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 백종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철학자의 서재]

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백종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칸트를 읽기 위해선 다른 건 필요 없고 엉덩이 근육과 인내가 필요하다. 둘 다 갖지 못한 나 같은 자는 그냥 포기하는 게 맞을 거다. 하지만 좋은 책이 나와서 그러지도 못하겠다. 백종현 선생님의 칸트 3대 비판서 특강이 책 한권으로 나온 것. 요즘은 공부를 하지 않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3대 비판서라 함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말한다. 주옥같이 어려운 책들, 우리가 인생 살면서 고민도 안하고 포기하는 책들 되겠다.

 

그런데 이 책을 일단 읽게 되면 없던 욕망이 생긴다. 칸트를 읽어봐야겠다는 무모한 욕망 말이다. 2백페이지 조금 넘는 작은 책이라 정신 바짝 챙기면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저 세 비판서는 각각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순수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실천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판단력비판>를 다룬다.

 

칸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 정의되는데 문제는 이성과 함께 ‘동물성’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은 어쩌면 그저 동물성만 있으니 문제될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성’을 놓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 이성의 한계다.

 

인간 이성은 신에 대해 논할 수 있는가. 신은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인데 말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신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있는 것은 공간과 시간 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p. 94). 칸트는 신과 영혼 같은 것은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 보았다. 인간 이성, 인간의 주관이 알 수 있는 것만을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한다. 칸트 이전에는 인간 이성 밖에 대상이 그 자체로 있다고 봤지만 이제 그런 것은 인간이 알 수 없고 우리 감각 지각에 들어오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세계와 잠자리나 개구리가 보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보는 세계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히 인간중심적 사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거칠게 말해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러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다룬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무엇을 다룰까. 인간 이성이 이렇게 한계가 있다면 이제 인간 이성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있는’ 것만을 보고 느끼고 알 수 있다면 세상은 참 심심하지 않겠는가. 아직 있지 않은 것을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실천’이다. 지금이야 장난감이 많지만 나 어릴적만 해도 장난감이 없으면 나뭇가지를 꺾어서 총도 만들고 지팡이도 만들며 놀았다. 하나의 ‘실천’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실천에는 ‘의지’(p. 140)가 들어간다. 그런데 칸트는 실천 중에는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선’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악’이다.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당연한 걸 우리가 모두 실천한다면 세상에는 사기도 악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선’을 실천할 인간의 능력을 ‘자유’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국 ‘악’을 행하는 자는 ‘자유’가 없는 자라는 뜻이 된다. 어릴 때 엄마 주머니에서 잔돈 훔쳐본 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들키면 혼날 텐데 하면서 하루 종일 자유롭지 못하고 안절부절 했음을. 기껏해야 떡볶이를 사먹기 위해서였을 텐데 나는 그 대가로 내 자유를 빼앗긴 셈이다. 칸트는 이런 자연적 요인, 감각적 요인(경향성Neigung : inclination)에 지배받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요즘 먹방 프로그램이 많은데 인간의 감각(미각)에만 너무 치중하는 것 같다. 생각해볼 문제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은 먹방에만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런 경향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유로운 존재다. 당연히 이게 중요하다. 그러면 이 자유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해야만 할까.

 

인간은 자기 경향성, 동물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고 이때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의지가 ‘선의지’이다. 칸트에게 선의지는 어떤 행위를 오로지 의무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p. 161). 그래서 칸트의 도덕법칙은 명령형이다.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와 같은 정언명령들이 그렇다. 이러한 도덕적 행위들의 원리를 ‘인간 존엄성의 원칙’이라 한다(p. 173).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만 대우해야 하며 존엄한 존재는 교환도 안 되고 바꿀 수도 없다(p. 175). 그런데 우리 현대 사회는 인간조차 노동력 상품으로, 자신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자꾸만 전락시키고 있다.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에게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자발성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희망한다. 이제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라는 문제를 다룬 것이 <판단력비판>이다. 칸트는 판단력이 이론이성(<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실천이성비판>)을 잇는 다리라고 생각했다(p. 234). 인간은 이성과 의지 둘 다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 이 둘을 칼로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둘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둘이 판단력에 의해 통일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최고선’이라는 이념에 의해서다. 칸트에게는 자연성, 경향성의 자연 세계가 도덕의 세계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보았고 그 상태가 최고선의 상태라고 보았다. 기독교 성서 중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대목이 있다. 저자는 ‘지상에 세워진 천국’이 칸트가 희망했던 ‘최고선의 상태’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세계적으로는 난민 문제를 비롯해서, 용산참사도 그렇고 일터에서 안전의 문제로 죽어나가는 젊은 노동자들의 문제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지상에는 희망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지상에 천국은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특별히 악하게 살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희망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절망만을 주고 있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도 대등한 인격(p. 158)으로 정당하게 대우받으며 인간 존엄성을 누릴 권리가 있다. 모든 인간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갑이고 너는 을이 아니다. 각자의 우리는 대체불가능하고 자유로운, ‘대등한’ 인격체이다. 그 옛날, 칸트도 알고 있었던 것을 왜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일까.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하는 것일까.

 

얼마 전 모 신문사 사장의 손녀가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칸트가 인간이 대등하다고 말한 지가 1780년대라고 치면 기함(氣陷)할 노릇이다. 칸트가 꿈꾸었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더 좋은 세상에 대해 꿈꾸지 않는다면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이라도 칸트를 꺼내 읽어야 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칸트를 읽는다는 것,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과 ‘다른 사유’를 하려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새로 배워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쉬운 것만 하고 사는 것도 재미없지 않은가. 어려운 것에 도전하고 깨지고 박살나는 살아있는 경험이 고프기도 하다. 새해 <순수이성비판>부터 도전해보려 한다. 무모하고 무한한 도전일지라도.

 

-글,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