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1)[대안도덕교과서]-5

법은 항상 바람직함이 될 수 있는가?(1)[대안도덕교과서]-5

 

 

김종곤(건국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법과 바람직함

 
키케로(Marcus Tulliut Cicero)는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Ubi societas ibi ius)고 했습니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거기에는 어떠한 규범적 질서가 있기 마련이라는 의미입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쓴 「토템과 터부」라는 책을 보면 그가 미개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조차 금기(禁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위반하였을 경우 벌을 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키케로의 말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원시부족 사회에까지 적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규범적 질서가 있다는 것은 그것을 지탱해주는 힘으로서 ‘바람직함’이라는 것이 늘 따라 다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우리의 질서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아 그 질서를 정당화합니다. 이렇듯 질서와 바람직함은 하나의 몸처럼 결합되어 있으면서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들을 규제합니다.

키케로(BC106~BC42)

키케로(BC106~BC42)

‘규제’는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행위와 금지된 행위를 구분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 말을 행위에만 해당하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 ‘기준’에 대한 우리의 생각(관념)역시 규제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어떤 것은 바람직하고 또 어떤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바도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떠올려보고 나름의 답변을 준비해보세요. ‘왜 우리는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는가?’ 어떤 대답을 하였는지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보다 환경미화와 위생을 위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훨씬 낫고, 또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대답 보다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법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즉, 불법(不法)이라고 답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물론 전자의 대답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후자, 즉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는 대답이 나름 타당하게 보이는 다른 대답보다 많은 경우에 있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떤 행위에 대한 이유를 물었을 때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다시 말해 법이 그렇게 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의존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마마보이 혹은 파파보이를 연상케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놀림감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에 따라 행동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해 주체성을 상실하였다는 점에서 그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왜 바람직한가? 혹은 왜 바람직하지 않은가?’라는 물음에 그 답변을 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혹은 ‘규정하지 않고 있다’로 대답하는 것은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말씀이 있으면 그것을 무조건 따른다는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즉, 주체적인 판단을 결여하고 단지 믿는 것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법을 항상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기에 법은 바람직함을 판단함에 있어 최고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이를 ‘법 물신’이라 한다. 물신(物神, Fetish)이라는 말은 포르투칼어로 ‘가짜의’ 혹은 ‘허위의’, ‘인위의’라는 의미인 feiti?o로부터 파생된 단어입니다. 1700년대 대항해시대에 아프리카 등을 방문한 포르투칼인들이 그곳의 원주민들이 어떤 사물을 숭배하는 풍습을 보고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기에 미개한 것으로 폄하시켜 이렇게 전한 것 입니다. 어쨌든 물신을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면, 예컨대 마을 입구의 큰 은행나무가 그 마을 혹은 종족을 수호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그것을 신성시하는 것을 떠올리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무는 생명이 있을지언정 정신은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나무에 기도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마치 그것이 어떤 정신이 있는 것, 혹은 영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믿는 미신처럼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물신은 그 어떤 것이 신(神)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으로서 원래 그것이 가진 속성들을 뒤집고 전도시키는 힘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 물신’은 이와 같이 법을 어떤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그 자체를 숭배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법이 인간보다 우선시 되고 물신화될 때 그것은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문제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주제로 다루는 SF영화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이러한 영화에서는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휴먼노이드 처럼 인간과 흡사하거나 구분이 안 되는 외모와 유연한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는 로봇이 등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로봇은 인간의 삶을 더욱 편리하고 안전하게 영위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은 로봇이 존재하는 목적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봇이 아무리 인간보다 신체적·연산능력이 뛰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하며 인간 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에서는 로봇이 인간을 몰아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간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이는 인간과 로봇의 자리가 바뀐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이 있어야 할 창조주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이 만든 피조물인 로봇이 인간의 세계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외’입니다.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봅시다. 법은 로봇과 같이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산물입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 혹은 국가 간에 접촉하고 교류를 하면서 대다수 때로는 일부가 규범화 시켜야겠다고 필요성을 느낀 다음 나왔다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법의 내용을 언제든지 변화시킬 수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폐기시킬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 명령하는 바데로 움직이는 것은 로봇이 오히려 인간에게 명령을 하고 인간이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소외’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SF영화에서는 로봇에 대한 공포, 즉 소외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늘 인간들은 로봇에 맞서 싸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법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때로는 국회에서 어떤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려고 할 때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편안하게 법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그것이 인간 세계의 외부에서 떨어진 것처럼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다시 말해 항상 옳은 것인 마냥 우리의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법 그 자체가 정당한지 아닌지는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이 논의가 법 그 자체가 폐기되어야 한다거나 모든 법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상 법은 항상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은 ‘왜 우리는 이처럼 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을까?’, 나아가 ‘왜 우리는 우리의 삶과 맞지 않거나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법에 대해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냥 가볍게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준법(遵法)정신을 강조하는 의식적인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러한 문제로 돌리기에는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단지 의식이라는 생각의 차원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2. 법과 이데올로기

 
몇몇의 맑스주의 법철학자들은 법을 지배층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이데올로기(Ideology)적 지배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맑스(Karl Marx)의 입장과는 사실상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생각을 왜곡시켰는지 아닌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법을 의식적 차원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가져가는 것이 위에서 우리가 제기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법을 절대적인 바람직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의식의 문제인가를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맑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그것을 맑스주의 법철학자들은 어떻게 법과 연과지어 그것을 의식적 차원에서 다루어버렸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에서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 한다”고 말합니다. 즉, 어떠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이 그 사람의 의식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복지정책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또 의미가 있다고 할지라도 복지정책은 대체적으로 저소득층을 위한 것이기에 자신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빈곤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보입니다.

하지만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상반돼 보이는 말을 합니다. “한 시대의 의식은 지배계급의 의식이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의식은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그의 사회적 조건보다는 그 사회에서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의식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얼핏 보면 두 말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저소득층은 대다수 사회적으로 약자인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들이 복지정책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맑스에게 있어 이 둘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강자가 지닌 의식의 힘이 사회적 위치에 의해 형성된 의식보다 더 강해서 장악력을 가진다면 결국 그것을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선 예를 통해 말하자면, 저소득층은 자신이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함으로 인해 삶의 어려움을 겪는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이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로 생각하고 강하게 비판하기 보다는 개인의 문제나 가족의 문제로 돌려버립니다. 사회적 강자에게는 그 사회의 구조가 별 문제될 바가 없기에 가난한 것은 곧 개인의 노력부족이나 게으름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자와 같이 사회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소수의 사회적 강자의 의식을 마치 자신의 의식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의식은 ‘가짜 의식’ 혹은 ‘허위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맑스에게 있어서 한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는 곧 ‘허구’이며 ‘환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몇몇 맑스주의 법철학자들은 법을 한 사회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진 강자들이 그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법은 바람직함이라는 허위적인 의식을 가지게 만든 것으로 이해합니다. 간단히 말해 법은 항상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머릿속에 주입시켰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이는 ‘법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국가기구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기에 결단력 있게 거부하면 그만이야!’라고 선언하면, 다시 말해 의식적으로 거부하면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규제하는 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즉, 생각만 고쳐먹으면 법 물신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합니까? 아니 그럴 수 있습니까? 다음과 같이 말해봅시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한 것은 국가가 국민들의 위생적인 삶의 환경을 만들어 줌으로 해서 그 의무를 다하고 이를 통해 국민에게 어떠한 의무를 지움으로 해서 국가의 존속을 유지하려는 계획이야! 그러니까 나는 자유롭게 내가 쓰레기를 버리고 싶을 때 아무 곳에서나 버릴거야’ 어떻습니까? 이는 용기나 자신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의식적으로 법이 바람직함과 상관이 없는 것이므로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할 때 무엇인가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이 우리를 괴롭힌다면 법물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을 의식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의식의 차원을 넘어선 영역에서, 다시 말해 마음 한 구석은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함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법은 단지 우리의 생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