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9.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上)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젠더의 의미를 둘러싼 현대 페미니즘 논쟁은 이 시대를 이끌다가 다시 특정한 의미의 트러블에 도달했다. 마치 젠더의 불확정성이 결국 페미니즘의 실패를 보여주는 정점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트러블이 있다고 해서 이처럼 부정적인 가치를 수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나는 트러블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최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렇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서문(73-74쪽[한글판])

 

1956년 헝가리와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주디스 버틀러(1956. 2. 24 ~)는 1990년 <젠더 트러블>의 출판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페미니즘에서 정치철학, 윤리학, 퀴어이론, 문학이론에 걸쳐 자신의 작업을 이어간 버틀러는 정체성과 주체성 형성의 문제를 뼈대로 삼아 젠더․섹스․폭력․언어 등에 대한 여러 새로운 논쟁적 입장을 제출함으로써 오늘날 미국 내에서 가장 주목받는(버틀러를 패러디하면 ‘트러블을 일으키는’) 철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문제는 그녀가 일으킨 트러블이 단지 기존의 관성처럼 받아들이던 법적․언어적 개념들이나 사고형태들만을 뒤흔든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에도 불편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현존하는 권력구조 안에서 우리가 정체성을 통해 주체가 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그 속에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모두 법과 제도의 이차적 결과물이며 나아가 그것들을 구분짓는 경계 역시 문화적역사적 구성물임을 폭로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자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연적․필연적 토대란 없으며 그러한 토대를 상정하는 이론을 ‘실체(혹은 본질)의 형이상학’으로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말처럼 ‘여성’ 정체성이 이처럼 언제나 유동적․불확정적이며, 그래서 심지어 페미니스트들 안에서도 ‘여성’의 의미를 동일하게 고정시킬 수 없다면, 여성을 억압하는 체제는 무엇이며, 또 그에 맞서 저항하는 토대는 무엇인지를 규정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남게 될 것이다. 즉 페미니즘의 안정적 기반을 동일하게 규정할 수 없다면(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운동의 측면에서나 이론의 측면에서 어떤 가능성을 갖게 되는가?

 

  • 섹스/젠더/욕망으로 분할된 인식틀에 대한 비판

 

‘젠더’라는 용어가 현재와 같이 통용되게 된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1908. 1. 9 ~ 1986. 4. 14)<제2의 성>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선언한 이후부터일 것이다. 즉 ‘여성적인 것’이 생물학적 성과는 달리 문화적․사회적 과정에 의해, 다시 말해 젠더화된 규범을 강제로 부과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만들어 진’ 것이라는 비판적 문제의식이 발전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보면 섹스는 생물학적 몸의 차이, 젠더는 문화적․사회적 동일시 양식, 섹슈얼리티는 성적 행위가 유래하는 근원적 욕망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구별짓고 분리시킨 인식론적 틀은 이후 여성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했고 페미니즘의 여러 형태의 이론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몸의 차이에 기초해 여성에게 부과했던 기존의 여러 속성들(예컨대 모성성, 수동성, 감정적임, 연약함 등)이 사회적인 제도나 규범이 낳은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 결과 여성으로 하여금 성역할이나 직업선택에서의 고정성을 탈피할 계기를 주며, 나아가 또한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분리될 수 있다면, 이성애에 기초한 정상가족체제의 필연성 역시 허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의 작업의 독특함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인식(보부아르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여러 페미니스트들을 지배하는 인식) ‘안에서’ ‘그에 맞서는’ 근본적이면서도 내재적인 비판을 전개한다는 점에 있다. 첫째, 보부아르의 생각, 즉 사람은 몸과 그 몸에서 비롯된 ‘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성이 젠더의 필연적․인과적 원인은 아니며 젠더는 신체적 외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설혹 성이 생물학적으로 둘(남자와 여자)로 분류된다 할지라도, 젠더가 둘이어야 할 필연성은 나오지 않으며 섹슈얼리티의 형태 역시 특정한 형태로 한정될 이유는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부아르는 젠더를 논할 때 늘 두 형태(남성성과 여성성)를 상정하곤 하는데 이는 그녀 역시 젠더를 이분법적 틀로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젠더가 섹스를 반영하거나 모방하는 관계에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95) 둘째, 보부아르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99)로서 즉 어쩔 수 없는 ‘자연적 소여’로 받아들이곤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염색체와 호르몬의 상태를 통해 우리에게 몸의 차이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확인시키려 하는 무수한 담론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임산부의 뱃속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그 무수한 담론들은 무엇이며 심지어 이런 성별감별의 담론들은 왜 종종 그 감별조차 실패하곤 하는가?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보부아르의 주장과 달리 ‘몸’은 늘 담론 안에 감싸여져 있으며, 그 담론들을 통해서야 비로소 어떤 특정한 형태로 생산된다는 점에서 ‘자연적 소여’일 수가 없다. 셋째, 보부아르는 ‘주체’가 언제나 이미 남성적인 것이고 나아가 보편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음을 폭로하면서 이를 여성적 ‘타자’와 구분하는데, 이를 통해 그녀(그리고 여러 페미니스트들)는 추상적인 인간이나 주체의 담론에 늘 도사려 있는 남성중심적 인간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계기를 주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보부아르가 ‘인간’이라고 하는 담론의 장에서 여성의 몸을 “부인되고 멸시당한 체현(embodiment)”(105)으로, 나아가 보편적 규범 바깥에 있는 것으로 전제되는 만큼 의미화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으로 보고, 그 결과 해방의 가능성은 의미화되지 않은(남성적 규범에 물들지 않은) 여성의 몸을 자유의 도구로 이해할 때 발생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주장에서 보부아르는 은연중에 ‘남성 의미화 對 여성 비의미화’, ‘남성=주체=문화=정신 對 여성=타자=자연=몸’이라고 하는 플라톤과 데카르트 등이 전개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며, 그래서 남성중심적 인간주의를 비판하는 뒷문으로 역설적이게도 이리가레가 말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를 끌어들일 여지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는 결국 ‘여성성’을 규범적으로 배제된 영역에 영원히 묶이게 만듦으로써 암묵적으로 젠더 위계의 체계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페미니즘의 정치의 일체의 해방적 가능성을 스스로 유폐시키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 열린 복합물로서의 젠더와 삶의 박탈

 

버틀러는 이처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분리시키는 인식’이 한편으로는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을 성장시킨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규범(남성성/여성성)의 고착화’, ‘담론 이전의 영역으로의 몸의 실체화․물신화’, ‘여성성의 항구적 타자화 및 배제’ 등의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을 비판함으로써 젠더와 몸뿐 아니라 페미니즘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버틀러는 섹스가 (1차적․본질적인) 자연과 관계되고 젠더가 (2차적․인위적인) 문화와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섹스는 이미 젠더이며 그런 점에서 섹스와 젠더(나아가 섹슈얼리티)는 모두 문화적 구성물임을 강조하는데 그 결과, 그녀의 관점에서 젠더는 “그 총체성이 영원히 보류되어서, 주어진 시간대에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도 없는 어떤 복합물[로서] … 다양한 집중과 분산을 허용”(114)할 가능성의 영역으로 열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버틀러가 이처럼 ‘섹스가 이미 젠더이고 젠더를 열린 복합물’로 이해하게 될 때, 문제는 그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라는 견고한 개념을 통해 확보되는 ‘정체성’(특히 ‘젠더 정체성’)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가 남게 될 것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만일 버틀러의 논의대로 젠더 정체성이 비일관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 일정한 자리를 배치받는 ‘인간’으로서의 터전, 아니 인간 그 자체의 존재론적 지위 및 문화적 인식 가능성이 위협받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인간’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문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미리 주어진 규범적 이분법, 즉 여성이나 남성으로 고착되지 않는다’로 대변되는 급진적 (탈)젠더정치는 ‘그럼 넌 사회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으니 그 안정적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라는 공포스러운 박탈정치를 예고하게 만든다. 버틀러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인간으로서 ‘인식된다는 것’의 의미와 그것에 내포된 권력관계를 분석할 필요를 제기하면서 프랑스 페미니즘과 후기구조주의 이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 이리가레푸코위티그크리스테바의 수용 및 대결

 

버틀러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론으로서 크게 4가지 입장, 즉 타자를 재생산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남성성만이 정체성으로서 존재한다’는 뤼스 이리가레(1930. 5. 3 ~)의 입장,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정체성 범주는 널리 확산된 섹슈얼리티의 규제적 경제체제의 산물’이라는 미셸 푸코(1926. 10. 15 ~ 1984. 6. 25)의 입장, 강제적 이성애 상황에서 ‘정체성은 언제나 여성적’이라는 모니크 위티그(1935. 7. 13 ~ 2003. 1. 3)의 주장, 마지막으로 ‘상징계(아버지 법)에 자리한 남성 정체성의 위치를 기호계(모체에서 비롯된 시적 언어)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자 했던 쥘리아 크리스테바(1941. 6. 24 ~)의 비판적 정신분석학의 입장 등이 있는데, 버틀러는 이 4가지 입장의 정체성 규정과 이론적 의의 및 한계를 제시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결론을 통해 페미니즘 이론 및 정치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첫째, 앞서 언급했던 보부아르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전도시키는 이리가레의 성차이론은 한편으로 서구문화의 관습적 재현체계 안에서 여성은 주체모델로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점에서 여성들은 보부아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항상 이미 남성적인 주체의 단순한 부정(타자)’으로는 이해될 수 없으며, 따라서 여성은 주체도 타자도 아닌, 이분법적 대립으로는 재현 및 환원될 수 없는 차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성=몸 對 남성=이성’을 은연중에 전제하는 보부아르 역시 지배적인 남성성, 남근로고스 중심주의 담론을 효과적으로 은폐하는 데 일조하는 것으로 비판된다. 둘째, 푸코가 보기에 본질적인 섹스의 문법은 이분법의 각 용어에 인위적인 내적 일관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양성 간의 인위적인 이분법 관계 또한 강요한다. 이처럼 섹슈얼리티를 이분법적 성범주로 규제하는 것은 이성애적․재생산적․법의학적 헤게모니를 파열시키는 섹슈얼리티의 전복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셋째, 보부아르의 연속선상에 있는 위티그가 보기에 성에 대한 이분법적 규제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을 수행한다. 그래서 그녀는 강제적 이성애주의의 전복이 자유로운 인간의 산출이라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열며, 에로스 경제의 확대가 섹스/젠더 그리고 정체성의 허상을 깨뜨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위티그는 여성들에게 보편적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섹스’의 허상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제3의 젠더를 세우자고 말하는데, 이는 결국 레즈비어니즘을 긍정하는 전략으로 소급된다. 넷째, 크리스테바는 라캉의 ‘아버지 법’이 모든 언어적 의미화 구조(즉 ‘상징계’)를 구성하는 보편원리로 기능하면서 모체에 대한 아동의 근본적 의존과 기원적 리비도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고 보았다. 결국 상징계는 모체와의 기원적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데, 이러한 억압의 결과로 나타나는 ‘주체’는 억압적 법을 전달하는 메신저나 옹호자가 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라캉의 서사에 도전하면서 기원적인 모성의 몸으로 생겨난 언어차원인 기호계가 상징계 안에서 영원히 전복의 원천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다원적 의미와 기호의 비종결성이 지배적인 시적언어를 통해 ‘상징계’ 질서를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입장들에 대한 버틀러의 분석 및 비판은 (지면의 한계상) 거칠지만 다음과 같은 간단한 도식의 형태로 정리될 수 있다.

 

이리가레푸코위티그크리스테바
규범과 정체성 규정․ 남성로고스 중심주의

․ 남성적 성만이 존재하며 여성은 남성적 성과의 차이로서만 기능

․ 이성애 중심주의

․ (남자든 여자든) 성범주는 섹슈얼리티의(이성애)의 규제적 효과

․ 강제적 이성애

․ 남성은 보편적 인간으로 등록되며 따라서 여성만이 성범주로 표시(ex.여의사)

․ 언어적 의미화 구조(상징계)

․ 아버지 법으로서의 상징계와 다원적 의미가 억압되는 母體(및 시적언어)

의의․ 여성의 오인 혹은 재현불가 능성으로 인한 ‘하나이지 않은 성‘의 가능성

․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와주체와 타자의 변증법 비판

․ 주체 개념에 전제된 실체 형이상학 및 인간주의 비판

․ 정체성의 기원을 제도․담론․ 실천의 효과로 봄으로써 성범주(섹스)가 역사적으로 특정한 섹슈얼리티 양식을 통해 구성된다는 계보학적 접근의 가능성

․ 금기가 담론을 통한 효과로 작용하며 금기를 권력관계 속에서 읽어내면서도 금기의 생산성을 설정한다는 점

․ 성의 자연성이 허구적임을 폭로하며 섹스가 상상적

구성물이며, 젠더화된 범주로 산출된다는 점을 폭로

․ 섹스의 허구성을 근원적인 언어적 존재론(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부여된다는 것)을 통해 극복할 가능성

․ 라캉과 정신분석학의 근본적 전제로서의 상징계를 전복할 가능성 제공

․ 모성적 몸에 가해지는 아버지 법의 단성적 의미화 기제를 다원적 의미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

․ 강제적 이성애 체제가 우울증과 비체화를 요청하는 인식적 가능성의 개방

한계․ 남근로고스 중심주의 비판을 통해 적을 단일화하는 인식론적 제국주의 설정.

․ 하지만 ‘식민화’는 남성성으로부터만 비롯되지 않으며, 인종, 계급, 이성애중심주의와 교차하면서 작동.

․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대한 해석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동성애적 인식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

․ 바르뱅의 쾌락을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로 이해할 때 드러나는 이상적 해방관 및 그에 따른 섹스와 정체성의 낭만화

․ 모든 발화에서 흠없는 매끈한 정체성을 요구

․ 대안으로 설정되는 ‘전세계적 레즈비언화’가 지닌 도전적 제국주의의 위험성

․ 레즈비어니즘이 가진 이성애 질서와의 근본적 단절 따라서 이성애내에서의 재의미화 가능성이 차단됨.

․ 의미 이전과 이후의 설정

․ 기호계의 시적언어를 통해 전복하고자 하는 아버지 법의 상징적 의미화에 의존

․ 문화에 앞서는 모성을 설정함으로 인한 모체의 자연주의화

․ 모성본능의 목적론 설정

 

  • 주디스 버틀러 (上)편은 여기까지 입니다 –
  • (下)편도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