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下)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0.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下)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반근본주의적 연합의 정치

 

이리가레는 남근로고스 중심적 언어에서 여성들은 재현불가능성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뜻이 명료한 일의적 의미화의 언어 안에서는 여성의 성적 차이는 지칭되거나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들은 ‘하나’가 아닌 다수의 성이다. 나아가 이리가레는 여성을 ‘타자’로 지칭하는 보부아르에 반대하면서 ‘남성=주체 대 여성=타자’라는 변증법적 인식에는 인간 안에 어떤 본질적 속성이 있을 거라고 미리 단정짓는 ‘본질(실체)의 형이상학’이 전제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버틀러는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의 이론이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나 결정론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나아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획일성을 비판할 근거를 줌으로써 페미니즘적 비평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게 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뒤이어서 이리가레가 ‘타자의 문화’를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확대사례로 포함하는 방식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인식론적 제국주의’의 일종임을 밝히고자 했다. 즉 사회적 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여러 권력작용들을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라는 단일한 기호로 비판하는 것은 ‘적을 단일한 형태로 동일시하는’ 전략이며, 이것은 ‘페미니즘 자체의 전체화’를 방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권력의 식민화는 항상 남근중심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며, 그 안에는 인종적․계급적․이성애중심적 권력생산 작용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와의 관계 안에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 속에서 배치되는 가운데 생산되며, 그래서 이는 여성운동 안에서조차 무수한 형태의 권력관계의 효과로 생산된 ‘여성’들이 있음을 수용하는, 즉 통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연합의 정치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방향을 취하게 만든다.

“페미니스트의 행동은 안정되고 통일되고 합의된 정체성으로부터 설정되어야 한다는 강압적 기대만 없다면, 이 행동은 더 빨리 출발할 것이고, 이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훨씬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여성 범주는 영원히 미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연합의 정치학에 대한 이런 반근본주의적 접근방식은 ‘정체성’이 하나의 전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형성되기 이전의 연합집단의 형태나 의미를 알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 열린 연합은 당면한 목적에 따라 번갈아 제정되고 또 폐기되는 정체성을 주장할 것이다.(113)”

 

  • 복종위반의 양가성과 삶의 욕망

 

보부아르가 젠더가 구성적이라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몸(그리고 ‘성’)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기인할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푸코는 여기서 벗어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푸코에게 몸은 오로지 권력관계의 맥락에서만 담론으로서 의미를 획득하며, 따라서 ‘성’은 일관된 정체성을 부여하는 규제적 관행, 즉 섹슈얼리티를 이성애로 안정화시키는 법적․규범적 장치를 통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푸코의 계보학적 탐구는 욕망이 단순히 금지나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되었다고’ 간주하게 만드는 담론적 생산과정을 통해 특정한 형태로 반복적으로 생산된다는 점을 제시한다. 근친상간 금기로 대표되는 금지의 이면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억압되었다고 간주한 이성애 욕망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인정받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푸코에게는 스스로의 관점과도 모순되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욕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페니스(혹은 확대된 클리토리스)를 갖고 태어난 그래서 ‘여자’의 성을 부여받은 에르퀼린은 수녀원에서 만난 소녀들과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한’ 수녀들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죄의식으로 괴로워했다. 에르퀼린은 자신이 작은 성기를 갖고 있음을 고백하고 당국으로부터 합법적인 남자의 권리를 부여받지만 이후 의사와 판사의 신체규정에 따라 법적 격리조치된 이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푸코는 바르뱅이 여자에서 남자로의 변신 전에는 사법적․규제적 성 범주의 압력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쾌락’을 향유했다고 보는데, 버틀러는 이렇게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를 설정하는 푸코의 논의는 섹스와 정체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유토피아적인 쾌락의 세계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따라서 섹슈얼리티를 형이상학적으로 물화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에르퀼린의 양성구유의 몸과 그/녀의 성적 쾌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버틀러는 에르퀼린의 몸과 쾌락은 일의적인 의미를 부과하는 법담론 내에서 생산된 것이면서도 동시에 법담론의 언어로는 규명될 수 없는 모호한 양가성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에르퀼린의 욕망은 한편으로 자매와의 섹슈얼리티를 금지시키는 수녀원의 제도적 명령(‘동성애 금지’)에의 위반으로 구성(‘동성애 감정’)되면서 다른 한편 자매들의 몸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따라서 ‘비동성애적 욕망’)을 느낀다. 사라라는 이름의 ‘자매’와의 하룻밤 뒤 에르퀼린은 ‘이성애가 내포된’ 소유와 승리의 언어(“바로 그 순간부터, 사라는 내 것이었다!!”)를 말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이성애 규범 내에서 작동하는 남성적 특권을 ‘찬탈’하고 그 특권을 모방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녀의 욕망은 푸코가 생각한 ‘비정체성의 지대’가 아니라, 이성애 규범체제에 복종한(즉 이성애적 정체성을 형성한) 결과이면서도 동시에 아직 권리상 여자인 상황에서 그 규범을 위반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복종․위반․굴절․혼란이 교차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려 했는데, 이러한 정체성 형성은 그/녀가 규범체제 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삶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 즉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서 행해진 것”(63)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버틀러는 바로 이렇게 정체성이 생산되는 그 자리에서 대안이 전개될 존재론적 지위를 확인한다, 즉 ‘삶을 욕망하는 한, 그들은 모두 자신에게 강제된 권력체제 한가운데에서도 늘 전복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젠더의 ‘통일성’은 강제적 이성애의 실천효과이다. 이 실천의 힘은 배타적 생산장치를 통해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의 상대적 의미를 제한하기도 하고 그 의미들의 융합과 재의미화가 일어나는 전복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성애주의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권력체제가 그들의 논리, 형이상학, 당연시된 존재론의 지속적 반복을 통해 스스로를 증식하고자 한다고 해서, 반복 자체가 멈춰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복이 정체성의 문화적 생산이라는 기제로서 지속된다면 다음과 같은 핵심적 질문이 등장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전복적 반복이 정체성 자체의 규제적 관행을 문제삼을 것인가?(145-146)”

 

  • 구성적 외부로서의 우울증

 

그렇다면 이러한 강제적 이성애 체제 안에서 그것을 벗어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버틀러는 그것을 정신분석학의 ‘우울증’ 논의를 통해 해명하고자 했는데, 그녀와 유사한 입지점을 가진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분석․비평함으로써 ‘우울증’의 확장된 개념틀을 확보하고자 했다.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모체에 대한 기원적 관계의 억압을 필요로 한다는 라캉의 서사에 도전하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라캉과는 반대로 그녀는 ‘기호계’가 기원적 모성의 몸 때문에 생겨난 언어 차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통해 기호계는 상징계 안에서 영원히 전복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이 점에서 크리스테바의 전략은 라캉의 상징계에 맞서 ‘기호계’를, 아버지 법에 맞서 ‘시적언어’를 대치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크리스테바의 전략은 몇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크리스테바가 시적언어로 아버지 법을 대체하려고 노력하는 그만큼 불가피하게 그 법의 안정성을 전제하고 그 체계를 확정짓는다는 점, 둘째, 크리스테바는 모성적 몸이 문화보다 앞서 있는 의미와 본질성을 지닌다고 말하는데, 그에 따라 모성은 물화되고 모성의 변이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 셋째, 크리스테바는 상징계가 억압하는 일차적 충동(모성적 충동)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 충동의 현실화로 ‘아이의 옹알이’나 ‘정신병자의 방언’처럼 상징계 바깥에 놓여있는 영역을 설정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동성애를 모성으로의 귀환으로 보는 만큼 ‘동성애=정신병’이라는 전제를 아무 문제의식없이 수용하게 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버틀러는 이렇게 크리스테바의 한계와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그녀가 ‘근친상간 금기’와 ‘동성애 금기’가 아이의 젠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문을 개방한다는 점을 긍정한다. 프로이드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주체가 보이는 심리적 반응을 애도와 우울증으로 구분해 설명한 바 있다. 상실된 대상을 분명히 이해하고, 대상에 대한 사랑에 머무는 ‘애도’와 달리, 상실된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며, 상실을 통해 자아의 형성으로 나아가며 또한 대상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변모하기도 하는 ‘우울증’은, 크리스테바에게서는 엄마에 대한 딸의 사랑이 근친상간과 이성애 금기를 통해 형성된 상실감을 내면화시키는 기제로 설명된다. 여자아이의 정체성은 모성적 몸에 대한 일종의 상실․결여가 되며, 아이의 에고는 모체와의 분리에 우울증적으로 반응한 결과 ‘특정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크리스테바의 관점이 그녀가 모성성을 우울증과 동일시함으로써 ‘젠더 정체성의 형성’을 설명할 근거는 제공하면서도, 그것이 왜 이성애적 틀 안에서의 젠더 생산과정에 동성애의 거부/보존이 지속적으로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크리스테바는 아버지 법을 금지 개념에만 독점적으로 한정시키기 때문에 아버지 법이 특정 욕망을 자연스러운 충동의 형태로 생성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여성의 몸은 그 자체 법에 의해 생산되는 구성물이고, 그것은 법의 토대를 약화시키게 되어 있다.”(261) 버틀러는 이성애 규범을 통해 배제되는 동성애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정신병으로 귀착하는 것만도 아닌 ‘주체의 내부로 진입해’ 매 순간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모든 이들의 내면에서 그들의 정체성(및 규범)을 흔들리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따라서 버틀러에게 우울증을 앓는 젠더 주체의 몸은 이성애 중심주의가 배제했던 동성애를 불완전하게 합체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젠더’는 이성애 규범을 신체로 통합하지만 항상 그 규범이 실패하고 거부됨으로써 형성된 내 안의 타자(즉 ‘구성적 외부’)인 것이다.

“젠더 정체성은 자신을 몸에 암호화하고 사실상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을 결정하는, 상실의 거부를 통해 설정될 것이다. 반은유적 활동으로서의 합체는 몸 위에 혹은 몸 안에 상실을 문자그대로 새겨넣어서 몸의 사실성으로, 즉 몸이 문자적 진리로서 ‘성’을 갖게 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주어진 ‘성감’대에서의 쾌락과 욕망을 금지하거나 그 위치를 설정하는 행위야말로 몸의 표면을 가득 채운 일종의 젠더 특정적 우울증이다.”

 

  • 수행적, 전복적 패러디와 페미니즘의 영원성

 

수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과 문헌에서는 행위 뒤에 행위자(‘여성 주체’)가 있다고 가정하곤 한다. 행위주체 없이는 어떤 행위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사회의 지배관계를 변화시킬 저항의 추동력도 주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니크 위티그 역시 행위작용의 장소로 주체와 개인을 상정하는 입장 안에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론이 이전보다 진일보한 것은 그녀가 젠더의 수행적 구성은 문화의 물질적 실천 속에서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위티그가 보기에 성의 이분법적 규제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을 수행하는데, 그 속에서는 오로지 여성 젠더만이 언어적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강제적 이성애 안에서 남성이 보편적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그만큼 젠더에는 오로지 여성만이 남게 되는데, 예컨대 각종 직업들의 표시에서 ‘여의사’, ‘여교수’, ‘여기자’가 말해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겠다. 위티그는 이러한 표식이 제도에 효과적으로 저항하는 실천들에 의해 삭제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생각의 전제에는 ‘섹스’가 언어적 허구이며, 이 허구를 유지하기 위해 이성애제도는 강제적 규범으로 작동한다는 점이 담겨 있다. 따라서 위티그에게 섹스와 젠더는 차이가 없으며 섹스 범주는 그 자체 권력관계 속에서 젠더화된 범주로 이해된다. 위티그의 이러한 발상은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확립할 동등한 기회가 언어 안에서 주어질 수 있으며, 그래서 여성들로 하여금 발화를 통해 자신에게 부과된 물화된 ‘성’을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두게 한다. 그 결과 위티그는 ‘문학작품도 전쟁기계처럼’ 작동할 수 있으며, 이 전쟁의 주된 전략은 여성, 레즈비언, 게이들이 ‘말하는 주체의 위치’를 선점하는 데 있다고 본다.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관점은 오직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관점을 취해야만 또 전세계를 레즈비언화해야만 강제적 이성애 질서가 파괴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고 보는데, 문제는 이러한 ‘도전적 제국주의 전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성애에 참여하고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억압을 반복하고 강화한다는 것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성애가 완전한 위치변경을 필요로 하는 체계라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이성애주의를 재의미화할 가능성 자체는 거부되며, 따라서 위티그의 이론에서는 이성애에 대한 근본적 순응인가 총체적 거부인가라는 양자택일만 남게 된다. 또한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저항전략에는 강제적 이성애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동성애’가 상정될 수밖에 없으며, 그만큼 이성애와 퀴어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도 보장되지 않는 근본적 단절만이 남게 된다고 점을 지적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생각에 맞서 “이성애 자체는 강제적인 법이기도 하지만 또한 필연적인 코미디이기도 하다. … 나는 이성애가 강제적인 체계이자 내재적 희극, 즉 그 자체에 대한 지속적 패러디로 보는 동시에 어떤 대안적인 게이/레즈비언 관점으로 보려는 통찰을 이성애 쪽에 제시하고 싶다”(315)고 말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버틀러만의 고유한 저항전략 개념(즉 ‘전복적 패러디’)이 도출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권력은 거부될 수도, 철회될 수도 없다. 다만 재배치될 뿐이다. 사실 나의 견해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실천에 대한 규범적 핵심은 권력의 완전한 초월이라는 불가능한 환영보다는, 권력의 전복적이고 패러디적인 재배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효과적인 전략은 정체성의 범주 자체를 전유하고 재배치하는 가운데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단지 ‘성’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체성’의 자리에 다양한 성적 담론이 집중된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어떤 형식이 되건 간에, 성의 범주를 영원히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다.”(318-319, 326)

이런 점에서 버틀러의 ‘패러디’ 개념은 강제적 이성애 체제 안에서 그것이 부과하는 규범에 대한 재이용․재의미화를 염두하는 것이며, 그만큼 그러한 저항전략은 담론 이전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상정하지도, 나아가 저항 이후의 유토피아적 낭만화로도 귀결되지 않는 진정한 ‘내재주의’의 성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재주의’는 권력작용이 있는 곳에서는 그 어떤 장소나 시간, 어떠한 위치에서도 저항과 전복이 가능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영구혁명’ 모델로 귀결되며, 그래서 페미니즘 정치의 새로운 대안을 확립하게 해준다. 이러한 대안적인 페미니즘 정치에 대해 버틀러는 마지막으로 젠더 트러블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최종 정리한다.

“페미니즘의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환영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이 환영적 구성물은 자신의 목적이 있지만, 그 용어의 내적 복잡성과 불확정성을 부정하고, 또 그것이 동시에 재현하고자 하는 구성물의 일부를 배제해야만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처럼 빈약하고 환영적인 ‘우리’라는 위상이 절망의 원인은 아니며, 최소한 절망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이 범주의 근본적인 불안전성은 페미니즘의 정치적 이론화에 대한 근본적 제약을 문제시하며, 젠더와 몸뿐 아니라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연다.”

 

  • 2회에 걸쳐 연재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부터는 마리아 미즈와 반다나 시바의 <에코 페미니즘>이 연재됩니다. 🙂 많은 기대 바랍니다.

주디스 버틀러(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9.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上)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젠더의 의미를 둘러싼 현대 페미니즘 논쟁은 이 시대를 이끌다가 다시 특정한 의미의 트러블에 도달했다. 마치 젠더의 불확정성이 결국 페미니즘의 실패를 보여주는 정점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트러블이 있다고 해서 이처럼 부정적인 가치를 수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나는 트러블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최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렇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서문(73-74쪽[한글판])

 

1956년 헝가리와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주디스 버틀러(1956. 2. 24 ~)는 1990년 <젠더 트러블>의 출판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페미니즘에서 정치철학, 윤리학, 퀴어이론, 문학이론에 걸쳐 자신의 작업을 이어간 버틀러는 정체성과 주체성 형성의 문제를 뼈대로 삼아 젠더․섹스․폭력․언어 등에 대한 여러 새로운 논쟁적 입장을 제출함으로써 오늘날 미국 내에서 가장 주목받는(버틀러를 패러디하면 ‘트러블을 일으키는’) 철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문제는 그녀가 일으킨 트러블이 단지 기존의 관성처럼 받아들이던 법적․언어적 개념들이나 사고형태들만을 뒤흔든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에도 불편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현존하는 권력구조 안에서 우리가 정체성을 통해 주체가 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그 속에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모두 법과 제도의 이차적 결과물이며 나아가 그것들을 구분짓는 경계 역시 문화적역사적 구성물임을 폭로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자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연적․필연적 토대란 없으며 그러한 토대를 상정하는 이론을 ‘실체(혹은 본질)의 형이상학’으로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말처럼 ‘여성’ 정체성이 이처럼 언제나 유동적․불확정적이며, 그래서 심지어 페미니스트들 안에서도 ‘여성’의 의미를 동일하게 고정시킬 수 없다면, 여성을 억압하는 체제는 무엇이며, 또 그에 맞서 저항하는 토대는 무엇인지를 규정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남게 될 것이다. 즉 페미니즘의 안정적 기반을 동일하게 규정할 수 없다면(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운동의 측면에서나 이론의 측면에서 어떤 가능성을 갖게 되는가?

 

  • 섹스/젠더/욕망으로 분할된 인식틀에 대한 비판

 

‘젠더’라는 용어가 현재와 같이 통용되게 된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1908. 1. 9 ~ 1986. 4. 14)<제2의 성>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선언한 이후부터일 것이다. 즉 ‘여성적인 것’이 생물학적 성과는 달리 문화적․사회적 과정에 의해, 다시 말해 젠더화된 규범을 강제로 부과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만들어 진’ 것이라는 비판적 문제의식이 발전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보면 섹스는 생물학적 몸의 차이, 젠더는 문화적․사회적 동일시 양식, 섹슈얼리티는 성적 행위가 유래하는 근원적 욕망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구별짓고 분리시킨 인식론적 틀은 이후 여성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했고 페미니즘의 여러 형태의 이론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몸의 차이에 기초해 여성에게 부과했던 기존의 여러 속성들(예컨대 모성성, 수동성, 감정적임, 연약함 등)이 사회적인 제도나 규범이 낳은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 결과 여성으로 하여금 성역할이나 직업선택에서의 고정성을 탈피할 계기를 주며, 나아가 또한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분리될 수 있다면, 이성애에 기초한 정상가족체제의 필연성 역시 허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의 작업의 독특함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인식(보부아르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여러 페미니스트들을 지배하는 인식) ‘안에서’ ‘그에 맞서는’ 근본적이면서도 내재적인 비판을 전개한다는 점에 있다. 첫째, 보부아르의 생각, 즉 사람은 몸과 그 몸에서 비롯된 ‘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성이 젠더의 필연적․인과적 원인은 아니며 젠더는 신체적 외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설혹 성이 생물학적으로 둘(남자와 여자)로 분류된다 할지라도, 젠더가 둘이어야 할 필연성은 나오지 않으며 섹슈얼리티의 형태 역시 특정한 형태로 한정될 이유는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부아르는 젠더를 논할 때 늘 두 형태(남성성과 여성성)를 상정하곤 하는데 이는 그녀 역시 젠더를 이분법적 틀로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젠더가 섹스를 반영하거나 모방하는 관계에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95) 둘째, 보부아르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99)로서 즉 어쩔 수 없는 ‘자연적 소여’로 받아들이곤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염색체와 호르몬의 상태를 통해 우리에게 몸의 차이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확인시키려 하는 무수한 담론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임산부의 뱃속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그 무수한 담론들은 무엇이며 심지어 이런 성별감별의 담론들은 왜 종종 그 감별조차 실패하곤 하는가?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보부아르의 주장과 달리 ‘몸’은 늘 담론 안에 감싸여져 있으며, 그 담론들을 통해서야 비로소 어떤 특정한 형태로 생산된다는 점에서 ‘자연적 소여’일 수가 없다. 셋째, 보부아르는 ‘주체’가 언제나 이미 남성적인 것이고 나아가 보편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음을 폭로하면서 이를 여성적 ‘타자’와 구분하는데, 이를 통해 그녀(그리고 여러 페미니스트들)는 추상적인 인간이나 주체의 담론에 늘 도사려 있는 남성중심적 인간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계기를 주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보부아르가 ‘인간’이라고 하는 담론의 장에서 여성의 몸을 “부인되고 멸시당한 체현(embodiment)”(105)으로, 나아가 보편적 규범 바깥에 있는 것으로 전제되는 만큼 의미화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으로 보고, 그 결과 해방의 가능성은 의미화되지 않은(남성적 규범에 물들지 않은) 여성의 몸을 자유의 도구로 이해할 때 발생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주장에서 보부아르는 은연중에 ‘남성 의미화 對 여성 비의미화’, ‘남성=주체=문화=정신 對 여성=타자=자연=몸’이라고 하는 플라톤과 데카르트 등이 전개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며, 그래서 남성중심적 인간주의를 비판하는 뒷문으로 역설적이게도 이리가레가 말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를 끌어들일 여지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는 결국 ‘여성성’을 규범적으로 배제된 영역에 영원히 묶이게 만듦으로써 암묵적으로 젠더 위계의 체계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페미니즘의 정치의 일체의 해방적 가능성을 스스로 유폐시키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 열린 복합물로서의 젠더와 삶의 박탈

 

버틀러는 이처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분리시키는 인식’이 한편으로는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을 성장시킨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규범(남성성/여성성)의 고착화’, ‘담론 이전의 영역으로의 몸의 실체화․물신화’, ‘여성성의 항구적 타자화 및 배제’ 등의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을 비판함으로써 젠더와 몸뿐 아니라 페미니즘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버틀러는 섹스가 (1차적․본질적인) 자연과 관계되고 젠더가 (2차적․인위적인) 문화와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섹스는 이미 젠더이며 그런 점에서 섹스와 젠더(나아가 섹슈얼리티)는 모두 문화적 구성물임을 강조하는데 그 결과, 그녀의 관점에서 젠더는 “그 총체성이 영원히 보류되어서, 주어진 시간대에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도 없는 어떤 복합물[로서] … 다양한 집중과 분산을 허용”(114)할 가능성의 영역으로 열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버틀러가 이처럼 ‘섹스가 이미 젠더이고 젠더를 열린 복합물’로 이해하게 될 때, 문제는 그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라는 견고한 개념을 통해 확보되는 ‘정체성’(특히 ‘젠더 정체성’)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가 남게 될 것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만일 버틀러의 논의대로 젠더 정체성이 비일관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 일정한 자리를 배치받는 ‘인간’으로서의 터전, 아니 인간 그 자체의 존재론적 지위 및 문화적 인식 가능성이 위협받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인간’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문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미리 주어진 규범적 이분법, 즉 여성이나 남성으로 고착되지 않는다’로 대변되는 급진적 (탈)젠더정치는 ‘그럼 넌 사회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으니 그 안정적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라는 공포스러운 박탈정치를 예고하게 만든다. 버틀러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인간으로서 ‘인식된다는 것’의 의미와 그것에 내포된 권력관계를 분석할 필요를 제기하면서 프랑스 페미니즘과 후기구조주의 이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 이리가레푸코위티그크리스테바의 수용 및 대결

 

버틀러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론으로서 크게 4가지 입장, 즉 타자를 재생산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남성성만이 정체성으로서 존재한다’는 뤼스 이리가레(1930. 5. 3 ~)의 입장,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정체성 범주는 널리 확산된 섹슈얼리티의 규제적 경제체제의 산물’이라는 미셸 푸코(1926. 10. 15 ~ 1984. 6. 25)의 입장, 강제적 이성애 상황에서 ‘정체성은 언제나 여성적’이라는 모니크 위티그(1935. 7. 13 ~ 2003. 1. 3)의 주장, 마지막으로 ‘상징계(아버지 법)에 자리한 남성 정체성의 위치를 기호계(모체에서 비롯된 시적 언어)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자 했던 쥘리아 크리스테바(1941. 6. 24 ~)의 비판적 정신분석학의 입장 등이 있는데, 버틀러는 이 4가지 입장의 정체성 규정과 이론적 의의 및 한계를 제시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결론을 통해 페미니즘 이론 및 정치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첫째, 앞서 언급했던 보부아르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전도시키는 이리가레의 성차이론은 한편으로 서구문화의 관습적 재현체계 안에서 여성은 주체모델로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점에서 여성들은 보부아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항상 이미 남성적인 주체의 단순한 부정(타자)’으로는 이해될 수 없으며, 따라서 여성은 주체도 타자도 아닌, 이분법적 대립으로는 재현 및 환원될 수 없는 차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성=몸 對 남성=이성’을 은연중에 전제하는 보부아르 역시 지배적인 남성성, 남근로고스 중심주의 담론을 효과적으로 은폐하는 데 일조하는 것으로 비판된다. 둘째, 푸코가 보기에 본질적인 섹스의 문법은 이분법의 각 용어에 인위적인 내적 일관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양성 간의 인위적인 이분법 관계 또한 강요한다. 이처럼 섹슈얼리티를 이분법적 성범주로 규제하는 것은 이성애적․재생산적․법의학적 헤게모니를 파열시키는 섹슈얼리티의 전복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셋째, 보부아르의 연속선상에 있는 위티그가 보기에 성에 대한 이분법적 규제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을 수행한다. 그래서 그녀는 강제적 이성애주의의 전복이 자유로운 인간의 산출이라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열며, 에로스 경제의 확대가 섹스/젠더 그리고 정체성의 허상을 깨뜨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위티그는 여성들에게 보편적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섹스’의 허상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제3의 젠더를 세우자고 말하는데, 이는 결국 레즈비어니즘을 긍정하는 전략으로 소급된다. 넷째, 크리스테바는 라캉의 ‘아버지 법’이 모든 언어적 의미화 구조(즉 ‘상징계’)를 구성하는 보편원리로 기능하면서 모체에 대한 아동의 근본적 의존과 기원적 리비도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고 보았다. 결국 상징계는 모체와의 기원적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데, 이러한 억압의 결과로 나타나는 ‘주체’는 억압적 법을 전달하는 메신저나 옹호자가 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라캉의 서사에 도전하면서 기원적인 모성의 몸으로 생겨난 언어차원인 기호계가 상징계 안에서 영원히 전복의 원천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다원적 의미와 기호의 비종결성이 지배적인 시적언어를 통해 ‘상징계’ 질서를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입장들에 대한 버틀러의 분석 및 비판은 (지면의 한계상) 거칠지만 다음과 같은 간단한 도식의 형태로 정리될 수 있다.

 

이리가레 푸코 위티그 크리스테바
규범과 정체성 규정 ․ 남성로고스 중심주의

․ 남성적 성만이 존재하며 여성은 남성적 성과의 차이로서만 기능

․ 이성애 중심주의

․ (남자든 여자든) 성범주는 섹슈얼리티의(이성애)의 규제적 효과

․ 강제적 이성애

․ 남성은 보편적 인간으로 등록되며 따라서 여성만이 성범주로 표시(ex.여의사)

․ 언어적 의미화 구조(상징계)

․ 아버지 법으로서의 상징계와 다원적 의미가 억압되는 母體(및 시적언어)

의의 ․ 여성의 오인 혹은 재현불가 능성으로 인한 ‘하나이지 않은 성‘의 가능성

․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와주체와 타자의 변증법 비판

․ 주체 개념에 전제된 실체 형이상학 및 인간주의 비판

․ 정체성의 기원을 제도․담론․ 실천의 효과로 봄으로써 성범주(섹스)가 역사적으로 특정한 섹슈얼리티 양식을 통해 구성된다는 계보학적 접근의 가능성

․ 금기가 담론을 통한 효과로 작용하며 금기를 권력관계 속에서 읽어내면서도 금기의 생산성을 설정한다는 점

․ 성의 자연성이 허구적임을 폭로하며 섹스가 상상적

구성물이며, 젠더화된 범주로 산출된다는 점을 폭로

․ 섹스의 허구성을 근원적인 언어적 존재론(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부여된다는 것)을 통해 극복할 가능성

․ 라캉과 정신분석학의 근본적 전제로서의 상징계를 전복할 가능성 제공

․ 모성적 몸에 가해지는 아버지 법의 단성적 의미화 기제를 다원적 의미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

․ 강제적 이성애 체제가 우울증과 비체화를 요청하는 인식적 가능성의 개방

한계 ․ 남근로고스 중심주의 비판을 통해 적을 단일화하는 인식론적 제국주의 설정.

․ 하지만 ‘식민화’는 남성성으로부터만 비롯되지 않으며, 인종, 계급, 이성애중심주의와 교차하면서 작동.

․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대한 해석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동성애적 인식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

․ 바르뱅의 쾌락을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로 이해할 때 드러나는 이상적 해방관 및 그에 따른 섹스와 정체성의 낭만화

․ 모든 발화에서 흠없는 매끈한 정체성을 요구

․ 대안으로 설정되는 ‘전세계적 레즈비언화’가 지닌 도전적 제국주의의 위험성

․ 레즈비어니즘이 가진 이성애 질서와의 근본적 단절 따라서 이성애내에서의 재의미화 가능성이 차단됨.

․ 의미 이전과 이후의 설정

․ 기호계의 시적언어를 통해 전복하고자 하는 아버지 법의 상징적 의미화에 의존

․ 문화에 앞서는 모성을 설정함으로 인한 모체의 자연주의화

․ 모성본능의 목적론 설정

 

  • 주디스 버틀러 (上)편은 여기까지 입니다 –
  • (下)편도 기대해주세요 🙂

낸시 초도로우(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8. <모성의 재생산>, 낸시 초도로우 (下)

 

김상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아주 어린아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가눌 수도, 스스로 음식을 섭취할 수도, 심지어는 스스로 잠을 청할 수조차 없는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다. 즉 문자그대로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 이 시기 어린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이를 필요로 하지만, 자신과 환경, 그리고 자신과 자신을 돌보는 사람(주로 어머니)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머니 없이는 생존하지 못함에도, 아이는 자신과 분리된 존재인 어머니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잘’ 돌본다면, 어린아이는 자신이 전능하다고 느낀다. ‘잘’ 돌보는 어머니는 아이에게 극도로 헌신하며 아이의 생리적인 욕구와 정서적인 욕구를 재빠르게 알아채고, 섬세하게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이의 일차적인 관계는 가장 안정적이고 완벽하며 모든 사랑의 토대가 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처럼 어머니와 아이의 초기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와 같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면, 자녀 양육이 자신이 어렸을 때 경험한 완전하고 충만한 관계를 어머니가 되어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모든 어머니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완벽한 사랑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왜 어떤 어머니는 육아우울증에 걸리는 걸까? 초도로우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다루는 정신분석학적 설명을 강하게 비판한다.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성은 아이에게나 적용된다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에게 어머니는 관계와 사회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여성은 아이 외에도 다른 사람과 다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가정 밖의 사회에 또한 속해 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 없이는 아예 생존이 불가능한 어린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인 여성이 자신의 아이에 대해 느끼고 경험한다고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적 중요성이 상호적이지 않다는 점 외에도,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이 이 초기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기술하는 정신분석학은 문제적이다. 어째서 여성만이 양육하는 ‘어머니’가 되는지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돌봄을 받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면, 부모를 가졌던 모든 이들이 부모노릇을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주로 여성만이 아이를 돌보는 부모노릇을 한다. 남성 또한 틀림없이 자신을 돌본 부모를 가졌음에도 말이다.

초도로우는 여자아이만이 자라서 ‘어머니’가 되는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주목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남자아이와 정확하게 대칭적으로 해소한다. 그 결과로 여자아이는 여성으로서 젠더정체성과 남성을 향한 이성애 지향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이와 같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극복기는 초도로우가 지적하듯, 매우 비약적이며 단순한 설명이다.

 

  • 여성-어머니의 돌봄으로 인한 대상관계경험의 젠더화

 

대상관계이론은 인생 초기에 만나는 가장 가까운 타인과의 애착과 분리의 경험이 자아 내에 대상 이미지를 형성하며, 이렇게 자아에 내면화된 대상과의 관계가 훗날 타인과의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초도로우는 대상관계이론의 설명을 빌어, 어머니와 자신이 분리된 주체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시기에서부터 성인 여성으로 성장하고 ‘어머니’가 되기까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을 다시 쓴다.

초도로우에 따르면 고전적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내용과는 달리, 여자아이 또한 남자아이 못지 않게 어머니에게 집중적으로 애착하며, 그 관계에 등장한 아버지를 경쟁자로 본다. “양성의 아이들 모두에게 일차적 사랑과 동일시의 대상은 어머니이고 아버지들은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그 관계 구도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기 진입 이전, 즉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 아버지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오이디푸스기’에서부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은 다르게 진행된다. 프로이트는 이 차이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초도로우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이 다른 이유를 비대칭적인 부모노릇에서, 그리고 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매개되는 부모의 양육 태도, 감정과 무의식에서 찾는다.

모자관계와 모녀관계를 다룬 여러 임상자료들을 통해 초도로우는 어머니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다름을 지적한다. 기존의 정신분석학은 어린아이의 심리발달이 타고난 충동들에 의한 것이라 설명하지만, 아이의 심리발달에는 돌보는 이의 느낌과 무의식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초도로우가 다루는 임상자료들에 따르면, 어머니는 아들을 자신과 분리된 타인으로 경험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아들을 어머니 자신과 분리하도록 권한다. 반면에 어머니는 자신 또한 어머니의 딸이었기에 자신의 딸을 분리된 타인이라기보다는 자기자신의 확장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전오이디푸스적 경험은 남자아이가 명확한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여자아이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장려한다. 그리하여 이 대상관계적 경험은 남자아이는 독립적인 남성적 남성이 되도록, 여자아이는 관계적인 여성적 여성이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결국 어머니노릇은 아이를 양육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어머니노릇)의 재생산 능력을 포함한다. 이 재생산은 일차적 양육을 감당하는 특정한 심리적 능력과 태도를 지닌 여성과 그것이 없는 남성을 생산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 딸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전오이디푸스기를 거쳐 여자아이는 자신의 성애적 지향을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바꾸는 오이디푸스기에 진입한다. 하지만 앞서 강조했듯, 아버지는 어머니의 애착을 깨뜨릴 만큼 충분히 중요한 대상으로 봉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기를 거치는 와중에도 어머니에 대한 의존, 애착, 공생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새로운 관계의 대상으로 등장한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단순히 추가되는 오이디푸스적 애착일 뿐이다. 이에 따르면 여자아이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더라도, 이는 자신에게 페니스를 주지 않은 어머니가 미워서, 혹은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경쟁상대로 간주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는데,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여전히 특별히 중요한 대상으로 사랑하고, 다른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획득하고 싶지만, 어머니가 이미 이성애자임에 대해 좌절한다. 이에 반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얻지 못하는 성애적 사랑을 여자아이에게 제공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만한 페니스를 소유한 사람이다. 결국 이와 같은 심리과정을 거쳐 여자아이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아이의 오이디푸스기는 아버지와 딸의 문제인 만큼이나, 전오이디푸스기에서 연장된 어머니와 딸의 문제이기에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해결한 이후, 새로운 성적 자극이 등장하기까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섹슈얼리티는 특별히 문제되지 않는다. 이 시기를 정신분석학에서 ‘잠재기’라고 부르는데, 초도로우에 따르면 이 잠재기에 아이들은 가족 안의 삶과 더불어 학교나 또래집단 등 가족적 삶의 바깥에서 생활하면서 의식적으로 학습하고 역할을 훈련한다. 잠재기 이후, 보다 더 비가족적인 관계의 세계에 진입하는 청소년기의 여자아이는 또 다시 위기와 갈등에 직면한다. 남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잘 해결했기 때문에 가족 외부의 세계에 쉽게 진입한다. 반면에 이 시기 여자아이는 해소하지 못한 전오이디푸스기와 오이디푸스기의 갈등을 지속한다. 게다가 청소년기는 여자아이가 월경을 시작하고, 남성과 교제를 하는 등 여성이 되는 것의 모든 사회학적, 심리학적 문제들과 맞닥뜨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어머니는 딸의 발달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개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아이는 어머니-여성과 의식적으로 동일시하면서도, 동시에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양가감정을 갖는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거부의 양가성에서 동요하면서, 여자아이들은 어머니 대신에 사랑하고 동일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단짝을 찾거나, 남성을 향한 성애를 선택하면서 이성애적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게 된다.

 

  • 서로를 재/구성하는 가족관계와 경제관계

 

“우리는 노동의 성별분업을 성 불평등과 분리할 수 없다. 노동의 성별분업과 여성의 아이 돌보기 책임은 남성 지배와 연결되고 남성지배를 낳는다.”

 

초도로우는 딸이 ‘어머니’가 되는 가족 내의 구조가 가족 외에서 젠더가 사회적으로 조직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가 책 전반에서 강조했듯, 어머니가 아이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대상이 되는 까닭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족 부양을 위해 가정 밖에서 노동하기 때문에 가정에 부재한다.

뿐만 아니라, 전오이디푸스기, 오이디푸스기, 청소년기를 모두 거쳐 성인기에 진입한 남성과 여성은 남성을 남성으로, 여성을 여성으로 사회화시키는 노동시장의 가족 외 제도에 속하게 된다. 노동시장이라는 사회는 여성을 일차적으로 아내와 어머니로 규정하고, 여성의 일을 “정서적 일”로 정의하는 반면, 남성은 일차적으로 보편적인 직업적 용어로 규정한다. 이는 단지 서로 다른 정의를 할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성적 활동을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우월한 것으로, 그에 반해 여성적 활동은 열등하고 남성의 활동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노동 세계와 가족 내적 삶은 서로를 재/구성하면서 남성지배적 가족과 사회를 재/생산한다.

 

  • 대안을 상상하기 – ‘어머니노릇’에서 ‘부모돌봄’으로, 그리고 사회적 돌봄으로

 

가족 내에서 돌보는 어머니와 가족 외에서 역할을 다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돌보는 성향을 닮아 아이와 남편을 돌보는 ‘어머니’가 되는 딸과 아버지를 닮아 독립적이고 사회적인 성인이 되어가는 아들. 낸시 초도로우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같은 장면을 보았다. 같은 장면을 보았음에도 이에 대한 분석과 이를 통해 이끌어낸 통찰은 매우 다르다. 초도로우는 <모성의 재생산> 초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책은 여성주의적 노력의 하나이다. 그것은 어머니노릇을 사회적 조직과 젠더 재생산의 중심적인 구성요소로 보고, 어머니노릇의 재생산을 분석하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자신의 글이 어머니의 배타적인 자녀 양육에서 출발하는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각종 젠더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여성주의적 개입임을 강조한다. “왜 여성이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인가? 왜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는 여성인가?”라는 질문은 “여성-어머니라는 성별 분업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라는 그 다음 물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부모의 젠더와 성역할, 이성애적 섹슈얼리티의 결정론적, 목적론적 심리발달과정을 기술하는 정신분석적 체계들을, 여성주의적 관심과 더불어 아들과 딸을 가진 어머니를 상담하여 얻어낸 임상 사례들을 통해 반증한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자연화하고 낭만화한 어머니의 역할과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세대를 거쳐 재생산되는 구성된 것으로 역사화하고, 젠더 정체성 획득과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는 본능적 충동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임을 지적했다.

그러나 초도로우의 논의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전제하는 어머니, 아버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그가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어린시기에 결정적임을 전제하기에 문제적일 수 있다. 그리고 초도로우는 후에 여성을 관계적인 사람으로, 남성을 독립적인 사람으로 본질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신분석학이 치료를 위해 개발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5세 이전에 핵심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지만, 삶의 경험으로부터 변화될 수 있고 분석적 과정을 통해 바뀔 수 있음을 전제한다. 바로 이 점에서 초도로우는 자신의 개입점을 명확히 한다. 만약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가 어린아이와 일차적 관계를 맺는다면, 다시 말해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 양육에 헌신한다면, 그리고 양육에 있어서 아이의 젠더와 무관하게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답습하지 않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초도로우는 가족 외에도 아이가 사회화되는 여러 핵심적인 과정들을 다루면서, 그 과정들이 어린 시절 형성된 정신구조가 공고해지는 계기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정상’과 ‘비정상’적 젠더정체성과 섹슈얼리티를 나누고, 학습시키는 제도들 또한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러한 제도에 개입하고, 수정하는 것 또한 불평등한 젠더이데올로기를 종식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초도로우 자신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로 구성된 정신분석학적 가족 모델에 한정해서 연구를 진행했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이성애적 핵가족 모델 안에서 여성의 배타적인 ‘어머니노릇’에 대한 문제제기일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가족모델과 다른 형태의 양육이 가져다 줄 다른 형태의 젠더관계에 대한 상상이기도 하다.

 

  • 낸시 초도로우의 <모성의 재생산>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로 연재될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바랍니다. 🙂

낸시 초도로우(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7. <모성의 재생산>, 낸시 초도로우(上)

 

김상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부모parents’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구성된다. 아버지는 아이의 남성 부모parent를, 어머니는 여성 부모parent를 의미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잉태와 출산의 과정 이후에도 다르게 지속된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단어는 단지 부모의 성별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특정한 역할까지 규정한다는 것이다. 특히 “누군가가 어머니이다 라고 말할 때는 누군가가 아버지이다 라고 말할 때와는 다른 어떤 의미가 덧붙여진다.” 낸시 초도로우(1944. 1. 20 – )<모성의 재생산>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왜 어머니는 여성인가?, 부모노릇의 모든 활동들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 왜 남성이 아닌가?”

낸시 초도로우 뿐 아니라, 많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여성의 ‘돌봄’을 페미니즘의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다. 돌봄의 역할이 주로 여성에게 할당되며, 돌봄은 여성화된 활동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러 여성주의 윤리학자들은 자기 입법적인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도덕 주체를 가정하는 비관계적인 도덕 모델을 비판하고, ‘여성적’ 활동으로 간주되어 가치절하된 돌봄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도덕적 패러다임을 전환시키고자 했다. 돌봄을 포함한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노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성과 연결지어 분석하고자 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노력도 적지 않다. 초도로우는 이들과는 다르게, 어쩌면 조금 도전적인 관점으로 돌봄, 특히 어머니가 아이와의 관계에서 수행하는 돌봄에 접근한다. ”어머니 노릇”이 젠더를 재생산하는 핵심적인 장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돌봄에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거나 임금을 지급하는 등의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여성-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한 불평등한 젠더관계는 유지될 것이다.

 

  • ‘어머니’와 ‘어머니노릇’


어머니mother라는 단어는 어머니라 불리는 사람의 젠더, 섹슈얼리티, 가족구성, 가족 내 역할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어머니라면, 대개 이성애자 여성이고, 아이가 있을 것이며, 아이에게 어머니로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다양한 수준에서 “여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고 질문하는 이론이라면, 이 문제의식에 어머니가 빠질 수 없다.

초도로우는 젠더재생산의 핵심이 ‘어머니’라는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 ‘어머니노릇’이라고 보았다. 어머니를 어머니로 만들며, 여자아이를 잠재적으로 어머니와 같은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어머니노릇’이라는 것이다. <모성의 재생산>의 원제인 <reproduction of mothering>에서 ‘mothering’이 바로 이 ‘어머니노릇’이다. 초도로우가 문제삼는 ‘어머니노릇’은 특히 어린 아이가 자신이 독립된 인간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일 때 어머니가 아이에게 제공하는 돌봄이다. 어머니노릇의 구체적인 활동은 아이와 접촉하며 애착을 형성하는 것에서부터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아이의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까지 다양하다. 초도로우는 이러한 어머니노릇으로 인해 여성의 삶, 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 남성성, 젠더 불평등, 그리고 특수한 형태의 노동 권력들이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 이론적 배경 –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


초도로우는 “어린 아이가 생의 초기에 경험한 어머니와의 관계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을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다.

정신분석학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 5. 6 – 1939. 9. 23)는 인간의 정신과 행동이 전적으로 의식적이지 않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인간의 정신적 삶은 의식적 사유뿐만 아니라, 무의식적 정신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목적과 동기를 의식적으로 파악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의식적 사고를 ‘말하기’ 그리고, 무의식적 정신을 ‘꿈’과 연결짓는 것처럼, 정신분석학 안에서 의식은 사회적 활동으로, 무의식은 의식화, 언어화할 수 없는 개인적 정서로 이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생물학적 유기체에 다름 아닌 상태, 즉 사회화된 의식적 주체가 되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에서 성적 욕망의 억압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모라는 대상에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화된 의식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상세히 다룬다. 이 때 사회화/의식화 과정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결과는 젠더화된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정상적’ 사회화 과정을 거친 아이는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를 지향하는 남성적 남아가 되거나 여성적 여아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 발달은 유아의 타고난 성기적 본능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초도로우는 프로이트가 인간 무의식의 영역을 발견하고, 인간의 정신발달이 가족 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밝혀낸 공헌을 인정한다. 또한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생애 초기에 조직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도 어느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초도로우는 인간의 타고난 충동들이 자연적으로 행동과 발달을 결정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간의 타고난 충동들은 오히려 관계를 획득하고 보유하는 과정에서 조작되고 변형된다는 대상관계이론을 따른다.

대상관계이론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발전된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이다. 대상관계이론의 핵심은 초기 어린 아이의 관계적 경험이 심리적 성장과 성격 형성에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대상관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자신이 다른 인간과 맺는 관계성이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물론 프로이트 또한 정신적 삶의 모든 요소는 관계적 경험의 영향을 받는다고 언급한 바 있지만, 대상관계이론은 프로이트가 본능이라 가정하는 것도 양식화되고 구성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초도로우는 “부모노릇을 통해 전달된 사회구조, 특히 젠더구조가 어린 아이의 내면에서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서 승인되고 변형되며, 아이의 정서적 삶을 발달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대상관계이론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간 대상관계이론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젠더에 따른 대상관계적 경험들의 차이와 이로 인한 심리발달의 차이에 주목한다.

 

  •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을 다시 쓰다

 

정신분석학의 주인공은 사실상 아들과 아버지이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주인공이 ‘오이디푸스’라는 그리스 비극의 남성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정신분석학은 어린 아이였던 남자아이가 사회적 주체로서 남자어른이 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아이의 발달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설명에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상징하는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아이가 극복하고 버려야할 ‘의존성’으로 간주된다.

앞서 말했듯, 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은 젠더화된 주체가 되는 과정이며, 이는 자신과 같은 젠더인 부모와 동일시하고, 젠더가 반대인 부모에 대한 사랑에서 확장된 이성애를 발달시키는 과정이다. 프로이트는 이 과정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에 진입하기 이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정체성이 특정되지 않은 상태이며 모두 어머니와 애착을 형성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을 거치면서 남자아이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만,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미워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페니스는 매우 중요한 매개물이다. 남자아이의 경우, 어머니와 형성하고 있는 애착관계에 아버지라는 인물이 중요하게 개입한다. 아버지의 등장으로 남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지속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페니스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고, 점차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 이 권위를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면에 여자 아이는 자신이 페니스를 결여하고 있다는 열등감을 갖는다. 그리고 자신을 이러한 상태로 낳아준 어머니를 미워하고, 그리하여 여자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바꾼다.

일반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핵가족 모델에서 아버지는 가정 외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어머니는 가정 내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한다. 프로이트가 저술하던 당대에는 이같은 젠더분업이 더 뚜렷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어째서 대체로 가정 외부인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던 아버지가 어린아이의 심리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가정하는 것일까? 그리고 페니스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남자아이의 심리발달모델을 여자아이에게 대칭적으로 적용하려는 무리한 시도로, 프로이트는 여자아이의 젠더정체성 발달을 비약적이고 단순하게 마무리한다. 이와 같은 비판과 더불어 초도로우는 어린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을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다시 쓰면서, 정신분석학이 상대적으로 덜 주목한 오이디푸스기 이전 과정, 즉 전오이디푸스기를 재이론화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下)편에서 계속-

마사 누스바움(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6.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下)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숨기고만 싶은 치부

 

인간은 누구나 취약하고 부족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걸 인정하는 것은 곧 자신이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한 사람이라는걸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봐 꼭꼭 숨기고 덕지덕지 봉합한다. 잡힐까 두려워 머리만 풀숲에 쳐박는 꿩처럼 그렇게 위장하고 은폐한다.

혹시라도 남들 앞에 자신의 이런 치부가 발각되거나 드러나기라도 하게 된다면, 많은 경우엔 강렬한 수치심이 동반되게 마련이다. 이런 수치심은 자존감을 무너뜨리리게 되고 온전한 인격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과 인간 관계를 비롯한 삶의 전반에 위협을 초래하게 된다.

이처럼 수치심은 우리를 압도하면서도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5.6~)은 저서 『인간성으로부터 숨기: 혐오, 수치심, 그리고 법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국역: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 조계원 옮김, 민음사, 1995)에서 이러한 파괴적인 감정인 수치심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본 글에서는 먼저 수치심에 대한 누스바움의 설명을 살펴보고, 그리고는 수치심이 법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그리고 수치심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 편안한 자궁, 비극적인 출생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인 수치심은 개별 인간의 삶의 발달과정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수치심은 전지전능함과 완전함, 그리고 편안함을 바라는 유년기의 욕구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다. 유아는 점차 성장하면서 자신의 유한성, 부분성, 거듭된 무력감을 깨닫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과 동시에 과도한 욕심과 기대가 두드러지는 존재라는 깨달음 안에 있는 일정한 긴장을 해소하는 일시적인 방법이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유아기에서부터 형성되는 수치심을 ‘원초적 수치심’이라고 일컫는다. 이 원초적 수치심은 불가피하면서도 다소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그만큼 위험하며 삶의 어느 단계에서는 극복되어야 할 감정이다. 그런데 어떤 외적인 계기로 인해 원초적 수치심을 제어하거나 극복하지 못하고 강화된 채로 존속된다면, 자신과 타인에게 매우 위험한 감정이 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유아는 태아 상태에서 자궁 속에 있을 때는 불필요한 자극이 없고 자동적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편안함과 완벽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출생의 순간부터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엄마의 편안한 자궁과 달리, 세상은 유아에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갖 고통스러운 자극과 매정함으로 가득차 있고, 돌봄 제공자는 항상 원할 때 자동으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이런 풍경은 다양한 고전들 속에 그려지고 있다. 이를테면 출생을 거센 파도에 난파되어 낯선 땅위에 표류한 선원에 비유하는 루크레티우스의 시라던지, 노동할 필요도 없고 강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며 날씨는 따뜻하고 대지는 풍요로운 곡식들로 넘쳐나는 황금시대를 이야기하는 헤시오도스의 신화라던지, 인간이 둥근 모습을 하고 있고 힘이 엄청났으며 신과 겉이 강했다가 제우스의 저주를 받아서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 이야기는, 완벽한 세상인 자궁 안에 있다가 출생과 동시에 비극적인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유아의 모습을 은유한다.

유아는 예전처럼 세상이 완벽하게 자기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전지전능하지 않고 결핍되고 부족한 인간이라는 깨닫게 되면서 원초적 수치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원초적 수치심은 완전한 자아 이상을 바라는 나르시시즘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들키기 않고 감추기 위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숨어버리고자 하는 방어적인 감정이다. 이런 원초적 수치심은 유아기 이후에도 잠복되어 있게 되며, 이제 부끄럽다고 여겨지는 특성들, 즉 부족하거나 결핍되거나 완벽하지 못하거나 의존적이라는 특성들은 수치스러운 것들이 되어 억압의 대상이 되고 파괴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 수치심을 옹호하는 사람들

 

그런데 수치심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짓을 저질러 놓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사회가 무질서해지소 타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수치심은 좋은 감정이며, 심지어 사회가 법을 통해서 수치심을 주는 형벌을 권장할 필요마저도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공동체주의 사상가 아미타이 에치오니(Amitai Etzioni, 1929. 1. 4 ~)나 법학자 댄 케이헌(Dan Kahan)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케이헌은 노상방뇨를 한 사람에게 직접 길바닥을 솔로 북북 문지르게 한 처벌을 옹호하며, 성매매를 한 사람의 신상을 신문에 공개해야 하고 심지어 음주운전자거나 범죄자임을 알리는 표시를 자동차에 부착해야 하며 얼굴에 낙인찍는 형벌을 복원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수치심을 주는 처벌들은 범죄에 대한 강력한 억제 효과와 처벌 효과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혼모, 약물중독자, 범죄자 같은 일탈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런식의 수치심 주기는 사회 질서와 도덕적 가치 구현에 매우 유용하기 때문에 권장되어야 할 좋은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이유를 근거로 수치심 처벌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첫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모욕을 주기 때문에 인간 존엄성을 해친다. 둘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국가의 사법적인 절차가 아니라 인민재판이 된다. 셋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잘못된 대상을 처벌하거나 처벌의 정도를 명확히 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 넷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억제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대상을 소외시킴으로써 더 범죄로 몰아넣는 역효과를 지닌다. 다섯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시민들을 사회적 통제 아래에 둔다.

 

  • 낙인찍히는 존재들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회적 수치심 처벌은 주로 역사적으로 억압당해온 집단에 부과되어왔다. 예컨대 옆에 있기만 해도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낙인찍히거나 수치심을 부여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특성들을 상기시키는 사람들은 낙인과 배제의 대상이 되곤 한다. 주로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존재들, 예컨대 여성이나 동성애자, 범죄자 등이 그런 낙인과 수치심주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다.

누스바움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과 같은 스티그마나 여성의 치마에 대한 역사등의 고찰을 통해서,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집단들에게 수치심을 주어왔다고 들려준다. 예컨대 여성의 신체는 남성에게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에 성차별적인 사회는 여성들의 패션과 치마 길이를 통제해 왔으며, 범죄나 동성애자는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존재들이지만 겉으로는 그들의 그런 특성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표지를 얼굴에 문신으로 새겨넣음으로써 누구나 인식하게끔 자행되어왔다.

앞에서 원초적 수치심을 다룰 때 이야기됐던 것처럼, 주로 장애인이나 여성, 동성애자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비정상적이거나 약하고 불완전하다고, 즉 수치스러운 특성을 지녔다고 간주됨으로써, 원초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대상이 되어 투사되는 것이다. 그런 낙인을 부여함으로써 그들과 다른 나는 정상적이며 완벽하다고 위안을 삼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야한 옷을 입다니 천해보인다”, “니가 짧게 입고 돌아다니니 그런 일을 당하지”같은 ‘피해자 비난하기’victim blaming나 ‘창녀 수치심주기’slut shaming를 생각해보자. 여성의 몸을 드러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경박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나이든 여성이 예쁘게 꾸미는 것도 수치스럽고 주책맞은 일로 취급하기도 한다. 반면 남성들의 경우엔 감정을 드러내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약해보이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것, 여성스러운 것이므로 수치스러운 것이기에 억누르라는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누스바움은 이렇게 감정이나 친밀성을 억누르면서 수치스럽게 여기는 이런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솔직한 감정의 표현과 타인과의 감정 교류나 공감과 연민의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을 공산이 크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여성적인 것에 대한 비하의 맥락 안에 놓여 있기에 ‘여성혐오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여성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망, 여성이 자신의 통제 밖에 놓여 있는 독립적인 개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통제되지 않는 여성을 향해 분노와 적대를 표출하는 것이다.

 

  • 좋은 수치심도 있을까?

 

이처럼 수치심은 신뢰할 수 없고 매우 위험한 감정이며, 특히 그것이 사회적으로 억압당해온 집단에게 부여될 경우엔 더더욱 위험한 낙인이나 예속으로 기능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좋은 수치심도 있을까? 누스바움에 따르면 도덕적인 분개나 도덕적 반성에서 기인하는 수치심이나, 아니면 성취한 목표에 대한 열망의 독려 차원에서의 수치심의 경우엔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차별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수치심에 비해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이러한 수치심을 ‘건설적 수치심’ 또는 ‘생산적 수치심’으로 일컫는다. 예컨대 작가이자 활동가인 바버라 에렌라이히(Barbara Ehrenreich, 1941. 8. 26~)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한, 노동자들이 극심한 빈곤과 주거 및 고용 불안,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에 무관심한 탐욕스러운 미국 사회를 향해 수치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변한 것과 같은 수치심이 그런 종류의 건설적인 수치심일 수 있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수치심은 누군가를 낙인찍지 않기 때문에 괜찮은 수치심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런 도덕적 반성을 일깨우는 건설적 수치심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첫째,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규범에 호소해야 하며, 둘째, 나르시시즘(완벽한 자아 이상에 대한 사랑)적인 요소가 없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수치심은 자칫하면 비정상에 대한 낙인과 배제로 기능하기가 쉽기 때문에, 이런 수치심의 경우에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수치심과 혐오가 없는 사회

 

수치심을 주지 않는 사회를 만드려면 어찌해야 할까? 누스바움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취약한 비정상성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 1922. 6. 11~1982. 11. 19)의 사회학적인 논의를 끌어들여 인종, 장애, 계급, 지역, 학벌, 외모, 성별, 성적지향 등에서 모두 완벽한 ‘정상적인’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또한 타인의 보살핌을 필요로하고 서로 상호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무엇보다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노인이 되고 장애인이 되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자신의 이런 취약성과 불완전성을 숨기려하고, 이를 환기시키는 사람이나 집단에게는 수치심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낙인을 찍고 모욕을 준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인간의 취약함과 인간다움을 인정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보호해주는 사회다. 이 점에서 그녀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과 상호의존성, 그리고 다양한 다원성을 인정하는 존 롤즈(John Rawls, 1921. 2. 21~2002. 11. 24)식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옹호한다. 롤즈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는 공공복리 같은 목적을 이유로 수단화 되어서는 안되며, 우리는 서로 타인의 종교, 세계관, 생활방식과 같은 ‘포괄적 교설’(comprehensive doctrin)을 존중해줘야 한다.

누군가는 동성결혼이 도덕적이나 종교적으로 옳지 않으며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거나, 여성의 자유로운 옷차림이나 성적인 표현이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수치스럽고 정숙하지 못한 일이라고 통제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그런 포괄적 교설은 개인이 가질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회의 법과 제도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된다. 특정한 누군가의 세계관이나 종교가 정치나 법의 영역에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롤즈는 그런 모욕과 수치심은 자유주의가 보장하고자 하는 시민의 존엄성과 배치된다고 보았으며, 이를 중요한 문제로 보았기 때문에 ‘자존감의 사회적 기반’(social base of self-respect)가 정의로운 사회가 신경써야할 가장 중요한 기본적 사회재(primary social goods)라고 이야기했다.

롤즈의 이런 자유주의는 누스바움의 수치심에 대한 주장과 공명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타인을 그렇게 통제하고 싶어하는 그런 도덕관이나 세계관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열등함을 참지 못하는 원초적 수치심이 잘못된 사회적 편견에서 강화된 경우일 수 있다. 누스바움은 이처럼 법이나 제도에 수치심이 들어와서는 안되며, 그럴 경우 낙인에 취약한 사회적 약자들이 주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의 말처럼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존재이며, 타인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차이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상호존중과 존엄성을 구축하는 자유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다시 말해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Avishai Margalit, 1939. 3. 22~)의 주장처럼 모욕을 주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수치심과 혐오로부터 보호받는 사회를 만드는 길이지 않을까.

마사 누스바움(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5.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上)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페미니스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5.6~)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철학적 작업을 일구어온 철학자이다. 그녀의 관심사는 주로 고대 철학, 정치철학, 페미니즘, 윤리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연구한 주제의 일부만을 거론해봐도 장애인, 동물에 대한 윤리, 생명윤리, 시민 교육, 전지구적인 사회 정의에까지 걸쳐 있다. 특히 그녀는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고찰, 혐오나 수치심 같은 인간의 감정과 정동에 대한 연구, 그리고 여성철학에서는 여성의 자율성이나 성적 대상화나 성노동에 대한 연구 등으로 유명하다. 사실 이 모든 철학적 문제의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철학적 물음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중 하나인 『인간성으로부터 숨기: 혐오, 수치심, 그리고 법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국역: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 조계원 옮김, 민음사, 1995)에서는, 우리를 지극히 취약하게 만들면서도 압도적으로 휘감아버리는 대표적인 감정인, 혐오와 수치심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혐오는 페미니즘이 많은 관심을 두는 주제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6.24~)혐오(aversion)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고,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disgust)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이 글에서는 누스바움의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다룬 저서인 『혐오와 수치심』을 중심으로 그녀의 혐오에 대한 사유를 전달해보고자 한다. 먼저 감정(emotion) 일반에 대한 누스바움의 논의를 살펴본 후에,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 감정의 비밀

 

마사 누스바움은 먼저 두려움이나 분노, 혐오와 같은 감정들은,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욕구(appetite) 또는 우울함이나 짜증같은 기분(mood)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감정은 욕구나 기분과는 어떻게 다른걸까? 먼저 욕구는 내 의지와 다르게 불가항력적으로 찾아온다. 예를 들어 피곤함이나 배고픔 같은 욕구를 생각해보자. 이 욕구들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본능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러나 감정은 보다 섬세한 측면이 있다. 예컨대 남편의 가정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성은 고통이나 무력감 같은 기분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어떤 대상,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믿음과 평가를 동반한다.

먼저 감정은 대상(object)을 갖는다. 북핵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 최순실과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연민을 생각해보자. 이 모든 감정들은 각각 구체적인 명확한 대상들을 가지고 있다. 불법촬영물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불법촬영물이라는 대상을 가지고 있으며, 성범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는 성범죄라는 대상을 향한다. 철학자들은 이런 대상을 갖는 감정의 특성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은 마음 바깥의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상 없이 발생하는 우울함 같은 기분과 달리, 연민이나 혐오 같은 감정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다.

감정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바로 믿음(belief)이 감정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져온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분노를 예시로 든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테네를 약탈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분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여성은, 남편이 자신을 죽이거나 상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이다. 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슬픔을 떠올려보자. 그 어머니 역시 아이가 사망했다는 믿음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믿음은 사실관계가 틀린 거짓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이가 사망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거나 착오에 의해 그런 말을 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틀린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슬픈 감정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믿음은 근거없는 부당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화성 외계인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화성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믿음은 분명 근거없는 믿음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칫솔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려움을 갖지는 않는다. 잃어버리면 사면 되기 때문이다. 치아 농양이라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역시 부당한 믿음이라고 누스바움은 설명한다. 이 질병은 조기에 발견되면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생소한 이 질병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누스바움에 따르면 감정에는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가 들어있다. 예컨대 친구나 가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생각해보면, 친구나 가족이라는 존재는 한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슬픔이 극심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우리는 먼 외국인의 사망 소식에는 그렇게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예컨대 중국에서 지진이 발생해서 사망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슬픔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동일한 감정도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모에 대해 많은 가치평가를 두고 있다면 외모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에 대한 분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특성, 즉 감정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도 감정이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 합리적인 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믿음’은 플라톤의 저서 『메논』이나 『테아이테토스』에서 보듯이, ‘앎’과 함께 전통적으로 중요한 철학적인 인식론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에는 거짓된 믿음이나 부당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역시 간파했던 사실이였다. 예컨대 페르시아인들을 향해 분노하는 아테네인들의 경우, 사실은 아테네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니라 스키타이인들이였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거짓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혹은 페르시아인들이 고의가 아닌 미비한 피해를 끼쳤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정당화되지 않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감정에 필수요소라는 누스바움의 논의는, 감정에 있어서 판단이나 이성의 중요성을 시사해준다. 아테네인들은 가짜뉴스를 듣고서 부당하게 페르시아인들에 대해 혐오나 분노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세네카 또한 식당에서 상석에 앉지 못했다고 화를 냈던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누스바움은 따라서 감정에 있어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교통체증에 대해 쉽게 화를 내는 사람, 혹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에게는 감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플라톤은 이미 유명한 영혼 삼분설에서, 영혼이 이성과 기개 또는 분노(thymos), 그리고 욕구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은 이를 각각 몸의 머리, 가슴, 배의 부분과 연결시킨다.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하는 욕구와 달리, 기개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욕구에 저항하도록 사용될 수 있다. 물론 기개가 욕구와 한편이 되어 이성을 따르지 않게 될 수 도 있다. 감정이 욕구와 다르며, 이성의 인도를 받기도 하고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고대철학에서도 사유되었던, 오래된 인류의 지혜인 것이다.

 

  • 혐오스러운 혐오

 

우리는 무엇을 혐오하는가? 누스바움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혐오하는 대상이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우리는 종이, 금잔화, 모래는 혐오하지 않지만, 신체 배설물과 부패한 음식은 혐오한다. 치즈는 냄새가 고약하다고 해서 혐오하지 않지만, 대변은 혐오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라는 속담처럼, 심지어 대변과 형태마저 유사한 된장은 혐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설탕은 혐오하지 않지만, 바퀴벌레에서 설탕맛이 난다 하더라도 혐오할 것이다.

앞에서 감정은 대상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서 떨어져나간 부산물들(예컨대 토사물이나 대소변)이거나, 인간의 불완전성과 동물성을 떠올리게 하는 물질들(동물이나 시체)이라는 것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대상들은 인간에게 불완전성과 유한성, 동물성을 환기시키면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은 두 가지 법칙, 즉 ‘접촉의 법칙’과 ‘유사성의 법칙’을 따른다. 먼저 접촉의 법칙이란, 혐오의 대상이 다른 대상과 접촉될 경우 다른 대상마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죽은 바퀴벌레가 떨어졌던 쥬스 잔의 경우, 우리는 그 쥬스 잔이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되었다 하더라도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염병이 있는 사람이 입었던 옷 역시, 살균 소독되어 전염병과 무관하게 세탁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피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사성의 법칙이 있다. 즉 원래의 혐오의 대상과 유사한 다른 대상 역시 혐오하게 되는 법칙이다. 예컨대 개똥 모양으로 만든 쵸콜렛의 경우, 왠지 꺼림칙하게 된다. 살균한 파리채로 휘저은 수프의 예시도 그렇다. 만일 파리채로 수프를 휘저었다면 그 수프 역시 마시기가 힘들 것이다. 새로 산 빗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 빗이 공장에서 막 나온 새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시기가 거북할 것이다. 이런 예시들은 혐오가 작동하는 법칙들을 잘 보여준다.

다음으로 누스바움은 혐오와 위험, 혐오와 비정상, 그리고 혐오와 분노를 구분한다. 예컨대 독버섯은 위험한 대상이지만, 우리는 독버섯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또한 돌고래는 바다에 사는 포유류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돌고래를 혐오하지는 않는다. 혐오의 대상들은 이것들과 달리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키는 존재들로, 나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초래하는 것들이다.

 

  • 혐오스럽다고 감옥에 보내야 할까?

 

누스바움은 다른 감정들과 달리 혐오는 특히 매우 불안정한 감정이기 때문에, 법이나 도덕의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따라서 혐오를 불신의 눈초리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혐오를 옹호하는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을 비판한다. 예컨대 생명윤리학자인 레온 카스(Leon Kass, 1939.2.12~)는 혐오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특정한 혐오감이 인류의 지혜를 드러내는 감정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명복제에 대한 직관적인 거부감 같은 것이 그것이며, 그런 혐오는 생명복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인류의 지혜의 지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편견에 기반한 감정이 되기 쉽기 때문에, 인종간 결혼이나 동성결혼법에 대한 혐오로 악용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과 박해에 이용되어왔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은 앞에서 다루었던 배설물이나 동물의 시체 같은 ‘원초적 혐오’와, 동성애자나 장애인에 대한 혐오 같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를 구별한다. 원초적 혐오는 위생과도 관련되어 있고 진화의 산물일 수 있기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며 인간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반면,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의 경우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같이 매우 위험한 혐오다. 특히 사회적인 혐오는 주로 해당 사회의 문화적 편견의 영향을 받으며, 주로 그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투사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초적 혐오가 사람에게 귀속되어 그 대상이 혐오하는 자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킨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고 혐오를 당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성애자 남성은 이성애 남성을 오염시킬 수 있는 전염성을 지닌 존재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기피당하며, 역사적으로 여성 역시 역사적으로 유약하고, 끈적거리며, 유동적이고, 냄새나는 존재로 취급당해 여성의 몸이 오염된 불결한 영역으로 상상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회적 혐오 혹은 혐오의 정치는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를 처벌했던 ‘소도미 법’(Sodomy Law)나 군대 내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금지했던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정책 등에도 반영되어 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공적인 영역인 법과 정치로 침투한 것이다. 누스바움은 존 롤즈(1921.2.21~2002.11.24)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따라, 공적인 영역에 사적인 감정이나 선입관이 진입해서는 안되며, 존 스튜어트 밀(1806.5.20~1873.5.8)을 따라 오로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행위들만 법적으로 처벌해야 하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나 알콜 중독, 약물 중독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지지한다. 해악 원칙이란 오로지 타인에게 해악을 낳은 행위만이 도덕적으로 그른 행위이며 법적으로도 제재할 수 있는 행위라는 원칙이다. 이러한 누스바움의 주장은 결국 ‘해악 원칙 대 불쾌 원칙이냐’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불쾌 원칙’(offense principle)이란 해악을 낳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벌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철학자 조엘 파인버그(Joel fineberg, 1926.10.19~2004.3.29)가 주장한 원칙이다. 누스바움은 혐오를 법이나 도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불쾌 원칙을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예컨대 지적 장애인이나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 혹은 혐오감을 줄 것이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은 어떤가? 보기만해도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보기에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이나 문신을 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도 되는 것일까? 뚱뚱해서 불쾌감을 주는 사람은, 특이한 헤어 스타일과 옷차림을 한 사람은 또 어떤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인권탄압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그런 적이 있었다. 부랑자들,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 장발을 한 청년들을 단속하고 적발한 역사가 있었다. 아직도 군형법에는 동성애 장병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존재한다.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많은 이들의 반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누스바움의 혐오에 대한 통찰을 따라 혐오는 많은 경우 사회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혐오는 잘못된 믿음에 기반한 이성적이지 않은 편견인 것이다.

베티 프리단(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4. <여성성의 신화>, 베티 프리단(下)

“두려움을 떨치고,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변화로 나서자 ”

 

김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프로이트와 마거릿 미드를 비판하다

 

“프로이트의 사상은 교육받은 현대 미국 여성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초자아를 만들었다. 바로 여성들로 하여금 과거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하고, 여성의 선택과 성장을 방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게 하는 새로운 ‘당위성’의 폭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베티 프리단은 미디어의 영향력을 짚으며, 대부분 남자로 이루어진 여성 잡지 편집자가 행복한 가정주부의 이미지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선전하고 전파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화 형성에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은 학계의 이론이었다. 프리단은 특히 대학교육의 교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두 명의 사상가를 겨누어 비판한다. 그 두 사상가는 지크문트 프로이드와 마거릿 미드이다.

페미니즘 운동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까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고, 과학 교육 민주주의 정신에 의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편견의 이론적 근거를 프로이트주의로 삼기 시작한다. 프로이트 심리학은 여성 해방 운동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이고, 해방된 여성의 관념에 기여했기에, 여성들은 오래된 굴레를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몬느 드 보부아르(1908. 01. 09 – 1986. 04. 14)도 지적하듯이, 프로이트의 이론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권위를 부여하여 여성의 본능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성의 신화』에서 프로이트 이론의 시공간적 한계를 지적하며, 그 이론을 상대화할 것을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여성성의 본질에 남근 선망(penis envy)이라는 이름붙인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빅토리아 시대의 빈이라는 지역에서 계급적으로는 중상층 여성 환자를 남성의 시선에서 관찰한 산물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은 실제로 그가 왜 그런 식으로 그 시대의 여성을 진단했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무비판적으로 프로이트가 설명한 여성성을 마치, 초시공간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프로이트가 보편적인 인간성의 특질로 묘사했던 것은 19세기말 어느 유럽 중산층 남자와 여자의 특성”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프로이트 이론의 주요한 전제가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안나 프로이트에 따르면, 프로이트가 자라난 가정 환경에서 그의 어머니는 아름다웠고 자기 나이보다 두 배나 많은 남자와 결혼하여 평생 복종하며 살았다. 프로이트의 아버지는 유대 집안의 독재적 권위로 집안을 다스린다.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이러한 환경에서 첫 아들 지크문트를 특별히 사랑한다. 프로이트 역시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를 질투했던 경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부른다. 프로이트 자신이 어머니의 태양이기에, 프로이트의 욕망에 따라 집안은 배치된다. 누이의 피아노 연습 소리가 연구 방해된다고 투덜거린 후, 피아노가 치워지고 음악가의 꿈을 소망한 누이의 기회는 사라진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상황을 여성의 입장으로 보지 않고, 남자의 지배를 받는 것을 여성의 본성으로 여긴다. 프로이트의 부인인 마르타 역시, 그의 소망대로 사랑스런 어린아이와 같이 자랐고, 그러기에 프로이트가 결혼한다. 그는 배우자의 미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젊고 귀여운 애인, 언제가지나 늙지 않고 한주 정도만 늙은 것 같아야 하며, 모든 신랄함의 흔적을 재빨리 지울 수 있는 여성”이어야 한다. 결국 프로이트의 이론은 소년의 눈으로 시작되어 결국엔 남자의 눈으로만 설명되는 것이다.

프리단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미국에서 프로이트 이론의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까닭에 관해, 현실에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쉬운 해결책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실상 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로이트 심리학은 인간의 이상행동에 대한 분석의 틀 그리고 전쟁의 상흔이 빚어낸 고통에 대한 치유로 제시되고, 문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전한 도피 통로이자, 미국의 새로운 종교가 된다. 이에 따라 여성성의 신화는 “이른바 전문가들의 판단이나 대중잡지를 통해 미국 여성의 생활”에 파고든다. 과학적 종교인 프로이트의 이론은 여성의 역할에 관한 이론의 근거로 자리 잡고 ‘여성성의 신화’를 공고히 하면서, 여성을 그 스스로는 미래를 개척할 수 없는 가부장제에게 보호받아야 할 유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단정한다.

프리단은 마거릿 미드 역시 문화 인류학을 프로이트 이론의 틀에 끼워 맞추어 연구했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마거릿 미드는 “왜 우리는 기술이 발달했는데도 미국의 여성들은 석기 시대로 후퇴하는가”라는 의문을 품는 글을 신문에 실지만, 본인의 저작이 그러한 풍토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미드는 인류학 연구의 성과를 통해 프로이트 이론을 보편인류의 특성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일조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기원을 성립시킨다. 생산성의 측면을 남성적인 것, 자궁을 수동적 수용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즉, 미드는 현대의 상태나 과거 상태를 당위적 상태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프리단은 미드의 이론을 비판하며, 아기를 갖는 것이 인간성의 성취의 절정이고, 생식이 인간 생활의 중요하고 유일한 것이라면, 왜 자궁 숭배가 없는지 되묻는다.

프로이트의 여성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마거릿 미드의 관점을 잘못 받아들인 결과, 50-60년대 미국 여성의 이미지는 한정적인 협소한 틀거리 안에 갇히고 말았다. 교육자들은 이러한 이미지가 ‘정상적인 여성상’이라고 말하며 여학생들 에게 천체를 관찰하거나 새로운 과학 기술을 개발하라고 격려하는 대신에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도록 교육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고 다양한 삶의 기회를 스스로 제한하는 결과를 맞는다.

 

  • 가정이라는 이름의 안락한 포로수용소

 

결국 이러한 신화는 미디어가 아름답게 포장하는 안락한 미국 중산층 가정이라는 이상적 이미지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프리단은 이 가정을 안락한 포로수용소라고 주장한다. 가정을 포로 수용소로 설명하는 이유는 실제로 포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과 가정 주부가 유사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단은 “정신 분석자이자 교육심리학자인 브루노 베텔하임이 1939년 다하우 집단수용소와 부겐발트 집단 수용소에서 죄수로 수감되어 있을 때 했던 연구”를 언급한다.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수감자는 수용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죽음에도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포로 수용소는 수감자들을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하고 개성을 포기하도록 하면서 특성이 없는 존재로만 살아가도록 강요한다. 수용소는 수감자에게 수용소 세계만을 유일한 현실로 만들고 원초적인 육체적 욕구만을 충족시키도록 한다. 이로 인해, 수감자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잊어버린다. 이 조건은 미국 주부들에게 자아 정체성 상실시키는 조건과 비슷하다.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주부들도 새로운 상황에 대항하는 능력이 사라지면서, 수동적인 존재로만 머물면서 주체적 의식을 갖지 않는다. 이는 약한 자아만을 유지한 채 관계성에서 단절된 이기심에 곧장 빠질 뿐 아니라, 적극적인 목적이나 야망, 이익을 잊어버리고 추상적인 사고에 대한 무력하며, 바깥세상을 향한 활동에서 후퇴한다.

또한, 베티 프리단은 50-60년대 아이들의 정서장애가 증가하는 현상과 가정이란 포로수용소에 갇힌 주부들의 상관관계를 지적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어린이 가 여성성의 신화에 의해 무기력해진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상호파괴적인 공생으로 나아가고, 이는 다시 여성성의 신화를 통해 악순환으로 구축된다. 특히 소녀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소녀들은 학교와 현실에서 치루는 시험을 기피하고, 결혼하면 결국엔 진정한 목적과 만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에 순응하면서 이른 나이에 결혼하도록 선동하는 사회에 따른다. 소녀들은 어린애 수준에 멈춘 채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이러한 어머니에게 자라난 아이 역시 개성을 갖춘 존재로 자라기 보다는 환상 속으로 머물 뿐 아니라, 그 딸 역시 또 다시 최악의 희생자가 된다. 프리단은 다음과 같은 예시를 제시한다. 남들 보기에 번듯하고 부유한 삶을 살며 남편이 대기업의 높은 직위에 있는 가정 주부는 딸을 자신에게 수동적으로 의존하게 하고 자기와 동일시하게 만든다. 남편은 바쁘다는 명목하에 사회적 지위와 자신의 직업적 성취에 몰두할 뿐이다. 그럴수록 가정주부는 아이들의 삶에 집착하고, 특히 이 주부에게 딸은 일종의 사물, 즉 또 다른 자아 의탁의 대상에 불과하다.

“가장 나쁜 것은 제가 제 배로 낳은 아이들을 질투한다는 것입니다. 전 아이들을 미워합니다. 아이들에겐 앞으로 자기들의 삶이 있지만, 전 이미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프리단은 이렇게 수동적인 의존에 갇힌 주부와 아이들 사이에 통제할 수 없는 폭력이 증가하는 징조를 목격한다. 해결책은 어머니들에게 아이들을 더 사랑하라고 촉구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여성들로 하여금 가정과 아이들에게 완전히 헌신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여성성의 신화의 역설을 직시하게 해야 한다. 또 한 여성들이 더 여성적이 되도록 촉구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이는 아이들과의 관계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 아이를 더 수동적으로 성장시키는 의존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여성이 자기 능력을 완전히 사용하도록 사회는 용인해야 하며, 여성이 완전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이는 오로지 여성성의 신화를 일소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프리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성은 남성의 성적인 존재이자, 자식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할 수 없다. 남편이나 아들을 통해 삶의 목적을 이루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성취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이 필요하다. 이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풍기는 병적 징후로부터 벗어나는 첫 걸음이 된다.

 

  • 주입된 여성성에서 벗어나, 2세대 페미니즘의 포문을 열다

 

프리단이 『여성성의 신화』에서 전달한 메시지는 여성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1966년 폴리 머레이, 케이틀린 클라렌바흐, 도로시 헤너 등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30명의 여성들이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를 설립한다. 창립 멤버중 한 명인 프리단은 NOW의 창립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 창립 선언문은 “모든 여성을 위한 진정한 평등”을 요청하고, “평등하고도 경제적인 성장”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프리단은 미국 최대의 여성운동 단체인 전미여성기구(NOW)를 비롯, 전미낙태권행동리그(NARA), 전미여성정치회의(NWP)의 창립자가 되어, 낙태, 출산 휴가권, 승진과 보수에서의 남녀평등을 위한 운동을 펼친다. 『여성성의 신화』의 저 자에서 더 나아가 페미니즘 운동가로서 베티 프리단은 우뚝 서면서, 직장에서의 성차별 폐지와 임신중단권 운동,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운동, 여성의 권리 향상 운동 등을 펼친다.

베티 프리단 덕분에 정치인들이 여성의 불만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1963년 여성의 상태를 검토하기 위하여 임명된 위원회는 불평등의 종식을 건의한다. 이에 대한 입법이 뒤따랐으며, 1963년에 디 이퀄 페이 액트 오브 1963(The Equal Pay Act of 1963, 1963년 임금 평등법)은 여성은 동일 노동에 대해서 남성과 같은 임금을 받는다고 명시한다. 프리단의 문제제기는 성평등적 교육 확대와 직장 내 법 ·제도 개선으로까지 이어져 여성의 사회진출을 늘이는 데 이바지한다.

NOW의 전 의장이기도 한 킴 간디는 프리단의 책에 관해, “삶의 실질적인 다른 무언가를 꿈꾸던 여성의 사고를 열어주었으며, 그런 생각들을 비밀스럽게 숨기고 살아온 여성들에게 자신 외의 다른 여성들도 더 나은 삶을 꿈꾼다는 것을 알려주었다”고 평가한다.

제2물결 페미니즘의 파도의 제일 높은 마루에 있는 나우는 미국 여성운동의 역사와 함께 한다. 나우의 활동가인 테리 오닐은 미즈와의 인터뷰에서 “나우는 항상 다양한 중요한 이슈의 현장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면서 “페미니즘이 미국의 규범(norm)이 되도록 돕는 역할”이라고 말한다. 나우는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이 헌법에 의해 낙태를 처음 인정했던 1973년 ‘로우 대 웨이드’와 ‘도우 대 볼튼’ 소송 현장뿐만 아니라, 1975년 신용기회균등법, 1978년의 강간피해자보호법과 임신차별금지법 등 중요한 양성평등 헌법수정안(ERA)의 법안 통과의 자리에 함께 한다. 1986년부터는 여성의 재생산권 확보를 위한 운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다른 여성단체들과 연합하여 매년 3월 미 전역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3월 여성 인권을 위한 행진’을 조직한다.

또한 나우는 1971년엔 성소수자(LGBT) 지원을 공식 발표하며 성소수자 인권 투쟁을 공식 선언한 첫 단체이기도 하다. 나우는 여성운동을 위한 전국 조직 결성을 최초로 시도한다. 중앙 조직이 지침을 결정하고 각 지역 지부들이 나우를 지원한다. 이러한 방식은 자연스럽게 전국으로 여성운동이 확산되도록 하는 것이다. “지역의 활동(actions)이 운동(movements)을 만든다”고 설명할 수 있는 이 방식의 성과로, 오늘날 나우는 50개 주 전역에 500개 이상의 지역 및 대학 지부를 두고 있다.

 

  • 여성성의 신화의 성과와 그 이후

 

“역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앨빈 토플러

“이 책은 1963년 현대 여성운동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사 회조직을 영구히 바꿔버렸다” -뉴욕 타임즈, 베티 프리단 부고 기사 중-

사회가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여성들을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만들고 억압하는지 밝혀낸 『여성성의 신화』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논픽션 책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여성 운동의 선구자였지만 프리단에게도 일정 한계가 존재한다. 프리단은 『미즈』(MS)를 창립한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끄나풀이며 미모를 무기로 여성운동을 독식하는 스타 페미니스트’라 공격할 뿐 아니라,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급진적인 여성 운동가 수잔 브라운 밀러는 그를 ‘가망 없는 부르주아’로 비판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이론과 행동은 가정과 직장일을 모두 완벽하게 해내는 ‘수퍼우먼’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적이다. 인종, 성적 지향성, 계급 등의 여성 내부의 차이를 무시하고 프리단 자신과 유사한 여성들의 문제에만 착목한다는 점에서 ‘중산층 백인여성 중심’의 페미니즘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는 1981년 저서인 『두 번째 단계』에서 『여성성의 신화』가 가정과 가족에 대해 너무 신랄한 분석을 했다는 비판을 수용하기도 한다. 그는 이 저서에서 “우리의 실패는 가정에 대한 우리의 간과에 있다”고 서술하여 자신의 첫 번째 저서의 주장을 뒤집기도 한다. 더 나이가 든 뒤에는 건강과 젊음에 몰두하면서 페미니즘을 등진 채 노인 문제를 다룬 책 『노년의 샘』(1993)을 쓰면서 죽음에 대한 혐오, 젊게 사는 비법을 전파하기도 하면서 논쟁에 휩싸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는 출간 이후 다양한 논의 를 끌어냈을 뿐 아니라, 그 영향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국어판 해제를 쓴 여성학연구자 정희진은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성성의 신화』는 지구상 ‘모든’ 여성들이 교육, 법, 고용, 경제적 지위 등 공적 영역에서 평등을 획득하는 ‘그날’까지 유효하다. … 이 시대 여성들의 근본적 고민은 여전히 남성과의 불평등 때문이다. 단지 ‘선택’이 다양해졌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를 출발선에 다시 세운다.”

프리단의 이후 행적과 상관 없이 『여성성의 신화』는 이름 붙일 수 없던 여성들의 문제를 해명하고,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변하지 않는다.

 

  • 2회에 걸쳐 연재된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는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로는 마사 누스바움의 책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

베티 프리단(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3. <여성성의 신화>, 베티 프리단(上)

“가부장제가 만든 신화의 허울을 벗겨내다.”

 

김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당신이 돌아보고 얼마나 먼지, 또 당신이 얼마나 왔는지 알게 되기 전까지는 얼마나 멀리 가야할지 알 수 없는 법이다…지금 수백, 수천 명의 여성들이 그러는 것처럼, 1963년에 어느 여성이 이 책이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말하며 처음으로 『여성성의 신화』에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나는 이렇게 적어줬다. “새로운 길 위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이 길에서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의 전 생애를 변화시켰고, 분명 내 생애도 변화시켰다. ”

 

  • 1942년 스미스 대학 입학생과 모나리자 스마일

 

1950년대 미국 동부의 웨슬리 대학을 배경으로 한, ‘모나리자 스마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줄리아 로버츠가 호연을 한, 영화의 주인공 캐서린 왓슨은 미술사 교수로 새로 부임해온다. 하지만, 왓슨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미래가 열린, 학생들의 인생 목표가 결혼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결혼 이외의 다른 삶의 가능성을 그들에게 제시하려 한다.

당시의 대학은 ‘결혼이 최고의 학생을 만든다’라는 표어를 걸고, 여학생을 완벽한 주부로 가는 길로 이끄는 예비 결혼 학교의 기능을 자처했다. 이 교육을 거치면서, 여성은 가정과 직업 중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자신의 미덕이자 의무라고 여기었다. 영화에서 왓슨은 학생들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잠재력을 일깨우고, 이러한 노력은 영화 결론부에 결혼 외에 다른 가능성을 긍정하는 학생들로 결실을 얻는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학생 중 하나는 법대로 진학하는 대신 결혼을 선택하며 말한다. “당신이 믿는 삶을 나까지 원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아요. 내가 원하는 삶은 결혼이에요. 원하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 건 당신이 아니었나요?” 결혼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라고 되받아치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1921. 2. 4. – 2006. 2. 4.)『여성성의 신화』는 시작된다. 바로 영화속 학생과 마찬가지로, 베티 프리단을 비롯한 많은 미국의 여학생들은 졸업 후 결혼을 선택했다. 그 역시 잘 재단된 드레스를 입은,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재원이었다. 멋진 남편의 배우자이자, 귀여운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며, 완벽한 가족의 꿈을 그렸다. 하지만 십여 년이 흐른 뒤, 프리단은 『여성성의 신화』를 통해서 영화 속 결혼을 선택한 그 여성으로 대변되는 많은 여성들의 인생 설계가 정말로 자유로운 선택인 것인가? 그리고 지금 행복할까? 라고 반문한다.

베티 프리단은 1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여성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쓰고 난 후 일생은 달라졌다. 프리단이 말한 것처럼 “내가 이 책을 썼다는 것 자체가 참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내 생애 전체가 이 책을 쓰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 식탁 위에서 글을 쓰다

 

베티 프리단은 일리노이주 피어리어에서 신문기자를 하다 전업주부가 된 어머니 미리엄과 보석상인 아버지 해리 골드스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학년 올 A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스미스 대학을 우등 졸업한, 프리단은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한다. 대학원 졸업 후 그는 심리학과에서 특별연구원 지위를 제안 받았으나 거절하고, 뉴욕에서 노동 전문 기자로 활동한다. 프리단 역시 경력단절의 아픔을 겪었다.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해고되고, 그 후 여러 잡지에 프리랜서로 글을 기고하지만, 전업 주부가 된 것이다. 프리단은 1957년, 그의 일생을 바꾼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의 삶을 살았다. 모교인 스미스 대학의 15주년 기념 동창회 사업의 일환으로 졸업생 동문 조사를 요청받은 것이다. 프리단은 대학 동창을 대상으로, 졸업 후 변화한 그들 삶에 대한 심층 면접 작업에 착수한다.

면접을 진행하던 당시, 프리단 역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자신의 열의 없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프리단은 심층 면접을 통해서 남성과 마찬가지로, 공적 영역에 참가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으나, 소위 ‘미국 정상 여성’의 이미지와 맞추기 위해, 가정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여성들, 가정과 사회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을 포착한다. 프리단은 그들 중 다수가 주부로서의 생활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은 프리단으로 하여금 다음 질문으로 나아가게 한다. “교육을 받았지만, 왜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가. 남편의 아내나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왜 여성들이 갖는가.”

프리단은 전업 주부의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위에 대한 답을 얻고자 근 5년간 독학으로 도서관을 찾아가 자료를 찾고 여성성의 신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프리단은 스미스대학 동창생들의 설문조사를 시작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기혼 여성들을 심도 깊게 인터뷰하고, 각종 매체의 기사와 광고, 전업주부 결혼생활을 추적하면서 방대한 양의 취재와 자료 조사를 실시한다. 또한, 잡지와 광고에 대한 이론과 심리학 저서들을 분석하면서, 사회가 여성들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 밝혀낸다.

이 때 그는 사회가 제시한 여성성에는 아내, 어머니로서 여성적 경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여성성은 여성들이 가정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다시 말해, 여성은 정치, 예술, 과학, 크고 작은 사건, 전쟁과 평화 등 어느 것에도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성은 남성만이 주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소위 여성성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면서, 프리단은 자신이 여성성의 신화에 사로 잡혀, 거짓된 삶을 살아왔음을 자각한다.

여성성을 분석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롱하고 비난했지만, 프리단은 무시하고, 집안일을 하지 않을 때 외에는 항상 글을 썼다. 식탁 위에서 글을 썼고, 거실 소파에서도 글을 썼다. 아이들을 돌보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글쓰기를 잠시 멈출 때에도 머리 속에서 이어 쓴 후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마치고, 재운 후에 작업을 계속했다.

이제는 여성학의 고전이 된 『여성성의 신화』는 원래 책의 형태가 아니라 르포 형식의 기사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어떤 잡지도 프리단의 기사를 게재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노이로제 있는 주부들에 대한 특수한 이야기로 치부할 뿐,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삼는 잡지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다. 여성 잡지 조차, 자신의 세계의 근간인 여성성의 신화를 위협하는 프리단의 글을 거절했다. 하지만, 『여성성의 신화』이 출간되자, 여러 가지 우려와 달리, 초판 발행 3000부가 순식간에 매진되었을 뿐 아니라, 260만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판매 지수는 갱신되었고, 프리단은 스테디셀러 작가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우선, 『여성성의 신화』는 당시 미국에 결혼한 여성의 40%가 10대였던 1960년대 미국 여성상에 대한 최초의 실증적인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또한, 방대한 연구는 여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최초로 명백하게 드러냈다. 게다가 이 책은 ‘여성성’이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여성에게 부과되는지 그 과정에 대해 충실히 설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당시로는 급진적인 주장을 감히 선언한다. “남편과 아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책은 행복한 현모양처란 없고, 여성은 남편과 육아에서 벗어나 사회적 활동에 뛰어들어 실질적 성평등과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강하게 말한다. 책의 울림은 컸고, 수많은 여성들의 삶과 의식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제2세대 페미니즘 운동의 위대한 서막을 알렸다.

 

  • 여성성의 신화: ‘더 없이 행복한 주부는 왜 그리 불행한가?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 도입부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등장한다. “왜 교외의 크고 멋진 저택에서 네댓 명의 아이를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며, 세간의 인식대로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야 할 주부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왜 더 없이 행복한 주부는 그토록 많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순간 이기적이라고 자신을 여기는가? 왜 여성은 자신의 욕망을 죄악시하는가?

프리단이 주요하게 관심을 둔 중산층 백인 주부들은 소위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온통 공허감과 권태감이 있고, 주부들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겼다. 프리단은 당시 여성들이 가정주부로서 겪고 있던 내면적 갈등을 자세히 묘사한다. 교외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에서 살면서, 직장으로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고, 아이를 학교로 보내고 난 후, 모두 떠난 빈 집에서 홀로 앉아 “이게 정말 행복일까?”라고 회의한다. 마음의 상태와 눈에 보이는 현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주부들은 더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더더욱 힘든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이 아름다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불행은 아무에게나 발설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마음과 현실 사이의 갈등은 오랫동안 침묵의 영역에 머물렀을 뿐 아니라, 여성들을 더욱 더 고통스럽게 했다. 베티 프리단은 미국의 많은 여성들이 이 고통을 겪고 있음을 발견하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널리퍼진 여성들의 고통을 오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로 명명한다.

그렇다면,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성성이라는 허구적 신화 때문이다. 당시 미국에 만연해 있던 허구의 이미지, 즉 여성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면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통념일 뿐이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결혼했고, 그러한 여성성을 추구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사실상 어떤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프리단이 책 제목으로 쓴 ‘여성성의 신화’란 결국 말 그대로 실재로는 존재한 적 없는, 여성성과 무관한 그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신화를 지칭한다. 이러한 여성성의 신화는 각종 매체, 광고, 교육, 학자들이 작위적으로 만들어 낸 현대식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오직 남성 중심적인 학계와 매스미디어가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신화로 만들고 사회 전반에 통용 시켜 여성에게 주입한 것이다. 이 여성성은 그 능력과 상관없이, 여성을 재생산 기관으로만 간주하는 사회가 만들어 냈다.

신화의 힘은 강력하다. 여성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인생 여정 외의 다른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주부이자 어머니로서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배운 여성들은 학업을 이어가거나 직업을 가지는 일 없이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가정주부로 살았다. 이 신화의 강력한 위력 속에서, 주부들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집안일을 하고 자식과 남편을 뒷받침하는 삶을 살면서 동시에 괴로워했다. 또한, 맞벌이로 일하는 여성들은 자신이 일을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죄책감을 느겼다. 이 신화는 프리단의 시대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기에, ‘여성성’을 사회가 아무리 찬양한다 하더라도, 여성들은 그 ‘여성성’으로 인해 더 억압받고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린다. 프리단은 더 이상 그러한 여성성의 신화로 인해 여성들이 고통받을 필요가 없음을 강력하게 주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은 ‘내가 누구이며, 내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것을 죄라고 느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은 남편과 아이를 넘어서 자기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느낄 필요가 없다.”

 

  • 1950-1960년대 미국 여성들

 

그렇다면, 왜 당시 미국 여성들은 사회가 강요한 여성성의 신화를 의심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가? 밀이 여성의 종속을 쓸 당시만 해도, 미국 여성은 영국 여성의 지위에 비해 훨씬 진보한 여성의 권리를 획득했고, 참정권과 재산권 역시 다른 나라 여성들에 비해 먼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참정권 운동이 끝난 후, 오랜 기간 동안 미국여성운동은 구심점을 찾지 못한 채 표류했다. 여성문제를 제기할 중심을 상실한 미국 여성들은 더 이상 여성운동을 지속시켜 나가지 못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50년대 아이젠하워 시대의 미국은 데이비드 리스먼이 “고독한 군중”으로 칭한, 순응주의적인 미국 시민들의 사회였다. 이들은 사회에 복종하는 존재들로 자신을 자리 매김한다. 이 시기에, 미국은 ‘풍요한 사회(Affluent Society)’로 불렸고, 뉴딜 정책과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한 경제 성장과 소득의 재분배의 효과로 넓은 중산층이 양산이 된다, 이들 중산층은 동질화(homogenization)된 미국적 가치의 상징이기도 하다.

거대한 기업 조직과 관료 조직이 사회를 지배 하면서, 청년들은 순종적인 소시민을 소망하고, 안정된 직업, 전원 주택, 퇴직 계획과 같은 개인의 안전에 관련된 문제에 주로 관심을 가지는 ‘조용한 세대’가 된다. 이 조용한 세대는 다수의 생활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의 발달은 이 청년 세대의 욕망을 조직하는데 일조한다. 1960년 초 미국 사회에서 텔레비전 보급은 전체 가정의 90%에 이르게 되었고, 텔레비전이 영상으로 전달하는 메세지는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모든 계층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미디어의 영향이 본격화되면서,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망을 만들고, 소비자들의 기호를 조작한다. 이와 더불어, 교육의 대중화 역시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비할 수 있는 사회 적응의 수단을 제공하는 도구로 작동하는데, 그 과정에는 여남의 데이트 방법, 여남 고정적 젠더 역할, 정상 가족의 가치 같은 것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1950년대와 1960대 초 분위기에서, 미국 사회의 여성 위치는 이전의 여성 해방 운동 시기와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1930년대 미국은 경제 공황을 겪으면서 기혼 여성 취업을 금지하는 입법을 추진했지만, 동시에 전쟁시기에는 여성들의 노동력을 요구했다. 그 사이 많은 여성들은 경제 참여와 가정복귀의 악순환을 경험한다. 이에 따라 기혼여성이 가정 밖에서 일을 하는 것은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라는 인식이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로 자리잡았다. 전 후, 순응주의적 사회 분위기에서 중산층 여성들은 사회 안정의 보루인 가정을 꾸리는 존재로 제시되었으며, 대중문화는 참된 양육자인 가정의 어머니의 역할만을 여성에게 강조할 뿐이었다. (이창신 저(2004), 미국 여성사, (주) 살림출판사)

이러한 환경이 빚어낸 시대에 살아가는 여성은 자신의 임금은 남성보다 낮고, 임신과 출산을 할 경우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자기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한다. 여성은 “하루를 살아도 아름다운 여성으로 살겠어요”라고 말하는 광고를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들은 시달리고 있고, 결코 이렇게 사회가 선전하는 여성성 덕분에, 행복할 수는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에이드리언 리치(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2.  <피, 빵, 시>, 에이드리언 리치(下)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미국 산타 크루즈(Santa Cruz) 길가에 그려져 있는 에이드리언 리치 초상화)

 

  • 니카라과 혁명과 흑인 페미니즘

198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의 페미니즘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 이후 1980년대 내내 언론·종교·대중문화·정치 등의 영역에서 페미니즘 운동에 반발하는 백래시(backlash)에 시달렸고 낙태를 둘러싼 이슈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이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둘째, 냉전 체제 속에서 국제적인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타국에 대한 내정 간섭은 국제적인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미국 여성들과 남미 여성들의 국제적인 연대 또한 위태로워졌다. 특히 1979년 7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Frente Sandinista de Liberacion Nacional)은 혁명을 통해 니카라과의 소모사(Somoza) 독재정권을 타도했지만, 니카라과의 좌경화를 우려하며 남미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기를 원하였던 미국 정부는 니카라과 내 반혁명세력인 콘트라(Contra)를 지원하였으며 그 결과 1980년대 내내 니카라과는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에서 니카라과 여성들은 무장봉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독재정권뿐만이 아니라 가부장제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건설하는 기획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반혁명세력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들 간의 국제적인 연대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였으나 80년대 페미니즘의 백래시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미국의 페미니즘은 니카라과 혁명이라는 이슈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

셋째, 미국의 페미니즘은 내부적으로 여러 분파들로 나뉘었고, 무엇보다도 제2물결 여성운동에 참여하였던 흑인여성들이 흑인운동 내에서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흑인 여성들은 주변화되어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흑인여성들에게 젠더와 인종 문제는 중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단지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흑인 여성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간 속에서 1984년 에이드리언 리치의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Notes toward a Politics of Location)」가 발표되었다. 이 글에서 리치는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우리’가 누군지, 그리고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들이 단일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질문함으로써 여성운동의 위기에 응답하고자 하였다.

(니카라과 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여성들)

 

  • 타자와 몸의 위치성

미국이 니카라과 내전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단지 “여성으로서 나에게 국가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피력했다. 오히려 리치는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국가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미국의 국가주의에 동조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 위에 그려진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며 그 속에서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 자신에게도 미국이 관여하고 있는 니카라과 내전과 그 내전이 일으키는 비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리치에게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곧 타자에 대한 자신의 책임성을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때의 위치는 단지 물리적인 위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치는 언제나 역사적으로 구성된 공간이었으며, 위치의 역사에는 타자들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다.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국가가 있다. 즉 여성으로서 나는 단지 정부를 비난하거나, 혹은 “여성인 나의 조국은 전 세계다”라고 3번 말한다고 해서 국가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민족적 충성심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리고 국민국가가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데 이용하는 구실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지도 위의 한 장소가 어떻게 또한 여성으로서, 유대인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내가 만들었고 또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역사의 한 장소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흑인 미국 시민들의 글에서, 그들의 행동, 연설, 설교들에서 내가 그들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있는 한 위치의 지점인 나의 백인성이라는 의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또한 오늘날의 쿠바 여성들이 쓴 시를 읽으면서부터 누가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나의 시각 및 생각의 방식을 형성했던 하나의 위치, 또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하나의 위치로서 북아메리카인이라는 의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작고 가난한 나라이자 빈곤을 뿌리뽑기 위해 4년을 바친 사회인 니카라과를 여행하고 있었다.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의 경계선이 되는 언덕 아래에서 나는 등 뒤로 북아메리카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무게, 미국의 군사력, 미국의 엄청난 화폐 전횡, 미국의 매스미디어 등을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즉 내가 반체제 인사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권력의 부츠를 한껏 치켜올린 미국인의 한 성원으로서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으며, 우리가 남아메리카 전역에 드리운 차가운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지도 위에서 내 몸이 놓인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곧 몸 자체에 대한 질문, 즉 내 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 몸은 어디에 있으며, 내 몸은 무엇으로 보이는가와 같은 질문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순간 몸은 단일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특이하고 다양한 것들의 집합체임을 발견할 수 있다. 몸에는 변형되고 변색되고 손상되고 손실된 부분, 그리고 쾌락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또한 몸의 피부색, 임신의 흔적 여부, 중산층으로 치과의 진료를 받은 치아의 흔적들은 내 몸이 특정한 역사의 지형을 지나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지형은 단일하지 않다. 여성으로서뿐만 아니라 백인으로서, 유대인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혼합되어 있는 흔적들이 몸에 새겨져 있다. 이처럼 몸을 통한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단지 성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관계 안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끔 한다.

위치의 정치. 나의 몸에서 시작한다 하더라도, 나는 처음부터 그 몸이 하나의 정체성 그 이상을 갖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산부인과 병원에서 세계로 옮겨질 때, 나는 여자로 간주되고 여자로 취급받지만, 또한 백인으로 간주되고 백인으로 취급받는다. 그 사람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모두가 나를 그렇게 취급한다. 한 명의 흑인 아이가 인종과 성별에 의해 위치지어지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것은 내가 인종과 성별에 의해 위치지어진다는 것이다. 비록 백인 정체성이 지닌 의미가 백인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가정에 의해 신비화되었을지라도.

(여성운동에 참여하는 흑인여성들)

 

  •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서 차이에 대한 인식으로

이 글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더이상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지속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여성들의 공통성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으며, 전세계의 모든 여성들의 고양된 의식과 함께 해방된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시기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더 이상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오히려 미국의 페미니즘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리’라고 말하는 경향은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의 경험을 삭제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타자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다는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자신의 몸에서, 지도 위의 위치에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서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여성운동을 지탱해온 ‘우리’, 그리고 단일한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또 다른 기제임을 확인한다. 오히려 차이들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인식 속에서 우리 또한 특정한 위치 속에서는 억압 기제의 일부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을 에이드리언 리치는 페미니즘 위기의 시기 속에서 새로이 발견한 페미니즘의 방향으로 이해했다. 이런 점에서 에드리언 리치의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는 제2물결 페미니즘 이후를 고민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주디스 버틀러, 찬드라 모한티, 로지 브라이도티 등 많은 현대의 페미니스트 사상 속에 에이드리언 리치의 언어와 고민들이 스며들게 되었다. 그녀에게 ‘우리’를 상실하는 것, 더이상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통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신념과 희망의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우리’의 상실을 “계속 나아가기 위한 투쟁으로서, 그리고 책임을 향한 투쟁”의 토대로 만들고자 하였다. 페미니즘이 단일한 ‘우리’의 정체성으로 확립될 수 없으며, 타자에 대한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은 페미니즘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그녀의 생각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증명되고 있다.

 

  • 두 편에 걸친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 어떠셨나요?
  • 다음으로는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가 연재됩니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8. <여성들과 공동체의 전복>,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下)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주부들을 계급에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한, 계급투쟁은 매순간 모든 지점에서 지연당하고 좌절당하며, 또한 자신들의 행동의 완전한 범위를 찾아낼 수도 없다. … 가사노동이 생산적 노동의 은폐된 형태임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것은 여성 투쟁의 목표와 형식 모두에 관한 일련의 문제를 제기한다.”

 

  • 핵가족과 그것의 정치경제학

 

그렇다면 이렇게 여성들의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되고, 그에 따라 부불노동으로 처리되는 것은 어떻게 형성되고 정당화되게 된 것일까? 왜 오늘날에도 여전히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조차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늘 가사노동이 당연한 것으로 떠넘겨지는 것일까? 달라 코스타는 그 이유를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적 가족’에서 찾는다. 그녀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전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은 주로 농업생산 및 수공업생산에 공동으로 참여했던 데 반해,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변화된 생산양식은 이전의 봉건제적 가족공동체를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붕괴시키면서 현재와 같은 핵가족 형태를 고착시켰다. 생산의 장소를 농촌의 가족공동체에서 도시의 공장 및 사무실로 이전시키는 사회의 공간적 재배치가 진행되는 동안, 여성, 어린아이, 노인, 장애인 등은 이전까지는 필수적으로 생각되었던 그들 노동의 지분과 그러한 노동참여에 따른 상대적인 권력을 상실했다. 자본은 도시로 떠밀려온(물론 그들은 기존의 가부장제로부터, 농노나 노예 신분으로부터의 기쁨에 찬 해방을 맞이한 것도 사실이다) 이들 중에서 선별한 인간인 남성을 가족으로부터 떼어내 공장과 사무실의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고, 그들에게 나머지 가족 전체의 생계의 짐을 지웠다. 이렇게 농노제에서 자유로운 노동력으로의 이행은 우선 남성 프롤레타리아트를 여성 프롤레타리아트와 공간적·기능적·이데올로기적으로 분리시켰고, 곧이어 학교제도를 통해 그들로부터 그들의 아이를 분리시켰다. 농촌공동체의 생산과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가부장 남성이 자유로운 임금 소득자로, 그 다음 그들의 자녀들이 예비노동자이자 학생으로 변형되는 동안, 갈기갈기 찢어진 가족 내에는 성별 및 세대간 분리에 따른 뿌리깊은 소외가 자라난다.

이처럼 자본은 가족구조를 재편함으로써 남성 및 아이들을 여성들과 분리시키고, 그들에게 남성과 아이들을 위한 뒷바라지, 즉 무상의 재생산노동인 가사노동의 과업을 할당했다. 이제 가정에서의 모든 일은 여성의 책임이 되며, 자본주의적 생산순환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들은 반드시 가정에 남아야만 한다. 자본은 이러한 가족형태에 의지함으로써, 자신의 이윤생산에 성공하고, 또 계급과의 대결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사서비스를 받아 잘 다려진 옷을 입고 충분한 식사를 하고 나타난 공장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더 많은 생산능력을 발휘해 줄 것이며, 그들이 일하면서 얻은 육체적 피로감과 상실감을 사랑으로 채워줄 사람이 가정에 늘 있을 것이며(단 자본의 관점에서는 이 사랑조차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을 가능케 할 삽입섹스로 고정되어야 한다), 그들이 은퇴하면 잘 훈련된(이른바 ‘가정교육을 잘 받은’) 아이들이 나타나 공장과 사무실의 빈자리를 메워줄 것이며, 또 그들이 일하다 다치고 불능상태에 처했을 때면 가정과 여성이 떠맡아줄 것이며, 그래도 일손이 부족할 때라면 집안에 유폐되어 ‘무능력’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저임금을 받으며 일해줄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 모든 비참한 착취상황에 대한 불만을 가족 내부의 갈등으로 극적으로 전환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와 아내가 불행한 것은 남편이 쥐꼬리만큼만 돈을 벌어와서이다.’ ‘남편과 아이가 불행한 것은 집안일을 소홀히 한 아내와 엄마 때문이다.’, ‘부모가 불행한 것은 그들 가족 전체를 계급이동 시켜줘야 할 아이가 공부도 못하고 툭하면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등등. 즉 이런 이유로 여성들이 집안과 가족에 머물러 있어야만, 그들이 무상의 노동을 해야만 자본은 자신의 정상적인 생산순환 및 이윤생산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달라 코스타의 ‘자본주의적 가족 비판’은 여성의 자유로운 사회진출이나 그에 따라 직장 내 유리천장을 없애는 것이 여성투쟁의 과제로 보는 ‘자유주의적’ 관점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여성투쟁을 계급투쟁의 종속변수로 보는 ‘사회주의적’ 관점이 은폐시킨 자본의 정치경제학을 그 근본에서부터 비판할 논거를 제공해준다.

 

“노동계급 여성의 해방이 그녀가 가정 밖에서 일자리를 얻는 데 있다는 점을 옹호하는 이들은 문제의 일부를 보지만 해결하지는 않는다. [공장의] 일관 작업대로의 예속이 부엌 싱크대로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또한 일관 작업대의 예속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여성들이 어떻게 착취되는지 모른다면 남성들이 어떻게 착취되는지를 정말로 알 수 없다는 점을 다시 증명하는 것이다. … 가족이 자본주의적 노동 조직화의 바로 그 기둥임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가족을 단지 상부구조로 간주하고, 변화를 위해서 오로지 공장들에서의 투쟁 단계들에만 의존하는 실수를 범한다면, 우리는 계급투쟁에서의 기본적인 모순 그리고 자본주의적 발전에 기능하는 모순을 항상 영구화하고 악화시킬 절름발이 혁명으로 옮겨갈 것이다.”

 

  • 여성들의 힘과 대안적 정체성

 

이 점에서 달라 코스타는 글을 쓸 1970년대 당시의 운동의 한 형태였으며 현재에도 하나의 구호로 사용되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투쟁을 지지 및 옹호하는 한편 그것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려 했다. “가사노동 임금에 대한 요구는 처음부터 하나의 토대이자, 여자가 당하는 억압·종속·고립을 그것들의 물질적 기초인 여자가 당하는 착취로 곧장 연결시키는 데에 본질적인 매력이 있는 하나의 관점”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투쟁이 여성으로 하여금 집에 평화롭게 있으면서도 국가가 지급할 임금을 순진하게 손놓고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으며, 또한 이 투쟁이 여성운동의 다른 형태들과 결합되지 않은 채 제기되거나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가족 제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 않는 한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여성의 노예적 삶을 더욱 공고히 할 위험, 즉 여성의 역할을 가사노동에 고정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사노동임금 투쟁의 목표는 단지 이런 노동을 덜, 적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노동을 부여받은 여성의 주부화를 박살내는 쪽에 맞춰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투쟁의 출발점은 “가사노동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아니라 이러한 투쟁에서 주인공으로서의 위치를 어떻게 찾느냐에 즉 가사노동의 더 높은 생산성이 아니라, 투쟁에서의 더 높은 전복성”에 두어져야 한다.

달라 코스타는, 맑스가 그러했듯, 이러한 여성들의 전복적 투쟁이 가능한 근거를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노동의 형태와 성격 속에서 찾고자 했다. 즉 여성들이 벌이는 “사회적 투쟁의 가능성은 가정에서의 여성노동이 지닌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성격”에서 나온다. 그것은 그녀들에게 “대안적인 정체성”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대안적인 정체성’, ‘사회적 투쟁의 가능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즉 자본주의적 생산체계와 가족체계는 여성을 무엇으로 생산하는가? (1) 마녀-되기와 악녀-되기. 여성 주부들은 집안의 벽 안에 구금되어 그녀들에게 부여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여성성’을 재차 강제당하는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노동조직화의 전체 구조를 보게 만든다. 즉 자본과 남성 노동자들이 공장 내에서의 적대를 중단하고 동맹관계를 회복하는 곳인 가정에서 여성들은 늘 ‘어디 나다니지 말고 집에만 있어!’, ‘몸가짐을 똑바로 해’, ‘집안 일을 완벽하게 해내라!’와 같은 명령을 듣곤 하는데, 이것은 구금된 여성들 자신으로 하여금 자본과 남성노동자의 은밀한 연합이 자신의 신체를 겨냥해서 이뤄지고 있음을 파악하게 만든다. 사랑스러운 아내, 영웅적 어머니, 조신한 딸로 그녀들에게 부과되는 이미지는 여성투쟁이 집중되고 또 그녀들이 위반할 수 있는 한계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려준다. (2) 가족관계 바깥의 자율적 개인. “여성들은 아내나 어머니로서만 자신들의 남편과 아이를 만나기를, 즉 그들이 바깥세상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 갖는 식사시간에만 만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모든 영역이 여성의 가정주부화를 전제하는 그만큼, 가정 바깥의 모든 장소들은 여성들에 의한 투쟁의 기회를 제공한다. 즉 공장 회합에서, 반상회에서, 학생총회에서, 심지어 취미모임들에서 여성들이 남성을 어머니 대 아버지나, 아들 대 딸이 아니라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로 만나고 대면하면서 공통 관심사를 다룰 때, 그들은 가정 내에서의 종속된 권력관계를 해체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3) 질 오르가즘의 신화를 파괴하는 사랑의 기계. 여성들이 회사나 공장에서, 노동자총회에서 단지 육체적으로 피곤하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밤에는 잠자는 것 외에 사랑을 하고 싶기에 야근을 금지해야 한다”고 요구할 때, 그것은 노동의 사회적 조직화에 맞서 여성으로서 그녀 자신의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좌파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은 사랑을 계급의 이해관계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개인들의 낭만적 영역으로 치부해왔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남성들이 아니라 왜 여성들이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계급의 전체 역사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계기를 준다. 따라서 이때의 사랑은 출산과 육아를 벗어난 사랑, 따라서 삽입성교에 구속되지 않는, 강제된 이성애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4) 생산에서 배제된 자들의 연합. 자본주의적 가족체계 내에서 남성들과 청소년들이 가족들로부터 분리되고, 그들이 근대적 훈육기관들에서 자본의 명령에 익숙해지는 동안, 여성들, 노인들, 장애인들과 같은 자본주의적 생산회로에서 배제된 이들은 자신들의 연합을 강화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서 어린아이들, 노인, 아픈 사람 등과 시간을 갖기를 원한다.” ‘시간을 갖기를 요구하는 것’, 이것은 단지 자본의 판매시장 확대를 의미하는 가사노동의 자동화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생산회로에서 배제되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생산회로를 떠받치고 있는 여성들이 투쟁의 주도권을 쥐고 자본과 국가를 향해 다른 모든 배제된 사람들과 함께 사회적 부를 재전유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들과 분리된 노동자 남성 및 학생으로서의 청소년들과의 재통합을 추진하는 시초적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 노동거부와 공동체의 전복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회로와 가족구조는 여성의 사회적 투쟁의 잠재력을 극도로 팽창시킨다. 자본주의는 부불노동으로서의 여성의 가사노동에 의존해 자신의 거대한 이윤생산체계를 지탱하고, 재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달라 코스타는 여성운동의 투쟁방향과 목표를 좀더 혁명적으로 수립하기 위해, 이 거대한 생산회로의 중심부에 있는 가사노동과 바로 그 경계선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확인하고자 했다. 여성들은 가정 바깥에서든 안에서든 항상 일하며, 바로 이렇게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바로 그 노동의 성격, 그 노동의 수행과정이 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을 끊임없이 팽창시키는 것이다. 자본은 자본주의 이전에는 한 덩어리로 생산했던 가족적 생산체계를 해체하고 그들 중 일부를 공장과 학교체계로 분리시켜 표면적인 착취관계를 확립했으며, 그 과정에서 모든 생산의 밑바닥에 여성의 부불노동이 뒷받침되게끔 하는 착취와 이윤의 안정된 판을 형성했다. 바로 이 숨겨진 노동, 그림자 노동이 없다면, 자본은 이윤은커녕 현재와 같은 사회형태로의 도약조차 이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달라 코스타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혁명의 비밀은 바로 이 근본적 밑바탕, 가사노동이면서 재생산노동인 이 잉여가치 생산의 원천인 여성 자신의 노동에서 찾아져야 한다.

심지어 오늘날 이 노동은 이제 숨겨진 노동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도 생산관계 전체의 전면으로 부상되었다. 노동의 여성화, 노동의 정동화, 노동의 가사노동화, 그리고 인간 자체, 주체성 그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의 삶정치화는 이제 산업자본을 넘어서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 내에서, 임금관계 안팎 모두에서 가장 핵심적인 생산능력이 되었다. 자본은 과거에는 부불노동의 당사자인 여성들에게만 요구했던 것을 이제 남녀 모두에게 예외없이, 심지어 자본 자신의 운동에게조차 명령한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라! 너 자신이자 타인인 저 특이한 인격체이자 감성적이고 정동적인 존재를. 모든 이에게 친절한 인간이 되어라!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타자에게 사랑받으며, 타자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라!라고. 이 점에서 바로 우리의 시대, 인지자본의 시대에서, 달라 코스타의 혁명적 페미니즘은 다른 어떤 혁명이론도 능가할 가장 근본적이고 해방적인 선언이 된다. (끝)

 

  •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편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론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