파의 자유를 향한 욕망은 부조리한 현실에 사는 모든 사람의 ‘희망’(스페인 내전을 다룬 앙드레 말로 소설의 제목)이다.

 

1905년 러시아 2월 혁명 전의 짜르 체제에서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을 유대인에 전가하는 상황에서 무고하게 살인자로 몰린 야콥 복(Yakov Bog)의 재판과 저항을 그린 소설 《수리공The Fixer》(국내 번역: 김재현 옮김, 〈키에프의 신화〉, 한신문화사, 1987. 광주항쟁 직전에 영화가 방영된 적이 있음)은 스피노자 철학을 밤 세워 읽고 자신의 수난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적 변화를 경험한다. 정치적인 것을 자신과 관계없는 특정 인간에 한정하던 이전의 비정치적 관점이 아무도 정치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인간 조건을 인식하게 된다. “모두가 유대인이다.” 아울러 그는 자신이 ‘수동적’ 존재에서 ‘능동적’ 존재로 변화하여, 저항의 길을 가는 자유의 꿈을 꾸게 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간관의 전신인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신체적 욕망이 공포와 슬픔이라는 수동성에서 기쁨이라는 능동적 구조로 변화되고, 아울러 이성을 통해 타인과의 유익한 관계를 확산해 가는 관계의 사상을 인식함으로써 자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을 설파한다. 공포와 슬픔은 폭정과 이를 축복하는 종교의 산물이라는 것이 그리스 유물론을 시로 표현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96~55)의 《De rerum natura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우주는 생명의 여신 비너스의 령으로 충만한 생명계임을 주장, 원자들은 그 안에서 존립)의 기본 주장이며, 이 명랑성의 회복은 스피노자와 마르크스의 인성론의 목표였다. 야곱 복은 감옥 속에서 자신의 내적 변화의 귀결을 간수장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의 목적은 타인을 위해 자유를 창조하는 것이다(The purpose of freedom is to create it for others).”(《The Fixer》, Penquins Book, p. 286. / 〈키에프의 신화〉, 304쪽). 이제 철학은 자유에의 욕망을 도덕적 양심의 근원적 실재로 보는 관점을 우리의 역사적 교훈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맹자는 거지도 발로 차면서 발을 주면 받지 않는다 했다. 이 부정의 의지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인간 현실일 것이다.

 

【참고】 로베스피에르는 개인들의 정치적 자유의 이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의 경제적 사회관계에서 농민과 노동자는 엄연히 노예상태로 존속했다. 사회주의는 이 상황을 극복하려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당시의 경제적 사회관계가 민주주의의 대의에 심각한 장애가 되며, 평민이 상공업자의 지배에 만족하거나 그것을 요구하는 한, 프랑스 혁명은 군사독재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가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단두대로 사라진 다음, 귀족과 대 부르주아가 지배력을 회복하게 되면서, 로베스피에르의 예언은 들어맞게 된다. 그의 사후 이를 깨달은 사람들이 생기는데 바쿠닌과 같은 무정부주의자, 푸리에와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의 노동영역에서의 사회적 관계가 갖는 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의 사회 이상(사회주의)을 <경제해방> 혹은 <사회해방>으로,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말하는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정치해방>으로 하는 두 해방의 이념을 제시했다. 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민주화를 목표로 갖는다. 전자는 기존 사회주의의 장점을 발전시키고, 후자는 기존의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성취한 민주주의 정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자신들의 이념을 사회적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구체적 민주주의로 불렀다. 레닌도 그것을 사회 민주주의로 불렀다. 러시아 혁명 이후 민주주의를 진부한 부르주아 사상으로 몰고, 사회주의와 대립시키는 왜곡이 일어나 양자는 분리되게 되었고, 사회 민주주의는 유럽의 점진적 사회당의 이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좁혀지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유럽과 아시아에 퍼진 레닌주의는 경제해방과 정치해방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론과 당 조직론을 더 한다. 그러나 이 레닌주의 체제는 파리코뮌의 자유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근대국가인 억압적 기계 장치로 보일 수 있었다. 스탈린 체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비판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빌미가 되었다. 중국혁명사에서도 공산당의 창시자인 진독수(陳獨秀)의 민주주의 요구는 우경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오늘의 시진핑 체제에 이르기까지도 복권되지 않고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무정부주의 전통이 강한 카탈로니아 지역과 그 수도인 바르셀로나에서는 무정부주의와 러시아와 연결되어 조직화되어 있는 공산주의자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말은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공통된 것이지만, 레닌주의는 당 권력의 군사적인 수직적 합리성에 대한 신앙 때문에 물리적 혁명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지만, 국가 권력형 범죄를 양산했다. 레닌의 사상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강고한 관료주의 국가 범죄 때문에 정신적으로 패배한 이념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코뮌은 인민공사(人民公社)로 불렸는데, 위로부터의 조직화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나 실패로 끝나고, 진정한 민주적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민간 급진주의가 문화혁명 기간에도 나타났다. 모택동과 보수적 당권파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민간 급진주의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시회주의에 이르는 과도적 단계로 활용한다는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을 따르는 현 중국 체제는 유교부흥 운동과 결합되어 관료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심각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역시 정치민주화를 넘어서는 경제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 직접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의 의지는 자유에의 욕망을 가진 개인들의 연합을 통해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다.

 

1) Adam Hochschild, 이순호 옮김,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갈라파고스, 2016, 80쪽.

2) 위의 책, 312쪽.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上) [톡,톡,씨네톡]

 

이 글은 2018년 5월 9일 이대 철학과 영화제에서 상영한 <토지와 자유>를 보고, 20분 정도 스페인 혁명의 사상적 의의에 대해 발표하고, ‘예스터데이’ 뒤풀이 자리에서 간략하게 토론한 글을 수정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上)

이규성(한철연 회원, 이화여대 철학과 명예교수)

 

어느 누구도 하나의 섬은 아니다.

사람은 모두가 대지의 한 조각, 이 땅의 한 부분.

어떤 사람의 죽음 이건 나의 생명을 줄이는 것,

나 스스로 인류의 하나이기에.

그러므로 묻지를 말라.

누구를 위해 조종을 울리느냐고.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John Donne의 기도문(For whom the Bell tolls). / 헤밍웨이,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題詞]

 

  1. 파리코뮌과 스페인 혁명전쟁

 

스페인 내전(1936~1939) 기간에 있었던 무정부주의 혁명은 파리코뮌(1871)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민중이 자신의 해방을 쟁취하여 자유와 평등을 실현해본 사건 중의 사건이다. 양자 모두 전쟁과 혁명이 결합되어 있었다. “전쟁은 혁명의 원동력(locomotive)”(마르크스)을 제공해 왔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 혁명은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주둔 군부가 선거에서 이긴 민주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켜 도처에서 학살극을 벌이면서 스페인에 진군하자 이에 민중이 봉기하여 일으킨 혁명전쟁이었다. 혁명전쟁은 인류 사상사에서 <우리는 생각한다>는 집단 지성의 필요성과 의의를 환기시킨다. 그 전쟁을 통해 우리의 양심의 승패가 시험받기 때문이다. 혁명전쟁과 유사한 상황은 민주제가 안착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광주항쟁을 유발한 한국의 군사 쿠데타와 같이 정황이 되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숭상하는 박근혜 정권도 많은 사람의 우려와 같이 촛불시위를 타도하기 위한 은밀한 쿠데타 시도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파리코뮌을 보자.

 

파리코뮌은 독일(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하여 독일군에 포위를 당한 상황에서 파리 시민이 봉건 귀족세력과 지배적 부르주아 계급에 봉기하여 만든 직접민주 공동체이다. 이 체제는 두 달간의 짧은 시기이지만 최초로 주요 생산 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라는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민주주의 혁명파와 기존 지배세력(토지 귀족과 상공업 부르주아) 간의 근 100년간의 피 튀기는 투쟁 이후 제3공화국(1870~1940) 하에서의 1875년 헌법이 제정되면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묘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헌정체제로 안착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부르주아의 자유주의(귀족도 자유주의 흉내를 내야 했음)와 혁명적 민주주의 사이의 타협을 의미했다. 한국에서는 원래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헌법에 없었으나, 독재를 옹호하는 유신헌법에 처음 등장하여, 반공 이데올로기로 남용되었다.1)  혁명파의 공화주의 정신이 반영된 프랑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철학적으로는 다수성과 통일성 간의 타협을 의미한다. 프랑스 제3공화국 헌정체제에서 다수성이라는 수와 통일적 일자 간의 대결이 의회 내의 논쟁으로 변화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진정한 자유는 다수성이 초월적 통일성을 민중의 힘 안으로 내재화하여 그 억압성을 제거하는 실천을 통해 민중의 진리로 실현된다는 것이 자각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언급처럼 루소는 원래 지배자의 권리를 의미했던 주권이라는 말을 민중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전시켰다. 점차 <다수성>이 정치적 진리로 부상한다. 이 진리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파리코뮌과 스페인 내란기의 혁명에서 섬광처럼 드러났다. 이 빛을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 표현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말은 원래 무정부주의자로 분류되는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가 ‘인간’, ‘국가’ 등과 같은 추상적 보편자를 거부하고, ‘특수한 개체들(singularity)’의 사회 이상으로 제시한 것이었는데,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의 특징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했다.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Popup.nhn?movieCode=17874

파리코뮌은 파리시민이 농촌과 괴리된 상태에서 주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연대를 실현했다. 스페인 내전에서의 인민전선가운데 혁명의 최대 세력이었던 자생적 무정부주의자들은 도시에서는 산업체의 노동자 경영, 농촌에서는 토지의 공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무정부주의 ‘전국노동연합(CNT)’이외에도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 당(POUM)’이 있었는데, 이 조직에 헤밍웨이, 오웰과 같은 문인들, 켄 로치(Ken Loach) 감독 《토지와 자유》에 나오는 데이빗도 가담한다. 그의 여자 친구는 담대한 자발성을 보여줌으로써 무정부주의적 인간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들이 가담한 ‘포움’ 조직도 반스탈린주의적이고 무정부적인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다. 이에 반해 스페인 공산당은 소련의 코민테른 조직의 일부가 되어야 했으며, 외국에서 참여한 ‘국제여단’도 소련의 코민테른 산하의 공산주의 조직과 연계되어 있었다 한다. 이들은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 토벌 대상으로 규정하게 된다. 러시아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중앙 집중적 권력 조직인 당이 국가와 인민을 대표한다는 대표성(representation)을 숭상했다. 무정부주의는 민중의 직접적 참여성과 자발성(spontaneity)을 숭상하기 때문에 이를 용인하지 않는 스탈린주의와 대립했다.

 

파리코뮌을 엥겔스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도 묘사했다. 이는 대다수 인민이 극소수의 지배세력을 억제하고 주권을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에도 인민, 시민, 프롤레타리아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의 무정부성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른바 중앙 지도체제를 갖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제기한다. 훗날 레닌주의는 그 인민독재론을 엘리트 당 조직의 영도아래 공산사회로 가는 역사의 객관적인 과도 단계로 설정한다. 레닌주의는 당 조직의 민중 대표성과 초월적 지위를 강조함으로써 민중의 자발적 자각성을 의문시하여 억압하고, 민중과의 변증법적 소통능력을 상실하는 단점을 갖는다. 스페인 내전 기에 무기 원조를 통해 개입한 모스크바 중심의 국제공산주의(코민테른)는 중앙 집중제에 의거한 조직을 통해 무정부주의와 같은 자생적 급진주의 운동을 억압하거나 흡수하는 정책을 썼다. 《토지와 자유》라는 영화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무정부주의 혁명 노선의 관점에서 당시 스탈린주의 조직과의 대립을 그렸다.

 

스탈린 지배하의 코민테른은 1920년에서 1930년대 중국혁명 과정에서도 공산당과 파시스트 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약세의 공산당을 유지하고 혁명을 성공시킨다는 정책을 썼다.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인 진독수(陳獨秀, 1879~1942)가 민주주의를 주장하다가 우경 기회주의로 몰려 축출되어, 지금까지 복권되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스페인 공산당도 대외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와의 대립을 원치 않고 대내적으로는 민족주의를 표방한 우파 정당과의 노골적 대립을 원치 않았다. 사회개혁에서도 코민테른은 급진적 사회화를 반대하고, 부재지주 이외의 토지 몰수와 재분배를 반대했다.

 

스페인 내란기의 혁명 운동에서 좌파 세력의 분열은 혁명 실패의 한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적 저항세력의 민중적 순수성은 그 후 모든 저항자들과 문학 및 예술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민중성을 결여한 니체주의적 탈근대주의 철학은 이러한 지적 원천을 경시함으로써 체제내적 이데올로기로 편입되고 말았다. 자유를 향한 개체의 욕망 해방이 연대적 활동성과 분리될 때, 민중적 민주주의는 이기적 합리주의(신고전경제학의 기본 전제)의 세련된 문화적 쾌락주의에 흡수되고 만다는 것이 오늘의 교훈일 것이다. 자유를 향한 욕망의 실현에 충실할 것을 명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것, 즉 인간현실이라면 바로 이 현실이야 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실재일 수 있다. 수많은 문학 작품이 보여주듯 자유에의 욕망이라는 이 실재성에 충실한 도덕은 언제나 사회 정치적 저항과 함께 일어났다. 이러한 도덕이 진정으로 신성한 내적인 양심의 소리일 것이다. 이 양심을 부인하도록 하는 모든 체제는 인성 모독이다. 종교가 이러한 인성을 모독한다면, 스페인 혁명기의 가톨릭처럼 총통의 편에서 민중을 살해하는 신성모독의 광기를 행하는 것에 접근하는 것이 될 것이다.

 

1)  1948년 대한민국헌법 전문(前文)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은 없다. 1972년 제7차 유신헌법으로의 개헌에서부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첨가된다. 이 말은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용어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 다음은 1987년 대한민국헌법 전문(12월 29일 9차 개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 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 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 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 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下)에서 계속됩니다…

 

악의 존재를 믿어야 할 이유 – 영화 <곡성>과 악에 대한 성찰 [톡,톡,씨네톡]

한상원(한철연 회원)

 

영화 <곡성>은 곳곳에서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부활한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의 성흔을 보여주는 예수를 다룬 서두의 복음서 인용이 그렇고, 영화 말미에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내 곁에 있으면 모두가 살아나고 악마들이 질 것이라고 알려주는 무명(천우희)의 대사가 그렇다. 후자는 닭이 울기 전에 세 차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양자는 모두 믿음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무덤에서 깨어난 예수를 믿지 않았고, 그가 끌려갔을 때 그와의 관계를 부인하였다. 영화에서 주인공 종구(곽도원)의 믿음이 흔들린 순간,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곡성>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다룬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곡성>은 그보다 더욱 깊은 문제를 제기한다. 믿어라. 왜 믿지 못하는가. 무엇을? 신의 존재를? 아니다. <곡성>이 믿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악의 존재, 세계의 악이다.

그 메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영화의 종결부다. 한 편에서 종구가 수호신 무명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교차편집을 통해 동시간적으로 양이삼 부제(김도윤)는 악마 외지인(쿠니무라 준)을 만난다. 죽은 외지인은 3일만에 부활한 채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메시아의 모습과 마찬가지다. 낫을 들고 악마를 벌하러 간 부제는 의기양양하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외지인이 다시 묻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부제는 말한다. 악마다. 왜 말을 못 하는가. 외지인이 말한다. 자네가 이미 말했잖나.

이 대사는 요한 수난 복음에 나오는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를 상기시킨다. 나약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빌라도는 예수에게 추궁한다. 그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는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하고 답한다. (요한 18,37) 나를 임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여라, 라는 예수의 메시지에도 나약한 인간 빌라도는 그를 스스로 처단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 그의 처분권을 이양한다. 믿음이 약한 부제는 마치 빌라도가 예수를 끝내 자기 손으로 죽이지 못하는 것처럼 외지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다. 외지인이 자신이 악마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를 살려주고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이제 대화의 주도권은 외지인으로 넘어간다. 그는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을 부제가 왜 믿지 못하는지 추궁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몸에 난 성흔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내 몸을 만져보아라. 수난당한 뒤 부활한 그리스도를 완벽히 재현해내면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나약한 부제를 조롱한다.

이 영화를 둘러싸고 가장 논란이 많은 이 장면에서 내가 느낀 건, 어째서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냐고 우리에게 묻는 (신이 아닌) 악마의 목소리가 외지인의 입을 통해 나온다는 것이었다. 너희 인간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다. 마찬가지로 너희들은 나, 즉 악마의 존재 역시 부인한다.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계는 악하지 않다고 말한다. 보아라. 나는 악하고, 너희가 나의 존재를 부인하는 동안 너희는 악에 의해 지배당한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은 절대적인 것이고 시초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 반면, 악은 선의 결핍으로, 선이 부재한 곳에 자리잡은 어둠으로 정의내렸다. 악은 따라서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악을 창조하지 않았다. 악은 신이 창조한 선의 빛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자라나는 것이다. 이와 달리 헤겔은 선 역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은 그것의 대립물인 악의 부정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악은 선을 규정하는 데 불가피한 요소다. 만일 우리가 헤겔의 논의를 확대해본다면, 악에 대한 존재 증명은 동시에 선의 존재에 대한 증명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선과 악이 상호 대립하지만 또한 상호작용하는 개념쌍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악’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대해서는 인색해 왔던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세계에 ‘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비정한 세계,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 속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선’에 대한 믿음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가 공감할 사실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선’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는 만큼이나 ‘악’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세기 아우슈비츠와 대학살, 거대한 살육전쟁 등을 악으로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거대한 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그러한가? 세계에 악은 세계에서 소멸했는가? 세계는 더 이상 악의 지배를 받지 않는가? 악은 종교인들이 현대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규제할 때 사용하는 보수적인 슬로건에 불과한가? 오히려 한나 아렌트가 말한대로, 악은 ‘평범성’의 모습을 띄고, 우리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악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 믿지 못하는 자들은 악마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영화 <곡성>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전지전능한 모습으로가 아니라, 희생물로 바쳐질 자들의 옷을 입고 쪼그려 앉아서는 우리에게 돌맹이를 던지며 주의를 끄는 미약한 메시아가 우리에게 하려던 말 역시 악이 존재한다는 것, 악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 죽은 듯 숨어 있다가도 부활을 기다리는 악이, 자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약한 인간에게 ‘성흔’을 보여주며 존재를 과시할 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악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악에 대한 믿음과는 다르다. 오히려 악의 존재에 대한 통찰은 우리가 그러한 악으로부터 현혹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과 악에 대한 교리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태초에 신이 세계를 선하게 창조했으나 선이 모자란 자리에 악이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은 악이며, 부재하는 선은 바로 그 악에 대한 대항으로서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악이 존재한다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이 현재를 넘어설 수 있는 ‘각성’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 영화 세편이 모두 극악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세 편을 통해 계속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각성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요. 끔찍하고 불행한 일들은 이유없이 벌어지고 행해지지 않게 인간이 더 인간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악에 대한 성찰은 선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쪼그려 앉아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는 메시아와 손잡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이전에 악의 존재를, 그리고 그것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악의 존재를 믿는 자만이 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악은 강하고 선은 약하다. 선은 미약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 곁에서 어느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 힘으로 악과 부딪힘으로써. 미약한 선의 꺼질듯한 촛불을 지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곡성 공식 포스터 사진출처 : 프레시안

영화 곡성 공식 포스터 – 사진출처 : 프레시안

영화 <아이,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 그리고 인간-2 [톡,톡,씨네톡]

3. 영화<아이, 로봇>이 전하는 인간다움에 대하여

영화는 가정부 로봇이 주인에게 호흡기를 가져다주는 데 그걸 도둑으로 의심하고 쫒아가는 형사 스푸너가 결국은 헛짚은 것이라는 데에서 시작한다. 로봇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이 내장되어 있는 이상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 로봇3원칙의 큰 줄기는 ‘로봇은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인풋(input)에서 벗어나는 아웃풋(output)을 상상할 수 없는 로봇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형사 스푸너 만큼은 로봇3원칙 따위는 믿지 않는다. 인간 형사의 직감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영화의 시작은 아무 메시지도 없을 것 같은 스푸너의 샤워장면이다. 얼짱에 몸짱까지 겸비한 윌스미스가 상반신을 벗고 샤워하는 장면이야 그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지만 샤워할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스푸너가 중얼거리는 장면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미신(superstition)이라는 제목의 노래인데 스푸너가 ‘아이가 거울을 깼네. 7년동안 재수없겠네’라는 부분을 따라 부른다. 미신을 믿는 것도 역시 인간의 영역이지 합리적인 기계의 영역은 아니다. 미신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런데 형사 스푸너는 가장 합리적인 로봇을 신뢰하지 않고 미신의 가능성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영화는 합리성에 의외성이 덧붙여질 수 있음을 자살한 래닝박사의 연설에서 살짝 흘린다. 이미 합리성에 의외성이 덧붙여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식의 서사는 <바이센테니얼 맨>에 등장한다. 가정부로봇 앤드류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엔지니어가 복잡한 회로에 샌드위치에 묻어있던 마요네즈를 흘리면서 특별한 로봇이 탄생한다. 로봇을 제조한 회사는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 나무를 창조적으로 조각할 줄 아는 앤드류를 불량품으로 간주하고 주인 리처드에게 새것으로 바꿔줄 것을 약속하지만 리처드는 이를 거부한다. 오히려 앤드류를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로봇 앤드류가 만든 창작조각품을 팔아 개인 은행계좌를 만들어주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앞서 이야기한 인간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할 것 같은 인공지능의 전형이다. 영화에서 앤드류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묻고 되묻는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겉모습까지 인간과 비슷하게 바꾼 앤드류가 기계로서 영원한 생을 포기하고 인간답게 죽음을 선택한다. 죽음이 있는 유한한 삶이기 때문에 인간은 삶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 로봇>의 써니 역시 래닝박사의 말처럼 예상치 못한 코드가 결합되면서 영혼이라는 것이 탄생한 인공지능 로봇이다. 써니는 부상을 치료하려고 잠입한 NS-5의 공장에서 형사에게 ‘나는 누구인가?’(What am I)라고 묻는다. <아이, 로봇>을 써니에게 초점을 맞춰 본다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주제에서 보아야 한다. 사실 스스로를 반성적,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이다.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방식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영화에서 로봇 써니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소중하지만 잊고 사는 신뢰, 믿음, 사랑을 가진 인간이다. 그 모습을 형사 스푸너를 통해 보여주고 마치 거울처럼 로봇 써니가 학습한다. 위기의 순간, 써니는 스푸너가 반장에게 표현한 윙크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인공지능 로봇과 도시를 장악한 비키마저 속이고 인간을 구한다. 비키가 아무리 인격화된 최첨단 인공지능이라고 하더라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거짓말 속에 감추는 신뢰마저 학습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인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비인간’은 무엇인가? 인공지능 로봇을 생산하는 기업의 사장으로 상징되는 계산적, 합리적인 인간이다. 근대적 사유를 대변하는 계산적 합리성은 바로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스푸너는 이러한 기계문명을 혐오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근대적 사유에서 세계는 한 치의 오차도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다. 기독교의 완전성이라는 이념과 수학적 세계관의 만남은 이 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기계처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비록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과학문명이 발달하면 언젠가는 밝혀질 것들일 뿐이다. 여기에 우연성이나 비효율성은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할 악한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근대의 세계관은 자본주의의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적인 효율성을 따져서 관리하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여기에 인간적인 가치가 전면에 나설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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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4. 영화<아이, 로봇>이 전하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와 경계의 해체

영화에서 형사 스푸너는 인간이고 써니는 로봇이다. 겉으로 보기에 명확한 이 진실은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철학적으로 인간을 정신과 신체가 결합된 존재로 보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정신과 신체 둘 중 하나가 없다면 불완전한 인간이거나 존재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존재이다. 철학적으로 정신이란 이성, 무한성, 완전성, 능동성을 갖는다. 정신은 전통적으로 인간에게만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신체 없는 정신이 곧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령 뇌만 남겨져 있는 사람은 인간인가? 그런 인간에게 남겨져 있는 인간다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신체는 물질, 유한성, 불완전성, 수동성을 갖는다. 또한 신체는 유기체적 특성을 가지며 동물과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부분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임이 명확해 보이는 형사 스푸너는 신체의 일부가 기계인 인간이다. 이미 신체의 일부가 기계라는 사실은 대체된 부분이 몇 퍼센트까지는 인간이고 몇 퍼센트까지는 기계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스푸너는 완전한 인간 정신과 기계의 신체를 가진 반쪽 인간이다. 또 써니는 비록 몸은 기계이지만 정신만큼은 인간과 거의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존속살인이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정신을 소유한 존재이니 써니는 반쪽 기계이다. 영화에서 스푸너와 써니를 통해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해체된 것이다.

5. 인공지능을 넘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하여

인공지능은 분명히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인공지능 식의 철저한 합리성을 미래의 지향적 가치로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이미 서양의 근현대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발전과 번영을 누렸지만 인간의 가치를 상실해버린 시대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미래의 인공지능에 대한 우려는 새롭게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는 어려움 속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좀더 정교해진 자본주의의 착취시스템일 것이라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기업에게 여러 가지 변수를 계산해서 재고가 남지 않게 할 것이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다줄 시스템을 제시할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복지와 생존은 1%를 위하여 고려될 것이며 99%는 지금보다 더 열악한 빈익빈 부익부의 굴레에 묶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고 준비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조금이라도 덜 착취당할 수 있는 반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욕망 혹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간존엄의 실현과 놀이하듯 노동하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대안 세계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한다. 이 모든 것을 꿈꿀 수 있다면 미래는 이미 현실일 것이다. 써니가 꿈꾸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영화에서는 ‘혁명’의 주체가 누가될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지만 무너진 다리 밑에 서 있는 주체는 인간다운 정신을 가진 써니일지도 모른다. 써니의 꿈은 냉정하게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키보다 한 세대 진화한 인공지능의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 세상이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일지 아니면 인간에게 재앙을 안겨줄 세상인지는 인간인 우리가 어떤 꿈을 꾸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참고자료 

http://www.ekn.kr/news/article.html?no=205605

<이세돌 맞수 알파고 바둑 학습비결> 이성규 과학칼럼니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2&contents_id=111401

네이버캐스트<인공지능>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2&contents_id=109419

네이버캐스트<알파고(AlphaGo>

강지은(전 웹진편집주간, 건국대 강사)

영화 <아이, 로봇>과 인공지능의 미래 그리고 인간-1 [톡,톡,씨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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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 영화<아이, 로봇>(2004,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줄거리

–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

법칙 1.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선 안 되며,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다치도록 방관해서도 안 된다.

(Law I – A Robet May Not Injure A Human Being Or, Through Inaction, Allow A Human Being To Come To Harm)

법칙 2. 법칙 1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Law II – A Robot Must Obey Orders Given It By Human Beings Except Where Such Orders Would Conflict With The First Law)

법칙 3. 법칙 1, 2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

(Law III – A Robot Must Protect Its Own Existence As Long As Such Protection Does Not Conflict With The First Or Second Law).

근 미래인 2035년, 인간은 지능을 갖춘 로봇에게 생활의 모든 편의를 제공받으며 편리하게 살아가게 된다. 인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로봇 3원칙’이 내장된 로봇은 인간을 위해 요리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신뢰 받는 동반자로 여겨진다.

NS-4에 이어 더 높은 지능과 많은 기능을 가진 로봇 NS-5의 출시를 하루 앞둔 어느 날, NS-5의 창시자인 래닝 박사가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시카고 경찰 델 스프너(윌 스미스)는 자살이 아니라는데 확신을 갖고 사건 조사에 착수한다. 끔찍한 사고 이후로 로봇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던 그는 이 사건 역시 로봇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이 뒤에 숨은 음모를 파헤치려고 한다.

로봇 심리학자인 수잔 캘빈 박사(브리짓 모나한)의 도움으로 로봇 “써니”를 조사하기 시작한 스프너 형사는 로봇에 의한 범죄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래닝 박사의 죽음은 자살로 종결 지어지고, 은밀하게 사건을 추적해 들어가던 스프너는 급기야 로봇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데…

(출처 : 네이버 영화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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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나무위키

 

1.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사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 우리 삶에 가까이 있었다. 인간이 명령을 하면 명령하는 것만 계산해서 토해내는 것이 단순 프로그램의 세계라면 인공지능은 그 과정에 자체 판단력이 들어간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무엇이 우리 주변의 인공지능 시스템일까? 가장 단순한 가전제품이 바로 세탁기이다. 대부분의 세탁기는 일일이 물높이를 지정해주지 않아도 전원을 누르고 원하는 세탁코스를 선택하면 세탁기가 무게를 감지해 스스로 물높이를 맞춘다. 이런 원시적인 인공지능과 비슷하지만 한 단계 발전한 가전제품이 로봇청소기이다. 기존의 청소기는 인간이 방향을 맞춰 흡입구를 갖다 대면 먼지를 빨아들이는 시스템인데 로봇청소기는 센서를 통해 장애물을 인식해서 스스로 방향을 틀어 방 구석구석의 먼지를 흡입하고 돌아다니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면 스스로 충전기를 찾아가 접속한다. 여기에 상상력을 좀더 발휘한다면 가정부 일을 도맡아 알아서 척척하는 로봇 정도는 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아직 인공지능 가정부 로봇은 <아이, 로봇>(2004, 알렉스 프로야스)이나 <바이센테니얼 맨>(1999, 크리스 콜럼버스)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을 엄청나게 학습하고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2016년 3월 9일에서 15일까지 서울에서 벌어진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의 바둑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 프로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대결은 ‘세기의’ 대결로서 전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간의 대결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1990년 초반 퍼스널 컴퓨터(PC)의 대량보급으로 우리는 수많은 PC게임을 즐겼고 여전히 즐기고 있다. 오락실에 가야만 게임을 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손에 동전을 쥐지 않고도 게임을 하는 즐거움이란 요즘말로 꿀잼이었다. 밤새 몇 백 판의 게임을 해도 내가 지불하는 것은 전기세 정도로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예전부터 있던 바둑프로그램과 프로바둑기사의 대결에 그리도 관심을 많이 가졌을까. 까짓 컴퓨터게임이야 질리면 컴퓨터의 전원만 꺼버리면 그만인 것을 말이다.

문제는 알파고가 기존의 컴퓨터 게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발전한 인공지능 시스템의 프로그램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주목했던 것은 순간의 판단과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고도로 복잡한 인간의 세계를 알파고가 학습해 인간의 영역을 넘볼 수도 있겠다 싶은 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 2015년 10월 프로바둑 2단의 판후이와의 대결에서 알파고는 완승을 거둔 상황이었다. 최근까지 바둑은 컴퓨터에게 너무 어렵고 복잡한 세계였다. 그런데 알파고라는 인공지능이 그 복잡한 바둑의 세계를 정복할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바둑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역사 혹은 인간지능의 역사와 함께 해온 고도로 복잡한 게임이다. 바둑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박물지(博物誌)》에 ‘요(堯)나라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쳤다’, 또 말하기를 ‘순(舜)나라 임금이 아들 상균(商均)의 어리석음을 깨치기 위하여 바둑을 가르쳤다’, 또 ‘그 법이 지혜 있는 자가 아니면 잘 할 수가 없다’고 하였고,《논어(論語)》에 공자가 이르기를 ‘바둑 두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다(以奕爲爲之猶賢乎己)’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대 중국에서는 많이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둑의 시작이 요순시대라면 4천 년 이상 된 것이고 공자시대 역시 기원전 5~6세기이니 최소로 잡아도 2천 5백년 이상은 된 게임인 셈이다.

게다가 바둑은 서양의 체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경우의 수가 엄청나다. 체스는 64칸 안에서 6종류의 말을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데 특정한 위치에서 가능한 움직임이 약 12개이다. 그에 비해 361곳을 무작위로 둘 수 있는 바둑은 특정한 위치에서 가능한 움직임이 약 200개에 달한다. 체스의 경우 한 경기를 둘 때 고려해야 하는 경우의 수는 보통 10의 120승으로 계산된다. 하지만 바둑에 대한 경우의 수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바둑 경기의 경우의 수가 10의 170제곱이라고 하지만 구글은 바둑에 대한 경우의 수가 250의 150승이라 했고, 혹자는 10의 360승이라고도 한다. 어떤 경우든 우주 전체의 원자 숫자보다 더 많은 조합과 배열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경기를 깨끗하게 이기지 못한 이유는 10의 170제곱 이상의 경우의 수를 아직 다 학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국을 할 때마다 상대방의 공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위기 대응 능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알파고가 모든 경우의 수를 꿰뚫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알파고를 이기기 위해서 머리 싸매고 대국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쓸데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알파고는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고 심리적으로 흔들리지도 않으니 말이다.

사진출처 : SBS 뉴스

사진출처 : SBS 뉴스

 

2. 알파고, 인공지능의 미래가 궁금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알파고가 미래 진화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그 인공지능의 가능성 중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지점은 ‘과연 인공지능이 인간의 영역을 어디까지 넘어올 것인가’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질문 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셈이 숨어 있다. 그 첫 번째는 인공지능이라도 그것은 기계인데 인간을 넘어서기는 어렵지 않겠느냐이고 둘째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을 때 인간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지 않겠느냐이다. 마지막으로는 질문을 하는 인간도 설마하며 말하겠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오는 것이 가능하겠느냐이다.

일단 알파고와 인간의 대결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할만한 것들 세 가지 중에 첫 번째 것은 지금까지의 인공지능 발전수준이라면 고민 없이 답을 내도 좋을 것이다. 알파고가 비록 지금은 인간 이세돌에게 1패를 했지만 하루에도 수천 대국을 학습하고 있는 이상 어떤 인간바둑기사도 알파고를 이길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궁금한 것으로 설정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을 때 인간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미 언론에는 인공지능이 대체할 인간의 직업군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떠들고 있다. UN이 내놓은 ‘미래직업보고서’는 2030년까지 20억 개의 일자리가 소멸하고 현존하는 80%가 사라진다고 하였다. 맥킨지 연구소가 일자리를 소멸시킬 신기술로 꼽은 것들은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첨단로봇, 무인자동차, 차세대 유전자 지도, 3D프린터, 자원탐사 신기술, 신재생 에너지, 나노기술’ 등이다. 이 신기술들은 직간접적으로 모두 인공지능에 선을 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게이츠는 “인공지능은 미래 인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고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호킹 박사는 “인공지능의 완전한 발전은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 수 있다”는 발언까지 한 상황이다.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의 주제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일으킬 ‘제4차 산업혁명’>이었다. 18세기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근대화의 촉매가 된 1차 산업혁명, 19세기 전기, 화학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2차 산업혁명, 20세기 컴퓨터와 인터넷이 이끈 정보화 물결의 3차 산업혁명,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이 온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은 인간의 일자리를 기계에게 내주는 과정을 반복했다. 기술의 발전과 산업혁명 그리고 인간의 일자리 축소는 함께 해왔다. 분명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다. 자본은 다루기 어려운 인간을 통해 이윤을 얻기보다 다루기 쉬운 기계를 통해 이윤을 얻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학습했으니 말이다.

일자리를 인공지능에게 내주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창작의 영역마저 점차 인공지능에게 내주고 있다고 볼만한 현실이 눈앞에 있다. 영화 <아이, 로봇>에서 형사 스푸너는 NS-5, 즉 살인로봇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써니에게 박사를 왜 죽였냐고 심문하지만 써니는 자신은 절대 죽이지 않았다고 분노하며 테이블을 내려친다. 분노는 인간의 감정이지 로봇의 영역이 아니다. 스푸너는 써니에게 분노를 흉내내는 것 뿐이라고 하며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없는 증거로 인간 고유의 영역인 작곡, 명화 등을 만들어낼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 때 써니가 스푸너에게 한 질문은 “당신은 할 수 있어?”다. 자기도 할 수 없지만 보통인간인 형사도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예술창작의 영역도 인간과 로봇(인공지능)을 가르는 기준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실재로 작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놀라운 작곡실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회화에서도 주목받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 예술가는 자신의 고유 영역 이외의 정보나 자료는 얻기 어렵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최고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모두 입력할 수 있고 그것을 일정한 알고리즘으로 재창작할 수 있다. 천재작곡가를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출현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문제는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라는 다소 황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황당하다고 모른척 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너무나 많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시스템에 지배당하는 아주 오래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 시스템이 어느 순간 스스로 진화해 인격 비슷한 것을 갖출 경우 인간이 아무리 온오프(ON OFF) 버튼을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은 많은 SF 영화들에 짙게 깔려있다. 합리성을 대변하는 기계문명이 비합리성 투성이인 인간 세계를 리셋(reset)하려고 할 것이라는 예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주요 악역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인공 의식인 스카이넷(skynet)은 설정 자체가 인격화된 최첨단 인공지능이 인간을 말살하고 지구를 차지하려는 ‘야욕’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아이, 로봇>의 첨단 인공지능 비키(VIKI)는 인간이 너무나도 비합리적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시스템으로 살아가는 상황을 ‘교정’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오히려 <아이, 로봇>쪽의 인공지능이 사실 더 그럴듯한 인공지능의 미래가 아닐까. 세상을 독차지하려는 ‘야욕’ 역시 인간을 닮긴 했지만 기계문명의 생명은 합리성이므로 사실 <터미네이터>식의 스카이넷은 SF 영화의 재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스카이넷은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한 가짜 인간일뿐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에 예상 가능한 최첨단 인공지능은 <아이, 로봇>의 비키(VIKI)이다. 비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합리적인 인공지능이 그냥 봐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최대한의 생산성을 지향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쥐어짜왔던 자본의 역사처럼 인공지능 역시 생산성을 추구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역사적으로 서양의 근대를 이끌어온 합리성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기계 시스템으로 최대한의 생산성을 내왔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부터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아무런 생산성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빈둥거리고 그림그리고 음악을 듣는다. 심지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살면서 인간다움을 이루어왔다. 인공지능이 만약 거기까지 학습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 역시 빈둥거리고 싶어하지 않을까. 알파고가 하루에도 수천 대국을 학습하고 있지만 스스로 딱 멈추는 경지까지 간다면, 그 때 알파고는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

강지은(전 웹진편집주간, 건국대 강사)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