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풀어주시오(2)-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를 풀어주시오(2)-

정보라 작가의 단편집 저주 토끼를 읽고

6)

작가가 절망감을 탈출하려는 시도를 처음부터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작품마다 탈출을 기획한다. 그러나 탈출을 감행한 주인공의 시도는 번번이 전도되고 만다.  정보라 작가에게서 삶은 아이러니로 보인다.

아이러니 개념은 낭만주의 문학자 프리드리히 슐레겔에게서 미학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아이러니란 곧 어떤 것이 자기의 반대로 전락하는 것을 말한다. 슐레겔은 문학이 단지 세상사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를 파악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슐레겔은 작가 자신의 아이러니를 말한다. 작가가 자기가 만든 세계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작품에서 작가를 대변하는 것은 곧 화자인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자기 부정이 슐레겔에서 아이러니 미학의 핵심이 된다.

정보라의 소설 곳곳에서 이런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작품 ‘머리’에서는 변기 구멍에 자신이 버린 머리칼과 배설물, 휴지 등으로 이루어진 머리가 커서 그 자신을 오히려 변기 구멍에 밀어 넣는다. 작품 ‘몸하다’에서는 배가 불러오자, 아이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좌충우돌하거나, 마침내 아이의 아버지가 나타났으나 이번에는 아이가 물거품 같은 핏덩어리이다. 작품 ‘안녕 내 사랑’에서는 자신이 만든 반려 로봇이 수명이 다해 이를 폐기 처분하려 하자,  반려 로봇이 오히려 그를 찌르고 도주한다.

정보라 작품에서 아이러니는 세계의 아이러니만은 아니다. 심지어 주인공 자신의 아이러니로 발전한다.

정보라 단편집 ‘저주 토끼’를 대표하는 단편 ‘저주 토끼’를 보자. 할아버지는 자신의 친구 회사를 망하게 한 경쟁사 사장에게 저주 토끼 인형을 보낸다. 저주 토끼는 회사의 문서를 갉아먹고 나중에는 사장 손자의 뇌를 갉아먹는다. 사장과 그의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삼대가 죽으면서 경쟁사는 무너진다.

한편으로 보면 통쾌한 복수극이지만, 작가는 복수한 할아버지 역시 저주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할아버지는 죽어도 죽지 못한 채로 유령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화자인 나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해 끝없이 되풀이 말한다. 영원히 방랑하는 유령, 죽어도 죽지 못한 것처럼 잔인한 처벌이 어디 있겠는가?

아마도 이런 아이러니가 정점에 이른 것은 작품 흉터가 아닐까? 주인공은 돈벌이 수단으로 능력을 상실하면서 해방된다. 그는 숲 속에 사는 눈먼 여자를 만나 자신이 동굴에 갇히게 된 사연을 듣게 된다. 주인공은 눈먼 여자를 구하기 위해 그녀 대신 괴물에게 바쳐진 희생물이었다.

주인공은 그를 한없이 고통 속에 밀어 넣은 여자를 오히려 사랑하면서 만악[萬惡]의 근원인 동굴의 괴물을 처치하러 떠난다. 마침내 동굴의 괴물을 자신을 묶었던 쇠사슬로 쳐서 죽이고 돌아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눈먼 여자는 물거품이 되고 지금까지 그를 괴롭혔던 마을도 마을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작가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다만 그는 마을 전체가 그것의 존재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이 괴물은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생존 본능이며 황금의 매력이다. 그것은 우리를 가두어 두는 괴물, 다름 아닌 ‘그것’이지만, 우리의 생존 자체가 사실은 그것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7)

저주 토끼라는 단편집에 실린 작품 가운데 가장 음울한 색채를 띤 것은 세 번째 작품인 차가운 손가락일 것이다. 이 작품은 동시에 가장 실험적인 작품이어서 독자로서 작품을 이해하기 정말 어렵다. 작품 속의 시간도 순환적으로 흐른다. 전체적으로는 꿈속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주인공은 이 선생이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한 모양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보니, 누군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는 차를 빠져나오라고 한다. 문을 미는 데 누군가의 손가락이 닿는다. 주인공은 그런 가운데서도 손가락에 끼였던 반지를 찾는다. 주인공에게는 아주 소중한 거다. 반지는 차밖에 있던 손가락이 전해준다.

차를 빠져나가니 바닥은 물컹거린다. 진흙 바닥 같다. 주인공은 손가락을 잡고 빠져나오며 손가락이 누군지 묻는다. 손가락은 자기가 같은 학교 동료 교사인 김 선생이라 한다. 손가락은 어떤 일이 주인공에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데, 매번 말이 바뀐다. 처음에는 동료 교사인 최 선생의 결혼식에 갔다 오다 사고 났다고 하더니, 다음에는 최 선생이 이혼하고, 퇴직해 시골에 내려가자 위로차 갔다 왔다 한다. 또 목소리는 최 선생의 장례식에 갔다 왔다고 한다. 꿈속의 장면으로 보면 이런 말 바꿈이 이해할 만하다. 오히려 이런 말 바꿈을 통해서 전체 사건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주인공은 두 사람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소리는 불분명하고 마치 바람 소리같이 들릴 뿐이다. 자기를 김 선생이라고 하는 손가락은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손가락은 자기에 의존해서 따라오는 주인공을 비웃기 시작한다. “똑같이 사고 나도 누구는 끈질기게 살고 누구는 그 자리에서 그냥 죽고…”라고 말하든가, “살아 있을 때도 혼자였는데, 죽어버리고 나서도 계속 혼자면….”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손가락은 주인공 보고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자기를 따라온다고 비웃는다.

그러자 두려움을 느낀 주인공은 뛰어간다. 시간은 여기서부터 처음 사고장면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갑자기 땅이 다시 물컹하고, 정면에서는 차가 달려온다. 운전석에는 주인공 자신이 앉아 있고 운전대에는 자신의 것이 아닌 다섯 손가락이 자신의 양손 사이에 놓여 있다. 이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이 차를 운전하면서 그녀를 덮치고 있다.

그 후 첫 장면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리면서 그 자신은 차에 갇혀 있다. 이때 차가운 손가락이 닿으면서 반지를 빼낸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녀를 비웃는다. 차가 가라앉으면서 주인공은 자신의 뼈가 부러지는 것을 느낀다.

꿈과 같은 시간이 역전된 상황 속에서 독자로서 혼란스럽지만, 최 선생의 남편을 빼앗아간 장본인이 바로 주인공 김 선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사고 가운데서도 반지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장면이 꿈속의 상황이라면 교통사고로 보이는 이 사건은 주인공의 죄책감의 표현일 것이다.

주인공은 최 선생의 남편을 빼앗았고, 그 때문에 최 선생은 자살했고 주인공은 그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주인공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더없이 행복하다. 타인의 것을 뺏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절망적인 운명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재회’의 남자는 자기 손을 자기가 묶은 채로 목을 매달아 죽고 만다. 자기 손을 묶은 것을 혹시 자기 손으로 자기를 살릴까봐서다.  ‘재회’의 화자인 나는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폴란드로 다시 온다. 그리고 환상 속에서 그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 묻는다. 풀어줄까? 남자는 목이 매여 있어 대답할 수 없다. 눈을 깜박거림으로써 대답한다. 작가는 죽음을 통해서 외에는 이 삶의 아이러니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8)

아이러니는 단편 ‘즐거운 나의 집’에서도 나타난다. 주인공은 7년을 노력한 끝에 빚을 전부 갚고 도시 변두리에 4층 건물을 구했다. 행복의 출발점일 수 있는 이 건물은 그녀의 불행의 출발점이었다.

건물에서는 바퀴벌레가 나오고 동네 사람은 텃세를 부려 자동차를 해친다. 남편은 비어 있는 3층을 친구 회사에 세를 내주지만 회사는 망하고 사장은 도망간다. 알고 보니 남편은 실내장식을 하는 동아리 후배와 내연의 관계에 있다. 둘은 함께 교통사고를 죽는다.

그 모든 것을 그녀는 견딘다. 이런 불행을 벗어나는 길은 없다. 그래도 이 작품에서는 작가는 우리에게 약간의 희망을 보여준다.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건물의 지하에 그녀의 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실제는 아니다. 그 아이는 주인공이 보는 환영이다. 처음 아이는 희끄무레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고통이 심해 감에 따라서 아이는 무게를 지니고 촉감을 지닌 존재로 성장했다. 아이는 자물쇠를 가지고 논다. 자물쇠를 철컥하고 잠갔다가 다시 여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모양이다. 그녀는 이 아이와 함께 지하실에 숨는다.

이상하게 다른 곳은 바퀴벌레와 쥐가 들끓었는데, 이 지하실만은 깨끗하다. 아마도 이 지하실조차 현실의 공간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아이 만큼이나 가상의 공간이다. 이 지하실은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주로 연극 무대에 쓰이는 의상이나 소품이다. 그렇다면 이 가상의 공간은 예술의 세계가 아닐까?

황금 물신주의 세계에 대립하는 구원의 세계를 작가는 환상과 예술 세계 속에 찾는다. 이 예술 세게 속에는 황금 물신주의가 파괴하는 가족이 살아 있다.

그러고 보면 이런 가족에의 희망은 곳곳에 숨겨져 있다. ‘몸하다’에서도 주인공은 끝까지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는다. 비록 물거품 같은 핏덩어리를 낳고 울음을 터뜨리지만, 그녀가 아이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그 마음이 느껴진다.

‘모래와 바람의 지배자’라는 작품에서 초원의 공주는 모래바람에 파묻힌 황금 물신주의의 나라를 떠난다. 황금 배의 주인인 주술사는 공주에게 자신과 함께 황금 배를 타고 “영원히 시간의 지평선을 떠다니며” 살자고 한다.

하지만 공주는 황금의 배를 떠나면서 자기는 인간 세계로 돌아가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할 거라고 말한다. 주술사는 그런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공주는 이렇게 말한다.

“알아요, 그러나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살아갈 테니까요”

하지만 그녀가 그리는 가족의 세계는 황금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는 없다. ‘재회’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주인공이 말한다. 이게 이 단편집 전체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하다.

“이제 내가 기다릴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욕실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기적처럼 찾아와서 이 삶에 묶인 나를 풀어 주기를 기다리며….”

기적처럼 찾아온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가상의 공간, 예술의 공간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9)

우리의 생존 의지, 욕망이 우리를 가두는 괴물, 동굴, 바로 ‘그것’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삶에서 풀려날 길은 없는가? 기적 같은 그 순간은 오지 않을까? 이 글은 작가의 질문을 다시 던지면서 끝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를 풀어주시오(1)-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를 풀어 주시오(1)-

정보라 작가의 단편집 저주 토끼를 읽고

1)

정보라의 작품은 우화나 설화, 동화, SF 형식을 취하고 있고 작품 곳곳에는 유쾌한 역설이 나 환상이 등장하므로 언뜻 가벼운 작품으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들어있어 깊고 진한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 자신이 후기에 말한 대로 그의 작품 곳곳에는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절망감이 배어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전체 작품을 이해하는 한 마디는 “나를 풀어주시오”라는 말이 아닐까 한다. 이 말은 ‘덫’이라는 작품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나를 풀어 주시오”라는 말에서 나오는 ‘하오 체’는 지금은 일상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과거에는 예컨대 장성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용하는 말투였다. 또는 남편이 아내에게 말할 때 사용할 수도 있겠다. 이런 말투는 상대방을 높이며 동시에 상대방에게 부탁하면서도 자신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말투라고 분석할 수 있다.

요즈음 ‘주십시오’와 같은 ‘합시오 체’가 많이 사용되는데, ‘하오 체’는 이런 ‘합시오 체’와 유사하기는 하지만 차이가 있다. ‘제안 사항 없음 자신이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부탁할 경우 사용한다. 반면 ‘하오 체’는 상대방이 자신과 매우 친밀한 존재라는 점이 전제될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말투라 하겠다. 친밀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가 바로 ‘하오 체’이다.

이런 ‘하오 체’ 말투는 이 단편집에 실린 ‘머리’와 같은 작품에 나오는 말투와는 반대다. 머리는 변기 구멍에서 나와서 주인공에게 어머니라고 부른다. 어머니와 머리 사이의 대화는 마치 사극에 왕과 대비 사이의 말처럼 들린다. 서로 존중하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런 거리감은 쉽게 반감으로 바뀌니 주인공과 머리의 대화는 곧 반말체로 바뀐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옷을 달라 하여 옷을 주지 않았느냐? 달라는 대로 다 주었으면 감지덕지하고 얼른 나갈 일이지 나더러 변기 속으로 들어 가라니 무슨 미친 소리냐?”

그러자 머리는 이렇게 답한다.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 네게 부탁한 적이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고 따뜻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었더냐?”

반면 “풀어주시오”라는 하오체는 거리감을 두고 있지만, 오히려 서로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이 이런 말투를 사용하는 주목적으로 보인다.

2)

‘나를 플어주시오’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이제 덫이라는 작품을 좀 더 들여다보자. 어느 남자가 겨울에 눈 덮인 산길을 가다가 덫에 걸린 여우를 보고 여우를 죽여 털가죽을 얻으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덫에 걸린 여우가 처음으로 이 말을 말한다.

여우가 사용하는 하오체에서 여우는 하나의 당당한 인격으로 인정되고 있다. 더구나 여우는 다가오는 남자를 존중하면서도 친밀한 존재로 보고 있다. 여우가 자신을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은 이야기가 ‘오래전에 읽은 이야기’ 즉 전설이나 민담에 속하니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다가오는 남자는 여우에게 낯선 남자인데, 여우는 무슨 이유로 그를 턱없이 믿고 있는 걸까? 여우는 남자가 양식 있는 인간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여우의 발목 상처에서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액체가 흐르는 것을 보고, 여우를 자신의 헛간에 가두어 놓는다. 이 단편 속에 ‘나를 풀어주시오’라는 부탁은 여러 번 변주되어 등장한다. 한번은 여우가 죽자 그 대신으로 갇혔다고 짐작할 수도 있는 딸의 입에서도 나온다. 딸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풀어주시오” 딸이 하는 말로서는 좀 서늘하다. 그래도 아직 아버지에 대한 약간의 믿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의사를 불러 딸의 임신한 배를 가르려 했다. 이 말은 재산과 사람을 모두 잃고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는, 아마도 산 채로 죽어 있는 남자의 입에서도 나온다. 남자는 그를 찾아온 동네 사람들에게 말한다. “나를 풀어주시오” 약간 사무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동네 사람이니 이렇게 ‘하오체’를 사용할 수 있겠다.

딸과 쌍둥이인 아들의 입에서도 나온다. 아들은 자기 여동생의 피를 빨아먹고, 남자는 그 아들의 상처를 쑤셔 황금을 얻었다. 아들은 자기 여동생을 사랑해 임신시켰고 의사가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려 했을 때 뛰어들어서 아이를 구해 멀리 도망친다. 그리고 산속에서 죽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 아들의 배를 갈라 금빛으로 빛나는 내장을 파먹으며 살아간다. 동네 사람들이 다가가자 죽은 듯했던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풀어주시오” 마지막 이 말에는 주어가 없다. 그 때문에 말 자체에 진지함이 사라졌다. 이미 상대를 믿지 않지 않는다는 의미가 강해진다.

이 말은 마지막으로 한번 반복되는 데, 이번에는 하오체가 사라진다. “플어….” 이젠 말을 하다 아예 멈추어 버린다. 더는 부탁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덫’이라는 단편에 반복되는 이 말은 점차 친밀함을 상실하고 의심이 강화된다.

3)

풀어달라는 말은 갇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대개 어딘가 갇혀 있거나 매여 있다. 단편 ‘흉터’에서 소년은 동굴에 갇혀서 한 달에 한 번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그것’으로부터 등골을 빨아 먹힌다. 소년은 자신이 왜 이 동굴에 던져졌는지, 자신의 등골을 파먹는 그것이 도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잔인한 고통 속에서 이 고통에서 풀려나기를 기다린다.

이렇게 갇혀 있다는 주제는 마지막 작품 ‘재회’에서도 변주된다. 주인공이 광장에서 만난 폴란드 남자는 아마도 마조히스트로 보인다. 그는 자신을 묶어주고 그것도 자기가 바라는 대로 묶어 주기를 바란다. 남자는 그렇게 묶어주었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에 주인공은 기꺼이 그를 돕는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지만 남자는 자신의 손을 묶어 놓고 목을 매고 죽었다. 주인공은 환영으로 그를 다시 만나서 이렇게 말한다. “풀어 줄까?” 목을 매고 죽은 남자는 말을 할 수 없고 다만 눈만 깜박거리면 응답한다. 풀어 달라는 말일 것이다.

작가는 이 남자를 풀어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래는 없었다. 그와 내가 알았던 모든 삶의 유형들은 전부 과거에 갇혀 있었다.”

갇혀 있는 상태에서 풀려나기를 기다리는 삶의 모습은 이 작품에서 여러 방식으로 재현된다. 이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은 폴란드의 어느 도시 광장이다. 이 광장에서 주인공은 광장을 가로지르는 할아버지를 본다. 남자는 매번 광장을 가로질러 같은 길을 반복한다. 환영이다. 나중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이 할아버지는 전쟁 중에 광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그만 죽고 만 사람이다. 이 할아버지는 전쟁의 현장에 갇혀 있다.

이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할아버지 역시 갇혀 있다. 남자의 할아버지는 전쟁에서 살아남으려 준비한다. 배낭을 싸 두고 통조림을 쌓아 둔다. 할아버지는 과거의 기억에 갇혀 있다. 그것은 남자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풀어주었던 남자는 환영을 볼 수 있다. 남자의 어머니는 자기의 아들이 환영을 따라서 떠나갈 것을 두려워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묶어 두고 아들이 환영을 보고 말할 때는 매를 들어 때린다. 남자의 어머니 역시 갇혀 있다.

4)

작가는 이 작품 ‘재회’에서 무엇이 사람을 가두어 두는지를 말해 준다. 길지만 정보라의 삶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니 인용해 보자.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순간은 짧지만,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생존을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확인하는 동안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에 고정되어버린 사람들, 그도 할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나도, 살아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사실은 모두 과거의 유령에 불과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생존본능이라는 것에 갇혀 있다. 사람들의 삶은 이 생존본능이 가장 격렬하게 발휘되었던 순간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사실은 과거의 유령일 뿐이다.

작가에게서 생존 본능이란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황금에 대한 매혹일 것이다. 앞에서 든 단편 덫에서 주인공 남자는 황금에 사로잡혀 있다. 황금 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황금 물신주의는 ‘모래와 바람의 지배자’라는 단편에서도 등장한다. 사막의 나라 왕은 황금의 배를 타고 사막을 오가는 주술사와 전쟁을 벌인다. 왕은 승리하지만, 마술사의 저주에 걸린다. 그 때문에 그의 아들인 왕자는 태어나자마자 눈이 멀었다.

초원에서 온 공주는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왕자가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주술사를 찾아간다. 공주는 주술사의 해법을 따라 왕자의 눈을 뜨게 했으나 사막의 나라에 모든 사람이 걸려 있는 황금 물신주의 저주는 풀어내지 못했다.

“자신의 욕심에 스스로 눈먼 인간을 눈 뜨게 할 방법은 없다.”

이런 황금 물신주의는 또 다른 변주를 낳는다. ‘흉터’에서 ‘그것’이라는 변주이다. 동굴에 갇힌 소년은 처음에 ‘그것’의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점차 그가 깨달은 것은 ‘그것’은 거대한 부리를 가지고 있고 잿빛 날개와 파란 눈을 가진 존재였다.

소년은 청년이 되어 오랜 궁리 끝에 동굴과 괴물을 탈출했으나, 그가 만난 것은 어쩌면 더 원초적인 동굴이다. 그는 돈벌이에 눈이 먼 대머리 남자에 끌려 다니면서 격투를 벌인다. 그는 이 새로운 동굴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그가 더 돈벌이의 수단이 되지 못하게 되자, 그는 버려지게 된다.

그렇다면 생존본능과 황금 물신주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삶을 벗어나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더는 황금을 생산하는 수단이 되지 못할 때 버려지면서 비로소 해방되는 것일까?

5)

“풀어주시오”라는 작가의 말투에서 짐작하듯이 사람을 가두고 있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친밀한 존재이며 가장 존중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생존본능 자체, 황금에 대한 매혹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질상 황금에 대해 매혹을 느낀다.

황금의 매혹은 작품 덫에서 딸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들은 딸의 피를 먹을 때만 상처에서 황금을 흘린다. 남자는 딸을 여우처럼 가두어 둔다. 그런 딸은 투명하고 창백한 얼굴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가 되었다. 그것은 작가의 말대로 ‘무감각하고 서늘한 병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또는 그 아름다움은 “달빛 아래 검은 숲과도 같은” 비밀스러운 매력을 발산했다.

딸의 모습에 대한 작가의 서술은 황금빛 자체에 관한 서술로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황금빛이 가진 매혹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금빛 안개는 서늘하고 창백했으며 바라보고 있으면 가까이 가고 싶어 졌고 가까이 가면 손을 담그고 싶어 졌다.”

이런 금빛 안개에 다가간 사람은 누구나 미칠 수밖에 없다. 사람을 가두고 있는 동굴은 바로 그 자신의 본성, 생존본능과 황금에 대한 매혹이다. 자기가 자기를 가두고 있는 한 이 동굴을 벗어날 길은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등골을 빨아먹는 ‘그것’의 모습이다. 그러니 누구도 자신의 본성인 그것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이 아닐까?

혹시 어둠 속에 쇠사슬을 바위에 부딪혀 내는 순간적인 빛이 하나의 구원이 되지 않을까? 아마 예술과 같은 것이 작가가 말하는 그런 순간적인 빛에 해당할지 모른다. 예술은 삶을 구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은 동굴을 나와 밤하늘에 별빛을 보면서 동굴에서 보았던 빛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저 별빛은 “누군가 자신처럼 동굴 안에 갇힌 사람이 쇠사슬을 거대한 돌벽에 부딪치며 저 수많은 반짝이는 빛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 자신이 말하듯이 이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별빛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게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외침인들 누가 들어주겠는가? 그게 공허와 어둠을 어떻게든 견디기 위한 놀이라면, 그처럼 허망한 놀이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소년은 밤하늘의 별빛조차 무심하게 바라보게 되는데, 작가의 절망감이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고 하겠다. 살아서 탈출할 길은 없다는 절망감이 정보라 작가의 작품 전체를 흐르고 있다.


달콤한 것들에 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달콤한 것들에 대해

언제부터 인가 교외에 빵집이 들어섰다. 처음엔 시내 임대료가 비싸서 그런가 했다. 곧 알았지만 그게 카페의 일종이었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빵을 함께 먹었다.

속으로 웃었다. 외국 사전에 가든의 의미로 고기집이 등록되었다고 한다. 빵집의 의미로 카페가 등록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어느 날 아이가 식사 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들었다. 내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빵이지? 아이의 말이 보통 빵집에서 파는 빵이 식사 빵이라 한다. 카페에서 파는 빵은 식사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카페에서 파는 빵은 카페 빵인가?

나도 카페 빵을 한번 먹어 보았다. 카페에 진열된 빵은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대개 아주 달콤한 빵이었다. 생각해보니 쓴 커피를 먹으면서 달콤한 빵을 곁들이는 것은 환상적인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스타벅스 이후 커피가 더욱 쓰게 되더니 급기야 이런 빵집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건 차가운 얼음에 뜨거운 팥을 얹어 먹는 팥빙수만큼이나 환상적이다.

처음에 한두 개 생기던 카페 빵집이 이제 어디서나 흔하게 등장한다. 이젠 시내에도 카페 빵집이 흔하다. 사람들이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겠지.

철학 본능이랄까? 내게 의문이 생겼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걸까?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이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것의 형태도 달라졌다. 우리 어릴 때는 단연 사탕이 인기였다. 요즈음 사람은 그 달콤함을 카페 빵에서 찾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시대에 사람들이 특히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달콤함은 문화의 다양한 형태에서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배용준이 한류를 대표하는 인기 품목이었다. 배용준은 그 미소 속에 달콤함을 달고 다닌다.

방탄 소년단에 대해 내가 인정하는 것은 오직 그들의 노래가 버터에서 보듯이 달콤하다는 것뿐이다. 그들에겐 고통도 슬픔도 저항도 없다. 

게다가 막걸리는 왜 또 그렇게 달콤해졌는지? 

그 뿐만 아니다. 정치의 세계는 원래 건달들의 세계였다. 옛날에는 우락부락한 파이터 아니면 건들거리는 한량, 조삼모사식 달변의 인물이 정치를 지배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치인의 모습도 바뀌었다.

마치 연예인처럼 생긴 정치인이 등장하더니, 이들이 내세우는 정책도 소확행이라고 한다. 작지만 확실히 행복하다는 것은 달콤함의 정의가 아닌가?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달콤함의 이면은 우울함이 아닐까? 우울할수록 더욱 달콤한 것이 그리워진다. 우울할 때는 쓴 술조차도 달콤하게 느껴진다.

이런 우울함은 환상에 대한 욕망을 낳는다. 그게 이 시대를 휩쓸고 있는 이미지 문화이다. 술과 달콤함, 영화, 이 세 가지는 내가 동시에 좋아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울함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우울함이란 상징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징조이다. 상징계가 무너지면 처음엔 달콤한 환상이 등장해 이를 메꾼다. 하지만 머지않아, 달콤한 환상은 무서운 박해자의 이미지로 대체된다. 그게 편집증이다.

이 시대 달콤함이란 편집증의 시대를 예고하는 전조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이미 사람들은 무서운 박해자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포퓰리즘에 관해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포퓰리즘에 관해서

서평 -거대한 반격(파올로 제르바우도 저, 남상백 역, 다른 백년, 2022)

1)

필자는 어느 교수님의 소개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거대한 반격’인데, 무엇을 반격하는지 부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부제는 ‘포퓰리즘과 팬데믹 이후의 정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를 부정하고 등장한 것이 포퓰리즘이다. 저자는 코로나 위기 이후 포퓰리즘이 무너지고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더 근본적인 반격이 시작하고 있다고 보며, 이런 반격에 ‘거대한’ 반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저자는 영국의 문화 이론가이며, 킹스 칼리지 문화연구소 소장이고, 디지털 문화에 대한 분석과 강의를 해왔다. 저자는 트위터, 소셜 등에 기초한 정치 운동이나 정당 등에 대하여 저서를 발표했으며 이 가운데 포퓰리즘에 깊은 관심을 둔다.

저자는 반격에 중점을 두었지만 필자로서는 반격보다는 오히려 포퓰리즘에 대한 논의에 흥미를 느꼈다. 왜냐하면, 트럼프 현상에서 잘 보듯이 오늘날 정치에서 포퓰리즘이 상당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데도 포퓰리즘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저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무너지면서 우파든, 좌파든 포퓰리즘이 압도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파 포퓰리즘 현상으로 미국의 트럼프, 이탈리아의 마테오 살비니(이태리 북부동맹 지도자였다), 항가리의 빅토 오르반, 영국의 브렉시트파 등을 들고 있다. 이들은 공통으로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이들이 이주 노동자나 소수 집단에 대해 아주 강한 혐오감을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혐오감의 표출을 통해 몰락하는 하층 제조업 노동자로부터 심정적 지지를 끌어낸다.

또한,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대 몰락한 전통 제조업의 부활을 주장하면서 그 방법으로 중상주의적 보호 정책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통해 이들은 구 자본가 계층의 지지를 받아, 구 자본가 계층과 하층 노동자의 정치적 블록을 형성한다.

저자는 좌파 포퓰리즘으로 미국의 샌더스와 민주사회주의자, 영국의 코빈, 차베스와 같은 21세기 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 피케티 등 기본 소득론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이들에게 공통된 정책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으나, 필자의 추측으로는 대체로 ‘소득 보전’ 정책이 곧 좌파 포퓰리즘의 핵심 정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신유주의에는 두 측면이 있다. 그 하나는 대처, 레이건 정책에서 보듯 작은 정부, 노동 유연화인데 한마디로 저임금화 정책이다. 다른 하나는 클린턴, 블레어 등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세계화, 금융 자본화다.

두 가지 가운데 좌파 포퓰리즘이 주로 반대하는 것은 저임금 정책이다. 좌파 포퓰리즘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정부가 금융자본의 손해를 보전하자, ‘월가를 점령하자’는 선동적인 주장을 내세웠으나, 일시적인 것에 그쳤고 실상 신자유주의의 해체로 나가지는 않는다. 좌파 포퓰리즘은 다만 현상을 유지하면서 저임금 정책을 소득 보전 정책을 통해 보완하려 한다.

좌파 포퓰리즘의 소득 보전 정책은 프레카리아(precariat)의 심정적 지지를 받는다고 한다. 프레카리아는 불안정(precarious)와 프로레타리아의 합성어로,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확산한 불안정 취업자를 말한다. 비정규직, 실업자, 신분 저하된 대졸 취업자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의 또 하나 측면 즉 세계화에는 긍정적이다. 세계화를 주로 값싼 생필품 수입 체제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화로 무너지는 국내의 제조업을 대신하기 위해 이들은 소위 그린-뉴딜 정책을 내세운다. 즉 그린-뉴딜 정책을 통해 몰락한 제조업을 기후 위기나 환경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산업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런 정책은 신중산층(전문기술 노동자 층)의 지지를 받으며, 좌파 포퓰리즘은 신중산층을 신자유주의 세력으로부터 탈취하여 프레카리아와 전문기술 노동자의 블록을 조직하려 노력하고 있다.

저자는 앞에서 보았듯이 소득 보전 정책을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이런 정책이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정책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소득 보전 정책은 케인즈 이론에 기초한 합리적 정책으로 간주되어 왔다. 실제로 복지국가 시대에 이런 정책은 경제적 선순환을 일으키는 정부의 주요 정책이었다.

그런데도 저자가 이런 소득 보전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규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소득 보전 정책이 비현실적이고 따라서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정책이라 판단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필자가 나름대로 추론하자면, 소득 보전 정책이 감정적인 정책인 이유는 이 정책은 통화와 재정을 국가가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민족국가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3)

대체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등장한 이런 정치적 세력을 저자는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포퓰리즘에 대한 개념이 중요한 이론적 문제로 대두된다. 무엇을 포퓰리즘이라 하는가?

저자는 여기서 구조주의 정치학자 에르네스트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을 먼저 자신의 개념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제시한다.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London, 2015)’라는 책에서 포퓰리즘을 구조주의적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을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접합시키는 담론 동학”으로 규정하면서 이질적 요소들이 결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이질적 요소를 결합하는 계기는 라캉적인 개념인 소위 ‘텅 빈 기표’인데, 이것은 상징적 구조가 몰락하는 구멍을 의미한다. 이런 텅 빈 기표를 채우기 위해 여러 환상이 중첩되니, 이런 텅 빈 기표는 정치적 영역에서 이데올로기가 접합되는 기표가 된다.

저자는 이런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분석을 형식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 분석에 의존한다. 저자는 여기서 대니 로드릭의 포퓰리즘 분석(‘포퓰리즘과 지구화 경제’, Journal of international business policy1, 1-2, 2018)을 참조로 하는데, 대니 로드릭은 포퓰리즘의 경제적 토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즉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로 금융자본이 지배하고 제조업이 무너지면서(이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금융 중심국의 처지에 한정된 것이지만) 한편으로 성장하는 금융 자본가와 몰락하는 제조업 자본가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흥 첨단 산업에 종사하는 전문기술 노동자 계층과 삶이 불안정해진 노동자 계급 사이의 불평등이 심화하는 데 기초한다.

이런 사회 경제적 조건에서 결과적으로 이에 저항하는 새로운 인민 블록이 형성된다. 하나는 몰락하는 중소기업 자본가 계층과 몰락한 제조업 노동자(블루 칼러)의 블록이다. 이것이 우파의 포퓰리즘 블록을 이룬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 블록의 중심은 신자유주의 시대 등장한 불안정한 노동에 종사하는 프레카리아와 신자유주의의 저임금 정책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진 노동자 계층이다.

이런 경제적 기초 때문에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이 등장하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4)

라클라우의 주장은 텅 빈 기표나 환상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포퓰리즘의 심정에 호소하는 이유는 밝혔다. 라클라우는 이런 텅 빈 기표가 사회의 상징적 구조에 구멍이 생김으로써 발생한다고 보지만 그런 구멍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분석하지는 않았다.

경제적 토대를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적 포퓰리즘 이론은 포퓰리즘을 합리적으로 분석한다. 즉 그런 포퓰리즘이 받아들이는 자들의 사회 경제적 조건을 합리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왜 주로 퇴행적이거나 공상적 정책을 통해 심정에 호소하는 것인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포퓰리즘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을 종합하면서 포퓰리즘이 발생하는 사회 경제적 조건과 그것이 환상에 기초하는 이유를 설명하려 하였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포퓰리즘 설명은 종합적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포퓰리즘이 전체적으로 설명되는 것일까? 저자의 설명은 우파 포퓰리즘에 대한 설명으로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저자의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모호하다.

5)

거대한 반격의 저자는 좌우파 포퓰리즘은 모두 심정에 기초한 포퓰리즘이라 분석하면서 그런 포퓰리즘은 2019년 이후 코비드 위기 이후 후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파 포퓰리즘이 트럼프의 반응에서 보듯이 코비드 위기에 대해 음모론적으로 접근하면서 대중의 신뢰를 잃어버렸고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한때 재난 지원금이라는 형태로 자기를 실현하는 듯했으나 그것이 전 세계적 인플레이션(주택 가격상승)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졌기 때문이라 한다.

저자는 이런 포퓰리즘을 극복하고 신자유주의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이념을 제시한다. 저자는 그것을 신국가주의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이 용어는 마치 나치즘을 상시시키는 용어라 필자는 이를 피하려 한다. 저자의 주장을 오히려 잘 설명할 수 있는 용어로는 자주 국가라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저자는 이런 자주 국가의 이념을 민족 국가의 귀환, 국가 소유와 공공경제의 확산, 평등한 세계화라는 개념으로 제시하지만, 필자로서는 이 자리에서 그런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필자는 저자의 포퓰리즘에 대한 언급에 주목하고 싶기 때문이다.

6)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쉬운 문제는 아니다. 저자는 일정한 경제적 조건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한다. 이런 판단은 그 정책이 환상적(퇴행적이거나 공상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환상적인지 아닌지, 이에 대한 판단은 과학성에 대한 판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 이래 과학성을 객관적으로 판정할 기준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환상적이라는 판단은 이미 비판하는 자신의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포퓰리즘을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과거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포퓰리즘이 등장했다. 나치가 등장할 시기가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 시대였으며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역시 당시 아르헨티나의 군부 정치 시대였다.

물론 간접적으로 또는 근본적으로는 이런 민주주의의 위기 현상 자체가 물질적 토대인 사회 경제적 조건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본다면 역시 민주주의가 기능을 상실했을 때 이런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개념적으로는 숙고를 통한 합의에 기초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민주주의는 숙고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그 이유는 상업적 언론의 영향일 수도 있으며, 정치 지도자나 정당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본다면 의회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중산층이 지배하게 되어 있는데, 이런 민주주의는 불평등이 심화하고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여 왔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시대 포퓰리즘이 등장했다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이 시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트린 원인은 무엇일까? 중상층의 붕괴, 불평등의 심화를 일차적으로 찾아볼 수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의 지나친 상업화와 더불어 SNS의 발달로 생겨난 정치 팬덤 현상,  정당보다는 개인적 지도자에 의존하는 경향 등을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런 의문만 제기한 채로 이 글은 마치도록 하자.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서평

6)

맹목적 의지의 세계에 도달하자마자 쇼펜하우어는 이로부터 근본적인 전환을 이룬다. 맹목적 의지의 세계는 세계의 참상을 보여준다. 자연의 맹목적 투쟁은 제쳐두자. 인간 세계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벌이는 투쟁의 세계이며, 타인을 기만하며 동시에 자기를 기만하는 인간 희극의 세계이다. 이런 세계 속으로 개인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가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끔찍한 세계의 실상 앞에서 전율하면서 이런 세계를 초극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선생의 저서가 최고로 관심을 두는 것도 바로 이런 세계 초극의 길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세계 초극을 해석하는 데서 선생은 두 가지 대립하는 해석을 소개한다. 일반적 해석은 줄리안 영으로 대표되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쇼펜하우어의 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로 단적으로 구분하며, 현상계는 표상의 세계이며 여기서는 시간과 공간, 인과성이라는 의식의 형식이 지배한다. 예지계는 내적 자기의식을 통해 밝혀지는 세계이며 그 자체가 세계의 진정한 본질이다. 예지계의 본질은 맹목적 의지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쇼펜하우어가 찾아가는 세계 초극은 예지계의 본질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이 맹목적 의지를 부정하는 의지 부정의 차원이다. 여기서 부정의 대상은 곧 의지 자체이니, 그 결과는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며 이 세계의 참상을 초연하게 정관하는 인식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다만 냉정한 세계 인식일 뿐이다.

맹목적 의지의 세계로부터 의지 부정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는 내감을 통한 본질 인식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인식을 상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인식은 곧 세계와 나 자신이 동일하다는 것, 즉 우주적 연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통해 맹목적 의지에 이끌려 서로 죽이고 기만하는 나와 세계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런 인식은 내적 자기의식과 구분되는 인식 곧 신비적 인식이며, 부처의 깨달음과 같은 인식이고 시간의 차원인 내감이 아닌 영원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인식이다.

7)

그러나 선생은 일반적인 쇼펜하우어의 해석과 구분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려 한다. 바로 이런 해석이 쇼펜하우어 속에서 급진적 혁명성을 발견하려는 선생의 의도와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해석은 제너웨이가 에트웰의 해석을 발전시킨 것이고 니콜스 역시 동의하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세계’ 초판보다는 재판에 주로 의존한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선생의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 이들의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니콜스는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의 초판본(1818년)과 재판본(1859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우선 니콜스는 초판본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 주목한다.

“의지 자체는 모든 현상 즉 자연 전체의 기체로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친근하게 의지로서 아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지계는 곧 의지 자체 즉 맹목적 의지 자체로 규정된다. 반면 재판본에 이르면 쇼펜하우어의 입장에 변화가 생긴다. 재판본에 나오는 다음 인용문을 보자.

“의지 자체에 대한 이 인식은 전적으로 충전적이지 않다. 우선 그러한 인식은 표상의 형식에 매여있지 있다. 그것은 지각이거나 관찰이어서 그 자체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되어 있다.”

즉 내감을 통한 인식은 비록 표상의 세계에서처럼 공간과 인과율의 형식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간이라는 내감의 표상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세계는 아직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전제되어 있어서 근본적으로 주객 분리를 넘어선 물 자체의 세계라 할 수 없다. 이런 내감에 의해 인식되는 세계의 본질은 예지계에 대한 부분적 인식에 지나지 않으며 충전적 인식이 아니다.

니콜스의 구분과 유사하게 제너웨이는 쇼펜하우어의 세계를 세 가지 세계로 구분한다. 현상계와 예지계 사이에 제너웨이는 ‘현상계에 나타나는 예지계’라는 중간 세계를 개입시킨다. 맹목적 의지의 세계는 예지계의 진정한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지계가 현상계 안에 나타나는 것에 대한 인식에 속한다.

“이 관점에서 제너웨이는 영의 견해를 수용해 현상과 물 자체의 이원 구조 대신 다음의 삼중구조를 제안한다. 이 견해는 물 자체에 대한 충전적 인식을 피하는 길이다. 이것은 현상과 예지적 실재의 이분법에 양자로부터 구분되는 제3의 세계를 끼워 넣는 삼분법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 제3의 세계는 비예지적이어서 칸트적 경계 안에 자리 잡고 있지만, 비의적이어서 일상 세계와는 다른 것이기에 형이상학적 탐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되면 예지계의 본질은 의지 자체의 단적인 부정, 세계에 대한 정관이 아닐 수 있다. 예지계의 본질은 그 자체가 의지이기는 하지만, 맹목적, 파괴적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힘 즉 생명의 원리이며, 그 자체는 일자[一者]이면서도 수많은 개별적인 힘으로 자기를 발현시키며, 만유[萬有]는 이 일자인 의지로부터 자발적으로 출현하며 서로 평등한 존재일 뿐이며, 개별자 사이의 상호 소통이 일어나는 우주적 연대가 전개된다고 파악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예지계는 근원적 물질에 작용하여 단계적으로 생명의 진화를 추동하고 무수한 종들로 분화하지만, 그 자체는 무한한 현상계 안에 동일하게 관류하는 일자이다. 내감에서 직접 알려지는 것이 의지의 활동이라면, 이 현상적 직접지는 현상계 전체의 내적 본질로 연장될 수 있다. 나아가서 영원의 관점에서는 만유가 평등한 공감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경험한다.”

이처럼 예지계의 본질이 생명의 원리라면 이 생명의 원리는 곧 새로운 개방적 질서를 낳은 창조적 활동성이 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선생의 이와 같은 해석을 통해 선생이 왜 2016년이라는 시공간에서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는지가 이해된다.

선생은 재판에서 이처럼 변화된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단적으로 아시아 철학의 영향이라고 평가한다. 길지만 선생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이 초월적 경험은 생의 의미의 체현이라는 점에서 물 자체의 현상이 표상의 형식 안에서 직관되는 차원, 즉 위의 도표에서 두 번째 중간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생명체를 해친 것에 대한 죄의식과 도덕적 연민은 물 자체인 의지가 경험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닥없는 심연에서 생기하는 생명원리에 접근하는 노력과 희망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아시아 철학이 예지계가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단서로 자기 수련을 통해 존재의 근원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찬양한다. 예를 들어 송명이학은 우주의 궁극적 본성이 우리의 심층적 내면으로부터 표면적 감정으로 드러내는 끝을 실미리로 삼아 심층의 본성이 우주의 본질임을 자각한다는 수양론적 심성론을 핵심 주제로 삼는다.”

서양 형이상학을 해체하면서 등장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내재된 창조적 활동성은 아시아 철학의 영향이며 앞으로 아시아 철학을 통해서 그 잠재적 힘이 더욱 발휘될 것이라고 선생은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9)

쇼펜하우어는 예지계의 본질로 들어가는 길로서 우주적 연대에 대한 인식을 들고 있는데, 선생은 앞에서 말했듯이 이 길이 맹목적 의지 부정의 길이 아니고 생명원리의 길이라고 본다.

선생은 이런 생명원리에 도달하는 인식의 길을 6장 5절 ‘시간과 영원’에서 더욱 철저하게 분석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 부분이 선생의 저서 가운데 백미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선생은 대열반경의 세계와 더불어 엘리옷의 시를 끌어들인다.

우선, 선생은 쇼펜하우어가 우파니샤드 철학이 심성론에 영향을 받아 인식을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분별적 의식이다. 그다음은 ‘꿈을 꾸는 잠’이다. 이 꿈꾸는 잠은 “예지계가 [현상계에] 침투하여 지성의 시공간 질서를 넘어서는 영적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차원”이다. 이 단계가 부정적 형이상학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다음은 ‘꿈도 없는 무의식’의 차원이다. 이것이 내적 자기의식 곧 현상계 안에서의 예지계를 인식하는 차원이다. 마지막으로 본질적 자아의 차원이 있다. 이 본질적 자아는 곧 “우주를 영원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깨닫고 있는 진실한 자아의 세계”이다. 선생은 바로 이 네 번째 단계가 세계 초극에서 등장하는 인식이라 보면서, 이 인식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파니샤드 철학은 이 네 번째 심층적 차원을 빛의 세계로 묘사한다. 이 세계는 영원성, 쾌활성, 진정한 자아, 고유한 맑음의 세계이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관념을 수용하여, 그것으로 불의 본질적 자아와 정신을 구성한다. 그것이 바로 대열반경에 나오는 붓다의 육체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으며 모든 부처와 중생들이 동경하고 깨닫는 영원한 여래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선생은 이런 상주 불변의 여래성을 쇼펜하우어가 예지계의 본질을 인식하는 영원의 눈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한다.

선생은 ‘시간으로부터 영원에 접근하는 길’과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보는 길’을 구분한다. 전자는 붓다의 죽음에 슬퍼하는 대중의 길이다. 이 길은 내감의 형식인 시간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니 여전히 주객 분열 속에 있다.

반면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보는 것이 바로 붓다의 길이니, 여기서는 만유에 내재하는 불성이 드러나면서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느낀다. 모든 인간은 이제 이런 쾌활한 자유를 동경하니, 자신의 불성을 깨달음을 통해서 이에 도달할 수 있다.

이어서 선생은 이 자유에 대한 동경을 엘리옷의 시 ‘4중주’를 통해 다시 설명한다. 여기서 엘리옷은 시간을 벗어나야 구속(救贖)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미래의 시간 속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만일 모든 시간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모든 시간은 구속할 수 없다.”

내감을 통해 인식된 세계는 여전히 시간에 구속되어 있다. 이제 이 시간을 벗어나야 비로소 진실된 예지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엘리옷의 시 사중주 가운데 세 번째 연주 살비지즈[salvages]는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영원의 세계를 그린다.

“그 끝이 어디 있는가?

소리 없는 오열에 꽃잎이 지며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가을철 꽃들의 소리 없는 조락에

그 끝이 어디에 있는가?

표류하는 난파물들, 해안에 밀린 백골의 기도, 재난의 예고를 접했을 때의 그 기도할 수 없는 기도에?”

살비지즈는 엘리옷이 어릴 때 살았던 곳, 강과 바다가 만나는 암초 지대이다. 여기서 난파물들이 소용돌이치면서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 이미지는 엘리옷에게 기억으로 나아 있다가 마침내 다시 떠올랐다. 선생은 이 이미지가 현상계를 넘어서 예지계로 초월하는 과정을 엘리옷이 그려낸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옷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과거와 미래를 탐색하고

그 차원에 집착한다.

그러나 무시간과 시간의 교차점을 이해하는 것은 성자의 직무다.

아니 직무라기보다

정열과 무아의 자기 방기 속에

일생을 바쳐 죽은 동안에 주고받는 그 무엇이다.”

무시간과 시간의 교차점은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지만, 이 문은 ‘정열과 무아’를 통해 얻어진다. 엘리옷이 여기서 정열과 무아라고 했던 것이 쇼펜하우어가 예지계의 본질에 들어가는 길을 말하는 것이니, 우주적 연대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10)

필자는 선생의 쇼펜하우어 연구가 위에서 보듯 정관과 도피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오히려 혁명적 급진성과 창조적 활동성에 관한 탐구에서 나왔다고 평가한다.

이런 관점에서 선생의 철학적 의식은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관심과 일치한다. 모더니즘은 일차세계 대전 이후 기존의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적 세계상을 그려내려 했다. 모더니즘은 이런 세계상을 세계에 대한 직접지를 통해 획득하려 하였으며, 이런 인식은 더이상 과학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서 가능해진다고 믿었다. 모더니즘은 이런 직접지는 인간 자신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모더니즘의 기본 관점은 선생의 쇼펜하우어 연구에서도 동일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철학적 기투가 과연 성공적인가는 여러 의문을 낳는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이런 논의는 선생의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라고 보면서 여기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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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서평

1)

이규성 선생(이후 선생으로 약칭)의 저서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쇼펜하우의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이하 ‘의지의 세계’로 축약)은 2016년 9월 발간되었다.

선생은 그동안 서양철학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기는 했으나 주로 아시아 철학을 연구했다. 선생은 말년에 서구철학이 중국과 한국에 어떤 파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이 책에서 선생은 비록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는 비주류에 속하기는 하지만, 분명 서양철학의 전통에 선 쇼펜하우어를 다루었으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의 책은 너무 방대하고 심지어 서문 자체가 상당한 부피이다. 그 때문인지, 책의 맨 앞에 ‘요약’이라는 제목으로 간단한 글이 첨부되어 있다. 필자는 선생의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 요약문을 발견했는데, 책의 내용이 정말 잘 요약되어 있었다. 필자는 이 요약문을 보면서 선생이 왜 쇼펜하우어를 다루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선생은 ‘19세기 유럽과 아시아의 폭력적 만남’으로부터 많은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서 유럽 정신의 폭력성에 대한 선생의 비판적 의식을 엿볼 수 있는데, 선생이 아시아 철학을 연구한 것은 유럽 정신의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이미 선생의 여러 저서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선생은 이번에는 유럽 철학 내부에서 직접 그와 같은 유럽 정신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찾아내려고 시도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을 연구하기로 선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비주류이며, “아시아 철학을 인류의 운명을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지혜로 간주한” 서양철학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생은 유럽 철학을 자체 내에서 해체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선생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대학 시절부터 쇼펜하우어에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선생은 서문 끝에서 대학 시절의 어떤 친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당시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던 친구의 운명을 보면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연구해야 하겠다는 부채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그런 부채의식 말고도 다른 이유가 개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2) 혁명적 급진성

필자의 경험으로는 선생은 세상으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취하면서 살아왔다. 물론 비참한 인간 희극에 대해 분노하고 비판하는 의식은 생생했으나, 선생은 현실적인 투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자제한 것으로 안다.

‘의지의 세계’가 작성되던 시기는 박근혜 정권이 전횡하던 시기였는데, 선생은 더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반박근혜 투쟁을 위해 직접 거리에 나오기도 했으니 그만큼 실천적 투쟁의 절실함을 몸으로 느낀 것으로 생각한다. 이 시기 선생은 지식인으로 빨치산이 되어 사망한 박치우의 삶에 대해 필자에게 자주 말하곤 했는데 그런 말을 통해 자신의 내심을 간접적으로 토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선생이 실천적 투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일반적으로는 가장 정관적이고 심지어 도피주의라고 비난을 받는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다는 것은 역설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하필이면 이 시기 선생이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주로 그 고민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필자는 ‘요약’ 속에서 다음과 같은 선생의 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새로이 정립하려는 철학에 대한 전망이다.

“이러한 방향(쇼펜하우어의 철학 방향)에서 전망되는 세계관은 안으로는 무한의 윤리를 본체로 하고 밖으로는 폐쇄적 질서를 개방적 질서로 변형하는 활동성을 갖는다. 이 활동성은 구체적 개인들의 기본적 역량들을 함양하고, 평등한 유대를 확장하는 개방적 노력을 동반한다.”

이런 구절이 지시하는 대상은 쇼펜하우어 철학 자신은 아니다. 하지만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이미 자신이 기대하는 그런 철학이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철학 속에서 가장 급진적인 혁명성(또는 그 가능성)을 보면서 오히려 “창조적 활동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급진적 혁명성을 선생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그것은 곧 ‘무한의 윤리’이며 ‘개방적 질서’이다. 여기서 ‘무한의 윤리’란 나중에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윤리의 근본이라고 본 두 가지 즉 자발성으로서 자유와 타자(자연과 타인)와의 연대 또는 소통의 세계이다. 선생은 이런 무한의 윤리는 사회적으로는 개방의 질서(평등한 유대의 세계)를 통해 확립될 것이라 본다.

바로 이런 무한의 윤리, 개방의 질서가 쇼펜하우어의 지향점이기에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 속에서 급진적 혁명성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서 선생은 이런 무한의 윤리로부터 세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단호한 실천적 투쟁이 나오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긴 의지 부정의 길이다. 이것은 죽음의 길이 아니며, 무를 체화한 삶에서 우주와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무대립의 자유의 길이다. 무는 허무를 의욕하는 궁극 목적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생성계의 존재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단계로 해석할 수 있다.”

선생의 생각에 따르자면 사람들이 이런 무한의 윤리에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즉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해 세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할 혁명의 꿈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심지어 쇼펜하우어 자신조차도 자신의 철학에 내재하는 혁명적 급진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의지 부정과 세계 도피의 한 측면에만 몰입한 것이 아닌가 하면서 비판한다. 선생은 쇼펜하우의 철학에서 보이는 이런 혁명적 급진성은 오히려 쇼펜하우어가 숭상한 아시아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아시아 철학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내재하는 그 가능성을 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생이 자신의 책의 제목을 쇼펜하우어의 책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쇼펜하우어의 책의 제목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다. 반면 선생의 책의 제목은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이니, 그만큼 소통 즉 우주적 연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3)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혁명적 급진성을 찾기 위해 선생은 방대한 연구를 전개한다. 선생의 연구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자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비교된다. 선생은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이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선생은 두 철학자가 지닌 공통성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으로 정리하고 있다.

➀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

➁ 세계를 구성하는 언어에 대한 비판

➂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 제기

사실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은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의 순서와 일치한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선험적 관념론의 세계(즉 표상의 세계)를 확립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물 자체의 세계로 이행한다. 이 물 자체의 세계를 그는 의지의 세계로 규정한다.

선생은 비트겐슈타인과 쇼펜하우어가 지닌 철학적 구도에 따라서 자신의 책을 서술해 나가는데, 1장 서문에 이어서 2장과 3장에서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 비판이 논의된다면, 4장과 5장은 쇼펜하우어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현상계)을 확립하고 여기서 현상계를 넘어서 물 자체 즉 예지계로 이행하기 위한 단서가 제시된다. 이 단서는 세계의 무한성을 보여주는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의 한계 내에서 제시된 것에 불과하다.

6장에 이르러 쇼펜하우어의 예지계가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이 예지계는 내감을 통해 확인한 대로 의지의 세계로 규정되지만, 그 자체가 물 자체의 세계는 아니다. 선생은 이 장에서 의지의 세계를 넘어 물 자체의 세계로 육박해 들어가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영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시한다.

2장에서 6장까지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한 논의에 해당하며 그 이후 7-9장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미치는 영향과 그 한계에 대한 비판,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에 바쳐져 있다.

이 가운데 필자의 관심은 주로 6장으로 향한다. 왜냐하면, 이 6장에서 쇼펜하우어는 예지계로서 의지의 세계를 논의하는데, 이런 논의에서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혁명적 급진성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4)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출발점은 칸트 철학, 그것도 ‘순수이성 비판’의 현상론이다. 칸트는 시간, 공간, 인과론이라는 의식의 형식을 통해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경험을 구성하면서 현상 세계가 구성된다고 한다. 칸트는 이런 의식의 형식을 물 자체 적용하게 된다면 즉 이런 의식 형식이 주관의 형식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면 형이상학에 빠진다고 비판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이런 선험적 관념론 즉 현상론을 받아들이면서 그 역시 기존의 형이상학은 이런 의식의 형식을 마치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비판한다. 칸트의 형이상학 비판은 쇼펜하우어가 서양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도구가 되었다.

쇼펜하우어가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칸트의 현상론에 그냥 머물렀다면, 쇼펜하우어는 버클리나 흄의 아류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현상계에 머무르지 않고 이 세계 배후에 있는 물 자체 세계 곧 예지계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예지계를 찾아가는 쇼펜하우어의 길은 선생의 서술에 따르면 세 가지가 있다. 그 중 첫 번째 길은 기존의 형이상학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기존의 형이상학은 개별 사실을 근거로 하여 가설 추리적인(이성적인) 방법을 통해 실재의 세계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 길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변증론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이율 배반에 빠지게 된다.

칸트는 이런 딜레마 때문에 물 자체의 세계에 이성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쇼펜하우어는 다르게 해석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제시한 네 가지 이율 배반 가운데 정립은 오류 추리에 해당하지만, 반정립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런 반정립은 곧 실재 세계가 무한하며 무규정적이라는 것, 즉 ‘무’라고 상정하는 형이상학이다. 이런 반정립은 비록 방법론적으로는 형이상학적 길과 동일하므로 기존 형이상학과 마찬가지 오류 추리이고 진정한 세계의 실재 자체, 물 자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반정립은 예지의 세계가 현상계로부터 무에 의해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 즉 ‘그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신의 속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쇼펜하우어는 당시 뉴턴에 의해 완성된 고전 역학의 세계를 넘어서서 진화론과 생리학 등 새로운 과학의 발전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과학의 발전은 정립의 길이 아니라 칸트가 반정립이라고 했던 길이 실재의 세계를 더 가깝게 암시한다고 믿었다.

5)

그러나 이런 가설 추리적 방법은 현상계를 넘어서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실재의 세계 자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예지계로 들어가는 근본적인 방법은 곧 내감에 의해 접근하는 방법이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길을 ‘성곽을 내부로부터 허무는 비밀의 통로’라고 말한다. 좀 길지만,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인용해 보자.

“객관적 인식의 길을 통해서는 즉 표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길에서는 우리는 결코 표상 즉 현상계를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들의 밖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우리는 한갓 인식하는 주관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인식하는 존재에 속하기에 스스로가 물 자체라는 것이다. 또한 그래서 우리가 밖으로부터는 침투하여 도달할 수 없는 사물 자체의 고유한 내적 본질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 안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 실재에 직면해서는 우리는 마치 성곽을 포위하여 밖으로부터 공격하는 병사와 같다. 그들은 성곽을 뚫고 들어가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 끝없이 그리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다른 방식으로 입성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전혀 성곽을 밖으로부터 공격하지 않고서 내부 배반을 통한 비밀스러운 접선에 의해 단번에 우리를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비밀 지하 터널이다. 바로 이와 같이 물 자체는 자기 자신이 자신을 의식한다는 바로 이 사실을 통해 온전히 직접적으로 의식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표상 배후에 의지가 있다. 이것은 내적 자기의식, 내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단적인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데카르트가 ‘필자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성을 지닌 것이다. 이 사실은 반박할 수 없는 명증성을 지닌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명증적인 사실 즉 나의 본질에서 세계의 본질로 유추해 나간다. 내가 이처럼 의지라고 한다면 내 앞에 있는 현상 세계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로 의지가 아닌가? 쇼펜하우어는 나의 의지로부터 의지로 이루어진 세계로 도약한다. 쇼펜하우어는 더 나가서 나의 의지와 세계의 의지는 서로 다른 의지가 아니라고 한다. 나의 의지와 세계의 의지는 본래 하나의 의지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개체적 의지를 넘어선 일반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세계적 의지가 나의 의지로 그리고 사물의 의지로 자기를 발현했을 뿐이다. 인간의 의지와 사물의 의지에 차이가 있다면, 인간의 의지는 내감의 자기의식을 통해 자각되지만, 사물의 의지는 자각이 없다. 쇼펜하우어는 사물은 마치 인간이 자기를 자각해 주기를 기다리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의지는 어떤 속성을 지닌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계속 따라가 보자. 내가 나의 내적 자기의식을 통해 확인한 것에 따르면 나의 의지는 맹목적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파괴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는 세계적 의지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의지 역시 맹목적이다.

이런 맹목적 의지로부터 개체적 의지가 출현하지만, 개별적 의지와 세계적 의지 사이의 관계는 결코 인과적 관계가 아니다. 인과성은 동일한 것이 원인과 결과에서 반복하는데, 맹목적 의지가 개별자를 실현하는 방식은 그와는 다른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맹목적 의지는 개별자를 발현한다.

이런 발현의 관계는 본질과 현상의 관계와 같이 이데아가 유출되는 것이 될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현상계로부터 본질을 추론해 들어가는 길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런 발현의 관계에서 맹목적 의지는 우연한(자발적) 방식으로 개별자를 발현한다고 본다. 이런 개별자와 의지 사이의 관계는 무라는 심연에 의해 단절되어 있으며 의지의 발현은 맹목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발견한 맹목적인 일반 의지 개념은 서양 현대 철학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의지는 이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의지’로, 프로이트에 의해 ‘죽음의 충동’으로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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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1)

앞의 글(서평, 1부)에서 이 책에서 저자는 조던이 과학자로서 불굴을 의지를 갖추고 자연 속에 질서를 세워 나갔던 힘의 원천을 묻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여기서 저자의 서술은 비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애가에 가깝다.

이 책에서 조던에 대한 애가는 갑작스럽게 분노로 전환한다. 이것은 저자가 조던의 생애에서 의심스러운 구석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이다.

첫 번째 의심은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해 1905년 스탠포드 학장으로 근무할 당시이다. 스탠포드 대학 이사장인 제인 스탠포드가 사망했는데 여러 증거로 볼 때 독살의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조던은 학장으로서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제인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으로 결론짓고 만다.

최근 이 사건은 다시 조사되었는데 저자는 이런 글을 읽으면서 조던이 제인을 독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이런 의심보다 더 결정적으로 저자의 평가를 전환한 것은 조던이 1920년대 전개했던 우생학 운동이었다.

우생학은 다윈의 사촌이었던 프랜시스 골턴이 1883년 제시했다. 조던은 이런 우생학을 미국으로 전파했으며 1920년대에는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우생학의 온상이 되었다. 조던의 영향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1924년 버지니아 수용소나 1928 인종 개선 재단은 모두 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우생학의 결과는 사회 부적응자를 강제로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후일 독일에서는 사회 부적응자를 청소하는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미국에서는 강제 불임 시술을 통해 유전적 영향을 제거하려 했다.

2)

여기서 강제 불임의 대상이 된 것은 단순히 간질환자나 정신지체인에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도덕적 타락으로 지목된 창녀, 동성애자 등도 강제 불임 시술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 근거가 된 이론이 도덕적 타락이 유전된다는 주장이다.

버지니아 수용소장이었던 프리디 박사는 캐리 벅이란 여성을 조사했다. 그녀는 고아로 자라났으나, 강간당해서 양부모가 수용소로 보냈다. 수용소에는 애마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프리디 박사는 애마가 캐리의 친어머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애마 역시 창녀로 이 수용소에 끌려왔다. 프리디 박사는 캐리가 수용소에서 출산한 아이 비비엔에게서도 정신적 퇴화의 징조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이 캐리 벅의 예를 도덕적 타락이 3대에 걸쳐 유전한 예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과거 버지니아 수용소에 수용되어 강제 불임 시술의 대상이 되었던 두 여인 애나와 메리를 만난다. 저자는 과연 그들이 그와 같이 처리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를 되묻는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우생학이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저자는 마침내 이 책의 근본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엄격한 절차를 따르는 탁월한 과학자 조던이 이런 우생학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물음이 아니다. 나치즘 역시 우생학에 기초하여 인종 청소를 하였으니, 이런 물음은 곧 나치즘의 원천에 대한 물음이기도 한다.

3)

저자는 조던의 저서를 연구하면서 그 단서를 찾으려 한다. 저자는 마침내 조던을 과학자로 이끌었던 그의 스승 루이 아가시의 사상에 부딪힌다. 루이 아가시는 조던이 스탠포드 대학의 표본실 건물 앞에 동상으로 세워놓은 인물이다.

저자는 조던이 나중에 다윈의 영향을 받아 탁월한 과학자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아가시의 사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말년으로 갈수록 이런 아가시의 사상에 지배되었다고 본다. 이런 아가시의 사상에 밑바닥에 있는 개념은 자연 속의 신의 계획이라는 개념이다.

저자는 거슬러 올라가서, 조던이 아가시를 자연관찰 캠프에서 처음 만난 날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때 저자는 아가시의 말을 같은 캠프에 참가했던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의 시 속에서 발견한다.

스승이 젊은이들에게 말했지

우리는 진실을 찾으러 온 것이라네.

불확실한 열쇠로 신비의 문을 하나하나 열려고 시도하지.

우리는 그분의 법칙에 따라

원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손을 뻗는다네

그 무한한 존재, 시작된 적이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그분,

이름 붙일 수 없는 유일자,

우리의 모든 빛의 빛, 그 빛의 근원,

생명의 근원, 그리고 힘의 힘을

맹인이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듯,

우리는 이곳에서 더듬으며 찾고 있다네.

그 상형문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보이는 것에 담긴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자연 속에 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아가시의 사상은 거슬러 올라가면 진화론의 태두라고 할 라마르크의 학설과 닮았다. 이 학설은 다윈의 맹목적 진화론과 구별되며 자연이 목적론적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목적론적 진화론에서 이제 진화의 단계는 동시에 탁월함의 단계이며 도덕적 완성의 단계가 된다. 그 단계의 최종 끝에는 인간이 있으며 이 인간의 끝에는 다시 이성적이며 기독교도인 백인종이 있다.

과학이 자연의 종을 연구하는 것은 자연의 종 속에 신이 숨겨놓은 이런 탁월성의 단계, 도덕적 완성의 단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가시는 이렇게 말한다.

“종 하나하나가 신의 생각이며, 그 생각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하는 분류학의 작업은 창조주의 생각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4)

저자에 의하면 조던 역시 끝내 아가시의 목적론적 진화론, 즉 자연의 층계 개념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자연의 층계라는 개념은 우생학의 원천이 된다. 그 대문에 조던 역시 우생학 운동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생학은 퇴화라는 개념과 관련된다. 일정한 단계에 이른 생물은 퇴화하여 자신이 진화의 단계에서 발전시킨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생학은 이런 퇴화를 막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퇴화를 막기 위해서는 퇴화가 일어난 종의 번식을 막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인종 청소나 강제 불임 시술의 근거가 된 것이다.

저자는 조던이 스위스의 아오스타라는 공간을 방문한 기록을 발견한다. 아오스타는 가톨릭교회가 장애인을 돌보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장애인이 서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며 어느덧 커다란 도시가 되었다. 조던은 이 아오스타를 진정한 ‘공포의 공간’으로 규정했다.

저자는 이런 목적론적 진화론에 대립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높이 평가한다. 다윈에서 모든 생물은 각자 적응하고 있는 존재니, 여기서는 어떤 층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생물은 마찬가지로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이런 다윈으로서는 퇴화라는 개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퇴화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새로운 적응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물의 다양한 변종이 생물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기제이니, 이런 변종이 생명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5)

초기에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기도 한 조던이 끝내 다시 아기시의 목적 진화론에 빠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관해 저자는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이 책의 전체 흐름을 통해서 볼 때 저자의 생각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보기에 조던이 은 우생학에 빠져든 것은 자연의 무질서 앞에 조던이 느낀 두려움 때문이었다.

저자는 자연이 혼돈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과학이 아무리 이 자연 속에 질서를 세우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대지진 앞에서 무너진 조던의 표본실과 마찬가지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혼돈의 세계 속에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저자는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버지니아 수용소에서 강제 불임 시술을 당한 채 살아남은 애나와 메리의 삶 속에서 발견한다. 저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서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 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그리고 자연에 어떤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을 곧 민들레 법칙이라 한다. 그것이 다윈이 독자에게 그토록 강조했던 것이라고 한다.

조던의 삶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이런 법칙은 작가 자신의 삶도 바꾸어 놓았다. 작가는 이제 자신을 떠난 남편을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이제 직시하며 새로 만난 여성과 삶을 꾸리게 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제 약간 감상적으로 되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모든 노력에 반대하는 투쟁을 선포한다.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을 해방시키는 것”

6)

마침내 저자는 결단을 내린다. 조던이 어류의 세계에서 세웠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저자는 자기의 일이 조던이 애나와 메리에게 가했던 잔인한 불임시술에 대한 복수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저자의 결단 속에는 어떤 미묘한 즐거움이 흐른다.

저자는 분지학을 연구하는 캐럴 계숙 윤의 도움으로 물고기라는 존재 즉 어류라는 분류 항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산에 사는 생물을 모두 산류로 분류할 수 없듯이 또는 공중에 나는 생물을 모두 조류로 분류할 수 없듯이 물에 산다고 해서 모두 어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어류라고 말해지는 폐어, 송어, 멍게, 가자미 등은 동일한 과에 속하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면 실재한다는 생각은 관념론 철학의 근본 주장이다. 물고기라는 말이 있어서 사람들은 물고기가 마치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처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제 물고기라는 분류명을 제거해 버린다. 이로써 조던이 목숨을 걸고 확립하려면 물고기의 존재는 사라지게 된다.

7)

글을 다 읽고 나서, 독자로서 나는 다시 회의에 빠진다. 우선 우생학에 대한 문제이다.

민들레 법칙, 아름다운 말이지만 저자가 기대한 만큼 희망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가 그려 놓은 것처럼 자연의 혼돈 앞에 그런 그물망이 얼마나 버틸 것인가? 아마 그것은 대지진으로 파멸된 조던의 실험실 유리병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저자가 가정했듯이 우생학이 목적론적 진화론의 결과인가? 다윈의 저서 속에 인간이 가축을 개량한 것 역시 진화의 한 방식으로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 자체 내에 이미 그런 우생학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이런 생물의 진화론을 인간의 사회 속에 끌어들인 것 때문이 아닐까? 인간이 생물과 동일하다면, 우생학은 불가피하게 된다. 오히려 인간이 다른 생물과 운동 법칙이 다르다는 전제 아래서만 우생학을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의 사다리라는 개념을 존재의 탁월성이나 도덕적 완성의 단계로 보는 것은 인간적 관점을 자연 속에 집어넣는 것이니 비판 받는다. 하지만 자연의 사다리를 자연 자체의 운동 법칙의 차이로 본다면, 이는 자연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가 되지 않을까?

두 번째는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자연은 정말 혼돈에 불과한 것인가? 모든 질서는 인위적인 것인가?

자연이 혼돈에 불과하다면 결국 니체의 철학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이란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의 산물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생존 의지는 영웅의 것이고 대부분 사람은 자연의 혼돈 앞에서 오히려 니체가 경멸하는 과학적 삶, 무리 지은 삶을 선택할 것이다.

자연이 혼돈에 불과하다면, 저자가 반대하는 삶이 결론으로 도출되지 않을까? 역시 인간은 자연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찾기 위한 투쟁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서평-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1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어느 물리학 교사의 말이다. 급하게 책을 구해 읽어 보니, 교사의 말이 틀림없다.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철학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번역서 제목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LuLu Miller 저, 정지은 역, 곰 출판, .2021.12)이다. 원본이 2020년 나왔으니, 얼마 전이다. 저서의 원래 이름은 의문문으로 되어 있다.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논픽션이다. 구체적으로는 20세기 초 미국의 대표적인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다룬다. 단순한 자서전과는 달리 저자가 과학자인 그의 삶에 물음을 던지며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책을 읽기 전에 조던을 먼저 소개해야 하겠다. 미국인인 그는 1851년 태어나 1931년 사망했다. 그는 어류를 연구했으며, 그가 발견해 명명한 물고기는 200여 종이 넘는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에 거대한 어류 표본을 보관하는 건물을 지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 나면서 이 건물에 이름표를 달아 놓은 유리병에 보관된 표본이 모조리 파괴된다. 물고기와 그 이름표는 서로 흩어져 일대 혼란이 벌어졌을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물고기의 이름표를 물고기의 몸에 바늘로 꿰매 놓는다. 그 후 그의 영웅적인 노력으로 과거보다 더 훌륭한 새로운 표본실이 건설되었다.

그는 인디아나 대학 학장(1885년)을 거쳐 스탠포드 대학 학장(1891년)을 역임했으며,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평화주의자로서 미국의 전쟁 참여를 반대했다. 그는 위대한 미국인의 반열에 들어 심지어 미국에는 그의 이름을 딴 호수와 산도 있다.

그런데 그의 삶에는 의심스러운 구석도 있다. 그는 1906년 스탠포드 대학교 이사장이었던 제인 스탠포드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는 우생학을 미국에 도입하여 그 영향으로 1924년 버지니아 간질환자 정신박약자 수용소가 건설되어 강제 불임 시술이 시행되었다. 1928년 죽기 직전 그는 미국의 인종 개선 재단의 위원이 되었다. 그의 행동은 사회 부적응자를 청소하려 했던 나치의 행동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그를 새롭게 평가하는 노력이 등장하여 미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있다. 저자의 이 책은 바로 이런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철학적 전기라고 하겠다.

2)

그의 생애를 간단히 훑어보는 것만으로 그의 삶의 문제가 금방 드러난다. 그는 탁월한 과학자이다. 그가 어떻게 부적응자를 사회에서 제거하기 위한 강제 불임 시술을 합법화하는 잔인한 행동에 빠져들게 된 것일까?

저자는 나중에 가서는 이런 문제를 깨닫게 되지만 처음에 저자가 그의 삶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오히려 다른 문제였다. 저자는 여기서 자신이 조던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저자의 아버지 역시 과학자이다. 아버지의 모습은 조던과는 전혀 다르다. 어느 날 저자가 아버지에게 인생의 의미를 물어보았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결국, 이 자연 세계 속에 남는 것은 혼돈뿐이다. 이런 혼돈 속에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보다 더 탁월하거나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저자의 아버지에 의하면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이며”, 우리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 이런 생각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형이상학자에 대항하면서 니체가 내뱉은 말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이렇게 혼돈이 지배한다면, 우리의 삶이란 무엇이겠는가? 니체가 세계의 혼돈 속에서 삶의 허무를 말했듯이 저자의 아버지 역시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저자가 어릴 때 부딪혔던 것은 바로 혼돈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 속에서 저자는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마음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비극적인 자기파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냉혹한 세상에서 잠시 ‘웃음의 잔물결’을 던져주는 희극배우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저자가 소녀를 유혹했다고 고소되면서, 남편도 떠나고 저자의 삶은 파괴되고 만다. 저자는 고통 속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과학자 조던의 삶을 연구하게 된다. “아무런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을 그에게서 찾고 싶었다.

3)

저자는 조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소개한다. 조던은 어릴 때 들꽃을 좋아한다. 그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마음을 쓰는” 아름다운 아이였다.

노예 폐지론자인 그의 형이 북부 연방군에 참가했다가 발진티푸스로 죽자 그는 내적으로 충격을 받는다. 그 후 그는 들꽃을 채집하여 표본을 만들거나 들꽃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 보존하는데 흥미를 느낀다.

그는 1873년 루이 아가시가 페니키스 섬에서 개설한 자연관찰 캠프에 참가하면서 그의 인생은 전환한다. 그는 아가시의 도움을 어류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 캠프에서 그는 수잔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 후 다윈의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으며, 앞에서 이미 소개한 것처럼 그는 탁월한 학자가 되었다. 그의 생애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어릴 때 따르던 형을 읽었고, 아내 수전도 병으로 일찍 죽었다. 나중에 다시 재혼했지만 아이 바버라도 잃었다. 그런 재앙에도 그는 굽히지 않는다.

저자는 조던이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에 파괴된 물고기 표본실을 구하기 위하여 어떻게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상세하게 서술한다. 그는 이런 서술을 통해 과학자로서 조던이 무질서한 자연에 대항하여 질서를 세우기 위해 벌였던 영웅적 노력의 원천을 발견하고자 했다. 대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4)

저자가 일단 먼저 가정한 것은 카프카가 말한 ‘파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 사람…. 그 사람은 계속 나아갈 의지를 어디서 다시 찾았을까…? 계속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계속 가게 만드는,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이 파괴되지 않는 것이란 곧 니체가 말한 생존의 의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런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는 어쩌면 인간을 계속 나가게 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자인 조던에서는 이런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저자가 조던의 생애에서 발견한 것, 즉 그것을 통해 조던이 자연에 질서를 세우도록 만든 힘은 오히려 두려움이라고 본다.

이 두려움을 저자는 조던이 형의 죽음에서 처음 느꼈다고 했다. 그는 형을 좋아했다. 그의 형은 노예 해방론자이며 남북전쟁에서 북군에 가담했다. 불행하게도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 어릴 때 그는 형의 죽음에서 충격을 느꼈다.

그는 자연의 혼돈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그런 두려움이 질서에 대한 집착을 낳았다. 이런 두려움이 자연의 파괴적 힘이 분출된 1906년 대지진 앞에서 그가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하도록 만든 원천이라는 것이다.

두려움과 질서에 대한 집착만이 이 투쟁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투쟁할 수 있게 했던 것은 또 하나의 힘은 어떤 기만이었다. 저자는 이 기만을 조던이 남긴 일기 속에서 발견한다.

“왜냐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사람이고,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이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은 기만이라 본다. 이는 근거 없는 어떤 확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근거 없는 기만이 인간에게 희망을 주면서 삶의 투쟁을 계속하게 만드니, 이것은 자기기만이 가진 긍정적 효과라고 한다.

두려움과 질서에 대한 집착, 자기기만이 과학자의 삶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니체가 말한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본다면 자연 과학자에 대한 애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자의 삶이 여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2부에서 계속)


보보스(보헤미안 부르주아) 문화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보보족[BoBos]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보헤미안 부르주아를 줄여 복수 어미를 붙인 말이다. 이 말은 미국의 작가 대비드 브룩스[D. Brooks]의 저서 ‘보보스[Bobos in pradise]’라는 책 때문에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실상 유럽에서 일찍부터 널리 쓰인 말이라 한다.

브룩스의 저서는 2000년에 발표된 것이다. 이 시기는 1980년대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성기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전성기는 곧 몰락을 예고한다. 결국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는 몰락의 조짐을 드러냈다.

이런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를 흔히 포스트모던 문화라 한다. 브룩스가 보보스라고 일컬은 문화적 현상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다룬 것과 동일한 현상을 다룬다고 보겠다.

90년대 말부터인가 우리에게도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불어 필자도 이 문화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에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포스트모더니즘론이 이 시대 문화의 일반적 특징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혼종[混種] 현상 또는 혼성 모방 현상이다. 여러 가지 문화적 현상 가운데 일부를 빌어와 뒤섞은 문화라는 뜻이다. 대표적인 예라 한다면 단순하고 기능적이며 추상적인 모더니즘적인 구조에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구상적 형태를 덧붙인 건축을 들 수 있다.

저자 브룩스는 이런 다양한 혼종 문화 가운데 특히 부르주아적이면서 동시에 보헤미안적인 혼종 현상에 주목하면서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적 현상을 대표한다고 본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 혼종 문화 현상에 보보 문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2)

부르주아 문화의 특징이란 세속적 욕망에 충실한 것을 기본으로 한다. 초기 부르주아는 개신교적 억압 아래 욕망을 통제하였으나 1871년 파리코뮌 이후 부르주아 전성기에 이르면 점차 부르주아의 욕망은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치와 방탕이 확산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문화는 이성적 합리성 자체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1950년대 전후 복지국가 시절 전문기술 노동자층이 등장하면서 부르주아 문화는 마침내 대중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런 부르주아 문화에 대립하는 보헤미안 문화란 거슬러 올라가면 1830년대 등장한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낭만주의 문화는 20세기 초 모더니즘 문화로 그리고 1960년대 들어와서 아방가르드 문화로 발전하면서 보헤미안적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보헤미안적 특징이라면 현실 초월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보헤미안적 특징은 낭만주의나 모더니즘에서는 소수의 지적이거나 예술적인 엘리트의 문화로 남았으나, 60년대 히피 세대에서는 대중적으로 확산했다. 이 시기 만연한 섹스, 대마초, 명상, 록 음악 등은 물질적 욕망의 충족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세속적 욕망을 초탈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모습은 무정부적이고 자기 파괴적이었다.

이런 두 가지 문화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까지 서로 대립적이었다. 보헤미안적인 지식인, 예술가는 부르주아 삶을 경멸했으며 부르주아는 이런 보헤미안을 자기들의 안정된 세계를 허물어뜨리는 질병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브룩스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두 문화가 마침내 융합하면서 보보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3)

브룩스는 두 문화가 융합된 모습을 지식인과 부르주아 양편에서 추적한다. 한편에서 부르주아는 이제 보헤미안적 문화를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기업가는 청바지를 입고 대중 앞에 등장하며, 휴일이면 할리 오토바이를 몰고 질주한다. 이런 기업가는 몇 주간 오지나 농촌을 찾아 고통을 감내하며, 아무도 오지 않을 곳에 통나무 집을 짓고 원시적 삶을 체험한다.

기업은 이제 단순히 유용한 상품, 고도의 기술을 자랑하지 않는다. 기업은 자신이 인류의 이상을 위해 봉사한다고 믿는다. 기업은 온난화 등 환경 위기를 극복하며 세계의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하며, 자신의 상품은 이제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하며 심지어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상실된 자연과 사랑, 그리고 영혼까지 찾아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들 보헤미안적 사업가는 기업의 경직된 조직 체계를 허물며, 조직 인간 대신에 자유로운 개인, 상호 소통하는 열린 공간을 기업 내 창출하고자 노력한다. 이들은 문명의 발전을 거시적으로 보면서 이 시대가 새로운 문명의 시대임을 예를 들어 4차 기술 혁명의 시대라든가,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는 시대임을 선지자적으로 고지한다.

브룩스는 이런 보헤미안적 사업가의 특징을 실천적 지혜, 육감적 능력을 의미하는 ‘메티스’라든가, 자기의 물질적 행복이 아니라 자기의 영혼과 사명을 강조하는 ‘고상한 자기 중심주의’라는 말을 통해 규정한다.

4)

거꾸로 지식인(동시에 예술가)은 이제 사회를 초월해 시대의 양심으로서 세상에 대해 분노의 심판을 내리던 선지자적 자세를 버린다. 과거 지식인은 자신의 언어나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 사회적 혁명을 만들 거대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지식인은 자신을 세속적 성직자로 간주했으며, 동시에 그는 사회로부터 추방되거나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확신했다.

브룩스는 이제 그런 지식인 즉 인텔리겐차는 사라졌다고 본다. 터무니없이 암울한 예감에 사로잡혔던 지식인들은 시대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해 공룡처럼 소멸했다.

지식인은 이제 자기의 전문 분야에서 부딪힌 문제를 풀어가는 지적인 기술자이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하나의 유용한 상품이며, 대중의 갈채가 지식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간주한다. 지식인의 가치는 이런 사회적 교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이제 성공한 지식인이 지식인 스타가 등장했다. 대중적으로 판매되는 그의 상품을 바탕으로 그는 언론과 방송으로 진출하며, 심지어는 TV 연예 코너에 등장하기도 한다.

지식인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전략 전술적으로 판단하며, 학계와 학술회의, 인적 맥락을 조직한다. 이들은 자신의 지식의 상업적 가치를 증대하기 위해 상업적 대중문화 속에 뛰어들어 그것으로 자신의 상품을 포장하며 아예 이런 상업적 대중문화를 자신의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5)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의 혼종 현상은 인간의 욕망과 관련해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과거 보헤미안은 욕망을 극단화했다. 그들은 욕망을 억압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욕망의 만족, 쾌락을 목표로 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억압의 파괴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욕망의 억압이 부르주아적 질서 자체의 토대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 대부분은 욕망의 해방 가운데 오히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보헤미안의 욕망은 곧 죽음에의 충동이었다.

부르주아에게서도 1870년대 이후 사지와 방탕이 확산했기에 마치 보헤미안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다. 보헤미안이 죽음의 충동이었다면 부르주아는 만족을 목표로 했다. 그렇기에 부르주아는 일시적으로 방탕에 빠졌으며 결국 자신을 절제하는 것을 배운다.

보보족의 경우는 마치 보헤미안처럼 욕망을 극단화한다. 그는 과거 부르주아가 꿈꾸지 못한 다양한 욕망에 탐닉한다. 그는 감각을 극대화하는 욕망의 전문가이다. 그렇기에 그의 집에는 전문가 수준에 걸맞은 값비싼 오디오가 있으며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자신을 커피 전문가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욕망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한계는 그의 건강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지만, 그의 건강에 해가 되는 것은 과감하게 단절한다. 그는 보헤미안처럼 록 음악과 명상을 즐기지만, 보헤미안과 달리 술과 대마초에 빠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문화화하듯이 그는 자신의 욕망을 문화화한다. 그는 여느 사도 마조히스트처럼 자신의 욕망을 규칙화하며, 자신의 욕망에 진보적 이상의 색깔을 입힌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자연과 공동체, 생태계에 기여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섹스는 영혼에 도달하는 수단이라 확신한다.

6)

브룩스는 서술에서는 풍자적 요소가 많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보보스 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다. 그는 이런 보보스 문화가 정보화 시대의 산물로 본다. 이 시대 지식이 대중화하면서 또한 지식이 자본화하면서 지식인 전통과 부르주아 전통이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두 문화가 함께 융합하면서 보보스 문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새로운 보보스 문화는 부르주아의 야만도 보헤미안의 고고함도 버리고 지식인은 상업화하며 반면 부르주아는 욕망에 탐닉한다.

그러나 브룩스는 보보스 문화를 너무 과도하게 긍정하는 것은 아닐까? 포스트모던 문화의 혼종적 특징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를 분석하면서, 부르주아의 보헤미안적 문화는 일종의 기호,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그런 기호나 상징에 진지하지 않기에 그런 기호는 부르주아의 물질적 문화를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지젝 역시 비판적으로 본다. 지젝은 포스트모던 문화는 한편으로는 쾌락 지향적 경향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자기 통제적인 측면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자기 통제적 경향을 일종의 편집증으로 해석했다. 즉 쾌락지향적 성격이 상징적 질서의 해체를 의미한다면, 자기 통제적 측면은 아버지의 이름이 환상 속에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부르주아의 보헤미아니즘이 허위라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지젝은 보헤미아니즘이 도달하는 자기모순을 지적한 것이 할 수 있겠다. 이런 비판적 분석과 대조해 보면, 브룩스의 해석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혼종적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도 기울어져 간다. 트럼프와 같은 구시대 야만적 자본가 유형의 인물이 대중적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보보스 문화도 퇴조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영화 멜랑콜리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영화 멜랑콜리아

 

1)

영화 멜랑콜리아는 감독 라스 폰 트리어의 영화이다. 60년대 프랑스에서 누벨 바그가 등장했을 때, 독일에서는 노이에 키노 바람이 불었다. 이들의 주축은 파스빈더, 헤어쪼그, 벤더스 등이다. 네델란드 출신 라스 폰 트리어도 한세대 후이지만 이들을 계승하는 작가로 간주된다. 그것은 그가 68세대와 공통의 정신적 지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아주 독특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는 서구 문명에 대한 그의 분노를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그를 알리는 데 공헌한 영화인 ‘백치’는 백치를 내세워 정상인의 세계를 조롱하며, 영화 ‘도그빌’은 마피아의 보스가 자기 딸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집단 강간당하자 마을 사람들을 집단으로 징벌하는 법과 불법이 전도된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 ‘멜랑콜리아’는 혜성(그 이름이 ‘멜랑콜리아’다)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가 종말에 이른다는 종말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전개된다. 지구 종말은 다른 한편, 지구 문명에 대한 분노와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가정된 지구 종말은 실제로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지구 종말적 상황은 감독이 서구 문명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심판을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 장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극 중 두 주인공 쥐스틴과 클레어의 대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쥐스틴은 지구 종말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구는 사악해, 그러니 애석해 할 필요 없어.”

2)

영화는 도입부에 이어서 주인공 자매의 이름을 따서 1부 쥐스틴(동생) 2부 클레어(언니)로 이루어진다. 구성상 두 주인공이 각기 독립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주인공은 항상 함께하며, 오히려 1부와 2부의 구분은 다루어지는 이야기 주제에 따른다고 하겠다.

1부에서 시종일관 쥐스틴의 결혼식 장면이 펼쳐진다. 1부를 시작하면서 거대한 리무진이 시골의 굴곡진 좁은 도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힌 모습을 감독은 상당히 길에 보여주는데, 이는 감독이 앞으로 보여줄 서구 문명의 한계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하겠다.

쥐스틴은 카피라이터로서 성공적인 경력 여성이다. 이제 막 마이클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행복할 만하다. 하지만 이 결혼식을 계기로 쥐스틴은 정식적 파국에 직면한다. 감독은 쥐스틴을 둘러싼 남자들, 회사 사장,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인 마이클을 스케치하면서 쥐스틴을 파국에 빠뜨린 원인이 무엇인지를 그려낸다.

쥐스틴을 고용한 사장은 쥐스틴이 쏘아붙인 대로 “권력에 눈이 먼 옹졸한 인간”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혼하고서 새로 사귄 애인인 두 명의 베티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온다. 어머니는 딸의 결혼식장에서 결혼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말하는 이제는 세상에 지친 여인이다. 그녀가 막 결혼하려는 마이클은 소시민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는 늙어서 함께 살 과수원 사진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쥐스틴의 갈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서구 문명의 대표적 두 축인 사회와 가족의 표면적으로 우아하고 화려한 모습 뒤에는 이처럼 끔찍한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감독의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잘 알 수 있다.

쥐스틴이 정신적 파국에 처한 것은 이런 사회적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감독은 1부에서 쥐스틴이 아버지와 할 얘기가 있다면서 아버지를 붙드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장면은 그녀가 아버지를 갈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갈망은 2부에서 행성이 지구에 다가오면서 쥐스틴이 밤에 나체로 행성과 교감하듯이 누워 있는 모습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때문에 행성이 다가오자 쥐스틴은 오히려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3)

2부에서는 행성이 다가와 지구와 충돌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2부에서는 쥐스틴보다는 오히려 클레어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녀의 남편 존은 18홀 골프코스를 지닌 대저택에 살면서 천체 관측을 즐기는 자기 과시적 또는 가부장적 인물이다. 클레어는 그런 남편 아래 살면서 결혼식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서 그려졌듯이 가족에 대한 자신의 의무에 철저한 주부이다.

표정이 극과 극을 오가는 쥐스틴과 달리 클레어는 시종일관 무표정하다. 우리는 클레어의 얼굴을 통해 그녀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부장제 아래 주부로서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적으로는 이미 무너지고 있다.

그녀의 삶 어딘가 균열, 틈이 생겼으며 그녀는 이를 철저히 막으면서 살아왔다. 조금도 빈틈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그녀의 꼿꼿한 태도가 거꾸로 그녀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균열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행성이 지구와 다가와 충돌한다는 종말적 상황이 펼쳐지자, 클레어는 더는 자신의 내적인 균열을 틀어막을 힘을 상실하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면 급기야 숨을 쉬지 못하게 된다. 그녀 역시 강박증에 사로잡히며 정신적 파국에 이른다. 그녀는 자살에 필요한 약을 사 놓는다.

4)

정작 최종 충돌 즉 최후의 심판이 가까워졌을 때, 클레어나 쥐스틴보다 존이 먼저 무너진다. 존은 클레어가 사 놓은 약을 먹고 자살하고 만다. 존의 죽음은 서구 문명이 내적으로 얼마나 허약한가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반면 클레어나 쥐스틴은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 가능성은 클레어의 아들 레오와 쥐스틴의 대화를 통해 미리부터 예고되었던 것이다. 바로 마법의 동굴을 짓는 것이다. 그 모습은 인디언의 텐트 같기도 하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마법의 동굴에서 레오와 쥐스틴, 클레어는 손을 서로 잡고 다가오는 종말을 기다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행성 충돌과 대폭발이지만 그 환한 빛은 어쩌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마법의 동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서구 문명에 대한 감독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마법의 동굴이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비합리적이지만 공동체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