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과 종교(1)[대안도덕교과서]-13

인간의 삶과 종교(1)[대안도덕교과서]-13

 

 

진보성(방송대)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세계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1. 삶과 죽음, ‘나’와 ‘신’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자연의 변화 현상이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예를 들어볼 수 있겠지만 단적인 예로 낮과 밤의 변화를 들 수 있을 겁니다. 하루의 구성은 크게 보면 낮과 밤의 시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낮과 밤의 구분을 정확히 나눌 수 있는 잣대가 있을까요? 물론 기준을 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계절에 따라서도 차이가 납니다. 낮과 밤의 나뉨에 엄밀한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대략 오후 2시를 ‘낮’이라고 할 때 1시간 후인 오후 3시는 오후 2시와 같은 낮이지만 오후 2시에 비하면 조금 더 ‘밤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낮’입니다. 또 밤 12시는 명백하게 ‘밤’이지만 새벽을 지나 아침을 맞으면 낮을 밝힐 태양이 떠오릅니다. 이것도 ‘낮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밤’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의 섭리와 운행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면서 삶을 맞이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동시에 죽음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삶’과 ‘죽음’이란 서로 분리되어 나누어져 분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커다란 구성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인간은 서로 분리된 채 개인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의 인간 개체는 다른 인간 개체와는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개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개체들이 모이면 인간 군집이 되고 더 나아가 하나의 사회를 구성합니다. 한편,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들이 가지는 각각의 개인성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간 고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개성이기도 하구요. 이런 것을 통틀어 우리는 개체성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 독립된 개체성에 의존해 삶과 죽음을 판단합니다. 인류, 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의 태어남과 사라짐을 자연적인 우주의 운행이라고 했을 때 이 커다란 구성의 관점을 떠나서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나’라는 외로운 한 인간이 맞닥뜨린 해결할 수 없는 숙명적인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독립된 ‘나’가 고립된 ‘나’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나’만의 문제가 되면 그 문제에는 ‘나’의 감정이 개입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삶’이라는 단어를 듣는 다면 어떤 감정이 느껴지나요? 환희, 생동감, 기쁨, 밝음 따위의 감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슬픔, 우울, 불안, 어두움과 같은 감정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적 대립은 ‘존재(being)’로써의 ‘삶’과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Non-being)’로써 ‘죽음’에 대한 각각의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의 대입양상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 보다 삶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가 인간에게 더 긍정적으로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 대해 무한한 추구와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인지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현실에서 목도하는 죽음이라는 것을 곧 인간의 한계로 받아들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유한한 세계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유한한 인간은 곧 죽음을 앞둔 인간입니다. 언젠가는 소멸해버리는 나약함에 서있는 인간이기에 불안합니다. 이 유한한 세계를 뛰어넘기 위해 인간은 신(神;God)을 만들었습니다. 이 신 존재의 중요성 때문에 중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지요. 신은 인간이 유한한 세계를 벗어나 현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입니다. 신의 세계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무한한 세계이며 또한 끊임없이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세계입니다. 보통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의 ‘천국’이 여기에 해당하는 세계입니다.
 
 

2. 종교와 선·악의 개념

 
신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에는 천국과 지옥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물론 이 두 세계를 설정한 기원은 주로 서양의 유일신론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신론과 다르게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신념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유래합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에서 보는 신과 인간의 차이가 그렇습니다. 신은 무한하며 완전하고 성스럽고 초자연적인 존재이지만 이에 반대되는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속된 존재로써 일상의 자연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 구도에서 신의 영역은 선에 포함되고 인간의 영역은 악에 포함됩니다. 이렇게 종교에서 선과 악을 양분하여 구분하는 것을 선악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물론 다신론의 이란종교에서도 선한 신과 악한 신을 나누어 선과 악을 철저히 구분합니다. 반대로 인도종교에서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의 구분이 없는 선악 일원론이 발견되기도 하지요. 또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선과 악을 모두 가진 모호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엄밀히 볼 때 선악을 둘로 나누어보는 관점과 하나로 보는 관점은 서양과 동양에 모두 나타나고 있었고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차적으로 그 정도의 차이에 기인하여 선악 이원론을 서양종교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규정하는 것이고, 전 세계적으로 파급된 서양기독교의 영향력에 의해 이분법적 선악 이원론의 전통이 서양종교에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양종교가 강한 이분법적 전통을 가진다고 전제했을 때 선과 악을 둘로 나누는 특징을 동양, 좀 더 정확히 말해 동아시아 전통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종교 교단의 종지(宗旨)에 입각해 보았을 때 도교의 ‘도(道)’·불교의 ‘불성(佛性)’등 동아시아의 종교형태에서 말하는 만물의 운행 원리는 이미 모든 사물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적인 유일신을 상정하기는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절대자적 유일신이 있지 않다고 해서 선악 이원론을 동아시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현 세상을 물리치고 새로운 선한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대승불교의 미륵사상이나 선천이 가고 후천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민중적 혁명사상은 선과 악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종말론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선과 악을 나누는 이분법적 기준이 서양에서 유래했다고 하여 서양만 선·악을 논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선과 악에 대한 설정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동아시아는 정교일치(政敎一致)체제 안에서 강력한 신념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가 종교적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유교에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말로써 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겨 보편타당한 ‘예(禮)’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일면 건전하기 그지없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극복해야 할 대상 ‘자기(己)’는 곧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극기’라는 개념은 사적 이기심과 사사로운 욕망의 발단이 되는 현실의 인간을 부정적인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는 한계를 만들어냅니다. 이 때 ‘극기’하여 일반 인간 대상을 넘어 이상적 경지로 옮겨가는 자는 선한 행위를 하는 자가 됩니다.

이상적 경지를 설정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BC427~BC347)이 현실이 모방하고 있는 이상적인 세계 이데아(Idea)를 설정한 것과 비교적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孔子, BC551~BC479)는 하늘과 같은 이상의 경지에 있는 추상적 선함을 말하기도 했지만 한편, 그것을 땅으로 끌어내려 현실에서 선한 행위를 구현하는 자를 ‘어진 사람[仁者]’이라고 했습니다. 어진 사람만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알아 볼 줄 압니다. 이 때 말하는 ‘나쁨[惡]’이란 어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어질지 않은 사람에 대한 미움입니다. 선함을 추구하는 어진 사람이 나쁜 행실을 보이는 악한 사람을 좋은 사람이 되도록 교화하려는 미움인 것이지요.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보면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선과 악에 대한 개념규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유교의 예를 들어 보았을 때 동아시아의 선악관은 서양의 이분법적 절대 신의 존재에서 파생된 종교의 선악관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종교적인 개념에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서양 중심의 종교개념 전파로 동서양의 전통적 차이가 현저하게 사라진 현대 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상적 세계의 주재자인 신의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선이 되고 그 반대는 악이 됩니다. 악의 발원지가 되는 현실 세계에서 악이라 규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은 우리 삶에서 고통을 수반하는 외부의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며 삶을 고통으로 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는 회귀적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은 힌두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으로 과거부터 인간을 위협하던 자연재해, 질병, 전쟁과 같이 고통스러운 일들은 유한하고 한계적인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이것은 곧 현실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이 고통의 현실을 만드는 것에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의 전횡도 한 몫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민중들이 비참한 현실에서 죽지 못해 살아갔던 것이었죠. 종교는 선과 악을 구분하고 동시에 현실에서 선을 행하는 대리자들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도 있는 가톨릭의 교황, 왕권신수설로 만들어진 국왕, 중국의 천자(天子)라는 명칭들은 신 또는 주재적(主宰的) 자연의 섭리를 대신한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이름입니다. 이 이름들은 무겁습니다. 무거운 이름은 권위를 가진 이름입니다. 무거운 권위는 가벼움을 상쇄하고 짓눌러 버립니다. 과거의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생동하는 인간의 상상력과 자유를 억압했지요. 중세의 가톨릭이 신의 이름으로 과학과 예술을 장악한 것이 그렇습니다. 1632년 ‘하늘의 원리가 지상에도 있다’고 발언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를 재판정에 세운 것도 종교였고, 예술은 종교와 권력 있는 절대자를 향한 찬미의 예술이 되었습니다.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그 이전 1600년에는 로마 교황청 광장에서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라는 르네상스시기 자연철학자가 자연의 무한성을 얘기한 이유로 화형 당한 비극적인 일도 있었습니다. 무한 존재인 신의 섭리가 모든 자연물에 그 자체로 생성되어 있다는 주장은 무한세계 절대자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던 겁니다. 이미 인간과 신을 나눈 종교는 선과 악을 나누고 현실의 사회정치에서 계급을 통해 인간 스스로를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분류된 인간들을 선별해 선과 악의 가치를 평가하고 소수의 힘 있는 자와 다수의 약자들을 나누어 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경계를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신의 이름으로 선한 위치를 선점한 힘 있는 권력자들은 다수의 약자를 악의 영역에 두고 이들을 지배합니다.

통일과 도덕(2)[대안도덕교과서]-12

통일과 도덕(2)[대안도덕교과서]-12

 

 

이원혁(건국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3. 나와는 다른 사람과 친해지기로서, 남북 화해와 통일

 

제일 처음 소개했던 민서와 지훈이의 에피소드에서 이 둘을 강제로 화해시키고 매일 같이 생활하게 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다고 둘의 다툼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둘의 성적은 올라갈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쉽게 되진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화해는 다툼의 당사자들의 상처를 보듬는 것부터 시작해야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없이 진행되는 화해는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 것입니다.

이는 남과 북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남북간의 화해와 통일은 요원할 것입니다. 기나긴 시간 속에서 점점 커져왔던 상처를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넘어져 다쳤을 때 무턱대고 반창고부터 붙이지 않듯이 상처의 치료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우선 상처를 물로 깨끗이 씻고, 소독약을 바른 후, 적절한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는 순서가 일반적이지요. 상처는 피가 멎으면, 부기부터 가라앉은 후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아나겠죠. 마음의 상처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듯합니다. 상처를 깨끗이 하고 소독을 하면 피가 멎고 부기가 가라앉듯이, 남과 북이 분단의 상처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부기가 가라앉듯이 상호간에 안정과 믿음이 찾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분단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적대감과 이질감 그리고 분단된 각각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분열과 대결의식을 걷어내는 것은 상처에서 가장 중요한 처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무언가 불완전하고 부족해보여 마음 속 불안감을 자아냈던 우리나라는 비로소 백수십년 전 조상들이 바라던 서로 돕고 웃으며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이대로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존중과 신뢰라는 말은 참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인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민서나 지훈이에게 단순하게 “너희는 서로 존중하고 믿어야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입니다. 민서와 지훈이에게 가장 큰 문제점을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잣대로만 상대를 바라보고 상대가 자신과 닮기를 강요하는 것이죠. 그리고 둘 다 그 생각을 굽히지 않으니 사이가 좋을 수가 없겠죠.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남은 나와 대립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참 어떻게 보면 당연한 소리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봅시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대하거나 평가할 때 나의 기준에서 남을 ‘내가 가진 것을 가진 사람 혹은 가지 않은 사람, 혹은 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거나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내가 아닌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죠. 나와 다른 사람을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바로 나와 다른 사람은 내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즉 이럴 경우 모든 다른 사람은 나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만 평가받고 인정되기 때문에 내가 없이는 다른 어떤 사람도 ‘없는 사람’ 또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도, 친구가 될 수도 없는 것이지요. 민서와 지훈이는 자신의 가치관으로만 서로를 헤아리고 있기 때문에 둘은 끊임없이 티격태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때에는 그 사람의 본질을 그 사람의 내부에서 찾아야지, 자신이 믿는 특정한 가치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분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해될 수 있는 사람이며 나와 다르지만 용납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상처를 진정시키는 단계로 서로간의 안정과 신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쳐서는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정말 나와는 전혀 다른 그래서 나의 가치관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정말 ‘남’이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이 ‘남’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불편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하겠지요.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결국 서로의 다름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정복하려 들거나, 반대로 숭배하거나 아니면 소통을 포기하는 외톨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상처가 진정되었다면 이제 그 갈라진 틈을 메우는 것이 중요하겠죠. 바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 그리고 동질성의 회복입니다. 역사책과 윤리교과서에서 많이 등장한 인물이죠. 원효대사는 ‘화쟁’이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효는 “다름이 있어야 같음이 드러나고 같음이 있어야 다름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서로의 다른 점은 서로의 닮은 점을 찾아낼 수 있는 좋은 힌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로 닮은 모습은 서로의 다른 모습을 돋보이게도 하는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봄으로써 상대에 대한 더욱 냉정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며 ‘나’라는 작은 틀을 벗어나게 하여 ‘나’ 밖에 있는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나의 위치는 나 자신한테만 있지 않으며, 타인 속에 있지도 않게 되겠지요. 그리고 비로소 이때 우리는 바로 다른 사람과 나의 중간, 즉 경계 속에서 서로간의 조화를 그릴 수 있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 사이를 드나들며 이루는 소통과 통일은 나의 입장으로 다른 사람들 묶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나를 귀속시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논어 자로편에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진 사람은 조화를 이루지만 똑같아지지는 않고 어리석은 사람은 똑같아지면서도 조화를 이루지는 못 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조화 속에서 나와 다른 사람과 친해질 수 있으며, 소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민서와 지훈이 간의 화해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는 개인 간의 관계를 남과 북에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www.segye.com

출처: www.segye.com

 

남과 북의 적대감과 불통은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상처, 그리고 그 상처의 방치 혹은 잘 못된 처치로 악화되어 왔습니다. 하나였던 것이 분열되니 이질성이 생기고 그것이 적대성으로 나아갔지만 오히려 이러한 이질성과 적대성은 통합을 위한 에너지이기도하다. 남과 북 사이의 차이의 인정은 밉고 싫지만 평화공존을 위해 인정한다는 인내의 차원을 넘어 밉고 싫은 마음이 분단체제가 낳은 비정상적 산물이라는 지각과 그 지각에 뒤이어 동반되는 상호존중이라는 보다 성숙한 차원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우리는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냉정히 판단함으로써 상대를 이해하고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상대도 나를 이해할 기회를 줌으로써 서로간의 조화가 가능해 질것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조화를 이뤄간다면 그 순간이 바로 통일이 시작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4. 아름다운 통일의 모습

 

통일의 효과에 대해서 많은 장밋빛 미래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통일한국이 경제적, 군사적 대국이 될 수 있다는 꿈들은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은 통일을 손익을 따지는 계산기 속에서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기업이 새로운 사업진출 여부를 가리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이런 모습에서는 통일의 정당성이 현재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할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이러한 상상의 이면에는 우리가 앞서 경계한 나의 입장에서 상대를 결정하고 둘의 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살펴본 것처럼 이런 모습은 결코 진짜 통일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이것보다 조금 큰 이상과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은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평화를 종결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제입니다. 분단이라는 조건으로 남북 주민들에게 제시되었던 부담과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남북간의 화해와 통일은 한반도라는 작은 지역의 평화가 아닌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화합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마지막 대치 장소는 그 긴장을 품으로서 서로 다른 세계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장소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남과 북은 ‘부국과 빈국’, ‘동양과 서양’, ‘근대와 탈근대’가 대립하는 장소입니다. 세계에는 다양한 나라가 있습니다. 남한과 같이 경제적 선진국 또는 자본주의국가 그리고 서구문화에 익숙한 나라들이 있는 반면, 북한과 같이 경제적으로 낙후되거나 사회주의 경제시스템을 고수하며, 아직 근대적 가치에 많은 비중을 두며 서구문명이 이질적인 나라들도 있습니다. 남북은 각자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의 다양한 대립을 축소해놓은 시험장이기도 합니다. 통일은 한반도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넘어 근대와 제국주의 시절에 자행되었던 세계 속의 수많은 대립과 갈등을 해소에 기여할 것입니다. 따라서 남북의 화해와 통일은 세계의 화해와 조화를 이끌고 그 미래를 제안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입니다. 이땅의 통일이 한반도와 세계 속에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어제와 오늘의 상처를 딛고 미래를 향해 웃을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을 기대해 봅니다.

통일과 도덕(1)[대안도덕교과서]-11

통일과 도덕(1)[대안도덕교과서]-11

 

 

이원혁(건국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서로 너무나 다른 남과 북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작은 상황극을 한번 살펴보는건 어떨까요? 한 책상을 쓰는 두 초등학생이 티격태격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해봅시다.

선생님 ? 지훈아 너랑 민서는 짝꿍인데 왜 그리 다투니?

지훈 – “제 짝꿍 민서는 저랑 너무 달라요. 도무지 한국인이라는 것 말고는 닮은 점이 없어요. 짝꿍끼리는 친하게 지내야한다고해서 이것저것 알려주고 친하게 지내려하지만 저 고집불통은 참견 말라며 오히려 역정을 내네요. 이 답답한 친구랑 한 책상에 묶여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에요. 사실 이 친구의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에요. 제가 이래봬도 공부를 쫌 하거든요. 그래서 제 공부 방법을 가르쳐주려하는데.. 세상에 그게 기분이 나쁘데요. 같은 책상을 쓰니 안 볼 수도 없고 그 친구랑 어떻게 지내야할까요?”

민서 – “지훈이는 이상한 친구에요. 말로는 친하게 지내자고하면서 항상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들거든요. 저는 저만의 공부방식이 있어요. 누가 뭐래도 이게 가장 저에게 맞는 것 같아요. 비록 지금은 성적이 좋지 않지만 곧 좋아지리라 믿어요. 저는 이 방식을 바꿀 마음이 없어요. 그런데 지훈이는 제 방식이 틀렸다고 비아냥거려요. 그리고 어색하기만한 자기 방식을 보여주며 우쭐되곤 해요. 그리고 제 짝꿍이지만 다른 친구들이랑 더 어울리곤하는데 가끔 제 험담을 하는 것 같아 속상해요. 그래서 한 소리를 했더니 적반하장으로 되레 제게 뭐라고 하네요.

선생님 ? “그런데 너희 둘은 저번에 반 아이들에게는 둘이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했다며? 둘이서 서로 조금 양보하면 안 될까? 둘이 쉽게 화해하기 힘든 이유가 있니?”

지훈 – “민서는 입이 너무 험해요. 조금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먹을 불끈 쥐고 욕설을 해요. 이렇게 말을 너무 함부로 하니 다가가기가 어려워요. 사실은 저희가 예전에는 매우 친했어요. 그런데 크게 한번 다툰 뒤로 사이가 너무 멀어졌어요. 얼마나 심하게 다퉜냐하면 주먹다짐을 할 정도였어요. 그때 민서가 저를 먼저 때려서 크게 다퉜어요. 왜 싸웠냐고요? 민서가 저를 먼저 때렸다니깐요? 어떻게 짝꿍을 먼저 때릴 수가 있죠? 사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민서랑은 놀고 싶지 않아요.

민서 – “제가 먼저 때렸다구요? 그게 중요한가요? 그 싸움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요. 사정이 있으면 먼저 때릴 수도 있죠. 지훈이는 지금도 항상 그런 식이에요. 전후 사정보다 제 행동의 겉모습만 보고 뭐라고 해요. 그리고 제가 뭐만 하려고 하면 ‘공부도 못하면서 그런 것도 하려고해? 공부나 해’라고 핀잔을 줘요. 치.. 공부를 못하면 다른 건 하면 안 되나요?

선생님 – “지훈이는 민서의 행동을 존중해 주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민서는 지훈이의 조언이나 다른 친구들의 공부 방법을 참고해보는 건 어떨까?”

지훈 ? “민서가 공부를 너무 못하니깐 하는 소리에요. 물론 공부 말고 다른 것도 중요하죠. 그런데 학생에게 제일 중요한건 공부 아니겠어요? 아무리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야지 않겠어요?

제 말대로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민서는 절대 말을 안 들어요. 민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지도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않아요. 이래서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매일 꽁하게 있기만 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화만 내니 도대체 쟤를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

민서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제방식이 옳다고 생각해요. 지훈이는 너무 자기마음대로에요. 자기랑 같은 방식이 아니라고 절 너무 이상한 아이취급해요. 사실 전 지훈이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해요. 이건 비밀인데 저번에 지훈이가 복도에서 주운 동전을 가지는 거 봤어요. 그런 아이의 방식을 제가 어떻게 믿겠어요? 전 사실 지훈이가 저를 자기랑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까봐 걱정이에요. 그래서 지훈이의 겉으로 보이는 호의를 믿지를 못하겠어요. 왜냐면 저는 저만의 방식을 잃고 싶지 않거든요.”

남북의 상황을 티격태격하는 두 아이의 상황으로 엮어서 만들어봤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위 대화에서 지훈이과 민서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러한 생황에서 과연 통일은 가능할까요? 두 아이는 서로 화해하고 싶어 하는 것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받아있습니다. 그리고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하는만큼 자신의 방법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히 차있습니다.

이 에피소드와 남북관계에는 비록 같을 순 없지만 비슷한 문제점이 있죠. 남과 북은 항상 통일과 화해를 이야기하지만 서로에 대한 불신과 상처가 이 화해를 가로막고 더 나아가 서로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남과 북은 어떻게 하면 서로의 상처를 딛고 서로를 웃으며 마주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위해서는 서로가 가진 상처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먼저 살펴봐야할 것입니다.

 

2. 분단의 상처와 그 발단

 

남과 북은 분단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아마 ‘분단을 극복하자’, 또는 ‘통일을 하자’라고 주장하는 큰 이유는 이러한 상처들을 극복하자는 것일 겁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인명, 재산적 피해, 이산가족, 남북간의 긴장관계 그리고 이로 인한 여러 부차적 효과들은 남과 북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분명 이러한 상처는 쉽게 치유되기 힘든 병으로 남과 북 모두의 몸과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단으로 인한 상처에 대해 조금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경제적 피해로만 분단의 상처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진출처: ehistory.go.kr

사진출처: ehistory.go.kr


 
분단이 된지 벌써 60년을 넘어 7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우리는 분단 그 당시의 상황과는 많이 다른 모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후 복구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완료되어 전쟁의 상흔은 박물관과 오래된 기록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산가족들도 오랜 세월 속에 그 수가 많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분단당시와 전쟁을 직접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분단의 상처가 쉽게 와 닿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분단은 일상에서는 완전히 잊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왠지 분단이라는 상황은 께름칙한 무언가를 계속 남기기도 합니다. 휴전선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재래식 무기의 대치장소입니다. 그러나 혹자는 안보불감증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겠지만, 70여년에 가까운 그 대치 자체보다 그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에는 분단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께름칙한 무언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나라를 ‘뭔가 부족한 나라, 뭔가 불안정한 나라’로 생각하게 합니다. 기존의 윤리교과서를 비롯하여 많은 책들은 분단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며, 통일은 우리나라를 완성하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설명이 부족해왔던 것 같습니다. 냉전시대 남한에서는 ‘민족의 원수 빨갱이 김일성’을 무찌르기 위해서, 북한에서는 ‘미제의 앞잡이 남조선 괴뢰도당’을 몰아내기위해서 분단과 통일을 설명해왔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분단으로 인해 가로막힌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나 현재나 이러한 인식들은 분단의 상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적어보입니다. 다만 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이 순간을 단순히 벗어나기 위해 다급하게 통일을 이야기하고, 남과 북은 서로를 자신의 잣대로 평가해왔습니다. 따라서 분단을 해소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더욱 고착화시키는 모양새를 띠었습니다. 위에 소개되었던 민서와 지훈이의 다툼에서 우리는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그 상황 자체에 대한 파악을 하지 않으려는, 또 그럼으로써 왜 상대가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두 아이의 안타까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두 아이의 화해를 위해서는 왜 두 아이가 다투는지 그리고 그 상처가 무엇인지 살펴봐야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서로 다른 그 둘이 어떻게 공존하고 화해하고 그리고 하나가 되는지 보는 것이 좋은 순서가 될 것입니다.

혹시 ‘트라우마’라는 말을 아시나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심각한 기계적 충격이나 사고 그리고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기타 사고를 겪은 후에 발생하는 스트레스 장애’를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트라우마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그리고 한 세대가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보통의 트라우마가 어떤 사고의 당사자의 개인적 체험에 그친다면 여러 세대에 걸쳐 집단에 나타나는 트라우마는 그 당사자와 관계하고 있는 집단 내부로 옮아가는 독특한 점이 있죠. 이러한 트라우마를 조금 어려운 말로 ‘역사적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설명이 조금 어려워졌는데, 조금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트라우마는 개인의 안전이나 살려고하는 에너지가 손상되었을 때 나타납니다. 즉 우리가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신체를 지켜가는 활동이 외부의 강제로 인해 손상되거나 박탈되었을 때 트라우마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트라우마’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공유하는 집단이 그들의 공통된 욕망과 욕구가 좌절되거나 억압되면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위의 말에 따르면, 과거와 현재 우리나라사람들 사이에 공통된 욕망이 있었고 그 것이 좌절되어 큰 상처를 남겼다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구한말 조선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바람 앞에 등불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유학의 전통은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었고, 서양의 위력은 세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과학기술은 부러움을 넘어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동양의 전통을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드리려 했으나, 이는 서양의 접시에 미역국을 담으려하는 것처럼 서로 결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근대민족국가와 자본주의라는 형식에서 만들어진 기술을 전근대의 사회와 국가에서 담아내기는 힘든 것이었죠.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서양과 같은 근대적 민족국가건설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래서 신민회도 만들고 독립문도 세우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갑오개혁과 동학혁명을 진행하기도 했죠.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이러한 노력은 일제에 의한 한반도의 식민지화로 좌절되었습니다.

흔히 서양의 민족국가를 ‘상상된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봉건시대에 흩어져있던 여러 사람들을 묶고,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적 대립 극복하기 위해 민족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해 소위 ‘세계화’가 진행되고 새로운 가치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기존의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보호장치이자 안식처로서 민족은 요청되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의 국가는 그러한 안식처이나 상호 호혜적 집단으로서 민족이 빠진 국가였습니다. 서양의 다른 나라들은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공동체의 공통된 욕망을 충족하고자 했습니다. 비록 그런 욕망이 제국주의 등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째든 그들은 집단의 욕망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내보였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우리나라는 민족과 국가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제가 강점한 국가는 민족을 억압하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그 국가는 공동체가 욕망하는 국가가 아니라 공동체의 욕망을 위해 제거되어야하는 국가였습니다. 숱한 탄압에도 우리네 선조들이 꿋꿋이 독립운동을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지요. 일제 강점기는 바로 아버지로서 국가가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도둑처럼 찾아온 광복’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서로가 자신이 아버지라 주장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남과 북은 서로가 과거에 좌절된 근대적 민족국가의 이상이 바로 자신이라며 대립을 하였고 다른 상대를 일제와 마찬가지로 민족국가 건국을 방해하는 적으로 삼고 타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전쟁은 지금과 같은 분단을 만들어 결국은 누구도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결손가정, 아니 결손국가를 만들었습니다. 100여 년 전부터 고대해온 민족국가의 성립이라는 집단적 욕구의 좌절은 남북 모두에게 큰 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 상대에 대해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자신은 그 책임을 면제 받으려 해왔습니다. 그리고 분단과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김으로서 상대방을 대화와 타협의 상대가 아닌 용납할 수 없는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남과 북은 구한말부터 내려오던 민족국가의 이상이 실패한 ‘원죄의식’을 서로에 대한 폭력으로 전환시켜왔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도 누군가 나서 어떻게든 가정을 이끌어야겠지요.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결손국가가 되어버린 남과 북은 완성된 민족국가가 아닌 결손국가가 되어버린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김으로서 남과 북 각자의 내부를 통합하여 국가의 정당성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남과 북은 각자를 지금은 조금 부족하지만 곧 완전해질 이상적 국가에 자신의 모습에 대입하고 상대를 방해꾼 혹은 이해할 수 없는 나쁜 편으로 정해버렸습니다. 남북의 적대감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형성되고 강화되어 왔습니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그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에 의해 한 집단 속에서 옮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트라우마는 요즘 일어나는 사건과 과거의 분단 또는 전쟁이 결합하면서 그 상처가 불쑥불쑥 표면으로 들어납니다. 예를 들어 북한의 미사일발사 실험은 과거 한국전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여 그 옛날 한국전쟁의 공포를 마치 오늘의 공포처럼 되살려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트라우마는 지나간 상처의 흉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 됩니다. 과거에 집단적으로 좌절된 이상과 그 실패의 정점을 찍은 전쟁은 후대의 세대에도 상처로 유전되어 집단적 허전함과 불안감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과거에 할아버지가 본 자라는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마음속에 자리하여 실제 자라와 크게 상관없고 겉모양만 닮은 솥뚜껑만 봐도 과거의 긴장이 되살아나는 신기한 유전병이 생겨난 것입니다. 즉, 분단의 상처는 우리가 평소에 뚜렷하게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세대를 넘어 전해져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은 이러한 서로간의 상처에 대한 문제에 대한 이해, 즉 서로의 상처가 닮았다는 점 그리고 그 상처가 오래되었다는 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서 비로소 그 논의의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2)[대안도덕교과서]-10

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2)[대안도덕교과서]-10

 

 

오상현(숭실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평생 공부만 하라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열심히 배우고 시도 때도 없이 익히면 즐거운가요? 만약 공부 자체가 너무너무 즐겁다면, 그래서 초중고 12년을 한 20년쯤으로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가까운 병원에 가서 상담받기를 권합니다. 솔직히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게 재미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 사상에서는 혼자 있을 때에도 삼가는 마음으로 자기를 위한 공부에 매진하라고 합니다. 참 답답할 노릇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 말은 천하를 평화롭게 하기 전에 반드시 나라를 다스려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 반드시 가정을 다스려야 하며, 가정을 다스리기 전에 스스로 엄격한 수양을 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천하를 다스리는 일도 결국은 자기 수양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게요. 대통령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정합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제는 누구나 그 잘못을 탓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의미에 비추어 해석한다면, 국가적 문제, 즉 대통령의 잘못을 탓하려고 한다면 그 전에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려야만 하고, 그 전에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시무시하죠. 공자의 제자 중에 증삼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야 비로소 (엄격한 자기 수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구나!” 유가의 자기수양의 엄격성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가의 자기 공부는 이렇게 무겁고 어려기만 한 일이었을까요?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집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서는 누구에게나 공손해야 한다. 삼가는 마음으로 뱉은 말은 꼭 지키고, 편 가르지 말고 사랑하여라. 또한 어진 사람과 가까지 지내도록 하여라. 이렇게 행하고도 혹여 남는 힘이 있다면, 비로소 그때 공부하여라.” 『논어』 「학이」

공자가 남긴 공부에 관한 말 중에서 위의 대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공부를 학문(學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 그럼 우리는 언제 학문을 해야 할까요? 공자는 말했습니다. ‘힘이 남을 때’라고. 우리가 흔히 쓰는 여력(餘力)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습니다. ‘여력’이란 ‘남은 힘’을 의미합니다. ‘여력이 없다’는 말은 ‘남은 힘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공자가 ‘남은 힘’으로 공부를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공자가 생각한 공부는 책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에서는 부모님과 마주하고 밖에서는 친구나 어른들, 혹은 선생님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늘 누군가와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의 의미처럼 혼자 살 수만은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지요. 공자가 볼 때, 공부는 바로 그렇게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쉽게 말해 도덕 시험 점수 100점 맞는 사람과 훌륭한 인격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묵묵히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단순한 문제의 해답 속에 공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이제 눈치를 채셨나요? 유가에서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사실 책을 읽고 암기하고 문제 푸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어 단어를 많이 외고 수학 공식을 많이 아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 아닙니다. 공자는 말합니다. 착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실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혹시 그렇게 하고도 남는 힘이 있다면 그때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린 것이니까요. ‘지행합일(知行合一)’, 즉 ‘아는 것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진리가 동서양 모든 철학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공부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공부 왜 하세요?” 새 학기 강의가 시작되면 첫 시간에 제가 꼭 학생들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대체로 ‘수업을 듣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저는 또 묻습니다. “수업을 왜 잘 들으려고 하나요?” 그러면 대체로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라고 답하더군요. 그러면 저는 또 묻습니다. “학점은 왜 잘 받아야 하죠?” 자 이제 눈치를 채셨나요? 제가 왜 이렇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졌을까요?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하다보면 결국 왜 사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삶의 물음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이 한결같이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점입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월급이 많아지고, 월급이 많아야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하고 그럴 수 있다는 거죠. 그래야만 비로소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행복’이라는 근원적 목표로 거슬러가는 길은 각자 조금씩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은 반드시 궁극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행동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행복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부모님의 행복을 위한 것? 혹은 선생님을 위한 것? 아닙니다. 모두 틀렸습니다. 결국 그 행복을 누리는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공자는 그래서 나를 위해서 공부하라고 말했습니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공부한다는 자들은 자신을 위해서 했다. (하지만) 요즘 공부한다는 자들은 남에게 보이려고만 하는구나.” 『논어』 「헌문」

월드 스타가 된 싸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전세계를 열광시킨 가수 싸이는 남들 다 하는 대학 입학 준비, 취업을 위한 스팩 쌓기 등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매일 음악만을 생각했습니다. 그저 음악에만 충(忠)했습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무명일 때에도 좌절하지 않고 음악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공자의 말을 빌리면 싸이는 전적으로 자기를 위해 공부한 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짜 자기를 위해서, 그래서 진짜 자기가 하고 싶어서 공부하고 있나요? 혹시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기대 때문에 억지로 하지는 않나요?

대학생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라는 것이 더 안타깝습니다. 초중고 학창시절 내내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정작 대학에 입학해도 남들 다 하는 토익 준비나 학점에 목을 매기 일쑤입니다. 정작 자기가 선택한 학과가 적성에 맞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는 학생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땀에 절어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땀냄새를 없애는 방법으로 향수를 택했다고 합시다. 몇 시간은 버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그 고약한 땀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또 다시 향수를 뿌리는 게 합리적일까요? 아니면 깨끗하게 샤워를 하는 것이 나을까요? 문제의 해결책은 근원적인 원인을 제가하는 데에 있지 드러나 증상만을 다른 것으로 뒤엎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정리할게요. 공부는 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 100점 맞는 놈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좋은 머리로 나쁜 짓을 더 많이, 완벽하게 해낼지 모르지요. 공부 잘 한다고 꼭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적은 좀 떨어져도 정말 인간적인 녀석들이 성공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사회라는 틀 속에서 누군가와 마주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짜 공부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엄마나 아빠가 바라는 꿈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보다 자기가 정말 좋아서 공부하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성공에 가깝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사 지내는 형식에 정답이 있다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면 평소에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온갖 음식을 정성껏 장만하고 조상님들께 차례를 올립니다. 또 종교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1년에 몇 번씩은 조상님들을 위해 제사를 지냅니다. 그렇게 되면 차례상 혹은 제사상을 두고 간혹 어른들끼리 의견 충돌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를테면 생선과 고기 위치, 혹은 흰 과일과 붉은 과일 등의 음식 위치를 바꿔야 한다는 상차림에 대한 논란에서부터, 술을 올리고 밥을 올려야 한다든가 밥그릇 뚜껑을 언제 닫아야 하느냐는 제사순서에 대한 논란까지 종류도 다양합니다. 게다가 시간(봄인지 가을인지)과 공간(전라도인지 경상도인지)에 따라 제사음식 자체도 다르고 순서도 모두 제각각입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다들 제사지내는 법이 따로 있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죄다 다른데도 정답이 있다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릴 때 저희 집은 일 년에 대여섯 번 정도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에만 올리는 음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젯상에는 올리지만 평소에는 거의 먹지 않는 음식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혹시 경상북도 안동지역의 ‘헛제삿밥’을 아시냐요? 제사에 쓰이는 나물들을 간장에 비비고, 고등어나 고래고기 같은 제사 음식을 곁들여 먹는 것으로 이제는 안동지역의 대표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 음식은 본래 제사를 지낸 뒤에 만들어 먹던 음식인데 그 맛이 좋아서 제사랑 상관없이 먹게 된 음식입니다.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이처럼 제사를 지내면 남은 음식들이 늘 문젯거리가 됩니다.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음식들을 젯상에 올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중에 내가 제사를 지내게 되면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올리겠다고요. 할아버지는 사이다를 엄청 좋아하셨습니다. 특히 별이 일곱 개가 있는 회사의 사이다만 드셨습니다. 할머니는 간장 게장을 좋아하셨는데 나중에는 이가 없으셔서 아예 잘게 부셔놓은 게에 양념을 버무려 게장을 담그시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한 제상에 사이다나 간장게장을 올리면 나쁜 행동이고 예의에도 어긋날까요?

원래 상상력은 끝도 없기 때문에 먼 훗날도 생각해봤습니다. 내 후손들이 나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면 어떤 음식이 좋을까 하고요. ‘오징어젓갈, 미역줄기볶음, 쇠고기무국, 홍어삼합’ 정도면 참 좋겠습니다. 제사가 끝나자마자 제사에 모인 사람들이 둘러앉아 바로바로 먹어치울 수도 있으니까 음식 남을 걱정도 없지요. 여러분들은 훗날의 자신의 제사상에 어떤 음식이 올라오길 바라나요? 돼지갈비나 초밥, 까르보나라 스파게티가 떠오르진 않나요? 우리의 이런 즐거운 상상에 대해 공자는 뭐라고 답할까요?

임방이라는 제자가 예의의 근본에 대하여 여쭈었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한 질문이구나. 예의라는 것은 사치스러운 것보다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또한) 장례를 치를 때에는 (절차를 잘 알아서) 쉽게 (잘) 치르는 것보다 차라리 (진정으로) 슬퍼해야 한다. 『논어』 「팔일」

실제로 동양철학의 역사 속에서 유가는 너무 형식에 얽매인 집단이고 장례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에 너무 사치스럽게 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논어 안에 등장하는 공자의 말을 들으면 과한 비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적어도 공자 자신은 겉으로 보여지는 형식적인 측면에 힘을 쏟기 보다는 내면의 진실성에 더 귀를 기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해봅시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 그와 같을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차 조심해라’, ‘밥 굶지 말고 다녀라’라고 잔소리하던 그런 엄마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니. 말로 하기 어려운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만약 개신교를 종교로 가진 이모와 불교를 종교로 가진 삼촌이 서로 자기의 종교식으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다툰다면 저는 아마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유족들이 장례법을 가지고 다투는 일은 자주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고인께서 생전에 믿던 종교의 예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장례는 세상을 떠나신 분을 위한 마지막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온전히 그분을 위해 슬퍼하고, 또한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러 와주신 분들에게 그분을 대신에 인사를 드리는 것이겠지요.

‘홍동백서(紅東白西)’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이 말을 ‘제사상을 차릴 때, 신위를 기준으로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사과처럼 붉은 과일은 동쪽에, 배처럼 흰 과일은 서쪽에 놓으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홍동백서’가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서울을 떠나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이 바다에 침몰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월호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을 온통 슬픔에 빠지게 했던 안타깝고 절망적인 사건이고 두 번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특히 이 배에는 수학여행을 위해 승선했던 10대의 학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건 이후 처음 맞이하는 추석명절, 유가족들은 희생된 아이들을 위한 정성스런 차례상을 준비했습니다. 피자와 치킨, 콜라와 과자로 차려진 차례상이지만 그 누구도 불경스럽고 예의에 어긋났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누구보다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부모들은 희생된 아이들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음식을 제사상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들의 진솔한 태도에 감히 누가 제사상의 예의범절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정리하겠습니다. 제사는 유가에서 행했던 중요한 의식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그 행위보다 중요한 것이 진솔한 마음가짐입니다. 앞서 세상을 떠난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번지르르한 상차림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러니 장례나 제사에 관한 절차로 싸우는 것도 모두 부질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자신들의 수준 낮음을 부끄럽게 드러내는 다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부모님이 아직 곁에 계실 때에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미리 말해두는 것입니다. 불행은 불현듯 다가오고 후회는 끝없는 고통으로 남게 됩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게 나쁘다고?

 

유가의 고지식한 선비를 떠올려 봅시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시대, 가난한 농촌마을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한 채가 있습니다. 쌀독은 비어있는데다 곧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은 일상적인 배고픔에 시달리고 아내는 삯바느질을 하고 있습니다. 알바를 하는 셈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이 집의 가장이란 양반은 집 안에 들어앉아 글을 읽고 있습니다. 벌써 10년 째,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다못한 아내가 선비에게 한마디를 던집니다. 애들 굶어죽는 꼴 보기 전에 나가서 돈을 좀 벌어오라고요. 기다렸다는 듯 선비가 소리칩니다. 어디 양반 체면에 장사꾼들처럼 이익에 눈이 멀어 돈을 벌어서야 쓰겠느냐고요.

공자가 만약 이 광경을 지쳐본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자기 자식들 굶기면서까지 책을 읽는 것도 모자라 물질적 이익 자체를 거부하는 이 선비를 보고 말입니다.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고 귀한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옳지 못한 방법을 통해서 얻어서는 안 된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안 된다. 『논어』 「리인」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거친 밥을 먹고 물만 마시며 팔베개를 하고 누워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단다.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고 귀한 자리에 오른다면 내겐 뜬 구름과 같을 것이니라.” 『논어』 「옹야」

가만히 보니 공자는 이익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이익 앞에 마주했을 때에 그것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받게 되는 정당한 급여는 옳은 것이지만 주식투자나 부동산 투기로 얻은 부귀는 옳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주식투자가 뭐가 문제냐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주식 역시 누군가 돈을 잃어줘야 내가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까요. ‘제로섬 게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 사회의 이익 전체는 일정하기 때문에 한쪽이 득을 보면 반드시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적어고 공자가 생각한 부귀는 다른 사람의 손해를 통해 얻어지는 이익과는 거리가 있었을 뿐이지 부귀함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닌 셈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공자는 정치가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먼저 굶는 백성들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방력에 힘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라는 공자의 입장을 보면, 그가 물질적인 측면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아가 공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성장과 분배의 분제, 즉 경제성장을 우선으로 놓을 것인지 아니면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우선하는 지에 대해 꽤 의미 있는 말도 했습니다.

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라면, 적다고 걱정하지 않고 골고루 분배되는지를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은지를 걱정한다.’고 들었다. 골고루 분배되면 가난함이 없고, 서로 어우러지면 적음이 없고, 편안하게 하면 편중됨이 없어진단다. 『논어』 「계씨」

부유함과 가난함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세계 최고의 부자인 만수르의 입장에서는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일 뿐입니다. 반대로 세 끼 따뜻한 밥을 먹는 것에 별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몸에 장애가 있어 생활이 매우 불편하거나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가정의 사람과 비교해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인 부자와 절대적인 가난뱅이가 없다면 결국 부유함과 가난함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라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앞서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가 힘써야 할 부분이 바로 ‘분배’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누구는 일한 만큼 대가를 가져가지 못하는데 누구는 노력에 비해 어마어마한 대가를 가져가는 사회라면, 아무리 그 사회가 성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억울한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억울함을 없애야 하는 자가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성장보다는 분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공자를 공산주의자라고 욕할 수는 없는 부분이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물론 공자는 물질적 이익 자체로부터 태연해지기를 바랐는지 모르겠습니다. 부귀를 쫓는다고 누구나 부귀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공자는 그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처해진 상황에 만족하고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의 의미를 찾으라고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참으로 훌륭하구나. 다른 사람들은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가난한 마을에 사는 것을 (창피하다고)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가난 속에서도 얻어지는 작은) 즐거움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으니 참으로 훌륭하구나” 『논어』 「옹야」

정리하겠습니다. 공자도 사람인지라 부유하고 귀함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익을 얻기 위해 누군가 반드시 손해를 봐야만 한다면 옳지 않다고 여긴 것뿐입니다. 그러니 식구들 굶겨가며 자기 공부만 하고 있는 선비를 공자는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하는 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이익 앞에 올바름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살짝만 비겁하면 손쉽게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새치기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바로 그것이겠지요. 그래서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임무가 중요합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한 만큼 그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나아가 누구나 자기 능력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공자가 생각한 국가의 임무가 아닐까요?

 

이것 하나만 기억하고 살자.

 

어떤 철학자의 삶의 방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공자처럼 똑같은 질문에도 묻는 사람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서 각기 다른 답변을 내놓던 인물에 대해서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철학자의 좌우명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도 이런 의문을 지녔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공자의 좌우명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궁금했던 것이지요. 바로 그 제자가 자공입니다. 어느 날 자공은 공자에게 돌직구 질문을 날립니다.

자공이 여쭈었습니다. “한 마디의 말 중에 평생토록 실천하면서 간직해야 하는 것이 있을까요?”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서(恕)라라는 것일 게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는 것이다.” 『논어』 「위령공」

우리가 흔히 공자의 철학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仁)이 아니라 서(恕)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인(仁)은 논어에 100번도 넘게 나오지만 서(恕)는 단 2번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비추어 봐도 좀 이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이야말로 공자가 후세에 전하려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恕)는 ‘같다’는 의미의 여(如)자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으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앞서 역지사지의 마음,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늘 이 마음,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마음’만 간직하고 살아도 다투고 싸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딱 이 하나의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억울한 공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흔히 유가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오해들이 상당부분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恕)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그동안 한국사회의 문제점이 유가적 전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공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이 모든 문제가 결국은 공자 때문이라는 식의 유치한 결론은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지 말고 저 아이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 애는 왜 저렇게 게임만 하고 공부는 뒷전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아이디를 만들어 그 게임을 함께 해보면 어떨까요? 왜 우리 엄마는 저렇게 잔소리만 하는 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기 전에 엄마의 입장에서 내세울 것이 결국 자식인 ‘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세상의 수많은 갈등은 대부분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동네 할아버지가 지적한 것처럼 아는 것보다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면, 우리 이제 행동할 때입니다.

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1)[대안도덕교과서]-9

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1)[대안도덕교과서]-9

 

 

오상현(숭실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공자님도 그냥 동네 할아버지일 뿐이다.

 

공자님도 그냥 동네 할아버지일 뿐이다.
무조건 어른 말씀이 옳다고?
평생 공부만 하라고?
제사 지내는 형식에 정답이 있다고?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게 나쁘다고?
이것 하나만 기억하고 살자.

공자님도 그냥 동네 할아버지일 뿐이다.

흔히들 세계 4대 성인으로 공자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와 마호메트를 꼽습니다. 이때 ‘성인’이란 평가는 모순투성이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인류의 역사 속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분들에게 붙여진 일종의 별칭입니다. 그래서 어쩐지 같은 인간이지만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우리와는 결이 다른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덕망도 있고 나이도 지긋하신 지도교수님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율곡 이이를 기리는 학술단체가 마련한 강의였는데 저는 이 강의를 듣고 작지만 중요하고 흥미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같은 분들을 성인이나 현자로 부르지 말자. 그냥 형이나 아저씨라고 부르자.” 강의 초반 힘주어 말씀하신 이 대목에서 실은 무척 놀랐습니다. ‘한평생 유가를 비롯한 동아시아 철학을 공부해오신 분께서 어떻게 저런 불경스러운 말씀을 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게다가 그 자리는 청중의 대부분이 그 지역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내 그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자신의 비관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엄청난 노력을 통해 성공을 이룬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무엇인가 그들에겐 특별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결국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니까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도무지 따라잡기 어렵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그 강의의 핵심은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 요인이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성인’이나 ‘현자’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실제 과학의 역사 속에서 2000년 전의 인류가 유전학적으로 혹은 지능이나 능력으로도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성인’이 살던 시절의 사람들과 별다른 능력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공자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오고간 이야기들로 꾸며진 『논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읽다보면 공자는 우리가 우러르는 ‘성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화도 내고 농담도 했습니다. 심지어 삐지기도 했으며 어떤 제자의 경우에는 뒷조사까지 했습니다. 자리를 떠난 제자의 흉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가 성인의 지위에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살았고 삶을 통해 배운 깨달음을 담담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분에게 제안을 하나 하렵니다. 공자를 그냥 동네 할아버지라고 부릅시다. 그도 결국 사람이었으니까요.
 

출처: womany.net

출처: womany.net


 
생애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은 외국인 여행객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숙소에 도착한 그는 짐을 풀자마자 근처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처음 만나는 한국음식에 대한 소감을 담아낼 스마트폰도 챙겼습니다. 식사를 마친 그가 처음 맛을 본 한국음식에 대한 느낌을 SNS를 통해 친구들에게 소개를 한다고 상상해볼까요? 자, 만약 그가 김치찌개나 순두부를 먹었다면 아마도 “한국 음식은 매운 국물이 기본이야.”라고 올렸을 것입니다. 파전이나 빈대떡을 먹었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한국 음식은 기름지고 소박한 맛”이라고 했겠지요. 불고기를 먹었다면 이랬겠죠. “한국 음식은 단맛과 짠맛의 환상적인 조화”라고요.

우리가 흔히 쓰는 유가(儒家)라는 말에도 이런 함정이 있습니다. 공자 시대의 유가와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위진시대의 유가와 ‘주희’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정리된 송나라 시대의 유가와 조선시대 양반들의 유가는 모두 ‘유가’라는 이름으로 묶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많이 다릅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나쁜 책입니다. 25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뒤틀리고 변모되는 유가의 궤적에서 나쁜 점만 모아서 열거하고 이게 죄다 공자 탓이라고 하는 것이니까요. “몹시 억울하시겠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아마도 공자가 이 시대에 다시 나타난다면 이런 생각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함. 한 번 느끼게 되면 무지 분하고 답답해서 잠도 오지 않게 만드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온전히 동생이나 형이 저지른 잘못인데 내가 혼날 때, 짝이 말을 걸었는데 떠들었다고 혼날 때, 왼쪽 콧구멍을 후볐는데 오른쪽 콧구멍에서 코피가 터질 때. 뭐 그럴 때 있잖아요. 공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게 이 글의 목표입니다.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오른쪽 콧구멍에서 코피가 터질 것만 같습니다.

 

무조건 어른 말씀이 옳다고?

 

유가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바로 ‘윗사람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충(忠)’이나 ‘효(孝)’와 같은 덕목입니다. 자식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학생은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조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심지어 처음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나보다 어른이면 무조건 먼저 인사를 하라고요. 또한 백성들은 임금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요. 오늘날로 말하면 국민들은 무조건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라고요. 하지만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계강자가 공자 할아버지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만약에 나쁜 놈을 죽이고 착한 놈에게 잘해주면 어떨까요?” 할아버지가 답하시길, “선생님께서는 정치를 하시면서 왜 살인의 방법을 쓰려고 하십니까? 선생님께서 착하게 사신다면 백성들도 (자동으로) 착해집니다. 윗사람의 도덕은 바람이고 아랫사람의 도덕은 풀입니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그 바람결에 따라 눕게 됩니다.” 『논어』 「안연」

계강자는 공자가 살았던 당시 사회에 꽤 영향력이 있었던 권력층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가를 물었던 대목입니다. 공자가 비유로 들었던 풀과 바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윗사람이 바람이고 아랫사람은 풀이라는 것이지요. 풀이 바람결에 따라 이리 누웠다가 저리 누웠다가 합니다. 윗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하면 아랫사람도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생각해보세요. 윗물이 더러운데 자꾸만 아랫물에게 깨끗해지라고 한다면 어처구니가 없겠지요. 이런 더러운 윗물에게 굳이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사하러 갈 필요가 있을까요? 공자는 다른 곳에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 할아버지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할아버지가 답하시길,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만 합니다.” 『논어』 「안연」

공자가 경공에게 말한 정치의 핵심은 임금이건 신하건 모두가 자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어려운 말로 바꾸면 ‘정명(正名)’이라고 합니다. 올바르다는 의미의 ‘정(正)’과 이름이나 지위를 의미하는 ‘명(名)’이 만나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각자가 그 지위(名)에 어울리도록 행동하는 것이 정치라는 말입니다. 임금은 임금답게 행동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행동하며, 부모는 부모답게 행동하고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정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공자는 왜 ‘임금’과 ‘아버지’를 앞에 두고 ‘신하’와 ‘자식’을 뒤에 두었을까요?

앞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바람’과 ‘풀’에 비유했습니다. 임금과 아버지가 윗사람이니까 그들은 바람입니다. 신하와 자식은 ‘아랫사람’입니다. 그래서 풀입니다. 풀은 바람이 어떻게 부느냐에 따라 이리저리 흩날린다고 했습니다. 결국 윗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랫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대목을 다시 해석하겠습니다. “임금이 임금다워야만 신하가 신하다울 수 있고, 아버지가 아버지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울 수 있다”라고요. 단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선배와 후배, 선생님과 학생, 형(언니)과 동생간의 문제도 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이 장관의 잘못을 탓하는 장면을 떠올려봅시다. 공자의 생각에는 대통령이 대통령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장관도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여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입장이지요. 따져보면 문제를 일으킨 장관을 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대통령입니다. 자기가 임명한 사람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그런 사람인지 몰랐던 자신을 먼저 탓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너는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그 모양이냐?”고 윽박지르는 부모가 있다고 해봅시다. 생물학적으로 그 자식이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바로 부모입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더러 누굴 닮아서 그러냐는 질문이라니,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모님들은 모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라고 종용하면서 급할 때는 무단횡단 정도는 괜찮다고 하는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인지를.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어떤 교육학자가 그런 말을 했답니다. “내가 몸으로 너무 크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내 제자들은 내가 입으로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한다.” 입으로는 착하고 성실하게 살라고 가르치면서 수업 준비도 성의가 없고 시간만 때우려는 선생님이라면 정말 ‘노답’입니다. 답이 없다는 것이지요.

공자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증삼아!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로 꿰어 있단다.” (제자인) 증삼이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공자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시자 다른 제자들이 (증삼에게) 캐물었다. “도대체 무슨 뜻이야?” 증삼이 답하길, “우리 선생님께서 삶을 살아가시는 방식은 오직 충서(忠恕)일 뿐입니다.” 『논어』 「리인」

‘충(忠)’과 ‘서(恕)’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유가에 대한 첫 번째 오해를 풀어줄 실마리가 여기에 있으니까요. 우리가 보통 충(忠)을 ‘충성’으로, 서(恕)를 ‘용서’라고 외우고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의미가 좀 다릅니다. 우선 두 글자 모두 마음을 의미하는 심(心)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 마음가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지요.

충(忠)은 마음(心)과 가운데(中)가 만난 글자이기에 ‘마음 한가운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사랑에 빠졌다고 해봅시다. 온종일 다른 일을 하는데도 자꾸만 그 사람이 떠오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사람이, 버스를 타고 갈 때도 그 사람이 떠오릅니다. 내 마음 속 한가운데에 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충(忠)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오직 그 일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 속을 가득 채웠을 때에 우리는 ‘충(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마음속에서는 아이유의 노래가 떠나지 않는다면 공부에 충(忠)하지 못하고 아이유에게 충(忠)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충(忠)을 ‘진정성’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렇다면 서(恕)는 어떨까요?

‘서(恕)’는 마음(心)과 같음(如)이 만난 글자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서(恕)’입니다. 흔히 용서라고 풀이하는 것은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면 당신은 완전 똑똑할뿐더러 지금 제 이야기에 충(忠)하고 있음을 의미하겠지요. 서(恕)에 대한 이야기는 마지막에 다시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충서(忠)을 삶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생각한 것일까요? 충(忠)은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공부를 할 때, 여행을 갈 때, 심지어 똥을 쌀 때에도 나는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내 마음 한 가운데에 ‘공부’만을, 혹은 ‘여행’만을, 혹은 ‘똥’만을 떠올렸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성’이고 ‘성실함’이 곧 ‘충(忠)’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충(忠)을 충성으로 이해해야 할 때는 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윗사람이 내게 하는 행동이나 말이 올바르고 적절하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윗사람이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한다면 나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과 행동으로 어른의 역할을 잘 하시는 분께는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혹시 주위의 철없는 어른들이 자기가 어른이니까 말 좀 들으라고 꾸중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글을 보여주세요.

동네 할아버지의 말씀을 정리해볼까요? 어른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르라고 공자는 말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어른다운 말과 행동으로 나를 대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법입니다. 충(忠)도 역시 무조건 윗사람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을 가득 채운 진정성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가에 대한 첫 번째 오해가 풀렸다면 좋겠습니다.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2)[대안도덕교과서]-8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2)[대안도덕교과서]-8

 

 

강경표(중앙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진짜 문제는 국가과학과 자본주의다!

 

만약 당신이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전시 상황에서 국가가 당신의 지식과 기술을 전쟁을 위해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면, 당신은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과학 윤리의 전형으로 대변되는 원자 폭탄 이야기는 사실 과학자 개인의 도덕 문제라기보다는 과학을 이용하는 국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 교과서는 이러한 문제를 간과한 채 마치 과학자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원자폭탄이 만들어진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자 폭탄을 개발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과학자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다. 몇몇 과학자들이 원자 폭탄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은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물리학자들 중에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고 즐겁게 임무를 수행한 학자가 있는가 하면, 초기부터 핵무기 개발이 인류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며 반대했던 학자들도 있었다. 심지어 별 생각 없이 참여하였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이후의 결과를 보고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출처: www.dailymail.co.uk

출처: www.dailymail.co.uk

아인슈타인은 이론은 제공했지만 제작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동료 과학자들의 권유에 밀려 원자 폭탄 개발을 촉구하는 편지에 서명하였지만, 나중에는 후회하였다. 그 후로 아인슈타인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적극적으로 평화활동을 펼쳤다.

(중학교 도덕2, 중앙교육진흥연구소 278쪽)

 

원자 폭탄 개발은 고도의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요구되는 과학입니다. 단순하게 과학자 몇명이 이론을 알고 있다고 해도 막대한 지원이 없이는 실행될 수 없는 과학입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당시 돈으로 20억 달러가 넘는 비용과 13만의 인력이 동원된 미국 정부가 주도한 과학 프로젝트입니다. 원자 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오펜하이머(1904-1967) 박사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여한 후 과학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고 이후 미국의 수소 폭탄 개발을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에너지국(AEC)위원장이었던 루이스 스트로슨은 오펜하이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축출했으며, 미국은 제일 먼저 수소 폭탄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국가가 주도하는 거대과학 프로젝트에서 과학자 개개인은 고용된 노동자에 불과합니다. 물론 과학의 내용이 전문적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원자 폭탄 개발과 같은 문제는 단순한 과학 윤리가 아닌 국가가 결정하는 정책 방향과 더욱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덕 교과서에는 이와 비슷한 또 다른 문제가 나옵니다. 이는 사실 시장자본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야기지만 도덕 교과서는 이를 과학자가 윤리적이지 못해서 발생한 사실로 그리고 있습니다.

 

아름 : 과학 기술은 어렵고 복잡해. 그냥 전문가들을 믿고 따르면 될 거야.

바름 : 그래도 될까? 과학자들의 말만 믿다 보면 큰일이 생길 수도 있어.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라고 못 들어보았어?

아름 : 그게 뭐야?

바름 : ‘탈리도마이드’는 임산부 입덧 방지용 약이야. 그런데 이 약의 안정성을 엉터리로 실험하고는 부작용이 없는 기적의 약으로 판매했어. 결국 그 약을 먹은 전 세계의 1만여 명의 임산부가 기형아를 출산하였어.

아름 : 정말 전문가의 말이라고 모두 믿고 맹신하면 안 되겠네.

(중학교 도덕2, 천재교육 317쪽)

 

탈리도마이드와 같은 약은 라세미 화합물입니다. 라세미화합물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분자 화합물과는 구성이 다릅니다. 쉽게 얘기해서 라세미 화합물은 오른손과 왼손처럼 그 모양은 같으나 반대 방향을 하고 있는 거울 대칭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방향의 화합물 중 한쪽은 약성을 갖고 다른 한쪽은 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탈리도마이드입니다. 이 약은 1953년에 독일의 제약회사 그루넨탈에서 개발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됩니다. 라세미 화합물은 분리를 통해 약성이 있는 부분만을 분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리 방법은 큰 비용이 듭니다. 사실 탈리도마이드 문제는 과학자가 위험 물질을 만들어 내거나, 위험을 속인 것이 아니라 라세미 화합물을 분리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거대 자본이 없이 신약을 개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거기에 더해 자본가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입덧은 임신한 여성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증상이지 각한 질병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단순하게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에 자본을 투입해서 정제를 한다는 것은 비용만 상승시키는 짓으로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자본의 투입은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요? 과학자일까요? 그 회사의 최고 경영자일까요? 그러나 우리의 도덕 교과서에는 마치 탈리도마이드 문제가 과학자가 비윤리적이라서 발생한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탈리도마이드가 2006년 미국에서 악성암치료제로 허가를 받았고 암치료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최근에는 이탈라아 알렉산드로 벤튜라 교수에 의하면 소아크론병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 볼까요? 탈리도마이드를 계속 사용해야 할까요? 아니면 폐기해야할까요? 희귀병치료제인 탈리도마이드의 가격은 얼마로 하는 것이 좋을까요? 바로 이것이 과학 윤리 뒤에 숨겨진 자본의 문제인 것입니다.

과학과 민주주의

 

도덕 교과서에는 “과학 기술의 목적은 자연 현상을 탐구하고 활용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데 있다”(중학교 도덕2, 중앙교육진흥연구소 280쪽)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과학 기술의 중요성은 민주주의와 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과학적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이 도덕적?정치적 판단을 옳게 내리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자유롭게 정보와 자료를 사용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가 사용하는 정보와 자료를 정확하고 엄밀하게 제공하는 학문입니다. 민주사회의 시민은 이러한 정보와 자료를 비교 분석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으며, 최선의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도덕 교과서에서 과학은 여전히 경제 개발과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는 도구일 뿐이고 정치적?도덕적 주장을 하는 미사여구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생명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유전자 조작이나 배아 복제 등의 문제는 도덕적 사고가 필요한 부분으로 기술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과 2차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들을 간과하거나 과학이 주는 혜택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물체의 유용한 특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생명공학 기술은 해충에 강한 옥수수나 당도가 높은 토마토를 만들어 내고, 품질이 좋은 가축을 대량으로 생산하며, 의약품을 만드는데 이용되고 있다……10억분의 1미터 크기의 입자를 다루는 나노 기술 등 다양한 현대 과학 기술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있다.(중학교 도덕2, 천재교육 304쪽)

 

유전자 변형 생물(GMO)에서 유전자 재작성 생물(GRO)까지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생명공학 기술은 비단 우리에게 혜택만 있을까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유전자 변형 식품을 왜 두려워할까요? 품질 좋은 가축을 생산한다는 목적 하에 행해지는 공장식 축산의 문제나 마블링이 많은 소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억지로 사료를 먹이는 행위도 우리에게 혜택이 될까요? 미세먼지를 걱정하는 현대 사회에서 나노 기술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나노 공해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사실 도덕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과학 기술의 혜택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기술일 뿐 과학이 전달해야 하는 사실 정보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 기술이 제공하는 정보를 피상적으로 혜택으로 묘사할 때 과학 정보는 왜곡이 일어나기 쉽고, 이 때문에 과학 전문가가 도덕 교과서를 만들 때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학 정보의 왜곡은 국가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결정해야 하는 문제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경인운하와 4대강 사업처럼 생태계에 영향을 주는 사업에서 과학이 제공하는 정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결정에 의해 과학 정보는 무시되거나 왜곡되기 일쑤입니다. 천안함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중한 청년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은 철저하게 검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혹이 남는 이유는 과학 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민주주의를 고양시키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아주 단순한 예로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도구들은 우리가 정보를 주고받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고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학 정보가 산출되기까지의 과정에 관심을 갖는다면 과학 정보가 얼마나 엄밀하고 공개적인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황우석의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거짓 정보는 결국 탄로나는 것이 현대 과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현대 과학 기술은 더 이상 전통 윤리의 통제를 일방적으로 받아야 하는 문화의 산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적 사실과 성과물이 우리의 판단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도덕?윤리적 판단도 과학적으로 생각해 봐야할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과학을 도덕과 윤리에 활용할 수 있을까요? 이제 그 대답을 살펴볼 때입니다.

 

새로운 시민&과학 윤리를 향하여

우리는 과학이 매우 어렵고 복잡한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천재들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나 현대 과학은 어려운 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우리나라에서는 영어로 과학논문을 써야만 인정을 받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사실 우리와 그렇게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도계는 열역학 법칙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의 온돌 문화는 베르누이(1700-1782)가 누군지도 모르는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현대 과학 기술을 표현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과학 전문가가 아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의 과학과 도덕을 생각할 때 중요한 점도 바로 이런 사례들입니다. 다시 말해 도덕과 마찬가지로 과학도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교과서는 과학을 서양 근대 사회에서 갑자기 생겨난 문화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과학기술을 도덕이 통제해아만 하는 그 무엇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 기술의 위험성을 발생시키는 진짜 문제는 도외시하고 과학 윤리를 과학자 개개인이 지켜야 하는 문제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원래 도덕과 윤리 교과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제시된 도덕을 맹목적으로 지키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율성을 갖고 비판적?합리적 사고를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과학 윤리를 이야기할 때도 시민과 과학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도덕적으로 바라볼 때의 기준은 그 과학이 시민을 위해 올바르게 복무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 기술도 시민에게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거나 특권화 된다면 우리는 그 과학을 반드시 경계해야만 합니다. 또한 과학을 규제하려는 도덕과 윤리가 담고 있는 내용이 현대 과학 기술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거나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할 때에는 현대 과학이 제공하는 사실과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 교과서가 과학 윤리라는 이름으로 담아야 할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도덕 교과서의 현실은 이와는 매우 다릅니다. 과학자가 지켜야할 윤리를 이야기하면서도 단 한 명의 과학자도 도덕 교과서를 만드는 데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윤리전문가들이 과학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내가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가 내 의견과 상관없이 만들어지면 그 규칙을 따르고 싶을까요? 도덕을 연구하고 전문가가 되면, 현대의 복잡한 과학 기술과 관련한 문제도 정말 정확하게 분석하고 진단할 수 있을까요? 이 정도 이유라면 우리의 도덕 교과서에서 과학 윤리를 다시 써야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가까운 미래에 새로운 과학윤리가 담긴 교과서가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1)[대안도덕교과서]-7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1)[대안도덕교과서]-7

 

 

강경표(중앙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도덕 교과서에는 ‘문화와 도덕’이라는 영역이 있습니다. ‘문화와 도덕’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해서 ‘예술이 주는 도덕적 감수성’의 문제를 지나, 갑자기 ‘과학과 도덕’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챕터로 마무리됩니다. 과학도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분류도 타당하겠지만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교과서를 만드신 선생님들이 하지 못한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부터 우리는 도덕교과서 속에 숨겨진 과학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도덕, 과학에 활을 겨누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를 묻는다면, 과학 자체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E=mc²이라는 수식은 그 안에 아무런 도덕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수식을 이용해 질량을 에너지로 바꾼다고 할 때, 그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사용하는 과학자의 행위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과학자가 살고 있는 시대, 문화, 역사, 환경, 정치, 신념에 따라 과학자의 행위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과학과 도덕’에서는 사실 과학자가 지켜야 하는 도덕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학자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 과학자가 지녀야 할 도덕적 태도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과학자는 우리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악당 과학자들은 항상 지구를 파괴하거나 세계를 정복하는 꿈을 갖고 있으면서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어 냅니다. 자신이 가진 과학의 힘을 과시하지만 도덕 능력은 빵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이야기이고 현실의 과학계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사실 과학계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과학자 개인의 윤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과학관, 자본과 과학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과학과 도덕’은 이런 문제를 외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덕 교과서의 출발이 국가가 원하는 인간상을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과 도덕을 이야기하면서도 과학을 반영하지 못하고, 엉뚱한 결론에 빠질 수 있는 생각들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도덕 교과서에는 과학 이야기가 등장하는데도, 왜 교과서를 만들 때 과학자 또는 과학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명도 참여하지 않았을까요? 과연 도덕은 모든 학문을 능가하는 것일까요? 정말 과학자가 도덕을 배우지 않는다면 모두 악당이 될까요? 예술은 도덕적 감수성을 키우지만 과학은 도덕에 따라 움직여야만 하는 학문일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질문들 속에는 우리의 도덕 교과서가 두려워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도덕 교과서는 새로운 힘을 가질 수 있는 존재들을 두려워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의 말처럼 ‘아는 것은 힘’이고 이때 ‘아는 것’이란 과학 지식을 의미합니다. 과학은 물질을 다루는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무모하기도 하고,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기에 생길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예전에는 인터넷이 없었습니다. 사이버 공간도 없었지요. 그러나 현재 우리는 이 사이버 공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또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사이버 공간도 사회적 성격을 지니기에 많은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도덕적인 문제는 우리가 기존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법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이버 윤리’라는 새로운 영역이 탄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도덕 교과서에는 과학자들의 행동을 전통적인 도덕 안에서 규제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과학자들의 양심만 올바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과연 과학자 개인을 겨냥한 도덕의 활만으로 과학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또한 과학자가 지켜야할 규칙이 과학자의 참여가 없이 만들어진다면 그 규칙을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은 불만이 생기지 않을까요? 이제 이런 문제들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신과학운동’이 과학 윤리인가?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서 과학적 사실을 밝혀내고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과학자에게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과학적 사실을 전통적 사고에 기초해서 찾아내고 조화를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전통적인 사유와 과학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신과학운동이 현대 사회와 과학 문명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종교와 과학의 융합, 생태?환경운동이 촉발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의 도덕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캐프라는 물리학을 동양사상과 비교하는 강연과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는데, 그가 저술한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이라는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과학 운동, 녹색 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해 줌.(중학교 도덕1, 미래엔 278쪽)

아직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캐프라로 대표되는 신과학운동을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과학운동은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신비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교과서에는 신과학운동이 과학의 도덕적 대안 모델인 것처럼 제시되어 있습니다. 캐프라가 뛰어난 과학자는 분명하다고 해도 그 한 사람의 견해가 과학의 도덕적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과학운동에 대해 다른 교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과학운동은 현대 과학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관을 찾는 과학 사상운동이다. 신과학 운동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핵전쟁으로 인한 공포, 자연환경의 오염 등을 비판하면서 우리 삶의 터전이 황폐해진 원인과 책임이 과학 기술에 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과학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거나 과학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신과학 운동은 동양사상이나 새로운 철학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과학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인간의 의식을 떠나서는 과학의 객관성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신과학운동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엄격히 분리시키는데 반대하고, 모든 사물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중학교 도덕2, 중앙교육진흥연구소 288쪽)

전통적 사유 속에서 도덕적 진리를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과학을 동양철학적 사유 위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매력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장에서 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에게는 크게 설득력이 없습니다. 실제적인 과학 윤리는 과학 탐구 행위에 부합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과학자들이 참여하지 않고서는 실제적인 과학 탐구 행위가 무엇인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과학의 뿌리는 서양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양의 전통과 과학의 조화가 마치 과학 윤리인양 이야기 하는 것은 현실 과학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의식을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과학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느끼지만 이는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다양한 현상들은 과학에 의해 밝혀졌고, 과학은 그러한 사례들의 연관성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근거를 동양철학적 사유에서 찾지 않아도 그 근거를 충분하게 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도덕?윤리 선생님들은 (자연적)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행위를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화론이라는 과학이 발전하던 시대에 진화론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조지 무어(1873-1958)라는 사람이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것에 반대하는 논리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철학적 당위 위에 놓인 과학은 좋은 과학이고 과학적 사실로부터 철학적 당위를 도출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문제일까요?

신과학운동은 철학적 당위와 과학적 사실을 결합한 형태의 학문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과학자들은 신과학운동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도덕 또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하나의 가설일 뿐입니다. 과학에서 가설은 실험을 통해 검증되어야만 합니다. 단순하게 전통이라는 이유로 도덕을 따르는 것은 과학적인 태도도 아닙니다. 이것은 과학자가 지켜야할 도덕을 만드는데 과학자가 참여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 과학자들의 생각이 반영되지 못한 우리의 도덕 교과서는 신과학운동을 마치 과학이 걸어가야 하는 모범적인 모습인양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2)에서 계속…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2)[대안도덕교과서]-6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2)[대안도덕교과서]-6

 

 

김종곤(건국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3. 법과 습관 그리고 믿음

 

예를 들어 현재 도로교통법 제50조, 제67조, 제156조, 제160조에서는 안전벨트 착용과 그 처벌에 관해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1990년(경향신문 1990.09.19.)에 들어서면서 안전벨트 착용은 의무화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필자의 기억을 더듬어 보더라도 대부분의 차량 운전자들은 안전벨트가 자동차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는 것은 불법도 아니고 더구나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전벨트 미착용에 대해 대대적인 집중 단속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즉 적발시 벌금을 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불편하고 번거롭지만 안전벨트를 착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자동차에 올라타자마자 습관적으로 운전자는 안전벨트를 착용하기 시작하였고, 운전자가 착용하지 않을 경우 동승자가 안전벨트를 착용할 것을 권고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것이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하거나 적발시 벌금을 내야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서는 안 할 수도 있으며 의도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예에서 안전벨트에 관련한 법을 따르는 것이 ‘습관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좋은 개념이 습관(Habit)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아비투스’(Habitus)입니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사회적인 것이 신체에 내면화되고 그것이 다시 사회화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았을 때 ‘의례적으로’ 선물을 준비합니다. 이는 어느 날 자연스럽게 생긴 마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때 부터인가 자신의 생일이 되면 부모나 주변사람들이 선물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생일에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 증여는 사회적인 관습이 내 신체에 아로새겨진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자신 역시 친구의 생일에 선물을 주면서, 그 선물을 받는 친구도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즉, 자신의 신체 또한 사회적 믿음을 만드는 것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비투스는 한편으로는 의식적인 측면에서 또 한편으로는 단지 생각이 아닌 무의식적인 것으로서, 둘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안전벨트의 예로 돌아가 봅시다. 그렇다면 법 제정 이후 안전벨트를 습관처럼 착용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믿음을 자신도 받아들이고 그럼으로 해서 자신 역시 그것을 사회적 믿음으로 만들거나 강화하는데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법의 내용이 바람직하든 혹은 그 내용이 문제가 있든지 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믿으며 자신도 모르게 따르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믿음’이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i?ek)이라는 철학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듭니다. 한 정신병자가 있었습니다. 그 정신병자는 자신이 옥수수 알갱이라고 생각해서 닭이 자꾸 자신을 쪼아 먹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의 치료 후 이 환자는 완치판정을 받고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이 환자는 자신의 주치의를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깜짝 놀란 의사가 이 환자에게 당신은 완치되었으니 다시 나를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자 이 환자는 자신이 옥수수 알갱이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 여전히 닭이 자신을 옥수수 알갱이로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불안을 호소합니다.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자신(정신병자)의 믿음보다 타인(닭)의 믿음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할지라도 타인이 믿는 바를 벗어나기가 너무나도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신체적인’ 습관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믿음을 나의 믿음 체계로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상관없이 법에서 규정하는 바를 이미 우리의 ‘양심’과 같은 것으로 우린 안에 받아들여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법을 어겼을 때에도 심리적으로 불편한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버지가 pc방에 가는 것을 금지시킨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것에는 나름의 합리적이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게임을 너무 많이 하게 되면 학업에 영향을 준다던지 어른들의 담배연기 때문에 건강에 해로운 공간이라든지 말입니다. 하지만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것은 그 어떤 것 보다 큰 즐거움이고, 그곳에 가지 않으면 하루 종일 다른 일에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아버지의 금기 사항을 어기고 pc방에 가서 신나게 게임을 합니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동안에도 아버지에게 발각될까봐 불안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왠지 아버지를 보는 것이 껄끄럽습니다. 이 아버지를 법이라 생각해보세요. 아버지의 금기 사항을 듣고 머릿속에 기억하듯이 법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법은 단지 ‘나’의 외부에 혹은 법전(法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들어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법 물신성이라는 측면에서 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준수하고 또 그것을 위반하였을 경우 왜 불편함을 느끼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첫째, ‘법=바람직함’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 그 어떤 법이 불합리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거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법 그 자체를 신뢰하면서 신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중요한 것은 ‘법=바람직함’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믿음 체계가 문제가 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부되어야 하는 것은 ‘법은 법이니까’와 같이 법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4. 안티고네의 저항과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희곡 《오이디푸스왕》에서 안티고네는 종종 법 물신성에 대해 저항한 인물로 해석됩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 두 오빠가 있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나중에 자기도 몰던 사실이지만, 자신을 버린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것을 알고 심한 죄책감에 스스로 눈을 찌른 후 테베를 떠납니다. 이 후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교대로 테베를 다스리기로 하지만, 에테오클레스가 먼저 약속을 어기고 폴리네이케스를 추방시켜버립니다.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망명해 그곳의 공주와 결혼 한 후 군대를 이끌고 테베를 공격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일대일 대결을 벌였지만 결국 둘 다 죽게 되고 말지요. 이 과정에서 크레온은 왕이 되고 에테오클레스는 선왕으로서의 예를 갖추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루지만 테베의 입장에서 적인 폴리네이케스는 들판에 방치해 짐승이 뜯어먹도록 명령하였으며, 누구든지 그의 시체를 장례치루고자 한다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그것을 어기고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위에 흙을 뿌려 덮었고, 결국 그녀는 국왕의 명령을 어긴 죄로 크레온 왕 앞에 끌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혈육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크레온의 명령 보다 우선하는 신의 율법이라고 항거합니다.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는 안티고네/ 출처: www.redian.org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는 안티고네/ 출처: www.redian.org


 

이 희곡에서 크레온의 명령과 포고령은 국가의 법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안티고네가 그것을 위반한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녀의 말처럼 죽은 형제의 시신이 처참하게 들판에 버려져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폴리네이케스는 에테오클레스가 배신하는 타국으로 쫒겨가야 했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있어 아픔입니다. 그렇기에 국가의 법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에 저항하고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고 매장하는 것은 그녀 내면의 ‘바람직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선 법이 그 국가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그것은 법 물신성이 완전히 성공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안티고네가 믿는 바람직함이 법은 항상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안티고네가 오빠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욕망이 법은 그 자체로서 바람직하며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는 명제 혹은 그러한 믿음에 대해 저항의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민주주의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공동체 내에서 살고 있지만 그 어떤 법은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안겨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친북행위나 반국가적 활동에 대해 처벌하는 규정들을 담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종종 정치적 목적에서 악의적으로 국가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물론 법 그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그것을 이용하고 판결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법을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사람이 완전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문제가 되기에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꾸면 문제는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법이 있고 이를 누군가가 해석, 적용하는 한 이러한 문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세상 어디에 오판을 하지 않는 법이 있는가라고 또 한번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오판이나 오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법 그 자체를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그 법의 지속만을 주장하는 것은 법에 대한 숭배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논쟁 중 하나를 보도록 하지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표현의 자유와 권리 등의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하나의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한 논자는 「국가보안법의 쟁점에 대한 바른 이해…」(www.konas.net)라는 글에서 우리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논리를 편고 있습니다.

이는 헌법이 법률 체계 상 가장 상위의 법이기에 그 하위법인 국가보안법이 문제가 되면 통제를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간이 없습니다. 그냥 남아 있는 것은 ‘헌법’이고 그것 보다 힘이 약하다고 말하는 ‘국가보안법’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헌법에서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지 않아서 국가보안법이 남용되거나 악용된 것이 아닙니다. 헌법에 기본권을 명시하고 37조와 같은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법의 집행은 욕망을 지닌 ‘인간’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주장은 공포스럽게 까지 느껴집니다. 현실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의 고통을 헌법 제37조 제2항이 쓰여 있는 법전의 한 페이지를 찢어서 덮어주면서 조소하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주장은 우리 헌법의 기본정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담고 있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4·19혁명은 과거 이승만 정권이 정부 집권을 연장할 목적으로 부정개표를 한 것이 알려지면서 정권교체를 위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정부 항쟁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헌법이 정의(Justice)는 법이나 정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수 민중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는 나아가 헌법이 안티고네와 같은 저항을 인정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우리 헌법의 정신을 그리고 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다면 위와 같이 철저한 법 물신성에 기초한 사고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고통을 주거나 그 고통을 방치하도록 하는 법이 그 자체로 법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어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법이 정의롭지 못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될 때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입니다. 그렇기에 법을 숭배하는 것에 대한 저항은 곧 민주주의로 향한 걸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1)[대안도덕교과서]-5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1)[대안도덕교과서]-5

 

 

김종곤(건국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법과 바람직함

 
키케로(Marcus Tulliut Cicero)는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Ubi societas ibi ius)고 했습니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거기에는 어떠한 규범적 질서가 있기 마련이라는 의미입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쓴 「토템과 터부」라는 책을 보면 그가 미개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조차 금기(禁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위반하였을 경우 벌을 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키케로의 말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원시부족 사회에까지 적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규범적 질서가 있다는 것은 그것을 지탱해주는 힘으로서 ‘바람직함’이라는 것이 늘 따라 다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우리의 질서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아 그 질서를 정당화합니다. 이렇듯 질서와 바람직함은 하나의 몸처럼 결합되어 있으면서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들을 규제합니다.

키케로(BC106~BC42)

키케로(BC106~BC42)

‘규제’는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행위와 금지된 행위를 구분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 말을 행위에만 해당하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 ‘기준’에 대한 우리의 생각(관념)역시 규제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어떤 것은 바람직하고 또 어떤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바도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떠올려보고 나름의 답변을 준비해보세요. ‘왜 우리는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는가?’ 어떤 대답을 하였는지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보다 환경미화와 위생을 위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훨씬 낫고, 또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대답 보다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법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즉, 불법(不法)이라고 답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물론 전자의 대답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후자, 즉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는 대답이 나름 타당하게 보이는 다른 대답보다 많은 경우에 있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떤 행위에 대한 이유를 물었을 때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다시 말해 법이 그렇게 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의존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마마보이 혹은 파파보이를 연상케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놀림감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에 따라 행동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해 주체성을 상실하였다는 점에서 그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왜 바람직한가? 혹은 왜 바람직하지 않은가?’라는 물음에 그 답변을 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혹은 ‘규정하지 않고 있다’로 대답하는 것은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말씀이 있으면 그것을 무조건 따른다는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즉, 주체적인 판단을 결여하고 단지 믿는 것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법을 항상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기에 법은 바람직함을 판단함에 있어 최고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이를 ‘법 물신’이라 한다. 물신(物神, Fetish)이라는 말은 포르투칼어로 ‘가짜의’ 혹은 ‘허위의’, ‘인위의’라는 의미인 feiti?o로부터 파생된 단어입니다. 1700년대 대항해시대에 아프리카 등을 방문한 포르투칼인들이 그곳의 원주민들이 어떤 사물을 숭배하는 풍습을 보고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기에 미개한 것으로 폄하시켜 이렇게 전한 것 입니다. 어쨌든 물신을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면, 예컨대 마을 입구의 큰 은행나무가 그 마을 혹은 종족을 수호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그것을 신성시하는 것을 떠올리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무는 생명이 있을지언정 정신은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나무에 기도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마치 그것이 어떤 정신이 있는 것, 혹은 영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믿는 미신처럼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물신은 그 어떤 것이 신(神)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으로서 원래 그것이 가진 속성들을 뒤집고 전도시키는 힘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 물신’은 이와 같이 법을 어떤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그 자체를 숭배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법이 인간보다 우선시 되고 물신화될 때 그것은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문제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주제로 다루는 SF영화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이러한 영화에서는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휴먼노이드 처럼 인간과 흡사하거나 구분이 안 되는 외모와 유연한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는 로봇이 등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로봇은 인간의 삶을 더욱 편리하고 안전하게 영위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은 로봇이 존재하는 목적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봇이 아무리 인간보다 신체적·연산능력이 뛰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하며 인간 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에서는 로봇이 인간을 몰아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간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이는 인간과 로봇의 자리가 바뀐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이 있어야 할 창조주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이 만든 피조물인 로봇이 인간의 세계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외’입니다.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봅시다. 법은 로봇과 같이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산물입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 혹은 국가 간에 접촉하고 교류를 하면서 대다수 때로는 일부가 규범화 시켜야겠다고 필요성을 느낀 다음 나왔다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법의 내용을 언제든지 변화시킬 수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폐기시킬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 명령하는 바데로 움직이는 것은 로봇이 오히려 인간에게 명령을 하고 인간이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소외’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SF영화에서는 로봇에 대한 공포, 즉 소외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늘 인간들은 로봇에 맞서 싸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법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때로는 국회에서 어떤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려고 할 때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편안하게 법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그것이 인간 세계의 외부에서 떨어진 것처럼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다시 말해 항상 옳은 것인 마냥 우리의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법 그 자체가 정당한지 아닌지는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이 논의가 법 그 자체가 폐기되어야 한다거나 모든 법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상 법은 항상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은 ‘왜 우리는 이처럼 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을까?’, 나아가 ‘왜 우리는 우리의 삶과 맞지 않거나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법에 대해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냥 가볍게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준법(遵法)정신을 강조하는 의식적인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러한 문제로 돌리기에는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단지 의식이라는 생각의 차원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2. 법과 이데올로기

 
몇몇의 맑스주의 법철학자들은 법을 지배층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이데올로기(Ideology)적 지배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맑스(Karl Marx)의 입장과는 사실상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생각을 왜곡시켰는지 아닌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법을 의식적 차원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가져가는 것이 위에서 우리가 제기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법을 절대적인 바람직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의식의 문제인가를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맑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그것을 맑스주의 법철학자들은 어떻게 법과 연과지어 그것을 의식적 차원에서 다루어버렸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에서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 한다”고 말합니다. 즉, 어떠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이 그 사람의 의식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복지정책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또 의미가 있다고 할지라도 복지정책은 대체적으로 저소득층을 위한 것이기에 자신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빈곤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보입니다.

하지만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상반돼 보이는 말을 합니다. “한 시대의 의식은 지배계급의 의식이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의식은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그의 사회적 조건보다는 그 사회에서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의식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얼핏 보면 두 말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저소득층은 대다수 사회적으로 약자인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들이 복지정책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맑스에게 있어 이 둘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강자가 지닌 의식의 힘이 사회적 위치에 의해 형성된 의식보다 더 강해서 장악력을 가진다면 결국 그것을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선 예를 통해 말하자면, 저소득층은 자신이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함으로 인해 삶의 어려움을 겪는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이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로 생각하고 강하게 비판하기 보다는 개인의 문제나 가족의 문제로 돌려버립니다. 사회적 강자에게는 그 사회의 구조가 별 문제될 바가 없기에 가난한 것은 곧 개인의 노력부족이나 게으름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자와 같이 사회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소수의 사회적 강자의 의식을 마치 자신의 의식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의식은 ‘가짜 의식’ 혹은 ‘허위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맑스에게 있어서 한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는 곧 ‘허구’이며 ‘환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몇몇 맑스주의 법철학자들은 법을 한 사회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진 강자들이 그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법은 바람직함이라는 허위적인 의식을 가지게 만든 것으로 이해합니다. 간단히 말해 법은 항상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머릿속에 주입시켰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이는 ‘법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국가기구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기에 결단력 있게 거부하면 그만이야!’라고 선언하면, 다시 말해 의식적으로 거부하면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규제하는 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즉, 생각만 고쳐먹으면 법 물신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합니까? 아니 그럴 수 있습니까? 다음과 같이 말해봅시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한 것은 국가가 국민들의 위생적인 삶의 환경을 만들어 줌으로 해서 그 의무를 다하고 이를 통해 국민에게 어떠한 의무를 지움으로 해서 국가의 존속을 유지하려는 계획이야! 그러니까 나는 자유롭게 내가 쓰레기를 버리고 싶을 때 아무 곳에서나 버릴거야’ 어떻습니까? 이는 용기나 자신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의식적으로 법이 바람직함과 상관이 없는 것이므로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할 때 무엇인가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이 우리를 괴롭힌다면 법물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을 의식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의식의 차원을 넘어선 영역에서, 다시 말해 마음 한 구석은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함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법은 단지 우리의 생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3)[대안도덕교과서]-4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3)[대안도덕교과서]-4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7. 분노와 절제

 
욕망은 어떤 때는 충동적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욕망의 특성을 충동적 욕망 혹은 중독성 욕망이라고 표현합니다. 절제란 그런 욕망의 마음을 행동으로 쉽게 옮기지 못하도록 하는 행동의 습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절제의 뜻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먹기를 자제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대화할 때 욕설이 습관처럼 배어서 욕이 아니면 대화를 못할 지경에 사람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는 욕심은 나의 배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욕을 하는 습관은 나의 혀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포르노 동영상을 보려는 욕구은 나의 눈이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더 진한 화장을 하려는 욕구는 나의 얼굴이 아니라 나의 마음인 것입니다. 나의 배, 나의 혀, 나의 눈, 나의 얼굴이 요구하는 욕구는 채워질 수 있지만, 나의 마음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우리는 절제라고 합니다. 절제된 마음에서 비로소 행동 습관이 멈춰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의 무절제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자기감정을 다스리는 절제력이 부족하다고 많이 느낍니다. 느끼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분노에 대한 절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분노는 일종의 심리적 고통으로서 몸의 고통이 있으면 이를 진통제 등으로 치료해야 하듯이 심리적 고통인 분노도 치료의 대상입니다. 분노를 치료하는 방법은 분노를 일으킨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지만 현대사회에서 그 원인을 피해가기는 실제로 쉽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술먹고 들어와 가족들을 못살게 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한 번 실수한 것 때문에 일 년 내내 나를 무시하는 담임선생님에 대한 분노, 집에 가는 밤길에 내 돈을 뺐어간 깡패들에게 대한 분노, 나를 왕따시키는 학우들에 대한 분노 등등, 이 모든 분노의 원인들을 헤아릴 수도 없고 적절히 대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분노를 일으키는 나 자신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절제하는 나 자신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침에 학교를 가다가 지나가는 나와 모르는 자전거에 우연히 부딪쳤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지각하고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화를 풀어야 할까요? 이처럼 의도가 없는 행동에 의해 피해를 보고 짜증내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결국 내 마음만 상처받고 풀리지 않은 채 나의 화만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 손해일까요? 어느 누구도 나의 화, 나의 짜증냄을 풀어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조차도 겉으로만 위안이 될 뿐 나의 화낸 나의 짜증냄을 풀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절제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내 마음속에 일어난 분노를 무작정 참는 것만이 문제해결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표출하는 감정조절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를 일시에 폭발시킬 경우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분노의 적절한 표출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어떤 때는 화가 나서 혼자서 교실 뒤에 걸린 거울을 부수기도 합니다. 유리에 다쳐서 피가 나는 그런 몸서리쳐지는 뻔한 결과가 예상되지만, 그런 예후를 고려하지 않고 분노를 표출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청소년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한 폭력을 가하기도 하는데, 이런 끔찍한 소식을 우리는 가끔 뉴스에서 접하기도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이런 마음의 고통으로서 분노를 내 안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절히 화를 풀고 짜증을 내지 않는 마음의 윤리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것은 고통의 감정에 해당합니다. 분노의 마음은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고통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분노는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 대하여 자식, 선생님에 대하여 학생, 기업주에 대하여 고용인, 독재자에 대하여 국민들, 이 모두 사회적 약자입니다. 권력에 대하여 느끼는 분노를 풀 행동의 탈출구가 약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분노가 증폭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노를 적절한 곳 적절한 때에 풀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터트린 분노의 책임은 그 공동체 즉 가족이나 학교 아니면 지역공동체나 국가가 대신 지지 않으며 고스란히 개인에게 되돌아옵니다. 청소년도 사회적 약자입니다. 부모에 대하여 약자이며 학교 선생님에 대하여 사회적 약자입니다. 사회적 약자로서 생긴 분노는 그 공동체에서 책임을 공유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은 바로 청소년인 나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이러한 뼈아픈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기 성장의 과정입니다. 결국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을 청소년기에 터득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청소년은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나쁜 것이니 스스로 잘 통제해야 한다’는 명령적 윤리만 있었고, 왜 내가 분노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찾기 어렵습니다.

나의 분노는 곧 내 마음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절제가 안 되면 방탕이 됩니다. 물질적 방탕이 방탕의 전부가 아닙니다. 정신적 방탕은 우리 청소년에게 다가온 가장 큰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정신적 방탕, 심리적 무절제를 스스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부모님이나 선생님 혹은 인생의 선배가 형식적으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무절제함을 절제심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묘수는 없습니다. 단지 꾸준한 일상생활의 연습을 통해 행동습관을 바꾸는 데 있을 뿐입니다. 그 연습의 하나로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한 순간씩 늦추는 방법이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표출을 하되 표출방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또한 제삼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마음의 절제로 찾아가는 뾰족한 정답은 없지만, 자신의 무절제함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일상적인 연습만이 가장 가까운 정답인 것입니다.
 
 

8. 욕망과 주체적 윤리학

 
청소년 시기는 자기존재감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항적 감정을 쉽게 폭발하기도 하고 혹은 나쁜 감정에 휘말리어 평생 눌려서 살 수도 있습니다. 한편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나의 동기를 세워서 끝내는 무엇이든지 이뤄낼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청소년의 징표입니다.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생물학적 보편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안에 욕망의 감정을 직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결단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과정에서 나의 행복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기 위하여 나의 감정을 피해가서는 안 됩니다. 행복에 이르기 위하여 감정들 특히 욕망의 감정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잘 통제해야 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이제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욕망은 나쁜 것이니만큼 그런 욕망을 싹둑 잘라버려야 한다는 강요된 윤리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게임은 나쁜 것이고 영어공부는 좋은 것이니,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만 하라는 식의 획일적인 윤리학은 찐정한 윤리적 실천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윤리학은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소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욕망은 감정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고 그리고 밥을 먹으려는 준비행동을 준비합니다. 추우면 옷을 입고 따듯한 방에 들어가고 싶으며 또한 그런 행동을 옮기려 합니다. 이런 행동이 지나쳐서 남의 밥을 훔치고 남의 집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부당한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나의 행동을 증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욕망은 세상을 다른 색깔로 칠하는 예술과 과학을 탄생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여 말해봅시다. 욕망이 감정으로 나타나며 이를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 어떤 적절한 조절이 필요합니다. 감정의 조절입니다. 그런 감정의 조절을 규범화한 것이 바로 기존의 윤리학입니다. 감정의 조절은 개인의 책무이기도 하지만 법이나 문화 같은 사회적 관습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화가 났다고 칩시다. 나의 화를 조절하기 위하여 나의 개인적인 마음의 수양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수양말고도 화를 나게 만든 이 사회의 관습이 과연 옳은 것인지도 관찰해야 합니다. 물론 사회적 윤리가 필요한 만큼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마음의 윤리도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의 윤리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침팬지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해 합니다. 15개월 이전의 아이들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울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보고 빗질도 여드름도 짜며 옷매무새를 잡아봅니다. 거울을 통해 머리모양만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비춰보는 것, 그것이 바로 반성인 것입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명령받아 억지로 쓰는 반성문의 그런 반성이라는 말을 이제부터 싹 잊도록 합시다. 그런 반성이 아니라 내 마음을 되돌아보는 반성입니다. 어려운 말로는 성찰이라고도 하는데, 자기 성찰이라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그저 반성이라는 소박한 말이 더 좋습니다. 반성을 억지로 할 필요 없습니다. 단지 일기를 쓰거나 블로그에 나를 표현하는 글을 올리거나 깊이 숨을 들이 쉬면서 잠시라도 어제 일을 회상하는 등등, 이런 차분한 시간을 갖는 일이 곧 반성의 시간입니다. 그런 반성으로부터 이미 마음의 윤리학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반성을 할 수 있을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의 윤리적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윤리학, 좀 더 쉽게 말해서 감정조절의 윤리학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침팬지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조절이란 뜻은 욕망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욕망을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없습니다. 욕망은 오히려 나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마음의 힘입니다. 기존의 금지의 윤리학에서는 욕망은 무조건 나쁜 것이어서, 욕망은 제거되어야 할 나쁜 감정이었습니다. “이거 해라, 저거는 하면 안 된다”라는 식의 금지의 윤리학에서 욕망의 창조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앞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청소년의 가장 큰 장점은 미래를 나름대로 설계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록 그 미래는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이지만 바로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나는 나의 미래를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무조건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나의 욕망을 나의 친구삼아 배려하고 귀기울이며 공감하며 협조하면서 공존하는 연습이 소중합니다. 그런 일상생활 속의 연습이 바로 청소년 윤리학의 기초이며 이를 앞에서 자유의 윤리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욕망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나의 감정을 연습하는 일이 바로 청소년 윤리학의 조건입니다. 타인의 규제가 작용되는 금지의 윤리학과 달리 자유의 윤리학은 나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윤리적 자율성을 제시합니다. 그런 자율성은 법적이거나 통제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감정 조절을 학습하는 마음의 원리들입니다. 자율성의 조건은 행동에 대한 결과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먼저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행동습관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행동습관이 구체적인 마음의 준칙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앞서 말한 긍지의 마음, 겸양의 마음, 정의로운 마음, 관심을 두는 마음, 분노를 조절하는 마음을 키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추게 된다면 우리에게 ‘금지의 윤리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주체의 윤리학’ 그리고 ‘자유의 윤리학’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욕망의 유혹이라는 큰 장벽이 있지만, ‘자유와 주체의 윤리학’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감정은 이미 여러분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스스로 끄집어내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