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예술혁명 강연 후기: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연결 짓기 ② [2019년 3월 월례회]

BTS 예술혁명 강연 후기: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연결 짓기 ②

 

한철연 회원 이상하

출처:https://image.aladin.co.kr/product/14212/80/cover500/k082532437_1.jpg

  • 지난 1부에 이어 계속 됩니다.

————————————————

또한 아즈마는 글을 쓰면서 프랑스 현대철학 전공자답게 들뢰즈의 철학에 대해서도 의식하며 글을 쓰고 있다. 대표적으로 들뢰즈의 수목형이 아닌 뿌리-줄기 리좀 모델과는 다른 자신의 데이터베이스 소비 모델에 대해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표층적인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표층을 규정하고 있는 심층 즉 커다란 이야기가(거대 담론) 있다. 따라서 근대에서는 그 심층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의 도래에 의해 그 트리형 세계상은 붕괴되어버렸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의 세계는 어떠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가? 80년대 일본에서는 그 하나의 후보로 심층이 소멸하고 표층의 기호만이 다양하게 결합해가는 ‘리좀’이라는 모델이 많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포스트모던의 세계는 오히려 데이터베이스 모델(읽어내기 모델)로 파악하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쉽다. 그 알기 쉬운 예가 인터넷이다. 거기에는 중심이 없다. 즉 모든 웹페이지를 규정하는 감춰진 커다란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리좀 모델과 같은 표층적 기호의 조합만으로 성립하는 세계도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에는 한편으로는 부호화된 정보의 집적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저의 읽어내기에 따라 만들어지는 개개의 웹 페이지가 있는 별종의 2층 구조가 있다. 이 2층 구조가 근대의 트리 모델과 크게 다른 것은 거기에서 표층에 나타난 겉모습(각각의 유저가 보는 페이지)을 결정하는 심급이 심층이 아니라 표층에, 즉 감춰진 정보 자체가 아니라 읽어내는 유저 쪽에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 표층은 심층만으로는 결정되지 않고 그 읽어내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러한 모델의 변화는 단순히 사회적으로 인터넷의 출현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자기조직화나 인공생명, 신경망 등 90년대에 널리 주목받은 복잡계통 과학의 발상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 데이터베이스는 유저 측의 읽어내기에 의해 얼마든지 다른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일단 ‘설정’에 손을 대기만 하면 소비자는 거기에서 원작과 다른 2차 창작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상황을 표층으로만 파악하면 오리지널 작품=원작이 무질서하게 시뮬라크르의 바다에 삼켜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우선 데이터베이스=설정이 있고 그 읽어내는 방식에 따라 원작도 가능하고 2차 창작도 가능한 현상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옳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68-71쪽에서 인용.

 

즉 들뢰즈의 리좀 모델은 심층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표층들의 조합으로서 성립하지만, 아즈마의 데이터베이스 모델은 심층은 존재하지만 유저가 표층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며 ‘2차 창작’으로 얼마든지 다른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방탄소년단과 그 음악에 대해서 이걸 적용해보자면, 이지영은 들뢰즈의 리좀 개념을 빌려와서 팬덤 아미가 탈중심화해서 방탄과 결합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방탄이라는 중심, 심층, 그리고 빅히트 기획사라는 공식official 설정이 부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국의 팬이 자신의 언어로 방탄의 음악을 번역하고 그 가사로 <뱁새>나 <불타오르네> 같은 노래를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 팬이 자신이 원작이며 심층이라고 주장한다면 수많은 다른 아미 팬들이 한국어 원작이 엄연히 있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온갖 비판과 비추를 받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인 것이다. 만약 이런 소동이 크게 난다면 빅 히트 기획사 차원에서 법적 대응을 하고 공식 성명을 낼 것도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심층 자체가 없는 들뢰즈의 리좀이 아니라 아즈마의 데이터베이스 모델이 이 포스트모던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더 적확한 면이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BTS 예술혁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한국에는 ‘부친살해’의 구전설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오히려 ‘자식살해’ 즉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비가 아프면 자식이 솥에 들어가서라도 효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끔찍한 설화가 전국 각지에 퍼져있다는 사실이었다. 허나 이 부분에서 이지영은 또 방탄과 아미가 이러한 부친살해, 기존의 사회 시스템과 문화를 파괴하는 한국의 첫 사회 문화적 혁명의 사례인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서태지와 신해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90년대 한국에 일본문화가 개방되고 일본 만화와 음악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시기에 유년기를 보낸 지금의 30대 이하 세대는 또다시 고개가 갸우뚱 해질 따름이다. 세계 판매 1위를 기록한 대표적인 작품인 드래곤볼의 손오공은 어릴 시절에 외계인임에도 자기를 키워준 할아버지 손오반을 죽였고, 자신의 형제이자 뿌리인 사이어인 라데츠가 외계에서 찾아와 지구를 멸망시키자고 하자 반기를 들며 형을 죽인다. 에반게리온은 아버지에게 버려진 주인공 신지가 부당한 아버지의 명령에 저항하고 적응하다가 결국은 부친을 죽이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원피스는 만화 내내 세계의 질서를 지키는 해군과 세계정부와 싸우며, 가장 자유로운 해적왕이 되기 위해 자신을 키워준 해군 할아버지마저도 공격하는 루피가 주인공이다. 부친살해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소녀용 취향이라 여겨지는 카드캡터 체리(사쿠라)도 알고 보면 옛날 크로우라는 마법사로가 만든 마법의 카드로 소동이 나고 체리가 크로우 카드를 대체해 새로운 카드의 주인이 되는 이야기다.

구전설화 같은 옛날이야기보다 TV영상 쪽이 훨씬 더 지금 2030 세대에게는 강렬한 이미지로서 기억에 박혀있고, 심지어 본인 같은 30대 세대 이후로는 옛날이야기도 할머니의 구전설화 같은 방식이 아니라 배추도사·무도사 같은 TV애니메이션을 통해서 효 사상에 대해 배워왔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에서 방탄소년단이 덜 새롭게 느껴지고 인기가 외국보다 상대적으로 덜한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미 어릴 적 봐온 만화가 더 부친살해적 코드로 가득하다!

 

이지영은 방탄의 노래가사를 분석하고 설명하는데 들뢰즈의 소수자-생성 또는 소수자-되기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이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자면 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은 자본가가 노동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주로 카프카의 문학을 비평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한다. 허나 미국 시장에 아시아인으로써 ‘뱁새’같은 노래를 부르는 도전자의 입장일 때는 그러한 소수자 생성으로 방탄과 아미를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이지영 본인이 강연에서 말했듯이 세계 음반 판매량 1위를 달성하고 빌보드차트 1위를 달성한 슈퍼스타가 된 방탄소년단이 계속 그러한 소수자-되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사회에서 난민이나 퀴어 같이 극도로 소외받고 약한 소수자들이 볼 때는 하나의 기만, 강하게 표현하면 박완서의 소설 제목처럼 ‘도둑맞은 가난’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일례로 나루토나 원피스 같은 소년만화는 점점 장기연재가 되고 길어질수록 만화 설정상의 구멍이 많아지고 독자들의 감정이입이 힘들어져 판매량도 떨어지는데, 다른 원인들도 있겠지만 이는 처음의 약하고 보잘 것 없던 주인공이 점점 세계관의 최강자에 가까워져서 ‘노력, 우정, 승리’라는 점프 만화의 주제가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것과 큰 연관이 있다. 10년이 넘는 장기방영 끝에 종영한 무한도전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평균이하 남자들이라는 루저의 정서로 시작하고 국민적인 팬덤이 생길만큼 큰 사랑을 받았지만, 그들은 이제 누가 봐도 사회의 승자들이고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도 루저 개그 등을 소화하기 버거워했다. 방탄소년단도 월드스타가 되면서 그와 같은 불안과 패배를 노래하는 승자의 딜레마를 겪을 텐데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어설픈 기만술로는 J.비버같은 다른 아이돌처럼 순식간에 대중의 외면을 받지 않을까?

후기를 끝내면서.

 

주유소 -벤야민 일방통행로 중에서 첫 글 주유소 전문.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한 형식들, 예컨대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신속한 언어만이 순간 포착 능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견해란 사회생활이라는 거대한 기구에서 윤활유와 같다.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내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에서,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대중들이 마치 자신의 구원인 것처럼 자신의 예속을 원하며, 들뢰즈는 이것이야말로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방탄소년단 같은 대중적인 주제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철학을 통해 둘 사이의 접점을 꾀한다는 저자의 시도는 의미 있는 이정표를 남긴다. 강연 중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대학교 강의에서 읽으라고 해도 읽지 않는 니체나 융 같은 고전을 방탄의 뮤비 해석에 필요하니 알아서 찾아 읽고 심지어 팬들끼리 모여서 공부하는 세미나를 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웬만한 학문의 석·박사 전공자보다도 그 분야를 즐기면서 파고든 오덕이 더 깊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전공자와 비전공자 같은 이분법이 점차 해체되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앞서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더 이상 철학이 고루한 형식만을 고집하지 말고 더욱 새로운 방식으로, 벤야민이 일방통행로에서 주유소에 대해 말한 것처럼 사유에 윤활제를 뿌리는 새로운 글쓰기가 필요해지는 시대가 아닐까.

아즈마 히로키또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끝내는 마지막 말로 -뛰어난 작품에 대해 하이컬처다 서브컬처다, 성인용이다 어린이용이다, 예술이다 엔터테인먼트다 하는 구별없이 자유롭게 분석하고 자유롭게 비평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기 위해 이 책은 씌어졌다. 이 이후의 전개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맡기고 싶다.-로 마무리한다. 이 졸고에서는 줄곧 아즈마의 입장에서 이지영과 들뢰즈를 비판했지만, 이 맥락에서는 들뢰즈도 벤야민도 이지영도 아즈마도 이항대립을 비판하는 같은 입장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과 강연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 보다 좀 세게 비판을 쏟아낸 것 같다. 허나 그만큼 이지영 선생님의 저서와 강연에서 마주한 흥미로운 내용 덕분에 지속적으로 사유하게 되었고 많은 발상들이 떠오르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어 보잘 것 없는 역량이지만 이에 감응하여 촉발된 글이라고 봐주시면 감사할 따름이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들뢰즈의 시간-이미지와 이지영의 네트워크-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끝.

BTS 예술혁명 강연 후기: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연결 짓기 ① [2019년 3월 월례회]

[2019년 3월 한철연 월례발표 후기]

BTS 예술혁명 강연 후기: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연결 짓기 ①

 

한철연 회원 이상하

 

그림출처:https://image.aladin.co.kr/product/14212/80/cover500/k082532437_1.jpg

방탄소년단에 대한 강연(이지영)을 3월말에 한철연(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듣는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니 꽤 많은 반응들이 한결같았다. ‘걔들이 그런 책이 나올 정도로 대단해?’ ‘BTS 예술혁명(부제: 방탄소년단과 들뢰즈가 만나다)’이라는 강렬한 제목에 걸맞을 정도로 방탄의 실력과 명성이 대단한가? 그런 철학책은 비틀즈나 마이클 잭슨 정도의 세계적인 레전드에게나 헌사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의문일 것이다.

저자인 이지영 선생님이 책을 낸 작년 2018년은 이제 막 방탄소년단이 세계적으로 뜨고 있다는 제목으로 한국 언론에 소개될 즈음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냥 해외에서 잘나가는 아이돌인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었다. 작년에 총 음반 판매량 세계 1위를 달성하고 빌보드 1위를 찍은 후 한국에서 지명도가 작년보다는 높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국내에서 인기 체감이 다른 아이돌 그룹에 비해서는 미진하다. 아마도 한국 예능과 음악프로에 잘 나오지 않은 탓이 클 것이다. 트와이스 같은 경우엔 한국과 일본 방송에서 활동이 활발하기에 세계적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한국에서 존재감은 압도적이듯이 말이다.

물론 단순히 상업적으로 세계 1위라서 찬양한다면 한때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빌보드2위를 찍고 유튜브 조회 1위를 찍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고 굳이 철학적으로 비평하는 글이 나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 이지영은 책과 강연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질서 속에서 대다수 국가의 특히 청년들이 무한경쟁 청년실업 소외 등으로 힘겨워하고 있고, 다른 가수와는 달리 방탄소년단이 삶의 시련과 아픔 절망 두려움 등을 진정성 있는 자발성과 개성으로 팬덤인 아미(ARMY)와 ‘탈중심적으로’ 결합해서 음악을 표현하기에 BTS만의 음악적 탁월함을 성취했다고 말한다.

 

허나 이렇게 과연 방탄이 조상 없는 ‘기원’origin, 마치 처음으로 있는 현상이고 완전히 새로운 혁명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혹 팬심 때문에 대중음악의 계보에 대해 망각하신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한국으로만 봐도 서태지의 <교실이데아>·<울트라맨이야>, 신해철 넥스트의 <아 개한민국>, HOT의 <전사의 후예>·<아이야> 같이, BTS의 <뱁새>처럼 현실비판이 주 요소인,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경계를 해체하는 가수는 분명히 존재했고, 그들의 팬덤이 가수와 결합하여, 종종 가수라는 중심을 벗어나서 사회적인 힘을 발휘했다는 것도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 아닐까?

세계적으로 봐도 흑인인 마이클 잭슨이 <Black or White>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된 것, 비틀즈 존 레논의 <Imagine>같이 체제 비판적이고 대안, 희망을 노래한 것은 그들의 팬덤과 떨어뜨려놓고 가수 개개인들의 역량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일까? 심지어 저자도 『BTS 예술혁명』 23쪽에서 비틀즈와 소비에트 연합의 붕괴에 대한 논문을 이미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들의 시대엔 스마트폰과 인터넷 인프라가 없거나 부족했고 지금의 시대엔 전 세계적으로 기술 보급이 되어있다는 것을 결정적 차이점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마치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이후의 ‘넷페미’ 혹은 ‘영영페미’로 호칭되는 이들이, 자신들에겐 보고 배울 선배도 계보도 없고 자기들이 대한민국의 첫 페미니즘 세대라고, 역사의 시작점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이후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대한민국 넷페미史』 같은 논쟁적인 페미니즘 책이 나왔듯이 이 글에서 목표로 하는 것도 방탄소년단-아미에게도 계보가, 조상이 존재하며 그것은 흔히 덕후라 불리는 오타쿠,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표현을 빌려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아닐까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다. 극단적이지만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에반게리온과 원피스-팬덤문화가 없었다면 방탄소년단-아미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BTS 예술혁명으로 돌아오면, 저자인 이지영은 방탄의 성공이 어떤 필연적 결과물이 아니라 방탄의 노래제목처럼 serendipity, 우연히 좋은 쪽으로 사건이 발생하고 전개되는 것이라 말한다. 또한 방탄과 팬덤 아미가 성공한 측면은 마케팅이 아니라 현재 세계 전체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 그 억압 아래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단절, 외로움은 어떤 것이고 사람들은 세상을 어떠한 방향으로 바꾸기를 욕망하는가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제기되어야 한다(『BTS 예술혁명』 17쪽)고 주장한다. 방탄의 팬들이 온라인에서 강력하게 연대하여 오프라인 현실 공간에 침투한 결과 영어 위주의 빌보드 차트에 한국어로 1위를 하는 등 기존 위계질서에 균열을 내었으며, 이러한 사회 문화적 변화에서 수목적 위계질서가 아닌 리좀Rizome, 계급이나 높낮이가 없는 뿌리-줄기적 혁명으로서의 정치적 함의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의 16-17년의 촛불혁명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정치변화를 가져왔다면, 방탄소년단으로 인해 초래되고 있는 변화는 전 지구적인 규모의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변혁을 징후적으로 표현한다며 실로 방탄과 아미를 혁명을 초래하는 구원자처럼, 냉정한 비평과는 거리가 먼 기쁨에 찬 어조로 설명한다. 왜 이렇게 철학이나 비평과는 다른 글이 써지게 된 것일까? 단순히 팬심 때문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들뢰즈의 말을 참조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철학책을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글쓰기 방식으로 쓰는 것은 머지않아 곧 불가능해질 것이다. “아아, 고풍스런 스타일……” 철학의 새로운 표현수단의 탐구는 니체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 그것은 연극과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의 혁신과도 제휴하여 속행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지금 즉시 철학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문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에게서 철학사는 회화에서 콜라주가 달성한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해야 한다.“

– 들뢰즈 차이와 반복 서문. 번역은 우노 구노이치의 『들뢰즈, 유동의 철학』에서 인용.

 

이지영은 강연에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한마디를 꼽자면 ‘수평성’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철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논문이 아닌 대중서라는 형식과도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들뢰즈가 말하는 것처럼 철학을 논문이라는 딱딱하고 엄밀한 글쓰기 형태로만 쓰는 것은 점점 불가능해지기에, 새로운 표현수단으로서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방탄의 팬들도 읽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강연의 내용적으로 봐도 방탄과 아미가 수평적으로, 탈중심적으로 결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탄소년단이 중심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다만 그 가수라는 중심과 팬덤 아미 사이의 관계가 수직적이지 않은, 유동적인 중심이라는 것이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가수와 관객은 더 이상 수직적 상하 관계가 아니라, 생비자Prosumer 라는 신조어처럼 관객은 끝없이 가수의 영상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며 새로운 편집을 하고 새로운 이미지의 네트워크를 생산해내는 소비자이다. 이러한 새로운 영상들의 배치를 이지영은 네트워크-이미지라고 이름 지으며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의 역할이라 할 수 있는 ‘공유 가치’를 제시한다고 말한다. 이전처럼 예술가가 생산한 작품을 수용자가 단순히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끝없이 가로질러지면서 네트워크와 작품의 경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예술 생산의 형식 속에서 예술가와 수용자가 함께 생산하고 실현해나가는 것이 바로 공유가치이다.(『BTS 예술혁명』 19쪽) 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과연 이것이 방탄과 아미만의 새로운 예술 생산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물음에는 ‘글쎄’ 하며 저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바로 오타쿠 한국말론 오덕, 만화나 게임 등의 서브컬쳐subculture에 대해 탐닉하며 2차 창작과 소비가 일상화되어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아즈마가 말하는 것처럼 오타쿠는 더 이상 일본만의 특수한 문화가 아니며 단순히 사회의 일부가 향유하는 소수집단만의 문화가 아니라고, 한국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이지영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입덕’ 같은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나 혼자 산다’같은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덕후, 오덕 출연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덕후의 일상을 관찰 하는 게 최고의 시청률을 찍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오덕에겐 왠지 사회부적응자 같은 이미지와 고도소비사회의 문화에 적응한 얼리어답터 같은 양면적인 이미지가 여전히 씌워져 있으며, 이에 대해 아즈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 권위적인 분위기가 강한 오타쿠들에게는 오타쿠적인 수법 이외의 것에 대한 불신감이 있으며, 오타쿠 이외의 사람이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를 환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현대사상 학술지로 논단에 나와 태생적으로 서브컬처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필자는 이 점에서도 일부로부터 반발을 받아왔다. 즉, 간단하게 말하면 한편에는 애당초 오타쿠 따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오타쿠에 대해서는 특정 집단만이 이야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기란 극히 어려웠던 것이다.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그 같은 기능부전을 회복하고 오타쿠계 문화에 대해, 그리고 나아가서는 일본의 현 문화상황 일반에 대해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분석하고 비평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우리 사회를 보다 잘 이해하는 것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21쪽에서 인용

 

앨범을 계속 사는 적극적인 트와이스의 팬이나 방탄의 아미에게 쏟아지는 사회적 시선도 오덕에 대한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위에서 말했듯이 ‘입덕’ ‘덕통사고’같은 용어를 그들 팬덤에서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이어서 강하게 말하면, 방탄소년단과 아미 또한 이 오덕, 오타쿠 서브컬쳐 문화로부터 영향 받은 한 줄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자면 일본이 선도하고 있는 서브컬쳐 오타쿠, 리오타르가 정의한 근대라는 거대 담론이 몰락한 ‘Postmodern’ 시대에 2차 창작이라는 데이터베이스적 소비를 하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야말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장 시대를 선도하고 있는 문화이다. 한국은 그걸 받아들인 영향으로 작곡가이자 빅히트 대표 방시혁이 방탄소년단을 탄생시켰고 ‘우연히’ 세렌디피티하게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방탄-아미의 탈중심화된 생산으로 대표적으로 거론하는 방탄의 노래 가사를 각국의 팬들이 협업해서 번역하고 유튜브에 자막으로 달아놓는 일은, 서브컬쳐계에선 유튜브가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부터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덕후라면 자연스레’하고 있던 일이였다. 대표적인 작품인 에반게리온과 원피스는 수십개 언어 버전으로 오프닝과 엔딩을 팬들이, 덕후들이 일일이 번역해서 광고도 달지 않은 채 유투브에 올리고, 저작권 문제가 생길 수 있는 티비판이나 극장판 애니매이션 영상도 각자가 번역해서 불법을 감수하고서라도 토렌트나 스트리밍 사이트등에 공유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전파했다는 각자의 ‘보람’ 정도 외에는 어떠한 보상도 인정도 존재하지 않지만 덕후들은 그것을 위해 생계를 이어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들이다. 또한 애니 영상을 자기 입맛대로 편집하거나 오프닝 노래를 자신이 다시 부른 영상은 도무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생산중이다. 이것이야말로 앞서 정의된 ‘공유가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원피스 덕후야말로 방탄-아미들의 문화적 조상이 아닐까?

 

물론 이는 나의 해석이며 지나치게 앞서간 것 아니냐며 고개를 젓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허나 아즈마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히 일본의 사례가 아니라 한국도 피해하기 어려운 정세적인 설명들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일본 오타쿠들이 미국에 패전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의사 일본’(가상 일본)을 만들어내는 욕망을 표현한다는 부분이다.

 

즉 80년대 이후의 애니메이션을 ‘오타쿠적인 것’ ‘일본적인 것’이게 하는 특징은 실은 미국에서 수입된 기법을 변형하고 그 결과를 긍정적으로 재수용 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오타쿠적인 일본의 이미지는 이와 같이 2차 대전 후의 미국에 대한 압도적인 열세를 반전시켜 그 열세야말로 우세라고 주장하는 욕망에 뒷받침되어 등장한다. 그것은 분명히 라디오나 자동차, 카메라의 소형화에 대한 열정과 마찬가지로 고도경제성장기의 국가적인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오쓰카가 주목한 2차 창작의 범람이나 <시끌별 녀석들>(란마와 이누야사의 작가 다카하시 루미코의 데뷔작)의 민속학적 세계 등 오타쿠계 문화의 ‘일본적’인 특징은 근대 이전의 일본에 소박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연속성을 괴멸시킨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주의(소비사회의 논리)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70년대에 코믹 마켓을 패러디 만화로 가득 채웠던 욕망은 에도 시대의 정수라기보다 그 10년 전에 미국에서 팝아트를 낳은 욕망에 가까운 것이며, <시끌별 녀석들>의 작품세계 또한 결코 민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SF와 판타지의 상상력이 굴절된 곳에 일본적인 의장이 스며든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오타쿠계 문화의 근저에는 패전으로 인해 ‘좋았던 시절’의 일본이 망한 이후에 미국산 재료로 다시 의사적인 일본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복잡한 욕망이 숨어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 모습은 많은 일본인에게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품게 한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34-36쪽에서 인용.

 

이를 읽으면서 평소에 오덕이라는 자의식이 아니더라도 만화에 관심이 있는 한국의 독자라면,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일본과 한국, 아시아의 제국과 식민지였다는 현실의 역사에 대해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흔히들 한국은 일본을 10년 정도 차이로 따라간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제는 일제강점기 시절 같은 격차는 분명히 좁혀져있지만, 그럼에도 만화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관습이나 법 같은 분야까지 일본의 영향은 뿌리 깊게 드리워져 있다. 허나 일본의 패전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식민지 시절은 쉽게 말해서는 안 되는 일종의 사회적 금기로, ‘애국’ ‘반일’이라는 코드와 분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남아있다.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아이돌 산업이 일본에서 유래, 더 정확히 말해서 모방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공연히 말해버리면 사회적 눈총을 받는 것이다. 마치 90년대에 인터넷을 뒤지다가 어린 시절 독수리 오형제가 사실은 한국인이 아니며 일본의 ‘과학닌자대 갓차맨’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말하게 되면 주변 친구들이 믿지 않거나 오히려 너 친일파지 라는 식으로 따돌리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른바 K-POP이 국제적으로 성공하고 있다고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정부에서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이를 일본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행태야말로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닌, 패배와 굴종의 역사가 아닌 ‘의사 한국’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이런 이율배반적인 욕망에서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한국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런 욕망의 계보를 제대로 분석함으로써 아즈마가 말하듯 이 사회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하고 변혁의 ‘뱁새’가 되는 것이 아닐까. 들뢰즈의 말처럼 ‘욕망은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욕망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다.’

1부 끝.

– 2부에서 이어집니다 –

[안내] 영화 <길> 공동체 상영 9월30일 토 3시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 1부 입니다. 

9월에 한철연 공동체 영화 상영을 안내합니다.

한국 사회의 주요 적폐 중 하나가 사학 재단의 각종 비민주적 행태, 비리 문제입니다. 

우리 한철연 공동체 회원 다수가 대학 교육에 몸담고 있는 만큼 사학 재단 문제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슈라 할 것입니다. 

이에 사학 민주화 투쟁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길>>을 상영하고자 합니다.

<<길>>은 오랜 세월 사학 재단의 횡포로 몸살을 알아온 상지대 40년 사학 민주화 투쟁사를 다룬 다큐입니다. 

한국 사학 재단이 안고 있는 각종 문제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7월 지병으로 별세하신 故박종필 감독과 함께 이 영화를 만든 박주환 조감독과의 토론의 자리가 이어집니다. 

회원 여러분과 가족, 친구를 초대합니다. 

 

– 한국 철학 사상 연구회 2017년 9월 월례회 공지 

일시 : 9월 30일(토), 오후 3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내용: <<상지대 사학 민주화 투쟁 40년의 기록 – 길>> 상영 및 관람 후 박주환 조감독과의 토론

비용: 회원, 비회원 모두 3000원

(잘 아시다시피 한철연은 순수 학술 단체로 재정상 문제로 전액을 후원하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아래 언론 보도내용
………………………………………………………………..

<<상지대 사학민주화 투쟁 40년의 기록-길>>

비대위-`다큐인’ 제작 나서 
내달 서울 이대역서 시사회

【원주】원주 상지대 사학분쟁 민주화 운동이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된다.

상지대비상대책위원회는 다큐멘터리 제작집단 `다큐인’과 상지대 사학분쟁과 관련한 다큐 영화 `상지대 사학민주화 투쟁 40년의 기록-길’을 제작 중이라고 18일 밝혔다.

다큐 영화 길은 40년간 상지대 사학분쟁에 대한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상지대 구성원들의 인터뷰와 재연, 기록영상 등으로 그린다.

2002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버스를 타자’를 연출했던 박종필씨가 프로듀서로 참가했고 뉴스타파 시사다큐멘터리 `목격자들’을 연출한 남태제씨가 연출을 맡았다.

텀블벅(Tumblbug) 인터넷 소셜 펀딩업체에서 3,000만원 후원을 목표로 한 달 동안 후원자를 모집했으며 지난 14일 최종 마감 결과 104% 초과 달성해 337명이 총 3,144만7,900원을 후원했다. 

영화는 내부시사를 통해 다음 달 12일 서울 이화여대역 앞 필름포럼 1관, 15일 오후 7시30분 원주영상미디어센터 모두극장에서 각각 시사회를 할 예정이다.

강원 일보- 김설영기자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안내]한철연 3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내

 

  “B급 철학자들과 함께하는 정치수다”

–  [B급 철학](알렙)의 필자들과 함께하는 난상 시국토론

 

 

1. 일시 및 장소 : 2017년 3월 25일(토) 오후2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2. 토론 주제 : 2017년 대한민국의 정치를 논하다. 광장의 ‘정치’가 단순히 ‘통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촛불혁명(?)은 과연 진정한 변혁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3. 진행방식 안내

– 처음 시도하는 편안한 파티 다과식 난상토론 : 생맥주 1잔, 간단한 안주와 다과.

– 단순한 책소개가 아니라, 책에서 논의된 주제들과 연관된 질문을 미리 선별해서 필자들과 공유 토론하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유로운 토론의 장.

– 사회 및 진행 : 조은평(웹진 편집주간) / 이지영(학술1부장)

– 토론자 : [B급철학]의 필자 3인

  : 유현상(숭실대 강사), 한길석(가톨릭대강의교수), 박종성(호원대 강사)

 

– ※ 추신 : 토론회를 마치고 참여한 외부 회원분들 중 5명을 선정해서 [B급철학](알렙) 책을 선물로 드립니다.

 

* 본 토론회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1부와 웹진 (e)시대와 철학의 공동기획으로 진행합니다. 앞으로도 1년에 2회 정도 월례발표회 대신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기획을 마련할 예정입니다. 한철연 회원님과 독자님들 및 철학에 관심을 가지 모든 분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한철연] 10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생님들과 독자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10월 월례 발표회를 공지합니다. 10월은 철학자의 서재 live로 진행합니다.

진행은 버틀러의 저서 『혐오 발언』을 가지고 유민석 선생님이 하십니다.

“혐오와 혐오 발언”은 일베, 메갈리안 등의 활동이 촉발시키고 쟁점화되며 최근 한국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주제인만큼 회원 선생님들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일시 : 10월 21일(금), 오후 6시

* 장소 :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 주제 : 버틀러의 『혐오 발언』 – “혐오 발언에 대한 대항은 가능한가”

* 진행 : 유민석 선생님(서울시립대)

 


<아래는 유민석 선생님이 보내주신 철학자의 서재 live 내용 개요입니다>

법학자들과 운동가들은 혐오 발언이 말하는 것 뿐 그것이 행하는 것에 근거하여 혐오 발언에 대한 금지를 종종 추구해왔다 (랭턴, 1993).
그들에 따르면 혐오 발언은 일종의 언어적인 따귀로, 표현의 자유의 보호를 받는 ‘그냥 말’이 아니며(매키넌),
수신자의 복부를 강타하고 종속적인 지위로 못박아 두거나(마츠다),
열등한 자로 서열을 매기고, 그들을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발언 불가능하도록 침묵시킨다(랭턴).

그러나 말은 의도된 대로 항상 행위하지 못한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주디스 버틀러는 잠재적으로 고통을 주는 말을 심문하고 수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말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말에 대한 반복에 위치시키면서 (1997)
“아무도 상처를 반복하지 않고서는 상처를 극복할 수 없다”(p.102)고 주장했다. (Eichhorn 2001)

『격분하기 쉬운 말Excitable speech』에서 버틀러는 포르노와 인종차별적 혐오 발언은 어떤 형태의 법적 제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몇몇 페미니스트들과 반인종주의 이론가들을 비판한다.
버틀러가 인용하는 이론가들―레이 랭턴, 캐서린 매키넌, 그리고 마리 J. 마츠다―는 모두 발화의 규제에 대한 “평등equality” 논증의 어떤 형태를 제공한다.
즉 만일 말이 억압된 집단 구성원을 종속시키고, 주변화하거나 피해를 준다면, 말은 규제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J. L. 오스틴의 언어 행위 이론을 사용하면서 그리고 말의 열린 본성을 강조하면서, 버틀러는 이러한 논증들을 거부한다.
궁극적으로 버틀러는 그 같은 규제는 그렇지 않았다면 혐오 발언을 “재의미화resignigying”하고 “재상연restaging”함을 통해
이러한 말에 대한 도전을 불러일으켰을 자들을 침묵시키도록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혐오 발언에 대한 어떤 규제를 실행하는데 반대할 것을 조언한다. (Schwartzman 2002)

혐오 발언이란 무엇이며, 혐오 발화자는 누구일까?
혐오 발언에 대한 대항은 가능한가?
버틀러는 어째서 혐오 발언에 대한 발화수반행위론에 반대하며,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 규제나 처벌을 반대하는가?
주디스 버틀러가 『혐오 발언 Excitable Speech』에서 개진한 발화효과행위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201608161942592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크기변환_한철연약도

[한철연] 2016년 9월 월례발표회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생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 1부입니다.

세상을 삶아 먹을 듯했던 여름의 기세가 하루 아침에 꺾이고 거짓말처럼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학술 활동에 탄력 붙으시길 바랍니다.

9월 월례 발표회를 공지합니다. 9월에는 남기호 선생님께서 헤겔 관련 연구 논문을 발표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가을의 정취를 한철연에서 헤겔과 함께 즐겨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회원 선생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10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도 기대하실만 자리일 것입니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9월 월례회 공지

*일시 : 9월 23일(금), 오후 6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발표자 및 논문 제목: 남기호 선생님(제주대)

: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 헤겔의 『철학백과요강』(1827) 예비개념을 중심으로>

*논평자: 이정은 선생님 (연세대)

 

<논문 개요>

본 발표는 『철학백과요강』 재판 예비개념 부분에서 전개된 헤겔의 변증법을 객관적 사유의 구조로서 분석한다.

헤겔에게 논리적인 것이란 존재와 직접적으로 매개된 객관적 사유규정들이다.

먼저 칸트 이전의 순진한 형이상학에서 객관적 사유규정은 대립 의식 없이 직접적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 사유규정은 유한한 것으로서 다른 객관적 사유규정과 대립된 것으로 밝혀진다.

그 다음으로 순진한 경험론과 비판 철학은 객관적 사유규정들을 자신들의 타자와의 대립 속에서 매개된 것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타자와 대립된 매개는 제약된 유한성을 의미한다.

끝으로 형이상학화하는 경험론 내지 직접지의 철학은 이러한 매개 자체에 대립하는 무한한 직접성을 주장하지만,

이는 유한자와 분리된 공허한 비약으로 귀착한다.

이에 반해 매개 자체의 지양을 통해 설정되는 직접성은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객관적 사유의 변증법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은 객관적 사고의 세 발전 입장들은 각각 논리적인 것의 추상적 오성적 측면, 변증법적 부정적-이성적 측면, 사변적 긍정적-이성적 측면에 해당한다.

본 발표는 이렇게 칸트 이전 볼프 형이상학, 칸트의 비판철학 그리고 야코비의 직접지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헤겔 변증법의 기본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논의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직접적 규정의 매개와 이 매개 자체의 지양을 통한 직접성의 무한한 긍정적 규정 가능성의 관점에서

헤겔의 객관적 사유의 변증법은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 10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예고

일시 : 10월 21일 (금) 오후 6시

진행 : 유민석 선생님(서울시립대)

주제: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언>

유민석 선생님은 버틀러의 <혐오 발언>의 역자이십니다.

근래 대한민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현상이 각종 혐오 발언과 페미니즘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자리가 아닐까 합니다.

2016081619425923

들뢰즈의 행동학(?thologie)과 되기(devenir) 개념의 실천적 의미[2월 월례발표회]

?[2014년 2월 월례발표회]

 

들뢰즈의 행동학(?thologie)과 되기(devenir) 개념의 실천적 의미

 

발표: 김은주(동덕여대)
후기: 김범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4년 2월 26일. 한철연에서는 <들뢰즈의 행동학과 되기 개념의 실천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김은주 선생의 논문 발표회가 진행되었다. 많은 인원이 참석하지 못해서 아쉽기도 한 자리였다. 그렇지만 이 주제는 지금 시대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되기 코스프레는 매우 훌륭하다.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은 약자를 보듬고 배려하는 상징처럼 간주된다. 이 코스프레와 함께 코드화된 폭력만 잘 활용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다. 물론 취임 1년 후에도 안정적인 지지율 50%도 가능하다.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 참으로 여성-되기 코스프레는 위대하다. 또한 이런 사건도 기억해 볼 수 있다. 어떤 여성은 어머니의 심정(엄마 코스프레?)으로 회사의 노동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바로 여성의 힘이다! 이런 시대에 여성되기는 오히려 구조적 파시즘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런 코스프레가, 이런 어머니가 여성-되기일까? 여성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여성-되기라는 개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 들뢰즈의 행동학, 특히 되기의 문제는 비판과 동시에 지지라는 양가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음가짐과 문제의식으로 들뢰즈의 행동학을 해석하면서 여성되기의 가능성을 연구한 성과를 정리하는 김은주 선생님의 2월 발표는 무척이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배치부터 심상치 않았다. 2시간을 훌쩍 넘는 발표와 토론이었지만, 여기에는 모종의 지지와 비판이라는 이중주가 넘실거릴 수 있는 배치였다. 프랑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성적 태도로 철학을 접근하는 사람들과 늘 대립각에 서야만 한다. 그리고 늘 한편에서 조용하게 혼잣말을 한다. ‘문제제기부터 잘못됐어!’ 발표자인 김은주 선생님(이하 발표자로 명한다.) 오른쪽에는 가따리 전공자가, 반대편 왼쪽에는 여성철학이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공부한 분이 앉았다. 이런 배치는 오묘한 이중주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임과 동시에 프랑스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긴장의 강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발표자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 설정부터 설명한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윤리적 작업은 규범을 따르는 의무의 논리에서 벗어나, 힘을 실행하고 존재하는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는 윤리적 논의를 ‘~해야만 하는 바’라는 형식적 보편타당성을 따르는 자율적 의무의 입각점에서가 아니라 존재 방식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가치의 문제를 새롭게 발견하는 비판과 구축의 작업으로 접근한다. 그의 입장은 도덕을 비판하는 니체를 계승하고, 존재의 역량(puissance)으로 설명하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 중심주의에 의해 재단된 삶에 저항하며 새로운 존재론적 조건을 생성해내는 행동학의 정치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다.”

ⓒ 서영화

ⓒ 서영화

문제 설정부터 많은 설명을 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발표에서는 니체의 선악비판보다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특히 신체의 역량에 관한 문제에 집중해서 행동학의 의미를 접근했다. 발표 후 토론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신체의 의미부터 보충설명하고 싶다. 신체란 구체적으로 인간의 신체, 동물의 신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모두 신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들뢰즈의 제자인 일본 철학자 우노 구니이치는 corps(신체)라는 말이 한자 문화권에서 쓰는 體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근대에서는 신체에 대해서 심과 신의 이원론적 대립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스피노자나 니체의 경우에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무의식이나 심층적 의식의 지위를 신체 개념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나아가 신체는 변이의 힘을 갖고 있는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발표자의 경우에는 이를 신체의 역량을 변용과 변용능력이라는 두 축에 따라 정의하면서 역량 강화의 윤리적 측면을 정리하였다. 이로부터 생성하는 되기의 개념을 힘들(초기 존재론에서는 강도로 설명한다)의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고 설명되는 지평으로 나아간다.

발표자는 이런 정리를 한다. “신체를 규정하는 지점에서 보자면, 경도는 신체들 간의 관계를 제시하며 신체들의 결합과 합성을 의미하는 변용(affection)이다. 위도는 한 신체에 있어서 역량의 증가와 감소라는 강도적인 변화 상태와 그 정도를 보여주는 정동(affect)이다.” 그리고 이 정동은 새로운 신체를 구성하는 개체성, 즉 이것임(hecc?it?)으로 나타난다. 이것임은 원래 둔스 스코투스 학파가 존재들의 개체화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 haecceitas에서 유래한다. 들뢰즈의 경우 이 개념을 사건과 관련해서 사용하는데, 사건은 인칭적인 자아를 구성하지 않는 개체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임은 정동을 통해서 신체를 조성하는 생산하는 되기 개념과 만나게 된다.

발표자는 되기(devenir)의 의미에서 신체 결합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즉 되기의 블록(bloc de devenir)으로서 둘 사이의 관계성으로 발전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는 개체화가 가능한 심층적인 접힘과 펼쳐짐을 해석할 수 있다. 발표자는 공진화(co-evolution)를 설명할 수 있는 이중 포획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되기 개념이 실재의 변화 ‘과정’이며 ‘상호 변용’의 결합으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런 해석 안에는 신체의 역량 강화라는 일차적인 의미와 함께, 여기서 비롯되는 의지적 주체의 도덕을 비판하는 함의가 깔려 있었다.

이 설명 안에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되기가 마치 상대주의, 심지어는 허무주의적 색채로 가득하다는 비판의 날이 설 수 있다. 특히 되기가 어떤 당파성을 견지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 들뢰즈의 되기가 막연하게 신체적 역량 강화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어쩔 수 없이 파시즘적 역량 강화의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던질 수 있는 비판의 내용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밝히기 위해서 발표자는 되기의 구체적 실천의미를 정리했다. 되기는 인간 중심주의에 의해 벗어나서 그 구분의 경계를 횡단하고, 다수의 권력 지점이라는 중심으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수적인 것의 되기는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존재 방식에서는 자아 중심적 사고, 인간중심적 사고를 해체하고 도처에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익명적 ‘아무개’로서 윤리 정치적 존재론의 의미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런 정치존재론은 자유로운 인간들의 합의체(합의라는 신체)로서 새로운 형태의 존재 조건들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로부터 이미 주어진 수동적인 역량, 혹은 이미 주어진 절대적 권력 앞에서 복종 대신에 도주와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되기의 과정이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는 여성되기에 해당한다.

중국의 지식(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10월 월례발표회 후기]

?[2013년 10월 월례발표회]

 

중국의 지식(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발표: 조경란(연세대)
후기: 진보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북아시아에서 센카쿠 열도(중국명:댜오위다오) 분쟁에 이어 이어도를 중심으로 한중일 3국의 방공식별구역(ADIZ) 갈등이 연일 고조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이 중재자로 개입하면서 동북아시아의 영토분쟁 문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첨예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제3자의 일인마냥 이 문제를 좌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동북아 정세를 감안한다면 지난 10월에 있었던 월례발표회에서 장장 3시간 30분에 걸친 논의도 어찌 보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주제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발표와 토론이 진행된 발표회는 근래에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조경란 선생님이 들고 나온 문제의식은 단순 담론을 넘어 우리 주위 현실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반드시 우리의 가장 가까운 미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급변하는 동아시아에서 그 중심 자리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중국이다. 조경란 선생님의 이번 발표에는 현재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중국의 부상에 대해 학자적 양심에 의한 견제와 비판이 담겨 있다. 특히 정치경제적인 중국의 부흥에 편승해 우러러 박수만치는 친중화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인문학적 분석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앞으로 책으로 출간될 이번 논의에서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의식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동아시아의 역사궤적에서 중국의 서양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던지는 질문이다. 바로 근대성 얘기이며 서구의 근대성과 동아시아에서 근대란 과연 무엇이었는지의 문제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중국사회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북경거리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오와 마주보게 된 부활한 공자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번 월례발표회는 중점적인 이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한 전초적인 과정의 일환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 내부에서 중국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의 경제성장 이후 양지에 주목하는 낙관론이다. 경제성장을 통한 중국인들 스스로 자신감의 소산이다. 또 하나는 비관론으로 중국의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신좌파와 유교중국을 꿈꾸는 자들이 힘을 합해 세계문명으로써 바라마지 않는 제국주의를 경계하고 이런 모습에 거리를 둔다. 다시 말해 비관론자들은 세계를 지배해 왔던 유럽적 보편주의(근대성) 문제에 대해 중국이 새로운 보편으로서의 근대적 민주주의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런 중국을 두고 “눈물의 계곡을 거쳤다”고 했다. 중국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국가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았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국가능력은 이미 보통을 넘어섰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빈부의 차이와 화려한 도시에서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민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지금의 중국이 제대로 된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동양에서 능력(能)은 곧 덕(德)을 말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후진타오 전 국가 주석이 달성하자던 전면적 소강(小康)사회가 중국의 정치적 부흥과 경제적 성장만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면, 또는 청중들이 이것을 염두하고 소강을 이해했다면 현대 중국에서 ‘인(仁)에 바탕을 둔 가족윤리’의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인 확장은 불가능하다. 그런 사회에서 ‘인(仁)’은 이미 사회의 최소단위에서 형성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부에서 보는 중국은 굴기에 대해 고무적이지만, 외부에서 보는 중국은 위중해 보인다는 것이다. 내부에서는 외부에서 보이는 것들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 이제 중국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지금 중국의 정치사회권의 분위기를 보자면 신좌파는 극우가 되어가고 있고 이 신좌파와 대륙 신유가의 관계는 서로 밀접해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유학의 ‘화(和)’개념을 통해 뒤에서 유가의 등을 밀고 있지만 동시에 통제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은 지난날 중국의 사회주의가 중국 내부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면서 지젝의 지적처럼 현재 중국 사회주의의 경제적 성공은 사회주의의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의 권위주의가 만나 결국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형성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중국은 과거 유교의 ‘천하’개념을 통해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동아시아에 대한 수평적 인식을 포기한다. 아시아가 중국이고 중국이 곧 아시아인 것이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중국모델론은 ‘문명-국가(civiliztion-state)’의 틀을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이것이 중국 지식인들이 고민하는 핵심문제이다. 중국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이른바 유교사회주의공화국을 주장하는 간양(甘陽)과 같은 사람은 ‘대중화문명-국가’ 개념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21세기 중국 사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경란 선생님은 이 대목에서 중국 21세기의 핵심개념인 ‘문명-국가’의 논리가 과거 유교적 천하통치주의였던 ‘천하-문명’과 과연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한다. 만약 중국모델론이 그 내용에 있어서 인문학적 통찰에 근거한 합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모더니티와 민주주의를 보여줄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헤게모니에 의해 국가와 ‘공모’한 중국모델론은 결국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표출할 수밖에 없다.

 

?박영미

 

마치 과거 중국 제국주의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듯하다. 그런데 과거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국은 19세기 말 서양의 제국주의의 형태와는 다르게 당시 조공제를 통해 어느 정도 평화적 체제를 유지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왕후이(汪暉)는 자신의 분석을 통해 이 조공체제를 재구성하여 현대에도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혹시 중화문명으로서 중국이 편제한 동아시아의 문명은 서구의 문명과는 다르기 때문에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서구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이것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마치 B급 중화반점식 짬뽕논리와 같은 막무가내 낙관론은 아닐까? 조경란 선생님은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역으로 서구도 중국과 같은 배경이었다면 국가 관계에 조공제를 썼을 것이고, 이 조공제라는 것 자체가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고는 하지만 상호필요에 의해 위선을 전제한 서로의 주고받기의 평화 유지 방법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논의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중국의 사회주의가 서구를 극복한 대안체제였는가? 라는 질문에 바로 ‘Yes’라고 대답할 수만은 없는 중요한 지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사회주의는 서구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중국 사회주의도 근대성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중국의 상황이 독립적인 지식인들의 윤리적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쉽지 않고, 사회 안에서 일정한 공론장도 형성되기 어렵다고 본다.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국가와 자본의 지배가 강력하며 국방비 지출 보다 국가 통제 시스템을 위한 지출이 더 많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식인이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중국의 정치경제적 신장에만 기대하여 교류를 위해 중국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 접근하면서 중국 내부의 문제나 중국과 우리 사이의 문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소중화주의 아닌가.

실패한 서구의 극복 차원에서, 또는 서구의 대안으로써 근래 사람들은 중국을 주목한다. 이런 관심은 서방 중심의 세상은 이제 종결되었다는 전제 아래, 중국은 기존의 것들과는 뭔가 다르며 유럽적 보편주의와 미국적 보편의 가치를 뛰어넘은 새로운 보편을 제시할 수 있다는 기대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서구의 좌파들이 중국의 좌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결국 중국의 모순적인 현 상황을 눈감고 지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한국에서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마찬가지 상황일 것이다. 조경란 선생님의 언급처럼 보편성은 가치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현실을 견인해 내는 것이지만 보편적 보편주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아닌가. 서양좌파들이 중국의 좌파들에게 기대하는 것 자체가 근거가 없다. 자기들의 사회와 체제는 문제제기하고 비판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에는 희망을 건다. 어떻게 중국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보이지 않을까? 이들은 세계 중심의 힘이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보는 것 같다. 그들은 이를 문명의 전환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문명론은 매우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편주의라고 불렀던 서구식 지식구조가 동서양의 패권구도, 현실사회의 강약구도에서 불평등을 은폐할 뿐 아니라 양극화를 조장하고 유지해오는 데 어떤 작용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와 함께 현 중국 자본주의가 ‘괴물자본주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에서 중국 내부의 ‘민족-국가’ 지배체제와 자본의 이중지배, 그리고 그 아래에서 어느 때보다 주변화 되고 있는 민(民)과 이(夷)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발표문 중에서 –

중국이 향후 50년 동안 어떤 새로운 대안적인 틀로써 ‘보편적 보편주의’를 제시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사실 어느 정도 지켜봐야할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논의한 내용들을 통해 현 동북아시아 정세를 두고 본다면 그다지 긍정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중국의 미래를 둘러싼 이해방식은 곧 한국의 미래에 대한 이해방식과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연구자로써 조경란 선생님 자신도 말한바 ‘또 하나의 도전’인 셈이다. 이 도전이 어떻게 진행될 지도 우리로써는 관심 있게 지켜볼만하다. 이번 발표회에서 논의된 내용들의 흥미진진함은 앞으로 출간될 책에서 더욱 풍부한 식견과 내용을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8월 월례발표회 후기]

?[2013년 8월 월례발표회]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후기: 박은미 (건국대)

 

 

 

어렵다. 책 제목 너무 멋있는데 멋있는 만큼 내용이 어렵다. 토론 사회를 맡은 죄(?)로 6만원이 넘는 거금을 책값에 투여하고 두꺼운 책을 마주 했다. ‘으와 좋겠다, 광제형은…이렇게 멋있는 강해서를 내시다니! 나는 흉내도 못 내겠는 걸!’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막상 강연회에서 나는 사회를 보느라 내 질문을 삼켜야 했다. 열띤 질문을 비집고 사회자가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은 후기라기보다 사회자의 못 다한 질문을 하는 글이 될 것이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나의 이해가 맞는가 하는 확인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후설 연구서로 『의식의 85가지 얼굴』(그린비), 퐁티 연구서로『몸의 세계, 세계의 몸』(이학사)등을 써오신 내공으로 이제 퐁티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사르트르 강해까지 쓰셨으니 현상학을 거의 다 훑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으로는 쓰지 않으셨지만 하이데거와 푸코에 대한 연구를 거쳐 사르트르에까지 이르셨으니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철학의 제 1의 물음이 ‘도대체 이 모든 것은 왜 존재하는가?’임은 철학에 관심 가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그리고 이 문제가 궁금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사실은 이 질문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리도 외로운 것이다.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든 모르든 말이다. 자기 안의 어두움이나 막막함을 외면하고 회피하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질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시달리고 있다. 도대체 왜 존재해서 이렇게 고통스럽냐는 말이닷!

모든 철학자들의 철학은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특히나 이 질문을 상당히 성실히 물고 늘어진 역작이라 생각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즉자 존재의 우연성’을 열심히 입증하고 있다. 존재는 단적이다. 존재가 왜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은 인식에서 나온다. 이 놈의 존재는 인식과 상관없이 ‘그저 있다’.

ⓒ 박영미

“존재는 그 자신으로 꽉 차 있고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존재는 그 자신에게 불투명하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존재는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는다. 존재가 스스로를 의문시한다면 이미 그 존재는 그저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광제 선생님은 강해에서 “사르트르는 즉자를 무한한 밀도를 지닌 존재의 충만으로 보고, 그 존재의 감압에 의해 의식 즉 대자가 생겨난다고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쉽게 표현할까?

생각해보자. 우리 아이를 기를 때 나는 아이를 기르는 과정이 ‘행복하다’고 의식하지 못했다. 지나놓고 보니 행복했다. 아이가 걷고 말을 하고 재주를 하나씩 늘려 갈 때마다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 성장에 순수하게 기뻐하면서도 나 스스로 기뻐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 때도 생활비 걱정, 어르신들 걱정이 있었으니 다른 걱정거리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순간만큼은 기뻤던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 인식은 늘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늦게 찾아오기 때문인 것 같다. 행복은 사라진 후에야 빛을 낸다는 영국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정말 행복하면 자신이 행복한지 어쩐지 판단할 새 없이 그 순간 충분히 행복해서 행복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행복하기에 바빠 행복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참으로 인식에로 저주 받았다. 행복할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행복이 달아날까봐 무서워요”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한 순간에도 행복하지 않을 순간에 대한 걱정을 미리 당겨 함으로써 행복을 상실한다. 행복할 때 그저 행복하면 좋을 것이다. 슬플 때 그저 슬프면 될 것이다. 왜 나는 슬퍼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편할 것이다. 그러니까 쇼펜하우어 말이 맞다. 인간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표상 때문에 괴롭다! 존재는 그저 존재하면 되고 존재는 누군가에게 인식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데 인간은 특이하게도 중뿔나게도 그 놈의 인식을 해댄다.

그러니까…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이라는 책 제목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나에게는 이렇게 이해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충만하다, 그런데 인간 인식이 존재를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즉, 존재로만 충만하지 않게 되는 순간, 간극이 현상적으로 존재해버린다. 그래서 이 간극으로 인해 인식이 가능해진다. “즉자라는 존재 속에는 최소한의 공백(le moindre vide)도 없다. 즉 무가 끼어들 수 있는 최소한의 틈(la moindre fissure)도 없다.” 존재에 이 놈의 무를 집어넣는 것이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다. 이 놈의 무를 집어넣지 않고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두면 될 것을!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로 살면 될 것을! 그게 바로 해탈일 것인데 말이다….

무를 집어넣지 않으면 현존과 존재가 분리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괴롭지 않을 것이다. 즉 그 순간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즉자대자적인 신적인 경지에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존의 삶을 이끄는 우리로서는 끝없이 존재와의 완연한 일치를 알게 모르게 추구한다.”는 조광제 선생님의 설명은 해탈 열반의 경지에 오르고자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나도 잊고 너도 잊고 나와 너의 관계도 잊는 순간을 인간은 영원히 추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한, 우리는 이런 순간을 단지 순간으로서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저주받은 인간의 존재양식이므로!

제가 제대로 이해했나요?

P.S. 조광제 선생님께서는 박은미 선생님의 질의에 대해 ‘잘 이해했다’는 답변을 주셨습니다.(학술1부장)

우리에게 ‘철학함’이란 무엇인가?[3월 월례발표회]

?[2013년 3월 월례발표회]

 

우리에게 ‘철학함’이란 무엇인가?

후기: 박영균 (건국대 HK 연구교수)

 

 

 

윤구병 선생의 <철학을 다시 쓴다> 강연을 들은 후 …

 

2013년 3월 8일 오후 5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에서는 <철학을 다시 쓴다>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열렸다. 이번 강연회는 윤구병 선생이 지난 2월 12일 보리출판사에서 출판한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라는 책에 담긴 그의 사유를 함께 나누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그의 책, <철학을 다시 쓴다>는 <시대와 철학>에 연재되었던 “있음과 없음에 관한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 <있음과 없음>이라는 책의 후속작이기도 하다.

윤구병 선생은 한철연의 역사이기도 하다. 1987년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이고자 했던 젊은 소장 철학자들이 모여 보수철학계에 반기를 들고 한철연의 창립을 모색하던 시절, 그 주춧돌이었을 뿐만 아니라 1989년 한철연의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그 후로 장시간 단독대표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당시, 청춘의 열정 속에서 반역의 철학을 꿈꾸었던 선배들도 이제는 머리 희끗한 장년이 되었으며 한철연의 회원들도 ‘출애굽세대들’로 채워졌다. 그것이 역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당에는 삼삼오오 모여든 40-50여 명의 청중들이 강연을 듣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거기에는 보리출판사 관계자들과 선생을 사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연탁자 위엔 ‘막걸리 한 병’이 놓여 있었고 윤구병 선생은 탁자 한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칠판 위에 ‘時空間 四次元 連續體의 存在論的 根據’라고 썼다. 순간적으로 ‘뭐지?’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어 선생은 이렇게 써야 사람들은 유식한 철학논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우리말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수입된 언어라고 말을 하면서 다시 지웠다.

사진: 박영미 학술1부장

우리말로 하는 철학, 그것은 윤구병 선생이 평소에 추구해왔던 길이기도 했다. 그는 ‘서양고대의 존재론’에 대한 탐색을 우리말 속에서의 사유하는 존재론으로 바꾸어놓았다. 존재와 무 대신에 ‘있음’과 ‘없음’의 철학을 사유하는 것도 모두다 이 때문이다. 우리는 평상시에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와 같은 말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있음은 있음이고 없음은 없음’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으로부터 운동과 생성, 그리고 ‘함’과 ‘됨’의 사유를 이끌어낸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참이며 ‘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거짓이다. 마찬가지로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을 때’, 그것은 좋은 것이며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을 때’ 그것은 나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식민지 지식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로서, “참과 거짓, 좋음과 나쁨을 가려낼 수 없는 이들이 어떻게 바른 생각을 일깨울 수 있고, 거짓에 맞서 좋은 앞날을 가꿀 올곧은 뜻을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한철연의 정신 또한 이로부터 출발했었다. <시대와 철학> 두 번째 창간호에서 한철연은 “현실로부터 출발하되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 … 초월적인 선천적인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독백이나 철학자들끼리의 속삭임, … 외국에서 차용”하기만 하는 반시대적이고 현학적인 철학들을 비판하면서 “주체적 철학”의 길을 주창했다. ‘주체적 철학’은 근원적 실천이자 생산자적 철학이며 비판적 철학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보적 핵심을 포착해 내고 이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시대에 되돌려줌”의 철학이다.

그 선언이 있은 이후, 벌써 20년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 동안 우리는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경험했으며 위로부터 진행된 수동혁명으로서 ‘포스트 87년 체제’와 ‘포스트 민주주의’, ‘포스트 민주주의’, ‘포스트 맑스주의’, ‘포스트 구조주의’를 거쳐 다시 2013년 현재 1972년 ‘유신’의 퍼스트레이디가 또 다시 대통령이 된 2013년 오늘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한철연은 무엇을 했는가? 돌이켜 보면 한철연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신에 한철연은, 그 운동을 가능케 했던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으로 철학함의 의미를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까?

윤구병 선생의 이번 강연과 2월에 있었던 이규성 선생의 <한국현대철학사론> 강연은 바로 이런 ‘한국에서의 철학함’의 의미를 2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되살리는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1994년 내가 처음 낙성대역에 있었던 한철연의 문을 두드렸을 때, 비좁고 초라해보였던 한철연은 철학적 사유함을 추동하는 열정과 낭만, 분노와 깨워있음이 있었다. 그 때 우린 분노의 술잔과 탄식의 넋두리 없이 철학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때 시대모순에 저항하는 ‘시대의 혼으로서 철학’이라는 모토와 함께 ‘한국에서의 철학함’이라는 ‘주체적 철학함’에 이끌렸다.

그러나 그 이후, 한철연에서 ‘시대의 혼으로서 철학’도, ‘한국에서의 철학함’도 한철연의 기조가 되지는 못했다. 철학을 다시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은 ‘없어야 할 것들이 있음’에 대한 분노와 ‘있어야 할 것들이 없음’에 대한 탄식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간 우리는 밀려들어오는 서양철학과 옥죄여오는 현실 속에서 ‘있음’을 사유하고 ‘없음’의 부정적 몸짓이 가지고 있는 ‘일깨움’의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그 속에서 ‘없어야 할 것’과 ‘있어야 할 것’들, 그리고 ‘함’과 ‘됨’을 사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강연을 통해서 다시 부여잡아야 할 화두는 ‘한국에서의 철학함’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탄생했던 많은 진보학계들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오늘날 명맥을 유지하기도 버거워하고 있다. 그들은 한철연보다 먼저 ‘비상’했으며 먼저 ‘추락’했다. 그러나 한철연은 가장 늦게 날개를 폈으나 아직도 그 날개짓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을 지나 어두운 ‘밤’을, 그것도 동 트기 직전에 가장 어두운 칠흑의 밤을 잠 못 든 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다시 ‘한국에서 철학함’을 보았다. 한철연의 20년 역사만큼이나 긴 시간이 흘러 이번에 우리는 다시 이규성 선생을 통해서 ‘시대모순’과 싸워야 했던 ‘한국현대철학의 사상사적 고뇌’를, 그리고 윤구병 선생을 통해서 서구의 존재론이 한국적 사유의 독특함과 보편성으로 전화하는 ‘주체적 철학함’의 열정과 길을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1980년대 중반 한철연이 시작했을 때와는 다른 시작이며 다르게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그 다른 시작을 알리는 것은 ‘한국에서 철학함’이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그것을 오늘에 되살린 그들이 아니라 동일한 짐을 지고 있으나 그들과 다른 철학과 경험 속에서 살아왔던 한철연의 ‘동학들’이다. 거기에는 ‘하나(있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없음’에 빠져들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디우가 말했듯이 ‘철학’은 항상 소피스트나 라캉과 같은 ‘반철학’과 함께 해야 한다. 왜냐 하면 다수만이 생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에 대해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단지 선언할 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 ‘선언’과 함께 이 새로운 시작을 사유해야 한다.

사진: 박영미 학술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