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 유랑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6

유랑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가느다란 선위에 걸린

마음을 따라

공간과 공간 사이를 유랑한다.

소금 사막에도 있고

산토리니에도 있고

노르웨이 숲에도 있고

흐릿한 구름사이로

파란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파랑색도 있고

회색도 있고

내 사랑도 있었다.

잃어버린 토끼도 있고

잊어버린 강아지도 있고

잊어버린 작은 강아지풀도 있고

잃어버린 청개구리도 있고

언제나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는

있는 것이 많다.

 

그렇게 보송보송

작은 기억이 조각조각

아슬아슬 걸려 있다.

 

2016.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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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털이 보송보송한 벌레가 아니지만 벌레 같은 현상을 보며 어렸을 때 추억이 생각납니다. 자연은 모두 내 것이었고 나의 세상이었습니다. 한때는 그랬습니다. 길을 쉼 없이 갈길 가는 털북숭이 벌레를 들여다보며 깔깔 웃고, 군집을 이룬 까만 개미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들을 보며 즐거워하며 작고 작은이들의 신기한 우주를 만나 행복을 느꼈습니다. 넓은 들판에 파란 하늘, 흐린 하늘, 바람, 나무, 벼, 수많은 풀벌레들,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들, 산토끼, 강아지, 빨간 고추잠자리, 푸릇한 작은 잎들, 밤, 살구, 모과, 감나무가 있는 그 시간의 조각을 추억하면서 내게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많음을 잊고 살고, 추억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 안에는 많은 것들이 살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있었음을 문득 깨닫습니다. 어린 시절의 꿈은 더 크고 넓게 자랐습니다. 나의 삶은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곳,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만 같은 큰 꿈도 생겼습니다. 그곳에는 산토리니도 있고 그곳에는 노르웨이도 있고 그곳에는 큰 호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공간에 현재의 공간에 머물러 있는 그들을 불러 행복한 조각조각들의 향기를 맡고 보고 만져보고 들어보는 유랑을 떠나봅니다.

섦 – 노래 위에 상인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0

노래 위에 상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퍼석퍼석 모래 위로 나는 새는 바람이었다.

그래도 삶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구름 위에 핀 꽃을 노래하는 슬픔의 변명이 놀라워

그들은 꽃을 멀리하였다.

기억에 없는 기억을 떠올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붉은 입술로 노래를 하고

익지 않은 푸른 사과는 아쉬워 바람에 춤을 춘다.

 

아직 낯선 사과에 겨울바람이 차곡차곡 쌓인다.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삶은 너무 낯설고 익지 않아 항상 거칠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황무지에

노랗게 피어나는 나비의 향기가 그립고

아직 익지 않은 밤, 푸르게 익어가는

한 여름 밤의 녹색 바람이 그립다.

부슬부슬 알 수 없는 비를 그리며

갓 구은 듯 한 초승달 한 마리가 반짝반짝

창밖으로 떨어지는 밤을 그리워한다.

그는 수많은 밤을 모아 곧 시장을 열 것이다.

그 추억의 밤을 누군가는 곧 사서 모을 것이다.

 

2017.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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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딱 경험한 만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덜 익고 푸릇한 사과처럼 모든 것이 그 크기만큼 낯설고 그 크기만큼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푸른 사과가 낯설지 않고 익숙해지는 것은 수많은 밤을 그 안에 담기 때문입니다.

 

익지 않은 열매는 많은 밤을 담을 것입니다. 푸르른 여름밤 풀냄새가 하늘에 가득하고 달빛에 반짝이는 빵 냄새가 나는 초승달과 수많은 별들과 뜨겁고 시원한 여름밤과 꽃이 피는 봄밤도 같이 담고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는 낯익은 가을밤도, 모든 것을 세상에 내던져 준 하얀 겨울밤을 차곡차곡 쌓은 사과의 낯설었던 밤은 누군가에게 달콤한 꿈이 됩니다. 상인은 수많은 밤을 팝니다. 작은 샘에 동그랗게 뜬 달을 떠서 누군가의 마음에 담는 것처럼 수많은 추억이 담긴 작은 우주를 경험하게 해주는 그 밤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삶들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보다 멀리 바라보는 삶을 때로는 갈망하며 삶은 항상 그리운 날이기도 합니다. 늘 꽉 찬 듯 부족한 것이 그리움입니다.

섦 -빈집 II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6

빈집 II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하얀 눈이 이 세상을 채우고

따뜻한 햇살에 세상이 비워지고

사람의 흔적이 없는 빈집 지붕 위에는

따뜻한 공기가 채워지고

또 다시 빈집은 비워져 있는 공간을

과거의 기억으로, 찬란했던 빛으로 채워 놓고

햇살이 지나간 흔적을 어둠으로 비우고

때로는 혼자만의 어둠으로 상실을 채운다.

나의 곁에 항상 머무를 것 같은 빈집은

채우기 위한 준비를 한다.

어둠의 공기로 닦아내고

먼지로 추억을 닦아내고

무언가 비어있다는 것은 채울 수 있는 것이고

채우지 않아도 여백의 즐거움이 있다.

 

2017-2-28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봄의 향기가 올 것 같으면서 느리게 겨울을 붙잡던 계절이 가고 새롭게 시작할 게으른 봄의 열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공간 속에 필요한 물질을, 그리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물질들을 채우는 것이 자주 습관적으로 반복됩니다. 겨울의 추위 속에 하얀 눈이 세상을 하얗게 채우고 따뜻한 햇살이 찾아와 하얗게 다시 비우고 북적북적 채워져 있는 집과 집 사이 어느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빈집은 누군가의 추억, 과거의 흔적, 찬란했던 삶을 채웠다가 어둠의 공기로 닦아내고 먼지로 추억을 닦아내고 새로운 희망을 채워 가기 위해 낯선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득 채우지 않아도 비어있는 삶이 즐겁다는 것을 가끔 잊고 살기도 합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며[4.16]

4.16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너와 내가 타지 않은 세월호에

가슴이 타지 않은 세월호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망각의 강을 건너

그래서 회피하고 싶은 공간을 어지럽히고

무차별하게 밟히고 또 밟혀서

잊혀진 꽃이 된 내 안의 붉은 꽃은

너와 내가 탄 세월호에

가슴이 타는 세월호에

고통으로 짓이겨 세월의 꽃을 밟는다.

모두가 타는 가슴으로 피어나는 세월은

우주 끝을 돌아 돌아 다시오는 세월

 

세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줘

깜깜한 어둠이 차오르는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을 간절히 찾아 헤매던 그 손길

이미 흐려지고 잊혀지고 지워져 가는 꽃들

 

붉은 꽃들, 날개를 피어 우주의 한 줄기 빛으로 피어나줘

 

 

 


세월호를 기억하며 2016-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