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50-시문학의 장르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50-시문학의 장르

 

1)

문학의 장르 문제는 아주 골치 아픈 문제이다. 우선 문학이 포에지를 넘어 가사[가요]나 산문[에세이,웅변 등]까지 포함하기 때문인데, 헤겔처럼 문학을 시문학으로 축소해서 본다 하더라도, 그 장르를 구분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요즈음 새로운 장르가 출현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내려오던 전통적 구분 즉 서사시, 서정시, 극시라는 구분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근대 시문학의 대표적 장르인 소설은 어디에 집어넣어야 될까? 보통 소설은 보통 근대적 서사시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그게 적절한 분류가 될까?

필자는 문학 전공자가 아니기에 현재 문학 장르 구분에 관한 논쟁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다행히 필자가 어릴 때 읽었던 ‘문학이란 무엇인가(김현 편집)’에 장르 구분에 관한 논의가 실려 있으니 참조해 보자. 그 논의는 Woffgang Kaiser의 장르의 구조라는 논문인데, 그는 이 세 가지 장르를 전통적으로는 표현형식에 따라서 구분했다고 말한다. 그는 서사 문학(서사시와 소설을 포함)은 서술하는 형식이며, 서정시는 표출하는 형식이며, 연극은 연기[재연]하는 형식이라 한다.

표현형식에 따른 구분을 결국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언표내적 사용: illocutionary)에 따른 구분인데, 카이저는 H. Junker의 구분을 따라서 언어를 묘사하는 기능(서사문학), 표현적 기능(서정시), 그리고 요구하거나 유발하는 기능(연극)으로 구분했는데, 그 차이는 연극을 연기라는 표현형식에서, 언어적 요구나 유발하는 기능으로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 [1]

융커는 언어의 세 기능은 명확하게 나누어진다기보다는 혼재하며 예를 들어 ‘불이야!’라는 말은 묘사하고 표현하고, 유발하는 모든 기능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그 중 언어의 어느 기능이 주로 사용되었는가 하는 상대적인 문제에 그친다는 것이다.[2]

 

2)

헤겔이 장르를 구분하는 원칙은 위에서 언급한 일반적 원칙에 비교해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헤겔의 분류 원칙은 스스로 명확하게 제시한 적은 없다. 그는 시문학의 세 종류를 구체적으로 서술해 나가는 가운데, 그 원리를 설명했는데, 대체로 본다면 앞에서 설명한 표현형식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헤겔은 서사시에서 “외적 실제성의 형식 속에서” “총체성을 내적 관념 앞에 제시하며” “이를 통해 대상적 사태 자체를 가시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시인은 뒤로 물러서며 사태가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표현된다.”[4]

 

서사시에 대한 헤겔의 설명은 서사시에서 화자가 사건을 객관적으로 묘사 즉 ‘가시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니, 전통적 개념과 차이가 없다. 물론 서사시에서 이런 묘사는 산문처럼 객관적 사건을 그저 끌어 모으는 것은 아니며 그런 객관적 사건 속에서 감추어진 채 전개되는 총체적 의미를 파악하려 한다. 그러므로 서사시의 태도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사실 속에서 총체적 의미를 형성하려는 구성적 묘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헤겔의 설명에서 주목되는 것은 헤겔이 단순히 표현형식 또는 언어 사용의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화자의 측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사시의 화자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서사시의 화자는 “뒤에 물러선 존재”라 하는데 즉 자신을 이미 시대 정신의 위치에 둔 화자이다.

그는 전지전능하게 모든 주인공의 주관을 넘나드는 전지적 화자이지만, 이 전지적 화자는 철학적 일반 주체가 아니라, 그 시대 정신에 제약된 주체이다. 서사시의 화자는 시대 정신의 눈으로 보고,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묘사한다. 작가는 이런 시대정신의 서술을 대행하는 통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이 이처럼 시대정신을 대행하는 경우 여기서 한 시대 사회가 정점에 이르러 개인은 그 시대 사회와 합일하고 있을 때이다. 그러므로 서사시는 시대 정신이 정점에 이른 경우에 비로소 출현한다.

 

3)

서사시에 대한 설명에서 헤겔이 언어의 표현 형식에서 화자의 측면에 주목했듯이 서정시나 극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화자의 측면이 주목된다.

서정시는 언어의 표현형식을 본다면, 자아가 자신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관점과 동일하지만, 헤겔은 여기서 서정시의 자아가 개인적 자아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개인적 자아가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서정적 자아는 단순히 개인적 자아가 아니다. 헤겔은 서정적 자아가 더 이상 행동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감정은 행동으로 나간다면 소멸된다. 감정은 행동으로 나가지 못하고 응축되면서 비로서 시적인 감정으로 된다. 그러므로 서정적 자아는 “심정이 행위로 발전하는 대신 오히려 내면으로서 자신 곁에 머무르며, 그리하여 또한 주관의 자기 언표를 유일한 형식이자 마지막 목표로 취해야 한다.”[5]

서정시인이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개인이 그 시대 사회에서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대에서 사회와 개인은 균열한다. 어느 시대나 균열된 자아가 존재한다. 이미 지나갔지만 여전히 사회적 힘이 지배하고 있을 때, 또는 앞으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이미 내적으로 출현한 새로운 시대, 한마디로 이행기에 서정적 자아가 출현하며, 이 이행기 시대가 곧 서정시의 시대이다.

 

4)

서사시와 서정시의 구분 원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연극의 경우, 이미 앞에서 얘기했듯이 전통적으로는 서사시적 서술[digesis]이 아닌 직접적 재연[mimesis]이 강조되었다. 반면 카이저는 연극을 언어의 호소 및 유발기능에 두었는데, 이 경우 화자는 항상 익명의 일반적 타자가 아닌 바로 앞에 존재하는 너를 두고 대화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것이니, 사실 재연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은 극시라는 이름으로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통일을 말한다. 즉 서사시가 객관적인 것(사실의 서술)이라면 서정시는 주관적인 것(자아의 표출)인데, 극시는 양자의 통일이라는 것이다. 즉 극시는 “객관적인 것을 주관에 속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주관적인 것은 때로는 실제적 표출로의 이행 속에서” “때로는 열정이 행동의 필연적 결과로서 초래하는 운명 속에서 가시화”된다.[6]

즉 극시는 등장 인물의 행위가 중심을 이룬다는 것이다. 사건은 객관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극 중의 행위를 통해 출현하며, 그 행위는 운명적 사건에 이른다. 이 운명적 사건은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내부에서 자기도 모르는 채로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행위자는 자기 모순 속에 있으니 한편으로 그는 하나의 행위를 대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기의 운명을 초래한다.

행위자, 극중 인물의 자기 모순은 고대에서는 사회적 실체 자체의 분열에 원인을 두고 있지만 근대에서는 주관성의 자기 내 복귀라는 원리에 의해 불가피하다. 어느 편이든 행위자의 행위를 통해 극시가 전개된다는 측면에서, 앞에서 말했듯이 연극이 재연을 통해 일어난다는 전통적 규정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연극의 질료는 ‘살아 있는 인간’, 그의 언표와 그의 몸짓이라 한다.

그러나 헤겔은 극시에서도 화자의 독특성에 주목한다. 극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인물은 행위를 하는 가운데 자기 속에 감추어진 이면을 알지 못한다. 인물은 따라서 자신의 표면적인 측면만을 대변한다. 그러나 극시를 구성하는 작가는 이런 인물의 관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는 이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그 내면의 충동을 다른 인물의 행동을 통해 표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인물의 주관성을 넘어서는 일반적 화자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일반적 화자는 서사시처럼 사건의 전체를 서술해나가는 화자는 아니다. 이 일반적 화자는 또 다른 극중 인물의 모습으로 등장할 뿐이니, 일반적 화자는 극시 가운데 은폐되며 전체를 구성하는 원리로서만 암시될 뿐이다. 여기서 일반적 화자는 자신을 이원화하면서 두 인물의 화자로 분열하는 가운데 존재한다. 이런 분열 때문에 극시에서 등장인물은 각기 자체 내에서 자기 분열 속에 있다.

 

“왜냐하면 드라마에서는 인간의 내면의 성격이 한편으로는 서정시에서처럼 그 자신의 것으로 언표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 현존재 속에서 자신을 타자에 대립하는 전체적 주관으로서 효과적으로 알리기 때문이다.”[7]

 

그러므로 극시의 화자는 표면적으로는 분열된 화자로 내적으로는 통일되어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분열된 두 대립된 인물로 등장한다. 감추어진 화자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서사시적인 시대정신적 화자이며, 인물의 행위를 통해 표출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서정시적인 화자이다. 그러나 극시의 화자는 그 어느 것도 아니며, 다만 나와 너라는 두 대립된 인물 화자 속에 분열되어 나타난다.

화자의 분열은 두 개의 대립된 실체, 두 개의 대립된 성격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대에 가능하다. 이런 시대가 그리스에서 혈연과 국가가 공존하는 시대이며, 낭만주의 시대 보이지 않는 시장이 지배하면서 개인이 주관성과 객관성 속으로 분열하던 시대이다.

 

5)

헤겔은 이상 시문학의 구분을 또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이미 헤겔은 예술의 형식을 질료에도 적용하여 예술 장르를 구분하는 원칙으로 삼았는데, 이 원리는 그 가운데 하나의 원리인 시문학에 다시금 적용된다. 여기서 조형 예술과 음악, 그리고 문학의 장르적 특성이 시문학 내부에서 서사시, 서정시, 극시의 관계로 반복된다.

우선 서사시에서 정신은 외적 사건을 통해 출현한다. 시인은 이런 사건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이를 서사적 화법을 통해 표현한다. 정신이 외적으로 가시화하여 표현되지만 그 외면 속에 감추어진다는 점에서 서사시는 조형예술을 닮았다. 다만 조형예술이 공간적 형태를 통해 표현하는 것과 달리 서사시는 이를 시간적 표상을 통해 표현할 뿐이다.

서정시는 개인적 자아가 출현하는 시대에 출현한다. 개인적 자아는 외적인 사건에 부딪혀 행동으로 나가지 못하면서, 자신을 직접적으로 언어로 표출하니, 이런 주체의 자기 언표가 곧 서정시이다. 이런 서정시는 자기 언표라는 점에서 정신을 내적인 소리로 표현하는 음악의 원리와 같다. 다만 음이 무규정적인 소리인 반면 서정시는 구체적인 표상을 통해 정신을 표현한다.

극시의 경우, 개인적 내면이 비록 언어가 아니라 행동으로 표출되지만 직접적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극시는 서정시적 요소를 지닌다. 또한 세계의 필연성이 외적 사건으로 출현한다는 점에서 극시는 서사시적 요소조차 지닌다. 다만 극시에서 필연성은 서사시에서처럼 감추어져 있지 않으며 자신을 대립하는 행동으로 직접 출현시킨다. 그러므로 헤겔은 극시를 서사시와 서정시의 통일이라고 한다.


[1] 연극을 언어적 요구나 유발하는 기능으로 규정하는 것은 연극이 단순히 언어가 아니라 행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이때 연극적 행위 자체도 요구하고 유발하는 것이니, 연극적 언어의 한 종류로 볼 수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2] 문학의 구분 원리로 운율을 든다면 운율이 없는 소설이나 시는 산문에 속하게 된다. 헤겔이 말하듯이 시문학에 나름대로 운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시문학 장르를 구분하는 핵심 원리는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참고로 헤겔은 서사시는 “고요히 굽이치는 파동을 갖는 6보격”이 적당하며, “급격하게 진행하는 단장격”은 극시에 적당하며, “오보격 또는 균제적으로 고정된 휴지와 결합하는 육보격”은 서정적인 만가의 표현에 적당하다고 말한다.

[3] 헤겔은 시문학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그 세 가지란 곧 서사시, 서정시, 극시이다. 헤겔은 이런 구분에 정확하게 들어가지 않는 다른 장르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헤겔은 서사시의 근본 규정을 검토한 다음 마지막으로 그리스 로마의 전원시, 교훈시, 기사담[Romanz]과 담시[Ballade] 등을 거론하며 마지막으로는 근대적 서사시로서 소설[Roman]을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헤겔은 시의 이런 장르는 방계의 장르로 간주하며, 시문학의 개념에 따르자면, 이상 세 가지 장르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4] 미학강의 3권, 323-324쪽

[5] 미학강의 3권, 324쪽

[6] 미학강의 3권, 325쪽

[7] 미학강의 3권, 326쪽


 

헤겔미학산책49-작가와 독자의 공동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9-작가와 독자의 공동체

 

1) 절대정신

지금까지 서술의 필요성 때문에 예술의 목적과 관련된 작가 독자 관계에 대한 서술은 생략하였다. 하지만 예술 장르에 대한 대체적인 소개가 끝난 이즈음에 집중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시문학에서 작가 독자 관계는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독특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논의는 거슬러 올라가 예술의 목적에서부터 시작하자.

헤겔에서 예술은 정신 또는 이념의 표현이다. 이때 정신이란 한 역사적 사회를 형성하는 공동의 목적과 공동의 의지를 의미한다. 헤겔은 이런 정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절대정신이라 한다. 이 절대정신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즉 종교와 예술, 철학이다. 종교적으로는 신으로 환상적 방식으로 출현하며, 철학적으로는 사유의 체계를 통해 전개된다. 예술적으로 정신 감각적 기호를 통해 표현된다.

그렇다면 절대정신 즉 정신을 표현하려는 활동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시대의 정신은 이미 내적으로 출현하고 있으나 이것은 구체적으로 자각되지 않은 상태이다. 절대정신은 그 시대 정신을 자각하고 이를 표현하며 이를 통해 대중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이다. 절대정신은 대중의 주관적 내면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힘을 지니며, 이를 통해 집단의 공동 의지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정신에 적합한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실천적 목표를 지닌다.

절대정신이 실천적 힘이며, 또한 실천적 목표를 갖는 것이기에 절대정신은 불가피하게 그 시대 사회정치적 투쟁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절대정신 자체가 직접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것은 아니다. 직접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치적 투쟁이다. 절대정신은 다만 주관적 내면을 변화시키며,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 형성에 기여하려 한다.

 

2) 예술의 목적

종교나 예술, 철학은 각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런 역할을 수행한다. 그 가운데 특히 예술은 감각적 직관의 방식으로 이런 역할을 수행하니, 다른 절대정신에 비추어 장단점을 지닌다.

종교는 환상 속에서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을 지닌다. 이런 능력을 지닌 자는 극히 소수이며 대중은 이 소수의 외적 환상에 수동적으로 종속한다. 철학은 논리적 사유를 통해 전개하니 대중이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것이지만 합리적 사유가 전개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예술은 시대의 정신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감각적 직관의 방식을 통해 자각하니, 시대정신을 철학보다 명확하게 자각한다는 데 예술가의 탁월성이 놓여 있다. 또한 예술은 감각적 직관을 사용하기에 대중적 영향력에서 종교적 수동성과 철학적 자발성의 중간에 머무른다.

헤겔에서 예술의 목적은 오락이나 장식이나 유희가 아니며 학문처럼 인식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관계된 정신을 표현하여 주관적 내면 자체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힘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미학은 20세기 초 중반에 등장한 아방가르드 미학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20세기 초 중반 아방가르드 모더니스트들은 미래의 새로운 사회의 이념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예술에 맡겨진 과제라 보았다. 이들은 합리적 인식을 거부하면서 직관적으로 그 이념에 도달하려 하였다. 이들 아방가르드들은 나아가서 예술은 주관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힘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고 보면서 예술이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예술적 기법을 실험하였다.

 

3) 예술가의 천재성

시대정신과 예술가 사이의 관계에서 예술가의 천재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헤겔은 예술가의 재능과 천재성을 구분한다. 전자는 예술의 질료를 다루는 솜씨를 말한다. 이런 솜씨는 다른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오랜 훈련을 통해 습득된다.

반면 후자는 감각적인 방식으로 시대의 일반적 정신에 도달하는 능력과 관련된다. 예술가는 여기서 시대의 정신을 먼저 파악한 다음 그것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수단 자체를 통해 시대의 정신을 파악하는 것이니, 정신의 인식과 감각적 표현은 서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감각적 방식으로 정신을 인식하는 능력에서 예술가는 다른 사람보다 더 탁월하며 이런 탁월성은 단순히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 이상이니, 이 능력은 상당한 정도 자연적으로 타고난다고 하겠다. 그 때문에 헤겔은 이런 예술가의 능력을 천재성이라고 하였다.

헤겔에서 예술적 천재는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존재는 아니다. 헤겔에서 예술가의 탁월성은 이미 내재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 정신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예민하게 파악하는 데 있다. 새로운 시대 정신이 내적으로 성숙되지 않는 한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자기 시대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 정신을 깨달을 수 없으니, 예술적 천재성 역시 시대 정신의 역사적 발전에 제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재의 영감은 재능에 속하는 감각의 훈련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인식에 속하는 생산 의도를 통해 환기되는 것도 아니다. 천재의 영감은 오직 정신적 내용에서 출현한다. 그러므로 영감은 외적인 동기(주문 등)에 의해서도 개인적인 감동을 통해서도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는 소재 자체 속으로 침잠해야 한다.

 

“참된 영감은 판타지가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붙들고 있는 어떤 특정한 내용에서 점화된다” [1]

“그는 역으로 자신의 주관적 특수성과 그 우연적 특칭성을 망각할 줄 알아야 하고 또한 자기의 편에서 소재 속으로 침잠해야만 한다.”[2]

 

이처럼 천재의 영감이 시대 정신 자체 속에 성숙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시대정신이 오히려 진정한 주관이고 내용이며, 천재는 시대정신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나 형식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주관으로서 그는 말하자면 그를 사로잡은 내용의 구성을 위한 형식으로 존재할 뿐이다.“[3]

 

4) 독자와의 관계

예술이 시대정신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오직 작가 자신이 즐기기 위해서 작품이 제작되는 경우는 없다. 예술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 선동의 수단이 되기도 하는데 예술은 자주 이런 목적성을 기피한다.

자주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순수한 고독 속에서 오직 미적인 창조의 산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시대로부터 외면당한 저주받은 작가,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파괴하는 작가라는 이미지가 흔히 돌아다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헤겔의 관점에서 예술은 절대정신의 표현인 만큼, 예술은 항상 그것이 전달되는 대상(사용자, 관람자, 청중, 독자, 관객 등)을 향하여 작품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예술은 다른 사회관계와 구별되는 독특한 작가-독자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작가-독자 관계는 예술 장르마다 독특하다. 헤겔은 각 장르를 설명할 때마다 부분씩 이 관계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것을 이제 종합해서 설명하여 보자.

헤겔은 조각과 건축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건축의 경우 자신의 목적을 외부에 지닌다고 한다. 즉 건축적으로 구축되는 공간은 삶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전이며 왕궁이며 주택이다. 여기서 사용자는 건축 자체에 대해 외면적이다.

반면 조각은 정신의 현상적 형태이니, 그것은 “그 스스로 존재한다[ihrer selber wegen da][4].” 조각 작품은 작가의 주관성 넘어 있는 것이며, 조각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주관성과도 무관한 것이다. 작품 자체에 어떤 주관성도 배제되어 있다. 그것은 정신의 현존 형태일 뿐이다. 그것은 숭배의 대상이다.

낭만적 예술에 이르면 작가와 독자는 특수한 주관성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낭만적 예술 자체가 주관성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품 속에 주관성이 새겨져 있다.

 

“조각상은 대개 그 자체로 독자적이어서 감상자가 어디에 서고자 하는가를 걱정하지 않는다. … 감상자는 작품에 대해 무차별적이다. …그 내용이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자신에게서 기인하고 완결되었으며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회화의 이미 내용을 이루는 것은 주관성 그것도 동시에 내적으로 특칭화된 내면성이다…. 까닭인즉 회화는 주관적인 것을 묘사하는 작품으로서 이제 본질적으로 오로지 주관을 위해 감상자를 위해 현존할 뿐, 그 자체로서는 현존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그 전체 표현방식에서도 역시 보여주기 때문이다.”[5]

 

물론 여기서 표현되는 주관성은 자립적인 주관성이 아니며, 자기 내로 복귀하는[in sich zuruekehren] 따라서 내밀한[innig] 주관성이다. 작가도 작품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며 독자 역시 작품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니, 이런 내면의 실천적 변화가 작품을 통해 매개된다.

 

5)

회화에서 시작된 작가와 독자의 관계 즉 한편으로 특수한 주관성의 만남이며 다른 한편으로 작품을 통해 서로 자기를 지양하는 관계는 음악이나 시문학을 통해 더욱 발전하게 된다.

회화의 경우 색채의 마법을 통해 작가의 주관적 감정이 표현되기도 하지만, 정신적 내용에 관한 한 작가의 주관성은 대상에 대한 주관의 위치, 시점에 제한된다. 또한 공간적 평면에 현존하는 작가로부터 분리되어 공간적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작가로서는 알지 못하는 독자를 만나게 된다. 작품은 특정한 장소에 걸리게 되면서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외적 환경에 의존하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6].

반면 음악의 경우 소리는 작가와 독자의 시간적 주관성과 심정의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음악은 간접적으로는 정신적 내용이 표현되지만 그것은 모호할 뿐이며, 직접적으로는 작가의 감정이 표현될 뿐이다. 여기서 작가와 청중의 관계는 긴밀하다. 음은 “감각적 현존재를 가지지만” “직접적 순간적으로 소멸한다”[7]. 즉 작가(또는 연주자)가 연주하는 가운데서 존재하므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아주 긴밀한 관계를 지니게 된다. 동일한 작가가 작품에 부여하는 의미는 연주하는 순간에 다르게 출현한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일시적이고 부유할 뿐이다.

같은 낭만주의 장르더라도 시문학의 경우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매우 독특하다. 전반적으로 볼 때 회화나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작가의 주관성은 관점이나 감정에 제한되니 매우 제한적일 뿐이다. 그러나 시문학의 경우 작품의 모든 내용에 작가의 주관성이 낙인 찍혀 있으며 그 내용은 감정에서 사유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으로 과거에서 미래에 걸친 다양성을 담고 있다.

 

“언어는 의식의 높은 곳, 깊은 곳을 두루 섭렴하여 내면에 현재하는 일체의 것을 포착하고 알릴 수 있는 최고의 지성적 정신적 전달수단이기 때문이다.”[8]

 

그런 가운데 작가와 독자가 만나게 되므로, 독자는 작가의 주관성에 아주 긴밀하게 그리고 매우 포괄적으로 동화된다. 회화의 외적 관계, 음악의 일시적 관계를 넘어선 장기적이고도 두터운 관계가 여기서 형성된다. 그 때문에 회화나 음악에서 애호가는 있어도 공동체는 없지만 문학에서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일정한 공동체가 형성된다.

음악이나 회화의 경우 작가는 일방적으로 전달하며 독자는 다만 그것을 선호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으로만 관계하게 된다. 그러나 시문학의 경우 작가의 작품에 대해 독자는 동일한 언어를 통해 반응(비평이나 감상 등)할 수 있으니, 작가 역시 거꾸로 독자로부터 영향을 받는 상호적 관계가 수립된다. 여기서 독특한 상호작용적인 문학 공동체가 세워지게 된다.

물론 문학적 공동체의 한계도 있다. 회화와 음악은 단순한 직관적 능력만 있으면 그 속에 표현된 정신이 전달될 수 있다. 이런 직관 능력은 민족의 차이에 대해 상당히 독립적인 인간의 일반적 특성이다. 회화나 음악은 범인류적, 세계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시문학의 경우 언어는 고유한 민족성을 지니게 된다. 타민족의 경우 언어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장애를 지니게 되고 번역이 가능하기는 하더라도 일정한 한계를 지니므로 시문학의 독자는 민족적으로 제한된다.

 

6)

헤겔이 밝힌 것처럼, 시문학에서 작가와 독자의 독특한 관계 때문에 시문학에서는 자주 작가와 독자의 공동체를 모색하려는 시도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다루고 있는 작가와 독자의 공동체일 것이다.

카페가 아닌 곳에 있는 사르트르를 생각할 수 있을까? 1966년 모습

사르트르에 따르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을 대상화한 것이다. 사르트르에게서 작품과 그 대상[주제, 내용]의 관계는 지향성의 관계에 있다. 즉 작품의 대상은 지향작용에 내재하면서도 초월하는 의미[sense: 의의]이며, 작품은 지향작용 내에서 의미를 지향하는 단편[signification: 의미]이다. 작가는 언제나 의미의 단편에 머무르며, 끝내 초월적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며 작품 속에서 이 의미는 침묵, 말하지 못한 것으로 남는다.

이 의미가 마침내 실제하는 것으로 출현하는 것은 독자의 참여를 통해서이다. 독자는 작가가 제시한 단편을 징검다리 삼아 좇아가는 가운데 어느 순간 작가가 상정한 의미에 도달한다. 이 과정은 현상학에서 의미를 인식하는 변용[variation]의 작업에 속할 것이다.

독자가 발견한 의미는 정말로 작가가 작품 속에 추구했던 의미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한 의미가 될 것이니, 독자가 작품을 읽는 것은 단순한 수동적인 인식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제시한 징검다리를 독자 자신이 해석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이다. 독자는 작품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작품을 존재하게 하니, 작품을 최종적으로 창조하는 이는 다름 아닌 독자이다.

사르트르는 이 관계가 수동적이면서 동시에 능동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독자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적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자유로운 창조는 어디까지나 작가가 제시한 징검다리를 따라 수동적으로 건너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니, 동시에 수동적인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과정을 마치 ‘자유로운 꿈’ 또는 “결연히 수동적 입장에 서려는 자유”라고 말한다.

 

“읽기란 자유로운 꿈이다. 나는 어느 때나 꿈에서 깨어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읽기란 자유로운 꿈이기 때문이다.”[9]

 

독자는 이렇게 자신이 창조한 의미를 자신이 창조한 것이라 보지 않는다. 독자는 이런 의미를 작가가 이미 숨겨놓은 의미라고 믿는다. 독자에게 작가는 신 자체이며,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이런 상정에 따라서 거꾸로 작가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우리들 독자는 우리의 자유를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타인인 작가의 자유를 인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우리에게 요구하면 할수록 우리도 더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10]

 

독자는 작가가 진정한 의미를 숨겨놓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더 이상의 많은 요구를 하지만, 독자의 이런 요구는 바로 작가가 작품 속에서 징검다리를 놓아줌으로써 독자에게 바라는 것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자신의 자유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며, 독자는 작가의 자유를 인정하는데, 그것은 작가가 명령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그런 것을 과제로서 제시했기 때문이다. 독자는 전적으로 자유롭게 작가의 자유를 인정하고 작가를 숨겨놓은 의미의 진정한 창조자로서 인정한다.

바로 이 관계가 사르트르가 말하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이며, 이 관계를 통해 작가도 자유로운 존재에 이르고 독자 역시 자유로운 존재에 이르는 관계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자유를 고매하게 증여하며, 독자는 작가에게 마찬가지로 고매하게 주체가 되게 한다. 사르트르는 이런 관계를 곧 ‘고매성의 협약’이라 이름 붙인다.

작품에 숨겨놓은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작가나 독자가 주어진 세계를 넘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이데거 식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존재자를 넘어 존재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작업이다. 작가와 독자는 작품을 통해 이런 존재 전체를 다시 인간에게 귀속시키니, 바로 이것이 작품의 진정한 목적이다. 작품은 자유의 세계를 만인에게 호소한다. 작가와 독자는 작품을 통해 만인이 존재자의 세계를 넘어가기를 호소한다.

 

“작가가 남들의 자유에 호소하기를 선택한 것은 양자 간의 요구의 연계를 통해서 그들이 존재의 전체를 인간에게 다시 귀속시키고 인간의 수중에 세계를 사로잡기 이해서이다.”[11]

 

헤겔이 미학강의에서 작가와 독자 사이의 상호작용적 관계에 주목했는데 사르트르는 현상학적인 의미론을 통해서 이 관계를 작가와 독자가 구축하는 자유의 공동체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1] 미학강의 1권, 389쪽

[2] 미학강의 1권, 390쪽

[3] 미학강의 1권, 390쪽

[4] 미학가의 2권, 380쪽

[5] 미학강의 3권, 32쪽

[6]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원래 계획된 성당에서 시청으로 이전되면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을 생각해 보라. 즉 작품은 작가에 의해 부여된 의미 이상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7] 미학강의 3권, 160쪽

[8] 미학강의 3권, 276쪽 그러므로 헤겔은 시문학은 노년의 깊은 지혜가 필요하다고 한다. 말년의 괴테가 대표적이다.

[9]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역, 민음사, 1998, 73쪽

[10]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75쪽

[11]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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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48-시문학의 삼각형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8-시문학의 삼각형

 

1)

앞에서 다양한 예술 장르를 살펴보았는데, 각 장르를 규정하는 매체는 어느 경우에나 이중적이었다. 건축은 공간적 덩어리를 통해 정신을 표현하지만, 이 공간적 덩어리는 물질적 형상을 지니므로, 건축의 외적 형태도 정신을 표현하는 데서 간접적인 역할을 갖는다.

조각은 물질적 형상을 통해 정신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런 물질적 형상은 공간적 덩어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니, 조각에서 공간적 덩어리는 물질적 형상의 이면이 된다.

회화에서 질료는 색채이다. 그러나 이 색채는 빛이 공간적 평면에 반사해서 출현하는 것이므로, 회화는 공간적 평면을 떠날 수 없다. 색채는 이 공간적 평면 위에서 정신을 표현한다.

음악의 질료는 소리이지만 이 소리가 주관의 시간적 평면에서 종합되지 않는 한, 대립하거나 조화할 수 없다. 음악은 이 시간적 평면이 실천적 감정의 차원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예술 장르에서 그 본질을 규정하는 질료는 각자 고유한 토대를 지니니, 엄밀하게 말하면 예술은 정신과 질료, 그리고 그 토대라는 삼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이 점은 시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은 언어적 기호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관념과 언어적 기호의 연관이라는 어려운 언어철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하지만 이런 철학적 논의는 생략하자.[1] 헤겔의 경우 기호와 그것의 의미인 관념 사이의 관계는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럼에도 기호와 그 관념 사이에는 비본질적인 관계가 없을 수 없다. 특히 기호가 소리로 이루어질 때, 소리가 지니는 다양한 리듬은 기호가 표현하는 관념과 무관할 수 없다. 어떻든 정신과 관념, 그리고 기호는 시문학의 세 가지 요소이다. 이를 우리는 시문학의 삼각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

먼저 정신과 관념 사이의 관계를 보자. 시문학은 추상적인 정신을 구체적 감각적 관념을 통해 표현한다. 그러므로 시문학에서는 많은 비유법이 사용된다.

이 비유법에 관해서는 헤겔이 상징적 예술 형식을 다룰 때 상징적 예술의 마지막 형식으로 상세하게 설명했다. 우리로서는 문학적 기술[技術]에 속하는 비유법을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시적 표현의 특징으로서 비유법이 지니는 의미만 설명하자.

앞에서 설명했듯이 시문학이 정신을 표현하는 비유는 자립적이고 자유로운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은밀하게 정신을 표현할 뿐, 직접적 수단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나 독자는 이 감각적 비유 자체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음미하고 향유한다.

산문적 표현은 사태를 정확하고[Richterlichkeit] 규정적[Bestimmtheit]이며 이해 가능하게[Verstaend lichkeit]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니 이런 산문적 표현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문학에서 등장하는 비유는 불필요한 우회 또는 과잉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문학은 비유를 벗어 던질 수 없으니, 시문학에서 비유의 목적은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려는 것도 아니고(그렇다면 그것은 시문학이 아니라 설득술이다), 화려하게 수식하기 위해서도 아니다(그렇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닌 장식술에 속할 것이다).

헤겔은 시문학이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시문학이 예술인 한, 구체적 감각적인 것을 통해 정신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표현하는 데 필요하지 않다면 비유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즉 정신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만을 비유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3)

이런 적절성은 그 시대 정신의 특징에 따라 변화하므로 사용되는 비유법도 시대성을 지닌다. 헤겔은 예를 들어 동양의 시문학에서 이미지가 화려하고 풍부한 직유법이 사용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동양의 정신이 추상적인 정신에 머무르고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이미지는 자립적인 것이니 직유를 통해 정신과 외적으로 연관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감각적 상징은 아무리 표현해도 추상적 정신에 비추어서는 부족하니 무한히 반복될 수 밖에 없다. 상징의 시대에 모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물은 그 속에 정신이 현현하고 있으니 추상적 정신을 표현하는 상징은 도처에서 발견되고 무궁무진하게 널려 있다.

 

“동방의 시는 특히 이러한 이미지와 비유로 화려하게 가득 차 있는데, 까닭인즉 그 상징적 입장이 한편으로는 가까운 관계의 것을 필히 섭렵하여 의미의 보편성에 광범위한 구체적 유사 현상을 제공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관의 숭고성 탓으로 의식이 찬양할 유일한 것으로 있는 일자의 장식에만 매우 다채롭고 다양한 찬란하기 그지 없는 것이 사용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2]

 

또한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게 되면, 은유가 비유법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정신의 무한한 주관성으로 회귀하므로, 정신을 표현하는 개별적 비유는 자립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지양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는 헤겔이 은유를 자기 부정적인 가상으로 파악한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낭만주의 시대 은유의 세계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이런 자기 부정성을 통해 서로 만난다는 사실이 시문학에 기지에 넘치는 생동적 활력을 불어넣는다.

 

“자신을 즐겨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낭만적 판타지는 이와 반대이니, 까닭인즉 여기서는 외물이 자신 안으로 물러간 주관성에 대해 하나의 부수물로 간주될 뿐 그에 적합한 현실성 자체로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 멀리 떨어진 이 현상들의 은유적 사용은 자체가 목적이 된다. 감응은 중심점이 되고 그 풍부한 환경을 빛나게 하며, 그것을 자신에게 끌어들여 재기 넘치게 자신의 장식으로 사용하고 그것에 생명을 부여한다.”[3]

 

각 시대 마다 고유한 비유법이 있다는 헤겔의 주장은 후일 벤야민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벤야민은 박사 학위 논문에서 바로크 시대 비애극을 분석해 그 비애극의 기본 원리가 알레고리적 형식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이런 알레고리적 형식을 다시 바로크 시대의 이행기적 성격에서 찾았다. 이런 알레고리적 형식은 비단 예술에서만 출현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정신의 일반적 구조 속에 들어 있으니 벤야민은 그 시대 출현한 개신교의 특징 속에서도 그런 알레고리적 성격을 발견한다.

벤야민의 분석이 옳은가는 제쳐놓더라도 벤야민의 문제의식이 헤겔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헤겔 역시 직유와 은유를 역사적 시대와 연결시켰으니 말이다.

 

4)

이번에는 기호와 관념 사이의 관계를 보자. 이는 포에지의 측면이 아니라 시인적인 측면이다. 헤겔은 정신을 관념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시적인 제작[Poetisch]으로 규정한다면, 이를 전달하기 위해 기호적 요소를 형성하는 것은 시인적인 것[dichterish]이라고 해서 구별한다.

시문학의 질료는 관념이고 언어는 전달을 위한 기호에 불과하다. 헤겔은 시문학에서 핵심은 포에지에 있으므로, 시문학은 굳이 낭독할 필요가 없으며 눈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전달되는 데 충분하다. 그것은 음악이 연주되지 않고 악보상으로 존재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정 반대가 된다. 악보를 읽으면서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시문학에서 부차적 요소에 불과한 기호를 시인은 전혀 무시할 수 없다. 기호적 요소는 간접적으로는 그 의미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기호인 소리와 그 의미인 관념 사이의 연관은 음악에서 음과 가사의 관계와 정반대가 된다.

음악에서 음의 전개는 그 자체로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뿐, 음악이 표현하려는 정신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질 뿐이며, 그 때문에 정신을 더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가사를 필요로 한다. 가사는 음악적 표현의 한계 내에 머물러야 하므로, 가능한 한 단순해 진다. 위대한 음악에서 사용된 가사는 의외로 단순하다.

반면 시문학에서 오히려 관념이 그것을 표현하는 기호를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의미를 강조할 경우, 그 의미와 연관된 기호를 강하게 발음한다.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에서 어느 말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렇다고 기호적 요소가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소리라는 기호적 요소는 그 음악적 특성 때문에 감정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감정적 분위기는 시문학이 관념을 통해 표현하려는 정신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관계에 있지만 그럼에도 이런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데 주요하게 기여한다. 그것은 마치 영화 음악이 영화적 내용을 전개하는 데 기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기호의 형식적 측면을 포기하자는 주장에 반대한다. 오히려 위대한 시인 이런 외적 형식을 매개로 내적인 정신을 표현할 수 있고 이런 외적 형식이 내적 정신의 표현을 더욱 촉발한다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헤겔은 레싱의 시도를 소개한다. 레싱은 운문적인 프랑스 희극에 반대하여, 산문적 어법을 도입하려 했다. 괴테와 실러도 처음에는 레싱의 주장에 동조하였으나, 나중에 모두 이런 시도를 포기했다고 한다. 레싱은 <현자 나탄>에서, 단장격으로 복귀했으며, 실러도 <돈 카를로스>에서 운율을 회복했고 그것은 괴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5)

헤겔은 시문학에서 기호적 요소가 지닌 특징을 상세하게 파악하는데, 이 자리에서는 그런 논의는 불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의 논의 가운데 핵심이 되는 것은 운율과 압운에 있다[4]는 점만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헤겔은 고대어는 운율이 중심이 되었으나 낭만주의 이후 압운이 중심이 된다고 한다. 운율은 음소의 장단과 강약 등 자연적인 발화에 기초한다. 자연어는 접두사나 접미사, 그 밖의 음운변화를 통해 운율을 발달시키는데, 고대의 시문학은 주로 이런 운율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격변화와 동사변화를 통해 어간이 여러 음향의 풍부한 음절로 발전되는데,… 그 수효와 확장을 통해 악센트가 즉각 어간음절로부터 실질적으로 분리되며, 이로써 주 의미와 강조의 악센트가 서로 분리되기 때문이다. … 이미 이를 통해 귀는 상이한 음절들의 음향을 듣게 되며, 또 그들의 운동[즉 운율]에 보조를 맞출 수 있다.”[5]

 

근대 게르만어에 이르면 시제 및 다양한 화법 조동사가 발달하여 음운변화를 대체하고 대명사가 분리되면서 동사변화, 격변화 등이 점차 소멸한 결과 압운법이 발달한다.

 

“이제 강조는 주 의미에 결속된 관계로, ..그 밖의 음절의 자연적 장단이 더 이상 부상하도록 두지 않고… 이러한 어근이…악센트를 거의 배타적으로 자신을 위해 요구한다면 이것은 의의와 의미를 철저히 우선시하는 악센트일뿐, 질료 즉 울림이 자유로울 법한 그리고 음절의 장단과 그 강세 두기가 어휘들의 관념 내용과 무관하게 주어질 법한 규정은 아니다.”[6]

 

압운은 동일한 음절이나 음소가 반복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압운적 요소는 자아가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은 게르만어에서 나타나는 압운을 해석하면서 이런 반복을 통해 자아가 드러나며 그 때문에 자아는 이런 반복 속에 만족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자아가 개입한다는 것은 자아가 그만큼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성숙은 낭만주의 이후에 이르러 완성되므로, 중세 이후 언어에서 시문학은 주로 이런 압운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이 점과 연관해 한국어의 경우 압운은 배제되어 왔고 전체적으로 운율이 지배해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압운이 등장한 것은 1980년대 말 서태지의 가요가 등장하면서이다. 서태지는 랩을 한국어에 도입했는데, 그것은 깜짝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이후 한국어에서 압운이 등장했다. 다만 여전히 시가 아닌 가요에서 한정된다. 이것도 헤겔처럼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사회에서 개인 자유가 확장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1] 관념은 기호와 무관한 것일까? 구조주의자에서는 기호 사이의 변별적 차이가 기호가 기호로서 사용되는 자격을 부여한다. 물론 그런 기호가 어떤 관념을 의미로 갖는가는 우연적이다. 반면 본질론적 언어학은 기호와 관념 사이의 본질적 연관성을 주장한다.

[2] 미학강의 3권, 282-283쪽

[3] 미학강의 3권, 283쪽

[4] 헤겔은 시문학에서 언어적 요소의 형식과 관련하여 다양한 요소를 제기한다. 그는 운율과 압운 외에도 표현법[Bezeichnung], 문채[Redefigur]와 문장 형성, 어투[Diktion]을 들고 있다. 이런 요소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관심 있는 사람은 헤겔의 미학강의 3건 287-291까지를 읽어보기 바란다. 이미 비유법에 관한 설명에서 보았듯이 헤겔의 설명은 개념적, 체계적이다.

[5] 미학강의 3권, 303쪽

[6] 미학강의 3권,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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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47-시와 산문의 차이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7-시와 산문의 차이

 

1)

앞에서 말했듯이 헤겔은 문학[Lietrature]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포에지[Poesie: 시문학]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문학은 문자에서 나온 말이니,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모두 다루게 되며, 굉장히 포괄적인 말이다. 헤겔의 경우 시문학의 질료는 관념이지만, 단순히 관념을 질료로 한다고 해서 시문학 즉 포에지[Poesie]가 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시문학 즉 포에지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기존에 문학에 포함하는 많은 영역을 시문학에서 배제하고 산문의 영역에 집어넣는다. 예를 들어 문학 교과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성경, 인도의 베다, 시저의 웅변, 그리스 로마 신화, 헤로도토스의 역사 등은 시문학에서 배제된다. 이런 산문은 문학에 속할지는 모르지만 시문학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이런 영역을 문학에서 배제한다면, 문학의 영역이 너무 좁아지지 않을까? 그 보다 중요한 물음은 곧 그런 영역이 배제된다면 그 기준이 무엇일까 다시 말해 시문학의 종차, 정의는 무엇인지 하는 의문이다. 이것은 시와 산문의 구별과 관련된 물음이라고 하겠다.

 

2)

흔히 시문학과와 산문은 언어적 기호 즉 음소가 지닌 리듬(운률이나 압운 등)과 관련시킨다. 헤겔은 시문학에서 기호의 측면은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하므로, 기호의 리듬이 시를 산문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리듬이 없는 서사시를 시문학에 집어넣는 것만 보아도 리듬이 시문학의 종차는 아니다.

다음으로 시와 산문은 관념의 중류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시는 감각적 표상이나 구체적 이미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관념이 주를 이루는 산문과 구분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문 가운데서도 역사는 구체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사건을 서술하기도 하며, 웅변이나 설교는 감동을 끌어내기 위해 화려한 감각적 관념을 제시하기도 한다. 거꾸로 시문학에서도 조국애나 사랑, 진실과 정의 등과 같은 추상적 관념이 감각적 표상의 매개 없이 직접 표출되는 경우가 많으니, 이런 구분은 무용지물이라고 하겠다.

시문학 즉 포에지가 창조적 형상화라는 의미에서 시문학의 형상은 환상적인 것이며 반면 산문의 경우 그 형상화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구분도 사실 엄밀하지 못하다. 포에지도 역사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현실적인 형상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서사시일 것이다. 거꾸로 철학이나 종교적 문학도 환상적인 경우가 많으니, 성경이나 플라톤 대화록이 그렇다고 하겠다.

 

3)

그렇다면 대체 헤겔은 시[시문학]와 산문을 어떻게 구분하는 것일까?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시를 다루면서 시와 산문의 구분에 관하여, 상당히 길게 논의하고 있는데, 여기서 시와 산문의 구분은 정신의 이념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다. 헤겔은 시적 표현 방식이 지닌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한다.

-먼저 시에서 감각적 관념은 이념과 관계하여 ‘유기적 총체성’의 관계에 있다. 즉 여기서 질료가 되는 감각적 관념은 이념을 통해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체 내 완결되어 있어야 하고 서로 조화하는 총체성이어야 한다. 이런 통일성은 물론 물질적인 인과적 통일성은 아니다. 그것은 합목적적인 통일성이니, 모든 개별적 관념은 최종적인 목적에 나름대로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로 개별적 감각 관념이 목적인 정신적 이념에 대해 단순히 수단적이고 외적인 관계만을 갖는다면 그것은 시문학에서 총체성은 아니다. 그런 외적 수단적 관계는 추상적 보편성에 지나지 않는다. 시문학에서 개별적 감각 관념은 독자적인 형상을 가지니, 그것은 표면적으로 본다면 이념과 무관한 자립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개별 감각 관념은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 피어나는 꽃과 같은 모습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개별적 감각적 형상은 이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야 하나, 그 연관은 필연적이지만, 구체적 관념의 독자성을 살리는 것이야 하므로 비밀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이런 필연성은 겉보기에 자유롭게 나타난다. 작가는 의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의도를 관철한다. 여기서 진행은 개별적인 감각적 관념을 즐기면서 가므로 느릴 수밖에 없으나, 어느 순간 그 속에서 필연성이 떠오르면서 사건은 급작스럽게 종말에 이르게 된다. 헤겔은 정신적 이념과 개별적 관념 사이의 이런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특수한 부분이 독자성을 띤다. 이것은…. 통일성과 모순되는 양 보이지만 사실 이런 모순은 거짓된 외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립성은 개별 부분의 상호 절대적인 분리의 방식이 아니라 단지 상이한 측면이 자기 자신 때문에 독특한 생동성 속에서 묘사되고 고유하고도 자유로운 지반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한에서만 타당하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

 

시문학의 성립 조건은 즉 자유롭고 생동적인 관계인데 이 조건은 예술의 성립조건과 동일하다. 예술이란 본래 정신과 그 감각적 표현 사이에 자유롭고 생동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다른 예술 장르의 경우, 감각적 표현 수단은 그 자체 자립성을 지니므로, 정신의 통일적인 지배를 벗어나는 측면을 지닌다. 반면 시문학의 질료인 감각적 관념은 그 자체가 정신적인 것이니 감각적인 측면에서 자립성을 갖더라도, 정신적인 것이라는 측면에서 정신적인 것의 통일적 지배에 완전하게 복속할 수 있는 것이니, 가장 완전한 예술적 장르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시문학은 예술 장르 전체를 대표하는 장르라 할 수 있다.

 

4)

이런 시문학에 반해서 다양한 산문은 이런 유기적 생동적 총체성을 결여 한다. 일상적 의식에 기초하는 산문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관념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며, 그 속에서 어떤 전체를 통일하는 정신적 이념을 발견하기 어렵다.

또 웅변이나 설교에서 나타나는 산문의 경우 구체적 표현은 자신이 전달하려는 의도에 대해 어떤 관계를 지닌다고 하더라도 이 관계는 외적인 수단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설득에 기여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는 구체적 표현 자체가 지니는 독자성, 자유로움이 상실된다. 시문학이 구체적 표현을 향유한다면, 웅변이나 설교에서는 그런 향유가 없다.

사변적 철학은 유기적 총체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시문학과 가장 유사하지만, 이런 사변철학은 사유를 통해 필연적으로 전개되는 반면 시문학은 자립적인 감각적 관념 속에서 비밀스럽게 전개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시문학과 가장 혼동되기 쉬운 것이 역사적 산문이다. 역사는 정신적 의미가 전개되는 것이기에 유기적 총체성은 역사적 산문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를 전개하는 구체적 사건은 창조될 수는 없으며 오직 발견될 수 있을 뿐이기에 역사는 엄밀하게 정신적 의미에 충실할 수는 없다. 반면 시문학에서 정신적 이념을 전개하는 구체적 관념은 작가가 환상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니 정신적 이념의 전개에 충실하다.

이런 차이 때문에 시문학이 역사를 토대로 작성되는 경우(서사시, 송시, 극시 등) 이미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이 시적 의미와 어울리지 않아 시적 전개를 방해한다. 거꾸로 시가 사실을 창조하게 되면,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충돌하면서 시적 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5)

시문학이 이처럼 산문을 배제한다면, 시문학의 범위가 너무 좁혀지는 것이 아닐까? 헤겔이 이런 산문을 문학에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술 즉 포에지에서 배제할 뿐이다. 과연 산문을 예술에서 배제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사실 웅변과 역사, 철학저서는 비록 그 속에 부분적으로는 예술적 측면이 존재하더라도 예술이라 하지 않더라도 쉽게 반발하기 힘들다. 여기서는 개별적 감각 관념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의도, 법칙, 관념에 수단으로 복종하는 것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 경전이나 신화나 전설, 영웅 이야기 등은 예술에서 배제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여기서는 좀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고전 시대나 낭만 시대에 종교적 관념이 고전적 현상이나 낭만적 가상으로 표현되는 경우 그게 예술이라는 것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고대 상징적 예술의 시대에는 종교와 예술은 서로 중첩되어 있다. 특히 종교적 관념이 감각적 물질로 표현되는 경우(건축이나 조각, 회화, 음악)는 물질적 차이 때문에 쉽게 구별되지만, 특히 종교적 관념[환상]을 시문학적 관념[상상, 이미지, 감각 관념]으로 표현되는 경우, 둘 다 관념이니 양자는 거의 서로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런 상징적 문학의 경우 그것은 종교적 표현일까 아니면 예술적 표현일까? 난감한 문제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헤겔에서도 혼란이 나타난다. 헤겔은 예술 형식에서 고대 상징적 예술을 다루는 경우, 언어로 된 종교적 경전과 신화에서 많은 예들을 찾아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시문학을 다루는 경우에는 서사시로부터 시작하면서, 경전이나 신화 등을 배제하고 있다.

여기서 상징이 지닌 이중적 의미에 주목해 보면 어떨까? 한편으로 상징은 비밀스러운 연관을 지닌다. 이 경우 상징적 기호와 그것이 상징하는 것 사이의 단절이 눈에 띈다. 다른 한편으로 상징은 적어도 기호적 연관을 지닌다. 상징은 종교적 관념의 한 부분이거나 인접해 있는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만일 상징을 비밀스러운 연관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연관은 종교적이니, 종교적 표현에 가깝다. 반면 그 연관이 합리성을 띄면서 예술적 표현에 다가간다.

헤겔의 경우 상징적 예술은 종교의 수단이었으니, 상징 예술에서 경전과 신화를 다룬 것은 그 종교 측면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시문학이라는 예술 장르를 다루는 경우 예술 측면에서 판단하면서 경전과 신화를 배제한 것이 아닐까 한다.


[1] 미학강의 3권,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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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46-회화와 음악 그리고 시문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6-회화와 음악 그리고 시문학

 

1)

헤겔에서 예술 장르는 발전적이다. 조각은 부조가 출현하면서 회화로 넘어간다 회화는 색채의 마법을 통해 음악을 소환한다. 음악은 악극이 출현하면서 시문학[1]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시문학은 예술적 장르에서 최종적 형식이 된다.

시문학을 예술 장르의 최종적 형식으로 보는 관점은 시문학 이외에 다른 예술을 즐기거나 제작하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 것이다. 필자는 음악을 잘 모르는데, 시인인 필자의 한 친구는 음악을 모르는 필자를 약간 경멸적으로(?) 바라본다. 인간이 아니라 무슨 동물을 보는 듯한 표정이다. 그 친구는 음악이 예술의 최고 형식이다. 아마 그는 자신의 시가 음악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친구에게 헤겔 말을 전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만날지 모른다.

헤겔처럼 예술 장르가 발전적이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시문학이 다른 예술에 비해 탁월한 어떤 점을 지닌다고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동의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소개한다. 필자는 오랫동안 영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화가 좀 식상해지기 시작했다.

영화는 음악과 회화, 드라마까지 포함하는 종합예술이지만, 핵심은 역시 눈에 보이는, 환상처럼 생생한 영화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눈에 보이는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힘드니, 그 세계는 아무리 풍성하게 만들어도 곧 진부해지고 만다.

이때부터 어릴 때 좋아했던 시가 다시 감동으로 다가왔다. 시인의 그 무한히 약동하는 상상력이 전율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에서 본다면 시문학의 탁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시문학처럼 아름다운 예술은 없지만, 거꾸로 시문학에서 한계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헤겔을 통해서 장르의 측면에서 본 시문학의 장단점을 논해 보기로 하자.

 

2)

시문학의 질료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이다.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호로서 언어 즉 문자나 음소가 아니라 기호가 지시하는 의미로서 관념이 시문학의 질료가 된다. 기호로서 언어는 시문학적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2].

헤겔은 시문학의 질료는 다른 예술의 질료와 구분되는 독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시문학 이전의 다른 예술들은 모두 물질적인 자체를 질료로 사용한다. 회화에서 색이나 음악에서 소리를 헤겔은 이미 관념화된 물질[즉 빛이나 시간적인 것]이라 하지만, 그것은 물질성을 떠난 것은 아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은 그 자체가 물질성을 벗어난 관념적인 것이다.

헤겔은 회화와 음악을 다루면서, 질료의 관념화가 일어나면서, 낭만적 예술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낭만적 예술은 내밀한[innig: 자기 복귀하는] 주관성을 표현하는 예술인데, 주관성은 물질적인 질료(건축적 덩어리나 조각적 물질성)를 통해서는 표현되기 어렵지만, 관념적 질료는 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관념적 질료는 추상적 원소(음, 색)로 구분되면서 이 원소의 상호 관계를 통해 주관적 내면을 표현한다. 헤겔은 그 방식을 색채의 원근법이나 음악에서 화성을 통해 충분하게 보여주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 역시 그 자체로 분화되어 있다. 그것은 문장 속에서는 주어와 술어로, 형용사와 목적어로 관계하고, 다양한 문장형식에 따라서 고유하게 결합한다. 관념은 이런 복잡한 결합을 통해 거의 무한한 정신의 세계를 그려낸다.

회화에서 주관성은 사물을 보는 개별적 주관의 시공간적 위치, 입각 점에 머무른다. 회화에서 그려진 내용은 정신의 현상을 주관이 위치한 한 지점에서 일순간 보여줄 뿐이다. 음악에서 주관성은 심정적 수준인데 이는 상당히 일반적 수준(관습화된 감정)이지만, 감정에 한정된 수준이다. 회화나 음악에서 주관성은 감정을 통해 정신을 다만 간접적(상징적으로)으로 표현한다.

반면 시문학에서 모든 발화는 개인적 자아의 발화이지만, 이 자아는 이미 자기의식적이므로 자기를 넘어선 일반적 자아이다. 이 일반적 자아는 발화하는 자아를 규정하면서 발화하는 자아를 반성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므로 언어적 발화에서는 발화 주체와 동시에 언표 주체로 이중화한다.

시문학에서 이중적 자아는 자기를 넘어서는 운동 속에서 정신의 세계를 전개한다. 그것은 감정의 수준에서 일반적 사유의 수준에 이르는 포괄적인 정신의 세계를 표현핟다. 그런 점에서 시문학은 주관적 정신을 표현하는 가장 낭만적 예술이 될 수 있다.

 

3) 음악과 회화의 종합

회화는 색채를 통해 구체적 형상을 보여주는데, 이런 형상은 정신이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구체적 현상이다. 회화는 이를 통해 정신을 명확하게 규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회화는 공간적 평면에 제약된다. 회화는 주관적 정신을 표현하더라도 공간적 평면에 나타나는 순간적인 모습일 뿐이다. 회화가 표현하는 순간적인 모습은 비록 내밀성[Innigkeit]을 지니더라도, 자기를 지양하는 운동을 표현하기 어려우므로, 회화는 한계가 있다. 회화가 운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벌이는 고투(예를 들어 몽타주 기법)를 생각하면 회화의 한계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시문학은 관념을 매개로 하고 이 관념은 그 자체에서 운동성을 지닌 것이므로 자기를 지양하는 정신의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문학은 그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나 그 속에서 전개되는 드라마를 표현하니, 이런 점에서 회화보다 탁월하다.

 

“시 예술[Dichtkunst]은 회화처럼 어떤 특정한 공간에 제한되거나 어떤 상황이나 특정한 계기의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내적으로 심원한 대상과 그것의 폭넓은 시간적 전개가 표현될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3]

 

시문학의 탁월성은 음악과 비교해서도 드러난다. 음악은 음의 조합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지만 이런 감정적 표현은 정신을 다만 간접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건축물이 신상을 다만 둘러싸고 있을 뿐이듯이, 음악에서 감정적 운동을 통해 표현되는 정신은 모호하고 무규정적이다. 음악은 정신을 암시할 뿐이지 직접 표현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음악은 가사와 문학을 자기 편으로 끌어오려 한다. 음악의 출발점에서 가요로 시작했다. 고전 음악이라는 완성 단계에서 다시 악극으로 넘어간 것도 그런 감정의 모호성 때문이다.

시문학은 정신을 관념을 통해 직접 표현할 수 있으며, 정신이 내면 세계 속에 그려놓은 환상의 세계는 눈 앞에 있는 현실 세계보다 더 생생하고 명확하니, 그것은 자주 내면의 회화에 비유되곤 한다. 이 점은 시문학이 음악에 대해 갖는 탁월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정신은 [시문학을 통해] …감정에 그치는 내면성을 떠나되 그것을 여전히 판타지 자체의 내면에서 전개된 객관적 현실의 세계로 다듬는다.”[4]

 

회화와 음악과 비교해 볼 때 시문학은 한편으로는 내면의 회화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처럼 시간적 운동을 표현하니, 시문학은 회화와 음악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은 시문학은 ‟조형예술과 음악이라는 양극단을 한층 높은 단계에서 즉 정신적 내면성 자체의 영역에서 내적으로 통일하는 총체성이다”[5]라고 말한다.

 

4) 시문학의 한계

이상에서 시문학이 같은 낭만주의 예술 장르인 회화나 음악에 비해 갖는 탁월성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시문학은 고유한 한계를 지니고 있으니, 이 점에서 회화나 음악에 미치지 못하며 항상 회화나 음악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우선 시문학의 특징은 관념이 시간적인 계열을 이룬다는 데 있다. 조형예술의 경우 정신은 공간 속에서 동시에 표현되는 반면, 동일한 정신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시문학의 경우에서 그 표현은 시간적으로 계열화되어서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시문학은 조형예술에 비해 한계를 지닌다. 조형예술은 공존하는 것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으므로, 여기서 무한히 세부적인 요소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시문학의 경우는 관념은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만 표현할 수 있으며, 더구나 그 관념은 아무리 구체적인 이미지의 수준으로 내려가더라도 일반성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문학이 아무리 시간을 들여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하더라도 공간적인 세부를 조형 예술처럼 세부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문학은 공간적으로 병존하는 것 가운데 필요한 요소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음악은 소리의 강도[强度: Intensity]를 통해 내적 감정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니, 감정을 산출하는 데서 가장 직접적이며 더구나 시대와 민족의 제약을 벗어나 보편성을 지닌다.

반면 시문학의 매체인 관념은 아무리 구체적인 이미지더라도, 감정을 직접 타격하지 못하는 관념적인 것에 머무른다. 그것이 울리는 것은 감정의 관념 또는 감정의 이미지이지 직접적인 감정이 아니다. 만일 감정을 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시문학은 음악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진다고 하겠다.

시문학은 앞에서 말했듯이 회화나 음악에 비해 탁월성을 지니지만 반대로 한계도 지니고 있으니 시문학은 자주 회화나 음악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그림 책이 등장하는 이유나 시가 가요화하는 지점을 생각해 보면, 시문학의 이런 한계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보편 문학의 개념

시문학의 매체가 이처럼 정신을 정신 속에서 표현하는 관념이므로, 시문학은 모든 시대 모든 예술 형식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시문학은 정신을 수수께끼와 같은 암시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으며, 정신이 현현하는 모습을 언어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고전적 현상으로도 표현할 수 있고, 또한 현상이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 자체를 가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헤겔은 시문학을 보편적 예술이라 하는데, 그의 보편 문학 개념은 그와 동시대 예술 이론가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보편 문학 개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의미는 상이하다. 슐레겔은 자기 스스로를 넘어서는 아이러니 개념에 따라 문학은 문학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문학은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우선 문학은 소설과 시, 극이 뒤섞일 수 있으며, 산문인 철학과 역사 자기 비평까지 포함한다.[6]

반면 헤겔에서 문학의 보편성이란 다양한 형식을 동시에 표현한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문학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출현했다는 의미이다.

시문학이 이처럼 예술에서 정점에 이른 보편적 예술이므로 시문학은 동시에 정신의 표현이 예술을 떠나는 지점이기도 한다. 예술의 특수성은 곧 감각적 질료를 통해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이 자기를 지양한다는 것은 곧 특수한 감각적 질료를 넘어선다는 것이며, 이것은 이미 회화와 음악을 통해 질료가 관념화되면서 시작했다. 마침내 문학에 이르러 감각적 질료의 관념화는 완성된다. 하지만 여전히 감각적 관념이 예술의 질료가 된다. 시문학은 예술의 특수성을 지양하는 가운데 보편적으로 된다.

이제 문학을 넘어서면서 정신은 감각적 관념의 지반을 떠나 일반적 사유의 지반에 이르게 된다. 정신은 사유의 지반에서 자기를 표현하니, 그것이 곧 철학이다. 예술은 자기를 넘어서 철학으로 넘어 들어가게 된다.   정신의 표현은 처음 종교를 통해 표현되었다. 그런 다음 예술로 넘어갔고 이제 마지막으로 정신에 대한 철학적 표현이 등장한다.


[1] 헤겔은 문학[Literature]이라 하지 않고 시[Poesie]라 말한다. 전자는 문자로 된 것을 다룬다는 의미이니 매우 포괄적이다. 역사 철학, 웅변 등 산문도 하나의 문학으로서 포함할 수 있다. 반면 시문학이라 하면, 그리스어 제작[Poesie]에서 나온 것이며, 이미 현실을 넘어서 어떤 형상을 창조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니, 여기서는 산문이 예술에서 제거되면서 시문학은 상당히 제한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시라고 하면 문학의 한 특수 분야를 말하나 헤겔은 극시나 서사시까지 포함하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번역상 시가 아니라 시문학이라 번역한다.

[2] 기호와 관념 사이의 관계는 언어 이론의 핵심 문제인데, 여기에 다양한 이론이 제시된다. 이 자리에서 이런 언어 이론을 충분하게 논의할 수는 없으나, 주를 통해 간단하게 헤겔의 입장을 소개하기로 하자. 기호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는 본질론자가 오랫동안 언어이론을 지배해왔다. 19세기 비교 역사 언어학자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벤야민 등의 이론이 그러하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훗셀 등 현상학자를 통해 의미가 의식의 지향작용에 내재하면서도 초월하는 존재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의식의 지향작용에 내재하는 측면을 언어의 언사[言辭]의 측면이라 하며 초월적 의미는 그런 언사측면을 둘러싸여 있다고 보면서 언어의 언사적 측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20세기 중반에 언어혁명을 일으킨 구조주의자는 언어의 의미가 구조적 관계를 통해 결정된다는 측면을 강조했으며, 이런 구조적 관계는 언어의 사용되는 삶의 공간을 통해 규정된다고 본다.

헤겔의 경우, 의미론은 여러 논의에서 분산적으로 설명되었다. 그의 논의는 아래 네 가지 측면으로 종합할 수 있겠다.

①그는 본질론적 언어 이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호와 언어의 의미는 상징적 관계이며, 의미는 관념 내에서 객관적인 것 즉 객관적 관념[reell]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인 것은 아니며, 문화와 사회의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동시에 ②그의 언어 이론에서 단어의 의미가 주어 술어라는 문장의 구조 속에서 결정된다. 같은 단어라도 주어로 사용되는 경우와 술어로 사용되는 경우 그 의미는 다르며, 어떤 단어가 어떤 판단 구조 속에 들어 있는가에 따라서도 의미가 달라진다. ③세 번째로 헤겔에서 언사나 표현의 문제를 절대정신을 다루면서 설명했다. 절대정신 즉 종교와 예술, 철학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④헤겔은 발화주체와 언표 주체의 구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문장을 발화하는 자아는 자기의식이어서 스스로 자기 내 반성하므로 여기서 발화 주체와 언표 주체가 분열된다. 이런 분열 때문에 판단은 다른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다.

[3] 미학강의 3권, 232쪽

[4] 미학강의 3권, 233쪽

[5] 미학강의 3권, 231쪽

[6] 필자는 언젠가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쿠의 ‘방랑자’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소설과 철학, 에세이, 논문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작품이니, 슐레겔의 보편문학에 가장 접근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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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45-수반음악과 자립음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5-수반음악과 자립음악

 

1) 시문학과 음악의 결합

앞에서 건축과 음악이 공통적으로 수학적 비례 법칙을 지닌다는 점에서 비교되었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고 음악은 생동하는 건축이다. 또한 헤겔은 음악을 시문학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시문학과 음악은 공통적으로 소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소리의 역할은 서로 다르다. 시문학에서 소리는 관념을 담지하는 상징적 기호, ‘독자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관념의 표시자’일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소리는 다른 소리와 변별성을 지니므로, 언어 기호로 사용될 수 있다. 반면 음악에서 소리는 그 자체가 질료 즉 형상화의 수단이다. 음악의 질료인 음은 양적 크기를 지닌 것이며, 이런 양적 크기 자체가 주관의 시간적 평면 위에서 일정한 청각적 인상을 남기면서 음악이 탄생한다.

시문학과 음악 사이의 비교는 정신과 관계해서 볼 수 있다. 시문학의 질료인 관념은 이미지와 상상, 환상 등과 같은 감각적 관념이다. 이런 감각적 관념은 사유의 추상적 관념을 비유적으로 즉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음악은 선율을 통해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지만 이런 감정은 정신을 ‘에워싸는 옷’에 불과하니, 음악을 통해서 정신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표현될 뿐이다. 헤겔은 음악은 정신에 대해 ‘무규정적인 공감’ 이상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예술의 목표가 정신을 드러내는 데 있다면 이런 점에서 내밀한 감정의 표현에 머무르는 음악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음악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직접 드러내는 시문학과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신을 직접 드러내는 시문학이 감정의 내밀성을 전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를 위해 음악의 도움을 빌리려는 시도와 맞물려 있다. 그 결과 음악과 시문학의 결합인 합창이나 악극이 출현한다.

그러나 음악과 시문학은 질료의 서로 다른 특성 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런 충돌은 시문학과 음악을 통일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온 오페라가 다시 내부에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분열되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 이런 차이 때문에 양자의 결합은 완전한 통일보다는 서로에 대해 종속적인 결과가 된다.

비극에서 합창, 악극에서 음악이 끌어들여질 때, 음악은 시문학을 위해 봉사하는 부수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 경우 음악은 차라리 낭송에 가까워진다. 반면 노래에서 시문학이 끌어들여질 때 사실 가사는 음악에서 표현 불가능한 정신을 표현하여 내밀한 감정을 더 강화하려는 종속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 경우 가사는 무척이나 단순하게 된다.

 

2) 음악의 두 유형

헤겔은 다른 장르의 경우에는 역사적 발전과정을 서술했으나, 음악 장르에서는 그런 역사적 서술을 생략한다. 대신 그는 음악적 표현 수단과 정신적 내용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이 절(음악 장 3절)에서 그는 음악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수반적 음악이며 다른 하나는 자립적 음악이다. 이런 구분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 시문학적 가사 즉 텍스트와 어떻게 관계하느냐이다. 한편으로 음악은 가사를 넘어서려 하며, 다른 한편으로 가사는 음악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기도 하니, 음악은 가사를 버리고 싶으나 버릴 수도 없다.

수반적 음악은 정신적 내용을 강조하면서 시문학과 관련을 가지는 음악이다. 헤겔은 이를 세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서정적 노래와 찬송의 노래 마지막으로 악극이다. 서정적 노래가 그 출발점을 이루며, 찬송의 노래(칸타타, 오라토리오 등)는 바로크 시대 정점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악극(오페라)은 근대 이후에 등장했다. 반면 자립적 음악은 음악의 내용보다는 형식이 강조되는 음악이다. 여기서 음악은 시문학으로부터 독립하여 고유한 형식적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이런 설명 속에서 어느 정도 음악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짐작할 수는 있다. 아마도 헤겔은 음악의 역사가 전 근대적 수반적 음악에서 근대적 자립적 음악으로 그리고 다시 근대적 수반적 음악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음악을 과연 엄격하게 역사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때문에 음악을 다만 유형적으로 분류하고 말았던 것 같다. 여기서는 헤겔의 입장에 따라서 종류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3) 수반적 음악

수반적 음악은 음악이 시문학과 관련하는 것이어서 수반적 음악이라 한다. 수반적 음악의 효시는 개인의 사랑의 기쁨과 헤어짐의 슬픔을 노래하는 서정시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이다. 시문학을 통해 완결된 내용에 내밀한 감정을 입히기 위해 음악이 사용되고 이미 단순한 낭송적인 것을 넘어선다. 따라서 음악은 화성보다는 선율을 따르며, 기악보다는 성악이 위주였다.

음악적 표현방식이 발전하면서 음악적 감정은 강화되며 순화된다. 이제 감정은 그 토대가 되는 자연적 감정 수준을 떠나서 자유롭게 자립적으로 울려 퍼지게 된다. 영혼은 음악을 통해서 “열정의 도취한 광란과 소용돌이치는 소란으로 찢기지 않으며” “기쁨의 환호와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로움을”[1] 느낀다.

음악이 더욱 자유롭게 되면서 이제 음악은 정신에 봉사하는 음악으로 발전한다. 음악은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처럼 텍스트에 맞추어 무한한 숭배나 경배의 감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한다. 구체적으로는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 음악에서 그 단초가 보이며 바로크 시대 교회음악에서 발전하였다.[2] 여기서 성악과 기악, 선율과 화성은 상호 균형과 통일을 이룬다.

음악의 내용과 형식 역시 하나로 통일된 최고의 수준에 이른다. 형식적 측면에서 “일체의 것은 제어된 형식 속에서 굳게 서로 결속하며” 내용적으로는 무한히 내밀한 감정이 지배하니, ‘정신의 고요’ 와 ‘지복의 평온’이 흐른다.

 

“고통이 영혼을 아무리 깊숙이 엄습할 경우라도 다양하게 펼쳐지는 음악들 자체의 향유 속에서 아름다움과 지복, 판타지의 단순한 위대함과 형상화를 발견한다.”[3]

 

여기서 음악은 “예술로서 예술의 향유, 자기 만족하는 영혼의 선율적 소리”[4]에 이른다.

 

“가슴은 … 자기 자신의 청취에 몰입하며 또한 오로지 그럼으로써 마치 순수한 빛이 자기 자신을 보듯이 지복의 내면성과 화해한다는 것에 관한 최고의 표상을 제공한다.“[5]

 

수반적 음악의 마지막은 오페라와 같은 악극의 형식이다. 이 유형은 근대에 음악이 자립적인 음악으로 발전하면서, 정신적 의미를 벗어나 형식적 아름다움에 심취해 들어간 경향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 이런 움직임의 결과 근대의 절대음악의 출현과 동시에 오페라, 오페레타가 발전한다.

오페라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서창: 敍唱)로 이루어지는데, 아리아는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므로 선율적인 것이며, 음악이 중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서창은 사건의 진행을 서술하므로, 음악은 낭송에서처럼 텍스트에 대해 종속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말의 특수한 내용이 음의 특정한 길이와 강약 고저에 각인된다.

그러므로 오페라는 “말에 대해 상대적으로 높이 떠 있는 선율적인 것”과 “말에 대해 최대한 가깝게 맞닿고자 하는 서창적인 것”[6] 사이에서 매개를 달성하고자 한다. 헤겔은 이 매개 과정에서 서창은 분산적이니, 통일성으로서 선율이 항상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그리고 각각의 내용 속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내밀성에 몰두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통일 속에서 정신화되어 있는 심정의 정조이다. 그런 정조의 자기 표현은 선율 자체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선율적인 것은 … [심정의 정조와] 동일한 통일성이며, 자기 내로 완결된 복귀이기 때문이다.”[7]

 

4) 자립적 음악

바로크 시대 성악과 기악, 선율과 화성, 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통일 상태를 지나게 되면, 음악은 정신에서 풀려 나와서 거침 없는 자유 속에서 자립적으로 된다. 여기서는 성악보다는 기악이 중심이 되며, 음악적 선율은 화성의 법칙을 통해 화려하고 풍부하게 전개된다. 이제 음악적 향유는 음악이 담지하는 정신적 의미에서보다 오히려 음들이 자체 내에서 전개하는 어울림 속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음악의 고유한 형식의 측면은 완성에 이른다. 그 이전 음악은 시문학 텍스트의 강제적 지배 아래 있었고 종교음악에서 제의나 악극의 경우 다양한 연극적 요소가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고 만다. 이제 음악은 이런 비음악적 요소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한 상태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음악의 완성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절대음악, 순수음악이라 불리는 자립적 음악을 추구한 모차르트는 베토벤 등 고전음악을 음악의 정점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헤겔은 자립적 음악을 완성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음악이 단순한 기교로 전락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순수 음악 또는 절대 음악에서는 음악적 정신적 의미는 더욱 모호하게 되고 심지어 전적으로 결여될 수도 있다. 이런 음악은 정신의 표현으로서 예술을 벗어나게 된다.

음악이 정신으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이제 음악은 전문가의 것이 되며 작곡가는 정신적 성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헤겔은 작곡의 재능이 아주 어린 나이에 발전할 수 있거나, 풍부한 재능의 작곡가가 의식 없는 빈곤한 인간의 상태를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음악은 이런 형식적 향유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음악도 예술이기 위해서는 정신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음악 속에 정신적 내용을 다시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출현하게 된다.

 

“한층 깊은 음악은 기악음악에서조차 내용의 표현과 음악의 구조라는 두 측면에 같은 주의를 기울일 때 성립한다.”[8]

 

5) 음악에 대한 구체적 평가

헤겔은 음악의 유형을 서술하면서 틈틈이 여러 음악에 대해 평가했다. 헤겔은 자신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관현악의 대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대해서는 평가가 인색하다. 모차르트는 예로서만 언급하며, 베토벤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헤겔에게서 수반음악 가운데서도 내밀함 감정을 표현하는 종교음악이 최고인데, 그는 마태수난곡과 같이 오라토리오의 형식을 통해 한편으로 화성악적인 완성을 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 텍스트에 봉사하는 음악을 높이 예찬했다.

같은 수반음악이라도 이탈리아에서 주로 발전한 오페라나 오페레타의 형식에 대해서는 은근히 비판적이다. 그러면서도 음악이 앞으로 전개되는 방향은 그런 오페라적 형식이라고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이란 장르 자체로만 본다면 이런 기악, 관현악, 절대음악이 가장 순수한 음악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헤겔이 절대음악을 최고로 간주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악 장르의 자체 내 한계 때문에 시문학과 결합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다. 더구나 헤겔이 예술의 목표를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한 불가피했을 것이다. 여기서 헤겔에서 예술 장르론과 예술 형식론 사이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헤겔에서 음악의 미래는 오페라다. 헤겔이 바그너의 음악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헤겔은 화성악을 넘어서서 시문학에 다가가는 바그너의 음악을 바흐처럼 높이 평가했을까? 


[1] 미학강의 3권, 202쪽

[2] 헤겔은 이 시기 바흐를 대표적 작가로 거론한다. 미학강의 3권, 217쪽

[3] 미학강의 3권, 203쪽

[4] 미학강의 3권, 204쪽

[5] 미학강의 3권, 204쪽

[6] 미학강의 3권, 208쪽

[7] 미학강의 3권, 209쪽

[8] 미학강의 3권, 222쪽

헤겔미학산책44-화성과 선율 그리고 정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4- 화성과 선율 그리고 정신

 

1) 음악의 핵심

음악의 핵심은 무엇일까? 흔히 서양 음악이나 근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악의 핵심은 화성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화성악적인 찬란함을 보여주는 기악이나 관현악을 음악의 최고봉으로 삼는다. 하지만 일반인에게서 이런 화성악적 음악은 어렵다. 많은 비 서양, 비 근대 음악은 화성악적인 요소가 드물고 주로 선율을 통해 전개된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율은 마음을 사로잡으니, 성악이나 오페라, 가요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화성이냐, 선율이냐 하는 논쟁에 대해 헤겔은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이런 물음이 헤겔의 음악 장르 분석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음악론을 읽어보면 누구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화성과 선율의 의미를 알아 보아야 하는데, 이 점과 연관하여 헤겔은 미리 사과하면서 시작한다. 음악에서 “세부 기교의 규정 즉 음의 양적 관계, 악기, 조성, 화음” 등이 중요하지만 자신은 “이 영역을 답사한 경험이 거의 없으므로, 일반적 관점과 단편적인 언급들에 그칠 뿐”[1]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가 음악의 구체적 기법을 잘 모른다는 것을 말할 뿐, 그가 음악을 즐기지 않거나 음악의 원리를 모르거나 음악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심지어 음악의 구체적 기법에 관해서도 일반인이 이해하는 간단한 원리 정도는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필자 역시 음악에 관한 한 헤겔보다 더 모르니 그저 그의 언급을 따라 살펴보는 데 그치기로 하겠다.

 

2) 음악의 형식

음악은 소리가 주관의 내면성 속에서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 소리가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는 피타고라스 이래 일찍부터 탐구되어 왔다. 템포, 박자, 리듬을 거쳐 화성에 이르는 음들의 관계는 수학적인 비례를 통해 규정된다.

그 출발점에 있는 템포는 대체로 인간의 심장 박동의 규칙성에 따른다고 보는데, 헤겔은 이를 단순한 자아의 반복을 통해 자연의 흐름을 규제함으로써 인간의 자아가 “자기를 지양하여 객체로 되며 다시 대자존재로 되돌아 와서” “자기 관계하는 것”[2]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박자는 세부 단위로 템포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니 빠르고 느린 등 음악 전개의 속도를 규정한다. 헤겔은 이런 박자를 건축의 열주나 창문이 배치된 간격에 비교하면서 인간은 “이런 박자를 통해 자기를 재 발견하며 그 속에서 만족을 얻는다”[3]고 한다.

박자는 음의 강약 즉 악센트와 결합하면서 규칙적인 리듬이 된다. 리듬에 이르러 음악적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리듬은 인간의 활동의 리듬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삶의 다양한 형식, 춤추거나 의식을 거행하거나 행진하는 등의 리듬은 음악적 리듬과 합치한다.

리듬은 음색과 결합된다. 음색은 악기가 내는 음향학적인 배음들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배음의 관계는 악기마다 독특하며 여러 악기의 음색은 서로 어울리거나 대립한다. 헤겔은 교향곡에서 여러 악기들이 서로 응답하면서 교차하는 것이 마치 “연극적인 연주, 일종의 대화처럼”[4] 들린다고 말한다.

음악형식과 관련해 최후로 헤겔은 화성을 설명한다. 일정한 비율로 추상화된 음들의 관계에 따라 음계가 형성된다. 여기서 음정의 배치가 중요한 데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곧 으뜸음이다. 으뜸음에 따라 결정되는 음들의 배치 방식에 따라서 화성이 결정되고 이는 다양한 감정과 연결된다.

 

“”그것들의 으뜸음을 통해 특정한 특성을 갖는데, 이 특성은 다시 나름대로 특정한 방식의 감정 즉 한탄, 기쁨, 슬픔, 고무적 선동 등에 상응한다.”[5]

 

전체적으로 보아서, 리듬과 화성 등은 음들의 관계를 다루는데, 여기에는 수학적인 비례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이처럼 수학적 비례 법칙이 지배한다는 측면에서 헤겔은 음악과 건축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건축이 얼어붙은 음악이라면 음악은 생동하는 건축이라는 것이다.

 

3) 선율

음악의 리듬과 화성이 음악을 풍부하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 자체로서 감정적 즐거움이나 카타르시스를 주기는 한다.

하지만 헤겔은 음악에 이런 측면만 있다면 그것은 마치 내용이 없이 공허한 형식에 탐닉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 경우 음악은 본격적으로 예술이 될 수 없으며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요소 안에 정신적 것이 표현될 때 비로소 참된 예술로 고양된다는 것이다.

 

“화성은 … 박자나 리듬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이미 본격적 음악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자유로운 영혼이 산책하는 실체적 토대이자 합법칙적 마당이며 터일 뿐이다. 음악의 시적인 요소인 영혼의 언어는 내면의 열락과 심정의 고통을 음으로 분출한다.”[6]

 

“이런 분출 속에서 감정의 자연 폭력을 완화하여 자신을 그 너머로 제고한다. 까닭인즉 그 언어는 당장의 감동에 휩싸인 내면의 상태를 내면 자체의 청취, 자신 곁의 자유로운 머무름으로 만들며 또한 바로 이를 통해 심정을 기쁨과 고통의 핍박으로부터 해방하기 때문이다.”[7]

 

즉 음악은 그 속에 영혼의 언어가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음악은 자연적 감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며,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 그런 가운데 음악은 정신적 높이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 높이에 도달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선율 즉 멜로디의 역할이다. 이 선율은 음의 운동이지만, 그 운동은 이제 수학적 비례 법칙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런 선율은 수학적 비례 법칙에 엄밀하게 종속하는 음악의 형식 즉 리듬, 화성을 넘어서 독립적으로 떠돈다.

음악은 “영혼의 가장 내적인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삶과 운동을 내용으로 삼으므로 자유로운 내면성과 양적인 근본 관계 사이에 가장 심각한 대립으로 분열된다. 하지만 음악은 이런 대립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것을 자신 속에 수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난제도 지닌다.”[8]

이제 “일체의 모순과 불협화음이 호출되면서”, 이런 모순 대립 속에서 다시 조화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가운데, “선율적 평온의 승리를 축하한다.” 헤겔은 이런 투쟁은 “화성적 관계가 지닌 필연성”과 “비상[飛翔에 자신을 맡기는 판타지의 자유의 투쟁”[9]이라고 한다. 이런 투쟁을 통해서 정신은 감정에 지배되는 “우연적 자의의 주관성을 벗어나” “자기의 참된 독자성을 드러낸다”[10]고 한다.

리듬과 화성의 법칙을 따르는 음악은 엄밀하게 수학적이다. 그러나 선율에 이런 불협화음과 우연적인 요소가 있으므로, 음악은 산만성을 지닌다. 마치 만화경이 무한히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음악은 자유롭게 유희하는 듯 보이며 그 결과 산만한 느낌을 준다. 음악의 자유로움은 재즈나 산조와 같은 비정형 즉흥적 음악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체로 음악은 통일성을 준수하거나 주관적인 생동성을 띠고 나가면서도 자의적으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가 하면, 같은 방식으로 이리저리 구부러져 가다가 변덕스럽게 정지하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갑자기 삽입하기도 하며, 다시 흐르는 듯한 음조 속에 자기를 내맡기기도 한다. …음악은 이미 주어진 형태들 밖에서 움직이므로 음악을 붙드는 그러한 자연의 영역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법칙과 형태의 필연성은 주로 음들 자체의 영역에 해당한다.”[11]

 

음악은 선율 때문에 산만성을 가지지만 이런 요소는 다시 극복되면서 선율의 평온이 회복되어야 한다. 헤겔은 선율과 화성의 관계를 ‘자세와 골격의 관계’에 비유한다. 즉 견고한 골격이 부적절한 자세와 운동을 막고 적절한 자세와 운동을 지지하듯 화성은 선율 움직임의 자유를 위해 지지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4) 선율과 정신

문제는 이런 선율과 정신의 관계이다. 헤겔은 선율은 근본적으로 닮음이라는 고전적 형상화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헤겔은 오히려 그 관계를 상징적인 관계로 보면서 건축과 음악을 다시 한번 비교한다.

건축의 공간은 외적인 형태를 갖는다. 이 형태는 자연법칙에 구속되지만 형태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 즉 덩어리는 정신과 관계해서 상징적인 관계를 가진다. 건축은 기능적 합목적성에 따라서 신전이며 왕궁이나 주택이 된다.

음악의 경우 헤겔은 그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차라리 감정의 요소만을 표현할 수 있으며 건축이 자신의 영역에서 신상을 오성적 형식의 열주들 … 로 에워싸듯이, 그 자체로 언표된 정신적 표상을 감정의 선율적 음향으로 감싼다.”[12]

 

“지극한 깊이의 내면성과 영혼뿐만 아니라 극히 엄격한 오성 역시 음악을 지배하며, 그리하여 음악은 서로에 대해 독립적으로 되기 쉬운 이 두 극단을 자신 속에서 통일한다.”[13]

 

여기서 건축이 정신을 에워싸듯이 음악 역시 정신을 에워싼다고 말한다. 에워쌈에서 매개적 역할을 하는 것은 곧 선율이다. 즉 선율 자체는 리듬이나 화음을 넘어서 전개된(불협화음까지 포함한) 음의 특정한 관계이며 이로부터 어떤 감정이 출현한다. 이렇게 선율에서 표현되는 감정은 자체 내에 어떤 정신적인 것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이다. 음악은 에워싸는 방식을 통해 정신을 표현하니, 건축과 마찬가지로 상징적 관계를 갖는다.

감정적 선율이 정신적 표상을 어떻게 에워쌀 수 있을까? 헤겔은 음악이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을 다루면서 세 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첫 번째 방식은 감정을 무한하게 즉 내밀하게 만듬으로써 정신적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음악은 [조형예술처럼] 가시화를 위해 작업하려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내면성을 내면에 포착하는 일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음악은 내용 자체의 실체적 내적 심연이 심정의 심연으로 파고들도록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내용의 생명과 역동을 개별적 주관의 내면에서 묘사하되, 주관적 내밀성 자체를 그 본격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을 선호할 수도 있다.”

 

여기서 헤겔은 음악은 오직 감정만을 묘사하는데 그치지만 다만 그 감정은 자연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무한히 순수하게 되니, 헤겔은 이를 곧 내밀한 감정이라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승리의 기쁨을 무한히 고양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며, 영웅의 죽음 앞에 느끼는 연민을 가장 깊게 표현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와 음악 사이의 연관성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소리는 “영혼상태의 … 생생하기 그지 없는 직접적 표출이자, 심정의 ‘아’와 ‘오’이며” “영혼의 자기 생산. 영혼의 영혼으로서의 객관성”[14]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감정적 언어는 음악적 선율의 출발점이 된다.

이런 관점을 확대하면, 관념을 표현하는 언어의 청각적 특징이 음악의 출발점으로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사실 많은 노래는 특히 오페라에서나, 판소리 등에서 보듯이 언어의 청각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물론 언어의 리듬과 화성이 음악의 리듬과 화성과 완전하게 평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는 대립 속에서도 평행한다.

이런 점에서 노래는 가사에 옷을 입힌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음악과 내용의 관계는 표상과 언어의 관계로 환원된다. 표상과 언어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기호적 연관일 뿐이니 이 역시 상징적이다.

세 번째는 음의 전개와 내용의 본성이 상응하는 경우이다. 어떤 면에서는 내용의 본성은 조형 예술의공간적 방식보다는 시간적인 음악적인 방식이 더 적합하게 상응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내용은 서사적 시간적 요소를 가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음악은 내용을 내용의 내적 관계와 친화적인 음의 관계 속에 감응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용이 빠르게 전개되는 경우, 음악도 빠르게 나가는 경우를 말할 것이다.

 

5) 음악의 한계

위의 세 가지 경우 가운데 음악에서 핵심적 방식은 역시 첫 번째 방식이다. 음악은 감정을 순수하고 무한하게 표현하면서 정신을 표현하니, 그런 한에서 음악 자체는 낭만적 예술이 된다. 주관의 내밀한 감정은 낭만주의 시대 와서 비로소 예술적 표현의 주요 내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음악이 표현하는 내용은 주로 낭만적 정신이고, 그 질료 역시 가상적인 성격을 지니므로, 낭만주의 시대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음악은 주관의 내밀성이라는 낭만적 정신을 무한한 감정을 통해 표현한다. 무한한 감정 자체는 낭만적이지만, 그 감정과 그 시대의 정신적 실체 사이의 관계는 상징적이다. 양자 사이에는 직접적 관계는 없으며 그 관계는 모호하다. 이 경우 내용과 감정은 비밀스러운 상징처럼 서로 구분할 수 없게 얽히게 된다. 내용은 감정 속에서 “비밀스러운 심연으로서 살아간다.”[15]

음악은 한편으로 고양되고 순수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서 그 어느 예술보다 탁월하다. 다른 한편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정신의 내용은 감정에 그치고 그 나머지 실체적 내용은 수수께끼처럼 감추어져 있으며, 정신의 풍부한 내용을 모호하게만 표현된다.

그 결과 음악에서 아주 짧은 테마는 무척이나 깊은 감동을 주지만, 조금만 길어지면 같은 것이 되풀이 되는 것과 같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고전 관현악을 즐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신적 실천적 훈련을 쌓아야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것은 음악이 지닌 장점과 한계는 음악가를 대표하는 오르페우스의 신화에서 잘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하데스까지 감동시켜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해내지만, 그의 음악은 자기 내에 머무르면서 음악의 정신적 가치를 알지 못하는 디오니소스 신도 바카이에 의해 살해된다. 음악이 지닌 한계 때문에 음악은 불가피하게 시문학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1] 미학강의 3권, 145쪽

[2] 미학강의 3권, 171쪽

[3] 미학강의 3권, 172쪽

[4] 미학강의 3권, 182쪽

[5] 미학강의 3권, 186족

[6] 미학강의 3권, 190쪽

[7] 미학강의 3권, 190쪽

[8] 미학강의 3권, 168쪽

[9] 미학강의 3권, 194쪽

[10] 미학강의 3권, 192쪽

[11] 미학강의 3권, 150쪽[번역은 필자 자신이 수정한 것임]

[12] 미학강의 3권, 146쪽

[13] 미학강의 3권, 148쪽

[14] 미학강의 3권, 157쪽

[15] 미학강의 3권, 159쪽

헤겔미학산책43-심정의 예술로서 음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3-심정의 예술로서 음악

 

1) 음악의 질료

낭만주의적 장르의 두 번째 형태가 음악이다. 많은 사람이 음악 장르가 특별하다는 점에 대해 언급한다. 음악은 그 어떤 예술보다 마음을 직접적으로 흔든다. 음악은 시대와 민족을 뛰어넘어 감동을 준다. 음악은 심정을 무한히 고양시켜 탈아 상태에 이르게 한다. 등등. 이런 음악의 일반적 독특성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 질료 또는 매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음악의 질료는 소리이다. 헤겔에서 이 소리는 물체의 진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체를 이루는 부분은 응집된 상태에서 고정되어 있다. 물체의 부분이 충격을 받으면 진동하게 된다. 진동은 물체의 부분이 제 자리를 이탈하였다가 다시 제 자리로 복귀하는 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운동이다. 헤겔은 이를 자기를 부정하고 부정된 자기를 다시 부정하는 ‘이중 부정’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헤겔은 진동이 물체의 공간적 고정성을 극복하는 운동이며 이를 통해 물체 내에 잠재하는 운동성이 밖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물체의 운동성이 해방된다고 말한다. 물체에 대립하는 순수 운동성으로서 빛이 물질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관념화라면, 물체의 진동은 두 번째 관념화에 해당한다. 진동은 빛처럼 물체에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운동이 아니라 물체 내에서 나온 운동이다. 헤겔은 진동을 ‘역학적인 영혼성[mechanische Seelenhaftigkeit]’[1]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질료를 통해 더 이상 정태적 질료적 형상이 아닌 최초의 한층 관념적 물질[ideelle[2]]인 영혼성이 나타난다. … 음은 진동 즉 공간적 상태의 지양이지만, 반작용에 의해 다시 자기를 지양하는 것이므로 이중적 부정이다. 따라서 이런 음은 발생 속에서는 외면성은 그 현존재를 통해 자신을 다시 폐기하여 그 자체로 사라지고 만다.”[3]

 

진동은 물체의 속성에 따라 다양하며, 또 전달되는 매질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는데, 그 가운데 음악적 소리는 가청적인 비교적 고른 음을 내는 진동이 공기 중에 전달되는 소리로 제한된다.

 

2) 소리의 가상성

진동은 운동성의 해방이기는 하지만 다시 물체로 복귀하고 마는 것이어서 그것이 내는 소리는 일시적이다. 소리는 공간적 형태와 같이 존속하지 않으며, 한번 울렸다가는 곧 바로 사라지는 것이니, 이런 일시적인 소리 그 자체로서는 음악의 질료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소리는 일시성 때문에 서로 끊어지면서 다양한 소리로 분화될 수 있다. 빛이 분화된 색채가 가상화되면서 회화의 질료가 듯이 소리도 분화되면서 비로소 예술적 질료가 될 수 있다. 색채가 다른 색채와 대비되어 의미를 지니듯, 소리는 다른 소리와 대비되어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빛은 타자적인 물체에 반사되면서 분화되지만, 태어나면서 이미 분화되고 결합 가능한 소리는 색채 이상으로 가상적인 질료가 된다.

가상적 질료는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할 수 있으니, 낭만적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소리는 색채보다 더 가상적이므로,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하기에 더 적합한 질료가 될 수 있다.

 

[소리 자체는] “이미 물질적 관념[ideell]이지만, 이런 물질적 관념의 현존을 포기하면서, 내적인 것에 적합한 표현방식으로 된다.”[4]

 

색채가 되려면 빛의 외부에 반사의 평면이 필요하다. 이 반사 평면에서 색채는 공존할 수 있기에 서로 대비되면서 주관성을 표현한다. 일시적인 음이 대비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음이 보존되면서 시간적으로 지속하는 지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 지반은 무엇일까? 음이 서로 대비되는 평면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처럼 어떤 시간적 지속체가 있는 것이라면, 그런 지속 위에서 소리가 서로 대비될 수 있겠다. 하지만 헤겔은 시간적 지속체를 상정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헤겔은 시간적 지속이 주관의 내면성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본다.  

소리는 인간의 주관적 내면 속에 받아들여짐으로써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며 과거 보존된 소리는 현재 다시 받아들여지는 소리와 더불어 하나의 시간적 공존을 이루게 된다. 소리는 시간적 내면의 평면 속에서 보존되면서 서로 연관을 맺는다.

회화의 질료가 색채이지만 그 색채는 공간적 평면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만큼 회화에서 공간적 평면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음악의 질료는 소리이지만, 그 소리가 지속되는 주관적 내면이라는 바탕이 없으면 소리로만은 음악의 질료가 될 수 없다. 그만큼 소리가 연관되는 주관적 내면성이 음악에서 중요하다.  

색채가 나타나는 평면은 외면적 공간이지만 음악이 나타나는 평면은 내면적 평면이다. 회화가 나타나는 평면은 주관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이 출현하는 시간적 평면은 주관 없이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음악은 소리를 받아들여 연결하는 바탕으로서 주관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예술이다.

 

“음악의 표현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공간적으로 상존하는 객관성으로 만들지 않고 … 음악은 오직 내면적 주관적인 것에 의해 수행되며 또한 오직 주관적 내면에 대해서만 현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5]

 

3) 시간성의 종합

그렇다면 음악의 소리가 지속하는 지반인 내면적 시간 평면은 어떤 평면인가? 헤겔은 주관성의 차원을 다양하게 구분한다. 그 첫 번째 차원은 지각적 인상이 주어지는 차원이며 두 번째 차원은 표상[Vorstellung: 관념]의 단계이다. 관념의 차원은 이미지에서 상상(또는 환상), 기호를 거쳐 관념(언어)에 이른다. 세 번째 차원은 분석하고 종합하는 사유의 단계이다.

두 번째 관념의 단계는 나중에 나오는 시문학의 질료가 된다. 시문학은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나 상상이나 환상을 통해 추상적 사유를 표현한다. 이 첫 번째 차원 즉 외적 자극이 처음으로 직접 받아들여지는 차원이 음악과 관련된 주관적 내면이다.

이 첫 번째 차원에서 주관성은 외적 자극은 내적인 인상을 남기는데, 여기서 시각적 인상과 청각적 인상 등 다양한 인상의 구분이 일어나게 된다. 시각, 청각 등 각각의 감각 영역에서 한정해 본다면, 어떤 인상은 같은 영역의 다른 인상과 구별되는 질적 차이가 없으며 다만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양적 차이만 가질 뿐이다. 헤겔은 이를 ‘흥분[Affekt]’ 또는 ‘육체화한[Verleiblichung] 정신’[6]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시각적 인상은 명도나 온도, 채도의 크기 차이를 가지며, 청각적 인상의 경우, 고저와 장단, 강약 등의 크기 차이를 갖는다.

어느 감각의 영역에서든 인상이 완전히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미 주관적 자아가 움직이면서 일차적으로 관념화가 일어나니, 관념화는 주관의 자기 관계에서 나온다. 모든 인상이 동일한 주관 속에 들어오면서 주관은 그 인상에 대해서 자기 관계를 갖는다. 이런 대자성 때문에 지각인상은 관념화된 것이다. 빛은 색채감각을 남기며, 음파는 소리라는 소리감각[7]을 남긴다.   

지각 인상은 동일한 하나의 주관 속에 들어오므로, 이 관념화된 지각인상에서 이미 일차적 종합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지각 인상이 하나의 흐름 속에서 공존하고 계기[繼起]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지각 인상이 하나의 주관 속에서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가 곧 시간성이다.

시간성 속에서 지각관념은 분석되거나 결합되는 법이 없이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만을 유지한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종합이며 가장 단순한 종합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동일한 시간적 주관을 “완전히 빈 자아”, “그 어떤 내용도 없는 자기”, “추상적 주관성 자체”[8]라고 말한다.

 

“자아는 시간 속에 있고 시간은 현존하는 자아 자체[Das Sein des Subjekts selber]이다.”[9]

 

헤겔은 시간을 ‘개념의 현존{Dasein des Begriffs}’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개념’은 자기 운동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자기를 구분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주관이 대상을 자기 내에서 분석하고 종합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개념이 여기 시간성의 차원에서는 단순히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일 뿐이므로 헤겔은 이를 ‘현존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감각적 인상의 첫 번째 주관화의 단계에서 등장하는 시간적 내면성 영역이 곧 소리가 받아들여져서 서로 공존하고 계기하면서 음악으로 발전하는 내면적 평면이다.

 

4) 심정의 차원

헤겔에서 지각적 인상에서 표상을 거쳐 사유까지는 이론적 인식의 영역이다. 반면 감정은 욕망 다음으로 일어나는 실천적 의지의 영역이다. 실천적 의지는 나중에 표상과 결합하면서 자유의지로 발전하는데, 감정은 욕망과 자유의지 사이의 중간 단계이다.

외적으로 주어진 감각적 인상은 시간성 속에서 최초로 내면화된 것이다. 이런 내면화된 감각 인상이 실천적으로 연결되면서 감정으로 발전한다. 이 감정은 실천적 의지의 일종인데, 감각 인상과 감정 사이의 연결은 조건-반사적이다. 즉 감각은 특정한 주관이 가진 습관적 기제에 따라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욕망이 자극에 대해 직접 반응하는 본능적 행동이라면 자유의지는 전적으로 주관의 선택에 달려 있다. 반면 감각과 감정은 조건-반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감정은 다중적으로 분화된 반사 체계가 구축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반사 체계 속에서 주어진 조건에 따라 어떤 반응이 나타나게 될 때 이를 조건-반사적이라 한다. 여기서 반사 체계는 오랜 경험, 습관을 통해 학습된 것이다. 감정은 이미 학습된 체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능동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주어진 조건이 주어지면 곧바로 반응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음악은 대체로 감정이라는 반응을 낳지만 때로는 이 반응이 직접 행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행진곡이나 춤곡을 예로 들고 있다.

이처럼 감각과 감정을 매개하는 주관은 다만 습관적인 체계일 뿐인, 헤겔은 이를 정신이 아니라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주관은 단순한 것이며, 헤겔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연의 즉자적인 총체성이다. 영혼은 개체적이며 배타성을 가지지만 이는 자기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감정, 자기 정체성[Selbstgefuel]에 머무른다. 헤겔은 이런 자기감정을 지닌 주관 즉 영혼을 가슴[Herz] 또는 심정[Gemuet]이라고 규정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적 시간의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청각적 관념의 결합은 감정을 조건 반사적으로 즉 습관적으로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의 주요 과제는 … 가장 내면적인 자기가 그 주관성과 추상 관념적[ideelle] 영혼의 면에서 내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방식을 반향하는[widerklingen] 데서 성립한다.”[10]

 

5) 음악의 독특성

음악에서 외적 자극이 지각을 거쳐 곧바로 감정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아의 활동이 시간적 종합에 머무르고, 감정은 습관성에 그치므로, 이 셋 사이에 수동적인 직접적 연결만 있을 때가 많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자극과 지각, 그리고 감정은 마치 하나로 결합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외면적 평면을 필요로 하는 회화가 독자성을 지니는 것과 달리 음악은 주관의 내면적 평면이 있어야 하므로 주관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예술로서 존재할 수가 없다. 악보에 쓰인 음악은 아직 아무런 음악이 아니다. 음악은 연주자가 있어야 하고 감상자가 있어야 한다. 그들의 주관이 살아서 움직이는 동안만 음악이 존재할 수 있다.

 

“음악을 통해 요구되는 것은 궁극의 주관적 내면성 자체이다. 음악은 심정 자체에 직접 호소하는 심정의 예술이다.”[11]

 

“음악이 목적과 내용으로 삼는 주관적 내면 자체는 … 주관적인 내면성으로 현상시킨다. 그런 한에서 음악적 외화는 … 생동적인 주관의 전달로서 제시되어야 한다.”[12]

 

이 주관적 내면이 시간적 종합의 차원이며 조건 반사적이므로, 이로부터 음악의 독특성이 생겨난다. 음악에서 주관적 내면은 표상 아래의 가장 단순한 차원이므로 음악은 문학과 달리 민족과 상관 없는 보편적인 예술이 된다[13]. 음악은 이 매개과정이 거의 수동적으로 일어나므로,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예술이 된다.

 

“음악은 의식을 사로잡는다. 의식은 더 이상 객체에 맞서지 않으며 자유의 상실 속에서 음 자체의 계속적 흐름에 의해 감화[fortgerissen]된다.”[14]

 

또한 음악에서 작동하는 내면성은 추상적 자아와 영혼의 차원이므로, 자기의식적인 관념의 차원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음악은 마치 사유하는 정신의 차원을 벗어나 감정의 차원인 영혼으로 되돌아가서 황홀경에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발생하게 된다.

이런 영혼이 동물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은 정신을 표현하면서 순수한 내밀성의 단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음악적 감정이 어떻게 무한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가? 이는 앞으로 살펴볼 문제가 된다.


[1] 헤겔, 철학강요, §300

[2] 헤겔의 용어 ‘ideell’ 이나 ‘reell’을 번역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관념적[ideal]’, ‘실재적[real]’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도 차별성을 지닌다. ‘ideell’ 이나 ‘reell’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본다면 양자는 실재하는 것과 관념적인 것 사이의 중간에 있다. 실재하는 물질이 물질성의 영역 내에서 관념화[ideell]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빛과 소리가 그렇다. 반면 관념적인 것이 관념의 영역 안에서 실재하면, 그것이 reell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의 의미나 수의 관념과 같은 객관화된 관념이 reell한 것이다. 그 의미를 살려 ideell은 ‘관념적 물질’로, reell은 ‘객관적 관념’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3] 미학강의 3권, 142쪽

[4] 미학강의 3권, 142쪽

[5] 미학강의 3권, 143-144쪽

[6] 헤겔, 철학강요, §401

[7] 시각이나 청각 인상이 시각이나 청각 관념과 다른 것은 아니다. 인상은 어디까지나 관념으로 존재한다. 인상이라 말할 때는 외부에서 자극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관념이라 말할 때는 주관 자신이 자기의 구별과 관계하는 대자적 관계의 측면을 말한다.

[8] 미학강의 3권, 143쪽

[9] 미학강의 3권, 163쪽. 여기서 시간이 자아 자체의 ‘존재’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시간이 개념의 현존이라 했을 때와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즉 아직 존재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자아, 개념이라는 뜻이다. 

[10] 미학강의 3권, 143쪽

[11] 미학강의 3권, 143쪽

[12] 미학강의 3권, 165쪽

[13] 엄밀하게 말하면 음악도 민족성이나 계급성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적 반응 체계는 습관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습관적 체계는 모호하며 일반성을 가지므로, 음악이 민족과 계급을 뛰어넘은 가능성이 생긴다.

[14] 미학강의 3권, 160쪽

헤겔미학산책42-내밀성(숭고함)의 회화[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2-내밀성(숭고함)의 회화

 

1)

원시인의 동굴 벽화부터 따진다면 회화의 역사는 아마 가장 오래되었을 것이다. 회화는 고대, 그리고 고전 시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출현했다. 그런데도 헤겔은 마치 고대나 고전 시대에는 회화가 없었다는 듯이 낭만주의 시대 이후부터 회화를 다루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고전 시대 예술은 일반적 정신을 표현하려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등장했다. 회화는 질료의 특성상 고대, 고전 시대의 관심을 충족하기 어려웠다. 그 당시 무덤 벽화나 도자기 그림은 다만 장식적이고 종속적인 역할만 담당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에 회화는 구체적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 장르로 주목 받으면서 예술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낭만주의 시대 회화가 특히 고전 시대의 신화적 인물을 다루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르네상스 회화나 신고전주의 시대 회화가 그렇다. 그러나 그런 회화는 그 표현 내용을 더 이상 고전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고전 시대 신화조차도 낭만주의적 방식으로 즉 그 특칭적 주관성과 개별적 사건을 중심으로 표현하려 한다.

 

2)

헤겔은 회화의 내용을 설명할 때에는 낭만주의 시대 출현한 회화를 주제에 따라 세 가지 주제로 구분한다. 그것은 종교적 내밀성[innigkeit][1]과 실체적 내밀성, 그리고 현실 자체이다. 회화의 역사적 발전을 설명할 때는 시대적으로 세 단계에 걸쳐 구분한다. 이 세 단계는 중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낭만주의 시대가 발전하는 역사와 대체로 일치한다. 고딕 시대까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까지, 그리고 계몽주의 이후의 시대이다. 주제와 시대의 관계는 세 가지 주제별 분포 곡선이 약간 중첩되면서 시대적으로 중심을 이동하는 방식으로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시대적 구분보다는 주제별로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

첫 번째 주제는 종교적 내밀성을 다룬다. 이는 인간인 동시에 신적인 존재의 주관성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성인에게서 나타나는 주관성이다. 그 주관성의 내용은 성령의 정신이다. 성령은 곧 무한한 사랑의 정신이니 이는 주로 성서나 실제 역사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역사적 현실의 리얼리티를 살리면서, 신성한 존재의 내밀한 주관성이 표현된다.

언뜻 보면 신성한 존재의 모습은 고전 시대 영웅의 모습과 닮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나 마리아, 성인 등의 내밀한 사랑의 정신이 회화에서는 그 외면적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전 시대 영웅의 모습이 이상화된 표현이라고 한다면, 여기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건 속에서 사랑의 정신이 표현된다.

전자가 고요함과 지복에 머물러 있다면 여기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고통을 매개로 한다. 이런 회화는 신성한 존재를 “인간의 죄악과 회한과 참회, 비열과 사악과 대비하여” 나타내거나 역으로 “경배자를 통해 가시화한다”[2].

헤겔은 고전적 영웅의 정신과 낭만적 종교적 내밀성을 비교하면서 전자의 예로 니오베와 라오쿤의 고통을 들고 있다. 니오베와 라오쿤은 신체적 고통 속에서도 “회한과 실망 속으로 스러지는 대신” “자신을 위대하게 보존한다”. 이런 자기 보존은 실체적 명령을 수행하는 것일 뿐, “공허하며” “차가운 체념이 화해와 만족을 대신하며” 이 속에서 개인은 이 속에서 “자기가 집착했던 것을 포기하며” 그것은 “경직된 침착함일 뿐이며 운명에 대한 만족 없는[erfullungslos] 순응일 뿐이다”.[3]

반면 종교적 사랑의 정신은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내면의 고통을 표현하며, 감각적 고통을 참는 의연함이 아니라, 내면의 참회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의 감정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감당하기 벅찬 지복의 감정으로 남는다.”[4] 낭만적 회화에서 사랑의 정신과 개인적 특성은 서로 자유롭다. 가장 개인적이면서 가장 사랑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으니, 그러면서도 양자는 서로 하나로 합일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인적 특성은 … 낭만적 예술 원칙에 따라 자유로워지며, 그럴수록 더 특성적으로 표출된다. 그런데도 이 특성적인 것은 내밀한 사랑을 흐리게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사랑도 … 특성적인 것 자체에 매임이 없이 자유롭고 또한 그자체로서 진정 독자적인 정신적 이상을 형성하기 때문이다.”[5]

 

헤겔은 종교적 내밀성을 표현하는 대표적 회화로 주로 르네상스 시대 종교화를 들고 있다. 그 대표적 작품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상일 것이다. 헤겔은 특히 성모의 자애로운 모습 외에도 십자가 아래 성 식스토스 1세와 성녀 바르바라의 기도하는 모습과 대비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2)

낭만적 회화에서 두 번째 주제는 실체적 내밀성을 다룬다. 여기서 개인은 성스러운 존재가 아닌 세속적 존재이다. 그의 주관성 역시 무한한 내밀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은 종교적 내밀성처럼 사랑이나 자애, 경건성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 내밀성은 인간의 특정한 성격으로 나타난다. 이 성격은 긍정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부정적인 성격도 있으니, 그것이 무한하다는 점에서는 종교적 내밀성에 못지 않는다. 르네상스 화가는 종교화에도 뛰어나지만 이런 실체적 내밀성을 표현하는 데도 탁월하다. 헤겔은 그 대표적 예로 무리요의 ‘거지 소년’을 들고 있다.

이런 내밀함은 군중의 혁명적 열정이나 전쟁이나 학살로 받는 고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곧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일 것이다.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이라든가, 고야가 그려낸 전쟁의 참화도 그와 마찬가지다.

회화의 경우 실체적 내밀성은 개인적 주관보다는 오히려 자연이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도 출현하니 “격랑을 일으키는 무한한 위력을 지닌 바다의 고요한 그 깊이”라든가 “폭풍우가 몰아쳐 울부짖고 솟구치면서 거품을 내며 부서지는 파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헤겔이 묘사한 것과 가장 닮은 화가라면 폭풍우 치는 바다를 자주 그린 윌리엄 터너가 아닐까?

알프스를 넘어가는 한니발의 군대, 자연 앞에서의 숭고함, 헤겔은 이를 실체적 내밀성이라 이름붙였다

3)

낭만주의 회화의 세 번째 주제는 현실의 긍정적 모습이다. 즉 “전적으로 우연적일 뿐만 아니라 저급하고 천박한 것으로도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삶의 장면들”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사악한 포주라도, 또는 단순히 식탁을 장식하는 꽃병이라도 이제 관심의 대상이 된다.

과거에는 이런 주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주제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 끝에 특히 근대 부르주아 질서가 형성되는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이런 우연적이며 천박한 것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으로 된다.

흔히 이런 예술은 사실주의로 간주되며, 여기서 구체적 현실을 얼마나 잘 모방할 수 있는가가 예술평가의 기준으로 된다. 하지만 헤겔은 이런 우연적이고 천박한 것에 대한 관심은 현실을 모방하려는 욕구 때문에 나온 것이라 보지 않는다. 이런 관심은 이 시대 정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즉 이 시대 정신은 가장 구체적인 것 속에 가장 일반적인 정신이 존재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것 자체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구체적인 것을, 그것이 아무리 무의미하고 천박하더라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하려 했으니, 사실 그것은 그것을 넘어 존재하는 초월적 정신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마치 근대 자연과학자가 자연 속에서 신의 흔적을 찾기 위해 자연을 연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예술작품이 이른바 자연성과 자연의 기만적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경탄될 만하다고 부추겨지더라도 이를 통해 [진정한] 향유가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부추김은 본래적 핵심을 호도하는 는 기만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모방의 경탄은 자연작품과 예술작품의 외적 비교에서 귀결할 뿐이며 … 여기서 … 본연의 내용과 예술적 요소는 표현된 사태가 사태 자체와 일치하는가 즉 실재에 영혼이 깃든 것인가 때문이다.”[6]

 

4)

우연적이고 무가치한 현실 속에서 영적 생기를 발견하려는 시도로 헤겔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독일과 네델란드 풍속화이다. 우선 이런 풍속화가 다루는 대상을 보자. 네델란드 풍속화는 “자연의 대상들과 자잘한 현상들, 가정생활의 품위, 평온함과 안빈낙도, 국경일의 행사, 축제와 행렬, 농부의 춤, 놀이공원에서의 재미, 흥청거림에서 얻는 기쁨” 등을 소재로 삼는다. 헤겔은 이런 작품이 단순히 세속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세속적인 것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건하며, 그 부에 오만함이 없이 만족하며, 가정과 주위에 대해 담백하고 기품 있고 순수하게 머물며, 그들의 모든 상태들을 철저히 염려하고 즐기는 가운데 독립성 및 진취적 자유로써 자신을 지킨다”[7]

 

한마디로 말해서 세속적 삶 속에 정신의 생동성이 살아 있다는 것인데, 이 정신적 생동성은 바로 종교 혁명과 해방, 그리고 세계 무역, 바다의 간척 속에서 활동했던 네델란드인의 올바른 대담성과 끈기, 충직하고 평온하고 인정 있는 시민성을 표현한다고 한다.

이런 순간적 현실로 들어갈수록 단순히 공간적 형태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이런 순간적 현실은 색채의 마법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으니 헤겔은 네델란드 풍속화가 보여주는 이런 기법에 대해 주목한다.

 

“이 회화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최대한의 예술적 진리로 발전시킨 것은 한편으로는 ..선술집의 광경들, 결혼식 및 기타 농부들의 잔치…등에서 표현된 빛, 조명, 그리고 채색 일반의 마법 및 색채 마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히 생동적인 성격의 특성화이다.”[8]

 

여기서 다시 헤겔은 색채의 마법을 강조하는데, 이는 앞에서 회화의 질료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바로 그 색채의 음악과 색채의 마법이다.

 

5)

헤겔은 색채의 마법과 음악을 통해 구체적 형상을 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색채의 마법은 단순히 색채원근법을 통해 입체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니다. 색채의 음악은 동시에 감정을 생산하니, 이를 통해 회화의 특칭적 주관성의 원리를 실현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헤겔이 칸딘스키가 주장했던 것처럼 회화가 형상의 창조를 넘어서서, 색채 자체의 음악으로 나간다고 보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색채가 색채의 음악으로 발전하면서 이제 회화 장르를 넘어서는 음악 장르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1] 헤겔이 자주 사용하는 내밀성[innigkeit]라는 말의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내면성 또는 심정성을 의미하면서도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기 내 복귀라는 운동성을 의미하며, 따라서 항상 무한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무한성은 한없이 크거나 작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내볼 복귀하여,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규정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칸트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숭고성 가운데 특히 역학적 숭고성에 해당한다.

[2] 미학강의 3권, 53쪽

[3] 미학강의 3권, 47쪽

[4] 미학강의 3권, 48쪽

[5] 미학강의 3권, 49쪽

[6] 미학강의 3권, 69쪽

[7] 미학강의 3권, 135쪽

[8] 미학강의 3권, 136쪽

헤겔미학산책41-회화에서 구성의 문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41-회화에서 구성의 문제

 

1) 회화

회화의 질료는 색채다. 헤겔은 회화의 질료 자체가 이미 가상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즉 빛은 요소로 분화되면서 색채로 되고, 그 색채의 상호 관계를 통해, 대립과 조화를 통해 대상을 표현한다.  색채는 이런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니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며, 자기 부정성을 지닌 가상적인 것이다.

질료의 특성상 회화는 특칭적 주관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평면적 형상은 특정한 주관적 시점에서 선택된 것일 수밖에 없고 색채의 대비 역시 주관적 심정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특칭적 주관성의 눈에 보이는 현실 즉 구체적 현실을 그려낼 뿐이다.

그 때문에 회화는 일반적 정신을 형상화하는 데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고대나 고전 시대에도 회화가 있었지만 이 시대 주된 관심의 대상인 신과 영웅 자신은 항상 조각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으니, 조각은 장르의 특성상 일반적 정신을 표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회화가 만일 신과 영웅을 표현하게 된다면, 그것을 특칭적 주관으로 만들어 인간화해 버리고 마니, 이 시대 회화라는 장르는 기피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에도 회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집트 무덤 벽화나 그리스 도자기 회화가 다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시대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으니 이를 표현하는 무덤 벽화나 도자기 그림은 다만 장식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다시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출현했다. 자기를 부정하고, 이행하고야 마는 그야말로 우연하고 허망한 현실이 이 시대에는 오히려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마치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듯이 이런 우연성과 허망함 속에 진정으로 실체적 정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 회화는 그 표현 가능성이 돋보이게 되면서 건축과 조각을 대신하여 주도적인 예술로 등장하게 된다.

 

2)

낭만주의 예술은 구체적 현실 즉 우연하고 허망한 현실을 그 자체로서 만족스러운 현실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낭만주의 예술은 구체적 현실을 통해 그 시대 정신을 드러내려 한다. 구체적 현실은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 가운데서 일반적 정신으로 복귀한다.

헤겔은 이런 자기 부정하는 운동 속에 있는 현실을 가상이라 규정했다. 구체적 현실에서 나타나는 이런 자기 부정의 운동성이 곧 ‘영적 생기[geistige Beseelung]’다. 이런 가상성은 개인의 주관적 모습 속에서는 그 속에 담긴 내밀한[innig] 심정으로 드러난다.

 

“회화는 색채들의 특수화를 통한 형상화, 평면으로의 확장이라는 감각적 요소 속에서 움직이며,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대상성의 형식은 정신에 의해 정립된 예술적 가상[schein]으로 변화하며, 회화에서는 이 가상이 실제의 형상 자체를 대신한다.”[1]

 

[외물의 현실적 현존재] “더 이상 그 자체로서 궁극적 타당성을 간직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이 실재성 속에서 정녕 자체가 내적 정신이 단순하게 빛나는 가상[Scheinen]으로 격하되어야 한다.”[2]

 

조각에서의 고전적인 이상화에서와 달리 회화에서 외적 형상은 자연적 명랑성, 지복, 자족성을 지니지 않으며, 오히려 외적 형상은 “분열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자기 안으로 회귀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명랑성, 지복, 자족성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이어야 하며, “전체가 정신의 내면성으로 전이되어야 한다.”[3]

 

3)

그러나 회화에서 가상성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는 문제이다. 회화는 색채를 통해 만들어진 평면적 형상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그것이 지닌 색채의 음악과 색채의 마법은 어디까지나 공간적 평면 위에 펼쳐진 것이다. 평면적 형상은 일단 외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그 형상이 질료의 측면에서 보면 조각에서처럼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고 평면 위에 그려진 가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마치 외적인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회화에서 표현된 그 모습을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그 모습이 부정적인 모습 즉 고통 당하고 죽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날 경우, 이는 단순한 고통과 죽음으로만 여겨질 뿐, 이를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는 모습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거꾸로 긍정적인 모습, 아름답고 즐거운 모습으로 나타날 경우 그 역시 단순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만 여겨지며 이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정신적인 아름다움이며 즐거움이라는 사실은 간과된다.

장르의 특성상 외적인 형상을 자립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회화 그 자체는 외적 형상을 넘어설 수 없다. 회화는 시문학처럼 어떤 형상이 그런 자기를 부정해 나가는 운동 자체를 표현할 수는 없다. 그것이 하나의 자기 부정적인 가상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평면적 형상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회화는 구체적 현실의 가상성, 자기 부정의 운동, 영적 생기, 내밀한 심정을 그려낼 수 있을까?

우선, 관람객이 눈으로 또는 마음으로 외적 형상을 읽으면서 그 운동을 따라갈 때 비로서 음악과 마법이 출현한다. 이런 마음의 운동이 없다면 회화에서 영적 생기가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마음의 운동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그런 운동을 암시하는 요소가 평면적 형상 속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회화의 다양한 특수한 기법이 출현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한 화면 속에 다양한 군상을 통해 또는 삼면화나 벽화 등 연속된 그림 통해 가능한 한 이런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화에서 이런 경향 때문에 회화의 구성의 문제가 등장한다.

 

4)

헤겔은 회화를 다루면서 색채라는 질료가 드러내는 가상의 측면 못지 않게 회화 속에 다양한 대상들 사이의 상황과 행위, 모티브 그리고 인물의 구성에 주목한다.

조각은 이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고요하게 머무르며, 아무런 배경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조각은 이념이 자기를 구현한 것이어서 자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각도 점차 생동적으로 되면서 상황과 운동 속에서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그리고 다른 조각상과 함께 집단적인 군상을 이루거나 연속적인 부조로 발전한다.

회화의 경우 이런 측면을 더욱 발전시킨다. 우선 회화는 구체적 현실 속의 특수한 인격, 구체적 상황, 특정한 행위를 통해서 ‘극적 생명성[dramatische Lebendigkeit]’을 표현할 수 있다. 회화 속의 인물은 특정한 개성을 지니고, 외적 상황과 생생한 관계 속에 있어야 하며, 특정한 동기를 지닌 구체적 행위로 자기를 표현한다. 이 행위는 곧 전체적인 극적 운동 가운데 가장 극적인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 행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외적 상황과 구체적 행위 속에 있는 특수한 인격은 불가피하게 여러 인물을 끌어들이니, 인물의 군상이 회화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회화는 하나의 평면 공간 속에 시, 공간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이 동시에 표현되며, 때로는 연속된 회화 장면(예를 들어 삼면화와 같이)을 통해 이 다양한 사건이 표현되기도 하니, 회화의 이런 기법은 조각에서 등장한 기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상황 속에서 다른 인물과 관계 속에서 어떤 인물의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독특한 구성이 필요하게 된다. 여기서 근본적인 것은 정신의 운동을 공간적 구성 속에 표현하는 것이다. 그 구성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상승하기도 하고, 혼란 속에서 결정적 행위를 하는 인물로 집중되기도 한다.

 

“조각적 구상방식을 이렇듯 포기하고 고요하고 부동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생생한 인간적 표현과 특성적 개성을 이렇듯 추구하고 각 내용을 주관적 특수성과 그 다채로운 외면성 속으로 이렇듯 투입하는 가운데 회화의 발전이 이루어진다.”[4]

 

헤겔은 회화에서 이런 공간적 구성이 단순히 공간적 형태의 구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 구성은 동시에 색채의 대비, 조화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회화의 생명성의 화룡첨정은 오직 색채를 통해서만 표현 가능”[5]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색조들 및 서로를 비추고 서로 유희하는 그 조화와 대비의 단순한 향기와 마법 속에서 완전히 음악으로 건너가기 시작한다.”[6]

 

5)

회화는 정신의 운동을 색채로 만들어지는 공간적 형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아직 음악이나 문학과 같이 운동을 시간 속에서 생성하는 측면에서 파악하지는 못한다.

이런 한계 때문에 회화는 운동을 표현하는 시문학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헤겔은 이런 시도를 뒤셀도르프 화가의 시화전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런 시화는 당대의 시인의 시를 회화로 그려냈는데 헤겔에 따르면 유감스럽게도 이런 시도는 장르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써 혼란만 자아냈다고 한다.

시문학은 언어적 표상을 질료로 하면서 사태를 시간적인 계기를 통해 서술해 나간다. 반면 회화는 색채를 질료로 하여 공간적 형상을 공존적으로 가시화한다. 회화는 평면의 공간을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회화는 시간적 계기 가운데 어떤 극적인 장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과거나 미래는 동일한 평면 공간 속에 표현된 잔재나 암시를 통해 표현할 수밖에 없다. ,

그에 못지 않게 더 중요한 것은 시는 추상적 언어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며, 이런 감정이 전환하고 진행하며 고양하는 과정을 서술할 수 있다. 그러나 회화는 감정을 외적 형상을 통해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추상적으로는 신체의 자세나 얼굴의 표정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행위를 통해서, 즉 특정 상황에서 일어나는 열정적 행위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열정은 색채의 대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뒤셀도르프 화가들은 시를 회화로 표현하려 했으니, 아주 단순한 장면을 선택했으며 감정을 주로 표정과 자세를 통해서 묘사하는 데 그쳤다. 대표적으로 헤겔은 샤도프의 미뇽을 예로 들고 있다.

헤겔은 이런 한계를 지적하는 가운데, 시를 회화로 표현하려면 공간 속에 과거와 미래의 상황을 보여주는 풍부한 감각적 형상이 필요하며, 심정은 색채의 마법을 통해 제시되는 행위의 열정을 통해서 표현하여야 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성서의 이야기를 회화로 표현하려 했던 르네상스 화가의 노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 정신이 현실의 극적 생명성 속에 표현된 대표적 작품으로 헤겔은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이나 팔마 베키오의 그림 ‘야곱과 라헬’을 들고 있다.

하나의 그림 속에 여러 장면이 구성되어 있다.

6)

회화는 이처럼 특수한 주관성을 통해 이념을 표현하는 한, 그것이 내밀하게 표현되든 아니면 운동 속에서 표현되든, 회화 속에는 이미 작가 자신의 주관성이 포함되어 있다. 회화가 그려낸 특수한 주관성이 곧 작가 자신의 주관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주관성은 곧 독자의 주관성을 의미하는 것이니, 회화 속에는 이미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의 주관성이 전제되어 있다. 회화는 작품 속의 특수한 주관성을 통해 작가 자신의 주관성과 독자의 주관성 사이의 매개와 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이점은 회화를 다시 조각과 비교하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념이 자립적으로 출현한 조각의 경우 이 조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작가 자신의 주관적 관점이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조각은 무시간적 공간 속에 전시되며, 이 공간은 관객의 주관성 조차 배제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회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화는 주관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이제 그 전체 표현방식을 보더라도 오직 주관을 위해, 감상자를 위해 현존할 뿐 독자적으로 그 자체로서는 현존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보여준다. 관조자는 말하자면 처음부터 작품에 같이 있으며, 함께 고려되고 있으므로 예술작품은 주관이라는 확고한 점에 대해서만 오로지 존재한다.”[7]


[1] 미학강의 3권, 27쪽

[2] 미학강의 3권, 27쪽

[3] 미학강의 3권, 45쪽

[4] 미학강의 3권, 92쪽

[5] 미학강의 3권, 92쪽

[6] 미학강의 3권, 93쪽

[7] 미학강의3, 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